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1930년대
    2026-03-06
    검색기록 지우기
  • 유방
    2026-03-06
    검색기록 지우기
  • 임야
    2026-03-06
    검색기록 지우기
  • 2026-03-0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323
  • [흥미진진 견문기] 서울의 옛 골목길 전시… 과거와 현재 동시 걷는 듯

    [흥미진진 견문기] 서울의 옛 골목길 전시… 과거와 현재 동시 걷는 듯

    태풍에도 불구하고 이상을 만나고픈 열정으로 답사를 시작했다. 차분한 목소리의 강영진 해설사가 들려주는 서촌과 이상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역관 ‘홍건익 가옥’과 ‘이상의 집’을 둘러보고, 이상이 보냈을 1930년대 서촌 골목을 어렴풋이나마 상상해 보았다.우산의 빗방울을 털며 보안여관으로 들어서자 ‘보안1942’의 최성우 대표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80여년 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여관으로 타일과 목재 기둥, 벽면 등 일제강점기부터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놀라웠다. 이곳에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머물렀으며 특히 서정주 시인이 머물며 ‘시인부락’을 만든 곳이라니 새삼 건물을 찬찬히 살펴보게 됐다. 이상의 흔적을 쫓아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 터를 지나 이상이 다녔던 보성고등학교 터를 거쳐 ‘오감도’가 연재됐던 조선중앙일보의 사옥에 도착했다. 이상의 삶과 사랑에 대한 일화를 들으며 그 당시 문인들이 모이던 카페 ‘제비’의 흔적이라도 찾고 싶어 종로 네거리를 기웃거렸으나 찾을 수 없어 아쉬웠다. 높다란 고층 빌딩 숲 사이 이런 유적이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 없는 곳에 위치한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 도착했다. 역사도시 서울의 옛 골목길과 건물 터가 발밑 유리 아래 전시돼 있었고, 상상 속의 역사가 ‘훅’ 하고 내 삶에 들어와 현재와 과거의 공간을 동시에 걷는 묘한 경험을 했다. 광통교를 지나 소공동 찻집 낙랑파라(플라자호텔 근처)에 이르렀다. 이상의 ‘절친’ 구본웅의 화실이 이 근처였으니, 이 찻집은 그들이 자주 만났던 장소였으리라. 개발과 보존이라는 시험에 직면한 소공동 거리를 지나 옛 미쓰코시백화점에 도착했다. 좌절된 현실을 초월하고자 백화점 옥상에서 날고 싶었던 이상에게 문득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다. 당신들의 사랑과 고통과 열정적인 삶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고. 역사와 문화와 예술의 도시 서울이 그대들의 흔적과 이야기를 품고 안으며 변화하고 있다고. 어느덧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한 줌 햇살이 따사로웠다. 황미선(책마루 연구원)
  • [미래유산 톡톡] 보안여관·공평도시유적전시관, 미래유산 지정해야

    [미래유산 톡톡] 보안여관·공평도시유적전시관, 미래유산 지정해야

    지난 6일 투어단이 찾은 코스 중 서울미래유산은 통인동 이상의 집, 옛 조선중앙일보 사옥(NH농협 종로지점), 1930년대 미국 유학파 출신 박인준의 건축사무소로 지어진 동헌필방, 일제강점기의 월스트리트 한국은행 앞 광장 등 4곳이었다. 이상의 날개에서 실명으로 등장하는 2개의 장소인 옛 미쓰코시백화점(신세계백화점) 옥상과 경성역(서울역)도 코스에 포함돼 있었지만 당일 태풍으로 말미암은 옥상 미개방과 시간부족 등으로 빠졌다. 이날 답사단이 둘러본 코스 중 현재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지 않지만 조만간 지정해야 할 곳이 통의동 보안여관과 공평동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다. 보안여관은 2009년 갤러리로 문을 연 이후 지금까지 17만명 이상이 다녀간 서촌의 ‘핫스폿’이다. 갤러리에 머물지 않고 최근 구관 옆에 아트 스페이스 ‘보안1942’라는 신관을 열어, 책방·찻집·술집·게스트하우스를 포함하는 문화숙박업이라는 새로운 문화생태계로 진화 중이다. 생활밀착형 예술공간의 재탄생이다. 서정주 시인이 이곳에서 장기 숙박하면서 최초의 문학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한 한국문학의 산 역사 현장이다. 조선시대 통의동을 드나들었던 추사 김정희와 겸재 정선의 예술혼이 묻어 있는 곳이고, 시인 이상이나 화가 이중섭을 비롯한 숱한 문인 예술가들이 문턱이 닳도록 출입한 장소이기도 하다. 서울미래유산 목록에 빠진 게 이상할 정도이다.지난달 문을 연 공평동 26층짜리 센트로폴리스 지하 1층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 조선의 시장 터와 관아 터, 한옥, 뒷골목과 담을 ‘생’으로 만날 수 있다. 개발과 보존의 상생을 보여준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운영하는 국내 최대의 도시 유적 박물관이다. 16~18세기 조선시대 도시유적을 통째로 보존해 유리판 보행 데크와 각종 전시물을 함께 곁들여 옛 경관을 통째 살려냈다. ‘압도적 스펙터클’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1000여평의 공간은 도시의 오아시스로 자리매김할 것 같다. 도심 유적 보존 활용을 놓고 겪은 시행착오 끝에 얻은 값비싼 전시공간이기도 하다. 건축주에게 용적률을 크게 늘려 지상 4개 층을 더 짓게 해주고 지하 1층을 전시관으로 기부채납 받았다. ‘공평동 룰’의 첫 사례이자 성공적인 결과물이다. 서울미래유산연구팀
  •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한국인의 사회적 DNA’ 시험…사회적 지위의 세습은 아닐까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한국인의 사회적 DNA’ 시험…사회적 지위의 세습은 아닐까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지난 2일 2018학년도 수능 성적 평가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자료에 따르면, 여학생과 재수생이 강세였다. 대도시 학교, 그중 사립 학교들의 강세도 여전했다. 그러고 보니 2019학년도 수능이 채 50일도 남지 않았다.수능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조바심은 말할 것도 없고, 학부모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숨죽이며 살고 있다. 수능은 대표선수일 뿐 대한민국은 각종 시험으로 점철된 공간이다. 어려서부터 각종 시험을 거쳐야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었기에 한국인들에게 시험은 일상이었다. ‘시험국민의 탄생’의 저자 이경숙은 시험이 “한국인의 사회적 DNA”라고 강조한다. 때론 시험에서 인생의 희망을 찾았고, 그 희망이 좌절로 바뀌는 경험도 해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불공정한 세상에서 시험을 통해 그나마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에는 간혹 이런 일이 있었지만, 이젠 이런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사회적 불평등이 가속화되면서 시험마저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 되고 있다. 고려 광종이 과거제를 도입할 때만 해도, 가문의 배경 없는 신진 세력을 등용하기 위한 개혁 정책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과거를 중심으로 하나의 교육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시험이 응시자들의 사고를 통일시키는 지름길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모든 답이 유학 경전으로만 수렴되었다. 과거는 신분제를 공고히 하는 기제였고, 유학사상의 한계 속에 스스로와 사회를 가둘 뿐이었다. 과거는 느슨하지만 강력한 통치 방식이었다. 외세의 영향을 비교적 많이 받았던 만큼 각종 외국어는 이 땅에서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는, 아니 권력에 기생하는 훌륭한 장치였다. 일제시대에는 일어, 해방 후에는 영어 만능시대였다. 미군정이 시작되고 영어는 ‘시대정신’이 되었는데, 새롭고 개방적이고 과학적이고 민주적인 정신으로까지 칭송받았다. 무엇보다 출세의 정신이기도 했다. 오늘날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영어야말로 우리 시대의 최고 경쟁력이라는 믿음만큼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시험은 서열주의를 강화한다. 서열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의 바탕에는 ‘능력주의’가 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출세하는 것을 뭐라 할 수는 없지만, 능력주의와 결합한 서열은 개인에게 무한대의 투자와 노력을 강요한다. 어렵게 획득한 서열인 만큼 서열 붕괴에 대한 두려움도 매우 클 수밖에 없다. 이 대목이 저자가 왜 우리 사회가 시험에 이토록 집착하는지 묻는 이유 중 하나다. 책은 딱딱한 사회적 함의만 나열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에도 커닝이 있었다는 사실, 그 명칭이 ‘방망이질’이라는 이야기, 1930년대부터 객관식 시험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성적표 조작이 동서고금의 흔한 일이라는 것도 알려준다.저자는 시험이 한 개인의 진로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얼개를 만들고 바꿔왔다”고 말한다. 좋은 것도 많지만 ‘사회적 지위의 세습’과 같은 나쁜 것들도 제법 많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배우고자 하는 이들은 원하는 곳에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 선발이 부의 대물림 통로가 되지 않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시험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라지지 않는다면, 고쳐 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시험국민의 탄생’에서 그 몇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어 보인다.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 크로켓과 론볼 섞어 놓은 듯, 괴상한 스포츠 트루고 아시나요

    크로켓과 론볼 섞어 놓은 듯, 괴상한 스포츠 트루고 아시나요

    트루고(Trugo), 세상에서 가장 괴이한 스포츠 중 하나로 꼽힐 만하다. 호주 멜버른에서만 성행할 뿐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보기 어렵다. 뒤로 돌아선 채 가랑이 사이로 해머를 던져 공을 쳐낸다. 사진의 시범을 보이는 이는 존 맥마혼으로 무려 89세다. 크로켓과 골프, 론볼, 해머던지기를 고루 섞어놓았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철로 위와 주변에서 경기하는 것도 괴이쩍다. 영국 BBC에 이 신기한 종목을 소개한 이는 멜버른을 여행했을 때 야라빌 트루고 클럽의 파트타임 선수로 뛰어 한 번도 공식 경기에 나서지 못한 제임스 바틀렛 기자. 재미있는 것은 멜버른 사람들도 무슨 이유에선지 이 종목이 바깥에 알려지길 주저한다는 것이다. 1920년대 후반이나 1930년대 초반 야라빌 철도원이며 나중에 빅토리아주 트루고협회 회장이 된 톰 그리브스가 고안해냈다. 물론 하릴이 없어 지루한 것을 잊으려고 이렇게 뒤로 돌아선 채 공을 때려 원하는 지점에 갖다 놓는 어려움을 부여했다.다른 설도 있다. 뉴퍼트 철도 워크숍 노동자들이 점심 먹고 소화시키려고 만들었다는 얘기다. 일간 ‘멜버른 헤럴드’의 1950년 3월 23일자 지면에는 알렉 비턴이란 변호사가 그리브스가 혼자 공원에 들어가 크로켓 채로 공을 날렸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돼 있다. 나중에 은퇴자들이 공원에서 즐기는 것으로 변형됐다. 맥마혼의 아버지는 철도 신호수였는데 1991년 조기퇴직한 뒤 이 운동을 시작했는데 초기 규칙들은 모두 60세 이상에 맞춰져 있었다. 그는 “한 의사는 트루고를 하면 10년은 더 살 것이라고 말하더군”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호주 최초의 철도 역이 들어선 플린더스 스트리트를 따라 철도 노동자들이 거주했기 때문에 멜버른의 서쪽 근교에서만 성행해 이 운동을 모르는 멜버른 사람도 적지 않다. 나중에 여성도 참여해 그들만의 리그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맥마혼의 딸 셰릴 왈던(63)도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손녀 윈터, 간호학교 학생들과 어울려 훈련하곤 한다. 장애를 갖고 있는 학생들도 이따금 찾아와 배운다. 새로 클럽 회장이 된 왈던은 소셜미디어 계정도 만들고 정기적으로 동영상도 올리는 등 시대에 발맞춰 나가려 한다. 13개 클럽이 경쟁한다. 2003년에 한 네덜란드 코미디언이 찾아와 동영상을 촬영해 네덜란드에서 열린 코미디 축제에 출품해 눈길을 끌었다. 또 2009년에는 얼마 전 자살해 세상을 등진 셰프 앤소니 부르댕이 미국 CNN ‘예약 없이(No Reservations)’ 촬영팀을 이끌고 찾기도 했다. 2000년에 세계챔피언에 올랐던 맥마혼은 “트루고는 배우기 쉽지만 27년이 되도록 난 아직도 제대로 못해 본 것 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안도현 시인 특별기고]평양은 멀지 않다

