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1970년대
    2026-08-05
    검색기록 지우기
  • 사무처
    2026-08-05
    검색기록 지우기
  • 책임
    2026-08-05
    검색기록 지우기
  • 임신
    2026-08-05
    검색기록 지우기
  • 구직
    2026-08-0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7,796
  •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中, 3000억원짜리 잠수함 공짜로 드립니다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中, 3000억원짜리 잠수함 공짜로 드립니다

    태국 국방부는 지난 6월 중순, 잠수함 도입을 위한 사업추진위원회를 열어 중국의 최신형 잠수함인 Type 041 위안(元)급 잠수함 3척 구매를 의결했다. 형식상 ‘구매’를 의결이지만, 실제로는 ‘공짜로 받아오는 것을 확정짓는’ 자리였다. 원래 잠수함이라는 물건은 엄청난 수압을 견뎌야 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다 속을 항해해야 하기 때문에 현존하는 모든 첨단 기술이 집약된 값비싼 물건이다. 우리 해군에 도입된 1,800톤 크기의 손원일급 잠수함은 척당 4,000억 원이 넘고, 미국의 7,000톤짜리 버지니아급 원자력 잠수함의 가격은 무려 2조원에 육박한다. 이번에 태국해군이 도입하는 잠수함 역시 중국제라고는 하지만 국제 무기 시장에서 척당 4,000억 원 이상을 호가하는 3,500톤짜리 중형 잠수함이고, 심지어 AIP(Air-Independent Propulsion) 시스템이 탑재되어 수중에서 장기간 작전이 가능한 최신형 잠수함이다. 이런 값비싼 무기를 태국은 어떻게 공짜로 얻게 되었을까? -태국해군, 한국제 대신 중국제 구매 태국해군이 잠수함을 가져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독일과 미국 잠수함들의 맹활약을 본 이후였다. 그러나 경제력이 넉넉지 않은 태국의 상황에서 값비싼 잠수함을 구매한다는 것은 제약이 많았고, 태국해군은 약 70여 년간 주변국들의 잠수함 도입에 입맛만 다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베트남이 러시아로부터 킬로(Kilo)급 잠수함을 도입한 데 이어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도 신형 잠수함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인접한 빈국(貧國) 미얀마조차 러시아에서 신형 잠수함을 구매하는 등 동남아시아에서 잠수함 보유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태국은 최소의 비용으로 잠수함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곳을 수소문했고, 독일해군이 노후 잠수함을 퇴역시키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독일정부와 접촉했다. 태국은 독일해군이 운용하던 500톤 크기의 소형 잠수함 U206A 6척을 76억 바트(약 2,500억 원)에 판매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잠수함들은 소형일 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 건조되어 수명이 30년을 넘은 상태였고, 선체 피로도 상태도 심각해 태국해군이 도입하더라도 6~7년 정도밖에 사용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그러나 태국해군이 제시한 조건을 독일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계획은 무산됐고, 대신 잠수함 건조사인 티센크루프 마린 시스템(ThyssenKrupp Marine Systems)이 태국정부에게 “중고 잠수함 대신 신품인 U-209 잠수함이나 U210 잠수함을 도입하는 더 나을 것”이라는 제안을 해 왔다. 태국해군 역시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면서 물밑으로 잠수함 승조원 양성을 위해 독일과 한국에 10여 명의 장교를 파견, 잠수함 승조원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러나 태국해군은 독일보다는 기술적 신뢰성이 더 우수하고, 더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후속 군수지원도 유리한 한국의 U209 잠수함 도입을 내심 바라고 있었지만, 태국 국방부는 가격 하락을 유도하고 공정한 경쟁을 위해 잠수함 사업을 공개경쟁입찰에 붙였다. 이 사업에는 중국의 CSIC(China Shipbuilding Industry Corps)가 Type 041 잠수함을, 러시아 국영 무기수출중계사인 로소본엑스퍼트(Rosoboronexport)가 킬로(Kilo) 636 잠수함을, 프랑스 DCNS가 스콜펜(Scorpene)급 잠수함을 제안했고, 우리나라의 대우조선해양(DSME) 역시 장보고급 개량형 잠수함을 제시했다. 4개국이 경합을 벌였지만, 전문가들은 한국의 대우조선해양의 낙승을 점쳤다. 킬로급 잠수함은 태국 주변국들이 도입하고 있는 기종이어서 태국해군이 꺼렸고, 프랑스의 스콜펜급은 너무 비쌌다. 그렇다고 중국제 잠수함을 도입하자니 중국제 무기에 대한 트라우마가 발목을 잡았다. -‘Made in China’에 대한 악몽 태국은 1990년대 초반 중국으로부터 2척의 3,000톤급 호위함을 헐값에 들여온 적이 있었다. 태국해군은 이 호위함에 대한 기대를 가득 담아 이 배의 이름을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는 나레수안(Nresuan) 대왕의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이 호위함은 오래 가지 않아 나레수안이라는 이름에 먹칠을 했다. 도대체 어떻게 건조를 했는지 볼트와 나사가 곳곳에 튀어나와 있었고, 군함이 적 미사일이나 포탄에 피격되었을 때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방수격벽조차 없었다. 격벽은 배가 피격되었을 때 배 안의 다른 구역으로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필수적인 것이지만, 나레수안에는 이러한 격벽은 없었다. 화재 발생 시 진화를 위한 소화시설도 없었고 무장 발사 버튼을 눌러도 미사일이나 함포가 발사되지 않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 결국 태국해군은 7,300만 달러라는 거금을 들여 스웨덴 사브(SAAB)에 사격통제장치와 지휘통제시설에 대한 전면 개조를 의뢰했고, 삼성탈레스 등 한국기업에 전투정보시스템 개량과 유지보수를 맡겼다. 그래도 못 미더운 이 호위함들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대우조선해양에 4억 7,000만 달러짜리 신형 호위함을 발주했다. 태국해군은 그동안 중국제 호위함의 신뢰성 부족과 결함 문제 해결에 있어 한국으로부터 상당한 도움을 받았고, 한국산 함정에 대한 기대가 컸던 데다가 잠수함 부대 기간요원들이 될 장교들이 한국에서 교육을 받아 한국제 장비를 상당히 선호했기 때문에 태국해군의 잠수함 도입 사업에서 대우조선해양의 승리는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져 왔었다. 태국해군 잠수함 도입사업에서 한국의 승리가 유력시되던 상황은 중국이 일반적인 상거래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면서 단숨에 뒤집혔다. 중국이 제시한 결제방식은 25년 거치 분할상환에 무이자 조건이었고, 약 1조원에 달하는 전체 계약 가격의 3배에 달하는 절충교역, 즉 약 3조 원어치의 태국산 물품을 구매해주기로 하였으며, 태국해군이 중국산 군함의 신뢰성에 불만이 많다는 점에 착안, 운용기간 중 품질을 중국정부가 보증해주기로 했다. 태국은 당장 돈 한 푼 안 들이고 동남아시아 각국이 보유하고 있는 잠수함 가운데 가장 우수한 성능의 최신형 잠수함 3척을 얻게 되었고, 덤으로 막대한 수출 이익까지 챙기게 됐다. 중국정부가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태국에 잠수함을 제공하려하는 것은 단순히 일개 조선소의 영업이익을 위한 차원이 아닌 국가의 전략적 이익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고, 미국은 중국과 해양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거나 분쟁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서태평양 국가들을 규합해 중국에 대항하는 연합전선 구축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 군사대국화의 브레이크를 풀어버렸고, 필리핀에 미군 재배치를 추진 중이며, 호주-싱가포르에 해군력 전진 배치를 천명했다. 이 지역의 우방국들에 대한 군사적 지원과 무기 판매를 확대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인도와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중국을 양쪽에서 압박하고 있다. -‘공짜 무기’ 뿌리는 중국의 속내 중국은 미국의 이러한 포위망을 뚫기 위해 필사적으로 ‘친구 만들기’에 나서고 있다. 이미 태국육군의 신형 다련장 로켓 개발 사업을 지원하고 있고, 자국제 초음속 훈련기를 태국에 제공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인도를 견제하기 위해 파키스탄에는 핵탄두 설계도와 고농축 우라늄을 넘겼고, 신형 전투기를 아예 새로 개발해 넘겨주기도 했다. 중국의 이러한 ‘친구 만들기’는 아프리카나 서태평양 각지의 후진국들에게서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앙골라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자이르, 수단 등의 국가에 낮은 이자로 차관을 제공하거나 부채를 탕감해주고, 군용 차량과 장갑차, 탄약 등을 무상으로 제공해주고 있다. 태평양 일대에서 다랑어 등 수산 자원이 풍부한 국가들을 끌어안기 위해 마이크로네시아, 팔라우, 나우루 등의 국가에 학교와 교량 등 인프라를 건설해주고 있다. 중국이 이러한 ‘선심 쓰기’ 정책을 계속해 나가는 것은 외환보유고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달러를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통해 미국을 능가하는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영향력 확대 차원이라고 보는 분석이 많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잿더미가 된 유럽의 공산화를 막고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재정 지원 프로그램, 이른바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진행한 바 있고,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 각국에도 이러한 재정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수많은 동맹국과 우방국을 만들어 세계 유일의 패권국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미국의 전례를 중국이 따라하면서 점차 그 영향력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중국의 이러한 대외정책 속에서 세계 방산시장은 빠르게 ‘Made in China'가 잠식해 나가고 있다. 태국의 군함들도, 파키스탄의 전차와 전투기도, 심지어 친미 국가인 쿠웨이트의 자주포와 전투기까지 중국제 장비들이 깔리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제 막 세계 방산시장에 뛰어든 한국 방산제품들의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이일우 군사통신원(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 [심재억 기자의 헬스토리 7] ‘100세 시대’의 겉과 속

