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1970년대
    2026-08-08
    검색기록 지우기
  • 모욕
    2026-08-08
    검색기록 지우기
  • 미사일
    2026-08-08
    검색기록 지우기
  • 중상
    2026-08-08
    검색기록 지우기
  • 애도
    2026-08-0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7,797
  • ‘法典’ 반세기

    ‘法典’ 반세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법전(法典)’이란 용어를 사용한 현암사의 ‘법전’이 출간 50년을 맞았다. 1959년 첫해부터 올해까지 매년 빠지지 않고 개정 증보판을 내온 현암사가 이를 기념해 19일부터 26일까지 국회도서관에서 법전 50년의 흐름을 한눈에 살펴보는 전시회를 연다. ‘법전’ 53권과 외국 법전, 소형 법전, 해방 직후 시사종합지 ‘건국공론’등 70여권이 전시된다. 현암사의 ‘법전’이 나오기 전까지 법령집을 일컫는 용어는 프랑스 단어를 일본어식으로 번역한 ‘육법전서(六法全書)’가 통용됐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현암사 창업자 고(故) 조상원 선생이 3년간 편찬 작업에 매달린 끝에 1959년 ‘법전’이란 이름을 붙인 법령집을 출간했다. 이 책은 초판 발매와 동시에 매진 사례를 빚으며 법령집의 기본형으로 자리를 잡았다. 법전은 초판부터 2009년 최신판까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외형을 바꾸고, 내실을 키워왔다. 초판은 120x150㎜ 판형에 1120쪽으로 430개 법령을 실었다. 책값은 5000환이었다. 올해 나온 최신판은 210x300㎜ 판형에 3616쪽, 1330개 법령을 싣고, 국제법 부록집과 세법집, 최신 법령 판례 CD를 부록으로 게재했다. 책 값은 16만원이다. 지금은 당연시되는 법조문별 제목은 1960년판에서 처음 도입했다. 법령의 조·항·호에 개정일을 표기하는 관례는 1963년판에, 가로쓰기 편집은 1964년판에 확립했다. 1970년대에는 판형이 커졌고, 단어별· 사례별 조문 찾기 색인이 처음 등장했다. 1980년대에는 일본식 낱말을 우리말로 바꾸기 위한 ‘순화용어편람’이 출간됐다. 1990년대엔 법령건수가 1500건으로 늘어나자 활자 크기를 대·중·소 세 가지로 구분 편집했고, 각 특별법에 공소시효를 표기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외지인 이주·농외소득… 행복마을 효과

    외지인 이주·농외소득… 행복마을 효과

    대흥사 바로 밑자락인 전남 해남군 삼산면 매정 마을은 최근 주변 풍경이 확 바뀌었다. 2~3년 전만 해도 오랫동안 방치된 폐가가 드문드문 보이고,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마을이 ‘행복마을’로 지정된 지난 2007년부터 젊은 층이 이주하고 서울과 해남읍 등 외지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을 앞길엔 메타세쿼이아와 동백나무들을 심었고, 빈터 곳곳엔 화단을 조성했다. 마을 어귀에 흐르는 실개천에 버려진 농약병 등 쓰레기를 치웠고, 가장자리마다 꽃들을 심었다. ●해남 매정마을 한옥22채 새로지어 이 마을 이장 최상용(60)씨는 “최근 들어 우리 마을에 이주하겠다는 외지인들의 전화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며 “정부의 각종 지원 사업에 힘입어 ‘돌아오는 농촌’이 현실화되고 있다.”고 귀띔했다. 주민 김모(59)씨는 “헌 집이 헐리고 현대식 한옥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마을이 깨끗해지고 생기가 돈다.”며 “‘제2 새마을운동’이나 다름없는 농촌마을 가꾸기 사업이 모든 지역으로 확산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 마을은 행복마을로 지정된 이후 모두 22채의 한옥이 새로 지어졌다. 낡은 115채도 점차 주거 환경개선 사업이 이뤄진다. 마을 주민들은 “1970년대 세워진 지금의 마을회관도 한옥으로 새롭게 신축되기를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전남도는 첫해인 2007년 해남 매정, 무안 석북 등 5개 마을을 시작으로 지난해 12곳, 올해 21곳 등 모두 39곳을 행복마을로 선정했다. 전원 마을 12곳도 행복마을로 지정, 새롭게 조성하고 있다. 도는 내년에 21개 마을을 추가로 선정해 정주여건 개선 등 각종 지원에 나선다. 이에 따라 내년 한해 동안 500동의 한옥이 신축 또는 개·보수된다. 행복마을은 선정위원회가 공모방식으로 지정하며, 희망 마을을 대상으로 현지 실사 등을 거쳐 결정된다. 한옥 12호 이상 신축이 가능하고, 주민들이 사업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추진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행복마을에서 한옥을 지을 경우 ‘한옥지원 조례’에 따라 지방비 4000만원과 장기 저리 융자 3000만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 또 마을 상·하수도와 마을회관, 진입로, 안길, 주차장 등이 확충된다. 행복마을은 약초, 녹차, 연꽃, 야생화 등 특화작물을 재배해 도시민을 마을로 유치하고, 체험활동과 민박·특산품 판매 등을 통해 소득증대를 꾀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도는 이를 위해 신축한 한옥은 반드시 방 한칸을 민박용으로 활용토록 규정해 놨다. ●고흥 명천마을 전입문의 월2~70명 행복마을 사업 3년째인 현재 무안 약실 34명을 비롯, 함평 오두 10명, 장흥 우산 13명, 해남 매정 11명, 구례 상사 20명, 진도 신전 4명 등 모두 147명의 외지인이 행복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마을주변 땅값도 고흥 명천마을이 ㎡당 6800원에서 2만 8000원으로 4배 이상 오른 것을 비롯, 행복마을로 지정된 곳의 주변 토지가 평균 200% 이상 상승한 것으로 조사됐다. 외지인들의 전입 문의도 매월 2~70명 정도에 이른다. 한옥 민박을 통한 농외소득도 가구당 평균 70만원을 웃도는 등 낙후된 농어촌 마을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승옥 전남도 행복마을 과장은 “이 사업은 고령화된 농어촌에 활력을 불어 넣고 주민 소득증대를 위해 마련됐다.”며 “해당 마을에는 그린농촌 가꾸기, 참살기좋은 마을 가꾸기 등 각종 개발사업을 패키지로 묶어 집중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외지인 이주·농외소득… 행복마을 효과

    외지인 이주·농외소득… 행복마을 효과

    대흥사 바로 밑자락인 전남 해남군 삼산면 매정 마을은 최근 주변 풍경이 확 바뀌었다. 2~3년 전만 해도 오랫동안 방치된 폐가가 드문드문 보이고,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마을이 ‘행복마을’로 지정된 지난 2007년부터 젊은 층이 이주하고, 서울과 해남읍 등 외지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을 앞길엔 메타세쿼이아와, 동백나무들을 심었고, 빈터 곳곳엔 화단을 조성했다. 마을 어귀에 흐르는 실개천에 버려진 농약병 등 쓰레기를 치웠고, 가장자리마다 꽃들을 심었다. ●해남 매정마을 한옥22채 새로지어 이 마을 이장 최상용(60)씨는 “최근 들어 우리 마을에 이주하겠다는 외지인들의 전화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며 “정부의 각종 지원 사업에 힘입어 ‘돌아오는 농촌’이 현실화되고 있다.”고 귀띔했다. 주민 김모(59)씨는 “헌 집이 헐리고 현대식 한옥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마을이 깨끗해지고 생기가 돈다.”며 “‘제2 새마을운동’이나 다름없는 농촌마을 가꾸기 사업이 모든 지역으로 확산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 마을은 행복마을로 지정된 이후 모두 22채의 한옥이 새로 지어졌다. 낡은 115채도 점차 주거 환경개선 사업이 이뤄진다. 마을 주민들은 “1970년대 세워진 지금의 마을회관도 한옥으로 새롭게 신축되기를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전남도는 첫해인 2007년 해남 매정, 무안 석북 등 5개 마을을 시작으로 지난해 12곳, 올해 21곳 등 모두 39곳을 행복마을로 선정했다. 전원 마을 12곳도 행복마을로 지정, 새롭게 조성하고 있다. 도는 내년에 21개 마을을 추가로 선정해 정주여건 개선 등 각종 지원에 나선다. 이에 따라 내년 한해 동안 500동의 한옥이 신축 또는 개·보수된다. 행복마을은 선정위원회가 공모방식으로 지정하며, 희망 마을을 대상으로 현지 실사 등을 거쳐 결정된다. 한옥 12호 이상 신축이 가능하고, 주민들이 사업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추진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행복마을에서 한옥을 지을 경우 ‘한옥지원 조례’에 따라 지방비 4000만원과 장기 저리 융자 3000만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 또 마을 상·하수도와 마을회관, 진입로, 안길, 주차장 등이 확충된다. 행복마을은 약초, 녹차, 연꽃, 야생화 등 특화작물을 재배해 도시민을 마을로 유치하고, 체험활동과 민박·특산품 판매 등을 통해 소득증대를 꾀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도는 이를 위해 신축한 한옥은 반드시 방 한칸을 민박용으로 활용토록 규정해 놨다. ●고흥 명천마을 전입문의 월2~70명 행복마을 사업 3년째인 현재 무안 약실 34명을 비롯, 함평 오두 10명, 장흥 우산 13명, 해남 매정 11명, 구례 상사 20명, 진도 신전 4명 등 모두 147명의 외지인이 행복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마을주변 땅값도 고흥 명천마을이 ㎡당 6800원에서 2만 8000원으로 4배 이상 오른 것을 비롯, 행복마을로 지정된 곳의 주변 토지가 평균 200% 이상 상승한 것으로 조사됐다. 외지인들의 전입 문의도 매월 2~70명 정도에 이른다. 한옥 민박을 통한 농외소득도 가구당 평균 70만원을 웃도는 등 낙후된 농어촌 마을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승옥 전남도 행복마을 과장은 “이 사업은 고령화된 농어촌에 활력을 불어 넣고 주민 소득증대를 위해 마련됐다.”며 “해당 마을에는 그린농촌 가꾸기, 참살기좋은 마을 가꾸기 등 각종 개발사업을 패키지로 묶어 집중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메트로플러스] 신월동 1400가구 아파트 재개발

