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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탄불/보스포루스 해협(아랍서 지중해까지:7)

    ◎동·서양 분기점… 이질문화 한품속에/이스탄불시를 양분… 기독·이슬람교 격전의 역사 간직 보스포루스. 탁한 암록색 물빛의 길이 30㎞,폭 0.6∼3㎞의 좁은 해협,그것은 바다라기보다 강에 가깝다.어원을 보더라도 Bous(ox:황소) Poros(ford:여울),황소여울이다. 제우스와 여사제 이오(IO)는 연인사이다.아내 헤라의 집요한 추적을 비켜나보려고 제우스는 이오를 황소로 변하게 한다.헤라는 그 사실까지도 눈치채고 등에를 이용하여 황소로 변한 이오를 괴롭힌다.황소는 괴로움에 못이겨 근처의 여울 속으로 뛰어드는데…이오가 몸을 던진 물이 바로 보스포루스다. 이 해협은 터키 최대의 도시인 이스탄불을 동양과 서양으로 갈라놓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을 분할하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한 도시가 동양과 서양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동양과 서양이라는 대칭적 이질문화를 하나의 품속에 끌어안고 있는 이스탄불은 어떤 도시일까? 이스탄불에 도착하자마자 떠오르는 궁금증이 그것이었다.「내가 지금 아시아에 있는가,유럽에 있는가?」 지도를 입수함으로써 그 궁금증은 싱겁게 풀리는가 했는데…사실은 그게아니었다. ○부를 나르는 물길 보스포루스 서안 돌출부에 그리스의 메가리아인들이 비잔티움 도시를 세운 것은 BC660년이었다.그들은 집터를 정하기 전에 점술가에게 물어보았다.「눈먼 사람들이 사는 땅의 반대편에」라는 대답을 듣고,그들은 보스포루스 서안 일대를 탐사하던중,경관이 빼어난데도 불구하고 거주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아름다운 터를 발견했다.그때 해협 건너편 땅엔 마케도니아인들이 이미 부락을 이루어 살고 있었으므로,메가리아인들은 이렇게 풍광이 수려한 땅을 몰라본 저들이 바로 「눈먼 사람들」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따라서 자신들이 발견한 곳이 바로 점술가가 점지한 땅이라고 확신하며,그들은 도시를 세웠다. 그것이 바로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양과 서양이 나누어지게 된 시초였다. 그후 비잔티움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에게 점령되었다가 알렉산더대왕이 페르시아를 패퇴시켜(BC334)아나톨리아를 장악함으로써 다시 그리스의 영토로 귀속되었다.대왕의 사후,맹주들에 의해 통치되던 비잔티움은 BC278년 갈라티아인들의 공격에 무릎을 꿇었고,그뒤 마케도니아인들을 쳐부순 로마제국의 출현으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황제 셉티무스는 비잔틴문화를 재건한다는 기치를 내세우고 도시를 둘러싼 성벽을 확장하고,소피아성당 주변과 도로를 정비했다.뒤이어 왕위를 계승한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고 새 수도의 이름을 콘스탄티노플ㅈ라 했다.황제는 트로이의 영화를 재현한다는 포부를 세우고 성벽을 서쪽으로 2.8㎞나 확장하고,자신이 그리스도교인임에도 이교도들의 사원을 보수하는 한편 소피아 성당을 대대적으로 넓혔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양과 서양이 격돌한 것은 14세기 중엽이었다.발칸에까지 진출하여 위세를 떨치던 오스만튀르크제국은 메흐메트 2세가 즉위한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이곳에 「이슬람교도가 많은 도시」라는 뜻의 이스탄불이란 새 이름을 붙였다. 그후 이스탄불은 오스만제국의 수도가 되어 이슬람문화권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19세기에 들어서 오스만제국이 쇠퇴함에 따라 이스탄불은 또다시 발칸을 둘러싼 열강들의 분쟁지가 되었다.1차 세계대전때 독일편이었던 터키는 패전후 1918년까지 연합군의 통제를 받던중,케말 아타튀르크의 혁명으로 새 공화국이 탄생되기에 이르렀다. 중앙아시아의 회교국가로서 자주권을 선언한 뒤에도 터키는 유럽공동체의 항구적인 회원이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한국전쟁중에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고,1952년에는 그들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NATO의 회원국으로 영입되었다.냉전이 종식되자 터키는 걸프전때 연합전선을 펼쳤던 NATO로부터 차갑게 되면당했다. 보스포루스는 과거에도,오늘날에도 이스탄불과 터키에게 막대한 부를 실어다주는 푸른 물길이면서,동시에 그들의 역사앞에 항시 하나의 질문으로 존재해왔다. 「우리는 아시아에 속하는가,유럽에 속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보스포루스를 통과하는 여행자인 나에게까지도 역사와 무관한,정신의 뿌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자 확인으로,이스탄불을 떠날 때까지 마음속에서 맴돌았다.엘레신 호텔. 4월20일 이스탄불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열흘 남짓 뜨거운 사막에서 지내는 동안 증발되었던 마음의 물기가 일시에 되살아났다.여로의 쓸쓸함,애달픔.몸이 으스스 떨리면서도 비릿한 비냄새,축축한 바람이 싫지 않았다. 차가 마르마라 해안에 있는 예쉴쿄이 국제공항을 벗어나 유럽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동안,나는 마음속으로 주머니를 불룩하게 만든 터키의 리라화를 가늠해보고 있었다.1달러에 2만9천리라,1백50달러에 4백35만리라.방금 떠나온 요르단 디나르화에 비해 끗수가 네자리나 더 많아진 것이다. ­이걸로 혹시 보스포루스 해협이 굽어보이는 언덕 어디쯤 오스만 시대에 지은 작은 집 한채 정도 살수 있지 않을까. ○구로동 골목 연상 그러나 차창 밖으로 휙휙 스쳐가는 노변풍경은 나를 황당한 공상에서 깨어나게 했다.겉만 말끔했지 상자곽처럼 보이는 저층의 아파트들,그 사이사이에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석탄더미,고철더미,그리고 산비탈에 빽빽이 들어찬 우중충한 가건물들.그것은 비잔티움이나 오스만이 연상시키는 고풍스런 우아함과는 거리가 아주 먼,어딘지…. 『여기는 서울의 구로동하고 흡사하군요』. 익살이었지만 S씨의 그 말은 활기찬 고도 이스탄불의 속얼굴,오늘의 터키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함축하고 있었다. 회교국들 중에서 최초의 여자 수상이 된 탄슈 칠레르는 취임과 동시에 터키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우리는 더이상 걷지 않을 것입니다.우리는 이제부터 뛰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이끄는 정부는 국내외로부터 밀려오는 거센 도전에 시달리고 있었다.인플레,일자리를 찾아 이스탄불·앙카라·이즈미르등 대도시로 밀려드는 유민들,구소련의 붕괴이후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웃 회교국들의 무력증강,10년이 넘도록 계속되어온 쿠르드족 분리주의자들과 게릴라전 등등. 아마도 우리는 3박4일의 짧은 일정에 쫓기는 여행자들로서는 이스탄불의 「구로동」을 이런 식으로 스쳐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터키인들이 게체콘두(밤에 지어졌다는 뜻.오스만법에는 밤에 짓기 시작해서 동틀때 완성된 집은 아무도 부술수 없다고도 함)라고 하는 그 집들은 이스탄불 중심가에서 불과 45분거리밖에 안되지만 관광객들이 흔히 지나다니는 길목으로부터 그 얼마나 먼 동네인가. 어느새 창변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안개 자욱한 보스포루스 바다,갈매기떼의 환영을 받으며 항구로 입항하는 크고 작은 선박들,그 너머로 붉은 지붕에 흰 벽의 그리스풍 건물들,백양나무숲,돔과 미나레트들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스카이라인이 펼쳐졌다.가슴이 뛰기 시작했다.사해의 짜디짠 물맛이 이제는 꿈이 된 반면,꿈이었던 이스탄불이 현실이 된 것이다. 호텔 엘레신은 신시가 베이올루의 중심지인 탁심 뒷거리에 있었다.이웃에 있는 마르마라나 셰라톤 호텔에 비하면 작고 보잘것없는 시설을 갖춘 곳이었다. 숙박계를 쓰고 604호의 키를 받아든 순간이었다.이스탄불이라는 미지를 해독할 수 있는 최초의 사인.저울의 추처럼 생긴 키를 받아듦으로써 나는 마음을 스쳐간 환영의 무게를 손에 느꼈다.머나먼 장안에서 비단을 싣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타슈켄트,카라쿰,자그로스산맥을 넘어서 바그다드,그리고 마침내 이스탄불에 당도한 옛대상.동양과 서양,기독교문명권과 이슬람문명권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격돌의 현장.이곳의 이니셜은 저울과 추 일법했다. ○이니셜 “저울과 추” 짐을 방으로 옮겨주려고 로비에 나타난 포터.옛 술탄의 왕자같이 수려한 용모.아마도 그는 전생에서 너무나 놀고 지냈기 때문에 차생에서 남의 무거운 짐을 옮겨주는 일을 하게 되지나 않았는지? 원도어식의 자그마한 승강기가 음악을 싣고 내려왔다.허밍으로 멜로디를 쫓고 있는 사이에 승강기가 멈추었다.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자,우리는 복도끝의 전면 거울속에 그림자처럼 담겨 있었다.갑자기 시간이 겹으로 느껴졌다.그리고 내 앞에 나타난 미지의 문.열려라,참깨! 짙은 청색 시트로 덮여있는 가지런한 트윈 침대,하얀 반투명 커튼,머리맡에 놓인 하얀 갓전등…창가로 가서 커튼을 열어본다.오래된 건물의 옥상에서 하얀 비둘기 한마리가 빗속을 가로질러 어디론지 날아간다.맞은편 건물의 지붕밑 방에는 오래전에 사람의 인적이 끊긴듯 책상과 의자 하나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 놓여있다.아니다.다시 보니 머리 까만 계집아이가 혼자서 마룻바닥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공깃돌 놀이를 하고있다.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다. 꿈을 꾸는 것일까.분명히 몸은 여기 있는데,의식은 전생을 살고 있는 것 같다. 『너 화장실에 좀 들어가봐.비눗곽이 참 예쁘다』 등 뒤에서 날아온 K의 목소리에,맞은편 건물의 빈 방에서 계집아이가 얼굴을 돌리고 이쪽을 바라본다.
  • 궁궐:3/“경복궁 싫다”태종이 창덕궁 창건(서울 6백년만상:40)

