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1970년대
    2026-08-06
    검색기록 지우기
  • 달걀
    2026-08-06
    검색기록 지우기
  • 설사
    2026-08-06
    검색기록 지우기
  • 진단
    2026-08-06
    검색기록 지우기
  • 출시
    2026-08-0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7,796
  • 정윤희, 20년 넘게 살던 아파트 경매로 나와…이유는?

    정윤희, 20년 넘게 살던 아파트 경매로 나와…이유는?

    정윤희 아파트 경매 정윤희 살던 아파트 경매로 나온 이유는? 남편 중앙건설 조규영 회장 소유 압구정 아파트와 토지 입찰 중앙건설 조규영 회장 소유의 서울 강남 아파트와 고양시 소재 토지가 법원 경매에 나왔다. 조 회장은 배우 장미희, 유지인씨와 함께 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렸던 정윤희씨의 남편이다. 부동산 경매전문 로펌인 법무법인 열린은 조 회장 소유의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법원 경매에 부쳐진다고 8일 밝혔다. 이 아파트는 전용면적 196㎡ 규모로 지난 6월 경매개시결정이 내려져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첫 입찰이 진행될 예정이다. 채권자인 국민은행이 대출금과 이자 20억원을 받기 위해 경매신청을 했다. 이 아파트는 최근 시가 25억원에 거래된 바 있다. 조 회장은 1988년에 이 아파트를 매입해 가족과 함께 20년 넘게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중앙건설이 자금난으로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경매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법무법인 열린 정충진 경매 전문 변호사는 “등기부상채무액이 53억원에 달해 중간에 경매가 취하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구현대아파트 가운데 가장 큰 주택형으로 구성된 단지에 있어 희소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열린에 따르면 이 아파트외에도 중앙건설 소유의 고양시 탄현동 103-1 번지 등 40개 필지 토지 6만 9284㎡와 탄현동 101-1 번지 땅 1788㎡가 각각 10일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에서 입찰에 부쳐질 예정이다. 중앙건설은 2000년대 중반 ‘중앙하이츠’라는 브랜드로 아파트 공급을 활발하게 해왔으나 글로벌 경제위기와 건설경기 침체로 2010년 워크아웃에 들어간데 이어 올해 3월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정윤희, 20년 살던 강남아파트 경매로 나온 이유가…충격

    정윤희, 20년 살던 강남아파트 경매로 나온 이유가…충격

    정윤희 아파트 경매 정윤희 살던 아파트 경매로 나온 이유는? 남편 중앙건설 조규영 회장 소유 압구정 아파트와 토지 입찰 중앙건설 조규영 회장 소유의 서울 강남 아파트와 고양시 소재 토지가 법원 경매에 나왔다. 조 회장은 배우 장미희, 유지인씨와 함께 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렸던 정윤희씨의 남편이다. 부동산 경매전문 로펌인 법무법인 열린은 조 회장 소유의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법원 경매에 부쳐진다고 8일 밝혔다. 이 아파트는 전용면적 196㎡ 규모로 지난 6월 경매개시결정이 내려져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첫 입찰이 진행될 예정이다. 채권자인 국민은행이 대출금과 이자 20억원을 받기 위해 경매신청을 했다. 이 아파트는 최근 시가 25억원에 거래된 바 있다. 조 회장은 1988년에 이 아파트를 매입해 가족과 함께 20년 넘게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중앙건설이 자금난으로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경매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법무법인 열린 정충진 경매 전문 변호사는 “등기부상채무액이 53억원에 달해 중간에 경매가 취하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구현대아파트 가운데 가장 큰 주택형으로 구성된 단지에 있어 희소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열린에 따르면 이 아파트외에도 중앙건설 소유의 고양시 탄현동 103-1 번지 등 40개 필지 토지 6만 9284㎡와 탄현동 101-1 번지 땅 1788㎡가 각각 10일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에서 입찰에 부쳐질 예정이다. 중앙건설은 2000년대 중반 ‘중앙하이츠’라는 브랜드로 아파트 공급을 활발하게 해왔으나 글로벌 경제위기와 건설경기 침체로 2010년 워크아웃에 들어간데 이어 올해 3월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40년 전 ‘낙후의 상징’ 코리아가 이젠 ‘희망의 상징’

    40년 전 ‘낙후의 상징’ 코리아가 이젠 ‘희망의 상징’

    “한국 대학을 졸업한 뒤 스리랑카로 돌아와 한국어 선생님이 되는 게 제 꿈이에요.” 18세 스리랑카 소녀 파와니 푼짜라는 한국어가 유창하다. 스리랑카 마타라 지역에 파견된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 단원에게 5년 전부터 한국어 수업을 받았기 때문이다. 파와니는 본래 공부와는 담을 쌓았었지만 코이카 봉사단원들의 지도를 받으며 조금씩 학업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어를 좋아해 지난해 열린 ‘제6회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는 역대 최연소로 1등을 차지했다. 심지어 순자라는 한국 이름도 지었다. 대입을 앞두고도 한국어 공부에 열심이다. 한국어 선생님이 되는 것은 가난에 신음하던 스리랑카 소녀가 이루고 싶은 간절한 꿈이다. 지난달 27~30일 코이카 관계자들과 함께 방문한 스리랑카 곳곳에서 한국 봉사단원들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수도 콜롬보에 있는 ‘코리안 클리닉’은 한방치료를 받으려는 현지인들로 이른 아침부터 문전성시를 이뤘다. 많은 현지인이 우리나라 1960~1970년대 수준의 시설을 갖춘 일반 병원보다 부작용이 적고 효과가 좋은 한방치료를 받길 희망하고 있었다. 코리안 클리닉에서 한 시간가량 차량으로 이동하면 나오는 돔페 지역에는 코이카 지원으로 완공된 스리랑카 최초의 위생 폐기시설이 위치해 있다. 지난달 27일 이 시설 개소식에 참석한 수질 프리마자얀트 스리랑카 환경재생에너지부 장관은 “그동안 쓰레기를 그냥 매립하는 바람에 전염병이 많이 발생했는데 이젠 걱정을 덜게 됐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스리랑카 남부에 위치한 마타라 지역에서는 2004년 쓰나미로 인해 부서졌던 왕복 2차선 다리가 코이카에 의해 6차선 다리로 재탄생됐다. 소신드라 한둔게 마타라 시장은 “당시 스리랑카에서만 4만명이 사망할 정도로 피해가 컸는데 다리가 복구돼 주민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며 웃었다. 1960~1970년대 스리랑카 사람들은 낙후한 지역을 가리켜 코리아라고 불렀다. 당시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한국은 동북아시아의 가난한 나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25년간 내전에 신음했던 스리랑카 사람들은 그동안 몰라보게 성장한 코리아의 도움을 절실히 바라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이에 호응하며 1987~2012년 사이에 무상원조로 9900만 달러(약 1100억원), 유상원조로 3억 1500만 달러(약 3500억원)를 지원했다. 2012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공적원조(ODA)는 스리랑카 공여국·기관 가운데 6위다. 현재 코이카를 통해서도 76명의 단원을 스리랑카 전역에 파견해 현지인들을 돕고 있다. 장원삼 주스리랑카 대사는 “스리랑카의 경우 과거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에 식민지배를 당한 적이 있으며 천연자원도 풍부하지 않다”면서 “이런 점들이 한국과 닮았다고 생각한 현지인들은 코리아에 더욱 친근함을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최근 집중되고 있는 일본과 중국의 물량 공세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ODA 규모는 초라하다.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지난 9월 스리랑카를 방문해 13억 달러(약 1조 4000억원)가 소요되는 화력발전소 추진을 약속했고 100억 위안(약 1조 8000억원) 규모의 통화스와프를 체결했다. 콜롬보항에 건설되는 인공섬 프로젝트에도 14억 달러(약 1조 5600억원)를 지원하는 대신 인공섬의 3분의1을 중국이 소유하기로 했다. 같은 달 아베 신조 총리도 일본 정상으로서는 24년 만에 스리랑카를 방문해 안테나탑과 송신소 등의 정비비용으로 137억엔(약 1335억원)을 지원하고 연안 순시선도 무상 제공하기로 했다. 일본과 중국이 ODA 경쟁을 벌이는 이유는 스리랑카가 해상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이다. 이미 방글라데시의 치타공 항구 운영권과 파키스탄 과다르항 운영권을 확보한 중국은 콜롬보항까지 영향권에 넣어 남중국해-인도양-아프리카로 이어지는 ‘해상 실크로드’를 계획 중이다. 이들 세 곳을 지도에서 연결해 보면 진주 목걸이와 비슷한 모양이어서 ‘진주 목걸이 전략’이라고도 불린다. 일본·하와이(미국)·호주·인도를 잇는 ‘다이아몬드 전략’을 구상 중인 일본은 스리랑카에 대한 지원을 통해 중국의 ‘진주 목걸이’를 자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코이카 관계자는 “우리나라도 2010년 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하며 매년 해외 원조를 늘리고 있지만 아직 다른 나라들에 비해 부족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스리랑카는 2009년 내전이 종결된 뒤 매년 6~8%에 달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 중이며 해상 교통의 요지로서도 중요하다”면서 “꾸준한 ODA 지원을 통해 한국과 스리랑카가 함께 발전해 나갔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콜롬보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커버스토리] ‘맨땅에 헤딩’… 세계 누비는 상사맨

