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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윤경의 노동을 묻는다] 노동자를 노동자라 부르지 못하고

    [이윤경의 노동을 묻는다] 노동자를 노동자라 부르지 못하고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노동자를 노동자라 부르지 못하는 기구한 사연이 있다. 1945년 해방 후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했는데, 1948년 남과 북에서 따로 정권이 수립되고, 남한에서 제헌헌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노동이라는 단어는 점차 금기어가 됐다. 노동 대신 근로라는 말로 대체됐다. 노동과 노동자를 사회주의, 공산주의 언어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1958년부터는 노동절이 근로자의날로 이름이 바뀌었고, 기념일도 5월 1일에서 대한노총(현 한국노총의 전신)의 창립일인 3월 10일로 변경됐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발전 시기에 한국의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노동자라 부르지 못하고, 그저 열심히 근로를 제공하는 근로자로 명명됐다. 물론 일상에서는 공순이, 공돌이라는 비하적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됐다. 1994년에야 근로자의날은 다시 5월 1일로 되돌려졌지만, 아직도 한국의 헌법과 노동 관련 법률에는 노동자가 아닌 근로자가 공식 용어로 사용된다. 아직도 ‘근로자’를 ‘노동자’로 바꾸지 않는, 또는 바꾸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반노동 정서와 반노동 정치 현실을 반영하는 예가 아닐까 한다. 최근에는 또 다른 형태가 노동 시장에서 횡행한다. 신자유주의에 따른 노동시장 변화는 노동자들을 수많은 ‘신분’으로 나누어 사용자들이 노동 비용 줄이는 것을 용이하게 해 왔다. 자본가들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전술 하나가 노동자를 노동자가 아닌 것으로 위장하는 고용관계 숨기기다. 이를 통해 사용자는 고용관계에서 발생하는 책임을 회피해 노동 비용을 줄일 수 있고, 노동자는 근로기준법의 기본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 첫째, 특수형태 근로 종사자로 분류된 노동자들은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근로자를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서 근로를 제공하는 자로 규정하고, 사용자로부터 업무 내용, 근무 시간과 장소에 대해 지시를 받는 자로 보고 있다. 그런데 대리운전 기사, 퀵서비스 기사, 대출 모집인, 골프장 캐디, 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 가정 방문 가전제품 수리 및 설치 기사 등은 특수형태 근로 종사자, 즉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있다. 사실상 사용자에게 고용돼 사용자로부터 업무 내용, 근무 시간과 장소에 대해 직접적인 지시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노동자는 개인사업자로 허위 분류돼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플랫폼을 통해 노동을 제공하는 노동자들이다. 플랫폼 경제는 앱을 기반으로 인력을 매칭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는데, 이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수는 세계적으로 증가 추세이고 한국 또한 마찬가지다. 현재 한국의 플랫폼 노동자 수는 노동 인구의 3%(60만명) 정도가 된다고 하고, 이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문제는 이들 또한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플랫폼 경제는 당연히 플랫폼을 운영하는 회사와 이를 통해 단위 노동ㆍ서비스를 배당받는 플랫폼 노동자, 그리고 단위 노동ㆍ서비스를 제공받는 소비자로 구성된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 플랫폼 노동자의 4분의3 이상이 한 회사로부터 소득의 절반 이상을 받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이들 플랫폼 노동자들이 플랫폼 운영 회사와 맺고 있는 고용관계가 명백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플랫폼 경제의 메카라 할 미국에서도 이는 심각한 노동 문제로 제기되고 있고, 최근 캘리포니아 주의회는 우버 운전자를 노동자로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셋째, 한국에서 노동자라 불리지 못하는 노동자는 가사 도우미 또는 육아 도우미라 불리는 여성 노동자들이다. 앞에서 언급한 근로기준법은 근로자의 법적 범위를 규정하면서 제11조 1항에 예외 조건을 두었는데, 가사 사용인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조항이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우리가 재생산 노동이라 부르는 가사, 육아, 돌봄 등이 노동으로 간주되지 않고, 재생산 노동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여성 노동자를 노동자로 보지 않는다. 이런 예외 조항이야말로 한국 노동법이 얼마나 재생산 노동에 무지하며, 여성 노동을 가치절하하는지, 따라서 얼마나 남성 중심적 제도인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노동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려면 노동자를 노동자로 부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기본 노동권을 보호받고, 사용자는 고용 관계의 책임을 회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 [In&Out] 한·아세안 경제 협력 성과와 과제/신윤성 산업연구원 신남방산업실장

    [In&Out] 한·아세안 경제 협력 성과와 과제/신윤성 산업연구원 신남방산업실장

    대한민국은 1960년대 이후 수출과 무역으로 급속히 성장했다. 특히 수출 경쟁력을 유지하고 안정적인 해외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글로벌 주요 국가들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다. 2004년 한·칠레 FTA를 시작으로 2007년 아세안, 2011년 유럽연합(EU), 2012년 미국을 거쳐 최근엔 영국과 FTA를 맺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촉발된 ‘신(新)보호무역주의’의 대안으로 우리 정부는 2017년 11월 신남방정책을 공식화했고 그동안 주변 4강에 비해 관심을 받지 못했던 아세안과의 협력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아세안은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베트남, 라오스 등 10개국으로 구성된 경제 공동체로 인구 세계 3위, 경제 규모 세계 4위의 거대 경제권을 형성하고 있다. 아세안 국가들은 최근의 글로벌 경제 침체에도 불구하고 5% 이상의 급속한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미중 무역분쟁 상황에서 중국을 대체할 수 있는 생산기지로 주목받고 있다. 상품 제조뿐 아니라 국제적인 차량공유 서비스업체인 ‘그랩’을 비롯한 다수의 유니콘기업이 탄생하는 혁신성장의 무대로 변모하고 있다. 아세안을 대상으로 우리나라는 2007년 체결된 FTA를 토대로 투자와 교역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현재 아세안은 중국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수출시장이 됐으며, 최대의 해외건설 수요처, 3위의 투자 대상 경제권역으로 성장하고 있다. 투자 형태 역시 초기의 저임금에 기반한 상품 제조에서 탈피해 최근에는 현지시장 진출을 목적으로 하는 형태로 고도화되고 있다. 지난해 사상 최대인 1597억 달러의 교역 실적은 정부의 노력과 변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세안과의 교류 확대 이면에는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아세안에 대한 교역과 투자에서 베트남이 차지하는 비중이 52%나 되면서 다른 국가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또 405억 달러에 이르는 대(對)아세안 무역수지 흑자는 아세안 국가로부터 불만의 대상이기도 하다. 상품 교역과 인적 교류가 확대되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아세안의 다양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세안은 ‘10국 10색’이라고 할 정도로 다양성을 갖고 있어 국가별, 지역별로 적합한 접근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이해는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5~26일 부산에서 개최되는 ‘제3차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는 우리와 아세안이 한 단계 높은 상호 이해와 협력의 단계로 나갈 것임을 선언하는 중요한 자리가 된다. 정상회의와 병행해 개최되는 ‘제1차 한·메콩 정상회의’는 아세안 국가를 세분화하고 협력의 수준을 제고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시작된 북방정책을 통해 우리의 경제·외교적 지평이 넓어졌듯이, 신남방정책은 우리의 시야와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도 된다. 가까운 이웃 아세안은 어느덧 우리 옆에 와 있다.
  • 서울대 중심 인재·기업 몰리는 ‘혁신경제도시’가 관악의 미래

    서울대 중심 인재·기업 몰리는 ‘혁신경제도시’가 관악의 미래

    서울 관악구는 1960년대 도심 개발 과정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이 정착한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로 출발했다. 입지적으로 강남에 위치하면서도 낡은 단독주택이 밀집해 있고 고질적인 교통난을 해소하지 못해 부동산 시장에서 줄곧 소외돼 왔다. 종사자 10명 미만의 영세사업체가 전체 지역 생산의 94.5%를 차지할 만큼 경제·산업 기반도 취약하다. 관악에서 16년간 구의원 두 번과 시의원 두 번을 지낸 박준희 관악구청장은 이 같은 문제의 해법으로 혁신경제를 내놨다. 미국 스탠퍼드대와 실리콘밸리처럼 서울대를 중심으로 인재와 기업이 몰리고 그게 도시 경제 발전으로 이어지는 ‘혁신경제’ 도시로 만들겠다며 서울대와 협력해 창업 클러스터인 ‘낙성벤처밸리’ 조성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역 교통난을 개선하기 위해 서울시의원 시절부터 꾸준히 추진한 신림선·서부선·난곡선 등 3개 노선의 경전철 도입 사업도 2022년부터 순차적으로 구체화된다. 서울시에 건의해 생태하천으로 복원한 관악의 센강인 도림천에서 지난 18일 그를 만나 관악의 도시 비전에 대해 들었다.-주력 공약 사업인 산학협력 벤처밸리인 낙성벤처밸리 조성 사업이 취임 1년 만에 속도를 내는데. “서울대가 관악에 자리잡은 지 40여년이 됐지만 그동안 우수한 자원과 지역을 제대로 연계하지 못했다. 우수한 졸업생들이 관악을 떠나지 않고 이곳에서 무엇인가 미래를 도모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관악의 미래가 달려 있다. 이에 서울대 연구공원부터 낙성대로, 남부순환로 일대 45만㎡가량의 부지에 낙성벤처밸리 조성 사업을 추진 중이다. 관악구와 서울대가 협력해 지역 내 벤처·창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스탠퍼드대가 있는 미국 실리콘밸리나 칭화대가 있는 중국 중관춘을 보면 우수한 대학이 있는 곳에 기업이 몰리고 이것이 지역의 경제 발전으로 이어졌듯 국내 최고의 대학인 서울대가 있고 전국에서 청년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의 특성을 살려 낙성벤처밸리를 조성해 관악을 혁신경제 도시로 발전시키겠다.” -사업 진척도는. “이미 지난 5월 연 관악 창업공간에 11개 스타트업이 입주해 활동하고 있다. 관악 창업공간은 서울시에서 50억원을 들여 건물 전체를 매입해 내년부터는 관악 창업센터로 확대해 운영한다. 내년 1월에는 벤처밸리의 구심점 역할을 할 앵커시설, 낙성벤처창업센터가 들어서고 센터에는 스타트업이 입주하며 스타트업을 육성할 지원시설도 들어선다. 특히 칭화대 기술지주회사인 치디홀딩스 산하에서 중국 전역에 지식산업단지 개발 역할을 하는 치디과기성 유한공사 총재가 관악벤처밸리에 2000억원가량을 투자하고 싶다는 의지도 구두로 밝힌 상태다. 치디홀딩스가 욕심을 내는 것은 서울대의 역량이다. 최근 인공지능(AI)에 투자하는 서울대는 벤처밸리 조성과 지역 발전을 위해 창업 기반 시설을 늘리고 창업기업을 발굴하며 투자를 유치하는 데 적극 협력하기로 관악구와 지난 12일 협약을 맺었다. 서울대와 함께 이달 말 예정된 서울시 대학캠퍼스타운 공모에도 지원, 벤처밸리 사업과 연계해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할 계획이다.”-낙성벤처밸리가 실현되면 관악은 어떻게 바뀌나. “지금은 방값이 싸니까 청년들이 관악으로 몰린다. 하지만 졸업 후에는 테헤란밸리, G밸리 등 일자리가 있는 곳으로 빠져나간다. 미국의 실리콘밸리처럼 대학과 지역 사회에 첨단 창업 시설이 생기면 서울대생을 비롯한 지역 청년들이 관악에서 일자리를 찾고 관악을 삶의 터전으로 삼을 것이다. 관악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생동감 넘치는 도시로 재탄생할 것이다.” -관악 인구의 절반가량이 청년인데 대표적인 청년 정책을 꼽는다면. “지난 8월 문을 연 청년문화공간 ‘신림동 쓰리룸’이 청년들 사이에서 인기다. 원룸에 주로 사는 청년들이 거실, 서재, 작업장 등 세 개의 방을 공유한다는 의미로 이름 붙인 곳인데 청년들이 떠안은 사회 문제에서 벗어나 편히 쉴 수 있는 대안 공간이라는 뜻도 있다. 이곳에서만큼은 취업 부담, 집 부담을 내려놓고 청년들이 서로 모여 소통하며 진로 탐색, 문화예술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끽할 수 있도록 했다. ‘신림동 쓰리룸’의 호응이 좋아 은천동에도 추가로 청년공간을 꾸밀 건물을 매입했다. 청년들의 주거비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올 1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행한 ‘청년 임차인 중개보수 감면 서비스’도 호응이 높다. 지금까지 170여명의 지역 청년들이 수수료 부담을 총 2300만원가량 덜었다.”-관악이 교통 호재로 부동산 시장에서 주목받는데. “지하철을 보면 동작구는 5개가 지나가는데 관악구는 2호선 하나다. 관악의 교통 문제 해결을 위해 시의원 시절부터 백방으로 뛰었다. 그때 다져 놓은 노력에 더해 민선 7기 구청장직을 맡으며 서울시와 적극 협력한 결과 획기적인 변화를 맞게 됐다. 우선 국토교통부에 계속 주장해 경전철 밑그림을 그렸고 그 결과 신림선이 2022년 2월 완공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다. 서울대에서 여의도까지 1시간이 걸리는데 신림선이 개통되면 10분대로 단축된다. 또 당초 장승배기에서 끝나는 것으로 돼 있던 서부선 경전철이 서울대 정문 앞까지 연장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통해 기존에 단절됐던 신림선과의 환승도 가능해졌다. 난곡선은 민자사업이라 답보 상태였다가 박원순 시장을 설득해 재정사업으로 바꿔 2022년 조기 착공하게 됐다. 신림선·서부선·난곡선 등 경전철 3개 노선 도입과 별도로 2023년 남부순환로와 강남도시고속화도로를 연결하는 신봉터널이 완성되면 관악은 사통팔달의 입지로 변신한다.” 진행 주현진 부장 jhj@seoul.co.kr 정리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사진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그가 걸어온 길 시의원·구의원·구청장까지운동화 신고 골목 누빈 18년자치구 첫 ‘관악청’ 주민 소통 낡고 투박한 운동화는 지방정치인 박준희 관악구청장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는 매일 잘 닦인 구두는 한쪽에 밀어 두고 운동화를 신고 출근길에 나선다. 1998년 구민의 지지를 받아 처음 구의원이 되기 전부터 16년간 구의원·시의원에 이어 구청장 2년차를 맞는 지금까지 운동화를 신고 1년 365일 관악 골목을 누비며 생활정치를 이어 가고 있다.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초·중·고 학창 시절을 보낸 그는 대학을 서울로 진학하며 방값이 싼 곳을 찾아다니다 관악구 봉천동과 인연을 맺었다. 대학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던 198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창당한 평화민주당에 입당했다. 이후 관악에서 국회의원이 된 한광옥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정책실장으로 활동하다가 1998년 치러진 3대 구의원 선거(봉천9동)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지금까지 관악에서 지방정치의 길을 걷고 있다. 시의원 시절부터 관악 주민 숙원 사업을 해결하는 데 힘썼다. 초선 시절 4년 내내 교통위원회에 소속돼 관악의 교통 조건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신림선·서부선 도입을 관철시키는 데 앞장섰다. 부지런하고 추진력이 강하며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 우직함이 강점이란 평이다. 운동화에 이어 지방정치인으로서의 소신인 ‘소통과 협치’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사업인 관악청(聽)을 1년 넘게 운영해 오고 있다. 관악청은 서울 25개 자치구 가운데 처음 시도한 구청 1층 로비의 현장 구청장실이다. 매주 화·목요일 오후 관악청에서 구민들을 만나 직접 민원을 듣는다. “구청장은 선거 때만 얼굴을 내비치는 줄 알았는데 내가 뽑은 구청장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는 반응이 많다. ▲1963년 전남 완도 출생 ▲금일고 졸업, 경기대 경제학과 졸업, 동국대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졸업(석사) ▲관악구의회 의원(1998~2006) ▲서울시의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2011~2012) ▲서울시의회 환경수자원위원회 위원장(2016~2018)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2010~2014) ▲더불어민주당 관악갑 지역위원회 수석부위원장(2010~현재) ▲더불어민주당 중앙당 정책위원회 부의장(2014~현재) ▲민선 제7대 관악구청장(2018~현재) ▲부인 김미정씨와의 사이에 2남
  • 英~깜깜하네…총선 브렉시트 탓에

