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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24일 창이 5호 발사, 달에서 뭔가 가져오는 세 번째 국가 야망

    중국 24일 창이 5호 발사, 달에서 뭔가 가져오는 세 번째 국가 야망

    1970년대부터 달의 암석 조각을 가져오고 싶어 했던 중국이 24일 마침내 그 염원을 풀기 위한 첫 장정에 나선다고 영국 BBC가 22일(현지시간) 전했다. 무인 우주탐사선 창이 5호를 실은 로켓 장정 5호 로켓이 하이난성 원창(文昌) 우주기지에서 발사된다. 만약 탐사가 성공해 암석 조각을 지구에 가져오면 미국과 옛 소련에 이어 세 번째 나라가 된다. 가장 마지막으로 달에서 샘플을 가져온 것은 1976년 옛 소련의 루나 24호였다. 창이 5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인류가 찾지 않았던 달의 ‘폭풍의 바다’ 지역에서 2㎏의 샘플을 모으게 된다. 이에 견줘 미국은 1976년 170g을 시작으로 아폴로 탐사 전체를 통틀어 달에서 382㎏의 암석과 토양들을 지구에 가져왔다. 중국은 2013년 첫 달 착륙에 성공한 뒤 10년 안에 달에서 샘플을 가져오기로 계획을 세웠다. 전문가들은 창이 5호 탐사를 통해 얼마나 달의 화산 활동이 오래 지속돼 태양 방사선으로부터 생명체를 보호하는 데 필수적인 자기장이 언제 소멸됐는지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전반은 남성, 후반은 여성으로 살다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전반은 남성, 후반은 여성으로 살다

    트랜스젠더 인권운동을 선도한 영국 기자 겸 여행작가 잔 모리스가 지난 20일(현지시간)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대영제국에 관한 기념비적 3부작 ‘팍스 브리태니카’를 내놓은 것을 비롯해 40권 이상의 책을 펴낸 모리스가 웨일스에서 눈을 감았다고 아들 트윔의 성명을 인용해 BBC가전했다. 병사이며 소설가 등의 다채로운 삶을 살었던 그녀는 남성으로 인생 전반을, 여성으로 인생 후반을 산 것으로도 유명하다. 모리스는 40대이던 1972년 성전환 수술을 받고 여자가 되면서 이름을 잔으로 바꿨다. 트윔은 “오늘 아침 11시 40분에 를린(Llyn)의 이스비티 브린 베릴(Ysbyty Bryn Beryl)에서 작가 겸 여행가인 잔 모리스가 가장 위대한 여정에 올랐다. 그녀는 기슭에 평생의 파트너 엘리자베스를 남겨뒀다”고 밝혔다. 엘리자베스는 성 전환 전 그의 아내였는데 다섯 자녀를 낳은 뒤 성 전환 뒤 동성 결합(civil partnership) 형태로 혼인 관계를 계속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자녀 중 한 명은 어릴적 사망했다. 고인은 2016년 동료 여행작가 마이클 팰린과의 인터뷰를 통해 “난 내 인생을 무척 즐겼다. 해서 존경스러울 정도다. 내 생각에 아주 좋고 재미있는 인생이었다. 그리고 난 이 모든 일을 아주 열심히 해냈다”면서 “내 서명을 크고 길게 가져가기 위해 모든 책을 썼다. 내 인생은 자족감으로 가득한 중심 진자 운동이었다”고 돌아봤다. ‘신유럽기행’을 쓰고 2018년 평양 르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던 팰린은 고인이 넌픽션 작가로도 활약하며 많은 이들의 마음에 머물러 온 장소에 대한 이미지와 느낌을 창조해냈다고 돌아봤다. ‘래비린스(Labyrinth)’를 쓴 작가 케이트 모스는 “각별한 여인이었다”고 애도했으며. 동료 작가인 사스남 상게라는 트위터에다 “대단한 인생, 대단한 작가였다”고 아쉬워했다. 기자 캐서린 오도넬은 “공적으로 알려진 인물이 성 전환을 해 나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혼자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만들었다”고 애도했다. 카디프 북부의 노동당 의원인 안나 맥모린은 “믿을 수 없는 작가이자 개척자이며 역사학자”라고 애도했다. 잔의 베네치아 가이드북은 워낙 일품이어서 더 나은 책이 나오기 힘들다는 평판을 들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 책이 클래식 반열에 올랐다고 했다. 팰린 역시 “내 인생에 가장 영향을 준 책 가운데 하나”라면서 “베네치아를 묘사한 문장들은 내가 마주친 어떤 관습적인 여행 글을 초월했다. 그녀의 영혼과 가슴은 이 책에 있었다. 일종의 불륜 같은 것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내가 마치 베네치아와 연애하는 느낌으로 읽기 시작해 내 평생 그 느낌이 지속됐다. 작가로서 그녀는 호기심과 관찰이 얼마나 중요한지 내게 가르쳐줬다”고 했다.그녀의 소설 ‘하브로부터의 마지막 편지’는 여행 문학의 형태로 쓰인 작품이었다. 고인은 또 1953년 5월 29일 인류의 첫 에베레스트 등정 발자취를 단독 취재해 타임스에 실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 동행하며 정상 도전을 중계하다시피 전했다. 마침 힐러리 경의 정상 등정 일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이 열렸는데 1999년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훈작사(CBE)를 받았다. 모리스는 1974년 자신의 성전환을 다룬 책 ‘수수께끼(Conundrum)’를 썼는데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카사비앙카의 한 클리닉에서 수술을 받은 과정을 옮겼는데 가디언은 “힘있고 아름답게 쓰인 다큐멘터리”라고 극찬했다. 고인은 2018년 파이낸셜 타임스 인터뷰를 통해 성전환 때문에 집필 생활에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털끝만큼도 아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영향이 미미했다”고 돌아봤다. 나아가 남자로서 더 많은 성취를 이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덧붙였다. 해외를 여행하지 않으면 웨일스의 그위네드에 있는 집에 머물렀는데 국수주의적인 견해를 강력히 천명했다. 웨일스 음유시인 경연대회인 에이스테드보드(Eisteddfod)는 웨일스의 생활 방식에 대한 그녀의 공헌을 높이 샀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K1 전차’ 수출은 왜 미국 허가를 받아야 할까 [밀리터리 인사이드]

    ‘K1 전차’ 수출은 왜 미국 허가를 받아야 할까 [밀리터리 인사이드]

    1978년 한미 양국 ‘한국형 전차’ 양해각서美 수출 반대하면 불가…1대당 5만弗 로열티무기한 약정…무기개발 약정 꼼꼼히 확인해야부품 국산화·유효기간 설정 등 대책 필요한국은 세계 11위 무기수출국입니다. 수류탄, 지뢰 등 탄약류를 넘어 고성능 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한 결과 K2 전차, K9 자주포, FA50 경공격기 등 명품무기가 잇따라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성능 좋은 외국산 무기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으며, 국산 무기를 낮춰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왜 우리는 국산 무기를 개발해야 할까. ‘K1 전차’가 그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22일 한국국방연구원이 발간하는 국방논단에 실린 ‘방산수출지원과 정부기관 간 약정’ 보고서에 따르면 1970년대 우리나라는 불안한 안보환경에 직면했습니다. 자체 전차 생산 능력을 갖춘 북한은 신형인 T62를 운용하고 있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자 한국에 주둔 중이었던 미 7사단이 철수하면서 주한미군 규모가 2만명이나 줄었습니다.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한국형 전차’ 개발에 나섰습니다. 국방부에 전차관리사업단을 신설하고 본격적인 기술 개발에 나섰지만, 당시 국내 기술력만으로는 신형 전차 개발이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크라이슬러 디펜스(1980년대 이후 제너럴 다이내믹스)가 설계한 ‘M1 에이브람스 전차’를 바탕으로 한 국산 전차 개발사업이 진행됩니다. 1986년부터 실전 배치된 이 전차가 K1 전차입니다. 서울올림픽을 기념해 ‘88전차’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한국형 전차’ 개발에 3가지 조건 건 美 1978년 7월 한미 양국은 역사적인 ‘한국형 전차’ 양해각서에 서명했습니다. 사업 목표는 한국형 전차 시제품 2대를 개발하는 것이었는데, 미국은 3가지 조건을 걸었습니다. 당시엔 이 조건들이 K1 계열 전차의 수출길을 막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서둘러 전차부터 개발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을 겁니다.양해각서는 ‘K1 전차 및 그 계열전차를 수출하기 위해선 미국 정부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못 박았습니다. 미국에 대한 적성국가가 아니더라도 기술 유출 위험이 있거나, 자국 방위산업체들이 수출에 반대하면 해외 수출은 불가능해진다는 얘기입니다. 만약 어렵게 미국 동의를 얻더라도, 오랜 시간이 소요돼 협상에서 불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로 미 정부는 해외에 수출할 경우 완성전차 1대당 5만 달러의 로열티를 지불하도록 했습니다. 국방연구원 연구팀은 “K1 전차와 계열전차 구매에 관심을 가질만한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의 개발도상국 입장에서는 가격이 특히 중요한 결정요소여서 로열티로 인한 가격상승은 수출경쟁력 약화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습니다. 실제로 가격 문제로 수출에 실패한 사례도 나왔습니다. ●“미국이 반대하면 K1 해외 수출 불가” 우수한 3세대 전차로 인정받은 K1 전차는 1997년 말레이시아가 추진한 7억 3000만 달러 규모의 전차 도입사업 입찰에 참여하게 됩니다. 현대정공(현재의 현대로템)의 K1과 폴란드 부마르 와벤데의 PT91, 우크라이나 KMDB의 T84가 경쟁했습니다. 현대정공은 정글이 많은 말레이시아 지형에 맞게 51.1t인 중량을 47.9t으로 크게 줄이고 적재 포탄수는 47발에서 41발로 줄이는 대신 레이저 거리측정기와 양압장치(차량 내부 압력을 높여 화생방 공격을 방어하는 장치)를 장착한 최신 ‘K1M’을 내세웠습니다.말레이시아 측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 계약이 성사되는 듯 했으나 막판에 폴란드의 PT91M에 밀려 수출이 좌절됐습니다. 연구팀은 “K1M의 탈락 원인은 성능보다는 가격 문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며 “이후 K1 전차 및 그 계열전차는 아직까지 수출된 적은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당시 양해각서의 효력이 영구적이라는 점입니다. 미국이 먼저 나서서 효력을 정지시킬 가능성은 ‘0%’일 겁니다. 결국 미국의 사전 동의와 로열티 지불이 계속 수출에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개발한 지 시간이 많이 지나 K1 전차를 구식 전차라고 여기는 분도 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군에서 1000대 이상 운용하고 있는 주력 전차입니다. 뿐만 아니라 105㎜ 강선포를 120㎜ 활강포로 강화한 K1A1·K1A2, 전후방 감시카메라, 실시간 전차간 정보공유, 디지털 전장관리체계 등 각종 전장시스템을 대폭 강화한 K1E1 등으로 계속 진화하고 있습니다. K2 전차 보급이 계속 확대되면 K1 전차는 개발도상국 등에 성능 좋은 중고전차로 수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미국과 협의해 양해각서 내용을 삭제하지 않는 한 수출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물론 이런 방식을 미국의 잘못으로 돌리기는 어렵습니다. 미국 입장에선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반드시 넣어야 할 항목이었는지 모릅니다.●“기술 국산화로 문제 소지 미리 없애야” 이런 사례는 K1 전차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연구팀은 “기존에 맺었던 무기개발·생산과 관련한 약정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관리해야 한다”며 “조율이 불가능하다면 문제가 되는 기술이나 부품의 국산화를 통해 문제의 소지를 미리 없애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앞으로 유사한 사례가 나오지 않도록 약정 체결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약정을 체결할 때 가급적 개조·개량품은 한국이 지식재산권을 소유하도록 하고, 외국이 지식재산권을 갖게 됐다고 하더라도 유효기간을 명확히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반대로 우리가 보유한 기술을 해외에 수출할 때도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2008년 K2 전차 기술 이전 계약을 맺고 터키가 개발한 ‘알타이 전차’는 이미 우리의 경쟁 상대가 됐습니다. 연구팀은 “지식재산권을 우리나라가 아닌 수입국이 가져간다면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수출하자마자 강력한 수출경쟁자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5·18 무명열사 40년만에 가족 찾을까

