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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2)남사고와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2)남사고와 ‘정감록’

    한번은 영조 임금이 대신들에게 “도대체 남사고가 누구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살아생전 그는 미관말직에 종사한 하급관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후 200여년 뒤 조정에서 그 학식과 인품을 둘러싼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큰 인물이었다.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1509∼1571)는 선조 초기 천문 교수로 발탁됐다. 보통 천문을 비롯한 잡학(雜學)의 교수는 중인 출신이 많았다. 하지만 남사고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유학자이면서도 당대 최고의 천문지리가로 평가를 받았다.‘정감록’의 핵심개념인 이른바 십승지설(十勝地·최고의 피란지에 관한 주장)도 그 한 뿌리가 남사고에 닿아 있다. 남사고는 예언서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그가 지었다는 ‘남사고비결’이란 책이 18세기 이후 크게 유행했다. 구한말엔 ‘격암유록’이란 예언서도 추가로 발굴됐다. 남사고처럼 이름난 예언가는 역사에 드물다. 그런 비상한 재주에도 불구하고 실상 그는 늘 곤궁했고 박복했다. 몸에 병이 많아 늘 죽음과 직면할 정도로 큰 고통을 겪었고, 한겨울엔 몸에 걸칠 외출복이 없어 친구 집에 문상조차 못 갔다. 너무도 불우했던 남사고는 굽이굽이 용틀임하며 달려가는 산줄기를 그리워했고, 밤하늘 별자리를 바라보며 외로운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 ●남사고와 불영사 남사고는 경북 울진 출신이다. 그는 어렸을 때 자주 불영사(不影寺)를 찾아갔다. 이 절은 산자수명하여 부처를 비춘다는 불영계곡 안에 있다. 전설에 따르면, 소년 남사고는 절간에서 한 노승을 만났는데 그는 소년이 남다른 인물이 될 줄로 짐작해 3권의 비결을 내주었다. 천편(天編)은 별자리의 운행과 그 운세 등 천문에 관한 모든 사항을 항목별로 적어 놓았다. 지편(地編)은 산천의 지세와 명당 등 풍수를 자세히 논한 것이었다. 마지막 인편(人編)은 한번만 사람 얼굴을 쳐다보면 그 명운(命運)을 알아맞히는 방법을 기록한 비밀스러운 책이었다. 노승은 이 책들을 건네주며 신신당부했다. 아무쪼록 덕을 쌓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뒤 어느 날 노승은 남사고의 공부를 점검하러 집으로 찾아갔다. 당연히 제1권인 천편부터 차례로 공부하고 있으리라 짐작했으나, 남사고는 인편에 실린 각종 비술에 빠진 나머지 천편은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노승은 남사고가 비결을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쓸까 염려한 나머지 남사고의 집에 불을 질러 책을 모두 태워 버렸다. 그러고는 불영사를 떠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남사고의 지리 공부 졸지에 비결을 빼앗긴 남사고는 새 각오로 삼천리강산을 두루 유람하였다. 그제야 지리 공부의 요체를 파악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명당을 얻더라도 결국 덕을 많이 쌓는 사람만이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진리를 깨쳤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남사고가 아버지 무덤을 아홉 차례나 이장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그는 지리를 완전히 터득한 고수였던 지라 가장 좋은 자리를 택해 아버지의 묘를 썼다. 그런데 써놓고 보면 더 좋은 자리가 문득 눈에 띄곤 해 옮겨 쓰기를 되풀이하였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비룡승천(飛龍昇天·용이 하늘로 날아가는 모양)형의 명당을 얻어 다시 이장을 하였다. 그때 지나가던 한 술사가 이런 노래를 불렀다. “구천십장(九遷十葬·아홉 번 묘를 옮겨 열번 장사를 지냄) 남사고야, 비룡승천을 좋아 마라. 고사괘수(枯蛇掛樹·말라 죽은 뱀을 나뭇가지에 걸친 모양)가 아닌가?” 남사고는 깜짝 놀라 산세를 다시 살폈다. 죽은 용이 분명했다. 그 술사를 만나 한 수 배우려 했으나 이미 자취를 감춘 다음이었다. 생각 끝에 남사고는 지각유주(地各有主)라, 명당도 저마다 임자가 따로 있어 인력으로 바꿀 도리가 없다는 깨침을 얻었다. 그는 별로 하자가 없어 보이는 평범한 묘 자리를 구해 아버지의 유해를 평안히 모셨다. 요컨대 사리사욕에 사로잡히면 눈이 멀어 명당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고, 설사 요행히 명당을 차지하더라도 발복(發福·복이 나타남)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남사고의 실패를 약간 달리 해석한다. 조상이 지은 죄가 워낙 많아 남사고가 일껏 명당을 잡더라도 쓸모없게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른바 구천통곡(九遷痛哭·아홉 번 옮기고 통곡함)을 통해 남사고는 덕을 쌓는 것이 최우선이란 고승의 가르침을 확인했다 한다. 앞의 이야기는 한낱 설화에 불과하지만 지관 남사고의 면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남사고의 명예언 지리 공부를 마친 남사고는 서울에 놀러 갔다. 그는 권판서를 비롯해 당대의 석학들과 두루 사귀었다. 그는 이미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터득했기 때문에 서울 친구들에게 몇 가지 예언을 들려주었다. 첫째, 곧 조정에 당파가 생겨날 테니 조심하란 것이었다. 둘째, 왜적이 난리를 일으키는데 만일 용(辰) 해에 전쟁이 일어나면 나라를 구할 수 있으나 뱀(巳) 해에 전란이 시작되면 나라는 영영 망하고 만다. 셋째, 지금 사직동을 둘러보니 왕기(王氣)가 서려 있어 거기서 임금이 나올 것이다. 넷째, 태릉이 들어설 곳을 가리키며 장차 태산에 봉해진다고 하였다. 첫째 예언은 선조 8년(1575)부터 동인과 서인의 분당이 일어나 사실로 입증됐다. 둘째 예언 역시 용 해인 임진년(선조 25)에 왜적이 쳐들어와 꼭 맞아떨어졌다. 셋째도 사직동에 살던 선조가 뜻밖에 대통을 이어 1567년 등극함으로써 적중했고, 넷째는 명종의 모후(母后)인 문정왕후가 죽은 뒤 태릉에 묻혀 기정사실이 됐다. 이처럼 남사고의 예언 능력은 신기에 가까웠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한번은 그가 하늘 별자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더니 자미성(紫微星·어진 사람의 운명을 관장하는 별)이 빛을 잃어버리는 참이었다. 아마 자기가 죽을 날이 다 된 모양이라며 남사고는 서울을 떠나 귀향길을 서둘렀다. 죽어도 집에 가서 죽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도중에 남명 조식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 하늘을 바라보니 자미성은 회복세에 있었다. 그제야 남사고는 자미성의 변화가 남명의 죽음을 예고했다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는 끊임없이 수련을 쌓았고 그 결과 자신이 죽을 날을 알아 맞힐 정도가 됐다. 천문 교수 임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하늘에는 태사성(太史星·천문 담당 벼슬을 상징하는 별)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 현상을 목격한 남사고의 상관은 자기가 세상 떠날 날이 되었다고 지레 짐작해, 동료들을 모아놓고 작별인사를 고했다. 그러자 남사고는 크게 웃으며 “죽을 사람은 따로 있다.”고 말했다. 며칠 뒤 남사고는 태연한 표정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사고와 퇴계 이황의 만남 남사고는 도술에도 능했다 하는데 흥미로운 설화가 전한다. 그가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 퇴계 이황을 방문했을 때였다. 마침 점심식사 시간이었다. 퇴계 집안은 검약하기 그지없어 밥상에는 보리밥과 고추장밖에 다른 반찬이 없었다. 남사고는 도술을 부려 잉어회를 만들었다. 그러자 퇴계는 손사래를 치며 남의 잉어를 빼앗아 먹을 수 없다며 한 점도 먹지 않았다. 설화 속의 퇴계는 실상 남사고보다 예언과 도술에 능통하다. 귀신에게 홀린 제자를 구해 주기도 하고,9대 자손에게 닥칠 위기를 미리 예견한다. 퇴계는 일찍이 여우의 구슬을 삼킨 적이 있어 축지법도 쓸 줄 알았다고 한다. 설화의 세계에서 보는 퇴계는 만능인간, 초월적 존재다. 이는 물론 역사적 사실과 완전히 다르다. 민중은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가 자기들의 편에 서서 따뜻한 보호자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퇴계를 만능의 인간으로 형상화했다. 남사고가 밥상에 올린 잉어회를 퇴계가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민중은 물론 남사고와 같은 예언가를 기꺼이 믿고 의지한다. 하지만 학덕이 높은 퇴계에게는 그 이상을 요구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남사고가 익힌 지리와 천문이 한낱 기술이라면, 퇴계의 학문은 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삶의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민중의 인식을 본다. ●십승지는 남사고의 작품인가 그렇다 해도 많은 사람들은 남사고의 특별한 지식과 능력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정감록’의 중심개념인 십승지설이 ‘남사고산수십승보길지지(南師古山水十勝保吉之地)’에서 발견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민중은 남사고 같은 예언가라면 당연히 훌륭한 피란지를 점지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남사고’는 ‘정감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여러 산들 중에서 소백산(小白山)이 으뜸이요, 지리산(智異山)이 다음이다.”라고 했듯, 길지는 주로 소백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큰 마디에 몰려 있다. 이를 지역별로 나눠 보면 경상도가 4개, 전라도 3개, 충청도 2개, 강원도 1개다. ‘남사고’의 이런 길지는 ‘정감록’외 다른 예언서에 나오는 한국 최고의 길지들과 대동소이하다.‘정감록’에 언급된 길지를 출현 빈도순으로 정리해보면, 경북 풍기, 충남 공주, 경남 가야산이 각 10회로 으뜸이다. 다음은 경북 안동으로 9회이며, 경북 예천과 전북 운봉은 각 7회, 태백산·소백산 및 충북 보은은 6회, 경북 개령·봉화, 강원 영월, 충청 단양, 전북 무주 및 부안이 각 5회로 각기 정상급 길지로 손꼽힐 만하다. 그밖에 충북 진천도 4회나 된다. 십승지를 비롯한 전국의 주요 길지는 해안선이나 큰길에서 떨어진 곳에 있다. 길지를 선정하게 된 이유가 전쟁, 전염병 및 흉년의 세 가지 피해(三災)를 벗어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해안지방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데다 조선후기엔 이양선의 출몰이 잦았고, 임진왜란이나 정묘호란 때 외적은 큰길을 따라 진군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대로변과 해안은 길지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흉년이 들지 않는 장소를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참 어려웠다. 그런데 최고의 길지 가운데는 전북 부안처럼 해안 고을도 있었다. 부안이 십승지로 부각된 것은 물론 다른 이유에서였다. 신라 말 민중적 미륵불교를 창시한 진표 스님이 미륵보살로부터 간자(簡子)를 받은 곳이 바로 부안이었다. 그때 이후 부안은 세상을 구할 진인이 출현할 땅으로 민중의 가슴속에 길이 기억됐다. 공주는 충청감영(忠淸監營)의 소재지로 조선시대엔 가장 큰 대로변에 위치했다. 그럼에도 계룡산이란 풍수상의 일대명산을 거느리고 있어, 길지 중의 길지로 손꼽혔다.‘정감록’은 계룡산 사상 즉 진인이 계룡산에 도읍해 새 세상을 연다는 예언이 핵심이다. 따라서 공주를 빼놓은 길지란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이쯤에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위에서 열거한 여러 길지들, 특히 그 대표가 되는 십승지는 과연 남사고가 창안했을까? 이중환의 ‘택리지’를 보면 남사고가 전국을 유람하며 길지를 점지한 것은 사실이었다. 남사고는 전국의 지세를 하나의 유기체로 파악했다.‘산수비경’에서 “한반도는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만주 땅을 할퀴는 형상이다. 백두산은 호랑이 코, 호미곶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했다. 경북 포항의 영일만 동쪽에 있는 호미곶은 우리나라의 동쪽 끝 땅이다. 우리 땅을 용맹스러운 호랑이로 보고 그 꼬리라는 뜻에서 호미(虎尾)라 부른 남사고였다. 그는 전국의 여러 명당 가운데서도 유독 소백산을 중시했다.“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活人山)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남사고’를 보면, 소백산 주변에 십승지의 상당수가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다. 이런 점에서 십승지설은 남사고의 뜻을 상당부분 반영한 것으로 믿어도 좋겠다. 그런데 사실 조선시대의 지관(地官)들은 누구나 전국의 길지를 논했다. 그들에겐 공통된 의견도 있었다. 태백산 이남에 길지가 많다는 것인데, 특히 소백산, 작성상(황장산), 주흘산, 희양산, 청화산, 속리산, 황악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남쪽 구간에 명당이 많다 했다. 십승지를 비롯한 전국의 길지는 남사고 한 사람이 모두 찾아낸 것은 아니었다. 남사고는 선배 지관들이 앞서 제기한 논의를 일단 종합했던 것이다. 이것이 다시 후배들에게 이어지면서 길지에 관한 논의는 더욱 풍부해졌다.‘남사고’는 한 사람의 단독 저술로 간주되기 곤란하다. 그것은 18∼19세기 조선의 지관들이 선배들의 다양한 의견을 참작해 만든 공동저작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후배들은 전설적인 지관이며 명예언가인 남사고의 이름을 빌렸던 것이다. ‘남사고비결’도 여러 번 다시 쓰였다 영조 9년(1733)에 적발된 ‘정감록’ 사건엔 ‘남사고비결’이 등장한다. 무신년에는 피가 흘러 내(川)를 이룬다는 등 흉흉한 내용이 나와 있었다(실록·영조 9년8월18일 병인). 마침 영조 4년(1728) 무신년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남부지방을 휩쓸었던 터여서 조정은 이 ‘비결’의 등장에 경악했다. 이 ‘비결’과 제목이 똑같은 예언서는 현재도 남아 있다. 당연히 ‘정감록’에 포함돼 있다. 그러면 현존하는 ‘비결’은 영조 때 발각된 것과 같은 내용의 예언서일까? “무신·기유(戊申己酉)년: 제갈량(諸葛亮·제갈공명)이 이미 죽었으니 어느 성 한쪽 금성(錦城)이 피폐하도다. 경시(更始·개혁의 시작)는 자리를 긁고 범증(范增)은 등창이 나는구나.”라고 하였다. 책사(策士)로 유명한 제갈공명과 범증이 이미 죽거나 병들었다 했다. 나라에는 제대로 일을 도모할 만한 신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판국이라 개혁은 제자리를 맴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전쟁 또는 반란을 예언했다는 영조 때의 ‘비결’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비록 예언서의 명칭은 ‘남사고비결’이라 했지만 알고 보니 그 내용은 전혀 달랐다. 세상은 날로 바뀌기 마련이다. 따라서 후배 술사들은 새로운 내용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새 예언서가 이미 알려진 예언서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때로 새 술도 헌 부대에 넣으면 값비싼 명품으로 둔갑된다. 이것이 시장의 논리다. ●남사고의 ‘격암유록’과 신종교 남사고는 예언계 최고의 브랜드였고, 그래서 끊임없이 이용됐다.19세기 말엔 ‘격암유록’이란 낯선 예언서가 등장했다.‘정감록’을 상당부분 모방하고, 그 무렵에 태동하고 있던 신종교의 선교에 도움이 될 내용을 덧붙인 것이었다.‘격암유록’은 뒷날 증산교의 종교적 입지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일부 기독교 계통의 신종교 단체는 남사고가 지었다는 ‘궁을가’를 기꺼이 인용한다. 이 역시 위작(僞作)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궁궁을을”에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궁궁”도 십자가,“을을” 역시 십자가라는 것이다. 역사상 남사고는 궁핍한 예언가였다. 하지만 후세의 사람들 중엔 그 이름을 팔아 기름진 음식과 호사를 누리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 민중이 남사고에게 걸었던 희망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피플 인 포커스] 中 IT갑부 잭 마

    ‘중등영어교사에서 40대 벤처 갑부로’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의 잭 마(40)사장은 지난 11일 야후와의 계약 후 터질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50만위안(약 6500만원)으로 시작한 회사의 가치를 6년만에 무려 40억달러(약 4조원)로 일궈낸 ‘대박신화’의 주인공답게 자신감과 성취감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야후는 알리바바의 지분 40%를 인수하는 데 무려 10억달러(약 1조원)를 내놨다. 중국 인터넷 산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 중 최대 규모다. 창업 6년 만에 ‘중국의 별’로 떠오른 마 사장. 영어를 배우려고 무급 여행 가이드도 마다하지 않았던 호반도시 항저우의 꿈 많은 청년이었다. 항저우는 한때 남송(南宋)의 수도로 외국선박의 출입이 잦았지만 19세기 후 인근 상하이에 밀려 저장성 성도(省都)로 만족해야 했다. 그는 항저우 사범대를 나와 몇 년 간은 교편을 잡았고 1995년에서야 ‘차이나 옐로페이지’와 중국 대외경제무역부의 웹사이트를 만들면서 인터넷 사업에 눈을 떴다. 마 사장이 1999년 귀향해 만든 알리바바는 2년만에 중국업체들의 온라인 수출 대부분을 차지하는 무역 사이트로 급성장했다. 경매 사이트인 자회사 타오바오닷컴과 함께 하루 평균 8000만회 페이지뷰를 기록하며 지난해 4600만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야후는 이번 계약을 통해 알리바바의 최대 주주로서 35%의 의결권을 갖지만 야후의 중국내 영업권과 두 사이트의 운영권은 여전히 마 사장의 몫이다. 그는 “합자회사가 아니다. 모든 경영은 우리가 맡는다.”고 강조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가 12일 전했다. 이런 계약은 순전히 카리스마 넘치는 마 사장의 리더십에서 비롯됐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평했다. 야후에 앞서 최대 외부 주주였던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사장은 “미국 바깥에서 새 인터넷 사업 모델을 제시하는 기업이 있다면 그건 알리바바”라고 단언했다. 마 사장은 10억달러 중 상당액을 알리바바의 지분을 재매입하는 데 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알리바바를 중국인이 설립한 최고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겠다.”고 야심을 감추지 않았다. 박정경기자 olive@seoul.co.kr
  •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파리시민들의 도심 바캉스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파리시민들의 도심 바캉스