    [커버스토리] ‘맨땅에 헤딩’… 세계 누비는 상사맨

    프로기사 입단에 실패한 ‘장그래’가 종합무역상사 계약직 사원으로 들어가 겪는 상사맨들의 실상을 그린 케이블 드라마 tvN ‘미생’이 웹툰(인터넷에 연재되는 만화)에 이어 인기몰이를 하면서 1990년 중반까지 세계를 누비며 우리나라 수출을 주도했던 종합무역상사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기 전까지 수출 전사로 해외를 오가며 수출입 계약을 체결하던 상사맨은 1980년대 대학생들의 취업 선호도 1위 직업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다. 종합무역상사는 대규모의 자본력을 가진 무역업자를 뜻한다. 해외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고급 시장정보를 상시 확보하고 현지 유력 바이어와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해 수출 유망제품을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마케팅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한때 넥타이를 맨 상사맨들의 007가방에는 국가 기밀이 들어 있다는 말들도 공공연히 나돌았다. 지금은 중계무역을 포함한 수출 대행뿐만 아니라 금융 및 위험관리 능력을 바탕으로 해외 자원 개발, 신시장 개척, 플랜트 수출 등 고위험·고수익 프로젝트를 하면서 기업 간 업무 제휴가 필요한 복합 거래를 수행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기능들은 각 제조업체가 독자적으로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상사제도는 1970년대 초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수출업을 전문화, 대형화하려는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의 일환으로 도입됐다. 정부는 당시 연간 수출실적 5000만 달러 이상, 자본금 10억원, 해외지사 10개, 수출국가 10개인 기업을 자격요건으로 내세워 종합무역상사로 지정했으며 1975년 삼성물산이 1호가 됐다. 지정제도 도입 초기에는 해외에서 돈을 빌릴 수 있도록 외화 취급 권리를 부여하고 원자재와 시설재에 대한 세제 감면 혜택과 해외로 나갈 때 절차를 간소화해 주는 등 각종 지원책을 내걸었다. 종합무역상사는 1978년까지 13개사로 늘어났다. 해외 출입이 통제되던 시절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세계무대에서 뛰어다니는 직업이 거의 없다 보니 종합무역상사는 취업 준비생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직장으로 꼽혔다. 업계에 따르면 그룹 차원에서 신입사원을 일괄해 뽑던 과거에는 성적 1~3위 등 최상위권자들이 모두 종합무역상사로 배정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지금은 전자든 중공업이든 접수와 전형을 따로 하지만 당시에는 그룹 차원에서 채용해 1~3지망을 받아 성적순으로 입사자들을 보냈다”며 “종합무역상사의 경쟁률이 가장 셌다”고 회고했다. 미생에서 명문대 엘리트 출신들이 대거 인턴사원으로 종합무역상사인 ‘원인터내셔널’에 들어오고 고졸 출신의 장그래가 바둑 프로 입단에 실패한 뒤 낙하산 인턴사원으로 입사해 혹독하게 회사 생활을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회사에 걸려 온 러시아 거래처의 전화를 능수능란한 러시아어로 받아넘기는 장그래의 여자 동기 안영이와 명문대 독어독문학과 출신 장백기의 유창한 독어 실력은 현실을 십분 반영했다. 취업대란을 겪는 지금도 영어는 물론 러시아어, 독일어 등 제2외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상사맨들은 종합무역상사에 건재하다. 그룹의 수출 창구 역할을 하며 각 계열사의 영업, 판매 지수 등을 모두 확인해 주던 종합무역상사의 탄생은 그해 최초로 우리나라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시키고 연평균 10%대의 고도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업계는 1990년 초반까지를 종합무역상사의 전성기로 꼽는다. 정부는 1978년 연간 수출액 부분의 지정요건을 국내 수출의 2% 이상으로 변경한다. 이때부터 부작용이 싹텄다. 종합무역상사들은 자격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무리하게 밀어내기 수출을 시도하게 되고 내부 부실을 키우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율산실업, 금호실업, 국제상사 등이 줄줄이 도산하거나 지정기준 미달로 탈락하면서 삼성물산, 대우인터내셔널, LG상사, 현대종합상사, SK네트웍스, 효성 등으로 줄어들었다. 1997년 외환위기(IMF)를 기점으로 종합무역상사는 위기를 맞는다. 기업들의 해외 직접 수출이 늘고 인터넷 발달로 현지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되면서 위상이 그만큼 낮아진 것이다. 계열사의 이탈 가속으로 영업기반이 지속적으로 축소되기도 했다. 미생의 배경인 대우인터내셔널이 1999년 부도난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분할된 것도 이듬해 12월이다. 2003년 12월 워크아웃을 끝낸 대우인터내셔널은 2010년 10월 포스코 계열사로 인수·합병됐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종합무역상사가 국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75년 9%에서 1980년대 30%를 넘어 1991년 51%로 정점을 찍었다가 2007년 5.7%, 2009년 4.3%, 올 초에는 2%까지 떨어졌다. 2002년 회계기준 변경에 따라 종합상사의 매출이 줄어든 면도 있다. 상사 관계자는 “과거에는 통관을 위해 이름을 빌려주는 계열사의 단순대행도 모두 우리 수출로 잡아 허수가 많았다”면서 “회계상 거품을 빼고 실제 상사가 돈 주고 대행·판매하는 것만 집계하니 매출액이 크게 줄어 보이게 됐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는 등 환경이 변화하고 계열 분리와 제조업의 자체 글로벌 마케팅 능력이 커지면서 독자 수출이 늘어나다 보니 상사의 매출 규모가 줄어드는 등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 종합무역상사에 대한 정부 지원은 거의 사라지게 된다. 급기야 정부는 2009년 34년 만에 대외무역법에서 종합무역상사 지정제를 폐지한다. 한국무역협회에서 중소기업들을 위해 운영하는 전문무역상사제(167개, 올해 제도화)로 대체된다. 이제 공식적으로 종합무역상사는 없다. 그러나 1980년대 경제성장의 주역이던 상사는 생존 위기 속에 자원 개발, 중계무역 강화 등 분명히 진화하고 있다. 철강, 화학 등 원부자재 트레이딩(무역중개) 사업과 함께 발전, 석유가스 등 해외 자원 개발과 인프라 등 사업 안건을 발굴하는 다양한 프로젝트 오거나이징 사업을 축으로 재도약의 기회를 찾고 있다. 미생을 본 상사맨들은 다소 과장은 됐으나 현실을 닮았다는 데 공감하면서 변화된 품목과 조직 문화는 다르다고 평가했다. 대우인터내셔널 관계자는 “현실에서는 꼴뚜기, 뽕팬티 등을 실제 다루지 않지만 맨땅에 헤딩하고 개척·도전하는 종합무역상사에 대한 관심과 재평가가 이뤄져 좋다”고 말했다. 실제 미생의 상사 사무실 촬영지인 서울스퀘어는 본래 대우그룹의 모든 계열사가 입주해 있던 대우빌딩으로 상사 시대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상징적 건물이기도 하다. 여성 차별이나 언어폭력은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는 일일이 서류 업무를 해야 하는 여상 출신의 단순 보조 인력이 많았지만 지금은 해외 영업을 직접 뛰는 여직원이 많아져 부당대우를 했다가는 큰일 난다”고 전했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사업 품목이나 비즈니스 모델은 10~15년 전 버전”이라면서도 “사업부별로 사업을 검토하고 거래선과 미팅을 협의하는 등 사업 성사를 위한 상사맨의 열정과 투지를 생생히 그려 내 종합상사의 인지도와 이미지 개선에 기여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다만 전 세계를 무대로 뛰어다니는 상사맨들로 구성된 조직이기에 글로벌 매너가 몸에 배어 있는 기업 문화는 드라마 내용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선을 그었다. 세종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와인 1잔=보드카 3잔”…연말연시 ‘와인 주의보’

    “와인 1잔=보드카 3잔”…연말연시 ‘와인 주의보’

    연말연시, 한해를 마무리 하는 모임에 참석해 ‘간단히’ 와인 두어잔을 즐길 계획인 사람들이라면 다음 내용을 유념하는 것이 좋겠다. 영국 국민건강보험공단(NHS) 대표인 던컨 셀비는 최근 영국에서 음주로 인한 질병률이 높아지고 있다면서, 특히 와인을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NHS에 따르면 영국에서 간 질환은 성인 사망원인 3위에 올라 있으며, 1970년대 이후 알코올 관련 사망률은 무려 500배나 증가했다. 특히 와인의 경우 전용 글라스 한 잔이 독한 술의 대명사인 보드카 3잔과 비슷한 영향을 미친다며 “와인은 고요한 살인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국의 소주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기 보다는 직접 따라 마시는 문화가 강한 와인의 가장 큰 단점은 음주자가 스스로 얼마만큼의 양을 마시는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와인전용 글라스의 크기가 점점 커지면서 음주자들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점점 더 많은 양의 와인을 마시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셀비는 “알코올로 인한 간 질환은 충분히 예방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에 대해 잘 모르고 있으며, 특히 큰 글라스에 마시는 와인 한 잔이 보드카 3잔과 비슷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더욱 모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국회의원인 피오나 브루스는 “노년층만 사는 가정에서는 알코올 섭취량이 지나치게 높은 것이 현실”이라면서 “우리는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국 알코올 오용 방지 단체의 전 대표이자 현재 보수당 당원인 트레이시 크로치 역시 “영국 공중보건부서가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알리고 사람들이 음주 습관을 바꿀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100년의 헤어스타일 10년 주기로 보여주는 1분 영상 화제

