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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플러스 칼럼] 실루엣에게 말을 걸다/김종봉 세무법인 더택스 대표

    [서울플러스 칼럼] 실루엣에게 말을 걸다/김종봉 세무법인 더택스 대표

    인류가 유목 생활을 끝내고 한곳에 정착, 공동체 조직을 형성하면서 내외부로부터 조직을 보호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더 나은 삶을 향유 하는데 공통의 비용이 필요하게 되었다. 지금의 세금이다. 최초에는 공동체 삶의 취지에 호응하면서 큰 불만 없이 유지되었을 것이다. 그 공동체 내에서 살아가기를 원했다면 말이다. 오늘날 세금은 ‘우리가 문명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내야 하는 돈’(Oliver Wendell Holmes Jr·19세기 하버드대 교수)으로 진화해 왔다.매년 정기국회가 열릴 즈음이면 정례적으로 다음 해의 살림살이를 짜면서 세제 개편안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국민의 입장에서는 머리로 이해하기보다는 내 주머니 사정으로 먼저 다가가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모두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누군가에게 세금은 산타클로스가 될 수 있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존재(苛政猛於虎)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금의 혜택이 몸을 상하게 할 정도로 너무 달콤해서도 안 되며 세금의 부담이 짊어지기 힘들 만큼 너무 과중해서도 안 될 것이다. 간혹 위정자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 밑도 끝도 없이 정치적 산물로 탄생했던 역사 속의 세금 중 웃지 못할 사례를 하나 들추어 본다. 300여년 전인 18세기 중엽 프랑스 루이 15세는 부족한 국가재정에 충당할 목적이라는 명목과는 달리 실상은 개인적 사치에 필요한 자금을 더 끌어모으기 위해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에티엔 드 실루엣(Etienne de Silhouette·1709~1767)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을 지시했고, 이에 실루엣은 공기세라는 획기적인 세금을 만들어낸다. 모든 국민이 살아있는 한숨을 쉬어야 하고 숨을 쉬는 사람은 국가의 공기를 사용하게 되므로 이를 과세근거로 삼아 나라에서 세금을 징수하겠다고 한 것이다. 세수확보 또한 용이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무부 장관 실루엣은 당초 상상과는 전혀 다른, 시행과 동시에 일반 국민뿐만 아니라 귀족, 왕족 등 특권층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공기세를 철회하게 된다. 국민적 조세저항을 견디지 못한 실루엣은 4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실루엣이 짧은 시간에 장관직에서 물러나자 이후 사람들은 그의 존재감에 빗대어 희미한 형체(그림자·윤곽 등)를 실루엣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2018년 초 서울, 미세먼지의 심각성이 더해 가고 있었다. 초미세 먼지의 인체 유해성으로 심장 질환·뇌졸중·폐암·만성 폐쇄성 폐 질환 등의 원인이 되어 연간 전 세계에서 수 백만 명이 사망하고 있고, 호흡기 질환, 알레르기 비염 등의 환자 등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심지어는 미세먼지가 다이어트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2018년 7월 4일 경희대병원 내분비내과 이상열 교수팀 발표)까지 국내에서 나왔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만든 문명사회의 상징물인 자동차·발전설비·도로 및 항만시설·각종 공장시설·가정의 부엌에서, 배기가스·매연·날림먼지 등의 공격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과거 한때는 서울시에서 ‘공기와의 전쟁’을 벌인 적도 있었다. 좋은 공기를 마실 권리를 누리기 위해, 우리가 문명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내야 하는 돈, 그 세금 중 일부를 미세먼지로부터 해방되는데 사용하자는 공감대도 있다. 정말 공기세라도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다. 300여년 전 실루엣이 2018년 서울 하늘의 미세먼지를 보고 공기세를 구상했었다면 그는 또 어떻게 되었을까?
  • “성 불평등 해소”로 출발한 페미니즘…수세대 거치며 분화

    “성 불평등 해소”로 출발한 페미니즘…수세대 거치며 분화

    ‘남성과 동일한 권리’ 주장하던 1세대 노동·민주화운동하며 70년대 새 국면 80년대에 성차별·성폭력 등 철폐 외쳐 성폭력특별법·호주제 폐지 등 큰 성과서울 시내 한 백화점 3층 여성복 매장 여자 화장실 변기 위 천장에서 몰래카메라가 발견됐다. 여기서 유출된 비디오테이프가 동남아 섹스숍에서 팔린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백화점을 이용해 온 여성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성단체와 소비자단체들의 거센 항의에 백화점은 공식사과했다. 어제의 몰카 범죄 뉴스가 아니다. 1997년 당시 신촌 그레이스 백화점에서 발생한 일이다. 여자 화장실 천장 구멍에 설치된 3㎜ 크기의 특수렌즈를 통해 백화점 방재실 직원들이 화장실 안을 지켜봤다. 불법 촬영의 수법, 대상, 장소 등이 요즘 범죄와 판박이다. ●각자 피켓 들고 참여… 美 급진주의와 닮아 2018년 한국 여성들이 겪는 성폭력은 20여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반면 현실을 바꾸기 위해 거리로 나온 여성들의 모습은 다소 낯설다. 1997년 백화점 앞에서 성명을 발표한 건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기존 여성단체였다. 올여름 혜화역의 ‘불법 촬영 편파 수사 항의 시위’ 주인공은 불특정 다수의 여성이다. 지난 4일 광화문에서 열린 4차 시위에 참가한 40대 김모씨는 “집회에 시민 단체나 정당의 깃발이 없어 어색했다”고 했다. 20대 초반 여성은 “여성 집회에 운동권 깃발이 왜 필요하냐”고 반문했다. 각자 만든 피켓과 붉은 드레스코드만이 동질성의 징표였다. 생물학적 여성만 참가할 수 있고 익숙한 구호 대신 온라인의 미러링(여성 혐오를 거울처럼 뒤집어 남성 혐오로 돌려주는 방식) 단어가 터져나왔다.20년간 못 봤던 여성들의 등장에 한국 사회는 놀라고 있다.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고정된 조직도 없이 여성집회를 끌어 온 이들. 일각에서는 이들을 급진적 여성주의자(Radical Feminist)라 부른다. 1960년대 미국 급진주의와 닮았다는 이유에서다. 미국에서 시작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프랑스의 68혁명을 계기로 탄생했다. 미국, 유럽, 남미까지 전쟁, 관료주의,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구호가 거리를 뒤덮은 시기, 여성들도 여성 억압 문제를 제기하면서 가부장제에 대항했다. 19세기 제1세대 페미니즘이 참정권 획득과 같은 정치 제도 개선에 노력했다면 제2세대 페미니즘인 이들은 보다 일상적인 문제에 집중했다. 낙태 결정권, 포르노 반대 등을 이슈화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공론장으로 끌어냈다. 1968년에는 미스아메리카 반대 시위도 일어났다. 브래지어처럼 여성의 몸을 옥죄는 것들을 쓰레기통에 던지며 성 상품화를 비판했다. 지난 6월 한국 페이스북 사옥 앞 상의 탈의시위, 탈코르셋 유행, 1999년 시작된 한국에서의 안티미스코리아대회와 겹쳐지는 장면이다. 1세대에서 2세대로의 변화는 페미니즘 역사를 관통하는 주제인 차이와 평등을 함축한다. 페미니즘 역사는 이 두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진화해 왔다. 1세대는 남성과 동일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여성과 남성은 똑같은 이성적 인간”이라며 평등의 언어를 내세웠다. 그러나 투표권만으로는 여성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았다. 여성의 경험을 드러내는 언어가 필요했다. 몸의 경험, 개인의 일로 치부됐던 성폭력, 가정폭력이 구조적 문제임을 강조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 “자매애는 강하다”는 유명한 구호도 등장했다. ●1987년 21개 단체 모여 ‘여성단체연합’ 결성 서구의 반권위주의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1960년대 한국은 권위주의 시대였다. 탄압받던 여성 운동은 1970년대 여성노동자 운동과 뒤이은 민주화 운동 속에 새 국면을 맞았다. 경제성장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라는 정체성이 드러났고, 동일방직, YH무역 등 젊은 여성 노동자가 밀집된 제조업에서 노조 설립 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당시 운동은 성차별 철폐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지만 여성 노동자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여성운동은 1980년대 전면에 등장했다. 1970년대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경험한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한 시기다. 이들은 ‘여성은 정치에 무지하다’는 편견을 깼다. 1983년 6월 여성평우회 창립을 계기로 여성의 전화, 또 하나의 문화, 교회여성운동단체 등이 여성 의제를 이끌었다. 결혼 퇴직, 임금 차별 등 노동현장의 성차별, 성폭력, 성매매 철폐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25세 여성조기정년철폐운동, 부천서 성고문대책위 등을 함께한 21개 여성단체는 1987년 한국여성단체연합을 결성했다. 민주정부가 들어선 뒤 1994년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됐고 1999년엔 군 가산점 위헌 결정을 이끌어냈다. 2005년에는 호주제가 폐지됐다. 가족법 개정을 추진한 지 약 50년 만이었다.●LGBT 등 소수자 주체… 영 페미니스트 나와 이전 30년간 여성계가 굵직한 제도 성과를 거뒀다면 민주화 이후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는 그동안 가려져 있던 페미니즘의 주제들이 빛을 봤다. 성소수자(LGBT), 여성장애인, 이주여성 등 소수자 주체들이 드러났다. 2000년대 중반까지 문화운동에 두각을 나타낸 젊은 페미니스트인 ‘영(young) 페미니스트’ 도 등장했다. 이들은 몸, 섹슈얼리티, 환경 등 새로운 문제를 꺼내고 월경페스티벌 등 축제를 통해 일상 속 주제를 풀어냈다. 2015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 10년간 페미니즘은 대중과 다소 멀어져 있었다. 이 단절을 끝낸 여성들은 20대 ‘영영(young young) 페미니스트’ 들이다.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고 학교와 사회에서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일베 등 여성 혐오를 학습한 남성들과 공존한 세대다. 2014년 세월호 참사로 안전 문제에 눈을 떴다. 이전 세대보다 미러링에 익숙하고 안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최근 자유·급진·상호교차 등 그룹 다양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일각에선 이들을 4세대 페미니스트라고 부른다”면서 “SNS를 기반으로 한 활동, 몰카나 여성 대상 범죄 등 안전 이슈에 적극 나선다는 차별점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페미니즘은 단일한 것으로 규정할 수도 없고, 우리나라 페미니즘도 여러 세대가 섞여 있다”고 분석한다. 최근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급진주의, 상호교차 페미니즘 등 여러 정신이 공존하며 다양한 그룹이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여성들의 이합집산도 유동적이다. 워마드의 성체 훼손 논란이나 난민 혐오에 대해 기존 여성계는 반대 의사를 보이며 선을 그었지만 ‘몰카 편파 수사’,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행 무죄 판결 비판에는 같은 목소리를 낸다. 영영 페미니스트도 단일한 집단으로 재단하기 어렵다. 지난 18일 여성단체가 주최한 시위에 20대 여성들이 다수 참여하기도 했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영미권에서만 보던 다양한 페미니스트 논쟁이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이것이 페미니즘을 더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끌어올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올여름을 달군 페미니즘의 열기는 당분간 식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년 전의 몰카 범죄가 반복되듯 성차별은 한순간에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여성들을 또 광장으로 소환할 것이기 때문이다. 낙태죄 폐지, 불법 촬영 수사 등 현안도 뜨겁다.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주체가 등장할지 광장으로 시선이 쏠린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4세대 페미니스트 기로는 세월호…몰카 등 ‘안전 이슈’에 눈뜨다

