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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라질 “한해 최다 골 기록, 펠레와 지코가 갖고있다”

    브라질 “한해 최다 골 기록, 펠레와 지코가 갖고있다”

    한해 최다골 기록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1970년대 활약한 잠비아 선수가 107골을 넣었다는 주장이 나온 가운데 브라질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나왔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그러나 기록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다면서 확인할 수 없는 기록을 인정할 수는 없다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삼바 축구가 배출했다는 한해 최다골 기록의 주인공은 지코와 펠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브라질의 프로축구단 플라멩고는 “전설의 공격수 지코가 1979년 89골을 넣었다.”며 메시의 기록(플라멩고의 발표 전까지 86골)은 세계 최고기록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플라멩고가 지코를 앞세워 세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고 나서자 또 다른 브라질의 명문클럽 산토스는 ‘축구황제’ 펠레를 앞세워 경쟁에 뛰어들었다. 산토스는 “1961년 당시 현역으로 뛰던 펠레가 110골을 넣었다.”면서 “이에 대한 문서자료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FIFA는 기록을 인정할 수 없다며 강경한 입장이다.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알렉스 스톤 FIFA 대변인은 “잠비아의 치탈루가 메시보다 많은 골을 넣었다는 주장이 나온 후 브라질에서 ‘지코가 더 많은 골을 넣었다.’ “펠레가 진정한 세계 기록을 갖고 있다.’는 말이 나오지만 모두 확인이 불가능하다.”며 공인이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는 “어쩌면 전쟁(2차전쟁) 전에 활약했던 선수들 중에서도 한해 더 많은 골을 넣은 선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자료가 완벽하게 보존돼 있어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고 덧붙였다. 축구신동 메시가 세운 한해 최다 골 기록에 처음으로 반론을 제기한 건 잠비아다. 잠비아 축구협회는 자국 선수 갓프레이 치탈루가 지난 1972년 107골을 넣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잠비아 축구협회에 따르면 치탈루는 1972년 1월 23일부터 12월 10일끼지 정규리그에서만 49골, 각종 국제-국내대회에서 58골을 넣었다. FiFA는 그러나 “치탈루의 골에 대해선 기록이 완전하게 남아 있지 않아 인정이 곤란하다.”고 밝혔다. 사진=자료사진(펠레) 임석훈 남미통신원 juanlimmx@naver.com
  • 北 유훈통치로 겉으론 안정… 경제개혁 지지부진 앞날은 불안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해 12월 17일 사망한 후 1년이 지났다. 후계자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은 지난 1년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권위에 의존하는 ‘유훈 통치’ 아래 1년을 보낸 것으로 평가된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지난 1년간 김 제1위원장이 김정일과는 다른 파격적 통치 방식을 보여줬고 김정일 사후 4개월 만에 공식적 권력 승계를 이뤄 군부에 대한 당의 지배를 강화하는 등 외형적 권력 승계와 안정은 이뤘다고 본다. 하지만 이는 개인의 능력보다는 김정일이 생전에 구축해 놓은 시스템에 의한 것으로, 앞으로 김정은의 리더십이 본격 시험대에 오를 것으로 본다. 특히 북한이 강조한 인민 생활의 향상 등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점은 여전히 불안 요인이자 난제로 지적된다. 북한은 주민들에게 김일성 주석은 건국의 아버지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선군 정치를 통해 외세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지킨 영웅으로,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은 주민 생활의 향상이라는 비전을 제시한 지도자로 각인시키려 한다. 김 제1위원장은 특히 할아버지인 김일성을 흉내 낸 짧은 헤어스타일과 복장으로 주민들의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스스럼없이 스킨십을 과시했다. 김 주석 100회 생일인 지난 4월 15일 군 열병식에서 육성 연설을 하면서 은둔 통치를 즐기던 아버지 김 위원장과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이러한 차별화와 파격 행보는 북한에서 지난 7월 이례적으로 ‘퍼스트 레이디’ 리설주를 공개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16일 “대중 친화적인 면모, 통치 행위와 관련된 공개성, 투명성을 보여주는 것이 김정일 시대와 다른 가장 큰 변화”라면서 “새 세대 산업혁명을 강조하며 인민 생활 향상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도 특징”이라고 평가했다. 김 제1위원장은 김정일이 급사한 지 13일 만인 지난해 30일 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추대되면서 군권을 장악했다. 그는 지난 4월 11일 제4차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당 제1비서가 됐고 13일 최고인민회의 제12기 5차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 추대됐다. 이는 김정일이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3년이 지난 1997년에 당 총비서가 된 전례에 비춰 발 빠른 승계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1970년대 초 후계자 내정 후 후계 수업 기간이 길었던 김정일과 달리 김 제1위원장은 후계 기간이 짧고 빠르게 권력을 장악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고 교수는 “지난 1년간의 권력 공고화 과정은 개인의 능력보다는 수령적 시스템이 작동한 것”이라면서 “핵과 미사일 능력을 보여줬으니 이를 협상의 수단으로 사용해 어떻게 미국 및 우리의 차기 정부와 대외관계를 풀고 성과를 내는가가 안정적 리더십 구축의 잣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류길재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도 “권력 안정은 측근 중 어느 누구에게도 힘을 실어주지 않고 충성하게 만들어 놓은 김정일이 생전에 용의주도하게 만든 시스템에 의한 것”이라면서 “올해 북한은 김정일 정권의 연장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권력 안정화 과정에서 군부에 대한 통제도 강화됐다. 북한군 총정치국장과 총참모장, 인민무력부장 등 군 수뇌부의 핵심 요직이 새로운 인물로 교체되면서 군에 대한 당의 통제가 대폭 강화된 특징을 보인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과거의 김정일, 김정은의 군대가 ‘김정은의 군대’로 바뀐 셈”이라고 평가했다. 경제 부문에서는 개혁과 개방에 대한 김정일 시대의 부정적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 여겨졌으나 공안통치가 강화되고 경제 개혁이 지지부진한 사실은 김정은 체제의 민생 안정이 순탄치 않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북한은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를 주도한 박봉주를 지난 4월 당 경공업부장에 임명하는 등 실무 경험이 많은 경제 전문가를 중용하고 군부가 운영하던 경제 사업 중 상당수를 내각에 이관하는 등 변화를 꾀했다. 하지만 북한은 중국과 위화도황금평 및 나선특구 개발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대중(對中) 경제 의존도가 심해지고 있다. 강동완 동아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외부 정보가 조금씩 유입되고 주민의 지도자에 대한 기대심리가 커지는 현 상황에서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이는 체제 균열 요인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백남준, 아이폰에까지 영감 줬다”

    “아이폰으로 음악이나 영화를 다운로드하는 아이디어는 이미 백남준(1932~2006)이 오래전에 상상했던 것이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아메리칸 아트 미술관(SAAM)의 수석 큐레이터이자 백남준 전문가 중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존 핸하르트는 12일(현지시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백남준이 스티브 잡스에게 영감을 줄 만큼 시대를 앞서간 천재였다고 평가했다. SAAM은 올해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탄생 80주년을 맞아 13일부터 8개월간 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특별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회는 한국의 국제교류재단(이사장 김우상)은 물론 미국의 여러 예술 재단과 기금 등 11곳이 후원할 정도로 미국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백남준의 주요 작품 67점과 개인 자료 140점이 관객을 맞는다. →이번 전시회의 특징은. -백남준의 작품과 함께 제작 과정을 담은 개인 기록물들을 함께 전시함으로써 그의 작품 활동에 대한 다층적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게 기존 전시들과 다른 점이다. →피카소가 20세기 전반을 지배했고, 백남준은 20세기 후반을 지배한 예술가라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맞는 말은 아니다. 피카소는 그림을 리메이크한 반면 백남준은 비디오아트를 창조했다. 백남준은 새로운 예술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예술계에 엄청난 충격을 준 천재다. 그는 영화와 TV, 미디어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끼쳤는데 한 인물이 이룬 업적으로는 엄청난 것이다. 우리는 그의 비디오아트로부터 아직도 배우고 있다. 백남준은 비디오아트계의 조지 워싱턴(미국 초대 대통령)이다. →백남준이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 개발에 영감을 줬다는 얘기도 있는데. -백남준의 아이디어와 작품은 온라인 교육과 인터넷 등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치고 있을 만큼 그는 미래를 내다보는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백남준이 상상한 대로 앞으로 동영상을 담은 책이 나올 수도 있다. →백남준 전문가가 된 계기는. -1970년대 초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을 때 그의 비디오아트 작품을 보고 매료돼 직접 맨해튼 스튜디오를 찾아가 교분을 맺었다. 이후 함께 해외 전시회를 다니는 등 친구처럼 지냈다. →백남준의 작품 중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한 가지만 택하기는 정말 힘들지만 ‘선’(禪·Zen for TV) 같은 작품을 좋아한다. →백남준과의 추억 한 토막만 소개해 달라. -1980년대 백남준의 스튜디오를 찾아갔을 때 그가 “존, 우리는 승리할 거야.”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 게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백남준은 그때 이미 비디오아트가 미래에 예술 분야의 ‘최고’가 될 것임을 내다본 것이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메시는 엉터리! 한해 최다 골 기록 선수 따로 있다”

    “메시는 엉터리! 한해 최다 골 기록 선수 따로 있다”

    세계 최고의 골잡이로 우뚝 선 리오넬 메시( FC 바르셀로나)의 정규리그 한해 최다 골 기록을 부정하는 보도가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스페인의 스포츠신문 AS는 최근 “메시가 86골을 넣으며 한해 최다 골 기록을 경신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대기록을 갖고 있는 선수는 1970년대에 활약한 아프리카 선수”라며 이같이 보도했다. 신문이 최고기록 보유자로 지목한 선수는 잠비아 출신의 갓프레이 치탈루라는 선수다. 잠비아의 카브웨 워리어스에서 선수생활을 한 그는 1972년 정규리그에서만 107골을 넣어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국제축구연맹(FIFA)이 기록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정규리그 107골은 비공인 세계기록으로 남았다. 스포츠신문 AS는 FIFA가 기록을 인정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당시 국제축구연맹이 유럽축구를 띄우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어 납득할 만한 이유없이 아프리카 영웅의 기록을 묵살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신문은 또 올해 메시가 세운 기록 86골도 정확한 게 아니라면서 “동료들이 넣은 골을 메시의 것으로 만들어준 심판들이 많았다.”고 주장했다. AS는 “지난 3월 24일 마요르카에서 열린 경기에서 동료 알렉시스 산체스가 헤딩으로 넣은 골이 메시의 골로 둔갑했다.”며 “올해 메시의 골 중 최소한 2골은 메시가 넣은 게 아니다.”라고 보도했다. 신문은 “알렉시스가 골을 넣은 뒤 메시에게 다가가 ‘안심해, 너의 골로 기록됐어.’라는 말을 했다.”고 보도하는 등 구체적인 증거(?)까지 소개했다. 메시는 지난 10일 스페인 세비야의 베니토 비야마린 경기장에서 열린 레알 베티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2골을 넣으며 통산 86골을 기록했다. 1972년 게르트 뮐러(독일)가 세운 한해 최다 골 기록(85골)을 1골 차이로 살짝 넘어서며 대기록을 세웠다. 사진=AS 임석훈 남미통신원 juanlimmx@naver.com
  • [서울광장] 대동단결, 그 저주의 메타포/진경호 논설위원

