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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생자가 된 가해자 ‘기억’들로 고발하다

    희생자가 된 가해자 ‘기억’들로 고발하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사상가 한나 아렌트(1906~1975). 그는 단지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이른바 ‘집합적 유죄’에 단호히 반대했다. 대신 개개인의 죄의 유무는 속한 집단이 아니라 인간 개인이 저지른 일의 내용과 결과에 따라 판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식민주의 집단학살, 홀로코스트, 인종청소, 조직적 성폭력 같은 반인륜적 범죄의 단죄와 처벌은 가해자들에게만 해당될까. 그 후손인 전후 세대는 책임에서 자유로울까. 반인륜적 범죄와 관련해 가장 큰 모순은 가해자와 희생자의 뒤바뀜, 혹은 뒤섞임이다. 특히 가해자와 공범자가 피해자로 둔갑하기 일쑤다. 역사의 영역에서 그런 모순은 문서 기록을 근거로 산 자가 죽은 자를 심문하고 재단하는 실증주의 탓에 발생한다. 그 방법론에 대한 회의와 개선의 목소리가 부쩍 높아지고 있다. 이른바 ‘기억 연구’다. 과거에 벌어진 복잡한 양상을 추적하려면 기억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대안이다. 임지현 서강대 사학과 교수도 ‘기억 연구’ 쪽을 택하고 있다. 그 지론은 이렇다. ‘전후 세대들은 과거사에 대한 직접적 책임은 없다. 하지만 과거사를 끄집어내 성찰하고 또 그 성찰의 기억을 지키고 끊임없이 재고해야 할 책임은 전후 세대에게 있다.’과거사 단죄 차원에서 가장 두드러진 가해자, 희생자의 전복 사례는 오스트리아에서 찾을 수 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스스로를 히틀러의 첫 번째 희생자로 여긴다. 그러면서도 히틀러 군대에 복무한 자국 병사들은 의무를 다했다거나 심지어 영웅적이었다고 말한다. 반면 히틀러 군대에서 탈영한 병사들은 전우를 버린 배반자로 몰아 댄다. 하지만 각종 통계는 인구 비율상 오스트리아인들이 독일인들보다 더 적극적인 히틀러 협력자였음을 증거한다. 폴란드도 마찬가지다. 나치 점령기 폴란드에선 숨어 있는 유대인을 밀고하거나 사냥하듯 잡으러 다니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런데도 폴란드인이 홀로코스트 공범자였다는 사실은 ‘희생자 민족’이라는 역사적 이미지에 철저히 가려진다.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점은 민족, 국가에 한정된 ‘민족주의 기억’을 탈영토화하고 유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개별적인 과거사 반성은 이제 기억의 공유와 연대 쪽으로 번지고 있다. 과거사의 단죄와 해결에서 실증적 사실보다 기억과 증언을 중시하게 된 첫 사례는 1961년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 재판이다.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본 연구자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에 주목했고, 이를 계기로 홀로코스트 연구는 문서 자료에서 생존자 증언으로 중심이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기억 공유와 연대의 대표적 사례는 201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북쪽 작은 도시 글렌데일의 ‘평화의 소녀상’ 건립이다. 가주한미포럼은 그해 7월 글렌데일 중앙도서관 앞에 동상을 세우고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반성을 촉구했다. 한국과는 전혀 상관없는 소도시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들어선 까닭은 무엇일까. 사정은 이렇다. 주민의 40%가 아르메니아계로 알려진 글렌데일에는 해외에서 가장 큰 아르메니아인 공동체가 있다. 그 아르메니아인은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오스만제국으로부터 집단학살을 당한 ‘기억’이 있다. 저자는 이를 놓고 “아르메니아 집단학살의 기억이 글렌데일 아르메니아인들로 하여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사례에 얹은 저자의 질문이 의미심장하다. ‘베트남 전쟁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잔학 행위엔 책임이 없다면서 왜 1945년 이후 태어난 일본의 전후 세대에게는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 끝난 일본 제국주의의 잔학한 통치에 대한 책임을 묻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까. 저자 자신도 밝혔듯이 딱부러진 건 없다. 하지만 ‘곤혹스러운 과거 앞에 당당한 사람보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더 건강한게 아닌가’라는 답을 던진다. “기억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빨강의 역사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빨강의 역사

    19세기에 인공 염료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붉은 색깔을 내는 염료를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고대 지중해 세계 동쪽 해안 레반트에 거점을 둔 페니키아인들은 페니키아 근해의 뿔고동에서 채취한 값비싼 자줏빛 염료를 지중해 각지에 수출해 큰 재미를 보았다. 색을 내기 어렵고 값이 비쌌기 때문에 붉은 옷감은 부유한 기득권층의 전유물이 됐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집정관이나 전쟁에 이기고 개선하는 장군들만이 자주색 망토를 착용할 수 있었다. 로마 제정 이후 자주색은 황제 전용이 된다. 이 전통은 로마 멸망 이후 중세에도 이어져 자주색은 왕이나 귀족의 색으로 간주됐다. 빨간색은 고대로부터 귀한 염료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귀한 색은 임페리얼 퍼플(imperial purple)이었다. ‘황제의 자주색’이라는 뜻의 이 색상은 범위가 넓어서 자주색뿐만 아니라 진한 주홍(scarlet)과 선홍색(crimson)까지도 포함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그 색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염색업자가 옷 한 벌을 염색하는 데 필요한 임페리얼 퍼플을 추출하려면 뿔고동 수천 마리를 으깨야만 했기 때문에 임페리얼 퍼플은 대단히 비싼 염료였다.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가 통치하던 시기에 임페리얼 퍼플로 염색한 최상품 옷감 1파운드(0.45㎏)는 로마 은화 5만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었다. 당시 석공의 하루 임금이 50데나리온이었으니 1000일치 임금을 합산한 것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비싼 가격 때문에 임페리얼 퍼플은 고대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권력과 위신의 탁월한 상징이 됐다. 칼리굴라와 네로, 그리고 4세기 황제 통치하에서는 황실 사람들만 임페리얼 퍼플로 염색한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이런 전통은 그리스도교가 수용된 중세 유럽으로도 이어졌다. 1295년 교황은 추기경들에게 임페리얼 퍼플 색상의 옷을 입을 것을 선포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추기경의 자주색’ 전통은 가톨릭교회에서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흰 눈을 뒤집어쓴 빨간 장미가 한겨울의 추위에도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고귀한 빨강의 전통을 지키려는 ‘꽃의 제왕’다운 기백이다. 우석대 역사교육과 초빙교수
  • [최만진의 도시탐구] 또 목포의 눈물인가?

    [최만진의 도시탐구] 또 목포의 눈물인가?