    100년의 헤어스타일 10년 주기로 보여주는 1분 영상 화제

    최근 유튜브에 올라온 100년 동안의 헤어스타일을 10년 주기로 보여주는 1분 영상이 화제다. 영상을 보면 한 여성 모델이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을 변화시키며 1910년부터 2010년까지 10년 주기로 당시의 시대별 인기 있었던 미용의 모습을 선보인다. 1분여의 시간 동안 ‘니나 카더너’란 여성 모델은 고대기를 이용해 살짝 웨이브 진 헤어스타일에 꾸밈없는 메이크업의 1910년대, 짧은 컷트에 헝클어진 웨이브 머리에 빨간색 루주로 강조한 입술을 한 1920년대, 머리 전반에 걸쳐 잘 정돈된듯한 웨이브에 도도한 여성의 모습을 한 1930년대, 위로 올려감은 듯 우아한 웨이브 모습의 1940년대, 마릴린 먼로가 즐겨던 ‘버블스 스타일’과 함께 섹시함을 강조한 메이크업이 전성기를 누린 1950년대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준다. 이어 정수리 부위의 헤어를 높게 하는 크라운 봄 베이지 스타일의 1960년대, 모발의 각도를 달리한 자연스러운 스타일의 1970년대, 폭탄을 맞은 듯한 부레랑펌의 1980년대, 매직 스트레이트 펌으로 찰랑거리는 헤어스타일로 청순가련함을 연출한 1990년대, 뇌쇄적인 눈화장과 중간 가르마의 스트레이트 펌을 한 2000년대, 긴 머리 웨이브의 섹시함을 강조한 메이크업의 2010년대를 선보인다. 컷닷컴(cut.com)에 의해 제작된 이번 영상은 지난달 20일 유튜브에 게재됐으며 679만 5100여 건의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사진·영상= Cut Video youtube 영상팀 seoultV@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2부)후계 경영인의 명암 현대백화점그룹] 현대 계열사 지원 회사서 출발…‘명품 백화점’ 공식 만들다

    [재계 인맥 대해부 (2부)후계 경영인의 명암 현대백화점그룹] 현대 계열사 지원 회사서 출발…‘명품 백화점’ 공식 만들다

    40여년 전 현대백화점그룹은 현대가(家) 주요 계열사의 뒷바라지 역할에 불과했다. 하지만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남의 노른자땅에 그룹 최초의 백화점을 지으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다른 유통기업이 대중화된 백화점을 세워 쉴 틈 없이 확장에 나섰다면 현대백화점의 전략은 달랐다. 강남 제일 비싼 땅인 압구정동에 그룹의 시작인 본점을 세운 만큼 차별화된 고급화 전략으로 강남 사모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현대백화점 하면 ‘명품 백화점’이라는 공식을 만든 이는 정몽근(72)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이었다. 정 명예회장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9남매(8남 1녀)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작고한 고 정몽필 전 인천제철(현 현대제철) 회장을 제외하고 현대가에서 두 번째로 큰 형님이다. 하지만 그는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정몽준 현대중공업 대주주 등 3형제가 MK, MH, MJ 등 영문 이니셜로 불리며 유명세를 떨친 것과 달리 눈에 띄는 행보를 자제했다. 현대백화점의 전신인 금강개발산업주식회사는 1971년 설립돼 당시 현대그룹 주력사인 현대건설이 진출하는 국내외 현장에 식품과 의복 등 잡화류를 공급하는 작은 회사에 불과했다.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등 6개의 금강슈퍼마켓을 운영할 뿐이었다. 현대건설의 하청업체에 불과했던 금강개발산업주식회사가 성장을 하기 위한 물꼬를 트게 된 것은 1985년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을 지으면서부터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은 대규모 현대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건축법상 근린상가를 의무적으로 지어야 했다. 현대아파트의 건설 주체인 한국도시개발(현 현대산업개발)은 롯데, 신세계 등 유통 대기업에 백화점 진출 의사를 타진했다. 당시만 해도 아파트만 있고 황량했던 그 땅에 무모하게 백화점을 진출할 기업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때 나선 것이 정 명예회장이었다. 정 명예회장은 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백화점을 지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주변에서는 현대가 백화점 사업을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의 뚝심으로 1985년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을 성공적으로 개점했다.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은 다른 백화점과 달리 명품 백화점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며 성공을 거뒀다. 본점의 성공에 따른 이윤으로 1988년 무역센터점을 짓게 되면서 본격적인 백화점 사업 확장이 이뤄졌다. 현대백화점의 성공 비결은 다른 백화점과 차별되는 고급화 전략에 있다. 1997년 외환 위기로 기업들이 쓰러지면서 유통업계도 타격을 입게 됐다. 유통업체들은 구조조정을 하면서 신규 출점을 자제하고 저가 정책으로 고객 확보에 나섰다. 이럴 때 현대백화점은 정반대의 전략을 펼쳤다. 1998년 부도 위기에 놓인 서울 신촌 그레이스백화점을 인수해 현대백화점 신촌점으로 바꿨고 울산 주리원 백화점 두 곳을 인수해 울산점으로 재탄생시켰다. 서울 천호점을 연 데 이어 서울 미아점(2001년), 목동점(2002년), 부천 중동점(2003년) 등 매년 1개 점포의 문을 열면서 남들이 쉴 때 공격적인 경영을 펼쳐나갔다. 2003년 정 명예회장의 바통을 이어받아 경영 일선에 나선 장남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은 2009년부터 본격적인 점포 확장을 이어갔다. 2009년 현대백화점 신촌유플렉스를, 2010년 8월 현대백화점 킨텍스점을 개점했다. 이어 2011년 대구점, 2012년 청주점의 문을 열었다. 내년에는 판교점과 현대프리미엄아울렛 김포점을 개점할 예정이다. 백화점의 성공을 바탕으로 현대백화점그룹은 그룹의 뼈대인 백화점사업과 관련된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한다. 2001년 홈쇼핑 시장에 이어 2002년 지역케이블 방송사업(HCN)에 진출했다. 2009년 종합식품 전문기업인 현대그린푸드를 출범시켰다. 2012년과 2013년 의류·패션기업인 한섬과 가구회사 리바트를 잇따라 인수해 유통뿐만 아니라 생활 전 영역에 현대백화점그룹이 진출하게 됐다. 현대백화점그룹의 총수이자 3세 경영인인 정 회장은 경복고와 연세대 사회학과, 미국 하버드대 스페셜스튜던트 과정을 수료했다. 정 회장은 고교 동창의 소개로 황서림(42)씨를 만나 결혼해 1남 1녀를 두고 있다. 황씨는 황산덕 전 법무장관의 손녀로 서울예고를 졸업해 서울대 미술대학과 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정 명예회장의 차남이자 정 회장의 남동생인 정교선 현대백화점그룹 부회장 겸 현대홈쇼핑 사장은 형과 마찬가지로 경복고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에서 무역학과를 전공했다. 정 부회장은 2004년 대원강업 허재철 부회장의 2녀 가운데 장녀인 허승원(39)씨와 결혼했다. 허씨는 이화여대를 졸업한 뒤 미국 컬럼비아대 치과대에 재학했다. 둘 사이에는 3남이 있다. 정 부회장은 현대백화점 경영관리팀장을 시작으로 그룹 경영의 중심이 되는 기획조정본부 이사, 상무, 전무를 거쳐 2009년 사장 자리에 올랐다. 이 밖에도 현대홈쇼핑 사장을 맡아 현대홈쇼핑의 중국 상하이 진출 등을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지난해 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해 형과 함께 그룹을 이끌고 있다. 형제 사이는 매우 돈독한 것으로 전해진다. 각자 다른 승용차를 이용해 사업소를 방문하다가도 떠날 때면 정 부회장이 형의 승용차에 같이 타면서 함께 경영 이야기를 나눈다고도 한다. 이처럼 현대백화점그룹의 경영권 승계는 범현대가에서 가장 먼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정 명예회장은 2006년 정 회장 형제에게 현대백화점 등 계열사 지분을 증여하며 오래전부터 경영에서 손을 뗀 상태다. 현재 정 명예회장은 현대백화점 2.6%, 현대그린푸드 2.0% 등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정 회장은 현대백화점 17.1%, 현대그린푸드 12.7%를 가지고 있고 정 부회장은 현대그린푸드 15.3%, 현대홈쇼핑 9.5%의 지분을 보유 중이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와인은 고요한 살인자” 英정부 공식 경고