    |파리 함혜리특파원|약국, 슈퍼마켓, 식당 등 모두가 바캉스를 떠나 텅빈 파리. 그러나 8월의 파리는 절대 무료하지 않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바캉스를 떠나지 못한 파리지앵들이나 관광객들을 위해 무궁무진한 프로그램들이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파리의 중심을 흐르는 센 강변에서 해변의 낭만을 즐길 수 있도록 파리시가 마련한 ‘파리 플라주(Paris Plage)’를 비롯해 파리 시내 명소 곳곳에서 마련되는 야외 영화감상회, 공원의 무료 음악회, 시청앞 비치발리 등 스포츠, 문화, 여가 프로그램이 곳곳에서 여름 내내 펼쳐지고 있다. ■ 문화 넘실대는 도시속 해변 ‘파리플라주’ ●센 강변에서 추는 삼바춤 퐁뇌프역에서 지하철을 내려 바깥으로 나오면 바로 센강과 만난다. 흥겨운 북소리에 이끌려 강변로 쪽으로 내려가 보니 북적이는 인파로 발을 내딛기 조차 힘들다. 파리 시내의 주택가가 쥐 죽은 듯 고요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지난달 21일 개장한 ‘파리 플라주’다. 플라주(plage)는 해변이라는 뜻이다. 파리 플라주는 센강 우안의 강변도로 3.9㎞를 막아 모래, 파라솔, 긴 비치 의자, 샤워기 등 해변의 시설물을 갖추고 각종 문화, 스포츠, 여가 관련 행사들을 한달동안 제공한다.1500t의 모래를 가져다 인공백사장을 꾸미고,50여그루의 야자수를 심어 해변 분위기를 냈다. 한쪽에는 깊이 1.1m의 야외수영장도 갖췄고 식당, 카페, 음료수대 등 편의시설과 피크닉을 즐길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오는 21일까지 계속되는 올해 파리 플라주는 ‘브라질의 해’를 맞아 ‘삼바와 축구의 나라’ 브라질과 관련된 프로그램이 많이 포함된 것이 특징. 전체 해변을 3개 구역으로 나눠 이파네마, 마라카나, 코파카바나 등 브라질의 명소와 같은 이름을 붙였다. 리우데자네이루의 관광명소 이름을 딴 ‘이파네마’는 여유롭게 일광욕을 즐기는 공간. 모래, 잔디, 자갈로 조성된 3개의 인공해변에는 긴 의자와 파라솔이 설치돼 있고 매일 오후 신나는 리듬에 맞춰 삼바춤도 배울 수 있다. 어린이들을 위한 카니발 아틀리, 암벽타기 연습장도 개설돼 인기다. 상파울루의 유명한 축구경기장 이름을 딴 마라카나는 비치발리볼, 비치축구, 스피드볼, 족구 등 해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코파카바나에는 브라질의 식물을 옮겨다 브라질 공원을 꾸몄으며 이곳의 수영장에서는 아쿠아짐나스틱 강습도 받을 수 있다. 주말에는 음악회와 영화상영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이밖에 신나는 드럼연주에 맞춰 삼바춤을 추거나 연주를 하고 축구공으로 발묘기를 보이는 거리의 예술가들이 방문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도심형 피서지로 정착 파리 플라주는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시장의 아이디어로 지난 2002년 시작돼 올해로 네번째를 맞는 도시 이벤트. 첫 해에는 행사 내용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교통혼잡만 초래한다며 파리 시민들로부터 많은 불평을 샀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프로그램이 충실해지고, 편의시설 또한 확대되면서 이제는 파리의 대표적인 여름행사로 자리잡았다. 특히 경제적 사정이 여의치 않아 휴가를 떠나지 못하는 저소득층이나 노인, 어린이들은 센 강변에서 각종 놀이를 즐길 수 있는 파리 플라주를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훌륭한 피서지 역할을 한다. 파리에 사는 아들네 집을 방문해 손자들과 파리 플라주를 찾은 마들렌(65·리옹 거주)은 “정말 볼 것도 많고 할 것도 많다. 집에서는 손자들과 할 이야기도 별로 없었는데 이곳에 나와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파리시의 문화담당 고문 크리스토프 지라르는 “대부분 사람들이 7,8월에 바캉스를 떠나지만 파리에는 그러지 못한 사람들도 무척 많다.”며 “바캉스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여가시설을 마련하고,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시(市)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실제로 비치 발리볼장이나 모래밭, 산책로 이용자들 중 상당수가 이민자 가정의 어린이들이나 여성들이다. 파리시의 1차 목표는 일단 성공한 셈이다. 지난해 파리 플라주를 찾은 사람은 모두 400만명. 파리시민 수(250만명)를 훨씬 넘어설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파리 플라주를 찾는 사람들은 비치 의자에 누워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시민들, 파리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관광객들, 주변 도시에 사는 사람들 등 다양하다. 지라르는 “파리 플라주에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어 각자 원하는 것을 선택해 즐길 수 있다.”며 “파리 플라주의 컨셉트는 파리 주변 지역과 지방도시, 다른 유럽국가의 대도시들로 수출될 정도로 각광받고 있다.”고 자랑했다. ●공원에서는 재즈와 클래식 감상 특별히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파리 시내와 근교의 공원을 찾아 클래식, 재즈, 로큰롤 등 다양한 장르의 연주를 즐길 수 있다. 파리 동쪽 뱅센에 있는 화훼공원에서는 다음달 18일까지 매주 주말 오후에 클래식 콘서트를 열고 있다. 올해에는 첼로, 피아노, 클라리넷 등 신세대 솔로연주자들의 연주가 소개되고 있다. 루빈슈타인 국제피아노콩쿠르 수상자인 이고르 레빗, 제네바 텝시코르드 사중주단 등 수준높은 연주자들의 음악을 야외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파리 남서쪽에 있는 소(Sceaux)공원에서도 다음달 18일까지 오랑주리 페스티벌이 열린다.21차례의 실내악 연주회와 함께 기량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연주자들을 위한 마스터클래스가 실시된다.10세 미만의 어린이들은 무료로 지도를 받을 수 있고, 성인들은 18∼25유로(2만∼3만원)를 내고 전문 연주자들의 지도를 받을 수 있다. 라빌레트 연주회장에서는 30일부터 다음달 10일까지 앨리스 콜르트레인 쿼텟, 데이비드 머레이 등 수준높은 재즈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생클루 숲에서는 25·26일 파리지역 최대의 록 페스티벌이 열려 젊은이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lotus@seoul.co.kr ■ 파리 유적지서 상영 한여름밤 영화 감상 |파리 함혜리특파원|8월 첫 주말인 지난 6일 저녁 루이 13세 때인 1612년 완공된 유서깊은 보주 광장. 왕에 의해 건설된 첫 왕실광장으로 17세기엔 파리의 귀족사회와 사교계의 중심지였고,19세기 중엽 광장의 6번지에 문호 빅토르 위고가 살았던 이곳이 이날은 거대한 스크린이 설치된 야외극장으로 바뀌었다. 잔디밭에는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리며 샌드위치와 포도주로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스크린 앞 정면에 가지런히 놓인 의자는 영화가 시작되기 1시간 전 모두 주인을 찾았다. 집에서 야외용 안락의자를 가져와 편안한 자세로 안방극장 분위기를 내는 사람도 있다.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오후 9시30분쯤 영화가 시작됐다. 이미지포럼(www.forumdesimages.net)이 파리시 후원으로 주최하는 제5회 ‘달빛 야외영화감상회(Cinema au claire de lune)’가 지난 3일부터 열려 영화팬은 물론 여름에 파리에 남아있는 파리시민들과 관광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오는 20일까지 총 15편의 영화가 무료로 상영되는데 그날 상영되는 영화와 관련있는 장소에서 감상회가 열린다는 점이 독특하다. 예컨대 첫날인 3일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장 르누아르 감독의 ‘프렌치 캉캉’을 상영한 것은 영화 속 배경이 되는 물랭루즈 카바레가 바로 몽마르트르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이날 상영된 영화는 필립 드 브로카 감독의 1962년 작품 ‘카르투슈(Cartouche)’. 젊은 시절의 장폴 벨몽도가 의적 카르투슈로 나오고 그의 상대역을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가 맡은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보주광장을 완성한 루이 13세 시절. 올해 행사의 폐막작은 마르셀 카르네 감독의 1945년 작 ‘천국의 아이들’. 올해로 제작된 지 60년을 맞는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아를레티가 장루이 바로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 장소가 바로 탕플 대로이며, 그곳과 인접한 생튀스타슈성당 앞의 르네카생 광장에서 오는 20일 감상회가 열린다. 이미지포럼의 안 쿨롱 홍보국장은 “‘달빛 영화감상회’는 문화적이고, 대중적이며,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행사”라며 “그날 상영되는 영화와 직접 관련이 있는 파리시내의 유서깊은 장소 13곳에서 감상회가 진행되기 때문에 시민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파리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동시에 야외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색다른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맛’ 때문에 매년 감상회를 찾는 단골관객도 상당수라고 쿨롱 국장은 소개했다. 지난해에는 5만 4000명이 야외 영화감상회장을 찾았고 올해에도 6만명 정도가 행사에 참석할 것으로 이미지포럼측은 기대하고 있다. lotus@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1)중국인 술사 두사총과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1)중국인 술사 두사총과 ‘정감록’

    ‘정감록’엔 중국인 술사 두사총(杜師聰)이 썼다는 ‘두사총비결’(杜師聰秘訣)이 포함돼 있다. 외국인의 이름을 빌린 예언서란 점에서 이채를 띤다. 자세히 알고 보면, 때로 중국 술사들이 한국에서 활동한 적이 없지 않았다. 특히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를 따라 중국의 술사들이 많이 왔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는 조정의 후대를 받았다. 위세를 부리다 못해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조선왕조실록’에 그런 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돼 있다. 뒷날 한국 민중은 그런 몹쓸 중국 술사들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민중들이 칭찬하는 중국 술사도 없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두사총이다. 이상하게도 조선왕조의 공식 기록에는 그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두사총은 민간설화와 함께 민중의 기억 속에 길이 간직되었다. 그가 저술했다는 ‘두사총비결’은 늦어도 19세기 말부터는 ‘정감록’의 일부가 되었다.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에 가면 묘라리(妙羅里)란 마을이 있다. 그곳 사람들은 이 마을 이름을 처음 지은 이가 바로 두사총이었다고 기억한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따라 조선에 온 두사총은 중국 군대를 따라 전국 각지를 누볐다. 한 번은 이곳을 지나게 됐다. 두사총은 이곳의 지세를 자세히 살핀 다음 ‘풍취라대’(風吹羅帶)라고 결론지었다. ●술사 두사총은 명나라군대의 일원 비단 허리띠가 바람에 펄럭이는 모양이란 이야기다. 비단 띠는 고관대작이나 두르는 귀한 물건이라, 장차 이 마을 사람들은 부귀를 누리게 된다는 풍수예언이었다. 그런 뜻을 새겨 두사총은 마을 이름을 ‘묘라’(妙羅 매우 고운 비단)라고 했다. 훗날 묘라리는 번영을 누렸고, 묘라, 후리, 두무동 등 3개 마을로 발전했다. 따지고 보면, 두사총은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군대의 일원이었다. 그에겐 조선의 지세를 자세히 염탐해 중국에 보고할 사명이 있었을 것이다. 만일 조선에 어마어마한 명당이 있다면 그 맥을 끊어 땅 기운을 약화시킬 임무를 띠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두사총은 그런 일에 종사한 흔적이 없다. 그는 전국을 유람하다 좋은 자리가 나오면 스스럼없이 조선 사람들에게 알려줬다. 조선에 명당이 있다면 그 복은 당연히 조선 사람들이 누려야 한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이런 두사총의 마음은 한국 민중에게 전해졌고, 민중은 그를 자기들 편으로 믿게 됐다. 두사총의 행적에 관해 많은 설화가 남아 있는 까닭이 바로 거기 있다. 경상북도 문경시 동로면에도 한 가지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진다. 생달리란 마을 입구에 ‘마총’(馬塚)이란 비석이 서 있고, 깊은 곡절이 있는 말 무덤이 있다. 경상도까지 살펴보게 된 두사총은 이곳에서 ‘연주패옥(連珠佩玉)’이라 불리는 대명당을 발견했다. 구슬을 꿰고 옥을 단다는 뜻의 이런 명당에 묘를 두면, 그 집안에 금관자·옥관자를 단 정승 판서 벼슬이 수없이 나온다고 한다. 이 천하제일의 명당을 두사총은 정탁(鄭琢·1526~1605)에게 전해줄 생각이었다. 정탁은 지조 높은 선비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 곽재우(郭再祐) 및 김덕령(金德齡)과 같은 명장을 발탁해 나라를 구하려고 애쓴 문신이었다. 정탁은 자기 한 몸의 안락보다는 국가의 안위를 위해 노심초사했다. 두사총은 정탁이야말로 장차 이런 명당의 주인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몰래 정탁의 하인에게 그 명당 터를 일러줬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정탁이 세상을 떴다. 정탁의 아들은 아버지가 묻힐 명당을 찾아 하인과 함께 생달리까지 찾아왔다. 그런데 그들 일행이 생달리 동구 밖에 도착했을 때 불행히도 그 하인은 말 뒷발에 차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아들은 몹시 억울하고 분심이 치밀어 올라 그 자리에서 말을 칼로 베어 죽였다. 생달리의 마총에 관한 전설에서 거듭 확인되듯 중국 술사 두사총은 ‘우리 편’으로 기억되었다. 전설 속의 그는 정탁과 같은 충신을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조선 최고의 명당을 조선 최고의 신하에게 전해주려고 했다. 이것이 과연 역사적 사실이었는지 누구도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이 있다. 민중은 중국인 술사 두사총을 의리 있고 믿을 만한 지관으로 손꼽았다는 점이다. 두사총은 국적을 떠나 도선 및 무학대사 등과 더불어 한국 민중이 가장 존경하는 풍수의 대가였다. 사실 임진왜란 때는 다수의 중국인 술사들이 전국을 훑고 다녔다. 명나라 군대가 가는 곳마다 그들이 보였고 그 기세도 높았다. 조선 사람들은 중국 술사들에 대해 깊은 혐의를 두고 있었다. 그들 술사는 아무래도 중국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일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중국인 술사들에 대한 불신이 깊어가는 가운데 민중은 그 반대편에 선 인물을 찾고 있었다. 민중이 보기에 진정 훌륭한 지관이라면 조선의 길지를 조선인들에게 돌려줘야 마땅했다. 위에서 살핀 두사총과 정탁에 관한 설화는 이런 민중의 바람을 형상화한 것이다. ●호종단이란 나쁜 중국인 술사 두사총과는 영 딴판인 중국인 술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악질적인 인물로 기억되는 이가 호종단(胡宗旦)이다. 그는 멀리 중국 송나라 때 인물로 제주도에 파견돼 명당기운을 해칠 사명을 띠었다 한다. 당시 세상엔 한 가지 소문이 횡행했다. 제주도엔 13개의 명당이 있어 천하제일의 인재들이 쏟아져 나와 세상을 주도하리라는 것이었다. 이 소문을 듣고 중국 황제는 무척 당황했다. 황제는 압승지술(壓勝之術 명당기운을 억누르는 기술)의 대가 호종단을 제주도로 보내 13혈(穴)을 찾아 침질을 하게 했다. 비밀리에 호종단은 북제주군 표선면 의귀리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이어 서귀읍 서홍리로 옮겨 혈을 죽이려 했다. 이렇게 13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지기(地氣)를 억눌렀다. 제주도 동부지방에는 샘이 별로 없고 서쪽에는 샘물이 많은 편인데, 그것은 호종단의 소행과 관련이 있다 한다. 더러 호종단의 뜻대로 된 곳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대개는 천지신명의 방해로 호종단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서둘러 일을 끝낸 호종단은 중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가 탄 배가 북제주군 한경면 고산리 앞바다의 한 섬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한 마리 날쌘 매가 배 위로 날아왔고 그러자 사나운 폭풍이 일어나 배를 물속에 가라앉혔다. 호종단은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았다. 제주도 사람들의 해석이 재미있다. 호종단의 횡포에 분노한 한라산신이 매로 변해 복수했다는 것이다. 호종단의 귀로를 차단했다는 뜻에서 사람들은 고산리 앞바다의 그 섬을 차귀섬(遮歸島)이라 부른다. 호종단의 활동과 죽음에 관한 설화는 과장된 것이 분명하다. 역사상 제주의 풍수지리를 염탐할 목적으로 외부에서 술사들을 파견했을 법은 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제주도의 어느 지역에선 샘물이 메마르고 인재의 배출이 멎었을 리는 없다. 도리어 사태는 그와 반대로 진행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정 지역에서 샘과 인재가 메마르자 그것을 호종단과 같은 악질적인 술사들의 행위 탓으로 돌렸다고 생각된다. 때로 민중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두려움의 근본적 원인을 외부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점에서 호종단은 민중이 공동의 기억 속에 불러들인 가공인물일 수도 있다. 그 점은 민중의 희망을 대변하는 두사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극히 선한 것과 극히 악한 것은 역사적 실체가 없는 기억의 창조물일 가능성이 많다. ●망각된 중국 술사 섭정국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당시 국왕 선조는 명나라에 술사의 파견을 요청하기도 했다.“특별히 방술에 정통한 사람을 보내 주시어 지리를 명백히 살피게 하여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실록, 선조 26년8월8일 기축) 조선 측은 왜란이 터지자 수도 이전을 비롯해 궁궐과 능묘의 이전을 검토 중이었다. 국내엔 이처럼 큰일을 감당할 마땅한 전문 인력이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중국 측에 도움을 구했던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명나라 군대를 따라 조선에 들어온 술사들이 여러 명이었다. 김상(金上), 풍중영(馮仲纓), 왕종성(王宗盛), 양문성(楊文成), 이문통(李文通), 유원외(劉員外 이름은 미상)가 이를테면 그 대표적인 존재였다. 그들 가운데 풍중영과 왕종성은 수도 한양의 풍수를 논하기도 했다.“건국된 지 2백년 만에 재액(災厄)이 있겠으나 그 뒤로는 무사하다.”(선조 26년8월10일 신묘) 1392년에 건국된 조선은 1592년 임진년에만 한 차례 난리를 겪을 뿐 운수가 무궁하다는 일종의 덕담이었다. 선조는 그 말에 무척 감격해했다. 중국의 여러 술사들 가운데서 가장 각광을 받은 이는 섭정국(葉靖國)이었다. 그는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와 가까워 왕실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풍수에 관한 일이라면 모두 관여했다. 선조비(宣祖妃)의 능을 정하는 문제에도 깊이 간여했다. 외국인이 조선 왕비의 능묘를 정하는 일에 뛰어들자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설사 섭정국 같은 이가 풍수에 능해 길지를 얻는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쓰는 격국(格局)과는 다르다. 그는 심지어 길가의 낮은 지역과 집 뒤의 조그마한 동산을 가리키며 가장 좋은 곳이라 하니, 무슨 증거로 그 말을 믿겠는가?”(선조33년7월14일 을묘) 본래 풍수지리에 관한 이론은 고대 중국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한·중(韓·中) 두 나라의 풍수 보는 법은 상당히 달랐다. 각 시대마다 새로운 풍수지리설이 등장하기도 했고, 지역마다 유행하는 이론도 달라 서로 일정할 수가 없었다. 당시 한국에는 김여견(金汝堅), 김덕원(金德元), 송건(宋健) 및 이의신(李懿信), 박상의 등이 술사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조선인 술사들의 능력을 불신했다. 결과적으로 섭정국의 활동영역은 하루가 다르게 확대되었다. 서울에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하는 것까지도 그의 견해를 참고할 정도였다(선조32년4월29일 무인).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게 된 섭정국은 남대문에 벽보를 붙여 명나라의 도망병들을 불러 모아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는 조선 측에 물자 공급을 독촉하면서 관리를 구타하고, 도망병들을 거느리고 못할 짓이 없었다 한다. 선조는 풍수설(風水說)에 현혹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은 섭정국의 터무니없고 괴이한 주장을 맹신해 왕비를 장사지내는 일정을 몇 달씩이나 지연할 정도였다. 그러나 섭정국은 거만을 피우며 도리어 조선왕조의 관리와 백성들을 마음대로 때리고 짓밟는 등 만행을 자행했다. 얼마 후 섭정국은 명나라로 송환되었으며 한국 민중은 그를 깡그리 잊었다. 민중은 사기꾼 같은 섭정국이란 존재를 오래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두사총비결’에 담긴 뜻 두사총은 조선의 중앙 정치무대에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 민중은 그를 무척 친근하게 여겼으므로, 예언서의 저자로 둔갑시켰다. 섭정국의 경우와는 확연히 달랐다. 크게 보아 ‘두사총비결’의 요지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어떤 곳이 길지며, 어느 곳이 흉한 땅인가를 밝혀 놓은 것이다. 이런 논의는 ‘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들과 공통되는 점이 대부분이다. 물론 ‘두사총’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주장도 전혀 없지 않다. 길지에 관한 ‘두사총’의 견해를 살펴보면 우선 “태백산과 소백산은 백두산에서 갈려 내려와서 산맥이 나뉘었는데 본래부터 왕성한 기상이 있어 화기(和氣)가 넘쳐흐른다.”고 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영천의 백운산, 동주, 용해를 먹을 것이 풍족해 대를 이어 길이 보존할 땅으로 보았다.‘정감록’은 어느 것이나 태백산과 소백산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두사총’ 역시 예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좀 더 부연하면 ‘정감록’은 백두산에서 시작돼 지리산까지 뻗어나간 백두대간의 주요 명당을 무척 중시한다.‘두사총’도 그런 입장이다.“화산, 가야산, 지리산, 두류산과 삼풍의 네 평야는 곧 어진 정승이나 좋은 장수가 계속해서 나올 곳으로서 땅은 기름지고 풍속은 순후해서 오래 갈수록 더 좋으나 누가 주인이 되겠는가?” 그밖에 영가의 백운산, 화약산, 대아산, 도성산, 명주(강릉), 소양의 기린산과 낭읍의 대미산을 길지로 손꼽은 것도 백두대간에 대한 깊은 신앙심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두사총’은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의 명산을 꽤 중시하는 편이다. 오서산과 성주산, 강화의 마니산, 약수산을 “병화(兵火)가 들어가지 않고, 간사한 것이 침입하지 않는다”고 했다.“태령의 수양산과 곡산의 밝고 아름다움은 재앙과 어지러움이 이르지 않아서 길이 복된 땅이 될 것이오”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들 여러 산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이른바 십승지(十勝地)에 속하지 않으며 ‘두사총’에만 길지로 나와 있다. 그런데 누구나 길지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한다.“덕을 쌓고 오랫동안 어진 일을 한 집이 아니면 어떻게 여기에 살 수가 있겠는가?” ‘두사총’은 이렇게 반문한다. 이런 자격 검토도 실은 ‘정감록’ 요소요소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메시지다. ‘두사총’의 개성은 흉한 땅에 대한 주장에서 좀더 뚜렷이 부각된다.“호남의 산은 등을 돌리고 달아난 것이 많아서 좋지 못한 일이 많이 생긴다. 이것은 내버려두고 말할 것이 없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호남의 지세를 배역(背逆)으로 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일례로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가 그렇다. 그와는 달리 ‘정감록’에는 부안 변산, 무주, 운봉, 해남 등지를 길지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웬일인지 이런 전통을 ‘두사총’은 따르지 않는다. 그 대신 “신안 몇 고을은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으리라.”고 하여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어쨌거나 호남을 푸대접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흔히 길지로 취급하는 경기도 양근의 용문산 등에 대해서도 ‘두사총’의 평가는 몹시 부정적이다.“양근 용문산과 유양산은 안으로 세 가지 안목의 정교한 것이 없으면서도 오로지 깊고 궁벽한 것을 숭상하여, 이 때문에 사람들이 다투어 여기에 산다. 그러나 용문산 기운은 삼각산에 빼앗겼으니 이는 아마도 헛된 꽃이요 죽은 굴혈일 것이다. 게다가 산 안의 형세도 돌아서서 버리고 끌고 나갔다. 지각 있는 군자라면 내 말이 없더라도 알 것인즉 삼가고 삼가라.” 인용문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용문산으로 들어와 피란하고 있었음이 밝혀져 있다. 그런데 이것은 19세기 말의 사정이었다. 앞에서 말하기를,‘두사총’은 충청도와 경기도 일원의 새 길지를 언급한 점에 한 가지 특색이 발견된다고 했다. 그에 덧붙여 19세기 말 경기도 용문산 일대의 형편도 사실적으로 기술돼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를 종합해 보면,‘두사총’은 19세기 말 경기도를 비롯한 중부지방에서 저술되고 읽혔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것도 임진강 동쪽, 철령 이남을 이상향으로 상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한 것으로 봐야 옳겠다.“임진강 서쪽과 철령 북쪽은 무엇을 족히 의논하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서북 지역은 극히 흉한 땅이란 얘기다. 굳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 주장이다. 어찌 보면 새로운 듯하면서도 ‘두사총’은 ‘정감록’의 상궤를 그리 멀리 이탈하지는 못한 것이 틀림없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박노자 지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러나 전통이 되고 규범이 된 승자의 역사가 반성을 거치지 않았을 때, 그것은 하나의 폭력으로 이어지기 쉽다. 러시아 출신으로 한국에 귀화한 역사학자 박노자 교수(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가 이같은 역사속의 폭력성을 해부한 책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인물과 사상사 펴냄)를 내놓았다. 책은 한국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근대화의 과정에서 많은 종류의 폭력들이 어떻게 형성됐으며 역사 속에서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 보여준다. 박교수에 따르면 개화기는 1000년 이상 유지됐던 중세 체제와 신분질서가 무너지면서,‘개인’을 중시하는 새로운 역사가 창조된 시기이다. 그러나 개화기 지식인들은 ‘개인’을 다만 국가의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인식하는 한계를 보였다고 지적한다. 이에 따라 개인은 국가와 군대, 부국강병 등을 위한 존재로서, 지배층의 지배이념이라는 폭력의 피해자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개화기 지식인들이 꿈꾸었던 부국강병이 오늘날까지 어떻게 폭력화되어 개인을 옥죄고 있는지도 살펴본다.1만 3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데스크시각] 사람도 만나는 개성·백두산관광을/허남주 주말매거진WE팀장

