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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해적방송/이순녀 논설위원

    정식 방송 면허 없이 비합법적으로 전파를 송출하는 행위를 해적방송(pirate radio)이라고 한다. 원래는 불법 도용의 뜻으로 해적이란 단어를 썼지만 공해상에 배를 정박하고 자국으로 전파를 내보내는 해상 방송국이 생기면서 명실상부한 해적방송이 됐다. 1960년대 영국은 해적방송의 천국이었다. 1964년 ‘라디오 캐롤라인’의 첫 등장 이래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당국은 단속에 골머리를 앓았다. 지난해 개봉한 영국 영화 ‘락앤롤 보트’는 당시 해적방송을 소재로 삼았다. 비틀스의 등장으로 로큰롤이 최전성기를 누리던 시기, BBC라디오의 대중음악 방송시간은 하루 45분에 불과했다. DJ들은 북해에 배를 띄우고 24시간 음악을 방송하는 해적방송 ‘라디오 록’을 개국했다. 영국 인구의 절반이 매일 애청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자 당국은 광고를 규제해 돈줄을 틀어막는 한편 모든 해적방송을 불법화하는 해상상해법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해적방송을 모티프로 삼은 또 하나의 영화로 크리스천 슬레이터가 주연한 미국 영화 ‘볼륨을 높여라’(1990)가 있다. 뉴욕에서 애리조나로 전학 온 고교생 마크는 내성적인 성격 탓에 외톨이로 지낸다. 아버지는 뉴욕의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마크에게 아마추어 무선통신기를 사준다. 마크는 밤만 되면 무선통신기에 온갖 이야기를 쏟아내는데, 이것이 라디오 FM채널을 통해 해적방송으로 전교생에게 전파되면서 학교가 발칵 뒤집힌다. 10대들의 억눌린 자아와 좌절을 해적방송을 매개로 설득력 있게 보여준 수작으로 꼽힌다. 해적방송은 국가차원에서 심리전에 활용되기도 한다. 적대 지역, 적대 국가의 반체제 세력을 가장해 정치적 주장을 선전한다. 해적방송 중에서 방송 단체나 송신소의 소재지를 위장하고 있는 것을 지하방송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도 북한인권단체, 선교단체 등이 운영하는 정식 대북방송과 함께 비공식적인 대북 해적방송을 하고 있다. 월드컵 중계권이 없는 북한이 조선중앙TV를 통해 남아공 월드컵 경기를 녹화중계해 해적방송 논란이 일고 있다. 방송 출처를 알 수 없게 화면 위 아래를 잘라내고, 현장 소리를 최대한 줄인 뒤 북한 해설자의 육성을 덧입혔다. 한반도 단독 중계권자인 SBS는 북한 측과 사전에 협상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북한은 2002년 한·일월드컵 때도 무단중계한 전력이 있다. 2006년 독일월드컵 때는 아시아방송연맹(ABU)으로부터 중계권을 무상으로 제공받았다. 이번은 어느 경우일까. 이순녀 논설위원 coral@seoul.co.kr
  • [월드컵 비타민] ① 전술·포메이션 의미

    [월드컵 비타민] ① 전술·포메이션 의미

    “축구가 뭐예요.”라며 외면하던 야구팬이나 축구 문외한들도 남아공월드컵이 11일 막상 시작되면서 관심을 갖게 된다. 한국팀이 사상 첫 원정 16강에 올라간다면, 관심과 열기는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할 것이다. 그러나 축구 관련 기사나 얘기는 어렵다. 조기축구 회원들과 유럽 축구에 몰두하는 올빼미형 ‘광팬’ 등 전 국민이 전문가 수준이기 때문이다. 월드컵의 계절에는 5살배기 꼬마부터 80세 할머니까지 누구나 “대~한민국”을 외칠 정도다. 이 기간에 축구의 전문적 전술부터 자잘한 관심사까지 낱낱이 해부해 상큼한 비타민으로 제공한다. 축구는 무방비 마음 상태로 볼 수 있다. 복잡한 규칙이 없는 스포츠다. 야구나 농구처럼 복잡한 룰이 없다. 문외한이 볼 때 축구는 골키퍼를 제외한 10명의 선수들이 넓디넓은 운동장을 무질서하게 뛰어다니다가 상대방의 골문에 운 좋게 공을 차 넣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외한의 시선일 뿐. 축구에는 감독의 전략·전술이 숨어 있다. 축구의 전략은 숫자로 표기되는데 ‘4-3-3’이나 ‘4-2-4’, 또는 ‘4-4-2’ 라는 난수표 같은 것이다. 한글로 표기하면 대형(포메이션)이라고 한다. ‘4-2-4’이란 숫자를 먼저 해독해 보도록 하자. 모든 숫자는 우리 팀 골문을 중심으로 시작된다. 우리 팀 골문에는 누가 있겠나. 맞다. 수비수다. 수비수의 숫자가 4명이라는 이야기다. 수비수를 지나면 중앙에 미드필더가 배치되고, 상대방 골문 언저리에 4명의 공격수를 배치했다는 의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비수의 숫자가 아니라 4명이나 되는 공격수다. 개인기가 뛰어난 브라질 대표팀이 1960년대에 애용하던 시스템이다. 연습문제다. ‘4-2-3-1’은 뭔가. 앞 뒤로 배치된 수비수 4명, 공격수 1명이다. 그런데 2-3은 뭐란 말이냐. ‘2-3’은 미드필더다. 수비형 미드필더가 2명, 공격형 미드필더가 3명으로 세분화된 것. 이 시스템은 상대팀에 따라 또는 경기 중에 변형이 가능하다. 공격형 축구를 할 때는 4-3-3으로, 수비형 축구를 할 때는 4-5-1로 변형할 수 있다. 이를테면 공격형 미드필더인 박지성이나 이청용, 기성용이 또는 수비형 미드필더 김정우 등이 중앙과 좌우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포메이션에 변형을 가져오는 것이다. ‘5-3-2’는 수비에 5명을 배치하니 수비를 강화한 것으로, 1994년 이탈리아가 월드컵에서 준우승할 때의 ‘카테나치오’(빗장수비)’ 전형이다. 그렇다면 ‘토털사커’니 ‘압박축구’는 뭔가. 말 그대로 1970년에 시작된 토털사커는 우르르 몰려가서 공격하고, 수비하고 하는 ‘떼축구’이고, 1980년대 시작된 ‘압박축구’는 토털사커가 현대적으로 변형된 것으로 체력 소모를 줄이면서 상대방이 공을 만지고 놀 수 없도록 중원에서부터 차단하는 것이다. 압박축구를 숫자로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 현재 각국 대표팀이 애용하는 ‘4-4-2’가 된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막걸리 세상/이춘규 논설위원

    힘겹게 중흥기를 맞은 막걸리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했다. 쌀농사를 시작한 3000년 전, 길게는 1만 5000년 전부터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막걸리는 청주(淸酒)를 뜨지 않고 그대로 걸러 짜낸 한국 고유의 술이다. 고려·조선시대의 기록에 청주와 탁주를 구별했다. ‘조선양조사’(釀造史)에 따르면 막걸리는 중국에서 전래된 민족 고유주다. 알코올 농도는 6∼8도 정도이다. 막걸리 원료는 지역 차가 있다. 현재는 흔해진 쌀이 주원료다. 고구마를 원료로 하는 막걸리도 있다. 강원도나 경북 산간에선 옥수수를 원료로 해 지역색을 살린다. 일제 시대 이전엔 집에서도 막걸리를 담가 먹었다. 쌀이 귀하던 1960년대 후반부터 10년 이상 쌀막걸리가 금지됐었다. 밀가루와 옥수수 막걸리만 허용됐다. 북한 막걸리의 운명은 식량난을 극적으로 반영한다. 예전에는 북한 주민들도 막걸리를 즐겨 마셨다. 하지만 식량난으로 제조가 거의 되지 않는다. 외국인 관광객용 정도로만 만들어진다고 한다. 쌀이 매우 귀한 북한에서는 감자, 옥수수, 도토리를 원료로 한 밀조 소주가 많이 제조되어 시장에서 유통된다고 한다. 그런데 막걸리 폭탄주인 혼돈주(混沌酒)는 위험하다. 정신을 잃게 만들 수 있다 해서 붙여졌다. 막걸리와 증류소주를 혼합한 조선시대 폭탄주다. 1782년 남원 사대부 이갑부의 둘째아들이 아버지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기생을 시켜 형에게 혼돈주를 먹여 살해한 사건도 있었다. 춘향이도 이몽룡에게 혼돈주를 권했다고 한다. 일본서는 ‘맛코리’라고 한다. 일본의 도부로쿠는 막걸리와 유사하다. 도부로쿠와 막걸리는 탁주(일본어 니고리자케)라고 불리는 공통점이 있다. 색깔도, 형태도, 맛도 매우 흡사하다. 다만 도부로쿠는 알코올 농도가 14~17도로 독한 것이 특색이다. 신사에서 행사 때 주로 쓰였다. 가정에서는 제조가 금지돼 밀주가 성행했었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서야 규제가 풀려 제조·판매가 쉬워졌다. 농민들마저 새참으로 맥주를 마셨을 정도로 1980~90년대 막걸리 산업의 위기는 심각했다. 중소기업 막걸리 종사자들이 눈물겨운 재생 노력 끝에 마침내 막걸리 산업이 명예롭게 부활했다. 중견기업은 물론 대기업까지 막걸리 산업에 군침을 흘릴 정도다. 농군도, 등산객도, 도시의 술꾼들도 막걸리를 벗한다. 때마침 서울 도심서 열리는 막걸리·한식 페스티벌과 함께 월드컵축구 단체응원 열기가 더 고조될 것 같다. 막걸리 세상이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변명에 불과한 해외 실패사례