    4세대 페미니스트 기로는 세월호…몰카 등 ‘안전 이슈’에 눈뜨다

    ‘남성과 동일한 권리’ 주장하던 1세대 노동·민주화운동하며 70년대 새 국면 80년대에 성차별·성폭력 등 철폐 외쳐 성폭력특별법·호주제 폐지 등 큰 성과서울 시내 한 백화점 3층 여성복 매장 여자 화장실 변기 위 천장에서 몰래카메라가 발견됐다. 여기서 유출된 비디오테이프가 동남아 섹스숍에서 팔린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백화점을 이용해 온 여성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성단체와 소비자단체들의 거센 항의에 백화점은 공식사과했다. 어제의 몰카 범죄 뉴스가 아니다. 1997년 당시 신촌 그레이스 백화점에서 발생한 일이다. 여자 화장실 천장 구멍에 설치된 3㎜ 크기의 특수렌즈를 통해 백화점 방재실 직원들이 화장실 안을 지켜봤다. 불법 촬영의 수법, 대상, 장소 등이 요즘 범죄와 판박이다. ●각자 피켓 들고 참여… 美 급진주의와 닮아 2018년 한국 여성들이 겪는 성폭력은 20여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반면 현실을 바꾸기 위해 거리로 나온 여성들의 모습은 다소 낯설다. 1997년 백화점 앞에서 성명을 발표한 건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기존 여성단체였다. 올여름 혜화역의 ‘불법 촬영 편파 수사 항의 시위’ 주인공은 불특정 다수의 여성이다. 지난 4일 광화문에서 열린 4차 시위에 참가한 40대 김모씨는 “집회에 시민 단체나 정당의 깃발이 없어 어색했다”고 했다. 20대 초반 여성은 “여성 집회에 운동권 깃발이 왜 필요하냐”고 반문했다. 각자 만든 피켓과 붉은 드레스코드만이 동질성의 징표였다. 생물학적 여성만 참가할 수 있고 익숙한 구호 대신 온라인의 미러링(여성 혐오를 거울처럼 뒤집어 남성 혐오로 돌려주는 방식) 단어가 터져나왔다.20년간 못 봤던 여성들의 등장에 한국 사회는 놀라고 있다.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고정된 조직도 없이 여성집회를 끌어 온 이들. 일각에서는 이들을 급진적 여성주의자(Radical Feminist)라 부른다. 1960년대 미국 급진주의와 닮았다는 이유에서다. 미국에서 시작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프랑스의 68혁명을 계기로 탄생했다. 미국, 유럽, 남미까지 전쟁, 관료주의,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구호가 거리를 뒤덮은 시기, 여성들도 여성 억압 문제를 제기하면서 가부장제에 대항했다. 19세기 제1세대 페미니즘이 참정권 획득과 같은 정치 제도 개선에 노력했다면 제2세대 페미니즘인 이들은 보다 일상적인 문제에 집중했다. 낙태 결정권, 포르노 반대 등을 이슈화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공론장으로 끌어냈다. 1968년에는 미스아메리카 반대 시위도 일어났다. 브래지어처럼 여성의 몸을 옥죄는 것들을 쓰레기통에 던지며 성 상품화를 비판했다. 지난 6월 한국 페이스북 사옥 앞 상의 탈의시위, 탈코르셋 유행, 1999년 시작된 한국에서의 안티미스코리아대회와 겹쳐지는 장면이다. 1세대에서 2세대로의 변화는 페미니즘 역사를 관통하는 주제인 차이와 평등을 함축한다. 페미니즘 역사는 이 두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진화해 왔다. 1세대는 남성과 동일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여성과 남성은 똑같은 이성적 인간”이라며 평등의 언어를 내세웠다. 그러나 투표권만으로는 여성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았다. 여성의 경험을 드러내는 언어가 필요했다. 몸의 경험, 개인의 일로 치부됐던 성폭력, 가정폭력이 구조적 문제임을 강조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 “자매애는 강하다”는 유명한 구호도 등장했다.●1987년 21개 단체 모여 ‘여성단체연합’ 결성 서구의 반권위주의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1960년대 한국은 권위주의 시대였다. 탄압받던 여성 운동은 1970년대 여성노동자 운동과 뒤이은 민주화 운동 속에 새 국면을 맞았다. 경제성장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라는 정체성이 드러났고, 동일방직, YH무역 등 젊은 여성 노동자가 밀집된 제조업에서 노조 설립 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당시 운동은 성차별 철폐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지만 여성 노동자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여성운동은 1980년대 전면에 등장했다. 1970년대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경험한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한 시기다. 이들은 ‘여성은 정치에 무지하다’는 편견을 깼다. 1983년 6월 여성평우회 창립을 계기로 여성의 전화, 또 하나의 문화, 교회여성운동단체 등이 여성 의제를 이끌었다. 결혼 퇴직, 임금 차별 등 노동현장의 성차별, 성폭력, 성매매 철폐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25세 여성조기정년철폐운동, 부천서 성고문대책위 등을 함께한 21개 여성단체는 1987년 한국여성단체연합을 결성했다. 민주정부가 들어선 뒤 1994년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됐고 1999년엔 군 가산점 위헌 결정을 이끌어냈다. 2005년에는 호주제가 폐지됐다. 가족법 개정을 추진한 지 약 50년 만이었다. ●LGBT 등 소수자 주체… 영 페미니스트 나와 이전 30년간 여성계가 굵직한 제도 성과를 거뒀다면 민주화 이후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는 그동안 가려져 있던 페미니즘의 주제들이 빛을 봤다. 성소수자(LGBT), 여성장애인, 이주여성 등 소수자 주체들이 드러났다. 2000년대 중반까지 문화운동에 두각을 나타낸 젊은 페미니스트인 ‘영(young) 페미니스트’ 도 등장했다. 이들은 몸, 섹슈얼리티, 환경 등 새로운 문제를 꺼내고 월경페스티벌 등 축제를 통해 일상 속 주제를 풀어냈다. 2015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 10년간 페미니즘은 대중과 다소 멀어져 있었다. 이 단절을 끝낸 여성들은 20대 ‘영영(young young) 페미니스트’ 들이다.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고 학교와 사회에서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일베 등 여성 혐오를 학습한 남성들과 공존한 세대다. 2014년 세월호 참사로 안전 문제에 눈을 떴다. 이전 세대보다 미러링에 익숙하고 안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최근 자유·급진·상호교차 등 그룹 다양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일각에선 이들을 4세대 페미니스트라고 부른다”면서 “SNS를 기반으로 한 활동, 몰카나 여성 대상 범죄 등 안전 이슈에 적극 나선다는 차별점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페미니즘은 단일한 것으로 규정할 수도 없고, 우리나라 페미니즘도 여러 세대가 섞여 있다”고 분석한다. 최근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급진주의, 상호교차 페미니즘 등 여러 정신이 공존하며 다양한 그룹이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여성들의 이합집산도 유동적이다. 워마드의 성체 훼손 논란이나 난민 혐오에 대해 기존 여성계는 반대 의사를 보이며 선을 그었지만 ‘몰카 편파 수사’,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행 무죄 판결 비판에는 같은 목소리를 낸다. 영영 페미니스트도 단일한 집단으로 재단하기 어렵다. 지난 18일 여성단체가 주최한 시위에 20대 여성들이 다수 참여하기도 했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영미권에서만 보던 다양한 페미니스트 논쟁이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이것이 페미니즘을 더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끌어올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올여름을 달군 페미니즘의 열기는 당분간 식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년 전의 몰카 범죄가 반복되듯 성차별은 한순간에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여성들을 또 광장으로 소환할 것이기 때문이다. 낙태죄 폐지, 불법 촬영 수사 등 현안도 뜨겁다.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주체가 등장할지 광장으로 시선이 쏠린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알쏭달쏭+] 남녀가 ‘첫눈에 반했다’라는 말은 사실일까?

    [알쏭달쏭+] 남녀가 ‘첫눈에 반했다’라는 말은 사실일까?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사람은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아름다움(美)을 인지할 수 있는 데 이는 단것을 먹었을 때와 비슷한 쾌감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미국 심리학자들이 주장하고 나섰다. 미국 뉴욕대 심리학 연구팀은 고대 철학자들과 현대 심리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움에 관한 다양한 글과 연구논문을 분석한 결과, 인간이 무언가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강한 쾌락의 감정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주저자 아엔 브리엘먼 박사과정 연구원이 박사 취득을 위한 대규모 연구의 일부분이다. 브리엘먼 연구원은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돼 왔지만, 우리 연구에서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는 1초로도 충분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연구에 참여한 데니스 펠리 심리학과 교수는 “아름다움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며 과학적으로도 매우 다루기 힘든 것으로 여겨지지만, 주된 특성 중 일부는 간단한 규칙을 따른다”면서 “이 분야의 연구를 분석한 결과 아름다움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덜 특별한 것일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신경경제학자들이 사람들의 쇼핑 습관을 이해하기 위해 재정적 결정과 뇌 발달 사이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방법과 같은 방식을 도입해 이같은 가정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에서 연구팀은 아름다움이 정말로 정의하기 힘들고 수량화할 수 없는 경험인지 아니면 측정할 수 있는 인자에 근거해 빠르게 측정할 수 있는지를 살폈다. 연구팀은 조사를 위해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18세기 독일 철학자 바움가르텐, 19세기 아일랜드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 그리고 실험 심리학의 선구자 구스타프 페히너 등 약 2500년 동안 아름다움에 관련한 글과 연구를 분석했다. 이번 연구는 심리학에서 점차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는 경험적 미학 분야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사람들이 아름다움과 예술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측정하기 위해 구체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다. 앞서 연구팀은 아름다움은 관심을 요구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었다. 사람이나 사물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려면 대상에 완벽히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에서 아름다운 무언가를 보며 다른 일을 했던 참가자들은 같은 것을 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참가자들보다 그 무언가의 아름다움에 덜 감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세한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Current Biology) 최신호(20일자)에 실렸다. 사진=antonioguillem / 123RF 스톡 콘텐츠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죽창을 든 조선의 노비, 폭압에 맞선 분투의 기록

