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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년간 숨겨진 ‘시크릿 원더우먼’…만화 작가 조이 험멜 [김정화의 WWW]

    70년간 숨겨진 ‘시크릿 원더우먼’…만화 작가 조이 험멜 [김정화의 WWW]

    “너무나 영광스러워요. 정말 믿을 수가 없어요.” 2018년, 미국 최대 규모의 대중문화 박람회인 샌디에이고 코믹콘 인터내셔널의 주인공은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90대 노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조이 험멜(결혼 후 이름 조이 머치슨 켈리). 최근까지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는 1940년대 DC코믹스의 최고 인기 만화 ‘원더우먼’을 쓴 고스트라이터(대필 작가)였다. 그가 지난 5일(현지시간)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DC코믹스가 홈페이지에 올린 추모 글을 이랬다. “‘원더우먼’ 시리즈를 쓴 최초의 여성으로서 험멜은 다이애나(원더우먼의 이름)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을 도왔다. 그는 오늘까지도 발자취를 따르는 수백명의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다.”원더우먼 작가 조수로 시작…3년여간 대본 70편‘21세기 최고의 여성 히어로’로 꼽히는 원더우먼을 만드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 험멜은 한번도 만화작가를 꿈꾼 적이 없다고 한다. 1924년 미국 뉴욕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던 부모님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밝고 야심찬 아이였다. 버몬트주에 있는 미들베리 칼리지에 입학할 만큼 성적도 우수했지만, 부모의 이혼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교육을 마치기로 결심한 그는 여성 전문 직업 교육기관이었던 캐서린 깁스 스쿨로 진학하는데, 여기서 일생의 인연을 만난다. 그 주인공은 바로 윌리엄 몰턴 마스턴(1893~1947). 후에 거짓말 탐지기를 개발한 것으로도 유명한 심리학자 마스턴은 험멜이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던 심리학 수업의 강사이자 원더우먼의 만화 대본 작가였다. 당시 수업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던 19살의 험멜은 마스턴의 제의에 그의 밑에서 조수로 일하게 된다.1941년 만화잡지 ‘올 스타 코믹스’ 8호에 처음 등장한 원더우먼은 이듬해 1월 ‘센세이션 코믹스’ 창간호 표지를 장식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슈퍼맨 등 남성 일색인 히어로 세계에서 근육질의 탄탄한 몸을 가진 강한 여성 히어로의 등장은 엄청난 충격과 놀라운 기쁨을 선사했고, 독자가 1000만명에 달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1940년대 역사적 상황과도 맞물린다. 가정과 사회를 책임지던 남성이 전쟁에 끌려가며 여성이 이들을 대신해야 했고, 여성도 남성과 같다는 인식이 퍼지던 때였다. 험멜이 원더우먼 대본을 쓴 첫 여성 작가였다는 저도 이런 상황과 궤를 같이 한다. 우연한 기회로 참여하게 됐지만, 마스턴과의 원더우먼 작업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중에 한 인터뷰에서 험멜은 “마스턴은 ‘여성들이 자유롭게 세상 밖으로 나가고, 공부하고, 좋아하는 것을 찾아 할 권리가 있다는 걸 안다’는 얘기를 자주했다”고 돌아봤다. 당시만 해도 급진적이었던 여성인권, 여성의 주체성은 대본 작업실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주제였다.처음엔 보조 역할만 하던 험멜은 몇 개월 뒤 마스턴이 소아마비에 걸리자 곧 단독 작가로서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솔로로 데뷔한 첫 작품은 1945년 ‘원더우먼과 비너스의 날개 달린 처녀들’(Wonder Woman and winged maidens of Venus). 원더우먼이 제3차 세계대전을 막기 위해 날개 달린 전사들의 도움을 구한다는 내용이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3~4년간 최소 70편의 대본을 썼다. DC코믹스는 “험멜이 참여한 시간은 길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의 작업은 초기 원더우먼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봤다. 대필 작가로 숨겨졌다 70년 만에 이름 알려하지만 이 같은 사실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어떤 작업도 ‘조이 험멜’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모든 원더우먼 만화는 마스턴의 필명이었던 ‘찰스 몰튼’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됐다. 험멜은 1947년 마스턴의 사망, 그리고 첫 번째 남편 데이비드 머치슨과의 결혼 등으로 대본 작업을 그만뒀다. 결혼 후엔 증권 중개인으로 제2의 경력을 쌓았고 수십년간 의붓딸과 두 아들을 양육하는 데 힘썼다. 집에는 옛날 작업물이 바인더 두 개에 꽉꽉 차있었고 두 아들은 이를 즐겨 읽었지만 이는 과거에 불과했다. 험멜은 손주들에게 원더우먼 얘기를 했지만, 아이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수십년간 아무도 몰랐던 조이 험멜이라는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건 불과 6년 전인 2014년, 하버드대 역사학 교수 질 르포어가 책 ‘원더우먼 허스토리’(원제 ‘The Secret History of Wonder Woman’)를 펴내면서다. 페미니즘의 기원과 변천을 꾸준히 연구한 르포어는 그 과정에서 원더우먼이라는 ‘잃어버린 고리’를 발견하고, 마스턴의 편지와 기록물 등을 통해 험멜에게까지 가 닿았다. 르포어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험멜은 당시 거의 완전히 잊혀졌다. 나는 사람들이 그를 찾으려고 애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며 “내가 직접 전화를 걸어 ‘당신이 1940년대 원더우먼을 쓴 조이 험멜이냐’고 묻자, 그는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고 전했다. 르포어의 인터뷰 제안에 험멜은 몹시 기뻐하며 놀랐다고 한다. “강력한 페미니즘 메시지…후대에 엄청난 영감”세월을 거치며 원더우먼의 모습과 그를 둘러싼 평가는 양분됐다.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위해 싸우는 영웅으로 주목받았지만 쇠사슬이나 재갈 같은 속박 장면이 너무 잦아 비난받았고, 큰 가슴 등 여성의 신체를 지나치게 부각한다는 점에서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불멸의 캐릭터로 살아남은 건 그 안의 명백한 메시지 때문이다. 원더우먼은 1970년대 미국 페미니즘의 물결과 함께 여성운동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당대 최고 유명한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이 만든 여성 잡지 ‘미즈’의 1972년 창간호 표지를 장식한 것도 원더우먼이었다. 제호 아래에는 ‘원더우먼을 대통령으로’라는 문구가 적혔다. 스타이넘은 “어린 시절 원더우먼을 읽고 자랐는데, 1940년대 쓰인 이야기에 이렇게 강력한 페미니즘 메시지가 있는 게 놀랍다”고 말했다. 스미소니언 박물관은 원더우먼에 대해 “놀라운 힘과 마법 장치로 무장한 아마존 공주는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여성 슈퍼 히어로로 깊은 문화적 영향을 미쳤다”며 “이 캐릭터는 동정심(compassion)과 힘(might)의 강력한 조합으로 후대에게 영감을 준다”고 평했다.물론 그 원더우먼을 만든 일등공신 험멜의 역할 역시 결코 작지 않다. 작가 겸 만화 편집자인 아니나 베넷은 “험멜은 무엇보다 진정한 페미니스트 작가였고, 그의 이야기엔 여성의 권리에 대한 메시지가 있다”며 “그가 계속 글을 썼으면 원더우먼은 다른 시리즈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르포어의 책으로 말년에야 유명해진 험멜은 94살이던 2018년 샌디에이고 코믹콘에 난생처음 참여하고, ‘만화계의 아카데미상’으로도 불리는 아이스너상(Eisner Awards)에서 ‘빌 핑거 상’을 받았다. 주목받지 못한 작가들을 위한 상이다.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조이 험멜은 누구 · Joye Evelyn Hummel (결혼 후 조이 머치슨 켈리 Joye Murchison Kelly)1924 미국 뉴욕 롱아일랜드 출생1944 캐서린 깁스 스쿨 졸업1944~1947 ‘원더우먼’ 집필2018 샌디에이고 코믹콘에서 빌 핑거 상 수상2021 미국 플로리다주 윈터헤이븐 자택에서 사망
  • 창원시, 국립현대미술관과 ‘문신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 업무협약 체결