    ◎임진왜란·인조반정·순조때 대형화제/세임금 폐출된 곳… 후원으로 비원 조성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태종은 서울 천도를 결심한다.태종은 경복궁은 창건때부터 좋지 않은 일이 잇따라 정궁을 다시 지으려했다.그러나 선왕 태조가 창건한 경복궁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조준등 중신들의 반대여론에 밀려 이궁으로 지은 것이 창덕궁이다. 정궁은 아니면서도 가장 많은 임금이 정사를 살폈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리는등 수많은 궁중 비사를 간직한 창덕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태종 4년(1404) 10월 경기·충청·강원에서 군병력과 승려 농민들을 동원,공사에 들어간 창덕궁은 이듬해 10월 완공됐다.규모는 경복궁에 비해 작은 편이었다.태종은 창덕궁에 든지 6년만에 거처를 경복궁으로 옮긴뒤에도 계속해서 정전과 누각을 지어 12년에는 정문인 돈화문을 건립했다.그리고 세종 원년(1419) 인정전이 완공돼 비로소 궁궐의 모습을 갖출 수있었다. 단종과 연산군이 폐출되는 비사를 간직한 창덕궁은 임진왜란발발로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피란에서 돌아온 조정은 경복궁의 터가 불길하다고해 가장 먼저 창덕궁 중건에 착수,광해군 원년(1609)에 완공했다.이후 창덕궁은 경복궁이 중건(1867)될때까지 「조선의 정궁」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경운궁에 거처하던 광해군은 창덕궁이 완공된 뒤 「선왕의 상중」이라고 이런저런 핑게를 둘러대며 궁에 들기를 꺼려했다.그러나 마지못해 창덕궁으로 이어한 뒤 20일만에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당시 이의신이라는 술사의 말에 의존하던 광해군은 창덕궁에서 노산군(단종)과 연산군이 폐출됐기 때문에 창덕궁에 들기를 꺼려했던 것으로 「광해군 일기」는 전하고 있다. 중건 5년만에 중신들의 성화에 못이겨 창덕궁에 든 광해군은 8년뒤 인조반정으로 노산군·연산군과 마찬가지로 창덕궁에서 쫓겨나는 비운을 맛봐야했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창건하면서 조성됐던 후원을 재정비했는데 이곳이 오늘날의 비원이다.비원은 북악에서 뻗어나온 완만한 산기슭 6만여평에 정자와 연못을 만들어 이룩한 조선조 정원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비원 연경당 뜰에는 괴석들이 석분에 담겨 눈길을 끄는데 이들 석분은 광해군 일기에 『기화·이목·괴석을 널리 모아 동산을 만들고 정자를 지어 소요해 그 화려함이 일찍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광해군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조반정이 있던날 창덕궁엔 두번째 큰 불이 나 인정전등 몇 전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됐다.이에 따라 인조 25년 6월 (1647) 광해군이 공들여 지었던 인경궁의 전각을 헐어 창덕궁 재건공사를 시작,그해 11월 복구공사는 완료됐다. 이후에도 크고작은 화재가 발생했으나중창은 없었다.그러나 순조 3년(1803)12월에 또 다시 대형화재가 발생,인조반정때 실화를 면했던 인정전등 주요전각이 모두 소실됐다.이듬해 완공된 인정전은 국보 2백25호로 지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번에 걸친 대화재로 중건과 재건을 거듭한 창덕궁은 19세기에 접어 들면서 역사의 거센 소용돌이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 세계 유명 페미니즘 단편소설집 출간

    ◎「19호실로 가다」… 영 도리스 레싱등 15인 작품 수록/여성문제 폭넓게 접근 여성의 존엄성과 구원을 주 테마로 하는 페미니즘 문학은 시대에 따라 형태와 양식을 달리하며 커다란 독자층을 형성해왔다.최근 국내에서도 페미니즘 문학이 점차 활기를 띠면서 올바른 위상찾기와 함께 접근방식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지는 추세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민음사가 펴낸 페미니즘 단편선 「19호실로 가다」는 세계의 대표적인 페미니즘 작가 15명의 단편소설 17편을 묶은 것으로 국내외 페미니즘 소설을 비교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말의 현재까지 1세기에 걸친 여성들의 삶의 모양새를 간추려 여성문제의 폭넓은 접근을 보여주는 이 책은 크게 세부류의 테마로 구성돼있다. 현대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불리는 도리스 레싱의 표제작을 비롯해 샬롯 퍼킨즈 길먼의 「누런 벽지」,에디스 와튼의 「뒤늦은 연인들」에서 보이는 결혼문제가 그 하나로 이들 작품은 여성 자아의 상실을 당연시하는 결혼생활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또 성의 문제에 치중한 작품들은 대개 여성의 자아추구를 성을 통한 육체적 욕망의 이해에서 찾는데 캐서린 맨스필드의 「희열」,케이트 쇼팽의 「소년과 집시」,질크리스트의 「복수」등이 그것이며 이와함께 앨리스 워커의 「닮은 꼴의 영혼들」류의 소설들은 가부장적 남성우월론적 이데올로기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 “국보급 고미술품”/신윤복화첩 되찾아왔다

    ◎동호인 모임 인우회,새달 3∼14일 덕원미술관서 전시/고려청자·「백자조문각병」 등 총 122점/문갑·책장 등 조선조 생활품도 선보여 세계 각급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점차 한국 미술품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등 해외에 유출됐던 우리의 귀중한 고 미술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하는 자리가 동호인들의 노력으로 마련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서울 인사동에서 고 미술품 수집을 통해 결성된 40대후반의 고 미술품 동호인모임 인우회(회장 진이근)가 오는 6월3일부터 14일까지 덕원미술관(723­7771)에서 여는 「고미술정품전」이 그것으로 서화 57점,도자기 38점,민속공예품 27점이 선보인다. 전시품들은 인우회 회원들이 해외에서 수집한 귀환문화재가 대부분으로 혜원 신윤복(1768∼?)이 술을 마시고 그린 「취화첩」과 속화첩등 조선시대 회화와 고려청자·백자청화등 자기,그리고 문갑 책장등 조선시대 생활품이 다양하게 전시된다. 이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미술품은 신윤복의 취화첩 6폭과 속화첩 10폭. 신윤복은 18세기 조선화단에독특한 화풍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연기를 써넣지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그러나 이번 전시에 나온 취화첩은 그림마다 시를 써놓고 곁에다 「술에취해 썼다」(취서)고 밝히고 있으며 작품에 「무진맹추」로 기록해 혜원이 54세때 그린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이와함께 속화첩 10폭도 현존하는 그의 풍속화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혜원풍속도」(간송미술관 소장)보다 먼저 것으로 추정돼 주목된다. 이 속화첩가운데는 혜원풍속도와 비슷한 화풍의 것도 4폭이나 들어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그보다 먼저 그린 혜원의 초기작이다. 이 속화첩에는 교미중인 개를 보고 있는 야릇한 모습의 부인과 처녀를 그린 것과 등을 든 소년을 앞세우고 세남녀가 밤 길을 가는 모습,기방에서 남녀가 얼싸안고 정담을 나누는 모습등 에로틱한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도자기는 고려시대 청자와 함께 18∼19세기의 백자청화가 주류를 이루어 청화의 원속에 점을 찍듯 그린 새와 각진 병 어깨 양쪽에 두마리의 다람쥐가 납작 엎드린 모습을 한 「백자청화원권조문각병」과 주둥이가 밖으로 휘어지면서 띠를 둘렀고 몸통에 원을 그려 그안에 매화를 간결히 처리해 여백의 공간과 원속의 매화가 아름답게 조화를 보이는 「백자청화매화문지통」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와함께 이층 책장과 주칠용문 3층장등도 실용성과 평민적인 개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목공예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 세계 유명 다이아몬드 서울전

