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19세기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 제조사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 사형제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5,303
  • [기고] 로힝야 문제, 그리고 종교갈등/이정호 신부·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종교간대화 위원장

    [기고] 로힝야 문제, 그리고 종교갈등/이정호 신부·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종교간대화 위원장

    로힝야 문제를 상기해 보자. 국교가 있는 나라에서 소수 종교가 겪는 어려움은 늘 있지만 유엔이 “인종청소의 교과서”라고 정의할 정도로 로힝야족에 대한 처우는 가혹하다. 그런데 이 문제는 19세기 미얀마를 식민통치한 영국의 대규모 이주정책이라는 배경 없이 이해하기 어렵다. 이후 식민지배와 관련된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이 얽히면서 강제이주된 무슬림, 특히 로힝야족에 대한 미얀마인들의 적개심은 어떻게 할 수 없게 됐다. 문제의 원인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현상만 남은 로힝야 문제는 종교갈등이라는 단순한 도식으로 남았다. 식민지배로 피해를 본 미얀마이고,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땅도 없는 강제이주자인데, 식민지배와 강제이주의 책임을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 문제의 원인은 제쳐 두고 종교갈등, 문화충돌, 혹은 반인륜적 국가정책만 운운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전 필자가 거주하는 경기도 남양주 수진사에 방화 사건이 있었다. 개신교 신자가 한 일이란다. 왜 이 땅의 개신교인은 사찰을 공격하는 것일까. 잘못 배워서 그렇다. 누군가 잘못 알려줬기 때문이다. 이 땅에 개신교가 전래될 당시 서구의 시대정신이 복음인 것처럼 들어왔다. 미얀마 문제의 원인이 된 시대정신이다. 식민지배와 노예제도에 정당성을 제공했던 기독교와 밀접한, 서구와 기독교에 대한 배타적 우월의식으로 가득한, 지금으로선 납득하기 어려운 낡은 시대정신이다. 그런데 그 낡고 오래된 것을 아직도 ‘신앙’이라 믿는 이들이 있다. 이웃 종교의 시설 혹은 신자를 향한 공격은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지만, 수진사 방화는 더 심각하다. 신앙적 신념으로 방화하는 그 순간, 그는 주변에 있던 요양시설, 아파트는 보지 못했을까. 이웃들이 처할 위험을 직감하지 못했을까.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황금률은 그 순간 그의 행동과 생각, 그 어디에도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를 사로잡고 있던 생각은 식민지배와 착취, 노예화를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던 낡고 쓸모없는 이전 시대의 잔재일 뿐이다. 새로운 시대이다. 세상은 과거와 판이하게 달라졌는데 언제까지 과거의 잣대와 생각으로 타자와 이웃을 재단할 것인가. 자신의 진리를 시대 변화에 따라 재해석하지 못하는 종교는 근본주의적 해결법을 택하기 쉽다. 정치에 기생하거나, 경제적 이권을 추종하면서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종교적 순수성을 강요하기 쉽다. 더이상 속지 말아야 한다. 강제이주가 범죄이듯, 이웃 종교를 공격하고 그 상징을 훼손하는 것도 범죄다.
  • [강남순의 낮꿈꾸기] ‘커밍아웃’, 살아 있는 생물체로서의 언어

    [강남순의 낮꿈꾸기] ‘커밍아웃’, 살아 있는 생물체로서의 언어

    언어란 살아 있는 생물체와 같다. 하나의 새로운 개념이 등장할 때 그 개념과 처음 연결된 특정한 정황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개념이 언제나 고정돼 동일한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한 개념의 등장은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 나무는 자란다. 나무가 처음 심었을 때의 모습을 계속 지녀야만 한다고 요구할 수 없다. 그 나무는 자라서 사방으로 가지를 뻗치고, 그 가지는 다양한 공간에서 새롭게 그 존재를 드러낸다. 최근 ‘커밍아웃’ 개념의 사용이 사회정치적 논란이 됐다. ‘커밍아웃’은 성소수자에게만 사용해야 한다는 이해 때문이다. 그런데 ‘커밍아웃’을 포함해서 특정한 개념이 사용돼 오는 역사를 살펴보면, 언어란 언제나 다양한 정황에서 크고 작은 가지를 치고 사방으로 뿌리를 내리는 살아 있는 생물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미등록이주자 자녀·뚱보 등 커밍아웃 확대 사회학 교수인 애비게일 서게이는 2020년 2월에 출간한 ‘컴 아웃, 컴 아웃, 당신이 누구든지’ (Come Out, Come Out, Whoever You Are)에서 ‘커밍아웃’이라는 개념의 역사에 대해 세부적으로 조명한다. 원래 ‘커밍아웃’은 상류층 엘리트 여성들이 사교계의 첫 무대에 들어서는 것을 지칭하는 의미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남성 동성애자’를 지칭하는 게이(gay) 문화는 미국의 대도시 저변에 확대되기 시작했다. 게이 문화는 이렇게 상류층 여성의 사교계 첫 진출을 의미하는 ‘커밍아웃’이라는 개념을 빌려서 사용하기 시작한다. 1930년, 40년, 50년대에 게이 문화에 대한 반격이 노골화되면서, 결과적으로 이들은 점점 자신의 성적 지향을 숨기며 살게 된다. 1960년대 말, 특히 1969년 미국 뉴욕시에서의 ‘스톤월 항쟁’ 이후 ‘커밍아웃’은 이성애자로 자신을 위장하는 동성애자들을 ‘벽장에 있는 사람’과 ‘커밍아웃한 사람’이라는 두 부류로 나누어 병렬하는 것으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성소수자 권익 확장을 위한 운동에서 성소수자 스스로 벽장으로부터 ‘커밍아웃’해야 한다는 요청이 강하게 제기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 ‘커밍아웃’은 성소수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사용하기 시작한다. 주류 언론에 “보수주의 벽장으로부터의 커밍아웃”(Coming Out of the Conservative Closet)과 같은 제목의 정치 칼럼이나 기사들이 등장하면서 ‘커밍아웃’이라는 말은 성소수자만이 아니라 정치권에까지 확장돼 사용돼 왔다. 1970년대 이후 성소수자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성공적으로 진행돼 성소수자들의 권리 문제가 개선되고 확장되면서 커밍아웃 운동은 이렇게 다양한 양태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커밍아웃 운동은 또한 ‘외모차별주의’에 대한 저항운동으로도 발전한다. 