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2차대전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 주파수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 이인제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 행운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 2027년 도입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3,134
  • 사병서 군총참모장 된 입지전적 인물/방한 라빈 이스라엘총리

    ◎76년 신화적 「엔테베작전」 성공 이끌어 14일 방한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총리는 지난 48년 여단장으로 1차 중동전을 치른 이래 참모차장 군총참모장등 군요직을 두루 거친 군출신 정치인.사병출신으로 군총참모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최근 아랍계와 반환협상중인 요르단강 서안,골란고원,가자지구,동예루살렘등은 모두 라빈총리가 군총참모장 재직시인 64∼68년 사이에 확보한 영토들.주미대사(68∼73년)를 거쳐 73년 현재의 페레스외무장관과의 경합을 통해 한차례 총리를 역임한 바 있다.페레스외무장관과는 지금까지 3번의 총리경합을 벌였던 정치적 라이벌관계로 84년에는 페레스에게 총리자리를 넘겨주었다가 92년 경합에서 다시 되찾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첫 총리재임때인 76년 당시 페레스국방장관과 함께 우간다로 납치된 프랑스항공 여객기에 대해 「엔테베작전」을 성공시킨 주인공이다. 부모가 모두 러시아태생에 독실한 유태교신자였으며 특히 여성의 몸으로 유태인 군대조직인 「하가나」의 최초 사령관으로 활동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전해진다. 다소 수줍어하고 내향적인 성격이나 『평화는 지킬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얻어지는 것』이라는 평화론을 제시,국제무대에서는 현실주의자로 통한다.지난해 팔레스타인측과 평화협정을 이끌어내 올해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40년 카두리 농업학교를 수석졸업,미국에 유학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나 2차대전중이던 당시 고국을 떠날수 없다면서 유태인 군사조직인 팔마치에 뛰어들어 자신의 진로를 굳혔다.
  • 동독군의 「백기통합」(통독 4년의 명암:3)

    ◎동톡무기 미그29만 남았다/동·서독군 같은 비율 감축… 동독군 6만/전비밀기관 밀고자 15% 가려내 예편 독일통일은 동서독간 대등한 통일협정 체결이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정치 경제 모든 면에서 서독에 의한 동독의 일방적 흡수통합이었다.이같은 사실은 시간이 흐르고 통일작업이 하나씩 추진돼가면서 더욱 분명해졌다.더욱이 동서독 군대의 통합과정을 보면 마치 동독이 서독에 「무조건 항복」을 한듯한 인상마저 받게된다. 통일직후 동독지역에 최고사령관으로 파견돼 동독군의 「민주시민군으로의 전환작업」을 완료한뒤 지난 10월 예편한 베르너 폰 셰벤장군(육군 중장)을 포츠담근교의 자택에서 만났다.2차대전후 포츠담선언으로 유명한 포츠담은 서베를린과 인접한 구동독지역으로 셰벤장군의 고향이었다. 『남북한 군대처럼 강하지는 않지만 동서독군 사이에도 적대감정이 있는게 사실이고 또 공산주의 사상교육의 영향도 있고해서 동독군의 강한 반발등 부작용을 예상했으나 의외로 평온하게 통합작업이 이뤄졌습니다』 물론 탈냉전시대라서 긴장관계가 심각하지는 않았다 치더라도 반세기 가까이 서방측 NATO(북대서양조약기구)군과 공산권 바르샤바조약기구군으로 대치해온 동서독군의 통합이 그의 말대로 그렇게 순조롭기만 했을까?셰벤장군의 2년에 걸친 동독군의 「서독군 편입」과정 설명을 듣고는 그같은 의문은 사라졌다.통합과정은 동독군의 해체절차로 진행됐지만 병력감축등이 양측에 비슷한 비율로 이뤄졌기 때문에 동독측이 반발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현재 통일독일의 병력은 34만명.통일과정에서 전점령군이던 미·영·불·러시아와의 합의에 따른것이다(정원은 37만명). 통일직전 서독군은 약49만,동독군은 약17만명이었다.여기서 절반 가까운 감군이 이뤄진 셈인데 현재의 34만병력의 20%선인 6만여명이 동독군출신이고 28만여명이 서독군출신이다.결국 통일로 서독군 21만,동독군 11만명 가량이 군복을 벗게된 셈이다. 동독군이 의외로 규모가 작았던 것은 동서독 인구(서독 6천3백만,동독 1천7백만명)와 동독지역에 45만의 러시아군이 주둔했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해가 가는 일이다.94년말까지 철수키로 돼있던 러시아군은 일정을 앞당겨 지난8월 완전 철수했고 서베를린에 주둔했던 연합군도 지난9월 철수,독일은 비로소 완전한 독립국이 됐다. 현재 독일군 장비는 군복에서부터 장비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서독군당시의 것들이다.동독군의 「유품」으로는 구소련제인 미그29전투기가 유일한 예외로 현역에 남아있다. 『통일 이틀전 동독의 민선정부는 동독군 소속의 장성 전원을 예편조치했죠.통일후 대령이하 나머지 동독장교 3만2천명 가운데 2만4천명이 서독군에 편입됐는데 또 그중 절반이 90년말 군을 떠났습니다.여러가지 이유로 스스로 떠난 것이죠.그래서 1만2천명의 장교가 남은 셈이죠』 독일정부는 2년근무 조건의 계약을 맺어 이들을 개별적으로 서독군 기성부대에 6∼8주간 배치해 특별훈련을 하면서 성분과 자질검사를 실시했다.그래서 통일독일군으로 살아남게된 동독군출신 장교는 당초의 6분의 1인 5천명.청년층인 사병들은 8만여명이 제대하고 5만5천명이 군에 남았다. 『구동독당시 비밀경찰과 군정보기관의 신상관련 비밀문서를 관장하는 신설조사기관 「가우크」 조회결과 15%의 군인들이 동료를 감시·밀고하는 역할을 했더군요.이들을 찾아내 정리하는 일도 어려웠지만 과거 베일속에 가려 국민을 위압하던 군에서 민주시민군으로 체질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셰벤장군은 또하나의 문제로 다른 공무원이나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동독군출신은 생산성·효율성원칙에 따라 서독출신 동료들보다 20% 적은 봉급을 받고 있다. 예컨대 독일군은 NATO군의 일원이어서 반드시 공용어인 영어를 할줄 알아야 한다.그러나 동독출신은 영어는 모르고 러시아말을 배웠기 때문에 새로 영어교육을 받고 있었으며 이런 것이 모두 비효율로 지적되는 셈이었다.
  • 「모범적 사회주의」의 유산(통독4년의 명암:2)

