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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 정치인 쉬망 별세

    【파리 AP 연합】 2차대전 당시 런던에서 송출되던 프랑스어 대독항전 방송책임자로 활약한 저명 정치인 모리스 쉬망이 10일 별세했다.향년 86세.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금세기 최대의 목격자를 잃었다”면서 고인이 2차대전 당시 드 골 장군과 함께 레지스탕스 활동을 전개하면서 프랑스어 항전 선무방송을 한 목소리의 주인공인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라고 애도했다. 파리 태생 언론인으로 사회에 발을 디딘 그는 조르주 퐁피두 정권의 외무장관 등을 역임했다.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미국의 대통령문화:10)

    ◎한국전 휴전 등 성사… ‘국제평화의 전도사’/후르시초프 방미 실현… 냉전해소 노력/동남아조약기구·IAEA창설 결정적 역할 【애빌린(미캔자스주)=나윤도 특파원】 “I like Ike”(나는 아이크를 좋아한다.)1952년 34대 미 대통령선거전에 나선 공화당 후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장군의 선거 캐치프레이즈는 오직 이 한마디 였다. 2차대전의 영웅으로 이미 탁월한 지도력이 입증된 아이젠하워 후보를 온국민들은 풀 네임보다도 애칭으로 부르기를 좋아했다.그리고 그들은 빨강·하양·파랑 바탕에 이 글귀가 쓰인 캠페인 뱃지를 자랑스럽게 달고 다녔다. 이같은 아이젠하워의 치솟는 국민적 인기는 일리노이 주지사 출신인 민주당 아들라이 스티븐슨 후보의 풍부한 행정력과 지식,재치,세련된 언변,화려한 공약 등을 두차례나 무용지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당선자 신분 한국전선 시찰 선거결과는 선거인단수 442대 89라는 아이젠하워의 압도적인 승리로 나타났다.더우기 공화당에 상하양원의 압승까지 안겨주어 루즈벨트­트루만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집권20년의 종지부와 함께 새로운 공화당 시대의 개막을 가져왔다. 20세기 들어 대공황­2차대전­냉전­한국전쟁의 사슬에 얽매여 한시도 긴장을 풀수 없던 미국민들은 하루빨리 정상상태로의 복귀를 열망했고 아이젠하워는 이같은 기대를 충족시켜줄 최적의 인물로 추대됐던 것이다.아이젠하워는 또 39세의 젊은 캘리포니아 출신 상원의원 리처드 닉슨을 런닝메이트로택함으로써 62세로 상대적으로 고령이던 자신의 나이에 대한 국민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당시 선거에서 최대의 이슈는 수많은 미군 사상자를 낸채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한국전쟁의 종식과 관련된 것이었다.아이젠하워는 이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선거가 끝난후 당선자 신분으로 아직 포화가 멎지 않고 있던 한국전선을 방문,국민과의 약속을 실천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였다. 취임연설에서는 “국제평화 유지를 위해 모든 국가와 협력하겠다”고 강조,평화를 갈망하던 국민들의 염원에 답했다.실제로 그는 한국전쟁의 휴전을 성사시켰으며 미군의 베트남전 참전을 반대했다.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역설,국제원자력위원회(IAEA)의 결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소련과의 대화도 시도했으며 장차 군산복합체 대두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국내적으로는 방만한 정부 예산의 감축을 위해 국방비의 절감,감세,정부사업의 축소,각종 규제의 완화 등 연방정부의 활동을 대폭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이끌어갔다.그리고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대통령보좌관을 선임,그에게 상당부분의 권한을 위임하고 자신은 세세한 문제에는 관여치 않는 당파를 초월한 정치를 추구했다. 미시시피강 서부 대평원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인구3천명의 캔자스주 애빌린은 아이젠하워의 도시로 유명하다.도시 중앙에 위치한 아이젠하워센터에는 중앙에 그의 동상을 중심으로 성장기의 집과 묘소,박물관,도서관이 자리잡고 있어 커다란 역사공원을 이루고 있다.1898년부터 46년까지 아이젠하워 패밀리가 살았던 사저는 캔자스의 평범한 시골집의 정형을 이루고 있다. 센터 입구에 ‘명산의 집’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교회형태로 생긴 그의 묘소는 경건의 장소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으며 박물관은 2차대전및 냉전시대의 전쟁박물관으로,도서관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8년간은 물론 그가 군사령관으로 남긴 것까지 모든 자료의 집대성을 이루고 있다.특히 아이젠하워와 맥아더가 주고받은 편지들도 보관돼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편지에서 아이젠하워는 맥아더를 항상 ‘장군님’이라고 존경의 호칭을 사용했고 맥아더는 ‘사랑하는 아이크’라고 적고 있는등 두사람의 인간적인 관계는 계속됐던 것으로 보인다. 대륙횡단 철도가 지나기 때문에 텍사스등지에서 동부로 수송을 위해 수백만마리의 젖소들만 몰려들던 황량한 시골마을인 이 도시는 오늘날 인구 3천명의 소도읍으로 성장했으며 아이젠하워를 키워낸 자부심에 가득차 있다. 19세기에 출생한 마지막 미대통령인 아이젠하워는 1890년 텍사스 데니슨에서 출생했으나 어려서 부친이 애빌린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초,중·고등학교를 이곳에서 다니는 등 애빌린을 실질적인 고향으로 간주해왔다.낙농업에 종사하던 부친의 사업부진으로 대학진학은 엄두에 두지도 못하던 아이젠하워는 21세때 뒤늦게 웨스트포인트에 진학,군생활을 출발하게 됐다. ○흑백차별엔 단호한 입장 1차대전때 군훈련교관을 역임하고 파나마운하 주둔군으로 활약하던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30년초 필리핀 주둔군사령관 이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보좌관으로 발탁되면서부터 였다.41년 일본의 진주만 폭격 이후에는 조지 마샬 참모총장에 의해 전쟁성의 태평양전략 담당관에 임명돼 탁월한 기획능력을 발휘했다.마침내 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히틀러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줌으로써 연합군측의 승리를 이끌어낸 그는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게 됐다. 전쟁이 끝난후 군을 떠나 콜럼비아대학 총장으로 잠시 외도한 그는 트루만 대통령에 의해 51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령관으로 다시 군에 복귀했다.52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을때 트루만 대통령의 불출마 선언에 따라 공화,민주 양당에서 그에게 대통령 후보를 타진해 왔으나 그는 공화당을 택했고 압승을 거두게된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재임중 사회복지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이를 담당할 보건부,교육부,복지부 등의 부서를 창설했다.특히 흑백차별 문제에는 단호한 입장을 표명했다.57년 아칸사스주 리틀록의 백인 고등학교에서 흑인들의 입학을 거부하고 주지사가 민병대까지 동원,이를 옹호했다.이에 대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천명의 낙하산부대를 투입,흑인학생들을 호위 등교케하고 한학기 동안 학교를 순시케 하는 등 단호히 맞서 마침내 차별론자들을 굴복시켰다. 대외정책은 존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위임시켜 행하게 했으며 동남아조약기구(SEATO),를 창설하는 등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데 크게 기여했다.또 후르시초프의 방미를 실현시키고 소련에 영공 공개와 공중 군사설비 조사에 관한협정 제안등 냉전해소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아이젠하워는 남북전쟁의 격전지 였던 펜실바니아주 게티즈버그에 농장을 짓고 퇴임후 그림을 그리며 말년을 보냈다.오늘날 애빌린 못지 않게 게티즈버그의 아이젠하워 하우스에도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으며 이곳에는 링컨 워싱턴 등 인물화와 각종 풍경화 등 그가 남긴 수십점의 작품들이 진열돼 예술가대통령으로서의 푸근함 또한 느끼게 하고 있다. ◎다니엘 홀트 아이젠하워 도서관장/“정치인·군인 모두 성공적 삶”/“62년 도서관 개관… 220만점 소장 한국전쟁 관련 자료도 상당수 보관” 【애빌린(미캔자스주)=나윤도 특파원】 아이젠하워 도서관의 마틴 티즐리 관장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정치인으로서 군인으로서 두가지 생을 모두 성공적으로 마친 훌륭한 대통령으로 국민적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대통령의 하나로 소개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센터 중앙에 있는 그의 동상에는 ‘평화의 챔피온’이라는 글귀가 써있다. 그는 전쟁에 피곤해있던 미국민들에게 평화를 심어주려 노력했다. ­도서관의 연혁및 활동은. ▲대통령 도서관으로는 네번째로 1962년 개관됐으며 초기 120점 이던 소장 자료가 이제 220만점으로 증가됐다.주로 2차대전과 관련된 것들이 많으며 400여명의 등록 학자들을 비롯 수많은 연구자들이 찾고 있다.특히 NATO 콜렉션은 미국내 최고를 자랑하고 있다.한국전쟁 관련 자료도 상당수 보관돼 있다. ­지역에의 기여는 어떤 것이 있는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탄생일과 2차대전* 각종 기념일 등에 다양한 추모행사를 갖고 있으며 애빌린 주민들의 참여도는 매우 높다.특히 묘소가 있는명상의 집은 주민들의 경건의 장소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국립문서보관소에서 모든 운영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주민들의 헌신적인 자원봉사자로서의 참여가 없다면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국민들과의 관계는. ▲TV시대가 개막될 무렵이어서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국민들과 접촉이 많았던 대통령으로 볼수 있다.특히 그는 골프와 낚시 등 스포츠를 좋아했으며 대통령과 아놀드 파머와의 골프경기는 국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의 하나였다.
  • 고지/예르진­스타니슬로 공저(미래를 보는 세계의 눈)