    나로호(KSLV-I) 2차 발사가 실패로 끝나자 교육과학기술부는 “발사 실패는 해외 우주선진국도 수차례 맛봤다.”며 나로호 실패를 있을 수 있는 일로 받아들였다. 지난해 1차 발사 때도 같은 말을 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첫 발사 실패는 1960~1970년대에 집중된 사례여서 변명에 불과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일고 있다. 가장 자주 거론되는 사례가 바로 미국의 ‘뱅가드(Vanguard)’호다. 미국 최초의 위성발사체인 뱅가드호는 탱크 및 인젝터의 낮은 압력 때문에 연소실의 고온 가스가 연료시스템으로 새어 들어가 발사한 지 2초만에 폭발했다. 뱅가드호는 1957년 12월6일 발사됐다. 무려 53년 전 일이다. 영국(1단)·프랑스(2단)·독일(3단)의 합작품인 ‘Europa’호는 1961년부터 1971년까지 총 11회의 발사 중 7번의 실패를 기록했다. 유럽(EU)의 ‘Ariane-V’호도 1996년 6월4일 첫 비행에서 발사 36초 후 급격하게 궤도를 이탈한 끝에 공중폭발했다. 중국과 일본도 1960년대에 이뤄진 첫 발사에서 실패를 맛봤다. 중국은 1969년에 ‘CZ-1’호가, 일본은 1966년에 ‘Lambda-IV’호가 자세제어에 이상이 생겨 실패의 쓴잔을 마셨다. 2010년 나로호보다 40년 이전에 있었던 일이다. 인도의 ‘SLV’호 역시 우리보다 31년 전인 1979년에 첫 실패를 겪었다. 이처럼 무려 30~53년 전의 실패사례를 들어 나로호 실패도 이들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나로호의 엔진은 첫 발사에 성공한 우주 선진국 러시아가 제작한 엔진이어서 실패가 심각하게 부각된다. 전 세계에 자국에서 발사체를 발사한 11개국 중 첫 발사에 성공한 나라가 단 3곳(성공률 27.2%)뿐인데 그 중 러시아가 포함돼 있을 만큼 러시아의 우주 기술력은 세계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한 항공우주공학과 교수는 “수십년 전 우주 선진국들의 발사 실패를 2010년에 들먹이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며 “이는 우리나라 과학기술력의 수준을 수십년 전으로 되돌려 놓는 꼴”이라고 꼬집었다. 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 새달 개방 평창 백룡동굴

    새달 개방 평창 백룡동굴

    참 사연 많은 동굴입니다. 강원 평창의 백룡동굴 말입니다. 발견 당시 과정도 그렇지만, 발견 이후 종유석 등 동굴 생성물을 노린 사람들에게 당한 ‘침탈’의 과정, 그리고 연이은 수몰 위기 등이 여간 드라마틱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5억년의 역사보다 인간의 눈에 띈 이후, 불과 30년 남짓한 세월 동안 더 기구하고 신산한 삶을 살았던 셈입니다. 그 백룡동굴이 7월 초쯤 일반에 개방됩니다. 여느 동굴과 달리 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일체의 조명을 배제했습니다. 방문객 또한 탐험 복장을 갖춘 소수의 인원으로 제한할 예정입니다. 관광보다는 교육과 탐사에 주안점을 둔, 체험형 동굴로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사람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오염을 최소화하겠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수평굴이라 하나 다소 품은 듭니다. 유격 훈련을 하듯 낮은 포복으로 가거나, 잔뜩 웅크린 채 ‘게걸음’으로 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장식되지 않은 동굴의 원형을 엿보는 과정이 제법 쏠쏠한 재미를 안겨줍니다. ●뭍에선 가장 긴 석회동굴… 1875m중 785m 공개 이무열(28) 평창군 동강생태체험운영팀장에 따르면 강원도 정선과 영월 사이 동강 주변에는 현재 확인된 것만 256개에 달하는 동굴이 있다. 평창 지역에는 딱 절반인 128개가 분포돼 있다. 백룡동굴은 그중 하나다. 백룡동굴의 발견 과정은 극적이다. 미탄면 마하리에 살던 20세 청년 정무룡은 1976년 5월12일 평소 자주 드나들던 동굴에서 뭔가 이전과 다른 점을 느낀다. “동굴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고, 거기에서 시원한 바람이 끊임없이 흘러 나오는 거예요. 게다가 천장에 한 가마니 매달려 있던 관박쥐들이 나를 보고 놀라 달아나는데, 전부 그 조그만 구멍으로 들어가더라고요.” 그는 즉시 인근 마을에 살던 사촌 동생 4명을 끌어들여 탐사 작전을 세웠다. 겁 없는 청소년 5명은 1960년대 영화 ‘대탈주’의 포로들처럼 교대로 두께 1m가 넘는 암벽에 구멍을 팠다. 꼬박 사흘이 지난 뒤 마침내 사람 한 명이 간신히 통과할 만한 구멍이 뚫렸다. 오늘날 ‘개구멍’이라 불리는 곳. 여기까지는 인근 마을 주민들도 흔하게 드나들었던 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백룡동굴의 발견이었던 셈이다. 동굴 중심부에 발을 디딘 ‘탐험대’의 눈에 경이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피자에 토핑된 치즈를 떼낸 듯한, 여러 갈래 찢어진 종유석과 석순 등 동굴 생성물들은 동굴 초입에서 보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훗날 천연기념물 260호로 지정된 백룡동굴이 처음으로 사람에게 속살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백룡동굴은 동굴을 품고 있는 백운산의 ‘백’자와 정무룡의 ‘룡’자가 합쳐진 이름이다. 전체 길이는 1875m다. 제주도의 동굴을 제외하면 뭍에서는 가장 길다. 동굴 초입은 평창, 가운데는 영월, 현지인들이 ‘뒤굴’이라 부르는 끝부분은 정선 땅에 속한다. 동굴 내부는 주굴인 A지역, 가지굴인 B~D지역으로 구분돼 있다. 이번에 공개되는 곳은 A지역. 길이는 785m다. 동굴이 언제 생성됐는지 정확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종유석 등 동굴 생성물들의 나이는 대략 5억년을 넘나든다. ●1800년대 조선시대 사람 산 흔적도 동굴 진입로는 높낮이를 달리하며 백운산 절벽을 에둘러 돌아간다. 철제 지지대 위로 목재 데크를 깔아 조성했다. 길이는 300m쯤. 그 덕에 예전이라면 동강 건너편에서나 보았을 절경들이 코앞에서 펼쳐진다. 20분 남짓 걷다 보면 동굴 입구에 닿는다. 동굴에서 맨 처음 만나는 것은 오래 전 이곳에 살았던 사람의 흔적이다. 박종일 동굴가이드에 따르면 온돌 시설과 함께 숯덩이가 발견됐는데, 탄소 측정을 해보니 1800년대 조선시대 것으로 판명됐다고 한다. 온돌 유구에서 한 굽이 돌면 햇빛은 한 줌도 남지 않는다. 손전등과 헬멧에 붙은 헤드랜턴의 조그만 불빛을 제외하면 완벽한 어둠의 세상이다. 50대 농부가 된 정무룡이 요즘 청소년이었다면 영화 ‘반지의 제왕’ 속 모리아 광산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게다. 어둠 속 저편에는 늘 영화 속 괴수 ‘발로그’가 튀어나올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러나 랜턴의 불빛이 닿을 때면 동굴은 어김없이 빼어난 형상의 동굴 생성물들을 보여준다. 일부 지역 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다. ‘백룡동굴 종합학술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물에 서식하는 ‘화석동물’ 옛새우 등 모두 56종의 생명체가 동굴에 기대 살아가고 있다. 물은 동강의 수위 변동과 높낮이를 함께한다. 따라서 장마철 등 동강 수위가 상승하는 시기엔 동굴 출입이 제한된다. 1991년 논란이 거셌던 동강댐이 예정대로 건설됐다면 필경 백룡동굴도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채 수몰되고 말았을 터다. ‘개구멍’을 낮은 포복 자세로 지나고 나면 기이한 풍경이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내 나라 안에서 가장 크다는 동굴 커튼과 방패형 석순, 베이컨 시트, 유석(流石) 등 15종에 달하는 다양하고 거대한 동굴 생성물들이 연이어 펼쳐진다. 여느 동굴과 달리 이들은 아직 이름이 없다. 여태 공개되지 않았던 탓이다. 저마다 이들에게 이름 하나씩 지어주는 건 어떨까. 백룡동굴은 1979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종유석을 떼가는 등 사람들의 훼손 행위가 이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남근석’(男根石)이라 불리는 원통 모양의 종유석 도난사건이다. 1997년 11월, 남근석이 현지 경찰 관계자 등에 의해 잘려져 외부로 반출된 사건이 언론에 공개됐고, 이는 백룡동굴 보호 여론이 들끓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남근석은 ‘치과적 봉합수술’을 거쳐 2002년 완벽에 가깝게 복원됐다. 하지만 지금도 동굴 곳곳에는 잘려진 종유석의 흔적과 반출하려다 내팽개친 석순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녹색, 흑색오염에도 주의해야 백룡동굴에 조명시설을 설치하지 않은 까닭은 이른바 ‘녹색오염’을 경계해서다. 이무열 팀장은 “빛이 들기 시작하면 이끼류 등이 자라게 되고, 이 때문에 동굴 원형이 변질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아울러 “사람의 맨손이 닿으면 손에 있던 유기물들이 암석에 옮겨져 흑색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며 ‘흑색오염’에 대해서도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쉽게 말해 눈으로만 보고, 이동할 때도 머리 바로 위의 종유석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 달라는 뜻이다. 탐사객이 딛고 선 바로 그 자리가 천연기념물이기 때문이다. 동굴 끝은 너른 광장이다.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췄다는 에그 프라이형 석순 등 다양한 동굴 생성물들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여기쯤 오면 힘든 탐사 과정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땀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박종일 가이드는 “동굴 기온이 평창 지역의 연평균 기온인 14도를 늘 유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탐사객들은 광장에서 ‘완전한 어둠’을 체험한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일제히 랜턴을 끄는데, 털끝만큼의 빛도 없는 암흑과 절대 고요의 세계가 펼쳐진다. 몇 분이 지난 뒤 하나 둘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동굴도 꼭 그만큼의 절경들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글 사진 평창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33) →가는 길 중앙고속도로 주천 나들목을 나와 평창방면 88번 지방도→82번 지방도→42번 국도→미탄, 혹은 영동고속도로 장평 나들목→31번 국도→평창→42번 국도→미탄 순으로 간다. →준비물 백룡동굴 체험은 1회 15~20명, 하루 9회 운영될 예정이다. 예약은 홈페이지(www.maha.or.kr)를 통해 받는다. 10% 정도는 현장 판매한다. 체험료는 어른 1만 5000원, 청소년 1만원. 체험복과 장화, 헬멧 등 장비는 백룡동굴관리사무소에 마련돼 있다. 샤워시설도 갖춰져 있다. 다만 식수와 무릎·팔꿈치 보호대 등은 준비해 가는 게 좋겠다. 기관지가 약한 사람의 경우 석회 먼지를 막을 마스크를 준비하는 것도 잊지 말자. 관리사무소 334-7200. →잘 곳 백룡동굴 초입 문희마을, 어름치마을(www.mahari.kr) 등에 민박집이 몰려 있다. 인근에 기화천 등 빼어난 계곡이 많아 피서지로도 인기가 높다. 동강레포츠(333-6600)는 래프팅 등 레포츠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맛집 마하생태체험관광지로 지정된 까닭에 민박집 외엔 음식점이 없다. 미탄면 소재지에서 먹고 가야 한다. 미탄면 창리 대림장(332-3844)은 막국수와 게장백반(9000원) 등으로 입소문 난 집이다.
  • 대중문화, 아날로그 감성과 통하다