    ◎동독은 환경오염·빚만 남겼다/통일후 정화시설에 자금 쏟아붓기 바빠/사유화기업 적자보전 1백20조원 투입 동독지역 남부의 작센주 수도 드레스덴은 「엘베강변의 플로렌스」로 불리던 인구 48만명의 아름다운 문화도시.19세기말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된 오페라 하우스(2차대전때 폭격으로 일부 파괴돼 복구)를 비롯,바로크시대의 공예품 전시로 세계적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그뤼네 게뵐베,주정부 청사등 유서깊은 건축물들이 시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줄곧 부슬부슬 비를 뿌리는 독일의 회색빛 겨울날씨까지 겹쳐 드레스덴은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특히 대부분 건물들이 새까만 석탄 그을음에 찌들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공해때문이죠.그을음을 잘 흡수하는 샌드 스톤을 건자재로 쓴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지난 40년간 유황 함유율이 높은 갈탄을 아무런 공기오염 방지시설없이 공장과 주택의 연료로 써온 결과입니다』 드레스덴 토박이라는 50대의 시내관광버스 운전사는 서독지역에 비해 동독지역이 눈에 띄게 검게 찌든 이유를 간단히 설명한다.얘기를 듣고보니 서독쪽 뮌헨이나 프랑크푸르트같이 상업·공업화한 도시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석탄 타는 냄새가 역하게 코를 찔렀다.통일덕에 95년말까지면 모두 청정연료인 도시가스로 전환될 것이란 부연설명이었다. 동독지역도 그랬지만 동구의 모든 사회주의국가들이 재원마련의 어려움과 인식부족으로 환경오염에 무방비상태였다고 한다.연방정부 통계에 따르면 동독은 유황을 많이 함유한 갈탄을 해마다 5백만∼6백만t(서독 1백만t)이나 사용,세계최대의 이산화탄소 방출국으로 꼽혔으며 산업폐수의 95%를 그대로 방류했었다.하수도시설의 60∼70%가 손상돼 있었고 정화된 수돗물을 공급받는 주민은 36%에 불과했다는 집계다. 이 때문에 오는 2000년까지의 통일비용 소요액 추정치 가운데 환경정화시설투자가 2천억 마르크(한화 1백조원)로 동독기업들의 사유화에 따른 적자보전비용 2천5백억 마르크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통일후 연방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동독지역엔 사회간접자본 투자가 급증,도로 항만 주택 등각종 공사가 활기를 띠고 있었다.마치 새로운 개척지모양 곳곳에 타워 크레인의 숲이 형성되는 등 온통 공사장 투성이였다. 드레스덴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공해에 찌든 건물들의 때벗기기 및 보수공사,서독지역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차도 및 인도의 재포장,연립주택 보수등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한국도 통일이 되면 같은 경험을 하게 될텐데 통일후 우리는 동독에 남은 것들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그래도 동유럽의 선두에 있던 나라인데 쓸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국제적인 빚만 남아 있더라구요』 지난11월 평양에 다녀온 바 있는 외무부 동아시아과장 코르넬리우스 좀머박사의 사회주의국가의 실상에 대한 개탄이었다. 통일후 동독기업들의 사유화작업을 맡아온 「트로이한트」(신탁청)의 국제담당국장인 볼프강 베스박사는 한국에서도 같은 문제를 겪게 될 것이라며 사회주의국가의 생산성의 문제점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는 자유시장경제의 생존경쟁원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회사들을 자본주의체제속의 기업으로 재탄생시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사업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생수를 생산하는 국가운영의 대형 콤비나트의 경우를 예로 듭시다.이 회사는 생수뿐 아니라 이를 담는 병도 생산하고 또 병을 만드는 기계까지 제작하고 있었습니다.그뿐이 아니죠.병뚜껑을 만들고 상표를 인쇄하고 거기다 상표를 찍는 인쇄기까지 만들고 하는 식이었으니 경쟁이니,효율성이니 하는 것은 애초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신탁청은 이런 생수회사같은 생산성없는 콤비나트를 해체하는등 동독내 8천5백개의 제조업체와 2만2천개의 서비스회사를 모두 1만4천개로 통폐합하여 매각,사유화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금년말로 문을 닫는 신탁청은 그동안 1만3천9백개의 기업을 매각한 결과(1백개는 미처분) 2천5백억 마르크(한화 1백25조원)의 빚을 남기게 됐다는 것이다.사회주의의 선두주자 동독은 결국 빚투성이의 부도국가였던 셈이다.
  • 베제크리크 천불동/허세욱(서역 문화기행:4)