    ◎“경제는 정부·시장 주도권 싸움터”/“국가통제 고비용·저효율성 노출/최근 20년새 시장원리 위력/대공황·전쟁 등 위기땐 상황 역전” 【워싱턴=김재영 특파원】 나라 경제의 모든 것이 시장에서 결정되도록 정부는 손을 놓아야 하는가.그래도 국가 경제인 만큼 정부의 지휘와 관여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학술적인 톤이 강한 이런 질문이 ‘IMF 시대’를 맞아 한국에서도 어느 때보다 폭넓게 제기되고 있다.한국 및 동남아의 금융위기는 기업과 은행이 수지타산의 경제 및 시장 원칙에 따라 돈을 빌리고 빌려주었다기 보다,정부의 힘을 업거나 정부의 눈치를 짐작해 금융거래를 한 ‘벌’이라는 해석이 강하다.문제의 아시아 국가들은 금융 뿐 아니라 경제 전반에 정부의 관여가 지나쳐 시장 원칙이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다고 서방 선진국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일단 아시아 경제는 정경유착의 부패,관의 권위주의적 개입과 같은 문제가 심하다고 치자.그러면 이런 문제점이 없는 국가에서 정부는 경제를 완전히 시장에 방임하고 있는가.한국 사람들이 자주 들을 수 밖에 없게 된 IMF 개혁 프로그램에는 시장원리라는 말이 많이 등장한다.그래서 잘못된 관치경제의 폐해가 없는 선진국에선 시장원리라는 거대한 자동기계에 의해 국가경제 전체가 돌아가고 정부는 팔짱만 끼고 있으려니 싶다.그러나 이는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다니엘 예르진과 조셉 스타니슬로가 공동 저술한 ‘고지’는 ‘근대사회를 개조하고 있는 정부 대시장의 전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이들에 따르면 20세기들어 선진국을 포함해 모든 나라에서 시장과 정부는 경제운용의 주도권을 놓고 간단없는 쟁탈전을 벌여왔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선진국이라 해서 시장원리의 메커니즘이 지휘권을 완전히 차지했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물론 20세기 후반부터 시장화가 주도적 추세이긴 하지만 선진국 경제에서 조차 현재와 같은 시장의 대 정부 우위는 최근 20여년 사이의 현상이라고 이들은 말한다.21세기를 앞두고 시장이 국가경제 전체를 잘 내려다볼 수 있는 고지에 보다 근접한 것은 사실이나 점령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고지’는 러시아 레닌의 말이다.1922년 신경제정책의 일환으로 시장 기능을 일부 허용하는 데 대한 반발이 생기자 레닌은 경제의 핵심요소는 국가가 통제한다고 발표하고 이때의 경제 핵심요소를 고지로 표현했다.국가경제를 지휘하기에 유리한 고지를 국가가 장악한다는 것인데 이는 영국 노동당의 정책,인도식 사회주의 경제체제 등을 거쳐 세계 여러 곳으로 퍼져나갔다.이 용어가 실제 사용되든 되지 않든,이 고지 경제의 목적은 국가경제의 전략적 부문 즉 주요 산업 및 기업에 대해 정부통제를 확고히 하는 것이다.이같은 혼합경제는 흔히 개도국의 전유물로만 여기기 쉬우나 이 책의 저자들은 소유권으로서가 아니라 경제 규제로써 정부가 고지를 통제하고 있는 미국도 ‘규제 자본주의’란 형식으로 혼합경제에 속한다고 말한다. 한때 국가통제의 추세는 거스릴 수 없는 대세로 여겨졌었다.미 대공황 이후의 뉴딜정책 기간과 2차대전 직후가 특히 그러했다.70년대 초반에도 선진국에서 시장 메커니즘을 완전히 질식시키지 않은 가운데 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혼합경제는 확장을 계속했다.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임금 및 물가 통제안을 관철시키고자 애썼다.그러나 90년대 이후 정부는 뒤로 물러서고 있다.전세계적인 현상이다.소련과 중국에서 공산주의 경제체제가 실패했을뿐 아니라 서방의 정부들도 통제권과 책임을 벗어던지는 중이다.국가가 떠맡은 일이 너무 방대하고 떠맡을려는 야심 또한 지나쳐,경제의 심판관이 아니라 주장 노릇을 하려는 데서 ‘정부의 실패’가 속출한 것이다. 통제의 비용이 너무 많고 효율성에 대한 환멸이 생겨 정부는 너도나도 민영화에 나서고 있다.정부의 방매가 역사상 최대치에 이른다.옛 소련,동유럽,중국 뿐 아니라 서유럽,아시아,라틴 아메리카,아프리카 그리고 미국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미국은 연방,주,지역 정부들이 전통적인 활동들을 시장에 넘기고 있으며 지난 60년동안 일상생활의 모든 곳에 영향을 끼치던 규제들을 폐기하고 있다.정부가 종언을 고하기 시작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정부가 벌이는 일들,경제에서 책임지고 있는 사항들은 확실하게 줄어드는 중이다.전 세계로 보아 정부는 예전보다 분명히 덜 계획하고,덜 보유하고,규제를 덜한다.대신 시장의 영역과 경계선이 확장일로를 치닫고 있다. 정부가 국가경제를 지휘하기 좋은 고지로부터 물러나는 현상을 저자들은 20세기와 21세기의 구분선이라고 말한다.저자 중 예르진은 이름있는 경제평론가로서 ‘상:석유,돈,그리고 권력’이란 베스트셀러로 퓰리처 상을 받았으며 스타니슬로는 예르진이 소장으로 있는 캠브리지 에너지연구소의 사무국장이다.그러나 저자들은 언뜻 명약관화해 보이는 이같은 정부에 대한 시장의 승리가 21세기에도 계속될 것이라고는 확신하지 못한다.한 세기전에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30,40년 동안 시장경제 위주의 자유방임주의가 풍미했다가 대공황을 당한 후 정부에 고지를 빼앗겼었다. 21세기에 어느 쪽이 더 우세할 것인가에 대한 통찰력은 부족하지만 457쪽에 걸쳐 20세기 시장과 정부간의 주도권 쟁탈 및 후반부의 시장화 추세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고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평이다. 원제:The CommandingHeights.시몬&슈스터 출판사.457쪽. 23.40달러.
  • 미·영·불의 성추문/최철호 국제부 기자(오늘의 눈)

    세계가 온통 성추문으로 뒤흔들리고 있다. 클린턴이 새해초부터 백악관내에서 애정행각을 벌였다는 추문이 터져나와 신세를 망칠 판인데,이에 질세라 이번엔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전현직 장관들이 성추문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선진국 3국이 ‘나란히’성추문에 정부가 놀아나고 있다. 이들 추문은 신빙성 있는 증거와 함께 구체적으로 나타나 관계자들에게 결정타를 가하려 하고 있다.관계된 사람들은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거나 애써 태연해하는 척 하고 있어 안쓰럽게 보인다. 유럽의 당사자는 영국의 쿡 외무장관과 프랑스의 롤랑 뒤마 전 외무장관이다.쿡장관은 정부를 향한 사랑이 너무 커 아내를 버린 철저한 애정행각인데 비해,프랑스 뒤마 장관은 권력을 이용한 부패속에서 돈과 연루된 애정행각이었다는 것이 조금 다를 뿐 스캔들의 강도는 서로 비슷하게 다가온다. 자고로 권력과 돈,그리고 성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옛성현들은 누누히 말하면서 자기를 다스리라고 갖가지 격언들을 남겼다. 역사학자 헤로도투스는 “나라의 흥망성쇠에서 초기건국기를 지나 성장기를 구가하다 망조가 들려고 하면 어김없이 권력비리와 여자문제가 드러나 국가 기강이 흔들린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들 나라들은 2차대전을 겪은 뒤 이제 성장기를 누린다고 볼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다.영국병과 실업문제 등 문제는 있으나 민주주의가 정착기에 접어들고,경제수준도 세계의 수위를 달리고 있다. 이같은 단계에서 터져나오는 성추문은 그래서 ‘성장기를 지난 나라에서 혼돈이 서서히 고개를 드는 것처럼 보인다’는 문명비평가의 말이 설득력 있다. 여성과 관련된 추문은 아마도 인류역사 이래 반복돼온 것인지도 모른다.그러나 문제는 이를 보는 시각이 성장기를 구가하던 국민들에게 순정어린 사랑이야기가 아니라,도덕성과 규범이 결여된 범죄행위로 비쳐지고 있다는데 있다. 국민들의 행태에는 단호한 면과 함께 외도를 부러워하고(?)어느정도 인정하는 2중 인격적인 모습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이번은 이들에 대한 단죄의 강도는 매우 높다.척결의 대상까지 되고 있다. 클린턴은 존스양과의 관계에서 이미 거짓말을 한번 했다. 이제 거짓말 시대의 시작,아니 문명퇴조의 시작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 김종길 교수의 시론집 ‘시와 시인들’ 시집 ‘달맞이 꽃’

