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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산 박물관 전시 2제] 75년 전 달동 모습 한눈에

    [울산 박물관 전시 2제] 75년 전 달동 모습 한눈에

    울산박물관은 오는 29일부터 내년 2월 5일까지 ‘75년 만의 귀향, 1936년 울산 달리(達里)’ 특별기획전을 갖는다고 24일 밝혔다. 특히 이번 기획전에서는 당시 울산 달리의 모습과 주민생활상을 담은 13분짜리 동영상이 처음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 이 동영상은 1936년 7~8월 일본 도쿄제국대 의학부 학생 12명이 울산읍 달리(현재 남구 달동·삼산동 일대)에서 위생조사를 하면서 찍은 것이다. 기획전에는 이 동영상(미야모토 기념재단 소장)을 포함해 오사카 국립민족박물관에서 대여한 달리 관련 자료 78점이 전시된다. 우리나라 국립민속박물관이 2009년 ‘달리 도시민속조사’를 실시하면서 수집한 자료 40점 등 총 118점이 소개된다. 이와 함께 위생조사 결과를 수록한 ‘조선의 농촌위생 - 울산읍 달리의 사회위생학적 조사’(1940년 발행)도 선보인다. 이 책은 달리의 주택, 주민의 영양상태, 초혼 연령, 월경, 임신과 출산, 출산 전 휴양 일수, 체격, 질병 등 위생조사 내용을 자세히 담고 있다. 우리나라 국립민속박물관이 수집한 자료는 현재 울산 시가지 중심으로 변한 전경 사진과 당시 마을에서 화재 등 긴급상황이 있을 때 이를 알리는 종(일명 불종) 등이다. 달리는 1962년 울산시로 승격된 후 급격한 변화를 통해 지금은 울산의 중심가로 탈바꿈했다. 김우림 울산박물관 관장은 “달리는 1930년대 한국 농촌의 타임캡슐로 평가되고 있다.”고 말했다. 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 [산학연 협력현장을 가다] (상)핀란드 공공벤처기업 ‘보네카’

    [산학연 협력현장을 가다] (상)핀란드 공공벤처기업 ‘보네카’

