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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헝가리에 가로명 복원운동 활발(세계의 사회면)

    ◎“독재잔재 불식”… 「공산주의 영웅이름」 떼어내기/「레닌가」 등 옛 제국시대 명칭으로 환원/작년 부다페스트서만 1백30곳 고쳐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등 「공산주의 영웅」들의 이름이 헝가리의 거리명칭에서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민주화 가도를 달리고 있는 헝가리가 과거 공산당 일당독재시대의 부산물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있는 것이다. 거리명칭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기 때문에 관광객뿐만 아니라 현지 주민과 택시운전사를 마저 헛갈릴 정도다. 수도 부다페스트에서는 지난 한햇동안 무려 1백30개 거리명이 변경됐다. 대부분 공산주의 영웅들의 이름을 빌려쓰다가 지난 48년 공산화되기 이전에 사용됐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시대의 명칭들로 「원위치」된 것. 부다페스트시내에서만 헝가리 공산주의 순교자인 벨라 소모기와 벨라 박소의 이름을 그대로 쓴 거리명이 각각 23개와 15개나 될 정도로 공산 정권에 의해 무성의하게 급조된 이들 거리명들은 멀지 않아 모두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출 운명에 처해 있다. 부다페스트 도심의 레닌가는오스트리아 황녀의 이름을 따서 엘리자베스가로 바뀌는 등 엘리자베스와 테레사가 다시 새로운 거리명의 주종을 이뤄가고 있다. 부다페스트시내에서 택시를 운전하는 벨라 코바치씨는 『거리 이름이 너무 빨리 바뀌어 일하기가 무척 힘들다』고 고충을 토로하면서도 『그러나 부적절한 공산주의자들의 이름은 우리들의 거리에서 뿌리뽑혀야 한다』고 말한다. 거리명칭 변경은 시내 유지들의 모임에서 결정되는데 이 모임의 자문역인 거리명 역사전문가인 기오르기 메차로스씨가 『내 생전에 거리명 변경이 완결되는 것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변화과정과 이에 따른 다소간의 혼란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더 계속될 것 같다. 시당국은 주민들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예전의 거리명 표지판을 당분간 새것과 나란히 붙여두되 검열관의 삭제지시처럼 표지판에 붉은색 줄을 그어놓기로 결정했다. 이같은 거리명칭 변경의 열풍은 수도뿐 아니라 헝가리 방방곡곡을 휩쓸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명칭변경에 대한 반발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티보르 차뮤엘리에서 로냐이 메니예르트로 명칭이 바뀐 거리의 인근에 사는 일부 주민들은 차뮤엘리가 단명했던 1919년의 부다페스트 코뮨 당시 핏발을 세웠던 악독한 인물인 것 못지 않게 19세기의 귀족관료였던 메니예르트도 부패로 악명 높았다며 새로운 명칭을 거부하고 있다. 노동절을 기념해 명명됐던 매이원(5·1절) 거리를 합스부르크 왕가 여공작의 이름을 따 허미나거리로 변경한 것도 노동자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켜 올해 노동절 때 극렬 노조원들이 허미나거리라는 새로운 표지판에 예전의 매이원거리라는 팻말을 덧붙여놓기도 했었다. 러시아 문인들 가운데서도 막심 고리키 같은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는 반면 볼셰비키파의 시인 겸 미래학자였던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같은 이름은 거리명에서 아예 사라졌다. 지난 56년 부다페스트 봉기를 유혈진압했던 스탈린의 이름이 헝가리의 거리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이제 공산주의 영웅들의 이름이 거리팻말에서 완전히 사라져 헝가리사회노동자당(옛공산당) 당사에 보존돼 있는 레닌의 흉상이 희귀한 역사의 유물이 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 암살 배후 “0순위” 지목/「타밀엘람해방호랑이」란

    ◎타밀족 독립추구 스리랑카내 반군단체/총리 재임시절 파병·탄압… 간디에 원한 라지브 간디 전 인도 총리의 폭사와 관련,스리랑카의 타밀분리주의 반군단체인 타밀엘람해방호랑이들(LTTE)이 「0순위」의 혐의를 받음에 따라 이 단체와 타밀족이 세인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LTTE는 타밀족의 독립을 추구하는 스리랑카내 10여 개 반군단체 중 가장 과격하고 호전적인 그룹. 2만명의 전사를 거느리고 있는 LTTE는 스리랑카 거주 3백만 타밀족의 독립쟁취를 위해 지난 75년에 결성됐으며 83년부터 반정부 유혈무력투쟁을 벌여오고 있다. 힌두교를 신봉하는 타밀족은 스리랑카의 1천7백만인구 중 18%를 차지,불교를 믿는 74%의 싱할리족과 그 동안 자주 마찰을 빚어왔는데 양종족간의 반목과 불화의 원인 제공자는 영국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영국은 지난 19세기 인도와 스리랑카를 점령한 뒤 「분할통치」의 식민정책에 따라 스리랑카에서의 차재배를 위해 우대조치를 베풀며 인도 남부에 살던 타밀족을 스리랑카로 이주시켜 분쟁의 소지를 만든 것. 싱할리족은 스리랑카가 48년 독립하자 영국 식민통치하에서 타밀족으로부터 받은 천대에 대한 분풀이에 나서 공무원임용 제한,타밀어의 공용어 제외정책 등을 폈다. 이에 분개한 타밀족게릴라들은 지금까지의 합법적 투쟁에서 급선회,83년부터 정부군과의 무력대결에 나서 이미 쌍방간 2만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라지브 간디의 암살사건의 배후세력으로 LTTE가 지목되고 있는 것도 라지브 간디가 총리 재임중이던 지난 87년 7월 스리랑카정부와의 협정에 따라 타밀반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스리랑카에 5만명의 평화유지군을 파병,타밀족의 원한을 샀으며 지난 2월에는 LTTE와 가까운 타밀 나두주정부를 해산하도록 세카르 총리에게 압력을 넣기도 했기 때문. 인도에는 남부의 타밀 나두주에 5천만명의 타밀족이 거주하고 있다. 드라비다계인 타밀족은 BC 3세기 인도 남부로부터 이주했으며 말레이시아·베트남·아프리카 동부 및 북부지역 등에도 일부가 살고 있다.
  • 외언내언

    해적선의 역사는 해상교통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다. 기원전 8백 내지 1천2백년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발견되는 것이 가장 오랜 기록. 그 다음이 9세기 전후 북해 등을 무대로 한 이른바 바이킹의 해적선이 유명하다. 16세기 엘리자베스여왕시절의 영국은 해적을 제국주의적 야심의 수단으로 동원해 「해적국가」의 오명을 남기기도. ◆흑색바탕의 흰색 「백골기」를 날리는 해적선은 약탈과 살육의 공포대상이면서 자유와 모험과 용기를 상징하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해적을 소재로 한 「해적문학」은 「보물섬」 「로빈슨 크루소」 등 무한한 꿈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명작들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증기기선이 바다를 누비기 시작한 19세기말에 이르면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 ◆얼마전부터 동남아,아프리카,중미 해역에서 되살아나고 있다고 보도되더니 마침내 한국인 선원 24명이 거액의 몸값을 요구하는 현대판 해적선에 인질로 잡혀있다는 소식이다. 동서무역의 관문으로 1일 약 2백30척의 선박이 통과하는 말라카해협을 끼고있으며 열대림이 우거진 섬들이 많아 잠복과 도주가 용이한 동남아해역은 해적활동의 최적지. 75년 월남패망 이후 해상탈출하는 베트남 난민 약탈로 재미를 본 해적들이 이제는 무역선,유조선,원양어선 등을 노리는 대담한 약탈행위에 나서고 있다는 것. ◆쾌속정까지 동원하는 전문적 해적이 있는가 하면 고기잡이를 가장하는 어선이 해적선으로 돌변하기도. 기름을 가득 싣고 오는 유조선들이 좋은 표적이고 원양어선은 어획물을 탈취당하기도. 일본선과 한국선을 좋아한다는 소문도 있다. 국제해사기구통계에 따르면 연간 1백여 건(한국 작년 10건)이 발생하는데 실제는 더 많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국제법상 「인류의 공적」으로 어느 국가나 나포처벌이 가능한데도 창궐하고 있는 것은 각국의 무관심과 국제공조체제의 결여가 가장 큰 이유. 해적의 연안국관리 뇌물공세도 한몫 하고. 소련처럼 선원을 무장시키는 자구책도 가능하나 부작용이 우려되기도.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이번 사건은 정부의 관심을 촉구하는 큰 경종이라 하겠다.
  • 이스라엘과의 공존 길 열어줘야(「팔」 문제 해결의 열쇠는:하)

    ◎국제회의 열어 「43년 적대」 청산 논의를/팔인구 급속 팽창… 이스라엘도 안보책모색 필요성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하나의 땅(팔레스타인지방)을 놓고 서로 자신들의 영유권을 주장한데서 비롯된 피할수 없는 마찰이다. 현재 이스라엘의 국토는 오래전부터 팔레스타인인들이 살던 곳이었지만 19세기말∼20세기초부터 유태인들의 이주가 본격화,유태인과 팔레스타인인들간의 다툼이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1차 세계대전시 오스만터키의 공격에 혼이 난 영국(당시 이 지역은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다)은 지역주민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 두가지 상반된 약속을 했다. 팔레스타인과 아랍인들에겐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약속한 맥마흔서한과 유태인들에겐 유태인 민족국가 수립에 대한 지지표명을 약속한 밸포어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이같은 두가지 상반된 약속을 두 민족간의 마찰을 더욱 첨예화시킬 수밖에 없었고 결국 2차대전후 유엔은 두 민족간의 마찰을 해결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방을 아랍국가와 유태인국가로 양분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유엔결의안에 따라 유태인들은 즉각 독립국가 이스라엘의 수립을 선포했고 이에 반발한 이집트와 시리아 등이 전쟁을 일으켰으나 이스라엘에 대패,오히려 요르단강 서안지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스라엘과 아랍제국은 4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였지만 모두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고 그때마다 이스라엘의 점령지와 팔레스타인 난민의 수는 크게 늘어났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긴 했지만 한번도 고향에서 쫓겨난 적은 없었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군사력에 밀려 고향을 떠나 난민신세로 전락함으로써 이들의 고달픔과 그에 따른 대이스라엘 적대감,아랍민족 특유의 복수심 등이 이스라엘에의 테러공격을 부추기게 됐고 이같은 팔레스타인인들의 공격으로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다는 이스라엘인들의 인식 및 대팔레스타인 강압정책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관계는 계속 악화만되는 악순환속에 빠져 들었다. 이같은 두 민족간의 상호적대감과 불신감이 먼저 해소되지 않는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분쟁해결은 영원히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두 민족간의 상호불신감,특히 국가생존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안을 해소시킨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나치치하에서 민족 대학살의 참혹한 경험을 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확실한 보장도 없이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립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곧 그들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과는 같다고 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이 과거의 강경전략을 상당히 수정,이스라엘에 대한 자세를 많이 누그러뜨린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일부 강경그룹에선 이스라엘과 공존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 지난 88년 일방적인 독립선포시 발표한 그대로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스라엘로선 이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입장이다. 이는 단순히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테러공격같은 것보다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협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민족간에 상당한 격차를보이고 있는 인구증가율 차이이다. 사실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팔레스타인 인구는 이스라엘로선 다른 어떤 것보다도 큰 위협요인이라고 할수 있다. 팔레스타인 인구가 늘어나는 것은 곧바로 팔레스타인의 세력강화에 직결되고 이는 곧 이스라엘의 사회불안요인 및 국가안보 저해요인으로 작용할수 있다. 이스라엘이 소련 등지의 유태인을 대규모로 받아들여 팔레스타인 점령지역에 정착시키려는 것도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이같은 인위적인 인구증가책이 자연적인 인구증가를 따라갈수 없음은 이스라엘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또 이같은 추세가 상당기간 지속될 경우 이스라엘의 안보가 지금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더 큰 위협을 받게 되리라는 것도 이스라엘로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것 같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좋든 싫든간에 보다 근본적인 안전보장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이다. 그것이 곧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병존문제를 다룰 국제평화회의이다. 물론 지금으로선 이스라엘국내의 반대여론도 상당히 강해 이같은회의의 개최가능성조차 불투명한 상태이다. 또 설사 이같은 회의가 열린다 해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가 받아들일만한 합의안이 도출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해결할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으로 중동문제를 다룰 국제회의에 기대를 거는 것외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이 협의를 통해 공존방안을 도출해내지 못하는한 양측의 분쟁은 어느 한쪽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현재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의 분쟁에서 상대적인 우위에 서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위치가 역전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수 있을 것같다.
  • “지상전은 사실상 미·소 전술의 대결”