    ◎‘달맞이꽃’에 실은 시인의 고향/개연성 중시·내용없는 시적 실험 질타/필립 라킨에 대한 애착어린 비평 실어 ‘성탄제’의 시인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김종길 고려대 명예교수(71)가 시론집 ‘시와 시인들’과 시집 ‘달맞이꽃’을 동시에 펴냈다.도서출판 민음사.특히 지은이의 회갑기념 시론집 ‘시에 대하여’에 이어 10년만에 나온 시론집 ‘시와 시인들’은 시인이자 영문학자로서의 학문적 온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어서 관심을 모은다. 김교수는 이 책에서 본격적인 시론을 다루기에 앞서 자신의 출신과 성장배경부터 살핀다.이를 위해 그는 영국 시인 T.S.엘리어트의 평문 한 대목을 원용한다.엘리어트는 유명한 그의 초기 평론인 ‘전통과 개인적 재능’에서 ‘경험하는 인간’,즉 생활인으로서의 예술가와 ‘창조하는 인간’,즉 예술가로서의 예술가가 완전히 분리됨으로써 완벽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엘리어트의 주장을 지은이는 한편으로 인정하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신봉하지는 않는다.엘리어트와는 문화적 배경이 다를뿐 아니라 개인적 체질도 다르기 때문이다. 김교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교문화권인 이른바 ‘안동문화권’ 출신이다.그 자신이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낸 지예라는 고향마을은 안동지방에서도 가장 궁벽한 산촌에 속한다.게다가 그곳은 지금은 임하댐 준공으로 수몰지구로 변했다.이번에 펴낸 시집의 표제로 쓰인 ‘달맞이꽃’이란 시는 바로 시인의 고향을 노래한 것이다.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이 막연한 물음에 김교수는 시읽기는 무엇보다 개별에 치중해 보편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다.아울러 텍스트를 떠나 자신의 경험에 매몰되면 편벽된 해석을 낳기 쉬우며 아무리 발랄한 상상력이라 하더라도 개연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안된다고 권고한다.이렇듯 개연성을 중시하고 내용없는 시적 실험을 질타하는 그가 내세우는 시의 정도는 바로 시의 ‘위의’를 지키는 것,곧 새로우면서도 시 본래의 모습을 잃지않는 것이다. 이번 시론집에는 필립 라킨,셰이머스 히니,T.S.엘리어트 등 외국시인에 대한 비평도 곁들여져 있다.특히 라킨(1922∼1985)에 대한 애착어린 글이 눈길을 끈다.라킨은 시집 ‘덜 속은 자(The Less Deceived)’로 일약 2차대전 후 영시단의 총아로 떠오른 인물. 라킨이야말로 어떠한 시적인 허세도 부리지않으며,의식적으로 특히 엘리어트나 딜런 토머스와 같은 시인들의 시풍을 배격하는 반모더니스트 시인이라는 게 김교수의 설명이다.이 책에는 ‘그리고 다음’‘혼인날 바람’‘교회를 찾아서’ 등 라킨의 대표적인 시들에 대한 분석적인 글들이 담겼다.
  • 현대미술 작가들 한자리에/네덜란드 스테델릭미술관 소장품 60점

    ◎몬드리안 말레비치 칸딘스키작품 전시 20세기의 대표적인 현대미술작가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20세기의 미술전’이 지난 17일부터 호암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삼성문화재단측이 2년전부터 추진해와 성사된 이번 전시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테델릭미술관 소장품 가운데 51명의 작가를 추려 모두 60여점을 보여주고 있어 서양 현대미술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한다.스테델릭미술관은 1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곳으로 특히 초기 추상의 거장 말레비치 작품소장으로 유명한 곳. 지난해 일본 전시와 같은 내용의 이번 전시는 반 고흐의 영향을 받은 독일표현주의,추상미술의 원조 세잔과 그 후예인 입체주의,그리고 몬드리안·말레비치류의 기하추상,네덜란드 지역작가들로 구성된 마술적 사실주의,2차대전후 등장한 아르브뤼·코브라그룹·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이 소개되고 있다.여기에 팝아트나 미니멀리즘,개념미술 작품들이 가세하고 있고 80년대초 독일·뉴욕·이탈리아에서 거의 동시에 보여졌던 신표현주의와 80년대 이후 미술 등그야말로 20세기를 모두 훑는다. 이번 전시의 큰 줄기는 추상미술.주지주의적 기하추상을 시작한 세잔과 그의 영향을 받은 몬드리안과 말레비치,그리고 그후의 색면추상·미니멀리즘의 맥을 더듬어볼 수 있다.또 한쪽은 주정주의적 성격의 반 고흐류로 반 고흐와 칸딘스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여기에 입체주의의 브라크·로랑·피카소,미래주의의 세베리니,추상표현주의의 폴록·드 쿠닝·뉴만,미니멀리즘의 스텔라·라이만 등도 들어있다.무엇보다도 스테델릭미술관의 자랑거리인 말레비치의 작품 5점을 비롯해 몬드리안의 작품 3점을 한 공간에서 비교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3월15일까지.
  • ‘고졸 대통령’ 해리 트루먼(미국의 대통령 문화:8)

    ◎냉전속 국제질서 이끈 위대한 지도자/전후 서유럽 부흥위해 ‘마샬 플랜’ 강력 추진/일에 원폭 투하·맥아더 해임 등 결단력 돋보여/한국에선 “한반도 분단 책임자” 시선 곱지 않아 【인디펜던스(미 미주리주)=나윤도 특파원】 “그는 보통사람이 위대해 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였습니다.그리고 대통령도 일반 시민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1972년 12월26일 88세를 일기로 서거한 미국의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만의 조사(조사) 마지막 부분을 컬럼니스트 메리 맥그로리는 이렇게 끝 맺었다. 원폭투하라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고 2차대전후 극렬한 대립을 보인 민주진영과 공산진영 양극의 한 정점에서 냉전의 국제질서를 강력하게 이끌었던 트루만 대통령은 민주주의 수호와 대통력직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결단력을 보여준 지도자란 평가를 받고있다.그러나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서민적인 ‘보통사람’대통령으로 꼽힌다. 45년 4월12일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4선 취임 80여일만에 숙환으로 급서,당시 부통령으로서 트루만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됐을 때 미 언론들 대부분은 루즈벨트의 큰 자리를 트루만이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우려했다.왜냐하면 트루만은 당초 민주당내 부통령 지명과정에서 최적의 인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좌파 헨리 월리스와 보수파 제임스 번즈의 각축 중에 중도파로 있다 어부지리로 부통령 자리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두차례의 상원의원을 지내면서 2차대전중 수십억달러의 국방예산낭비 조사를 위한 소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을 당시 차분하고 공정한 업무처리로 인정받았던 그는 3차투표까지 간 부통령 지명전에서 막판에 루즈벨트로부터 제의를 받았을 때 정중히 사양했으나 거듭된 간곡한 부탁에 가까스로 응했다. 국민들이 우려를 나타낸 또 한가지 이유는 그가 20세기 미대통령 가운데 유일한 ‘고졸대통령’이라는 점이었다.과거 무학 대통령들의 입지전적인 스토리들이 있기는 했으나 20세기들어서는 직전의 루즈벨트가 하버드 출신인 것을 비롯,스탠퍼드 출신의 후버,프린스턴의 윌슨,예일의 태프트 등과 같이 최고의 학력이 대통령의 필수조건처럼 돼있었다. 그러나 막상 대통령으로서의 트루만은 어떤 명문대학 출신 못지 않은 업무수행능력을 보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2차대전 이후 새로운 전후질서 형성과정에서 미국을 부동의 지도국 위치에 올려놓았고 국내적인 안정도 가져와 라이딩스의 대통령 랭킹에 따르면 조사 각분야에서 상위를 기록,41명중 종합 7위로 나타났다. 2차대전 막바지 대통령직에 오른 그에게는 전쟁의 마무리가 가장 큰 임무였다.독일은 5월초 무조건 항복을 했으나 일본이 문제였다.45년 2월 맥아더 장군의 마닐라점령을 계기로 연합군이 승기는 잡았으나 일본군이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본토상륙이 불가피한 시점이었다.그러나 그를 위해서는 100만명의 인명손실이 예상되고 있었다.따라서 때마침 실험에 성공한 원자탄이 자연스레 그 대안으로 부상했으며 트루만은 그해 8월6일과 9일 두차례에 걸쳐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라는 가장 고독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더우기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 야욕에 맞서 그는 외교안보적으로는 공산세력의 침투로부터 자유민주주의의 수호했다는 평가를 받는 ‘트루만독트린’을,경제적으로는 전후 피폐해진 서부유럽국가들의 부흥을 위한 대대적 경제원조인 ‘마샬플랜’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같은 그의 강공은 소련의 베를린봉쇄를 가져왔고,유엔 설립을 위한 대서양헌장 채택,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탄생 등 냉전체제의 골격을 완성시켰다.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안전보장법을 제정해 국방부와 CIA를 창설했다. 그러나 국내적으로 취임초기 물가상승과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인한 사회불안이 높아져 46년의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여소야대 정국이 초래됐다.48년 마샬플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미국내 반대세력이 늘어갔으며 또한 민주당내 분열이 심화돼 언론들 대부분은 그해 말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토마스 듀이 후보가 당선할 것이라고 예측했다.그러나 트루만은 유명한 3만마일 역전유세를 통해 유권자에 직접 호소,재선할 수 있었다. 재선후 트루만은 농민보조금 제공,의무적 건강보험 실시 등 새로운 사회개혁정책을 시도했다.이 정책은 “모든 집단과 모든 개인은 정부로부터 공정한 대우(Fair Deal)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그의 연설에서 ‘페어 딜’정책으로 명명됐다.그러나 일련의 개혁정책들은 의회내 보수파들에 의해 대부분 묵살돼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한국전쟁을 둘러싸고 당시 연합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가 중국군대의 개입을 저지하고자 만주에 원폭투하를 요청하면서 트루만과 공공연히 맞섰는데,이에 그는 맥아더 사령관을 전격 해임해 대통령직 권위에 대한 도전에 단호히 대처했다.한국쪽에서 볼 때에는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있는 당사자라 곱지 않은 시선이 있다.당시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되던 맥아더의 해임은 여론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결국 의회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러나 미국민들에게 남아 있는 트루만은 정치적 업적보다도 그의 인간됨이다.미주리주 인디펜던스 소읍을 둘러싸고 청년농부 트루만과 후에 퍼스트레디가 된 읍내 소녀 엘리자베스 월리스(베스라는 애칭으로 불렀음)와의 사랑이야기는 ‘아메리칸 러브스토리’로 남아 있다.그가 그녀에게평생을 쓴 1천600통의 사랑의 편지는 지금도 젊은이들의 연애편지로 읽히고 있다. 그는 52년 퇴임후 20년 동안 고향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보여준 보통사람으로서의 삶 때문에 후세에 더욱 높은 인기도를 유지하고 있다.고향집으로 돌아온 그는 1마일쯤 떨어진 트루만도서관의 사무실로 매일 걸어서 출근했으며 강의와 회고록 집필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특히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와 동네사람들,옛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여생을 보내던 그가 가장 불편해 했던 것은 63년 케네디 암살 이후 통과된 전직대통령 경호법에 의해 경호팀이 집부근에 상주하면서 활동에 제약을 받게된 일일 정도로 그는 완벽하게 보통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인디펜던스의 그의 사저 일대는 역사공원으로 지정돼 있으며 인근의 언덕위에 높게 자리잡은 트루만도서관과 함께 보통사람 대통령의 체취를 느끼려는 관광객과 학생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랜드 스웰 트루먼 대통령 도서관 자료담당관/퇴임후 평범한 삶 후세에 귀감/한국 좋아해 고려청자 현관에 보관/어머니에 배운 피아노 연주 수준급 【인디펜던스(미 미주리주)=나윤도 특파원】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옆의 소읍인 인디펜던스시 북부의 언덕위에 넓게 위치한 트루만도서관은 냉전 초기의 역사에 관한 기록들로 가득 차 있다.이 도서관의 랜드 스웰 자료담당관은 “트루만대통령은 많은 정치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적인 측면이 더 부각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트루만 대통령이 높은 인기도를 유지하는 이유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린 지도자로서 결단력과 대통령직을 마친 후 평범한 이웃으로 다시 돌아온 점이다.대통령이 살던 집으로 돌아와 그 집에서 살다 죽은 예는 흔치 않다. ­대통령 퇴임후의 생활은 어땠는가. ▲인디펜던스 읍내 노스 델라웨어 스트리트 219번지 자택은 원래 트루만의 부인 베스 트루만의 집으로 1919년 결혼후 줄곧 이 집에서 살아왔다.그는 퇴임후 강연과 저술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59년 입법 후에야 전직대통령에 대한 연금이 지급됐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도서관의 특별한 활동은. ▲95년부터 그의 ‘50주년 행사’를 계속해오고 있다.지난해는 트루만독트린 50주년 세미나및 전시회를 가졌고 올해는 이스라엘 건국 50주년,99년에는 NATO 50주년,2000년에는 한국전쟁 50주년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한국인들은 트루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그의 한국에 대한 인상은 어떤 것이었나. ▲공산주의 저지의 최후 보루로 인식했기 때문에 남침 즉시 유엔 결의를 기다릴 것 없이 미군의 참전을 명했다.다만 한국전쟁때 마샬플랜에 더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소극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개인적으로 한국을 좋아했다.46년 한국 교육계대표 장이욱 박사로부터 선사받은 고려청자가 현관에 보관돼 있는데 의 위치는 그가 잡은 것이다. ­그의 피아노를 잘 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어머니에게 배운 것이 수준급에 달해 45년 포츠담회담때 처칠과 스탈린 앞에서 연주했고 케네디 취임식때도 연주했다.트루만이 백악관 당시 즐겨 치던 피아노가 닉슨 대통령의 기증으로 전시관에 진열돼 있다.
  • “스위스도 유태인 강제 노역”/미 역사학자 연구보고서

