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1960년대
    2026-08-11
    검색기록 지우기
  • 결성
    2026-08-11
    검색기록 지우기
  • 파기
    2026-08-11
    검색기록 지우기
  • 판정
    2026-08-11
    검색기록 지우기
  • 생드니
    2026-08-1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5,518
  • 토탈미술관서「격정과 도전의 세대」전/모더니즘 미술 실체를 규명한다

    ◎60년대이후 주역 13명의 신구작 공개/사회상황 따른 미술계 판도변화 제시/새달 26일까지… 전시도록에 관련논문도 수록 지난 1960년대이후 한국현대미술을 휩쓴 모더니즘미술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이를 본격적으로 규명하는 기획전이 서울 평창동 토탈미술관(388∼3994)에서 개막돼 미술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현대미술­격정과 도전의 세대」란 주제로 6월20일까지 공개되는 이전시는 이른바 한국모더니즘미술의 주역으로 군림해온 작가들의 젊은 시절 구작과 함께 작업이 무르익은 오늘의 신작이 나란히 전시되고있다. 초대작가는 김구림 김봉태 김종학 김차섭 김형대 서승원 윤명로 이봉렬 이승조 이태현 최명영 하종현 한영섭씨등 13명. 이들 대부분은 지난60년대 약관 20여세의 나이로 당시 앵포르멜운동(제2차세계대전후 일어난 서정적 추상회화의 한 경향)에 참여하면서 등단한 작가들. 추상표현주의 시기인 한국현대미술 도입기의 후반을 장식하며 기하학적 추상과 팝아트, 앗상블라주(폐품이나 잡다한 물건을 조립해서 작품을 만드는 일),키네틱(움직임을 주요소로 하는 예술),해프닝,전자매체등 다양한 실험기를 경험한 이들은 80년대 후반에는 「모더니즘계열」로 분류돼 젊은 작가들과 소장평론가들로부터 도전의 대상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들은 특히 국내화단의 중심세력을 형성하며 미술계 여러가지 측면에 실력을 행사, 후세대들에게는 가장 치열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힘」을 가져다준 「한국현대미술의 모더니즘」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번 전시도록에는 지난2년간의 국내미술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이 문제를 진단해온 논문과 평문을 망라하고있다. 논문들에 따르면 한국의 모더니즘미술은 서구모더니즘과는 달리 평면주의를 비물질주의와 범자연주의의 정신적 기조아래 해결하려는 독자성을 가져왔다는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서구미술사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왔다는 많은 비판을 받아온 것이 우리 모더니즘미술의 실상이기도 하다. 이 논문들에는 또 당시 한국의 정치·사회상황과 맞물린 미술계 판도의 전개상황이 구체적으로 밝혀져있어 이들 모더니즘 작가들의 오늘에 이르는 세력형성 과정을 짐작케 하고있다. 이 전시기획자인 토탈미술관의 큐레이터 정준모씨는 『한국모더니즘미술이 80년대이후 민중미술과 포스트모더니즘미술에 의해 부정적 측면만 강조된 감이 없지않다』면서 당시의 미술운동을 오늘의 시점에서 제대로 바라보기위해 전시를 마련했다고 했다.
  • 국토이용과 나무/박태식 서울대 명예교수·산림경영학(굄돌)

    국토를 농업적으로 이용하는 형태를 세가지로 구분할 때 경종업적 이용(좁은 뜻의 농업)과 목축업적 이용및 임업적 이용으로 나뉜다.경종업적 농지는 평야지대에 발달되고 목축지는 중산간지에,그리고 임지는 농업과 목축업을 하기 어려운 산간지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국토이용의 형태이다.즉,임업은 농축산업을 하기 어려운 곳에서 이루어지므로,국토를 완전히 이용한다는 의미에서도 중요하다. 나무는 여러가지 식물중 가장 강한 생리작용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한랭지·건조지·습지등 어느 곳에서도 자란다.그러므로 나무를 가꾸는데 마음만 쓰면 한치의 국토도 놀리지 않고 완전히 활용할 수 있다.나무를 산지에만 심을 것이 아니라 산지와 농지의 경계선,농지주변,주택주변,동네입구,구릉지,공한지,하천부지,도로변,철도주변,학교,공장,아파트 주변,도시공원,어린이놀이터등에 특성에 따라 속성수·유실수·밀원식물·화목(꽃나무)·녹화목 등을 심도록 하면 국토미화뿐만아니라 소득도 올릴 수 있다는 견지에서 큰 뜻이 있다. 이와 같은 임업을 사회임업(사회림업)이라하여 인도,동남아지역의 여러 나라가 국가시책으로 장려하고 있다.옛날 우리나라의 지방행정사를 살펴보면 마을 주변,농네 입구,집주위에 밤나무·살구나무·감나무·대추나무·가래나무 등을 심도록 하여 그것이 오늘까지 존속되어 밤나무골,살구나무골등의 이름을 계승하게된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8·15해방후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전반까지 연료림 조성,1960년대 후반부터의 밤나무림 조성,1970년대의 속성수 조림(새마을조림)시책등으로 앞서 말한 사회임업적 견지에서 많은 나무를 심어 국토를 잘 활용하도록 노력하였으나,근래에 와서는 빛을 잃어 가고 있다.연료림은 기름연료 대체로 중요성이 없어졌고,밤나무조림은 값싼 중국밤때문에 수출이 안되어 수확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다.하천부지에 많이 심었던 포플러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하천관리상 조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는 지역사회의 사회림을 밀원식물로 조성,공해없는 꿀을 생산하여 소득을 올리고 환경도 미화하도록 하는 국토활용의 전환이 요망된다.
  • 러시아의 「두뇌」유출 현상/전일동 연대교수·핵물리학(해시계)

    옛날부터 과학자들은 위정자의 보호를 받아야만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고 그들의 지원없이 과학은 발전되지 않았다.현대사회에 있어서도 정부지원이 없이는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명제는 변함이 없다. 막강한 군사력과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을 자랑하던 소련이 무너지면서 통제경제에서 자유시장으로의 이행과정에서 시행착오와 혼란 때문에 러시아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그 여파로 러시아 과학은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되어 세계 모든 과학자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구소련의 과학기술자 수는 약 1백50만명인데 그중 약 30%가 실직하였고 나머지 과학자들도 25%는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다.중견 과학자가 받는 월급은 1만2천루블즉 미화로 약 18달러이며 버스운전사 월급의 약 반 정도라고 한다.생활에 위협을 받고있는 것 뿐만 아니라 연구비 삭감이 또한 심각하며 러시아 과학의 몰락을 초래할 지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나오고 있다고 한다. 군수사업연구비는 이미 80% 삭감되었고 과학연구비도 GNP6%에서 1·9%로 떨어졌다.과학기술 및 고등교육성의 과학기술담당국장인 이골 니콜라예프씨는 정부가 긴급 처치를 취하지 않으면 1년내에 파국이 올 것이며 러시아 과학은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첨단과학기술을 갖고 있는 연구소나 과학기술자는 그것을 서방국가에 팔려고 그 판매루트를 모색하고 있고 또 어떤 연구소는 서방국가와 계약을 맺어 공동개발이란 형태로 현상유지를 시도하고 있다.예로서 물리연구소는 미국 AT&T벨 연구소와 계약하고 광통신에 관한 연구를 추진하면서 약 1백명의 과학기술자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각자 한달에 약 60달러의 추가월급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또한 생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입자가속기 연구소에서는 2백50명의 과학자 중 약 20%가 2∼3년 계약으로 외국에 나가버렸다고 한다.그중에 많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연구소 소장인 N.N.니콜스키는 말하고 있다.시베리아 소재 과학도시에서는 이론물리학자들이 대부분 외국에 나갔기 때문에 이론물리학에 관한 강의를 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최근에 한국에도 연구원자리를구하는 문의편지가 더러 날아오기도 한다. 1960년대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가에서도 많은 과학자가 연구조건과 대우가 훨씬 좋은 미국으로 이주하는 소위 말하는 두뇌유출현상이 일어났으며 이들 국가는 첨단과학기술발전에 대단히 어려움을 겪었으나 그후 연구조건을 획기적으로 개선함으로써 과학자들을 다시 되돌아오게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흐름은 과학자가 국가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점과 정부의 과학정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 조림의 필요성/박태식 서울대 명예교수 산림경영학(굄돌)

