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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31) 애완견과 개장국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31) 애완견과 개장국

    개가 나오는 풍속화는 여럿이 있다. 그런데 개가 주인공이 된 경우는 드물다. 그림(1)과 (2)는 확실히 생활 현실 속에서의 개를 그렸다는 점에서 여느 개 그림과는 다르다. 그림(1)은 신광현의 ‘강아지와 놀기’다. 어린아이가 앞서 달리며 강아지를 부르고 강아지는 열심히 쫓아간다. 이처럼 어린이가 좋아하는, 어린이와 어울려 노는 강아지는 애완견이다. 하지만 김준근의 ‘개백정’(그림2)을 보면 사정이 전혀 다르다. 사내, 곧 개백정이 개를 끌고 있고 개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앞발로 줄을 잡아당기고 있다. 불쌍한 생각이 왈칵 든다. 이 경우 개는 개장국의 재료일 뿐이다. 애완견과 식용견의 구분은 있지만, 그 선은 명확하지 않다. 인간의 태도에 따라 애완견이 식용견이 되기도 하고, 식용견이 애완견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림(1)의 애완견은 언제 그림(2)의 식용견이 될지 모른다. 애완견의 역사는 오래다. 동아시아의 정치교과서인 ‘서경’에는 개에 관한 글 한 편이 실려 있다.‘여오’라는 글이다.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장악하자 사방에서 공물을 바친다.‘여족’이 보낸 것은 큰 개(‘오’는 개란 뜻이다)였다. 여족이 바친 개는 식용이 아니고, 애완의 대상이었음은 물론이다. 여족의 개를 보고 소공이 무왕에게 이렇게 충고한다.“개와 말은 지금 이곳의 풍토에 맞지 않으면 기르지 마시고, 진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은 나라에서 기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왕이 애완동물에 빠져서 국정을 게을리 하고 또 이런 것들을 구하느라 백성을 괴롭힐까 하여 하는 소리다. 어쨌거나 ‘여오’를 보면 애완견의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후기 시장에서도 개장국 많이 팔아 조선시대 문헌에 애완견의 존재를 찾기란 어렵다. 다만 연암 박지원의 ‘취하여 운종교를 거닐고 쓴 글’에서 개를 ‘애완’하는 흔적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어느 여름 날 밤 박지원은 박제도(박제가의 형)·이희경·이희명·원유진·이덕무·서유린 등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운종가 종각 아래를 걷는다. 직접 읽어 보자. “이때 3경 4점이 벌써 지나 달빛이 더욱 훤하게 비치고, 사람 그림자는 모두 열 발이나 늘어났다. 돌아보니 오싹하여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길거리에 개들이 어지러이 짖어댄다. 큰 개 한 마리가 동쪽에서 다가왔는데 희고 수척했다. 여럿이 둘러 앉아 쓰다듬으니, 좋아서 꼬리를 흔들고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연암은 이어서 이 개가 몽골 원산이라는 것, 말처럼 크고 사나워 길들이기 어렵다는 것, 중국에 들어간 것은 작은 종자이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더 작은 종자라는 것, 하지만 우리나라 개보다는 그래도 크다는 것, 중국에 간 사신을 따라 조선으로 들어온다는 것 등 이 개에 대한 정보를 늘어 놓는다. 재미있는 것은 개의 이름이다. 보통 이 개를 호백(胡白)이라 하고, 그 중에서 작은 종자를 ‘발발이’라고 한다는 것이다.‘발바리’란 애완견은 아마도 이 개를 지칭하는 것일 터이다. 다시 더 읽어보자. 무관(이덕무의 자)이 취하여 개에게 ‘호백(豪伯)’이란 자를 지어 주었는데,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없다. 무관이 서운하여 동쪽을 향해 서서 흡사 오래된 친구를 부르듯 ‘호백이!’ 하고 세 번을 불렀고, 일행이 한바탕 껄껄 웃었다. 그러자 길거리에 개떼가 마구 달리며 더욱 큰 소리로 짖기 시작하였다. 어떤가. 개에게 자까지 지어 주었으니, 이덕무가 개를 가장 ‘애완’했던 모양이다. 호백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애완’은 그날로 끝나고 개장국이 되지 않았을까? 이제 개장국 이야기를 해 보자. 정조 때 문헌인 유득공의 ‘경도잡지’에 의하면 개장국을 먹는 것은 복날 풍속이다.“개고기를 총백(파의 밑동)과 섞어 푹 찐다. 닭고기나 죽순을 넣으면 맛이 더욱 좋다. 이것을 ‘개장(狗醬)’이라 부른다. 혹 국을 끓여 고춧가루를 뿌려 흰 쌀밥을 말아서 먹기도 한다. 이것을 먹고 땀을 내면 더위를 물리치고 허한 기운을 보충할 수 있다.” 유득공은 “‘사기’에 진(秦)나라 덕공 2년 처음으로 복날 제사를 지냈다. 사대문에서 개를 잡아 충재(蟲災)를 막았다.”고 한 것을 복날에 개를 잡아먹는 풍습의 시초로 보고 있다.‘예기-내칙’에도 개고기에는 차조가 잘 어울린다고 하고 있으니, 아마도 개는 가축이 되면서부터 식용이 되었을 것이다. 유득공의 기록에 의하면 개장은 원래 개고기를 찐 것이었고, 지금의 국을 말아 먹는 스타일과는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개고기를 푹 찐다.”는 부분의 원문은 ‘훈증(燻蒸)’이다. 찐다는 의미의 ‘증(蒸)’ 자를 쓰고 있다. 그리고 “다시 국을 만든다.”(又作羹)라고 하고 있으니, 원래 개장은 찌는 요리였던 것이다. 순조 때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에도 개장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경도잡지’의 것과 동일하다. 다만 “시장에서도 많이 판다.”는 부분만 추가되어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개장국은 조선후기 시장에서도 많이 파는 음식이었던 모양이다.‘개백정’ 그림 역시 영업용 개장국을 끓이기 위해 개장수가 개를 끌고 가는 것을 그린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서울 시내에 개장국을 파는 집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정조실록’ 1년(1777) 이찬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던 일당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개장국 이야기가 나온다. 정흥문이란 자의 자술서에 “7월 28일에 대궐 밖의 개 잡는 집에서 강용휘와 제가 개장국을 사 먹은 뒤 같이 대궐로 들어갔습니다.”라는 말이 있다. 곧 서울에 개장국을 상시적으로 파는 가게가 있었던 것이다. ●손꼽히는 개고기 마니아는 중종때 권신 김안로 개고기는 서울 시내에서 팔기까지 한 전통 식품이지만, 개고기는 먹는 사람, 안 먹거나 못 먹거나, 먹기를 반대하는 사람이 뚜렷이 갈린다. 근대 이후에 와서 분화된 것이 아니고, 조선시대에도 그랬다.19세기 문헌인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실린 ‘정승이 개장국을 즐겨 먹은 일’이란 글에는 북경에 가서까지 개고기를 삶아 대령하라고 해서 먹은 심상규와 남의 집 잔치에 나온 개장국을 보고 ‘손님에게 대접하는 음식’이 아니라며 먹지 않았던 이종성의 일화가 나란히 소개되어 있다. 개고기 마니아와 개고기를 혐오식품으로 보는 시각은 조선시대 때부터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개고기 마니아를 꼽자면 중종 때 권신 김안로가 있다. 이팽수란 자는 김안로의 비위를 맞추느라 봉상시 참봉이 되자, 크고 살진 개를 골라 사다가 요리해 김안로에게 올렸고, 김안로는 이팽수의 개고기 구이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이팽수는 그 공으로 승정원 주서가 되었다. 승정원 벼슬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청직이다. 이팽수는 개고기로 주서가 되었으므로 ‘가장주서(家獐注書)’란 별명을 갖게 되었다. 가장이란 ‘집노루’란 뜻인데, 개고기를 가장이라 불렀던 것이다. ●초복날 성균관 유생들에게 인기 있던 별미 개고기는 또 성균관 유생들에게 공급하는 별미이기도 하였다.19세기 초반의 윤기란 문인은 성균관에서 오랫동안 학생으로 있었는데, 그가 성균관의 풍속을 노래한 한시에 개고기에 관한 부분이 있다. 학생들에게 주는 특식을 ‘별미’라 하는데, 매달 1일 6일이 드는 날 아침에 대별미를 제공한다. 고직이는 그 날이 되기 전에 미리 유생들에게 물어보고 요구하는 것을 구해 올린다.3일 8일이 되는 날은 소별미날이다. 이 날은 생선을 올린다. 국을 끓이거나 구워서 올리는데 양이 적어서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그 외 명절 등의 별식이 있는 날이 있는데, 복날도 거기에 들어간다. 초복에는 개고기를 주었고, 중복에는 참외 2개, 말복에는 수박 1통을 주었다고 한다. 윤기는 초복의 개고기가 사소한 것 같지만, 중복의 참외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다. 국립대학에서 초복에 주는 보신탕이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이다. 개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것은 지금도 계속되는 논쟁이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자리에 끼면 마지못해 수저를 들지만, 일부러 찾아다니며 먹지는 않는다. 집에 강아지를 키우고 난 뒤로 그렇다. 이제 아주 안 먹으려 한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아렌트·토크빌 통해 한국 현실 고민

    “2008년의 촛불을 새로운 사상으로, 새로운 정치로, 새로운 경제로, 새로운 사회로, 새로운 문화로 승화시키는 데 아렌트와 토크빌이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박홍규 영남대 법대 교수가 한나 아렌트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을 불러냈다. 독일 출신 정치철학자인 아렌트와 프랑스 정치학자인 토크빌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병목현상을 읽어내고 극복방안을 찾아내려는 노력이다. 박 교수는 국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다작 필자다. 관심사는 전방위적이다. 전공인 법학에서부터 음악, 미술, 인권, 교육 등을 경계 없이 넘나든다. 그가 혼자 쓰고 번역한 책에 다른 필자와 함께 작업한 책까지 합치면 60권을 훌쩍 넘는다. 이번엔 아렌트와 토크빌이다. 박 교수는 최근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글항아리)를 펴냈다. 왜 지금 아렌트이고 토크빌인가. 아렌트와 토크빌은 그동안 한국 지식사회에서 다른 대접을 받았다. 전체주의 분석에 업적을 남긴 아렌트는 1990년대 말 이후 그의 저서 출간 붐을 타고 마르크스가 남긴 공백의 한 모퉁이를 메운 반면, 민주주의와 자유의 관계를 탐구한 토크빌은 자신의 대표작 ‘미국의 민주주의’가 간간이 인용되는 것 외에 별다른 추종자를 거느리지 못했다. 박 교수는 국내에서 한 번도 함께 논의된 적이 없는 두 학자를 한 책에 호명했다. 유대계 독일인으로 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아렌트가 미국 민주주의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토크빌의 민주주의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두 사람은 사실 매우 밀접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난해한 사변적 철학자,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연인, 전체주의 고발자 등의 파편적 이미지로 인식돼온 아렌트에게서 박 교수는 자유와 자치를 핵심 가치로 하는 민주주의 탐구자의 모습을 찾아냈다.19세기 유럽제국주의의 식민지 침략을 지지해 그가 추구한 민주주의에 대해 의심받기도 했던 토크빌에게서 박 교수는 인간이 압제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정치적 자유의 갈망을 발견했다. 박 교수가 보기에 오늘의 한국은 대의민주주의가 실패한 사회다. 경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정부 탓에 공공성은 무너지고 사적 이익에의 열망만이 팽배한 사회다. 박 교수는 “경제적 부만을 추구하는 경우 민주주의의 핵심인 자유는 없어지고 전제주의와 전체주의로 타락한다.”면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생활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는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촛불시위의 가능성을 새로운 직접민주주의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그는 두 사람을 통해 민주주의를 고민할 것을 권한다. 책 제목부터 매우 논쟁적이다. 아무도 아렌트와 토크빌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아렌트와 토크빌 비전공자인 박 교수가 한국의 내로라하는 아렌트·토크빌 전문가들의 번역과 해설의 문제점을 낱낱이 해체하고 비판했다. 이진우(계명대 철학과), 김비환(성균관대 정외과), 김선욱(숭실대 철학과), 강정인(서강대 정치학) 교수 등이 실명으로 도마에 올랐다. 박 교수의 공격적 비판이 아렌트와 토크빌을 학문논쟁의 한가운데로 이끌어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조선시대 천재화가 3인 재조명