    창원시, 국립현대미술관과 ‘문신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 업무협약 체결

    창원시(시장 허성무)는 14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2022년 문신(1922-1995)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 공동주최를 위한 상호협력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창원 출신 조각가 문신의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은 2022년 상반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릴 예정이다. 시는 이번 협약으로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각가 문신 관련 모든 작품과 자료를 국립현대미술관에 공유한다. 이를 바탕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은 작가의 삶과 예술세계에 대해 조사·연구하고 탄생 100주년 기념전시를 기획·운영한다. 문신은 1922년(호적상 1923년) 일본 규슈 사가현 다케오 탄광지대에서 태어났다. 만 5세 때 조모가 있는 마산으로 귀국해 성장한 그는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상황에서도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1939년 일본으로 떠났고, 1945년 일본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화가로 활동하던 그는 1961년 프랑스로 건너가 1980년 영구 귀국할 때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 이 시기 문신은 화가가 아닌 조각가로서 국제무대에서 뛰어난 예술적 성과를 인정받았다. 그의 조각은 우주와 생명의 신비를 담고 있는 ‘시메트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서울 올림픽조각공원에서 만날 수 있는 25m 높이의 대형 스테인리스스틸 조각 ‘올림픽 1988’이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그는 소년 시절을 보낸 마산시 추산동 언덕에 청년 시절부터 꿈꿔 왔던 미술관을 세웠다. 1985년 본격적으로 건립공사를 착수한 지 14년만인 1994년 문신미술관을 개관했다. 이듬해 문신은 지병으로 타계했다. 미술관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2004년 당시 마산시에 기증돼 현재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이 오랜 시간 문신의 예술적 업적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며 “국립현대미술관은 문신 탄생100주년을 기념해 작가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보다 깊이 있고 입체적으로 재조명하고, 더불어 지역 공립미술관과의 협업도 더욱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허성무 창원시장은 “2022년 국립현대미술관 문신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를 통해 거장 문신이 새롭게 조명되고 재평가될 것이다”며 “성공적인 전시회가 될 수 있도록 협력하겠다”고 말하며 전시 개최를 결정한 국립현대미술관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글로벌 In&Out] 사료, 마오쩌둥선집 그리고 북한사 연구/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글로벌 In&Out] 사료, 마오쩌둥선집 그리고 북한사 연구/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역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료(史料)이다. 사료를 고찰하고 실증해 사실(史實)을 밝히는 것이 가장 전통적인 연구방법이다. 타임머신이 발명되지 않은 이상 자연과학과 달리 실험이 불가능한 역사학은 사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학의 이러한 한계는 정치적으로 많이 이용돼 왔다. 사료가 특정 사람이나 집단을 보호하거나 사상적 투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무기로서 사용되면서 크게 수정하거나 아예 위조됐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라는 교리를 직설적으로 서술하고 치열한 내부 논쟁을 멈추기 위해 성경에 삽입된 ‘요한의 콤마’가 대표적 사례이다. 필자가 하는 한중일 사회주의운동 역사 연구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자주 나타난다. 중국의 마오쩌둥의 경우를 살펴보자.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에 의해 수립됐다. 12월 16일, 마오는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과 회담을 가졌다. 중국의 정치, 경제, 군사 등에 대해서 합의한 후 스탈린은 마오쩌둥 저작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것에 대해 물었다. 이 질문에 당황한 마오는 그 저작은 오류가 많아 수정할 필요가 있다면서 중국어 원문 편집까지 도와줄 것을 소련에 요청했고 스탈린은 동의했다. 1950년 5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마오쩌둥선집편집위원회’를 설립했다. 1951년 10월, 마오쩌둥선집 제1권을 시작으로 총5권까지 출판됐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의 저작을 수록한 선집은 중국 국내외에 인기가 많았으며 중국혁명사연구의 기본 사료로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중국이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진짜 마오쩌둥 사상”을 학습하기 위해 반항의 자유를 맛본 홍위병 조직들은 반동분자라는 죄목으로 숙청당한 사람들의 이름을 제외하고 마오쩌둥 저작들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수록한 ‘마오쩌둥 사상 만세’라는 시리즈의 책들을 비밀리에 출판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중공은 이 책들의 인쇄를 금지했으나 ‘마오쩌둥 사상 만세’는 해외로 유출돼 버렸다. 이 자료를 접하게 된 일본 학자들은 마오쩌둥 저작의 연구에 들어갔으며 1970년대 총 10권으로 구성된 ‘마오쩌둥집(集)’을 출판했고 1980년대에는 연구를 한층 더 심화해 제2판까지 발표했다. 중국의 마오쩌둥선집에 수록된 글과 비교한 결과 1950년대 편집 과정에서 중공이 원문 내용의 50% 이상을 삭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선집은 사료적 가치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일본 학자의 노력은 마오쩌둥 사상을 규명하는 역사학적 연구가 비로소 가능하게 했고 전 세계의 중국혁명 연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면 북한사 연구는 어떠한가? 북한이 발행한 ‘김일성전집’은 원문 왜곡에서 ‘마오쩌둥선집’의 수준을 크게 초월했다. 김일성은 마오쩌둥과 달리 항일투쟁 초기에 논문을 쓰는 것보다 유격활동에 더 집중했기 때문에 1945년 해방 이전에는 저작이 거의 없다. 해방 직후에도 소련군정의 영향과 간섭을 많이 받아서 완전히 독립한 활동을 하는 것이 어려웠다. 때문에 한국전쟁 직후 주체사상을 내세운 북한은 김일성이 해방과 새로운 조선의 건설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국가와 정권의 정통성을 세계공산주의 운동이 아니라 김일성의 혁명활동에서 찾기 시작한 북한의 학자들은 김일성전집을 발행하면서 김일성의 연설문 등 저작들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거나 아예 조작했다. 김일성의 저작에서 소련군과 스탈린에 대한 칭찬이 사라진 것뿐만 아니라 당시 역사적 배경을 감안하면 전혀 있을 수 없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김일성전집에 대한 사료 비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일부 북한사 연구자들도 이에 수록된 자료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 나치가 강탈한 카미유 피사로 작품 주인은 누구? 대서양 오가는 다툼

    나치가 강탈한 카미유 피사로 작품 주인은 누구? 대서양 오가는 다툼

    1940년 6월 나치 독일은 프랑스 파리를 점령했는데 다음해 나치 장교 몇몇이 남서부 한 시골 은행에 쳐들어왔다. 그들은 은행 금고를 열어달라고 하더니 유대인 부부 라울과 이본느 메이어가 맡긴 인상파 화가 카미유 피사로의 작품 ‘양들을 기르는 목동 여인’을 들고 가버렸다. 그 뒤 이 그림은 완전히 사라진 듯했다. 그러다 2012년 미국 오클라호마주의 한 갤러리 벽에 걸린 채로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 이본느 메이어는 프랑스의 백화점 갤러리에 라파예트 소유자의 상속녀였는데 그녀의 수양딸 레오네 놀레 메이어(81)가 미국에 이 그림이 옮겨진 과정을 추적했다. 그에 따르면 2000년에 미국인 가족이 이 그림을 “좋은 뜻에서” 오클라호마대학의 프레드 존스 미술관에 기증한 것을 확인했다. 원 주인의 상속녀인 메이어는 당연히 이 그림을 다시 프랑스로 가져왔으면 하고 바랐다. 오랜 싸움 끝에 2016년에 양측은 합의했는데 이 그림을 동시 소유하는 것으로 하고 양측이 합의하지 않는 한 한쪽이 판매하거나 교환하거나 기증하지 않기로 했다. 나아가 3년마다 한 번씩 번갈아 오클라호마 미술관과 프랑스 갤러리에서 번갈아 전시하기로 했다. 대학 재단은 이 합의가 “오늘날 예술사에 전례가 없는 공정하고 정당한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흡족해 했다. 하지만 양측이 합의했더라도 나치 이전의 소유자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해법은 애초에 아니었다. 문제의 핵심은 나치가 약탈한 예술작품을 “좋은 뜻”으로 기증했다고 해서 합법적인 주인에게서 좋은 뜻으로 산 원 주인의 뜻을 묻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냐, 그들에게 적절한 보상은 주어졌는지 등이 공란으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나라마다 다르고, 법원마다 다른 규칙을 적용하려 한다는 점도 문제였다.메이어의 변호인 론 소퍼는 오클라호마 대학이 이렇게라도 합의하지 않으면 영영 프랑스에서는 이 그림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압박해 어쩔 수 없이 동의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죽기 전에 동의하지 않으면 미국 대사관 예술품 목록에 넘어가게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2017년부터 이 그림은 파리 오르셰 미술관에서 전시됐다. 하지만 3년 뒤 미국으로 이 작품을 돌려주는 비용 문제로 메이어는 곤란을 겪고 있다. 정기적인 운송 루트를 만드는 비용을 누가 어떻게 부담할 것인지를 놓고 대립했다. 지난해 7월 말 미국으로 부쳤어야 했는데 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메이어는 프랑스 법원이 끼어들어 미국으로 이 작품이 유출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해 13일 첫 변론이 예정돼 있다. 미국 오클라호마 법원은 하루 2500 달러씩의 과태료와 법정 수수료를 물린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환수 전문가인 마크 마주로프스키는 메이어 같은 이들의 문제점은 국제협약이나 정부 지원 없이 개인의 힘만으로 소유권 주장을 관철시키려 한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시작부터 달갑잖은 소리로 받아들여진다. 재정적으로 정치적으로 법적으로 잘 준비됐느냐는 문제와 별개로 많은 소유주들은 골치 아프기 때문에 회피하려고만 든다”고 말했다. 1945년 프랑스 정부가 나치 약탈물에 대한 칙령을 발표한 것도 대서양 저편에서는 완전 다르게 해석된다. 마주로프스키는 “2차 세계대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약탈된 것들에 대해서는 물론 유대인이 어떻게 착취당하는지 전혀 모르는 판사 앞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고 털어놓았다. 프랑스 문화부의 연구 및 환수임무 책임자인 다비드 지비에는 전후 독일에서 프랑스로 되돌아온 작품 수가 4만 5000점에 불과한데 그걸 되찾기 위해서도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그런데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프랑스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예술품 환수를 우선순위에 놓지 않는다면서 특히 국보급 작품일 수록 장관이나 미술관이나 정말로 주저하게 된다”고 말했다. 다만 지난달 프랑스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하나를 오스트리아 원 주인의 상속녀에게 돌려주기로 해 조금씩 태도가 바뀐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고 BBC는 전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프랑스, ‘엘리트 특권’ 지적에 대통령 배출 산실 국립행정학교 폐지

    프랑스, ‘엘리트 특권’ 지적에 대통령 배출 산실 국립행정학교 폐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8일(현지시간) 1945년 샤를 드골 장군이 설립, 이후 많은 프랑스 대통령과 총리를 배출한 대학원 대학인 국립행정학교(ENA)를 내년에 폐지한다고 가디언이 전했다. 앞으로 공공서비스연구소(IPS)가 ENA 기능을 대신할 계획이다. 마크롱은 2년 전 사회·경제적 정의를 추구하는 노란조끼 시위가 벌어질 때 토론회 이후 엘리트 교육의 일환인 ENA 폐지 구상을 밝혔다. 누구에게나 최고위직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설립 취지와 다르게 ENA가 대통령과 총리, 산업계 수장을 배출한 폐쇄적 엘리트 특권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는 비판을 수용한 조치다. 마크롱을 비롯해 4명의 대통령이 ENA 출신이다. 최근 졸업생 중 1%만 노동자 집안 출신이란 비판도 나왔다. ENA 재학생 중 상류층 출신 비율도 1950년대 약 45%에서 최근 약 70%로 높아졌다. ENA 유지를 주장하는 측은 ENA 졸업생 일부만 고위 정치인이 될 뿐 대부분 행정관료로서 주목받지 않고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ENA를 천편일률적인 엘리트 집단으로 보는 시각에 이의를 제기했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서울광장] ‘부평 일제 조병창’ 보존 희망한다/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부평 일제 조병창’ 보존 희망한다/서동철 논설위원