    ◎화염산기슭 석굴 83개… 6세기 불교유적/위구르족 왕가 사원… 당시 생활상 벽화로 남겨/서유기의 무대… 삼장법사­손오공 등 3제자의 조각상 곳곳에 투루판은 그 동서를 관통하는 국도 312번에 놓여있다.그것은 신강의 최서단인 이닝(이령)에서 황하와 황해가 만나는 최동단의 상하이(상해)까지 장장 5천㎞,어쩌면 미국의 동서를 횡단하는 80번 하이웨이에 상당하다. 투루판에서 312번국도를 타고 동쪽으로 40㎞쯤 달렸을 때,갑자기 그 왼편으로 빨간 바위산을 만나는데 그 형상은 얼핏 한국전쟁당시 철의 삼각지,아이스크림고지를 방불케하는 타원형으로 마치 험상궂도록 쪼글쪼글한 노인의 얼굴 혹은,여름날 여인의 풍덩한 주름 치마같았다.한 포기의 폴도 없이 세로의 주름살은 차라리 빨간 폭포가 쏟아지는 형상이었다. 그것이 바로 화염산의 남쪽 기슭이었다.그 맹렬한 화염의 섭곡을 보자 놀랍고 반가웠다.그 명성을 들은지 너무 오래라서 그렇다.당나라의 고승 현장(602∼664)의 「대당서역기」를 비롯,당나라의 유명한 변새시인 잠참(715∼770)이 이곳에서 벼슬하는 동안 썼던 경화산」,「화산운가송별」등의 명작,그리고 중국4대기서로 꼽히는 오승은(1500?∼1582?)의 「서유기」등에서 익히 화염산,그 「팔백리에 걸친 불길」을 들어 왔었다. ○홍산에 풀한포기 안나 화염산은 「홍산」혹은 「화산」으로 불렸다.그보다 위구르말로는 「쿠즈로다고」즉 홍산이란 뜻이다.그것은 지구상에서 두번째로 넓고 낮은 동서 1백20㎞,남북 60㎞의 투루판분지에 동서 98㎞의 길이에 남북 9㎞의 폭으로 가장 높은 곳이라야 8백32m,평균 높이는 고작 5백m다.하지만 해발 이하의 분지라서 그 높이는 상당했다.연간 강우량이 겨우 16㎜의 초건조지역에 평균 기온이 섭씨38도 최고 기온이 49도나 된다.그래서 암석표면의 온도는 무려 80도를 넘는다.거기다 지층에 매장된 무진장의 석탄과 석탄에서 배출되는 가스로부터 폭발 연소도 적지 않다고 하니 「서유기」에 묘사한 대로 「화두 불길이 천길의 높이」란 형용도 결코 터무니 없는 말이 아니었다. 필자가 화염산을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은 지금부터 1천2백45년전인 기원749년,이곳에 당도했던 잠참의 「화산을 지나며」란 시에 잘 나타났다. 「화산금시견, 돌올포창동. 적염소로운, 염기증색공. 불지음양탄, 하독연차중? 아래엄동시, 산하다염풍. 인마주한류, 열지조화공」 (처음 만난 화염산은, 포창 동녘에 우뚝하여라. 화염은 오랑캐의 구름을 불지르고, 증기는 변방의 하늘을 찜질한다. 음양의 숯이, 어찌 여기서만 훨훨 타오르는가? 엄동설한에도 산밑엔 삼복의 열풍이. 사람도 말도 땀을 뻘뻘 흘리거늘, 누가 알랴? 자연의 조화를) 화염산 섭곡이 끝나는 승금구에서 312번 국도를 작별하고 좌회전하자 이윽고 빨간협곡이 열리면서 차는 화염산 북록을 휘돌았다.그 협곡의 정면에 보이는 둥근 모자모양의 홍산이 피라미드의 형세로 성큼 다가섰다.그것이 화염산의 주봉이었는데 주봉은 충격적 이라기보다 다소곳한 곡선으로 다만 풀 한 포기 없을 뿐 여느 동리앞을 지키는 안산의 크기였다.거기서 삼장의 길이 막히고 손오공이 파초의 부채로 재주를 부렸다는 곳이다. ○아래쪽 설수도 흘러 그 주봉아래로 기원6세기 고창왕국씨때부터 9세기까지 3세기에 걸쳐 위구르족들 왕가의 사원으로 건설한 석굴의 촌락 「베제크리크 천불동」이 있고 천불동아래로는 파란 설수가 콸콸 흐르는 목두구.그리고 천불동 입구 편편한 산기슭엔 최근 「서주천성원」이라는 작은 전시장을 개설 해 놓았다.그 안에는 「서유기」의 주연으로 삼장법사를 비롯,손오공·저팔계등을 조소한 외로도 「팔십일난」을 도해한 동굴,동굴밖 언덕위로는 잠참의 입상과 그의 대표작인 「화산운가송별」을 새긴 시비가 있었다.그 시비에 새겨진 첫 절은 이러했다. 「화산돌올적정구, 화산오월화운후. 수운만산응미개, 비조천리불감래」 화산이 우뚝 적정 어귀에 섰거늘, 오월이라 불꽃 구름 뭉게 뭉게. 불꽃 구름 엉긴 채 풀리지 않거늘, 천리길 나는 새도 얼씬할 수 없네) 필자가 찾은 때는 다행히 쾌청한 9월중순 이어서 인지 불꽃구름커녕 흰구름 한 조각도 보이지 않는 진하디 진한 쪽빛 하늘 뿐이었다.그 쪽빛에 적갈의 산빛,골짜기와 석굴,길가에 굴러가는 돌멩이조차 일색으로 빨갰다. 그런데 그토록 숨 막힌 빨간 모랫벌과협곡에도 서원의 의지는 굴을 파고 예술의 꽃을 피웠었다.바로 베제크리크 천불동이 그것이다. 화염산 주봉 동쪽 기슭엔 광장이 닦여 있었다.그 왼편엔 「서유기」의 일사삼도의 조상을 세웠는데 초입의 서주천성원에서 보았던 그것보다 규모가 큰데다 훨씬 정교하고 생동감이 있었다.그 바른편 계단으로 내려가면 황갈색의 가파른 벼랑이 무르토크강(목두구))을 굽어 보고 있었다.과연 「베제크리크」란 지명이 「산 허리」라는 위구르말을 딸만했다. 기록상으로 석굴의 수는 83개라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50여개이며 그중 벽화를 소유했던 것이 40여개요 벽화의 총면적은 1천2백㎡라고.그것들은 열차의 창을 방불케 일렬횡대로 늘어서 있었고,그 내부는 대체로 석굴의 길이 20m에 5m의 폭과 5m의 높이의 장방형,거기다 천장은 동그란 궁륭식이라 쿠차의 키질,돈황의 막고굴에 비해 훨씬 넓고 시원했다. ○일부 벽화 손실 아쉬워 기원6세기부터 13세기까지 지금 위구르족의 조선인 고창왕국씨들의 왕가 사원을 비롯,당시 불가의 승려·신도들의 승방,고승을 기리는은굴,혹은 그들이 좌선하던 비가라굴로 쓰였었다.당대의 문헌인 「서주도경」에 고창지역 불교의 승지로 소개한 「영융굴사」가 바로 베제크리크 천불동인 것이다. 여기 벽화는 비록 석가모니 전생의 사적을 선양하는 본생고사를 비롯,서원도·경변도·공양상·인연고사등 불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거기에 등장하는 왕공 귀족과 공양 신도들의 복식·가옥·거마·기악등을 통해 당시 불교를 신앙하던 회골사람들의 생생한 생활과 문화를 볼수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했다. 특히 33호 석굴의 「왕자거애도」에 그려진 여러나라 왕자의 각기 다른 모습과 표정은 마치 오늘날 정상들의 모임을 발불케했고,39호 석굴의 커다란 공양 보살의 풍윤한 얼굴과 굵직한 청화의 무늬,그리고 31호 석굴의 설법도에 그려진 보살의 성장과 복식등은 생생한 역사와 문화가 묻혀 있음을 직감케 했다. 그러나 20호 석굴과 27호 석굴에서 만난 복사물의 대체와 훼손된 잔화를 대하면서 허탈과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특히 20호 석굴의 서원도,회골국왕과 왕후의 형상은 10세기 당시 회골국 복식을 알수있는 증거임에도 절취된 채 지금 영인된 사진만 걸려 있음은 27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필자가 참관한 9호,37호등 석굴에서도 불상의 눈이 뭉개지거나 벽면을 도려낸 칼날의 선이 남아 여기 저기서 수난의 흔적은 완연했다. 베제크리크의 수난은 크게 두번 있었다.13세기말,몽골의 말굽 아래 처음 망가졌고,그를 전후해서 이슬람교가 흥성하면서 불교의 석굴은 쇠락을 거듭하였다.또 한번은 금세기초인 1902년,독일의 그륀베델과 로코크 등이 네차례나 답사를 빙자한 예술품의 절취가 있었다. 그 속에는 20호,27호 석굴의 것 말고도 회골귀족과 몽골인들의 복식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공양도」와 회골문자가 들어 있는 「본생고사도」등이 절취당한 것은 통석할 일이다.더구나 그중 베를린 박물관으로 납치되었던 벽화 일부가 2차대전의 전화에 소실되었다니 서역의 찬란했던 회골문화의 운명도 꽤나 기구한 것이었다.
  • 일 평화원칙 포기는 아시아인 배반행위/오에,노벨상수상 연설

    【스톡홀름 로이터 AFP 연합】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일본의 오에 겐사브로씨는 7일 일본헌법에서 「영구평화」 원칙을 제거한다는 것은 아시아인들과 원폭 피해자들에 대한 배반일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59세인 그는 노벨상 수상연설에서 제2차대전의 패배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전후 미군점령 등을 겪은 현대의 일본인들은 방향을 잃고 혼란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 러­일 영토분쟁 관련/북한,일본태도 비난

    【내외】 북한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현안이 되고 있는 북방영토문제와 관련해 『일본이 러시아의 힘이 약화된 틈을 이용해 네개 섬을 차지하려 하고 있다』며 일본을 비난하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 당기관지 노동신문 최근호는 쿠릴열도가 러·일전쟁후 일본에 빼앗겼다가 2차대전시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국제협약에 따라 러시아가 되찾은 것이라면서 『남부쿠릴열도가 일본에 양도될 경우 심각한 군사적 후유증을 초래할 것』이라고 전했다.
  • 전쟁사죄 반대(외언내언)