    ◎15C 최초의 약혼반지·빅토리아여왕반지 포함 「15세기 오스트리아 맥시밀리언 대공이 귀공녀 메어리의 손가락에 끼워준 청혼반지.19세기 대영제국 빅토리아 여왕이 약혼식날 선택한 뱀 문양의 다이아몬드반지…」등. 서양에서 결혼 및 약혼반지로 널리 쓰여져 왔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어느새 혼인 예물로 보편화된 다이아몬드(보석말 「영원」)의 변천사및 그 화려함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서울에서 열린다(롯데백화점 청량리점 24∼29일,본점 31∼6월5일,잠실점 6월14∼19일). 「사랑의 선물 컬렉션」이라는 이름의 이 행사는 영국의 다이아몬드 원석회사 드비어스사가 다이아몬드 판촉의 일환으로 각국을 순회하며 개최하는 전시회.모두 28점이 선보이는데 대부분 유럽명문 가문의 소장품이나 그 복제품들로 비매품.시가로 따지자면 수십억원을 호가할 것이라는 것이 주최측의 설명이다. 문헌 기록상으로 최초의 다이아먼드 약혼반지라고 알려진 15세기 오스트리아 맥시밀리언 대공의 청혼반지(비엔나 쿤스시스토리시스 박물관 소장)를 비롯,이탈리아 스포르자 가문의 결혼반지,『하나님이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다』는 문구가 새겨진 16세기의 짐멜(쌍둥이)반지,희귀한 유색 분홍빛 다이아반지,19세기 미국의 티파니가 개발한 빛이 58면 전체에 고루 도달해 불꽃광채를 보는듯하게 꾸며진 반지…등은 역사적 배경과 보석연마 기법 발달상을 보여줄 것으로 예견돼 벌써부터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 수공업 고수하는 「란자니가구」(이탈리아 중소기업 탐방:6)

    ◎6대 2백년간 같은 가구 만든적 없다/시대별 제품의 특징·유행도 모두 기록/「장인의 혼」 곳곳에… 무늬·새김 각각 달라/창사이래 팔고남은 상품 전부 보관… 미래 창조의 “원천” 이탈리아 가구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18세기 때 나온 의자가 한달 전 것과 같고 엊그제 만든 책상이 수백년된 골동품 같다.생산 공정이나 기술도 달라진 게 없다.현재와 과거가 공존한다.다른 게 있다면 가구를 쓰는 사람이다. 이탈리아의 경제 수도 밀라노에서 북쪽으로 20㎞ 떨어진 메다.이 곳에서 6대째 중세풍 의자와 책상을 생산해온 란자니사는 2가지 원칙을 지키고 있다.똑같은 제품은 만들지 않는다는 것과 시대별 제품의 특징,유행,모델 등을 일일이 문서로 남긴다는 것이다. 담쟁이 덩굴로 뒤덮인 사무실 건물 2층에 있는 창고에 들어서면 이 같은 원칙을 실감할 수 있다.아직 칠을 입히지 않은 의자가 바닥에서부터 5m 높이의 천장까지 빽빽이 쌓여있다.최근 10여년동안 만든 것이다.똑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살피면 등받이의 문양이나 다리의 새김 등이 모두 틀리다.2천개가 넘는 의자가 세계에서 하나뿐인 모델이다. 그 뿐 아니다.한 층 더 올라가면 회사설립 때인 1799년부터 엊저녁에 만든 의자와 책상이 모두 보관돼 있다.프랑스 왕실에 납품하던 의자,나폴레옹이 쓰던 종류의 책상,이탈리아 통일을기념한 집기 등 선대부터 만든 3천여개의 제품이 고스란히 놓여 있다.하나같이 방금 만든 제품처럼 디자인과 품질이 뛰어나다. ○생산직원은 2명뿐 창고라기보다 가구의 역사를 펼친 박물관이다.유럽을 통틀어 2백년간 가구의 흐름을 제품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팔리지 않는 제품은 창고에 10년동안 보관하다 박물관(?)으로 옮긴다.주세페 란자니가 회사를 세운 뒤 2백년 가까이 계속된 전통이다.현재 사장인 아킬레 란자니나 대를 이을 움베르토씨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회사의 근로자는 란자니 일가 3명을 포함,총 5명으로 실제 생산직에서 일하는 사람은 2명이다.이 인원으로 1년에 수백개의 의자와 책상을 만들지만 모델과 색깔은 같은 게 없다.주문과 관계없이 끊임없이 제품을 만드는 장인의 「한우물」정신 때문이다. 란자니는 의자의 다리를 자르고 틀을 짜는 기본적인 공정을 가내 수공업에 맡겼다.대대로 가구를 짜는 전문가들로 바로 조립해도 큰 문제가 없지만 란자니는 장인의 손을 다시 빌린다.특별히 2명의 장인을 고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다리에 문양을 내기도 하고 한부분을 잘라 독특한 맛을 낸다.스타일은 스스로가 알아서 결정하고 사장의 간섭은 받지 않는다.고용원이라기보다 전문 기술을 제공하는 기술제휴자인 셈이다.란자니 가구의 다양성과 창조성은 여기에서 나온다. 아킬레 사장은 『기계를 도입,일의 능률을 높이려는 회사가 많지만 품질은 제자리 수준』이라며 『가구는 정확성이 아니라 얼마나 편하고 쉽게 오랫동안 쓸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기계는 같은 제품을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지만 기호나 취향이 다른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지는 못한다.다시 말해 융통성이 없다는 얘기이다. 란자니의 또 하나 철칙은 「옛 것의 재창조」.수천개의 완제품이 쌓인 「가구 박물관」은 아이디어 뱅크이다.전통가구는 유행을 타지 않아누가 더 많은 진품과 자료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는 게 보통이다.이런 점에서 란자니는 무궁무진한 보고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움베르토씨는 『팔리지 않는 제품은 박물관에 보관한다.버리거나 헐 값에 팔지도 않는다.일단 이 곳에 옮겨지면 어떤 값을 치른다 해도 내놓지 않는 게 원칙』이라며 『자기 회사의 노하우나 창조의 원천을 파는 사람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생산한지 2∼3년만 되면 중고시장에 내다 팔고 결혼 시즌 등을 빙자해 마구 할인하는 우리나라 업체들을 꾸짖는 듯했다. 란자니는 「보고」를 바탕으로 모방과 창조를 거듭한다.19세기 프랑스 화가이자 조각가인 에밀 갈레의 작품을 가구에 접목시킨 것은 유명한 일이다.그러나 단순히 베끼지는 않는다. ○세계 30여개국 수출 움베르토씨는 『갈레의 작품을 모방했지만 오랜 연구끝에 색깔과 무늬를 더했다』며 『복사품이란 사실을 떳떳이 알린다』고 밝혔다.갈레의 고향인 프랑스에서도 란자니의 가구가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이같은 응용기술을 높게 평가받았기 때문이다.지난해 매출은 4억원에 불과했지만 유럽,미국,일본,동남아 등 세계 30여개국에 수출했다. 지난달 초 밀라노에서 가구 전시회가 열렸다.1년마다 열리는 세계적 규모로 참가업체가 3천여개를 헤아리고 전시장도 우리나라의 보통 전시장보다 25배 정도 넓다.그러나 우리 업체는 하나도 참여하지 못했다.대규모 관람단을 보낸 게 고작이었다.그나마 기술을 배우려고 마구 사진을 찍다 사진기를 빼앗기는 국제적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우리 업체들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5년전부터 의자에 무늬를 새기고 광택을 내는 마리오 프라다씨는 『12살 때부터 조각하는 일을 배웠다.집에서 하던 일을 란자니처럼 오래된 곳에서 활용할 수 있어 자랑스럽다』며 『그러나 나보다 뛰어난 기술을 가진 사람이 온다면 언제든지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말했다. 사무실 겸 창고로 쓰는 란자니 건물의 현관에 들어서면 누렇게 변색된 수십개의 사진첩이 눈길을 끈다.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연대별 가구의 사진이 정리돼 있고 그 밑에 생산연도,공정,특징 등이 깨알같이 적혀있다.한 권의 사진첩으로도 수백개 의자를 만들 수 있을 만큼 다양하다.우리나라 업체도 사진기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할 게 아니라 자기 공장에 쌓여있는 가구의 장단점부터 분석,정리하는 게 나을 뻔했다.사진첩위에 걸린 설립자 주세페 란자니의 초상화가 유난히 깨끗해 보였다.
  • 의료시장 개방대비/약국들 체인화 붐/경영지도·판촉활동등 노하우제공

    ◎92년 첫선… 상반기 5∼6개사 설립준비/“경쟁력 확보” 주장에 서비스개선 지적도 개업 약국들 사이에 체인화 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다. 약국의 체인화현상은 내년 대외시장 개방을 앞두고 나온 것으로 기존의 「구멍가게식 약국경영」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영모델을 창출,UR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풀이된다.또 약국의보와 의약분업시대를 맞아 지역사회의 건강상담인으로서 약사의 역할과 위상을 스스로 높이지 않으면 전문인으로 대우 받기 어렵다는 상황 인식도 약국체인화에 큰 몫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92년 1월 (주)온누리건강이 국내 처음으로 체인약국을 설립한 뒤 불과 1년사이에 녹색건강체인,새생명건강체인,바이엘코리아,파마토피아,협동약국등 무려 12개사가 잇따라 문을 열었다.또 상반기중 개설을 목표로 준비작업을 서둘고 있는 곳도 5∼6개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국내의 체인약국 형태는 법인을 설립한 뒤 회원 약국들을 모아 3백만∼5백만원의 회비를 받고 약국경영지도,교육훈련,판매촉진활동등 각종 경영 노하우를 제공하는 신종기업의 성격을 띠고 있다.또 의약품등을 공동구매하거나 약국점포 기획,금융지원등도 해준다.특히 체인약국은 개인약국과 달리 의약품은 물론이고 각종 건강보조식품,건강화장품등 건강에 관련된 모든 제품을 취급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1개 법인에 가입된 회원약국수는 큰 차이를 나타내 온누리건강의 경우 3백69개인데 반해 나머지 법인들은 거의 1백개 안팎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면 국내의 체인약국은 「약국은 약사만이 개설할 수 있다」는 약사법상의 제한 때문에 「체인」이라기보다 「프랜차이즈」로 불리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지적도 있다.미국의 경우 체인약국 소유주는 한 개인 또는 한 회사로 돼 있고,1개 회사가 5개 이상의 약국을 경영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이와 달리 우리나라는 약국을 개설한 개개인만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호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소유권 개념으로 볼 때 프랜차이즈가 더 적절하다는 것이다.미국은 이미 19세기말부터 체인약국이 출현하기 시작해 지난 92년에는 전체약국의 41%,매출액면에선 67%를 차지할 정도로 대형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온누리건강 박영순회장은 『약국이 지역사회 건강의 1차 파수꾼으로서 환자상담및 교육등을 등한시한 채 구태의연히 약품만 판매하는데 그쳐서는 개방화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약국 체인화의 당위성을 피력했다. 그러나 대한약사회 권태섭부회장은 『약국체인화가 개인약국 혼자 해결하기 힘든 경영문제를 공동으로 연구,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지만 눈앞의 이익만 좇아 성급하게 체인화를 추진할 경우 오히려 국민의 불신만 가중시킬 소지가 크다』고 지적,영리추구보다 양질의 서비스 제공에 주력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 아주국 담배소비량 급증/서방업체들의 “황금시장”