    대중문화, 아날로그 감성과 통하다

    디지털의 최전선에 서 있던 대중문화가 아날로그 감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문학적 가치를 조명한 드라마나 영화가 부활하고, 디지털 기술로 복원한 고전영화가 상영되는가 하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원로 배우들을 출연시키는 등 과거와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문학적 접근 시도하는 드라마·영화 3일 막내린 KBS 수목 미니시리즈 ‘신데렐라 언니’는 문학적 감수성이 성공의 요인으로 평가받는다. 작위적인 설정을 앞세운 막장드라마나 영상미를 강조하는 최근 드라마 트렌드와는 달리 고전적인 대사나 구성을 강화한 것이 오히려 색다른 느낌을 준 것이다. “뻐꾸기가 뻐꾹뻐꾹 울듯이 따오기가 따옥따옥 울듯이 새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주인공 은조의 대사)처럼 의성어를 활용하거나 ‘온다.’ ‘웃는다.’처럼 짧고 함축적인 대사는 마치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서사적이고 경쾌하다. 전반적으로 화면 구성도 느리고 여백이 강조됐다. 과거 ‘네멋대로 해라’의 인정옥 작가나 ‘바보같은 사랑’의 노희경 작가는 인생의 깊이를 담은 통찰력 있는 대사로 인기를 끌었지만, 최근엔 빠른 전개와 직설적인 화법의 드라마가 유행하면서 대본의 영향력은 약화됐다. 때문에 자칫 진부해 보일 수도 있는 드라마의 문학적 회귀는 오히려 시청자들에게 신선함을 줬다. 방송계의 대표적인 스타PD로 통하는 표민수 PD는 “최근 드라마가 영상을 강조하다 보니 개성있는 작가의 대본도 많이 줄었다.”면서 “사건 중심의 빠른 드라마가 있다면, 서사적이고 문학적인 향기가 있는 드라마도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다양성 측면에서 적절한 분배가 요구된다.”고 말했다. 칸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이창동 감독의 ‘시’도 인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서사적인 전개, 여백을 강조한 영상으로 단편 소설 한 권을 읽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 감독은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을 통해 경제적으로 가치를 따지기 어려운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며 문학적 가치를 조명했다. ●극장가·방송가 단절된 과거 복원 ‘한창’ 이와 함께 극장가와 방송가에서는 고전 영화 재개봉 등 단절된 과거를 복원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디지털 복원 기술의 발전 덕도 있지만, 단순한 고전 감상보다는 그 시대 작품들의 진정성을 이해하고 ‘온고지신’하자는 분위기도 강하다. 최근 임상수 감독이 리메이크한 영화 ‘하녀’가 대표적인 경우. 이 작품의 원작인 고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년작)는 지난 3일 50년 만에 재개봉됐다. 고전 영화가 회고전이나 특별상영전이 아니라 극장에서 정식 재개봉되는 것은 이례적이다. 영화사 ‘미로비전’ 측은 “임감독의 ‘하녀’가 칸영화제에 공식 초청된 이후 현대 영화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원작의 완성도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재개봉에 힘을 실었다.”고 밝혔다. 지난달 27일 전국 15개 상영관에서 재개봉한 필름누아르의 걸작 ‘대부’(1972)도 개봉 7일 만에 1만 1000명을 동원하는 등 관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영화 수입사인 예지림 엔터테인먼트 측은 “걸작으로 알려졌지만, 정작 극장에서 ‘대부’를 본 적이 없는 관객들이 30년을 뛰어넘는 관심을 보였다.”면서 “‘하녀’와 함께 국내외를 아우르는 고전 영화 재개봉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적 다양성 확대·세대간 소통” 방송가에서도 원로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세대 공감’에 나섰다. EBS는 ‘시’로 복귀한 배우 윤정희의 전작인 1994년작 ‘만무방’(감독 변장호)을 HD(고화질)로 20일 방영하고, MBC 예능프로그램 ‘황금어장-무릎팍도사’도 19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를 형성했던 윤정희를 주인공으로 초대해 녹화를 마쳤다. 윤정희는 최근 인터뷰에서 “영화 ‘시’를 통해 나를 잘 모르는 세대도 배우 윤정희를 찾아보고, 영상을 통해 함께 공감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원로 배우 신성일도 현재 방영 중인 MBC 특집극 ‘나는 별일 없이 산다’의 주인공을 맡아 17년 만에 브라운관에 컴백했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흐름이 젊은층 일변도로 흐르던 문화의 다양성을 확대시키고, 세대간 단절을 회복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대중문화 평론가 정덕현씨는 “아날로그와의 소통은 표피적으로 흐르는 영상물에 지친 대중들이 생각할 여유를 주는 작품에 대한 선호를 보여준다.”면서 “고전에 대한 재조명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이전 세대의 가치관이나 접근 방식을 현대적으로 접목해 문화계의 풍요로움을 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씨줄날줄] 나로호의 재도전/이순녀 논설위원

