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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원폭에 日 항복했지만… 광복 직전 ‘독립작전’은 이미 시작됐다

    美원폭에 日 항복했지만… 광복 직전 ‘독립작전’은 이미 시작됐다

    “일본은 오늘 정오를 기해 미국에 항복한다.”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1901~1989)가 떨리는 목소리로 종전을 선언했다. 광복을 기뻐하는 국민의 만세 소리가 거리에 가득했다. 그러나 이날 저녁 중국군으로부터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전해 들은 김구(1876~1949)는 크게 낙담했다. 그는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일본의 항복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일본 항복 받아낸 미국의 ‘리틀보이’ 이날 히로히토가 발표한 종전 방송은 “짐은 제국정부(일본)로 하여금 미·영·소·중 4국에 대해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하게 했다”로 시작한다. 히로히토가 말한 ‘공동선언’이란 1945년 7월 26일 발표한 독일 포츠담 선언을 가리킨다. 연합군이 일본에 항복을 권고한 이 선언에는 전후 일본 처리 문제 등이 담겼다.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이미 연합군에 항복했다. 포츠담 선언 당시 일본은 혼자서 연합군과 싸우고 있었다. 사실상 승패는 정해져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을 뿐이다. 결국 미국은 일본 도심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코드명 ‘리틀보이’가, 9일 나가사키에 ‘팻맨’이 투하됐다. 10일 일본은 스위스에 있던 국제연맹(유엔의 전신) 본부에 포츠담 선언 수락 의사를 전달했다. 일본이 항복한 직접적 이유는 원자폭탄이라고 할 수 있다. 히로히토가 발표한 종전 방송에도 “적국은 잔학한 원자폭탄을 사용해 수많은 국민들을 살상하고 있다. 그 참상의 범위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그는 “더이상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하고 인류의 문명까지 파멸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원자폭탄의 위력을 짐작할 만한 구절이다. 민중운동가 함석헌(1901~1989)은 원자폭탄 투하 뒤 찾아온 광복에 대해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고 했다. 그만큼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뉴라이트’ 계열의 일부 학자는 “우리의 광복은 미국의 원자탄 두 발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는 미국의 폭탄이 없었다면 나라를 되찾지 못했을까. ●독립단체 “광복 위한 결정적 시기 온다” 확신 1930년대 후반부터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은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이 독립하는 ‘결정적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느꼈다. 1941년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며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이 생각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상대로 국외 무장운동 세력과 연합군이 한반도에 진격하고 동시에 국내에서도 폭동과 무장봉기에 나서면 충분히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1908~ 1932)의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 뒤 중국 각지를 떠돌다가 1940년 충칭에 터를 잡았다. 김구는 이때부터 한국광복군을 훈련시키며 국내에 진입할 준비를 했다. 광복군은 지청천(1888~1957)을 총사령관으로 1940년 9월 결성된 임정 최초의 정규군이다. 초기에는 장교 30여명으로 이뤄진 ‘사병 없는 부대’였다. 1942년 김원봉(1898~1958)이 조선의용대 300여명을 이끌고 합류한 것이 큰 힘이 됐다. 광복군은 1945년 4월쯤 340여명, 같은 해 8월 700여명 정도였다. 아무리 많아도 1000명을 넘지는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견해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군은 군속을 포함해 최대 750만명으로 추산된다. 임정이 일대일로 맞붙어 이길 상대가 아니었다. 일부 언론에서 “원자탄이 없었어도 김원봉 등 걸출한 혁명가들이 일본을 몰아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우리의 역량을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다.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수석 연구위원은 “광복군의 규모와 전투 능력을 아무리 높게 쳐도 일본을 몰아내기는 어려웠다. 광복군은 그저 항일투쟁의 상징적 존재였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일본군 750만… “광복군이 몰아내긴 힘들어” 그렇다고 임정이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체념에만 빠져 있었을까. 아니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승전국 지위를 확보해 우리 스스로 독립을 얻어내고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44년에는 버마(현 미얀마) 임팔전투에 참가해 1945년 7월 일본군이 패배해 철수할 때까지 영국군을 도왔다. 1945년 8월 중국에 있던 미국 정보기구 육군정보전략본부(OSS)에서 광복군 38명이 특수요원 훈련을 마치고 국내 잠입을 기다렸다. 미군과 함께 한반도 진공 작전도 추진했다. 역사소설 전문 이원규(72) 작가는 “일본이 일주일만 늦게 항복해 광복군이 한반도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전후 일본 처리 문제를 두고 국제회담이 열렸다. 여기서 장제스(1887~1975) 중국 국민당정부 총통은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1874~1965) 영국 총리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했다. 김구 등 임정 수뇌부의 간절한 청원을 받아들인 것이다. 애초 한국은 카이로 회담의 논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장제스가 예외 조항까지 만들어 우리를 도왔다. 독립을 갈망하는 우리 민족의 염원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인도의 독립운동가로 훗날 총리가 되는 자와할랄 네루(1889~1964)는 한국을 “아시아 식민지 국가 가운데 열강에게 독립을 보장받은 유일한 나라”라고 부러워했다. 장 연구위원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하지 않았어도 일본은 소련의 참전 등으로 결국은 패했을 것이다. 어찌됐든 당시 한반도는 (임정의 다각적 노력 등이 맞물려) 광복을 맞이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연합국 덕에 해방? 독립노력 폄하해선 안돼” 일부 학자들은 “연합국이 해방을 가져다줬다”고 말한다. 한국이 독자적으로 일제를 이길 힘이 없었고 국제사회도 임정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 제패를 꿈꾸며 전 세계로 세를 넓혀 가던 강대국 일본을 우리 혼자 막지 못했다고 해서 독립을 위한 선조들의 노력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연합국이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던 것은 일본이 항복한 뒤 전리품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이기도 하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한시준(65)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해방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어느 나라보다도 오래 그리고 치열하게 일제와 싸웠다. 대한민국은 임정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 세력의 길고 긴 투쟁의 산물”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광복 이후 우리를 기다린 것은 ‘한반도 분단’이었다. 당시 소련은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한 뒤 거침없이 한반도로 진격했다. 당시 미군은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어 한반도로 바로 들어오기 어려웠다. 결국 미국은 소련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에 나눠 들어오자”고 제안했다. 당시 임시로 친 철조망이 지금까지도 한반도를 반으로 갈라놨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우리가 좀더 주도적으로 독립을 얻어냈다면 해방 이후 한반도 분단과 전쟁, 이념 갈등 등은 없었을 수도 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나치에 강탈 당한 코닝크의 유화 76년 만에 원래 소장자 후손에게

    나치에 강탈 당한 코닝크의 유화 76년 만에 원래 소장자 후손에게

    1639년 네덜란드 화가 솔로몬 코닝크가 그린 유화 ‘깃을 벼리는 학자(A Scholar Sharpening His Quill)’를 소장했던 프랑스의 한 유대 가문이 1943년 독일 나치에게 강탈 당한 작품을 76년 만에 되찾았다.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방의 명화 수백점을 소장하고 있었던 유대인 부호 아돌프 슐로스의 후손들이 1일(현지시간) 저녁 미국 뉴욕의 프랑스 총영사관에서 작품을 건네받아 가문의 한을 풀게 됐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의 온라인판 바론스 닷컴이 1일(현지시간) 전했다. 경매회사 크리스티 산하 크리스티 반환 연구(Christie’s Restitution Research)에 따르면 슐로스는 1910년 죽으면서 그림들을 아내와 아이들에게 물려줬다. 프랑스를 침공한 나치는 눈에 불을 켜고 슐로스 컬렉션의 소재를 알아내려 했다. 결국 가족들의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나치는 1943년 프랑스의 한 와인농장에 숨겨놓은 명화 수백점을 강탈했다.그 뒤 그림들은 오스트리아 린츠에 있는 아돌프 히틀러 박물관으로 향했는데 끝내 도착하지 못했다. 독일 뮌헨의 휴러바우 건물에 잠시 들렀는데 전쟁이 끝나버렸다. 제3제국이 끝장나면서 진공 상태가 되자 독일 민간인들이 들이닥쳐 약탈하는 바람에 사라졌다. 2017년 크리스티는 칠레의 한 소장가 작품들을 팔아달라는 위탁을 받고 크리스티 뉴욕 사무소가 작품을 전달받았는데 여러 모로 교차 검증한 결과 슐로스가 약탈당한 진품이 맞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전 판매 절차를 중지했다. 작품 의뢰자와 슐로스 가문 둘다에 알렸다. 지난해 10월 이 그림을 진짜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해 크리스티는 미국 연방수사국(FBI) 예술범죄 전담팀에게 넘겼다. 이 팀과 크리스티를 대신해 한 명씩 모두 참석해 슐로스 가문에 공식 반환되는 현장을 지켜봤다. 후손들이 이 그림을 어떻게 할지는 알려진 게 없으며, 다만 판매하겠다는 뜻을 밝히지 않아 크리스티 역시 이 작품의 가치를 논하길 거부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시대 때 유럽의 예술 작품들은 전례 없는 약탈을 당했다. 반환되지 않은 예술작품들이 때때로 팔아달라는 주문과 함께 지금도 세상의 밝은 빛 속으로 나온다고 크리스티는 전했다. 크리스티 수석 부회장 겸 국제 반환 디렉터인 모니카 두곳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지금까지 크리스티는 나치가 망가뜨린 작품 200점 가까이를 반환하는 데 도움을 줬다”며 “오늘의 성공적인 반환은 연구에 돈을 계속 투자하고 이렇게 꼭 필요한 영역의 장학금을 제공하겠다는 우리의 약속을 재확인하게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반환된 작품 가운데 자크 구드스티커, 존과 애나 자페, 아델레와 퍼디넌드 블로흐바우어 콜렉션이 대표적이다. 홀로코스트 전문가이며 연초에 워싱턴 포스트에 전면 광고를 게재했던 스튜어트 E 아이젠슈타트에 따르면 나치가 유대인들에게서 빼앗은 그림 숫자만 60만점 가까이 되며 적어도 10만점은 여전히 찾지 못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日침략 당했던 말레이시아에 ‘일본군은 영웅’ 위령비 파문

    日침략 당했던 말레이시아에 ‘일본군은 영웅’ 위령비 파문

    일본이 과거 말레이시아에서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나섰다 죽은 일본군들의 위령비 재건에 관여했다가 역풍을 맞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점령해 막대한 피해를 안겼던 곳에 가해자인 일본군의 위령비를 복원하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인 상황에서, ‘영웅’이라는 표현까지 동원된 게 파문의 결정타가 됐다.1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문제의 위령비는 말레이시아 북부 크다주의 주도 알로르스타르에 있는 것으로, 1941년 연합군이 장악한 다리를 공격하기 위해 폭탄이 실린 오토바이를 몰고 달려들다 폭발물이 너무 일찍 터져 죽은 일본군 장교와 병사 3명을 기리기 위해 조성됐다. 지난달 크다주 정부는 주페낭 일본 총영사관의 재정 지원을 받아 그동안 방치돼 있던 이 위령비를 78년 만에 복원했다. 그러나 위령비 앞에 설치된 안내판에 일본군 병사가 ‘영웅’이라고 표현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지역사회는 물론이고 말레이시아 전역에 강한 반발이 일었다. 특히 화교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1941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말레이반도를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 본토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싱가포르에서만 2만 4000∼5만명을 학살하는 등 1945년 패전 때까지 중국계 주민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살해했다.현지 언론은 “침략군이 어떻게 영웅이 될 수 있느냐”라고 비난의 포문을 열었다.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도 트위터를 통해 “위령비는 모든 말레이시아인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했다. 크다주 정부는 언론의 비난과 화교단체의 항의에 “지역업체의 실수”라고 사과하고 바로 안내판을 철거했지만, 현지에서는 그걸로는 안되고 위령비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화교단체인 중화대회당은 이번주 일본대사관을 방문, 위령비 철거를 요청하는 청원을 제출할 방침이다. 중화대회당은 “침략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행위”라며 “위령비를 복구한 것 자체가 배려가 결여된 행위”라고 지적했다. 문제의 안내판을 만든 말레이시아 역사협회 크다주 지부는 “위령비를 관광명소로 만들어 일본인 관광객을 유치하고 싶었다”며 “침략행위를 찬양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다. 주말레이시아 일본대사관은 “위령비 재건 비용은 주페낭 총영사관에서 지불했지만, 일본군을 영웅이라고 표현한 안내판의 내용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아사히에 밝혔다. 아사히는 “위령비가 있는 알로르스타르는 마하티르 총리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현재 총리의 3남이 주정부 수석장관을 맡고 있다”며 “이번 일은 야당의 입장에서 친일파로 알려져 있는 총리 가문을 공격하는 절호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이번 사태로 말레이시아내 민족간 대립도 나타나고 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하고 있다. 모흐드 아스미룰 아누아르 아리스 크다주 관광위원장은 화교 세력을 중심으로 특히 거센 이번 반발에 대해 “이런 식이라면 1511년 믈라카를 점령했던 포르투갈군이 세운 기념비 등도 모두 철거해야 할 것”이라면서 일부 화교계가 계속 문제를 제기할 경우 민족갈등을 부추기는 것으로 보고 경찰에 고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군은 말레이시아를 점령했을 당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말레이계와 인도계는 협조적이라는 이유로 비교적 온건한 대우를 했다. 현지인 중에는 일본의 침공 덕분에 독립이 빨라졌다고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잊지 말아야 할 15인의 여성 2] 첫 택시 기사·조종사·형사·소프트웨어 개발자

