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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후변화 공포… 사라진 감염병 불러들인다

    기후변화 공포… 사라진 감염병 불러들인다

    지난주 서울, 경기, 인천 수도권을 중심으로 쏟아진 폭우는 곳곳을 물바다로 만들고 인명·재산 피해를 입혔다. 이번 폭우도 극한 기상만 발생하면 들먹이는 ‘기후변화’가 원인인지에 대해서는 분석이 필요하지만 간접적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많은 기후학자들은 지금처럼 온실가스 배출이 계속돼 온난화가 가속화할 경우 폭염, 가뭄, 홍수 같은 예측 불가한 날씨가 일상화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런 기후변화가 이제는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진 감염병들을 다시 불러내고, 감염병의 독성도 더욱 세게 만들 것이라는 우울한 예측을 내놨다. 실제로 지난 10일 영국 런던의 하수에서 소아마비(폴리오) 바이러스가 검출되면서 영국 보건 당국은 비상이 걸렸다. 1945년 원자폭탄이 발명되기 전까지 인류 최악의 감염병 중 하나였던 소아마비 바이러스가 1984년 이후 런던에서 검출된 적이 없다. 영국 정부가 2003년 소아마비 종식을 공식 선언한 지 19년 만에 다시 발생한 것이다.전염병의 제왕으로 오랜 기간 인류를 괴롭혔던 두창(천연두)도 1980년 5월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종식이 선언되며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지만 지난해 말부터 동물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원숭이두창이 인간에게 전염되고 미국, 유럽을 중심으로 사람 간 감염이 확산되면서 WHO는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미국 하와이대 지질환경학과, 지구과학과, 천연자원·환경관리학과, 해양생물학연구소, 위스콘신 메디슨대 공중보건과학과, 스웨덴 예테보리대 해양과학과 공동 연구팀은 기후변화가 홍수, 가뭄, 폭염, 혹한 등 극한 기상을 일상화시키고 사라진 전염병을 불러내고 동물이 주로 걸리던 감염병이 인간을 공격하는 사례는 더 많아질 것이라고 14일 밝혔다. 연구팀은 기후변화가 병원균의 독성을 강화시키고 사람의 면역체계까지 약화시킬 것이라는 분석도 내놨다. 이 같은 연구 결과는 기후학 분야 국제학술지 ‘네이처 기후변화’ 8월 9일자에 실렸다. 기후변화와 감염병 증가의 관계는 그간 개별 병원균이나 폭염, 홍수 같은 특정 위험에만 초점을 맞춰 분석돼 왔다. 연구팀은 기후 위험과 질병에 관해 연구한 3213개 연구를 정량적으로 재분석하는 메타분석 방식으로 연구했다. 이를 위해 사람을 감염시킬 수 있는 286종의 전염병과 홍수, 가뭄, 혹한, 해수면 상승 같은 10가지 기후 위험의 상관관계를 들여다봤다.그 결과 9종을 제외한 277종의 전염병은 홍수나 폭염 같은 단 하나의 극한 기상만으로도 감염력과 독성이 강화될 것으로 봤다. 인류에게 영향을 끼쳤던 전염병의 58%(218종)는 기상 이변으로 인해 변이가 발생해 이미 독성이 강해졌다. 서아프리카 풍토병으로 치사율 30~50%에 이르는 라사열, 공기나 물을 매개로 발열과 호흡기증상을 수반한 박테리아성 감염병인 재향군인병(legionnaires’ disease) 등은 기상이변으로 병원균의 감염성과 강도가 더 세질 것으로 예측됐다. 또 열대 지역에서 많이 발생하는 라임병, 뎅기열, 말라리아 같은 질병은 감염 지역이 전 세계로 확대될 것이라고 연구팀은 밝혔다. 특히 북극의 온난화가 지구 평균보다 4배 이상 빠르다는 연구 결과는 전염병 확산이 더욱 암울하게 흘러갈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지구과학 국제학술지 ‘커뮤니케이션스 어스 앤드 인바이러먼트’ 8월 12일자에 실린 연구를 보면 북극 온난화가 지구 평균보다 2~3배 빠르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4~7배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핀란드 국립기상학연구소, 이스턴 핀란드대 응용물리학과, 노르웨이 국제기상연구센터 공동 연구팀은 1979~2021년 북극권 기상 관측 데이터를 분석해 빠른 북극 온난화를 일컫는 북극 증폭이 가속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연구팀은 또 실제로 북극 대부분 지역은 최근 10년 동안 산업화 이전 대비 0.75도 높아졌고, 스발바르 군도와 러시아 노바야제믈라 군도는 10년 동안 1.25도나 상승했다고 분석했다. 기후변화와 감염병 발생을 연구한 카밀로 모라 하와이대 교수는 “기후 위험이 질병으로 이어지는 만큼 각각의 질병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온실가스 배출 감소로 기후변화를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 ‘안면 부상’ 한소희, 근황 셀카 공개

    ‘안면 부상’ 한소희, 근황 셀카 공개

    배우 한소희가 얼굴 부상으로 쉬고 있는 가운데, 팬들에게 근황을 공개했다. 한소희는 최근 팬들이 모인 익명 채팅방인 ‘고독방’에 등장했다. 한소희는 새 드라마 ‘경성 그리처’에서 액션신을 촬영하던 중 눈 쪽에 부상을 입어 걱정을 자아냈다. 한소희의 소속사 측은 “경미한 부상이어서 응급처치를 받고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며칠 경과를 본 후에 촬영장에 복귀할 것”이라 알렸다. 그럼에도 팬들의 걱정은 이어지는 가운데, 한소희는 “여러분 걱정 많이 하셨죠? 저 괜찮아요”라며 얼굴 셀카를 공개했다. 검은 생머리로 눈 쪽은 살짝 가려졌지만 한소희는 집에서 편하게 쉬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한소희는 “집에서 푹 쉬면서 그림도 그리고 제 시간을 오랜만에 보내고 있다. 많이 놀라셨을 우리 팬 분들을 위해 잠시 들렀다”며 “보다 건강을 챙기고 몸을 가꿔서 좋은 작품으로 빨리 찾아갈게요. 조금만 기다려줘요. 외로운 삶 속에 여러분들은 제게 너무나 큰 위로이자 행복이자 사랑이자 아픔이자 제 꿈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한편, 한소희가 촬영 중인 ‘경성 크리처’는 시대의 어둠이 가장 짙었던 1945년 봄, 생존이 전부였던 두 청춘이 탐욕 위에 탄생한 괴물과 맞서는 크리처 스릴러를 그렸다.
  • [씨줄날줄] 잃어버린 핵무기/임병선 논설위원

    [씨줄날줄] 잃어버린 핵무기/임병선 논설위원

    미사일 발사 시스템이 자리잡기 전에 미국과 옛소련은 비행기로 핵폭탄을 실어 날랐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와 9일 나가사키에 떨군 인류 최초와 두 번째 원자폭탄도 전폭기들이 운반했다. 보통 핵무기를 분실하면 ‘부러진 화살’(broken arrow)이라 부르며 회수 작전에 들어간다. 그런데 1950년대와 60년대 미국이 잃어버린 핵무기 셋은 지금도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 1958년 2월 5일 조지아주 타이비섬 상공을 날던 전투기 조종사는 안전한 착륙을 위해 핵폭탄을 떨궜다. 수면에 떨어지며 다행히 폭발하지 않았다. 숱하게 수색했지만 아직도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1965년 12월 5일 미국의 타이콘데로가급(級) 순양함에서 추락 사고로 전투기와 함께 사라진 B43 핵폭탄도 오키나와 근처 바다에 잠들어 있다. 1968년 5월 그린란드 툴레의 미군기지 화재 때 핵무기를 탑재한 비행기가 바다에 빠진 뒤 행방이 묘연하다. 1966년 1월 17일 스페인 팔로라메스 바다에서 벌어진 일은 더욱 놀랍다. 핵무기를 탑재한 두 대의 B47 폭격기가 비행훈련 도중 충돌해 네 개의 핵폭탄을 떨어뜨렸다. 셋은 지상에서 곧바로 회수한 반면 바다에 떨어진 하나는 각고의 노력 끝에 겨우 찾았다. 미국이 핵무기를 분실한 것은 적어도 32건, 세 건을 제외하고는 회수했다. 이런 사실은 1980년대 기밀 해제된 국방부 문서를 통해 알려졌다. 영국이나 프랑스, 중국, 특히 옛소련 사례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옛소련은 1986년 4만 5000개의 핵무기를 비축하고 있었는데 소련 붕괴 와중에 상당수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확인된 것은 잠수함 침몰처럼 도저히 감추지 못해 드러난 것들뿐이다. 1970년 4월 8일 대서양 비스케이만에서 에어컨 화재로 수장된 옛소련 K8 핵잠수함이 대표적이다. 4개의 핵어뢰가 탑재돼 있었다. 4년 뒤 K129 핵잠수함도 태평양에서 자취를 감췄다. 77년 전 일본에서의 핵 참화를 목도하고도 사람들은 핵무기를 관리하는 이들과 시스템이 여느 사람보다 똑똑하고 완벽할 것이라고 마음 편하게 믿는다. 하지만 그들도 실수하고 시스템은 완벽하지 않으며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 잃어버리고 위치도 모르는 미국 핵폭탄 적어도 셋, 옛소련은 “비밀”

