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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원한 2인자’ 꿈 많았던 JP, 영원히 잠들다

    ‘영원한 2인자’ 꿈 많았던 JP, 영원히 잠들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로 통하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해온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그는 꿈많은 사나이였다. 어려서 선생도 해보고 싶었고, 군에서는 정풍(整風)도 해보고 싶었고, 제대해서는 혁명도 해보고 싶었으며, 혁명한 뒤에는 대권을 향해 도전도 했었다. 그러나 그가 애송하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싯구인 ‘잠들기 전에 가야할 몇 마일’을 끝내 가지 못한 체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향년 92세.●박정희의 2인자로 출발한 정치 인생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그 당시 규암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급장과 검도부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검도는 4학년 때 입단을 했고, 승마와 그림도 즐기는 낭만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서울사대 2학년 때 맞은 부친의 죽음은 인생 행로를 바꿨다. 가세가 기울면서 3학년 때인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했다. 육사를 졸업한 뒤 맡은 첫 보직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육본이 대구에 피난했을 당시 중령이던 박 전 대통령 곁에와 하숙하던 조카딸 박영옥도 알게 됐다. JP가 메모를 보내 프로포즈를 하고 박 중령이 권하여 결혼을 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과 부대에서는 상사와 부하, 인척으로는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인연을 맺게 됐다. 전쟁이 가고 휴전이 왔다. 4.19가 오고 이승만이 갔다. 그도 당시 혼란스런 시대 상황과 맞물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결정적인 사건은 1960년 9월에 일어났다. 당시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을 가진 뒤 육사 8기 동기생 11명과 함께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국군 정풍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2인자 시대를 열었다. 이 때 JP의 나이 35세였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인생 항로는 순탄치 않았다. 그해 6월 10일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정보부장을 지내고, 공화당 창설을 주도하면서 실세 2인자로 부상했으나 창당 과정에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린다. 그 여파로 1963년 2월 창당을 하루 앞두고 박 의장의 권유에 따라 외유길에 나서야 했다.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의 첫 번째 시작이다. 1963년 11월 6대 총선 때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되면서 옛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이 불거져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또다시 외유길에 올랐다. 19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고, 1969년 3선 개헌 때는 반대 의견을 주장하다가 결국 박 전 대통령에 설득되어 개헌 작업에 앞장섰다. 이어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45세의 나이로 총리에 임명, 75년까지 국내 최연소 총리로 활약했다. 총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그는 1979년 10·26 사건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박정희 이후 시대를 이끌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5공 신군부의 5·17조치와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면서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 유랑 생활을 떠났다. 그는 10.26 직후 어느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나를 태평양 한 복판에 내놓고 가셨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비 마다 캐스팅 보트로 영향력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13대 대선에 출마해 득표율 8%로 4위에 그치며 고배를 마셨으나 1988년 13대 총선에서 원내교두보를 확보, 정치 무대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면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윽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3당 합당을 도모하면서 다시 여당으로 변신했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 자리도 확보한다. 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도의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정치 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음으로써 다시 위기를 맞는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였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 그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 강등된다. 1995년 민자당을 돌연 탈당, 같은해 소리소문없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킨 데 이어 이듬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권의 지역 정서를 업고 55석의 제3당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한 번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다. 그의 제 2 황금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1997년 두 번째 대선 고지 등정에 나서면서 내각제를 고리로 다시 한 번 킹메이커가 된다. 그해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극적인 DJP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를 이뤄낸 것. 합의문 서명식장에는 ‘단일후보로 정권교체, 내각제로 정치발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그는 여권 성향이던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 정권의 한 축이 됐다. 비록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1998년 2월 총리 임명 뒤 6개월 동안 ’서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기도 했으나 ’DJ대통령, JP 총리‘ 시대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후 잇딴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충청권도 그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 정부 파기를 선언했다. 2000년 4·13 총선 대비용이라는 말이 나왔다. 총선 결과는 참패. 17석에 그치며 원구성에 실패하자 다시 DJ와 손잡았다. 당시 17인을 원내교섭단체로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주당으로부터 의원 3인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어 이듬해인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결국 공동 정부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이와 함께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자민련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고 그 해 대선에선 후보도 내지 못하며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기 시작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을 맞아 17석은 급기야 4석으로 줄었다. 단 한 석의 비례대표 의석도 배분받지 못하면서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10선 고지 등정에 실패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합 당시에는 경선 이틀 전 YS와 전격 회동을 갖고 5촌 조카인 박근혜 후보 대신 “경제 살리기를 할 수 있는 유능한 후보가 선출돼야 한다”고 주장,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며 정계 원로로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2008년 말 뇌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졌지만 2010년 초인적인 재활운동 끝에 회복하기도 했다. JP는 ’3김‘ 가운데 가장 오래 현실 정치에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었다. 영호남의 대립구도 속에 충청도가 캐스팅 보트를 쥘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한국적 정치 상황과 항상 힘있는 쪽과 손을 잡는 그의 현실감각 어린 처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치적 장수가 가능했다. 기회주의자라는 평가와 함께 소수의 힘을 극대화한 실용주의자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 김종필 떠나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 김종필 떠나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로 통하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해온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92세. 그는 꿈많은 사나이였다. 어려서는 선생을 하고 싶었다. 군에서는 정풍(整風)을, 제대해서는 혁명을 원했다. 혁명한 뒤에는 대권을 향한 도전도 했다. 그러나 그가 애송하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싯구인 ‘잠들기 전에 가야할 몇 마일’을 끝내 가지 못한 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박정희의 2인자로 출발한 정치 인생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그 당시 규암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급장과 검도부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검도는 4학년 때 입단을 했고, 승마와 그림도 즐기는 낭만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서울사대 2학년 때 맞은 부친의 죽음은 인생 행로를 바꿨다. 가세가 기울면서 3학년 때인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했다.육사를 졸업한 뒤 맡은 첫 보직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육본이 대구에 피난했을 당시 중령이던 박 전 대통령 곁에와 하숙하던 조카딸 박영옥도 알게 됐다. JP가 메모를 보내 프로포즈를 하고 박 중령이 권하여 결혼을 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과 부대에서는 상사와 부하, 인척으로는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인연을 맺게 됐다. 전쟁이 가고 휴전이 왔다. 4.19가 오고 이승만이 갔다. 그도 당시 혼란스런 시대 상황과 맞물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결정적인 사건은 1960년 9월에 일어났다. 당시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을 가진 뒤 육사 8기 동기생 11명과 함께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국군 정풍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2인자 시대를 열었다. 이 때 JP의 나이 35세였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인생 항로는 순탄치 않았다. 그해 6월 10일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정보부장을 지내고, 공화당 창설을 주도하면서 실세 2인자로 부상했으나 창당 과정에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린다. 그 여파로 1963년 2월 창당을 하루 앞두고 박 의장의 권유에 따라 외유길에 나서야 했다.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의 첫 번째 시작이다.1963년 11월 6대 총선 때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되면서 옛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이 불거져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또다시 외유길에 올랐다. 19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고, 1969년 3선 개헌 때는 반대 의견을 주장하다가 결국 박 전 대통령에 설득되어 개헌 작업에 앞장섰다. 이어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45세의 나이로 총리에 임명, 75년까지 국내 최연소 총리로 활약했다. 총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그는 1979년 10·26 사건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박정희 이후 시대를 이끌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5공 신군부의 5·17조치와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면서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 유랑 생활을 떠났다. 그는 10.26 직후 어느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나를 태평양 한 복판에 내놓고 가셨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비 마다 캐스팅 보트로 영향력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13대 대선에 출마해 득표율 8%로 4위에 그치며 고배를 마셨으나 1988년 13대 총선에서 원내교두보를 확보, 정치 무대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면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윽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3당 합당을 도모하면서 다시 여당으로 변신했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 자리도 확보한다.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도의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정치 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음으로써 다시 위기를 맞는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였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 그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 강등된다. 1995년 민자당을 돌연 탈당, 같은해 소리소문없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킨 데 이어 이듬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권의 지역 정서를 업고 55석의 제3당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한 번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다. 그의 제 2 황금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1997년 두 번째 대선 고지 등정에 나서면서 내각제를 고리로 다시 한 번 킹메이커가 된다. 그해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극적인 DJP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를 이뤄낸 것. 합의문 서명식장에는 ‘단일후보로 정권교체, 내각제로 정치발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그는 여권 성향이던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 정권의 한 축이 됐다. 비록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1998년 2월 총리 임명 뒤 6개월 동안 ’서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기도 했으나 ’DJ대통령, JP 총리‘ 시대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그러나 이후 잇딴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충청권도 그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 정부 파기를 선언했다. 2000년 4·13 총선 대비용이라는 말이 나왔다. 총선 결과는 참패. 17석에 그치며 원구성에 실패하자 다시 DJ와 손잡았다. 당시 17인을 원내교섭단체로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주당으로부터 의원 3인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어 이듬해인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결국 공동 정부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이와 함께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자민련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고 그 해 대선에선 후보도 내지 못하며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기 시작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을 맞아 17석은 급기야 4석으로 줄었다. 단 한 석의 비례대표 의석도 배분받지 못하면서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10선 고지 등정에 실패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합 당시에는 경선 이틀 전 YS와 전격 회동을 갖고 5촌 조카인 박근혜 후보 대신 “경제 살리기를 할 수 있는 유능한 후보가 선출돼야 한다”고 주장,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며 정계 원로로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듯 했으나 뇌경색이 발병하면서 입원하기에 이른다. 이후 건강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아호를 딴 ‘운정회’를 창립하고, 회고록을 내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JP는 ‘3김’ 가운데 가장 오래 현실 정치에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다. 영호남의 대립구도 속에 충청도가 캐스팅 보트를 쥘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한국적 정치 상황과 항상 힘있는 쪽과 손을 잡는 그의 현실감각 어린 처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치적 장수가 가능했다. 기회주의자라는 평가와 함께 소수의 힘을 극대화한 실용주의자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막 내린 ‘3金 시대’…김종필 별세