    “꼭 금강산 같다!” “그런데 자네 금강산 안 가봤잖아.” 얼마 전, 한라산 영선코스를 오르던 중 어르신들의 대화에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금강산 만물상의 모습이 연상되는 봉우리도 있었고, 멋진 산은 금강산과 비교하는 게 마땅하다는 듯한 대화내용에도 공감이 갔다. 금강산 여행이 시작된 2000년 6월이래 5년간 100만의 관광객이 다녀왔다 한다. 영해로 둘러서 하루가 걸려야만 갔던 금강산이 육로가 열리면서 더 가까워졌고, 다가오는 19일이면 개성관광과 백두산관광길도 열린다 한다. 일반인들이 본격적으로 관광을 하기엔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더이상 “나 살아 생전에 가볼 수 있을까.”한숨까지 내쉬며 그리워만 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더욱이 백두산은 꼭 가고 싶은 여행지다. 다녀온 사람들의 들뜬 여행담을 직접 느껴보고 싶다. 하지만 백두산 여행이 현실화된다 해도 개인적으로는 당장 가족들과 함께 떠나기엔 망설여진다. 몇해전 다녀온 금강산 여행의 기억 때문에. 금강산 여행은 ‘하지마 관광’이란 말이 어울릴 만큼 주의사항과 금지투성이로 숙지할 것도 많았다. 신통치 않은 기억력이 염려될 만큼. 또 세관통과하던 순간의 지루하고 으스스한 절차, 경직된 분위기도 여행이 주는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금강산은 참으로 수려했다. 어렵게 북녘땅을 왔다는 감회가 감동을 더 키웠을까. 만물상을 오를 때 발걸음은 가볍고 빨랐다. 하지만 아름다운 홍송군락을 지나는 버스 속에서부터 ‘이 길을 가족과 함께 김밥과 음료수를 몇가지 챙겨 차에 싣고 온다면’이런 생각이 발목을 잡아 산에 오르면서도 ‘남쪽’의 가족들이 그리웠다.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았다. 그래서 동행했던 교장선생님 일행에게 짐짓 소리쳐서 물었다.“선생님들, 지금 사모님 생각하시죠?”그러자 50∼60대의 교장선생님들은 마치 초등학생처럼 “예”라고 큰소리로 화답해줬었다. 여행이란 아름다운 여행지를 찾아가는 그것만은 아니다. 숙박시설에따라 여행지를 선택할 만큼 트렌드가 바뀌었다지만, 그것도 여행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누구와 함께 가서 어떤 추억을 만들었느냐가 여행의 의미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금강산 여행만큼 백두산, 개성관광도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4일 한국관광공사가 프레스센터에서 발표한 ‘개성관광종합계획세미나’에서 그 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2박3일 정도의 일정으로 차를 직접 몰고 여행하기를 원했고, 개성에서 골프나 스키를 즐기기보다 북한주민의 생활을 접하길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현대측은 개성시내와 선죽교, 왕건왕릉, 박연폭포와 고려박물관 등 역사유적지를 돌아보는 개성 당일관광이 20만원이 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는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과 고려궁터, 전등사, 강화역사관 등을 둘러보는 여행상품(4만원)과 거의 흡사한 일정인데, 가격은 무려 5배나 비싸다. 더욱이 어르신을 모시고 4∼5명이 가족여행에 나선다면 개성당일관광에 무려 100만원을 써야 할 정도다. 또한 3박4일에 400달러를 넘을 백두산 관광도 지나치게 높은 가격임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개성관광을, 백두산관광의 의미를 어느 곳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고 따져물을 수도 있겠다. 더욱이 개성관광은 북한의 대외개방을 이끌어내고 남북간 이질감 해소 등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올 것이란 의의있는 일에 몇 푼 금전을 이야기하는 것은 좀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성도 백두산도 여행으로서의 경쟁력과 가치가 없다면 실향민이외 일반국민들에게, 특히 젊은 층에게는 결코 매력적인 곳이 될 수 없다. 허락된 길로만 가서 통제된 방법만으로 백두산을, 개성을 느껴야 한다는 것은 여행의 참맛과는 거리감이 있다. 150년전, 관서지방과 금강산 일대를 여행하면서 기록한 일기 ‘금강일기부서유록(金剛日記附西遊錄)’의 그 이름모를 선비처럼 풍경도 만나고, 역사도 만나고 사람도 만나는 백두산 여행을 하고 싶다. 가족들과 돌려 읽으면서. 마침 ‘19세기 선비의 의주·금강산기행’이란 제목으로 완역판도 나왔으니…. 허남주 주말매거진WE팀장
  • 카툰문학의 거장 대표작 4편 국내첫선

    카툰문학의 거장 에드워드 고리(1925∼2000)의 대표작 4권이 국내 처음으로 황금가지에서 출간됐다. 1953년 ‘현 없는 하프’로 데뷔한 에드워드 고리는 펜으로 그린 섬세한 일러스트레이션에 간결하고 함축적인 글을 결합한 독특한 스타일로 수많은 예술인들과 독자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다. 고딕풍 음울함에 풍자적 유머와 미스터리를 뒤섞은 그의 작품은 문학적으로는 헨리 제임스, 허먼 멜빌, 이오네스코 등과 같은 선상에 놓이며, 그림에선 19세기 후반 영국 일러스트레이션의 황금기를 이끈 환상 유파를 독창적으로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데뷔 이후 100여권의 책을 집필하는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친 그는 연극,TV, 애니메이션 등 다방면의 대중문화에도 손길을 뻗쳤다. TS 엘리엇의 ‘노련한 고양이들에 관한 늙은 주머니쥐의 책’에 그린 삽화는 뮤지컬 ‘캐츠’의 캐릭터 디자인에 영향을 미쳤고, 무대미술을 담당한 연극 ‘드라큘라’(1977)로 토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번에 선보인 책은 ‘현없는 하프’를 비롯해 ‘펑 하고 산산조각난 꼬마들’‘수상한 손님’‘불가사의한 자전거’ 등 그의 작품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걸작들이다. ‘펑 하고 산산조각난 꼬마들’(1963)은 A부터 Z까지 각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 제각각 다른 방법으로 죽는 이야기다.‘수상한 손님’(1958)은 우습게 생긴 이상한 생물체가 난데없이 나타나 17년간 가족의 일원으로 지내게 되는 황당한 사건을 담았다. 1969년작인 ‘불가사의한 자전거’는 악동 남매가 주인없는 자전거를 타고 낯선 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와 보니 173년이나 흘렀다는 내용. 처녀작 ‘현없는 하프’는 1920년대 영국 어딘가에서 같은 제목의 책을 출간하는 주인공을 통해 예술가의 고뇌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책이다. 송경아 옮김, 각권 75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증산도 경전 ‘道典’ 15년만에 번역 완결

    증산도가 한국 민족종교로는 처음으로 증산도 경전인 ‘도전(道典)’의 외국어 번역작업에 착수한 지 15년 만에 사업을 완결짓게 됐다. 증산도는 27일 대전 증산도사상연구소 세미나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오는 12월 러시아어 번역작업을 끝으로 영어·중국어·일어·프랑스어·독어·스페인어 등 7개 언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마무리짓는다고 밝혔다. 1500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증산도 ‘도전’은 증산도를 창건한 강증산(1871∼1909)의 행적과 가르침을 담은 책이다. 한국과 중국의 고전에서 인용된 구절들과 한시 등이 많아 문장의 의미와 과거 사실의 기록을 해석하는 작업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증산도 관계자는 밝혔다. 증산도 도전은 한국의 전통 사상과 문화뿐 아니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한국의 역사와 민속, 사회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외국인들이 한국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는 게 증산도측의 생각이다. 이날 기자회견엔 러시아어 번역을 맡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쿠르바노프와 아크닌 교수, 블라디슬라브 연구원 등이 참석해 러시아에서의 증산도 연구와 보급 등에 대해 의견을 밝혔다. 쿠르바노프 교수는 “증산도 사상이 한국문화 속에서 알게 모르게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으며, 나아가 세계 무대로의 확산 가능성도 매우 크다.”고 말했다.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9)이득윤과 ‘서계이선생가장결’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9)이득윤과 ‘서계이선생가장결’