소위 ‘뚱뚱한 사람’이라고 놀림받는 이들이 자신의 외모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비만 수용 운동’(fat acceptance movement)의 일환으로 커밍아웃 운동이 전개됐다. ‘비만 해방 운동가’(fat liberation activist)인 메릴린 완은 소위 뚱뚱한 몸으로 사는 것은 마치 성소수자로 사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사회적으로 낙인을 찍는 ‘비만 혐오’(fatphobia)가 팽배함을 토로한다. 이들에게 ‘커밍아웃’은 자신이 뚱뚱하다는 것을 당당히 받아들이면서, 이제 자신의 뚱뚱한 몸을 약점이나 열등한 것으로 보는 시각을 거부하는 것이다. 또한 ‘커밍아웃’은 이민정책 문제에서도 등장했다. 미국에서 미등록이주자의 자녀들이 숨어 있던 위치에서 ‘커밍아웃’하면서 이들의 커밍아웃은 ‘미등록이주자 청년운동’으로 확장됐다. 특히 미등록이주자 청년들의 커밍아웃 운동은 벽장 속에 숨어 있지 말고 “미등록이주자라고 대담하게 커밍아웃하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새로운 사회정치적 운동으로 확장됐다. 미등록이주자 청년 운동의 한 지도자는 성소수자 운동가였던 하비 밀크의 말인 “만약 당신이 커밍아웃하지 않으면 아무도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른다.… 당신이 자신을 위해서 일어나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를 인용하면서 미등록이주자 청년들이 ‘커밍아웃’하도록 설득하고 행동하게 함으로써 중요한 정치적 운동을 활성화했다. ‘미등록이주자’로 커밍아웃한 4명의 청년은 ‘드리머’(The DREAMers)라는 조직을 구성한 뒤 2010년 5월 17일 당시 애리조나주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사무실을 점거하며 권리보장을 위한 운동을 했다. 또한 미국 전역에서 점거, 시위, 단식투쟁, 행진 등을 하면서 이들이 미국에서 살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주는 ‘드림 법안’(DREAM Act)을 지지하고자 하는 운동을 확산시켰다. 미등록이주자 청년들의 ‘커밍아웃’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미국에서 이민정책에 대한 폭넓은 정치적 논의를 하는 데에 기여했다. ●미투운동도 더이상 숨지 말라는 메시지 ‘커밍아웃’ 운동은 종교의 영역에서도 등장했다.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지 못하고 이성애자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과 같이, 기독교가 중심 종교인 사회에서 무신론자들은 유신론자인 것처럼 산다. 이렇게 종교적 벽장 속에 숨어 사는 것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무신론자로 용감하게 ‘커밍아웃’하라는 “아웃 캠페인”이 전개됐다. ‘이기적 유전자’와 ‘만들어진 신’의 저자이며 무신론자로 알려진 리처드 도킨스는 “이 세계에는 벽장에 갇혀 살고 있어 커밍아웃해야 하는 무신론자들이 많다”고 하면서 미국에서 시작된 “아웃 캠페인”에 대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커밍아웃’은 이렇게 다양한 정황에서 사회적 낙인이나 불명예가 두려워 침묵하던 개인들이 여러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의 권리와 인정, 그리고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한 용기 있는 긍정적 행위로 사용된다. 다층적 사회정의를 위해 필요한 소수자들의 행위인 것이다. 커밍아웃은 주로 개인의 자발적인 행위로 사용되지만, 동시에 외부에서 요구되는 ‘풍자적 의미’로도 쓰인다. 실제로는 보수주의자인데 아닌 척하지 말고, 본 모습을 드러내 ‘커밍아웃’하라고 촉구하는 풍자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커밍아웃’이라는 개념은 또한 미투운동에서도 숨어 있는 피해자에게, 또는 가해자에게 더이상 숨어 있지 말고 나오라는 각기 다른 함의를 지닌 의미로도 사람들은 사용한다. ●게이는 원래 여성 성노동자 지칭하는 말 ‘게이’라는 개념의 역사도 변화돼 왔다. 게이란 원래 여성 성노동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다음에는 남성 동성애자를, 또한 더 나아가 ‘동일한 젠더를 좋아하는 사람 일반’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쓰이기도 한다. 또한 지금은 ‘세계시민’이라는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코즈모폴리턴’이라는 개념도, 나치 시대에는 유대인과 같이 ‘계획된 대량학살의 모든 희생자’를 지칭하면서 ‘사형선고’와 같은 매우 부정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렇듯 하나의 개념은 결코 동일하게 고정되지 않는다. 언어란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새로운 형태로 태동하기도 하는 살아 있는 생물체와 같기 때문이다. ‘커밍아웃’과 같은 하나의 개념이 어떠한 정황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의미로, 또 다른 정황에서는 부정적이거나 냉소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나의 개념이 이렇듯 다양한 정황에서 상이한 함의를 지니고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불필요한 논쟁에 빠질 때, 사회정치적 에너지는 잘못된 방향으로 낭비된다. 예를 들어 미등록이주민 청년들이 자신들이 미등록이주자라고 ‘커밍아웃’하는 운동을 전개하면서 한국의 이민정책이 지닌 문제점에 대한 항의와 시위를 한다고 하자. 그런데 정치계나 언론이 정작 관심을 둬야 할 중요한 이민정책에 대한 논의는 외면한 채, 왜 성소수자들도 아닌데 ‘커밍아웃’이라는 말을 사용하느냐는 것에만 관심을 쏟는다면 사회적 에너지를 오용하고 낭비하는 무책임한 행위가 된다. 그 어떤 집단이나 개인도 ‘커밍아웃’과 같은 특정한 개념에 대한 절대적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한국의 사회정치적 에너지를 빗나가는 방향으로 쏟아붓는 것은 모두가 경계해야 할 문제다. 우리가 가진 시간이나 에너지는 제한된 것이기에, 그것을 어디에 써야 하는가를 분별하는 것이야말로 개인은 물론 정치인과 언론인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글 텍사스크리스천대(TCU)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그림 김혜주 서양화가
  • [그 책속 이미지] 디자인으로 편견에 맞선 여자들

