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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정부 ‘고시개정·항소’ 기로

    日정부 ‘고시개정·항소’ 기로

    |도쿄 이춘규특파원|25일 일본 도쿄지방법원이 소록도 한센인의 보상청구를 기각하고, 타이완측 한센인들의 청구는 받아들이자 한국과 일본측 변호인단은 ‘즉각 항소’ 계획을 밝혔다. 변호인단은 동시에 타이완 한센인들이 보상권을 획득한 점을 들어 소록도 한센인도 후생노동성의 ‘고시’를 고쳐 동시에 보상받을 수 있도록 고시 개정을 촉구하기로 했다. ●한국정부 ‘강건너 불구경´ 이 과정에서 그동안 ‘외교력 부재’라는 지적을 받아온 한국 정부가 외교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변수다. 이를 위해 원고와 변호인단, 일본·한국·타이완 인권 및 시민단체 회원 수백명이 도쿄시내 후생노동성 청사 앞에서 28일까지 ‘항소 포기’와 ‘고시 개정’ 촉구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아울러 정치권의 협조를 얻기 위해 이날부터 연립여당인 공명당은 물론 공산·사민당 등 야당측과 간담회를 갖고 소록도 한센인들도 법개정 없이 보상받을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했다. 고시가 개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피해자들이 70∼90대의 고령인 점을 감안,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항소심을 진행시켜 승소하겠다는 입장이다. 변호인단은 항소심이 1년정도 소요될 것으로 전망했다. 원고측 한국 변호인인 박영립 변호사는 “법원의 양식을 믿고 항소해 반드시 승소하겠다.”면서도 “후생성 고시에 소록도 한센인들의 강제격리시설도 보상대상에 포함시키면 즉각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고시 개정 촉구 운동을 병행할 뜻을 밝혔다. ●변호인단 “항소땐 승소 확률 높다” 타이완 한센인들이 승소했기 때문에 같은 외국인인 소록도 한센인들도 항소하면 승리 확률이 높아 후생성이 타이완 한센인 판결에 항소를 포기하면서 고시를 개정, 소록도 한센인도 동시에 보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고측 일본인 변호인단도 “앞으로 후생성이 ‘고시’만 바꾸면 소록도 한센인 문제는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다.”며 “이제 바통은 후생성 쪽으로 넘어갔다.”고 밝혔다. 하지만 항소 전망이 밝은 것만은 아니다. 타이완 낙생원 재판장의 경우, 법무성 인권옹호국장 출신으로 과거 한센병 관련 소송에 밝았던 인사여서 타이완측 한센인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왔을 수 있다고 원고측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日정부 낙생원 판결 항소할까 따라서 일본 정부가 고시 개정 요구를 묵살하고, 낙생원 재판에 항소해 법논리를 중시하는 2심 재판부를 만날 경우 사태는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일본 정부측은 그동안 “한센병보상법은 2차대전후 국내에서의 격리정책의 구제를 염두에 둔 것으로 전후에 주권이 미치지 않게 된 외국시설 수용자는 보상대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해 왔다. taein@seoul.co.kr
  • 전쟁 아니면 밥맛도 잃는 사나이