    조선시대 천재화가 3인 재조명

    EBS ‘다큐프라임’은 조선시대 대표 화가 3인을 조명한다. 사실적인 풍속화로 천재성을 떨친 김홍도, 색(色)으로 시대를 신랄하게 풍자한 신윤복,19세기 개화기의 운명을 기록한 김준근의 삶과 작품을 분석하는 것.‘조선의 프로페셔널-화인(畵人)’ 3부작은 28일부터 사흘 연속으로 오후 11시10분에 방영된다. 첫날 1부 ‘풍속화, 조선을 깨우다’는 단원 김홍도 편이다. 그는 18세기말 다양한 생활현장과 생생한 민중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 조선에 본격적인 풍속화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행적을 더듬어 올라가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궁중 최고의 화가로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것. 그런 그가 어떻게 일반 서민들의 풍속에 관심을 가지게 됐을까. ‘씨름도’ 등 작품의 화풍을 비교해보며 그의 천재성을 짚어본다. 29일 2부 ‘여인과 색깔, 조선을 흔들다’는 혜원 신윤복 편. 그의 대표작 ‘기방무사’는 갑작스레 외출에서 돌아온 기생 때문에 당황해, 무더운 날씨에 기생의 계집종과 함께 두꺼운 이불로 몸을 급하게 가린 우스꽝스러운 양반의 모습을 담았다. 또 ‘유곽쟁웅’은 기생을 놓고 웃통까지 벗은 채 싸움을 벌이는 양반의 모습을 희화화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 이같은 파격적 화풍은 당시로선 충격이었다. 지금까지도 신윤복은 향락적인 풍속에만 주목한 화가로 비쳐져 왔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채색의 농담(濃淡)을 철저히 고려한 탁월한 미의식, 화려한 색채를 구사한 그만의 기법과 색재료의 정체, 근엄한 척하지만 기생들과의 유흥에 빠진 양반들의 이중성을 비판한 풍자정신 등도 함께 들여다본다. 30일 3부 ‘조선풍속화, 세계를 거닐다’는 19세기말 조선의 화가 기산 김준근의 세계를 다룬다. 단원이나 혜원에 비해서는 덜 알려진 이름이지만, 사실 그는 세계적 수준의 화가로 꼽힌다. 그의 그림은 세계 10여개국에 1190여점이 퍼져 있을 정도다. 그는 과연 누구이며, 왜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그의 풍속화는 세계가 조선을 알아가는 밑바탕이 됐다. 서양 사람들은 기산이란 낙인이 찍힌 그림을 사진보다 더 선호했다. 하지만 그의 세계는 베일에 싸여 있다. 김준근이란 가명으로 여러명의 화가들이 그림을 공동제작했다는 설, 근대 번역소설 ‘천로역정’의 삽화가라는 설 등이 난무하는 건 그래서다.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토요영화] 인도에서 생긴 일

    [토요영화] 인도에서 생긴 일

    ●인도에서 생긴 일(EBS 세계의 명화 오후 11시 25분) 1920년대 영국의 인도 식민지배하의 영국인들 모습을 그린 영화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드라마 구조가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뒤섞은 드라마 틀거리 사이사이에 미스터리와 로맨스를 끼워넣어 극의 긴장감을 유지해간다. 고전문학 작품을 우아한 시대극으로 재창조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특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9세기 인도 사티푸르. 더글러스 리버스(크리스토퍼 카젠노브)는 그의 아내 올리비아(그레타 스카키)가 더 이상 병원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를 듣고 눈물을 흘린다. 이어 장면은 1982년, 미래공간의 사티푸르로 바뀐다. 올리비아의 손녀인 앤(줄리 크리스티)은 한 남자에게서 할머니에 대한 얘기를 전해듣는다. 그 후 앤은 할머니 올리비아의 행적을 되짚는다. 다시 19세기 인도로 영화는 시점을 돌린다. 남편과 함께 영국인 상류사회의 모임에 참석한 올리비아는 인도의 지배자 나왑(사시 카푸르)과 사랑에 빠진다. 또다시 현재로 돌아온 영화는 관객들에게 묘한 기시감을 안긴다. 그 옛날 올리비아가 그랬듯, 앤 역시 할머니의 이야기를 함께 추적하던 인도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있다. 지난날 온갖 스캔들의 주인공이 됐던 할머니의 삶에다 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투사해보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베일에 싸인 한 인물의 이야기를 추적함으로써 주인공의 현재를 객관화시키는 매력이 압권이다.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교감하는 두 여자의 이야기 구도는 잘 짜여진 페미니즘 드라마로도 손색없다. 제작자인 이스마일 머천트와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은 1961년 영화사 ‘머천트 아이보리 프로덕션’을 세웠다.‘하우스홀더’(1963) 등 적은 제작비로 품격 높은 작품들을 내놓는 영화사로 한동안 유명했었다. ‘인도에서 생긴 일’은 그들 콤비가 내놓은 최초의 본격 상업드라마로 꼽힌다. 식민지 인도의 생활상이나 상류사회의 모습을 가감없이 묘사하는 등 시대 재현을 완벽하게 해냈다는 측면에서 영화적 가치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복합적인 내면연기를 흠잡을 데 없이 소화해낸 그레타 스카키는 이 영화를 통해 스타로 발돋움했다. 그와 사랑에 빠지는 나왑 역할의 사시 카푸르는 당시 인도의 국민배우로 통했다.130분.18세 이상 관람가.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원작과 다른 로맨스 화려해진 ‘돈키호테’

    원작과 다른 로맨스 화려해진 ‘돈키호테’

    미국의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가 12년 만에 한국 무대에 선다. 다음달 1∼3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릴 레퍼토리는 희극발레의 대표작이라는 ‘돈키호테’. 한국 팬들 앞에서 여는 두 번째 무대이다. 1940년 창단된 ABT는 영국의 로열발레단, 프랑스의 파리오페라발레단과 함께 세계 최정상 3대 발레단으로 꼽히는 단체.19세기의 전막 발레 ‘백조의 호수’‘잠자는 숲속의 공주’‘지젤’‘돈키호테’를 비롯해 ‘아폴로’‘레실피드’‘라일락 정원’‘로데오’등 주옥같은 20세기의 레퍼토리들을 잇달아 무대에 올리며 세계 발레의 정상에 올랐다. 특히 ‘Airs’‘Push Comes to Shove’는 현대발레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독특한 레퍼토리들. 영화 ‘백야’로 유명한 미하일 바리슈니코프와 조지 발란신을 비롯해 안소니 튜더, 제롬 로빈스, 아그네스 드 밀, 트와일라 타프 등 천재급 안무가들이 바통을 이어 일군 불후의 명작들이다. 이번 내한 무대에서 선보일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의 작품을 모티프로 삼았지만 원작과는 판이한 버전. 예쁘고 발랄한 아가씨 키트리와, 가난하지만 낙천적인 젊은 이발사 바질리오가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이루어가는 러브 스토리로 꾸며졌다. 세르반테스 원작의 주인공 돈키호테는 한낱 조연에 머물 뿐. 원작과는 사뭇 다르게 돈키호테와 그의 충복 산초, 판자 두 사람은 선술집 딸 키트리와 이발사 바질리오가 펼쳐가는 로맨스의 들러리일 뿐이다. 정열적인 스페인 춤이 볼거리로 삽입되면서도 고전발레의 특징인 고난도 테크닉과 화려한 기교가 그대로 살아있어 현대와 고전 발레가 묘하게 어우러지는 경쾌한 레퍼토리. 무엇보다 ABT의 스타 무용수들이 매 공연마다 바꿔가며 무대에 올라 팬들이 스타 무용수들의 기량을 비교해볼 수 있다. 팔로마 헤레라·호세 마뉴엘 카레뇨(1일 오후 8시), 헤르만 코르네호·시오마라 레이즈(2일 오후 3시), 에단 스티펠·질리안 머피(2일 오후 8시), 데이비드 홀버그·미셸 와일즈(3일 오후 4시)가 그 주인공들이다. 본 공연에 앞서 31일 오후 8시 열리는 오프닝 갈라도 만만치 않은 무대. 클래식 발레의 화려함이 살아있는 헤럴드 랜더의 ‘에튜드’(Etudes)와 모던발레의 상상력을 앞세운 트와일라 타프의 ‘래빗 앤드 로그’(Rabbit and Rogue) 두 작품이 한국 초연된다. ‘에튜드’가 예술적인 성취를 위한 무용수들의 고난한 과정을 시각적으로 무대 위에 풀어낸다면 ‘래빗 앤드 로그’는 검은색 의상의 로그와 흰색의 래빗이라는 상반된 캐릭터를 통해 세상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문제를 들여다본 흥미로운 작품이다. ABT의 스타 무용수들이 한 무대에 오르는 보기 드문 자리. 특히 미하일 바리슈니코프와 공동작업했고 빌리 조엘과 호흡을 맞춘 뮤지컬 ‘Movin’ Out’으로 유명한 안무가 트와일라 타프의 면모를 생생하게 볼 수 있는 무대이다.(02)399-1114∼6.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서구적 근대만 근대화라고?”

