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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공동체 삶과 비리/정기홍 논설위원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는 일본 강점기인 1932년 서울 중구 회현동에 지은 유림아파트로 친다. 도요타라는 일본인 건축가가 설계해 ‘도요타 아파트’로 불렸다. 이보다 몇년 앞서 아파트 형태의 건물이 있었으나 관사로 쓰여 임대 형식의 아파트로는 유림이 처음이다. 지금과 비슷한 단지형 첫 아파트는 1962년 서울 마포 도화동에 지은 마포아파트(현 삼성아파트)다. 10개동에 564가구 규모이니 제법 단지다운 형태를 갖춘 셈이다. 이 아파트는 당시 근대화의 상징이자 생활혁명의 시금석으로 통했다. 아파트의 역사는 비화(?話)도 쏟아냈다. 1960년대에는 서민을 한 곳에 모으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마포아파트의 경우 10평 정도로 작아 ‘영세민 주거지’로 인식됐다. 1958년에 완공한 서울 중구 주교동 중앙아파트 공사 현장에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하고, 마포아파트 준공식에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참석해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마포아파트는 엘리베이터와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하려 했으나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무슨 수세식 화장실이냐’는 여론에 밀려 무산됐다. 70년대 초엔 서울 청계천에서 경기 성남으로 강제이주한 철거민들이 보상에 불만을 품고 시영버스를 탈취해 관공서로 몰려간 적도 있다. 아파트가 ‘제1 자산’이 된 지금 생각하면 금석지감을 느끼게 한다. 아파트는 편리함과 치부의 수단이었지만 만만찮은 문제점도 드러냈다. 콘크리트로 단절된 공간은 남에게 간섭당하지 않는 만큼 남을 간섭하지도 않는다. 내적 자족(自足)의 공간이라고나 할까. 박철수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는 아파트 공간을 ‘공적 냉소와 사적 열정이 지배하는 사회’로 정의한다. 배려하고 소통하는 열린 공간이 아니라 자폐적인 공간으로, 개인의 삶과 가치만을 추구하는 곳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경찰청이 엊그제 ‘아파트 비리 단속’ 결과를 내놓았다. 입주자대표회의 회장과 관리소장은 불법공사 과정에서 뒷돈(리베이트)을 받은 뒤 지인의 계좌로 돈 세탁을 했고 아파트 관리비로 도박을 하다가 덜미를 잡히기도 했다. 전체 비리 규모도 64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이번 수사 대상은 164건에 불과하다. ‘빙산의 일각’일지 모른다. 우리는 아파트 생활의 편리함에 젖어 아파트의 운영에 대해서는 사뭇 오불관언의 태도로 살아가고 있다. 아파트가 잠시 머물고 가는 임시거처가 아니라 가족의 삶이 움트는 공간이란 인식의 전환이 요구되는 때다. 비리를 감시하는 ‘매의 눈초리’도 물론 있어야겠지만 사람 냄새가 물씬한 ‘함께하는 마을’이 가슴에 더 와 닿는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구본영 칼럼] 자성은 하되 자학할 이유는 없다

    [구본영 칼럼] 자성은 하되 자학할 이유는 없다

    지난 주말 저녁 청계천. ‘한성백제 천년의 꿈’이란 테마로 서울 등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물길을 따라 그 옛날 위례성의 가을밤을 거니는 듯 시민들의 표정은 편안하다 못해 그윽해 보였다. 장사진을 친 관람객들 사이에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는 외국인들도 많았다. 문득 과거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청계천 복원을 공약하면서 벌어졌던 논란이 생각났다. 지금의 민주당인 당시 여당은 막대한 건설비를 들여 환경을 파괴하는 인공하천을 복원해서는 안 된다며 극력 반대했다. 진보적 환경원리주의자들은 한강물을 끌어들여 시멘트 어항을 만들자는 거냐며 더욱 냉소적이었다. 물론 이런 비판적 논리가 100%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 성싶다. 그런 반대 의견도 있었기에 공사를 밀어붙인 측에서도 그나마 환경보전에 더 신경을 쓰고, 그 결과 다수 시민이 즐거워하는 친수공간으로 복원됐는지도 모르겠다. 청계천 복원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벌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역사논쟁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살펴봐야 할 것이다. 진보 학계에서는 교학사의 역사 교과서가 이승만 대통령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실제로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기술되거나 부풀려진 사료는 고쳐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부터 잘못됐다고 보는 시각까지 납득하긴 어려운 일이다. 나아가 유신과 5공이 드리운 역사적 그늘을 있는 그대로 조명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현대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과연 온당한 것일까. 우리를 보는 외부의 시선을 보라. 우리가 스스로를 폄하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얼마 전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 “한국은 아시아의 등불 같은 존재”라고 했다. 특히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최근 한국이 과거 원조 수혜국에서 세계 주요 원조국의 하나로 변모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믿기 어려울 정도의 이야기”라고 칭송했다. 사실 1948년 건국 당시 우리는 세계 최빈국이었다. 6·25전쟁 이후 1960년대까지 옥수수 등 미국의 잉여농산물로 주린 배를 채우며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다. 온갖 비리와 부정, 그리고 각종 시위로 인한 혼돈이 이어지면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격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그런 한국이 이제 2차대전 후 100여개 신생국 중 유일하게 민주화와 산업화에 동시에 성공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올해 무역흑자에서 일본을 앞지르는 등 세계 15위권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 무역협회가 최근 국내외 거주 외국인 대상으로 포커스그룹 인터뷰와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라. 이 조사에서 한국은 세계인들에게 ‘급속히 발전한 국가’라는 이미지로 투영되고 있으며 한국의 경제성장은 ‘저소득 탈식민 국가들의 역할모델’로 평가됐다. 우리의 현대사는 총합적으로는 성공 스토리로 자부해도 좋을 듯싶다. 권위주의 정권에서 인권 유린의 후유증이나 압축성장의 폐해 등 누적된 이런저런 문제는 안고 있지만 말이다. 물론 진보와 보수가 과거사를 놓고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은 불가피한 통과의례인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경우이든 “대한민국이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나라”로 치부하는 ‘자학사관’은 곤란하다. 이는 피땀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군 동시대인들에 대한 모독일 뿐이다. 그런 맥락에서 안희정 충남지사가 던진 돌직구 언급이 와 닿는다. 대표적 친노 인사인 그가 진영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공칠과삼(功七過三)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역사논쟁을 벌이더라도 나만 옳다는 독선은 안 될 말이다. 어느 진영이든 역사 앞에 겸허해야 한다. 일찍이 철학자 파스칼은 “피레네 산맥 이쪽의 정의가 저쪽에선 불의가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보수든 진보든, 여든 야든 과거사를 놓고 과도하게 반목하기보다는 미래를 놓고 경쟁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kby7@seoul.co.kr
  • 도로주행 가능!…영화판 배트모빌 등장 화제

    배트맨 마니아들에게 희소식이다. 은행 잔고 약 1억 5000만원 정도만 있으면 도로 주행이 가능한 배트모빌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13일(이하 현지시간) 영국 일간 메트로 등 외신이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오는 30일 영국 서리주(州) 브루클랜즈에 있는 ‘메르세데스-벤츠 월드’ 서킷에서 열릴 경매에 팀 버튼 감독의 1989년작 영화 ‘배트맨’에 등장한 배트모빌을 모티브로 제작한 래플리카 차량이 출품된다. 낙찰 예상가 9만 파운드(약 1억 5000만원)인 이 차량은 제규어 3.2리터 6기통 엔진을 장착, 시속 96km까지 속도를 내는 데 5초가 걸리지 않는다. 즉 제로백이 5초대라는 것. 또한 이 차량에는 실제 영화에 등장한 배트모빌의 내외관을 완벽 카피한 것은 물론 후면부 화염방사장치까지 완벽하게 구동된다. 특히 놀라운 점은 이 차량을 합법적으로 도로에서 주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매 주관사 히스토릭스 옥션 하우스의 담당자 에드워드 브리저-스틸은 “이 배트모빌 래플리카는 배트맨 팬들에게 꿈과 같다”면서 “이를 찍으려다 교통이 마비되기 일쑤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1960년대 배트맨 TV 시리즈에 등장했던 원조 배트모빌은 올해 초 462만 달러(당시 약 49억원)에 낙찰된 바 있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23년간 섹스리스, 황혼 이혼사유 안돼”