    잃어버리고 위치도 모르는 미국 핵폭탄 적어도 셋, 옛소련은 “비밀”

    미국이 냉전이 기승을 부리던 1950년대와 60년대에 적어도 세 개의 핵폭탄을 잃어버렸는데 아직껏 정확한 위치조차 모른다는 지난 4일(이하 현지시간) 영국 BBC 기사는 충격적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왜 이렇게 무책임하지? 질문들을 퍼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무지했거나 관심이 너무 없었구나 하는 자괴감을 지울 수 없다. 1966년 1월 17일 오전 10시 30분, 스페인의 새우잡이 어민이 하늘에서 흰색 물체가 뭔가를 길게 드리우며 파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다. 거의 같은 시간 근처 팔로라메스 항구의 주민들은 두 개의 거대한 불덩어리가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건물이 흔들렸고, 파편이 땅에 꽂혔다. 사람들의 신체 일부가 지상으로 떨어졌다. 그 뒤 몇주 동안 전 세계 신문은 끔찍한 사고를 풍문으로 전했다. 두 대의 미 군 B47 폭격기가 공중에서 충돌해 4개의 B28 열핵폭탄을 떨궜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세 개의 폭탄은 지상에서 재빨리 회수했는데 하나는 남동쪽 바닷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110만t의 TNT 폭발력과 1.1메가t의 위력을 갖춘 탄두를 찾기 위한 사냥이 시작됐다. 사실 이 사건은 핵무기를 분실한 유일한 사례가 아니다. 보통 핵무기를 분실하면 ‘부러진 화살’(broken arrow)이라고 한다. 같은 제목의 영화도 있다. 지금까지 미국에게는 최소 32건이 있었다. 실수로 떨어뜨리거나 비상상황에 투하한 다음 회수하곤 했다. 하지만 세 개의 미국 핵폭탄은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 1958년 2월 5일 조지아주 타이비 섬 근처에 떨어진 폭탄이 첫 번째였다. 조종사는 안전하게 착륙해야 한다며 기체의 무게를 덜기 위해 핵폭탄을 떨어뜨렸다. 두 번째 핵폭탄은 1965년 12월 5일 미 해군 순양함 티콘데로가 함상에에서 바다로 떨어뜨린 B43 열핵폭탄이었다. 세 번째는 1968년 5월 22일 그린란드 툴레의 미 공군기지에서다. 비행기에 화재가 발생했고, 승무원들은 탈출해야 했으며, 비행기는 핵무기를 탑재한 채 바다에 추락했다.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제임스 마틴 비확산 연구 센터의 동아시아 비확산 프로그램 책임자인 제프리 루이스는 “우리는 대부분 미국 사례에 대해 알고 있는데 전체 목록은 1980년대 미국 국방부의 기밀 해제가 이뤄졌을 때에야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다른 나라에 대해 잘 모른다. 영국이나 프랑스, 러시아, 중국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완벽한 셈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털어놓았다. 소련의 핵 과거는 특히 흐릿한데 1986년 기준 4만 5000개의 핵무기를 비축하고 있었는데 국가가 핵폭탄을 분실하고도 회수하지 않은 건들이 제법 알려졌다. 미국과 달리 모두 잠수함에서 발생한 점이 특이하다. 해서 접근할 수는 없지만 해당 위치가 알려져 있는 건들이 있다. 1970년 4월 8일에 소련의 K8 원자력 잠수함이 대서양 북동쪽의 위험한 물길인 비스케이 만에서 잠수하는 동안 에어컨 시스템을 통해 화재가 확산됐다. 잠수함에는 4개의 핵어뢰가 탑재돼 있었고 곧바로 침몰했을 때 방사능 화물이 잔뜩 있었다. 1974년에도 소련의 K129 잠수함이 태평양에서 의문의 침몰을 했는데 세 개의 핵미사일이 탑재돼 있었다. 미국은 곧바로 회수하기 위한 비밀 작전(?)을 결정했는데 루이스는 “그 자체로 아주 미친 얘기였다”고 말했다. 조종사와 영화감독 등 다양한 활동으로 유명한 미국의 괴짜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가 갑자기 심해 채굴에 관심을 갖게 된 척했다. 루이스는 “사실은 심해 채굴이 아니라 해저까지 내려가 잠수함을 잡아 다시 들어올릴 수 있도록 작업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아조리안(Azorian) 프로젝트였는데 불행히도 작동하지 않았다. 그 잠수함이 인양되는 과정에 부서져 버린 것이다. 물론 핵무기는 다시 바다 밑바닥으로 떨어져 녹슨 무덤에 갇혀 오늘날까지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이따금 미국의 잃어버린 핵무기가 발견됐다는 보고가 있었다. 1998년 퇴역 장교 데릭 듀크와 파트너가 40년 전 타이비 섬 근처에 떨어뜨린 폭탄을 찾아내겠다고 결심했다. 두 탐험가는 문제의 조종사와 수십년 동안 폭탄을 수색한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대서양 근처 바사우 만으로 수색 범위를 좁혀 몇년 동안 두 사람은 샅샅이 뒤졌고, 그들은 조종사가 지목한 지점에서 다른 곳보다 10배 많은 방사선 패치를 확인하고, 정부에 보고했다. 정부는 즉각 조사팀을 파견했는데 핵무기가 아니었고, 해저 광물에서 나온 방사선 영향인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미국의 잃어버린 수소폭탄 3개와 소련 어뢰 다수가 바닷속에 잠들어 있다. 핵전쟁의 위험을 경고하는 묘비마냥 보전돼 있지만 대부분 잊혀지고 있다. 왜 우리는 이 모든 불량 무기를 아직도 찾지 못했을까? 폭발할 위험은 없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되찾을 수 있을까?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팔로마레스 폭탄 수색 과정을 장황하게 방송은 소개했다. ‘베이지안 추론’과 최첨단 심해잠수정 알빈(Alvin)을 이용하고 낚싯바늘을 이용해 폭탄을 들어올리는 작업을 했는데 실패를 거듭하다 마침내 성공했다. 잃어버린 세 개의 핵무기가 폭발할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방송은 전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초기의 것으로 비키니섬 실험 당시에도 개발자들은 에너지의 연쇄 폭발 반응이 멈출 것이란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런데 1950년대와 60년대 사용된 차세대 핵무기는 중수소와 삼중수소(방사성 수소)를 포함해 수천 배 강력해졌지만 안전장치를 더욱 충실하게 보강했다. 해서 앞의 타이비 섬 상공 9144m 지점에서 B47 폭격기끼리 충돌한 뒤 넓은 지역을 방사성 물질로 오염시켰는데도 핵분열 반응에 필요한 핵 물질을 무기 자체와 분리한 덕에 연쇄 폭발로 이어지지 않았다. 낙하산이 펼쳐져 지상이나 바다와 접촉할 때의 충격을 줄여준다. 나중에는 핵 장치가 활성화되지 않고 꺼지지 않도록 하는 ‘원포인트 안전’ 기능이 더해졌다. 하지만 항상 안전하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많은 안전 기능을 갖추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1961년에도 B52 폭격기가 노스캐롤라이나주 골드즈버러 상공을 비행하다가 두 개의 핵무기를 지상에 떨어뜨렸다. 낙하산이 잘 펼쳐쳐 핵무기 하나는 비교적 손상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4개의 안전 장치 중 3개가 실패한 것으로 나타났다. 1963년 기밀 해제된 문서를 통해 당시 국방장관은 “약간의 기회, 글자 그대로 두 개의 전선이 교차하지 못해 핵폭발을 피할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다른 핵폭탄은 땅에 떨어졌고, 그곳에서 부서져 결국 들판에 묻혔다. 대다수 부품은 회수됐지만 우라늄을 함유한 부품 하나는 15m가 넘는 진흙 아래에 남아 공군은 주민들이 흙을 파내는 것을 막기 위해 주변 땅을 매입했다. 어떤 사건은 너무 놀라워 거의 꾸며낸 얘기처럼 들린다. 1965년 티콘데로 함상에서 A4E스카이호크가 B43 핵폭탄을 탑재한 채 비행기 엘리베이터에 잘못 앉혀졌다. 갑판원이 조종사에게 브레이크를 잡으라고 손을 휘저었다. 불행히도 중위였던 조종사는 수신호를 보지 못했고 필리핀해로 사라졌다. 오키나와 근처 수심 4900m 아래에 여전히 있을 것으로 보인다. 루이스는 잃어버린 세 개의 핵폭탄을 끝내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눈으로 찾아야 하는데 쉽지 않고, 블랙박스나 위성위치측정(GPS) 송신 장치가 같은 것도 없기 때문에 또 타이비 섬 수색 때처럼 방사능 스파이크를 찾는 것도 어렵다. 핵폭탄이 실제로 특별히 방사능을 띠지 않기 때문이다.1984년에는 또 다른 소련 핵잠수함 K-278 콤소몰레츠가 노르웨이의 바렌츠 해에서 침몰했다. K8과 마찬가지로 원자력 추진력을 갖고 있으며 핵어뢰 두 발을 탑재하고 있었다. 수십 년째 그 난파선은 북극해 1.7㎞ 아래에 누워 있다. 루이스에게 핵무기 분실 얘기는 그것들이 지닌 잠재적인 위험이 아니라 위험한 발명품을 안전하게 취급하기 위해 겉보기에 정교해 보이는 시스템을 갖췄다고 우리는 자신하지만 실은 취약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핵무기를 다루는 이들은 우리가 아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어떻게든 다르고 실수가 적거나 더 똑똑하다는 환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핵무기를 취급하는 조직이 다른 모든 인간 조직과 같아 실수를 저지르고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핵폭탄이 모두 회수된 팔로마레스에서도 토양은 여전히 재래식 폭발물로 터진 방사능으로 오염돼 있다. 토양의 표면을 삽으로 떠 넣은 미군 일부는 정체 모를 암에 걸렸다. 생존자들은 미국 보훈처 장관을 상대로 집단 소송을 제기했는데 상당수가 70대 후반과 80대다. 루이스는 냉전 기간에 일어난 일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핵폭탄을 탑재한 비행기가 더 이상 비행 훈련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는 핵잠수함이며, 오늘날에도 아찔한 사고가 이어지고 있다. 미국은 현재 14척의 탄도미사일잠수함(SSBN)을 운용하고 있으며 프랑스와 영국은 각각 4척을 운용하고 있다. 핵 억지력으로 작동하려면 이 잠수함들은 해상 작전 중 위치가 탐지되지 않아야 한다. 2018년에도 영국 군의 SSBN이 페리에 거의 부딪힐 뻔한 것을 비롯해 많은 사고가 일어났다. 핵무기를 잃어버리는 시대는 끝나지 않았을 수 있다고 방송은 섬뜩한 경고로 마무리했다.
  • 맏이가 모닥불 뛰어든 날, 12남매의 심장 다시 뛴 날