    근대성이란 서구에서 나온 개념이다. 계몽주의적 합리성이 자본주의와 결합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이 일어난 17세기론을 펴는 학자도 있고, 르네상스와 연관지어 12∼16세기를 제안하는 학자도 있다. 그런가하면 라틴아메리카의 탈식민주의 연구자들은 서구의 근대성이란 아메리카의 ‘발견’ 및 식민지배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본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근대성 논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산물이라고 한다.1980년대 치명적 경제위기의 원인을 좌우 갈등에서 찾던 사람들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념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처방으로 생각되었다는 것이다. 우파는 거대담론의 종말을 논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이데올로기 갈등을 종식시킬 희망을 보았고, 좌파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다양성을 끌어안아 마르크스주의의 계급투쟁의 경직성을 완화시켜줄 ‘차이의 정치학’을 발견했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에서 ‘근대 다운 근대’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근대 이후(포스트모더니즘)’를 논할 수 있느냐는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근대가 무엇인지 처음부터 논의해 볼 필요가 대두될 수밖에 없었다. 근대성에 관한 논쟁은 식민시대를 겪었고, 해방 이후에는 군부독재를 경험하는 등 라틴아메리카와 여러모로 닮아 있는 한국도 피해갈 수 없었다.1990년대 식민지 근대화를 둘러싼 역사학계의 논쟁과 박정희 정권의 발전주의 담론을 근대화와 연결시킬 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있었고, 서구화가 과연 근대화인가를 두고 지식인들 사이에 진행되었던 논쟁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라틴아메리카의 근대를 말하다’(니콜라 밀러·스티븐 하트 편저,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옮김, 그린비 펴냄)는 근대성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지식인들의 논쟁을 담고 있다. 2005년 2월 런던의 아메리카연구소에서는 ‘라틴아메리카의 근대가 언제부터 였는가’라는 주제로 인류학, 역사학, 지리학은 물론 문학, 영화, 문화비평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들이 참여한 워크숍이 열렸는데, 당시 모임의 성과를 담은 것이 이 책이다. 참가자들은 서구에서 만들어진 근대성 담론을 비판하면서, 서구에 의해 대상화되어 온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성찰하고 다양한 대안적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서구에 의해 이식된 역사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브라질 출신으로 영국 맨체스터대학의 대서양비교연구학 교수인 주앙 세자르 데 카스트로 호샤는 동향의 작가 마샤두 지 아시스의 사례로 라틴아메리카의 문화가 서구의 복제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호샤는 라틴아메리카와 같은 ‘주변부’작가는 ‘중심부’인 서구의 서로 다른 역사적 시기로부터 동시다발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그 결과 합리적인 연대순이나 정형화된 해석틀을 성실하게 따라가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마샤두는 바로 역사적 시간이 뒤섞이고 문학적 장르가 뒤섞이는 ‘고의적인 시대착오’ 기법으로 기존의 ‘창조’라는 개념을 허물고 새로운 독창성을 펼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런던대학 버크백 칼리지 스페인어학과 교수인 윌리엄 로우에게도 이어진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역사발전론이나 자본주의 근대화론자의 역사론이 모두 시간적 순서에 따른다고 비판하고, 페루 문학에서 근대성의 장면을 다룬 작품을 검토하면서 연속성과 순차성을 거부하고 시간성과 공간성을 함께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근대성을 새롭게 바라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책은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가 기획한 라틴아메리카 총서 ‘트랜스라틴’의 첫권이다. 서구 지식만을 중히 여기는 국내 학계의 풍토에서 주변부를 공부한 대가로 저절로 ‘마이너리그’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국내 라틴아메리카 연구자들은 라틴아메리카를 체계적으로 소개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일대 사건’에 해당한다고 기뻐하고 있다.1만 8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어린이책꽂이]

    ●요술 손가락(로알드 달 글, 틴 블레이크 그림, 열린어린이 펴냄)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인기작가 로알드 달의 창작동화. 억울해서 화가 치솟을 때 오른쪽 집게손가락을 쳐들고 마술을 부릴 수만 있다면…. 초등 저학년 이상.8500원.●우리 민족문화 상징 100(전3권)(이장원 글, 김이랑 그림, 한솔수북 펴냄) 선사시대에서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문화의 상징들을 총망라했다. 자장면에서 효(孝)사상까지 화보를 곁들여 빠짐없이 소개한 ‘민족문화 백과사전’. 초등고학년 이상. 각권 1만 2000원.●블랙 뷰티(애너 슈얼 글, 찰스 키핑 그림, 파랑새 펴냄) 19세기 영국을 무대로, 검은 말 ‘블랙 뷰티’가 화자. 그들의 입을 빌려 동물들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창작동화. 초등 3년 이상.1만 5000원.●바다를 헤엄쳐요(파트릭 루이지 엮음, 웅진주니어 펴냄) 얕은 바다에서 먼 심해까지. 갖가지 바다생물들, 바다오염 문제까지 두루 귀띔하는 ‘바다 사진 백과’.6세 이상.1만 3000원.
  • [문화마당] 글로벌시대 번역의 힘/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문화마당] 글로벌시대 번역의 힘/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19세기 러시아 시인 중에 주코프스키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시도 잘 썼지만 유럽 문학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일에서 더욱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그가 공들여 번역한 ‘오디세이’는 러시아 문학사에 큰 획을 그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후배 작가 고골은 주코프스키의 ‘오디세이’ 번역이 문학의 새로운 시대를 연 사건이라고 환호하면서 미사여구로 가득 찬 아주 긴 에세이를 썼다. 한마디로 주코프스키의 번역은 기적이며 번역자는 원저자보다 더 생생하고 아름답게 고대 그리스의 삶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심지어 주코프스키가 평생 동안 썼던 창작 시는 이 번역을 위한 습작이라는 것이다! 나는 문제의 ‘오디세이’ 번역을 읽어 보지 못했으므로 고골의 평가가 어느 정도 공정한지 가늠할 수 없다.‘이거야 원 꿈보다 해몽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고골의 글을 읽으면 어쨌든 무척이나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번역을 기적적인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문학 풍토가 부럽고, 번역가에 대한 지극한 예우가 부럽고, 번역을 창작보다 더 높이 둘 수 있는 독자의 열린 마음이 부럽다. 러시아는 옛날부터 번역을 중시했다. 특수한 역사적 상황 때문이다. 러시아는 17세기까지 유럽 문화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따라서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18세기 초부터 러시아인들이 당면한 과제는 서구 따라잡기였다. 번역은 서구화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다. 지식인들은 서구 문화의 전통을 차용하고 번역하고 수용했다. 그러는 사이에 번역은 창작이 되고 수용은 서구를 향한 새로운 도전이 되면서 찬란한 러시아 문학과 예술을 탄생시켰다. 그러므로 푸시킨에서 파스테르나크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유명한 문인들 대부분이 창작과 번역을 같이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러시아의 번역문화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물론 러시아가 서구화를 향해 줄달음치던 시절과 오늘의 글로벌 시대를 같은 틀 안에서 얘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히려 글로벌 시대이기에 그리스 로마 문화도 르네상스도 모르던 러시아를 한 세기 만에 문학강대국으로 만들어준 번역의 힘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번역은 대화다. 원저자와 번역자 간의 대화이고 언어와 언어 간의 대화이며 문화와 문화 간의 대화이다. 우리가 세계를 향해 말을 하고 싶다면 세계가 하는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이해의 양과 질과 속도는 결국 우리 문화의 성장을 좌우한다. 글로벌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대화로서의 번역을 요구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나라에서도 번역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학부에 번역학과가 창설되기 시작했고 번역학회와 번역가들의 활동이 다원화되고 있으며 명저 번역에 대한 정부의 지원도 지속되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전문 번역인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언어적 소양과 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전문가적인 양심을 갖춘 번역인 양성을 위해 지금이라도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더불어 번역 서평을 활성화하고 번역 윤리를 정착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무성의한 번역, 엉터리 번역, 기존 번역의 표절 같은 것들이 설 자리가 없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시급한 것은 번역에 대한 사회 통념의 전격적인 변화이다. 번역은 문화 발전을 위한 가장 강력한 원동력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굳건하게 뿌리내려야 한다. 우수한 번역가도 필요하고 명민한 번역비평가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번역에 대한 국민의 인식 자체를 바꾸어 글로벌 시대를 선도할 수 있는 번역 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일이다.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 박물관서 역사·문화체험 어때요

    박물관서 역사·문화체험 어때요

    장거리 피서여행을 떠난다면 도중에 한 두 개쯤은 스쳐 지나갈 박물관이 여름휴가를 더욱 보람차게 만들 것이 틀림없다. 올해부터 국립 박물관은 입장료도 받지 않는 만큼 고속도로를 달리다 휴게소에 들르듯 편한 마음으로 찾을 수 있다. 마침 전국의 국립 박물관은 다양한 특별행사를 마련하여 지역 관람객뿐 아니라 휴가철을 맞아 찾아오는 외지 손님을 반긴다. ●국립해양유물전시관(061-270-2084) 지난 21일부터 조선소로 탈바꿈했다. 경기도 무형문화재인 김귀성 조선장(造船匠)이 전남 목포의 갓바위공원에 자리잡은 해양유물전시관의 해변광장에서 실물의 조선시대 배를 복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배는 두 개의 돛대와 방향타 역할을 하는 치, 닻줄을 감아 올리는 호롱, 나무로 만든 닻을 갖춘 평저형으로 길이 15.16m, 너비 4.93m, 높이 2.06m에 이른다. 서해에서 조기잡이를 하던 중선망 어선으로 아버지로부터 제작기술을 전수받은 김 조선장이 1920년대 ‘조선어선조사보고서’를 참고하여 짓고 있다. 관람객은 오는 9월30일 완성되는 이 배의 복원과정을 자유롭게 지켜볼 수 있으며, 특히 24∼25일과 새달 21∼22일,9월 11∼12일,25∼26일에는 조선장과 함께 직접 배짓기 체험도 할 수 있다. 새달 1∼4일에는 신안해저유물선이 발견된 증도의 갯벌생태체험관(061-270-2045)에서 ‘돛을 올려라!꿈의 항해’라는 주제로 해양유물전시관의 ‘이동박물관’도 펼쳐진다. ●국립제주박물관(064-720-8000) 새달 17일까지 우리문화의 정수를 소개하는 ‘영원의 빛, 고려청자’ 기획특별전을 연다. 국보 제96호 청자거북모양주전자와 국보 제114호 청자상감모란국화무늬참외모양병을 비롯한 명품 청자가 나왔다. 매주 토요일에는 오후 5시30분과 오후 6시, 오후 7시30분 세 차례에 걸쳐 도자기전문가의 해설을 들으며 특별전을 감상할 수 있는 ‘큐레이터와의 대화’도 마련된다. ●국립광주박물관(062-570-7032) 진도 출신의 화가 소치 허련(1808∼1893)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특별전을 새달 31일까지 연다. 소치는 호의선사의 도움으로 해남의 녹우당을 출입하며 공재 윤두서 일가의 회화를 익히고, 추사 김정희를 만나 남종화의 세계에 눈을 뜬 인물. 훗날 추사는 “압록강 동쪽에는 소치만한 화가가 없다.”고 찬사를 보냈다. ‘남종화의 거장 소치 허련’이라는 제목의 특별전에는 150점에 이르는 소치의 서화뿐 아니라 ‘운림묵연’과 ‘한묵청연’에 실린 당대 명사들의 유묵도 공개되고 있다. 조희룡과 이한철, 전기, 유재소, 박인석 등 같은 시대를 살며 예술적 교감을 나눈 이들의 작품을 한 자리에 모아 19세기 예술계를 거의 온전하게 재현한다. ●국립대구박물관(053-768-6052) 새달 31일까지 ‘인류의 여명-동아시아의 주먹도끼’특별전을 갖는다. 세계 고고학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구석기 유물인 연천 전곡리 주먹도끼를 비롯하여 450점 남짓한 유물이 관람객을 맞는다. 최근 30년 동안 전국에서 출토된 주먹도끼를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았다. 직지성보박물관(054-436-6009)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및 몽골 과학아카데미 고고학연구소와 공동으로 몽골의 암각화와 사슴돌, 비문 탑본을 한 자리에 모은 ‘돌에 새긴 선사 유목민의 삶과 꿈’ 특별전도 새달 10일까지 대구박물관에서 열린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시론] 러시아의 독도 표기 유감/박종효 모스크바대 객원교수 한국학센터