    “와인은 고요한 살인자” 英정부 공식 경고

    연말연시, 한해를 마무리 하는 모임에 참석해 ‘간단히’ 와인 두어잔을 즐길 계획인 사람들이라면 다음 내용을 유념하는 것이 좋겠다. 영국 국민건강보험공단(NHS) 대표인 던컨 셀비는 최근 영국에서 음주로 인한 질병률이 높아지고 있다면서, 특히 와인을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NHS에 따르면 영국에서 간 질환은 성인 사망원인 3위에 올라 있으며, 1970년대 이후 알코올 관련 사망률은 무려 500배나 증가했다. 특히 와인의 경우 전용 글라스 한 잔이 독한 술의 대명사인 보드카 3잔과 비슷한 영향을 미친다며 “와인은 고요한 살인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국의 소주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기 보다는 직접 따라 마시는 문화가 강한 와인의 가장 큰 단점은 음주자가 스스로 얼마만큼의 양을 마시는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와인전용 글라스의 크기가 점점 커지면서 음주자들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점점 더 많은 양의 와인을 마시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셀비는 “알코올로 인한 간 질환은 충분히 예방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에 대해 잘 모르고 있으며, 특히 큰 글라스에 마시는 와인 한 잔이 보드카 3잔과 비슷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더욱 모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국회의원인 피오나 브루스는 “노년층만 사는 가정에서는 알코올 섭취량이 지나치게 높은 것이 현실”이라면서 “우리는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국 알코올 오용 방지 단체의 전 대표이자 현재 보수당 당원인 트레이시 크로치 역시 “영국 공중보건부서가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알리고 사람들이 음주 습관을 바꿀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사설] ‘세월호 참사’ 교훈 잊은 501오룡호 사고

    모두 60명의 선원이 탄 사조산업 소속의 1753t급 명태 잡이 트롤어선 ‘501오룡호’가 그제 러시아 서베링해에서 침몰했다. 7명이 구조됐지만 1명은 저체온증으로 숨지고 52명은 여전히 실종 상태라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사고 해역에서는 러시아 구조본부와 미국 해양경비대의 항공기, 러시아 구조선 및 우리 어선들이 이틀째 실종자 수색 작업을 벌였다. 하지만 바람이 강하게 불면서 파도가 매우 높아 수색 작업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구조된 선원들은 구명보트를 타거나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 서베링해의 수온이 얼음물과 다름없는 0도 안팎인 만큼 실종자들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을 것으로 보는 전문가가 많다. 그럼에도 지금은 실종자를 찾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아직 뇌리에 생생한 상황에서 또다시 대형 해난 사고의 소식을 듣는 국민들의 마음은 착잡하다. 침몰 원인이 확인되지 않는 가운데 선사 측은 어획물 처리실에 바닷물이 일시에 들어차면서 배가 기운 것으로 추정한다. 북태평양 조업에 나서는 원양어선이라면 파도에 대한 대비는 철저히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럼에도 배수가 되지 않아 침몰에 이르렀다는 설명은 이해하기 어렵다. 전문가들이 사고의 직간접 원인으로 선박의 노후화를 지목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78년 1월 스페인에서 건조된 사고 선박의 선령은 만 36년이 넘는다. 세월호 참사 때와 마찬가지로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퇴선 명령이 제대로 내려졌는지도 의문이다. 사고 선박에는 한국인 11명, 인도네시아인 35명, 필리핀인 13명과 러시아 국경수비대 소속 감독관이 타고 있었다. 원양어선의 인적 구성은 원양어업의 취약성을 그대로 보여 준다. 고철에 가까운 배를 사들여 저임금의 외국인 선원을 투입하는 원양어업계가 안전 쪽에 투자하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1960~1970년대 외화를 벌어들이며 경제발전에 기여한 원양어업이지만 최근에는 활력을 잃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세월호 참사로 큰 타격을 입은 해양수산부지만, 원양어업의 경쟁력 하락을 방치한 책임에서도 비켜 갈 수 없다. 정부와 사고 선사는 러시아 및 미국 당국과 협력해 마지막 순간까지 실종자의 생존 가능성을 포기하지 말고 수색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실종자의 가족에게는 현지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외국인 실종자의 가족에게도 해당국 정부와의 협력 채널을 가동해 같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정부는 우선 원양어선의 안전 실태를 점검해 비슷한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원양어업을 포함한 수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장기 대책도 세워야 할 것이다.
  • [기획] 달을 넘어 화성까지... 오리온 우주선 4일 첫 도전

