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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만 불안한 걸까? 인간이면 누구나…

    나만 불안한 걸까? 인간이면 누구나…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스콧 스토셀 지음/홍한별 옮김/반비/496쪽/2만 2000원 불안과 불안 관련 장애는 이 시대 정신질환 중 가장 흔한 병이다.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에 따르면 미국인 일곱 명 중 한 명은 현재 불안장애를 겪고 있으며 정신 건강 관리에 드는 비용의 31%가 불안 치료에 사용된다. 영국에 사는 사람 가운데 15%가 현재 불안증을 앓고 있고 그 비율은 상승하고 있다. 2006년 캐나다 정신의학 저널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여섯 명 가운데 한 명은 평생 어느 시점에 1년 이상의 기간 동안 불안에 시달린다. 잇따른 경제위기, 증가하는 소득 불평등, 기술 변화로 인한 노동시장의 변동, 사회 전반적인 불확실성의 증대 등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새 책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는 평생 동안 불안장애를 앓아 온 환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스콧 스토셀이 ‘불안에 대한 문화와 지식의 역사를 자신의 불안 경험과 함께 엮은 책’이다. 두 살 때부터 공포증, 불안, 신경증을 지닌 예민덩어리였던 저자는 열 살 이후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 봤다. 개인 상담 치료는 물론이고 가족 치료, 최면 치료, 명상, 역할연기 치료, 자극감응 노출 치료, 실제상황 노출 치료,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 마사지 요법, 기도, 침술, 요가 등. 약도 아주 다양하게 처방받아 사용해 봤고 알콜에도 의지해 봤다. 하지만 불안을 근본적으로 줄여 준 치료 방법은 없었다고 토로한다. 저자가 선택한 방법은 이 모호한 불안의 수수께끼를 풀어 극심한 불안을 경험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불안에 관한 이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역사와 철학, 의학, 문학을 넘나들며 불안의 근원을 파악하려는 지적 역사를 전방위로 파고든다. 그리고 이를 자신의 경험과 한데 엮어 불안의 정체를 탐색한다. 불안은 현대병이라고 하지만 그 지적 탐구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또 문화와 시대에 따라 불안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관점도 다르다.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불안이 의학적 질환이라며 그 원인으로 ‘검은 담즙’을 지목했다. 담즙이 뇌로 갑자기 몰려가면서 불안이 일어난다고 봤다. 반면 플라톤은 불안이나 우울은 생리적 불균형이 아니라 영혼의 부조화에서 오며 여기에서 회복하려면 깊은 자아성찰, 자기통제, 철학을 따르는 삶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불안의 뿌리는 생물학적 신체가 아니라 우리가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에 있다고 생각했다. 스피노자는 불안은 논리적 문제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저자는 찰스 다윈, 지그문트 프로이트, 윌리엄 제임스 등 19세기 학자들의 연구를 지나 현대 신경과학과 유전학의 최전선까지 나아간다. 저자의 지적 여정은 학술연구에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인 사례를 동반해 광범위한 탐구의 면면을 생생하게 만든다. 평생 동안 공포증이나 신경성 위장병과 싸워 온 다윈과 프로이트의 사례, 자신의 투병 경험, 스포츠 스타와 유명 연예인의 증언 등을 동원해 이 모호한 병에 대해 생생하면서도 탁월한 해석을 보여 준다. 또한 정신약리학의 역사부터 치료 약물이 결국은 새로운 병을 만들어 낸 사례, 향정신성의약의 위험도 다룬다. 객관성과 중립성을 미덕으로 아는 저널리스트로서 스토셀은 ‘이렇게 하면 나을 수 있다’는 낙관을 제시하지 않고, 그렇다고 비관하지도 않는다. 대신 불안이 용기의 원천이 된 사례나 불안이 품은 인간성과 도덕성을 바라본다. 프로이트는 가장 큰 불안을 일으키는 위협은 주변 세계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다며 “불안을 전혀 모르거나 혹은 불안에 파묻혀 파멸하지 않으려면 누구나 반드시 불안에 대해 알아 가는 모험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고 했다. 스토셀은 “적당히 불안해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가장 중요한 일을 배운 셈”이라는 키르케고르의 말을 빌려 우리가 인간이게끔 해 주는 불안의 역할을 발견한다. 책은 우리가 불안을 완전히 정복할 수 없다 해도 불안이 가진 힘을 발견하고 다스리며 살아가는 길은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미라가 된 레닌·도굴당한 하이든 ‘시신을 향한 탐욕’

    미라가 된 레닌·도굴당한 하이든 ‘시신을 향한 탐욕’

    무덤의 수난사/베스 러브조이/장호연 옮김/뮤진트리/392쪽/1만 8000원 유명인들의 시신은 예로부터 수난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손가락, 치아, 발가락, 팔, 다리, 두개골, 심장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중세 시대에 성인의 유물은 순례자들의 발길을 끌었고, 19세기에는 골상학의 등장으로 유럽 전역에서 두개골 절도가 기승을 부렸다. 사람들이 시신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신을 소유하고 만지고 보고 전시함으로써 유명 인사와 연결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다. 책은 모차르트에서 히틀러까지 역사적 인물들이 죽고 나서야 겪어야 했던 기상천외하고 오싹한 모험을 그들의 삶과 연결해 살펴본다. 하이든의 두개골은 그의 음악적 능력을 골상학으로 분석해 보겠다는 무리에서 도굴당한 후 100년이 넘도록 제 몸을 만나지 못했다. 세기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시신은 본인의 뜻에 따라 화장됐지만 천재의 뇌는 연구를 빌미로 부검의에게 강탈당했고 수십년간 미국 전역을 떠돌아다녔다. 유명 정치인이야말로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살아 있는 자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당했기 때문이다. 혁명가이자 정치가였던 레닌은 죽은 후 소박하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어머니와 여동생 곁에 묻히길 원했지만 스탈린은 그의 시신을 영원히 썩지 않는 미라로 만들어 공산당의 선전물로 모스크바 광장에서 전시했다. 무솔리니의 시신은 반파시스트들의 공격을 피해 수도원의 벽장에 11년간이나 숨겨둬야 했고 체 게바라의 유해가 묻힌 장소는 수십년 동안 비밀이었다. 저자는 “유명한 위인들의 삶과 죽음을 살펴보고 그들의 시신이 겪은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죽음을 터부나 삶의 대척점이 아닌 삶의 일부분으로 바라보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아인슈타인의 뇌가 강탈당해 떠돌아다닌 이유는?… ‘무덤의 수난사’

    아인슈타인의 뇌가 강탈당해 떠돌아다닌 이유는?… ‘무덤의 수난사’

    ●무덤의 수난사 베스 러브조이/장호연 옮김/뮤진트리/392쪽/1만 8000원. 유명인들의 시신은 예로부터 수난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손가락, 치아, 발가락, 팔, 다리, 두개골, 심장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중세 시대에 성인의 유물은 순례자들의 발길을 끌었고, 19세기에는 골상학의 등장으로 유럽 전역에서 두개골 절도가 기승을 부렸다. 사람들이 시신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신을 소유하고 만지고 보고 전시함으로써 유명 인사와 연결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다. 책은 모차르트에서 히틀러까지 역사적 인물들이 죽고 나서야 겪어야 했던 기상천외하고 오싹한 모험을 그들의 삶과 연결해 살펴본다. 하이든의 두개골은 그의 음악적 능력을 골상학으로 분석해 보겠다는 무리에서 도굴당한 후 100년이 넘도록 제 몸을 만나지 못했다. 세기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시신은 본인의 뜻에 따라 화장됐지만 천재의 뇌는 연구를 빌미로 부검의에게 강탈당했고 수십년간 미국 전역을 떠돌아다녔다. 유명 정치인이야말로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살아 있는 자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당했기 때문이다. 혁명가이자 정치가였던 레닌은 죽은 후 소박하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어머니와 여동생 곁에 묻히길 원했지만 스탈린은 그의 시신을 영원히 썩지 않는 미라로 만들어 공산당의 선전물로 모스크바 광장에서 전시했다. 무솔리니의 시신은 반파시스트들의 공격을 피해 수도원의 벽장에 11년간이나 숨겨둬야 했고 체 게바라의 유해가 묻힌 장소는 수십년 동안 비밀이었다. 저자는 “유명한 위인들의 삶과 죽음을 살펴보고 그들의 시신이 겪은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죽음을 터부나 삶의 대척점이 아닌 삶의 일부분으로 바라보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울산서 ‘한국 산업발전 60년사’ 되새긴다