    막 내린 ‘3金 시대’…김종필 별세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김 전 총리 측 관계자는 “김 전 총리가 오늘 오전 8시 15분쯤 별세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김 전 총리는 이날 오전 중구 청구동 자택에서 순천향병원으로 옮겨진 것으로 전해졌다. 병원 측에 따르면 김 전 총리의 가족들은 이날 오전 119를 통해 김 전 총리를 인근 순천향병원으로 옮겼으며, 김 전 총리는 병원 도착 당시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김 전 총리의 측근은 “한 달 전쯤부터 기력이 떨어졌지만 특별한 병환은 없었다”면서 “빈소가 차려지면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하고 조화나 조의금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측근은 또 “생전에 국립묘지에 가지 않고 검소하게 부인 고 박영옥 여사가 묻혀 있는 고향의 가족묘원에 묻어달라는 말씀이 있었다”면서 “이미 언론 보도가 나왔으니 부고도 따로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측근은 “제가 마지막으로 본 게 지난 21일인데 기력이 다하는 순간까지 기억력 하나는 그대로였다”면서 “과거에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면 오히려 저희보다 기억하는 연도나 순서가 정확했다”고 전했다. 빈소는 평소 진료를 받았던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이로써 김대중·김영삼·김종필 트로이카가 이끌어왔던 ‘3김(金)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지난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김 전 총리는 공주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범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지난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고 그해 치러진 6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 7·8·9·10·13·14·15·16대를 거치며 9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3김 시대’의 한 축인 김 전 총리는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현대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으며, 같은 해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초대부장에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줄곧 영원한 ‘제2인자의 길’을 걸어왔다. 공화당 창당과정에서 증권파동을 비롯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에 휘말리면서 63년 2월 ‘자의반 타의반’ 첫 외유를 떠난 데 이어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의 주역으로서 핵심쟁점이던 대일 청구권 문제와 관련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으로 6·3사태가 일어나자 1964년 또다시 2차 외유길에 올랐다.이후 1971년부터 1975년까지 4년 6개월 간 국무총리를 지내며 승승장구했으나, 1980년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다. 김 전 총리는 1984년 미국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하다 1986년 귀국한 뒤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해다가 낙선했다. 그러나 1988년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기반으로 35석의 국회의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 오뚝이처럼 정치 일선에 복귀했다. 그는 이어 평생의 꿈인 내각제를 고리로 1992년 대선에서 3당 합당과 함께 김영삼(YS) 당시 대선 후보를 지원했으며, 1997년 대선에선 자신이 창당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다시 대권에 도전했으나 선거 막바지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성사시키며 김대중(DJ) 당시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함으로써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함께 국민회의·자민련 공동정권을 탄생시켰다.그러나 내각제 파동과 16대 총선 과정에서 쌓인 공동정권 수장 사이의 앙금은 결국 2001년 9월 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 해임안 가결 및 공조파기로 이어졌다. 김 전 총리는 2004년 17대 총선을 통해 재기를 시도했으나, 자신의 10선 도전 실패와 함께 고작 4명의 의원만 배출하는 참패를 당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김 전 총리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쿠데타 원조에서부터 중앙정보부 창설자, 풍운의 정치인, 영원한 2인자, 경륜의 정치인, 처세의 달인, 로맨티스트 정치인 등 그에 따라붙는 여러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영욕과 부침을 거듭해왔다. 김 전 총리의 서거로 1960년대부터 우리 정치권을 풍미해 온 ‘3김 시대’는 실질적 종언을 고하게 됐다. 유족으로는 아들 진씨, 딸 예리씨 1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포스코 회장 후보 5명 모두 ‘포스코맨’… 전·현직 대결 압축