    ◎나치탈출 난민 수용소 60곳에 억류/노역 불만자 게슈타포에 넘기기도 【로스앤젤레스 AFP 연합】 나치자금 은닉 등 2차대전 당시의 불미스런 행동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스위스가 이번에는 나치독일을 탈출한 유태인들을 수용소에 억류,강제노동을 시켰다는 주장으로 궁지에 몰렸다. 스위스정부는 1939년 나치독일의 박해를 피해 탈출한 유태인 난민들을 수용소에 몰아넣고 열악한 조건 속에서 무보수 또는 소액의 임금으로 노역을 강요했다고 유태인기구인 시몬 위젠탈 센터의 의뢰로 작성된 보고서가 폭로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미 역사학자 앨런 모리스 스콤씨는 ‘원치 않는 손님들:스위스판 강제노동수용소’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재소자들중 불만자들은 별도의 응징수용소로 보내졌고 나머지 유태인들은 프랑스 비시정권 경찰 또는 게슈타포에게 넘겨졌다고 그는 밝혔다.궁극적으로 10만명 이상의 유태인들이 독일로 송환돼 대부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그는 말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1933년부터 1945년까지 20만명 이상이 스위스에 망명했으며 이중 2만8천명이 스위스내 60여개 수용소에 분산수용됐다. 스콤 보고서는 “불행하게도 스위스 사회는 악의적 반유태주의 편견에 깊이 물들어 있었고 때로는 그 지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스위스에 입국한 유태인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남자들은 엄혹한 노동현장으로,여자들은 청소부로 파견됐다고 이 보고서는 말했다. 스위스가 작지만 용감한 ‘무장 중립국’으로 나치의 위협에 맞서 난민들에게 피란처를 제공했다는 종전의 이미지를 뒤엎는 보고서들이 최근 속속 공개돼 왔다.
  • 케네디가 끊이지 않는 비운/마이클 케네디 스키타다 사고사

    ◎존 F 케네디 조카… 부친도 피살 【애스핀·보스턴외신 종합】 암살당한 존 F.케네디 미대통령의 조카이자, 68년 대선 유세중 역시 암살된 로버트 F.케네디 전 미법무장관의 아들인 마이클 케네디(39)가 구랍 31일 콜로라도주 애스핀의 스키장에서 가족과 함께 스키를 타다가 나무에 부딪쳐 사망했다. 이로써 미국제일의 명문가이면서도 끊임 없는 비극에 시달려온 케네디가에 또 한차례의 비극이 재연됐다. 케네디가를 덮친 첫번째 비극은 조지프 2세가 2차대전 당시 29살에 자신이 몰던 비행기 폭발사고로 숨진 것.이어 딸 캐슬린도 28살때인 48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자식들중 미국 대통령이라는 최대의 숙원을 이룬 존 F.케네디 대통령은 63년 46세에 암살됐으며 그해 조산아로 태어난 그의 아들도 2년후에 숨졌다. 존의 사망 5년후 로버트 F.케네디 상원의원 역시 저격으로 사망했다.이번에 죽은 마이클은 케네디가의 명망을 뒤이을 촉망받는 젊은이로 평가돼 왔다. 그는 그러나 지난해초 자신의 자녀를 돌보던 보모와의 추문으로 기소된후 공석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 동북아­미­EU 삼각축 형성/21세기 충고

    ◎경제적 지역통합 가속도… 자유무역주의 위협/한국,북개방 유도로 주체적 통일환경 조성을 세계의 많은 석학들은 한세기전부터 21세기의 새 국제질서에 대해 얘기해 왔다. 다니엘 벨은 21세기는 세 축으로 움직일 것이며 유럽연합(EU),미국권,아시아권이 그것이라고 했다. 폴 케네디같은 사람은 유럽과 일본의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보았다. 어떤 학자는 미국이 슈퍼강국으로 계속 남을 것으로도 본다. 하지만 나는 다니엘 벨의 ‘세 축’에 더 관심을 갖는다. 더욱이 아시아권이 21세기 국제질서의 주 축으로 작용할 거라고 본다. 세계은행이 평가하는 미래의 경제대국중국,초강국지위는 잃었지만 한때의 강국위치로 발빠른 선회를 하고 있는 러시아,경제대국 일본의 존재가 이를 반증한다. 세계의 질서를 어떻게 구분하든 새 국제질서는 공통점을 가진다.이른바 경제를 우선시하는 경제주의와 지역통합추세가 가속화되고 있는 경향이다. 이러한 지역주의는 단기적인 자구책일 지 모르나 장기적으로 자유무역주의에 커다란 위협이 된다. 세계는 이 ‘경제적 패권주의’에 맞서야 옳다고 본다. 이를 위해 모든 국가에 평등하고 공동이익이 되도록 극내는 물론 극간다변적인 협력이 절실하다고 본다. 협력의 주체는 선진공업국이 되어야 한다. 발전도상국가들은 시민의 자유·평등에 대한 요구를 저버리지 않고 국제경제와의 새 통합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2차대전직후 한국은 일본의 전후처리문제의 하나로 인식됐었다. 이런 한국이 이제는 무역규모로만 볼 때 ­경제적진통을 겪고 있지만­세계 10대무역국진입을 앞둔 국가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21세기를 앞둔 현 시점까지도 미국의 정치·경제 우산속에 있다. 한국이 높아진 위상과 변화하는 환경에 역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한 이유라고 본다. 20세기를 마감하는 동안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격동을 경험하는 한 현장이 될 것이다. 해답은 자명하다. 통일을 바라보는 한국은 국제적으로 높아진 위상만큼 주체적으로 통일환경을 조성해가야 한다. 체제경쟁의 승자로서 자신감과 확고한 역사의식을 갖고 적극적인 자세로 북한과의 협력을 주도해야될 것으로 본다. 그럼으로써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하루빨리 회복해야 할 것이다. 옛서독이 동독에 대해 취했던 아량있는 태도도 중요하다고 본다.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어 ‘항복’을 요구하기 보다는 적당한 체면을 세심하게 배려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부분은 한반도통일 전문가만이 꼭 생각하는 대목은 아닐 것이다. 남과 북의 교류와 관련해 몇가지 제안할 것이 있다. 우선 북한의 값싼 유휴노동력을 이용해 남과 북이 제3국으로의 공동진출을 모색해보면 어떠냐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류에 필수적인 운송로의 확보,즉 공로와 해로 몇군데를 지정해 서로 개방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해로는 북한이 몇군데를 이미 개방하고 있는데 이는 좋은 전조로 보인다. 가급적이면 정치·군사적 매듭을 뒤로하고 민간분야의 문화·체육활동교류등을 이끌어내도록 양측이 노력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나는 매우 초보적인 단계이긴 하지만 현재 UNDP(유엔개발기구)가 추진중인 두만강개발계획,경수로지원계획이 향후 한반도의 미래에 중요한 의미를부여할 것으로 믿는다. 북한을 어떤 식이든 동북아시아 혹은 아시아경제권에 진입시켜보는 국제적인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얘기다. ‘어떻게 하면 북한을 다자간 대화와 경제협력의 장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민족적 관점에서 한국의 책임이다. 북한으로 하여금 스스로 대외개방과 교류를 촉진하도록 하는 분위기조성도 물론 한국의 몫이라고 본다. 이 전략은 남북간 신뢰회복은 물론 장기적으로 통일비용을 줄이는 기회를 가져다 줄 것이다.
  • 미 오만·이기주의 각국서 비난

