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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학의 번역과 반역]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조영학의 번역과 반역]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며칠 전 한영 번역을 하며 ‘신입생’을 ‘a freshman’으로 했다가 아차 싶어 얼른 ‘a first-year student’로 바꾸었다. 나름 조심한다 하는데도 이따금 실수를 하고 만다. 그러고 보니 페이스북에 ‘딸이 시집 갈 때’라고 썼다가 황급히 ‘딸이 결혼할 때’로 바꿔 적기도 했다. 어찌 됐든 시대에 걸맞은 표현은 아니지 않은가.어느 모임에선가 후배 커플을 만났을 때 얘기다. 여자는 꼬박꼬박 존대를 하고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야, 너”라고 불러 난감한 적이 있었다.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남자가 2년 후배라 꼬박꼬박 선배님이라고 부르며 쫓아다니고 여자가 오히려 면박을 주던 사이였건만,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 역전된 관계를 받아들였다. 이런 식의 고착화된 성 역할은 ‘구글’에도 존재한다. 얼마 전 성 구분이 없는 터키어 ‘O bir asker’(군인이다)를 ‘He’s a soldier’로, ‘간호사’는 ‘She’s a nurse’로 번역해 한바탕 시끄러웠다. 사실 우리 번역서를 펼쳐 보면 부부 사이에서 남자는 하대를, 여자는 존대를 하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영어야 존대, 하대의 구분이 없을 텐데도 번역자들은 무슨 대수냐는 듯 그렇게 남녀의 서열을 정해 버리고 만다. 성평등이 해소되고 있다고들 하지만,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지고 여성이 맘 편히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기껏 100년 안팎이다. 남성 위주, 남성 편의 사회가 빚어낸 오랜 차별을 바로잡기엔 너무도 짧은 시간일 수밖에 없다. 특히 언어가 그렇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 낸 단어, 표현들이 그 속에 뿌리 깊은 차별과 왜곡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man’은 사람이지만 ‘woman’은 사람이 되지 못한다. 여성은 결혼하자마자 하녀처럼 남편 식구들을 ‘도련님’, ‘서방님’, ‘아가씨’라고 불러야 한다. 미혼모, 여교수. 녹색어머니회 같은 표현은 여전히 당연하고 당당하기만 하다. 만일 언어가 거울이라면, 거울 속 자신의 왜곡된 모습에 여성은 한껏 위축될 수밖에 없으리라. 아니 오히려 거울도 여성에게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여자여, 난 네가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영어는 오래전부터 불평등을 고치려 노력했다. 그래서 ‘chairman’은 ‘chairperson’이 되고 ‘fireman’은 ‘firefighter’로 바뀌었다. “Everybody goes to school, doesn’t he?”의 ‘doesn’t he’는 이제 ‘don’t they’로 고쳐 쓴다. 언어가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한다는 얘기다. 여성에게 언어가 허락되지 않았던 시절 아리스토텔레스가 남성의 성 메커니즘에 빗대어 서사문학의 플롯을 만든 이후 펜으로서의 남성이 여성의 몸을 백지로 비유하고 희롱하는 식의 표현 방식은 얼마든지 있어 왔다. 남자는 나비가 돼서 이 꽃 저 꽃을 탐하며 돌아다니고 가을 낙엽은 화냥년처럼 한껏 분칠을 하고는 노골적으로 남심을 유혹한다. 문제는 그런 식의 표현들이 전지전능도 아니고 만고의 진리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시대가 변하면 언어도 변해야 한다. 이미 1970년대 제2세대 여성학자 헬렌 식수, 루스 이리가레 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류, 남성 중심의 언어, 문학에 맞서 “여성이여, 네 몸을 써라(Write your body)”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지금의 시각으로 과거를 단죄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과거의 기준이 현재의 잘못을 정당화할 수도 없다. 저 표현들도 그때는 맞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틀리다. 무의식적으로 모르고 했을지라도 행여 누군가 아파한다면, 왜 그런지 돌아보고 반성할 일이다. 그래야 어른이다. 어른은 그래야 한다. 여성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거나 유리천장으로 승진 길을 막거나 기존 성역할을 강조하는 광고를 내보내는 것만 “여혐”이 아니다. 내 언어 속의 여성 비하를 외면한다면, 알면서도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여혐일 수밖에 없다. 진정한 성평등 사회라면 언어라는 이름의 거울 속에서 여성도 여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 ‘윤필용 사건’ 박정기 前한전사장… 45년만에 “강제전역 무효”

    1970년대 ‘윤필용 사건’에 연루돼 강제 전역한 박정기(83) 전 한국전력공사 사장이 45년 만에 “전역 처분은 무효”라는 법원 판결을 받았다.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부장 조미연)는 박 전 사장이 국방부 장관을 상대로 낸 전역처분 무효 확인소송에서 “보안사 조사관들의 강요와 폭행, 협박으로 전역지원서를 작성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5일 밝혔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박 전 사장은 1958년 소위 임관 뒤 중령으로 진급해 제722포병대대장으로 근무하다가 1973년 이른바 ‘윤필용 사건’에 얽혀 군복을 벗었다.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윤필용 소장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노쇠해 형님이 후계자가 돼야 한다”는 말을 했다가 ‘쿠데타 설’로 번져 윤 소장과 측근 군 간부 등 13명이 처벌됐다. 베트남전쟁 당시 사단장이던 윤 소장과 인연을 맺은 박 전 사장은 귀국 후 1년여간 수도경비사령관 비서실장을 지냈다. 박 전 사장은 재판 과정에서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윤 소장과의 관계, 하나회 명단 등에 대해 조사받았고 다음날 예편서를 쓸 것을 요구받았다”면서 “욕설 및 폭행, 협박과 회유를 당하다가 옆방에서 나는 비명소리와 숨넘어가는 소리를 듣게 돼 공포감에 예편서를 썼다”고 증언했다. 재판부도 “만 22세에 임관해 전역 당시 만 37세, 중령 계급이었던 원고가 자진해 전역을 지원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며 가혹행위 끝에 강제 전역된 게 맞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이 확정되면 박 전 사장은 국방부로부터 정상 복무를 했을 때를 가정해 산출한 밀린 급여 등을 보상받을 수 있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故 신성일 빈소 찾은 최불암·이순재 “반짝이는 별이 사라졌다” 애도

    故 신성일 빈소 찾은 최불암·이순재 “반짝이는 별이 사라졌다” 애도

    배우 신성일이 지난 4일 세상을 떠난 가운데 최불암, 이순재 등 많은 연예계 동료들이 빈소를 찾았다. 故 신성일의 빈소를 찾은 최불암은 취재진에게 “그분이 만든 문화의 역사가 지나고, ‘후배들이 어떤 것을 배워야 하나’에 대한 생각을 한다”며 “반짝이는 별이 사라졌다. 조금 더 건강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고인이 남긴 업적이 길이 오랫동안 빛나길 바란다”고 전했다. 배우 이순재는 “(고인은) 한국영화가 획기적으로 발전하는데 기여한 사람”이라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신성일 씨를 다 기억한다. 더 할 수 있었는데, 너무 일찍 갔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순재는 이어 “신성일 씨 작품은 많은 자료가 남아있어 후학들에게 좋은 교본이 될 것”이라며 “영화 중흥에 큰 역할을 했다. 제일 바쁠 때는 동시에 20 작품 이상을 했다. 정말 애를 많이 쓴 사람”이라고 고인에 대해 추억했다. 공동장례위원장인 안성기는 “지난해부터 내년 영화 한 편을 같이 하기로 약속했고, 시나리오도 거의 완성됐다고 들었다. 오랜만에 영화를 함께하게 돼 기뻤는데 허망하게 가시니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어 “(신성일은) 1960~1970년대 지금의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스타였다. 빛는 졌지만 우리들 마음에는 그 빛이 오랫동안 함께하리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신성일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이후 전남의 한 의료기관에서 항암 치료를 받아 왔으나 지난 4일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4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6일 진행되며, 장지는 경북 영천이다.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지며, 지상학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회장과 배우 안성기가 공동 장례위원장을 맡는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왜 혼례는 신부 집에서 했을까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왜 혼례는 신부 집에서 했을까