    [기획] 달을 넘어 화성까지... 오리온 우주선 4일 첫 도전

    아폴로 계획은 인류를 달에 보낸 것 이외에도 우주항공 분야에서 미국의 적수는 없다는 것을 세계에 알린 하나의 이정표였다. 그러나 그 후 45년간 인류는 달을 넘어 더 먼 우주로 나가기는커녕 다시 달에도 가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인류의 달 착륙 자체가 사기라는 음모론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미국과 미국항공우주국(NASA)으로서는 자존심을 구기는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여기에 종지부를 찍고 인류를 달 너머로 실어나를 차세대 우주선이 테스트를 준비하고 있다. ▲ '인류 달 착륙은 사기' 음모론속 첫번째 비행 테스트 인류를 달 너머 저 멀리 우주로 보낼 차세대 우주선의 이름은 오리온(Orion Multi-Purpose Crew Vehicle (MPCV))이다. 미국 현지시간으로 2014년 12월 4일 이 우주선이 첫 번째 비행 테스트를 시도한다. 오리온 우주선은 과거 미국 우주 과학의 자존심이었던 우주 왕복선(Space Shuttle)의 후속으로 개발된 것이다. 우주 왕복선은 멋진 외관과는 달리 실제로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일단 그 태생부터가 본래 목표와는 거리가 멀었다. ▲ 우주 왕복선 잇단 인명 희생 '실패' 본래 나사가 1970년 아폴로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계획했던 것은 일회용 로켓을 대신할 반복 사용 우주선이었다. 비싼 로켓을 한 번 쓰고 버리니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고 여긴 나사는 여러 차례 반복 사용이 가능한 어미-자식형 로켓을 개발하려고 했다. 항공기의 형태를 한 대형 로켓에 이보다 작은 로켓이 올라타고 우주로 화물을 실어나르는 구상이었다. 이 경우 버리는 부분 없이 모두 재활용이 가능했다. 또 각 로켓은 항공기 수준으로 유지 보수가 간단해 유지비가 적게 든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베트남 전쟁과 인플레, 석유파동 등을 겹치면서 예산 확보가 불투명해졌고 결국 계획을 대폭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적인 디자인은 결국 우리에게 친숙한 우주 왕복선의 모습으로 결정되었다. 이 디자인은 오비터라고 부르는 왕복선과 고체 로켓 2기는 재사용하고, 거대한 주황색의 연료 탱크는 일회용으로 사용하고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디자인은 구조가 너무 복잡했다. 우주 왕복선을 한번 발사하기 위해서는 거의 우주선을 새로 조립하는 수준의 노동력과 시간이 투자되었으며 비용 역시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발사 비용을 낮추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서 개발된 우주 왕복선이 오히려 기존의 로켓보다 더 비싸졌다. 하지만 더 당혹스러운 문제는 사고였다. 우주 왕복선은 135회의 임무 동안 2차례의 사고를 일으켜 탑승한 우주 비행사 전원이 사망했다. 우주 왕복선은 만약 사고가 나는 경우 비상 탈출 방법이 없었고, 단순 화물 수송 임무에도 사람이 탑승해야 하는 구조로 되어 있어 사고 시 물자만 잃는 게 아니라 인명까지 같이 희생당했다. 나사는 새로운 우주 수송 수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0여 년 전 새로운 방식의 로켓인 SSTO(Single Stage to Orbit)를 개발하고자 시도했으나 기술 및 예산 부족으로 중간에 포기했다. 이 실패를 딛고 우주 왕복선과 아폴로 우주선의 유산을 최대한 다시 활용한 우주선이 바로 오리온 우주선과 SLS(Space Launch System)이다. ▲ 오리온 우주선의 탄생 오리온 우주선은 그 외형에서 아폴로 우주선의 사령선과 유사하게 생겼다. 사실 재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닮은꼴 우주선이다. 높이 3m, 지름 5m의 원뿔형 우주선인 오리온은 사실 아폴로 우주선과 같은 방식으로 낙하산을 써서 지구에 착륙한다. 오리온 우주선은 약 8t 정도 무게를 가지고 있으며 4명 정도의 우주 비행사가 탈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 우주선에 여러 가지 서비스 및 임무 모듈이 장착되어 임무를 수행한다. (세번째 사진 참조) 외형만 보면 사실상 우주 왕복선보다 퇴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나사가 다시 이 오래된 디자인을 되살린 것은 비상 탈출 시스템을 위한 것이다. 오리온 우주선을 발사 시에 마치 고깔모자 같은 구조물을 그 위에 올리는데 이는 비상 탈출 시스템이다. 로켓이 발사되는 과정에서 뭔가 이상이 감지되면 신속하게 이 비상 탈출 시스템의 로켓 작동해서 우주 비행사가 탑승한 오리온 우주선 부분만 분리한다. 그 후 오리온 우주선은 우주 비행사를 안전하게 태우고 지구로 귀환하면 되는 것이다. 이 오리온 우주선은 아폴로 우주선과 비슷하게 여러 가지 형태의 서비스 모듈 및 다른 우주선들과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이 중에는 유인 화성 탐사 임무를 위한 우주선도 있고 알테어(Altair)라는 이름의 달 착륙선도 있다. 다만 현재까지 차기 유인 미션의 목표는 확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달에 갔다 온 이상 다음 목표는 그 너머의 화성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 험난했던 로켓 개발... 좌절 연속 이 오리온 우주선은 본래 아레스 I(Ares I)이라는 로켓으로 실어나를 계획이었다. 아레스 I 로켓은 본래 우주 왕복선 양옆에 탑재되었던 대형 고체 로켓 부스터(SRB, Solid Rocket Booster)를 개조한 것으로 이 역시 재활용이 가능하게끔 디자인되었다. 다만 이 중형 로켓으로 인류를 화성까지 실어나를 수는 없으므로 또 다른 대형 로켓을 개발되었는데 아레스 V(Ares V)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아레스 V는 너무 거대해서 다시 회수해서 재활용하는 것은 고려하지 않았다. 나사가 두 가지 로켓을 동시에 개발한 건 물론 우주 왕복선의 교훈 때문이었다. 화물 수송 임무도 사람이 탑승하는 우주 왕복선을 사용한 결과 실제로 실어나를 수 있는 화물도 적었고, 한번 사고가 나면 귀중한 인명이 모두 희생되었다. 화물 수송용 로켓을 따로 만들면 이와 같은 문제는 해결이 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먼저 테스트 된 아레스 I 로켓부터 문제를 일으켰다. 고체 로켓 부스터는 본래 우주 왕복선 연료 탱크 양옆에 탑재하기 위해 개발된 만큼 사실 단독으로 1단 로켓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진동과 안전성 문제가 제기되면서 2009년에 첫 번째 비행 테스트에서 성공했다는 사실은 퇴색되었다. 여기에다 2008년 이후 국제 금융 위기가 닥치고, 미국 연방 정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아레스 로켓과 오리온 우주선을 포함한 콘스텔레이션 계획(Constellation Project)은 사실상 좌초되었다. 예산이 없는 상황에서 나사는 차세대 우주 개발 계획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든지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 지구 공전한 후 지구 대기권에 재진입 테스트 몇 차례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나사가 제시한 '더 저렴한' 대안은 두 개의 로켓 대신 하나의 로켓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가능한 우주 왕복선을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이 로켓의 이름은 SLS(Space Launch System)이다. 나사는 개발 비용 및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우주 왕복선의 연료 탱크와 RS-25D/E 엔진을 사용하는 방식이 사용했다. (물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고 상당부분 개조될 예정이다) 과거 우주 왕복선에 사용되던 고체 로켓 부스터는 역시 SLS의 양옆에 탑재되어 비용을 절감하게 된다. 다만 엄밀하게 말하면 여기에는 아레스 로켓의 유산이 들어가게 된다. 즉 아레스 I을 개발하는 데 사용되었던 5단 고체 로켓 부스터가 탑재되는 것이다. 이 로켓 부스터는 기존의 셔틀의 4단 부스터보다 더 강력하다. 본래 우주 공간에 화물(인간을 달 너머로 보내기 위한 우주선과 착륙선을 포함)을 수송할 대형 로켓과 오리온 우주선을 발사할 중형 로켓 두 가지를 개발하는 계획은 수정되어 코어 스테이지라고 명명된 1단 로켓과 고체 로켓 부스터는 공유하고 2단 로켓 이상 부위를 달리하는 방식이 사용된다. 비효율적이긴 하지만 두 개의 로켓을 개발할 예산이 없는 상태에서는 고육지책이라고 할 수 있다. 대신 SLS는 화물과 오리온 우주선을 발사하는 페이로드 70t급, 105t급, 130t급 등 여러 버전이 있다. ▲ 나사의 '유인 우주 탐사'로 이어질까 그런데 오리온 우주선은 아레스 로켓과는 별도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2014년에 최종 우주 비행 테스트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이를 탑재할 SLS가 아무리 빨라도 2018년 첫 테스트 비행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비해서 나사는 대비책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현재 나사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큰 로켓인 델타 IV 헤비 로켓을 사용하는 것이다. 오리온의 첫 번째 비행 테스트인 Exploration Flight Test-1(EFT-1)은 SLS 대신 델타IV 헤비 로켓이 사용된다. 이 테스트 비행에서 오리온 우주선은 지구 주변을 공전한 후 지구 대기권에 재진입해서 발사 및 대기권 재진입이 가능한지 테스트하게 된다. 단 승무원이 탑승하지 않은 무인 테스트이다. 이 임무는 과거 아폴로 계획에서 아폴로 4호가 1967년 담당했던 임무와 유사하다. 다음 단계 테스트는 2018년쯤에 진행될 EM-1(Exploration Mission 1)으로 오리온 우주선과 SLS가 결합해서 우주선을 달까지 수송하게 된다. 단 착륙은 하지 않고 달을 한 바퀴 돌고 오게 되는데, 이런 점에서 1968년의 아폴로 8호와 같은 성격의 임무가 될 것이다. 물론 이 테스트를 진행하려면 우선 첫 번째 시험 비행에 성공해야 한다. 이번 테스트는 미국이 다시 달 너머로 인간을 보낼 수 있을지를 시험하는 첫 번째 무대가 되기 때문에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다. 실패가 나사의 유인 우주 프로그램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겠지만, 중대한 차질이 생길 수는 있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주목된다. 고든 정 통신원 jjy0501@naver.com
  • 주한미군 철수 백지화 암스트롱 보고서 결정적

    1970년대 후반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 결정을 백지화한 데에는 미 육군 소속 한 대북정보 담당 분석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30일(현지시간) 밝혀졌다. 이는 비영리기관인 국가안보기록보존소가 중앙정보국(CIA)에 기밀 해제를 요청해 공개한 사례연구집을 통해 확인됐다. 1976년 6월 23일 대선 경선 후보였던 카터는 주한미군 철수를 대선 공약으로 발표하고 취임 직후인 1977년 1월 26일 각 군에 철군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미 정보기관들이 당시 남한과 북한의 군사력이 비슷하다는, 오래된 정보에 따른 평가를 내려 철군 결정에 더욱 힘이 쏠렸다. 그러나 육군 산하 싱크탱크인 특별조사대 소속 존 암스트롱 대북정보 분석관의 생각은 달랐다. 암스트롱 분석관은 포기하지 않고 북한 군사력 정보 수집에 몰두했고, 1978년 5월 북한 지상군 병력 규모와 관련해 완전히 새로운 정보 평가를 담은 보고서를 정보기관들과 전문가들에게 제시했다. 그동안 북한군 편제표에 없었던 3개 사단과 1개 여단이 새롭게 확인됐으며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정부는 즉시 특별팀을 꾸렸고, 1978년 10월 충격적인 내용의 ‘암스트롱 보고서’가 나왔다. 북한 지상군 병력 규모가 기존 45만명이 아니라 55만~65만명에 달하고 지상군 사단의 숫자도 28개가 아니라 41개에 달한다는 것이었다. 암스트롱 보고서는 1979년 1월 언론에 누출됐고 여론은 철군 반대쪽으로 돌아섰다. 결국 카터 대통령은 1979년 2월 상원 권고 형식으로 철군 보류 결정을 발표했하기에 이르렀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문화재 복원 伊에서 길을 찾다] “지진 때 벽화서 조각 30만개 떨어져… 사진자료 등 활용 대부분 꿰어 맞춰”

    [문화재 복원 伊에서 길을 찾다] “지진 때 벽화서 조각 30만개 떨어져… 사진자료 등 활용 대부분 꿰어 맞춰”