    [시론] 러시아의 독도 표기 유감/박종효 모스크바대 객원교수 한국학센터

    러시아에는 독도에 대한 일본의 부당한 주장이 잘 알려져 있다. 학계를 중심으로 한 사회여론은 한국의 영토로 독도를 지지하고 있다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 오래전부터 일본은 러시아의 극동 관문은 동해라고 생각했다. 러시아 태평양 항로 중심에 있는 울릉도와 독도를 러시아의 진출을 방해할 수 있는 전략지역으로 판단했다. 울릉도는 한국의 소유로 이미 열강에 알려져 있지만 독도는 ‘리앙쿠르 바위섬’으로 지도상에 표시돼 있어 청·일전쟁 중에 일본이 댜오위다오(센카쿠)를 편입했듯이 러·일 전쟁을 시작하면서 1905년 2월22일에 일본 시네마현에 편입시켰다. 러·일전쟁에 앞서 일본은 울릉도에 통신부대를 설치하고 원산을 경유, 만주로 진격하는 일본군을 지휘했다.1905년 3월 쓰시마 해전에 앞서서는 독도에 탑망 시설을 두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러시아 함대를 전면적으로 포위하여 항해를 저지하는 데 성공해 태평양 2함대 사령관의 부상으로 지휘권을 위임 받은 태평양 3함대 사령관 네바가토프는 독도 해상에서 일본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은 독도를 쓰시마해전은 물론 전 러·일 전쟁을 결정적으로 승리케 한 성지(聖地)로 생각한다고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현재 러시아의 지도에서 사용되고 있는 독도 호칭은 러시아의 전통적인 한반도 정책과 러시아의 전신인 구 소련이 얄타협정과 카이로 선언에 합류한 정신과도 모순된다. 러시아가 독도를 최초 발견한 1855년 지도에는 동도를 ‘올리부차’, 서도를 ‘메네라이’라고 표기했다.19세기 말부터 20세기초까지는 지도상에 리앙쿠르, 호네트, 올리부차, 메네라이라고 병기표기했다. 러·일전쟁 이후에는 다케시마라는 표기가 하나 더 붙어 명칭이 4개가 됐었다. 혁명 이후 1974년까지는 다케시마 호칭 하나만 사용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 페테르부르크에서 발행한 세계 도서사전에도 다케시마로 표시하고 일본 영토라고 하였다. 그 후 현재는 모든 지도에 프랑스 포경함 이름을 따라 리앙쿠르로 표기하고 있다. 이와 같은 표기는 러시아의 전통적인 일본군국주의 반대정책은 물론 한반도 우호정책과도 모순된다. 이같은 러시아의 표기는 한·일 어업조약에 따라 중립을 지키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나 독도는 한국의 삼국시대부터 고유한 영토다.1945년 광복 후에는 일본의 음모를 물리치고 계속 지금까지 63년간 실효적 점유를 하고 있으며 일본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지금 같은 러시아의 독도 표기는 첫째, 전통적인 러시아의 한반도 우호정책에 모순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한국은 쿠릴열도를 일본어로 지시마(千島)가 아닌 러시아어 쿠릴열도로 러시아 영토로 표기하고 있으나 러시아는 독도를 일본이 찬성하는 리앙쿠르라고 표기하여 무국적으로 놓아둔 것은 불공정한 처사인 것이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때 다케시마라고 표기하여 일본 영토로 생각했었다면 지금은 당연히 독도로 호칭해야 옳다. 셋째, 한국이 독도를 실효적 점유를 하고 있으므로 다케시마 표기는 한국의 역사와 현실 그리고 영토 주권을 무시하는 태도로 비쳐질 수 있다. 한국은 19세기 중엽부터 러시아와 뿌리깊은 우호관계를 맺고 있다. 도서 명칭 문제에서도 러시아는 한국의 입장을 지지했으면 한다. 그래야 앞으로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는 물론 대일 도서정책에서도 동반자로 함께 갈 수 있다. 박종효 모스크바대 객원교수 한국학센터
  • 현대미술 장르 망라 ‘영국 스타일’을 보다

    현대미술 장르 망라 ‘영국 스타일’을 보다

    무엇이 그들을 ‘예술’이게 만들고 있을까. 예술, 좀더 정확히는 미술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재기발랄한 전시가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아이러니 & 제스처’(Irony & Gesture)전에는 영국 현대미술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대표작가 11명의 작품들이 나와 있다. 이 기획전은 갤러리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관람객의 ‘순발력’을 시험한다. 화려한 색감의 합판조각들로 이뤄진 전시장 바닥이 펼쳐지고, 신발을 신은 채 그냥 돌아다녀도 될지 잠시 고민하게 만드는 것. 걸어다니도록 설정된 화려한 바닥은 리처드 우즈의 엄연한 판화작품이다.10여개 패턴의 합판조각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 붙여 공간에 따라 달라보이는 효과를 연출한다. 그렇다면 고급 인테리어 바닥과 이 작품은 어떻게 다를까.“인테리어나 현대미술이나 다를 게 없다.”고 잘라 말한 작가는 “작품이 미술관, 컬렉터의 집, 대형 숍 등의 바닥, 벽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된다.”고 설명했다. 미술 개념의 상품화를 보여주는 작품인 셈이다. 뜻밖의 ‘바닥 예술’이 유쾌한 흥분을 안겼다면, 스테인리스 판을 팝업북처럼 만들어 놓은 샘 벅스턴의 작품 ‘마이크로맨 컬렉션’은 순식간에 냉정을 되찾게 해준다. 정교한 미니어처를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은, 먼저 얇은 스테인리스 판에 드로잉을 한 뒤 산을 부어 부식시키고 다시 일일이 손으로 입체 조형물로 다듬어내는 과정을 거쳤다.“2차원적 평면이 3차원적 조형물로 변하는, 미술의 유연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벅스턴은 영국에서 요즘 한창 잘 나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이 전시에는 딱히 주제어가 없다. 공통 주제 없이 현대미술 담론의 ‘아이러니’를 포착해 보는 것이 전시의 취지다.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이지윤씨는 “현대미술 전시장을 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나만 이해를 못할까?’하는 의문을 품게 되는데, 작품 면모의 아이러니를 읽어낼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층에서 선보이는 데이비드 배철러의 설치조각 시리즈에서는 그렇다면 어떤 메시지를 건져낼 수 있어야 할까. 빨래집게, 거울, 빗, 가위 등 형형색색의 플라스틱 용품들을 긴 막대에 꽂아 만든 조형물 4개가 선보인다. 조형물의 오브제들은 모두 작가가 1파운드숍에서 사들인 잡동사니들. 세계적 색채이론가이기도 한 작가는 “색채의 혁명적 변화는 도시 안에서 이뤄져 왔다.”며 “플라스틱 제품이 선보인 19세기 이후 현대 일상의 색깔은 플라스틱이 주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원색 플라스틱 잡동사니 조형물의 의미를 해설했다. 전시에서는 설치, 회화, 조각, 영상 등 영국 현대미술의 오늘을 보여주는 여러 장르의 작품 38점을 감상할 수 있다. 나이지리아 출신으로 2006년 터너상을 수상하고 영국 여왕의 훈장(MBE)까지 받은 잉카 쇼네바레의 흑인과 백인의 발레 영상물, 영국왕립미술원 교수인 데이비드 맥이 캔버스에 잡지 사진을 오려 붙여 6개월에 걸쳐 만든 대형콜라주 ‘바벨탑’ 연작도 소개되고 있다. 영국 팝아트를 주도한 리처드 해밀턴의 판화작품도 11점이나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새달 14일까지.(02)733-8449.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29) 엿 파는 아이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29) 엿 파는 아이