    ◎미·이라크의 중동 사막전 전망/공중·지상전 병행… 전후방 동시교란/미국/다국적군 유인,대규모 포격·전격기습/이라크 첨단무기가 화려한 활약을 보이던 공중전에서 지상전으로 걸프전쟁의 양상이 바뀌면서 미국과 이라크가 어떤 전술로 지상전을 치를까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우세한 공중화력으로 적을 「신나게」 두들긴 미국은 지상전에 돌입하면 소련식의 무기체제와 전술을 구사하는 이라크 지상군과 피나는 전투를 벌여야 한다. 지상전이 공중전처럼 화려하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미국은 소련군이 2차대전 때부터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 갈고 닦아온 전술을 교범으로 삼고 이란과의 8년 전쟁으로 전투에 달인이 된 이라크 지상군과 맞닥뜨려야 한다. 이라크 전술의 핵심은 대규모의 포부대의 지원하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킬링 존」에 들어오는 적을 맞받아친다는 것이다. 적이 전체적인 전투력이 앞서기 때문에 적과 직접적으로 공격전을 벌이는 대신 방어전으로,정규전 대신 기습적으로,무기의 열세는 사람의 수로 극복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정치전·심리전이 가미된다. 이에 대해 미국은 지난 40년간 소련을 가상적으로 해서 발전시켜온 전략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이 전술은 적의 우세한 인력과 방어적 자세를 공중화력으로 초토화시키고 나서 지상전을 벌인다는 것이다. 지상전은 공중전력과 지상전력을 결합,적의 전방과 후방을 동시에 교란시키는 것으로 돼 있다. 지금까지 전쟁의 양상은 양측이 각자의 교리에 충실하게 이루어졌다. 이라크군의 구조는 소련군의 구조와 매우 유사하게 고도로 집중화돼 있으며 무기도 소련의 체제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전술의 측면에서도 소련의 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라크는 공중전은 내준 채 지상에서의 방어자세는 흐뜨리지 않고 있다. 웬만한 공중폭격에는 허물어지지 않는 참호속에 전투력을 보존시키고 공격 예상로에는 50만개의 지뢰를 묻어 놓았다. 지뢰밭 뒤에는 4m의 모리방벽을 구축해 놓고 그 뒤에는 4m 깊이의 도랑에 석유를 채우는 등 세계 최악의 장애물 코스로 방어진지를 강화해 놓은 상태다. 강화진지의 후방에는 야포를 배치시켜 놓았다.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에서도 야포부대의 위력을 과시했었는데 근자에는 캐나다의 기술자가 개발한 세계 최대의 「왕대포」인 슈퍼건도 보유하고 있어 다국적군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소련의 군사교리는 이 밖에도 우세한 적에 대해 정면대응 보다는 기습전을 벌이도록 권고하고 있다. 적을 내부로 깊숙이 끌어들여 적의 전투력 배치를 면에서 선으로 바꾼 뒤 기습전으로 고리를 끊는다는 것이다. 이라크군이 원용하는 소련군의 군사교리는 2백년 전 영국의 웰링턴공에 의해 개발된 뒤 발전을 거듭한 방어전략의 진수로서 러시아에서 꽃을 피웠다. 19세기초 러시아는 프랑스 나폴레옹군을 맞아 모스크바까지 끌어들여 보급로를 늘어뜨리고 추위의 고통을 안기며 패퇴시켰다. 2차대전 때도 히틀러의 나치군을 모스크바평원 깊숙한 스탈린그라드까지 들어오게 한뒤 강력한 방어로 패퇴시켰다. 스탈린그라드의 승리는 나치독일의 경제적 고갈과 함께 사기에도 치명타를 가한 2차대전의 분수령이었다. 러시아군이 밖으로 나가 싸운 전투에서 패배의 기록이 많은 반면 안에서 싸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것은 방어전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소련의 교리는 또 군사적 전투의 이면에서 정치전·심리전을 활용하도록 하고 있다. 이라크군이 쿠웨이트 유전에 불을 지르거나 기름을 흘려 해상오염을 일으키는 것,포로로 잡힌 다국적군 조종사들을 TV에 출현시킨 것,화학무기의 사용시사로 끊임없이 위협하는 것 등은 서방여론을 겨냥한 심리전의 요소를 담고 있다. 이라크의 방어전략에 대해 미국은 지난 40년간 나토에서 발전시킨 대소전략을 걸프전에서 응용하고 있다. 우세한 공중전력을 십분 활용하는 것으로 지상전이 벌어져도 적의 탱크를 감싸고 있는 대공망을 무력화시키고 나서 A10기나 8㎞ 밖에서 적 탱크를 사냥할 수 있는 아파치 헬기를 동원한 뒤에나 지상군을 진격시킨다는 것이다. 미국의 화력이 워낙 우세하기 때문에 전쟁의 승패를 곧 바로 전술의 우열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또 쿠웨이트는 적을 끌어들인 뒤 공격을 가할 만큼 넓지 못하다. 그러나 이라크로서는 소련식 방어전술로 시간만 끌 수 있다면 정치적 승리가 가능하기 때문에 양측의 전술대결은 흥미있는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 페레스트로이카의 과제/조지 캐넌 진단(해외논단)

    ◎“「오도된 평등주의」가 소개혁 막고 있다”/70년 독재로 자유경쟁원리 완전 망각/민족분규는 자율협조로 해결 바람직 소련은 지금 극도의 혼란에 빠져있다. 경제적 혼란도 문제지만 연방체제마저 와해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1947년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을 주창,세계적 명성을 얻었던 조지 캐넌교수는 이제 「슈퍼 스테이트」,소련의 붕괴를 우려하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외교문제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 91∼91년 겨울호에 실린 그의 논문을 요약,소개한다. 러시아는 과거 수세기동안 지리·정치적으로 서구문명과 단절돼 있었으며 그만큼 현대화 과정도 뒤졌다. 그러나 18∼19세기에 들어 러시아사회는 이러한 단절을 극복하고 현대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의욕적인 교육개혁과 농업개혁이 추진됐고 사회전반에 의욕이 엿보였다. 물론 이를 가로막는 체제내 갈등과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절대왕정,의회제도의 부재,민족문제 등 고질적인 문제들이 이 현대화 작업의 장애요소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유혈혁명까지 필요하지는 않았다. 1917년 초에는 의회제도의 토대가 마련됐고 왕정폐지는 무혈로도 가능했다. 1917년 혁명은 이 평화적 변화가능성을 하루 아침에 뒤엎어 버렸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 러시아의 반체제 세력중엔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변화를 반대하는 급진 과격세력이 들어 있었다. 이들은 차르왕정과 러시아 사회를 완전히 파괴시키기를 원했다. 파괴 후의 계획은 극히 모호하고 유토피아적이었다. 이들은 러시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함으로써 예상외의 호기를 얻었다. 1917년 여름 임시정부는 왕정이 붕괴된 어수선함 속에서 이 전쟁을 계속키로 결정,큰 실수를 저질렀다. 레닌파의 권력장악을 가능케한 것은 2년반에 걸친 전쟁과 1917년초 국내정치의 혼란이었다. 그러면 공산정권 수립이 러시아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레닌은 일차적으로 부르주아 인텔리층을 몰아냈다. 그리고 그후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 인텔리층까지 모조리 제거했다. 이 결과 러시아는 문화적으로 과거와 단절됐고 이 단절은 지금까지 회복되지 않고 있다. 스탈린은 자신의 개인통치에 장애가 되는 지식층과 레닌의 잔재세력을 모두 몰아내기 위해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했다. 1937년과 38년에 이 숙청은 절정에 달했고 수백만명의 무고한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사회전체가 히스테리 속으로 빠져들었다. 1940년대에 들어 러시아 국민들은 설상가상으로 숙청보다 더 무서운 2차 대전의 공포를 맞게 된다. 소련은 1941년 6월 정식으로 참전했다. 하지만 이 전쟁은 소련국민들 사이에 외부의 적에 대항하는 원초적 민족주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스탈린은 자신을 이 감정과 교묘히 결합시켰다. 정부와 국민은 힘을 모아 나치에 저항했고 국민들은 정부에 대해 새로운 희망을 가졌다. 전쟁이 끝나면 정부의 통치방법에도 변화가 올 것이라는 기대였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 변화를 단호히 거부하고 예전의 통치방식을 그대로 고수했다. 무서운 전쟁의 공포에서 살아남은 국민들의 간절한 희망을 스탈린은 철저히 무시했다. 국민들은 엄청난 좌절을 맛보았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으로 급격한 체제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지배이념으로서스탈린주의에 대한 조직적인 대안도 반대도 러시아사회엔 존재하지 않았다.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잔재세력을 지도부에서 모두 몰아내는데 4년이 걸렸다. 그러나 흐루시초프 자신도 곧이어 밀려나고 말았다. 그후 80년대 중반까지 오면서 소련에는 계속해서 그렇고 그런 지도자들만 번갈아 등장했다. 물론 유리 안드로포프는 예외였다. 고르바초프가 시작한 체제변혁은 이들의 상상 범위를 넘는 것이었다. 전자통신 시대를 맞아 소련내 젊은 지식층들의 체제불만은 점점 더 높아져갔다. 여행과 표현의 자유는 제한돼 있고 경제기술 수준은 19세기 수준에 머물러 국제경쟁력이 크게 떨어져 있었다. 레닌이 물려준 이데올로기로는 더이상 체제유지가 힘들게 됐다. 국민들 가슴속에선 이미 죽어 없어진 이데올로기에 소련 지도자들은 계속 매달려 있었다. 이 체제위기를 감지하고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이 고르바초프였다.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공산주의 이후 러시아의 앞날에는 힘든 3가지의 과제가 놓여있다. 첫째,공산당에 집중돼 있던 권력중심을 선거에의해 선출된 민주정부 체제로 이전하는 것. 둘째,중앙집중적인 경제체제를 자유기업 체제로 전환하는 것. 셋째,지난 3세기동안 지속돼온 다민족체제를 보다 자유로운 관계로 전환시키는 것. 이 3가지 변화들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러시아 국민들의 생활은 분명 크게 도약될 것이다. 그러나 어려움은 상상 밖으로 심각하다. 70여년의 공산독재로 러시아 국민들은 민주통치 원리에 대한 이해를 모두 잊어버렸다. 그 이해수준은 1910년대보다도 더 뒤떨어진다. 경제현실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의 창의적 영역이 철저히 억압당해왔기 때문에 국민들 스스로가 자신을 체제의 한 수동적인 일부분으로 간주한다. 과장된 평등주의가 만연돼 누구도 선두에 나서려 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생활수준을 남보다 앞세우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이러한 고질적인 병폐들로 인해 고르바초프가 추진하는 체제변화는 신속한 진전을 보이기가 상당히 어럽게 돼있다. 이런 태도들을 고치려면 오랫동안 꾸준한 교육적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이를 담당할 마땅한 교사들도 없다.한편 소련방을 구성하고 있는 제민족간 관계 재조정도 필수적이다. 현재 강력한 추세에 있는 민족주의로 인해 지난 세기의 다민족·다언어 제국 유지는 이제 용납이 안된다. 발트해 3국은 분명 독립할 자격이 있고 결국은 독립할 것이다. 그러나 공화국마다 차이가 있어 일괄적으로 단일모델이 제시되기는 힘들다. 현재 소련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러시아 공화국의 주권요구에도 상당한 근거가 있다. 러시아 민족은 전통적으로 여타 소수민족에 대한 배타적 감정을 갖고 있다. 그것은 전통·문화·종교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인정이 돼야 한다. 하지만 러시아 공화국까지 주권을 내세우면 소련방의 존재 이유가 의문시된다. 그리고 중앙정부와 연방공화국과의 관계도 깊은 역사적 뿌리가 있어 이것이 갑자기 끊어지면 엄청난 혼란이 불가피하다. 경제적 혼란도 클 것이다. 보다 심각한 것은 연방공화국 몇몇은 서로 전쟁을 일으키거나 공화국내에서 끔찍한 내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현재 연방 수중에 있는 핵무기에 대한 관리책임이 분담됨으로 인해 생겨날 문제도 끔찍하다. 여기에 덧붙여 세계무대에서 강대국으로 막대한 발언권을 행사하던 소련이라는 단일 국가가 갑자기 무대에서 사라진다는 것도 아무래도 불길하다. 현재 소련의 민족문제는 연방과 공화국 모두 양극단만 고집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래선 안된다. 타협이 마련돼야 하고 절제와 인내가 양쪽 모두에게 지켜져야 한다. 완전한 독립도 아니고 과거의 연방체제도 아닌 새로운 관계가 모색돼야 한다. 그것이 소련 자신뿐 아니라 세계의 평화에도 유익하다.
  • 노대통령 방소 계기로 본 두나라 관계사