    [잊지 말아야 할 15인의 여성 2] 첫 택시 기사·조종사·형사·소프트웨어 개발자

    최초의 택시 기사 게트루드 자넷 뉴욕의 첫 여성 기사로 첫 출근해 의도적으로 사고를 냈다. 왈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앞에 정차하고 있었는데 다른 택시가 앞에 쏙 끼어들어 손님을 가로채려 했다. 그는 “그 시절(1940년대)이라면 흑인 기사가 도심에서 어슬렁 거리기도 힘들었다”고 돌아봤다. 많은 기사들이 모여들어 삿대질을 해도 그는 조용히 택시 줄을 지키고 서 있었다. 또다른 택시가 끼어들자 일부러 범퍼로 상대 차 꽁무니를 박았는데 그 차의 남자 기사는 그를 보고 “여자 운전사닷! 여자 운전사닷!”이라고 다급하게 외쳐댔다. 첫 비행 면허증 딴 베시 콜먼 비행을 원했지만 미국 항공학교에서는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프랑스어부터 배운 뒤 프랑스로 건너가 흑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1921년에 조종사 면허를 땄다. 노예였다가 주인으로부터 땅을 불하받아 계약재배했던 셰어크라퍼(sharecropper)의 딸로 태어난 그는 라이트 형제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파일럿들의 얘기에 매료됐다.뉴욕의 첫 여형사 이사벨라 굿윈 뉴욕 최초의 흑인 여자 형사로 1912년 잠복 근무 끝에 은행 강도 에디 붑 킨스먼의 정체를 밝혀냈다. 그 일 때문에 미국 최고의 민완 여형사란 명성을 얻었다. 1920년대에는 성매매 여성이나 가출 청소년,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전담하는 여성청소년과를 지휘하는 역할을 했다. 오늘날 뉴욕의 경찰 인력 3만 6500명 가운데 2%가 여형사들이다.검색 엔진 개척자 카렌 스파크 존스 구글과 같은 검색 엔진의 기초를 만든 컴퓨터 공학 개척자 가운데 한 명으로 한때 “컴퓨팅은 워낙 중요해 남자들에게만 맡겨놓을 수 없다”고 갈파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다수 과학자들이 컴퓨터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코드를 개발하려고 애쓴 반면, 그는 컴퓨터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게 만들도록 가르치려 했다. 초기 프로그래머 매리 앨런 윌크스 1960년대 세계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LINC로 알려진)의 소프트웨어를 제작했던 초기 프로그래머 가운데 한 명이다. 컴퓨터 코딩 초기에는 미국에서 만들어진 프로그램 넷 중 하나는 여성들이 만들었는데 그 중 윌크스가 최고였다. 당시는 키보드나 스크린이 없어 직접 손으로 적어야 했기 때문에 코드 작업에 몇년이 걸리곤 했다.양성 평등 운동가 클로뎃 콜빈 1955년 학교 공부를 마친 그는 친구들과 함께 백인 승객들이 타는 버스에 올라 자리를 비워달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친구들은 양보했으나 열다섯인 그는 거부해 경찰관들에게 끌려갔다. 몽고메리의 버스 좌석 분리 법안을 어겨 경찰에 체포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저유명한 로자 파크스가 앨라배마주에서 비슷한 일을 당하기 아홉 달 이전이었는데 오히려 인권운동 지도자들은 파크스보다 콜빈이 먼저 행동한 사실을 달갑지 않아했다. 그가 일으킨 버스 보이콧은 일년 넘게 이어졌고 앨라배마주의 버스 좌석 분리 법안이 헌법 위반이란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내는 데 조금이나마 역할을 했다.양성 평등 운동가 엘리자베스 페라트로비치 미국에서 차별 반대 법안이 1940년대 처음 통과된 것에는 알래스카 원주민의 동등한 권리를 위해 싸운 그가 끼친 공로가 적지 않다. 알래스카에서 격리된 틀링깃 원주민이었던 부부는 인종에 기반한 차별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법안을 주정부와 함께 작업해 성안했다. 1945년 법안이 통과돼 모든 알래스카인들은 공공기관에 “완전 평등하게 채용될” 자격을 얻게 됐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남북 모두 임정 실체 정치적 활용·왜곡… 시기·인물별로 평가해야

    남북 모두 임정 실체 정치적 활용·왜곡… 시기·인물별로 평가해야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 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해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대한민국 헌법 전문) “(1919년 3·1 봉기로) 인민이 피흘리고 싸울 때 (일부 민족 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미국에 대한 애국운동만 진행했다. 이들은 미 제국주의자들의 지지와 도움으로 나라가 독립할 수 있을 것으로 타산(계산)하고 그들에게 아양을 떨면서 원조를 구걸했다.”(북한 조선전사) 3·1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과 수탈, 민족말살 정책에 항거한 전국 단위의 민중 시위였다. 이를 계기로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생겨났고 임정 요인들의 희생 덕분에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임정에 대한 평가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임시정부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건 아니다. ‘나약한 부르주아 혁명가들의 집합소’, ‘우리 민족 독립운동에 숟가락만 얹은 조직’이라며 싸늘한 냉소를 보내는 국내 연구자도 적지 않다. 우리는 임정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까.●北·국제사회 “임정 제 역할 못 해…정부 아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가장 큰 논란은 임정이 정말로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의 대표이자 정부로서 역할을 수행했는가 하는 점이다. 대한민국 정부와 국사편찬위원회는 임정이 엄연한 정부였고 국내 독립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고 천명한다. 초·중·고교 역사 교과서에서도 임정을 우리 민족의 반만년 역사상 첫 민주공화국 정부로 소개한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임정을 독립운동 단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식민지 체제에서 일제에 고통받으며 목숨 걸고 저항한 이들은 당시 한반도에 살던 노동자와 농민들이었지 임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해외에서 “힘 없이 외교청원 놀음이나 펼친” 망명가 집단에게 정부 자격을 부여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최근 우리 정부가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 행사를 남북 공동으로 추진하려다가 실패한 데에는 이런 역사 인식 차가 깔려 있다. 북한이 자신의 정통성을 김일성 일가에서만 찾다 보니 임정을 더욱 깎아내릴 수밖에 없는 내막이 있기도 하다. 여운형(1886~1947)을 비롯해 주요 독립운동가들도 임정의 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외국에서 지리멸렬하게 파벌 싸움만 하다가 국내에 별다른 지지 기반을 만들지 못했고 시베리아와 만주 등에 임정보다 훨씬 크고 실력 있는 단체가 존재했다는 이유에서다. 국제사회 역시 임정을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국제법상 국가의 3요소인 영토, 주권, 국민이 없던 탓이다. 오직 중화민국(대만)이 임정을 정부로 인정하고자 미국과 영국 등을 설득했지만 열강의 반응은 차가웠다. 1945년 해방 뒤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미국 대통령은 임정 승인을 요청한 장제스(1887~1975)에게 이렇게 답했다.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이 분열돼 있어 임정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 임정은 한반도와 연계가 없다. 중국이 (친중 세력인) 임정을 승인하면 소련도 친소단체를 승인할 텐데 이렇게 되면 갈등이 커질 수 있다.”●‘1919년 건국론’ ‘1948년 건국론’ 대립 임정의 위상에 대한 시각차는 건국절 논쟁으로도 이어졌다. 가장 큰 쟁점은 대한민국 수립 시점이다. ‘1919년 건국론’과 ‘1948년 건국론’이 대립하고 있다. 상당수 역사학자들은 1919년 건국론을 주장하지만, ‘뉴라이트’를 포함한 일부 사회과학자들은 1948년 건국론을 지지한다. 1919년 건국론자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임시헌장을 통해 국민·주권·영토 등 국가의 3요소를 규정했기 때문에 국가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1948년 건국론자들은 임정이 한국 독립에 이렇다 할 기여를 하지 못했기에 1919년은 진정한 건국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명실상부한 주권을 되찾고 국제사회에서도 합법적으로 승인한 1948년이 진짜 건국이라는 것이다. 1919년 건국론자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한다면 1948년 건국론자들은 국제법적 형식 논리를 더 중시한다고 볼 수 있다. 독립운동사 전문가인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교육과 교수는 27일 “임정 지도자들이 1919년 건국론자 주장처럼 1919년에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그 뒤부터 국가의 완성도를 높여 가는 과정으로 여겼는지 아니면 1948년 건국론자 생각처럼 그저 독립운동을 한다고 인식했는지는 좀더 정교한 사실 규명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임정은 ‘빛과 그림자’를 함께 지닌 조직” 임정은 3·1운동으로 드러난 민족국가·국민주권국가 수립 욕구를 맨 처음 구체화한 조직이다. 3·1운동으로 생겨난 여러 정부를 하나로 묶어 독립운동 대표체로 거듭났다. 이것만으로도 임정은 대한민국의 시원으로서 정통성을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그렇다고 해서 임시정부가 정통성을 독점한 건 아니었다. 수립 초기부터 분열과 무능, 파벌 싸움 등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고 일개 독립운동 단체보다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시기도 보냈다. 임정은 분명 ‘빛과 그림자’를 함께 지닌 조직이다. 그래서 시기와 인물에 따라 다르게 평가받아야 한다. 전문가들은 과거 냉전 구도 속에서 정권에 따라 임정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다보니 지금의 논란이 생겨났다고 지적한다. 김희곤(65) 안동대 사학과 교수는 “광복 이후 임정의 위상을 두고 정치적 논쟁이 일어나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남한에서는 군사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부족한 정당성을 보완하고자 임시정부를 치켜세우려고 애썼다. 이들은 임정이 독립운동의 최고봉이자 한반도를 장악한 대표 조직으로 과장해 선전했다. 상당수 학계 인사도 이런 분위기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하며 곡학아세에 나섰다. 하지만 남한과 체제 경쟁을 펼친 북한에 임정은 ‘실패한 망명가 집단’에 불과했다. 1980년대 남한의 운동권 세력도 군사정부에 대한 반발로 북한의 ‘민중사관’을 흡수해 3·1운동 민족대표나 임정 요인을 무시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훗날 ‘뉴라이트’가 돼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부터 대놓고 임정을 부정한다. 언론 역시 이런 상황에 대해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임정에 대한 정치적 논란이 있을 때마다 정확한 사실관계에 근거하기보다는 매체가 지향하는 이념이나 정권 성향에 맞춰 임정을 평가 절상 혹은 절하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지금부터라도 정치적 유불리에 휘둘리지 말고 임정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고 인정해야 정확한 사실 전달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남북 시각차 인정… 꾸준한 교류로 극복해야” 지금의 한반도 현실이 남한이나 북한 어느 한쪽에만 정통성을 부여하기 어려워진 만큼 지금부터라도 남북이 함께 임정의 정확한 위상을 재평가해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스위안화 중국 푸단대 한국북한연구센터 교수는 최근 열린 임정 관련 토론회에서 “(일제강점기 핵심 독립운동단체였던) 김구의 임정 세력, 김일성의 항일무장 세력, 중국 내 조선의용군 세력에 대한 정확한 연구와 평가야말로 남북통일 실현의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에서는 임정을 법통으로 적시했지만 북한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상하이 임정 청사를 방문하는 것조차 꺼린다. 학계의 교류와 충분한 인내로 이런 간극을 극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봉오동전투의 잊혀진 영웅, 최운산 장군을 아시나요”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봉오동전투의 잊혀진 영웅, 최운산 장군을 아시나요”