    ◎맹방들 “세계문제 사사건건 간섭” 불만 팽배/미국내서도 “리비아 등 제재조치 남발” 지적 【워싱턴 AFP 연합】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프랑스와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지난해 세계외교가의 화두는 미국의 ‘오만’이었다.2차대전이후 어느때 보다도 막강한 힘과 자신감을 보유하게 된 미국은 세계유일의 초강대국 지위를 뽐내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그 한 예로 클린턴대통령은 지난 6월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열린 G­8 정상회담에서 미국경제를 세계의 모델로 내세워 가까운 맹방들의 신경을 건드렸다.유럽은 힘을 통해 쿠바·이란·리비아 등을 제재의 명목하에 고립상태로 몰아넣으려는 미국의 기도에 사사건건 이견을 보여 왔다. 리오넬 조스팽 프랑스총리는 지난 9월 이란과 프랑스 석유회사 토탈간의 계약체결에 관련한 논평에서 “미국이 자국의 법을 전세계에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수용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꼬집었다. 미국에 불만을 가진 것은 유럽뿐이 아니다.넬슨 만델라 남아공대통령은 그의 리비아방문을 비판한 미국을 겨냥,“그들(미국)이 어떻게 우리에게 가야할 곳이 어디이고 어떤 친구를 가져야 한다는 식으로 강요하는 오만을 부릴수 있단 말인가”라고 따졌다. 중남미와의 관계에서도 미국은 오만하다는 비난을 여러차례 받았다.지난 10월 브라질을 방문했던 클린턴의 사진을 표지에 실은 한 잡지는 “제국주의의 오만”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미국은 오타와 지뢰금지협약의 서명을 거부하고 교토 지구온난화협상에서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등 지난해 여러차례 부정적 이미지를 심었다. 미국관리들 스스로가 문제점을 잘 알고 있다.토머스 피커링 국무부 정치담당차관은 “우리는 힘있게 리드를 하되 오만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워싱턴 소재 브루킹스연구소의 헬무트 조넨펠트 연구원은 미국의 오만에 대한 지적이 새삼스런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미국측에서도 이같은 맹방들의 불평을 감수하기만 하지는 않는다.그들은 유럽인들이 은혜를 모르고 위선적이라고 응수한다.쿠바에 대한 헬름스­버튼법과 이란·리비아 제재를 강화하는 다마토법의 경우 클린턴이 원내 다수당인공화당의 반대에 굴복한 것은 순전히 국내정치 때문이었음을 이들은 지적한다.
  • 독일군 내년부터 해외 파병/미­독 군사협정 발효

    ◎미사일부대 나토와 공동작전 【본 AP 연합】 내년 1월1일부터 발효되는 미국­독일간 새 군사협정에 따라 독일의 미사일 방어부대가 처음으로 독일 영토밖에 배치될 수 있게 됐다고 독일국방부가 26일 확인했다. 미·독 양국간의 새 협정은 독일 미사일 방어부대의 독일 영토밖 배치를 허용하고 있으나 반드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영역 이내여야 한다는 단서를 달고 있다고 국방부는 전했다. 그러나 국방부대변인은 독일 미사일 방어부대가 유엔이나 나토의 명령 또는 독일 의회의 승인이 있을 경우,나토 영역밖에서 벌어지는 군사작전에도 참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같은 협정은 지난 수십여년간 계속되어온 2차대전 패전국 독일에 대한 해외군사활동 억제조치가 또 한차례 완화된 것으로 독일이 나토의 범위안에서 경제력에 걸맞는 군사적 역할을 수행해 나가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뉴딜정책 기수 프랭클린 루즈벨트:하(미국의 대통령 문화:5)

    ◎2차대전 적극 개입… 1천만 실업자 구제/전후 평화 정착 기대속 4선 당선 영광/대통령 문화 요람 도서관 시스템 도입/부인 일리노어 적극적 사회 활동/헌신·박애정신 국민 마음속 각인/동상 선 세계 최초 퍼스트 레이디 【워싱턴〓나윤도 특파원】 대공황의 질곡에서 미 국민을 구출할 희망의 상징으로 32대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루즈벨트(애칭 FDR)는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강력한 뉴딜정책을 추진했다.테네시강 개발사업,국가부흥청 설립,농업조정법 제정,사회보장제도 도입,노동조합 활성화 등 100일 입법을 통한 새행정부의 의욕적인 정책추진은 무기력과 절망에 빠졌던 국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뉴딜정책 평가를 위한 국민투표의 성격을 띤 1936년 대통령선거에서 FDR은 선거인단수 523대 8의 미 역사상 최대의 표차로 재선고지에 오를 수 있었다.그러나 활기찬 뉴딜정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대공황으로부터의 탈출은 요원했다.36년 다소 회복되는 듯 하던 경기는 37년 중반부터 다시 불경기로 돌아섰으며 38년에는 최악의 상태로 떨어져 실업자가 전체 노동력의 5분의 1인 1천만명에 달할 정도였다. 당초부터 실험적 성격이 강했던 뉴딜정책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사방에서 FDR에 대한 비난의 소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천운을 타고난 듯,뜻하지 않은 방향에서의 해결책이 마련됐다. FDR의 대통령 취임과 같은 해인 33년 독일의 권력을 장악한 아돌프 히틀러가 국제연맹을 탈퇴,인접국들에게 과거 독일영토의 반환을 요구하며 전쟁준비에 광분하면서 유럽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마침내 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대전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마침내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고,이로 인해 군수산업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면서 미국의 경제상황은 대공황에서 탈피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전후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전쟁이 미국을 구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전쟁이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던 40년,미 대통령선거의 최대쟁점은 참전문제였다.초기 FDR은 재선한 대통령으로서 명예로운퇴진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전쟁에 직면한 위기상황에서 민주당은 전폭적으로 그를 또 다시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그는 참전반대 의사를 명확히 했으나 미국이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막강한 군대가 필요함을 역설했다.미 국민은 그를 미 역사상 최초의 3선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전쟁 초기 FDR은 곤경에 처한 영국을 도우려 했지만 고립주의자들로 가득찬 미 의회의 거부로 소규모 제한적인 원조밖에는 할 수 없었다.그러나 그는 “미국은 민주주의의 거대한 무기고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며 의회와 국민을 설득,마침내 ‘무기대여법’을 통과시켜 본격적인 지원에 나설 수 있었다.39년 10월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핵폭탄에 관한 서신에 접한 FDR이 즉시 비밀계획팀을 만들어 연구에 착수,마침내 원자탄을 만들어내게 한 것도 이같은 그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던 중 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미국의 본격적인 참전 계기가 됐다.참전은 모든 미국 경제를 전시경제로 돌아서게 했고 미 전역의 공장들로부터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들이 쏟아져 나왔다.1천만에 달하던 실업자가 방위산업 증강에 따른 구인수요와 군입대로 사라지게 됐다.또한 FDR의 활발한 전시외교는 그를 자연스레 국제지도자로 부상시켰다. 44년 11월,아이젠하워 장군 지휘하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연합군이 최후의 승리를 위해 독일로 진격하고 있을 때 미국은 다음 대통령선거를 치렀는데,FDR은 공화당의 토머스 듀이를 물리치고 4선 대통령에 당선됐다.전쟁의 마무리 뿐 아니라 전후평화에 있어서도 미 국민은 그의 영도력에 큰기대를 걸었던 것이었다.그러나 격무에 시달리던 그는 취임 3개월도 못된 4월12일 조지아주 웜스프링 휴양지에서 뇌출혈로 숨졌다.그의 나이 63세. 라이딩스의 대통령 순위에 따르면 FDR은 지도력과 정치력에서 각각 1위,업적 및 위기관리와 용인술에서는 각각 2위,성격 및 집중도에서는 15위를 기록해 전체 순위에서는 링컨에 이어 2위로 나타나 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과의 일화는 그의 지도력 및 용인술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첫대통령 취임 직후 FDR의 군예산 대폭 삭감계획에 불만을 품은 맥아더 육군참모총장이 조지 던 전쟁장관과 함께 백악관을 방문했다.대통령과 부딪히는 것을 꺼리고 있던 던 장관을 제치고 맥아더가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FDR은 빈정거리는 투로 평화시에 많은 군대를 유지할 필요가 있느냐고 답했다.두사람 사이에는 다소 설전이 오갔다. 마침내 맥아더가 자제력을 잃고 “만일 다음 전쟁에서 미국이 져 미국 병사들이 적의 군화발에 짓밟힌다면 그들은 맥아더가 아닌 루즈벨트를 원망할 것입니다”라고 대들었다.그러자 FDR 역시 화를 버럭내며 “당신이 대통령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라며 고함을 질렀다.잠시 침묵이 흘렀다.맥아더의 생명은 끝난 것과 다름 없었다.군통수권자에 대한 모욕은 군법회의 감이었다.그는 사과를 한 후 총장직 사의를 표하고 뒤돌아 나왔다. 맥아더가 막 집무실 문을 나서려는 순간 뒤에서 대통령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더글라스,어리석은 짓 말게.여기 당신의 목과 예산안을 함께 가져 가게” FDR의 정치생애에서 가장 주목을 받아야할 사람은 부인일리노어 여사라는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그녀는 남편의 투병중 세심한 간호는 물론 그가 주민들로부터 잊혀지지 않도록 정치활동을 대신,남편의 정치적 재기를 가능케 했다.또 퍼스트 레디가 된 후에도 신문에 ‘마이 데이’라는 칼럼을 정기적으로 썼으며 적극적인 사회활동으로 현대적 퍼스트 레디상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FDR이 죽은후 그녀는 남편 생가의 옆동네인 바킬의 고향집에서 17년을 더 살았으며 트루만 대통령의 요청으로 6년간 유엔총회 미국대표단장을 역임하는 등 공직생활을 하기도 했다.62년 78세로 생을 마감한 그녀는 국민들 마음에 헌신적이고도 박애적인 영원한 퍼스트 레디로 깊이 각인됐으며 지난 여름에는 워싱턴에 동상이 선 첫 퍼스트 레디가 됐다. FDR의 업적 가운데 주목받는 것으로는 대통령도서관 시스템의 도입이 있다.역사기록의 중요성과 대통령직 수행 자체가 국민의 위임에 의한 것임을 자각했던 그는 1기 임기가 끝났을 때 자신의 모든 자료들과 하이드파크의 생가를 국가에 기증,대통령도서관을 만들어 국민들이 언제라도 편하게 접할 수 있게 했다.현재 미국내 존재하는 대통령도서관은 모두 11개로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의 관할 아래 제31대 후버 대통령부터 41대 부시 대통령까지 주로 생가에 건립돼 있으며 미 대통령문화의 요람이 되고 있다. ◎수잔 쿠퍼 미 국립문서보관소 대통령도서관 담당/“대통령직 관련 자료 보존·열람 FDR 투철한 역사의식서 시작” 미 국립문서보관소의 수잔 쿠퍼 대통령도서관 담당관은 “미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대통령직 수행과 관련된 자료들을 한데 모아 보존하고 열람시키는 전통을 수립한 것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투철한 역사의식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도서관의 설립 동기는. ▲1939년 두번째 임기중이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하이드파크의 생가일부와 소장하고 있던 모든 자료들을 연방정부에 기증하고 그 관리를 의뢰하면서부터 시작됐다.도서관 건물은 이듬해인 40년 후원회에서 건립후 국가에 헌납했다.1955년 ‘대통령도서관법’이 제정돼 도서관의 건립은 대통령후원회 등 개인이 맡고 관리만 국립문서보관소에서 하도록 돼 있다. ­이전에는 대통령문서가 어떻게 보존돼 왔나. ▲대통령마다 의회도서관 또는 출신대학,거주지 도서관 등에 기증하거나 혹은 후손에 남기는 등 가지각색이었다.그래서 팔려나간 경우도 있고,훼손·분실되는 일도 많았으며 여러군데 흩어져 있는 경우도 많았다. ­현재 대통령도서관 현황은. ▲최근 텍사스 A&M유니버시티 내에 개관한 부시도서관을 포함 모두 11개이다.루즈벨트에 이어 트루만(미주리 인디펜던스),후버(아이오와 웨스트브렌치),아이젠하워(캔자스 애빌린),케네디(매사추세츠 보스톤),존슨(텍사스 오스틴),포드(미시간 앤아버),카터(조지아 애틀란타),레이건(캘리포니아 시미 밸리)도서관 등이 있다.워터게이트로 물러난 닉슨의 도서관은 캘리포니아 요루바린다에 있으나 의회명령으로 방대한 양의 워터게이트사건 관련 문서들은 아직 국립문서보관소의 닉슨자료실에 보관돼 있다. ­대통령 도서관에 전시되는 자료들의 내용은. ▲대통령이나 비서진에 의해 공식적으로 만들어진문서,국내외로부터 받은 문서 및 서신,취임전후의 자료,사진·필름 등 각종 오디오 비디오 자료,유품 등 개인소장물품과 공식선물 등이다.
  • 불/가톨릭 국가 성당 위기에