    요동치는 지구촌의 경제상황과 가속화되는 첨단 지식기반사회의 경쟁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지식과 정보를 효과적으로 결합해 불황을 뛰어넘어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로 나아갈 수 있을까. 선진국과의 격차는 좁혀지지 않고, 중국 등 신흥개도국들의 추격은 날로 숨가빠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지식과 기술, 인재를 효과적으로 결합해 번영과 자존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소량 다품종 생산체제의 확산으로 강한 중소기업의 육성이 세계적인 화두가 되는 상황에서 산업계와 학계(대학), 정부(연구소)의 탄탄한 상호협력의 네트워크와 공동기술개발로 중소기업과 벤처의 경쟁력과 기술력을 유지해 나가고 있는 핀란드, 일본, 싱가포르 등의 예를 통해 세 차례에 걸쳐 한국의 지속 발전 방향을 모색해 봤다. 헬싱키 서쪽 에스푸에 위치한 알토대학 오타니에미 캠퍼스. 핀란드 국립과학기술연구원(VTT)의 소형 원자로 연구센터가 지난 10월말 늦가을 낙엽으로 물든 캠퍼스 입구에 자리하고 있었다. 핀란드 과학계가 최근 자랑스럽게 내놓은 방사능 항암 치료기술인 ‘붕소 및 중성자 포착 치료시스템’(BNCT)을 실용화한 곳이다. 이 기술은 붕소-10 원자가 낮은 에너지의 중성자와 반응하는 원리를 활용해 뇌와 식도 및 목 주변의 암을 치료한다. 1~2회의 방사선 주사로 암세포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칼을 대 수술하기 어렵거나 환자의 안면을 손상시키지 않고 뇌와 식도에 생긴 암을 치료하고 있다. 삼엄한 보안검색과 잠금장치가 돼있는 열세 개의 문을 지난 뒤 겨우 도착한 곳은 트리가 마크Ⅱ로 불리는 250kW급 소형 연구용 원자로. 건물 3층 높이의 원자로 지상층은 붕소에 반응시킨 중성자를 환자의 환부에 쐬어 암을 치료하는 장치가 설치돼 있었다. 지난 2004년부터 말기 암 환자에 대한 부분적인 임상실험을 시작해 유럽연합의 안전성검사도 통과했고, 250여건의 치료가 이뤄지는 등 본격적인 상용화에 들어갔다. 이 기술은 물리학자와 의학자들의 학술 차원의 연구 프로젝트를 산·학·연 공동출자로 설립된 벤처가 떠맡아 실용화의 꽃을 피웠다. 학술차원의 연구 프로젝트를 사장시키기 아까워 연구소와 대학, 그리고 공공기관이 함께 아예 벤처를 만들어 릴레이식으로 실용화에 도전한 것이다. 이런 연유로 이 기술을 실용화한 벤처기업, 보네카의 소유주는 VTT와 헬싱키 의과대학 연구센터(HUCH), 국립벤처 지원기관인 시트라(Sitra)다. 국립 연구소와 의과대학, 벤처지원 기관이 힘을 합쳐 서로 인력과 돈을 추렴하고 역할 분담을 하면서 이뤄낸 산·학·연 공동기술개발 사업의 성과다. 이 치료법의 시발점은 지난 1990년. 헬싱키대 의학자들과 물리학 교수들사이에 1930년대말 나온 ‘중성자로 암세포를 없앨 수 있다’는 연구를 어떻게 암 치료에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발상이 공감을 얻으면서다. 공공 기술혁신 연구지원기구인 테케스(tekes)가 30만 유로(약 4억 6000만원)를 연구 종잣돈으로 지원하면서 이들의 아이디어는 공동 학술연구 과제로 모습을 나타냈다. 헬싱키대 물리학과 교수와 의학자 10여명은 처음에는 학술적인 차원에서 연구를 시작했고, 붕소 10이 낮은 에너지의 중성자와 반응하는 원리를 이용한 연구를 진행했다. 10년동안의 학술 연구 프로젝트가 끝나자, 연구성과를 사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학계와 산업계의 열망속에 이를 실용화하기 위한 벤처가 설립됐다. 이 공공 성격의 벤처가 보네카다. 보네카는 2000년부터 2년 단위로 공공 벤처지원 기관인 시트라에서 200만 유로(약 30억 5000만원)의 이노베이션 펀드를 받으면서 프로젝트는 다시 실용화 연구로 탈바꿈했다. 연구 주체들의 릴레이 협력뿐 아니라 산·학·연 공동기술 개발사업에 대해 자금을 지원하는 공공 기관들도 테케스에서 시트라로의 바통터치와 릴레이가 이어졌다. VTT의 페트리 코티루토 박사는 “연구 결과를 실용화해 보자는 생각 아래 지난 2000년에 VTT와 헬싱키 의대 등이 중심이 돼 벤처 기업을 만들었고, 시트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 실용화 연구를 본격화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물리학자와 기초의학자들의 아이디어와 꿈이 공공 연구지원기관의 자금 지원과 결합되고, 벤처 운영자들의 노하우와 맞물리면서 실용화를 이뤄낸 것이다. 보네카의 마르크 포효라 대표는 “산·학·연이 힘을 합친 공동 기술개발 사업이 기초 학술연구 성과를 실용적인 의학적 치료 방법으로 발전시키고 꽃피게 했다.”고 강조했다. 알토대학의 김장룡 교수는 “산·학·연의 긴밀한 협력과 연구클러스터를 기반으로 한 핀란드 연구계의 끈끈한 협력연구 전통이 아이디어를 실용화시킨 바탕”이라고 말했다. 그는 투크홀마 카투의 바이오 산업단지인 바이오메디쿰 센터에 헬싱키대학 중앙병원, 바이오 관련기업 및 의료 연구소들과 함께 보네카가 입주해 있는 것을 상기시켰다. “핀란드 연구개발의 특징인 바이오 클러스터의 장점과 연구주체들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산·학·연 공동기술개발의 협력 전통이 실용화 성공의 일등 공신”이라고 지적했다. 보네카의 포효라 대표는 “올해 다른 병원에서 수술 후 재발한 환자 30명 가운데 30%는 완치됐고, 나머지 환자의 상태를 개선시켰다.”면서 “세계 어떤 병원과도 협동 연구와 임상 실험의 확대를 통해 치료기술을 더욱 발전시키고, 외국인 환자들에 대한 치료도 넓혀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헬싱키(핀란드) 이석우 편집위원 jun88@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오감도’ 이상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오감도’ 이상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 1934년 식민도시 경성의 여름은 뜨거웠다. ‘조선중앙일보’에 7월 24일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작품 ‘오감도’(烏瞰圖) 때문이다. 작가는 2000여편 중에서 30편을 골라 연재할 계획이었지만, 결국 15회를 넘기지 못했다. 띄어쓰기 무시! 문법 파괴! 기호와 숫자가 문자를 대신하는 시! 독자들은 분노했다. 이것은 시가 아니다, 당장 원고를 불살라라, 작가가 미쳤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을 미쳤다고 비난하는 독자들에게 반문한다.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년씩 뒤떨어져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그가 보기에 대중은 게으르고 편협했다. 자신은 지금 시대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뛰어넘고 있는 중인데 독자들은 아직도 구태의연한 문학관만 소비하는 중이니 말이다. ‘오감도’의 작가 이상(李箱·1910~1937). 그는 정말 시대와 불화한 천재였을까. 시대가 박제시켜 버린 천재였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재능이나 영감에 의지해 개성을 뽐내는 그런 천재는 아니었다. 모두가 문명화, 근대화라는 덧없는 망상 속에서 허둥댈 때, 그는 아무도 보지 못했던 문명의 메커니즘을 보고, 시대의 이면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비상(非常)한, 비상(飛上)을 꿈꾼 지식인이었다. ●모던 경성, 적빈(赤貧)의 시공간 1910년 9월생인 그는 일본어를 국어로 하는 세상에서 태어나 문화통치 기간인 1920년대에 학교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1920년대 중반이 되면 제국 일본의 식민 경영이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아울러 경성의 도시경관은 총독부 건물, 경성제국대학, 백화점을 중심으로 근대 도시의 풍모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 안에서 근대적 학교교육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고 출판산업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졌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는 신문과 잡지를 통해 동시대의 근대문화를 흡수하고 소비하는 ‘대중’이 유럽풍 옷가지와 장신구로 몸을 두르고 커피 한잔을 찾아 방랑하는, 보들레르가 명명했던 ‘산보객들’이 경성 한복판에 등장하기에 이른다. 경성고등보통학교 건축과 학생이었던 이상 역시 화구통을 메고 거리를 어슬렁거린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친 것은 가난이었다. 끼니를 잇기 힘든 가난한 중인 가문의 장남이었던 그는 현미빵을 팔아 학교를 다녔다. 그가 배우는 최신 기하학과 건축학이 식구들과 이웃의 허기를 달래줄 날은 참으로 요원했다. 하지만 이런 물질적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정신의 가난이었다. 생활은 점점 더 돈을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돈은 아비와 자식, 친구와 애인을 연결시켜 주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였다. 의리도 인정도 돈 앞에서는 힘을 쓸 수 없었다. 지독한 정신의 가난은 가난한 서민들뿐 아니라 도시인 전체를 갉아먹고 있었다. 대중매체가 선전하는 소비와 향락, 학교에서 강요하는 청결하고 근면한 생활. 이상이 보기에 이것은 실상 일본식 유행풍속을 좇아 양복을 입고 몇 개 안 되는 다방을 전전하면서 ‘교양입네’ 하는 꼴이었다. 제국 일본의 식민도시 경성은 제대로 문명화를 구가하지도 못하면서 박래품 소비에만 열광하는 ‘무늬만 근대도시’였다 경성의 도시인들은 모두 ‘모던’(modern)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지만, 정작 자신의 텅 빈 정신은 보지 못하는 불구자들이었다. 왼팔을 들면 거울 속의 나는 오른팔을 들어 올리는 기묘한 형국처럼 도시인들은 자신을 비추는 문명의 거울 앞에서 분열증에 시달렸다. 지독한 정신의 가난 속에서도 겉으로는 잘사는 척, 문명인인 척하기에 급급한 삶이라니! 이상은 이 사태가 공포스러웠다. 그 수선스러움에 질식할 것 같았다. 이 가난에 맞서야 한다! ●나의 펜은 나의 칼이다 1930년 ‘조선’에 연재된 첫 장편소설 ‘십이월 십이일’을 필두로, ‘이상한 가역반응’, ‘삼차각설계도’, ‘건축무한육면각체’ 등 기하학과 일본어가 맞물린 시들과 ‘지도의 암실’ 등의 소설, 다양한 수필이 발표된다. 문명을 지탱하는 정신의 가난과 대결하면서 그가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것은 언어의 문제였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어가 국어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은 조선어다. 그는 식민지에서의 가난과 소외가 무엇보다도 언어와 그 언어 사용자 사이에 놓인 간극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1930년대를 지배하는 ‘모던’이라는 말 안에는 그 어떤 진지한 성찰도 부재했다. 도시의 소비자들은 양복(洋服), 양행(洋行)과 같이 서양풍을 내세운 습속에만 매달릴 뿐 왜 서양식 옷을 입고 서양에서 나온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자문하지 않았다. ‘모던’이란 말은 식민지 조선에서 텅 빈 기호였다. 그 안에서 어떤 정신적 가치도 찾을 수 없었다. 이상은 그런 시대를 ‘활자허무시대’라고 명명했다. 이상은 그렇게 기호에 갇혀 자기 삶의 진실을 외면하는 문명인의 삶을 해부하기로 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런 그에게 문학은 대중이 기대하는 여가선용이나 위안의 도구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듯 특정한 계급의 현실을 드러내고 정치적 방향을 선동하는 이념의 도구에 머무를 수도 없었다. 문명의 매커니즘을 해부하고, 소외된 삶을 극복하는 것! 이것이 문학의 일차적인 임무여야 했다. 이상에게 펜은 그런 가난한 문명과 나태한 정신을 향해 휘두르는 칼이어야 했다. 그의 시 ‘오감도’는 숫자와 여러 가지 기호들을 통해 근대적 삶의 폐쇄성과 불구성을 해부하는 ‘메스’로서의 문학이었던 셈이다. ‘오감도’ 연재가 중단된 후 자신의 시도가 불러일으킨 적대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이상은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을 몰라보는 대중을 무시하지도 않았으며, 관광객의 시선으로 그들의 삶을 관조하지도 않았다. 속악한 돈의 횡포나 비정한 이기주의를 직시하면서도, 그는 자신 역시 허위에 찬 근대의 산물임을 처절하게 의식했다. 박태원과 김기림 같은 지인들은 이상이 퇴폐적 카페를 열고 여급들과 연애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문학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도 문명을 비판하고 자조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감추려고도, 미화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겪은 배반과 궁핍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근대문명을 고민하고, 그 안을 휘청거리며 걸었다. ●이상, 시대의 혈서를 쓰는 자 1936년 가을, 이상은 일본 도쿄로 떠났다. ‘날개’를 통해 평단으로부터 큰 주목과 호평을 받은 직후였다. ‘날개’는 돈으로 마음과 정신을 사고파는 근대인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여기서 이상은 주인공이 날개를 얻어 비상할 것을 꿈꾸는 장면으로 작품을 마무리했다. 해부를 넘어 새로운 도덕을 발견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어쩌면 그 도덕적 비전이 식민지 조선 바깥에, 현해탄 건너 문명의 본산에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쿄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허영의 낙원이었다. 특가품, 할인품, 온갖 상품들로 넘쳐나는 긴자 거리에서 사람들은 모두 성병에 걸린 듯 화려하게 치장한 채 돌아다녔으며, 최신 서적들은 그저 교양으로 소비되고 있었다. 거기에도 자기 삶의 정열을 태우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현대 자본주의의 병폐가 더 노골적으로 발산되고 있었다. 영국 런던에 가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딜 가도 적막, 암흑, 권태뿐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새로운 도덕을 찾아야 한단 말인가. 20세기가 그토록 찬미해 마지않는 문명이란 정신의 가난만 키우는 황금만능의 허위 세계임을, 이상은 낯선 땅에서 뼛속 깊이 절감한다. 그해 겨울 도쿄 거리에서 이상은 불온한 조선인으로 낙인찍혀 감방에 갇히게 된다. 도일(渡日)하기 전부터 앓았던 폐병은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문명의 속악성은 그의 마음에서 한 가닥 희망마저 앗아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글을 쓰면서 돌파구를 모색하겠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1937년 4월 17일. 채 십년이 되지 않는 창작 기간 동안 오직 근대문명의 실상을 파헤치기 위해 글을 썼던 이상이 죽었다. 그의 죽음은 친구 김기림의 말대로 제 육체의 마지막 조각을 갖고 제 혈관을 짜서 쓴 시대의 혈서였다. 죽기 몇 달 전 탈고한 소설 ‘종생기’(終生記)에서 이상은 자신의 묘지명을 작성한다. “일세의 귀재(鬼才) 이상은 그 통생(通生)의 대작 ‘종생기’ 일편을 남기고 서력 기원후 일천구백삼십칠년 정축(丁丑) 삼월삼일 미시(未時) 여기 백일(白日) 아래서 그 파란만장(?)의 생애를 끝막고 문득 졸하다. 향년 만이십오세와 십일개월.” 자신을 죽이고, 그 시체로부터 생과 예술의 본질을 투시하려 했던 자. 임박한 죽음 앞에서도 이상은 그렇게 끝까지 예리한 언어의 칼날을 거두지 않았다. 오선민 남산강학원 연구원
  • 퓨전 국악 원조 ‘신민요’ 한마당

    신(新)민요 한마당이 펼쳐진다. 오는 23일 오후 5시 서울 필동 신민요연구회 주최로 열리는 ‘방아 찧는 색시의 노래’ 공연이다. 신민요는 일제시대였던 1930년대에 서양음악의 박자와 리듬을 응용하고 서양 악기로 반주한 새로운 형식의 민요로 퓨전 국악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다. 퓨전의 초기 단계였던 만큼 지금의 퓨전 국악보다는 국악 냄새가 더 짙게 배어 있다. ‘방아 찧는 색시의 노래’는 한국 최초의 신민요로 꼽힌다. 1931년 컬럼비아레코드사에서 발매된 곡으로 홍난파(1898~1941)가 작곡했다. 평양 명기로 이름을 날렸던 왕수복(1917~2003)의 ‘포곡성’도 공개된다. 북한이 ‘모란봉’과 함께 대표 민요로 꼽는 곡이 ‘뻐꾹새’인데, ‘포곡성’은 이 곡의 원곡이다. 6·25전쟁 이후 최고의 신민요 가수로 꼽혔던 황정자(1929~1969)의 대표곡 ‘봄바람 임바람’, ‘울산아가씨’로 이름이 바뀐 채 애창돼온 황금심(1922~2001)의 ‘울산큰애기’도 들을 수 있다. 바니걸스와 서유석이 부른 민요풍 노래도 넣었다. 경기소리계의 독보적 스타로 불리는 고금성, 가야금 산조와 병창에 능한 차수연, 재담소리를 이어 가고 있는 김혜영, 최근 경기민요판에서 주목받고 있는 신예 박정미 등이 나선다. 무료. (02)375-0595.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박재범칼럼] ‘이웃집 암소를 죽여 주세요’