    작가이자 자민당소속 중의원의원인 이시하라 신타로(석원신태낭·63)는 일본의 대표적인 보수우파 정객이자 지식인의 한사람이다.89년 출판한 저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으로 유명한 그가 미국비판자세로 주목받고 있는 말레이시아총리 마하티르와의 공저로 이번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아시아」를 펴내 화제가 되고 있다. 그동안 일본은 하고 싶은 말들을 너무 안하고 못했다는 것이며 이제부턴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상대는 물론 미·유럽등 서양이다.서양문명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일본은 아시아혈통을 지닌 아시아인의 아시아국가』임을 애써 주장하며 「탈구미입아」를 강조하고 있다.시장을 노린 교활한 대아시아 추파다.국수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신일본민족주의 보수세력의 열렬한 환영도 받고 있다. 그의 주장에 고무받은 탓인지 최근 일본에서는 그동안 하고 싶어도 못했던 말들을 거침없이 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에 기여한 면도 있다』최근 프레스센터 주최 한·일언론인세미나에 참석했던 산케이신문 요시다(길전신행)논설위원장의 발언이다.53년 구보다망언의 복사판이자 일본인들의 이른바 「혼네」(본심)인 것이다. 새로이 드러내기 시작한 일본인들의 혼네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일본의 침략전쟁을 솔직히 인정하려했던 호소카와 전총리에 대한 저격이라든가 『2차대전은 일본의 침략아닌 대동아공영의 동아시아이익을 지키기 위한 정의의 전쟁이었다』는 나가노법상 망언등은 모두 일본의 혼네다. 기회있을 때마다 앵무새처럼 되풀이된 그동안의 유감과 사죄는 말짱 마음에 없는 거짓말이요,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다테마에」(건전=진심이 아닌 겉으로 하는말)였다는 이야기가 된다.일본자민당의 태평양전쟁사죄반대 의원연맹결성 소식도 결국은 신민족주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일본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목으로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 보스니아 공습참가/나토·독에 공식요청

    【본 로이터 연합】 독일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로부터 보스니아에 대한 공습을 위해 토네이도전폭기들을 출격시켜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독일정부대변인이 1일 밝혔다. 독일이 이같은 요청을 받아들여 전폭기들을 출격시킬 경우 독일은 처음으로 보스니아내에서 군사작전에 참가하게 된다. 노르베르트 샤에페르대변인은 이날 브뤼셀 나토본부에 있는 군지휘관들로부터그같은 요청을 받았다며 『우리는 나토의 요청을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헬무트 콜총리의 독일정부는 그동안 독일군을 보스니아에 파견하게 되면 2차대전중 나치점령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게 됨으로써 오히려 내전을 격화시킬 수 있다며 보스니아에서 군사임무를 수행하거나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데 부정적인 입장을 밝혀왔다.
  • 「하나의 유럽」 계획에 차질/「EU가입 부결」과 향후 전망

    ◎“잘사는데 EU가입 필요 있나”/젊은층·농어민서 반대표 많아/새해 통합체제 출범땐 경제고립 심화 예상 노르웨이가 27,28일 이틀동안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유럽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유럽연합(EU) 가입을 반대,EU의 회원국이 되기를 거부했다. 이에따라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돼온 하나의 유럽 계획은 차질이 빚어지게 됐다.EU는 새해 1월1일부터는 이미 가입이 결정난 오스트리아,핀란드,스웨덴등 3개국과 함께 15국 체제로 출범하게 됐다. 노르웨이는 지난72년 유럽경제기구(EEE) 가입에 대한 국민투표에서도 하나의 유럽이 되기를 거부한 적이 있다.노르웨이가 통합 유럽의 일원이 되지 않으려는 가장 큰 이유는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사회복지와 풍부한 천연자원때문이다. 『잘살고 있는데 구태여 EU에 들어갈 까닭이 없다』는 것이 반대 논리다.「부국」 노르웨이는 내년에는 하루 3백만 배럴의 석유를 양산해 사우디 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제2의 산유국이 된다. 이런 특혜를 EU에 가입함으로써 침해당하지 않겠다는 것이다.특히 젊은층이 이런 점을 들어 EU가입을 반대했으며 여성들은 사회보장제도가 약화될 것을 우려해 반대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또 총연장 8백㎞에 달하는 피요르드 해안에 풍부한 어장을 갖고 있는 어부들도 어장을 공유하지 않기 위해 대부분 찬성하지 않았다.2만여명의 농민들도 2차대전 종전후 최대 규모로 꼽히는 시위를 갖고 EU가입에 강하게 반대해 왔다. 투표결과를 보면 남북 분열현상이 두드러진다.반대계층이 주로 북부에 위치했던데 비해 남쪽의 산업지대에서는 찬성표가 많이 나왔다.스웨덴과 핀란드에서도 반대여론이 많았다가 막판에 찬성한 점이나 주변국으로부터의 도미노현상으로 강한 반대속에 근소한 차이로 가입할수 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예상돼 왔다. 이런 점들은 EU가입 거부이후 노르웨이의 위상을 알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우선 노르웨이는 주변국과 공동보조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북유럽뿐 아니라 유럽전체에서 정치·경제·안보등 모든 면의 고립이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통합유럽을 지향하는 국제사회에서 제목소리내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같다.노르웨이가 속해 있는 유럽자유무역연합(EFTA)도 아이슬란드를 제외한 스웨덴,핀란드,오스트리아등 회원국들이 탈퇴해 버린 상태이다. 따라서 노르웨이는 단기적으로 천연자원등을 바탕으로 권역에 속하지 않고도 독자적인 경제체제를 유지해 나갈수 있겠지만 EU국가의 투자위축등으로 멀지않아 EU가입의 필요성을 절감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노르웨이에서 투표를 하던 28일 공교롭게도 EU외무장관들은 체코,폴란드등 구공산권국가들의 EU가입 계획초안을 마련했다.노르웨이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전반적인 EU확대계획은 계속 추진될 것으로 전망된다. EU국가 가운데는 보수적인 노르웨이가 가입해 사사건건 트집을 잡느니 오히려 15국체제가 낫다는 의견도 나오는 것으로 알려진다.그러나 단일통화,통합군,통합외교권에서 난항을 겪고 있으며 이민문제등에 공동보조를 취하지 못하고 있는 EU에 노르웨이의 거부는 또다른 상처로 남을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 최초의 영화사/불파테 설립 98돌 기념전/파리 퐁피두 센터서 내년

    3월까지 열려/초기 영사기 등 3천점 전시/희귀영화 3백편 상영… 불 영화사 한눈에 세계에서 가장 먼저 영화를 산업화한 인물은 프랑스인 샤를 파테다.파테는 꼭 1백년전인 1894년 파리 근교 뱅센 숲근처의 전시장에서 미국의 에디슨이 만든 축음기를 처음 보고 당시 7백프랑에 구입한다. 파테는 다음해 런던에서 영사기를 산지 1년만인 1896년 동생과 함께 파리의 리슐리에 거리에 영화제작사인 파테회사를 차리고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98년동안의 프랑스 영화뿐 아니라 세계 영화산업의 역사가 그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 언론들이 파테 개인을 영화계의 「최초의 황제」라고 부르기에 서슴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이런 파테 영화전시회가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지난달말부터 시작해 내년3월6일까지 열리고 있다. 퐁피두센터의 중앙에 자리잡은 전시장에는 이 회사의 상징인 수탉 로고와 함께 초기단계부터 2차대전때까지의 영화제작 기구 3천점이 전시돼 있다.이곳에서 볼 수 있는 희귀영화만도 3백편. ○백년전 축음기 선봬 무성영화시대초기에 실물 대신 그림을 그린뒤 돋보기로 확대해 촬영하던 당시의 기구와 모습들이 전시장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더 들어가다 보면 목소리를 전해주던 1백년전의 축음기 10여종도 그 역사를 뽐내고 있다. 전시장내의 특별관에는 1912년 가정에서 볼 수 있도록 개발된 미니 영사기로 가로30㎝,세로 20㎝의 작은 화면에는 3분짜리 단편 희극영화를 볼 수 있다.텔레비전이나 비디오의 시초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셈이다. 프랑스 최초의 장편영화인 「달갑지 않은 사건들」(1908년)이나 영화예술의 정상으로 꼽히던 「귀즈공작의 암살」(1909년)등의 영화선전 포스터는 시대별로 전시돼 있다.「늑대와 함께 춤을」이나 「연인」,「마르고 왕비」등 최근의 포스터도 함께 나붙어 있어 포스터만 보고 있더라도 프랑스 영화사를 알수 있다. 파테가 자랑하는 것은 뉴스영화인 파테 주르날.한국의 대한뉴스에 해당하는 파테 주르날은 오래전 극장에서 사라졌지만 1908년부터의 프랑스 사회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한다.무엇보다 파테는 뉴스영화를 만들기 위해 아시아지역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에 처음으로 카메라기자를 포함한 특파원을 내보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고 있다. ○1백주년 기념전도 전시장 한쪽에서는 1910년대 뉴욕·모스크바·빈·런던·캘커타·싱가포르·도쿄등에 지사를 설립하면서 만든 계약서도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 당시 파테의 위력을 실감 할 수 있다.파테는 1차,2차대전을 겪으면서 황혼기에 접어들어 이탈리아인의 손에 넘어가기도 하는등 그동안 명맥만 겨우 유지해왔다. 그러나 파테는 지난8월 프랑스 재력가인 제롬 세이두씨가 인수한뒤 대규모 투자를 하는등 새로운 변신을 꾀하고 있다.2년뒤의 1백주년을 맞아 과거의 영광을 되살린다는 부흥운동을 펼치고 있다.
  • 독일/러시아/“약탈 문화재 반환” 신경전