    “5, 4, 3, 2, 1. 발사” 2009년 8월25일 오후 5시 정각. 140t 육중한 몸체의 나로호가 전남 고흥군 외나로도 나로우주센터의 지축을 흔들며 힘차게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55초 만에 음속을 돌파한 나로호는 2분43초 뒤에는 대기권을 통과했다. 발사 9분 후, 센터에서 “위성이 정상적으로 분리됐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현장에서 숨죽이며 발사 장면을 지켜본 관계자들은 물론 TV로 중계화면을 보던 국민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우주강국을 향한 7년간의 땀과 눈물이 결실을 맺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분리된 위성이 정상궤도 진입에 실패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 첫 우주발사체의 꿈은 아쉽지만 그렇게 ‘절반의 성공’으로 기록됐다. 그로부터 10개월. 나로호의 재도전이 눈앞에 다가왔다. 오는 9일 2차 발사를 앞두고 오늘 오후 4시 조립동에서 발사대로 이동해 기립을 완료함으로써 발사 직전의 위용을 갖추게 된다. 1차 발사 실패의 아쉬움이 컸던 만큼 이번 2차 발사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나로호 발사를 총괄하는 항공우주연구원은 1차 발사의 시행착오를 거울 삼아 만반의 준비를 갖춰 이번에야말로 ‘완전한 성공’을 다짐하고 있다. 주무부처인 교육과학기술부의 염원도 다르지 않다. 김중현 2차관은 양복 주머니에 행운을 뜻하는 네잎 클로버를 넣고 다닐 정도다. 지난 4월 초 나로우주센터를 찾았을 때는 이주진 항우연 원장에게 네잎 클로버 80개를 선물하기도 했다. D데이를 앞두고 여수시와 고흥군은 관람객을 맞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화정면과 남면 도서지역 등 9곳을 발사 장면을 관망하기 좋은 ‘뷰 포인트’로 선정해 소개했다. 고흥지역 호텔과 모텔 등 숙박시설도 예약이 꽉 찬 상태라고 한다. 발사 당일 나로호 성공발사를 기원하는 각종 특별행사도 준비하고 있다. 꿈과 희망은 갖되 실제 우주개발이 쉽지 않다는 현실적 측면을 간과해선 안 된다. 자국의 우주센터에서 자국의 발사체를 사용해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스페이스 클럽’ 회원국인 일본은 1960년대 후반 연속 4차례나 로켓 발사에 실패했고, 러시아도 소유스를 쏘아 올린 첫해에 17번 시도에 7번만 성공했다고 한다. 위성 자력발사 국가들의 첫 발사 성공률은 27.2%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있다. 나로호의 재도전 성공을 간절히 기원하지만 혹 잘못되더라도 실망보다는 격려를 보낼 일이다. 이순녀 논설위원 coral@seoul.co.kr
  • [도시와 길] (18) 전주 은행나무길

    [도시와 길] (18) 전주 은행나무길

    ‘천년고도’ 전북 전주시는 조선왕실의 본향이다. 역대 임금들이 몸과 마음의 뿌리로 여긴 고장이다. 조선시대 전라도와 제주도를 관할하던 전라감영이 있던 곳으로 삶의 근본인 전통문화를 힘겹게 지켜온 도시다. 요즈음에도 전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한옥마을이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즐비하게 늘어선 이 한옥마을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가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널리 알려진 ‘은행나무 길’이다. ●전주만의 감성을 담은 길 전주 사람들은 정겹고 유서 깊은 은행나무 길을 사랑한다. 그곳에 가면 잃어버린 그 무엇인가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역사와 전통의 향기가 온몸을 휘감아 오기 때문이다. 은행나무 길은 남천교에서 동부시장에 이르는 980m 구간으로 전주만의 감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고향 같은 아담한 한옥마을을 두루 살펴 볼 수 있는 코스다. 은행나무 길 도로 양편으로는 대궐형에서부터 서민형까지 700여채의 한옥이 줄지어 있다. 화강암으로 포장된 길을 걷노라면 마치 시대를 거꾸로 거슬러 오른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세월이 비켜간 듯한 고풍스러운 풍경 속에 현재가 공존하는 모습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다. 은행나무 길이라는 명칭은 600여년 동안 한옥마을 입구를 한결 같이 지키고 있는 기세 좋은 거목에서 비롯됐다. 전주 최씨 종대 앞에 서 있는 이 나무는 조선왕조 500년과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묵묵히 지켜본 산역사로, 전주가 호남 유학의 본향임을 상징한다. 은행나무 길의 역사는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나무의 수령이 600년을 넘는 만큼 은행나무 길은 적어도 이 나무 보다 오래된 길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당초 은행나무 길은 폭이 좁아 은행나무 골목으로 불렸다. 마을 주민과 우마차가 다니는 옛길이었다. 하지만 커다란 은행나무에 얽힌 전설이 입소문을 타고 퍼져 나가면서 타 지방에서도 찾아오는 명소로 등장했다. 과거를 보러 가는 과객과 학문을 공부하는 유생, 아들을 낳기 원하는 아낙네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은행나무에 제사를 올리고 소원을 빌면서 은행나무 길은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인가도 하나 둘 늘어나 조선 후기에는 제법 큰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1900년대 초반에도 이 길은 풍남동, 교동 일대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마을 안길이었지만 이 일대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주요 도로로 자리 잡았다. 이는 한옥마을이 형성되던 시기와 함께한다. 한옥마을은 전주 중심가에 일본인들의 가옥이 늘어나자 유지들을 중심으로 일본인에게 우리 것의 자리를 내주어서는 안 된다는 정신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은행나무 길은 일제강점기인 1920~40년대 도시계획 개념이 도입되면서 비로소 도로로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2차선 도로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다. 당시에는 내로라하는 명문가와 부자, 관리들이 이곳에 몰려 살았다. 그러나 1977년 한옥마을이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돼 개조나 신축을 할 수 없게 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아파트 시대가 열리면서 한옥마을은 슬럼가로 변했고 주민들은 하나 둘 신개발지로 빠져나갔다. 은행나무 길 역시 그리 붐비지 않는 한적한 주택가의 통학로 수준으로 전락했다. ●관광명소로 제2의 전성기 맞아 은행나무 길은 1999년 전주시가 한옥마을을 전통문화특구로 지정하면서 30여년간의 침체에서 벗어나 옛 영화를 되찾기 시작했다.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는 한옥마을이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 체험 테마마을로 탈바꿈하는 일대 전환점이 됐고, 은행나무길은 그 중심에 섰다. 한옥마을과 흥망성쇠를 함께 해온 은행나무길이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 길은 전 구간을 화강암으로 포장하고 주변에 소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 철쭉 등 고유 수종을 심어 도심 속 최고의 쉼터로 거듭 났다. 볼거리, 쉴자리, 먹거리가 풍성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느리게 걸으며 역사의 깊은 향취와 전통문화도시를 음미할 수 있는 보물 같은 장소가 됐다. 고개만 살짝 돌리면 고즈넉한 카페, 훈훈한 인심을 느낄 수 있는 맛집, 한가로움이 가득한 골목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은행나무 길 한편에 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실개천과 폭포, 분수를 조성해 한껏 운치를 살렸다. 이 실개천은 은행나무 골목 옆을 흐르던 실개천을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곳에선 주말이면 다양한 공연과 공예품을 판매하는 장이 서 관광객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방문객들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것을 체감할 수 있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길”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은행나무 길은 그 매력이 국내외에 알려지면서 연간 600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최고의 관광도로가 됐다. 그동안 버려지다시피 방치됐던 은행나무 길 주변 한옥들은 이제 한옥체험관과 카페, 공예품점, 찻집, 음식점 등으로 변했다. 동락원, 아세헌, 설예원, 승광재, 목우헌, 학인당 등 한옥체험시설은 예약을 해야 묵을 수 있을 만큼 인기 절정이다. 예전에는 팔려고 내놓아도 물어보는 사람 조차 없던 한옥들은 요즈음 3.3㎡에 500만원을 준다 해도 매물을 찾아 보기 힘들다. 한옥마을이 관광지로 변하면서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떠나고 장사를 하는 영업집들만 늘어나 한옥마을이 ‘한옥 장사촌’으로 변질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실제로 2003년 1만1000명을 넘던 한옥마을 주민들은 이제 8500여명으로 줄었다. 한옥마을 토박이 김용택(74·청수약국 약사)씨는 “한옥마을과 은행나무 길이 깨끗하게 정비되고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활기를 띠고 있지만 주민들이 줄어 약국으로서는 손실이 크다.”고 말했다. 글 사진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2010 남아공월드컵] 伊 수비축구 알고보면 재미있다