    죽창을 든 조선의 노비, 폭압에 맞선 분투의 기록

    조선에 반하다/조윤민 지음/글항아리/400쪽/1만 7000원숙종 26년인 1700년 겨울, 얼마 전 천민 신분을 벗어난 이명과 이가음이(李加音伊) 형제는 경북 상주 읍내의 한 기와집에 잠입했다. 이날만 기다리며 13년간 절치부심하던 형제는 사랑채에 머물고 있던 한 양반을 살해했다. 그는 세상을 떠난 노비 출신 아버지의 옛 상전이었다. 철종 11년인 1860년에는 경희궁과 인근 관청에서 보수 작업을 하던 목수들이 포도청에 난입해 닥치는 대로 시설을 때려 부수고 관원과 하졸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했다. 그 다음해인 1861년에는 30대 중반의 조만준이라는 남자가 왕실 사당에 행차하는 임금의 가마에 주먹만 한 돌멩이를 느닷없이 던져 가마 꼭대기의 황금 봉황 장식을 부러뜨렸다.신분 차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 밖으로 뛰쳐나온 하층민들이 감행한 이 같은 행위를 보면 절로 떠오르는 속담이 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괜히 꿈틀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힘없고 보잘것없는 미물이라도 극심한 횡포 앞에서는 절로 분노하게 되는 법이다. 신간 ‘조선에 반하다’는 조선시대 주류 흐름과 지배 세력에서 벗어나 있었던 ‘외부자’ ‘이탈자’ ‘탈락자’들이 싸우고 분투한 기록이다. 책은 도대체 왜 이들이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반역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속사정을 들여다본다. 저자에 따르면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은 순응하던 백성을 시위와 난동의 주역인 난민(亂民)으로 만들었다”. 미천한 신분인 아버지를 채찍으로 매질해 죽인 양반 상전에 복수하기 위해서, 관청에 차출돼 일하면서 품삯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는데 푼돈마저 포졸에게 탈취당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관료의 부정부패가 횡행해 백성이 도탄에 빠져 있지만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군주에게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 백성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생존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난동을 주도한 백성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 “권세를 앞세운 폭압을 중단하고 행정과 법을 빙자한 수탈을 멈춰 달라는 것”이었다.파편처럼 곳곳에서 일어났던 개인들의 저항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배층에 전면적으로 맞서는 집단적인 움직임으로 거듭난다. 17세기 미륵과 생불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사람들이 승려와 무당의 통솔 아래 정치변란을 일으키고, 조선 왕조의 몰락을 희구하며 ‘정감록’ 같은 예언서에 기댄 반란을 모의하기도 했다. 19세기에는 진주민란, 홍경래의 난 등 탐관오리들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농민들을 규합한 대규모 항쟁 바람이 전국 곳곳에서 불었다. 반란을 주동했던 사람 중 홍경래(1771~1812)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평안도 지역의 세도 정치를 비판하면서 농민 반란을 일으킨 그의 봉기 의지는 반란의 후예들에게 두고두고 이어졌다. 오죽하면 그가 죽고 난 후인 1817년 전북 장수에 ‘홍경래 생존설’이 퍼졌고, 그로부터 9년 뒤인 1826년 청주에 걸린 괘서에도 홍경래가 거병을 도울 것이라는 내용이 등장했다. ‘홍경래 불사설’이 끈질기게 이어진 것은 그만큼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길 바라는 백성들의 마음이 간절했다는 방증일 터다. 저자는 “명징과 미혹이 교차하고 진전과 좌절이 함께하는 역사의 난장판에서 제대로 발언할 기회를 갖지 못한 이들에게 외칠 자리 하나를 마련하려 한다. 압제의 대상에서 저항의 주체로 거듭난 이들의 몸짓을 헤아리면서 조선 지배층이 구축한 억압과 착취의 사회구조 한 자락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때로 격렬하고 폭력적이었던 시위들이 단순히 지배 세력에 대한 저항의 발로였다고 정당화될 수는 없다. 다만 “반항은 한순간 한순간마다 세계를 재고할 대상으로 문제 삼는다”는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분노와 투쟁의 기록을 살피는 일은 자못 중요하다. 부당함에 순응하지 않았던 인간의 의지를 확인하는 동시에 지금 이 시대의 이면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기고] ‘데이터 금광’ 케이블TV/신성철 CJ헬로 데이터사이언스 팀장

    [기고] ‘데이터 금광’ 케이블TV/신성철 CJ헬로 데이터사이언스 팀장

    1995년 케이블TV 방송이 막을 올리며 시청자는 입맛에 따라 TV 프로그램을 골라 볼 수 있게 됐다. 2002년 위성TV, 2008년 IPTV가 시작되면서 유료 방송업계는 더욱 풍부한 콘텐츠와 기술로 경쟁해 왔다. 현재 우리나라 유료 방송은 가입자 3100만명, 매출 5조 6000억원의 거대 시장으로 성장했다. 이제 유료 방송업계는 ‘4차 산업혁명의 놀이터’로 불리며 인공지능(AI), 빅데이터, 클라우드 등 신기술의 각축전이 펼쳐지는 장이 됐다.한편으로 유료 방송업계는 가입자 포화 상태로 맞은 성장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주문형비디오 서비스(VOD)를 통한 매출 증대, 신수종 사업 발굴·확대를 꾀하고 있다. 특히 데이터 알고리즘 및 분석 기술은 필수적이다. 가입자의 방송 시청·이용 행태를 파악할 수 있는 디지털방송 셋톱박스의 접속기록을 ‘핵심 데이터’로 하고 이를 실시간으로 수집할 수 있는 ‘하둡’(Hadoop·데이터적재 공간) 등이 바탕이 된다. 이 공간에서 매일 4억 2000만 건의 데이터가 처리된다. 이런 기술은 가입자 기반 유료 방송 사업의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케 하고 4차 산업혁명과 케이블TV 산업의 유기적 연결을 도와주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 이용자 시청 패턴이 기록된 빅데이터는 사물인터넷(IoT) 기반의 유료 방송이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하고 인접 사업으로 확대되는 데 꼭 필요하다. 고객의 취향이 담긴 시청 데이터는 개인별 취향을 사전에 파악한 맞춤형 컨설팅을 도와준다. 또 기존 시청률 조사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도 긴요하게 쓰인다. 그러나 한 가지 걸림돌은 개인정보 보호와 관련된 규제다. 우리나라는 개인정보에 대한 개념이 지나치게 광범위한데 임의적이어서, 데이터를 활용한 신사업 진입에 장벽이 되고 있다. 하지만 카드, 통신, 물류, 콘텐츠, 커머스 사업 과정에 담긴 각종 데이터와 방송 시청 데이터 간의 이종 결합이 가능해질 때 생겨나는 산업적 시너지는 엄청날 것이다. 19세기만 해도 석유는 그저 ‘검은 물’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나 존재했지만 어떻게 활용할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매일 수억 건의 시청 데이터가 오가는 케이블TV 역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새로운 자원이다. 이를 활용하고 진화시킬 제도와 관련 법규가 절실히 필요하다.
  • ‘첫눈에 반했다’는 사실…1초 내 아름다움(美) 인지 가능(연구)

    ‘첫눈에 반했다’는 사실…1초 내 아름다움(美) 인지 가능(연구)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사람은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아름다움(美)을 인지할 수 있는 데 이는 단것을 먹었을 때와 비슷한 쾌감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미국 심리학자들이 주장하고 나섰다. 미국 뉴욕대 심리학 연구팀은 고대 철학자들과 현대 심리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움에 관한 다양한 글과 연구논문을 분석한 결과, 인간이 무언가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강한 쾌락의 감정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주저자 아엔 브리엘먼 박사과정 연구원이 박사 취득을 위한 대규모 연구의 일부분이다. 브리엘먼 연구원은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돼 왔지만, 우리 연구에서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는 1초로도 충분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연구에 참여한 데니스 펠리 심리학과 교수는 “아름다움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며 과학적으로도 매우 다루기 힘든 것으로 여겨지지만, 주된 특성 중 일부는 간단한 규칙을 따른다”면서 “이 분야의 연구를 분석한 결과 아름다움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덜 특별한 것일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신경경제학자들이 사람들의 쇼핑 습관을 이해하기 위해 재정적 결정과 뇌 발달 사이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방법과 같은 방식을 도입해 이같은 가정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에서 연구팀은 아름다움이 정말로 정의하기 힘들고 수량화할 수 없는 경험인지 아니면 측정할 수 있는 인자에 근거해 빠르게 측정할 수 있는지를 살폈다. 연구팀은 조사를 위해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18세기 독일 철학자 바움가르텐, 19세기 아일랜드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 그리고 실험 심리학의 선구자 구스타프 페히너 등 약 2500년 동안 아름다움에 관련한 글과 연구를 분석했다. 이번 연구는 심리학에서 점차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는 경험적 미학 분야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사람들이 아름다움과 예술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측정하기 위해 구체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다. 앞서 연구팀은 아름다움은 관심을 요구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었다. 사람이나 사물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려면 대상에 완벽히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에서 아름다운 무언가를 보며 다른 일을 했던 참가자들은 같은 것을 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참가자들보다 그 무언가의 아름다움에 덜 감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세한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Current Biology) 최신호(20일자)에 실렸다. 사진=antonioguillem / 123RF 스톡 콘텐츠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씨줄날줄] AI 교사와 무인 편의점/박현갑 논설위원

    [씨줄날줄] AI 교사와 무인 편의점/박현갑 논설위원

    19세기 초 산업혁명으로 영국에 방적기 등 직물기계가 보급되면서 가내 수공업 종사자들이 실업자가 되거나 공장 노동자로 전락한다. 이들은 가난의 원흉이 기계 때문이라며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 운동’을 일으킨다. 기술혁신과 경제발전의 명암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다.21세기 4차 산업혁명 시대, 이 같은 ‘노동의 종속’은 가속화되고 있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등 신기술이 전통 산업 체계를 뒤흔들며 육체노동 현장은 물론 인간의 사고 영역까지 파고들고 있다. 일본에서는 내년부터 AI 로봇이 초등학생 영어 말하기 교사로 등장한다. 일본 NHK에 따르면 문부과학성은 학생들의 영어 말하기 능력 향상을 위해 이같이 결정했다. 인공지능을 가미한 로봇이 가치판단과 상호교감이 필요한 교육 영역에까지 침투하는 셈이다. 로봇이니 수업 시간 내내 떠들어도 지치지 않을 게다. 하지만 수업 당시 마음가짐에 따라 제각각일 개별 학생과의 ‘수업을 통한 사회화’라는 교육 가치도 이뤄 낼지 지켜볼 일이다. 한국세븐일레븐은 본사 등 4곳에서 시범 운영 중인 ‘세븐일레븐 익스프레스’라는 무인 편의점을 오는 9월부터 상용화한다. 소비자가 자판기에서 음료·스낵·푸드·가공식품·비식품 등 200여개 상품 가운데 원하는 상품을 골라 신용카드나 교통카드로 결제하고 사는 방식이다. 도시락, 라면 등 30여종의 푸드 상품은 자판기 안의 실물을 확인하고 상품별 번호(두 자릿수)를 입력한 뒤 결제하면 된다. 나머지 상품은 키오스크 화면에서 제품을 골라 구매할 수 있다. 기존 편의점주에 한해 개설한다는데, 24시간 운영 가능한 무인 편의점이 가맹점 매출 증대로 이어질지 궁금하다. 상품 판매나 교육현장에 투입된 기계는 인간처럼 불평할 줄 모른다. 노사 갈등은 사라지는 셈이다. 하지만 인간소외와 고용절벽에 따른 사회병리 현상은 심화된다. 지난해부터 미국에서 실험 중인 ‘기본 소득제’(Universal basic income)는 이런 점에서 양날의 칼이다.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은 시간문제인 만큼 정부가 소득 규모에 관계없이 국민에게 일정한 생활비를 지급하자는 개념이다. 에어비앤비, 드롭박스를 만든 실리콘밸리의 창업지원 기업에서 이를 실험 중이다. 21세기형 러다이트 운동을 사전에 막겠다는 극대화된 물질만능주의가 속내일 수도 있고, 기술 혁신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경고로도 해석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기술 혁신 속에서 인간이 인간다움을 어떻게 구현해 낼지 흥미롭다.
  • 높이·거리·속도 모두 신기록…캐나다에 ‘괴물 롤러코스터’ 생긴다