    포스코 회장 후보 5명 모두 ‘포스코맨’… 전·현직 대결 압축

    포스코 차기 회장 후보군 5명이 모두 전·현직 ‘포스코 맨’들로 채워지면서 차기 회장 선임은 전직과 현직의 대결로 압축됐다.포스코는 22일 임시 이사회를 열어 전날 최고경영자(CEO) 승계카운슬(카운슬)에서 올린 5명의 면접대상자를 승인하는 안건을 처리했다. 포스코는 이사회 직후 그동안 ‘비공개 선임’이라는 정치권 안팎의 비난을 의식해 후보자 동의를 거쳐 최종 후보군 명단을 모두 공개했다. 면접대상자에는 김영상(61) 포스코대우 대표이사 사장, 김진일(65) 전 포스코 대표이사 사장, 오인환(60) 포스코 대표이사 사장, 장인화(63) 포스코 대표이사 사장, 최정우(61) 포스코켐텍 대표이사 사장 등(가나다 순) 5명이 올랐다. 현직 인사 4명과 전직 인사 1명으로 후보 자리를 사실상 전·현직 포스코 사장 출신으로 채워졌다. 김영상 사장은 부산 출신으로 경남고,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으며, 포스코대우 철강본부장·금속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철강1부문장을 맡고 있는 오인환 사장은 권오준 회장 체제에서 실질적인 2인자로 꼽혔다. 지난해 12월 문재인 대통령의 방중 때 중국 경제사절단에 포함되기도 했다. 철강2부문장을 맡고 있는 장인화 사장은 올해 3월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승진하며 권오준 회장 체제에서 오 사장과 함께 실세로 통했다. 권 회장과 마찬가지로 포항산업과학연구원 출신이다. 최정우 사장은 권오준 회장의 컨트롤타워 격인 가치경영센터장을 지냈고, 대우인터내셔널(현 포스코대우) 시절 기획재무본부장을 맡는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전직 인사로는 유일하게 김진일 전 사장이 이름을 올렸다. 김진일 전 사장은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했고, 2014∼2017년 포스코에서 사장과 철강생산본부장을 겸임했다. 2009년에는 포스코 포항제철소장, 2008년에는 베트남프로젝트 추진반장을 맡았다. 앞서 사외이사 5명으로 구성된 카운슬은 지난 4월 23일부터 8차례 회의를 통해 5명을 CEO 후보 자격심사 대상자로 확정했다. 카운슬은 후보의 요구역량을 ‘포스코그룹의 100년을 이끌어 갈 수 있는 혁신적인 리더십’으로 정의하고 글로벌 역량, 혁신 역량, 핵심사업 추진 역량 등 3대 세부역량을 기준으로 적합한 후보 21명을 발굴했으며, 회의를 통해 후보를 압축했다. 카운슬 측은 최근 정치권을 중심으로 제기된 ‘비공개 인선’ 논란과 관련해 “운영기간 중 추측, 음해성 기사와 명단을 공개하지 않은 데 대한 비판이 많았지만 이에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정해진 프로세스에 따라 소신껏 후보선정을 위해 노력해 왔다”고 강조했다. 이날 이사회는 향후 심층면접을 진행할 사외이사 7인 전원으로 구성된 ‘CEO후보추천위원회’(추천위) 운영에 대한 안건도 결의했다. 추천위는 5명의 후보를 대상으로 면접 등 자격 심사를 하고 최종 2인을 선정한다. 23일에는 2배수 후보를 대상으로 심층 면접을 한 차례 더 거친 뒤 1인의 단독 후보를 결정할 예정이다. 포스코는 이르면 오는 25일쯤 이사회를 열어 후보 1인을 확정하고, 다음달 말 임시 주주총회와 이사회에서 회장을 선임할 예정이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김정은 “中과 긴밀 협력”…시진핑 “북중, 새 단계”

    김정은 “中과 긴밀 협력”…시진핑 “북중, 새 단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조선반도(한반도)와 지역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가는 역사적인 여정에서 중국 동지들과 한 참모부에서 긴밀히 협력하고 협동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0일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전날 자신의 중국 방문을 환영하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마련한 연회 연설에서 이같이 밝힌 뒤 “진정한 평화를 수호하기 위하여 책임과 역할을 다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오늘 조중(북중)이 한 집안 식구처럼 고락을 같이하며 진심으로 도와주고 협력하는 모습은 조중 두 당,두 나라 관계가 전통적인 관계를 초월하여 동서고금에 유례가 없는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고 있음을 내외에 뚜렷이 과시하고 있다”고부연했다. 이어 “습근평(시진핑) 동지와 맺은 인연과 정을 더없이 소중히 여기고 조중 친선 관계를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 부단히 승화 발전시키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시 주석도 이에 연회 연설에서 시 주석은 김 위원장의 이번 방중이 “(북중) 두 당과 두 나라 관계의 불패성을 전세계에 과시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김 위원장의) 지난 3월 중국 방문후 중조관계는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서고 쌍방이 이룩한 중요한 공동 합의들은 하나하나 리행되고 있으며 중조친선협조 관계는 새로운 생기와 활력에 넘쳐 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김 위원장이) 조선반도에서 대화와 완화의 흐름을 더욱 공고히 했다”며서 “이에 대하여 기쁜 마음으로 보고 있으며 이를 높이 평가한다”고 언급했다. 조선중앙통신과 조선중앙방송 등 북한 매체들은 이날 오전 7시쯤 “김정은 동지께서 6월 19일부터 20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시게 된다”며 김 위원장의 세 번째 중국 방문 및 전날 시 주석과의 회담·연회 내용을 일제히 보도했다. 연회에 앞서 진행된 북중 정상회담에서는 최근 ‘성과적(성공적)으로’ 진행된 북미정상회담 결과와 이에 대한 양측의 평가와 견해,입장이 교환됐다고 중앙통신은 밝혔다. 한편 북중 정상의 연회는 이번 방중에 동행한 김 위원장의 부인 리설주 여사와 시 주석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 여사가 함께 참석한 가운데 예술공연 등을 곁들여 성대하게 진행됐다. 중국에서는 회담 배석자 이외에 리커창(李克强) 총리와 외교 사령탑인 왕치산(王岐山) 국가부주석,궈성쿤(郭聲琨) 중앙정법위원회 서기 등이 연회에 참석했다. 북측에서는 ‘사실상 2인자’인 최룡해 노동당 부위원장 이외에 박봉주 내각 총리,박태성 당 부위원장,노광철 인민무력상 등이 연회에 추가로 초청됐다. 북한 매체들은 이번 방중 보도에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은 수행자로 언급하지 않아 지난 5월 2차 방중 때와 달리 평양에 남은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백두혈통 남매 없는 北… 최룡해 ‘대리 통치’

    백두혈통 남매 없는 北… 최룡해 ‘대리 통치’

    체제 단속·내부 단속 자신 방증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10일 싱가포르행에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동행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이른바 ‘백두혈통’인 김 위원장과 김여정 남매가 동시에 북한을 비우게 됐다.김여정은 지난달 7일 중국 다롄에서 열린 북·중 정상회담 때도 김 위원장과 동행하며 북한을 비운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사전에 알려지지 않은 외국 방문이었다. 이번 싱가포르 방문처럼 사전에 일정이 공개된 상태에서 남매가 동시에 북한을 비운 것은 처음이다. 지난 4월 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때 남매가 군사분계선을 살짝 넘어왔을 때도 당일에 일정이 공개되긴 했지만, 그때는 매우 짧은 거리여서 북한을 비웠다고 보기 힘들다. 이번 싱가포르행의 경우 사전에 공개된 일정임에도 남매가 동시에 북한을 비운 것은 그만큼 김 위원장이 체제 통제나 내부 단속에 자신이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다만 김 위원장은 에어차이나 소속 보잉747 항공기를 타고 싱가포르에 온 반면 김여정은 김 위원장의 전용기인 ‘참매 1호’를 타고 왔다. 항공기 사고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남매가 같은 비행기를 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남매가 동시에 북한을 비움에 따라 북한의 권력 공백은 실질적 2인자인 최룡해 당 부위원장이 평양에 남아 맡을 것으로 관측된다. 그간 최 부위원장은 김 위원장이 평양을 비우는 동안 사실상 ‘대리 통치’ 역할을 수행해 왔다. 최 부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의 최측근인 최현 인민무력부장의 아들로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전부터 김 위원장을 보좌하는 역할로 키워져 온 인물이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백두혈통 남매 없는 北… 최룡해 ‘대리 통치’