    금년도 48회의 식목일을 맞으면서 올해의 국내 조림예정면적을 살펴보니 3만여 정보에 약 8천만주의 나무를 심는 것으로 돼 있다.이 수치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매년 심던 조림면적으로 볼때 적은 수치이다.우리나라에서 나무를 많이 심던 1970년대에는 매년 10만정보가 넘는 면적에 3억주 이상의 나무를 심었던 것이다.그리하여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나무를 많이 심는 나라로 꼽혔다.과거의 나무 심는 일은 산주가 이익을 내려고 한것이 아니라 헐벗은 산림을 녹화하여 국토를 보전하려는 정부와 국민의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꾸준히 노력한 결과 1960년대 정보당 평균 축적이 10㎥정도이던 것이 이제 40㎥정도로 증가되어 한일합방이 되었던 1910년대의 축적을 유지케 되었다. 세계 선진임업국의 평균 축적(독일 2백96㎥,일본 1백13㎥)에 비하면 보잘것 없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국토는 녹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과거에는 나무의 질은 생각지 않고 구하기 쉽고 잘 사는 나무위주로 심었던 관계로 용도에 적합하지 않은 나무가 많았다.그러므로 앞으로할 일은 어느정도 자란 나무를 질이 좋은 나무로 바꾸어 심는 일과 이미 심은 어린 나무를 솎아 주어서 잘 키우는 일이다.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과거에는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국민이 협력해서 나무를 심었으나 이제와서는 그러한 애국심이나 애향심에 호소하여 나무를 심고 산을 가꾸기가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이제 조림은 이익을 전제로 한 경제원칙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1978년부터 목재 수입을 자유화하고 국내 목재생산을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연간 목재수요의 90%가 수입되고 있어 국산 임목값은 10년전이나 다름이 없다.10여년전에는 산에서 나무를 1㎥ 매각하면 인부를 7∼8명 쓸수 있었으나 현재는 인부 한명을 쓰기 어렵게 되었다.농산물 수입을 1997년까지 완전 자유화할때 초래될 결과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고 있으나 임업은 이미 10여년전에 자유화된 목재수입으로 현재도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그래서인지 국내조림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므로 올해부터 해외조림을 시작하는 기업이 많이 나오고 있다.자본은 이익이 있는 곳으로 흐르게 마련이지만 나무심는 일의 이익은 물질적 이익만이 아니고 수원함양,자연보존,환경보호등의 공공적 이익이 있으므로 공공적 이익에 해당하는 일부를 기업에 보조하여 국내 조림의 진작을 도모하는 것이 요망된다.
  • 「재정립」의 방법론(한국정신의 원류를 찾는다:10·끝)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한 캠페인/“민족자존의 전통이념 생활화를”/고유철학의 실체 구명에 모두가 나설때/「옛것」의 긍정적 측면 되살려 실천해야 깨끗한 정부를 만들려는 새 정부의 개혁의지가 최근의 결단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내각 구성에서 몇몇 공직자가 도덕성 시비에 걸려 자리를 떠나야만 했고 곧이어 고위 공직자의 재산 공개과정에서 이와 같은 의지가 또한번 드러났다.국민들은 이제 막 출범한 정부에 대해서 기대를 걸어도 좋다고 판단한 것 같다.그러나 이런 판단은 좀 이른감이 있다.우리는 그동안 새로 수립된 정권들이 처음에는 참신하게 시작하다가도 1년이 못되어 원래의 상태로 회귀하는 사례를 수없이 보아왔기 때문이다.그래서 신악이 구악보다 더 심각하다는 세평들이 설득력있게 들리기도 한다. ○개혁에도 근원은 필요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 어디있냐는 논리에 의하면 이번 개혁의지에 철퇴를 맞은 사람들은 재수 없게 걸린 사람들이다.그러나 이런 개혁의 결단이 통과의례처럼 한차례 겪는 진통으로만 여겨진다면 새 정부에도기대를 걸만한 것이 없다.지금 드러나고 있는 치부의 형태는 단연 권력형 부정 축재의 유형에 들어간다.이러한 권력 엘리트의 부정사례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빙산의 큰 덩치는 아직도 바다 깊숙이 잠겨 있다.우리 사회는 전체적으로 곪아 있다.한국정신의 원류를 찾고 그 올바른 실체를 규명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이미 우리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버린듯이 까마득한 지난해 대통령선거때의 사회상황을 떠올려 본다면 우리 사회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들이 어떤 것들이었는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과거 우리 한국정신의 부정적 측면으로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탈법과 편법주의,돈과 향응 대접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금력과 금권주의,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상대방의 인격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남을 비방하고 모함하는 맹목적 이기주의와 상호불신주의,혈연과 지연과 학연을 찾아 자기 욕심을 채우는 연고주의나 계층과 지역간의 갈등 등이 난무했다.과시주의와 과대 망상주의에서 발로된 자기 분수를 넘어 소비하고 소유하는 문제,이것이 부동산 투기로 연결된다.그리고 도덕성의 부재,과정과 절차를 존중할 줄 모르는 준법 의식의 일탈행위 등이다.우리 사회의 교통상황만 보아도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단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외국인들이 말하기도 한다.과연 우리는 이런 사회도 등잔불만한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동안 우리 사회의 난제들을 진단하고 이에따라 여러가지의 정부 대책과 처방들이 나오기도 했다.1960년대 3공화국은 국민의 내핍 생활,근면정신,빈곤퇴치,생산과 건설의식을 고취하는 재건국민운동을 벌였고 동시에 정정법을 발동하여 한차례 정치사회의 정화를 기도한바 있다.1970년대에 또한번 정치 불안과 사회불안을 극복한다는 차원에서 관기숙정(관기숙정)의 서정 쇄신 운동이 잠시 추진되기도 하였다.1980년대의 사회 정화운동역시 이러한 의도에서 진행된 처방이었다. 그러나 70년대의 관기 숙정과 서정쇄신 운동은 3선 개헌후에 밀어닥친 사회적 저항을 멈추기 위한 대책이었고 80년대의 사회정화 운동은 5공화국의 정통성 확립이라는 또 다른 방편으로 전개된 운동이었기에 잠시후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어떤 것도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처방으로서는 미흡하였다.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아마 이 모든 시도들 속에는 진정한 개혁의지가 결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회의 불합리와 불의의 상태는 20년 전이나 30년 전이나 마찬가지이다.오히려 부정의 방법이 더욱 지능화되었고 그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우리는 다시금 처음의 문제로 돌아온 것이다.도저히 해결될 것 같지도 않는 우리 사회의 엄청난 난제들 앞에서 때때로 우리는 좌절해 버리거나 「우리는 안돼」 「이제 우리는 틀렸어」라고 자학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이럴때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행정부에다 기대를 걸어본다. ○단번에 해결할수 없어 그러나 정부는 언제나 불가능한 대책만 내놓는다.모든 일을 단번에 해결하겠다고 말하거나 모든 일을 뿌리째 뽑는다(발본색원)고 말하지만 그 뿌리는 너무나 깊어서 계속 존속된다.사회의 문제란 원래 단김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역사상 어떤 사회도 단번에 완성되었다는 기록은 없다.선진 민주주의 사회가 수세기의 역사적 과정속에서 시행착오를 겪어와서 오늘에 이르렀고 지금도 실험하듯 신중하게 걸어가고 있다.다시 말하면 선진사회는 수없이 많은 실험과정을 거치면서 성숙해온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정신의 부정적측면보다는 긍정적 측면들을 앞세워 그를 생활화하고 실천해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물론 사회의 문제들은 사회 지도층의 각성,그들의 솔선수범,정부의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통치방식에서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다.그렇다고 사회의 모든 문제가 구조적인 모순의 해결에서만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언제나 제도 전반의 개혁없이는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크게 시작하지만 갑자기 그것도 이유없이 중단하고 만다.이제 우리 사회의 희망을 건 결단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또 한번 정치 권력층의 약속을 믿어볼 것인가 아니면 우리 모두가 기대해도 좋은 밝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어디서든,누구에게서든 우리 스스로가 당장무엇이든 시작해야 할 것인가.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민주주의 사회는 결코 엄청난 계획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사회의 곳곳에서 이루어진 조그마한 실험들이 어우러져 완결된다.그래서 사회 전체는 작은 실험들의 전시장일 뿐이다.「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우리의 속담에서처럼 우리에게 엄청나게 큰 문제로 다가오듯 느껴지는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들을 그 문제가 발생한 근원에서 차근차근 해결하려는 노력과 결단력이 우리에겐 과거 어느때보다도 더욱 더 절실하게 요청된다.그래서 우리 사회의 문제를 내가 속한 가정 속에서 풀고 내가 속한 직장에서,또는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이나 지역의 모임을 통해서,내가 참여하고 있는 친목단체에서 그리고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내 가까운 곳에서 그 첫걸음을 내딛는 용기와 결단이 요구된다.지금은 바로 이 작은 실험의 정신이 한국정신의 원류를 되찾으려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이제 막 시작한거나 다름없는 우리 사회가 걸어야 할 길은 아직도 멀다. □약력 ▲1943년경남 진주출생 ▲한국 신학대학 졸업 ▲연세대 대학원 졸업 ▲연세대 대학원 졸업 ▲독일 보쿰대(철학박사) ▲현연세대 교수 ▲저서:「현대사회의 이데올로기」 「사회구조와 삶의 질서」등 다수.
  • 해방이후 대표적연극 다시 본다