    英~깜깜하네…총선 브렉시트 탓에

    영국 일간 가디언의 정치 칼럼니스트 라파엘 베르는 최근 한 ‘스윙보터’(유동층)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2017년 영국 총선에서 테리사 메이 당시 총리를 지지했다는 이 유권자는 “보리스 존슨 현 총리는 너무 싫고,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는 (총리가 되면) 나라를 망칠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대체 어느 당을 찍어야 하느냐”고 메시지를 보낸 이 사람은 다름 아닌 전직 보수당 내각의 장관이었다. 당료와 각료를 두루 거친 장관 출신까지 선뜻 지지 의사를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 바로 다음달 12일 조기 총선을 앞둔 영국의 모습이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를 둘러싼 대혼란과 함께 치러지는 이번 선거를 두고 역대 영국 총선 가운데 가장 예측이 어렵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유권자 30% 지난 총선서 지지 정당 바꿔 서구 정당들도 더이상 과거처럼 유권자들로부터 안정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시대가 됐지만 그나마 과거와 같은 ‘정당 귀속감’의 역사가 남아 있는 국가로는 영국을 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노동당을 지지하면 아들도 노동당을 지지한다’는 영국의 유권자들조차 이제 세상에서 가장 변덕스러운 투표를 한다고 해도 무방한 상황이 됐다. 가디언에 따르면 앞서 두 차례 영국 총선에서 유권자의 3분의1이 지지 정당을 계속 바꿨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조기 총선 ‘D-30일’을 맞아 지난 11일 보도한 잉글랜드 더비셔주 볼소버 지역의 모습은 브렉시트를 둘러싸고 요동치는 민심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과거 탄광촌이었던 볼소버는 이 지역 토박이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는 대표적인 노동당 강세 지역으로 꼽혔다. 탄광노동자 출신인 데니스 스키너 하원의원이 1970년부터 의원직을 맡아 왔을 정도로 보수당에는 난공불락과도 같은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지난 브렉시트 투표에서 70%가 ‘EU 탈퇴’ 쪽에 섰다. 동유럽 이주노동자에 대한 불만이 커지며 전통적인 노동당 지지자들조차 우파가 주도한 브렉시트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브렉시트는 심지어 지지 후보와 지지 정당이 반대인 경우까지 만들었다. 중년의 요양보호사 길 프리저는 FT에 “개인적으로는 이번 선거에서 과거 어려울 때에도 지역과 함께해 왔던 스키너 의원을 계속 지지할 예정”이라면서도 “‘브렉시트 강경파’인 존슨 총리가 선거에서 승리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전직 엔지니어인 남편은 보수당을 지지한다고 했다”며 부부 사이에서도 양분된 여론을 전했다. 이 같은 민심 이반이 감지되자 존슨 총리는 이번 총선에서 탈환을 목표로 하는 50개 지역구 중 하나로 볼소버를 점찍고 있다. 이들 노동당 강세 지역에서 승리하면 런던, 스코틀랜드 등에서 의석을 뺏기더라도 상쇄할 수 있다는 복안이다.●브렉시트 입장 따라 찬반 뒤엎기 일쑤 그러나 현재 판세가 집권당에 마냥 유리하지는 않다. 코빈 대표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존슨 총리의 광폭 행보가 연일 보도되고 있지만 이 같은 모습이 실제 과반 확보의 결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11월 둘째 주 보도에서 전국 판세의 바로미터로 꼽히는 노팅엄셔주 게들링의 선거운동 현장을 보도하며 “보수당에는 ‘티핑포인트’(급변점)인 이 지역에서 노동당이 42%로 보수당(37%)을 여전히 앞서고 있다”고 전했다. 이 지역은 브렉시트 투표에서 56%가 ‘EU 탈퇴’에 손을 들어줬지만 이들이 이번 총선에서 보수당을 지지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이코노미스트는 이 지역의 브렉시트 찬성표 가운데 절반만이 이번 총선에서 보수당에 투표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보수당이 게들링을 탈환하기 위해서는 브렉시트 찬성표 전체가 필요한 상황이다. 브렉시트를 둘러싼 정당 간 합종연횡도 한창이다. ‘EU 탈퇴’를 목표로 창당한 브렉시트당은 최근 브렉시트 찬성표를 분산시키지 않겠다며 보수당 소속 317개 지역구에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밝혔다. 반대로 자유민주당과 녹색당, 웨일스민족당은 EU 잔류를 위한 연대를 선언했다. 가디언은 “브렉시트당의 무공천 결정이 유권자들에게 엇갈린 신호를 보내고 있다”며 브렉시트 찬성파 간 암묵적인 선거연대가 반드시 보수당에 유리한 것이 아니라고 진단했다. 브렉시트를 찬성하는 노동당 지지자가 만약 투표용지에 브렉시트당 후보가 없는 것을 본다면 보수당이 아닌 기존 지지 성향대로 노동당에 투표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새 스윙보터는 중산층 아닌 중년층” 영국의 경우 1960년대만 해도 보수당이나 노동당 중 한 곳을 지지한 유권자가 10명 가운데 8명이었지만 2010년 총선에서는 6명으로 줄었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는 보수당과 노동당을 합해 61%의 지지율이 나오기도 했다. 양당 합계 80%까지 나왔던 2017년 총선 여론조사와 비교하면 20% 포인트 가까이 떨어진 수치다. 보수당·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양당제는 자유민주당과 같은 제3당의 등장으로 ‘2.5당’제로 재편되기도 했지만 브렉시트와 같은 대형 이슈는 더 많은 당이 의석을 가질 수 있는 균열을 만들었다. 1997년 총선에서 노동당(418석), 보수당(165석), 자유민주당(46석) 등 3개 정당이 의석수를 대부분 가져갔지만 2015년과 2017년 선거에서는 이들뿐만 아니라 민주연합당(DUP), 신페인당 등도 의미 있는 의석을 차지했다. 2015년 총선에서는 우익 포퓰리즘 정당인 영국독립당이 1석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 정당의 대표는 바로 현 브렉시트당 대표인 나이절 패라지였다. 이 같은 극우정당은 기존 보수당을 지지했던 ‘가장 오른쪽’의 유권자들을 끌어모아 영향력을 확대한 셈이었다. 2017년 총선에서는 앞서 자유민주당을 앞질러 ‘제3당’의 위치를 차지했던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이 21석을 잃어 최대 패자가 되기도 했다. 이는 EU 잔류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스코틀랜드 유권자들이 SNP가 주장하는 스코틀랜드 독립보다는 영국 연방에 남아 있기를 선호하며 나타난 결과였다. 각 정당이 이래저래 브렉시트 때문에 울고 웃는 결과가 연출된 셈이었다. 이처럼 여러 정당의 후보가 난립하면서 영국 총선은 20~30%의 적은 득표율로도 당선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이는 판세 읽기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가디언은 “주요 정당들은 이제 새로운 지지자를 확보하는 게 아니라 기존 지지자들을 지키는 것이 더 큰 과제가 됐다”고 설명했다. 2015년부터 이번 총선까지 5번의 전국 단위 선거를 치르고 있는 영국은 선거 때마다 매번 여론조사 결과가 빗나가며 여론조사업체들이 쩔쩔매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2015년 총선 예측에 실패했던 영국 여론조사업체들은 이듬해 브렉시트 투표에서 ‘EU 잔류’를 예상했다가 또다시 예측에 실패하며 망신을 당했다. 여기에 고령화 등 인구 변화도 선거 예측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보수당과 노동당 지지를 갈랐던 계층보다는 연령이 새로운 변수가 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에 따라 여론조사기관들은 기존 조사 샘플이 노동당에 편향됐다는 결론을 내리고 몇 년 전부터 노년층 등을 감안한 샘플을 재구성하고 있다. 가디언은 “새로운 스윙보터는 중산층(middle class)이 아닌 중년층(middle aged)”이라고 분석했다. 2017년 선거를 기준으로 노동당보다 보수당 지지가 더 높아지는 기준 연령은 47세였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여왕과 비틀스, 롤링스톤스가 사랑한 사진작가 테리 오닐 81세 일기로

    여왕과 비틀스, 롤링스톤스가 사랑한 사진작가 테리 오닐 81세 일기로

    넬슨 만델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비틀스와 롤링스톤스, 데이비드 보위, 엘튼 존, 로저 무어, 프랭크 시내트라와 로라 부시 전 대통령 부인 등 유명인들을 렌즈에 담아온 영국 사진작가 테리 오닐이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에이전시 ‘아이코닉 이미지스’는 지난달 사진에 끼친 공로를 인정 받아 대영제국 훈작 작위(CBE)를 받은 고인이 전립선암과의 오랜 투병 끝에 16일(이하 현지시간) 밤에 자택에서 영면했다고 전했다. 미국 여배우 페이 더너웨이(78)의 두 번째 남편으로 1983년부터 87년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처음에 재즈 드러머가 되고 싶어 했으나 히드로 공항의 사진팀에 취직했다. 당시 랩 버틀러 내무장관이 흠결 하나 없는 옷차림으로 벤치에 잠든 사진을 찍어 유명해져 언론과 출판의 거리로 유명한 플리트 스트리트에 있는 한 신문사 사진부에 취직했다. 이곳에서 비틀스란 신생 밴드의 초상화를 찍게 돼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았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촬영한 것은 단 두 번뿐이었다. 2001년에 그는 BBC 라디오4 인터뷰를 통해 1992년에 두 번째로 여왕을 뵙고 사진을 찍었을 때를 생각하면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고 털어놓았다. “그 해는 여왕에게 좋지 않은 해였는데 난 여왕에게 경주마 농담을 건네 웃게 한 뒤 처음으로 웃었다는 사실을 알려드려 더 웃게 만들었다. 여왕이 좋은 사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오닐이 여러 차례 촬영했던 엘튼 존은 트위터를 통해 고인을 예찬한 이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존은 “그는 똑똑했고 재미있었고 동료를 진짜 좋아했다”고 적었다. 코미디언이자 어린이 책을 많이 쓴 데이비드 윌리엄스는 “대단한 재주꾼이자 완벽한 신사”였다며 그가 떠난 것은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뜻”이라고 추모했다. 아이코닉 이미지스는 고인이 “품위가 있었고 재치 만점이었으며 매력으로 가득했다”고 밝혔고, 대변인은 “관대함과 겸손에서 비길 바가 없는 그를 알고 함께 일해본 이들은 운이 좋았다”며 1960년대 말을 대표하는 사진작가 중 한 명으로 전설적인 그의 작품들은 영원히 우리 기억과 가슴 속에 새겨져 남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단독] 賞 없는 노벨상의 나라… 학교·국회에서 상은 1등 아닌 봉사 의미