    조선시대를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수명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습니다. 연전에 서울대 의대 황상익 교수가 산출한 연구 결과를 보면, 절대 지존이라는 왕 27명의 평균 수명이 46.1세에 불과했고, 이들 중에 회갑연을 치른 사람이 20%도 안 됐답니다. 용상에 올라 잘 먹고, 잘 입고, 온갖 호사를 누렸을 왕의 수명이 이 정도였으니 백성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겠지요. 황 교수의 추정에 따르면 백성들의 평균 수명은 고작 35세 이하였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그 시대의 실상이었지요. 그러니 누군가가 태어나 60년을 죽지 않고 살아남으면 거하게 회갑연을 열어 장수를 축하하고, 더 오래 살라고 축원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환갑이 기본이어서 회갑연조차 의미 없다고 피하는 세상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100세 시대’는 꿈이 아니다 그 조선시대의 끝자락에서 세자면 불과 100여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은 어떨까요. 1970년대의 우리 국민 평균 수명은 61.9세였습니다. 이만 해도 조선시대와 견주면 거의 2배에 가까운 수명 연장을 이룬 것입니다. 이후 1980년대에는 65.7세, 1990년대에 드디어 70대에 진입해 71.3세를 기록하더니 2000년대에 76.0세, 2010년대에 80.8세, 2012년에는 이보다 더 늘어난 81.4세를 기록합니다. 가장 최근 기록인 81.4세를 기준으로 보면 조선시대 왕의 수명보다 두 배 가까이 오래 살게 된 것이지요. 단순히 수명 만을 기준으로 보자면 정말 좋은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무엇이 좋은 일인지는 주관적이어서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지만, 한사코 죽음을 회피하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의지이고 본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수명이 늘어나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지요. 예전에는 입에 발린 말로 백 살까지 살라고 덕담이라도 건네면 “벽에 똥칠 해가면서 뭐하러…”하는 대답이 돌아오곤 했습니다. 백 살을 그저 기대나 할 수밖에 없는 ‘꿈의 나이’로 쳤던 것이지요. 그 꿈에 도달하기 직전의 나이인 아흔 아홉살을 백수(白壽)라고 불렀는데, 100을 뜻하는 ‘百’자에서 ‘一’을 빼면 ‘白’ 자가 되는 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백수를 세속에서는 선계(仙界)의 경계 쯤으로 봤다니, 요즘 모두가 현실로 받아들이는 ‘100세 시대’가 얼마나 대단한 변화이고, 발전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0세’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러나 우리는 통계로 단순화된 수명 연장의 이면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명이 늘어난 것에는 다양한 요인이 작용합니다. 우선, 잘 먹고 사는 덕분에 영양 상태가 좋아진 탓이 크겠지요. 인체는 무한히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유기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밥을 먹고도 누구는 10의 생산성을 보이고, 또 누구는 100의 생산성을 발휘합니다. 이 생산성은 기본적 필요조건인 ‘먹음’에 기초합니다. 생산성을 고도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항상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몸이 그런 필요에 부응할 만큼 먹어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먹음’의 문제가 충족되지 않으면 ‘잘 먹고 잘 생산한다’는 선순환의 연결고리가 견고하지 못해 생산성에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런 만큼 수명 연장의 일차적인 요인은 치명적인 영양 결핍이 없도록 잘 먹고 산 결과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다음 요인으로는 위생상태의 개선을 들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인간의 수명을 결정적으로 위협한 것은 세균 감염과 이로 인한 질병, 그리고 기생충이었습니다. 실제로 콜레라나 이질, 장티푸스 등이 해마다 창궐해 수많은 사람들을 요절냈지만 사회적으로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을 갖지 못했습니다. 수인성 전염병은 물이 전파 경로에서 매우 중요한 매개물질로 작용하지만, 그래서 먹는 물만 잘 관리해도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지만, 당시에는 오염된 물이 문제라는 생각조차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지요. 기생충도 그렇습니다. 요즘처럼 사회적 위생관이 확립돼 기생충의 생리가 낱낱이 드러나 있고, 보건 분야에서 감염을 차단할 수 있는 다양한 필터가 작동하며, 효과적인 구충제가 개발돼 있는 세상과 그 때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기생충의 알과 성충이 바글대는 인분을 밭에 뿌리고 맨발로 들어가 밭일을 해댔으며, 회와 쌈 등 생식문화가 보편화돼 기생충 감염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장치가 전무한 상황이었다고 봐도 틀리지 않지요. 생산성을 극단적으로 위축시킨 절대 왕정 체제에다 지배계급인 양반과 관료들의 수탈, ‘사농공상’으로 집약되는 계층 인식에서 보듯 농업이나 상공업을 통한 사회적 부의 축적이 용인되지 않는 사회였습니다. 이렇듯 총체적으로 부실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 속에서 질병과 기생충을 경계하고, 차단할 인식조차 갖지 못했고, 당장 먹고 사는 일이 화급한 터에 위생을 따질 엄두 조차 내기 어려웠던 게 그 때의 실상이었던 것이지요. 다음으로 꼽는 요인은 의료의 발전입니다. 누가 뭐래도 인간의 수명을 지금 수준으로 연장시킨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의학과 의료의 기여라고 봐야 합니다. 윤리나 상식을 배제한 채 단순히 의료의 관점에서만 말하자면 이미 우리 국민의 평균 수명은 100세에 거의 도달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생명체는 죽어야 비로소 죽는 것인데, 현재의 의료 수준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지는 못 해도 절명에는 이르지 않도록 하는 많은 장치를 갖고 있으며, 더러는 이런 장치를 의료수입 확대의 방편으로 악용하기도 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말이야 인륜과 윤리성을 앞세우지만 의료인들이 의료적으로 도저히 회생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정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환자들이 지금도 연명치료에 의존해 아예 기대해서는 안 되는 가능성에 기대어 돈을 쏟아붓는 것이지요. ●‘100세’의 이면 의료인들은 이렇게 반문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그런 환자를 포기해야 하느냐?”거나 “그런 환자에게 아무런 의료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이냐?”고요. 일리가 있는 문제 제기입니다. 당연히 모든 환자는 천부적으로 ‘치료 받을 권리’를 갖습니다. 그러나 치료는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행해지는 것입니다. 의료적으로 단 1%의 가능성도 기대할 수 없는 환자를 끌고 다니며 온갖 비싼 검사를 다 받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일단 최선을 다해 봅시다”라거나 “결과는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친절이나 열의가 아니라 기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만적이지 않은 유일한 처방은 “이미 의료적으로는 회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원한다면 다른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는 있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저의 견해입니다. 이제 선택은 보호자의 몫입니다” 정도일 것입니다. 일부 의사들은 이 경계 지점에서 모호하고 불명확하게 말하곤 합니다. 가능성이 없음에도 “어쩌면…”이라고 일말의 미련을 갖도록 하는가 하면 이미 결과가 뻔한데 “좀 더 지켜보자”는 식이지요. 이런 경우 가족들은 대부분 의사의 판단을 따른다는 일반적 통념이 그들에게서는 돈으로 환산되는 일이 지금도 비일비재한 것이 바로 의료계이고, 병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의료 발전과 의료인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인간의 생명은 놀랄 만큼 길게 연장되기에 이르렀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생명 연장에 따른 삶의 질이 전혀 보장되지 않고 있는데, 의료적인 수명만 기형적으로 연장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삶의 질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보장책이 없는 사회에서 수명만 연장하는 것은 축복이라기 보다 재앙에 가깝습니다. 국가는 노령화에 대한 비용을 부담하려 하지 않는데, 자꾸 수명이 연장되니 노후에 걸맞는 개개인의 삶은 그야말로 진창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이 되기 십상인 것이지요. ●‘돈’이 항상 삶의 질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흔히 듣는 ‘고독사’는 이런 부조리한 사회의 단면을 여과없이 보여줍니다. 전염병도, 기생충도 없고, 먹고 마시는 일에 별다른 구속이나 제약도 없고, 사소한 고통만 느껴도 병원을 찾는 현실, 그러나 일단 나이가 들어 일터에서 배제되고, 그래서 안정적인 수입원이 사라지면 조막만 한 몸뚱이 하나 의탁할 곳이 없어 습한 곳을 전전해야 하는 또다른 현실이 바로 오늘날 보편적인 한국인의 삶의 겉과 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허덕이며 내일이 없는 삶을 산 데다, 약삭 빠르지도 못해 돈도 못 불린 그렇고 그런 사람들, 겨우 모은 재산을 주식이네, 펀드네 다 털어 부자들에게 고스란히 상납하고 난 뒤 그들의 삶은 시쳇말로 허무맹랑해지고 맙니다. 물신주의가 아니라 몸을 움직여 돈을 벌기가 어려운 노후에는 돈이 좀 있어야 복락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그 돈이 노후에 들면 더 많은 실효적 상징성을 갖습니다. 아무리 고고한 삶을 살았어도 아침 저녁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라면 고고함이 깃들 자리에 비루함이 자리잡게 마련이고, 그런 비루함이 곤궁을 넘어 가족 해체와 자기 부정으로 이어진다면 그 삶을 누가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노후의 행복이라든가 복지도 결국은 돈의 문제로 귀결되는 게 사실이니까요. 노인이란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이라는 뜻인데, 이 말에는 ‘건강이 취약하다’, ‘경제적 자율권을 행사하지 못하거나 풍족하지 않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의탁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부담이 된다’는 등 많은 부정적 의미를 함께 포괄하고 있습니다. 순전히 한국적 해석이지만, 이 같은 의미를 되짚어 보면 적어도 한국에서 나이 든다는 사실이 축복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 축복이 아닌 점이 약점이 됩니다. 정부가 시행하는 사회적 복지의 수준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산다면 늘어난 수명이 여락을 즐기는 시간이 아니라 비탄과 무기력의 시간이기 쉽고, 그렇다면 수명 연장은 복지나 의료의 개가가 아니라 어떻게 해도 균형을 잡지 못하는 외발로 거친 강을 건너는 것 만큼이나 위험한 수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불여사’의 삶은 지금, 우리의 문제입니다. 토대가 견고하지 못한 장수의 시대, 수많은 노인성 질병과 취약한 신체 조건, 의식주의 곤궁에 노출된 많은 노인들이 거리를 배회하며 만들어 내는 음울한 풍경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현대 복지국가의 허상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죽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살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죄악이라는 의미 없는 계몽 탓이기도 하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근거없는 믿음 때문이기도 할텐데, 어떻든 “여러분의 노후가 늘어난 수명만큼 늘어나는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아무도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는 세상인 것은 사실입니다. ●장수가 축복인 사회를 위해 확실히 노인은 사회적으로 생산성이 떨어지는 부류임에 틀림없습니다. 생산성의 향상에만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산업사회에 어울리는 부류가 아니지요. 게다가 산업사회에서 작동하는 국가의 기능 역시 그런 산업사회에 걸맞는 체제를 갖출 수밖에 없는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자조는 여기에서 배태됩니다. 모든 산업사회는 이윤의 극대화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국가도 그런 가치 추구에 편승하는 것이 상식인데, 그렇다보니 산업사회가 가진 가장 심각한 인간 소외, 노인 소외의 문제가 우리에게서 너무나 소홀하게 다뤄지는 것이고, 여기에서 발아된 각성이 없지 않지만, 적어도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는 주목할만 한 어젠더조차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지요. 현실의 인간 소외는 연령과 성별, 계층을 가리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일, 즉 예전의 농경사회에서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 가치였던 인간 존중의 가치를 되살리자고 말하는 것은 시대 역행의 발상일 뿐입니다. 이래서는 오래 산다는 것이 자랑할 일도, 기뻐할 일도 아닙니다. 요양병원의 한 의사가 제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더군요. “나이가 많으면 병도 많아지는 게 당연한데, 우리나라의 경우 ‘아픈 노인들’의 문제가 처음부터 선순환이 아니라 악순환에 빠져 어디에서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난감하다”고요.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나이 들어 이런 저런 질병에 노출된 노인들 중에 더러는 자식들이 부양할 형편이 못돼 요양병원에 맡겨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가족들의 관심이 멀어지다가, 종국에는 아예 경제적인 지원을 끊어버리기 일쑤라는 겁니다. 이런 설명에 딱 어울리는 환자가 한 명 있었답니다. 이 환자는 초기 치매에 중증 노인성 질환을 가져 특별한 관리가 필요했는데, 어느 순간 이 환자를 부양해 온 외아들로부터 연락이 끊기고 말았답니다. 수소문 끝에 겨우 연락이 닿았는데, 사업에 실패해 집까지 날리고, 가족들과도 따로 사는 형편이라 어쩔 수가 없다고 하소연을 하더랍니다. 흙 파서 병원 하는 것도 아닌데, 그 의사도 난감했겠지요. 그래서 시한을 정해 두고 환자를 집으로 모셔가도록 안내했는데, 그 후로는 아예 연락도 되지 않더랍니다. 자식 키우느라 ‘몰빵’을 하는 바람에 돈도 못 모았지, 가족은 벌써 해체돼 자식도 같이 살려 하지 않지, 남은 것은 빈궁과 병 뿐이어서 혼잣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운데, 정부의 지원이라는 것도 이래 저래 꼬이기만 하는 빛 좋은 개살구이니 악순환이랄 밖에요. ●‘복지 망국’이 아니라 ‘복지 부국’을 이뤄야 그렇다고 정부더러 ‘복지 망국’으로 가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두선으로 복지를 말하지 말고 실질적인 복지를 실행하라고 주문하기를 주저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 땅의 선각자들이 “나라는 백성의 안온한 삶을 위해 ‘이용’ ‘후생’에 힘싸야 한다”고 외쳤던 게 벌써 200년쯤 된 얘기입니다. 그 이용(利用)은 공자왈 맹자왈만 하지 말고 제도와 물산과 이기를 적극적으로 개선하고 활용하지는 뜻이겠고, 후생(厚生)은 그렇게 해서 백성들 삶을 요족하게 만들어 주자는 의미입니다. 그 후생의 가치가 바로 오늘날의 복지 개념과 일치합니다. 북학파였으며, 실학의 씨를 뿌린 박제가의 말을 듣지요. “이용과 후생은 둘 중 하나라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정덕(正德)을 해친다. 공자도 백성을 넉넉하게 한 다음에 가르치라고 했고, 관중도 의식주가 갖춰져야 예절을 안다고 하지 않았는가. 지금 백성들의 삶이 날로 곤궁해지고, 나라 살림은 궁핍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사대부들은 팔짱만 낀 채 백성들을 외면하는 것인가.” 박제가의 이 질타에서 겉돌 뿐만 아니라 선거용으로 선심 쓰듯 주어지는 우리의 복지를 떠올리는 건 저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고도의 산업사회란 ‘이용’이 왕성하게 번창한 사회일 터인데, 그런 점에서 우리는 확실히 많은 것을 이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이용과 맞물려 가야 할 후생은 답도 없고, 길도 없습니다. 국부는 크게 팽창했는데 여전히 가난한 국민들은 차고 넘칩니다.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관행이 용인되는 수준을 넘어 은밀하게 장려되고 권장되는 사회, 그래서 사회정의의 큰 축인 분배의 질서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에 ‘화염지옥이라도 이만 하겠느냐’는 절망의 대꾸가 터져 나올 법 하지요. 누구에게나 오랜 산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누구든 필요하면 의료와 복지의 수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말도 있지요. ‘한국인은 병원 안에 있는 사람과 병원 밖에 있는 사람, 치료 받고 있는 사람과 치료 받을 사람으로 나뉜다’고요. 이에 걸맞게 병원도 많고 의료의 질도 수준급입니다. 그러나 그 수혜가 최소한에 머물고 있어서 문제입니다. 살만 한 사람이라면 까짓 것 신경 쓸 필요도 없을 터이지만, 나이는 들었지, 벌어놓은 것도, 벌 일도 없지, 남은 건 중증 질환 뿐인 곤궁한 노약자들에게는 ‘새발의 피’일 수도 있고, 어쩌면 ‘언 발에 오줌 누는 식’의 복지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오래 살아서 좋은 세상”이라고 하려면 이에 걸맞는 삶의 질이 갖춰져야 한다는 점, 이 삶의 질을 오로지 개개인의 노력만으로 개선할 수는 없다는 점, 그러니 국가의 몫과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국가가 그렇게 제 몫을 다 할 때라야 겉과 속이 딱 맞아 떨어지는 ‘100세 시대’가 될 테니까요. 심재억 기자 jeshim@seoul.co.kr
  • [新국토기행] 대구 동구