    서울시는 양천구 신월동 159-102 일대 9만 2546㎡를 신월1주택재개발 정비구역으로 12일 지정 고시한다고 11일 밝혔다. 이 구역은 사업성 확보와 주거환경 개선을 동시에 실현시키기 위해 대규모 단지로는 처음으로 1400가구의 아파트가 저층 블록형과 탑상형이 조합된 형태로 설계됐다. 기존의 격자형 가로망을 활용하기 위해 도로변에는 저층형 상가를 배치했으며 단지 시설이 주변지역 공원 및 도로와 잘 연계될 수 있도록 설계했다. 1970년대 철거 이주민 정착지였던 이 지역은 도로와 주차공간 등 기반시설이 부족하지만 남부순환로와 가로공원길에 인접해 있고 주변에 화곡역과 신월IC 등이 있어 교통 접근성이 양호하다고 시는 덧붙였다. 주변 지역에도 재정비 계획이 진행 중이어서 앞으로 이 일대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변모할 것으로 전망된다.
  • 양식화된 그림을 거부하는 두 작가를 만나다

    양식화된 그림을 거부하는 두 작가를 만나다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베르나르 뷔페(1928~1999)의 그림은 1950년대의 작품이 1980년대의 후기 작품보다 높이 평가받는다. 당연히 미술시장에서 가격도 초기 작품이 높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나올까. 미술가들은 뷔페가 말년에 양식화된 기술로 작품을 기계적으로 그린 탓이 아니겠느냐고 한다. 사람들은 작품에 익숙해지면 금방 혼이 담긴 그림과 그렇지 않은 그림을 골라낼 수 있다고 한다.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가격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작가들은 작품활동을 할 때 관람객들은 대부분 작품이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작가들은 그 비슷해 보이는 작품 안에서도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한다고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그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양식화를 피하고자 노력하면서 일필휘지의 느낌을 강조한 작품들이지만, 그 크기에서는 서로 다른 두 명의 전시가 열린다. ●설원기 초대전 - 새달 6일까지 금호미술관 “양식화된 그림은 싫다.”는 설원기(58) 한국예술종합대 교수는 서울 소격동 금호미술관 전관에서 12월6일까지 초대전을 갖는다. 드로잉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즉흥적이고 자연스러운 그림을 그려온 설 교수의 특징이 이번 전시에도 잘 나타나 있다. 1970년대 작품부터 근작까지 페인팅 60점, 드로잉 200점을 걸었다. 드로잉도 페인팅도 대체로 20호 안팎이다. 드로잉은 복사지 A4용지 크기의 작품들을 하나로 묶어서 대형 작품을 만들어놓기도 했다. 여자의 누드와 꽃 정물, 얼굴 초상화 등이 소재다. 설 교수가 지난해 교환교수로 미국에 있을 때 그린 드로잉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설 교수는 이번 전시에서 캔버스 대신 종이와 마일러 필름(Mylar Film)이라는 미끈거리는 폴리에스테르 필름을 사용해 드로잉과 페인팅을 선보였다. 그는 “붓질의 예민함과 물감의 물성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지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덧칠을 할 경우 그림의 맛과 멋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마일러 필름에 그린 그림도 그러했다. 이를테면 얼굴 선을 몇 번 이어 그렸는지 보이게 되는데, 설 교수는 대체로 일필휘지로 한 번에 인물을 그려냈다. 그림이 그리 크지 않은 이유에 대해 설 교수는 “나는 내 그림이 커다란 빌딩의 로비에 걸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사람의 눈을 매혹하는 작품에 매력이 없다.”라면서 “서재에 걸리는 그림, 보고 난 다음 생각나서 또 들여다보고 싶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계산하는 성격에 따지기도 좋아하고 술· 담배도 하지 않아 예술가적 기질과 거리가 있다는 설 교수는 원래 법학대학원을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미국 위스콘신주의 벨로이트 대학교에서 우연하게 미술분야를 한두 과목 수강한 뒤 3학년 때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20살 무렵이다.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미술 석사를 했다. 어려서부터 화가수업을 받지 않고도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미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으로 발령받은 아버지를 따라나선 덕분이다. 미술은 그에게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하나의 수단이자 목적”이었다고 한다. 전시장은 마치 고등학교 미술반처럼 다양한 종류의 그림과 드로잉이 걸려 있고, 열정과 실험정신이 가득한 것 같아 부담이 없다. (02)720-5114. ●김종학 초대전 - 13일부터 가나아트 설악산을 그린 서울대 김종학 전 교수와 구별하도록 ‘젊은 김종학’으로 불린다는 세종대 김종학(56) 교수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에서 13일부터 12월6일까지 초대전을 연다. 가나아트 1~3관까지 전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 김 교수는 4년 전 토탈미술관에서 보여줬던 극사실주의적 꽃 작업과 다른, 거칠고 힘찬 드로잉을 커다란 화면에서 보여준다. 전시 제목은 ‘이미지와 기억’. 이번 전시에서 변신을 시도한 김 교수의 캔버스는 흰색 아크릴판. 그 위에 김 교수는 번쩍번쩍하고 화려한 색깔이 더 도드라지는 자동차 도료로 드로잉하듯이 일필휘지로 그림을 그려냈다. 붓의 움직임을 동적으로 표현한 이번 작품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함께 공존하는 세계를 한 화면에 담아낸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자동차 도료를 페인팅용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내가 처음일 것”이라며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세계로 넘어가는 사이에 끼인 세대들의 복합적인 감정을 보여주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림의 소재는 꽃이나 사과, 배, 포도 등 ‘별것 아닌 것들’이다. 이 별것 아닌 사물들은 김 교수의 손에서 대형 이미지로 재현돼 관객들을 압도하거나 매혹할 것이다. 이 그림의 원형은 1989년 파리 유학길에서 찾아낸 것이다. 서울대 서양화학과를 졸업한 그는 서양식 그림을 제대로 배워보겠다며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서양에 가자 동양인인 자신이 더 잘 보이고, 동양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 서양과 동양의 차이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질 수 없을 무렵 어느 날 저녁 디저트로 나온 포도를 보면서 그는 ‘득도’를 한다. 그 포도가 수박만 한 크기의 검은색 알맹이로 보인 것이다. 다음날 그는 가로 4m, 세로 3m 크기의 캔버스에 수박 크기의 검은 색 포도 알갱이를 그리고 몹시 흡족해했다. 삶의 열정과 에너지를 포도의 형태에서 발견했다고나 할까. 그 후로 서양 배나, 욕망의 상징 같은 붉은 사과, 한국적 이미지가 숨어 있는 마른오징어 등 별것 아닌 소재를 뻥튀기해서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관객들이 작품의 이미지를 통해 서양과 동양, 세대와 세대의 차이를 찾고, ‘나는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해보길 바란다. 그의 작품은 주로 빌딩의 로비에서 보게 되는데, 워낙 작품 크기가 커서 개인이 소장하기에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크기에서 오는 압도적인 힘, 매력을 그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02)720-1020.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카펜터스 데뷔 40년 명곡 40곡

    카펜터스 데뷔 40년 명곡 40곡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팝송을 꼽을 때 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노래 가운데 ‘톱 오브 더 월드’, ‘예스터데이 원스 모어’가 있다. 혼성 듀오 카펜터스는 록 음악의 전성기였고, 베트남전 등으로 낭만보다는 허무가, 또 산업화로 인한 물질만능주의가 지배하던 시기인 1970년대에 이러한 노래들을 불러 전세계 음악팬들을 따뜻한 감성으로 물들였다. 감미로운 목소리로 보컬을 맡았던 동생 카렌 카펜터와 작곡·편곡을 비롯해 프로듀싱을 담당한 5살 터울의 오빠 리처드 카펜터로 구성된 카펜터스는 1983년 카렌이 거식증으로 32세의 나이에 숨지며 날개를 접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의 노래는 시대를 뛰어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카펜터스의 데뷔 40주년을 기념하는 베스트 앨범 ‘40/40’이 발매됐다.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했던 ‘톱 오브 더 월드’와 ‘클로즈 투 유’, ‘플리즈 미스터 포스트맨’을 비롯해 ‘예스터데이 원스 모어’, ‘레이니 데이스 앤드 먼데이스’, ‘포 올 위 노’, ‘슈퍼스타’, ‘위브 온니 저스트 비건’ 등 대표곡 40곡을 CD 2장에 담았다. 음악 CD와는 별도로 리처드가 직접 참여한 다큐멘터리 DVD ‘클로즈 투 유-리멤버링 더 카펜터스’도 발매됐다. 카펜터스의 데뷔부터 성공에 이르는 과정과 대표곡의 라이브 영상, TV 출연 모습 및 CF 영상, 백악관 방문 모습, 카렌의 죽음과 관련한 숨은 이야기 등을 담았다. 유니버설뮤직.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지방시대] 요산의 휴머니즘 정신 아래 화합할 때/박창호 부산도시공사 감사

    [지방시대] 요산의 휴머니즘 정신 아래 화합할 때/박창호 부산도시공사 감사

    국제 영화제와 불꽃 축제가 부산의 초가을을 열더니 요산 문학제가 이어지면서 부산의 만추를 적시고 있다. 별들의 행진과 불의 향연은 가을밤에 스러지고 영혼을 살찌우는 인문학의 잔치가 제격이다. 영화와 불꽃, 그리고 문학제라는 절묘한 순열이 세상살이의 행복샘을 자극한다. 마치 오감의 카타르시스 뒤에 허탈함이 따르니 정신의 허기를 돋우라는 자연의 이치 같다. 지난달 30일부터 시작해 8일까지 열리는 ‘요산 문학제’를 바라보는 기대가 남다른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그래도 개항 이후 부산이 내세울 수 있는 ‘정신적 가치’는 요산 김정한(1908~1996)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41편의 소설을 발표한 요산의 문학적 업적과 기법은 잘 알려졌다. 작품 속에 스며있는 사상과 가치관은 말할 것도 없고 문체와 사투리에 이르기까지 면밀하게 해석한 평론, 논문을 접속하기도 어렵잖다. 작품 속에 녹아있는 요산의 문학 정신은 한마디로 ‘사람답게 살아라.’라는 것이다. ‘사람답게 살아가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한다든가,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이 갈 길이 아니다.’는 글귀는 요산이 원로 소설가 최해군에게 직접 뽑아준 대표적 구절이다. 또 하나,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은 꼬장꼬장한 정신 속에 깃든 성실과 치열함이다. 작품을 쓰기 위해 식물도감까지 만들 정도였다. 1970년대 후반 요산은 동아대생들에게 “세상에 이름 모를 꽃이 어디있나. 작가 자신이 이름을 모를 뿐이지. 이런 무책임한 표현을 쓰지 말라.”고 일갈했다. 올해 요산문학제 테마는 ‘요산 정신, 새로운 100년을 향하여’다. 지난해 탄생 100년을 맞아 ‘요산은 살아 있다’는 캐치프레이즈의 속편이다. 올 문학제는 창작기금이 신설됐고 시민 참여 프로그램이 마련된 것이 특징이다. ‘사진으로 보는 요산의 삶과 정신’ 전시회와 요산이 한때 교직에 몸담았던 경남 통영으로 문학기행을 떠나는 것도 이채롭다. 참가 문인단체의 외연도 확대됐다. 부산문인협회 부산시인협회 한국펜클럽문학회 부산지회 등을 포함해 요산기념사업회가 주관한다. 그러나 문단 내부의 불협화음을 극복하지 못한 점은 옥에 티다. 부산작가회의가 불참하게 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요산 문학제에 문단이 모두 참여해 최대 규모로 단합을 과시하자는 뜻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지난 12년 동안 요산기념사업을 주관해온 작가회의의 전문성과 경험을 활용할 수 없게 된 것은 기념사업에 손실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작가회의 측의 불참 선언에 대한 배경이 아직은 정확하게 공개되지는 않은 것 같다. 기념사업회 측은 범 문단의 행사로 바뀌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작가회의는 기념사업회 측이 문학제의 정체성을 흔든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갈등과 대립은 세상살이의 한 모습일 수도 있다. 그래도 요산 정신이 ‘지역 사회의 소금 역할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숙성되는 가운데 양측 관계자 일부가 서로 돌아앉은 듯한 모습은 협량스럽게 보이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요산의 삶과 정신을 공감하고 실행하는가에 달렸다. 요산 정신은 문학인만 누리는 것보다 보통 사람이 함께 느끼고 실천할 때 감동이 배가 된다. 누구나 요산의 삶을 이야기하고, 요산 문학을 비평할 수도 있어야 ‘요산은 살아 있고, 또 새로운 100년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요산 기념사업회 측이나 작가회의 측이 대승적 견지에서 양보와 포용의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요산 정신은 혼탁한 우리 사회에 공명을 주는 곧은 소리이기 때문이다. 박창호 부산도시공사 감사
  • 이탈리아 ‘붉은 여단’ 여조직원 목매 자살