    ◎「…이중생」/「산불」/「국물…」/「초분」/「새들도…」/연우무대,「한국현대연극의 재발견시리즈2」 공연/연극·학계 중진,시대별로 1편씩 선정/윤광진·김철리·기국서씨 등이 연출 극단 연우무대가 심혈을 기울여 마련한 「한국 현대 연극의 재발견2­해방이후의 문제작 시리즈」가 4월부터 8월까지 넉달동안 연우소극장에서 공연된다. 올해로 두번째인 「한국 현대연극의 재발견」무대에는 연극계와 학계의 중진들의 추천을 받아 최종 선정된 각 시대를 대표할만한 작품 5편이 공연된다.이들은 오영진의 「살아있는 이중생각하」(1940년대·4월15∼5월9일),차범석의 「산불」(1950년대·5월13일∼6월6일),이근삼의 「국물 있사옵니다」(1960년대·6월10일∼7월4일),오태석의 「초분」(1970년대·7월8일∼8월1일),황지우시·주인석 희곡「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0년대·8월5일∼29일)등이다. 지난 91년의 첫번째 무대는 1912년부터 45년사이 작품들 가운데 소개되지 않았던 조일제의 「병자삼인」,유진오의 「박첨지」,함세덕의 「동승」,송영의 「황혼」등 단막극 4편을 모아 마련한바 있다.이 공연에서는 그동안 우리 희곡사에 묻혀있던 함세덕의 「동승」이라는 보고를 발견 소개함으로써 크게 주목받았다.따라서 이번 두번째 무대에도 연극계 안팎의 관심이 쏠려있는 것이다. 1949년 발표된 「살아있는 이중생각하」는 전통적인 희극적 정서로 현실을 비판한 사회극.차범석의 초기 대표작인 「산불」은 6·25전쟁을 시대배경으로 한 우리나라 리얼리즘 희곡의 모범으로 꼽힌다.이근삼의 「국물 있사옵니다」는 너무 평범해 취직도 결혼도 못한 청년의 출세행로를 통해 가치관이 전도된 사회의 비리와 문명의 허구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오태석의 「초분」은 70년대 발표당시 실험성으로 연극계에 충격을 던진 작품으로 전통적 「굿」형식을 현대적 무대에 접목시킨 오태석연극의 원형이다.「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황지우의 동명시집에 실린 시들을 주인석이 희곡화한 것으로 80년대의 암흑기가 잉태한 연극적 산물이다. 이번 무대는 연우출신 연출가들만이 참여했던 첫해때와는 달리 연우와 직접적인 관계여부를 떠나 윤광진 김철리 박원근 기국서 김광림등 참신한 감각과 활동력이 있는 40세 전후의 연출가 5명을 참여시키고 있다.이로써 「한국현대연극의 재발견」은 더 이상 단순한 연우무대의 행사가 아니라 범연극계의 행사로 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또 작품당 공연기간을 배이상 늘리고 출연자들도 공개오디션을 통해 뽑아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 이번무대가 우리연극사를 재조명하는 선언적인 수준에 그치지 않도록 내실을 기하고 있다. 연우무대는 한국 피자헛주식회사(사장 성신제)가 문예진흥원을 통해 후원금 5천만원을 지정 기탁해옴에 따라 예산상의 어려움을 어느 정도 덜게 됐다.더군다나 한국 피자헛측이 예산지원을 올해로 그치지 않고 앞으로 계속해나간다는 뜻을 분명히 해옴에 따라 연우무대는 보다 유리한 여건속에서 이 시리즈를 지속해나갈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4월15일부터 시작되는 첫 작품 「살아있는 이중생각하」공연에 앞서 연우무대측은 7일쯤 「2천년대를 향한 한국연극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심포지엄」도 개최할 계획이어서 이론적인 고찰도 겸하게 된다. 지난해 정한룡 극단대표와 김광림 예술감독 중심으로 새진영을 갖추고 연우무대의 거듭나기를 모색해온 이래 첫행사인 「한국 현대연극의 재발견2」는 「연우무대의 재도약」선언의 가능성을 가름해보는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 「플럭서스」영화·비디오주간마련/주한독일문화원,22∼26일 무료상영

    ◎실험·공연예술영화·다큐물 등 17편/“예술·생활통합” 플럭서스정신 소개 주한독일문화원은 22∼26일 매일 하오3시·7시에 플럭스영화 및 비디오주간을 갖는다. 예술의전당 전관개관 기념축제의 일환으로 개최되는 「서울 플럭서스 페스티벌」에 즈음해 마련하는 것으로 플럭서스 작가들이 제작한 실험영화,플럭서스 작가들의 공연을 기록한 예술영화 및 비디오작품,그리고 19 82년 플럭서스20주년기념 비스바덴 페스티벌 등 플럭서스 페스티벌에 관한 기록영화등 총17편이 무료로 상영된다. 플럭서스(FLUXUS)는 1960년대의 가장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미술운동으로서 예술과 생활의 통합을 시도하고 예술속에 즐거움과 감흥을 접목시키는 작업.이 작업은 영화에도 큰 영향을 끼쳐 기존의 영화가 갖는 전통적 서술구조와 묘사적 기능에 반기를 든 플럭서스영화를 낳게 했다. 특히 플럭서스영화는 고전적인 극영화와는 달리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가장 단순한 테크닉을 이용,영화자체가 갖고 있는 기능과 인식을 실험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번에 상영되는 영화들은 각 예술 장르들의 통합,예술과 생활의 통합을 시도하는 플럭서스의 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작들로 영화 전문가들은 물론 타분야의 예술가 및 예술학도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상영일정별 주요작품은 다음과 같다. ◇22일=▲플럭서스 필름 ▲비스바덴 플럭서스 ▲나의 플럭서스생활과 그 반대 ◇23일=▲조지 미키우나스 추도공연 ▲지구·선·사다리 ▲먹기/날기 ◇24일=▲존 케이지에 대한 찬사 ▲준비운동 ▲플럭서스의 끝없는 이야기 ◇25일=▲나는 미국을 좋아하고 미국은 나를 좋아한다 ▲필름 №4 궁둥이 ◇26일=▲환상의 페스티벌 ▲강탈,존 레논과 함께 ▲필름№5 스마일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33)

    ◎소년시절:14/정치비밀결사 「ㅌ·ㄷ」 조직설/“26년 「타도제국주의동맹」 결성” 새 주장/15세 외톨이의 청년 30명 규합에 의문/화성의숙생활 반항적… 이단 취급 받아 이번 회고록에서는 김일성이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김시우 집에서 읽었다고 하고 있는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가 이 책을 가지고 그 무슨 「투쟁」을 했다고 전에 없던 새 주장까지 하고 있다.이 책을 빌려다 읽고 있던 계영춘이 화성의숙 교원에게 적발당하자 김일성은 김시우에게 다음과 같이 항의했다는 것이다. ○우매화정책 장본인 『사람이 건전한 인격을 갖추려면 다면적인 지식을 섭취해야 하지 않습니까.학교 당국은 어째서 새것을 한창 섭취해야 할 청소년들에게서 세계적으로 공인된 선진사상을 연구할 권리마저 빼앗습니까.마르크스나 레닌의 저작들이 보통책방에까지 흘러나와 글을 아는 사람은 다 읽는 판인데 유독 화성의숙에서만은 어째서 그런 책들을 못 읽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용작가들이 쓴 이러한 글을 읽고 북한에 「독서의 자유」가 있다고 착각하는 독자는 이제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 나라는 자본주의 서적 같은 것은 처음부터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1960년대 중반까지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서적은 출판되었고 읽을 수도 있었다.그러나 67년에 김일성이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문제를 들고 나온 후는 이러한 책은 보통책방에서 없어졌다.그 후 민중들은 「세계적으로 공인된 선진사상」이나 「다면적인 지식」에 접할 기회를 잃었고 「주체사상」밖에는 아는 것이 없도록 우매화되었다.이 민중 우매화정책의 장본인인 김일성이 회고록을 쓰면 이상과 같이 북한 현실과 정반대의 「작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여기서 그가 화성의숙의 기숙사나 교실이 아니라 그의 보호자로 되어 있었던 것 같이 보이는 김시우 집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서적을 읽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그가 무송소학교 시절의 비정상적인 생활태도를 지속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서술이다. ○비정상적 생활 지속 또 그는 학교에서도 반항적이었다.예를 들면 회고록에서는 어떤 수업시간에 자본주의가 좋다고 주장하는 교원과 학생들을 김일성이 반대했다고 쓰고 있다.그가 『우리는 조선을 독립시킨 후 조국땅에 착취와 압박이 없는 사회를 세워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이것은 그가 화성의숙의 교실에서는 이단적인 존재였다는 것을 말하는 일화이다. 물론 이러한 「일화」들은 이번 회고록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므로 사실은 창작물일 것이다.그들은 이러한 창작물까지 만들면서 김일성이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을 이 시기 결성했다는 날조를 정당화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이전에 김일성은 김형직이 죽기 전인 26년 3월에 화성의숙에 입학하고 부친이 죽은 후인 6월쯤에 중퇴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이때문에 26년 10월17일에 그가 화성의숙에서 ㅌ ㄷ(트 드)을 결성했다는 북한측의 주장은 그 재학기간 등으로 있을 수가 없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무송소학교 시절 김일성이 살부회와 관련이 있었고 김형직이 죽은후 민족주의자들이 그를 화성의숙에 보냈다는 증언이 나온 이상 이 문제는 새로 재고할 점이 생기게 되었다. ㅌ ㄷ이란 북한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참다운 공산주의 혁명조직」이라고 선전되고 있다.1925년에 서울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은 한갓 「종파」에 지나지 않고 김일성이 만주의 벽지인 화전현 관가에서 「결성」한 ㅌ ㄷ만이 진정한 공산조직이라는 주장이다.이 주장은 1968년에 발간된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부터 나타나 그후는 조선노동당의 조직적 전통은 그 뿌리가 이 ㅌ ㄷ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김일성이 26년 6월부터 화성의숙에 전학하였고 그후 몇개월 이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면 그 실태는 어떻든지 간에 적어도 그의 재학기간에 이러한 조직이 생겨날 가능성 자체는 부인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가령 김일성의 화성의숙 재학기간이 이렇다 할지라도 그가 ㅌ ㄷ을 결성한 일이란 여전히 있을 수가 없다. 백보 양보하여 그가 김시우 집에서 「공산주의 서적」을 읽고 학교 교실에서 「사회주의」를 주장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화성의숙에서 그가 ㅌ ㄷ을 조직할 여건으로는 될수 없다. ○상식선서 납득안가 그 이유로는 우선 사람을 지도하거나 어떤 정치단체를 만들기에는 그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는 점을 들 수 있다.당시 15세였던 그는 이때 나이가 평균 20살 정도인 학생들과 같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장유의 서열의식이 철저했던 당시 30명이나 되는 이 청년들이 고립된 일개 소년에 불과한 김일성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따를 리는 만무하다. 다음으로 그 이전에는 면식도 없었던 이러한 학생들과 단 4개월 정도 있었을 뿐인 그가 이 기간에 ㅌ ㄷ이란 정치비밀결사에 가입하는 「동지」들을 규합할 수 있었다는 말은 객관적으로는 사람을 납득시키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ㅌ ㄷ의 결성이란 있을 수가 없다. ①「세기와 더불어1」160면 ②「세기와 더불어」154면 ③평전 121면 이하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31)