    맏이가 모닥불 뛰어든 날, 12남매의 심장 다시 뛴 날

    1% 걸리는 조현병 6명 걸렸어도아픈 형제 사이 인간다움 재발견‘병 만드는 엄마’ 낙인에도 꿋꿋이학대당한 막내는 눈물겨운 봉사DNA 자료 기증해 연구에 기여과거 ‘정신분열증’으로 불렸던 조현병은 전 세계에서 100명 중 1명꼴로 발생하고 있지만 정확한 원인과 치료법은 여전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특히 사랑하는 가족들이 조현병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 분명하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로버트 콜커의 ‘히든밸리로드’는 조현병에 괴로워하는 한 대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논픽션으로, 조현병이 가족에게 준 아픔과 이에 직면한 가족들에게 어떠한 용기가 필요한지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한다. 돈과 미미 갤빈 부부는 2차 세계대전 후 베이비붐세대가 겹쳐진 1945년부터 1965년까지 12명의 자녀(아들 10명, 딸 2명)를 낳았다.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콜로라도스프링스 히든밸리로드에서 완벽한 대가족을 이루고 싶었던 이들의 삶은 언뜻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어느 날 첫째 아들 도널드가 모닥불에 뛰어드는 등 자기파괴적 행동을 계속하면서 가족의 불행이 시작된다. 형에게 경쟁 의식을 느끼던 차남 짐도 환청을 듣는 등 이상 증세를 보였고, 4남 브라이언, 7남 조, 9남 매슈, 10남 피터도 잇달아 조현병의 수렁에 빠진다. 여섯 형제의 발작을 고스란히 지켜본 나머지 형제자매들은 자신도 조현병에 걸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고, 미미는 아픈 아들들을 돌보면서도 ‘조현병을 만드는 어머니’로 낙인찍혀 매서운 눈총을 받았다. 조현병 형제들 때문에 자신의 경력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 일부 형제는 가족을 멀리하게 된다. 하지만 미미는 엉망이 된 가족의 모습을 숨기면서도 아픈 아들들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1970년대 조현병 연구가 진척되면서 이들 가족은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을 뒤로하고 자신들의 DNA 자료를 기증해 조현병 연구의 새로운 장을 펼치는 데 기여한다. 오빠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두 자매는 점차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딸들의 아픔을 외면했던 어머니를 이해하기에 이른다. 특히 막내딸 린지의 희생과 봉사는 가족들에게 큰 감동과 희망을 준다.저자는 이 책을 통해 조현병 연구의 획기적 발전사를 보여 준다. 형제 중 일부는 조현병을 억압적 성장 환경과 아버지의 욕심 탓으로 돌리기도 하지만, 학계는 유전적 문제에 주목한다. 갤빈 형제들에게선 공통적으로 ‘SHANK2’라는 유전자 돌연변이가 발견됐고, 이는 조현병에 걸리지 않은 어머니 미미의 혈통에서 온 것으로 분석됐다. 아들 6명이 정신질환으로 고생하고 나머지 아들 4명과 딸 2명은 괜찮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어머니 쪽 돌연변이가 아버지 쪽의 또 다른 돌연변이와 뒤섞였을 가설이 제기된다. 조현병을 유발한 유전적 결함이 부모 어느 한쪽의 문제가 아니며, 둘의 유전자가 가족 전체의 삶을 바꿀 만큼 강력하고 독특한 ‘칵테일’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조현병 치료법은 크게 진전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현병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다. 이는 난청과 실명을 장애가 아닌 차이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많은 사람들이 조현병을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정확히 진단하기 어려운 질병으로 인식하게 됐다. 그리고 대다수 연구자들은 예방을 좌우명으로 삼아 최초의 정신착란 전에 조현병 발생 위험이 있는 사람을 정확하게 진단하고자 한다. 인터뷰를 통해 갤빈 가족 한 명 한 명의 초상을 그리듯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전개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하다. 무엇보다 아픈 형제들 사이에서도 인간다움을 재발견하는 가족의 이야기가 울림을 준다. “우리의 관계는 우리를 파괴할 수도 있지만, 우리를 변화시키고 회복시킬 수도 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기 때문에 인간이 되는 것이다”라는 린지의 고백을 통해 갈수록 파편화되는 우리 시대 가족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된다.
  • 한소희, 촬영 사고로 응급실…얼굴수술 염두

    한소희, 촬영 사고로 응급실…얼굴수술 염두

    배우 한소희가 액션신을 촬영하던 중 안면에 부상을 입었다. 한소희는 3일 드라마 ‘경성크리처’(강은경 극본, 정동윤 연출)를 촬영하던 중 얼굴에 부상을 입고 현재 응급실로 향했다”고 밝혔다. 눈 부근에 부상을 입은 상태로 수술 가능성까지 열어두고 있는 상황이다. ‘경성크리처’는 시대의 어둠이 가장 짙었던 1945년의 봄, 생존이 전부였던 두 청춘이 탐욕 위에 탄생한 괴물과 맞서는 크리처 스릴러를 그리는 작품. 생과 사의 경계에서 뜨거운 사투를 벌이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기 때문에 한소희의 액션 신 분량이 특히 많은 상태다. 드라마 내의 과반 이상이 액션으로 이뤄졌기에 부상의 위험도 높았던 바. 결국 한소희가 부상을 입으며 촬영 중단이 되는 등의 사태를 겪고 있다. 한소희는 부상을 수습하고 회복한 뒤 촬영에 나설 것으로 예상돼 촬영 공백 역시 피할 수 없게 됐다. ‘경성크리처’는 한소희와 박서준이 선택해 화제를 모은 드라마로, ‘낭만닥터 김사부’ 시리즈를 완성한 강은경 작가와 ‘스토브리그’의 정동윤 감독이 함께한다. 오는 2023년 공개를 앞두고 있다.
  • 한소희, ‘경성크리처’ 액션 촬영 중 안면 부상

    한소희, ‘경성크리처’ 액션 촬영 중 안면 부상

    배우 한소희가 ‘경성크리처’ 촬영 중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3일 한 매체는 “한소희가 드라마 ‘경성크리처’(강은경 극본, 정동윤 연출)를 촬영하던 중 얼굴에 부상을 입고 현재 응급실로 향했다”고 밝혔다. 한소희는 ‘경성크리처’에서 고난도의 액션신을 촬영하던 중 안면 부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눈 부근에 부상을 입은 상태로 수술 가능성까지 열어두고 있다고 매체는 전했다. 한소희 소속사 9아토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한소희가 ‘경성크리처’ 촬영을 하던 중 눈 주위 안면에 부상을 입었다”면서 “부상이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 한소희는 인근 병원에 이동해서 응급 치료를 받았다. 수술을 받을 상태까지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관계자는 “한소희는 현재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경과를 보는 중”이라며 “예정된 촬영 일정에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경성크리처’는 시대의 어둠이 가장 짙었던 1945년의 봄, 생존이 전부였던 두 청춘이 탐욕 위에 탄생한 괴물과 맞서는 크리처 스릴러를 그리는 작품. 한소희와 박서준이 주연으로 출연하며 2023년 공개 예정이다.
  • 앞마당처럼 드나들며 쌓은 중국 이야기… 그의 서가는 대륙 펼친 ‘역사 놀이터’다 [김언호의 서재탐험]