    높이·거리·속도 모두 신기록…캐나다에 ‘괴물 롤러코스터’ 생긴다

    무려 75m 상공에서 수직 낙하하는 등 세계 최고의 롤러코스터가 캐나다의 한 테마파크에 생긴다. 미국 CNN 등 외신은 16일(현지시간) 캐나다 토론토 인근에 있는 테마파크 ‘캐나다 원더랜드’가 내년 4월 오픈 예정인 롤러코스터 계획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유콘 스트라이커’로 이름 붙여진 이 롤러코스터는 19세기 후반 골드러시를 테마로 설계됐다. 약 75m 높이에서 단번에 떨어지고 연못 밑을 지나는 터널로 뛰어드는 등 다양한 코스를 자랑한다. 캐나다 원더랜드 측은 유콘 스트라이커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코스가 길고 가장 속도가 빠르며 가장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다이빙 롤러코스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롤러코스터 설계를 맡은 스위스 유명 업체 볼리거 앤드 마빌라드에 따르면, 다이빙 롤러코스터는 코스 중 ‘탑승자가 바로 밑을 향한 상태에서 수직으로 하강하는 구간이 존재하는 롤러코스터 유형을 가리킨다. 유콘 스트라이커의 최고 속도는 시속 130㎞, 코스 길이는 1105m로 축구장 12개분의 길이와 비슷하다. 코스 한 바퀴에 필요한 시간은 3분 25초. 이 동안 좌석이 거꾸로 되거나 회전하는 움직임이 4회 있다. 좌석은 바닥이 없는 타입으로 급강하와 공중회전 직전 3초의 시간을 둬 공포심을 부추기는 연출을 넣을 계획이다. 한편 캐나다 원더랜드는 유콘 스트라이커가 추가되면 총 17종의 롤러코스터를 보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캐나다 원더랜드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서대문, 시민대학 오픈

    서울 서대문구는 사회 변화와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시민역량을 높이고 평생교육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학습하는 시민들’이란 제목으로 시민대학을 연다. ‘내가 ??시대 사람이라면’(9월12일∼10월24일), ‘2018 서울’(9월18일∼10월23일), ‘스웨덴 학교’(10월12일∼11월16일),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11월15일∼12월13일) 등 4개 과정이 운영된다. 과정마다 주 1회씩 4~6주에 걸쳐 두 시간씩 강의가 이뤄진다. 무료이다. 모집인원은 과정당 60명씩 모두 240명이며 강의일 전일까지 선착순으로 모집한다. 개별 강의 신청도 가능하다. ‘내가 ??시대 사람이라면’ 과정은 ‘삶에 대한 질문. 그 답을 찾다’, ‘프랑스혁명과 시민사회’, ‘소통과 포용, 조선의 리더십을 배우다’,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다’, ‘명화에 담긴 19세기’ 등의 내용을 다룬다. ‘2018 서울’은 ‘4차 산업혁명과 서울의 변화’, ‘서울 스토리’, ‘대한민국은 세대전쟁 중?’, ‘분노의 사회’ 등에 관해 배운다. (02)330-8273.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은 “시민대학이 사회변화를 전망하면서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한 가능성을 찾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미식가의 성지 이탈리아…현지인 휴양지 ‘마르케’에서 먹고 놀기

    미식가의 성지 이탈리아…현지인 휴양지 ‘마르케’에서 먹고 놀기

    伊 중북부 동쪽 아드리아해 위치 현지인들 휴식 위해 찾는 휴양지 예술·사색 좋지만 먹고 놀기가 기본 단순한 재료·조리법에도 놀라운 맛 입안이 즐거운 천국…행복이 녹아내렸다여행작가를 직업으로 삼고 있지만 사실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소설가들이 대부분 소설 쓰기를 좋아하지 않고 요리사들이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과 같다. 회사원도 회사에 가길 싫어하질 않나? 솔직히 말하자면 일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측면이 없지는 않다. 여행작가지만 ‘깨달음을 얻는 곳은 푸른 하늘 아래지만 좋은 일은 집에서 생긴다’를 모토로 삼고 있다. 누가 등 떠밀면 마지못해 나서는 척하는 인간이 나란 인간이다. 하지만 그곳이 이탈리아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가는 곳이 어딘지, 숙소가 어떤지 묻고 따지지 않는다. 일단 간다. 누군가 내게 “마르케에 좀 다녀와 주세요” 하고 요청했을 때 “거기가 어디죠?” 하고 시큰둥하게 물었다가 “이탈리아예요”라는 답을 듣고는 군말 없이 짐을 꾸렸다.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는 들어봤어도 마르케 하면 고개를 갸웃하시는 분들이 많으리라. 이탈리아 중북부 동해안, 그러니까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크로아티아와 마주한 마르케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는 곳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제주도쯤 된다. 주도는 안코나(Ancona)다. 페사로(Pesaro), 우르비노(Urbino), 페르모(Fermo), 아스콜리 피체노(Ascoli Piceno), 예시(Jesi), 세니갈리아(Senigallia) 등이 마르케의 주요 도시다. 이탈리아 여행이 즐거운 이유 중 하나는 맛있는 음식 때문이 아닐까. 예술도 좋고 ‘인생의 의미’ ‘자아 찾기’도 좋지만, 올바른 여행이 되기 위해선 우선 맛있는 음식이 있어야 한다. 여행의 기본은 먹고 노는 것이니까. 여행이 뭔가 의미 있는 행동이었던 건 항해시대였던 19세기까지였다.마르케에 도착해 처음 먹은 음식은 탈리아텔레①였는데, 이 음식은 한입 뜨자마자 역시 이탈리아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탈리아텔레는 우리나라 칼국수처럼 납작한 면으로 만든 파스타의 한 종류다. 셰프가 탈리아텔레를 만드는 과정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여간 정성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우선 밀가루에 달걀 노른자를 넣는다. 100g당 달걀 하나. 그 후에는 그냥 열심히 반죽을 치대는 일이 전부다. 마르코라는 건장한 셰프는 굵은 팔뚝으로 아주 오랫동안 반죽을 치댔다. 한참이 지나 마르코는 반죽이 마음에 드는지 야구방망이만 한 밀대를 밀며 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면을 뽑은 다음에는 새우와 조개 등으로 만든 육수를 붓고 볶으면 완성. 쫄깃한 면발이 해산물 육수, 올리브 오일 등과 어우러져 풍미가 보통이 아니다.우르비노에서 맛본 염소치즈를 올린 파스타②는 지금까지 맛본 모든 파스타를 무효로 만들 정도로 맛있었다. 13시간 동안 저온 조리한 송아지 스테이크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입에 들어가자마자 눈처럼 녹아내렸고 야생 사과로 만든 잼을 바른 치즈③와 나무화덕에서 막 구워낸 빵은 이탈리아 여행 내내 도시락으로 배달시켜 먹고 싶을 정도였다.아스콜라나 올리브④라는 음식도 있다. 올리브의 씨를 빼고 그 안에 소고기나 돼지고기, 닭가슴살, 채소, 토마토, 육두구 등을 버무린 소를 채운 뒤 얇은 튀김옷을 입혀 튀긴 것이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병사들이 즐겨 먹은 음식인데, 짭조름한 맛과 고소한 기름맛이 어울려 중독성을 불러일으킨다. 예시에서 맛본 베르디키오 와인도 기억에 남는다. “베르디키오는 고대 로마시대부터 재배했다는 청포도 품종이죠.” 검은 테 안경을 쓴 안드레아가 시음용 와인을 졸졸졸 따랐다. 와인잔에 코끝을 대니 상쾌하면서도 분명한 신맛을 가진 향이 파고들어 미간을 살짝 찡그리게 만들었다. “베르디키오는 숙성력이 탁월합니다. 빈티지가 좋기만 하면 10년은 너끈하게 묵힐 수 있죠. 잘 숙성된 베르디키오에서는 농익은 사과향이 난답니다.” 시음해 본 베르디키오는 아주 상큼하고 향기로웠다. 금방 빚어 내놓은 것 같았는데, 아몬드 향이 나는 것도 같았고 여름의 쌉싸름한 풀향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글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거장이 숨쉬는 도시…문화가 녹아 있었다●라파엘로의 흔적이 남아 있는 ‘우르비노’ 마르케의 주도는 안코나이지만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도시는 우르비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화가 라파엘로가 1483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우르비노 시내에는 14세기에 지어진 라파엘로 생가(Casa di Raffaello)가 남아 있는데, 중정을 품은 3층짜리 저택에는 생전에 그가 사용하던 가구들이 그대로 놓여 있고, 화구를 놓곤 했던 자리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우르비노는 르네상스 시대의 전성기를 이룩한 도시이기도 하다. 유네스코는 1998년 우르비노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는데 아마도 중세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우르비노의 전성기를 이룩한 주인공은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Federico da Montefeltro)다. 이탈리아 최고의 용병으로 활약하던 그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그 돈으로 르네상스 초기에 지어진 궁전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는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을 지었다. 이곳에선 라파엘로를 비롯해 ‘회화의 군주’로 불리는 티치아노의 작품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걸작 ‘세니갈리아의 성모’ 등 눈부신 ‘르네상스 컬렉션’을 만날 수 있다.●작곡가 로시니에 헌정된 도시 ‘페사로’ 우르비노에서 자동차로 1시간 떨어진, 인구가 10만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도시 페사로는 ‘세비야의 이발사’를 작곡한 로시니가 태어난 곳이다. 1792년 페사로에서 태어난 그는 6살에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했고 14살에 오페라를 만들었다. 그가 첼로와 피아노, 작곡을 체계적으로 배운 곳은 볼로냐 음악학교였는데 지루한 수업을 견디지 못해 학교를 그만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바그너를 기념하는 독일의 바이로이트, 모차르트를 기념하는 잘츠부르크와 함께 한 음악가에게 증정된 축제가 있는 도시가 바로 페사로입니다. 그만큼 로시니에 대한 페사로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하죠.”1819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극장인 로시니 극장(Teatro Rossini)의 음악 감독인 안토니오는 매년 8월 열리는 로시니 오페라 페스티벌 기간에 전 세계 오페라 마니아들이 이곳 페사로로 몰려든다고 자랑했다. 시내 한켠에는 1882년 로시니의 유산으로 세운 로시니 음악학교(Conservatorio di Musica)도 있다. 학교를 기웃거리다 어느 피아노실을 엿보게 됐는데, 호기심 어린 낯선 여행자를 발견한 학생은 ‘세비야의 이발사’의 한 대목을 신나게 연주해 주기도 했다. 마르케 여행의 마지막은 아스콜리 피체노라는 도시였다. 로마보다 오래된 도시다. 아링고(Arringo) 광장 앞의 산 에미디오(San Emidio) 대성당에서 르네상스 화가 카를로 클리벨리의 그림을 보고 나와 노천 카페에 앉아 젤라토를 먹었다. 마르케의 환한 햇살 아래 앉아 달콤한 젤라토를 먹고 있자니 여행이란 어쩔 수 없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란 거창한 명분이나 위대한 성취만을 추구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역시 이탈리아 여행은 우리가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도와준다. 글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 여행가방 알리탈리아항공의 직항편을 이용해 로마까지 간 다음, 안코나행 국내선으로 갈아탄다. 로마~안코나 구간의 비행시간은 약 1시간 10분. 안코나 공항에서 약 25분 거리의 산 피에트로(San Pietro)에 호텔 몬테코네로(hotelmonteconero.it)가 자리한다. 12세기 수도원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호텔로 재단장한 것으로, 고풍스러운 외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해발 550m의 산자락에 자리한 까닭에 조용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가 장점이다. 아드리아 해의 멋진 풍광도 감상할 수 있다. 페르모(Fermo)에는 로마시대의 지하 물탱크(Le Cisterne Romane)가 있다. 모두 15개의 홀로 이루어져 있는데 무려 2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수질 유지를 위해 기온이 1년 내내 14℃로 유지된다고 한다. 도시 아래 강에서 끌어올린 물을 정화하는 데 최적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 [홍석경의 문화읽기] 상하이에서 읽는 동아시아