    전쟁 아니면 밥맛도 잃는 사나이

      한국에 온 30년 고참병, 겪은 전투만도 5백 회 「스포츠·커트」형 머리에 다부지게 다져진 미육군중령「맥윈니」의「유니폼」을 보면 그가 전형적인 GI장교가 아님을 쉽게 알게 해준다. 그의 겉저고리엔 흔한 훈장 하나 붙어있지 않다. 훈장 대신 그가 즐겨 붙인 것들은 -「레인저」(유격)훈련수료「마크」, 공수단「마크」, 영국군 공수훈련수료「마크」,「그린·베레·마크」, 특수폭탄취급「마크」, 한국군 태권도「마크」등 좀 엉뚱하다. 사나이「맥윈니」의 과거는 한 마디로 파란만장이다. 그는 16세 때 2차대전의 명「킬러」인 영국군특공대「블랙·워치」에 입대, 전투를 배운 이래 북「아메리카」특공대,「이탈리아」의「가리발디」유격대, 영국공군 폭탄투하수 등으로 2차대전을 치른 뒤 다시 미군「그린·베레」에 입대, 월남,「라오스」, 태국 등지를 돌아다녔고 6·25 땐 소대장으로 철원, 금화 지구 전투에 참전했다. 그가 30년 동안 겪은 5백여 전투의 대부분은 특공전 또는 유격전. 특공전, 유격전 등이 새삼 중시되고 있는 요즘의 한국전선에 노병「맥윈니」가 일선 대대장으로 찾아온 것이 퍽 귀하게 여겨져 그의「논·픽션」파란만장한 30년을 들어본다. 나이 어려서 안된다는 걸 16세 소년 때 떼써서 입대 「맥윈니」의 군대생활은 퍽 단순하게 시작했다. 1940년, 그가 16세 되던 때 고향인「글라스고」(영국「스코틀란드」지방)에서「스코틀란드」민속「유니폼」을 입고「파이프」나팔을 불며 시가행진하는「스코티시」의장대를 보고 그 길로 뛰어가 입대를 자원했다. 문을 두드린 곳은「스코티시·레지먼트」로 불리는 호전적인 직업군인부대. 처음엔 나이가 어리다고 다른 정규부대로 가보라는 거절을 받았으나 한사코 졸라 입대에 성공했다. 위험한 특수부대, 최전방만 골라 지원 기본훈련을 끝내고 처음으로 배치된 곳은「글라스고」비행장 경비대. 당시 영국 곳곳은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던 독일군의 공습으로 쑥밭이 되다시피 했고 특히 비행장은 독일공군의 밥이었다. 「맥윈니」는 열심히 했으나 땅에 서서 비행기를 상대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고 또 개인전투능력을 발휘해 보지도 못한 채 번번히 당하기만 했다. 비행장 근무에 불만인「맥윈니」는 입대조건이 까다롭고「베테랑」급 직업군인들만이 지원하는 공정부대「블랙·워치」에 부모 몰래 지원했다. 그곳에서는 훈련만 1년이 걸렸다. 훈련을 끝낸「맥윈니」는 가장 적합한 공수대원이라는 칭찬을 받고 42년 11월 처음으로 전투요원으로 북「아프리카」근무를 명령 받았다. 「스코티시」의장대를 본 순간부터 부풀었던 공수대원의 꿈이 2년 만에 결실된 것이다. 그는 북「아프리카」의「블랙·워치」대원의 자격이 취소될까봐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명령을 받자마자 비행기에 올라「아프리카」로 떠났다. 이때 그의 계급은 1등병, 나이는 18세. 「맥윈니」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1등병 이상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1등병 계급장을 달고 다닌 일은 거의 없었다. 북「아프리카」에 날아 온「맥윈니」는「알제이」에서 3주일 동안 대기했다가「튜니스」로 갔다. 북「아프리카」는 당시「사막의 여우」「로멜」장군의 독일전차부대가 석권하고 있었다. 「튜니스」에 설치한「베이스·캠프」를 거점으로「맥윈니」부대는 북「아프리카」의 사막을 누비며 끊임없이「히트·앤드·런」전을 폈다. 약관 18세의「맥윈니」는 본부요원 근무를 굳이 마다하고 꾸준히 전투대를 따라다니며 싸움을 익혔다. 「맥윈니」의 강점은 대담한 성격.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폭발물 장치임무를 맡아 독일군이 장악하고 있던 철도를 곳곳에서 폭파시켰다. 북「아프리카」근무 4개월만에 그는 중요한 임무 하나를 명령 받았다. 2차 대전 때 아프리카에선 독일군 비행장에 특공대로 「리비아」의「퐁·두·파」에 있는 독일군 비행장을 공격, 다시는 비행장으로 쓸 수 없도록 쑥밭을 만들라는 것.「맥윈니」는 기쁨으로 떨렸다. 그는 곧 특공대를 편성했다. 총원 45명. 15명씩 3개조로 편성,「퐁·두·파」로 출발했다.「리비아」에 들어서면서 그들은 차를 버리고 걸었다.「퐁·두·파」비행장으로 향하는 마지막 하루는 이글거리는「아프리카」의 태양에 시달리며 온종일 모래바다를 걷는 강행군이었다. 드디어 닿은 비행장엔 한 대의 비행기도 없었다. 모두 출동했었다. 3개조로 나뉜 특공대「블랙·워치」는 공격 10분 전에 이제까지 참아 온 물을 마음껏 마시고 마지막 총기점검을 끝낸 뒤 서로 분산, 대장의 총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공격했다. 그들의 목표는 활주로와 관제탑이었다. 역전의「블랙·워치」에겐 그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관제탑을 폭파하고「택싱·웨이」를 무차별 사격으로 망쳐 활주로를 폐쇄시키고 철수했다. 임무를 성공리에 끝낸 것이다. 목표물 공격보다 더 힘든 것은 뜨거운 사막을 걸어 철수하는 일. 그건 대단한 인내가 강요되는 고된 행군이다. 더욱이 목표물을 폭파하고 되돌아가는 특공대의 뒤는 독일군이 자랑하는 사막전차가 무섭게 쫓는다. 돌아온「맥윈니」특공대에겐 숨돌릴 여유도 없이 또 하나의 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퐁·두·파」로부터 그리 멀지 떨어져 있지 않은 한 독일군 정거장을 폭파하라는 것. 명령복종은 영국군「블랙·워치」가 자랑하는 가장 영광스런 전통이다.「맥윈니」「팀」은 곧 목표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우연히 독일군 대전차부대와 맞부딪쳤다. 다시 특공에 나갔을 땐 전차 만나 포로 되기도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특공대와 사막전차대가 정면으로 맞부딪쳐 싸움을 벌인 일은 2차 대전을 모두 통틀어도 그리 흔치 않다는 이야기다.「맥윈니」의 특공대는 후퇴를 모르고 필사적으로 대항했다.「맥윈니」는 뜨거운 사막에 엎드려 마구 수류탄을 던지면서「탱크」에 뛰어오를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자「쾅」하는 소리가 났다. 「맥윈니」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원. 그는 오른쪽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어떻게 이곳「튜니스」의 병원에 옮겨졌는지는 그는 기억할 도리가 없었다. 그의 특공대 중 6명이 이곳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러나 입원생활 1주일 만에 병원이 독일군에 점령됐다.「맥윈니」는 병원에 누워있다가 그대로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 독일군은 입원 중이던 영국군 포로들을「이탈리아」로 옮겼다. 옮겨 수용된 곳은「악질적 연합군 포로」들만 수용하는 북부「이탈리아」의「토르·사리세」포로수용소. 포로생활은 특히「맥윈니」에겐 죽음보다 못한 것이었다. 수용소에 수용되자마자 그는 탈출을 노렸다. 독일군과「무소리니」「파쇼」정권의「이탈리아」군대가 공동 관리하는「토르·사리세」수용소는「탈출은 바로 죽음」이라는「슬로건」을 내건 요새. 아무도 이곳을 탈출, 살아 도망간 사람은 없다는 것이 이 수용소의 자랑(?)이다. 살아서 도망간 자 없다는 포로수용소 탈출에 성공 「맥윈니」는『죽어도 죽어도 탈출한다』는 집념을 몇 번이고 다짐하면서 동지를 규합했다. 그의 불 같은 집념에「스코틀란드」인 1명과「아일란드」인 1명이 감동, 같이 행동하기를 자청했다.「맥윈니」는 처음엔 망설였으나 그들이「앵글로·색슨」인이라는 점에서 의심을 거두고 받아들였다. 수용소생활 3개월 때에「맥윈니」와 탈출동지 2명은 D「데이」를 잡았다. 망루의「서치·라이트」를 피해 철조망을 1명씩 차례로 넘는다는 퍽 평범하고 무모한 계획이다. 모두들 말렸으나 무슨 기발한 계략을 짤 수가 없었고 더 수용되어 있기엔 북「아프리카」를 발랄하게 누빈 천부의「전투업자」「맥윈니」의 성격이 용납하지 않았다. 계획은 바로 실천해 버리는「맥윈니」였다. 그는 제일 먼저 철조망으로 뛰었다. 약 30초 간격으로 나머지 두 명도 잇따라 뛰어 철조망을 기어올랐다. 그건 기적이었다.「맥윈니」의 작전은 그것이 비록 평범하고 위험스러워도 늘 성공했다는 전례가 여기에서도 깨어지지 않았다.「맥윈니」중령은『그때의 탈출성공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다』고 회고했다. 「토르·사리세」포로수용소를 탈출한「맥윈니」는 그 길로 북부「이탈리아」의 중심「밀라노」로 뛰었다. 닿아보니「밀라노」는 독일군의 엄격한 점령에 들어가 있었다.「맥윈니」는「밀라노」에서 기다렸다가 연합군에 귀환할 생각을 할 수 없이 버리고 우연히 만나 사귄 어느「이탈리아」아가씨의 도움으로「버스」표를 입수,「코모」호수근처의 산으로 들어가「이탈리아」인 유격대「가리발디」부대에 입대했다. 「밀라노」에서 만난「이탈리아」아가씨는「맥윈니」의「가리발디」입대를 한사코 말리면서 곁에 머물러 있기를 간청했다.「맥윈니」는 뛰쳐나가다가 몇 번이고 발걸음을 돌려 정열적인「이탈리아」아가씨의 사랑을 받곤 했으나 끝내 뿌리치는데 성공했다. 유격대「가리발디」에서「맥윈니」의 역할은 유격대원들에 대한 식량조달이었다. 성격에 맞지 않았으나「이탈리아」인 유격대장은 영국인인 그에게 그 이상의 중책을 맡기지 않았다.「맥윈니」는 식량을 민가에서 기증받아 오라는 대장의 명령을 외면, 반드시 독일군 보급부대 및 보급열차를 습격, 보급물자를 빼앗아 조달했다. 이탈리아 유격대에 끼어 독일군 보급열차 등을 습격 대표적인 보급열차 습격으로「맥윈니」는「바시리」역 습격을 들었다. 하루는 식량조달을 하러 산을 내려가다 독일군 보급열차가「바시리」역에 머물러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바시리」역은 산에서 3시간 길. 그는「유고」인 1명을 조수로 데리고「바시리」역에 잠입했다. 수가 적기 때문에 교전을 피하고 몰래 화차를 털기로 했다. 그러나 보급열차는 무혈습격을 용납하지 않는 엄중한 경계에 있었다. 「맥윈니」와 그의 1명의 조수는 경비병 2명을 대검으로 해치우고 화차의 문을 깨고 물자를 들어냈다. 뛰려는 순간 경비병과 맞부딪쳐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는 그때 몇 명을 사살한 지 모른 채 쏘고 뛰며, 뛰고 쏘면서 산으로 돌아왔다. 그가 메고 온 독일군의 식빵은 1개 분대원의 3일분이었다. 「맥윈니」는「가리발디」부대에서 10개월을 보내다가 부상당한 동료대원을 메고「밀라노」의 어느 병원에 치료하러 갔다가 그 길로「알프스」를 넘어「스위스」로 갔다.「알프스」산을「맥윈니」는「유고」인 안내자 1명과 함께 열흘을 걸려 넘었다.「맥윈니」는「제네바」에 도착하자마자 그 곳 영국대사관에 달려가 그 동안의 경위를 전하고 영국행 비행기를 주선해주기를 부탁했다. 한 달 후에 그는「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런던」에 도착하자「맥윈니」는 바로「글라스고」로 달려가 귀환신고를 했다. 그러나「글라스고」의「블랙·워치」는 그가 포로가 되었고「이탈리아」유격대에 가담했다는 것을 들어 냉담, 군복을 벗게 했다. 2차 대전 끝나자 미국 이민, 다시 세계의 전쟁터 찾아 「맥윈니」는 당시 매우 어렵던 예편조치를 당했지만 기쁘긴커녕 실의에 빠졌다. 생각다 못해 그는 다시 공군에 입대, 폭탄투하수로 폭격기를 타고 독일상공을 날다가 종전을 맞았다. 종전이 되자 영국사회는 매우 혼란했다.「맥윈니」는 영국군이 더 이상 흥미가 없어 군복을 벗고 미국에 이민했다.「클리블란드」의 식품상으로 그는 16세 이후 처음으로 가정생활을 했다. 부인은 종전 후 사귄 영국여인. 그러나 민간인으로서의「맥윈니」는 생활의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내가 갈 곳은 군대다』라는 결의를 씹고「맥윈니」는 미군에 입대, 다시 1등병이 됐다. 미군으로서 그는 독일에서 근무했다.「맥윈니」는 독일근무가 끝나면서 보병에 싫증을 느껴 미육군공수특전단인「그린·베레」에 들어갔다. 「그린·베레」대원으로「맥윈니」는 10년 동안「라오스」, 태국,「오키나와」, 6·25 때의 한국을 거쳐 월남전선에서는「베트콩」수색타격대로 월남인 민병대원들과 함께 2년 동안「정글」을 쏘다녔다. 「맥윈니」는 팽팽히 긴장된 임진강 북쪽 최전방에 다시 부임, 북괴를 노리면서『지난 30년 동안의 나의 보람찬 군대생활의 마지막을 이곳에서 장식하겠다』면서 허리에 찬 권총을 꽉 쥐었다. <강형석(姜亨錫) 기자> [ 선데이서울 69년 3/16 제2권 11호 통권 제25호 ]
  • [씨줄날줄] 유엔 60돌/이목희 논설위원