    [박재범칼럼] ‘이웃집 암소를 죽여 주세요’

    ‘부잣집 옆에 살고 있는 농부가 있었다. 부자에게는 암소 한 마리가 있었다. 농부는 평생 뼈 빠지게 일해도 갖지 못할 가축이었다. 농부는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마침내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웃집 암소를 죽여주세요.’ 미 클린턴 대통령 때 노동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가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원제 After Shock)라는 저서에서 소개한 러시아의 민담이다. 그는 러시아에서는 대개 모든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보다 끌어내리는 쪽으로 기운다며, 추세가 바뀌지 않는다면 미국도 러시아와 비슷한 처지가 될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한 전직관료는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이 얘기를 끄집어냈다. 정부와 민간부문에서 골고루 일했던 그는 금융통으로 독서광이다. 연초 나온 책을 읽고 동료였던 전직 장·차관들에게 일독을 권했더니 모두 ‘현직 시절 책을 봤더라면….’ 하며 아쉬워했다는 것이다. 금융위기가 한창인 가운데 미국에서 ‘우리가 99%’라는 반(反)월가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시위가 열렸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도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다. 까닭은 무엇일까. 단순화시켜 보면 보통 사람들의 부자에 대한 시선이 달라진 탓이 아닐까 싶다. 대공황 시절 미국은 케인스의 처방에 따라 총수요 관리를 통해 중산층을 두껍게 육성하는 일에 나섰다. 아울러 유럽을 친구 삼아 시장 규모를 넓혔다. 절정은 1970년대였다. 돈 흐름이 좋아지면서 일자리와 보수가 넉넉해졌다. 중산층의 호주머니가 두툼해졌다. 지금 부자에 대한 반감은 중산층에 돈이 돌도록 하는 장치에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미국에서 1928년과 2007년 개인소득 상위 1%가 국민소득 23% 이상을 가져갔다고 한다. 1970년대에는 7~8%였다. 돈이 적절히 분산되면 안정과 번영을, 돈이 쏠리면 불안과 위축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관점은 한국에도 시사점이 많다. 우리는 40여년 전까지만 해도 보릿고개를 넘는 게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이제는 주변에 수천억원대 부자가 즐비하다. 70년대에는 포니 자동차만 굴려도 빛이 났다. 요즘 경차를 타고 다니면 대접받기 힘들다. 모두 가난했을 때에는 심정적 안정감이 있었으나, 돈이 제법 모이자 비교를 하게 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당시 강남권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분위기가 형성된 연유다. 우리는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접근법을 영점에서 뜯어고쳐야 한다. 성장을 해치지 않으면서 중산층 호주머니에 돈을 담아줄 수 있도록 발상과 제도를 전환해야 한다. 그럼에도 지금 정부와 정치는 가난으로부터 굴기하려 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의 틀에 안주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휘발유에 붙는 세금이라고 본다. 30~40년 전만 해도 자동차는 특수계층만 가질 수 있었다. 그때는 휘발유를 특별하게 바라보는 것이 타당했다. 자동차가 생필품이 된 지 오래됐음에도 발상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 위치가 달라졌음에도 관행적으로 일을 하고 있다. 우물가에서 살다가 강가로 터전을 옮겼음에도 여전히 우물 물을 길어 먹는 식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안철수 바람을 이해할 수 있다. 젊은이들은 정부·정당을 과거 낡은 틀을 부여잡고 매달리는 기득권층으로 본다. 젊은이에게 보릿고개를 얘기해봤자 공허할 뿐이다. 눈높이에 맞춘 일자리와 실질임금이 필요하다. 소득불균형을 알려주는 지니계수는 2000년 0.279에서 2010년 0.315로 악화됐다. 무상급식처럼 골고루 나눠 먹자는 식의 단세포적 해법이 판을 칠 수밖에 없다. 성장의 과실을 소수만 독식하는 것은 결단코 막아야 할 일이다. 마찬가지로 무작정 골고루 나눠 먹자는 것도 나라와 개인의 삶을 망치는 일이다. 사람의 심성은 다 똑같은 법. 우리나라에서 ‘이웃집 암소를 죽여달라.’는 기도가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파탄을 막으려면 정치와 정책의 일대 개혁이 시급하다. jaebum@seoul.co.kr
  • “60~70년대 추억놀이터 초대합니다”

    “1960~70년대 추억의 놀이터로 초대합니다.” 경북 군위군 산성면 화본마을운영위원회(위원장 윤진기)는 오는 23일 ‘추억의 놀이체험’ 행사를 연다. 올해가 첫 회다. 120여 가구 200여명이 사는 화본마을은 전국 네티즌들이 뽑은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인 1930년대 화본역과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급수탑 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 옛 정취를 더해 주고 있다. 특히 이 마을은 올해 2월부터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하는 ‘폐선 철로 및 간이역 관광자원화 사업’ 대상지로 선정돼 화본역사와 관사를 복원하는 등 각종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화본아, 가을 놀자’란 주제로 열리는 이번 축제는 주민들이 마을을 알리기 위해 스스로 기획했다. 옛 산성중학교를 리모델링한 ‘추억의 학교’에서 체험할 추억의 놀이로는 떡메치기를 비롯해 뻥튀기, 팽이치기, 딱지치기, 제기차기, 콩잎·깻잎 김치 만들기, 볏짚 계란 꾸러미 만들기 등으로 다양하다. ‘추억의 학교’는 40~50여년 전의 시골 학교 교실과 이발소, 사진관, 소리사, 만화방, 문방구, 구멍가게, 연탄가게 등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곳이다. 인근의 주말농장에선 가족과 연인, 친구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미꾸라지잡기, 허수아비 만들기, 밤 구워먹기, 콩사리 등 농촌체험 행사가 준비돼 있다. 대추, 오이, 콩 등 마을에서 재배한 친환경 농산물을 싼 가격에 구입할 수도 있다. 윤 위원장은 “도시민들이 산골에서 전통 놀이와 농촌을 체험하면서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와 피로를 말끔히 풀 수 있도록 행사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군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커버스토리-월가의 99%시위] 자본주의 부정 아닌 승자독식 시스템 거부