    [新국토기행] 대구 동구

    동구는 대구의 관문이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대구부 동부출장소가 개설되면서 동구의 모습이 처음 드러났다. 1981년 대구직할시 승격과 더불어 경산군 안심읍과 달성군 공산면이 동구로 편입됐다. 1988년 자치구로 승격해 오늘에 이르렀다. 동구는 대구 변화를 선도하면서 신성장 동력의 메카로 웅비하고 있다. 대구공항을 비롯해 KTX 동대구역 등의 교통 인프라가 밀집돼 있으며 혁신도시와 첨단의료복합단지, 복합신도시가 들어서 있다. 또 대구의 진산인 팔공산이 있고 낙동강 지류인 금호강이 지역 곳곳을 흐르고 있다. 팔공산은 동화사를 비롯해 갓바위, 파계사, 북지장사, 부인사 등이 들어서 불교문화의 성지로 꼽히고 있다. 금호강변에는 레저휴양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볼거리] ●파계사·부인사 등 즐비한 불교문화의 성지 ‘팔공산’ 팔공산은 대구의 북동 쪽을 감싸고 있다. 주봉인 비로봉에서 좌우로 이어지는 동봉 서봉이 날개를 펼친 독수리처럼 기세를 뻗치고 있다. 대구 사람들은 마을 뒷산처럼 스스럼없이 오르내리지만, 실제로는 해발 1192m에 이른다. 규모는 122.08㎦로 거대하다. 전체 능선 길이만도 20㎞에 이른다. 파계사, 부인사, 은해사 등 유명 사찰이 즐비하다. 절의 좌우계곡에서 흐르는 9개의 물줄기를 흩어지지 않도록 모은다는 의미에서 유래된 파계사는 804년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됐다. 경내에 들어서면 원통전을 중심으로 진동루, 설선당, 적묵당 등 격조 높은 당우 4채가 ‘ㅁ’자 형을 이루고 있다. 보물 제805호인 북지장사(485년 신라 소지왕)는 대웅전 동쪽에 동서 쌍탑이 배치돼 있으며 단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올렸다. 석조지장보살좌상은 50여년 전 대웅전 뒤쪽 땅속에 있다가 폭우로 노출됐으며 높이는 1.1m이다. 동화사 말사로 7세기쯤 창건된 부인사는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판각한 초조대장경을 보관하기도 했다. 이 밖에 팔공산 입구와 순환도로 주변은 장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불로목공예단지, 국내 최초의 방짜유기박물관, 불로화훼단지, 자연염색 박물관 등이 들어서 문화체험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다. ●현대와 과거의 공존 신라 고찰 ‘동화사’ 동화사는 팔공산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다. 493년(신라 소지왕 15년) 극달화상이 창건했으며 832년(신라 흥덕왕 7년) 심지대사가 중창했다. 당시 오동나무가 겨울에 상서롭게 꽃을 피웠다고 해서 동화사로 이름을 고쳐 불렀다. 동화사는 현대와 과거의 흔적이 공존한다. 고색창연한 신라시대 본존과 함께 1992년 만들어진 통일을 기원하는 통일여래대불이 있고 2012년과 2013년에 선(禪) 체험관 및 선센터가 조성됐다. 대웅전, 극락전, 연경전, 천태각 등은 물론 당간지주, 비로암 3층석탑, 마애불좌상,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금당암 3층 석탑, 석조부도군 등 보물 6점이 있다.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영험의 상징 ‘갓바위’ 지극정성으로 빌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 준다는 갓바위는 영험의 상징으로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참배객이 줄을 잇고 있다. 특히 머리에 쓴 갓 모양이 대학 학사모와 비슷하여 입시철이면 합격을 기원하는 인파로 북새통을 이룬다. 정식 이름은 관봉석조여래좌상이지만 갓 모양의 돌을 쓴 부처라고 해서 갓바위로 더 잘 알려졌다. 해발 850m에 위치하며 높이는 6m에 달한다. 갓바위에서 경산 와촌과 팔공산 동봉으로 가는 길이 있다. 동봉행 등산로에서는 인봉, 노적봉 등 각양각색의 봉우리를 만날 수 있다. ●삼국시대 집단 묘지… 걷기 좋은 ‘불로동 고분군’ 불로동 일대 야산으로 214기의 고분이 밀집해 장관을 이루고 있다. 4~5세기 삼국시대 때 조성된 것으로 토착 지배 세력의 집단묘지로 추정된다. 분구 규모는 직경 5~31m, 높이 4m다, 고분 내부는 냇돌이나 깬돌로 4벽을 쌓고 판석으로 뚜껑을 덮은 직사각형의 수형식 석곽분이다. 금동제 장신구와 철제무기, 무늬가 새겨진 토기 등 많은 부장품이 출토됐다. 완만한 구릉에 고분이 퍼져 있어 야트막한 언덕을 거니는 기분이다. ●천연기념물 제1호 ‘도동 측백나무 숲’ 불로동에서 동쪽으로 2㎞ 거리에 강을 낀 향산이 있고 이 산의 북쪽으로 울창한 숲이 도동측백나무 숲이다. 측백나무는 큰 것이 높이 20m에 이르지만 이곳의 측백나무는 바위틈이나 메마른 땅에서 자라 큰 나무가 5~7m 정도이다. 식물지리학상 중요성으로 천연기념물 제1호로 지정됐다. 서거정 선생이 꼽은 대구 10경 중 하나로 절벽 아래로 흐르는 계곡수 등이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다. ●옛 시골정취 간직한 ‘금호강 자연생태공원’ 금호강 자연생태공원에는 자연관찰을 하는 초등학생부터 강바람을 쐬는 시민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찾고 있다. 물가에서 둑까지 50여m 너비의 강변에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잔디밭 중간에는 느티나무와 참나리, 원추리, 꽃창포 등 우리 나무와 야생초들이 심겨져 있다. 시멘트와 돌로 반듯하게 다듬은 다른 강변과 달리 옛 시골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산책로, 자전거도로, 농구장, 벤치, 가로등, 파고라, 조형물 등 휴식 및 운동 시설이 갖춰져 있다. ●도심 속 피서지 ‘금호강과 신서공원 물놀이장’ 금호강 아양철교 하류 둔치 좌안에 있는 금호강 물놀이장은 이달부터 8월 중순까지 무료로 운영된다. 규모 1070㎡, 수심 40㎝로 어린이들이 한여름 무더위를 식히기에는 최적이다. 동호지구 신서공원 중앙에 자리잡은 신서공원 물놀이장은 전국 어느 공원 물놀이장에 뒤지지 않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용객들의 건강을 위해 상수도를 사용할 뿐 아니라 오존소독장치를 설치했다. 바닥에 탄성 포장재를 사용해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이용토록 했다. ●폐철교 활용한 도심 속 여가공간 ‘아양기찻길’ 1978년 시민과 함께한 대구선 기찻길이 폐선되면서 아양기찻길로 새롭게 태어났다. 길이 277m, 높이 14.2m, 연면적 427.75㎡로 전망대와 전시장을 갖췄다. 폐철교를 도심 속 시민 문화·여가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복원한 점이 높이 평가돼 독일의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리를 살펴볼 수 있는 디지털 다리 박물관과 명상원, 카페가 있으며 다리 내부에서도 철로와 강물을 볼 수 있다. ●뱃놀이 할 수 있는 추억의 장소 ‘동촌유원지’ 금호강변에 있는 유원지로 오래전부터 대구시민이 즐겨 찾는 곳이다. 놀이시설과 체육시설, 식당, 레스토랑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수량이 많은 지점에 있는 구름다리와 해맞이 다리는 이곳의 명물이다. 또 뱃놀이를 할 수도 있으며 유선장을 갖추고 있다. 주변에 있는 망우당공원과 조양회관, 영남제일관도 볼거리다. [먹거리] ●굽지 않고 튀긴 후 양념 입힌 ‘평화시장 닭똥집’ 동대구역에서 차로 10분 거리의 동구 신암동 평화시장. 이곳에는 닭 모래주머니(닭똥집) 전문점 30여곳이 모여 있다. 평화시장 닭똥집 골목이다. 평화시장 닭똥집은 1970년대 처음 등장했다. 맛있다고 입소문이 났고, 전문점이 하나둘 시장 골목에 자리잡아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이곳에서는 다른 지역에선 보기 어려운 특별한 맛의 닭똥집 요리를 판매한다. 닭똥집은 보통 구워서 기름장에 찍어 먹는데 평화시장에서는 치킨처럼 튀기거나 튀긴 후 양념을 입혀 먹는다. 이름과 달리 닭똥집 골목은 깨끗하다. 세제를 사용해 재료를 손질하지 않는다. 물로만 씻어 조리한다. 튀김똥집과 양념똥집 이외에 간장똥집, 찜닭, 양념치킨, 프라이드치킨 등도 판매한다. 닭똥집 골목에는 아트 포토존과 공연장도 있다. ●여름철 특급 보양식 ‘오리요리’ 오리는 해독이 뛰어난 알칼리성 식품이다, 오리고기에 포함된 불포화지방은 고혈압과 비만 등 성인병에 좋은 웰빙음식으로 알려졌다. 오리요리는 동구가 선정한 동구 5미(味)에 포함돼 있다. 동구 곳곳에는 다양한 오리고기 요리를 하는 음식점들이 산재해 있다. 이들 음식점에서는 한방오리, 오리바비큐, 생오리구이 등의 메뉴를 취급하고 있다. 한방오리는 산 오리와 십전대보탕이 조화를 이룬 음식으로 먼저 오리고기의 맛을 느낀 다음 육수에 찹쌀 누룽지를 삶아 먹는 영양 만점의 음식이다. 방촌동의 쌍쌍오리한마당이 한방오리불고기로 유명하다. 용계동과 송정동에도 오리바비큐와 생오리구이 별미집들이 있다. ●청정미나리의 대명사 ‘팔공산 미나리’ 팔공산 자락 청정지역에서 재배된 미나리는 줄기가 굵고 부드러우며 향이 진한 게 특징이다. 또 깨끗한 환경과 지하수를 이용한 농법으로 재배돼 친환경 농산물 인증을 받았다. 대구시 보건환경연구원에 의뢰해 잔류농약 137개 항목을 검사한 결과 모두 잔류농약 불검출 판정을 받았다. 미나리는 각종 비타민과 무기질, 섬유질이 풍부한 알칼리성 식품으로 체내 중금속 배출에 효과적이다. 간 활동을 도와 피로회복 및 숙취해소에 도움을 주고 고혈압 등 심혈관질환에 좋다. 미나리에 찰떡궁합인 삼겹살을 곁들이면 더없이 좋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미나리는 3월이 제철이다. 미나리 중의 미나리 팔공산 미나리를 꼭 맛보려면 내년 봄 한번 더 동구를 찾아야 할 것 같다. ●다이어트 식품으로 떠오르는 ‘연근요리’ 동구 반야월은 전국에서 연근 생산량이 가장 많은 곳이다. 이 연근을 활용한 식당이 팔공산 일대에서 성업 중이다. 이들 식당은 반야월 연근을 공급받아 직접 손질해서 연근요리를 만들고 있다. 연근을 이용한 떡갈비와 장아찌, 연잎밥 등이 나오는 연근정식이 주 메뉴다. 연근은 아미노산과 탄수화물이 풍부하고 몸속의 중금속을 중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특히 섬유질이 풍부한 다이어트 식품으로 건강에 관심이 높은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5부) 업종별 기업&기업인 대웅제약] 건강·장수의 神 ‘곰’… 우루사·베아제 히트 업계 4위 ‘우뚝’

    [재계 인맥 대해부 (5부) 업종별 기업&기업인 대웅제약] 건강·장수의 神 ‘곰’… 우루사·베아제 히트 업계 4위 ‘우뚝’

    대웅제약의 모체는 부산 경남여고 앞 선화약국이다. 경남 합천이 고향인 설립자 윤영환(81) 명예회장은 성균관대 약대 졸업 후 제2의 고향이기도 한 부산에서 개업했다. ‘약 잘 짓는 약국’이라는 소문에 약국은 문전성시를 이뤘고 그만큼 돈이 모였다. 당시 윤 명예회장은 또 다른 도전을 준비했다. 1966년 평소 알고 지내던 박문수 사장이 자신의 제약회사인 대한비타민사의 인수를 제안하자 그는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인수가는 1억 2000만원. 우선 현금 6000만원에 공장과 기계, 원료 등을 건네받고 나머지는 1년 내 갚는 조건이었다. 윤 회장은 원료 입고에서부터 생산, 영업 방식까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회사 내 고질적인 병폐와 부실 기업의 흔적 등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직원들과 밤을 새워 일하기를 밥 먹듯 한 결과 1966년 인수 당시 350만원에 불과했던 회사 월매출은 5년 후 10배 이상인 4000만원까지 치솟았다. 34위에 머물던 업계 순위도 1970년대 들어 12위까지 올랐다. 해마다 60%가 넘는 급성장이었다. 운도 따랐다. 1969년 일어난 사이클라메이트 발암물질 파동이다. 당시 제약사들이 드링크에 설탕 대신 인공 감미료인 사이클라메이트를 넣었는데 이 물질이 발암물질로 판명되면서 사회에 엄청난 파문이 일었다. 대한비타민의 ‘아스파라S 드링크’에는 유일하게 발암물질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조사 결과가 소비자에게 알려지면서 해당 드링크제는 불티나게 팔렸다. 윤 회장은 서울행을 결심했다. 부산은 유능한 인재와 양질의 원자재, 경영정보 등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1972년 9월 경기 성남시 상대원동 4300평 땅에 성남 공장을 완공했다. 현대화된 새 공장에서 사원들은 신제품 개발과 원료 합성, 생산기술 개발에 매달렸다. 1973년에는 기업 공개와 함께 우리사주조합도 발족시켰다. 회사의 주인은 사원인 만큼 이익도 응당 나눠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이듬해인 1974년에는 제약연구소를 설립해 독자적인 원료 합성개발에도 나섰다. 이런 기반에서 탄생한 간장약이 ‘우루사’다. 이미 경쟁사가 간장약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던 터라 뭔가 확실한 한 방이 필요했고 이내 웅담을 꺼내 들었다. 귀한 한약재인 웅담의 약효 성분인 우루소데속시콜린산(UDCA)이 들어갔다는 광고에 대중은 반응했다. 발매 당시 1억원이던 판매 실적은 1985년 127억원, 1990년대에 들어서는 200억원에 이르렀다. 결국 우루사는 간장약 시장의 50%를 접수하며 사실상 시장을 평정했다. 우루사 덕분에 대웅제약은 1980년대 중반 제약업계 10위권에 진입했다. 이후 대웅제약은 성장을 이어가 지난해 매출 기준으로 제약업계 4위에 올라섰다. 우루사는 회사 이름도 바꿨다. 창립 33주년을 맞은 1978년 2월 윤 회장은 대한비타민사라는 이름 대신 대웅제약이라는 이름을 내걸기로 했다. 대한비타민의 ‘대’자와 웅담의 ‘웅’ 자를 합쳐 만든 이름이다. 곰은 라틴어로 북두칠성을 뜻하며 장수의 신, 치료의 신, 건강수호의 신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후 대웅제약은 선진 기술을 배우고자 부지런히 다녔다. 미국의 유명 제약사인 일라이 릴리사, 알피셰러사 등과 손을 잡았다. 1988년에는 국내 최초로 국산 배합신약 종합 소화제인 베아제정을 개발했다. 베아제정은 몇 해 만에 2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는 또 하나의 히트 상품이 됐다. 대웅제약은 신약 개발에도 몰두했다. 첫 결과물은 국내 바이오 신약 1호인 ‘이지에프’였다. 심한 당뇨에 발이 헐어 버리는 당뇨병성 족부궤양 치료제로 1988년 이후 무려 13년이 넘는 연구개발 끝에 국내 기술로 탄생한 신약이다. 더 큰 도약을 위해 윤 명예회장은 2002년 10월 대웅제약을 지주회사인 대웅과 대웅제약으로 분할 상장했다. 최근에는 해외 진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13년 중국 선양에 있는 제약회사 바이펑을 인수해 2017년 현지 생산과 판매에 나설 예정이다. 특히 최근에는 나보타를 앞세워 해외시장 공략을 강화하고 있다. 나보타는 대웅제약이 5년간 연구를 통해 자체 기술로 개발한 고순도 보툴리눔톡신 제제로 현재 60여개국에 약 7000억원 규모의 수출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5부) 업종별 기업&기업인 녹십자] 세계 세 번째 ‘B형 간염 백신’ 개발… 국민 건강 업그레이드