    국제사회가 어지러워지면 세계정부를 꿈꾸는 이들이 늘어난다.2차대전 직후가 그랬다. 나치 및 일제의 침략전쟁과 원자폭탄의 위력을 보고 인류는 경악했다. 국가무력을 통제할 지구촌 차원의 권력을 만들고 싶어했다. 하지만 모든 개별국가의 주권 반납은 상상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현실적 방법을 택해야 했으며, 그것이 유엔이다. 유엔은 1차대전 후의 국제연맹보다 세계정부에 한걸음 다가섰다. 만장일치제를 다수결로 바꾸었고, 집단안전보장을 위한 무력제재권을 가졌다. 그러나 5개국의 거부권을 인정, 스스로 한계를 설정했다. 미·소 냉전체제에서 두 강대국 중 한쪽이 거부하면 유엔의 집단안보기능은 마비됐다. 소련의 헝가리·체코 침입, 미국의 그레나다·파나마 침공이 대표적 사례다. 그나마 한국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유엔 창립 초기, 미국의 우위가 뚜렷했을 때 독립국가 건설과 한국전쟁에서 유엔의 도움을 받았다. 유엔이 어제로 창설 60주년을 맞았다. 냉전체제는 해체됐으되, 새로운 국제질서를 주도할 능력을 유엔은 갖고 있지 않다. 군사분야에서 미국의 독주가 확연하고, 경제에서는 유럽, 일본, 중국이 미국에 이어 영향력을 발휘하는 다극체제가 형성되고 있다. 유엔 회원국은 191개국으로 늘어났다. 복잡한 국제관계를 정리해줄 틀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모든 국가는 1표’를 주장하는 다수와 초강대국 미국간 신경전을 우선 정리해야 한다. 지난주 문화다양성협약이 찬성 148, 반대 2표로 통과됐으나 반대의 무게가 만만찮다. 미국이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소국(中·小國)의 충돌은 유엔 산하기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유엔을 시끄럽게 하는 것은 또 있다. 일본·독일 등이 거부권을 가진 안보리 말석에 앉아보려고 애를 쓰는 상황이 첫째다. 둘째는 사무국의 추문과 재정난이다. 이대로 가면 유엔의 역할은 더 축소된다. 강대국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기존 강대국은 일방주의에서 벗어나고, 신흥 강국은 기득권에 편승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할 것이다. 유엔 민주화, 회원국 단결을 위해 중견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마침 중견국가의 대표격인 한국이 유엔 사무총장 후보를 낼 움직임이다. 정부는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이 강대국·약소국 양쪽에 도움이 된다는 공감을 국제사회에서 이끌어내기 바란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티타임의 정사’ 쓴 부조리극 대가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해럴드 핀터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새뮤얼 베케트와 더불어 현대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극작가로 꼽힌다. 국내에서도 1970년대초 ‘티타임의 정사’라는 제목으로 그의 작품 ‘정부’(원제 The Lover)가 처음 공연된 이후 30년 넘게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1930년 런던의 해크니에서 유대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극작가 이전에 배우로 출발했다. 초등학교 연극공연에서 발군의 연기력을 과시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학교 졸업후 왕립연극아카데미에 입학하지만 중도에 그만두고 연극학교에서 배우 수련을 받았다. 이후 극단에 합류해 1년 동안 아일랜드를 순회하는 등 배우로서의 경력을 차곡차곡 쌓았다. 배우로 활동하는 동안 핀터는 데이비드 배론이라는 예명을 사용해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영국 전역의 레퍼토리극장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핀터는 1957년 5월 친구이자 동료배우인 헨리 울프의 부탁을 받고 처녀작 ‘방(The Room)을 썼다. 이후 ‘생일파티’와 ‘귀향´ ‘관리인´ 등을 쓰면서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하게 됐다. 또 극장, 라디오, 텔레비전을 위한 작품들을 직접 쓰는 한편 연출과 연기도 겸했다. 영화에도 관심을 가져 1963년에는 조지프 루시 감독의 ‘관리인’과 ‘하인’을 시나리오로 각색했다. 2002년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대니스 타노빅 감독의 영화 ‘노맨스랜드’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핀터 희곡의 강점은 삶의 무의미성을 보여주면서,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끝없이 조롱당하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다루는데 있다. 런던에서 태어났지만 유대인이라는 사실과 2차대전 당시 정기적으로 폭격을 당한 경험은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상화된 폭력의 위협은 그에게 존재론적 상처를 남겼고, 핀터는 이를 바탕으로 유럽식의 부조리극과는 다른 영국식 부조리극을 창조했다. 초기극들인 ‘방’‘벙어리웨이터’‘생일파티’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관이 행하는 폭력의 위협을 노출시키지만 구체적인 정치적 언급은 피하고 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핀터가 노골적으로 정치극을 표방하고 쓴 ‘최후의 한잔’‘산골사투리’는 정치적 성향이 뚜렷하다. 그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이라크전 참전을 비난하는 등 인권운동가로도 활동했다. 1950년대 이후 영국의 대표적인 극작가들인 존 오스본, 톰 스토파드, 에드워드 본드처럼 핀터는 극작의 영감을 이론에서보다 실제에서 얻고 있다. 특히 배우로서 무대경험은 그의 작품을 한층 풍부하게 만들었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그의 독특한 스타일은 ‘핀터레스크(Pinterresque)’라는 형용사로 회자될 만큼 세계 연극팬들을 열광시켜 왔다. 연극계에서는 “핀터의 작품이 갖는 매력은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불확실성, 과감한 생략과 정지, 침묵으로 가득찬 모호함에 있다.”고 평한다. 그의 작품이 갖는 특성은 최근 국내에 번역 소개된 마틴 에슬린의 저서 ‘부조리극’(한길사)에도 잘 나와 있다. 배우, 극작가뿐만 아니라 연출가로도 활동중인 그는 국내외에서 두루 인정받고 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는 매년 그의 이름을 내건 페스티벌이 열린다. 그는 최근까지 존 부어맨 감독의 ‘테일러 오브 파나마’(2001)에 조연으로 등장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지난 2002년 평민사에서 그의 전집 9권이 출간됐으며 그해부터 국내에서도 ‘핀터 페스티벌’이 개최되고 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수상자 연보 ▲1930년 영국 런던 출생 ▲1948년 왕립연극아카데미 입학, 중퇴 ▲1949∼59년 아뉴 맥매스터 극단에서 배우로 활동 ▲1957년 단막극 ‘방’으로 데뷔 ▲1958년 희곡 ‘생일파티’ 발표 ▲1960년 희곡 ‘관리인’ 발표 ▲1964년 희곡 ‘귀향’ 발표 ▲1968년 희곡 ‘풍경’ 발표 ▲1970년 셰익스피어상 수상 ▲1973년 유럽문학상 수상 ▲1978년 희곡 ‘배신’ 발표 ▲1980년 피란델로상 수상 ▲1995년 데이비드 코언 영국문학상 수상 ▲1996년 로렌스 올리비에 특별상 수상 ▲1997년 몰리에르 데도뇌르 상 수상 ▲1999년 런던대 교수 ▲2004년 아일랜드 국립대 교수
  • [씨줄날줄] 여성총리 메르켈/ 육철수 논설위원

    역사상 1만 5000여 차례의 전쟁이 있었다고 한다. 남성 통치시대의 공격성·호전성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은 그럴듯하다. 그러면 모든 나라의 지도자를 여성으로 바꾸면 평화가 정착되고 사랑이 넘치는 시대가 올까. 여기엔 반론도 만만찮다.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 때 영토팽창이 가장 왕성했다. 인도의 인디라 간디는 파키스탄과 전쟁을 벌였고, 이스라엘의 여성총리 골다 메이어는 아랍 나라들과 6일 전쟁을 치렀다. 국가지도자가 되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국익이 먼저여서 어머니처럼 섬세하고 자상한 여성형 리더십이 반드시 평화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례들이다. 여성 국가지도자가 또 탄생해 세계적 관심사다. 차기 독일총리 앙겔라 메르켈(51·기민당 당수)이다.2차대전 이후 최연소이자 최초의 독일 여성총리다. 정치입문 전에는 과학자였고, 동독 출신이라는 점도 이채롭다. 정치를 하면서 헬무트 콜 전 총리의 도움을 많이 받아 ‘콜의 양녀(養女)’로 불린다. 영국 마거릿 대처 전 총리처럼 정치감각과 뚝심을 갖춰 ‘독일의 대처’로도 통한다. 카리스마가 약하다고 알려졌으나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을 바꿔 단점을 단단히 보완했다고 한다. 군소국가의 여성 대통령과 총리는 꽤 많으나 강대국에서 여성 국가지도자가 나온 경우는 대처 이후 처음이다. 세계 3위의 경제대국 독일은 이제 메르켈의 어깨에 국운을 걸었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 놓인 과제는 결코 녹록지 않아 보인다. 지난 15년간 1600조원의 통일비용을 쏟아부었고 노사협력의 실패, 놀고먹는 복지에 따른 ‘독일병’이 만연해 이 나라 경제는 침몰 직전이다. 영국은 1979년 5월 대처가 총리에 올랐을 때 나눠먹기(분배)와 강성 노조 때문에 고질적인 ‘영국병’을 앓고 있었다. 대처는 “단 1페니도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며 정신상태가 풀어진 국민, 특히 노조에 일을 하도록 무자비하게 다그쳤다. 대처가 1990년 11월 총리에서 물러날 때 영국 근로자의 평균연봉은 3배 가까이 올라 있었다. 현대의 국가지도자에겐 머리를 써서 경제를 살리는 리더십이 가장 중요하다. 독일 국민은 메르켈에게 ‘여성’이 아닌 ‘총리’를 원할 것이다. 그녀가 독일병을 고쳐놓고 대처처럼 철녀(鐵女)의 반열에 오를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국제플러스] 위구르 독립세력 무장투쟁 선언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중국 신장(新疆) 자치구의 위구르족 독립세력이 중국에 대해 무장투쟁을 선포, 중국 당국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독일 뮌헨에 본부를 둔 신장 독립 분리주의 단체인 ‘동투르키스탄 해방조직(ETLO)’은 1일 신장자치구 성립 5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위구르족 동포들에게 기념활동 저지와 무장전쟁 동참을 호소했다. 터키계 인종인 위구르족은 2차대전 이후 한때 서투르키스탄 5개 국가들과 함께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을 세우며 독립했으나 1949년 중국에 강제로 병합된 뒤 1955년 10월1일 중국 내 신장 위구르자치구로 출범했다.
  • 60년만에 얄타회담 재현

    2차대전 말기 독일 점령과 유럽 분할을 논의했던 얄타회담의 세 주역, 미국, 영국, 옛 소련 정상의 손자들이 1일(현지시간) 만나 이 회담의 성과를 재평가하는 자리를 가졌다. 1945년 2월4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요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등이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가졌던 비밀 회동이 60년만에 손자들에 의해 재현된 것이다.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에서 통치 분야의 국제적인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올초 설립된 거버넌스(Governance)대학원에서 이날 만난 손자들은 할아버지와 똑같은 이름의 윈스턴 처칠, 루스벨트의 손자 커티스, 스탈린의 손자로 그루지야 출신 가문의 성을 쓰고 있는 예브게니 주가시빌리였다. 이들의 회동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6차례나 공개 석상에서 얄타회담을 ‘역사상 가장 실패한 회담’으로 깎아내리는 등 할아버지들의 노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부시 대통령은 지난 5월7일 2차대전 승전 기념일에 라트비아에서 얄타협정이 역사상 최대 실수 가운데 하나이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은 동유럽을 옛 소련에 팔아넘긴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임영숙칼럼] 중국의 美軍 동상

