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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백진의 탑산(압록강 2천리:3)

    ◎발해의 기상 말하듯 「5층 전탑」 고고히…/높이 12.64m의 네모꼴… 꽃무늬 벽돌로 쌓아/조선인 2가구 19세기 이주,현재 4만명으로 중국 길림성 장백조선족 자치현 장백진의 탑산은 산에 탑이 서 있기 때문에 탑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그 탑산의 탑은 이른바 영광탑인데 벽돌을 쌓아 만든 5층 전탑으로 되어있다.네모꼴을 기본형으로 한 이 탑의 높이는 12.64m에 이른다.탑 꼭대기 지붕(옥개)위에는 마치 조롱박 5개를 포개 올린 것처럼 보이는 높이 1.98m의 청동제 상륜을 세워놓았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불탑이다.청회색 꽃무늬 벽돌을 쌓아 마감한 상층기단 남쪽에는 아치형 문을 냈다.그리고 각층의 탑신 남쪽 벽에 네모꼴 창을 뚫었다.지붕의 추녀와 추녀 받침은 벽돌쌓기를 통해 마치 목조건물이 풍겨주는 것과 같은 그런 멋을 부렸다.상층기단 아래에는 길이 3.2m,너비 3.4m,깊이 1.49m의 지하공간 지궁을 갖추었다.지궁 뒷벽에는 사리함을 봉안했던 것으로 보이는 대좌가 마련되었다. ○청동제로 상윤 세워 이 탑이 후대에 들어 발해의 탑으로 고증된 것은 19 82년께다.중국 동북고고대의 소춘화와 중국과학원 장어환 교수가 2년에 걸친 검증에서 발해시대 불탑임을 확인했던 것이다.그러나 어느때 누가 세웠는지,또 불탑의 이름이 무엇이었는 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으로 담아있다.다만 19 08년 청나라 장백부 관리였던 장풍대가 이 탑을 보고 생김새가 노나라 때 영광전을 닮았다고 해서 영광탑으로 불러왔다. 이 탑에 대한 전설도 있다.장백조선족자치현 문화관 이성태 관장이 들려준 전설은 발해의 퇴락을 간접적으로 이야기 한성 싶다.전설에 의하면 어느 해 어느 날 괴상한 사람들이 탑속으로 스며들어 이레를 보냈다.그리고 금불상을 훔쳐 배에 싣고 가다 배가 뒤집히는 통에 금불상이 강에 가라앉았다고 한다.그 뒤에 늘 빛을 훤히 드러내던 탑은 광채를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그러자 독사가 탑주변에 살면서 사람과 가축을 마구 잡아먹었다는 것이 전설의 요지다. 장백현 일대는 발해가 융성한 시기의 강역 압록부에 해당한다.그 중심지 서경이 하류에 있었는 데 장백진에서 그리 멀지 않다.이 탑은 물론발해가 융성했던 시기에 세웠을 것이다.오늘 날도 탑이 있는 산아래 압록강변 장백진의 벌이 탑전이고 보면 탑산의 탑은 아직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이 탑의 영향력이 어디 장백진에만 국한했으랴.강건너 북한땅 혜산시 역시 옛 발해의 압록부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압록강 유역의 양안은 본래 고구려 강역이었다.그러나 고구려는 당에 정복되어 장백진에는 정복자의 전설이 더 많이 남아있을 뿐이다.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이 함께 세운 발해가 멸망한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더 많은 세월을 지배했기 때문에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는 쇠잔하기 이를 데 없는 잔영에 불과했다.그런 탓인지 탑산에는 당의 장수 설인귀의 전설이 남아있다.탑산에 세운 한 비석에다 설인귀가 말에 올라 군사를 호령했던 자리라고 기록해 놓았다.그리고 말발굽자리처럼 자연적으로 푹 파인 커다란 화산돌은 설인귀가 탔던 말발굽자리라 해서 과마석으로 묘사했다. ○정복자의 전설남아 역사의 흥망성쇠를 두고 「삼국지연의」머리시는 「한 마당 꿈」이라고 했다.정녕 그런 것인가.민족의 고대국가 강역에서 중국의 역사도 흥망성쇠를 거듭했다.발해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면서 요,금에 이어 명이 숨가쁘게 지나가고 청이 시작되었다.청은 중국의 동북을 만족(만주)자신들의 발상중지로 여기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봉금령을 내렸다.그리고 나서 청은 16 77년 백두산과 압록강,두만강 이북의 1천여리 넓은 땅을 봉금구로 정했다.특히 장백현은 경위장이라는 이름의 그들 사냥터가 되었다. 그러니까 장배현은 짐승들만 들끓는 무인지경이었다.19세기 초엽에 와서야 밥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이다. 「장백현황」에 따르면 청나라 연호로 도광 11년(서기18 31년)오늘날 길림성 임강 부근인 모아산 북탕하지방에서 조선인 2가구를 발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이어 도광25년에 조선인 10여명이 임강으로 건너왔고,함풍 2년(서기 1852년)에는 함경도 단천군 사람들 10여명이 와서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함경도서 많이 이주 이들이 바로 압록강을 건너온 이주민 선구자들이다.그로부터 세월리 흘러 20세기에 접어들어 19 05년에는 압록강 유역 장백·임강·집안 등지에 사는 조선족 이주민은 8천7백가구 3만9천4백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그 무렵 장백현으로 들어온 평안도 출신의 이주민2세 이동근(82)노인은 압록강을 건너와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던 뼈 아픈 사연을 회고했다. 『고향을 떠나서리 들어온 데가 장백진 탑전 사탕골이었댔시요.내 나이 연네살이었는데 자꾸 고향 생각이 납데다.그런 판에 부친은 한 해치 품삯 60원을 받고 연치산이라는 조선족 집에 머슴으로 들어가고 모친은 삯일을 했수다.부친이 만 네해 머슴을 살고 여섯식구가 다시 모였디요.기쁜 맘도 잠시고 여러 식구가 먹고 살게 있어야디.그래서 내 열여섯살 나던 해에 김세익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갔시요.저 노친(김증손·77)이 겨우 열한살이었던가 기래요.다섯 해 데릴사위 노릇을 하다보니 어린 처가 숙성해집데다.그래서리 결혼을 해버렸디요』 이 노인은 딸 넷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딸들은 모두 인근으로 출가하고 막둥이로 둔 아들도 커서 장가를 들었다.아들은 장사를 하는데 조선(북한)을 자주 드나든다는 이야기다.노인은 묻지도 않았는데 『조선에 물건만 가지고 가면 다 돈이 된다고 기래요』라는 말을 했다.노인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해관(세관)이 있는 압록강변 국경지대로 짐을 실은 차들이 몰려들었다.물건이 잔뜩 든 골판지 상자와 큰 부대자루들이 장백진 쪽에서 통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 중국의 얼굴/나이젤 카메론 등 지음(화제의 책)

    ◎서구인 눈에 비친 19세기 중국 모습 19세기 서구인의 눈에 비친 중국의 모습을 담은 사진 68컷과 참고도판,이와 관련된 글 4편을 엮었다.사진작가는 펠리스 비토,존 톰슨 등이다. 자희황태후(일명 서태후)가 악명높은 내시장 이연영과 함께 자금성에서 찍은 사진,아편전쟁 때 폐허가 된 이화원의 모습,북경으로 진주하는 서양연합군을 찍은 사진 등 희귀한 자료가 많이 소개돼 있다.또 중국인 상류층의 집 내부와 가족,하녀를 거느린 만주족·한족의 여인,범죄자 처형 등 중국인의 생활상과 풍속도 두루 등장한다.양자강의 고산,절강성 남부의 사원 등 절경도 곁들였다. 그러나 이 사진집은 단순히 자료집으로서만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이 사진들에서는 당시 동양문화에 대해 우월감에 넘쳤던 서구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곁들여 미지의 세계인 중국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도 뒤섞여 있다. 따라서 이 책을 편역한 미술사학자 이영준씨는 『이 사진들이 중국을 찍었다는 이유만으로 서양사진의 주변적 영역으로 볼 것이 아니라 사진의 역사를 이해하는중요한 자료로서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열화당 5천원.
  • 서울신문 주최 「해외 독립운동 유적지 순례」 단장 박성수

    ◎“항일투쟁 현장서 조국 소중함 실감”/독립선언문 낭독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인상적 서울신문과 스포츠서울, LG전자는 광복50주년을 맞아 지난 2∼12일 독립운동 유공자 후손인 대학생 20명과 함께 애국선열들의 숨결이 배있는 중국과 러시아의 해외독립운동 유적지를 순례하는 행사를 가졌다. 순례단의 단장이었던 박성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교수의 답사기를 싣는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후손20명이 중국과 러시아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돌아본 것은 다른 어느 행사보다도 뜻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지난날의 전승국이요 열강이었던 중·소 두나라가 체제선택의 잘못으로 인하여 반세기도 못가서 빈민대국이 되거나 거의 황폐화되다시피 조락해버린 현실을 직접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게 된 것은 여간 큰 성과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상해의 임정청사와 홍구공원 연변의 청산리·봉오동 전투현장,그리고 하얼빈의 안중근의거 현장 등 책에서만 보던 항일투쟁의 생생한 자리를 보고 학생들은 다시는 나라가 망해서는 안되겠다는 교훈을 가슴에 새겼다. 중국을 거쳐 러시아 땅을 밟았을 때 학생들은 엄청난 주검의 도시들을 목격하고 놀랐다.우리가 처음 도착한 하바로프스크 공항에는 날지 못하고 버려진 러시아제 여객기 10여대가 눈에 띄었고 우수리스크로 가는 유명한 시베리아 전도열차는 6·25때 피란열차를 연상케 하는 빈민들의 고철 객차였다. 위도 48선에 자리한 하바로프스크는 왕년의 발해 12부의 하나로서 알고 보니 옛날 우리 땅이었다.영하 40도까지 내려간다는 한대까지 우리 조상들이 북상하였다고 생각하니 새삼 우리들 후손이 낯뜨거웠다. 시베리아 철도는 우수리강을 따라 남하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닿게 되는데 우수리강의 어원이 오수리요 한강 상류의 소양강이 바로 우수리강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드물다.지금도 우수리강에 살던 예맥의 후예가 춘천시 우수촌에 살고 있다.그러고 보니 시베리아는 우리들에게 낯선 땅이 아니었다. 그러나 차창 밖에 펼쳐지는 끝없는 시베리아 벌판이 잡초로 우거져 있으니 이 땅을 차지한 러시아인들의 대욕과 태만을 질타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다못해 콩이나 옥수수라도 심어 놓는다면 가축에라도 먹일 양식이 생길텐데 그들은 지금 보드카에 취해 있을 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한 도시는 극동의 홍콩 블라디보스토크였다.19세기말 우리의 조상들이 가서 피와 땀으로 건설한 금강만 항구에는 녹슨 군함과 상선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는데 움직일줄을 모른다.기름도 없고 갈곳도 없는 배들의 행렬위에 어둠이 깔리면 전등불 하나 없는 암흑의 항구가 된다. 블라디보스토크 중심가에 자리한 개척리(개탁리)거리와 쫓겨난 달동네 신한촌에는 그 옛날 우리 고려인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건물 하나가 외롭게 남아 있다.1937년 냉혈한 스탈린의 명령으로 강제수용 화차에 실려 머나먼 타슈켄트까지 추방되던 비극의 정거장 블라디보스토크 역사도 지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는 온통 빈민굴로 화한 이 도시의 낡은 건물과 잡초로 우거진 거리가 역사의 교훈으로 더 인상 깊었던 것이다.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다시 생각게 하는도시 블라디보스토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서울을 향해 날아 가는 정든 우리 여객기에 몸을 실었다.
  • 크라스노야르스크(시베리아 대탐방:30)