    울산서 ‘한국 산업발전 60년사’ 되새긴다

    국립산업기술박물관이 산업기술의 요람으로 자리잡을 시설로 건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산업기술을 보존하고 기술문화를 확산할 산업기술박물관 건립은 울산시의 역점사업이다. 9일 울산시에 따르면 산업기술박물관이 2020년 하반기 개관을 목표로 남구 신정동 산 195의 12 일원 23만여㎡에 추진되고 있다. 사업비는 4393억원이 들어갈 것으로 추산되며 2017년 하반기 착공할 계획이다. 산업기술박물관은 산업기술의 전시·보존, 교육·연구·홍보 기능을 갖추며 문화·휴식 공간 역할도 한다. 정부는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SK에너지 등 국내 주력기업이 입주해 우리나라 수출의 17%를 담당하는 울산을 대상으로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의뢰해 지난 1월부터 오는 11월까지 예비타당성 조사를 하고 있다. KDI는 경제성(BC) 분석과 관련, 이달 중 박물관·도서관·생태공원 등의 사업성을 검증할 때 사용하는 ‘조건부 가치측정법’(CVM)으로 산업기술박물관 사업 타당성을 조사할 예정이다. 하지만, 울산시는 예비타당성 조사로 산업기술박물관 사업비 축소 등을 걱정하고 있다. CVM은 박물관 건립 등 가상의 상황을 만들어 각 가구에서 부담하겠다는 금액(세금)을 추정하는 방법이다. 이 과정에서 국민 1000명을 무작위로 뽑아 시설 건립에 드는 비용을 세금으로 낼 의사가 있는지와 세금을 얼마나 더 낼 수 있는지 등을 묻는다. 이런 조사에서 건립비용을 세금으로 내겠다거나 추가로 더 지급할 수 있다고 응답하기는 쉽지 않다. 이렇게 되면 당초 예상보다 사업비가 줄어 제대로 된 산업기술박물관 건립이 어려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술 선진국들은 19세기부터 산업기술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프랑스는 1986년에 라빌레트 과학산업박물관을, 미국은 1933년에 시카고 과학산업박물관을, 독일은 1925년에 뮌헨 독일박물관을, 스페인은 2000년에 프린시페 펠리페 과학관을 각각 건립해 산업유물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산업기술사에 남을 주요 유물들이 창고에 들어가 있거나 유실돼 경제발전 성공 경험을 제대로 전수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산업 유물을 정리·보존하고 연구·전파할 산업기술박물관 건립 필요성이 제기됐고, “울산에 산업기술박물관을 건립하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도 나왔다. 시 관계자는 “정부는 산업기술박물관을 대한민국 산업발전 60년사를 반추하는 기념비적 시설로 만들 계획”이라며 “따라서 산업기술박물관은 첨단 과학기술 교육·체험의 장이 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건립돼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계 관계자는 “산업기술박물관이 제대로 건립되려면 모든 국민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울산시는 한국박물관협회, 국제박물관협회 한국위원회,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등 전국 61개 기관·박물관, 기업 등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지난 7월에는 울산박물관에 유물기증창구를 개설해 기업과 시민들로부터 유물을 기증받는 등 산업기술박물관 건립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한편 현대경제연구원은 지난해 국립산업기술박물관 건립에 따른 생산유발 효과 7467억원, 부가가치유발 효과 722억원, 취업유발 효과 6533명 등의 분석을 내놨다.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 [알쏭달쏭+] 그 많은 비둘기, 새끼들은 왜 안보일까

    [알쏭달쏭+] 그 많은 비둘기, 새끼들은 왜 안보일까

    한동안 국내 네티즌 사이에서는 “참새는 사실 비둘기의 새끼”라는 ‘낚시성’ 농담이 유행한 적 있다. 터무니없는 농담인데도 불구하고 새끼 비둘기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 워낙 없다보니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적지만은 않았다. 그렇다면 둥지 속 새끼들의 모습이 종종 관찰되는 도심 속 다른 조류들과 달리, 비둘기 새끼의 모습은 유독 보이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영국 BBC가 8일(현지시간) 이 오랜 의문에 대한 대답을 내놓았다. 도심에서 볼 수 있는 집비둘기의 원종은 물가에 사는 양비둘기(rock dove)다. 두 종의 비둘기들은 주 서식처가 달라 주식이나 생활양식 등에서 다소 차이가 나지만 서식지 선택에 있어서는 동일한 습성을 보여준다. 양비둘기와 집비둘기 모두 다른 동물들이 접근하기 힘든 은밀한 곳에 둥지를 짓는다는 특성을 가지는 것. 예를 들어 해안에 사는 양비둘기들의 경우 해안 절벽의 틈이나 해안 동굴 등에 둥지를 튼다. 19세기 영국의 한 조류학자는 “매우 많은 수의 비둘기가 절벽의 틈에서 새끼를 키우는데, 그 둥지가 매우 깊이 자리하고 있어 접근할 수가 없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 도시에는 이러한 절벽, 바위산, 동굴 등 새들이 안심하고 찾아들만한 은밀한 자연공간이 없다. 대신 도시 비둘기들은 도심 속 인공적 장소 중 교회 종탑, 버려진 건물, 다리 밑 등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에 둥지를 짓는다. 그러므로 이런 장소들을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이상 둥지 안에 있는 비둘기 새끼를 보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새끼 비둘기는 물론, 중간 정도로 자란 ‘청소년’ 비둘기를 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는 비둘기들의 경우 둥지를 떠나는 시점이 다른 새들에 비해 훨씬 늦기 때문이다. 비둘기들은 약 40일이 지나서야 둥지 밖으로 나서는데, 이 때 비둘기의 크기는 우리가 흔히 보는 다 자란 비둘기들과 거의 동일해서 어른처럼 보이도록 '위장'된 상황이라 구분이 쉽지 않다. 그러나 갓 둥지를 떠난 어린 비둘기들은 가만히보면 그들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이들의 깃털에서는 성년 비둘기에게서 보이는 옅은 녹색과 목 주변의 보라색이 아직 관찰되지 않는다. 부리 위의 납막(蠟膜, 조류의 윗부리를 덮고 있는 부드럽고 불룩한 피부) 또한 성인 비둘기들과 달리 밝은 흰색이 아닌 분홍빛 회색으로 돼있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을 잘 관찰하면 좀 더 어린 비둘기를 찾아낼 수 있다고 BBC는 전했다. 사진=ⓒ포토리아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참새가 비둘기 새끼?…새끼 비둘기가 눈에 띄지 않는 이유

    참새가 비둘기 새끼?…새끼 비둘기가 눈에 띄지 않는 이유

    한동안 국내 네티즌 사이에서는 “참새는 사실 비둘기의 새끼”라는 ‘낚시성’ 농담이 유행한 적 있다. 터무니없는 농담인데도 불구하고 새끼 비둘기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 워낙 없다보니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적지만은 않았다. 그렇다면 둥지 속 새끼들의 모습이 종종 관찰되는 도심 속 다른 조류들과 달리, 비둘기 새끼의 모습은 유독 보이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영국 BBC가 8일(현지시간) 이 오랜 의문에 대한 대답을 내놓았다. 도심에서 볼 수 있는 집비둘기의 원종은 물가에 사는 양비둘기(rock dove)다. 두 종의 비둘기들은 주 서식처가 달라 주식이나 생활양식 등에서 다소 차이가 나지만 서식지 선택에 있어서는 동일한 습성을 보여준다. 양비둘기와 집비둘기 모두 다른 동물들이 접근하기 힘든 은밀한 곳에 둥지를 짓는다는 특성을 가지는 것. 예를 들어 해안에 사는 양비둘기들의 경우 해안 절벽의 틈이나 해안 동굴 등에 둥지를 튼다. 19세기 영국의 한 조류학자는 “매우 많은 수의 비둘기가 절벽의 틈에서 새끼를 키우는데, 그 둥지가 매우 깊이 자리하고 있어 접근할 수가 없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 도시에는 이러한 절벽, 바위산, 동굴 등 새들이 안심하고 찾아들만한 은밀한 자연공간이 없다. 대신 도시 비둘기들은 도심 속 인공적 장소 중 교회 종탑, 버려진 건물, 다리 밑 등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에 둥지를 짓고 1년에 2~3회, 한 번에 한두 개씩 알을 낳는다. 그러므로 이런 장소들을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이상 둥지 안에 있는 비둘기 새끼를 보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새끼 비둘기는 물론, 중간 정도로 자란 ‘청소년’ 비둘기를 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는 비둘기들의 경우 둥지를 떠나는 시점이 다른 새들에 비해 훨씬 늦기 때문이다. 비둘기들은 약 40일이 지나서야 둥지 밖으로 나서는데, 이 때 비둘기의 크기는 우리가 흔히 보는 다 자란 비둘기들과 거의 동일해서 구분이 쉽지 않다. 그러나 갓 둥지를 떠난 어린 비둘기들은 그들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이들의 깃털에서는 성년 비둘기에게서 보이는 옅은 녹색과 목 주변의 보라색이 아직 관찰되지 않는다. 부리 위의 납막(蠟膜, 조류의 윗부리를 덮고 있는 부드럽고 불룩한 피부) 또한 성인 비둘기들과 달리 밝은 흰색이 아닌 분홍빛 회색으로 돼있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을 잘 관찰하면 좀 더 어린 비둘기를 찾아낼 수 있다고 BBC는 전했다. 사진=ⓒ포토리아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추사의 서예·우성의 조각, 시공 넘은 만남

    19세기 서예의 거장 추사 김정희(1786~1856)와 20세기 조각의 거장 우성 김종영(1915~1982), 이들 두 사람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학고재 갤러리에서 11일부터 열린다. 추사와 우성의 작품이 한자리에서 전시되는 것은 처음이다. ‘추사 김정희·우성 김종영: 불계공졸과 불각의 시공’이라는 제목의 전시에 대해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미술관 부장은 “추사와 우성은 모두 본질에 대한 탐구를 통해 얻은 순수함을 기초로 물질과 정신을 잇는 진리 체계를 파악하고자 했다. 미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내재해 있는 형을 자연에 되돌려주는 것이라는 우성의 불각은 추사의 불계공졸과 맞닿아 있다. 이들을 통해 한국 예술의 연속성을 파악할 수 있는 전시”라고 설명했다. 추사는 24세에 중국 주요 문인과 사제 관계를 맺었다. 경남 창원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우성은 한학자인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부터 한학과 서예를 배웠다. 1953년 영국 런던 테이트갤러리에서 열린 ‘무명 정치수를 위한 모뉴멘트’ 국제공모전에 출품해 국내에선 처음으로 해외 공모전에 입상한 바 있다. 전시는 자아, 절대추상과 구축미, 불균형과 하모니, 서화일체 등 4개 주제를 갖고 두 사람의 작품 30여점을 함께 배치했다. 추사의 작품은 ‘자신불’(自身佛) ‘우향각’(芋香閣) 등이고 우성의 작품으로는 자화상과 브론즈, 나무, 돌을 재료로 삼은 추상적인 조각이 선보인다. 추사가 생전에 지인과 주고받은 서신, 우성의 드로잉과 서예 등도 함께 선보인다. 전시는 10월 14일까지.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언론인 김호준이 본 유라시아의 들꽃, 고려인의 파노라마] (상) 대륙 개척의 전위