    [임영숙칼럼] 중국의 美軍 동상

    과문한 탓이었을까. 중국에서 마주친 미국 장군 동상은 낯설었다. 중국이 미군을 영웅으로 대접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것이다. 중국의 경제성장이 앞으로 20년 이상 지속되도록 하기 위해 미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바란다고는 하지만 이토록인가 싶었다. 후난성 지장의 비호대 기념관(플라잉 타이거스 메모리얼)에서 마주친 동상의 주인공은 클레어 리 체놀트(1890∼1958) 장군이다. 사실 그는 중국이 기억해야 할 사람이다. 체놀트 장군은 2차대전 중 퇴역 미 공군 조종사들로 구성된 비호대를 이끌고 전략적 요충지였던 지장에 와서 비행장을 만들고 일본군과 싸웠다. 비호대의 활약으로 일본군의 보급은 끊겼고 서남지역 진공은 막혔다. 결국 중국은 이곳 지장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 냈다. 비호대 기념관은 이런 사실을 알리는 사진 자료와 미군이 쓰던 무전기, 군복, 일상용품들을 전시하는 한편 당시 희생된 비호대원들의 명단을 기념관 벽에 새겨 놓았다. 중국은 이달 초 지장에서 국제평화문화축전과 비호대 기념관 개관 기념식을 갖고 항일전쟁 승리 60주년을 크게 자축했다. 지장 비행장 잔디밭에서 열린 국제평화문화축전에는 비호대를 비롯한 2차대전 연합국 노병들과 중국의 노병들, 일본의 항복을 받아 낸 관련 증인들, 주중 외교사절 등이 초대됐다.2차대전 중 아이젠하워 장군의 미군 상륙작전이 이루어졌던 프랑스 노르망디 시장도 자매도시의 축제에 참가했다. 20여명에 이르는 비호대의 노병들은 당연히 가장 큰 환대를 받았다. 그들은 행사 도중 자리에서 일어나 당시 군가를 부르며 감회에 젖었다. 비호대 노병들의 군가 합창이 끝나자 중국의 유명가수는 당시 유행하던 노래라며 그들을 향해 ‘유아 마이 선샤인’을 열창했다. 이런 정경은 흡사 미국이 중국을 해방시킨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중국과 미국의 협력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낮은 자세로 실리를 추구하는 화평굴기(和平起) 전략은 그토록 철저했다. 유일 초강대국 미국과 미국이 위협을 느낄 만큼 커져 가는 중국의 관계는 미묘하다. 지장 축제 직전에 열린 제5차 한·중 지도자포럼에서 중국의 ‘제2외교부’로 불리기도 하는 외교학회 회원들은 미국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토로했다. 회원들의 대미비판 수위가 높아지자 루추톈 회장이 나서서 “하나하나 따지면 불만이 많지만 중국은 미국의 동북아 지역에서의 이익을 고려해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미국의 냉전의식을 누그러뜨리고 우호국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고 정리해야 할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지장으로 가는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미국 외교관은 양복 깃에 두 나라의 우호 친선을 상징하는 배지를 달고 있었다. 성조기와 오성홍기가 교차한 모양의 배지였다. 그는 베이징 미국 대사관에 근무하는 대부분의 외교관들이 이 배지를 달고 다닌다고 밝혔다. 한국의 미국 대사관에도 태극기와 성조기를 교차한 배지가 있지만 기념품으로 주로 나누어질 뿐 미국 외교관들이 옷에 착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냉전을 넘어 한반도 평화체제의 단초를 열 것으로 기대되는 이번 6자회담의 9·19공동성명 채택은 미국과 중국의 협력으로 가능했다. 미·중 관계와 동북아 질서 또한 큰 변화의 흐름을 타게 될 것이다. 역사의 한 흔적으로 잊혀져 가던 맥아더 동상이 새삼 상징성을 부여 받고 극단적인 대립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우리 사회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논설고문 ysi@seoul.co.kr
  • [논술 길라잡이]시사 키워드/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

    맥아더는 영웅인가, 역적인가.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놓고 보수·진보 진영이 충돌하고 있다. 다소 엉뚱해 보이는 이 논쟁은 분단 한국을 바라보는 보·혁 양 진영의 시각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진보측은 노무현 대통령이 동상 철거에 반대하자 노 대통령까지 보수파로 몰아세우고 있다. ●철거를 주장하는 이유 동상 철거를 요구하는 미군추방공동대책위원회의 주장은 맥아더가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해 민족의 자주성을 짓밟은 장본인이며 한국전쟁 때 대량학살을 지시한 전범이라는 것이다. 맥아더가 ▲‘점령군’으로 들어와 이땅을 일제 식민지에서 미국의 식민지로 전락시켰고 ▲일제가 약탈해 간 우리 문화재 10만여 점에 대한 반환 요구를 미국에 대한 일본의 감정이 악화될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으며 ▲노근리 양민학살 등의 주범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최근 인천에서 열린 ‘한국전쟁의 역사적 재조명과 맥아더의 재평가’라는 토론회에서 주제 발제를 맡은 동국대 강정구 교수가 한국전쟁을 통일전쟁이라며 논쟁에 불을 질렀다. 강 교수는 현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고 있다. 강 교수는 한국전쟁을 한반도에서 외국군대가 철수한 이후 한 나라에서 두 개의 정권이 단독주권을 확립하기 위해 상대방과 무력행위를 일으킨 ‘내전’이라고 규정하면서 누가 침략자인지 따지는 것은 보편적 역사관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작은 전쟁의 연장선인 6·25전쟁은 통일전쟁으로, 분단을 주도한 미국이 원인제공자라고 주장했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한국전쟁에서 최소한 40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맥아더에 대해 ▲2차 대전 종결후 조선분단 집행 ▲식민지 점령 총독 ▲유엔 승인범위를 무시하고 38선을 넘어 북진 감행 등의 이유를 들어 미국에서도 평가가 달라졌듯이 전쟁 영웅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철거에 반대 보수진영은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을 구출한 은인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교과서에서 가르쳐 온 내용이다. 반대쪽 사람들은 철거하려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 김일성 동상을 세우려는 사람들이라고 몰아세운다.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번영은 없었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어떻게 볼 것인가 맥아더는 어떤 인물인가, 특히 우리에게는?어떤 역사적 사건과 인물의 실체에 대한 진실이 하나라도 평가는 두가지 이상이 나오기 마련이다. 맥아더 또한 마찬가지다. 둘 이상의 평가가 나오는 또다른 이유는 어떤 사람이든 양면성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맥아더는 2차대전의 영웅이고 인천상륙작전의 이끈 장군이면서도 중국군을 과소 평가하고 원자탄 사용을 주장한 과오를 인정하고 있다. 우리도 맥아더의 실체가 무엇이냐에 대한 평가를 달리 내릴 수 있다. 분단의 주범인가 아니면 한국을 적화에서 구해낸 영웅인가 하는 것이다.2차대전이 끝난 뒤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전승국들의 나눠먹기로 약소국 한국은 분단되고 말았다.6·25는 이념의 대결이 전쟁으로 비화된 것으로 그것을 내전으로 보든 보지 않든,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입장에서는 미국 등 우방의 도움을 받아 공산화를 저지한 것은 사실이다. 맥아더는 그 과정에서 분단을 주도한 인물도 아니고 혼자서 북한군을 막아낸 사람도 아니다. 다만 군인으로서 지시를 받아, 더러는 자신의 판단 아래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또한 북한을 남한과 동등한 실체로 인정하는 관점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6·25를 내전으로 보고 맥아더가 통일을 가로막았다는 주장이 그런 것이다. 이는 우리의 법체제하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나 이데올로기에 따른 체제의 대립도 영원할 수는 없다. 6·25에 개입하고 통일을 방해한 중국은 오늘에는 한국과 아주 가까운 나라가 되었다. 북한 또한 마찬가지다. 영원히 대립하는 적국이 아니라 통일을 향해 화해하고 함께 걸어야할 동반자로 인식할 필요가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맥아더를 신성시하는 것도 문제가 없지 않다. 시대적 변화에 맞춰 맥아더의 실체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아울러 행동으로 상대방을 묵살하고 보자는 태도에 앞서 토론과 연구를 통해 실체에 함께 접근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포인트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이 왜 제기됐는지, 극단적인 보수와 진보의 대립을 어떻게 봐야 하며,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손성진기자 sonsj@seoul.co.kr
  • [열린세상] 폴크스바겐 이야기/김화진 미국변호사·고려대 경영대 겸임교수

    독일의 대학은 등록금을 받지 않는다. 외국에서 온 학생들에게도 받지 않는다. 필자도 그 수혜자다. 문제는 미국학생들도 수혜자라는 것이다. 독일학생들은 미국대학에 유학하면서 거액의 등록금을 내는데 미국학생들은 독일에 와서 무료 학업을 한다. 이것이 독일에서 이슈가 된 일이 있다. 상호주의에 의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결말은 싱거웠다. 한 언론인이 TV에 출연해서 말하던 것이 기억난다.“히틀러는 쿠데타로 집권하지 않았다. 선거로 집권했다. 나치가 세계에 저지른 죄는 독일의 죄다.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외국학생들에게 등록금을 받을 수 없다.” 좀 황당하게도 느껴지는 이 논리가 바로 독일인들의 심성이다. 필자가 받았던 한 독일 재단의 장학금도 독일 외무부 예산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 독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기업이 바로 폴크스바겐(Volkswagen)이다. 아우디도 그 자회사다. 마니아들의 꿈인 람보기니도 여기서 만든다. 폴크스바겐은 독일 최대의 자동차 회사인데 독일 내수시장의 30.5%, 세계시장의 11.5%를 점유하고 있고, 작년에 34만명의 종업원이 500만대 이상을 생산했다. 다임러크라이슬러도 있고 BMW도 있지만 폴크스바겐은 이름 그대로 독일의 국민차다. 폴크스바겐은 독일의 아픈 역사와 함께했다.1937년 5월에 설립되어 이듬해 포르셰 교수가 디자인한 딱정벌레차를 출시하고 바로 2차대전을 맞았다. 나치의 지시로 약 2만명이 강제노역에 동원되어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폴크스바겐은 1998년 9월에 회사 내에 기념관을 설치하고 강제노역보상기금을 설치했는데 2001년 말 현재 26개국에서 2000명 이상이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국영기업 시절에 국가가 한 일을 왜 50년이 지난 후에 사기업이 책임지는가 하는 반론도 있었으나 상술한 독일인들의 정서가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2차대전 후 회사는 영국점령군이 경영하다가 1949년 10월에 독일 니더작센 주정부에 경영권이 이양됐다.1960년 8월 폴크스바겐은 이른바 ‘폴크스바겐법’에 따라 민영화되었다. 최근 독일이 폴크스바겐의 경영권 보호 때문에 EU와 갈등을 빚고 있다.EU는 독일의 폴크스바겐법이 자본의 EU역내 자유이동을 규정한 EU협약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작년 10월 독일을 EU사법재판소에 제소했다. 폴크스바겐법은 단일 주주 20% 의결권 상한을 규정하고 있다. 니더작센주가 18%를 가지고 있어서 독일 내외의 어떤 자본도 폴크스바겐에 대한 적대적 M&A를 꿈꿀 수 없다. 폴크스바겐이 경영이론에 충실한 전형적인 기업이었다면 과거사에 대한 조치를 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외국기업이 경영권을 가졌더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EU의 제소에 대해 니더작센 주지사 출신인 슈뢰더 총리는 유감의 뜻을 표했다. 폴크스바겐의 노조도 EU의 조치가 독일 노동시장에 대한 위협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독일이 대표적인 자국기업의 경영권과 고용안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함을 보여준다. 세계화의 시대지만 기업들은 나름대로의 오래된 추억을 가지고 있다. 기업이란 물리적인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 추억은 사실은 그 기업을 둘러싸고 살아왔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이다. 한 경제사가가 말했듯이 “훌륭한 기업은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존재의미는 그런 기억과도 결부되어 있다. 세계화란 지난 일은 다 잊고 정체불명으로 세계시장에 나간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데 우리만 그럴 이유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폴크스바겐은 전세계에 414개의 계열사를 가진 글로벌 기업이다. 지구상에 굴러다니는 차 10대 중 1대를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편리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훌륭한 기억력을 가진 멋진 독일기업일 수 있는 것이다. 김화진 미국변호사·고려대 경영대 겸임교수
  • [오늘의 눈] 유엔 60주년과 개혁/박정현 정치부 차장