    ◎소년시절:12/화성의숙서의 불만/40년대까지 신식훈련 못받았으면서/“이청천 등 낡은 군사교육에 환멸” 기술/겨우 3개월 배우고 트집 위한 트집 김일성은 화성의숙에 들어갈 때 팔도구 시절부터의 김형직의 친구 김시우가 데려간 모양이다.그는 당시 화전현 관가에서 정의부 화전총관소 총관으로 있었고 영풍정미소를 경영하여 정의부의 각 기관에 재정원조도 하고 있었다. ○기숙사에서 생활 그 다음 날부터 김일성은 화성의숙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학급에서는 몇몇 친구가 생겼는데 그 하나는 훗날 김일성이 중공계 유격대에 있을 때 그에게 일제에 투항할 것을 권고하러 온 박차석이었고 다른 하나는 1930년 무렵까지 언제나 그의 선배였던 최창걸이었다.그는 이밖에 김리갑,계영춘,이제우,박근원,강병선,김원우 등과도 알게 되었다 한다. 회고록에서 그는 화성의숙에 2주일 남짓 있은 후부터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학과목은 김일성에게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그런데 의숙생들은 특히 수학문제로 그를 괴롭혔다.4칙계산도 잘못하는 청년들이 숙제가 나올 때마다 찾아왔다.그런데 군사훈련 때는 거꾸로 의숙생들이 김일성을 도와주는 형편이었다. 의숙생과 김일성 사이에는 학습과 훈련 면에서 서로 정반대의 실력 차이가 있었다.자라난 환경과 사회생활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지만 김일성에게는 특히 무송소학교 시절부터의 불량한 사고방식과 비정상적인 학교생활 습성이 남아 있었다.이런 상황이 그의 당시 감수성으로는 「환멸」이었던 모양이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에게 화성의숙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는 1960년대에 밝히게 되었다.그러나 이 시기는 그가 26년 3월에 입학한 것같이 서술했던 것을 「26년 6월 전학」으로 바꾸어 나가는 복잡한 조작이 잇따랐다. 또 이 때는 이른바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을 날조하는데 바빠서 그가 화성의숙에서 어떤 학창생활을 지냈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할 겨를이 없었다. ○“학생 지지받았다” 전기작가들이 화성의숙 생활문제를 쓰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후반부터이다.그들은 김일성이 이 학교에서 어떻게불만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쓰게 되었다.「불멸의 자욱을 따라」가 그 대표적인 것인데 필자는 이 책을 분석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회고록에서는 그 「불만」이 더욱 체계적으로 설명되어 있다.그것을 3개로 나누어 그중 2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군사훈련…실탄사격에 쓸 탄알이 없어서 늘 나무총이나 가지고 훈련했다.아래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달리기도 했다.또 독립군 대원들이 와서 안중근 장인환 강우규 이재명 나석주 같은 열사들이 쓴 개인 테러를 무훈담이라고 들려주었다. 김일성은 이러한 구한국 냄새가 나는 낡은 군사훈련이나 투쟁방법으로는 도저히 왜놈들을 타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상…어떤 학생은 왕조정치에 미련을 가져 봉건왕조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또 어떤 학생은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하여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어느 시간에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강의와 토론이 있었다. 이때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선생의 강의와 학생들의 토론에 대항하여 김일성은 자본주의나 봉건주의는 다같이 돈 많은 놈들이 근로대중을 착취하여 호강하는 사회다.자본주의나 봉건주의의 병집을 잘 보아야 한다.조선을 독립시킨 후는 조국땅에 착취와 압박이 없고 근로대중이 잘 사는 사회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학생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필자의 분석은 다음과 같다. ㈀당시 정의부에는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이청천 그리고 군사훈련을 체육이라 불러서 실시한 평양 대성학교 졸업생 오동진 등이 간부였고 한일합방 후 이시영 이상용 등이 남만주에 세운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도 많았다.그들은 신식 군사지식과 훈련방법도 알고 있었다.나무총이나 모래주머니·테러리즘 같은 것도 결코 구식은 아닐 것이다. 한편 김일성은 화성의숙 초창기에 군사학을 모르는 초년생으로 있었는데 겨우 3개월 정도 밖에 재학하지 않았다.따라서 이러한 불평은 트집을 위한 트집일 뿐이다.화성의숙의 군사학을 구식이라고 하지만 김일성에게는 구식이 아닌 신식 군사훈련을 받을 기회는 1940년대까지 주어진 일이 없었다. ㈁당시 만주의 독립운동가 속에는 이씨왕조를 다시 일으키려는 전덕원 같은 복벽파가 있었고 정의부 청년들에게도 그 영향이 있었다.또 미국식 민주주의를 선호하는 안창호 계통의 인물들과 학생들도 있었다. ○요주의학생 신분 김일성은 이런 민족주의 군사학교에 자의가 아닌 타의로 「전학」하였다.박만포선생에 따르면 그는 전학 이전에 이미 살부회에 들어가고 있었다.부친이라도 부르주아 같으면 타도한다는 「이론」의 소유자는 화성의숙에서는 요주의 학생이게 마련인데 그는 「전기」에서 사실을 거꾸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①「세기와 더불어1」140∼148면 ②같은 책 149면 ③평전 74∼75면 ④「불멸의 자욱을 따라」전4권 1978년 당간 ⑤「세기와 더불어Ⅰ」150∼154면
  • 21세기로 가는 길(정근모/과학평론)