    ◎절경의 스탈브이 자연공원… 기암 40개/일군 포로가 지은 스탈린식 건물 곳곳에/19세기 화가 「수리코프」는 이 고장의 자랑/예니세이강 유역에 목재 콤비나트 줄이어 목재산지 예니세이강의 도심 선착장 대합실은 49년 당시 소련에 억류돼있던 일본군 전쟁포로들을 동원해 지었다는 전형적인 스탈린식 건물이다.시베리아 전역에서 전쟁포로들을 동원해 지은 건물들을 많이 볼수 있었다.치타·연해주 등 동시베리아쪽에서는 일본군 포로들이 동원됐고 서부지역에서는 독일군 포로들이 동원됐다. 일제때 학병으로 끌려간 우리나라 사람들중에도 소련군포로가 돼 러시아땅에서 강제노역을 당한 사람들이 많다.김영삼대통령의 단골 러시아어 통역인 유학구씨도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포로로 잡혀 하바로프스크에서 무려 4년여 강제노역을 했던 사람이다.그는 그곳에서 좌익활동을 해 전후 일본으로의 송환을 거부하고 소련시민이 됐다.이후 그는 소련의 연구소에서 한반도관계 일을 맡다가 한소수교 뒤 다시 한국국적을 취득해 지금 서울에서 살고 있다. ○유학구씨도강제 노역 그와는 달리 학술원회원인 동완 선생은 하바로프스크에서 유학구씨와 함께 포로생활을 했으나 일본으로 되돌아간 경우다.그는 어릴 때 부친을 따라 만주에서 성장하며 배운 유창한 러시아어 때문에 관동군 통역장교로 참전했다고 한다. 귀국 후 그는 오랫동안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학과에서 후학을 가르쳤다.이 두 사람의 인생유전도 우리 근대사의 한 비극을 압축해 보여준다. 크라스노야르스크 동쪽의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 유형자들의 종착지였다.그래서 유형자들의 수도라고 불린다.따라서 그 직전 도시인 크라스노야르스크는 유형자들의 마지막 중간 기착지였던 셈이다.그리고 많은 유형자들은 이곳에서 유형생활을 마감하기도 했다.「파크로프스크(첫눈)」라는 이름의 18세기 사원을 지나면 시립 공동묘지가 있는데 데카브리스트(12월당원)들을 비롯,유형자들의 묘지가 대거 눈에 띈다.「파크로프스크」라는 이름은 첫눈 내리는 10월1일에 착공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보통 10월1일 첫눈이 내리면 이듬해 4월까지 겨울이 계속되고 1월 평균기온이 지금도 영하18∼20도로 내려간다.지난 겨울에는 예전같은 혹한은 줄어들었지만 대신 폭설이 많이 내렸다고 한다. 크라스노야르스크의 가장 자랑거리는 뭐니뭐니해도 자연공원 「스탈브이」봉이다.수력발전소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약 40개의 기암 봉우리로 이루어진 자연공원이다.우리의 설악산에 비할바는 못되지만 산이 귀한 시베리아인들은 이 스탈브이를 한번 가보는 게 평생 꿈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산이다.산세도 산세지만 사회주의 나라들의 공원은 역시 사람의 발길이 뜸해 오염되지 않은 게 제일 장점인 것같다.무료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공원입구 매표소 여직원은 엽서·안내책자 등을 종류대로 다 사고 싶다는 말에 신이 나서 먼지가 뽀얗게 쌓인 서랍을 이리저리 뒤졌다.이곳의 안내책자들은 사진기술은 괜찮은데 하나같이 종이질과 컬러 인쇄술이 조잡한 게 흠이다.얼음같이 찬 계곡물에 잠시 발을 담그니 쌓인 여행의 피로가 말끔히 씻겨지는 기분이다. ○유형자들 중간 기착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특히 「클레시」라고 부르는 해충을 조심해야한다.작은 벌 모양으로 생겼는데 한번 물리면 뇌·신경조직에 치명적인 해를 가한다고 한다.공원 입구는 물론,크라스노야르스크 시내 곳곳에 클레시를 조심하라는 경고판이 나붙어 있다.스탈브이를 내려오면 예니세이강을 끼고 시내 초입까지 내내 목재 콤비나트가 줄줄이 들어 서 있다.뗏목으로 이동해온 목재들을 이곳에서 가공해 시베리아철도를 이용해 각 도시로 공급하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의 문화적 자랑거리로는 19세기에 활동했던 이곳 출신 화가 수리코프를 빼놓을 수 없다.시내 한복판에 있는 전형적인 동시베리아 목재집을 박물관으로 꾸며 그가 쓰던 가구와 그림들을 전시해 놓았다.시베리아의 자연풍경과 여인·가족,특히 자연속의 사람을 즐겨 그린 수리코프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자긍심은 대단하다. 크라스노야르스크가 우리에게 비교적 낯설지 않게 들리는 이유중 하나는 지난 88년9월 고르바초프가 이곳에서「크라스노야르스크 선언」이라는 새 아시아 군사외교노선을 천명한 때문이기도 하다.아시아에 탈냉전의 바람을 불어놓는 선언이라며당시 우리 언론들도 대서특필 했었다.고르비가 당시 이 선언을 발표했던 주당위원회 건물은 지금 주정부·주의회가 입주해 있고 정작 거리의 시민들은 이 선언에 관해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하기야 고르비마저도 거의 잊혀진 인물이 됐으니. ○고르비 “탈냉전” 천명한 곳 시베리아에서 5월말은 졸업시즌이다.크라스노야르스크의 중심가인 칼 마르크스거리의 불러바르(도보)에는 졸업을 앞둔 여중생들이 들뜬 기분에 10여명씩 무리를 지어다니는 모습이 눈에 띈다.11학년제이니까 15∼16살쯤 되는 나이들이어서 화장도 짙게 하고 모두 숙성한 모습들이다.우리를 보더니 『우리는 졸업한다』『사진을 찍어달라』는 등 명랑하게 재잘거리며 지나간다. 러시아는 지금 학제도 큰 변혁기에 있다.지금까지는 국민학교 5년에 중학교는 6년,합쳐서 11년제였다.우리와 달리 국민학교·중학교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같은 학교에 있으며 제도만 분리돼 있을 뿐이다.국민학교는 담임교사가 학급을 책임지고 모든 과목을 다 가르치는데 중학교로 가면 과목별 교사가 따로 있다.가장 큰 차이는 국민학교에는 시험이라는 게 전혀 없다가 중학교로 가면 과목별로 시험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요즈음은 이 공립학교 대신 김나지움이나 리세라는 엘리트학교가 많이 생겨나고 있다.일명 「뉴(new)러시안」이라 불리는 신흥 부자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곳이다.시설도 좋고 교육의 질이 매우 좋지만 월학비가 5백∼1천달러에 이르니 일반국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이들 학교학생들과 일반 공립학생간의 위화감이 사회문제로 언론에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취직을 하거나 아니면 대학으로 진학한다.요즈음은 너도나도 취직하는 게 유행이다.대학은 우리같이 학부 4년,대학원 2년이 기본이다.그러나 의대의 경우는 예과 2년,인턴 2년을 합쳐 모두 7년제이고 공대 6년,법대 5년등 다양하다.이를 모두 미국·유럽학제로 일원화하는 문제가 요즘 큰 논란거리다.
  • 101세 독립투사 김경하옹의 광복 50돌 기원

    ◎광복조국 밝은 모습 뿌듯/민족통일이 마지막 소원/“서대문 형무소 붉은 담장 아직도 눈에 선해”/김좌진 장군 딸등도 함께 감회 젖어 늙은 독립투사가 15년만에 다시 들러 바라다본 광복 50주년의 조국땅은 밝고 힘에 가득차 있었다.살아있는 최고령 독립투사인 김경하옹. 평북 강계가 고향인 김옹의 올해 나이는 1백1세. 그의 정확한 생년월일은 금세기가 아닌 19세기말인 1895년 3월 24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열혈청년의 정열이 남아있는 듯 김옹은 광복 50주년 기념식을 하루 앞둔 14일 상오 서울 독립공원에서 기자들에게 큰 소리로 소회를 피력했다.『70여년전 서대문형무소의 붉은 벽돌 담장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나라 잃은 청년의 비애같은 것이 느껴집니다.그러나 오늘 이 땅에 사는 청년학생들이 밝고 힘에 넘쳐 가슴 뿌듯합니다』 김옹은 조국이 자기를 잊지않고 광복 50주년 기념행사에 초청해 준 게 무척 흡족한 모습이었다. 김옹이 독립투사로 형극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3·1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진 기미년 4월8일 강계 장날.당시강계 영실중 교사로 재직중이던 김옹은 동료 교사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 일본 기마헌병에 붙잡혀 징역 2년6월형을 받고 평양감옥에 수감된다.그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병보석 되어 풀려나자 만주로 피신,선교활동을 통한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우연한 인연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40여년동안 목사로 활동을 해오고 있다.『조국사랑은 누구나 당연한 것이며 결코 자랑거리가 안되는데…』. 김옹의 곁에는 김옹처럼 국가보훈처의 초청으로 조국 땅을 밟은 김좌진 장군의 외동딸 김순옥(68·중국 연변)씨와 전명운 의사의 둘째딸 전경영(72·미국 로스앤젤레스)씨,그리고 외국인이면서 우리의 독립을 위해 고종황제의 밀사로 외교활동을 했던 호머 헐버트의 손자 리처드 헐버트(67·뉴욕 캐미컬뱅크 직원)씨가 자리를 함께 했다.그들의 표정도 김옹과 같이 감회에 젖어 있었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이렇게 자랑스런 일을 한 줄은 몰랐어요.살면서 고생은 했지만 정말 자랑스러워요』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장군의 딸 김순옥씨는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의얼굴조차 모른다.독립운동 뒷바라지에 고생만 하던 어머니는 그녀를 낳다 세상을 떠나 아버지의 부하였던 김기철에 의해 키워졌다고 했다. 『어떻게 소문을 듣고 일본경찰들이 찾아와 여러차례 매를 때리곤 했어요』.농사를 짓고 살면서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는 고생을 했다는 그녀는 이번에 장군의 외손녀인 위연홍(45)씨와 함께 처음으로 조국땅을 밟았다. 미국의 외교고문자격으로 친일 행각을 노골적으로 벌이던 스티븐스를 향해 총을 뽑았던 전명운의사의 딸 전경영씨는 『영원히 아버지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 할 것』이라고 말했다.어릴적 부터 미국에서 자란 탓에 우리말은 서툴지만 사회사업을 하는 애국지사의 후손답게 힘차고 또렷또렷하게 얘기했다. 묵묵히 듣고있던 최고령 독립투사 김옹은 『이제 바라는 게 있다면 남이든 북이든 한자리에 모여 오래오래 사이좋게 번영하는 민족의 통일,통일을 이룩하는 것입니다』.이 말을 뒤로 김옹의 눈에는 「간절한 소망」의 이슬이 맺혔다.
  • 한국인 선교사/119개국서 3,272명 활동