    앞마당처럼 드나들며 쌓은 중국 이야기… 그의 서가는 대륙 펼친 ‘역사 놀이터’다 [김언호의 서재탐험]

    2012년 ‘중국인 이야기’를 써내기 시작하면서 저자 김명호(전 성공회대 교수)는 “40년 가까이 중국은 나의 놀이터였다”고 했다. “책·잡지·영화·노래·경극과 새벽 시장, 크고 작은 음식점 돌아다니는 것이 나의 행로였다.” 중국 근현대사 주역들의 사상과 행동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중국인 이야기’는 현재 제9권까지 출간됐다. 중국을 자기 바깥마당처럼 드나드는 김명호가 아니고는 써낼 수 없는 내용일 것이다. ●이야기로 풀어내는 중국사 내가 김명호 교수를 본격적으로 대면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은 2009년 4월이었다. 한국·중국·일본·대만·홍콩의 인문출판인들이 동아시아 출판공동체·독서공동체의 실현을 모색하는 동아시아출판인회의의 여강(麗江)회의에서였다. 중국 측이 김 교수를 초청했던 것인데, 그때 나는 “그래,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야!”라고 소리쳤다. 전 22권의 ‘이이화·한국사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전 15권을 펴내면서, 나는 ‘중국인 이야기’를 궁리하고 있었다. 대형의 ‘이야기’ 3부작 기획이었다. 여강 이후 나는 김명호 교수를 매일처럼 만나고 있다. 그에게 몇 시간이고 중국과 중국인 이야기를 듣는다. 그의 방대한 독서세계에 빠진다. 만나지 못하면 전화를 건다. 30분, 한 시간씩 통화가 이어진다. 심야를 가리지 않는다. 여강 이후 독서인 김명호와 출판인 김언호가 만나고 통화한 횟수가 수천일 것이다. 나의 ‘출판일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가 김명호다. 어느 날 밤늦게 전화 걸면 북경(北京)에서 받는다. 대만에서, 홍콩에서 받는다. 책 보러 왔다 한다. 그의 일상적인 중국체험이다. 중국의 역사와 인물, 인문·예술과 놀고 있다. 김명호의 이야기마당에 나는 고수가 된다. 추임새로 그의 이야기를 받아 낸다. ●‘난독의 시대’ 김명호는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할아버지가 계시는 서울 효자동 한옥 사랑방에서 청전 이상범 화백, 윤제술 국회 부의장 같은 어른들이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이었다. 서가엔 한적(漢籍)들이 즐비하게 꽂혀 있었다. 수십 권에 이르는 ‘증국번가서’(曾國蕃家書)가 서가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증국번의 ‘가서’가 그렇게 중요한 책인 줄은 한참 후에야 알았다. 함석헌 선생의 사상적 자서전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를 중학교 때 읽었다. 세종문화회관 그 자리의 시민회관에서 열린 함 선생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강연도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을유문화사가 펴낸 ‘세계문학전집’과 ‘한국문학전집’을 읽었다. 1945년 해방부터 1950년 한국전쟁까지 쏟아져나온 진보적인 책들을 읽으려 했다. 서울신문사에서 출간된 홍명희의 세로쓰기 ‘임꺽정’을 완독했다. 현암사에서 펴낸 ‘최남선전집’과 신구문화사의 ‘한용운전집’, 일지사의 ‘조지훈전집’을 읽었다. 신구문화사의 베스트셀러 ‘한국의 인간상’, ‘세계의 인간상’을 읽었다. 신구문화사의 ‘전후세계문학전집’과 ‘전후한국문학전집’은 표지와 장정이 참 현대적이었다. ‘탐구신서’를 탐독했다. 김명호에게 1960년대는 ‘난독’(亂讀)의 시대였다. 1970년대 대학 시절부터는 역사·사회과학 책들을 읽었다. 이기백·천관우·송건호·강재언·리영희·김열규가 그 저자들이었다. 일제 말 ‘조선과학사’를 써낸 민족사학자 홍이섭의 난삽한 ‘한국사의 방법’을 읽었다. “이병주 소설 좋아했습니다. ‘산하’ 재미있지요. 책머리에 실린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이병주가 아니면 생각 못할 메시지가 아닐까 했습니다. ‘행복어사전’도 좋았어요. 이병주 소설 하면 역시 ‘지리산’과 ‘관부연락선’이지요. ‘지리산’은 진주에서 읽어야 해요. 서울에선 그 맛이 나지 않아요. 난 노신의 소설보다 ‘잡문’을 좋아하는데, 북경의 겨울밤에 읽어야 노신을 더 느낄 수 있습니다.” 1980년대는 금서의 시대였다. 출판인들과 책들이 권위주의 권력과 싸우던 시대였다. “금서들 거의 다 읽었습니다. 신동엽의 ‘금강’도 읽었습니다.”●중국으로 이끈 앙드레 말로 독서인 김명호는 어떻게 중국을 만났을까. “‘을유세계문학전집’에 들어 있는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과 ‘정복자’를 읽고 중국공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두 소설은 홍콩·광동 파업을 다루고 있습니다.” 중국을 전공하기 위해서는 한문을 공부해야 했다. “1970년대 초 청명 임창순 선생이 개설한 태동고전연구소에 가서 한문공부를 했습니다. 파고다 공원 근방에 있었지요. 봉은사로 가서 동초 이진영 선생에게 한문을 배웠습니다. 뚝섬 나루터에서 배 타고 봉은사로 건너가는 공부길이었습니다. 봉선사에 계시던 운허 스님도 만났지요. 1970년 초부터 1972년 2월 군입대 전날까지 봉은사를 다녔는데, 그때 봉은사에서는 ‘팔만대장경’ 국역작업이 진행됐고, 운허 스님이 역장(譯長)이었습니다. 제대 후엔 민족문화추진회에서 2년간 한문공부를 했습니다.” 1980년대에 김명호는 주말이면 홍콩과 대만에 가서 살았다. 경상대에서 6년, 건국대에서 4년을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이었다. 격동하는 중국대륙을 읽고 체험하는 것이었다. 방학 땐 아예 거기 가서 놀았다. 홍콩은 중국을 체험할 수 있는 자유지대였다. 중국대륙의 내면을 깊게 관찰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정보와 이론을 담아내는 다양한 잡지들을 접할 수 있었다. 1989년 4월 15일 북경의 천안문(天安門)광장에서 대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중국공산당 정부는 군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다. 6월 4일 진압이 끝나는 천안문광장은 붉은 피가 흘러넘쳤다. 한국지식인들을 비롯한 많은 국외자들은 중국공산당의 운명을 비관적으로 예측했다. “난 중국공산당이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동안 읽고 관찰한 결과 중국공산당이 그렇게 허약하지 않다고 확신했습니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의 민국시대는 중국문화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의 사상가·혁명가·문학가들의 문집·전집을 주력해서 읽었다. “‘장개석일기’는 정말 흥미롭습니다. 장개석은 죽기 전날까지 일기를 썼는데, 늘 반성한다면서 자신을 채찍질합니다.” ●교수 사직하고 서점인이 되다 1990년 3월 1일, 서울 동숭동에 대형 중국전문서점이 문을 연다. 1992년 8월 24일 중국대륙과 수교하기 한참 전이었다. ‘북경삼련’과 ‘홍콩삼련’에 이어지는 ‘서울삼련’이었다. 교수 김명호는 학교를 사직하고 서점인이 됐다. “1980년대 내가 홍콩삼련을 드나드는 것을 그쪽에서 주의 깊게 보았던 것 같아요. 많은 책들을 구입하면서 한 번도 할인해 달라 하지 않은 나는 그들에게 특별한 손님이었던가 봐요. 하루는 동수옥(董秀玉) 대표가 날 보자고 했어요. 그날 동수옥 대표의 안내로 각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동수옥 대표와 깊은 만남이 이루어지지요. 나에 대한 그의 신뢰와 권유로 서울삼련을 열게 됩니다.” 한중문화교류사에서 한 차원을 높이는 서울삼련의 개관으로 한국의 지식인들은 중국출판의 깊이와 넓이를 서울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됐다. 개관하면서 서울삼련에 비치된 책이 8t 트럭 20대나 되는 분량이었다. 해마다 5~6회씩 책을 들여왔으니, 엄청난 양의 서점이었다. 해외에 있는 중국서점 가운데 책의 수준과 규모 면에서 가장 큰 서점이었다. 안목 있는 연구자·지식인·예술가들에게 서울삼련의 등장은 가히 문화사적 사건이었다. 화가 서세옥·송영방·정탁영,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이용희가 단골이었다. 수교가 되면서 중국과의 내왕이 자유로워졌다. 1999년 큰 적자를 내고 문을 닫지만, 서울삼련은 중국의 중요 인사들이 방한하면 으레 들르는 코스가 됐다. 비치된 책들의 수준을 중국인들도 놀라워했다. “서울삼련의 10년은 참으로 귀중한 기회였습니다. 전설 같은 중국의 예술가·지식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서점을 방문하는 중국인사들과 ‘문화친구’가 됩니다. 화가 황영옥(黃永玉), 서예가 계공(啓功)과 황묘자(黃苗子), 사상가 이택후(李澤厚), 만화가 정총(丁聰) 같은 거장들과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지요. 중국인들의 심연을 알게 됩니다.” 북경의 지화사(智和寺)에 보존돼 있는 ‘건륭판 대장경’의 탁본을 1억원도 더 주고 수입했다. 책 자체가 부처님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담고 있기에 법보(法寶)다. 해인사 ‘팔만대장경’과 함께 ‘동방의 유이(有二)’한 존재다. 지금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문화유산이다. 김 교수는 서점을 닫으면서 ‘건륭판 대장경’을 승가대학에 시주했다. 서점의 재고들을 반품하지 않고 7개 대학에 기증했다. ●저자 김명호와의 특별한 여행 김명호 교수는 지금 파주서재 말고 서울에 제2의 서재가 있다. 상도동엔 서고가 있다. 서울삼련을 끝낸 후 다시 컬렉션한, 엄청난 수준의 책들이다. 나는 김 교수에게 ‘중국인 이야기’를 끝내면, 김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로 ‘중국책 특별전’을 해보자고 하고 있다. ‘중국인 이야기’ 제1권을 펴낸 그해 여름, 나는 ‘중국인 이야기’ 독후감 대회를 열고 재미있는 독후감을 보내 준 독자들과 북경을 가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저자 김명호 교수와의 특별한 여행이었다. 그는 북경의 뒷골목까지 훤히 알고 있었다. 저명한 정치가·예술가·지식인들이 어느 골목에 살았는지. 유서 깊은 사가(史家) 골목을 걸으면서, 이 집은 한때 국가주석이었던 화국봉(華國鋒)의 집이고, 그 옆집이 외교부장 교관화(喬冠華)가 살던 집이라고 했다. 우리 일행은 외교관들이 드나드는 식당 ‘열빈’(悅賓)에 가서 식사할 수 있었다. 열빈은 개혁개방 이후 ‘중국 제1호 민간식당’이다. 북경의 구석구석을 서울처럼 아는 김명호는 그래서 ‘중국은 나의 놀이터’라고 말한다. 장대한 역사공간에서, 책들의 숲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문협(文俠) 김명호의 이야기를 우리는 더 듣고 싶어 한다. 한길사·한길책박물관 대표
  • [박인휘의 서울 오디세이] 서울, 2022년 여름/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