    ‘목포의 눈물’은 1935년 이난영이 불러 대성공을 거두었던 노래이다. 당시 목포는 일본과 중국에 가깝다는 지리적 장점으로 일제 수탈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에 일찍부터 개항을 강요당했고, 식민지 열강들 중에 일본이 유일하게 영사관을 설치했다. 강점기 동안에는 경제 수탈을 위해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과 은행 등을 설립하여 비옥한 전라도의 쌀과 목화를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이에 많은 조선인이 노동에 동원되었고 때로는 임금조차도 받지 못하는 억울함을 맛보던 곳이 목포항이었다. 억압을 몸소 느끼다 보니 항일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고, 일제는 목포형무소나 목포경찰서를 세워 잔혹하게 통치하였다. 이난영의 노래가 더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나라 잃은 한을 그 특유의 애잔한 목소리로 실어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목적이 어찌됐든 당시 목포는 도시계획과 건축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고, 근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런 일제의 개발은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첫째로는 당연히 식민화의 도구다. 두 번째로는 그나마 긍정적인 것으로 근대적 건축과 도시계획의 도입이었다. 특히 서양의 영향을 받은 건축가나 도시계획가에게는 제약이 많은 일본에 비해 조선은 실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이로써 목포에는 일본식 가옥 외에도 고전주의, 절충주의, 근대건축 등 다양한 형태의 서양건축물이 들어서게 되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의 유럽도시를 재현하는 듯했다. 또한 도시계획 측면에서도 1930년대에 대규모 사업인 ‘시가지계획령’ 지정을 받는 등 괄목할 만한 변화를 경험했다. 근대적 격자형 도로망과 지구가 생긴 것도 이때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설치된 방공시설도 일부 보존되어 있기도 하다. 최근 많은 화제를 낳고 있는 ‘목포 문화거리’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목포 도심은 해방 직후나 산업화과정에서 변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전체가 그야말로 근대도시의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이는 당시의 도시, 건축, 생활상을 이해하고 읽어낼 수 있는 좋은 사료임에 틀림이 없다. 그간 아쉬웠던 것은 건축물과는 달리 도시공간에 대한 문화재지정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1910년대의 나진이나 진해는 유럽식 개념을 도입한 획기적 성격의 신도시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일본에서조차도 볼 수 없었던 이 계획이 가지는 의의는 상당히 크며, 향후 도시 보존과 개발에 있어 많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 도심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군대가 연합군 폭격기에 대응 사격을 위해 만들었던 방공타워가 있다. 탄환 흔적이 곳곳에 있는 이 콘크리트 덩어리는 주변 공원과 함께 생태체험 공간으로 거듭나 사랑받고 있다. 한 특정 정치인에 대한 투기 의혹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고 도심 공간 전체를 문화재로 지정하고 이를 관광, 산교육, 도시 되살리기 사업의 소재로 삼는다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따질 것은 따지되 목포에서 제2의 눈물을 쏟아내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 또 목포의 눈물인가?

    또 목포의 눈물인가?

    ‘목포의 눈물’은 1935년 이난영이 불러 대성공을 거두었던 노래이다. 당시 목포는 일본과 중국에 가깝다는 지리적 장점으로 일제 수탈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에 일찍부터 개항을 강요당했고, 식민지 열강들 중에 일본이 유일하게 영사관을 설치했다. 강점기 동안에는 경제 수탈을 위해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과 은행 등을 설립하여 비옥한 전라도의 쌀과 목화를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이에 많은 조선인이 노동에 동원되었고 때로는 임금조차도 받지 못하는 억울함을 맛보던 곳이 목포항이었다. 억압을 몸소 느끼다 보니 항일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고, 일제는 목포형무소나 목포경찰서를 세워 잔혹하게 통치하였다. 이난영의 노래가 더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나라 잃은 한을 그 특유의 애잔한 목소리로 실어냈던 것이 아닌가 싶다.목적이 어찌됐든 당시 목포는 도시계획과 건축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고, 근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런 일제의 개발은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첫째로는 당연히 식민화의 도구다. 두 번째로는 그나마 긍정적인 것으로 근대적 건축과 도시계획의 도입이었다. 특히 서양의 영향을 받은 건축가나 도시계획가에게는 제약이 많은 일본에 비해 조선은 실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이로써 목포에는 일본식 가옥 외에도 고전주의, 절충주의, 근대건축 등 다양한 형태의 서양건축물이 들어서게 되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의 유럽도시를 재현하는 듯했다. 또한 도시계획 측면에서도 1930년대에 대규모 사업인 ‘시가지계획령’ 지정을 받는 등 괄목할 만한 변화를 경험했다. 근대적 격자형 도로망과 지구가 생긴 것도 이때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설치된 방공시설도 일부 보존되어 있기도 하다. 최근 많은 화제를 낳고 있는 ‘목포 문화거리’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목포 도심은 해방 직후나 산업화과정에서 변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전체가 그야말로 근대도시의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이는 당시의 도시, 건축, 생활상을 이해하고 읽어낼 수 있는 좋은 사료임에 틀림이 없다. 그간 아쉬웠던 것은 건축물과는 달리 도시공간에 대한 문화재지정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1910년대의 나진이나 진해는 유럽식 개념을 도입한 획기적 성격의 신도시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일본에서조차도 볼 수 없었던 이 계획이 가지는 의의는 상당히 크며, 향후 도시 보존과 개발에 있어 많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 도심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군대가 연합군 폭격기에 대응 사격을 위해 만들었던 방공타워가 있다. 탄환 흔적이 곳곳에 있는 이 콘크리트 덩어리는 주변 공원과 함께 생태체험 공간으로 거듭나 사랑받고 있다. 한 특정 정치인에 대한 투기 의혹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고 도심 공간 전체를 문화재로 지정하고 이를 관광, 산교육, 도시 되살리기 사업의 소재로 삼는다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따질 것은 따지되 목포에서 제2의 눈물을 쏟아내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글: 최만진 경상대 건축학과 교수
  • ‘러시안룰렛’ 게임하던 美 경찰, 가슴에 총맞고 사망

    ‘러시안룰렛’ 게임하던 美 경찰, 가슴에 총맞고 사망

    미국 경찰관이 동료와 ‘러시안룰렛’ 게임을 즐기다 사망했다. 미 당국은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경찰청 소속 캐틀린 앨릭스(24)가 게임 도중 가슴에 총을 맞고 사망했으며, 동료 경찰관인 나다니엘 헨드렌(29)을 1급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CNN과 뉴욕타임스 등 주요 외신은 캐틀린이 지난 24일(현지시간) 나다니엘의 자택에서 ‘러시안룰렛’을 즐기다 나다니엘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사건 당일 캐틀린은 비번이었으며 헨드렌과 그의 파트너 경찰관은 근무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장에 있었던 또 다른 경찰관은 두 사람에게 총을 가지고 놀지 말라고 경고하고 방을 나갔다고 전했다. 미국 경찰은 공식 성명에서 캐틀린과 나다니엘이 6연발 리볼버에 총알 한 발을 장전하고 서로에게 한 번씩 방아쇠를 당겼으며, 두 번째 세트에서 나다니엘이 방아쇠를 당기자마자 총알이 발사됐다고 밝혔다. 이어 방을 나갔던 동료 경찰관이 총소리를 듣고 돌아와 가슴에 총을 맞은 캐틀린을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사망했다고 덧붙였다. ‘러시안룰렛’은 19세기 러시아 감옥에서 교도관들이 죄수들에게 강제로 시키며 누가 죽을지 내기를 벌인데서 유래했다. 6연발 리볼버 같은 회전식 연발권총에 총알 한 발만 장전하고 위치를 알 수 없도록 탄창을 돌린 뒤 돌아가면서 상대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방식이다. 러시안룰렛으로 사람이 죽을 확률은 약 17% 정도로 그야말로 목숨을 건 게임이다. 앨릭스는 지난 2017년 1월 세인트루이스 경찰학교를 졸업한 새내기 경찰관으로 2년간의 군 복무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다. 앨릭스의 어머니 에이미 채드윅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딸은 쉬는 날에도 동료들을 만나러 가곤 했다. 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 동료들과 유대 관계를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세인트루이스 경찰청 측 변호인 킴벌리 가드너는 “계획된 살인은 아니었으나 나다니엘이 근무 중 벌어진 사로고 1급 살인 혐의가 적용됐다”면서 “3~10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이광식의 천문학+] 저울 하나로 지구 무게를 단 천재의 이야기