    ◎한국선교정보연구원 집계/필리핀 401명·러시아 261명·일본 252명 순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들어온지 1백10년 밖에 안된 현재 한국인 선교사는 세계 1백19개국가에 3천2백72명이 파송되어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선교사 숫자만으로는 미국·인도·영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독일에 이어 세계 7대 해외선교국이 되었다. 한국선교정보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한국교회가 해외에 파송한 선교사수는 3천2백72명으로 지난 79년 93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15년동안 무려 35배에 이르는 놀라운 성장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선교대상국은 79년 29개국,82년 37개국,86년 47개국,90년 87개국이었으나 94년에는 1백19개국으로 전세계에 걸쳐 선교사들을 파송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륙별로는 아시아 21개국 1천5백6명,아프리카 30개국 2백85명,남 아메리카 15개국 3백38명,구 소련에 4백54명,유럽 26개국에 2백76명,중동 11개국에 1백41명,카리브연안 5개국 23명등이다. 국가별로는 필리핀에 4백1명으로 가장 많이 나가있고 러시아에 2백61명,일본에 2백52명,중국 1백29명,대만 1백명순으로 밝혀졌으며 러시아·중국등 공산권에는 3백90명이 파송되어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파별로는 예장의 통합,합동,고신,개혁,대신,기장등 장로교단에 속한 선교사들이 1천8백6명으로 전체의 59%를 차지했으며 감리교가 13.5%인 2백44명,하느님의 성회가 10.7%,성결교가 10.6%,침례교가 6.1% 인 것으로 조사됐다. 개신교는 오는 2천년까지 국내교회에서 9천명,해외한인교회에서 3천명등 모두 1만2천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들중 상당수가 중국과 러시아등 공산권에서 조선족과 북한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오는 2천년에는 한국에서 파견한 선교사수가 현재의 세배 이상에 달해 한국교회가 세계의 주도적인 선교세력으로 부상하게 될 전망이다. 기독교 21세기운동본부는 최근 「세계기독교대표 서울 총회」를 폐막하면서 『오는 2천년까지 1만여명의 대학생을 선교사로 파송할 계획』 이라고 밝혔다. 기독교 21세기본부 관계자들은 영국의 국력이 가장 왕성하던 19세기에 영국에서 가장 우수한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대학생들이 선교사로 세계의 오지로 떠났던 사실을 상기하면서 『한국의 우수한 선교사들이 중국과 인도·북한등 미전도지역의 선교에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 묘지문화도 예술/불서 묘비조각 이색전

    ◎파리 역사도서관서 새달 17일까지 열려/쇼팽 등 유명인사 정신세계 깃들여/신고전·낭만주의 조각양식 한눈에 「묘지문화도 예술이다.」프랑스 파리에서 이런 기치아래 장례예술이라는 이색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전시회는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여름의 무더위를 식히기 위한 납량물이 아니라 예술차원에서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이 전시회에 가면 페르 라셰즈·몽마르트·몽파르나스 등 파리시내에 흩어진 묘지를 다 둘러보지 않아도 프랑스 묘지 조각의 역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파리9구 말레르거리 22번지 파리시 역사도서관에서 오는 9월17일까지 열리는 전시회 정식명칭은 「대리석의 기억」.살아있는 사람들이 고인에 대한 기억을 초상화나 사진이 아닌 대리석으로 된 묘비로 더욱 영속화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듯하다. 프랑스 현대미술을 이해하려면 파리의 묘지는 꼭 한번 들러야 하는 곳으로 꼽힌다.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조각양식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묘지의 비석들이다.이른바 「노천 박물관」인 셈이다. 묘지라는 이유만으로 음침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지만 파리의 묘지는 비교적 깨끗하게 단장돼 있어 그런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자신이 좋아하는 유명인사의 묘를 찾아 그의 정신세계를 음미하거나 경의를 표하는 곳이다. 아니면 마로니에 잎이 질 때쯤 묘지의 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우수를 감상하는 로맨티스트들이 자주 들른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됐고 우아한 묘지로 꼽히는 페르 라셰즈에는 극작가 몰리에르,샹송의 대가 에디트 피아프,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등이 묻혀 있다.또 아일랜드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비극배우 사라 베를하르트,영화배우 이브 몽탕 등의 묘지앞에 서면 그의 작품세계가 또 다르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쇼팽의 친구이자 조각가인 오귀스트 클레징거는 친구를 잃은 슬픔을 예술로 승화,「울고 있는 음악」이라는 조각을 남겼다.이밖에 「울고 있는 여인상」「영광스러운 군인」「자비로운 천사」 등의 조각들도 있다. 18 99년 프랑스의 조각가 바르톨로메가 조각한 「사자의 비」는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경계로 꼽힌다. 몽파르나스 묘지에는 소설 「비계덩어리」의 기 드 모파상,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보들레르 등의 묘비가 있다.몽마르트 묘지에서는 독일 시인 하이네,러시아 무용가 니진스키 등과 만날 수 있다. 로댕미술관장 앙트안느 르 노르망 로맹씨는 『조각은 망각과 싸워 이기는 방법의 하나이자 고인을 다시 살리려는 노력』이라고 밝히고 있다.로맹씨는 『고인과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을 중개하는 곳이 바로 묘지』라며 『고인에 대한 기억을 영원히 하는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프랑스가 묘지조각을 본격적으로 보호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초부터.특히 당시의 조각가 데이비드 당제르는 묘지비석으로 조각의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그러나 이제 프랑스에는 비싼 대리석으로 된 묘지를 세우는 사람들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동경 강연 요지

    ◎일본은 침략의 역사에 눈을 닫지 말라/과거는 역사이자 현재… 진실된 속죄로 불신고리 끊어야 리하르트 폰 바이츠체커 전독일대통령은 7일 서울신문과 제휴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 도쿄신문의 초청으로 도쿄 국립교육회관에서 「독일과 일본의 전후 50년」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가졌다.「독일의 양심」으로 불리는 바이츠체커 전대통령은 이날 과거 침략의 역사에 대해 일본이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을 촉구했다.다음은 2시간여에 걸친 강연 내용의 요약. 독일과 일본 양국의 운명에는 유사점이 많다.양국이 금세기 전반에 군사적 수단으로 세력을 확대하려 했던 점,대부분의 이웃나라와 전쟁상태에 있었던 점,50년 전에 끝난 제2차대전에서 무조건 항복한 점,그후는 특히 경제면에서 극적인 부흥을 이룩했다는 점,따라서 「전쟁의 패자에서 평화의 승리자」로 불리고 있다는 점은 같다. ○독 전후처리와 대조적 그러나 양국은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우선 국가 규모의 차이이다.일본은 인구및 경제력에서 독일보다 50% 정도 웃돈다.또 독일은 대륙의 중앙에위치하고 있지만 일본은 섬나라이다.섬나라 사람들은 독자색이 짙은 단일전통,역사,문화를 갖고 있어 이웃 대륙의 여러 민족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갖고 있다.독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독일은 유럽이라는 다민족대륙의 가운데 놓여 있다.독일 역사는 외부로부터 내부로,내부로부터 외부로 부단히 영향을 주고 받는 상호작용의 역사였다.독일과 국경을 맞댄 나라는 9개국으로 러시아를 제외하면 세계 제1이다. 이처럼 양국에는 전혀 다른 고유의 특징이 있지만 양국민이 2차대전의 결과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를 비교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과거는 역사다.그러나 과거는 단순히 역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역사이자 현재인 것은 아닌가.과거 해석은 역사가의 일이지만 그러나 정치가 또는 정신적 지도자들도 참가할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나는 있다고 확신한다. 만일 책임있는 입장의 독일 정치지도자가 「전시중의 행위는 역사이므로 평가하려 하지 않는다든지 또는 할 수 없다면」,「전쟁을 시작한 것이 누구인지,자국의 군대가 타국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해 판단을 주저한다든지」,「타국에 대한 공격을 자위였다고 해석하는 일이 있다면」 현재의 우리에게 중대한 외교상의 결과로 되고 말 것이다. 이웃나라로부터 정치적,윤리적 판단력을 결여했다고 비판을 받는다든지 아직 무엇을 할지 알 수 없는 위험한 나라로 보일 것이다. 불신 해소가 중요하지만 불신이 생긴 것은 전쟁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독일인이라면 확실하게 깨우치고 있다.불신 해소에 성공하는 것,이것이야말로 현재와 장래에 걸쳐 사활적 관심사인 것이다. ○「원폭」이 면죄부 아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정치적 책임인 것이다. 과거를 부정하는 사람은 과거를 되풀이할 위험을 안고 있다. 독일은 이런 통찰로부터 적절하게 책임있는 결론을 내리기까지 어려운 길을 오랫동안 걸어왔다.우선 19 68년 「청년들의 반란」으로 과거의 범죄가 용서없이 논의의 대상이 됐다.또 이에 앞서 기독교회가 나치즘 지배 아래서 오랫동안 침묵하면서 여기에 저항할 용기가 없었던 점을 고백했다.여기에 아데나워 총리가 50년대 나치 희생자의유족 특히 이스라엘에 대한 거액의 보상정책을 내놓았던 것이다. 독일로서는 전쟁 패배의 날이 독재로부터 해방의 날인 것이다.독일연방공화국이 솔직히 과거를 다룬 것은 국제관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유럽공동체의 가맹도,독일연방군의 북대서양조약기구 가맹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폴란드와도 조약이 체결됐다.정력적인 청소년교류계획도 추진되고 있다.인간으로서,국민으로서 화해에 이른 것이다. 일본은 서양의 영향을 받아들이기는 하면서도 종속에 빠지지 않았다.일본은 현격히 강해졌고 국민으로서 아이덴티티를 강화하게 됐다.19세기 일본은 정신적 의미에서는 아시아로부터 등을 돌렸다.동시에 이 지역에서 군사적,정치적인 권력을 확대해 나갔다.이러저러한 군사적 분쟁을 일으켰다. 독일에 있어 나치는 이상한 시기,단절이었지만 일본은 전후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기초로 하면서도 종교적인 기반,천황제,또 국가체제는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일본에서는 종전됐을 때나 그 후나 전통과 계속성이 강력히 유지되고 있다.거기에다 독일과 일본이 다른 것은 원폭 피폭 경험이다.미국이 무방비의 일본 일반시민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이유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그러나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상대측이 옳지 않은 일을 범했더라도 우리에게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솔직히 과거 다뤄야 전쟁에서의 죄와 옳지 않았던 일들을 공평하게 판단하려면 역사의 진실에 눈을 닫아서는 안된다.이 진실은 파사현정,새로운 상호 신뢰를 일으켜 세우는데 도움이 된다.때로는 사죄가 필요하지만 거짓으로 꾸미지 않은 사죄가 아니면 효과가 없다.마음으로부터 사죄가 아니면 차라리 그만두어야 한다.또 독일의 경험으로는 보상의 행동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말보다도 크게 효과적이다.적극적으로 과거를 생각하는 것은 독·일 양국민의 내외의 과제의 해결에 있어서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핵무기 폐기론은 옳지 않다”/마이클 메이(해외논단)