    5·18 진상조사위원회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숨졌지만 신원이 밝혀지 지 않은 ‘무명 열사’들의 유전자 시료 추가 채취하면서 그들이 가족을 찾을 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진상조사위는 지난 19일 광주 북구 5·18민주묘지에 안장된 어린이 등 3기의 묘지에서 뼛조각 등을 추가로 채취해 감정에 들어갔다고 20일 밝혔다. 1980년 5·18 직후 망월동 구묘역에 가매장됐다가 2002년 국립 5·18민주묘지로 옮긴 지 18년 만에 관이 다시 열렸다. 모두 11기 가운데 6기는 신원이 확인됐고, 5기는 40년째 ‘무명 열사’로 남아 있다. 조사위는 이들 묘지 5기 가운데 더이상 DNA 대조가 불가능해진 3기의 묘를 파내 추가 시료를 채취했다. 무명 열사들의 신원을 확인하는데 쓰이는 유전자 시료가 기존에 확보한 분량이 소진된 탓이다. 조사위는 이번에 채취한 시료를 이전 보다 발전된 DNA 확인 기술을 적용키로 해 이들 유해가 가족을 찾을 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번에 개장한 1,3,5번 열사의 묘지는 관 크기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자그마한 유골을 비롯해 10대,20대 청년들의 유해가 묻혔던 곳이다. 앞서 지난 2002년 진행된 감식에서 무명 열사 1번은 4세 쯤으로 추정되는 남자아이로, 총상으로 숨진 뒤 남구 효덕동 야산에 묻혀 있다 80년 6월7일 발견됐다. 2번은 16세 전후로 추정되며 복부를 총탄에 관통당했다. 3번은 20대 초반으로 파란색의 광주 모 고교의 체육복 상의와 교련복 바지를 입었다. 나머지 4번 무명열사는 30대 중반으로 추정되며 4~5개의 철사가 유해에서 발견됐는데 법의학자들은 척추 수술의 잔해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5번은 5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남성으로 왼쪽 팔에는 1970년대 프랑스 브랜드의 시계를 찼는데 시계줄은 국산 ‘오리엔트’ 제품으로 밝혀졌다. 5·18민주묘지에 묻힌 이들 5명을 포함해 5·18 당시 행불자로 인정된 사람은 모두 78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10대 미만의 어린이가 두 명인데 실종 당시 5살이던 박광진군과 7살이던 이창현군이다. 5월 단체는 이번에 유전자를 채취한 4세 가량의 1번 무명 열사가 박군 혹은 이군일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박군은 5·18 당시 아버지와 외할머니, 삼촌과 함께 외출했다가 4명이 모두 행방불명됐다. 이군의 사연은 2년 전 5·18 38주년 기념식 당시 소개되기도 했다. 이번에 채취된 시료는 전남대병원과 서울대병원으로 보내져 5·18 행방불명 피해 인정 가족이 포함된 ‘광주시 5·18 관련 행방불명자 가족찾기 신청자’의 유전자형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검사가 진행된다. 특히 이번 유전자 검사는 이전 검사에 사용된 STR기법에 가족의 방계 유전자형까지 분석하는 SNP기법이 적용된다. SNP기법은 고도로 훼손된 인체 시료 분석에서 유용성이 높은 기법으로 23개 유전자 정보를 제공하는 STR 검사보다 더 많은 141개 유전자 정보를 제공하는 방식인 것으로 알려졌다. 즉 부모, 형제를 포함한 방계(삼촌, 조카)까지 유전자를 대조해 확인할 수 있는 기술이다. 허연식 조사과장은 “SNP기법은 이전 제주 4·3사건의 DNA 분석에 사용된 만큼 입증이 된 검사기법”이라며 “신원 확인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채취된 시료의 분석 결과가 나오기까진 일주일 정도가 걸릴 것으로 보인다. 조사위는 행방불명자 가족 찾기 혈액 채취 신청자의 유전자형과 일치하는 정보가 없다면 경찰청이 미아 찾기를 위해 구축한 유전자 DB와도 대조할 방침이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저세상 떠나야 하니 경찰서 전화 걸어 “내가 25년 전 살인범”

    저세상 떠나야 하니 경찰서 전화 걸어 “내가 25년 전 살인범”

    저세상으로 갈 때가 다가오니 25년 전의 범행을 털어놓을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지난 18일(이하 현지시간) 저녁 무렵 미국 앨라배마주 디케이터 경찰서에 전화 벨이 울려댔다고 현지 일간 뉴욕 타임스(NYT)가 19일 전했다. 두어 사람 손을 거친 뒤 미제 사건(콜드 케이스) 전담인 강력반의 션 무카담 형사가 받았다. 전화기 너머 남자 목소리는 “몇년 전에 내가 저지른 살인을 고백하고 싶다”고 했다. 전화 주인공은 같은 주 트리니티에 사는 조니 드와이트 화이티드(53)로 1995년 4월 26일 디케이터의 숲속에서 크리스토퍼 앨빈 데일리의 머리에 단 한 발의 총알을 박아 넣어 살해한 뒤 그의 주검을 승용차와 함께 호수 밑바닥에 유기했다고 했다. 무카담 형사는 “그이는 사건 날짜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더라”고 말한 뒤 그가 말하는 살인이 어떤 사건인지 알아내려고 자료를 그러모아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1980년대 미제 사건까지 뒤졌지만 화이티드가 말한 시신 유기 현장에 부합하는 사건은 없었는데 결국 데일리가 살해된 사건으로 귀착됐다. 결국 화이티드가 일러준 호수를 찾아가니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고, 사건을 재수사할 수 있게 됐다. 화이티드는 그 날로 살인 혐의로 기소돼 디케이터의 한 교도소에 보석 증거금 1만 5000 달러에 수감됐다. 무카담 형사는 “전화로 이런 중범죄 자백을 들은 적은 전에 없었던 일”이라고 말했다. 화이티드의 변호인 그리프 벨서는 다음날 밤 의뢰인을 만나고 싶다고 접견을 신청했다. 살해됐을 때 데일리는 스물여섯 살로 1983년식 도요타 테르셀을 운전하고 있었는데 차는 테네시 강물 위에 떠올랐다. 둘은 모르는 사이였고 전한 경찰은 동기 등 상세한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무카담 형사는 화이티드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무척 후회하고 있다. 몇 가지 일에 대해선 매우 황당해 한다. 그는 마음에서 지워내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병명이나 상태 등은 밝히지 않았다. 화이티드가 스스로 범행을 털어놓고 구금된 것은 최근에 수십 건의 미제 사건이 뜻하지 않게 해결되는 현상과 겹쳐 주목된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캘리포니아주 골든스테이트 지역에서 13건의 살인, 13건의 납치 범행을 저질러 뒤늦게 검거된 조지프 제임스 드안젤로가 지난 8월 가석방 없는 종신형 선고를 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15년 동안 강력 범죄를 다뤄 온 무카담 형사는 그럴 듯한 첩보와 유명세를 끌려는 어줍잖은 제보자를 대번에 분간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그는 “몇 가지 질문만 던져보면 금세 알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체포했다는 사실을 데일리 친척들에게 통보했다고 털어놓았다. 다만 본인은 한 역할이 별로 없고 선임자들이 많은 시간 애를 쓴 결과라고 공을 돌렸다. 이어 “난 그들이 써 온 책의 마지막 쪽을 펼쳐 끝내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철군’ 트럼프에 반기든 매코널 “중동 철군은 베트남 철수만큼 굴욕적”