    SNS의 발달로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청첩장으로 주말엔 정신이 없다. 은퇴자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청첩장이라더니 실감 난다. 그 흔한 청첩장마저 돌릴 기회조차 포기한 젊은이들을 삼포 세대(연애?결혼?출산 포기)라 한다. 옛날에는 시집 장가 못 가고 죽은 처녀, 총각 귀신을 가장 악질이라고 했다. 얼마나 한이 되고 억울했으면 모든 화기가 이로부터 나온다 했을까. 그만큼 혼인을 중요시해 신랑은 벼슬아치가 입는 관복을 입고 관청에서 빌려준 말을 타고, 신부는 왕비나 할 수 있는 원삼족두리로 치장하는 것을 허락했다.조선 중기까지는 혼인 첫날 신랑이 종들을 데리고 저녁 무렵 처가에 당도하면 진수성찬으로 대접받고 신부와 동침에 들어가 첫날밤을 보냈다. 둘째 날은 남침이라 하여 처가 친척들과 신랑 친구, 하객들을 위한 잔치를 벌였다. 셋째 날은 신랑 신부가 비로소 초례상을 마주 보고 혼례식을 올린다. 이를 동뢰연이라 했다. 중국은 우리와 달리 신랑이 신부를 모시고 와 남자 집에서 혼례를 치렀다. 이를 친영례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거꾸로 남자가 여자 집에 가 혼례를 치렀다. 음이 양을 따르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우리의 음양이 뒤바뀌어 남자인 양이 음인 여자 집으로 가 혼례를 치러 중국인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1430년 음력 12월 22일 세종은 우리는 왜 혼례를 중국처럼 남자 집에서 치르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김종서에게 물었다. 만일 여자가 신랑 집으로 들어가게 되면 여자가 노비와 의복, 기구와 그릇 등 모든 살림살이를 마련해야 되기 때문에 곤란하며, 남자도 가난하면 신부를 맞는 것이 부담돼 신랑 집에서도 이를 꺼려 왔다고 했다. 조선시대는 신접 살림살이를 모두 신부 집에서 마련했는데, 이를 자장, 비수개라 했다. 자장의 폐단이 얼마나 심했으면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딸을 시집보내려면 혼수 마련에 많은 돈과 재물이 들기 때문에 딸을 낳으면 집안을 망칠 징조라 하고, 어린 딸이 죽으면 사람들은 얼마의 돈을 벌었다는 말로 비유해 위로하는데, 이것은 인륜과 도덕이 여지없이 타락한 것이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개탄했다. 혼수의 폐단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돈 없어 시집 장가 못 간다는 삼포 세대의 외침이 결코 빈말이 아니다. 조선시대 내내 신랑 집에서 혼례를 치르고자 노력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경국대전’에서 남자 15세, 여자 14세가 돼야 혼인토록 했으나 열 살 안팎의 조혼이 많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조정에서는 남자 집에서 행하는 친영을 주장하다가도 막상 딸을 시집보낼 때는 언제 그랬느냐며 자기 집에서 혼례를 치렀다. 왕들의 당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료와 백성들은 여전히 여자 집에서 혼례를 치렀다. 그러나 1970년대 제3의 장소인 ‘예식장’이 생기면서 수천 년 이어 온 혼속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결혼식은 몇 시에 하면 좋을까. 시뻘건 대낮? 아니다. 저녁 무렵 신시(오후 3~5시)가 가장 이상적이다. 저녁에 신부를 맞이하기 때문에 황혼 혼(昏) 자를 써 혼례라 한 것이다. 이때는 만물이 타고난 음기의 성질을 부여받고, 그 형체를 완성하는 시간이다. 곧 이어 유시(오후 5~7시)가 되면 음양이 서로 같아져 조화를 이룬다. 이 때문에 명나라 때 팽대익도 ‘산당사고’에서 “신부집에 예단을 보낼 때는 반드시 아침에 보내야 하고, 신부를 맞아 올 때는 반드시 저녁에 해야 좋다”고 했다. 한가한 저녁 시간대에 예식을 치르면 식장비도 깎아 주고 식장도 복잡하지 않아 좋다. 더 좋은 것은 음양이 절로 조화된다고 하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는가.
  • “난 딴따라가 아니다” 맨발로 50년…투병 중에도 ‘소확행’ 꿈꿔

    “난 딴따라가 아니다” 맨발로 50년…투병 중에도 ‘소확행’ 꿈꿔

    ‘맨발의 청춘’ 반항적 캐릭터로 스타 반열 2013년 ‘야관문’까지 총 535편 영화 참여 같은 영화 출연한 엄앵란과 세기의 결혼 강신성일로 개명 뒤 2000년 총선서 당선 자서전에 외도 고백·뇌물 복역 등 부침도“나는 ‘딴따라’가 아닙니다. 나는 종합예술 속의 한가운데 있는 영화인입니다.”‘맨발의 청춘’으로 시작해 영화판을 50년 넘게 누빈 배우 신성일은 생애 마지막까지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영원한 영화인’이었다. 1957년 한국배우전문학원에 입학해 김수용, 유현목, 김기영 등 감독들의 강의를 들으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운 고인은 이후 신상옥 감독이 설립한 신필름 배우 공모에 합격하면서 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본명이 강신영인 고인은 신필름 시절 ‘뉴 스타 넘버 원’이라는 영어 뜻을 한자에 담은 ‘신성일’이라는 예명을 얻었다고 한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그는 1962년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청춘영화의 주인공은 그가 모두 꿰찼는데 당시 한국 영화를 ‘신성일이 나오는 영화’와 ‘신성일이 나오지 않는 영화’로 구분할 정도였다. 부산영화제 등이 지난해 펴낸 책 ‘배우의 신화, 영원한 스타’에 따르면 1967년 한 해에만 그가 주연한 영화 51편이 극장에 걸렸다. 특히 공전의 히트작인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1964)에서 길거리의 삶을 사는 폭력배를 연기한 그는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반항적인 캐릭터를 대표했다.지난 50여년간 스크린에 등장한 횟수도 단연 독보적이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고인은 영화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등 500편 넘는 작품에 참여했다. 1970~80년대 무력과 좌절에 빠진 지식인을 연기한 ‘별들의 고향’(1974), ‘겨울여자’(1977), ‘길소뜸’(1985) 등을 비롯해 2013년 ‘야관문:욕망의 꽃’에서 주연으로 활약하는 등 2000년대까지 작품 활동을 한 ‘현역 배우’였다. 결혼식 역시 영화처럼 극적이었다. 그는 1964년 11월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전국민의 관심 속에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엄앵란과 웨딩마치를 울렸다. 당시 결혼 초청장이 암거래되고 4000여명의 하객과 구경꾼들이 몰려들 정도로 북새통을 이룬 ‘세기의 결혼식’이었다. 당대 최고 스타답게 스캔들도 끊이지 않았다. 그는 2011년에 펴낸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에서 1970년대 연극배우와 아나운서로 활동한 고 김영애씨와의 사랑 이야기를 공개해 파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엄앵란씨가 지난 3월 MBC TV에 출연해 “우리는 동지야. 끝까지 멋있게 죽어야 한다”며 마지막까지 신성일을 돌본 사실이 알려지면서 잔잔한 감동을 안겼다. 영화계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정치에 눈을 돌린 고인은 예명인 ‘신성일’에 본래 성인 강을 붙여 ‘강신성일’로 이름을 바꿨다. 그는 2000년 제16대 총선 때 대구 동구에서 한나라당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진출했다. 하지만 2003년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 옥외광고물업자 선정과 관련해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그는 2005년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7년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신성일은 지난해 자신의 회고전이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내년에는 따뜻하고 애정이 넘치는 영화 ‘소확행’(당시 밝힌 제목은 ‘행복’)이라는 작품을 기획하고 있고, 내후년에는 김홍신 작가의 소설 ‘바람으로 그린 그림’도 영화로 옮길 것”이라며 차기 계획을 밝혔었다. ‘소확행’의 연출을 맡기로 했던 이장호 감독은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성일이 형이 영화 제목을 ‘행복’이라고 붙이신다길래 제가 허진호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작품이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고심 끝에 ‘소확행’이 좋겠다고 하시더라”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형님께서 예측할 수 없는 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니 안타깝다”고 말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한국 영화의 큰 별’ 신성일, 폐암으로 별세 ‘장례는 영화인장’

    ‘한국 영화의 큰 별’ 신성일, 폐암으로 별세 ‘장례는 영화인장’

    ‘한국 영화의 큰 별’ 배우 신성일(본명 강신성일)이 폐암으로 별세했다.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4일 한국영화배우협회 측에 따르면 명예 이사장인 신성일은 이날 오전 2시 25분께 폐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앞서 신성일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항암 치료를 받아오며 회복에 힘써왔다. 그러다 전날인 지난 3일부터 병세가 위독해져 그간 치료를 받아오던 전남의 한 요양병원에서 전남대 병원으로 이송됐다. 그의 곁은 아들 강석현 등 가족들이 지켰다.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거행된다. 현재 한국영화배우협회와 한국영화인총연합회 등 영화계 관계자들이 유족과 영화인장의 구체적 절차를 놓고 논의 중이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오는 6일로 예정돼 있다. 장지는 고인이 직접 건축해 살던 가옥이 위치한 경북 영천 성일각이다. 신성일은 1960~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국민적 스타 배우였다.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난 신성일은 생후 사흘 만에 부모의 이사로 대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1956년 경북고를 졸업, 1966년 건국대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 신상옥 감독, 김승호 주연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고인은 1964년 ‘맨발의 청춘’으로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별들의 고향’(1974년), ‘겨울 여자’(1977년) 등 숱한 히트작에 출연하며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남자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출연 영화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등 데뷔 이후 500편이 넘는 다작을 남겼다. 1963년 한 해에만 ‘청춘교실’ 등 21편에 출연했으며, 1964년에는 ‘맨발의 청춘’ 등 32편, 1965년 ‘흑맥’ 등 34편, 1966년 ‘초우’ 등 46편 영화에 출연했다. ‘안개’ 등 51편 영화에 출연한 1967년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한 해였으니, 이해 제작된 한국 영화는 총 185편이었다. 명성만큼이나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1968년과 1990년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남자최우수연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대종상영화제 공로상, 부일영화상 공로상 등 수없이 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영화 관련 단체 활동도 적극적이었다.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1994년에는 한국영화제작업협동조합 부이사장을 지냈다. 2002년에는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과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았다. 1993년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언론과정, 1997년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2000년 경희대 대학원 사회학과를 수료했다. 대구과학대학 방송연예과 겸임교수, 계명대 연극예술과 특임교수를 맡아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 인터뷰집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 등의 저서를 남겼다. 고인은 영화계 성공을 발판으로 정계에도 진출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서울 마포·용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으며,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 그러나 삼수 끝에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대구 동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의정활동을 펼쳤다. 고인의 생전 마지막 공식 활동은 지난달 초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이었다. 그는 부산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해 이장호 감독, 배우 손숙과 함께 밝은 표정으로 레드 카펫을 밟았다. 전찬일 평론가는 “신성일은 투병 와중에도 그가 아니면 소화해내기 힘들 파격적 의상과 환한 미소로 부산영화제 개막식을 빛냈다”면서 “부산영화제 개막식 주인공을 단 한 명 꼽으라면 단연 신성일이었다”고 평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김정숙 여사가 ‘헌화’한 인도 허왕후는…김해엔 허왕후 인도설 전설 다수