    [안도현 시인 특별기고]평양은 멀지 않다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당시 수행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했던 안도현 시인이 서울신문에 당시 감동을 담은 기행문을 보내오셨습니다. 안 시인이 보고 느꼈던, 그리고 언론 매체에선 볼 수 없었던 정상회담 이면의 이야기들을 원문 그대로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바로 눈 앞에서 펼쳐지듯 생생한 북한의 풍경들을 함께 즐겨 보시기 바랍니다.평양은 역시 멀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수행원, 그리고 기자단을 태운 공군 1호기는 ‘ㄷ’자의 서해 직항로의 경로를 좌석 앞 모니터에 정확하게 펼쳐보였다. 이른 새벽 해 뜨기 전에 잠을 자지 못하고 나선 길이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비행기의 머리가 항로를 따라 시시각각 순조롭게 순항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서울공항에서 평양국제비행장에 도착하는 데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2008년 봄에 평양 근교 역포구역에 어린이사과농장을 만들기 위해 다녀온 뒤로 10년 만의 방북이었다. 순안비행장이라 불리던 평양국제비행장 청사는 현대식 건물로 면모를 완전히 바꿨고, 의장대와 환영 나온 평양 시민들의 함성이 귓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차범근도, 유홍준도…벅찬 감동에 “왜 이렇게 눈물이” 평양 시내로 들어가는 길가에 환영 나온 평양 시민들이 어마어마한 사람의 파도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가도 가도 끝없이 늘어서서 손을 흔들고 깃발을 흔들고 발을 구르고 있었다. 10만 명이 넘을 거라고 했다. 남녀가 따로 없었고 노소가 따로 없었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천천히 움직였고 우리는 시민들의 진심 어린 표정 하나하나를 가까이에서 읽을 수 있었다. 버스 바깥도 버스 안도 만남의 감격의 출렁거렸다. 선두에서 남북 정상은 정상끼리, 행렬 뒤쪽에서 같은 동포인 우리는 우리끼리 만나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 차범근 감독이 유홍준 교수를 보며 말했다. “이상하네요. 왜 이렇게 눈물이 나려고 하죠?” 차 감독의 눈자위는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물이 나야 정상이지. 울고 싶을 때는 실컷 울어버려요. 아무 걱정 말고 울어버려요.” 이렇게 말하면서 유 교수도 눈가를 훔쳤다. 서로 대화 한번 나눈 적 없는 남과 북의 시민들이 썬팅 처리된 버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함께 우는 것으로 만남은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는 울어볼 일이 없는 세상에서 너무 오래 살았다. 밥을 버느라, 통장의 잔고를 늘리느라, 오로지 내 자식 뒷바라지 하느라, 비즈니스를 위한 일에 매달리느라 울어볼 날이 없었다. 누군가가 눈물 타령한다고, 감상적이라고 또 이죽거린다고 해도 평양에서는 울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공식수행원들의 숙소는 백화원초대소, 특별수행원들의 숙소는 고려호텔이었다. 오랜만에 들어선 고려호텔은 별다른 장식 없이 조용히 낡아가고 있었다. 1인 1실로 배정된 방에는 사과, 배, 귤, 바나나로 구성된 과일 한 접시와 과자, 사탕, 껌이 담긴 접시 하나가 ‘당신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라는 팻말과 함께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아직 담배를 끊지 못한 내게 재떨이는 또 반가운 선물이었고. 호텔 창밖으로 평양화력발전소 굴뚝에서 희뿌연 연기가 솟아올라 평양 시내 상공을 뒤덮고 있었다. 호텔에서 가까운 평양역 구내로 화물차와 전철이 쉼 없이 오가는 게 보였다. 평양을 방문했을 때 음식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호텔 2층 뷔페식당의 메뉴 중 하나로 나온 돌목어식해는 처음 먹어보는 북쪽 음식이었다. 널리 알려진 가자미식해와 모양과 빛깔은 비슷했는데 식감이 완전히 달랐다. 돌목어는 도루묵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봤다. 북쪽 접대원에게 물어도 그는 도루룩을 모르고 나는 돌목어를 모르니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걸 입에 넣고 씹으면 비리지 않은 쫄깃한 생선회를 씹는 느낌이 났다. 발효 과정에서 생기는 퀴퀴하고 들척지근한 맛도 없었다. 부드럽고 몰캉한 생선 식해에다 흰 밥을 먹으면서 나는 1930년대 후반 시인 백석을 떠올렸다. ●김정숙 여사 ‘영부인 외교’ 동행한 리설주 여사 ‘깍듯한 환대’ 인상적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옥류아동병원을 방문하는 김정숙 여사를 수행하는 일이었다. 유홍준 교수, 김형석 작곡가와 같은 문화예술계 인사, 차범근·현정화 감독, 이기흥 대한체육회 회장, 박종아 평창아이스하키남북단일팀 주장 등 체육계 인사, 에일리·알리·지코 같은 가수들, 마술사 최현우는 소형버스 14호차를 함께 타고 다녔다. 14호차 일행이 옥류아동병원에 도착한 직후 북쪽의 리설주 여사가 승용차에서 내렸다. 리설주 여사는 병원 관계자들과 30분 가까이 병원 입구에서 김정숙 여사를 기다렸다. 그녀는 한 번도 의자에 앉지 않았다. 정장 차림에다 하이힐을 신고 부동자세에 가까운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북 정상회담 일정 내내 김정은 국무위원장 부부는 문재인 대통령 부부를 깍듯하게 모시듯 환대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한 국가의 지도자이기 전에 젊은 부부가 웃어른을 모시는 우리의 전통 예절을 잊지 않으려는 자세가 분명했다. 아동병원에 도착한 김정숙 여사는 리설주 여사에게 특별수행원들을 일일이 소개했다. 가까이에서 악수하면서 잡은 리설주 여사의 손은 연약하고 따뜻했다. 이어서 김원균 음악종합대학을 방문했다. 김원균은 북한의 국가와 ‘김일성장군의 노래’ 등을 작곡한 사람으로 북한 정권 초기 앞장서서 음악으로 ‘혁명과업’을 수행했다. 저녁에 평양대극장에서 ‘2018 평양 수뇌회담 환영공연’이 열렸다. 평양 시민들은 김정은 위원장이 입장할 때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와 함께 ‘만세’ ‘만세’를 입 모아 외쳤다. 김 위원장이 손짓으로 제재를 해도 그 웅장한 소리는 끝이 없었다. 최고 지도자를 향한 그 존경심의 표현은 머리끝이 곤두설 정도로 극적이었다. 공연은 우리도 잘 아는 ‘반갑습니다’를 시작으로 북쪽 노래와 남쪽의 노래를 섞어 진행되었다. 남쪽 가요 중에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아침이슬’ ‘흑산도 아가씨’ ‘그대 없이는 못 살아’와 같은 노래들이 들어 있었다. 모두 북한식 편곡과 연주로 우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던져주었다. 남쪽의 대중가요를 선곡한 것도 모두 남쪽 손님들에게 예를 갖추기 위한 거라고 안내원은 설명했다. 그렇지만 나는 귀에 익숙한 노래를 들으면서도 왠지 불편했다. 낯간지러운 가사와 트로트풍의 가요를 내가 모두 좋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국에 나가 북한 식당을 들렀을 때 점점 남쪽 사람들의 입맛대로 음식들이 변화하는 것을 볼 때 느끼는 불편함과 유사한 것이다. ●‘홀로아리랑’에 눈물…“어떤 난관도 아리랑 고개 넘듯 헤쳐 가야” 환영공연에 등장한 인민배우들의 한복 디자인도 현재 남쪽의 한복 디자인과 거의 비슷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북한이 원래의 것을 놓치고 남쪽을 흉내 내는 일로 남쪽을 배려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진행될 모든 남북 관계에서 북한은 원래의 북한을 유지해야만 화해와 협력도 대등한 관계 속에서 진전될 것이 아닌가. 공연의 절정 부분에 한돌이 작사하고 작곡한 ‘홀로아리랑’이 배치되었다. 가사 뒷부분은 이렇다. “백두산 두만강에서 배타고 떠나라/ 한라산 제주에서 배타고 간다/ 가다가 홀로섬에 닻을 내리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해보자/ 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 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평화와 번영을 향해 가는 길이 순조롭고 반듯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남북을 가로막기도 하고 우리의 운행을 방해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듯이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한다. 1980년대 후반에 남쪽에서 만들어진 이 노래가 2018년 평양에서 울려 퍼진다는 것은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뜻이다.평양은 확실히 변화하고 있었다. 시내를 걸어가는 시민들의 발걸음은 밝고 자신감이 넘쳤고, 여성들의 옷차림도 전보다 훨씬 다양한 디자인을 보여주었다. 어떤 젊은 여성은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휴대폰(손전화)을 계속 들여다보며 걸어가기도 하였다. “문재인 대한민국 대통령 내외분의 평양 방문을 환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이신 김정은 동지와 부인 리설주 녀사께서 주최하는 연회”가 목란관에서 열렸다. 이 연회의 차림표를 여기 북한 표기대로 적는 것으로 나는 평양 방문을 한 것에 대해 우쭐거려 보려고 한다. 백설기, 약밥, 칠면조말이랭찜, 해산물 물회, 과일남새생채, 상어날개야자탕, 백화대구찜, 자신소심옥구이, 송이버섯 편구이와 볶음, 흰 쌀밥, 송어국, 도라지 장아찌, 오이숙장과, 수정과, 유자고, 강령록차 이에 화답하듯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는 첫날 환영만찬에서 ‘동무생각’을 불러 왕년의 솜씨를 뽐냈다. 내 옆자리에 앉은 당중앙위 조용원 부부장은 낮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금지의 언어가 아니라 소통의 언어로 말하고자 하였다. 우리 14호차의 안내를 맡은 여성 두 사람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서 일하는 젊은 엄마들이었다. 탁아소에 아기들을 맡기고 나온 이들은 찡그린 얼굴을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한 한 사람은 소월과 육사의 시를 이야기했다. 나는 이들이 사용하는 핸드폰을 한번 들여다봤다. 뒷면에 ‘평양’이라고 적혀 있는 이 핸드폰의 앱에는 체계관리(설정), 조선대백과사전을 비롯해 류경바둑, 별찌까기와 같은 게임이 들어 있었다. 십여 년 전부터 북한에서 휴대폰이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사용자가 500만 명을 넘어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평양에서 가장 현대화한 지역은 미래과학거리 구역이었다. 여기에는 전에 없던 현대식 고층빌딩과 아파트들이 도열해 있었다. 이곳에는 과학자, 연구자, 교육자들이 주로 거주한다고 했다. 이 거리의 가로수들은 대부분 메타세쿼이아였다. 북에서는 이걸 수삼나무라고 부른다. 이밖에 평양의 가로수로 많이 심어진 나무들은 살구나무와 버드나무가 있다. 봄이 되어도 평양 거리에 벚나무들이 벚꽃을 휘날리는 일은 없다.9월 19일 이튿날 일정은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점심 때 옥류관에서 열린 오찬장에 도착하자 남북공동선언 합의문이 만들어졌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큰 숙제를 끝낸 듯 표정이 밝아 보였다. 이번 평양 회담의 가장 중요한 성과로 기록될 공동선언은 남쪽에 생중계 되었다. 평양을 방문한 수행단보다 남쪽의 국민들이 더 빨리, 더 생생하게 뉴스를 접했을 것이다. ●웅장한 집단체조…남북 정상을 향한 15만 환호는 ‘지축 진동’ 평양 방문은 휴대폰으로부터 해방된 여행이었다. 혹시나 진동이 울리나 싶어 무의식적으로 양복 안주머니 쪽으로 손이 간다는 분도 있었다. 옥류관 오찬으로 나온 음식은 평양냉면뿐만이 아니었다. 잉어달래초장무침, 자라탕, 송이버섯볶음 등이 맛있었고, 나는 냉면을 한 그릇 먹고 나서 반 그릇을 더 먹었다. 모두 300g이었다. 평양교원대학은 우리의 교육대학과 사범대학을 합친 교육기관이다. “어린이들에게 한 컵의 물을 주기 위해 한 동이의 물을 들이키는 심정으로 가르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평양 방문 때 각 장르의 미술가들이 창작하고 그 창작물을 전시, 판매하는 만수대창작사를 들르는 일은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다. 나는 ‘감자꽃 필 때’라는 제목의 유색판화 한 점을 구입했다. 큰 가격은 아니었지만 그림 값을 깎는 ‘가격투쟁’에는 실패했다. 집에 그 판화를 가져와 펼쳐 놓고 다시 보아도 내 선택이 현명했던 건 분명하다.대동강의 능라도에 있는 5·1경기장은 15만명의 평양 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 보는 집단체조와 예술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가슴이 자꾸 두근거렸다. 카드섹션에 참여하는 경기장 반대편 ‘배경대’는 1만 7490명의 중학생들로 구성되었다고 했다. 남과 북의 양 정상들이 경기장에 막 도착했을 때 15만명이 하나의 목소리로 환호하는 소리를 상상해 보라. 지축을 울린다는 그 상투적인 표현이 여기에 딱 들어맞는 수사일 것이다.대규모 평양 시민들 앞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연설에 나섰다. 거의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집단체조 ‘아리랑’의 일부와 남북 정상회담을 축하하는 특별공연이 수만 명의 청년학생과 예술가들에 의해 펼쳐졌다. 공연은 북한식 집단주의가 역사적 경험과 만나면서 어떠한 예술적 영향력을 생산하는지 웅장하게 보여주었다. 다들 하나같이 말했다. “남쪽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공연이지. 아이들을 저렇게 동원해서 연습 시키면 가만히 있을 엄마가 한 사람도 없을 걸.” 씁쓸했지만 그게 또 우리의 현실이었다. 1970년대 중반 전국체육대회를 앞두고 중학생이었던 나도 마스게임에 참여해본 적이 있다. 어린 우리는 뙤약볕 속에서 살을 태워가며 연습을 해야 했다. 개인은 없고 집단만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북쪽 안내원이 말했다. “여기 참여하는 어린이들의 엄마는 아주 영광스럽게 생각한답니다.”평양 방문단이 백두산을 간다는 소식이 들린 것은 19일 저녁 9시경이었다. 20일 새벽 4시에 출발한다는 갑작스런 통보가 전해졌다. 평양 방문 내내 우리는 그 다음 일정을 알지 못해 궁금해 하였다. 일정이 정해진다고 해도 남과 북의 안내원 말이 다를 때가 있었다. 대규모 행사를 진행하면서 실무적으로 삐걱거리는 일도 있었던 것 같다. 백두산을 간다는 말에 특별수행원들은 들뜨기 시작했다. 방한복을 싣고 공군2호기가 평양국제비행장에 온다는 말도 들렸다. 공군1호기 조종사는 삼지연비행장의 활주로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미리 떠났다고도 했다. 백두산은 밤에 영하의 기온으로 내려간다는 말도 들렸다. 어쨌든 젊은 가수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대박!” 9월 20일 새벽 1시까지 큰 짐들을 호텔 로비에 내려놓으라는 전갈이 왔다. 1시쯤 잠이 든 나는 4시에 모닝콜을 받았다. 평양 거리는 불을 켠 곳이 별로 없었다. 5시 30분 비행장으로 가는 길은 어두웠다. 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때 버스 창문으로 우리를 환송하러 나온 평양 시민들이 보였다. 불빛 하나 없는 거리에서 그들은 손을 흔들면서 연도에 줄지어 서 있었다. 평양에 도착했을 때보다 숫자는 적었지만 환송 열기는 그에 못지않아 보였다. ‘뭉클하다’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든 말일 것이다. 비행장에서는 남쪽에서 급히 공수해온 방한복이 두 벌씩 지급되었다. 기자도, 그룹 총수도, 노동자도, 학생도, 성직자도, 교수도, 공무원도, 국회의원도 모두 하나같이 점퍼로 중무장을 마쳤다. 백두산으로 가는 비행기까지 따로 수속 과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좌석표도 없었다. 우리에게 배정된 고려항공에 탑승해서 빈 자리에 앉으면 그만이었다. 마치 수학여행을 가듯이 말이다.●남북을 위한 백두산의 환대, 이젠 평양도 백두산도 멀지 않더라 7시 40분, 평양에서 한 시간을 날아가 삼지연비행장에 도착했다. 2005년 남북작가대회 때 삼지연에 가본 이후 13년 만이었다. 해발 1300m의 고원지대에 위치한 삼지연의 공기는 서늘한 가을의 공기였다. 우리는 한두 달 앞당겨 가을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나는 마음껏 맑고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어디 보자기에도 싸갈 수 없는 바람이 얼굴을 어루만졌다. 만약에 할 수만 있다면 삼지연의 공기를 팔아 돈을 벌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지연비행장과 그 주변은 말끔하게 단장이 되어 있었다. 새로운 터미널이 신축되었고, 활주로는 깨끗하였다. 백두산으로 가는 포장도로도 손색이 없었다. 이깔나무(냑엽송), 가문비나무, 자작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길을 운전하는 운전기사가 말했다. “남쪽에서 오신 나이 드신 손님들을 위해 속도를 80㎞ 이하로 줄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삼지연에서 백두산까지의 길은 32㎞다. 모든 길의 양쪽 갓길에 이끼를 깔아 남과 북의 양 정상을 맞이하려는 노력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갔다. 백두산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난간의 테두리도 대리석으로 새로 단장했고 천지로 내려가는 삭도(케이블카)도 운행을 멈추지 않았다. 장군봉 정상까지 SUV 차량으로 올라간 수행원들도 있었고, 두 정상과 함께 천지로 내려가는 삭도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삭도를 타고 생전 처음 천지 물을 손에 적시는 행운을 누렸다. 백두산과 천지는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로 우리를 환대해 주었다. 1920년대에 육당 최남선이 쓴 ‘백두산근참기’를 나도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꽃은 졌지만 잎은 푸르게 남아 있는 만병초 잎사귀 하나를 따서 수첩에 끼워 넣는 일이었다. 두메양귀비는 보이지 않았지만 구절초로 짐작되는 식물의 씨앗을 봉투에 넣는 일도 빼놓을 수 없는 나만의 즐거움이었다. 백두산과 천지 주변을 마음껏 걸으며 둘러보고 노랗게 물든 자작나무 잎사귀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는 것, 그것으로 나의 ‘백두산근참기’는 완결편을 갖게 되었다. 평양도 백두산도 이제 먼 길이 아니다.
  • 종로구, 홍난파 ‘울 밑에 선 봉선화야’ 가곡제 개최