    ‘철군’ 트럼프에 반기든 매코널 “중동 철군은 베트남 철수만큼 굴욕적”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중동에서 미군을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미치 매코널 상원 의원이 16일(현지시간) “베트남 철수만큼 굴욕적”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상원 다수당 원내대표인 매코널 의원은 공화당에서 트럼프 다음으로 강력한 실력자다. 매코널 원내대표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직접 겨냥하지 않았지만 군사 외교정책에서 반기를 든 것이다. 특히 매코널 원내대표는 이날 의회에서 기자들에게 “미군이 아프간에서 성급하게 철수하는 것은 우리 동맹에 해를 끼치고, 우리를 해롭게 하는 이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며 “미군이 1970년대 사이공에서 철수한 것만큼이나 굴욕적인 것”이라고 말했다고 의회전문 매체 더 힐이 보도했다. 미군은 1975년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앞서 국방부는 해당 사령관들에게 아프간과 이라크에 파견된 미군을 각각 2500명 수준으로 감축하는 계획을 내년 1월 15일까지는 시작하도록 하는 ‘준비명령’ 통지를 했다고 CNN이 전했다. 현재 아프간에는 미군 4500명, 이라크에는 약 3000명이 주둔해 있다. 이와 관련, 트럼프는 대선 유세에서 해외에 파견된 전투원들의 철수를 공약했다. 그는 아프간에 주둔한 미군에 대해 “크리스마스까지 집으로”라는 트윗을 날리기도 했다. 미국은 지난 2월 탈레반과 합의를 통해 135일 이내에 1만 2000 수준의 아프간 주둔 미군 병력을 8600명까지 줄이고 14개월 내 철군키로 한 바 있다. 이라크 주둔 미군도 지난 9월 3000명 수준으로 감축했다. 매코널 원내대표는 “미군이 성급하게 철수하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발호에 기름을 부어 전세계에 테러를 가중시킨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2011년 이라크 철수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동 전문가 상당수는 IS의 발호는 시리아 내전의 결과로 연결짓는다. 매코널 원내대표는 또 아프간에서 미군의 급속한 철수를 지지하는 의원은 극소수라면서 “무질서한 철수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축적한 주요 성공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크리스토퍼 밀러 국방장관 권한 대행은 지난 13일 서한에서 “이번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알카에다를 패배시키기 직전에 와 있지만 그 싸움을 끝내지 못한 과거의 전략 오류를 피해야 한다”며 “이 싸움은 오래됐고, 많은 이들 전쟁에 지쳐있으며 나 역시 그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밀러 권한대행은 그러면서 “모든 전쟁은 끝내야 한다. 전쟁을 끝내려면 타협과 파트너십이 요구된다”며 “우린 도전에 대처했고, 전력을 다했다. 이제 돌아올 시간”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서한문에는 미군이 남아 있어야 한다면서도 싸움에 지쳤으니 이젠 돌아와야 한다는 메시지가 동시에 담겨 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씨줄날줄] 97그룹과 장강의 뒷물결/박홍환 논설위원

    [씨줄날줄] 97그룹과 장강의 뒷물결/박홍환 논설위원

    더불어민주당 박용진·박주민 의원과 김해영 전 의원, 국민의힘 김세연 전 의원, 같은 당 윤희숙 의원, 정의당 김종철 대표…. 1990년대에 대학 생활을 한 1970년대생들이라 해서 이른바 ‘97그룹’으로 분류되는 정치인들이다. 이들의 정치권 내 존재감이 확대되고 있다. 박용진 의원은 당내에서 금기시됐던 이승만·박정희 재평가 등 진영 논리를 혁파하면서 대권 도전 의사까지 밝혔다. 박주민 의원은 재선이지만 당 대표에 도전했고, 내년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주요 후보로도 꼽힌다. 국민의힘 김 전 의원은 소속당을 “생명력 없는 좀비”라고 비판한 뒤 4선 고지를 포기하고 총선에 불출마했는데 당내에서는 조만간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저는 임차인입니다”라는 국회 5분 연설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윤 의원은 초선이라는 약점 및 최근의 ‘전태일 논란’에도 불구하고 보수 경제통 입지가 두터워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로도 거론된다. 정의당 김 대표도 “진보정당 금기를 깨겠다”며 적극적인 정치 행보를 보여 주목받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이른바 ‘386세대’가 정치권에서 회자됐다. 군부독재 시절이던 1980년대에 대학 생활을 한 1960년대생들이 30대에 접어들면서 정치권에 수혈되기 시작했는데 당시 가장 빨랐던 PC칩 이름을 차용해 386세대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진 것이다. 세대교체의 의미도 컸다. 기득권 세력의 견제가 집요했음은 물론이다. 허인회씨의 김대중(DJ) 전 대통령에 대한 큰절을 빌미로 ‘운동권 정치상술’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노무현 시대’에 ‘좌희정·우광재’로 대표되던 386세대는 40대에 접어들면서는 ‘86세대’로 불리고 지금 여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86세대가 기득권 세력을 대체했던 것처럼 기득권 세력이 돼버린 86세대를 교체할 집단으로 97그룹이 주목받는다. 중국의 오래된 격언으로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長江後浪推前浪)라는 말이 있다. 장강의 도도한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듯이 오래된 사람이 새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세상의 이치라는 뜻이다. 노무현 시대 이후 10년이 한참이나 넘었으니 97그룹이 대세가 된다 해서 조금도 어색할 일도 아니다. 문제는 세력화 여부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는 것은 당연하지만 수량이 적다면 천천히 밀어낼 수밖에 없다. ‘민주화 운동의 공유’라는 가치연대의 86세대와는 달리 97그룹의 공통점은 나이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21대 국회에서 1970년대생은 전체 300명 중 42명(14%)에 불과하다. 이들이 ‘큰 울림’의 정치로 세대교체의 정당성을 확보하길 꿈꾼다. stinger@seoul.co.kr
  • [안도현의 꽃차례] 송창식 노래에 대한 편애

    [안도현의 꽃차례] 송창식 노래에 대한 편애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젓가락 두드리는 솜씨가 전문 연주자에 가까운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악보 하나 없이 3절까지 가사를 외워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어쩌다 노래를 청하면 다소곳하게 두 손을 모으고 가곡을 부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목을 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불꽃을 토해 내야만 술자리에서 일어서던 사람도 있었다. 전주에서는 소설가 이병천 형이 특히 그랬다. 물론 이 세상에 노래방이라는 희한한 공간이 등장하기 이전의 이야기다. 최근에는 한반도 남쪽에서 ‘트로트’가 바야흐로 만화방창이다. 숨어 있던 가수들이 속속 발굴돼 그 기량을 유감없이 뽐내고 있고 그들의 노래는 코로나19로 위축된 마음들을 위무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국민 전체가 노래를 즐기면서 가수들의 가창력을 평가하는 ‘귀명창’이 된 것도 예상 밖의 소득이다. 이들 가수가 부르는 노래는 신곡보다 대부분 2000년대 이전의 대중가요가 많다. 리듬은 호소력이 강하고 가사 내용은 서정적이어서 불편하지 않다. 이미자, 남진, 나훈아…. 젊은 시절 이들의 노래에 빠졌던 분들은 이제 거의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텔레비전은 이 가수들을 다시 무대로 불러내고 있다. 온고지신,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열풍이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내게도 마음 한쪽 창고에 쟁여 둔 가수와 노래가 있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나는 송창식의 ‘사랑이야’를 입에 달고 다녔다.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내 마음 깊은 거기에 찾아와 어느새 촛불 하나 이렇게 밝혀 놓으셨나요.’ 이 감미로운 노래는 젓가락 장단이 필요 없었다. 내게 왔던 그 모든 ‘당신’을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반쯤 눈을 감고 부르면 제격. 송창식은 마치 기도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메마르고 암울한 시기에 세상을 잘 견뎌 내자는 따스한 응원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그의 장인적 기질, 우리 전통에 대한 배려, 그리고 도가풍의 허허로운 웃음과 옷자락이 나는 좋았다. 스타에 대한 애착은 곧잘 편애로 연결된다. 내가 좋아하는 송창식에게 눈이 팔려 다른 가수들의 노래를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그의 ‘나의 기타 이야기’도 내가 좋아하는 노래다. 이 노래의 가사는 정말 시적인 진술에 가깝다. ‘옛날 옛날 내가 살던 작은 동네엔 늘 푸른 동산이 하나 있었지. 거기엔 오동나무 한 그루하고 같이 놀던 소녀 하나 있었지.’ 이렇게 시작하는 가사는 오동나무에 소녀의 모습을 그려 놓고 거기에 다정한 목소리를 담고 싶어 하는 대목에 가서 절정에 이른다. ‘바람 한 줌 잡아다 불어 넣을까. 냇물 소리를 떠다 넣을까.’ 시각적인 것에 청각을 입히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바로 시적인 것의 출발이 아닌가. 소녀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은 ‘몇 무릎 몇 손’이라는 낯선 조어마저 자연스러운 표현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동일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하나가 된다. 노래를 듣고 부르는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은 차이를 극복하고 뛰어넘는 데 아주 효과적이다.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팬들이 ‘아미’라는 이름으로 동일성을 느끼듯이 나는 송창식의 노래를 좋아하는 이들을 만나면 유난히 들뜬다. 송창식의 노래를 같이 듣고 또 같이 부르게 될 때 나는 그 사람에게 감기고 마는 것이다. 전북대 영문과에서 정년을 앞두고 계신 이종민 교수는 연애 시절 데이트를 할 때면 송창식 노래만 들었다고 한다. ‘피리 부는 사나이’와 ‘고래사냥’은 젊은 두 연인을 더 단단하게 죄어 매는 끈이 됐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날 우리는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송창식 노래만 불렀다. 아는 가사는 따라 부르고 모르는 가사는 휴대전화로 검색을 하면서 말이다. 겨울이 다가오면 떠오르는 송창식의 노래가 있다. ‘밤눈’이다. 나는 첫눈을 기다리며 흥얼거린다.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소리도 없이. 가만히 눈 감고 귀 기울이면 까마득히 먼 데서 눈 맞는 소리. 흰 벌판 언덕에 눈 쌓이는 소리.’ 적막 속에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을 줄 아는 예민한 귀, 마냥 그립다.
  • 50억 이어 또 10억… ‘고려대 아름다운 기부왕’

    50억 이어 또 10억… ‘고려대 아름다운 기부왕’

    10년간 고려대에 50억원이 넘는 돈을 기부한 졸업생이 코로나19 극복에 힘써 달라며 또다시 모교에 거액을 쾌척했다. 고려대는 조흥건설 창업주인 유휘성(82)씨가 코로나19 위기 극복과 심혈관질환 연구에 쓰라며 10억원을 기부했다고 16일 밝혔다. 충북 진천 출신인 유씨는 13살 때 한국전쟁으로 부친을 여읜 뒤 어려운 시절을 보냈으나, 학업에 정진해 1958년 고려대 상과대학 상학과(현 경영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유씨는 1970년대 건축 공사와 토목 자재 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를 설립해 기업가로 성공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2011년 건립기금 10억원을 시작으로 2015년에는 연간 40여명의 학생에게 생활비를 지원할 장학금 10억원을 내놨다. 2017년에는 가족과 평생 살아온 서울 서초구 아파트(당시 시가 22억원 상당)를 학교에 기증했으며, 지난해에는 과학 연구에 써 달라며 10억원을 기부했다고 고려대는 밝혔다. 유씨는 지난 3일 고려대 본관에서 열린 발전기금 기부식에서 “고대인의 새로운 자긍심이 된 의료원에 예전부터 기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코로나19로 의료계가 힘든 시기에 기여할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이우환의 공간서 만난 비디오아트