    김정숙 여사가 ‘헌화’한 인도 허왕후는…김해엔 허왕후 인도설 전설 다수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6일(현지시각) 인도 아요디아에서 허왕후 기념공원 착공식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계기로 허왕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김정숙 여사의 인도 방문과 관련해 영부인이 단독으로 외교 행보에 나선 것은 2002년 이희호 여사의 미국 뉴욕 방문 이후 16년 만이다. 허왕후의 행보와 관련해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고려시대 스님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처음 등장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편에는 허왕후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였으며, 건무(建武) 24년(서기 48년) 7월27일에 배를 타고 가락국으로 왔고, 시조인 김수로왕(王)과 결혼했다. ‘수로왕비’ 허왕후의 본명은 허왕옥(許黃玉)이며, 김해 허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아유타국에 대해서는 인도를 비롯해 태국·중국·일본 등에 있었다는 설이 있지만 인도 아요디아가 유력하게 꼽힌다. 경남 김해시 서상동 수로왕릉 정문 대들보에 새겨진 물고기 두 마리가 인도 아요디아 지방의 건축 양식에 따랐기 때문이다.1970년대까지 신화로만 전해진 허왕후에 대해 김병모 교수가 역사적 사실로 재구성해 1987년과 1988년에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후 가락중앙종친회가 김 교수의 논문을 바탕으로 2002년에 아요디야의 사리유 강가에 허왕후 탄생비를 건립했다. 허왕후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반론도 나온다. 이광수 부산외대 교수는 저서 ‘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에서 “아유타는 힌두의 라마야나 신화에 나오는 코살라국의 수도”라며 “아유타라는 단어는 한역불경을 통해 8세기 이후 ‘인도’를 의미하는 뜻으로 처음 알려졌다”고 밝혔다. 그는 허왕후로 대표되는 고대 인도와 가야 교류설이 1970년대 이후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아동문학가 이종기 씨가 1977년에 상상력을 더해 쓴 ‘가락국탐사’를 김병모 교수가 역사적 사실로 재구성해 1987년과 1988년에 논문으로 발표했다는 것.그는 “인도와 가야사 전문가들이 비판 논문으로 반박했으나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고 뉴스1이 전했다. 허왕후의 인도 출신은 명확히 입증되지는 않았다. 학계가 더 풀어야 할 숙제이지만 경남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수로왕비인 허왕후가 인도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전설과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아득히 먼 옛날 서로 잘 몰랐을 한국과 인도가 결혼으로 맺어졌다는 스토리는 분명 흥미롭다. 없는 인연도 만들어내는 게 나라와 나라 사이의 친교이자 외교인 점을 감안하면 800여년 전에 우리 조상이 분명히 기록으로 남긴 스토리를 정색하고 부정할 것만은 아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한국 영화의 큰 별’ 배우 신성일 별세, 아내 엄앵란 그리움 드러내

    ‘한국 영화의 큰 별’ 배우 신성일 별세, 아내 엄앵란 그리움 드러내

    ‘한국 영화의 큰 별’ 배우 신성일이 오늘(4일) 새벽 2시 25분 향년 81살의 나이로 별세했다. 故(고) 신성일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전남의 한 의료기관에서 항암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숨을 거뒀다. 신성일은 1960∼1970년대 최고 인기를 누린 배우로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이후 ‘맨발의 청춘’ ‘별들의 고향’, ‘겨울 여자’ 등 숱한 히트작을 남겼다. 유족으로 부인인 배우 엄앵란(82)과 1남 2녀가 있으며,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신성일의 투병 생활은 지난 3월 20일 MBC ‘사람이 좋다’를 통해 전해졌다. 신성일은 방송에서 아내 엄앵란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그는 병문안 온 딸 강수화에게 “둘러보고 엄마를 설득해서 여기 오게 해”라고 했다. 강씨가 잠옷을 선물하자 “네 엄마를 만나는 시간은 잠옷 입었을 때밖에 없었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신성일이 암 선고를 받던 날 엄앵란이 병원비를 부담했다고 한다. 엄앵란은 올해 초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신성일이 초라하게 죽을 수는 없다. 마지막까지 특실에서 지낼 수 있도록 병원비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톱스타들이 초라하게 죽었던 옛날 시대에 살았다. (신성일은) 그렇게 죽으면 안 된다”며 마지막 애정을 드러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배우 신성일씨 폐암으로 타계…한국 영화사 최고 스타

    배우 신성일씨 폐암으로 타계…한국 영화사 최고 스타

    ‘은막의 스타’ 신성일씨가 4일 오전 2시 25분 폐암으로 타계했다. 81세. 신성일 측 관계자는 이날 “한국영화배우협회 명예이사장이신 영화배우 신성일께서 4일 오전 2시 반 별세했다”고 밝혔다. 고인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뒤 전남의 한 의료기관에서 항암 치료를 받아왔다. 전날 오후 한때 고인이 별세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단지 위중한 상태로 전해져 오보인 것으로 정정됐다가 결국 몇 시간 뒤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1960~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국민적 스타 배우였다. 본명은 강신영이지만 고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예명 ‘신성일’을 주로 썼고, 이후 본명을 표기해야 하는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앞두고 예명과 본명을 모두 살린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난 신성일씨는 생후 사흘 만에 부모의 이사로 대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1956년 경북고를 졸업, 1966년 건국대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 신상옥 감독, 김승호 주연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고인은 1964년 ‘맨발의 청춘’으로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별들의 고향’(1974년), ‘겨울 여자’(1977년) 등 숱한 히트작에 출연하며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남자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다작이 성행했던 시대적 특성을 감안해도 신성일씨는 출연 작품 수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출연 영화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등 데뷔 이후 500편이 넘는 다작을 남겼다. 1963년 한 해에만 ‘청춘교실’ 등 21편에 출연했으며, 1964년에는 ‘맨발의 청춘’ 등 32편, 1965년 ‘흑맥’ 등 34편, 1966년 ‘초우’ 등 46편 영화에 출연했다. ‘안개’ 등 51편 영화에 출연한 1967년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한 해였으니, 이해 제작된 한국 영화는 총 185편이었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기록적 다작 속에서 생명력 있는 행군을 펼친 것은 한국 영화사에서 그 예를 찾기 불가하다”며 “기록적 출연 편수야말로 그 스타성 증거”라고 평했다. 명성만큼이나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1968년과 1990년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남자최우수연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대종상영화제 공로상, 부일영화상 공로상 등 수없이 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영화 관련 단체 활동도 적극적이었다.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1994년에는 한국영화제작업협동조합 부이사장을 지냈다. 2002년에는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과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았다. ]1993년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언론과정, 1997년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2000년 경희대 대학원 사회학과를 수료했다. 대구과학대학 방송연예과 겸임교수, 계명대 연극예술과 특임교수를 맡아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 인터뷰집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 등의 저서를 남겼다. 고인은 영화계 성공을 발판으로 정계에도 진출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서울 마포·용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으며,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 그러나 삼수 끝에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대구 동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의정활동을 펼쳤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자유한국당 강석호 의원이 그의 조카다. 고인의 생전 마지막 공식 활동은 지난달 초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이었다. 그는 부산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해 이장호 감독, 배우 손숙과 함께 밝은 표정으로 레드 카펫을 밟았다. 전찬일 평론가는 “신성일은 투병 와중에도 그가 아니면 소화해내기 힘들 파격적 의상과 환한 미소로 부산영화제 개막식을 빛냈다”면서 “부산영화제 개막식 주인공을 단 한 명 꼽으라면 단연 신성일이었다”고 평했다. 영화계에서는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영화인장을 거행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영화인 단체 대표들이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한국영화인단체총연합회 지상학 회장과 배우 안성기가 공동장례위원장을 맡는 방안이 거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으로 당대 최고의 여배우 부인 엄앵란 씨와 장남 석현·장녀 경아·차녀 수화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4호실에 차릴 예정이었으나 23호실로 옮겨졌다. ☎ 02-3010-2000(대표번호)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국악방송, ‘고전의 숨결’ 공개방송 진행

    국악방송, ‘고전의 숨결’ 공개방송 진행

    국악방송은 2017년 8월부터 매달 첫 번째 월요일을 24시간 전통음악 듣는 날로 지정해, 명품 고전인 우리의 전통음악을 깊이 있게 조명하는 특별기획 ‘고전의 숨결’을 마련하고 있다. 국악방송의 모든 프로그램이 정통 국악만을 선곡하여 방송하는 것은 물론, 국악의 전통을 오롯이 지켜온 명인 명창들의 예술혼을 되짚어보는 특집 프로그램도 마련하여, 국악의 원형을 돌아보는 의미있는 시간으로 평가받아 왔다. 2018년 11월의 고전의 숨결은 ‘강도근 탄생 100주년 기념 - 이난초 전인삼의 동편제 흥보가’로 마련된다. 고(故) 강도근(姜道根, 1918∼1996)은 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김정문, 송만갑, 유성준 등 동편제 최고 명창에게 소리를 익혔다. 해방 전후 여러 창극단에서 활동하다가 1970년대 고향인 남원에 정착했으며, 1988년 중용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타고난 성량에 쇠처럼 단단한 철성을 갖고 있어서 동편제 소리에 가장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농사꾼이었던 자신의 우직한 삶을 닮은 소리, 흙내음 폴폴 나는 흥보가가 최고의 장기였다. 1996년 타계할 때까지 남원 땅을 지키며 동편제 판소리의 맥을 이은 동편 소리의 마지막 적자이다. 강도근 명창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악방송은 강도근 명창의 예술세계를 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한다. 채수정(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국악방송 “채수정의 판소리 유람” 진행)의 사회로 진행되는 이번 프로그램은 강도근 명창의 소리를 잇는 이난초(강도근 동편제 판소리보존회 이사장), 전인삼(전남대 국악학과 교수) 명창이 출연해 스승 강도근의 삶과 그가 남긴 발자취 등을 돌아보며, 강도근 명창의 동편제 흥보가의 눈대목을 선보인다. 북장단은 임현빈, 윤호세가 맡는다. 본 프로그램은 11월 5일 월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2시간 동안 생방송으로 펼쳐지며, 국악방송 웹TV, Facebook live를 통해서는 영상으로도 만날 수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엄마의 숨은 김치맛 비결, 알고보니 요녀석 젓갈이네