    종로구, 홍난파 ‘울 밑에 선 봉선화야’ 가곡제 개최

    서울 종로구는 8일 오후 7시 종로구 송월1길 38 홍난파 가옥 앞 월암근린공원 야외무대에서 2018 한국가곡제인 ‘울 밑에 선 봉선화야’를 개최한다. 홍난파 선생은 봉선화, 사랑, 장안사, 봄 처녀, 고향의 봄 등 한국인이 즐겨 부르는 수많은 가곡과 동요를 작곡했다. 이를 널리 알리고 문화공유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행사를 기획했다. 홍난파 가옥은 1930년대에 지어진 서양식 벽돌 건물로, 홍난파 선생 타계 전까지 6년을 거주한 곳이다. 지난 2004년 등록문화재 제90호에 지정됐으며, 홍난파 선생과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하고, 하우스 콘서트와 동요 교실 등 문화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행사에는 소프라노 이명주, 바리톤 정일헌이 부르는 동심초, 성불사의 밤 등 홍난파 선생의 가곡과 더불어 종로구립 소년소녀 합창단과 홍난파 합창단의 가곡과 동요도 들을 수 있다. 김영종 종로구청장은 “2018 한국가곡제가 한국예술가곡의 명성을 부흥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앞으로도 문화재와 연계된 다양한 행사를 통해 생동하는 문화도시 종로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슬픈 역사…폐허가 돼가는 소록도병원