    유엔은 한때 우리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창설된 1945년 10월24일을 기념한 ‘유엔데이’에 하루를 쉬면서 한국전쟁 때 우리를 도와줬던 유엔의 고마움과 유엔의 막강한 힘을 어렴풋이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로 창설 60주년을 맞은 유엔은 과거와는 달라진 듯하다.172개국 정상이 참석해 ‘세계 최대 규모의 정상회의’라고 할 만한 유엔 정상회의는 이견을 노출하면서 삐걱거렸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각국 정상들은 14일(한국시간 15일) 기조연설에서 유엔의 개혁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우리는 나와 다른 많은 회원국들이 요구하는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유엔 개혁안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상임이사국을 늘리려는 일본·독일·인도·브라질과 저지하려는 한국을 비롯한 ‘커피클럽’ 국가간의 치열한 외교전을 이르는 말이다. 뉴욕타임스는 14일자 사설에서 유엔 개혁의 실패이자, 리더십의 실패라고 규정했다. 리더십의 실패는 유엔의 아난 총장을 포함한 도덕성의 문제점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바닥에 떨어진 유엔의 권위는 말이 아니다. 유엔 석유·식량조사위원회는 690억달러의 예산이 들어간 석유·식량프로그램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뇌물과 밀수, 석유 값 폭리가 횡행했다는 보고서를 최근 제출했다. 아난 총장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포함됐다. 유엔의 변화와 개혁은 남북한이 동시에 가입하던 1991년부터 예고됐던 것 같다. 냉전의 붕괴에 이어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은 2차대전과 냉전의 산물인 유엔이 변화해야 한다는 신호였다는 얘기다. 유엔은 탈냉전 이후 이념을 대체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도도한 물결 앞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터다. 하루에 1달러도 안되는 돈으로 생활하는 기아선상의 10억명에게 제대로 된 대책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제 유엔은 강대국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회원국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할 때가 아닐까. 분쟁은 총칼이 아닌 기아와 차별에서 태동하는 탓이다. 유엔본부에서 박정현 정치부 차장 jhpark@seoul.co.kr
  • [씨줄날줄] 맥아더와 아이크/이목희 논설위원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동상 철거 논란을 보면서 짝사랑의 허망함을 느낀다.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와 함께 20세기 미국 군인을 대표한다. 미국민의 애정은 50여년전 아이젠하워쪽으로 결론났다. 맥아더에게는 이성적 평가가 주를 이룬다. 미국민에게 그는 전쟁에서 지략을 보였으되, 정치야욕은 달성하지 못한 인물일 뿐이다. 맥아더를 둘러싼 한국내 애증(愛憎) 대립은 어이없는 짝사랑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비친다. 여러 문헌과 증언을 보면 맥아더는 전쟁을 즐겼다. 맥아더가 기분나빠 한 것은 미국 수뇌부의 유럽 중시정책이었다.2차대전 당시 맥아더는 태평양지역 사령관으로 일본과의 전쟁을 지휘했다. 나치와 싸운 유럽지역 연합군사령관은 아이젠하워였다. 아이젠하워는 한때 맥아더의 부하였지만, 전쟁 동안 더 각광받았다. 미국민은 정신적 고향인 유럽 전쟁에 우선 신경을 썼다. 한국전쟁은 ‘영웅 경쟁’을 뒤집을 기회를 맥아더에게 제공했다. 맥아더가 문민통치에 항거하며, 만주 폭격 등 동북아에서 전면전을 주장하는 무리수를 택한 배경이 된다.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된 맥아더의 인기는 한때 상당했다. 하지만 곧 냉정을 되찾은 미국민은 아시아에서 필요 이상의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는 판단을 했다. 휴전을 내건 아이젠하워는 2차대전 후 특별히 인기있었던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는다.“나는 아이크(아이젠하워의 애칭)를 사랑한다.”는 구호는 가장 호소력있는 정치구호로 꼽히고 있다. 맥아더동상 논쟁의 원인 제공은 이승만 정부와 이후 군사정권이 했다. 미국에서도 냉정한 평가를 받는 그를 과도하게 미화했다. 미국 국익과 스스로의 야심 때문에 한국전쟁에 몰두한 그를 자유민주주의 수호자인 듯 만든 것은 잘못이다. 결과적으로 한반도 공산화를 막는 데 기여를 했으나 그가 한국의 영웅이 될 수는 없다. 나치로부터 유럽을 해방시킨 아이젠하워는 미국의 영웅이지, 유럽의 영웅은 아니다. 그렇다고 맥아더를 살인마, 양민학살자로 매도하는 일이 옳아 보이지 않는다. 어떤 문헌에도 그가 양민학살을 지시했다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과도한 미화에 대한 반작용이겠지만, 동상철거 주장 또한 국제사회에서 촌스러운 짓이다. 그를 역사속 인물로 담담히 보고 동상 논란을 끝냈으면 한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탈관료·친시장주의의 승리”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9·11 총선 압승은 관료적 국가 지배에서 시장주의와 신자유주의로 재편되고 있는 일본 경제의 ‘구조개혁’을 보다 가속화하라는 요구로 풀이된다.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은 2차대전 후 재건에 초점을 둔 준사회주의 모델의 일본이 서구식 자본주의·개인주의·현시(顯示)적 소비 중심의 경제로 변모하는 전환점을 맞았다고 12일 경제 칼럼니스트 호타 겐스케의 글을 통해 논평했다. 그는 일본 국민이 저축보다 소비를 택하고 있으며 주주 중심의 경영과 구조조정, 인수합병(M&A) 붐이 일고 있는 일본 경제의 체질 변화가 압승의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의 경제 칼럼니스트 윌리엄 페섹도 이날자 블룸버그 통신에 ‘고이즈미 총리에게 드리는 편지’를 실어 연금 개혁과 공공부채 축소, 노동시장 유연화 등에 박차를 가하라고 제언했다. 우정공사는 350조엔(약 3500조원)의 자산을 보유한 세계에서 가장 큰 금융기관이다.2만 5000개의 지점과 26만명의 정규직을 보유, 자민당 장기집권의 기반이었다. 국민들은 고이즈미 총리의 ‘자기희생적’ 결단에 환호했고 과거 자민당 세력과 야당을 모두 수구세력으로 싸잡아 비판한 선거전략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한편 자민당의 압승으로 민영화가 확실시되는 우정공사는 직원 3분의1이 옷을 벗어야 할 것으로 보이며 일본 정부의 대대적인 공무원 감축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박정경기자 olive@seoul.co.kr
  • [책꽂이]

    ●붉은 고양이(괴테 외 지음, 이관우 옮김, 우물이 있는 집 펴냄) 괴테의 고전주의 문학부터 루이제 린저의 전후문학까지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단편소설 10편을 묶었다. 린저의 ‘붉은 고양이’를 비롯해 보르헤르트의 ‘빵’, 카프카의 ‘변신’, 하우프트만의 ‘선로지기 틸’, 괴테의 ‘노벨레’등 수록.8500원.●책이 무거운 이유(맹문재 지음, 창비 펴냄) 소박한 언어로 소외된 삶을 따뜻하게 감싸온 시인의 세번째 시집.‘…출근하려고 현관문을 열다가 깜짝 놀랐다/나의 길을 내기 위해 목련꽃들이/천둥소리를 잡아먹고 널브러진 채 죽어있는 것이다’(‘목련꽃’중)‘어느 시인은 책이 무거운 이유가/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내게 지금 책이 무거운 이유는/눈물조차 보이지 않고 묵묵히 뿌리박고 서 있는/그 나무 때문이다’(‘책이 무거운 이유’중).6000원.●실종자(한스 울리히 트라이헬 지음, 강유일 옮김, 책세상 펴냄) 2차대전 직후 독일 서부로 피란온 한 소년의 성장기를 통해 전후 독일 사회를 은유하는 소설. 독일 중견 작가 한스 울리히 트라이헬의 대표작이다. 주인공 ‘나’는 전쟁 때 죽은 줄 알았던 형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형을 찾으려는 부모의 노력은 점차 강박적으로 변하고, 이 와중에 소년의 존재는 점점 소외된다.8000원.●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김형경 지음, 푸른숲 펴냄) 1993년 1억원 고료의 ‘국민일보문학상’을 수상해 화제를 모은 작품. 폭력의 시대인 1980년대를 힘겹게 거쳐온 네명의 주인공들이 흉터와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통해 삶의 희망과 위대함을 이야기한다. 탁월한 심리묘사, 절제된 문장이 돋보인다. 전 2권. 각권 9800원.●붉은 브라질(장 크리스토프 뤼팽 지음, 이원희 옮김, 작가정신 펴냄) 2001년 프랑스 공쿠르상 수상작.16세기 중반 브라질 과나바라만에서 펼쳐진 식민의 역사를 소재로 삼았다. 강대국들의 침략, 광신의 종교 갈등, 인간들의 탐욕과 공포 등이 박진감 넘치게 그려진다. 저자 뤼팽은 ‘국경없는 의사회’소속의 의사이자 사회활동가이다.1만 2000원.
  • 한국여성처럼 불쌍한 여성은 없다