    이탈리아 ‘붉은 여단’ 여조직원 목매 자살

    이탈리아의 극좌파 테러조직 ‘붉은여단’의 여자 조직원이 로마교도소에서 자살했다고 영국 BBC가 ANSA통신 등을 인용해 1일(이하 현지시간) 보도했다.  지난달 31일 오후 로마의 레빕비아 여자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다이애나 블레파리 멜라치(43)가 자신의 감방에서 침대 시트로 목을 매 숨진 채로 발견됐다.그는 2002년 노동개혁을 추진하던 정부 자문관 마르코 비아지를 볼로냐에서 살해한 혐의로 2005년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이었다.  안젤리노 알파노 법무장관의 지시에 따라 그녀의 사망 경위를 조사하고 있는데 변호인은 그녀가 심각한 정신적인 문제를 갖고 있어 몇년 동안 병원으로 이감해줄 것을 법원에 청원해왔다고 밝혔다.이탈리아 고등법원이 그녀의 청원을 기각한 직후 자살을 결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탈리아 교도소 노조는 교도소의 관리 부실을 지적해왔는데 특히 멜라치가 자살한 레빕비아 교도소는 간수들이 심각하게 부족한 것으로 지적돼 왔다.  멜라치 외에도 비아지 살해 혐의로 4명이 유죄 선고를 받고 복역 중이라고 BBC는 덧붙였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납치와 살인,사보타지 등으로 악명을 떨쳤던 붉은 여단은 이후 경찰의 치밀한 검거 작전으로 조직이 크게 약화됐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해외서도 푸른농촌 희망 찾자”

    “해외서도 푸른농촌 희망 찾자”

    반세기 전,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 한국. 그러나 이제는 글로벌 이슈를 논의하는 메인 테이블인 주요 20개국(G20) 의장국이자 글로벌 경제위기를 가장 빨리 극복한 경제 강국으로 주목받고 있다. 또한 만성적인 식량난을 극복하고 농업 선진국으로 농업 기술과 인력을 지원, 식량문제 해결의 가장 성공적인 모델로 손꼽히고 있다. 여기에 농촌진흥청은 개도국에 대한 맞춤형 농업 기술과 인프라를 제공, 자발적 의식 개혁 운동인 푸른농촌희망찾기의 국제화에 앞장서고 있다. 1일 농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해외에 농업 기술을 이전한 것은 1970년대로 올라간다. 1972년부터 농진청 주도로 시작된 외국인 초청 훈련 실적은 지난해까지 116개국 3275명에 달한다. 우리가 직접 파견한 농업전문가도 72개국 457명이나 된다. 김재수 농진청장은 “연수생 중에는 캄보디아 부총리, 태국 상원의원 등이 배출되는 등 해당 국가의 지도층에 친한국적인 정서가 자리잡는 데 농업기술 이전 사업이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개도국 농업기술 지원 사업이 축적되면서 농진청에 한국 농업과 농촌 개발 노하우를 이전해 달라는 요청도 쇄도하고 있다. 농진청은 지난 6월 열린 한·아세안 정상회담을 계기로 필리핀과 미얀마, 캄보디아 등과 기술지원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기도 했다. 농진청은 농업기술협력의 질적인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과거 초청훈련과 전문가 파견 등 비연속·간접지원 방식에서 지속적·직접지원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다. 푸른농촌희망찾기의 핵심인 의식 개혁과 더불어 기술 이전, 농촌 개발을 아우르는 맞춤형 농업개발 노하우를 전수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농진청은 베트남과 미얀마, 우즈베키스탄, 케냐, 브라질, 파라과이 등 6개국에 설치돼 있는 농진청 해외농업기술개발센터(KOICA)를 2012년까지 30개소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농진청 관계자는 “단순한 식량 원조가 아닌 농업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재배기술과 종자 등 농자재 지원, 관배수 시설 등 농업 인프라 구축, 교육 훈련 등 인적자원의 개발과 지원이 더욱 중요하다.”면서 “우리 역시 해당국의 자원을 공동 개발하는 등 양국이 함께 ‘윈윈’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글로벌 시대] 이미지 시대/조환복 주 멕시코 대사

    [글로벌 시대] 이미지 시대/조환복 주 멕시코 대사

    과연 이미지 시대이다. 개인은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기업은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국가는 위상 제고를 위해 이미지를 활용한다. 이미지에 국제수지 개념을 도입하면 일반적으로 선진국은 이미지 흑자국이고 후진국은 이미지 적자국이다. 생산국이 어디냐에 따라 상품의 선호도를 결정하는 국가 이미지 효과가 있다. 우리 전자제품이 일본제품에 비해 가격이나 품질 면에서 부족한 것이 없었음에도 한동안 국제시장에서 선호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일본 제품은 기술의 상징으로 강하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국가이미지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 경기와 같다. 국가 이미지는 해당 국가의 국민, 기업, 정치 및 경제 상황, 문화 수준 등에 대한 다양한 인식이 국제적으로 누적되어 이루어진다. 한번 형성된 이미지를 바꾸는 것은 새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개별 기업이 브랜드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듯 국가 역시 좋은 이미지를 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러시아는 최근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등 주변국과의 분쟁으로 국제적 비난에 직면하자 국가이미지를 정부차원에서 관리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국가이미지개선위원회를 설립했다. 뉴질랜드는 ‘100% 청정국가’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화석연료 배출이 급증하면서 녹색국가 이미지를 상실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이미지 개선이 심각한 국가적 과제로 등장했다. 한국은 금년 1월 국가브랜드위원회가 설립되기 전까지 국가적 차원의 이미지 관리 노력이 종합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아직도 외국인에게 한국은 빠른 경제발전, 최첨단 IT제품 생산국이라는 긍정적인 면뿐 아니라 남북 분단, 북한 핵문제, 격렬한 시위문화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혼재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미지 수지는 과거 만성적자 상태에서 점차 흑자상태로 돌아서고 있다.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계기들이 있다. 우선 2002년 월드컵이다. 그 이전까지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와 같은 수동적이고 은둔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700만 거리응원과 4강투혼의 신화를 이루며 우리의 이미지는 ‘다이내믹 코리아’로 변신하게 됐다. 또한 정보화시대로 접어들면서 IT강국의 이미지 역시 국제사회에 한국은 다이내믹하게 발전하는 나라라는 인상을 줬다. 또 하나의 계기는 역설적으로 한국의 경제위기이다. 1997년 말 외환위기로 인해 한국경제가 벼랑에 섰을 때 수많은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장롱 속의 금반지 등을 내놓아 외환 부족을 타개하는 데 일조했다. 이러한 애국심은 위기 속에서 단합하는 한민족이라는 인상을 국제사회에 부각시켰다.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도 한국은 OECD국가 중 가장 빨리 회복할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위기를 거치며 한국은 위기에 강한 나라이며 한국민은 위기에 직면하면 단단히 뭉치는 민족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었다. 국가이미지는 경쟁력이다. 우리의 새로운 국가이미지가 강화될수록 상대적으로 저평가됐던 우리의 기술과 상품에 대한 인지도와 선호도가 높아질 것이다. 이러한 국가이미지 개선을 통해 우리는 수출 증진에 따른 직접적 경제효과, 기업의 위상 변화, 국제적 신뢰도 제고, 국민적 자긍심 증진이라는 엄청난 가치변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한국의 이미지 수지는 아직 확실히 흑자상태로 고착되었다고 할 수 없다.우리는 지난 1970년대 일본이 높은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왜 경제동물이라는 비아냥을 받았는지를 인식해야 한다. 국제사회에 상응하는 기여가 부족할 경우 한국은 돈만 아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박힐 공산이 크다. 이제는 국가이미지 흑자가 고착될 수 있도록 국민, 기업, 정부가 함께 노력해야 할 때이다. 조환복 주 멕시코 대사
  • 中정부 7080 고위직 기용 논란