    [언론인 김호준이 본 유라시아의 들꽃, 고려인의 파노라마] (상) 대륙 개척의 전위

    광복 70주년을 맞아 지난 8월 ‘유라시아 친선특급열차’가 아시아·유럽 두 대륙을 달렸다. 박근혜 대통령이 2년 전 발표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구상을 따라 미리 가 보는 길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횡단 철도를 거쳐 베를린까지 이어지는 장장 1만 4400㎞의 대장정이었다. 150년 전부터 우리 동포들은 그 길을 따라 디아스포라의 수난을 겪으면서도 근면과 교육열로 다시 일어섰다. 대륙 곳곳에 똬리를 튼 우리 동포들의 어제와 오늘을 ‘유라시아고려인 150년’의 저자이자 이 특급열차에 동승했던 언론인인 김호준 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의 집필로 3회에 걸쳐 조명해 본다. 고려인은 구소련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를 가리키는 말이다. 고려인이란 호칭은 한민족의장혈통을 지니고 있지만 남한의 한국인도, 북한의 조선인도 아니라는 함의가 크다. 과거엔 주로 ‘조선인’이라고 불렸던 이들은 냉전 종식 후 자신들의 호칭을 ‘고려인’으로 통일시켰다. 양분된 조국과 관련해 그들의 고뇌를 엿볼 수 있는 호칭이다. 고려인은 우리 민족사에서 ‘북상(北上)개척’을 선도한, 대륙 진출의 선구자다. 고구려·발해 멸망 이후 비좁은 한반도에 갇혀 살던 한민족의 지평을 저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으로 넓힌 주역이 바로 고려인이다. 고려인의 러시아 이주는 제국주의 시대인 1863년에 시작되었다. 그때 기근과 봉건적 탐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선의 콜럼버스’ 최운보 양응범이 이끈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두만강 너머 연해주로 이주해 정착했다. 1902년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노동자로 태평양을 건넌 하와이 이민보다 39년이나 앞선, 우리 근현대사 최초의 국외 진출이다. 구한말 연해주고려인 사회는 만주, 용정과 함께 항일 구국투쟁을 선도한 해외기지였다. 조선 강점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준비한 곳이, 1919년 3·1운동 후 최초로 임시정부를 세운 곳이 연해주다. 고려인들은 연해주에서 70여년간 민족공동체를 운영하며 블라디보스토크를 주도(州都)로 하는 고려공화국 건립 운동을 벌였다. 비록 소련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이 운동 역시 역외 건국운동의 효시다. 1937년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는 해외 한인이 겪은 시련 가운데 가장 큰 아픔이다. 강제 이주에 앞서 스탈린은 고려인의 저항을 막기 위해 지도층 2500명을 무더기로 체포, 일본 간첩이란 누명을 씌워 처형했다. 적성(敵性)민족으로 몰린 고려인 18만명은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에 내던져졌다. 그때 처형, 기아, 질병 등으로 희생된 고려인은 총 1만 6500여명에 달했고 그들이 원동에서 살던 606개 촌락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이런 참담한 역경 속에서도 중앙아시아고려벌들은 근면을 바탕으로 농업의 성공 신화를 쓰며 소련 제1의 소수민족으로 우뚝 섰다. 당시 소련이 세계에 자랑한 모범농장 폴리트오트젤과 김병화 농장 등은 모두 고려인이 운영한 집단농장이었다. 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탄생한 15개 민족공화국의 소수민족 차별은 고려인의 이동을 촉발했다. 이슬람 문화권인 중앙아시아에 살던 고려인 10만 명이 슬라브 문화권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 이주했다. 그 결과 최대 20여만명을 헤아리던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수는 13만명 수준으로 격감했다. 내전이 터진 타지키스탄에선 고려인 사회가 무너져, 한때 1만 3000명에 달했던 인구가 이젠 60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현재 고려인 최다 거주국인 러시아의 고려인 인구는 공식통계상 15만명이다. 무국적자와 불법체류자를 포함하면 20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 밖에 카자흐스탄에 10만 3000명, 키르기스스탄에 1만 7000명, 우크라이나에 1만 2000명이 거주하고 있다. 총 48만명에 달하는 고려인은 유라시아 대륙의 대표적인 분산민족이다. 고려인은 대륙의 어디든 없는 곳이 없다지만 그렇다고 민족자치를 거론할 만큼 다수파로 밀집해 사는 곳도 없다. 광활한 대륙에 마치 하늘의 별처럼 점점이 흩어져 살고 있는 것이 고려인이다. 고려인들은 19세기 말 이래 시베리아철도를 따라 서진(西進)을 계속하며 자신들의 영역을 꾸준히 넓혀 왔다. 최근에는 러시아 남부와 볼가 강 유역으로 뻗어나가 그곳에 새로운 고려인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모스크바 등 대도시 지역의 고려인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사안이다. 이렇게 우리 동포의 생활 영역이 확장되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려인들은 기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국 해방을 위해, 또 탄압과 차별 때문에 유랑을 계속했지만 그것만이 동인(動因)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려인에겐 일찍부터 글로벌시대에 걸맞은 진취성, 모험성, 개방성 등이 있었다. 그것이 고려인들로 하여금 광활한 유라시아를 떠돌며 한민족의 영역을 넓혀 나간 저력의 근원이 아니었을까.
  • 태초의 신비 그대로 간직한 땅, 뉴칼레도니아

    태초의 신비 그대로 간직한 땅, 뉴칼레도니아

    남태평양의 뉴칼레도니아는 ‘천국에 가장 가까운 섬’으로 불린다. 1억 4000만년 전 중생대 쥐라기의 비밀을 고스란히 간직한 원시 동식물들이 살아 숨 쉬고, 시리도록 맑고 푸른 바다와 하얀 모래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전 국토의 60%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돼 있을 만큼 태초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EBS 1TV ‘세계테마기행’은 7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남태평양의 푸른 낙원’ 뉴칼레도니아를 집중 조명한다. 프랑스령인 뉴칼레도니아의 주도 누메아에선 낯설고도 흥미로운 프랑스 문화를 접할 수 있다. 항구에 늘어선 수많은 요트와 산호 가루 반짝이는 하얀 해변, 그리고 잘 꾸며진 도시를 보면 자연스레 프랑스 마을 니스를 떠올리게 된다. 누메아는 19세기 프랑스 지배를 거치며 150여년의 유럽 문화와 수천 년 이어온 원주민 문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세계자연유산에 이름을 올린 ‘라군’의 모습도 담았다. 라군은 파도를 막아주는 거대한 바다 산맥 ‘리프’ 안쪽으로 형성된 잔잔한 호수 같은 바다다. 본섬의 남쪽 해상 ‘아메데섬’에 세워진 하얀 등대는 산호바다에 좌초되곤 하던 배들을 위해 설치된 바다 길잡이다. 섬의 상징물이 된 하얀 등대에 오르면 한눈에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우베아는 에메랄드빛 바다로 유명하다. 일본 작가의 소설 ‘천국에 가장 가까운 섬’의 배경이 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40㎞가량 끝없이 이어지는 물리 해변은 단연 압권이다. 그곳 원주민 ‘카나크’는 프랑스 문화와 조화를 이루면서도 자신들만의 전통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7~10일 밤 8시 50분 방영.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김경운 기자의 맛있는 스토리텔링 6] 국수와 파스타