    ◎극동패권 겨냥,러시아함대 1854년 첫 입항/거문도 상륙뒤 한달동안 동해지역 실측/열강침탈 막으려 1884년 조·로조약/노·일전에 지자 공식관계 끝나… 일제땐 독립운동의 무대로 근대에 들어와서 한국과 러시아가 외교관계를 정식으로 맺게 되는 것은 1884년의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관계의 수립에 앞서서 러시아인과 한인들 사이의 교섭관계가 선행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1850년대 초반에 러시아와 미국은 일본의 개항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경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때에 러시아의 해군중장 푸티야틴은 대일교섭을 위하여 마닐라에서 북상하여 나가사키로 가는 도중 분산된 함대의 집결장소로 거문도를 지적하였다. 1854년 4월2일 푸티야틴의 기함 팔라다호를 위시로 러시아함대는 5일간 거문도에 상륙하였다. 러시아함대는 계속 북상하여 4월20일부터 5월 중순까지 약 1개월간 한반도의 동해지역을 실측하기도 하였다. 푸티야틴은 또한 강원도 봉천군 금난진과 함경도 안변부 화등해진,영흥부 고령사 대암진 등에 상륙하거나 정박하였다. 이러한 사건은당시에 빈번하게 출몰하였던 많은 이양선사건의 하나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 러시아는 조선을 개항시키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었으므로 그 이후의 다른 특별한 관계는 일어나지 않았다. 러시아는 19세기 중엽에 극동으로의 진출을 활발히 하게 되어서 1858년에는 아이훈조약을 통하여 아무르지방을 러시아영토로 편입하였고 1860년에는 이어서 북경조약을 체결하여 우수리지방을 러시아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리하여 연해주를 통하여 조선과 러시아는 국경을 맞대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히 러시아와 조선과의 관계가 일어나는 조건을 만들게 되었다. 1863년에는 조선에서의 흉년을 계기로 함경도의 농민들이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함으로써 재소 한인의 첫 이민그룹을 형성하였다. 이어서 많은 한인들이 연해주로 속속 이주하였고 이들 한인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양측간의 교섭도 이루어졌다. ○흉년 못견뎌 국경 넘어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당시의 극동의 정세로서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은 한반도를 침탈하여자신의 영향권 아래에 두려고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조선정부는 러시아에 대하여 대단한 공포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미국이나 영국에 기대어 나라의 독립을 유지해 보려던 계획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조선정부는 방향을 바꾸어 적성국이었던 러시아를 끌어 들였다. 청에 대한 견제세력으로,그리고 영국과 일본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이때에 또한 러시아측으로서도 코르프가 프리아무트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동아시아정책을 적극화 하여 일본의 한국지배를 막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와 한국과의 외교는 급진전되어 1884년 7월7일에 처음으로 공식적인 국교를 수립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과 러시아의 첫 외교관계는 이같이 열강의 침입을 외교적 균형을 통해 회복하려는 조선의 노력과 그 열강의 일원으로서 동아시아정책을 강화하려던 러시아의 정책이 만남으로써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국교수립 이후의 조선은 아직 자주적인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국가의 외교적 힘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침략하고 있는 외세에 의존하여 문제를 풀어보려는 의존심만 키워주었고 그것조차도 결국은 만족되지 못하였다. ○1896년 친로내각 러시아는 결국 한국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국의 이권을 위하여 한국에 진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러시아와의 관계 이후에 친러세력이 조정에서 형성되었으며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삼국간섭을 통하여 일본의 세력을 견제한 러시아의 외교적 역할에 대해 높이 평가하여 친러세력은 더욱 더 강화되었다. 바로 이렇게 강화된 친러세력의 형성으로 인하여 1896년에는 아관파천이 일어나고 친런내각까지 성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친러내각의 성립은 러시아의 이익을 철저히 옹호해 주는 역할 밖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강화되어가는 러시아세력과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기도하던 일본과의 대립은 드디어 1904년에는 러일전쟁으로 폭발하였고 이 전쟁에서 일본이 기선을 제압하면서 1904년 5월18일에 한로 조약은 폐기되어 공식적으로 한로관계는 차단되고 만다. 한로조약의 폐기 이후 한국은 얼마 안되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 상태로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공식적으로 외교적 관계는 없었지만 한국의 정치적 지도자들과 러시아와의 관계는 다양한 형태를 통하여 여러 각도에서 이루어졌다. 일제에 의하여 나라를 빼앗긴 한인들은 노령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여 거기에서 독립운동의 꿈과 실질적 힘을 키워나갔다. ○북방정책의 결실 맺어 또 1917년의 러시아의 10월혁명 이후에는 소비에트정부의 민족해방운동의 지원을 기대하고 민족운동자들로 하여금 러시아와의 유대를 강화하는데 많은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역시 한인들은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소련의 지원을 기대한 것이므로 이 기대는 종종 기대 수준에 못미쳤을 뿐 아니라 민족운동의 발전에 역행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21년 6월에는 자유시 사변이 일어나고 1925년에는 일로협약에 의하여 한인의 독립운동이 또다시 제약을 받았으며 그외에도 소련은 자주적 민족운동세력이 새로운 한국건설의 주역이 되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이로써 1945년 해방 이후에도 패권주의에 입각하여 미국과 더불어 남북한을 분단시키고 북한에서도 자주적 성격의 정권이 성립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분단된 한반도에 냉전논리를 강요하면서 소련은 북한을 사회주의국가로 간주하고 일방적으로 지원하였고 그 결과 남한은 소련과 적대적인 채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기본적으로 1985년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중 냉전논리의 현실적 적용의 결과 1950년에서 1953년까지 피비린내나는 내전이 있었으며 이는 스탈린의 승인에 의한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후 한국과 소련은 서로 적의 상태에서 남남이었다. 이 기간중 1978년 KAL기 무르만스크호수 기착과 같이 외교관계가 없는 상태에서 소련이 한국에 대하여 인도주의적 일반원리를 따라서 행동한 적도 있었지만 1983년에는 KAL기를 격추하여 2백69명의 승객을 전원 사망케 하는 비인도적인 행위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제정치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는 것이며 이해관계가 있을 뿐이다. 소련은 남한의 경제력을 새롭게 평가하고 있으며 동북아의 냉전구도를 바꿀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남한 역시 통일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위해 냉전논리에서 탈피하여 1988년부터 북방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한국과 소련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되어 1990년 6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양국의 정상이 회담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9월에 한소 수교를 이룬 것이다. 그리고 12월13∼16일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하여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공식적인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이렇게 하여 한로관계의 역사상 두번째로 다시 국교관계를 가지게 되는 한국과 소련은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양상을 가지고 있다. 소련은 더이상 한국에 대해 패권주의를 강요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며 한국은 더이상 저개발국이 아니다. 한국은 경제면에서 소련과 대등한 위치에서 교섭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며 한국민이 원하면 한국정부가 추구하고 있는 평화적 통일정책은 소련의 기본적인 정책과 어긋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점은 한국과 소련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며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실질적으로 이루어나가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유럽안보회의 냉전종식 선언의 함축

    ◎「동·서 45년 적대」 청산… 새 동반자시대로/19세기 「빈회의」 맞먹는 역사적 대전환/「화해의 신 국제질서」 창출 기대 부풀게 전후 세계사의 중심이었던 유럽에서 냉전이 종식됐다. 그리고 새로운 질서의 틀이 짜여지고 이제는 「안정과 평화」위에 새로운 국제질서가 자리잡게 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아니 새로운 국제질서는 이미 태동하고 있다고 해도 괜찮다. 19일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에 참석하고 있는 34개국 정상들 가운데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 16개국과 소련 등 바르샤바조약기구(WTO) 회원국 6개국은 개막에 앞서 유럽재래식무기(CFE) 감축협정에 서명했다. 이들은 CFE협정 정치선언에서 「40년 이상 지속됐던 분열과 대결의 시대가 종식되고 이들 국가들간의 관계가 개선됐으며 이것이 모두의 안전에 기여했다」고 선언,냉전이 끝났음을 공식 확인했다. 아울러 「이같은 발전이 보다 더 단결된 유럽구조를 건설하기 위한 지속적인 상호협력 과정이 돼야한다」고 천명,단순히 냉전이 끝난 것이 아니라 유럽의 대대적인 역사적 변화가 눈앞에 다가와 있음을 천명했다. 지난해 초부터 동유럽의 변화와 함께 동서대결의 분위기가 급격히 무너지고 지난 10월3일 역사적인 독일통일로 이미 냉전체제는 붕괴됐었지만 이번 회담은 이를 재확인하고 새 국제질서의 창조를 선언함으로써 전후 세계사의 한 시대를 구분짓는 중요한 회담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일부 논자들은 이번 회담을 1814년 나폴레옹 몰락이후 빈에서 열려 구체제(Ancien Regime)를 부활시켰던 빈회담에 비교하기도 한다. 물론 빈회담이 구체제의 부활을 가져온 반면 이번 파리회담은 새로운 질서의 출발점이 되고 있어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시대를 가르는 역사성이라는 면에서는 경중을 가르기가 쉽지 않을 정도라고 평가해 무리가 없다. 「1945년 이래 가장 의미깊은 국제적 행사」라고 불릴 정도로 높이 평가되는 이번 회담은 단순선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구체적 조치에 합의함으로써 신질서의 초석마련에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군사적 측면에서는 CFE감축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CFE협정의 내용은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선제공격이 불가능할 정도로 각 군사블록 및 각국의 군사력을 제한하고 이를 현장검증하기 위해 불시 사찰을 받아들이고 있다. 아직도 유럽에서의 군축과 화해를 보다 증진시키기 위해 새로운 신뢰조치의 구축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CFE협정이 타결되고 핵무기 감축문제의 논의를 시작키로 합의함으로써 전쟁의 위협을 대폭 감소시키는데 거보를 내디뎠다. 또 ①정상과 외무장관회담의 정례화 ②상설 행정사무국의 설치운영 ③분쟁방지센터의 설치 ④회원국의 자유선거 관리기구 신설 ⑤의회위원회의 설치 CSCE의 상설기구화가 이루어지게 됐다. 현재까지등 유럽질서의 양대 축인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해체와 의미축소의 공백을 전유럽국가들이 참여하는 CSCE의 상설기구화로 보완함으로써 신질서의 밑받침이 마련된 셈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미국이나 영국이 유럽대륙에서의 영향력 감퇴를 우려,나토의 역할 축소에 반대하고 있으나 「하나의 유럽」 혹은 「유럽 공동의 집」이라는 유럽통합의 구상이 점차 세를 얻어가며 구체화될 전망이다. 하지만 넘어야할 산이 더 남아 있다는 점도 지적돼야 할 것이다. 첫번째로 추가군축과 나토의 위상 재정립,상설기구의 권한과 위치 등 중요한 것에서부터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들이 남아 있다. 다음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군사분야와 정치분야에서는 꽤 진전이 이루어졌고 합의도 이루어졌지만 경제적 통합을 이룰 수 있을 만큼 동서 유럽국가들간의 경제력 차이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 만일 동유럽의 경제 사정이 혼미상태를 빨리 벗어나지 못하면 그만큼 화해와 평화,안정과 번영의 틀은 훼손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여기에 세포분열 현상을 보이고 있는 동유럽의 민족문제도 새 질서에 위협을 줄 가능성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유럽국가들이 대소 어려운 점들을 극복하면서 파리회담에서 합의한 것처럼 신국제질서를 창조해내고 그것이 아시아·중남미·아프리카 등으로 확산된다면 전후 냉전체제가얄타체제로 불렸듯이 화해의 신국제질서는 파리체제로 불리게 될지도 모른다.
  • 북한­일본의 「수교행보」를 보며…(세평)

