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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 한 호텔 ‘나치 포로체험’ 테마상품 출시

    독일 한 호텔 ‘나치 포로체험’ 테마상품 출시

    독일의 한 호텔이 나치 포로·죄수체험 테마상품으로 손님을 끌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하멜른에 있는 슈타트 하멜른 호텔이 내놓은 ‘교도소 파티’ 상품이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외신이 25일 보도했다. 요금은 1인당 44유로, 우리나라 돈으로 약 6만8000원. 포로로 투숙하는 손님에겐 유니폼으로 나치정권 때의 죄수복(흰 바탕에 검은 줄이 쳐진 옷)이 제공된다. 식사시간엔 음료수와 국수가 교도소식단으로 나온다. 원하는 사람은 4시간30분 특별코스인 프러시아 교도소 생활을 체험할 수도 있다. 하이라이트는 호텔에서 열리는 교도소 파티. 파티장으로 갈 때는 교도관(?)의 감시 속에 두 사람씩 줄을 서 이동하게 된다. 급히 화장실에 가려면 교도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볼일을 볼 때도 교도관의 감시를 받는다. 슈타트 하멜른 호텔 건물은 1827년 지어졌다. 원래 교도소로 건설된 건물이 실제 생지옥 같은 수감시설로 활용되기 시작한 건 나치정권 때인 1935년이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나치정권 때 교도소에선 최고 474명이 즉결사형, 고문, 영양실조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독일이 2차대전에서 패한 뒤 교도소는 전범수용시설로 이용됐다. 영국군은 이곳에서 전범을 다수 처형했다. 한동안 버려졌던 건물은 1993년 호텔로 변신했다. 사진=슈타트 하멜른 호텔 홈페이지 캡처 서울신문 나우뉴스 해외통신원 손영식 voniss@naver.com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10)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10)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

    “다행스럽게 사르트르가 있었다. 사르트르는 우리들의 외부였다. 그는 정말로 뒤뜰에서 부는 바람이었다. 그는 우리들에게 새로이 자리잡은 질서를 견딜 수 있는 힘을 준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그런 수단이었다. 그는 하나의 모델, 하나의 방법 혹은 하나의 전형이 아니라 약간의 신선한 공기, 바람이었다. 카페 드 플로르에 들어서면서 그는 이상하게도 지식인들의 분위기를 바꿔 버리는 그런 지식인이었다.”(들뢰즈 ‘대담’) 1980년 4월 19일, 파리 몽파르나스는 인파로 넘쳐났다. 한 꼬마의 말로 회자되듯이 “사르트르의 죽음을 반대하는 시위”가 열린 것. 이 스펙터클한 장례식 행렬 속에는 도무지 하나로 파악될 수 없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한데 섞여 있었다. 보기 흉하리만치 작달만한 신체, 까칠한 피부, 썩은 치아, 실명한 한쪽 눈에 콧소리 섞인 목소리를 지닌 철학자. 사르트르만큼 세인의 관심을 받은 철학자가 또 있을까. 어떤 사건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그의 입을 주시했으며, 그에게 무언가를 기대했다. 그는,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표현대로 ‘대중의 열정과 조급함의 대상’이었다. 사르트르 역시 자신에게 떨어지는 스포트라이트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공적 삶과 사적 삶이 분리될 수 없다고 믿었으며, 자신의 삶과 철학이 당대에든 후대에든 ‘투명하게’ 노출되기를 바랐다.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열광했고, 또 한없이 분노했다. ●사르트르의 영광과 비참 세계 제2차대전 직후인 1945년.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제목으로 열린 사르트르의 강연회는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몰린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의자가 부서지고 고함소리가 난무했으며, 몇몇은 실신했다. 그들은 왜 거기 모였는가? 그들 중에 난해하기 짝이 없는 텍스트인 ‘존재와 무’를, 그의 처녀작 ‘구토’를 읽은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 사르트르는 하나의 ‘유행’이었다. 이 강연은 즉각적으로 그에 대한 오해와 비난을 야기했다. 젊은 들뢰즈와 그의 친구들은 ‘휴머니즘’이라는 낡은 모토에 아연실색했으며, 레비-스트로스를 위시한 일단의 ‘구조주의자’(미셸 푸코를 포함해서)들은 역사와 주체의 책임을 말하는 그의 논리를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르트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실존주의’라는 용어는 사르트르의 꼬리표가 되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사르트르’라는 이름은 대중문화처럼 삽시간에 소비되었으며, 1950년대와 60년대에 세계 각지의 민족해방운동단체, 혁명집단, 압제당하는 소수집단들은 앞을 다퉈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중에는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인 프란츠 파농도 있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는 증오의 표적이 되었다. 그의 소설 ‘구토’는 세상의 모든 오물과 악취에 비유되었으며, 그의 여성 편력과 취향은 소설 속의 묘사와 비교되면서 끊임없이 가십거리가 되었고, 그의 아파트에는 두 차례에 걸쳐 폭탄이 투하되기도 했다. 좌파, 우파, 공산주의자, 반공주의자, 신, 도덕, 국가 등등 사람들은 사르트르를 거의 모든 것의 이름으로 공격하고 비난했다. 심지어 알튀세르는 이런 ‘사기꾼’의 입을 막으려면 채찍으로 때리는 수밖에 없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이 영광과 비참 사이에 사르트르가 있다. 그는 끊임없이 인용되었으며, 그보다 더 많이 오해되었다. 사르트르라는, 한 시대의 아이콘에 대한 애정을 담아 쓴 꼼꼼하고도 깊이 있는 평전 ‘사르트르의 세기’의 저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사르트르에게 가해진 당대의 비난들, 즉 휴머니스트·역사주의자·주체주의자 등의 명명으로부터 사르트르를 구출해 내려고 한다. 사르트르는 영속적인 본질과 내면을 지닌 인간 주체를 믿기는커녕 끊임없이 ‘인간’ 자체를 회의하고 자아를 부정했으며, 고리타분한 역사의 진보 따위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분출하고 단절하고 폭발하는 ‘사건들의 도래’를 기다렸다는 것이 레비의 생각이다. 사르트르의 텍스트에 대한 가치판단은 해석자의 몫이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누구나 그를 비난할 수 있었지만 당대의 누구도 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사르트르의 ‘뒤틀리고 왜곡된 사유’를 비난했던 푸코도 마지막 대담에서는 자신이 그에게 진 빚을 고백했으며, 들뢰즈 역시 그러했다. “마지막 철학자는 사르트르야. 알겠나. 우리 모두는 그에게 모든 것을 빚지고 있어.” ●나는 지식인이다, 나는 작가다 20세기 철학자 중 사르트르만큼 다양한 장르에 열정적으로 참여한 지식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문학, 정치, 연극, 저널리즘, 비평, 방송, 샹송 작사 등 그는 글로 참여할 수 있는 거의 전 영역을 종횡무진했던, 말 그대로 ‘총체적 지식인’이었다. 사르트르가 지향했던 ‘총체적 지식인’의 이미지는 보부아르의 ‘이별의 의식’에 나오는 한 구절로 단번에 짐작된다. “내가 당신을 알게 되었을 때, 당신 스스로 스피노자이면서 동시에 스탕달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지요.” 스피노자와 스탕달, 냉정한 철학자와 이야기하는 사기꾼을 동시에 꿈꾸었던 철학자. 사르트르는 자기 시대를 사유하기 위해 수많은 철학자를 경유했고, 이를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내기 위해 문학을 필요로 했다. 그에게 문학과 철학은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세계에 참여하는 두 개의 동시적 글쓰기요 존재양식이었다. 정치와 문학, 정치와 철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지식인으로, 때로는 작가로, 그는 필요할 때마다 여러 가지 모습으로 발언하고 행동했다. 전후에 벌어진 거의 모든 시위 현장에는 사르트르, 그가 있었다. 1947년에 발표된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문학에 대한 이론이라기보다는 ‘쓴다는 행위’에 대한 현재적 질문으로 구성된 텍스트다.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쓰는가?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사실, 아무도 이런 물음을 스스로 제기해본 일이 없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르트르의 답은 이렇다. 작가는 자기 시대에 관해 쓰고, 자기 시대를 위해 쓰며, 그럼으로써 현재의 다수에게 호소해야 한다는 것. 문학작품은 바나나처럼, ‘상하기 전에’ 소비되어야 한다. 문학 자체가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즉 이 시대의 비참함과 가난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는 ‘후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을 위해, 지금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게 바로 사르트르의 그 유명한 ‘참여문학론’이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듯이, 사르트르는 ‘문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현실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학 자체가 이미 ‘참여된’ 것이라고 말한다.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 자체가 이 세계에 참여하는 행위라는 것. 사르트르는 자신의 작품을 틈날 때마다 가다듬고 수정하는 그런 유의 작가가 아니었다. 작가의 임무는 걸작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대중을 도발하는 것이라는 믿음. 이 믿음 하에서 그는 사유의 속도로 글을 써내려갔고, 불멸의 작가가 되기보다는 현재에 어필하는 ‘공공작가’가 되기를 소망했다. “작가는 설령 그것이 가장 명예로운 방식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기관화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인간과 문화는 ‘기관’의 간섭 없이 존재해야 합니다.” 잘 알려진 대로 사르트르는 ‘기관’이 주는 일체의 상과 지위를 거부했다. 1945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거부했으며,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직도 거부했다. 그리고 1964년에는 노벨상 수상마저 거부한다.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줄 뻔했던 작품 ‘말’은 사르트르의 유년기를 담은 일종의 자전소설이다. 사람들은 ‘말’이라는 작품을 통해 사르트르가 ‘참여문학’이라는 유치한 망상에서 벗어나 문학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레비에 따르면, ‘말’은 문학에 고하는 이별선언문이다. 문학이 세계를 치유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야말로 병증이었다는, 자신이 유년기부터 앓아오던 ‘문학’이라는 병증으로부터 이제야 벗어났다는 섬뜩한 고백. 그러니까 스웨덴 한림원은 문학에 이별을 고한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려 했던 셈이다. 희대의 아이러니! 사르트르는 끊임없이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는 척하면서 대중을 배반한다. 그래서 누구도 사르트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를 사랑했던 이들도, 그를 증오했던 이들도.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삶은 그대로 그의 텍스트였다는 사실이다. 저자의 죽음이 말해지는 시대에, 사르트르는 여전히 텍스트와 삶의 일치를 꿈꿨다. 그런 점에서 그는 가장 20세기다운, 20세기의 작가다. “내가 미래에 요구하는 것은, 그 미래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나의 작품을 읽어달라는 것이다.” 채운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 [씨줄날줄] 군견(軍犬)/이춘규 논설위원