    [2010 남아공월드컵] 伊 수비축구 알고보면 재미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이탈리아의 주전 공격수 프란체스코 토티(34·AS로마)는 한국과의 16강전을 하루 앞둔 6월17일 “한국을 이기는 데 한 골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한국팬들은 이 발언을 두고 “건방진 언행”이라며 공분했고, 토티는 순식간에 붉은 악마의 증오 대상이 됐다. 경기는 토티의 예상대로 진행됐다. 이탈리아는 전반 18분 첫 골을 넣은 뒤 빗장수비에 돌입했다. 후반 43분 설기현(포항)의 동점골이 터질 때까지 88분 동안 토티의 발언은 사실로 입증됐던 셈. 사실 토티의 발언은 한국 축구를 깔본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빗장수비(카테나치오)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왔다. 도시국가 전통의 이탈리아에서 축구는 각 도시 간의 대리 전투이며, 전투에서 최선은 ‘승리’다. 축구에서 승리를 위해서는 많은 골이 필요 없다. 5-0이나, 1-0이나 이긴 것은 똑같고 골을 내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탈리아에서 5-0은 공격력 과잉일 뿐이며, 월드컵에서도 16강 이후에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탈리아 프로축구는 재미가 없다. 화끈한 공격은 보이지 않고, 선제골을 넣은 팀은 나머지 경기 시간을 모두 수비에 집중한다. 30초마다 반칙이 이어지고, 밀착수비를 펼치면서 끊임없는 욕설과 모욕적인 언사를 이어간다. 대표팀도 마찬가지다. 2006년 독일월드컵 결승전에서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은퇴)이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에 대한 모욕을 참지 못해 이탈리아 마르코 마테라치(인테르 밀란)에게 박치기를 날리고 퇴장당했다. 어쨌든 우승컵은 이탈리아가 차지했고, 마테라치는 영웅이 됐다. 상대팀 팬에게는 재미없지만, 자국팬에게는 짜릿한 승리의 축구다. 1960년대 탄생한 카테나치오의 원형은 포백 수비진 뒤에 상대 공격수에 대한 대인마크를 전담하는 ‘리베로(스위퍼)’를 놓는 ‘1-4-3-2’ 전형(그림1)이었다. 2000년대 이후의 현대 축구에서 리베로를 두는 팀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공간을 선점, 상대 공격의 길목을 차단해 슈팅 공간을 내주지 않는다는 카테나치오의 핵심은 이탈리아 축구에 여전히 남아 있다. 최근의 이탈리아는 ‘4-3-3’의 정상적인 전형(그림2)으로 경기를 시작해 선제골이 터지면 숨 막히는 빗장수비 전형(그림3)을 펼친다. 허술해 보이지만 골대에 다가갈수록 공을 패스할 공간도, 슈팅을 날릴 골대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경향은 16강 진출 이후에 두드러진다. 4경기만 이기면 우승하는 단기전에서 불확실한 공격보다 확실한 수비로 승부를 거는 것이다. 사상 첫 원정 16강을 노리는 한국의 본선 첫 상대는 이탈리아의 빗장수비보다 더 악명 높은 ‘질식수비’의 그리스. 30일 한국은 ‘가상의 그리스’ 벨라루스의 밀집수비에 고전했다. 무리하게 공간을 파고들다 역습의 찬스만 제공했다. 그리스의 장신 수비숲을 뚫기 위해서는 여러번의 무의미한 공격보다는 단번에 수비 뒷공간을 파고들어 골을 결정짓는 날카로움이 필요하다. 물론 선제골을 내주는 것은 곧 패배로 이어진다. 선제골을 넣은 그리스는 철저하게 수비 축구를 펼칠 것이기 때문이다. 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美 1955년생 vs 韓 1960년대생

    美 1955년생 vs 韓 1960년대생

    ‘1955년생에게는 천재 유전자가 있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에릭 슈미트. 세상을 바꿨고 지금도 바꾸고 있는 이 세 사람은 모두 1955년생이다. 선마이크로시스템스의 공동 창업자 앤디 백톨샤임, 월드와이드웹(WWW)을 만들어 인터넷의 기초를 제공한 영국의 팀 버러스 리도 같은 해에 태어났다. 베스트셀러 ‘아웃라이어(보통을 넘어선 천재)’를 쓴 말콤 글래드웰은 이들의 성공에 ‘시대의 은총’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마이크로프로세서 혁명이 시작된 1975년에 스무살을 맞았고,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창업에 도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컴퓨터의 중추인 마이크로프로세서가 8비트, 16비트를 구성하며 소형화·고성능화하기 시작한 것이 1975년의 일이다. 또 창업이 자유로운 땅에서 태어났고, 고급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과정에서 당시 일반인들이 접할 수 없었던 컴퓨터와 자유롭게 만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바꿔 말하면 이들이 1940년이나 1960년에 태어났거나 미국이나 영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오늘날 애플이나 마이크로소프트(MS)는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아웃라이어는 우리나라에서도 재현된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와 이해진 NHN 이사회 의장은 1967년생, 김정주 넥슨 대표는 1968년생이다. 이들이 회사를 창업한 1997~1999년은 한국에서 벤처붐이 일기 시작했고, 인터넷 사업의 본격적인 개념이 도입된 때였다. 1971년생으로 나이는 조금 어리지만 나성균 네오위즈 대표가 창업한 것도 1997년이었다. 시대의 혜택을 얻고, 기회를 놓치지 않은 이들 모두 실리콘밸리의 천재들처럼 주식평가액이 수천억~1조원에 이르는 한국의 젊은 거부들이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제18회 공초문학상] 모국어 혈맥 타고 ‘무위이화’ 공초정신 구현

    올해는 국권 침탈에 의한 모국어의 수난이 시작된 지 100년을 맞는 해다. 저 사나운 어둠이 나랏말씀과 내 나라의 글자를 무너뜨릴 때 이 겨레 정신의 혼불을 피워 아시아의 여명을 노래한 한국시의 선각인 공초 오상순 선생의 문학세계와 사상을 기리기 위해 1992년 공초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구상, 박두진, 설창수 선생 등이 나서 제정한 공초문학상 운영세칙에는 지난 1년간의 발표 작품과 등단 20년 이상의 시력을 가진 시인을 대상으로 하며, 인품을 참조한다는 좀 특별한 조항도 있다. 제18회 수상자는 시집 ‘도둑산길’을 출간한 이성부 시인으로 수상작은 ‘백비’(白碑)가 선정되었다. 시력 50년을 맞는 이성부 시인은 1960년대 한국시의 백두대간을 등반한 이후 시대정신과 모국어의 깊은 혈맥을 타고 독보적 시 세계를 구축해 왔다. 특히 이번 수상작 ‘백비’가 실린 시집 ‘도둑산길’은 그의 반 세기 시업(詩業)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이룬 절정의 경지를 이루고 있다. 어느 한 작품도 저 웅휘했던 공초시와 맥락이 닿지 않는 것이 없지만 ‘백비’는 특히 무위이화(無爲而化·힘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변하여 잘 이루어짐)의 공초정신이 구현된 선시의 어법을 밟고 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너무 크고 많은 생 담고 있는 나머지/ 점 하나 획 한 줄도 새길 수 없던 것은 아닌지’에서 글자를 새기지 않아도 마음으로 읽고 전하는 불립문자의 진수를 담고 있다. 산과 더불어 생각하고 산에서 시를 떠올리는 산의 시인 이성부, 아무리 파헤쳐도 다 알아낼 수 없는 대자연의 장엄과 온 몸으로 부딪쳐 써내고 있는 시들은 그가 쏟아 부은 시간과 내딛은 발걸음만큼이나 이 땅의 모국어의 높은 탑을 쌓아가는 것이다. 수유리 빨래골에 장좌불와(長座不臥)하고 계실 공초께서 시 ‘백비’를 보시고 아마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며 크신 손을 내밀 것이다. 공초문학상에 빛을 더 해준 이성부 시인의 수상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임헌영 문학평론가 신달자 시인·이근배 공초숭모회장
  • [도시와 길] 서울 강남대로