    ◎확실한 전쟁 억지력… 냉전후 안보체계 와해 막아 냉전 이후 핵무기 무용론이 세계지성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마이클 메이 스탠포드대 교수(국제안보·무기통제 연구소장)는 세계안보 유지를 위한 핵무기의 긍정적 역할을 강조한다.브루킹스연구소 계간지에 실린 그의 글 「무서운 안전보장」을 소개한다. 오늘날 여러나라 무기고에 저장돼 있는 핵무기는 한개 평균 사방 수마일을 파괴하면서 대도시에선 1백만명은 족히 죽일 수 있다.이런 물건들의 역할은 무엇인가.미국은,또 다른 나라들은 무엇 때문에 이를 필요로 하는가. 클린턴 미국 행정부의 입장을 대충 정리하면 『무엇 때문에 필요한지는 우리도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러시아 등 여러나라가 수많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고 세계 도처에 불안정한 상황이 깔려 있다.점차로 숫자를 줄이고 더 이상 확산되는 걸 막으려고 애쓰고 있으나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몇천개 정도는 간직할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지식계층과 학자들은 이런 입장을 비전이 부족하다고 비판한 뒤 한시라도 빨리 몽땅 없애버리자는 폐기론과 심심하면 출현하는 깡패·무뢰한 국가들에 대한 응징용으로 몇개만 남겨두자는 극소보유론 두노선으로 편을 갈랐다. 유행에 뒤지긴 했지만 미국 입장이 올바른 것이며 폐기론,극소보유론은 잘못된 것이다.세계는 지금 핵무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두리뭉실한 미국정부의 변명보다 훨씬 논리적이며 사람들에게 썩 기분좋게 들리지 않는 냉엄한 판단에서 비롯된다.자기들 사이의 평화를 「멋지긴 하나 근본적 안보 이해가 문제될 땐 무시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던 세계강국들은 핵무기의 존재로 평화를 「정부와 국민들 모두의 근본적 안보 이해」로 여기게 된 것이다. 우리의 소원과는 달리 현재의 국제사회를 하나의 세계 안에서 법을 준수하는 동등한 시민같은 국가들의 모임으로 볼 수는 없다.특히 근본적 안보 면에서 그렇다.미국이나 다른 나라들이나 이런 국제 형편에선 결국 의지할 건 자신의 힘뿐일 것이며 이는 당연한 것이다.이에 따라 전통적인 안보최우선 행태가 아직도 팽배한다.지금 중부유럽,동아시아,중동에서 벌어지는모습은 19세기초의 메테를니히나 19세기말의 비스마르크 때와 별로 다를게 없다.현재의 국가들은 과거와는 다르게 상호의존적,반응적,쌍방향적이긴 하나 불안정하다는 점에선 과거와 똑같다.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강력한 무기들과 억지력을 보유하는 것이 미국 안보정책의 최우선 목적이며 이는 곧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미국의 중심적 권익을 해외에서 지키는 것으로 이어진다. 핵무기의 존재로 분명 전쟁이 쓸모없는 낡은 것으로 되지는 않았지만 전쟁억지와 관련해 이를 대신할 어떤 것도 현실적으론 존재하지 않는다.핵무기는 교전 양측이 전쟁에서 얻고자 했던 것들을 단숨에,확실하게 파괴시킨다.적 뿐 아니라 이익을 뽑아낼 수 있는 전쟁터까지도 파괴시킬 수 있는 점이 핵무기를 근본적이며 핵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폐기론자와 극소보유론자들은 이같은 역할을 대체할 현실적 대안이 없다. 몇몇 나라들은 냉전 이후 지금 훨씬 불안정해졌다.냉전은 억압과 고통을 수반했지만 전통적으로 갈등 지역에 위치한 많은 국가들에게 단단한 안보 틀을 제공했다.자신보다 더 큰 여러나라에 끼여 있거나 이해 문제를 제기한 이들 전통적인 갈등 국가들중 몇몇은 냉전 이후 독자적 안보체계를 요망하면서 핵무기에 시선을 돌렸다.세계로부터 고립된 북한과 이란이 좋은 예다.폐기론자들과 극소보유론자들은 미국에 대한 주요 위협은 이들 고립국가들이며 이런 위협만 제외하면 핵무기 보유는 무의미하기 때문에 핵무기를 완전포기하거나 핵심방어체계가 아닌 주변무기단위로 격하시킬 때라고 주장한다. 핵무기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는 평화를 제공하거나 유지하게 하는 권위를 창출하지 못하지만 이를 무시했을 경우에 대한 책벌만은 명확하게 공지시킨다.이에 따라 앞으로 세계는 핵보유국끼리 이해상충할 때 앞뒤를 재는 조심성의 크기로 이해가 갈릴 가능성이 짙다.경계를 확실히 그으려는 경향에 힘입어 장래 수년,수십년 동안 세계는 다시 강국들의 영향권 재편과 확정의 과정을 거칠 것이다.러시아가 아직은 주위를 살펴야만 하는 이때를 활용해 나토와 유럽연합 가입을 향해 대시하고 있는 체코,헝가리,폴란드의 처지가 이해된다.반면 대만에 대해 확고부동한 정책을 가지고 있는 중국의 뜻을 무시하고 지금 대만 인정을 추진하는 것은 사려깊지 못하다. 핵억지력은 현대생활의 한 엄연한 사실이다.그러므로 미국이 이 억지력을 무효화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핵폐기는 현상황에서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가능하더라도 이의 추진은 틀린 것이다.극소보유론은 무의미하다.핵무기는 매일 몇개인가로 계산되지 않고 최종적 안보 개념으로 논해지기 때문이다.지난 50년간 억지력은 시사전문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했고 견고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어쩌면 억지력이 이토록 잘 작동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이를 포기할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윈스턴 처칠은 원자시대 초두에 『안전은 공포감에서 생겨난 튼튼한 아이일 수 있다.공포감을 대신할 보다 나은 어떤 것을 완전히 확신하지 않는 한 우리는 원자무기를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갈파했다.사방을 둘러봐도 이를 대신할 보다 나은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 런던의 여름/프롬 음악축제 열기 “후끈”

    ◎BBC방송 주최로 새달 16일까지 로열 앨버트홀서/1백년 전통 자랑… 유럽음악팬 대거 몰려/음료수 마시고 산책하며 자유롭게 감상/한국 김덕수 사물놀이패 공연 4일에 요즈음 영국 런던에는 매년 여름 온 유럽의 음악팬들을 열광시키는 음악축제인 프롬축제 열기가 뜨겁다.이 프롬축제는 지난 7월21일 런던 중심가인 켄싱턴로드의 대규모 연주장 로열앨버트홀에서 막이 올랐다. 특히 이 축제는 올해 1백주년을 맞는 전통성과 명성이 맞물려 5천2백석의 엄청난 수용인원을 자랑하는 앨버트홀을 단숨에 메워버렸다.4파운드짜리 최하위석을 10파운드에 파는 이른바 「암표」도 없어서 못 들어갈 정도였으니 그 열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오는 9월16일까지 연속 70일간의 마라톤 음악회를 펼치는 프롬축제는 지난 1895년 영국의 지휘자 헨리 우드(1869∼1944)가 시작한 영국 최고의 음악축제. 영국의 BBC방송이 주최하는 이 음악회는 프로그램의 성격상 음악팬들의 진지한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지만 한편으론 객석의 분위기가 자유롭다는 점에서 더욱 대중적 인기를끌고있다. 연주중 청중이 자유로이 산책하면서 듣는 연주회라 해서 「프롬나드(Promenade)콘서트」라 하는 이 축제의 자리는 대형 원형연주장으로 평상시엔 복싱경기도 열린다. 홀의 중앙에 둥그런 크기의 입석까지 마련되어 연주가 끝날때마다 이곳을 메운 젊은 청중들이 발을 구르는등 환호가 만만치 않다. 또 객석외곽 대기층 회랑부에도 청중을 입장시켜 이곳에선 담요를 깔고 음료를 마셔가며 음악을 감상하는 낭만파들의 모습이 매우 여유로워 보인다. 이 음악회는 특히 마지막날 청중들이 각국의 국기를 흔들며 풍선을 터뜨리며 밤을 지새는 축제분위기로 유명한데 이를 즐기기 위해 전세계 음악팬들이 런던을 찾아 몰려든다. 이 축제의 예술감독인 존 드루먼드경은 기자회견을 통해 『94년 축제가 1백년간의 지난 프롬 음악사를 돌아본 자리였다면 올 프롬은 20세기 음악과 그 성과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이에따라 1백주년을 맞아 1백1번째 시즌을 펼친 올해는 19세기와 20세기 음악의 양 극단에 걸친 과도기적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세계를 주제로 말러의 10개 교향곡 전곡을 우선적으로 연주한다. 지난 21일 개막연주에 1천명의 출연진이 동원되는 말러의 8번 교향곡 「천인교향곡」이 무대에 올랐다. 앤드루 데이비스가 이끄는 BBC심포니와 버밍엄시티심포니의 합창단·웨스터민스터성당의 소년합창단등 7백명이 넘는 인원이 등장, 웅장한 사운드로 서막을 장식했다. 유럽 각국의 정상급 연주자들은 물론 미국과 러시아의 연주자들이 대거 출연하는 이 무대에 오는 4일엔 중국·타이음악과 함께 우리나라 「김덕수패 사물놀이」가 심야무대를 꾸미게 돼 한국인 팬이 있다면 아마도 긍지를 느낄 것이다. 축제의 대중적 성격때문이라도 런던 곳곳의 서점에 이 프롬축제의 작은 프로그램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그만큼 문화인구층이 두꺼운 그들의 현실이 매우 부럽기도 했다.
  • 일본 고지도전과 동해 원적/강석진 도쿄특파원(오늘의 눈)