    │베이징 박홍환특파원│1970년대에 태어난 ‘70허우(後)’나 1980년대생인 ‘80허우’ 등 최근 중국에서 젊은 세대의 고위직 진출이 잇따르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중국 윈난(雲南)성 성도인 쿤밍(昆明)시 인민대표대회(인대) 상무위원회는 29일 국무원 재정부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 서기인 리첸을 부시장 후보로 선출했다. 올해 32세인 리첸은 인대 심의를 통과하는 대로 정식으로 부시장에 취임할 예정이다. 리첸은 산둥(山東)성 지난(濟南)의 산둥재정학원을 졸업한 뒤 1998년 공직에 입문, 잠시 고향인 산둥성 페이(費)현의 현장보와 부현장을 지낸 것을 빼고는 주로 재정부에서 근무해 왔다. 2006년부터 3년간 재정부의 ‘10대 젊은 인재’로 뽑힌 바 있다. 쿤밍시 관계자는 “어려운 업무도 거뜬하게 처리하는 등 능력이 뛰어나다.”고 발탁 배경을 설명했다. 지난 6월에는 29세 청년이 후베이(湖北)성 이청(宜城)시장에 선출됐다. 올초에는 산둥성 공청단 부서기에 1980년생인 장후이(張輝)가 임명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중국은 최근 지방정부 개혁을 위해 파격적으로 젊은 인재를 잇따라 요직에 기용하는 연경화(年輕化)를 추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짧은 경력으로 지방정부를 이끌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출신 배경에 대한 의혹도 제기된다. 앞서 이청시장에 선출돼 ‘최연소 시장’이 된 저우썬펑(周森鋒)과 마찬가지로 리첸도 인터넷상에서 큰 홍역을 치르고 있다. 그녀의 쿤밍시 부시장 후보 선임 소식이 알려지자 네티즌들은 “어느 고관집 자제냐.”는 등 비판적인 여론을 쏟아내고 있다. stinger@seoul.co.kr
  • [토요 포커스]천태만상 병역기피 수법 변천사

    병역기피 수법도 시대별로 발전해 왔다. 1960년대에는 학력을 속이거나 졸업시기를 늦춰 군 입대를 최대한 연기한 후 고령으로 병역을 면제받는 수법이 유행했다. 그 당시는 행정 시스템이 부실해 병적기록 조작도 쉬웠다. 병무담당자에게 뒷돈만 주면 진단서나 학위 조작 등이 가능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징병검사의 행정적 시스템이 점차 갖춰지자 고령으로 인한 병역면제는 거의 불가능해졌다. 단순한 학력 조작도 쉽지 않게 됐다. 그러자 질병으로 인한 병역기피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당시 낙후된 의료기술을 악용한 것이다. 후진국 질병으로 불리는 폐결핵을 비롯해 만성간염, 관절염, 중이염 등이 면제사유가 됐다. 1960~1970년대의 이 같은 병역기피 수법으로 볼 때 현재 병역 미필인 정치인 가운데 면제사유가 ‘고령’이나 ‘만성간염’이라면 병역기피 의혹을 받기에 충분하다. 1980년대에는 1970년대보다 질병의 수준이 높아졌다. 쉽게 발각되지 않고 치료가 쉽지 않은 정신병과 디스크가 대표적이다. 또 이때는 체중·신장 조작도 병역기피의 수법으로 사용됐다. 체중과 신장은 유동적이기 때문에 차후 적발돼도 변했다고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1990년대에는 국제화 시대에 맞게 국외 영주권 취득과 장기간 해외 체류 등으로 병역을 면제받는 수법이 주로 사용됐다. 이때 ‘군 면제자는 신의 아들이다.’라는 유행어까지 생겨났다. 2000년대 들어 병역기피 수법은 다양해지고 지능화됐다. 또 이전에 사용됐던 모든 수법들이 더 치밀한 모습으로 재탕되기도 했다. 약 15년 전쯤에 사용됐던 ‘환자 바꿔치기’와 허위 진단서 수법이 다시 등장하는가 하면 공무원시험, 해외연수 등으로 입영기한을 넘겨 면제 받으려는 수법도 동원됐다. 지난 2004년에는 유명 연예인과 프로야구 선수 등 136명이 소변에 약물과 피를 섞어 신장병으로 진단받아 병역을 면제받은 사실이 적발되기도 했다. 2007년에는 병역특례업체에 뇌물을 주고 편입했지만 복무를 전혀 하지 않다가 적발, 다시 현역으로 복무하는 사례도 있었다. 지난해에는 일부 연예인들이 잠을 자지 않고 커피를 많이 마시는 수법으로 혈압을 높여 면제되기도 했다. 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 남해안 멸치, 불법어획에 씨마른다

    남해안 멸치, 불법어획에 씨마른다

    “불법 어구를 장착한 양조망(연안 선망) 어선을 단속해 주세요.” 전남 완도군 청산도 등 남해안 일대는 멸치잡이 전쟁이 한창이다. 1970년대부터 멸치잡이 허가를 받은 기선권현망(선인망) 어선들이 불법 어구를 매단 채 ‘싹쓸이’ 조업을 일삼는 양조망 어선 단속을 촉구하고 있다. 올해 멸치 어획량이 지난해보다 40~50% 감소하면서 이들의 요구는 더욱 강경해지고 있다. 30일 전남도에 따르면 완도군 청산도·보길도·모도·횡간도 일대에 최근 멸치어장이 형성되면서 여수에 기반을 둔 기선권현망과 완도지역의 양조망 어선들이 몰려들어 멸치잡이에 나서고 있다. 기선권현망 어선들은 “양조망 어선들이 우리와 같은 형태의 그물로 멸치를 잡고 있다.”면서 “멸치가 흉어가 들면서 불법 양조망 어선들이 늘고 있지만 단속을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해양경찰 등은 명확한 법규정이 없다며 단속에 소극적이다. 이에 따라 어민들끼리 다툼이 일거나 민원이 빈발하고 있다. 이를 내버려두면 멸치 자원 고갈로 다른 어족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들은 “바다 먹이사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멸치가 마구 싹쓸이되는 행태를 방치한다면 결국 어족자원 황폐화를 불러올 것”이라면서 강력단속을 촉구했다. 연안어업용인 양조망(그림)은 수산업법에 따라 8t 미만의 동력선이 끄는 어망으로, 배 1~2척이 어군의 진행 방향 앞을 가로질러 원을 그리면서 투망하는 방식이다. 주로 중층이나 표층에서 회유하는 전어·학꽁치·정어리 등을 잡도록 고안됐다. 기선권현망(그림)은 근해어업용으로 등록된 40t 미만의 비교적 규모가 큰 어선으로 4~5척이 선단을 이뤄 멸치를 전문으로 잡는다. 전남지역에는 16개 선단이 조업 중이다. 조업은 1개의 자루그물 양쪽에 날개가 붙어 있는 형태로, 2척의 배가 투망한 후 양날개 끝을 끌고 어군(魚群)을 쫓는 방식이다. 어민간 분쟁은 양조망 어선들이 멸치떼를 향해 그물을 둘러치는 ‘법적 방식’이 아니라 불법 어구를 장착해 선인망처럼 ‘끄는 형태’의 조업에 나서면서 비롯된다. 이들 어선은 멸치를 현장에서 삶는 ‘굴뚝달린 가마솥’을 설치하고, 조업중 사고 예방을 위해 배 뒤쪽에 부력판을 다는 등 불법적으로 선체 구조를 바꾸고 있다. 현재 전남도에 등록된 양조망 어선은 80여척으로 이 가운데 20여척이 불법 조업을 일삼고 있으나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를 틈타 전북지역 양조망 어선 10여척과 나머지 전남지역 양조망 어선 50여척도 불법조업에 나설 채비를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양조망 어민들은 “서해안 어민들은 우리와 똑같은 그물을 쓰는데도 단속대상에도 들지 않는다.”면서 “정부에서도 그물에 자루를 달도록 규정을 바꿔주려는 상황에서 단속을 요구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완도해경 관계자는 “불법 멸치잡이 규정을 전남도가 마련해주면 곧바로 단속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전남도는 멸치 남획을 막고, 다른 어족자원 보호를 위해 기선권현망 어업 허가를 30년이 넘도록 내주지 않고 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거미박사’ 김주필 명예교수 200억대 가치 ‘거미박물관’ 동국대 기증

    ‘거미박사’ 김주필 명예교수 200억대 가치 ‘거미박물관’ 동국대 기증

    “대학에 기증해야 생태학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기증을 결심했습니다.” 국내 ‘거미박사 1호’인 동국대학교 김주필(66) 명예교수가 자신의 사재를 털어 만든 ‘주필 거미박물관’을 학교에 기증했다. 경기 남양주시의 이 박물관은 세계 최초의 거미 박물관으로, 김 교수가 평생 채집해 온 25만여점의 거미 표본과 수백종의 화석, 종유석 등이 보관돼 있으며 도자기, 불상, 병풍 등 다른 수집품도 빼곡히 들어차 있다. 부동산과 건물, 전시물 등을 합해 200억원대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교수는 1967년 서울대 동물학과를 졸업한 후 거미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1993년 갈라파고스군도에 서식하는 거미를 채집하러 갔는데 UN이 지정한 보호구역이라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면서 “1970년대 초 소백산맥에서 채집을 위해 밤낮 없이 산을 뒤지고 다녔는데 주민들이 무장간첩으로 오인해 체포된 적도 있었다.”고 말하며 웃어보였다. 김 교수는 “환경과 생태는 전 지구적인 문제인데 아직 정부는 생태학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부족해 아쉽다.”고 지적했다. 동국대는 전시관 주변의 학교 토지와 공휴지 1만㎡를 개발해 박물관 관람과 수목원 산책을 즐길 수 있는 ‘환경생태 체험학습장’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박성국기자 psk@seoul.co.kr
  • [씨줄날줄] 퉁단(通丹) 경제벨트/오일만 논설위원

    북한 접경지역에 ‘퉁단(通丹) 경제벨트’가 구축된다.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과 지린(吉林)성 퉁화(通化)시는 두 시를 묶는 개방 선도구(先導區)를 건설하기로 합의했다고 중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일종의 경제개발특구로서 2012년까지 4억 4000만위안(약 880억원)이 투입되며 북한과의 무역을 확대하고 나아가 동북아 지역에서의 경제무역 협력을 강화한다는 목표다. 퉁화항이 완공되면 국제보세 물류센터로서의 역할을 기대한다. 퉁단 경제벨트는 랴오닝·지린·헤이룽장(黑龍江)성 등 동북 3성 노후 공업기지 진흥전략의 일환이다. 동북3성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경제를 떠받쳐온 중화학 공업기지였지만 개혁·개방 이후 중국경제의 ‘애물단지’로 전락한 곳이다. 최근 4조위안(약 800조원) 규모의 경제 부양정책을 추진하면서 기존 노후공업 개조에서 ‘전방위 개발’로 전략을 수정했다. 지난 3월 하순 동북개발의 주창자인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랴오닝성을 찾아 ‘강력한 추진’을 촉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동북개발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헤이룽장성 수이펀허(綏芬河)와 랴오닝성 다롄(大連)을 잇는 전장 1389㎞의 둥볜다오(東邊道) 철도다. 이 철도는 압록강과 두만강 북편을 달리다가 언제든지 북한의 주요 지역과 연결될 수 있다. 중국 훈춘(琿春)과 북한 나진을 잇는 도로도 2006년부터 공사를 하고 있다. 원자바오 총리가 최근 북한 방문시 합의한 나진항 1호 부두 개발권과도 맥이 닿는다. 지난달 1일에는 지린성 허룽(和龍)과 난핑(南坪)을 잇는 철도 공사가 착공됐다. 난핑은 아시아 최대 노천 철광인 북한 무산광산과 맞닿은 곳이다. 자원 개발과 확보에 혈안이 돼 있는 중국이 북한의 철광과 텅스텐, 마그네사이트 등에 눈독을 들이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퉁단 경제벨트 건설 계획은 북한을 ‘동북 4성’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보다 구체화됐다는 의미다. 단둥은 중국 전체 대북 무역의 60%를 차지하는 핵심 지역으로 북한 신의주와 연결된다. 이 연결고리가 바로 압록강 대교 신설이다. 남북 간엔 지금 식량 지원을 놓고 기싸움이 한창인 가운데 중국의 북한 경제 침투 속도는 참으로 놀라울 정도다. 오일만 논설위원 oilman@seoul.co.kr
  • [10·26 30주년] 박상범 전 실장의 인터뷰 전문