    월가의 반(反)자본주의 시위는 자본주의의 부정이 아닌 따뜻한 모습의 자본주의가 탄생하길 바라는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 현재 전문가들이 진단하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핵심은 ‘국가의 귀환’으로 요약된다. 탈규제와 시장 만능주의를 지향했던 신자유주의가 2008년 금융 위기 등 많은 부작용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가 민간경제에 양적으로 개입해 소비를 늘리는 1950~60년대 케인스학파의 논리와는 다르다. 시장의 실패를 거울삼아 정부가 공정한 분배를 위해 조율하고 개입하는 형태를 의미한다. 부(富)가 1%에 집중될 정도의 양극화를 미리 방지하고 금융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갖는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는 그간 수없이 진화를 거듭해 왔다.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1930년대 불황을 통해 국가가 민간경제에 개입해 소비를 촉진해야 한다는 케인스식 자본주의로 전환됐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1970년대 국가 개입의 실패가 가시화되면서 시장의 복권이 시작됐다. 이렇게 등장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는 복지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조금씩 보완되면서 발전했다. ●“정부는 공정분배 개입하라”… 99%의 반발 하지만 장하성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자본주의는 독주 때문에 진화의 기회를 잃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자본주의는 현실적이지만 모두를 품는 이상적인 면이 부족해 사회주의에서 사회보장제도 등을 배워 보완했다.”면서 “하지만 자본주의는 승자 독식(시장만능주의) 시스템 때문에 기존 20%대80%의 사회가 1%대99%의 사회로 갔다고 대중은 믿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시위를 하는 대중이 시장체제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왜 너희만 잘 먹고 잘사느냐고 반발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역시 현재의 상황을 기존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포스트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로 옮겨 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금융 자본의 영향력은 커졌지만 통제 수단이 없고 사회 양극화가 커진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유승경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금융권의 높은 임금이 비판받는 이유는 긴 시간 동안 기술 개발 등을 하면서 꾸준하게 노력한 결과로 이득을 창출한 게 아니고, 한 번의 선택에 따라 큰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 “결국 상품 교환 관계나 임금 계약 형태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금융 의존도 줄이고 규제 강화해야 강석훈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의 역할이 커지지만 예전과 같은 모습의 케인스식 수정자본주의는 아닐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금융 부문 의존도를 줄이고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동의는 이미 이뤄진 것 같다.”면서 “하지만 재정이 불안해 정부가 통화정책으로 개입할 여지가 줄었기 때문에 양적완화 등의 방식보다 공정한 분배를 위한 역할이 강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경주·임주형기자 kdlrudwn@seoul.co.kr
  • [서울시장 보선 D-14] “재벌에 삥 뜯는 시민운동가” vs “선거기간 중 투기하는 후보”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둘러싼 여야의 네거티브 비방전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한나라당은 11일 열린 국회 정치분야 대정부질문에서 범야권 무소속 박원순 후보를 겨냥해 대대적인 공세를 폈고, 박 후보 측과 민주당 등 야권은 장외에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의 재산을 문제 삼으며 공방을 가열시켰다.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과 시민사회 세력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정치권 전반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반면, 이로 인해 정치판이 더욱더 극한의 대결로 치닫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은 “악취 나는 의혹투성이 후보” “재벌에게 삥을 뜯는다.”는 과격한 언사를 써가며 박 후보를 맹비난했다. 차명진 의원은 “박원순씨는 민중봉기론을 주장하며 대한민국 체제 전복을 행동강령으로 삼는 자들을 옹호하고 함께 행동한다. 박원순 당신은 종북 좌파에 이용당하고 있다. 지난해 아름다운 재단 등의 모금액 중 30%가 좌파단체 지원용 등으로 쓰였다.”고 주장했다. ●“아름다운재단 모금액 30% 좌파 지원” 차 의원은 또 “박씨는 한 손으로 채찍을 들어 재벌들의 썩은 상처를 내리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삥을 뜯는 식으로 사업을 운영해 왔다. 시민운동이 아니라 저잣거리 양아치의 사업방식”이라고 공세를 퍼부었다. 이에 야당 의원들은 “흑색선전 선거운동을 한다.”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같은 당 김성태 의원은 “박 후보는 노조결성 움직임이 보이자 ‘만약 노조가 생기면 아름다운 가게가 종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노조를 탄압하는 사람이 어떻게 서울시장 공직에 적합한가.”라고 따졌다. 안형환 의원은 “박 후보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대학교를 1979년부터 1985년까지 다녔는데 1978년 12월부터 1979년 8월까지는 춘천지법 정선 등기소장이었고, 1980년 사시에 합격한 뒤 학생임에도 1981~82년 사법연수원을 다녔다고 한다.”면서 “상식적으로 학생 시절에 어떻게 등기소장을 하고 연수원을 다닐 수 있느냐. 악취 나는 경력·학력을 가진 의혹투성이 후보가 표를 달라고 외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노조 결성 움직임에 종말 올 것” 이에 대해 민주당 유선호 의원은 “박 후보에 대해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매카시즘적, 적대적 공격이 자행되고 있다. 한나라당이 이런 검증을 한다는 건 바이러스가 백신을 치료한다는 꼴”이라고 힐난했다. 그러면서 “이명박 대통령과 김황식 국무총리, 원세훈 국정원장 등 병역미필자가 주축이 된 정권이 무슨 병역문제를 검증한다는 것이냐.”라고 반박했다. 장외공방도 치열하게 펼쳐졌다.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은 국회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박 후보의 할아버지 대신 작은할아버지가 사할린으로 강제징용을 갔다는 주장은 거짓이라며 “박 후보가 호적 조작도 모자라 가족사까지 조작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부산 고등법원 제5민사부 판결문을 들어 “일본이 전쟁으로 인력·물자가 부족해지자 1939년 7월 8일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징용령(칙령 제451호)을 제정했지만 한반도에선 칙령 제600호에 의해 1943년 10월 1일부터 적용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일본은 한국인의 반발을 우려, 국민징용령 대신 특수기능공들의 일본 이주 정책을 추진했는데 그것도 일본 회사 중심의 노무동원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면서 “작은할아버지가 사할린으로 갔다면 모집에 응해서 간 것이지 형을 대신해 징용 간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신당동 상가 투자 13억 챙겨” 이에 민주당 이용섭 대변인은 “신 의원이 주도하는 뉴라이트 인사들이 주축인 ‘교과서포럼’에서 출판한 대안교과서에도 강제징용이 193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다고 나와 있다.”고 반박했다. 신 의원이 지난해 2월 공동발의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안’에도 국외강제동원 희생자를 ‘1938년 4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 사이 일제에 의해 국외 강제동원된 사람들’로 규정하고 있어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무상급식도 한나라와 엇박자” 박 후보 측은 한나라당 나 후보의 재산에 대해서도 공세를 폈다. 나 후보는 2004년 4월 12일 중구 신당동 상가를 매입했다가 지난해 매각하는 과정에서 13억원가량의 시세차익을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후보 측 우상호 대변인은 “나 후보의 건물 매입시점은 한나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로 등록된 상태에서 선거전이 진행되던 중이었다.”면서 “공직선거에 나온 후보가 건물이나 보고 다녔다는 얘기”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부동산 투기 혹은 부동산 투자로 거액의 재산을 증식한 분이 서울시장이 돼 부동산가격 안정대책을 발표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면서 “나 후보가 시세차익을 사회에 환원할 의사가 있는지 묻고자 한다.”고 꼬집었다. 이재연·강주리·황비웅기자 oscal@seoul.co.kr
  • ‘복지천국’ 스웨덴식 보편적 복지국가 핵심은

    복지정책의 쟁점은 수혜자가 아니라 부담자다. 결혼, 출산, 육아, 교육, 실업 등 삶에서 누구나 부딪히게 될 위험에 국가적 차원의 대응책을 마련하자는 데 뭐라 할 사람은 없다. 해서 반대론자들은 늘 부담자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한다. 복지논쟁이 불붙으면서 이 부분도 비교적 상세히 거론되기 시작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최근 내놓은 ‘역동적 복지국가의 길’(도서출판 밈 펴냄)에서 주목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들이 복지국가를 좌파적 이념이 아니라 새로운 자본주의로 본다는 점이다. 좌파가 아니라는 점은 보편적 복지가 결국 자본가들에게도 이득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결혼, 육아, 실업 등에 대한 노동자들의 부담이 적어야 임금인상 압박이 줄고, 구조조정이 용이해진다. 역사적으로도 복지국가론은 우파보다 좌파들의 공격 대상이었다. 무크지 창간 형식이다. 2, 3, 4권을 내면서 지속적으로 ‘계몽’하겠다는 의미다. 또 한 가지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라는 단체 자체가 야권과 깊은 연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민주당이 내건 ‘증세 없는 복지’를 비판한다는 점이다. 정치인에게 증세 주장이란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와 같다. 그래서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하다. 때문에 이들의 목표는 정치권 비판 그 자체라기보다, 증세 주장의 토양을 마련해주는 쪽에 초점을 맞췄다. 13편의 논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글은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의 글 ‘복지국가의 조세재정-역사에서 배운다’이다. 국민대 교수를 지낸 정 위원은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와 함께 베스트셀러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쓰기도 했다. 복지재정 확충을 위한 증세라고 하면 흔히 부유세를 떠올린다. 고소득층에게 고도의 누진적 과세를 부과하자는 것이다. 정 위원은 한국적 상황에서 참고할 점은 있으나, 문제가 있는 방식이라고 본다. ‘복지의 전범’으로 꼽히는 스웨덴 사례를 예로 든다. 1930년대 사민당 집권기에 가장 먼저 추진된 정책 가운데 하나가 법인세 인하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권의 법인세 인하를 비판하는 사람들로서는 다소 뜻밖이다. 아울러 재분배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부가가치세율이 한국은 10%, 스웨덴은 25%다. 그런데 스웨덴은 복지천국이다. 정 위원이 보기에 부유층에게 고액의 소득세를 매기는 행태는 정치적 불안정의 결과다. 실제 미국과 영국은 1929년 대공황 이후 개인소득세 최고세율을 80~90%대까지 높였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 부자를 쥐어짜는 것이어서다. 대공황과 세계대전 와중이라 반대할 명분도 없다. 반면, 스웨덴은 최고세율이 47%를 넘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국·영국의 조세 수입 가운데 소득세와 법인세 비중은 40%에 그친 반면, 스웨덴은 1940년대부터 50%를 넘어섰다. 정 위원이 분석해 보니 미국, 영국은 급하게 세율을 올리는 데 따른 정치적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각종 공제제도와 감면제도를 마련했다. 명목상 최고세율은 치솟는데 조세 수입은 크게 늘지 않은 이유다. 반면 스웨덴은 세율을 높이지 않되 예외가 되는 구멍을 막았다. 예나 지금이나 인구의 대다수는 고소득층이 아니라 중·저소득층이다. 조금 적더라도 더 넓게 걷다 보니 더 많은 조세가 가능했다. 정치적 필요에 따라 등장한 고도의 누진적 과세는 정치적 변동에 따라 언제든 급격히 사라진다. 최고세율을 79%에서 33%로 대폭 깎아내린 미국 레이건 정권이 대표적 예다. 정 위원은 이런 비교작업을 통해 복지국가는 재분배에 역진적이라는 소비세 비중이 오히려 높고, 복지에 후진적인 나라들은 개인소득세와 법인세에 크게 의존한다는 역설적인 상황을 제시한다. 결론적으로 보편적 복지란 부자가 가진 것을 뺏어와 나눠 갖는 개념이 아니라, 낸 것을 다시 되돌려받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물론 소득에 따라 부담하는 세금의 차이는 있지만 이 차이는 좀 더 부드러워야 하고, 대신 감면·공제제도는 대폭 간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 위원은 “이렇게 해야 왜 내가 낸 돈으로 남들이 이득을 보느냐는 정치적 불만을 제압할 수 있고, 이는 복지정책 자체의 제도적 안정성에 기여한다.”고 지적한다. 보편적 복지를 위해서는 보편적 증세가, 다시 말해 “돈 많은 너희들이 세금 다 내라.”가 아니라 “돈 없는 나도 버는 만큼 세금을 내겠다.”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美·EU 성장률 1% 하락땐 한국 수출 각각 2%·4% ↓