    35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 30일 일본 요코하마 개항자료관에서는 일본 고지도전이 마지막 날을 맞고 있었다.근처 사쿠라기쵸역 앞에는 제3회 코리아청년축전을 맞아 동포 3세들로 구성된 풍물패가 한국 가락을 멋들어지게 선보여 차에서 내려 덩실덩실 춤을 추며 감탄사를 연발하는 서양인들도 있었다. 개항자료관에는 미국외교관이었던 폴 C 블룸씨(1898∼1981)가 소장했던 서양인들이 제작한 세계,동아시아,일본 지도가 진열돼 있었다. 일견 15∼16세기의 지도 등에는 인도와 인도지나반도 등은 비교적 정확하게 그려져 있지만 필리핀 이북은 부정확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서세동점의 시기에 유럽인들의 발길이 그 지역에 먼저 닿았던 탓이리라.한반도가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17∼18세기에 들어서면 한반도 등도 정확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데 위트의 「타타르국」지도에는 제주도까지 나타나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시기 지도에서는 거의 전부라고 할 만큼 동해바다가 한국해로 표기돼 있다는 점이다.베랑의 일본도(1752)에는 「Merde Coree」였고 보엔의 일본도(1747)에는 동해가 「Sea of Korea」로 명기돼 있었다.이에 앞서 에도(도쿄)를 방문한 네덜란드 사절단이 에도에서 들은 것을 바탕으로 제작한 다베르니에의 일본도(1680)에는 「The Sea of Coreer」로 돼 있었다. 이 시기 지도에서 일본해라는 표기는 동해가 아니라 일본 동쪽 태평양을 가리키는 것으로 표시돼 있었다. 그러나 19세기가 되면서 제작된 지도에는 동해가 일본해로 둔갑하기 시작한다.에로스미스(1804),핀카튼(1809),톰슨(1816),페로(1826)의 지도가 그러하다.물론 이 시기 지도에도 대한해협은 부산에서 쓰시마,쓰시마에서 규슈까지를 아우르는 해협 이름으로 표시돼 있었다. 여하튼 이들 지도에서는 태평양을 일본 코 앞까지로 표시하면서 일본해라는 지명을 엉뚱하게도 일본열도를 건너뛰어 한국바다에다가 붙여버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동해의 「원적」은 꼭 찾아야 한다.일본측이 제작한 지도를 확인하는 노력도 필요하다.다만 이번 전시를 보면서 우리가 동해를 한국의 바다로 찾기 위해서 일본이 일본해를찾도록 도와주는 것과 병행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 탈민족주의­2020비전/송복 연대교수·정치사회학(서울광장)

    「2020비전」이 한창 숙의되고 있다.4반세기 후인 2020년,세계가 어떻게 달라질 것이며 거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이다.물론 그만이 아니다.보다 주체적으로 어떻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를 이끌 것인가도 포함돼 있다. 지난 7월18일에서 20일,사흘동안 96년 올림픽개최지인 미국 동남부의 애틀랜타시에서 이 문제들이 집중적으로 토의됐고,지금도 쉬지않고 연구되고 있다.주최는 「세계미래협회」(World Future Society)이고,회원은 세계 각국에서 실제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전문가들이다.이날 토론에 참석한 인원만도 7백명이 넘었다. 오늘날 세계는 장기비전속에 살고 있다.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계획하는것,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다. 거기서 바라보는 한국사회는 1890년대의 조선조 사회를 연상할만큼 아득히 뒤떨어져 있다.21세기는 차치하고,20세기도 아닌 19세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 같다.누가 무슨 당을 만들고 누가 무슨 당을 깨고,누구는 무슨 당 세몰이를 어떻게 하고,누구는 무슨 당 물갈이를어떻게 하려 한다는 것.그것은 변화도 아니고 준비도 아니고 대비도 아니다.다음 시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이웃 일본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고,어떻게 우리에게 달려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악머구리처럼 안에서 싸우다 나라를 고스란히 내주고 만 19세기말 상황이나 하나도 진배가 없다. 밖에서 보는 한국만큼 기가 차는 나라도 드물다.정치인만 그런 것이 아니고,일반인의 의식도 그렇다.그 중에서도 민족주의 의식이 가장 한심한 의식이다.아직도 민족주의를 내세우거나 부르짖는 사람들,아직도 민족통일,통일하고 외치는 사람들,그 사람들만큼 한심한 사람들도 없다.그 사람들이야말로 아직도 공산주의 의식을 가진 사람들만큼 뒤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다.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천지분간을 못하는 사람들이다. 세계는 이미 오래전에 탈민족주의 시대에 들어와 있다.세계는 「오직 내민족을 위하여」라는 구호를 사장한 지 오래다.세계는 오래전에 그 의식 자체를 무효화했다.쓸모없는 의식으로 만들어 버렸다.그 의식을 바탕으로 해서는 이세상에 살아 남을수 없도록 변화돼 버렸다.세계는 내 민족만이 운명공동체이고,내민족의 통일,내민족의 결속만이 선이라는 의식에 등을 돌린지 오래다. 세계는 민족주의를 벗어나야만이 그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바뀌었다.탈민족주의가 그 민족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 됐다.「내민족을 위하여」라는 구호나 의식만큼 내민족을 죽이는 것이 없게 됐다.더구나 우리처럼 혈통순도 99%의 민족과 그 민족의식을 계속 고수하고는 어떤 상황에도 버티기 어렵게 됐다.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의 차이는 그 의식의 근저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느냐의 차이다.그 인식의 근거가 무엇이 되어 있느냐의 차이다.보호와 경쟁­ 근대이후 모든 국가들은 이 두 의식의 유형중 어느 하나를 우선적으로 택해야 했다.그 어느 하나의 의식을 바탕으로 정책을 강구해야 했다. 민족주의는 보호의식이며 보호심리다.내 민족의 생명을,그리고 내 민족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지고의 선이라는 사고며 행동이다.반대로 탈민족주의는 경쟁이다.경쟁이 최선의 지향이며가치라는 의식이며 심리다.경쟁에서 어떤 지식·지혜,어떤 수단을 동원하면 이길수 있느냐의 정책이며 조치다. 지금 우리의 의식속에는 보호의식,보호심리가 깊이 도사리고 있다.어떻게 하면 경쟁에서 이기느냐보다 어떻게 하면 「적으로부터」「외부로부터」우리를 보호할수 있느냐가 의식의 근저를 이루고,인식의 근거가 돼 있다.자식을 경쟁의 마당에 냉정히 내던지려 하지 않고,어떻게 하면 그 경쟁에서 보호받을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한다.그 경쟁에 뛰어들어 이길 것을 먼저 생각지 않고,지면 죽는다는 것을 먼저 생각한다.그야말로 민족주의적 패배의식이다.우리 국민의식도 그러하고 우리 국가정책도 그러하다.오랜 피해의식 속에 살아온 민족주의의 결과다. 그것은 20세기도 아닌 19세기식 민족의식이며 민족주의다.세계는 벌써 21세기에 들어와 있다.시간적으로는 20세기지만 경쟁의 양태는 21세기를 오래전에 넘어서 있다.광복50주년.무엇을 광복할 것인가.「보호」의식을 버리고 「경쟁」의식을,「민족주의」를 버리고 「탈민족주의」를 광복해야 한다.그것이 21세기 민족이 살아남는 길이고 일어나는 것이다.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연극무대에

    ◎스칼렛 오하라의 파란만장한 인생행로/현대극장 창단 20주년 기념공연… 29일부터 세종회관서/78년·80년 이어 2번째… 제작비 7억원 투입/주인공 버틀리·오하아역에 이덕화 박상아 클라크 게이블과 비비안 리가 주연한 영화로 잘 알려진 마거릿 미첼 원작「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다시 한번 연극으로 복원된다. 내년으로 창단 20주년을 맞는 극단 현대극장(대표 김의경)은 기념공연으로 이 작품을 오는 29일부터 8월2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무대에 올린다. 「바람과…」는 지난 78년과 80년에 무대화된 바 있으나 이번에는 호화 캐스팅과 대기업(대홍기획)의 첫 연극 직접투자 및 공동제작으로 연극계 안팎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제작비는 총 7억여원.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스칼렛 오하라라는 한 여성의 파란만장한 인생행로를 그린 이 작품은 전세계 20개 국어로 번역 출판돼 현재 2천만부 이상이 팔린 영원한 고전.정일성씨 연출로 극본은 원로연극인 차범석씨가 맡았다. 15년만에 새로 선보이는 이번 무대는 암전이 전혀 없이 모두 38개의 장면 전환을 통해 영화보다도 빠른 이야기 전개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영화같은 연극」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특징.특히 무대위에 세워진 4개의 호화저택을 배경으로 19세기 미국 상류사회의 화려한 파티 장면을 비롯,피비린내 나는 전장,불타는 시가지 사이로 달리는 마차,스칼렛이 계단 위에서 구르는 장면 등을 기술적으로 재현하는 등 무대예술의 역동성을 살리는데 역점을 뒀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번 공연이 눈길을 끄는 것은 출연진의 화려한 면면이다.세상물정에 밝고 능글맞기 짝이 없지만 가슴만은 따뜻한 남자 레트 버틀러 역은 만능배우 이덕화가 맡았다.『뮤지컬이 아닌 정통연극에 출연한게 벌써 10년이 넘는 것 같다』는 이씨는 『너무나 잘 알려진 배역인만큼 가장 정통적인 해석으로 접근하겠다』는 말로 극중 레트 역을 설명한다. 여자 연기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탐낼만한 역이 스칼렛 오하라.그 활화산같은 대지의 여인은 KBS 탤런트 박상아가 열연한다.『가녀린 몸에서 뿜어나오는 오만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밉지않은 스칼렛을 만들어내겠다』는 것이 그녀의 각오.여기에 국회의원 탤런트 강부자는 15년전과 똑같이 스칼렛의 흑인유모 마미 역으로 무대에 서 스칼렛의 충실한 그림자 역할을 해낸다. 이번 무대의 또하나의 히어로는 현대극장 아카데미생 1기 출신인 김갑수다.먼 발치에서 사랑을 지켜보기만 하는 젊은 이상주의자 애슐리 윌크스 역이 그의 몫.78년 초연 당시 「말」앞다리 역으로 얼굴없이 출연한 경험이 있는 그는 『현대극장과의 18년의 인연끝에 애슐리 윌크스 역을 맡게 된 것은 엄청난 신분상승인 셈』이라며 의욕을 보인다.이밖에 탤런트 이주경이 이지적인 모성의 소유자 멜라니 해밀튼으로,중견배우 김길호가 미드 박사로 호흡을 맞춘다.한편 톱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스칼렛의 의상을 전담,화사한 무대를 꾸민다.하오3시·7시30분 공연.문의 762­61 94.
  • 앤 크루거저 미 스탠포드대 교수/「미 무역정책의 자충수」 요약