    [단독] 賞 없는 노벨상의 나라… 학교·국회에서 상은 1등 아닌 봉사 의미

    [상을 팔고 스펙을 삽니다] <3·끝> 돈으로 사면 안 되는 것들 서울신문은 ‘상을 팔고 스펙을 삽니다’ 1·2회를 통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린 ‘돈 주고 상 타기’의 병폐를 파헤쳤다. 각종 시상 단체들이 매해 쏟아내는 수많은 상들은 대학생, 기업가, 정치인 등에게 팔려 입시와 취업, 홍보, 선거를 위한 수단이 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상을 사서라도 수상 실적을 쌓지만 그럴수록 상의 가치는 추락하고 있다. 상으로 대변되는 스펙 경쟁은 교육 현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올해 서울대 수시 입학생이 써낸 상장의 수는 평균 30개. 가장 많은 상을 받은 학생은 고등학교 재학 중 총 108개의 상장에 이름을 올렸다. 한 고등학교에서는 한 해 동안 학생에게 준 상장의 개수가 전체 학생 수의 5배를 웃돌기도 했다. 교과목 경시대회부터 토론대회, 봉사상, 개근상, 친절상까지 이름만 바꿔서 찍어대는 상장은 더이상 성과와 노고에 대한 격려의 의미가 아니라 만들어진 ‘스펙’에 불과하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 해법을 찾아 지난달 ‘노벨상의 나라’ 스웨덴으로 향했다. 경쟁보다는 개인의 적성과 능력을 존중하는 스웨덴의 학교에는 ‘전교 1등’ 상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 남단에 위치한 시트브링크스고등학교. 전교생 수 220명인 이 학교는 일반고와 직업고가 함께 있다. 직업고에서는 집 짓기, 자동차 수리 등 직업에 관련된 실무를 가르친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목공 수업으로 흙투성이가 된 검정색 작업복을 입은 남학생들이 우르르 카페테리아로 몰려들었다. 대학 진학과 취업을 앞둔 학생들이었지만, 같은 시각 문제집과 씨름하고 있을 한국의 학생들과는 분위기나 표정이 사뭇 달랐다. 학생들에게 대뜸 “상 받아본 사람 있느냐”고 묻자 몇몇이 “스테판!”을 불렀다. 이 학교에서는 매년 연말 전교생 중 딱 한 명에게 수여하는 ‘베스트(Best) 학생상’이 유일한 상이다. 2학년인 스테판 테오도로픽(16)은 올해의 강력한 후보 중 한 명이다. 베스트 학생이라고 해서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교사들은 그해 학교 생활을 성실하게 하고 다른 친구들을 잘 챙긴 학생들을 눈여겨보았다가 연말에 추천한다. 그리고 교사들의 토론과 투표 과정을 거쳐 공정하게 선정한다.베스트 학생상의 특전은 선생님들과의 저녁식사다. 이는 선생님들 못지않게 학생들을 잘 이끌고 수업 분위기를 좋게 한 학생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다. 이 상을 받는다고 해서 대학 입시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은 이 상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테오도로픽은 “베스트 학생상을 받으면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내가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인증서를 받는 느낌이 들 것”이라며 “내 자신과 가족들에게 매우 자랑스러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가 가능한 건 경쟁보다는 평등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스웨덴의 교육 정책에 있다. 1960년대부터 스웨덴은 과목당 일정 점수 이상만 받으면 모두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학점제 시스템을 만들었다. 학교 성적으로 입학이 어려운 경우 호그스콜레프로비엣이라는 대학 시험을 통해 다시 점수를 받아 입학할 수 있다. 얼핏 보면 우리의 수시·정시 입학 개념과 비슷해 보이지만 대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분위기는 정반대다. 더 높은 점수를 받고자 입시 코디네이터를 동원하는 일도, 학원과 과외에 수백만원을 쏟아붓는 일도, 스펙을 쌓기 위해 부모의 인맥을 총동원하는 일도 없다. 모든 것이 공교육 내에서 해결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각 학교에 진학설계사를 파견해 학생들이 진로를 설계하고 관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취업을 위한 인턴 프로그램도 각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서 연결해 준다. 이런 기조에 맞게 스웨덴의 학교들은 ‘베스트 학생상’처럼 봉사상 개념의 상만 일부 남기고 경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는 교육 현장에서 모두 걷어냈다. 주임교사인 사라 달크비스트(42)는 “적당한 종류의 상이 있다면 학생 능력을 계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너무 많은 상은 학생들에게 오히려 스트레스를 주고 과도한 경쟁을 부추겨 불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스웨덴에서의 상은 대개 각 분야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한 사람에게 수여되는 ‘감사패’의 개념에 가깝다. 수상자들은 사회에서 존경의 대상이 된다. 남발하지 않은 덕에 얻은 권위다. 누군가가 성공하고 인정받기위해 ‘수단’이 되어버린 우리나라 상들과는 격이 다르다. 스웨덴에서는 대학 입학 원서에도, 취업 원서에도 수상 경력을 기재하는 란이 없다. 스웨덴의 입시 원서는 단출하다. 대학 지원 통합 사이트에 가입한 뒤, 원하는 대학에 지원하고 고등학교 성적과 졸업 증명서만 올리면 된다. 이후 합격자 발표가 나면 원하는 대학 전공 코스를 신청한다. 내신과 수능 성적, 자기소개서·교사 추천서·동아리와 봉사 활동·수상 경력 등 각종 스펙 증명서를 챙기고 면접까지 준비해야 하는 우리나라와 대조적이다.스웨덴 정치인은 상복이 없다. ‘좋은 게 좋지 않느냐’는 식으로 정치인들에 뿌려지는 ‘의정상’ 따윈 존재하지 않는 탓이다. 평생을 바친 몇몇 의원에게 주는 감사패가 전부다. 지난달 9일 스웨덴 국회의사당에서 만난 국회의원 마르쿠스 비셸(31·스웨덴민주당)은 “스웨덴에서 정치인은 국민을 대표할 뿐, 미국이나 한국처럼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특권층과는 거리가 멀다”면서 “국회에는 고졸부터 박사까지, 그리고 20대부터 60대까지 농부든 의사든 다양한 직업과 배경을 가진 정치인들이 모여 있다”고 말했다. 우리만큼 화려한 스펙 없이도 스웨덴의 인적 자본의 질과 활용도는 훨씬 뛰어나다. 2017년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인적자본지수를 보면 130개국 중 스웨덴은 8위(100점 만점에 73.95점)를 기록했다. 한국은 27위(69.88점)에 그쳤다. 학습능력 면에선 양국이 비슷했지만, 사회 진출 이후 노동자들의 숙련도(스웨덴 3위, 한국 25위)나 기술력(16위, 26위) 면에서 스웨덴이 훨씬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상이 귀한 스웨덴에서 시트브링크스고는 올해 상복이 터졌다. 직업반 교사이자 교감인 존 페터손(42)이 구청으로부터 올해 ‘최고의 선생님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상 역시 A4용지 크기의 상장 외에는 상금도, 승진 가산점도 주어지지 않지만, 이 지역 사람들은 매년 한 명의 선생님을 선정하기 위해 노벨상 시상식만큼이나 뜨거운 관심을 보낸다. 학생과 동료 교사는 물론 학부모와 학교 이사들의 투표를 거치고, 동료 교사가 장문의 추천서를 써 줘야 하는 등 선정 과정이 까다롭다. 페터손은 “교사 생활 22년 만에 처음 상을 받았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처럼 뿌듯하다”면서 “더 많은 학생들에게 헌신할 수 있는 큰 힘이 된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소수의 엘리트를 키워내는 게 아니라, 모두가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우수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학교 교육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상을 받는 일은 경쟁이 아니라 즐겁고 좋은 일이지요.” 글 사진 스톡홀름 이혜리 기자 hyerily@seoul.co.kr 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빅카인즈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과 빅카인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피시앤드칩스, 왜 영국음식의 대명사가 됐을까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피시앤드칩스, 왜 영국음식의 대명사가 됐을까

    실제로 발을 내딛기 전까지 내게 영국이란 나라는 전설 속에 등장하는 아틀란티스와 다름없었다. 유럽에서 핀란드 다음으로 음식이 형편없다는 오명을 가진 나라, 전 국민이 맛없는 음식을 감내하는 나라라니. 아틀란티스가 존재한다는 것만큼이나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 한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운영하며 전 세계 부를 빨아들인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이 기껏해야 기름에 튀긴 흰살 생선과 감자라니. 대체 영국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피시앤드칩스는 문자 그대로 반죽을 입혀 튀겨낸 생선과 감자튀김으로 구성된 요리다. 영국식 피시앤드칩스란 소금이나 신맛이 덜한 몰트식초를 뿌려먹는 게 정석으로 통한다. 예상과는 달리 같이 딸려나오는 마요네즈나 케첩은 피시를 위한 게 아니라 칩스를 위한 조미료라는 게 영국인의 설명이다. 그러니까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취향대로 넣는 다진 양념과 들깻가루를 순댓국이 아닌 같이 딸려나온 밥에 비벼먹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까.피시앤드칩스의 역사는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영국에서 발간된 관련 자료를 교차 비교해 보면 대략 1860년대를 전후로 탄생한 음식이라는 데엔 다들 동의하고 있다. 흥미로운 건 ‘전국 생선튀김 업자 연합’(NFFF)이 무려 1913년 결성됐으며, 이들이 주축이 돼 2010년에 피시앤드칩스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생선을 밀가루 반죽이나 계란옷을 입혀 튀겨내는 방식은 유대인의 조리법으로 피시앤드칩스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다만 지금처럼 튀겨낸 후 바로 먹는 게 아니라 일종의 보존을 위한 전처리였다는 게 다른 점이다. 유대인들은 튀겨 익힌 생선을 식초물에 담가 먹었는데 이렇게 하면 냉장고 없이도 1년 정도 보관이 가능했다. 감자튀김은 19세기 초중반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유행했다.피시앤드칩스는 테이크아웃이 가능한 최초의 영국식 패스트푸드였다. 산업화의 영향으로 도시에 인구가 몰리면서 노동자 계층이 주를 이뤘는데, 이들에게 피시앤드칩스는 매력적인 음식이었다. 우선 값이 저렴했다. 여기엔 증기 트롤어선이 등장해 어획량이 급격히 늘고 철도가 항구와 도시를 촘촘히 이으면서 신선한 생선의 공급이 용이해진 배경이 있다. 20세기 초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집에서 요리하는 걸 감히 상상할 수 없었는데, 식재료를 준비해 장만하는 노력이 만만찮았고 연료비도 충분치 않았다. 이들에게 있어 저렴하면서 금방 조리돼 나온 피시앤드칩스는 훌륭한 대안 식사였던 셈이다. 맛과 영양 측면에서도 피시앤드칩스는 매력적인 선택이었다. 해안가에 살거나 강가에 살지 않는 이상 신선한 상태의 생선을 먹기란 쉽지 않았다. 내륙에 거주하는 이들 대부분은 소금에 절이거나 훈제하거나 식초에 절인 보존식품으로 생선을 접해 왔기에 신선한 생선의 맛에 쉽게 열광할 수 있었다. 또 피시앤드칩스는 적은 비용으로 탄수화물과 단백질, 지방을 섭취할 수 있는 고열량 식품으로도 사랑받았다. 노동자의 간편식이었던 피시앤드칩스는 1960년대까지 큰 인기를 누리다가 경쟁자들의 등장으로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KFC나 맥도날드, 중국식 누들이나 인도식 카레 등 노동계급이 선택할 수 있는 테이크아웃 음식이 많아지면서 식당이나 매대도 자연스럽게 감소했다. 그럼에도 피시앤드칩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영국음식의 대명사가 된 데엔 미디어의 역할이 컸다. 영국의 문화인류학자 파니코스 파나이는 외국 음식의 홍수 속에서 영국의 정체성을 구분 짓는 마케팅 도구로 피시앤드칩스가 이용됐다고 지적한다. 이탈리아의 피자, 미국의 햄버거 등에 대항해 영국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아이콘이 된 것이다. 여기엔 자부심과 일종의 자학적인 냉소가 섞인 영국인 특유의 이중적인 성향이 한몫 거들었다. 하찮은 음식이 영국을 대표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를 대놓고 부끄러워하지는 않겠다는 심리가 깔려 있다.피시앤드칩스를 비롯해 영국을 대표하는 일련의 음식을 맛보고 난 후 조심스럽게 내린 결론이 있다. 영국인에게 맛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이들도 맛있는 음식이 어떤 음식이라는 건 분명히 자각하고 있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영국인이 아니고서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사찰음식을 먹고 난 후 마음이 평안해지는 경험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느꼈다고 할까. 음식은 당연히 맛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란 생각조차 문화적인 편견일 수 있겠다는 큰 깨달음을 영국에서 얻었다.
  • 화폭 속 乙들의 삶, 가슴이 먹먹하다