    ‘정감록’에 수록된 예언서의 저자들 중에도 비교적 낯선 인물이 있다.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1553∼1630)이 그런 경우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서계 역시 조선시대엔 상당히 유명한 예언가였다. 서계가 살던 16세기는 우리 역사상 별들의 시대였다. 퇴계 이황, 화담 서경덕, 하서 김인후, 율곡 이이, 고봉 기대승, 우계 성혼, 남명 조식 등 조선 유학사(儒學史)의 거장들이 일시에 배출되어, 성리(性理)를 궁구했다. 노수신·백인걸·유희춘임억령 등 선비의 기개를 떨친 이도 많았고, 최경창·백광훈·이달 등 시문의 대가도 적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북창 정렴, 토정 이지함, 격암 남사고 등은 신선의 세계를 드나들어 이채를 띠었다. 불가(佛家)에도 서산대사 같은 거물이 있었다. 위에 언급한 16세기의 인물 가운데 상당수는 예언서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우선 토정과 북창이 그렇고, 격암과 서산대사도 예외는 아니다. 서계도 이 부류에 속한다. 서계는 유학자인 동시에, 역술가요 음악가였다. 그가 지었다는 ‘서계이선생가장결’(西溪李先生家臧訣)은 현재 ‘정감록’의 일부로 되어 있다. 서계는 누구였는가? 그의 저술로 알려진 ‘서계이선생가장결’은 또 어떤 책인가? 그리고 서계가 살던 16세기가 ‘예언가들의 전성시대’로 불릴 수 있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서계 이득윤이란 예언가 서계는 어려서부터 성리학 공부를 많이 했다. 선조 21년(1588년)에는 진사(進士)가 되었으므로, 그의 실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서계는 수학과 역학(易學)에도 밝았다. 당시 역술의 대가 박지화(朴枝華)를 방문해 수준 높은 토론을 펼쳤다 하며, 이를 계기로 역학의 대가로 이름을 얻었다. 그는 우주자연의 생성과 운행원리에 관한 전문가였다. 쉽게 말해, 서계는 주역 점을 잘 치기로 유명했다. 아마 그런 덕택이었겠지만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1597년 서계는 관직에 등용되었다. 처음엔 희릉 참봉(禧陵參奉)에 임명되었고 얼마 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이밖에 한두 가지 벼슬을 더 지냈다. 그러다 광해군이 집권하자 조정에서 물러났다. 오늘날 충북 청원군 미원면이 서계의 고향이었다. 그는 낙향 직후인 광해1년(1609) 미원면 일대 9곳에 이른바 ‘옥화구곡’(玉華九曲)을 정했다. 일찍이 성리학의 대가 주희(朱熹)가 송나라 때 푸젠성 무이산에 머물며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묻혀 지낸 사실을 모범으로 삼은 것이다. 서계는 청원군 미원면을 남북으로 흐르는 박대천을 따라 하류에서 상류 쪽으로 만경대(萬景臺), 후운정(後雲亭), 어암(漁巖), 옥화대(玉華臺), 천경대(天鏡臺), 오담(鰲潭), 인풍정(引風亭) 및 봉황대(鳳凰臺)를 두었다. 옥화구곡이란 이름이 암시하듯 구곡 가운데서 서계에게 가장 중요한 곳은 제4곡 옥화대였다. 옥화란 옥구슬이 떨어지듯 아름답다는 뜻이다. 옥화대의 이름에서 유래한 미원면 옥화리엔 서계가 지은 추월정(秋月亭)도 남아 있다. 서계처럼 ‘구곡’을 정해놓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에 침잠하는 태도는 16세기 이후 선비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했다. 전라도 해남의 고산 윤선도 같은 이도 ‘고산구곡’을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무려 십여 년 동안이나 서계는 옥화구곡에 칩거했다. 이 때 그는 기호지방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서신을 통해 태극도(太極圖)와 역학에 관해 토론을 벌였다. 여기서도 재차 확인되듯, 일평생 서계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역학이었다. 그에겐 또 하나 전문분야가 있었다. 음악이었다. 정두원(鄭斗源)을 상대로 거문고에 관한 지식을 교류했는데, 나중에 서계는 한국의 역대 금보(琴譜·거문고 악보)를 집성하여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를 만들었다. 일종의 거문고 악보였고, 이를 통해 서계는 한국음악사에 길이 남을 자료를 남겼다. 서계가 못마땅하게 여긴 광해군이 축출되고 인조가 즉위하자 그는 관직에 복귀했다. 선공감정(繕工監正)을 거쳐 충청도 괴산 군수에 임명됐다. 바로 그 때의 일이다.‘실록’에 보면, 서계는 서울에 올라와 국왕에게 사은(謝恩)하는 길에 의미심장한 예언을 했다. 서울 사람들의 음성을 듣고 나서 서계가 이렇게 말했다.“아직도 쇳소리가 거세게 나오고 있으니, 난리가 끝이 안 났다.” 그 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서계의 예언이 맞았다며 그의 예언능력에 감탄했다. 예언가 서계는 매우 유능한 지방관이기도 해 통치 실적이 당대 최고였다 한다(실록, 인조8년 5월28일 정미). 요컨대, 서계는 주역(周易)의 대가로 출세해 훌륭한 목민관(牧民官)이 되었고 정묘호란을 예언하기도 했다. 물론 예언가 서계의 명성은 그의 탁월한 주역 실력에 기인했다. 뒷날 서계는 후손과 후학들에 의해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과 귀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그들은 서계를 주역의 대가로서보다는 성리학자의 전형으로 기렸다. 이것은 예언가 서계에 관한 일반 민중들의 기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서계이선생가장결’의 내막 서계가 남겼다는 예언서의 제목엔 ‘가장결’이란 용어가 포함돼 있다. 말 그대로라면 집안에 보존되어 오던 비결이어야겠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앞서 말한 대로 후손과 후학들이 기억하는 서계는 근본적으로 성리학자였다. 그런데 그 ‘가장결’의 내용을 보더라도 그것은 서계의 집안에 전승된 비결은 아니었다. “선생이 사기막(沙器幕)에 살 때 이웃에 살던 최생(崔生)이 와서 여쭸다. 임진(壬辰)의 화는 피할 수 있었으나, 앞으로 2백여 년 뒤엔 반드시 큰 난리가 일어날 텐데, 그 일을 조목조목 적어두어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자 선생이 그럼 네게 말해줄까 라고 대답했다.”(서계이선생가장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따른다면, 문제의 예언서는 서계 집안에 전해진 것이 아니었다. 서계의 제자로 추측되는 최씨가 애써 부탁해서 얻은 예언서였던 만큼 그 전승과정에서도 최씨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봐야 한다. 과연 최씨는 서계의 예언을 받아 적었을까? 우선 당장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이 예언서가 ‘정감록’과 대체로 일치한다는 점이다. 잠시 예를 들어보자. “적호(赤虎):이인(異人)이 남쪽으로부터 오니 한곳에 소동이 일어난다. 왜인(倭人) 같으면서도 왜인은 아닌데 화친을 주장한다.(중략) 청계(靑鷄):천리 강산이 셋으로 나뉘니 어찌할 것인가.(중략) 흑룡·현사(黑龍·玄蛇): 푸른 옷과 흰옷이 함께 동쪽과 남쪽에서 나온다.”(‘서계이선생’) 위에 인용한 내용은 말세의 시운을 말하는 것인데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말세엔 이인 또는 진인이 등장한다. 둘째, 국토가 분단된다. 셋째, 남동쪽에서 정체불명의 침략군이 쳐들어온다는 것이다. 참고로 말해, 인용문에 나오는 ‘적호’와 ‘청계’ 같은 것은 60갑자를 이용해 연도를 표시한 것이다. 예컨대 ‘청계’의 ‘청’은 갑(甲)과 을(乙),‘계’는 유(酉)를 가리킨다. 청계는 곧 을유년이다.‘서계이선생은’ 을유년에 천리강산이 셋으로 나뉜다고 하였다. 이미 말했다시피 3국 분국설은 18세기 이래 정감록의 골자를 이뤘다.‘서계이선생’은 그 전통에 충실한 예언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일제식민지에서 해방되던 1945년이 바로 을유년이었다. 예언서의 내용과는 달리 나라는 셋으로 쪼개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 해에 남북으로 분단된 것은 틀림없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서계의 예언이 또 적중했다고 믿었다. 그것은 물론 우연이었다. 적호(병인)에 이인이 나와 화친을 주장한다는 내용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적중했다고 볼 수 있다. 무리한 점이 없지 않으나 고종 3년의 병인양요(1866)를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흑룡(임진) 현사(계사) 연간에 정체불명의 외국군대가 침략해 온다고 본 것은 전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만일 병인양요에 관한 예언이 들어맞았다면 그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병인양요를 겪은 뒤에 창작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서계이선생’은 일단 1860∼1870년대에 창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서계이선생’의 저술연대에 대해 좀더 생각해보자. 첫째,‘서계이선생’이 19세기 후반에 저술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그 근거는 예언서에서 발견된다.“이상하도다, 세상의 재난이여! 병란도 아니요, 칼날도 아니로다. 가뭄이 아니면 수재요, 흉년이 아니면 역병이다.”(‘서계이선생’) 여기서 보듯, 이 예언서에서 거론되고 있는 말세의 가장 중요한 조짐은 외침이나 내전을 비롯한 전쟁이 아니었다. 문제는 천연재해와 전염병이었다. 인플루엔자와 장티푸스, 콜레라가 한국을 강타해 많은 피해를 주었던 시기에 ‘서계이선생’은 쓰여졌다고 본다.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가며 민중을 몹시 괴롭히던 때 ‘서계 이선생’을 빙자한 말세의 예언이 나왔다고 추정된다. 그 때는 다름 아닌 19세기 후반이었다. 그러나 아직 갑오동학농민전쟁이나 청·일전쟁 같은 대사건이 터지기 전이었다. 그렇다면 병인년(1866) 이후 갑오년(1894) 이전에 저술됐다는 이야기다. 둘째,19세기 후반 창작설을 뒤집을 만한 근거도 ‘서계이선생’에서 발견된다. 문제의 예언서를 자세히 분석해보면 서계가 활동하던 16세기의 사정을 반영하는 부분도 있다. 이 기회에 ‘서계이선생’의 특징을 간략히 요약해 보자. ●‘서계이선생가장결’의 특징 이 예언서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위에서 언급한 대로 말세의 징후를 전염병과 자연재해에서 찾았다는 점이다.‘정감록’은 대체로 전쟁의 발발을 말세의 시작으로 본다. 둘째, 피란지를 충청도, 그것도 주로 충청북도에 설정하였다는 점이다. 충북 보은에 있는 속리산의 증항(甑項), 황간(黃澗)과 영동(永同) 사이, 청주(淸州) 남쪽과 문의(文義) 북쪽, 옥천(沃川)이 주요한 길지로 부각된다. 충청남도의 경우 진잠(鎭岑)과 공주의 유구(維鳩)와 마곡(麻谷)도 거론된다. 길지로 선정된 지역이 충청북도에 많고, 특히 청주와 보은을 중심으로 사방에 배치된 점이 인상적이다. 실제로 서계 이득윤의 고향이 충북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연치 않은 것 같다. 설사 말세의 징조에 관한 예언은 서계의 붓끝에서 직접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길지에 관한 언급은 서계와 모종의 관련이 있었을 법하다. 서계와 동시대의 인물이던 격암 남사고가 그랬듯, 서계도 자기 고향을 중심으로 길지를 논의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셋째, 이 예언서엔 부지런히 농사짓는 것이 말세를 헤쳐 나가는 최고의 방법으로 돼 있다.“이런 세상을 맞아 남편은 땅을 갈고 아내는 베를 짜되 벼슬자리에 오르지 말고 농사 짓는 데 부지런히 힘씀으로써 스스로 살길을 버리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이런 구절도 있다.“밭이여, 밭이여!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농사일에 진력하면 난세를 이겨낸다고 주장한 것이 흥미롭다. 이것은 여느 예언서와는 다른 점이다. 간혹 ‘정감록’에 밭(田) 또는 개활지에 살길이 있다고 된 부분이 있긴 하다. 하지만 ‘서계이선생’처럼 뚜렷하게 독농(篤農)을 주장한 경우는 없다. 굳이 부자가 될 필요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서계이선생’은 힘써 농사짓기를 거듭 강조한다. 이런 대목은 생전에 훌륭한 지방관으로 이름을 날리던 서계의 진심과 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계이선생’엔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서계의 본뜻을 담고 있는 대목도 있지 싶다. 그러나 어떤 부분은 서계가 작고한지 300년가량 지난 19세기 후반, 그 이름을 빌려 위작한 것으로 봐야 옳겠다. ●16세기는 예언가들의 전성시대 신기하게도 서계가 활동하던 16세기에는 문화계에 많은 별들이 등장했다. 특히 그 가운데 이름난 예언가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쏟아져 나왔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이것은 내 억단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 이유를 나는 다음의 세 가지로 짐작한다. 첫째, 당시 사회가 무척 불안정했다는 점이다.16세기에는 여러 차례 사화(士禍)가 일어나 억울하게 핍박을 받는 선비들이 많았다. 그들은 자연히 인간의 길흉화복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고, 그런 문제를 직접 연구하는 선비들도 생겨났다. 토정 이지함과 북창 정렴 등은 그 대표적인 경우다.16세기 후반에 이르러 당쟁이 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왜적이 침략해 사회는 위기감에 젖어들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16세기에 활동한 기인(奇人)과 이승(異僧)의 언행에서 예언을 발견하려는 분위기가 더욱 강화됐다. 둘째,16세기까지만 해도 한국의 문화계는 성리학 일변도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그 시기엔 성리학계에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대두해 자웅을 겨뤘다. 하지만 조선의 사상계는 아직 그다지 경화되지는 않았다. 이 시대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여러 학설에 골고루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대가들이 이단으로 지목한 불교, 도교 및 음양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한 마디로, 학계의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런 까닭에 격암 남사고의 경우처럼 역학 또는 음양학의 대가들도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을 받았다. 이 번호의 주인공 서계 이득윤 역시 그러했다. 셋째, 한국역사상 드물게 지방문화가 융성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실 통일신라시대는 물론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고급문화의 생산과 소비는 수도에서만 가능했다. 그 시대엔 지방에 고급문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중앙과 지방의 문화적 편차는 조선시대에 들어가자 급격히 줄어들었다. 중국에서 창안된 강남농법(江南農法)이 전해지면서 지역개발 붐이 일어났고, 새 시대의 국가적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의 이상에 따라 전원문화(田園文化)가 고급문화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16세기에는 경상, 전라, 충청도 각지가 경제적인 면에서 골고루 개발됐고, 그 문화적 수준도 서울과 비등하였다. 각지에 고급문화의 거점이 들어섬으로써 성리학이든 역술이든 대가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예컨대 남사고는 경상도 출신이며, 이지함과 이득윤은 충청도 출신이었다. 서산대사는 평안도에서 자라나 전라도와 강원도를 비롯한 각지에서 활동했다. 조선 후기에도 사회적 불안은 수그러지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는 더욱 심해졌다고까지 하겠다. 지방의 문화적 수준은 여전히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비해 서울과의 문화적 편차는 더욱 커졌다. 사상적인 면에선 어떠했나? 이른바 ‘이단’(異端)이 공식적인 논의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심지어는 성리학 내부에서도 사상적 통일을 강조하는 경향이 지나쳤다. 지배층이 내세운 이론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멀쩡한 성리학자들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배척되었다. 이처럼 사회분위기가 경직되다 보니 새 예언가가 ‘공식적으로 탄생’하기란 불가능했다. 예언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더욱 늘었지만 누구도 자기 이름을 내걸고 예언가로 행세할 수는 없는 분위기였다. 이런 판국이라 16세기를 수놓은 예언가들의 화려한 이름은 계속 도용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본래 예언가로 정평이 나있던 토정이나 서계의 이름을 빌려 새 예언서가 여러 차례 만들어졌다. 그와 더불어 그들은 해묵은 명성을 더욱 드날렸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킬러본능’ 새 잡는 슈퍼쥐

    쥐는 집안에 있는 음식찌꺼기나 훔쳐먹는 ‘변변찮은 동물’이라는 편견은 버려야 할 것 같다. 자연상태로 돌아간 쥐는 자기 몸집보다 몇 백배 큰 새를 산 채로 잡아먹는 ‘킬러’가 되기도 한다. 영국왕립 새보호협회(RSPB)에 따르면 ‘바닷새의 낙원’으로 불리는 남대서양의 영국령 고우섬에서 ‘슈퍼 쥐’들이 바닷새 새끼를 무차별 공격, 일부 희귀 바닷새들이 멸종 위기에 처했다고 인디펜던트가 25일 보도했다.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인 고우섬에는 약 1000만마리의 바닷새가 서식하고 있다. 험준한 지형이고 바람도 강하게 불어 천적들이 살지 못했기 때문에 바닷새들이 번식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이 섬에 정박한 영국 배에서 쥐들이 옮겨오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고우섬에 자리를 잡은 쥐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몸무게가 보통 쥐의 2배 이상으로 커졌고 ‘킬러’로서의 본능도 살아났다. 현재 이 섬에는 약 70만마리의 쥐가 살고 있는데 해마다 약 100만마리의 바닷새가 쥐들에게 희생된다고 RSPB는 밝혔다. 쥐들의 주 공격대상은 알바트로스(신천옹)의 새끼다. 한때 고우섬을 지배했던 알바트로스는 이제 멸종위기에 놓였다. 알바트로스 새끼들은 날지 못하고 쥐들은 떼를 지어 공격하고 있다. 그렇다 해도 쥐의 250배가 넘는 덩치를 가진 알바트로스 새끼들이 속절없이 당하는 이유는 납득하기 어렵다.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인권선진국으로 가는 길] (2) 여성이 일할 만한 나라(뉴질랜드)

    [인권선진국으로 가는 길] (2) 여성이 일할 만한 나라(뉴질랜드)

    뉴질랜드는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이 남성들과 어느 나라보다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나라다.‘효율성의 걸림돌’이라는 미명 아래 여성들의 권리는 무시될 수 없고 그만큼 여성의 능력을 발휘하며 사회적 지위를 유지한다. 이를 받쳐주는 원동력은 사회 구성원의 재생산이 달려 있는 육아 문제를 여성에게만 맡기지 않는 국가 사회적 인식이다. 정부나 기업이 육아에 대해 책임감을 가짐으로써 여성들이 마음껏 사회 생활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오클랜드(뉴질랜드) 이재훈 특파원| 지난 7일 오전 7시20분. 뉴질랜드 유명 방송국 TVNZ의 사업개발팀에서 일하고 있는 셰릴 가비(34·여)는 출근 준비로 분주하다. 아들 대니얼(2)에게 시리얼로 아침을 먹인 뒤 함께 승용차로 출근길에 나선다. 50분 걸려 방송국에 도착하면 셰릴과 같이 아이를 회사로 데려오는 부모를 위해 따로 마련된 전용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방송국 2층에 위치한 차일드케어 센터(Childcare Centre)에서 ‘아쉬운 작별’을 하면 셰릴이 퇴근하는 오후 5시까지 대니얼은 이곳에서 50여명의 또래 친구,5명의 선생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뉴질랜드에서는 육아 문제를 여성의 일할 권리를 보장하는 ‘모성 보호’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육아는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책임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짊어져야 할 공동의 의무’라고 정부나 사회가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직장에서 마련한 육아 시설에 아이를 맡기고 부담없이 일하는 뉴질랜드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일할 권리를 보장받고 있는 셈이다. ●“육아는 사회의 책임” TVNZ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인 오클랜드 중심 거리 빅토리아 스트리트에 있다. 차일드케어 센터는 이 건물에서도 가장 접근하기 쉬운 2층에 있다.2세 이하 영아와 3∼4세 유아를 위해 두 개의 침실과 실내외 놀이방, 목욕탕과 식당, 컴퓨터 이용실 등이 마련된 센터에서 50여명의 아이들이 장남감 놀이, 종이접기, 낮잠자기 등 저마다 하고 싶은 놀이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아이들은 모두 TVNZ 직원의 자녀들이다. 셰릴은 원래 주치의가 있는 병원 근처 사설 센터에 대니얼을 맡긴 적도 있다. 하지만 대니얼이 자꾸 울면서 엄마를 찾는 바람에 일에 집중할 수가 없어 넉달 전 회사 내 시설로 옮겼다. 업무 도중 잠시 짬을 내 대니얼을 품에 안은 셰릴은 “언제 무슨 일이 생기든 바로 찾아볼 수 있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다.”며 대니얼의 뽀얀 볼에 입을 맞춘다. TVNZ은 지난 89년 이 보육 공간을 만들어 사설 센터보다 15% 가량 싼 값에 직원의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다.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활발해지고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면서 뉴질랜드의 기업들은 기업이나 사회가 여성에게 동등한 기회를 제공해줘야 할 의무를 갖게 된 점을 알고 있다. 현재 TVNZ의 여성 직원 비율은 전체 980명 가운데 47%로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높다. 뉴질랜드에서는 공공기관이나 대학, 병원, 방송국 등에서 직원들을 위한 자체 차일드케어 센터를 마련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하지만 일반 중소기업 직원들은 보통 공공 또는 사설 센터를 이용하며 국가로부터 수입에 비례한 육아보조금을 노동시간당 2.34달러 정도 지급받는다. 때문에 사설 센터의 주당 이용료는 180∼200달러(한화 13만∼15만원) 정도지만 가계에 큰 부담은 없다. 뉴질랜드 정부는 또 만약 사설 차일드케어 센터가 정부의 인가를 받으면 아동 수에 따라 일종의 운영 보조금도 지급하고 있다. ●160명 돌보는데 선생님 45명 같은 날 오후에는 중심가에서 택시로 5분 거리인 르무에라 로드의 오클랜드 대학 차일드케어 센터를 찾았다.2년전부터 이 대학에서 일하고 있는 사무직원 수지타 쉐티(29·여)는 업무를 마치고 4살된 딸 선지나의 도형만들기를 도와주고 있었다. 수지타 역시 매일 아침 선지나와 함께 출근한 뒤 사무실과 걸어서 5분 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센터에 선지나를 맡기고 오후 5시까지 업무를 본다. 임신 8개월째인 수지타는 뱃속의 아이가 태어나면 역시 대학이 마련해준 센터에 맡기고 자기 일을 계속할 예정이다. 수지타는 “내가 어릴 때 엄마는 집에서 육아와 가정 일로 분주해 다른 직업을 가진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지만 지금의 우리는 육아의 부담을 덜고 자기 일을 가질 수 있다.”며 활짝 웃었다. 1970년 만들어진 오클랜드 대학 차일드케어 센터는 오클랜드 시내 4곳에 분산 운영된다. 학생과 교수, 사무직원과 대학 부설 병원 직원 등의 생후 6개월 이상 5살 미만 영유아 자녀 160여명이 45명의 자격증을 갖춘 선생들의 보살핌을 받는다. 2살 이하 영아들을 위해선 ‘몇 시에 기저귀를 갈았다.’,‘오늘은 아이가 자꾸 칭얼거린다.’는 등의 상세한 육아일기를 부모에게 제공하고 3∼4세 유아들을 위해서는 예술과 과학, 언어 등의 공부도 시켜준다. nomad@seoul.co.kr ■ 지금 뉴질랜드에선|오클랜드(뉴질랜드) 이재훈 특파원| 지난 7일 오전 호텔방으로 배달된 뉴질랜드 유력 일간지 ‘뉴질랜드 헤럴드’를 펼친 기자는 졸린 눈을 다시 한번 비벼야 했다. 뉴질랜드의 모성보호에 대해 취재하러 간 기자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든 건 바로 ‘선거 2005, 차일드케어-국민당이 세금으로 가족들을 유혹하려 한다.’는 신문의 1면 톱 기사 제목이었다. 뉴질랜드 제1야당 국민당이 오는 9월로 예정된 총선에서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 ‘엄마 이상의 그 무엇’이 되고픈 여성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공약을 들고 나온 것이다. 공약의 골자는 “한 가정의 취학 전 아이 한명당 연간 1650뉴질랜드 달러(이하 달러)의 세금을 환불, 아이 키우는 비용에 도움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신문은 ‘3살 된 아이를 키우며 맞벌이를 하고 있는 사라와 마크 부부의 경우 1년 수입은 8만달러 정도. 이 가운데 아이를 사설 차일드케어 센터에 맞기는 비용은 주당 180달러로 1년에 8820달러 정도인데 국민당이 이 비용 가운데 1650달러를 보전해 주겠다고 했다.’고 보도했다. 집권 노동당이 이제까지 보전해준 세금은 연간 310달러 상당이었다. 하지만 노동당은 2007년부터 3∼4세 취학 전 아동을 주당 20시간 국가가 의무 교육시키는 제도를 시행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이날 인터뷰를 위해 만난 사람들마다 화제는 ‘이 공약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가.’였다.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가장 큰 사설 차일드 케어 센터 체인을 운영하고 있는 킨더케어 러닝센터(Kindercare Learning Centre) 로젠느 살루니 센터장은 “나도 4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매주 200달러를 지불하고 있는데 1650달러면 어마어마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센터 직원 수지 왓슨은 “뉴질랜드의 미취학 아동이 모두 14만명이라 이를 위해선 1억달러의 재원을 마련해야하는데 이 역시 다른 세금 부담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부정적으로 내다봤다. 모성보호라는 이슈가 정권 재창출을 위한 주요 공약으로 신문 1면 톱을 장식하고 발길 닿는 곳마다 육아 문제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며 현실성 여부를 토론하는 나라. 뉴질랜드는 그래서 ‘여성 선진국’이란 이야기를 들을 만한 나라였다. nomad@seoul.co.kr ■ 여성정책과 실태 |오클랜드(뉴질랜드) 이재훈 특파원| 뉴질랜드는 1893년 세계 최초로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해준 나라다. 헬렌 클라크 총리, 아넷 킹 보건장관, 매리언 홉스 환경장관, 케리 프랜더게스트 수도 웰링턴 시장이 모두 여성이고 국회의원 120명 가운데 여성의원은 35명으로 29%를 차지한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비율은 60.8%로 남성의 75.0%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는다. 지난 5월 스위스의 세계경제포럼(WEF)이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도, 경제활동 기회, 정치적 권리, 교육 성취도, 보건복지 수준 등 5개 평가항목을 바탕으로 발표한 ‘여성의 권리와 남녀불평등조사’ 보고서에서 뉴질랜드는 스웨덴,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덴마크, 핀란드 등 북유럽국가에 이어 6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최하위권인 54위였다. 집권 노동당 여성위원회 부위원장 레슬리 소퍼 의원은 뉴질랜드 여성의 지위가 높은 이유를 국가 태생의 역사에서 찾았다. 지난 5일 웰링턴 국회의 의원 사무실에서 만난 소퍼 의원은 “19세기 초반 유럽인들이 섬나라 뉴질랜드를 개척하고 정착하는 데 여성들이 큰 역할을 했고 이후 여성들의 교육수준도 높였기 때문에 여성의 지위가 자연스레 올라갔다.”고 설명했다. 높은 여성 지위와 여성의 정치·경제 참여비율은 자연스레 여성을 위한 법과 제도를 갖추게 만들었다.1972년 남녀 동등임금법을 만들어 지난해 여성의 임금수준을 남성의 87%까지 끌어올렸고 1986년에는 세계 최초로 여성부를 만들었다. 여성부는 내각 최상급기관으로 모든 이슈를 여성의 입장에서 검증하는 역할을 맡는다. 1990년에는 기업내 남녀 고용 비율을 똑같이 맞추게 하는 동등고용법을 만들었으나 3년 뒤 집권당이 노동당에서 국민당으로 바뀌면서 폐기됐다. 하지만 1999년 재집권한 노동당이 법안 마련을 다시 추진하고 있다.2007년부터는 모성보호를 위해 정부기관이 모든 3∼4세 아동들의 교육을 주당 20시간 책임지는 의무 육아교육시스템도 시행할 예정이다. nomad@seoul.co.kr 협찬 KT
  •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생활로봇’ 왕국 꿈꾸는 日 오사카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생활로봇’ 왕국 꿈꾸는 日 오사카