    ◎구텐베르그성경 등 돌려줘야/독/나치가 가져간 보물과 교환을/러 전쟁때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보물은 전리품인가 아니면 장물인가. 최근 러시아와 독일간에는 2차대전 당시 독일을 점령한 구소련인들이 마구 가져간 보물들의 반환문제를 놓고 소리없는 문화재 전쟁을 하고 있다. 최근에서야 소재가 확인된 이 보물들은 유럽 최초의 활자인쇄본인 구텐베르크의 성경책을 비롯해 마네·모네·르누아르·드가·세잔·로트레크·벨라스케스등 거장들의 그림등 모두 4천여점의 예술작품들인데 그 액수를 논하기 어려울 정도의 값어치를 지닌 것들이다. 소련인들은 이 작품들을 구동독의 라이프치히박물관을 비롯해 스위스·헝가리·네덜란드·프랑스등지에서 조직적으로 혹은 군인들이 개인적으로 마구 쓸어온 것들로 드러났다. 그 때문에 이들은 지난 50여년동안 예술작품의 목록에서만 존재할 뿐 그 소재가 확인되지 않아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으며 구텐베르크의 인쇄본 성경책은 자그마치 2천5백만달러(2백억원)를 호가하고 있다. 이 예술품들의 존재는 냉전을종식시킨 고르바초프대통령 시절에서야 확인됐는데 주요 피해 당사국인 독일은 즉각적인 반환을 요구했지만 러시아인들은『그것은 전쟁의 전리품이며 독일인들이 소련내에서 행한 만행에 비하면 손해배상액에도 못미치는 것들』이라고 반환요구를 거절했다. 이때부터 작품의 반환을 요구하는 독일을 비롯한 서방세계와 러시아간의 문화재 반환논쟁이 시작,지금까지 그 결말을 보지 못하고 있다. 소련인들은 「크렘린」으로 불릴 만큼 응큼한 면모를 과시,그동안 이 보물들의 소재를 전혀 모른체 해왔을 뿐 아니라 목록조차 만들지 않았고 이를 보관하고 있던 레닌박물관은 이 사실을 직원들이 발설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단속해 왔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러나 이 사실은 마침내 밝혀졌고 독일과 러시아는 지금 독일이 2차대전중 히틀러가 훔쳐간 소련내 보물들과의 교환이나 다른 대가를 요구하면서 반환에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나서고 있다. 또한 다행스럽게도 반환등의 어려운 절차는 이뤄지지 않더라도 내년에 레닌박물관이 소장하던 세기의 보물들을 일반에게 공개키로 함에 따라 햇빛을 보지 못했던 이 보물들이 조만간 다시 빛을 발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 일 종군위안부 배상금/최소 4만$씩 지급을/국제 법률가위 권고

    【제네바·도쿄 AP 연합】 일본정부는 2차세계대전 당시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에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폭력과 잔악행위를 저지른 대가로 1인당 4만달러씩을 지불해야 한다』고 국제법률가위원회가 22일 권고했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률가협회는 이 4만달러의 개인보상금이 단지 시작에 불과하고 나중에 더 늘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협회는 2백40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통해 2차대전기간과 전후에 위안부들에게 자행된 제도적인 만행을 자세히 묘사한 뒤 일본정부는 이 여성들이 당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 「우리의 선택」 성공해야 한다/현승일(특별기고)