    인천 부평의 미군기지 캠프마켓 터에 남아 있는 ‘20세기 유적’의 보존을 놓고 찬반 논란이 한창이라고 한다. ‘인천시 캠프마켓시민참여위원회’는 캠프마켓 남쪽 야구장 일대 시설물 31개동 가운데 22개동을 남겨 두고 9개동은 철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자 ‘일제강점기 흔적을 남기지 말아 달라’는 청원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제 패망 직후 인천에 진주한 미군은 1945년 9월 부평 일본 육군 조병창을 접수해 군수지원사령부(애스컴시티)라 이름 붙였다. 1973년 해체된 애스컴시티의 중심 시설인 캠프마켓은 2019년 한국 정부에 반환됐다. 캠프마켓을 ‘일제강점기 흔적’이라 하는 이유다. 개인적으로 ‘부평 일본 육군 조병창’의 존재를 처음 안 것은 ‘일본’이나 ‘조병창’과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강화도 전등사를 오래전 찾았을 때다. 그다지 눈썰미가 없는 사람들도 전등사 범종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마련이다. 아무리 봐도 우리 것과는 무언가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등사 범종은 한국 종이 아니라 중국 송나라 시대 유물이다. 전등사에 왜 중국 종이 걸려 있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역사학자 김상기(1901~1977)가 전등사 범종을 보물로 지정할 당시 관계자들을 인터뷰하면서 그 연유를 밝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제는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무기를 만들 금속류를 닥치는 대로 수탈했다. 문화재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전등사 범종도 부평 조병창으로 실려 갔다. 전쟁이 끝나자 전등사 스님들은 서둘러 조병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전등사 범종은 이미 간 데가 없었고 마당에 나뒹구는 중국 종들 가운데 북송 철종 4년(1097) 조성한 백암산 숭명사 범종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조병창 마당에 나뒹굴었던 다른 중국 종들의 행방도 궁금하다. 광복 이후 인천시립박물관 초대관장을 지낸 미술평론가 이경성(1919~2009)의 회고담에 해답이 담겨 있다. 1946년 3월 당시 김재원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부터 조병창에 중국 종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부평을 찾았다는 것이다. 지금 인천시립박물관에 가면 당시 수습한 중국 종 3구를 야외 전시공간에서 만날 수 있다. 금나라, 원나라, 명나라 시대 것이다. 특히 명나라 종은 태산행궁이라는 도교사원에 걸려 있었다. 인천시립박물관을 둘러보고 있으면 조병창에서 수습한 청동관음보살이며 동물 모양 대포, 청동향로 등 일제가 중국에서 수탈한 각종 문화재와 곳곳에서 마주치게 된다. 중국 문화재뿐이겠는가. 전등사 범종을 비롯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리 문화유산이 부평 조병창 용광로에 던져져 전쟁 무기로 탈바꿈했다고 생각하면 손발이 다 오싹해진다. 문화유산을 빼앗아 간 나라는 많아도 이런 방법으로 말살한 나라가 또 있나. 그런데도 문화유산 파괴를 다룬 ‘반달리즘의 역사’에 일본의 행태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는 것은 유감이다. 한국이 문화 국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역사를 보존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부평역사박물관이 조병창에서 캠프마켓에 이르는 상설 전시를 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하나라고 본다. 부평역사박물관에 따르면 일본이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고 1941년 부평 조병창을 세울 당시 초기 생산 목표는 소총 2만정, 총검 2만정, 경기관총 100정, 군도 1000자루였다고 한다. 지역에서는 ‘미쓰비시 줄사택’의 보존 여부도 논란이다. 역시 부평역사박물관에 따르면 1937년 화물열차와 광산기계를 생산하는 히로나카상공이 설립됐다. 1942년 미쓰비시중공업이 이 회사를 인수해 같은 해 미쓰비시제강 부평공장으로 재편한다. 미쓰비시제강은 박격포와 방탄용 강판 등을 만드는 병기창이었다. 부평2동에 남은 줄사택도 세워졌다. 부평은 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한 거대한 병기공단이었다. 그러니 부평 조병창과 줄사택은 한국사를 넘어선 세계사의 일부분이다. 무엇보다 조병창 터와 줄사택, 인천시립박물관, 부평역사박물관, 전등사를 한데 엮으면 인천의 근대 역사를 보여 주는 훌륭한 역사 투어 코스가 된다. 모두 둘러보고 나면 ‘일제 흔적을 없애고 쇼핑센터로 개발하자’는 일부 시민의 생각도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세계적으로 해외여행이 다시 자유화되면 부평 조병창과 인천시립박물관, 그리고 전등사는 중국 관광객의 한국 관광 필수 코스로 떠오를 가능성이 충분하고도 남는다고 본다. 그렇게 인천시민들이 ‘세계사의 현장’을 ‘우리 손’으로 보존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날도 머지않았다고 믿는다. sol@seoul.co.kr
  • 60년 인생을 뒤흔든 ‘좋은 피’ 실험의 흔적

    60년 인생을 뒤흔든 ‘좋은 피’ 실험의 흔적

    1942년 독일이 점령하던 유고슬라비아 첼예(현 슬로베니아)에는 ‘인종 검사관’이 있었다. 아이들의 코 길이를 재 이상적 코와 비교하고 입술, 치아, 엉덩이, 생식기까지 찔러 봤다. ‘소중한 유전자’를 가진 알곡과 ‘쭉정이’를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상위권 아이들은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함러의 비밀 프로젝트 ‘레벤스보른’으로 넘겨졌다. 생명의 샘이라는 뜻으로 불린 이 계획은 제2차 세계대전 나치가 ‘우수 인종’을 길러 아리아인 국가를 건설하려 실행한 인종 실험이다. 미혼 임신부의 출산을 돕는다는 명목이었지만, 친위대원과 아리안 혈통 여성들의 혼외 관계를 장려해 ‘좋은 피’를 생산했다. 점령지에서 ‘우수 인종’ 특성을 보이는 아이들도 납치했다. 2000년대 들어서야 관련 자료가 공개된 이 만행은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 ‘시녀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는 생후 9개월에 인종 심사를 통해 독일인 가정에 보내진 한 여성이 뿌리를 찾는 과정을 담은 회고록이다. 독일 이름 잉그리트 폰 욀하펜으로 살아온 그의 이전 이름은 에리카 마트코였다. 60세 무렵이던 1999년 친부모를 찾고 싶은지 묻는 독일 적십자사의 전화가 삶을 통째로 흔들었고, 이후 자신의 과거와 ‘레벤스보른’의 진실을 하나씩 찾아간다.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발견하면서부터 7년에 걸쳐 가까스로 퍼즐을 푼 뒤에는 분노를 느끼지만 깨달음도 얻는다. 에리카도 잉그리트도 둘 다 ‘나’라는 사실과 “우리는 태생의 조건이 아닌 우리가 내리는 선택으로 정의된다는 근본적인 진실”이다. 70년 전 범죄가 과거에 머물지 않는 건 지금도 우생학적 신념이 수많은 분쟁을 낳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민족주의를 만지작거리며 인종적·역사적 열등성을 토대로 한 증오에 불을 붙인다. 1945년 이래 세계가 이토록 위험하게 분열된 적이 없다. 이제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레벤스보른의 아이’는 절절히 호소한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상하이에 있는 ‘다윗의 별’, 삶의 터전 잃은 유대인 2만명이나 ‘품은’ 곳

    상하이에 있는 ‘다윗의 별’, 삶의 터전 잃은 유대인 2만명이나 ‘품은’ 곳

    중국 상하이의 도심 티란차오에 있는 한 벽돌 건물 문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식이 있다. 이른바 ‘다윗의 별’이다. 유대인 게토를 상징한다. 지구촌 어디에나 유대인 발자국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1930년대 유대인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 그 수는 한때 2만명에 이르렀다. 나치 독일의 박해와 겁박에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심지어 이라크까지 유대인 난민들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 이 도시만은 유대인들을 품었다. 1933년부터 1941년까지 독일을 비롯해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에 살던 유대인 2만명이 7000㎞나 떨어진 이곳까지 찾아들었다. 상하이에는 크게 세 차례 유대인 이주의 역사가 있다. 19세기 초중반에 온 세파르딕(Sephardic) 유대인이다. 스페인이나 북아프리카에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두 번째 유대인들이 1880년대와 1900년대 초반에 걸쳐 집단학살을 피해 온 러시아 유대인들이다. 이들 러시아 유대인들이 현대적으로 설계한 도시가 티란차오였으니 그저 피난처를 제공한 것 이상으로 유대인에게는 공감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상하이 주민들도 따뜻이 환대했다. 학교와 사교의 장에서도 강한 유대감을 표출했다. 몇몇 난민은 곧바로 의과와 치과를 개업했고, 가게와 카페, 클럽을 열었다. 1941년에 일본이 상하이 시를 점령했다. 일본인들은 나치의 사주를 받아 티란차오를 완전히 포위하고 이들을 나오지 못하게 했다. 이른바 상하이 게토가 이렇게 탄생했다. 유럽의 게토와 달리 이곳은 담이나 벽으로 둘러 싸인 것이 아니었다. 게토의 크기는 1.6㎢이며 1940년대 초반에는 1만 5000명이 살았다. 호우샨 공원은 유대인들이 낮에 모이는 거실과 같은 역할을 했다. 모두 유럽에서는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이곳에 온 뒤로는 사정이 좋지 않았지만 같은 유대인끼리 애환을 나누며 시름을 달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포위한 뒤로는 게토 밖 출입도 쉽지 않고 취업도 안돼 굉장히 궁색해졌다. 질병과 영양실조가 전염병처럼 퍼졌다. 끼니를 거르는 이들도 날로 늘었다.하지만 홀로코스트로 목숨을 빼앗긴 유대인이 600만명에 이르고,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과의 전쟁에 목숨을 잃은 중국인이 1400만명에 이르른 것에 견줘 상하이 게토의 유대인들은 어쨋든 목숨을 건졌고 상대적으로 자유를 누렸다. 홀로코스트 역사학자인 다비드 크란즐러는 일본군의 주 타깃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상하이의 기적’이라고 했다. 역사를 살펴보면 독일 장군이 일본군에게 유대인들을 쫓아내라고 최후통첩까지 했는데 왜 일본인들이 유대인을 함부로 유린하지 않았는지는 정말로 궁금하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상하이의 유대인들은 곧바로 미국과 호주, 캐나다 등으로 떠났다. 하지만 상하이가 품어주지 않았더라면 2만명의 유대인들은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현재 상하이에는 2000여명의 유대인이 남아 있다. 지난해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덮치기 전에는 4000명 정도였다. 이들이 1930년대 이곳으로 이주한 이들의 후손인지 여부는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럴 것으로 추정된다.앞에 다윗의 별 장식이 달린 건물은 사실 2차 세계대전 당시 시나고그(유대교 회당)였는데 2007년 박물관으로 개조돼 운영해오다 지난해 12월 대대적인 확장을 해 다시 열었다. 이 박물관의 전시 및 연구부서 책임자 소피아 티안이 들려준 제이콥 로젠펠트 박사의 얘기도 실로 놀랍다. 1939년 오스트리아를 탈출해 이곳에 온 그는 중국 인민군에 입대해 야전병원 의사로 수많은 중국군 병사의 목숨을 구해냈다. 여러 훈장을 받고 1949년 오스트리아에 돌아가 가족과 재회했다. 여섯 살이던 1941년 독일을 탈출해 가족과 함께 상하이에 이주한 제리 모제스는 “상하이 사람들의 관용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삶은 더욱 비참했을 것”이라면서 “유럽의 유대인은 탈출했더라도 숨어 지낸 반면, 여기 상하이에서는 춤추며 기도하며 사업도 했다”고 말했다. 5일 이곳을 소개한 영국 BBC의 영어 기사는 티란차오 곳곳을 마치 관광 투어하듯 안내하고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 살펴볼 만하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일본 군부 지도자들을 향해 도시락 폭탄을 던졌던 홍커우(虹口) 공원이 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국부 아웅산 장군까지 건드린 미얀마 군부…“딸 수치 ‘바보’라 했을 것”

    국부 아웅산 장군까지 건드린 미얀마 군부…“딸 수치 ‘바보’라 했을 것”