    백두혈통 남매 없는 北… 최룡해 ‘대리 통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10일 싱가포르행에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동행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이른바 ‘백두혈통’인 김 위원장과 김여정 남매가 동시에 북한을 비우게 됐다.김여정은 지난달 7일 중국 다롄에서 열린 북·중 정상회담 때도 김 위원장과 동행하며 북한을 비운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사전에 알려지지 않은 외국 방문이었다. 이번 싱가포르 방문처럼 사전에 일정이 공개된 상태에서 남매가 동시에 북한을 비운 것은 처음이다. 지난 4월 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때 남매가 군사분계선을 살짝 넘어왔을 때도 당일에 일정이 공개되긴 했지만, 그때는 매우 짧은 거리여서 북한을 비웠다고 보기 힘들다.  이번 싱가포르행의 경우 사전에 공개된 일정임에도 남매가 동시에 북한을 비운 것은 그만큼 김 위원장이 체제 통제나 내부 단속에 자신이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다만 김 위원장은 에어차이나 소속 보잉747 항공기를 타고 싱가포르에 온 반면 김여정은 김 위원장의 전용기인 ‘참매 1호’를 타고 왔다. 항공기 사고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남매가 같은 비행기를 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남매가 동시에 북한을 비움에 따라 북한의 권력 공백은 실질적 2인자인 최룡해 당 부위원장이 평양에 남아 맡을 것으로 관측된다. 그간 최 부위원장은 김 위원장이 평양을 비우는 동안 사실상 ‘대리 통치’ 역할을 수행해 왔다.  최 부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의 최측근인 최현 인민무력부장의 아들로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전부터 김 위원장을 보좌하는 역할로 키워져 온 인물이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시진핑·푸틴 ‘反트럼프 연대’ 맺는다

    시진핑·푸틴 ‘反트럼프 연대’ 맺는다

    중·러 회담서 美 정책 등 논의할 듯지난해만 다섯 차례 정상회담을 열며 시진핑(習近平·왼쪽) 중국 국가주석과 남다른 ‘브로맨스’를 과시한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이 8~10일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국빈 방문한다. 지난 3월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네 번째 임기를 시작한 푸틴 대통령의 첫 해외 방문이다. 칭다오에서 열리는 이번 18차 SCO는 2001년 중국과 러시아 등이 설립한 지역 안보 모임으로, 지난해 인도 가입으로 회원국이 8개 국가로 늘었다. 이번 중국·러시아 정상회담의 주제는 ‘반트럼프 연대’가 될 것이란 게 중국 언론의 전망이다. 리싱(李星) 베이징 사범대 국제관계학 교수는 7일 관영 글로벌타임스를 통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에 맞서는 SCO의 세계적 가치가 날로 강화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적대적이고 변덕스러운 외교 정책 탓에 중국과 러시아 정상은 지역 안보를 위해 자연스럽게 관계를 강화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운동에 러시아가 개입했다는 의혹에 대한 조사와 중·미 무역전쟁, 남중국해를 둘러싼 지정학적 문제, 북·미 정상회담으로 야기된 중·미의 껄끄러운 관계 등 어느 때보다 서로 긴밀한 협력이 필요한 것으로 분석된다. 시 주석은 2012년 취임 이후 모스크바를 가장 많이 방문했으며 그동안 이뤄진 중국·러시아 정상회담 횟수는 모두 25차례나 된다. 푸틴 대통령은 방중을 앞두고 중국 중앙(CC)TV와 가진 인터뷰에서 “2013년 발리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정상회담에서 시 주석과 소시지를 잘라 보드카와 함께 먹고 마시며 나의 61번째 생일을 축하했다”면서 “우리는 부친들의 세계 2차 대전 경험을 이야기했는데 어떤 정상과도 시 주석처럼 신뢰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타스통신에 따르면 중국은 러시아의 최대 무역 상대국으로 지난해 상호 무역 규모는 전년보다 31.5% 증가한 870억 달러(약 93조원)에 달했다. 중국 지도부 내 2인자인 왕치산(王岐山) 국가부주석도 외교 정책 사령탑으로 나선 후 첫 해외 출장지가 지난달 다녀온 러시아였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평양 비우는 김정은… 최룡해·김여정 ‘권력공백’ 단속하나

    평양 비우는 김정은… 최룡해·김여정 ‘권력공백’ 단속하나

    崔, 남북회담 때 내부통제 맡아 ‘백두혈통’ 김여정, 대리자 역할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확정됨에 따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수일 동안 북한을 떠나 있게 됐다. 북한 지도자가 사전에 공개된 일정으로 평양을 비우는 것은 처음이어서 정변 발생 가능성 등 권력 공백 우려를 어떻게 해소할지에 관심이 쏠린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실질적 2인자인 최룡해 국무위원회 부위원장이나 김 국무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남아 단속을 할 것으로 예측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3일 “4·27, 5·26 남북 정상회담과 두 차례 북·중 정상회담을 보면 최룡해와 김여정 둘 중의 한 사람은 남을 것”이라고 전망했다.최 부위원장은 지난 3월 김 국무위원장의 비공식 중국 베이징 방문에는 동행했지만 이후 4·27, 5·26 남북 정상회담과 지난달 7일 중국 랴오닝성 다롄 북·중 정상회담에는 동행하지 않았다. 특히 김 국무위원장이 평양을 비우는 사이 내부 조직 통제와 실질적 영향력 행사는 최 부위원장이 맡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 평가다. 최 부위원장은 지난해 10월 당 전원회의에서 권력 2인자 자리인 당 조직지도부장에 임명됐다. 당 조직지도부는 당 중심의 북한 체제에서 인사와 검열권 등을 행사하는 핵심 권력기관이다. 최 부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의 최측근인 최현 인민무력부장의 아들로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전부터 김 국무위원장을 보좌하는 역할로 키워졌다. 김정은 집권 이후 진행된 당 중심의 군부 개혁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최근 인민군 총정치국장에 임명된 김수길도 최 부위원장 측 인사로 알려진 만큼 김 국무위원장의 부재 시에도 군부 통제가 원활할 것이라는 평가다. 김 국무위원장은 판문점 남측에서 열린 4·27 남북 정상회담과 지난달 중국 다롄 방문 당시 최 부위원장을 공식 수행원으로 대동하지 않고 평양을 맡길 정도로 그를 신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최 부위원장이 지난 3월 김 국무위원장의 베이징 비공개 방문 시 동행했을 때는 김 국무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제1부부장이 수행원 명단에 포함되지 않고 평양에 남았다. 따라서 ‘백두혈통’인 김 제1부부장이 이번 북·미 정상회담 기간 북한에 남아 김 국무위원장의 역할을 대리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헌법상의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박봉주 내각 총리 등도 북한에 남을 것으로 예측된다. 일각에선 북·미 정상회담을 상징적으로 지지한다는 의미에서 군부 인사의 대동 가능성도 제기된다. 북·미 관계를 담당해 온 김영철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과 외교 분야를 담당하는 리수용 당 중앙위원회 국제담당 부위원장, 리용호 외무상, 최선희 외무성 부상, 김창선 국무위원회 부장(서기실장) 등이 싱가포르행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김영철의 양복 차림, 18년 전 군복 입었던 조명록과 왜 달랐나