    ‘장군의 손녀’ 최성주가 말하는 잊혀진 장군 ‘최운산’“99년 전 봉오동전투는 당시 세계 최강이라던 일본 정규군과 싸워 이긴 빛나는 전과입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파르티잔 특히 홍범도(1868~1943)·김좌진(1889~1930) 같은 영웅이 화승총으로 매복을 잘 해서 이긴 것이 아니라 우리 독립군이 체계적으로 훈련받고 무기와 군장비를 잘 갖췄기 때문에 이긴 겁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우리 독립군이 어떻게 무장하고, 체계적으로 훈련받을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잊혀진 영웅 최운산(崔雲山·1885~1945) 장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당시 사진사를 동원해 전쟁 현장을 촬영했던 준비된 전쟁이었습니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해야 하는 이유이지요.”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최성주(61) 이사를 최근 한 모임에서 우연히 만났다. 자신이 장군의 손녀라며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의 최운산 장군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다. 학교에서 익히 배웠던 ‘홍범도·김좌진 장군의 영웅담’과는 결이 달랐다. 기자만 최운산 장군에 대해 모르나 싶었지만 최 이사는 “역사학자조차 최운산 장군의 역할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기에 지난 22일 서울신문사에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에서 최 이사는 노트북을 들고와 현장에 다녀왔던 사진과 관련 서류들을 보여줬다. 이 봉오동 전투의 총사령관은 그의 형인 최진동(崔振東·1883~1941), 참모장은 최운산이고, 홍범도·김좌진은 그 부대의 연대장이었다고 말했다. 최 이사는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는 봉오동 전투 현장이 수몰됐다고 했지만 실제 전투가 있었던 곳은 봉오저수지를 10km 정도 거슬러 올라간 곳”이라고 말했다. 최 이사는 거의 해마다 전투지를 답사한다고 했다. “봉오동전투 사진사 동원한 준비된 전쟁전투 모습 3장…임정에 보냈다는 기록만”- 봉오동전투 당시 현장을 촬영했다고?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최진동이 국민회에 보낸 공문(‘기안104’) 기록만 남아 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은 전해지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기록을 보면 ‘봉오동전쟁 전황 촬영사진 3매, 상해를 보낼 예정. 별지 전쟁 촬영 사진 3매는 제2남지방의 박준재씨가 전쟁 당시 실시 전황을 보고 촬영한 것이다. 이것은 임시정부로 보내서 석판으로 인쇄하여 세계에 선전하려는 것인데 보신 뒤에 반송하기 바란다.’고 적혀 있습니다. 번역해서 문서로 남아있는 것을 역사자료실에서 찾은 것입니다. 최운산 장군은 당시 종군기자라고 할 수 있는 전문 사진사를 동원해 기록을 남기도록 했던 겁니다. 그만큼 준비가 철저했던 거지요.” - 당시 돈이 있다고 무기를 살 수는 없었을 겁니다. 우리 독립군이 어떻게 무장했을까. “최운산 장군이 러시아와 무역거래를 하고 있던 관계로 지속적으로 무기를 구입해 왔습니다. 그러나 뒷거래로 수천명이 무장할 무기를 확보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은 소련에 배속됐던 체코 군의 무기로 무장한 겁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소련은 체코군을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귀국시킵니다. 이들이 장기간에 걸쳐 러시아 대륙을 횡단해 1918년 말에 동쪽 끝에 도착합니다. 체코군은 무기는 필요 없고,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반면 우리 독립군은 대량의 무기 확보가 절실한 상태였습니다. 무기가 있어도 돈이 없었거나, 돈이 있어도 무기를 파는 데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겠지요. 하늘의 뜻인지 최운산 장군에게 재력이 있었고, 체코군은 무기보다 현금이 더 필요했지요. 체코군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산 무기로 무장했다고 하니 우리 독립군도 당시로서는 최신의 미국 무기를 갖췄다고 봅니다.” “독립군들, 귀향하는 체코군 무기로 무장독립군들의 무기 구매 대금 출처는 최운산1920년 토지 팔아 5만원 마련… 무기 매입”- 막대한 무기 구입 대금은 어디에서 나왔나. “이 부분이 만주 무장독립운동 연구에서 가장 미진한 부분입니다. 우리 집안에서는 최운산 장군이 지원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의병 수준의 독립군 통합 부대원들을 훈련하고 무장시키기 위해 1920년 1월 최운산 장군이 석현의 대규모 토지를 5만원에 팔아 그 돈으로 대한북로독군부 부대원 전원을 완전무장시켰습니다. 당시 5만원은 전투기 한대 가격이라 합니다. 최운산 장군의 부인인 김성녀(金性女·1894~1975) 할머니가 1969년 남편의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하면서 밝힌 장비를 보면 ‘대포 10여문, 기관총 수십정, 수류탄 수천개, 장총 천여정, 권총 수백정, 실탄 수만 발’을 갖췄다고 합니다. 당시 훈련소 격인 사관연성소 병사 1인당 무장 상태를 보면 ‘소총 1정, 실탄 500발, 수류탄 1개, 좁쌀 6되, 짚신 1족이었다’는 일제의 밀정보고서도 있습니다.” - 최운산 장군, 얼마나 부자였나. “간도 제1의 거부였죠. 부를 일군 배경으로 중국이 토지 정리사업을 할 때 엄청난 규모의 황무지를 헐값에 불하받았습니다. 이를 조선 동포들과 함께 개간해 옥토로 바꿔 신한촌(新韓村)을 만들었습니다. 김성녀 할머니가 생전에 말씀하시길 ‘우리 땅은 사흘을 둘러봐도 다 못 본다.’고 하셨습니다. 1960년대 우리가 부산에 살 때 봉오동전투에 참전한 부하 한 사람이 국제시장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할머니께 인사와 우리에게 이야기하길 ‘최운산장군의 땅 면적이 이 부산의 6배였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콩기름공장·국수공장·주류공장·성냥공장·비누공장·과자공장을 비롯한 다수의 생필품 기업을 운영했습니다. 또 대곡상이자 축산업자로 한 번에 수백 마리의 소를 창춘이나 훈춘으로 몰고 가서 팔았답니다. 이 소떼와 곡물은 러시아 군대 식량으로 들어갔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이게 연결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최재형(1858~1920) 선생이 소고기를 러시아군에 공급했다고 하는데 두 분의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겠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오늘날 삼성과 비견 되는 재벌이었지만 40여년에 이르는 무장 독립운동으로 그 막대한 재산을 거의 다 소진했습니다. 말년에 남은 것이라고는 살고 있던 집과 그에 딸린 수남촌 토성리 일대의 땅 뿐이었습니다.” “최운산… 간도 최고의 갑부이자 대지주부산 6배 넓이 땅 소유…무장투쟁에 소진”- 최운산 장군, 정확한 이름은 어떻게 되나. “일본군의 눈을 속이자면 변장이 필수였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여러 개를 썼습니다. 어릴 때는 최명길(崔明吉), 장작림 군벌에 있을 땐 중국식의 최풍(崔豊), 간도 제1의 거부로서 경제활동을 할 때는 최만익(崔萬益), 무장투쟁을 할 때는 최문무(崔文武)·최빈(崔斌)·최운산(崔雲山)을 사용했고, 러시아에서 무기를 밀매할 때는 최고려(崔高麗), 중국 장사꾼으로 위장해 첩보활동을 할 때 최복(崔福)을 사용했습니다. 8개의 이름을 가졌지만 모두 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복잡다단한 삶을 사셨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청년 시절, 장작림 군벌서 군사지식 습득중국군 이직시 자위대 조직…私兵 100여명” - 무법천지 만주에서 대규모 재산 지키자면 자위대가 필수였겠다. “최운산 장군은 청년 시절, 중국 동북3성 지배세력인 장작림(張作霖·1875~1928) 군벌에 들어갔습니다. 전투에서 장작림의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어 장작림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습니다. 이때 형 최진동, 동생 최명순과 함께 3형제가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군사 지식과 군조직 운영을 익히며 만주군벌과 혈맹의 관계를 맺은 겁니다. 최운산은 조선인과 중국인의 다리 역할을 하면서 양쪽의 신뢰를 다졌습니다. 그러다가 1912년 최운산 장군이 중국군을 이직하고 마적떼로부터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 명목으로 자위부대 구성하겠다고 했을 때 장작림이 기꺼이 허락해준 겁니다. 그가 사병(私兵)을 모집할 때 1개 중대 이상의 병력이 따라 나왔다 합니다. 100명이 넘는 규모라 처음부터 정규 군대와 같은 편제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몇 명의 중국 사병이 포함된 이 자위부대가 대한민국 국군의 작은 씨앗일지도 모릅니다. 도독부(都督府)의 복장은 중국군과 같은 색깔이어서 잘 구별되지도 않았답니다. 독립군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1915년엔 봉오동 산중턱을 벌목하고 개간해 연병장과 막사를 지어 독립군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이때가 500명이 넘었습니다.” “3·1운동 후 열혈청년들 간도로 몰려 들어6개월 과정 군사학교인 사관연성소도 창설안무·홍범도 등과 함께 대한북로독군부 창설”- 대한북로독군부 창설 과정은.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었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임시정부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운영하던 670명의 자위부대를 대한민국 첫 정식 군대 대한군무도독부(大韓軍務都督府)로 재창설합니다. 그때 중국 지방정부에서 일하고 있던 최진동, 최치홍 두 사람도 대한군무도독부에 합류합니다. 사령관인 부장(府長)에 형인 최진동 장군을 추대했습니다. 자신은 참모장으로 재정 등 군대 운영의 전반을 책임졌지요. 병참을 맡은 겁니다. 동생 최치홍도 참모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소유지인 서대파에 대한북로군정서를 창설합니다. 3·1운동 이후 간도로 들어오는 열혈 청년들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이들을 모두 받아들여 다음해에 6개월 과정의 군사학교인 사관연성소를 십리평에 설립했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북로군정서 무장과 사관연성소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군자금으로 상당한 규모의 재산을 소진하였습니다.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언했습니다. 일본군과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치르려면 대군단을 이루어야 한다는 판단을 한 최운산 장군은 만주의 독립군 모두에게 무기와 식량, 군복 등 군자금 일체를 제공하기로 약조하여 본격적인 대통합을 이뤄냈습니다. 북만주의 대소 독립군부대가 모두 합류했고 최종적으로 안무(1883~1924)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에 최씨 형제의 군대를 합쳐 독립군 통합부대를 만들었습니다. 명칭은 大韓北路督軍府(대한북로독군부)였고, 통합 서약서에 서명 날짜는 대한민국 2년 즉 1920년 5월 19일이었습니다. 국민회, 신민회, 광복단 등을 비롯한 크고 작은 독립부대가 대한북로독군부 기치로 모였습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군인의 신분으로 전투에 임했던 것입니다.” - 봉오동전투 상황은.“통합을 이룬 대한북로독군부는 두만강을 건너 일본 헌병대를 습격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며 실전 훈련을 쌓아갔습니다. 봉오동을 중심으로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의 세력이 커지고 있었기에 당시 일제는 독립군 토벌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정보전으로 이를 파악한 우리 독립군은 마을 주민을 미리 대피시키고, 연대별로 각 산에 주둔하고 산능선을 따라 참호를 파고 매복했습니다.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도 봉오동전투 현장에 가면 낙엽이 가득 차있는 참호를 볼 수 있습니다. 1920년 6월 7일 새벽 일본군 1개 연대 이상의 병력이 봉오동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봉오동을 둘러싼 산에서 맹렬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이어서 봉초봉 아래에선 백병전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억수같이 내렸습니다. 돌멩이만한 우박이 떨어지고 뿌연 안개가 앞을 가렸던 거죠. 우리 독립군이 짙은 안개와 비,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승세를 굳힐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후퇴하던 일본군이 지원부대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해 서로 총격전을 가해 더욱 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봉오동전투서 적군 500여명 사살…기존보다 많아청산리전투는 봉오동전투 연장… 6일간 교전”- 봉오동 전투 전과는. “전과에서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차이가 많이 납니다. 김성녀 할머니가 낸 진정서를 보면 ‘적군 사살이 500여명, 중상자 700여명, 경상자 1000여명입니다. 노획물자는 대포 4정, 기관총 수십 정, 장총 500여정, 탄환 수만 발에 수류탄 다수’라고 기록합니다. 홍범도 일지에도 일본군 사망자가 5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에는 여전히 일본군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명으로 축소돼 있습니다. 우리의 피해가 거의 없다고 했지만 독립군도 사망자 수십명과 다수의 부상자를 냈다고 김성녀 할머니가 증언합니다. 총상 환자 치료를 위한 의사가 부족해 애를 태웠고, 용정 제창병원에 의사를 보내달라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독립군 지도부는 주민들의 무고한 희생을 줄이고, 더 많은 독립군이 편하게 활동하기 위해 연해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합니다. 4000여 명에 이른 독립군들이 부대별로 이동하던 중 일본군이 그해 10월 21일 청산리에서 따라 잡아 전투를 벌인 게 청산리전투입니다. 청산리전투는 하루 전쟁이 아니라 대한북로독군부의 여러 부대가 6일 동안 치른 전쟁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청산리전투가 별개의 전투가 아니라 봉오동전투의 연장전이라 생각합니다.” “최운산, 6차례 옥고…이름 8개 사용광복 40일 전 평양 장남 집에서 사망”- 최운산 장군, 역할에 비해 많이 잘못 알려졌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이 몇몇의 영웅담 위주로 신화화 한 것이 가장 큰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파르티잔들이 겨우 화승총으로, 청나라 및 러시아에도 이긴 세계 최강의 일본군에 승리했다는 것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역사학계도 언론도 처음의 잘못된 기록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류의 논문을 낸 역사학자를 직접 만나 물어보면 ‘앞선 논문을 인용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역사학계가 정말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최운산 장군 그 뒤 어떻게 됐나. “연해주에서 자유시참변을 겪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무장독립운동을 계속합니다. 1930년대에도 우수리강전투, 나자구전투, 대황구전투, 도문대안전투, 안산리전투, 대전자령전투에 참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에 유학 중이던 장남 최봉우(일명 최치영·1922~2001)가 학도병 징집을 피해 고향 봉오동으로 돌아왔다가 일제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다 죽을 지경에 이르자 장례나 치르라며 내주었습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최봉우가 평양으로 숨어들자, 아버지 최운산장군이 아들을 보러 왔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해방 40일 전인 1945년 7월5일 평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최운산장군은 1924년~1926년 3년간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1939년 일본 경찰서 습격과 군자금 모집, 창씨개명 거부 등으로 10개월간 감옥에 갇힌 것까지 일생동안 모두 6번 옥고를 치렀는데, 매번 심하게 고문을 당해 수레에 실려 나오곤 했습니다. 가족들도 그가 언제 감옥에 갔다 왔는지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유공자 인정 조건 뒷돈 요구에 주먹 날려1977년 서훈…동생 최치홍은 여태 안 돼”- 정부는 최운산 장군의 역할 일찍 인정해줬나. “1961년 1월 최운산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는 통보를 정부로부터 받고 총무처로 아버지 최봉우가 갔더니 담당공무원이 ‘뒷돈’을 요구하더랍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모든 가산을 독립군 무장에 썼는데….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아버지가 그 공무원에게 주먹을 날렸습니다. 그 이후론 독립유공자 선정에 번번히 밀려났습니다. 십수년동안 미운털이 박혔던 게지요. 아버지는 생전에 ‘내가 욱하는 성질을 못 이겨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을 가렸다’며 후회하곤 했습니다. 그 후 할머니가 1969년에 진정서를 냈지만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2년 뒤인 1977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셨습니다. 같이 독립운동한 동생 최치홍은 100년이 지난 올해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했습니다.”- 설명을 듣고 보니 김성녀 할머니도 큰 역할을 했다. “저도 할아버지의 삶을 살펴보다보니 할머니의 역할이 과소평가됐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할머니는 독립운동가를 내조한 차원을 넘어 무장 독립운동의 한 축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남편의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해 낸 진정서를 보면 독립운동을 내조한 정도에서는 알 수 없는 당시 북로독군부의 조직 현황과 봉오동전투의 전과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봉오동전투를 바로 앞두고 최운산 장군이 집에 계시지 않을 때 도착한 중요한 정보는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어 직접 산속의 본진으로 올라가 정보를 전달했습니다. 또한 군사들이 없을 때 집으로 쳐들어 온 마적들을 향해 직접 총을 쏘고 일꾼들을 독려해 무장 강도들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물론 주민 부녀자들을 동원해 군복제작과 세탁 등 의복을 조달하고 식사를 준비했지만, 한 끼에 3000명분의 식사를 마련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지난해 김성녀 할머니에 대해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장군의 부인 김성여도 무장독립운동 한 축무장독립운동사, 영웅담서 벗어나야 할 때”-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가 결성됐다. “우리 5남매는 만주 무장독립 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정리되기를 기다렸습니다. 후손들의 주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역사가들의 연구가 깊어지면 언젠가 역사가 바로 서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여태까지 바로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잘 못된 기록이 반복되고,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저희가 직접 일제 문서를 찾고, 봉오동전투와 최운산 장군의 삶을 역사학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반가워하면서 학술적 재조명이 필요한 일이니 기념사업회를 설립하라고 조언해주었습니다. 셋째인 제가 60대입니다. 독립전쟁의 현장을 직접 본 사람의 증언을 들은 마지막 세대일 것입니다. 우리 남매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역사를 올바로 기록하고자 뜻이 맞는 분들을 중심으로 2016년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집안 자랑이 아니라 수많은 독립군들이 함께 지켜낸 만주의 무장독립전쟁의 진실을 전하고 싶을 뿐입니다. 영웅담 위주의 독립운동사를 넘어서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내년이 봉오동전투 100주년이다. 계획한 행사는. “사실 최운산 장군이 잘 알려진 분이 아니라 정부 지원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5남매가 비용을 갹출해서 학술세미나 개최나 봉오동 답사 등 필요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손주들도 나이가 들어 경제활동에서 물러나 있으니 기념사업회 활동에 필요한 기금을 마련이 어려워 필요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올해는 당시 독립군이 사용한 무기를 살펴보는 학술세미나를 열고 7월 5일 국립현충원에서 순국 74주기 추도식을 개최합니다. 100주년이 되는 내년엔 봉오동전투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행사와 최운산 장군을 연구한 책을 한 권 펴내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의열단장 김원봉, 무장투쟁 ‘공’vs 北정권 참여 ‘과’… 엇갈린 평가