    [그 책속 이미지] 디자인으로 편견에 맞선 여자들

    우리에겐 우주선 모양의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유명한 건축가 자하 하디드는 생전 비난과 공격에 시달렸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설계를 폐기해야 했을 때, 하디드는 “3중으로 운이 나빠서”라고 했다. 여성, 외국인, 표준을 벗어난 설계라는 ‘3중고’에도 그는 실력으로 유리 천장을 뚫었다. 책은 19세기 디자인 학교에서 21세기 IT업계에 이르기까지 디자인 분야에 도전해 성공한 여성 20명을 소개한다. 이들은 ‘여성’이라는 틀로 규정되길 거부하면서도, 그 상징성 때문에 자신이 다른 여성들의 롤모델임을 알고 있었다. “내가 다른 여성들에게 그들도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주어야 하는 입장이란 걸 잘 안다”는 하디드가 2011년 자신이 설계한 영국 리버사이드 미술관 앞에 선 모습은, 그래서 더욱 당당해 보인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피자, 허기를 채우는 완벽한 방법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피자, 허기를 채우는 완벽한 방법

    흔히 사람들이 요리사에 대해 오해하는 게 있다. 음식을 만드는 일을 하니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이와 큰 괴리가 있다. 본인이 만든 요리를 매번 맛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제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고 해도 매일같이 냄새를 맡고 진땀 흘리며 음식을 만들면 식욕이 싹 사라지기 마련이다. 역설적으로 식재료와 음식이 차고 넘치는 주방에서의 실생활은 배고픔과 허기의 연속인 경우가 대부분이다.배달과 야식문화 강국인 한국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온갖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시칠리아 남쪽 작은 도시에서 주방일을 마치고 야식을 먹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일주일에 절반 정도 운이 좋으면 오아시스처럼 갈 수 있는 곳이 있었으니. ‘지로 디 비테’(Giro di vite),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이곳은 헨리 제임스의 소설 ‘나사의 회전’에서 이름을 따온 피자 레스토랑이다. 고단한 외국인 노동자에게 피자는 그 어떤 음식보다 저렴하고 푸짐한 데다 맛도 좋은 완벽한 야식 메뉴였다. 이탈리아인에게 파스타는 집에서, 피자는 밖에서 먹는 음식으로 통한다. 파스타는 집에서 손쉽게 요리할 수 있지만, 피자는 커다란 오븐이나 화덕이 있어야 제대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도 피자의 본고장 하면 나폴리를 든다. 그럼 나폴리가 피자의 원조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빵에 재료를 올려 먹는 음식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절부터 존재해 왔다. 먼 곳으로 원정을 떠나는 이들, 특히 군인에게 빵은 접시 대용으로도 사용됐다. 물론 그 음식을 두고 피자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피자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0세기에 쓰인 한 문서다. 당시 한 임대계약서에는 “매년 임대료로 피자 열두 판과 돼지고기 어깨살과 콩팥을 지불해야 한다”고 돼 있다. 피자 외양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 당시 피자는 오늘날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었을 걸로 추측된다. 16세기에 피자가 다시 등장하는데 이때 피자는 도우 위에 버터와 설탕을 바른, 일종의 후식용 과자나 케이크 형태였다. 신대륙에서 건너온 토마토가 이탈리아에서 식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전래된 지 100년이 지난 후였다. 모종의 이유로 나폴리 사람들은 빵 위에 토마토소스와 각종 재료를 올려 먹었고, 이것이 현대적인 피자의 원형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9세기 나폴리에서 파는 피자는 길거리 음식이었다. 피자를 만드는 사람, 피자이올로들이 구운 피자는 곧바로 바구니에 담겼고, 피자가 든 쟁반을 머리 위에 이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팔았다고 한다. 뭔가 익숙한 장면이다. 당시 피자는 빈곤한 사람, 부랑자, 바쁜 이들을 위한 음식이었기에 토핑이라고는 토마토소스에 오레가노, 후추, 마늘이 전부였다. 보잘것없는 재료들로 만들었어도 배고픈 이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렇다면 나폴리의 길거리 음식이었던 피자가 어떻게 글로벌 외식 메뉴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피자의 운명은 대서양을 건너가며 급변했다. 19세기 극심한 가난을 겪은 남부 이탈리아인은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대거 이민을 떠났는데 여기엔 나폴리인도 상당수였다. 새로운 터전에 자리잡은 이들에게 피자는 그리운 고국 음식, 일종의 소울푸드였다. 일부 이탈리아인은 고향 음식을 만들어 팔았고 피자도 그중 하나였다. 1905년 미국에 처음 피자 체인점이 등장했는데 그리 대중적이지는 않았다. 2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에 다녀온 군인들에게 추억의 음식이 된 피자는 1958년 ‘피자헛’의 등장과 함께 미국 외식업의 주류로 급성장했다. 미국이 강대해지는 만큼 피자도 전 세계 곳곳에 영향력을 떨쳤다.미국식 피자가 성행하자 위기감을 느낀 이탈리아에서는 나폴리식 피자를 보호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84년 설립된 나폴리피자협회는 전통 방식대로 피자를 만드는 곳에 한해 ‘정통 나폴리 피자’라는 인증을 준다. 국내에도 이런 인증을 받은 곳이 있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건 전통 나폴리식 피자 인증이 곧 ‘맛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반죽하는 시간, 재료의 상태 등에 따라 맛은 얼마든지 달라진다. 인증은 단지 한 가지 방식으로 만든 한 가지 맛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의 가치를 지킨다는 존중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탈리아에 가 보면 둥그런 피자도, 네모난 피자도 있다. 꼭 나폴리 방식이 아니면 어떤가. 좋은 재료를 사용해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든다는 것, 그 음식으로 배고픔을 잊고 다시 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모든 음식에 있어야 할 가치가 아닐까.
  • ‘정조 왕비’ 효의왕후 한글 글씨 보물 지정

    ‘정조 왕비’ 효의왕후 한글 글씨 보물 지정

    문화재청은 조선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 김씨(1753~1821)가 1794년(정조 18년) 한글로 필사한 ‘만석군전·곽자의전’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17일 밝혔다. 왕후의 글씨가 보물로 지정된 건 2010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의 ‘어필 칠언시’(보물 제1627호) 이후 두 번째다. 효의왕후는 조카 김종선에게 ‘한서’(漢書)의 ‘만석군석분’과 ‘신당서’(新唐書)의 ‘곽자의열전’을 한글로 번역하게 한 뒤 그 내용을 적어 내려갔다. ‘만석군전’은 한나라 경제(景帝) 때 벼슬을 한 석분의 일대기이며, ‘곽자의전’은 안녹산의 난을 진압한 당나라 무장 곽자의에 관한 이야기다. 효의왕후는 표지에 ‘곤전어필’(坤殿御筆)이라고 적힌 어필책 발문에서 ‘충성스럽고 질박하며 도타움은 만석군을 배우고, 근신하고 물러나며 사양함은 곽자의와 같으니, 우리 가문에 대대손손 귀감으로 삼고자 한 것’이라고 썼다. 어필책을 보관하는 오동나무 함도 보물로 함께 지정 예고됐다. 문화재청은 “한글 어필은 왕족과 사대부들 사이에서 한글 필사가 유행하던 18세기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자 범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정제되고 수준 높은 서풍을 보여 준다”고 설명했다. 특히 왕후가 역사서의 내용을 필사하고 발문을 남긴 사례는 극히 드물어 희소성이 크고, 당시 왕실 한글서예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어 국문학과 서예사적 가치를 가늠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문화재청은 경남 고성 옥천사에 있는 19세기 초 대형 불화와 경남 하동 쌍계사가 소장한 16~17세기 목판 3건도 이날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수준 높은 서풍”… 정조 왕비 효의왕후의 한글 글씨 보물 된다

    “수준 높은 서풍”… 정조 왕비 효의왕후의 한글 글씨 보물 된다

    문화재청은 조선 정조 임금의 왕비 효의왕후 김씨(1753~1821)가 한글로 필사한 ‘만석군전·곽자의전’을 보물로 지정예고했다고 17일 밝혔다. 왕후의 글씨가 보물로 지정된 건 2010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의 ‘어필 칠언시’(보물 제1627호)이후 두 번째다. 이 글씨는 효의황후가 1794년(정조 18년) 조카 김종선에게 ‘한서’(漢書)의 ‘만석군석분’과 ‘신당서’((新唐書)의 ‘곽자의열전’을 한글로 번역하게 한 뒤 그 내용을 적어내려간 것이다. ‘만석군전’은 한나라 경제(景帝) 때 벼슬을 한 석분의 일대기이며, ‘곽자의전’은 안녹산의 난을 진압한 당나라 무장 곽자의에 관한 이야기다. 효의왕후는 표지에 ‘곤전어필(坤殿御筆)’이라고 적힌 어필책 발문에서 ‘충성스럽고 질박하며 도타움은 만석군을 배우고, 근신하고 물러나며 사양함은 곽자의와 같으니, 우리 가문에 대대손손 귀감으로 삼고자 한 것’이라고 필사 이유를 밝혔다. 가문의 평안과 융성함에 대한 염원을 담은 자료임을 보여준다. 어필책을 보관하는 오동나무 함도 보물로 함께 지정 예고됐다. 1762년(영조 38) 세손빈으로 책봉된 효의왕후는 자녀를 두지 못한 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효성이 지극해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성으로 모셨다 하며, 일생을 검소하게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문화재청은 “한글 어필은 왕족과 사대부들 사이에서 한글 필사가 유행하던 18세기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자 범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정제되고 수준 높은 서풍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특히 왕후가 역사서의 내용을 필사하고 발문을 남긴 사례는 극히 드물어 희소성이 크고, 당시 왕실 한글서예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어 국문학과 서예사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덧붙였다.문화재청은 경남 고성 옥천사에 있는 19세기초 대형 불화와 경남 하동 쌍계사가 소장한 16~17세기 목판 3건도 이날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고성 옥천사 영산회 괘불도 및 함’은 1808년(순조 8년) 수화승 평삼 등 화승 18명이 화폭 20폭을 붙여 10m가 넘는 높이로 만들었다. 하동 쌍계사 목판은 문화재청이 비지정 사찰 문화재의 보존관리를 위해 불교문화재연구소와 시행하는 전국 사찰 소장 불교문화재 일제조사에서 발굴한 유물이다. 2016년 조사한 경남 지역 사찰 소장 목판 중 완전성, 제작 시기, 보존상태, 희소성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했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열린세상] 인공지능 시대의 투표/하대청 광주과학기술원 기초교육학부 교수