    김영철의 양복 차림, 18년 전 군복 입었던 조명록과 왜 달랐나

    김정은 시대에 최초로 미국 대통령을 만난 북한 고위급 인사의 모습은 18년 전과 사뭇 달랐다.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예방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은 흰색 와이셔츠에 남색 넥타이를 맨 어두운 색 양복 정장 차림이었다. 가슴에는 김일성·김정일 배지를 달았다. 이날 백악관에 도착해 존 켈리 비서실장의 안내를 받은 김영철 부위원장은 백악관 집무동으로 들어갈 때 다소 긴장된 표정이었다. 그러나 약 90분간 면담을 마치고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나올 때에는 이따금씩 미소를 지으며 손짓까지 해가며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다. 북한 최고위급 인사가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0년 10월 10일 조명록 당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군 총정치국장(인민군 차수)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서 백악관을 방문, 빌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다. 그러나 그 풍경은 이번 만남과 크게 달랐다. 조명록 차수는 인민군 차수의 ‘왕별’ 계급장과 함께 훈장이 주렁주렁 가득 달린 군복을 입고 나타났다. 백악관 예장에 앞서 국무부에서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만났을 때에는 양복을 입었다가 이후 다시 갈아입은 것이기 때문에 그의 군복 차림은 의도적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었다.당시 웬디 셔먼 대북정책조정관은 브리핑에서 그의 군복 차림에 대해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에 외무성 등 민간 측뿐만 아니라 군부도 함께하고 있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와 북한 주민, 그리고 (동북아) 지역에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나름의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당시 일각에서는 조명록 차수의 군복 차림이 미국에 대한 북한의 호전성을 의도적으로 보인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그보다는 김정일 정권이 근본적으로 군사우선주의 통치 철학인 ‘선군 정치’를 내세웠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그러한 해석의 연장선에서 보면 김영철 부위원장의 양복 차림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집권 뒤 군부 중심의 통치에서 당 중심의 국가 운용 시스템을 복원해 온 것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김정일 체제에서 사실상 군부에 종속돼 하위 기관으로 전락했던 노동당의 역할을 복원시키고 군부에 대한 당의 통제 강화를 추진해왔다.트럼프 대통령은 면담 뒤 기자들에게 김영철 부위원장을 ‘북한에서 두번째로 힘 있는 사람’(second most powerful man in North Korea)으로 지칭했다. 18년 만에 미국을 찾은 북한의 ‘2인자’가 군 인사에서 당 인사로 바뀐 상징적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김영철 부위원장 역시 총참모부 정찰총국장 등을 지낸 정통 군 출신이다. 그렇지만 현재는 노동당 대남담당 부위원장으로서 한반도 관계 전반에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미국도 이번 김영철 부위원장의 방미 관련 브리핑에서 그를 ‘(노동당) 부위원장’(Vice Chairman)으로 일관되게 지칭하고 있다. 이날 미국 측이 김영철 부위원장에 대해 켈리 비서실장이 영접을 나오고, 트럼프 대통령이 차량 탑승까지 배웅까지 하는 등 각별한 대우를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트럼프, 6·12 북미정상회담 공식화…종전 선언 가능성도 언급

    트럼프, 6·12 북미정상회담 공식화…종전 선언 가능성도 언급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오는 12일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공식화했다.이로써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 전격 취소 선언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숨가쁘게 돌아갔던 한반도 정세는 6·12 북미정상회담을 향한 본궤도에 오르게 됐다. 특히 김영철 북한 노동당 대남담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을 만나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받은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전쟁 종전 문제까지 언급하면서, 이번 회담에서 남북미 정상의 종전선언까지 나오게 될지 주목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1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김영철 부위원장의 예방을 받고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전달받은 뒤 기자들과 만나 “오는 12일 김정은 위원장과 만날 것”이라며 “(회담은) 매우 성공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써 6·12 북미정상회담은 사실상 최종적으로 공식화됐다. 북미가 뉴욕 고위급 회담, 판문점·싱가포르 실무접촉을 통해 최대 쟁점인 북한 비핵화와 체제 안전보장에 대한 큰 틀에서의 의견 접근을 본 것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6월 12일 빅딜이 시작될 것”이라면서도 “이날 서명을 하진 않을 것이며 과정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6월 12일 회담에서 모든 논의의 결론을 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향후 북한과 회담 내지 논의를 계속 이어나갈 계획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어 “우리는 시간을 갖고 천천히 갈 수도, 빨리 갈 수도 있다”면서 “하지만 북한은 무언가 일어나길 희망하고 있고, 그것을 만들어낸다면 대단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싱가포르에서 12일에 시작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히 “나는 (회담이) 한번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한번에 (합의가) 성사된다고 하지 않았다”면서도 “결국에는 매우 긍정적인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즉 6·12 회담에서 최종 결론에 이르지 않더라도 추가 회담을 열어 북한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북미정상회담에 앞서 종전 논의가 있을 것”이라면서 회담에서 종전 선언이 나올 수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종전 문제를 다루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따라 북미정상회담에서 종전 선언을 추진하기 위한 남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도 높아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종전 선언 전망을 묻는 기자에게 “우리는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면서 “그럴 수 있다. 지켜보자”고 여러 차례 답했다. 이어 “한국전쟁의 종전 선언은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일”이라면서 “우리가 70년이 된 한국전쟁의 종전을 논의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기자들에게 반문하기도 했다. 이날 김정은 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예방한 김영철 부위원장은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하고 약 90분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하고 체제 안전 보장과 경제적 지원 의사를 여러 차례 다시 언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에 전념하고 있다고 믿는다”면서 “북한에 대한 제재를 해제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최대의 압박’(maximum pressure)이라는 말이 더는 사용되지 않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특히 북미 간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새로운 제재를 북한에 부과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체제 보장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들의 안전을 확실히 할 것이며 (비핵화 등이) 끝났을 때 안전하게 할 것”이라면서 “북한은 위대한 나라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은 나라의 발전을 바라고 있다”면서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며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러나 “우리는 북한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로, 원조에 많은 돈을 쓰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면서 “이웃 국가인 한국, 중국, 일본이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영철 부위원장과의 대화에 대해서는 “친서만 전달받는 자리였는데 북한의 2인자와 2시간짜리 대화의 자리가 됐다”면서 “대북 제재 등 많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북한 측의 관심 표명으로 대북 제재에 대해서는 대화를 나눴으나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북한 인권 문제는 북미정상회담에서 다뤄질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또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에 대해서 “아직 읽진 않았지만, 매우 좋고 흥미롭다”면서 “조만간 내용을 공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2000년 ‘김정일 특사’ 조명록 방미… 클린턴 대통령 만나 북·미수교 논의

    2000년 ‘김정일 특사’ 조명록 방미… 클린턴 대통령 만나 북·미수교 논의

    북한 김영철 노동당 대남담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29일 중국 베이징을 거쳐 미국 뉴욕행 비행기에 30일 탑승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과거 북한 고위급 인사의 미국 방문 내력에 관심이 쏠린다.이번 김 부위원장의 방미는 역대 두 번째 북한 고위급 인사의 미국 방문이다. 지금까지는 2000년 조명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게 유일하다. 18년 전인 2000년 9월 당시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밀레니엄 정상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북한으로서는 사상 첫 국가원수급 방미로 뉴욕에서 일본, 스웨덴과의 정상회담 일정까지 잡아 놨다. 그렇지만 정작 김 상임위원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뉴욕으로 가는 아메리칸항공(AA)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으면서 방미는 없었던 일이 됐다. 표면적 이유는 김 상임위원장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AA 측의 신체 보안검색을 거부한 것이었다. 실제로 북한은 당시 미국 정부와 AA 사에 사과를 강력히 요구했다. 통상 국가원수급에 대해 보안검색을 하지 않는 관례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 상임위원장의 방미가 불발된 지 한 달 뒤인 그해 10월 북한 권력 2인자인 조 부위원장이 미국 수도인 워싱턴을 방문하면서 최고위급 인사의 방미가 이뤄졌다. 조 부위원장의 방미에는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동행했다. 조 부위원장은 유나이티드항공(UA)을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워싱턴 덜레스 공항에 도착했다. 미국은 이번엔 항공사 측에 협조를 요청해 조 부위원장에 대해 이민·세관·검역 절차를 생략하고 특별라인을 통해 보안 검색대를 신속히 통과토록 했다. 조 부위원장은 미국에서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물론 빌 클린턴 대통령과도 만나 북·미 수교 등을 논의했다. 당시 인민군 차수였던 조 부위원장은 인민군 정복차림으로 클린턴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만나 북·미 간 상호 주권 인정과 적대관계 청산,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추진 등을 뼈대로 하는 ‘북·미 코뮈니케(공동성명)’를 발표했다. 이어 같은 달 올브라이트 장관이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까지 논의했으나 바로 다음달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가 승리하면서 북·미 관계는 급랭했다.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 노조 와해 주도 의혹 삼성 간부 피의자 소환