    ◎신도수 12%로 격감… 후원금 줄어 재정난 심각/읍면 지원금도 끊겨 박물관 등 활용 자구 나서/문화재급 수도원 등 2,300여개 사실상 폐쇄 【파리=김병헌 특파원】 프랑스 성당들이 점차 황폐화되고 있다. 프랑스내 성당은 문화재로 지정된 4천443개를 포함해 모두 4만여개에 이른다. 이들 성당들은 지역별로 3만6천개의 읍면사무소의 재정적인 지원과 신도들의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나 최근 신도들이 크게 감소하면서 재정난으로 건물관리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프랑스는 전통적인 카톨릭 국가이나 갈수록 매주 성당에 나가는 ‘실질적인’ 신도들이 줄고 있다. 2차대전 직후 33% 였던 실질적인 신도들이 최근들어서는 12%까지 격감한 게 가장 큰 이유다.따라서 신도가 한명도 없는 성당들도 줄을 잇고 있으며 이러한 성당들은 사실상 폐허가 됐다.특히 산업화로 인구가 크게 줄고있는 시골지역 성당의 경우 더욱 심각한 실정이다.관계당국에 다르면 이미 2천300개의 성당이 사실상 폐허가 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프랑스 성당들은 1904년 정경분리정책에 따라 성당 운영관리를 읍면사무소에서 하게 됐다.당시에는 그래도 성당을 찾는 신도들이 많아 각지역 읍면사무소에서는 서로 많은 수의 성당들을 자신들의 관리하에 두려고 했다.그러나 성당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신도수가 줄면서 이제는 그지역 행정기관의 최대부담으로 대두되고 있는 셈이다. 성당관리를 담당하는 당국의 한 관계자는 “오트 노르망디 지역의 한 성당의 경우에는 지역 인구가 300명에 지나지 않아 사실상 면의 지원도 미미해 아예 성당관리를 맡아줄 독지가를 찾고 있는 실정”이라며 “연간 60만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는 성당을 그정도의 인구가 사는 지역행정기관에서 계속 운영관리하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으나 대책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따라 성당들은 스스로 자구책 마련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읍면사무소에서 직접 나서 성당을 운영관리하는 재단을 만드는가 하면 콘서트홀이나 박물관 상설전시장 등으로 아예 용도를 바꾸고 있는 지역도 크게 늘고 있다.상리스의 생프랑부르성당은 운영재단을 만들었으며앙제에 있는 투생 수도원은 아예 박물관으로 개조했다.그리고 디종지역의 생장성당은 극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새르트르의 생트프와성당은 상설전시 판매장으로 탈바꿈했다. 관계당국은 문화재로 지정된 성당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보존가치가 있는 만큼 이들의 관리를 위해 용도변경을 적극 장려하고 있다.단지 유흥장 등 세속적이거나 지나치게 상업적인 용도로만 바꾸지 못하게 하는 선에서 규제하고 있어 앞으로 프랑스에서는 성당을 이용한 각종 공공시설들은 어쩔수 없이 갈수록 늘어날 것 같다.
  • IMF와 한국 자본주의(해외논단)

    한국의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김대중 당선자가 이번 IMF 구제금융을 계기로 도출된 한국민들의 애국심을 결집시키는데 성공한다면 박정희 대통령 이래 최고의 대통령이 될 것이고,나아가 북한과의 화해까지 이뤄낸다면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인이 될 것이라고 미캘리포니아 일본정책연구소 이사장인 찰머스 존슨 박사가 최근 LA타임스의 기고문에서 주장했다. ‘한국 자본주의 IMF하에서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제목의 그의 기고문을 소개한다. 김대중 한국의 새 대통령 당선자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일들이 있다. 3만7천명 주한미군의 방위비 분담금을 달러에 비해 절반 이하의 가치로 떨어진원화로 지불해야 하는 것에 덧붙여 북한의 김정일이 한국의 경제적 재난을 이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지난 16일 뉴욕타임스는 김정일을 “21세기의 항해를 위한 북극성과 같은 길잡이”라고 설명한 전면 칼라광고를 실었다. 구제금융을 댓가로 한국민들이 치욕적이라고 생각하는 IMF의 조건들을 수용하도록 강요받고 있을 때 북한은 사실상 한국민들에 대해 “만일당신이 남측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탐탁치 않다면,우리 진정한 애국자들은 팔을 활짝 벌여 당신을 환영할 준비가돼있다.”고 선전해댔다. 북한 또한 올들어 굶주리는 국민들을 위해 쌀과 식량 등을 포함한 상당량의 구호물품을 받았다는 사실은 거론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 원조에는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부대조건도 없었고 심지어는 8만5천달러를 낭비해가며 신문에 자찬하는 광고를 내는데도 아무도 그것을 금하지 않았다. DMZ 양측의 한국민들은 모두 자부심 강하고 애국적인 국민들이다. 북한인들은 그들이 2차대전중 일본에 대해 보다 격렬하게 싸웠다고 주장하며 이 광고에서 몇차례 강조했다. 김정일은 “항일게릴라 비밀캠프에서 조선의 독립을 승리로 이끈 젊은 김일성장군과 항일 여성전사였던 김정숙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기술돼 있다. 그러나 북한은 이 광고에서 미국이나 한국을 전쟁으로 몰아가기 위해 자극하는 입장은 취하지 않았다. 그들의 자본주의적 형제들이 몰락하게 된 불행을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조소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또한 한국,태국,인도네시아 등 아시아경제를 보다 서구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려는 IMF의 오만한 요구들은 상황을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더욱 악화시켜 나갈 수 있다고 미국에 대한 경고 의미도 있었다. 1980년대 중반 IMF는 비슷한 조건들을 베트남에 적용시킨 적이 있었다. 그때 베트남은 신속하게 한국에서 나이키 신발과 다른 의류들을 생산하고 있던 한국 기업들에게 인기있는 투자지로 변하게 됐다. 만일 한국경제가 축소를심하게 강요당한다면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네시아,중국 등에 널려 있는 많은 그들의 투자가 위축될 것은 분명하다. 한국의 새 대통령 당선자 김대중은 위대한 한국의 애국자이다. 과거의 군사정권들은 그를 살해하려고까지 했다. 그는 또한 정치적 경제적으로 오랫동안 소외돼 왔으며,80년 미국이 눈감아 주었던 광주 시위군중 학살의 희생자인 한국의 서남부 주민들을 대표하고 있다. 만일 김당선자가 IMF로부터 한국적 정서와 공존할 수 있는 사항들을 도출하여 한국민의 애국심을 결집시키는데 성공한다면 그는 박정희 이래 최고의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그가 미군을 본국으로 돌아가게하고,굶주리지만 동등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북의 주민들과 공존할 수 있는진정한 협상을 이뤄낼 수 있다면 그는 한국정치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 친구같은 대통령/나윤도 워싱턴 특파원(오늘의 눈)