    수많은 동물들이 독특한 특질 때문에 고대부터 전쟁에 동원됐다. 인간과 동물이 하나가 되어 전장에서 싸우기도 했고 수송·통신·적 탐지에 투입됐다. 가장 널리 활용된 동물은 말(馬)이다. 특권층만 타다가 2300여년 전 알렉산더대왕이 보병·기병을 조합시킨 전략을 폈다. 지금은 의전에만 활용된다. 코끼리의 육중한 체구는 적을 와해시키기에 충분했지만 약점도 많아 전장에서 일찍 퇴장했다. 코끼리 공격에 혼이 났던 로마군. 돼지의 등에 기름을 바른 뒤 불을 붙여 뜨거움에 악을 쓰며 돌진토록 해 코끼리들을 혼란시킨 전술까지 썼다. 비둘기는 고속통신 수단이었다. 무선기기 고장 때 대체수단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도 이용됐다. 쥐, 매, 닭 등 동물을 군사목적으로 활용하려는 실험은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계속되고 있다. 개(영국 육군), 고양이(영국 해군), 곰(폴란드 육군), 펭귄(노르웨이 육군), 양 등은 군 마스코트로 이용된다. 동물에 계급이 부여된 사례도 많다. 낙타는 사막·산악지대·극한지 등 특수 지역에서 이동수단으로 활용된다. 돌고래는 지능지수가 높기 때문에 기뢰 탐지 등에 활용된다. 중국 전국시대에는 야간에 수백 마리 소의 뿔에 횃불을 동여맨 뒤 돌진시켜 적을 뒤흔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2차대전 때 미군은 목조건물이 많은 일본 공습에 빛을 싫어하는 박쥐 활용을 검토했었다. 소형 네이팜탄을 매단 박쥐를 새벽에 날려보내 해가 뜨면 건물 지붕 밑에 들어가게 한 뒤 폭발시켜 도시를 불바다로 만든다는 계획. 실전엔 투입되지 않았다. 개는 고대부터 군사목적에 활용됐다. 뛰어난 시각·후각을 활용해 경계·수색·탐지 등에 투입된다. 20세기 초엔 화학전에도 활동할 수 있게 군견용 가스 마스크도 개발됐다. 조직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로 그후 세계로 전파됐다. 군견은 독일에서 가장 발달했고, 독일 셰퍼드는 한국 군견의 주축이다. 군견은 현재 마약과 같은 밀수 방지와 폭탄테러 수색에도 활용된다. 오사마 빈라덴 사살작전에 특수부대와 함께 최첨단 장비로 무장된 군견 한 마리가 투입됐다고 한다. 독일 셰퍼드나 벨기에 말리노이즈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적외선 카메라가 달린 2만 1500달러(2334만여원)짜리 특수 방수·방탄 조끼를 입혔다. 문틈으로 새 나오는 냄새를 통해 방에 위장폭탄이 설치돼 있는지 감지하는 역할 등을 했다. 이슬람권은 개를 불결한 동물로 여긴 탓에 군견은 빈라덴 일행에 대한 심리적 압박도구로 유용했다고 한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삼성 VS 애플 ‘태블릿PC 2차대전’ 맞짱

    삼성 VS 애플 ‘태블릿PC 2차대전’ 맞짱

    애플이 두 번째 태블릿PC인 ‘아이패드2’를 국내에 출시하면서 본격적인 ‘태블릿 2차 대전(大戰)’이 시작됐다. 업계에서는 아이패드에 대적할 가격과 성능을 갖춘 제품을 만들기가 쉽지 않은 데다 국내 시장의 태블릿 수요 또한 예상을 밑돌아 이번에도 애플의 독주를 삼성이 막아내는 대결구도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2일 업계에 따르면 애플은 지난달 29일부터 이동통신사와 애플스토어 등을 통해 두 번째 태블릿PC인 아이패드2의 판매에 나섰다. 본사 방침에 따라 판매량은 밝히지 않고 있지만 3세대(G) 모델을 판매하는 SK텔레콤과 KT, 와이파이 전용 모델을 내놓은 애플스토어 등에서 초기 물량이 매진되며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아이패드2 판매에 나선 표현명 KT 사장은 기자들에게 “많이 파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고객에게 즐거운 경험을 제공해 태블릿PC 생태계를 조성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반면 국내외 경쟁업체들의 사정은 녹록지 않다. 우선 삼성전자는 6월 8일로 예정된 두 번째 태블릿 ‘갤럭시탭 10.1’의 출시를 앞당기기 위해 막바지 작업 중이다. 애플과 경쟁하기 위해 아이패드2(두께 8.8㎜)보다 더 얇은 8.6㎜로 만드는 등 성능 및 디자인 개선에 주력하고 있다. 현재 삼성은 갤럭시탭 10.1의 출시 일정을 최대한 당겨 빠르면 이달 중 시장에 내놓을 예정이지만 이미 애플과는 출시 시기가 한 달 가까이 차이가 나 초기 주도권 싸움에서 열세에 놓이게 됐다. LG전자는 아예 태블릿PC ‘옵티머스 패드’의 국내 출시를 보류했다. 현재 상황에서는 국내에서 아이패드2와의 경쟁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에서다. 당분간 옵티머스 패드는 미국과 일본·유럽 지역 등에만 판매하고, 국내에는 후속작을 최대한 빨리 개발해 투입한다는 전략이다. LG전자 관계자는 “태블릿PC 시장 사업자들과의 협력 관계, 통신환경 등에 따라 선택과 집중을 하겠다.”면서 “아직까지는 국내 태블릿 시장이 무르익지 않은 만큼 차기작으로 승부를 보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전자제품전시회(CES 2011)에서 ‘올해의 제품상’에 선정되며 기대를 모았던 모토롤라의 ‘줌’ 역시 지난달 전 세계에서 25만대가량 팔리는 데 그쳐 ‘아이패드2 대항마’라는 별칭이 무색해졌다. 이 밖에도 TG삼보나 앤스퍼트 등 국내 업체들도 각각 10.1인치와 7인치 태블릿PC를 내놓으며 틈새시장 개척에 나서고 있지만 출시 시기를 연기하는 등 애플과의 정면승부를 피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전작과 달리 아이패드2가 예상보다 빨리 한국에 들어오면서 경쟁제품들이 설 자리가 크게 줄어들었다.”면서 “조만간 삼성전자 갤럭시탭 10.1이 출시되고 LG전자도 차기 제품을 내놔야 비로소 애플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전 세계 ‘제2의 미들턴’ 되기 열풍

    전 세계 ‘제2의 미들턴’ 되기 열풍

    평민 출신으로 윌리엄 왕자와의 결혼이라는 전 세계 소녀들의 꿈을 이룬 케이트 미들턴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현실이 되면서 전 세계가 ‘제2의 미들턴 되기’ 열풍에 휩싸였다. 열기를 반영하듯 각종 언론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사이트 등은 왕자와 결혼할 수 있는 실전 전략을 제시하는 프로그램에 사례 분석까지 내놓고 있다. 장래 왕자의 신부를 꿈꾸는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예비 공주 캠프도 인기를 끌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웹사이트 바두(www.badoo.com)는 27일(현지시간) ‘왕자와 결혼할 수 있는 7가지 황금수칙’을 내놨다. 바두는 세계 2차대전 이후 이뤄졌던 전 세계 30개국 왕자의 연애 사례 107건을 바탕으로 최적의 전략을 뽑아 네티즌들에게 제시했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명문대에 진학하거나 방송 등 언론, 쇼비즈니스 계통의 직업에 종사하면서 왕족과의 접촉 가능성부터 최대한 늘리는 것이다.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과 케임브리지대학교 등 왕자들의 로맨스 107건 가운데 10건이 대학교에서 싹텄다. 바두는 “미들턴과 윌리엄 왕자가 세인트앤드루스대학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것처럼, 대학은 새로운 왕실 결혼 시장으로 떠올랐다.”고 밝혔다. 유럽 왕족들이 즐겨 하는 테니스, 폴로, 수영 등의 스포츠 활동이나 파티 참석도 왕족을 만날 수 있는 주요 통로로 소개됐다. 왕실 혈통이 아니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2차 대전 이후 유럽 왕자 가운데 71%가 평민 여성과 사랑을 키웠기 때문이다. 영국 스카이TV는 지난달부터 왕자와 결혼하는 단계별 가이드를 소개하는 프로그램 ‘왕자를 잡는 법’(How To Nab A Prince)까지 편성해 방영 중이다. 4차례 결혼한 것으로 유명한 여배우 팻시 켄짓이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왕자를 차지하기 위해 어떻게 말하고 입어야 하는지, 어디를 다녀야 하는지 등 시시콜콜한 조언까지 건넨다. 스카이TV 관계자는 “우리가 준 최고급 조언들을 활용해 제2의 미들턴이 나올지 누가 알겠나.”라며 자신했다. 런던에서는 공주가 되고 싶은 8~11세 소녀들을 상대로 한 ‘예비 공주 여름캠프’도 열려 화제가 되고 있다. 상류층 지역인 켄징턴, 첼시의 호화 아파트에서 7일간 먹고 자는 이 캠프의 참가 비용은 일인당 무려 3005달러(322만원·항공료 제외). 소녀들은 예절 강습은 물론, 하이드파크에서의 승마, 왕실 결혼식 및 버킹엄궁 투어, 공주 따라 말하기 등의 다양한 교육을 받는다. 24시간 내내 유모와 집사가 소녀들의 감독과 시중을 도맡으며 ‘신데렐라 신드롬’을 충족시켜 준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신데렐라 신드롬에 빠진 세계...제2의 미들턴 되기 열풍