    [박인휘의 서울 오디세이] 서울, 2022년 여름/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

    하루가 지났지만, 어제는 한국전쟁 ‘정전(停戰)협정일’이다. 영어 원문에 ‘정전’(armistice)으로 돼 있고, 한국 정부가 참여를 거부한 채 북한이 협정 주체로 참가한 까닭에 북측에서 작성한 국문 문서에도 ‘정전’으로 표기됐다. 다만 우리가 통상 ‘휴전(休戰)협정’이라고 얘기하는 데에는 정전이라는 행위 중심적인 상태를 넘어 전쟁 중지를 통해 궁극적으로 평화를 지향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돼 있다. 물론 일부에서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의지에 초점을 맞추고 휴전이 정전보다 더 호전(好戰)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전후 국제질서에서 한반도처럼 정전 상태가 오래 지속된 곳은 없다. 국제정치 변수가 강하게 작용한 독일과 베트남의 분단 사례, 국내외 변수가 복잡하게 얽혔던 아일랜드와 중국의 사례, 민족·종교적 요인이 강했던 예멘의 사례들을 두루 보더라도 한반도의 장기적인 분단 상태는 이례적이다. 물론 1949년 분리된 대만 정부가 아직까지 동아시아 안보의 핵심 현안으로 남아 있기는 하다. 하지만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 대부분의 국가들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채택하고 있으니, 중국이 분단됐다고 얘기하는 것은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있다. 남북한 사이의 안보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은 항상 있었지만, 유독 진보정부 때에는 국내 정치 요인들과 맞물려 더욱 뜨거운 쟁점의 대상이 되곤 했다. 노무현 정부 때에는 협정 ‘당사자’ 문제가 쟁점이었고, 문재인 정부 때에는 ‘정전협정’과 ‘평화협정’ 사이의 연결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워낙 이념적으로 휘발성이 강한 사안이라 해법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그렇더라도 과거 냉전 시대는 물론이고 1991년 ‘기본합의서’ 이후 남북한 사이에 숱한 회담과 합의가 이뤄진 상태라 합의 내용의 다수가 무용지물이 됐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당사자’ 문제는 현실적으로 상당 부분 해소된 측면이 있다. ‘종전(終戰) 혹은 평화 협정’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한 사안이다. 정전협정 62조에 “본 협정을 대체하는 다른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 효력을 가진다”라는 표현이 있긴 하다. 하지만 멀리 갈 것도 없이 2018년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은 공동선언 제1항을 통해 ‘새로운 관계’(new US-DPRK relations)를 만들겠다고 천명했다. 이를 하나의 사례로 고려할 때 정전협정 지위를 허물 논리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물론 현실에는 핵무기 등 북한이 저지른 많은 일탈행위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큰 난관이 버티고 있기는 하다. 학기마다 학생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북한은 우리의 관점에서 하나의 독립된 국가인가요?” 학생의 3분의1은 “우리 헌법이 규정한 불법집단”이라고 답한다. 또 다른 3분의1은 유엔에 동시 가입돼 있으니 하나의 국가로 다뤄야 한다고 답한다. 마지막 3분의1은 뭐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답한다. 약속이라도 한 듯 지난 20년 동안 학생들의 대답에는 변화가 없고, 우리는 여전히 북한을 특정할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소설가 김승옥은 익명성을 통해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일찍이 예고했다. 한국 소설의 완결성을 한 차원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 김승옥은 인물을 특정하지 않고 ‘나’, ‘안’(安), ‘구경꾼’ 등과 같이 애매한 가리킴으로 대신했다. ‘북한’이 적(敵)인지 동포인지, 파괴의 대상인지, 혹은 번영의 동반자인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현실 속에서 북한은 너무도 구체적인 대상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익명의 대상이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주인 의식을 가지고, 미국과 국제사회에 신뢰를 주면서 동시에 정책적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보수정부로서의 이점이 극대화되기를 기대한다.
  • [씨줄날줄] 조선총독 관저/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조선총독 관저/서동철 논설위원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늑약에 따라 일제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했다. 처음에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리인 외부(外部) 청사에 자리잡았다. 오늘날의 외교부에 해당한다. 통감부는 청사와 관저 신축에도 나선다. 통감부 청사는 남산 왜성대(倭城臺)에 르네상스양식의 목조 2층 건물로 지어 1907년 2월 완공됐다. 서울 중구 예장동 일대다. 주변에는 1893년 지은 공사관 건물도 있었다.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공사관은 통감 관저로 바뀌었다. 통감부는 1910년 경술국치와 함께 조선총독부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총독부는 남산의 통감부 청사와 관저를 물려받아 쓰다 1926년 경복궁 흥례문권역을 헐고 새 건물을 짓는다. 이와 함께 경복궁 후원 건물의 일부를 철거하고 새로운 총독 관저를 지어 1939년 9월 낙성식을 갖는다. 일제는 용산에 또 다른 총독 관저를 지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서쪽의 미군 121후송병원 자리다.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 주둔군 사령관이 주도해 1909년 완공했다. 하세가와는 1916~1919년 제2대 조선총독도 지낸 인물이다. 남아 있는 사진을 보면 당시 유행하던 네오바로크양식으로 매우 화려하게 지은 건물이었다. 이 관저는 주로 연회 장소로 쓰였다. 경복궁 관저는 일본 전통 구조의 2층집이었다. 집무 공간인 1층은 서양식이었지만, 생활 공간인 2층은 다다미를 깐 일본식이었다. 생활 공간엔 일본인들이 목욕할 때 쓰는 커다란 무쇠솥도 있었다. 제9대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1945년 8월 15일 일왕이 무조건 항복하자 각종 문서는 물론 다다미를 비롯한 관저 집기까지 모두 훼손했다고 한다. 이름을 되찾은 경무대는 존 하지 미군정 사령관 관저로 쓰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야 비로소 이승만 대통령을 주인으로 맞는다. 윤보선 대통령 시절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었고, 노태우 대통령 시절 구 본관을 헐고 관저와 본관을 분리 신축해 오늘에 이른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청와대 구 본관의 모형 제작을 추진한다는 소식에 논란이 한창이다. 하지만 구 본관은 새 대통령이 입주할 때마다 증축과 구조 변화가 뒤따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느 시절을 모델로 하느냐에 따라 논란이 수그러들기는커녕 더욱 증폭될 수도 있다.
  • 실제 친자관계면 자녀에게 임차권 승계해야