    [서울광장] 대동단결, 그 저주의 메타포/진경호 논설위원

    18대 대선에선 의미 있는 진동(振動)이 하나 있다. 야권 후보 단일화라는 매머드 이벤트에 가린 탓에 별 이목을 끌진 못했으나 동교동과 상도동이 굴곡진 한국 정치사의 또 한 능선을 넘은 것이다. 한화갑, 한광옥, 김경재, 안동선. 1960~1970년대 ‘타도 박정희’를 외치며 김대중을 좇아 싸웠고 국민의 정부에서 영욕을 맛봤던 그들이 박정희의 딸 곁에 섰다. 한 손으론 군부독재, 또 다른 손으론 동교동과 맞서 싸웠던 김영삼의 수족 김덕룡은 김대중을 승계했다는 노무현의 비서실장 문재인에게로 갔다. 이젠 내리막 어느 중턱에서 낙조를 바라보며 쉴 법도 하건만, 대체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그들은 그렇게 또 비탈에 섰다. 역사의 화해라고도 하고, 늦깎이 철새들의 때 잊은 노욕이라고도 한다. 조건 없는 화해이길 바라지만 그렇지 않은들 숱한 정치놀음에 익숙해진 처지로 크게 마음 상할 일도 없다. 그들이 박근혜, 문재인에게 요구한 게 있는지, 약속을 받았다면 그게 뭔지, 다가올 시간이 말해줄 그 답을 지금 알 길도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동교동과 상도동의 크로스오버가 상징하는 화해와 연대의 메타포(은유·隱喩), 배척이다. 박정희와의 화해보다 노무현·친노에 대한 배격이고, 문재인과의 연대보다 박근혜·친박에 대한 거부다. 누가 좋아서가 아니라 누가 싫어서 그들은 힘겹게 걸음을 뗐다. 이번 대선에 담긴 부정과 배격의 진정한 메타포는 그러나 이들이 아니다. 대선정국 1년을 관통한 ‘안철수’다. 낡은 질서, 앙시앵레짐에 대한 거부, 기성 세대에 대한 젊은 세대의 배격이 ‘안철수 현상’을 낳았고, 집권세력에 대한 실권세력의 부정이 안철수를 키웠다. 그리고 갖은 수사로 띄웠지만 결국은 밟고 올라설 발판으로 상대를 삼으려 했을 뿐인 배타의 정치공학이 문재인-안철수 단일화를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아마도 두 사람은 ‘강자와 연대하면 결국 이용만 당할 뿐’이라는 마키아벨리의 잠언을 몰랐던 듯하다. 문재인은 안철수를 몰랐고, 안철수는 문재인과 민주통합당은 물론 제 자신과 ‘안철수 현상’ 자체를 몰랐던 듯하다. 그리고 세상은, “영혼을 팔지 않았다.”고 했다가 불과 사흘 뒤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자처하고는 문재인 지원 행보에 나서고도 “문재인을 지지한다.”는 말을 더는 하지 않는, 형용모순의 안철수를 아주 몰랐던 듯하다. 누구는 절대 안 된다는 부정과 배격의 메타포에 가려, 누가 왜 돼야 하는지를 우리는 까맣게 잊었다. 박근혜는 절대 안 되기에 비(非)박근혜는 문재인-안철수의 플레이오프를 마다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돼도 ‘노무현과 그들’은 결코 안 되기에 정파와 지역을 뛰어넘는 월경과 전향을 주저하지 않았다. 민주화 25년에 유례가 없이 보수와 진보가 제각각 타도를 외치며 대동단결하는 사이, 18대 대선은 이제 정치에 관심 없거나 안철수에 실망한 약간의 소수를 빼고는 제3의 완충지대가 실종된 채 단 하나의 대치전선만 남게 됐다. “아무개를 떨어뜨리기 위해 출마했다.”는 군소후보의 핏빛 발언에 섬뜩한 분노를 느끼는 자와 대리만족의 쾌감을 느끼는 자만 존재하는 극한 대치의 진영 대결만이 남았다. 아마도 새 대통령은 득표율 50%를 넘길 것이다. 1987년 개헌 이후 5명의 대통령 누구도 밟아보지 못한 전인미답의 출발선이다. 축복이다. 그러나 또한 저주다. 그저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을 뿐인 게 아니라 똘똘 뭉쳐 결사적으로 거부한 절반을 끌어안고 가야 한다. ‘100% 대한민국’이나 ‘새정치 국민연대’ 같은 레토릭만으론 헤쳐갈 수 없는 도전이다. 노태우는 12%, 김영삼은 6%, 김대중은 27%, 그리고 노무현은 24%의 지지율(한국갤럽 조사)로 임기를 끝냈다. 현재 지지율 23%인 현 대통령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을 듯하다. 일주일 뒤 축복과 저주를 한데 거머쥐고 탄생할 새 대통령에게 미리 묻는다. 당신은 이 전례 없는 대동단결에 담긴 분열을 이겨낼 수 있는가. 5년 뒤 퇴임 때 더 큰 박수를 받을 자신이 있는가. 그 무거운 통합의 책무를 아는가. jade@seoul.co.kr
  • 인재가 미래다, 군위의 교육복지 실험

    전국 초미니 자치단체인 경북 군위군이 200억원에 육박하는 자치단체 최대 규모의 교육기금을 조성하는 등 일류 교육복지를 실현해 나가 다른 자치단체와 학부모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특히 2010년 7월 장욱 군수 취임 이후 두각을 보이면서 주목받고 있다. 군위군은 11일 지역 우수인재 육성 및 열악한 교육여건 개선을 위한 교육발전기금 196억원(군 출연금 106억원, 성금 66억원, 기타 24억원)을 조성했다고 밝혔다. 1999년 ㈔군위군교육발전위원회(위원장 장욱 군수) 설립을 통해서다. 이 같은 규모의 교육(장학)기금은 전국 자치단체 가운데 최상위권으로 알려졌다. 도내 시·군의 경우 경산시 106억원, 영천시 103억원, 안동시 82억원, 의성군 68억원 등이다. 특히 군 전체 성금의 64%인 42억원이라는 거액이 장 군수 취임 이후 불과 2년여 만에 모아졌다고 군은 설명했다. 이는 열악한 교육여건 개선을 통해 인구 및 자금의 역외 유출 등을 최대한 막아보겠다는 장 군수의 각오와 열의에 주민과 출향인들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결과로 풀이된다. 군은 내년 1분기 중 교육기금 200억원 돌파가 무난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1970년대 초반 7만명을 웃돌던 군위 인구는 자녀 교육 등을 위해 인근 대도시 및 중소도시로 계속 빠져나가 현재 2만 4000여명, 재정자립도 10%에 불과하다. 군은 2000년부터 매년 교육기금 1억~7억원씩, 지금까지 총 88억여원(서울학사 구입비 35억원 포함)을 지역 각급 학교 및 성적 우수 학생 등에게 지원했다. 군은 또 내년 3월부터 지역 성적 우수 중·고교생들을 대상으로 공립학원인 ‘인재양성원’ 운영에 들어간다. 학부모들의 교육비 경감과 지역 우수 인재 양성을 위해서다. 이를 위해 군은 최근 군비 8억 3000만원을 들여 군위읍 동서1길 옛 농업기술센터(2층)를 리모델링, 강의실 7개와 교무실, 시청각실 등을 갖췄다. 이 양성원은 내년 1월 중 군위지역 중2∼고3 학생 중 120명(중2~고1년생 각 20명, 고2~3년생 각 30명)을 시험 선발한 뒤 방과후 학습 지원 형태로 평일 4시간, 주말 보강수업 등을 실시한다. 교육비는 전액 무료다. 군은 양성원 운영을 위해 매년 교육기금 10억원씩을 투입할 예정이다. 군위지역에는 중·고교 9곳이 있지만 변변한 학원 하나 없는 실정이다. 군의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2007년까지 수십년째 계속 감소하던 고교 학생수가 2008년부터 증가세로 돌아섰다. 올해 496명으로 5년 만에 131명이 증가했다. 우수 대학 진학 성과도 내고 있다. 2004년 서울대 진학생을 처음 배출한 데 이어 매년 서울대 등 서울지역 명문대학에 다수의 학생을 진학시키고 있다. 장 군수는 “지역 학생과 학부모들이 학비 걱정 없이 오로지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있다.”면서 “더욱 큰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중단 없는 지원책을 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군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씨줄날줄] 에너지 폭탄주/오승호 논설위원