    슬픈 역사…폐허가 돼가는 소록도병원

    한센인 첫 1만명 미만… 환자 평균 75세의사 필요인력 44%·간호사 22%에 그쳐균열·지붕 파손 등 병사 절반 이상 폐가“기념사업 추진보다 의료기능 강화 필요” 전남 고흥군 국립소록도병원의 한센인 병사(病舍) 절반 이상이 폐가로 방치되는 등 섬 공동화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이미 1980년대에 한센병 퇴치가 선언됐지만 급속한 한센인 고령화에 대한 대처는 미흡한 실정이어서 종합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 5일 보건복지부가 올해 실시한 ‘국립소록도병원 감사 결과’에 따르면 2002년 759명이었던 한센병 환자는 지난해 511명, 가장 최근 조사인 지난 2월 503명으로 급감했다. 환자의 평균 연령은 75.6세에 이르렀다. 이들은 고혈압(62.1%), 골다공증(38.7%), 당뇨병(25.3%) 등 각종 만성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의 건강을 관리할 의료진은 더 빨리 줄어 의료법 기준에 크게 미달하는 상황이다. 의사 필요 인원은 25명이지만 정원 11명, 간호사는 필요 인원 201명의 4분의1에 불과한 45명이다. 환자들이 거주하던 병사 112개 동 중 64개 동은 방치돼 폐가가 됐다. 대부분 1930년대에 만들어진 건물로 벽체 균열과 지붕 파손 수준이 심각하다. 관사도 79개 동 중 37개 동이 폐가로 남았다. 복지부는 2016년부터 소록도병원에 폐건물 철거용 예산을 지원하고 노인병원 전환을 지시했지만 병원 측은 종합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고흥군과 순례길 조성을 요구하는 천주교 단체, 추가 지원을 요구하는 한센단체 등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정착촌을 떠나 소록도병원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한센인도 있어 관리 대책이 시급하다. 지난해 기준으로 전국의 한센인 정착촌은 87곳, 거주민은 3129명이나 된다. 2011년 한빛복지협회 조사에서 정착촌 폐쇄 후 돌봄을 받기 위해 소록도로 이주할 의사가 있는 한센인은 34.5%였다. 복지부는 “의료 기능의 강화보다는 문화재 보존, 기념사업 측면으로 편향되게 연구가 추진되고 있다”며 “의료인력 확충 등 중장기 발전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병원에 요구했다. 한편 국내 한센인 수는 2002년 1만 8014명에서 2010년 1만 3316명, 지난해 1만 33명으로 해마다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올해 이미 1만명 미만으로 줄었고, 2025년이면 7262명으로 급감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미 1980년대 중반에 우리나라 한센병 퇴치를 선언했다. 항생제인 ‘리팜피신’을 한번만 복용하면 균 감염력이 99%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균 활동성이 있는 한센병 양성환자는 현재 소록도병원에 단 한 명만 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한센인 고령화 못 따라가는 소록도병원

    한센인 고령화 못 따라가는 소록도병원

    한센인 첫 1만명 미만… 환자 평균 75세 의사 필요인력 44%·간호사 22%에 그쳐 균열·지붕 파손 등 병사 절반 이상 폐가 “기념사업 추진보다 의료기능 강화 필요” 전남 고흥군 국립소록도병원의 한센인 병사(病舍) 절반 이상이 폐가로 방치되는 등 섬 공동화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이미 1980년대에 한센병 퇴치가 선언됐지만 급속한 한센인 고령화에 대한 대처는 미흡한 실정이어서 종합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5일 보건복지부가 올해 실시한 ‘국립소록도병원 감사 결과’에 따르면 2002년 759명이었던 한센병 환자는 지난해 511명, 가장 최근 조사인 지난 2월 503명으로 급감했다. 환자의 평균 연령은 75.6세에 이르렀다. 이들은 고혈압(62.1%), 골다공증(38.7%), 당뇨병(25.3%) 등 각종 만성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의 건강을 관리할 의료진은 더 빨리 줄어 의료법 기준에 크게 미달하는 상황이다. 의사 필요 인원은 25명이지만 정원 11명, 간호사는 필요 인원 201명의 4분의1에 불과한 45명이다. 환자들이 거주하던 병사 112개 동 중 64개 동은 방치돼 폐가가 됐다. 대부분 1930년대에 만들어진 건물로 벽체 균열과 지붕 파손 수준이 심각하다. 관사도 79개 동 중 37개 동이 폐가로 남았다. 복지부는 2016년부터 소록도병원에 폐건물 철거용 예산을 지원하고 노인병원 전환을 지시했지만 병원 측은 종합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고흥군과 순례길 조성을 요구하는 천주교 단체, 추가 지원을 요구하는 한센단체 등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착촌을 떠나 소록도병원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한센인도 있어 관리 대책이 시급하다. 지난해 기준으로 전국의 한센인 정착촌은 87곳, 거주민은 3129명이나 된다. 2011년 한빛복지협회 조사에서 정착촌 폐쇄 후 돌봄을 받기 위해 소록도로 이주할 의사가 있는 한센인은 34.5%였다. 복지부는 “의료 기능의 강화보다는 문화재 보존, 기념사업 측면으로 편향되게 연구가 추진되고 있다”며 “의료인력 확충 등 중장기 발전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병원에 요구했다. 한편 국내 한센인 수는 2002년 1만 8014명에서 2010년 1만 3316명, 지난해 1만 33명으로 해마다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올해 이미 1만명 미만으로 줄었고, 2025년이면 7262명으로 급감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미 1980년대 중반에 우리나라 한센병 퇴치를 선언했다. 항생제인 ‘리팜피신’을 한번만 복용하면 균 감염력이 99%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균 활동성이 있는 한센병 양성환자는 현재 소록도병원에 단 한 명만 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청와대 불상 원래 위치 경주로 옮겨 질까?

    경북 경주시의회가 3일 청와대 경내의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불상(청와대 불상·보물 제1977호)의 경주 반환을 촉구하고 나섰다. 경주시의회는 이날 236회 1차 정례회를 열고 한영태 시의원이 제안한 ‘청와대 소재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반환 촉구 결의안’을 채택했다. 시의회는 “청와대 관저 뒤쪽에 안치된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은 일제 강점기인 1913년 부당한 권력에 의해 경주 남산에서 서울 남산 조선총독관사로 옮겨졌다”며 “이 불상은 총독관사가 1927년 현 청와대 자리로 이전하면서 함께 옮겨져 현재까지 그 자리에 남아있다”고 밝혔다. 이어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경주 남산 아래 도지동 절터에 있던 것을 일본인 오히라가 총독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선물했다는 문서가 있고 현재 불상 앞 표지석에도 경주 남산에서 옮겨왔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며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을 때 가치가 있다”며 반환을 요구했다. 이 불상은 9세기 통일신라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108cm, 어깨너비 54.5cm, 무릎 너비 86cm의 크기로 균형잡힌 신체적 특징과 조각적 양감이 풍부한 것이 특징이다. 불상은 드물게 사각형 연화대좌(蓮華大座)를 갖추고 있는데, 편단우견(偏袒右肩·한쪽 어깨 위에 법의를 걸치고 다른 쪽 어깨는 드러낸 모습)과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왼손을 무릎 위에 얹고 오른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손 모양)을 한 형태는 경주 석굴암 본존상과 닮았다. 본래 경주에 있었지만, 1913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총독이 머물던 서울 남산 총독관저(왜성대)로 옮겨진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1930년대 현 청와대 위치에 새로운 총독관저가 만들어지면 이 위치로 옮겨졌다.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때는 1974년이다. 불상을 받치던 중대석과 하대석은 손실됐으나 나머지 부분 보존 상태는 괜찮은 편이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당당하고 균형 잡힌 모습과 풍부한 양감이 인상적이고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팔각형 대좌 대신 사각형 연화대좌가 있어 독창적이라고 평가한다. 지난해 6월 문재인 대통령이 공관 뒤편을 산책하다 불상 가치를 재평가해볼 것을 지시해 올해 4월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로 지정됐다. 경주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미래유산 톡톡] 양화대교는 ‘이별의 제2한강교’?… 감수성 폭발하네

    [미래유산 톡톡] 양화대교는 ‘이별의 제2한강교’?… 감수성 폭발하네

    지난 25일 진행된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6차 양화진(한강의 밤풍경) 편의 서울미래유산은 무형유산 1건과 무형유산 2건 등 모두 3건이었다. 유형 유산은 양화대교이고, 무형 유산은 분단으로 잃어버린 시인 백석의 수필 ‘마포’와 변훈 작곡, 정공채 작사의 1986년 발표가곡 ‘한강’이다. 양화대교는 2013년, 수필 ‘마포’와 가곡 ‘한강’은 2017년 12월에 각각 지정됐다.양화대교 구교는 한강 위에 가설된 세 번째 교량이면서 우리나라 기술진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교량이다. 마포구 합정동 352와 영등포구 당산동 7 사이 한강에 놓인 다리이다. 서울 도심에서 서부 지역으로의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한강대교만으로는 교통량을 감당하기 어려워 한강 하류에 다리를 가설하고 ‘제2한강교’라고 했다가 양화대교로 바꿨다. 제1한강교는 한강대교, 제3한강교는 한남대교이다. 교통난 해소를 위해 1982년 원래 있는 양화대교에서 한강 상류 쪽으로 양화대교 신교를 가설했다. “안녕하고 돌아서는 그대 두 눈에/담뿍 고인 이슬을 나는 보았소/수없이 주고받은 사랑의 맹서/흐르는 강물위에 던져버리고/마지막 이별하는 제2 한강교”라는 한산도 작사, 나화랑 작곡, 진송남의 ‘이별의 제2한강교’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훤칠한 외모에 큰 키, 검은 곱슬머리와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의 깔끔한 옷차림. 조선 최고의 모던보이였던 백석은 해방 전 요정 대원각(길상사) 주인 자야와의 러브스토리로 유명하다. 백석의 문학적 감수성에 불을 지폈던 것은 오산학교 7년 선배 김소월이었다. 백석의 시는 소월이 그랬듯 향토색 짙은 민속어를 통해 질박하고 정감 있는 우리의 일상과 민족혼을 담아내고 있다. 수필 ‘마포’는 1930년대 마포나루의 모습을 운치 있게 묘사해 마치 그때의 풍경을 그림으로 그린 듯 생생하게 표현한 점이 인정받았다. ‘명태’, ‘떠나가는 배’를 작곡한 변훈의 작품인 가곡 ‘한강’은 “한강수야 흘러라 넘실넘실 흘러라/굽이굽이 휘돌아 오늘도 흐른다/꿈과 사랑 품안고 잘도 흐른다/님도 나도 품안고 잘도 흐른다/한강수야 흘러라 오늘도 흐른다”로 평화로운 한강의 흐름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울미래유산연구팀
  • [인터뷰 플러스] “발효 젓갈 ‘셀링(sailing)’… 한류화로 세계 시장 도전”

    [인터뷰 플러스] “발효 젓갈 ‘셀링(sailing)’… 한류화로 세계 시장 도전”