    [홍석경의 문화읽기] 상하이에서 읽는 동아시아

    사람마다 꿈꾸는 도시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 그 도시는 상하이였다. 오랫동안 프랑스에 살았기에 올 8월에야 처음 방문하게 된 상하이. 물론 국제학회에서의 발표를 위해 왔지만, 도시 전체가 텍스트인 이곳, 하루 정도 ‘발로 하는 독서’의 매력을 물리칠 수 없다. 아편전쟁의 결과로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에 조계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이곳은 오랫동안 서구와 동아시아 간 순간이동 터널 역할을 했다. 상하이를 통로로 서구가 동아시아로 쏟아져 들어왔고, 동아시아인은 상하이에서 멀고 먼 프랑스와 영국 등 서구의 일부를 만났다.서구에도 상하이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는 신비한 곳이었다. 오손 웰스의 1947년 영화 ‘상하이에서 온 여인’의 주인공 리타 헤이워스는 상하이에서 보낸 몇 년의 과거와 중국어를 한다는 사실에 힘입어 영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팜파탈의 반열에 오른다. 그녀는 유명한 거울 신 속에서 죽는데, 이 장면이 중국을 다시 글로벌한 동서 간 문화교류 속으로 끌어들인 이소룡에 의해 ‘용쟁호투’(1973)에서 패러디됐던 것도 우연이 아니리라. 대한민국에게 상하이는 문자 그대로 동아시아에 열린 서구의 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젊은 장군 드골이 대서양을 건너가 런던에 임시정부를 세울 것을 생각하기 무려 20년 전 근대국가를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하고 식민지가 됐던 조선의 엘리트들은 3·1운동으로 깨어나 이곳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웅지를 틀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당시 조선의 어두운 미래와 조선인의 힘든 삶을 실감할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청나라에 이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대륙 침탈을 준비하는 일본의 기세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내걸어 민족의 정당하고 자주적인 미래를 도모한다는 결의와 실행은 얼마나 큰 결심과 신념이 있어야 가능했을까. 레지스탕스를 부르는 드골의 런던 행보에 대한 프랑스의 역사적 대접을 보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그간의 한국 내 이견이 부끄러웠다. 당시 경성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암살’ 속에서 주인공들이 거사 전날 모여 샹송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에서 임시정부의 상하이 커넥션이 강하게 암시된다. 1930년대 상하이와 조선의 커넥션은 영화 속에서 임시정부를 넘어선다. 중국 영화사에서 가장 빛나는 별 진린은 한국인이었다.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중심이었던 당시 상하이의 위상을 고려할 때, ‘동양의 루돌프 발렌티노’라고 불렸다는 이 한국인 남자 배우의 의미는 되새겨볼 만하다. 한국 이름 김염, 그의 부친은 독립운동가 김필순이고 고모부가 무려 김규식이니, 아무리 험난한 세월 속 인척 간 교류와 교육의 영향이 크지 않았더라도 그의 존재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상하이, 중국을 잇는 노드(node)다. 동아시아의 초국적 인기인의 전형과도 같은 노래하는 배우 장국영과 그 뒤를 잇는 한류 스타들이 있기에 앞서서 1930년대 글로벌 상하이에 한국인 배우 김염이 있었던 것이다. 밤이 되니 팔월에 크리스마스같이 치장한 불야성의 상하이가 펼쳐진다. 강의 이쪽과 저쪽이 이처럼 극적으로 서로 다른 모습이라니. 하늘을 향해 다투어 치솟는 푸둥 고층 건물들의 화려한 파사드를 마주 보는 와이탄의 강변로에는 프랑스 니스 해변의 콜로니얼 건축을 닮은 건물들이 육중하게 늘어서 있다. 와이탄 지역은 명·청대의 상점과 정원을 배경으로, 70년대 재개발 서민촌을 닮은 거리를 감추고 있다. 어두운 골목 끝 고담시티를 연상시키는 상하이타워가 구름 속으로 치솟는다. 중국의 들끓는 자본주의적 욕망처럼.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는 훙구공원에 해가 뉘엿뉘엿하자 노인들이 배 두드리며 나와 바람을 쐰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 서구 문호들의 동상 군집에서 멀지 않은 곳엔 새로 세워진 중·일 청년들의 우의를 다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시내 도처에서 한국어가 들리지만 한국 사드가 지나간 중국 어느 곳에도 한류의 자취는 없고, 일본식 바와 음식점이 즐비하다. 거대한 쇼핑몰 벽에 붙은 한류 스타를 똑 닮은 중국 배우의 모습이 묘하게 과거와 현재의 상하이, 그리고 동아시아의 굴기 속 중국의 욕망을 느끼게 해 준다.
  • 2018년 상하이에서 감상해 본 1930년대 동아시아

    2018년 상하이에서 감상해 본 1930년대 동아시아

    사람마다 꿈꾸는 도시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 그 도시는 상하이였다. 오랫동안 프랑스에 살았기에 올 8월에야 처음 방문하게 된 상하이. 국제학회에서의 발표를 위해 왔지만, 도시 전체가 텍스트인 이곳, 하루 정도 ‘발로 하는 독서’의 매력을 물리칠 수 없다. 아편전쟁의 결과로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에 조계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이곳은 오랫동안 서구와 동아시아 간 순간이동 터널 역할을 했다. 상하이를 통로로 서구가 동아시아로 쏟아져 들어왔고, 동아시아인은 상하이에서 멀고 먼 프랑스와 영국 등 서구의 일부를 만났다.서구에도 상하이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는 신비한 곳이었다. 오손 웰스의 1947년 영화 ‘상하이에서 온 여인’의 주인공 리타 헤이워스는 상하이에서 보낸 몇 년의 과거와 중국어를 한다는 사실에 힘입어 영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팜파탈의 반열에 오른다. 그녀는 유명한 거울 신 속에서 죽는데, 이 장면이 중국을 다시 글로벌한 동서 간 문화교류 속으로 끌어들인 이소룡에 의해 ‘용쟁호투’(1973)에서 패러디됐던 것도 우연이 아니리라. 대한민국에게 상하이는 문자 그대로 동아시아에 열린 서구의 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젊은 장군 드골이 대서양을 건너가 런던에 임시정부를 세울 것을 생각하기 무려 20년 전 근대국가를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하고 식민지가 됐던 조선의 엘리트들은 3·1운동으로 깨어나 이곳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웅지를 틀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당시 조선의 어두운 미래와 조선인의 힘든 삶을 실감할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청나라에 이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대륙 침탈을 준비하는 일본의 기세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내걸어 민족의 정당하고 자주적인 미래를 도모한다는 결의와 실행은 얼마나 큰 결심과 신념이 있어야 가능했을까. 레지스탕스를 부르는 드골의 런던 행보에 대한 프랑스의 역사적 대접을 보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그간의 한국 내 이견이 부끄러웠다. 당시 경성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암살’ 속에서 주인공들이 거사 전날 모여 샹송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에서 임시정부의 상하이 커넥션이 강하게 암시된다.1930년대 상하이와 조선의 커넥션은 영화 속에서 임시정부를 넘어선다. 중국 영화사에서 가장 빛나는 별 진린은 한국인이었다.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중심이었던 당시 상하이의 위상을 고려할 때, ‘동양의 루돌프 발렌티노’라고 불렸다는 이 한국인 남자 배우의 의미는 되새겨볼 만하다. 한국 이름 김염, 그의 부친은 독립운동가 김필순이고 고모부가 무려 김규식이니, 아무리 험난한 세월 속 인척 간 교류와 교육의 영향이 크지 않았더라도 그의 존재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상하이, 중국을 잇는 노드(node)다. 동아시아의 초국적 인기인의 전형과도 같은 노래하는 배우 장국영과 그 뒤를 잇는 한류 스타들이 있기에 앞서서 1930년대 글로벌 상하이에 한국인 배우 김염이 있었던 것이다. 밤이 되니 팔월에 크리스마스같이 치장한 불야성의 상하이가 펼쳐진다. 강의 이쪽과 저쪽이 이처럼 극적으로 서로 다른 모습이라니. 하늘을 향해 다투어 치솟는 푸둥 고층 건물들의 화려한 파사드를 마주 보는 와이탄의 강변로에는 프랑스 니스 해변의 콜로니얼 건축을 닮은 건물들이 육중하게 늘어서 있다. 와이탄 지역은 명·청대의 상점과 정원을 배경으로, 70년대 재개발 서민촌을 닮은 거리를 감추고 있다. 어두운 골목 끝 고담시티를 연상시키는 상하이타워가 구름 속으로 치솟는다. 중국의 들끓는 자본주의적 욕망처럼.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는 훙구공원에 해가 뉘엿뉘엿하자 노인들이 배 두드리며 나와 바람을 쐰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 서구 문호들의 동상 군집에서 멀지 않은 곳엔 새로 세워진 중·일 청년들의 우의를 다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시내 도처에서 한국어가 들리지만 한국 사드가 지나간 중국 어느 곳에도 한류의 자취는 없고, 일본식 바와 음식점이 즐비하다. 거대한 쇼핑몰 벽에 붙은 한류 스타를 똑 닮은 중국 배우의 모습이 묘하게 과거와 현재의 상하이, 그리고 동아시아의 굴기 속 중국의 욕망을 느끼게 해 준다. 글·사진: 홍석경 서울대 언론학과 교수
  •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광복절에 한양도성의 성공과 실패를 생각한다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광복절에 한양도성의 성공과 실패를 생각한다