    [도시와 길] 서울 강남대로

    ‘강남은 욕망의 용광로다. 구별짓기의 아성이다. 강남은 한국의 초고속 성장을 온몸으로 드라마틱하게 웅변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강남이 한국이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서울의 강남을 이렇게 정의했다. 강남의 허리 역할을 하고 있는 강남대로는 서울은 물론 대한민국의 발전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527 한남대교 남단에서 서초구 양재동 352의 3 양재대로에 이르는 6.9㎞의 도로로, 너비는 50m(보도 포함, 차도만 약 40m)이고 왕복 10차선이다. 쭉 뻗은 도로는 한국 근대화의 상징이며 강남역을 중심으로 한 상권은 1980~90년대 대한민국의 제일이었다. 2000년 들어서는 벤처붐이 불면서 곁가지 격인 ‘테헤란로’가 주목을 받으면서 화려한 부활을 했다. ●한국 현대화의 표상 서울 역사의 중심은 종로 일대와 남산 등 강북이었다. 하지만 그 무게 중심이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한강의 이남 즉 강남으로 옮겨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시민의 약 80%가 한강을 건너지 못해 공산 치하에서 혹독한 3개월을 보냈다. 전쟁이 끝났지만 서울시민의 가슴에는 ‘공포’가 남아있었다. 그래서 1966년 제3한강교, 현재 한남대교 건설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어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부산과 서울을 잇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했다. 제3한강교에서 남쪽으로 7.6㎞에 달하는 고속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영동 구획정리사업이 실시된다. 강남 고속버스터미널과 영동아파트 지구개발 계획에 온갖 종류의 세금 면제가 이뤄졌다. 논밭이었던 강남의 넓은 땅은 경제·택지 지구의 최대 공급원이 된 것이다. 곧게 뻗은 광활한 강남대로는 한국의 초고속 성장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1960년대 말부터 ‘강남 신화’, ‘부동산 불패 신화’가 생겨났다. 그것은 폭발적인 아니 광적인 ‘땅값 상승’이다. 제3한강교 건설로 일기 시작한 강남 말죽거리 투기 광풍은 평당 200~400원 이었던 이 곳 땅값을 공사 착공 후 1년 만에 6000원까지 올려놨다. 시세차액이 무려 30배에 달했다. 빠른 고도산업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1세대 부동산 졸부들이 탄생했다. 이렇게 강남대로는 강남 교두보 역할을 하면서 서울의 중심지로 진입하는 길로 자리잡는다. ●패션과 문화의 상징 거리로 강남대로는 1984년 서울 지하철 2호선 개통과 함께 다시 한번 도약을 한다. 8개 출구를 가진 강남역 주변은 매일 수 만명의 젊은이들이 모이는 패션과 문화의 상징거리로 자리잡았다. 이때부터 높은 빌딩과 부동산 투기로 대표됐던 강남대로에 하나 둘씩 옷가게와 카페, 술집, 식당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특히 강남역 5·6번 출구 뒤로는 젊은이들을 위한 카페와 나이트클럽, 명품 옷가게 등이 속속 들어서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패션과 문화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작은 백화점이라고 불리는 강남역 지하상가도 이때 생겨났다. 현재 214개 점포들이 성업 중이다. 윤종희 강남역 지하상가 상인회 대표는 “정말 1990년 후반에는 넘쳐나는 젊은이들로 걸어다니는 게 아니라 떠밀려 다녔지. 그때가 강남대로의 황금기야.”라고 말했다. 도성 이남으로 내려 가기 위해 잠시 쉬며 말에게 죽을 먹이던 말죽거리에서 시작된 강남대로는 2000년대 벤처붐과 교보빌딩, 강남대로 미디어폴 사업 등으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첨단 기술의 장으로 화려한 부활 강남대로의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 바로 교보타워다. 강남대로의 랜드마크는 강남역 뉴욕제과에서 교보빌딩으로 옮겨가고 있다. 거리의 이름도 제일생명 사거리에서 교보타워 사거리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교보타워가 스위스의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교보타워는 적벽돌의 쌍둥이 건물이 오작교를 사이에 두고 연결되는 H자 형상으로 지어졌다. 지역성에 근거한 태도, 기하학적 대칭성, 빛이 주는 극적인 효과, 그 지역의 재료에 주목한 벽돌마감을 특징으로 하는 서울을 대표하는 예술적인 건축물이다. 또 이 빌딩 앞에는 보타가 직접 채택한 미술작품 ‘코레아 환타지아(류근상 작)’가 조경과 어우러져 도심 속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해 5월 3일에는 교보강남타워의 지하 1, 2층에 총면적 3600평(전용면적 1800평)규모의 교보문고 강남점이 문을 열었다. 35만종 200만여권의 서적을 소장하는 교보문고 강남점은 지구에 착륙하는 우주선을 모티브로 삼아 ‘미지와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인테리어 디자인을 꾸며 많은 시민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또 지난해 3월 강남구청에서는 강남대로 특화사업의 하나로 대형 단말기인 미디어폴을 세웠다. 이것은 교통·지역정보·공공정보·실시간 뉴스 등 각종 정보 뿐만아니라 게임이나 영화정보 같은 엔터테인먼트 서비스도 제공해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내장 카메라로 즉석에서 사진을 찍어 이메일이나 블로그로 전송할 수 있어 모임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이 미디어폴 앞에서 단체로 사진을 찍는 풍경도 종종 볼 수 있다. 미디어폴 상단에 있는 LCD·LED 전광판을 통해 예술 작품을 선보이는 등 다양한 볼거리도 제공해 눈길을 끌고 있다 한국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인 강남을 관통하는 강남대로는 지금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詩’의 윤정희, 16년전 그녀를 만나다

    ‘詩’의 윤정희, 16년전 그녀를 만나다

    영화 ‘시’의 칸 영화제 각본상 수상을 계기로 배우 윤정희(66)의 마지막 출연작 ‘만무방’이 방영된다. EBS는 새달 20일 오후 10시50분 한국영화특선으로 만무방을 선정, 고화질(HD) 방송을 선보인다. 1994년 개봉한 ‘만무방’은 변장호 감독이 제작하고, 엄종선 감독이 연출한 작품. 1960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오유권의 ‘이역의 산장’을 영화화한 것이다. 한국전쟁 막바지, 접전지역 산골에서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비극을 다뤘다. 만무방은 예의나 염치도 없는 뻔뻔한 사람이란 뜻이다. 미국 마이애미 폴라델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고, 대종상영화제에서 6개 부문을 수상했다. 물론 윤정희에게도 여우주연상이 주어졌다. 낮에는 태극기, 밤에는 인공기를 걸면서 목숨을 구걸하던 시절, 한 40대 여인(윤정희)이 있는 산골 오두막에 두 남자가 피란 온다. 오두막은 전쟁의 비참함을 피할 수 있는 평화스러운 곳이 되어야 하는데 이내 소란스러워진다. 바로 여인을 차지하기 위한 남정네들의 전쟁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리얼리티를 위해 실제 사람이 살았던 강원도 대관령 횡계의 한 오두막을 세트장으로 그대로 옮겨서 촬영했다. 윤정희는 1967년 첫 출연작 ‘청춘극장’을 통해 대종상 신인여우상을 받는 등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후 1970년대까지 문희, 남정임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이끌었다. 30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각종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과 인기상을 휩쓸었다. 한편 EBS는 ‘만무방’에 앞서 변장호 감독의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는 두 작품을 방영한다. 6일에는 과부의 억눌린 욕망을 다룬 ‘홍살문’(1972), 13일에는 김동인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한 ‘감자’(1987)를 내보낸다. 변 감독은 1960년대 코믹멜로물을 찍는 흥행감독이었다. 22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눈물의 웨딩드레스’(1972)를 기점으로 문학작품을 밑그림으로 완성도 높은 문예영화를 선보였다. ‘홍살문’, ‘감자’ 외에도 ‘망나니’, ‘벙어리 삼룡이’ 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윤정희가 주연을 맡은 ‘만무방’도 이런 흐름 속에 있는 작품이다. 변 감독의 예술세계 속에서 배우 윤정희를 조명해 보자는 것이 EBS의 의도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문화마당] 몸으로 노래하는 대중음악/강태규 음악평론가