    20년 넘게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혼 사유가 되지는 않는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법 가사3부(재판장 이승영)는 부인 A(68)씨가 남편 B(71)씨를 상대로 낸 이혼 소송에서 “이혼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깨고 이혼 청구를 기각했다고 11일 밝혔다. 황혼에 접어들면서 자연스레 잠자리가 끊겼다면 이 때문에 혼인이 파탄났다고 보거나 어느 한쪽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법원은 판단했다. 이들은 1960년대 후반 결혼했다. 재산을 수십억원대로 불리며 풍족한 생활을 해왔지만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부부는 20여년 전부터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 B씨는 전립선비대증을 앓았고, 칠순이 넘어서는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다. 두 사람은 2004년 B씨의 모욕적인 말에 화를 참지 못한 A씨가 집을 나오면서 별거를 시작했다. A씨는 결혼한 지 40여년이 지나 이혼소송을 냈다. 1심은 B씨의 ‘성적 유기’와 장기간의 폭언·폭행 등으로 혼인이 파탄에 이르렀다고 판단해 이혼과 함께 A씨에게 위자료를 지급하고 재산도 나눠 주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23년 섹스리스’를 이혼 사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살아가면서 점점 무덤덤해져 성관계 횟수가 줄다가 딱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성관계가 단절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고 전제한 뒤 “성관계 부재가 부당한 대우라거나 이 때문에 혼인관계가 파탄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20년 넘게 섹스리스 부부에 법원 “이혼 안돼”

    20년 넘게 섹스리스 부부에 법원 “이혼 안돼”

    20년 넘게 성관계를 하지 않고 지내온 사실만으로는 이혼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판결이 나왔다.황혼에 접어들면서 자연스레 잠자리가 끊겼다면 이 때문에 혼인이 파탄났다고 보거나 어느 한쪽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법원은 판단한 것이다.A씨와 부인 B씨는 1960년대 후반 결혼했다. 재산을 수십억대로 불리며 풍족한 생활을 해왔지만 부부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부부는 1980년쯤부터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 A씨는 설상가상으로 전립선비대증을 앓았다. 칠순이 넘어서는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다.B씨는 남편의 가부장적 태도도 불만이었다. 남편에게 맞는 바람에 뇌진탕을 입고 응급실에 실려가기도 했다.B씨는 2004년 어느 날 남편과 다투다가 모욕적인 말에 화를 참지 못했다. 결국 환갑을 눈앞에 두고 집을 나와 별거를 시작했다.B씨는 결혼한 지 40여년이 지나 이혼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A씨의 ‘성적 유기’와 장기간의 폭언·폭행 등으로 혼인이 파탄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혼과 함께 A씨가 B씨에게 위자료를 지급하고 재산도 나눠주라고 판결했다.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23년 섹스리스’를 이혼사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서울고법 가사3부(부장 이승영)는 원심을 깨고 B씨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고 11일 밝혔다.재판부는 “살아가면서 점점 무덤덤해져 성관계 횟수가 줄다가 딱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성관계가 단절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고 전제했다.재판부는 “성관계를 중단할 무렵 이미 쉰 살에 가까웠고 전립선 질환 때문에 성관계를 하기 어려웠다는 A씨의 주장은 수긍된다”면서 “성관계 부재가 부당한 대우라거나 이 때문에 혼인관계가 파탄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A씨의 폭행·폭언도 진술이 엇갈리거나 증거가 부족해 이혼사유로 인정되지 않았다.재판부는 “대화와 설득으로 갈등을 해결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강조하며 “세 자녀가 훌륭히 성장해 독립했고 A씨의 여생이 길지 않아 보이는 점 등을 고려하면 혼인생활이 B씨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고대 바다 주름잡던 ‘메가마우스 상어’ 신종 발견

    고대 바다 주름잡던 ‘메가마우스 상어’ 신종 발견

    약 2300만년 전 지구의 바닷속을 주름 잡았던 고대 메가마우스 상어(Megamouth Shark)의 신종이 확인됐다. 최근 미국 시카고에 위치한 드폴대학교 고생물학자 켄슈 시마다 박사는 메가마우스 상어의 희귀 이빨을 연구한 결과를 관련 학회에서 발표했다. 이 희귀 이빨은 지난 1960년대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처음 발견됐지만 이와 유사한 고생물이 없어 그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채 잊혀진 존재가 됐다. 그러나 시마다 박사 연구팀이 우연히 LA의 한 박물관에 전시된 이 이빨을 발견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재개된 것. 세계적인 극 희귀종인 메가마우스 상어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 1976년으로 당시 미 해군이 하와이 인근에서 발견했다. 이후 메가마우스 상어는 공식적으로 53차례 목격됐을 만큼 관련 전문가들 조차 쉽게 구경하기 힘든 종이다. 시마다 박사는 “우리가 발견한 고대 메가마우스 상어는 현대의 종과 비교해 더 길고 이빨이 뾰족하다” 면서 “고대 종은 물고기부터 플랑크톤까지 먹이의 폭이 더 넓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어떤 학자들도 이 이빨을 신중하게 관찰하지 않아 우리가 연구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고 덧붙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씨줄날줄] 얼렁뚱땅 문화재 복원/손성진 수석논설위원