    한 주류기업이 올해 1~2월 공식 블로그를 통해 폭탄주인 ‘소맥’(소주+맥주) 제조법을 공모한 적이 있다. 참가자들의 비밀 레시피는 다양했다. 안주를 먹지 않는 주당들에게 적합한 소맥도 있단다. 날계란 노른자를 맥주잔에 먼저 넣은 뒤 소주와 맥주를 연달아 부어 만드는 방법이다. 주당들의 속을 보호해 주는 게 특징으로, ‘계(鷄)소맥’이라고 한다. 소맥에 계란 노른자를 첨가하는 것은 콜레스테롤이 알코올을 분해시키는 효과에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맥주잔 바닥에 얇게 썬 레몬을 넣은 다음 소주와 흑맥주를 부어 만드는 ‘흑소맥’, 일반 소맥에 탄산음료를 첨가한 ‘탄소맥’도 등장한다. 폭탄주의 대중화를 실감케 한다. 위스키 폭탄주는 1980년대 알려지기 시작했다. 베트남전 때 군인들이 철모에 맥주를 가득 붓고 위스키를 병째 담아 마신 걸 본뜬 것이란 설(說)도 있다. 군인들이 맥주 컵에 물 따르듯 양주를 채워 돌리는 데 질린 민간인 기관장이 맥주와 양주를 섞어 마시자고 제안한 것이 출발점이란 얘기도 있다. 백과사전에는 1960~1970년대 미국에 유학 간 군인들이 들여왔다고 소개한다. 1980년대 초 정치에 나선 군인들이 각계 인사들과의 술자리에서 만들어 마시면서 음주문화로 자리잡았다는 것. 양주나 소주에 고(高)카페인 음료를 섞어 마시는 신종 폭탄주가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란다. ‘파워 칵테일’, ‘○○밤’(bomb·폭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에너지 폭탄주’다. 20대가 30~60대에 비해 폭탄주를 더 즐겨 마신다고 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지난 6, 10월 전국 15세 이상 남녀 2066명을 조사한 결과, 최근 1년 사이 폭탄주를 한 번 이상 마신 적이 있다고 밝힌 연령층은 20대가 49.2%로 가장 높았다. 에너지 폭탄주를 경험한 사람도 20대가 9.6%로 가장 많았다. 미국에서는 2009년 1만 3000여명의 대학생이 에너지 음료를 마셨다가 응급실 신세를 졌다는 조사도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김난도 서울대 교수는 지난 8월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두 번째 에세이집 출간 기자회견에서 “우리 시대의 특징적 문제가 15~20세 사춘기 때 겪어야 할 과정들이 대학입시에 치이면서 발생한 측면이 크다.”고 진단했다. 20대가 왜 폭탄주를 찾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에 비해 부드러워 짧은 시간에 많이 마실 수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정도다. 혹여 기성세대들이 젊은이들의 성장통(痛)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한다. 오승호 논설위원 osh@seoul.co.kr
  • ‘아드’ 전성시대

    ‘아드’ 전성시대

    지상파 방송 3사의 일일 아침드라마가 나란히 전성기를 맞고 있다. 걸출한 톱스타가 출연하지 않아도 기존 시청층인 주부를 넘어서 직장인과 학생까지 타깃을 넓히며 연일 시청률 10%를 웃도는 고공비행 중이다. 평일 밤에 방영되는 일일연속극 중 3분의 2가 시청률 10%를 밑도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현재 방영되는 지상파 아침드라마는 채널 별로 1개씩. 오전 7시 50분 방송되는 ‘사랑했나봐’(MBC)에 이어 8시 30분 ‘너라서 좋아’(SBS), 9시 ‘사랑아 사랑아’(KBS2)가 뒤를 잇는다. 흥행 이유는 간단하다. 주부들의 입맛에 맞는 기존 소재들을 적절히 섞어 부담 없이 시청하도록 했다. 불륜, 이혼, 복수 등 불건전한 소재는 욕을 먹기도 하지만 중독성도 상당하다. 아울러 그동안 주부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아침드라마가 방학을 맞은 대학생과 중고생까지 시청자로 끌어들이면서 시청률을 높이고 있다. 시청률에 포함되진 않지만 지상파 DMB를 이용해 출근하며 시청한다는 직장인도 상당수다. 여기에 겹치지 않는 방송시간도 한몫한다. 시간차 방송으로 주부들을 지속적으로 TV 앞으로 끌어모은다. 덕분에 고정 시청층을 활용해 안정된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 6일 시청률(AGB닐슨 기준)에선 3개 작품 모두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사랑아 사랑아’가 15.0%, ‘너라서 좋아’ 12.1%, ‘사랑했나봐’ 10.9% 순이다. 과거 일부 아침드라마가 20%를 웃도는 시청률로 주목받긴 했어도 이처럼 고르게 인기를 끈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다. 이들 효자 프로그램의 줄거리는 역시 남녀 간 사랑이다. ‘사랑아 사랑아’는 1970년대를 배경으로 부모 세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탓에 역시 결혼하지 못한 홍승희(황선희 분)와 박노경(오창석 분)의 ‘러브라인’이 기본 축이다. 여기에 승희의 이복자매이자 여배우인 홍승아(송민정 분)가 노경을 사랑하면서 벌어지는 얽히고설킨 성공과 사랑이 드라마에 담겼다. 지난 5월 처음 방송된 뒤 150회 방영을 즈음해 시청자들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방영 초기 훈훈한 분위기로 예전 향수를 자극해 일종의 ‘착한 드라마’로 불렸다. 하지만 극적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막장 드라마’란 오해도 받고 있다. 친모의 아들인 노경과 얽힌 승희의 사랑이 승희에게 남편인 강태범(김산호 분)을 배신하도록 만들 것이란 가능성을 내비치면서부터다. ‘사랑했나봐’는 억울하게 이혼당한 윤진(박시은 분)이 주부들의 심금을 울린다. 시어머니 수미(박정수 분)의 시집살이와 점점 무관심해진 남편 현도(황동주 분) 때문에 고생하던 윤진은 급기야 딸 예나까지 뺏긴 채 이혼당한다. 현도의 여자 친구인 선정(김보경 분)이 남편과 딸까지 앗아 가며 고난의 세월이 이어진다. ‘너라서 좋아’는 팽팽한 선을 놓고 대립하는 두 여자 주인공 강진주(윤해영 분)와 양수빈(윤지민 분)이 한 남자를 놓고 뺏고 지키려고 하면서 주목받고 있다. 한 방송사 관계자는 “아침드라마라고 불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건강한 내용을 다루려고 노력한다.”면서 “방송사 간에 아침극의 인기를 이어 가기 위해 방송 시간대를 겹치지 않도록 편성하는 ‘암묵적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시리즈를 끝내며…기획·필자 5인 좌담