    [열린세상] 인공지능 시대의 투표/하대청 광주과학기술원 기초교육학부 교수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2주가 지났지만 아직 당선인이 공식 확정되지 않았다. 바이든 후보가 과반의 대통령 선거인단을 확보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우편투표 부정을 주장하며 패배를 부인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많은 유권자가 우편투표를 선택했는데, 투표용지 도착이 늦어진 지역의 개표가 정치적 쟁점이다. 투표 종료 2주가 넘어도 승자를 확정 짓지 못하는 미국의 선거시스템이 의아하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아슬아슬한 상황이 폭력적 대결로 비화되지 않는 것이 미국 민주주의의 힘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2000년 대선 때 부시와 고어의 초박빙 승부 결과가 한 달 이상을 끈 뒤에 결국 연방대법원 판결로 마무리된 걸 떠올리면 좀더 지켜봐야 한다. 사실 4년 전인 2016년 대선 당시 러시아의 투표 시스템 개입 의혹이 제기되면서 미국의 이번 선거는 그 어느 때보다 투표기계의 보안을 기했다. 2000년 대선 당시 논란이 된 펀치 카드 투표기계는 집계를 자동화할 수 있다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사라졌고 대신 해킹을 할 수 없는 종이와 펜으로 대체됐다. 장애인 유권자를 위해 도입됐지만 그 후 비장애인 시민도 사용하게 된 터치 스크린 컴퓨터를 일부 주에서 채택했지만 검증 가능한 종이(paper trail)를 인쇄하도록 했다. 물론 투표용지 추적 시스템이나 우편투표 용지를 스캔해 집계하는 기계 등은 여전히 사용 중이지만, ‘종이 투표용지’가 핵심 요소이다. 주마다 투표를 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런 차이점조차도 중앙집중화된 방식보다 보안에 더 유리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미국은 자동 집계가 가능한 다양한 투표 기계를 사용해 왔지만 결국 돌고 돌아 종이 용지를 핵심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인터넷이 세상 모든 곳을 연결하고 디지털 기술이 모든 만남을 비대면으로도 가능하게 만들고 있지만, 정치적 대표를 결정하는 기술로는 수천 년 된 종이만 한 것이 없다. 복잡한 알고리즘이 순식간에 복잡한 계산을 해내고 블록체인과 같은 첨단기술이 그 어떤 해킹 시도도 막아 낸다고 주장하지만,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종이 투표용지를 대신하지 못한다. 디지털 신호로 저장해도 될 일을 굳이 종이에 인쇄하고, 디지털로 전송해 집계하면 몇 시간 만에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일을 두고도 우편 봉투에 담아 옮기고 눈으로 서명을 확인하고 기계와 인간의 손으로 용지를 하나씩 세며 며칠을 기다린다. 개표와 집계가 이렇게 번거로운데도 종이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만든 정치제도는 효율성과 편리성을 최우선적 가치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거의 모든 국가의 정치제도는 비효율성에 기초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공정성과 투명성을 위해 비효율성을 용인하는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한 온라인 투표 시스템이 이미 개발됐지만 도입되지 않는 것은 기술적 미진함도 일부 있겠지만, 무엇보다 시민 개개인의 투표가 투표수로 집계되는 과정을 종이 용지의 집계만큼 이해하기 쉽고 투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유권자들과 이해당사자들이 원하는 명백하고 분명한 검증 가능성을 아무리 뛰어난 첨단기술도 종이만큼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역사가 보여 주듯이 종이 투표용지를 사용하는 투표 또한 투표함 절도나 바꿔치기 등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종이 투표는 투명성, 명백함과 쉬운 검증 가능성을 제공한다. 투표기계의 정확성은 공정성과는 다르다. 기계의 효율성과 객관성이 시민들이 기대하는 공정성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사회적 지향들을 한데 합치는 과정인 민주적 대의 시스템은 이번과 같은 논란이 있더라도 시민의 선택이 투명하게 반영된다고 쉽게 인지할 수 있는 단순하고 오래된 기술을 선택한다. 기술은 목표로 하는 가치에 적합하게 사용돼야 한다. 곳곳에서 도입되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의 객관성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적용하는 대상에서 우리가 효율성을 뛰어넘는 가치를 추구한다면 이를 거부할 수 있다. ‘비효율적인’ 논쟁을 회피할 수 있다는 이유로 도입되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의 판단을 우리가 따르지 않아도 반과학적이라거나 맹목적이라고 비판받지 않는 이유이다.
  • ‘조선 과학기술의 정수’ 앙부일구 1점 美서 귀환

    ‘조선 과학기술의 정수’ 앙부일구 1점 美서 귀환

    조선시대 과학기술의 정수인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 1점이 미국에서 돌아왔다. 문화재청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을 통해 지난 6월 미국의 한 경매에서 매입해 8월에 들여온 앙부일구를 17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했다. 이와 유사한 크기와 재질의 앙부일구는 국내에 7점이 있으며, 이 중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2점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앙부일구는 ‘하늘을 우러러보는(仰·앙) 가마솥(釜·부) 모양에 비치는 해 그림자(日晷·일구)로 때를 아는 시계’라는 뜻으로, 백성을 살피는 애민 정신을 담아 만든 조선 최초의 공중(公衆) 시계다. 세종대왕이 처음 만들어 백성들이 오가는 종묘와 혜정교(현 종로1가)에 설치한 이후 조선 말까지 제작됐다. 이번에 환수된 앙부일구는 해시계가 설치됐던 한양의 북극 고도(위도)가 표시돼 있어 1713년 이후부터 19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름 24.1㎝, 높이 11.7㎝, 약 4.5㎏의 무게를 지닌 금속제 유물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이 앙부일구가 언제, 어떻게 해외로 반출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골동품상에서 한 개인이 구입해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앙부일구는 국립고궁박물관이 관리하며, 18일부터 오는 12월 20일까지 박물관 내 과학문화실에서 일반에 공개된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포토] 조선 과학기술의 정수, 해시계 ‘앙부일구’ 귀환

    [포토] 조선 과학기술의 정수, 해시계 ‘앙부일구’ 귀환

    문화재청은 지난 상반기 미국의 한 경매에 출품된 조선 시대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을 통해 지난 6월 매입했다고 17일 밝혔다. 앙부일구는 하늘을 우러러 보는(앙) 가마솥(부) 모양에 비치는 해 그림자(일구)로 ‘때를 아는 시계’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조선 시대 과학 문화의 발전상과 통치자의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이번에 환수된 앙부일구는 18세기에서 19세기 초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름 24.1㎝, 높이 11.7㎝, 약 4.5㎏의 무게를 지닌 금속제 유물이다. 2020.11.17 문화재청 제공
  • 조선시대 해시계 앙부일구 경매로 미국서 환수

    조선시대 해시계 앙부일구 경매로 미국서 환수

    조선시대의 천문과학기술을 반영한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1점이 미국에서 돌아왔다. 문화재청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을 통해 지난 6월 미국의 한 경매에서 매입해 8월에 들여온 앙부일구를 17일 오후 2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한다. 이와 유사한 크기와 재질의 앙부일구는 국내에 7점이 있으며, 이중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2점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앙부일구는 ‘하늘을 우러러 보는(仰·앙) 가마솥(釜·부) 모양에 비치는 해 그림자(日晷·일귀)로 때를 아는 시계‘ 라는 뜻으로, 백성을 살피는 애민 정신을 담아 만든 조선 최초의 공중(公衆) 시계다. 세종대왕이 처음 만들어 백성들이 오가는 종묘와 혜정교(현 종로1가)에 설치한 이후 조선 말까지 제작됐다. 현대 시각체계와 비교했을 때도 거의 오차가 나지 않으며, 일몰시간과 방향 등을 알 수 있는 체계적이고 정밀한 과학기기다. 이번에 환수된 앙부일구는 18세기에서 19세기 초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름 24.1㎝, 높이 11.7㎝, 약 4.5㎏의 무게를 지닌 금속제 유물이다. 정확한 시간과 계절을 측정할 수 있는 우수한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동시에 정밀한 주조기법과 섬세한 은입사 기법, 다리의 용과 거북머리 등 뛰어난 장식요소를 볼 때 숙련된 장인이 만든 수준높은 예술작품이란 평가다. 문화재청은 지난 1월 이 유물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면밀한 조사와 검토, 국내 소장 유물들과의 과학적 비교분석 등을 진행했다. 코로나19로 인해 3월부터 6월까지 수차례 경매가 취소되고 연기되는 우여곡절 끝에 지난 8월 마침내 국내로 들여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앙부일구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자격루, 혼천의 등 다른 과학 문화재들과 함께 연구와 전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계획이다. 우선 18일부터 12월 20일까지 박물관 내 과학문화실에서 일반에 공개된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금요칼럼] 코로나19와 집단기억력/황두진 건축가