    그림(1)은 기산(箕山) 김준근의 ‘엿 파는 아이’다. 그림(2)는 김홍도의 ‘씨름’의 일부분으로 역시 엿을 파는 아이를 그린 것이다. 엿을 파는 아이가 나오는 풍속화는 더러 있지만, 엿 파는 아이만을 그린 것은 오직 김준근의 것만 남아 있다. 그림(1)의 두 소년은 엿 목판을 메고 있는데, 왼쪽 소년은 떼어서 파는 판엿을 팔고, 오른쪽 소년은 긴 가래엿을 판다. 그림(2)에서 팔고 있는 엿도 가래엿이다. 그림(1)에서 나는 오래된 의문을 풀었다. 나는 엿장수의 가위는 언제부터 있었던가 늘 궁금했는데, 이 그림을 보고 적어도 19세기 말에는 있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왜냐면 김준근은 주로 19세기 말에 활동했기 때문이다. ●엿은 이따금 맛보던 특별한 기호품 각설하고. 엿은 언제부터 먹었을까. 인간에게 단것은 가장 원초적인 맛이다. 맛을 느끼는 데도 여러 경지가 있어, 오랜 훈련 끝에 느끼는 그런 맛도 있다. 하지만 단맛은 타고 나는 맛이다. 아이들이 유난히 단맛에 끌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엿은 그 단맛 때문에 먹는 식품이다. 물론 단맛의 제왕으로 꿀이 있지만, 그것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단맛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려는 노력은 오래 전부터 있었을 것이고, 그 노력이 곡물의 당화(糖化) 과정을 발견토록 했을 것이다. 한데 한국에서 엿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고려시대 이규보의 시에 한식날 아무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다면서 행당(杏塘)과 맥락(麥酪)이 모두 자기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 되었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 시의 행당과 맥락을 엿으로 보기도 한다. 원래 중국에서는 한식날 은행을 갈아 쑨 죽에 엿을 넣어 먹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규보의 시에 나오는 행당을 엿을 넣은 은행죽으로 보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 시를 고려 시대에 엿이 있었다는 증거로 본다. 엿은 귀한 꿀을 대신하는 조선시대의 유일한 단것이었다. 설탕은 고려시대 때 송나라에서 전해진 이후 귀족과 양반들이나 겨우 맛볼 수 있었고, 일반 백성들은 그 존재조차 모르는 귀한 물건이었다. 엿이 거의 유일한 단맛이었던 것이다. 또 엿은 이따금 맛보는 별미였다. 조선중기의 문인 이식의 ‘한식 때의 일을 쓴다’라는 시를 보자. “한식에도 불 피우는 것을 금하지 않고/ 부엌에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기가 피어오른다/ 엿을 고아 늙으신 어머님께 올리고/ 술을 걸러 선영 찾아 절을 올리노라” 한식날에야 특별히 엿을 고아서 부모에게 올렸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덕무는 친구 박제가에게 부치는 편지에서 “보내 온 엿과 포는 아버지께 올렸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엿은 노인들에게나 올리는 특별한 기호품이었던 것이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자. 엿 파는 아이들이 파는 엿은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유본예가 쓴 ‘한경지략’을 보면 백당전(白糖篆)이란 가게가 있다. 유본예는 백당전은 서울 각처에 있으며, 엿과 사탕을 판다고 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다음 기록이다.“아이들이 목판을 메고 다니며 팔기도 한다.” 즉 김홍도의 풍속화에 나오는 엿장수는 곧 백당전에서 엿을 받아 파는 소년 중 하나인 것이다. ●영조때 과거시험장서도 엿 팔았다는 기록 엿을 파는 곳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다. 씨름하는 곳에 사람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의외의 장소가 있다.‘영조실록’ 49년(1773) 4월 9일조에 의하면 지평 이한일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이번 과거 시험장은 엄숙하지 못해 떡과 엿, 술이며 담배를 등불을 켜 놓고 일산 아래서 거리낌 없이 팔았다.”라고 과거장의 질서를 단속하는 금난관을 파면시킬 것을 청하고 있다. 정말 웃기는 일이지만, 과거장에서도 요긴한 주전부리는 엿이었던 것이다. 엿도 잘 만드는 지방이 있다. 조선후기의 문인 이하곤은 1722년 전라도 일대를 유람하는 길에 전주에 들러 시장을 본 기록을 남기고 있다. 12월12일 박지수와 경기전(慶基殿)에 갔다. 민지수도 왔다.…회경루에 올라 시장을 바라보았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빽빽이 모인 것이 흡사 서울의 종로의 오시(午市) 같았다. 잡화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패랭이와 박산이 반을 차지했다. 박산은 기름으로 찹쌀을 볶아서 엿으로 버무려 만든다. 목판으로 눌러 종이처럼 얇게 펴서 네모로 약간 길쭉하게 자른 것이다. 네댓 조각을 겹쳐서 한 덩이로 만든다. 공사의 잔치와 제사상 접시에 괴어 올려 쓴다. 오직 전주 사람들이 잘 만든다. 전주의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다는 박산은 요즘 말로 하자면 쌀강정이다. 박산을 전주에서 잘 만드는 것은 엿이 좋기 때문이다. 허균은 자신이 먹어본 음식 중에서 맛있는 음식을 모두 모아서 ‘도문대작’이란 글을 썼는데, 이 글에서 “개성 엿이 상품이고 전주 엿이 그 다음이다. 요즘은 서울 송침교 부근에서도 잘 만든다.”라고 말하고 있다. 전주의 엿은 전국에서 두 번째였던 것이다. 그는 또 ‘백산자’를 소개하면서 속명은 ‘박산’으로 전주 지방에서만 만든다 하고 있다. 역시 전주가 품질이 좋은 엿의 생산지였기 때문이다.‘세종실록’ 3년(1421) 1월13일조에 의하면, 예조에서 진상하는 물목을 아뢰면서 ‘백산엿은 오직 전주에서만 만드는 것’이라고 하고 있으니, 전주 엿의 전통은 오래된 것이다. ●개성 엿이 상품… 전주 엿이 그 다음 이제 궁금한 것은 엿장수다. 그림(1)과 그림(2)의 엿장수 소년은 역사 기록에 남을 수 없다. 문헌을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단 한 사람의 이름을 발견했다. 정약용의 ‘흠흠신서’에 등장하는 신착실이다. 황주의 백성 신착실은 엿장수다. 모갑이가 외상으로 그의 엿을 두 개 먹고 당최 갚지 않는다. 그 해 말 착실은 모갑이의 집에 가서 엿값을 달라고 재촉하다가 시비가 붙어 손으로 모갑을 떠밀었다. 그때 마침 뒤에 있던 지게 가지가 공교롭게도 모갑이의 항문을 통과해 복부까지 치밀고 올라왔다. 모갑이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엿값 2푼 때문에 살인을 했으니,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이 중론이었지만, 다산은 지나친 형이라 주장했고, 이듬해 정조에게 아뢰어 정조의 동의를 얻어낸다. 정조 역시 살인의도가 작용하지 않은 공교로운 죽음이라 하여 신착실을 석방한다. 신착실은 아마도 기록에 이름을 올린 최초의 엿장수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연한 예외일 뿐이다. 누가 엿장수 따위를 거룩한 문자로 남긴단 말인가. 그러면 가공의 세계, 곧 문학작품에서 엿장수를 찾아보자. 가사 작품 중 ‘덴동어미 화전가’란 작품이 있다. 화전(花煎)은 꽃지짐이다. 진달래꽃으로 지짐을 해 먹으면서 여자들이 하루를 즐긴다. 어느 날 여자들이 모여 꽃지짐을 하던 중 한 청상과부가 신세타령을 하며 개가 여부를 고민한다. 이에 ‘덴동어미’가 개가하지 말고 수절을 하라고 하면서 고난에 찬 자신의 일생을 회고한다. 덴동어미는 네 번 결혼한 여자다. 남편 셋을 잃고 마지막으로 결혼한 남자가 바로 홀아비 엿장수 조첨지다. 조첨지와 살면서 잠시 행복이 찾아온다. 아들을 낳았고, 부부는 어리장고리장 사랑해 마지않는다. 그러나 그 행복은 정말 잠시였다. 별신굿에 팔 엿을 고다가 불이 나서 조첨지는 죽고 아이는 불에 데어 병신이 된다. 덴동어미란 이름은 불에 덴 아이의 어미이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덴동어미는 이후 덴동이를 데리고 홀로 산다. 불쌍한 조첨지는 어떻게 엿장수를 했던가. 작품을 직접 읽어보자.“그날부터 양주(兩主)되어 영감 할미 살림한다/ 나는 집에서 살림 살고 영감은 다니며 엿장사라/ 호두약엿 잣박산에 참깨박산 콩박산에/ 산사과 질빈사과를 갖추갖추 하여 주면/ 상자 고리에 담아 지고 장마다 다니며 매매한다/ 의성장 안동장 풍산장과 노루골 내성장 풍기장에/ 한 달 육 장 매장 보니 엿장사 조첨지 별호되네.” 여자는 엿을 갖추갖추 만들고 남자는 그것을 지고 경상북도 안동 일대의 시장 여섯 곳을 돌아다니며 팔았던 것이다. 이 부분이 아마도 조선시대 엿장수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보고서일 것이다. 엿의 단맛을 설탕이 대신한 지 오래다. 설탕도 건강에 나쁘다 하여 잘 먹으려 들지 않는다. 하물며 엿이랴. 이따금 예쁘게 포장한 엿을 보면 엿장수의 가위소리, 엿 사라는 엿단쇠 소리, 엿치기를 하는 사람들을 비추던 카바이드 불빛이 문득 그리워진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21세기 新다빈치 프로젝트-통섭을 말하다] 음악가가 음향기기 만드는 ‘통섭의 시대’ 온다