    [김경운 기자의 맛있는 스토리텔링 6] 국수와 파스타

    국수(면)만큼 거의 세계 전역에서 즐기는 음식도 흔치 않다. 국수의 모양이나 요리법, 곁들이는 고명은 지역의 특징에 맞게 변천했지만, 그 원형은 유라시아 문명 교류의 중요한 상징이다. ●국수, 기원전 5000년 중앙아시아 유목민 음식서 유래 면(麵)은 중앙아시아로부터 전해진 밀가루를 이르는 말이다. 진나라 때 서역인이 ‘밀’이라고 부르는 말을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또 국수라는 말은 삶은 면을 물에 헹궈 건져 올린 것을 뜻하는 한자어다. 따라서 밀가루를 반죽해 물에 넣고 삶은 게 면이자 국수다. 국수는 기원전 5000~6000년쯤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음식이었다. 반면 서양인은 기원전 3000년쯤부터 밀가루로 음식을 만들었다. 그들의 주식인 고기에 부족한 탄수화물을 섭취하기 위해서다. 국수가 빵보다 역사가 깊은 셈이다. 국수의 유래에 대해 많은 학설이 있지만, 국수가 유목민의 음식인 까닭은 우선 남방의 쌀과 달리 밀은 북방의 건조한 지역에서 자라는 작물이기 때문이다. 반죽한 밀가루를 굳이 수고스럽게 손바닥으로 비벼서 가는 국수 형태로 만든 것은 잠시 머문 정착촌에서 국수를 물에 삶을 때 되도록 빨리 익히기 위해서다. 가느다란 국수가 식감이 좋고 소화도 잘 됐을 것이다. 또 양고기나 마른 야채 등을 넣고 함께 끓여도 잘 어울린다. 다시 이동할 때에는 반죽한 국수만 잘 보관하면 그만이다. 오히려 숙성의 맛을 더할 수 있다. 국수는 기원전 1~2세기 후한 때 실크로드 상인에 의해 동쪽으로 전파된다. 국수는 진과 당을 거쳐 송나라 때 꽃을 피운다. 송의 수도 카이펑에서는 높은 성벽이 사라지고 개방된 국제도시답게 노점이 성행했다. 이 노점에서 국수에 국물을 붓고 고기 절편 등 고명을 얹어 먹었다. ●통일신라~고려초 한반도 유입... 밀가루 귀해 잔치때만 맛 봐 이 시기인 (통일)신라 또는 고려 초 한반도에도 국수가 전해진다. 그러나 우리 땅에선 밀가루가 귀한 식재료였다. 따라서 조선 시대 때까지도 결혼식, 회갑연, 제례일 등 특별한 날에만 국수를 맛볼 수 있었다. 이는 요즘 결혼식장에서 잔치국수를 내놓고 또 일부 지역에선 제사상에 삶은 국수를 올리는 전통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국수 요리는 크게 냉면, 비빔국수, 국수장국(온면), 제물칼국수로 나뉜다. 이 4종에서 무려 60여 가지의 국수 음식이 탄생한다. 우리는 메밀이나 녹두 가루도 국수 재료로 썼다. 함경도와 평안도에는 비빔국수와 냉면이 있다. 황해도 개성은 예부터 부유한 상인이 많이 살던 곳인 만큼 귀한 밀국수를 즐겼다. 지금 밀국수의 본고장은 옛 개성처럼 국제적 항만 도시인 부산이다. 6·25전쟁 이후 미군 원조로 받은 밀가루 덕분이다. 이어 한양에서는 각종 국수 음식이 다 있었지만 특히 전통식 온면을 으뜸으로 여겼다. 온면의 국수는 밀가루 외에도 메밀가루 등을 썼다. 경기도에선 국물이 걸쭉하고 구수한 칼국수를 먹었다. 온면은 삶은 국수를 먼저 그릇에 담은 뒤 맑은 형태의 육수를 부어 깔끔한 맛을 낸다. 반면 제물칼국수는 각종 식재료가 들어간 육수에 국수를 함께 넣고 푹 끓인다. 전라도와 경상도도 만들기 편한 칼국수를 즐겼는데 다만 서해 지역은 조개, 동해나 남해 지역은 멸치, 육수 등 지역 특산물로 맛을 더했다. 까다로운 선비의 고장이라는 안동의 건진국수는 일종의 칼국수이긴 한데, 이를 다시 온면 방식으로 국수를 건져 육수를 붓는 정성을 더 들였다. ●9세기 이슬람 시칠리아 지배하며 국수 유럽에 전파 동양에선 국물과 함께 먹는 국수 음식이 발달된 반면 서양에선 국물 없이 소스를 이용한 국수를 선호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게르만족, 바이킹족 등이 유럽에서 득세하는 동안 중동에선 신흥 이슬람 세력이 힘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슬람 세력은 중앙아시아도 손에 넣으며 현지 음식인 국수를 받아들인다. 그들은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을 굴복시킨 뒤 오래전부터 지정학적으로 유럽의 교두보 역할을 하던 시칠리아마저 정복한다. 827년 이슬람군 1만명이 시칠리아 섬에 상륙해 200여년 동안 지배하면서 중앙아시아에서 배운 국수 요리를 처음 유럽 땅에 전파한다. 유럽 남부의 지중해 근처에는 흰 경질밀보다 노란 듀럼밀이 흔했다. 듀럼밀은 단단하고 거칠지만 접착력과 탄력성이 좋다. 우리가 아는 파스타의 노란색 국수 원료다. 스파게티는 300여종에 이른다는 파스타의 한 종류일 뿐이다. 이슬람인들은 듀럼밀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고, 이게 이탈리아 본토인 나폴리 등을 거쳐 오늘날 세상에 퍼진 파스타가 된다. 토마토소스는 남미의 작물인 토마토가 유럽에 전해진 것이 16세기, 식재료가 된 게 19세기 중반인 만큼 나폴리 등에서 소스로 사용하다가 이탈리아계 미국 이주민이 늘면서 확산된 것이다. 그전엔 치즈 가루 등만 뿌려 맛을 냈다. ●흰 경질밀아닌 노란 듀럼밀 사용... 포크 사용문화로 면 길이 짧아져 그럼 왜 긴 가닥의 국수가 마카로니 등처럼 짧고 도톰한 모양의 파스타(쇼트 파스타)로 바뀐 것일까. 또 이슬람권에서는 왜 국수가 거의 사라졌을까. 국수를 먹는 방법의 차이에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동양에서는 고대 시절부터 젓가락과 숟가락을 사용했다. 젓가락은 길고 미끌미끌한 국수 가닥 한 올까지 잘 잡을 수 있다. 반면 서양인은 포크를 쓴다. 우리 상식과 다르게 유럽 귀족이 지금과 같은 모양의 포크를 사용한 것은 베네치아 공국 이후였고, 백성은 대부분 손이나 작은 칼을 썼다. 그러니 가느다란 국수 가닥을 잡기에는 불편했다. 따라서 더 굵거나 또는 나사 모양으로 돌돌 감은 국수를 파스타의 재료로 사용했다. 아울러 이슬람인은 손으로 음식을 집어서 먹는 게 전통인데, 끈적끈적한 육즙을 묻혀 미끈거리는 국수는 더 이상 환영받지 못했을 것이다. 옛 이란 원주민은 국수를 이르는 말을 가느다란 ‘실’이라는 뜻과 함께 썼다. 음식은 언어처럼 더 나은 진화를 향해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래서 음식의 원형을 찾는 노력을 하면 인류 문명의 긴 역사가 보일 것이다. 김경운 전문기자 kkwoon@seoul.co.kr
  • 거북 조상은 2억 6000만년 전 도마뱀 같은 파충류 (네이처)

    거북 조상은 2억 6000만년 전 도마뱀 같은 파충류 (네이처)

    현대의 거북이 고생대 후기에 살았던 파충류에서 진화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최근 미국 뉴욕 공대(NYIT) 등 공동연구팀은 멸종 파충류 '에우노토사우로스'(Eunotosaurus africanus)가 거북의 '조상'이라는 논문을 유명학술지 '네이처'(Nature) 최신호에 발표했다. 19세기에 처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발견된 에우노토사우로스는 약 2억 6000만 년전 살았던 고대 파충류로 거북의 가장 큰 특징인 등껍질은 없다. 또한 길이는 약 30cm 정도로 몸은 비닐 껍질로 덮여있고 꼬리가 있으며, 특히 현대의 거북과는 달리 많은 이빨이 나 있어 사실 도마뱀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이같은 차이에도 학자들은 에우노토사우로스의 몸통이 둥그렇고 편평한 늑골, 그리고 거북에서만 볼 수 있는 확장된 갈비뼈를 갖고 있어 거북의 '먼 조상'으로 의심해왔다. 2년 전에도 미국 스미스소니언 연구소는 거북이 어떻게 지금과 같은 신기한 등껍질을 갖게 됐는지 밝혀줄 '고리'로 이 화석을 지목했다. 거북의 등껍질은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갈비뼈와 등뼈가 붙은 복잡한 구조가 돌출한 것인데 비해 다른 동물들의 껍질은 모두 신체 표면에 난 뼈비늘이다. 연구를 이끈 NYIT 가베 비버 교수는 "에우노토사우로스의 두개골을 중심으로 분석해 거북의 조상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면서 "고대 파충류와 현대 거북의 진화과정을 잇는 결정적인 연결고리" 라고 설명했다. 이어 "거북의 기원은 진화과정을 푸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데 도마뱀, 뱀, 악어, 새 등의 진화와 모두 관련이 있기 때문" 이라고 덧붙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아일랜드의 체호프’ 프리엘 작품 ‘아버지와 아들’ 첫 무대

    ‘아일랜드의 체호프’ 프리엘 작품 ‘아버지와 아들’ 첫 무대

    ‘아일랜드의 체호프’로 불리는 극작가 브라이언 프리엘의 작품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국립극단이 가을마당 첫 작품으로 2일 선보인 ‘아버지와 아들’이다. 프리엘의 ‘아버지와 아들’은 1862년 발표와 동시에 러시아 문학사상 가장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반 투르게네프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연출가 이성열은 “프리엘은 원작을 단순히 각색한 게 아니라 새롭게 다시 썼다”며 “원작과 줄거리는 같지만 대사는 거의 다 새로 썼다”고 설명했다. 작품 배경은 농노 해방을 앞두고 러시아가 사회적으로 크게 요동치던 1859년이다. 대학을 졸업한 아르카디는 친구 바자로프와 함께 아버지 니콜라이, 큰아버지 파벨이 살고 있는 고향 농장을 찾는다. 아르카디와 바자로프의 환영 파티를 위해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자유롭고 독립적인 성격의 안나와 그녀의 여동생 카차, 숙모 올가 공주가 농장을 방문하면서 얽히고설킨 사랑이 시작된다. 프리엘은 원작에서 러시아의 격변하는 사회·정치적 현실을 과감히 덜어 냈다. 아버지와 아들 세대의 갈등이라는 원작의 주제를 유지하면서도 세대 간 화해와 사랑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추구했다. 평범하면서도 낯선 일상을 그리거나 사람들이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해 일상에 변화를 주는 사람들이 떠나면서 끝나는 극 구성 방식 등 체호프의 극 구성 방식도 차용했다. 이성열 연출가는 “어느 시대나 아버지와 아들 세대 간엔 다름이 있다. 그 다름 때문에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갈등이 생긴다. 이 작품은 그 갈등 너머에 있는 가족의 사랑, 화해와 용서를 얘기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다룬 작품 중 화해와 사랑을 그린 건 거의 없다. 역사적으로 살부(殺父) 의식이 많이 반복되고 있다. 프리엘의 작품은 화해와 용서가 이뤄진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오는 25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2만~5만원. 1644-2003.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이 여자가 야하다고? 규범에 갇혀 있군요!

    이 여자가 야하다고? 규범에 갇혀 있군요!