    맨해튼 서쪽끝의 헨리 허드슨 파크웨이를 타고 두시간쯤 북쪽으로 올라가면 하이드파크 라는 작은 도시가 나오고 그 도시 한가운데 허드슨강 언덕에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생가가 자리잡고 있다.생가와 도서관과 무덤이 한데 어우러져 역사공원을 이루고 있다. 이 작은 마을이 매년 수백만명의 관광객으로 붐비는 것은 루즈벨트가 경제와 안보의 두위기,즉 대공황과 2차대전이라는 극단적 위기상황에서 미국을 구한 현대적 미 대통령의 모델로 미국민들의 마음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미국민이 그에게 3권을 초월하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미역사상 전무후무의 4선 대통령에 당선시킨 것은 그의 정치적 업적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국민의 친구가 됐기 때문이다.그는 취임 직후부터 ‘노변정담’이라는 라디오연설 시간을 만들어 수시로 국민과 대화를 나눴다.“친구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그의 연설은 어떤 어려운 상황의 사람에게도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국민들은 그의 연설을 듣고 있으면 배도 고프지 않았고 춥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았다.힘이 솟았다.내가 대통령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그가 현대적 대통령직의 본보기로 추앙받는 것은 바로 이러한 대통령과 국민과의 새로운 관계설정 때문이었다.그의 취임후 백악관에는 하루 4천통이상의 편지가 날아들었다.전임자 후버 대통령의 40통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92년 무명의 빌 클린턴 아칸소 주지사가 일약 미대통령에 당선됐을때 워싱턴 포스트는 ‘친애하는 대통령께’라는 제목하에 18세 이하를 대상으로 미지의 대통령에게 할 말 있는 청소년들의 편지를 모았다.3주만에 10만700통이 응모됐다.그렇게 할말이 많은지 미처 상상치도 못했으며 기발한 내용들로 가득차 있었다.이들 편지는 클린턴 당선자에게 전달되었다. 우리 대통령 선거날 TV가 다투어 비춰주는 김대중 당선자의 하의도 생가를 바라보면서 루즈벨트의 하이드파크를 떠올려본다.그리고 하의도가 ‘친구대통령’을 탄생시킨 한국 대통령문화의 새출발지가 되기를 기대해보면서 짧은 편지도 써본다.“국민들은 친구 같은 대통령을 원한다.할 말이 너무 많기 때문에.그리고솔직한 대통령을 원한다.믿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 유럽연합 6개국 가입 갈길 험난(해외사설)

    룩셈부르크 정상회의는 역사적인 사건이다.역사적이란 표현이 다소 거창하게 들릴지라도 유럽연합의 확대 계획을 한마디로 요약할 말은 이보다 적합한게 없기 때문이다.15개국 정상들은 유럽대륙의 새로운 질서의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금세기 들어 처음으로 유럽은 이제 하나의 유럽의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2차대전이후 나치가 멸망한 이후,공산주의가 사라진 이후,동 서유럽간 서로 갈라진 형제들은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이제 폴란드 체코 헝가리에 스토니아 사이프러스 등 5개국가의 회원국 가입은 최근 오스트리아나 스웨덴의 가입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대서양에서 우랄산맥까지의 정치적 문화의,즉 민주주의와 평화을 위한 공동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주요 원칙에는 합의했지만 그러나 실제 가입까지는 멀고도 험한 길이 될것이다.가장 큰 장애물은 ‘깊이’의 문제다.이는 실질적인 유럽연합의 확대를 의미한다.가입하려는 6개국이 회원국으로서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위한 조치에 있어 15개국들의 의견의 합의를 보지 못했다.지난번 암스테르담 회의에서 실패를 보여준 것처럼 프랑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확대에 필요한 관련법을 개혁하지 못한데서도 잘 나타난다. 연방주의는 근본적으로 회원국들의 이익과 상치되고 있다.회원국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희생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한 여러가지 이유를 댔다.실질적인 면에서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결국 15개 회원국들은 일시적인 생각에 큰분야는 물론이고 작은 수단에 이르기까지 유럽연합 확대를 위한 완전한 형태를 취하지 못할 전망이다.부자인 서유럽회원국들은 이상적인 유럽공동체를 입으로는 떠들지만 먼저 도움을 바라는 가난한 동유럽회원국들의 가입을 위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5개 회원국들은 물론이고 새로 가입하려는 6개국들도 조만간 이같은 룩셈부르그회의를 미래를 현실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지지부진한 협상,과도기를 위한 긴 세월 등을 감안할때 회원국이 실질적으로 21개국으로 늘어나는데는 족히 10년은 걸릴 것이다.
  • ‘죽음과 광기의 그림자’ 베른하르트 장편 발간

    ◎‘옛 거장들’ ‘비트겐슈타인의 조가’ 2권/단순한 줄거리·화자중심의 독특한 세계/파란만장했던 삶 그대로 작품속에 투영 ‘알프스의 베케트’‘인간 혐오자’ 등으로 불리는 오스트리아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1931~1989).현대 독일어권 문학을 이야기할 때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바로 그다.그러나 베른하르트는 국내 독자들에게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최근 도서출판 현암사에서 펴낸 베른하르트의 장편소설 ‘옛 거장들’(김연순·박희석 옮김)과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윤선아 옮김)는 그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압축해 보여주는 대표작들로 관심을 모은다. 베른하르트 문학의 뿌리는 작가의 유년시절과 청소년 시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사생아로 태어나 죽음만을 생각하며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낸 그는 2차대전의 참상과 자신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외할아버지의 죽음,그리고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게 한 폐결핵에 이르기까지 더없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그의 작품에 온통 죽음과 질병,고립과 광기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베른하르트에게 있어 글쓰기란 자아인식을 통해 자신을 구제하고 치료하기 위한 시도다.그는 삶과 죽음을 대립관계로 보지 않는다.대신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통해 삶의 희비극성 내지 인간의 불완전성을 강조한다. “세상엔 찬양할 것도 없고 저주할 것도 고소할 것도 없다.다만 우스꽝스러운 것이 많이 있을 따름이다.죽음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그는 1968년 오스트리아 국가문학상 수상 연설문에서 이같이 밝혔다.이는 곧바로 베른하르트의 문학정신과도 통한다.베른하르트 문학의 또 다른 특징은 서술의 불가능성을 주제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조이스의 작품이나 릴케의 ‘말테의 수기’ 등 현대의 유럽 고전소설에서 종종 볼 수 있듯이 베른하르트의 작품에도 줄거리라고 할만한 것이 없거나 있다해도 간단히 요약될 수 있을 정도로 지극히 단순하다.베른하르트는 마지막 소설 ‘소멸’에이르기까지 이 창작원칙을 고수한다.자연히 그의 작품에서는 이른바 구성이주는 긴장감은 찾아보기 힘들다.그는 스스로를전형적인 ‘이야기 파괴자’라고 했다.요컨대 베른하르트 문학의 매력은 박진감 넘치는 줄거리에 있는것이 아니라 화자의 자기성찰을 통한 언어 그 자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베른하르트의 85년작 ‘옛 거장들’의 무대는 오스트리아 빈의 미술사 박물관.소설의 화자인 철학자 아츠바허가 음악평론가인 레거와 만나기로 한 미술사 박물관에 한시간 먼저 가 레거를 몰래 관찰하면서 그전에 레거와 나눴던 대화를 회상하는 내용이다.작가는 레거의 입을 빌어 예술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예술의 ‘거장’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예술적 속물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다.이 소설은 베른하르트의 작품들이 으레 그렇듯이 단락이나 절 또는 장 따위의 구분이 전혀 없어 쉽게 읽히지 않는다.때문에 그의 문학을 이해하려면 언어의 음악성이나 언어가 주는 박진감,특히 호흡이 긴 만연체 문장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현대철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논리 철학 논고’를 쓴 오스트리아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인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작가 자신의 운명적인 만남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이 작품에서 화자로 등장하는 베른하르트는 자신과 파울,그리고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비교하면서 세 사람을 ‘정신적 인간’이라고 부른다.나아가 파울은 광기를 생활화해 미치광이가 되었으며,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광기를 철학화해 철학자가 되었고,자신은 광기를 통제해 작가가 되었다는 점도 분명히 한다.자칫 ‘정신의 감옥’으로 변질될 수 있는 부와 안정을 버리고 치열한 정신적삶의 길을 택한 두 기인을 통해 작가가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정부서 한인 등 불법 강제징용”/일 74개 노조 ILO에 제소