    이우환의 공간서 만난 비디오아트

    백남준 조수 출신… 비디오아트 발전극도의 슬로모션 통해 시간 시각화45초 영상 10분으로 늘린 ‘인사’ 압권 극도의 느린 화면으로 삶의 본질적 문제와 인간의 내면을 성찰해 온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의 초기작부터 대표작까지 주요 작품 16점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가 화제가 되고 있다. 부산시립미술관이 ‘이우환과 그 친구들’ 기획전으로 열고 있는 ‘빌 비올라, 조우’다. ‘이우환과 그 친구들’은 한국 현대미술 거장인 이우환 작가와 장르가 다르지만 예술관을 공유하는 작가들을 부산시립미술관 별관인 ‘이우환 공간’에서 소개하자는 취지로 기획된 프로젝트다. 지난해 앤터니 곰리의 전시에 이어 두 번째다. 1951년 미국 뉴욕 퀸스에서 태어나 시러큐스대학에서 회화, 뉴미디어, 인지심리학을 공부한 비올라는 1972년부터 비디오 영상 작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1973년 졸업 후 모교 에버슨미술관에서 비디오아트 기술자로 일하던 중 백남준을 만나 그의 조수로 일하며 비디오아트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비올라는 초기작부터 시간을 재료로 삼은 다양한 실험적 영상 작업에 몰두했다. 일례로 ‘투영하는 연못’(1977~1979)은 숲에서 걸어 나와 물웅덩이 앞에 선 남자가 물을 향해 뛰어들려고 힘차게 도약하는 순간 화면이 정지한다. 언뜻 모든 것이 멈춘 듯 보이지만 남자를 제외한 주변 풍경은 아주 느리게 움직인다. 시간을 물질로 보고, 이를 시각화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담긴 작품이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극도의 슬로모션이 본격적으로 적용된 시작점은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한 ‘인사’다.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폰토르모의 회화 ‘방문’에서 영감을 얻은 이 작품은 고정된 하나의 카메라로 45초간 촬영한 영상을 10분 길이로 재생했다. 원작은 동정녀 마리아가 사촌에게 임신을 알리는 내용이지만 ‘인사’는 어떤 설명 없이 세 여인이 거리에서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 준다. 르네상스 회화를 닮은 화면의 색감과 구도 아래 한없이 느리게 흐르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미세하게 변화하는 인물들의 표정과 감정이 관람객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다. 세 명의 배우가 기쁨, 슬픔, 놀라움, 경악 등 4가지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을 1분간 촬영한 뒤 무려 81분으로 늘린 ‘아니마’(2002)는 흡사 초상화를 연상시킨다. 비올라의 작품에는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 물질과 정신 등 명상적인 동양 사상이 짙게 배어 있다. 선불교, 이슬람 수피교, 기독교 신비주의 등에 두루 관심을 둔 덕분이다. 기혜경 부산시립미술관장은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들과 영적 경험, 무의식의 세계를 다루는 비올라의 영상 작품들을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지속해 온 이우환의 작품과 함께 감상하는 흔치 않은 기회”라고 소개했다. 이우환 공간에는 1970년대 작품 3점이 설치됐고, 본관 3층 대전시실에 ‘순교자 시리즈’(1994), ‘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2002) 등 1990년대 이후 작업들이 걸렸다. 내년 4월 4일까지. 부산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가좌역~효창공원앞역 6.3㎞ 철길, 격동기 그림자 짙은 대한제국 뒤안길

    가좌역~효창공원앞역 6.3㎞ 철길, 격동기 그림자 짙은 대한제국 뒤안길

    1905년 서울~신의주 잇는 경의선 개통日·美·佛·러 등 경의선 부설권 이권다툼 70년대 연남파출소 인근 기사식당 생겨홍대부근 기찻길 거리에는 예술 작품들서서갈비·마포최대포집 등 추억의 맛집 김구 묘·안중근 가묘 모셔놓은 효창공원한강 심원정 터엔 수령 670년 느티나무서울신문과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이 함께하는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5회 ‘경의선 숲길 걷기’ 편은 마포구 가좌역에서 용산구 효창공원앞역까지 6.3㎞에 이르는 경의선 숲길 전 구간을 걸었다. 경의선 숲길 공원 전체가 서울미래유산이다. 제국주의 열강이 집어삼킨 대한제국의 어느 시간을 들춰도 안 아픈 곳 없다. 일제의 자원 약탈과 대륙 침략을 위해 놓인 경의선 철길을 걷는 마음이 만추의 단풍처럼 화사하지만은 않다. 깊어가는 가을, 나무에 매달린 단풍잎보다 떨어져 뒹구는 낙엽이 더 많다. 수렴의 이치는 새봄에 다시 피어날 새잎에 닿아 있으니, 가을이 남긴 유산 앞에서 마음이 숙연하다.경의중앙선 가좌역 4번 출구에서 출발했다. 소란한 자동차 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한 건 사천교를 건너 다리 아래 도로에서 경의선 숲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곳에 도착할 무렵부터였다. 하늘거리는 억새꽃과 절정 지난 단풍이 어울려 반짝인다. 경의선 기찻길의 추억을 위해 설치한 철로는 햇볕을 머금은 듯 빛나지 않는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서울~개성~사리원~평양~신의주에 이르는 499㎞의 경의선이 개통됐다.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일제의 계획이 부산~서울을 잇는 경부선과 서울~신의주를 잇는 경의선이 완성되면서 구체화됐다. 미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이 경의선 부설권을 놓고 이권다툼을 벌이는 사이 대한제국은 만신창이가 되고 있었다. 역사의 격동기 대한제국의 어느 하루를 들추어도 아프지 않은 곳이 없으니, 경의선 숲길의 화려한 단풍은 그 아픔 위에서 피어난 꽃이거니 생각했다. 경의선이 지하로 들어가면서 지상의 철길 구간은 공원이 됐다. 좁은 흙길 양쪽에 은행나무가 줄지어 섰다. 은행나무길 끝 소실점을 향해 걷는다. 나무 밖에 아파트 단지 건물이 있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 은행나무 단풍길에서 가을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애완견과 산책하는 사람들이 붉은 단풍 아래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불타는 가을도 쉼표가 필요하다. 입동이 지난 지도 꽤 됐으니 계절이 바뀌는 하늘 아래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가 을씨년스럽다. 경의선 숲길이 찻길에 의해 끊겼다 이어진다. 그 부근에 연남파출소가 있다. 파출소 좌우로 이어지는 도롯가에 기사식당이 띄엄띄엄 자리 잡았다. 이른바 ‘연남동 기사식당 거리’다. 이 거리도 서울미래유산이다. 1970년대부터 생기기 시작한 기사식당들은 택시기사의 단골식당이 됐다. 손님이 없는 사이 잠시 짬을 내 식사를 해야 하는 택시기사의 입맛을 사로잡던 음식들 덕에 이 거리의 기사식당들은 맛을 찾아다니는 청춘들의 순례지가 되기도 했다.홍대입구역 부근에서 경의선 숲길은 도로를 건너고 역이 있는 건물을 지난다. 홍대입구역 7번 출구에서 길은 본 모습을 찾는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홍대 앞 걷고 싶은 거리 쪽을 바라본다. 그 길 끝에 옛 당인리발전소가 있다. 1923년 용산에서 당인리발전소를 오가는 철길이 놓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 철길 옆에 상가 건축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철로는 1976년에 폐선됐고 주변 상가 건물만 남았다. 그 거리 중 마포구 서교동 365-2에서 26번지까지 구간이 ‘서교365’라는 이름으로 서울미래유산이 됐다. 은방울자매가 부른 대중가요 ‘마포종점’도 서울미래유산이다. 노랫말에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하나둘씩 불을 끄고 깊어가는 마포종점/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라는 구절이 있다. 서대문~마포 구간을 운행하던 전차의 마포종점이 지금의 불교방송국 부근에 있었다. 이 노래를 작사한 정두수씨가 당시 마포구 도화동에 살았다고 하니, 그가 마포 종점에서 당인리 발전소의 불빛이 꺼지고 어둠만 남은 풍경을 보았던 것이다. 홍대 부근 기찻길 옆 마을, 생활의 편린이 나뒹굴던 거리에 예술이 꽃피기 시작한 건 홍대 주변에 둥지를 튼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 덕이었다. 문화예술의 전초이자 게릴라였던 그들이 가난과 고독을 딛고 창작해낸 예술의 물결 위에서 홍대 주변 거리는 넘실댔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문화 위에 덧씌워진 상업의 잇속이 옹이처럼 단단하게 남았지만, 거리에 흐르는 예술의 혈맥은 경의선 숲길로 이어지고 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분야별로 접할 수 있는 부스 주변 길에서 상상을 자극하는 예술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이 길에 붙은 이름이 ‘경의선 책거리’다.그 거리 끝을 ‘땡땡거리’라는 이름으로 따로 부른다. 건널목 차단기가 내려갈 때 ‘땡땡땡땡’ 울렸던 소리를 따서 만든 별칭이다. 예전에 이 부근에 고기를 구워 먹던 실비집이 많았다. 오랜만에 주머니 든든한 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애환이 깃든 집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서강로를 가로지르는 서강하늘다리를 건넌다. 다리 왼쪽 이면도로 골목에 있는, 1953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연남서식당’도 서울미래유산이다. 드럼통 가운데 연탄불을 피워 양념에 잰 소갈비를 구워 먹는다. 메뉴는 소갈비 하나다. 식당에 의자가 없다. 그냥 서서 먹는다. 그래서 단골들 사이에서 불리던 ‘서서갈비’라는 별칭이 더 유명해졌다. 한국전쟁 이후 화기와 연료가 부족했던 시절, 드럼통에 연탄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던 초창기 모습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초창기에는 버스와 트럭 기사가 많이 찾았다. 지금은 외국인들도 종종 눈에 띈다. 고기 굽는 향을 뒤로하고 가로수가 터널을 이룬 길로 접어들었다. 마지막 가을을 불태우는 단풍잎들이 머리 위에서 별처럼 반짝인다. 할머니 대여섯 분이 길가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며 이야기를 나누신다. 50년도 넘게 이 마을에서 살고 계시다는 할머니는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길을 공원처럼 만들어서 좋다시며 단추공장이 있던 자리까지 손수 안내해 주신다. 어느 가게 담벼락에 붙은 마을 옛 사진을 함께 본다. 할머니는 단추공장 사람들 이야기를 하시다가 옛날에는 사람들이 정도 많았다며 웃으신다. 공덕역 부근에서 길은 다시 도로에 의해 끊어졌다 이어진다. 그 언저리에 있는 ‘역전회관’도 서울미래유산이다. 역전회관은 1962년 용산역 앞에서 역전식당으로 시작했다. 용산역 앞이 개발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지금의 역전회관을 있게 만든 바싹불고기, 선지술국, 선지백반과 함께 새로운 메뉴도 개발해서 손님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역전회관 창업주는 전라남도 순천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시가에서 요리를 배워서 식당을 시작했다. 바싹불고기는 얇게 저민 치맛살에 양념을 해서 숯불 향 짙게 구운 요리다. 선지백반은 구구하고 담백한 선지국을 곁들인 한상 차림이다. 공덕역 5번 출구 부근에 있는 ‘마포진짜원조최대포집’도 서울미래유산이다. 1955년 처음 문을 열었다. 돼지갈비 전문이다. 소금구이와 껍데기도 인기다.길은 경의선 숲길 커뮤니티센터로 이어진다. 새창로 언덕길과 나란히 이어지는 길에서 만난 커다란 수양버들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쉬어 간다. 답답하고 무거운 마음 다 놓고 쉬었다 가라는 위로처럼 수양버들 가지가 바람에 낭창거린다. 고개를 넘으면 도착지점이 보인다. 이 고개가 새창고개다. 조선시대 나라에서 관리하던 창고인 만리창이 이곳에 들어섰다. 새 창고가 생겼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새창마을이라 부르기 시작하고, 고개 이름도 새창고개라고 지었다. 이 부근에서 마포구 도화동과 용산구 효창동이 만난다. 새창고개 북쪽에는 효창공원이 있다. 효창공원은 원래 조선시대 정조 임금의 큰아들인 문효세자의 묘가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그곳에 공원을 만들었다. 해방 이후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의 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묘를 이곳에 썼다. 김구의 묘와 안중근 의사의 가묘도 이곳에 있다. 효창공원 위에서부터 시작된 산줄기가 새창고개를 지나 남으로 달려 한강에 닿는다. 옛날에는 이 산줄기를 용산이라고 불렀다. 한강이 보이는 산줄기에는 함벽정, 삼호정, 심원정 등 정자가 있었다. 함벽정은 지금 용산성당 부근, 삼호정은 성심여고 후문 부근, 심원정은 용산문화원 부근에 있었다. 삼호정은 조선시대 여류 시인들이 모여 시를 짓던 곳이다. 심원정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와 왜군이 강화회담을 했던 곳이다. 회담을 기념하기 위해 명과 왜는 ‘왜명강화지처비’를 세우고 백송도 심었다. 비석은 남아 있고 백송은 죽었다. 670년 정도 되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심원정 터에 남아 있어 옛일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새창고개를 넘어 도착지점인 효창공원앞역에 이르렀다. 두 시간 정도 걸어서 경의선 숲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걸었다. 점심때가 되었고 배도 고팠다. 걷기는 끝났지만 서울미래유산은 아직 한 곳 남아 있으니, 그곳이 바로 용문시장에 있는 ‘창성옥’이다. 1967년에 문을 연 창성옥은 해장국으로 유명하다. 해장국에는 된장의 구수한 맛과 비법 양념장의 맛이 어우러져 녹아 있다. 글·해설 장태동 여행작가 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 NYT “미 보이스카우트 성적학대”…피해 접수 8만여건 쏟아졌다