     평민 출신으로 윌리엄 왕자와의 결혼이라는 전 세계 소녀들의 꿈을 이룬 케이트 미들턴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현실이 되면서 전세계가 ‘제2의 미들턴 되기’ 열풍에 휩싸였다.  열기를 반영하듯 각종 언론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사이트 등은 왕자와 결혼할 수 있는 실전 전략을 제시하는 프로그램에 사례 분석까지 내놓고 있다. 장래 왕자의 신부를 꿈꾸는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예비 공주 캠프도 인기를 끌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웹사이트 바두(www.badoo.com)는 27일(현지시간) ‘왕자와 결혼할 수 있는 7가지 황금수칙’을 내놨다. 바두는 세계 2차대전 이후 이뤄졌던 전 세계 30개국 왕자의 연애 사례 107건을 바탕으로 최적의 전략을 뽑아 네티즌들에게 제시했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명문대에 진학하거나 방송 등 언론, 쇼비즈니스 계통의 직업에 종사하면서 왕족과의 접촉 가능성부터 최대한 늘리는 것이다.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과 캠브리지대학교 등 왕자들의 로맨스 107건 가운데 10건이 대학교에서 싹텄다. 바두는 “미들턴과 윌리엄 왕자가 세인트앤드루스대학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것처럼, 대학은 새로운 왕실 결혼 시장으로 떠올랐다.”고 밝혔다.  유럽 왕족들이 즐겨하는 테니스, 폴로, 수영 등의 스포츠 활동이나 파티 참석도 왕족을 만날 수 있는 주요 통로로 소개됐다. 왕실 혈통이 아니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2차 대전 이후 유럽 왕자 가운데 71%가 평민 여성과 사랑을 키웠기 때문이다.  영국 스카이TV는 지난달부터 왕자와 결혼하는 단계별 가이드를 소개하는 프로그램 ‘왕자를 잡는 법’(How To Nab A Prince)까지 편성해 방영 중이다. 4차례 결혼한 것으로 유명한 여배우 팻시 켄짓이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왕자를 차지하기 위해 어떻게 말하고 입어야 하는지, 어디를 다녀야 하는지 등 시시콜콜한 조언까지 건넨다. 스카이TV 관계자는 “우리가 준 최고급 조언들을 활용해 제2의 미들턴이 나올지 누가 알겠나.”라며 자신했다.  런던에서는 공주가 되고 싶은 8~11세 소녀들을 상대로 한 ‘예비 공주 여름캠프’도 열려 화제가 되고 있다. 상류층 지역인 켄징턴, 첼시의 호화 아파트에서 7일간 먹고 자는 이 캠프의 참가 비용은 일인당 무려 3005달러(322만원·항공료 제외). 소녀들은 예절 강습은 물론, 하이드파크에서의 승마, 왕실 결혼식 및 버킹엄궁 투어, 공주 따라 말하기 등의 다양한 교육을 받는다. 24시간 내내 유모와 집사가 소녀들의 감독과 시중을 도맡으며 ‘신데렐라 신드롬’을 충족시켜 준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주말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OBS 일요일 밤 11시 15분) 눈물나게 아름다운 그 여자의 잔혹동화가 시작된다. 도쿄에서 백수 생활을 하던 쇼(에이타)는 고향의 아버지(가가와 데루유키)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행방불명되었던 고모 마츠코(나카타니 미키)가 시체로 발견되었으니 유품을 정리하라는 것이다. 허물어져가는 아파트에서 이웃들에게 ‘혐오스런 마츠코’라고 불리며 살던 그녀의 물건을 정리하면서 쇼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마츠코의 일생을 접하게 된다. 중학교 교사로 일하며 모든 이에게 사랑받던 마츠코에게 지난 25년간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제자가 일으킨 절도사건으로 해고당한 마츠코는 가출을 감행한다. 하지만 동거하던 작가 지망생은 자살해 버리고, 그의 친구와 불륜행각을 벌인 마츠코는 곧 버림받고 절망에 빠져 몸을 팔게 된다. 심지어 기둥서방에게 배신당한 마츠코는 그를 살해한 죄로 8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한다. ●카틴(KBS1 토요일 밤 12시 55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카틴 숲에서 자행된 폴란드인 대학살을 다룬 영화 ‘카틴’은 살해당한 폴란드 장교들과 그 사실을 모른 채 남편과 아버지, 아들과 형제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다. 소련공산당이 자신들이 자행한 학살을 강제로 묻으려 했던 거짓말에 대해 단호한 평가를 내린다. 2차대전 초기인 1939년 9월 17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스탈린의 명령을 받은 소련의 붉은 군대도 폴란드 땅에 침입한다. 그로 인해 모든 폴란드 장교들이 소비에트 수용소에 억류된다. 한편 기갑부대 연대장의 아내 안나는 남편 안제이를 기다린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외면하고 살지만, 카틴 숲에서 폴란드 군인들의 시체 무더기들이 발견된 후 어쩔 수 없이 소련군들이 그의 남편을 죽였다는 사실과 대면하게 된다. ●당통(EBS 토요일 밤 11시)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끝난 후 혁명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하나인 로베스피에르는 1793년 9월 공포정치를 펼치기 시작하며 수많은 과격파 정치인들을 단두대 위에서 숙청시킨다. 국민공회 산악당 소속 의원인 조르주 당통은 파리에서 평화를 호소하며 공포정치의 중단을 요구했고, 국민 공회와 정치인 친구들의 응원, 민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로베스피에르, 공안위원회 등과 맞선다. 몇 번의 비리 사건에 연루되었음에도 민중의 반발이 두려워 로베스피에르는 당통의 기소를 거부한다. 하지만 비공개 회담에서 두 사람의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못하고 로베스피에르의 제안에 따라 국민공회는 당통과 그의 친구들을 체포한다. 당통은 뛰어난 웅변으로 재판장에서 자신을 변호해 보지만 결국 1794년 4월 5일 동료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만다.
  • “독도문제에 너무 몰입하면 민족주의 광풍에 휩쓸릴 것…日 학습지도요령 깨부숴야”

    “독도문제에 너무 몰입하면 민족주의 광풍에 휩쓸릴 것…日 학습지도요령 깨부숴야”

    일본 교과서 문제가 불거지면서 다시 바빠진 곳이 있다.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다.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불거지자 학계·시민단체 전문가들이 2001년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로 출범시킨 단체다.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까지 터지자 지금의 형태로 확대 개편됐다. 이번에도 민간 차원에서 일본 교과서 왜곡에 대한 심층 분석과 대응방안을 모색한다. 교과서 분석 작업을 총괄지휘하는 이신철(46) 공동운영위원장(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30일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실에서 만났다. →일본 교과서 왜곡의 대명사는 후소샤(扶桑社) 출판사였다. 이번엔 지유샤(自由社)와 이쿠호샤(育鵬社)다. 어떤 차이가 있나. -일란성 쌍둥이다. 종군위안부 문제를 서술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1997년 출범한 극우단체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었다. 이들은 2001년 후소샤를 통해 교과서를 냈다. 그 뒤 계속 교과서를 냈지만 채택률이 1%에도 못 미치는 등 지리멸렬하자 내분이 일어나면서 새역모가 두개로 쪼개졌다. 이때 생겨난 ‘교육재생기구’라는 단체가 후소샤의 자회사인 이쿠호샤와 손잡았다. →이쿠호샤는 후소샤의 실패가 투박한 서술 때문이었다면서 조금 더 세련되게 접근하겠다고 공언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독도 영유권 주장을 비롯해 서술이 개악된 이유가 뭔가.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다. 후소샤는 자신들이 교과서 문제로 너무 표적이 되어 있으니 자회사로 이쿠호샤를 만들었고, 이게 교육재생기구와 손잡았다. 기존의 새역모는 지유샤로 갈아탔다. 지유샤의 경우 일본 국내법적으로 교과서를 낼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교과서를 내는 출판사 자격 요건 가운데 전문가를 5명 이상 보유하고 교과서 출간 6개월 전에 회사가 설립되어야 한다는 등의 제한 규정이 있다. 그런데 지유샤는 고작 사장 1명과 직원 3명에 불과한 급조된 회사다. 그런데도 교과서 검정 신청을 했는데 받아들여졌다는 게 무척 의외다. 이쿠호샤의 세련된 서술이란 것도 잘못 알려진 대목이다. 2006년 교과서 채택 과정에서 일본내 반대 운동 진영이 쓴 전술 가운데 하나가 끊임없이 흠집 잡기였다. 요코하마에서 이 전술이 특히 먹혀들었다. 후소샤 교과서를 갖다놓고 일본사 서술이 잘못된 부분을 집요하게 문제제기했다. 그러다 보니 교육청에서 수정 공문을 내려보낼 수밖에 없었고, 이게 쌓이다 보니 결국 후소샤에서 틀린 부분을 통째로 들어내는 삽지 작업까지 했다. 이쿠호샤가 세련되게 서술하겠다고 한 것은 이렇게 꼬투리 잡힐 짓을 안 하겠다는 뜻이지, 극우 논리를 완화하거나 정교하게 다듬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일본 교과서에 등장한 독도 문제 왜곡이 어느 정도인가. -예전에도 독도 문제를 거론한 교과서들이 있었다. 차이라면 예전에는 한·일 양국 간 영유권 문제가 있다는 식의 비교적 건조한 서술방식이었던 데 반해 지금은 아예 한국이 불법점거하고 있다고 못 박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역사학계에서도 한국이 독도를 불법점유하고 있다는 주장은 안 나온다. 아예 한국땅이라고 인정하거나, 우익쪽 학자라 해도 양국 간 다툼이 있다는 수준에 그친다. 그런데 교과서에 ‘불법점거’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이다. 이는 일본 문부성의 요구사항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다만 독도 문제에만 너무 초점이 맞춰지면 한·일 양국의 내셔널리즘(민족주의)만 강화시킬 우려가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독도 문제에 너무 몰입하면 일본 우익의 손에 놀아난다고 주장한다. 반면 이 같은 주장이 전형적인 한국 외교관료들의 논리라며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는데. -교과서 문제에 초점을 맞추자는 게 우리 태도다. 독도 문제는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고, 강력 항의할 수도 있다. 그런데 너무 지나치면 애국주의 물결에 휩쓸릴 수 있다. 일본은 일본대로, 한국은 한국대로 내셔널리즘 광풍이 불어닥치면 그 다음 행보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본질적으로 다뤄야 할 문제는 아베 정권 당시 만들어진 학습지도 요령을 어떻게 깨부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를 위해 전반적인 역사 인식 자체를 문제삼아야 하고, 그래야 다른 나라들과 연대해 움직이는 데 도움이 된다. →독도 외에 다른 대목은 어떻게 교과서에 서술됐는가. -가장 중요한 게 사실 그 부분이다. 식민지, 전쟁 미화 등의 내용이 들어가 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국에 도움이 됐고, 위안부 문제는 아예 취업을 위해 공장에 간 것처럼 쓰여져 있다. 대동아전쟁은 아시아해방전쟁으로 미화했다. 2차대전 당시 미국과 치른 오키나와 전쟁에 대해 자신들의 침략전쟁은 쏙 빼버리고 미군이 침범해와서 많은 일본인들이 피해를 봤다는 식으로 서술했다. 결국 무라야마 담화, 간 나오토 담화 등 한·일 우호적인 내용의 담화를 깡그리 무시해버린 것이다. 이는 아시아 평화에 대한 직접적 위협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독도 영유권 문제보다 장기적으로 더 위험한 대목들이다. 한마디로 애국심 고취를 위해 자신들에게 불리한 대목은 전부 빼버렸다. →그 대목에서는 우리나라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이 있다. 2008년 뉴라이트 진영의 대공세로 금성사 교과서가 문제되면서 집필자였던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가 교육과학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기도 했다. -옳은 지적이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2008년 교육안을 다시 만들었고, 교과서도 수정됐다. 대한민국 정체성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대목이 강화됐고 북한 인권 문제도 거론했다. (교과서가) 정치 논리에 휘둘리기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매한가지다. →교과서가 나오기 직전 일본을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제까지 우리는 (교과서) 검정채택 결과가 나오면 그에 맞춰 대응했다. 그런데 검정 과정에 이미 일본 정부가 깊숙히 개입한 이상 결과가 나온 뒤에 대응하면 늦다는 반성이 나왔다. 그래서 관련 일본 단체들과 힘을 합쳐 미리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두루 만나고 왔다. →일본 시민단체들의 분위기는. -2001년에는 왜곡 교과서 채택률이 0.039%에 그쳤다. 그런데 최근에는 1.7%까지 올라갔다. 미미하지만 계속 올라가는 추세다. 채택률 상승 못지 않게 중요한 점은 이런 왜곡 교과서들이 다른 출판사의 서술방향에까지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일본 시민단체들의 위기의식이 상당할 수밖에 없다. →교과서 채택 저지 운동은 어디에 집중되나. -아무래도 교토와 요코하마다. 도쿄의 경우 우리로 치자면 구(區) 단위로 교과서가 채택된다. 그런데 교토와 요코하마처럼 우익 정치인들의 영향력이 큰 곳은 좀 더 광역화돼 시(市) 단위로 채택된다. 그래서 이들 지역을 우선 타깃으로 삼았다. 글 사진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WHO&WHAT] 독재자의 만찬