    시멘트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단청했던 옛 광화문뿐만이 아니라 엉터리로 복원한 문화재는 많다. 불국사의 복원도 옛 규모에 맞지 않고 석가탑 복원도 원형에 충실하지 못했다. 석굴암은 일제강점기 때 시멘트를 발라버렸는데 1960년대에 그 위에 다시 시멘트를 발랐다. 경주에 비해 유적이 적은 부여나 공주는 복원한답시고 그나마 있던 문화재들마저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해 복원이 아니라 개발을 해놓았다. 익산 미륵사지석탑도 그런 사례다. 얼렁뚱땅 빨리빨리 해치운 탓이다. 최근 중국 랴오닝(遼寧)성 차오양(朝陽)시의 한 사찰에 있던 청나라 초기의 벽화를 마치 만화같이 복원한 일을 비웃을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 문화재 복원은 원형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신중히 해야 한다. 외국에서는 복원보다는 보존에 더 공을 들인다. 풍화되고 삭아가는 문화재를 마냥 방치할 수만도 없다. 복원에 수십 년, 수백 년이 걸리더라도 철저한 고증을 거쳐서 원형을 살리려 노력한다. 한번 잃은 원형은 다시는 되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슬람 사원이나 무기고로도 사용되는 등 훼손이 심한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은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몹시 더딘 속도로 복원 작업을 하고 있다. 떠들썩한 완공식을 가졌던 숭례문은 복원에 5년이 걸렸지만 기둥과 단청 등에서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에도 숭례문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 건축물이 있다. 화려한 금박(箔)을 자랑하던 교토의 금각사는 1950년 7월 불에 타 5년 만에 복원됐다. 그러나 급히 복원한 탓에 단청이 떨어지듯 금박이 떨어져 나가 버렸다. 1987년부터 2, 3차 복원공사에 들어가 1999년에야 거의 완벽한 옛 모습을 되찾았다. 복원이 아닌 신축이지만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성가족 성당)으로도 불리는 스페인의 가우디 성당에서 본받을 점이 많다. 규모 면에서 숭례문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가우디 성당은 무려 100년이 넘게 짓고 있다. 이제 공정률 65% 정도다. 느림의 미학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설계자의 구상대로 지어왔기 때문에 공사가 세기를 넘어선 것이다. 거장 안토니오 가우디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이 성당은 공사 시작 144년 만인 2026년에야 완공될 예정이다. 숭례문도 복원 과정의 과오를 인정하고 전면 재복원 공사에 들어가야 한다. 금각사가 완전 복원에 50년이 걸리고 가우디 성당이 144년이 걸려서야 완공 예정이듯이 애초에 충분한 공사 기간을 잡았어야 했다. 이번에는 진정한 전문가와 좋은 재료들을 골라서 완벽을 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열린세상] 기초연금법안의 출구는 없는가/표학길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열린세상] 기초연금법안의 출구는 없는가/표학길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보건복지부는 지난 9월 26일 10만~20만원(현재가치)의 기초연금을 국민연금 가입 기간에 연동해 소득 하위 70%의 60세 이상 노인에게 차등 지급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연이어 10월 2일에 20일간의 예고기간 동안 입법예고한 기초연금법안에 의하면 기초연금의 최소지급액을 ‘10만원’(현재가치기준)으로 명시하지 않고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금액’으로 표기해 논란이 일고 있다. 기초연금의 최소 지급액부터 10만원으로 명시되지 않음에 따라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에 대한 불확실성이 증폭되고 있다. 국민연금 지역가입자 중 공적소득자료 미보유자는 본인이 소득이 없다며 보험료를 내지 않겠다고 신청하면 ‘납부예외자’가 될 수 있다. 국민연금공단 자료에 의하면 ‘납부예외자’ 신청이 2010년 438만명에서 지난해에는 405만명 선으로 줄어들었으나 올해 9월 현재 414만명 선으로 다시 늘어났다고 한다. 특히 50대의 납부예외자 신청은 지난 1월의 89만 9611명에서 9월에 93만 731명으로 3만 1120명 늘었다고 한다. 결국, 기초연금액을 국민연금 가입 기간에 연동한 정부안은 50대의 국민연금 장기가입 동기를 급속도로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기초노령연금은 65세 이상 노인 가운데 소득 하위 70%에게 9만 6800원씩 지급되고 있다. 정부의 기초연금 도입계획이 그대로 이번 예산국회에서 확정된다면 현재 기초노령연금 대상자의 90%인 353만명은 20만원을 받게 된다. 전체 노인 598만명의 60%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나머지 65세 이상 노인 중 20만명은 15만~20만원을, 18만명은 10만~15만원을 받게 되어 박근혜 대통령의 선거공약인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원’이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노인 10명 중 6명’ 정도가 지급받게 되는 것이다. 가령 2014년에 만 65세가 돼 기초연금을 받는 사람은 국민연금 가입 기간이 11년 이하이면 20만원을 전부 받을 수 있지만 가입 기간이 12년 이상 되면 점차 금액이 줄어들어 20년에 이르면 10만원이 된다. 정부는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생각하여 현재 65세 이상 노인들 ‘다수’에게 20만원을 지급하고자 노력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은 2011년 기준 45.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2010년 현재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기초연금, 공적연금을 합친 공적연금 지출비율은 0.9%로 OECD 28개국 중 최하위였으며 27위인 호주(3.6%)에 비해서도 격차가 큰 상태라고 한다. 그리고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원’을 지급하기로 한 박 대통령의 대선공약이 그대로 이행되더라도 2020년 공적연금 지출 수준은 GDP 대비 2.8%가 돼 OECD 평균의 4분의1 정도밖에 안 되는 것으로 추계되고 있다. 공적연금제도는 가장 중요한 복지정책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중장기 거시경제정책이기도 하다. 미국이 1960년대 사회보장제도를 본격 도입했으나 아직도 ‘오바마 건강보험법안’으로 인해 연방정부 재정의 마비 사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우리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일본 학자들은 1990년대 초부터 일본 경제가 장기 저성장 기조에 빠진 가장 큰 이유를 일본의 공적연금제도가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급격히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국정감사가 끝나면서 여야는 기초연금법안을 둘러싼 내년도 예산심사에서 크게 대립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야가 재정건전성의 유지를 위해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은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조세 저항이 덜한 부가가치세율 인상, 대기업에 유리한 법인세율의 단일화 방안 등이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부유하거나 가난한 사람이 똑같은 비율로 세금을 내는 부가가치세율 인상은 빈부격차를 확대시키며, 법인세율의 단일화는 안 그래도 확대되고 있는 수출·내수기업과 대기업·중소기업 간의 양극화 추세를 악화시킬 수 있다. 기초연금 도입계획이 노인 빈곤율의 축소와 소득 재분배의 개선에 그 목적이 있다면 소득세와 법인세율의 인상이라는 정공법을 택하는 것이 가장 공평한 정책이라는 경제학의 원리를 우리 모두 되새길 필요가 있다.
  • ‘거대한 입’ 가진 신종 ‘메가마우스 상어’ 발견

    ‘거대한 입’ 가진 신종 ‘메가마우스 상어’ 발견

    약 2300만년 전 지구의 바닷속을 주름 잡았던 고대 메가마우스 상어(Megamouth Shark)의 신종이 확인됐다. 최근 미국 시카고에 위치한 드폴대학교 고생물학자 켄슈 시마다 박사는 메가마우스 상어의 희귀 이빨을 연구한 결과를 관련 학회에서 발표했다. 이 희귀 이빨은 지난 1960년대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처음 발견됐지만 이와 유사한 고생물이 없어 그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채 잊혀진 존재가 됐다. 그러나 시마다 박사 연구팀이 우연히 LA의 한 박물관에 전시된 이 이빨을 발견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재개된 것. 세계적인 극 희귀종인 메가마우스 상어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 1976년으로 당시 미 해군이 하와이 인근에서 발견했다. 이후 메가마우스 상어는 공식적으로 53차례 목격됐을 만큼 관련 전문가들 조차 쉽게 구경하기 힘든 종이다. 시마다 박사는 “우리가 발견한 고대 메가마우스 상어는 현대의 종과 비교해 더 길고 이빨이 뾰족하다” 면서 “고대 종은 물고기부터 플랑크톤까지 먹이의 폭이 더 넓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어떤 학자들도 이 이빨을 신중하게 관찰하지 않아 우리가 연구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고 덧붙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예술이 ‘鐵鐵’… 문래동의 변신

    이곳엔 1930년대 크고 작은 방적공장이 생겨났다. 그래서일까. 문래동 이름은 방적기계의 순우리말인 ‘물레’에서 따왔다고도 한다. 1960년대 말 청계천에서 철공소가 하나 둘 옮겨오며 골목을 바꿔놓기 시작했다. 1970~80년대엔 철강재 판매 1번지로 통했다. 기계소리와 쇳소리가 잦아든 것은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이후다. 대형 철공소들이 떠나갔다. 아파트가 주변을 둘러쌌다. 여전히 철공소가 1300개를 웃돌았지만 곳곳에 빈 공간이 생겨났다. 슬럼화가 진행됐다. 생기를 되찾은 것은 2000년대 들어 젊은 예술가들이 몰려들면서부터다. 홍대와 신촌 등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치솟는 임대료를 피해 문래동으로 들어왔다. 철공 장인들과 예술가들의 공존은 이렇게 출발했다. 영등포구가 오는 9일 문래예술창작촌에서 ‘철부지(鐵阜地)의 날’을 선포한다. 문래동이 철공소 산업과 문화 예술이 조화롭게 숨쉬는 ‘철의 땅’이라는 것을 널리 알리며 지역 경제 활성화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망치와 개미’, ‘기린:수호신’, ‘장도리 벤치’ 등 문래동 곳곳에 새로 설치된 예술조형작품 10개에 대한 제막식도 곁들인다. ‘철부지의 날’은 영등포문화원과 문화예술단체 보노보C 주관 행사로 서울시 자치구 동네관광상품 프로그램에 선정된 사업이다. 선포식에 앞서 다듬이연주, 화관무, 진도북놀이, 부채춤, 신민요 등 전통 문화 공연을 열어 분위기를 돋운다. 선포식 뒤에는 곳곳을 돌며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철부지 투어가 진행된다. 문래예술공장에서는 변사의 구슬프면서도 맛깔스러운 설명과 함께 1970년대 문래동 철공소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은 공연 ‘그 시절, 그 쇼’가 펼쳐진다. 조길형 구청장은 “철부지의 날을 철공소 장인과 예술가를 위한 화합과 소통의 행사이자 지역 대표 관광상품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말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귀는 럭~셔리… 값은 억~소리