    “한양도성은 오늘도 변함없이 거대도시 서울을 품고 있다.” 이 구절은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서울 한양도성이 중요한 문화재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1000만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서울시와 서울시 주변의 ‘서울 세력권’을 포함하는 대서울 속에서 한양도성은 극히 좁은 구역만을 담고 있다. 이런 류의 주장은 한양도성 밖으로 거대하게 성장한 현대 서울과 대한민국을 조선시대의 눈으로 ‘퉁 치는’ 시대착오적인 판단이다.한양도성의 가치를 과도하게 강조하려는 일각의 움직임에 대한 위화감은 군사학적인 관점에서도 그렇다. 성을 쌓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방어다. 조선인들은 유사시에 한양도성이 군사적인 목적을 발휘하기를 기대했다. 한양도성은 번번히 방어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내가 5년 전에 교감 번역본을 출간한 바 있는 ‘징비록’에서 류성룡이 생생하게 묘사했듯이,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한양도성을 군사적인 방어선으로 이용하려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남은 한양 사람을 총동원해도 다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한양도성이 넓었던 탓이다. “성안의 백성과 공노비, 사노비, 서리, 내의원·전의감·혜민서 관리들을 뽑아 성벽을 나누어 지키게 했지만, 지켜야 할 성첩은 3만여개인데 성을 지킬 인구는 겨우 7000명이었을 뿐 아니라 모두 오합지졸이어서 성벽을 넘어 달아날 생각만 했다”. 한양도성이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규모가 크다”는 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다. 임진왜란 때에도 방어에 적합한 견고한 산성 대신 평지의 읍성을 지키려다가 일본군에 패한 사례가 적지 않다. 물론 한양도성은 한양이라는 행정구역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존재한 것은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에 보이는 “성곽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려는 것이다”라는 구절은, 한양도성의 목적이 행정구역 표시와 방어의 두 가지임을 선언한다. 그 기록에 의거해서 생각한다면, 한양도성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피지배자들에게 지배집단의 권능을 보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성이 방어를 위해 존재한다는 가장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한양도성은 임진왜란이라는 국제전쟁뿐 아니라, 이괄의 난뿐만 아니라 인조반정 때에도 뚫렸다. 마찬가지로 1868년의 메이지 유신이라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도쿠가와 정권을 지키지 못한 일본 도쿄의 에도성 역시 나는 높이 평가할 수 없다. 한양도성이나 에도성의 이러한 실패와 대조적으로,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이라는 국제전쟁에서 조선 지배층을 군사적으로 지켜냈다. 국내외의 여러 성곽과 비교해 보면 조선시대의 한양도성은 그 한계가 명확하다. 이러한 한양도성을 세계 10위권의 국가로 성장한 현대 한국의 수도인 서울의 상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조선왕조와는 질적으로 달라진 대한민국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19세기 조선왕조의 관점으로 한국과 세계를 바라보려는 것이다.
  • 광복절에 한양도성의 성공과 실패를 생각한다

    광복절에 한양도성의 성공과 실패를 생각한다

    “한양도성은 오늘도 변함없이 거대도시 서울을 품고 있다.” 서울 한양도성에 대한 어떤 책에 실려 있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서울 한양도성이 중요한 문화재인 것은 분명하지만, 오늘날 한양도성은 “변함없이 거대도시 서울을 품고 있”지 않다. 1천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서울시와 서울시 주변의 “서울세력권”을 포함하는 대서울 속에서 한양도성은 극히 좁은 구역만을 담고 있다. 이런 류의 주장은 한양도성 밖으로 거대하게 성장한 현대 서울과 대한민국을 조선시대의 눈으로 “퉁 치는” 시대착오적인 판단이다. 한양도성의 가치를 과도하게 강조하려는 일각의 움직임에 대한 나의 위화감은 군사학적인 관점에서도 비롯된다. 성을 쌓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방어다. 사람들은 유사시에 한양도성이 군사적인 목적을 발휘되기를 기대했으며, 그러한 기대에도 한양도성은 번번히 본래의 방어 기능을 달성하지 못했다. 내가 5년 전에 교감 번역본을 출간한 바 있는 “징비록”에서 류성룡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듯이,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한양도성을 군사적인 방어선으로 이용하려 한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남아 있는 한양 사람을 총동원해도 다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한양도성이 넓었기 때문이다. “성안의 백성들과 공노비, 사노비, 서리, 내의원·전의감·혜민서 관리들을 뽑아 성벽을 나누어 지키게 했지만, 지켜야 할 성첩은 3만 여 개인데 성을 지킬 인구는 겨우 7000명이었을 뿐 아니라 모두 오합지졸이어서 성벽을 넘어 달아날 생각만 했다.” 한양도성이 “현존하는 전세계의 도성 중 가장 규모가 크”다는 것은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에도 방어에 적합한 견고한 산성 대신 평지의 널찍한 읍성을 지키려다가 일본군에 패한 사례가 적지 않다. 물론 한양도성이 방어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한양이라는 행정구역을 나타내는 존재도 것은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에 보이는 “성곽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려는 것이다”라는 구절은, 한양도성의 목적이 행정구역 표시와 방어의 두 가지임을 선언한다. 이 말에 의거해서 생각한다면, 한양도성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피지배자들에게 지배집단의 권능을 보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성이 방어를 위해 존재한다는 가장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한양도성은 임진왜란이라는 국제전쟁 뿐 아니라, 이괄 및 능양군(인조)의 봉기 때에도 뚫렸다. 마찬가지로 성을 쌓느라 사람들을 고생시켰지만, 1868년의 메이지 유신이라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도쿠가와 정권을 지키지 못한 일본 도쿄의 에도성 역시 나는 높이 평가할 수 없다. 한양도성이나 에도성의 이러한 실패와는 대조적으로,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이라는 국제전쟁에서 조선 지배층을 군사적으로 지켜냈다. 이처럼 국내외의 여러 성곽과 비교할 때 조선시대의 한양도성은 그 한계가 명확하다. 이러한 한양도성을 세계 10위권의 국가로 성장한 현대 한국의 수도인 서울의 상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조선왕조와는 질적으로 달라진 대한민국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19세기 조선왕조 시대의 관점으로 한국과 세계를 바라보려는 시대착오적인 행동이다. 급변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이 바라는 방식으로 세상이 돌아가기를 바라는 시대착오적인 판단이 조선왕조를 망하게 했다. 8월 15일 광복절을 하루 앞둔 아침에 한양성곽을 바라보며 서울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한다. 글: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교수
  • [이은경의 유레카] 산업재, 소비재, 복지재…에어컨의 과학사

    [이은경의 유레카] 산업재, 소비재, 복지재…에어컨의 과학사

    냉장고와 에어컨은 더위와 열기에 맞서 개발된 대표적인 기술이다. 두 기계의 겉모습은 다르지만 열을 퍼내 낮은 온도를 유지시키는 펌프라는 기본 기능은 같다.어떻게 열을 퍼낼까. 18, 19세기 과학자들은 물질이 고체, 액체, 기체 상태로 바뀌는 상(相)변화 과정에서 열이 흡수되거나 방출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질이 고체에서 액체로, 액체에서 기체로 바뀔 때는 열이 흡수되고, 반대로 기체에서 액체로, 액체에서 고체로 바뀔 때는 열이 방출된다. 이 원리에 따라 상변화 과정을 통제하면 열펌프로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좁은 관을 지나는 냉매 물질의 압력을 조절해 상변화를 일으키는 방법이 개발된 것이다. 가장 먼저 제빙기와 냉장고가 만들어졌다. 고기와 생선을 여름에 보관하기 위해서는 얼음이 반드시 필요했다. 제빙기 등장 이후 식재료를 얼려서 유통하는 이른바 ‘냉동식품’도 나타났다. 초기의 제빙기와 냉장고는 대용량의 산업용, 상업용이었다. 현재 널리 쓰이고 있는 가정용 냉장고는 여러 초기 모델을 거쳐 1920년대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전기 냉장고가 시장 표준이 되었다.에어컨도 처음엔 산업용으로 개발됐다. 에어컨은 고온다습한 여름에 인쇄공장에서 종이가 눅눅해지고 잉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에서 1902년에 개발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맡았던 엔지니어였던 윌리스 캐리어는 1915년에 회사를 세우고 에어컨을 본격적으로 생산했다. 캐리어 에어컨은 온도와 습도를 동시에 조절해 실내 공기를 쾌적하게 만들었기에 대규모 상업시설에서도 환영받았다. 미국 남부의 부자들도 집에 에어컨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냉장고와 에어컨이 가정용 소비재로 본격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이후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에서 경제붐을 타고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가 열리면서 냉장고와 에어컨은 세탁기 등 다른 백색가전과 함께 중산층의 필수 소비재가 되었다. 물론 에어컨은 지역별 계절 특성에 따른 수요 차이가 있기는 했다. 한국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가정용 냉장고와 세탁기는 1970년대부터, 가정용 에어컨은 1990년대부터 대중화되었다. 에어컨의 대중화가 늦었던 것은 서구에서 에어컨이 냉난방 기능을 동시에 하는 것과 달리 온돌난방을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냉방기로만 사용돼 용도가 제한적이었고 전력 소모도 컸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2018년 여름, 역대 최악의 더위를 겪으면서 우리의 생각은 급격하게 바뀌었다. 에어컨이 더이상 여러 소비재 중 하나가 아니라 생존 차원의 필수재라는 인식이 생긴 것이다. ‘냉방복지’라는 새 단어는 이런 인식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런 인식의 변화에 맞게 기술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에어컨이 필수재라면 에어컨의 기술 스펙은 더 다양해져야 한다. 사람들이 형편에 맞춰 선택할 수 있도록 에어컨의 에너지 효율이 높아져야 하고 크기와 용량이 다양해져야 하는 한편 다른 첨단 기능은 빼고 냉방에 집중한 단순한 제품도 나와야 한다. 경우에 따라 정부는 이런 제품 개발을 지원하거나 저소득층의 제품 구입 비용 일부를 지원해야 할 수도 있다.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 때문에 이런 더위가 올해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년 여름까지는 1년밖에 남지 않았다.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경운궁 日 방화 추정’ 특종 뒤 해고당해… 대한매일신보 창간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경운궁 日 방화 추정’ 특종 뒤 해고당해… 대한매일신보 창간