    [WHO&WHAT] 독재자의 만찬

     ‘민주’(民主)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오늘날, ‘독재’(獨裁)란 말은 듣는 것만으로도 유쾌하지 않은 단어다. 다른 사람의 운명을 멋대로 좌우하고 과장된 논리나 종교와 다를 바 없는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독재에 대한 거부감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한국인에게도 ‘독재’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군사정권에 맞서 밑으로부터의 민주화를 일궈냈다는 자부심,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최장수 독재체제(북한)와 마주하고 있는 현실 등 우리는 독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 몰아닥친 ‘재스민 혁명’에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수십년간 그래온 것처럼 아랍권의 민주화 운동이 ‘찻잔 속 태풍’이 될 것이라는 전망은 이미 빗나갔다.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과 권리를 찾고자 하는 이들의 싸움은 점점 격해지고 있고, 이젠 국제사회의 개입도 본격화됐다.  가상 인터뷰 ‘WHO&WHAT’의 이번 주인공은 역사 속 인물들이다. 이름 자체가 공포가 되고, 금기어가 됐던 이들. 현대 정치사를 피로 물들이며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악몽’ 그 자체였던 네 명의 독재자들을 만찬장에 초대해 그들이 생각하는 재스민 혁명과 ‘독재’ 그리고 ‘민주화’에 대해 들어봤다. 사회:독재돼지 나폴레옹(소설 ‘동물농장’의 주인공)  식당으로 들어서는 네 사람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살아생전 서로 배신의 총부리를 겨눴던 사이도 있었고, 서로 ‘사상적 동지’로 돈독한 관계를 자랑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 사이에 가로놓인 반세기의 시간도 서먹한 분위기를 가시게 하지는 못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사전에서 바로 튀어 나온 듯한 이들은 같은 자리에 마주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마뜩치 않아 보였다.  콧수염을 기른 사람이 셋, 군복을 입은 사람이 셋이었다. 앞에 이름표를 놓을 필요조차 없이 얼굴만으로도 누구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 이오시프 스탈린, 마오쩌뚱, 사담 후세인. 인류 또는 자기의 민족을 위해 떨쳐 일어났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웠지만 결국엔 자기자신의 안위와 비뚤어진 욕망으로 가득찬 이미지만 역사에 남긴 공통점을 가진 이들. 한 사람만 있어도 공포를 느끼게 할 만한 20세기 정치가 네 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날 만찬 자리는 현재 국제정세를 감안하면 상당히 늦은 감이 있었다. 시대적 차이는 있지만, 각자의 전성기 시절 국내외 정치에 대해서라면 남부럽지 않을 역량을 과시했던 이들에게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강타하고 있는 ‘쟈스민 혁명’에 대해 묻지 않는다면 과연 누구한테 물어야 한단 말인가. 더구나 만찬의 주제가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독재’인데 말이다.  네 사람의 만남에 적합한 사회자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민주화 전문가나 학자는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이들을 통제하기엔 늘 역부족이기 마련. 결국 메이너 농장의 절대권력자 나폴레옹(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독재자 돼지)에게 어려운 역할을 부탁했다. 1945년 처음 세상에 알려진 이후, 지금까지 농장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나폴레옹의 능력이라면 참석자들도 특별한 불만이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오웰이 묘사한 것처럼 나폴레옹은 ‘사람이 돼지인지, 돼지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능수능란하게 만찬장의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본인들의 얘기와 현재 상황을 비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오늘의 메뉴●  애피타이저 - 당신은 떳떳한가  메인 디시1 - 당신의 국민은 왜 당신을 버렸을까  메인 디시2 - 당신은 부패했나  디저트 - 당신의 사랑은 진짜였나      <애피타이저> 당신은 떳떳한가.   →나폴레옹 인간 세상 최고의 독재자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게 돼 기쁘다. 나야 동물 100여마리 거느리는 수준이지만, 당신들은 수백만명에서 수억명에 이르는 사람의 목숨을 한 손에 좌우했던 사람들이지 않은가. 실제로 죽이기도 많이 죽였고…. 당신들보다 훨씬 잔혹하거나 무자비한 사람도 없진 않지만, 20세기 이후 독재자들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 선정됐다는 점을 밝혀둔다. 우선 당신들이 지금 이 테이블에서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있을 수 있는 자신감의 근원부터 묻고 싶다.   히틀러 정당성을 묻는거냐. 어디까지나 국민들이 원해서 적합한 위치를 맡았을 뿐이다. 내가 총통이 됐을 때 4500만명이 투표에 참가했고 그중 3800만명이 찬성했다.(히틀러는 1934년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죽은 직후 1시간 만에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통합하고 최고사령관 직까지 합쳐 그 자리에 오른 다음 투표를 실시했다.) 국민들이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에 자발적으로 동참해서 내가 그 위치에 올랐다는 증거다. 정당성의 측면에서 과거의 왕들과는 평가부터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왕 중에서도 네로나 헤롯 같은 사람이 있었고, 나름 성군(聖君)으로 존경받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들은 왕으로 태어나 왕으로 살면서 그 권력을 조금 더 쓰느냐 마느냐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스탈린 난 볼셰비키 혁명을 주도했고 성공시킨 레닌이 직접 지목한 정당한 후계자다.(실제로는 레닌이 그의 위험성을 경고한 편지를 공개하려고 했지만,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막았다. 뿐만아니라 스탈린은 레닌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여러 장의 사진과 역사기록을 조작했다.) 그루지아 출신이라는, 심지어 러시아어를 잘 하지 못한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범 러시아 지역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데 대해 지금까지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국민의 지지가 없으면 독재고 뭐고 간에 아예 정권을 잡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최소한 총과 칼로만 쿠데타를 일으켜서 최소 몇 년 이상 유지한 사례가 얼마나 될지 지난 100년 간을 꼽아봐라. 처음엔 그렇게 잡더라도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하지 않으면 유지가 안되는 게 정치다.   →나폴레옹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역사에 악인으로 이름을 남긴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다. 듣다보니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요새 연설을 통해 계속 반복하고 있는 논리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그 얘기는 나중에 이어가기로 하고, 최근 전 세계 최고 관심사인 ‘쟈스민 혁명’에 대해 들어봤나.   마오 내용이야 어떻든 오랜만에 가슴이 뛰는 기분이다. 지난해 12월 한 청년이 분신을 하면서 벌어진 일이 불과 석달 만에 이렇게까지 커지다니. 벌써 두 나라(튀니지·이집트)의 정권이 뒤집혔고 리비아, 시리아, 바레인도 내전이 한창이지 않은가. 난 ‘공산당’을 알리고 ‘혁명 동지’를 모으기 위해 10만여명을 이끌고 1934년 370일 동안 1만 5000㎞를 걸어야했다.(마오는 12개의 지방을 지나고 18개 산맥과 24개 강을 건넜다. 마오의 짐은 두 장의 담요와 홑이불, 외투 한 벌, 책 몇 권 뿐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고도 15년 이상 지나서야 중국을 세울 수 있었다. 고작 석달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지금 같은 세상이라면 보다 완벽한 혁명을 꿈꿀 수 있을 것 같다.   히틀러 거기엔 100% 동감한다. 요즘처럼 다양한 수단이 있었으면 내가 연설을 일부러 석양무렵에 하면서 다양한 무대장치를 동원하는 수고는 덜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이런 아이디어는 히틀러의 선전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의 능력이라는 얘기가 정설이다.) 아! 물론 난 연설 대신 다른 방법으로 국민들을 설득해야 했겠지만 말이다.   후세인 참석한 다른 사람들은 딱 와닿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내 입장에서 쟈스민인지 뭔지는 정말 충격적인 일이다. 아랍에는 ‘하마’라는 게 있다. 1980년대 초반에 시리아의 하마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민란이 일어났는데, 정부는 마을 전체를 지도에서 지워버리다시피 했다.(2만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시리아 정부는 그 숫자를 본보기 삼아 일부러 널리 공포했다.) 그 이후 ‘하마’는 절대권력에 대항하는 반항에 대한 응징을 뜻했다. 아랍권에서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내던 반 체제 인사들은 힘을 잃었고, 일반인들은 조용해졌다. 그게 지금까지 아랍권을 지탱해온 버팀목이었다. 왕정이든 사회주의 체제든 광범위하게 사용돼 왔다. 물론 무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영TV와 신문을 장악하고, 시골에서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세뇌시켰다. 나름 치밀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한 순간에 무너질 줄은 솔직히 상상도 못했다.   →나폴레옹 후세인 당신과 카다피가 유난히 비슷한 점이 많다고 들었는데.   후세인 카다피와 나는 소위 말하는 ‘역경의 자식들’이다. 전통적인 아랍사회가 혈통과 명문을 높이 떠받드는 점이 가장 큰 타도의 목표가 됐다는 점에서 일면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아랍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중요시되지만 혹시 내 아버지나 카다피의 아버지 이름을 아는가? 뭐 사실 이 만찬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말이다. 우리는 기존 사회의 합의나 계급은 무시하고, 아랍의 전통적인 가치들이 권력에 장애가 된다면 과감히 지워버렸다.  <메인디시1> 당신의 국민은 왜 당신을 외면했나.   →나폴레옹 슬슬 본격적인 식사로 들어가보자. 여러분은 다들 수십년에 걸쳐 자기 나라는 물론 주변국가, 나아가 전 세계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앞서 스탈린이 말한 것처럼 독재는 총칼 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많은 국민의 열광적 지지를 받는 지도자의 위치에 오르는 게 선행돼서 가능했다. 그런데 끝까지 초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인지 통치스타일이 변하면서 서서히 독재자가 돼 가는 공통점이 나타났다. 말은 자꾸 바뀌고, 점점 잔혹해지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안듣게 되었는데.   스탈린 국민들에게 제시했던 내 목표는 무조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었다. 어떤 수단을 써서든 달성하는 것이 최우선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가 내 뜻에 복종해야 했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은 틈만 나면 배신하려 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 나를 밀어내려고 했다. 심지어 공장 노동자들도 내 목표량에 미달했다. 충분히 열심히 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5개년 경제계획을 세워 모든 농민들이 국가 소유의 조합에 가입하게 했다. 그러나 대부분 농민들은 재산을 내주는 대신 땅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였다.) 결국 나는 그들을 피로 다스릴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가까운 사람들조차 나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처럼 생각됐다. 잠도 잘 오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은 적을 정하고, 만반의 준비를 한 다음 철저하게 복수를 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히틀러 난 독일 국민에게 약속한 것을 대부분 다 지켰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정책에는 본인의 증오 이외에 ‘독일 국민들에게 잘 통할 것’이라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고, 실제로 주효했다.) 솔직히 내가 세운 모든 계획 중에 딱 하나 틀린 게 있었는데, 바로 전쟁에 졌다는 것이다. 난 거창하게 세계정복 같은 공약을 내세우지 않고, 우리가 받을 수 있을 걸 받자고 얘기했을 뿐이다. (히틀러의 전쟁은 세계를 상대로 한 전쟁이라기보다는 영국과 프랑스 양강으로 구분돼 있던 유럽 내에서 독일의 정당한 위치를 인정해 달라는 권리찾기에 가까웠다. 