    “갑자기 땅 밑이 흔들리고 육중한 천장과 벽들이 허물어졌죠. 곧바로 밖으로 뛰어나가려는데 무언가 몸을 덮치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 성당 복원 책임자인 세르조 푸세티(62)는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면 소스라치게 놀란다. 1997년 9월 26일 새벽 움브리아주를 강타한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성당의 내부 벽화를 살펴보기 위해 들어간 그는 이날 정오쯤 발생한 2차 지진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성당 안에 머물렀던 5명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가 돼 ‘기적의 사나이’로 불린다. 규모 5.5 안팎이었지만 마치 성당 바로 아래에서 지진이 일어난 듯 심하게 흔들렸다고 한다. 지난달 6일 찾은 성프란체스코 성당은 여전히 당시의 상흔을 곳곳에 간직하고 있었다. 푸세티는 “지금도 당시 30만여개로 산산조각 난 벽화들의 조각을 꿰어 맞추고 있다”면서 “아직 8만개 정도가 남아 있다”고 전했다. 성당 창고에선 손톱 크기로 흐트러진 조각들이 수백 개의 서랍에 나뉘어 보관돼 있었다. 1253년 프란치스코(1182~1226) 성인을 기리기 위해 완공한 성당은 한국인에게 친숙한 곳이다.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이 조화를 이룬 건물뿐 아니라 조토 디본도네, 시모네 마르티니 등 당대 최고 화가들이 남긴 벽화 덕분이다. 성당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1974년부터 성프란체스코 성당에서 근무했다는 그는 이곳 아시시가 고향이다. 이탈리아 문화관광부 소속 공무원으로 일하다 지진 이후에는 성당이 속한 바티칸시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진 이전과 이후의 차이가 궁금했다. “1970년대 이후 성당에서 이뤄진 복원 작업 덕분에 사진자료 등 풍성한 기록이 남아 있었죠. 2~3㎝ 크기의 조각 30만개가 떨어져 나왔지만 예전 자료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었어요. 마치 퍼즐을 맞추듯 원본 사진과 조각들을 일일이 대조하면서 작업했습니다.” 남은 8만개 조각은 육안으로 도저히 대조할 수 없어 피사 대학에서 개발한 3D 스캔 프로그램의 힘을 빌려 제자리를 찾아갈 예정이다. 기록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1997년 지진 이후 복원 작업도 모두 기록해 책자로 발간한 상태다. 피해 복구 과정에선 다양한 방법과 재료가 사용됐다. 처음 성당이 축조됐을 때의 전통 방식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예컨대 ‘21 아시시’란 애칭이 붙은 모르타르 특수 접착제는 21회나 현장 실험을 거쳐 아시시에서 사용됐다. 어느 위치에 어느 정도 사용했는지 꼼꼼히 기록으로 남겼다. 아울러 성당 상부에는 탄소섬유를, 구조물 사이에는 충격 완화 빔을 사용했다. 곳곳에 지진 감지 센서도 설치했다. 복원 성과보다 훼손 예방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복원 이전으로 되돌릴 수 있어야 한다’, ‘복원 작업을 옛것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두 가지 원칙은 철저히 지켜졌다. 1980년대에 진행된 성당 내 벽화 복원 작업과 마찬가지였다. 복구에는 전문가뿐 아니라 전국에서 몰려온 자원봉사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개인과 단체, 유럽과 비유럽 지역의 구분 없이 동참했다. 성당 관계자는 “복원 전문가와 자원봉사자 등 1000여명이 2800만 유로(약 385억원)의 예산을 들여 원형 그대로는 아니지만 옛 기록에 충실한 보존에 도전했다”면서 “성숙한 시민 의식이야말로 숨은 힘”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아시시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사진으로 보는 전자정부 발자취

    사진으로 보는 전자정부 발자취

    행정자치부는 유엔 전자정부 평가 3회 연속 세계 1위 달성을 기념하기 위해 1일부터 3일까지 정부서울청사 1층 로비에서 ‘전자정부 발전사 특별 사진전’을 연다. 사진전에서는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전자정부의 발자취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은 1990년대 민원 접수 창구의 모습.
  • ‘성폭행 추문’ 유명 코미디언, 모교서 퇴출

    성폭행 추문에 휩싸인 미국 코미디 스타 빌 코스비(77)가 모교와 버클리음대 등 대학가에서도 퇴출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와 보스턴글로브 등 외신은 28일(현지시간) 코스비에게 3억 달러의 기금 모금 캠페인 명예 공동의장을 맡겨온 매사추세츠 앰허스트대가 코스비와의 관계를 끊었다고 보도했다. 1970년대에 이 대학에서 석사 및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은 코스비는 매해 25만 달러에서 약 50만 달러의 기부금을 내왔으며 2004년에는 150만 달러의 기금을 모아주기도 했다. 이 대학 홍보담당자는 “코스비는 이제 기금 모금 캠페인과 상관없고 학교에서 어떤 지위도 갖지 않는다”고 말했다. AP통신은 매사추세츠주 검찰총장이 이 대학에 ‘코스비가 기소되지는 않았지만 주 당국이 캠퍼스 성폭력 방지에 주력하는 시점이니 관계를 끊어달라’고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고 전했다. 코스비에게 10년 전 명예학위를 줬던 버클리음대도 코스비 이름으로 지급한 장학금을 중단했으며 노스캐롤라이나주 하이포인트대도 자문위원회에서 코스비를 빼기로 했다. 코스비가 1960년대 초 다녔던 필라델피아주 템플대도 이사회에서 코스비를 빼라는 압력을 받는 것으로 전해졌다. 장학금 모금을 위한 연말 행사에 코스비를 초청했던 테네시주 프리드하드먼대는 초대를 취소했다. 코스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은 우후죽순 늘어 20명에 달하고 있다고 WP는 전했다. 이들은 대부분 코스비가 약을 먹여 정신을 잃게 한 뒤 성폭행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코스비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 [서울&평양 리포트] 참담해진 비동맹외교… 北 외교관들 “아 ~ 옛날이여”

    [서울&평양 리포트] 참담해진 비동맹외교… 北 외교관들 “아 ~ 옛날이여”

    지난 1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유엔 제3위원회. 북한 외무성의 최명남 부국장과 주유엔 북한대표부의 김성 참사관 등은 긴장한 표정이었다. 인권 문제를 담당하는 제3위원회가 중요한 표결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엔 제3위원회는 북한 내 인권 유린과 관련해 가장 책임 있는 인물에 대해 책임을 묻는 내용의 북한인권결의안을 다룰 예정이었다. 유럽연합(EU)과 일본이 주도적으로 만든 결의안은 특정 국가를 겨냥했다는 북한의 반발 속에 쿠바가 수정안을 제출했지만 회원국의 반응은 싸늘해 부결된 상황이었다. 쿠바 수정안이 부결되고 EU 결의안을 놓고 계속된 표결 끝에 찬성 111표, 반대 19표, 기권 55표의 압도적인 표차로 북한인권결의안이 통과됐다. 유엔 총회 본회의 채택 과정이 남아 있긴 하지만 2005년 이후 계속 결의안이 채택되는 순간이었다. 특히 이번 결의안에는 최고책임자에 대한 제재를 권고하는 내용 등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처음으로 포함돼 있었다. 경우에 따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타깃이 될 수 있는 북한으로서는 대형 ‘외교 참사(慘事)’가 벌어진 것이다. 이 때문인지 최 부국장과 김 참사관은 표결이 끝나자 외교관답지 않게 분노를 여과 없이 표출했다. 최 부국장은 “국제 사회가 북한과 대화를 거부하자는 것은 북한의 이데올로기와 사회 체제를 부인하고 없애려고 의도한 것이라는 게 드러났다”며 “반공화국 인권 소동은 우리로 하여금 핵시험(핵실험)을 더는 자제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며 협박상 발언을 이어 갔다. 앞서 북한은 인권결의안 채택 저지를 위해 강석주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지난 9월 독일과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를 돌며 인권 외교를 펼치고, 리수용 외무상도 인권 문제를 지적한 유엔 보고서 대응을 위해 뉴욕을 방문하기까지 했다. 북한 외교는 왜 이렇게 참담한 결과를 받아야만 했을까. ●‘北인권결의안’ 북한 반발 속 유엔 통과 북한의 외교 이념은 자주, 평화, 친선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내면적으로 해방과 혁명을 기본으로 한국을 고립시키고 북한 정권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하나의 조선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목표였다. 특히 제3세계와는 반제국주의라는 이념적·정치적 이유를 근거로 결속을 강화했다. 이 때문에 비동맹 외교 분야에서만큼은 한국보다 우위를 갖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이번 결의안 투표 결과를 잘 살펴보면 전통적으로 비동맹 외교를 강조한 나라가 기권하거나 심지어 반대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삼성그룹의 대규모 투자에 한국의 대외 원조 역시 많이 받고 있는 베트남이나 이집트가 반대표를 던진 것이나 인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이 기권표를 던진 것은 비동맹 외교를 강조한 ‘북한의 말빨’이 어느 정도 수용된 것이라는 평가도 할 수 있다. 외교부 관계자는 “인도 등이 기권한 것은 북한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어느 한쪽 편을 지지하지 않으려는 비동맹 성향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北 1975년 비동맹 정회원국 된 후 외교적 성과 북한이 비동맹 국가에 대한 외교 접근을 시도한 것은 1956년 4월 개최된 제3차 당대회에서 다변외교로 정책 전환을 밝히면서부터다. 당시 상황은 중국과 소련의 분쟁으로 북한의 외교적 입지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과 소련은 제3세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그렇게 되자 북한 역시 자연스럽게 제3세계에 진출했다. 북한은 1960년 6월 기니를 비롯해 알제리 등 비동맹 21개국과 수교했다. 이후 1970년대 비동맹국을 대상으로 한국의 비동맹 회의 가입을 저지하고 1975년 8월 비동맹 정회원국이 됐다.이 과정에서 북한은 비동맹회의에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해 주한미군 철수,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에 대한 비동맹권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1976년 스리랑카에서 열린 제5차 비동맹 정상회의에서 한반도와 관련해 ‘주한 외국군 철수 및 외군 기지 철폐’, ‘유엔사령부 해체’, ‘7·4공동성명의 평화통일 3대 원칙 지지’를 이끌어 내는 등 외교적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북한의 비동맹 외교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념을 기본으로 한 양극체제가 무너지고 각국마다 실리추구 외교 경향이 분명해지면서 한국을 향한 북한의 외교적 공세는 쉽게 수용되지 않았다. 여기에 비동맹 외교에서 고전하던 한국 역시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제3세계와의 교류를 적극 추진하면서 북한의 우위는 상당 부분 상쇄됐다. 특히 북한이 1970년대 이후 외교관의 마약밀매, 테러단체 지원 의혹, 달러 위조 등 정상적인 국가로 보기 힘든 일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으면서 국제적 위신이 크게 손상됐다. 1983년 미얀마에서 아웅산 사태가 벌어지면서 테러 국가라는 낙인까지 찍혔다. ●1983년 미얀마 아웅산사태 후 테러국가 낙인 최근 북한 외교의 특징은 개방 외교를 본격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의 생존과 발전 등 핵심적 이익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갖고 미국과 일본 등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당면한 문제를 풀어 나가려 하고 있다. 즉 과거의 폐쇄성에서 벗어나 국제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를 위해 유럽 등 과거의 적성 자본주의 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특히 이같은 경향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집권과 맞물려 주목받고 있다. 인권결의안이 채택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북한이 이례적으로 뉴욕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인권과 관련한 설명을 한 것은 이 같은 개방 외교의 예로 볼 수 있다. 일본인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한 북·일 간 접촉 역시 개방 외교의 연장선이다. 현재 한국과 중국이 급속하게 밀착하는 데 위기를 느낀 북한과 과거사 문제로 중국과 한국의 견제를 받고 있는 일본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지면서 관계 정상화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북한이 실제로 일본과 관계 정상화 교섭을 갖는 것은 미국을 향한 외침 성격이라는 것이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전문가들도 북·일 수교는 북·미 관계 개선과 맞물릴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미국과 일본이 중국과 수교할 당시 접촉은 미국이 먼저 했지만 수교는 일본이 먼저한 것을 감안할 때 일본의 경우 관계 개선과 수교를 동시에 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최룡해 노동당 비서의 러시아 방문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지난 25일 최 비서의 러시아 방문을 놓고 미국에 대한 북·러 공조체제가 작동한 것으로 평가했다. 신문은 ‘동북아 질서 재편을 예고한 조(북)러 특사외교’란 제목의 글에서 “푸틴 대통령이 지휘하는 러시아의 전방위 다극화 외교와 김정은 조선의 선군노선·자주외교는 미국의 강권과 전횡을 배격하고 동북아시아에 평화번영의 새 질서를 세운다는 지향점에서 일치한다”며 북·러 공조의 배경을 소개했다. ●개방외교 본격화… 폐쇄성 벗어나 국제화 모색 북한이 개방 외교를 펼치지만 진전이 없고 오히려 외교 무대에서 설 자리가 좁아지면서 냉전시대와 같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허문영 통일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28일 “예전에 북한이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누가 반미 성향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무게를 실어 줬던 ‘시계추 외교’를 이번 최 비서의 러시아 방문을 통해 부활시켰다”면서 “경제적 측면에서는 중국을 어떻게 해서든지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북한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더라도 여전히 유엔과 같은 국제무대에서 설 자리는 좁아 보인다는 것이 대체적인 전망이다. 이 때문에 북한 외교관의 수모는 계속될 가능성이 많다. 이제훈 기자 parti198@seoul.co.kr
  • [단독] [커버스토리] 골프 걸 골드 걸