    [금요칼럼] 코로나19와 집단기억력/황두진 건축가

    분야를 막론하고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흐른다. 소위 ‘뉴노멀’은 어느덧 ‘노멀’이 돼 사람들은 거기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자체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확진자 증가 추세는 여전하지만 사망자 비율은 그렇지 않고, 게다가 백신 개발 관련 뉴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근본적으로 확 변할 것 같지는 않다는 낙관적인 생각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항상 모험이다. 코로나19처럼 기본적으로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비전문가가 상식과 추측으로 접근하는 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그래서 때로 역사를 돌아보게 된다. 적어도 상황에 대처하는 인간의 방식이나 태도에 대한 교훈은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집단 기억력에 대한 의문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1918년에 발생했던 ‘스페인 독감’은 이런 점에서 참고가 된다. 유행했던 기간은 불과 1년 남짓. 그러나 그 피해는 엄청나서 어떤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500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어서 ‘무오년 독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백범 김구 선생도 상하이에서 감염됐다. 당시 한반도 인구 1670만 명 중 742만명이 독감에 걸렸고 14만명이 사망했다고 하니 현재까지의 추세로만 보면 코로나19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존재였던 셈이다. 그런데 스페인 독감은 그 이전에 인류가 경험했던 대역병, 이를테면 중세의 흑사병 등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과학의 발전이었다. 도저히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어마어마한 공포에 시달리며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경험, 혹은 주술과 신앙으로만 대처해야 했던 중세와는 달랐다. 박테리아는 1676년 네덜란드의 레이우엔훅에 의해 그 존재가 알려졌고, 바이러스가 발견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최초의 백신인 천연두 백신도 이미 18세기 말에 개발됐다. 스페인 독감 당시의 기록을 읽어 보면 당시의 대처는 요즘과 원리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격리는 중세부터 시행된 것이기는 했지만 그 필요성이 무엇인지 더욱 명확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구글에 들어가 당시의 사진을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할 수 없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유럽에서 극동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그전과는 사뭇 다른 방식과 태도로 대역병에 대처했던 것이다. 코로나19가 처음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마스크에 대한 사회적 논쟁이 길고 지루하게 이어졌다. 비용, 효과, 간편성 등의 종합적 관점에서 마스크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우 효과적인 전염병 대처 수단이다. 결국 논쟁은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쓰는 것으로 일단락됐지만, 방역 초기의 그 귀중한 시간을 조금 더 단축할 수는 없었을까? 심지어 질병관리청조차 올해 3월 초까지도 ‘일반인 마스크 착용은 불필요’라고 발표했다. 마스크 무용론, 제한적 효과설, 심지어 아예 대놓고 마스크 착용에 반대하는 주장이 등장한 것도 100년 전과 다르지 않다. 즉 모두 역사에 기록돼 있던 일들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작동하고 있는 부분은 분명히 있고, 그 덕분에 100년 전과는 사뭇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집단기억력이 종종 효과적으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문제는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만약 코로나19가 현재 상황 이상으로 확대되지 않고 종식된다면,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우리 모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잊고 말 것은 아닌지, 그러다가 다른 역병이 발생하면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것인지.
  •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노벨 문학상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노벨 문학상

    문학 하면 우리는 으레 시와 소설을 떠올린다. 당연히 노벨 문학상도 시인, 소설가에게만 수여하는 것인 줄로 알기 일쑤다. 토마스 만(1929), 헤르만 헤세(1946), 오에 겐자부로(1994) 등이 얼른 떠오른다. 2020년 수상자 루이즈 글릭도 미국 시인이다. 2016년 수상자인 밥 딜런은 그의 ‘노래’가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일부 ‘전문 문학인’들이 ‘가수’의 노벨상 수상에 반발하기도 했지만, 서양 문학의 원조 호메로스 역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노래 부른 가수였으니, 반대한 사람들만 협량해 보일 뿐이다. 사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중에는 ‘전문 문학인’ 아닌 인물이 여럿 있다. 예를 들면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노벨상(1953)을 받았는데, 이 작품은 물론 역사 저술이다. 독일 역사가 테오도어 몸젠은 ‘로마사’(1902)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 또한 역사 저술로 분류된다. 어디 역사뿐일까. 독일 관념론 철학자 루돌프 오이켄(1908),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1927),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1950)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노벨 문학상의 선정 범주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영어권 학자 171명이 참여해 집필한 전 18권, 1만 10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케임브리지 영문학사’(1907~1921)에는 셰익스피어, 존 밀턴과 나란히 에드워드 기번(역사학자), 토머스 홉스, 존 로크, 데이비드 흄, 벤담과 공리주의자들(철학자), 에드먼드 버크(정치학자), 애덤 스미스(경제학자) 등에게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시와 소설만이 문학이 아니란 의미다. 정치학, 철학, 경제학의 위대한 저술도 인류에게 감동을 주는 문학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아마도 이게 글로벌스탠더드일 것이다. ‘한국 문학사’에도 이런 광폭 행보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의 범주가 너무 협소한 건 아닐까. 우리의 협소함이 문학에 국한된 것일까. “의자에 앉아 글귀나 짓는 시인은 대단한 시는 결코 짓지 못할 것입니다. 생각건대 진정한 시인의 내면에는 정치가, 사상가, 입법자, 철학자의 자질이 잠재해 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역사가, 사상가인 토머스 칼라일의 ‘시인’에 대한 정의다. 문학에 대한 놀라운 찬사다. 이 찬사에 걸맞게 문학의 꽃은 더 위대하게 피어나야겠다. 우석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 [정승민의 막론하고] 두 개의 미국