세계를 상대로 한 전쟁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히틀러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 독일 사람들은 1933년부터 2차대전이 본격화되기 이전, 내가 제3제국을 이끌던 시기를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기억한다.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지지만 않았다면 난 절대로 여기 다른 ‘실패한 독재자’들과 함께 앉아있지 않을거다.   마오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공통된 적이 필요했다. 사회를 뒤집어 엎으려면 당연히 원동력이 필요하고, 그 힘은 밑에서부터 나온다. 히틀러는 그것을 외부(유대인)에서 찾았고, 나와 스탈린은 노동자·농민을 앞세워 인민의 적을 만들어내는 수법을 썼다. 그런데 정권을 잡고 공공의 적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당연히 사회적 결집력과 추진력이 떨어지지 않겠나. 난 1950년대 중반에 무조건 억누르기만 했던 스탈린과는 다른 길을 가려고 했다. 지식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금방 사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졌다. (마오는 헝가리에서 검열 완화 이후 폭동이 일어난 것을 보고 ‘모든 의견’을 허용하는 대신 ‘공산당의 입지를 굳히는 의견’만을 허용했다.) 고작 6주간 ‘백화제방·백가쟁명’(쌍백) 정책을 펼쳤는데 불온성을 이유로 잡아들인 사람이 100만명이 넘었다.   →나폴레옹 뭐 결국엔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주장했고, 국민들이 그에 부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폭압적인 독재자들로 될 수 밖에 없었다는 논리인 것들 같은데. 국민들이 언제 돌아서는 것을 느꼈나.   스탈린 독재에 대한 대중의 영합은 독재권력이 국민들이 원하는 것을 주기 힘들어지면 힘을 잃기 시작한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일반 국민들에게 정치적인 이데올로기가 가장 중요했던 적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정권이 제시하는 조건이나 삶의 질에 만족하면 그 권력을 지지하지만 그게 안 되면 외면하는 게 국민들의 속성이다. 내 영향력이 다소간 줄어든 것도 ‘산업화’라는 당면과제가 생각만큼 잘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큰 문제는 아니다. 영향력이 떨어지면 그걸 보완하기 위해 총과 칼이나 숙청, 강제노동 등을 동원하면 충분히 되돌릴 수 있다. (스탈린은 꾸준한 생산력 증대를 원했고, 만족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무력을 사용했다.) 이런 것이 독재자와 왕의 가장 큰 차이점이자 독재자에게 불리한 점이다. 독재자는 국민들이 실망하면 이를 되돌리기가 군주보다 훨씬 힘들다. 엘리자베스1세 말기에 영국 국민의 생활수준은 역사상 최저였지만, 아무도 그런 사실은 기억하지 않는다.   히틀러 이번 아랍혁명이 ‘빵의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들었다. 식량값 폭등 같은 단편적인 시각에서 볼 수는 없는 문제다. 원래 독재자는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명확한 미래상을 제시하고 조금이라고 가까이 가고 있다고 믿게 해야 한다. 정권을 지지하는 국민들 입장에서 ‘어제보다 조금 나아진 오늘’은 별 의미가 없다. 독재자가 “5년 후에 우리가 이 정도 수준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제시하면 반드시 거기에 가 있어야 한다. (히틀러가 뚜렷하게 정책에 실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표방하는 제3제국이 명확한 수치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게 이뤄지지 않으면 위기가 찾아오는 거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독재정권들이 망가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금씩 나아지는 건 왕정 아래서도 얼마든지 가능한데, 정권을 잡으려는 독재자들은 국민들에게 “우리 모두 잘 살 수 있다.”고 소리친다. 결국 삶에 찌들어 있는 대중의 지지를 받아 순식간에 정권을 장악할 수 있지만, 결코 그들이 약속한 삶은 만들어낼 수 없다.   후세인 아랍권의 문제가 심각한 건 사실이지만, 구조적으로 ‘복지독재’라는 희한한 형태가 있어 국민들이 모두 돌아서는 시기를 간단히 전망할 수는 없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같은 왕권독재 국가에서는 독재의 정도가 다른 나라보다 심하면 심하지 덜하지 않은데, 국민들의 삶은 다른 나라보다 풍요롭다. 일자리도 주고 의식주 걱정도 없다. 대학도 보내준다. (아랍의 왕조 체제에서는 가진 자의 수가 극히 제한돼 있고, 이들은 인자한 독재자의 모습을 띤다. 이들은 국부를 독점하는 만큼 그것을 나눠주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그럼 이 상황을 뒤집어서 민주화가 되고 완전한 자본주의 국가가 되면 어떻게 되느냐. 가진 자의 수가 늘어나면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절대 빈곤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민주화라는 것은 결국 허상이다. 위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고 가정했을 때 민주화를 원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난 가진 자의 입장에 설 기회가 생긴다.”는 생각만 한다. 결국 ‘기회’라는 게 어느 순간 현재 생활에 대한 불만을 뛰어넘느냐가 관건이 아닐까 싶다.  <메인디시2>당신은 부패했나.   →나폴레옹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영국의 역사학자 로드 액튼 경이 말했다. 독재와 관련된 경구 중 가장 유명한 말이 아닐까 싶다. 흔히들 독재자는 부패하기 때문에 망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부패가 독재의 종착점인가.   히틀러 진정한 목표가 있는 독재자는 부패할 시간이 없다. 난 채식주의자에 담배조차 피우지 않는다. 가끔 맥주를 마시기는 하지만, 내 뒤를 아무리 캐봐라. 내가 부정적인 일에 연루됐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할 거다. 심지어 난 평생 두 여자(의붓여동생의 딸인 겔리 라우발, 최후를 같이 했던 에바 브라운)만을 사랑했고, 한명이 죽은 후에야 다른 사람을 만났다. 만약에 지금 세상처럼 청문회가 있다면 난 무조건 100% 무사 통과다. 오로지 위대한 제3제국을 세우겠다는 목표 이외에 개인적인 욕심 따위는 없었다. 제3제국이 부패해서 망했다고 말할 수 있나. 난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스탈린 나 역시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사람들이 나를 ‘금욕주의자’라고 부를 정도로 난 개인적으로 즐기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 딸 스베틀라나가 나중에 쓴 책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내 가족들조차도 화려한 옷이나 식사는 꿈도 꾸지 못했다. (스탈린은 부인을 잃은 후 스베틀라나를 사실상 ‘어린 퍼스트레이디’로 대접했고, 자식 중 유일하게 애정을 쏟았다.) 오로지 대업을 완수하는 것만이 내가 평생을 생각했던 유일한 관심사였다.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을 만난 윈스턴 처칠의 부관들은 스탈린에 대해 “지금까지 만나본 중 가장 철두철미하고 명석한 지도자”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나폴레옹 최근 아랍권의 가장 큰 문제는 본인은 물론이고 부인이나 아들, 측근들이 부패한 경우가 많다는 것인데 후세인 당신도 자식 간수에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 아닌가.   후세인 독재자는 외로운 존재다. 누군가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았으면, 언젠가 자신도 똑같은 일을 당하지 말란 보장이 없다. 결국에 믿을 사람은 가족 밖에 없다. 그런데 가족은 통제가 불가능하다. 각자 욕심을 부리게 마련이고, 절대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대부분 용서 받는다. (후세인의 큰아들 우다이는 공식 행사에서 사람을 총으로 쏘아 죽이거나 싸움을 벌이는 등 난폭했다. 정신박약아라는 설도 있다.) 튀니지의 벤 알리, 이집트의 무바라크, 리비아 카다피 모두 가족이 문제였고 자식한테 권좌를 물려주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 결국 ‘부패’의 진정한 원인은 독재자의 개인적인 성향보다는 독재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1인 중심적인 체제에서 찾아야 한다.   마오 아무리 독재라도 권력은 최소한의 시스템이라도 갖추고, 그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 권력을 사유화하고 개인적으로 대놓고 이용하기 시작하면 그게 부패한 거다. 난 솔직히 주지육림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방탕한 생활을 즐기기도 했지만, 최소한의 기구를 갖고 있었고 그걸 이용해서 모든 것을 움직였다. (그의 문화혁명을 앞장서서 주도했던 홍위병은 결국 스스로 부패하고 갈라져 사라져갔다.) 간단히 말해서 사회를 바꾸기 위한 목표를 갖고 조직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지 개인이 가진 것을 오로지 지키려는 목적으로 조직을 운영한다면 그건 독재자 중에서도 가장 저질이라고 생각한다. 카다피나 북한의 김일성, 저기 앉아있는 후세인이 대표적인 인간들이다.  <디저트>당신의 사랑은 진짜였나   →나폴레옹 곧 무너질 것 같았던 카다피가 계속 버티고 있다. 심지어 쟈스민 혁명이 곧 사그라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쟈스민 혁명은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나.   히틀러 국민을 장악하는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내가 연설을 통해 국민을 사로잡았다면 카다피한테는 TV로 보여지는 강력한 모습과 반미 감정몰이가 결정적인 힘을 줬다. 그런데 최근 유행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그걸 뛰어넘을 수 있다. 결국엔 모든 것이 정보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왜 저렇게 폐쇄정책을 고집하겠나. 밖에서 국민들이 정보를 얻기 시작하면 바깥세상이 더 낫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면 지금까지 주장해 온 모든 것들이 허사가 된다. 결국 정보가 공개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럴듯한 꼬임이나 세뇌만으로 할 수 있던 독재의 시대가 끝났다. 결국 총과 칼을 통한 억압만이 가능하다는 얘기인데, 이번에 혁명이 실패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나중에 또다시 내란이 일어나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한번 떨쳐 일어났던 기억은 생각보다 오래가는 법이다.   마오 그래도 중국은 꽤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리비아가 여러 개의 부족이라서 마지막 한 고비를 넘을 원동력이 부족한 것처럼 중국 역시 민족이 다양하고 워낙 지역도 넓기 때문에 하나로 모으는 추진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중국은 아직 폭발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국민들이 뭔가를 추가적으로 기대할 여지가 남았다는 얘기다. 특히 연안지역만 개방해서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도록 하고 조금씩 열어가면서 개방과 통제라는 두가지 토끼를 모두 잡았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반면 북한 같은 경우에는 특정지역만 열고 통제하는 게 불가능하다. 결국에 경제적 몰락을 극복하기 위해 체제붕괴를 피하기 힘들다.   후세인 내가 보기엔 미국이 얼마나 나서느냐가 관건이다. 군사적, 외교적으로 영향력이 절대적이니 말이다. 여기 있는 네 사람 모두 미국과는 좋은 감정이 아니겠지만, 내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솔직히 대량 살상무기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달아서 억지로 쫓아낸 것 아니냐. 이번에도 이집트에는 개입 안하고, 리비아에만 개입하려고 꼼수를 쓰는 모습이라니…. 결국 다른 나라의 민주화를 자기 입맛대로 골라서 이용하겠다는 것 밖에는 안된다. 민주화니 어쩌니 떠들지만 실제로 국제사회를 독재하고 있는 건 미국이다.   →나폴레옹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다. 철저하게 자기자신의 논리로 무장한 당신들에게 물어보나 마나겠지만, 당신들은 정말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나.   스탈린 1994년 김일성이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던 평양 시민들을 기억하나. 그 원조가 바로 나다. 내 시신을 보겠다고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수백명이 깔려 죽었다. (영하의 날씨였지만 방부처리된 시신을 보기 위해 몰려든 조문객의 일부가 바리케이드에 부딪히거나 밟혀서 목숨을 잃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마오 내가 죽은 후 숱한 변화 속에서도 난 중국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존재다. 톈안먼 광장에 걸려있는 내 초상화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마오가 죽은 1976년 그의 문화혁명으로 쌓인 불만이 폭발한 톈안먼 사건이 일어났다. 1981년 그의 후계자 덩샤오핑은 마오의 문화혁명을 ‘내란’으로 규정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도움말 주신 분들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 김한지 한국외대 중동연구소 책임연구원 최 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 소장 류한수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장대익 동덕여대 교양학부 교수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 인물사진의 거장이 돌아왔다