    미얀마 군사정권 대변인이 CNN 특파원과 가진 인터뷰에서 구금 중인 아웅 산 수 치 국가 고문을 아버지 아웅 산 장군까지 거론하며 비난한 동영상이 유출돼 시민들의 비난이 더욱 커지고 있다. 5일 로이터통신과 트위터 게시물들에 따르면 미얀마 군사정권 대변인 조 민 툰 준장은 전날 CNN 특파원 클라리사 워드와 인터뷰를 했다. 클라리사 특파원이 통역을 통해 “아웅 산 수 치 고문의 아버지(아웅 산 장군) 초상화를 봤다. 만약 그가 살아서 작금의 미얀마 상황을 보면 뭐라 할 것 같으냐”고 물었다. 이에 조 민 툰 준장은 “만약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한 마디만 할 것이다. 내 딸이 얼마나 바보인지(how stupid my daughter)”라고 답했다.소셜미디어를 통해 유출된 해당 영상은 CNN이 공개한 것이 아니라, 클라리사 특파원과 조 민 툰 준장의 인터뷰 장면을 누군가 옆에서 촬영한 것이 유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소셜미디어에는 조 민 툰 준장의 인터뷰 답변 중 아웅 산 수 치 고문에 관련된 부분만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미얀마 시민들은 “CNN과 인터뷰에서 감히 어떻게 아웅 산 수 치 고문을 아버지까지 거론하며 바보 같다고 할 수 있느냐”며 “조 민 툰은 자신과 군부가 어떤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나 보다”라며 분노했다. 아웅 산 장군은 미얀마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 영국과 일본을 상대로 독립 투쟁을 벌였고 영국으로부터 독립 약속을 받아냈다. 비록 독립을 두 눈으로 보지 못하고 암살됐지만, 미얀마 독립과 통합의 상징이 됐다. 아웅 산 장군은 미얀마의 민주화 진영뿐만 아니라 군부 역시 국부로 추앙하고 있다. 이 때문에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민주화 운동에 나선 아웅 산 수 치 여사에 대해 군부도 함부로 해를 가하지 못했다.시민들은 “조 민 툰은 아웅 산 수 치 고문을 시기해 험담하고 평가절하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75세의 아웅산 수치 고문은 미얀마 군사정권 아래 15년간 가택연금을 당한 정치범이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민주화의 꽃’으로 여겨진다. 1945년 미얀마 독립영웅인 아웅산 장군의 딸로 태어난 그는 두 살 때 아버지가 암살된 뒤 인도와 영국에서 성장, 뉴욕 유엔(UN) 본부 등에서 근무하다가 1988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미얀마에 왔다가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수치 고문은 2015년 11월 자신이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당이 총선에서 압승하면서 정권을 잡았고, 작년 11월 치러진 총선에서 재집권에 성공했으나 올해 2월 1일 군부가 부정선거 등을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켜 구금됐다. 미얀마 군부는 “국제사회의 오해를 풀 것”이라며 로비스트를 고용해 CNN 취재팀의 입국을 허용했지만, 이들의 방문 기간 유혈 진압을 자제하고 비교적 평온한 곳만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앞서 미얀마 군부가 고용한 이스라엘계 캐나다인 로비스트 아리 벤메나시는 자신이 CNN 취재팀의 미얀마 방문을 주선했다고 말했다. 현지 매체 미얀마 나우는 CNN 취재팀과 인터뷰한 시민 가운데 최소 6명이 군 시설에 구금됐다고 친척 및 친구들을 인용해 보도했고, CNN 대변인도 이번 일을 인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책꽂이]

    [책꽂이]

    제국주의 일본 나카노 학교의 그림자 전사들(스티븐 메르카도 지음, 박성진·이상호 옮김, 섬앤섬 펴냄) 미국 중앙정보국(CIA) 분석가 출신 저자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정보 요원 양성소 ‘나카노 군사학교’ 졸업생들의 활동을 상세히 소개한 책. 종전 당시 이들이 미국과 소련의 냉전을 활용해 일왕이 전범으로 처벌받지 않도록 한 공작, 한국전쟁 중 첩보활동 등도 담았다. 460쪽. 2만 5000원.식물이라는 우주(안희경 지음, 시공사 펴냄) 식물학자인 저자가 식물의 일생에 대해 섬세하게 설명한다. 아주 작은 점 하나인 씨앗에서 연둣빛 싹이 터져 나오는 과정, 뿌리가 아래로 뻗는 모습, 잎이 돋고 꽃이 피어 씨를 맺으며 노화하는 전 과정을 생생히 담았다. 식물학자를 꿈꾸는 학생들은 과학자의 일을 미리 경험할 수 있다. 552쪽. 2만 3000원.한국의 새 생태와 문화(이우신 지음, 지오북 펴냄) 조류학자의 시각에서 두루미, 뜸부기 등 한국의 새 122종의 생태와 행동, 분포, 새와 관련한 동서양 문화에 대해 자세히 정리했다. 자연환경 조사를 오랫동안 함께 한 조성원 작가와 시화호 지킴이 최종인 작가가 공들여 포착한 사진을 함께 수록했다. 576쪽. 4만 9000원.스위스 메이드(제임스 브라이딩 지음, 안종희 옮김, 에피파니 펴냄) 스위스 투자회사 ‘네상스 캐피털’의 설립자 제임스 브라이딩이 스위스 경제의 성공 비결을 소개한다. 스위스인들은 남아도는 우유 처리 방안을 고민한 끝에 세계 최대 식품 기업을 만들어 내고, 가내 수공업 수준이던 시계 산업을 명품 산업으로 키워 냈다. 저자는 개방성, 변화, 탐구 덕분으로 설명한다. 680쪽. 2만 7000원.홀로코스트(눈빛아카이브 엮음, 눈빛 펴냄) 눈빛출판사 부설 ‘눈빛아카이브’가 10여년간 수집해 온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관련 사진을 모은 사진집. 히틀러 집권기인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 내 반(反)유대주의 징조와 추방, 강제수용소, 해방, 전범재판에 이르는 전 과정을 적나라하고 소름끼치게 전달한다. 608쪽. 3만 3000원.인간의 법정(조광희 지음, 솔 펴냄) 장편소설 ‘리셋’으로 한국 문학에 새 지평을 연 조광희 작가의 SF 철학소설. 22세기를 배경으로 주인을 살해한 인공지능(AI) 안드로이드 인간이 법정에 서게 되는 이야기다. ‘안드로이드 인간이 현 인류와 함께 살면 과연 이를 기계로 다뤄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248쪽. 1만 4000원.
  • “오른손 기부, 왼손도 알게… 세계 라이온들 年100달러씩 다 함께”

    “오른손 기부, 왼손도 알게… 세계 라이온들 年100달러씩 다 함께”

    창립 104년 맞아… 215개국 회원 143만명16년 만에 韓회장 선출… 부산 출신 최초유엔과 인연 기려 기념공원서 추모·식수 은퇴자·취미 모임들, 클럽으로 전환 권유저소득층 지원·장애인 복지 사업 등 매진 국내 활동 年1000억원 넘어… 홍보 강화“라이온(회원)들의 자발적인 노력은 지역사회와 세계 곳곳에서 어려움을 겪는 인류의 희망입니다. 우리가 봉사활동에 나설 때마다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최중열(77) 국제라이온스협회 국제회장은 지난달 31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기념식수를 마친 뒤 서울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봉사활동을 하면 큰 기쁨을 얻기 때문에 44년째 라이온 활동을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최 국제회장은 “우리가 건강하려면 지구가 건강해야 한다”며 지구촌 최대 봉사단체인 국제라이온스협회 국제회장을 맡아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보여 줬다. 1917년 멜빈 존스가 미국에서 창립한 국제라이온스협회는 215개국에 4만 8300여클럽과 143만여명의 회원이 있다.최 회장은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2019년 7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제102회 국제대회에서 제103대 국제회장으로 선출됐다. 2003년 이태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에 이어 두 번째이며 부산 출신으로는 최초다. 최 회장은 1977년 부산제일라이온스클럽에 가입해 1993년 부산지구 총재로 활동했다. 2012년에는 제95차 국제대회 부산 유치에 큰 공을 세웠다. 당시 111개국에서 5만여명이 부산대회에 참가해 국내 최대 컨벤션 행사로 한국기록원의 공인 인증을 받기도 했다. 다음은 최 회장과의 일문일답. -국제라이온스협회가 전 세계 대표 봉사단체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모든 사람의 마음 한구석에는 따뜻한 마음이 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계기만 있으면 지역사회와 인도주의적인 봉사활동에 언제든지 뛰어들 준비가 돼 있다. 지역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린 라이온스클럽들이 그런 계기를 만들어 준다. 앞으로도 국제협회는 지역 라이온스클럽을 통해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인도주의적 요구에 부응하며 평화를 증진하도록 적극 돕겠다.” -대한민국 60년 라이온스 역사상 두 번째 국제회장을 역임하는 소감과 의미는. “종주국 미국과 유럽이 아닌 아시아에서 국제회장을 배출했다는 것은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다는 걸 의미한다. 국내 2000여클럽 8만여명의 라이온들에게 거듭 깊은 감사를 드린다. 국제회장은 회장국을 대표하며 최고의 민간외교관 역할을 한다. 실제로 미국 시카고 본부에는 태극기가 매일 게양되고, 국제회장이 가는 국가마다 태극기를 달고, 행사 때마다 애국가를 제창한다. 대한민국 국가 브랜드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다.” -유엔기념공원 기념식수의 의미는. “1945년 유엔이 창설될 때 라이온스는 이미 국제연합 봉사단체로서 활발하게 봉사활동할 때였다. 라이온스를 창립한 멜빈 존스가 유엔 창립 자문역을 맡은 계기로 유엔이 매년 3월 두 번째 화요일을 ‘라이온스의 날’로 제정했다. 그런 인연으로 한국전쟁 중 전사한 유엔군이 잠든 부산 유엔기념공원으로 주요 인사들을 초청해 전몰장병 영령 추모식과 기념식수를 하게 됐다. 유엔기념공원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유엔군 묘지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케네디 미 상원의원 등을 배출한 국제라이온스클럽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46년 전 작은 봉사가 계기가 됐다. 1975년 젊은 나이에 코알라 상사(현 코알라 기업)를 창립해 미력하나마 국가 경제 성장에 기여하던 어느 날 회사 앞 도로에서 자전거를 탄 우유배달 소년이 넘어져 우유병 350여개를 깨뜨린 사고를 목격했다. 그 손실금을 대신 내주면서 소년에게 “그 돈을 나에게 갚지 마라. 열심히 노력해서 너도 다른 누군가에게 갚아 달라”고 당부하면서 마음이 따뜻해져 남을 돕는 보람을 알게 됐다. 또 2년 후 거래처 사장이 어떤 행사에 얼굴만 보여 달라고 해서 갔더니 당시로선 거액이었던 50만원의 입회금을 대신 내주면서 부산 제일라이온스클럽에 입회시켜 줬다. 그래서 소년에게 당부한 삶을 내가 살아오게 됐다.” -존경받는 라이온들의 가입을 더 늘리기 위한 복안과 다른 나라의 경향은. “가입은 자기 사업이나 직업과 무관해야 한다. 미국, 일본 등의 회원 연령층은 높은 편이지만 그 외 국가는 젊은이들이 많이 가입한다. 우리나라도 젊은 회원 영입이 많고 활발하게 활동한다. 고령화 사회에 대비해 은퇴자들의 모임을 라이온스클럽 활동으로 돌리는 것을 적극 권유하고 있다. 외국에서도 그렇게 한다. 취미활동으로 시작한 모임들도 라이온스클럽으로 전환해 봉사활동에 동참하도록 한다. 서구에서는 소모임으로 봉사를 하는 경우가 많고, 가족끼리도 많이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다양한 직업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집단 행사나 봉사를 주로 한다.” -국제라이온스재단(LCIF) 기금을 활용한 지난 2년 동안 활동을 소개한다면. “다음 회기부터는 제가 우리 LCIF 이사장이 된다. 우리나라 라이온은 원조하는 국가의 국민으로서 제가 주창한 매년 100달러 기부운동을 실천하도록 강조한다. 협회는 기존 봉사사업 외 지구환경문제, 소아암 예방, 당뇨병 퇴치, 기근 구제, 시력 보존 활동 등 5대 사업에 주력한다. 당뇨병으로 매년 500만명이 목숨을 잃고 그 수는 계속 증가한다. 우리가 건강하려면 지구가 건강해야 한다. 매일 밤 10억명의 인류가 굶주린 채 잠자리에 든다. 2분마다 소아암 판정을 받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치료를 받지 못한다. 헬렌 켈러가 라이온들에게 맹인을 위한 기사가 돼 줄 것을 당부한 이후 맹인과 시력장애인 수억명을 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취임 후 성과와 남은 임기 동안 꼭 이루고 싶은 것은. “국제라이온스협회는 제2의 100년을 시작하면서 기아·환경·소아암·당뇨·시력 등 5가지를 5대 봉사(중점) 사업으로 정했다. 클럽 확장과 회원 증강에도 집중할 계획이다. ‘캠페인 100’을 완성하는 일도 중요한 과제다. 회원 1인당 1년에 100달러를 LCIF에 기부하는 것이다. 전 세계 라이온이 동참해 1년에 100달러를 기탁하는 게 이번 회기 목표다. 아울러 국제협회 주요한 핵심과제가 홍보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도 알게 하는 쪽으로 바꾸는 홍보전략이 필요하다. 국내 라이온들의 연간 봉사금액을 합산하면 1000억원이 넘는다. 클럽은 정부나 자치단체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저소득층 지원사업, 장애인 복지사업, 집수리 사업, 무료급식 봉사, 장학금 전달, 저소득층 생필품 전달뿐 아니라 각종 긴급구호활동을 한다. 이러한 봉사실적을 모든 국민이 알 수 있도록 협회 차원에서 새로운 홍보전략과 방안에 대한 예산 수립이 필요하다고 보고 협회운영에 반영할 계획이다.” -국내 라이온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는 세계 4위 라이온스 회원국이다. 원조를 받던 국가에서 이제는 원조하는 국가가 됐다. 대한민국 라이온스는 열심히 일해서 한국의 기적을 이룬 주인공들이다. 지난해 케냐 나이로비에 학교를 짓고 올해는 태국 등 세계 곳곳 오지에 학교 및 아동병원 건립 등의 도움을 줄 예정이다. 한국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으니 회원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래서 회원 확장 특별 대책을 세우겠다.” -아직 라이온스클럽에 가입하지 않은 예비 라이온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라이온 윤리강령’을 읽어 보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겠다는 울림이 들릴 것이다. 클럽회원들은 지역사회발전을 가져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회원들의 자발적인 노력은 지역사회와 세계 도처에서 어려움을 겪는 인류의 희망이다. 누구나 라이온이 돼 인류에 희망을 줄 수 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국제라이온스협회 소식] 최중열 국제회장과 국내 총재단 UN기념공원 헌화