    [정승민의 막론하고] 두 개의 미국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것이 ‘명백한 운명’이라고 자부해 왔던 나라가 미국이다. 하지만 작금의 대선을 보면 고개를 숙여야 할 것 같다.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가 승리 연설을 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가 조작됐다며 불복하고 있다. 신성한 민의를 도둑질당할 만큼 자질과 능력이 없다는 고해성사인 것인가. 게다가 지지자들의 ‘행동’을 유도하는 언행은 무책임하다. 반대파까지 포용해야 할 정치인이 적대와 증오를 부추기는 것은 곤란하다. 무엇보다 근거나 물증 없이 내뱉는 막가파식 주장은 공동체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극히 우려스럽다. 그럼에도 주목할 것은 트럼프의 득표력이다. 당선인 바이든과 나란히 미국 선거 사상 처음 7000만표의 벽을 깼다. 집계가 끝나지 않았지만 득표율 차이도 근소하다. 미국 사회는 홍해가 갈라지듯 절반으로 나뉘었다. 정치적 양극화가 고착됐다는 분석이 일반적이지만 트럼프 이전부터 사실 미국은 두 개였다. 정치학자 강상중과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는 공통적으로 미국 사회 내부의 해소하기 어려운 대립 구조에 주목한다. 지역적으로는 남부와 북부, 해안과 내륙이 다투는 구도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남부와 내륙은 대체로 야만과 폭력의 이미지다. 뉴욕의 ‘위대한 개츠비’와 달리 텍사스 카우보이는 주먹이 먼저고 여성을 차별하는 마초다. 록과 컨트리음악이 겨루고 금융과 유전이 맞선다. 마천루와 옥수수밭은 지금도 평행선을 긋고 있다. 19세기 남북전쟁의 후유증이 아닌가 싶지만 뿌리는 한층 깊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건너온 청교도 후예들은 전쟁을 통해 나라를 만들었다. 영국군과 동족상잔을 치른 것이다. 피로 세운 나라를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강력한 중앙정부가 필요하다는 해밀턴주의자와 지방분권을 주장하는 제퍼슨주의자들은 처음부터 각을 세웠다. 인간관의 차이도 크다. 크고 힘센 정부에서 국민은 통치 대상이다. 반면 독립을 쟁취한 시민에게는 자치가 최우선이다. 중도적 입장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갈등 확산을 경고했지만 나중에 내전으로 비화됐다. 두 개의 미국엔 지역뿐만 아니라 대중과 엘리트의 반목도 겹쳐 있다. 특히 동부의 기득권 세력을 경멸하던 앤드루 잭슨의 백악관 입성이 분기점이 됐다. 대통령이 된 ‘촌뜨기’ 잭슨은 권력자, 언론, 지성인과 척을 졌지만 대중은 열광했다. 이때부터 미국 대중은 주기적으로 엘리트 집단에 격렬한 반감을 표출해 왔다. 이 때문에 기성 정치의 때가 덜 묻은 것처럼 보이는 인물에게 마그마처럼 뜨거운 지지를 보내곤 한다. 1992년 대선에서 백만장자 로스 페로가 선전한 것이나 2016년 선거 당시 트럼프의 역전극이 펼쳐진 것은 대중의 에너지가 분출된 덕이다. 1950년대 초 무명의 초선 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대통령급’으로 급부상한 것도 엘리트 관료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전문가와 지식인에 대한 적대감은 요즘 절정에 달한 듯하다. 백악관의 정략적 코로나 정책에 버텨 온 앤서니 파우치 전염병연구소장을 효수해야 한다는 반문명적 선동까지 나오니 갈 데까지 간 듯하다. 이러다가 건국 초기부터 내연해 온 이분법적 모순이 활화산처럼 폭발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미국은 두 개이기 때문에 생산적이다. 남부와 북부, 민주당과 공화당, 대중과 엘리트의 긴장과 갈등이 국가적 생존 능력을 키워 왔다. 양대 세력 간에 빚어지는 혼란에서 질서를 창출하는 파워가 나오기 때문에 다양한 혁신과 창조가 가능한 것이다. 한때는 소련에 패배하고 일본이 추월한다고 했다. 지금도 중국이 앞지른다고 하지만 여전히 미국이 건재한 까닭이다. 이번 대선으로 미국 민주주의의 민낯이 드러났다고도 하지만 글쎄다. 거의 반분된 사회가 봉합되려면 패배한 쪽의 살풀이는 어느 정도 불가피하지 않을까. ‘분열된 집은 바로 설 수 없다’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유훈이 몸에 밴 미국의 복원력은 결코 만만치 않다.
  • [근대광고 엿보기] 최초의 고무신 회사 대륙고무

    [근대광고 엿보기] 최초의 고무신 회사 대륙고무

    고무는 일본어 ‘ゴム’(gomu)를 차용한 말이다. ‘고무구쓰’(ゴムぐつ)라는 일본식 고무신은 19세기 말 국내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한국식 고무신이 등장하기 전인 1910년대까지 일부 계층에서 일본식 고무신을 신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무구쓰와 우산 절도범을 붙잡았다는 기사가 있다(매일신보 1916년 7월 16일자). 제목이 ‘고무신과 우산’인 것을 보면 1910년대부터 고무신이라는 말이 일반화돼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호모화’(護謨靴)라고도 불렸던 일본식 고무신은 원래 구두 모양으로 바닥창만 고무였다. 그런 고무신을 지금처럼 남자용은 앞이 넓적한 초혜(草鞋·짚신), 여자용은 코가 뾰족한 당혜(唐鞋·가죽신) 모양으로 바꿔 만들어 먼저 대박을 터뜨린 이는 이병두라는 사람이었다. 일본식 고무신을 팔러 다니던 그는 일본으로 가서 고무 배합 기술과 제조 공정을 배우고 귀국했다. 비슷한 시기인 1919년 8월 1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1가에 우리나라 최초의 고무신 공장이 세워졌는데 광고 속의 대륙고무다. 주식회사 형태로 대륙고무를 설립한 사람은 구한말 외부대신과 법부대신을 지낸 이하영이었다. 친미·친러파여서 을사오적에 포함되지 않은 그는 한일병합 후 중추원 고문을 맡아 일제에 협력한 인물이다. 많은 이들이 고무신 사업에 회의적이었지만 이하영은 박영효, 윤치호, 박중양 등 재력가들을 대주주로 영입한 뒤 공장을 설립해 고무신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함남 원산, 경남 동래와 기장, 평남 평양 등지에도 공장을 추가로 설립하는 등 사업을 키웠다. 대륙고무는 1922년 ‘대장군’이라는 상표명을 붙인 고무신을 출시했다. 1922년 9월 21일자 광고에는 ‘대륙고무가 고무신을 출매함에 있어 이왕께서 이용하심에 황감함을 비롯하여…’라는 구절이 있다. 순종 임금도 고무신을 신었다는 뜻이다. 대륙고무는 고무공도 생산했다. 이하영의 고무신이 히트를 치자 반도고무, 중앙상공, 한성고무, 원산의 조선고무, 평양의 정창고무 등이 잇따라 설립됐다. 1937년에는 전국에 고무신 제조업체가 86개나 있었고 연간 생산량이 3119만 켤레에 이르렀다. 광복 전에는 서울고무의 ‘거북선’, 중앙상공의 ‘별표’, 천일고무의 ‘天자표’ 고무신이 가장 인기 있었다. 대륙고무는 원효로에서 중림동 155 일대로 옮겨졌다. 1936년 서울에 고무공장이 25곳 있었는데 8개가 중림동에 있었다고 한다. 중림동은 우리나라 고무공업의 중심지였던 셈이다. 대륙고무 자리에는 2000년대까지도 신발을 만드는 공장이 있었다. 지금은 중림종합사회복지관이 들어서 있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2030 세대] 주택문제의 해결, 교통에서 답을 찾자/양동신 건설 인프라엔지니어

    [2030 세대] 주택문제의 해결, 교통에서 답을 찾자/양동신 건설 인프라엔지니어

    19세기 말 유럽은 사회, 경제, 기술, 정치적으로 유례없이 번성했다 하여 벨 에포크 시대, 즉 ‘아름다운 시절’로 표현된다. 하지만 당시 일상을 살아가는 도심 노동자 가족의 삶은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도시계획가 피터 홀의 ‘내일의 도시’에는 당시 영국 런던을 묘사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썩어서 악취가 나는 한 방에서 두 가족이 거주하며, 천연두를 비롯한 각종 전염병에 노출돼 살아가는 일반 시민들의 삶이 묘사된다. 전염병의 발생 원인을 찾는 역학조사가 그즈음 런던에서 시작됐으니, 예상 가능한 풍경이다. 당시 런던에서 이런 삶을 살아가는 빈곤층의 비율은 30~40%였으며, 이는 다른 유럽의 대도시, 그리고 뉴욕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런 고밀화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일자리 인근에 살며 걸어서 출퇴근할 수밖에 없었던 물리적 제약 때문이었다. 다행히 20세기 들어서 이러한 문제는 급격히 해결됐는데, 그 실마리는 교통이었다. 20세기 초반 철도와 도로 등 교통망이 급격히 발달해 도심 외곽에 살더라도 일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덕분에 확장된 도시들의 예가 도쿄 23구, 파리 20구 등이다. 서울의 역사도 이와 유사하다. 조선시대 한양도성에 불과했던 서울의 면적은 20세기 중반 인접 5개 군 일부를 편입하며 약 5배에 가까운 면적 확장이 이루어졌다. 확장된 면적을 커버하기 위해 서울시는 강변도로와 한강다리를 짓기 시작했고, 지하철과 외곽순환도로 등을 만들며 교통혁신을 이끌어냈다.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서로 한양도성 내에서 살고자 분투했을 것이며, 주거의 질은 벨 에포크 시절 노동자 가족의 삶과 같이 참혹했을 것이다. 안타까운 부분은 그런 ‘20세기 교통의 혁신’이 현재 거의 자취를 감춰 가고 있다는 점이다. 강변도로, 남산터널, 지하철 건설, 한강교량 등 교통인프라는 대부분 20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지고 21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렇다 할 신규 교통인프라가 존재하지 않는다. 있더라도 1969년 한남대교는 3년 만에 준공됐는데, 2020년 월드컵대교는 11년이 지나 준공될 예정이니, 오히려 퇴보하는 수준이다. 이렇다 보니 강남은 고인물과 같이 수십년째 가장 선호되는 주거지며, 주거지역의 층위는 딱히 변화될 여지가 안 보인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서 조금 더 창의적인 사고로 서울 및 수도권의 대중교통 인프라 구축을 고민해 봐야 한다. 간선급행버스체계(BRT)망 구축, 대중교통 복합환승센터 구축, 경전철망 확대다. 한국의 대도시는 여전히 더 많은 교통인프라가 필요하다. 예산이 부족하다면 차량대수규제(COE)나 혼잡통행료(ERP) 정책 등으로 대중교통망 구축 예산을 마련한 싱가포르의 사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조금 더 혁신적인 생각으로 지속가능한 교통망을 만들며 확장해 나가는 우리나라 도시들이 더 많이 등장했으면 한다.
  • AI부터 종교까지… ‘코스모스’ 칼 세이건의 빛나는 사유