    [재계 인맥 대해부 (5부) 업종별 기업&기업인 녹십자] 세계 세 번째 ‘B형 간염 백신’ 개발… 국민 건강 업그레이드

    녹십자의 모태 기업은 지난 1967년 동물 백신을 제조 판매하던 수도미생물약품이다. 이후 1969년 극동제약으로 회사명을 변경하는 동시에 신갈공장을 세우고 일본뇌염 백신 등을 생산하며 본격적으로 백신 생산을 시작했다. 이후 1971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세계에서는 여섯 번째로 혈액분획제제 공장을 준공해 알부민과 플라즈마네이트 등의 생산을 시작했다. 현재 사명인 녹십자는 1971년 변경됐다. 녹십자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83년 B형 간염 백신 ‘헤파박스B’의 제조품목 허가를 취득하면서부터다. 녹십자는 김정룡 서울대 의대 교수와 함께 B형 간염 백신을 개발하기 시작해 12년 만에 결실을 이뤘다. 헤파박스B는 미국과 프랑스에 이어 세계 세 번째, 국내 최초로 탄생한 B형 간염 백신으로 당시 전량 고가의 수입제품에 의존해 왔던 B형 간염의 예방의약품을 수입제품의 3분의1 가격으로 공급해 국내 B형 간염 퇴치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1970년대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약 10~15%에 달하던 B형 간염 표면항원 보유율은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며 전체 인구의 2%대로 감소했다. 헤파박스B의 개발은 재단법인 목암생명공학연구소의 탄생에도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녹십자는 1984년 목암생명공학연구소를 설립했다. 목암생명공학연구소는 국내 민간 연구기관으로는 최초로 과학기술처의 승인을 받아 설립한 비영리 연구재단법인으로 유전공학 등 첨단 생명공학을 토대로 각종 질병의 예방, 진단 및 치료에 필요한 의약품을 개발하고 있다. 녹십자는 2005년에는 당시 산업자원부 및 전라남도가 주관하는 ‘독감백신원료 생산기반 구축사업’의 최종사업자로 선정돼 독감백신원액생산시설, 기초백신원액생산시설, 완제품생산시설 등을 갖춘 화순공장을 전라남도 화순 지방산업단지에 건설했다. 특히 녹십자 화순공장 준공을 앞둔 2009년 4월, 새로운 인플루엔자(독감) 바이러스가 멕시코에서 발발하면서 녹십자는 공장 준공 막바지 작업과 함께 신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백신 개발 및 생산 준비도 함께 진행해 2009년 9월 세계 8번째로 신종 인플루엔자 백신 개발에 성공하고 시판 허가를 획득했다. 이후 2011년에는 세계에서 4번째로 세계보건기구(WHO)의 독감 백신 사전적격인증(PQ)을 획득했으며, 이후 세계 최대 백신 수요처 중 하나인 WHO 산하 범미보건기구(PAHO) 입찰에 참가하며 독감 백신을 수출하고 있다. 녹십자는 해외 시장 개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 6월 녹십자는 캐나다 퀘벡 주 몬트리올에서 현지법인 Green Cross Biotherapeutics(GCBT)의 공장 기공식을 열고 혈액제제 설비 착공에 들어갔다. 약 2억 1000만 캐나다달러(한화 1870억원)가 투입되는 이 공장은 연간 최대 100만 리터 혈장을 분획해 아이비글로불린(IVIG), 알부민 등의 혈액제제를 생산하게 된다. 녹십자는 1995년 한·중 합자 ‘안후이녹십자 생물제품유한공사’를 설립해 중국에서도 시장 개척에 나서고 있다. 녹십자는 중국 진출 15년 만인 지난 2011년 누적 흑자전환에 성공했으며, 지난해에는 품질과 제품 인지도 등을 앞세워 2013년 매출액인 300억원의 2배인 약 6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기도 했다. 박재홍 기자 maeno@seoul.co.kr
  • [송혜민의 월드why] 하루 평균 살인 22명… ’어린왕자의 나라’ 아시나요?

    [송혜민의 월드why] 하루 평균 살인 22명… ’어린왕자의 나라’ 아시나요?

    중남미의 엘살바도르에서 인권이 위협될 만큼의 살인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엘살바도르 국립 법의학 연구소(Institute of Legal Medicine)가 지난 3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5년 1~6월 엘살바도르에서 발생한 살인 등 강력범죄에 의해 사망한 사람의 수는 총 2865명에 달하며, 지난 6월에는 677명이 피살된 것으로 나타났다. 하루 평균 22.6명 꼴이다. 인구 600만여 명에 불과한 이 작은 나라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한국인에게 비교적 낯선 나라인 엘살바도르는 1970년대 말부터 내전이 시작됐다. 70년대 후반 반정부 게릴라 단체인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과 정부군 사이의 본격적인 전쟁이 발발했고 이는 무려 12년간 지속됐다. 12년 동안 내전으로 최소 8만 명이 사망하고 100만 명 이상이 터전을 잃었다. 이후 불안한 경제상황과 내전을 틈타 범죄조직이 범람했다. 2013년 엘살바도르 정부는 범죄조직과 휴전을 맺었는데, 범죄조직은 도리어 평화롭고 감시가 느슨한 휴전을 틈타 중무기를 사 모으고 세력을 키웠다. 지난 1월, 휴전이 깨지면서 범죄조직은 다시금 활개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불안한 심리는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과거 정부-FMLN간 휴전 협상에 참여한 전직 군 관계자 라울 미한고는 “젊은 조폭들이 스스로 명성을 쌓기 위해 더 광적으로 날뛴다”고 분석한다. 꿈이 없는 젊은이들이 스스로 젊은 범죄 조직원이 돼 막막한 현실을 탈피하려 한다는 분석도 있다. 한 달 동안 무려 667명이 살해된 나라, 엘살바도르는 도대체 어떤 나라일까. ▲우리가 몰랐던, 혹은 알고 있는 엘살바도르의 이면(異面) 스페인어로 ‘구세주’라는 뜻의 엘살바도르는 사실 우리에게 비교적 생소한 나라다. 면적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정도에 불과해 지도에서도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야 할 정도다. 그러나 이면에는 익숙한 무언가가 있다. 바로 누구나 한번쯤 읽었을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다. 생택쥐페리는 프랑스 출신이지만 그의 ‘장미’였던 아내 콩쉬엘로 드 생택쥐페리는 엘살바도르 출신이다.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화산들은 생택쥐페리의 아내인 콘쉬엘로가 항상 그리워했던 고향을 그린 것이다.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최근까지, ‘어린 왕자’ 안에서 엘살바도르를 만나온 것이다. 국토의 90% 이상이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이 나라는 ‘화산의 나라’로 불리기도 하다. 내전으로 발전의 기회를 잃은 것이 전화위복이 된 것일까.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또 일부 고온다습한 저지대를 제외하고는 1년 내내 온화한 기후를 보이고, 국토 면적이 적은 대신 하루 안에 산과 바다를 동시에 만끽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장점으로 꼽힌다. 뿐만 아니라 엘살바도르는 중미 다른 나라들처럼 고품질의 커피를 생산하는 나라다. 국토의 12%가 커피 농장이며 여기서 만들어지는 커피는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로 수출된다. 당신이 이 글을 읽으며 마시고 있을 커피가 엘살바도르산(産)일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우리에겐 낯선 이 작고 먼 나라에도 한류가 있다. 젊은층을 대상으로 K-Pop 등 한류 문화의 확산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2015 엘살바도르 K-POP 페스티벌’이 열리는 등 그 인기를 입증하는 행사들이 속속 열리고 있다. 한국과의 공통점도 있다. 엘살바도르 국민에게는 한국전쟁과 같은 내전으로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겨난 동병상련의 아픔이 있다. 이 때문에 가족을 매우 중시하는 문화가 깊게 자리 잡았다. ▲엘살바도르에도 희망은 있다 경상남도만한 작은 땅에서 한 달에 677명(2015년 6월)이 살해된 엘살바도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역시 치안이다. 풍부한 인적자원과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지만 치안 불안이 외국인 투자 유치 확대 등 경제발전의 최대 장애요인으로 지목된다. 가뭄 등 기후변화에 따른 농작물 피해도 급증해 국민들이 먹고 살만한 길이 막막한 것도 문제다. 하지만 엘살바도르에도 희망은 존재한다. 1970년대 후반 엘살바도르에서 우파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다가 1980년 암살당한 故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식이 지난 5월 열렸다. 이로서 엘살바도르 국민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인물이 엘살바도르 최초로 ‘복자’(福者·가톨릭에서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여 공적으로 공경을 받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존칭으로, 聖人의 바로 전 단계)에 오른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카톨릭 신도인 엘살바도르로서는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엘살바도르 대사관 측은 서울신문 나우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제도화 된 정치 시스템과 여타 중미국가에 비해 낮은 사회적 부패 정도”를 엘살바도르의 장점 중 하나로 꼽았다. 국제사회를 경악케 한 살인사건 발생률은 정부-범죄조직 간의 갈등으로 야기된 것이며, 정치세력 내부적으로 좌파-우파의 대립은 존재하지만 이것이 폭력사태로 확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또 “정치적 대립을 줄이고 한국을 포함한 외국의 각종 지원을 적극 활용해 치안 안정화를 이루는 것이 시급하다”면서 “엘살바도르는 작지만 중요한 중미 국가라는 의미에서 ‘중미의 유태인’ ‘매력적인 소국’(Rincon Magico) 등으로 불린다. 성실하고 근면한 국민성을 가졌으며 생활력이 높고 손재주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뒷받침 된다면 발전 잠재력을 디딤돌 삼아 발전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커피의 나라. ‘어린왕자’가 사랑한 나라. 한국의 음악과 문화를 즐기는 나라. 우리에게 엘살바도르는 더 이상 낯설고 먼 나라가 아니다. 이것이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엘살바도르의 평화를 호소하고 응원해야 하는 이유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교황 “남미는 소외 계층에게 큰 빚 지고 있다”

    “라틴아메리카는 소외 계층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힘없는 형제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5일(현지시간) 에콰도르에 도착, 볼리비아와 파라과이로 이어지는 7일간의 중남미 순방을 시작했다. ‘가난한 자의 친구’로 불리는 교황은 첫 방문지인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 공항에 도착해 행한 연설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수탈로부터 환경을 지키며 사회 갈등을 야기하는 분파끼리 대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번 방문은 프란치스코 교황 취임 뒤 두 번째 남미대륙 방문이다. 2013년 브라질 방문이 전임 베네딕토 교황 당시 확정됐던 것인 만큼, 가난한 중남미 스페인어권 3개국을 동시에 방문하는 이번 행보가 아르헨티나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의 진정한 귀향이라고 로이터는 평가했다. 교황은 이날 좌파 정치인인 라파엘 코레아 에콰도르 대통령 앞에서 경제 발전의 사회적 책임과 지구에 대한 훼손을 막아달라고 요구했다. 에콰도르는 1500만명의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나라인데다, 생물학적 보존 지역인 갈라파고스 섬을 갖고 있다. BBC는 반정부 시위가 끊이지 않는 이번 방문국들이 교황의 방문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교황은 노인, 수감자, 원주민, 빈민, 어린이들을 만나고 빈곤 문제를 핵심 주제로 다루면서 정치적 논쟁을 피해갈 예정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곳의 우익 정치인들이 신자유주의를 비판해온 교황의 순방 일정을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라고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중남미 순방에는 끝없이 추락하는 가톨릭의 교세를 유지하기 위한 의미가 담겼다고 보도했다. 단일 대륙으로는 가장 많은 4억 2500만명의 신자를 보유한 남미에서 에콰도르(79%), 볼리비아(77%), 파라과이(89%)는 여전히 가톨릭이 최대 종교다. 1970년대에 90%에 이르던 남미의 가톨릭 점유율은 최근 69%까지 곤두박질쳤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박신자컵은 제 농구 인생의 보너스죠”

    “박신자컵은 제 농구 인생의 보너스죠”