    인물사진의 거장이 돌아왔다

    유명인 인물 사진의 대가 유섭 카쉬(1908~2002)의 작품이 돌아왔다. 2009년 한 차례 전시돼 개막 한달여 만에 10만 관객을 끌어모았던 전시다. 이번에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리는 ‘인물사진의 거장 카쉬’전은 몇 가지 다른 포인트를 잡았다. 우선 캐나다의 유섭 카쉬재단의 후원을 이끌어냈다. 덕분에 디지털프린팅이 아니라 카쉬가 직접 찍고 인화한 오리지널 필름이 전시된다. 또 지난번 전시가 워낙에 잘 알려졌던 작품들 위주로 선정됐다면, 이번 전시에는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들을 대거 선보인다. 모두 100여점이 전시되는데 이 가운데 80%가 새로운 작품이다. 넬슨 만델라, 크리스티앙 디오르, 엘리자베스 테일러, 앤디 워홀, 무하마드 알리, 샤갈 등이 새로 공개된다. 가령, 1941년 라이프지 표지에 실려 카쉬를 세계적인 작가로 떠오르게 했던 윈스턴 처칠 사진의 경우 이제까지 알려진 것은 시가(cigar)를 빼앗겨서 불퉁하니 고집스러운 얼굴이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는 그 뒤 처칠이 웃으며 말하는 사진도 공개된다. 2차대전의 영웅이라는 점 때문에 세계적으로는 불퉁한 사진이 널리 알려졌으나, 정작 처칠 가족들은 웃는 얼굴 사진을 더 좋아한다고 한다. 또 동갑내기 배우로 미모와 우아함을 두고 한판 대결을 벌였던 그레이스 켈리와 오드리 헵번 사진도 함께 공개된다. 콘서트 대신 스튜디오 작업에만 집중할 정도로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록 꺼렸던 바흐 전문가이자 피아니스트인 글렌 굴드가 미친 듯 연주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도 이채롭다. 각 인물 사진 밑에는 간단한 설명도 곁들여지기 때문에 사진 찍을 당시의 분위기, 카쉬와 인물 간 사진에 대한 의견 조율 과정 등을 모두 엿볼 수 있다. 여기에다 카쉬가 찍은 ‘손’ 작품들도 함께 전시된다. 카쉬는 손에 인물의 성격과 직업에 따른 애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보고 인물 사진들 못지않고 무척이나 손 사진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5월 22일까지. 6000~9000원. 1544-1681.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시론] 지진과 한일 안보협력/김태우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시론] 지진과 한일 안보협력/김태우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거대한 자연의 힘이 일본열도를 강타하고 있다. 지진과 쓰나미로 생활터전을 잃은 일본인들에게 최악의 원전 사태까지 가세하고 있다. 전 세계가 일본을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선 마당에, 가장 가까운 이웃인 우리 역시 할 수 있는 바를 다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일본이 대재앙을 딛고 일어서기를 손꼽아 기원한다. 하지만 이번의 대재앙은 단순히 큰일을 당한 나라를 돕는다는 인도주의적 차원을 넘어 한·일관계 전반에 걸쳐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가장 먼저 필자의 뇌리를 스쳐간 것은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한·일 양국이 진정한 이웃으로 발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일본을 가해자로 생각하면서 살아왔지만, 이번엔 태평양에서 발생한 쓰나미를 고스란히 막아준 일본열도에 대해 처음으로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꼈을 수 있다. 일본인들에게도 한국을 다시 보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이웃나라를 돕기 위해 정부와 국민이 한 덩어리가 되고 있는 한국을 보면서, 그리고 일본 팬들의 사랑을 받아온 한류스타들이 앞다투어 거금을 쾌척하는 것을 보면서 처음으로 한국을 ‘진정한 이웃’으로 생각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이렇게만 된다면, 적어도 한·일관계에 있어서는 이번 대재앙이 소중한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최근 들어 한·일관계에 미묘한 전기들이 감지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작년부터 일본의 관리들과 언론들은 ‘한·일 안보협력’을 부쩍 강조해 왔다. 금년 1월 10일 베이징에서 미국과 중국의 국방장관들이 만나던 날, 서울에서는 김관진 국방장관과 일본의 기타자와 도시미 방위청 장관이 만나 ‘물품역무상호제공협정’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의 필요성에 대해 협의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동아시아의 안보정세를 보면 일본이 왜 이러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중국의 군사적 부상, 북한의 핵개발과 대남도발, 북·중동맹의 강화 등 시시각각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신냉전 구도를 보면서 일본 역시 ‘한·미·일’이라는 삼각 협력구도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삼국협력을 끌어내려는 미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일 간에는 깊은 감정의 골이 존재한다. 일본은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여 한국인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으며, 과거청산에 대해서도 미온적이다. 일본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배상한 적이 없으며, 일본의 교과서들은 여전히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있다. 2차대전을 통해 저지른 침략과 유대인 학살에 대해 철저하게 용서를 빌고 국가차원에서 배상해온 독일에 비하면 일본정부의 자세는 파렴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욕심일지 모르지만, 이번의 대재앙을 계기로 이런 일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를 소중한 이웃으로 인정한다면 일본도 과거사 문제에 대해 새로운 발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의 육지 영유권을 깨끗이 인정하고 수산자원과 해저자원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독도문제를 풀어갈 수는 없을까. 양국 사이의 바다를 중립적인 창해(滄海)로 개칭하고 해군협력의 터전으로 삼을 수는 없을까. 물론, 중국과 우호적 공존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한국에 있어 일본과 안보협력을 강화하는 것은 무척 부담스러운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이 원하는 대로만 하는 것이 바람직한 대중관계를 담보하는 길은 아닐 터이다. 지금은 북한이 도발을 저지를수록 더 많은 안보비용을 지불하게 된다는 점을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할 때이다. 중국에도 도발자를 두둔하는 것이 결코 자국에 유리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때이다. 지금이야말로 한·일 두 나라가 ‘소중한 이웃’ 관계로의 발전을 넘어 안보협력의 장을 열어갈 최상의 기회인지도 모른다.
  • 일본에 띄우는 편지-소설가 현길언

    일본에 띄우는 편지-소설가 현길언

    삶의 자양을 무진장으로 제공해주던 텃밭인 바다에 여러분은 인생을 맡기고 더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오면서 작은 행복에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사랑했던 바다가 어느 날 아무런 은원(恩怨)도 없는 여러분을 향해 거친 몸짓으로 밀려와 가족과 친구를 빼앗아 갔고, 열심히 일해서 마련해놓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망가뜨려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가사의한 일은 여러분 탓은 아닙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논리 이전의 문제입니다. 엄청난 재난을 당하고 절망하는 여러분, 재난이 여러분 탓이 아니기에 우리는 더욱 아픈 마음으로 여러분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그 옛날 중동에 ‘욥’이라는 선한 사람도 갑자기 가족과 재산을 잃고 질병의 고통과 친구의 정죄(定罪) 앞에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이겼을 때에 신은 그에게 더 많은 것으로 채워 내려주었습니다. 여러분의 내일은 욥처럼 더 풍성한 것으로 채워져서 잃어버렸던 것보다 더 좋고 귀한 삶을 살아갈 것임을 지구 가족들은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강인한 생명력은 여러분의 불행을 이기게 할 것입니다. 그 엄청난 혼돈의 상황에서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과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상황에 순응하면서도 극복하려는 여러분의 강한 의지를 보았습니다. 성난 검은 해일이 땅을 휩쓸어 갈 때에 나뭇잎처럼 떠내려가는 뱃전을 부여잡고 사투하는 사람들의 안간힘, 고립된 집 안에서 위기의 상황을 세상에 알리는 하얀 깃발, 수십 시간 진흙 속에 묻혀 있던 노인의 생환, 그것들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생존의 엄숙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생명력은 이제 고통받는 여러분에게 회복의 에너지가 되어 폐허를 딛고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어가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지구 가족들은 여러분의 절망과 아픔을 같이하며 사랑과 헌신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국가와 국가 간의 경쟁과 이해에 얽힌 대립을 극복하고 지구 가족으로서 공동운명을 절감하여 여러분의 회복을 위해 함께 일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분쟁과 경쟁의 세계 질서를 뛰어넘어 화해와 협력의 새 질서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이것도 지진과 해일로 인한 여러분의 고통에 상응하는 귀한 선물입니다. 슬픔과 고통을 서로 나눠 가질 때 더 빨리 회복될 수 있음을 모두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망연자실한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새로운 역사를 열어갈 여러분의 몸부림에 우리 모두는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것처럼 아름답고 장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가족 친지의 생사를 모르고 배고픔에 허덕이고 언제 불행의 덫이 닥칠지 모르는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질서를 지키는 여러분의 의연한 모습에서 우리는 안정된 사회를 배울 수 있었고, 위기에 대처하는 지혜로운 모습도 대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이것도 이번 재난이 세계인들에게 던져 주는 중요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더구나 여러분은 혼란의 와중에서도 살아남은 자로서의 감사와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심금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제 세계가 여러분들에게 사랑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픔과 고통이 모든 지구 가족의 그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2차대전의 폐허 위에 새로운 경제 대국과 진정한 민주국가를 건설한 여러분의 저력이 이번 사태에도 유감없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저력이 이제 여러분의 회복을 앞당기게 될 것입니다. 이번 재난은 여러분의 탓이 아닙니다. 그러니 힘을 내십시오. 세계가 여러분에게 이웃으로서의 사랑과 협력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세계인들은 여러분의 비극적 정황 앞에서 문득 지구 가족으로서의 강한 동류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회복되는 날, 여러분의 이야기는 절망을 극복하는 교과서가 될 것입니다. 힘을 내십시오.
  • [이춘규 논설위원 도쿄 리포트] 너도나도 사재기… 자제하던 그들의 눈빛이 변했다