    [단독] [커버스토리] 골프 걸 골드 걸

    올해 미국과 일본 등 주요 해외 골프 투어에서 무려 29승을 합작한 한국 남녀 프로골퍼들이 상금으로만 3억 1600만 달러(약 348억원)의 외화를 벌어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수입(약 325억원)을 이미 뛰어넘은 데다 아직 일본 투어 시즌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많은 ‘외화벌이’가 기대된다. 최나연(27·SK텔레콤)을 비롯한 미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선수들이 외화벌이를 이끌었지만 특히 최근 상금밭으로 주목받고 있는 일본프로골프투어(JGTO)와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선수들의 맹활약도 돋보였다. 특히 올시즌 유일한 해외 투어 상금왕인 안선주(27)는 30일 끝나는 시즌 최종전 우승과 함께 46년 만의 일본투어 최저 평균타수 달성이라는 대기록에도 도전하고 있어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여자 선수들의 경우 1454만 7960달러(약 161억 2000만원)를 벌어 지난해 1240만 달러(약 131억원)를 뛰어넘었다. 5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한국 선수는 12명에 달했다. 세계 랭킹 1위의 박인비(26·KB금융그룹)는 남녀 선수 통틀어 가장 많은 222만 6641달러(약 24억 6700만원)를 획득해 ‘골프여제의 위용’을 입증했다. 남자의 경우 노승열(23·나이키골프)이 취리히클래식에서 데뷔 첫 승을 거둔 데 힘입어 지난해(480만 달러)보다 많은 554만 4450달러(약 61억 4000만원)를 획득한 것을 비롯해 김형성(34)을 비롯한 일본파도 4차례나 우승컵을 들어올려 외화벌이에 가세했다. 그러나 이건 모두 해외파 얘기다. 기세등등하게 어깨를 겨루며 나란히 골프 국격을 높이고 있는 해외파와는 달리 국내에선 남녀 선수의 불균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최근 11년간 국내 투어를 대표하는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와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규모만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지난 2003년 12개 대회를 치르면서 총상금 24억여원에 불과했던 KLPGA 투어는 올해 27개 대회를 치르는 동안 총상금만 무려 165억여원을 나눠 주는 특급 투어로 성장했다. 세계 경기 불황으로 주춤했던 2011년 잠시 성장세가 주춤했을 뿐 이후 규모면에서 상승곡선을 가파르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KPGA 투어는 2003년 11개 대회에 총상금 37억원으로 여자 투어보다 앞섰지만 올해 대회 수는 14개에 불과했고 총상금 역시 91억원으로 여자 투어에 견줘 절반가량 못 미쳤다.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 회장이 협회를 맡아 이끌었던 2000년대 말~2011년 총상금 최고 130억원을 기록하는 반짝 성장세를 보였지만 박 회장의 퇴진 이후 협회 내 알력 등으로 인해 급격하게 후퇴했다. 뒷걸음친 지가 벌써 5년째다. 세계 주요 프로골프 투어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우위인 곳은 한국과 일본 투어뿐이다. 미국 PGA 투어는 지난 시즌 45개 대회에 총상금이 3억 230만 달러로, LPGA 투어 32개 대회의 5755만 달러보다 5배 많았다. 유럽 투어 역시 남자가 여자대회 규모에 비해 월등하게 크다. 그나마 일본 투어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다. 뜻있는 사람들은 “남녀 프로골프투어가 균형 있게 성장해야 한국골프도 한 단계 더 발전한다. 남자프로골프투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 같은 바람을 따라주지 않는다. 1970년대 초 남자프로골프협회 사무실의 방 하나를 빌려 눈칫밥으로 시작한 KLPGA 투어의 상승세는 어디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볼을 잘 치고, 예쁘니까 더 끌린다’는 사실 하나 때문이다. 핸디캡 15 안팎인 남자 주말골퍼라면 자신들이 소화하기에 딱 어울리는 여자 선수들의 스윙에 눈길이 꽂히는 건 당연한 일. 이들은 스스로 팬클럽을 결성하고 이른바 ‘삼촌팬’을 자처하며 평일 대회장을 찾아 열광한다. 여자 선수들의 ‘미모 지상주의’가 비난을 받고 있지만 여자 투어의 상승세는 멈출 줄 모르고 다른 한편에서는 빈곤이 또 다른 빈곤을 낳는다. 최근 KPGA의 한 관계자는 내년 신설 대회를 만들기 위해 한 대기업의 문을 두드렸지만 “여자대회가 아니면 곤란하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KLPGA 투어 상금랭킹 ‘톱10’ 가운데 메인 스폰서가 없는 선수는 없다. 반면 남자 투어의 경우 올 시즌 상금왕에 오른 김승혁(28)조차 이렇다 할 후원사가 없는 형편이다. 국내 남녀 골프의 불균형은 쉽게 잡히지 않을 전망이다. 그나마 국내에서 뛰던 선수들도 ‘상금’을 좇아 해외, 특히 투어 비용이 상대적으로 적게 드는 일본 등으로 눈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박호윤 KPGA 사업국장은 “내년에는 프레지던츠컵(10월 8일)이 국내에서 열리는 만큼 남자 대회에 대한 관심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며 “올해보다 2~3개 대회를 더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병규 전문기자 cbk91065@seoul.co.kr
  • ‘아! 그땐 그랬지’ 영화 ‘국제시장’ 늬우스 영상

    ‘아! 그땐 그랬지’ 영화 ‘국제시장’ 늬우스 영상

    “아버지에 대한 감사함과 그리움을 담아, 영화를 시작하면서부터 언젠가는 꼭 해야겠다고 생각해온 이야기다” ‘두사부일체’(2001년)와 ‘해운대’(2009년) 등을 연출한 윤제균 감독이 신작 ‘국제시장’의 메가폰을 잡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윤 감독의 말에서 묻어나듯 이 영화는 오직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온 우리들의 아버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처럼 ‘국제시장’은 1950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관통하며 굳세게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인만큼 추억이 되어버린 그때 그 시절의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들을 그려내 유쾌한 웃음은 물론, 뭉클한 감동을 선사할 예정이다. 최근 영화의 재미와 감동을 예고한 ‘국제시장 늬우스 영상’이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해당 영상에는 1950년대 어린이들의 유행어인 ‘쪼꼬레또 기브 미’와 1960년대 파독 광부와 간호사, 1970년대 존재했던 국민의례 시간 등을 담고 있다. 부모님 세대에겐 ‘그땐 그랬지’라는 말이, 요즘 세대에겐 ‘세상에 이런 일이?’이 되어버린 이야기. 그래서 온 가족이 함께 봐도 손색없을 영화 ‘국제시장’은 오는 12월 17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사진 영상=CJ엔터테인먼트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이경희, 장편소설 ‘기억의 숲’