    ◎북방정책­남방정책의 접점 찾을 때/한반도 안정과 통일에 긍정적 변수로 이끌어야 일본과 수교협상을 제의한 북한의 갑작스런 태도변화는 놀라움과 충격을 넘어 당혹감마저 느끼게 한다. 북한이 그토록 오랫동안 성역처럼 외쳐대던 교차승인불가의 원칙이 생각보다 너무 쉽게 무너져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당혹감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북이 일본에게 수교제의를 하면서도 「조선은 하나」라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조선이 하나이기 때문에 교차승인을 반대해왔고 유엔에도 동시가입이 아니라 단일가입을 주장해왔었다. 그런데도 사실상 교차승인을 결과할 제의를 하면서 자가당착의 주장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왜 이렇게 갑자기 앞뒤가 맞지 않는 방향선회를 결심했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한소수교가 박두한 지금에 와서 북한이 소련과의 관계를 단절시키지 않는 이상 소련과 남북한은 교차승인의 상태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이 동구국가들과 수교했을 때 북한은 이들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격하시키는 방법으로 불쾌감을 표시했지만 소련의 경우에는 이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 북한이 아무리 주체성이 강한 국가라해도 소련과의 관계를 격하 또는 단절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북한의 입장을 충실하게 지지해온 중국마저 아시아경기대회를 계기로 한국과의 관계개선 의사를 굳히고 있다. 당장 정치관계로 발전되지는 않는다 해도 사실상 정치적 성격을 띤 연락사무소의 설치가 실현되면 북한의 국제적 고립은 완벽에 가까운 상황이 된다. 이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은 현실에의 점진적 적응이 아니라 현실을 대폭적으로 수용하는 과감한 정치적 변신일 수밖에 없다. 점진적 적응을 택하기에는 안팎의 정세변화가 너무나 급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일성만이 지금까지 북한이 고수해 온 기본입장을 뒤집는 극적인 방향전환을 결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일본을 수교의 대상으로 택한 데에는 경제적 이유와 정치적 계산이 복합적으로 깔려 있다. 북한의 경제는 한마디로 더이상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평양에 살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선택된 일부를 제외하면 북한주민의 대부분이 식생활의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다. 대외채무가 60억달러에 가까워 이미 국제적으로 파산선고를 당했고 대외수지적자도 매년 10억달러에 육박하고 있어 더이상 견디기 힘든 실정이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9월2일 평양에 온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상은 북한이 소련에서 수입하는 원유대금을 지금까지 해온 현물결제 대신 경화로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국제시세보다 25%나 싸게 하던 것도 점차 인상하겠다고 통고했다. 북한이 위기타개를 위한 돌파구 마련이 필요했다는 점은 더이상의 논증을 요하지 않는 명백한 사실이다.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미국보다 일본이 북한에게 부담이 적고 손쉬운 상대였다. 미국은 휴전 당사자이며 주한미군 문제 등이 있기 때문에 북한이 수교제의를 하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있어 남북 관계개선과 북한의 핵안전협정 서명 등 구체적 조건들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에는 거북한 상대인 것이다. 물론 북한의 수교제의가반드시 북한의 대외정책 특히 대남정책의 중대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북한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경제적 곤경을 타개하기 위한 일본의 돈이다. 배상금이든 청구자금이든 명목이야 어쨌든 일본에서 받아올 수 있는 돈이 40억달러 이상에 달할 것으로 추측되고 있기 때문에 김일성으로서는 대단히 매력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수교 이전에 배상문제가 타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김일성도 잘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조선은 하나라는 주장을 하면서도 사실상 교차승인의 원칙을 수용해 버린 것이다. 이제 한반도에는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그것이 갖는 구체적 의미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를 수 있겠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게임규칙이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한반도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국제정치 질서는 한마디로 세력균형의 정치라 할 수 있다. 냉전시대를 통해 존재해온 진영정치가 퇴색하고 그대신 다양한 세력들 사이에 실리에 따라 서로 견제하고 협력하는 새로운 균형정치의 시대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남북한 관계는 주변국가들과의 세력균형에 의해 그 구체적 전개양상이 영향받게 될 것이다. 남의 북방정책이 진영정치의 일각을 무너뜨린 것이라면 북의 남방정책이 진영정치의 나머지 부분을 깨뜨리고 있는 셈이다. 북방정책과 남방정책이 주변의 역학관계 속에서 경쟁함으로써 남북한관계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될 가능성이 크게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북방정책의 열기에 휩쓸려 남방정책에 다소 소홀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의 북방정책이 북의 남방정책을 유도했고 이것이 한반도 안정과 통일에 긍정적 기여를 할 것이긴 하지만 새로이 전개되는 세력균형정치의 시대에 대비하는 비전과 전략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19세기말 우리가 경험했던 쓰라린 실패의 되풀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본사 논평위원 정종욱 서울대교수·정치학〉
  • 모스크바건물 수백채 붕괴위기(세계의 사회면)

    ◎지반 약한데다 건축방식 조잡… 관리도 허술/볼쇼이국장ㆍ레닌도서관등 포함/재원ㆍ전문인력 모자라 보수못해 모스크바시내에 산재해 있는 유서깊은 역사유적물들이 원래 지반이 약한데다 관리소홀로 대부분 붕괴될 위험에 놓여 있다. 이러한 사태는 건축물자체의 운명뿐 아니라 빨리 손을 쓰지 않을 경우 그안에 소장돼 있는 귀중한 예술품ㆍ장서들까지 손상될 위험을 안고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근착 미시사주간 「뉴스위크」는 붕괴 위기에 처한 모스크바의 건축물들을 소개하면서 현재 이런 건물들이 모스크바 시내에 수백개에 이른다고 적고 있다. 모스크바의 상징처럼 돼있는 붉은광장의 성바실리성당도 거의 무너지기 직전에 와있다. 최근 크렘린궁에 속한 건축물들의 안전검사를 마친 한 소련지질학자는 『붉은광장에서 탱크 퍼레이드가 한번만 더 벌어지면 바실리성당은 무너져내릴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내렸다. 이반대제의 종탑을 비롯한 여러 곳의 대성당들도 같은 진단을 받았다. 건축물들이 무더기로 이같은 지경에 이르게 된것은 원래 건축방식이 조잡한데다 건물의 지반이 대부분 늪지대ㆍ웅덩이ㆍ지하수층 등으로 약하기 때문인 것으로 지적됐다. 물론 보수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도 크다. 모스크바시 당국은 2년전 건물보존위원회를 구성해서 우선적으로 3백2개의 대상 건물을 선정,보수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재원마련과 전문인력확보의 어려움 때문에 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들에게 재정 및 기술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스탈린ㆍ흐루시초프시절에 무모하게 지은 대형 건축물들도 마찬가지 운명을 맞고 있다. 붉은광장 한쪽 구석에 있는 대형 레닌묘는 매년 4㎜씩 광장쪽이 내려앉고 있다. 한 전문가는 레닌묘가 물구덩이를 진흙으로 메워서 기술공사를 한 자리에다 웅장한 시멘트 구조물을 세웠으니 내려앉는 것은 당연하다고 지적한다. 크렘린궁 내에 있는 각료회의 건물도 붕괴위험에 처해있는데 주범은 스탈린이 이 건물 지하에다 만든 지하벙커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1961년에는 흐루시초프의 지시로 크렘린궁내에 초현대식 대형 인민대회궁전이 건설됐는데 이 건물의 기초공사를 하면서 지하를 무리하게 파내 주변의 유서깊은 대성당들이 피해를 보았다. 소련지도자와 소련을 방문하는 외국정상들의 회담장으로 자주 이용되는 19세기 건축물 크렘린 대궁전도 인민대회궁전의 피해자이다. 우스펜스키성당은 지하수로 지반이 약해져 내려앉는 케이스이다. 크렘린궁 가까이 있는 레닌도서관 건물은 옆에 보로비츠키 지하철역이 들어서면서 지반이 내려앉아 붕괴위기를 맞고 있다. 레닌도서관에는 역사적인 기록문서와 대문호의 저작물을 비롯,각종 국보급 장서들이 소장돼있다. 당국에서는 우선 급한대로 장서 3천만권을 옮길 장소를 물색중이나 서둘러야 할 형편이다. 시 중심가에 있는 말리극장은 시멘트 기초공사가 제대로 안돼 현재 철재 버팀목으로 건물이 유지되고 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볼쇼이극장은 지반에 지하수가 스며들어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건물 오른쪽이 내려앉기 직전에 와 있다. 구모스크바는 피터대제때 성외곽을 둘러싼 해자를 메워 그 위에 건설됐는데 이후 지하수가 차오르면서 해자를 메운 모래와 자갈이 씻겨내려가 지반전체가 내려앉고 있다는 설명이다. 1872년에 세워진 폴리테크니칼 박물관은 피터대제의 해자위에 세워진 대표적인 건물로 급속도로 건물이 내려앉고 있다. 트레티야코프미술관,제르진스키광장의 구KGB청사도 모두 같은 경우이다. 시 당국자들은 요즘 이런 넋두리를 한다. 『마르크시즘은 무너졌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다음은 모스크바의 건물들이 무너질 차례이다』
  • 「부자와 빈자의 정치」 큰 파문/김호준 워싱턴특파원(특파원수첩)

    ◎미 공화당 브레인 필립스의 저서/“부익부 빈익빈 레이건 재임시절 심화” 주장/일ㆍ서독 등에 국부 나눠준 무역정책도 비난/“90년대는 개혁시대” 예견… 중간선거 앞둔 민주당은 희색 미 보수진영의 탁월한 선거 전략가겸 평론가인 케빈 필립스의 신저 「부자와 빈자의 정치­레이건 이후의 부와 미국 유권자」란 책이 워싱턴 정가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올해 미 정치권에서 가장 큰 화제가 되고 있는 이 책에 대해 공화당의원들은 『평론가란 믿지 못할 사람들』이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으나 민주당 진영에선 『왜 우리가 민주당원으로 있는지를 공화당원들에게 깨우쳐 주는 책』이라며 열렬한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 책은 1960년대 존슨 민주당정부의 「빈곤 퇴치 전쟁」 및 현대 미국의 복지제도에 큰 영향을 미쳤던 마이클 헤링턴의 저서 「다른 미국」 이후 가장 큰 충격을 주고 있다는 것이 민주당 사람들의 얘기다. 「부자와 빈자의 정치」는 한마디로 말해 1980년대 레이건 공화당정부의 시책이 미 국민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유별나게심화시켰다는 주장의 전개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개혁주의자들의 반동이 19세기 말과 1920년대의 「황금기」 이후처럼 1990년대에 나타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필립스는 1980년대를 『부자들이 승리한 시기』라고 규정하며 레이건 행정부를 『자본가의 소생과 소수 엘리트의 부 축적을 주도한 고성능 기관차』로 비유했다. 그는 레이건의 정책이 미국 경제의 경쟁력을 약화시켰다고 비판하고 『미국의 부를 재분배하려는 다음 세대의 반체제파들에게 기분 나쁜 뉴스는 부의 큰 몫이 이미 일본 서독 등에 재분배됐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과거 미국에서 부자란 연수 5만달러 이상이나 10만달러 이상을 지칭했으나 80년대엔 백만장자도 흔해빠져 1989년의 경우 백만장자가 1백50만명을 헤아렸다. 문제는 부의 집중이 백만장자보다 훨씬 상층에 있는 천만장자ㆍ억만장자ㆍ5억장자ㆍ10억장자 층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미 국민의 1%에 해당하는 고소득층이 국민총소득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81년의 8.1%에서 86년엔 14.7%로 늘어났다. 81년과 89년 사이에미 4백대 부자의 재산은 3배가 커졌다. 동시에 그들과 다른 계층간의 간격은 엄청나게 벌어져 회사 시장과 공장 노동자간의 봉급차이는 1979년의 29대 1에서 1989년엔 93대 1로 확대됐다. 막대한 부가 월가에서 만들어졌고 실업계의 거물들이 저명인사가 되었다. 금융계 12대 소득자의 연간 수익은 81년의 5백만∼2천만달러에서 88년엔 증권시장 몰락에도 불구하고 5천만∼2억달러로 상승했다. 레이건 집권 8년간 미술품과 골동품 가격은 4배가 뛰어,20만∼30만명의 부유층 가족에게 큰 이익을 안겼다. 한편 해고된 철강 노동자로부터 농토를 잃은 농민에 이르기까지 사회 저변층은 고통을 받았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자녀를 가진 30세 이하 세대주의 실질 수입은 73∼86년에 약 4분의 1이 감소됐다. 80년대엔 1백50만개의 중간관리직이 없어졌다. 그 희생자는 물론 중산층이었다. 필립스는 레이건의 경제정책을 「부유층으로의 소득 이전」으로 파악하고 있다. 레이건이 백악관에 들어갈 때 최고 70%에 달했던 부자들에 대한 소득세율은 레이건이 백악관을떠날 땐 28%로 떨어져 있었다. 반면 사회보장세와 소비세의 증가 때문에 전체적으로 빈자들의 납세액은 늘어났다. 미국의 세금정책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이후 처음으로 계급의 충성도에 따라 재편됐다고 필립스는 주장했다. 필립스는 1990년대는 「반월가시대」로 예견하고 있다. 과거처럼 90년대에도 호황기 뒤의 반동이 재현될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80년대의 마감과 더불어 새로운 정치 경제철학이 요구되고 있고 또 미국의 부와 권력의 역사에서 90년대는 지난 80년대와 분명히 다른 장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늘어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필립스는 강조한다. 그는 이런 변화의 무드가 미국뿐 아니라 영국 일본 캐나다 등에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 나라에서도 80년대에 금융 부동산 붐으로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고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됐다는 것이다. 필립스의 주장은 새롭거나 놀랄만한 것은 아니다. 레이건 시대에 미국민의 소득과 부에 불평등이 심화됐다는 주장은 많은 사람들이 거론했던 얘기다. 그럼에도 필립스의 비판이 새삼스럽게 설득력을 발휘하는 것은 골수 공화당원으로서의 그의 신인도와 성가 때문이다. 필립스는 1968년 이래 6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5차례나 승리를 끌어낸 공화당 핵심전략가의 한 사람이다. 11월초 중간선거를 목전에 두고 민주당측은 『필립스가 문제를 올바르게 지적했다』며 백만원군을 만난듯 떠들어대고 있다. 그러나 공화당측은 불균형이 확대되기 시작한 것은 레이건 집권전인 카터 민주당 정부때부터라고 주장하며 『아직도 많은 미국인들이 카터 시대보다 레이건 시대가 좋았다고 말하는 것을 무얼로 설명하겠느냐』고 반문한다.
  • 97년 중국 귀속 앞두고 투자확대(특파원수첩)