    ◎90년대는 두뇌기능연구 시대/꿈이 아닌 인공지능 개발… 과학자들의 관심을 인간이 갖고 있는 기능 중 가장 신비롭고 놀라운 것이 두뇌가 갖고 있는 기능이다.돌이 갓 지난 갓난아이가 한가지 두가지 배워가는 것을 보면 배우는 기능이 얼마나 신통한가 하고 감탄한다.비록 마음껏 언어로 표현은 못하지만 부모를 알아보고 자기의 행동이 어른들에게 용납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판단하는 것을 보면 어린아이들의 두뇌들이 갖고 있는 판단력에도 놀랄때가 많다.성장과정에 있는 유아들의 언행이나 심리발달의 오묘하면서도 기특한 점들을 관찰하면 인간두뇌기능의 진수의 일면을 볼수 있다.이러한 순수한 상태에서의 두뇌기능의 발달을 연구하면 바로 인간두뇌연구의 첩경을 발견한다는 발달심리 학자들의 접근방법에 크게 호응이 간다. 인간의 사물 인식력,새로운 지식의 이해력과 관찰한 사항들의 기억 또는 주어진 여건을 통한 추리력 등은 인류문명의 오랜 역사속에서 중요한 연구과제로 취급되어 왔다고 할 수 있겠다.최근에 이르러 두뇌기능과 지능체제에 대한연구에 급격한 진전이 일어나고 있고 복잡한 생태계 현상의 이해가 필요해져 인간의 행동분석이라든지 삶의 질을 제고해야겠다는 의욕이 증진됨에 따라 21세기를 향한 핵심 분야로서 두뇌기능 연구가 각광을 받고 있다. ○최근 연구성과 급진전 두뇌기능 연구는 신경생리학적 연구,발달심리학적연구 및 분자생물학적 연구 등으로 연구의 접근방법을 대별할 수 있다.신경생리학적 연구는 금세기 중반에 호지킨(Hodgkin)과 헉슬리(Huxley)가 신경망의 전기적인 모형을 제시한 이후 전자공학의 발전과 연계되어 빠른속도로 계량화되면서 응용과학의 참신한 분야로 발전하고 있다.1980년대 홉필드 망(HopfieldNet)과 「역전파」(BackPropagation)이론이 제시된 후로는 형상인식이나 최적화 과정에 연구결과의 실제응용까지 가능해져 두뇌기능연구가 첨단기술개발과 직결되고 있는 것이다.지능체계의 물리학적및 공학적인 이해를 토대로 인간의 학습방법이나 복합적인 판단과정이 조직화됨으로써 인공지능개발이 결코 꿈의 일이 아님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발달심리학적인 두뇌기능의 연구는 다른 방법론보다 훨씬 역사도 깊고 내용도 풍부하다.최근에는 이 분야에서도 인지과학적인 방법론의 도입과 더불어 전산학 등의 공학분야가 접속됨으로써 직관적인 접근 방법보다도 훨씬 강력한 종합분석이 시도되고 있다.발달심리학의 연구결과들은 인간 두뇌기능의 포괄적인 발달과정을 해명해내었고 이러한 거시적인 연구들을 통하여 두뇌기능과 지능체계의 이해를 위한 기본적인 바탕이 이루어졌다 하겠다. 90년대에 들어와서는 두뇌기능연구에 더욱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두뇌기능연구가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거시적인 연구가 미시화되고 있으며 두뇌기능의 발달과 쇠퇴,건강함과 병듦을 분자수준에서 연구하여 놀랄만한 연구결과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이제는 두뇌기능을 세포수준 또는 분자수준에서 관찰,분석하고 있으며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분자생물학의 직접적인 기여가 이러한 추세를 선도하고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3가지 접근방법 대별 예를 들어 방사능동위원소의 추적기술을 이용하여 정상두뇌의 활동양상과 비정상 두뇌조직의 반응양상을 비교하여 두뇌기능의 주요인자의 인식은 물론 비정상두뇌조직의 치료 또는 교정방법도 강구해볼 수 있는 것이다.이러한 연구방법은 1960년대에 Mo­99 동위원소의 붕괴로 생성된 To­99m 방사능동위원소를 인공적으로 생산함으로써 활발해지고 있다.오늘날 방사능동위원소 추적기술에는 85% 이상이 반감기가 짧은(6시간)To­99m 동위원소를 활용하고 있으며 이를 이용하여 각종의 근육이나 조직에의 비정상증세를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특히 70년대부터 개발되어온 토모그래피(Tomography)는 컴퓨터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급속한 발달을 이루었다.두뇌와 같이 3차원적인 조직에 있어서는 컴퓨터 토모그래피를 방사능동위원소추적기술과 접속시킴으로써 장족의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8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학적 모델을 개량함으로써 세밀한 영상조합이 가능해져 분자수준의 두뇌기능연구가 훨씬 용이해졌다.최근에는 단일 광전자 발진을 이용하는 토모그래피와 양전자발진 토모그래피기술의 개발로 수개 분자들에 의한 생체조직변화의 측정이 가능해졌다.이에 따라 지금까지 불가능하였던 인지기능의 이장,정신질환 및 정신착란증세 등에서도 정확한 진단과 치료방법의 발견이 가능해지고 있는 것이다. ○응용 가능성 무한대 두뇌기능의 연구는 이러한 신경생리학적,발달심리학적 및 분자생물학적 방법론들에 의한 획기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아직은 초보상태에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심리학자 의학자 물리학자 화학자 약학자 전자공학자 전산학자 수학자 원자력공학자들이 두뇌 기능및 지능체계연구의 과학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실제 응용상의 높은 가능성 때문에 이 분야로 모여들고 있다.90년대를 두뇌기능연구의 세대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고조된 관심과 하루하루 급속히 발전하는 연구내용 때문이다.21세기에 선진국으로 발전하려는 우리나라의 경우 능력있는 많은 과학기술자들이 두뇌기능연구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 플럭서스/해프닝 그룹 첫 서울 공연/새해 3월4일부터 3일동안

    ◎예술의 전당 축제극장 개관기념/출범 30년만에… 창립멤버 12∼15명 참석/전시회 등 동반,반상업주의 종합예술 선보여/실험정신·동양사고 접점 모색 1960년대 유럽과 미국에 성행했던 해프닝의 세계적 그룹인 플럭서스가 새해 3월4일부터 3일간 예술의 전당 축제극장 개관을 기념,특별공연에 나선다. 「서울 플럭서스 페스티벌」이란 이름으로 국내에 첫선을 보이는 이번 공연에는 생존하는 플럭서스 창립멤버 12∼15명이 참석한다.한국의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씨가 지난60년대 국제무대에 첫발을 들여놓도록 영향을 끼친 그룹이 바로 플럭서스.이러한 인연 때문에 국내에도 비교적 인식이 넓어진 이들은 당대만 해도 예술계의 아웃사이더 집단일수 밖에 없었다.이들의 서울 진입은 그룹 출범 30년만에 이루어졌다.플럭서스의 서울공연은 동양사고와 접점을 모색하는 실질적이고도 구체적인 실마리를 찾는다는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플럭서스의 이번 공연에는 전시회가 동반된다.그리고 영사회를 열어 플럭서스 작가들의 종합예술가로서의 역량을 과시해 보인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반상업주의 반직업주의의 골수멤버들이 실험주의와 현장예술을 통해 그들의 예술이념을 한껏 펼쳐보인다는 것이다. 참여작가는 백남준씨를 비롯,덴마크 제1의 개념예술가 에릭 댄더슨,구름그리기의 1급작가 제프리 헨드릭스,미국 최초로 구체시를 전시로 펼쳐보인 딕 히긴스 등으로 돼 있다.이밖에 잭슨 맥 로,래리 밀러,김순기,알리슨 놀스,에멋 윌리엄스 등 플럭서스의 창립멤버들이 대거 내한한다. 플럭서스는 리투아니아태생의 미국건축학도 조지 마키 우나스에 의해 명명,조직됐다.지난 62년 9월 독일 비스바덴 미술관에서 「플럭서스국제페스티벌,신음악」이라는 첫 공연을 시발로 새로운 예술세계의 막을 올렸다.한달간 14개의 프로그램을 통해 각종 실험음악 작품들을 선보였던 이 공연에서 백남준은 급진적 행위음악을 가지고 참가했다.이후 플럭서스에는 요셉 보이스나 비틀스멤버 존 레넌의 부인이었던 일본여성 오노 요코 등 각분야의 전위예술가들이 참가하여 전성기를 구가했다. 플럭서스는 「흐름」이라는 뜻의 영어 플럭스(flux)의 어원이기도 한 문자 그대로 옛 라틴어 플럭서스.이름에서부터 묘한 친근감이 느껴지듯 플럭서스예술은 어려우면서도 쉽고 심각하면서도 재미있다는 호응을 받는다.1960년대 가장 급진적인 실험미술운동이었던 플럭서스는 그들의 예술이 창조작업인 동시에 삶이며 생활의 연장임을 주장한다.전세계를 무대로 떠돌아다니는 보헤미안 예술집단인 플럭서스의 한국초청은 미술사학자 김홍희씨에 의해 기획됐다.
  • “흘러간 역사”/구소 사회주의미술전

    ◎35∼65년 포스터·유화 등 2천여점 돌이켜보면 예술이 아니라 한편의 코미디같지만 불과 몇년 전까지만해도 소련에서 당연한 것으로 통용되던 예술인 이른바 「사회주의·현실주의」(Sotsrealism)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은 이색 전시회가 최근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모스크바 포토센터에서 열린 이 전시회에는 소위 사회주의의 영광을 주제로 한 사진·유화·포스터·도자기 등 총2천여점이 출품됐다. 소츠리얼리즘(Sotsrealism)은 쉽게 말해 사회주의의 영광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한 목적예술로 1960년대까지는 문학·예술의 한장르로 존재했다.이번 전시회에는 소츠리얼리즘의 전성기로 불리는 35년부터 65년 사이의 작품들이 출품됐다. 접시에 그린 스탈린 초상화는 말쑥한 옷차림에 완벼하게 손질된 콧수염의 멋쟁이 모습이다.붉은색 접시 가장자리에는 소비에트권력과 산업전사들의 공적을 기리는 공장·항공기·집단농장·빌딩등이 그려져있다. 2차대전때의 선전용 포스터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색채를 쓰고 만화스타일을 즐겨 쓴 데니의 작품은 관객들의발길을 끌었다.강한 「소비에트 주먹」(소매끝에 별이 그려져있다)이 히틀러의 목을 움켜쥐고있다. 전시회 총책임자인 지노비예르 알렉세예비치(46)는 전시회의 목적에 대해 『우리가 이런 작품들로부터 해방된 것은 신의 은총이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이들은 쉽게 잊거나 버릴 수 없는 우리의 역사이다.그래서 개인소장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다시 보는 기회를 마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 「환경투자」 앞줄에 세우라/수질보전… 전문가의 제언