    귀는 럭~셔리… 값은 억~소리

    6억 5000만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전세 사는 사람은 천정부지로 오르는 전세 걱정을 내려놓고 남는 돈으로 재테크를 할 수도 있다. 자녀의 입시를 걱정하는 일부 학부형은 학군 좋다는 서울 목동에 30평대, 강남의 20평대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다. 돈 많은 자동차광에겐 페라리의 이탈리아와 포르셰 911을 한 대씩 구입할 수 있는 돈이다. 그럼 6억 5000만원으로 가정용 스피커를 산다면 어떨까. 제조사 회장 스스로 “미친 가격이라는 걸 우리도 안다”고 할 만큼 고가인 스위스 골드문트사의 초하이엔드 스피커 ‘아폴로그 애니버서리 리미티드 에디션’의 한국 출시 현장을 지난 30일 가봤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 한쪽에는 25년째 오디오 한 대가 전시 중이다. 골드문트사가 1987년 전 세계에 50조를 한정 생산한 스피커 ‘아폴로그’다. 아폴로그 애니버서리 리미티드 에디션의 전작인 이 제품은 마치 미술작품처럼 미술관 안에서 다른 작품에 뒤지지 않는 조형미를 자랑한다. 이탈리아 화가이자 디자이너 클라우디 오로타 로리아가 외형을 디자인한 이 스피커는 모양만큼이나 파격적인 가격이 화제였다. 국내에 수입될 당시의 가격은 6500만원. 1980년대 후반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2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현재 중고가격도 8500만원 이상인 명기 중의 명기다.  이후 아폴로그의 출시 25주년을 기념해 나온 스피커가 아폴로그 애니버서리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말이 좋아 가정용 스피커지 높이 185㎝, 무게도 각각 500㎏에 달하는 거함이다. 모양은 전작과 거의 같지만 25년 사이 기술은 진보했다. 우선 무선 기술을 사용해 전원선 외 인터케이블 등 다른 선을 찾아볼 수가 없다. 무선이 대세인 시대에 와이어리스에 웬 호들갑이냐고 하겠지만 레퍼런스급 오디오 제품으로는 파격이다. 와이어리스 기술은 편리함을 보장하지만, 음원에 손실을 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초고가 오디오 시스템을 만들 때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일부 오디오 마니아들이 음악신호가 전선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손실을 줄이려고 미터당 수십만~수백만원 하는 고가의 케이블을 연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구형 제품이 3웨이 패시브 스피커인 반면 신작은 6채널의 액티브 방식을 채택했다. 쉽게 말해 파워앰프 등을 모두 스피커 안에 넣어 CD플레이어 같은 소스 기기 외에 다른 기기는 살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6억 5000만원짜리 스피커 소리는 어떨까. 비록 30분 동안이었지만 팝부터 클래식, 재즈, 국악까지 총 7곡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연이어 들은 관현악과 대편성에서 아폴로그는 스피커의 크기만큼이나 넓고 깊은 무대를 펼쳐냈다. 눈을 감고 들으면 마치 콘서트홀 VIP석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클래식에 문외한인 사람도 오케스트라 속 악기의 제 위치를 콕콕 집어낼 수 있을 정도로 정위감이 뛰어났다. 갑자기 울리는 공과 심벌즈는 기자들을 놀라게 했지만 거친 굉음과는 달랐다. 팀파니의 저음은 지나치게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단단하며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저음부는 오디오를 듣는 사람이나 만드는 사람에게 강한 유혹이다. 마치 화학조미료처럼 첫 경험은 강렬하다. 이른바 하이파이 오디오를 처음 접한 사람은 한없이 내려가는 콘트라베이스나 드럼이 내는 깊은 저음에 가슴이 뛰는 것을 경험하는 일이 많다. 이후엔 저음이 잘 나는 오디오를 찾기 마련인데 이 때문에 일부 입문기를 만드는 오디오 업체는 저음부를 지나치게 강조해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인공적으로 과장된 저음은 강한 조미료 맛처럼 자연스러운 음악의 균형을 깨뜨리기 마련이다.  장사익의 ‘아버지’에서는 탁한 듯하게 내지르는 소리꾼 특유의 목소리와 바이브레이션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오디오 마니아들 사이에 “어떤 오디오를 듣다 가수의 목젖을 봤다”는 말이 있는데 기자 역시 좀 과장되게 말하면 목젖이 보이는 듯 선명한 무대가 펼쳐졌다. 하지만 주최 측이 준비한 음악은 늘 최고의 음원이다. 공정성을 위해 따로 몇 장의 CD를 준비했다. 이 중 한 곡은 1960년대에 녹음된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의 ‘위 겟 리퀘스트’(We Get Requests). 두말할 나위 없는 명반이지만 녹음 기술의 한계로 최근 음원보다는 음질이 떨어지는 음반이다. 도입부의 오스카 피터슨의 피아노부터 멜로디 선을 받쳐 주며 뒤쫓아가는 레이 브라운의 베이스까지 마치 SACD(Super Audio Compact Disc)를 듣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했다. 돈의 위력인지 좋은 소리가 주는 집중력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귀를 호사스럽게 했던 30여분의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그럼 6억 5000만원짜리 스피커를 실제 살 사람이 한국에 있을까.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공급사인 오디오 갤러리 측의 설명이다. 전작인 아폴로그 50대 중 5대가 국내 소장가가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방증이다. 이 중 한 명이 오디오 마니아로 유명한 H 그룹 전 부회장인 K씨다. 수입사 측은 조심스럽게 “25대 중 5대 정도는 한국에서 팔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소리 속 쾌감을 뒤로하고 남는 건 6억 5000만원짜리 스피커가 6억 5000만원의 값어치를 하느냐는 문제였다. 기자처럼 매월 100만원씩 꼬박 38년 7개월 동안 적금을 부어야 이런 돈을 만질 수 있는 사람에게는 결론이 정해져 있다. 신포도일 뿐이라고 생각하자. 어차피 세상에서 이 소리를 개인적으로 소장할 수 있는 사람은 25명밖에 없다. 기자 역시 10여년 동안 오디오에 빠져 있지만, 개인적으로 음악 자체를 즐겼던 때는 중고등학교 시절이었고, 이를 도와준 건 작은 번들용 이어폰과 워크맨이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예술 입은 거리, 통하겠습니까