    AI부터 종교까지… ‘코스모스’ 칼 세이건의 빛나는 사유

    천문학에 관심이 적은 이라도 ‘코스모스’ 정도는 들어봤을 터. 1980년 출간한 책은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이를 기반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는 전 세계 60개국에 방영됐다. 퓰리처상을 받은 1978년작 ‘에덴의 용’, 영화로 만들어진 1985년 소설 ‘콘택트’까지, 칼 에드워드 세이건은 타계 이후에도 여전히 과학계의 대명사 중 하나다. ‘브로카의 뇌’는 1974년부터 1979년까지 그가 각종 과학잡지와 대중잡지에 낸 에세이를 모았다. 과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유사 과학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 그의 롤모델 아인슈타인 평전, 태양계 행성 탐사와 인공지능 로봇의 전망, 종교에 대한 성찰 등 5부에 걸쳐 모두 25개의 글을 실었다. 1986년 지학사는 과학총서 ‘부로카의 두뇌’에 14개 글을 추려냈다. 이번엔 완역본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폴 브로카는 19세기 중반 의학과 인류학 발전에 주요한 역할을 했던 외과 의사이자 신경학자로, 그의 뇌는 프랑스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그로부터 시작한 표제작 ‘브로카의 뇌’부터 그의 에세이는 지하에서 우주까지, 고대부터 미래까지를 넘나들며 그의 빛나는 사유를 보여준다. 과학을 소재로 했지만 사물과 우주, 인간의 근원을 찾아간 인문학 서적에 가깝다고 하겠다. 글을 읽다 보면 과학적 사고 방식은 어떻게 시작한 것일지 궁금해진다. 강연을 마친 뒤 ‘신을 믿으십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쓴 ‘주일예배’ 편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무한히 오래된 우주와 무한히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신은 똑같이 난해한 불가사의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답을 찾아가는 인간의 호기심이라고 강조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쩌면 자신의 기원에 놓인 불가사의 때문에 이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치열하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430쪽)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펜 하나로 현실과 맞서다

    펜 하나로 현실과 맞서다

    1991년 한국에 번역 출간돼 지금은 절판된 잭 런던의 소설 ‘마틴 에덴’(1909)을 기억하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 같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여러 육체노동을 전전하며 청년이 된 마틴 에덴이다. 어느 날 그는 두 가지 대상에 매혹된다. 하나는 사람, 다른 하나는 꿈이다. 둘 다 성취하기 쉽지 않다. 마틴이 반한 사람은 그와 처지가 상반된 상류 계급 여성이다. 그녀는 경제적 자산이 풍족하고 문화적 교양도 풍부하다. 두 사람의 조건이 꼭 맞아야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의 조건이 너무 다르면 사랑을 이루기가 그만큼 어려워진다. 이것이 사람에게 매혹되었으므로 그가 해결해야 하는 첫 번째 과제다. 마틴이 품은 꿈은 그동안 그가 살았던 삶과는 전혀 관련 없는 낯선 직업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다름 아니라 그는 소설가가 되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자기의 정리되지 않은 생각과 혼란스러운 감정을 세밀하게 언어화하는 기쁨을 알았기 때문이다.어휘가 빈곤하고 문법은 엉망이지만 마틴은 습작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소설가가 될 수 있을지, 된다고 해도 그 길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것이 꿈에 매혹되었으므로 그가 해결해야 하는 두 번째 과제다. 마틴이 두 개의 과제를 어떻게 풀어 나가는지, 결말은 무엇인지 여기에서 밝힐 수는 없다. 그래도 힌트 하나를 언급할 수는 있겠지. ‘마틴 에덴’이 잭 런던의 반(半)자전 소설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 과제의 결과는 이토록 명백하다. 이를 동명의 영화로 만든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은 원작의 19세기 후반 미국 배경을 20세기 중반 이탈리아로 옮겼다. 배경만 달라진 게 아니다. 전개와 결론도 바꿨다. 그는 원작을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세련되게 번안해, 소설과 비슷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영화로서의 독특성을 갖는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런 한에서 봉준호 감독이 공식 지면을 통해 영화 ‘마틴 에덴’을 극찬하고 마르첼로를 향후 행보가 기대되는 차세대 감독으로 선정한 이유도 납득이 된다. 또한 분명한 건 그가 본인만의 입지를 구축하려는 대담한 시도를 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마르첼로는 시에서 쓰이는 객관적 상관물(인물의 정서를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빗대어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영화에 도입했다. 그는 ‘마틴 에덴’과는 관계없는 실제 과거 필름들의 장면을 편집해 넣어 인물의 심경을 드러내는 기법으로 활용한다. 예컨대 마틴이 누나와 대화를 나누며 옛날을 회상할 때, 소녀와 소년이 손을 맞잡고 흥겹게 춤을 추는 화면을 짧게 보여 주는 식이다. 그의 의식 흐름에 따라 관객은 현실과 허구가 겹쳐진 이중의 영화적 시간을 체험한다. 잭 런던 소설을 마르첼로는 영화 내용보다 형식으로 주제화했다. 참신한 스타일리얼리스트의 솜씨다. 허희 문학평론가·영화 칼럼니스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서낭당나무와 돌장승/장재민 · 고용/니르거라즈 라이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서낭당나무와 돌장승/장재민 · 고용/니르거라즈 라이

    고용/니르거라즈 라이 나는 어느 회사의 직원입니다우리 사장님은 이 도시에서 수많은굶주림과 결핍의 신입니다 어느 날 사장님께 말했지요사장님 당신은 내 굶주림의 신이시며내 삶은 당신의 은덕입니다그래서 생일을 특별하게 보내고 싶어요휴가를 주세요 사장님이 말씀하셨어요내 덕분에 너는 오래 살 거야이번에는 일이 많다내년에 생일을 잘 보내도록 해라나는 네라고 말했어요 어느 날 다시 사장님께 부탁을 했지요사장님 당신은 굶주림의 신이십니다 당신의 자비로 집을 꾸며 주세요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저에게 휴가를 주세요 사장님이 말씀하셨어요좋은 날들은 또 올 거야이번에는 일이 많다다른 길일에 결혼하도록 해라나는 다시 네라고 말했어요 하루는 삶에 너무도 지쳐서내가 말했어요사장님 당신은 내 굶주림과 결핍을 해결해 주셨어요당신에게 감사드려요이번에는 나를 죽게 해 주세요 사장님이 말씀하셨어요알았어 오늘은 일이 너무 많으니그 일들을 모두 끝내도록 해라그리고 내일 죽으렴! 이주 노동자의 삶을 다룬 이 시 읽을수록 부끄럽다. 불과 사오십 년 전 한국인들 또한 사우디로 이라크로 리비아로 서독의 광산 노동자로 팔려 나갔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는 하와이나 멕시코의 사탕수수밭으로 팔려 나가기도 했다. 지난 시기의 한국인들이 그러했듯 이주 노동자들 또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나선 선구자들이기도 하다. 그들을 만나면 손을 잡고 “감사해요” 따뜻한 한마디를 하자. 우리의 지난날에 대한 예의이기도 할 것이다. 곽재구 시인
  •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인도에서 한국까지, 카레의 기구한 운명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인도에서 한국까지, 카레의 기구한 운명