    화폭 속 乙들의 삶, 가슴이 먹먹하다

    95년 작품부터 세월호 참사·故김용균… 현대사 어두운 단면 기록한 36점 배치가로 130㎝, 세로 162㎝ 크기 캔버스. 잿빛 하늘 한가운데 어둡고 큰 굴뚝이 위압적이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잡풀이 무성한 무덤과 실루엣뿐인 군중이 눈에 들어온다. 유일하게 얼굴이 그려진 한 청년은 흰색 안전모와 방진 마스크를 썼다. 어딘가 눈에 익은 청년이다. 대통령에게 비정규직 노동자 처우 개선을 요청하는 팻말을 들었던 청년. 그러나 그는 2018년 12월 11일 새벽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처참하게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나이 고작 스물셋, 고(故) 김용균씨다. 김씨 주변 군중은 모두 노동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을 의미한다. 작가는 이 그림에 ‘기념비 자리2’라는 이름을 붙였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화가가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방식이다.서울 소격동 갤러리 학고재 전관(본관·신관)에서 열리는 노원희(71) 작가의 개인전 ‘얇은 땅 위에’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집약한 공간이다. 미술관에 걸린 36점의 그림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마치 현대사 박물관에서 시대의 아픔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는 느낌이 든다. 이번 전시는 학고재가 1991년 이후 두 번째로 여는 노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이다. 1995년 작품부터 최신 작품까지 총망라해 본관에는 신작을, 신관에는 옛 작품을 배치했다. 두 전시관으로 나뉜 작품들은 제작 시기 차이만 있을 뿐 내용은 같은 궤도를 따른다. 여성에 대한 폭력, 경제와 사회 권력의 폭압, 인간성 상실 등이 작가의 주된 관심사다. 노 작가는 지난 40여년간 비판적 현실주의와 여성주의적 시각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왔다. 1960년대 서울대 학생기자로 활동하면서 부조리한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후 서울대 미술대 회화과와 미술대학원을 수료하고 야학을 하는 사람들과 인연을 쌓으며 곤궁하고 팍팍한 노동자와 서민들의 삶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때 예술과 민중의 삶은 서로 맞닿아 있어야 함을 깨닫고 이전까지 추구해 온 추상미술에서 벗어나 민중의 삶을 화폭에 담았다. 1980년대 민중미술을 이끈 ‘현실과 발언’ 창립 작가로,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사회 변혁을 촉구해 왔다. 이번 전시 주제 작품 ‘얇은 땅 위에’(2019)는 지금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노 작가의 시선이 압축적으로 담겼다. 한 무리의 사람들은 거대한 벽 앞에 큰절하듯 엎드리고 있고, 그 벽 뒤에 양복 차림의 거대 동상 이미지가 서 있다. 엎드린 사람들은 집회에 나선 노동자들이다. 한여름 폭염 속 서울 효자동에서 삼보일배 시위 중인 노동자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들의 애타는 목소리는 높고 두꺼운 장벽에 가로막혔다. 장벽 뒤 거대 동상은 재벌 등 자본 권력을 의미한다. 노동자들이 엎드린 땅은 너무 얇아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불안하다. 본관 중앙에 걸린 ‘광장의 사람들’(2018)도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광화문 촛불집회를 소재로 그린 이 작품은 그림 중심을 기준으로 왼쪽은 삼성반도체 산업재해 희생자를, 오른쪽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담았다. 그림에 빼곡한 이름은 희생자와 유가족, 민주언론시민연합 후원회원 이름이다. 노 작가는 “그림 속 이름은 단순히 사람의 이름이 아닌, 한 개인의 삶과 그 궤적을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12월 1일까지.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손석우 별세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손석우 별세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로 잘 알려진 원로 작곡가 손석우씨가 12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99세. 1920년 전남 장흥 출생인 고인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거치며 대중음악의 태동기를 만든 1세대 작곡가다. 고인은 1960년대 가수 한명숙이 부른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를 작곡해 대히트를 기록했다. 일본과 동남아에서도 인기를 끌었으며 이후 프랑스의 샹송 가수 이베트 지로가 우리말로 취입해 ‘한류 1호 작곡가’로 기록됐다. 이 밖에도 그는 ‘꿈은 사라지고’(안다성), ‘나는 가야지’(문정숙) 등 히트곡들을 대거 만들었다. 빈소는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5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4일이다. 1차 장지는 성남영생원, 2차 장지는 분당 메모리얼파크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배우 윤정희 10년째 알츠하이머 투병…파리에서 요양 중

    배우 윤정희 10년째 알츠하이머 투병…파리에서 요양 중

    배우 윤정희(75)가 10년째 알츠하이머를 투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10일 윤정희의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73)의 공연을 담당하는 기획사 빈체로 측에 따르면 윤정희가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이며, 최근 증세가 심각해졌다. 10년 전쯤 시작된 윤정희의 알츠하이머 증상이 최근 심해지면서 같은 질문을 수없이 반복하거나 그의 딸인 바이올리니스트 백진희를 알아보지 못 하는 등 상태가 심해진 것으로 전해졌다. 윤정희는 현재는 프랑스 파리에 있는 딸의 집에서 함께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윤정희는 1960년대를 대표하던 톱배우다. 1967년 영화 ‘청춘극장’을 시작으로 약 30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1960~1970년대를 풍미했다. 윤정희의 2010년에는 영화 ‘시’(감독 이창동)에서 알츠하이머 치매로 기억을 잃는 미자 역할을 맡아 열연하기도 했다. 영화에서 윤정희는 홀로 손자를 키우며 늦은 나이에 시를 배우는 할머니 ‘미자’를 연기했다. 미자라는 이름은 윤정희의 본명이다. 영화 ‘시’ 이후 연기 활동을 제대로 재개하지는 못 했지만 알츠하이머 증세가 완화됐을 때는 여러 차례 공식석상에 참석했다. 아름다운예술인상을 선정하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로도 활동했으며,지난해 11월에는 영화평론가상 시상식에 참석해 공로상을 받았다. 조현석 기자 hyun68@seoul.co.kr
  • [2030 세대] 일본의 ‘포스트 전후’ 30년을 맞이하여/임명묵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4학년

    [2030 세대] 일본의 ‘포스트 전후’ 30년을 맞이하여/임명묵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4학년

    ‘전후’, 현대 일본에서 이 단어가 뜻하는 바는 단순한 사전적 의미를 뛰어넘는다. 그저 전쟁이 끝난 직후의 일정 시점이 아니라 수십년에 걸친 하나의 시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전후 시대’는 일본이 파멸적 전쟁을 일으킨 군국주의 과거와 단절하고, 민주주의를 운영하며 고도 성장을 이루어 낸 호시절이었다. 특히 경제가 그러했다. 한국전쟁 특수로 폐허에서 일어서기 시작한 일본 경제는 1960년대부터 세계를 놀라게 한 고도 성장을 이룩하며 서방 세계 최강의 경제로 발돋움했다. 미국으로부터 철을 공급받지 못해 중일전쟁에서 쩔쩔매던 미숙한 공업 국가였던 일본은 철강, 조선, 자동차, 화학 가릴 것 없이 모든 분야에서 압도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이 같은 경제 번영의 결과로 급증한 도시민들 대부분이 에어컨, 세탁기, TV 같은 가전제품에 접근하면서 일본은 전기, 전자 영역의 강국으로도 도약했다. 하지만 전후의 번영은 멈춰 섰다. 미국의 역사학자 존 다우어는 일본의 전후가 1989년에 끝났다고 이야기했다. 일본이 미국에 안보를 전적으로 기댔던 냉전 체제가 무너졌고, 전후 경제 기적은 버블 붕괴와 함께 어두운 터널로 들어갔다. 시대 변화를 예시하듯 그해 1월 64년 동안 재위했던 히로히토 천황도 죽었다. 1989년 이후로 세계 속 일본의 위상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경제는 활력을 잃었고 정치는 혼란했다. 헤이세이 30년 동안 중국은 일본을 규모로 압도했고 한국은 일본을 질적으로 따라잡으며 ‘아시아 1등’이라는 일본의 자아 정체성마저 흔들렸다. 그래서 비전을 잃은 이 시대를 일각에서는 ‘포스트 전후 시대’라고 부른다. 과거는 끝났지만 새로운 미래가 다가오지 않았기에 이런 우스우면서도 씁쓸한 명칭이 붙은 것이리라. 하지만 전후에서 포스트 전후로의 전환은 아직 많은 사람에게 와닿지 않았던 것 같다. 군국주의 부활을 아직도 우려한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일본이 미국에 도전했던 1940년대나 1980년대는 일본의 국력이 팽창일로를 걸었던 시대였다. 포스트 전후는 그와 정반대의 시대, 수축의 시대다. 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전면적으로 뒤집힌 상황에서 수축 중인 사회가 다시 팽창을 선택할 능력과 의지가 남아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런 인식의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아마 식민지의 기억, 직접적으로는 전후 일본의 거대한 번영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생생하기 때문일 것이다. 포스트 전후 30년이 된 지금, 변화한 일본의 현실을 바라볼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일본은 여전히 배울 것이 많은 나라다. 다만 방향이 달라졌을 뿐이다. 실체 없는 군국주의 위협에 벌벌 떠는 것보다는, 정치 리더십이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서, 산업과 문화가 활력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일본을 들여다보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다. 바로 그것이 이제 과거가 되어 버린 ‘전후 일본’이 아닌 ‘포스트 전후의 일본’과 동거하는 현명한 방법이리라 믿는다.
  • 김진표 “제2 벤처 열풍으로 경제 위기 벗어나야”

    김진표 “제2 벤처 열풍으로 경제 위기 벗어나야”

    노무현 정부의 초대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낸 김진표 더불어민주당 국가경제자문회의 의장은 저성장 시대에 접어든 한국 경제의 탈출구로 ‘제2의 벤처기업 열풍’ 조성을 꼽았다. 지난 2년 반 동안 성과가 미흡했던 혁신성장 정책이 열매를 맺으려면 재벌 대기업을 대체할 새 성장동력인 기술혁신형 중소벤처기업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 의장은 7일 서울신문과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우리 경제가 1960년대부터 ‘선진국 베끼기’ 전략으로 고속 성장을 했지만 한계에 다다랐다”고 말했다. 그는 “창조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거나 혁신 기술로 생산비를 낮춰야 하는데 이런 투자는 성공 확률이 낮다”며 “과거 정권에서 재벌기업에 지원을 집중해 투자를 유도했지만 재벌 3~4세 체제로 가면서 기업가들의 도전정신이 줄어든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 의장은 창업 생태계 조성과 함께 금융권의 중소벤처기업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의장은 “최고의 엔지니어들이 대기업이나 대학 연구실이라는 온실에 머물러 있지 않고 창업 전선에 뛰어들게 해야 한다”며 “문제는 금융사들이 부동산 담보 대출 등 안전한 금융에만 치중했고 중소벤처기업의 기술과 미래가치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험자본 육성을 위한 금융 혁신이 정부가 역점을 두고 추진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김 의장은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보완해야 한다는 의견도 밝혔다. 그는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으로 일자리가 줄어드는 부작용을 지난 2년 반 동안 경험했다”며 “앞으로는 소득주도성장을 강조만 할 게 아니라 부작용을 잘 흡수해야 한다. 임금을 높이고 근로시간을 단축함으로써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노동력을 제공해 생산성을 높이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장은석 기자 esjang@seoul.co.kr
  • 전쟁의 비극·고단한 삶…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恨 많은 고개’