    美·EU 성장률 1% 하락땐 한국 수출 각각 2%·4% ↓

    미국과 유럽연합(EU)의 경제성장률이 1% 하락하면 우리나라의 미국과 EU 수출이 각각 2%, 4% 정도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5일 산업연구원(KIET)의 ‘선진권 경기불안이 국내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해외경기 변동에 대한 수출 탄력성(추정치)을 살펴본 결과, 세계 경제 성장률이 1% 감소하면 한국의 총 수출은 1차연도에 3% 줄고, 미국과 EU의 경제 성장률이 1% 떨어지면 우리나라의 미국 수출은 2%, EU 수출은 4% 안팎으로 감소한다. 민성환 KIET 연구위원은 “최근 주요 해외 전문기관들은 올해와 내년 주요 선진국의 성장률이 1%대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며 “한국의 미국, EU 수출도 최근 감소세로 바뀌는 등 선진국 경기둔화가 수출에 미치는 영향이 가시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산업별로는 미국, EU 수출 비중이 높은 업종 중 경기에 민감한 반도체·컴퓨터·가전·디스플레이 등 정보기술(IT) 관련 업종의 타격이 상대적으로 클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자동차는 신흥시장의 수요 호조와 국내 업체의 중·소형차 특화 구조 등으로, 조선은 수출이 기존 수주물량의 인도라는 점에서, 석유화학은 미국·EU보다 중국 시장의 영향을 주로 받는다는 점에서 영향이 적을 것으로 나타났다. 신현수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수출에서 선진권 시장 비중은 30% 내외로 선진권 경기 둔화가 전체 수출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며 “다만 선진권 경기 부진이 신흥권으로 파급되거나 선진권의 재침체가 전 세계적인 금융 불안으로 이어질 경우에는 훨씬 큰 충격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 등 선진국 경제의 재침체도 경고했다. 보고서는 “미국 등 선진국들은 경기가 부진한 가운데 재정악화 문제가 정치적으로 크게 부각되면서 정책 기조가 뚜렷하게 긴축으로 선회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며 “이는 대공황기인 1930년대의 미국, 금융위기 아래에서 1996년의 일본 등 대형 경기침체 이후 재침체를 경험했던 사례와 유사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이어 “이 사례들은 대형 경기침체로부터 어느 정도 회복 추이를 보인 이후 재정 건전화에 대한 강박으로 성급한 출구전략을 추진하면서 재침체를 초래했다는 공통성을 보인다.”고 덧붙였다. 강두용 선임연구위원은 “재침체는 전 분기 대비 마이너스 성장을 뜻하고, 수출 감소 효과 수치는 경제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회귀분석을 통해 최근 성장률과 수출증가율 등을 감안해 추정했다.”고 설명했다. 김승훈기자 hunnam@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25) ‘만세전’의 작가 염상섭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25) ‘만세전’의 작가 염상섭

    염상섭(1897~1963)은 널리 알려진 ‘국민작가’다. 염상섭이 ‘국민작가’인 것은 물론 그의 걸출한 문학작품 덕분이지만, 그의 삶이 근대 이후 한국사의 중요한 맥락들과 궤를 같이해 온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철들 무렵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고, 그는 한일병탄 2년째인 1912년 일본 유학생활을 시작한다. 1930년대에는 만주로 건너갔다가 해방이 되자 신의주를 거쳐 38선을 간신히 통과해서 서울로 돌아왔고, 이후 종군작가로 한국전쟁을 체험한다. 이처럼 식민지 조선과 제국 일본, 해방과 한국전쟁을 마주했던 염상섭의 삶의 국면들은 100편이 훨씬 넘는 그의 장·단편 소설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가히 문제적 시대를 살아낸 문제적 작가인 셈이다. 그러나 역사와 시대가 문제적이었다고 해서 반드시 문제적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흔히 한국문학사에서 염상섭을 일컬어 ‘리얼리즘의 최고봉’이라 하는데, 이 찬사 속에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생생하게 재현해냈다는 평가가 담겨있다. 그렇다면 염상섭이 바라본 ‘있는 그대로의 사실’은 어떤 것이었을까. ●선망과 자괴 사이에서 일본 유학생 시절, 그는 식민지인이라는 피해자의 입장과 제국 일본을 선망하는 학습자 사이에 놓여 있었다. 이른바 ‘친밀한 적’을 마주해야하는 고통, 즉 일본을 본받고 따라하면서도 그런 자신을 경멸하고 자책하는 이중적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일본에 유학한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다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염상섭의 경우는 좀 더 특별난 데가 있었다. 그의 유학이 일본군 육군 중위였던 맏형의 보살핌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맏형 염창섭은 대한제국 시절, 영친왕이 유학이라는 명분 아래 일본으로 인질처럼 끌려갈 때 그 시종으로 따라갔다. 이후 염창섭은 대한제국의 유학생 신분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그는 일본군대로 편입하는 길을 선택한다. 곡절 많은 내력이지만, 현실에서 일본군 장교라는 위치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형 덕분에 염상섭도 사립학교나 학원가를 전전하던 조선유학생들과는 달리 정규 일본 명문중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이후 염상섭은 동아일보 정경부 기자(일본특파원)를 비롯해서 시대일보, 조선일보, 심지어 총독부기관지였던 매일신보, 만주국의 홍보지 역할을 했던 만선일보에서까지 두루두루 일한다. 할 일 없이 이 거리 저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는 가난한 식민지 지식인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셈이다. 게다가 염상섭만큼 일본어와 일본문학에 정통한 문인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염상섭에게는 ‘군복자락 콤플렉스’, ‘현해탄 콤플렉스’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일본군 장교인 형은 든든한 버팀목이었지만 부끄러운 존재였고, 조선과 일본 사이의 바다 현해탄을 오가는 것처럼 일본을 선망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식민지인임을 자각하고 괴로워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 콤플렉스를 잘 보여주는 것이 오사카 독립선언서 사건이다. 염상섭은 2·8독립선언서, 기미독립선언서에 영향을 받아 1919년 3월 18일 오사카에서 단독으로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거사를 꾀하다가 체포되어 3개월의 미결수 생활을 겪는다. 이 독립선언문에는 ‘오사카 한국 노동자 일동 대표 염상섭’이라고 쓰여 있다. 그 전해에 병으로 대학을 자퇴했고, 작은 신문사의 기자생활을 하긴 했지만 그가 노동자 대표라기엔 다소 억지스럽다. 게다가 정규 일본 명문 중학을 졸업하고, 귀족자제들이 다니던 게이오 대학 문과에 입학했던 그의 이력을 떠올리면 생뚱맞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노동자를 자처하고 나선 것은 그의 깊은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염상섭의 내면에는 일본 육군장교의 동생, 안온한 일본유학생이라는 자괴감이 늘 존재했고, 그 반작용의 심리로 자신을 노동자대표로 내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군복자락으로부터 야차의 길로 식민지 상황에 대해 어떤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받아들이고 체념했다. 또 어떤 이는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 일본과 투쟁하는 것만이 최선이라 했다. 어떤 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을 부끄럽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 괴로움으로 현실을 등지거나 스스로 자기 파멸로 내몰아가기도 했다. 물론 자기이익만을 챙기기에 급급한 무리들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염상섭은 자기 삶을 글쓰기로 옮겨놓음으로써 자괴감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세계와 대면하고자 한다. 염상섭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만세전’(1924)은 자전적 경험이 깊이 투영된 일본 유학생 ‘이인화’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인화’는 답답한 현실에 대해 맹렬하게 발작을 일으킬 정도이면서도 딱히 해결방법을 찾지 못하는 괴로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자기변명과 자기연민, 자조가 뒤범벅인 소설 속 인물. 그런 인물을 그려놓는 일, 바로 글쓰기를 통해 염상섭은 새로운 길을 만난다. 그는 1923년 첫 창작집 ‘견우화’를 발간하면서 자신의 소설쓰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소설이란 것이 인생과 그 종속적 제상을 묘사하는 것인 이상 인간이 어떻게 고민하는가를 그리는 것은 물론이다. 소설에 예술적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연극적·음악적·회화적·조각적 요소를 어떻게 약배하며 약동하도록 그리겠느냐는 문제이지만, 기초적 조건은 역시 사람은 어찌하여, 어떻게, 얼마나 고민하는가, 또는 그 고민이 어떻게 전개되며 어떻게 처리되는가를 묘사함에 있다. (중략) 이러한 의미로 나의 처음 발간하는 단편집에 대하여 야차(夜叉)의 마음을 가진 보살을 의미하는 ‘견우화’라는 표제를 택하였거니와…….” (‘견우화’의 서문) 그에게 소설쓰기는 세련된 기교를 펼쳐 보이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술적 사명감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내면을 가차 없이 속속들이 살펴보는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오죽하면 첫 단편집을 “야차의 마음을 가진 보살을 의미하는 ‘견우화’”라고 이름 붙였다고 스스로 해명하는 것일까. 혼란스럽고 복잡한 세상 속에서 인간의 내면을 그리는 일은 스스로 야차(악마)가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야차되기를 선택함으로써 그는 군복자락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다. 일본 육군장교의 동생이자 독립선언을 하는 식민지 조선인, 총독부 기관지의 정치부장이자 조선인 소설가. 이러한 극단들을 오가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 그러한 자신이 속해있는 두 세계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기. 그것이 염상섭의 작가적 출발이자, 글쓰기의 의미였다. 물론 두 눈으로 세계를 똑똑히 본다고 해서 쉽게 해답을 발견할 수는 없다. 오히려 염상섭의 작가적 두 눈은 해답보다는 일상적 삶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삶의 미세한 진실을 바라보고자 했다. 일상 속에서는 아무도 순결하거나 정의롭지 않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은 박쥐 같은 양면성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가족들조차도 핏줄보다는 돈(욕망)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 등. 1930년대 ‘삼대’가 그려낸 풍경은 그러한 삶의 이면에 대한 해부였다. 그래서 염상섭의 작품은 우리가 쉽게 지나치거나, 마치 외눈박이처럼 하나로만 바라보는 것을 온전히 다 보여준다. 해방 이후, 이데올로기의 각축장이 되었던 역사적 현장이나 전쟁 상황에서도 염상섭의 이러한 자세는 계속 이어진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서 1·4후퇴 때까지의 긴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드러낸 ‘취우’(1953)는 전쟁의 극한상황이나 고통을 묘사하기보다는 그 와중에도 노골적으로 돈에 집착하는 인간의 욕망을 그려내고 있다. 이 지점에 이르면, 왜 염상섭이 국민작가로 회자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역사와 삶을 대면하는 방식으로서의 글쓰기. 그리고 단면적인 세계, 양가적인 판단을 넘어서는 복잡다단한 세계를 그려내는 작가. 그의 글쓰기는 현실의 복잡함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두 눈 크게 뜨고 자신과 자신의 삶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자기 삶의 응시가 그로 하여금 글쓰기로 나아가게 했고, 그것이 국민작가 염상섭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일 터이다. 김연숙 남산강학원
  • 황순원 미공개 작품 71편 발굴