    엄마의 숨은 김치맛 비결, 알고보니 요녀석 젓갈이네

    충남 논산시 강경과 홍성군 광천은 해마다 젓갈 전쟁(?)을 벌인다. 두 지역은 젓갈 산지로 충남에서 쌍벽을 이루고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명소다. 9년 전인 2009년 10월에는 실제로 두 지역의 갈등이 표출되기도 했다. 당시 논산시장이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강경젓갈의 우수성을 자랑하면서 “광천 토굴새우젓은 위생적으로 상당히 안 좋다. 토굴의 천장에서 낙숫물이 떨어지고 벌레도 생기고…”라고 한 게 발단이 됐다. 광천토굴젓갈 상인들은 즉각 반발하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토굴에서 숙성시키는 곳인데 위생적으로 안 좋다는 근거가 무엇이냐”고 요구했다. 당시 홍성군수 권한대행(부군수)도 기자회견을 열고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 사건은 논산시장이 홍성군에 특사를 보내 사과하면서 수습됐지만 젓갈 명산지로서 두 지역의 ‘라이벌 의식’은 강하다. 올해도 김장철을 앞둔 지난달 중순 강경젓갈축제와 광천토굴새우젓축제를 동시에 열어 경쟁을 펼쳤다.새우젓 라이벌… 토굴숙성 광천·맞춤 강경 토굴새우젓은 예나 지금이나 광천 젓갈 상인들의 자랑이다. 국내 유일의 젓갈 숙성법이란 점도 있지만 맛이 좋다는 것이다. 신경진(50) 광천새우젓축제 사무국장은 “냉장고에서 숙성시키는 새우젓보다 맛이 깊고 감칠맛이 난다”며 “온도가 항상 13~15도를 유지하고 습도가 70% 안팎으로 높기 때문”이라고 했다. 광천읍 옹암포에는 젓갈을 숙성시키는 토굴 42개가 있다. 고려 때부터 형성된 시장이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토굴에 새우젓을 숙성시키면서 전통 숙성법으로 자리잡았다. 2000년대 들어 홍보지구가 건설되면서 바다와 분리돼 포구는 사라졌지만 젓갈 시장은 명맥과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젓갈 가게는 120개다. 강경도 금강하구둑 건설로 광천과 같은 운명을 맞았지만 오랜 전통의 젓갈 명성은 여전히 높다. ‘1 평양, 2 강경, 3 대구’로 불리던 조선 후기 전국 3대 시장의 자존심을 잃지 않고 있다. 이곳은 새우젓을 냉장고로 저온 숙성한다. 최충식(61) 강경전통맛깔젓협동조합장은 “냉장고는 같은 새우젓이라도 반찬용, 김장용 등 용도에 맞게 숙성시킬 수 있는 이점이 있다”면서 “강경에서는 짜지 않고 감칠맛 나게 하는 염장법이 이어져 왔고, 그게 특징”이라고 했다. 젓갈 가게는 145개다. 두 지역 명성을 유지해 주는 젓새우 원산지는 전남 신안이다. 전국 생산량의 85% 이상을 생산해 유통하며 신안젓갈타운이 중심에 있다. 주부들이 사랑하는 오젓과 육젓은 음력 5월이나 6월 산란기 직전에 알이 꽉 찬 젓새우로 담근다. 특히 6월에 잡히는 새우는 살이 통통하고 우윳빛이 감도는 최상품이다. 이른바 ‘육젓’이다. 신안은 새우 품질도 으뜸이지만 젓을 담그는 소금도 일등품이다. 청정한 신안 갯벌에서 나오는 미네랄 풍부한 천일염을 쓴다. 대부분 선상에서 갓 잡은 새우에 소금을 얹어 절인 게 신안 새우젓이다. 값싼 중국산에 밀리지 않고 비싸게 팔 수 있는 게 여기에 있다. 신안군 일대 230어가는 연간 젓새우 9300여t을 생산하고, 최상품은 드럼(300㎏)당 1000만원에도 후딱 팔려 나간다.기장 멸치젓갈·곰소 까나리액젓 ‘우등생’ 김장철만 되면 부산 기장시장은 몰라보게 활기를 띤다. 시장 인근 도로는 멸치 액젓을 사려는 차량으로 뒤엉킨다. 젓갈 가게가 50여개에 이르지만 상인들은 멸치 액젓 판매하랴, 전국에서 밀려오는 택배 신청 전화 받으랴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1970년대부터 형성된 멸치젓갈 생산 중심지로 국내 멸치젓갈의 65% 이상을 공급하는 명소라는 사실을 알면 놀랄 일이 아니다. 기장멸치젓갈은 뼈를 발라 낸 뒤 반찬용으로 먹어도 환상적이다. 액젓은 김장용으로 인기 만점이다. 1~2년 숙성 기간을 거친 액젓 맛은 깊이가 있다. 김치 맛을 크게 좌우한다. 기장에서는 멸치젓갈을 통째로 넣어 김장을 담기도 하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전북 부안군 곰소항은 까나리액젓이 유명하다. 까나리는 어리고 싱싱하며, 소금은 질 좋은 곰소만 천일염을 쓰기 때문이다. 칠산어장을 낀 곰소 일대는 예로부터 젓갈이 유명하다. 명란, 낙지, 오징어, 가리비, 토하, 꼴뚜기, 황석어, 갈치속, 아가미, 멍게, 밴댕이, 전어, 개불, 바지락 등 해산물이라면 무엇이든 맛깔스러운 젓갈로 담아낸다. 곰소만 천일염이 일등공신이다. 조선시대 때부터 염전이 발달한 곰소만 소금은 타지산보다 쓴맛이 적은 명품 천일염으로 통한다. 이 소금으로 젓갈을 담가 담백하고 풍미가 좋다. 게다가 곰소 까나리액젓은 어린 것을 써 담백할 뿐 아니라 고소하기까지 하다. 비리거나 고약한 냄새가 나지 않고 맛이 깔끔하다. 까나리는 성어기가 지나면 잡어가 섞이고 액젓이 적게 나올 뿐 아니라 내장 특유의 쓴맛이 있다. 곰소 까나리액젓은 일년 내내 10~15도에서 영양분을 보존한 채 저온 보관하면서 발효시키는 전통 젓갈 숙성법을 고수하고 맛과 품질을 인정받은 제품만 출하한다. 멸치액젓과 자웅을 겨루는 까나리액젓은 김장에 넣으면 김치의 시원한 맛을 더해 준다. 곰소젓갈단지에서 100여개 업체가 성업 중이다.향토젓갈 다양… 제주 자리젓갈 명성 제주도 자리젓갈은 제주 바다에서 나는 자리돔으로 만든 전통 젓갈이다. 주로 반찬으로 먹는데 자리돔과 소금을 4대1로 버무려 항아리에 넣고 4~5개월 숙성시켜 풋고추·고춧가루·참깨·참기름·마늘 등과 무쳐 먹으면 입이 벌어진다. 옛날부터 서귀포 보목 바다 자리돔은 뼈가 부드럽고 맛이 담백해 최고로 쳤다. 젓갈은 배추나 구운 돼지고기를 찍어 먹거나 무와 함께 조려 반찬을 한다. 초여름에 담가 가을에 먹지만 3년 넘게 숙성시킨 젓갈을 김장에 넣는 집도 일부 있다.갈치속젓 등을 넣는 지역도 있다. 해방 전만 해도 충남·경기 황석어젓, 강원 아가미젓, 경북 고등어새끼젓, 경북 꽁치젓 등 다양한 젓갈을 김장에 썼다. 김미리 충남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옛날에는 서산 실치(뱅어)젓 등처럼 56종의 생선을 젓갈로 담갔고 상당수는 김장에도 넣었는데 일부 어종이 귀해지고, 유통망이 발전하는 등의 현상으로 김장 젓갈이 전국적으로 비슷해지는 추세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젓갈은 김장 김치에 풍부한 영양과 감칠맛 나는 풍미를 제공한다. 피로 회복에 좋은 타우린을 비롯해 알리신, 글리신 등 성장 발달에 효과가 있는 아미노산이 풍부하다. 새우젓은 김장을 시원하게 하고, 멸치·까나리젓은 구수하고 감칠맛이 나게 한다. 젓갈을 넣으면 김장 김치를 덜 짜게 한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간을 적절히 조절해 주면서 염도를 낮추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옛날에는 양반 등 살림이 넉넉한 집일수록 젓갈을 많이 먹고 김장에도 다양하게 넣었다”며 “젓갈 재료와 숙성법에 따라 맛 차이가 많이 나는 게 김장”이라고 말했다. 홍성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부안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서울 초선 구청장에게 듣는다] 사심 없는 소통 투어… 회색도시 지우고 ‘탁 트인 영등포’ 만든다