    ◎미에 금연운동 번져 대체시장 부상 중국 한국 등 아시아 각국이 서방 담배회사들한테 황금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지는 15일 『아시아는 다국적 담배제조회사들의 미래』라면서 양담배 연기가 자욱한 아시아 각국의 현황을 소개하고 흡연 증가로 인해 아시아인들의 건강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보건기구(WHO) 통계에 의하면 아시아 지역의 담배시장은 90년대에 3분의 1이상이 늘어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반면 미국에서는 대부분 공공장소에서 담배피우는 것이 금지될 정도로 금연운동이 확산되고 있어 90년대 말에는 담배시장이 약 15%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베트남에서는 영국제 담배인 「555」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을 정도이고 중국인들은 말보로를 선택하며 태국의 부유층은 던힐을 즐긴다. 『아시아의 흡연자들에게는 담배 맛보다도 어느 상표의 담배를 피우느냐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고 뉴욕타임스는 지적했다. 미국 담배회사들이 제1목표로 꼽는 시장은 당연히 중국이다.12억 인구에다 세계에서 가장빠른 경제 성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지난 10년간 중국인의 담배소비량은 매년 7%의 증가율을 보였다. 중국에서는 현재 미국 인구보다 더 많은 3억명이 담배를 피우며 1년에 소비되는 담배는 1조6천억 개비에 달한다. 한국은 어떤가.WHO의 94년도 통계에 의하면 남자 성인 가운데 70%가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나타났다.남자 성인 흡연 비율에서 한국은 캄보디아(90%)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번째다. 한국 다음으로는 인도네시아(65%),필리핀(64%),중국·일본(각각 61%),태국(47%) 등의 순이다.남녀 성인 흡연자 비율에서 한국이 70%,7%인데 비해 미국은 91년도 통계를 기준으로 28%,24%에 달하고 있다. 아시아 각국의 담배 소비 증가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의학전문가들은 끔찍스럽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흔히 19세기 중반의 아편전쟁에 비유되고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 리처드 피토 교수(역학전문)는 아시아의 담배 소비 증가로 앞으로 20∼30년간에 걸쳐 흡연과 관련된 질병으로 인한 전 세계 사망자 숫자가 연간 3백만명에서 1천만명으로 늘어날 것이며이중 20%는 중국인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 5·16민족상 과학기술상 수상/전과기처장관 최장수박사(인터뷰)

    ◎“일 과학기술 따라잡는게 급선무”/정부의 과감한 투자 등 실질조치 있어야 최장수 과기처장관,「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KIST 신화의 주역,학술원회원,러시아 아카데미 정회원,포항제철 산업과학기술연구소 상임고문.이미 고희를 훨씬 넘겨버린 「할아버지」에게 붙는 말치고는 너무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올해 개편된 5·16민족상에서 과학기술부문상을 첫 수상한 최형섭박사(74)가 그사람이다.여느 사람같으면 손자들과 어울리며 조용히 지낼 나이에도 그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하기만 했다. 『우리나라가 살아남으려면 먼저 일본을 따라잡아야 합니다.우리가 지금처럼 살 수 있게 된 것도 지난 60∼70년대 과학기술발전에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이지요.그런데 지금은 우리의 과학기술이 진보하지 못하고 있어요.이렇게 가다가는 우리의 손자대에는 제대로 먹지도 못할겁니다.과학기술에 정부의 과감한 투자와 세금감면혜택등 실질적인 조치가 있어야해요.돈을 아끼지 말라는 거죠.능력이 있는 사람,창의력이 있는 사람들은 관료주의의 잣대를 대서는 안됩니다』 최박사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설립당시 박대통령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구원 학생들의 병역면제를 고집해 관철시킨 사람이기도 하다.고집이 너무 세고 보수적이라고 해서 교수시절 「19세기」라는 별명이 붙은 적도 있다는 그는 『학문을 하는 사람의 자세는 5세기나 25세기나 다를 것이 없다』고 후학들에게 힘주어 말한다.실제로 대학에서 실험을 지도하고 있을 때 피곤을 못이겨 의자에 앉아 실험을 하던 학생들이 「19세기 교수」한테 발로 걷어차인 적도 많다고 했다.『그때 밤잠 못자고 꼬박 서서 실험하던 학생들이 이젠 벌써 한국 과학계의 중견』이라며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지난 81년부터 미 국제개발처의 초청으로 거의 10년간을 태국,스리랑카,미얀마,방글라데시 등 저개발국을 돌아다니며 과학정책,과학기술지원법등을 전수하기도한 그는 『한 나라가 잘되려면 최고 지도자가 과학기술진흥의 선두에 나서야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 순수 민간자본으로 설립된 「계면공학연구소(소장 문광순박사)」의 이사장을 맡고있기도 하다.『미국최대의 연구소인 바텔연구소,스탠퍼드연구소등이 모두 순수 민간연구소입니다.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대규모연구가 정부출연연구소에 의해서만 이뤄지고 있어요.따라서 정부의 입김을 벗어난 자유로운 연구활동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죠.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연구소와 정부기관으로서의 연구소를 중간에서 자연스럽게 연결해줄 순수 민간연구소가 필요합니다』 한국 과학계를 넉넉하게 받치고 있는 「큰나무」 최형섭박사.요즘 그는 해방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산경험을 토대로 회고록을 집필하고 있다.『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를 쓸 작정입니다.교수로서 정부관료로서 일해오면서 겪었던 일과 열심히 하는 후배들을 소개할 겁니다』 어투에서 느껴지는 지적 엄격함뒤에서도 후배들에 대한 따사로움이 내비치는 그는 이번 5·16민족상 상금 2천만원을 KIST에 전액 기증하기로 했다고 말하며 슬쩍 웃는다.
  • 섬유업(이탈리아 중소기업 탐방:3)