    황순원 미공개 작품 71편 발굴

    소설가 황순원(1915~2000)의 초기작 등 미공개 작품 60여편이 빛을 보게 됐다. 김종회 경희대 국문과 교수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황순원의 초기 작품들을 최근 대거 찾아냈다고 20일 밝혔다. 발굴된 작품은 황순원의 등단 직후인 1930년대 전반기 작품이 대부분이며, 6·25전쟁 이후의 작품도 일부 포함돼 있다. 김 교수가 찾아낸 황순원의 작품은 동요·소년시·시 등 65편, 단편소설 1편, 수필 3편, 서평·설문 각 1편 등 모두 71편으로 이 가운데 이미 밝혀진 작품을 제외하면 60여편이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 교수는 “습작기의 초기 작품들은 서정적 감성과 따뜻한 인간애를 잘 보여 주고 있다.”면서 “초기 습작이지만 서정성과 사실성, 낭만주의, 현실주의를 모두 포괄하는 작가의 문학세계가 어떻게 발아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요소들이 들어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번에 찾아낸 1932년 4월 ‘혜성’ 2권 4호에 실린 ‘하로의 삶을 니으려고/ 주린 창자를 웅켜쥔 후 거리거리를 헤매는 군중’으로 시작되는 시 ‘가두로 울며 헤매는 자여’는 당시의 시로서는 희소한 유형이라는 게 김 교수의 말이다. 이 시는 황순원의 작품 세계 전체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시대를 향한 젊은이의 기개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또 “현재까지 확인된 황순원의 최초 발표 시인 ‘누나생각’은 1931년 매일신보에 실린 작품으로, 숨진 누나에 대해 노래하고 있어 그의 유명한 단편소설 ‘별’을 상기시킨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앞서 지난해 9월 열린 황순원의 10주기 추도식에서 미발굴 작품 4편을 공개했으며, 이후 약 1년간 추가 발굴 작업을 벌여 왔다. 김 교수는 23일부터 경기도 양평 소나기마을에서 열리는 ‘제8회 황순원문학제’ 문학세미나에서 이 작품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김진아기자 jin@seoul.co.kr
  • [씨줄날줄] 뱅크런(Bank Run) /주병철 논설위원

    은행을 뜻하는 영어 단어 ‘bank’는 시장 상인의 의자를 일컫는 이탈리아어 ‘banco’에서 유래됐는데,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추수한 농작물을 국고로 거둬들인 게 은행의 발달을 가져온 계기가 됐다고 전해진다. 유럽에서는 1397년 이탈리아의 메디치가(家)가 세운 은행이 가장 유명했고, 잉글랜드 은행은 스코틀랜드인 월리엄 패터슨이 1694년에, 스코틀랜드 은행은 잉글랜드인 존 홀랜드가 1695년에 각각 설립했다. 이후 은행은 돈거래를 위한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인식됐고, 미국 은행들은 튼튼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대리석으로 건물을 짓기도 했다. 은행은 신용과 신뢰가 생명인데 이게 무너지면 끝장이다. 금융시장이 극도로 불안해 은행에 맡긴 돈을 제대로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생기면 예금 인출사태, 이른바 뱅크런(bank run)이 일어난다. 말 그대로 예금자들이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하기 위해 몰려드는 현상을 말한다. 뱅크런의 대표적인 사례는 1907년 미국 뉴욕의 니커보커 신탁회사다. 구리 투기에 나섰다가 실패한 니커보커 회사의 수표를 은행들이 받지 않자 니커보커의 예금자들이 돈을 찾기 위해 몰려들면서 뱅크런이 생겼다. 1930년대 미국 대공황 때와 1980년대 말 미국의 ‘저축대부조합’(S&L) 사태 때도 뱅크런이 발생해 엄청난 혼란을 초래했다. 2007년 영국 노던 록 은행과 2008년 리먼사태 등 미국발 금융위기 때도 같은 후유증을 겪었다. 우리는 1997년 종금사 연쇄부도사태로 혼쭐이 났다. 뱅크런 사태를 겪은 뒤에는 금융시스템이 발전되는 효과가 있었다. 1907년 뱅크런 사태는 청문회를 통해 1913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전신인 연방준비제도(FRS)를 창설하는 밑거름이 됐고, 1930년 대공황 때는 투자은행과 여·수신은행을 구분하는 ‘글래스-스티브법’이 제정됐다. 그런데 거대 금융세력을 견제하려고 했던 취지와 달리 J P 모건 등 금융세력이 법안의 최대 수혜자가 돼 버렸다. 글래스-스티브법은 1999년 클린턴 행정부와 의회가 66년 만에 폐지했다. 금융위원회가 그제 부실한 상호저축은행 7곳에 대해 영업정지를 내렸다. 올 초에 이어 2차 뱅크런이 재현될까봐 걱정이다. 예금자 1인당 5000만원까지 보장해 주는 예금보험제도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다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은행들은 고객의 돈을 함부로 굴리지 말고, 예금자들도 이율을 높게 받는 만큼 위험도 커진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히틀러의 찻집‘이 해외 관광 명소로

    ‘히틀러의 찻집‘이 해외 관광 명소로

    2차 대전 종전 전 히틀러가 이용하던 독일의 찻집이 해외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로 떠오르고 있어 화제다. 미국 인터넷 매체 허핑턴 포스트는 7일 1930년대 나치 정권을 이끌던 히틀러 총통을 위해 건립된 한 찻집에 관광객들이 쇄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독일 바바리아 지방의 켈스타인 산 정상의 ‘독수리 둥지’가 바로 그 새로운 관광명소다. 이 찻집은 호전적인 히틀러의 추종자들이 침략전쟁에 나선 나치 군대가 행군하는 모습을 내려다 보도록 하기 위해 해발 6000피트(약 1829m)의 산 꼭대기에 건축한 목조 휴양시설이다. 하지만 정작 고소 공포증이 있는 히틀러는 자주 이용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독일 관광청에 따르면 1인당 20 유로씩 입장료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지난해 한해만도 3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켈스타인 산 정상의 이 찻집까지 등정했다고 한다. 현지 언론은 히틀러를 위해서 건립된 이 찻집에 당시 나치와 싸웠던 미국, 영국 등 연합국 관광객들이 역사의 발자취를 보기 위해 대거 몰려들고 있다고 전했다. 퍽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보는 셈이다. 사진=허핑턴 포스트 캡처 서울신문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정진석 “공생 저항 대기업 오너 각성해야”

    정진석 “공생 저항 대기업 오너 각성해야”

    정진석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1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를 중심으로 한 대기업들이 ‘공생발전’에 저항하고 있다.”면서 “대기업 오너들이 각성해야 하며 오너들이 나서서 ‘공생발전’을 위해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2일 공주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정 전 수석은 하루 앞서 배포한 특강 원고에서 이같이 밝혔다. 정 전 수석은 “대기업 오너의 선의(善意)에만 맡기기에는 양극화가 너무 심각하다.”면서 “정부와 정치권은 대기업 보호와 성장 촉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법과 제도, 관행을 손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의 보호와 지원 속에 성장한 대기업들이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고 재계를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면서 “1930년대 미국 대공황도 결국 국가가 나서서 인공적으로 수요를 창출하는 케인스방식으로 극복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동차, 조선, 플랜트, 반도체, 철강, 정보기술(IT)을 이끄는 대기업에는 사내 유보금이 넘쳐나지만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견·중소기업은 ‘단가 후려치기’에 녹아나고 있다.”면서 “삼성전자 같은 대기업이 문구류 같은 소모품까지 자회사를 통해 구입해 왔고, 대기업은 10년마다 외형이 두 배 이상 불어나지만 고용 규모는 그대로여서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 전 수석은 또 현재의 정치 시스템을 ‘당·청 분리’가 지표로 받아들여지는 ‘민주주의 2.0’으로 규정하고 “여당과 대통령의 정책 조율을 ‘청와대의 압력’으로, 대통령이 추진하는 주요 입법을 ‘청부 입법’으로 생각하는 상황에서 ‘당·정 협조’는 덜컹거릴 수밖에 없다.”면서 “민주주의 2.0은 한계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통령 중심제를 더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한국 민주주의 3.0’ 버전을 생각해야 할 때”라며 “5년 단임 대통령제가 우리의 발전 수준에 적합한 권력 구조인지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전 수석은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정무수석을 하면서 대통령 중심제의 취지에 맞게 권력 운용 시스템의 결함을 보완해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면서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한 당·청 관계를 위해 기본적으로 의회 중심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김정일 울란우데 도착… 철도·항공시설 시찰