    [서울 초선 구청장에게 듣는다] 사심 없는 소통 투어… 회색도시 지우고 ‘탁 트인 영등포’ 만든다

    “영등포가 제대로 바뀌었다. 저 사람이 사심 없이 일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습니다.” 채현일 서울 영등포구청장은 1일 서울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민선 7기 임기 막바지에 그런 평가를 받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탁 트인 영등포’를 구정 목표로 삼은 채 구청장은 주민과 직원들을 날마다 만나며 소통을 거듭했다. 그에게 영등포 발전의 밑그림을 들었다.→초선 구청장으로서 100일 동안 일해 본 소회는. -영등포 미래 100년 초석을 놓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직원, 주민과의 소통에 집중했다. 현장과 정책은 혼연일치가 돼야 하고, 제 생각만으로 영등포의 미래를 그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화통한 스쿨데이, 원탁토론 등을 통해 주민을 만났고, 변화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점을 체감했다. →실제로 구청장 업무를 해 보니 외부에서 바라보던 것과 어떤 차이가 있나. -국회 보좌관 생활을 하면서부터 줄곧 영등포구민이었다. 이후 청와대와 서울시에서 근무하면서도 가족이 사는 영등포라는 지역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 왔다. 하지만 구청장이라는 자리는 단순히 고민만 하는 자리가 아니다. 책임지는 자리에 온 만큼 지역의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펴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 청와대와 서울시에서 근무하면서 터득한 소통과 협치를 영등포에서 구현하겠다는 생각에는 많은 분이 호응과 공감을 보내 주고 있다.→그런 의미에서 영등포 신문고, 영등포 1번가 등 다양한 소통 창구가 눈에 띈다. -구정은 주민 의견을 바탕으로 운영돼야 한다. 그래서 취임하자마자 18개 동을 직접 찾아가 지역 현안을 듣고 해결하는 소통 투어를 했다. 이전에는 구민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구청장한테 말할 수 있는 체계화된 시스템이 없었다. 영등포 1번가는 문재인 정부 초기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옆에서 운영했던 국민 참여 공간인 광화문 1번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영등포 1번가’에는 현재까지 3964건의 정책 제안이 접수됐다. 접수 내용은 쓰레기, 주차 문제 등 주민 민원부터 교육, 일자리,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 등 장기적인 검토가 필요한 정책 제안까지 다양하다. 10월 1일부터는 구민 1000명이 제안하는 현안에 직접 답변하는 영등포 신문고를 개설했다. 영등포 신문고에는 47건의 구민 제안이 접수됐고, 이 중 영등포역 주변 노점상 문제 개선과 신길도서관 조기 착공 요구 등 2건에는 이미 1000명 이상이 동의했다. 조만간 주민들 앞에서 관련 내용에 대한 의견을 밝힐 예정이다. →지난 100일 동안 주민과의 만남을 바탕으로 ‘탁 트인 영등포’를 구정 목표로 삼았는데. -그렇다. 10월 15일 영등포구의 분야별 목표로 ‘꿈이 실현되는 교육도시’, ‘조화로운 성장 경제도시’, ‘쾌적한 주거 안심도시’, ‘더불어 잘사는 복지도시’, ‘소통과 협치의 민주도시’를 제시했다. 교육, 주거환경, 4차산업, 일자리, 문화, 사회적경제 등 중요 정책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우선 주거환경이 개선돼야 아이들 키우기 좋은 곳이 되고 주변 상권도 살아난다. 지금의 영등포는 회색도시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제 변화를 시작할 때라고 생각한다.→최대 중점 현안도 주거환경 개선을 꼽았다. -주거환경 정책의 핵심은 낡은 주거환경, 재건축, 도시재생 등 하드웨어 부분과 쓰레기, 주차 등 생활민원 부분 개선이다. 살고 싶은 영등포를 만드는 기본이 쾌적한 주거환경이라고 본다. 매주 청소 현장에 나가 고질적인 쓰레기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눈으로 보고 느끼고 있다. 주차 문제와 쓰레기 문제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운영하고 있다. 클린하우스 설치, 쓰레기 무단투기 다발 지역에 조화 또는 화단 설치, 무선인터넷(IoT) 기술을 활용한 주차공간 공유 서비스와 같은 정책 아이디어를 내고 시범적으로 시행하고 있다.→영등포 고가차도 철거도 주요 사업 중 하나인데. -1970년대 만들어진 영등포 고가차도를 철거하는 것도 주거환경 개선과 관련이 있다. 고가를 철거한 이후에는 평면교차로 방식으로 전환하고, 영등포를 상징하는 공간을 조성할 계획이다. 또 타임스퀘어와 영중로 일대도 보행자 친화 거리로 조성할 계획이다. 노점상도 거리가게 허가제로 전환하고, 하반기쯤 이를 위한 디자인 심의와 주민 설명회를 연다. →이 밖에도 ‘탁 트인 영등포’를 위해 집중해야 할 분야가 있다면. -교육 문제다. 취임 이후 무엇보다 교육이 우선이라는 생각으로 매주 화요일 초중고등학교를 직접 방문했다. 또 지난 9월에는 지역 내 학부모 150명과 원탁토론을 진행했다. 아이들에게 안전한 교육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전국 최초로 지역 내 모든 초중고 통학로를 금연거리로 지정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영등포구를 떠나지 않고 초중고교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다녔으면 한다. 새로운 영등포는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직원들과 함께 노력해 구민들이 최고의 행정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미래유산 톡톡] 1970년대 대장장이 땀방울·미용사 손길 그대로

    [미래유산 톡톡] 1970년대 대장장이 땀방울·미용사 손길 그대로

    투어단은 을미사변 후 의병을 일으켜 국권을 지키고자 했던 왕산 허위 선생을 기리는 왕산로를 따라 8곳의 서울미래유산을 탐방했다. 동대문구 청량리 일대는 교통, 교육, 전통시장으로 대표되는 곳이다. 근현대 서민들의 삶의 변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동광대장간은 17세 때 작은아버지로부터 말편자와 농기구 제작 기술을 배운 이흔집씨가 1975년에 용두동, 제기동 일대에서 개업한 대장간이다. 경력이 50년이 넘는 창업자의 뒤를 이어, 지금은 아들 일웅씨가 이어 받았다. 홈페이지를 개설해 주문을 받는 등 적극적으로 사업을 이어 가는 아들을 보는 창업자의 마음이 든든하다고 한다. 건축용 자재와 캠핑용 제품, 텃밭용 농기구 주문이 효자상품이다. 공장의 대량 생산과 중국산 제품의 공략에도 꿋꿋이 버티고 있다.가을의 알록달록한 풍경과 함께 투어단을 8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 곳은 서울시립대의 경농관과 자작마루이다. 서울시립대는 1937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경농관과 자작마루, 박물관 건물을 지었다. 전형적인 일제강점기의 건축양식을 보여 주는 건축물이다. 연와조의 벽체, 목조 트러스 지붕 등 건립 당시의 모습이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돼 있어 건축사적인 측면에서 보존 가치가 매우 높은 건축물이다. 경농관은 당시에 대학 본부와 강의실로 사용됐다가 현재는 전시실과 서울학연구소로 상용되고 있으며 자작마루는 강당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학교의 중요 행사와 결혼식장 등으로 이용된다. 딱 트인 내부 공간은 한 폭의 명화 속에 안겨 있는 느낌을 줬다. 목재 트러스 구조의 천장에서는 진한 송진 냄새가 배어 나왔다. 나무들은 각목으로 다듬어진 것도 있고 어떤 것은 통나무 그대로 사용되기도 했다. 연한 갈색을 띤 점토 벽돌의 외벽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한몫하고 있었다.또 다른 서민의 삶의 모습을 보여 주는 미래유산은 금강헤어라인이었다. 1967년 청량리 현대코아에서 미용실을 개업한 이는 김미자 창업주이다. 현재는 창업주의 올케인 신간난씨가 가게를 이어 받았다. 신씨는 딸을 출산하기 하루 전까지 시누이를 도와 일했다고 한다. 2003년부터 가게를 도맡아 운영하고 있다. 좋은 인연을 만나 미용실을 물려주는 게 단 한 가지 바람이다. 김은선 (서울미래유산연구팀 연구원)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선농단 향나무는 기억한다 풍년 기원하는 왕의 손길을 빼앗긴 봄 암울했던 세월을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선농단 향나무는 기억한다 풍년 기원하는 왕의 손길을 빼앗긴 봄 암울했던 세월을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6회 청량리(약령시의 기억) 편이 지난 27일 동대문구 휘경동·전농동·청량리동·제기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을이 농익은 서울시립대에서 낙엽이 흩날리는 캠퍼스의 낭만을 만끽했다. 또 청량리역을 중심으로 청량리 수산시장, 동부청과시장, 청량리 재래시장, 청과물도매시장, 서울약령시(경동시장) 등 끝도 없이 이어지는 5개 개별시장이 뭉친 슈퍼시장의 위용을 체감했다. 때마침 26일부터 이날까지 ‘제24회 서울약령시 서울한방문화축제’ 기간이어서 흥겨운 한방축제 분위기에 젖었고, 한방박물관 무료관람 혜택도 누렸다.이날 오전 10시 지하철 1호선 회기역에 집결한 투어단은 의병장 허위 장군의 호를 딴 왕산로를 따라 내려오다 110년 전통의 시조사를 보고 동광대장간을 들렀다. 떡 파는 가게가 즐비했던 떡전교를 지나 서울시립대에서 경농관과 자작마루를 둘러봤다. 사도세자의 능이 있던 배봉산은 건물과 아파트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청량리 육교 위에서 수십 갈래로 쪼개지는 철길의 행렬을 지켜본 뒤 청량리역~금강헤어라인~청량리청과물시장~서울약령시~제기동성당의 순서로 2시간 20분간의 바쁜 일정을 마무리했다. 해설을 맡은 김은선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철저한 사전답사와 준비를 통해 만족스러운 투어를 선사했다. 서울시립대는 자작마루의 문을 열어줬고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동광대장간, 금강헤어라인의 장인으로부터 자부심 어린 뒷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가곡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같은 아리아가 흐른 10월의 마지막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였다.청량리는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인창방 청량리계에 속하는 고요한 성 밖 동네였다. 1911년 경기도 경성부 인창면 청량리,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청량리를 거쳐 1946년에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으로 자리잡았다. 서울과 경기도를 들락날락한 동쪽 교외(동교)였다. 겸재 정선이 남긴 ‘동문조도’(東門祖道)라는 진경산수화에 300년 전 동대문 밖 풍경이 등장하는데 낙산과 동망봉, 안암, 용마산 아래 동묘와 청량리 일대가 펼쳐져 있다. 조도란 길 떠나는 사람을 송별한다는 뜻이니 동대문 밖 청량리가 서울을 벗어난 첫 지점이라는 장소성이 내재돼 있다. 그러나 용두동·제기동·전농동 등 이른바 청량리 일대는 왕이 몸소 농사를 짓는 친경(적전)을 두고 제사를 모신 점에서 여타 교외 지역과는 격을 달리했다. 적전은 한성과 개성 2곳에 뒀는데 한성의 적전을 동적전, 개성의 적전을 서적전이라고 지칭했다. 김정호의 경조오부도를 비롯한 대부분의 고지도에 동적전을 안암천(성북천)과 정릉천 사이에 표시하고 있고 동적전의 관리청인 필분각이 있던 텃골과 곡식을 저장하던 창고마을인 창마을(倉村)이 오늘의 서울시립대 앞 전농로에 있었다. 선농단의 친농의례는 종묘제와 사직제, 환구제의 대사(大祀)에 이어 중사(中祀)의 위상을 가졌다. 조선 성종 6년(1475)에 적전의례가 처음 실행된 뒤 연산군, 중종, 명종, 선조, 광해군 때 1회씩 거행됐으며 이후 영조와 고종, 순종 때 자주 거행됐다. 선농대제가 끝난 뒤 소를 잡아서 참가자들에게 나눠 준 게 설렁탕(설롱탕)의 유래가 됐다. 청량리(淸凉里)는 신라 고찰 청량사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청량이란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청량산에서 따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삼각산(북한산)에 청량사가 있다고 적었다. 또 고려 예종 12년(1117) 왕이 남경(서울)에 행차하면서 청량사에 머문 사실도 전한다. 세종 5년(1423) “태조의 공신은 청량사에, 태종의 공신은 승가사에서 주상의 탄신일에 장수를 기원하자는 재를 열자”는 세종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조선 초 청량사의 격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청량사는 1897년 명성황후가 홍릉에 들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선농단 일대는 참담한 변화를 겪는다. 고종은 영조 이후 100년 넘게 거행하지 않던 친경례를 부흥시켰고, 순종은 1909년과 1910년 두 차례 친경례를 행했지만 1908년 개정된 제사제도 칙령에 의해 선농단의 위패는 사직단으로 옮긴 뒤여서 사실상 폐지된 것과 다름없었다. 일제는 선농단 터에 느닷없이 잠업기술 및 기술자를 양성하는 잠업시험소의 전신 원잠종제조소를 설치했다. 또 1934년 경성여자사범학교 부지로 제공, 기숙사를 짓는 과정에서 원형을 잃었다. 일제강점기 선농단은 청량대(淸凉臺)라는 공원으로 훼손됐다.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책동이었다. 지금도 청량대라고 새겨진 빗돌 하나가 누워 있다. 광복 후 주민들이 넘어뜨려 울분을 달랬다고 안내문에 적혀 있다.선농단은 1950~60년대 서울사대부고나 서울사범대생들에게 개나리와 벚나무, 측백나무가 우거진 뒷동산으로 기억되고 있다. 선농단 터라는 사실은 알지 못하고 왕이 농사를 지은 장소 정도로 알았다. 휴식과 축제 장소로 사용했다. 대학신문 1961년 4월 27일자 ‘청량대 새 단장’이라는 기사에서 “왕이 백성들의 농사하는 모습을 살피려고 올라서곤 했던 청량대 비석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도록 그 위치를 옮긴다. 가장 큰 나무인 향나무에 중점을 두고 주위의 다른 나무들은 제거 혹은 이식시킨다”고 적혀 있다. 선농단 터는 제기동에 속하지만 1970년대까지는 제기동과 용두동 경계에 걸쳐 있었다. 이후 116개의 필지로 분할됐다. 우뚝 솟은 향나무 한 그루가 선농단의 존재를 말없이 증언하고 서 있다. 천연기념물 제240호로 지정된 높이 10m, 줄기의 둘레 2m에 이르는 600년 묵은 이 노거수는 다른 향나무처럼 휘어지지 않고 위로 곧게 자란 게 특징이다. 청량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청량리역, 588 집창촌, 서울약령시로 이름을 바꾼 경동시장 등이다. 주민의 삶이 아니라 외부인의 시각이다. 청량리의 두드러진 정체성은 철도이다. 청량리역은 1950~60년대 철도교통의 발달에 따른 도시적 확장 과정의 산물이다. 근대교통기관인 전차가 1899년 처음으로 홍릉까지 왕래했고, 수송의 중심이 전차에서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1968년 70여년간의 전차운행이 중단될 때까지 전차노선의 중심이었다. 1911년 경원선 철도가 일부 개통됐고 1939년에는 경춘선이 성동역(제기역)을 기점으로 운행된 데 이어 중앙선까지 연결되면서 청량리는 물자 유통과 여객 수송의 요충지이자 철도 중심지로 명맥을 이었다. 1974년 개통된 지하철 1호선이 근대 전차의 첫 목적지였던 청량리 궤도를 여전히 달리고 있다. 관사주택과 부흥주택, 도시 한옥, 시민아파트에 이르기까지 도심주변부 근대도시 주거지의 역할을 해냈다.서울약령시는 1000여 한의약 관련 전문 업소가 모여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한약재 전문시장으로 전국 한의약 약재의 70%가 거래되고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서울의 문학3(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일시 : 11월 3일(토) 오전 10시~12시 ●집결장소 : 지하철 2호선 신촌역 3번 출구 앞 ●신청·안내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go.kr)
  •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역사란 무엇인가 - 대치동 구마을에서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역사란 무엇인가 - 대치동 구마을에서