    ◎3분 걸려 짠 직물 30분간 검사/“고품질만이 살길”… 검사공정 3배 강화/정보제공 등 염색업체와도 긴밀 협력/클레임 한건 없고 광고 안해도 각국의 바이어 몰려 피아트의 아성인 피에몬테주 토리노에서 북동쪽으로 60㎞ 떨어진 비엘라.15세기 때부터 직물업이 성해 프랑스 왕족도 이 곳 원단만을 찾았다는 모직물의 도시이다. 비엘라에서 자동차를 타고 북쪽으로 30분정도 가면 알프스의 언저리에 해당하는 「발레사모」에 다다른다.계곡속의 마을이라는 뜻의 이곳에서 1세기가 넘도록 모직물을 만들어온 가르란다사는 연간 매출액이 2백억원을 넘는 이 지방의 대표적인 모직물 생산업체이다. 1881년 원단 하청업체로 출발,지금은 원사와 원단을 함께 만들며 생산량의 70%를 세계 20여개국에 수출하고 있다.고객의 관심을 끄는 환상적인 원단을 만든다는 사훈를 지녔지만 기업광고나 제품선전은 한번도 한적이 없다.그럼에도 「가르란다」라는 브랜드는 국경을 넘어 전세계 의류업체에 알려져있다.그래서 매년 여름,겨울 시즌을 앞두고 세계곳곳에서 수십명의바이어들이 이 계곡마을을 찾는다. ○디자인실 벽 유리로 가르란다에 특별한 노하우나 원단을 짜는 비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편직기나 실틀도 다른 업체와 같고 실의 소재는 중국이나 페루·호주 등 다른 나라에서 대부분을 수입해 쓴다.종업원도 1백50여명에 불과하고 생산 공정은 19세기때와 달라진게 별로 없다. 그러나 품질의 검사 과정을 강화하고 중간 공정을 몇번이고 반복,제품의 질을 높이고 있는것이 이 회사만의 강점이다.최근 염색업체와의 공조 체제를 강화,기술 개발에 힘쓴 것도 남다른 점이다.주로 평범하면서도 흉내내기 힘든 독특한 특징을 지녔다. 먼저 디자인실을 들러보면 가르란다의 세심함을 엿볼 수 있다.30평 남짓한 방의 천장과 벽이 모두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졌다.하루 종일 태양 빛이 내부를 비춰 전등이 거의 필요없다.실외에서의 색상과 전등 아래에서 보는 색상은 엄연히 틀리다는 사실을 고려한 구조이다. 「그런 것까지」하고 웃고 넘어갈 수도 있고 「누구나 아는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그러나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을 실천에 옮긴 점이 제품의 질을 높이고 있다.백화점에서 산 물건이 집에서는 다른 색으로 보여 실망한 경험이 있는 소비자에겐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 뿐 아니다.가르란다는 가늘고 질긴 실을 뽑기 위해 생산공정을 여러차례 반복한다.실을 짜기전 한번으로도 충분한 세탁과정을 2∼3차례 반복하고 원단의 표면을 고르게 하기 위해 건조과정을 2∼3배 더 오래 한다. 그만큼 시간과 일손이 많이 필요하지만 품질과 가격도 함께 높아진다.게다가 품질의 신뢰성도 한층 높인다.그래서인지 다른 회사들이 양털 1㎏으로 1만5천∼1만8천m의 원단을 짜는데 비해 가르란다는 2만m의 원단을 짜고 값도 10∼20% 높게 받고 있다. 원단을 검사하는 종업원도 별도로 10여명을 두고 있다.기계가 고장나지 않는 한 특별한 검사를 하지않는 게 직물업계의 상식이지만 이회사에서는 일일이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확인하는 공정을 추가하고 있다.때문에 기계로 원단을 짜는데는 3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검사과정은 30분 이상이 소요된다.배보다 배꼽이 더 크지만 가르란다는 1백년이상 이 방식을 지켜왔다. ○값 10∼20% 더 받아 이같은 과정을 거쳐 가르란다가 해마다 생산하는 원단은 서울과 부산을 한차례 왕복하고도 남는 1천2백㎞에 이르고 있다.그러나 클레임은 단 한건도 없을 만큼 뒷마무리는 완벽하다.생산하는 원단의 종류,색깔,무늬 등도 4천가지나 된다.원단 한가지의 길이는 3백ⓜ 정도로 역시 다품종 소량생산원칙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가르란다의 제품이 뛰어난 또다른 이유는 염색업체와 철저한 수직적,수평적 공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가르란다는 지난 79년부터 비엘라에 위치한 염색업체 코텍스사에 모든 직물의 염색을 맡기고 있다.코텍스사도 종업원이 14명에 불과한 중소기업이지만 컴퓨터로 원사의 특성을 1백% 분석,소화한 뒤 염색을 한다. 그러기 위해선 가르란다로부터 염색할 원사나 생산할 원단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다.회사의 기밀이나 남에게 알리기 싫은 것도 있을 수 있다.그러나 가르란다는 서슴지 않고 자료를 준다.보다 나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이다.염색을 대행하고 맡기는 관계라기 보다 대학의 공동 연구실과 업체 같은 협력관계이다. 이같은 협력 체제에 힘입어 2년전만 해도 실을 분석하고 염료의 배합을 정하는 등 염색하는데 최소한 2주일이 걸렸으나 지난 해는 1주일,올해는 2일로 크게 줄였다.가르란다의 생산공정이 빨라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코텍스는 현재 물을 사용하지 않고 염색하는 방법을 연구중이다.물 대신 컴퓨터를 이용,염료를 섞지 않고 털이 지닌 자연 색상의 배합만으로 색깔을 만드는 기술이다. 비엘라에 있는 직물업체는 약 5천개,이중 대부분이 염색업체와 정보를 주고 받으며 품질 향상에 힘쓰고 있다.보통 1개의 염색업체가 30∼50개 직물업체와 거래하며 이중 3∼4개 업체는 가르란다와 코텍스의 경우처럼 새로운 기술 개발에 함께 힘쓰고 있다. 이탈리아 울 생산협회의 회장이기도 한 파올로 네그리 가르란다 사장의 얘기이다.『발레사모에서 광고를 하는 기업은 한 군데도 없다.광고할 시간과 돈이 있다면 새로운 원단을 연구하고 더 좋은 기계를 사는데 쓸 것이다.제품의 질을 높이고 소비자에게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게 바로 가장 좋은 광고이다.그러기 위해선 관련 업체끼리의 긴밀한 협조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 그림자인형극 자료 전시관 “북적”/독일 전용공간에

    ◎이집트·중국등 소도구 수백점/“매혹적 신비감”… 유럽에 큰 반향 전세계에 있는 초기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들이 파리에 모였다. 파리의 그랑 팔레 미술관은 세계 각국에 퍼져있는 19세기 후반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모두 모아 「인상파와 그 기원」이라는 대대적인 기획 전시전을 지난달 23일부터 열고 있다. 세계 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상파의 마네·모네·피사로·세잔·르누아르·드가등 화가들 작품 1백80여점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다. 전시되는 그림들은 사물을 구조에 따라 묘사하는 기존의 아카데믹한 방법을 과감히 탈피하고 눈에 띈 순간의 모습을 그리려 시도했던 1859년부터 1869년까지 10년간의 인상파 초기화가들의 작품들.당시 아카데미와 살롱에서 배척됐던 「혁명적」작품들이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모스크바,스톡홀름등에 소장돼 있는 이 미술품들이 1백40여년만에 집결된 셈이다. 그랑 팔레의 이번 전시회 기획 취지는 인상파 화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명을 하는 것이지만 파리가 예술의 중심임을 다시한번보여주려는 의도도 있는 듯하다. 15세기에는 피렌체,17세기에는 로마가 유럽 미술의 중심지였으나 19세기에 들어서 비로소 파리가 미술뿐 아니라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몽마르트의 테르테르 광장에서 무명의 화가들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주는 것도 화실을 박차고 나온 인상파 화가들이 정착시킨 새 풍속이다. 전시되는 작품들 중에는 초상·풍경·바다경치·생활정경·정물·나체등을 그린 에두아르 마네의 「젊은 부인의 초상」「풀밭위의 식사」「스페인의 가수」등이 있다.마네는 매일 하오 2시부터 2시간동안 비평가인 보들레르와 튈르리 공원을 산책하면서 자신의 미술세계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보들레르로부터 「현대적인 생활을 하는 화가」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또 「인상파」라는 이름을 낳게 한 클로드 모네의 그림 「인상,해돋이」등이 전시돼 인상파의 역사를 알수 있게 해준다. 부드러운 터치와 밝고 감미로운 색깔로 주로 인물을 그렸던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한길」「목욕장 풍경」등과 드가의 판화작품들도 볼 수 있다.이 전시회는 당시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화가들이 마치 다시 모인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새로운 소재와 화법으로 기존 화단에서 배척받아 살롱에 등장하지 못하고 「낙선자 전시회」라는 특별전시회에 전시됐던 작품들이 살롱에 다함께 등단하는 것이다.
  • 「기묘제현 수필」등 5종/보물로 새로 지정

    문화체육부는 2일 16세기 초에 쓰여진「기묘 제현 수필」을 보물 제1197호로 지정하는 등 문화재 4종을 보물로 지정했다. 「기묘제현수필」은 조선 중종 때(1519년)발생한 기묘사화로 희생된 조광조·성세창등 당대의 명현 24명의 친필 시문을 담은 것으로 조선 중기의 정치사상사및 서지학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또 기묘명현 12명의 편지 39통을 수록하고 표제를 명필 한석봉이 쓴「기묘 제현 수첩」은 보물 제1198호로 지정됐다. 이와 함께 19세기의 화가인 유숙이 그린「혜산 유숙 필 매화도」8첩 병풍이 보물 제1199호로,전북 고창군 선운사 도솔암 주변 바위에 새겨진「선운사 도률암 마애불」을 제1200호로 각각 지정했다. 이밖에 경북 울진군 불영사의「불영사 대웅보전」은 1725년 건축 당시의 내부단청과 탱화가 잘 보존된 것으로 평가돼 보물 제1201호로 지정받았다.
  • 초기인상파 그림 파리에 모였다/팔레미술관

    ◎마네·드가등 명화 1백80점 특별전 전세계에 있는 초기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들이 파리에 모인다. 파리의 그랑 팔레 미술관은 세계 각국에 퍼져있는 19세기 후반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모두 모아 「인상파와 그 기원」이라는 대대적인 기획 전시전을 23일부터 열고 있다. 세계 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상파의 마네·모네·피사로·세잔·르누아르·드가등 화가들 작품 1백80여점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전시되는 그림들은 사물을 구조에 따라 묘사하는 기존의 아카데믹한 방법을 과감히 탈피하고 눈에 띈 순간의 모습을 그리려 시도했던 1859년부터 1869년까지 10년간의 인상파 초기화가들의 작품들.당시 아카데미와 살롱에서 배척됐던 「혁명적」작품들이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모스크바,스톡홀름등에 소장돼 있는 이 미술품들이 1백40여년만에 집결되는 셈이다. 그랑 팔레의 이번 전시회 기획 취지는 인상파 화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명을 하는 것이지만 파리가 예술의 중심임을 다시한번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는 듯하다. 15세기에는 피렌체,17세기에는 로마가 유럽 미술의 중심지였으나 19세기에 들어서 비로소 파리가 미술뿐 아니라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몽마르트의 테르테르 광장에서 무명의 화가들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주는 것도 화실을 박차고 나온 인상파 화가들이 정착시킨 새 풍속이다. 전시되는 작품들 중에는 초상·풍경·바다경치·생활정경·정물·나체등을 그린 에두아르 마네의 「젊은 부인의 초상」「풀밭위의 식사」「스페인의 가수」등이 있다.마네는 매일 하오 2시부터 2시간동안 비평가인 보들레르와 튈르리 공원을 산책하면서 자신의 미술세계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보들레르로부터 「현대적인 생활을 하는 화가」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또 「인상파」라는 이름을 낳게 한 클로드 모네의 그림 「인상,해돋이」등이 전시돼 인상파의 역사를 알수 있게 해준다. 부드러운 터치와 밝고 감미로운 색깔로 주로 인물을 그렸던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한길」「목욕장 풍경」등과 드가의 판화작품들도 볼 수 있다. 이 전시회는 당시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화가들이 마치 다시 모인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새로운 소재와 화법으로 기존 화단에서 배척받아 살롱에 등장하지 못하고 「낙선자 전시회」라는 특별전시회에 전시됐던 작품들이 살롱에 다함께 등단하는 것이다.
  • 핀란드에선:3(녹색환경 가꾸자:44)