    ◎경제와 같은 맥락… 정부·기업·국민 함께 나서야 1960년대초 본격적으로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된 이후 1970년대 초반부터 우리나라 4대강의 수질오염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특히 1974년도에는 한강본류에서 취수하던 서울시 상수원을 상류인 팔당으로 이전하였으며,영남지방의 젓줄인 낙동강 또한 구미하류의 수질오염이 매우 심각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1980년 환경청이 발족한 이후 환경행정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고는 하나 전국의 주요상수원은 상수원수 2급이하가 되었으며 1989이래 연속적으로 매년 상수수질문제가 크게 사회문제화 되었다.더욱이 1991년 3∼5월 낙동강 유역에서의 페놀누출사건은 매우 큰 사회적 충격이었다. 당국에서는 1989년이래 맑은물 공급대책의 일환으로 상수원을 정비하고 대도시와 주요 공업단지주변의 지천에 하수처리장을 건설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나라경제사정상 경제개발을 우선적으로 수행하는 실정에서 수질보전사업과 많은 마찰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일부 공업지역에서는 경제불황을이유로 폐수처리장을 운영하지 않았으며 또한 이에 대한 당국의 조치도 미온적이었던 때도 있었다. 과거 우리나라의 산업구조는 중화학·섬유등 에너지와 물을 다량사용하는 것이었으므로 하천수질오염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래에 한강의 주요오염원인 경안천이 서서히 깨끗한 수질로 바뀌는 현상이 보도되고 있는 사실은 당국의 노력과 주변의 축산산업과 공장들의 이전 또는 업종변경 등으로 일부 산업구조조정에서도 그 개선효과를 찾아볼수 있다. 환경처는 수질보전종합대책을 마련하여 1996년까지 4계 주요수계에 총4조9천2백22억원을 투자하여 그 수질들을 상수원수 1∼2급수로 개선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환경처의 안대로 상수보호구역지정확대,오염원규제,오염물질 처리시설설치,수질감시강화등의 수질오염관리가 강화되면 수질환경의 개선이 예상된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처의 계획은 매년 작성하여 새로이 제시되었왔으며 계획안의 실천을 뒷받침할 예산은 경제기획원에서 정부예산책정 과정에서 언제나 삭감되었고,전년도 대비의 몇%예산 증액만이 반영되었었다. 과거에 정부의 환경부문투자는 GNP대비 0.2%를 넘지 않고 있는 실정으로 선진국의 경우와 비교하면 매우 낮다. 현재 세계적으로 모든 과학기술분야에서 환경오염을 시키는 기술은 많은 비용이 또한 처리비용으로 소모되므로 새로운 기술로서 채택될수도 없으며 경제적으로도 경쟁할수 없게 되었다. 이제 환경보전과 경제문제는 같은 선상에 있으며 환경보번을 위한 투자가 오히려 새로운 환경보전기술을 개발하여 경제적인 이득을 가져오게 할 것이다. 환경보번문제 중 특히 수질보전대책을 강구하는 것은 우선 국가 의지를 보여야 할 것이다.단지 담당부처인 환경처가 아무리 좋은 계획을 내세워도 그실행과정에서 종래와 같이 투자된다면 그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당국이 수질보전의 의지를 강력히 보일때 국민들의 환경보전에 대한 실천이 이루어질 것이다.현재 국민들의 관심이 고조되어 있는데 비하여 오히려 당국과 기업에서의 대처가 미흡한 면이 있다. 수질보전의 근본적인 해결은 국민 각자의 의식에서 출발하므로 당국과 기업은 환경보전의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투자하여야 하며 시민들은 절제와 깨끗한 환경,안심하고 마실수 있는 물을 보전하는 정책에 적극 호응하여야 할 것이다.
  • 21세기로 가는 길(정근모/과학논평)

    ◎MIT공대 20호빌딩 연구실의 교훈/과학기술 발전에는 전문가의 사기앙양 절대적 세계적 공과대학인 미국의 MIT는 「첨단기술의 산실」이라고 주장하여도 과언이 아닐만큼 20세기 과학기술발전을 이룩한 훌륭한 연구들을 수행하여 왔다.특히 이 학교의 20호빌딩은 유서깊은 건물이다.2차대전중에 건축된 이 실험동은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2층 목조건물이지만 50년동안 MIT 전자연구소의 핵심연구실의 역할을 해온 곳이다.2차대전 승리의 결정적 장비로 공헌이 지대하였던 레이더를 비롯하여 오늘날의 전자문명을 가능케한 수많은 전자장치들이 이곳에서 창안되고 개발됐다. ○첨단기술 개발의 산실 복도를 걸어가면 삐걱소리가 요란하고 수도관·전선·가스관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낡아빠진 이 건물은 학생들의 열정적인 실험정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각 연구실의 벽은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변형돼 험한 몰골을 하고 있고 첨단기술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듯한 고출력 레이저장치,프라즈마발생장치,초단파실험장치,초음파연구장치 등은 쉴새없이 작동되고 있다.한때 대학당국이 이 빌딩을 철거하고 현대식 건물을 짓는다는 계획을 발표했을때 교수 및 학생들의 강력한 반발이 일어났다고 한다.세계 어느 곳에 가서도 이 연구실만큼 훌륭한 업적을 낸 곳이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연구원들은 현대식 고층건물들보다는 낡았지만 유서깊은 20호빌딩이 훨씬 더 귀하고 소중한 것임을 역설하였다고 한다.어떤 교수는 얘기하기를 20호 빌딩에 들어서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계속 떠오르고 그 아이디어들을 즉시 실험할 수 있는 시설들이 마련되어 있어서 다른 어떤 실험실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무엇보다도 논문연구를 하는 학생들은 그들이 자유자재로 기구를 설치하고 부담없이 활동할 수 있는 20호빌딩이 다른 비싼 건물보다도 실용적이라는 주장이었다.이러한 20호빌딩은 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가장 연구가 활발한 연구실로 숨쉬고 있으며 철거되기 이전에 20세기 과학기술의 살아있는 사적지로 변해야 될지 모른다.성탄절 전야에도 연구작업으로 북적대고 신년새벽에도 실험에 열중하는 학생들로 붐비는 20호빌딩이야말로 MIT가 자랑하는 명소일 뿐만 아니라 현대과학기술의 귀중한 역사라 하겠다. ○전통의 중요성 일깨워 과학기술의 연구개발에는 보이지 않는 전통이 말할수 없는 위력을 발휘한다.시간이 지나면서 축적되는 실험기구들과 연구 경험,실험실 속에서 대대로 전수되는 지식과 연구방법,선후배간에 엮어지는 연구개발의 살아있는 드라마 등이 그것이다.이를 직접 체험하여 보고 그 속에서 희열을 맛보지 않고서는 과학기술연구의 참뜻을 이해하기 어렵고 훌륭한 연구성과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때묻은 연구장비를 다듬어 보지 못하고 두뇌들의 활발한 토론과 협력이 없이는 창조적인 과학연구와 획기적인 기술개발의 건실한 뿌리는 내려지지 못하는 것이다.업적이 뛰어난 연구소는 보기 좋은 건물이나 비싼 장비가 아니라 전통과 경험으로 엮어진 「두뇌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부터 출연연구소들을 설립하면서 많은 연구실들을 운영하기 시작했다.초창기의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과학기술의 뿌리를 내리고자 피눈물나는 노력들을 모았던 것이다.전통이 없는 환경속에서 전통을 세우는 작업을 했고 새로 사온 연구장비들을 길들여 가면서 움직이는 연구실들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것이다.그 결과 이제야 하나 둘 자랑할만한 연구실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다.그러나 이러한 성과의 이면에는 성급한 판단에 의한 역작용들도 감추어져 있다.예를 들어 80년대초에 이루어진 연구소 통폐합이라는 강제적인 행정조치로 인하여 많은 연구실들이 뿌리째 흔들려야 했었다.우리나라는 과학기술의 불모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초기반 조성작업으로서 출연연구기관들을 설립운영하였기 때문에 출연연구기관들은 한국의 과학기술계의 핵심체제가 되어왔던 것이다.이들 출연연구기관들이 중심을 잃고 외풍에 시달리게 되면 그 안에서 일하는 과학기술자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지게 된다.한국 과학기술계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능력있는 중견과학기술자들이 일할 의욕을 잃고 출연연구기관들을 떠나려한다면 이는 국가적으로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분위기 조성이 급선무 과학기술의 주체는 바로 과학기술자이다.과학기술자들의 사기가 떨어진다면 훌륭한 연구건물을 지어도,연구비를 대폭적으로 증액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다.무엇보다도 자존심이 강한 과학기술자들이 자신들의 연구개발업무에 긍지를 갖고 스스로 연구실을 자랑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이다.과학기술자들은 두뇌들이기 때문에 간단한 물질적 회유와 강압적 행정조치들로서는 신나는 연구활동을 기대할 수가 없다.신나는 과학기술자들이 없고서는 소망스러운 과학기술발전은 무망한 것이다.MIT의 전통은 마음놓고 일할 수 있고 자율적으로 운영해 갈 수 있는 20호빌딩속의 연구실 분위기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연구실의 주인공 자신들이 소속 연구소를 사랑하고 아끼는 전통을 만들수 있는 분위기가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의 연구소내에서 확고히 자리잡도록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하겠다.
  • 새 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