    ◎영,「홍콩 새 국제도시화」 은밀 추진/신시가지ㆍ새공항ㆍ해저터널 건설 서둘러/기득ㆍ운영권 등 획득,영구 식민지화 기대 홍콩의 신국제화(New Internationalization)전략이 은밀하게 추진되고 있다. 홍콩의 종주국인 영국이 이 지역의 중국 귀속시점인 오는 97년전에 모든 동원가능한 수단을 써서 새롭게 국제화된 모습을 갖추게끔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이같은 전략에 따라 홍콩정부는 올들어 대규모 항만 개발계획을 발표했고 홍콩섬 주변의 해안을 매립,신시가지를 조성하는 사업을 진행중이다. 또 홍콩섬 옆의 란타우 섬에 새로운 공항을 건설하기 위해 미국 벡텔사와 지난 4월 건설용역 계약을 체결했다. 홍콩과 구룡반도를 연결하는 세번째의 해저터널도 뚫을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같은 주요 개발사업에 소요되는 비용은 1백63억달러 정도로 추산되고 있으며 홍콩정청은 이 금액의 60%를 외국자본으로 충당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개발사업 이외에 홍콩에 보다 많은 외국상사ㆍ금융기관을 유치하려는 계획도 추진중이다. 오는97년 7월1일 중국에 반환될 홍콩에 대해 영국이 이처럼 투자를 확대하고 개발을 서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히 말하면 이러한 전략에는 먼 장래의 이익을 염두에 둔 치밀한 계산이 깔려있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같다. 영국으로선 현재 홍콩밖에는 이렇다 할 수입원이 될만한 식민지가 없기 때문에 마지막 달러 박스격인 홍콩을 쉽사리 포기하기 싫어서 중국반환을 앞두고 오히려 개발투자에 열을 올린다는 얘기다. 새로운 첨단기술과 공정으로 비행장을 건설하고 신시가지를 조성하며 금융ㆍ무역도시로서의 기능을 더욱 높일 경우 중국으로선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별 도리없이 영국측에 홍콩의 운영권을 맡길 것으로 영국정부는 기대하고 있다. 그렇게 될 경우 영국은 97년 이후에도 홍콩의 계속적인 발전에 따라 생기는 과실을 항구적으로 챙길 수 있는 기득권을 보장받게 된다는 것이다. 영국은 또 투자재원을 자국은 물론 미국 서독 프랑스 일본 등 여러나라로부터 조달하려 노력중이며 한국엔 건설인력을 요청하고 있다. 영국이 홍콩의 신국제화계획에 각국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는 이유는 장래의 이익과 관련,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다. 즉 97년 이후 홍콩이 중국에 넘어 가더라도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중국당국이 마음대로 홍콩을 다룰 수 없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지난 19세기 중엽 서구열강들이 중국에 발을 디뎌 놓았을 때 공동으로 이권다툼에 개입함으로써 청나라 조정을 속수무책의 상태로 만들었던 것과 비슷한 방법을 써 보겠다는 것이며 이는 새로운 스타일의 식민지확보전략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때문에 홍콩의 신국제화계획에 대한 중국당국의 반응은 그다지 흔쾌한 것 같지 않다. 중국측 입장에서도 앞으로 외화획득에 큰 몫을 하게될 홍콩의 발전이 중요한 과제이기는 하지만 외세의 지속적인 개입과 간섭이 달가울리 없는 것이다. 중국당국은 또 지난해 6.4천안문사건과 관련,홍콩이 자본주의와 민주사상을 대륙에 주입시켜 그들의 사회주의체제를 위태롭게 만드는 전초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난을 계속하고 있다. 따라서 홍콩의 경제성을 너무 중요시한 끝에 정치적으로 큰 손실을 입게 되지 않을까하는 의구심이 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판단에서 비롯된 발상이 바로 상해대개발 계획인 것으로 지적된다. 중국은 지난 6월 과거 국제무역ㆍ금융도시로 명성을 떨쳤던 상해가 옛 영광을 되찾고 홍콩을 능가하는 자유무역항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빠른 시일안에 대규모 투자를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 따라 지난 7월에는 주용기 상해시장을 단장으로 한 중국시장대표단이 각 도시를 순방,투자유치활동을 벌였으며 특히 화교실업인들을 대상으로 상해에 대한 투자를 적극 요청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영국의 홍콩 신국제화전략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도 밝은 편은 아니다. 97년 이후의 공산정권지배에 대한 불안감과 6.4사건의 충격으로 연간 5만명 이사의 고급두뇌인력이 해외로 이민을 가는 상황에서 신국제화계획이 제대로 실효를 거두기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게다가 외세와 오랜 투쟁경험을 쌓은 북경정권이 홍콩을 사실상 영구적으로 식민지화하려는영국의 속셈에 호락하게 말려들지 않을 것이며 비록 97년 이후에도 홍콩의 현체제를 지속시킬 것으로 알려지고는 있지만 조만간 강력한 주권을 행사,외국의 영향력을 점차 배제시킬 것이란 예측을 하고 있다.
  • “중ㆍ소 분쟁 상징” 진보도 중국 귀속

    ◎소,대중관계 개선 신호로 88년 반환/농지 개발에 한창… 국경무역도 빈번 지난 69년 중ㆍ소국경분쟁의 원인이 됐던 중국 동부국경 우수리강의 진보도(소련명 다만스키도)가 이미 중국에 반환돼 현재 개발이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마이니치(매일)신문은 30일 소련소식통의 말을 인용,1㎢크기의 이 조그마한 섬이 이미 지난 88년 「우호의 상징」으로 중국에 반환돼 현재 농업용지로 개발중이며 섬 주위에서는 중ㆍ소양국의 어민들이 활발히 국경무역을 전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또 중ㆍ소ㆍ일 3개국 관계 소식통의 말을 인용,『소련이 진보도를 중국에 자진반환한 것은 전적으로 정치적인 배려에 의한 것』이라면서 『이는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일본 북방영토문제와 관련,역사적 경위나 법률들을 고집하지 않고 북방영토를 일본에 반환할 수 있는 좋은 선례가 될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3천㎞에 달하는 중소양국의 국경선은 지난 19세기 중반 제정러시아와 청조시대에 아이훈조약(1858년)과 북경조약(1860년)을 통해 각각 아무르강(중국명 흑룡강)과 우수리강을 그경계로 확정됐다. 국제법상 국경선이 하천으로 정해질 경우 그경계선은 하천의 중앙이 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우수리ㆍ아무르강에는 수백여개의 섬이 있어 물의 흐름이 섬을 중심으로 바뀌기 때문에 그동안 진보도의 귀속문제가 중소양국간 분쟁의 원인이 되어왔다. 지난 69년 중소양국의 무력충돌까지 빚었던 이섬의 귀속문제는 그러나 86년 고르바초프의 블라디보스토크 연설을 계기로 해결의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고 87년 2월 중소양국은 9년만에 국경교섭을 재개,88년 진보도를 중국에 이관했다. 중국외교소식통은 이에 대해 『중소양국간 아직 국경협정은 체결되지 않았으나 진보도는 틀림없이 중국령이 되었다』고 확인했다.
  • 노대통령·민자수뇌 청남대회동 안팎

    ◎“야권 장내유도”… 강온 양면 포석/경제 악영향 우려,“총선불가” 견지/“야 입장 최대 수용”… 협상에 유연성 민자당총재인 노태우대통령과 김영삼대표최고위원,김종필·박태준최고위원 등 민자당 수뇌부 4인이 24일 대통령 여름집무실인 청남대에서 7시간30분여에 걸쳐 회동,야당측이 제출한 의원직사퇴서 처리문제등 국정전반을 심도있게 논의함으로써 여야대결로 치닫는 정국경색을 풀기 위한 여권의 사태수습 방향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날 회동에서 김대표는 지자제 실시일정및 내각제 개헌여부에 대한 여권의 명확한 입장을 밝힌 후 국민을 상대로 정국을 풀어나가자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결국 막후대화등을 통해 여당측을 최대한 설득,조속히 국회로 북귀케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으며 김종필최고위원이 앞장서 온건론을 주장했다고 최창윤 청와대정무수석이 전했다. 이에따라 민자당은 지자제법·국가보안법 등에 있어 야당측의 주장을 대폭 수용,야권의 장외투쟁 명분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8월 중순께부터 각급 레벨의 대화채널을 가동해 9월 정기국회전까지는 정국을 정상화시키는 데 주력키로 했다. ○…민자당 수뇌부 4인은 이날 야권이 주장하는 국회해산및 조기총선은 헌법에 위배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야당의원이 제출한 사퇴서는 국회의장에게 일임해 적절한 시기에 반려토록 한다는 데 견해가 일치. 노대통령은 『야당이 의원직 사퇴로 헌법에 없는 사실상의 국회해산과 조기총선을 주장하는 것은 국민적 합의와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라고 야권의 주장을 일축했다고 청와대관계자가 전했으며 다른 최고위원들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동조. 노대통령은 특히 야당의 장외투쟁이 투자심리 위축,산업평화정착 저해 등 경제에 미칠 영향을 지적하면서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소련의 대변혁,독일의 통일 등 세계가 격변하고 있는 때에 국내정치상황이 의원직 사퇴,장외정치 등으로 바람직하지 못하게 전개되는 것은 마치 당파싸움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외면,국권을 침탈당했던 19세기말을 생각케한다』면서 야당이 민주헌정의 대도에 복귀토록 최고위원들이야당과의 대화에 적극 나서도록 당부. 그러나 야당을 대화 테이블로 이끄는 구체적 방법을 놓고 최고위원들간에 약간의 이견을 보였다는 관측. 박준병사무총장·김용환정책위의장 등 민정·공화계 인사들은 『여야간 냉각기를 가진 뒤 8월초나 늦어도 8월 중순부터 야권의 체제가 정비되는 것을 보아가며 여야대화를 가속화해 정국을 푸는 것이 순리』라면서 『노대통령과 최고위원들의 회동에서도 이같은 방향으로 논의가 진전됐을 것』이라고 설명. 박총장은 특히 『지자제의 정당공천 허용이나 국가보안법의 대체입법등 야당측이 주장하는 내용도 절충여하에 따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유연한 자세를 견지. 반면 민주계의 김대표 측근의원은 『청와대나 민정계는 야권의 예봉이 무디어질 때를 기다리자는 입장이나 김대표의 생각은 다르다』면서 『내각제와 지자제등 야권이 쟁점으로 삼고 있는 부분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힌 뒤 국민을 상대로 정면승부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김대표가 밝힌 것으로 안다』고 피력. 민정계의 한 당직자는 이와관련,『민정계에서는 야당측의 총선요구를 개헌문제와 연결시켜 내각제개헌을 조기에 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표출되고 있는 데 대해 민주계 일부에서는 차제에 내각제 포기선언을 하자는 주장이 대두하고 있다』고 소개. 이와관련,최정무수석은 이날 회동이 끝난 뒤 『개헌문제로 당내이견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으며 지금은 개헌문제를 논의할 시점이 아니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면서 『그러나 민자당은 의회민주주의 발전과 정착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한다는 데 견해를 같이했다』고 발표해 내각제개헌을 계속 검토해 나갈 것임을 밝혀 민주계의 견해가 채택되지 않았음을 시사. 노대통령과 세 최고위원은 여야가 냉각기를 갖는 동안 당정비에 주력키로 하고 지구당위원장들의 귀향활동등을 통해 당조직 강화와 함께 정국정상화를 위한 홍보활동을 적극 벌여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날 회동에서는 정국 정상화방안과 함께 최근의 남북관계·경제문제 등도 폭넓게 협의됐으며 연말까지 물가안정·치안확보에 당력을 집중키로 결론. 특히민정계 일각에서 민주계가 대야 협상창구를 맡고 있어 여야대화가 단절됐다는 이유를 들어 조기 당직개편요구가 나오고 있는 사실도 거론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당분간 현 당직체제를 유지하면서 모든 채널을 동원,여야 막후대화에 나선다는 입장을 정리했다는 관측. 노대통령은 이날 남북문제에 대해 『7·20 민족대교류선언은 통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될 과정』이라며 『야당도 초당적 차원에서 협조가 긴요하며 정치인은 물론 국민 모두가 하나가 되어 통일에 착실히 대비해 나가야한다』고 강조. 김대표등 다른 최고위원들도 『당차원에서 정부의 남북 대화노력및 북방외교를 적극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다짐. 이날 회동에서 노대통령과 세 최고위원은 우루과이라운드협상등 국제경제여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한편 증시대책등 국내경제안정에도 당정이 전력을 기울이기로 결정. 노대통령은 『우루과이라운드등 대외의 도전이 치열할 때 국력을 한데 모아 도전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이목희기자〉
  • 미에“신마피아”중국인 갱단/FBI조사서 드러난 실태(특파원수첩)