    ◎“지금은 문민정부 격려할때”/정통성 있기에 개혁 가능… 「저의 있는 비판」 삼가야 우리나라 민주주의 전개에 있어서,가장 뜻깊은 일은 대한민국의 건국이었으며,그 다음번으로 뜻깊은 것은 YS 문민정부의 탄생일 것이다. 건국에서는 우리나라의 국체를 민주주의로서 기본틀을 삼았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문민정부 탄생은 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다.이 두사건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50년이었다. 민주주의 전개가 이만큼 힘든 일이고,앞으로도 과거에 겪었던 우여곡절을 또 겪게될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가 정치사적으로 나아갈 방향은 결국 민주주의의 전개인 이 방향일 것이다. 이것은 서구에서 민주주의 전개역사가 가장 험난하였던 프랑스에서 조차도 결국에는 첫단추를 끼웠던 대혁명의 원리대로 민주화의 길을 걸었던 예에서 보는 바와 같다. ○자작없는 정권 YS문민정부 이전까지 민주주의가 잘 되지 못했던 것은 민주주의의 핵심요소인 국민의 정부선택권이 유린된 사실이었다.일찍이 자유당때도 헌법조작,부정선거 따위로 국민의 정부선택권을 제약해 왔었으나 박정희씨 이래로는 군부의 일부 강자들이 숫제 정권을 자작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한 자작정권 아래서 야기되는 문제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복종에 관한 문제였다. 즉 정통성이 없는 정권에 대해서도 국민이 복종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심각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해답 그자체 보다는 정부는 정통성을 지녀야 한다는 인식으로 정리되었고 이것은 곧 국민의 정부선택권을 요구하는 민주화투쟁으로 연결되었다. YS정권의 성립으로 실로 오랜만에 정통성 있는 정부를 갖게 되었으며 과거 정통성 부재에서 야기되었던 정부의 대내외적 약점들을 일시에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내치에 있어서 이제 정부는 정의의 문제,도덕의 문제,반역의 문제를 다룰수 있게 되었다.정부가 국가와 사회의 기본에 관련된 이러한 문제를 다루지 못한다면 정치를 한다고 할수 없는 것인데도 자작정권들은 자신들이 먼저 거기에 저촉되기 때문에 거론부터가 곤란한 문제였다.그러므로과거 정권들은 정치의 성과를 정량적 척도의 향상에 두어 언제나 생산성·효율성·실적등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고 반면에 정의·도덕·법통·권위등과 같은 삶의 올바른 지혜와 덕성과 아름다움에 관련된 상위가치등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렸다. ○민주투쟁의 결정 YS정부가 공직사회의 정의로움을 위해 사정과 재산등록을 실시하고 검은 돈의 거래와 번식을 막기위해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고 타락·금권선거를 타파하기 위해 새로운 선거법을 채택하고 군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특권적 사조직부터 배제시킨 개혁조처 등은 정권의 정통성이 없이는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사안들이었다. 이러한 개혁조처들에는 불가피하게 부작용도 따르고 있지만은 부작용이 있다고 해서 이러한 정책들의 본질적 가치가 저하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들어 YS정부는 많은 비판과 공격을 당하고 있다.공격재료는 대개 다음의 몇가지다.즉 공무원의 복지부동 현상등 개혁의 부작용에 관한 비판,혹은 개혁이 퇴색해가고 있다는 정책 비일관성에 관한 비판,부처간의 정책이 조율이 안된채 튀어 나온다는 정책조율부족에 관한 비판,인사가 적절하지 못하여 패착이 자주 일어난다는 비판,국제화·지방화등에 좀더 적극적으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 등이다. 여기에 덧붙여 국가에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정부는 당한다.불행으로 인한 원망과 비판의 심리를 정부로 향하도록 공격을 전이시키는 의도가 작용하기도 한다.얼마전 성수대교가 무너졌을때 모일간지는 『이런 정부를 믿고 어떻게 사나』하는 제목을 크게 달았다.성수대교가 무너진 것은 복합적인 원인,국민전체가 반성하고 책임져야 할 해묵은 원인들에 의해 무너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정직할 것인데,언론이 이런식으로 나오는 것은 참으로 옳지않은 태도라 하겠으나 그렇게 하였다. YS정부가 비판·공격받고 있는 사안의 내용들을 보면,과거의 정권에서 문제되었던 것들에 비해 치유와 개선이 훨씬 용이한 성격의 것들이다.과거 정권에서는 권력형 부정부패,정경유착,인사에 있어서 특정지역독식,범죄와의 전쟁사태,친인척비리 등이 주조로서 권력핵심부에 관련된 문제가 대부분이어서 치유가 훨씬 어려운 문제들이었다.그럼에도 현재 YS정부가 받고 있는 공격의 강도는 과거보다 강하며 또한 훨씬 더 조직적인듯 하다. YS정부를 의도적으로 공격하는 부류는 대개 3종이다.첫째는 북한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거나 동조하는 친북세력,둘째는 YS정권으로부터 소외되었다고 생각하거나 섭섭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기득세력,셋째는 차기의 집권을 겨냥하는 야권세력등이다. 첫째 북한은 김일성 사망전에도 그랬지마는 특히 사망이후 한국을 교란시킬 전략을 강화하여 대남 3대 목표로 공언하고 있는데 「김영삼 정권타도」「UR반대」「연방제통일」이 그것이다.김일성을 승계한 김정일은 그의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주석직에 취임조차 하지 못하는 내부적 약점을 은폐하기 위해서인지,혹은 남한의 안정과 성장을 두려워한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으나,김영삼정부의 타도와 퇴진운동을 전개할 것을 친북세력에게 선동·지령하고 있다. ○왜 공격 하는가 둘째,3공이래 집권층에 속했던 기득세력은 대선전에 민주화에의 동참과 국민대화합의 차원에서 정치권에서 YS진영과 3당 통합을 하였으나,대선직전에 노대통령및 그의 최측근 인사의 이탈로 말미암아 구 기득세력은 YS정권창출에서 장자노릇을 할 수가 없었다.따라서 구 기득세력은 YS정권창출에서 거듭 태어나지 못하고 여당의 비주류 집단처럼 되어버렸다.정치권에서 3당통합이 이와같이 기득세력의 기득권확보로 연결되지 못하자 기타의 기득세력들은 YS정권의 사정개혁 등에 대해 경계심을 갖게 되었으며 잠재적인 반 YS세력으로서 약점만 잡혔다하면 강도높은 비판의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셋째,야당의 정부비판은 당연하며 더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과연 YS정부가 비판의 목소리 크기만큼 잘못하고 있는가? YS정부가 과거 정권보다 더 못한다는 말인가? 광주사태와 같은 천인공로할 만행을 저지르고,정권연장을 위한 내각제 개헌에만 골몰하여 세상만사가 물에 떠내려가고,오합지졸의 집단 이기심으로 사업장마다 파업으로 해가 뜨고 해가 지던 과거의 정부가 더 잘 했단 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러하나잘 해왔다고 하더라도 YS정부는 더 잘해야 하고,잘 못해왔다고 하더라도 더 잘해야 한다.이유는 자명하다.건국 50년만에,긴긴 민주화 투쟁끝에 성취된 문민정부가 실패로 끝난다면 인간 삶에 있어서 사회적 이상과 도덕적 지조와 희생적인 노력의 의미는 어떻게 되어버린다는 말인가! YS문민정부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이탈하려는 원칙을 다시 바로 세우고 불만세력을 좀더 포용하며,악의 세력에 대해서는 좀더 단호해야하며,미래에 대비하여 좀더 적극적이고 좀더 창조적이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2차대전이후 서독에서 아데나워정부가 성공을 거둠으로써 독일 국민의 의식으로부터 과거 나치스정권의 효율성에 대한 향수를 씻어낼 수 있었고 민주주의의 가치들이 자리잡아 갔던 것이다.이 나라의 장래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국민이라면 YS문민정부가 아데나워 정부처럼 성공을 거둘수 있도록 격려하고 돕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 일제,미얀마위안소 운영 확인/영전쟁박물관 소장 공문서 발견

    【도쿄=강석진특파원】 일본군이 2차대전중 점령지였던 버마(미얀마)중심부 만달레이에 군대위안소를 다수 설치하고 버마인 군대위안부들을 혹독하게 관리했던 사실이 영국 전쟁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일본군 공문서에서 밝혀졌다고 일본의 아사히신문이 22일 보도했다. 아사히신문은 또 현지에 있던 당시 일본인 상사원도 군대위안소 이용을 특별히 허가받는 등 주둔군과 상사가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사실도 드러났다고 밝혔다. 버마인 위안부의 존재및 버마위안소 규정이 일본군 공문서에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이 자료는 지난 91년 이후 일본정부가 실시한 군대위안부 조사에서도 누락된 것이라고 이 신문은 덧붙였다.
  • 정치적혼란기…신중하게 접근/일·북관계/고바야시 가즈히로