    NYT “미 보이스카우트 성적학대”…피해 접수 8만여건 쏟아졌다

    최소 8세·최고 93세, 수십년 누적된 피해BSA 지난 2월 파산법원에 파산보호 신청미국 보이스카우트에서 성적 학대를 당했다며 보이스카우트연맹(BSA)을 상대로 한 소송에 참여하겠다고 밝힌 이들이 무려 8만 2000명을 넘은 것으로 보도됐다. 수십년간 성적 학대가 광범위하게 일어났다는 뜻으로 최소 연령 8세부터 최고령 93세까지 소송 참여 의사를 밝혔다. 뉴욕타임스는 15일(현지시간) “델라웨어주 파산법원이 정한 피해자들의 피해 접수 기한인 16일을 하루 앞둔 이날 오후까지 BSA에서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8만 2663명의 소송 요청이 쇄도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성적 학대 신고는 미국 50개주 전역에서 접수됐고, 일본·독일 등의 미군 기지에서도 왔다고 한다. 피해자들의 나이는 8세부터 93세 사이였고, 남성이 대부분이었지만 여성들의 신고도 있었다. BSA는 지난 2월 성적 학대 의혹과 관련한 소송비를 감당하지 못해 델라웨어 파산법원에 파산보호 신청을 받았다. 자산은 5만 달러가 되지 않는데 부채가 1억~5억 달러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미 2010년 한 성적 학대 피해자가 소송으로 BSA에서 1850만 달러(약 205억원) 상당의 배상 판결을 받았다. 또 지난해 4월 공개된 법원 진술 자료에 따르면 72년간 7800명 이상의 BSA 간부들이 1만 2000명 이상의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성적 학대를 자행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런 상황이 알려지면서 숨어 있던 피해자들이 쏟아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 1910년 창설돼 110년이 된 BSA는 그간 총 1억 3000만명의 어린이와 청소년이 가입했다. 1970년대 500만명대의 회원수를 자랑했지만 최근에는 220만명 가량으로 줄었다. 워싱턴 이경주 특파원 kdlrudwn@seoul.co.kr
  • 시간을 연출하는 예술가, 비디오아트의 거장 빌 비올라를 만나다

    시간을 연출하는 예술가, 비디오아트의 거장 빌 비올라를 만나다

    극도의 느린 화면으로 삶의 본질적 문제와 인간의 내면을 성찰해 온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의 초기작부터 대표작까지 주요 작품 16점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가 화제가 되고 있다. 부산시립미술관이 ‘이우환과 그 친구들’ 기획전으로 열고 있는 ‘빌 비올라, 조우’다. ‘이우환과 그 친구들’은 한국 현대미술 거장인 이우환 작가와 장르가 다르지만 예술관을 공유하는 작가들을 부산시립미술관 별관인 ‘이우환 공간’에서 소개하자는 취지로 기획된 프로젝트다. 지난해 앤터니 곰리의 전시에 이어 두 번째다. 1951년 미국 뉴욕 퀸스에서 태어나 시러큐스대학에서 회화, 뉴미디어, 인지심리학을 공부한 비올라는 1972년부터 비디오 영상 작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1973년 졸업 후 모교 에버슨미술관에서 비디오아트 기술자로 일하던 중 백남준을 만나 그의 조수로 일하며 비디오아트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비올라는 초기작부터 시간을 재료로 삼은 다양한 실험적 영상 작업에 몰두했다. 일례로 ‘투영하는 연못’(1977~1979)은 숲에서 걸어 나와 물웅덩이 앞에 선 남자가 물을 향해 뛰어들려고 힘차게 도약하는 순간 화면이 정지한다. 언뜻 모든 것이 멈춘 듯 보이지만 남자를 제외한 주변 풍경은 아주 느리게 움직인다. 시간을 물질로 보고, 이를 시각화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담긴 작품이다.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극도의 슬로모션이 본격적으로 적용된 시작점은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한 ‘인사’다.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폰토르모의 회화 ‘방문’에서 영감을 얻은 이 작품은 고정된 하나의 카메라로 45초간 촬영한 영상을 10분 길이로 재생했다. 원작은 동정녀 마리아가 사촌에게 임신을 알리는 내용이지만 ‘인사’는 어떤 설명 없이 세 여인이 거리에서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 준다. 르네상스 회화를 닮은 화면의 색감과 구도 아래 한없이 느리게 흐르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미세하게 변화하는 인물들의 표정과 감정이 관람객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다. 세 명의 배우가 기쁨, 슬픔, 놀라움, 경악 등 4가지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을 1분간 촬영한 뒤 무려 81분으로 늘린 ‘아니마’(2002)는 흡사 초상화를 연상시킨다.비올라의 작품에는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 물질과 정신 등 명상적인 동양 사상이 짙게 배어 있다. 선불교, 이슬람 수피교, 기독교 신비주의 등에 두루 관심을 둔 덕분이다. 기혜경 부산시립미술관장은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들과 영적 경험, 무의식의 세계를 다루는 비올라의 영상 작품들을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지속해 온 이우환의 작품과 함께 감상하는 흔치 않은 기회”라고 소개했다. 이우환 공간에는 1970년대 작품 3점이 설치됐고, 본관 3층 대전시실에 ‘순교자 시리즈’(1994), ‘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2002) 등 1990년대 이후 작업들이 걸렸다. 내년 4월 4일까지. 부산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한 권의 책은 예술이자 삶… 오늘도 또 다른 운명을 펼친다