    멸치액젓 찌꺼기 재활용해 에너지 생산사업 등 자원화 추진“젓갈은 전통 발효식품 중 하나로서 아미노산이 풍부하고 소화 흡수가 잘 되는 식품입니다. 새우젓은 특히 키틴 올리고당 성분이 면역력을 강화시켜 각종 바이러스와 감기 예방 등에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김희정 아리랑 전통젓갈 대표는 “새우젓은 온갖 종류의 염증 질병에 치료 효과가 좋다”면서 “식도염, 위염, 장염, 구강염 같은 소화기관의 염증에 좋은 식품이다”는 젓갈의 효능을 자랑하듯 설명했다. 새우는 한방에서 양기를 북돋아 신장을 강하게 하는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김 대표는 ‘젓갈의 메카’라 불리는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에서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 친족경영으로 전국 최고의 ‘셀링(sailing) 젓갈’(상표 등록)을 생산해 도소매하고 있다. 김 대표는 선친 고(故) 김병선 씨로부터 젓갈 만드는 기술과 젓갈의 유통에 이르기까지의 노하우를 배웠고, 젓갈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강경지역에서 젓갈을 생산하면 생기는 부산물 잔사의 자원화로 산업폐기물 처리비용의 획기적인 절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 김 대표는 발효과정이 젓갈과 유사한 전통차 개발에도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그 결과 그는 차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장관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10월 10일에서 14일까지 5일간 열리는 ‘강경젓갈축제’를 앞두고 젓갈의 메카 강경에서 ‘갓 잡은 새우와 멸치 등을 곧바로 염장’해 숙성 발효식품인 ‘셀링 젓갈’을 생산하는 김 대표를 인터뷰했다. “젓갈의 한류화로 세계시장에 도전할 역량을 기워가는 것이 꿈”이라고 인터뷰하는 김 대표. 그의 꿈이 실현되길 기대해 본다. 편집자 주 →‘젓갈의 메카’ 강경에서 선친의 가업을 인수해 친족 경영을 하고 계신데요. 그간의 소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젓갈의 1번지 강경에서 태어나 젓갈과 함께 ‘젓갈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학 시절 외에는 강경을 떠나보지도 않았죠. 당시 젓갈의 장인이라고 할 수 있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버지(김병선 씨)로부터 젓갈 만드는 기술과 젓갈의 유통에 이르기까지의 노하우를 배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생전에 ‘강경 젓갈 1호’라는 별명을 들었을 만큼 발효식품인 젓갈의 전문가였습니다. 또 아버지께서는 군산과 서천, 목포와 낙월도 등 전국 방방곡곡의 거래처를 수없이 방문하셨죠. 젓갈에 열정을 바치신 거죠. 아버님의 생전의 열정과 뜻을 이어 지금은 어머니와 언니, 동생과 함께 ‘젓갈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젓갈에는 많은 종류가 있는데요. 대표님께서 특히 아끼는 젓갈, 말하자면 ‘아리랑 젓갈’을 대표하는 젓갈은 무엇인가요. -그렇습니다. 다양한 것이 젓갈 종류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생선을 잡으면 어디 한 부분 버리는 것 없이 모두 젓갈로 담갔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젓갈이라면 새우젓, 멸치젓, 조개젓, 토하젓, 낙지젓갈, 어리굴젓, 오징어젓, 명란젓, 창난젓, 갈치속젓 등 많습니다. 이 중에서 생선을 통째로 염장한 젓갈은 새우젓, 멸치젓이 대표적이고요. 내장은 창난젓과 갈치속젓, 알은 명란젓이죠. ‘아리랑 젓갈’을 대표하는 브랜드 젓갈은 새우젓과 조개젓, 멸치젓 등입니다. 새우젓은 여름철 입맛 없을 때 사라진 입맛을 되돌아오게 한다는 말로 유명한 젓갈입니다. 짭조름하니 감칠맛이 일품이죠. 새우젓은 잡는 시기에 따라 명칭이 다양한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육젓은 주로 6월에 수확한 산란기의 새우로 담근 젓갈입니다. 새우젓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품질을 자랑합니다. 조개젓은 신석기시대부터 먹어온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젓갈입니다. 잔 조갯살을 소금에 절여 삭힌 젓갈로 어떤 젓갈보다 감칠맛이 뛰어납니다. →대표님의 말씀처럼 젓갈은 우리나라 특유의 저장식품으로 독특한 맛과 향, 영양을 갖춘 발효식품인데요. 우리 건강에 미치는 효능은 어떻습니까. -젓갈은 생선이나 조개류 또는 그 내장과 알을 원료로 하기 때문에 아미노산과 단백질이 우선 풍부합니다. 또 이 단백질이 발효되어 글루탐산, 핵산 물질과 휘발성 성분 등으로 젓갈 특유의 구수한 맛과 영양을 높여줍니다. 특히 쌀밥을 주식으로 할 때 부족하기 쉬운 필수 아미노산 즉 라이신과 트레오닌을 보충해 줍니다. 또한 식욕 증진, 간 보호, 비타민B 보급에 좋으며 감칠맛의 기본이 되는 성분으로 글루탐산, 알라닌 또는 글리신이 대체적으로 높습니다. 특히 새우젓은 키틴 올리고당 성분이 면역력을 강화시킨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면역력을 높여 각종 바이러스와 감기 예방 등에 효과적이라고 하죠. 그렇다 보니 온갖 종류의 염증 질병에 치료 효과도 좋다고 합니다. 식도염, 위염, 장염, 구강염 같은 소화기관의 염증에 좋은 식품인 거죠.→강경하면 젓갈, 젓갈 하면 강경인데요. 강경젓갈에 대해 자랑한다면 어떻습니까. -강경은 우리나라 굴지의 내포항으로 서해 해산물과 교역량이 많아 한 세기 동안 영화를 누리던 곳으로 평양, 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의 하나였습니다. 1930년대 최대의 성시를 이루었던 강경포구는 새우젓을 담가 금강의 물줄기를 이용해 배를 타고 나가 충청북도 부강까지 가서 새우젓을 팔았습니다. 특히 강경은 김대건 신부가 천주교를 세운 곳이고, 한국 침례교가 태동한 곳이기도 합니다. ‘강경 젓갈’의 특징은 모든 재료를 원산지에서 직접 가져와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전통비법에다 현대화된 저장시설로 정갈하게 제조한다는 겁니다. 전국의 어느 젓갈과 비교될 수 없는 옛 고유의 참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거죠. 그렇다 보니 우리나라 대표적인 산업형 축제로 ‘강경 젓갈 축제’가 발전했습니다. 당초 IMF가 한창이던 1997년 경제극복의 일환으로 지역경제 활성화와 상인들의 소득증대 취지에서 강경 젓갈 상인들의 뜻을 모아 시작한 축제가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커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특히 2007년부터 ‘강경젓갈축제’로 명칭을 변경하고 젓갈이 염장식품이라는 단순개념에서 탈피해 ‘세계 속의 젓갈, 발효식품’이라는 인식을 확고히 다진 결과 관광객들의 호응도 훨씬 높아졌죠. 이제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매김을 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하는 2013~2015년 최우수축제, 2016~2017년 우수축제의 영애를 안았습니다. 올해 20회를 맞는 강경젓갈축제는 문화광광 우수축제로 선정되어 볼거리, 먹을거리 풍성한 지역 문화축제가 될 겁니다. 많은 응원 바랍니다. →젓갈이 잘 삭혀져 숙성발효가 잘되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젓갈의 맛은 발효기술로 결정됩니다. 젓갈 속에 순백으로 하얗게, 마치 박꽃이 피듯 한 젓갈입니다. 그러니까, ‘젓갈 속에 박꽃이 피면 그 제품은 아주 숙성이 잘 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젓갈 속의 박꽃’이 징표입니다. →현재의 젓갈 노하우를 얻기까지 시행착오는 없으셨습니까. -어느 분야이든 전문가가 되자면 수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저 역시 한해에 수없이 많은 젓갈을 버리는 등 국민과 소비자 건강을 위해, 완벽한 제품을 만들기 위한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야 오늘에 이르렀습니다.→그렇다면 그 노하우는 무엇인가요. -지역 특성에 맞는, 논산딸기를 이용한 ‘딸기 젓갈’을 개발했죠. 이어 ‘동백하 새우젓 액젓’ ‘키조개 젓갈’ 등을 개발했습니다. 특히, 젓갈을 숙성하는 ‘당고’도 제가 처음으로 개발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지금은 젓갈의 표준화를 이루는 겁니다. 다양한 젓갈의 생산과 판매에 필요합니다. 또 저염젓갈 개발과 발효식품으로서의 과학적 근거제시, 원산지 표시, 원료와 젓갈의 투명성 확보, 위생상태 등 수 많은 해결책을 만드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비전은 무엇인가요. -고급의 양질 젓갈을 생산하자면 부산물, 즉 젓갈 잔사가 생기는데요. 이 젓갈 잔사에 미생물 등을 첨가하는 최첨단 방법으로 ‘에너지 환원’을 통해 사업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결과 잔사 처리비용의 획기적인 절감과 농어촌지역의 악취, 토양의 염류축적 방지 등 환경문제 해결, 그리고 재활용 에너지화라는 1석 4조의 시너지를 창출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젓갈의 세계화에도 일익을 담당해 대한민국의 국위를 선양하고 싶습니다. 홍의석 객원기자 hong5960@seoul.co.kr
  • 이효석의 고장 봉평… ‘흐붓한’ 달빛언덕 보러오세요

    이효석의 고장 봉평… ‘흐붓한’ 달빛언덕 보러오세요

    소설가 이효석(1907~1942)의 고향인 강원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에 문학 테마 관광지 ‘효석 달빛언덕’이 21일 문을 연다. 효석 달빛언덕은 한국 현대 단편소설 중 뛰어난 작품으로 나뉘는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인 봉평을 모티브로 책 박물관과 이효석 문학체험관, 테마형 경관, 효석광장 등으로 이뤄졌다. 근대문학체험관은 1920∼1930년대 이효석의 활동 시간과 공간, 문학을 이야기로 풀어내 한국 근대문학과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체험공간을 제공한다. 꿈꾸는 달은 이효석의 기억과 추억들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꾸미고 카페, 작은 도서관, 기념품 판매점 등 휴게공간을 곁들였다. 또 각종 문화행사와 공연을 열 수 있는 시설인 나귀광장·수공간과 아름다운 효석 달빛언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도록 달빛나귀 전망대를 설치했다. 이 밖에도 사계절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꿈꾸는 정원’과 창밖의 달 모형을 통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연인의 달’, 달빛나귀 전망대와 꿈꾸는 달 카페 옥상을 잇는 하늘 다리, 야외공간인 달빛광장 등을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게 배치해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낸다. 이효석문학선양회는 개관에 앞서 지난 15~19일 시범 개방해 점검을 마쳤다. 한왕기 평창군수는 “효석문화제를 앞두고 방문객에게 만족을 안길 수 있도록 달빛공원을 매끄럽게 꾸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문화제와 더불어 인근에 있는 이효석 문학관과 효석 문학의 숲, 폐교를 활용해 만든 무이예술관까지 함께 둘러보면 문학의 향기와 함께하는 최고 여행을 누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평창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홍석경의 문화읽기] 상하이에서 읽는 동아시아