    이경희, 장편소설 ‘기억의 숲’

    2008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작가 이경희가 두 번째 장편소설 ‘기억의 숲(문학사상)’을 냈다. 첫 소설집 ‘도베르는 개다’에서 삶과 현실의 눅진한 맛을 보여줬다면 ‘기억의 숲’에서는 지나간 시간이 가진 감성의 울림과 향수를 일깨우고 있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의 영향으로 시골 마을에까지 불어 닥친 변화의 바람을 그리고 있다. 박씨들만 모여 사는 명달리 마을에 외따로이 떨어져 있는 중미네 가족의 이야기다. 작가는 어쩌면 자신이 그 시간을 기억헐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친구들을 불러내고 고향 마을의 풍경과 설화같은 소문과 풍문을 짜집기해서 만들었다고 말했다. 또 “소중한 것들은 대개 깊고 후미진 곳에 은밀히 감춰져 있다. 금방 드러나지 않고 쉽게 꺼내지지 않기에 추억이 되고 역사가 되고 삶의 화두가 된다.”고도 했다. 작가 이경희는 충남 당진 출신으로 2008년 ‘실천문학’에 단편소설 ‘도망’으로 등단한 이후 소설집 ‘도베르는 개다’, 장편소설 ‘불의 여신 백파선’, 산문집 ‘에미는 괜찮다’를 출간했다.252쪽.1만2000원.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단독] [커버스토리] 장하나 모자 스폰 年 2억 4000만원, 가슴 로고 年 4400만원

    [단독] [커버스토리] 장하나 모자 스폰 年 2억 4000만원, 가슴 로고 年 4400만원

    프로골프 선수들은 다른 종목에 비해 유달리 ‘스폰서 로고’(후원사 광고)를 많이 달고 다닌다. 모자와 의상은 물론 가방과 신발 등 눈에 보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로고로 넘쳐난다. 좋은 성적을 낸 선수일수록 로고가 많아 그 개수를 보면 선수의 인기도를 가름할 수 있다. 골프는 종목 특성상 스폰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선수들은 연간 20~30개의 국내외 골프투어에 참가해야 하는데 참가 비용이 많이 드는 골퍼들에게 스폰서 로고는 든든한 경제적 후원자로, 스폰서에게는 기업을 홍보하는 ‘움직이는 광고판’으로 공생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스폰서 로고에도 법칙이 존재한다. 선수의 인기도에 따라 스폰서 갯수와 액수가 달라지고, 로고를 부착하는 위치에 따라 후원 단가도 큰 차이를 보인다. 일반적으로 가장 눈에 잘 띄는 모자 정면은 가장 비싼 곳으로 메인 스폰서 차지다. 경기를 할 때 모자를 쓰지 않거나 광고가 없는 ‘빈 모자’일 경우 아직 스폰서를 구하지 못한 골퍼라고 보면 된다. 나머지는 서브 스폰서의 차지인데 오른손잡이의 경우 샷을 날릴 때 카메라에 많이 잡히는 왼쪽 가슴이 두 번째로 비싼 곳이고 왼쪽 소매와 모자 왼쪽 등이 뒤를 잇는다. 예를 들어 지난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상금왕 장하나를 보면 모자 정면에는 연간 2억 4000만원을 후원하는 메인 스폰서 비씨카드의 로고가 붙어 있고 왼쪽 가슴에는 연간 4400만원을 후원하는 이동수골프 로고가 자리 잡고 있다. 오른쪽 가슴은 1년간 횟수에 제한 없이 1등석(퍼스트 클래스)을 후원하는 아시아나항공(금호타이어) 로고가 차지했다. 골프백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골프채는 계약금은 없지만 대회 성적에 따른 ‘인센티브’ 계약을 맺고 있는 용품업체 테일러메이드가 올 한 해만 2400만원을 지원했다. 장갑과 골프공, 신발은 타이틀리스트가 용품 외에 역시 2400만원의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몸에만 무려 3억원이 넘는 광고가 붙어 있는 셈이다. 올해 KLPGA 상금왕 김효주는 롯데가 메인스폰서를 맡았고 아시아나항공과 대만의 스윙잉스커츠 로고가 오른팔에 달렸다. 전인지(하이트진로), 이정민(비씨카드), 김민선·백규정(CJ오쇼핑), 이승현(롯데마트) 등도 모자 등에 메인 스폰서의 로고를 달고 뛴다. 스폰서 로고를 보면 경제 흐름도 읽을 수 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오란씨오픈과 쾌남오픈 등 음료와 화장품 업계가 후원을 시작했고 골프가 대중화 시기에 접어든 1990년대 후반에는 팬텀오픈, 휠라오픈, 제일모직오픈 등 골프용품과 의류업체가 주류를 이뤘다. 2000년대 이후에는 호황을 누리던 증권·카드사 스폰서가 주류를 이뤘고 최근에는 제2금융권까지 후원에 가세했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민주주의의 퇴보 계속된다면 문인들은 거리로 나가 지킬 것”

    “민주주의의 퇴보 계속된다면 문인들은 거리로 나가 지킬 것”

    “세월호 참사가 보여준 안전불감증, 군 일색의 인사, 극우단체를 내세워 종북·친북 딱지 붙이기…. 현 정부 들어 민주주의가 급속도로 후퇴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1970년대로 현저하게 후퇴한다면 문인들은 다시 거리로 나가 민주주의를 지킬 것이다.” 이시영(65)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은 25일 작가회의 모태인 ‘거리의 결사체’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올해로 작가회의 출범 40돌을 맞지만 민주주의는 40년 전의 상황으로 퇴보하고 있다고 판단해서다. 작가회의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협의회)가 전신이다. 자실협의회는 1974년 11월 18일 고은, 염무웅, 박태순, 황석영 등의 문인들이 서울 광화문 거리에서 옥중 김지하 시인 석방과 표현의 자유 보장을 요구하는 ‘자유실천 문학인 101인 선언’을 발표하며 결성됐다. 자발적으로 출범한 거리의 결사체였다. 이 이사장도 스물여섯의 나이로 참가했다. 자실협의회는 1980년대 6월 항쟁을 거치며 대중 조직인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됐고 지금의 작가회 면모를 갖추게 됐다. “억압적인 정권 아래에서 김지하 시인을 필두로 세계에 저항하는 문인상을 제시했다. 카뮈나 사르트르처럼 개개인의 저항은 있었지만 결사체를 만들어 저항하는 문인들의 상을 보여준 건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억압이 있을 땐 언제든 침묵하지 않고 작가의 양심을 걸고 사회적인 발언을 할 것이다.” 이 이사장은 작가회의 출범 배경이 된 것은 새로운 문학이었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4·19 세대들이 문단 전면에 등장했다. 최인훈 ‘광장’, 황석영 ‘객지’, 신경림 ‘농무’ 등 남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거나 노동 현실을 반영하는 새로운 문학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조직을 요구했다. 1950년대 반공·순수문학과의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40년간 작가회의를 지탱해 온 힘도 문학이다. 이 이사장은 “작가들이 생산하는 새로운 문학, 그 시대 현실을 담고 있는 문학, 독자들로부터 인정받고 독자들과 함께 호흡한 문학”이라며 “훌륭한 작품을 통해 사회적인 발언을 하고 독자들에게 영향력을 미친 것이 조직을 지금껏 생동감 넘치게 했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1978년 4월 고은, 백기완 등 문인들의 주도로 서울 성공회 본당에서 열린 ‘민족문학의 밤’과 2005년 7월 남북 문인들이 평양, 백두산, 묘향산에서 개최한 제1회 남북민족작가대회를 잊지 못한다. “긴급조치 9호까지 발효된 억압적인 상황인데도 수많은 사람이 모여 저항을 담은 시들을 낭독했던 그때 문학은 단순히 종이 책으로만 전달되는 게 아니라 대중과 현장에서 호흡하는 것이라는 걸 절감했다. 민족작가대회는 남북 문인들이 개성, 금강산에서 편집회의도 하고 잡지도 발간하는 등 민주화 이후 가장 큰 성과를 거뒀다.” 젊은 작가들을 향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요즘 젊은 작가들은 현실 문제를 치열하게 다루지 않는다. 가상공간이나 사적 세계에 빠져 있다. 무조건 거리로 나오라는 게 아니다. 작가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감성노동자인 만큼 기본적으로 타자의 고통에 동참하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서 ‘세월호 참사’가 젊은 작가들의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라고 내다봤다. “세월호 참사가 젊은 작가들에게 준 트라우마는 엄청난 것 같다. 어른들의 무능을 그대로 보여준 세월호 참사 전후로 문학이 완전히 달라질 것 같다.” 작가회의 수장인 이 이사장의 꿈은 역설적이다. 역설적이어서 울림이 더 크다. “이 땅에 글자 그대로 민주사회가 구현돼 작가회의가 필요 없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문인들은 자유로운 영혼들이다. 단체에 소속되기보단 자기만의 영역에서 글을 써야 한다. 작가회의가 현실에서 역사로 돌아갔으면 한다. 역사 속의 작가회의가 될 날이 오길 바란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