    [이광식의 천문학+] 저울 하나로 지구 무게를 단 천재의 이야기

    기괴한 성격의 천재 과학자 지구의 무게를 최초로 측정함으로써 과학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긴 영국의 헨리 캐번디시(1731-1810)는 과학자로서는 아주 특이한 캐릭터의 소유자였다. 우선 그는 역사상 어떤 과학자보다 부유했다. 데본셔 공작 가문 출신으로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아 당시 영국 은행의 최대 예금주였다고 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그의 성격인데, 지독하게 수줍음을 타는 성격으로 상대와 눈을 맞추고 대화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모임에서도 늘 구석자리만 찾아다녔으며, 누가 질문이라도 하면 늘 허공을 본 채 몇 마디 중얼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수줍음은 특히 여성에 대해 더욱 심했다. 심지어 그는 집안의 하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가 테이블에 저녁식사 메뉴를 적은 쪽지를 올려놓으면 그것을 보고 저녁을 준비할 정도였으며, 특히 하녀와의 만남을 피하기 위해 저택 내에 따로 전용 계단을 만들었을 정도다. 만약 하녀가 실수로 그와 마주치기라도 했다면 바로 해고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성격에 대한 현대의 설명은 자폐증의 하나인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 syndrome)을 의심하고 있다. 캐번디시의 유일한 사회적 활동은 왕립학회 참여였는데, 여기서는 매주 모임 전에 회원들이 함께 식사를 했다. 캐번디시는 이 모임을 빠진 적이 거의 없으며, 동료 과학자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캐번디시는 비사교적인 성향으로 인해 종종 자신의 업적을 출판하는 것을 피했고, 자신의 연구 결과를 동료 과학자들에게도 거의 알리지 않았다. 많은 실험과 여러 논문을 남겼으나, 그 3/4은 미발표였다. 캐번디시의 선구적인 연구 업적은 약 1세기 후인 19세기 후반, 전자기파 이론을 확립한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그의 유고를 정리하면서 밝혀졌다. 1785년에 발표된 쿨롱의 법칙을 1772∼1773년 사이에 발견했고, 옴이 1826년에 발견한 옴의 법칙을 옴보다 45년 먼저 앞선 1781년에 발견했다. 지구의 무게를 알아낸 캐번디시 실험 이 같은 선구적인 캐번디시의 업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지구의 무게를 측정한 실험이다. 이미 2100년 전 에라토스테네스가 지구의 크기를 알아냈지만, 그 질량은 근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수수께끼였다. 캐번디시 실험으로 알려진 이 지구 밀도 측정 실험에서 캐번디시가 사용한 기구는 아주 단순한 장비로, 막대기 양쪽에 둥근 납공을 실로 매달아놓은 비틀림저울이었다. 이것은 저울은 영국 지질학자 존 미첼이 고안한 비틀림 저울을 약간 수정한 것이었다. 미첼 역시 이 저울로 지구 무게를 측정하려다가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사망 하는 바람에 저울은 캐번디시에게로 보내졌고, 캐번디시는 1797-1798년에 실험을 완료하고 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실험에 사용된 장치는 막대의 양 끝에 매달린 2개의 큰 고정식 납공(159㎏)에 각각 2개의 작은 납공(0.7㎏)이 또 매달린 비틀림 저울이었다. 이 저울은 수평 방향으로만 회전한다. 막대의 관성 모멘트는 막대가 복원력에 의해 진동하는 주기를 측정하여 알아낼 수 있다. 막대의 한쪽 끝에 다른 공을 가까이 대면 중력에 의해 서로 끌어당기게 되고 막대가 미세하게 회전한 각도를 측정하여 이 힘을 알아낼 수 있다. 이것을 이용해 중력상수를 구하려는 실험이었다. 질량을 갖는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 뉴턴의 이론에 따르면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만유인력의 크기는 물체의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중력이란 것이 큰 규모에서는 지구를 공전시키고 물체를 낙하시키는 강한 힘을 보이지만, 사실 자연계에 작용하는 힘 중에서도 가장 약한 것으로, 1m 떨어진 3톤짜리 두 트럭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의 힘은 모래알 하나를 움직일 정도라 한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에 따르면,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은 두 물체의 질량의 곱을 그들 사이의 거리 제곱으로 나눈 값에 비례하며, 그 비례상수는 중력상수 G로 나타낸다. (만유)인력상수라고도 하며 단위거리만큼 떨어진 2개의 단위질량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의 값으로 만유인력법칙에서 비례상수 G를 말한다. 식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캐번디시는 작은 두 납공 사이의 중력적인 이끌림을 측정하려 했다. 그는 미첼의 장치가 온도차와 공기 흐름에 아주 민감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장치를 분리된 공간에 두고 시험시에는 외부 제어를 통해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방식을 취했다. 캐번디시는 비틀림 저울의 진동주기에서 납공 사이의 인력을 계산한 다음, 이 값을 사용하여 지구 밀도를 계산했다. 그는 이 실험을 무려 29차례나 거듭하고 그 값들을 평균한 결과 지구의 평균 밀도는 물의 평균 밀도보다 5.48배 큰 것으로 나왔다. 캐번디시 실험의 특별한 점은 측정에 개입될 모든 오류 원인을 제거하고 납공 무게의 1 / 50,000,000에 불과한 놀랍도록 작은 인력을 측정해낸 정확성이다. 캐번디시가 구한 지구 밀도 값의 오류 범위는 현재 받아들여지는 수치의 1% 이내이다. 보다 정확한 중력상수 및 시간에 따른 중력상수의 변화를 측정하려는 실험이 현재도 진행 중에 있다. 캐번디시의 이 실험으로 인해 정확한 중력 상수(G)와 지구 질량이 결정되었다. 이 실험을 토대로 중력 상수 G는 6.754 × 10−11N-m2/kg2로 나타났고, 이는 실제 중력 상수 6.67428 × 10−11N-m2/kg2에 아주 근접한 값임이 밝혀졌다. 캐번디시가 자신의 저택 정원에 있는 별장에서 그 유명한 지구의 밀도를 측정하는 실험을 할 때, 이웃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그 건물을 가리켜 지구의 무게를 다는 곳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광식 칼럼니스트 joand999@naver.com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레스토랑의 번성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레스토랑의 번성

    춥고 배고플 때 따끈한 국물 한 사발만큼 기운을 북돋아 주는 특효약이 있으랴. 레스토랑은 애초에 식사를 제공하는 장소가 아니라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국물을 의미했다. 1765년 파리 루브르궁 근처에 근대적 식당이 문을 열었다. 여기서는 고기 국물로 만든 맑은 수프와 몇 가지 요리를 내놓아 인기를 끌었는데, 사람들은 이 수프를 레스토랑이라 불렀다. 레스토랑 파는 곳이 하나 둘 늘면서 문 앞에 그날 먹을 수 있는 요리를 알리는 표지판을 내걸고, 테이블에 앉은 손님에게는 작은 표지판을 제공해 음식을 고르게 하는 아이디어도 등장했다. 레스토랑이 만개한 것은 19세기의 일이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자 귀족들은 목숨을 잃거나 파산하거나 망명길에 올랐다. 그들이 거느린 요리사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됐다. 이들은 까다로운 귀족의 입맛에 맞추느라 갈고 닦은 솜씨를 무기로 식당을 열었다. 부르주아 계층은 요리별로 가격이 매겨진 메뉴판을 보고 원하는 것을 골라 식사하는 데 재미를 붙였다. 1830년대 파리에는 식당이 2000여개로 불어났다. 레스토랑은 수프가 아니라 식당을 의미하는 어휘가 돼 프랑스 아카데미사전에 올랐다. 제르벡스는 불로뉴공원 안에 있는 레스토랑 ‘프레 카탈랑’의 한때를 보여 준다. 1905년 파리시는 이곳에 카지노와 고급 레스토랑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카지노 건설은 무산됐으나 레스토랑은 문을 열자 곧 명소로 떠올랐다. 신고전주의풍으로 지어진 레스토랑은 식당이라기보다 상류층 사교클럽 같은 분위기다. 주렁주렁 드리워진 샹들리에가 앞마당까지 훤히 밝히고 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손님들은 당대 사교계를 주름잡던 인사들이다. 앞마당에서는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애너 굴드, 그녀의 남편, 화가의 부인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미국 부호의 딸인 애너는 막대한 지참금을 싸들고 대서양 건너 시집을 왔다. 사람들은 “애너의 예쁜 데는 등뿐”이라고 농담을 했다. 등(dos)과 지참금(dot)의 발음이 같은 데 착안한 말장난이다. 화가는 짓궂게도 그녀를 뒷모습으로 그려 넣어 이 농담에 동조했다. 이 사치스런 레스토랑은 오늘날도 건재하다. 미술평론가
  • [우주를 보다] 목성 남반구 휘감는 대적점과 거대 폭풍 포착