    “살아 있을 때 제 이름을 딴 대회가 열린다는 것은 제 삶에 보너스와 같다고 생각해요.” 1967년 제5회 체코 프라하 세계여자농구선수권에서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끈 원로 농구인 박신자(74)씨가 6일 강원 속초체육관에서 막을 올린 박신자컵 서머리그에 참가한 손녀뻘 후배들 앞에서 시구를 했다. 요즘 팬들은 고개를 갸웃하겠지만 박씨는 한국은 물론 아시아 농구의 살아 있는 레전드다. 그는 “대한민국이 어느 것으로도 다른 나라를 이겨 보지 못하던 때 세계대회를 마치고 돌아온 우리는 선수들 이름을 각각 내건 해병대 지프차에 탄 채 김포공항부터 서울 도심까지 퍼레이드를 벌였다”고 돌아봤다. 같은 해 11월 그의 은퇴 경기가 열렸던 서울 장충체육관에는 7000여명이 찾아와 그와의 작별을 아쉬워했다. 은퇴한 지 32년이나 흐른 1999년 6월 세계여자농구 명예의전당에 동양인 최초로 헌액되는 영광도 누렸다. 이날 속초체육관에는 박씨와 한동네에서 함께 자란 방열(74) 대한농구협회장을 비롯한 원로들과 팬들이 100명 남짓 찾아와 대회 첫 경기(KB스타즈가 신한은행에 83-80 승리)를 지켜봤다. 박씨도 관중석 한가운데 앉아 득점 순간마다 손뼉을 치거나 공이 림을 맞고 튕겨 나오면 안타까운 동작을 취하곤 했다. 경기를 지켜본 소감을 묻자 박씨는 “국제대회 순위에 들 만큼 세련된 기술이나 능력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빨리 움직이는 모습이 좋았고 체력과 기술을 계속 연마하면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또 여자농구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영광을 되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선수들은 기본기와 체력을 열심히 가다듬어야 하고, 연맹은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대회가 제2의 박신자를 발굴하기 위해 마련됐다고 지적하자 “나라면 제2의 누군가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난 늘 남보다 조금 더 열심히 연습하는 선수였다”고 돌아본 뒤 “우리 팀의 모든 선수를 선의의 경쟁 차원에서 뜯어보고 하나라도 더 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생애 가장 잊지 못할 순간으로는 “세계선수권 시상식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체코를 떠나 파리에 도착해 내가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와 명예의전당 첫 번째 선정자 9명에 포함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였다”고 소개했다. 박씨는 체코 세계선수권 4개월 후에 도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일본을 누르고 우승한 뒤 주한미군 문관인 브래드너와 결혼, 미국으로 이주했다. 지금은 뉴욕에 거주하며 암 투병 중인 남편을 돌보고 있는데, 많이 걷고 태극권과 라인댄스를 즐기는 것을 건강의 비결로 꼽았다. 박씨는 8일 숙명여고 선배이자 농구 원로인 윤덕주 여사의 10주기를 맞아 경남 통영 선영을 찾은 뒤 9일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속초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명인·명물을 찾아서] 함박웃음 고래 입속 발 디디면 시간을 잊은 마을이 펼쳐진다

    [명인·명물을 찾아서] 함박웃음 고래 입속 발 디디면 시간을 잊은 마을이 펼쳐진다

    ‘부~웅’, ‘부~웅’ 만선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울산 장생포 앞바다에 울리면, 마을 주민들과 상인들이 항구로 몰려든다. 고래잡이로 명성을 날렸던 1960~70년대의 장생포. 하지만 1986년 상업포경이 금지되면서 장생포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이후 29년 만에 고래잡이로 번성했던 당시의 장생포 마을이 복원돼 관광객을 맞고 있다. 울산 남구는 2010년 장생포 일대 10만 2705㎡ 부지에 272억원을 들여 ‘장생포 고래문화마을’ 조성사업을 착공, 지난 5월 15일 준공했다. 고래문화마을에는 고래광장, 장생포 옛마을, 선사시대 고래마당, 고래조각정원, 5D입체영상관, 고래 이야기길, 고래놀이터, 야외무대, 수생식물원, 주차장 등이 조성됐다. 특히 1960~70년대 장생포 동네 풍경을 실물 그대로 복원한 장생포 옛마을은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장생포에는 2005년부터 고래박물관과 고래생태체험관, 고래연구소, 고래바다여행선 등 고래 관련 인프라가 구축돼 고래관광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고래문화마을은 장생포 울산항만공사 인근에 조성됐다. 문화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고래 머리를 형상화한 대형 조형물이 방문객을 맞는다. 조형물 옆에는 집채만 한 고래 모형이 큰 입을 벌리고 있다. 조형물을 뒤로하고 마을에 들어서면 1930~40년대 장생포의 모습이 한눈에 펼쳐진다. 포경으로 전국에 이름을 날렸던 1970년대 이전 동네 모습이다. 장생포 옛마을 안에는 수십 년 전의 학교와 철공소, 전파사, 여인숙, 구멍가게, 서점 등 낯익은 건물이 즐비하다. 고래연구를 위해 장생포에 머물렀던 미국 탐험가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 박사의 하숙집을 비롯해 선장과 포수의 집, 거대한 고래를 해체하는 고래해체장, 고래 기름을 짜는 착유장, 고래 고기를 삶아 파는 고래막 등 23개 건물을 실물 크기로 볼 수 있다. 포경선 선장과 포수의 집은 당시 고래잡이 상황을 잘 알려준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실제 모델이자 1914년 한국계 귀신고래를 세계 학계에 처음 소개한 앤드루스 박사가 머물렀던 하숙집은 새로운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인근 고래박물관 포경역사관에는 앤드루스의 논문도 전시돼 있다. 옛 건물만 되살린 게 아니라 당시 생활 소품과 거리 풍경도 그대로 재현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연탄가게를 비롯해 잡화를 팔던 구멍가게 등은 40대 이상 중·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하고 10~20대 젊은이들에게는 호기심으로 다가온다. 당시의 장생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맞아, 그때 저게 있었지. 큰 고래를 순식간에 해체하는 모습이 참 신기했어”라며 추억을 더듬게 할 만한 것들이 즐비하다. 또 장생포 옛마을 내에는 참기름집, 고래빵집, 매점 등이 운영되고 있다. 이달부터는 방문객들의 입맛에 맞는 다양한 음식도 제공할 예정이다. 고래꼬치, 고래강정, 고래스테이크 등이 출시된다. 앞으로 고래관광 기념품 판매점을 개점하고 국수공장도 옛모습을 재현해 운영할 예정이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장생포 주민들로 구성된 가판장수, 엿장수, 다방, 달고나 체험, 뽑기 등 각종 퍼포먼스도 진행한다. 장생포 문화마을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장생포 옛마을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고래광장이 나온다. 이곳에서는 장생포 전경뿐 아니라 울산항, 울산석유화학공단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광장 옆 조각공원에는 대왕고래를 비롯해 밍크고래, 향고래, 귀신고래, 범고래, 혹등고래 등 실물 크기의 고래를 재현한 모형도 있다. 조각공원 입구에는 길이 20여m 규모의 대왕고래 뱃속을 볼 수 있다. 산책로인 ‘고래 이야기길’(길이 300m, 너비 2m)을 따라 걸으면 엄마 고래와 새끼 고래, 장생포 사람들의 이야기를 곳곳에서 접할 수 있다. 또 길이 240m, 너비 3m의 ‘고래 만나는 길’에는 ‘이야기 속의 고래’를 비롯해 ‘고래와 숲’, ‘물결과 고래’, ‘소녀와 고래’, ‘돌고래와 함께’ 등 사람과 친숙한 고래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여기에다 고래놀이터와 선사시대 고래마당, 수생식물원, 고래피크닉장 등 고래와 관련된 특색 있는 시설도 많다. 고래문화마을 동쪽 정상에는 내년 6월까지 지름 15∼18m, 높이 9m 규모의 ‘5D 입체영상관’이 들어선다. 이 영상관은 360도 회전하는 스크린을 통해 고래와 관련한 생동감 있는 입체영상이 12∼15분간 상영된다. 고래문화마을은 장생포 옛마을을 제외하고 모두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장생포 옛마을은 지난 6월부터 입장료 1000원을 받고 있다. 고래문화마을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여파에도 개장부터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남구가 지난 한 달간 고래문화마을 방문객을 집계한 결과 2만 771명이 찾은 것으로 조사됐다. 상황이 좋지 않음에도 관람객을 모으는 ‘집객 효과’를 증명해 장생포 대표 관광상품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평가됐다. 앞서 남구는 2005년 우리나라 유일의 고래박물관을 건립하고 전국 최초로 고래관광사업의 돛을 올렸다. 2008년 7월에는 장생포가 고래문화특구로 지정되면서 ‘고래 도시’의 옛 명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고래박물관에는 길이 12.4m의 브라이드고래 골격 등 고래 관련 유물 283점이 전시돼 관광객을 부르고 있다. 2009년에는 일본에서 들여온 돌고래 4마리가 고래생태체험관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크루즈선을 타고 울산 앞바다를 3시간여 동안 돌아보는 고래바다여행은 살아 있는 고래를 보는 획기적인 시도로 평가받고 있다. 1995년부터 시작된 울산고래축제는 문화체육관광부 유망축제, 지역브랜드 대상 특별상, 세계축제협회(IFEA) 7개 부문 수상 등 국내 최고 수준의 축제로 자리를 잡고 있다. 울산고래축제 방문객만 매년 60만~80만명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국내 최고의 고래문화 콘텐츠와 인프라를 가진 장생포는 이제 ‘고래문화 도시’로 뜨고 있다. 서동욱 남구청장은 “고래문화마을 준공으로 장생포 고래관광사업이 시너지 효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한다”면서 “(5월) 고래축제 때 다방 DJ와 종업원, 우체부, 연탄배달부 등의 복장을 한 연기자들이 관람객들의 관심을 끌면서 관광객 유치에 한몫한 만큼 앞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 나만의 초록 샤워장… 제주도 ‘삼다수 숲길’

    나만의 초록 샤워장… 제주도 ‘삼다수 숲길’