    “陸여사 서거뒤 일에 몰두… 국산로켓·잠수함에 집념”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는 것 같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30주기인 26일을 사흘 앞둔 박상범 전 대통령 경호실장의 소회였다. 1979년의 ‘10·26’ 당시 경호계장이었던 그는 궁정동 저격 현장의 경호실 관계자 중 유일한 생존자다.  그는 특히 박 전 대통령이 말년에 유신헌법을 개정한 뒤 물러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비화를 들려줬다. 즉, “박 대통령이 집권 18년 정도 됐을 때인데 ‘1∼2년 뒤에는 하야를 해야하지 않겠나.’라는 말을 사석에서 했던 걸로 기억한다.”는 얘기였다. 경호 실무자로서 피경호대상을 지켜내지 못한 아쉬움을 넘어 그의 표현대로 “경제적으로 세계사에서 드문, 한강의 기적을 이룬” 박 전대통령이 평화적 권력이양까지 일구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 배어있는 듯했다.  “기억하기도 싫은 일들이라서 가능한 이야기를 안 꺼낼려고 했다.”며 서울신문의 인터뷰 요청을 완곡하게 사양하던 그였지만, 본지 취재진이 지난 23일 서울 방배동 민주평통장학재단 그의 사무실을 찾자 특유의 온화한 미소로 반겼다.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간 남북정상회담 준비과정의 뒷얘기에서부터 최근 김정일 국방위원장 답방 가능성에 이르기까지 경호 및 남북관계 전문가로서 견해를 담담하게 피력했다. 합기도 등 각종 무술이 도합 10단이 넘는 무골답지않게 담담한 어조였다.  ●‘10·26’ 30년을 맞는 소회가 남다를텐데.  -(박 대통령이) 서거하신지 30년이 된 요즘에 와서 박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하는 학술대회도 열고, 유물·기록전시회도 하고 그러더라. 기억하기 싫은 일들이라서 가능한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정부가 수립된 이후 한 60년만에 이 만큼 경제·사회·문화적으로 발전하게 된 나라는 세계사에 없다. 소위 한강의 기적은 정확히 이야기 하면 (박 대통령이 집권한 뒤부터) 약 40년만에 된 것으로 봐야할 것 같다. 우리보다 앞서가는 나라들이 이 정도까지 올라오는데 최소한 100~150년 걸렸다. 그런걸 보면 당시 지도자였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고 강력하게 뒷받침 해줬던 국민의 저력이 “참 대단하다.” 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해외 나가면 특히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한국 위상이 상당히 높아졌다고 느낀다. 서거 30년이 흘렀지만 매년 개인적으로 현충원을 간다. 그분 생각이 가끔 떠오른다.  ●최근 국제학술회의에서 진보쪽에서도 박 전 대통령을 재평가하는 움직임도 있다. 한 교수는 김일성 유일체제인 북한에 비해 상대적이지만 반대 세력을 허용한 박정희의 남한이, 그리고 개방적·국제적 전략을 택한 남한이 폐쇄적 전략을 취한 북한을 압도했다는 평가를 내렸는데.  -당시 그 분을 모시고 신변안전을 책임지고 다녔다. 1970년대부터 시작해서 지금 우리 경제를 이끌어가는 핵심인 조선, 제철, 자동차 등이 짧은기간에 상당한 발전을 했다. 과학분야도…. 요즘 두각을 나타내는 군수산업. 그게 그 당시에 기초가 다져지고 그랬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참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혜안을 가졌던 지도자가 아니였던가 하는 생각을 한다. 가끔 친구들과 부부동반으로 국내를 다니다 보면 관광지 재정비 한 곳을 많이 보는데 대부분 그 때 시작한 것이다. 그 족적을 보면서 당시의 지도자로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신 때 데모하다가 호주에서 공부한 김형아 호주국립대교수가 박정희 대통령을 재평가를 하게됐다는 말을 했다. 여러 면에서 박 대통령의 캔두이즘(Candoism)이 큰 기반이 됐다 하더라. 박정희 대통령의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캔두이즘이 국민성을 바꿨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그런 신념을 가까이서 감지할 수 있었는지.  -나이가 들수록 그런 생각이 난다. ‘할 수 있다.’, ‘우리도 잘 살 수 있다.’ 라는 신념을 심어준 자체가 중요하다. 그것이 밑거름이 돼 소위 말하는 한강의 기적이 이뤄진 게 아닌가 싶다. 그런 것들이 경제나 문화쪽에서 보인다. 최근 광화문 세종대왕 좌상이 생겼지만, 그 전에 이순신 장군 동상 세워지고…. 여주의 영릉이나 아산의 충무공 사당도 그 때 다 성역화됐다. 처음에 갔을때는 초라했는데 그분이 성역화시키고, 그게 우리 역사에서 계속 남는 거다. 사석에서 말씀하는 걸 보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갖고 계셨다.  ●경호를 하시면서 사선(死線)을 수차례 넘나들으셨겠지만, 그 중에서도 ‘10·26’ 현장이 가장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을텐데. 1983년의 아웅산사태 때도 아슬아슬했겠지만.  -경호했던 사람으로 거기에 대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자칫 변명으로 들릴 수 있고. 다만 그 이후에 후배들에게 나와같은 전철을 밟으면 안된다는 뜻에서 경호 기법이나 기술적 측면에서 엄청난 연구를 통해서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소위 경호라는 힘이 미칠 수 있는 범위가 있는데 경호력이 미칠 수 없는 지역을 최소화시키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10·26’도 봐야하지 않나 싶다. 어떤 경우라도 경호는 일단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매사를 접근하고 매사 들어봐야한다. 경호력이 미칠 수 없는 그런 부분을 최소화 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야한다는 건가.  -그렇다. 아웅산 사태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들이 다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경호관계자 중 ‘10·26’ 현장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것은 그 때 중앙정보부(현재 국가정보원) 후배가 평소에 후덕한 모습을 기억하고 일부러 비껴 쏴서 허벅지와 옆구리를 스치게 했다는 말도 있었는데. 확인사살 과정에서 버클에 맞췄다는 얘기도 있었고.  -제 3자를 통해 그런 얘기도 들었지만, 지금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다. 총을 맞고 쓰러져 있었고, 중정 직원들도 다 사형당했으니.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중정 직원들도 참 고생 많이 했다. 대통령 경호원과 한 집안 식구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 사람들 고생하는거 보고 서로 따듯하게 해서 깊은 우정들을 갖고 있었는데 그런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사실 정말 안타까웠다. 정말 제가 아끼는 후배들도 있었고 그 중에 저를 참 좋아하는 후배들도 꽤 많았다.  ●정황상으로는 어떤가.  -그 현장이 한 10평 그 정도 밖에 되지않는다. 가운데 직사각형의 막힌 조리대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졌으니까 확인사살은 실수할 리가 없다.  ●군출신 아닌 첫 문민 경호실장을 지냈는데, 박종규, 차지절, 장세동, 안현태, 이현우씨등 군 출신의 여러 경호실장들의 노후는 불행했거나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 욕심 탓인지, 아니면 권력의 비정한 생리나 속성 때문인지.  -둘다로 본다. 하나는 권력의 속성 탓이다. 당시 여러 사회적 여건이 그 자리에 그분들이 있을 때 여건이 그런쪽으로 갈 수 밖에 없게끔 만들어진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각 개인의 성격에도 (다소) 문제가 있지 않겠나 싶다.  ●문민정부 첫 경호실장으로서 그런 행로를 답습하지 않아야겠다는 철학을 정립했을 것 같은데.  -거기서 오랫동안 생활하다보니 많은 상사들을 모시고 이런저런 일을 겪었다. 그럴 때마다 확신은 안서지만 내가 만약에 과장자리. 처장자리에 갔을 때 ‘이러이러한 것은 내가 이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많이 했다. 어느 직장이나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우선 권위라는건 꼭 필요하지만 배타된 권위는 안된다. 예컨대 정부 각료들 회의 때 경호실장이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 그 안에 근접 경호를 책임지고 있는 팀장도 있기 때문에 굳이 국가 정책 논의하는 그 자리에 경호실장이 꼭 들어가서 앉을 필요가 있느냐. 교육도 참 중요한것 같다. 2년 있는 동안 교육문제에 신경을 많이 썼다. 어차피 경호도 국제화되기 때문에 많은 국빈들이 오고 우리 대통령도 1년에 몇 번씩 해외를 순방하고 그런 시대가 돼서 이제 어학 문제라든가 이런것을 체계적으로 해서 경호원들의 수준을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1년 코스이지만 해외 유학도 보냈다. 지금은 우리 후배들 보면 아주 상당한 수준에 와있다는 생각이다. 통역 필요없이 업무를 직접 협의할 정도까지 상당한 직원들이 와 있다. 경호실이 예전처럼 권위적이지 않다. 한 때는 날아가던 새도 떨어뜨린다는 조직이란 소리 들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아주 순수한 전문 조직으로 자리를 잡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경호라는 것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경호하는것이지 인간 누구를 경호하는것 아니다. 적어도 경호실은 그런 생각을 갖고 전문 조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  ●차지철 경호실장이 월권 등으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알력이 생겨 박 대통령 서거라는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고 보는 쪽도 있다. 이와 달리 박 대통령이 3선후 유신체제로 가면서 장기집권하는 통에 산업화 이끈 훌륭한 지도자로 남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불행해졌다는 지적도 있다.  -당시 저는 계장급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정치적이나 정책적인 면 잘 모르지만 다 일리가 있다. 다만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 의해 저격된 뒤 차지철 실장이 들어왔을때 사회적 환경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측면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차 실장이) 장관들을 배석시킨 채 국기하강식을 한다든가 하는 월권도 저질렀다는데.  -주말마다··· 그랬다. 굉장히 힘들 때가 있었다.  ●차 실장의 다른 독특한 면은.  -차 실장은 그런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금전, 돈 에 대해서 상당히 깨끗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아무것도 남겨놓은 게 없다. 돈에 있어선 깨끗했다.  ●최근 남덕우 전 국무총리가 회고록에서 1978년 경제특보 재임 당시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방식은 내가 봐도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어.”라며 개헌후에 물러나겠다는 박 대통령의 육성을 기록했는데 당시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  -사적으로 들었던 기억이 난다. 문제는 그 때가 (박 대통령 집권) 18년 정도 됐을때인데 “1~2년 뒤에는 내가 하야를 해야하지 않겠나.”하는 말을 사석에서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게 좀 앞당겨 실현됐더라도 ‘10·26’ 같은 불행한 일은 없었을텐데.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박 대통령의 지시로 유신헌법 개정안 초안 작업을 하던 신직수 법률특보가 10·26 이후 관련자료를 폐기했다고 남 전총리가 구체적으로 증언했던데.  -2년 정도 뒤에 하야하려고 생각하셨던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박 대통령은 그때 그런 생각을 확실하게 갖고 있었다.  ●문민정부 첫 경호실장 하실 때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과의 정상회담이 1994년 있을뻔 했는데, 그 때 경호 관련 협상에서 어느 정도까지 진도가 나갔었나.  -어느 단계에 가서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냐면 경호 통신 문제에 대해 협의가 다 끝나고 일주일 뒤에 우리 경호 선발팀들이 들어가게 돼 있었을 때였다. 