    “500년 제조업 벤처의 전통을 살려 오사카를 로봇산업의 메카로 만들자.”. 오사카의 중소기업과 대학, 시 당국은 물론 시민들이 로봇산업 부흥을 통한 ‘모노쓰쿠리(제조업) 오사카’ 부활의 꿈을 키우고 있다.2만여개 중소기업들이 선두에 서고, 대학 교수와 학생들이 아이디어를 제공하면 오사카시·부 정부는 예산을 지원한다.260여만 시민들은 시제품 실험에 적극 응해주는 등 산·학·관·민 일체다. |오사카 이춘규특파원|오사카의 제조업은 16세기 말 오사카성을 축성할 때부터 본격화된다. 총기 제조가 주류였다. 19세기 말 방적업이 활발, 동양의 맨체스터로 불렸고 이후 기계, 부품, 소재산업과 전후에는 철강, 조선, 화학 등을 거쳐 태양전지, 액정패널 같은 각각의 시대가 요구하는 산업과 상품에 끊임없이 도전, 발전해 왔다. ●‘로봇산업=오사카시대’ 열겠다 도전의 도시 오사카시, 나아가 인구 1700만명의 오사카 생활권이 최근 수년간 “로봇산업 하면 오사카”를 세계인이 떠올릴 수 있도록 로봇산업 진흥에 도전하고 있다. 마사키 히로시 오사카부 홍보실장은 “로봇은 물론 바이오, 나노 등 새로운 비즈니스 개발에 도전하겠다.”면서 오사카인들의 끊임없는 ‘도전정신’을 강조했다. 다카노 슈이치 오사카시 로봇산업담당과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오사카는 마쓰시타전기산업, 샤프, 산요전기, 미즈노 등 세계적인 제조업의 전통이 있는 고장”이라며 “이처럼 실생활과 관련된 벤처에서 출발한 기업들의 모태인 오사카가 10년 뒤에는 ‘로봇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사카시 주택가에 산재한 2만여개의 중소기업 중 로봇과 관련된 150여개 기업이 현재 로보(RooBo)라는 중소기업네트워크에 가입해있다.7개 안팎씩의 기업·대학연구소 등과 20여개 컨소시엄을 형성, 생활로봇을 만드는 데 도전중이다. 오사카시는 연간 2억 5000만엔을 지원한다. ●도전하는 중소기업이 앞장선다 중소기업중 로봇 연구 및 생산에만 전념하는 기업은 아직 없다. 내년에 로봇전업기업의 출범을 꿈꾼다. 현재는 기업들이 핵심 부품기술을 갖고 개별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형식이다. 로봇제품을 개발, 대기업이 실용화하거나 직접 대량생산하는 것도 목표로 한다. ㈜에잇테크 기무라 토시오 사장, 후쿠치금속㈜ 후쿠치 마모루 사장 등은 현재 산학 연계 컨소시엄을 결성, 대형 수족관 내부를 청소할 로봇을 개발하고 있다. 누전 등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수력을 이용한 로봇이다. 비행기 모형이나 특수스탠드, 금형 등 수많은 제품을 소량 생산하고 있는 에잇테크의 기무라 사장은 “세계에서 누구도 흉내내지 못하는 기술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 목표”라면서 소방로봇도 개발하고 싶다는 의욕을 비쳤다. ●교수, 연구원, 학생, 시민도 참여 오사카시의 산·학·관·민 합동 로봇산업 진흥에는 오사카대학 대학원의 아사다 미노루 교수 등이 후원자로 활동하고 있다. 시와 오사카부 당국은 자금과 연구공간을 지원한다. 오사카 시내 대학생들은 인턴사원으로 중소기업 현장에서 기술을 익히고, 자원봉사도 한다. 시민들도 기업들이 행하는 제품 실험에 적극 협조한다. 지역특성이다.“오사카사람들은 남을 돕길 좋아한다. 로봇팬들도 많다. 그게 중소기업에는 힘이 된다.”(간사이국제홍보센터 아리야마 히토시 심의역) 오사카 로봇산업의 연구지향점은 인간의 삶의 질 개선. 각종 로봇관련 대회나 이벤트를 만들어 기술력 향상도 꾀한다. 그러면서 병간호나 말동무, 청소 등 인간생활에 도움이 되는 로봇을 개발하기 위해 지혜를 모으고 있다고 아사다 교수는 설명한다. 아사다 교수는 로봇이 인간의 영역을 침해하거나 인간성을 상실시킬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인간이 싫거나 힘든 것을 로봇이 대체하면 된다.”고 로봇만의 역할을 강조했다. ●오사카의 꿈 2009년 시작 지난해 11월 로봇전문가인 이시구로 슈가 중심이 돼 오사카역 근처 역전 제3빌딩 16층에 로봇연구실험실을 열었다. 오사카부와 오사카시, 오사카 경제인들이 힘을 모았다. 차세대 로봇산업 진흥과 개발, 지원의 총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로봇연구실험실은 중소기업 로봇산업네트워크를 지원하고, 연구자·기술자와 산업계의 교류를 촉진한다. 시장에서 제품실험프로젝트도 실시한다. 로봇산업 활성화 이벤트도 자주 마련한다. 특히 2011년까지는 오사카역 북쪽의 드넓은 화물열차기지에 로봇산업기업, 도시형주택, 호텔, 연구·개발전시관, 상업지구, 비즈니스센터 등이 들어서는 ‘지식자본’기지를 완성, 로봇산업의 총본산으로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꿈의 로봇산업비즈니스거점은 2009년 우선 완공된다. 오사카시는 지식자본기지 가시화를 위해 지난 15일 북미지역투자유치단 등을 상대로 설명회를 통해 “첨단기술과 인간의 피드백이 잘되고, 서비스와 거주지가 제공되며 노하우가 축적돼 사업 성공률이 높은 오사카에 투자하라.”고 호소했다. 다카하시 토루 오사카시 도시재생기획담당과장은 “마쓰시타, 샤프, 산요 등은 오사카에서 벤처기업으로 출발해 크게 성공했다.”면서 ‘로봇은 왜 오사카인가.’를 강조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2025년 차세대 로봇산업시장은 7조 2000억엔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아울러 오사카시와 연구자, 중소기업인들은 지난 13일부터 17일까지 오사카시 남항지역에서 로보컵2005세계대회를 개최했다. 로보컵은 일본 연구자들이 제창,1997년 시작돼 올해로 9회를 맞았다. 올해는 한국·미국·일본 등 31개국 330여개 팀에서 2000여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taein@seoul.co.kr ■ 아카자와 요헤이 (주)시스테크 사장|오사카 이춘규특파원|항공·우주산업 부품 등을 생산하는 ㈜시스테크 아카자와의 아카자와 요헤이 사장은 “자원이 없는 일본은 제조업을 해야 하는데 비행기, 로켓, 반도체, 디지털제품 등의 부품은 최근 1년반 사이에 새로운 모델이 나오는 등 경쟁이 심해 로봇산업에 도전하게 됐다.”는 전형적인 오카사 중소기업인이다. 아버지 때부터 일궈온 그의 회사는 65년 역사를 자랑한다. 주택가에 위치한 회사에서는 지금도 항공기나 로켓 부품 등을 만들고 있으며 로봇은 전체 매출에서 10%를 차지한다. 시스테크는 시대의 변화에 맞춰 끊임없이 변화, 발전해 왔다.1950년대에 화물열차 부품을 만들었다. 이후 중공업시대가 열리면서 선박 부품을 만들었고,70년대 이후 원자력발전소 터빈, 모터, 발전기 등의 부품을 제작했다. 신칸센과 전차 부품, 항공기와 로켓, 반도체관련 부품까지 만든다. 15일 오사카시내 공장에서 만난 아카자와 사장은 91년 일본경제의 거품 붕괴는 시련이었다고 말했다. 새롭게 도전할 사업을 물색하다 2003년 로봇산업에 뛰어들었다. 전업은 아니고 ‘7명의 로봇산업 사무라이’가 지혜를 모은, 네트워크 형식이다.2003년 300만엔이던 로봇관련 매출은 지난해 2900만엔으로 급증했고, 올해 6000만엔을 예상하고 있다. 그는 오사카의 부활은 로봇산업의 성공여부에 달렸다고 강조한다.2만개의 중소기업 중 800개사가 로봇관련 잠재기술을 갖고 있고, 그 중 150여개사가 로봇산업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이 오사카 차세대 로봇산업의 기수라는 것이다. 아카자와 사장은 “오사카대 아사다 미노루 교수 등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로봇을 연구시켜 기업들에 연구성과를 제공하는 등 오사카는 로봇산업을 하기에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며 로봇사업에 뛰어든 배경을 설명다. 아울러 90년대 중반 도산위기를 경험한 뒤 대기업 하청만이 아닌 스스로의 사업으로 활로를 찾아야 미래가 있다고 판단, 오사카시 비즈니스인큐베이터에 가입해 그 곳에서 교수·연구원 등의 지원을 받으며 희망을 일궜다. 그의 꿈은 원대하다. 한국기업과 실용로봇 수출관련 상담을 진행중이다.17일 끝난 로보컵2005대회 인간형로봇부문 축구대회에서는 그의 회사가 포함돼 있는 네트워크가 2연패했다.2연패후 지명도가 높아져 지난해 우승한 로봇 ‘비전’을 대학과 다른 중소기업들이 연구용으로 250대나 사갔다. 가격을 현실화시키자 공립중학교들로부터 교재용 주문이 잇따르고 있다. 다양한 로봇도 개발중이다. 손님을 안내하는 펭귄로봇에 대한 주문을 받고, 제작을 서두르고 있다. 피아노에 광택을 내는 로봇도 생산 가능성을 타진받고 신이 나 있다. 로봇사업에 뛰어든 지 3년 만에 로봇계의 신흥강자로 떠오르는 그는 ‘세계인들에게 로봇하면 오사카’라고 알리고 싶단다. 현재는 로봇의 매출에서 연구비를 빼면 마이너스이지만 2년뒤에는 흑자로 전환될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다른 부품사업들도 포함하면 회사는 수년째 흑자경영이다. taein@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8) 토정 이지함과 ‘토정가장결’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8) 토정 이지함과 ‘토정가장결’