    김정일 울란우데 도착… 철도·항공시설 시찰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러시아 방문 나흘째를 맞은 23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이 예정된 시베리아 동부 울란우데에 도착해 바이칼 호수 지역을 관광하고, 항공산업 관련 시설 등을 둘러본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은 오전 9시쯤(현지시간) 특별열차편으로 부랴트 자치공화국의 주도인 울란우데 역에 도착해 뱌체슬라프 나고비친 부랴트 공화국 대통령의 영접을 받았다. 극동 연방관구 대통령 전권대표 빅토르 이샤예프와 시베리아 연방관구 대통령 전권대표 빅토르 톨로콘스키가 이곳까지 동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위원장은 20여분 동안 진행된 영접 행사가 끝난 뒤 메르세데스 승용차를 타고 현지 경찰의 경호를 받으며 울란우데에서 서북쪽으로 170㎞ 정도 떨어진 바이칼호 동쪽 호숫가의 투르카 마을을 찾아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둘러보는 등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고 이타르타스 통신은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또 바이칼 물로 채워진 수영장에서 수영을 즐겼으며, 바이칼 호수에서만 자라는 민물고기로 만든 부랴트 전통음식을 맛본 뒤 오후 3시쯤 다시 울란우데로 향했다. 울란우데 시로 돌아온 김 위원장은 오후 6시쯤 시 외곽에 있는 항공기 제작공장 아비아 자보드를 방문했다. 아비아 자보드는 1930년대 말부터 수호이와 미그기 등의 전투기와 헬기를 함께 생산해온 유명 항공기 제작공장이다. 김 위원장은 24일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남·북·러 가스관 연결 사업과 한반도종단철도(TKR) 및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연결사업 등 대규모 경제개발 프로젝트를 집중 논의할 예정이다. 또 북핵문제와 대북 식량지원, 남·북·러 철도 연결, 국방협력 등도 논의될 것으로 관측된다. 러시아는 지난 22일부터 국방부 방문단을 북한에 파견, 합동훈련과 인사교류 등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러시아 이타르타스 통신이 전했다. 회담 장소는 울란우데 시내에서 50㎞ 정도 떨어진 러시아군 동부군관구 소속 제11 공수타격여단 내 ‘소스노비 보르’(소나무 숲)가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회수권·안내양… ‘서민의 발’ 애환 품고 달려 왔다

    회수권·안내양… ‘서민의 발’ 애환 품고 달려 왔다

    “예전에 10장 한 세트의 회수권을 작게 잘라 11장으로 사용했던 추억이 떠올라요. 직접 회수권을 정교하게 그리는 간 큰 녀석들도 있었죠. 회수권은 학생들의 재산목록 1호였습니다.” (이필식씨·44·서울 서대문구 홍은2동) 통근·통학 회수권을 처음 사용한 1957년도 버스값도 아까워하던 시절의 우리네 풍속도다. 21일 서울시에 따르면 대중교통 수단으로 버스가 도입된 지 올해로 어느새 100년째를 맞았다. 한 세기 동안 서민들의 애환을 싣고 달려온 시내버스의 변천사와 함께 당시의 소비자물가와 시대상을 반추해 볼 수 있다. 과거속 추억의 시간 여행을 떠나 보자. 버스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8인승 승합자동차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대구에서 처음 영업을 시작했다. 한 일본인이 승합자동차에 여러 사람을 태우고 다니며 돈을 받은 것이 시초였다. 사업자와 노선이 빠르게 늘면서 경기, 서울 등지에도 상업용 버스가 등장했다. 경성(서울)에 버스 도입이 늦어진 이유는 1927년 당시 서울 인구가 31만여명으로 전차, 자전거, 인력거, 마차만으로도 이동이 원만했기 때문이다. 1927년 6월 서울 최초로 시내버스 운행 신청서가 총독부에 제출됐고 이듬해 1928년 경성부에 시내버스 사업권을 내주면서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시내버스 운행 시대가 열렸다. 1928년 첫 운행 당시의 버스 요금은 7전. 반면 전차는 동대문과 서대문, 남대문을 경계로 구역당 5전씩을 받았다. 새로 등장한 버스가 요금 경쟁에서 기존 전차에 밀리자 지금의 전철·버스 간 환승개념이 도입된다. 전차가 다니지 않는 곳에 버스를 배치, 전차와 운행 구간을 분리한 것이다. 적자를 메우려는 나름대로의 고육책이었던 셈이다. 결국 1930년대 요금은 5전으로 내렸다. 5전이면 당시 자장면 한 그릇을 사 먹을 수 있었다. 반면 1920년대 택시 요금은 거리와 관계없이 균일제로 시내요금이 1원이었다. 택시 요금은 1937년 기본 50전, 1949년 200원, 1950년 200원, 1966년 60원, 1970년 90원, 1988년 800원, 1998년 1300원이었다. 1965년 시내버스 요금은 8원. 1970년대는 15~80원, 1980년대 120~200원을 거쳐 현재 900원까지 이어졌다. 반면 1974년 처음 운행된 지하철의 첫 요금은 1구간이 30원에서 시작해 1981년 100원, 86년 200원, 93년 300원을 거쳐 1999년 500원으로 뛰었다. ●1930년대 요금 5전 ‘자장면 한 그릇값’ 버스 요금은 1930년대 같은 가치로 출발한 자장면값이 요동친 것에 비하면 오름폭이 적은 편에 속한다. 물론 왕복 요금을 감안하면 두 배 정도 격차를 보인다. 1960년대 자장면값은 15원, 1970년대 30원, 1980년 초 1000원 고지를 넘더니 1990년 초 2000원, 90년대 말 3000원, 2000년대 4000원대로 뛰었다. 만원 버스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오~라이”라고 외치던 여성 차장. 버스 안내양은 진한 남색 등의 제복과 모자를 착용했으며 엄격한 필기시험과 구술면접을 거쳐 선발됐다. 당시 표를 끊어 주던 안내양의 인기가 엄청나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얻었으며 실제 배우로 발탁되기도 했다. 김경숙(55·북부운수 버스기사)씨는 “면접을 볼 땐 주로 또렷또렷하고 행동이 민첩한 젊은 여성을 뽑은 것 같다. 안전이 최우선이니까 승객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명감이 없으면 견디기 힘든 게 버스 안내양”이라며 웃었다. 앞서 1949년부터 버스 앞쪽에 승차해 기사를 돕는 조수(남성)가 등장했으나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비싸고 승객과 허구한 날 살랑이를 벌여 1960년대에 사라졌다. ●남자 조수는 비싸고 실랑이 많아 퇴출 1970년대는 그야말로 버스의 전성 시대. 승객들과 부대끼느라 학생들의 가방끈이 끊어질 정도였다. 차량이 너무 부족해 당시 지각하는 회사원이 하루에 20만명을 웃돌았다고 한다. ‘콩나물 버스’라는 별명도 이때 생겨났다. 경기 북부지역에서 7년간 안내양을 했다는 김경순(55)씨는 “1970년대만 해도 장날이면 버스 안에 120명이 탈 때도 있었어요. 문도 못 닫고 문에 대롱대롱 매달려 갈 때도 많았죠. 당시 요금이 15원이었는데 돈을 받으면 메모지 같은 종이에 적어 주기도 했죠. 승객이 어디서 내린다는 암호 같은 걸 적어 기억했던 게 생각나요.”라고 당시를 떠올리며 웃었다.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으로 젊은 여성들이 공장으로 몰리면서 버스 안내양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결국 1980년대부터 안내양 없이 승객이 앞문 승차, 뒷문 하차하고 요금을 선불로 내는 시민자율버스 운행이 시작되고 1989년 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을 통해 버스 안내양 고용 의무조항이 삭제됐다. 애환을 함께 나누던 버스 안내양이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이병한 서울시 교통정책과장은 “버스 이용객이 여전히 지하철을 앞지른다.”면서 “지난해 마을버스를 포함한 시내버스 일일 이용객 수가 지하철의 483만명보다 약 100만명 더 많은 572만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신평사 리스크’?…美·佛이어 日까지 강등 우려