    검찰이 삼성전자서비스 고위 임원을 잇달아 소환하면서 삼성노조 와해 공작 의혹 규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검찰은 삼성전자와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등 ‘윗선’의 지시가 있었다고 의심하고 수사망을 넓히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공공형사수사부(부장 김성훈)는 8일 최평석 삼성전자서비스 전무와 영등포센터 송모 대표를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조사했다. 최 전무는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직원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인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설립된 2013년부터 지금까지 사내 이사로 근무하며 종합상황실장 등을 지냈다. 사측 노동대응 조직인 종합상황실은 노조 와해 공작으로 지목된 ‘그린화’ 작업을 주도해 온 것으로 검찰은 파악하고 있다. 검찰은 이날 최 전무를 상대로 그린화 작업 도입 경위와 배경, 지시 등 관여 정도 등을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최 전무는 사내 2인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 전무는 지난달 17일 지회 측과 함께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직원 8000여명의 직접 고용을 합의한 바 있다. 당시 일각에선 검찰 수사가 한창 진행 중인 가운데 갑작스럽게 발표된 합의안의 진정성에 의문을 품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앞서 “삼성전자서비스에서 갑자기 직고용을 보장하겠다고 선언한 배경에는,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검찰은 윤모 삼성전자서비스 상무에 대해서도 ‘그린화’ 작업을 실시하고 기획 폐업을 지시한 혐의 등으로 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조직적 범죄인 이 사건 범행에서 피의자가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 수사 진행 경과 등에 비춰 구속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기각했다. 윤 상무는 기획 폐업을 한 대가로 해운대센터장에게 억대 불법 금품을 건넨 혐의도 있다. 검찰은 삼성전자서비스를 넘어 원청 회사인 삼성전자와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그리고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에서 노조 와해 공작에 관여한 정황도 포착해 조만간 임원급 관계자 조사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나상현 기자 greentea@seoul.co.kr
  • [문화마당] 슈퍼맨보다 스파이더맨/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문화마당] 슈퍼맨보다 스파이더맨/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조지프 퓰리처(퓰리처상을 만든 언론인)는 자신이 발행한 신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조지 럭스의 만화 ‘옐로 키드’를 언론 재벌인 윌리엄 허스트의 신문에 빼앗기자 다른 작가를 기용해 ‘옐로 키드’의 연재를 이어 간다. 같은 제목의 만화가 두 개의 신문에서 동시에 연재된 것이다. ‘옐로 저널리즘’의 효시가 된 촌극이 말해 주듯 일간지에 인쇄된 만화의 영향력은 대중들이 ‘만화를 보기 위해 신문을 구독한다’는 말이 나올 만큼 막강했다. 다만 “상업주의의 도구로서 출발했기에 창작자들이 발전의 방향을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미국에서의) 만화는 주류 예술의 언저리에도 끼지 못했다”고 김기홍 교수는 ‘만화로 보는 미국’에 적고 있다. 만화가 독립적인 매체로서 자리매김한 것은 DC 코믹스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디텍티브 코믹스’ 앞으로 ‘빨간 팬티를 입은 히어로’가 도착하면서부터다. 때는 1938년, 대공항으로 무너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뉴딜 정책이 실시된 이후 미국인들은 가혹한 생활고를 견디며 고투하는 중이었다. 거기에 파렴치한 범죄자와 탐욕스러운 자본가를 ‘정의의 이름으로’ 단죄하는 슈퍼맨이 나타났으니 대중들의 환호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간다. 새로운 시대의 영웅을 만나기 위해 독자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어젖혔다. 이에 힘입어 어둠의 기사로 불리는 배트맨, 우주 경찰 그린랜턴, 아마존 부족의 여왕이었던 원더우먼이 차례로 등장한다. 하지만 미국 내 청소년 범죄의 증가가 만화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대대적인 검열이 시작됐고 만화산업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회사가 마블이었다. 그동안 2인자로 시류에 편승해 온 마블은 ‘저스티스 리그’(슈퍼맨, 배트맨, 그린 랜턴, 원더우먼 등이 힘을 합쳐 싸우는 슈퍼 히어로 팀)에 버금가는 떼거리 슈퍼 영웅들의 집합체 ‘판타스틱 4’를 창설한다. 이어서 감마선에 노출되는 바람에 화가 나면 괴력의 녹색 거인으로 변신하는 헐크, 방사능 거미에 물려 초인적인 힘을 갖게 된 스파이더맨, 방탕한 재벌 2세로 살다가 자신이 개발한 무기가 어떻게 쓰이는지 목도한 후 개과천선한 아이언맨이 등장하며 마블은 전성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 DC의 캐릭터가 힘을 잃어 간 그 시기에 마블의 캐릭터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까닭은 전자가 말 그대로 슈퍼 히어로였던 데 반해 후자는 안티 히어로(영화나 소설에서 비영웅적이고 나약하고 소외된 인물로 그려지는 주인공)였기 때문이다. 즉 무결점의 전지전능하고 바른생활 사나이였던 슈퍼맨보다 악당들과 싸울 때 이외에는 어딘가 모자라 보이고 교우관계에도 꽤나 문제가 있었던 스파이더맨 쪽이 관객들의 지지를 받은 것이다. 최근 ‘어벤져스: 인피니트 워’의 개봉을 맞이하여 케이블 채널에서 날이면 날마다 틀어 주는 마블 영화들을 주야장천 관람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다들 남 잘난 꼴 보기 싫어하는 소셜 미디어 채널에서야말로 ‘나는 정의롭다’, ‘정의의 이름으로 진실을 요구한다’는 식의 DC 캐릭터적 허세 마인드보다는 ‘나에게는 뭔가 문제(geek)가 있어’, ‘나는 정말 소심(nerd)하구나’라는 식의 마블 캐릭터적 겸손 마인드를 갖는 것이 세계 평화에 일말의 힘이나마 보태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바야흐로 세계 평화에 동참하기 좋을 때 아닌가.
  • ‘그림자 수행’ 김여정, 실질적 권력 2인자 재확인

    존재감 과시… 선전선동부 소속 “南 스타” 文 발언에 얼굴 빨개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은 27일 오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근거리에서 시종일관 ‘그림자 수행’을 펼쳤다. 정상회담에서도 김 위원장의 왼편에 자리했다. 그가 ‘비서실장’ 역할 이상으로 국정 전반을 보좌하는 실질적인 북의 ‘2인자’임을 재확인한 장면이었다. 김 제1부부장은 이날 김 위원장이 남측 땅을 밟은 순간부터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는 김 위원장이 화동으로부터 받은 꽃다발을 건네받고 사열 행사에서도 다른 수행원들과 떨어져 약 2m 거리에서 김 위원장을 따라 걸었다. 방명록을 쓰기 위해 판문점 평화의집에 도착한 김 위원장에게 펜을 건넨 이도 그였다. 김 제1부부장은 파란색 펜케이스를 꺼내 펜을 건넸고 서명을 마치자 펜을 다시 건네받았다. 김 제1부부장은 남북 양측에서 각각 참모 2명만 배석해 진행한 오전 회담에도 자리했다. 그는 김영철 노동당 대남담당 부위원장과 함께 배석자로 참석해 김 위원장의 발언을 파란 수첩에 받아 적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그를 보며 웃거나 농담을 던졌다. 문재인 대통령도 회담 전 환담 자리에서 김 제1부부장을 가리켜 “남쪽에서는 아주 스타가 돼 있다”고 말했고 이 발언으로 김 제1부부장의 얼굴이 빨개지기도 했다고 청와대는 전했다. 오후 식수 행사에서도 그는 하얀 장갑과 행사에 쓰일 물을 미리 챙겨 김 위원장에게 건넸다. 김 제1부부장은 낮은 굽의 리본 장식이 달린 검은색 구두를 신고 회색 투피스 치마 정장 차림을 했다. 왼손엔 가죽 소재의 검은색 핸드백과 문서케이스를 들었다. 옅은 화장에 귀걸이 등 액세서리는 하지 않았다. 머리는 반묶음을 했고 검은색 핀을 착용해 수수하면서도 단정한 느낌을 연출했다. 지난 2월 방남 당시 그의 임신설이 불거졌으나 배가 나온 듯한 모습은 관찰되지 않았다. 김 제1부부장은 당 선전선동부에 근무하는 것으로 이날 확인됐다. 김 위원장은 이날 “김여정 부부장 부서에서 ‘만리마 속도전’이란 말을 만들었는데 남과 북의 통일 속도로 삼자”고 말해 그가 당 선전선동부 소속 제1부부장임을 밝혔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 김여정, 타이트한 회색 정장입고 김정은 보필…‘임신설 확인안돼’