    [국제라이온스협회 소식] 최중열 국제회장과 국내 총재단 UN기념공원 헌화

    “매년 한 번 정도는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해 오늘날 대한민국을 있게 한 6.25 참전 영령들에게 참배를 바랍니다.” 국제라이온스협회 최중열 국제회장과 김종석·최규동 국제이사, 오인교 국제재단이사, 국내 21개 지구 총재 등 50여명이 31일 부산에 있는 유엔기념공원에 헌화하고 기념식수를 했다. 국내 라이온스 60여년 역사상 두번째 국제회장을 엮임하고 있는 최중열 회장은 기념사에서 “1945년 유엔이 창설될 때 라이온스는 이미 국제연합 봉사단체로서 활발하게 봉사활동을 할 때 였다”면서 “라이온스를 창립한 멜빈 죤스가 유엔창립 자문역을 맡은 계기로 유엔이 매년 3월 두 번째 화요일을 ‘라이온스의 날’로 제정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런 인연으로 한국전쟁 중 전사한 유엔군들이 잠든 부산 유엔기념공원으로 현직 대한민국 대표 라이온들을 극히 제한적으로 초청해 전몰장병 영령 추모식과 기념식수를 하게 됐다”며 이날 행사 배경을 밝혔다. 최 회장은 “국제라이온스협회와 유엔은 오랜세월 협동적 관계에 있다”며 “매년 유엔의 라이온스 데이(day)에 맞춰 각 지구 총재·총장·의장 등 모든 지도자들이 유엔기념공원 호국영령들을 참배하여 유엔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이어가자“고 당부했다. 유엔묘지는 세계적으로 부산에 있는 재한유엔기념공원이 유일하다.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미얀마 군부 ‘저항의 날’ 5세 어린이 등 무차별 학살… 내전 양상도

    미얀마 군부 ‘저항의 날’ 5세 어린이 등 무차별 학살… 내전 양상도

    국제사회 개입 주저한 새 군부 무력 강화유엔 보고관 “국제 긴급 정상회담 열어야”한미일 등 12개국 합참의장 “폭력 중단을”안보리 중·러 반대로 구체적인 조치 못해 카렌민족연합, 국경 초소 습격 10명 사살민주진영 일각선 반군과 무장투쟁 추진‘미얀마군의 날’이던 지난 27일을 맞아 군부 학살은 더 무참히 자행됐다. 이날 미얀마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열린 가운데 5살 어린이를 포함해 114명의 시민이 군경의 무차별 총격에 스러졌다. 지난달 1일 군부 쿠데타 이후 지금까지 450명 넘는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쿠데타 이후 두 달간 국제사회가 개입을 주저하는 사이 군부의 무력 강도가 세지면서 이에 반발한 소수민족 반군이 무장 저항에 나서는 등 미얀마 사태는 내전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3월 27일은 원래 미얀마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자국을 점령한 일본군에 대항해 무장 저항을 시작한 날을 기념하는 ‘저항의 날’이었다. 그러다 1962년 군부 쿠데타 이후 ‘미얀마군의 날’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날을 ‘저항의 날’이라고 부르며 거리로 나왔다. 전날 밤 국영 MRTV를 통해 ‘조준사격’을 경고했던 군부는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일부 시위대는 철제 방패를 만들고 대나무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군부의 총알 세례를 견뎠다. 무차별 총격 과정에서 특히 어린이들의 희생이 컸다. 현지 매체 이리와디 등에 따르면 5~15살 어린이 최소 4명이 군경의 총에 맞아 숨졌다. 이 중 14세 소녀는 집에서 총을 맞아 스러졌다. 소녀의 엄마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그냥 미끄러져 넘어진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이의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며 울먹였다.쿠데타 이후 군부 총격에 목숨을 잃은 어린이가 2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대 도시인 양곤 교외의 집 근처에서 놀던 한 살배기 여자 아기가 오른쪽 눈에 고무탄을 맞아 붕대로 눈을 덮은 사진과 죽은 어린 아들을 안고 울부짖는 아버지의 영상 등이 트위터를 통해 퍼지면서 국제사회의 분노도 커지고 있다. 미얀마 주재 미국대사 토머스 바이다는 “어린이들을 포함한 비무장 민간인들을 살해하는 것은 소름 끼친다”며 군부를 비판했다. 톰 앤드루스 유엔 미얀마 인권특별 보고관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내지는 국제 긴급 정상회담을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과 미국, 일본 등 12개국 합참의장은 “미얀마 군부와 경찰의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치명적 무력 사용을 비난한다”며 군부의 유혈 진압 규탄 공동성명을 냈다. 하지만 유엔 안보리 상임 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규탄 외 실효성 있는 국제사회 조치는 이행되지 않고 있다. 특히 러시아는 미얀마 군부가 미얀마군의 날을 기념, 수도 네피도에서 연 군사 열병식에 대표단을 파견해 쿠데타 세력을 합법화해 주고 있다는 비난을 샀다. 무력을 과시한 열병식에 앞선 TV 연설에서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은 “안정과 안전을 해치는 폭력적 행위들은 부적절하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경고해 민간 희생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국제사회 개입 부재 상황에서 미얀마에서의 쿠데타 저항이 내전으로 비화될 여지가 커지고 있다. 군부의 무력 진압에 속수무책이 되자 미얀마 민주 진영 일각이 반군과 손잡고 무장 투쟁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로이터에 따르면 태국과 국경 지역에서 미얀마 소수민족 무장반군 중 하나인 카렌민족연합(KNU)은 군부가 미얀마군의 날을 기념하는 동안 군 초소를 습격해 10명을 사살했다. 반격에 나선 미얀마군이 태국 국경 근처 카렌족 마을을 공습하면서 2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 미얀마에는 20여개 소수민족 무장조직이 있으며, 미얀마 총인구 5400여만명의 4분의1이 무장조직 통제 지역에 있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무고한 시민 110여명 스러진 밤, 미얀마 장군들은 턱시도 걸친 채 파티