    전쟁의 비극·고단한 삶…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恨 많은 고개’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8차 서울의 대중가요3(단장의 미아리고개)’ 편이 지난 2일 강북구 미아동과 성북구 길음동·돈암동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이날 오전 10시 우이신설선 솔샘역 1번 출구에 집결했다. ‘미아리’라는 지명을 낳은 신라의 고찰 미아사~송천동성당~옛 미아리공동묘지~옛 미아리 유해업소를 거쳐 미아리고개예술극장에서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 노래의 1950년대 명곡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를 만났다. 최근 송가인이라는 트로트 가수의 등장으로 사람들의 입에 다시 오른 구성진 노랫가락의 위력을 새삼 느꼈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미아리 점성촌이 마지막 코스였다.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넘어가는 미아리고개에는 절절한 슬픔이 뱄다. 너무 가팔라서 넘나들기 고달팠고, 병자호란과 한국전쟁의 서울 침공로였으며, 공동묘지가 있던 시절엔 상여길, 조문길이었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끌려가던 가족을 향해 울부짖던 비극의 장소이기도 했다. 지금 그 ‘창자를 끊는’ 미아리고개에는 미아리하늘고개다리와 노래비 그리고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이 무심하게 서 있을 뿐이다. 이날 해설을 맡은 강영진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늘 스쳐 지나가기만 하던 미아리의 애사를 두 발로 직접 느낄 수 있도록 안내했다.서울 동북부의 관문 미아리의 역사는 2002년 서울시 시범 뉴타운 지정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개발의 속도와 규모는 전광석화 같았다. 10여년 만에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된 미아리의 잔상은 오간 데 없고 거대한 아파트 숲이 하늘을 가린 채 즐비하다. 1894년 갑오개혁 때 미아리의 행정구역은 한성부 동부 숭신방 동소문외계 미아리였다. 동소문 밖 성저십리(성 밖 십리)에 속했다.‘조선성시도’와 ‘한양도’ 등 옛 지도에는 오랑캐 적(狄), 넘을 유(踰), 고개 현(峴)자를 써서 적유현이라고 적었다. 한양에서 강원도나 함경도를 오가는 길손은 동소문(혜화문)~적유현~수유현~양주 길을 지나다녔다. 사람들은 이를 쉽게 병자호란 때 되놈(청나라군)이 넘어온 되너미고개라고 말하고, 이를 한자로 돈암현이라고 옮겼다. 또 길음동이라는 지명은 ‘기리묵골’ 또는 ‘기레미골’이라는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바꾼 것이다. 미아리고개 북쪽 정릉천 골짜기의 물소리가 맑고 고와서 길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비가 오면 땅이 질퍽해 ‘질음골’이라고도 불렸다. 1792년 광릉으로 행차하던 정조는 미아리고개에 이르자 말에서 내려 잠시 머문 뒤 ‘야차제만장봉’이라는 시를 남겼다. 이때 이곳의 지명이 미아리(美阿里)라고 적혀 있어서 현재의 미아리(彌阿里)와는 한자가 다름을 알 수 있다. 길음1동의 옛 돌산(신안아파트)은 건축용 석재를 채취하던 채석장으로, 나머지 지역은 왕실의 매장 터로 쓰였다. 1911년 경성부 지도에 미선리, 미하리라고 표기됐으나 1930년대에 인쇄된 경성부 관내도에 비로소 미아리(彌阿里)라는 표기가 정착됐다. 청량사에서 청량리가 유래했듯 원효대사가 세운 불당골(미아7동)에 있던 미아사가 미아리라는 지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차 종점이 있던 돈암동은 시내, 고개 너머 미아리는 시골로 인식했다. 이후 경기 고양군 숭인면 미아리(1914년)에서 성북구 미아리(1949년)로 변경되면서 미아1·2·3동과 길음동, 인수동, 송천동, 삼양동 등 우리 귀에 낯익은 이름이 생겼다. 인수동은 삼각산(북한산) 인수봉, 삼양동은 삼각산 아래 양지바른 동네라는 뜻이다. 송천동은 샘이 솟는 소나무 숲 마을이었다. 1973년 도봉구에 속했다가 1975년 다시 성북구로 회복됐다. 1995년 강북구가 분구되면서 길음동은 성북구, 미아동은 강북구로 갈라졌다.장소인문학에서 말하는 미아리의 정체성은 일제강점기 1930년에 완공된 공동묘지 조성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미아리 공동묘지는 1912년에 만들어진 19개 공동묘지 중 한국인 전용 공동묘지였다. 1937년에 모두 1만 6000기의 무덤이 있었다. 주택난과 매장지 부족으로 1933년 망우리, 1958년 파주 용미리, 벽제로 각각 이전했다. 이상, 이육사, 유관순, 한용운, 최학송, 나석주, 이중섭 등이 묻혔다가 망우리 등으로 이장됐다. 또 도시빈민들의 이주로 정릉천변과 공동묘지 주변에 토막촌과 무허가주택촌이 형성됐다. 미아리는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인민군의 격전지였다. 전쟁이 끝난 뒤 북으로 끌려가던 북송인사 때문에 ‘한 많은 미아리고개’ 별칭이 붙었다. 1958년 미아리공동묘지가 벽제와 망우리로 이장하면서 이재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길음동의 대표적 공영주택 백호주택은 1962년 입주 신청을 받았는데 당시 분양가구가 100호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호당 50평 안팎의 대지에 12평짜리 벽돌기와집을 지었다. 당첨자는 땅값을 내고 건축비 14만 2500원은 25년 분할 상환했다. 미아리는 인수로, 삼양로, 미아로 등 세 가닥 큰 길이 주축을 이룬다. 정릉천 물길인 인수로는 정릉천에서 길음동 돌산에 이르는 도로명이다. 인수로 좌우에는 거대한 무허가 간이주택이 천변동네를 형성했다. 본래 좌우제방을 도로로 이용하다 세 번에 걸쳐 복개돼 도로가 됐다. 뉴타운개발 후 길음시장과 역세권을 제외하고 아파트가 들어섰다. 1960년대 후반 청계천 복개와 종로3가의 집창촌 ‘종삼’이 철거되면서 하월곡동 88 정릉천변 일대로 이주, ‘미아리 텍사스’라는 오명이 따라붙었다. 2000년대 길음 재개발로 대부분 헐려 나갔다. 삼양로는 길음역4거리에서 수유동 쪽 길이다. 1962년 미아초등학교 앞쪽에 백호주택이 들어선 뒤 위쪽을 잇는 도로가 생겼다. 수유동에서 미아리고개를 넘어가는 미아사거리는 본래 미아삼거리였다. 장위동으로 나가는 길이 확장되고 입체교차로가 들어서면서 사거리가 됐다. 백화점과 할인마트, 극장 등이 들어와 길음동과 미아동, 삼양동 일대 상권의 중심지가 됐다. 1997년 미아리 텍사스가 정비되고, 1999년 내부순환도로 완공, 2002년 길음뉴타운 지정으로 이 일대는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개벽했다. 미아로, 미아리고개, 미아리하늘다리, 미아사거리 등 미아리가 붙은 지명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다는 이유로 지명을 바꾸려던 한때의 시도가 무색하다.가슴 저미는 노랫말로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린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우리나라 대중 가요사에 한 획을 그었다. 작사자 반야월은 가요 사상 가장 많은 작사, 가장 많은 히트곡, 가장 많은 노래비를 남긴 인물이다. 작사가 반야월은 작곡가 박시춘, 가수 이난영과 함께 ‘한국 가요계의 3대 보물’로 꼽혔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반야월은 미아리고개 너머에 살았다. 혼자 피란을 떠난 부인이 5살짜리 어린 딸을 등에 업고 미아리고개를 넘다 숨진 딸을 길섶에 묻은 비극적인 가족사를 노랫말로 만들었다. 미아리는 문학작품의 단골 소재였다. 미아리 사람들의 생활사가 서민의 삶을 대변했다. 소설가 김소진의 대표작 ‘장석조네 사람들’에서 “한 지붕 아래 아홉 개의 방이 한 일자로 늘어서 있어 사람들이 기차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장석조네 집터는 옆의 행길보다 석 자 정도는 높게 다져져 있었다”라는 대목은 1970년대 돌산 아래 ‘열차주택’을 묘사한 장면이다. 소설가 조정래의 장편소설 ‘한강3’에서도 미아리 무허가 판자촌과 구불구불한 비탈길이 나온다. 신경림의 시 ‘길음시장’과 박완서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는 미아리의 불법 매장 풍경이 그려졌다. 1986~1994년 방영된 인기 TV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에도 열차주택 풍경이 등장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29차 효창공원 ■집결 장소: 11월 9일(토) 오전 10시 효창공원역 1번 출구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미래유산 톡톡] 시각장애 극복한 역술인들 밀집 ‘미아리 점성촌’

    [미래유산 톡톡] 시각장애 극복한 역술인들 밀집 ‘미아리 점성촌’

    옛 서울의 북쪽 관문인 혜화문을 나서면 돈암동 로터리를 지나 의정부로 가는 길목인 고개가 있다. 바로 ‘미아리고개’다. 지금도 언덕이 높아 통행하는 차들이 한 번쯤 액셀러레이터를 더 밟아야 고개를 넘어가는 높이인데 그 옛날에는 얼마나 험하고 높았을까. 오죽하면 고개 넘기가 너무 힘들어 중간에 밥을 한 번 더 먹어야 넘을 수 있다고 하여 ‘되넘이 고개’라고도 하고, 병자호란 때 되놈이 넘어왔던 고개라고 ‘되넘이’라고 불렸던 고개다. 1950년 새벽 한국전쟁이 발발해 소련군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이 6월 28일 이 고개를 넘어 서울로 들어왔다. 같은 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3개월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동족상잔의 비극,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인민위원회에 끌려간 남한의 많은 사회지도층 인사와 예술인, 학자, 법조인, 교육자 등 1500여명이 강제로 북한으로 끌려가게 됐을 때 가족들은 미아리고개를 넘지 못하고 눈물의 이별을 해야만 했던 바로 그 고개다. 고개 꼭대기에 한국 대중가요사의 보물 반야월 선생의 노래비 ‘단장의 미아리고개’가 서 있다. 노랫말을 읊조릴 때마다 반야월 선생의 5살 딸아이가 피란 중 굶어 죽어 길가에 묻은 뒤 시신을 찾지 못한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과 처참한 풍경이 그려진다. 또 돈암동에서 미아리고개를 오르는 미아리 고가 양쪽으로는 2014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미아리 점성촌’이 있다. 번성할 때는 100호가 넘는 점집들이 성업했고 지금은 40호 넘게 영업 중이다. 한국전쟁 전 종로3가에 집단 거주하던 점술가들이 전쟁과 함께 남산 근처로 생활 터를 옮겼고 남산 정비로 흩어진 후 1960년대 말부터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곳의 점술가는 모두 시각장애인이며, 역학에 근거한 점을 본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대한맹인복지회가 연합해 성북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1년 단위의 역술강의 프로그램을 개설해 역술인 양성을 하고 있다. 장애를 극복한 맹인들이 역학으로 인생의 길흉을 점치는 점성가 밀집지역으로 외국 관광객들까지 찾아온다고 한다. 강영진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원
  • 文이 꺼낸 원칙 세우기… 적극행정 막는 중구난방法 수술 시작됐다