    의열단장 김원봉, 무장투쟁 ‘공’vs 北정권 참여 ‘과’… 엇갈린 평가

    올해 의열단 창단 100주년을 맞았지만 약산 김원봉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여전히 극명하게 갈린다. 의열단을 조직해 무장투쟁에 앞장선 ‘공’에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과 함께 북한 정권에 참여한 ‘과’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선다. 독립유공자 포상을 놓고도 김원봉은 뜨거운 감자다. 독립운동가는 맞지만 독립유공자가 될 수 없는 애꿎은 현실이 70년 분단 역사의 아픔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과 같다는 지적도 나온다. 20일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김원봉은 현행 법 체계에서는 독립유공자가 될 수 없다. 김원봉이 단순히 사회주의 활동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방 이후 월북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는 이유에서다. 지난해 4월 보훈처는 ‘광복 후 행적 불분명자’(사회주의 활동 경력자)도 독립유공자로 포상할 수 있도록 선정 기준을 완화했지만 ‘북한 정권 수립에 직접 기여하지 않은 인물이어야 한다’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 당시 보훈처가 집계한 독립유공자 포상 보류자 2만 4737명에 김원봉도 포함돼 있지만, 최근 재심사 대상에서 제외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앞서 지난 1월 국가보훈처 자문기구로 활동한 보훈혁신위원회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독립운동을 했다면 독립유공자로 봐야 한다”고 보훈처에 권고했다. 보훈혁신위원회 위원을 지낸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남한 정부만 정통성을 가지고 여기에 참여하지 않으면 ‘적’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면서 “6·25전쟁 때 전범 수준의 책임이 없다면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배제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지적했다. 김원봉은 1948년 북한 국가검열상을 거쳐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지만, 1958년쯤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훈처는 보훈혁신위의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보훈처 관계자는 “헌법 가치와 국가 정체성에 부합하는지 따져봐야 하고, 국민들의 종합적 의견도 들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수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독립운동가는 반드시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아야 하는가”라면서 “불필요한 좌우 대립의 논란만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독립유공자 포상 기준을 독립운동 공적만 가지고 할 수 있도록 법을 마련해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도올 김용옥 “이승만은 ‘거룩한 사기꾼’…분열만 일으켰다”

    도올 김용옥 “이승만은 ‘거룩한 사기꾼’…분열만 일으켰다”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는 16일 방송된 KBS1 ‘도올아인 오방간다’에서 완전한 독립을 위한 ‘해방’을 주제로 강연을 하던 중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국립묘지에서 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됐지만 해방의 주체는 우리가 아닌 미국이었다. 소련은 8월 24일 김일성을 데려왔고 미국은 하버드 석사학위에 프린스턴대학의 박사학위를 갖고 있던 이승만을 데려왔다. 김용옥은 “김일성과 이승만은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 통치하기 위해 데려온 인물들”이라며 “일종의 퍼핏(puppet), 괴뢰”라고 설명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활동할 대표가 필요해 이승만을 정무관 최고 지위인 집정관총재 역할을 줬다. 이승만은 코리아공화국 대통령을 표방하며 명함과 엽서를 만들어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김용옥은 이승만이 사태를 파악하고 장악할 능력이 있었고 나쁜 방향으로 지식인이자 지식인임을 끊임없이 반성하게 하는 인물이라고도 평가했다. 김용옥은 저서에서 이승만을 ‘거룩한 사기꾼’이라고 비유했다. 한 방청객은 이승만이 부정선거로 인해 쫓겨났는데도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는 것에 대해 김용옥의 의견을 물었다. 김용옥은 국립묘지에서 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신탁통치에 찬성했으면 분단도 없었을 것”이라며 “당연히 파내야 한다, 우리는 이 대통령 밑에서 신음하며 자유당 시절을 겪었고, 4·19혁명으로 그를 내쫓았다, 그는 역사에서 이미 파내어진 인물”이라고 말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국제 항공산업 주도하는 IATA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는 1945년 쿠바 아바나에서 설립된 국제협력기구다. 전 세계 120개국 287개 민간 항공사들이 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캐나다 몬트리올과 스위스 제네바 등 두 곳에 본부가 있으며, 전 세계 53개국에 54개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IATA는 국제항공업계의 정책 개발, 규제개선, 업무 표준화를 이끌고 항공산업 발전과 회원사들의 권익을 대변한다. 회원 항공사들의 안전운항을 위한 감사 프로그램(IOSA)을 운영하며 안전 운항 강화에도 힘쓴다. 특히 운항 거리 및 유가 등을 고려해 국제선 항공 운임을 결정하고 조정하는 중요한 권한도 갖고 있다. IATA는 크게 연차총회(AGM), 집행위원회, 분야별 위원회 등 3개의 회의체를 통해 각종 주요 의사 결정을 내린다. 1년에 한 번씩 개최되는 연차총회에는 회원사의 최고 경영층, 제작사 및 유관업체 관계자, 언론 매체 등이 대거 참석한다. 연차총회에서는 IATA 결의안 채택과 주요 의사결정 승인이 이뤄진다. 사실상 글로벌 항공업계의 정책과 철학을 이끄는 중요한 회의다. 전 세계 회원사 대표 중 31명으로 이뤄지는 집행위원회(BOG)는 연 2회 열린다. 특히 정책 방향을 결정하고 예산, 간부 임명, 회원사 가입·탈퇴 등 IATA의 운영 사항들을 여기서 정한다. 분야별 위원회는 화물, 환경, 재무, 산업, 등 총 6개 분야로 구성돼 있다. 각 분야에는 20명 이내의 위원들이 소속돼 있으며 이들이 부문별 IATA 정책 및 전략 등을 수립한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 유대인 1000명 구한 신들러, 5000명 구한 스페인 외교관 산즈 브리즈