    ◎김형직 우상화에 조선국민회 이용/회원명단에 포함된 사실 뒤늦게 알아/68년판 전기부터 정치·군사 투쟁가로/단체성격도 임정과 관계 없는듯이 기술 김일성은 그의 부친 김형직이 조선국민회 회원이었다는 사실을 50세가 넘도록 모르고 있었다.이 점은 부친이 조선국민회의 「지도자」였다는 대대적인 선전이 행하여지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김일성은 조선국민회 뿐 아니라 그것보다 더 기초적인 사항들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많았던 인물이다.예를 하나만 들면 그는 52년 전기에서는 부친이 1928년에 36세로 사망하였다고 말하고 있다.그후 사망한 해는 26년으로 시정되었으나 사망당시의 부친의 나이는 1964년에 나온 박상혁의 「조선민족의 위대한 령도자」까지 32세로 시정된 일이 없었다.이러한 전기들에는 조선국민회 같은 것은 단 한줄도 기술되지 않았었다. 조선국민회는 1917년에 평양에서 결성된 비밀결사이다.이 결사의 회원명단에 김형직의 이름이 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당시 일본에서 조총련의영향하에 있었던 재일사학자 강덕상교수이다. 강교수는 지금은 조총련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지만 1960년대까지는 북한을 지지하고 있었다.그런 관계로 그는 60년대에 김형직과 관련된 자료들을 조총련을 통하여 북한에 보냈다. ○재일사학자 발견 그런데 이 자료를 입수한 무렵의 북한은 김일성의 유일지도체제를 세우는 와중에 있었다.그는 1967년에,해방전 보천보전투 때 이 전투를 국내에서 도운 박금철 이효순 등을 숙청하고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서두르게 되었다.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이란 북한주민이 오직 김일성의 사상만으로 사고하고 그의명령지시 대로만 움직이며 과업수행 과정에서 언제나 김일성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 체제를 확립한다는 말이다. 김일성은 이 책동의 일환으로 1968년에 백봉이라는 가명을 쓴 저자이름의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을 출판하게 하였다.종전의 김일성전기와는 내용이 판이한 이 전기에서 비로소 「조선국민회」를 김형직 우상화의 도구로 이용한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김형직을 우상화하는데 단순히 그를 과대선전하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역사적인 존재인 국민회 자체를 북한체제의 「정통성」에 부합되도록 그 활동내용을 뜯어 고쳐버렸다. 1917년에 실제로 평양에서 조직된 조선국민회는 1919년에 대한민국회로 개편되어 상해임시정부의 지도를 받게되는 조직이었다.이 국민회가 19년 10월에 상해임정에 보낸 규칙초안을 보면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설립목적이 있다. 「대한정을 관민상화하고 자순하며 신의 공보를 유종함을 목적으로 함」 당시의 대한국민회는 일제식민지하에서 대한이란 국호를 사용하고 관민이 서로 화합하여 자문을 주고 받는 정치를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그러나 이 단체는 동시에 신에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기독교단체이기도 하였다.훌륭한 독립단체이기는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종교결사이기도 하였던 것이다.대한민국회의 전신이 조선국민회이므로 조선국민회도 이상과 거의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68년 백봉이 쓴 전기에 나오는 「조선국민회」는 그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고 있다. 「이조직은 우리 나라에서 과학적 마르크스­레닌주의사상이 보급되기 이전에 벌써 반제민족해방의 과업을 정확히 내세웠으며 조국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방도로서 외국세력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주적인 힘에 의거하며 청원이나 개량의 방법이 아니라 정치적활동과 군사적 활동을 적절히 배합할 것을 내세웠다」 북한에서는 이상과같이 원래의 조선국민회나 대한국민회의 설립목적에서 신과 종교를 빼고 이 결사가 마치 무신론자의 단체인 것처럼 만들었다.또 외세의존이나 「청원이나 개량의 방법」같은 것을 부정하여 상해임정과의 연계를 끊어버렸다.이 국민회의 성원들 속에는 미국이나 재미교포와의 연계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 많았는데 이러한 연계마저 끊어서 「반제민족해방의 과업」을 수행하는 「자주적인」정치비밀결사였던 것처럼 그 목적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김일성은 50세 무렵까지 부친 김형직의 정치활동 중에 조선국민회원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그러나 이 점에 대하여 알게 된 순간부터 조선국민회의 활동을 그대로 두는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존재인 조선국민회가 설정한 목적 자체를 이상과 같이 변경하게 하였다. ○50세 넘도록 몰라 그러나 백봉의 전기가 나오는 무렵은 아직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책동이 초기단계에 있었다.이 때문에 북한이 설정한 목적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사상이 보급되기 이전」시기에 국민회가 결성되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이것은 조선국민회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조직이 아니며 김형직도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의미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또 백봉은 「이 조직은… 3·1운동 이전의 가장 큰 반일운동조직이었다」라고 하였다.3·1운동 이전의 가장 큰 반일조직은 따로 있지만 이러한 표현은 김형직이 3·1운동 이전 밖에 조선국민회에 있지 않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백봉은 3·1운동 이후 조선국민회가 대한국민회로 발전하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이 때문에 그는 독재자인 아들의 뜻과는 정반대로 이승만이 설립한 상해임정에 김형직이 붙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조선국민회는 3·1운동 이전의 조직이라고 그 활동을 중도에서잘라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은 김형직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조선국민회에서의 그의 활동은 3·1운동 이전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점에서 그후의 전기들과 구별되는 전기이다. 현대사자료25,강덕상론,일본 미스즈서방간,544면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백봉저,1968년 평양 인문과학출판사간,14면 같은책 동면
  • 재일 조선대교수 20년… 김일성연구 1인자/집필자 허동찬씨는…

    ◎76년 평양방문때 학문적 절망… 조총련서 추방된뒤 본격 추적 「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를 집필하는 허동찬씨는 재일교포 학자이다. 허씨는 1932년 일본 오사카(대판)에서 태어났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듬해에 오카야마(강산)에 소개하여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였다. 8·15해방은 허씨와 허씨의 가정에 민족재생의 희망을 주었다.당시는 재일교포사회가 좌경화되어 있어서 허씨 가족도 자연 조련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경대학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한 허씨는 1955년부터 조총련의 맹원으로 있었으며 1962년 조총련계 조선대학교에 들어가 82년까지 20년간 교편을 잡았다. 조총련에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72년까지 김병식사건이 있었다.의장 한덕수를 그의 종매부인 김병식이 쫓아내고 자신이 의장자리에 앉으려는 책동이었다. 허씨는 한덕수파도 김병식파도 아니었지만 이 비판사업에 동원되어 매일 같이 「비판과 자기비판」에 참가해야 했다.이 와중에서 그는 사람이 사람에게 딱지를 찍어 정치적 생명을 빼앗아 가는 광경을 보고 절망하여1971년에 4개월동안 교직을 내던진 일이 있었다. 1976년 가을 그는 조총련 조선대 문학부부부장의 자격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창립 30돌 기념축하대표단의 일원으로 2개월반 북한을 순방하였다.11월에는 김일성과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북한방문은 그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백문이불여일견이라 하지만 북한땅은 지상락원이 아니라 생지옥이었다.그는 돌이킬 수 없는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고민에 빠진 그는 1978년 강사로 강등되었다.결국 82년에 「주체사상을 신봉하면 나라가 망한다」라는 즉흥시가 발각되어 조총련에서 추방된다. 이때부터 허씨는 북한 김일성을 필생의 연구분야로 선택하게 되었다.날조된 김일성 역사를 바로잡는데 일생을 바치기로 마음먹고 오직 김일성연구에 전념한지 10여년에 이른다. 그 결과 「김일성평전」(85년)「김일성,하상과 실상」(87년)이라는 저서를 냈다. 미국과 일본의 기존자료외에 최근 개방화 물결을 타고 중국과 구 소련으로부터 많은 자료를 입수 할수 있어 「김일성 연구」를 보다 객관적으로,학문적으로접근할수 있게 됐다는 그의 말이다. 올해 4월부터는 사단법인 외교국방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요즈음 중국의 대한관/황성돈 행정연연구원·정박(특별기고)

    중국은 변하고 있었다.오늘의 중국은 『잘 살아 보자』고 몸부림치던 1960년대 우리들의 변화희구 모습을 제현하고 있었다.거리의 잡상인으로부터 지식인과 정치인,그리고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필자가 만나 본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는 『중국이 잘 사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변화시켜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과감히 변화시켜야 하고,배워와야 할 것이 있다면 어떤 값을 치르고서라도 배워와야 하며,이런 점에서 한국과의 수교는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변화』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한국은 크게 세 가지의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다. 첫째는 「경제발전의 모델케이스」라는 모습이었다.『수교와 함께 한국에게 가장 시급하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필자의 질문에 중국의 황 화 전부총리는 『어떻게 한국이 그처럼 짧은 기간에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가르쳐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라고 답했다.천안문옆에서 만두국 장사를 하는 20대 젊은이도,책방에서 만났던 북경대학 여학생도,백화점의 점원들도,한국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는 인사부 소속의 젊은 관료도,북경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도,무용을 전공했다는 가라오케의 조선족 여인도 『한국을 잘 사는 나라,가보고 싶은 나라,경제적으로 빨리 성공한 나라』라는데 입을 모았다. 인민대학교 국제정치학과의 한 노교수는 한중수교의 근저에 깔린 중국측 속셈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또다른 흥미로운 한국관을 피력했다.『한국과의 수교가 중국에 어떤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 교수는 『일본과 미국에의 독점적 경제의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제3의 카드가 바로 한국이라는 생각이 중국의 고위정책결정자들 사이에 폭넓게 공유되고 있다.비록 한국의 경제역량이 일본과 미국에 견줄만큼은 못되지만,이번 수교를 통해 무역상대국의 다변화를 꾀함으로써 그동안의 높은 대일·대미 무역의존에 따른 정치,경제적 불이익 가능성을 감소시키는 효과는 분명히 있으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러한 경제적 측면 이외에도 한국의 모습을 국제정치적 역학관계에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한 예로 언론관계 국제부에서 오랫동안 근무해온 부장급 인사에 의하면 한국은 극동아시아에 있어서 중국의 정치적 안정을 꾀하기 위한 적극적 포용상대국으로 인식되고 있었다.즉 중국이 소련과는 달리 자체붕괴하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이념적 대립가능국이었던 미국,일본과 일찍부터 우호적 수교관계를 맺은데 힘입은 바 컸다는 자체분석에 입각,극동아시아의 주변국 중 마지막 이념대립국인 한국과의 수교를 통해,현실로 나타난 소련붕괴와 같은 가능성에 마지막 쐐기를 박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한국관은 철저하게 실리적이었다.필자를 안내했던 젊은 통역관의 말처럼,그들은 「창문을 열면 신선한 공기도 들어 오지만,똥파리도 들어오고 벌레들도 들어 온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면서 문호를 개방한 조심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그들이 지니고 있는 인적,물적 하드웨어는 실로 엄청난 용량임을 필자는 보았다.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낙후의 원인이 엄청난 하드웨어를 저급의 소프트웨어로 운영해 왔다는데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진단하고,소프트웨어의 격상작업을 하나하나 이루어 나가고 있음도 역력하게 느낄 수 있었다.그들의 소프트웨어 격상작업이 성공하는 날,그날은 곧 「종이 호랑이」가 「표효의 호랑이」로 탈바꿈하게 되는 날이 될 것이다. 최근의 한중수교로 무슨 먹고 살 일이나 난 것처럼 실속없이 들떠 있을 것이 아니라,지금의 우리는 「중국을 삼킬 수는 있어도,결코 소화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신중히 음미하며,중국을 아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우리는 중국을 너무나 모르고 있다.
  • 남우 앤터니퍼킨스 에이즈합병증 사망