    한국여성처럼 불쌍한 여성은 없다

      『한국여성처럼 불쌍한 여성은 없을 것 같다-』남성으로부터「뭇매를 맞을 듯한 소리」를 펼친다. 신학박사 김태묵(60)목사의 거침없는 결론이다. 약 1년 전부터「카운셀링」(정신위생상담)업을 개업, 갈등을 안고 찾아온 내담자(來談者)와의 정신분석적인 대담 끝에 얻을 결론이란다. 상담실 찾아오는 여성 손님들은 거의 신경쇠약증 환자 김태묵 목사는 그 학위가 말해주듯 바로 신학자이고 또 종교활동가이다.「하와이」한인교회 목사,「워싱턴」한인교회 창립, 서울 남대문교회 목사, 중앙신학교 교장, YMCA연맹 총무, 대구 신명(信明)여고 교장 등의「코스」를 주로 걸어왔다. 그 목사가「한국정신위생원」이라는 정신상담소를 개업, 사무실을 서울 중구 충무로 2가 52의 4에 있는「소피아·하우스」에 차렸다. YMCA에 근무할 때부터 젊은이들의 정신상담을 맡아 듣고 차차 그 방면의 공부를 해온 결과, 근대화병의 하나인「노이로제」를 고쳐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8·15해방과 6·25동란, 4·19와 5·16의 두 차례의 혁명 등 수차에 걸친 정치 문화의 격동기를 거친 우리 겨레는 지금 급격한 사회 변천과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정신력의 박약과 부조화로 근심 불안 번뇌 등 각종 정신장애와 절망감 좌절감에 사로잡히는 신경쇠약증에 빠져들어가고 있습니다』 「카운셀링」개업의 변(辯)이다. 『서울에는 정신장애자가 많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일례를 들면 호주머니에는 돈 한 푼도 없으면서 큰 사업을 합네 하고 다방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일종의 정신질환 환자일겝니다』 1년 동안에 약 2백 건의 상담을 받았다. 목회(牧會) 상담학의 강의를 맡고 있는 장로교 신학대학과 숭실대학 학생들의「카운셀링」을 맡아보고 또 교회의 목사들이 보내주는 신도들의 정신상담을 들었다. 상담내용의 대부분이 가정문제 애정문제의 갈등이 일으킨 정신장애, 입시 등에 실패한 중·고교학생들의 열등감과 이로 인한 부모들의 정신적 고통 등이다. 특히 기혼여성들의 대담자가 많았다. 최근에「카운셀링」한 여성 대담자의 고민 두 가지를 실례로 들었다. ① 결혼 생활을 약 20년간 해온 주부 김영숙(45·가명)씨의 경우. 원래는 국민학교의 교사였는데 10년 전에 그만두고 양장점을 차렸다. 장사는 계획대로 잘 되었다. 자연 바빠졌다. 그녀의 장사수완이 가족의 생활을 유지해 왔다. 한편 남편은 회사원이었는데 10년 전에 실업. 월급쟁이는 죽어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남편은 아내가 번 돈을 번번이 가지고 나가 사업을 한다고 뛰어 다녔으나 제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다. 처음 5년 동안은 아내를 실업 이전과 다름없이 다루었다. 폭력도 쓰지 않았다. 그것이 5년 전부터는 아내의 일거일동에 일일이 말썽을 부리고 폭력을 휘둘렀다. 신경쇠약증에 빠진 이 주부가「카운셀링」을 받기 위해 김박사를 찾아왔다. 돈 못 벌면 열등감만 남는 남편한테 매맞고 구박 받기 일쑤 김박사의 진단 -『남편이 의처증을 나타내고 폭력을 쓰는 것은 열등의식의 발로이거든요. 5년 전까지는, 비록 실업상태에 있고 또 아내의 도움을 받았었지만 자기도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뛰어다니는 기력이 있었기 때문에 아내를 옛날과 다름없이 사랑할 수가 있었죠. 빈번한 실패로 그 기력조차 없어지고 아내에 대한 열등의식만이 남았습니다. 남편은 자기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아내에게 오히려 공격적으로 나온 것입니다』 김박사는 그 주부를 만난 후 남편의 상담도 받았다.「카운셀링」은 내담자에게 고민거리를 모두 쏟아 놓게 한다. 내담자는 자기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확 털어놓는 과정에서 스스로 자기의 해결방법을 발견해 낸다. 이 부부는 그 이후 다행히 원만한 가정생활로 돌아갔다. ② 일류 여대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여성 이강희(40·가명)씨의 경우. 초혼에 실패하고 재혼한「인텔리」여성인데 이혼문제를 들고 김박사를 찾아왔다. 초혼에 실패한 것은 춤바람 때문이었다. 그 초혼은 부모가 정해주는 남자와의 평범한 결혼. 십수 년을 같이 살아 오는 사이에 두 남매까지 두었다. 춤을 배우기 전까지는 그저 남자란 모두 남편과 같은 줄만 알고 지냈다. 3년 전에 춤을 배워「댄스·홀」에서 자기와 같은 나이 또래의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가 남편보다 훨씬 좋아졌다. 화끈 달아오르는 연애감정을 느꼈다. 남편과 이혼했다. 친정어머니가 준 돈 3백 만원을 가지고 그 남자와 결혼을 했다. 새 남편은 공무원이었다. 3년 동안의 새 살림을 위해 3백 만원이 고스란히 들어갔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부부싸움이 잦아졌다. 남편이 번번이 가출했다. “그래도 무슨 정이 남았는지” 이혼계(離婚屆) 차마 못내기도 드디어 이혼을 결심, 새 남편도 그것에 동의하고 이혼신고서에 도장을 찍었다. 남은 절차는 자기의 도장을 찍어 구청에 내기만 하면 된다. 여기서 이여인의 고민이 시작됐다.『그래도 무슨 정이 남았는지』그것을 구청에 낼 수가 없었단다. 신경쇠약에 빠졌다. 이 부부도 다시 평화스러운 가정으로 되돌아갔다. 애정문제의 갈등의 대부분은 여성쪽이 피해자였다. 그래서『우리나라 여성처럼 불쌍한 여자가 없다』고 주장한다. 벌써 이혼을 했을지도 모를 문제들을 안고 한국여자들은 고민에 떨어지고「노이로제」에 빠진다. 요즘은 이혼들을 쉽게 한다지만 그래도 이혼이라는 것은 한국여성에게 있어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대사건이다. 여기서 생기는 마음의 갈등과 부조화가 기혼여성들을 괴롭힌다. 김박사는 반드시 결합만 시킨 것은 아니었다. 이혼을 서둘러 시킨 예도 있다. ③ 젊은 남녀가 목사의 소개로 그를 찾아왔다. 두 사람은 결혼식만 올린 부부였다. 결혼식 후 신혼여행을 어디로 가느냐고 두 사람이 대립했다. 남자는 유성온천을, 여자는 제주도를 내세웠다. 그 길로「별거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부부는 나란히 앉아 김박사와 상담한 결과 이혼하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삶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영남지방에서 다소는 알려진 승려, 법옹(法翁)스님이 박사의 선친이다. 승려의 아들이 16세에 기독교에 입신, 목사가 됐다. 미국유학(오벨린대학) 중에 제2차대전이 터지자 일어능력으로 발탁되어 대일본어 방송의 요원으로 활약, 일본제국은 궐석재판에서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여 선고문을 고향인 대구의 자택까지 보내왔다. 선고장을 들고 온 일본인이 김박사의 선친을 위로한답시고 말했단다. 일본이 이길 것이니 전승기념특사가 내리면 10년 징역으로 감형될 것이니 안심하라고. 해방 후는 미군정청 관리로 일했고 4·19 후는 YMCA 총무 자리를「쫓겨났다」. 미국으로 건너가서 그때까지 안 얻은 미국시민권을 갖고 정신분석학을 연구,「카운셀러」가 된 것이다. 현재는 정신병원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다. 『「카운셀링」은 그러므로 제2경제의 실천행동이 되기도 합니다』라고 상당히 확대된 포부를 피력했다. [ 선데이서울 69년 1/26 제2권 제4호 통권18호 ]
  • [일본을 다시본다] (21) 전문가 좌담