    ◎내외전문가 한반도 정세 조망/“실리외교” 여론 비등… 「전후보상」 걸림돌 「냉전의 화석」이라고 불려온 한반도에도 미·북한의 제네바합의로 「화해」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북풍의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던 북한에 「경수로 지원」 「미국과의 연락사무소 상호설치」라는 「태양」이 비치며 「핵무기 개발」이라는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고 할까.낙관적으로 보면 동북아시아에 이제 겨우 대립구도를 벗어나 평화와 번영을 향한 새로운 질서구축이 시작되는 환경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이미 「북방외교」로 중국과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맺고 미국과 북한도 제네바합의로 외교관계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나머지는 일본과 북한과의 관계와 한반도의 주역인 남북관계뿐이다. 이때문에 일본정부도 기본적으로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하고 있다.그러나 아직은 구체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결론부터 말하면 일본정부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매우 신중하게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과 북한과의 국교정상화교섭은 지난 1991년 1월에 시작됐다.그러나 일본측은 북한의 핵개발 의혹의 해소를 요구하고 북한은 2차대전 전뿐만이 아니라 전후의 보상까지 요구,회담은 평행선을 걸어왔다.더욱이 92년 11월 제8차 교섭에서 일본측이 제기한 KAL기 폭파범 김현희의 일본인 교사 「이은혜」 문제에 북한이 강력히 반발하며 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한국과 함께 미·북한제네바합의에 따라 40억달러의 경수로 건설지원과 경수로 완성까지의 대체에너지인 중유 공급비 20억달러의 대부분을 부담할 것 같다.일본정부는 이를 「안전보장 비용」으로 보고 응분의 부담을 지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러나 일본 국민들 사이에는 국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장거리 미사일을 일본을 향해 시험발사하고 일본인처의 고향방문도 허용하지않는 북한에 거액의 세금을 사용,지원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과 불안이 강하다.그런 가운데 사회당은 미·북한합의후 북한과의 관계개선의 실마리를 찾기위해 같이 연립여당을 구성하고 있는 자민당과 신당사키가케에 북한방문을 요청했다.그러나 신중론이 강해 전망은 불투명하다. 신중론은 지난 90년 평양에서 발표된 자민·사회당 대표단과 조선노동당의 3당공동선언에 포함된 「2차대전 전뿐만 아니라 전후 45년간의 보상도 한다」는 내용을 이번 방문에서 확인해주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이유 때문이다.또하나는 김정일의 최고 지도자 취임이 정식 결정되기전에 북한을 방문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일본내에서는 또 북한에 경수로지원등을 하려면 핵의혹의 불식만이 아니라 군비증강·인권문제등에 대해서도 북한에 적극적으로 발언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일본은 더욱이 지금 정치적 혼란기에 있어 강력한 리더십의 발휘를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북한은 또 일본이 외교채널를 통한 관계개선을 추구할 경우 반발할지 모른다.이러한 복합적 요인으로 일·북관계는 진전과 후퇴를 반복하며 조금씩 진전될 것 같다.극적인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일본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것은 남북관계다.김영삼 대통령은 남북경협에 대해 「신중히 검토발전시킬 때가 됐다」고 발언하고 있으며 한국정부도 경제인의 상호방문등을 용인할 방침을 정했다.지금까지 「선통일·후교류」를 주장해온 북한이 이번 한국조치에 어떻게 대응할지는 북한의 대남정책 변화의 시금석이 된다. 북한의 부자세습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 같다.북한은 권력기반을 강화하기위해 김정일에 대해서도 김일성과 유사한 신격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그러나 그러한 체제는 외부로부터의 정보유입에 무너지기 쉬운 결정적인 취약점을 갖고 있다.이때문에 북한의 개혁·개방에는 스스로의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한국인중에는 「남북이 통일되면 경제·군사면에서 일본의 위협이 되기때문에 일본인들은 통일을 바라지않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물론 일본인중에 그러한 발언을 하는 사람이 극히 일부 있다.그러나 여론화되지는 못하고 있다.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되어 안정되는 것이 일본의 국익을 위해서도 가장 바람직하다.그러한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북한이 경제적으로 좋아지고 개방체제로 바뀔 필요가 있다.그러나 현실은 북한의붕괴라는 시나리오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그 경우 한국에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줄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불안정요인이 될지도 모른다. 북한의 이러한 붕괴를 막기위해서는 중국의 역할이 중요하다.중국도 그러한 사실를 잘알고 있어 북한과의 정치적 관계 유지를 중시하고 있다.그러나 일본정부는 남북관계개선을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할 의사도 없고 개입해서도 안된다.다만 중국에 대해 북한의 개혁·개방 노선으로의 전환을 촉구하도록 요청하는 정도일 것이다. 일본은 현실적으로 국내 정치적 혼란때문에 한반도및 동북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질서구축의 청사진을 그릴 수 없는 상황이다.한국도 북한이라는 불안정 요인을 없애는 것이 급선무다.그러나 완벽한 해결책을 찾는 것은 어렵다.이때문에 북한의 핵문제 대응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일·미·한 3국이 연대를 유지하며 대화해 나가는 수밖에 없지않을까.
  • 일 진주만공격 선전포고/대사관실수로 전달지연

    ◎일 기밀해제 문서공개로 드러나/주미공관서 본국지시사항 경시/「긴급」 이행않고 직원송별연 참석 일본은 2차대전 당시 하와이 진주만 공격에 앞서 미국에 선전포고문을 전달할 예정이었으나 사전연락을 받지 못한 워싱턴의 주미 일본대사관 직원들이 자리를 비워 제시각에 전달하지 못한 것으로 20일 기밀해제된 문서에서 드러났다. 이문서는 대사관 직원들이 다음날 상오중에 공격시한을 알리는 긴급전문과 선전포고문의 마지막 부분을 발견했으나 타이핑이 늦었던데다 교정을 보느라 공격 개시 한시간 뒤에야 미국측에 전달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항공모함의 비행기를 이용,41년 12월 7일 진주만에 기습공격을 감행,비행기 1백20대와 전함 19척을 파괴시키고 2천4백명을 숨지게해 미국이 2차 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일본 외무성의 야부나카 미소지씨는 이문서와 관련 지금까지 워싱턴의 대사관 직원들의 사무착오때문에 협상의 공식중단을 알리는 통지문의 전달이 지연된 것으로 알려져왔다면서 이문서들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이들뿐만 아니라 일본 외무성과 당시 주워싱턴 대사관측간에 이해차가 있었음이 드러났기때문에 외무성 전체가 이문제에 책임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날 기밀에서 해제된 이문서들은 당시 대사관 직원들이 전후에 작성한 회고록들로 구성돼 있다.일부 문서간에는 모순되는 점이 있지만 외무성 관리들은 이번에 공개한 문서들이 진주만 공격직전 최후의 시각에 워싱턴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가장 광범위하면서도 유일한 정부의 공식기록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문서들은 21일중으로 일반에게 공개된다. 이문서들은 협상을 중단하는 선전포고문의 대부분의 암호가 해독된 뒤에도 「긴급사항」을 지시하지 않아 대사관 직원전원은 고별파티를 하기위해 중국식당에 참석했다고 기록했다.호리우치 마사나 당시 공보관은 『우리 모두는 비상사태에 우리가 대비할 수있게끔 경보전보가 올줄 알았다』고 쓰고 있어 사전에 일본 본국과 대사관측간에 진주만 공격에 대해 연락이 취해지지 않았음을 내비치고 있다.
  • 일 정부,「정신대기금」 출자/요미우리신문/사업내용 기본방향 확정

    【도쿄=강석진특파원】 일본은 일본군을 위한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온 여인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기 위해 구상중인 민간기금에 국가도 기금 일부를 출자할 방침이라고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이 17일 보도했다. 요미우리신문은 또 일본 정부·여당은 이 민간기금이 단순히 전군대위안부에 위로금을 지급하는 것 뿐아니라 여성의 지위및 복지향상 도모에 목표를 둔다는 기본방향을 정했다고 밝혔다. 정부·여당은 이와 함께 ▲위로금은 한국을 비롯,필리핀 네덜란드 등의 전군대위안부를 지급대상으로 하고 ▲기금은 민간모금을 주체로 하되 국가도 일부를 출자키로 합의했다. 일본정부는 이에 따라 2차대전 패망 50주년인 내년부터 시작될 「평화우호교류계획」에 맞춰 내년중 기금을 설치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다음주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일본정부는 앞으로 연립여당내의 「전군대위안부 등 소위원회」 등과 접촉을 갖고 민간과 국가의 기금 출자 비율,목표액,여성의 인권및 복지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단체에 대한 지원 등 기금의사업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압축,이달말까지 기본 골격을 마련할 생각이다. 그러나 한국 등의 전군대위안부 출신과 이들의 지원단체는 물론 사회당내 일부에서도 『일본정부는 피해자 개인에 대한 보상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 국가가 이에 대한 책임을 명확히 하는 한편 개인 보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어 일본정부의 기금 구상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한 실정이다.
  • 국내외작가 대규모 그룹전