    세계 3위의 경제대국 일본이 추락이냐, 반전이냐 하는 기로에 서 있음을 이곳 도쿄에 와서 지켜보고 있다. 3·11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피해는 열도에 궤멸적인 타격을 가했다. 대지진 여파로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방사능이 잇달아 누출, 수도 도쿄까지 위협하며 마스크 품귀 현상을 빚을 정도로 방사능 공포까지 덮쳐 왔다. 억제된 불안과 공포의 눈빛들을 보게 된다. 간 나오토 일본 총리 등은 대지진·방사능 유출을 2차대전 이후 가장 큰 국난이라고 탄식하고 있지만 대재앙을 헤쳐 나갈 지도력을 의심받고 있다. 거대 지진에 방사능 유출 공포까지 겹치자 정치권 전체가 통제력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다고 아사히·요미우리 신문 등 현지 언론들은 탄식한다. 문제는 일본이 변혁을 이뤄내지 못하면 추락할 수 있는 전환점에 서 있다는 데 있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근대화를 추진, 늦었지만 당당하게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 메이지유신 주역들은 한반도 등 식민지를 개척했고, 태평양전쟁을 도발해 결국 패전국이 된다. 그러나 일본 사회 주류는 변하지 않았다. 승전국 미국이 공산권 견제 전략에 따라 이들에게 의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1960년대 경제 부흥을 이끌었고, 1980년대에는 미국을 위협하는 수준의 경제를 일궈 냈지만 흥청망청은 오래가지 못했다. 풍선이 터지는 것처럼 1990년 이후 일본 경제의 거품은 꺼졌다. 잃어버린 10년의 시작이다.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 등 자민당 총재들이 단명 총리로 마감했다. 마침내 2009년 9월에는 54년 만에 자민당 정권이 무너지고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의 민주당이 집권했다. 하지만 하토야마도 11개월로 단명하고, 뒤이은 간 정권도 취임 9개월인데 지지율 10%대에서 헤매고 있다. 이 상황에서 재앙이 몰아치며 정치권이 허둥대자 일본 국민들은 등을 돌리고 있다. 정치권에 대한 믿음을 접었다. 대참사에 갈팡질팡하자 일본인들은 ‘우리’보다 ‘나’를 찾기 시작했음을 실감한다. 나부터 살기 위해 컵라면, 생수, 응급약품을 사들이며 상품이 순식간에 동나고 있다. 일본 역사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기이한 현상이다. 도쿄 도심 여기저기 편의점 생필품 진열대는 놀랍게 텅 비어 있어 을씨년스럽다.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다. 은근하고 조심스럽던 사재기를 눈치 볼 것 없이 하고 있다. 매점매석도 성행한다. 불신받는 정부가 자제를 부탁해도 안 통한다. 내재된 야만성이 분출하는 기세다. 도쿄 주변과 도호쿠 지방에서 쉴 틈 없이 이어지는 강력한 여진은 공포심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일본이 다시 혼란에 빠져 새로운 주도 세력을 만들어 낼지, 아니면 지진과 방사능 공포를 잘 수습해 점진적인 개혁을 이뤄 낼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한·일 관계도 변곡점을 맞고 있음을 확인한다. 따라서 단순하게 현재 진행 중인 지진·방사능 유출 사태만을 보면 안 된다. 일본 정치권, 사회 전체의 거대한 소용돌이를 주시해야 한다. 도쿄에서 지인들을 만나며, 출퇴근길 시민들의 표정에서, 언론을 통해 변화의 에너지가 임계점임을 감지한다. 수년 전과는 완연하게 달라진 일본, 일본 사람이 왠지 낯설다. 전환시대 일본이 140년 만에 격동에 휩싸이면 한·일 관계도 영향받는다. 대재앙 이후 일본의 변화를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지켜봐야 한다. 일본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응하는 외교 전략을 기대한다. 수면 위보다 물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본의 근본적인, 거대한 변화의 에너지를 추적하자. taein@seoul.co.kr
  • 李대통령 “원자력 사고대비 훈련강화”

    李대통령 “원자력 사고대비 훈련강화”

    “일본의 재난시스템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15일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 있는 행정안전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찾아 이렇게 지시했다. 2박 4일간의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순방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다. 오후 1시쯤 서울공항에 도착한 이 대통령은 일본 원전 폭발 및 국내 파급·영향 전망 등에 대해 맹형규 행안부 장관과 임태희 대통령실장, 정진석 청와대 정무수석의 보고를 받았다. 이어 이 대통령은 청와대로 가서 민방위복으로 갈아입은 뒤 오후 1시 55분쯤 재난안전대책본부를 찾았다. 마침 민방위의날이라 이 대통령은 이기환 소방방재청 차장 등으로부터 훈련상황을 보고받았다. 이 대통령은 또 월성 원자력발전소 이용태 본부장과 통화하면서 “원자력 안전(사고)에 대비한 훈련을 강화해야 한다.”면서 “불안감을 느끼지 않도록 우리 원전이 안전한 것을 국민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본이 수십년 동안 반복 훈련한 덕에 아주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다. 방송에서 보니 한 공직자가 쓰나미가 오는데도 물에 빠져가며 최선을 다해 (대피) 방송을 계속하는 모습을 보았다.”면서 “일본의 언론과 방송하는 것을 보니 그게 일본의 품격을 높여주고 이런 것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또 “2차대전 당시 영국이 공습받을 때 방공호로 대피하는데 여자와 노약자들을 앞세우고 줄서서 대피했다고 한다.”면서 “이번에 일본이 그런 것을 보여줬다. 우리도 이런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울릉도서 독도 안 보인다고?… 日 영유권 주장 치명적 오류”

    “울릉도서 독도 안 보인다고?… 日 영유권 주장 치명적 오류”

    지난 22일은 일본 시마네현이 선포한 ‘다케시마의 날’이다. 같은 날 동북아역사재단은 책 한권을 내놨다. 제목은 ‘독도! 울릉도에서는 보인다’. 생뚱하다 못해 썰렁하다. 당연한 얘기 아닌가. 그런데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다. ‘독도 박사’ 홍성근(43)씨의 얘기다. 일본이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학문적 근거가 바로 ‘울릉도에서는 독도가 안 보인다.’였다는 설명이다. 1966년 일본 외무 관료 가와카미 겐조가 ‘독도의 역사 지리학적 연구’라는 책에 이 같은 주장을 처음 실었다. 그래도 선뜻 고개를 주억거릴 수 없다. 국가 영토를 논하면서 ‘보이고 안 보이고’를 논거로 삼는다는 게 너무 ‘단세포적인’ 접근으로 느껴져서였다. 그래서 3·1절을 앞두고 ‘독도 박사’를 찾아갔다. 그는 동북아역사재단 독도 연구소 팀장이다. 법학을 전공한 진짜 박사이자, 재단이 펴낸 ‘독도! 울릉도에서는’의 대표 저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터뷰 과정에서 뜻밖의 사실을 알아냈다. 한국전쟁 뒤 일본 해상자위대와 총격전까지 벌였던 홍순칠(1986년 작고) 독도 의용수비대장이 홍 박사의 큰아버지인 것이다. “딱히 언론에 대고 떠들 내용이 아니어서…”라며 홍 박사는 멋쩍게 웃었다. 가족사는 잠시 제쳐 두고 독도부터 물었다.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이고 안 보이고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웃음) 매우 중요하다. 국제법상 섬의 소유권을 논할 때 그 섬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느냐가 1차 관문이기 때문이다. 자국 영토에서 섬이 보이지도 않는데 (섬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면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겠는가. →실제 사례가 있나. -물론이다. 1928년 필리핀 군도에 포함된 팔마스 섬을 두고 미국과 네덜란드가 국제재판에서 맞붙었다. 이 재판에서 ‘국제법상 발견’은 ‘점유 취득에 관한 어떤 행위, 심지어 상징적 행위조차 없이 육지를 보았다는 단순한 사실’이라 규정됐다. 따라서 울릉도 주민들이 독도를 ‘보았다’는 것 자체가 국제법상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권리 주장의 출발점이다. →1966년 일본 관료 가와카미가 울릉도에서는 독도가 안 보인다는 주장을 내놓은 것도 그래서인가. -맞다. 가와카미는 1947년 시작된 미·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협상 과정에 참여해 독도 부문을 담당했던 외무성 관료였다. 일본에서는 가와카미의 연구가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주장의) 바이블처럼 통한다. →가와카미는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이는지 직접 조사했나. -기록상으로는 1952년 독도에 한번 다녀간 것으로 돼 있다. 물론 가와카미도 독도가 아예 안 보인다고 단정 짓진 않았다. 울릉도 해변에서 배를 타고 나가, 그러니까 해발 4m 위치에서 독도를 바라다본 결과를 수학적으로 계산해보니 독도가 안 보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실제 관측해 보니 어떻던가. -물론 잘 보인다. 하하. 2008년 7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1년 6개월 동안 울릉도에서 독도를 관측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생활 근거지에서 (독도가) 잘 보이느냐이다. 울릉도 주민들이 모여 사는 해발 150m 지점에서는 독도가 아주 잘 보인다. 그런데 가와카미는 울릉도 높은 곳에 올라가면 숲 때문에 독도가 잘 안 보인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가와카미) 주장의 치명적 오류가 있다. →이왕 얘기 나온 김에 울릉도에서 독도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포인트’ 좀 짚어 달라. 1년에 울릉도를 찾는 관광객만 10만명이다. -아쉽게도 기상청에서 1년 6개월의 관측 기간으로는 법칙화하기 어렵다고 하더라. 다만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애써 명당을 찾으려 말고 그냥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 보는 게 독도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비결이라는 거다. →국제법적 측면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어떻게 봐야 하나. 이 조약에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내용이 빠진 것을 두고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사학과)는 미국 외교관 윌리엄 시볼드(1901~1980)를 배후 인물로 지목하기도 했다. -확답하긴 어렵지만 그런 부분이 있다. 시볼드의 자서전을 검토해봤는데, 일본은 처벌을 기다려야 하는 패전국 처지임에도 정치인이나 고위 정부 관료들이 수시로 시볼드 집을 드나들면서 전후(戰後) 처리 문제를 논의했더라. 심지어 요시다 시게루(1878~1967·전후 총리대신을 지낸 보수 정치인) 총리가 연합군 앞에서 연설할 때 영문 초안을 잡아주고 교정해 준 인물도 시볼드다. 그 정도로 친일파였던 셈이다. →독도 교과서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정부가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표기하라는 내용의 교과서 제작 지침을 내려보낸 뒤 그 지침이 처음 적용되는 해가 올해다. 이 지침을 따른 중학 교과서가 나올 확률이 어느 정도라고 보나. -거의 100%라고 보면 된다. 궁극적으로 일본은 남쿠릴열도(일본은 ‘북방 4개섬’이라 표현) 수준으로 독도 문제를 끌어올리고 싶어 한다. 일본이 독도보다 더 신경 쓰는 게 남쿠릴열도다. 2차대전에 참전한 옛 소련에 억울하게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부 아래 특수법인 형태로 북방영토대책협의회가 구성되어 있고 그 밑에 북방영토현민위원회가 있다. 전국적 조직이 있는 셈이다. 이 잘 만들어진 고속도로 위에 독도 문제를 올리고 싶어 한다.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내건 목적도 결국 여기에 있다고 보인다. →툭하면 독도 문제가 터지는데도 뚜렷한 해결책이 없어 보인다. -그러니까 남쿠릴열도와 독도 문제는 다르다는 점을 일본 사회에 우선 부각시켜야 한다. 남쿠릴열도는 제국주의 열강끼리의 문제였고, 독도는 식민 지배국과 피식민국 간의 문제라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이 부분을 강조해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17세기에 일본은 논리 싸움에서 밀리자 울릉도를 과감히 포기했다. 나중에 말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독도도 근거를 갖고 싸우는 게 중요하다. 깨끗하게 정리되면 한·일 관계가 더 좋아질 수 있다. →큰아버지 얘기도 해 보자. -(손사래를 치며) 사적인 얘기는 하지 말자. 괜한 오해나 부담을 살 수 있다. 다만, 외모나 글솜씨가 무척 뛰어난 분이었다. 한마디로 굉장한 멋쟁이셨다. →독도 연구자가 된 것도 큰아버지 영향을 받은 것인가. -그런 셈이다. 중학교 때까지 울릉도에서 살았고 군 복무도 울릉도에서 했다. 원래 대학(한국외대 법대) 갈 때만 해도 그렇게까지 (독도를) 의식하진 않았다. 그런데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이왕이면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 싶어 독도의 국제법적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왜 독도가 이렇게 국제법적으로 이슈가 되는지 학문적으로 규명해 보고 싶었다. →독도 연구에 고향 덕도 봤다던데. -하하. 울릉도에서 독도가 잘 보이는지 관측하면서 고향 친구(최희창) 신세를 많이 졌다. 울릉산악회장이기도 한 그 친구는 울릉도 지형지물을 손바닥처럼 파악한다. ‘울릉도-독도-태양’이 일직선상에 놓이면서 가장 아름다운 일출을 선보이는 때가 2월 초와 11월 초라는 사실도 그 친구 덕분에 확인한 것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영화프리뷰] ‘언노운’