    [일본을 다시본다] (21) 전문가 좌담

    |특별취재팀|서울신문은 ‘한·일수교 40주년 특별기획-일본을 다시 본다’ 시리즈를 종합 정리하고 일본의 현주소와 미래를 전문가 시각에서 재조명하기 위해 김도형 계명대 일본학과 교수 및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과의 좌담을 마련했다. 한종태 서울신문 국제부장의 사회로 진행된 좌담에서 두 일본 전문가는 일본의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에 대해 긍정평가를 자제하거나 평가 자체를 유보하는 등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일본 정치권의 세대교체 바람과 우경화 추세에 대해서는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이 기회에 보다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관계개선 노력을 기울일 것을 주문했다. -사회자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일본의 1990년대 경기침체 시기를 현 시점에서 평가한다면. ●진창수 센터장(이하 진) 잃어버린 10년은 새로운 기술 개발의 실패, 금융위기, 제도적 피로 등 3가지 원인으로 초래됐다. 이런 결점을 완전히 극복했는지 여부가 포인트다. 우선 금융개혁부문은 굉장히 안정적이라고 본다. 부실채권을 해소하는 등 안정화 추세로 가고 있다. 기술 부문에서는 제조업 부문은 여전히 강하지만 차세대 정보통신(IT) 기술은 발전이 느리다. 새로운 기술을 통해 리드하는 부문에서는 아직 부족함이 있다. 제도적 피로의 경우 고용 바꾸기 노력이 진행과정에 있다고 본다. 대체로 최근 일본경제가 안정적인 상황에 들어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하지만 이런 안정적인 추세가 개혁의 결실이라기보다는 중국 특수로 인한 수출 증가와 소비가 조금씩 살아나는 데 따른 결과인 측면도 있다. 결국 잃어버린 10년을 평가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얘기다. 잃어버린 10년을 준비기간으로 봐야 하는지 침체기간으로 봐야 하는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개혁이 한창 진행 중에 있기 때문이다. ●김도형 교수(이하 김) 80년대 일본의 제조업은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은 시기였지만 91년 이후부터는 지가·주가하락으로 인해 자산가치가 하락했다. 무려 2∼3년 동안의 자산 손실이 110조엔에 이를 정도로 엄청났다. 이 후유증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주가는 다소 회복됐지만 91년부터 2005년까지 일본은 15년째 장기불황이라고 할 수 있다. 잃어버린 15년을 야기한 원인은 첫째도 둘째도 ‘정책’의 실패다. 정부는 금리를 올려야 할 때 올리지 못하고 내려야 할때도 마찬가지였다. 재정도 그런 셈이다. 정부는 90년 이후 경기부양에 치중하느라 구조개혁을 미뤘다. 매년 연속해서 경기부양을 하다 보니 결과적으론 재정적자를 유발하게 됐다. 단기적인 경기부양이 국민들의 세금 확대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소비를 줄이는 악순환을 반복한 것이다. 이에 따라 금융이든 재정이든 정부의 정책 수단이 굉장히 제한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빠졌다. 또 96년부터는 세계화가 본격화됨에 따라 중국의 성장 등으로 비정상적인 물가하락 추세까지 겹쳤다.2차대전 이후 5년 연속 물가가 하락한 자본주의 국가는 일본이 유일하다. 디플레이션의 와중에 재정적자와 부실채권 문제가 상승작용을 하면서 일본은 헤어나기 힘든 장기불황으로 빠지고 만 것이다. 결국 정책운용의 실패가 이런 결과를 빚었다.80년대 후반부터 정부가 경제를 주도하면서 민간이 활력을 잃게 됐다. 돈이 자꾸 정부로 흘러들어감에 따라 공공부문 비대화와 내수 위축을 초래했다. 반면 수출 의존도가 커지면서 해외 요인이 국내 경기를 좌우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사회자 일본이 제조업 분야에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것으로 보는가. ●진 기존의 제조업과 IT를 어떻게 결합하느냐가 일본의 고민이다. 예컨대 소니의 경우 TV 같은 품목이 80년대까지 가장 많은 부가가치를 냈다면 지금은 노트북이나 애니메이션 게임기 등이 주요 부가가치 품목으로 바뀌고 있다. 기존 제조업이 IT와 결합해 새로운 형태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게 중요하다. 문제는 고용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일본이 고용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개혁의 방향은 정해져 있지만, 내부의 문제가 너무 많다. 총론은 찬성하면서도 자기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각론에서는 반대하는 게 문제다. ●김 일본은 제조 기술력의 ‘보고’다. 그런데 경제운용이 잘못되면서 기술이 지체됐다. 제조업 설비투자의 연령이 10.5년이라면 미국은 9.5년이다. 일본은 특히 IT와 생명공학(BT) 쪽이 취약하다. 반면 나노기술(NT)과 환경기술(ET)은 미국보다 강하다. 일본은 IT,BT,NT,ET를 잘 융합해 활력을 찾는 게 중요하다. 이와 함께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도록 경쟁력 시스템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 -사회자 화제를 정치 얘기로 돌려 보겠다. 일본 정치권에서도 세대교체 열망이 만만찮은 것 같다. ●김 지금 세대교체가 전면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에 있다. 자민당의 경우 고이즈미가 등장하면서 파벌의 추천을 통한 공천 시스템이 붕괴됐는데, 이게 큰 의미가 있다. 전전(戰前) 세대의 정치가들이 전면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지금은 전후세대가 내각과 당의 주요 자리를 맡고 있다. 민주당은 더욱 젊은 정치가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있다.9·11 총선에서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 세대교체가 엄청난 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추세가 우리한테 반드시 좋은 징조로 볼 수만은 없다. 국제주의적 정치가가 늘어나는 형태로 진행되면 좋은 거지만, 일본의 젊은 정치인들은 여전히 국내 중심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 힘의 논리에 치중하는 아베 신조 같은 인물이 총리가 된다면 오히려 우리와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더 있다. ●진 세대교체엔 양면성이 있다. 개혁과 시장의 논리를 중요시하는 형태로 가면서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좋은 모습으로 일본이 변할 가능성이 있다. 반면 한·일관계에 있어 현실주의적인 외교정책이 실시되면서 우리 입장에서 더욱 힘들어질 수도 있다. ●김 2세 국회의원들의 국제감각이 부족한 것을 보면, 그들의 아버지 세대를 연상케 한다. ●진 고이즈미를 비롯한 2세들은 정치적인 훈련은 아주 잘 돼 있다. 국민이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반면 동북아 관계 등 세계질서에 대한 비전은 거의 문외한이다. -사회자 일본이 자꾸만 힘의 외교를 바탕으로 우경화로 치닫는 것 같아 걱정된다. ●진 일본의 군사대국화. 보통국가화는 첫째, 잃어버린 10년과 연관돼 있다. 경제가 내려가면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정체성을 논하는 국민이 많아졌다. 찬란했던 제국주의 시대에 대한 열망이 커진 것이다. 옛날에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반대했던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반반으로 변했다. 경제에서의 패배감을 회복하려는 자존심이 우익의 논리와 맞아떨어진 셈이다. 이와 함께 정치권의 세대교체도 요인이다. 전전 세대는 한·일관계를 특수관계로 인정했지만 전후 세대는 보통관계로 보면서 현실적인 외교정책을 펴고 있다.9·11테러 이후 대테러 전략의 일환으로 일본의 역할을 키우려는 미국의 의도도 일본 우경화에 한몫하고 있다. -사회자 독도, 야스쿠니신사 참배, 역사왜곡 등 고질적인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은 없나. ●진 과거사 문제는 정치적 쟁점으로 발전되지 않도록 관리를 해야 한다. 제도적으로 풀어야 한다. 독도 문제 쟁점화가 일본한테도 유리하지 않다는 점을 주지시켜야 한다. 일본의 제1 표적은 북방도서 반환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우리도 독도 문제를 지나치게 쟁점화할 필요는 없다. 야스쿠니참배 문제는 제3의 추도시설 건립으로,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는 공동연구위원회의 위상을 강화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사회자 그렇다면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위한 과제는. ●진 우리 국민은 일본을 다원주의적인 시각에서 바라봤으면 한다. 일본을 공포와 배신의 대상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 협력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그 속에서 친구를 만들기 위해 압력을 가하는 인식이 정착돼야 한다. 이와 함께 한·일간의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겠다는 발상을 버려야 한다. 장기적이고 제도적인 틀에서 꾸준히 접근해 가야 하는 것이지, 급격하게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경우 항상 역풍을 맞을 수 있다. 또 양국 관계에서 좀 떨어져서 글로벌한 차원에서 한·일관계를 봤으면 한다. 일본 제국주의도 보편적 시각에서 틀리지만 일정부분 일본의 안보부문 확대도 인정해 줘야 한다. ●김 우리는 일본을 특수하고 이질적인 국가로 간주해서 부정적인 부분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된다. 일본은 첨단기술을 보유한 경제대국이자 고급시장이다. 일본의 제조기술력은 우리가 꼭 배워야 할 부분이다. 이제는 경쟁하면서 협력하는 동반자가 돼야 한다. 그 기초를 제도적으로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이에 대한 협상이 빨리 재개돼야 한다. 일본의 정권이 바뀌더라도 이 문제는 조속히 해결돼야 한다. carlos@seoul.co.kr ●진창수 세종硏 일본연구센터장 ▲1961년생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도쿄대 정치학 박사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객원 연구원 및 교토대 법학부 객원교수 역임 ▲현재 세종연구소 국제정치경제연구실장 및 일본연구센터장 ▲저서 ‘일본형 금융시스템의 위기(한울아카데미 2004년) 등 ●김도형 계명대 일본학과 교수 ▲1944년생 ▲일본 히토츠바시 대학 및 대학원 졸업. 동 대학원 경제학박사 ▲산업연구원 일본연구센터 소장, 히토츠바시대 객원교수 역임 ▲현재 계명대 국제학대학 일본학과 교수. 한국무역협회 객원연구원 ▲저서 ‘일본의 구조개혁과 글로벌 경쟁력(계명대 출판부 2005년)’ 등 ●특별취재팀 한종태 국제부장(팀장), 황성기 사회부장, 이춘규 도쿄특파원, 주병철(경제부)·손원천 이언탁(사진부)차장, 안미현(산업부)·김상연 황장석(정치부)·유지혜(사회부)·정연호(사진부)기자 협 찬 POSCO
  • [일본을 다시본다] (19) 한일관계의 미래지향적 지평 모색