    [문화마당] 몸으로 노래하는 대중음악/강태규 음악평론가

    며칠 전 문화전문 계간지 ‘쿨투라’ 편집을 마감했다. 여러 편의 원고 가운데 편집을 끝내고서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하는 글이 있었다. ‘특집원고’에 실릴 이 글의 제목은 ‘몸과 음악’이었다. 한 음악 전문기자가 기고한 이 글은 대중음악과 몸의 상관관계를 예리하게 지적한다. 최근 우리 대중음악의 편향적인 지형도와 몸의 노출에 대한 가수들의 태도를 단칼에 비판하는 빛나는 글이었다. 글의 요지는 이렇다. 1960년대 이후 팝의 역사에서도 몸의 노출로 인한 관능이 존재했다. 사이키델릭 록그룹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여성보컬 그레이스 슬릭은 음악에 대한 철학을 선보이면서 억압된 성의 자유를 외쳤다. 그의 관능적인 이미지 표출은 늘 화제를 모았다. 세계적인 뮤지션 에릭 클랩튼이 결성한 프로젝트 밴드 ‘블라인드 페이스’의 재킷 표지는 어린 소녀의 알몸 상반신 사진이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의 음반 ‘일렉트릭 레이디랜드(Electric Ladyland)’의 재킷 또한 여성들의 나체사진이었다. 비틀스의 존 레넌 역시 솔로 앨범 ‘투 버진스(Two Virgins)’에서 자신의 부인 오노 요코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을 당당하게 내보였다. 록그룹 ‘록시뮤직’은 두 여자의 대담한 노출로 낯뜨겁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세월이 지나서도 ‘몸의 노출’보다 ‘음악적 조명’을 받고 있다. 이들 이후로도 음악은 몸의 진화와 함께 성장했다. 마이클 잭슨은 노출 없는 몸짓으로 세계적인 영향력을 떨쳤다. 그의 현란한 몸의 움직임은 자신의 음악성을 더욱 의미 있게 포장했다. 2000년대 이후 우리 대중음악은 어떤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는가. 지금 국내 대중문화계는 어느 때보다 상업성에 의존한 콘텐츠들이 범람하고 있다. 배우가 연기를, 가수가 노래를 잘 한다는 것, 즉 맡은 역할에서 예술의 미학을 찾는 일은 이제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다. 되레 자본주의 시대가 추구하는 상업적 논리와 배척되는 행위라는 자괴감마저 든다. 이에 발맞춰 콘텐츠의 주역들은 점점 더 노골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탈바꿈시킨다. 앨범 재킷 등을 통해 슬쩍 몸을 내보이는 대리전도, 춤 동작 등 예술의 일부로서 보여주는 퍼포먼스의 영역도 아닌, 몸 그 자체를 드러낸다. 현재 국내 대중문화계 전반을 돌아보면, 남녀 엔터테이너 모두 몸 자체의 섹시함을 드러내고 홍보하는 데 주력하는 형국이다. 방송, 영화, 음악 등 대중문화계 전반이 ‘육체의 바다’에 빠졌다는 주장은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대중예술 분야에서 콘텐츠는 2순위로 밀려난 지 오래고, 육체를 통한 감각적 노출이 제1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아이돌이 점령한 대중음악계에서 근육질 몸매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행태는 이제 보편적 규칙이 됐다는 데 이견이 없다. 몸이 디지털 환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아이템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 원류는 몸에 대한 인간 본연의 욕망이겠지만, 차별을 요구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또 다른 쟁탈 현장의 희생물일 수 있다는 것은 곱씹어야 할 대목이다. 가수라면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이 의무이고, 노래를 위해 자신이 가진 대부분의 역량을 바쳐야 하는 것이 기본적인 태도다. 그것이 더욱 중요한 이유는 40년 전, ‘몸’이 수행한 대리 기능을 되돌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재킷에 낯뜨거운 노출 장면이 여과 없이 실렸어도, ‘그들의’ 음악은 여전히 훌륭하고 역사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많은 가수들은 음악을 위해 몸을 이용하는지, 아니면 몸을 위해 음악을 이용하는지 한번 되짚어 봐야 하지 않을까. 음악은 그 자체로 영속성을 보장하지만, 몸은 그 자체로 순간의 쾌락을 제공할 뿐이라고 엄중하게 묻는다. 세상이 바뀌어도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대중음악계가 불황을 탄식하기 전에 가수의 영역과 위상의 문제를 한번쯤 되짚어 봐야 때다. 언제까지 몸으로 노래할 것이며, 몸의 노래를 요구할 것인가.
  • 中·日 벼 다수확 유전자 발견

    │도쿄 이종락특파원│전 세계적으로 안정성 논란을 빚고 있는 유전자조작작물(GMO) 방식이 아닌 육종 방식으로 벼 수확량을 대폭 늘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에 따라 1960년대 미국의 노먼 볼로그 박사가 밀의 수확량을 획기적으로 증대, 기아로부터의 탈출에 기여한 이른바 ‘녹색혁명’이 벼에서도 재현될 가능성이 커졌다. 일본 나고야대 아시카리 모토유키 교수 연구팀과 중국과학원 식물게놈연구센터 리지아양 박사 연구팀은 24일(현지시간) 영국의 과학저널 ‘네이처 지네틱스’에 각각 발표한 논문에서 수확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OsSPI, 14’ 유전자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아시카리 교수 연구팀은 수확량이 높은 ST-12 벼 품종과 수확량이 낮은 ‘니폰베어(Nipponbare)’ 품종을 비교 연구해 ‘OsSPI, 14’ 유전자의 발현 여부가 생산량 차이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두 품종 모두 ‘OsSPI,14’ 유전자를 갖고 있었지만, 유전자가 실제 형질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 발현에서 ST-12가 니폰베어에 비해 10배나 높았다. 아시카리 교수는 “ST-12로부터 추출된 ‘OsSPI,14’ 유전자를 니폰베어에 주입한 결과, 수확량이 크게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리 박사 연구팀도 ‘OsSPI,14’ 유전자를 중국 남부지역에서 재배되는 ‘슈수이’ 품종에 넣자 수확량이 10% 가량 늘어난 사실을 확인했다. 리 박사는 “이 변종은 원래의 니폰베어보다 40% 가량 수확량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jrlee@seoul.co.kr
  • [2010 칸영화제 결산]이창동 ‘시’·홍상수 ‘하하하’ 첫 2편 동시수상