    [선택! 역사를 갈랐다] 시리즈를 끝내며…기획·필자 5인 좌담

    ‘선택! 역사를 갈랐다’ 연중시리즈가 2월 20일자 제1회 ‘선덕여왕과 김춘추’를 시작해 고대국가와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 등을 거쳐 제37회 ‘이승만과 박용만’을 마지막으로 12월 3일자로 막을 내렸다. 역사의 라이벌을 내세워 당시 이들의 주장과 선택이 이후 한반도 역사에 미친 영향들을 평가하는 기획으로, 인물비교라는 신선한 접근으로 화제를 모았다. 이번 시리즈의 공동기획에 참여한 박혜숙 푸른역사 대표와 집필자로 참여한 주진오(55)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임기환(54) 서울교대 교수, 계승범(52) 서강대 사학과 교수, 한명기(50)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지난 6일 서울신문에서 문소영 문화부 차장 사회로 시리즈의 의미와 성과, 오는 19일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사회적 발전에 도움이 되는 올바른 선택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좌담을 가졌다. 사회자 임기환 교수가 ‘선덕여왕과 김춘추’를 써주셨고, 주진오 교수가 마지막회에 실렸던 ‘이승만과 박용만’을 비롯해 4회 집필을 맡아주셨다. 계승범 교수는 정조 때의 ‘김종수와 채제공’, 한명기 교수는 인조 때의 ‘최명길과 김상헌’을 써주셨다. 참여한 학자로 이 시리즈를 평가해 달라. 임기환(이하 임) 올 2월 약간 쌀쌀할 때 글을 쓴 기억이 나는데 벌써 12월 대선을 코앞에 두고 있다. 이 시리즈는 애초에 한국사회에 굉장히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기획된 것이었다. 유권자들이 다음 주 대선 후보를 선택할 때 조금이나마 기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명기(이하 한) 무거운 주제를 갖고 장기간 독자들과 호흡하는 게 사실 어려운데, 잘 마무리된 것 같다. 독자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글들이었다. 신문사에서 좀처럼 하기 힘든 기획이었다고 본다. 기획의 성패를 떠나 사람들이 잘 몰랐던 지식을 자세히 전달했고, 자연스럽게 역사적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었다. 계승범(이하 계) 그동안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얘기들을 특정 주제로 엮어냈다.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현재 한국의 역사와 관련지어 대중이 반면교사 할 수 있게 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주진오(이하 주) 사람은 늘 선택을 하며 사는데, 어떤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나을지 알고 선택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이런 걸 역사 속에서 알아봄으로써 독자들이 내 인생에서 어떤 선택을 할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상해 볼 수 있다. 시리즈를 읽은 독자라면 앞으로 선택해야 할 때 도움을 얻지 않았을까 싶다. 계 이 기획시리즈에 영감을 얻어서, 한국 근현대사 과목을 듣는 학생들에게 과제를 냈다. 학생들의 부모나 조부모의 개인적 선택을 당시 역사환경 등을 연결시켜서 인터뷰하고 리포트를 쓰라는 것이었는데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 박혜숙 대선이라는 가장 큰 정치적 선택이 화두가 될 것이고, 역사학자의 발언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공동기획을 하게 됐다. 사회적 이슈에서 역사학계 목소리가 약해지고 있는데, 이런 방식의 작업이 그 대안이 되지 않겠나. 여성 대통령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선덕여왕을 1번으로 하자고 했다. 사회자 역사라고 하면, 사람들이 고리타분하게 생각한다.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나. 역사는 왜 중요한가. 주 세상 살기 힘들고 바쁠 때 ‘500년 전, 1000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굳이 알아서 뭐할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역사를 공부하고 안다는 것이 결코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미래를 위해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계 과거에 일어난 어떤 현상이나 사건이 현재의 나와는 무관하고, 그 사건을 나의 삶과 연관시키지 못하니 재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역사는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 완료 진행형’으로서의 역사이고 개인의 삶과 모두 연결돼 있다. 20세기는 세계사적으로 볼 때 파란만장한 시대다. 그런데 20세기 역사학이라는 것이 ‘이념의 시녀’로 전략해 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한 신입사원에게 역사의식의 중요성을 묻는 설문조사를 하면, 25%는 대학 교양강의 듣는 걸로 충분하다고 하고, 25%는 사극 보는 걸로 공부를 대신한다, 25%는 책을 사볼 정도로 관심 있고, 나머지 25%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라고 답한다. 고리타분한 교과서 중심의 역사교육은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이걸 반성해야 할 시점이다. 역사교육이 문제다. 또 한국 근현대사는 성공하지 못한 역사이기 때문에 역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낮을 수 있다. ‘역사가 정치에 복무했다.’라는 비판도 있다. 임 해방 이후 1960~1980년대 역사 얘기할 때, 평가하기 이르다고 미룬다. 그런데 불과 10년 전의 노무현 정권에 대한 평가는 신랄하게 이뤄지고 있다. 말이 안 된다. 역사라는 것은 언제나 지금의 맥락 속에서 평가가 가능하다. 꼭 시간이 지나야 평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가까운 시대에 대한 평가를 역사의 범주에서 제외시키는 게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 교육이었다. 시간 속 단절, 즉 화석화시키다 보니 고리타분한 것으로 인식되어온 거다. 입맛대로 역사적 진실을 사용하기도 한다. 주 이념이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될 땐 곤란하지만, 현실에서 역사인식이 넘칠 땐 학자들이 이런 세태를 올바른 역사 접근 방식을 통해 풀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1980년대와 비교해 요즘은 아무래도 정치적 인식, 소명의식 이런 게 사라지지 않았나 싶다. 임 요즘 고등학생 등의 역사의식이나 각성은 국민교육 시스템 때문에 불가능하다. 교과서대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 국민교육 시스템이다. 국가에서 용인한 교과서대로 가르쳤는지 감시하고, 시험을 통해 평가하려는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 교육의 목표나 시험제도나 교과서의 발간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 주 이를테면, 국사편찬위원회가 천재교육에서 나온 중등교과서 검정심사를 한 뒤 ‘이한열 사망 사진’을 저자(주진오 등)의 허락도 받지 않고 삭제할 것을 요구해 올 가을에 파동이 일었다. 사실 내년부터 교과서가 바뀌기 때문에 검정심사를 내년에 해야 하는 것인데 정부가 조급하게 앞당긴 것이다. 계 미국은 교과서라는 것이 아예 없다. 텍스트북이라 부르지만 교과서가 단순히 읽을 자료일 뿐이다. 사회자 한반도 역사에서 여러 차례 중요한 선택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왜 그렇게 생각하나. 임 고대를 다룬 4편 중 2편이 7세기를 다뤘다. 초점은 신라는 어떻게 생존하고 살아남았느냐. 백제와 고구려는 왜 패망했는가가 중요했다. 한 삼국통일 이후 대륙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했거나 봉쇄됐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서 중앙으로 진출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진취적 기상이 사라졌지만, 덕분에 그나마 정체성을 갖고 살아남았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중국 조선족 교수에게 배운 한족 학생들이 “왜 중국이 한반도를 삼키지 않았느냐.”고 질문해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청나라, 몽골, 만주, 여진, 거란 등이 중원을 차지했다가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거나 사라져버린 걸 보면 한국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계기가 뭐였는지 찾는 게 중요하다. 임 그것은 고려시대 때로 돌아가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신라가 삼국통일 했을 때 당나라 중심의 질서를 수용하겠단 의미였다. 한 허목(1595~1682)은 조선인들이 기국(器局)이 작다고 말했다. 영토의 크기는 생각의 크기를 결정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계 제국의 질서를 수용하는 대신 왕조의 안녕을 인정받았다. 조선은 16세기 말 왜란과 17세기 초 호란을 겪고서도 자구책을 만들었다기보다 오히려 과거의 기억에 묶여 있었다. 18세기 실학자나 양반 어느 누구도 그러지 않았다. 아무리 청나라가 싫어도 몽골제국 때부터 중화질서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거다. 국가 경영자로서 중요한 기로인데 자구책조차 마련하지 않고, 자기 기득권에 매달렸던 선택이 한국 문명사 차원에서 볼 때 잘못되지 않았나. 결국 근대라는 쓰나미가 밀려올 때 쓸려 갔다. 주 우리 역사에서 식민지 역사는 아주 중요한 갈림길이다. 후발국가가 살아남으려면 끊임없는 내부 개혁과 열강 사이에서 살아남도록 적극적인 외교 정책이 필요했다. 고종의 책임이 크지만 동시에 근대개혁론자들의 태도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너무 쉽게 일본의 프레임에 갇혀 일본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조선 문제를 봤다. 일본의 모델을 통해 근대화를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군사, 정치, 그리고 사상적으로까지 무장해제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무저항적으로 쉽게 일본 식민통치를 받아들였다. 이런 것들이 일제 하 독립운동이 구심점 없이 많은 조직과 방식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원인일 것이다. 임 개화 이후 지식인들은 사실 일본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겉으로는 식민사관과 민족사관이 대비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변형일 뿐이다. 우리만의 시각, 프레임을 갖지 못한 게 아쉽다. 해방 이후 이게 더 큰 문제가 된 게 아닌가. 계 개화파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바꾸자 했던 건 사실인데, 이 사람들 중엔 정말 주권이 위기에 닥쳤을때 총칼 들고 저항한 사람이 없다. 주된 핑계는 이미 늦었다는 것인데, 위정척사파들 때문이었다. 그런데 비판받아야 할 사람들이 애국자로 칭송돼 왔다. 여기서부터 한국 근대사가 꼬이기 시작했다. 주 사실 위정척사파들 중 의병활동한 사람도 별로 없다고 한다. 당시 유학자들의 대응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가 자결이다. 둘째가 의병인데 얼마 안 된다. 세 번째는 더러운 땅 떠나서 자기 뜻 지키기 위해 섬으로 들어가는 것을 저항인 것처럼 여겼다. 우리 역사에서 의병들의 모습 을 볼 때마다 울컥한다. 의병 사진을 보면 하나같이 좀 그렇다. 안타깝고 초라하기 그지없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조선왕조로부터 받은 게 뭐가 있다고 저러고 있었을까. 양반과 지식인 등은 의병을 화적떼라고 손가락질하는데 말이다. 사회자 최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유튜브에 ‘백년전쟁’이란 동영상을 무료로 공개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한 독립운동의 실상과 무장독립운동가인 박용만을 음해한 내용,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 배경에 미국이 있었다는 내용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것을 보고 ‘멘붕’이라는 사람들도 있다. 주 이승만이 어떻게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나 싶다. 특정 논리, 지역적 기반에 입각한 사람들 덕분이었다. 외세를 등에 없고 실질적 지도자가 되다 보니까. 지도력에 대한 인정 여부가 약화되는 거다. 또한 이승만은 일제 말기에 VOA(미국의 소리) 전파를 탔고, 미국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이승만은 프로파간다의 귀재로, 한국 최초의 마키아벨리적 정치 인물로 볼 수 있다. 계 중요한 자료들이 공개된 것 같은데, 지금껏 공개하지 못한 것이 문제다. 역사를 볼 때 국내 시각에서만 보지 말고 미국이 깔아놓은 동아시아 무대 위의 이승만·박정희의 위상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교 수업 자료로 써야겠다. 한 현대사뿐 아니라 교과서도 자료가 굉장히 제한돼 있다. 역사적 평가는 사실만 알려줘도 바뀐다. 알려져 있는 제한된 사실 자체를 넘어서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예컨대 대통령기념관 만들 때 잘한 일, 잘못한 일을 모두 포함하면 문제는 없다. 근데 나쁜 건 다 빼버리니까 문제다. 사회자 대선 후보들의 역사인식에 대해 논란이 많았는데 이게 정책에 어떻게 반영될까. 임 유신시대가 자기가 살아온 시대였기 때문에, “그 시대가 문제가 없다.” 라고 한다면 그가 집권한 뒤에 언제든 그 시대가 재현될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닌가. 그 시대의 공과를 얘기해줘야 하는데, 역사적 평가로 미뤄버리는 것은 과거의 과실도 재현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계 최고통수권자의 철학에 유동적인 역사인식, 즉 현재진행형으로서의 역사인식이 없고, 내 생각만 옳고 다른 생각은 틀렸다고 한다면 문제가 있다. 이것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의식에 매몰되는 것이다. 한 최고 권력자의 역사인식을 본인이 아니면 누가 교정할 수 있겠나. 조선시대처럼 경연을 통해 국왕을 계속 개혁시키고 그렇다면 모를까 어렵다. 무엇보다 겸손이 중요하다. 인간의 삶 자체가 굉장히 다양한데 하나의 틀 안에서 다른 삶의 형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겸손이 없는 것이다. 한 의사가 “불치병을 고치려면 7년 묵은 쑥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고 치자. 그 환자는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일단 쑥을 뜯어 말리고 묵혀야 1년이 되고 7년도 되는 거 아니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 나로호 문제만 봐도 그렇다. 러시아에 돈을 지불하고 의존할 텐가. 지금 좀 늦었더라도 독자적으로 로켓 개발을 해야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주 과거에 대한 인식이 곧 현재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역사인식이 중요한 거다. 아버지를 부정하는 것은, 본인의 정치적 자산인데 어려울 거다. 아버지를 잃었을 때 박근혜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소녀가장이라는 식으로 변호하면 안 된다. 아무리 아버지더라도 반성할 일은 반성해야 새로운 정치적 비전이 생긴다. 한 겸허의 문제다. 정권의 수준이 국민의 수준이 아닌가 싶다. 5년 전 한 대통령 후보가 “부자됩시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는데 얼마나 천박했나. 사회의식이 두텁고 겸허해야 하는데 한국사회가 아직 그렇지 못하다. 주 박정희가 언제나 선거에서 이겼고, 분명 그 시대에 박정희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정치적 선택이 이런 지도자를 정치적 지도자로 뽑을 만큼의 수준밖에 안 되는가 싶다. 계 1960, 1970년대를 절대진리로 생각하고, 시대와 역사적 환경의 변화와 무관하게 절대진리를 적용하면 안된다. 사회자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반복하면서 실수했다면 무엇이 있을까. 계 역사교육의 부재, 기록 문헌을 남기지 않고 비공개했던 건 문제다. 해외 파병을 놓고 찬반이 갈렸다면 토론하고 그 결과를 남겨야 그 다음번에 파병문제를 논의할 때 한 단계 높아진 단계에서 토론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안 되기 때문에 반면교사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한다. 한 망각이다. 오랜 기간 동안 험악한 역사를 겪다보니까 빨리 잊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일본인이 한국인들에게 “옛날보다 냄비가 두꺼워졌다.”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정권에 불리한 어떤 이슈도 두 달만 되면 덮여진다. 음모론이 나오는 이유다. 박경리 작가는 사망 후 유고집에 ‘해방 직후 일제에 강제 징용됐다가 고생한 사람들이 집 근처에 서서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이어 말하길 ‘저렇게 안 웃으면 어떻게 남은 인생을 살 것인가’. 어떤 화두를 잡았을 때 진지하게 이끌고 나가야 하는데 언론, 지식인들의 이런 역할이 부족하다. 제주 강정마을이 논란인데 해군기지를 세우자 말자는 논의만 있고, 기지에 과연 배치할 군함은 있는 것인지는 논의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주제를 선정하고, 망각의 속도를 늦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임 부정적인 것, 바뀌어야 하는 것들이 살아 있다. 반복된다는 건 개선이 안 됐다는 얘기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결국엔 개선의 의지나,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 목표 등이 없어서다. 대선이나 뭔가 이슈화되는 과정에서 누구의 정책이 옳은가 하고 소극적인 선택들을 하는데, 바꿔야 될 것들을 바꾸는 데 유권자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하지 않나. 주 시대적 환경에 따라 비슷한 형태로 드러나지만, 완전한 반복은 아니다. 오늘날 한반도의 국제정세가 19세기와 비슷하다고 한다. 그런데 100년 전 국제정세와 어떻게 비슷한지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단편적이고 주먹구구식이다. 반복적 현상에 대한 치열한 비판과 탐구가 필요하다. 이 정부 들어 역사 교육 비중을 약화시키고, 수업 시수도 형편없이 줄었다. 이 상태에서 어떻게 올바른 방향을 찾아나갈 수 있을지 답답하다. 사회자 오는 19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 유권자들에게 역사적으로 올바른 선택이 있다면. 임 선거 목표중 하나는 민주주의와 시민사회로의 이행이다. 사실 모든 선거에서 그랬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선거들이 있다. 민주적 사회 질서를 확장해가는 그런 기준을 가진 후보를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한 통시대적 관점에서 얘기하자면 훌륭한 나라라는 개념은 일반 국민들이 정치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나라다. 의병이 될 필요가 없는 나라를 만들어주고, 정치를 술자리의 안주로 안 올릴 수 있게끔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계 유권자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본다. 한국 역사가 어떻게 굴러왔고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선 후보에 대해 정확하고 적극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니까, 민주공화국은 어떤 사람이 어떻게 운영하는지에 대한 공부도 필요하다. 우린 그 총수를 뽑는 것이다. 주 최근 정치인들 모습을 보면서 구시대가 부활할 위기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시대에 다양한 변화와 그 변화와 발전이 확대되는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한국은 산업화는 뒤늦었지만, 정보화 시대는 앞서갔다. 이 흐름이 민주정치 리더십과 맞물린다고 생각한다. 재벌 위주의 경제 틀이 아니라 중소기업들이 공존하는 사회, 민주정치가 기민하게 작동해 상상력을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또다시 재벌, 기득권 위주에 갇히면, 5년 후 어떻게 될지 모른다. 계 올해 제대로 선택을 못하면 5년 뒤에 대통령 선거 못할지도 모른다(웃음). 정리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29) 울산 외솔큰길