    모더니즘/피터 게이 지음/정주연 옮김/민음사/816쪽/3만 5000원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서 막상 정의를 내리려면 막막해지는 것들이 있다. ‘모더니즘’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유럽 근대사상을 연구한 저명한 문화사학자 피터 게이는 다양한 영역에서 수집한 증거들을 통해 다양성 속의 통일성, 단일한 심미적 사고 방식, 눈에 띄는 양식, 즉 모더니즘 양식을 발견하는 데 주력했다. 새 책 ‘모더니즘’은 지난 5월 뉴욕에서 눈을 감은 그가 평생의 연구를 집대성해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집필한 마지막 저작이다. ●性의 해방·개성 표현·솔직함 중시 모더니즘은 대략 184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초까지, 보들레르와 플로베르에서 베케트와 그 이후 잭슨 폴록, 앤디 워홀의 팝아트까지를 아우른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견디었고, 전체주의의 혹독한 적개심을 이겼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인 인물들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 시작은 프랑스 파리였지만 서서히 거점을 미국 뉴욕으로 옮겼다. 물질주의에 대한 반항, 부르주아들의 가식에 대한 혐오에서 시작된 모더니즘은 성의 해방, 솔직함, 자신만의 감정을 소중하게 여기는 정신과 연결된다. ●보들레르·모네 등 당대 미학 비판 저자는 모더니즘의 특징을 ‘이단의 유혹, 즉 관습적인 감수성에 저항하려는 충동’과 ‘철저한 자기 탐구에서 비롯된 개성적 표현력’이라고 정리한다. 모던 발레의 거목 세르게이 댜길레프는 안무가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던 “나를 놀라게 하라!”, 에즈라 파운드가 제시한 “새롭게 하라”는 슬로건은 많은 모더니스트들의 열망을 반영한다. 저자는 시인 보들레르를 ‘모더니즘의 창시자’로 가장 자격이 있다고 지목한다. 독창적이고 자극적인 미술비평, 스스로에 대한 공정한 평가, 내밀한 시적 언어로 문학적 한계에 반항한 점, 탁월한 시적인 재능 등으로 보들레르는 모더니즘의 근본 원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보들레르와 같은 시대에 진보적 아웃사이더로 꼽혔던 또 다른 인물은 화가 마네다. 역사가들은 당대의 미학과 도덕적 규범을 가장 심하게 비웃은 마네의 작품 ‘올랭피아’(1863)를 최초의 모더니즘 작품으로 평가한다. 이어 클로드 모네와 뜻을 같이하는 반아카데미 화가 스물아홉 명이 1874년 4월 파리에서 공동 전시회를 열었다. 이때 전시된 모네의 작품 ‘인상, 해돋이’에서 유래해 훗날 인상파라고 이름 지어지는 이들을 어떤 비평가들은 ‘비타협주의자’라고 불렀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다”라며 ‘예술을 위한 예술’을 옹호했던 테오필 고티에의 신조는 예술가를 숭배하는 미학운동의 선구자 휘슬러를 거쳐 19세기 후반 유미주의자들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인물은 오스카 와일드. 인생의 목표가 세상이 아름다움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공언했던 그는 결국 그 신념 때문에 파멸했다. ●그림·건축 등으로 자유 열정 증명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험난한 여정이었다.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살아남은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은 전체주의의 박해와 전쟁의 시련 속에서 살아남았음을 소설과 그림, 건축으로 증명해 보였다. 모든 노력은 결국 예술적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귀결된다. 책은 모더니즘의 발생부터 발전, 쇠퇴에 이르기까지를 구체적이고 명확한 사례들을 통해 소개한다. 산문과 시, 음악과 무용, 건축과 디자인, 연극과 영화, 아방가르드까지 각 장르의 모더니스트들과 예술가들의 상호교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많은 도판을 곁들이고 있지만 자칫하면 모더니즘의 광대한 바다에서 파도에 휩쓸리기 쉽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10] ‘조운선의 무덤’ 확인된 태안 마도 앞바다-굴포운하와 안면도 낳은 이유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10] ‘조운선의 무덤’ 확인된 태안 마도 앞바다-굴포운하와 안면도 낳은 이유

    지난해 충남 태안 마도 해역에서 발견된 고선박 ‘마도 4호선’이 조선시대 조운선으로 확인됐다고 한다. 조운선이 발굴된 것은 처음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정밀조사한 결과 ‘광흥창’(廣興倉)이라고 적힌 목간, ‘내섬’(內贍)이라고 쓰인 분청사기 등 유물과 견고한 선박 구조로 미뤄 조선 초기 조운선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조운선은 삼남지방에서 걷은 세곡을 싣고 한양에 있는 경창으로 운반하던 선박이다. 선박 안에서 발견된 목간 60여점에는 대부분 출발지인 나주와 종착지인 한양의 세곡창고인 광흥창을 뜻하는 ‘나주광흥창’(羅州廣興倉)이 적혀 있었다. 목간이란 오늘날의 종이 문서처럼 각종 정보를 적은 나무 판자 조각이다. 연구소는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이 배가 1410∼1420년 마도 해역에서 침몰한 것으로 추정했다. 현재 마도 4호선의 잔해는 대부분 마도 북동쪽 해역의 수심 9∼15m 지점에 파묻혀 있다. 태안은 삼국시대에는 중국을 오가는 수운의 요충지였다. 고려시대 태안 앞바다는 개경을 오가는 송나라의 사신이 머물다 가는 객관 안흥정이 자리 잡은 국제항로의 일부로 기능했다. 물론 세곡을 포함한 전라도와 경상도의 풍부한 물산을 수도인 개경이나 한양으로 나르는 중요한 뱃길이기도 했다. 안흥정에 관한 기록은 송나라 사람 서긍(1091~1153)의 ‘고려도경’에도 보인다. 안흥 해역은 조석 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빨라 선박의 침몰 사고가 빈번했다. 배를 타고 통과하기 어렵다는 난행량(難行梁)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서긍도 이곳을 지나며 ‘격렬한 파도는 회오리치고, 들이치는 여울은 세찬 것이 매우 기괴한 모습이어서 무어라고 표현할 수가 없다’고 적었다. 침몰선의 흔적은 오늘날 이 뱃길의 역사적 중요성을 유물로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수중 발굴에서 건져 올린 유물의 시대와 국적은 매우 다양하다. 고려자기는 11세기 해무리굽 청자부터 14세기 후반의 상감청자까지 질과 양에서 풍부하다. 조선시대는 15세기 분청사기와 17~18세기 백자가 다채롭게 보인다. 중국 것은 송나라와 원나라 시대 청자, 15~16세기 명나라 시대 복건성 남쪽에서 만들어져 동남아시아로 많이 수출됐던 청화백자, 18~19세기 청나라 시대 백자가 망라됐다. 난행량은 조운선에 더욱 두려운 뱃길이었다. 상선은 그래도 전문적인 뱃사람들이 익숙한 뱃길로 오가는 만큼 사고 위험이 덜했지만, 각 지역에서 징발된 세곡선의 일꾼들은 뱃길이 익숙지 않았고, 화물도 무거웠으니 항해는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안흥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곡선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태조 4년(1395)에는 경상도 조운선 16척이 가라앉았다. 태종 3년(1403)에는 5월에 경상도 조운선 34척이, 다시 6월에는 경상도 조운선 30척이 잇따라 피해를 입었다. 태종 14년(1414)에는 전라도 조운선 66척, 세조 원년(1455)에는 전라도 조운선 54척이 침몰했다. 많을 때는 전체 세곡선의 3분의 1 가까이가 안흥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평안하게 번성한다’는 의미의 안흥(安興)이라는 지명이 태어난 것도 조운선의 안전을 빌고자 난행량이라는 이름을 안흥량으로 고친 결과라고 한다. 고려시대에도 조운선이 이 일대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난행량을 피해 태안반도를 관통하는 운하를 파는 계획이 일찌감치 추진됐기 때문이다. 세곡선의 잇따른 침몰이 국가재정을 크게 위협할 정도였으니 운하 건설까지 궁리한 것이다. 고려 인종 12년(1134) 군졸 수천 명을 풀어 운하 공사를 벌였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의종 8년(1154)에도 운하 개착 시도가 있었다. 공양왕 3년(1391) 공사를 재개했으나 바닥의 화강암 암반이 나타나는 바람에 중단됐다. 당시 추진된 것은 태안반도 남쪽의 천수만과 북쪽의 가로림만을 잇는 굴포운하였다.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와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를 연결하는 12㎞ 구간이다. 갯벌이 8㎞ 정도로 난공사 구간인 육지 부분은 4㎞ 정도였다. 운하가 완성되면 세곡선이 난행량은 물론 난행량만큼이나 통과가 쉽지 않았던 안면도 남쪽의 ‘쌀썩은여’를 지나지 않고 개경이나 한양으로 북상 할 수 있었다. 쌀썩은여는 세곡선의 잦은 침몰로 쌀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굴포운하는 조선시대에도 태종과 태조에 이어 세조까지 줄기차게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대안은 태안군 소현면 송현리와 의항리를 잇는 의항 운하였다. 안흥에서 가까운 의항운하는 2㎞만 파면 난행량을 피할 수 있었다. 의항운하는 중종 32년(1537) 승려 5,000명이 동원되어 6개월만에 완성하지만, 토목기술의 한계로 둑의 흙이 계속 무너지는 바람에 다시 메워지고 말았다. 태안반도의 남쪽으로 길게 내민 작은 반도였던 안면도를 섬으로 만든 것이 마지막 대안이었다. 남쪽에서 북상하는 세곡선이 천수만으로 진입한 다음 안면도를 가로질러 다시 큰 바다로 나갈 수 있게 한 것이다. 난행량은 어쩔 수 없이 통과해야 하지만, 쌀썩은여는 피해갈 수 있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면도 분리공사는 인조연간(1623~1649)부터 추진되어 17세기 후반 완성됐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마도 4호선은 조운에 대한 최초의 실증 자료로 해양사, 경제사, 도자사, 문화사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 활용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조운선의 발견은 우리나라 해양문화의 중심지로 태안 지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분명히 보여준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8] 혜원 신윤복이 묘사한 동성애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8] 혜원 신윤복이 묘사한 동성애