    [21세기 新다빈치 프로젝트-통섭을 말하다] 음악가가 음향기기 만드는 ‘통섭의 시대’ 온다

    원효의 화엄사상 해설이나 조선 말기 실학자 최한기의 기(氣) 철학에서 주로 사용됐다. 정치적으로는 ‘총괄하여 관할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최재천 교수가 에드워드 윌슨 미국 하버드대 석좌교수의 저서 ‘컨실리언스(Consilience)’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재해석해 도입한 개념이다. 요즘 한국 지식사회의 최고 화두는 ‘통섭(統攝)’이다. 대학들은 앞다퉈 통섭을 표방한 학과를 설립하고, 석학들은 지식의 통합을 외치고 있다. 통섭이 ‘새로운 변화’의 상징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4년 전 일개 학설로 한국에 소개된 통섭은 이제 스쳐 지나가는 유행이 아닌, 우리 사회가 가야 하는 방향으로 대접받고 있는 셈이다. 통섭이 왜 국내 지식사회의 주제어로 떠올랐고, 그것은 왜 필요한 것일까. 통섭을 주장하는 많은 학자들은 통섭이 ‘한국적 특수성’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라는 데 대부분 동의한다.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 이과의 구분에 익숙해진 한국 사람들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별개의 학문으로 생각한다. 서양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는 편의상의 학과 구분이 한국에서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자리를 잡았고, 결국 그것은 유연하고 복합적인 사고를 갖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학자들은 인간과 기계, 우주, 생명공학 등 다양한 학문을 과학적 방법과 인문학적 방법으로 동시에 고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는 1933년부터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교류가 시작됐고, 일본도 학문 전 분야를 아우르는 ‘슈퍼대학원’의 등장을 앞두고 있다. 물론 특수한 학과가 오히려 인기를 끌 정도로 ‘전문성’이 강조되는 한국사회에서 통섭을 논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노령화, 산업 변화의 가속화 등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통섭적 사고를 갖춘 인간상이 필요하다. 한 예로 평생 직업의 개념이 희박해지는 상황에서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직업을 찾기 위해 매번 새로운 자격증을 따고 공부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폭넓은 사고를 갖고, 뛰어난 적응력을 가진 사람을 키운다면 그만큼 새 길을 모색하고 목표를 세우는 데 유리할 수밖에 없다. 학자들이 ‘통섭형 사고 교육’을 어린 시절부터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통섭은 학문의 벽을 허무는 일에서 시작된다. 현재 한국의 대학사회는 같은 학과 교수들 사이에서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을 불문율처럼 여기고 있다.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해낼 수 없는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이같은 구분은 오히려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데 장애로 작용할 뿐이다. 특히 다른 학문에 대한 관심과 기본적인 개념의 이해는 전혀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개미를 연구하는 생물학자가 인간사회를 기본으로 연구하거나, 기계공학자 대신 음악 전공자가 음향기기를 만든다면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미국의 경제학자들은 미분방정식으로 경제를 예측하는 대신 자기공명영상을 도입해 경제활동을 하는 인간의 뇌를 분석하기 시작했다.MIT에서는 사람이 전혀 등장하지 않은 채 전자기기가 오페라의 막을 올리고 공연을 한다. 여러 학문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아리스토텔레스 통섭의 원조 통섭은 인류 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지식의 경계’를 넘어서려고 했던 모든 노력을 통섭의 일환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각종 학문에 ‘광범위한 관심’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지식의 경계가 없던 시절인 만큼 그의 관심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그 결과 수많은 분야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조’로 떠받들어진다. 박지원, 홍대용, 최한기 등 조선시대 후기 실학자들도 인문사회과학을 배워 자연과학에 적용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통섭의 역사에 기록될 만한 것으로 평가된다.200여년의 시간 차이는 있지만 서양의 다빈치와 조선의 정약용이 약속이나 한 듯 기중기(거중기)를 개발했다는 사실은 통섭적 사고가 시대적 배경이나 사회환경과는 상관없이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가장 전형적인 형태의 통섭은 ‘자연을 흉내내는 일’에서 시작된다. 인간사회를 바꾼 수많은 도구와 아이디어가 자연에서 비롯됐다. 기업들은 동물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연구해 새로운 휴대전화를 만들기 위해 연구 중이다.‘현실에 존재하는 통섭의 메카’로 불리는 미국 MIT 미디어랩은 1985년 ‘함께 모여 상상의 나래를 펼치자.’는 소박한 목표로 시작됐지만, 매년 수백건 이상의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내는 ‘상상력 공장’으로 발전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국내 연구 현주소 2005년 최재천 교수 등 윌슨의 ‘컨실리언스’를 번역 학문적 기반 아직 취약… 대학들 전면도입 움직 통섭의 개념이 국내 학계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과학철학자 장대익 박사와 최재천 교수가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 ‘컨실리언스(Consilience)’를 ‘통섭’이란 이름으로 번역, 출간한 2005년의 일이다. 퓰리처상을 두 차례나 받은 미국 하버드대 석좌교수이자 생태학자인 윌슨은 개미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로 섬 생물지리학과 사회생물학이라는 두 개의 학문을 개척했다. 윌슨이 주창한 컨실리언스는 르네상스 회귀로 집약된다. 인문학과 사회과학 등 모든 학문이 언젠가는 자연과학적인 방법론으로 통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컨실리언스는 19세기 자연철학자 윌리엄 휴얼이 처음 만들어냈다. 라틴어의 ‘컨실리에르(consiliere)’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된다.‘컨(con)’은 영어로 ‘함께’라는 뜻을,‘살리에르(salire)’는 ‘뛰어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결국 휴얼과 윌슨의 ‘컨실리언스’는 ‘서로 다른 현상들로부터 도출되는 결론들이 서로 일치하거나 정연한 일관성을 보이는 상태’를 의미한다. 최 교수와 장 박사는 컨실리언스에 대응하는 우리말을 찾기 위해 고심하다가 원효대사의 화엄 사상에서 통섭이라는 말을 찾아냈다. 그러나 이들의 통섭은 방법론과 지향점에서 윌슨 것과 다르다. 윌슨이 자연과학으로의 통합을 강조한 데 반해, 이들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동등한 위치에서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제로 국내에서 진행되는 통섭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학자들의 상당수가 무조건적인 생물학 중심의 학문적 통합보다는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자연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비중을 두고 있다. 통섭이 ‘학문간의 벽을 허물자.’라는 정도의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그것의 정확한 의미나 지향점을 설명할 수 있는 학문적 기반은 취약하다. 올 초 서울대에서 열린 포럼에서는 “기계적으로 학과가 통합되는 것을 물리학적 통합, 두 학문이 새 학문을 만들어내는 것을 화학적 통합으로 정의한다면 통섭은 생물학적 결합으로 경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차원으로 볼 수 있다.”는 발표가 있었지만 구체적 지향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방향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했다. 특히 가설과 학문 사이에서 여전히 논쟁 중인 외국과 달리, 전면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움직임은 다소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쪽도 있다. 인위적인 벽 허물기가 될 경우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통섭의 시대’ 다시 주목받는 다빈치식 사고 통섭을 언급하는 학자들은 통섭형 인간의 표본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꼽는다. 다빈치식 사고는 끊임없는 지적 호기심과 경험을 통한 증명정신, 예리한 관찰과 섬세한 감각, 모호한 것까지 포용하는 묘사법, 과학과 예술의 조화, 건강한 육체와 정신, 그리고 한 가지 아이디어에 다양한 분야를 엮어내는 연결 습관 등으로 집약된다. 시대와 환경을 뛰어넘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인 셈이다. 과연 다빈치는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사고방식이 그로 하여금 위대한 업적을 쌓게 만들었을까. 다빈치식 사고를 가진 수많은 사람을 키워 새로운 시각으로 현대를 바라보게 할 수는 없을까. 이탈리아 각지에 숨어 있는 다빈치의 발자취를 찾아, 왜 그가 지금 다시 주목받고 있는지를 짚어봤다. |빈치·피렌체·밀라노(이탈리아) 박건형특파원|이탈리아 밀라노에 자리잡은 오페라극장 라 스칼라 앞 광장. 거대한 성당 두오모를 보려는 관광객들이 꼭 지나야 하는 이곳에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동상이 우뚝 솟아 있다. 동상 아래에 적혀 있는 ‘과학과 예술의 혁명가(AL Rinnovatore Delle Arti E Delle Scienze)’라는 문구는 다빈치를 설명해주는 가장 짧은 수식어이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로 추앙받는 다빈치에 대한 이탈리아인들의 헌사다. ●거대한 박물관이 된 다빈치 고향 50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이탈리아 곳곳에는 다빈치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다빈치는 이탈리아인들의 영웅이자 정신적 지주다. 수도 로마 공항의 공식 명칭은 ‘레오나르도다빈치공항’. 공항과 시내를 연결하는 기차의 이름 역시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다. 공항 곳곳에 다빈치의 작품을 형성화한 조형물들과 그의 동상을 목격할 수 있다. 암흑의 중세를 벗어나 인문학의 부흥을 이끌어낸 르네상스의 핵심도시 피렌체를 지나 피사 방향으로 65㎞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 빈치에 도착했다. 나지막한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사방 어느 곳에나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만이 가득한 특별할 것 없는 시골마을이 바로 다빈치의 고향이다. 마을 중심지의 가장 높은 곳에는 3m가 넘는 비트루비우스의 ‘인체 비례도’ 조형물이 다빈치의 고향임을 말해주고 있다. 다빈치는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의 이론에 따라 기하학적으로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원 안에 사람의 몸을 그렸다. 이 비례도의 원본은 베니스 박물관에 소장돼 있지만, 공개는 허용되지 않는다. 다빈치가 빈치에 살았던 기간은 태어난 이후 피렌체에서 베르키오의 도제로 들어가기 전까지 16∼17년간으로 알려져 있다.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그의 생가는 세 개의 방으로 이뤄져 있다. 집 내부에는 다빈치의 생애와 작품에 관한 글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지만, 실제로 다빈치의 흔적은 벽난로와 책상뿐이었다. 생가를 지키고 있는 빈치 시청의 알베르토 로카티는 “다빈치는 세르 피에로와 카테리나라는 하층계급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면서 “다빈치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다빈치의 왕성한 학구열이 어린 시절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반사작용이란 설도 있다.”고 소개했다. 마을의 중심지 폭이 채 500m밖에 되지 않는 조그만 빈치지만, 마을 전체가 거대한 다빈치 박물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성당 옆에 자리잡은 다빈치 박물관에는 그가 설계한 물레와 기중기 등의 원리가 자세히 설명돼 있다. 다빈치 아이디어 박물관은 다빈치의 사고가 어떻게 형성됐으며 후세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체험관이다. 박물관 학예사인 세르지오 페오네는 “다빈치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사고가 다방면으로 발달해 있었다.”면서 “이 박물관의 첫 번째 전시물도 플라톤의 흉상”이라고 밝혔다. 이어 “다빈치가 스케치한 작품을 실제로 만들어보는 작업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잡고 있을 정도로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덧붙였다. 마을 곳곳에 자리잡은 상점에서는 티셔츠나 엽서 등 흔한 기념품 대신 다빈치가 고안한 시계와 헬리콥터 모형 등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학문과 예술 꽃피운 피렌체, 밀라노 다빈치 연구자들은 그의 생애를 크게 제1차 피렌체 시대(1466∼1482), 제1차 밀라노 시대(1482∼1499), 제2차 피렌체 시대(1499∼1506), 제2차 밀라노 시대(1506∼1513), 그리고 로마ㆍ앙부아즈 시대(1513∼1519) 등 다섯 시기로 구분한다. 말년을 제외하면 그의 성과가 대부분 밀라노와 피렌체에서 이뤄진 셈이다. 피렌체 우피치 박물관에는 다빈치의 작품 중 가장 오래된 1473년의 데생이 걸려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다빈치는 보티첼리, 크레디, 페루지노 등 베로키오 산하의 수많은 제자들 중 한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베로키오의 도제로 있는 동안 다빈치는 그림을 그리는 일에만 매달리지 않고 건축, 도형 연구, 광학론, 원근법, 기하학, 자연과학, 음악 등을 폭넓게 익혔다. 이때 배운 원근법의 결실이 바로 1495∼1497년에 다빈치가 완성한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최후의 만찬’이다.15분에 단 25명의 관람객에게만 공개되는 이 불후의 거작은 성당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울 만큼 크고 장엄했다.‘최후의 만찬’ 전문 가이드인 실비아 솜바루는 “작품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미술사학자, 구조학자, 역사학자, 광학자 등 각 분야에 걸쳐 있다.”면서 “지금도 이 그림 연구로 연간 수십편의 논문이 쏟아져 나올 정도”라고 밝혔다. 성당 길 건너편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립 과학기술박물관이 있다. 온통 과학에 관한 내용으로 꾸며진 박물관 전시물 중 다빈치가 고안한 각종 기계들이 단연 인기다. 피렌체 시내에도 다빈치의 기계를 실물 크기로 재구성해 전시·체험할 수 있도록 한 두 곳의 박물관이 있다. 두 도시의 대형 서점에는 다빈치 관련 서적들이 별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탄생 555주년을 맞았던 지난해에는 도시 전역이 다빈치 기념물로 꾸며지기도 했다. 빈치시의 다빈치 박물관장 알레산드로 베조시는 “다빈치의 지식은 대부분 직접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실험을 통해 검증하는 단계를 거쳤다.”고 소개했다. 이어 “다빈치가 ‘단순한 천재’였다면 그저 동경의 대상이자 신화적인 존재에 머물렀겠지만, 다빈치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각고의 노력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닮고 싶은 존재’ ‘배워야 할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kitsch@seoul.co.kr ■다빈치는 어떻게 만능학자가 되었을까 호기심·증명정신 겸비 ‘노력하는 천재’ 해부학자, 건축가, 식물학자, 도시계획가, 의상·무대디자이너, 요리사, 해학가, 엔지니어, 발명가, 지리학자, 지질학자, 수학자, 군사과학자, 음악가, 화가, 철학자, 물리학자, 이야기꾼…. 다빈치는 인간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 관심을 가졌고, 여러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했던 인물이다. 이탈리아 전역은 물론, 프랑스와 영국에도 다빈치 박물관이 있고 대부분 진품을 최소한 한 가지 이상 소장하고 있다. 평생 그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얼마나 방대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탄생한지 55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다빈치는 지식인들이 꿈꾸는 ‘만능인’(Universal Man)의 표상으로 꼽힌다.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가 주창한 지능의 다양성에 대한 이론에 따르면 천재는 논리·수학(스티븐 호킹, 아이작 뉴턴), 언어(윌리엄 셰익스피어, 에밀리 디킨슨), 공간·기술(미켈란젤로), 음악(모차르트), 신체·운동감각(무하마드 알리), 사회적 대인관계(엘리자베스1세, 마하트마 간디), 자기 인식적 대인관계(틱낫한, 테레사 수녀) 등 일곱가지 척도 중 하나에서 특이성을 보인다. 그러나 다빈치는 일곱가지 분야에서 모두 천재성을 나타냈다. 고도로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현대 사회에서 다빈치가 다시 각광받는 것은 그가 거의 모든 학문에서 특이성을 보인 이유가 단순한 천재여서가 아니었다는 점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노력하는 천재’였고,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한 실용주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가 해부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좀 더 정확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고, 물의 과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좀 더 좋은 다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유체역학에 대한 연구는 비행기 설계로 이어졌고, 노년에는 이 모든 기계의 원리를 하나로 설명할 수 있는 근원을 찾기 위해 골몰했다.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는 다빈치의 사고방식을 이해함으로써 교육법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마이클 겔브가 쓴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생각하기’는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교육서적 목록에 올라 있다. 겔브는 “다빈치가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에는 다재다능하고 균형잡힌 인간, 예술과 과학 양쪽을 모두 편안하게 포용할 수 있는 인간을 이상형으로 삼았다.”면서 “정보의 홍수 속에서 폭넓은 지식을 쌓아야 하는 현대인에게 다빈치식 사고는 최적의 모델”이라고 밝혔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씨줄날줄] 강치/김인철 논설위원