    무고한 시민 110여명 스러진 밤, 미얀마 장군들은 턱시도 걸친 채 파티

    27일 하루에만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간인 110명 이상이 군경의 유혈 진압에 희생됐는데 턱시도를 걸친 장군들은 그날 밤 파티를 벌였다. 사진은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도 참석한 것으로 알려진 파티 도중 턱시도를 걸친 한 장군이 다른 장군의 손을 반갑게 맞잡는 모습이다. 마웅 자르니란 활동가가 다음날 트위터에 이 사진을 올린 뒤 “세계인이여, 우리 #미얀마는 더 이상 무장한 갱단을 우리 육군이라 부르거나 보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내피도의 #테러리스트들이라고 일컫는다. 우리 국민 대중의 압도적이며 상식적인 견해를 존중해달라. 저녁 파티에서 이 테러리스트들이 턱시도를 입고 있다”고 애통해 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장군들의 파티를 담은 다른 사진들도 많이 올라와 있다고 영국 BBC는 전했다. 지난달 1일 군부 쿠데타 이후 지금까지 목숨을 잃은 사람이 450명 안팎에 이르고 12개국 합참의장들이 연대해 쿠데타와 유혈 진압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국제사회는 미얀마의 민주 회복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지만 학살 주도자들은 이를 비웃듯 미얀마군의 날을 축하하는 호화로운 파티를 여유있게 즐긴 것이다. 이날은 미얀마가 1945년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의 점령에 맞서 무장 저항을 시작한 날을 기념한 ‘저항의 날’을 1962년 군사정권이 쿠데타로 집권한 뒤 ‘미얀마군의 날’로 바꾼 기념일이었다.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민들은 ‘저항의 날’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있다. 국영 MRTV는 전날 밤 시위대를 겨냥해 “머리와 등에 총을 맞을 위험에 처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경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실제로 이날 무자비한 유혈 진압에 나서 하루 기준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군경의 끔찍한 반인도적 만행은 28일에도 이어졌다. 현지 매체 미얀마 나우와 이라와디 등은 두 번째로 큰 도시 만달레이에서 주민 한 명이 총격에 부상한 뒤 불에 타 숨졌다고 보도했다. 군경이 전날 밤 9시쯤 아웅먀타잔구를 급습하는 과정에 아이 코(40)씨가 총에 맞아 다쳤는데 군경은 그를 체포한 뒤 불타는 폐타이어 위로 던졌다. 한 주민은 이 매체에 “불길로 던져진 뒤 그는 ‘엄마 살려줘요’라고 외치고 있었다”고 말했다. 군경이 계속해 총을 쏴 주민들은 그를 구하러 집 밖에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매체는 전했다. 아이 코에게는 4명의 자녀가 있다고 매체는 전했다. 미얀마 나우는 이날 오전 양곤 인근 바고 지역의 한 장례식에 모인시민들을 향해 군경이 총기를 발사했다고 보도했다. 전날 군경이 쏜 총탄에 맞아 숨진 스무 살 학생을 추모하는 자리였다. 이라와디는 군경이 도망치는 장례식 참석자들을 체포하려 했다고 전했다. 매체는 또 최대 도시 양곤의 흘라잉구에서는 이날 군경이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해 최소 두 명이 다쳤다고 보도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군경은 열차를 타고 와서 내린 뒤 총격을 가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27일 90명 이상 희생, 길 가던 오토바이에도 총질, 미얀마 군은 열병 퍼레이드

    27일 90명 이상 희생, 길 가던 오토바이에도 총질, 미얀마 군은 열병 퍼레이드

    ‘미얀마군의 날’인 27일 군경의 무차별 총격에 이날 하루만 91명 이상 숨진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달 1일 군부 쿠데타 이후 하루 기준 가장 많은 사람이 희생돼 지난달 1일 쿠데타 발생 이후 사망자는 400명을 훌쩍 넘겼다. 현지 SNS에는 행인과 차, 오토바이 등을 향해 군경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는 장면이 속속 올라왔다. 현지 매체 미얀마 나우는 “미얀마군의 날에 군부는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며 “오후 4시 30분(한국시간 오후 7시) 자체 집계로 40개 도시에서 91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양곤, 만달레이, 사가잉, 바고, 마그웨, 카친 등 전국에서 희생자가 나왔다. SNS에 현지인들이 올리는 사망자 수는 시간이 갈수록 늘고 있으며 희생자 수가 “100명이 넘는다”는 게시물도 확산되고 있다. 미얀마 정치범지원협회(AAPP)는 이날 적어도 89명이 진압에 숨졌다고 집계했다. 이날은 미얀마가 1945년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의 점령에 맞서 무장 저항을 시작한 날을 기념한 ‘저항의 날’은 1962년 군사정권이 쿠데타로 집권한 뒤 ‘미얀마군의 날’로 바꿨는데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민들은 ‘저항의 날’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있다. 국영 MRTV는 전날 밤 시위대를 겨냥해 “머리와 등에 총을 맞을 위험에 처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경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실제로 이날 무자비한 유혈 진압에 나섰다. 남부 다웨이 지역에서 지나가는 오토바이를 향해 군경이 갑자기 차를 세우고 총격을 가하는 장면도 많은 누리꾼의 공분을 자아냈다. 군경이 거리에서 시신을 유기하는 모습들도 SNS에 올라왔다. 특히 어린이 희생자들이 잇따랐다. 현지 매체 이라와디는 7살, 10살, 13살 아이들이 총에 맞아 숨졌다고 보도했다. 미얀마 나우는 만달레이에서 13살 소녀가 집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고 전했다. 로이터 통신은 현지 매체를 인용해 만달레이 사망자 가운데 5살 어린이도 있다고 보도했다. SNS에는 총에 맞아 피 흘린 아이들의 사진과 동영상이 잇따랐다. 한 동영상을 보면 남성이 차 안에서 축 늘어진 아이를 안고 “내 아들이 죽었어요”라고 울부짖었다. 한 살배기가 고무탄에 눈을 맞아 붕대를 감은 사진도 급속도로 퍼졌다. 군경의 유혈 진압에 대해 임시정부 역할을 하는 ‘연방의회 대표위원회’(CRPH)가 임명한 사사 유엔 특사는 온라인 포럼에서 “이날은 군부 수치의 날”이라고 비판했다. 사사 특사는 “군부 장성들은 300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들을 죽여놓고는 미얀마군의 날을 축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날 양곤의 미국 문화원에도 총알이 날아 들어왔으나 부상자는 없다고 미국 대사관이 밝혔다. 군사위원회는 이날 제76회 ‘미얀마군의 날’을 기념하며 군인과 무기들을 대거 동원해 열병식을 개최했다.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은 열병식에 앞서 TV 연설을 통해 “안정과 안전을 해치는 폭력적 행위들은 부적절하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경고했다. 그는 비상사태 이후 총선을 실시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지만, 구체적 일자는 여전히 제시하지 않았다. 이날 열병식에는 러시아 국방 차관 알렉산데르 포르민이 외국 관리로는 유일하게 참석해 눈길을 끌었는데 흘라잉 사령관은 “러시아는 진짜 친구”라며 감사를 표했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국내에는 중국이 미얀마 군부의 뒷배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러시아와 군사 협력이 최근 들어 강화돼 러시아군은 수천명의 미얀마 군인들을 훈련시키고 무기를 제공하고 있다고 방송은 전했다. 미국과 영국, 유럽연합(EU)이 갖가지 제재를 가하고 있지만 러시아와 중국이 미얀마 군을 돕고 있다. 한편 미얀마 소수민족 무장반군 중 하나인 카렌민족연합(KNU)은 태국과 국경지역에서 군 초소를 습격해 10명을 사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 KNU 대원 한 명도 숨졌다. 현지에서는 이날 KNU와 정부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사망자 수가 훨씬 많다는 소식도 나오고 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남양주 정약용 도서관서 ‘말괄량이 삐삐’ 만나요

    남양주 정약용 도서관서 ‘말괄량이 삐삐’ 만나요

    경기 남양주시와 주한 스웨덴 대사관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스웨덴 아동 문학 전시회 ‘축하해, 삐삐! & ALMA 수상 도서전’이 26일부터 9월 30일까지 정약용도서관 어린이자료실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회는 스웨덴을 대표하는 ‘말괄량이 삐삐’ 캐릭터 탄생 75주년과 백희나 작가의 ALMA 수상을 기념하기위해 마련됐다. 삐삐 캐릭터의 탄생 배경과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는 과정,백 작가 등 ALMA 역대 수상자 작품을 조명한다. ALMA는 말괄량이 삐삐를 탄생시킨 스웨덴 여성 동화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년)을 기리고자 스웨덴 정부가 2002년 제정했다. 아동·청소년을 위한 문학 창작에 힘쓴 글 작가,일러스트레이터,구연동화가,독서 단체 등이 대상이며 유엔아동권리협약을 바탕으로 운영된다. 린드그렌의 소설 속 주인공인 ‘삐삐 롱스타킹’은 1945년 탄생했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모든 연령대가 자유분방한 삐삐를 독립과 반권위주의의 상징으로 여긴다.아동 문학을 뛰어넘어 교육 현장에서 성평등의 소재로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이날 오프닝 행사에는 조광한 시장, 야콥 할그렌 주한 스웨덴 대사, 백희나 작가가 참여해 관내 학부모와 함께 ‘내 이름은 삐삐 롱 스타킹’의 작가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작품 세계와 ALMA의 의미, 아동 인권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스웨덴토크를 진행했다. 조광한 시장은 “스웨덴의 공공 도서관을 벤치마킹해 설립된 정약용도서관에서 스웨덴 아동 문학 전시회를 개최하게 돼 더욱 뜻깊다.”라며 “남양주시의 어린이들이 도서를 통해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기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야콥 할그렌 대사는 “어려운 시기에 아동 청소년을 위한 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어 기쁘다. 코로나19로 인해 문화 활동이나 외부 활동의 부재로 힘들었을 아동과 학부모가 삐삐를 비롯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소설 속 인물들과 호흡하고 희망찬 내일을 꿈꾸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개막 행사로 학부모 대상 스웨덴 토크와 6∼8세 아동을 위한 마임 공연이 열렸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을사오적 처형’ 상소로 옥고… 나석주 폭탄투척 의거 도운 ‘참선비’

    ‘을사오적 처형’ 상소로 옥고… 나석주 폭탄투척 의거 도운 ‘참선비’