    ◎조직원 입회식 엄격… 36개 항목 충성서약/마약밀매ㆍ매음ㆍ도박ㆍ총기 암거래로 떼돈 마약 밀매로 살찐 중국인 갱단이 미국에서 신마피아로 등장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중국인 갱단은 1백년의 역사를 가진 비밀범죄 조직으로서 미국 마약시장을 움직이는 배후 세력의 하나다. 미 FBI(연방수사국) 관계자들에 따르면 중국인 갱단은 점점 더 많은 젊은이를 조직원으로 확보,세계적인 범죄세력으로 커가고 있다. 2년전 FBI는 월 3천5백달러를 주고 고용한 한 중국인 협조자를 앞세워 아시아인 범죄조직을 상대로 한 「흰 노새」라는 이름의 사상 최대의 마약단속 작전을 전개했다. 그 결과 지난해 FBI는 유명한 「프렌치 커넥션」사건을 무색케 하는 8백20파운드의 헤로인을 압수했다. 이는 마약 중독자 10만명이 1년간 복용하고도 남는 양이며 돈으로 환산하면 10억달러가 넘는다. 이처럼 엄청난 마약 밀매량에 깜짝 놀란 미당국은 아시아인 범죄조직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많은 마약단속 관리들은 『과거 금주법시대의 주류밀매를 이탈리아인 범죄조직인 마피아가 담당했던 것처럼 이제 헤로인 밀매는 아시아인 갱단이 맡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동남아 「황금 삼각지대」의 아편 생산량은 86년 이후 두배로 증가해 지난해 3천50t을 기록했다. 동남아 아편의 미국 마약시장 점유율은 8년전의 14%에서 지난해엔 약 절반으로 늘어났다. 중국인 갱단은 「아편 왕」으로 알려진 미얀마의 군벌 「쿤사」를 비롯한 황금 삼각지대의 지배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인 갱단들은 초기의 마피아처럼 마약 밀매외에 협박ㆍ매음ㆍ불법 도박ㆍ총기 암거래ㆍ외국인 밀입국 사업 등으로 돈벌이를 하고 있다. 이 돈벌이의 주역은 ▲통(Tong) ▲트라이애드(Triad) ▲거리의 갱(Street Gang)들이다. 「통」은 미국의 많은 대도시에서 볼 수 있는 중국인 기업체 및 사회단체의 모임으로서 그 역사가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있다. 통의 회원들은 범죄와 거의 무관하나 중국인사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조직 범죄엔 통의 지도자가 관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트라이애드」는 홍콩에 본부를 둔 비밀단체로서 전 세계에 걸친 조직망을 갖고 있다. 원래는 청조를 멸망시키고 명조를 재건하기 위해 17세기에 조직된 정치결사였으나 점차 범죄단체로 변모했다. 거리의 갱은 원래 각 지역의 통이 운영하는 도박장의 청년 협조자나 망보는 소년들로 엉성하게 짜여진 그룹으로서 지금은 「날으는 용」「유령의 그림자」라는 이름으로 조직돼 비행을 자행하고 있다. FBI 관계자들은 영국 식민지인 홍콩의 97년 중국 귀속과 관련한 불안감 때문에 홍콩을 떠나는 조직 범죄자까지 미국이 「탈출자」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대해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6만명의 구성회원을 가진 홍콩의 트라이애드가 미국에 엄청난 범죄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조직원만을 놓고 본다면 마피아는 2천명에 불과해 트라이애드에 비교가 안된다. FBI 관리들은 중국인 갱단과 마피아가 유대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서로 상대방을 위한 계약살인 임무를 이행하고 동남아 마약과 마피아의 고리대금 자본 및 추적불능 무기를 교환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인 갱단과 마피아는 비슷한 입회식을 거행한다. 마피아는 새로운 입회자에게 조직에 대한 충성을 선서시키고 죽을 위기에 처하더라도 침묵의 규약을 지킬 것을 서약케 한다. 트라이애드의 입회식,즉 「청등 매달기」에선 36개항목의 충성서약과 1개 항목의 비밀엄수 서약을 하게 한다. 미국정부의 한 정보 보고서는 기본적인 인력부족과 중국어를 구사하는 요원 부족 등으로 인해 중국인 갱단에 대한 단속활동이 장애에 부딪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중국인 갱단에 침투하기는 아주 힘들다. 그들은 원래 폐쇄적이고 비밀적인데다가 비아시아인을 경계하고 특수 용어를 쓰고 있다. 또한 FBI 요원 9천6백명 가운데 아시아계는 1백23명에 불과해,중국인 갱단에 대한 단속활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차이나 타운의 주민들은 경찰과 정치인을 불신하고,발설하는 것을 겁내고 있다. 그들의 두려움을 복합적인 것이다. 범죄집단으로부터의 보복도 두렵지만 공격해서는 안될 「성우」인 커뮤니티의 지도자들이 많은 범죄집단의 두목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워싱턴=김호준특파원〉
  • 로즈여사 100회 생일잔치(세계의 사회면)

    ◎“미국의 왕조”케네디가의 산 증인/영광ㆍ슬픔속 가문의 정신적 지주로/미 의회,7월22일을 「감사의 날」선포/“모든 부문서 1등이 되라”열성적인 자녀교육 「미국의 왕조」라고 불리는 케네디가의 산증인인 로즈 피츠제럴드 케네디여사가 영광과 슬픔으로 점철된 한세기를 보내고 22일 가족들의 축하속에 1백회 생일을 맞았다. 한편 미의회는 이날을 「로즈 피츠제럴드 케네디가에 대한 감사의 날」로 선포,3대에 걸쳐 케네디가를 미국의 최고 명문가로 키워낸 로즈여사의 공로를 기렸다. 고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가족들을 응집시키는 아교풀」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았던 로즈여사는 4남5녀 가운데 둘째아들인 존 F 케네디를 대통령으로,셋째 넷째아들인 로버트,에드워드 케네디를 상원의원으로 키워내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여장부. 그러나 로즈여사의 삶이 행복으로만 가득찼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녀는 1944년 첫째 아들인 조2세의 전사,1948년 둘째딸 캐슬린의 비행기 추락사와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1968년 대통령 선거유세중 로버트를 암살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로즈여사는 슬픔을 가슴으로 삭이며 이를 극복한 초연함과 용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극에서 극으로 모든 행ㆍ불행을 겪어왔던 로즈여사는 1890년 보스턴의 정치인인 존 F 피츠제럴드의 6남매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 역시 케네디가와 마찬가지로 지난 19세기 중엽 아일랜드를 휩쓴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가정이었다. 그녀의 부친은 1895∼1901년 하원의원을 역임했으며,1906년에는 보스턴시장을 지내기도 했다. 따라서 허니 피츠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로즈여사는 여유있는 환경속에서 자유분방하게 성장할 수 있었으며 가정적인 조용한 성격의 어머니를 대신해 일찍부터 안주인 역할을 맡아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그녀는 명문여대인 웨슬리대 진학을 희망했지만 존 F 피츠제럴드는 그녀를 여동생인 아그네스와 함께 네덜란드의 「성심수녀원」으로 유학시켰다. 로즈여사는 성심수녀원에서의 생활을 통해 침착성과 신앙심을 키울 수 있었으며 이때 체득한 그녀의 독실한 종교관에 입각,그뒤 자신의 딸들을 수녀학교에 진학시키는 열의를 보였다. 로즈여사는 1914년 주영대사를 역임한 백만장자인 조셉 P 케네디와 결혼,케네디가를 세인들의 주목을 받는 가문으로 키워내는데 중요한 몫을 했다. 조셉 케네디부부는 『첫째가 되어야 한다』는 가훈을 바탕으로 자녀들을 강하고 훌륭히 키웠다. 모든 부문에서 2등을 용납치 않은 조셉은 자녀들에게 인습을 무시하고 자신의 규칙대로 살 것을 가르쳤으며 로즈는 경건ㆍ신앙ㆍ엄격함을 가르쳤다. 그녀는 자녀들의 식단ㆍ운동량ㆍ질병을 기록한 신상카드를 늘 지니고 있을 정도로 자녀교육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을 뿐만 아니라 식사시간에 토론을 자주 갖기도 했다. 평소 뛰어난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였던 로즈여사는 존 F 케네디가 46년 하원의원에 출마했을 때 선거운동원으로서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했으며 존 F 케네디가 60년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는 14개 주를 돌면서 무려 46회에 걸쳐 지원연설을 하는 투혼을 보였다. 로즈여사는 평소 『나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정복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무너지면 다른 가족들에게 엄청난 불행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이처럼 정신력 뿐 아니라 10년전까지 수영과 조깅을 즐겼던 강한 체력의 소유자인 로즈여사도 나이는 어쩔 수 없어 요즘은 휠체어에 의지한 채 간호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손자들과 보내는 시간을 낙으로 삼으며 지내고 있다. 그녀는 자서전을 통해 『후손들은 역경ㆍ실망ㆍ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인내력을 가져야 할 것』이라면서 『신은 우리들이 견디지 못하는 십자가를 지우지 않는다』고 기술,케네디가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흔들림 없는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곽태헌기자〉
  • “아편전쟁ㆍ천안문 사건은 구국 운동”(특파원수첩)