    예술 입은 거리, 통하겠습니까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의 안양예술공원. 이곳에는 허름한 백색 노출 콘크리트 건물이 자리한다. 어느 각도에서나 다른 형태로 읽히는, 독특한 모양새다. 2005년 지어진 건축물을 보기 위해 매년 수천명의 건축가와 건축학도가 몰려들었고, 지금은 연인들의 만남의 장소로 탈바꿈했다. 이 건물은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의 마지막 거장’으로 꼽히는 포르투갈의 알바루 시자 비에이라 작품이다. ‘알바루시자 홀’로 불리던 건물은 내년 개막하는 ‘제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를 앞두고 ‘안양파빌리온’으로 최근 이름을 바꿨다. 설계자인 비에이라의 의견을 존중하고, 시민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기 위해서다. 안양파빌리온의 재개관과 함께 지난 8년간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 온 APAP도 실험대에 놓였다. 2005년 1회 프로젝트 이후 2~3년 주기로 미술·건축·영화·공연 등을 통해 공공예술과 안양을 접목하려 했지만, 이렇다 할 호응을 얻지 못한 탓이다. 안양유원지를 예술공간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비롯된 행사는 평촌신도시 개발, 지역공동체 결합 등과 맞물리면서 시민과 호흡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공공예술’이 아직 국내에 낯설던 시절이었다. APAP를 주최하는 안양문화예술재단은 지난해 7월 아르코미술관장 출신인 백지숙 예술감독을 영입했다. 백 감독은 “시민들이 작품만 보고 가는 게 아니라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공간과 연계된 프로그램을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예술공원로를 따라 무질서하게 널린 수십점의 작품들을 리모델링하는 일이다. 백 감독은 “공공예술은 관리와 보존이 중요한데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면서 “일회성 행사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존 설치됐던 작품에 다시 의미를 부여하거나 창의적으로 해체·보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내년부터 APAP에선 시민들이 직접 예술을 읽고 쓰고 말하는 등 다양한 방식이 시도된다. 우선 작가에게 예술을 배우고, 자신의 언어로 해석해 보는 ‘공원도서관’이 조성됐다. 또 과거 APAP 관련 자료가 정리된 ‘프로젝트 아카이브’가 꾸려졌다. 시민들이 1박2일간 꼬박 밤을 새워 가며 해외 유명 작가들과 예술작품을 만드는 워크숍도 마련된다. 하지만 지자체에 의존한 공공예술이다 보니 한계도 뚜렷하다. APAP는 시장이 바뀌면서 전임 시장의 홍보물로 치부돼 한때 존폐의 기로에 놓이기도 했다. 심혜화 안양문화예술재단 팀장은 “인구 60만명의 안양에 시립미술관조차 없기에 신·구 도심을 이어 주는 매개체로서 APAP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APAP의 성패가 국내 공공예술의 향후 진로에 미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 APAP의 벤치마킹 모델은 탄광촌이었던 영국 뉴캐슬의 ‘게이츠헤드’나 군수 공장이 있던 독일 뮌스터의 ‘카셀’이다. 공공예술을 통해 삭막한 도시를 예술의 도시로 변화시킨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뮌스터의 경우 1977년부터 10년에 한 차례 개최되는 조각예술프로젝트를 통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소도시를 풍성한 역사와 생태의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공공예술은 국내에서도 활발하게 실험되고 있다. 2010년 시작된 울산 남구 야음장생포동의 ‘신화마을’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이곳은 1960년대 석유화학공단에 밀려 고향을 떠난 주민들의 집단 이주지였다. 하지만 예술가들이 나서 담과 건물에 고래와 바다를 주제로 한 벽화를 그리고, 조형물을 설치하면서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탈바꿈했다. 지금도 하루 100여명의 관광객이 들를 정도다. 신화마을은 이웃 울산 중구(우리동네 미술관 프로젝트)나 동구(벽화마을)는 물론 강원 정선·태백 폐광지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도시 단위에선 서울시가 올해 닻을 올린 ‘도시 게릴라 프로젝트’가 주목받고 있다. 건물주의 요청을 받아 행해지던 기존 미술 프로젝트와 달리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소재와 주제를 찾아내 남모르게 작업한다는 특징을 지녔다. 60여명의 예술가들은 지난달 13일부터 서울 북촌과 한강시민공원, 강변북로 등 5곳을 돌며 주택가 돌담이나 도로 방음벽에 큰 고래와 물고기 떼 등의 그림을 그리거나 ‘서울전망대’란 이름의 미술품을 설치하고 있다. 앞서 재개발로 텅 빈 철공소 등에 형성된 서울 영등포구 ‘문래창작촌’에선 2000년대 후반부터 매년 ‘문래예술공장 프로젝트’가 벌어지고 있다. 200여명의 입주 예술가들이 시민들과 함께 회화, 설치, 조각, 디자인, 영상,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죽은 거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부고] 美 ‘언더그라운드 록의 전설’ 루 리드

    [부고] 美 ‘언더그라운드 록의 전설’ 루 리드

    미국 언더그라운드 록 음악의 전설로 불리는 루 리드가 27일(현지시간) 별세했다고 대중문화 전문지 ‘롤링스톤’이 보도했다. 71세. 뉴욕 태생의 리드는 1964년 뉴욕에서 결성된 록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에서 기타리스트, 작곡가 겸 가수로 활동했다. 1970년 밴드를 떠난 뒤에도 솔로 아티스트로 성공적인 길을 걸었다. 그는 당시 생소했던 아방가르드 록과 팝아트를 주류 음악계에 소개했고, 세계적인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과 ‘예술적 동지’로 불렸다.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상업적으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많은 평론가들이 1960년대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그룹 가운데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1996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올랐다. 오랜 기간 폭음과 마약 사용으로 건강이 나빠진 리드는 올해 초 간 이식수술을 받았고, 지난 4월 예정됐던 콘서트도 모두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김규환 선임기자의 차이나 로드] “물까지 약탈” 시위 진압…발포…신장·티베트·네이멍구 지역 준계엄

    [김규환 선임기자의 차이나 로드] “물까지 약탈” 시위 진압…발포…신장·티베트·네이멍구 지역 준계엄

    신장(新疆)위구르·시짱(西藏·티베트)·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등 중국 3대 민족 갈등 지역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중국의 강압 통치와 차별 대우에 반발하는 이들이 공안 당국, 한족과 유혈 충돌함으로써 이들 3개 소수민족 자치 지역은 ‘준(準)계엄’ 상태에 들어갔다. 지난 19일 시짱자치구 나취(那曲)지구 비루(比如)현 샤취(夏曲)진에서 티베트족 100여명은 진(鎭)정부 앞에 모여 전날 체포된 주민 단쩡랑줘(丹增讓卓·34)를 즉각 석방하라고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정부 당국은 순박한 티베트족을 반란자의 죄명을 씌워 잡아들이고 있다”면서 “당국은 사법 집행을 공정히 하라”며 한족과의 차별 대우 철폐를 촉구했다. 현지 공안 당국은 이들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며 티베트족 6명을 체포했다고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이 21일 보도했다. 8일에는 비루현 썬탕(森塘)촌에서 국경절(10월 1일)을 맞아 중국 오성홍기를 게양하는 것에 반대한 티베트족을 체포했다. 이에 주민들이 당국에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공안의 발포로 3명이 숨졌다. 현지 주민 쌍주(桑珠)는 “중국 당국은 200명 이상의 준군사 조직과 경찰차를 마을에 배치하고 주요 도로에 검문소를 설치했다”면서 “공안들은 신분증을 소지하지 않은 이들을 모두 붙잡아 데려갔다”고 밝혔다고 RFA가 전했다. 이들 지역에 긴급 상황이 발생하자 궈성쿤(郭聲琨) 공안부장은 14~16일 시짱자치구를 급거 방문해 “무장경찰과 민병조직 등 모든 치안 역량을 동원해 순찰을 강화하고 위법 행위를 단속하라”고 지시했다. ‘국가반테러공작영도소조’의 수장인 그의 이 같은 발언은 소수민족의 분리·독립 활동에 강력한 경고를 보낸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공안 당국이 지난달 말 이후 위구르족 7명을 테러 혐의로 사살해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6월 26일 투루판(吐番)지구 산산(?善)현 루커친(克沁)진에서 위구르족 30여명이 파출소와 지방청사 등을 습격해 한족과 위구르족 47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사건이 발생한 데 따른 것이다. 신장 지역에서는 최근 4개월간 위구르족과 공안, 한족 간의 유혈 충돌로 1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2009년 7월 5일 우루무치(烏木齊)에서 위구르족과 한족 간의 충돌로 197명이 사망한 ‘7·5사건’ 이후 최악의 참사로 기록됐다. 네이멍구자치구에서는 테러 움직임이 포착됐다. 네이멍구 당국은 지난달 30일 퉁랴오(通遼)시에서 ‘2013 안정 임무’라는 암호명으로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반테러 훈련을 실시했다. 공안과 무장경찰, 소방 등 15개 기관에서 1700여명이 참가한 이번 훈련은 불법적인 시위 진압에 초점이 맞춰져 현지 주민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도 이뤄졌다. 앞서 공안국은 “최근 네이멍구 지역에서 실시한 일제 단속에서 폭발물 50t, 12만개의 기폭장치 그리고 총 2000정과 칼 3만 2000개가 압수됐다”고 주장했다. 이들 투쟁에는 한족이 부(富)와 권력을 독점하는 데 대한 불만과 차별 대우에 대한 반감 등이 주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돼 있다. 전체 인구 12억 7318만여명 가운데 한족이 11억 5939만여명(약 91%)이고 55개 소수민족은 1억 1379만여명에 불과하다(2010년 11월 1일 제6차 인구조사). 이들 소수민족 가운데 위구르족(약 839만명)과 몽골족(581만명), 티베트족(542만명)이 한족 통치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저마다 다른 투쟁 이유도 있다. 시짱자치구는 1950년 10월 중국 인민해방군이 침공해 점령했다. 1951년 5월 중국은 ‘티베트의 평화적인 해방’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티베트와 17조 협의를 체결해 강제 합병했다. 1959년 고문과 학살로 강압 통치를 하는 중국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주도한 이후 인도로 망명한 달라이 라마를 정신적 지도자로 받들고 있다. 1960년대 문화혁명 때는 사찰 3700개 가운데 13개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파괴됐다. 신장 지역 위구르족은 중국 정부에 뿌리 깊은 증오심을 갖고 있다. 위구르는 1759년 청나라 건륭제 때 중국에 강제 합병된 이후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키다 진압당했다. 한족들이 신장 지역으로 물밀듯이 이주해 오면서 위구르족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이 때문에 자치구 내 위구르족 비율이 40.1%로 곤두박질쳤다. 이슬람교를 믿는 위구르족이 끊임없이 분리·독립 운동을 시도하면서 중국 당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네이멍구자치구에서는 한족에게 생활 기반을 빼앗기고 있다는 불만이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다. 중국 정부가 에너지 자원 확보를 위해 이 지역의 석탄을 ‘싹쓸이’하고, 사막화로 물이 부족한 상황인데도 수자원을 독점 이용하고 있는 데 대해 몽골족이 반발하는 것이다. 신장 및 시짱 지역의 투쟁 방식은 네이멍구 지역과는 달리 조직적이고 계획적이다. 중국 내는 물론 해외에 지부 또는 망명정부를 구성해 중국 정부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다. 위구르족은 ‘세계위구르대표대회’(독일 뮌헨)와 산하조직 ‘세계위구르청년대표대회’, ‘동투르키스탄 이슬람운동’(파키스탄), ‘동투르키스탄 망명정부’(터키) 등의 조직을 거느리고 있다. 티베트족은 ‘티베트 망명정부’(인도 다람살라)와 산하 조직으로 ‘티베트 청년대회’ 등을 두고 있다. 중국 정부는 유화 공세도 펴고 있다. 위정성(兪正聲)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이 티베트를 방문해 티베트 사회 안정 방안을 협의했다. 위 주석은 지난 8월 1일부터 5일까지 티베트 라싸 등 각 지역의 전통 불교 사원과 학교, 기업, 농촌 등을 방문해 각계 대표들로부터 티베트 발전 방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한편 사회 안정에 협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고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khkim@seoul.co.kr
  • [씨줄날줄] 인구이동과 종속변수/정기홍 논설위원