    ‘토정비결’(土亭秘訣)을 굳게 믿는 친구가 있다. 그는 해가 바뀔 때마다 자기 자신의 일년 신수는 물론 가족과 친지들의 새해운수도 일일이 챙겨준다. 실은 그 친구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엔 그런 이들이 참 많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1517~1578년)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토정은 매월당 김시습, 북창 정렴과 함께 조선의 3대 기인으로 손꼽힌다. 놀랍게도 ‘정감록’가운데는 토정이 지었다는 ‘토정가장결’이 포함돼 있어 관심을 끈다. 더욱이 이 예언서는 여러 대 동안 비밀리에 전해졌다고 하므로 더욱 호기심이 일어난다. 그런데 ‘토정가장결’에 무슨 사연이 담겨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친숙한 이름이긴 하지만 실상 우리가 잘 모르는 토정 이지함의 비극적인 생애를 알아보자, 이 기회에 그가 후세에 남겼다는 ‘토정비결’과 ‘토정가장결’, 그리고 ‘정감록’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좋겠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을 굳게 믿는 친구가 있다. 그는 해가 바뀔 때마다 자기 자신의 일년 신수는 물론 가족과 친지들의 새해운수도 일일이 챙겨준다. 실은 그 친구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엔 그런 이들이 참 많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1517~1578년)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토정은 매월당 김시습, 북창 정렴과 함께 조선의 3대 기인으로 손꼽힌다. 놀랍게도 ‘정감록’가운데는 토정이 지었다는 ‘토정가장결’이 포함돼 있어 관심을 끈다. 더욱이 이 예언서는 여러 대 동안 비밀리에 전해졌다고 하므로 더욱 호기심이 일어난다. 그런데 ‘토정가장결’에 무슨 사연이 담겨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친숙한 이름이긴 하지만 실상 우리가 잘 모르는 토정 이지함의 비극적인 생애를 알아보자, 이 기회에 그가 후세에 남겼다는 ‘토정비결’과 ‘토정가장결’, 그리고 ‘정감록’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좋겠다. ●토정은 대단한 기인(奇人) ‘조선왕조실록’엔 토정의 풍모를 전해주는 몇 가지 기록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지함을 토정이라 불렀다. 이지함이 거처하던 곳이 토정(土亭)이었기 때문이다. 토정은 일찍이 한양의 마포 항구(麻浦港口)에 흙을 쌓아 언덕처럼 만들어 놓고 그 아래 굴을 팠으며 위에는 정자를 지었다. 그런데 큰물이 졌을 때도 토정이 만든 흙 언덕은 언제나 그대로였다(실록, 선조 수정 11년 7월1일 경술). 토정은 여느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어 보이는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이었다. 특히 발이 무척 컸다고 한다. 토정의 얼굴은 둥글고 검은 편이었고 눈빛이 강렬했다. 목소리는 우렁차고 맑아 상쾌한 느낌을 주었다. 토정은 보통 선비들과는 차림새도 확연히 달랐다. 그는 짚신을 신고 죽립(竹笠)을 쓴 채 걸어 다녔다고 한다. 초립(草笠)에 나막신을 신은 구부정한 모습이었다는 진술도 있다. 그 당시 선비들은 당연히 조랑말이라도 타고 다녀야 되는 줄로 알았고, 항시 의관을 정제했다. 고급스러운 말총으로 꾸민 큰 갓을 쓰고 가죽신을 착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토정은 이런 풍습을 도외시했으므로, 그가 길거리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며 비웃기 마련이었다. 담화를 나눌 때도 토정은 수수께끼나 농담을 즐겼고, 점잖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도 많았다(실록, 선조 수정 6년 5월1일 경진). 한마디로, 토정은 격식을 초월했다. 혼례를 치른 다음 날에도 의외의 행동으로 가족과 친지들을 놀라게 했다. 모처럼 새로 지은 도포를 입고 외출한 토정은 어느 다리 밑을 지나다가 추위에 떨고 있는 세 명의 거지아이를 만났다. 토정은 입고 있던 새 도포를 벗어 세 폭으로 찢어서 그 아이들에게 입혀주었다. 그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종일 바깥에서 일을 보았다. 토정은 이처럼 호방한 성격이었다. 도인의 면모를 보인 적도 많았다. 그는 열흘 정도는 굶어도 거뜬했다. 무더운 여름철에도 냉수 한 모금 마시는 일이 없었다. 요즘의 건강상식에 크게 어긋난 행동이었다. 토정은 간혹 천리 길을 걸어 어딘가를 바람처럼 다녀오기도 하였다. 배를 타고 방랑하기를 좋아해 제주도를 여러 번 찾았다는데 태풍이 불거나 파도가 거센 날을 용케 피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간혹 여행 중에 기생들이 별의별 수단을 다 써 유혹했으나 한 번도 넘어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토정은 정욕마저 완전히 끊어버린 이를테면 속세의 신선이었다는 이야기다.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설화도 그래서일까. 토정에겐 앞일을 내다보는 예지 능력이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장인에게 화가 닥칠 것을 미리 알았다 한다. 명종 초년의 일이다. 하루는 토정이 그 부친에게,“아내의 가문에 불길한 기운이 있어 집을 떠나지 않으면 장차 화가 미칠 것입니다.” 라고 아뢴 뒤 식구들을 이끌고 서둘러 한양을 떠났다. 바로 그 다음 날, 토정의 장인은 사화에 연루돼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까지 용했을까 하는 일말의 의문이 없지 않다. 어쨌거나 ‘실록’은 토정의 예언 능력을 무척 칭찬한다. 한 번 사람을 만나보면 그 성품은 물론, 앞날의 길흉까지 환히 알아 맞혔다 한다. 토정은 이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오래 전에 사태를 예언했다는 구비설화가 남아 있다. 만년에 그는 조선 팔도를 두루 유람했다고 한다. 당연히 천하명산 금강산에도 들렀다. 하루는 날이 기울자 토정은 지친 몸을 이끌고 암벽 위에 서 있는 초라한 암자를 찾아갔다. 워낙 피곤해서 제대로 자리를 펴고 누울 겨를도 없이 방안에 들어가 한 쪽 벽에 기대어 깜빡 잠이 들었다. 조금 있다가 꿈속에 스님 두 분이 나타났다. 그들은 병풍과 자리를 깔며 부산을 떨었다. 토정은 스님들에게 그 까닭을 물었더니, 여러 산의 산신령들이 모여 장차 다가올 난리를 의논할 거라는 답변이었다. 과연 전국 명산의 산신령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회의를 열었다. 여러 주장이 난무했다. 그러자 금강산 산신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왜놈들이 동방예의지국 조선을 침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최선을 다해 놈들을 물리치자고 주장했다. 놀란 토정은 퍼뜩 깨어났다. 조금 전 기대어 잠을 청했던 암자는 오간 데 없었다. 암벽 위엔 한 그루 늙은 소나무만 외롭게 서 있었다. 이런 일을 겪고 나서 토정은 왜란이 일어날 줄을 짐작했다. 이것은 한낱 설화다. 토정을 뛰어난 예언가로 간주하게 된 후대의 민중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수가 있다. 역사 속에서 믿고 따를 만한 인물을 재발견하는 것이 민중들로선 익숙한 일이었다. 그들은 본래 토정이 특이한 선비인 줄 알고 있었으므로, 이런 설화를 덧붙여 민중의 스승으로 이상화했다고 풀이된다. 왜란에 관해선 또 다른 이야기가 토정의 문집에 실려 있다. 일찍이 그는 상중(喪中)에 있던 제자 조헌(趙憲)을 조문하였다. 그날 혜성(彗星)이 밤하늘에 뻗쳐 조헌이 그 조짐을 물었고, 토정은 이 혜성이 천하에 큰 난리가 일어날 조짐이라며 그때에 대비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다 한다(실록, 영조 30년 11월27일 임인). 스승의 말을 가슴에 새긴 조헌은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돼 금산에서 북상하던 왜적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문집의 기록은 사제간의 문답을 확대 해석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토정이란 인물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기도 한다. 그는 일상적인 일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국가의 장래를 염려했던 것이다. 토정은 다분히 도가적(道家的)이었지만 본질적으론 유가(儒家)의 선비였다. ●사화에 얽혀 불우했던 토정 사실 토정은 국가경영에 관심이 컸다. 평상시 그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내가 일백 리 되는 고을을 맡아 다스리게 되면 가난한 백성을 모두 부자로 만들고 야박한 풍속을 돈독하게 바꿀 것이다.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아 나라의 평안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토정은 벼슬에 나아갈 기회를 얻지 못했다. 명종5년(1549년) 토정이 33세 되던 해에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토정의 장인이 역모사건에 연루돼 사형을 당했고, 연좌법에 걸린 토정은 벼슬길이 막혔다. 설상가상으로 죽마고우(竹馬故友) 안명세(安名世)마저 필화를 입고 죽었다. 사관(史官)으로 이름이 높았던 안명세는 명종 연간 을사사화(1545년)에 관련해 윤원형과 이기 등 소윤(小尹)이 윤임 등 대윤(大尹)을 모함해 몰살했다고 적었다. 윤원형 일파는 몰래 사초를 들여다보았고, 자기들에게 불리한 기사를 쓴 안명세를 제거한 것이다. 이후 토정은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기인(奇人)으로 처세하게 됐다. 지지난 호에 소개한 정렴은 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의 아들이라 스스로 세상을 피했던 데 비해, 토정은 억울하게도 세상에 용납되지 못해 기벽(奇癖)을 갖게 됐다고 해야 맞다. 어찌 보면 세상을 원망하고 자포자기하기가 참 쉬웠을 텐데, 토정은 절망하지 않고 학문에 힘썼다.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및 의학에도 발군의 실력을 보였고, 조헌과 이산보를 비롯해 여러 제자를 키웠다. 조정이 토정에게 벼슬길을 열어준 것은 한참 지나서였다. 을사사화의 주도세력이 조정에서 물러난 선조 초년이었는데, 그 사이 토정은 이미 늙어버렸다. 그는 60이 가까운 나이에 사실상 초임이나 다름없는 아산군수 자리에서 세상을 떴다. 평생 닦아온 선비의 웅지를 펼칠 겨를도 없었다. 토정이 남긴 글은 뒷날 ‘토정유고’(2권1책)로 정리됐다. 이와는 별도로 민간에서는 ‘토정비결’과 ‘토정가장결’, 주역(周易)에 관한 ‘월영도’, 풍수지리를 다룬 ‘농아집’ 등을 토정의 저술이라 일컫는다. 그런데 실상 ‘토정유고’에는 위에 언급한 어떤 책자도 거론되지 않고 있다. 만일 실증주의의 입장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토정비결’이나 ‘토정가장결’ 등은 토정의 저술이 될 수 없다.‘토정유고’외에는 이지함의 저술로 단정할 만한 결정적인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모두 후대의 위작으로 볼 것인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토정비결의 매력 물론 어느 쪽도 단언하긴 어렵다. 그러나 다른 책은 몰라도 ‘토정비결’만은 토정의 붓끝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토정은 의학과 점에 능통했기 때문에 그를 찾아와 운수를 묻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일반의 그런 요구가 많아지자 토정은 아예 한 권의 책을 지어 일상의 번거로움에서 해방되기를 도모했을 법도 하다. ‘토정비결’은 주역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주역과는 다르다. 주역의 기본 괘는 48개인데 비해 ‘토정비결’은 32개다. 괘를 짓는 방법도 달라 이른바 사주 가운데 시(時)를 뺀 년(年), 월(月), 일(日)을 사용할 뿐이다. 조선시대 민간에는 시계가 없어 시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편의를 도모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토정비결’은 주역을 이용하면서도 조선의 특성을 십분 고려했다. 그러다 보니 점괘의 총수도 주역과는 다르게 됐다. 주역에는 총 424개의 괘가 있으나 ‘토정비결’은 총 144개뿐이다. 훨씬 간편하다고 말할 수 있다. 토정 이지함처럼 기발하고 독창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토정비결’은 열두 달의 운수를 시구(詩句)로 적어 놓았다.“동쪽에서 목성을 가진 귀인이 와서 도와주리라.”,“관재수가 있으니 혀끝을 조심하라.”는 식이다. 간단명료한 글귀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은 점괘다. 각 항목마다 길흉이 적절한 비율로 배합돼 있어 낙관도 실망도 하기 어렵게 돼 있다. 결과적으로,‘토정비결’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며, 일마다 조심스럽게 정성을 다해 처리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토정비결’은 운수를 판별하는 데 중점이 있다기보다 일반 민중들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토정비결’은 단순히 점을 봐주고 금품을 요구하는 직업적인 점쟁이의 저술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내 눈엔 그것이 점을 통해 점을 치는 사람들이 점에만 의존하지 않게 유도하는 기능이 숨겨진 반점술서(反占術書)로 보인다. 토정 이지함과 같이 점에 능통하면서도, 본질적으론 유가(儒家)의 철학을 신봉한 큰선비가 남겼을 법한 저술이다. ●그럼 ‘토정가장결’은? 정리하면, 토정은 살아생전에 이미 기인, 도사 그리고 큰선비로 세상에 유명했다. 더욱이 후세에는 ‘토정비결’과 같은 명저의 지은이로 민중에게 더욱 친숙한 이름이 됐다. 그가 만일 무수한 개인의 운명을 점칠 수 있다면, 나라의 운수인들 모를 까닭이 있었겠느냐는 의견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맴돌았음이 틀림없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선 토정이 남긴 예언서가 어디선가 발견돼야만 했다. 이것이 조선후기 ‘토정가장결’이 탄생한 문화적 배경이다. 분명한 사실은 ‘토정가장결’에 앞서 ‘정감록’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조선왕조가 망하고 진인 정씨가 새 나라를 세운다는 ‘정감록’의 예언을 참작해 ‘토정가장결’이 쓰였다.“내 비록 재주 없으되 우러러보고 굽어 살피며 수년 간 별의 숫자로 헤아려 보니 한양이 50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토정가장결’은 이런 식으로 조선왕조의 멸망을 점쳤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수년 간 별의 숫자로 헤아려” 본 결과, 조선왕조의 운수를 짐작하게 됐다고 했다. 천문에 중점을 두고 예언을 했다는 점이 ‘토정가장결’의 특징이다.‘감결’을 비롯해 다른 예언서들이 풍수지리에 의존해 국운을 점친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참고로, 천문 점의 전문가들은 서북지방에 많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의 천문지식은 중국 사람들도 감탄할 정도였다. ‘토정가장결’에 보이는 두 번째 특징은 압록강 이북의 요동이 중시된다는 점이다. 이 점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잠시 비결을 인용하겠다.“장류수(계사) 운은 푸른 옷과 흰 옷이 서쪽, 남쪽에서 침략한다. 이때 전읍(奠 , 즉 鄭姓 眞人)이 바다 섬의 군사를 이끌고 방성, 두성의 장수와 함께 갑오년 섣달 즉시 금강을 건너면 다시 천운이 커질 것이다.(중략) 곽 장군이 요동 군사를 이끌고 방씨, 두씨 장수와 함께 왜적 및 서남 오랑캐를 무찌르며, 청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돕는다. 정씨를 편들고 이씨를 공격하면 이씨는 제주로 들어갈 것이니 4,5년간의 운수에 지나지 않는다.” 요약하면, 계사년에 외침이 있는데 만일 그 때 요동의 곽 장군이 나서서 정씨를 도우면 동아시아의 정치질서가 재편된다고 했다. 곽 장군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확립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는 것인데, 곽 장군은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 사람으로 상정되었다. 늦어도 19세기 후반엔 고구려의 옛 땅이던 만주가 가난에 쫓겨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간 상당수 민중들의 손길로 개발되고 있었다.‘토정가장결’에 등장하는 곽 장군은 아마도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인물로 해석된다. 달리 말해, 간도에 진출한 빈농들이 이상적인 지도자로 여겼을 법한 가상인물이다. 셋째,‘토정가장결’은 난세의 피란지로 전혀 새로운 장소를 거론했다.“만약 요동 간방으로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라면 반드시 삼척부 대소궁기를 향하여 부지런히 힘을 기울여 곡식을 쌓을 일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정감록’은 주로 삼남 지방에 십승지 또는 길지를 설정해두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경상도의 풍기, 충청도 공주 및 전라도 운봉이었다.‘토정가장결’은 이를 정면에서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요동과 삼척이란 뜻밖의 장소를 최고의 길지로 내세운다. 확실히 새로운 변화였다. 여기서 나는 ‘토정가장결’이 출현한 시기를 좀더 정확하게 짐작해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간도로의 ‘불법이민’이 본격화된 19세기 후반에 이 예언서가 창작된 것은 아닐까. 참고로, 삼척이 길지로 대두된 이유를 헤아려 보겠다. 토정에 관한 구전설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한때 토정은 삼척에 머문 적이 있었다는데 거기서 스님 행색으로 위장한 왜놈 첩자를 붙들었다. 이 일로 임진왜란 때 왜군은 토정이 살던 삼척에는 아예 얼씬도 못했다는 설화가 있다. 신기하게도 구전설화는 예언서의 내용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 모양이다. 물론 거꾸로 됐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토정은 정치적으로 무척 불우한 재사였다. 그래서 그는 기인이자 도사가 되기도 했고,‘토정비결’ 같은 책을 지어 고난 받는 민중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으려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토정은 민중의 스승으로 자리매김돼 ‘토정가장결’의 저자로도 둔갑됐다.‘토정가장결’은 ‘정감록’의 논리를 존중하면서도 19세기 후반의 변화된 사회현실을 그대로 투영한다.“알 자는 알리라.” (푸른역사연구소장)
  • [씨줄날줄] 산업스파이/육철수 논설위원

    인류역사상 오래된 전문직업을 굳이 꼽자면 아마 매춘부가 1위, 스파이가 2위쯤 될 것이라고 한다. 초기의 인류에겐 남녀관계나 적정(敵情)을 살피는 일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파이는 군사적 의미에 머물다가 19세기 산업화 이후 산업스파이로 본격 확대된다. 역사상 첫 공식적인 산업스파이 행위는 1500년 전 비단의 전래다.552년 중국에 갔던 수도사들은 뽕나무 씨와 누에를 지팡이에 숨겨가 동로마제국 황제에게 바쳤다.751년에는 아랍인들이 당나라의 명장 고선지와 싸워 이겨 중국 제지공들을 데려가 제지술을 서구에 전파했다. 고려말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붓뚜껍에 목화씨를 숨겨와 의류혁명을 일으킨 것도 일종의 산업스파이로 볼 수 있겠다.18세기 영국은 중국과의 차(茶) 무역 적자를 줄이기 위해 차 재배법을 훔쳐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미국 최초의 산업스파이는 1811년 영국의 방직기 기술을 훔친 캐벗 로웰로 기록돼 있다. 산업기술을 훔쳐내는 수법도 다양하다. 문서빼내기, 미인계로 핵심 기술자 꾀기, 납치 등은 고리타분한 수법에 불과하다. 지금은 경영컨설팅이나 기술자문, 합병전 경영실사 등 감쪽 같은 고난도 수법이 주로 활용된다. 정보를 빼돌리는 수단도 녹음기, 초소형 사진기, 컴퓨터 하드디스크, 인터넷 해킹 등 최첨단 기기와 기술이 총동원된다. 산업스파이가 제법 흔했던 19세기 유럽에서는 머리 좋은 산업스파이를 체계적으로 양성해 문서를 통째로 외워 오게 했다는데,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국내에서 또 6000억원대 반도체기술이 중국으로 새어나갈 뻔했다. 유출직전 막았기에 망정이지 이게 성공했더라면 12조원대의 손실이 난다고 한다. 그러잖아도 우리나라는 최근 7∼8년간 60건 이상 산업스파이 사건이 발생해 60조원의 피해를 입었다. 세계적으로도 1000대 기업의 56%가 산업스파이 때문에 골치를 앓는다. 경제대국 미국은 1980년대 산업스파이 피해액이 공식집계로 1조 2000억달러에 이르고, 지금도 한해에 450억∼2500억달러나 된다고 한다. 기술은 개발도 힘들지만 지키기는 더 어려운 법이다. 특히 이웃 중국은 유럽과 미국에 산업스파이를 대거 심어놓았고, 일본은 이미 소문난 산업스파이국이다. 세계적 산업스파이국들로 둘러싸인 우리로서는 철저한 문단속만이 살 길인 것 같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7)무학대사와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7)무학대사와 ‘정감록’