    [2010 칸영화제 결산]이창동 ‘시’·홍상수 ‘하하하’ 첫 2편 동시수상

    ‘시’는 웃고 ‘하녀’는 울었다. 아시아의 신예 거장들은 축배를 든 반면, 유럽 거장들은 쓴 잔을 들이켰다. 이창동(56) 감독이 24일 새벽(한국 시간) 프랑스 칸에서 폐막한 제63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자신의 다섯 번째 연출작 ‘시’로 각본상을 받았다. ‘떠오르는 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40) 태국 감독은 ‘엉클 분미 후 캔 리콜 히스 패스트 라이브스’(Uncle Boonmee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로 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 영화로는 13년 만에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거머쥐며 활짝 웃었다. ●한국영화 칸 경쟁부문 5번째 수상 이 감독은 ‘시’를 통해 삶의 황혼기에 접어든 60대 여성 미자(윤정희)가 시 쓰기에 도전하며 겪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 감독은 전작인 ‘밀양’으로 칸 경쟁 부문에 초청받아 전도연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겼고, 이번에 또 다시 각본상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한국 영화가 칸 경쟁 부문에서 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다섯 번째. 이 감독은 “윤정희 선생님이 여우주연상을 탈 것 같다는 반응이 많았는데 (받지 못해)안타깝다.”면서 “시나리오를 인정받았다는 게 참으로 기쁘다. 차기작 연출에 새로운 동기를 부여해 주는 기회인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1960년대 문희, 남정임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를 이뤘고 197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윤정희는 1994년 ‘만무방’ 이후 16년 만의 스크린 복귀로 여우주연상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으나 아쉽게 수상에 실패했다. 윤정희는 “각본상 수상도 기쁘지만 무엇보다 르몽드, 피가로 등 프랑스 유력지가 평론가 리뷰에서 영화에 대해 극찬한 것을 가족들과 함께 보고 너무나 뿌듯했다.”고 말했다. ●경쟁부문 진출 ‘하녀’ 수상 끝내 불발 ‘하하하’로 여섯 번째 칸 초청장을 받아들었던 홍상수(50) 감독은 비록 경쟁 부문은 아니지만, ‘주목할 만한 시선’의 대상을 받으며 5전6기만에 처음으로 칸 트로피를 가져가는 기쁨을 누렸다. 우리나라 영화가 칸영화제에서 경쟁·비경쟁 부문을 통틀어 2편 복수 수상 기록을 낸 것은 처음이다. ‘시’와 함께 경쟁 부문에 진출해 기대를 모았던 임상수 연출·전도연 주연의 ‘하녀’는 수상 대열에 끼지 못했다. 가장 큰 웃음을 터뜨린 이는 아피찻퐁 감독이다. 1997년 ‘체리 향기’(감독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와 ‘우나기’(감독 이마무라 쇼헤이)의 황금종려상 공동 수상 이후 아시아 영화계에 큰 경사를 안겼다. 젊은 거장으로 평가받는 그는 2002년 ‘친애하는 당신’으로 칸의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받았다. 2004년 ‘트로피칼 말라디’로 태국 영화 사상 첫 칸 경쟁 부문 진출을 일궈내며 심사위원상을 받은 데 이어 이번 쾌거까지 태국 영화사를 고쳐 쓰고 있다. 방콕에서 태어나 미국 시카고 예술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한 그는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에 녹여내는 한편, 태국에서 금기시되는 소재를 다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미디어아트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코미디 ‘엉클 분미’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한 남자가 사별한 아내의 영혼과 오래 전 잃어버린 아들의 영혼을 만나며 자신의 전생을 접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무속 신앙 가운데 하나인 애니미즘(자연숭배)이 녹아 있다. ●영국출신 거장들 한개의 상도 못건져 유혈이 낭자하고 과격했던 영화가 많았던 지난해에 견줘 올해 칸 영화제는 개인의 내면과 일상 생활의 잔잔함을 다룬 작품이 강세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사회 때 높은 평점을 받아 황금종려상 수상이 유력했던 영국 출신 거장 마이크 리(67) 감독의 ‘어나더 이어’와 켄 로치(74) 감독의 ’루트 아이리시‘가 단 한 개의 상도 건지지 못했다는 점은 이변으로 통한다. 그러나 유럽 작품은 9개 부문(단편 경쟁 포함)에서 5개 부문을 휩쓸며 여전히 강세를 보였다. ‘시’와 ‘엉클 분미’, 심사위원상을 받은 아프리카 차드 출신 마하마트 살레 하룬(49) 감독의 ‘어 스크리밍 맨’ 정도가 비유럽권 영화였다. ‘퐁네프의 연인들’로 유명한 쥘리에트 비노슈는 칸 영화제에서 처음 여우주연상을 받아 활짝 웃었다. 다른 국제영화제에서는 여러 번 상을 받았지만 프랑스 출신임에도 유독 칸과는 인연이 없었다. 비노슈에게 여우주연상 영광을 안긴 ‘서티파이드 카피’는 이란의 거장 키아로스타미(70) 감독이 만들었지만 그의 첫 영어 작품이고,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서양 연기자들이 주연을 맡아 아시아 영화로 분류하기가 애매한 편. 황금종려상의 뒤를 잇는 그랑프리(심사위원 대상)는 프랑스 출신 자비에 보부아(43) 감독의 ‘오브 갓스 앤드 멘’이 차지했고, 배우로 유명한 프랑스의 마티유 아말릭(45) 감독은 ‘온 투어’로 감독상을 받았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윤정희, 여우주연상 25회 수상..’60’s 트로이카’

    윤정희, 여우주연상 25회 수상..’60’s 트로이카’

    배우 윤정희의 스크린 복귀작 ‘시’가 지난 23일 제 63회 프랑스 칸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문희, 남정임과 함께 1960년대 트로이카로 불리운 톱스타로 꼽힌 윤정희는 1968년부터 1994년까지 청룡영화상과 대종상에서 ‘여우주연상’을 25회나 수상했다. 특히 윤정희는 데뷔 후 영화 ‘소라의 꿈’에서 문희와 처음 연기 호흡을 맞춰 이름을 알렸다. 윤정희는 현대를 사는 여기자로, 문희는 비밀을 간직한 불구 여인으로 분해 열연을 펼쳤고 자존심을 건 연기대결은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고 평가 받았다. 이후 16년 만에 이창동 감독의 ‘시’로 복귀해 자신과 닮은 60대 여인 ‘미자’로 분해 열연을 펼쳤다. 극중 미자는 집단 성폭행에 가담한 외손자 정욱(이다윗 분)과 단둘이 삶을 살아간다. 그녀는 오랜 숙원이었던 ‘시 쓰기’에 도전하며 겪는 과정을 탁월한 연기력과 심리묘사로 표현해 호평을 받았다. 사진 = KBS 감성다큐 ‘미지수’ 캡처 , 서울신문NTN DB 서울신문NTN 전설 인턴 기자 legend@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서울광장] 서울대 82학번 vs 고려대 61학번/곽태헌 논설위원

    [서울광장] 서울대 82학번 vs 고려대 61학번/곽태헌 논설위원

    고려대에서는 61학번(1961년 입학)이 가장 센 학번으로 꼽힌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난 4·19 혁명과 관련이 있다. 이승만 정부는 1960년 3월15일 대통령·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유례 없는 부정선거를 했다. 전국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특히 경남 마산에서는 경찰의 발포로 8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4월11일 마산 중앙부두에서 고교생인 김주열군의 시신이 떠올랐다. 이를 본 시민 수만명이 시위에 또 나섰다. 고려대생 3000여명은 18일 안암동 본교 교문을 나서 국회의사당(현 서울시 의회)까지 시위를 했다. 유진오 총장의 설득으로 국회의사당을 빠져나온 학생들을 정치깡패들이 폭행했다. 서울에서의 첫 유혈기록이다. 이튿날 학생과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진 배경이다. 고려대는 매년 4·18을 기념한다. 4·19 혁명 당시 고교 3학년 중 4·18 때문에 고려대를 선택한 경우도 있었다. 정치인을 꿈꿨던 학생들이 고려대를 선택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그래서인지 고려대 61학번 중 국회의원 출신은 20명 정도 된다. 특정대학, 단일학번으로는 기록이라고 한다. 현 18대에는 민주당 김충조 의원이 유일하지만 14대에는 이명박 김덕규 김충조 남궁진 의원 등 10명이나 됐다. 이 역시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고향인 경북 포항에서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야간 상고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1년을 일하며 지냈다. 이 대통령이 고려대에 들어간 것은 정치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서울대는 모든 학번들이 세지만 82학번이 가장 강할 것 같다. 82학번이 센 이유는 대학 입시제도 때문이다. 전두환 정부는 갑자기 81학번 때 졸업정원제를 도입했다. 본고사는 없애고 내신은 강제로 도입하도록 했다. 대학원서는 무한정 쓸 수 있지만 면접 당일에는 한 곳만 선택하도록 했다. 서울대를 비롯해 주요 대학의 상당수 계열(학과)에서 대규모 미달 사태가 빚어진 이유다. 그래서 정부는 82학번 때에는 2개 대학만 원서를 쓸 수 있도록 제한하는 대신 대학마다 1지망(70%), 2지망(30%)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제도로 서울대가 우수학생을 거의 싹쓸이했다. 서울대 82학번 출신 현역 국회의원은 나경원 원희룡 이혜훈 조해진 의원 등 9명이다. 민주당 김민석 최고위원이 15대에 금배지를 달면서 서울대 82학번 국회진출 테이프를 끊었다. 고려대 61학번과 서울대 82학번은 나이 차이 때문에 맞대결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2002년 지방선거 당시 여당인 민주당 김민석 후보와 야당인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서울시장에서 정면대결한 게 유일한 게 아닐 듯싶다. 당시 38세의 김 후보가 당선됐더라면 물론 이 대통령은 지금 청와대에 있을 수 없다. 김 후보가 당선됐더라면 대통령 유력후보로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3명의 서울대 82학번이 6·2 지방선거에서 광역단체장에 도전했으나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한나라당 나경원 원희룡 의원은 서울시장 경선을, 민주당 김민석 최고위원은 부산시장 경선을 각각 뚫지 못했다. 서울대 82학번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화려한 데뷔를 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실망하기는 이르다. 젊기 때문에 기회가 많다. 각 분야에 포진한 막강한 동기생들도 힘이 될 수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신임총리는 40대다. 19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인 신민당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의원과 이철승 전의원이 40대 기수론을 주창, 세대교체가 이뤄지기도 했다. 차기(2012년)나 차차기(2017년) 대선에서 세대교체 분위기가 무르익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서울대 82학번을 포함한 소위 386세대(1960년대생)가 정계의 주류로 부상할 시기는 점점 다가오고 있다. 젊음과 참신함은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경박하지 않아야 한다. 또 구상유취(口尙乳臭)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신뢰와 실력을 갖춰야 한다. 젊다는 사실만으로는 세대교체를 추진할 명분도 없고 성공할 수도 없다. 콘텐츠가 없는 젊음만으로는 이룰 게 없다. tiger@seoul.co.kr
  • 티아라 소연·큐리, ‘자이언트’서 바니걸스로 변신

    티아라 소연·큐리, ‘자이언트’서 바니걸스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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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연·큐리, ‘자이언트’ 카메오..비바걸스로 변신

    소연·큐리, ‘자이언트’ 카메오..비바걸스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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