    1848년 미국 캘리포니아 중부 새크라멘토에서 금맥이 처음 발견되자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너도나도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골드러시다. 이어 서부개척시대가 열리고, 캘리포니아는 이내 10만 인구의 대도시로 바뀌었다. 서부이주가 절정을 이룬 1849년 금광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간 사람들은 ‘포티 나이너’(Forty-Niner)라 불릴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하지만 백인 이주민들에 의해 쫓겨나야 했던 원주민인 체로키족 인디언은 1300km에 이르는 ‘눈물의 여로’(The Trail of Tears)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몽골인들은 드넓은 초원에 ‘게르’(Ger)라는 이동식 천막집을 짓고 평생 유목생활을 한다. 이 공간에는 집단생활을 위한 소박한 세간들이 갖춰져 있다. 인구 300만명에 불과한 이들은 한반도의 7배(남한의 16배)나 되는 넓은 땅에서 메뚜기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 두 사례는 인구이동의 요인과 양태들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인구의 이동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다. 서부개척시대는 짐칸이 있는 ‘왜건’이라는 4륜차를 탄생시켰고, 군대의 텐트 천으로 만든 광부의 ‘진’바지도 그 때 유래됐다. ‘아파치 헬기’도 백인 이주민들과 싸운 인디언 부족 아파치족의 이름에서 나왔다. 몽골제국의 영웅 칭기즈칸이 이동식 천막집과 말의 속도전으로 세계를 지배했다는 것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상징적인 대규모 인구이동은 이외에도 많다. 4∼5세기 게르만족을 비롯해 7∼8세기 노르만인의 이동, 17세기 초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 이동 등이 그것이다. 우리에게도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남부의 농촌에서 관북(關北) 공업지대로 대규모 인구이동이 있었다. 1960년대 이후의 산업화와 도시화는 인구를 도시로 집중시켰다. ‘이촌향도’(離村向都)다. 우리나라의 월별 인구이동이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장기적인 집값 폭락으로 인한 주택거래 급감이 큰 변수로 작용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6월 국내 이동자수는 54만 2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14%(8만8000명) 줄었다. 눈에 띄는 대목은 충청권의 인구 증가다. 세종시 덕분에 호남권을 처음으로 앞질렀다고 한다. 2017년 대선 즈음이면 영호남 패권주의를 허물고 ‘영·충·호 체제’를 갖출 것이라는 성급한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인구의 이동 요인에는 경제, 문화 등의 종속변수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향후 인구이동은 어떻게 변할까. 결혼인구 감소와 고령화 등으로 인한 1인가구의 증가로 인구이동이 주춤할 것이란 주장도 제기된다. 미래 주택정책에 감안해야 요소들이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새 영화] 노라노

    [새 영화] 노라노

    “남들이 입으니까 나도 입는다면 그야말로 민족 반역자” 1967년 가수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난 뒤 전국이 미니스커트 열풍에 휩싸이자 한 신문이 내보낸 기사의 제목이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에게는 ‘25일 구류 처분’이 떨어졌고, 언론은 “미니에 속지 말자” “각선미에 자신 없는 여성은 긴 치마를 입을 것” 같은 제목의 기사를 쏟아냈다. 그만큼 미니스커트는 남성 중심의 경직된 사회에 충격을 던진 하나의 사건이었다. 윤복희의 미니스커트 뒤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 디자이너로 꼽히는 노라노(85)가 있었다. 다큐멘터리 ‘노라노’는 “1947년 내 나이 스무살,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노라노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지난해 열린 60주년 기념전 ‘라 비앙 로즈(La Vien Rose·장밋빛 인생)’를 중심으로 노라노의 삶을 돌아본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처음으로 노라노의 옷을 입었던 ‘신여성’들과 다음 세대의 패션업계 종사자들은 노라노를 “패션이라는 단어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패션의 역사를 개척한 주인공이라고 회고한다. 배우 엄앵란이 “대중문화의 기수”라고 치켜세우는 노라노는 최초의 기성복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여성들이 소비 문화의 주체로 등장하던 1960년대에 노라노는 “많은 사람들이 평등하게 옷을 입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여자를 멋있고 당당하게” 만든 디자이너였다. ‘두개의 문’과 ‘종로의 기적’을 제작한 여성주의 미디어공동체 연분홍치마가 무엇보다 주목하는 것은 주체적인 여성으로 독립했던 노라노의 삶이다. 노라노는 전쟁으로 일제에 끌려갈 처지가 되자 임시방편으로 육사 출신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지만 불합리한 시집살이를 참지 못하고 열 아홉살에 스스로 집을 뛰쳐 나온다. 노라노는 “시댁에서 잘 대해줬다면 디자이너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라면서 “인생의 갈림길에서 내 갈 길을 가자고 결심했다”고 돌아본다. 희곡 ‘인형의 집’에 등장하는 주인공 노라의 이름을 따 ‘노명자’에서 노라노가 된 그는 “지금도 낯선 길에서 선택할 용기를 잃지 않고 싶다”고 담담히 덧붙인다. 3년을 따라다닌 끝에 촬영을 시작했다는 김성희 감독은 ‘인간 노라노’의 미시사를 통해 억압되고 배제됐던 여성의 욕구와 욕망이 정당하게 인정받는 과정을 보여준다. 93분. 31일 개봉. 전체 관람가.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지금까지 2056번 핵폭발 있었다”…‘핵폭발세계지도’ 소개