    文이 꺼낸 원칙 세우기… 적극행정 막는 중구난방法 수술 시작됐다

    원칙 없이 오락가락하는 답답한 행정. 공무원들의 소극적인 태도에 속 터지는 것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이를 무조건 공무원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그보다도 공직사회 전체가 ‘복지부동’ 행태를 보일 수밖에 없도록 짜인 행정법 체계 자체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질적인 문제에 정부가 칼을 대기 시작했다. 법제처를 중심으로 ‘행정기본법’ 제정에 착수한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정부의 행정에 원칙을 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복지부동 키우는 기준 없는 행정법 체계 5일 법제처에 따르면 지난 9월 기준 우리나라 국가법령 4812건 중 4400여건(92%)이 행정법령에 해당한다. 행정은 국가가 운영되는 방식을 뜻한다. 행정법령은 그 방식을 규정해 놓은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기업의 활동을 규제하는 수단인 각종 인허가부터 사소하게는 주차 위반을 했을 때 과태료를 부과하는 것까지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펼치는 거의 모든 행위를 행정법령으로 규정하고 있다. 국민의 실생활에 가장 밀접한 영향을 주는 법령이라고 할 수 있다. 거의 모든 법령이 행정법령이라고 할 정도로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지만 여기에 원칙과 기준을 제시하는 ‘기본법’이 우리나라 법체계에 아직 없다. 형사법(형법)과 민사법(민법)에서 개별법령들을 아우를 수 있는 기본법이 있어 법령을 해석하거나 집행할 때 상위의 원칙으로서 일관된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점과 비교해 보면 매우 대조적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지내 왔으니 겉으로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피해는 생각보다 크다. 먼저 규제를 개선하는 문제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신산업 분야를 창출한 기업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존의 규제를 개선해야 한다. 국민의 불편을 해소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를 위해서는 수백 가지의 법률을 각각 따로 고쳐야 한다. 엄청난 비효율이다. 대통령령 이하의 시행령을 개선하는 것이면 그나마 낫다. 자칫 법률 개정 사항으로 이어지면 국회의 문턱도 넘어야 한다. 너무 오래 걸릴뿐더러 여야가 대치하는 상황에서는 무기한 표류할 수도 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것이 현대사회의 특징이다. 기회를 놓치는 것은 경쟁력을 놓치는 것과 같다. 공직사회를 수식하는 단어들을 떠올려 보자. 복지부동, 무사안일, 무책임 등 부정적인 어휘들이 따라붙는다. 개별 공무원의 잘못으로만 여길 수는 없는 문제다. 일하면서 대의와 원칙 없이 자잘한 개별법령만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공무원들에게 법령의 범위를 다소 넘어서는 적극적인 조치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괜히 나섰다가 감사에 징계까지, 일이 복잡해진다. 정부 각 부처로 분산된 개별법령들은 행정의 일관성도 떨어뜨린다. 같은 인허가 제도라고 해도 어느 부처 소관인지에 따라 민원인을 배려할 때도, 정반대의 판단이 나올 때도 있다. 들쑥날쑥한 행정에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점점 낮아진다. 명확한 기준이 없으니 행정기관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다. 각 지방자치단체가 중구난방으로 내놓은 자치법규 상당수가 상위법에 위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영우 자유한국당 의원이 법제처와 행정안전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 상반기 상위법에 위반하는 자치법규는 무려 1만 3227건이나 됐다. 법제처가 관련 조사를 처음 시작했던 2017년 1만 2186건에서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마구잡이로 만들어진 자치법규로 발생하는 혼란과 불이익은 오롯이 국민의 몫이다. 행정기본법 제정은 이를 바로잡는 작업이기도 하다. 김 의원은 “(주민들이) 자치법규를 지키는 것이 지자체의 조례나 규칙에 어긋나고 있던 것”이라며 “법을 지킨 국민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조속히 개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1960년대부터 논의… 1996년 절차법만 제정 행정기본법 제정 논의가 처음은 아니다. 학계와 법조계를 중심으로 행정의 원칙과 공통으로 필요한 사항을 규율하는 법을 구상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1960년대 중반부터 이어졌다. 그러나 학계와 정부의 의견 차이가 심했고 기본법 내용을 채워 넣을 만한 판례도 부족했다. 기본법을 제정하기에는 사회적인 여건이 성숙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실체적인 내용을 제외하고 행정절차 등이 담긴 ‘행정절차법’만 1996년 제정되기에 이른다. 행정절차법조차도 완벽한 합의를 이뤄 제정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1986년 당시 총무처(정부의 인사와 행정관리 등을 담당하던 기관)에 ‘행정절차법안심의위원회’가 설치됐고 이듬해 행정절차법안을 정부안으로 만들어 입법예고했다. 그러나 국회에 제출하지 못하고 폐기됐다. 제6공화국(노태우 대통령)을 지나 1995년 문민정부(김영삼 대통령)에서 다시 정부안을 만들어 이듬해 입법예고했고 비로소 국회의 문턱을 넘었다. 1998년 본격적으로 시행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실체적 내용을 넣어야 한다는 주장은 끊임없이 제기됐지만 지금껏 숙원사업으로만 남아 있다. 행정기본법 제정을 위한 논의는 지금까지 ‘그들만의 리그’였다. 복잡한 법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공무원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필요성이 언급됐을 뿐 일반 국민과는 동떨어져 커다란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행정기본법은 수많은 행정법령을 아우르는 ‘기본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이지만 그동안 정부의 무관심 속에 방치됐다. 그러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월 국무회의에서 행정기본법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문 대통령은 “국민 불편을 개선하는 사안마다 수백 가지의 개별법을 정비해 문제를 해결하지 말라”면서 “일반적이고 원칙적인 규정을 통해 문제를 일괄 해결하려는 방안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법제처도 더는 미뤄 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본격적인 개편에 나선 것이다. ●법제처 “연말 완성해 내년 국회 입법 목표” 그래서 어떤 내용이 담기는 것일까. 법제처는 “국민의 권리는 강화하되 규제는 최대한 완화하겠다”는 기본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특히 법전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국민의 권리 보호와 깊은 관련이 있는 행정법의 기본 원칙을 명문화해 법에 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국민의 보호할 만한 가치 있는 신뢰는 보호해야 한다는 ‘신뢰보호의 원칙’, 행정청이 처분을 내릴 때 상대방에게 처분과 실질적인 관련이 없는 의무를 부과해서는 안 된다는 ‘부당결부금지의 원칙’ 등 판례나 학설로만 거론됐던 내용이 주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공직사회에 적극행정 바람이 불고 있다. 적극행정의 토대를 강화하고 불합리한 규제를 빠르게 개선할 수 있도록 ‘적극행정의 원칙’도 법에 들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공무원의 소극행정을 법률로 뿌리 뽑으려는 시도라고 하겠다. 불필요한 규제가 새로운 산업의 출현을 막는 것을 방지할 수 있도록 규제를 만들 때는 ‘국민의 편익’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도 담길 것으로 보인다. 답답한 행정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개별법에 흩어진 제도들의 공통점을 한 곳에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한다. 불필요한 절차는 과감하게 삭제하는 등 전반적인 체계를 손질할 전망이다. 법제처 관계자는 “이런 내용을 담은 행정기본법 추진체계는 지난 7월 완성됐다. 관계부처, 지자체 등과 구체적인 내용을 협의하고 있다”며 “연말쯤 행정기본법의 기본적인 내용과 하위법령을 완성해 내년 상반기 정부입법안을 확정한 뒤 국회에 제출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퓨전 사극·한국형 스릴러+미학적 작가주의… 흥행·작품성 인정받다

    퓨전 사극·한국형 스릴러+미학적 작가주의… 흥행·작품성 인정받다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계에 불었던 산업의 활기는 2006년 그 정점을 찍었다. 2003년부터 80편대를 기록하던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2006년을 기점으로 100편을 넘어섰다. 2001년 50%를 넘어 2004년부터 60%대에 육박하던 한국영화 점유율도 급기야 2006년 63.8%를 기록했다. 현재까지도 가장 높은 수치로 기록되는 비율이다. 2006년이 한국영화산업에서 가능한 최대치를 보여준 해였다면, 2007년 이후는 위기 혹은 조정 국면으로 진입하게 된다. 2006년 7월, 긴 논란 끝에 결국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 상영제도)가 73일로 축소되었고, 때마침 버팀목이라도 무너진 듯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세가 거세졌다. 한국영화 관객은 감소했고 수익률과 수출 실적 또한 하락했다. 2007년 50%로 내려선 한국영화 점유율은 2008년 42.1%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한국영화는 2년 만에 침체기를 극복하고 2009년부터 다시 상승세를 만들어낸다. 시장 규모에 맞는 한국형 장르가 다듬어졌고, 상업영화와 작가주의 영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독창적인 감독들이 작품을 이어갔다. 이번 연재는 2000년대 중후반의 한국영화가 어떻게 도약해 갔는지 살펴보기로 한다.●한국형 장르의 역동성 200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에서 주목할 장르 키워드는 바로 사극과 스릴러다. 퓨전의 길을 택한 사극·시대극 그리고 범죄·액션과 결합한 스릴러 장르는 다양한 장르적 요소와 이합집산하며 더욱더 진화해갔다. 이러한 장르 다변화와 ‘복합장르화’ 경향은 2010년대로 이어지며 ‘한국형 장르’가 구축되는 방법론이 됐다. 물론 한국영화의 전통적인 장르인 멜로·로맨스와 1990년대의 인기 장르였던 로맨틱 코미디도 관객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1960년대 한국 관객들이 가장 많이 찾았던 사극 장르는 2000년대 들어 현대적인 감각의 퓨전 사극으로 부활했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이재용, 2003)를 시작으로 2005년 ‘혈의 누’(김대승)·‘형사 Duelist’(이명세)가 이어졌고, 2005년 12월에 개봉한 ‘왕의 남자’(이준익)는 12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해 사극 흥행의 정점을 찍었다. 특히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시나리오를 쓴 김대우 감독은 대담한 상상력과 세련된 유머가 돋보인 ‘음란서생’(2006)과 ‘춘향전’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방자전’(2010)을 내놓으며 퓨전 사극의 유행을 이끌었다. 2000년대 후반에도 사극의 인기는 계속되었는데, 고려 왕조를 배경으로 에로티시즘과 결합한 ‘쌍화점’(유하, 2008), 한국형 히어로물을 표방하며 판타지 장르에 도전한 ‘전우치’(최동훈, 2009)가 대표적이다. 근현대사의 사건이나 실존 인물을 다룬 시대극 장르도 주목할 경향이다. 2004년에는 ‘효자동 이발사’(임찬상)·‘하류인생’(임권택) 등 근현대사를 가공하거나 ‘슈퍼스타 감사용’(김종현)·‘역도산’(송해성) 등 실존인물을 소재로 과거를 되돌아보는 노스탤지어 영화들이 수확됐다. 2005년에는 대통령 시해 사건을 블랙코미디 감각으로 풍자한 ‘그때 그 사람들’(임상수), 일제강점기 여류 비행사 박경원의 일대기를 그린 ‘청연’(윤종찬)이 이어졌다. 2007년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정면으로 다룬 ‘화려한 휴가’(김지훈)가 전국 730만 관객의 선택을 받았다.‘살인의 추억’(봉준호, 2003)이 선취한 스릴러 장르는 2008년 ‘추격자’(나홍진)에서 완성됐다. 실제 연쇄살인마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추격자’는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임에도 불구하고 관객 500만 이상을 동원해 화제가 됐다. 이 영화의 성공은 범죄·액션 등의 요소와 결합한 스릴러 장르의 유행을 촉발, 스릴러가 현대 한국영화의 대표 장르로 등극하는 계기가 됐다. 2010년에는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끼’(강우석), 잔혹한 이미지를 전시한 ‘하드보일드’ 스릴러 ‘악마를 보았다’(김지운)가 흥행 배턴을 이었다. 액션과 스릴러는 장르 특성상 결합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의 전통적인 강세 장르인 액션이 더 전면으로 나서는 영화들도 있었다. 2010년에는 남북 분단 상황을 현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한 ‘의형제’(장훈)가 540만 관객을, 2011년에는 ‘감성 액션’을 표방한 ‘아저씨’(이정범)가 61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과 비평 모두 주목을 받았다.범죄스릴러의 인척 장르라 할 누아르, 갱스터 영화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윤종빈, 2011)는 1980년대 시대상을 풍자와 해학 그리고 블랙코미디 방식으로 그리며 갱스터 장르의 신기원을 보여주었다. 한편 최동훈은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2004)으로 한국형 ‘케이퍼 무비’(범죄 전문가들의 정교한 범죄 과정을 보여주는 장르)를 성공시켰다. 이후 허영만 작가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타짜’(2006), ‘멀티캐스팅’의 묘를 살린 범죄영화 ‘도둑들’(2012) 등을 내놓으며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등극했다. 큰 예산이 들지 않는 로맨틱 코미디도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 법칙을 새롭게 재해석한 ‘달콤한 거짓말’(정정화, 2008), 박중훈의 귀환과 ‘88만원 세대’의 묘사가 인상적인 ‘내 깡패 같은 애인’(김광식, 2010), 장르 화법에 더없이 충실했던 ‘시라노: 연애조작단’(김현석, 2010), 기획 코미디의 힘을 보여준 ‘댄싱퀸’(이석훈, 2011), 460만 가까운 관객을 모은 성공작 ‘내 아내의 모든 것’(민규동, 2012), 키치적인 B급 정서가 매력적인 ‘남자사용설명서’(이원석, 2012) 등이 이어졌다. 멜로를 코믹호러에 접붙인 ‘달콤, 살벌한 연인’(손제곤, 2006), 로맨틱 코미디의 뼈대에 호러를 녹여낸 ‘오싹한 연애’(황인호, 2011)도 주목받았다. ●예술영화·상업영화 아우르는 작가주의 1996~1997년 데뷔해, 2000년대 초중반 주요 해외영화제를 통해 인정받은 작가주의 감독 홍상수, 김기덕, 이창동은 미학적 성숙을 거듭하며 그들의 영화세계를 완성시켜갔다.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치면 단연 홍상수다. 그는 매년 1~2편의 작품을 연출하며, 새로운 미학적 실험과 변주를 멈추지 않고 있다. 2004년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2005년 ‘극장전’, 2006년 ‘해변의 여인’, 2008년 ‘밤과 낮’·‘첩첩산중’(단편), 2009년 ‘잘 알지도 못하면서’, 2010년 ‘하하하’·‘옥희의 영화’, 2011년 ‘북촌방향’ 등 언뜻 앞의 영화와 겹치는 듯하면서도 매번 기존의 틀을 바꿔가는 방식으로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다. 마치 거울처럼 마주 보는 그의 연작들은, 각 영화의 제목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차라리 ‘홍상수 영화’로 호명하고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비평적 해석의 단초가 될 수 있다. 그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국내외 비평계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고, 예술영화 관객들의 지지도 굳건하다. 김기덕은 ‘활’(2005), ‘숨’(2007), ‘비몽’(2008) 등 본인의 작품뿐만 아니라 ‘영화는 영화다’(장훈, 2008)·‘풍산개’(전재홍, 2011) 등 조감독 출신 감독의 영화 제작까지 겸했다. 그는 ‘아리랑’(2011)으로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수상했고, ‘피에타’(2012)로 제6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안았다. 이창동 역시 인간의 실존적 고통과 구원에 관한 질문을 멈추지 않으며, 미학적 성취를 이어갔다. ‘밀양’(2007)은 제60회 칸국제영화제 장편경쟁부문에 진출, 주연 배우 전도연이 한국영화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시’(2010)는 제63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각본상을 받았다. 한편 이창동은 2009년 제62회 칸영화제에서 장편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을, 2011년 제64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했다.2000년대 들어 새롭게 발견된 시네아스트(cineaste·영화예술가)로는 재중동포 출신인 장률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두 번째 장편영화인 ‘망종’(2005)이 제58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되고 여러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하며 널리 알려졌다. ‘경계’(2007), ‘중경’(2007), ‘두만강’(2009), ‘풍경’(2013) 등 일련의 작품을 통해, 조선족, 탈북 여성과 소년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 등 경계인들의 이야기를 건조한 풍경 속에 담아내고 있다. 특히 그는 ‘경주’(2013) 이후 새로운 화법으로 전환해 더 넓은 관객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 외에도 ‘천년학’(2007)으로 100번째 영화를 연출한 거장 임권택, 현대 한국사회에 대한 성찰을 로맨스 장르에 녹인 ‘멋진 하루’(2008)의 이윤기, 리얼리즘과 신비함이 뒤섞인 ‘파주’(2009)의 박찬옥, 제주도 4·3 사건을 독특한 미학으로 승화시킨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2012)의 오멸 등이 작가주의 영화의 계보를 이었다. 또한 제28회 밴쿠버 영화제에서 용호상을 수상한 ‘회오리바람’(2009)의 장건재, 탈북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시선을 예리하게 포착한 ‘무산일기’(2010)의 박정범, 뛰어난 스토리텔링을 창조한 ‘파수꾼’(2010)의 윤성현 등 인상적인 독립장편영화로 데뷔한 감독들도 특기할 필요가 있다.대중영화와 작가영화의 전통적인 경계를 넘어, 독창적인 장르 해석과 자신만의 영화 스타일을 유지하는 감독군으로는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그리고 나홍진이 있다. 봉준호는 국내를 넘어선 흥행과 비평적 지지를 받은 ‘괴물’(2006), 뛰어난 미학적 완성도로 국내외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은 ‘마더’(2009) 그리고 글로벌 영화 프로젝트의 성공작 ‘설국열차’(2013)를 이어가며 그만의 영화세계를 진보시켜갔다. 박찬욱은 ‘복수 3부작’의 완결편 ‘친절한 금자씨’(2005), 디지털 영화 미학을 개척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제62회 칸국제영화제 장편경쟁부문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박쥐’(2008), 그리고 첫 번째 할리우드 영화 ‘스토커’(2013)까지, 영화적 야심과 예술가적 자의식을 팽팽하게 유지하고 있다. 김지운은 만주웨스턴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를 오마주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고어 영화(선혈이 낭자하는 잔인한 묘사가 특징)에 가까운 하드보일드 ‘악마를 보았다’(2010) 등을 통해 특유의 장르 미학을 추구하고 있다.2008년 범죄스릴러 ‘추격자’로 데뷔한 나홍진은 광기 어린 액션스릴러 ‘황해’(2010), 초자연적 미스터리스릴러 ‘곡성’(2016)을 내놓으며, 스릴러 장르를 그만의 스타일과 해석으로 새롭게 구축해가고 있다. 그의 세 작품은 모두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추격자’는 제61회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황해’는 제64회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곡성’은 제69회 비경쟁부문에서 세계 영화인들을 만났다. 그는 가장 차기작이 기대되는 감독임에 틀림없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퓨전 사극·한국형 스릴러+미학적 작가주의… 흥행·작품성 인정받다