    “1905년이 저물어 가던 어느 날, 경복궁 앞에서 두 사람이 땅을 치며 통곡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60세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30세가 채 못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이들은 대한제국이 이른바 보호라는 이름 아래 일본 제국과 불평등하게 체결한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대궐문 앞까지 왔던 것이다.” 두 사람은 영남의 유학자 이승희와 제자 김창숙이었다. 심산(心山) 김창숙 선생은 일제와 독재에 항거하며 평생 꼿꼿하게 살다 간 대쪽 같은 선비였다. 양반 지주로서 누릴 수 있는 편안한 삶을 버리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인물이다. 선생에게는 벽옹이라는 별호가 있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었다고 해서 붙인 것이다.선생은 1879년 7월 10일(음력) 경북 성주 대가면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기의 명현(名賢)인 동강(東岡) 김우옹의 16대손이다. 선생은 27세까지 이진상의 한주학파에 속한 여러 학자에게서 유학과 한학을 배웠다. 특히 함께 상소를 올린, 이진상의 아들 이승희는 선생이 존경하고 따른 큰 스승이었다. 선생은 을사오적 처형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린 일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이후 선생은 나라의 패망을 걱정하면서 1908년 대한협회 성주지회를 결성했다. 이듬해에는 한일합방을 주장하던 매국노 송병준과 이용구를 일컬어 “이 역적들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라는 글을 신문에 실어 8개월 동안 구금되는 고초를 겪었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기자 몇 년 동안 방황하던 선생에게 노모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아직 젊으니 학술을 쌓고 천천히 광복을 도모하면서 시기를 보아 움직여라.” 노모의 뜻을 받들어 선생은 이후 5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학업에 정진, 훗날 독립운동에 투신할 준비를 했다.●파리장서사건·제1차 유림단 의거 참여 1919년 기미독립선언에 유림이 참여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선생을 비롯한 유학자들은 1919년 3월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조선 독립을 의제에 상정할 계획을 세웠다. 이른바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제1차 유림단 의거’다. “한민족은 불행히도 일제의 간악한 침략으로 노예적 상태에 있지만, 역사적 전통과 현실적 역량에서 충분히 독립자존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인간 및 만물을 통한 독립생존의 원리에 비추고, 민족자결원칙에 입각하여 우리 한민족에 대해서도 자주독립을 보장하라.” 선생은 자신이 주도해 곽종석과 김복한 등 영남·기호 유림 137명의 연명으로 독립탄원서를 작성했다. 선생은 탄원서를 가지고 중국 상하이로 가서 파리평화회의에 우송했다. 또 영어로 번역해 각국 대사·공사관과 중국 정계 요인들에게도 전송해 독립 염원을 세계에 알렸다. 파리장서 의거에 참여한 주모자들은 일경에 체포돼 곽종석, 하용제, 김복한 등은 감옥에서 순국했고 일부는 망명길에 올랐다. 선생은 파리장서의거 이후 중국에 머물며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이시영, 신채호, 이동녕 등과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고 임시의정원 구성에 참여해 부의장에 당선됐다. 1919년 7월 초에는 중국 지도자 쑨원을 만나 조선의 독립운동을 설명하고 중국의 지원으로 조선독립후원회를 결성했다.1920년 8월 말 광주에서 상하이로 돌아온 선생은 언론에도 몸담았다. 그해 박은식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창간하고 이듬해에는 베이징으로 가서 신채호가 발행하던 ‘천고’(天鼓)라는 잡지 발간에 동참, 독립 정신을 고취했다. 그러나 체계적이고 장기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고심 끝에 얻은 답은 독립기지 건설이었다. 중국 측으로부터 만몽(滿蒙) 접경지의 황무지 3만 정보의 사용 허가를 얻어냈다. 그러나 자금이 있어야 했다. 1925년 8월 선생은 고국 땅에 잠입해 모금을 시작했다. 애초 계획은 20만원(현재 가치로 약 20억원)이었지만 부호들의 비협조로 모금한 돈은 소액에 불과했다. 많지 않은 돈을 들고 비통한 심정으로 다시 압록강을 건넜다. 귀로는 큰 고통을 안겨 주었다. 가는 곳마다 중국 군벌들의 내전으로 교통이 끊겼고 잠잘 곳을 찾기도 어려웠다. 더 큰일이 터졌다. 선생이 갖은 고생 끝에 험로를 뚫고 상하이로 돌아간 뒤 국내에서는 대대적인 유림 검거 열풍이 불었다. 선생의 모금활동이 발각돼 시작된 이른바 ‘제2차 유림단 의거’다. 1926년 4월 송영우를 필두로 일제는 마구잡이 체포에 나서 600여명을 감옥에 잡아넣고 고문했다. 한편 상하이로 돌아온 선생은 이동녕과 김구 등에게 국내 정세를 설명하고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향을 제안했다. “가져온 자금으로는 독립기지 건설 사업을 착수하기 어렵겠지만, 청년결사대에 자금을 주어 무기를 가지고 국내로 들어가서 왜정기관을 파괴하고 친일부호를 박멸하자.” ●김구 소개로 나석주 의사에게 폭탄·권총 전달 김구는 적극적으로 찬성하면서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했다. 선생은 김구의 소개 편지를 들고 톈진으로 가서 의열단원이던 나석주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민족의 고혈을 빨고 있는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가 그대의 손에 폭파되는 날 일제의 간담이 서늘해질 것이며 잠자고 있는 민족혼이 불길처럼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서 선생은 모금한 돈으로 구입한 폭탄과 권총을 전달했다. 나 의사는 서울로 잠입해 1926년 12월 28일 두 기관에 폭탄을 던지고 일경 7명을 사살하고 자결, 산화했다. 선생은 상하이 조계의 병원에 입원했다가 1927년 5월 1일 일경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국내로 압송돼 일어설 수도 없는 참혹한 고문을 당했다. 모진 고문에도 선생은 “너희들이 고문을 해서 정보를 얻어 내려느냐. 나는 비록 고문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고 결코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굽히지 않았다. 선생의 결기에 일본인 고등과장이 갑자기 경례를 하면서 “나는 비록 일본인이지만 선생의 대의 앞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선생은 일본인 재판장이 본적(本籍)이 어디냐고 묻자 “나라가 없는데 본적이 어디 있느냐”고 받아쳤다. 변론과 항소도 거부한 선생은 1928년 12월 징역 14년을 선고받았다. 1933년에는 감옥에 새로 부임한 간수장이 절을 하라고 강요하자 “내가 너희를 대하여 절을 하지 않는 것은 곧 나의 독립운동 정신을 고수함이다”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고문 후유증이 위중해진 선생은 1934년 9월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대의’위해 살다 83세로 한 많은 인생 마감 출옥 후에도 선생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에 계속 저항했고 조선건국동맹 남한 책임자로 활동한 사실이 발각돼 1945년 8월 7일 구금됐다가 광복을 맞았다. 선생은 두 아들도 독립운동의 제단에 바쳤다. 큰아들은 항일운동을 하다 체포돼 베이징에서 고문으로 옥사했고 둘째 아들도 학생운동을 하다 투옥됐다가 1945년 중국에서 사망했다. 광복 후 선생은 반탁·민주운동에 앞장섰다. 1946년에는 유도회(儒道會)총본부를 조직하고 성균관대학을 설립해 학장과 총장을 역임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의 독재와 맞섰고 그 이유로 모든 직책에서 쫓겨났다. 이승만 정권에 의해 투옥되고 핍박을 받았던 선생은 만년에는 허름한 여관을 전전하고 병원비조차 구하지 못할 정도로 힘들게 생활했다고 한다. 오직 대의를 위해 ‘참선비’로 살았던 선생은 1962년 5월 10일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83세를 일기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정부는 그해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슈만과 버르토크…짙은 사랑 녹아든 두 작곡가의 마지막 비춘 백건우

    슈만과 버르토크…짙은 사랑 녹아든 두 작곡가의 마지막 비춘 백건우

    지난 12일과 14일, 연달아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선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관객들과 나눈 음악들에는 애틋함이 담겼다. 슈만과 버르토크. 그가 비춘 다른 시대 두 작곡가의 마지막에는 공교롭게도 이들이 사랑한 아내에 대한 감정이 녹아 있다. 올해가 되기 전부터 짜여져 있던 프로그램이었지만 최근 부인 윤정희 후견을 둘러싸고 다툼을 벌인 곤혹스러운 시간을 보낸 백건우의 지금과 어쩐지 와닿았다. 12일 ‘백건우와 슈만’은 지난달 26일 대전을 시작으로 대구(4일), 인천(6일)에 이은 앙코르 여정의 마지막이었다. 슈만의 첫 작품인 ‘아베크 변주곡’부터 ‘아라베스크’, ‘새벽의 노래‘ 등을 거쳐 마지막 작품 ‘유령 변주곡’으로 슈만의 생애를 찬찬히 짚었다. 지난해 10월에도 선보인 프로그램이지만 몇 달 새 훨씬 짙은 농도로 다가왔다. 특히 더 깊어진 ‘유령 변주곡’은 연주자도 객석도 숨죽이며 음을 따라갔다.지난해 백건우는 “이제야 비로소 슈만을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정신착란에 시달리던 슈만이 라인강에 몸을 던지기 전에 쓴 ‘유령 변주곡’을 두고 아내 클라라와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 그 심경을 피아노에 마주앉은 지 65년이 다 돼서야 공감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음 한 음이 살아 있고 모두 의미가 있다”면서 현실과 공상을 오가면서도 완벽하게 음을 컨트롤한 슈만의 음악성을 높이 평가했다. 자신의 설명대로 한 음 한 음 타건은 가볍지만 소리에는 묵직한 의미를 담아 이어 간 백건우는 모든 연주를 마친 뒤 20초 가까이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 객석에서도 마음을 보태듯 그의 침묵을 온전히 지켜줬다.14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와 드뷔시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에 이어 마지막으로 선보인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3번’은 헝가리 대표 작곡가였던 버르토크의 마지막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백혈병과 싸운 버르토크는 1945년 봄, 그의 아내 디타 파츠토리를 위해 이 곡을 쓰기 시작했다. 스물세 살 연하 제자이기도 했던 아내의 42번째 생일인 10월 31일에 맞춰 곡을 완성하려 했지만 열일곱 마디를 남기고 그해 9월 26일 숨을 거둬 나머지 부분은 제자 티보리 세를리가 마무리 지었다. 특히 ‘아다지오 렐리지오소’(종교적인 아다지오)라는 지시어가 붙은 2악장은 차분하고 서정적인 선율로 찬송가 같은 분위기로 시작됐다가 버르토크가 직접 채보한 경쾌하고 맑은 새소리가 이어진다. 자신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버르토크의 마음을 그대로 풀어낸 백건우에게 객석에서도 그의 치유를 기원하듯 화답의 박수가 쏟아졌다. 공연을 마치자마자 백건우는 15일 오후 파리로 돌아간다. 다만 윤정희에 대한 후견인 지정을 두고 윤정희 동생들과 딸 백진희 사이 법정 공방이 국내 법원에서 진행 중이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인간 존엄성 말살의 현장… 그래도 민중은 견뎌냈다