    [길을 품은 우리 동네] (29) 울산 외솔큰길

    울산 ‘외솔큰길’은 한글학자 최현배(1894~1970년)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름 붙여진 도로다. 최현배 선생의 호를 딴 이 도로는 선생이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생가와 기념관 인근에 들어선 왕복 4차선이다. 또 중구와 북구를 가르는 동천강을 따라 조성돼 강변과 관련된 추억을 간직한 ‘삶의 길’이기도 하다. 외솔큰길은 울산 중구 반구동 내황배수장에서 동동 동천서로 삼거리까지 3.8㎞(너비 32m) 구간에 조성된 왕복 4차선. 시작과 끝 지점 일부는 아직 개설되지 않은 미완의 도로다. 이 도로는 최현배 선생이 어린 시절 꿈을 키웠던 ‘외솔 생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개설됐다. 1970년대 이전에는 도로의 기능보다 인근 주민들의 생활 터전이자 놀이터 역할을 했다. 이후 1990년대부터 이곳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도로 기능을 하게 됐다. 이어 왕복 4차선 도로가 개설된 2001년 3월 외솔큰길로 고시됐다. 1970년대 이전에 이곳은 논과 밭, 둔치(모래)로 이뤄졌다. 또 생활의 터전이자 홍수를 막아 주는 제방 역할도 했다. 당시에는 병영과 산전 주민들이 동천강에서 물고기를 잡고, 둔치에서 씨름과 축구를 즐겼다. 이후 1990년대부터 도시가 확장되면서 차가 다니는 도로의 기능을 가지게 됐다. 현재는 왕복 4차선으로 국도 7호선(울산~경주 산업로)의 출퇴근길 교통체증을 완화해 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중구와 북구 주민들이 현대중공업이나 현대자동차, 남구 석유화학공단 등으로 출퇴근할 때 많이 이용한다. 2000년대 이후에는 동천강변을 따라 삼일아파트를 시작으로 남외푸르지오, 에일린의 뜰, 삼한나우빌 등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신흥 주거지로 뜨고 있다. 도로 인근에는 최현배 선생의 생가(복원)와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2010년 3월 개관한 기념관 및 생가에는 주말과 휴일뿐 아니라 평일에도 시민, 관광객, 어린이들이 찾아 외솔의 한글 사랑을 배우고 있다. 중구는 앞으로 외솔 기념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 병영 일대를 교육·문화 지역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도로의 북쪽 끝 지점에는 물맛 좋기로 소문난 ‘산전샘’이 지금도 시원한 천연 지하수를 뿜어 내고 있다. 산전샘은 경주와 동구 방어진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에 있어 먼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휴식처이기도 했다. 도로변(강변 쪽)에는 자전거 연습장과 조깅로, 쉼터 등이 조성돼 시민들의 휴식·문화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매일 밤 동천강변을 걷는 인파가 수백명에 이르고, 자전거 연습장에는 가족단위 시민들이 몰려 자전거를 즐긴다. 여기에다 중구 보건소 앞 강변로에서는 연주회와 합창대회 등 예술 공연도 열린다. 중구는 외솔큰길 일대 동천강변에 음악 시설을 설치해 매일 아름다운 선율을 제공하고 있다. 외솔큰길 주변에는 조선시대 축조된 병영성(면적 5만 6371㎡·사적 제320호)과 울산 3·1만세운동의 중심이었던 병영초등학교 등이 있다. 병영삼일사봉제회는 해마다 울산 병영3·1독립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재현 행사는 위령제를 시작으로 고유제, 3·1 독립만세 운동기념 퍼레이드 등으로 진행된다. 김기환 전 울산시의원은 “외솔큰길이 들어선 동천강변은 병영, 산전, 반구동 일대 주민들의 생활 터전이고 놀이터였다.”면서 “특히 병영은 울산의 호국정신이 뿌리 깊게 내린 곳”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 한양대, 창업 DNA… 제2의 벤처신화 이끈다

    한양대, 창업 DNA… 제2의 벤처신화 이끈다

    모두가 취업에 목을 매는 대학가에 ‘한양대발 창업 바람’이 심상찮다. 2010년 기준으로 전국 4년제 대학에 재학 중인 대학생 창업자 수는 사립대가 평균 2.2명이고 국공립대는 1.8명이다. 하지만 한양대 재학생 창업자는 23명에 이른다. 국내 대학 중 최고경영자(CEO)를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실용학풍’ 한양대의 밝은 미래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한양대가 ‘창업 사관학교’ 또는 ‘CEO의 요람’으로 불리는 것이 우연의 산물은 아니다. 한양대는 재학생은 물론 졸업생과 동문들에게도 창업의 기본부터 성공의 노하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톡톡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올해부터 추진하고 있는 ‘한양 동문 스타트업(Start-up·신규기업) 아카데미’가 대표적이다. 한양대 출신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예비 창업자와 초보 창업자들을 대상으로 선배 기업인이 직접 후배의 성공 창업을 지원하는 일종의 멘토링 프로그램이다. 한양대뿐 아니라 한양사이버대, 한양여대 재학생과 졸업 동문까지 모두 아우르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스타트업 아카데미는 창업 교육에서 팀 빌딩, 투자, 창업보육 등 전 과정을 망라했다. 7주간 단기 집중교육을 통해 ▲사업타당성 분석 ▲자본조달 ▲기업세무 ▲기술 마케팅 ▲지적재산권 관리 ▲기업설명(IR) 등 창업 실무 전반을 교육한다. 단순한 교육에서 그치지 않고, 수료생들이 직접 창업에 나설 수 있도록 사회경험과 자금이 있는 졸업 동문과 재학생 간의 매칭으로 창업 성공 조합까지 만들어 실제 적용이 가능하도록 했다. 우수 창업팀에는 한양대 벤처 동문으로 이뤄진 ‘한양엔젤클럽’ 투자를 비롯, 신규 창업보육센터 입주까지 지원한다. 올 8월 졸업한 1기에는 05학번 재학생부터 중견기업 임원인 77학번까지 다양한 예비창업인들이 참가해 꿈을 키웠다. 스타트업 아카데미는 임덕호 총장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창업 역량을 지닌 졸업생과 재학생을 벤처동문과 엮어 ‘CEO 사관학교’란 한양대 브랜드를 강화한다는 복안이었다. 임 총장은 “오랜 기업현장 경험과 해당 분야 기술력을 보유한 졸업 동문 예비창업자와 도전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재학생들을 상호 연계해 공동 창업을 촉진하는 네트워킹 장이 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예정”이라며 “매년 50개씩 5년간 250개 이상의 창업기업을 배출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한양대의 창업 성과는 ‘기업가 정신’에서 시작된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나 중국 칭화대처럼 세계 최고 수준의 창업 붐을 일으키는 것이 목표다. MIT에선 1970년대 이후부터 졸업생들의 창업 붐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기업과 대학을 연결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이 꾸준히 갖춰져 왔다. 세계적으로 MIT 출신이 설립한 기업 가운데 현재 활동 중인 곳만 2만 5000개를 넘어섰으며, 이들은 300만명이 넘는 인원을 고용하고 연 2조 달러가 넘는 매출을 올리고 있다. 2003년 설립된 중국 칭화대의 기술지주회사인 ‘칭화홀딩스’는 현재 자회사가 90여개에 이른다. 자산규모는 4조원에 이른다. 칭화홀딩스는 대학 내 우수 연구성과나 아이디어가 모여 실제 사업화를 통해 기업으로 거듭난 ‘허브’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창업에서 대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대학에는 아이디어가 있고, 인프라가 있으며, 젊은 열정이 있다. 2000년 전후의 벤처 붐도 대학이 제 역할을 해줬다면 그렇게 사그라지지 않고 지속성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1세대 벤처기업인인 이금룡 코글로닷컴 회장은 “대학 없는 벤처 붐은 완전할 수 없다.”면서 “제2의 벤처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선 대학이 젊은이들을 독려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양대는 국내 1호 대학기술지주회사인 ‘한양대학교기술지주회사’를 통해 대학의 역할을 다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지주회사가 세운 ‘글로벌 넘버원 HYU홀딩스’는 2020년까지 자회사를 35개로 늘려 매출 1조원, 순이익 2500억원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현재 트란소노와 크레스타, 크린컴, 오메가퀀트아시아 등 까다로운 상용화 검증을 거친 회사들이 탄탄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성균 한양대기술지주 대표는 “한양대가 보유한 국내외 특허출원 건수가 3000여건 이상이지만, 무턱대고 기업을 늘리는 것보다는 내실을 키우는 것이 핵심 목표”이라고 강조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데스크 시각] 김근태와 1970년대, 남영동/문소영 문화부 차장