    [홍석경의 문화읽기] 상하이에서 읽는 동아시아

    사람마다 꿈꾸는 도시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 그 도시는 상하이였다. 오랫동안 프랑스에 살았기에 올 8월에야 처음 방문하게 된 상하이. 물론 국제학회에서의 발표를 위해 왔지만, 도시 전체가 텍스트인 이곳, 하루 정도 ‘발로 하는 독서’의 매력을 물리칠 수 없다. 아편전쟁의 결과로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에 조계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이곳은 오랫동안 서구와 동아시아 간 순간이동 터널 역할을 했다. 상하이를 통로로 서구가 동아시아로 쏟아져 들어왔고, 동아시아인은 상하이에서 멀고 먼 프랑스와 영국 등 서구의 일부를 만났다.서구에도 상하이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는 신비한 곳이었다. 오손 웰스의 1947년 영화 ‘상하이에서 온 여인’의 주인공 리타 헤이워스는 상하이에서 보낸 몇 년의 과거와 중국어를 한다는 사실에 힘입어 영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팜파탈의 반열에 오른다. 그녀는 유명한 거울 신 속에서 죽는데, 이 장면이 중국을 다시 글로벌한 동서 간 문화교류 속으로 끌어들인 이소룡에 의해 ‘용쟁호투’(1973)에서 패러디됐던 것도 우연이 아니리라. 대한민국에게 상하이는 문자 그대로 동아시아에 열린 서구의 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젊은 장군 드골이 대서양을 건너가 런던에 임시정부를 세울 것을 생각하기 무려 20년 전 근대국가를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하고 식민지가 됐던 조선의 엘리트들은 3·1운동으로 깨어나 이곳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웅지를 틀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당시 조선의 어두운 미래와 조선인의 힘든 삶을 실감할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청나라에 이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대륙 침탈을 준비하는 일본의 기세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내걸어 민족의 정당하고 자주적인 미래를 도모한다는 결의와 실행은 얼마나 큰 결심과 신념이 있어야 가능했을까. 레지스탕스를 부르는 드골의 런던 행보에 대한 프랑스의 역사적 대접을 보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그간의 한국 내 이견이 부끄러웠다. 당시 경성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암살’ 속에서 주인공들이 거사 전날 모여 샹송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에서 임시정부의 상하이 커넥션이 강하게 암시된다. 1930년대 상하이와 조선의 커넥션은 영화 속에서 임시정부를 넘어선다. 중국 영화사에서 가장 빛나는 별 진린은 한국인이었다.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중심이었던 당시 상하이의 위상을 고려할 때, ‘동양의 루돌프 발렌티노’라고 불렸다는 이 한국인 남자 배우의 의미는 되새겨볼 만하다. 한국 이름 김염, 그의 부친은 독립운동가 김필순이고 고모부가 무려 김규식이니, 아무리 험난한 세월 속 인척 간 교류와 교육의 영향이 크지 않았더라도 그의 존재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상하이, 중국을 잇는 노드(node)다. 동아시아의 초국적 인기인의 전형과도 같은 노래하는 배우 장국영과 그 뒤를 잇는 한류 스타들이 있기에 앞서서 1930년대 글로벌 상하이에 한국인 배우 김염이 있었던 것이다. 밤이 되니 팔월에 크리스마스같이 치장한 불야성의 상하이가 펼쳐진다. 강의 이쪽과 저쪽이 이처럼 극적으로 서로 다른 모습이라니. 하늘을 향해 다투어 치솟는 푸둥 고층 건물들의 화려한 파사드를 마주 보는 와이탄의 강변로에는 프랑스 니스 해변의 콜로니얼 건축을 닮은 건물들이 육중하게 늘어서 있다. 와이탄 지역은 명·청대의 상점과 정원을 배경으로, 70년대 재개발 서민촌을 닮은 거리를 감추고 있다. 어두운 골목 끝 고담시티를 연상시키는 상하이타워가 구름 속으로 치솟는다. 중국의 들끓는 자본주의적 욕망처럼.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는 훙구공원에 해가 뉘엿뉘엿하자 노인들이 배 두드리며 나와 바람을 쐰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 서구 문호들의 동상 군집에서 멀지 않은 곳엔 새로 세워진 중·일 청년들의 우의를 다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시내 도처에서 한국어가 들리지만 한국 사드가 지나간 중국 어느 곳에도 한류의 자취는 없고, 일본식 바와 음식점이 즐비하다. 거대한 쇼핑몰 벽에 붙은 한류 스타를 똑 닮은 중국 배우의 모습이 묘하게 과거와 현재의 상하이, 그리고 동아시아의 굴기 속 중국의 욕망을 느끼게 해 준다.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일제 암흑기·근대 새벽의 경성…구보씨의 고독한 하루를 걷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일제 암흑기·근대 새벽의 경성…구보씨의 고독한 하루를 걷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4회 서울의 문학1(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편이 지난 14일 진행됐다. 여름 야행 세 번째 행사가 치러진 이날 여름의 마지막 몸부림이 느껴졌으나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진 못했다. 예약하지 않고 현장으로 직접 오거나 현장에서 일행을 따라나선 이들도 있어 준비된 오디오 가이드 시스템과 쿨 스카프가 동났다.이날 투어는 집결 장소인 청계광장의 소음을 피해 한국관광공사 2층 관광안내센터 ‘K-STAR 존’으로 이동,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쾌적하게 시작했다. 서울 중구 다동 10 한국관광공사 서울센터는 구보의 옛 집터(다옥정 7번지)이다. 청계천을 따라 광교까지 나간 뒤 화신백화점(종로타워)을 보고, 나석주 열사의 동상이 서 있는 옛 동양척식주식회사(하나은행 본점)~조선은행(한국은행 화폐박물관)~소공로 낙랑파라(더플라자호텔)~숭례문~경성역(서울로7017) 구간을 걸었다. 해설을 맡은 최서향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구보의 동선을 안내하면서 소설 속의 적절한 장면을 낭독했다. 참가자들은 문학 향기를 음미하면서 몰입했다. 1930년대 경성과 박태원이라는 소설가, 주인공 구보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구보가 배회했던 1930년대의 서울, 식민지의 수도 경성은 어떤 도시였을까. 일제강점기의 암흑과 근대의 새벽이 공존하는 이 시기는 식민 잔재라는 이름으로 혹은 근대유산이란 이름으로 서울 도시 공간 곳곳에,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다. 도시는 자연환경의 개조이고, 근대성의 임상실험이다. 이 시기 식민지 도시문화와 도시계획이 만들어 낸 지층이 우리가 사는 21세기 서울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식민통치기 경성의 외관과 도시민의 내면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주입하는 일본식 전통과 일본이 도입한 서구 문물이 혼재돼 있었다. 중국식 전통이나 중국을 경유한 서구 문물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일본으로부터 전해진 서구 문물에 눈을 뜨고, 귀가 열린 게 바로 1930년대 경성의 본질이다. 한국적 근대의 비밀은 한국인이 서구에서 직접 가져오거나, 서구에서 전해진 게 아니라 일본을 거쳐서 받았다는 데 있다. 소설 속 식민지 지식인 구보가 걸었던 소공로와 남대문로의 이국적 풍경과 우울한 독백 또한 여기에서 기인했을 수도 있다.구보가 소설에서 보고, 듣고, 생각한 경성은 사실상 새로운 도시였다. 현대 서울의 기원은 조선의 수도 한성이 아니라 경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부터 30년 동안 경성시구개수 계획과 경성시가지 계획에 따라 경성의 간선도로망을 정비한다는 명목으로 전통적 도심 공간의 구조를 재편했다. 청계천 이북 종로 중심 도시구조를 청계천 이남 경성부청(시청) 중심의 격자형 도시로 뜯어고쳤다.광화문 네거리 정동 쪽을 막고 있던 황토마루(황토현) 고개를 밀고 광화문~남대문에 이르는 남북 간 축선도로 태평로(세종대로)를 뚫었다. 종묘관통선(율곡로)을 만들고, 식민통치 기구와 일본인 거주지가 밀집한 본정통(충무로)과 황금정통(을지로) 중심의 방사상 도로망을 구축했다. 본정통과 남대문의 교차점인 조선은행(한국은행) 앞에 광장을 조성하고, 경성부청과 조선은행 앞 광장을 잇는 장곡천정통(소공로)을 뚫어 연결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하나은행 본점) 등 일제의 경제 수탈기구와 금융기관, 백화점이 명치정(명동)·본정통(충무로)과 이어졌다. 소설의 주인공 구보는 월북 소설가 박태원(1910~1986)의 분신이다. 박태원은 이념을 배제하고 도회적인 풍물과 도시성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다. 도시를 무대화하면서 전통의 몰락, 가족의 생성과 해체, 물질주의와 환락의 변주, 반복되는 일상을 묘사했다. 도시를 배경으로 개인의 일상을 그려 내면서 내면의식의 추이를 서술하는 모더니즘소설의 경향을 대변하고 있다. 도시 문학의 전형이다. 소설 속 구보는 집을 나서 경성 최고의 백화점을 둘러보고, 전차를 타고, 당대 대표적 건축물인 조선은행을 지나 경성역을 오간다. 낙랑파라로 대표되는 경성의 다방과 술집에서 오가는 대화와 친구와의 만남은 욕망과 소비문화의 분출을 나타낸다. 박태원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간 여러 설이 구구했으나 2016년 구보의 장남 박일영이 펴낸 ‘소설가 구보씨의 일생’(문학과 지성사)이 믿을 만하다. 조부 때부터 약방을 운영했고 부친이 약종상으로 공애당약방을 운영했으며 숙부가 양의로서 공애의원을 개업했다는 이유로 그동안 개화한 중인가문 출신이라고 알려졌으나 밀양 박씨 양반 가문임을 족보를 통해 밝혔다. 구보의 첫 부인 김정애는 한약국집 무남독녀로 숙명여학교(숙명여고)를 수석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서울사대) 연수과를 수료한 뒤 진천에서 보통학교 교사를 지낸 신여성이었다. 슬하에 2남 3녀를 뒀다. 영화 ‘괴물’, ‘설국열차’를 연출한 봉준호 감독이 외손자이다.구보는 7살 때부터 소설책에 관심을 보여, 9살까지 춘향전과 심청전 등 집에서 구할 수 있었던 시중의 이야기책 50~60권을 독파했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 재학 중이던 17살 때 본명으로 시 ‘할미꽃’을 발표했고, 18살 때 춘원 이광수에게 사사했으며 스승의 글을 평한 ‘묵상록을 읽고’를 발표하기도 했다. “문학에 인생을 걸 천재에게 정규교육은 불필요하다”면서 휴학, 집에 틀어박혔던 시절도 공개됐다.이상한 머리 모양과 친구 이상과의 우정, 월북 후 ‘갑오농민전쟁’ 출간 스토리가 대표적 이야깃거리다. 23세에 도쿄 법정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한 구보는 빨간 넥타이에 지팡이를 짚고, 바가지 머리 모양으로 다니면서 장안의 화제 인물이 됐다. 트레이드마크였던 ‘오갑빠머리’에 대해 구보는 ‘나는 내 머리를 다른 이들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다스리고 있다.… 내 머리터럭은 그저 제멋대로 위로 뻗쳤다. 나는 수없이 빗과 기름을 가지고 이것들을 다스리러 들었다.… 이마 위에 간즈런히 추려가지고 한일자로 짜르는 방법이었다’고 고백했다. 이상과 구보에 대해 ‘자신만큼 아는 사람도 흔치 않다’고 장담한 언론인이자 작가 조용만은 저서 ‘구인회 만들 무렵’에서 ‘이상과 구보는 짝패였다. 이상의 더벅머리와 수염에 대해서 구보의 ‘오갑빠머리’가 한 쌍이었고, 언변에 있어 두 사람이 주고받는 결말을 들으면 포복절도할 만담가의 흥행을 보는 것 같았고…둘이 다 한가한 몸이므로 밤낮 붙어 다니며 노닥거렸다’고 기록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여름야행 4=성수동(서울숲 밤마실) ●일시:8월 18(토) 오후 6~8시 ●집결장소:지하철 분당선 서울숲역 3번 출구 역 구내 ●신청(무료):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2018년 상하이에서 감상해 본 1930년대 동아시아