    김여정, 타이트한 회색 정장입고 김정은 보필…‘임신설 확인안돼’

    김여정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27일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오빠인 김정은 위원장의 비서실장 역할을 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이날 오전 9시29분쯤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첫 대면한 뒤, 오전 9시32분쯤 레드카펫이 깔린 자유의집 오른쪽 도로를 통해 자유의집 주차장에 마련된 공식 환영식장까지 약 130m를 이동했다. 문 대통령의 손을 맞잡은 김여정은 “반갑습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김여정은 지난 평창 겨울올림픽 개회식 당시 북측 고위급 대표단으로 방남, 문 대통령에게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하며 실질적 2인자임을 과시했다. 이날도 김여정은 행열 바깥 쪽에서 함께 걸었고 김 위원장이 방명록을 기록할 때 옆에서 펜을 건넸다. 군사분계점에서부터 서류가방을 들고와 회담 테이블에서 파일을 꺼내 김정은 앞에 놓았다. 모두 발언 내내 내용을 꼼꼼히 메모했다. 타이트한 회색 정장을 입었고 두 달 전과 달리 배가 나온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때문에 김여정의 현재 모습을 본 이들 사이에서는 “올림픽 후 아이를 출산하고 왔을 것” “지난 방남 때 이미 출산한 상태였고, 아이를 낳은 직후라 부어있었을 것” 등 다양한 의견이 오가고 있다.지난 2월 21일 일부 매체는 “지난 2월 9일부터 2박3일간의 방남 과정에서 배가 불러 있는 모습이 여러 차례 포착됐다.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는 모습이 임신부의 행동과 비슷하다는 관측도 나왔다”고 보도했다. 이어 고위급 탈북자의 증언이라며 “김정은의 집사인 김창선 서기실장이 대표단에 동행한 것은 김여정이 임신해 특별히 챙길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김여정이 둘째를 임신했다는 보도와 관련해 “(김여정 부부장의) 신상과 관련해서는 정부에서 알고 있는 바가 없다”고 확인했다. 과거 국정원은 김여정의 남편이 김일성대학 동기일 것으로 추정했다. 탈북자 단체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는 최근 “김여정의 남편이 당 하급 관리의 자녀로 김일성대학 출신 우인학이라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어 김정은이 ‘제2의 장성택’ 출현을 막기 위해 김여정의 남편을 정치적 배경이 없는 평범한 집안의 인물로 선택했을 수 있다는 관측이 전해진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정은 수행단 누가 왔나 보니…김여정·김영남·리수용 등 동행

    김정은 수행단 누가 왔나 보니…김여정·김영남·리수용 등 동행

    ‘2018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27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방남길에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 9명의 수행원이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동행했다.수행단에는 김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을 비롯해 김영철·최휘·리수용 당중앙위 부위원장, 리영수 총참모장, 박영식 인민무력상, 리용호 외무상,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이 포함됐다. 헌법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앞서 2000년과 2007년 정상회담 당시에도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면담 또는 회담한 바 있다. 김여정 제1부부장은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 당시 북측 고위급 대표단으로 방남, 문 대통령에게 김 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하며 실질적 2인자임을 과시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베일에 싸인 리설주 동행… 김여정에 힘 실어주기?

    베일에 싸인 리설주 동행… 김여정에 힘 실어주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부인 리설주 여사의 27일 남북 정상회담 동행 여부가 회담 전날인 26일까지도 결정되지 않은 배경에 관심이 집중된다. 북한이 ‘깜짝 등장’을 준비하고 있다는 해석과 회담에서 공식 수행원으로 참석하는 김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에게 영부인 역할과 실권 등을 모두 맡기기 위해서라는 분석 등이 나온다.남북 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위원장인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날 경기 고양시 킨텍스의 남북 정상회담 메인프레스센터(MPC)에서 브리핑을 열고 “아직 협의가 완료되지 않아 리 여사의 동행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저희로서는 (27일) 오후에 혹은 만찬에 참석할 수 있기를 많이 기대하고 있지만, 아직 확정적으로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최근 북한 매체는 ‘존경하는 리설주 여사’라고 부르며 그를 퍼스트레이디로 부각시키고 있다. 김 위원장은 ‘1호 열차’를 타고 간 지난 3월 중국 비공식 방문에 리 여사와 동행했다. 김 위원장 부부가 주요 외교 현장에 함께하는 이유를 북한이 ‘정상국가’라는 이미지를 강조하려는 의도로 해석하기도 한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부인이 외교 행사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리 여사가 처음이다. 리 여사의 동행 여부가 확정되지 않은 배경에 대해 홍현익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깜짝 등장으로 화제성을 더 모으기 위한 북한의 전략”이라고 평가하며 “남북 정상의 오전 첫 만남에 리 여사가 동행할지 확실치 않지만, 환영 만찬에는 참석할 것 같다”고 분석했다. 홍순직 국민대 한반도미래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리 여사보다는 북한에서 실질적 2인자 역할을 하는 김 제1부부장을 주목시키기 위해 공식적으로 발표를 안 한 것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GM 본사, 10년 이상 한국에 체류…자산 처분 거부권도 수용 ‘급물살’

    “관철 안 되면 정부 지원 불가능 GM도 상당 부분 수긍 분위기” 한국GM 새달초 본계약 가능성 GM 본사가 정부와 산업은행이 한국GM에 대한 지원 선결 요건으로 제시한 10년 이상 한국시장 체류와 자산 처분 등에 대한 거부(비토)권 조항 등을 수용할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GM과 산은의 한국GM 정상화 협상이 늦어도 27일까지 가계약 형태로 이뤄지고, 다음달 초 본계약 체결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25일 금융권 등에 따르면 GM은 정부·산은이 지원 조건으로 제시한 ▲10년 이상 체류(지분 매각 제한) ▲한국GM 총자산의 20% 초과 자산의 처분·양도 등에 대한 비토권 요구 등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와 산은은 GM이 지원금만 받고 한국 시장에서 철수하는 ‘먹튀’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요건을 반드시 충족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직간접적 일자리 15만 6000개가 달린 만큼 최소 10년 이상은 정상적인 경영이 이뤄져야 지원이 가능하다는 논리다. 한 정부 관계자는 “두 사항은 협의 대상이 아니라 관철되지 않으면 정부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전제조건”이라면서 “이에 대해 GM 측도 상당 부분 수긍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GM은 신차 2종을 배정하겠다고 밝힌 데다 정부에 제출한 외국인투자지역 지정 신청서에 앞으로 10년(2018∼2027년)간의 생산 및 사업계획을 담은 만큼 10년 이상 체류 조건과 비토권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다만 GM은 한국GM에 대한 차등감자에 대해서는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고, 정부와 산은도 이 카드는 접은 분위기다. 정부와 산은은 당초 28억 달러로 설정했던 신규자금 투입규모를 늘리는 방안도 GM과 협의 중이다. 이 경우 정부 몫 신규자금 투입 금액도 기존 5000억원에서 6000억~8000억원 수준으로 늘어날 수 있다. GM 측은 한국시간으로 26일 저녁 미국에서 진행되는 1분기 기업설명회(IR) 콘퍼런스콜에 앞서 협상을 마무리 짓기를 원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관련 업계에 따르면 GM의 2인자인 댄 암만 총괄사장이 26일 방한한다. 암만 사장은 더불어민주당 한국GM대책특별위원회와 면담을 가진 뒤 산은 및 정부 관계자들과도 만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 장은석 기자 esjang@seoul.co.kr
  • [고든 정의 TECH+] 인텔 아성에 도전하는 2세대 라이젠을 이해하는 4가지 키워드