    제주엔 숲이 많다. 엇비슷해 보여도 특징은 조금씩 갈린다. 삼나무, 편백나무 등이 잘 정비된 휴양림도 있고, 이 나무 저 나무가 이런들 저런들 어떠냐며 어지러이 얽힌 곶자왈도 있다. 잘 정돈된 숲과 곶자왈이 한데 어우러진 곳도 있다. 그중 하나가 조천읍 교래리의 삼다수 숲길이다. 이름 참 촌스럽다. 요즘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사려니 숲길 등에 견주자니 더욱 그렇다. 한데 이름만으로 숲의 깊이를 가늠해선 안 된다. 게다가 이름난 숲에선 그 유명세 탓에 나무들과 차분하게 대화하기가 쉽지 않다. 삼다수 숲길은 다르다. 언제 가도 인적이 드물다. 그래서 가능하다. 나만의 ‘초록 샤워’를 즐기는 것이. 교래리는 마을이 들어선 지 무려 700년이나 됐다는 곳이다. 다리 교(橋), 올 래(來)자를 써서 교래리다. 오래전 긴 다리 모양의 ‘빌레’(용암이 굳어져 형성된 너럭바위를 뜻하는 제주 사투리)가 이 일대 마을과 마을을 연결했는데 이 빌레를 다리 삼아 사람들이 오갔다고 해서 이 같은 이름을 얻게 됐다. 이 이름이 삼다수 숲길을 이해하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다. 삼다수 숲길은 산과 들이 경계를 이루는 중산간 지역에 형성돼 있다. 높이는 440m쯤 된다. 삼다수 숲길엔 꼿꼿한 삼나무와 초록빛 난대림이 어우러져 있다. 저 유명한 사려니 숲길과 형태가 비슷한 편이다. 실제로 삼다수 숲길 끝은 사려니 숲길과 연결돼 있다. 하지만 찾는 사람은 사려니 숲길에 견주기 어려울 만큼 적다. 그 덕에 혼자 조용히 ‘초록 샤워’를 즐길 수 있다. 숲길로 정식 개장한 건 2010년이다. 더 오래 전엔 중산간을 호령했던 ‘테우리’(말몰이꾼)와 ‘사농바치’(사냥꾼)들이 이 길을 오갔다. 마을 주민들도 땔감과 식수 등을 구하기 위해 수시로 지나다녔다. 길 여기저기에 고단한 삶을 이어 갔던 선인들의 숨결이 배어 있는 셈이다. 숲 안에는 아직도 옛사람들이 거주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한데 왜 하필 삼다수 숲길일까. 시판되고 있는 생수 이름과 같다. 숲길이 펼쳐져 있는 곳도 생수 공장 위쪽이다. 오래전부터 이런 이름으로 불렸을 리는 없다. 필경 삼다수의 유명세에 기대자는 뜻이었을 텐데, 숲이 가진 무게감에 견줘 이름이 지나치게 가볍다는 느낌이 든다. 숲길은 두 코스로 나뉜다. A코스는 5.2㎞다. 2시간 남짓 소요된다. B코스는 8.2㎞다. 3시간 30분 이상 잡아야 한다. B코스의 중간쯤을 가로지른 뒤 돌아 나오는 게 A코스라고 보면 알기 쉽다. 거리는 짧지만 A코스만 걸어도 온몸에 초록물 들이기엔 충분하다. 두 코스 모두 들머리는 교래리 종합복지회관이다. 숲길 초입은 포장도로다. 1㎞ 남짓 딱딱한 시멘트 길을 걸어야 한다. 이 탓에 처음 가는 이들은 길을 잘못 들었나 오해하기 십상이다. 길은 말 목장을 지나면서 유순해지기 시작한다. 목장 초원 너머로 한라산이 넓게 자락을 펼치고 있다. 그제야 비로소 발 딛고 선 곳이 중산간이란 게 실감나기 시작한다. 목장길 옆으로는 시냇물이 흐른다. 안내판은 이를 ‘포리수’(파란물)라 적고 있다. 투명한 물에 맑은 하늘이 잠기면 파란빛이 감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70년대 초반까지 인근 주민들이 마실 물로 이용했다고 한다. 목장을 가로지르면 본격적인 숲길이다. 초입부터 빼어나다. 포장도로를 걷는 내내 이게 무슨 숲길이냐며 구시렁댔던 말들을 신속하게 주워 담아야 할 판이다. 무엇보다 삼나무 군락이 인상적이다. 군더더기 없이 위로 뻗어 수직 세상을 펼쳐 놓았다. 1970년대 말 조성됐다니, 얼추 40년 가까이 지난 셈이다. 삼나무 군락지는 삼다수 숲길 초입과 끝자락에 각각 조성돼 있다. 숲길 초입은 산수국이 장식하고 있다. 푸른 이파리 위로 파란 꽃잎들이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푸른 이끼 낀 삼나무 몸통엔 흰 버섯이 별처럼 박혀 있다. 입에서 혼잣말이 삐져 나온다. “그래, 좋구나. 이 길.” 안으로 들어갈수록 숲 그늘은 더욱 짙어진다. 빽빽하게 난 삼나무 때문에 빛 한 줌 들어오기 어려운 모양새다. 온몸에 초록물이 들 지경이다. 이 길을 단풍 물든 가을에, 흰 눈 덮인 겨울에 걸으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삼나무 군락지를 휘휘 돌아 가면 풍경이 바뀐다. 주변 나무들은 굽었고, 바닥은 제주조릿대 차지다. 삼나무가 만든 수직 세상의 조형미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정돈되지 않은, 그러나 더없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대신하고 있다. 고도를 높일수록 낙엽활엽수들도 늘어난다. 단풍나무와 때죽나무, 자귀나무 등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뒤엉켜 있다. 숲길 바닥은 곶자왈이다. 곶자왈은 ‘화산 활동으로 분출된 용암류(熔岩流)가 분포한 지대에 형성된 숲’이다. 쉽게 말해 굳은 용암 위에 형성된 숲이다. 붉은 화산송이와 유난히 구멍이 많은 다공질 현무암이 지천에 널린 건 이 때문이다. 현무암의 작은 구멍은 용암 속에 있던 가스가 빠져나가며 생긴 것이다. 층층이 쌓여 있는 다공질 현무암은 빗물을 걸러 지하로 흘러들게 한다. 일종의 정수기 노릇을 하는 셈이다. 숲길에서 여과된 물은 아래쪽 공장으로 모여 생수로 팔려 나간다. 비만 오면 숲길은 개골창으로 변한다. 반환점을 지나면서부터 이 같은 현상이 부쩍 잦아진다. 숲길 여기저기 물이 고여 있거나 졸졸 대며 흘러간다. 물기 잔뜩 머금은 길은 진흙으로 변해 걷기조차 불편하다. 숲길 초입의 안내판에 비 오는 날 출입을 자제하도록 권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삼다수 숲길은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길이라 주변에 편의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 음식점은 초입에 하나 있고 편의점은 없다. 물, 간식 등은 미리 챙겨 와야 한다. 화장실도 사실상 없다. 안내판은 교래리종합복지회관을 이용하라고 돼 있지만 실제로 회관 건물은 문을 닫아걸었다. 렌터카를 이용할 경우 ‘교래리종합복지회관’이나 ‘삼다수 숲길’을 찾아가면 된다. 버스 정류장은 복지회관에서 10분쯤 떨어져 있다. 1시간 간격으로 제주 시티투어버스가 다닌다. 한 방향으로만 운행하기 때문에 목적지에 따라 시간 안배를 잘해야 한다. 1200원. 최근 제주에서 독특한 곳 하나만 덧붙이자. 세계 최대 착시 테마파크로 꼽히는 ‘박물관은 살아있다’(www.alivemuseum.com/branch/jeju) 제주 중문점이 대형 오르간을 들여왔다. 벨기에 모르티에사가 1920년에 제작한 ‘얼라이브 통 오르간’(Alive 通 Organ)이다. 독일, 네덜란드, 미국 등을 전전하는 동안 제2차 세계대전 등 난관도 겪었지만 별다른 하자 없이 한국 땅을 밟았다. 오르간 가격은 3억원, 미국에서 옮겨 오는 데만 2억원 가까운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오르간은 101개의 키와 600여개의 파이프로 구성됐다. 첼로, 플루트, 카리용(종소리) 등 총 18개 음색으로 편곡돼 합주할 수 있다. 연주 형식은 전통적인 재생 방식인 ‘타공 종이 악보 연주’와 현대적 방법인 ‘미디파일 연주’ 2가지다. 박물관 측은 내부에 전용 뮤직홀을 갖춰 오는 10일 이를 선보일 예정이다. 글 사진 제주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가 프랑스풍의 정찬 레스토랑 ‘밀리우’를 새로 선보였다. 밀리우는 중심, 중앙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12개의 바 좌석과 5개의 개별룸 등 총 32개 좌석만 운영된다. 주방은 윤화영 셰프가 총괄을 맡았다. 프랑스 국립고등조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프랑스 요리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유명 셰프다. 밀리우가 내세우는 중요한 가치 중 하나는 제주산 식자재와 프랑스 전통 테크닉의 만남이다. 7, 8월이 제철인 제주산 광어와 농어, 각종 채소 등을 이용해 다양한 메뉴를 꾸린다. 오프닝 특선 디너는 6코스다. 가격은 8만 9000원이다. 오픈 초기에는 오후 6~10시에만 운영되며 17일부터 점심식사(낮 12시~오후 3시)도 준비된다. 이민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대표는 “제주의 알려지지 않은 다채로운 로컬 식재료와 조리법에서 영감을 받은 새로운 스타일의 프렌치 요리들을 선보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 수치 경쟁에 폐허가 된 상아탑

    수치 경쟁에 폐허가 된 상아탑

    폐허의 대학/빌 레딩스 지음/윤지관·김영희 옮김/책과함께/368쪽/2만 2000원 오랜 시간 대학은 상아탑(象牙塔)으로 통했다. 애초 성서에서 미인의 희고 매끄러운 목줄기를 상아탑으로 비유했듯 대학은 아름다우면서도 범접하기 어려운 지적, 정신적 활동을 펼치는 공간이었다. 물론 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 슬픈 우스갯소리로 이름지어진 ‘우골탑(牛骨塔)’은 농민들이 자식 교육을 시키기 위해 농사 밑천인 소를 팔아서라도 대학 공부시켜야 했던 현실을 반영했다. 12세기 르네상스 시절 유럽에서 대학이 첫 모습을 드러낼 때만 해도 대학은 고도의 자치권을 가지고서 연구하는 학자를 양성하는 목적이 주를 이뤘다. 건물과 공간의 존재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교수조합, 학생조합, 교수와 학생 공동의 연구자 조합 등 지식인 집단이 바로 대학이었다. 공간을 여기저기 빌렸고, 학생들은 바닥에 앉아 토론하며 공부했다. 19세기 들어서는 민족국가의 발달에 따라 민족문화를 지키고 재생산하는 원천으로서 기능했다. 하지만 21세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 대학의 모습들은 더이상 초기의 형태와 같지 않다. 자본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대학사회 운영의 지배질서가 됐다. 나아가 더이상 겸연쩍어 하거나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기업처럼 이윤추구를 제1의 가치로 내세우는 모습도 보일 정도가 됐다. 대학이 전통적으로 추구해온 이성과 학문의 발전, 고유문화를 수호하는 기능은 희미해진 반면 대학평가 순위, 취업률, 연구비 규모, 외국인 학생 비율 등과 같은 각종 수월성 지표가 대학의 가치를 매기는 새로운 기준이 됐다. 심지어 옥스퍼드대 뉴 칼리지와 같은 유서 깊은 기관조차 채용 광고를 비롯한 모든 공고문에서 ‘수월성에 전념하겠다’는 내용을 넣고 있다. 캐나다 몬트리올대 비교문학과 부교수로 재직했던 빌 레딩스(1960∼1994)는 저서 ‘폐허의 대학’에서 이런 대학의 상황을 두고 수월성만 추구하는 몰락기를 맞았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대학 본연의 기능을 저버리고 수치와 효용성만 따지는, ‘기업화’돼 버린 대학의 모습은 책 제목과 같은 ‘폐허의 대학’일 뿐이라는 것이다. 34세의 젊은 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뜬 저자는 대학이 ‘폐허’가 된 현실을 인정하되 그 폐허 곳곳에서 질문하기를 멈추지 말자고 제안한다. 그는 “우리는 대학이 폐허가 된 기관임을 인정해야 하며, 한편 낭만적 향수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그 폐허에 거주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대안적 성찰의 필요성을 말한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5부)업종별 기업&기업인 매일유업] 우유에서 외식·커피·의류까지… 그 중심엔 ‘신용’ 있었다

    [재계 인맥 대해부 (5부)업종별 기업&기업인 매일유업] 우유에서 외식·커피·의류까지… 그 중심엔 ‘신용’ 있었다

    민관 합작 회사로 시작해 국내 유가공 업계 3위이자 우유를 넘어 외식, 커피, 유아동 의류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매일유업. 이 기업의 성장사 중심에는 2006년 1월 2일 86세로 세상을 떠난 김복용 창업주가 있다. 그는 1920년 함경남도 이원에서 태어나 북청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1946년 남동생과 월남하며 서울로 생활 터전을 옮겼다. 광복 이후의 격변기, 6·25전쟁 등 혼란 속에 김 창업주는 누구보다 뛰어난 사업 감각을 보였다. 김 창업주는 서울 방산시장에서 담배 좌판을 벌이며 사업 밑천을 위한 종잣돈을 모았다. 이후 1956년 공흥산업, 1964년 신극동제분 등을 설립하며 무역과 제분업으로 사업을 키워 나갔다. 그가 우유사업에 뛰어든 것은 정부의 권유를 받으면서부터다. 6·25전쟁 이후 식량 부족 상태는 더욱 심각해졌고, 정부는 낙농업을 키워 국민들의 식생활을 풍요롭게 키울 계획을 세웠다. 정부는 1969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종합낙농개발사업을 추진하면서 매일유업의 전신인 ‘한국낙농가공’을 설립했다. 당시 사업을 추진하던 농어촌개발공사(현 농수산물유통공사)는 사업 자금의 조달과 사업의 효율성을 위해 민간 자본과의 합작을 계획했고, 당시 성공한 사업가로 주목받던 김 창업주에게 합작 투자를 제의했다. 김 창업주는 사업의 취지에 공감한 것은 물론 농촌 출신에다 농업학교를 나왔다는 인연으로 제의를 받아들였다. 1971년 5월 27일 민간 대주주 자격으로 한국낙농가공을 인수했다. 이후 1973년 3월 한국낙농유업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꿨고, 1980년 3월 지금의 매일유업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했다. 김 창업주의 성공적인 경영 비결은 ‘신용’이다. 그는 성공한 사업가로 인정받기 전 두 번의 사업 실패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가 또 다른 사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됨됨이를 보고 신뢰해 주변 사람들이 많이 도와줬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낙농사업을 맡아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는 겉치장에 신경 쓰지 않고 수익을 내면 이를 다시 투자했다. 매일유업은 지금도 사옥이 없다. 매일유업도 성공했으니 번듯한 사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얘기에 김 창업주는 “그런 곳에 쓸 돈이 있으면 그 돈으로 농민들을 돕는 데 쓰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김 창업주는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1976년 농림부 장관 표창, 1999년 금탑산업훈장 등을 받기도 했다. 1970년대 약 1500개의 낙농가를 조성하고 유가공 공장을 잇따라 설립하면서 매일유업은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1980년대는 자체적인 연구와 개발로 떠먹는 요구르트 ‘바이오거트’를 생산하는 등 더 고급화된 제품 개발에 집중했다. 1990년대는 매일유업이 그동안 쌓아 온 기술력을 바탕으로 유제품의 다양화는 물론 음료와 제과 등 신규 식품사업에 진출하면서 종합 식품회사로서 면모를 갖춰 나간 시기다. ‘허쉬 초콜릿 드링크’를 시작으로 국내 최초의 냉장유통 주스 ‘썬업’, 고급 커피음료인 ‘카페라떼’가 성공을 거뒀다. 매일유업은 2000년대 들어 건강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높아진 것을 반영해 프리미엄 상품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해 무지방(지방 0%)부터 저지방(1%, 2%), 일반우유(4%)까지 라인을 세분화해 저지방 우유에 대한 선택의 폭을 넓힌 신제품을 출시한 게 대표적이다. 이처럼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한 매일유업이지만 현재는 사업 정체기에 놓인 상태다. 이는 매일유업만이 아니라 유가공 업계 전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기도 하다. 그룹의 가장 큰 사업 부문인 우유 소비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김 창업주가 우유 생산 사업에 뛰어들 때만 해도 국내에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했던 시기였지만, 지금은 우유의 가장 큰 소비층인 영유아 수가 줄어들고 있다. 또 우유값이 공급과 수요를 반영해 즉각적으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 정부와 업계로 구성된 낙농진흥회와 낙농가가 협의해 결정되는 구조라 수요가 줄어도 값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매일유업의 연결 기준 매출은 1조 4479억원으로 우유 등을 생산하는 시유 부문이 3264억원, 분유가 1727억원으로 우유를 기반으로 하는 사업이 전체 매출의 3분의1가량을 차지한다. 어려움에 처한 그룹의 중심 사업을 되살리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게 매일유업 앞에 놓인 과제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복거일 “암 판정 후 1년 안 돼 3권 썼다”

    복거일 “암 판정 후 1년 안 돼 3권 썼다”