    2018년 상하이에서 감상해 본 1930년대 동아시아

    사람마다 꿈꾸는 도시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 그 도시는 상하이였다. 오랫동안 프랑스에 살았기에 올 8월에야 처음 방문하게 된 상하이. 국제학회에서의 발표를 위해 왔지만, 도시 전체가 텍스트인 이곳, 하루 정도 ‘발로 하는 독서’의 매력을 물리칠 수 없다. 아편전쟁의 결과로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에 조계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이곳은 오랫동안 서구와 동아시아 간 순간이동 터널 역할을 했다. 상하이를 통로로 서구가 동아시아로 쏟아져 들어왔고, 동아시아인은 상하이에서 멀고 먼 프랑스와 영국 등 서구의 일부를 만났다.서구에도 상하이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는 신비한 곳이었다. 오손 웰스의 1947년 영화 ‘상하이에서 온 여인’의 주인공 리타 헤이워스는 상하이에서 보낸 몇 년의 과거와 중국어를 한다는 사실에 힘입어 영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팜파탈의 반열에 오른다. 그녀는 유명한 거울 신 속에서 죽는데, 이 장면이 중국을 다시 글로벌한 동서 간 문화교류 속으로 끌어들인 이소룡에 의해 ‘용쟁호투’(1973)에서 패러디됐던 것도 우연이 아니리라. 대한민국에게 상하이는 문자 그대로 동아시아에 열린 서구의 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젊은 장군 드골이 대서양을 건너가 런던에 임시정부를 세울 것을 생각하기 무려 20년 전 근대국가를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하고 식민지가 됐던 조선의 엘리트들은 3·1운동으로 깨어나 이곳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웅지를 틀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당시 조선의 어두운 미래와 조선인의 힘든 삶을 실감할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청나라에 이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대륙 침탈을 준비하는 일본의 기세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내걸어 민족의 정당하고 자주적인 미래를 도모한다는 결의와 실행은 얼마나 큰 결심과 신념이 있어야 가능했을까. 레지스탕스를 부르는 드골의 런던 행보에 대한 프랑스의 역사적 대접을 보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그간의 한국 내 이견이 부끄러웠다. 당시 경성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암살’ 속에서 주인공들이 거사 전날 모여 샹송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에서 임시정부의 상하이 커넥션이 강하게 암시된다.1930년대 상하이와 조선의 커넥션은 영화 속에서 임시정부를 넘어선다. 중국 영화사에서 가장 빛나는 별 진린은 한국인이었다.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중심이었던 당시 상하이의 위상을 고려할 때, ‘동양의 루돌프 발렌티노’라고 불렸다는 이 한국인 남자 배우의 의미는 되새겨볼 만하다. 한국 이름 김염, 그의 부친은 독립운동가 김필순이고 고모부가 무려 김규식이니, 아무리 험난한 세월 속 인척 간 교류와 교육의 영향이 크지 않았더라도 그의 존재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상하이, 중국을 잇는 노드(node)다. 동아시아의 초국적 인기인의 전형과도 같은 노래하는 배우 장국영과 그 뒤를 잇는 한류 스타들이 있기에 앞서서 1930년대 글로벌 상하이에 한국인 배우 김염이 있었던 것이다. 밤이 되니 팔월에 크리스마스같이 치장한 불야성의 상하이가 펼쳐진다. 강의 이쪽과 저쪽이 이처럼 극적으로 서로 다른 모습이라니. 하늘을 향해 다투어 치솟는 푸둥 고층 건물들의 화려한 파사드를 마주 보는 와이탄의 강변로에는 프랑스 니스 해변의 콜로니얼 건축을 닮은 건물들이 육중하게 늘어서 있다. 와이탄 지역은 명·청대의 상점과 정원을 배경으로, 70년대 재개발 서민촌을 닮은 거리를 감추고 있다. 어두운 골목 끝 고담시티를 연상시키는 상하이타워가 구름 속으로 치솟는다. 중국의 들끓는 자본주의적 욕망처럼.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는 훙구공원에 해가 뉘엿뉘엿하자 노인들이 배 두드리며 나와 바람을 쐰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 서구 문호들의 동상 군집에서 멀지 않은 곳엔 새로 세워진 중·일 청년들의 우의를 다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시내 도처에서 한국어가 들리지만 한국 사드가 지나간 중국 어느 곳에도 한류의 자취는 없고, 일본식 바와 음식점이 즐비하다. 거대한 쇼핑몰 벽에 붙은 한류 스타를 똑 닮은 중국 배우의 모습이 묘하게 과거와 현재의 상하이, 그리고 동아시아의 굴기 속 중국의 욕망을 느끼게 해 준다. 글·사진: 홍석경 서울대 언론학과 교수
  • “남북 공동 연구하면 잊혀진 우리 역사 바로 설 것”

    “남북 공동 연구하면 잊혀진 우리 역사 바로 설 것”

    “광저우 독립운동가를 남북한이 공동 연구하고 잊혔던 우리 역사도 바로 섰으면 좋겠습니다.”1920~1930년대 중국 광저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33명을 발굴한 재중 연구가 강정애(60)씨는 14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이 같은 간절한 바람을 전했다. 공산주의자라는 낙인 때문에 치열한 항일 투쟁을 했음에도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이들을 이제는 남북한이 함께 연구해야 한다는 바람이었다. 강씨는 2009년 11월 광저우에 있는 황포군관학교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한국인 김근제, 안태의 묘를 보게 됐다. 1927년 이십대 젊은 나이에 죽은 이들은 입학도 하지 못한 예비학생 신분이었다. 이들은 왜 꽃다운 나이에 광저우까지 오게 됐을까. 강씨는 의문이 생겼다. 자료를 찾아본 강씨는 독립운동가들이 1924년 쑨원의 국공합작 이후 광저우를 찾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실제로 1924년 1월 중국 국민당 전국 대표대회에 의열단 김원봉과 권준 지사 2명이 참여했다는 기록도 있다. 김원봉은 이듬해인 1925년 의열단 12명을 황포군관학교에 데려온다. 이런 식으로 1927년 봄까지 광저우에 온 독립운동가는 800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1927년 4월 국공합작 결렬 이후 다시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한국 역사에 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강씨는 발품을 팔아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광저우 지역에서 사들인 중고 서적, 중국 중산대학의 역사 자료, 당시 기사와 현장 방문으로 자료를 모았다. 그리고 이 자료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자료, 그리고 독립기념관의 자료들과 비교, 대조했다. 회사를 마친 뒤 자료에 나온 곳을 찾고 후손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새벽 4시에 일어나 자료를 정리했다. 전문 연구가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현지에서 10년 동안 모은 자료는 방대하고 촘촘하다. 이렇게 1차로 33명의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냈다. 신해혁명에 참여한 첫 한국인인 범재 김규흥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다. 분명한 발자취가 있음에도 우리 역사에는 왜 이들에 관한 자료가 없었을까. 알려지지 않은 이들 대부분이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란 게 강씨의 주장이다. “당시 독립운동가는 나라를 되찾을 힘이 필요했습니다. 공산주의와 상관없이 중국을 돕고, 중국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이루자는 의도였습니다. 이승만을 비롯해 상하이나 미국 등에서 활동했던 이들은 잘 알려졌지만 (광저우의 독립운동가들은) 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모두 잊혔습니다.” 강씨는 자신이 이렇게 얻은 방대한 자료를 내년까지 책으로 낼 예정이다. 이 자료에 관한 검증과 활용은 남북한이 함께 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연구 결과가 맞는지 틀리는지, 그리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떤 식으로 바로잡아야 하는지는 결국 후대의 과제라는 것이다. “남북 관계가 어느 때보다 좋은 시기입니다. 체육이나 예술 교류는 활발하지만 다른 분야는 미진합니다. 이런 점에서 광저우 독립운동가는 남북이 함께 연구하기에 아주 좋은 소재라 생각합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한국인 머리 크기 산업화 이후 커졌다

    한국인 머리 크기 산업화 이후 커졌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산업화 등을 거치면서 한국인의 머리 크기와 생김새가 크게 달라졌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태어난 한국인보다 1970년대에 태어난 한국인의 두개강 부피와 머리뼈 높이, 너비 등 전반적인 머리 크기가 40년 새 6%가량 커졌다. 유임주 고려대 의대 해부학교실 교수팀은 자기공명영상촬영(MRI)으로 1930년대와 1970년대에 각각 태어난 한국인 115명의 머리를 촬영한 뒤 3차원으로 재구성해 연구한 결과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고 13일 밝혔다. 연구팀은 1945년 광복을 기준으로 전후 40년간의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1930년대 출생자 58명, 1970년대 출생자 57명의 머리 크기를 측정했다. 분석 결과 사회경제적 안정을 찾은 1970년대에 태어난 한국인의 머리뼈 안쪽 ‘두개강’의 부피는 1930년대 출생한 사람에 비해 평균 약 90㎖ 컸다. 서구에서도 산업혁명 이후 산업화,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1~2세기에 걸쳐 머리뼈의 형태학적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국내에서는 광복을 전후로 4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런 변화가 나타났다는 점이 흥미롭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한국인의 머리 크기, 급격히 커진 이유 “영양 공급”

    한국인의 머리 크기, 급격히 커진 이유 “영양 공급”