    ◎육림 100년… 벌림보다 더 심는다/입목면적 해마다 1백만㏊ 늘어나/전국토의 10% 자연보호권역 지정/제지·펄프업 번창… 수출물량의 50%를 임업이 차지 핀란드는 하계휴가가 한달가량 된다.여름이면 핀란드인들은 해외로 나가는 대신 자국의 호수가를 찾아 숲속 통나무집에서 수영을 하고 낚시를 즐긴다. 이 나라의 호수는 19만여개로 국민 25명당 한개의 호수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산림면적은 국토의 65%로 1인당 4.1㏊의 숲을 소유하고 있는 꼴이다.유럽의 다른 임업국가들이 0.5㏊인 것과 비교하면 8배를 웃도는 것이다. 핀란드는 어디를 가나 호수와 숲이다.아침 저녁 호젓한 호수가에서 개를 끌고 산책을 하거나 조깅이나 자전거 하이킹을 하는 모습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처럼 풍부한 산림은 핀란드인들에게 뗄래야 뗄 수 없는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다.그래서 이들은 『우리나라에 나무가 없다면 털없는 곰과 같다』고 자랑한다. 핀란드는 이미 알려진대로 목재를 기반으로 하는 제지·펄프업으로 번영을 누려오고 있다. 20세기초만해도수출물량의 85%가 임업이었으며 현재도 임업은 전체 수출물량의 절반 가까이 된다. 전세계적으로 산림은 매년 1천7백㏊정도씩이 사라지고 있다.그러나 핀란드는 목재소비량이 많은 산업구조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나무가 늘어나고 있다.벌목하는 나무보다 계속 자라는 나무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이들은 브라질의 산림은 방치될 경우 언젠가는 없어지겠지만 핀란드에서 나무가 사라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국토의 65%가 산림 핀란드의 전체 입목면적은 1억9천만㏊.50년대초와 비교할 때 25%가량 늘어난 것이다.연간 벌목되는 양은 7백만㏊이지만 8백만㏊의 나무가 새로 생겨난다. 핀란드의 산림정책은 「지속적인 육림」이라는 말로 대변된다.19세기에 제정된 최초의 산림법에 명시된 이 정신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다시말해 벌채한 만큼 나무를 심는 것을 말한다.이 때문에 이 나라에서는 벌목업자들이 나무를 벌채하면 그만큼 나무를 심어야 한다.또 보호해야할 가치가 있는 고목 원시림등은 베어내지 않는다.산림은현세대의 재산이기도 하지만 후손의 재산이기도 하다는 인식이 넓게 퍼져 있어서다. 식목 뿐만아니라 육림도 산림소유자·정부관계자·기업등 3자의 긴밀한 협력하에 이루어지고 있다.정부의 지원을 받는 산림위원회는 육림가는 물론 사유림소유자들에 대한 기술지도를 하고 행정지도를 편다. ○낚시도 면허제 실시 벌목하는 만큼 나무를 심고 육림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풍부한 자연림의 감소,도로건설등 각종 개발행위는 생태계의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자연생태계를 있는 그대로 보호하자는 움직임은 20세기초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1916년 절대자연보전지역이 지정됐고 1923년 자연보전법이 제정됐다. 현재 핀란드는 자연보전법에 따라 국토 면적의 10% 가까이 되는 2백80만여㏊가 자연보전권역으로 지정돼 있다.이 가운데 1백30만㏊는 국립공원·원시공원·특별보호산림지대·습지보전지역등 6등급으로 구분·지정돼 있으며 1백50만㏊는 야생동물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자연보전권역에서는 등급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유재산이라 하더라도 나무 한그루,풀 한포기도 마음대로 할수 없는등 각종 「반산림」행위가 엄격히 규제된다. 빙하시대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북부 쿠사모국립공원은 이 나라에서 드물게 산을 끼고 있는 지역으로 국민들로부터 4계절 휴양지로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개펄 등 습지도 보호 겨울에는 스키어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으며 얼음이 녹는 봄부터 여름까지 계곡과 야영지등에서 낚시·카누·등산·캠핑활동이 수를 놓는다. 특히 가을에는 곱게 물들어 가는 단풍이 구경거리다.이 나라에서는 수질보호를 위해 낚시 면허제를 실시하고 있는데 면허가 없는 사람은 낚시를 할 수 없다. 쿠사모 국립공원은 1차대전이후 나무를 벌목하지 않았다.연간 2백일가량 눈이 오고 연평균 기온이 섭씨 0도를 유지할 정도로 추워 나무의 생장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은 또 순록 곰 여우등 야생동물의 서식지다.야생동물은 4개 조합이 지역별로 관리하고 있는며 이들 조합의 회원외에는 어느 누구도 사냥을 할 수 없다.이들은 추운 겨울 먹이를 구하지 못한 야생동물을 위해 양식을 제공하기도 한다. 개펄등 습지가 물새들의 서식지로 중요하다는 인식은 60년대 후반부터 생겨나면서 70년대말 전국 습지보호계획이 수립됐다.현재 습지보전지역은 1백73개 지정돼 있다. 천연의 자연혜택을 누리고 있는 핀란드는 인공적인 노력을 더해서 지구상에서 가장 멋있는 환경을 가꿔가고 있는 것이다.
  • 중국 대표시·노래집 출간/기세춘·신영복씨,「중국역대시가선집」 편역

    ◎시경서 근대작품까지 4권에 담아 서기전 10세기 무렵에 나온 노동요에서 19세기의 해방가까지 중국의 대표적인 시와 노래를 모은「중국역대시가선집」이 4권짜리로 출간됐다(돌베개 간). 이 선집은 ▲시경·초사에서 시작해 남북조시대의 작품까지를 담은 1권 ▲중국시가의 전성기인 당시를 수록한 2∼3권 ▲송·원·명·청 시대와 근대까지의 작품을 실은 4권으로 짜였으며 모두 1천2백39수를 수록했다.책의 구성은 시대·유파·개인의 순서로 배열하고 각각의 해설을 곁들여 역대 중국시가의 흐름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했다. 또 책의 왼쪽 면에는 원문과 주해를,오른쪽 면에는 번역시를 실어 번역시만을 읽으려는 독자들에게 편리하게끔 배려했다.아울러 한문투의 딱딱한 번역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시어로 다듬은 것도 특징이다. 그동안 시경이나 당·송시대의 시를 번역한 책들이 여럿 있었지만 중국의 역대시가를 양감있게,체계적으로 소개한 저서로는 이 선집이 처음이다. 정범진 성균관대 중어중문과교수는『수록된 시가의 양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면서『중국의 고전 시·가·사·곡·요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자료』라고 찬사를 보냈다.이 선집은「통혁당 사건」으로 함께 옥살이를 했던 기세춘씨와 신영복씨가 공동편역했으며 이구영 이문학회대표,김규동시인이 감수했다. 기씨는『중국시가의 전통이 음풍농월에 있는 것으로들 알고 있으나 시경에 실린 노래들에서 보듯 그 전통은 민중의 삶을 반영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민중성과 사실성이 뛰어난 작품들을 주로 골랐으며 국내에 널리 알려진 명시들을 추가했다고 밝혔다.
  • 일본 TV극 「오싱」 세계적 인기 여전