    퓨전 사극·한국형 스릴러+미학적 작가주의… 흥행·작품성 인정받다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계에 불었던 산업의 활기는 2006년 그 정점을 찍었다. 2003년부터 80편대를 기록하던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2006년을 기점으로 100편을 넘어섰다. 2001년 50%를 넘어 2004년부터 60%대에 육박하던 한국영화 점유율도 급기야 2006년 63.8%를 기록했다. 현재까지도 가장 높은 수치로 기록되는 비율이다. 2006년이 한국영화산업에서 가능한 최대치를 보여준 해였다면, 2007년 이후는 위기 혹은 조정 국면으로 진입하게 된다. 2006년 7월, 긴 논란 끝에 결국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 상영제도)가 73일로 축소되었고, 때마침 버팀목이라도 무너진 듯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세가 거세졌다. 한국영화 관객은 감소했고 수익률과 수출 실적 또한 하락했다. 2007년 50%로 내려선 한국영화 점유율은 2008년 42.1%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한국영화는 2년 만에 침체기를 극복하고 2009년부터 다시 상승세를 만들어낸다. 시장 규모에 맞는 한국형 장르가 다듬어졌고, 상업영화와 작가주의 영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독창적인 감독들이 작품을 이어갔다. 이번 연재는 2000년대 중후반의 한국영화가 어떻게 도약해 갔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한국형 장르의 역동성 200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에서 주목할 장르 키워드는 바로 사극과 스릴러다. 퓨전의 길을 택한 사극·시대극 그리고 범죄·액션과 결합한 스릴러 장르는 다양한 장르적 요소와 이합집산하며 더욱더 진화해갔다. 이러한 장르 다변화와 ‘복합장르화’ 경향은 2010년대로 이어지며 ‘한국형 장르’가 구축되는 방법론이 됐다. 물론 한국영화의 전통적인 장르인 멜로·로맨스와 1990년대의 인기 장르였던 로맨틱 코미디도 관객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1960년대 한국 관객들이 가장 많이 찾았던 사극 장르는 2000년대 들어 현대적인 감각의 퓨전 사극으로 부활했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이재용, 2003)를 시작으로 2005년 ‘혈의 누’(김대승)·‘형사 Duelist’(이명세)가 이어졌고, 2005년 12월에 개봉한 ‘왕의 남자’(이준익)는 12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해 사극 흥행의 정점을 찍었다. 특히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시나리오를 쓴 김대우 감독은 대담한 상상력과 세련된 유머가 돋보인 ‘음란서생’(2006)과 ‘춘향전’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방자전’(2010)을 내놓으며 퓨전 사극의 유행을 이끌었다. 2000년대 후반에도 사극의 인기는 계속되었는데, 고려 왕조를 배경으로 에로티시즘과 결합한 ‘쌍화점’(유하, 2008), 한국형 히어로물을 표방하며 판타지 장르에 도전한 ‘전우치’(최동훈, 2009)가 대표적이다. 근현대사의 사건이나 실존 인물을 다룬 시대극 장르도 주목할 경향이다. 2004년에는 ‘효자동 이발사’(임찬상)·‘하류인생’(임권택) 등 근현대사를 가공하거나 ‘슈퍼스타 감사용’(김종현)·‘역도산’(송해성) 등 실존인물을 소재로 과거를 되돌아보는 노스탤지어 영화들이 수확됐다. 2005년에는 대통령 시해 사건을 블랙코미디 감각으로 풍자한 ‘그때 그 사람들’(임상수), 일제강점기 여류 비행사 박경원의 일대기를 그린 ‘청연’(윤종찬)이 이어졌다. 2007년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정면으로 다룬 ‘화려한 휴가’(김지훈)가 전국 730만 관객의 선택을 받았다.‘살인의 추억’(봉준호, 2003)이 선취한 스릴러 장르는 2008년 ‘추격자’(나홍진)에서 완성됐다. 실제 연쇄살인마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추격자’는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임에도 불구하고 관객 500만 이상을 동원해 화제가 됐다. 이 영화의 성공은 범죄·액션 등의 요소와 결합한 스릴러 장르의 유행을 촉발, 스릴러가 현대 한국영화의 대표 장르로 등극하는 계기가 됐다. 2010년에는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끼’(강우석), 잔혹한 이미지를 전시한 ‘하드보일드’ 스릴러 ‘악마를 보았다’(김지운)가 흥행 배턴을 이었다. 액션과 스릴러는 장르 특성상 결합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의 전통적인 강세 장르인 액션이 더 전면으로 나서는 영화들도 있었다. 2010년에는 남북 분단 상황을 현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한 ‘의형제’(장훈)가 540만 관객을, 2011년에는 ‘감성 액션’을 표방한 ‘아저씨’(이정범)가 61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과 비평 모두 주목을 받았다.범죄스릴러의 인척 장르라 할 누아르, 갱스터 영화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윤종빈, 2011)는 1980년대 시대상을 풍자와 해학 그리고 블랙코미디 방식으로 그리며 갱스터 장르의 신기원을 보여주었다. 한편 최동훈은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2004)으로 한국형 ‘케이퍼 무비’(범죄 전문가들의 정교한 범죄 과정을 보여주는 장르)를 성공시켰다. 이후 허영만 작가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타짜’(2006), ‘멀티캐스팅’의 묘를 살린 범죄영화 ‘도둑들’(2012) 등을 내놓으며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등극했다. 큰 예산이 들지 않는 로맨틱 코미디도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 법칙을 새롭게 재해석한 ‘달콤한 거짓말’(정정화, 2008), 박중훈의 귀환과 ‘88만원 세대’의 묘사가 인상적인 ‘내 깡패 같은 애인’(김광식, 2010), 장르 화법에 더없이 충실했던 ‘시라노: 연애조작단’(김현석, 2010), 기획 코미디의 힘을 보여준 ‘댄싱퀸’(이석훈, 2011), 460만 가까운 관객을 모은 성공작 ‘내 아내의 모든 것’(민규동, 2012), 키치적인 B급 정서가 매력적인 ‘남자사용설명서’(이원석, 2012) 등이 이어졌다. 멜로를 코믹호러에 접붙인 ‘달콤, 살벌한 연인’(손제곤, 2006), 로맨틱 코미디의 뼈대에 호러를 녹여낸 ‘오싹한 연애’(황인호, 2011)도 주목받았다. ●예술영화·상업영화 아우르는 작가주의 1996~1997년 데뷔해, 2000년대 초중반 주요 해외영화제를 통해 인정받은 작가주의 감독 홍상수, 김기덕, 이창동은 미학적 성숙을 거듭하며 그들의 영화세계를 완성시켜갔다.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치면 단연 홍상수다. 그는 매년 1~2편의 작품을 연출하며, 새로운 미학적 실험과 변주를 멈추지 않고 있다. 2004년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2005년 ‘극장전’, 2006년 ‘해변의 여인’, 2008년 ‘밤과 낮’·‘첩첩산중’(단편), 2009년 ‘잘 알지도 못하면서’, 2010년 ‘하하하’·‘옥희의 영화’, 2011년 ‘북촌방향’ 등 언뜻 앞의 영화와 겹치는 듯하면서도 매번 기존의 틀을 바꿔가는 방식으로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다. 마치 거울처럼 마주 보는 그의 연작들은, 각 영화의 제목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차라리 ‘홍상수 영화’로 호명하고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비평적 해석의 단초가 될 수 있다. 그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국내외 비평계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고, 예술영화 관객들의 지지도 굳건하다. 김기덕은 ‘활’(2005), ‘숨’(2007), ‘비몽’(2008) 등 본인의 작품뿐만 아니라 ‘영화는 영화다’(장훈, 2008)·‘풍산개’(전재홍, 2011) 등 조감독 출신 감독의 영화 제작까지 겸했다. 그는 ‘아리랑’(2011)으로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수상했고, ‘피에타’(2012)로 제6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안았다. 이창동 역시 인간의 실존적 고통과 구원에 관한 질문을 멈추지 않으며, 미학적 성취를 이어갔다. ‘밀양’(2007)은 제60회 칸국제영화제 장편경쟁부문에 진출, 주연 배우 전도연이 한국영화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시’(2010)는 제63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각본상을 받았다. 한편 이창동은 2009년 제62회 칸영화제에서 장편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을, 2011년 제64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했다.2000년대 들어 새롭게 발견된 시네아스트(cin?ste·영화예술가)로는 재중동포 출신인 장률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두 번째 장편영화인 ‘망종’(2005)이 제58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되고 여러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하며 널리 알려졌다. ‘경계’(2007), ‘중경’(2007), ‘두만강’(2009), ‘풍경’(2013) 등 일련의 작품을 통해, 조선족, 탈북 여성과 소년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 등 경계인들의 이야기를 건조한 풍경 속에 담아내고 있다. 특히 그는 ‘경주’(2013) 이후 새로운 화법으로 전환해 더 넓은 관객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 외에도 ‘천년학’(2007)으로 100번째 영화를 연출한 거장 임권택, 현대 한국사회에 대한 성찰을 로맨스 장르에 녹인 ‘멋진 하루’(2008)의 이윤기, 리얼리즘과 신비함이 뒤섞인 ‘파주’(2009)의 박찬옥, 제주도 4·3 사건을 독특한 미학으로 승화시킨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2012)의 오멸 등이 작가주의 영화의 계보를 이었다. 또한 제28회 밴쿠버 영화제에서 용호상을 수상한 ‘회오리바람’(2009)의 장건재, 탈북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시선을 예리하게 포착한 ‘무산일기’(2010)의 박정범, 뛰어난 스토리텔링을 창조한 ‘파수꾼’(2010)의 윤성현 등 인상적인 독립장편영화로 데뷔한 감독들도 특기할 필요가 있다.대중영화와 작가영화의 전통적인 경계를 넘어, 독창적인 장르 해석과 자신만의 영화 스타일을 유지하는 감독군으로는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그리고 나홍진이 있다. 봉준호는 국내를 넘어선 흥행과 비평적 지지를 받은 ‘괴물’(2006), 뛰어난 미학적 완성도로 국내외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은 ‘마더’(2009) 그리고 글로벌 영화 프로젝트의 성공작 ‘설국열차’(2013)를 이어가며 그만의 영화세계를 진보시켜갔다. 박찬욱은 ‘복수 3부작’의 완결편 ‘친절한 금자씨’(2005), 디지털 영화 미학을 개척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제62회 칸국제영화제 장편경쟁부문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박쥐’(2008), 그리고 첫 번째 할리우드 영화 ‘스토커’(2013)까지, 영화적 야심과 예술가적 자의식을 팽팽하게 유지하고 있다. 김지운은 만주웨스턴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를 오마주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고어 영화(선혈이 낭자하는 잔인한 묘사가 특징)에 가까운 하드보일드 ‘악마를 보았다’(2010) 등을 통해 특유의 장르 미학을 추구하고 있다.2008년 범죄스릴러 ‘추격자’로 데뷔한 나홍진은 광기 어린 액션스릴러 ‘황해’(2010), 초자연적 미스터리스릴러 ‘곡성’(2016)을 내놓으며, 스릴러 장르를 그만의 스타일과 해석으로 새롭게 구축해가고 있다. 그의 세 작품은 모두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추격자’는 제61회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황해’는 제64회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곡성’은 제69회 비경쟁부문에서 세계 영화인들을 만났다. 그는 가장 차기작이 기대되는 감독임에 틀림없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그때의 사회면] 대선 날짜 택일을 점쟁이가?