    “지금까지 2056번 핵폭발 있었다”…‘핵폭발세계지도’ 소개

    50여 년간 지구 상에 있었던 핵폭발을 나타낸 지도가 인터넷상에서 재조명을 받고 있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24일(현지시간) 일본의 예술가 이사오 하시모토가 과거 제작한 ‘1945-1998’이란 제목의 핵폭발 지도를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중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한 미국이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핵폭탄을 투하한 이후 세계에서는 지금까지 총 2056번이라는 믿기 어려운 수치의 핵실험이 진행됐다. 실제 영상을 보면 처음에 아메리카 대륙을 나타낸 지도가 나타나는 데 미국의 한 지역까지 줌인이 된 뒤 한 차례 섬광이 일어난다. 이는 1945년 7월 미국 뉴멕시코주 앨러모고도에서 시행된 최초의 핵실험인 트리니티 실험으로, 약 20킬로톤의 성능을 지녔다고 한다. 이어 지도는 다시 확대돼 일본 열도를 비추는 데 두 차례 섬광이 일어난다. 이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리틀 보이’와 3일 뒤 나가사키에 떨어진 ‘팻맨’을 나타낸 것이다. 각각 13킬로톤과 22킬로톤의 성능을 지닌 이들 폭탄으로 20여만 명이 사망했고 두 도시는 폐허가 됐다. 이후 지도는 줌아웃되고 세계 곳곳에서 섬광이 일어나 무려 50여년간 끊임없이 수행된 핵실험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영상 우측 하단에는 핵폭탄 투하를 포함한 총 핵실험 횟수를 수치로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섬광은 1960년대 초반부터 영상이 끝나는 1998년까지 점차 증가한다. 이때 미국은 1032번, 영국은 45번의 핵실험을 진행했다. 2003년 이 같은 영상 기획물을 발표한 하시모토는 최근 유명 잡지 ‘와이어드 UK’를 통해 “핵무기의 공포와 어리석음을 보여주기 위해 제작했다”고 말했다. 1959년생인 그는 17년간 금융계에서 외환딜러로 일했으며 이후 도쿄 무사시노미술대학에서 예술문화학을 전공, 현재는 일본 하코네 라리크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근무하고 있다. 한편 이 지도는 지난 2003년 제작됐기 때문에 북한이 2006년 10월, 2009년 5월, 올해 2월 시행한 것으로 보고된 핵실험은 포함하지 않아 총 2053번의 섬광만 나타나 있다. 사진=유튜브 캡처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美 40여년전 성추행 70대 ‘43년형’

    미국 법원이 40여년 전 여중생들을 성추행했던 교사에 대해 사실상 종신형을 선고했다.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카운티 법원은 지난 18일(현지시간) 40여년 전 자신이 가르치던 여중생 5명을 성추행한 전직 교사 크리스토퍼 클로먼(74)에게 징역 43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클로먼이 고령의 나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종신형에 해당한다. 클로먼은 1960년대 후반 당시 명문 중학교 ‘포토맥 스쿨’의 1학년 학생이던 앤 설리번(현재 50대 중반)을 자신의 집 수영장으로 부른 뒤 물속에서 부적절한 신체적 접촉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또 그의 집 지하실에서 로라 질(당시 14세)이라는 학생을 성추행하기도 했다. 설리번은 어린 나이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40여년간 그 일을 마음 속 깊이 묻고 살았다. 그런데 2011년 중학생 아들의 학교인 ‘워싱턴 성공회 학교’를 방문했다가 복도에서 이 학교 대체교사로 재직 중인 클로먼과 우연히 마주쳤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설리번은 고민 끝에 학교에 자신이 40여년 전 당한 사건을 제보했고 경찰 수사가 시작됐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美법원, 40년전 여중생 성추행 교사에 사실상 종신형

    미국 법원이 40여년 전 여중생들을 성추행했던 교사에 대해 사실상 종신형을 선고했다.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카운티 법원은 지난 18일(현지시간) 40여년 전 자신이 가르치던 여중생 5명을 성추행한 전직 교사 크리스토퍼 클로먼(74)에게 징역 43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클로먼이 고령의 나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종신형에 해당한다.  클로먼은 1960년대 후반 당시 명문 중학교 ‘포토맥 스쿨’의 1학년 학생이던 앤 설리번(현재 50대 중반)을 자신의 집 수영장으로 부른 뒤 물속에서 부적절한 신체적 접촉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또 그의 집 지하실에서 로라 질(당시 14세)이라는 학생을 성추행하기도 했다.  설리번은 어린 나이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40여년간 그 일을 마음 속 깊이 묻고 살았다. 그런데 2011년 중학생 아들의 학교인 ‘워싱턴 성공회 학교’를 방문했다가 복도에서 이 학교 대체교사로 재직 중인 클로먼과 우연히 마주쳤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설리번은 고민 끝에 학교에 자신이 40여년 전 당한 사건을 제보했고 경찰 수사가 시작됐다.  설리번은 “아들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들이 정확히 내가 성추행을 당했던 바로 그 나이”라면서 자신이 용기를 낸 이유를 워싱턴포스트에 말했다. 질은 “40여년 전 그 일로 여성으로부터의 자존감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클로먼은 선고 전 법정에서 자신의 혐의를 시인했다. 그는 “내가 저지른 일이기 때문에 벌을 달게 받겠다”면서 “(피해자들이) 이제 그만 상처를 치유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한강(중)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한강(중)