    한 권의 책은 예술이자 삶… 오늘도 또 다른 운명을 펼친다

    늦가을로 접어드는 서울 중구 한길사 ‘순화동천’에서 그를 만났다. 새삼 그를 만나기로 한 건 이번에 신작 ‘그해 봄날’이 나왔기 때문이다. ‘출판인 김언호가 만난 우리 시대의 현인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그 책에는 한국 현대사의 최전선에 섰던 열여섯 분의 삶과 언어가 담겼다. 그 책에 관한 이야기, 걸어온 책 인생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물론 김언호는 세상이 다 아는 우리나라 대표 출판인이다. 그는 1975년 동아일보에서 해직되고 그 이듬해에 한길사를 창립한 이래 45년 동안 우리 인문·사회·예술 분야의 중요한 책들을 최량의 품격으로 펴낸 출판인이자 스스로 중요한 책을 저술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 결과가 그동안 ‘책의 공화국에서’, ‘한 권의 책을 위하여’, ‘책들의 숲이여 음향이여’, ‘김언호의 세계서점기행’ 등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계보를 잇는 ‘그해 봄날’은 그의 정신적 수원(水源)이 돼 준 당대 현인들과의 만남을 기록한 현대 지성사라고 불릴 만한 결실이 아닐 수 없다.●‘그해 봄날’의 현인들을 찾아 ‘그해 봄날’은 1980년 ‘서울의 봄’을 함축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봄이자 김언호 개인에게는 이 책 속 주인공들과 만나게 된 봄이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다루어진 거인들을 그때부터 만나기 시작했다. 시대는 암담해져 갔지만 이분들과 새로운 미래를 구상했던 시절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감사하기만 하다. 코로나19와 함께 꼬박 1년여의 시간을 바친 이 책에서 그는 이분들에 대한 해설이나 논평을 가급적 삼가고 “해석을 앞세우지 않고 현인들 육성을 충실히 받아 적는 기록자”이고자 했다. 누군가의 치열한 생애는 다른 누군가의 기억과 기록을 통해 역사가 된다. 이 책에 기록된 열여섯 분의 삶과 언어는 김언호의 시선을 통해 한 시대의 증언과 사표와 지도가 됐다. 그해 봄날부터 이분들이 건넨 정신사의 울림과 떨림이 아직도 깊고 융융하기만 하다. 그는 이렇게 선명하고 아름다운 현대사의 인물지(誌)를 낱낱의 충실성과 정성스런 헌정으로 완성함으로써 스스로 ‘한 권의 책’이 됐다. 김 대표는 그분들과의 만남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국가 사회적 공공재이고, 흘러간 옛 기록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현재형임을 알려 준 것이다.“험난한 시절 저는 이 현인들을 만나고 책을 만들면서 불굴의 용기를 얻었습니다. 또한 인간의 길을 배웠습니다. 이 땅 젊은이들에게 우리 시대의 현인들의 생각과 실천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목록은 함석헌, 김대중, 송건호, 리영희, 윤이상, 강원용, 안병무, 신영복, 이우성, 김진균, 이이화, 최영준, 이오덕, 이광주, 박태순, 최명희 선생들이다. 정치인, 사상가, 예술가, 언론인, 학자가 망라됐다. 그 가운데 그는 함석헌을 맨 앞에 수록했다. “인생의 스승을 묻는 질문에 주저 없이 함석헌 선생을 꼽는다”는 그는 “선생은 우리 모두의 스승”이라며 “지금도 우리에게 탕진되지 않는 감동과 영향력을 주고 있다”고 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1980년대 지성사를 가로질렀던 함 선생은 걸출한 사상가이자 평화주의 종교인이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특별히 내 기억에는 ‘수평선 너머’라는 시집을 남긴 시인으로 남아 있는 함 선생의 육성이 잠시 떠올랐다.●책과 함께하고 책을 확장해 간 삶 김 대표의 고향은 경남 밀양이다. 그는 거기서 농사지으시는 부모님 밑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농사일과 책 만드는 일이 비슷한 것 같아요. 손이 조금이라도 더 가면 반듯해지고 풍부해지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시골에는 책이 없었고 당연히 서점도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부산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 앞 책방을 통해 책의 세계를 발견한다. 보수동 책방 골목은 그야말로 황홀한 책의 난장이자 유토피아였다. 그곳에서 ‘사상계’를 만났다. 서울에서 대학 시절 동대문에 줄지어 서 있던 헌책방을 열심히 찾아 민족사적 해석과 전망을 내놓은 책들을 열심히 읽었다. 그때 인문, 사회, 역사, 철학이 한 몸이라는 걸 배웠다. 그가 창립한 출판사 ‘한길’은 우리말로 ‘큰길’, ‘하나의 길’ 혹은 ‘마당’이나 ‘광장’을 함의한다. 어쩌면 그 ‘한길’로 김 대표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엄혹한 시절을 걸어갔을 것이다. “너무도 어려웠지만 오히려 그 시대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혹했던 시대가 더 치열한 사유와 고민과 전망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김 대표는 그러한 사유와 고민을 ‘책’이라는 전망으로 담아냈다. 책을 만드는 시간은 그에게 둘도 없이 귀한 만남을 가능하게 했다. 시대정신이 사람들을 발견하게 했고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중요성을 통찰하게 해 주었다. “1980년대를 여러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그때를 책을 만들고 책을 읽는 시대였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길사가 1979년 출간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은 당대의 금기를 깨면서 한국사의 실증과 해석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야말로 시대를 움직인 책인데 어쩌면 시대가 그 책을 요구했을 것이라고 김 대표는 술회한다. 김 대표는 책을 만드는 일을 넘어 여러 출판 관련 일에 나선다. 그는 1998년 한국출판인회의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1기 위원을 지냈고, 2005년부터는 한국·중국·일본·타이완·홍콩·오키나와의 출판인들과 동아시아출판인회를 조직해 출판운동에 나섰다. 1980년 후반엔 파주출판도시 건설, 1990년대 중반에는 예술인마을 헤이리를 설계에 큰 역할을 하면서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도 역임했다. 출판 관련 운동을 확장하면서 그는 출판인들과 함께 출판문화를 발전시키려는 지속적인 실천을 해 왔다. 이 점, 김 대표를 설명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축일 것이다. “파주출판도시도, 예술인마을 헤이리도 모두 혼자는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한 시대를 고민하는 분들과 함께하는 운동으로만 가능했지요.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혼자 열 걸음 걷는 것보다 손잡고 함께 한 걸음 걷는 일이 훨씬 중요한 것 같습니다.” 김 대표는 ‘책’이라는 단어에 꽂힌 사람이다. 원래 ‘冊’(책)이란 죽간을 끈으로 엮어 놓은 모양을 본뜬 일종의 상형문자가 아니었던가. 최근 책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디지털이라는 무형의 문화가 발전했지만 김 대표는 여전히 ‘책향’(冊香)과 함께 살아가는 ‘책’의 사제다. “책은 세계에 눈뜨게 해 주는 유일하고 강력한 힘”이라는 그는 “책을 통해서만이 삶의 가치를 알아가고 개인과 사회를 설계해 갈 수 있다”고 역설했다. 김 대표는 그러한 믿음을 반세기 동안 책을 만들면서 굳히게 됐다고 고백한다. ‘책’이라는 경이로운 발명품을 통해 인류는 진화해 왔고 한국 사회도 이만한 발전을 해온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말이다. 디지털의 힘은 정보의 집적에 있고 종이책은 그야말로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도 그의 움직일 수 없는 지론이었다. 책을 읽고 만들고 써온 그의 일생도 이러한 믿음 위에서만 가능했을 것이다.●예술로서의 ‘한 권의 책’ 연전에 그는 출판인으로서의 경험을 담은 ‘김언호의 세계서점기행’을 통해 책에 바치는 헌사를 완성한 바 있다. 그는 “서점은 태생적으로 시민사회”라고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때 우리는 서점에서 만났고 시간을 죽였으며 거기서 좋은 책을 발견하고 기뻐하지 않았던가. 옆구리에는 책을 끼고 가방에는 세계의 가능성을 담고 다니지 않았던가. 그렇게 한 시대의 빛으로 가득한 서점의 광휘를 아름답게 담은 결실이 ‘세계서점기행’이었다. 이제 그는 어떤 책을 읽고 내고 써 갈까? 그는 “고전 문제작을 읽음으로써 사람은 성장하게 되는 것 같다”며 고전을 강조했다. 특별히 감염병과 관련해 재난의 근원과 진단과 처방에 관련한 인문학적 비전을 담은 책들을 생각하고 있다. 김 대표는 책 만들기와 책 읽기 없이는 창조적이고 품격 있는 사회를 구현할 수 없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앞으로도 그는 ‘한 권의 책’이 한 시대의 생각과 말씀을 담아낸다는 정신으로 쉬지 않고 책을 펴낼 것이다. 그는 국가가 개입해 도서관을 풍요롭게 구축해 가야 한다고 마지막으로 역설했다. “마을마다 도서관이 있어야 합니다. 문화 선진국들은 도시 곳곳에 도서관이 있어서 좋은 책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지요. 책이라는 희망을 아이들에게 전해 줄 수 있는 도서관 정책이 긴요합니다.” 김 대표는 ‘한 권의 책’은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한글이 아름답듯이 그것을 담아내는 책도 아름답다고 말한다. 영국 아티스트 윌리엄 모리스를 통해 ‘아름다운 책’을 배웠다는 그는 모리스가 말한 “인간의 예술품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 건축이고 그다음이 한 권의 책”이라는 말을 거듭 말했다. “한 권의 책은 운명입니다. 운명을 걸고 책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오늘도 고민하고 있어요. 물론 그 고민은 제가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 의의이기도 합니다.” 책 만드는 운명을 사랑하는 ‘작가 김언호’의 생각과 실천이 ‘그해 봄날’처럼 쏟아지는 늦가을이었다.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 2020 전태일을 위한 위로 ‘너는 나다’

    2020 전태일을 위한 위로 ‘너는 나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을 남기고 짧은 생을 마감한 전태일의 50주기를 맞아 그의 생애와 현재의 의미를 되짚는 특집 프로그램들이 마련된다. ●10대 전태일 다독이는 노랫말 12일 밤 10시 KBS 1TV ‘다큐인사이트-너는 나다’는 여전히 열악한 오늘날의 노동환경을 살펴보고 음악을 통해 위로를 건넨다. 전태일과 같은 1948년생 경비원의 하루에서 ‘노인 빈곤율 세계 1위’ 한국을 살아가는 노년의 고된 삶을 조명하고, 50년 전처럼 가장 열악한 노동현장으로 내몰리는 10대 노동자의 현실을 직업고등학교 학생들을 통해 살펴본다. ‘이 시대의 이소선 여사’로 불리는 고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씨도 만난다.가수 양희은, 안치환, 하림, 래퍼 치타는 2020년의 ‘전태일’들을 위해 무대에 오른다. “나는 세상의 모든 너이고 너는 아직 나를 알지 못하는 나다”라는 말로 함께 잘사는 세상을 염원한 전태일. 그의 꿈을 되새기고 현재의 전태일을 어루만지는 노래들을 들려준다. ●기독교인 전태일을 향한 기도 CBS TV는 13일 오후 8시 특집 다큐멘터리 ‘기독청년 전태일’을 방송한다. 작품 제목은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있는 전태일의 묘비명에서 따왔다. 전태일의 친구들과 여공들, 가족, 기독교인 30여명을 인터뷰하면서 그 삶의 의미를 조명한다. 특히 1970년대 박정희 독재 정권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전태일의 생애와 죽음을 설교 시간에 공개하며 교계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한 경동교회 강원용(1917~2006) 목사의 설교 녹취가 처음으로 공개된다. 방송은 유튜브 채널에서도 볼 수 있다. ●청년 전태일을 위한 랩소디 TBS TV는 12일 밤 11시 30분 다큐멘터리 ‘너는 나다’에서 노동운동을 이끌어 온 시대별 전태일들을 되짚는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의 주연배우 홍경인이 내레이션을 맡아 25년 만에 전태일로 시청자를 만난다. 음악 서사극 형식으로 노동자가 현장에서 겪는 설움을 현실감 있게 담는다. 13일 오전 9시 라디오 다큐멘터리 ‘2020 전태일 랩소디’는 택배기사, 콜센터 직원, 하청 노동자, 패션 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 등 이 시대 청년 전태일들의 현주소를 전한다. 13일 오전 7시 30분 방송하는 아리랑TV ‘나우’는 외국인의 시선으로 본 전태일의 모습을 따라간다. 한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스타트업을 운영 중인 파키스탄인 자히드 후세인이 전태일기념관을 찾는다. 그는 몰랐던 한국의 노동 현실과 전태일의 희생적인 일생을 마주하고 “한 영웅을 알게 됐다”며 고마움을 드러낸다. 노동자의 모습을 고양이로 표현한 ‘뉴워커 프로젝트’와 찾아가는 전태일기념관도 소개한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열린세상] 암흑물질의 정체는 원시 블랙홀/조현욱 과학과 소통 대표