    【로스앤젤레스 AP AFP 연합】 1960년대 유명한 공포영화 「사이코」에서 뛰어난 연기로 잘 알려진 남우 앤터니 퍼킨스가 12일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합병증으로 숨졌다고 가족 대변인이 밝혔다.
  • 음파가 냉매/음향냉장고 미서 곧 실용화

    ◎유체 통과한 고음이용 냉각시켜/실험용 제작,우주왕복선서 사용/프레온가스대체품으로 각광… 우리도 개발 서둘러야 소리에 의한 온도변화를 이용해 저온상태를 얻는 「열음향냉동기술」이 차세대 냉동기술의 하나로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음향진동연구실 김동혁박사는 14일 열린 선진기술동향 발표회에서 미국등지에서 실용화에 성큼 다가서고 있는 열음향냉동기술개발동향을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보통 일상생활에서는 못느끼지만 음파가 유체속을 통과할때는 음파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유체의 압력이 주기적으로 변화하면서 유체의 온도에 변화폭이 발생한다.보통수준의 대화에서 발생되는 공기중의 온도변화폭은 섭씨 0.0001도 정도. 열음향냉동기술은 바로 이같은 온도변화폭을 이용해 한쪽의 열을 다른 한쪽으로 뿜어내 저온상태를 얻는 기술이다. 열음향에 관한 연구는 1777년 히긴스라는 사람이 긴 파이프의 한쪽끝에 횃불을 이용해 열을 가했을때 파이프의 반대편에서 음향이 발생하는 것을 최초로 발견한 데로 거슬러 올라간다.이어 19세기 중반 존트하우스는 유리세공을 할때 뜨거운 유리가 찬 유리에 붙는 순간 유리튜브에서 음향이 발생하는 것을 정량적으로 해석해 설명했으며 20세기 중반 타코니스는 초저온 냉동장치의 가스충전튜브 양끝에 심한 온도차이가 존재할때 매우 큰 음향이 발생되는 것을 발견,이를 정성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이와 반대의 현상,즉 음향을 이용해 저온 열원으로부터 고온 열원으로 열을 이동시키는 열 펌핑현상은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발견됐다.1960년대 중반에 지포드와 롱스워드는 펄스튜브냉장고라고 불리는 장치를 이용해 상당한 수준의 냉동을 실현했는데 이는 튜브에 충전된 가스에 저주파이면서도 고진폭의 압력변화를 가함으로써 저온 열원의 온도를 고온 열원 온도의 약 절반까지 떨어뜨린 것이었다.이같은 연구는 80년대 실용화연구로 이어져 82년 미국립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의 휘틀리등이 열음향을 이용한 열기관을 고안하는데까지 이른다. 열음향냉동은 오존층파괴의 원인물질인 염화불화수소(CFC)를 사용하지않고 종래의 열기관과 같은 복잡한 부품이 필요없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 특히 20 00년대까지 사용금지가 예고된 프레온가스냉장고의 대체품으로서,우주공간과 같이 고장수리가 어려운 곳에서도 높은 신뢰도를 가진 냉동기로서 효용가치가 커 차세대냉동기술로 부각되고 있다. 현재까지 개발된 열음향냉장고는 먼저 고열로부터 음향에너지를 발생시킨뒤 이 음향에너지로 저온을 얻는 열구동식냉장고와 스피커의 높은 음압을 이용해 열펌핑을 하는 스피커식냉장고의 두가지로 크게 구분된다.이때 필요한 음압은 1백40∼1백50데시벨정도의 높은 수준. 김박사는 『이제 연구를 한지 10년밖에 안돼 실용화되지는 않았지만 실험용 음향냉장고가 지난 1월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러호에 실려 우주에 발사되는등 연구진척이 빨라 앞으로 2∼3년내로 가정용 음향냉장고가 출현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한다.특히 90년도 미국 로스 알라모스연구소가 개발한 열음향냉장고는 최저 절대온도 89도까지 얻을 수있고 절대온도 1백20도에서 5W의 열펌핑을 할수 있는 성능이었으며 디스커버러호에 실린 제품은 인공위성에서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첨단제품이라는 것. 김박사는 『미국에 뒤질세라 일본 유럽도 열음향냉동기술개발에 착수하고 있다』면서 『연구현황추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우리나라도 이에대한 연구를 서둘러야 할것』이라고 주장했다.
  • 주인석 첫장편 「희극적인…」(이작가 이작품)

    ◎“좌절한 운동권세대의 표류하는 삶”/니체의 「인간적인…」서 제목 차용/격동의 80년대 살아온 젊은이 아픔 그려 젊은 소설가 주인석씨(29)가 첫 장편소설 「희극적인,너무나 희극적인」을 열음사에서 펴냈다. 니체의 저서 「인간적인,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제목을 따온 이 소설은 좌절한 80년대 운동권 세대의 표류하는 삶과 인식을 연극적 파라다임에서 조명한 지식인 소설이다.서울대 국문과 출신으로 연극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통일밥」등의 대본을 집필했던 작가의 전력으로 보아 이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상당히 개입된 작품으로 파악된다. 『격동의 80년대에 20대를 보낸 젊은 세대로서 혼돈스런 현실 속에서 지난 젊은 날 경험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추적해보고 싶었습니다』 과거는 그냥 존재했던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삶에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있을진대 따라서 「희극적인,…」은 80년대를 해석·반성함으로써 총체성과 전망을 상실한 90년대를 뚫고 나가려는 작가의 노력의 소산으로 보여진다. 이 작품에는 『식민지 반봉건사회에서 태어나 제3세계적 개발독재사회에서 교육받고 예속적 국가독점 자본주의사회에서 젊은 날을 보냈으며 이제 포스트모던사회로 진입』한 1960년대산의 내면풍경과 진지한 고뇌가 배어있다.한 마디로 「희극적인,…」은 모더니즘적 가치가 붕괴된 현실에서 바라본 지식인의 음울한 소상이다.그 초상은 끔찍하게 일그러진 모습을 띠고 있다. 천민자본주의의 총아인 방송국의 드라마PD 상우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3일동안 벌어진 일을 다루면서 수시로 80년대로 회귀하는 회상형식을 취하고 있다.80년대 대학시절 운동권 학생이었던 상우는 세계와 첨예하게 불화하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이는 그의 개인사적 불행의 삶과 함께 운동권시절 당했던 끔찍한 고문과 고문후유증에 연유한 것이다.그는 고문에 못이겨 수배된 친구 영환과 애인 지숙의 은거지를 자백했는데 이는 그에게 좀처럼 떨치기 힘든 커다란 죄책감을 짐지웠다.이같은 죄책감으로 굴절된 의식을 갖게된 상우의 세계관과 역사관은 다분히 냉소적이다.그는 80년대 이후의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이 잘 짜여진 희극일 뿐이며 80년대의 변혁운동 역시 다른 세상으로 뛰어들기를 열망했던 젊은세대의 연극일 따름이라고 자조하며 자신이 부패해가고 있다고 느낀다.고문과 감금으로 대표되는 엄혹한 시대의 비극이 엄연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굳이 희극이라 우기는 것은 작가의 역설적 드러냄이며 그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리는 것은 60년대산의 지극한 허무주의의 반영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운동권친구 영환의 의문사와 옛 애인 지숙과의 우연한 재회는 그의 의식과 행동에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다.그는 연극 「외디푸스왕」 「햄릿」 「세추안의 착한 처녀」,영화 「닥터 지바고」등의 텍스트가 주는 의미를 해독하며 80년대 부조리한 삶과 변혁운동에 존재론적 성찰을 시도한다.결국 방송국을 사직하고 불투명하지만 자유로운 정신의 비상을 꿈꾸며 여행을 떠나는 주인공의 모습은 아직까지 60년대산의 낙관주의가 소진된 것은 아니라는 암시를 준다. 이 작품은 상처받은 한 젊은 영혼의 「비극적 길찾기」의 기록이다.따라서 「희극적인,너무나 희곡적인」이란 제목은 지독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문학과 사회」90년 여름호로 데뷔하여 최근 연작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를 활발히 발표하고 있는 작가 주인석씨는 『90년대 서구적 모더니티의 위기를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19세기를 되돌아보며 21세기를 전망하는 과학소설을 구상중』이라고 밝혔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