    ■한강 잔혹사 무동·백마도 10여개 섬, 택지 조성 위해 훼손 ‘양화진의 절경’ 선유봉, 깎이고 깎여 ‘섬’ 신세로 한강에는 10여개의 크고 작은 섬(하중도)들이 명멸(明滅)했다. 한강 2000년사 속에서 실재했던 뭇 섬들은 불과 50년 전에 뭍으로 변하거나 사라졌다. 큰 섬을 꼽으라면 팔당 하류부터 당정섬(미사리 섬), 석도(무학도), 잠실도(잠실섬), 뚝섬, 저자도, 율도(밤섬), 여의도, 난지도를 들 수 있다. 부리도, 무동도, 반포도(서래섬), 노들섬(중지도), 백마도도 당당했다. 이 중 석도, 무동도, 부리도, 저자도, 백마도는 한강변을 메워 택지를 조성하는 모래로 쓰이면서 파괴됐다. 밤섬과 당정섬도 같은 운명이었지만 20여년 만에 되살아나고 있다. 잠실도와 뚝섬, 서래섬, 여의도, 난지도는 이름만 섬(도)일 뿐 육지가 됐다. 밤섬과 함께 ‘강의 기적’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당정섬은 경기 하남시 산곡천과 한강이 만나는 팔당대교 하류 미사리 조정경기장 옆에 있다. 석도는 고덕천과, 잠실도와 부리도는 성내천과 탄천이 한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각각 형성됐다. 잠실도와 부리도는 별개의 섬이었지만 합쳐져 육지가 되었다. 무동도는 탄천이 흘러나오는 지금의 청담동쯤에 있었다. 반포 서래섬은 이름이나마 남았지만 무동도는 무자비한 채취에 흔적도 없다. 저자도는 청계천과 중랑천, 여의도와 밤섬은 만초천(욱천)과 봉원천, 난지도는 한강 이남의 안양천과 한강 이북의 홍제천과 불광천이 맞닿는 곳에 있었다. 노들섬은 1917년 한강인도교(한강대교) 건설 당시 이름이 없던 모래 언덕에 둑을 쌓으면서 만들어졌다. 노들이란 ‘백로(鷺)가 노닐던 징검돌(梁)’이라는 뜻이며 강 건너편 노들나루(노량진)의 이름을 딴 것이다. 오페라하우스를 건립키로 했으나 한강대교를 오가는 차량이 내는 소음과 예산문제로 백지화되고 나서 텃밭으로 쓰이고 있다. 난지도는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보다 33배나 더 큰 거대한 쓰레기 산이 됐다. 난초와 지초 향기가 진동하던 섬이 쓰레기 침출수의 악취를 풍기는 인공산이 된 셈이니 비극이 따로 없다. 백마도는 김포대교 아래 모래섬이었지만 신곡수중보 공사로 가라앉았다. ‘한강 잔혹사’는 섬을 없애기도 했지만 새로운 섬을 생성시키기도 했다. 선유도와 세빛둥둥섬이 새롭게 태어난 인공 섬이다. 선유도는 본래 높이 40m의 선유봉이었다. 지금의 합정동 절두산(잠두봉)과 마주 보고 서 있었으며 18세기 겸재 정선의 실경산수화 ‘선유봉’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양화진의 절경이었다. 한강제방 축조와 여의도 윤중제 조성용 골재로 조금씩 깎여 나가기 시작해 결국 섬 신세가 됐다. 1390억 원을 들여 반포한강공원에 지어진 3채의 세빛둥둥섬은 세계최대의 인공 섬이다. 강물에 휩싸여 떠내려가지 않도록 쇠사슬로 고정한 유리성(琉璃城)이다. 인간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없앤 자연섬에게 바치는 레퀴엠(진혼곡)인지도 모른다. 자연을 훼손한 대가가 얼마나 비싼지 생각게 한다. ■뚝섬 과거사 경상·충청·강원도 연결하는 도성 동남쪽 관문 다리 건너고 배로 한강 넘어야 닿아 섬으로 인식 한강 제방이 생기기 전 한강 강폭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었다. 제2차 한강종합개발이 완료된 1987년 이후 한강의 강폭은 최대 900m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강제방이 없었던 1960년대 이전의 한강은 서울~원산 간 경원선(지금의 중앙선 구간) 철길이 경계선을 이뤘다. 홍수 때면 여의도, 이촌, 신사, 잠원, 반포, 압구정, 뚝섬, 잠실 등 한강 양안이 물바다가 되기 일쑤였다. 홍수기 한강의 넓이는 평균 1800~2000m였고, 잠실섬을 중심으로 현재의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석촌호수 남단까지를 측정했을 때 최대 3500m에 이르렀다. 갈수기에는 한강대교를 기준으로 노량진과 흑석동 쪽에 붙어 흐르는 50~100m의 가느다란 물줄기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백사장이었다. 옛사람들은 왜 뚝섬을 섬으로 여겼을까. 긴 다리를 건너고 배를 타야 닿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뚝섬은 한양인 듯하지만 한양이 아니었다. 도성 밖 성저십리(城底十里)의 경계지점이자 도성의 동남쪽 관문이었다. 1751년에 제작된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之圖)를 보면 뚝섬을 섬으로 그리지 않았다. 다만 살곶이다리를 건너 뚝섬, 광나루, 송파나루로 향하는 지점에다 ‘뚝섬’이라는 지명을 적어 놓았다. 중랑천을 건너서 다시 배를 타고 한강을 넘어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로 연결되는 뚝섬을 섬으로 여긴 까닭이다. 당시 강원도 가는 길은 경기도 광주를 거쳐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충청도와 경상도를 가려면 남한강 줄기를 따라 내려갔다. 3도의 물산이 모이는 광나루와 송파나루가 흥청대기 마련이다. ‘광주 가는 나루’라고 해서 광나루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양도성을 나서면 광희문~왕십리를 거쳐 개천(청계천)과 중랑천이 한강본류와 만나는 살곶이다리(箭串橋)를 건너야 뚝섬에 닿았다. 함흥에서 도읍으로 돌아오던 태조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태종에게 화살을 날렸던 바로 그 장소이며 조선에서 가장 긴 돌다리였다. 중랑천을 따라 도봉천과 만나는 지점까지 이어지는 동부간선도로를 생각해 보면 옛사람들이 뚝섬을 섬으로 여길 만했다. 뚝섬(纛島)이라는 지명은 태조 때 왕을 상징하는 깃발인 독기(纛旗)가 떠내려온 장소라고 하여 생겼다. 처음에는 독도라고 부르다가 이후 둑섬, 둑도, 뚝도를 거쳐 뚝섬으로 굳어졌다. 장안평이나 전관평(살곶이벌)처럼 넓은 벌을 형성하는 비옥한 땅이어서 한성부의 배후 농업지대 역할을 했다. 마장동(馬場洞)이나 면목동(面牧洞)이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을 키우고 사냥을 하던 드넓은 목장이었다. 이곳에 경마장과 골프장이 생겼다가 없어지고 현재의 서울숲이 조성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뽕밭 변천사 홍수방지 제방쌓기서 택지·도로 조성으로 변질 잠실섬·부리도 육지화… 금싸라기 땅으로 개발 한강의 섬은 어떻게 없어졌으며 강변 백사장은 어디로 다 사라졌을까. 물난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방을 쌓는 것이 1960년대 제1차 한강 개발의 주목적이었지만 차츰 택지조성과 제방 둑에 도로를 개설하는 사업으로 목적이 변질됐다. 이름하여 공유수면 매립공사로 불린 한강 제방쌓기가 이권사업으로 등장한 탓이다. 1960~1970년대 동부이촌동, 흑석동, 서빙고, 반포, 압구정동, 구의, 잠실 등이 주 대상지역이었다. 국유하천인 한강을 막아 제방을 쌓고 택지를 조성했다. 모래와 골재는 한강에 지천으로 널린 모래섬과 강변 암벽을 폭파해 메웠다. 그 결과 섬은 사라졌고, 한강제방에는 강변도로와 올림픽대로가 생겼고, 한강변은 아파트 단지가 됐다. ‘땅 짚고 헤엄치기 식’ 공유수면 매립공사를 수주한 건설업체들은 재벌이 됐다. 잠실섬은 본래 광진구 자양동에 붙어 있던 땅덩어리가 ‘아득한 옛날’ 홍수 때 허리가 잘려나가 섬이 됐다고 한다. 이때 새로 흐르게 된 북쪽 물길이 신천(新川)이다. 또 잠실섬 서쪽에 부리도가 있었는데 갈수기에는 하나의 섬이었다가 강물이 불면 딴 섬이 되었다. 행정적으로 잠실섬은 고양군 뚝섬면, 부리도는 광주군 중대면으로 갈렸다. 잠실에는 16세기 무렵까지 뽕나무가 무성했지만 잦은 홍수로 피폐해졌다. 지금의 서초구 잠원동이 잠실의 역할을 대신했다. 1960년대 말까지 서울의 끝은 뚝섬과 광나루였다. 잠실섬의 존재를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1969년 경기도 광주에 조성한 300만평 규모의 광주대단지(성남)에 집단이주한 주민 10만명의 교통불편 민원과 서울에서 소외됐다는 불만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강북의 기존 시가지와 광주대단지를 연결하는 방안이 검토됐다. 잠실 공유수면 매립과 잠실섬의 육지화, 잠실대교의 개설이 최대 현안으로 부각됐다. 1971년 4월 한강 남쪽 본류인 삼개나루(삼전도) 쪽 흐름을 차단하는 물막이공사가 완료됐다. 잠실섬이 뭍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북쪽 지류인 신천 쪽을 막지 않고 남쪽 본류인 삼전도 쪽을 막은 것은 택지를 더 많이 조성하기 위해서다. 서울에서 유일한 호수인 석촌호수는 이때 막은 강물이다. 롯데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대비한다는 명목 아래 이 땅에 동서 390m, 남북 265m, 바닥면적 합계 56만㎡의 엄청난 건물을 지었다. 이렇게 탄생한 잠실 롯데월드는 여의도 63빌딩이나 삼성동 코엑스보다 4배 가까이 큰 덩치를 자랑한다. 석촌호수를 가로지르는 송파대로 좌우 동호(東湖)와 서호(西湖) 중 서호를 20년 장기 대여해 실외테마파크를 운영하고 있다. 동호 남쪽에 이곳이 옛 송파나루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고, 서호 옆에는 1639년 병자호란 때 세운 삼전도비(大淸皇帝恭德碑)가 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뽕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 것을 이른다면 잠실의 변화는 ‘상전금지’(桑田地)란 신조어를 낳을만하다. 뽕밭이 금싸라기 땅(地)이 되었으니 말이다. 1972년 7월 잠실대교와 송파대로가 준공돼 서울과 성남시가 이어졌다. 1978년 잠실매립이 마무리되자 75만 평이 생겼다. 여기에 국유지와 시유지를 주축으로 대대적인 토지구획정리사업을 벌이자 무려 340만 평에 이르는 신생 도시 한 개가 생겼다. 이른바 잠실지구이며 올림픽유치의 꿈을 이룰 잠실 메인스타디움이 깃들 기회의 땅이었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매립 당시 토사가 부족하자 개발업체 측이 ‘몽촌토성 언덕을 헐어 사용하면 어떻겠느냐’라는 제안을 했으나 서울시가 수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성백제의 역사를 한순간에 허물어 버릴 수도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j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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