    일본에서 무역업을 하던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의 인생을 바꿔 놓은 것은 러일전쟁이었다. 고베에서 안정적 생활을 하던 베델은 돌연 영국 일간지의 특별통신원이 돼 한국에 왔다. 그가 훗날 항일 언론인으로 죽어가던 조선을 위해 싸우게 될 줄은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베델이 잠시 사업을 접고 새로운 일을 모색하던 1904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는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전운이 감돌았다. 2월 8일 일본 함대가 중국 랴오닝성 뤼순항을 기습 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시작됐다. 베델은 이때까지도 일본에서 평상시와 다름없이 생활하고 있었다.당시 전쟁은 언론사들의 최고 인기 아이템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월드컵이나 미국 대선처럼 세계인이 큰 관심을 갖는 뉴스거리였다. 유명한 종군 기자는 슈퍼스타 대접을 받았다.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종군기자로 참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무기여 잘 있거라’와 같은 작품을 썼다.러일전쟁을 전후해 ‘로이터’를 비롯한 영국의 주요 매체들은 한국으로 특파원을 보냈다. 영국 총리를 역임한 윈스턴 처칠도 종군기자로 러일전쟁 취재차 한국을 찾았다. ‘데일리 크로니클’도 마찬가지였다.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쏟아내는 전장을 하루라도 빨리 묘사하고자 우선 동북아 사정을 잘 아는 현지 통신원을 채용하기로 했다. 영국 런던에서 정식 특파원을 파견할 경우 물리적으로 한 달 가까이 시간이 걸리는 데다 일본이나 러시아 사정에 밝지 않아 배경지식이 풍부한 기사를 쓰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데일리 크로니클’은 전쟁 발발 직후 일본에 있던 토마스 코웬을 임시직인 특별 통신원에 임명해 조선에 보낸 뒤 베델을 두 번째로 파견했다. 3월 10일이었다. 일본 업체들의 소송과 형제 간 불화 등으로 고베 사업을 접었던 베델은 ‘데일리 크로니클’에서 통신원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조선행을 결심했던 것 같다. 지금도 영국에서 기자라는 직업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할 수 있는 일이다. 브리스톨 지역 최고 사립고교를 졸업한 베델 역시 기자로서의 바탕은 충분했다. 이때부터 그에게 언론인이라는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다.●‘한국 황궁의 화재’ 5면 톱기사로 실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 관련 기사가 전 세계로 퍼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들의 기사가 적국인 러시아에 들어가면 군사 정보가 유출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이 사실을 모르던 외신기자들은 종군 취재 허가를 받으러 도쿄에 갔다가 4월 초순까지 발이 묶였다. 이들은 일본어를 몰랐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하지만 고베에서 16년을 살며 일본어에 능통했던 베델은 이들보다 한 달이나 앞서 조선에 들어왔다. 베델은 조선에 온 지 36일 만에 ‘특종’을 발굴했다. 4월 16일자 ‘한국 황궁의 화재’ 기사였다. 베델은 14일 저녁 고종이 머물던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발생한 의문의 화재 사건을 추적해 ‘일본군이 방화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의 기사를 전송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이듬해부터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 궁궐에 어느 날 갑자기 불이 나 중화전과 그곳에 있던 보물이 모두 탔다. 당시 ‘데일리 크로니클’은 그가 쓴 기사를 5면 톱기사로 편집해 전 세계에 타전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베델과 코웬은 이 기사 때문에 해고 통보를 받았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이유가 거론된다. 친일 성향의 데일리 크로니클이 일본에 비판적 기사를 쓴 베델을 문책했다는 것과 전장인 한반도에 통신원을 두기보다 본지 기자들이 일본 정부에서 자료를 받아 기사를 쓰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것이다.●“데일리 크로니클, 일본에 우호적 기사 지시” 훗날 베델은 이 사건에 대해 “‘데일리 크로니클’에서 일할 때 받은 지시는 ‘우리 신문은 일본에 우호적이기 때문에 통신원이 쓰는 기사 역시 이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었다”면서 “또 동양에 간 특파원들이 전쟁터에서 얻는 정보보다는 영국 런던 주재 일본대사관에서 듣는 사실이 더 많았다는 이유도 있었다”고 말했다. 참고로 1872년 창간된 ‘데일리 크로니클’은 1930년 ‘데일리 뉴스’와 합병해 ‘뉴스 크로니클’로 바뀌었다. 이 매체는 1960년 ‘데일리 메일’에 흡수돼 지금도 운영 중이다. 학계에는 베델이 ‘데일리 크로니클’에서 경운궁 화재 기사 한 건만 쓰고 회사를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것말고도 그가 쓴 기사가 하나 더 있다는 주장이 있다. 서울신문이 취재도중 만난 영국 출신의 역사연구가 에이드리언 코웰(62·싱가포르 거주)에 따르면 베델은 경운궁 화재 기사보다 보름 앞서 4월 1일자에 조선의 전통놀이인 ‘석전’(두 편으로 나뉘어 돌팔매질로 승부를 겨루던 놀이)과 축구를 비교하는 글을 썼다. 해당 기사는 지금도 ‘데일리 크로니클’ 데이터베이스(DB)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베델은 통신원으로서 모두 2개의 기사를 쓴 것이 된다. 코웰은 “당시 통신원들은 자신이 쓴 기사를 다른 매체에도 팔 수 있었다. 이 글을 뉴질랜드 언론사에도 판매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그 기사도 찾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32세 나이에 3개월 만에 신보와 KDN 펴내 특종 기사를 남기고 회사를 떠나게 된 베델은 곧바로 자신이 이곳에서 직접 신문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고는 단 3개월 만에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발행했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20년 가까이 무역 일만 하던 베델이 갑자기 일사천리로 언론사를 창간한 이유를 두고 지금까지도 의아해하는 이들이 많다. 우선 신문 발행은 당시로서는 첨단산업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종이 몇 장만 사면 알 수 있다는 것은 지금의 정보화 혁명에 비견될 충격이었다. 19세기 말부터 동북아시아 지역은 영자신문 창간이 유행처럼 번졌다. 특히 조선에는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영어신문이 하나도 없었다. 서울에서는 1896년 서재필이 한글판 ‘독립신문’과 영문판 ‘인디펜던트’를 창간했지만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1899년 12월 폐간했다. ‘고종의 밀사’로 잘 알려진 미국인 호머 허버트(1863~1949)가 월간지로 발행하던 ‘코리아 리뷰’가 유일한 영어 간행물이었다. 베델은 이런 조선에서 하루빨리 영어신문을 창간해 시장을 선점하면 장기적으로 큰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다. 또 투자금을 모아 회사를 차리는 일은 베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본을 모으는 이른바 ‘펀딩’은 16년간 무역업을 하며 돈의 흐름을 읽을 줄 알던 베델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였다. 여기에 그는 일본 시절부터 언론 친화적 모습을 보여줬다. 베델이 고베에 있을 때 발행되던 영어신문 ‘고베 크로니클’은 그가 활동하던 스포츠 클럽 고베 레가타 앤드 어슬래틱 클럽(KR&AC)이 주최하는 연례 총회와 스포츠 경기, 콘서트 등을 단골 기삿거리로 삼았다. 그 역시 여기에 수차례 기고글을 쓰며 논쟁을 즐겼다. 마지막으로 그가 영국에서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베델연구가 코웰은 “19세기 당시 영국 사정을 감안할 때 베델 정도면 (귀족이나 거대자본가가 아닌) 일반인으로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면서 “소규모 언론사를 운영하거나 기사를 쓰는 데 있어 기본적인 소양은 충분했다”고 말했다. 고베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싱가포르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시칠리아의 여름 나기, 가지 요리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시칠리아의 여름 나기, 가지 요리