    ◎83년 방영후 중국 등 40개국에 수출/“빈곧 딛고 선 일본” 인상 심어 문화외교 한몫 지난 83년부터 일본 NHKK­TV로 방영돼 일본열도에 「오싱열풍」을 불러일으켰던 연속극 「오싱」에 대한 일본인들의 사랑이 11년이 지난 요즘까지 이어지고 있다. 산케이신문은 전후사특집 시리즈물을 기획 연재하면서 TV부문에는 「오싱」이라는 제목을 붙여 5회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심지어 지난 66년 방영돼 전무후무한 56.4%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소프 드라마(아침 연속극)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던 「오하나상」조차 「오싱의 원조」라고 소개할 정도다. ○시청률 56%로 최고 오싱은 일본 동북지방의 한 촌에서 태어나 일곱살 어린 나이에 쌀 한가마에 남의 집 더부살이로 팔려가는 주인공의 이름인데 그가 각고의 노력을 쌓아 성공을 하게된다는 줄거리.19세기 말엽부터 소화시대까지 80여년에 걸친 일생을 그린 이 드라마는 일본인들이 과거에 겪었던 「어려웠던 시대」를 재현,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으며 경제적 번영속에 「일본병 증후군」을 보인 젊은 세대에 경종을 울렸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도 높이 평가받았었다. ○레이건도 연설 인용 영화배우 출신으로 대통령까지 오른 미국의 레이건전대통령은 당시 일본을 방문해 「오싱」을 보고 감동한 나머지 일본 국회연설에서 오싱을 인용해 일본의 국민성을 칭찬,일본인들을 흐뭇하게 해 주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특히 오싱이 84년 미국과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중국 폴란드 브라질 캐나다(85년) 이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86년) 사우디 아라비아(87년) 칠레 쿠바(93년)등 40여개국에서 방영된 데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오싱이 방영된 국가에서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경제의 일본」이라는 이미지에 다 「어려움을 겪고 일어선 일본」이라는 이미지가 덧붙여져 문화외교에도 기여했다는 평이다. ○아역 여우 환영 받아 오싱의 아역을 맡았던 고바야시 아야코(소림릉자)가 21살의 성인이 돼 올해 1월 오싱이 방영되고 있는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이집트인들은 고바야시가 가는 데마다 「오싱 오싱」이라고 부르며 반겼다는 것이다.고바야시는 『아역을 맡은지 10년이 지났음에도 어떻게 알아보는지 궁금하다』고 하자 통역은 『요즘 이집트인들은 일본여성만 보면 오싱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할 정도로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는 것이다.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해외에서 오싱이 대단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중국이었다고 한다. 85년 중국중앙전시대(방송국)가 「아신」이라는 제목을 붙여 방송을 시작하자 길거리에 인적이 끊길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도둑들도 오싱을 보느라 범죄율이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 광개토대왕비 탁본/북경서 6종 또 발견

    【도쿄 연합】 고대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해명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인 고구려 광개토대왕비(길림성 집안시)의 원석 탁본 6종류가 새로 북경에서 발견됐다고 일본의 요미우리(독매) 신문이 21일 북경발로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광개토대왕비 탁본을 새로 발견한 사람은 중국 사회과학원 세계역사 연구소 서건신부연구원(41)으로 일본 고대사를 연구하는 서씨는 지난 91년부터 광개토대왕비의 탁본 발견에 노력해 오고 있으며 이미 20건이 넘는 탁본을 찾아냈다. 서부연구원은 지금까지 찾아 낸 탁본은 대부분 19세기말 이후의 석회 탁본이었다고 밝혔다.
  • 하노이거리 노점상들로 장사진(생동하는 베트남:상)

    올해부터 한국은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탈바꿈했다.유니세프(유엔아동구호기금)한국위원회가 올해 1월1일을 기해 출범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치가 변한 것이다.유니세프한국위원회는 첫 지원대상국으로 베트남 선정하고 베트남방문단을 최근 파견했다.방문단의 일원으로 베트남을 다녀온 임영숙서울신문논설위원의 방문기를 싣는다. ◎농촌개발사업 한창… 양어장 겸용의 화장실 분리/흙바닥 교실·「베니어판 공책」에도 교육열기 후끈 베트남에서 우리는 대책없는 가난과 남누를 보게 될것으로 생각했다.19세기말부터 시작된 프랑스로부터의 기나긴 독립투쟁에 이어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10년 전쟁을 치르고 다시 캄보디아와 전쟁을 벌였다가 지난 89년에야 전쟁없는 평화를 맛보게 된 나라,개방과 개혁을 표방하는 「도이 모이」(쇄신)정책에 따라 시장경제가 도입되고 최근 외국자본이 물밀듯 들어가고 있다지만 아직도 연평균 국민소득 2백달러 수준의 세계 최빈국 10개국중 하나가 베트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남은 우리의 50∼60년대를 연상시킬 만큼 가난하긴 해도 남루하지는 않았으며 5모작까지 벼를 재배할수 있는 축복받은 자연(베트남은 세계 제3위의 쌀 수출국이다)과 강인하고 부지런한 국민성으로 인해 오히려 풍요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세계 최빈국중 하나 유니세프한국위원회 베트남방문단의 첫 방문지였던 하노이 교외의 농촌마을은 우루과이 라운드 파동을 겪고 있는 한국의 농촌보다 훨씬 여유있게 보일 정도였다.이 마을은 하노이에서 12㎞정도 떨어진곳에 위치한 두륭군 순흥리.지난 80년대부터 시작된 농촌개발사업의 시범마을로 베트남의 연평균 국민소득보다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는 곳이다.베트남의 농촌개발사업은 우리의 새마을운동과 같은 것으로 현재 14개리에서 실시되고 있는데 앞으로 전국적으로 확산시킨다는 것이 베트남정부의 계획이다. 집집마다 과수원이 있어 태국 원산의 과일 홍시엔나무가 무성하고 그레이프프루트 장미꽃등 이른바 경제수목의 묘목이 심겨 있다.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홍시엔 나무 밑에는 사람의 머리털과돼지털등이 뿌려져 있는데 열매맛을 좋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또한 대부분의 집에서 닭 돼지 개등의 가축을 기르고 양어장이 있는 집도 보인다. 베트남의 농촌에 있는 연못은 물고기를 기르는 양어장이자 화장실로서 물고기들이 사람의 배설물을 먹으며 자란다.그러나 이 마을에는 농촌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지어진듯한 콘크리트 구조물의 화장실이 골목길에 따로 있었다. 전쟁영웅 출신이라는 이 마을 이장집에서는 마침 마을회의가 열리고 있었다.참석한 10여명의 마을 원로들은 대체로 준수한 외모와 품위를 지니고 있다.한반도 전체의 약 1.5배가 되는 면적에 남북간의 길이가 우리나라의 함경북도 나진에서 제주도를 잇는 정도인 1천5백㎞에 이르는 국토를 지닌 베트남에서는 사람들의 외모도 남북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듯싶다. 베트남에는 『임금님의 권세도 마을 입구에서 멈춘다』는 속담이 있을만큼 지방자치의 전통이 강하고 유교적 가족주의가 뿌리 깊어 공산주의 사회인데도 마을 원로들이 공동체 현안을 자치적으로 해결해 왔다고 한다. 마을에서 가장 큰 규모인 이장집의 중앙에는 조상을 모시는 제단이 있고 제단 양옆으로 평상이 놓여 있다.왼쪽 평상옆에 손님을 위한 응접세트가 있어 그곳에서 마을회의가 열리고 있었다.평상이 바로 침실역할을 하여 방이 되는 셈인데 제단으로 공간의 구분이 이루어질뿐 벽이 없는 점이 특이하다.베트남 농촌의 가옥구조는 기본적으로 이런 형식이라고 한다. 중국의 북동쪽에 자리잡아 「동이」,서남쪽에 위치해서 「남만」으로 불리며 오만한 중국인들로부터 똑같이 오랑캐 취급을 받아온 한국과 베트남은 역사 문화 풍습등 여러면에서 유사점이 많다.우연하게도 두나라 다 삼국시대와 이씨왕조를 거쳤고 한자로 과거시험을 보았다.베트남 말 역시 한자를 뿌리로 하고 있어 「동서남북」을 「동 떠이 남 박」으로 읽는등 한자에서 파생된 비슷한 발음의 말들을 두나라 말에서 쉽게 찾을수 있다.근대에 들어서는 일본의 잔혹한 지배를 받는 경험을 공유하며 똑같이 냉전의 희생양으로서 남북분단과 동족상쟁의 비극을 겪는다.그러면서도 끈질긴 노력으로 한쪽은 통일을이루어내고 또 한쪽은 경제발전을 이루어 낸다. ○대로에 이발소 차려 통일은 됐으나 가난한 베트남은 지금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그 노력은 거의 폭발적인 힘으로 하노이 거리에서 분출되고 있었다.지난 90년 사유재산이 인정된 후 나타난 현상이라는데 『저렇게 모두 장사에 나서면 물건은 누가 살까』싶을 만큼 거리에 장사꾼들이 많다.길가에 좌판을 벌여놓고 돼지고기도 팔고 옷감도 팔고 주로 플라스틱과 양은 제품인 그릇도 판다.어엿한 가게도 안쪽은 텅 비워 놓고 집밖에 물건을 진열해 놓았다.물건이 많지 않은 탓이기도 하겠지만 가능한한 눈길을 많이 끌기 위해서다.심지어 빵 두개를 달랑 조그만 진열대 위에 올려 놓고 파는 사람도 있으며 자동차가 달리는 큰길가에 의자를 놓고 이발소를 차린 경우도 보인다. 하노이 시외로 나가 보아도 오가는 사람들이 거의 경제활동을 위해 이동중이다.시내버스가 없는 하노이의 주요교통수단은 자전거와 오토바이와 시클러(자전거로 미는 인력거)다.그러나 시골길에선 시클러가 보이지 않고 대신 물소 두 마리가 이끄는 짐수레가 보인다.그런데 물소가 끄는 짐수레는 물론이고 자전거와 오토바이도 뒷바퀴 양쪽에 짐을 가득 담은 광주리를 매단채 달린다.이런 활력이 가난한 베트남을 남루하게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베트남은 53개의 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가난한 성 가운데 하나라는 화빈성에서도 베트남의 여유를 볼수 있었다.하노이에서 자동차로 2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화빈성은 산간지역으로 소수민족이 많이 산다.성인민위원회는 유니세프 방문단 일행을 위해 소수민족공연을 마련해 주었고 그 공연이 바로 베트남의 문화적 다양성과 풍부함을 보여주었다.베트남의 소수민족은 53개 종족으로 중국의 소수민족보다 2개종족이 적을 뿐이다.전체인구의 12%에 이르는 이 소수민족들의 춤이나 음악·의상의 다양함은 베트남문화를 살찌우기에 충분했다. 또한 화빈성에는 베트남 최대의 수력발전소가 지금 건설중에 있다.베트남 전국에 필요한 전력의 60%를 공급하게 될 이 발전소 건설의 자재는 한국의 현대건설이 공급하고 있다.수력발전소 건설은 거대한 댐을 만들어 냈고 2만여명의 주민이 이주해야 했다.그 결과 고립된 산간마을에는 다학급학교를 세우는 지혜로움도 베트남은 지니고 있었는데 화빈성 다박군 솜머리학교는 불과 16명의 학생을 위한 것이었다. ○“자전거위의 호랑이” 우리의 남다른 교육열이 오늘의 경제발전을 이룬 원동력이라고 하지만 베트남은 한국보다 더욱 어린이와 교육을 위한 투자에 열성인 듯싶다.전국단위의 어린이보호위원회를 구성하고 장관급을 위원장으로 앉혀 정부 주요부처와 같은 기능을 하도록 하고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베트남밖에 없다.또한 베트남은 「어린이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을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비준한 나라다.경제발전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가운데도 정부예산의 40%를 교육 보건등 사회복지에 사용하고 있다.베트남은 미래를 위해 투자할 줄 아는 나라인 것이다. 우리가 지난 30년 사이에 이루어낸 경제발전을 베트남은 10∼15년 사이에 달성해 낼것으로 기대되고 있다.그래서 베트남은 「자전거 위의 호랑이」로 불린다.그 가능성에 우리는 투자해야 하는 것이다.지금 일어서는 그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고도 할 수 있다.그래야만 한국은 진정한 국제화를 이룰수 있으며 내일의 우리 살길도 거기서 배울수 있게 된다.그런점에서 유니세프한국위원회가 첫번째 지원국으로 베트남을 선정한 것은 현명한 결정이라고 생각된다. 솜머리의 수몰지역 주민들은 우리일행을 신기한듯 구경하다가 눈길이 마주치면 미소를 지었다.흑치의 한 할머니(베트남 여성들은 치아건강을 위해 이빨을 검게 물들였는데 지금은 사라져가는 풍습이라고 한다)는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끌고가 차를 대접하고 그들의 주식인 카사바(감자와 비슷함)를 듬뿍 싸주었다.또한 솜머리학교 어린이들은 우리 일행을 배 타는곳까지 배웅하고 파파야 열매를 한개씩 선물했다.비록 그들이 연평균소득 30달러의 가난속에 있고 대나무로 얼기설기 지은 초가지붕 흙바닥의 간이학교에서 공책도 없이 합판에 분필로 글씨를 써가며 공부하고 있을지라도 마음은 그렇게 풍요로웠다.
  • 한만국경(외언내언)