    [우주를 보다] 목성 남반구 휘감는 대적점과 거대 폭풍 포착

    신비로운 거대한 기체 행성의 민낯이 생생한 사진으로 공개됐다. 지난 18일(현지시간) 미 항공우주국(NASA)은 탐사선 주노가 촬영한 목성의 남반구 모습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마치 유화 물감으로 휘갈려 그린듯 목성의 표면이 인상적인 이 사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붉게 멍든듯한 대적점의 모습이다. 목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적점(大赤點)은 대기현상으로 발생한 지옥같은 폭풍이다. 19세기에 관측될 당시 대적점은 지구보다 2~3배 크기로 측정됐으나 1979년 보이저 1, 2호의 관측 결과 지구보다 2배 정도 큰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최근 주노 탐사에 따르면 대적점은 보이저호 때보다 폭은 3분의1, 높이는 8분의1로 줄어들어, 현재는 1만6000㎞ 정도로 지구 하나 쯤은 쏙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대적점 바로 아래에는 역시 거대한 목성의 폭풍인 '오블 BA'(Oval BA)가 돌고있다. NASA 측은 "오블 BA는 대적점의 절반 정도 크기로 오래 전 비슷한 과정을 통해 생성됐다"면서 "최근 몇달 사이 색깔이 붉은 톤에서 흰색으로 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사진은 지난해 12월 21일 주노가 촬영한 것을 시민과학자들이 재가공한 것으로 탐사선과 목성 구름 상층부와의 거리는 3만8300~5만5500㎞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현대미술관 4관 4색

    현대미술관 4관 4색

    개관 50주년을 맞은 국립현대미술관이 다채로운 전시 라인업을 공개했다. 4관 체제 원년을 맞아 각 관의 특성을 적극 살리는 한편 이를 유기적으로 운영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16일 공개된 ‘2019 전시 라인업’에 따르면 국립현대미술관은 각 관마다 키워드를 둬 차별화를 꾀했다. 과천관은 ‘전통-근대-현대 미술을 관통하는 내러티브의 전개와 확장’, 서울관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 미래를 그리는 상상’, 덕수궁관은 ‘한국 근대미술의 발굴과 심화’, 지난달 개관한 청주관은 ‘미술품 생애주기에 대한 개방과 공유’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전시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과천·서울·덕수궁 3관 공동 기획전 ‘광장’이다.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해방·자유·열망’을 모티브로 시대별 미술의 역할과 작가들의 창작 활동을 ‘광장’을 통해 살펴보는 전시다. 10월부터 시작되는 덕수궁관 전시(‘광장, 해방’)에서는 19세기 말 개화기에서부터 해방까지 격동의 시기에 의병 활동, 독립 운동 등 해방의 대서사를 지켰던 의로운 인물들과 그 유산에 대해 살펴본다. 같은 시기 과천에서는 해방 이후 한국 현대 미술사를 사회와 예술, 삶과 연계하고 9월 서울관 전시에서는 ‘광장’ 이후에 개인들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 되짚는다. 한국 미술사를 정리하려는 노력도 여전하다. 김구림의 ‘1/24초의 의미’(1969)로부터 태동한 한국 비디오 아트의 역사를 조망하는 전시 ‘한국 비디오 아트 6999’가 11월부터 과천관에서 열린다. 덕수궁관에서는 향후 3년 단위로 개최할 ‘근대미술가의 재발견’ 시리즈를 통해 요절하거나 월북 등의 이유로 조명받지 못했던 작가들을 발굴, 소개한다. 과천관에서는 일본에서 주로 활동한 추상화가 곽인식 탄생 100주년 회고전이, 서울관에서는 박서보, 김순기의 개인전이 열린다. 해외 작가로는 4월부터 서울관에서 20세기 초·중반 북유럽 아방가르드와 사회참여적 예술운동을 주도한 덴마크 작가 ‘아스거 욘’전 등이 열릴 예정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美 유명 앵커 메긴 켈리 335억원 받고 NBC와 결별

    美 유명 앵커 메긴 켈리 335억원 받고 NBC와 결별

    인종주의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미국 유명 앵커 메긴 켈리(48)가 결국 NBC 방송과 결별하게 됐다.NBC는 11일(현지시간) 밤 성명을 통해 “켈리와의 견해차를 해소했으며 켈리는 더 이상 NBC 직원이 아니다”고 밝혔다. 계약기간이 1년 이상 남은 켈리는 남은 연봉인 약 3000만 달러(약 335억원)를 받을 것이라고 CNN 등은 보도했다. 켈리는 2017년 NBC와 3년에 6900만 달러(약 770억원)라는 천문학적 금액에 계약한 뒤 토크쇼를 진행해왔다. 지난해 핼러윈(10월 31일)을 앞두고 방송에서 “백인이 블랙페이스(흑인으로 분장하는 것)를 하면 문제가 되는데 우리 어릴 적엔 괜찮았다”고 말해 논란이 됐다. 블랙페이스는 노예제도가 잔존했던 19세기에 백인 배우가 흑인 연기를 하면서 흑인의 신체적 특징을 극적으로 과장한 분장을 일컫는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美NBC 앵커 메긴 켈리, 330억 받고 NBC와 결별

    美NBC 앵커 메긴 켈리, 330억 받고 NBC와 결별

    미국 NBC의 유명 앵커 메긴 켈리(48)가 무신경한 인종주의 발언으로 결국 NBC 방송과 공식 결별했다. 켈리는 남은 계약기간 1년간의 연봉 330억원도 받는다. NBC는 11일 밤(현지시간) 성명에서 “양측(NBC와 켈리)은 입장 차이를 해소했다. 켈리는 이제 NBC 직원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켈리는 NBC와 6900만 달러(759억 원)의 천문학적 몸값에 3년 계약했다. 계약기간을 1년 넘게 남긴 가운데 NBC는 켈리에게 남은 기간의 연봉으로 약 3000만 달러(335억 원)를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방송가의 한 정통한 소식통이 CNN에 전했다. 2016년 미 대선 당시 도널드 트럼프 후보와의 설전으로 이름값을 높인 켈리는 미국 3대 지상파인 NBC의 대표적 아침 토크쇼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메긴 켈리 투데이’를 진행해왔다. 그러다 지난해 핼러윈(10월 31일)을 앞두고 진행된 방송에서 무신경하게 내뱉은 발언이 논란이 됐다. 켈리는 금지령이 내려진 핼러윈 복장을 소개하면서 “정치적 올바름이 지나치게 과한 규제를 가하고 있다. 백인이 블랙페이스를 하면 문제가 된다. 우리 어릴 적엔 괜찮았다”고 말했다. 켈리의 블랙페이스 발언은 인종주의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블랙페이스란 노예제도가 잔존해있던 19세기에 백인 배우가 흑인 연기를 하면서 흑인의 신체적 특징을 극적으로 과장한 분장을 일컫는다. 변호사인 켈리는 2004년부터 폭스뉴스에서 일하다 2017년 초 거액의 몸값을 받고 NBC로 이적했다. NBC는 켈리를 영입했으나 기대만큼 효과를 올리지 못한 것으로 평가됐다. 켈리의 발언이 종종 논란을 일으켰고 아침방송에 적합하지 않은 캐릭터 탓에 그의 방송이 시청률 향상이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분석도도 많았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귀족 대구’ 때문에 미국 독립혁명이 시작됐다고?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귀족 대구’ 때문에 미국 독립혁명이 시작됐다고?