    한국인의 머리 크기가 커졌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교실 유임주(사진) 교수 연구팀은 1930년대 태어난 한국인보다 1970년대에 태어난 한국인이 두개강 부피가 약 90㎖ 더 크고, 더불어 머리의 생김새도 변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13일 밝혔다. 연구팀은 자기공명영상(MRI)으로 1930년대와 1970년대에 태어난 한국인 115명의 머리를 촬영하여 3차원 영상으로 재구성한 다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비교 관찰했다. 그 결과 광복 이후 사회경제적 안정을 찾은 1970년에 태어난 한국인의 머리뼈 안쪽, 즉 두개강의 부피가 광복 이전인 1930년대 출생한 한국인에 비해 약 90㎖ 커졌으며, 두개골의 형태도 남녀 모두 머리뼈의 높이와 너비가 커진 것으로 나타났다. 서구사회에서도 산업혁명 이후 산업화,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1-2세기에 걸쳐 머리뼈의 형태학적 변화가 동반된 바 있으며, 국내에서는 광복을 전후로 4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러한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이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 시대에 태어난 한국인들이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것은 물론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영양상태 부족 등으로 인해 성장발달이 지연된 반면, 사회적, 경제적 안정을 찾은 1970년대 한국인은 성장에 필요한 적절한 영양을 공급받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유임주 교수는 “두개강의 부피와 머리뼈로 뇌 크기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에 체질인류학 뿐 아니라 뇌과학, 진화인류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지표로 여겨져 왔다. 1970년대는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성장을 시작하면서 적정한 영양이 공급되어 한국인의 신체적 변화도 함께 일어난 것이라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결과는 국제 학술지인 ‘아메리칸 저널 오브 피지컬 안쓰로폴로지(American Journal of Physical Anthropology)’ 최근호에 게재됐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영원한 ‘별들의 고향’… 경성의 낭만을 소환하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영원한 ‘별들의 고향’… 경성의 낭만을 소환하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3회 극장순례(영화의 고향) 편이 지난 4일 서울 종로와 충무로 일대에서 진행됐다. 여름 야행 두 번째 행사를 맞아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답사단 일행 30여명은 모자와 부채, 손풍선 등으로 완전 무장했지만 쏟아지는 폭염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안전사고를 막고자 도보 코스를 줄이고, 서울신문사에서 때마침 제공한 ‘아이스 쿨 스카프’에 의지해 답사를 마쳤다. 참가자들은 이날 오후 6시 지하철 종각역 3번 출구 앞 종로타워빌딩(옛 화신백화점) 앞에서 집결, 우미관 옛터~인사동 조선극장 옛 터~허리우드극장~단성사 옛터~서울극장~충무로 영상센터 순으로 2시간짜리 극장순례를 다녀왔다. 서울극장에서 충무로 영상센터까지는 지하철로 이동했다. 지난해와 올해를 통틀어 답사 중 첫 대중교통 이용사례다. 해설을 맡은 심흥식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흘러간 추억의 영화는 물론 자신이 경험한 70~80년대 영화의 주제가를 직접 부르면서 영화와 극장 분위기를 전달해 공감과 호평을 얻었다.서울은 극장의 도시이다. 한국영화의 고향이기도 하다. 근대화의 산물이자 대중문화의 상징인 영화는 일제강점기의 수도 경성에서 화려하게 꽃피었다. 1920년대 전후 ‘문화로써 생활의 중심으로 삼는 사상’ 즉 문화주의와 문화운동이 전개되었고, 그 중심에 영화가 있었다. 일제의 통치방식이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색깔을 바꾼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일제의 문화정치는 진정한 의미의 문화주의 정치가 아니라 식민지의 ‘문명개화’(文明開化) 혹은 ‘문치교화’(文治敎化)의 흉내에 불과했지만 500년 봉건왕조의 지배에서 막 깨어난 대중을 유혹하기엔 충분했다. 영화로 대표되는 서울의 대중문화는 양반 선비문화, 고급 엘리트문화에 대항한 문화적 민주주의의 시발점이었다.1930년대 접어들면서 신파극, 뽕짝가요, 영화 등 3대 장르가 주도하는 ‘조선식 대중문화’가 경성에서 폭발했다. 근대화와 식민지 정서가 뒤섞인 독특한 문화양식이었다. 당대 경성의 신인류를 지칭하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낭만주의적 퇴행성을 대표하는 식민지 근대성의 표식이라면, ‘장한몽’(이수일과 심순애),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홍도야 울지 마라) 같은 신파극은 이율배반적 비극미의 표출이었다. 3대 장르에서 짜내는 부조리한 눈물은 대중에게 위안을 제공했다. 체제 순응이라는 자학적 죄의식을 외면하는 핑곗거리를 제공했다. 대중문화는 정치 이데올로기 전파의 수단으로 사용됐다. 특히 영화(Screen)는 성(Sex), 스포츠(Sports)와 함께 ‘3S’의 대명사였다. 1919년 제작돼 한국영화의 기원으로 간주하는 ‘의리적 구토’는 과도기 성격의 영화이다. 연극 무대에서 구현이 어려운 장면이나 풍경을 활동사진으로 찍어서 중간에 끼워 보여주는 연쇄극이었다. 단성사 사장 박승필은 명월관, 청량리, 홍릉, 장충단, 한강철교 등 경성의 명소를 찍어 단성사에서 공연하는 연극의 중간에 삽입했다. 한국영화의 전성기는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과 함께 막을 올렸고, 1937년 나운규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최초의 무성영화이자 흥행 대작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과 대중의 민족 정서를 반영한 이 영화는 상영 첫해에 110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아리랑이라는 걸출한 영화 한 편이 영화를 대중문화의 간판산업으로 밀어 올렸다. 1935년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히트를 한 이후 1938년 경성 시내에서 영화와 연극관객이 하루 평균 1만명에 이르렀고, 1942년에는 연인원 2000만명이 영화와 연극을 관람했다고 한다. ‘영화 경성시대’였다.한국영화는 1950~60년대 르네상스를 맞았다. 1955년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은 정비석이 서울신문에 연재한 동명 소설을 영화화해 영화 부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교수 부인의 바람은 전통적 가부장제를 밑바닥에서 흔드는 발칙한 소재였다. 1961년 한국영화사상 최대의 문제작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을 시작으로 신상옥, 김기영 감독의 작품이 뒤이었다. 1970년대 유신 시절 침체기에 접어든 한국영화는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 등 호스티스 영화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사회성 짙은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 등으로 되살아났다.극장은 신파극, 뽕짝가요, 영화 등 오락문화를 쓸어 담는 그릇이었다. 본래 연극 공연장이던 극장은 무용·음악·예능 등 무대예술 공연장으로 영역이 확대됐다. 19세기 말 영화의 발명 이후 극장과 영화관이 구별됐다. 무대와 조명을 갖춘 국내 최초의 실내극장은 1902년 서대문밖에 세워진 협률사였다. 로마 원형극장을 본뜬 협률사가 최초의 관립극장이자 서양식 극장이었다면 1908년 신문로에 설립된 이인직의 원각사는 최초의 사설극장이었다. 활동사진 상설극장으로 가장 먼저 개관한 곳은 1910년 종로구 관철동 경성고등연예관이다.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뀐 뒤 1915년 수용인원 1000명 규모의 상설영화관 우미관으로 거듭났다. 판소리와 창극을 공연하던 단성사는 1918년 활동사진 전용관이 되기 전까지 경성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유일한 극장이었다. 무성영화 시절 유명한 변사는 대부분 우미관 출신이었다. 찰리 채플린이 제작·감독·각본·주연을 맡은 무성영화 ‘황금광시대’도 우미관에서 상영했다. 우미관은 단순한 극장이라기보다 종로상권을 넘보는 청계천 이남 남촌에 근거지를 둔 일본 야쿠자의 북촌 진출을 막는 방어선이었다. 종로 주먹 김두한의 사무실이 우미관에 있었다. 영화 ‘장군의 아들’, 드라마 ‘야인시대’의 주 무대이다. 종로2가 길가 화단에 표석이 남아 있다. 답사단이 찾은 종로타워 뒷골목 우미관은 1959년 관철동 우미관이 불타 없어진 뒤 화신백화점 뒤로 옮긴 곳이다. 이전 후에는 이류 재개봉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1982년 폐업, 지금은 우미관 주차장이 됐다. 1907년에 개업한 단성사는 1919년 ‘의리적 구토’를 시작으로 ‘장화홍련전’과 ‘아리랑’을 상영하면서 장안의 영화 중심가로 떠올랐다. 이후 ‘서편제’ ‘태백산맥’ ‘장군의 아들’ 등을 개봉했다. 1913년 황금연예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한 국도극장은 일본인 거주지역인 을지로를 대표하는 극장 황금좌로 운영되다가 1948년 개칭했다. 지금은 국도호텔로 변신했다. ‘미워도 다시 한번’ ‘별들의 고향’ ‘겨울여자’를 각각 개봉했다. 1922년에 건립된 인사동의 터줏대감 조선극장은 영화상영과 판소리, 가무곡 공연 겸용관이었다. 김기진 등이 신파극에 대항해 근대 신극운동을 펼친 토월회의 창립공연을 비롯해 명창대회가 열린 유서 깊은 장소이다. 1936년 방화로 소실된 뒤 이런저런 장소로 떠돌다가 포장마차 골목으로 쓰이고 있다. 뒷면 대나무 숲 앞에 조선극장 터 표석이 서 있었으나 훼손돼 사라졌다. 황금좌, 우미관, 단성사, 조선극장이 경성의 4대 극장으로 군림했다. 1935년 설립된 연극전용 동양극장은 1976년 폐관될 때까지 서대문을 대중연극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서울의 문학1(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일시: 8월11일 토요일 오후 6~8시 ●집결장소: 청계광장(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5번 출구, 1.2호선 시청역 4번 출구)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go.kr)
  • 2차대전 때 비행기 스위스 동부 계곡에 수직 추락 20명 참변

    2차대전 때 비행기 스위스 동부 계곡에 수직 추락 20명 참변

    1930년대 독일에서 만들어져 2차 세계대전 때 활약했던 비행기가 스위스 동부 계곡에 추락해 탑승자 20명 전원이 목숨을 잃었다. 스위스의 마운틴 플라이트 회사인 JU-에어는 17명의 승객과 3명의 승무원이 탑승한 JU-52 HB-HOT가 스위스 남쪽 국경 근처 로카르노를 이틀 동안 돌아보고 취리히로 돌아오기 위해 지난 4일(이하 현지시간) 저녁 이륙한 직후 알 수 없는 이유로 추락했다고 밝혔다. 이 회사는 취리히 근처 듀벤도르프 공군 비행장에서 여러 대의 독일제 군용기를 빈티지 비행 투어에 운용하고 있었다. 추락 지점은 해발 고도 3000m로 알려진 피츠 세그나스 봉우리의 서사면 2540m 지점이다. 영국 BBC는 일부 목격자가 추락 순간을 목격했지만 비행기 안에 블랙박스도 없고 레이더 추적도 안되는 지역에 추락한 것이라 사고 원인을 규명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전했다.스위스 교통안전조사국의 대니얼 크네흐트는 “추락 지점의 상황들을 볼 때 비행기가 거의 수직으로 비교적 빠른 속도로 바닥에 곤두박칠진 것으로 볼 수 있다”며 “현재로선 추락 전에 어떤 비행체와 충돌하지도 않았고 케이블과 같은 장애물에 부딪친 것도 아니란 점만 분명하다”고 말했다. 한 목격자는 스위스 무료신문 ‘20 Minutes’에 “그 비행기가 180도 각도로 바닥까지 마치 돌멩이처럼 떨어졌다”고 진술했다. 현지 경찰은 희생자 20명 가운데 11명이 남자, 9명이 여자이며 승객 연령대는 42세에서 84세까지라고 전했다. 스위스인이 17명, 나머지 3명은 오스트리아 부부와 아들로 파악되고 있다. 쿠르트 발트마이어 최고경영자(CEO)는 AFP통신과의 인터뷰를 통해 문제의 비행기가 지난달 정밀 점검을 통과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모든 비행기의 운행을 중단하고 유족들을 돕기 위해 비상대책반을 가동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스위스에서는 또다른 비행기 추락 참사가 있었는데 부부와 두 어린 자녀 일가족을 태운 경비행기가 중부에 떨어져 모두 세상을 등졌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