    [데스크 시각] 김근태와 1970년대, 남영동/문소영 문화부 차장

    오는 30일은 고(故) 김근태 민청련 초대의장의 1주기다. 제15~17대 국회의원과 열린우리당 의장,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나름대로 화려한 경력을 가졌지만, 김근태를 가장 김근태답게 하는 직함은 ‘민청련 초대의장’이라고 생각한다. 재야 운동권의 맏형으로 이름값이 높았던 그는 1994년 국민회의가 출범하자 48살의 늦은 나이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다. 직함은 부총재였으나 빛 좋은 개살구였다. 당시 국민회의 총재는 정계은퇴를 번복한 뒤 ‘대통령 4수’를 준비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기에 동교동계 가신들과 비교해 한없이 힘없는 자리였지만, 김근태에겐 정권교체를 하겠다는 일념이 있었다. 일부 재야 운동권은 ‘변절’이라며 그를 숱하게 욕했다. 김영삼 야당총재가 19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선거자금 걱정 말고, 종로·중구에서 출마하라’고 제의했을 때 김근태가 거절했다는 사실을 그들이 몰랐던 탓이다. 1998년 여름 초선의원 김근태를 처음 만났다. 외환위기에 몰려 한국은 IMF체제에 놓여 있었다. 여기저기서 ‘박정희 신드롬’이 기승을 부릴 때라 ‘김근태-조갑제 지상 논쟁’을 준비했던 탓이다. 흰색 드레스 셔츠에 감색 양복바지를 입은 김근태는 뽀얀 피부에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귀공자였다.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0일간 받은 고문을 폭로해 한국사회를 뒤집어 놓았던 비타협적인 투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치 현안에 대한 질문에 단칼에 자르듯이 말하는 법도, 과격한 단어를 사용하거나 언성을 높이는 법도 없었다. 어떤 적의나 분노도 보이지 않는 그를 보며 “고문 받은 것이 맞나?” 싶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때는 지난해 7월 19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에 가설한 임시 천막 앞에서다. 노회찬·심상정 전 의원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면서 단식농성을 하던 때다. 김근태가 그들을 방문하고 있었다. 눌변이 더 눌변이 되고 표정도 어색했지만, 그는 “조만간 막걸리 한 잔 하자.”고 했다. 그 약속은 실현되지 못했다. 소설가 방현석이 장편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를 내놓았다. 방현석은 그 소설에서 “98%의 사실에 2%의 허구를 섞어 순도 100%의 진실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했다. 가난한 교사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한 집안의 기대주 소년 김근태가 서울대 경제학과에 진학한 뒤 영국 유학이라는 출세의 기회를 뒤로하고 왜 고달픈 운동의 길로 들어섰는지 섬세하게 그려놓았다.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과 10월 유신헌법 제정 등으로 1970년대 한국사회를 유린했기 때문이었다. 장기집권 체제를 굳히고자 박정희는 인혁당·민청학련 사건 등 간첩단 조작사건을 터뜨렸고, 군대로 대학을 짓밟았으며, 교련을 도입해 지성의 대학을 병영화했다.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대중가요는 숱하게 금지곡이 됐다. 그때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나왔다면 즉각 금지곡이 됐을 터다. 김근태는 1971년 수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뒤 남파간첩보다 더 많은 포상금을 목에 건 채 10년을 숨어 지냈다. 10년. 상상하기 어려운 세월이다. 1980년에 수배가 해제된 그는 1983년 민청련이 발족하자 초대의장에 올라 광주 학살의 진상 규명 등 사회운동을 펼친다. 사실 그는 그만두고 싶었다. 그러나 한 후배가 찾아와 “선배들은 어떻게 했기에 우리나라를 이 따위로 내버려 뒀느냐.”고 한 절규가 그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한국의 1960~1970년대 정치인들과 결탁한 산업화세력은 자신들 덕분에 대한민국이 이만한 꼴을 갖췄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1970~1980년대 김근태와 같은 민주화 운동세력이 없었다면, ‘민주주의의 한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근거를 대라고? 영화 ‘남영동 1985’와 ‘26년’이 그것이다. 인두겁을 쓰고 어떻게 저런 고문을 할 수 있을까 싶겠지만, 이들을 양산하고 가슴 펴고 다닐 수 있게 한 정권들이 있었다. 김근태를 다룬 소설과 영화를 보면서 김근태에게 진 빚을 다 헤아리기 어렵다. “2012년을 점령하라!”라고 한 김근태의 유지가 실현되기를 기다려 본다.
  • [생각나눔 NEWS] ‘카지노 vs 박물관’ 폐광촌의 생존법

    [생각나눔 NEWS] ‘카지노 vs 박물관’ 폐광촌의 생존법

    프랑스 북부 노르파드칼레주의 랑스. 1970년대까지 탄광촌으로 명성을 누린 랑스는 석탄산업 사양화와 함께 인구 3만 5000명의 보잘것 없는 작은 도시로 퇴락했다. 그렇고 그런 폐광도시 랑스가 문화도시로 거듭나게 됐다. 세계 최고의 박물관으로 꼽히는 루브르가 4일(현지시간) 이곳에 분관을 개설하기 때문이다. 루브르 분관 개관식에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기로 했다. 시커먼 석탄 부스러기만 날리던 폐광촌에 루브르의 르네상스 거장들이 대거 이사 온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의 풍부한 문화자산, 정부의 과감한 정책, 지역주민의 전폭적 호응이 빚어낸 결과로 풀이된다. 실제 프랑스 정부는 침체된 지방 경제 활성화를 위해 골머리를 앓다 ‘문화·예술의 지방 분권화 프로젝트’를 시행, 랑스를 제2의 루브르 박물관 건설 장소로 결정했다. 단순히 공기업을 옮기거나 예산을 퍼주는 대신 프랑스를 세계 문화중심지로 만들어 준 박물관을 만들어 지방 경기 활성화 모델로 삼자는 생각이었다. 조선업 쇠퇴로 몰락한 스페인 공업도시 빌바오가 구겐하임미술관 유치 후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변모한 것을 본딴 것이다. 루브르는 박물관 운영권을 지역 주민에게 넘기고, 건물은 이곳에서 캐낸 철광석에서 뽑아낸 알루미늄 벽의 단층 건물 네 동으로 지었다. 박물관이 지역사회의 불청객이 아니라 지역 및 주민들과 융합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루브르는 파리 본관의 소장품 가운데 일정 부분을 랑스 분관에 대여하고, 4년에 한번씩 일부 교체전시하는 방법으로 사실상 본관과 분관의 구분을 없앨 예정이다.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을 마주하고 있는데다, 북쪽으로는 벨기에, 네덜란드와 접해 있어 관광객을 끌어들일 지리적 입지도 좋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폐광촌 살리기 프로젝트가 있었다. 강원도 정선의 폐광지역 경제 회생을 위해 우리는 내국인 전용 카지노를 만들었다. 관광산업을 통해 지역 경기를 되살린다는 취지였다. 카지노는 매년 수조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지만 사회적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재산을 탕진하고 가정파탄을 유발하는 도박 중독자가 양산되고 있다. ‘정선=도박도시’라는 불명예도 안겼다. 박물관을 지어 유무형의 문화재를 전시하며 지역 주민에게 교육과 재미를 동시에 안겨주는 프랑스와 세금 거둬들이기에 유리한 도박장을 지어 지역 경기 부흥에 나선 한국. 목표는 같지만 방법은 달랐다. 최재헌기자 goseoul@seoul.co.kr
  • [글로벌 시대] 글로벌 리더를 소망한다/이혜주 현대건설 해외영업본부 상무

    [글로벌 시대] 글로벌 리더를 소망한다/이혜주 현대건설 해외영업본부 상무

    우리나라처럼 정치권 뉴스가 1년 내내 주요 메뉴가 되는 나라는 많지 않다. 대선을 앞둔 요즘은 쏟아지는 정치 관련 뉴스에 혼란스러울 정도다. 정치에 식상하면서도 국민들의 관심은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이냐에 모아져 있다. 자원 빈국의 좁은 국토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가 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역량을 키워야 하고, 이를 이끌어낼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런 이유에서 이번 대선과 차기 정부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하겠다. 근대 이후 우리 정치가 국가발전에 얼마나 기여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개인마다 평가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경제계 인사들이 정치를 보는 눈은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당리당략에 얽매여 있는 정치권에서는 글로벌 리더십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것은 기업들이 일찍부터 글로벌화를 서둘렀기 때문이다. 일본이 오랜 기간 경제적으로 고전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필자는 이것 역시 대외적인 요인보다는 일본 내 ‘글로벌 에너지’의 고갈에서 찾고 싶다. 기업 운영에도 ‘관성의 법칙’이 작용한다. 즉, 성장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에서도 당분간은 기업이 성장하는 듯 굴러간다. 착시현상이다. 그리고 이런 착시현상을 간파하지 못하는 기업은 오래가지 못한다. 글로벌화에도 변화와 혁신이 필요하다. 일본은 아날로그 시대에 단연 글로벌화의 선두에 있었다. 한때 소니의 TV와 워크맨, 도요타와 닛산의 자동차, 일본 종합상사의 세일즈맨은 글로벌화의 총아였다. 그러나 일본은 자신들의 기술과 제품에 대해 자만했고, 변화와 혁신을 등한시했다. 글로벌화의 에너지가 고갈된 것이다.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이 쇠멸한 이유도 세계를 향해 달리던 ‘말’이 달리기를 멈추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무역 1조 달러 달성의 위업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대내외 여건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악화돼 있다. 무역 규모가 더 늘지 못하고 지금의 1조 달러에 머문다면 우리의 미래는 밝지 않을 것이다. 신시장 개척의 채찍을 높이 들고 더 넓은 곳으로 내달려야 한다.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돼 중동 및 북아프리카로 확산된 반(反)정부 시위인 ‘아랍의 봄’의 원인 제공자는 글로벌화를 막고 있던 통치권자들이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가 단초가 됐지만, 옛 소련이 붕괴된 것도 글로벌화에 대한 욕구가 분출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중동에서 글로벌화로 성공한 나라가 있다. ‘창조 경영’의 화두를 던진 작은 도시국가 두바이다. 두바이가 최근 10여년 만에 사막의 기적을 일군 것으로 아는 이가 많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석유 매장량이 적어 자원 고갈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서 라시드 왕은 어촌도시로서는 성장에 한계가 있음을 간파하고 1970년대부터 국가발전 청사진을 만들었다. 국교(國敎)는 무슬림이지만 다종교와 다문화를 수용하고, 술을 허용했다. 이슬람 국가들의 이단이 되는 길을 택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글로벌화를 통해 물류·관광·금융의 허브를 지향한 결과, 두바이는 수많은 외국인이 오가며 돈을 쓰는 ‘중동의 뉴욕’이 됐다. 현재 두바이에는 자국민이 10%도 되지 않는다. 중국은 덩샤오핑이 ‘죽의 장막’을 걷어낸 이래 글로벌화를 위한 가속 페달을 쉼 없이 밟아 왔다. 세계 어디를 가도 중국인과 중국 상품이 넘친다. 낮은 가격과 물량 공세로 승부하던 중국은 이제 옛말이 돼 가고 있다. 여러 분야에서 우리 업체들을 위협하고 있을 정도다. 우리가 국가 발전을 계속할 수 있는 길은 글로벌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 경쟁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좁은 국토가 아닌 글로벌 빌리지를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세계는 급변하는데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글로벌 리더가 우리 정치권에서도 많이 배출되기를 소망해 본다.
  • [北 10~22일 미사일 발사] 4월 실패 보완… 성공 가능성 매우 높아져