물론 총기 휴대하고. 제일 문제된 게 위성 통신 문제였다. 그것까지도 다 원만하게 잘 협의가 돼서 일주일 뒤에는 최종적으로 선발팀이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모든 게 중지돼 버렸다.  ●그 때 김일성 사망을 예상하는 꿈을 꿨다는 비화가 있던데.  -당시 윤여준씨가 안전기획부 제 3특보였고, (별세한) 엄익준이 북한 국장이었다. 나중에 통일부 장관 지낸 정세현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있었다. 오찬하는데 저한테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경호실에서 인원을 정리해줘야겠다는 연락이었다. 그 자리에서 정리를 다 했다. 경호 쪽에서 인원 줄이고…. 오찬이 끝나고 제가 지나가는 이야기로 ‘아무래도 정상회담 안될거 같다.’라고 말하니 다들 깜짝 놀라더라. 경호실장이 그런 이야기 하니 (무슨) 특별한 정보있는줄 알고…. ‘무슨 이야기냐.’고 하길래 내가 농담처럼 ‘며칠 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해서 관에 입관하는 꿈을 꿨다.’고 얘기했다. 당시에 정책비서관이 ‘맞으면 도사로 모시겠다.’고 농담으로 말하더라.  ●김영삼 대통령에겐 보고했나.  -안했다. 지나가는 이야기로 끝났다. 김일성 주석 사망 일주일 전에 꿈을 꿨다. 새벽 3시쯤 깜짝 놀래서 깼다. 집사람을 깨워 ‘이상한 꿈을 꿨다.’고 하니 집사람이 ‘절대 다른 곳에 가서 말하지 말라. 경호실장이 그런 말 하면 북한가기 싫어서 이야기 한다고 오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더라.  ●당시 정상회담이 이뤄졌다면 남북관계 큰 진전 있었을 텐데 김일성주석 답방도 있을 수 있고.  -그렇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한국의, 한반도의 운명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든다.  ●꿈으로 나타날 정도면 신경 많이 써서 그런 것 같다. 사상 최초로 북한에 가는 남쪽 정상을 경호 하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 상당했을 것 같다.  -처음 이뤄지는 일이고 민감한 일이었다. 여러가지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사실 잠이 안왔다. 현장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여건들이 많았는데, 혹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옥쇄할 수 밖에 없다는 각오까지 했었다.  ●요즘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을 하고 싶어한다는 보도가 잇다르고 있다. 그런데 북측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경호문제로 답방에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호상 여러가지 가정도 있는데 그쪽도 똑같은 가정을 놓고 검토를 할 것 아니겠는가. 아차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문제이고 전부 총기를 휴대하고 있으니까 힘들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꼭 물리적인 위해가 아니더라도 김 위원장 쪽에선 남쪽 보수단체에서 계란이라도 던지지 않나 이런 것 신경쓰는 거 아닌가.  -그런것도 있고. 예를 들어 근접 경호하는 사람 중에 약간 정신적으로, 순간적으로 문제가 발생돼 총이라도 뽑고 한다면 그건 큰일이 생기는 거다.  ●영화 쉬리의 한 장면 떠오르는데.  -그럴 경우 전쟁터가 되는 거다. 사실 초청한 쪽에선 그런 의도 없더라도…. 그게 젤 위험하다. 우리도 그렇지만 그쪽에서도 그런 생각 했을 것이다.  ●역대 대통령 몇분 모셨나.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 등 다섯분을 모셨다. 김종필 총리 인준이 안되는 바람에 (인수인계가 늦어져) 김대중 대통령 취임 초반 (보훈처장으로) 잠깐 재직하기도 했다.  ●경호하면서 역대 대통령들의 성품을 가까이서 봤을텐데.  -서로 다르지만 공통점은 부지런하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건강하다. 그게 아주 공통되는 거 같고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대통령은 카리스마, 결단력이 있었던 분들 같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 같은 분은 공과가 있겠지만, 30~40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다. 제 기억으로는.  ●김영삼 대통령도 전두환,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보스형 리더십의 소유자인가.  -그렇죠.  ●노태우 대통령은 좀 다르지않나.  -좀 다르다. 최규하 대통령도 그렇고.  ●어느 정부든 할거 없이 대통령 아들 때문에 속썩인 일이 많은데.. (김영삼 대통령 아들인) 현철씨 관련해서 경호실장 하면서 김 대통령에게 직언하자 언짢아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런거 보다도…. 김현철씨 같은 분 보면 예의도 바르고 총명하고 그렇다. 대인관계도 좋고. 그런데 제가 볼 때는 아버님이 두 번씩 대선에 출마할 때 김영삼 대통령과는 부자간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동지이기도 했다. 대선 때 어려움을 겪으면서 참모역할을 하면서. 그런 측면에서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한다. 저도 한 2년 현철씨를 접촉했지만 예의바르고 대인관계 좋고 그랬는데, 대통령학에 대한 책도 좀 읽어보고 했지만 집권후 1년, 1년반 지나다 보면 주변에 사람들이 자꾸 모이게 되지않나. 어떤 사람들이 주위에 모이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이 본의 아니게 본인 생각과는 전혀 관계 없이 그런 문제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오랫동안 다섯 분 대통령 모시면서 보고 느꼈던 일이고, 김현철씨도 그랬던 듯하다. 그래서 그 당시 대통령께 (박관용 비서실장 등을 포함해) 여러분들이 고언을 드렸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아들인) 박지만씨와 관련한 에피소드중 기억나는 것은.  -박지만씨가 몇년 전 결혼해서 축복해 주기도 했지만, 그때는 육사를 다녔다. 아주 어릴 때인 1974년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신 뒤로 정신적 어려움이 많았고, 그래서 저항적인 그런 쪽으로 한 때 잠깐 바뀌었던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까 약물도 시작하게 됐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오죽 외롭고 했으면 그랬겠나 하고 이해도 된다. 어린 나이에 부모가 세상을 떠났고, 더군다나 비명에 가시지 않았나. 자연사로 가신것도 아니고…. 다행스러운건 지금 새 보금자리 만들어 잘 살고 있고….  ●육 여사 서거후 지만군을 돌보라고 박 대통령이 특별히 밀명 준건 없나.  -그런 건 없고, 그 당시에 지만군이 주말에 나오면 (청와대에) 안 들어가려고 했던 적이 있다. 외출나와서. 대통령이 찾으니까 차지철 실장이 나를 부르더니 ‘지만이좀 데리고 오라.’고 해서 명동에서 찾아서 데리고 갔던 그런 일도 있고…. 나중에 지만씨가 약물 때문에 보훈병원에서 봉사한 적이 있다. 제가 1997년 초에 보훈처장 할 때였다. 지금은 사업도 잘하고 가정도 이루고 애도 갖고 해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권부 근처에 있었으니 일부 측근들이 엉뚱한 권력을 행사하는것을 보는 등 온갖 인간 군상들을 목격했을 듯한데.  -그런 것들이 대통령의 자제분들이나 가까운 친척 분들을 망가뜨릴 수도 있고. 역시 사람이 젤 중요하다. 사회생활하면서 어떤 사람을 만나 대화하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기도 하니까.  ●지난 대선에 나온 허경영 후보가 공중부양한다는 농담같은 얘기가 나도는 데 무술의 달인으로서 말하자면 원조 공중부양 전문가라는 소문은 사실인가.  -(손을 내저으며) 에이, 지금은 세월이 흐르니 아픈데도 생기고…. 요즘엔 무술 훈련은 안하고 하루에 한시간 반 정도 집에서 열심히 헬스는 하고 있다. 지금 나이에 무슨 헬스 하냐고, 또 얼마나 오래살라고 그러냐고도 하는데 적어도 열심히 운동해서 건강해야 통일되는 것도 보고, 요즘 G20 그러는데 (한국이) G10 되는 건 보고 죽어야 할것 아니냐는 농담도 한다. 열심히 운동한다. 한 시간 헬스가서 운동하면 기분 좋고 정신도 맑아지고 의욕도 생기고 그렇더라.  ●다친 무릎 때문에 고생한다는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이제 등산은 하지않는다. 가끔 골프할 때는 보호대 차고 한다.  ●공직 땐 골프 안했는데 입문 1년만에 싱글했다는데.  -1998년 3월 중순까지 보훈처장으로 일했다. 그 직후 집사람과 골프 시작해 6개월 만에 80타 쳤다.  ●경호 전문가지만 민주평통 사무총장, 보훈처장 등 남북관계나 안보전문가로서 식견을 사회에 환원할 복안은.  -후배들에게 그런 이야기 많이 한다. 1996년 평통 총장 막바지에 장학재단을 하나 만들었다. 장학재단 일이 다 봉사다. 수익사업 하는것도 아니고.  ●강의 같은 것도 하나.  -강의를 그만둔게 한 3년 됐다.대전 배재대에서 경제학부 학생들이 인간관계론을 강의해달라 해서 2년, 경기대에 경호문제 및 대테러 문제로 석·박사 과정 학생들 한 2년 지도했는데 무척 힘들더라.  ●10·26 사태의 배경을 설명해 달라.  -신문이나 언론을 통해 수없이 많이 보도 됐다. 합동 수사팀들이 조사결과가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런 사건을 당했던 사람들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났더 일들이니까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그 다음에 모르잖아요. 총맞고 깨어나니 병원이었다. (공식)기록이 가장 중요하다. 작년에 어느 매체에서 1974년 문세광 사건 재조명한다고 했다. 한 11년동안 음성전문가 동원해서 준비했다는데, 어떤 결론을 내놓고 그쪽으로 몰아가니까.  ●경호원이 육 여사 돌아가시게 했다는 추측성 보도를 가리키는 건가요.  -그런 뉘앙스로…. 하도 그래서 내가 한 말이 있다. 총알은 절대 거짓말을 안한다. 탄환이 다 있다. 건물 내부에서 일어났던 일이니까 탄환이 없을리 없잖아요. 총알은 각도가 있다. 그렇게 이해시키려 했는데, 자칫잘못하면 왜곡된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 10.26 사건도 조금 전에 말씀드린대로 합동수사팀의 조사결과가 젤 정확하다. 객관적인 측면에서 합동 수사팀에 검찰도 다 들어가고 했기 때문에 숨길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운명이다. 운명이 아니고는 벌어질 수가 없다. 물론 원인도 다들 아시잖아요. 차 실장과 김재규씨하고 인간관계도 있고. (유신정권의)권력독점 문제 등도 있고.  ●호사가들은 미국 CIA가 배후조종했다는 설도 제기하는데요.  -(고개를 저으며)원래 그런 사건에 별별 추측이 다 일어나거든요.  ●박정희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는 어땠나요.  -그분도 유년시절부터 어렵게 성장하셨던 분이지만, 굉장히 정이 많은 분이었죠. 외모를 보면 아주 매섭고, 단구에다가 깡마르고, 눈매도 무섭고. 하지만 인정은 많았죠. 예전에 골프를 가끔 나가시면 추울 때나 더울때나 근무자를 꼭 챙기셨다. 아주 서민적이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74년도에 영부인 서거한 뒤에 굉장히 외로워하셨죠. 박근혜씨가 영부인 대행하셨지만 외로움을 타는 것 같았죠. 그러다 보니까 국정에만 몰두해서 74년 이후 쭉 기록을 봐도 알 수 있지만 공단이나 산업단지 조선소 등이 그 때 건설된 거죠. 창원 신도시에서 창원 공단, 풍산에는 풍산금속 등이 하나하나 자리잡기 시작했지요. 70년 초만 해도 우리나라가 철모도 하나 못만들었지요. 철모가 간단한거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총알이 맞아도 튕겨나갈 정도가 돼야하는데 그걸 못만들었으니까. 안면도에는 제 2국방과학연구소가 있었는데 거기서 로켓을 만들었고 타코마라는 회사가 당시 마산에 있었는데 거기서 잠수함 만들기 시작했지요. 허전함을 그런 일로 푸셨던 듯합니다.  ●말년에 박 대통령이 지방시찰 유난히 많이 다녔는가요.  -처음에 말씀드렸지만, 가끔 여행하다 보면 그분의 족적을 볼 수 있다. 지금 관광지인 설악동인가요, 그게 그 당시엔 정말 형편 없었거든요. 그런 걸 그 때 다 정비하는 등 짧게는 30년, 길게는 50년 이상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광양제철소는 본래 아산에 만들려고 결정됐다가 광양으로 바뀌었죠. 그때 모시고 현장에 갔을 때 중국 쪽에서 바람이 부니까 매연이 내륙으로 들어오고 그러니까 전문가들이 건의하고 그래서 현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그럼 광양으로 하자고 결정했던 억들이 납니다  대담 구본영 편집국 수석부국장·정리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1970년대 농구선수 임채오씨 산골학교 골프코치로