    [고든 정의 TECH+] 인텔 아성에 도전하는 2세대 라이젠을 이해하는 4가지 키워드

    AMD는 CPU 시장에서 인텔의 그림자에 가린 2인자였지만, 몇 번에 걸쳐 인텔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던 시기가 있습니다. 애슬론 프로세서로 1GHz의 문턱을 먼저 넘어선 시기나 최초의 대중적인 64비트 CPU와 듀얼코어 CPU를 먼저 출시할 때가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인텔은 개선된 아키텍처를 지닌 코어 프로세서 시리즈로 다시 시장을 석권하며 x86 프로세서 부분에서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독점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인텔의 경쟁자는 퀄컴이나 삼성처럼 x86이 아닌 ARM 기반 모바일 프로세서를 생산하는 제조사라는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반면 AMD는 언제 회사가 파산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회사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킨 건 지난해에 등장한 라이젠 CPU입니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8코어, 6코어, 4코어 CPU를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소비자들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회사의 매출과 수익 모두 개선되었습니다. 이 기세를 몰아 16코어의 전문가 CPU와 32코어의 서버 CPU를 연속으로 출시하면서 CPU 시장에 사라졌던 경쟁이 되살아났습니다. 오랜 세월 4코어 CPU를 일반 사용자용으로 팔아온 인텔이 갑자기 6코어 CPU를 내놓은 것이 대표적 사례일 것입니다. AMD 역시 2세대 라이젠을 준비하면서 대응책을 마련했습니다. 1세대 제품 이후 1년 만에 출시된 2000시리즈 라이젠 CPU(코드명 피나클 릿지)를 4가지 키워드로 살펴봅니다. - 성능 신형 CPU는 당연히 이전 제품보다 더 빨라집니다. 특히 IT 분야는 발전이 빨라 과거에는 2년에 두 배 이상 성능이 좋아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CPU 성능 향상은 점차 느려지고 있습니다. 반도체 제조 기술이 물리적 한계에 가까워지고 프로세서 구조가 매우 복잡해짐에 따라 새로 나온 CPU라고 해서 이전 제품보다 획기적으로 빨라지는 일은 거의 기대하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2세대 라이젠 역시 마찬가지라서 라이젠 1800X 대비 라이젠 2700X의 성능은 평균 10% 정도 좋아졌습니다. 최근 x86 CPU의 성능 향상 폭을 생각하면 코어 숫자가 늘어나지 않는 이상 이 정도가 평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0%가 무의미한 수준은 아닙니다. 공개된 벤치마크 결과를 보면 과거 약점이라고 여겨졌던 게임 성능도 좋아졌고 강점이었던 멀티 쓰레드 성능은 더 좋아졌습니다. 특히 게임 성능이 좋아진 것은 동작 클럭이 높아지고 캐시 및 메모리 레이턴시가 줄어든 덕으로 보입니다. 물론 아직도 게임이 주목적이라면 인텔 CPU가 더 좋은 선택일 수 있지만, 게임 이외에 다양한 목적으로 고성능 CPU를 원하는 소비자에게 라이젠 2000시리즈는 합리적인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 가격 라이젠 1800X는 499달러에 출시되었습니다. 따라서 같은 급의 신제품인 2700X 역시 비슷한 가격에 출시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AMD는 329달러는 훨씬 낮은 가격에 출시되었습니다. 같은 8코어인데 클럭이 조금 낮은 2700은 299달러, 6코어인 2600X와 2600은 229달러, 199달러입니다. (사진) 이렇게 낮은 가격으로 출시가 가능한 이유는 실제 프로세서를 제조하는 파운드리 업체인 글로벌 파운드리의 제조 단가가 많이 내려간 덕분으로 보입니다. 2세대 라이젠은 글로벌 파운드리의 12LP 공정으로 제조되는데 기존의 14LPP 공정 대비 15% 정도 회로 밀도를 높일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한 번에 제조하는 프로세서의 숫자를 늘려 가격을 낮출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2세대 라이젠의 가격은 국내에서는 약간 높지만, 멀지 않아 가격이 안정화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 호환성 완제품 컴퓨터를 구매하는 일반 소비자에게 CPU와 메인보드의 호환성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컴퓨터를 직접 조립해 사용하는 경우 이는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새로운 CPU와 구형 메인보드가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면 CPU나 메인보드만 업그레이드할 수 없고 매번 같이 사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바로 이 문제가 극적으로 드러난 사태가 바로 인텔의 6코어 커피레이크 CPU입니다. 기존의 200시리즈 이하의 인텔 칩셋 메인보드와 호환되지 않아 새 CPU가 쓰고 싶으면 새 메인보드를 사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새로 산 메인보드 역시 앞으로 나올 CPU와 호환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반면 AMD는 CPU 호환성을 길게 유지해왔습니다. 이는 소비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득입니다. 새 CPU를 쓰기 위해 매번 새 메인보드를 살 필요가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기 때문이죠. 더 나아가 신형 메인보드가 나와서 가격이 내려간 구형 메인보드를 더 저렴한 가격에 살 수도 있고 중고 매물을 사고파는 데도 유리합니다. 소비자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점에서 이는 환영할 일입니다. - 인텔 2세대 라이젠을 이해하는 마지막 키워드는 인텔입니다. 앞서 열거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AMD의 신제품이 인텔의 챔피언 타이틀을 뺏을 정도로 뛰어나지 않은 건 분명합니다. 적어도 프로세서 부분에서 인텔의 입지는 그렇게 쉽게 흔들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넘볼 수 없을 것 같았던 CPU 성능 부분에서 경쟁자가 많이 따라온 점도 사실입니다. 일부 고객의 이탈을 막고 현재의 반독점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선 새로운 신제품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확인되지 않은 루머지만, 인텔이 일반 소비자용 8코어 CPU를 출시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라이젠 8코어 CPU의 성능이 향상되면서 지금처럼 6코어 제품군으로는 효과적인 대응이 어렵기 때문이죠. 지금 상황에서는 6코어 제품 가격을 인하거나 8코어 제품을 일반 소비자용 메인스트림 제품군에 투입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 해결책인데 매출과 수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후자가 더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어떤 방향이든 소비자에게는 모두 이득입니다. 어느 회사 제품을 구매해도 같은 값에 더 좋은 제품을 구매할 수 있으니까요. 라이젠이 등장한 지난해부터 CPU 시장은 이전보다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시장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가 경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고든 정 칼럼니스트 jjy05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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