    인간 존엄성 말살의 현장… 그래도 민중은 견뎌냈다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을 비롯해 다른 나라 국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독일 국민이 이런 히틀러에게 열광했다는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히틀러와 독일 국민은 마치 ‘악의 집단’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히틀러 통치 기간인 1938년 4월부터 1945년 4월까지 독일 국민 300만여명이 정치범으로 몰렸고, 목숨을 잃은 이가 수만명에 이른다는 사실은 잘 모르는 이가 많다. 2차 세계대전에 관한 우리의 생각은 어쩌면 이런 모습일 터다. 영국, 미국, 소련 등 선한 연합국이 악당 국가인 독일과 일본을 물리치고 정의가 승리한 전쟁.●파시즘·독재에 맞선 민중이 일어난 ‘민중전쟁’ ‘2차 세계대전의 민중사’ 저자 도니 글룩스타인 스티븐슨 칼리지 역사교수는 ‘평행전쟁’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다르게 설명한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연합국과 주축국이 물고 뜯은 제국전쟁인 동시에, 파시즘과 야만, 압제, 독재 정권에 맞서 민중이 수행한 민중전쟁이었다. 연합국의 목표는 나치즘에 맞서 승리를 끌어내는 게 아니라 자국의 욕심을 채우는 데 있었다. 1945년 유럽 전승 기념일에 미국 측 대변인이 “우리가 독일을 점령하는 목적은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패배한 적국으로 다루는 것”이라고 한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실제로 나치가 몰락한 뒤 독일에서 100여개의 자치 권력이 생겨났지만, 연합국은 나치 잔존 세력보다 이들을 더 적대시했다. 러시아는 동유럽에서 독일인 1100만명을 인종 청소하듯 폭력적으로 대했다.●연합국과 주축국, 정의 아닌 ‘이익’ 위해 손잡다 저자는 민중의 시각으로, 특히 우리가 그동안 잘 몰랐던 나라들의 당시 민중사를 펼친다. 연합국과 주축국 진영 사이에 끼어 있던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라트비아, 그리고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을 두루 살핀다. 당시 그리스를 예로 들자면, 레지스탕스인 EAM/ELAS는 나치에 맞서 좀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총을 잡았다.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자치 기구와 자체 법정을 만들기도 했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향상하고자 직접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스탈린과 퍼센트 협정을 맺은 영국이 그리스를 90% 차지하기로 돼 있었다. 영국은 급기야 나치와 손잡고 레지스탕스 탄압에 나섰다. ●KBS종군기자가 기록한 전쟁터 속 인간 전쟁은 여전히 민중을 가리고 탄압한다. 1990년대에 KBS 종군기자로 전장을 다녔던 박선규 서울과기대 교수가 쓴 ‘전쟁 25시’에서도 전쟁 탓에 고통받는 민중의 고난한 삶을 읽을 수 있다. 소말리아 수단의 내전을 취재한 그는 적십자 병원에서 손과 다리를 잃은 10살 안팎 소년병, 군인들에게 몸을 팔며 생계를 유지하는 어린 소녀들을 통해 인간 존엄성 말살의 현장을 보여 준다. 전쟁터에는 철저하게 본능에 충실한 인간 본연의 모습만 남는다. 민중은 오로지 생존만을 생각한다. 살아남으려고 모든 것을 견뎌 내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바로 전쟁터다. 그래도 민중은 견뎌 내고 이겨 낸다.2차 세계대전의 민중사를 풀어낸 책, 그리고 각기 다른 전쟁터 4곳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한 책은 자연스럽게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전쟁을 기회로 욕심을 채운다. 전쟁신화에 가려진 민중의 삶에 우린 좀더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베레모에 파이프 문 ‘명동백작’ 럭비선수… 詩는 건강한 정신이었다

    베레모에 파이프 문 ‘명동백작’ 럭비선수… 詩는 건강한 정신이었다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조병화, ‘꿈의 귀향’ 전문)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소 옆에 지은 묘막 ‘편운재’에서 막내아들이 지은 시의 전문이다. 조각구름마저 쉬어 가는 곳이라는 뜻의 편운재는 아들의 효심이 지은 그리운 구름의 집이자 어머니의 숨결이 시가 된 시의 집이다. 아들은 그곳에서 어머니가 작고하신 나이와 같은 수의 시 81편을 짓는다. 모두 어머니를 위한, 어머니에 의한, 어머니만을 그린 시다.편운재의 현관 옆에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놓여 있다.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어머니가 계신 곳을 짚어 보고자 하는 시인의 뜻이다. 어머니에 관해서라면 생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사람, 시인 조병화다. 그는 1921년 5월 2일 경기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에서 5남 2녀 중의 막내로 태어났다. 미동공립보통학교, 경성사범학교를 거쳐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물리와 화학, 수학을 공부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45년부터 경성사범학교 물리 교사로 재직했고, 서울고등학교와 경희대에서도 근무했다. 그 후 자리를 옮긴 인하대에서 정년퇴임을 하며 길었던 교직 생활을 마친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열중함과 동시에 창작 활동도 왕성히 했다. 1945년에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의 출간을 시작으로 53권의 시집과 선시집 28권, 시론집 5권, 수필집 37권, 번역서 2권, 시 이론서 3권, 화집 5권 등을 합하여 총 160여권의 저서를 출간했다.그가 다룬 시편들의 소재보다 그가 다루지 않은 것을 찾는 것이 더 빠르다는 세간의 농담은 이 저서들의 방대함에서 시작된 것일 터. 시인의 다양한 시편은 국내에만 머물지 않았다. 중국, 일본, 독일, 프랑스, 미국, 영국, 스페인, 스웨덴, 네덜란드 등지로 뻗어 나갔다. 그 덕분에 그의 제자들은 그를 “가장 많은 시집을 냈으며, 세계문학행사에 국가대표로 참가해 그 엄혹했던 시절에도 해외여행을 가장 많이 하는 시인이었고, 문학상도 가장 많이 받은’ 작가로 기억했다. ‘가장’이 여러 번 붙는 시인은 그 시작 활동의 우수성과 공헌을 인정받아 금관문화훈장을 받기에 이른다. 금관문화훈장의 기념비는 그의 고향 난실리에 세워졌다. 시인은 자신의 작품 활동에만 그치지 않고 후배 문인들의 창작 활동을 격려하기 위해 1991년부터 편운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기 시작했다. 시인이 작고한 후에는 그의 가족들이 안성시의 후원을 받아 현재까지도 문학상 운영을 지속하고 있다. 왕성한 창작과 사회공헌활동, 은퇴 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특강 등으로 바삐 지내던 시인은 절필 선언을 한 지 6개월 만에 영면에 들었다. 시인이 절필을 선언하고 타계하기 직전까지의 여백이 유독 짧게 느껴지는 것은 생전에 그가 했던 여러 활동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김수영·박인환… 그리운 명동백작들 지금의 서울 명동은 코로나19로 인해 비어 가는 가게가 속출하는 거리가 됐지만 한때는 외국인들이 한국을 찾으면 가장 먼저 발걸음을 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전, 그러니까 6·25전쟁이 있기 전의 명동은 예술인들의 거리이기도 했다. 명동 개발의 붐이 일기 전인 1960년대까지도 명동은 낭만과 꿈, 우울과 병증, 창작에 대한 열의와 애환, 작가들의 우정과 반목이 얼기설기 엮여 있던 곳이었다. 명동은 가히 문화예술의 산실이었다. 조병화 시인 역시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는 여기서 김수영, 박인환, 이봉구, 김환기 등과 함께 ‘명동백작’으로 불릴 만큼 명동 터줏대감 노릇을 했다. 그 시간 덕분이었을까. 6·25전쟁 이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던 김수영 시인이 조병화 시인에게 엽서를 보내 자신의 생사를 알렸다. ‘나 이곳에 있다. 포로수용소이지만 무섭지 않은 곳이다. 한번 찾아와 다오.’ 부산에서 이 엽서를 받은 조병화 시인은 그 길로 박인환 시인과 거제 포로수용소에 찾아가 김수영 시인을 만나고 돌아온다. 그리고 명동의 문우들에게 ‘김수영이 살아 있다’고 일러 줬다. 박인환, 김수영 시인과 막역한 우정을 나누다가 두 벗을 차례로 먼저 떠나보내며 그들의 장례에 조시(弔詩)를 써서 애도했다. 명동백작의 시대는 조병화 시인이 가장 늦게까지 이생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2021년인 올해는 조병화 시인과 김수영 시인이 백 세를 맞이하는,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더불어 김종삼 시인까지도. 한 인물이 나고 자라고 돌아간 시계만을 이야기하는 100년이 아니라 한 세계가 한 세기를 거뜬히 이겨 낸 100년이다. 시인의 힘은, 시의 생명력은 이토록 길다. 그들이 있어 한국문학의 지형도가 다양하고 풍성한 100년이었다. 우리가 미처 다 볼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의 100년도 그들의 시편들이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리라 믿는 이유이기도 하다.●돌아본 문인 서재 중 유일한 럭비공과 유니폼 시인은 검은색 베레모와 파이프, 럭비공과 수많은 저서로 독자들에게 각인돼 있다. 시인의 베레모와 파이프, 명동의 나날들까지는 모두에게 익숙한 이야기지만 럭비라니. 시인은 경성사범학교 시절부터 럭비를 시작해 럭비 선수로 활동했으며, 부임하는 학교마다 럭비부를 창설해 선수들을 직접 지도하기도 했다.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신체에서 나오는 건강한 정신이 학생들과 선생을 이어 주는 끈이 되기도 하며 또 시를 쓰는 정신에 활력을 불러일으킨다고 믿었던 까닭이다. 그가 럭비 선수로 활동했던 이력은 조병화문학관 한편에 오롯이 전시돼 있다. 문학관에 뜬금없이 럭비라니, 하는 물음에 대한 유쾌한 답은 그가 입고 뛰던 유니폼과 트로피들 앞에서 찾을 수 있게 해 뒀다. 여러 문학관을 찾아가 봤지만 문인의 서재에 럭비공들이 즐비한 곳은 단연코 이 자리밖에 없을 터다.●구름의 집 ‘편운재’·개구리 소리 듣는 ‘청와헌’ 교직에서 은퇴한 시인은 난실리로 돌아와 편운재 옆에 개구리 소리를 듣는다는 뜻의 ‘청와헌’(聽蛙軒)을 짓고 기거하며 여러 문인의 사랑방지기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당대의 문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기거하며 시와 예술에 대해 논했던 곳. 젊었을 적의 명동의 시간이 고스란히 재현된 곳이 바로 난실리다. 시인은 편운재와 청와헌에서 숨 쉬는 것처럼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그의 문학관에 유독 문인에 대한 자료와 사진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시인이 작고한 뒤에 문학관의 전시실에 놓인 유품들이 그의 꼼꼼한 정리벽을 말해 주고 있다. 사소한 메모와 창작 노트들, 자필 원고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림과 서예 작품에 찍던 낙관, 즐겨 마시던 술병, 애용하던 찻잔과 커피 그라인더, 베레모와 펜던트, 만년필과 몽블랑 잉크, 펜던트와 시계, 세계 각국에서 모아 온 기념품들로 장식한 페치카, 스케치북과 카메라와 럭비부 시절의 운동용품 등이 전시돼 있다. 편운재 현관에는 “살은 죽으면 썩는다”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생에 대한 성실성과 근면을 유독 엄격하게 훈육했던 어머니의 음성을 벽에 새기며 시인은 어떤 마음을 다지고자 했던 것일까. 그 가르침 덕분에, 어머니를 종교처럼 믿고 의지했던 까닭에 시인은 그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또 성실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한 사람의 생애에는 희로애락애오욕이 있기 마련이다. 그의 작품 세계와 활동에도 활발한 세계 속에 묻힌 고뇌와 오욕이 있었을 거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의 세계를 읽고 재해석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또한 그의 활동을 되짚어 보며 평가를 내리는 것 역시도 후대가 해야 할 일이다. 그만큼 한국문학에서 그의 자리가 크다는 방증이다. 시인의 100년이 고스란히 저장된 난실리 전체가 문화특구가 된 것 역시 시와 시인의 깊이와 크기를 톺아볼 수 있는 증거다. 편운재와 청와헌, 조병화문학관이 있는 난실리는 봄이 유독 예쁜 고장이라고 한다. 탄생 100주년을 맞는 조병화 시인의 터에 다가오는 봄에는 꼭 한번 들러 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곳에서 100세가 된 노시인이 넌지시 건네는 투명한 술잔에 문장을 가득 채워 오시기를 바라며.소설가 이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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