    【도쿄 교도 연합】 일본 74개 노동조합은 8일 제2차 세계대전 전과 진행중 한반도와 중국에서의 강제 징용과 관련해 일본정부와 민간기업을 비난하며 국제노동기구(ILO)에 소송을 제기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이들 노동조합 전국조직 사무국은 2차대전 당시 일본군 ‘종군위안부’와는 별개로 강제징용과 관련해 일본 노동조합이 소송을 제기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노동조합 전국조직 사무국은 일본의 상습적인 불법 강제징용에 관한 ILO의 결정을 통해 일본정부와 기업들로 하여금 모든 내용을 밝히고 강제 징용자들에 대한 보상비를 지불토록 해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뉴딜정책 기수 프랭클린 루즈벨트:상(미국의 대통령 문화:3)

    ◎휠체어 앉아 ‘미국’을 일으킨 영웅/맥빠진 국민에 “무엇이든 해보자”/노변정담 설득… 공황극복 견인/국민신뢰 대단… ‘대통령학’ 모델/정계입문 초기 잇따라 선거 패배/소아마비로 “정치생명 끝장” 중평/목발 짚고 민주 전대 웅변 감동적 “나는 여러분에게 맹세합니다.또 나 스스로에게 맹세합니다.미 국민을 위한 ‘새로운 정책’(New Deal)을 펼 것을 말입니다” 1932년 7월2일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장.대통령후보지명 수락연설에 나선 프랭클린 루즈벨트 당시 뉴욕주지사가 처음으로 ‘뉴딜’을 외쳤을때 아무도 그 한 단어가 미국을 절망에서 구출하고 세계최고의 번영으로 인도할‘키워드’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후 ‘뉴딜’은 ‘대공황’의 반대어로 자리매김했으며 미국민의 자존심과 긍지를 나타내고 승리를 대표하는 어휘가 됐다. 루즈벨트는 선거운동과정에서도 대공황 여파로 자신감을 상실한 채 무기력해져 있는 미국민들을 향해 외쳤다.“어떤 방법이든 택하여 그것을 해봅시다.만일 실패한다면 그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다른것을 해봅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 해보자는 것입니다” 워싱턴 중심의 몰공원 남쪽 포토맥강가에 지난 여름 개장된 프랭클린 루즈벨트 기념공원은 어린 학생부터 노인들까지 하루종일 수많은 관람객들로 붐빈다.미 역사상 훌륭한 대통령 빅3에 들면서도 수도 워싱턴에 이렇다할 기념관 하나 마련돼 있지 않아 워싱토니안(워싱턴사람들)은 물론 관광객들로부터도 많은 아쉬움을 불러일으키던 참이어서인지 더욱 찾는 사람이 많다. 이 공원에는 그의 재임 4기를 시기별로 네개의 공간에 나누어 각종 상징적 조형물을 세우고 또한 대표적 어록을 벽에 새겨놓아 당시의 시대상과 루즈벨트 대통령의 업적 등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미시간주에서 관광온 테드 모간씨(74)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국민 설득을 위해 자주 사용했던 라디오연설을 들은 기억이 있다”면서 한 실업자가라디오 앞에서 대통령의 방송을 듣고 있는 상징물 앞을 떠날 줄 몰랐다.‘노변정담’(fireside chats)이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시도됐던 루즈벨트 대통령의 라디오연설은 당시 절망감에 사로잡힌 국민들에게 최고의 인기있는 복음이었다고 모간씨는 회상했다. 1차대전 이후 호황기의 절정에 다달았던 29년 말부터 갑자기 몰아닥친 대공황은 3년동안 5천개의 은행을 문닫게 했으며 그에 따른 기업과 공장들의 연쇄도산이 뒤를 이었다.근로자들이 땀흘려 저축한 돈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전체 노동력의 40∼50%에 달하는 3천4백만의 실업자가 하루하루의 생계를 위해 거리를 배회했다. 이같은 암흑기를 지나면서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눈덩이처럼 커진 미국민들에게 루즈벨트는 공황의 종식을 위한 ‘뉴딜’을 외치며 균형예산과 실업자 구조,금주법의 폐지 등을 공약으로 제시,무기력한 후버 행정부와의 차별성을 부각시켰다. 특히 루즈벨트가 실의에 빠진 유권자들에게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선거공약의 내용및 실현성 여부를 떠나 ‘의욕’이라는 심리적인 자극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그는 희망이 사라진 곳에 희망을 불러 일으켰으며 확신이 상실된 곳에 확신을 심어주었다. 결국 선거결과는 루즈벨트가 유효표의 57%를 득표,선거인단 472명을 확보함으로써 40% 득표에 선거인단 59명을 확보한 후버 현직대통령을 압도적으로 물리치고 승리했다.이렇게 해서 대공황을 극복하고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미국을 세계 최강의 국가로 자리매김한 4선 대통령 루즈벨트시대가 개막된 것이다.초대 워싱턴 대통령 이래 불문율로 지켜져온 중임 전통에도 불구하고 미국민들로부터 네차례나 대통령직을 부여받을 정도로 그는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며 그같은 지지를 바탕으로 경제위기와 전쟁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미현대사에 있어 가장 훌륭한 대통령의 모델로 기록되고 있다. 1882년 뉴욕주 업스테이트의 허드슨강변 동쪽 언덕에 위치한 하이드 파크에서 출생한 루즈벨트는 부유한 가정형편 덕분에 개인교습을 받고 사립학교에 다녔으며 어려서부터 유럽여행을 다니는 등 풍족하고 귀족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특히 그의 성장기에 대통령으로 명성을 날리던 테오도어 루즈벨트(26대)는 먼 친척 형(12촌)뻘로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그의 부인이 된 일리노어 루즈벨트는테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조카로 부친을 일찍 여의였기때문에 1905년 그들의 결혼식에는 현직 대통령이 신부를 데리고 입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바드 대학과 콜럼비아대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로 활동하다 1910년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정계입문한 루즈벨트는 각종 선거에서 여러차례 낙선을 경험하는 등 초기에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다.우드로 윌슨 대통령(28대)에 의해 해군성 차관보로 임명돼 1차대전 당시 중요한 해군전략 수립에 관여했으며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이같은 1차대전때의 그의 경험은 대통령으로 2차대전을 맞았을때 십분 활용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패배했으며 1920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제임스 콕스 대통령후보의 런닝메이트로 출마해 고배를 마시는등 중앙정치무대와는 인연이 없는듯 했다.엎친데 덮친 격으로 잠시 금융회사의 임원으로 정치를 떠나 있을때 그는 엄청난 개인적 불행을 당하게 된다. 이듬해 8월 캐나다 해안에서의 휴가중 찬물에 빠져 감기에 걸린 것이 척수성 소아마비로 발전,양다리를 못쓰게 됨은 물론 팔과 손에까지 부분 마비가오게 되었다.당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정치적 생명은 끝난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그는 의지를 잃지 않았다.조지아주의 웜스프링스로 가서 3년동안 기적적인 투병으로 그는 스스로 휠체어를 타고 움직일 수 있었다. 1924년 그가 휠체어를 타고 민주당 전당대회장에 나타났을때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으며 그가 목발에 의지해 단상에 기대서서 연설할 때는 그의 인간승리 모습에 감동적인 환호를 보냈다.결국 그는 1928년 뉴욕주지사로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했다. ◎루즈벨트 도서관 사서 레이몬드 타이크만/“항상 국민과 함께한 지도자”/4연임,전쟁 마무리 위한 국민의 선택 FDR(프랭클린 D.루즈벨트의 약자 애칭)학의 권위자인 뉴욕주 하이드파크 프랭클린 루즈벨트 도서관의 선임 사서레이몬드 타이크만 박사는 그가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어느 대통령보다도 국민과 함께 하려고 노력한 대통령이었다고 소개했다. -FDR이 미국민들로부터 빅3로 추앙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공황으로 잃은 정부의 신뢰회복을 위하여 그는 국민들과의 직접대화를 택했다.라디오 연설시간인 ‘노변정담’을 통해 그는 정부정책에 대한 세세한 설명과 이해를 구했다.국민들은 그가 국민편에 있다고 생각했다. -뉴딜정책이 국민들에게 어필한 이유는. ▲후버 대통령이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제퍼슨적인 자유주의 입장에서 있었다면 FDR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해밀튼적인 보수주의 입장에서 있었다.대공황으로 의욕을 상실하고 무력감에 빠져있던 국민들에게 정부와 대통령의 적극적인 유도는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당시 불문율로 돼있던 중임 전통을 깨고 3연임에 도전하게된 이유는. ▲FDR도 처음에는 주저했다.그러나 대공황의 그늘이 아직 걷히지 않은 가운데 2차대전이 발발했고 불과 수개월만에 프랑스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그의연임은 국민적 합의의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4연임 역시 전쟁의 성공적 마무리에 대한 국민의 기대 때문이었다. -FDR에게 4연임까지도 허용했던 미국민들이 1951년대통령 임기를 중임으로 제한하는 22차 헌법수정안을 서둘러 마련한 이유는. ▲국민들이 경제위기및 전쟁위기 상황하에 있을때는 강력한 정부,강력한 지도력을 원했지만 일단 모든 것이 정상상태로 회복된 후에는 큰 정부의 필요성도,집중된 권력의 필요성도 인정치 않았기 때문에 견제와 균형의 기본원칙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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