    [열린세상] 암흑물질의 정체는 원시 블랙홀/조현욱 과학과 소통 대표

    암흑물질의 정체는 원시 블랙홀일까? 우주의 질량 대부분(85%)을 차지하는 암흑물질의 정체는 수수께끼다. 최근 논문에 따르면 우주가 태어난 직후 생겨난 원시 블랙홀 집단이다. 암흑물질이란 스스로 전자파를 방출하지도 남의 빛을 반사하지도 않는 미지의 물질이다. 이것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은하를 이루는 별들의 회전속도에서 계산되는 질량은 은하 내의 별이나 성간물질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크다. 또한 은하나 은하단의 중력은 그 주변을 지나가는 빛을 휘게 만드는데(중력 렌즈 효과) 이를 통해 계산된 질량은 실제 관측된 질량을 크게 넘어선다. 블랙홀이란 자체 중력이 너무나 강해서 어떤 입자나 복사파도 그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는 시공간의 영역을 의미한다.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충분히 밀도가 높은 물체는 시공간을 왜곡해 블랙홀을 만들 수 있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은 이런 사실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영국의 로저 펜로즈에게 주어졌다. 나머지 공동 수상자 두 명은 우리 은하의 중심에 태양 질량 430만배 규모의 초대질량 블랙홀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별 규모의 블랙홀은 무거운 별이 타고 남은 잔해가 태양 질량의 3~4배가 되면 스스로 수축해서 만들어진다. 여기에 빨려 들어가는 외부 물질이 뿜어내는 입자나 빛, 다른 별이나 행성의 운동에 미치는 영향, 주변을 지나가는 광선이 휘는 렌즈 효과를 통해 간접적으로 관측할 수 있다. 원시 블랙홀이란 우주 탄생 직후인 138억년 전에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기본 입자들이 뭉쳐 무거운 입자가 되면서 우주의 압력이 낮아졌고 이 덕분에 원시 블랙홀도 많이 생겨날 수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위의 블랙홀이나 물질을 흡수해 점점 커질 수 있다. 1970년대 스티븐 호킹이 존재를 추론했으나 아직 관측되지는 않고 있다. 여기에 대한 관심은 2015년 레이저 간섭계 중력파 관측소(Laser Interferometer Gravitational-Wave ObservatoryㆍLIGO)가 작동하면서 급증했다. 서로의 주위를 돌던 블랙홀들이 합쳐지는 현상이 속속 관측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주에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블랙홀이 있다면 원시 블랙홀도 많이 존재할지 모른다. 이것이 수십년간 탐구해도 전혀 발견되지 않는 암흑물질의 정체일 수도 있다. 약한 상호작용을 하는 무거운 입자, 초대칭입자인 뉴트랄리노 등에 이어 후보군이 하나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2017년 여기에 찬물을 끼얹는 계산 결과가 나왔다. 초기 우주에 지금의 암흑물질을 설명할 만큼 많은 블랙홀이 있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대부분 서로 주위를 도는 쌍성이 됐다가 합쳐졌을 것이다. 그러면 라이고에서 실제 관측된 것보다 수천 배 많은 합체 현상이 일어났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난점은 극복이 가능하다. 지난 9월 ‘우주론과 천체입자물리학 저널’(Journal of Cosmology and Astroparticle Physics)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그렇다. 프랑스 몽펠리에대학의 카르스텐 제담지크가 발표했다. 태초 대량의 원시 블랙홀이 만들어졌지만 라이고의 관측과 일치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는 수치 시뮬레이션 결과다. 원시 블랙홀은 실제로 쌍성이 되겠지만 블랙홀이 넘쳐나는 우주에서는 세 번째 블랙홀이 다가와 둘 중 하나와 자리를 바꾸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파트너를 바꾸는 과정은 수없이 되풀이되고, 쌍성은 거의 원형 궤도를 돌게 된다. 원시 블랙홀이 엄청 많다고 할지라도 이것들이 합체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원시 블랙홀들은 2~3광년 정도의 지름을 가진 무리를 이루어 우주 도처에 자리잡고 있다. 태양 30배 질량의 괴물을 중심으로 이보다 작은 블랙홀 1000개 정도가 나머지 공간을 채우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물리학자는 암흑물질을 구성하는 것이 탐지가 극도로 어려운 모종의 기본 입자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결론은 관측이 말해 줄 것이다. 태양보다 작은 질량을 가진 블랙홀이 하나만 발견돼도 상황 전체가 달라질 것이다. 이런 물체는 원시 블랙홀 시나리오에 따르면 매우 흔할 것이고 별을 통해서는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2020년대 중반에 미항공우주국이 발사할 로만우주망원경에 대한 기대가 큰 또 하나의 이유다.
  • 김장일 경기도의원, 경기대진테크노파크 행감에서 노후 슬레이트 건물 철거사업 조속완료 촉구

    김장일 경기도의원, 경기대진테크노파크 행감에서 노후 슬레이트 건물 철거사업 조속완료 촉구

    경기도의회 경제노동위원회 김장일(더불어민주당·비례) 의원은 10일 경기대진테크노파크(이하 대진TP)에 대한 행정사무감사에서 조속한 슬레이트 건물 철거사업을 촉구했다. 김장일 의원은 “슬레이트는 19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대량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며 “슬레이트 1급 발암물질인 석면 등이 포함되어 건강을 위협한다. 노후·마모된 슬레이트는 위험물질이 더욱 빠르게 노출되기 때문에 슬레이트 지붕 철거사업은 시급성을 요하는데 다소 부진한 것이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또한, 김 의원은 “도민의 건강뿐 아니라 도시 미관도 해치는 슬레이트 건물을 조속히 개선하여 도민의 삶의 질 향상에 만전을 기해야한다”며 “예산 및 각종 지원 부족은 의회와 논의하여 해결해 나갈 것”을 당부했다. 이에 대진TP 박귀남 경영기획본부장은 “대진TP에서 2017~2025년에 걸쳐 진행하고 있는 슬레이트 철거사업은 중장기사업으로 무척 중요하다”며 “의원님이 말씀해주신 사항을 잘 반영하여 도내 건물 철거사업을 반드시 완수하겠다”고 답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새벽 예매로 들떴던 충무로, 그때 군밤 냄새… 영화 같은 추억 속으로