    ◎미는 「개방·다자 무역체제」로 돌아가라/“공정무역” 앞세워 보호정책 강화는 무리/개방체제 약화땐 전세계가 손해·고통 받을것 미국은 최근 일본 및 한국 등과의 무역마찰에서 보듯 보호주의적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이같은 무역정책은 미국과 세계경제를 위해 개방·다자 원칙으로 환원돼야 한다고 주장한 앤 크루거 스탠포드대학 경제학교수겸 미경제학회 차기회장의 저서 「미국 무역정책의 자충수」를 요약소개한다. 지난 2백년간 세계경제가 진전했다는 최대의 증거로 통합성의 확대를 들 수 있다.19세기엔 영국이 국제경제의 틀을 짰으나 2차대전 전부터 영국의 패권이 축소된 탓에 전후에는 미국이 세계의 무역자유화를 이끌게 됐다. 전후 초반 국제무역의 틀은 다름아닌 미국의 외교정책이라 할 수 있었다.그러나 독일과 일본이 부흥하면서 무역이 미국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커졌으며 유달리 특정이익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의회에 의해 무역정책이 결정되는 추세도 강해졌다.해가 지날수록 미국의 무역정책은 다자·단일적이 아닌쌍무·개별적 성격이 강한 방향으로 흘러갔다.이같은 현재의 정책방향은 그동안 지구촌 경제에 크게 공헌한 다자적 개방 무역틀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다.개방체제가 약해지면 전세계가 손해와 고통을 받을 것이다. 아담 스미스가 주장한 「보이지 않은 손」 이론 이후 자유무역의 의미는 명확하다.해외에서 보다 싸게 살 수 있다면 굳이 국내에서 이를 생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개방경제는 국제경쟁력과 생활수준을 현재와 같게 유지하거나 보다 개선하기를 원하는 나라에게 가장 잘 맞는 정책이다. 가트체제 출범 후 다자간무역협상 라운드가 연속되면서 관세인하와 무역장벽 제거에 많은 결실을 거뒀다.그런데 70년대 이후부터 미국의 무역정책은 「자유로우나 공정해야 하는 무역」을 강조하면서 이율배반적 성격이 강해졌다.때로는 개방다자 무역체제를 지지하다가도 때로는 「공정한 무역」이란 수사를 내세워 보호주의적 관행으로 흐르곤 한다.특히 최근년의 연속적 몇몇 정책 선택은 다자간 절차를 거의 전적으로 적용하던 전통에서 벗어나 개별국가 아니면소그룹 무역상대국과의 양자단독적 흥정으로 변질했음을 보여준다. 미의회는 해외의 불공정 무역관행에 희생됐다는 국내 기업들의 불평에 대해 기업측의 입증 책임을 완화해 주는 대신 기업이익을 넘어설 수 있는 대통령의 재량권은 축소시켜왔다. 행정부 또한 가트체제에 의해 규제받는 관세율 조종은 포기하되 다양한 보호주의적 시행령의 적용을 위협하면서 개별 상대와 흥정을 벌여 다자간 협상에선 불가능한 「자의적」 수출제한 약속 등을 상대방에게서 받아내곤 한다.미국의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의회가 자체 권한으로 보호주의적 보복책을 강구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면서 자유무역체제에 대한 옹호 의사를 피력하는 셈이다. 그러나 미국 국가경제 이익의 대부분은 자유무역의 추구에서 발생된다.말많은 자동차,철강,섬유의복 산업에선 보호주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고용이 줄어들었다.소득분배의 형평성 제고와 비숙련 근로자 보호를 위한다는 그럴듯한 명분론이 제기되곤 하지만 이같은 사회적 목표는 자유무역 포기보다 비용이 덜 드는 다른 방도로 충분히 달성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같은 보호주의적 정책으로 지구촌 경제가 입은 피해는 현재까진 그리 크지 않다.미국이 다자간협상 원칙을 재천명하고 개방다자 무역체제를 적극 지지할 중요한 순간이다.
  •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미 상원외교위 증언

    ◎가까운 장래의 미 외교정책 목표/미국은 한·일·중과 불필요한 대결말라 헨리 키신저 전미국국무장관은 13일 미상원 외교위원회에 출석,「가까운 장래의 미국 외교정책목표」에 관해 증언했다.키신저의 증언을 요약한다. 냉전이후의 외교정책 방향을 어떻게 세워야할 것인가의 문제는 진정 미국이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역사상 가장 어려운 난제중의 하나이다.냉전 때의 문제보다도 덜 위험하지만 한층 복잡해 거의 모든 기본요소가 동시에 사라져버린 세계에서 방향감각을 되찾는 것과 흡사하다. 너무도 많은 미국인들이 외교적으로 이뤄져야 할 일들이 모두 달성되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그러나 세계는 지금 틀을 짜면서부터 미국이 배제된 결정들이 가면 갈수록 많아지는 추세다.이같은 추세는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미국은 건설적인 세계질서의 틀을 잡아갈 능력을 아직도 보유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제한없는 선택의 장으로 외교정책을 여기고 있고 국제적 약속에 대해 참여나 철회의 결정을 언제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선에서 이해한다.냉전에서 이긴 미국인들은 외교란 영원한 승자가 없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군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은 점점 줄어드는 대신 경제와 기술의 중요성은 급속도로 높아져 간다.현재 세계에는 비군사적 결정에서 힘을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6,7개의 주요국가들이 있다. 이같은 국제질서에서는 한 국가의 지배적 우세 아니면 힘의 균형 등 두가지 길만이 안정을 보장한다.그런데 국민 여론을 통한 미국의 정치는 곤란하게도 이 두가지 접근 모두를 거부하는 경향을 보여왔다.헤게모니는 힘의 소진을,힘의 균형은 끝없는 긴장을 뜻하기 때문이다.새로운 세계질서는 균형개념에 바탕을 두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현실적 판단이다.과거에는 정복을 통해서만 균형의 변화를 끌어낼 수 있었으나 지금은 경제와 기술이 획기적인 변화를 만들어낸다. 미국 뿐아니라 모든 주요국가들은 지금 과도기에 놓여있다.이럴 때 이론적으로 미국은 지난 19세기 최강국 영국이 취했던 「아주 특별한 경우외에는 특정 편을 들지 않고 모두와 좋게 지내고자 한」「멋있는 고립주의」를 추구할 수 있으나 걸림돌이 너무 많다.또 미국은 자신들이 믿는 가치가 전세계에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다는 신념이 강한 국가다.세대간에 역사적 경험의 상이함이 정책결정의 혼란을 부추기고 있는데 결국 배타적이지 않는 국익바탕 주의냐 아니면 소위 다자간 국제주의냐의 갈등으로 귀결된다고 할수 있다. 클린턴 대통령의 외교노선은 다자간주의 쪽에 기울어져 있다.심한 국수적 고립주의자가 아니라면 국익과 국제 콘센서스를 양 극단으로 구별하지 않는다.실제 세계에선 뉘앙스의 차이일 따름이다.이런 점들을 명심한 뒤 유럽과 함께 현 미국 외교정책의 「사고지역」이라 할 아시아를 살펴보도록 하자. 미국은 최근 수년간 때로 불필요하게 중국·일본등 여러 아시아국가들과 동시에 불화에 휩싸임으로써 아시아정세에서 나오는 이득을 얻는데 실패했다.미국은 아시아 주요국가들과 동시에 대결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외교정책의 좌우명으로 삼아야한다. 현재 거의 모든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적 상황은 극도로 취약해지고 있으며 대부분 국가는 과도기에 처해 있고 이같은 변형은 내부적으로 민족주의와 국제주의간의 긴장을 조성한다.기존의 동맹관계도 수정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정치제도의 틀이 근본적으로 바꿔지는 중이며 외교정책의 방향도 똑같이 그럴 전망이다.자신을 낮추고 숨기는 정치시대는 끝나 한층 민족적이 되고 지금보다 훨씬 「정치적」이 될 것이다. 중국은 등소평으로부터 차세대 지도층으로의 권력이행이 거의 완료된 것으로 짐작된다.그럼에도 등이후가 안정되는 데는 수많은 변수의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경제적 성장은 어쩔수 없이 정치체제로 하여금 최소한 산업정보사회에 발맞추는 시늉을 내도록 할 것이다. 한국은 통일에 대한 욕망과 고립에 대한 두려움이 동시에 마음을 휘어잡고 있다. 이같은 변화는 아시아에서 경제의 세계화가 요구하는 국제주의와 정치적 결속에 큰 효과를 발휘하는 민족주의간에 긴장을 야기하고,미국의 정책이 변화의 와중에 있음을 감지한 결과등으로 현존의 동맹및 우방정책에 대한 재고압력을 일으키고 있다. 최후로 남아있는 분단국인 한국은 통일문제에 국가의 온 신경이 집중될 것이다.합법적인 상대로 취급해 주지 않으려는 북한의 전략과 맞서야 하는데 핵문제 때와 같이 북한은 미국과 직접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미국은 북한의 경직성이 세계경제에서 배제된 데서 연유한 만큼 접촉을 통해 그들의 고립감을 풀어줘야 한다는 입장이나 한국은 이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갖고있어 충돌의 소지마저 안고 있다.나아가 한국은 중국 그리고 일본까지 자신의 통일추구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해서 민족주의적 성향을 확대하고 있다.따라서 중국과 미국이 계속 지금처럼 사이가 좋지 않다면 한반도의 상황도 나쁜 국면으로 빠질 수 있다. 미·중 관계가 조속하게 회복되지 않고 대립이 심화되면 미국의 일본에 대한 영향력은 극적으로 감소할 것이며,한국은 어쩌면 화염통으로 변할는지 모른다.
  • 에카테린브르크(시베리아 대탐방:23)