    지난해 말 강원 고성군 죽왕면 공현진 앞바다에 명태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일이 있었다. 표본을 추출해 유전자 분석을 해 보니 모두 자연산이었다. 어민들과 수산 전문가들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언제부턴가 동해에서 명태가 사라졌고, 이를 되살리기 위해 2014년부터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어민들과 수산 전문가들은 그 계획의 성공을 예측했지만, 놀랍게도 2만 1000여 마리의 명태는 모두 자연산이었다. 40여 마리가 더 잡히고 다시 사라진 명태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간 것일까. 수산 전문가들은 명태의 회유 경로와 습성 등을 더 세밀하게 연구해야 한다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장담하기 어려운 모양이다.기후변화와 남획으로 사라진 명태의 속성을 좀더 자세하게 볼 수 있는 책이 있다. 명태와 사촌쯤 되는 대구에 얽힌 역사와 조리 방법까지 서술한 마크 쿨란스키의 ‘대구’가 그것이다. 일단 책에서 말하는 대구는 ‘대서양대구’로 몸집이 크고 개체수가 많으며 맛이 담백해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어종이었다. 얕은 물을 좋아해서 잡기 쉬웠다. 전 세계에서 상업적인 생선이 된 이유다. 저자에 따르면 대구는 역사상 유럽인의 주요 식량이자 부를 쌓는 수단이었다. 8세기에 바이킹은 말린 대구, 우리로 치면 북어를 주식으로 삼아 유럽을 주름잡았다. 17세기 초 종교 박해를 피해 바다를 건넌 순례자들은 종교도 종교지만, 대구를 잡아 부자가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 앞바다에는 그만큼 대구가 풍부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어민들 중에 명태 잡아서 큰 부자가 된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대구를 잡아 큰돈을 번 유럽인들은 제법 많다. 18세기 초 뉴잉글랜드는 대구 무역의 중심지였는데, 대구 어업으로 가문의 부를 쌓은 사람들을 일러 ‘대구 귀족’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국제적인 상업 세력으로 부상했는데 소금에 절인 대구를 지중해 시장에 판매해 큰 이익을 챙겼다고 한다. 질이 떨어지는 대구는 서인도제도의 설탕 플랜테이션에 팔았다. 설탕 플랜테이션 노예들은 이 물고기를 주식 삼아 하루 16시간의 중노동을 버텨야만 했다. 저자는 말한다. “결과적으로 소금에 절인 대구는 카리브해의 노예들을 먹여 살려 노예무역을 더욱 활성화시켰다.” 저자는 대구 때문에 미국이 독립했다는, 듣기에 따라 황당한 주장도 펼친다. 역시 18세기 들어 영국이 식민지인 뉴잉글랜드의 당밀과 차에 세금을 매기고 대구 무역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었다. 대구를 잡아 부자가 될 꿈에 부푼 사람들이 이 조치에 반발해 미국 독립혁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1782년 영국과 평화협상이 벌어졌지만, 가장 큰 난제는 미국의 대구 잡이 권리에 대한 것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예나 지금이나 남획이 문제다. 더 많은 대구를 잡기 위한 노력은 끝이 없었는데, 19세기 들어 어업 현대화가 이뤄지면서 대구 개체수는 급감했다. 어업의 현대화를 이룬 수단은 주낙이었다. 프랑스는 국가적으로 선단에 주낙을 설치하기도 했다. 낚싯줄에 낚싯바늘이 여러 개 달린 이 장비에 얼마나 많은 대구가 잡혔을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대구의 남획을 걱정하면서도 저자는 각 장이 끝날 때마다 ‘한 요리사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대구 요리를 소개한다. 흥미롭지만 다소 생뚱맞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구’를 읽으며 자연산 명태도 돌아오고,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로 바다에 나간 치어들도 성장해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식탁이 더 풍성해질 테니 말이다. 이 기대도 다소 생뚱맞은 것 아닌가 저어된다.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 [안녕? 자연] 새해 첫날 멸종…세계 단 한마리 달팽이 세상 떠나다

    [안녕? 자연] 새해 첫날 멸종…세계 단 한마리 달팽이 세상 떠나다

    전세계인들이 새해 희망에 부풀어 있던 1일, 가문의 멸종을 고하고 사라진 달팽이가 있다. 최근 미국 하와이 토지 자연보호부(DNLR) 측은 그간 많은 사랑을 받아왔던 달팽이 조지가 1월 1일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14세 나이로 생을 마감한 조지에 얽힌 사연은 인류와 함께사는 수많은 생물종 보호에 대한 인식을 다시한번 상기시킨다. 조지는 '하와이안 나무 달팽이'(학명·Achatinella apexfulva)종으로 놀랍게도 지구 상에 단 한마리 남아 가문을 이어왔다. 사연은 이렇다. 지난 1997년 DNLR 측은 멸종위기에 놓인 고유 달팽이종을 보호하고자 하와이안 나무 달팽이 10마리를 포함한 여러 고유종들을 하와이 대학 실험시설로 데려와 키우기 시작했다. 당초에는 종을 번식시켜 개체수를 늘리려는 계산이었으나 태어난 새끼들은 다 죽고 조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이 달팽이에 조지(George)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갈라파고스의 명물이자 생물 보존의 아이콘인 핀타 섬의 마지막 코끼리거북 ‘외로운 조지’에서 따온 것이다. 곧 하와이의 조지 역시 생물보존의 아이콘으로 관심과 보호를 받아왔으나 결과적으로 자손을 남기지 못한 채 멸종됐다. 그렇다면 왜 하와이안 나무 달팽이는 멸종이라는 비극을 맞았을까? 대표적인 화산섬인 하와이는 원래 생물이 살지 않았으나 다양한 외래종이 새와 배 등 전달 통로를 통해 섬으로 유입됐다. 이후 외래종들은 하와이 특유의 자연환경 속에서 살면서 고유종으로 진화했다. 이중 하와이안 나무 달팽이가 대표적인 셈. 보도에 따르면 19세기만 해도 하와이 섬들에 사는 달팽이는 하루에 1만 마리를 잡을 수 있을만큼 흔하디 흔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 유럽인들 사이에 야구카드를 수집하듯 '달팽이 모으기'가 인기를 끌면서 하와이 달팽이들이 무차별적으로 잡혀 이 과정에서 일부 종이 멸종됐다. 다행히 하와이안 나무 달팽이는 살아남았으나 이번에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1955년 또다른 외래종인 아프리칸 랜드 달팽이(Achatina fulica)를 없애기 위해 육식성 포식 달팽이인 늑대달팽이(Euglandina rosea)를 섬으로 들였는데 문제는 하와이안 나무 달팽이같은 토착종까지 무차별적으로 잡아먹은 것. 하와이 대학 생물학자 마이클 G 해드필드 박사는 "우리는 달팽이가 사라지고, 또 사라지는 것을 그저 지켜만 봤다"면서 "늑대달팽이가 등장하면서 토착종의 3분의 1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쥐와 애완동물로 카멜레온이 들어오기 전까지 하와이는 달팽이의 보고였다"면서 "하와이의 여러 섬에 아직 남아있는 여러 달팽이종도 외래종과 기후변화 탓에 멸종위기에 직면해있다"고 덧붙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우피치 미술관 “독일이 명화 돌려줄 때까지 ‘도둑 맞음’ 붙이겠다”

    우피치 미술관 “독일이 명화 돌려줄 때까지 ‘도둑 맞음’ 붙이겠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이 1943년 나치 독일 군대가 훔쳐가 현재 독일인 가정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 하나를 돌려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문제의 작품은 1824년 피렌체에서 첫 선을 보인 네덜란드 화가 얀 반 하위섬의 작품 ‘꽃병’이다. 토스카니의 레오폴드 2세 대공이 19세기 초반 이곳 미술관에 가져와 100년 넘게 다른 네덜란드 화가들의 작품과 나란히 걸려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이탈리아 군이 진주하자 근처 마을로 옮겨졌다. 나중에 들어온 나치 독일군이 1943년 북쪽으로 퇴각하면서 다른 작품들과 함께 가져가버렸다. 1991년 독일 통일 이후 이 작품 반환이 이슈로 떠올랐으나 그 뒤 온갖 노력에도 결국 작품 반환은 이뤄지지 않았다. 에이케 슈미트 관장은 새해 첫날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 독일 정부는 이 작품을 박물관에 반환하는 것에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일 때문에 2차 세계대전과 나치의 상흔이 아직까지 치유되지 않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독일인 가족은 값을 쳐주면 작품을 돌려주겠다는 중재안을 내놓았지만 미술관 측은 거절했다. 독일 정부는 30년도 더 된 과거의 일이기 때문에 중재하기 어렵다는 뜻을 밝혔다. 독일인인 슈미트 관장은 나치가 훔쳐간 작품들에 대해서는 시효를 없애 약탈된 작품들이 “합당한 주인들”에게 반환될 수 있도록 하자고 촉구했다. 아울러 훔쳐간 작품이 돌아올 때까지 작품의 흑백 사진을 걸어놓고 그 밑에 영어와 독일어, 이탈리아어로 “도둑 맞음”이라고 적어놓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망신을 주겠다고 겁박하는 셈이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양의 탈을 쓴 돼지?…곱슬곱슬 털 가진 만갈리차 화제