    “서해에는 표범이, 그리고 동해엔 사자가 있어 한반도를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했는데….” 1997년 7월 환경부 생태조사단과 함께 백령도의 자연생태계를 취재하던 중 한 조사단원에게서 들은 얘기는 무척이나 새로웠다.‘동물의 왕국’이란 TV프로그램에서나 봄직한 물범이 20∼30마리 떼를 지어 백령도 앞바다 암초를 오르내리는 광경을 보는 것만도 생소한데 독도 앞바다에 바다사자 떼라니. 그러나 이듬해 11월 취재차 들른 독도 앞바다는 황량했다. 망망대해 푸른 파도만 넘실댈 뿐이었다. 다만 높이 11.8m의 유인(有人)등대가 거의 완공돼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페인트칠도 채 안 된 등대 사진은 11월16일자 초판 신문에 게재됐다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관계당국의 요청으로 빠졌다. “이날 둘러본 각 포구의 해안에는 아홉 굴이 있었는데 물개(海狗)와 물소(水牛)가 자라고….” 조선 말 고종 때 검찰사 이규원이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본 뒤 쓴 ‘울릉도 검찰일기’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말하는 물개가 바로 강치, 해려(海驢) 등으로 불리며 동해를 호령하던 독도의 수호신 바다사자다. 가제, 가지로도 불렸기 때문에 옛 문헌에 독도는 가지도(可支島)로, 독도의 서도 북쪽에 있는 바위는 가제바위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일본은 1890년대 후반 가죽은 피혁제품으로, 지방은 기름으로, 살과 뼈는 비료로 이용하기 위해 강치잡이에 전념하다 끝내는 1905년 동해 강치를 싹쓸이할 목적으로 독도를 영토로 편입시켰다.19세기초 4만∼5만마리에 이르던 독도 인근 강치는 1905년부터 8년간 1만 4000여마리가 도살되는 등 일본 어부들의 남획으로 인해 1940년대 아예 멸종되고 말았다. 국토해양부가 물개보다 1.5배 정도 덩치가 큰, 온몸에 아름다운 흰털이 난 강치를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서다. 강치 학살이 횡행하던 당시 일본 어부가 발사한 탄환에 겁먹지 않고 어망을 입으로 찢거나 배를 습격해 일본인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었던 ‘독도의 대왕’의 정신을 되살린다니 반갑다. 더 이상 ‘조용하고 신중한’ 외교적 대응이 능사가 아니다. 김인철 논설위원 ickim@seoul.co.kr
  • ‘20세기 지성’ 손택의 마지막 이야기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 ‘뉴욕 지성계의 여왕’ ‘20세기 미국의 지성’…. 미국 최고의 에세이 작가이자 소설가이며 예술평론가인 수전 손택(1933∼2004)에게 붙는 수식어는 이처럼 끝이 없다. 손택은 1964년 평론집 ‘해석에 반대한다’를 통해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대해 가하는 복수”라며 그동안의 서구미학 전통을 통렬하게 비판해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 뒤 손택은 극작가, 영화감독, 연극연출가, 반전운동가 등으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변신시키며 ‘예술에 온 정신이 팔린 심미가’ ‘열렬한 실천가’로 불려 왔다.1988년에는 미국펜클럽 회장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 한국정부에 구속 문인의 석방을 촉구했고,93년에는 전쟁 중인 사라예보에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 전세계인들의 반전 의식을 일깨웠다. 2002년 9월 9·11테러 1주년을 맞이해 손택은 ‘진정한 전투와 공허한 은유’란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미국 대테러전쟁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해 또 한번 행동하는 지성의 면모를 보여 줬다. 손택은 2003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세계 사상수호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12월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손택의 아들인 저술가 데이비드 리프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유해를 사르트르, 보들레르 등이 묻혀 있는 프랑스 파리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손택의 말년을 엿볼 수 있는 책 두 권이 동시에 출간됐다. 손택의 마지막 소설이자 2000년 전미도서상 수상작인 ‘인 아메리카’(임옥희 옮김, 이후 펴냄)와 리프가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들을 기록한 ‘어머니의 죽음’(이민아 옮김, 이후 펴냄). 지병인 자궁육종 치료까지 뒤로 미루고 손택이 심혈을 기울여 써내려간 소설 ‘인 아메리카’는 19세기 후반 미국으로 이민 온 폴란드 국민 여배우 헬레나 모드제예브스카를 모델로 가상의 주인공을 만들어내 미국 서부에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려 했던 그들의 시도를 그리고 있다. 다양한 형식 실험이 돋보인다.1만 6800원. ‘어머니의 죽음’에는 손택이 암 판정을 받은 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9개월간의 모습이 아들 리프의 담담한 회고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9500원.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행복 나라’ 바누아투를 아시나요

    인구 21만명의 남태평양 작은 섬. 그러나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 바누아투.12일 오후 10시 30분에 방송되는 EBS 창사특집 문화인류 다큐멘터리 ‘행복한 섬, 바누아투’편에서는 문명을 거부하고 고유한 전통을 찾아 숲으로 돌아간 한 부족의 삶을 통해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조명한다. 영국의 신경제재단(New Economic Foundation)이 지난 2006년 행복지수를 측정한 결과, 바누아투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였다.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1800㎞ 동쪽에 위치한 바누아투는 인구 21만 5000명에 13개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1인당 GDP는 1576달러(약 158만원)로 세계 121위 규모이다. 제작진은 지난 2월 바누아투의 남쪽 타나 섬에 있는 ‘존 프럼’이라는 마을을 찾았다. 이날은 ‘존 프럼의 날’이라는 국경일. 숙연한 분위기 속에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미국 국기를 게양하고, 추장은 인사말을 전한다. 그리고 ‘USA’라는 붉은 글자를 새긴 대나무 막대를 든 건장한 남자들이 행진한다. 프럼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미국 의무병으로, 구호 물자를 이곳 주민들에게 전해줬다. 이때부터 주민들은 프럼을 신처럼 모시기 시작했고, 마을 이름도 ‘존 프럼’이라 지었다. 이 부족은 미국을 지상낙원으로 숭배하며, 지금도 프럼이 바누아투에 다시 풍요와 평화를 가져오리라 믿으며 그를 기린다. 한편 톰만 섬의 ‘유모란’이라는 마을은 이와는 다른 모습이다.19세기 후반 기독교가 바누아투에 들어오면서 숲속에 살던 주민들은 선교사들의 설득으로 해변으로 내려와 새로운 마을을 만들었다.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병원과 학교가 생겨났고, 원주민들은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며 물질적 풍요로움과 생활의 편리함을 누리며 살게 됐다. 부족 간의 잦은 싸움에 지쳐 있던 그들에게 기독교는 구세주였던 셈이다. 하지만 곧 그들은 조상이 남긴 전통을 잃어간다는 두려움과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추장의 설득으로 주민들은 다시 숲속 오지마을로 돌아갔다. 조상이 남겨준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이 편리한 삶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는 게 그들이 내린 결론. 박쥐를 잡아먹으며 자연속에서 자급자족하는 삶을 선택한 ‘유모란’ 주민들. 그들의 선택이 미개한 것이었다고 누가 잘라 말할 수 있을까.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세계화 급류가 불평등 양산… 국민국가의 정체성 흔들어

    두 개의 가치가 존재한다. 세계화는 오늘날 거부할 수 없는 절대가치인 것처럼 여겨진다. 다른 대안이 없다는 이유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포기할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였다. 인간적인 삶의 기초가 된다는 이유에서다. 문제는 거부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두 개의 가치가 만나면 충돌이 발생한다는 데 있다. 세계화가 가속화될수록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장면이 곳곳에서 목격되고,‘민주주의 수호’를 외칠수록 세계화에 걸림돌이 된다는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세계화 시대에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두 가치의 충돌은 최대의 딜레마이자 고민거리다. 이 딜레마의 깊숙한 곳으로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파고 든다.‘시대’ 3부작(‘혁명의 시대’‘자본의 시대’‘제국의 시대’)으로 19세기를 탁월하게 해부했던 홉스봄은 어느덧 91세가 됐다. 그의 생애 마지막 책이 될지도 모를 ‘폭력의 시대’(이원기 옮김, 민음사)에서 홉스봄은 세계화와 민주주의의 이율배반적 관계를 고찰한다. 홉스봄은 다분히 비관적이다. 본질적으로 21세기는 세계화의 급류에 휩쓸려 불평등을 양산하고 있다는 게 홉스봄의 기본 시각이다. 세계화는 국민국가의 붕괴를 가속화한다. 오랜 기간 민주주의는 국민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작동되는 것으로 믿어져 왔다. 이제 그 믿음은 무너지고 있다. 세계화가 국민국가의 역할을 뒤흔들면서 국민 삶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민주주의 장치들이 해체되고 있다. 세계화의 음지는 국민국가의 복지 기능을 약화시키고, 국가 구성원들의 사회·경제적 차별을 심화시킨다. 홉스봄은 지난 시기 세계화의 장애물을 제거해온 각국 정부의 경쟁적 노력이 이젠 거꾸로 개인의 불안을 자극해 세계화를 발목잡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진단한다.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홉스봄의 전망은 묵시론적이라고 할만하다. 세계화에 대한 대안이 없는 한 국민국가의 정체성은 거듭 약화되고, 그 결과 불안정이 증폭되는 현상이 되풀이될 것으로 본다. 그렇다고 홉스봄이 국민국가를 무조건 옹호하는 건 아니다.21세기 유일 초강대국의 지위를 잃지 않으려는 미국의 국민국가적 열망이 패권적 세계화의 형태로 표현되면서 둘은 교묘한 ‘공범’관계를 맺는다. 미국의 패권전략은 세계화로 인한 내부의 불평등을 돌파하려는 위기관리 방법이기도 하다. 국민국가와 세계화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들이 여기저기 산재한다. 현 시기 한국은 세계화와 민주주의간의 충돌이 가장 극적으로 가시화되고 있는 공간 가운데 하나다. 민주주의는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진전되지 못하고 있고, 세계화가 파생시키는 양극화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책의 해제를 맡은 김동택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는 “홉스봄을 인용하자면 검역주권과 건강권을 지키려는 촛불집회는 무차별적인 시장의 자유와 세계화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운동으로, 일국적 차원의 민주주의와 세계화가 충돌하는 지점을 잘 보여 주고 있다.”고 썼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신경림 누항 나들이] “딸그락 딸그락 달뜨걸랑 나는 가련다”에 숨은 뜻

    [신경림 누항 나들이] “딸그락 딸그락 달뜨걸랑 나는 가련다”에 숨은 뜻

    “은하 푸른 물에 머리 좀 감아 빗고/달뜨걸랑 나는 가련다/목숨 壽자 박힌 정한 그릇으로/체할라 버들잎 띄워 물 좀 먹고/딸그락 딸그락 달뜨걸랑 나는 가련다.”라고 1940년대의 이병철의 시 ‘나막신’은 시작하고 있다. 농경시대의 우리 조상들이 대단한 멋과 풍류를 가지고 살았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거꾸로 많은 사람들은 이 멋과 풍류의 그늘에 게으름과 느림과 미련함이 있었으며 그것이 지난날의 우리 민족적 특성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세대가 교과서에서 배운 ‘은근과 끈기’의 민족성도,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은 이를 인정하면서 반발 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일제당국에 의해서 만들어진 집단최면일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우리 스스로 게으르고 무지몽매해서 그들의 지배를 자초했다고 생각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진짜로 게으르고 미련하고 몽매한 민족이 되면서 패배주의적 현실론에 사로잡히게 되면 지배하는 쪽으로서는 그보다 더 편한 일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흔히들 우리는 본디 게으르고 미련한 민족이었는데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부지런하고 영악하고 성급한 성격의 민족으로 바뀌었다고들 말하지만, 이 말도 실은 그 최면에서 비롯된 면이 크다. 우리가 본디부터 게으르고 미련하고 몽매한 민족이 아니었음은 19세기 말 외국 사람들의 여러 기록에도 나타나 있으니, 가령 한국에 와 있던 외국인 전도사가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썼다는 달레의 ‘조선 교회사’를 보면 한국인을 “자기가 아는 것을 말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사람들은 항상 매우 큰 소리로 말하고, 모임은 항상 말할 수 없이 떠들썩”하며,“남녀를 막론하고 천성적으로 매우 정렬적”이며,“일반적으로 완고하고 까다롭고 성 잘 내고 복수를 잘 하는 성격”으로 묘사하고 있다. 긍정적으로만 본 것은 아니지만 모두 게으르고 미련하고 몽매한 것과는 상반되는 이미지들로, 오늘의 우리의 특성을 너무도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다. 달레의 시각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우리 민족성이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바뀐 것이 아니고, 일제와 그 시대 상황에 의해서 억압되고 왜곡되었던 것이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회복되고 복원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제 부지런하고 영악함이 민족적 브랜드가 되었으며, 어느 나라엘 가든 ‘빨리 빨리’로 통하는 민족이 되었다. 우리가 세계대전 후의 신생국 중 거의 유일하게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와 민족이 된 데도 이 영악함과 ‘빨리 빨리’가 바탕에 있음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한데 문제는 그 ‘빨리 빨리’가 이제는 우리의 삶에 크게 부정적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해 보면 촛불이 켜진 데도 그 ‘빨리 빨리’가 원인이다. 미국으로부터 어떤 협박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쇠고기 들여오는 일이 무엇이 그리 바빴는가. 정권을 인수하기도 전에 영어 몰입 운운하고 설친 행태며, 대운하를 파겠다며 온통 나라를 들쑤시고 다닌 작태도 보기 민망했다. 촛불을 가라앉히려는 과정 또한 그렇다. 아직도 국민의 반수 이상이 쇠고기 추가 협상을 못미더워하는데 서둘러 고시할 것은 무엇인가. 국민과 소통을 하겠다면서 촛불의 배후 운운하면서 국민을 협박하는 데서는 달레의 말 그대로 “완고하고 까다롭고 성 잘 내고 복수를 잘 하는 성격”이 느껴져 쓴웃음이 나온다. 이제 잃어버렸던 것들 중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풍류와 멋이다. “삽살개 앞세우곤 좀 쓸쓸하다만/딸그락딸그락 달뜨걸랑 나는 가련다.”라는 이병철의 ‘나막신’의 마지막 대목의 숨은 뜻을 깊이 생각하면서, 아직도 대다수 국민들이 많은 불편과 손해를 감수하면서 촛불 집회에 박수를 보내고 있는 까닭을 깊이 헤아려 볼 때다. 시인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27) 우아한 취미 ‘서화 감상’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27) 우아한 취미 ‘서화 감상’