    조선시대 대표적 풍속화가의 한 사람인 혜원 신윤복은 개방적 성 모럴이라는 전에 없던 문화현상을 작품의 주제로 채택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높은 수위였지만,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내용을 뛰어난 필력에 실려 표현한 결과 ‘19금(禁)’ 딱지 따위는 붙지 않았다.  혜원은 태어나고 죽은 연대가 분명치 않다. 그저 18세기 중엽에서 태어나 19세기 초반까지 살았던 인물로 알려진다. 전통적 신분질서가 흔들리고, 경제력이 사회적 행세의 중요한 기준으로 부상한 시기다. 성 모럴도 전 시대와는 크게 달라졌다. 에로티시즘이 넘쳐나는 그의 풍속화는 당시 ‘그림시장’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결과이기도 했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은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30점의 풍속화로 포착하고 있다. 이 화첩에 묶인 각각의 그림에는 제목이 적혀있지 않다. 오늘날 전하는 제목들은 감상자들이 정황을 추정해 지어 부른 것이다. ‘이승영기’(尼僧迎妓)라는 그림도 그렇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여승이 기생을 맞이한다.’ 쯤이 되겠지만, 비구(남승)인지, 비구니(여승)인지, 기생인지 여염집 아낙인지 조차 논란거리이고, 해석도 제각각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로 유명한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은 이 그림의 제목을 ‘봄 나들이’라고 붙이고, ‘여인들의 아랫도리 흰 속곳을 훔쳐보고 있는 승려’하고 해석했다. 타락한 승려와 유부녀 혹은 기생의 부도덕한 관계를 암시한다는 일반적인 시긱하다.  장옷을 입은 여인을 기생이라 한 것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다. 장옷이 조선 초기 서민이나 기생의 복식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가 되면 양반계층에서도 일반화된 것은 물론 왕실의 유물에서도 나타난다. 다만 오른쪽 시중드는 여인의 성격은 학계의 의견이 일치하는데, 양반집 여인들만 했다는 오른쪽 치마여밈을 하고 있는 만큼 몰락한 양반 출신이라는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궂은 일을 하고는 있지만, 뿌리깊은 습관은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왼쪽 인물을 비구라고 보면 새로운 시대의 풍속도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부녀자가 절에 올라가 공공연히 음행을 저지르고 절개를 잃는 것’을 한탄하는 목소리는 벌써 태종실록과 같은 조선 초기 기록에서도 보이기 때문이다.  ‘여승이 기생을 맞이한다.’는 제목에 힌트가 있다. 실제로 승려의 얼굴은 장옷을 쓴 여인보다 오히려 곱다. 체구가 아담하고 자태 또한 매우 여성적이다. 승려의 얼굴에서 비치는 묘한 기대감 역시 단순히 절의 불사에 공헌한 공덕주에 대한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혜원은 동성애를 암시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동성애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지만, 유교적 질서가 긴장감있게 유지되는 시대에는 겉으로 드러나기 어려웠다. 하지만 여염집 처자가 성매매에 나설 정도로 세상이 바뀐 조선 후기에 이르면 양상은 달랐다. ‘이승영기’는 드러내지 못할 비밀을 가진 여인들의 은밀한 만남을 그린 것으로 해석해야 의문이 모두 풀린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역사문제 상호 소통 방식 접근…관광 등 연성이슈 교류 넓혀야”

    “역사문제 상호 소통 방식 접근…관광 등 연성이슈 교류 넓혀야”

    한국과 일본의 전문가들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신문, 도쿄신문이 공동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두 나라 국민 간 적대적 정서가 심화되고 있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중국에 대한 인식 차가 큰 것도 풀어야 할 숙제로 제시했다. 양국 전문가 5명은 공통적으로 역사 문제의 해결도 중요하지만 관광과 요리 등 연성 이슈에서부터 교류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 관계 개선에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진창수 세종연구소장, 젊은층 적대정서 문화서 해법 찾아야 한·일 양국 간 적대적 국민 정서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띈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그런 정서가 커지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한국 입장에선 매스컴에서 일본의 역사 인식에 대한 보도가 잦아진 것을 이유로 들 수 있다. 특히 언론에서 아베 신조 정권의 역사수정주의에 대한 의구심을 지속적으로 제기하면서 역사 문제가 이슈로 대두되고 있다. 이는 미디어에 친숙한 젊은 층에서의 일본에 대한 부정적 정서 확산으로 이어졌다. 일본 측에선 한·일 관계가 나빠진 것도 있고,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 내에서도 논쟁이 격화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아사히신문이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이 오보임을 인정하면서 지금까지의 위안부에 대한 사죄, 반성 분위기가 변화한 측면이 있다. 원칙을 강조하는 한국의 대일정책과 혐한류 정서도 기폭 작용을 했다. 역사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같은 문제를 바라봐도 그 초점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위안부 문제를 한·일 모두 주요 이슈로 인식하지만 일본의 경우 ‘강제 연행을 했느냐’ 여부가 주요 관심사다. 한국이 바라는 인권 문제 내지 식민지 시대의 불법 행위 전반에 대한 논쟁이 주가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역사 문제가 양국에서 활발히 논의된다 해도 오히려 인식의 차이를 확대하는 형태로 전개될 우려가 있다. 역사 문제는 양국이 각자 논의를 이어 갈 게 아니라 전략적으로 상호 대화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주요 쟁점 몇 가지에 대해 양국 전문가들이 공통의 담론을 만들어 일반 국민들에게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 양국 국민이 관광, 요리 등의 문화 영역에 서로 흥미를 보인 것도 주목할 만하다. 연성 이슈에서 출발해 교류를 활성화하는 것이 한·일 관계 개선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연구소장, 정상회담 양국 관계 개선 돌파구 삼길 한·일 관계가 최악인 상황에서 설문조사가 진행됐지만 한국 국민 10명 중 8명이 일본에 대해 친밀감을 못 느낀다는 조사 결과는 너무 극단화돼 있다고 생각한다. 그 원인으로 구조적·지정학적 요인을 들 수 있다. 거시적으로 중국이 급부상하는 한편 일본은 쇠퇴하고 있고 한국이 중견국가로 등장하는 등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를 꼽을 수 있다. 상황적으로는 리더십 문제를 들 수 있다. 양국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요소다. 언론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아베 신조 정부의 헌법 개정 시도 등을 군사대국화, 19세기 후반 침략의 길로의 회귀 등으로 부정적으로만 다뤘다. 일본 국민들이 생각하는 한국에 대한 인식에도 현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경우 한국 국내에서는 인권 의식의 고양, 민주화 등과 연계되는 일인데 무조건 반일 정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베 총리의 담화에 대해 일본 국민의 약 40%가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평소 아베 총리의 인식보다 누그러졌기 때문이다. 한반도 통일을 일본인의 45.8%가 지지한다는 응답은 주목해야 한다. 과거에는 한국의 통일을 지지하는 세력이 컸는데 최근에는 통일이 되면 한·일 관계가 안 좋아진다거나 통일 한반도가 반일로 바뀌어 일본이 궁지에 몰린다는 인식이 많다. 하지만 한·일 문제가 ‘역사 문제’에 초점을 둘수록 반통일 인식이 강해지고, 북한 문제와 북·일 관계를 활용해 한국을 견제하는 등 남북한 간 양다리 전략으로 통일을 방해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한·일 관계가 개선되려면 먼저 정상회담 개최를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 공공외교를 강화해야 한다.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 東亞질서 안정에 한·일 관계 활용을 한·일 관계가 나빠졌다는 응답이 71.5%로 나타났는데 이는 2012년 조사에서 74.3%를 기록한 이래 한·일 경색 국면이 장기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일본에 대해 한국 국민이 느끼는 친밀감도 2년 8개월 만에 10.3% 포인트나 줄어 앞으로 민간 교류를 통한 관계 회복도 쉽지 않을 것으로 우려된다. 한국 국민들은 한·일 관계 전망에 관해 변하지 않을 것(45.3%)이라는 의견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반면 일본 측 조사에서는 한·일 관계가 좋아질 것이라는 응답이 41.4%를 차지하는 등 일본 국민들이 훨씬 낙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한국은 역사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에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회의적 시각이 강한 반면 일본은 한국 측이 냉정한 자세를 되찾는다면 상황이 개선될 수 있다고 보는 분위기인 것 같다. 한국 국민들이 한·일 관계 개선에 큰 기대를 하지 않으면서도 절반 이상(54.7%)이 정상회담 개최가 필요하다고 답한 것은 3년 이상 정상회담이 개최되지 못한 비정상적 상황이 한국 외교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일본과의 정상회담이 미뤄질수록 한국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일본과의 외교에서 한·일 관계 개선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한반도 통일과 동아시아의 안정된 질서 등 큰 목적에서 한·일 관계를 활용해야 한다. 한·일 정상회담 개최는 외교를 정상으로 돌려놓는 포석으로 삼을 수 있다. 이번 여론조사는 역사 문제나 위안부 문제 그리고 중국에 대한 양국 국민들의 인식 차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단기간에 양국 관계가 개선되기는 어렵겠지만 현재의 경색 국면에서 전환해 적절히 관리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한국 국민들의 민의라고 생각된다. ■아사바 유키 니가타현립대 교수, ‘상대국 필요 40%’는 관계 성숙 방증 조사 결과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사죄’를 둘러싼 양국의 인식 차이다. 아베 신조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에 대해 한국 측은 부정적 평가가 압도적이었지만 그 이유로 ‘역대 내각의 담화를 계승하지 않고 있다’(28.7%)보다 ‘반성과 사죄가 충분하지 않다’(80.1%)를 꼽고 있다. 게다가 일본군 위안부 등 역사문제에 관해서 ‘전혀 사죄하지 않고 있다’가 과반수로, ‘별로 사죄하지 않고 있다’를 합치면 90%에 육박한다. 한편 일본측에서는 ‘그러한 주장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응답이 60%를 넘는다. 일본 입장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피로감이 쌓이고, 이렇게 통하지 않는다면 더이상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는 마음이 커진다. 반면 일본 측은 담화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부정적 평가를 웃돌아서, ‘미래지향적이다’ 뿐만 아니라 ‘반성과 사죄를 했다’고 대답하고 있다. 향후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이런 인식의 간극을 메워 나가지 않으면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 양국의 정치 리더는 서로가 인내하고 무엇보다 함께 움직이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대국에 대한 친밀감을 묻는 설문에 대해 ‘느끼지 않는다’, ‘별로 느끼지 않는다’라고 응답한 사람의 경우 일본 측이 약 50%, 한국 측이 약 80%에 달했지만 ‘상대국은 필요할 것 같다’는 응답이 일본과 한국에서 각각 40%를 차지한 점이다. 개인의 감정은 별개의 문제로 하고 양국 관계는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분리해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번 조사에서 일본, 한국 모두에서 ‘정상회담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절반을 넘은 것은 향후 정상회담을 실현하는 데 탄력이 될 것이다. ■오쿠조노 히데키 시즈오카현립대 교수, 對中 인식 차 커 한·일 관계 저해 우려 서로의 필요성에 대한 설문에서 한·일 간 차이가 드러났다. 한국에서 ‘일본이 필요하다’는 사람이 지난 조사보다 늘어난 것은 한·일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한국이 필요하다’는 사람이 줄었다. 역사 인식 등에서 일본 입장을 아무리 설명해도 한국 국민이 납득하지 않는 데 대한 피로와 불신이 반영된 것이다. 한국에 관심 있는 일본인 학생들 중에서도 “무엇을 해도 한국이 반드시 비난한다”는 사람이 생겨났다. 서로에 대한 관심은 과거보다 다양해졌다. “일본 하면 만화”, “한국 하면 한류” 등과 같은 고정관념이 줄었다. 특히 한국 젊은이들이 “독도 문제에선 양보를 안 하지만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평가한다”는 유연한 사고를 하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정치적·외교적 마찰이 심해져도 대화의 실마리는 반드시 남기겠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중국을 보는 인식 차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존재감이 약화된 현재 동일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한·일이 협력해 힘의 공백을 메우고 중국과의 균형을 취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은 중국에 경제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반면 일본을 안보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양국이 역사 인식을 놓고 갈등하는 가운데 중국은 한국을 끌어들여 한·미·일 공조를 흐트러뜨리고 싶어 한다. 일본군 위안부는 여성 인권과 관련된 세계적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데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일본으로선 손해다. 한·일은 양자 관계뿐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안정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내정과 과거에 눈길을 빼앗기지 말고 중장기적으로 서로에 이익이 되는 관계를 재정립하는 게 중요하다.
  • [와우! 과학] ‘모나리자’ 미소 비밀…다빈치의 ‘착시’ 기술