    1970년대 남자 실업농구의 대표격인 한국은행 포워드 출신 임채오(62)씨가 속리산 산골학교의 골프코치로 변신했다. 임씨가 골프를 가르치는 곳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수정초등학교. 그는 오전 8시20분 어김없이 이 학교 운동장 모퉁이의 골프연습장을 찾아 어린이들의 스윙 폼을 잡아준다. 무보수 봉사활동이다. 임씨는 1995년 한국은행을 퇴직한 뒤 미국으로 건너 가 슈퍼마켓 매니저로 활동하면서 취미 삼아 골프를 배웠다. 타고난 운동신경 덕에 3년여 만에 미국골프지도자연맹이 주는 티칭프로 자격도 땄다. 7년여간의 미국 생활을 접고 2년 전 귀국한 그는 각박한 도시생활 대신 공기 좋은 산기슭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부인과 함께 텃밭을 일구는 산골 농부로 제2의 삶을 살면서 짬이 나면 이 초등학교를 찾아 골프와 농구를 지도한다. 보은 남인우기자 niw7263@seoul.co.kr
  • [10·26 30주년] 산업화·독재의 功過 넘어 ‘박정희 리더십’ 재평가

    [10·26 30주년] 산업화·독재의 功過 넘어 ‘박정희 리더십’ 재평가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 시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사후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신중하게 접근했다. 내로라는 학자들조차 박 전 대통령의 공과(功過)를 섣불리 재단하지 않으려 했다. 다만, “지금껏 평가 작업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으며, 이제는 본격적인 평가 노력을 시작해야 할 때”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또한 30년 세월은, 연구와 관심의 영역도 확장시켜왔음을 보여줬다. 그 대상은 과거처럼 성장이나 독재, 민주주의라는 ‘주제어’에만 얽매이지 않고, 통치이념이나 국민 정신, 교육에서부터 구체적 정책으로까지 광범위해졌다. ‘산업화냐 민주화냐.’라는 이분법적인 평가에도 새로운 시각이 더해졌다. 서울대 사회학과 한상진 교수는 25일 “박 전 대통령은 자연사가 아니라 특수한 형식으로 운명했기 때문에 여러 감상에 젖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운을 뗐다. 이어 “단순히 부국강병과 경제 성장으로 만족하는 시대가 아니고, 민주주의나 인권 등 보편적 가치 추구가 강화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박 전 대통령의 부정적 유산은 지금도 남겨져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한 교수는 “지금은 부정적 유산을 철저히 연구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동시에 요구되는 양면성이 있는 시대”라고 진단했다. 그는 “새로운 국가 건설의 물질적 토대를 박정희 정부 시기에 만든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며, 그 시기를 지나면서 경제적 도약을 할 수 있었다.”면서 “시간이 지나면 과거를 좀 더 여유있는 눈으로 보고 싶은 욕구도 있는 만큼 앞으로 좀 더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평가의 방법으로 “1973년부터 시작했던 종합정책, 근대화 과정에 미친 영향을 촘촘히 다시 연구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제시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동노 교수는 “박정희 정권의 정책을 보면 상당히 평등지향적인 것들이 있다. 흔히 박 전 대통령은 경제개발에만 관심을 쏟은 지도자라고 평가되지만, 당시 정책 가운데 국가사회주의적인 요소들이 꽤 있었다.”는 평을 내놓았다. “예컨대 의료보험 정책에서 시장지향적이 아닌 국가주도적 체제를 도입했으며, 교육분야에서 중·고등학교 평준화를 시행한 것은 대표적인 국가사회주의적인 시도였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이 같은 정책을 시도했다면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을 가능성이 컸지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힘으로 밀어붙였다.”고 주장했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김한종 교수는 “박정희 정권이 정신교육과 전통정신을 내세우며 한국의 가부장적 사고를 미화한 측면도 있다.”면서 “국민 정신에 관한 부분을 통해 국가적 교육을 어떻게 이끌려고 했는지 등을 다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호주국립대 김형아 교수는 “한국인의 국민성은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대 벌였던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캠페인에서 나온 산물이며, 이 정신의 유산이 여러 단점이나 모순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적 입장에서 약점보다는 강점을 대표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신율 교수는 “당시 근대화 과정에서 개발독재가 불가피했던 점은 인정해야 한다.”면서도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는 문구가 우리 국민에게 자신감을 줬다는 평가도 있지만, 이 때문에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풍토가 생긴 측면도 있다.”고 다른 해석을 내놨다. “민주주의는 과정이 중심인데도, 결과 위주의 정치·사회 문화가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경희대 정외과 윤성이 교수는 산업화를 박 전 대통령의 ‘공’으로, 민주화 지체를 ‘과’로 보는 이분법적 사고를 경계했다. “산업화와 민주화에 각각 ‘공’과 ‘과’가 있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산업화를 이루며 경제성장을 한 것은 ‘공’이 되지만, 그 과정에서 노동인권 탄압, 정경유착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면서 “빠른 성장을 하기 위해 사회적 규범과 절차가 무시된 것도 지금까지 계속 영향을 주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민주주의 측면에서는 “독재정권을 이끈 것은 ‘과’가 되지만, ‘경제성장 없이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는 정치학적 시각에서 보면 중산층을 만들어낸 것을 비롯해 ‘공’이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부연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류석춘 교수는 “‘박정희 독재’가 가능했던 것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동의했기 때문이며 동의를 얻어내는 데에는 도덕성이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류 교수는 “당시의 리더십은 “‘잘 살기 위해 부정부패 안 하고 열심히 할테니, 국민도 잘 따라오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전반적으로 국가와 기업의 유착도 있었지만, 국가를 위한 것이었다는 측면에서 동의를 얻었던 것”이라는 해석이다. 미국 랜드연구소의 함재봉 박사는 “‘성공적인 근대 국민 형성’이라는 최종 결과는 바람직했지만,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법이 없었던 시대였다.”면서 “그 국민 형성 작업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것이었고, 도덕적으로 모호한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라고 총평했다. 이지운 허백윤기자 jj@seoul.co.kr
  • [10·26 30주년] “陸여사 서거뒤 일에 몰두… 국산로켓·잠수함에 집념”