    ‘정감록’엔 이른바 삼절운(三絶運)이 예언돼 있다. 조선왕조의 운수가 세 번 끊길 위험에 처한다는 것인데,“이씨의 운에 세 개의 비밀스러운 글자가 있으니 소나무, 집, 그리고 밭이라(李氏之運 有三秘字 松家田三字也)”고 한 구절이 그것을 집약하고 있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소나무, 집, 그리고 밭이 최적의 피란처란 뜻이다. 소나무(松, 명나라 장수 李如松) 덕택에 임진왜란을 넘길 수 있었으며, 병자호란은 겨울철에 일어난 전쟁인 데다 단기간의 전쟁이라 집에 조용히 머문 사람은 무사했고 멀리 피란간 사람들은 도리어 혹한을 만나 얼어 죽었다는 이야기다. 밭이 피란처가 되는 것은 세 번째 위기가 닥쳐올 때라고 했다. 위기가 닥쳐올 시기에 대해 “해를 헤아려보면 세 번의 전쟁은 원숭이, 쥐 또는 용해에 일어난다.(考基年數 則兵在申子辰)”고 했다. 임진(辰)·병자(子)는 이미 역사적 사실로 입증됐기 때문에 원숭이해가 언제인가로 초점이 모아졌다. 조선 후기 기득권층은 그 해가 언제냐며 전전긍긍해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왕조의 종말을 바라던 사람들은 이 예언에 큰 희망을 걸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도 이 예언을 남긴 사람은 무학대사(無學大師)라고 했다. 무학이라면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로 한양 천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조선왕조의 멸망 시기를 예언했다니 갑자기 어리둥절해진다. 무학은 정말 조선 왕조의 멸망을 예언했을까. 만일 그런 일이 없었다면, 언제 누가 왜 무학의 이름을 판 것일까.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사실 태조 이성계는 무학에게 정신적으로 적잖이 의지했다. 이 점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실세로 등장하자 이성계는 왕위를 버리고 고향땅 함흥으로 낙향했다. 이것은 태종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의 표현이었고, 따라서 태종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정치적 부담이었다. 태종은 부왕을 다시 서울로 모셔오지 않으면 안 됐고, 그래서 여러 차례 함흥으로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항간에는 태조가 함흥으로 내려온 사신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고도 한다. 어딜 가서 아무 소식도 전하지 못하는 경우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유래는 태종 때의 복잡한 사정을 반영한다. 태조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태종은 마침내 무학대사를 함흥으로 보냈다. 평소 태조는 무학을 한없이 공경하고 믿었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라면 태조의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태종2년 11월9일 무자). 과연 무학의 설득은 효과가 있어 얼마 후 태조는 다시 서울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 만큼이나 태조는 무학을 존경했고 인간적으로 신뢰했다. 몇 년 뒤 무학이 타계하자 태조는 아들 태종에게 부탁해 무학에게 묘엄존자(妙嚴尊者)라는 시호를 내리게 하였다(태종 10년 7월12일 정축). 마지못해 태조의 뜻을 따르기는 했지만 태종은 실상 무학을 우습게 여겼다. 태종의 눈에 비친 무학은 한낱 평범한 승려에 불과했다. 조선 초기의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무학은 설법(說法)에 뛰어나지 못했다 한다. 한 번은 궁중에서 선(禪)에 관해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무학은 불교의 종지(宗旨)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그 자리에 있던 여러 스님들의 애를 태웠다는 것이다(실록, 태조 1년 10월11일 기미). 그 자신 선승(禪僧)이었지만 참선에 관해 별로 많이 알지 못했다는 악평인데, 물론 이것은 태종을 비롯한 일부 인사들에 의해 왜곡된 평가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태조는 무학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태조는 무학이 머무는 회암사(檜巖寺)를 찾아가 숙식을 함께 하기도 했고,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계(戒)를 받고 심지어 대사의 생활방식을 본 떠 일체 육식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된다. 무학의 어떤 점이 태조를 그렇게까지 매료시켰을까. 역사적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두 사람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큰 구실을 담당한 것은 풍수지리에 관한 무학의 전문적 지식이었다. 태조는 즉위 초 계룡산 천도를 검토했다. 당시 무학은 태조의 측근에서 계룡산의 풍수지리를 검토했다. 결국 그는 천도를 반대하게 되었고(실록, 태조 2년.2월11일 병술), 계룡산 천도도 무위에 그쳤다. 그 뒤 한양이 새 수도의 후보지로 떠올랐고 그 때도 태조는 무학의 의견을 물었다.“이 곳은 사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므로,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실록, 태조 3년.8월13일 경진) 이러한 무학의 찬동에 태조는 무척 만족했다. 왕은 정도전·하륜·이양달 등에게도 명령해 천도문제를 함께 결정짓게 했다. 무학은 북한산에 올라 한양의 풍수를 살폈다. 그 때 무학이 미래의 도성 풍경을 조망한 곳은 삼각산의 하나인 만경대(萬景臺)였다. 거기서 한양 쪽을 내려다보면 만 가지 모습이 한 눈에 보인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학이 나라의 도읍터를 살폈기 때문에 국망봉(國望峰)이라고도 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 때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을 좌청룡(左靑龍), 목멱산(남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정도전(鄭道傳) 등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북악이 주산이 되었다 한다. 무학은 정도전 등과 더불어 한양 천도의 일등 공신이었다. 도읍을 옮기는 문제는 가벼운 일이 아니었지만 태조는 이를 서둘렀다. 그는 고려 말 갑자기 중앙정계에 등장한 신흥세력이었기 때문에, 고려의 수도 개성에 포진한 해묵은 귀족 세력들이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무학은 왕의 그런 심중을 정확히 헤아려 한양천도를 적극 도왔다. 이로써 무학은 태조와 하나가 되었다. ●무학대사는 갈수록 높이 평가돼 무학은 실제로 풍수지리에 능통했다. 그런데 후대로 갈수록 풍수 및 예언에 관한 그의 능력은 더욱 미화되었다.17세기 중반 대신(大臣) 송시열(宋時烈)은 효종 임금 앞에서 조선시대의 3대 풍수지사를 거론하는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첫 손가락에 꼽힌 사람은 무학(無學)이었다. 나머지 둘은 이의신(李懿信)과 박상의(朴尙毅)라고 했다.(‘실록’, 현종 개수 즉위년 7월3일 임술). 이것은 아마도 당대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평가로 봐도 좋을 것이다. 후대 사람들이 무학을 높이 평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조선왕조의 기틀이 확고해지면서 건국의 주역들이 신성화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태조 이성계는 신성한 왕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런 가운데 태조를 가까이서 보좌한 무학은 신인(神人)으로 기려졌다. 태조와 무학의 특별한 관계를 상징하는 설화도 많이 생겨났다. 예컨대, 무학이 스승 나옹화상과 함께 왕후(王侯)가 배출될 명당과 장상(將相)이 나올 명당을 봐두었는데 무학이 이성계에게 이를 알려주었다는 이야기다. 이성계는 무학의 말을 듣고 아버지 이자춘의 묘를 잘 써서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왕건 가문과 도선의 관계를 꾸민 설화를 연상케 한다.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나이를 고려할 때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둘째, 수도 한양이 명실공히 모든 분야에서 조선왕조의 중심이 됨에 따라, 도읍을 정하는 데 기여한 무학의 능력이 과장되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왕십리에 관한 설화도 탄생했다. 한양에 도읍하려고 했을 때 무학은 왕십리 자리에 궁궐을 지으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았으므로, 이런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설화에 따르면, 무학은 왕십리에서 검은 소를 타고 지나가던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소를 때리면서 무학만큼이나 미련하다고 꾸짖었다. 이에 무학이 노인에게 가르침을 청했고 십 리를 더 가라는 깨침을 얻어 왕(往)십리라는 지명이 생겼다 한다. 어떤 설화에서는 그 노인이 신라의 고승 도선 국사였다고 한다. 물론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그렇긴 해도 이 설화에는 한두 가지 숨은 뜻을 담고 있다고 본다. 한양의 궁궐터를 정하기가 쉽지 않았던 사실이 암시되어 있고, 풍수지리의 대가였던 도선과 무학은 죽음의 세계를 뛰어넘어 서로 통한다는 믿음이 보인다. 그런가 하면, 이런 신이한 우여곡절을 통해 얻은 도읍인 만큼 한양은 최고의 수도라는 뜻도 있는 것같다. 이런 주장과 믿음은 조선시대 일반 민중의 의식세계를 반영한다. 그것이 정말 옳으냐 그르냐하는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셋째, 풍수지리에 관한 무학의 능력이 점차 과장되면서 그가 생전에 발휘하지 못한 다른 능력까지도 재평가되었다. 해몽을 잘해 이성계의 즉위를 미리 알아 맞혔다는 전설은 그 가운데 하나다.(‘대동기문’) 인왕산 선바위에 얽힌 전설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무학은 애초 조선왕조가 5백년 뒤 망할 줄 알았기 때문에 나라의 수명을 늘리려고 선바위에 와서 천일기도를 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선바위가 한양도성 안에 포함되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신령의 계시를 받았으나, 정도전의 주장에 밀려 무학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그러자 무학은 장차 불교가 유교에 억눌려 지내게 되고, 나라의 수명도 500년에 불과하게 되었다며 통탄했다. 선바위에 관한 전설 역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무학의 예언 능력이 조선후기 민중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은 유교사회가 된다는 예언은 실제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해 꾸민 이야기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국운이 500년에 그친다는 예언은 많은 민중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 편으로 조선왕조와 수도 한양의 번영을 바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조선사회의 각종 모순이 해소된 새 나라를 꿈꾸었다. 이런 소망은 왕조의 종말에 관한 예언 설화를 낳았고, 그 중심에 무학이 자리잡게 되었다. 무학의 신이한 예언 능력을 소재로 한 설화는 전국 여러 곳에 있다. 부평의 원통골이나 부산의 강선대(降仙臺)의 지명 설화는 해당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설명하면서 무학의 예지능력을 강조한 경우다. 그밖에 서산의 나무 설화는 특정한 나무를 대상으로 해 세상의 운명을 예언한 것이다. ●무학은 예언과는 거의 무관한 고승 역사적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무학은 예언가가 아니었다. 경남 합천 삼가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 원나라의 수도에서 인도승려 지공(志空)을 만나 불법을 배웠고, 뒤에 고승 나옹(懶翁)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태조의 두터운 신임으로 왕사(王師)가 되어 한양천도를 도왔다. 그러나 세상사에 깊이 관여한 흔적은 없다. 무학은 주로 회암사에 조용히 머물다가 태종 5년(1405) 금강산 금강암에서 세수 78세, 법랍 62세로 입적하였다. 비록 풍수에 능통하긴 했지만, 사사건건 세상일에 관심을 두었다고 볼 근거는 조금도 발견되지 않는다. ●무학을 둔갑시킨 술사들 하지만 후대에 이르러 무학은 풍수지리와 예언의 대가로 부풀려졌다.16세기 후반, 무학이 타계한 지 약 180년쯤 지났을 때, 불현듯 그가 저술했다는 ‘도참기’(圖讖記)가 한양에 등장했다. 그 때는 고질적인 당쟁이 시작된 데다 일본과의 관계가 경색되기 시작해 안팎으로 무척 어수선하였다. 이런 판국에 누군가 무학의 명성을 빌려 국가의 장래를 논하였다고 하겠다. 무명의 술사가 실은 ‘도참기’의 저자였을 것이다. ‘도참기’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상당히 널리 퍼졌다. 그런데 처음에는 누구도 그 내용을 명확히 해석하지 못했다. 그만큼 난삽했다. 예컨대, 임진년에 대해 “악용운근(岳聳雲根) 담공월영(潭空月影) 유무하처거(有無何處去) 무유하처래(無有何處來)”란 구절이 적혀 있었다. 이 구절은 한바탕 왜란을 겪은 뒤에야 명료해졌다. 결론적으로 말해, 신립(申砬) 장군이 충주에서 패전해 그 군사들이 월낙탄(月落灘)에서 몰사한다는 내용으로 풀이되었다. 왜 그런가. 첫 구절의 ‘악’(岳)은 곧 ‘유악강신’(維岳降申)이므로 신(申)이다.‘용’(聳)은 ‘입’(立)과 같은 뜻이라 입(立)이다. 그리고 ‘운근’(雲根)은 돌(石)이다. 따라서 ‘악용운근’(岳聳雲根) ‘신립’의 이름이다. 다음 구절인 ‘담공월영’(潭空月影)은 ‘달이 여울에 떨어지다.’(月落灘)는 뜻이다. 달리 말해,‘물에 빠져 죽는다.’는 말이다. 마지막 두 구절은 ‘도성의 백성들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피란 간다.’,‘왜구가 입성(入城)한다.’는 말로 해석된다(실록, 선조 25년 4월30일 기미) 물론 이런 해석은 사후 약방문이었다. 억지스러운 면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무학의 예언가적 능력에 새삼 주목했다. 실제로는 어느 술사가 무학의 이름을 빌려 저술한 ‘도참기’였을 텐데 그 위력에 힘입어 예언가 무학의 명성은 더욱 빛났다. 역사에는 이런 아이러니가 있다. 서양 중세의 도서관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저자로 내세운 위서(僞書)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하지 않은가. 한 때 장안의 화제가 됐던 ‘도참기’는 남아 있지 않다. 워낙 알쏭달쏭한 내용이라 해석이 어려워 임란과 함께 수명을 다한 것 같다. 그 대신 오늘날에는 ‘정감록’의 일부로 돼 있는 ‘무학비결’이 전한다. 눈을 부릅뜨고 ‘무학비결’에서 ‘도참기’의 흔적을 살폈으나 허망한 노릇이었다. ‘무학비결’은 조선왕조의 멸망에 초점을 맞춰 말세의 징후를 논의한 예언서다. 주요한 내용은 ‘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들과 대체로 일치한다. 조선왕조의 국운을 약 400년으로 봐 “앞의 360년” 즉 18세기 말까지는 국정이 비교적 순탄할 것으로 예상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그 뒤 56년은 물과 불이 서로 살아주기 때문에 백성들이 난리를 깨닫지 못하고 재상은 쓸모없는 글만 숭상하니 가히 풍요롭고 태평하나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은 위에서 도둑질하고 아전과 군교(軍校)는 아래에서 약탈을 일삼으니 백성들이 불안하여 들에 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18∼19세기의 실제 상황과 대체로 일치한다. 그 사실로 미루어 보면 ‘무학비결’이 저술된 시기는 그 때가 아니었을까 한다. 조선의 운명이 다할 무렵에 대해선 “신인(神人)이 두류산(頭流山)에서 도읍을 옮기는 계책을 세우고 200년이나 국운을 연장시킬 것”이라고 했다. 두류산 즉, 지리산에서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지만 그것은 매우 서서히 진행된다고 보았다.“때에 무(武)는 강하고 문(文)은 약하여 가히 임금이 임금이 아니요 신하 또한 신하가 아니라 슬프도다.” 조선의 마지막은 무인정권이 장식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무학비결’이 저술된 시기를 좀더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다. 새로 오군영이 설치되어 수도 방어가 강화되던 18세기 말 이후, 외세의 침입이 노골화되기 직전인 1860년대까지 저술되었다고 추측된다. 누누이 말했듯 18∼19세기엔 술사와 그들에게 협력한 승려들이 다양한 예언서를 생산 유포했다. 그들은 새로운 예언서들에 근거해 때로 반란을 획책했다.‘무학비결’은 바로 그런 예언서의 일종이었다. 고승 무학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지만, 풍수와 예언으로 이미 명성이 높아진 무학의 이름을 빌려 술사들은 민중을 포섭하려 했다. 그러잖아도 민중들은 설화 속의 무학같은 신승(神僧)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무학비결’의 창작은 사회적 여망에 부응하는 행위였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토종애니’ 예비스타들“둘리보다 뜰거야”

    귀여운 반달곰과 너구리, 앙증맞은 이웃집 소년, 이종 격투기 외계인, 로봇 등등. 누가 국내 애니메이션의 대표 캐릭터 둘리의 대를 이을 수 있을까. 7월 들어 토종 창작 애니메이션이 연이어 안방극장을 두드리고 있다. 이미 방영에 들어갔거나, 이달 안에 방영을 준비하고 있는 것만 무려 10편에 이른다. ●전체방송시간 1%는 국내작품 채워야 지난 1일부터 시작된 ‘애니메이션 총량제’ 때문이다. 이는 영화계 ‘스크린 쿼터제’와 비슷하다. 국내 애니 산업의 진흥을 위해 도입된 것으로 지상파 3사는 전체 방송 시간의 1% 이상을 반드시 새로 만들어진 국내 작품으로 채워야 한다. 지난해 지상파 3사를 통해 방송된 신규 국산 창작물이 18개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총량제’는 시작부터 상당한 파급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한국 애니의 전성시대가 돌아온 듯하다. 지난 1987년 국내 창작 TV용 애니메이션이 첫 선을 보인 뒤 잠시 동안 붐을 일으키기도 했지만,18년이 흐르는 동안 국산 애니의 인기는 ‘외화내빈’ 상태였다. 최근 문화관광부가 내놓은 ‘2004 문화산업통계’에 따르면 국내 애니메이션 분야는 7105만 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 국내 문화 콘텐츠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반면 국내 시청자들에게는 외국산 애니에 밀려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번 ‘총량제’ 실시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토종 애니의 붐이 일어나는 한편, 둘리나 하니, 머털도사 등의 인기를 뛰어 넘는 캐릭터가 탄생될지 기대된다.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지난 4일 부터 전파를 타고 있는 SBS ‘고미의 만화 호기심 천국’(매주 월∼금 오후 4시50분)이다. ●‘고미의 만화호기심천국´ 눈길 끌어 여섯 살 꼬마 고동이가 생활 속에서 느꼈던 갖가지 궁금증을 전설의 반달곰 고미가 해결해준다는 내용. ‘고인돌’의 작가 박수동씨가 원안을 그린 주인공 고미는 귀엽고 토속적이며 친근한 느낌을 준다.2D,3D 컴퓨터그래픽과 실사화면을 섞은 점도 독특하다.SBS는 19세기말 하늘을 날겠다는 꿈을 이뤄가는 과정을 그린 코믹 어드벤처물 ‘파닥파닥 비행선’(매주 금 오후 5시)도 8일부터 내보낸다. KBS는 6편의 보따리를 풀었다. 이미 2TV에서 ‘내 친구 우비소년2’(매주 화 오후 6시10분) ‘출동 유니온 킹’(매주 수 오후 6시10분) ‘마스크맨’(매주 목 오후 6시10분)을 방송하고 있다. 특히 ‘마스크맨’은 이종격투기를 소재로 바이크맨등 톡톡 튀는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주목되고 있다.3부작 ‘출동’에 이어서는 곧바로 ‘천하통일 파이어 비드맨’이 나가게 된다. ●KBS ‘내 친구 우비소년2´등 6편 방송 1TV에서는 각각 8일과 9일부터 시작하는 ‘너구리와 숲 속 친구들’(매주 금 오후 4시30분) ‘재동아 학교 가자’(매주 토 오전 7시40분)가 기대를 모으고 있다. 북한 애니메이션으로 국내 안방을 찾는 ‘너구리’는 북한발 감동과 재미를 선사하게 된다.‘재동아’는 4년 전 ‘우당탕탕 재동이네’의 후속편. 유치원생이던 재동이가 초등학생이 돼서 겪는 학교생활을 이야기로 꾸민다. 4일부터 세계 각국 고전 등을 애니로 옮긴 ‘이야기 여행’(월 오후 4시30분)을 내보내고 있는 MBC는 7일부터는 가까운 미래에 자신의 그림자 로봇을 불러내 악당들과 겨루는 소년 케이의 모험담 ‘섀도우 파이터’(목 오후 4시30분)를 방송하고 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6)북창 정렴과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6)북창 정렴과 ‘정감록’