    평소 일이 있어서 어딘가 갈 때면 지도앱의 스카이뷰 모드를 켜고 지리를 살핀다. 그곳의 지형과 길, 유적지와 가게들을 훑어보고, 눈에 띄는 것이 있으면 약속시간보다 두 시간 정도 먼저 가서 답사한다. 서울 등 수도권은 넓기 때문에 내가 가보지 않은 곳이 많다. 그리고 ‘서울은 만원’이 아니라 ‘서울은 공사 중’이어서 아직 가보지 못한 곳들이 오늘도 재개발?재건축되고 있다. 서울답사가의 마음은 바쁘고 발길은 빨라진다.대치동 지역에 눈이 간 것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였다. 잡지 인터뷰 건으로 대치동에서 미팅이 잡힌 김에 이 지역을 답사하려고 지도앱을 켜고 이리저리 살피다가 특이한 사실을 확인했다.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된 대치동의 곳곳에 빗금처럼 사선으로 난 길과 구불구불한 길이 보였다. 사선으로 난 길은 역삼로 69길과 역삼로 73길, 도곡로 73길이었고, 구불구불한 길은 이른바 대치동 구마을이다. 이 길들이 신경 쓰여 1974년에 찍은 항공사진과 비교해봤더니 영동 개발 중이던 40여년 전에도 그 길들이 있었다. 좀 더 알아봐야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 길들이 강남 개발 이전의 농촌 강남 시절부터 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1974년 항공사진을 실마리 삼아 대치동 구마을에 가보니 이곳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가파른 계곡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영동 개발 때에도 일단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때 어떤 중년 남성이 “어디서 나오셨냐”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늘 겪는 일이다. 서울은 오늘도 어딘가에서 공사 중이고 임차인은 늘 쫓겨나고 있다. 개발을 추진하는 관청 공무원이나 건설회사 직원으로 생각한 임차인 분들이 경계의 눈빛을 보내온다. 이 대치동 구마을은 강남 개발 과정에서 살아남은 옛 영동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띤 곳이라고 설명했더니, “여기 볼 게 뭐 있다고 오셨냐”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언제나 역사란 국가나 왕족이나 양반의 것이라고 교육받은 한국 시민들의 생각이 바로 이와 같기 때문이다. 역사의식이란 국가나 민족이 아니라, 내 가족과 우리 마을에서 시작해서 귀납적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서울과 수도권의 시민들은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임차인으로 살고 있기에,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이 어떤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갖고 있는지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사대문안에 있는 지배층의 역사적 흔적에 대해 배우고 이것들이야말로 가치있는 역사라고 주입받는다. 그 후로 매달 한 번씩은 대치동 구마을을 답사하고 있는데, 최근 들어 개발 속도가 빨라져서 주민들의 이주가 상당히 진행된 모양이다. 1970년대 강남의 풍경을 남기고 있는 ‘평화의 교회’라는 건물이 구마을 남쪽에 있다. 교회 계단 아래에는 “내 집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라”라는 글자가 소박한 손글씨로 새겨져 있다. 옛 강남과 영동 개발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로서 공공 박물관에서 이 머릿돌만이라도 수집해 주면 좋겠다.
  • 의병 홍범도·시인 윤동주가 통탄할 너무 매끈히 덧입힌 ‘그날들의 흔적’

    의병 홍범도·시인 윤동주가 통탄할 너무 매끈히 덧입힌 ‘그날들의 흔적’