    유대인 1000명 구한 신들러, 5000명 구한 스페인 외교관 산즈 브리즈

    영화 ‘신들러 리스트’로 널리 알려진 독일 기업인 오스카 신들러가 홀로코스트에서 구한 유대인은 1000여명이다. 그런데 스페인의 외교관 앙헬 산즈 브리즈는 헝가리 유대인 5000명 이상을 아우슈비치 송환 위기에서 구해내 ‘부다페스트의 천사’로 불렸는데도 오늘날 스페인 사람들조차 그의 존재를 잘 모른다. 영국 BBC가 19일 나치의 헝가리 침공 75주년을 하루 앞두고 산즈 브리즈가 유대인들을 구한 과정을 자세히 소개해 눈길을 끈다. 1944년 3월 19일 홀로코스트 총책임자인 SS 친위대장 아돌프 아이히만이 부다페스트로 옮겨왔다. 대략 100만명으로 추산되던 헝가리 유대인을 뿌리부터 제거하기 위한 ‘마가레뜨 작전’이 실행됐다. 33세의 산즈 브리즈는 스페인 대사관의 상업 참사관으로 일하다가 침공한 지 몇주 되지 않았는데도 SS 친위대가 벌써 40만명 넘게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치로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스페인 외교관들은 보호 여권이란 것을 발급해 수많은 유대인을 구한 스웨덴 외교관 라울 왈렌베리를 따라 하기로 했다. 왈렌베리는 나중에 옛 소련군에 붙잡힌 뒤 사라졌는데 소비에트 감옥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나치 수용소들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보고가 계속 들어오자 산즈 브리즈는 파시스트 정권인 프랑코 정부에 편지를 보내 참상을 알리고 유대인들을 구할 방법을 찾아보자고 호소했다. 하지만 나치와 전쟁에 협력하던 본국 정부는 몇달 동안이나 머뭇거렸다. 답답해 하던 그는 직접 나서기로 했다. 영사관 기록을 위조하고, 헝가리 유대인은 아슈케나지가 대세를 이루는데도 세파르딕 유대인에게 난민들에게 국적을 부여하기 위해 1924년 제정됐다가 폐기된 스페인 법률을 적용해 국적을 부여했다. 유대인들을 부다에 있던 스페인 대사관에 숨겼고, 현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먹였다. 나치와 헝가리 파시스트 조직인 ‘애로 크로스’ 순찰대와 맞섰고, 연합군의 공습이 쏟아지는 가운데 유대인들에게 처마 밑을 내줬다. 산즈 브리즈가 1944년 12월 스페인 정부에 보낸 보고서의 한 대목이다. “난 겨우겨우 200명의 세파르딕 유대인을 스페인이 보호한다는 점을 헝가리 정부로부터 공인받았다. 이 200명의 군대로 200개의 가족을 만들어냈다. 이 200개의 가족은 다시 무한대로 증식됐다. 200보다 늘어나면 결코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딱 200명씩 늘렸다.” 산즈 브리즈의 아들 후안 카를로스는 “아버지는 각자에게 편지를 써줬다”고 말했다. 그는 외교관이란 캐릭터와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현지 법률보다 인권을 앞에 뒀고, 난민을 보호하기 위해 외교 면책권을 이용한 첫 번째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외교 목적이 아닌 건물에 국기를 꽂고 가짜 여권을 발급하는 등 외교관이 해서는 안될 행동을 앞장서 했다. 352명에게 임시 여권 232개를 발급해줬고, 1898통의 보호 편지들, 45명의 세파르딕 유대인들에게 15개의 진짜 여권을 발급했다. 11개의 아파트 건물을 임대해 대략 5000명의 유대인들을 스페인 보호 아래 머물게 했다. 최근 세상을 떠난 제이미 반도르는 2013년 스페인의 RNE 공영 라디오와의 인터뷰를 통해 전쟁 후 가족과 함께 바르셀로나로 이주한 사연, 스페인 난민으로 살았던 고단한 삶에 대해 털어놓았다. “방 둘에 조그만 거실 딸린 아파트에서 51명이 살았다. 비좁은 데다 배고프고 추웠고 벼룩이 들끓었다. 위생은 엉망이었다. 그 많은 인원이 화장실 하나로 버텼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최악은 공포, 아우슈비츠로 보내질지 모른다는 공포였다.”나치 점령 하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지 몇주 안된 몸으로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산즈 브리즈가 세운 안가 중 한 곳에 머물러 목숨을 구한 에바 베나타는 “신들러보다 더한 영웅”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스페인 대사관이 보낸 보호 편지를 갖고 있었다. 스페인 대사관은 나치 점령 전에 탈출한 할머니가 마드리드에서 써보낸 엽서의 우표를 근거로 보호 편지를 써준 것이었다. 베나타는 한 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 아버지는 이른바 죽음의 행진이 벌어지던 1945년 초 세상을 떴다. 헝가리를 탈출한 이들은 탄지에르에 머무르다 나중에 결국 스페인에 정착했다. 산즈 브리즈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1944년 11월 부다페스트를 떠났다. 상관들은 소련 군에 보복을 당할까봐 우려했다. 외교관 커리어에 복귀했지만 반이스라엘 노선을 표방한 프랑코 정부에서 일했다는 이유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센터가 주는 공로훈장을 1966년에야 뒤늦게 받았다. 나치의 패망이 확실해지자 뒤늦게 유대인들을 구하라고 전통을 보냈던 프랑코 정부는 1970년대 중반 민주주의를 회복한 뒤 자신들이 유대인 구호에 앞장섰다는 식으로 증언해달라고 산즈 브리즈에게 강요했다. 그는 마지못해 동의했는데 아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손을 내저었다. 1980년 세상을 떠났을 때 스페인 일간 ABC 지면에 실린 부고에는 부다페스트의 일이 소개조차 되지 않았다. 아들은 “아버지와 그 일로 대화를 하지도 않았다. 집에서 입에 올릴 얘기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고통스러워 한 것이 분명했고, 그래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나경원 “반민특위가 국론 분열”…역사왜곡 넘어선 ‘극우결집’

    나경원 “반민특위가 국론 분열”…역사왜곡 넘어선 ‘극우결집’

    4월 재보선 염두 극우세력 결집 위한 ‘막말화법’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15일 국회에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이 잘 됐어야 했지만 (반민특위가) 결국 국론분열을 가져왔다”고 주장하면서 정치권에 ‘친일 청산’ 프레임 전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앞서 나 원내대표는 14일에도 ”해방 뒤 반민특위로 인해 국민이 무척 분열했던 것을 모두 기억하실 것이다“고 포문을 열었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밝힌 ‘친일 잔재 청산’ 발언에 대한 한국당 측의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 대표의 발언은 국민의 인식과 동떨어진 역사왜곡이자 망언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반민특위, 친일청산 기치 내걸고 221명 검찰 송치 반민특위는 일제 식민지 시대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고자 1948년 설치한 특별위원회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와 친일 경찰의 조직적인 방해로 이렇다할 활동 없이 1년여 만에 와해됐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로 꾸려진 제헌국회는 같은 해 9월 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켰다. 8·15 광복 뒤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인 친일파 척결을 이뤄 내 민족 정기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이 법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전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일제에 협력했거나 항일 독립운동가를 살해·위협한 조선인을 처벌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10월 23일 국회의원들이 추천한 10명의 위원(임기 2년)을 선출했다. 위원장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지낸 김상덕(1891~1956)이, 부위원장에는 훗날 최초의 민선 서울시장이 되는 김상돈(1901~1986)이 뽑혔다. 반민특위는 국회 안에 특별조사위원회(친일파 조사)와 특별검찰(기소·송치), 특별재판소(재판)를 설치했다. 곧바로 특별경찰대를 꾸려 반민족행위자 70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에 나서 이듬해 1월부터 검거에 들어갔다. 모두 559건(221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지역별로는 서울 282건, 경기 32건, 황해 26건, 충남 25건, 충북 26건, 전남 27건, 전북 35건, 경남 50건, 경북 34건, 강원 19건이다. 대표적 친일반민족행위자로는 일제시대 악질기업가이자 화신백화점 소유주였던 박흥식(1901~1994)과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몬 최남선(1890~1957)·이광수(1892~1950), 여제자들에게 정신대 참여를 독려한 김활란(1899~1970) 등이다. ●미 군정·이승만·친일경찰 반발로 1년 만에 유명무실화 그러나 친일청산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우선 1945년 해방 직후 미 군정이 남한 지역을 통치하면서 한국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반민족행위자를 척결할 가장 좋은 시기를 놓쳤다. 미 군정은 남한에 반공국가를 세워 소련으로 대표되는 공산세력의 확장을 막아내려고 했다. 이들은 친일파의 역할에 주목했다. 민족의식 없이 강자에게 의지해 자신의 삶을 영위해 온 이들이라면 미 군정에도 마찬가지로 충성할 것으로 생각해서였다. 친일파의 청산은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일이 돼 버렸다. 또 미 군정은 자신 이외의 어떠한 정부 활동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임정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김구(1876~1949)로 대표되는 임정 세력은 미 군정 규정을 어기고 임정을 사실상의 정부로 간주하려고 해 양측 간 갈등이 컸다. 이 과정에서 미 군정은 일제시대 통치 구조를 부활시키고 친일파를 대거 등용했다. 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이승만(1875~1965) 역시 미 군정의 통치구조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친일파는 이승만 정권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임정 세력은 더욱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정치적 라이벌인 김구 등과의 경쟁에서 우위에 서고자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한 반민특위 활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우선 친일경찰의 상징인 노덕술(1899~1968) 등이 독립운동가 겸 살인청부업자 백민태(생몰연대 미상)를 고용해 반민특위 요인들을 암살하려고 했다. 하지만 백민태가 자수해 미수에 그쳤다. 1949년 6월 국회 부의장 김약수(1890~1964)와 노일환(1914~1982), 이문원(1906~1969) 등 진보성향 의원들이 외국군대(미국·소련) 철수와 남북정치회의 개최를 요구하는 평화통일방안 7원칙을 제시했다. 당시 북진통일론을 주장하던 이승만 정부는 “이들이 남조선로동당(남로당) 공작원과 접촉해 정국을 혼란시키려 했다”며 김약수 등을 체포했다. 이것이 ‘국회 프락치사건’이다.이 사건 직후 시민단체 ‘국민계몽회’ 회원 수백명이 반민특위 사무실에 몰려와 “반민특위에서 암약하는 공산당을 숙청하라”며 시위를 벌였다. 특위에서 서울 중부경찰서에 도움을 청했지만 경찰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특위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항의하고 시위 배후로 지목된 서울시 사찰과장 최운하(생몰연대 미상) 등을 반민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그러자 경찰이 반격에 나섰다.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특경대원 35명을 체포하고 사무실 서류와 집기도 압수했다. 때맞춰 서울시경 9000여명이 반민특위 간부 교체와 특경대 해산을 요구하며 집단 사표를 제출했다. 이승만은 “경찰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는 현실론을 명분삼아 반민특위 압박을 강화했다. ●반민특위 실패로 친일파가 대한민국 지배세력으로 군림 이 때부터 반민특위 활동은 빠르게 위축됐다. 1949년 7월 법무부 장관에서 돌아온 이인(1896~1979) 의원이 반민법 공소시효 단축을 골자로 하는 정부개정안(반민법 2차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이 의원은 독립운동가 출신임에도 “민족분열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며 반민특위에 내내 부정적이었다. 결국 김상적 위원장 등 특조위원 전원이 개정안에 반대하며 사임했다.그나마 특조위에서 구심적 역할을 하던 위원들의 사퇴하자 친일 비호세력을 주축으로 새로운 특위가 구성됐다. 이로써 반민특위 활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기소된 친일 인사 가운데 재판을 마무리한 이는 불과 38명으로, 그나마도 전원이 집행유예 등으로 풀려나 실제 처벌받은 반민족행위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친일파 청산에 대한 국민적 염원에도 당시 이승만 정부의 조직적 방해 때문에 반민특위 활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는 2019년까지도 친일세력이 우리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길을 열어준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4·3 재보궐 선거 노려 극우세력 결집 의도 반민특위 실패는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럼에도 나 대표가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유는 다분히 정략적인 계산이 담겨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4·3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태극기부대’로 불리는 극우 보수세력의 결집을 노려 ‘트럼프식 막말화법’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선거 승리를 위해 제1야당 원내 대표가 왜곡된 역사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표를 모으려는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행동이라는 반응이 많다. 민주당은 “나베 경원”(아베 신조 일본 총리 이름에 나경원 원내대표의 이름을 합친 비난) 등으로 나 원내대표를 비난했다. 윤호중 사무총장은 이날 대전에서 열린 예산정책협의회에서 “이런 망언이 계속되고 있기에 한국당을 극우 반민족당이라고 이야기하고, 나 원내대표 이름이 ‘나베 경원이라는 이야기가 계속되는 것 아니냐”며 “이런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면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했다. 문정선 민주평화당 대변인도 논평을 통해 “(나 원내대표가) 괜히 자위대 행사에 참석한 게 아니었다”며 “한국당 국회의원 나경원은 토착왜구란 국민들의 냉소에 스스로 커밍아웃했다”고 했다. 이어 “국민을 분열시킨 것은 반민특위가 아니라 친일파들이었다”며 “실패한 반민특위가 나경원과 같은 국적불명의 괴물을 낳았다”고 비판했다. 정의당 윤소하 원내대표는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의 훼방과 탄압으로 인해 친일부역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이 한국 현대사의 비극임은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이라며 “(나 원내대표의 발언은) 한국당이 친일파의 후예임을 고백한 것과 진배 없다”고 말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조센징, 꼬레아노 그리고 한국인 - 인천 한국이민사박물관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조센징, 꼬레아노 그리고 한국인 - 인천 한국이민사박물관