    실제 친자관계면 자녀에게 임차권 승계해야

    서류상 입증이 되지 않더라도 실제 친자관계가 맞다면 자녀에게 임차권을 승계해야 한다는 판단이 나왔다. 사망한 임대주택 임차인과 세대원 자녀간 친자관계가 서류상으로 입증되지 않더라도 주소가 같고 가족사진을 촬영한 정황 등이 있다면 자녀에게 임차인 명의를 변경해줘야 한다는 취지다. 21일 국민권익위원회는 가족관계증명서에 부친의 전처로 등재된 모친과 함께 거주한 세대원 자녀에게 임차인 명의변경을 허용하도록 주택공사에 의견표명했다. 권익위에 따르면 민원인 A씨는 모친 사망 후 임차권을 승계받으려 했으나 주택공사가 가족관계증명서 등 공식 자료상 상속권이 있는 가족관계가 확인되지 않는다며 명의변경을 허용하지 않았다.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인 A씨의 부친은 1945년 전처와 혼인했으나 1951년 전쟁당시 남한에서 A씨의 모친을 만나 가족을 이뤘다. 하지만 자녀들의 호적이 정리되지 않은채 부친의 전처가 친모로 등재돼 있었다. 이에 A씨는 “서류상 친자 관계를 입증할 수 없지만 임대주택 임차인이 실제 친모가 맞다”며 임차권 명의변경을 허용해 달라는 고충민원을 권익위에 제기했다. 권익위는 조사 결과 A씨의 모친이 호적에 등재돼 있고, 모친 사망으로 친자관계를 입증할 수는 없어도 가족 사진 등을 볼때 A씨의 주장을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주택공사는 권익위의 의견표명을 수용해 A씨에게 임차인 명의변경을 허용했다. 임규홍 권익위 고충민원심의관은 “임차인과 그 세대원의 주거안정을 도모하려는 임대주택 제도의 취지 등을 고려할 때 공적인 자료 이외에도 참작할 만한 개별 정황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 [열린세상] 세계 역사가 크게 움직이고 있다/김경민 한양대 명예교수

    [열린세상] 세계 역사가 크게 움직이고 있다/김경민 한양대 명예교수

    국제정치는 마치 빙하와 같다.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멈춘 듯 보이지만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국제정치도 어제 무사했듯 오늘도 무사한 것 같으나 현실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게 새로운 역사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전쟁같이 직접 체감하는 경우는 움직이는 역사를 바라보게 되나 조용히 움직이는 역사의 변화는 지혜롭고 영리한 국가와 민족만이 항상적으로 변화를 감지하며 미래를 대비한다. 이들 국가 모두가 선진국이다. 느리게 움직이는 사례 하나를, 그랬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사례 하나를 들어 보겠다. 현재 남중국해에서는 중국의 해양패권 장악 시도와 미국의 항행의 자유라는 힘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고 미국을 비롯한 일본, 호주, 인도 등이 중국 견제로 단합하고 있다. 그런데 작금의 사태는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 아니다. 1974년 중국이 베트남 소유의 서사제도를 점령하고 1988년 전투기 활주로 1.6㎞와 5000t급 항만을 건설한 것을 계기로 중국의 해양패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2022년 기준으로 보면 48년 전부터 서서히 진행된 일이다. 중국 지도를 펼쳐 보면 최남단이 하이난섬인데 여기에서 남중국해까지는 거의 1000㎞나 떨어져 있다. 남중국해를 장악하기 위해 중국 전투기가 군사작전을 펼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 그래서 1974년 중국은 하이난섬에서 약 460㎞ 떨어진 지점에 있는 서사제도를 중간 교두보로 설치하면서 본격적으로 남중국해 장악이라는 오래 묵은 해양패권의 야욕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중국의 군사력이 막강해지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혼자 남중국해 견제를 감당하지 못하게 됐고 일본, 호주, 심지어는 한국에도 군사적 행동을 같이하자는 연합전선을 요구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방예산이 1%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깨고 미국은 2%까지 국방예산을 더 쓰라고 일본을 독려하고 있다. 군국주의 일본이 군사력을 갖지 못하게 강요한 평화헌법 제9조를 미국 스스로가 깨면서 일본이 강력한 군사력을 갖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1945년 미국에 항복한 일본은 군국주의에 의해 국민 수백만명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 때문에 국방비가 커지는 것을 걱정하는 일본인도 많다. 그러나 보수 우익이 정권을 틀어쥐고 있다 보니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처하고 중국을 견제한다는 말로 국민을 현혹시키는 정도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 북한 김정은이 두려워한다는 스텔스 전투기도 한국은 60대가 목표지만 일본은 147기로 이미 첨단 군사력에선 한국을 앞지른다. 미국은 독일에도 군사대국을 희망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이 미국의 마음을 바꾸는 계기가 되고 있다. 600여만명 유대인을 학살하며 악행의 역사를 경험한 독일에도 국방비를 더 쓰며 유럽의 평화를 돕는 일에 협력해 달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수십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마치 거대한 빙하처럼 서서히 움직이는데 요즘은 그 변화가 대단히 빠르다. 그러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한국은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부터 온 국민이 단합해 세계에 내로라하는 중진국이 되고 선진국이 되려 하는 문턱에 있다. 이 문턱을 잘 넘어야 하는 국민의 지혜와 단합된 힘이 필요한 때다. 이미 중국이 거대한 힘으로 한국을 억누르려 하고 있으며,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앞선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강대국이다. 앞으로 50년은 세계 역사가 크게 바뀌어 나갈 것임을 똑똑하게 인식해야 한다. 아울러 쉴 틈 없이 노력해 강대국이 돼야 우리의 후손들이 남의 나라에 휘둘리지 않는 안전한 대한민국이 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 [시론] 우크라이나, 한국 외교의 반면교사/홍완석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장

    [시론] 우크라이나, 한국 외교의 반면교사/홍완석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장

    장기전 양상을 보이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72년 전 한국전쟁의 모습이 발견된다. 두 전쟁은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깊게 개입된 지정학적 단층지대에서 발생했다. 또 내전을 넘어 국제전 성격을 띠고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안긴 강대국 정치의 희생양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 동남부 영토를 동강 내면서 종전 없이 군사적 대치 상태가 고착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유사하다. 닮은꼴은 또 있다. 한국전쟁에서 소련은 미국을 상대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미국이 러시아를 상대로 대리전을 벌이고 있고, 이를 통해 제3차 세계대전으로의 비화를 막고 있다. 전후 국제질서의 지각변동을 야기한 분수령적 사건이라는 점도 판박이다. 소련의 지원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이 미소 냉전의 서막을 열었다면 중국의 동의로 촉발된 우크라이나전은 미중 신냉전의 본격화를 알린다. 미국의 전략가 매슈 포틴저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제2의 6·25로 규정한 이유다. 유럽의 우크라이나와 동북아의 한국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두 나라가 처한 지정학적 환경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매우 흡사하다. 크림반도와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충돌 지점,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 양국 모두 세계적 강대국 사이에 끼인 소위 ‘중간국가’이고 유라시아대륙의 서쪽과 동쪽 날개에서 패권국의 세력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지정학적 ‘추축국가’에 해당한다. 대외적 좌표 선택이 국가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우크라이나는 미러가 엮어 내는 여러 형태의 세력 투쟁 속에서 준(準)제로섬적인 선택을 강요받고 있고,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외교적 좌표 설정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남의 일이 될 수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사하는 교훈으로 크게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동맹의 소중함도 새삼 확인되지만 자강이 우선이라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군사·외교적으로 자립 능력을 갖추지 못할 때 전략적 요충지는 언제든 강대국들의 전쟁터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준다. 이런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한국만큼 처절히 경험한 나라도 드물다. 한반도가 강대국들의 격전장이 된 1894년의 청일전쟁, 1904년 노일전쟁, 1945년 미소에 의한 남북 분단과 1950년 한국전쟁 등이 적절한 사례다. 무수히 외세에 유린당한 한국의 굴곡진 역사는 남 탓이 아니라 내 탓으로 돌려야 한다. 편승과 의존, 사대에 빠져 정작 부국강병과 안보 역량 강화 노력을 게을리한 결과인 것이다. 미·중·러·일로 대표되는 세계적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해야 하는 한국이 끊임없이 경제력의 고도화, 군사력의 첨단화, 문화력의 세계화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다. 국익 우선의 유연한 실용외교도 중요한 시사점이다. 가치는 이익을 넘어설 수 없고, 이익 역시 생존에 앞설 수 없다.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정권이 보여 주듯 미러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민감하게 교차하고 직접 충돌하는 지정학적 공간에서 선명한 친서반러(親西反露) 노선은 국토를 절단 내고 무고한 인명을 사지로 내모는 국가 존망의 위기를 초래했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미중, 미러 사이에 있는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교훈이라고 본다. 한미, 한중, 한러 관계의 지정학적 숙명성에 비추어 양자택일 또는 진영외교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의 선택지는 한국의 국익과 안보에 전혀 이롭지 못하다. 한국의 대외적 좌표 설정은 철저히 객관적인 현실에 바탕해야 하고, 그 방향성은 냉철한 국익 기반의 실용외교가 돼야 한다. 특정 강대국의 이익에 봉사하는 가치동맹의 허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외면하면 감당하기 힘든 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 66년 만에 ‘최악’의 무역적자를 기록한 경제위기가 이미 경고음을 발신하고 있다.
  • 아베 피격 보도에 태극기 내보낸 美 방송국…“일종의 인종차별”