    [영화프리뷰] ‘언노운’

    학회 참석을 위해 아내(재뉴어리 존스)와 함께 독일 베를린에 온 식물학자 마틴 해리스(리암 니슨) 박사는 호텔에 도착하고 나서야 공항에 여권이 든 서류가방을 놓고 온 사실을 알아챈다. 서둘러 공항으로 돌아가던 길. 그가 탄 택시는 의문의 교통사고로 강물에 처박힌다. 택시기사(다이앤 크루거)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는 72시간 만에 의식을 되찾아 호텔로 찾아간다. 하지만 웬걸, 사랑하던 아내는 그를 모르는 사람 취급한다. 설상가상 아내의 곁에는 처음 보는 남자(에이든 퀸)가 남편 행세를 하고 있다. 주변에서는 슬슬 그를 미친 사람으로 내몬다. 극도로 혼란스러운 순간, 괴한들이 그의 목숨을 노린다. 영화 ‘언노운’(Unknown)은 이름과 직업은 물론, 아내에게까지 존재를 부정당한 남자가 벌이는 사투를 담고 있다. 샌드라 불럭의 ‘네트’(1995)를 비롯해 할리우드가 ‘골백번’은 우려먹은 설정이지만 이 영화가 차별성을 갖는 지점이 두 가지 있다. 우선 ‘테이큰’(2008)으로 늦깎이 액션 본능을 뿜어낸 영국의 연기파 배우 리암 니슨 덕에 비슷한 소재의 영화와는 다른 재미를 가진다. 니슨은 ‘테이큰’에서 인신매매단에 납치된 딸을 구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전직 CIA 요원을 맡았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특수효과에 기대지 않은 맨몸 액션을 뽐냈다. 두들겨 맞기도 하지만, 여전히 몇명 정도는 거뜬하게 제압한다. 마치 20~30살쯤 더 먹은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맷 데이먼)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환갑을 앞둔 니슨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돋보이는 역할들은 20세기 초반 영국에 맞선 아일랜드의 영웅 콜린스(‘마이클 콜린스’)나 2차대전 당시 1000여명의 유대인을 구해낸 오스카 쉰들러(‘쉰들러 리스트’)처럼 선 굵은 역사적 인물이다. 하지만 ‘스타워즈 에피소드 2-클론의 습격’ 같은 블록버스터나 ‘러브액추얼리’ 등 멜로까지 그의 연기 스펙트럼은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다. ‘언노운’의 또 다른 매력은 요즘 할리우드에서 보기 드문 억지스럽지 않은 반전이다. 워너브러더스 측은 스포일러 유출을 막기 위해 전 세계 주요 국가의 동시개봉을 결정했다. 물론 액션만 놓고 보면 ‘테이큰’에 못 미친다. 하지만 정체를 뒤늦게 깨달은 니슨은 짧지만 굵직한 맨몸 액션의 정석을 보여준다. ‘오펀:천사의 비밀’로 가능성을 보인 하우메 콜레트 세라 감독의 연출 솜씨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17일 개봉. 113분. 15세 관람가.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서울신문 신년특집] 뉴패러다임! 뉴에이지! 뉴스타트!

    [서울신문 신년특집] 뉴패러다임! 뉴에이지! 뉴스타트!

    10년 전 오늘, 사람들은 환호했고 노래했다. 발전과 진보의 21세기에 대한 들뜬 희망이었다. 새로운 10년을 출발하는 지금, 사람들은 다시 꿈을 꾼다. 지난 10년이 준 교훈과 아픔을 밑천 삼아 인류가 나아갈 진정한 길을 찾으려 한다. 지난 세기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절정으로 시작했다. 2001년 1월 20일 취임한 조지 부시 대통령은 미국을 초월해 세계의 집정관을 자처했다. 소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중국은 숨죽이고 있었다. 부시로 대변되는 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유일 초강대국의 패권과 영광을 향한 미국의 선택이었다. 냉전의 시대를 건너온 지난 10년은 이념이 아닌 문명의 충돌로 얼룩졌다. 그 중심에 미국 패권주의가 자리했고, 이슬람 과격파의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오리엔탈(이라크·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은 10년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이어졌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G20(주요 20개국)서울 정상회의에 10년 전의 미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팍스 시니카’를 꿈꾸는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에게 집중되는 세계의 이목을 씁쓸히 지켜보아야 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지난 10년은 국가와 사회의 권력이 쉼 없이 이동하고 분산되고, 기존 철학과 가치의 권위가 허물어진 시기였다.”고 정의하고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전 세계를 연결하며 시공의 경계를 허물어뜨린 광속 네트워크였다.”고 말했다. 새로운 10년은 미국 중심의 1극 체제가 중국과의 양극 또는 다극 체제로 변모하고, 세계 질서를 지배해 온 신자유·신보수의 조류가 큰 틀의 변화를 맞으면서 시작됐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새로운 10년은 기존 가치들의 절대성이 부인되고 새로운 가치로 옮겨가는 ‘이행(移行)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차대전 후 1950~60년대를 풍미했던 서구 복지사회 체제가 70년대에 위기를 맞은 뒤 80년대에 와서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으로 정착된 것처럼 지금의 혼돈이 바로 다음 단계의 해답으로 연결되지는 않을 것이며, 해답을 찾기 위한 불투명한 시간이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李대통령 9일 ‘발리민주주의 포럼’ 공동주재

    이명박 대통령이 8일 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방문을 위해 출국했다. 이 대통령은 9일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초청으로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제3차 발리민주주의포럼’을 유도요노 대통령과 공동 주재한다. 발리민주주의포럼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의 민주주의 모범 관행과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2008년 12월 유도요노 대통령 주도로 창설된 고위급 지역 협력 포럼이다. 이 대통령은 포럼 기조연설에서 세계 제2차대전 이후 신생국 가운데 유일하게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달성한 우리나라의 경험을 소개할 예정이다. 이 대통령은 또 유도요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통해 방위산업과 원자력 사업 분야에서 우리 기업의 진출과 서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이후 국제무대에서의 협력 방안에 대해 협의한다. 이어 이 대통령은 9일 밤 올해 수교 50주년을 맞는 말레이시아를 국빈 방문한다. 이 대통령은 10일 나집 툰 라작 총리, 술탄 미잔 자이날 아비딘 국왕과 각각 면담과 만찬을 갖고 무역 및 투자, 과학·기술, 문화 등 사회 각 분야 협력 증진 방안에 대해 협의한 뒤 11일 새벽 귀국한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영화단신]

    ●한국영상자료원이 충무로를 대표하는 이야기꾼의 작품을 모아 상영한다. 31일까지 한국 영화 VOD사이트(www.kmdb.or.kr)를 통해 ‘시나리오 작가전’을 연다. ‘뽕’ ‘돌아이’ 등을 통해 멜로, 액션, 사극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200여 편의 각본을 쓴 윤삼육 작가와 ‘만다라’, ‘길소뜸’ 등에서 임권택 감독과 환상적인 궁합을 맞춘 송길한 작가가 주인공이다. 모두 7편이 상영된다. 무료. ●서부극의 거장이자 고전 미국영화를 대표하는 존 포드(1894~1973) 감독 걸작선이 다음 달 5일까지 서울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초기 유성영화 스타일을 볼 수 있는 블랙 코미디 ‘굽이도는 증기선’(1935)을 비롯해 무성영화 시절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인 ‘철마’(1924), 서부극의 원형이 살아 있는 ‘모호크족의 북소리’(1939), 존 스타인벡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분노의 포도’(1940), 2차대전 종전 직후 만든 ‘황야의 결투’(1946), 전통과 현대의 충돌,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을 담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 등이 상영된다.
  • 2차대전 수류탄 갖고 등교한 12살 학생 ‘충격’

    2차대전 수류탄 갖고 등교한 12살 학생 ‘충격’

    폴란드에서 한 학생이 수류탄을 갖고 등교, 학교가 발칵 뒤집히는 소동이 났다. 폴란드 남서부 브로츠와프에서 지난 9일(현지시간) 벌어진 일이다. 12살 학생이 수류탄을 갖고 등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교생 400명이 긴급 대피했다. 출동한 경찰은 학교 건물을 완전히 비운 후 조심스럽게 수류탄을 수습했다. 이렇게 큰 소동이 난 건 문제의 수류탄이 2차 대전 때의 것이었기 때문. 최소한 65년 된 수류탄이라 자칫 폭발사고의 위험이 컸다. 학생은 어떻게 골동품 수류탄을 갖고 있었을까. 경찰에 따르면 학생은 학교 인근의 한 숲에서 우연히 수류탄을 발견했다. 알 수 없는 영웅심(?)이 발동한 학생은 친구들에게 보여주려 수류탄을 갖고 등교했다. 현지 언론은 “세계 2차대전이 끝난 지 65년이 됐지만 아직까지 종종 당시의 폭탄이 발견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해외통신원 손영식 voni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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