    한만국경 하면 우리는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백두산을 생각하게 마련이다.그리고 일제시대의 독립투사들이 위경의 눈을 피하며 조국광복을 위해 넘나들던 한많은 국경선을 연상한다.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간도 즉 사잇섬 이라는 이름의 땅을 떠올리게도 된다. 예부터 압록·두만 양강연안에 살던 우리 사람들은 흉년이 들거나 난리를 당하면 강건너 대안의 기름진 땅에서 농사를 지어오기도 하고 살기도 했다.19세기 들어 청나라가 국경순찰대를 두고부턴 몰래 건너가 도둑농사를 짓다 붙들려 목숨을 잃기도 했던곳.그런 우리의 슬픈 사연들이 서린 간도다. 그곳 중심지가 바로 오늘의 만주 연변이며 중국 유일의 한주자치주다.2백만 인구의 40%인 82만의 동포가 살고있는 그곳이 오늘에 와 다시 또 우리한주의 목숨을 건 새로운 선택의 땅이 되고있다니 이무슨 기구한 인연인가.기아와 공포의 북한탈출 동포들이 줄을 이어 그숫자가 이미 수백 수천에 달한다는 것이다. KBS의 충격적인 르포에 이어 30년전 월북한 서울대생이 50대가 되어 탈출했으나 붙들려송환될 운명에 처하자 차라리 자살을 택했다는 처절한 소식도 날아들었다.연이은 흉년에 경제파탄의 난리고 보면 인내에 숙달된 북한 동포들이지만 별수 있겠는가.강건너 개혁중국의 유혹이 있고 그로부터 흘러드는 서울소식 또한 만만치 않을터. 한만국경이 한반도의 베를린장벽 되지말라는 법 없다.동독인들처럼 쏟아져 나온다면 바로 여기서부터일 것.북한이 개혁을 않는한 그것은 반드시 일어날수밖에 없다.그리고 핵고집과 전쟁위협은 그것을 앞당길 뿐일 것이다. 월경자에 대한 무차별 사살령과 공개화형보도도 나왔지만 최근 북한의 한만국경 경비도 수차에 걸친 김정일의 명령으로 크게 강화되고 삼엄해졌다고 한다.그런다고 막아질까.핵으로도 못막는것이 민심인 것을.
  • 동북아 평화·번영 향한 여로/지명관(시론)

    김영삼대통령이 일본과 중국을 방문하는 정상외교의 여정은 지난 19일에 있었던 남북실무접촉에서 북측단장이 「전쟁나면 서울은 불바다」라고 한 발언때문에 무거운 것이 되지 않을수 없었다.사실 김대통령의 이번 걸음을 그처럼 무겁게하기 위하여 북측은 그들나름대로 용의주도하게 계산했을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금년을 동학혁명 1백주년이라고 우리의 민족사에서 되새기고 있지만 동북아시아사에서는 청일전쟁 1백주년으로 기억된다.그로부터 일본은 아시아를 제패하는 강국이 됐다고 했고 한반도나 중국대륙은 그들의 말발굽밑에서 신음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후 반세기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는 한국이나 중국등 아시아 여러 나라를 위해서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 일본자신을 위해서도 불행했고 동북아시아 전체에 대한 그지없는 참화였다는 것이 분명해졌다.그리하여 1945년 이후 또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그 상처를 치유하고 일어서기 위해 많은 나라들이 고난의 고개를 넘어야했다.그러는 동안 우리 동북아시아 세나라는 각기 자기나라를 일으켜 세우는데여념이 없어 우리에게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이라는 공동의 이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하여 일본과 중국에 협력과 압력을 요청할 수밖에 없게됐다.분명히 오늘의 동북아시아의 상황은 백년전 19세기 말엽이나 20세기 초두와는 엄청나게 다르다.중국대륙이나 한반도는 그 당시처럼 힘의 공백지대가 아니다.일본이 마음대로 그 병마를 이끌고 달려갈 수 있었던 힘의 진공상태는 더이상 아니라는 말이다.동북아시아는 이제 군사력뿐만이 아니라 정치경제력을 비롯한 국력에 있어서 세계사적으로 주목을 받는 지역으로 부상하고 있다.그러니까 한반도의 평화는 동북아시아 전체를 위한 최대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는 지난 백년동안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여 훨씬 목마른 심정으로 「동양평화」를 갈구해왔다.금년으로 75주년을 맞이한 2·8독립선언이나 3·1독립선언만큼 「동양평화」를 진정으로 염원한 외침을 어디서 다시 찾아볼수 있겠는가.그것은 우리나라가처한 지정학적인 운명때문에 불가피했다고 할수 있었다. 우리는 한반도에 평화가 왔을때 동북아시아에 평화가 오고 동북아시아에 평화가 있을 때 한반도에 평화가 온다는 것을 오랜 역사를 통해 뼈저리게 터득하고 있었다.그래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도 했지 않는가. 대륙의 중국도 섬나라의 일본도 힘이 있으면 팽창하려고 하고 또 그들이 주장하는 평화란 것이 자기들의 지배하에 있어서의 동북아시아의 평화라는 사이비 평화에 지나지 않았다.그런 지배욕 사이에서 우리는 동북아시아 삼국이 정립하여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는 진정한 평화의 질서를 염원해왔다. 힘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지배와 피지배라는 패권의 시대를 극복한 평화와 번영이라는 이념을 그려왔다고도 하겠다.전후 50년사에서도 중국은 소련을 향하고 일본은 미국을 향했을 때 그런 냉전체제는 우리민족을 양분했다.이른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충돌할 때 언제나 한반도는 그 비극의 가장 커다란 희생자였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두가지 세력사이에 화해와 평화를누구보다도 갈망했던 것이다. 이제 냉전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중국도,일본도 진정으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희구하는 공통된 이념으로 회귀할수 있을 것인가.그리하여 근대이후 백년사의 불행을 극복하려고 할 것인가.그러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없이는 동북아시아의 평화가 없다는 역사의식을 확고하게 해야하리라고 생각한다.한반도의 불행과 혼란을 방치하거나 이를 기화로 한 일국번영의 꿈을 지난날의 악몽으로 되돌리려는 결의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동북아시아 전체가 고도한 동질성 즉,현대적인 의미에서 말한다면 민주주의 시장경제 자유와 인권등을 공유할때 가능하다는 것도 잊지말아야 하리라고 본다. 이번에 김대통령이 걷고 있는 정상외교의 고된 여정이 이러한 새로운 세기를 위한 진지한 노력이고 그것이 동북아시아에 깃들이는 공동의 평화와 번영을 향한 긴 여로의 시발이 되기를 바란다. 이제는 우리나라가 주체적으로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할 시대가 온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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