    ◎중국정부,“동질성”홍보 안간힘/“두 사건 모두 「서방침투」막는데 크게 기여”/「무력진압」이후 정치위기 벗으려 몸부림 1백50년전의 아편전쟁과 지난해 6ㆍ4천안문사건. 중국당국은 겉보기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듯한 이 두가지 사실에 구국차원의 공통점을 부여,현실적인 정치위기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즉 아편전쟁이나 6ㆍ4사건 모두가 중국을 수탈하고 반식민지화하려는 서방세계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역사적 사명감과 애국심에서 비롯됐다는 식으로 이색적인 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6ㆍ4사건의 경우 개방ㆍ개혁에 편승해서 유입된 자산계급 자유화등 사회주의 중국을 좀먹는 부르주아사상이 정신적 아편으로 작용,대학생을 비롯한 일부 젊은이들을 현혹시켰기 때문에 당국으로선 이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국가와 전체 민족을 구하기 위해 무력진압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중국당국은 아편전쟁발발 1백50주년(6월)을 맞아 요즘 북경 등 주요도시에서 이와 관련된 자료전시와 함께 영화 연극등을 공연하는 등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벌이고 있으며 강연회 등을 통해 아편전쟁과 6ㆍ4사건의 동질성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지난 6월4일 6ㆍ4사건 1주년을 전후해서도 대학생등 청소년들을 이러한 행사에 의무적으로 참석케 해 애국심을 되새기게 함으로써 사건의 부정적인 영향을 희석시키려 했다. 중국당국은 앞으로 연말까지 아편전쟁의 애국적 성격을 강조하는 캠페인을 계속 벌이고 6ㆍ4사건도 같은 시각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식의 정치사상교육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아편전쟁은 누구나 잘 알고 있듯 팽창적 제국주의에의 야심에 가득찼던 영국이 19세기 들어 중국대륙에 아편을 대량으로 팔아 넘기던 과정에서 발생한 것. 영국은 대륙에서 수입하는 중국차와 비단의 결제대금으로 당시 국제통화역할을 했던 은을 주는게 아까워 그들 식민지 인도에서 재배하던 아편을 대신 주기 시작했고 중국측은 몇차례 수입금지령을 내렸지만 영국상인들의 밀무역으로 아편수입량이 급증했다. 이처럼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아편값을 치르느라 거꾸로 중국의 은이 해외로 대량유출,대륙경제는 큰 타격을 입게 됐다. 당시 중국의 본위화폐이던 은보유량의 격감과 가격급등은 은으로 세금을 납부하던 상인과 농민들의 담세능력을 극도로 저하시켰고 결국 중국대륙은 아편중독의 만연과 함께 정부재정이 파탄에 이르게 된 것. 그당시 청국의 전권대신 임측서가 1839년 6월3일 영국은 물론 미국 포르투갈상인들로부터 압수한 2천t의 아편을 광주에서 불태워 버리자 영국은 이를 기화로 다음해 6월 군대를 파견,2년간에 걸친 아편전쟁이 벌어졌고 청국의 참패로 맺게 된 남경조약에 따라 홍콩이 영국에 할양됐다. 또 중국측은 이 전쟁으로 허약한 실체가 드러나 서구 열강에게 이리저리 뜯기는 식민지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현재의 북경정권은 그당시 중국이 싸움에는 졌지만 아편전쟁은 빈사상태에 빠져가는 조국을 지키기 위한 국민들의 애국심이 반영된 것이며 아편으로 중국을 병들게 한 제국주의에 분연히 대항했던 임측서야말로 사상 보기 드문 구국의 민족영웅이라고 치켜 세우고 있다. 또 과거에는 너무 오래 쇄국정책을 썼기 때문에 국가가 쇠퇴해지고 서구열강에 의해 강제로 문호를 개방당하는 치욕을 겪었지만 현정권은 10년전에 스스로 개방ㆍ개혁을 단행,국가발전을 이루고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강력한 힘을 과시하게 됐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다만 개방의 틈을 타서 서방국가들이 정신적 아편인 자본주의의 독소들을 계속 대륙에 침투시켜 국민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하려 하기 때문에 아편전쟁 당시의 애국심을 되살려 이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중국당국의 논리가 그들 국민들에게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발휘할지는 정확히 헤아리기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그러나 관측통들은 중국당국이 지난해 천안문광장의 민주개혁요구시위를 무력진압한데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실망이 엄청나게 큰데다 진정한 애국심이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므로 별다른 실효를 거둘 것으로는 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대학생을 비롯한 중국의 지식층은 민주개혁과 인권보장노력이 참된 애국이라고 생각할 것이므로 아편전쟁과 6ㆍ4사건을 같은 역사적 유형으로 묶는 견해에 큰 저항을 느낄 것이란 지적을 하고 있다.
  • 통독과 「남북한」/송복 연세대교수(세평)

    통독을 보는 우리들의 심경은 어둡고 착잡하다. 독일은 어찌해서 통일하게 됐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여 유일의 분단국가로 여전히 남아있게 됐는가. 이 지구상에서 통일국가로서는 역사가 가장 오래된 나라,명실공히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서 통일된 모습으로 단절없이 가장 오래 지속돼 온 나라는 중국도 인도도 아니고 서구의 그 어느 나라도 아닌 바로 우리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오늘날 세계 모든 나라들이 통일된 국가양태를 보이고 있는데 유독 우리만이 양쪽으로 갈라져서 아직도 죽이네 살리네 하고 싸우고 있는가. ○쉽게 합칠 수 있었던 이유 독일이 통일국가로서의 모습을 보인 것은 불과 1백20년전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50개 공국으로 혹은 80개 공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러던 것이 보­오전쟁과 보­불전쟁의 승리로 1871년 처음으로 근대국가로 통일이 됐고 이 통일은 2차대전이 끝나기까지 근근 70수년을 유지해오다 종전이후 또 분단됐다. 이처럼 통일보다는 분단이 역사의 주경향이 돼있던 독일이 분단보다는 통일이 역사의 주경향이 돼온우리보다 쉽게 합쳐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는 3개의 깊이 생각해볼 교훈이 있다. 첫째로 그들은 서로 전쟁하지 않았다. 적대적으로 서로 대치하고는 있었다해도 무력으로 동족을 죽이는 살상전을 벌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남이 억지로 씌워놓은 이념때문에 형제를 죽이지 않았고 이웃을 살육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불공대천지원수가 될 이유가 없었고 감정의 앙금이 끝까지 용해되지 않고 남아서 서로를 비뚤어지게 볼 이유가 없었다. 언제든 만나면 같은 민족으로 미소지을 수 있었고,환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2+4」라는 신조어가 말하듯이 4대 강대국에 의해 나누어지기는 했지만 그들은 같은 민족임을 서로의 내부에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외부적 요인에다 내부적 요인을 종속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패전으로 나누어져도,그리고 나치즘이라는 역사적 유죄를 같이 짊어지고 있었어도 역사는 역사,현재는 현재로 분리해 보았다. 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장이 언제나 열려져 있었다는 것,외부에 내부를 독립시키고 있었다는것,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분리해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것이 수백년간의 분열과 짧은 통일기간과 그리고 그후의 계속된 분단의 역사를 다시 통일케하는 첫째의 요인이며 교훈이 된다. 둘째로 그들은 비록 통일의 역사는 짧았다 해도 그리고 그 통일과 맞먹을 만큼 통일후의 분단의 역사가 거의 반세기에 이르도록 길었다해도,그들간에는 서로 합칠 수 있는 근대화된 체제의 공유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나치스 이전의 바이마르공화국 체제이고,그리고 현재 그들이 돌아가는 체제역시 이 역사적 공유경험의 체제에서 일보도 달라짐이 없는 자유·개방·경쟁의 민주국의 체제이다. 그들은 비록 세대를 뛰어넘는 시간적 갭을 가지고 있다해도 이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이 여전히 다수로 남아 있고,그리고 여전히 사회의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동일체제 경험여부 중요 통일은 같은 경험을 공유한 체제로 양쪽이 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같은 체제를 경험해 보았느냐,보지 않았느냐가 통일의 조건이며 기준이 된다. 만일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체제로 그 어느 한편이든지 돌아가게 된다면,그들 사이에는 동질성이 전혀 있을 수 없고 그들사이에 이제부터 전개되는 관계는 오직 서로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질성의 관계만이 남는다. 이 경우,이루어지는 것은 「통일」이 아니라 실제적으로는 「통합」이 된다. 그런데 독일은 쉽사리 동질성을 회복할 수 있는 경험공유체제를 가지고 있었고,따라서 정신적으로,심리적으로 민족공동체를 재창출해 낼 수 있는 기틀을 사실상 확보하고 있었다. 셋째로 공산주의 경제의 비효율성 내지 비생산성이다. 출발할 때부터 동독은 공산권사회에선 가장 산업화된 나라이고 그리고 60년대와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세계 10대 공업국의 하나가 돼 있었다. 그러나 70년대를 지나 80년대를 거치면서 정반대로 이 나라는 서구 그 어느 나라에 비해서도 가장 낙후한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특히 일상 생활용품에서도 전화 한대를 갖기 위해서도 10년을 기다려야 하는 나라가 됐다. 여기에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공산주의 경제정책의 비역동성­정체성이 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가장 발전할 수 있는 것­그 어느 의미에서나 유일하게 발전할 수 있는 것,그것은 군사산업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군사산업이 계획을 세우는 데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가지수가 적고 그리고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군비이외의 생산품목은 그 어느 것 하나 계획부터가 너무 수가 많고 너무 유기적으로 복합화 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소련사회 하나만 보아도 이 한나라에서 해마다 세우지 않으면 안되는 생산품목은 2천4백만종이나 된다. 이 2천4백만종의 생산품목을 유기적으로 생산해 내는 데 세워야 하는 계획은 1백50억개가 넘는 것으로 산정되어 있다. 누가 어느 기관에서 이것을 완벽하게 계획해낼 수 있겠는가. 자유시장 경제에서라면 스스로 조정해서 생산될 것은 생산되고 문을 닫을 것은 문을 닫는다. 그러나 중앙집중화된 계획경제에선 이것은 아무리 계획하고 생산해 나가도 인위적으로 한계에 부딪치고 만다. 그래서 소련에선 1천6백만명이상의 노동력이 필요없는 자리,서로 중첩되어 있는 자리에 채워져 있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비생산적으로 소모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전노동력의 15%인 1천8백만명이 경영관리직에 앉아서 방대한 운영기구를 맡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조직,그 국가사회야말로 얼마나 역피라미드 현상을 초래하고 있는가. 공산주의 경제가 어느 나라나 하나도 예외없이 1970년대의 초중반에 들어서면서 정체해 버리는 것은 이 인위적 계획의 한계성을 극복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그것을 뚫고 극복하는 방법은 동독처럼 체제전환을 해서 통일의 길로 가든지,지난 2일 28차 공산당대회에서 한 고르바초프의 연설­「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이념은 19세기의 자본주의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세계는 엄청나게 변화했음에도 우리는 고전적 이데올로기에서 답을 구하고 있다」­에서처럼 페레스트로이카로 가든지,둘중 하나이다. ○“언제까지 분단국가로…”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떻게 돼 있는가. 40년전의 6·25는 「40년동안 여전히 살아 있는 전쟁」­계속 불구대천지 원수로 가는 전쟁으로 작용하고 있다. 거기에 우리는 역사적으로 경험을공유한 근대화된 체제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남북」이 공유한 것은 전통사회 체제이든 아니면 일제식민지 체제 뿐이다. 긴 통일의 역사가 무색할 정도로,우리는 어떻게 합치든 「통일」 아닌 「통합」의 이질적 관계만이 전망되고 있다. 그리고 북쪽은 밖이야 어떻게 변하든 아랑곳 없다는 듯 페레스트로이카도 글라스노스트도 외면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분단국가로 남아 있을 것인가.
  • “「시장경제」 서두른 나라가 잘산다”(차동세의 경제기행 동구:하)