    새벽 예매로 들떴던 충무로, 그때 군밤 냄새… 영화 같은 추억 속으로

    지난 1월 시작된 코로나19가 11월이 되도록 지속되는 상황에서 영화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크게 줄어들었다. 서울신문과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이 함께하는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4회 ‘추억의 극장가’ 편에 참여하기 위해 충무로역 1번 출구 앞에 모인 우리들은 눈앞의 대한극장을 바라보며 잠시 감회에 젖었다. 1958년 개관해 초대형 스크린에 ‘벤허’, ‘마지막 황제’ 등 대작을 상영했던 그 시절을 기억하는 이도 있을 테고, 2001년 11개 상영관의 멀티플렉스로 완전히 변신했을 때를 되돌아보는 이도 있을 터였다. 저마다의 나이에 따라 추억은 다르겠지만 모두가 공감하는 기억은 바로 지난 11개월간의 일상일 것이다. 지난해 가을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이하고 올 초에는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이 전해지면서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시기에 감염병의 습격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바꿔 놨다.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 사람끼리 어떤 형태로든 접촉한다는 것에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절이 오리라곤 상상도 못 했던 그때 영화관은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이었고 오락 공간이었다. 돌아보면 어느새 전설처럼 그리운 시절이다. 어둡고 밀폐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앉아서 스크린 속의 이야기에 함께 빠져들며 같은 장면에서 소리 내어 함께 웃고 눈물 콧물 훌쩍거리며 함께 울기도 했던…. 가을이 깊어 가는 주말 우리는 충무로를 거쳐 을지로와 종로까지 한때 ‘서울의 10대 개봉관’으로 불렸던 극장들을 따라서 걸어 보기로 했다. 사라지고 변화되고 그나마 남아 있기도 한 그 모습들을 찾아서.먼저 서울미래유산 산업노동 분야에 선정된 ‘충무로 인쇄골목’을 따라 걷는 동안 오래되고 활력을 잃은 듯한 분위기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영화산업의 발전과 함께 영화 관련 홍보물을 제작하면서 형성된 충무로 인쇄골목은 이제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인해 인쇄산업 메카로서의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산업과 함께 발전해 온 흔적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특히 연말을 맞아 달력과 연하장, 다이어리 등을 진열해 놓은 가게 앞을 지날 때는 디지털 시대에도 인쇄물을 통해 시간을 관리하고 손글씨로 안부를 전하는 풍경이 사라지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정겹게 되돌아보며 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만난 스카라극장 터. 지금은 아시아미디어타워 건물이 우뚝 솟아올라 있다. 1935년에 1000석이 넘는 규모로 세워져 국내 초창기 극장 건축의 역사를 간직해 온 까닭에 2005년 문화재 등록이 예고되자 건물주가 재산권 침해라며 철거를 해 버린 것이다. 급속한 사회 변화로 근현대 서울 시민의 모습이 담긴 문화유산이 덧없이 사라져 버린 생생한 현장이다. 1990년대 들어 멀티플렉스 체인들이 생겨나면서 기존의 극장들이 복합상영관으로 변신해 갈 때도 스카라는 단관을 고수하며 국내 최대 스크린을 유지해 왔으나 반원형 현관 부분이 도로 쪽으로 튀어나온 독특한 모양새로 모더니즘 건축 양식의 전형을 70년 동안 보여 주던 모습은 이제 찾을 수 없다. 서울미래유산처럼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개별적 특성을 수용할 수 있는 유연한 보전 방식이 그때도 있었다면, 문화재나 문화 전반에 대한 인식이 그때도 지금처럼 높았다면…. 아쉬운 마음으로 대각선 방향의 명보극장으로 향하자 그나마 안심이 된다. 이제는 뮤지컬과 연극 등의 공연을 주로 하는 명보아트홀로 바뀌었지만 1957년 개관한 이래 스카라극장과 마주 보며 관객몰이를 했던 모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극장 앞 광장에 새겨진 영화인들의 핸드프린팅은 그 시절의 추억을 불러오고, 광장 한쪽의 이순신 장군 생가터 표지석은 충무로라는 도로명의 유래까지 알려 준다.하지만 을지로로 접어들어 국도극장 터에 이르자 또다시 진한 아쉬움이 밀려든다. 문화재로 등록될 기미가 보이자 극장주가 건물을 허물어 버린 것은 이곳이 스카라보다 먼저였으니 1936년에 동양풍을 가미한 아름다운 르네상스식 대리석 건물로 세워진 국도극장은 1999년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이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국도호텔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충무로 인쇄골목을 지나오면서 1970년대 지어진 낡은 건물들 속의 인쇄 관련 업체들을 살펴봤고, 또한 1970년대에 완공된 세운상가 건물군을 지나쳐 온 까닭일까. 국도극장 터를 표시하는 기념 표석 앞에서 우리는 어느덧 1970년대를 추억하게 됐다. 지금과 같은 예매 시스템도 없이 단일 개봉관에서 신작 영화를 몇 달씩 상영했던 그 시절에는 이곳 국도극장에서도 아침부터 영화표를 예매하려는 줄이 길게 늘어서곤 했을 것이다. 서울미래유산으로도 선정된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영자의 전성시대’가 모두 이곳 국도극장에서 개봉됐으니 이른바 70년대 청년영화를 보기 위해 당시 을지로의 대표적인 극장이었던 이곳에 얼마나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을까.고도 성장기에 접어든 70년대 산업화의 역군들은 극장에서 한국 영화가 보여 주는 젊은이들의 욕망과 방황과 좌절에 공감하며 한편으로는 영화처럼 빛나는 삶을 꿈꾸기도 했을 것이다. 급격한 산업화의 그늘과 유신 시절의 억압을 잠시 잊은 채 함께 울고 웃던 사람들이 극장 밖으로 나서며 새로운 삶의 희망을 얻었듯 우리는 국도극장 터를 뒤로한 채 바로 앞 세운상가 3층 보행데크로 발걸음을 옮겼다. 충무로와 나란히 종로로 이어지는 세운상가는 약 1㎞ 길이의 초대형 주상복합상가로 일제강점기에 전쟁을 대비해 비워 둔 공터 자리에 세워져 각종 전자제품을 취급하며 명성을 날렸으나 1990년대 용산전자상가가 생기고 강남이 부상하면서 급격히 침체에 빠졌다. 그래서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녹지축을 만들기 위한 시도도 있었으나 5년 전부터 서울시가 도시재생 사업의 하나로 ‘다시세운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역동적으로 변모하고 있다. 오디오와 비디오, 컴퓨터, 불법 복제 등 세운상가를 통해 보급되고 발달한 다양한 ‘신기술’과 ‘신문화’는 종합예술로서의 영화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시 정비된 세운상가의 3층 보행데크를 걸으면서 한국 영화와 극장 건물에 대해 생각이 이어졌다. 이쪽은 기존의 제조 산업을 디지털 디바이스와 결합하고 우리가 지나온 인쇄골목 쪽 상가 구간은 인쇄산업과 크리에이티브 디자인을 결합해 4차 산업혁명의 거점으로 다시 살리겠다고 하니 철거 대신 선택한 존치 재생이 다른 여러 산업과 문화에도 좋은 본보기가 됐으면 싶었다. 청계천을 지나는 구간에서는 세운상가군이 자연스럽게 공중 보행교로 연결되고 있어서 잠시 청계천을 내려다보는 시간도 가져 봤다. 근대화의 상징과도 같았던 청계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청계천을 복원한 지도 어느덧 15년. 산업화 시대를 지나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는 진정한 현대화를 이뤄 가는 우리의 미래를 청계천 물길을 따라 상상해 본 시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종로와 만나는 세운상가 끝자락에서 다시세운광장 건설 때 발굴한 조선시대 중부관아 터 유적을 둘러보고 9층 옥상에 올라 눈앞에 펼쳐진 종묘 숲을 보면서 서울이 얼마나 오랜 역사를 간직한 아름다운 도시인가를 실감했다. 옥상에서 사방으로 둘러보는 도심은 현대식 빌딩으로 가득하지만 바로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낡고 오래된 건물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으니 다시 한번 개발과 보존에 관한 여러 생각이 교차한 순간이었다.다시세운옥상에서 서울의 기운을 가득 받아 안고 종로로 내려가서 서울극장 앞에 이르자 추억의 오징어구이와 군밤 냄새가 우리를 반겼다. 길 건너 단성사는 한국 영화 100년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지만 새로 지은 빌딩의 이름 속에 흔적으로만 남았고, 피카디리극장도 광장의 핸드프린팅마저 지하로 내려가 옛 모습이 아니었지만 영화관으로서의 역할은 여전히 다 하고 있다. 1960년대의 세기극장을 인수해 1979년 서울극장으로 개관한 이후 증축을 거듭하며 일찌감치 복합상영관 시대를 열었던 서울극장은 종로와 충무로 일대 영화의 역사를 대변하는 극장으로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마지막으로 우리가 찾은 허리우드극장 역시 서울미래유산인데, 1969년 낙원상가 건립과 동시에 개관했던 모습 그대로 이제는 노년층을 위한 실버 극장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사회적 기업 방식으로 특화돼 어르신들을 위한 영화를 저렴한 관람료로 상영하는 그곳에는 모처럼 만나는 옛 영화들이 알록달록한 포스터로 가득했다.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언젠가는 낡은 게 된다. 코로나19에 저당 잡힌 이 시대도 언젠가는 추억이 될 것이다. 서울 도심을 가로질러 추억의 극장가를 걸어온 끝에 우리에게 다가온 화두는 결국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였다. 글·해설 고은주 소설가 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 다음 일정 - 제25회 경의선 숲길 걷기 ●출발 일시 11월 14일(토) 오전 10시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21세기 전태일의 눈물… 비정규직 67% “고용 불안 시달린다”

    21세기 전태일의 눈물… 비정규직 67% “고용 불안 시달린다”

    비정규직 38% “노동 현실 나아졌다”정규직 52% 긍정 답변한 데 비해 낮아비정규직 49%는 8시간 이상 초과 근무“수당으로 부족한 소득 보충 위해” 이유민주노총, 전태일 3법 국회 통과 등 촉구50년 전 청년 전태일은 자신의 일터인 평화시장의 노동 실태를 조사하려고 사장들 몰래 설문지를 돌렸다. 전태일은 동료들이 한 달에 며칠 쉬는지, 며칠 쉬기를 희망하는지, 하루에 몇 시간 근무하는지 등을 꼼꼼히 조사했다. 그로부터 50년 후 노동자들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시민단체가 직장인 1000명에게 전태일의 질문을 던졌더니 ‘21세기 전태일’인 비정규직 노동자 10명 중 6명은 고용 사정이 불안정하다고 답했다. 비정규직의 절반은 부족한 월급을 수당으로 채우려고 하루 8시간 이상 일하고 있었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전태일 50주기를 맞이해 이런 내용의 설문조사 결과를 9일 발표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엠브레인 퍼블릭이 지난달 22일부터 26일까지 만 19~55세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50년 전 전태일과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삶은 2020년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이어졌다. 전태일이 살았던 1970년대와 비교한 현재의 노동 현실을 묻는 질문에 정규직의 51.5%는 좋아졌다고 답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37.8%만이 좋아졌다고 했다. 현재 직장의 고용 상태에 대해 비정규직의 66.8%가 불안정하다고 응답했으며 54.5%는 앞으로 자신의 근로조건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답했다.직장인의 한 달 평균 휴일은 8.25일로 조사됐다. 그러나 8일 미만 쉰다는 응답은 정규직(21.3%)보다 비정규직(28.0%)이, 사무직(16.0%)보다 비사무직(32.0%)이, 공공기관 노동자(7.8%)보다 5인 미만 노동자(29.0%)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원하는 날에 쉬지 못하는 직장인은 응답자의 54.8%로 집계됐다. 원하는 날에 쉬고 있다는 응답은 일터의 약자인 여자, 비정규직, 서비스직, 중소기업, 저임금 노동자에서 낮게 나타났다. 직장인들의 하루 평균 근무시간은 8.05시간으로 조사됐다. 노동자들에게 8시간 이상 근무하는 이유를 물어본 결과 ‘일이 바쁘니까’가 54.7%로 가장 많았고, ‘수당을 더 벌기 위해서’(30.0%)가 뒤를 이었다. 수당 때문에 8시간 이상 일한다는 응답은 비정규직(49.0%)이 정규직(22.0%)에 비해, 비사무직(43.8%)이 사무직(18.6%)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았다. 취약한 노동자들이 부족한 소득을 보충하려고 초과근무에 내몰리는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이날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태일 3법’이라 불리는 근로기준법 등의 개정을 촉구했다. 전태일 3법은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을 개정하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는 것이 골자다. 이들은 “전태일 열사가 장시간 저임금 노동자를 위해 산화한 지 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힘없는 특수고용,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한 해 2500명씩 죽어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손지민 기자 sjm@seoul.co.kr
  • 포크그룹 ‘따로 또 같이‘ 나동민 미국서 별세…향년 64세

    포크그룹 ‘따로 또 같이‘ 나동민 미국서 별세…향년 64세

    1980년대 포크 그룹 ‘따로 또 같이’로 활동한 가수 겸 작곡가 나동민이 지난 5일 미국 뉴저지주에서 지병으로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64세.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청년 시절 라이브 카페 무대에서 공연해오다 1976년 강인원을 만나게 돼 함께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1979년 강인원, 이주원, 전인권과 포크 그룹 따로 또 같이로 1집 ‘노래모음 하나’를 냈다. 이후 전인권과 강인원이 탈퇴 후 나동민은 이주원과 함께 팀에 남아 3∼4집을 발표했다. 3집은 따로 또 같이의 최고 명반이자 들국화 데뷔 음반과 함께 1980년대 중후반 국내 대중음악의 르네상스기를 이끌었고, 4집은 전문 세션맨을 기용해 스튜디오 세션의 전문화를 가져온 앨범으로 평가받는다. 포크와 록의 결합을 보여준 따로 또 같이는 1970년대 포크 문화와 1980년대 록 문화의 다리 역할을 하며 1988년까지 활동했다. 들국화의 모체가 됐다는 평가도 있다. 나동민은 뛰어난 작사·작곡 실력으로 ‘맴도는 얼굴’, ‘언젠가 그날’, ‘조용히 들어요’, ‘잠 못 이루는 이밤을’, ‘풀잎’, ‘그저 가려나’, ‘나는 이 노래하리오’ 등 많은 명곡을 탄생시켰다. 팀 활동이 끝난 후 1993년 ‘하늘과 땅’, ‘나는 떠나가야 하리’ 등이 실린 솔로 음반을 발표하고 미국으로 이민 간 고인은 작곡이나 가수 활동을 하지 않고 음향 관련 업체를 운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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