    ‘북창비결’은 조선 명종 때 도사(道士)로 유명한 북창(北窓) 정렴(鄭 1506-1549)이 썼다고 하는 비결인데, 난해한 부분이 많다. 이 예언서는 19세기 말 또는 20세기 초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 때부터 줄곧 ‘정감록’의 일부가 되어 있다. ‘북창비결’의 저자로 알려진 정렴은 매월당 김시습, 토정 이지함과 더불어 조선의 3대 기인(奇人)으로 손꼽힌다. 꽤 흥미로운 인물인 셈이라 한 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북창비결’을 비롯해 그가 저술한 책의 내용을 간단히 검토해 보는 것도 한낱 쓸데없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북창 정렴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도사(道士) 정렴은 다재다능한 선비였다. 그는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약(醫藥), 복서(卜筮)는 물론, 불교와 도교에 모두 정통하였고, 음악과 그림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문집인 ‘북창집(北窓集)’ 외에도 ‘북창비결(北窓秘訣)’,‘용호비결(龍虎秘訣)’,‘동원진주낭(東垣珍珠囊)’,‘유씨맥결(劉氏脈訣)’ 등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전호에서도 인용한 ‘궁을가(弓乙歌)’ 역시 정렴의 글이라 한다. 계곡(溪谷) 장유(張維)의 글을 보면, 정렴은 유·불·선 3교에 두루 통달하였으나 사상적 중심은 유교에 있었다고 한다. 도사라기보다는 유학자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말은 조선시대가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았기 때문에 나온 말에 불과한 것 같다. 장유가 정렴을 위해 지은 글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렴은 “한 번 산에 들어가 며칠 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수양한 다음 내려올 때면 산 아래 100리 간에 일어난 일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훤히 알아 맞혔다.”고 했다. 굉장히 높은 수준의 점쟁이였다는 말이다. 정렴에겐 남다른 풍모가 있어 성수익(成壽益)과 같은 조선후기의 학자는 정렴을 신인(神人)이라 평했다. 성수익은 일찍이 정렴이 중국에 가서 유구(琉球·오키나와)의 사신을 만난 이야기를 예로 든다. 당시 유구 사신은 정렴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뜰 아래로 내려가 절을 올렸다고 한다. 유구 사신이 소지한 책자에는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시(某時) 중국에 들어가면 진인(眞人)을 만날 수 있다.’고 돼 있었다. 유구 사신은 정렴을 바로 그 진인(眞人)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유구 사신은 여러 시간 동안 정렴에게서 주역(周易)을 배웠다. 그와 대담하는 동안 놀랍게도 정렴은 일본말을 유창하게 했다고 한다(‘삼현주옥 三賢珠玉’). 정렴이 과연 언제 어디서 일본어를 배웠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사람들은 정렴이 대단한 인물이라 믿었고, 특히 지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언젠가 한 번은 정렴의 사촌이 아버지 묏자리를 부탁하러 왔다고 한다. 사양하던 끝에 정렴은 묏자리 하나를 점지해 주었는데, 땅을 파자 온통 물구덩이였다. 모두들 당황했으나 정렴은 시종일관 그 자리만을 고집했다. 결국 구덩이에 큼지막한 돌멩이 몇 개를 채워넣고 장례를 마치게 됐다. 이것은 이른바 수중명당(水中明堂)이었다. 훗날 무덤 안에 채워넣은 돌멩이 숫자만큼 무덤 주인공의 자손들이 문과에 급제했다는 것이다. 정렴이 수중명당을 정했다든가 일본어에 능통했다, 또는 100리 안팎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알아 맞혔다는 이야기는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서 유구의 사신을 만난 것, 주역과 풍수지리에 밝았던 점 그리고 도가적 수련을 즐겼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정렴은 점술에 능했기 때문에 그에 관해 많은 전설이 남아 있다. 그 중 특이한 이야기 하나가 있어 간단히 소개할까 한다. 본래 그는 슬하에 몇 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하는데 아이들을 좀체 귀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의 불평이 무척 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정렴의 어린 자녀들이 한꺼번에 죽어버렸다. 가족과 친지들은 깜짝 놀라서 죽은 아이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큼지막한 구렁이였다. 소년 시절 정렴은 길을 가다 우연히 구렁이 하나를 죽인 적이 있었다 한다. 그 구렁이가 정렴에게 복수하려고 둔갑술을 빌려 그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는 이런 사실을 미리 눈치챘기 때문에 아이들을 전혀 귀여워하지 않았다 한다. 구렁이가 변해 아이들이 될 이치는 없다. 방금 말한 이야기는 정렴이 세상살이에 만족하지 못해 후세에 혈육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풀이해야 맞을 것 같다. 뒤에 다시 말하듯 정렴은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과 불화하였다. 정렴은 여러 면에서 재능이 빼어났지만 불우했고, 그래서인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때이른 죽음에 대해서도 이를 미화하는 설화가 있어 주목된다. 요컨대 정렴은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떼어줬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선조 때 정승을 지낸 윤두수(尹斗壽)가 정렴의 친한 친구였다고 한다. 그런데 윤두수는 어디선가 자신이 단명하다고 들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다 아는 친구 정렴에게 매달렸다. 정렴은 친구의 간청을 외면할 수 없어 마침내 신선들이 모여 있는 곳을 알려주며 찾아가서 수명을 빌라고 했다. 덕분에 윤두수는 수명을 연장하게 됐다. 그러나 신선들은 천기를 누설한 죄로 정렴의 수명을 줄이기로 했고, 정렴은 친구를 위해 사십대 초반에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만일 정렴이 오래 살았더라면 윤두수에 못지않은 큰 인물이 되었을 것이라는 기대가 후대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전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정렴의 능력은 특히 방외(方外)에서 빛났던 모양으로,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도교사’에서 정렴을 김시습·권극중·이지함·곽재우에 비견되는 조선 최고의 도사로 손꼽았다. ●정렴은 정치에 희생된 불우한 인물 위에서 간단히 암시했듯이 도사 정렴은 말년이 무척 불우했다. 그가 39세 되던 해, 명종 즉위년(1545)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아버지 정순붕(鄭順朋)은 윤원형, 이기 등 세력자들과 함께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억울하게 죽이고 귀양보냈다. 정순붕은 이른바 소윤의 핵심세력으로서 명종 초년 세도가로 행세했다. 하지만 정렴은 이런 아버지에 대해 불만이 컸다. 그는 사화로 인해 명망 있는 선비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슬프게 생각했다. 아울러 권력을 잡기 위해 그런 일을 일으키는 아버지의 말로가 평탄하지 못할 줄을 미리 내다보았다. 그랬기 때문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정렴은 곧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다시피 했다. 그는 아버지를 만류해 사화를 막아내지 못하였다는 자괴감과 세상에 대한 불만을 술과 시로 달래며 소일했다. 그런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정렴은 성품이 명민하고 착한 일을 좋아하여 마음속으로 자기 아비가 하는 짓을 그르게 여겨 일찍이 간(諫)하여 말렸으나 아버지 정순붕이 따르지 않았다. 동생인 정현이 부자간에 이간질하여 온 집안에 변고가 일어나려 하였다. 정렴은 아버지의 이해를 받지 못한 채 양주(楊州)의 시골집에 가 있거나 산사(山寺)에 머물러 지낸 것이 실로 여러 해였다(명종 즉위년 8월28일 무오). 또 다른 기록에 보면, 아버지 정순붕은 둘째아들 정현과 공모하여 큰아들 정렴을 죽이려고까지 했다.‘집안에 변고’란 이런 비극적인 사건을 일컫는 말이다. 요컨대 정렴은 현실정치에 관해 아버지와 다른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하마터면 죽음을 당할 지경이었다. 아버지와 아우로부터 버림받은 정렴은 산중에 파묻혀 지내다가 슬픔을 안고 죽어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비극이었고,‘이 점을 지금까지 선비들은 슬퍼하고 있다.’고 할 지경이었다(실록, 명종20년 10월29일 임진). 자세히 알고 보니 정렴은 너무도 불우한 재사였다. 집안의 저버림을 당한 그는 불교와 도교에 침잠했고, 천문, 풍수지리, 수학, 음악 및 미술로 마음을 달래려 했던 것이다. 그의 초인적 능력에 대한 호평은 대부분 사후에 내려진 것이었을 뿐, 그의 인생은 처참했다. ●‘북창비결’은 덕과 지혜를 최우선으로! ‘북창비결’은 말세의 한 가지 조짐을 음주의 폐습과 음란한 풍토에서 찾았다. 이런 예언에서 인터넷 성매매와 호스트 바가 횡행하는 오늘날의 세태를 떠올릴 수 있지만 그런 해석은 지나치게 현재적인 입장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북창비결’에선 말세가 되면 남쪽에서부터 나라가 망한다고도 했다. 좀더 정확히 말해 “물과 물이 있는 서남쪽의 독이 궁궐에까지 미칠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서남쪽이라면 제주도와 전라남도에 해당한다. 이 구절은 조선 말기의 동학농민운동 또는 이재수의 난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데 반드시 이런 사건을 미리 염두에 둔 예언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많은 경우 딱 들어맞는 예언은 도리어 그런 사건이 일어난 뒤 소급해서 조작된 예언서라는 증거가 될 뿐이다. 어쨌거나 말세가 되면 ‘쥐의 아비 시체가 온 나라에 누워 있고, 뱀의 형 집 연기가 천리 밖에서 나리라.’고 했다. 쥐의 아비와 뱀의 형이 누군지 모르겠다. 혹시 쥐의 해와 뱀의 해보다 한 해 앞선 시점 또는 해당 되는 해의 첫머리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경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임진왜란은 뱀해보다 한 해 전인 용해에 일어났고, 병자호란은 쥐해에 있었다.‘북창비결’의 독자들은 이 두 전쟁이 정확히 예언됐다며 이 예언서가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런 환란이 닥치면 ‘여덟 줄의 백성이 다섯 달 동안 시체로 쌓일 것이다. 그 때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을 것이요, 제비와 기러기가 가고 오는 시절이로다.’ 요점은 말세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비명횡사한다는 것이다. 방금 인용한 구절을 나름대로 짐작해보면 이렇게도 풀이된다.‘소나무와 잣나무’는 임진왜란 때 명군(明軍)을 이끌고 와서 싸운 이여송(松)과 이여백(栢) 형제를 가리킨다. 그런가 하면,‘제비와 기러기가 가고 오는’ 것은 병자호란 이후 포로와 사신들의 연행(燕行)길이 잦아졌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연행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제비가 간다.’는 것이다. 당시 전쟁포로와 사신 행차가 기러기 떼마냥 연이어 서울과 연경을 오갔기 때문에, 이를 암시하는 구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북창 정렴이 과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날 것을 정확히 예언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북창비결’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점은 난세를 극복할 사람이 누군가 하는 점이다.‘재물에 인색한 사람은 먼저 집에서 죽고, 아무 재주도 없는 선비는 저절로 길에서 죽는다.’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는 사람, 참된 지혜를 갖춘 사람만 난세에도 살아남는다는 것이 ‘북창비결’의 대답이다. 지혜와 덕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애써 십승지(十勝地) 같은 데를 찾아 피난해도 결국 아무 ‘쓸데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런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하늘에서 떨어져 죽는 기러기 신세를 후회하리라.’고 했다. 정리하면,‘북창비결’은 덕과 지혜를 처세의 으뜸으로 친다는 사실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비슷한 취지의 주장이 ‘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에서도 전혀 없지는 않다. 어쨌든 말세에 피난할 장소를 거론하면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인간의 덕성을 온전히 갖추는 일이라고 말한 점은 인상적이다. ●곡식이 풍부한 평야지대로 가라! 그러면서도 ‘북창비결’은 말세의 피난지에 상당한 비중을 할당하고 있다.‘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들과 마찬가지로 피난지를 강조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만일 차이가 있다면 ‘북창비결’이 선호하는 피난지역이 다르다는 점이다.‘충청도와 강원도는 살 수가 없고, 경기도 동쪽에서는 어육(魚肉)이 난다.’ 다른 예언서에서도 강원도, 특히 오대산 이북을 위험지역으로 선포한 점은 쉽게 확인된다. 하지만 강원도에 이웃한 경기도 동부 및 충청도까지 위험지역으로 본 것은 ‘북창비결’의 특징이다. ‘바라건대 내 자손들은 산에 올라가지 말고 물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흰 것에 의지하는 자는 살겠고, 풍년 든 곳에 가까이 있으면 살리라.’ 이른바 십승지란 태백산, 소백산, 덕유산, 지리산 등 백두대간의 명산대천을 말하며 다른 예언서에서는 피난지로서 중시된다. 그러나 ‘북창비결’엔 그와 전혀 다른 의견이 제시돼 있다. ‘흰 것에 의지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풍년’을 위기 극복의 상징으로 보았던 점으로 미루어 물산이 풍부한 평야지대를 선호했다는 증거로 해석된다.‘돈과 곡식이 쌓인 시골에서 마을 사람들을 구조할 것이네.’라고도 했다. 이런 점으로 보아 ‘흰 것’은 백미, 즉 흰쌀이나 당시의 화폐였던 무명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북창비결’이 말세의 조짐을 흉년에서 읽었던 사실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된다. 흰쌀과 흰 베가 많이 나는 곡창지대라면 우리나라의 지리적인 조건상 서쪽일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북창비결’은 말세에 ‘기강은 서쪽에서 지탱한다.’고 하였다. 서쪽의 곡창지대라면 전라북도의 김제 만경평야를 비롯해 충청남도의 내포평야, 경기도의 김포평야, 황해도의 연백평야 등이 생각난다. 그런데 황해도는 처음부터 고려대상에서 제외된다. 조선시대는 서북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고,‘정감록’은 어느 예언서에서나 이를 기정사실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밖에 ‘북창비결’은 경기도와 충청도 역시 피난지로 삼지 말라고 심각하게 경고했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나라가 지탱해야 될 서쪽은 김제 만경 평야로 대표되는 호남평야였을 것으로 풀이된다. 마땅한 피난지와 관련해 ‘명승지(名勝地)라는 곳이 먼저 혹독한 화를 당한다.’고 말한 대목도 유념할 만하다. 정감록의 다른 예언서와는 전적으로 달리 ‘북창비결’은 십승지 자체를 부정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지경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생각할 이유는 없다.‘양쪽으로 끊어진 산맥, 물이 깊은 곳 섬에 숨어라.’고 말한 구절이 있다. 명산대천 또는 섬에서 말세의 피난처를 구한 흔적이 다소나마 감지된다. 그런 충고는 산에 올라가지 말고 물에 들어가지 말라던 ‘북창비결’의 또 다른 구절과 모순된다. 하지만 내용상의 이 같은 모순은 예언서의 역사를 감안할 때 도리어 당연할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예언서란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베껴 쓰는 과정에서 조금씩 개작(改作)돼온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예언서의 논지가 중층적이거나 상호 배치된 경우가 없을 도리가 없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선조들의 문방구엔 멋과 철학이

    예전의 문방구 속엔 실용 정신과 더불어 당대인들의 미학과 철학이 진하게 배어 있다. 특히 조선시대 문방구는 글 읽기와 글 쓰기로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던 선비들의 생생한 숨결이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보문화재단 호림박물관(관장 오윤선)이 이처럼 우리 선조들이 만들고 사용한 거의 모든 기종의 문방구를 한 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호림박물관 소장 문방구특별전-소박함·멋스러움·예스러움’을 마련했다. 6일부터 9월30일까지 열리는 이번 특별전에선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연적인 ‘백자청화철화접문시명팔각연적’(白磁靑華鐵畵蝶文詩銘八角硯滴) 등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200여점의 문방구를 선보일 예정. 조선시대의 것이 주류를 이루며, 종이·붓·먹·벼루·필통·지통을 비롯한 거의 모든 기종의 문방구를 망라하고 있다. 이 중 지금의 책상과 마찬가지인 19세기의 목조 경상(經床)은 간결하고 절제된 구성과 자연스러운 나뭇결에서 선비들이 지향했던 미학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 18세기의 청화백자 팔각연적은 각 면마다 시를 쓰고 윗면에 나비를 그려넣어 시서화 일체를 구현한 격조 높은 멋의 세계를 전해 준다. 백색 바탕에 푸른 청화로 대나무와 매화나무를 생생하게 그린 19세기의 ‘백자청화매죽문필통’은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양반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종이를 담아두던 ‘죽제양각십장생문지통’(19세기)은 대나무 특유의 직선적 요소와 곡선적 요소를 적절히 활용하여 시원하고 대담한 조형성을 담고 있다. 이밖에도 시를 짓는데 사용된 죽첨(竹籤), 책을 몇 번 읽었는지 셈하던 서산(書算), 일종의 지시봉으로 사용한 서간(書竿), 수정으로 만든 붓과 용이 새겨진 붓 등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없는 다양한 문방구의 세계를 보여 준다. 관람문의 (02)858-2500.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공연리뷰] 뮤지컬 ‘밑바닥에서’

    지난달 초연돼 호평을 얻은 극단 자세레퍼토리의 창작뮤지컬 ‘밑바닥에서’가 7일부터 대학로 예술극장 나무와물에서 앙코르 공연된다. 뮤지컬 ‘밑바닥에서’는 소설 ‘어머니’로 유명한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의 동명 희곡을 각색한 작품.19세기 말 러시아 빈민 계급의 밑바닥 인생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희곡은 1920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처음 선보였고,1936년 장 가뱅 주연의 프랑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지난 98년, 랩뮤지컬을 표방한 ‘서푼짜리 오페라’로 신선한 인상을 남겼던 연출가 왕용범과 작곡가 박용전이 의기투합해 만든 ‘밑바닥에서’는 기존 뮤지컬 문법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분방함이 돋보인다. 또한 원작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으면서 희극과 비극의 절묘한 강약으로 메시지의 강렬함을 유지하는 균형감각도 빛난다. 무대는 허름한 선술집. 이곳은 희망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인생 패배자들의 마지막 피난처다. 몰락한 귀족, 사기도박꾼, 매춘부, 알코올중독자 무명배우, 불치병에 걸린 소녀…. 매일 밤 이곳은 이들이 서로 싸우는 전쟁터가 되기도 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낭만적인 장소가 되기도 한다. 지하실을 배경으로 19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원작의 방대한 내용을 효율적으로 압축한 연출가의 각색 솜씨가 깔끔하다. 강렬한 비트의 전자음 대신 어쿠스틱 반주를 주조로 한 음악은 이 작품의 정서를 무엇보다 잘 드러낸다. 극의 후반부, 내내 침묵하던 무명배우가 탁자 위에 올라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압권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노래와 극의 유기적인 결합은 다소 떨어지는 듯해 아쉽다. 역량있는 뮤지컬 연출가와 작곡가의 발견 못지않게 재능있는 신인 배우들을 만나는 기쁨도 크다.‘지하철1호선’에 출연했던 이주원과 황지영을 포함해 페페르역의 황태광, 바실리사역의 김희원, 그리고 뛰어난 가창력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무명배우역의 이승현 등의 열연이 인상적이다. 연장공연에서도 초연멤버들이 그대로 참여한다.8월21일까지.(02)745-2124.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녹색공간] 환경과 지속가능발전 행진/박은경 환경과문화연구소장

    보름사이에 일본에서 열린 환경관련 유엔회의에 두 번 다녀왔다.6월13∼14일에는 동해 쪽에 위치한 이시가와현의 가나자와시에서 ‘이시가와 평화·환경문제 국제심포지엄’이 일본유엔협회와 유엔의 평화와 군비축소를 위한 아시아·태평양지역센터 주최로 열렸다.27∼29일에는 나고야시에서 유엔대학과 유네스코가 주최한 ‘전지구화와 지속가능발전 교육 10년:미래를 유지하기를’이라는 주제의 회의에 아시아·태평양지역 대표들이 모였다. 이시가와 국제심포지엄은 인구 45만명 정도의 작은 도시 가나자와에서 올해로 11년째를 맞는 소규모회의이다.10여년간 안보문제를 다루어 국제적으로 상당히 알려진 평화관련 회의였다. 북한핵문제에 촉각을 세우고 중국, 러시아, 미국 참석자들이 북한이 6자회담에 나오기를 기대하는 발언들을 쏟아 놓았다. 이 안보회의에서 올해 처음으로 환경문제를 평화의 주제와 함께 다루었다. 평화와 환경의 연결은 환경문제가 자연과 생태계 환경오염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 경제적 관점과 어우러져서 해결될 수 있다는 전 지구적 관심이 잘 부각된 결정이었다. 나고야에서 개최된 유엔 대학과 유네스코회의는 작년 유엔 총회가 채택한 ‘지속가능발전 교육 10년’의 개시식을 통하여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유엔 권고 사항을 준비하고 공동대처해 보려는 회의였다. 유네스코 사무총장, 유엔대학 총장을 비롯하여 교육·문화·체육·기술부의 차관, 전직 교육부 장관 등 일본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이 연사와 토론자로 참여하였다. 지속가능발전의 사회화가 앞서간 스웨덴, 캐나다, 뉴질랜드 등의 대표들은 물론, 인도네시아의 저명한 ‘지속가능발전 신사’로 일컬어지는 에밀 살림 장관과 일본의 우주비행사 출신인 마모루 모리의 참여로 이 회의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모리비행사가 자신이 화성의 사진과 함께 나고야 지역을 30㎞,300㎞, 더 먼 지구밖에서 찍은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지구상의 어느 한 지역도 결국 동그란 모양의 하나의 지구의 모습으로 보여지는 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설명은 감동적이었다. 살림 장관은 인간이 이 지구를 지킬 수밖에 없는 신이 만든 자연의 관리자로서 자연과 사회 다양성을 인내하고 공존해야 함을 근엄하게 다짐하였다. 이제 지구는 한계에 도달했다고 외쳤던 1972년 로마의 지성인들의 보고서가 나온 지도 어느새 33년이 흘렀다. 지난 30여년간 지구인들은 기술과 의사소통, 교통의 발달로 더 빨라진 산업화의 대열속에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행진하고 있는 느낌이다. 풍요로움과 편안함을 갈구하는 66억 지구인들이지만 더욱 넓어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경제적, 생태적 상황의 차이에 당혹하고 있는 요즈음이다. 결국 선진국들은 산업화로 대량 사용한 화석연료로 인한 ‘생태적 빚’을 지고 있고, 개발도상국들은 뒤늦은 산업화를 향한 몸부림으로 인한 ‘경제적 빚’을 지고 전지구적 공동체 운동에 동참하는 21세기 세계의 구성원이 되었다. 지구 곳곳에 쏟아지는 때 아닌 홍수와 6억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는 건조지대의 확산을 어떻게 한 지역이나 국가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단 말인가? 기후 온난화로 높아진 해수면으로 곡창지대가 줄어들어들고 있으니 지금도 지구인 5명중 한명은 하루에 1달러 이하로 살고 있는 굶주린 배를 어떻게 채워야 할 것인가? 먹을거리 생산의 원천인 땅과 바다가 산성화되어 생산능력을 잃어 가는데 지구인들은 이제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봄이면 날아 들어오는 황사를 어찌 한국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언제부터 한국인들이 국지성 폭우와 열대야로 여름마다 시달리게 되었는가? 이 모든 기후 변화가 인류의 450만년의 역사 중 19세기 중반이후의 지난 150년 동안 산업화라는 미명하에 써댄 화석연료가 주범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지구 성층 40∼50㎞에 지구를 둘러 싼 둥그런 막이 있어 지구는 마치 후텁지근한 온실 속에 들어가 있는 꼴이 되었다. 지구공동체의 결단을 요구하는 운동이 유엔의 지속가능한 발전 행진이다. 지난 두 주에 걸쳐 열렸던 이시가와 심포지엄이나 나고야의 지속가능발전교육 10년의 아시아·태평양지역 개시식도 이러한 맥락에서 치러진 회의였다. 이제 한국인들도 점차 전 지구적 관심사에 눈과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우리 자신과 자식들을 위해서 말이다. 아니 며칠 전 어느 경제 연구소가 발표한 2015년에 한국이 선진국이 되는 길을 닦기 위해서도 지속가능한 발전은 필수적인 조건임을 우리 모두 인지해야 한다. 박은경 환경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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