    러시아 크라스키노에서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 훈춘시로 가려면 러시아, 중국 세관을 차례로 거쳐야 한다. 수백여m를 사이에 두고 두 곳은 극명히 비교된다. 낡고 허름한 러시아 세관에 비해 중국 세관은 최신 지문 인식 기계를 도입했고, 규모 역시 수십 배나 된다. 비포장도로도 중국으로 들어서면 매끈한 아스팔트로 바뀐다. 달라진 중국의 모습을 새삼 느낀다.지난 24일 훈춘시에서 하루를 보내고 투먼시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1시간 정도 더 가면 왕칭현 봉오동이다. ‘봉오저수지’라는 한글과 한자를 함께 적은 간판을 지나 10여분을 더 걸어가니 매끈한 화강암으로 만든 ‘봉오동 기념비´가 나온다. 2013년 투먼시 인민정부가 세운 것으로, 글씨 윗부분에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 별 문양이 붙었다. 그 뒤로 100m 정도 떨어진 흙바닥에 1993년 만든 낡은 기념비가 적벽돌 주춧돌을 그대로 드러낸 채 방치돼 있다.두 기념비는 문구가 조금 다르다. 새 기념비는 봉오동전투에 관해 “중국 조선족 반일무장이 여러 민족 인민들의 지지하에 처음으로 일본 침략군과 맞서 싸워 중대한 승리를 거둔 규모가 비교적 큰 전투”라는 부분을 추가했다. 두 개의 기념비에서 중국의 역사관을 어렴풋이 느낄수 있다. 기념비 왼편 계단을 올라 비탈길을 10분 정도 더 가면 봉오동 전적지를 볼 수 있다. 1970년대 후반에 댐을 만들며 많은 지역이 수몰됐지만, 그나마 저수지 너머로 당시 전투지가 남아 있다.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연해주를 비롯해 간도와 만주에서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일어났다. 이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나들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 정규군과 싸워 최초로 승리한 전투가 바로 봉오동 전투다. ‘나는 홍범도´로 불리는 의병장 홍범도가 이끄는 부대와 난무의 대한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가 산에서 매복하다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한 야스가와 지로 소좌가 이끄는 일본군 19사단의 ‘월강 추격대대’를 격파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군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독립군 전사 4명, 부상 2명이라고 발표했다. 다만 이 숫자에 관해서는 의견이 여전히 갈린다. 버스를 타고 80㎞를 달려 옌지시로 향했다. 한 식당에서 옌볜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학자로 꼽히는 김성호(67·전 조선력사연구소장) 옌볜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그는 1980년대 평양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에서 근현대사를, 1990년대는 인하대에서 조선근현대사를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은 독특한 이력이 있다. 그에게 봉오동전투 일본군 사상자 수가 왜 불명확한지 묻자 “하나의 역사를 두고 조선, 미국, 중국, 일본이 다 다르게 말했다. 자기 나라에 맞게 부풀리거나 줄이는 사례가 당시에는 흔했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에 관해서도 “당시 독립신문이 일본군 2000명이 죽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장소에 직접 가 봤나. 2000명이 누울 자리 있던가”라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과거와 달리 지금도 정권이 앞장서서 그런 식으로 주장하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남북이 갈라진 지금 역사 인식을 통해 분단 사관을 극복해야 한다”며 “안중근 의사, 일본군 위안부, 항일투쟁 등 남북 역사학계가 함께할 수 있는 주제부터 다뤄야 한다”고 충고했다.옌지시에서 룽징시를 향해 1시간 정도 더 달리면 명동학교가 나온다. 명동학교는 ‘간도 대통령’으로 불린 민족운동가 김약연이 세운 학교다. 그는 1908년 간도 명동으로 이주해 한인 집단 촌락을 건설하고, 명동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렀다. 윤동주를 비롯해 문익환, 나운규, 송몽규 등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1929년까지 모두 1200여명의 졸업생이 나왔다. 졸업생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윤동주다. ‘명동’, ‘윤동주 생가’라고 쓰인 큰 안내돌을 돌아 마을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윤동주 생가와 마주한다. 1932년 윤동주가 용정 은진학교에 진학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팔려 허물어졌던 것을 1994년 복원했다. 윤동주는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편입해 공부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해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 도쿄 릿쿄대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교토 도시샤대 문학부로 전학했다.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했지만, 항일독립운동으로 1943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당하다 옥사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게 살기를 바랐던 민족시인의 향취를 이곳에서 느끼긴 어려웠다. 명동촌은 봉오동 전적지와 마찬가지로 ‘연변조선족자치주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돼 관리 중이다. 집 인근에 윤동주의 시가 적힌 금색 조형물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이곳에서 200여m 정도 떨어진 명동학교는 너무 번듯하게 새로 지어놔 어색하기까지 했다. 명동학교에 들어가니 교실에 윤동주 인형을 만들어 사진 촬영용으로 쓰고 있었다. 준수한 얼굴의 인형을 바라보며 실소가 났다. 명동학교의 옛 모습은 간데없고 인공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값싼 관광지를 찾은 느낌만 들었다. 현지 가이드가 ‘중국은 돈 되는 것이라면 뭐든 한다’며 농담을 건넸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명동학교를 나와 가곡 ‘선구자’의 배경이 된 룽징시 비암산의 일송정으로 향한다. 버스를 타고 산 정상까지 오르며 조잡한 관광물을 계속 마주쳐야 했다. 일송정 역시 울긋불긋한 정자로 탈바꿈한 지 오래다. 독립운동가들이 바라보며 울분을 달래고 마음을 다잡았던 해란강이 시야에 들어온다. 흔적만 남은 러시아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중국풍으로 바뀐 중국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돌아보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해를 등지고 산에서 내려오며 ‘우리는 그동안 무얼 했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글 투먼·룽징(중국)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역사란 무엇인가 - 대치동 구마을에서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역사란 무엇인가 - 대치동 구마을에서

    평소 일이 있어서 어딘가 갈 때면, 지도 애플리케이션의 스카이뷰 모드를 켜고 지리를 살핀다. 그곳의 지형과 길, 유적지와 가게들을 훑어보고, 눈에 띄는 것이 있으면 약속 시간보다 두 시간 정도 먼저 가서 답사한다. 서울 등 수도권은 넓기 때문에 내가 가보지 않은 곳이 많다. 그리고 “서울은 만원”이 아니라 “서울은 공사 중”이어서, 아직 가보지 못한 곳들이 오늘도 재개발?재건축되고 있다. 서울답사가의 마음은 바쁘고 발길은 빨라진다.대치동 지역에 눈이 간 것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였다. 잡지 인터뷰 건으로 대치동에서 미팅이 잡힌 김에 이 지역을 답사하려고, 지도앱을 켜고 이리저리 살피다가 특이한 사실을 확인했다.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된 대치동의 곳곳에, 빗금처럼 사선으로 난 길과 구불구불한 길이 보였다. 사선으로 난 길은 역삼로 69길과 역삼로 73길, 도곡로 73길이었고, 구불구불한 길은 이른바 ‘대치동 구마을’이다. 이 길들이 신경쓰여 1974년에 찍은 항공사진과 비교해봤더니, 영동개발 중이던 40여년 전에도 그 길들이 있었다. 좀 더 알아봐야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 길들이 강남개발 이전의 농촌 강남 시절부터 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1974년 항공사진을 실마리삼아 대치동 구마을에 가보니, 이곳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가파른 계곡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영동 개발 때에도 일단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때 어떤 중년 남성이 “어디서 나오셨냐”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답사 다니다보면 늘 겪는 일이다. 서울은 오늘도 어딘가에서 공사 중이고 임차인은 늘 쫓겨나고 있다. 40대 초반의 남자가 혼자 다니면서 사진찍고 있으면, 나를 개발을 추진하는 관청 공무원이나 건설회사 직원으로 생각한 임차인 분들이 경계의 눈빛을 보내온다. 그래서 “서울 역사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답하고, 1974년의 항공사진을 보여드리면서, 이 대치동 구마을은 강남 개발 과정에서 살아남은 옛 영동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띤 곳이라고 설명드렸다. 내 설명을 들은 그 중년 남성분은 내가 재개발 관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하신듯, 한 마디 하셨다. “여기 볼 게 뭐 있다고 오셨냐”. 이 말을 듣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언제나 역사란 국가나 왕족이나 양반의 것이라고 교육받은 한국 시민들의 생각이 바로 이와 같기 때문이다. 역사의식이란 국가나 민족이 아니라, 내 가족과 우리 마을에서 시작해서 귀납적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수많은 서울과 수도권의 시민들은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임차인으로 살고 있기에,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이 어떤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저 멀리 서울 사대문안에 있는 지배층의 역사적 흔적에 대해 배우면서, 이것들이야말로 가치있는 역사라고 주입받는다. 흔히 한국인은 역사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나는 많은 한국 시민이 자신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있는 역사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 이데올로기로서의 역사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란 무엇인가. 그 후로 매달 한 번씩은 대치동 구마을을 답사하고 있는데, 최근 들어 개발 속도가 빨라져서 주민들의 이주가 상당히 진행된 모양이다. 1970년대 강남의 풍경을 남기고 있는 “평화의 교회”라는 건물이 구마을 남쪽에 있다. 교회 계단 아래에는 “내 집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라”라는 글자가 소박한 손글씨로 새겨져 있다. 옛 강남과 영동 개발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로서, 공공 박물관에서 이 머릿돌만이라도 수집해 주시면 좋겠다.글 사진: 서울대 규장각 교수
  • 안중근 의사 의거일에 불거진 ‘김재규 의사’ 논란...‘적폐 청산 주역’ vs ‘갈등 유발 소지’

    안중근 의사 의거일에 불거진 ‘김재규 의사’ 논란...‘적폐 청산 주역’ vs ‘갈등 유발 소지’

    “김재규 의사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만주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 109년이 되는 날인 26일, 인터넷 상에 “김재규 의사를 추모한다”는 글이 잇따라 올라와 논란이 예상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권총으로 살해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의사’로 칭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지를 놓고 보수·진보 세력 간 갈등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에 맨 몸으로 저항해 자신의 지조를 나타낸 사람은 ‘열사’, 무력으로 항거한 사람을 ‘의사’로 정의한다. 1970년대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에서 독립운동사 편찬을 앞두고 항일 선열들의 공적을 조사하면서 처음 정해졌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친 희생 정신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용어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 내린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쏜 안중근 당시 대한의군 참모중장은 무력으로 항거했기 때문에 의사로 불린다. 하지만 비참한 노동자의 현실을 바꾸고자 자신의 몸을 불태운 전태일 ‘열사’처럼 의사, 열사라는 표현이 독립운동가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이유로 일부 네티즌들은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박 전 대통령을 총으로 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도 ‘김재규 의사’로 불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적폐 청산에 앞장 선 인물인만큼 역사적으로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날도 일부 인터넷 게시판에는 “39년 전 오늘, 유신의 종지부를 찍은 고 김재규 의사의 명복을 빕니다”란 글이 어김없이 올라왔다. 사형 집행 당일 그가 남긴 마지막 발언 중 일부인 ‘국민 여러분, 자유 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십시요. 저는 먼저 갑니다’라는 내용과 함께 “언젠가 복권되고 국립현충원에 모시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라는 글도 있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안중근 의사 의거, 10·26 사태,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 모두 10월 26일이란 점에서 이날을 ‘탕탕절’로 명명하고 탕수육 먹는 날로 기념하자는 움직임도 있다. 실제 일부 네티즌은 탕수육 먹은 사진을 ‘인증샷’이라며 올리기도 했다.이에 대해서는 불편하다는 시선도 없지 않다. 안중근 의사 의거 109주년을 맞아 고귀한 희생 정신을 기리는 날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이들을 잊지 않기 위해 쓰는 표현(의사, 열사)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표현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외부로 드러낼 수는 있지만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은 표현은 사회적 갈등을 유발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전쟁은 세상을 협력하게 만든다