    양의 탈을 쓴 돼지?…곱슬곱슬 털 가진 만갈리차 화제

    얼핏 보면 살찐 양 같지만, 사실은 돼지다. 지난 28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양털처럼 곱슬곱슬한 털을 가진 돼지 ‘만갈리차’에 대해 소개했다. 스코틀랜드 소도시 인버네스의 보울리 근처에서 돼지를 기르고 있는 짐 만은 만갈리차의 ‘털’이 스코틀랜드의 겨울나기에 더할나위 없는 ‘맞춤형 수트’라고 말했다. 자작나무 시럽을 만들고 있는 짐 만은 자작나무 근처의 고사리들을 없애기 위한 친환경적 방법으로 만갈리차를 이용하고 있다. 그는 “만갈리차는 멀리서 보면 양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영락없는 돼지”라며 웃었다.헝가리를 대표하는 동물인 ‘만갈리차’는 금색 또는 검은색의 곱슬곱슬한 털로 뒤덮여 있다. 양의 털과 비슷해 종종 양과 돼지의 교배종이라는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만갈리차는 멧돼지과의 포유류이며 양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그저 ‘털 달린 돼지’일 뿐이다. 데일리메일은 “만갈리차는 19세기 중반 루마니아 살론타, 헝가리 바코니 등지에서 서식한 헝가리 토종 멧돼지와, 세르비아의 슈마디아 멧돼지 같은 유럽산 멧돼지의 교배로 번식했다”고 보도했다. 만갈리차는 목초지 풀이나 감자, 호박 등을 주식으로 한다. 지방이 많고 살코기가 적어 현대에 들어 대체품종에 밀려났다. 그러나 최근에는 헝가리 농민 단체의 노력으로 그 개체 수가 조금씩 늘고 있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씨줄날줄] 상업포경 회귀하는 일본/이순녀 논설위원

    [씨줄날줄] 상업포경 회귀하는 일본/이순녀 논설위원

    국보 제285호인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는 고래 그림 48점이 새겨져 있다. 이 중 화살표 모양의 작살이 등에 박힌 고래와 20여명의 사람들이 배보다 큰 고래를 끌고 가는 모습은 7000여년 전 한반도 신석기인들의 고래잡이 풍습을 짐작하게 한다. 지금까지 기록으로 확인된 세계 최초의 고래사냥이다.미국 근대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허먼 멜빌의 ‘모디빅’은 19세기에 번영을 구가한 미국 포경업의 실상을 생생히 보여준다. 에이해브 선장의 포경선 ‘피쿼드’호가 흰 고래 모비딕을 쫓는 처절한 항해를 묘사한 소설은 포경선의 구조와 선실 배치, 포경의 기술과 해체 작업 등 포경에 관한 모든 것을 망라한 백과사전으로도 꼽힌다. 20세기 초까지 고래사냥은 기름 획득이 주목적이었다. 산업혁명이 본격화하면서 기계용 윤활유로 사용하는 고래기름의 수요가 급증한 탓이다. 고래기름이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된 뒤에는 식용을 위한 고래잡이가 일반화됐다. 대규모 포경이 무분별하게 이뤄진 탓에 고래는 멸종 위기에 처했다. 국제포경위원회(IWC)는 고래 개체수를 적절히 보호해 지속 가능한 포경 환경을 유지한다는 목적으로 1946년 설립됐다. 때문에 초기엔 회원국 다수가 포경국가였다. 그러나 고래 수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포경 반대 국가의 가입이 증가했고, 양측 간 대립은 격화됐다. 특히 IWC가 1982년에 상업포경을 일시 중지하는 결의안를 투표로 통과시키고, 이어 1986년부터 연구 조사 목적 이외의 고래잡이를 전면 금지하면서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전통적으로 고래고기를 즐겨 온 일본도 IWC 회원국이다. 1951년 가입했다. 상업포경 금지 조치 후 일본은 줄기차게 상업포경 재개를 허용하라고 IWC에 요청해 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엊그제 일본 정부가 IWC탈퇴를 공식 발표했다. 탈퇴가 확정되면 일본 근해나 배타적경제수역(EEZ)에서 고래잡이에 나설 방침이라고 한다. 일본은 그동안 남극해에서 연구 목적을 명분으로 고래잡이를 해왔지만, 환경단체로부터 끈질긴 비판을 받아왔다. 2014년엔 국제사법재판소가 일본이 연구 목적의 포경을 악용하지 않을 때까지 일본의 포경을 완전히 금지하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일본 정부의 IWC 탈퇴는 이미 예견된 수순이었다. 우리나라는 1978년 IWC 회원국이 됐다. 고래잡이는 불법이고, 우연히 그물에 걸려 죽은 고래만 유통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해 울산지검 검사가 불법 포획으로 추정되는 고래고기 장물 21t을 포경업자에게 돌려준 사건이 알려지면서 정부가 고래 포획을 방관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래저래 고래의 수난이 안타깝다. coral@seoul.co.kr
  •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세고비아의 새끼 돼지 요리와 ‘호세 마리아’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세고비아의 새끼 돼지 요리와 ‘호세 마리아’