    누구에게나 고향은 있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고향은 태어나고 자란 곳만 의미하지 않는다.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장소도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저 멀리, 한국 밖에서 고향의 향수를 느끼는 곳이 있다. 바로 인도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지만, 인도와 유전적인 연관성은 딱히 없다. 20대 시절 배낭과 카메라 하나 둘러메고 호기롭게 인도 대륙을 종횡무진했던 추억이 있을 뿐이다.이제는 시간이 꽤 흘러 북으로는 카슈미르, 남으로는 케랄라까지 유유자적했던 그때의 기억은 희미하다. 생각하지 않으면 잊힌다는 말처럼 그동안 유럽을 오가는 동안 오랫동안 인도를 잊고 지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인도가 내게 찾아왔다. 정확하게는 수년 만에 찾은 인도 음식점에서 맡은 인도 음식의 향기가 고이 자고 있던 기억을 세차게 흔들어 깨웠다. 그 순간만큼은 식당 의자에 앉아 있던 건 서른 중반의 내가 아닌 온몸으로 인도를 맛보고 있던 이십대의 나였다. 인도를 다녀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늘 물어본다. 인도 카레는 뭔가 다르냐고. 카레의 고향이 인도인 것은 맞다. 하지만 카레라는 음식은 인도에서 찾아볼 수 없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인도에 카레처럼 생긴 걸쭉한 수프나 소스 같은 음식은 있어도 카레로 부르지 않는다. 인도 현지에서는 카레 대신 ‘마살라’란 말을 쓴다. 마살라는 인도 요리에 두루 사용하는 으깬 향신료 혼합물이다. 마살라가 들어간 요리는 치킨 티카 마살라, 팔라크 파니르, 알루 고비, 빈달루 등 각각 고유의 이름을 갖고 있다. 카레는 단지 외국인들이 마살라가 들어간 인도 요리를 편의상 일컫는 말일 뿐이다. 카레 하면 떠오르는 샛노란 색깔의 소스에 덩어리진 채소와 고기가 어우러진 이미지는 사실 인도 카레와 큰 괴리가 있다. 우리나라의 카레는 적어도 세 나라를 거쳐 들어와 변형된 음식이다. 시작은 물론 인도다. 영국은 19세기부터 인도를 식민 지배하면서 본격적으로 수탈을 시작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영국인들이 인도에서 생활하거나 다녀가면서 자연스레 영국에선 인도풍 음식이 유행했다. 그중 채소와 고기를 덩어리째 넣고 익힌 유럽식 스튜와 인도의 마살라가 결합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유사한 형태의 카레가 탄생했다.인도의 화려한 향신료 믹스는 밋밋하고 자극이라곤 짠맛뿐인 영국 음식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사람들은 자극적이고 이국적인 맛에 매료됐고, 영국식 인도 요리인 카레는 국민 요리로 자리잡게 된다. 워낙 인기가 많다 보니 영국 해군의 식단에도 카레가 있었다. 19세기 당시 영국 해군은 세계 최강이었고, 서양의 제도를 본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일본에 영국 해군은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일본에 주둔하던 영국 해군이 카레를 매주 먹는 것을 본 일본 해군도 이를 따라 하기 시작했고, 주식인 쌀과 카레 소스를 더해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매주 보급했다. 영국인들이 카레 맛에 금방 반한 것처럼 일본인들도 카레의 독특한 맛에 매료됐고,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에 처음 상륙했다. 초기에는 카레 파우더를 이용해 조리법이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고급 음식이었지만, 손쉽게 카레를 만들 수 있는 고체형 카레가 등장하면서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카레가 진정한 한국의 국민 요리로 자리잡게 된 건 레토르트 형태의 ‘3분 카레’ 제품이 등장하면서부터다. 한국의 카레는 초기에는 일본 음식과 유사했지만 점차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됐다. 강황의 영양성분을 강조하면서 노란색을 강조한 황금빛이 카레의 이미지로 굳어졌다.음식은 국경을 넘고 인종과 문화가 뒤섞이면서 다양한 형태로 재창조된다. 인도에서 출발한 마살라 요리는 카레가 돼 영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을 거쳐 오면서 수많은 변형을 낳았다. 한식이 전 세계에 퍼지고 현지화하면서 변형되는 것처럼. 한 인도 식당 사장은 한국의 카레를 맛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고는 진짜 인도의 맛을 보여 주기 위해 식당을 열었다고 한다. 굳이 멀리 나가지 않아도 정통 인도식 카레, 일본식 카레, 엄마표 한솥 카레 등 유형별로 취향대로 고르고 맛볼 수 있는 시대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바몬드 카레’는 일본에서 유행한 건강법에서 비롯됐다는 사실. 미국 버몬트주의 특산물인 사과와 꿀을 이용한 ‘버몬트 건강법’이 일본에서 잠시 인기를 끌면서 카레에도 사과와 꿀을 넣어 탄생했다. 당연히 미국엔 버몬트 카레가 없다. 버몬트주를 일본식으로 발음해 만든 ‘바몬드 카레’의 고향은, 미국이 아니라 일본이다.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병충해가 만든 색깔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병충해가 만든 색깔

    유럽의 10월은 포도 수확의 계절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살던 아를의 농부들도 바쁘다. 아낙들은 바구니에 포도를 따 모으고, 밭 가운데에는 포도를 운반해 갈 마차가 서 있다. 론강을 따라 아득히 펼쳐진 들판 끝으로 태양이 가라앉고 있다. 붉은색과 노란색의 대비가 강렬하고 아름답다. 그런데 포도나무는 이렇게 붉지 않다. 수확기에도 잎이 녹색이라야 정상이다. 화가가 색을 왜곡했을까? 아니다. 19세기 말 진딧물의 일종인 필록세라가 유럽의 포도밭을 덮쳤다. 20년 가까이 계속된 병충해로 수확량은 심각하게 감소했다. 이 공백을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아르헨티나, 칠레 등지에서 생산된 포도주가 메웠다. 포도주를 증류한 브랜디도 품귀현상을 빚으면서 스카치위스키가 대체재로 떠올랐다. 병충해는 주류 시장의 지형을 변화시켰고 덤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탄생시켰다. 고흐는 900여점의 유화를 그렸는데 살았을 때 팔린 것은 이 그림 단 하나였다. 산 사람은 벨기에 화가 안나 보슈. 안나의 남동생 외젠도 화가였고 고흐와 친구 사이였다. 이 남매는 부유한 사업가 아버지 덕택에 여유 있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1890년 고흐는 외젠의 권유로 브뤼셀에서 열린 ‘20인전’에 참가했다. 여기서 안나는 이 그림을 400프랑에 샀다. 일류 화가들 그림이 1만~3만 프랑을 호가한 데 비하면 형편없는 헐값이었지만, 무명인 고흐로서는 잘 받은 것이었다. 안나는 고흐가 동생 친구고 사정이 어려운 걸 잘 알고 있어서 후하게 값을 치렀다. 1895년부터 인상주의 그림값이 치솟았다. 안나는 1906년 파리의 한 화랑에 그림을 내놓았다. 그림은 1만 프랑에 러시아 사업가 시추킨의 손에 들어갔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그의 저택과 수집품은 몰수됐다. 시추킨은 파리에서 우울하게 여생을 마쳤다. 혁명 정부는 시추킨의 저택을 미술관으로 만들어 대중에게 공개했다. 1948년 스탈린은 건물이 너무 부르주아적이라는 이유로 미술관을 폐쇄하고, 수집품은 모스크바의 푸시킨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슈 미술관으로 분산시켰다. ‘붉은 포도밭’은 푸시킨 미술관으로 이관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술평론가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