    아베 피격 보도에 태극기 내보낸 美 방송국…“일종의 인종차별”

    미국 NBC방송이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피격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화면에 태극기와 서울 광화문의 전경을 내보내는 황당한 실수를 저질렀다. 9일(현지시간) 영국 인디펜던스 등에 따르면 NBC ‘투데이쇼’는 아베 전 총리 관련 뉴스에서 기자가 “일본의 총기 법은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것 중 하나”라고 전하는 동안 배경으로 태극기가 휘날리는 자료 화면을 내보냈다. 이어 서울 광화문을 보여주는 화면도 등장했다. 해당 보도 직후 SNS 등에는 일본과 한국의 국기를 헷갈린 NBC에 대한 조롱이 줄을 이었다. 미국의 보수 성향 미디어 감시단체 뉴스버스터스의 커티스 후크 편집장은 트위터에 태극기 보도 화면을 캡처해 올리고 “음, 나라가 틀렸다. 투데이쇼”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SNS 이용자들도 “그들은 인턴에게 이 책임을 덮어씌울 것. 불쌍하다”, “NBC 같은 엘리트도 한국과 일본의 국기를 구별하지 못한다”, “부끄럽다”, “일종의 인종차별” 등의 비난을 쏟아냈다. NBC는 현재 홈페이지와 유튜브 채널 등에 올라온 관련 영상을 수정한 상태다.앞서 NBC는 지난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중계방송 중 한 해설자가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해 물의를 빚은 바 있다. 당시 중계진 중 한 명인 조슈아 쿠퍼 라모는 일본 선수단이 입장하자 “일본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강점을 했지만 모든 한국인은 발전 과정에서 일본이 문화, 기술, 경제적으로 중요한 모델이 됐다고 말할 것”이라고 소개했다. 해당 발언에 대해 항의가 쏟아지자 NBC 방송은 “한국인들이 모욕감을 느낀 것에 대해 인정하고 사과드린다”고 공식 사과한 바 있다.
  • 전남 지역 3·1 독립운동가 80명 추가 발견

    전남 지역 3·1 독립운동가 80명 추가 발견

    전라남도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나 기록이 현존하지 않고 기록이 있어도 자료 부족으로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한 3·1운동 독립운동가 80명을 발굴, 서훈 신청을 했다고 8일 밝혔다. 광역지방자치단체가 직접 발굴한 전국 첫 사례다. 도는 지난해 8월부터 10개월 동안 일제 강점기 문헌, 범죄인 명부, 독립운동 기록, 제적부 등을 조사해 미서훈자 128명을 발견했다. 이중 판결문 등 거증자료가 확보된 80명을 신청하고, 나머지는 자료 확보 후 추가 신청할 계획이다. 시군별로 해남 15명, 영암 9명, 목포·순천·강진 각 8명, 무안 6명, 담양과 영광 5명이다. 광양 4명, 나주와 완도 각 3명, 장성 2명, 곡성·구례·함평·진도 각 1명씩이다. 광양에서 신청한 유족 최모 씨는 “전남도에서 직접 서훈 발굴을 해줘 매우 감사드린다”며 “할아버지의 명예가 꼭 회복됐으면 하는 게 자손들의 바람이다”고 말했다. 전남지역에는 독립운동에 함께한 분들은 많으나 실제 서훈을 받은 사람은 많지 않다. 전국 3·1운동 서훈자 5991명 중 전남은 267명으로 4.55%에 불과하다. 이런 가운데 이번 80명에 대한 서훈 신청은 기존 전남도 서훈자의 30%에 이를 정도로 큰 성과로 평가된다. 그동안 국가가 주도해 대규모로 발굴하거나, 기초자치단체에서 추진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광역지자체가 직접 발굴하는 경우는 전남이 처음이다. 김영록 전남지사는 “마지막 한 분의 독립운동가까지 찾아낸다는 마음으로 미서훈자를 발굴하고 있다”며 “독립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대한민국 역사 속 ‘의향 전남’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전남은 독립운동 유가족이 고령화됨에 따라 조속히 미서훈자를 발굴하기 위해 1895년 한말의병부터 1945년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전 기간으로 확대해 독립운동 미서훈자 발굴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 최악 가뭄에…가라앉은 2차 세계대전 美 상륙정 호수 위로 ‘쑥’

    최악 가뭄에…가라앉은 2차 세계대전 美 상륙정 호수 위로 ‘쑥’

    최악의 가뭄 탓에 호수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1940년 대 제작된 상륙정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최근 미국 현지언론은 북미 최대 인공 호수 미드호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제작된 히긴스 상륙정이 절반 정도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보도했다. 네바다주와 애리조나주 접경에 있는 인공호수 미드호는 북쪽의 콜로라도 강을 막아 만든 190㎞에 달하는 거대 호수로 대부분의 물을 농업 관개용으로 쓴다. 문제는 계속되는 심각한 가뭄으로 수심이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지난 1일 기준 현재 호수의 수위는 317m로, 한달 전보다 1.3m, 작년 같은 기간보다 7.6m, 2년 전 보다 무려 16m 이상 낮아졌다. 이처럼 기록적으로 낮아지는 수위는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로 인한 최악의 가뭄 때문이다.  이번에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히긴슨 상륙정은 지난 1942~1945년 사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을 수송하기 위해 제작된 수천 대 중 하나다. 실제 이 상륙정이 전쟁에 투입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전후 콜로라도 강의 측량을 위해 이곳에서 사용돼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그러나 기록적인 가뭄으로 인해 호수의 수위가 내려가면서 현재 상륙정의 절반 정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 국립공원관리국은 "호수의 수위가 계속 감소함에 따라 침몰한 상륙정이 모습을 나타냈다"면서 "역사를 직접 눈으로 보고싶은 방문객들을 위해 그 상태 그대로 보존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지난달에는 호수의 수위가 내려가면서 바닥에 잠자고 있던 신원 미상의 유골이 연이어 발견되기도 했다. 지난달 1일에는 1970~1980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총상 흔적이 있는 유골이, 1주일 후에는 또다른 유골이 발견됐다.  
  • [특파원 칼럼] 우키시마호 유족의 국제전화/김진아 도쿄특파원

    [특파원 칼럼] 우키시마호 유족의 국제전화/김진아 도쿄특파원

    “기사 써 줘서 고맙습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지난 21일 우키시마호유족회 한영용 회장이 이같이 말하며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배상 문제 해법을 찾기 위한 민관 합동 기구’(서울신문 6월 20일자 1·6면)를 구성한다는 기사를 쓴 후 다른 기자로부터 한씨가 내 연락처를 찾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국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 줬고, 그렇게 국제전화로 한씨와 통화를 했다. 기사 내용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까 싶어 각오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감사 인사를 들었다. 우키시마호 사건은 1945년 8월 22일 일본 패망 후 강제동원 조선인 노동자들을 태운 배가 당초 목적지인 부산 대신 돌연 마이즈루항으로 향한 뒤 같은 달 24일 폭발해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은 일을 말한다. 일본은 당시 공식 발표에서 승선자 3725명, 사망자 524명, 실종자 수천여 명으로 집계했는데, 생존자 목격담에 따르면 8000명 이상이 배에 있었다고 한다. 배가 부산으로 가지 않고 폭발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일본인 장교들이 한국의 보복이 두려워 자폭했다는 주장도 있고, 기뢰 충돌설도 있다. 한씨가 3살 때 일본에 강제동원된 한씨 아버지는 우키시마호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공식 사망 명단에 한씨의 아버지는 없었다. 2004년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를 발족해 우키시마호 사건 진상 규명에 나섰지만 진실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한씨는 2012년 직접 잠수사를 데리고 마이즈루항에 가라앉은 우키시마호의 반쪽을 수색했지만 실패했다. 한씨는 올해 80세다.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을 그저 기다리고만 있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가 됐다. 그래서 그는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배상 문제 해법을 찾기 위해 민관 합동 기구를 출범시킨다는 소식에 누구보다도 기뻐했던 것이다. 한씨는 “계속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 주고 해결될 때까지 기사를 써 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그 말의 무게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2018년 10월 대법원이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해 일본 전범기업이 1명당 1억원씩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최종 판결한 이후 한일 관계는 최악의 상황에 놓였다. 배상할 이유가 없다며 버티는 미쓰비시중공업의 한국 내 자산 현금화 작업이 올가을로 예정돼 있다. 일본 정부가 이 문제를 가장 민감하게 여기고 있어 실제 자산매각을 하라는 판결이 난다면 한일 관계는 돌이킬 수 없다. 지난 4년간 피해자 중심주의에 가려 방치된 이 문제의 심각성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기구를 출범시켜 해법을 모색하려는 것은 평가할 만하다. 한국 탓만 하며 가만히 있는 일본과 비교해 우리가 지나치게 저자세가 아니냐는 지적이 있는데, 일본의 태도 변화만을 기다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파국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성급하게 나서라는 주문은 아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의 전례를 보더라도 그렇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성급하게 나서진 않되 가만히 있어서도 안 되는 상황까지 왔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라도, 또 피해자들이 정당한 배상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정부가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피해자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다. 물론 그 해법을 찾기는 쉽지 않겠지만 이를 통해 일본을 움직였으면 한다. 기구 출범을 기대하는 이유다.
  • “교황님 제발 도와주세요” 유대인들의 편지 170건 온라인 공개