    여행을 하다 보면 언제 다시 가더라도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풍경과 마주칠 때가 있다. 내게는 체코의 체스키크룸로프, 스페인의 톨레도, 그리고 세고비아가 그런 곳이다. 사는 사람에게는 답답한 일이겠지만 낡고 오래된 것들을 새롭게 바꾸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계승하고 유지한다는 철학이 깔려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게 살아남은 유무형의 유산들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현재를 사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기 마련이다.마드리드에서 한 시간가량 떨어진 작은 도시인 세고비아를 찾을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동화 속에서나 봄직한 알카사르성이다. 디즈니 영화 백설공주에 나오는 성의 모티프가 된 곳으로 흔히 세고비아성으로 불린다. 다른 하나는 기원전 1세기 때 로마인들에 의해 지어진 수로교다. 만들어진 지 천년이 넘는 건축물이라는 생각을 하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근사하다. 마지막은 세고비아가 자랑하는 전통요리 ‘코치니요’다. 스페인을 찾는 식도락가들이 반드시 먹어 봐야 할 음식으로 꼽히는 코치니요는 생후 3주 미만의 젖먹이 돼지를 통째로 구워내는 요리다. 물을 담은 도기에 새끼 돼지를 눕혀서 90분 동안 한 번 굽고 엎어서 같은 시간 동안 한 번 더 구워내는데 이렇게 조리하면 껍질은 바삭하면서 살은 부드럽게 익는다. 바삭거리는 껍질과 사르르 녹아내리는 속살의 식감 대조가 재미있다. 북경오리를 먹어 본 이들이라면 익숙한 식감이다. 비빔밥이 전주를 너머 한국의 대표음식으로 자리잡은 것처럼 세고비아의 코치니요도 스페인 대표 요리 중 하나로 꼽힌다. 그렇다고 세고비아를 코치니요 ‘원조’로 보는 건 곤란하다. 돼지를 통째 굽는 방식은 원초적인 조리법이다. 인류가 돼지를 키우기 시작한 시점부터 돼지 통구이는 가장 보편적인 요리였다. 아마도 키우던 돼지가 너무 일찍 죽었거나, 돼지가 클 때까지 참지 못한 성질 급한 이에 의해 새끼 돼지요리가 탄생했을 것이다.카스티야 지방의 별미로 꼽히는 코치니요는 세고비아 말고도 인근의 마드리드, 아빌라 등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어째서 세고비아가 코치니요의 성지가 됐을까. 18세기와 19세기 사이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향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세고비아는 마드리드로 향하는 길목 중 하나였다. 세고비아는 늘 순례자와 여행객으로 붐볐다고 한다. 여관이나 주점에선 이들에게 식사를 팔았는데 카스티야 전통요리인 코치니요도 그중 하나였다. 세고비아 시내엔 저마다 최고라 자부하는 코치니요 식당이 있다. 수로교 인근에 1884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곳도 있지만 그중에서 ‘호세 마리아’를 빼놓고는 코치니요를 논할 수 없다. 이 식당의 오너이자 셰프인 호세 마리아 루이즈 베니토는 ‘코치니요의 아버지’로 통한다. 단순히 전통요리를 계승했다는 차원을 넘어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코치니요를 세고비아를 대표하는 산업이자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1972년 밀라노에서 열린 첫 번째 세계 소믈리에 대회 동메달 리스트이기도 한 호세 마리아는 1982년 고향인 세고비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식당을 열었다. 그는 세고비아의 음식 유산 중 코치니요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그의 주된 관심사는 전통의 답습이 아니라 코치니요를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개선시킬까였다. 코치니요의 맛은 새끼 돼지의 상태에 따라 결정되는데 당시에는 종이나 크기를 구분하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생산됐다. 무엇보다 품질과 위생관리가 엉망이었다. 이렇다 보니 결과물의 품질도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호세 마리아는 코치니요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생산 단계부터 관여했다. 그는 생산자들과 협업해 코치니요 요리에 적합한 품종을 찾고, 최적의 상태로 고기를 출하하도록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힘을 썼다. 다른 식당의 셰프들과 코치니요 요리를 완벽하게 만드는 방법을 상의하는 한편 어울리는 와인을 찾기 위해 포도밭을 인수하는 등 열정을 보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세고비아는 2002년 새끼 돼지에 대한 품질 인증 마크를 얻어냈고, 코치니요 요리에 대한 주도권을 완전히 거머쥘 수 있었다. 식당에서 코치니요를 썰어주는 호세 마리아를 보고 있자니 일흔셋 나이가 무색할 정도였다. 그의 눈과 표정에서는 아직도 현역임을 과시하는 충만한 열정이 엿보였다. 호세 마리아를 보며 생각해 본다. 전통유산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전통유산이 앞으로도 힘을 갖게 하려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먹음직스럽게 놓인 새끼 돼지요리 한 접시를 두고 많은 생각이 오갔다.
  • [애니멀 픽!] 판다보다 희귀한 개 ‘댄디 딘몬트’, 새끼 출산

    [애니멀 픽!] 판다보다 희귀한 개 ‘댄디 딘몬트’, 새끼 출산

    전 세계적으로 진귀한 개 품종 중 하나에 속하는 댄디 딘몬트 테리어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귀여운 새끼를 출산했다. 영국이 원산지인 댄디 딘몬트 테리어는 본래 털이 많은 사냥개였지만, 19세기 들어 인기가 높아지고 전문가들이 교배와 개량을 거쳐 오늘날의 외모를 가지게 됐다. 과거에는 쥐를 잡는데 능한 반려견으로도 인기를 끌었으며, 현재는 똑똑하고 친화력이 좋아 아이를 키우는 집에서 더 큰 사랑을 받는다. 영국 현지 언론의 23일 보도에 따르면 댄디 딘몬트 테리어는 2006년 영국애견협회(UK Kennel Club)이 연간 등록 마릿수가 300마리 미만일 경우에만 지정하는 희귀견으로 지정됐다. 2003년도에는 1년간 90마리가 등록됐는데, 이는 같은 해 9823마리가 등록된 웨스트하일랜드 화이트 테리어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다. 2015년에 79마리가, 2016년엔 80마리가 등록됐다. 영국에서는 한때 멸종위기에 놓였었던 판다보다도 희귀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드문 댄디 딘몬트 테리어에게서 운 좋게 새끼를 받아 낸 주인인 앤디 캐네디(54)는 “얼마 전 댄디 딘몬트 테리어 품종의 반려견이 새끼 5마리를 출산했다”고 밝혔다. 이어 “새끼 한 마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분양할 예정이며, 이미 두 마리는 분양을 마쳤다. 한 마리당 1000파운드(약 142만원) 정도에 분양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영국애견협회의 한 관계자는 “댄디 딘몬트 테리어의 개체수는 15년 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다행히 지난 18개월 동안 등록 마릿수가 증가한 편”이라면서 “일반적으로 이 품종의 개는 한번에 낳는 새끼의 수가 3마리 정도인데, 5마리를 한꺼번에 낳았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 전했다. 이어 “우리는 댄디 딘몬트 테리어의 새 주인들이 강아지를 잘 보살펴 개체수를 늘리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유시민 ‘어용지식인’ 복귀선언…유튜브·팟캐스트 진행한다