    김홍도의 작품 ‘그림 감상’을 보자. 유건을 쓴 유생들이 둘러서서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워낙 단순한 그림이라 그림 자체에 대해서는 달리 설명할 것이 없다. 작자 미상의 ‘후원아집도(後園雅集圖)’는 연못까지 있는 부유한 양반가의 후원을 그린 것이다. 왼쪽에는 바둑이 한창이다. 그 오른쪽 소나무에 기댄 두 사람을 보기 바란다. 두루마리를 펴서 감상하는 장면이다. 아마도 그림이나 글씨를 보고 비평하는 중일 것이다. ●안평대군 서화 소장품 어마어마 이처럼 서화를 감상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있던 일이다. 하지만 그 농도는 다르다. 이 부분을 약간 검토해 보자. 세조 때 인물인 신숙주의 ‘화기(畵記)’란 글은 안평대군의 어마어마한 서화 소장품에 대한 기록이다.‘화기’를 통해 조선전기 서화의 수집과 감상 풍조가 유행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서화들은 남아 있지 않다. 고려와 조선전기 서화가의 작품도 전해지는 것은 몇 안 된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은 전쟁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면서 궁중에 소장된 책과 서화, 골동품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또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판이니, 민간에서도 서화를 챙길 여유가 없다. 이래서 대부분이 망실된 것이다. 서화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다. 이 문제를 조금 살펴보자. 박지원의 글 중에 ‘필세설’이란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시커멓고 우묵하게 생긴 돌덩이 하나를 골동품이라고 하며 팔러 다니는데, 그게 무슨 골동품이냐며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연암의 친구 중 서상수란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 그 물건을 보더니, 단박에 “이것은 필세(붓 씻는 그릇)다.”라 하고는 그 재질과 생산지를 따지더니, 보물이라면서 거금을 던지고 소유해 버린다. 연암은 이 글에서 서상수의 높은 안목을 칭찬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인즉 “처음 시작한 공로는 있지만 감상안은 투철하지 못했다.”라고 평가한다. ●18세기 서화·골동 수집의 선구자 김광수 그의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김광수부터 골동품과 서화의 감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만은 틀림없다. 김광수는 김동필의 아들인데, 김동필은 소론 온건파로서 영조의 탕평책에 협조하고,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이조판서에 이른 인물이다. 김광수는 “감식안이 신묘하여 한 물건이라도 마음에 들면 가산을 기울여 후한 값을 치렀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소장품의 대부분이 중국 수입품이란 것이다.19세기의 서화가 조희룡은 김광수를 두고 “사람됨이 소탈하고 우아하여 집 재산을 기울여서 멀리 연경에서 고서·명화·벼루·먹·골동품 등을 많이 사들여 종일토록 그 사이에서 읊조리고 완상하였다.”라고 했으니, 김광수는 서화와 예술품, 골동품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것을 자기 인생의 유일한 즐거움으로 알았던 사람이었다. 김광수는 1696년 출생이고 사망한 해는 모른다. 대체로 영조 일대를 살았을 것이고, 좀 오래 살았다면 정조의 치세도 경험했을 것이다. 김광수가 서화 골동을 소장하고 또 애호하는 취미의 선구자라면, 조선후기의 서화 골동 취미는 18세기 이후의 산물인 것이다. 김광수에게서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그가 북경에서 서화와 골동품을 수입해 왔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주목해 보자. 조선은 병자호란 이래 청을 섬기게 되어 여전히 북경에 사신단을 파견했다. 청은 조선을 의심하여 조선 사신단을 숙소에 묶어 놓고 내보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18세기 중반에 와서 청 체제가 안정되자 조선의 사신들은 비로소 서적과 서화, 골동의 거대한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유리창 거리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거창한 규모의 서화와 골동품이 서울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최초의 대량 구입자가 바로 김광수였던 것이다. 이 수입 서화와 골동은 국내의 생산을 자극했다. 도화서와 선비 화가들의 작품이 쏟아져 나와 감상과 품평의 대상이 되고, 급기야 예술품 수집가들의 소장 대상이 되었다.18세기를 지나면서는 그 풍조를 비판하는 소리까지 나왔다.18세기의 문인 이정섭은 이런 풍조를 “요즘 사람들은 고서화를 많이 소장하는 것을 청아한 취미로 삼아 남에게 비단 한 조각이라도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떳떳하지 못한 온갖 수단으로 기필코 구해 농짝을 가득 채우고 진귀한 보배인 양 자랑을 한다.”라고 비판하였다. 이제 서화와 골동품을 수집하고 그것에 대해 지식을 쌓아, 그림이나 글씨 혹은 골동품을 보면 거기에 대해 진위를 가리고 비평을 하는 것은 양반들의 독특한 문화가 되었다. 서화 수집가이자 비평가인 남공철(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멋있게 포장했다.“정자를 용산과 광릉 사이에 지어두고 매화,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많이 심어 간소한 차림으로 나가서 한가롭게 거닐었다. 손님이 찾아오면 향을 사르고 단정히 앉아 경전과 역사에 대해 토론하였고, 곁에 고금의 법서(法書)·명화·골동품을 두고 품평하고 감상하였으니, 마음이 담박하여 세상의 영리를 바라지 않았다.” 서화와 골동을 품평하고 감상하는 것을 아주 고상한 삶의 형태로 보고 있는 것이다. ●광통교서 산 그림을 자기 작품이라 속이기도 이런 풍조로 인해 별별 희극이 다 벌어졌다. 다산 정약용이 이정운이란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보내주신 신선 그림은 대릉(이정운이 살던 곳을 말함)에 계시는 여러분의 그림은 아닌 듯싶은데 혹 광통교에서 사 오신 것은 아닙니까? 어떤 신선이기에 눈은 순전히 욕심으로 불타 있고 얼굴은 순전히 육기뿐이니 말입니다. 우열을 비교해 봤자 반드시 하등일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림으로 승부를 걸려면 반드시 우리 모임의 벗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대면하여 직접 그린 것만이 시합에 응할 수 있도록 기준을 세워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가지로 간사스러운 폐단이 있어 두루 방어할 수 없을 것이니, 우스운 일입니다. 이정운은 다산과 같은 서클에 든 사람이고, 이 서클은 그림을 그려서 서로 돌려보며 품평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위의 그림도 그런 그림 감상, 품평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이정운은 그림에 별 솜씨가 없어 광통교에서 파는 그림을 사와서 자기 그림이라고 남에게 돌려보였던 모양이다. 광통교는 청계천에 놓여 있던 다리다. 추측건대 18세기 후반에 광통교에 그림을 걸어놓고 파는 상인이 생겼고, 서울 시민들은 집치레 그림을 여기서 구입하였다. 이정운은 요즘 말로 하자면 이발소그림을 사서 동료들에게 자신의 것인 양하고 보냈다가 들통이 난 것이다. 다산은 또 윤참판이란 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윤참판이 자신에게 그려 보내준 난초와 매화 그림을 격찬한 뒤 장난조로 다시 이정운을 비난한다.“오사(이정운)께서는 언제나 광통교 위에서 걸어놓고 파는 하찮은 그림을 사다가 사중에서 일등을 하려고 하니 이러한 사실을 시험관에게 알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정말 웃음이 터지는 일입니다.” 이정운의 가짜 그림은, 그림을 그려 동료들 간에 돌려 보이고 품평하는 풍조가 낳은 희극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 이발소에 가면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시골풍경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 그림을 보며 지루한 이발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이발소그림을 굳이 예술사조로 따지면 낭만주의 풍이다. 이발소그림이 다루는 가장 흔한 제재, 곧 목가적 풍경이나 장엄한 풍광이 낭만주의 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얼마 전 퇴근길에 보니 길거리에 그림을 잔뜩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이발소그림이었다. 반가운 생각이 왈칵 들었다. 한참을 떠나지 못하고 천천히 그림을 보았다. 배운 사람들은 이발소그림을 한 마디로 폄하하지만, 이른바 제대로 된 예술품 대접을 받는 그림은 값이 너무 비싸 구입하기 어렵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발소그림이야말로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이상향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김홍도의 ‘그림 감상’을 보고 절로 떠오른 생각이다. 그런데 ‘그림 감상’ 속의 그림은 어떤 그림이었을까? 궁금하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아관파천 당시 조선과 현재 한국 위기 닮은꼴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친일내각을 세운 데 위기감을 느낀 고종이 1896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俄館播遷)은 나라의 체면을 구긴 수치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위기관리 측면에서 보면 고종의 피신 결정을 잘못된 선택이라고 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경복궁을 탈출함으로써 생명의 위협, 왕권 고사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친일 내각을 붕괴시키고 친미·친러 내각을 발족시킴으로써 일시적이나마 왕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위기관리의 관점에서 본 고종시대의 리더십’(오인환 지음, 열린책들 펴냄)은 19세기 후반의 조선을 외부 침략 세력과 내부로부터 붕괴 위기를 동시에 맞아 대응해야 하는 전형적인 내우외환의 위기를 맞은 시기로 본다. 한국일보 주필을 거쳐 공보처 장관을 지낸 지은이는 이같은 총체적 위기가 결국 국망(國亡)으로 이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당시 위기에 대응해 갔던 과정의 의미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지은이는 고종 시대가 ‘한국 현대사의 뿌리’라고 믿는다. 조선 왕조는 상하이 임시 정부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국가의 법통이 이어졌다. 게다가 일제의 식민 통치라는 단절기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민족주의와 민족성이 여전히 승계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대내 위기의 패턴까지도 닮은꼴을 반복하는 것이 전통처럼 되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특히 오늘날의 한반도는 고종 당시의 상황과 유사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주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지정학적으로 볼 때 고종 당시는 현재의 대한민국이 겪어야 할 위기의 원형을 여러 형태로 보여주는 역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은이는 역사에서 교훈을 구하고자 한다면 자기 나라보다 나은 스승이 없고, 핏줄을 이어받은 선조의 시행착오보다 효율적인 반면교사가 어디에 있겠느냐고 반문한다.21세기 한국이 위기에 보다 유연하고 신축적으로 대응하려면 고종의 경험을 철저하게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이 책은 그런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지은이는 언론인 출신답게 심층 취재 방식을 원용해 위기를 불러온 사건의 배경, 원인과 근인, 관련 국과의 상관관계 등을 입체적으로 살핀다.2만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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