    ◎헝가리,비교적 부유… 체코는 훨씬 궁핍/개방ㆍ개혁 이끌 「경영두뇌」없어 애태워 1인당 국민소득통계로 보면 폴란드가 소련보다 훨씬 못사는 나라여야 하는 데도 공중에서 내려다 본 폴란드의 모습은 소련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농장의 집들도 제법 깨끗했고 길거리에 차들도 더 많았다. 만나본 사람들도 소련보다는 활기차 보였으며 어느 정도 개혁에 대한 확신이 있어 보였다. 시장경제에 대한 예비지식도 꽤 축적되어 있는 것 같았다. 동독 체코 헝가리 등 방문 5개국중 헝가리가 가장 잘 살고 그다음이 동독 체코 폴란드이고 소련이 가장 못사는 것 같았다. 국민의 실제 생활수준은 국민소득에 관한 통계와는 거의 정반대였다. 시장경제를 가장 먼저 도입한 나라가 생활수준도 가장 앞서있고 시장경제도입이 늦은 나라는 가장 뒤져 있는 셈이다. 경제발전에 있어 시장의 힘이라는 것이 그토록 강한 것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번 방문국중에서 폴란드의 농가가 유독 잘 살아 보였고 주택도 농장도 깨끗이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되어 물었더니 폴란드에서는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도 농토만은 80%가 사유지라는 것이었다. 공산주의하에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의문스럽기도 했지만 어떻든 현재 폴란드에서는 식량이 오히려 남아도는 이유를 알수 있었다. 동구권국가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특히 동독사람들은 자기들이 언제 공산주의자였더냐는 듯 하였으며 그들의 머리속에는 이데올로기 대신에 독일민족의 위대함과 경제적 풍요에 대한 기대가 가득차 있는 듯하였다. 동독 사회과학원 간부급인사에게 독일이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을 보니 같은 분단국의 국민으로서 대단히 기쁘다는 말과 함께 남ㆍ북한도 가까운 장래에 통일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가 뒤통수를 한대 얻어 맞았다. 그의 얘기인 즉,독일의 경우와 한국의 경우는 사정이 판이하다는 것이다. 독일은 비유하면 사랑하는 남녀가 부모에 의해 강제로 떨어져 살아온 격이지만 남ㆍ북한은 서로 치고 받고 싸우는 것을 부모들이 겨우 떼어말려 놓은 것과 같지 않느냐고 했다. 또 하나 동독은 오래전부터 서독과 교류를 실행해왔고 서로 내왕이 있었으며 김일성이 같은 독재자도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남ㆍ북한 통일에 대해 너무 성급한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약이 올랐지만 할 말이 없었다. 결국 무안을 당한 꼴이 된 채 겨우 늘어 놓은 변명은 베를린장벽도 그렇게 쉽게 무너질 줄은 아무도 모르지 않았느냐. 그러니 우리의 휴전선도 어느날 갑자기 무너져 내릴지 모르지 않겠느냐는 말로 대신하였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동서독분계초소를 지나 서베를린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모처럼만에 김치를 실컷 먹고 나니 속이 얼얼하였지만 살것만 같았다. 그러나 서베를린의 번화한 모습과 바로 경제하나 넘어 동베를린의 침울하고 정체된 모습이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루어 그것이 인간의 장난인가 아니면 신의 조화인가 실로 감회가 착잡하였다. 체코에서는 19세기에 지어진 왕궁의 하나를 사무실로 쓰고 있는 과학원산하 경제연구소를 방문하였다. 서구세계 같았으면국보급 문화재로 지정해 놓고 박물관이나 기념관으로 써야할 왕궁을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나는 마루며 무너진 벽,망가진 화장실을 고치지도 않고 그대로 사무실로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계획경제란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다시 한번 실감하였다. 천장의 화려한 벽화가 부서진 난간이나 허물어진 벽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경제가 무너지면 문화도 긍지도 자존심도 다 무너지는 것인가. 체코경제연구소의 한 경제학자는 동구권국가들의 공통된 애로사항은 시장경제를 이끌어 갈 기업인이 없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경제건설을 위해 가장 다급한 것은 시장원리에 따라 상품을 만들어 국내에도 공급하고 세계시장에 수출하는 일인데 막상 그일을 수행해 낼 경험있는 기업인이 없어 큰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와는 퍽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부르주아계급으로 지탄받아야 할 사회주의 국가에서 파탄에 이른 경제를 되살려 내 줄 기업인을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이번 여행 마지막 체류국인 헝가리에서는 서구 여느나라와 별차없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맛볼 수 있었다. 수도 부다페스트에서는 상점마다 각종 소비재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시내 번화가에는 세계유명브랜드 상품을 파는 패션상점도 즐비해 있어 사람사는 곳 같았다. 사람들의 얼굴모습도 한결 활기차고 무엇인가 하려는 의욕에 넘치고 있었다. 이번에 돌아본 동구권국가들은 모두 지금 시장경제의 도입이라는 엄청난 개혁의 물결속에 휩싸여 있었고 서방의 기술과 자본을 끌어들이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그들은 두려워하면서도 개혁에 마지막 승부를 걸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한 혁명적인 변화를 보고 지금은 경제가 어려우니까 시장경제니 개혁이니 하며 떠들지만 일단 급한 불만 끄고나면 다시 공산주의로 되돌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로의 회귀가능성을 묻는 유도성질문을 해보았다.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그럴 가능성은 결코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로 그들은 처음부터 공산주의가 아니었는데도 소련의 힘에 눌려 할수 없이 공산체제를 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소련은 줄곧동구권국가들을 침략하고 괴롭혀 왔기 때문에 비록 소련이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 해도 그들은 이번기회에 완전히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얘기에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었다. 결국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들의 계획경제가 참담하고 쓰라린 실패로 끝나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사회제도와 인간본성의 괴리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보다 현실적으로는 경제문제의 해결에 관한 한 정부관료와 정치인들의 치밀한 머리로 짜낸 그럴듯한 경제조치들이 엉성하고 결점투성이 같아 보이는 시장기능 보다 훨씬 못 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데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인간은 이윤추구와 개인의 욕망충족을 위해 일할 때는 보람을 느끼고 기운도 나지만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할 때는 한낱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변해 버린다는 사실을 이번 여행에서 눈으로 직접 확인한 셈이다.
  • 지일이 극일/송복 연세대교수(세평)

    우리에게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도대체 우리와 일본은 어떤 관계인가. 서로 주고 받는 호혜관계인가,주기만 하고 받기만 하는 일방적 봉사관계인가. 역사를 돌아 보면 마치 우리는 일본을 위해서 존재하는 나라처럼 되어있다. 그들이 미개한 때는 우리의 문화를 그들에게 전파해서 깨우쳐주는 구실이나 하는 나라로,그것도 모자라면 대륙의 문물을 그들에게 전해주는 다리구실까지 해주는 나라로,또 그것도 모자라면 우리 연안을 무인지경으로 노략질하던 왜구들의 약탈장소나 돼주는 나라로­. 그러나 이 정도는 고려때까지이고,조선조에 들어서면 아예 그 구실과 역할의 양태로 달라지고 내용도 달라진다. ○미래 장담할 수 있는가 자기들끼리 분열해 싸움을 일삼다 통일이 되니 이젠 그 통일된 힘의 시험장소로,혹은 통일된 제 세력들의 내부압력을 바깥으로 분출시키는 외부발산장소로 우리를 초토화시킨 것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어떤 이들은 네덜란드 중간상인들과 무역하던 사카이지방 조총상인들의 안팔린 조총소화장소로 우리를 이용한 것이 임진왜란이라는 주장도 펴고 있다. 17세기이후 평화로웠던 얼마간의 시기도 있었지만 일본은 내내 위협의 적이 됐고,마침내 19세기 중엽을 넘어서면 후발 일본 자본주의를 보다 빨리 발전시키고 완성시키는 구실을 하는 장소로 바뀐다. 그들의 야욕을 충족키 위해 청일전쟁을 벌일 때는 그 전쟁의 싸움터로 그들 나라가 아닌 우리가 돼 주었고,잇따라 일어난 노일전쟁에서 우리는 그들 승전의 주배후지가 됐다. 드디어는 식민지까지 돼서,뿐만 아니라 대륙침탈의 병참기지까지 돼서,무소불위로 그들이 하고 싶은대로 해도 되는 가장 악랄한 수탈의 대상자가 돼 주었다. 45년 원자탄을 맞고 참담한 패배자로 무조건 손을 들었을 때는 이제야말로 그 잔인 무극의 나라가 최후의 비명을 지르고 물러가나 했더니,난데없이 6ㆍ25가 터져서 그들 부흥의 기틀을 만들어 주었다. 물러간 지 5년도 채 못돼,우리가 우리를 죽이는 상잔을 벌이면서까지 전쟁의 폐허에서 몸부림치는 그들을 구해주는 것이 됐다. 가장 잔인했던 적을,그것도 치가 떨리도록 증오했던 적을 1백만명이상의 사상자를내면서까지 구해준 것이 우리의 6ㆍ25였다고 한다면 6ㆍ25야말로 일본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를 죽인 전쟁이다. 일본에 대해선 우리야말로 살신성인의 나라다. 역사상 그 어느 나라가 자기를 죽이면서까지 원수를 구해준 나라가 있던가. 오늘날은 어떤가. 우리는 매년 40억달러이상의 적자를 내면서까지 일본의 물건을 사주는 나라가 돼있다. 세계에서 가장 부한 나라가 된 그 일본의 부를 증가시키기 위해,우리 기업가가 밤낮없이 뛰고 있고,우리 노동자가 살을 에이면서까지 불철주야 일하고 있는 격이 돼있다. ○우리 힘으로 청산해야 도대체 우리는 일본에 어떤 나라인가. 우리 역사는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일본을 살찌우기 위해서,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져 있는 나라인가. 우리는 단호히 아니라고 대다할 수 있는가. 우리는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고 우리의 역사를 다시 고쳐 쓸 수 있는가. 그러나 그 일본은 언제나 기껏해야 「통석의 염」에 불과하다. 그들의 사고를 속에는 호혜의 염이란 있을 수 없고,호혜의 염이 있을 수 없는한 「통석」아닌 「통한의 염」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 마음이 일어날 수 없는 그들을 보고 우리의 한을 달래는 말을 받아 낸다고 해서 그 내실이 바뀔 리 없고,그 내실이 바뀔 리 없는 한 그 일본을 위해 존재해온 것이나 다름없는 우리의 과거역사가 미래에도 그 구실로 지속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아니 더할나위 없이 요구되는 것은 그 과거의 역사를 우리가 우리 힘으로 청산하는 것이다. 통석의 염이든 통한의 염이든 뼛속에 깊이 간직하면서 과거는 과거로 보내는 것이다. 이제 그것을 다시 거론해서 이렇게 반성해라 저렇게 사죄하라 한다고 해서 우리의 미래에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일본을 볼 때마다,그리고 일본을 생각할 때마다 이제 더이상 이제 더이상 일본을 위해 존재하는 역사를 만들지 않겠다는 극일의 앙다짐이 있어야 한다. 일본은 명명백백 자진해서 우리에게 도움을 줄 나라가 아니다. 일본은 명명백백 과거역사의 패턴을 패턴 그대로 지속시키려는 나라다. 지속시키려 하는 그만큼 그 일본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 교포들의 지위를 바로 잡아 줄 리 없고,우리를 위해서 그 과거 역사와는 다른 패턴을 가지라고 기술을 순순히 이전해줄 리도 없을 뿐아니라,더더구나 우리 부에 한 푼이라도 도움이 되는 무역역조를 스스로 나서 시정해줄 리 없는 것이다. 오로지 우리가 해야 할 따름이다. 우리가 주체가 되고 우리가 주도를 해서 우리가 다시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일본을 알고 일본을 배워야 한다. 오래전 그 일본이 우리를 배워서 우리를 좌지우지 했듯이 거꾸로 우리가 일본을 배워야 그 일본을 극복할 수 있다. 그 다른 무엇보다 일본인들의 「나라사랑 마음」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역사시대이후 대소 전쟁을 수도 없이 치르면서도 이상하게도 나라사랑 마음을 내면화 시키지 못했다. 뼈에도 안 박히고 살에도 안 박히는,입발림만의 나라사랑만 무성해 있다. 더구나 중상층의 경우 자기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 나라사랑이라는 것은 너무나 「완벽히」 잊고 있다. 대일 무역역조를 시키는 사람들이 우리 국민 가운데 도대체 누구인가.수입개방이야 피할 수 없어 한다해도 그 물건을 안 사쓰는 양식과 양심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나라사랑 마음이 있다면 그 양식 그 양심이 어디로 갈 것인가. 자기 상품이 질이 낮다해도 남의 것을 안 사쓰는 정신,그래서 내수용 수입을 한푼이라도 줄이는 생활자세 그것이 일본인들의 나라사랑 마음이며 그것이 오늘의 대국 일본을 만든 장본이다. ○「나라사랑」 본받을만 일본은 미국처럼 통이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 통이 큰 미국도 불리하니 우리에게 개방하라고 수없이 압력하지 않던가.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그리고 심적으로 일본은 대국이 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작은 기술로 오직 나라사랑하는 일념으로 오늘의 대국이 됐다. 자기를 돕지 않는 자는 하늘도 돌아보지 않는다. 자기가 자기를 일으키지 않는데 어느 하느님이 자기를 일으켜 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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