    [와우! 과학] ‘모나리자’ 미소 비밀…다빈치의 ‘착시’ 기술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가 남긴 명작 '모나리자'의 비밀을 파헤친 연구결과가 또 나왔다. 최근 영국 셰필드할람 대학등 공동연구팀은 다빈치가 눈의 착각을 '의도적'으로 이용해 신비한 모나리자 미소를 만들었으며 또 다른 작품에서도 이같은 특징이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세계적인 명작으로 꼽히는 모나리자는 그림 자체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신비한 미소로도 유명하다. 특히 모나리자의 미소는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데 정면에서 봤을 때는 입가에 미소가 드러나지 않으나 측면에서는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같은 눈의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다빈치는 그림에 여러 겹의 물감을 덧칠해 사물의 윤곽선을 안개에 싸인 것처럼 흐릿하게 처리하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사용했다. 특히 이 사실은 지난 2010년 프랑스 박물관 연구 복원센터 전문가들이 X선 형광분광기를 동원해 모나리자 물감층과 화학성분을 분석한 결과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당시 연구에 따르면 다빈치는 모나리자의 눈가와 입가 등에 산화망간 성분의 얇은 막을 최대 30겹까지 입혔다. 이번 연구에 대상이 된 작품은 세계적으로 큰 화제와 논란을 일으킨 다빈치의 또다른 걸작 '아름다운 왕녀'(La Bella Principessa)다. 연구팀은 피실험자들을 대상으로 이 그림을 여러 방식으로 보여주는 시각적인 실험을 실시했다. 예를들어 멀리 떨어져서, 흐릿한 그림으로, 입과 눈 등 특정 부위를 가리고 보여주는 등의 실험을 실시한 것. 그 결과 그림의 표정 변화는 입가에 의해 야기된다는 사실이 확인됐으며 연구팀은 이를 '붙잡을 수 없는 미소'(uncatchable smile)라 불렀다. 연구를 이끈 알렉산드로 소란조 박사는 "이 그림의 미소를 느끼게 되는 순간 사라져 붙잡을 수 없는 미소라 부르는 것" 이라면서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한 시각적 기법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사람이 바로 다빈치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다빈치는 눈의 착각을 일으키는 이같은 기술을 의도적으로 여러 작품에 넣었다" 고 덧붙였다. 한편 '아름다운 왕녀'는 지난 199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당시 이 그림은 19세기 초 독일 미술학도가 다빈치를 흉내낸 작품으로 오인돼 경매에 올랐고 이 때문에 판매 가격은 불과 1만 2039파운드로 당시 환율로 채 2000만원이 안됐다. 그러나 10년 뒤 이 그림에서 다빈치의 지문과 탄소연대 측정 결과 1440~1650년에 제작된 것이 확인되면서 세계 미술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또한 영국 옥스퍼드 대학 석좌교수 마틴 캠프는 이 그림의 인물이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자(1452~1508년)의 딸인 비앙카 스포르자라고 주장하면서 '아름다운 왕녀'라는 작품명을 갖게됐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6] 징비록 특별전과 안동 유림 패션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6] 징비록 특별전과 안동 유림 패션

    KBS TV 역사 드라마 ‘징비록’이 얼마 전 막을 내렸다. 드라마가 끝나기를 기다린 것은 아니겠지만 때맞춰 국립민속박물관이 지난주 ‘징비록’ 특별전을 시작했다. 일반 공개에 앞서 지난 11일에는 초청인사를 대상으로 하는 개막식이 열렸다. 민속박물관 전시회의 개막식은 대개 조촐하게 치러지곤 하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휴관일이어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각종 차량이 박물관 앞마당을 온통 점령했다. ‘징비록’의 지은이이자 주인공인 서애 류성룡(1542~1607)의 향리인 안동에서도 대거 올라온 듯 전세버스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눈길을 끌었다. 류성룡이라는 인물의 역사적 무게를 반영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흥미로웠던 대목은 단체로 참석한 안동 유림의 패션이었다. 정갈하게 손질한 모시 두루마기에 중절모, 그리고 새하얀 고무신 차림이었는데, 그 모습 자체에서 품위와 권위가 느껴졌다. 조선시대 유림이 아닌 21세기 안동 유림의 여름 ‘드레스 코드’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안동의 전통이란 한때 존재하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특별전은 기획전시실에 마련됐다. 둘러보면 ‘징비록’과 관련된 각종 유물이 매우 좋은 상태로 보존되고 있는 모습에 감탄하게 된다. 전시 유물 대부분은 특별전의 공동주최자인 한국국학진흥원이 관리하고 있는데, 안전하게 보존하고자 풍산 류씨를 비롯한 각 문중이 소장 유물을 위탁했기 때문이다. 전통을 지키되 과학적 사고와 실천에도 적극적인 안동 유림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당연히 ‘징비록’ 그 자체다. 국보로 지정된 서애의 1604년 친필본과 이후의 목판본, 그리고 ‘징비록’을 찍어낸 조선 후기 책판을 모두 볼 수 있다. 친필본에서 정치적으로 미묘한 대목은 목판본으로 찍어내며 생략하기도 했다고 사실은 처음 알았다. 서애와 친분이 깊었던 오리 이원익(1547~1643)의 종가가 소장한 19세기 한글본 ‘징비록’도 눈길을 끈다. 전시는 ‘영의정으로 임진왜란을 극복하다’, ‘이순신을 등용하다’, ‘명나라 군대와 평양성을 탈환하다’, ‘병으로 사직을 청하다’, ‘오직 나라를 위해 힘쓰다’ 등의 몇가지 주제로 나뉘어 졌다. 임진왜란의 극복 과정을 알게 해주는 다양한 역사적 문헌 자료가 제시되어 있지만, 관람객의 발길은 아무래도 서애의 갑옷과 투구, 그리고 말안장이 있는 곳에 가장 오래 머무는 듯 하다. 서애가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가 되어 현장에서 군사업무를 총괄할 때 직접 썼던 것들이라고 한다. 함께 전시된 ‘정원전교’(政院傳敎)는 글자 그대로 승정원에서 서애에게 왕명을 전달한 문서를 모아놓은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12월 4일 왕의 전교를 보면 ‘경으로 하여금 군사를 검찰하게 하였으나, 현재 일컬을 만한 직책이 없어서 일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많을 것이다. 지금 경울 도체찰사로 삼으니 여러 군사를 총괄하여 흉적을 섬멸하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징비록’ 특별전은 9월 30일까지 열린다. 매주 화요일 휴관. 글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아베 담화 전문