    ‘신평사 리스크’?…美·佛이어 日까지 강등 우려

    최근 국가신용등급이 강등된 미국뿐 아니라 유럽의 경제 맹주인 프랑스, 아시아 경제대국 일본까지 신용등급 하락 우려가 제기되면서 금융시장에는 ‘신평사(신용평가사) 리스크’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일각에서는 적절한 경보를 울리지 않아 도마에 오른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를 기점으로 위축된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신평사들이 반격에 나섰다는 해석까지 제기된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무디스, 피치 등 3대 국제 신평사는 경제 위기가 늘 사세를 확장하는 기회였다. 1930년대 대공황 때 처음으로 몸집을 불렸으며, 1975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이들을 국가 공인 신용평가사로 지정하면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게 됐다. 하지만 투자 부적격 금융상품에 적격 판정을 내리고 금융위기의 경보를 못 울리는 등 2008년을 기점으로 이미지가 실추되고 ‘월가의 기생충’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개발도상국의 경우 신흥국의 위험을 축소하기 위해 일부러 나쁜 평가를 내린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에 따라 국제 신용평가사들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평가기준과 평가결과 등 대부분이 업무상 기밀로 돼 있어 쉽지 않다. 미국 SEC가 자신들의 신용등급을 하락시킨 S&P를 상대로 진행 중인 국가신용등급 산정 방법 조사에 눈길이 쏠리는 이유다. 임주형기자 hermes@seoul.co.kr
  • [블랙먼데이] 위기의 지구촌, 두 남자만 쳐다보는데…

    [블랙먼데이] 위기의 지구촌, 두 남자만 쳐다보는데…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의장과 티머시 가이트너 미 재무장관. 미국이 신용등급 강등으로 위기에 처한 지금 전 세계가 두 사람을 주목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2년 반 동안 버락 오바마 정부의 경제 사령탑을 맡아왔다는 점에서 현 위기를 극복할 책임을 지고 있다. 공화당으로부터 퇴진 압력을 받아온 가이트너는 7일(현지시간) 자리를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돈줄을 쥐고 있는 버냉키는 이르면 9일 통화정책 결정기구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주재하면서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입장을 밝힐 것으로 보인다. ■가이트너 美 재무장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티머시 가이트너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했을 때 적절한 인사라는 평가가 많았다. 가이트너는 빌 클린턴 정부 시절 재무장관으로서 미국의 호황을 이끌었던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의 ‘아이들’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가이트너는 루빈 밑에서 ‘루비노믹스’(루빈의 경제정책)를 충실히 실행했고 1997년 한국 등 아시아 금융위기 때는 재무차관으로서 금융위기를 공부해본 경험이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가이트너는 루빈의 길을 걸을 수 없었다. 루빈은 재정 지출을 줄이고 세금을 늘리는 방법으로 균형 재정을 추구함으로써 경제회복을 이뤘다. 반면 가이트너는 당장에 닥친 금융위기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루비노믹스와는 정반대로 곳간 문을 활짝 열었다. 이로 인해 미국의 정부 부채가 늘어났고, 이는 미국 신용등급 하락의 단초를 제공했다. 가이트너가 지난달부터 “신용등급 하락은 없을 것”이라고 공언해왔다는 점에서 망신살이 뻗친 셈이다. 한때 사임설이 돌던 가이트너가 장관직을 계속 수행하겠다고 밝힌 것은 개인적으로는 결자해지와 명예회복 차원일 수 있다. 또 오바마 대통령 입장에서는 공화당의 공세에 밀려 가이트너를 경질할 경우 내년 대선 때까지 레임덕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가이트너를 붙잡은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가이트너가 막상 손쓸 게 별로 없다는 점이다. 여야가 이미 재정 감축에 합의했기 때문에 돈을 풀 여력이 없고, 하원 다수당인 공화당의 반대로 증세도 할 수 없다. 따라서 그는 당장은 ‘입’으로 시장에 신뢰를 주는 방법을 구사하고 나선 모양새다. 가이트너는 7일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신용등급 강등 결정을 “형편없는 판단”이라고 비판하면서 미국 국채는 신용등급 강등 결정 이전과 마찬가지로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또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옳은 결정을 내리기만 한다면 더블딥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버냉키 Fed 의장 버락 오바마 정부 출범 전인 2006년부터 앨런 그린스펀에 이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를 맡은 벤 버냉키를 오바마 대통령이 유임시켰을 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학에서 1930년대 대공황, 1970년대 디플레이션, 1990년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등 경기불황에 대한 연구로 학문적 일생을 바친 그의 이력이야말로 2008년 닥친 금융위기의 해결사로 더할 나위 없이 적합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그는 대공황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위기 극복 처방으로 돈을 쏟아붓는 방법을 택했다. 2008년과 지난해 2차례에 걸쳐 모두 2조 3000억 달러 규모의 양적완화정책을 폈고, 사상 처음으로 제로 금리를 실시했다. 가사 상태까지 갔던 미국 경제는 한숨 돌렸지만 기대했던 경기회복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버냉키가 푼 돈이 실물경제로 가지 않고 월가만 좋은 일 시켰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9일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의 가장 큰 관심은 버냉키가 3차 양적완화를 발표할지 여부다. 국채 매입을 통해 시중에 돈을 푸는 양적완화는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는 데는 기여할 수 있다. 그는 “경기 부양을 위해서라면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릴 수도 있다.”고 말해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경기부양 정책을 확신하는 인물인 데다 여태까지 쏟아부은 돈이 아까워서라도 추가 양적완화를 불사할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인플레와 달러가치 하락 우려 등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두 차례 양적완화에도 불구하고 별로 효과가 없었다는 점도 버냉키를 망설이게 할 대목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양적완화 대신 ‘제로금리를 유지하겠다.’는 정도의 구두 개입 수준으로 시장을 진정시킬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이 방법은 너무 미약한 처방이란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다. 버냉키의 결단은 8일과 9일 미 주식시장 상황에 좌우될 것으로 전망된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아이돌… 7080… ‘주크박스 뮤지컬’ 인기

    아이돌… 7080… ‘주크박스 뮤지컬’ 인기

    귀에 익은 멜로디, 낯익은 가사대로 따라가는 줄거리…. 아는 노래들의 향연인 ‘주크박스 뮤지컬’이 요즘 인기다. 유형은 크게 두 가지. K팝 열풍에 힘입어 아이돌 가수의 히트곡을 전면 배치한 ‘아이돌 주크박스 뮤지컬’과 흘러간 인기가요를 통해 7080 세대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복고풍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어디만큼 왔니’(14일까지)는 대표적인 ‘복고풍 주크박스’다. 가수 양희은의 노래 인생을 ‘아침이슬’ ‘한계령’ ‘하얀목련’ 등 그녀의 히트곡들로 표현했다. 앞서 공연된 ‘젊음의 행진’과 ‘광화문 연가’도 이 범주다. ‘젊음의 행진’은 윤시내의 ‘공부합시다’,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 김건모의 ‘핑계’ 등 왕년의 히트가요를 줄줄이 불러냈다. 아예 배경도 1980년대 인기 음악 프로그램이었던 ‘젊음의 행진’을 무대로 삼았다. ‘광화문 연가’는 가수 이문세와 짝을 이뤄 수많은 곡을 히트시킨 고(故) 이영훈 작곡가의 대표곡들을 엄선했다. 모두 관객몰이에 성공한 작품들이다. 오는 28일까지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타임스퀘어 팝아트홀에서 공연되는 ‘스트릿 라이프’는 ‘아이돌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DOC와 춤을’, ‘여름이야기’ 등 DJ DOC의 22개 히트곡으로 꾸몄다. DJ DOC의 리더 이하늘이 직접 음악작업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2PM, 동방신기, 소녀시대, 카라, 샤이니 등 아이돌 그룹의 히트곡을 한데 모은 ‘늑대의 유혹’도 빼놓을 수 없다. 10월 30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아티움에서 공연된다. 이렇듯 주크박스 뮤지컬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늑대의 유혹’ ‘젊음의 행진’ 등을 잇따라 올려 주크박스 뮤지컬 시대를 연 송승환 PMC프로덕션 대표는 “K팝 열풍 덕분에 외국인 팬들까지 한국어 가사를 모두 외우고 있어 해외 진출 때 언어 장벽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게 주크박스 뮤지컬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늑대의 유혹’은 아예 기획 단계부터 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주크박스 뮤지컬로 만들었다는 게 송 대표의 얘기다. 그는 “국내 시장만 놓고 봐도 이미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노래들이라는 점에서 뮤지컬을 잘 모르는 관객도 쉽게 공연장으로 끌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대중문화평론가이자 뮤지컬 연출가인 조용신씨는 “올해 유난히 주크박스 뮤지컬이 강세”라면서 “구매력 있는 중장년층과 세시봉 바람을 연결시키려는 기획의 산물”이라고 풀이했다. 관객 처지에서 ‘낭패 위험’이 덜한 것도 한몫했다는 분석이다. 조씨는 “뮤지컬은 티켓 가격이 비싸 선택에 신중할 수밖에 없고 초연 작품은 검증이 안 돼 더더욱 망설이게 되는데 주크박스 뮤지컬은 아무래도 노래의 힘을 믿고 공연장을 찾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뮤지컬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마저 주크박스 뮤지컬을 즐겨 찾으면서 흥행의 선순환이 이뤄졌다는 설명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대중가요의 위상이 높아진 시대적 상황을 꼽았다. 그는 “복고형이든 아이돌형이든 대중가요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가요와 뮤지컬 접목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었다.”고 분석했다. 뼈 있는 충고도 곁들였다. “앞으로 주크박스 뮤지컬이 더욱 발전하려면 기존 가요의 힘만 빌릴 게 아니라 가요를 재해석하는 등 좀 더 공격적인 시도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용어클릭] ●주크박스(jukebox) 동전을 넣고 희망하는 곡목을 누르면 자동으로 노래가 나오는 기계장치. 1930년대 미국 선술집(juke)에 등장하기 시작해 서구에서 널리 보급됐다. 여기서 유래된 말이 주크박스 뮤지컬로, 스웨덴 팝그룹 아바의 히트곡들로 꾸민 ‘맘마미아’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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