    [北 10~22일 미사일 발사] 4월 실패 보완… 성공 가능성 매우 높아져

    북한이 오는 10일부터 22일 사이에 ‘광명성 3호 위성’ 2호기를 ‘은하 3호’ 미사일에 실어 발사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기술의 보완 정도와 성공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북한은 지난 4월 13일에도 은하 3호 미사일을 발사했지만 1~2분 비행하다 공중에서 폭발해 기술적 결함을 드러냈다. 전문가들은 날씨에 따라 발사일이 달라질 수는 있겠으나 기술적으로는 성공 가능성이 높아졌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북한은 지난 4월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에서 은하 3호의 엔진성능 개선 시험을 수차례 실시했으며 해외 미사일 전문가의 방북을 은밀히 진행하는 등 발사 준비에 전념한 것으로 파악됐다. 군 관계자는 2일 “이번 발사 시도는 핵개발을 완성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으로 핵무기 운반을 위한 장거리 탄도미사일 기술 확보가 목적”이라면서 이같이 전했다. 북한은 1970년대부터 스커드 미사일을 기반으로 액체연료의 로켓 기술을 개발해왔다. 발사 추진체 기술만 놓고 보면 남한보다 앞섰다는 평가다. 권세진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항공우주공학과 교수는 “북한은 인공위성부터 미사일까지 부품을 만드는 산업체들이 유기적으로 협업을 하고 있는 만큼 지난 4월 실패 당시의 결함을 보완해 이번에는 성공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사일 발사 예정지인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기지는 북위 39.2도로 해안지역에 있으나 겨울에는 찬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다. 북한은 이에 따라 오는 10~22일 중 날씨가 맑고 기온이 비교적 따뜻한 날을 골라 미사일을 발사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한겨울 날씨로 인해 발사에 필요한 액체연료에 이상이 생겨 실패할 가능성이 있음을 점치기도 하지만 전문가들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장영근 한국항공대학교 교수는 “로켓에 사용하는 액체연료는 빙점이 매우 낮아 영하 5~10도에서 발사하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북한이 대내용 매체를 통해서는 실용 위성 발사 계획을 밝히지 않고 있는 것은 발사가 실패할 경우에 따른 부담 때문 아니겠느냐는 전망도 나왔다. 대외 매체인 조선중앙통신과 달리 일반 주민들이 접하는 노동신문과 조선중앙TV 등 주요 매체가 2일 오후까지 발사 예고를 언급하지 않아 과거와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하프타임] 고양 Hi FC 감독에 이영무씨

    고양 Hi FC 감독에 이영무씨 내년 프로축구 2부리그에 참가하는 고양 Hi FC가 지난 29일 이사회를 열어 이영무(59) 단장을 초대 감독으로 선임했다. 1970년대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이 감독은 1980년대부터 고양의 전신인 할렐루야, 안산 HFC에서 선수, 감독, 단장을 지냈다. 발롱도르 후보에 메시·이니에스타·호날두 국제축구연맹(FIFA)은 30일 리오넬 메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이상 바르셀로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레알 마드리드)를 올해 발롱도르(Ballon d’Or) 후보로 압축했다. 메시는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세 차례 연속 영예를 안았다. 그가 내년 1월 7일 스위스 취리히의 FIFA 본부에서 수상자로 선정되면 호나우두(브라질), 지네딘 지단(프랑스·이상 3차례)을 제치고 최다 수상의 기쁨을 누린다. 배구연맹 사무총장에 신원호씨 한국배구연맹(KOVO) 신임 사무총장으로 신원호(56) 글로벌리서치 부사장이 선임됐다. KOVO는 30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이사회 및 임시총회를 열어 최근 사퇴 의사를 밝힌 박상설 사무총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후임으로 2004~05년 남자 프로배구 LIG손해보험 단장을 지낸 신 부사장을 내정했다.
  • [전국플러스] 새해부터 KTX 경북 경산역 정차

    새해부터 KTX 경북 경산역 정차 코레일은 내년 1월 1일부터 경북 경산역에도 KTX가 정차한다고 30일 밝혔다. 경산역에서 새마을호나 무궁화호를 타고 동대구역에서 KTX로 갈아타는 수요가 많은 점을 고려, 하루 4회 운행키로 했다. 서울역∼경산역 KTX 소요시간은 2시간 6분이다.운행시간은 하행선의 경우 오전 9시 46분, 오후 8시 41분이며 상행선은 오전 7시 13분과 오후 7시 17분이다. 운임은 평일기준(월∼목)은 4만 500원, 금~일요일과 공휴일은 4만 3600원이다. 승차권은 12월 1일 오전 7시부터 코레일 홈페이지 등에서 예약할 수 있다. 서울 내년 2월까지 보도블록 공사 금지 1일부터 내년 2월 28일까지 3개월간 서울시내에서 보도블록 공사가 중단된다. 서울시는30일 연말마다 되풀이돼온 동절기 보도블록 공사 관행을 없애고 짧은 공사 기간으로 인한 부실시공을 방지하기 위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혔다. 시는 25개 자치구에 공문을 보내 진행 중인 보도블록 정비, 상수도 관로 매설, 도로굴착 등 보도공사장 74곳의 공사를 연말까지 마무리하라고 독려했다. 시는 공사금지 기간에 현장점검을 벌여 적발되면 엄중히 처벌할 계획이다. 다만시민 생활과 직결된 긴급 공사의 경우는 예외로 했다. 경남도·의회 무상급식 예산 동결 공방 내년 무상급식사업 예산 동결을 놓고 경남도와 도의회 야권 의원 등이 공방을 벌이고 있다. 경남도는 30일 도와 도교육청이 2010년 약속했던 무상급식사업 확대 추진 계획을 도의 심각한 재정난 때문에 잠정적으로 보류할 수밖에 없다며 도민들의 이해를 당부했다. 내년 예산은 올해와 같은 356억원이다. 이와 관련해 경남도의회 야권 교섭단체인 민주개혁연대는 기자회견 등을 통해 재정이 어려운 것은 다른 지자체도 마찬가지 라며 약속 이행을 요구하고 있다. 동해시, 연말 日 여행 할인행사 강원 동해시 ㈜DBS크루즈훼리는 연말 연시 동해시민과 강원도민을 위해 일본 여행 할인행사를 펼친다. 동해항∼일본 사카이미나토항을 운항하는 이스턴드림호를 이용한 관광상품으로 13일과 20일 2차례에 걸쳐 시행된다. 운임의 58%를 할인해준다. 44만원짜리 관광상품은 29만원으로 34% 할인된다. 신청은 출발 5일 전까지 가능하다. 모집인원은 1항차에 250여명이다. 양구백자박물관 백토 소성식 강원 양구군 양구백자박물관이 방산면 칠전리 전통가마에서 전통 방식으로 100여점의 백토 작품을 빚어내는 소성식을 가졌다. 2009년 3월 40년 만에 칠전리 전통가마에서 소성 요출식이 열리면서 고려시대 때부터 전해 내려오다 1970년대 초반 명맥이 끊긴 양구 백자에 대한 재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양구백자박물관에서는 현재 연간 2~3회에 걸쳐 전통가마를 이용해 옛 방식대로 백자를 빚어내고 있으며 백자 제작 체험 개인과 단체반을 운영하고 있다.
  • [연극리뷰] 그와 그녀의 목요일

    [연극리뷰] 그와 그녀의 목요일

    “시원한 거 없어?” “없어.”, “주스 없어?” “없다니까.”, “나갈까?” “싫어.”, “갑자기 웬 풀이냐?” “난()이거든!” 아옹다옹하는 중년 남녀가 꽤나 귀엽다. 주변을 뱅글뱅글 돌면서 재잘대는 정민(조재현)과 톡톡 쏘아붙이는 말투로 응대하는 연옥(배종옥)의 관계는 오랜 친구로 포장돼 있지만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 속이 쓰리다는 연옥에게 낙지볶음을 권하는 무심한 정민이 대뜸 “진지하게 만나보자.”면서 매주 목요일 만날 것을 제안하고 훌쩍 떠났다. 연옥은 “한번 휘젓고 사라지면 몇 달이고 연락도 없는” 정민과 목요일마다 다른 주제를 놓고 정기적으로 만나기로 30년 만에 처음 ‘약속’했다. 둘은 연구실, 야구장, 전시회 등에서 다섯 차례 목요일을 보내면서 비겁함, 역사, 죽음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속에 정민과 연옥의 과거가 있고 복잡 미묘한 둘의 관계가 담겼으며 금성과 화성만큼 다른 심리 상태가 녹아들었다. ‘그와 그녀의 목요일’은 달콤한 로맨틱 연극으로 한정하면 곤란하다. 가까워질수록 복잡해지고 서로 차이점을 더 극명하게 느끼게 되는 남녀 관계를 유쾌하면서도 진지하게 품는다. 1970년대 프랑스 대표 작가로 꼽히는 마리 카르디날(1929~2001)의 소설 ‘샤를르와 룰라의 목요일’을 한국 상황에 맞춰 만들었다. 원작에서 프랑스 북부 출신의 역사학자이자 자유주의자인 샤를르는 역사학 교수 서정민이 됐고 알제리 출신 저널리스트 룰라는 은퇴한 국제분쟁 전문기자 정연옥으로 태어났다. 룰라는 프랑스 제국주의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고 연옥은 1980년대 서슬 퍼런 군부독재를 비판한다. 룰라와 샤를르가 40년 동안 친구와 연인 사이를 오갔다면 연옥과 정민은 30년 동안 그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했다. 두 작품 사이에는 다른 시공간의 배경이 놓여 있지만 남녀 관계의 그 애매하고 혼란스러운 관계, 다른 말과 표현에서 비롯되는 오해와 갈등은 여전하다. 정민과 연옥이 서로에게 터뜨린 불만의 핵심이 거짓말과 무책임이라는 점도 많은 이들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사랑은 사랑일 뿐 사랑할 나이가 따로 있다거나 나이에 따라 사랑이 다르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 같다. 중년의 사랑을 다룬 것이 아니라 삶의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다.”라는 배종옥의 말에 공감이 간다. 인물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은 황재헌 연출의 공도 커 보인다. 차분하고 지적인 연옥은 배종옥과 정재은이, 유쾌하지만 다소 철없어 보이기도 하는 정민은 조재현과 정웅인이 연기한다. 연극열전과 예술의전당이 공동 제작했다. 12월 30일까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3만 5000~5만원. (02)580-1300.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요정의 도시’ 달구벌