    전쟁은 세상을 협력하게 만든다

    초협력사회/피터 터친 지음/이경남 옮김/생각의힘/376쪽/1만 800‘인간사회의 발달은 전쟁을 빼놓곤 설명할 수 없다.’ ‘전쟁은 세상을 협력하게 만든다.’ 전쟁을 없애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목소리가 요란한 지금, 전쟁 타령이 새삼스럽다. 하지만 따져보면 그 주장은 괜한 게 아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또 다른 세계대전을 막기 위해 창설된 유엔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치열한 경쟁 당사자 15개국이 지원하는 합작 프로젝트인 국제우주정거장(ISS)은 또 어떤가. 현재 ISS를 지원하기 위해 세금을 보태는 사람은 전 세계 10억명이 넘는다. “나는 전쟁 예찬론자가 아니다.” 인류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피터 터친 옥스퍼드대 인류학과 연구교수는 결코 전쟁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지 않는다. ‘창조적 파괴’라는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의 유명한 말에 빗대, 전쟁을 ‘파괴적 창조’로 자리매김해 눈길을 끈다. 인류 사회의 진화 원인을 전쟁의 발전 과정에서 찾아낸 것이다. “인류가 거대한 협력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도, 오랜 평등의 시기를 마친 후 극도의 불평등 시기를 거쳐 또다시 평등한 시대를 열게 된 것도 전쟁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리고 그 전쟁에 ‘협력’이란 결정적인 키워드를 얹는다.“어떻게 생면부지의 수많은 인간들이 협력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됐을까.” 책은 그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많은 사가들은 협력의 진화를 농경사회에서 찾는다. ‘총, 균, 쇠’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대표적이다. “최초로 농사를 지을 지역을 결정한 것은 지형이었고, 그것이 이후의 인간 역사를 엮어 갔다.” 하지만 터친 교수의 주장은 다르다. 농업은 복잡사회 진화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낯선 사람들과 협력할 줄 아는 인간의 능력.’ 터친 교수가 주목한 건 인류의 초협력성이다. 그는 그 초협력성이 바로 전쟁과 함께 발전돼 왔다고 일관되게 말한다. “집단의 생존이 좌우될 만큼 혹독한 환경적 조건에서라면 협력을 잘 이루어낸 집단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고 협력을 잘 이루어낸 집단일수록 더 큰 규모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게 핵심이다. 널리 알려졌듯 유라시아 대초원에서 시작된 군사기술은 대륙과 산맥, 바다, 사막지대 등 지형을 가리지 않고 확산됐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농경지가 언제 어디서 큰 국가로 발전했는지 알려면 무엇보다 전쟁의 패턴을 잘 살펴야 한다.” 전쟁의 파괴적 창조성을 설파한 선인들은 숱하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전쟁에 주목한다. “소규모 수렵채집인과 농경마을에서 정교한 통치제도와 복잡하고 매우 생산적인 경제생활로 인간을 탈바꿈시킨 것은 집단 간 경쟁으로, 보통 전쟁의 형태를 띤다.” 그런가 하면 스위스 역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전쟁과 파괴를 일삼는 힌두교 신 시바를 놓고 이렇게 설명한다. “파괴의 즐거움이 가득한 전쟁은 폭풍우처럼 대기를 맑게 씻어내고 용기를 한층 북돋우며 영웅적 성품을 회복시켜 준다. 국가는 원래 게으름과 배신, 비겁함을 몰아내고 회복한 영웅적 성품을 기반으로 설립되었다.” 하지만 ‘파괴적 창조’라는 전쟁의 발달과 확산은 책의 핵심 테마가 아니다. 그 주장의 요체는 확장된 사회나 국가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 협력의 가치를 제대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대규모 사회가 여전히 취약하다는 전제가 깔렸다. 1970년대의 북아일랜드처럼 북아메리카나 서구 유럽에서도 협력은 한순간에 와해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사회 전반, 특히 규모가 큰 사회에서의 협력은 본래적으로 허약할 수밖에 없고 그럴 때 파괴적 창조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협력은 쉽게 와해되고 만다.” 책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역사는 과학’이라는 강변이다. “‘협력의 과학’을 이용해 효과적인 정책을 제시하고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수단까지 개발해야 합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바다와 바람이 쉬는 거제!

    바다와 바람이 쉬는 거제!

    거제도는 제주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육지와 다리로 연결된 섬 중에서는 단연 큰 규모를 자랑한다.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한 지심도, 외도 등 부속 섬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긴 하지만 본섬은 그간 관광지로는 주목을 덜 받은 게 사실이다. 1970년대 이래 조선산업의 전진기지로서 한국 수출에 큰 기여를 해 온 덕에 섬이지만 공업도시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 거제가 변하고 있다. 예부터 이름난 명승지뿐 아니라 새로운 관광상품 개발을 위한 노력도 하고 있다.●거제관광모노레일 -정상에 오르면 가슴 확 트인 풍경 거제관광모노레일은 이런 변화의 상징이다. 거제시청이 위치한 거제도 중심 고현동의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과 해발 566m 높이의 계룡산 정상을 잇는다. 왕복 3.45㎞의 모노레일은 소나무와 편백나무가 울창한 숲 사이로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져 있다. 고가 위로 건설된 대형 모노레일이 아니다. 산세를 따라 오르내리며 운행하는 6인승 미니 모노레일을 타면 앉아서 등산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산 정상까지 25분가량 천천히 운행되니 자칫 지루할 수도 있지만 마음을 내려놓고 주변 숲과 앙증맞게 조성된 돌무더기 등을 감상하다 보면 힘들이지 않고 정상에 다다른다. 정상에 오르면 가슴이 확 트인 풍경이 발아래로 펼쳐진다. 섬의 서부 중앙부에 있는 거제면 어촌 풍경이 남해 바다 앞에 고적하게 드러누워 있다. 마을 뒤로는 노랗게 익어 가는 들판이 펼쳐지고, 주위를 봉긋한 언덕들이 에워싸고 있다. 바다 위로 조약돌처럼 떠 있는 섬들은 그림 같은 경치에 더해진 꽃송이 같다. 반대편 전망대로 발길을 옮기면 바다 풍경보다 운치는 덜하지만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빼곡히 늘어선 아파트와 마주한 조선소 크레인이 거제만의 그림을 그려 낸다.●매미성-아담한 성 안 계단을 오르면 어쩐지 묘한 기분 최근 몇 년간 입소문을 타고 있는 매미성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거제시청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이색적인 장소다. 매미성은 시에서 관리하는 관광지는 아니다. 2003년 태풍 ‘매미’로 자신의 농지가 망가지는 것을 경험한 벡순삼씨가 다시는 태풍 피해를 당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해안가에 쌓기 시작한 것으로, 사유지다. 한 개인의 손으로 십수년간 차곡차곡 쌓아 올린 건축물은 성이라고 부르기엔 한없이 소박하다.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이지만 ‘관광’할 거리는 이렇다 할 게 없다. 그러나 이 아담한 성 안으로 난 계단을 하나씩 오르면 어느새 어딘가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다른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기묘한 기분마저 든다. 계단 중간쯤에 걸터앉아 조금씩 빛깔이 달라지는 하늘에 눈을,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에 귀를 기울이면 시간은 그저 흘러간다. 까만 몽돌이 펼쳐진 해변에 앉으면 파도소리가 한결 가까이 들린다. 밀려올 때는 쏴 하는 여느 파도소리와 다름없지만 몽돌을 씻으며 바다로 물러갈 때는 몽돌에게 친구 하자고 재잘대는 것 같다. 몽돌의 매력에 빠졌다면 거제의 많은 해변 중 가장 유명한 학동흑진주몽돌해변에 들러보는 것도 좋겠다.●인기 명소 바람의 언덕… 푸른 바다 펼쳐지는 신선대 매미성과는 정반대 편에 있지만 거제8경 중 제1로 꼽는 바람의 언덕과 신선대를 빼놓으면 섭섭하다. 차로 1시간가량 남쪽으로 달려야 하는 먼 길이 지루하지는 않다. 해안도로 옆으로 스치는 풍경들은 그 자체로 여행의 즐거움이 된다.거제도 남쪽 끝자락 동으로 삐죽 나온 곶 북쪽에 바람의 언덕이 있다. 여러 드라마 촬영지로 인기를 얻은 곳이라 거제를 찾은 여행자라면 누구나 들르는 명소다. 억새풀 사이로 솟은 언덕 위에는 네덜란드풍 풍차가 있어 이곳이 바람의 언덕임을 알려준다. 경관을 해치는 설치물인 듯싶다가도 기념사진을 남기기엔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선대는 바람의 언덕에서 차로 이동하면 지척이다. 바다를 향해 절벽을 이루고 있는 기암괴석의 아름다움에 하늘에서 내린 것 같다는 이름이 붙었다. 신선대 너른 바위 위에서 바다를 바라볼 수도 있지만 신선대 자태를 감상하기에 적합한 곳은 따로 있다. 신선대 전망대에 오르면 가까이로는 신선대 앞 송도부터 멀리로는 다포도, 대병대도, 대매물도 등 겹겹이 포개진 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햇빛을 하얗게 반사하는 푸른 바다, 그 위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여행자의 마음을 시원하게 씻어 준다. 글 사진 거제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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