    ◎「러」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일가의 슬픈역사 간직/4자녀·부부 함께 볼세비키들에 의해 처형 당해 비참한 최후맞은 통나무집 자리엔 추모비만/우랄산맥 벗어나 서시베리아로 다시 끝없는 평원이… 굳이 에카테린부르크를 찾은 이유중 하나는 볼셰비키들에 의해 참혹한 최후를 맞은 비운의 러시아 마지막 황제일가의 모습을 되돌아보기 위함이었다.비록 왕정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어린 자녀 4명과 함께 유배지의 지하실방에서 처형당한 차르 니콜라이부부의 비극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택시기사는 이 비극의 장소를 쉽게 찾아냈다.그러나 황제일가가 최후를 맞았다는 2층 통나무집은 옐친대통령이 이곳 당제1서기를 할 때 허물어버려 지금은 흔적도 없고 대신 그 자리에 작은 목조교회와○옐친이 건물 허물어 추모비가 들어서 있다.황제일가가 처형당했다는 지하실방으로 통하는 입구는 흔적이 남아 있으나 쇠줄로 출입구를 봉쇄해놓았다. 추모비는 「순교비」로 명명돼 있었고 황제일가의 죽은 시각을 19 18년7월17일부터 18일 사이의 새벽으로 밝히고 있다.그리고 차르 니콜라이,차르비 알렉산드라와 함께 황태자 알렉시,공주인 올가·타치아나·마리아·아나스타시아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왕정에 향수를 가진 미국·유럽인 사이에 아나스타시아공주가 당시 기적적으로 살아나 외국으로 도피했다는 억측이 끊이지 않고 있으나 이곳 사람들은 이를 터무니없는 낭설로 일축했다.미국영화 「아나스타시아」에 나오는 황제일가의 살해장소도 사실은 영화속같이 완전 지하실방이 아니라 우랄식 반지하방이었다. 당시 이곳 지방 볼셰비키들은 옴스크에 있던 백군 콜차크부대가 진격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직후 튜멘주의 토볼스크를 거쳐 이곳에 유배돼 있던 황제일가를 서둘러 처형했다.이 처형을 레닌이 직접 명령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들었으나 확인하지는 못했다.그 수일 뒤 7월25일 에카테린부르크는 백군부대가 점령했다. 이외에 에카테린부르크에는 러시아기계공업의 자존심으로 일컬어지는 「우랄마시」가 있다.에카테린부르크가 자랑하는 것 두가지만 꼽으라면 이곳 사람들은 서슴없이 「우랄마시」와 우랄 돌을 꼽는다.우랄마시,즉 우랄중공업기계공장은 지난 28년 소련정부가 제1차경제개발계획의 핵심사업으로 시작해 33년 완공한 러시아 최대 중공업공장이다.냉장고에서부터 탱크·우주선부품까지 다 만들어내는 공장인데 길이가 공장정문에서 맞은 편으로 5㎞,좌우로 각각 5㎞라니 공장규모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우랄마시와 관련,재미있는 것은 시내중심가에서 5㎞ 떨어진 이 공장정문앞의 「1차 5개년계획 광장」주위에 세워져 있는 노동자숙소다.공장을 세우면서 이곳에 노동자숙소를 함께 건설했는데 노동자수가 늘어나며 30년대·40년대·50년대의 전형적 아파트건물이 나란히 세워져 당시 사회주의 건물양식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곳의 명물인 우랄 돌의 진수를 감상하려면 지난해 개통된 지하철역 구내 플랫폼의 장식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각종 우랄석으로 바닥·벽·천장을 장식해 마치 우랄석 전시장에 온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그리고 역마다 실내장식을 다른 종류의 돌로 해놓았다. 우랄의 최고대학으로 꼽히는 키로프종합대학도 이곳의 자랑거리다.1916년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할 때 바르샤바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유서깊은 대학이다.정문앞에 서 있는 대형 키로프의 동상을 보며 늙수그레한 택시기사는 대뜸 이렇게 말을 거들었다.혁명 뒤 키로프는 레닌·스탈린과 함께 혁명의 심벌이었는데 스탈린이 그를 죽였다며 『그것은 물같이 분명한 사실』이라고 잘라 말했다.스탈린은 자기보다 똑똑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모두 수용소로 보내거나 죽이고 아니면 망명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출발 3일째 되는 날 모스크바시간으로 하오8시30분 옴스크행 열차를 탔다.시베리아인을 뜻하는 「시베리야크」호였다.옴스크까지는 꼭 12시간이 걸려 다음날 아침에 도착하게 된다. 여행중 신통하게 느껴지는 일중 하나는 기차칸의 좁은 침대가 안락한 호텔방보다 더 평안하고 깊은 잠을 가져다준다는 점이었다.그래서 중간기착지에 들러 호텔에서 밤을 지내노라면 어서 빨리 기차를 다시 타고 싶은 생각이 늘 따라다녔다. 기차여행에도 물론 맹점이 있다.가장 큰 문제는 밤중에 잠자는 시간에 지나가는 역이나 풍경은놓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그렇다고 낮에만 이동하고 밤에는 기차에서 내려 호텔신세를 지는 것도 여의치는 않다.구간별로 낮에만 이동하는 열차편이 따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그래서 어떤 특정구간은 별도리없이 밤에만 지나갈 수밖에 없다.이날도 오일의 수도로 일컫는 튜멘주를 밤중에 통째로 지나가게 됐다. ○어느덧 서시베리아에 우랄산맥을 벗어나 서시베리아로 들어서면서 다시 끝없는 대평원이 이어지고 있다.어둡기 전 1905년 오데사혁명 때 반란을 일으킨 수병들의 유형지이던 카뮈실로프역이 지나갔다.인구 3만3천명에 불과한 소읍이지만 우랄과 서시베리아간 옥수수의 주거래지로 이름높은 곳이다. 잠자는 도중 튜멘시와 데카브리스트들의 유형지이던 얄루토로프스키역등이 지나갔다.튜멘은 인구 50만명의 도시로 북부의 석유·가스전을 총괄하는 소위 시베리아석유의 수도다.16세기 이반 그로즈니시대때 서시베리아를 차례로 정복한 예르마크장군이 건설한 도시다.서시베리아 절반을 이 사람이 정복했다.그래서 당시 이곳에 살던 카자흐인은 지금도 그를 민족 최대의 적으로 간주한다.철도가 놓이기 전 이곳의 교역은 투라강을 오가는 증기선을 이용해 이루어졌다.튜멘을 출발,투라강을 따라 북동진하면 타볼강으로 이어진 다음 타볼스크시까지 갈 수 있다.이 타볼스크시는 19세기초까지 교역중심지로서 서시베리아의 수도역할을 했다. 그러던 것이 1885년 에카테린부르크에서 튜멘까지 철도가 놓이면서 이 도시의 역할은 끝났다.철도건설이 도시를 죽인 또 하나의 좋은 예인 것이다.지금은 역할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길이 1천30㎞의 투라강은 우랄에서 발원해 타볼을 거쳐 이르티시강으로 연결된다.그리고 타볼강은 카자흐스탄에서 발원해 옴스크의 이르티시강까지 1천6백㎞를 흐르는 장강이다. 새벽 6시경 시끄러운 사람의 소리에 잠을 깨 창밖을 보니 우유·스메타나·빵 등 먹을 것을 파는 상인이 열차문 밖마다 새까맣게 모여들어 있다.나지바예프스카야역이었다.
  • 워싱턴의 북경정책 저변/전직 미 외교관 레빈 분석

    ◎뿌리깊은 미의 대중 오해 전 미국외교관이자 아시아협회 홍콩지국장인 버튼 레빈은 최근 미국이 중국을 오해한 데서 대중국정책이 잘못돼왔다고 비판하고 중국 인권문제 개선요구도 경제적 관계가 우선돼야 한다고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서 지적했다.다음은 그의 기고요약. 지난 세월동안 미국은 줄곧 중국에 대해 잘못 이해해왔다. 이같은 오해는 지난 19세기말에 뿌리를 두고 있다.당시 중국내 미국의 활동은 주로 선교와 관계가 깊었다.이후 미국인은 자신들을 중국에 대한 시혜자로 여겨왔다.미국은 중국에 종교·의료적 도움,교육·경제적 및 기술적 지원 등을 주었을 뿐 아니라 영국·프랑스와는 달리 중국의 영토를 차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게다가 워싱턴은 중국을 구하기 위해 일본과 싸우기도 했다. 따라서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은혜의 보답을 바라다가 실망만 갖게 됐다.사실 중국에서 일어난 첫 공식적 시위는 지난 1905년 배타적인 미국의 이민정책을 반대한 반미시위였다. 국민당에 대한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이 49년 권력을 장악했을 때 미국의 반응은 일종의 불신이었다.미국에 신세진 국민이 어떻게 공산주의로 돌아설 수 있는가.이에 대해 미국이 생각해낸 정답은 다음과 같다.공산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국민이 아니라 인민을 속인 반역적인 지도자일당이라는 것. 이 엉터리 같은 생각은 그후 미국의 국내및 국외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이는 매카시즘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미국은 중국의 지도자들을 악마로 만듦으로써 전략이나 외교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중국을 소련의 앞잡이로만 보는 워싱턴의 시각,공산주의정부는 인민의 대표가 아니라는 미국의 불신 등은 현대 중국역사의 역동성에 대한 무지의 소치다. 중국은 베트남에서 미국이 겪은 불운의 주요한 원인이기도 하다.워싱턴측은 베트남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중국 팽창주의의 일환으로,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을 중국의 시녀로 보았다.미국은 베트남을 「민족해방」전쟁을 통해 세계를 제패하려는 중국의 시험장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미정부가 이처럼 무시무시한 혁명적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 중국은 사실자신의 나라도 제대로 통치하지 못했다.대약진운동·문화혁명을 통해 자국에 생채기만 냈을 뿐이다. 미국사회에 혼란을 일으켰던 베트남은 미국이 중국을 오해함으로써 낳은 비극적 결과를 여실히 보여주었다.이는 미국인이 중국을 판단하거나 대응함에 있어 겸손하고 용의주도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미국은 최근 중국의 인권문제를 취급하면서 또 중국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89년 천안문사태의 유혈진압은 끔찍했다.워싱턴이 중국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북경을 비난한 것은 옳았다.반면 곧 조지 부시 대통령이 고위급 비밀특사를 중국에 보내 양국간 관계에는 실질적으로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밀담을 나누게 한 것은 큰 실수였다. 당시 미 정책입안자들은 천안문사태 이후 일어난 일들이 모택동주의자들의 복귀가 아니라 중국정부에 의해 잘못 취급된 불행한 일이었으며 중국내에 개방사회를 향한 움직임과 개혁이 재개됐다는 것을 명확히 알아냈어야 했다. 또 빌 클린턴 대통령이 집권한 뒤 그가 중국외교정책의 초석으로 인권문제를 삼은 것도 현실을 잘못 이해한 본보기다.클린턴 행정부가 인권문제에 집착하고 있을 때 중국인은 지난 50년동안 어느 정도 나아진 자유와 높은 생활수준을 즐기고 있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무역거래에서 최혜국대우를 해주지 않겠다고 위협하면서 큰 총을 꺼내 중국에 들이대며 경고했다.『인권문제를 개선하라.그렇지 않으면 쏘겠다』그러나 북경은 개선하지 않았고 워싱턴은 총을 내렸다.중국은 이미 이를 알고 있었다. 클린턴 행정부의 인권문제에 대한 잘못된 접근은 미국을 과민하게 만들었으며 이제 미·중관계를 괴롭히는 사안이 됐다.인권문제에서 퇴각한 미국의 굴욕감은 복수심에 불타는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클린턴 행정부는 미국의 경제적 관계가 중국의 인권문제를 개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중국을 민주주의로 전환하게 하는 것은 미국 사업가들과의 접촉이 아니다.미·중 경제관계는 중국의 삶에 수천명의 홍콩거주 중국인과 대만인을 끌어들인다.이들은 공장을 운영하기 위해 중국에 살거나 방문할 것이고 무역을 증진시키려 할 것이다. 이들은 힘있는 전보세력이다.이들은 다른 사상·행동·가치 등을 심게 되며 권위를 파괴한다.가라오케·디스코 등 쓸모없는 것을 가져오기도 하겠지만 이는 자유를 넓히는 역할을 할 것이다. 중국의 인권상황은 즉시 개선돼야 한다.죄수에 대한 고문을 비롯해 심각한 학대,즉결사형집행 등이 비일비재하다.그러나 중국은 이제 겨우 자급자족 경제상태다.모든 사람이 살기 위해 동물처럼 일하고 있다.산업혁명 이전에 서양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태가 지배했다. 자급자족의 낮은 경제상태에서는 개인의 존엄에 관한 관심은 별로 없다.사회적인 부가 증가해 교육이 확대되고 여유가 생겨야 이런 생각이 싹튼다.그때 가서야 개인이나 국가가 존경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국가를 대하게 되는 것이다.
  • “첨단기술 접목… 새 농업혁명 이루자”/박원규(공직자의 소리)