    # 이민의 역사 :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 항으로 떠나다. “나두야 가련다. / 나의 이 젊은 나이를 / 눈물로야 보낼거냐.”<박용철, 떠나가는 배 中에서, 1930> 시인 박용철(1904-1938)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국을 떠나야 되는, 떠날 수 밖에 없는 조선 젊은이들의 눈물을 <떠나가는 배>를 통해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나라의 해외 이주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 되었는 데, 재외한인으로서의 첫 해외 이주 공식 기록은 1903년 1월 13일로 남아 있다. 당시 101명의 조선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이민'의 형태가 아니라 ‘계약 노동자’의 신분으로 호놀룰루 항에 도착하였고 이후 1905년까지 약 7,226명의 조선인들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물론 1800년대 후반부터 많은 조선인들이 삶의 터전을 찾아 유랑민의 형태로 만주나 연해주, 러시아 등지로 이주한 비공식적인 기록도 남아있다. 격동하던 20세기 초 조국을 떠나야 했던 우리 민족의 아픔을 기억하는 곳, 인천의 한국 이민사 박물관이다.우리나라의 이민의 역사는 크게 4단계로 나뉠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바로 1860년대부터 한일강제병합이 일어난 1910년까지다. 이 시기는 구한말의 농민, 노동자, 동학 농민 운동에 참가했던 수많은 민중들이 기근, 빈곤, 압정을 피해 만주, 연해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로 경제유민(流民)의 형태로 이주하였다. 이중 중남미로의 이주는 1905년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에네켄 농장의 계약 노동자로 1,033명이 떠난 것이 시작이며, 이들 중에서 300여명이 다시 1921년에 경제난을 피해 쿠바로 재이주한 기록이 남아있다.하지만, 본격적인 재외 한인 이주는 일제 강점기 시기인 1910년부터 1945년까지로 본다. 바로 두 번째 시기다. 이 시기에는 일제로부터 토지와 생산수단을 빼앗긴 농민과 노동자들이 만주와 일본으로 대거 이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난민들과 독립 운동가들이 중국, 러시아,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특히 1931년의 만주사변과 1932년의 만주국 건설을 계기로 일제는 만주 지역에 25만명에 이르는 한인들을 강제로 집단이주시킨다. 또한 일본에는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대규모 한국인들이 광산, 전쟁터로 강제 이주를 하였는데, 1945년 8월까지 약 230만 명이 이주하였다. 이후 일본의 패전이후 한인들이 조국으로 귀환하자 급속히 감소하여 1947년에는 598,507명으로 급감하였다. # 나라 잃은 딸들의 절규, 8만 명이 종군위안부의 이름으로 이중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가 등장한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개시하면서 전선확대에 따른 병력과 일본 본토의 전시산업을 지탱할 노동력 확보가 필요하게 되자 1938년 4월에 국가총동원법을 발표한다. 바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1945년까지 조선인 노동자징발과 학도징용이 이루어졌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 연행된 조선인 숫자만 724,787명에 이르고 여기에 군인, 군속 365,263명을 합하면 조선인 강제연행자 수는 100만 명을 훨씬 뛰어넘는다. 물론 공식적인 기록이어서 실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들이 강제 이주된 것으로 추정된다.그런데 당시 일제는 ‘여성자원봉사대’라는 명목으로 20만 명의 여성을 전시 준비에 동원하였다. 이 중에서 소위 ‘종군위안부’로 강제 동원된 여성이 공식 기록으로만 8만 명에 이른다. 따라서 ‘종군위안부’ 이주 기록은 우리 민족에게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될 해외 강제 이주 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형태로 남아 있다. 재외 한인 이주 세 번 째시기는 1945년부터 1962년까지다. 이 시기에는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발생한 전쟁고아, 미군과 결혼한 여성, 혼혈아, 학생 등이 입양, 가족재회, 유학 등의 목적으로 미국 또는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시기는 1962년부터 현재까지다. 1962년에 한국정부는 남미, 서유럽, 중동, 북미로 집단이민과 계약이민을 시작하였는데, 최초의 집단이민은 1963년 브라질로 103명의 농업 이민자들이 떠난 것이었다. 이후 독일로의 광부, 간호사 이민, IMF 외환위기 시절의 이민, 최근의 취업 이민 등으로 해외 이주의 역사는 계속 이루어져 오고 있다.바로 이러한 재외 한인 이주 역사의 기록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 바로 인천에 위치한 이민사박물관이다. 우리나라 첫 공식 이민의 출발지였던 인천에 2008년 지하 1층, 지상 3층, 연건축면적 4천100㎡ 규모로 만들어진 이민사박물관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100년의 재외 한인들의 고단한 이민 역사를 잘 담아 놓고 있다. <인천 이민사박물관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월미도에 갈 일이 있다면 시간을 내어서라도 한 번쯤은 방문해도 좋다. 역사적인 의미가 풍부한 곳이다. 2. 누구와 함께? - 가족 단위 방문. 3. 가는 방법은? - 지하철 인천역 하차→ 버스 45번 승차→ 해사고등학교 앞 하차 4. 감탄하는 점은? - 생각보다 오래된 이민 역사. 특히 일제 강점기 시절의 강제 동원 역사.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특색있는 박물관으로서 의미가 풍부한 곳인데 비하여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일제 강점기 시절 강제 이주한 우리 민족의 역사. 우토로의 사진들.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박물관 바로 앞이 월미도 관광지구다. 많은 식당과 횟집, 카페들이 있어 먹거리 걱정은 없다.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icmuseum.incheon.go.kr/articles/13446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월미도 관광지구, 차이나 타운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우리 민족의 아픈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지금은 재외국민이 해외에 거주하더라도 한국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 선거를 할 수 있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미일 안보논리의 희생양 오키나와… 주민투표까지 묵살당해

    미일 안보논리의 희생양 오키나와… 주민투표까지 묵살당해

    日 0.6% 땅 미군기지 74% 몰려 있는 곳 70년된 후텐마, 위험한 비행장으로 악명 이전 추진·취소 번복… 24년째 지지부진 주민 72% 대체지 헤노코 매립 반대 투표‘이것이 민주주의 국가인가.’ 지난달 26일 아침 일본 아사히신문에는 다소 격한 제목으로 사설이 실렸다. 다음날 도쿄신문도 사설을 통해 ‘민주주의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일갈했다. 두 신문이 공통적으로 가리킨 곳은 일본 정부였다. 아베 정권이 지난달 24일 실시된 오키나와현 주민투표 결과를 짓뭉개고 미군 해병대 비행장 건설 공사를 강행키로 한 데 대한 비판이었다. 연간 1000만명이 찾는 짙푸른 쪽빛바다 상하(常夏)의 땅. 사계절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 아래 피로 물든 역사를 간직한 땅. 전투기들이 뜨고 내릴 활주로 건설을 둘러싼 오키나와의 갈등이 점점 더 고조되고 있다. 일본 전체의 0.6%밖에 안 되는 땅에 주일미군기지의 74%가 집중돼 있는 오키나와. 투명한 바다에 잿빛 토사를 들이부어 군사기지를 만들고 있는 정부에 맞서 주민들은 필사의 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것은 긴 세월 본토로부터 받아 온 차별과 핍박에 대한 분노의 외침이기도 하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 갈등의 과거와 현재를 문답으로 알아본다. -사안의 핵심은 무엇인가. “기노완시의 ‘후텐마’라는 지역에 있는 70년 이상 된 미군기지를 없애고 이를 북서쪽 해안지대 ‘헤노코’(나고시)로 이전하는 것을 둘러싼 문제다. 일본 정부가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말 기지 이전을 위한 해안 매립공사를 시작하면서 대립이 한층 격화됐다.” -오키나와에 대해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다. “오키나와는 원래 ‘류큐’라는 이름의 독립된 왕국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1609년 이곳을 정복했고, 메이지유신 이후인 1879년에는 ‘오키나와’라는 이름으로 자국 영토에 정식 편입시켰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1945년 4월 미군이 상륙한 이후 단 3개월간의 지상전투에서 주민 9만 4000명을 포함, 총 2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이 미군에 협력할 것을 우려해 집단자결을 강요하기도 했다. 종전 후 27년간 미군의 군정통치를 받은 뒤 1972년 5월 일본에 반환됐다.” -후텐마 기지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비행장’으로 통한다는데, 왜 그런가. “미군은 1945년 오키나와를 점령하자마자 일본 본토 공습을 위해 대형 폭격기 등 이착륙이 가능한 활주로를 건설했다. 전쟁 중에 급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민간인 거주지와의 거리 등 주변여건 고려는 생략됐다. 종전 이후 오키나와를 북태평양의 군사 요충지로 삼은 미군은 면적 4.8㎢의 후텐마 기지를 그대로 유지했다. 현재 가장 큰 문제는 이곳이 오키나와현에서 인구밀도가 특히 높은 기노완시 주택가에 인접해 있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소음은 물론이고 때때로 일어나는 군용기 사고 등에 불안을 호소해 왔다. 그러나 대체부지와 비용 등 문제로 진전은 없었다.” -1995년에 큰 사건이 일어나면서 기지 이전 논의가 활발해졌다던데. “그해 9월 주일미군의 12세 소녀 성폭행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당시 미군은 범인 3명의 일본 측 신병 인도를 거부했고, 주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이는 후텐마 기지 폐쇄 운동으로 이어졌다. 결국 1996년 4월 당시 하시모토 정권은 기지를 5~7년 내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로 미국 정부와 합의했다.”-그래서 결정된 곳이 헤노코인가. “1996년 12월 미일 정부는 오키나와섬 동쪽 앞바다 헤노코 지역을 대체부지로 선정했다. 하지만 오키나와 주민들은 헤노코로 옮기더라도 안전이 위협받기는 마찬가지이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안 산호초 지역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반대했다. 미군기지를 오키나와 바깥으로 옮겨 달라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미일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1999년 12월 ‘헤노코 이전’을 최종 확정했다. 이후 지난한 과정을 거쳐 2014년까지 ‘헤노코 연안지역 매립→V자형 활주로 건설’을 완료하기로 2006년 확정했다.” -지난해 말에야 매립이 시작된 것은 왜인가. “2009년 9월 민주당 정부가 출범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당시 민주당의 선거공약은 ‘후텐마 기지의 오키나와 바깥 이전’이었다. 하지만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미국의 반대와 본토의 우려가 커지자 결국 8개월 만에 공약을 번복했다. 환호했던 오키나와 주민들은 실망과 분노로 바뀌었다.” -2012년 12월 아베 내각이 다시 들어서면서 기지 이전에 속도가 붙은 건가. “그렇다. 5년 만에 다시 집권한 아베 신조 총리는 ‘미국 올인’이라는 일본 보수 외교의 기조를 한층 강화했다. 지지부진했던 헤노코 이전을 2022년까지 완료하기로 미국 정부와 합의했다. 오키나와에는 낙후된 경제의 지원이라는 당근을 제시했다.”-오키나와현도 초기에는 찬성을 했다던데. “2013년 말 당시의 오키나와현 지사는 경제발전을 조건으로 내건 정부 방침을 수용, 헤노코 앞바다에 대한 토사 매립을 승인했다. 그러나 1년 만인 2014년 12월 ‘헤노코 이전 강력 저지’를 내건 오나가 다케시가 지사에 당선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오나가 지사는 2015년 10월 전임자가 했던 연안부 매립 승인을 전격 취소했다. 정부는 ‘승인 취소는 위법’이라며 법원에 제소했다. 이듬해 최고재판소는 정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지난해 오키나와현 지사의 사망이라는 급변 요인이 있었다. “췌장암 수술을 받았던 오나가 지사가 지난해 8월 세상을 떴다. 생전에 “헌법이 국민에게 약속하는 자유, 평등,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똑같이 보장되고 있는가”라고 외쳤던 그의 죽음이 주민들에게 안겨 준 상실감은 매우 컸다. 반면 아베 정부는 이를 기지 이전 실현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보고 여당 측 인사를 후임 지사에 당선시키려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9월 치러진 선거에서 전임 오나가 지사의 유지를 계승한 다마키 데니가 당선됐다. 아베 정권은 충격을 받았지만, 오히려 이를 계기로 공격적 행보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지난해 12월 시작된 헤노코 연안 매립 강행이다.”-그러면 지난달 24일 치러진 오키나와 주민투표는 무엇인가. “정부의 전방위 강공 드라이브에 다마키 지사는 ‘주민투표 실시’로 맞섰다. 오키나와현 조례를 만들어 헤노코 연안 매립공사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물었다. 결과는 ‘매립 반대’(43만 4273표)가 72% 이상으로 나타났다. 다마키 지사는 지난 1일 아베 총리에게 투표 결과를 전달하고 공사 중지를 재차 요청했다.”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아베 정부는 투표 이전부터 단순한 현의 조례로 이뤄지는 투표결과는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혀 왔다. 아베 총리 본인이 투표 다음날 “결과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만, 기지 이전을 더 늦출 수는 없다”고 거부의사를 명확히 했다. 맨 앞에서 인용한 아사히신문 등의 사설은 이렇게 민의를 무시하는 데 대한 비판이었다.”-아베 정부에 새로운 난관이 나타났는데. “이른바 ‘마요네즈 지반’의 문제다. 활주로가 놓여질 매립 예정지의 40%가 연약지반인 것으로 드러났다. 방위성은 해저에 7만 7000개의 모래말뚝을 박는 공사를 추가로 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를 위한 설계변경에는 오키나와 지사의 승인이 필요하다. 다마키 지사가 받아들일 리가 없다. 새로운 법정 공방을 예고하는 부분이다. 공사의 파행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아사히신문 사설은 이렇게 적고 있다. “기술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현재 계획의 파탄은 분명하다. 공사의 장기화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헤노코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후텐마 기지의 고착화를 가져올 것이다. 아베 정권은 신속히 공사를 멈추고, 오키나와현 및 미국 정부와 협의에 들어가야 한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모바일 픽!] 2차대전 희귀사진, 책으로 부활…“역사에 숨결을”