    “문학을 여흥으로 여기는 세상이 와 독자들이 문학 작품을 많이 읽게 됐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문학이 변신을 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힘들다. 그 변신에 이번 작품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작가로서 사회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가 복거일(69)이 장편소설 ‘역사 속의 나그네’(문학과지성사)를 전 6권으로 완간했다. 1989년 중앙경제신문에 연재를 시작한 뒤 이듬해 연재를 중단하고 한 권 정도 분량을 더해 1991년 3권으로 출간한 지 햇수로 25년 만이다. ‘역사 속의 나그네’는 21세기(2070년대) 인물 이언오가 백악기 시대로 시간 여행을 하려다 임진왜란 직전인 16세기 조선에 좌초해 사회를 개혁하는 이야기다. 첫 세 권은 조선 사회 구조나 속살을 드러내는 데 미흡했다는 평을 들었다. 작가는 이번에 추가한 세 권에서 모반을 일으켜 중앙정부와 싸우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조선 내부의 속살을 드러냈다. 작가는 1일 서울 중구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그리고자 했다”고 했다. “조선은 노예제도로 인해 가난하고 약한 나라가 됐다. 세계 어느 나라도 우리나라보다 노예제도가 공고한 나라가 없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까지 지배계층이 안 바뀌었다. 1000년이 넘으며 노예제도가 고착화됐다.” 작가는 2012년 간암 4기 판정을 받았다. “간암이라는 얘길 듣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역사 속의 나그네를 어떻게 하나’였다. 병원에서 나와 택시를 타며 생각했다. ‘역사 속의 나그네가 큰 빚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더 큰 빚이었구나.’ 20년이 넘도록 뒷이야기를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글을 마저 쓰기 위해 병원에 가지 않았다. “내일 죽는다면 사람의 정신이 맑아지고 집중이 잘 된다고 하는데, 닥쳐보니 실제 그렇더라. 세 권 쓰는데 1년이 채 안 걸렸다.” 작가는 “암은 그냥 놔두면 된다.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고 했다. “건드리면 상처가 나듯 놔두면 오래갈 사람도 건드려서 문제가 된다. 살살 달래가며 글 쓰면서 버티려 한다. 작가는 어차피 글을 쓰지 못하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나는 장편만 쓴다. 호흡이 긴 사람이라 쓰다가 막히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좀 든다. 1970년대 노벨상 후보로 오른 위대한 작가도 쓰다가 죽을까봐 글을 못 썼다.” 그는 시집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그동안 두 권 냈는데 두 권 더 내려 한다. 한 권은 생전에, 한 권은 사후에 내려 한다. 앞으로 소설은 하느님이 협조를 해주셔야 쓸 수 있다. 쓴다면 ‘역사 속의 나그네’ 연장선상에서 임진왜란에 대해 쓰겠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5부)업종별 기업&기업인 한국야쿠르트] 한국 1호 유산균 발효유 개발… ‘집념’ 하나로 총 470억병 판매

    [재계 인맥 대해부 (5부)업종별 기업&기업인 한국야쿠르트] 한국 1호 유산균 발효유 개발… ‘집념’ 하나로 총 470억병 판매

    1971년 첫선을 보인 후 44년간 470억 병의 누적 판매고를 올리고 있는 유산균 발효유 ‘야쿠르트’.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마셔 봤다는 ‘국민 간식’ 야쿠르트의 탄생에는 파평 윤씨 윤덕병(88) 회장의 고집과 집념이 녹아 있다. 숙종조 선비였던 윤증(尹拯) 선생의 후손인 윤 회장은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만 8세의 나이로 일본 도쿄 유학길에 올랐고 고등학교까지 일본에서 학업했다. 이후 1951년 육군에 자원입대해 6·25전쟁을 치른 그는 1961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경호실장을 지냈다. 1963년 사업의 꿈을 안고 중령으로 예편한 윤 회장은 ‘우유 소비량’에 주목했다. 당시 정부의 적극적인 축산진흥정책에 따라 우유 생산량은 많아졌지만 처리 능력이 턱없이 부족해 지방에서는 원유가 개천에 버려지는 일이 많았다. 윤 회장은 번뜩 일본에서 접한 유산균 발효유를 우리 기술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건국대 축산연구소장을 맡고 있었던 사촌 형 고 윤쾌병 교수(초대 사장)가 큰 힘이 됐다. 윤 교수는 일본대에서 수의학 박사를 취득한 뒤 서울대에서 12년간 교편을 잡다 건국대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구체적인 사업 계획에 돌입한 윤 회장은 어렵게 자금을 꾸려 1969년 5월 청계7가의 허름한 임시 사무실에 ‘삼호유업’ 간판을 달았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그는 서울 중구 무교동 11번지에 자본금 5000만원으로 한국야쿠르트의 씨앗인 ‘한국야쿠르트유업주식회사’를 세웠다. 회사는 세웠지만 제품을 출시하기까지는 만만치 않았다. 오랜 고민 끝에 윤 회장은 일본야쿠르트의 기술 도입을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야쿠르트유업은 일본야쿠르트와의 합작 투자(한국 61.7%, 일본 38.3%) 방식을 취했다. 한국야쿠르트는 일본에서 들여온 종균 앰풀을 바탕으로 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1971년 경기 안양에 국내 최초의 발효유 공장인 안양공장을 완공하며 생산설비도 완벽하게 갖췄다. 국내 최초의 유산균 발효유 ‘야쿠르트’는 이렇게 같은 해 8월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균을 돈 받고 팔아먹는다’, ‘병균을 판다’는 일부 소비자의 반발도 있었지만 야쿠르트는 금세 저렴하고 건강에 좋은 데다 맛도 좋은 간식으로 자리잡았다. 방문판매라는 판매 방식도 독특했다. 우리나라 주부 취업의 효시 격인 ‘야쿠르트 아줌마’가 그것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 여건이 열악하던 1970년대는 물론 지금도 여성 일자리 창출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1971년 7월 당시 야쿠르트 아줌마는 47명에 불과했으나 1975년에 1000명, 1978년 3000명, 1983년 5000명, 1998년에는 1만명을 넘어서 지금은 1만 3000여명의 야쿠르트 아줌마가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윤 회장은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는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전문경영인 체제가 한국야쿠르트의 특징이다. 행사에도 나서지 않는다. 명예가 있다면 당연히 전문경영인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게 윤 회장의 소신이다. 한때 윤쾌병 교수가 오너 경영인으로 인식된 것도 이 때문이다. 회사는 전문경영인에게 맡겼지만 공장과 영업소 등의 현장을 찾는 일에는 결코 소홀함이 없다. 윤 회장은 상대적으로 경영진이 찾기 어렵거나 관심이 덜한 공사 현장, 관리 손길이 드문 생산 현장, 소비자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는 영업소 등을 주로 찾는다. 이 같은 윤 회장의 행보는 구순(九旬)이 가까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는 지금도 매일 오전 10시쯤 서울 잠원동 본사에 출근한 뒤 오후 4시에 퇴근한다. 사실상 가업을 물려받은 외아들 윤호중(44) 전무도 필요할 때 대주주로서 의사 결정에만 관여한다. 기업 경영은 기본적으로 전문경영인 체제로 돌아간다. 윤 전무는 한국야쿠르트를 중심으로 팔도, 비락 등의 식품사업과 능률교육, 에듀챌린지의 교육사업, 큐렉소의 헬스케어사업 등을 맡고 있다. 윤 전무는 팔도 지분을 100% 소유하고 있고 팔도는 지배구조의 핵심인 한국야쿠르트의 지분 40.83%를 가지고 있다. 이어 야쿠르트가 능률교육, 큐렉소, 비락, 플러스자산운용 등의 계열회사를 거느리는 구조다. 야쿠르트는 비상장 회사로 지난해 매출액은 9673억 9394만원, 영업이익은 844억 4382만원이었다. 자산 총액은 1조 100억 9317만원에 달한다. 총관계사는 14개다. 윤 회장은 부인 심재수(83)씨와 혼인해 1남 5녀를 뒀다. 윤 전무는 그가 44세에 본 늦둥이 외아들로, 윤 회장은 윤 전무를 끔찍이 아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담배를 피우지 않고 소식으로 건강관리를 한다는 윤 회장은 1998년 명지대에서 명예 이학박사를 받았다. 한편 윤 회장은 딸들과 사위의 경영은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양반정신을 강조하며 장성한 딸들이 골프를 치거나 운전하는 것을 금했을 정도다. 조용한 가풍을 중시해 과시하거나 드러내는 것 자체를 꺼린다. 아들 윤 전무에 대한 정보도 철저히 가려 있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 마릴린 먼로 이름담긴 ‘묘지판’ 경매, 2억 훌쩍

    마릴린 먼로 이름담긴 ‘묘지판’ 경매, 2억 훌쩍

    영원한 섹시스타 마릴린 먼로(1926-1962)에 대한 미국인들의 사랑은 정말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것 같다. 지난 27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줄리안 옥션 주최 경매에 할리우드 유명인들의 물품들이 대거 출품돼 화제를 모았다. 이날 경매가 열리기 전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은 물품은 지난 1962년 먼로가 영화(Something’s Gotta Give) 촬영 당시 입었던 꽃무늬 실크 드레스. 이날 이 드레스 34만 8000달러(약 3억 9000만원)에 낙찰돼 높았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경매의 진정한 '승자'는 따로있었다. 2000-4000달러(약 220만원-440만원) 수준의 가격이 예상됐던 먼로의 이름이 담긴 묘지판(grave marker)이 무려 21만 2500달러(약 2억 4000만원)에 낙찰됐기 때문이다. 먼로의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사망일이 새겨진 이 묘지판은 당연히 그녀의 묘지에 있었던 것으로 경매에 출품된 사연도 재미있다. 당초 먼로 묘지에 설치됐던 이 묘지판은 1970년대 묘지가 새단장하면서 교체돼 '쓰레기' 신세가 됐다. 이 묘지판을 '득템' 한 사람이 바로 묘지 관리인으로 오랜 시간을 거치며 이날 경매장까지 나온 것이다. 줄리안 옥션 측은 "먼로의 묘지판이 해외 입찰자에게 팔렸으며 신원은 공개할 수 없다" 면서 "먼로가 표지 모델로 나서고 창업주 휴 헤프너(89)의 사인이 담긴 특별판 플레이보이도 7만 5000달러(약 8400만원)에 팔렸다"고 밝혔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女보는 눈을 바꿔야 국가경제가 산다]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월요일 낮, 덴마크 아빠들 모임

    [女보는 눈을 바꿔야 국가경제가 산다]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월요일 낮, 덴마크 아빠들 모임

    행복지수 세계 1위인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거리에서는 젊은 남성들이 유모차를 끌고 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덴마크의 아빠들은 한 손에는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장바구니를 든 채 장을 본다. 북유럽 특유의 바퀴가 커다란 유모차에 아이를 태운 채 조깅을 하기도 한다. 요즘 덴마크에서는 아빠들의 육아 모임이 유행이다. 자녀가 있는 아빠들은 80% 이상이 육아휴직을 사용하고 아내 대신 아이를 돌보거나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바로 이 점은 직장과 가정이 양립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단지 여성을 보는 눈만 바꿔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일단 집안일은 여자 일로 제쳐 두고 남자는 시간 날 때 거들면 된다는 생각, 남자가 어떻게 아이 기저귀를 갈 수 있느냐는 생각 등 남성을 보는 시각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지난 22일 낮 12시 30분. 업무로 한창 분주할 시간에 코펜하겐 코어스게드할른 시립 체육관에 젊은 남성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입구에 유모차를 일렬로 댄 남성들은 아이를 안고 체육관으로 들어섰다. 입구에는 ‘파스 라이스트우’라는 팻말이 있다. 우리말로 ‘아빠들의 놀이터’라는 의미다. 20여명의 아빠들은 편한 곳에 자리잡고 체육관 바닥에 아이들을 내려놓았다. 아빠가 손수 돌려 주는 회전 놀이기구에 ‘까르르’ 하는 아기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월요일 아빠들의 육아모임 6개 도시서 성황 정부가 지원하는 복지센터의 예산 중 일부로 운영되는 월요 아빠 모임은 올해로 18년이 됐다. 1996년 “왜 엄마들의 육아 모임만 있고 아빠들의 육아 모임은 없느냐”며 다섯 명의 아빠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육아 나눔을 한 데서 출발했다. 이렇게 시작된 모임에 해마다 4000명가량의 아빠들이 참여하고 있다. 코펜하겐 외에도 5개 도시에 이런 자발적인 모임이 만들어져 운영되고 있다.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아빠 모임을 담당하고 있는 코페하겐 복지센터의 하네 두에르는 “덴마크에서도 예전에는 아빠들은 항상 일만 하는 존재였다”면서 “1970년대부터 일하는 여성들이 늘기 시작했지만 육아는 늘 엄마들의 몫이었다”고 상기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서 가정에서 여성은 더욱 고단했고, 남성은 점점 가족에게서 소외됐다. 두에르는 “일만 하던 아버지들이 어느 날 자녀들과의 유대 관계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에 빠지곤 했다”면서 “가족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심화되면서 남성들도 자녀 육아에 대한 참여가 동등하게 보장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육아휴직 정착 30년 걸려… 아빠의 권리 찾아라 1984년 남성 육아휴직이 도입됐다. 여성에게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 4주와 태어난 후 14주의 의무 휴직이 주어진다. 남성은 아이가 태어난 후 14주 안에 2주의 의무 휴직이 있다. 부부는 이외에 32주의 유급 육아휴직을 나눠서 사용할 수 있다. 총 52주의 법적 육아휴직 기간 동안 매주 4075크로네(약 68만원)의 급여가 보장되며 이는 자영업자에게도 해당한다. 이런 육아휴직 제도는 육아가 남녀에게 똑같이 주어진 의무이자 권리라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아내 대신 휴직을 하고 9개월 된 딸을 돌보는 스틴 옌센(37·전기기술자)은 “아내가 일이 더 많고 바쁘기 때문에 내가 육아를 맡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주변에도 이런 경우가 적지 않을뿐더러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선택이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설명했다. 아빠 모임에서 상담자 역할을 하고 있는 미케엘 왕 허겐센(50)은 “요즘은 남성들도 육아휴직을 잘 쓸 수 있도록 충분히 지원하는 회사가 인기 있는 회사로 통한다”면서 “이 때문에 주로 고학력, 고스펙의 직장인들이 모임에 참석하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10개월 된 아들을 데리고 온 야코브 마드센(30·엔지니어)은 3년 전 첫째 아이에 이어 이번에도 두 달 전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마드센은 “아기가 태어난 아빠들은 대부분 육아휴직을 쓴다. 다만 부부가 나눠 쓰기 때문에 보통 3~4개월 정도 이용한다”고 말했다. ●낮에 유모차 끌 수 있다면 좋은 직장 다니는 아빠 아빠들은 모임을 통해 아이들이 크는 과정이나 직장, 가정 생활 등에 대해 상담을 하거나 토론을 하기도 한다. 금융권에서 일하는 프란스 로렌센(33)은 “아내가 엄마들 모임에 나가고 있는데, 아빠도 아이가 크는 과정에 대해 알아야 하고 다른 아빠들과도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다”면서 “요즘은 육아휴직을 하지 않는 남성들이 오히려 소외되거나 바보란 소리를 듣는다”고 귀띔했다. 이어 “오늘날 덴마크에서 낮 시간에 아이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남자에게는 (좋은 직장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특별한 지위가 부여된다”며 “그것이 바로 (덴마크에서) 남성 육아휴직과 아빠 모임이 활성화된 배경”이라고 강조했다. 로렌센은 “남성 육아휴직이 도입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덴마크 아빠들도 육아에 익숙해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면서 “회사는 가정 생활을 충실히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직원들의 만족도와 능률을 높인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이를 장점으로 내세우기 시작했고, 남성들도 육아 참여를 반드시 지켜야 할 ‘아빠의 권리’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 가장 중요한 변화”라고 힘주어 말했다. 글·사진 코펜하겐(덴마크)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새로운 50년을 열자] 朴대통령 관례 깨고 日보다 中 먼저 방문… 최악 갈등의 ‘서막’