    “교황님 제발 도와주세요” 유대인들의 편지 170건 온라인 공개

    제260대 교황 비오 12세(1876∼1958년)는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의 유대인 탄압에 제동을 걸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의 즉위 기간은 1939년부터 1958년까지로 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 시기와 겹친다. 박해에 시달리던 유대인들은 교황에게 강제 이송과 수용소 감금을 피할 수 있도록 외교적 개입을 주문하거나 가족을 찾는 데 가톨릭 교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역사학자 데이비드 커처는 책 ‘교황 vs 무솔리니- 교황 비오 12세의 비밀스러운 역사와 유럽의 파시즘 부상’을 통해 “비오 12세는 유대인을 위해 사안에 개입하거나 나치의 잔학한 행위를 비난하는 것을 꺼렸다”고 썼다. 물론 교황청은 비오 12세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조용한 외교’를 했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하지만 전쟁 전부터 중립적인 노선을 취하는 것처럼 보였던 비오 12세는 전쟁이 끝나자 가해자에게 유럽 각국이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전후 복구 과정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은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청의 비오 12세 아카이브에 보관된 유대인 단체와 가족 등의 서한 등 2700건의 자료 가운데 우선 170건을 온라인에 공개하라고 지시했다고 AP 통신이 23일(현지시간) 전했다. 교황청은 성명을 발표해 지난 2020년 3월부터 연구에 참고할 수 있도록 학자들에게는 공개됐으나, 모든 사람이 기록물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뜻에 따라 온라인에 공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도움을 요청했던 이들의 후손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AFP 통신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3년 즉위 이래 가톨릭 교회의 투명성 강화를 추진하는 것과 연결지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가톨릭 교황에게 구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언뜻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이들 대부분은 유대 관습을 더 이상 따르지 않겠다며 가톨릭 세례를 받은 이들이었다. 커처는 최근에 공개된 문서들을 연구해 ‘전쟁 중의 교황’이란 책을 집필해 지난 7일 출간했는데 바티칸 사람들이 구하려고 가장 애쓴 사람은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 가톨릭 신자와 유대인이 결혼해 가진 후손들이었다고 지적했다. 이 말은 교황이나 바티칸이 다른 유대인들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비오 12세는 아돌프 히틀러나 베니토 무솔리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데만 신경썼다고 했다.프란치스코 교황의 외교 책임자인 폴 리처드 갤러거 대주교는 현지 신문 기고 글에서 “유대인들이 보낸 각각의 요청은 처리가 되면 ‘유대인’이라고 이름 붙은 자료 보관함에 넣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공개 대상 기록에는 이 같은 도움 요청에 관한 내용이 포함돼 있지만 결과가 어떻게 처리됐는지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고 덧붙였다. 대주교는 베르너 바라슈란 유대인을 사례로 들었는데 1938년 세례를 받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942년 교황에게 편지를 써 스페인의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나게 도와달라고 했다. 해외에 있는 어머니와 연락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뜻도 함께였다. 그의 간청은 마드리드 주재 바티칸 대사에게 전달됐지만 그 뒤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미국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을 온라인으로 조사한 결과, 실제로 바라슈는 얼마 뒤 풀려나 1945년 미국에서 그리던 어머니와 해후할 수 있었다고 갤러거는 전했다.
  • 1991년 경찰청 ‘외청’ 분리… 장관 사무에서 ‘치안’도 삭제

    행정안전부 경찰제도개선자문위원회가 21일 발표한 권고안이 현실화되면 경찰에 대한 행안부 장관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독립성 침해를 둘러싼 논란도 한층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1945년 경무국으로 출발한 경찰은 1948년 정부 수립 당시 장관급인 ‘치안부’ 독립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내무부 산하 치안국으로 격하됐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헌법과 정부조직법에는 경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는 규정이 포함됐지만 1년 후인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헌법이 개정돼 관련 규정도 삭제됐다. 1974년 치안국에서 치안본부로 승격된 후에도 여전히 내무부 통제를 받았다. 당시 경찰은 권위주의 정권에 휘둘리며 정치적 중립성 훼손과 인권 탄압 문제가 수차례 불거졌다. 이후 민주화 열기 속에 1991년 경찰법이 제정돼 내무부 외청인 경찰청으로 개편됐다. 행안부 장관 사무에서 ‘치안’이 삭제된 것도 1991년 경찰청이 외청으로 분리됐을 때다. 1988~1989년 대통령 소속 행정개혁위원회가 경찰의 중립성을 위해 건의한 내용에는 “경찰은 내무부 장관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있어 선거와 국민투표 업무에 영향력을 행사할 소지가 있는 등 경찰의 민주성과 독립성 보장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미흡하다”는 부분이 포함돼 있다. 대신 경찰 행정에 관한 의결기구로 경찰위원회 설치를 제안했고 지금의 국가경찰위원회로 이어졌다. 당시 경찰청 개청을 앞두고 내무부 치안국 신설과 경찰지휘규칙 제정 논란이 있었으나 경찰청 독립과 수사권 독립 취지에 위배된다는 지적이 잇따르며 무산됐다. 31년 동안 유지된 이 같은 골격은 행안부 내 ‘경찰 지원조직’(일명 경찰국) 신설 등 자문위 권고안이 나오면서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이번 권고는 경찰 인사·정책과 관련한 행안부의 역할 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경찰청이 행안부 지휘 체계에 편입되더라도 경찰 수사를 총괄하는 국가수사본부의 독립된 지위는 변함없을 것이란 의견이 있지만 수사 인력도 결국 인사권을 쥔 장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 수사권 독립이 훼손될 수 있다는 지적도 만만찮다.
  • 경찰 개편 31년 만에 행안부 지휘 편입...독립성 논의 역사는

    경찰 개편 31년 만에 행안부 지휘 편입...독립성 논의 역사는

    1991년 경찰청 분리..‘치안사무’ 삭제“장관 하에 민주성·독립성 미흡” 지적 행정안전부 경찰제도개선자문위원회가 21일 발표한 권고안이 현실화되면 경찰에 대한 행안부 장관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독립성 침해를 둘러싼 논란도 한층 커질 전망이다.1945년 경무국으로 출발한 경찰은 1948년 정부 수립 당시 장관급인 ‘치안부’ 독립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내무부 산하 치안국으로 격하됐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헌법과 정부조직법에는 경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는 규정이 포함됐지만 1년 후인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헌법이 개정돼 관련 규정도 삭제됐다. 1974년 치안국에서 치안본부로 승격된 후에도 여전히 내무부 통제를 받았다. 당시 경찰은 권위주의 정권에 휘둘리며 정치적 중립성 훼손과 인권 탄압 문제가 수차례 불거졌다. 이후 민주화 열기 속에 1991년 경찰법이 제정돼 내무부 외청인 경찰청으로 개편됐다. 행안부 장관 사무에서 ‘치안’이 삭제된 것도 1991년 경찰청이 외청으로 분리됐을 때다. 1988~1989년 대통령 소속 행정개혁위원회가 경찰의 중립성을 위해 건의한 내용에는 “경찰은 내무부 장관의 직접적인 지휘 하에 있어 선거와 국민투표 업무에 영향력을 행사할 소지가 있는 등 경찰의 민주성과 독립성 보장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미흡하다”는 부분이 포함돼 있다. 대신 경찰 행정에 관한 의결 기구로 경찰위원회 설치를 제안했고 지금의 국가경찰위원회로 이어졌다. 당시 경찰청 개청을 앞두고 내무부에 치안국 신설과 경찰지휘규칙 제정 논란이 있었으나 경찰청 독립과 수사권 독립 취지에 위배된다는 지적이 잇따르며 무산됐다. 31년 동안 유지된 이 같은 골격은 행안부 내 ‘경찰 지원조직’(일명 경찰국) 신설 등 자문위 권고안이 나오면서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이번 권고는 경찰 인사·정책 관련 행안부 역할 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경찰청이 행안부 지휘 체계에 편입되더라도 경찰 수사를 총괄하는 국가수사본부의 독립된 지위는 변함없을 것이란 의견도 있지만 수사 인력도 결국 인사권을 쥔 장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 수사권 독립이 훼손될 수 있다는 지적도 만만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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