    아베 담화 전문

    종전 70년을 맞아 전쟁에 이른 길, 전후의 발자취, 20세기라는 시대를 우리는 조용히 되돌아보고 그 역사의 교훈 속에서 미래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00년 전 세계는 서양 제국을 중심으로 각국의 광대한 식민지가 커지고 있었습니다. 압도적인 기술 우위를 배경으로 식민지 지배의 물결은 19세기 아시아에도 밀려들었습니다. 그 위기감이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됐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입헌정치를 시작하고 독립을 지켜 왔습니다. 러일전쟁은 식민 지배하에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민족자결의 움직임이 커지면서 식민지화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이 전쟁은 1000만명의 전사자를 낸 비참한 전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강하게 원하고 국제연맹을 창설해 부전(不戰) 조약을 탄생시켰습니다. 전쟁 자체를 위법화하는, 새로운 국제사회의 조류가 생겼습니다. 당초 일본도 발걸음을 같이했습니다. 그러나 세계공황이 발생하고 구미제국이 식민지 경제를 끌어들여 경제의 블록화를 진행하자 일본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일본은 고립감이 깊어져 외교적, 경제적으로 한계에 부딪히자 힘의 행사로 해결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국내의 정치 시스템은 그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세계의 대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만주사변, 그리고 국제연맹으로부터의 탈퇴. 일본은 점차 국제사회가 엄청난 희생 위에 쌓으려 한 ‘새로운 국제 질서’에 대한 도전자가 돼 갔습니다. 나아갈 진로를 잘못 잡아 전쟁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70년 전, 일본은 패전했습니다. 전후 70년을 맞아 국내외에서 돌아가신 모든 사람들의 목숨 앞에 깊이 고개를 숙이고 통석의 마음을 표시하고 영겁의 애도를 바칩니다. 과거 전쟁에서 300만 동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고 가족의 행복을 바라며 싸움터에서 돌아가신 분들. 종전 후, 극한(極寒)의 또는 작열하는 머나먼 타향에서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다 돌아가신 분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도쿄를 비롯한 각 도시에서의 폭격, 오키나와 지상전 등으로 많은 시민이 무참히 희생됐습니다. 전쟁이 벌어진 나라에서도 젊은이들의 목숨이 수없이 사라졌습니다. 중국, 동남아, 태평양 섬 등 전장이 된 지역에서는 전투뿐 아니라 식량난 등으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고난에 빠지고 희생됐습니다. 전쟁터의 그늘에서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은 여성들이 있었던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본이 아무런 죄 없는 사람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손해와 고통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역사란 실은 돌이킬 수 없는, 가혹한 것입니다. 개개인에게 각자의 인생이 있고 꿈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되새기면서 지금 다시 할 말을 잃고 단장(斷腸)의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런 희생 위에 현재의 평화가 있습니다. 이것이 전후 일본의 원점입니다. 두 번 다시 전쟁의 참화를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사변, 침략, 전쟁, 어떠한 무력의 위협과 행사도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두 번 다시 써서는 안 됩니다. 식민지 지배와 영원히 결별하고 모든 민족의 자결권이 존중되는 세계가 돼야 합니다. 전쟁에 대한 깊은 회오(悔悟)의 마음과 함께 일본은 그렇게 맹세했습니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를 만들어 법의 지배를 중시하고 오로지 부전의 맹세를 견지해 왔습니다. 70년에 걸친 평화국가로서의 행보에 우리는 조용한 자부심을 가지면서 이런 변하지 않는 방침을 앞으로 관철해 가겠습니다. 일본은 지난 전쟁에서의 행동에 대해 거듭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해 왔습니다. 그런 생각을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의 동남아 국가, 대만, 한국, 중국 등 이웃 사람들이 걸어온 고난의 역사를 가슴에 새기고 전후 일관되게 평화와 번영을 위해 힘을 다해 왔습니다. 이러한 역대 내각의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어떤 노력을 다하더라도 가족을 잃은 분들의 슬픔, 전화로 도탄의 고통을 맛본 사람들의 아픈 기억은 앞으로도 절대 아물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전후 600만명이 넘는 일본인이 아시아 각지에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고 일본 재건의 원동력이 된 사실을. 중국에 두고 온 3000명 가까운 일본 어린이들이 무사히 성장하고 다시 조국 땅을 밟게 된 사실을. 미국, 영국, 네덜란드, 호주 등에 있던 포로들이 일본을 찾아 전사자들을 위한 위령을 계속해 주고 있는 사실을. 전쟁의 고통을 겪은 중국인 여러분과 일본군에 의해 참기 어려운 고통을 받은 전쟁 포로들이 그토록 관대하려면 얼마만큼 갈등하고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했는지. 그러한 것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관용의 마음으로 일본은 전후 국제사회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전후 70년을 계기로 일본은 화해를 위해 힘을 써 준 모든 나라,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일본에서는 전후 세대가 인구의 80%를 넘었습니다.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우리의 아들과 손자 등 미래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과를 계속할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 일본인들은 세대를 넘어, 과거의 역사와 정면으로 마주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과거를 이어받아 미래에 물려줄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의 부모, 또 그 부모 세대는 전후의 폐허, 가난의 밑바닥에서 생명을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 세대, 나아가 다음 세대들로 미래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조의 꾸준한 노력과 함께 적으로 치열하게 싸운 미국, 호주, 유럽 각국을 비롯한 정말 많은 나라로부터 원한을 초월한 선의와 지원의 손길이 뻗친 덕분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미래에 계속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역사의 교훈을 깊이 가슴에 새기고 더 나은 미래를 열어 가면서 아시아, 그리고 세계 평화와 번영에 힘을 다한다는 큰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한계를 힘으로 타개하려 했던 과거를 가슴에 계속 새기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나라는 어떤 분쟁에서도 법의 지배를 존중하고 힘의 행사가 아니라 평화적,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이 원칙을 앞으로도 굳건히 지키면서 세계 각국에도 호소하겠습니다. 유일한 원폭 피해국으로 핵무기 비확산과 궁극적인 폐기를 목표로 국제사회에서 그 책임을 다해 나가겠습니다. 우리는 20세기 전쟁 중 많은 여성의 존엄과 명예가 크게 상처받은 과거를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일본은 그런 여성들의 마음에 다가가는 나라가 되고 싶습니다. 21세기야말로 여성의 인권이 상처받는 일이 없는 시대로 만들기 위해 세계를 이끌어 가겠습니다. 우리는 경제의 블록화가 분쟁의 싹을 키운 과거를 이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일본은 어떤 나라에도 함부로 좌우되지 않고 자유롭고 공정하고 열린 국제 경제 시스템을 발전시키고 개발도상국 지원을 강화해 세계의 번영을 견인하겠습니다. 번영이 평화의 초석입니다. 폭력의 온상이 되는 빈곤에 맞서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의료와 교육, 자립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더욱 힘을 쓰겠습니다. 우리는 국제 질서에 대한 도전자가 돼 버린 과거를 이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일본은 자유민주주의, 인권과 같은 기본적 가치를 확고하게 견지하고, 그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손잡고 ‘적극적 평화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어 세계 평화와 번영에 지금 이상으로 공헌하겠습니다. 종전 80년, 90년, 나아가 100년을 향해서, 그런 일본을 국민 여러분과 함께 만들어 가겠다는 결심입니다. 2015년 8월 14일 총리 아베 신조
  • 민주주의 ‘창’으로 본 3·1운동 ~ 임시정부

    민주주의 ‘창’으로 본 3·1운동 ~ 임시정부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김정인 지음/책과함께/408쪽/2만 2000원 사관(史觀)은 역사를 바라보는 창이다. 어떤 사관을 통해 역사를 접하느냐에 따라 시대에 대한 이해, 분석, 역사적 사건에 대한 원인과 결과 등의 해석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또한 역사에서 추출해내는 현재적 의미 역시 사실과 아주 멀리 떨어지게 된다. 식민주의 사관, 영웅주의 사관, 왕조주의 사관이 득세하던 시절, 사학계에서는 사관의 균형추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민중사관, 민족사관을 통한 역사인식과 연구에 힘썼다. 그러나 민족-반민족, 민중-지배세력의 대결구도로 바라보는 역사 인식에는 여전히 부족한 지점이 있었다. 바로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었다. 특히 19세기, 20세기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은 학계 전반에서 외래에서 온 제도이자 사상쯤으로 치부하며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춘천교대 교수면서 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으로 활동하는 젊은 사학자인 저자는 ‘민주주의 사관’이라는 창을 통해 19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범까지의 역사에서 한국의 자생적인 민주주의의 기원을 살핀다. 명명되지 않았고 구체적으로 제도화하지 않았을 따름이지, 민주주의는 이미 우리 안에 그 가치와 내용을 담은 문화와 문명으로서 실재했음을 ‘인민’, ‘자치’, ‘정의’, ‘권리’, ‘도시’ 등 핵심 개념으로 명쾌하면서도 깊이를 놓치지 않고 풀어간다. 민주주의를 핵심 사관으로 삼아 바라보면 19세기를 조선후기사와 근대사로 분리하는 방식이 아닌 연결되는 총체적 역사 흐름으로 살필 수 있고, 그때 비로소 민중과 지배계급의 대결, 개화와 척사의 갈등 등 도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분절된 삶이 존재할 수 없듯 분절된 역사도 존재할 수 없음은 자명한 진리다. 소외와 배제의 대상에 불과하던 노비와 여성 등 기층계급이 추구한 해방의 과정을 통해 민주주의를 이끌어 갈 주체인 인민이 탄생됐다. 그리고 천주교, 동학 등 평등지향적 종교 공동체 속에서 인민들은 스스로 사회 운영 제도를 만들고 규율을 습득하는 자치의 과정을 겪었다. 자치의 원리를 기반해 벌어진 농민항쟁 등은 신분세습, 사회적 자산 분배의 불평등, 과세 불평등, 소수자 차별 등 사회의 여러 구조적 문제를 극복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투쟁으로 민주주의의 내용적 충실성을 다지기 시작한 걸음이었다. 부제가 ‘시대의 건널목, 19세기 한국사의 재발견’이다. 인민을 상징하는 전봉준과 개화를 상징하는 김옥균이 역사적으로 조우하는 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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