    [새로운 50년을 열자] 朴대통령 관례 깨고 日보다 中 먼저 방문… 최악 갈등의 ‘서막’

    2013년 6월 27일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이후 미국 다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자 일본 언론들은 “한국이 중국과 밀착해 일본을 소외시키는 것 아니냐”며 들끓었다. 일반적으로 우방인 미국 다음으로 일본을 먼저 방문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지난 50년간의 한·일 관계는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에 비유된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부터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1965년 6월 이전까지 일본은 적대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양국은 1965년 국교정상화 후 군사동맹을 맺지 않았지만 우호협력적 안보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그 과정에서도 왜곡된 역사 인식 등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됐다. 박정희 정부는 수출제일주의와 경제 실리 외교를 표방했고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통해 경제 성장을 이루겠다는 데 기대를 걸었다. 박 대통령은 1964년 1월 발표한 연두교서에서 한·일 관계 정상화가 “자유 진영 상호 간의 결속을 강화해 극동의 안전과 평화유지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6·3 사태로 불리는 대규모 대학생 시위 등 반대 여론에 부딪혔다. 문제는 한국 내 부정적 대일 여론 못지않게 일본 내 한국에 대한 우월감도 심각했다. 국교정상화를 추진했던 시나 에쓰사부로 외무상도 1963년 “조선과 대만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는 훌륭한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일본 주요 정치가의 역사에 대한 성찰은 결여돼 있었다. 1970년대에는 일본 한복판에서 중앙정보부가 당시 야당 의원이던 김대중씨를 납치한 사건(1973년), 재일 교포 문세광이 영부인이던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사건(1974년) 등이 겹치며 한·일 관계는 단교 직전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80년 출범한 전두환 정부는 일본에 대한 ‘안보 무임승차론’을 내세워 경제적 실익을 얻고자 했다. 1981년 당시 노신영 외무부 장관은 일본 정부에 “한국이 소련, 중국, 북한의 위협 속에서 대규모 군사력을 유지해 일본의 안보를 지켜 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일본은 한국에 안보 경제협력 자금으로 100억 달러를 지원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본은 이 구상에 반발했지만 결국 1983년 1월 한국에 40억 달러의 경제협력 차관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당시 미국과 소련 간 신(新)냉전이 격화된 시기라 가능했던 일로 평가받는다. 한·일 양국은 1982년 일제의 침략을 ‘진출’로, 3·1 운동을 ‘폭동’으로 표현한 일본의 고교 역사교과서 문제로 외교적 마찰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19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방한해 사실상 처음으로 반성의 뜻을 내비쳤다. 이에 따라 비교적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는 평이다.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는 1990년대 탈냉전을 맞아 북한이 핵개발을 본격화하자 한·일 간 경제뿐 아니라 외교안보 관계도 발전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 때는 일본의 군사력 확대와 군국주의 회귀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는 시기였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표면화됐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3년 8월 일본 고노 요헤이 관방 장관이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발표하고 1995년 8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공식 사죄하는 등(무라야마 담화) 한·일 관계가 순풍을 타는 듯했다. 하지만 1996년 독도 영유권 문제가 불거지자 김 대통령이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고 강력히 반발하며 양국 관계는 다시 극도로 악화됐다. 1998년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은 대북 화해협력 정책에 대한 국제적 협력을 얻기 위해서는 악화된 대일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문제 의식을 갖고 있었다. 1998년 8월 북한이 발사한 대포동 미사일이 일본 본토 상공을 지나 태평양으로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도 한국과의 안보 협력 필요성에 공감했다. 김 대통령은 1998년 10월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 미래지향적인 한·일 파트너십을 선언하며 한·일 간 장관급, 실무 국장급 교류와 재해 구난을 위한 공동 훈련(SAREX)을 실시키로 합의했다. 하지만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집권하면서 역사교과서 왜곡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이 다시 갈등의 핵으로 떠올랐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에는 시마네현이 독도 영유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는 파동을 겪었다. 고이즈미 총리 본인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는 등 일본의 도발이 잇따랐다.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임기 초 노무현 정부에서 악화됐던 한·일 관계를 회복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는 2009년 5월 북한의 2차 핵실험과 2009년 9월부터 집권한 일본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총리가 역사 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 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2011년 12월 교토에서 열린 일본 노다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정면 충돌했다. 2012년 6월 양국 정부가 체결하려던 군사 정보보호협정은 국내 여론의 압박에 무산됐다. 같은 해 8월 이 대통령이 독도를 전격적으로 방문하면서 일본 내 반한 감정에 불이 붙었다. 이후 일본 자민당의 총선 승리로 재집권한 아베 신조 총리는 고노 담화를 부정하기 위해 담화를 검증하겠다고 밝혀 한·일 관계는 다시 얼어붙게 됐다. 조양현 국립외교원 교수는 28일 “지난 50년간 한·일 관계가 냉탕과 온탕을 오갔지만 1990년대 이전까지는 냉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정부 차원에서 이를 쉽게 봉합할 수 있었다”면서 “21세기 들어서 여론이 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를 의식한 정치 지도자들이 악화된 한·일 관계를 봉합하기 어려워진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진도희 췌장암으로 별세, 진도희 누구? 70년대 인기 여배우 ‘출연 작품 보니..’

    진도희 췌장암으로 별세, 진도희 누구? 70년대 인기 여배우 ‘출연 작품 보니..’

    진도희 췌장암으로 별세, 진도희 누구? 70년대 인기 여배우 ‘출연 작품 보니..’ ‘진도희 췌장암으로 별세’ 영화배우 진도희(본면 김태야,66)가 지난 26일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진도희는 여배우 춘추전국시대인 1970년대 초반 주연급 배우로 왕성한 활동을 했던 영화배우 중 한 명이다. 지난 1971년 MBC 4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진도희는 지난 1972년 영화 ‘작크를 채워라’를 통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제10회 백상예술대상 신인여배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대추격’(1972), ‘늑대들’(1972), ‘체포령’(1972), ‘일요일에 온 손님들’(1973), ‘원녀’(1973), ‘서울의 연인’(1973), ‘죽어서 말하는 연인’(1974)에 잇따라 주연을 맡아 영화배우의 입지를 굳혔다.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이며 입관 예배는 27일 오후 3시, 발인은 29일 오전 8시다. 장지는 서울 승화원이다. 진도희 췌장암으로 별세, 진도희 췌장암으로 별세, 진도희 췌장암으로 별세, 진도희 췌장암으로 별세, 진도희 췌장암으로 별세 사진=서울신문DB(진도희 췌장암으로 별세)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열린세상] 차세대 산림바이오매스 에너지 개발 서둘러야/윤영균 국민대 특임교수·전 국립산림과학원장

    [열린세상] 차세대 산림바이오매스 에너지 개발 서둘러야/윤영균 국민대 특임교수·전 국립산림과학원장

    우리나라는 현재 쓰고 있는 에너지의 95%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전체 수입액의 25%를 에너지 수입에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어느 정유회사 광고 카피를 보니 ‘석유를 수출하는 기업’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석유 에너지의 100%를 수입하는 나라인데 석유를 수출한다고 하니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알고 보니 해외에서 원유를 들여와 고급 휘발유, 경유, 항공유 등 고부가가치 석유제품을 만들어 내수용으로 공급하고 나머지를 수출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미래에 유망한 성장산업으로 바이오, 기후, 나노 등 세 가지를 선정하고 바이오 미래전략, 기후변화 대응전략, 나노기술 산업화 전략을 마련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이 기후변화에 대응한 바이오에너지 산업 육성이다. 바이오 에너지 산업은 사실 오래전부터 미국, 일본, 캐나다, 브라질과 같은 국가에서 집중 연구하고 투자해 왔다. 유럽연합(EU) 등 유럽 국가들도 1970년대 석유위기를 겪은 후부터 태양광발전, 풍력, 조력과 같은 재생에너지 사용을 늘려 왔는데 그중 가장 보편화되고 많이 사용하는 것이 산림바이오매스를 이용한 에너지 산업이다. 산림바이오매스란 벌채나 숲가꾸기 작업에서 생산되는 잔가지 등 산림부산물과 폐목재 등을 말한다. 산림바이오매스의 장점은 첫째 국내 산림자원을 이용, 석유를 대체함으로써 에너지 자급률 향상에 기여할 수 있다. 둘째 숲가꾸기 사업을 통해 농·산촌 지역의 고용과 소득을 창출할 수 있다. 셋째 많이 사용할수록 유엔기후변화협약에서 탄소배출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전 국토의 64%가 산림이지만 아직 경제적 자원으로서의 가치는 낮다. 총 목재 수요의 83%를 외국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 산림기업들은 1970∼80년대 인도네시아, 베트남, 솔로몬 등 해외에 진출해서 원목을 들여와 목재산업을 일으켰다. 합판, 파티클보드(PB), 중밀도 섬유판(MDF) 등으로 1차 가공한 후 수출에 역점을 둔 것이다. 또한 2000년대 들어 이들 기업은 대규모 해외 조림사업을 추진해 많은 기술과 경험도 갖게 되었다. 국내적으로도 성공적인 치산녹화사업의 결과 숲이 많이 울창해져 본격적인 숲가꾸기 작업이 실행되고 있으며, 여기서 생산되는 부산물을 수집해 에너지원으로 활용한다면 1석 3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산림바이오매스에 대한 인식은 매우 낮은 실정이다. 산림바이오매스는 나뭇조각(Wood chip)이나 목재 펠릿(Wood pellet)으로 이미 개발되었고, 이를 사용하는 전용 보일러와 난로도 보급되어 있다. 벌써 목재 펠릿은 경제성이나 편리성이 뛰어나 충분히 석유와 대응할 정도가 됐다. 원래 인간은 오래전부터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했는데 이제는 열효율이 높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개량해서 쓰는 단계로 발전한 것이다. 앞으로는 보다 혁신적인 기술개발을 통해 산림바이오매스를 전기, 가스, 수송용 연료 등 현대적인 에너지로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바이오연료의 대표인 것이다. 그동안 바이오연료 산업은 옥수수, 콩, 감자와 같은 식량자원(1세대 바이오매스)을 사용함으로써 많은 논란을 야기시켰다. 하지만 산림바이오매스는 비식용 자원일 뿐 아니라, 국내에서나 해외에서 조림사업을 통해 많은 양의 원료를 확보할 수 있다. 즉, 1세대 부작용을 완화시키고 차세대 바이오에너지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산림바이오매스를 이용한 전용발전소나 열병합발전소(Combined Heat and Power)뿐만 아니라 바이오 부탄올, 에탄올, 디젤까지 생산하는 기술 개발이 시급히 요구된다. 물론 아직 이 분야의 우리 기술력은 선진국에 비해 상당히 뒤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희망은 있다. 이달 초 전남 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친환경 바이오산업을 집중 육성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GS칼텍스에서 폐목재와 같은 산림바이오매스 자원을 활용해 바이오 부탄올을 개발하고, 전남 여수에 500억원을 투자해 상업화를 위한 실증 플랜트를 건설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하루빨리 성공하여 바이오 에너지도 수출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 [부고] ‘70년대 충무로 스타’ 배우 진도희

    [부고] ‘70년대 충무로 스타’ 배우 진도희

    여배우 춘추전국시대인 1970년대 초반 왕성하게 활동했던 영화배우 진도희(본명 김태야)씨가 지난 26일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66세. 1949년 부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중앙대 전신인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하고 2년 뒤 동국대 연극영화과로 편입했다. 동국대 재학 시절 교내 연극 여주인공으로 뽑히면서 알게 된 국립극단장의 권유로 MBC 공채에 응시, ‘김경아’라는 예명으로 MBC 4기 탤런트가 됐다. 1972년 배우였던 박노식씨의 영화감독 데뷔작 ‘자크를 채워라’에 주연으로 캐스팅되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죽어서 말하는 연인’(1974) 등에서 주역을 맡았고 1974년 백상예술대상 신인여배우상을 수상했다. 조흥은행 창업주 직손인 정운익씨와의 열애로 은막을 떠난 이후 외식사업과 무역회사 중역으로 미국을 오가며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했다. 슬하에 딸이 한 명 있다.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9일 오전 8시.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