    어릴 때 잘 먹지 않았지만 크고 나서 잘 먹게 되는 이른바 ‘어른의 음식’이 있다. 가끔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 화두를 던지면 열에 일곱은 듣게 되는 이름의 식재료가 있다. 바로 가지다. 어릴 적 여름날이면 어김없이 밥상에 올랐던 가지 무침은 기피대상 1호였다. 식욕을 뚝 떨어뜨리는 푸르죽죽한 빛깔과 기분 나쁘게 물컹거리는 식감이 좋지 않았다.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 가지 요리는 소년에게 원초적인 불쾌감을 주는 존재였다.대체 무슨 맛으로 가지를 먹는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의외로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았는데 흥미로운 건 그들 중 아직도 가지를 싫어하는 이는 별로 없다는 점이다. 다들 일부러 찾아 먹으러 다닐 만큼 즐기는 음식이 됐다는 걸 보니 가지는 확실히 어른의 음식이 아닌가 싶다. 이탈리아 어린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탈리아에서 가지는 꽤 인기 있는 식재료다. 식당 어디를 가도 가지를 이용한 요리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가지 요리의 메카로 통한다. 이탈리아 전통요리 중 가지가 들어간 요리라면 그 본적은 십중팔구 시칠리아일 공산이 크다. 중국과 인도가 고향으로 알려진 가지는 어째서 시칠리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일까. 이는 다사다난한 시칠리아의 역사와 관계가 있다.가지를 처음 유럽에 전한 건 아랍인들이었다. 6세기 즈음 실크로드를 통해 중동에 당도했다.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유럽 진출을 노리던 이슬람 세력은 9세기경 이베리아반도와 시칠리아를 완전히 점령함으로써 남유럽의 패권을 손에 넣었다. 이 시기에 중앙아시아의 여러 문물과 식재료가 유럽에 이식됐는데 가지, 아몬드, 석류 등이 시칠리아와 이베리아반도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중동에선 맛있는 식재료인 가지였지만 이슬람 세력권 밖에서는 꽤 오랫동안 몹쓸 식물로 여겨졌다. 당시의 가지는 지금과 달랐다. 가시는 더 날카롭고 쓴맛이 강했는데 심지어 생으로 먹으면 구토와 발작을 일으키기도 해 많은 유럽인들이 기피했다. 가지가 유럽에서 먹을 만한 식재료로 인정받게 된 건 16세기다. 꾸준한 품종 개량 외에도 아랍과 유럽의 교집합 역할을 한 시칠리아와 이베리아 지역 요리사의 역할도 있었으리라 추측해 본다. 요즘은 사시사철 가지를 구할 수 있지만 역시 제철은 여름이다. 양분을 한껏 머금은 가지는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 아래 서서히 보랏빛으로 물든다. 유럽의 가지를 보면 우리 가지와 생김새가 다르다. 동아시아의 가지가 가늘고 긴 모양이라면 유럽의 가지는 크고 둥근 편이다. 작은 건 계란 정도 크기지만 큰 것은 사람 머리만 하다. 원래 가지의 색은 자주색부터 흰색, 녹색, 줄무늬까지 꽤 다양했지만 소비자가 진한 자주색을 선호하는 바람에 오늘날 볼 수 있는 가지는 대부분 한 가지 색이다. 시칠리아 사람들은 가지를 어떻게 요리해 먹을까. 데치고 절이고 볶는 우리와 달리 서양에서는 굽고 튀기는 조리방식이 일반적이다. 가지는 스펀지처럼 기름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어 기름으로 조리하면 꽤 고열량 음식으로 변한다. 요즘같이 더운 날이면 뭐니 뭐니 해도 ‘카포나타’다. 가지를 먹기 좋은 크기로 튀기거나 구운 후 익힌 양파와 샐러리, 토마토와 함께 섞고 식초와 설탕을 가미해 먹는 대표적인 여름음식이다. 지역과 기호에 따라 케이퍼, 아몬드 등 각종 부재료를 넣어 먹기도 한다. 이탈리아어로 ‘아그로 돌체’, 직역하면 새콤달콤한 맛이 더위에 지친 입맛을 돋워 준다. 가지가 들어간 파스타도 있다. 시칠리아식 파스타 하면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노르마 파스타다. 이름만 보면 아랍의 뒤를 이어 시칠리아를 한동안 지배한 노르만 세력과 연관이 있을 것 같지만 전혀 상관이 없다. 이 파스타의 이름은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빈첸초 벨리니의 작품 ‘노르마’에서 유래했다. 음식에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이탈리아인들이 단순히 벨리니의 고향이 시칠리아라는 이유로 헌정을 한 건지 아니면 벨리니가 즐겨 먹어서인 건지 알 방도는 안타깝게도 없다. 노르마 파스타는 가지의 맛이 이렇게도 변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는 좋은 예다. 가지를 진한 갈색이 날 정도로 오래 튀기면 구운 야채 특유의 진한 풍미가 더해지면서 질감은 크림처럼 물러진다. 여기에 소금을 살짝 토마토 소스에 넣고 버무리면 캐러멜처럼 달콤해진 가지의 진한 향이 토마토의 감칠맛에 더해진다. 어릴 적 가지 요리를 노르마 파스타로 접했다면 가지에 대한 추억이 조금은 더 아름다웠지 않았을까 싶은 맛이다.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영원한 ‘별들의 고향’… 경성의 낭만을 소환하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영원한 ‘별들의 고향’… 경성의 낭만을 소환하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3회 극장순례(영화의 고향) 편이 지난 4일 서울 종로와 충무로 일대에서 진행됐다. 여름 야행 두 번째 행사를 맞아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답사단 일행 30여명은 모자와 부채, 손풍선 등으로 완전 무장했지만 쏟아지는 폭염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안전사고를 막고자 도보 코스를 줄이고, 서울신문사에서 때마침 제공한 ‘아이스 쿨 스카프’에 의지해 답사를 마쳤다. 참가자들은 이날 오후 6시 지하철 종각역 3번 출구 앞 종로타워빌딩(옛 화신백화점) 앞에서 집결, 우미관 옛터~인사동 조선극장 옛 터~허리우드극장~단성사 옛터~서울극장~충무로 영상센터 순으로 2시간짜리 극장순례를 다녀왔다. 서울극장에서 충무로 영상센터까지는 지하철로 이동했다. 지난해와 올해를 통틀어 답사 중 첫 대중교통 이용사례다. 해설을 맡은 심흥식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흘러간 추억의 영화는 물론 자신이 경험한 70~80년대 영화의 주제가를 직접 부르면서 영화와 극장 분위기를 전달해 공감과 호평을 얻었다.서울은 극장의 도시이다. 한국영화의 고향이기도 하다. 근대화의 산물이자 대중문화의 상징인 영화는 일제강점기의 수도 경성에서 화려하게 꽃피었다. 1920년대 전후 ‘문화로써 생활의 중심으로 삼는 사상’ 즉 문화주의와 문화운동이 전개되었고, 그 중심에 영화가 있었다. 일제의 통치방식이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색깔을 바꾼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일제의 문화정치는 진정한 의미의 문화주의 정치가 아니라 식민지의 ‘문명개화’(文明開化) 혹은 ‘문치교화’(文治敎化)의 흉내에 불과했지만 500년 봉건왕조의 지배에서 막 깨어난 대중을 유혹하기엔 충분했다. 영화로 대표되는 서울의 대중문화는 양반 선비문화, 고급 엘리트문화에 대항한 문화적 민주주의의 시발점이었다.1930년대 접어들면서 신파극, 뽕짝가요, 영화 등 3대 장르가 주도하는 ‘조선식 대중문화’가 경성에서 폭발했다. 근대화와 식민지 정서가 뒤섞인 독특한 문화양식이었다. 당대 경성의 신인류를 지칭하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낭만주의적 퇴행성을 대표하는 식민지 근대성의 표식이라면, ‘장한몽’(이수일과 심순애),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홍도야 울지 마라) 같은 신파극은 이율배반적 비극미의 표출이었다. 3대 장르에서 짜내는 부조리한 눈물은 대중에게 위안을 제공했다. 체제 순응이라는 자학적 죄의식을 외면하는 핑곗거리를 제공했다. 대중문화는 정치 이데올로기 전파의 수단으로 사용됐다. 특히 영화(Screen)는 성(Sex), 스포츠(Sports)와 함께 ‘3S’의 대명사였다. 1919년 제작돼 한국영화의 기원으로 간주하는 ‘의리적 구토’는 과도기 성격의 영화이다. 연극 무대에서 구현이 어려운 장면이나 풍경을 활동사진으로 찍어서 중간에 끼워 보여주는 연쇄극이었다. 단성사 사장 박승필은 명월관, 청량리, 홍릉, 장충단, 한강철교 등 경성의 명소를 찍어 단성사에서 공연하는 연극의 중간에 삽입했다. 한국영화의 전성기는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과 함께 막을 올렸고, 1937년 나운규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최초의 무성영화이자 흥행 대작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과 대중의 민족 정서를 반영한 이 영화는 상영 첫해에 110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아리랑이라는 걸출한 영화 한 편이 영화를 대중문화의 간판산업으로 밀어 올렸다. 1935년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히트를 한 이후 1938년 경성 시내에서 영화와 연극관객이 하루 평균 1만명에 이르렀고, 1942년에는 연인원 2000만명이 영화와 연극을 관람했다고 한다. ‘영화 경성시대’였다.한국영화는 1950~60년대 르네상스를 맞았다. 1955년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은 정비석이 서울신문에 연재한 동명 소설을 영화화해 영화 부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교수 부인의 바람은 전통적 가부장제를 밑바닥에서 흔드는 발칙한 소재였다. 1961년 한국영화사상 최대의 문제작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을 시작으로 신상옥, 김기영 감독의 작품이 뒤이었다. 1970년대 유신 시절 침체기에 접어든 한국영화는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 등 호스티스 영화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사회성 짙은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 등으로 되살아났다.극장은 신파극, 뽕짝가요, 영화 등 오락문화를 쓸어 담는 그릇이었다. 본래 연극 공연장이던 극장은 무용·음악·예능 등 무대예술 공연장으로 영역이 확대됐다. 19세기 말 영화의 발명 이후 극장과 영화관이 구별됐다. 무대와 조명을 갖춘 국내 최초의 실내극장은 1902년 서대문밖에 세워진 협률사였다. 로마 원형극장을 본뜬 협률사가 최초의 관립극장이자 서양식 극장이었다면 1908년 신문로에 설립된 이인직의 원각사는 최초의 사설극장이었다. 활동사진 상설극장으로 가장 먼저 개관한 곳은 1910년 종로구 관철동 경성고등연예관이다.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뀐 뒤 1915년 수용인원 1000명 규모의 상설영화관 우미관으로 거듭났다. 판소리와 창극을 공연하던 단성사는 1918년 활동사진 전용관이 되기 전까지 경성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유일한 극장이었다. 무성영화 시절 유명한 변사는 대부분 우미관 출신이었다. 찰리 채플린이 제작·감독·각본·주연을 맡은 무성영화 ‘황금광시대’도 우미관에서 상영했다. 우미관은 단순한 극장이라기보다 종로상권을 넘보는 청계천 이남 남촌에 근거지를 둔 일본 야쿠자의 북촌 진출을 막는 방어선이었다. 종로 주먹 김두한의 사무실이 우미관에 있었다. 영화 ‘장군의 아들’, 드라마 ‘야인시대’의 주 무대이다. 종로2가 길가 화단에 표석이 남아 있다. 답사단이 찾은 종로타워 뒷골목 우미관은 1959년 관철동 우미관이 불타 없어진 뒤 화신백화점 뒤로 옮긴 곳이다. 이전 후에는 이류 재개봉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1982년 폐업, 지금은 우미관 주차장이 됐다. 1907년에 개업한 단성사는 1919년 ‘의리적 구토’를 시작으로 ‘장화홍련전’과 ‘아리랑’을 상영하면서 장안의 영화 중심가로 떠올랐다. 이후 ‘서편제’ ‘태백산맥’ ‘장군의 아들’ 등을 개봉했다. 1913년 황금연예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한 국도극장은 일본인 거주지역인 을지로를 대표하는 극장 황금좌로 운영되다가 1948년 개칭했다. 지금은 국도호텔로 변신했다. ‘미워도 다시 한번’ ‘별들의 고향’ ‘겨울여자’를 각각 개봉했다. 1922년에 건립된 인사동의 터줏대감 조선극장은 영화상영과 판소리, 가무곡 공연 겸용관이었다. 김기진 등이 신파극에 대항해 근대 신극운동을 펼친 토월회의 창립공연을 비롯해 명창대회가 열린 유서 깊은 장소이다. 1936년 방화로 소실된 뒤 이런저런 장소로 떠돌다가 포장마차 골목으로 쓰이고 있다. 뒷면 대나무 숲 앞에 조선극장 터 표석이 서 있었으나 훼손돼 사라졌다. 황금좌, 우미관, 단성사, 조선극장이 경성의 4대 극장으로 군림했다. 1935년 설립된 연극전용 동양극장은 1976년 폐관될 때까지 서대문을 대중연극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서울의 문학1(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일시: 8월11일 토요일 오후 6~8시 ●집결장소: 청계광장(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5번 출구, 1.2호선 시청역 4번 출구)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go.kr)
  • 낡은 금융 기득권 깬다…文 규제혁신 1호는 ‘인터넷은행 활성화’

    낡은 금융 기득권 깬다…文 규제혁신 1호는 ‘인터넷은행 활성화’

    文 “英 붉은깃발법으로 마차업자 보호 결국 독일·미국에 자동차 산업 뒤처져” 일각 “기존 금융기업들에 경종 울릴 것” 여야 16일부터 은산분리 관련 법안 논의문재인 대통령이 7일 인터넷 전문은행에 한해 은산 분리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힘에 따라 관련 규제 개선에 속도가 붙게 됐다. 청와대와 정부는 일찌감치 은산 분리 규정을 인터넷 전문은행에 한해 완화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추진해 왔다. 애초 문 대통령은 지난 6월 준비 부족으로 취소했던 규제혁신점검회의에서 은산 분리 완화 문제를 핵심 안건으로 올려 논의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규제혁신 현장 방문은 지난달 의료기기 분야 규제혁신 방안 발표 행사 참석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이지만 문 대통령이 추진하고자 했던 규제혁신 1호 안건은 인터넷 전문은행 은산 분리 규제 완화였던 셈이다. 가장 풀기 어려운 규제부터 혁신해 다른 산업의 규제 혁신 노력을 끌어내겠다는 복안으로 풀이된다.이날 문 대통령은 자동차가 마차보다 빨리 달리지 못하도록 붉은 깃발을 흔들어 속도를 제한한 19세기 말 영국의 ‘붉은 깃발법’을 규제가 산업의 발목을 잡은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 문 대통령은 “마차 업자들을 보호하려고 이 법을 만들었는데, 결국 영국이 시작한 자동차 산업은 독일과 미국에 뒤처지고 말았다. 규제 때문이었다”며 과감한 혁신을 주문했다. 문 대통령은 인터넷 전문은행에 대한 규제 혁신을 통해 새로운 일자리와 성장동력을 창출하려고 한다. 이날 연설에서도 “혁신기술과 자본을 가진 IT 기업의 인터넷 전문은행 참여는 연구개발(R&D)과 핀테크 등 연관 산업의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인터넷 전문은행을 기존 금융기업과 경쟁시켜 금융산업을 혁신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문 대통령은 “그동안 우리 금융산업의 시장구조는 기존의 금융회사를 중심으로 굳어져 왔고, 이미 시장에 진입한 금융회사들은 경쟁과 혁신 없이도 과점적 이익을 누렸다”며 “인터넷 전문은행의 활성화는 금융권 전체의 경쟁과 혁신을 촉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기존 금융기업들에 경종을 울린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금융감독기관은 금융권이 자칫 기득권과 낡은 관행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도록 금융혁신과 경쟁 촉진 노력에 박차를 가해 달라”고도 촉구했다. 정치권에서 논의가 어떻게 전개될지도 관심이다. 당장 여야는 오는 16일부터 열리는 8월 임시국회에서 은산 분리 관련 법안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는 “은산 분리 원칙은 지켜져야 하지만 인터넷 은행이 처한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다”며 “인터넷 은행에 한해 은산 분리 규제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자유한국당은 은산 분리 규제를 대폭 허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당 관계자는 “인터넷 뱅크에 한해 은산 분리 규제를 완화하고 기존 규제는 그대로 놔두는 식으로 간다면 혁신 성장은 어렵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일부에서는 인터넷 전문은행 활성화 정책이 문 대통령의 금산 분리 공약 파기라는 지적도 나온다. 문 대통령은 대선 당시 “산업자본의 금융계열사에 대한 의결권 규제 강화 등 금산 분리의 원칙을 준수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은 전날 언론 인터뷰에서 “금산 분리 규정을 엄격하게 해석해 누구든 못 들어가게 만들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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