    [그때의 사회면] 대선 날짜 택일을 점쟁이가?

    1953년 9월 경찰은 미신타파 강조 주간을 정해 점쟁이, 사주쟁이들을 일제히 단속했다. 전후에 불안 심리가 팽배했고 마땅한 일거리가 없어 도심에도 좌판을 펴놓은 점쟁이들이 즐비했다. 점괘나 손금을 보고 비관해 자살한 사건이 종종 보도될 만큼 서민들의 미신에 대한 믿음은 컸다. 1966년 8월 전남 나주의 13개 마을 부녀자 200여명이 명산에 묘를 써 가뭄이 길어졌다며 묘 7개를 파헤쳤다가 경찰 조사를 받았다. 1977년 7월 전북 남원에서도 “여자가 부정한 짓을 하면 비가 온다”는 미신을 믿고 부녀자들이 전라(全裸)로 동네를 돌아다니며 굿판을 벌였다. 물건을 도난당한 무당이 점을 쳐서 식모를 범인으로 고소하자 경찰이 그 말을 믿고 식모를 문초하다 범인을 놓친 황당한 일도 벌어졌다(경향신문 1964년 5월 5일자). 1971년 7월 11일 전남 순천시의 모 관청에서는 돼지 머리를 차려 놓고 징과 북을 두들기며 요란한 굿판을 벌였는데 관청 측은 “흉사가 잇따라 액땜 차원에서 굿을 벌인 것”이라고 해명했다. 간 큰 사주·관상쟁이들은 서울시내 관청의 국장실까지 드나들었고 국과장들이 근무시간에 사주 관상을 보기에 바빴다(동아일보 1954년 7월 15일자). 1960년대 후반에 서울의 후암동 ‘복술가촌’ 등에 점집이 번창했다. 비서를 둔 점쟁이도 있었고 월수입이 50만원(현재 가치 약 5000만원)이나 돼 고액의 사업소득세를 내는 기업형 점집이 23곳이나 됐다고 한다(매일경제 1967년 5월 30일자). 영화계에서도 고사를 지내는 것은 그럴 수 있다 쳐도 극 중에서 부부로 결합되는 남녀 배우의 궁합을 미리 봤으며 궁합이 나쁘면 캐스팅을 꺼렸다. 미신이라기보다 헛소문도 있었는데, 영화배우 L씨가 몰락한 것은 “L씨를 쓰면 망한다”는 미신이 영화계에 퍼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뱀이 나오는 영화는 망한다”는 말도 있었다(경향신문 1975년 7월 19일자). 국가 대사와 주요 투자도 점에 의존할 만큼 정치인, 재벌이 먼저 점과 사주에 빠져 미신 타파 운동도 소용이 없었다. 1969년 10월 10일 점쟁이들은 ‘역술인 대제전’을 열었는데 후원자가 당시 이효상 국회의장과 윤치영 공화당 의장서리였다. 역술인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기필코 삼선을 한다”고 주장했다. 1971년 7대 대선 날짜는 4월 27일이었는데 당시 정부, 여당이 사주쟁이한테 택일을 맡겨 정한 것이며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 발표 날도 점쟁이가 정해 준 날짜라고 한다. 박정희는 공공기관 자리도 풍수지리를 보고 결정했으며 과천정부종합청사도 그런 과정을 거칠 만큼 역술 신봉자였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1973년 중국외교 전담 조직 창설...독자 대중외교 본격화

    1973년 중국외교 전담 조직 창설...독자 대중외교 본격화

    올해는 중화인민공화국(신중국) 건국 70주년과 한중 수교 27주년이다. 두 나라는 한국전쟁(1950~1953) 때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등 수십년간 적대 관계를 유지하다가 1992년 수교한 뒤로 세계 외교가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비약적으로 교류 발전했다. 하지만 2016년 한반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로 갈등을 빚은 뒤로 ‘빙하기’를 맞고 있다. 반면 지속적으로 악화일로를 걷던 북중 관계는 지난해 북미 핵협상 재개를 계기로 서로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하고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 중국을 둘러싼 한반도 주변 정세가 ‘역사적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이에 1970년대 미중 화해를 시작으로 20여년 뒤 한중수교가 이뤄지기까지 우리나라와 중국이 어떤 진통을 겪었는지 살펴보고 두 나라 관계의 미래도 함께 전망해보고자 한다. 전·현직 중국 주재 외교관·특파원 등이 만든 계간지 ‘한중저널’ 창간호(9월)의 내용을 중심으로 여러 문헌·자료를 요약 정리했다. ●1970년대 미중 화해로 데탕트 시대 돌입 1960년대 말 전 세계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가운데 공산권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프라하의 봄’(민주화 운동)과 이를 막으려는 소련의 ‘브레즈네프 독트린’(사회주의 수호를 위해 다른 나라 내정에 간섭하겠다는 주장), 1969년 중소 국경분쟁(아무르 강 유역 영유권을 두고 두 나라가 벌인 전쟁) 등으로 사분오열했다. 자유주의 국가들도 1969년 미국의 ‘닉슨 독트린’(각국의 안보는 미국 개입 없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주장) 천명으로 위기감이 감돌았다. 진영에 관계없이 말 그대로 ‘각자도생’의 시대가 왔다.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 간 화해 분위기가 싹텄다. 소련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때부터 ‘제3세계론’(미국과 소련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세력을 키우자는 주장)을 역설한 마오쩌둥(1893~1976)은 중소 국경분쟁 당시 소련의 군사력을 실감하고 두려워했다. 리처드 닉슨(1913~1994) 미 대통령 역시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소련의 팽창을 봉쇄할 필요를 느꼈다. 미중 모두에게 ‘적의 적은 동지’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가 1800년 가까이 지나 다시 한 번 국제정치 무대에서 구현됐다. 1971년 중국이 미국 탁구 대표팀에게 초청장을 보내 ‘핑퐁 외교’의 물꼬를 텄다. 같은 해 7월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은 아시아 국가 순방 중 몸에 탈이 났다며 잠적한 뒤 극비리에 중국 베이징을 찾아가 저우언라이 총리와 비밀회담을 가졌다. 10월 중국은 미국의 도움으로 유엔에 공식 가입하고 대만의 상임이사국 자리도 이어받았다.이듬해 2월 닉슨은 미 대통령 최초로 중국을 방문했다. 국교도 맺지 않은 상태였지만 두 나라 정상은 환하게 웃으며 악수했다. 데탕트 시대의 막이 열렸다. 닉슨은 ‘골수 반공주의자’였지만 중국 문제만큼은 적극적으로 관계 개선을 추구했다. 과거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 미 외교전문 매체 ‘포린어페어’에 기고한 글에는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영토도 큰 나라(중국)를 마치 지구에 없는 듯 지내는 것은 바람직한 외교가 아니다”라고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북관계도 미중관계 반영…한국도 사회주의 국가와 교류 나서 미중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자 남북 관계도 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은 1970년 전태일 분신 사건 등으로 제3공화국의 정치적 정당성이 도전받았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북한도 중소 국경분쟁 등 공산진영의 분열을 지켜보며 독자적인 생존 노선을 찾았다. 북한이 먼저 남북회담을 원했고 우리 정부도 이에 화답해 1971년 9월 비밀리에 남북 적십자 회담이 열렸다. 이후 양측이 합의한 내용을 정리해 통일 원칙 등을 담아 성명을 발표하는데, 이것이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이었다. 이때 만들어진 기본 정신은 2000년대에 들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남북 정상 회담에서도 부각됐다.그간 남북 사이에는 1968년 ‘1·21 사태’(북한군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려던 사건) 등 특수부대를 보내 상대를 타격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7·4 선언을 계기로 무장도발을 자제하기로 해 남북관계도 잠시나마 ‘봄날’을 맞았다. 박정희 대통령도 “사회주의 국가와 교류에 나서겠다”고 밝히며 외교적 외연 확장 의지를 드러냈다. 곧바로 이듬해인 1973년 우리나라 외교부에 중국을 전담할 ‘동북아2과’가 만들어졌다. 이곳은 훗날 한중수교의 산실이 된다. ●韓, 미국에 대한 서운함·중국에 대한 기대감 속 외교부 내 중국 전담 조직 마련 당시 박정희 정부는 미중 수교 당시 한국을 무시하는 듯한 미국의 태도에 반감이 컸다. 미 조지워싱턴대 자료에 따르면 1971년 10월 열린 키신저와 저우언라이 간 두 번째 비밀회담 때 저우 총리는 키신저에게 김일성 북한 주석이 작성한 8개항의 메모를 전달했다. ‘미중 수교 때 자신들의 입장을 반영해 달라’는 요구다. 중국은 비밀회담이었음에도 혈맹인 북한에 이를 통보하고 상의했다. 저우 총리는 회담 직후에도 평양을 찾아가 김 주석에게 회담 내용을 설명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 정부에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 미중 관계 개선이라는 큰 그림만 살피다보니 남한이 느낄 소외감은 신경쓰지 않았다. 우리로서는 이런 미국의 태도가 섭섭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반영하듯 당시 조선일보에는 박 대통령이 초조하게 청와대 경내를 오가며 “미국과 중국 사이에 분명히 뭔가 진행되고 있는데…”라고 토로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나온다. 미국은 1972년 말에 가서야 국무부 아시아태평양 차관보를 서울로 보내 정보를 공유했다. 우리 정부의 서운함을 달래기에는 늦은 감이 있었다. 외교부가 동북아2과를 창설할 때에는 당시 미국에 대한 불만과 국제무대에 새로 등장한 중국에 대한 기대감 등이 복합적으로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영화 ‘대부’ 제작힌 할리우드 거물 로버트 에번스 세상 떠나, 향년 89세

    영화 ‘대부’ 제작힌 할리우드 거물 로버트 에번스 세상 떠나, 향년 89세

    영화 ‘대부’와 ‘차이나타운’ 등을 만든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로버트 에번스가 지난 26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베버리힐스의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고 CNN 등이 29일 전했다. 89세. 의류사업을 하다 배우로 전향한 에번스는 짧은 연기 인생을 마치고 1960년대 영화 사업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파라마운트 스튜디오 사장으로 있으면서 ‘악마의 씨’(1968), ‘러브스토리’(1970), ‘대부’(1972) 등을 제작하며 파라마운트사의 부흥을 이끌었다. 이후 독립 제작자로 활동하며 ‘마라톤맨’(1976), ‘코튼클럽’(1984) 등의 제작을 맡았다. 그는 모두 일곱 번의 결혼을 했지만 3년 이상 지속된 적은 없었다. 1980년 코카인 소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 말년에 할리우드 스타 배우 그레타 가르보가 한때 소유했던 저택에서 조용히 지냈으며 2년 전 베니티페어와의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은둔자’로 묘사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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