    [모바일 픽!] 2차대전 희귀사진, 책으로 부활…“역사에 숨결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촬영된 보기드문 컬러사진 일부가 책으로 부활한다. 미 CNN 등 외신에 따르면, 영국 런던 임페리얼전쟁박물관(IWM)은 소장 중인 2차대전 당시 희소 컬러사진을 편집해 오는 4월 책으로 출간한다. 책의 제목은 ‘워 인 더 에어: 더 세컨드 월드 워 인 컬러’(War in the Air: The Second World War in Colour)로,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치러진 2차대전 중 공중 전투에서 활약한 연합군의 조종사나 군용기 등을 보여준다.이들 사진은 유럽과 지중해에서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 그리고 미국의 공군이 수행한 수많은 임무를 담고 있다. 그중에는 100번째 임무를 완수하고 무사히 귀환한 영국 공군의 당시 폭격기 랭커스터 주위에 부대원들이 모여들어 축하하는 모습부터 1943년 북아프리카 튀니지 사막에서 이륙을 기다리는 영국 공군의 전투기 키티호크의 모습도 눈에 띤다.책의 저자인 이안 카터 IWM 수석 큐레이터는 “2차 대전 당시 촬영된 컬러사진은 희소해 필름도 거의 유통되지 않았으며 현상 비용도 높았다”며 책의 출간이 쉽지 않은 과정이었음을 시사했다. 또 “각 사진은 박물관의 복원 담당자에 의해 색채의 정확성 등을 살리기 위해 세심한 처리 작업을 거쳤으며 오랜 기간 동안 색이 바랬던 세세한 부분까지도 재현됐다”고 덧붙였다. 한편 IWM은 2차대전 당시 촬영한 사진 약 1100만 장을 소장하고 있으며, 2017년에는 ‘더 세컨드 월드 워 인 컬러’(The Second World War in Colour)라는 제목의 책도 출간한 바 있다.사진=IWM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해방 뒤 경찰간부는 다 친일파?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

    해방 뒤 경찰간부는 다 친일파?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

    광복군 출신 장동식·백준기·송병철 등 다수경찰청, 독립운동가 경찰 유공자 추진‘순사’로 대표되는 일제 강점기 경찰은 3·1운동 당시 민초들을 잡아들이는 등 암울했던 시대에 부역했다. 당시 조선인 경찰 다수는 광복 뒤 미군이 진주하자 미군정 경찰로 재차 채용됐다. 무장 독립투쟁의 선봉에 섰던 약산 김원봉을 해방 뒤 체포·고문했던 친일 경찰 노덕술(1899~1969)이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우리 근·현대사에서 ‘경찰=부역’ 이미지가 있었다. 실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따르면 해방 직후인 1946년 기준으로 서울시내 10개 경찰서장 가운데 9명이 일본경찰 출신이었다. 나머지 1명은 군수 출신이다. 하지만 경찰청은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해방 뒤 경찰을 이끌었던 간부들도 많았다”며 3·1운동 100주년인 올해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관 32명을 발굴해 알리고 있다. 26일 경찰청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관의 면면을 보면 광복군 소속으로 일제와 싸우다 해방 이후 경찰관이 된 이들이 많다. 경찰 최고위직까지 오른 장동식 치안총감이 대표적이다. 그는 1943~1945년까지 광복군 정보장교로 복무하면서 일본군 내 한국 병사들을 탈출시킨 뒤 광복군에 합류시키는 역할을 했다. 광복 이후 순경으로 입직했다. 1954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1960년 총경으로 다시 임용된 뒤 1971년 6~12월 내무부 치안국장을 지냈다.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기도 했다.또 광복군에서 적(敵) 정보수집 등의 임무를 수행했던 백준기 경위, 광복군에 입대해 항일활동을 하다 임시정부에서 근무한 송병철 순경, 천호인 등도 광복군 출신 경찰관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비밀결사 조직이나 학생단체 등에서 활동하다 해방 이후 경찰관이 된 경우도 있다. 노기용 총경은 1920년 항일 비밀결사 조직 ‘군사주비단’에 가담해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했다. 1923년 군자금 모금 계획 도중 일제에 체포돼 7년을 감옥에서 보내기도 했다. 노 총경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1924년부터 학생단체를 조직해 항일 학생운동을 하고 일본 동경에서 신간회 활동을 했던 박노수 총경, 경찰이 되기 전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활동 중 체포되어 1년 복역했던 최철룡 경무관 등도 해방 이후 경찰조직에 몸 담았다. 안창호 선생의 조카딸이기도 한 안맥결 총경, 초대 수도여자경찰서장이었던 양한나 경감, 부산여자경찰서장을 지낸 이양전 경감도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거나 항일단체에서 활동했다. 경찰청은 자체적으로 발굴한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 가운데 서훈을 받지 못한 경찰에 대한 독립유공 심사를 보훈처에 요청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그때 그날의 함성과 눈물 따라 가볼까

    그때 그날의 함성과 눈물 따라 가볼까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된 해다. 순국선열들의 독립정신과 활약상을 되새길 전국의 역사적 장소들이 후손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관광공사가 독립운동의 흔적이 짙게 배인 7개 지역을 3월에 가볼 만한 곳으로 추천했다. 우리 근대사가 기억하는 선조들의 뜨거운 함성과 눈물에 귀 기울여볼 때다.① 서울 독립문… 역사박물관·경희궁 등 일제강점기 흔적 서울에는 도심 곳곳에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등 시대별로 서울의 변화상을 전시한다. 특별전 ‘딜쿠샤와 호박목걸이’, ‘서울과 평양의 3·1운동’도 열린다. 박물관 옆 경희궁은 아픈 역사가 서린 궁궐이다. 인현왕후와 혜경궁홍씨 등이 거주했던 궁은 일제가 집중적으로 파괴한 대상이었다. 경희궁을 나서면 강북삼성병원 내에 있는 경교장이 금방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이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도심재생예술을 입은 돈의문박물관 마을, 아관파천의 아픔이 서린 정동길 등으로 시간 여행이 이어진다. 3·1운동 열사들이 옥고를 치른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독립선언서를 전 세계에 타전한 앨버트 테일러가 살던 행촌동 딜쿠샤 등을 함께 둘러보면 좋다.② 서울 망우리공원… 만해 한용운·위창 오세창 넋 기린 곳 망우리공원은 뜨거운 역사를 품은 야외박물관이다. 만해 한용운, 위창 오세창, 호암 문일평, 소파 방정환 등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잠들었다.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연보비를 읽다 보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지난해 9월엔 ‘유관순열사 분묘합장표지비’가 세워졌다. 이곳은 20년 전까지 망우리공동묘지로 불렸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약 83만 2800㎡(25만여평) 규모로 문 열어 1973년까지 운영됐다. 2만 8500기가 넘는 무덤이 있었지만 꾸준히 이장해 현재 7400여기가 남았다. 이장으로 생긴 빈자리에는 나무를 심었고 울창한 생태 공원으로 변신했다. 숲이 우거져 고즈넉한 곳에 5.2㎞ ‘사색의 길’도 조성됐다. 망우리공원에는 화가 이중섭, 시인 박인환, 소설가 계용묵, 조각가 권진규 등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 묘지도 있다.③ 충북 괴산 홍범식 고택… 1919년 1500명의 함성 생생히 독립운동가 홍범식은 대한제국이 1910년 한일병탄으로 국권을 빼앗기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결했다. 그는 아들에게 “죽을지언정 친일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마라”는 유서를 남겼다. 아버지의 유훈을 받은 소설가 벽초 홍명희는 고향 괴산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 홍범식 고택에 들어서면 홍명희가 3·1운동을 준비했다는 사랑채를 만난다. 그의 주도 아래 1919년 3월 19일 괴산산막이시장 거리에서 1500여명이 목 놓아 만세를 외쳤다. 정면 5칸, 측면 6칸의 ‘ㄷ자형’ 안채는 조선 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고택을 둘러봤다면 진주성대첩의 명장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 괴산호의 절경이 아름다운 연하협구름다리 등을 함께 둘러봐도 좋다.④ 충남 천안 유관순 생가와 7개 전시관 있는 독립기념관 천안에는 독립운동의 함성과 결의를 되새길 수 있는 곳이 여럿 있다.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사를 살펴볼 수 있는 독립기념관이 대표적이다. 높이 51m ‘겨레의 탑’과 동양 최대 기와집인 ‘겨레의 집’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우리 역사를 시기별로 전시한 7개 전시관은 다양한 문헌자료와 체험시설로 방문객을 맞는다. 꼼꼼히 둘러보려면 5시간 정도 걸리니 미리 동선을 짜서 가는 것이 좋다. 주변 숲과 호수가 어우러진 캠핑 공간에는 꼬마열차, 어린이방 등 편의시설이 있어 한나절 가족 소풍지로도 손색이 없다.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기억할 수 있는 병천에는 유관순 열사 생가가 있다. 유관순 열사가 체포돼 옥사할 당시 전소된 가옥과 헛간을 복원했다. 가까운 곳에 그의 영정을 모신 기념관이 있다.⑤ 전남 완도 소안도 항일운동기념관… 항일운동의 성지 완도 본섬에서 남쪽으로 한참 떨어진 소안도에는 1년 내내 태극기가 휘날린다. 함경 북청, 부산 동래와 함께 항일운동의 3대 성지로 불릴 만큼 치열한 저항정신을 보여준 땅이다. 소안도에 가려면 완도 화흥포여객선터미널에서 하루 10~12회 운항하는 배편을 이용해야 한다. 여객선 이름부터 대한호, 민국호, 만세호다. 소안항일운동기념관에 가면 이곳이 어떻게 항일운동 성지가 됐는지 알 수 있다. 당사도등대 습격사건과 사립소안학교 설립 등을 알게 된다. 인구 6000여명밖에 안 되는 섬에서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가 20명, 기록에 남은 독립운동가가 89명에 이르는 사실도 소안도가 항일운동의 성지였음을 뒷받침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림과 몽돌해변 등도 소안도를 방문해야 할 이유다.⑥ 경북 안동 경북도독립운동기념관… 독립지사의 투쟁사 안동은 시·군 단위로 전국에서 독립 유공자(약 350명)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1894년 갑오의병부터 1945년 광복까지 줄기차게 이어진 안동과 경북 독립지사의 투쟁사를 문헌과 자료, 영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유학이 뿌리 깊은 지역이지만 의병활동이 실패한 뒤 신학문을 받아들인 혁신유림이 생겨났다. 이들은 국권을 빼앗긴 후 만주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일제의 고문시설인 벽관 체험 등 체험 프로그램이 많아 흥미롭다. 기념관을 나서면 독립운동 성지로 알려진 내앞마을이다.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일송 김동삼 생가 등이 있다. 안동의 명소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으로 임청각도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생가다. 가까운 월영교의 밤경치도 놓치면 아깝다.⑦ 경남 밀양 의열기념관…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도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밀양은 영화 ‘암살’을 통해 재조명된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의 고향으로 항일 독립운동 요람이다. 의열단은 식민지배자와 민족반역자 처단, 조선총독부 등 식민지배기관 파괴에 집중했다. 의열단원 최수봉이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고,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는 등 모든 투쟁의 배후에 김원봉이 있었다. 김원봉이 태어난 집터에 지난해 의열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단정하고 아담한 건물로 들어가면 영상과 자료들로 그의 삶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일대는 밀양의 만세운동으로부터 태극기 변천사 등을 살펴볼 수 있는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로 꾸며졌다. 이 지역 최초 만세운동이 일어난 밀양 관아지와 보물 147호 밀양 영남루도 독립운동과 연결되는 장소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70년 전통의 러시아 음악의 대가 ‘보로딘 콰르텟’, 5월 15일 예술의전당서 공연