    ◎세계현대미술전/젊은 모색 94전/시를 그린 화가전/현대미술전/미·불 등 10개국 23명 판화 모아/젊은 모색/창작·완성도 뛰어난 24명 참여/시를 그린/중견화가 40명이 시를 화폭에 국내외 작가의 대규모 그룹 기획전이 잇따라 열려 눈길을 모은다.23인의 「세계현대미술전」,24인의 「젊은 모색 94전」,40인의의 시를 그린 화가의 서정전」 등이 그것. 이들 기획전은 전위미술 이후 현대미술에 이르는 세계의 미술사조,또는 국내 중견 및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조형의식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꾸미는 등 각각 특징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각별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 가운데 지난주 개막한 「세계현대미술전」(12월 10일까지·서울미술관)은 미국,프랑스,독일,스페인,이탈리아,벨기에,포르투갈,콜롬비아등 10개국 23명의 대표적 현대작가의 판화만을 모은 전시. 전위미술에 대치되는 반사조주의에서 초현실주의,특히 2차대전 이후 팝아트를 위시한 누보레알리즘,뉴페인팅 등 새로운 형태의 추상과 구상을 포함한 미술운동 작품이 모두 망라돼 있다.참여작가는 대표적인 팝작가 리히텐슈타인을 비롯,신표현주의의 톰 웨셀만과 에릭 휘슬,이탈리아 신구상주의의 엔조 쿠기,그리고 스페인의 안토니 타피에스,프랑스의 발터스 등 거장들로 짜여져 있다. 「젊은 모색94전」(12월6일까지·국립현대미술관 제2전시실)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우리 미술계의 미래를 가늠해 보기 위해 마련한 특별기획전.회화,조각,설치,테크놀로지미술 등 각부문에서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과 모색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는 국내의 젊은 작가 24명의 작품을 전시중이다. 일정한 장르에 편중됨이 없이 다양한 부문에서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특히 만39세 이하로서 조형적 측면에서의 완성도와 독자적 창작성,무엇보다도 표현의 자기화에 충실한 작가만을 참여시키고 있는 것이 이 전시의 특성이다. 무한한 표현의 자유와 새로운 방향성을 가늠할 수 있는 이 전시에는 물감과 목재,철 등 비교적 전통적인 재료에서부터 레이저,비디오,스피커,홀로그램 등 기술적 매체에 이르기까지 여러 매체와 다채로운 형상화 방식의 작품 40점이 선보이고 있다. 「시를 그린 화가의 서정전」(12월1∼10일·수목화랑)은 국내화단에서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는 동·서양화 중견작가 40여명이 참여해 시를 그림으로 형상화한 전시이다.평소 문학적 소재에 관심을 기울여온 작가들,그중에서도 많은 저서를 갖고 있는 김병종,이숙자,황주리,정강자씨를 비롯해 이왈종,오용길,황창배,이두식,석철주,장순업,송수련,전준엽씨 등 지면에 자주 글을 발표한 작가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시화전과는 달리 한 시인(류석우)이 노래한 시를 이처럼 많은 작가들이 서정적 화면으로 표현하기는 유례가 없다.특히 이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자기만의 다양한 형상 및 색채언어를 구사하는 구상·비구상의 중견들로 시인이 노래한 역사와 삶,자연과 사랑의 테마들을 각각 밀도있는 화면에 담아 내놓는데서 관심을 끈다.
  • 유엔 유고전범 재판소/혐의자 첫 재판 착수/「세」계 수용소장

    【헤이그 로이터 AP 연합】 유엔 유고내전 전범재판소는 첫 전범 혐의자를 기소,체포영장을 발부한데 이어 8일 첫 공개심리에 들어감으로써 유고 내전기간중의 잔학행위에 대한 재판절차에 본격 착수했다.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이날 유엔 전범재판소의 심리는 1차로 현재 독일감옥에 수감중인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 두스코 타디치(38)의 인도문제를 다루었다.타디치는 지난 2월 뮌헨에서 체포돼 독일 감옥에 수감돼 있다. 타디치는 약 3천5백명의 회교도들이 억류돼있던 오마르스카 수용소에서 최소한 10명을 고문,사망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유엔 전범 재판소는 7일 구유고 내전의 첫 전범혐의자를 기소하고 그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고 발표했다.
  • 독/분단의 상처 아직도 남아/베를린장벽 붕괴 5주년

    ◎동·서지역간 정치·경제적 이질감 잔존/국제사회 「공룡」 부상… 유럽질서 격변 베를린장벽이 무너져내린 지 9일로 만 5년이 흘렀다.베를린장벽 붕괴로 동·서대결을 특징으로 하는 전후 유럽사,넓게는 세계사의 한장이 덮였고 유라시아대륙은 엄청난 변화를 겪어왔다. 베를린장벽 붕괴는 동·서독의 통일로 이어지면서 「기대」만큼이나 많은 후유증을 독일인들에게 떠안겼다.국제정치적으로도 동서간 세력구도에 공백이 생기면서 새 질서를 모색하려는 유럽국들의 노력이 계속되어왔지만 아직 완전한 틀을 잡지 못하고 있다. 독일에게 있어 베를린장벽 붕괴후 지난 5년간은 숨돌릴 틈도 없는 격변에 이어 새로운 자리매김을 향한 끊임없는 변화 그 자체였다.정치적으로는 동·서독일의 경제·사회통합에 이어 90년10월3일 동독이 소멸함에 따라 동독소속 5개주가 서독에 편입되는 이른바 흡수통일이 이뤄졌다. 지난달 16일 총선에서 동독재건문제가 크게 다뤄지지 않은 것은 독일인들이 그동안 통일후유증을 어느정도 수습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그러나 옛 동독공산당(현민사당)이 재기에 성공한 것은 동독인들의 불만을 대변하는 것으로 정치관측통들은 지적하고 있다.제도적으로 통일은 성취했지만 양독지역의 진정한 융합은 아직도 진행중인 사항이라는 시각이다.통일후유증 수습과정에서 서독인들의 불만도 커다란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무엇보다도 달라진 것은 외교·군사부문.지난 5년간 독일의 대외정책이나 국제정치학상 차지하는 위치변화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지난 7월에는 독일군 해외파병지역제한을 철폐,2차대전 패전국의 멍에를 벗어던졌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사상 유례가 없는 경제통합의 거대한 실험장에 던져진 독일은 지난 5년동안 암흑천지를 벗어나 이제 터널의 한 끝에서 빛을 보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 대부분의 경제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베를린장벽의 붕괴가 상징하는 냉전체제의 종식은 국제적으로 많은 과제를 새로 만들어냈으며 대부분의 부문에 있어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새로운 질서의 정착은 요원한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동구지역 대부분이 극심한 혼란을 거쳐 정치체제재편과 경제재건에 나서고 있으나 이른바 서구식 시장경제에 제대로 합류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후유증으로 옛 세력들이 다시 힘을 얻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5년전 무너져내린 베를린장벽이 지금은 모습만 바꾼 채 독일내에서는 동·서독인들간 마음의 장벽으로,국제적으로는 민족주의의 장벽으로 다시 우뚝서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