    [일본을 다시본다] (19) 한일관계의 미래지향적 지평 모색

    |도쿄 특별취재반|‘한·일관계의 미래지향적 지평 모색.’ 이보다 우리를 더 난감하게 만드는 주제가 있을까. 지금껏 한국과 일본 사이에 ‘미래’가 자리할 틈은 없었다. 한·일은 여전히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고, 과거에 발목잡혀 있다. 독도, 야스쿠니, 역사교과서 등의 현안은 시간의 정방향성과 격리된 채 수십년째 제 자리에서 ‘현재진행형’이다. 한·일관계에 있어 모든 과거는 현재에 투영되고, 모든 현재는 과거에 닿아 있다. 도대체 한·일이 과거를 훌훌 털고 현재를 뛰어넘어 미래로 내달릴 수 있는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대전환은 불가능한 것일까. ●지금 뭐라고 했지?… 對한국 관심지수 30 A라는 사람이 친구 B한테 잔뜩 화가 나서 항의한다. 하지만 B는 별다른 대꾸가 없다.A는 더욱 화가 나 욕을 퍼붓는다. 그래도 B는 묵묵부답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A는 급기야 B의 멱살을 잡는다.“야, 내 말이 말같지 않아?” 그제서야 B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입을 뗀다.“응?아까 뭐라고 했지?” A는 얼마나 황당할까. 일본에 가서 일본인과 직접 한·일관계를 얘기하면서 든 기분을 조금 과장해서 비유하자면 이런 것이다. 그동안 일본을 향해 분기탱천해온 기억이 무안할 정도로 일본 사람들은 한·일간 현안에 대수롭지 않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우리의 대일(對日) 관심지수가 ‘100’이라면 일본 국민의 대한(對韓) 관심지수는 ‘30’정도, 심지어는 ‘0’에 가깝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런 정서는 지난달 말 서울신문과 도쿄신문이 공동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됐다.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 상대국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50%대로 나타났지만, 일본인한테서는 유독 무관심성 응답이 35%나 나왔다. 한국인의 대일 무관심 비율 20.9%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치다. 일본 국민의 이같은 정서가 정치인들의 반쪽짜리 역사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게 아닐까. 일본의 정치인을 만나면서, 한국이 과거의 거울로 일본을 재려는 데 반해 일본은 과거를 외면한 채 현재만 보려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중의원 해산 전인 지난 5월 만난 고노 다로 의원은 군대를 가질 수 없도록 한 일본헌법 9조를 개정해야 한다고 거침없이 주장했다.“일본이 이미 해외에 자위대를 평화유지군으로 파병하고 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과거는 외면한 채 현재만 보는 논리다. 자민당의 차세대 유력 정치인인 그는 또 “사이가 안 좋다고 한국이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에 반대하는 논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마네현의 독도의 날 조례안 통과에 대해서도 그는 “시마네현이 일본 정부에 어민들을 좀 챙겨달라는 취지로 한 것이지, 한국을 겨냥한 게 아니다.”면서 “한국이 왜 그렇게 민감하게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내가 한국 대통령이라면 배용준과 독도에서 함께 사진을 찍어 일본인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활용하겠다.”는 ‘조언’까지 곁들였다. 야당인 민주당의 기타하시 겐지 중의원이 준 첫 인상도 비슷했다. 그는 “일본인들은 독도 문제를 크게 인식하지 못했는데, 이렇게까지 이슈화되는 데 놀랐다.”고 했다. 그는 특히 지난 1970년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가 나치에 의해 희생된 폴란드의 유대인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 유명한 일화를 기자가 꺼내자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느냐. 처음 들었다.”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변화의 씨앗´ 키우는 야당 정치인들 하지만 야당을 중심으로 한·일관계 개선에 청신호가 될 만한 조짐들을 조금이나마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고무적이다. 기타하시 의원은 “10년 전 한국의 독립기념관을 가보고 충격을 받았다.”면서 “일본 정치인은 아시아 민족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 야스쿠니신사에 참배를 안 하는 것은 물론,2차대전 전범은 야스쿠니에서 분사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일 정부가 프랑스 등 제3자를 포함시키는 역사 공동연구회를 만들어 연구한 뒤 결과를 TV 등을 통해 공표함으로써 기정사실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그는 한국을 향해 한가지 당부의 말을 덧붙였다.“독립기념관의 전시물이 너무 리얼해서 충격적인데, 한국 어린이들이 그런 것을 자꾸 보면 평생 일본을 미워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한·일간 우호가 정착되기 힘들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미카즈키 다이조 중의원은 보다 진보적인 비전을 제시했다. 그는 “일본의 미래상은 경제선진국이 아니라 문화선진국, 인간부흥, 자연과의 공생, 아시아 공동체 등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지금 고이즈미 총리의 정책은 자기나라의 이익만 생각하는 정책”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한·일의 진정한 미래 모색 그럼에도 불구, 결국 한·일간의 진정한 ‘미래’는, 정부 차원의 화해 같은 것이 담보해줄 수 있는 사안이 아닐 것이다. 근본적으로 일본 국민이 변하지 않는 한,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들의 변화는 사상누각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 국민들의 변화를 어떻게 유도할 것인가. 일본에 항의하고 일본 내 양심세력과의 연대를 추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우리 스스로 힘을 키워 경제적·문화적으로 선진국 대열로 들어서는 것밖에 왕도가 없다는 것이 일본을 취재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으로서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지향하며 한국을 아예 맞수로 치지 않는 일본 국민을 향해 “내 말을 들어보라.”고 핏대를 올리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보다는 상대가 저절로 관심을 갖게끔 힘을 기르고 매력을 키워가는 게 그들을 움직이는 동력이 될 수 있다. 미래에 대한 모색은 그 다음 단계일 것이다. 최근의 ‘욘사마 열풍’은 이런 핵심을 적나라하게 예시한 사례이다. 욘사마 때문에 난생 처음 지난해 한국을 여행했다는 일본인 간다 가쓰에(39)의 ‘고백’은 시사점이 크다.“욘사마 이전에는 한국이나 한·일관계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한국이 아주 발전된 나라더라. 한국을 더 자세히 알고 싶고, 좋은 한국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싶다.” carlos@seoul.co.kr ■ 日 민주당 ‘386 보좌관’들이 말하는 일본 |도쿄 특별취재반|지난달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국회를 해산하기 전 일본을 취재하면서 도쿄 시내의 한 음식점에서 노자키 도시오 등 민주당의 국회의원 보좌관 6명과 한·일관계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30∼40대 연배인 그들과의 토론을 통해 일본에 대해 갖고있던 선입견이 많이 깨졌고, 일본인을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보좌관들은 일본 정치가 개혁돼야 하고, 그러려면 자민당 장기집권 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당이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우경화의 테두리는 벗어나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일왕제와 관련해 직설적인 질문을 던져봤다.“일왕제 때문에 일본이 변화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일왕제가 존속됐기 때문에 과거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집권층은 기득권을 유지했으며, 우경화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닌가.” 보좌관들은 하나같이 묵묵부답이었다. 화자(話者)를 배려해 미소 띤 얼굴을 일그러뜨리지는 않았지만, 동의하지는 않는다는 무언의 항변 같았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정말 일왕을 신의 자손이라 믿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젓는다.“신의 자손이라고 전혀 믿지 않는다. 다만 국가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일본이 왜 우경화 하느냐.”고 묻자 “우경화를 나쁘게만 보지 말라.”고 반박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이 유엔 분담금을 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이 내는데,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진입하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니냐.”고 강조했다. “일본국민은 왜 자꾸 자민당에 몰표를 주느냐.”는 질문에는 “막상 정권이 바뀌면 불안해서.”라는 대답과 함께 “이혼을 두려워하는 것” “부모들 때문에 젊은층도 자민당을 찍는 경향이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젊은층의 정치 무관심에 대해서는 “투표해도 선거결과가 바뀌지 않으니 아예 투표에 참가하지 않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에 대한 인상을 물어봤다.“그전에는 한국이 뒤처진 나라라고 인식했는데 최근 한국 드라마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는 의견과 “한국 드라마는 한 편도 본 적이 없다.”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취재에 도움을 줘 고맙다는 뜻으로 식사비를 내려 했더니 그들은 “안된다. 더치페이하자.”고 사양했고, 결국 각자 밥값을 계산했다. carlos@seoul.co.kr ●특별취재팀 한종태 국제부장(팀장), 황성기 사회부장, 이춘규 도쿄특파원, 주병철(경제부)·손원천 이언탁(사진부)차장, 안미현(산업부)·김상연 황장석(정치부)·유지혜(사회부)·정연호(사진부)기자
  • 日 “위안부 법적 책임 없다”

    |도쿄 이춘규특파원|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26일 일본 정부에는 2차대전 당시 일본군 성 노예로 동원된 ‘종군 위안부’들에 대한 법적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도쿄(東京) 시내 집권 자민당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우리 입장은 한국 정부의 것과 다르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 외교관이 ‘독일현대사’ 출간

    독일지역에서 모두 10여년을 근무하며 통일문제 연구에 매진해 ‘학구파’ 외교관으로 꼽히는 손선홍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 홍보과장이 최근 ‘분단과 통일의 독일 현대사’를 펴냈다. 이 책은 독일이 2차대전을 일으키고 분단과 통일에 이르게 된 과정, 특히 통일 후 통합 과정 등을 주요 문건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외국어대 독일어과 졸업 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수학한 손 과장은 1980년 외교부에 들어와 프랑크푸르트와 본 등 독일지역에서 10여년간 근무하면서 자료 및 사진수집, 관계자 인터뷰 등 집필 준비를 해왔다.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한·중 차세대 지도자 교류 넓힌다”

    “동북아 평화와 번영을 위한 한·중 협력방안이 논의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선언이 발표된다.” 다음달 6일 중국 후난(湖南)성 즈장(芷江)에서 열리는 ‘국제평화문화축전’에 한국대표단을 조직해 참가하는 김한규 21세기 한·중교류협회 회장. 김 회장은 “한·중이 함께 전승을 축하하며 두 나라 지도층간에 이해와 교류를 넓히는 자리”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의 ‘2차대전 승전 60주년’ 기념행사 중 하나로 즈장은 중국에 대한 일본군의 항복문서가 조인된 곳이다. “국가서열 2위인 우방궈(吳邦國) 전인대 상무위원장이나 4위인 자칭린(賈慶林) 정협 주석 등 국가지도층이 대거 참가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두관 대통령 정무 특별보좌관, 전재희·김부겸·우제창 의원, 이수성 전 총리, 박세직 전 의원 등 전·현직 정치인과 지도층 인사 15명이 참가한다.김 회장은 이수성 전 총리와 ‘평화선언’ 조인식에 참석하고 ‘한·중의 동북아 평화를 위한 역할’을 주제로 발표도 한다. 참가자들은 이에 앞서 3일부터 후난성 웨양(岳陽)에서 중국외교부 산하 인민외교학회와 공동으로 ‘지도자포럼’도 갖는다. 주제는 동북아시대의 한·중협력방안. 중국측에서 장·차관급 30여명이 참가할 예정이다. “한·중의 전·현직 지도층 인사들이 양국관계의 문제점과 발전방향을 논의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차세대 주역인 젊은 정치인들이 참가해 중국측과 호흡을 맞춘다는 점에서 포럼의 산파 역할을 한 보람을 느낀다.” 김 회장은 지난 5월 후진타오(胡錦濤)정부의 핵심정책 과제로 추진 중인 빈곤타파운동의 ‘브레인’으로 추대돼 ‘칙사 대접’을 받으며 활동중이다. 정부산하기관인 ‘부빈(扶貧)개발협회’ 특별고문 자격으로 낙후지역 개발과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자문에 열중하고 있다. 지난달 칭하이(靑海)성 시닝(西寧)에서 열린 ‘칭차후이(靑洽會)´에 초청받아 칭하이성 성장·서기 등과 만나 서부대개발의 활성화와 한·중협력방안을 협의했다. “칭하이는 서부대개발 전진기지다. 서부개발과 한국의 진출을 한데 묶을 수 있는 ‘윈·윈 협력전략’에 대한 중국 지도자들의 입장을 타진했다.”칭차후이는 중국 동·서 교류협력 강화와 서부대개발 전략을 마련하는 자리다. 지난 14일부터 4일간 구이저우(貴州)성 초청으로 ‘황하축제’에 참석, 구이저우성 지도자들에게 관광진흥 방안과 향후 발전모델에 대해 조언했다고 한다. 오는 10월 양저우시, 네이멍구(內蒙古)자치주,11월 베이징시 등 초청이 줄을 이었다. “중국이 197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새마을운동을 통한 농촌 잘살기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배울 점을 찾고 있어 한국인 고문을 필요로 했던 것 같다.”고 김 회장은 부빈개발협회 고문에 추대된 이유를 풀이했다. 중국지도부 사이에서 총무처장관을 지낸 김 회장은 한국의 대표적인 ‘친중 우호 지도자’여서 이런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지난 88년 13대 국회의원으로 올림픽지원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지원에 나서면서 중국과 인연을 맺었다.93년 6월 한·중의회 교류의 물꼬를 튼 것도 중국인들에게 기억되고 있다.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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