    [길을 품은 우리 동네] ‘요정의 도시’ 달구벌

    대구는 한때 ‘요정의 도시’라 불렸다. 그 중심에 종로가 있다. 종로에만 1960~70년대 50여개의 요정이 있었다. ●전성기땐 기생만 500여명… 지조도 유명 이같이 대구에 요정이 많았던 것은 일제와 관련이 있다. 경부철도가 건설되면서 일본인들이 대구에 몰려왔다. 그러자 이들을 겨냥한 요릿집이 대구역 인근 곳곳에 문을 열었다. 이후 1909년 4월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기생들은 생업을 위해 대구기생조합을 설립하고 요릿집에 나가 예악을 팔았다. 10여년 이후에 대구기생조합의 후신인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이 설립돼 기생들을 교육하고 알선, 관리하며 화대를 징수했다. 1942년 권번제도가 폐지되었으나 1960년대부터 요릿집과 권번의 역할을 합친 본격적인 요정시대가 열렸다. 1950년대에는 죽립헌, 칠락, 삼한관, 보현장, 계림관, 대구관 등이 대구의 일급 요정으로 자리 잡았다. 1970년대에는 춘앵각, 청수원, 일심관 등이 대표적 요정이었다. 이 중 춘앵각이 단연 으뜸이었는데 주인이었던 나순경은 자연스레 대구 요정업계의 대모 노릇을 했다. 거쳐간 기생들만 수백 명이 넘고, 훗날 지역의 요정과 한식집의 선두주자로 자리 잡은 수제자만 해도 20여명이나 된다. 춘앵각은 2003년 말 문을 닫으며 지역 요정 시대는 저물었다. ●현재 ‘가미’가 유일하게 명맥 이어 종로에 요정이 전성기를 이룰 때 기생들만 500여명에 이르렀다. 대부분 춤과 노래 실력이 뛰어나고 인물은 출중하지만 몸은 팔지 않는 1급기생이었다고 한다. 돈벌이 못지않게 지조도 유명했다. 일본인 손님 앞에서도 일어를 쓰는 법이 없었고, 지나치게 고고한 자세를 지키다 다툼이 일어나기가 부지기수였다. 현재는 요정 가미가 유일하게 종로에서 명맥을 잇고 있다. 가미는 1962년 가정집을 개조해 ‘식도원’이라는 요정으로 시작했으며, 1986년부터 ‘가미’로 이름을 변경했다. ‘가미’입구에는 일제시대부터 1960년대, 70년대, 80년대까지 대구의 밤을 밝혔던 요정의 미니어처가 전시돼 있다. 윤금식 가미 대표는 “대구 종로 요정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다는 심정으로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글 사진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28)대구 종로

    [길을 품은 우리 동네] (28)대구 종로

    조선 시대 도성에는 종루가 있었다. 종루에서 나오는 종소리로 도성의 문을 여닫았다. 종소리는 시계가 보급되기 전, 사람들이 시간을 인식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종소리가 들리는 만큼을 도성의 중심으로 여겼다. 서울의 중심에 종루가 있었다면 대구에도 읍성 남쪽에 종루가 있었다. 그 앞을 지나는 길은 서울이든 대구든 종로로 불린다. 근대화의 물결과 함께 종루는 소리를 잃었지만 종로는 도시의 중심을 굳건히 지켜왔다. 하지만 1904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종로는 중심 통로로서의 기능을 점차 잃어갔다. 이 사업을 계기로 일본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대구에 진출했고 이들은 대구역 인근 북성로 일대에 자리를 잡았다. 일제는 자국민을 위해 신작로를 뚫었다. 경상감영 앞을 동서로 지나는 거리를 만들어 여기에 관청과 금융기관 등을 속속 입주시키며 종로의 세를 조금씩 빼앗아 갔다. 대신 종로에는 요정들이 들어와 대구의 밤 문화를 지배했다. 종로와 수동, 상서동 일대만 요정이 50개를 넘었고 수백명의 기생들이 드나들어 1960년대 후반까지도 불야성을 이뤘다. 종로는 화교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1905년부터 화교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러다 해방 직후 화교들의 경제활동이 크게 번창하면서 종로 일대의 부지를 매입하여 특색 있는 건물을 지었다. 당시 대구 화교의 지도자였던 모문금, 연보주 같은 이들의 역할이 컸다. 화교협회, 화교 소학교와 중학교, 화교성당, 화교교회, 그리고 1920년대에 문을 연 지역 최고의 청요릿집 군방각 같은 건물들이 들어섰다. 이들 건물은 중국인 기술자들이 평양에서 구워온 붉은 벽돌과 금강산에서 베어온 나무로 지었다고 한다. 1950년 5000명이 넘기도 했던 대구 화교들은 이후 정부의 외국인등록제, 외국인 토지소유금지법 등 여러 규제로 타이완, 미국 등지로 터전을 옮겨 지금은 950여명에 그치고 있다. 화교들에 이어 종로 상권을 장악한 것은 가구상들이었다. 목공소와 농방 등 소규모 점포 5~6개가 들어서면서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한 가구거리의 면모는 1950년대 후반 ‘가구사’란 간판들이 잇따라 내걸리면서 일반인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10여년 동안 꾸준히 가구점이 늘어 1970년대 초에는 만경관 네거리~염매시장 입구거리에 50개가 넘는 가구점, 공예사가 있었다. 가구상들이 번성하자 철물점과 금고상 등 관련 업종까지 함께 모여들었다. 그러나 전국적인 유통망과 가격 경쟁력을 갖춘 대형 가구기업들이 밀고 내려오자 가구상들도 결국 종로의 주인 자리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빈 건물이 방치되다 쇠락의 길로 내 몰렸다. 더구나 인근 동성로에 인파가 몰리고 대중교통전용지구사업으로 차량마저 접근하기 힘들면서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이에 관할 구청인 중구청이 5년전 도심재창조란 주제로 ‘걷고 싶은 거리, 테마가 있는 거리’사업을 펼쳤다. 박동신 중구청 전략경영실장은 “종로는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데다 쉼터나 벤치도 조성되지 않아 사람보다는 차가 우선인 거리였다. 또 전통거리로서의 특성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에 쌈지공원과 작은 도서관을 만들고 건물 곳곳에 종로의 역사를 소개하는 벽화를 그렸다. 거리 양쪽에는 청사초롱을 매달아 전통미를 살렸다. 종로 인근이 소설 ‘마당 깊은 집’의 실제 배경이었다는 점도 강조했다. 소설 속 상황을 상상할 수 있도록 주인공 길남이와 길남이 엄마를 형상화한 입체 조형물 2개를 설치했다. 마당 깊은 집 내용과 1950년대 대구의 모습을 담아 시대적 문화를 엿보는 스토리공간인 스토리보드를 설치했다. 이 같은 노력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재 종로에는 차, 다기, 천연염색, 골동품 등을 취급하는 40여개의 점포가 성업 중이다. 곳곳에 작고 실험적인 갤러리나 공방 등도 함께해 전통거리라는 명성을 되찾고 있다. 박 실장은 “차와 다기 전문점에 이어 천연염색, 골동품, 전통음식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는 데다 이를 전시하는 갤러리들이 최근 생겨나고 있는 것도 새로운 종로의 모습이다.”며 “현대백화점이 들어서면서 염매시장 떡집들도 종로로 옮겨오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생명과 동아쇼핑 등 대형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종로 인근에는 원룸촌도 활발히 형성되고 있다. 또 일부 젊은 층들도 동성로에서 종로로 발길을 돌리면서 이들을 겨냥한 식당들도 들어서고 있다. 이 곳에서 식당을 하는 한 주인은 “젊은 층과 주위의 유통업·금융업 등에 종사하는 손님들이 부쩍 늘고 있다.”며 “저녁 늦게까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비는 식당들이 많다.”고 밝혔다. 최병헌 종로상가번영회 회장은 “종로가 먹거리 골목으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종로 발전을 위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에게 환한 미소와 친절로 정성을 다할 것이다. 회원 간의 단합과 정보교류로 삶의 터전인 종로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전의 문화도 여전히 살아있다. 화교학교와 영생덕 만두집, 복해반점, 경희반점 등은 아직도 남아 과거 이 일대를 장악했던 화교들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대구화교협회가 종로에서 화교문화축제를 7년전부터 매년 열고 있다. 종로는 앞으로가 더 주목된다. 종로 일대를 살기 좋은 지역으로 만들려는 계획이 국토해양부 시범사업으로 선정된 데다 지속적으로 종로를 특색 있는 전통거리로 만들어 가겠다는 중구청의 각오 덕분이다. 매월 전통차, 천연염색, 한복 등 테마별로 축제를 열어 대구의 멋과 역사 문화를 소개함으로써 대구를 대표하는 거리로 만드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때마침 이곳 상인들도 전통문화거리 만들기에 동참하고 있다. 박 실장은 “아름다운 종로로 꾸미는 운동을 펼치겠다. 상가 앞 화분 내놓기 운동 등도 실천하고 자체 축제도 성사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글 사진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29회에는 울산 중구 외솔큰길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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