    유시민 ‘어용지식인’ 복귀선언…유튜브·팟캐스트 진행한다

    “정계 복귀 절대 안 해”“유시민 테마주? 전부 사기”“경제 살릴 대책 학자들도 몰라”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어용지식인’ 복귀를 선언했다. 일주일에 한 번 유튜브와 팟캐스트를 통해 국민 관심이 큰 국가 정책과 이슈를 정리하겠다고 밝혔다. 유 이사장은 이런 대외활동이 정계 복귀 초읽기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했다. 주식시장의 이른바 ‘유시민 테마주’도 본인과 무관한 “사기”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유 이사장은 지난 22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추계예대 콘서트홀에서 열린 ‘노무현재단 회원의 날’ 행사에서 근황을 전했다. ‘시민에게 듣는다’라는 이름으로 마련된 이날 토크콘서트에서 유 이사장은 회원들의 질문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 자리에서 유 이사장은 노무현재단 차원에서 팟캐스트와 유튜브 채널 개설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처음 공개했다. 그는 17대 대선 당시 대통합민주신당(현 더불어민주당)의 이른바 ‘박스떼기’ 논란에 대해 최근 어떤 시사평론가가 언급한 일을 들며 “방송에 나갔다면 바로 (반박)했을텐데 말할 기회가 없었다”며 “폼 잡고 하차했는데 방송에 다시 나갈 수는 없고 대신 재단이 팟캐스트를 하나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유 이사장은 지난 2016년 1월부터 지난 8월까지 JTBC 시사프로그램 ‘썰전’의 패널로 활동하다 하차했다. 유 이사장은 “진행은 제가 하고 이야기손님 등은 준비가 끝나면 정식으로 알려드리겠다”며 “요새 대세라는 유튜브도 ‘정복’해볼까 한다”고 말했다.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채널을 개설하는 이유에 대해 유 이사장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근거 없이, 또는 잘못된 사실을 갖고 비방하는 파동이 올해 여러 차례 있었는데 대처법이 없었다”며 “우리 스스로 얘기할 수 있는 매체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유 이사장의 이런 발언을 ‘어용지식인 복귀선언’으로 받아들였다. 유 이사장은 지난해 5월 한겨레TV ‘김어준의 파파이스’에 출연해 “진보 정부가 출현한다면 사실에 의거해서 제대로 비판하고 제대로 옹호하는 ‘범진보 정부의 어용지식인’이 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유 이사장은 이날 토크콘서트에서 “어용지식인 은퇴 비슷하게 했는데 다시 해야 할 거 같다”며 “최근에 국민 관심이 큰 국가 정책과 이슈에 대한 보도를 챙겨보면 갑갑하다. 반지성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혹세무민 보도가 넘쳐난다”고 지적했다. 유튜브 방송을 정치복귀를 위한 몸풀기로 해석하는 일부 언론에 대해서도 유 이사장은 경계했다. 그는 “가만히 있는 저를 자꾸 언론사들이 괴롭힌다. 여론조사 후보로도 넣는데 법을 찾아보니 강제로 못하게 할 방법이 없다”며 “그래서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에 여론조사시 본인을 넣지 말아달라는 강력한 요청이 있었다는 안내문을 보내려고 한다. 그게 법적으로 가능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유 이사장은 주식시장에서 ‘유시민 테마주’로 거론되는 기업도 자신과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제가 사외이사로 있는 기업(보해양조)이 있는데 그 회사 대주주가 제가 생각하기에 괜찮은 일을 하려고 해서 도움이 되고자 맡은 것”이라면서 “(테마주로 분류한) 다른 회사들도 대학 동기가 대표로 있거나 제가 알던 분이 사외이사로 있는 곳인데 저는 그분들 전화번호도 모른다”고 말했다. 유 이사장은 “제가 선거에 나갈 것도 아니고 결국 자기들끼리 돈가지고 장난치는 것”이라면서 “그것도 법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더라. 피곤하다. 저를 그만 괴롭히십시오”라고 말했다.유 이사장은 최근 악화된 경제상황과 청년일자리 문제로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지지도가 하락하고 있는 것에 대해 방법이 있는데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뾰족한 해법이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유 이사장은 “경제가 안 좋아져서 대통령이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며 “사람들은 오래 기다려주지 않는다. 경제는 빨리 좋아지지 않기 때문에 지지율이 떨어지는 것은 예견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솔직히 얘기하자. 노무현 정부때도 경제성장률 공약은 사기니까 하지 말자고 했다”며 “불황에 빠진 국민 경제를 다시 고도성장으로 끌어올릴 방법을 안다면, 그런 방법이 있다면 어느 나라가 가난하게 살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기구들이 내놓은 전망을 보면 미국, 유럽의 내년 경제성장률이 1%대로, 2%대인 우리나라 성장률 전망보다 낮은 것을 보면 선진국도 비슷한 문제에 당면했다는 게 유 이사장의 설명이다. 유 이사장은 미국의 경제학자 폴크루그먼의 말인 “현대경제학은 19세기 의학과 비슷하다. 건강을 유지하는 데 적합한 조언은 많이 해줄 수 있지만 정작 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지 못 한다”를 인용했다. 그는 “지금의 경제학을 학자들은 과학이라고 말하지만 환자들을 치료하지 못한다”며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컴퓨터, 인공지능 등 과학기술의 발달 때문이다. 산업혁명 시절 기계가 사람을 대체했던 상황과 똑같다”고 말했다. 이어 유 이사장은 “또 고학력의 청년들을 흡수할 일자리가 사람 수보다 훨씬 적게 생기기 때문에 일자리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 대해 전문가들이 똑바로 얘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유명 전문가가 언론과 한 인터뷰를 보니 “문재인 정부의 정책이 엉터리이고 산업정책이 없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며 “그러면 어떻게 산업을 키워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잘 키워야 한다’고 대답하더라”고 전했다. “지금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해결방법을 알면서도 팽개치고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유 이사장은 말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열린세상] 지역구에 목매는 정치, 던져 봄이 어떠할까/조성대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

    [열린세상] 지역구에 목매는 정치, 던져 봄이 어떠할까/조성대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비유가 있다. 19세기 말 영국의 정치경제학자 윌리엄 로이드가 제기했고, 이후 재정학이나 생태학에 널리 소개된 이론이다. 이야기는 19세기 영국의 마을 공동 소유 목초지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공유지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은 이 마을의 소중한 가치였고 가축들이 목초지의 수용 능력을 초과하지 않는 한 하등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마을 농부들의 욕심은 이에 머물지 않았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더 잘살고 싶어 몰래 가축수를 늘려 갔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눈앞에 펼쳐진 것은 다름 아닌 황폐화된 목초지였다.개인의 이익만을 따지는 행동이 전 사회의 공공재를 파멸시키는 실례를 굳이 영국까지 가서 찾을 필요는 없다. 지난 8일 새벽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예산안을 둘러싼 여야 정치인들의 행태가 바로 그 짝이기 때문이다. ‘밀실 야합’, ‘소소위 쪽지예산’, ‘실세 예산’ 등의 비난을 차치하고라도 가장 뼈아픈 대목은 노인기초급여 예산 4100억원과 청년일자리 예산 6000억원 등 국민 복지예산이 사라지고 지역구 예산이 1조 2000억원 늘어 났다는 점이다. 그리고 너 나 할 것 없이 “지역구를 위해 이만큼 했소이다”라며 대대적인 치적 홍보에 들어간다. 언론의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뉴스를 계속 생산해 주었으면 하는 눈치다. 이 정도는 양반이다. 심지어 자치단체장의 1호 공약이었고, 지역 여야 의원들이 모두 협력해 얻어 낸 ‘경부선 철로 지하화’ 관련 예산 35억원을 마치 혼자 힘으로 따낸 것처럼 지역구 홍보에 열 올리는 국회의원도 있으니 말이다. 단언컨대 합리적 인간이 비합리적 사회를 낳는다는 이 역설은 그 지역구에서 있을 ‘차기 총선에서 재선’이라는 애물단지로부터 자유로울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한 푼이라도 더 갖다 주어야 하고, 누가 더 많이 갖고 왔나가 당선의 기준이 되는 사이클의 반복은 결국 나라살림을 황폐화시킬 것이다.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왜 지역구여야 하는가다. 서울 성북구 사람들이 갑과 을로 따로 대표가 돼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성북구가 인접한 강북구와 무슨 갈등 관계에 있기에 따로 의원을 두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광주는 어떠하며 부산은 또 어떠한가. 서구와 동구가, 남구와 북구가 정말 다른가. 의회 구성에서 지역구가 등장한 이유는 지리적 구획이 대표를 선출하기에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구는 사회적 이해관계들을 골고루 대표하기에 좋은 단위가 아니다. 특히 1등만 뽑는 소선거구제는 국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기 어렵다. 소금 장수와 우산 장수 중 수적 우위를 누리는 사람들만을 대표하기 쉽다. 그런데 좋은 의회는 소금 장수와 우산 장수 모두 골고루 대표가 되게 해야 한다. 지지고 볶고 싸우더라도 일단 대표가 돼야 배제되거나 소외되는 국민들이 줄어든다. 그런데 우리의 의원님들께서는 지역구를 포기할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합의했다고 하나 자기 밥그릇을 내려놓기 싫다는 속내가 여기저기서 느껴진다. 합의안 내의 ‘적극 검토’ 문구는 민주, 한국 양당의 이런 속내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아예 지역구를 폐지하고 권역 단위로 대표를 선출해 보자. 한 예로 17개 시·도를 권역 단위로 인구수에 따라 의석수를 할당하고 정당득표율로 의석을 배정해 보자. 국회의원은 더이상 성북갑을 대표하지 않고 서울시를 대표한다. 광주를 대표하고 부산을 대표한다. 지역구가 단지 넓어졌을 뿐 사라진 것이 아니다. 기존 지역구 현안은 광역의회의 몫으로 넘기자. 지역구가 넓어지니 몰래 쪽지예산을 밀어 넣거나 함께 해놓고 자기 치적이라고 과장 홍보할 필요도 없다. 권역의 이기심은 정당의 전국 정책으로 견제된다. 지역 발전 문제는 권역 내 정당 간의 공개적 경쟁과 협력으로 풀어 간다. 공개되니 차기 선거에서 보상과 처벌도 쉬워진다. 많이 보상받기 위해 정당도 내부 개혁에 열을 올린다. 무엇보다 정당지지율만큼 의석이 배정되니 소금 장수도 우산 장수도 모두 대표가 된다. 의원수를 늘리지 않아도 된다. 그동안 의석을 도둑맞았다고 주장해 온 소수 당들도 불만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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