    그동안 농업기술의 혁신과정을 살펴보면 19세기 전후의 윤작법에 의한 농업의 생산성향상이 첫번째 농업기술혁명이고,두번째 혁명은 20세기 중반의 육종 및 비료혁명으로 교잡육종법에 의한 다수확 신품종의 개발보급과 화학비료와 농약의 개발로 농업의 생산성이 급격한 향상을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후반부터 일어나고 있는 생명공학과 전자공학,수송 정밀기술의 발달로 인한 농업의 혁신적 변화가 제3차의 농업기술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생명공학기술은 80년대 말부터 농업부분에 실용화되기 시작하여 육종기술,물질이용기술,번식기술에서 새로운 변혁을 가져왔고 전자공학의 발달로 농업생산의 자동화와 농업정보 이용기술을 확대시켰다. 자동화기술분야에서는 농업생산환경의 자동조절을 통한 표준화,대량생산,연중생산 체제가 가능해지고 있으며 고감도센서와 컴퓨터 시스템에 의한 동식물의 집단진단,농산물 품질의 판단등도 가능해졌다. 또한 정보통신과 운송기술의 발달은 종합정보망 구축에 의한 농업경영과 유통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냉장·냉동기술의 발전과 수송수단의 발달은 수송비절감과 신선도 유지가 가능해짐에 따라 모든 농산물의 국제간 교역이 용이해지는 등 세계농업환경의 변화는 농업분야의 국제경쟁을 격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우리 농수산업이 국제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제3차 농업혁명이 될 생명공학과 전자공학,그리고 수송정보기술을 응용한 새로운 농업기술을 개발보급하여 우리농업을 첨단기술 농업으로 변모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농업의 생산세계는 첨단기술농업으로 탈바꿈시킨다면 가난했던 노동집약농업에서 편하고 신바람나는 자본기술 집약농업으로 바뀌고 기계화,자동화,시설화가 촉진되면 일주일에 3일 쉬고 4일 일하는 농업으로 우리농촌은 쾌적한 생산공간,휴식공간,자연공간으로 탈바꿈하여 돌아오는 농촌이 될 것이다.
  •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출간/시인·소설가 김승희씨(인터뷰)

    ◎“권태에 빠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의 산물” 『고정관념,관습적 사고 따위의 당연히 옳다고 못박혀온 생각들을 한번쯤 놀려먹고 싶다는 욕망이 이 책을 낳았어요』 신작시집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세계사간)을 낸 시인 겸 소설가 김승희씨(44).책 서문에다 그 싸움이 「당연과 물론의 세계에 길들여져 있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반쯤 자기반성적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정작 시엔 길들일 수 없는 지은이의 생래적 야성이 생생하게 부조돼 있다. 『91년이후 쓴 시인데 너무 많아서 30여편쯤 덜어내고 묶었어요.권태나 무위가 휘감아올 때 달아나듯이 썼는데 그게 이렇게 두꺼워져버렸네요』 시인은 「무기력·망각·순응」의 지문을 「핏속에 DNA처럼 입력」한 채 주어진 틀에 삶을 결박당한 사람들을 보면서 「가장 야만스러운 열정이여/나에게 와달라」고,신내림을 부르는 무녀처럼 외친다.「가장 야만스러운 열정/잔혹한 그 검은 웃음이 없다면/누가 우리를 그물에서 해방시킬 것인가?」 그물을 뚫고 날으려는 열정은 시인을 일견 평온한 듯한 일상에서 떨어내기에 필연적인 아픔을 낳는다.하지만 시인은 이같은 상처를 삶의 비극적 조건으로 보기보다 비상의 동력으로 적극적으로 감싸안는다.「상처의 용수철/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19세기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는 「흠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고 삶의 필연적 불구성을 읊었지만 김승희는 「혼속에 상처를 간직하지 않으면/무엇이 나를 별이게 하겠는가」고 되묻는다.영혼의 상처에서 별의 가능성을 본다는 데서 그의 시는 요즘 같은 첨단시대에 드문 영웅적 울림을 갖는다. 『풀브라이트 펠로십으로 오는 26일부터 1년간 버클리대에 나가 한국학 세미나와 강의를 열 것』이라는 시인은 마흔이 넘은 나이에 아직도 버리지 않은 비상의 꿈을 말하고 있다.
  • 황금의 관광코스 「골든 링」(시베리아 대탐방:17)

    ◎13∼16C 아름다운 교회건물 오지에 산재/볼셰비키 혁명때 대도시 건물 거의 파괴/소도시선 보존 완벽… 종소리 화음 기막혀/볼가강 지나며 특급열차는 진짜 러시아품으로 하오 4시. 모스크바주와는 작별을 고하고 블라디미르주의 첫 역이며 모스크바 교외선 전철의 종착역인 알렉산드로프역을 지나간다. 주민이 불과 6만8천여명인 소도시이지만 16세기 후반 폭군 이반 그로즈니가 마치 피터대게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천도를 결행했던 것처럼 모스크바의 반대세력들을 피해 이곳에서 비밀 개혁세력을 만들었던 유서깊은 곳이다. 당시 이반 그로즈니가 거처했던 궁들은 지금 박물관으로 꾸며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기차역 3천개 넘어 시베리아철도가 달리는 길은 바로 광포했던 러시아 역사가 달려온 길과 일치한다. 타타르·몽골인들이 세운 제국을 짓밟고 동진하며 러시아의 정복자들은 마을을 정복하면 그곳에 요새를 짓고 교회를 세웠다. 그뒤 그 요새는 도시가 됐다. 그리고 그 도시에 공장을 세우면서 철길이 놓여졌다. 시베리아 철도는 또한이 도시들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철도가 들어서며 흥한 도시도 있고 반대롤 철도 때문에 무대뒤로 사라져간 도시들 또한 숱하다. 끔찍했던 러시아 현대사의 자취 또한 이 철길과 같은 길을 걸었다. 숱한 유형자들이 이 길을 따라 동으로 이동했고 혁명 뒤 내란중에는 백군·적군이 서로 이 철도를 자어악하기 위해 철길 전구간을 따라가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세르기예프 파사드를 지나 조금 더 달리면 오른편으로 플레세예보 호수가 보인다.피터대제가 16세 소년일 때 이곳에서 배를 만들며 조선술을 익혔다는 곳이다.이때 익힌 조선술을 바탕으로 그는 후일 북부 아르항겔스크에서 본격 대함대를 건설했다.그러니까 러시아함대의 출발지가 바로 이 호수인 셈이다.이곳에서는 해마다 여름이면 러시아해군 함대창설일을 맞아 대단한 잔치가 벌어진다. 북으로 좀더 올라가면 19세기까지 야르마르카라고 부르는 러시아 3대시장중 하나이던 로스토프역이 나온다.당시 니즈니노보고르드에 있는 니즈가롭스크시장,우랄에 있는 이르비츠카시장,그리고 목재·교회성물을거래하던 이 로스토프시장이 러시아의 3대시장이었다.특히 금속박스에 특수에나멜을 입혀 장식하는 피니프치라고 부르는 교회장신구를 만들어내는 곳이 바로 로스토프다.러시아인은 지금도 아주 큰 시장을 야르마르카라고 부르는데 모스크바에도 서너개의 야르마르카가 있다. 야로슬라블에 도착하기까지 4시간여동안 기차는 한번도 정차를 하지 않는다.특급열차이기 때문이다.특급열차·완행열차·교외선역을 다 치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역수만 3천개가 넘는다고 한다.특급열차가 서는 역은 이중 2백∼3백개에 불과하다. ○20년대말 파괴 극심 습지가 많아지면서 체료무하향기가 차창을 넘어 들어온다.남녀의 사랑을 노래하는 러시아의 유행가에도 자주 등장하는 체료무하의 흰꽃 역시 북으로 가면서 추위가 끝났다는 신호기역할을 한다.모스크바시 남쪽의 마피아 많기로 소문난 체료무시키시장은 실상 이 낭만적인 꽃이름 체료무하에서 따온 이름이다. 피터대제의 이름을 딴 페트롭스카야역이 지나간다.한때 야로슬라블이나 모스크바보다도 더 화려한 명성을 날리던 도시이나 지금은 완전히 쇄락했다.오직 종교적인 도시로 건설됐으나 철도가 교차하거나,강을 끼고 있거나 하는 지리적 강점이 하나도 없어 세월이 지나며 자연 쇄락의 길을 걸었다.도시의 흥망에 지리적 여건은 피할 수 없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모스크바에서 멀어질수록,시베리아땅으로 들어갈수록 훌륭한 교회들이 더 잘 보존돼 있어 흥미롭다.혁명 뒤 볼셰비키들은 종교를 혁명의 주적으로 삼고 교회파괴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그중 20년대말과 1931년,32년이 가장 치열했다.특히 수도·주도(주도)·대도시에서는 예외없이 철저히 교회를 파괴,폐쇄했다.그런데 도시라도 주도가 아닌 곳의 교회는 그냥 두었다.그 덕분에 시베리아 오지에 훌륭한 교회가 많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하나하나 지나고 있는 블라디미르·수즈달·야로슬라블·로스토프·알렉산드로프·세르기예프 파사드등을 가리켜 언제부터인지 러시아인들은 「골든 링」이라고 부르고 있다.특별히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그룹은 아닌데 훌륭한 교회건물이 많아 황금의 관광코스라는 의미로 붙인 것이다.어쨌든 이들 도시에는 교회가 참 많다.차창밖으로 어림잡아 봐도 수㎞마다 반드시 교회마을이 나타난다.13∼16세기 사이 이들 교회를 건설할 때 일부러 12∼20㎞를 넘지 않도록 지어 종소리로 서로서로 연락이 가능하도록 배려했다고 한다.해동하고 눈이 녹아 진창이 되거나,혹은 눈으로 길이 막힐 때,마을에 길흉사가 생길 때는 종소리로 약속한 특수전보로 서로 소식을 알렸다는 것이다.아름다운 러시아의 종소리교향곡은 아마 이렇게 해서 시작됐는지 모른다.지금도 이들 교회에서는 종탑 하나에 보통 10여개의 크고 작은 종이 매시각 기막힌 화음을 연출해낸다. ○철도변 습지대 형성 곳곳에 습지대가 이어지고 있다.습지라고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저지대습지는 더럽고 해충의 서식처가 되지만 고지대습지는 맛있는 딸기가 자라는 곳이다.산언덕 약간 움푹한 곳에 물이 괴어 습지가 되면 그곳에 베료자꽃씨가 바람에 날려와 뿌리를 내려 자라면서 습기를 빨아먹고 세월이 지나면 물렁물렁한 고지대습지가 생겨난다.그곳에서 클류크바라는 맛있는 고지대 딸기가 자라는 것이다.러시아인들은 이 딸기를 따다가 잼을 만들어놓고 긴 겨울밤 차이(다)를 마실 때 함께 숟가락으로 푹푹 떠먹으며 한담을 즐긴다. 자세히 보니 철로변을 따라서는 반드시 습지대가 형성돼 있다.이는 철길을 보호하기 위해 철로변의 나무를 베어내면서 생긴 인공습지다.철로변 1백m 안쪽땅은 철길·전선줄등을 보호하기 위해 철도청 노동자들이 정기적으로 나무를 베어주는데 땅의 습기를 빨아먹을 나무가 없어짐에 따라 물이 땅에 괴어 습지가 형성된 것이다. 야로슬라블주에 들어서면서 카스트라스카야시·포세호니시등 혁명 전 6백여종의 치즈를 생산해 유럽에까지 수출하던 러시아 최고 치즈산지가 나온다.지금은 여러가지 어려운 사정탓에 40여종의 치즈를 생산,주로 러시아국내시장에서 소비하고 있다.「세미 브라타바(7형제)」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시골역이 차창밖으로 지나가고 체료무하 흰꽃이 만발해 봄이 이곳까지 밀고 올라왔음을 알린다.모스크바의 체료무하꽃은 우리가 떠나기 전에 이미 시들기 시작했었다.러시아는 참 큰 땅이다.지금 흑해에서는 수영을 하고 있는데 북부에서는 아직 스키를 탈 수 있다.아르항겔스크·볼로그다에는 아직 체료무하꽃이 피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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