    70년 전통의 러시아 음악의 대가 ‘보로딘 콰르텟’, 5월 15일 예술의전당서 공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악 4중주단 중 하나인 보로딘 콰르텟이 오는 5월 15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내한공연을 펼친다. 올해로 창단 74년째를 맞는 보로딘 콰르텟은 1945년 모스크바 음악원 4명의 학생으로 구성되어 결성되었고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창단 멤버는 남아있지 않지만, 역대 멤버들 모두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으로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다. 보로딘 콰르텟의 현재 멤버는 루벤 아하로니안(제1 바이올린), 세르게이 로모프스키(제2 바이올린), 이고르 나이딘(비올라), 블라디미르 발신(첼로)이다. 보로딘 콰르텟은 모차르트, 베토벤에서 쇼스타코비치, 차이코프스키, 스트라빈스키지까지 폭넓은 실내악 레퍼토리와 통찰력 있고 깊은 해석으로 세계적인 명성과 권위를 얻었다. 특히 쇼스타코비치는 콰르텟의 감독을 역임했던 긴밀한 인연으로 그의 실내악곡과의 연관성은 더욱 특별하다. 쇼스타코비치 실내악 사이클은 비엔나, 취리히, 프랑크푸르트 등 전 세계에서 연주되었으며 15곡으로 구성된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 전곡 음반은 앙상블의 최고 명연주로 꼽히고 있다. 이들은 창단 이후 환경과 인식의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음색과 탁월한 테크닉, 깊이 있는 음악을 계승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육과정을 통해 음악에 대한 변함없는 통찰력과 지속력으로 보로딘 콰르텟 고유의 미션과 비전을 이어나가고 있다. 음악에 대한 앙상블의 열정은 보로딘 콰르텟의 정기 공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스비아토슬라브 히리터, 유리 바쉬메트, 마이클 콜린스, 알렉세이 보로딘, 마리오 부르넬로 등 다른 저명한 음악가들과 협연하며 끊임없이 레퍼토리를 연구, 확장해 나가고 있으며 2005년 첫 음반 발매를 시작으로 레코딩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18세기 현악 4중주에 큰 영향을 끼친 곡 중 하나인 하이든의 현악 4중주 Op. 33 No. 5를 비롯하여 쇼스타코비치 현악 4중주 No. 9, 차이코프스키 현악 사중주 No.1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다. 2월 27일부터 예술의전당 유료회원을 대상으로 선오픈을 시작했으며, 일반 티켓은 3월 5일 11시부터 예술의전당 홈페이지와 인터파크 티켓, Yes24 공연을 통해 구매 가능하다. 보로딘 콰르텟 내한공연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예술의 전당 홈페이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미경 은평구청장 “3·1운동 100주년, 새로운 100년 여는 희망과 화합 꿈꾼다”

    김미경 은평구청장 “3·1운동 100주년, 새로운 100년 여는 희망과 화합 꿈꾼다”

    “3·1 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에 이종열 애국지사와 독립유공자 가족을 모실 수 있고 그날을 되새길 수 있어 기쁩니다. 이번 기념식으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 새로운 100년을 시작을 여는 희망과 화합이 만들어지길 바랍니다.”지난 26일 오전 10시반 서울 녹번동 은평구청 은평홀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식 ‘3·1운동, 그날의 함성’에서 김미경 은평구청장이 밝힌 소망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순국선열들의 헌신을 기억하기 위해 은평구와 광복회서울시지부은평구지회가 함께 마련한 이번 행사에서 김 구청장은 지역의 유일한 생존 독립운동자인 이종열 애국지사(96)에게 독립유공자 명패와 100주년 기념 배지를 전달했다. 1945년 중국 호북성, 신점진에 주둔하던 일본군에서 탈출해 항일운동을 폈던 이종열 지사는 “일제 시대 군사 훈련과 일본군 입대부터 광복 운동에 이르기까지 지나간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국민들이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 역사와 정신을 잊지 않고 기억해주길 바란다”는 소감을 밝혔다. 김 구청장, 조동현 광복회서울시지부은평구지회장, 은평구 청소년 및 청년 대표 등 400여명의 참석자들은 이날 행사에서 만세 삼창을 외치며 독립을 위해 투신했던 선조들의 뜨거운 의지를 다시 확인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글로벌 In&Out] 문희상 의장 발언과 한일 관계/기미야 다다시 도쿄대 교수

    [글로벌 In&Out] 문희상 의장 발언과 한일 관계/기미야 다다시 도쿄대 교수

    2018년 10월 초순까지는 김대중·오부치 게이조의 파트너십 선언 20주년 덕분에 그리 나쁘지 않았던 한일 관계가 10월 30일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 이후 레이더 문제, 화해치유재단 해산 등 ‘악재’가 겹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국면에 빠졌다. 새 ‘악재’로 문희상 국회의장의 ‘일왕 사과 발언’도 등장했다. 일본 정부는 문 의장에게 사과를 요구했으나 문 의장은 ‘적반하장’이라며 일본의 자세를 비난하고 거부했다. 최근 일본에선 한국에 대한 여론이 북한에 대한 여론보다 더 나쁜 것 같다. 일본 사회의 대한국 여론 악화를 한국 정부가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한국 사회도 둔감해진 듯하다. 우선 문 의장 발언에는 중대한 사실 오인이 있다. 쇼와 천황을 ‘전범’이라고 했지만, 쇼와 천황은 전범으로 지정되기는커녕 천황의 지위를 유지했다. 미·소 냉전이 격화하면서 일본의 정치적 안정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 천황제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천황은 ‘전범의 아들’이 아니다. 한국 언론은 으레 일본을 ‘전범 국가’, 일본 기업을 ‘전범 기업’이라고 부른다. 이런 말은 중국에서조차 거의 쓰이지 않고 한국과 북한에서만 사용될 정도다. 그런 표현을 당연하게 사용하는 것은 그만두는 게 좋다. 문 의장 발언에 대한 일본의 반응에도 이성을 결여한 측면이 있다. 일본 국민에게 천황은 ‘특별한 존재’다. 그러나 한국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일본 국민과 같은 시각을 한국에 요구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항일독립운동 영웅으로 존경받는 안중근, 김구가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로 취급되는 것을 한국이 비난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 의장 발언은 ‘일왕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피해자가 납득하고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 필요하다’는 일본의 진지함을 시험해 본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천황을 모욕했다’는 비판은 본질에서 빗나간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전에도 몇 차례 역사 문제 해결을 위해 ‘천황의 역할’을 기대하는 발언이 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직후 ‘일왕이 방한하려면 항일독립운동가에게 사과하라’는 식의 발언이 있을 때마다 천황의 방한 가능성은 더욱 줄었다는 역설이 있다. 한국 내 지일파가 ‘천황 역할’을 기대하는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역시 ‘천황은 정치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 헌법의 기본 이념이다. 그 점은 한국이 이해해야 한다. 영토·역사를 놓고 한일 관계는 더욱 격랑에 휩싸일 것이다. 우선은 상대방의 말꼬리를 잡아 갈등을 고조시킬 게 아니라 발언의 진의를 간파하고 전달해야 한다. 정치인들도 오해를 사는 발언을 삼갔으면 한다. 문 의장의 발언을 둘러싼 한일 관계에서 새삼 그런 중요성을 절감했다. 동료로부터 한일 관계는 도대체 왜 이러냐는 질문을 받았다. 한일 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적 힘을 키우는 데 노력해 온 필자로선 매우 아픈 말이었다. “서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관계가 나빠도 그다지 곤란한 것은 없다”면 어쩔 수 없다. 분명히 한반도 현상 인식이나 바람직스러운 모습에 대한 한일 간 괴리가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정말 그래도 좋은가. 2차 북미 정상회담으로 한반도 정세가 크게 움직일 것이다. “한일 관계쯤이야” 혹은 “관계 악화 책임은 상대방에 있다”고 포기해도 되는가. 지금이야말로 ‘한국에 있어서 일본’, ‘일본에 있어서 한국’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때가 아닌가. 1945년 이후 한일 관계를 떠받쳐 온 선인들은 지혜를 짜내 고민해 왔다. 나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통절한 외침이다.(일본인 필자의 요청으로 일왕을 ‘천황’으로 표기하니 양해 바랍니다.)
  • [3·1운동 100주년 맞은 지자체들] 은평선 애국지사 명패 드리고

    [3·1운동 100주년 맞은 지자체들] 은평선 애국지사 명패 드리고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서울 은평구가 나라에 헌신한 애국지사의 발자취를 재조명한다. 은평구는 26일 은평구청 은평홀에서 열리는 ‘3·1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식’에서 지역 독립운동가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이종열(96) 애국지사를 초청해 독립유공자 명패를 전달한다고 25일 밝혔다. 1945년 일본군에 강제 입대한 이종열 지사는 일본군을 탈출한 뒤 광복군 전방 공작원으로 항일 활동에 투신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진관동에서는 다음달 5일까지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이 독립운동 당시 사용한 태극기를 구파발역과 백초월길 등 주요 도로에 게양해 ‘진관사 태극기 거리’를 조성한다. 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서는 26일 백초월 스님의 항일 정신을 기리는 기획전 ‘3·1운동과 백초월’을 열어 스님의 유품과 3·1운동, 임시정부와 관련된 유물, 이종열 지사의 활동 자료 등을 전시한다. 김미경 은평구청장은 “독립운동의 역사와 지역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재조명해 구민들의 역사의식을 높이고 순국선열의 숭고한 희생을 오래 기억하겠다”고 밝혔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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