    [10·26 30주년] “陸여사 서거뒤 일에 몰두… 국산로켓·잠수함에 집념”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는 것 같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30주기인 26일을 사흘 앞둔 박상범 전 대통령 경호실장의 소회였다. 1979년 ‘10·26’ 당시 경호계장이었던 그는 궁정동 저격 현장의 경호실 관계자 중 유일한 생존자다. 인터뷰 요청을 완곡하게 사양하던 그였지만, 본지 취재진이 지난 23일 서울 방배동 민주평통장학재단 그의 사무실을 찾자 온화한 미소로 반겼다. 대담:구본영 편집국 수석부국장 →‘10·26’ 30년을 맞는 소회가 남다를 텐데. -(박 대통령이) 서거하신 지 30년이 된 요즘에 와서 박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하는 학술대회도 열고, 유물·기록전시회도 하고 그러더라. 기억하기 싫은 일들이라서 가능한 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정부가 수립된 이후 한 60년 만에 이만큼 경제·사회·문화적으로 발전하게 된 나라는 세계사에 없다. 소위 한강의 기적은 정확히 이야기하면 (박 대통령이 집권한 뒤부터) 약 40년 만에 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우리보다 앞서가는 나라들이 이 정도까지 올라오는 데 최소한 100~150년 걸렸다. →최근 국제학술회의에서 진보쪽에서도 박 전 대통령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있다. 한 교수는 김일성 유일체제인 북한에 비해 상대적이지만 반대 세력을 허용한 박정희의 남한이, 그리고 개방적·국제적 전략을 택한 남한이 폐쇄적 전략을 취한 북한을 압도했다는 평가를 내렸는데. -당시 그분을 모시고 신변안전을 책임지고 다녔다. 1970년대부터 시작해서 지금 우리 경제를 이끌어가는 핵심인 조선, 제철, 자동차 등이 짧은 기간에 상당한 발전을 했다. 과학분야도…. 요즘 두각을 나타내는 군수산업도 당시에 기초가 다져지고 그랬다. 참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혜안을 가졌던 지도자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유신 때 데모하다가 호주에서 공부한 김형아 호주국립대교수가 박 대통령을 재평가하게 됐다는 말을 했다. 여러 면에서 박 대통령의 캔두이즘(Candoism)이 큰 기반이 됐다 하더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캔두이즘이 국민성을 바꿨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그런 신념을 가까이서 감지할 수 있었는지. -나이가 들수록 그런 생각이 난다. ‘할 수 있다.’, ‘우리도 잘살 수 있다.’ 라는 신념을 심어준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것이 밑거름이 돼 소위 말하는 한강의 기적이 이뤄진 게 아닌가 싶다. →경호를 하면서 사선(死線)을 수차례 넘나들었다. 그 중 ‘10·26’ 현장이 가장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을 텐데. -경호했던 사람으로 거기에 대해 이야기할 수가 없다. 자칫 변명으로 들릴 수 있고. 다만 그 이후에 후배들에게 나와 같은 전철을 밟으면 안 된다는 뜻에서 경호 기법이나 기술적 측면에서 엄청난 연구를 통해서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경호라는 힘이 미칠 수 있는 범위가 있는데 경호력이 미칠 수 없는 지역을 최소화시키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10·26’도 봐야 하지 않나 싶다. 어떤 경우라도 경호는 일단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매사를 접근하고 들어봐야 한다. 경호력이 미칠 수 없는 그런 부분을 최소화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경호실장 때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과의 정상회담이 1994년 있을 뻔했는데, 그때 경호 관련 협상에서 어느 정도까지 진도가 나갔었나. -경호 통신 문제에 대해 협의가 다 끝나고 일주일 뒤에 우리 경호 선발팀들이 들어가게 돼 있었을 때 김 주석이 사망했다. 총기 휴대하고. 제일 문제된 게 위성 통신 문제였다. 그것까지도 다 원만하게 잘 협의가 돼서 일주일 뒤에는 최종적으로 선발팀이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김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모든 게 중지됐다. →그때 김일성 사망을 예상하는 꿈을 꿨다는 비화가 있던데. -당시 윤여준씨가 안전기획부 제3특보였고, (별세한) 엄익준씨가 북한 국장이었다. 나중에 통일부 장관 지낸 정세현씨가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있었다. 오찬하는데 “아무래도 경호실에서 인원을 정리해 줘야겠다.”는 연락이 왔다. 오찬이 끝나고 제가 지나가는 이야기로 “아무래도 정상회담 안 될 거 같다.”라고 말하니 다들 깜짝 놀라더라. 경호실장이 그런 이야기하니 (무슨) 특별한 정보있는 줄 알고…. “무슨 이야기냐.”고 하기에 농담처럼 “며칠 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해서 관에 입관하는 꿈을 꿨다.”고 얘기했다. →요즘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을 하고 싶어 한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그런데 북측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경호문제로 답방에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호상 여러가지 가정도 있는데 그쪽도 똑같은 가정을 놓고 검토할 것 아니겠는가. 아차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문제이고 전부 총기를 휴대하고 있으니까 힘들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경호하면서 역대 대통령들의 성품을 가까이서 봤을 텐데. -서로 다르지만 공통점은 부지런하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건강하다. 그게 아주 공통되는 거 같고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대통령은 카리스마, 결단력이 있었던 분들 같다. 특히 박 대통령 같은 분은 공과가 있겠지만, 30~40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다. →육 여사 서거후 지만군을 돌보라고 박 대통령이 특별히 밀명 준 건 없나. -그런 건 없고, 그 당시에 지만군이 주말에 나오면 (청와대에) 안 들어가려고 했던 적이 있다. 외출나와서. 대통령이 찾으니까 차지철 실장이 나를 부르더니 “지만이좀 데리고 오라.”고 해서 명동에서 찾아서 데리고 갔던 그런 일도 있고…. 나중에 지만씨가 약물 때문에 보훈병원에서 봉사한 적이 있다. 제가 1997년 초에 보훈처장 할 때였다. 지금은 사업도 잘하고 가정도 이루고 애도 갖고 해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말년에 박 대통령이 지방시찰 많이 다녔나. -지금 관광지인 설악동인가, 그게 그 당시엔 정말 형편없었다. 그런 걸 그때 다 정비하는 등 짧게는 30년, 길게는 50년 이상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던 것 같다. 광양제철소는 본래 (충남) 아산에 만들려고 결정됐다가 (전남) 광양으로 바뀌었다. 그때 모시고 현장에 갔을 때 중국 쪽에서 바람이 부니까 매연이 내륙으로 들어오니 전문가들이 건의하고 그래서 현지에서 박 대통령이 “그럼 광양으로 하자.”고 결정했던 기억이 난다. →박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는. -유년시절부터 어렵게 성장하셨던 분이지만, 굉장히 정이 많은 분이었다. 외모는 아주 매섭고, 단구에다 깡마르고, 눈매도 무섭고…. 하지만 인정은 많았다. 전에 골프를 가끔 나가시면 추울 때나 더울 때나 근무자를 꼭 챙기셨다. 아주 서민적이셨던 걸로 기억한다. 1974년 영부인이 서거한 뒤 굉장히 외로워하셨다. 그러다 보니 국정에만 몰두해서 74년 이후 쭉 기록을 봐도 알 수 있지만 공단이나 산업단지 조선소 등이 그때 건설됐다. 안면도에는 제2국방과학연구소가 있었는데 거기서 로켓을 만들었고 타코마라는 회사가 당시 마산에 있었는데 거기서 잠수함을 만들기 시작했다. 허전함을 그런 일로 푸셨던 듯하다. 정리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박상범 전 靑 경호실장 인터뷰 전문 보러가기
  • “내 동화가 창의적 발상의 장난감 되길”

    “내 동화가 창의적 발상의 장난감 되길”

    │파리 문소영특파원│ “동화작가는 사진이나 기타 예술장르의 작가보다 어린이에게 정말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고, 훨씬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동화책을 한 장을 넘기면서 놀라고, 또 한 장을 넘기면서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동화작가 에르베 튈레(51)는 자신이 동화 작가가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 뒤편의 4층 자택에 위치한 아틀리에에서 지난 20일 만난 튈레는 나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장난꾸러기 같았다. 현재 영국 현대미술관인 테이트모던의 의뢰로 2007년에 이어 두 번째 어린이 미술책을 제작하고 있는 그는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기획하고 있는 책자의 원고를 숨기면서 저작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엄포를 놓는 등 방문객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17살과 14살 아들, 9살 딸의 아빠인 그가 동화책에 관심을 가진 것은 첫째 아들을 낳으면서. 잡지사 아트디렉터였던 그는 첫 아들에게 보여줄 동화책을 찾았지만 마땅한 작품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특별하고 남다른 동화책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만지고·뚫고… 가지고 놀면서 이해하는 그림책 그의 책은 색채의 사용과 구성이 정말 남다르다. 그의 동화책은 본질적으로 장난감과 똑같아서 가지고 놀아야 한다. 어른들은 대체적으로 그의 책을 만나면 갸우뚱하고 뒤적뒤적하다가 곧 흥미를 잃고 내려놓지만, 아이들은 손에 잡으면 책을 이리저리 굴리고, 구멍을 찔러보며, 위와 아래를 바꾸고, 선과 면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즐거워한다. 그의 동화책은 글이 없이 그림만으로 이뤄져서 한국에서는 영유아책으로 분류되지만 독서의 연령이 꼭 낮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튈레는 “내 책은 0세부터 어른까지 즐길 수 있다. 다만 영유아부터 초등학생들은 내 책을 보자마자 금방 책과 놀 수 있지만, 그 이상의 학생들과 어른들은 내 책을 읽고 이해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면서 “나이를 먹으면서 사람들이 창조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책을 가지고 놀 준비를 해야 된다.”고 말했다. ●“동화책 만들면서 생각이 더 어려지고 자유로워져” 그는 동화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을까. 어린이들이다. 파리 초등학교에서는 그를 자주 초청해 어린이들이 놀이를 통해 미술에 접근하는 다양한 방식을 제시하는데, 그는 현장학습에서 만난 어린이들에게 반짝반짝하는 아이디어를 얻는다. 튈레는 “나는 아이들과 만나 동화책을 만들면서 생각이 점점 어려지고, 아이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될수록 점점 자유로워진다.”고 말했다. 그는 소통과 대화, 상호교류가 동화책이 가져야 할 주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하는데 이탈리아에서 1970년대 활동하던 부르노 무나리, 앤조 마리 등의 동화책을 사랑한다. 그는 “지금 나오는 동화책과 비교해도 아주 현대적이고 인터랙티브하고, 디자인적이다.”면서 “동화책은 예쁜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아이들에게 불어넣고 떠오르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컴퓨터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했다. 따라서 그는 미래의 동화작가나 동화책을 고르는 부모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린이들은 ‘이럴 것’이라고 단정하는 선입견을 갖지 말아야 한다.”면서 “선입견이 생길 때마다 과연 내 어린 시절에 나는 어땠는지 돌아보고, 길거리나 TV 등에서 만나는 어린이를 잘 관찰해 보라.”고 조언했다. 또한 그는 감히 말한다. “만약 나와 같은 동화작가의 책을 어린시절에 만났더라면, 나는 정말 달라졌을 것이다. 나는 내 동화책이 어린이들을 창의적이고 창작을 즐거워하는 쪽으로 변화시키길 희망한다. 어린이들이 양의 무리처럼 똑같이 살아가길 바라지는 않는다.”고. 글 사진 symun@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