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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너지 절약 특집] 머지않은 석유시대의 종말…미래 에너지 먹거리를 찾자

    [에너지 절약 특집] 머지않은 석유시대의 종말…미래 에너지 먹거리를 찾자

    록펠러는 석유를 ‘악마의 눈물’이라고 불렀다. 자신에게 엄청난 부를 선물해 준 자원에 대한 비유치고는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표현은 적확했다. 150년 전, 인류가 석유의 가치를 재발견한 이후 세계 각지에서는 전쟁과 갈등이 이어졌다. 석유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의 패권을 장악했다. 세계 권력이 19세기 석탄경제를 일으킨 영국에서 20세기 이후 미국으로 넘어간 것도 석유의 힘이다. 과거 그 어떤 에너지원보다 쓰기 쉽고 구하기도 편한 석유는 세상을 바꿔놨다. 공장과 기계가 쉼 없이 돌면서 부는 재편됐고 그 속도에 맞춰 인류는 석유를 소비했다. 휘발유 1ℓ는 유기물 23t이 100만년을 기다려 만들어진다는 과학의 교훈도, 자원은 유한하다는 평범한 진리도 망각했다. 이런 소비의 미학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나라마다 한정된 자원의 사용을 줄이고 미래에너지를 찾으려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기업들 역시 효율적인 에너지 사용을 강조하며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미래에너지 찾기에 분주하다. 석유 시대의 종말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위기감의 발로이기도 하다. 우리 기업의 에너지경영 현장을 점검해 본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길섶에서] 망친 ‘하지 감자’/문소영 논설위원

    그제 하지 감자를 캤다. 3월 중순에 씨감자를 넣어서 100일쯤 지난 6월 23일 하지 언저리에 캐는 감자를 ‘하지 감자’라고 부른다. 최근 주말 농부들이 ‘감자가 조막만 하다’고 한탄했지만 ‘내 감자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근거없이 믿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캐 보니 겨우 너덧 살짜리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다. 쪄먹기에는 너무 작아 된장찌개용이다. 게다가 아무리 깊게 호미질을 해도 몇 개 찾을 수 없다. 도시농부 6년째에 감자 흉년은 처음이다. 탄저병 등 병충해로 고추농사를 망쳐도 땅속에서 자라는 감자는 늘 통통하게 여물었는데 40년 만의 가뭄에 주말 농부의 가슴도 멍들게 생겼다. 제주도 등에서 하지 감자가 쏟아져 가격이 내렸던 과거와 달리 요즘 감자 가격은 고공행진이다. 매년 하지 감자를 캐면 오빠네와 한 상자씩 나눠 먹었는데 올해는 빈손이라 망연하다. 아일랜드 농부들의 주식은 감자였는데 19세기 중반 감자 역병이 돌아 100만명이 굶어 죽자 살아남은 150만명이 미국으로 이주했던 기록이 떠오른다. 7년 연속 가뭄에 사람도 잡아먹었다는 17세기 현종 때의 ‘경신 대기근’도 생각난다. 가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서울대 지망생의 책장-읽어라, 청춘] 리처드 니스벳 ‘생각의 지도’

    [서울대 지망생의 책장-읽어라, 청춘] 리처드 니스벳 ‘생각의 지도’

    질문 하나. 당신 자신을 소개해 보자. 질문 둘. ‘닭, 소, 풀’ 중 서로 가장 관련 있는 두 개를 고른다면 당신은 무엇을 고르겠는가? 이 책은 동양과 서양의 생각 차이가 어떻게, 왜 다른지를 기술하고 있다. 동양과 서양의 교육, 사회, 경제, 생활, 의학, 언어습관 등을 해부하는 비교문화 연구서로 두 문화권에서 발생한 철학의 내용이 어떻게 세계를 다르게 인식하게 했는가를 탐구한다. 그 탐구 과정에서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 차이를 다양한 실험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증명 과정에서 보여 주는 것은 인간 사고는 사회화 방식에 의해 영향받는다는 것이다. 위의 두 질문은 그 실험 중 하나다. 첫 번째 질문은 동양인과 서양인의 자기개념에 대한 것이다. 또 다른 키워드는 동양의 사회와 서양의 개인이다. 이 실험 결과 많은 동양인은 가족관계나 사회적 맥락 속의 자신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나는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한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한다, 가족이 어떻다’ 등으로 자신을 소개한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서양인은 주로 ‘나는 친절하다, 근면하다, 캠핑을 자주 한다’ 등 자신과 관련된 속성과 행동을 서술했다. 이 밖의 다른 여러 실험들도 동양에서는 사회와 관계를 중요시하는 반면 서양에서는 개인과 자기 자신을 중요시한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두 번째 질문은 관계와 범주 중에 더 중시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알아보는 실험이다. 이 질문에 많은 동양인은 ‘소와 풀’을 하나로 묶었다. 그 이유는 ‘소가 풀을 먹기 때문’이라는 관계에 주목한 것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많은 동양인들은 전체와 그 안의 사물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개체 간의 유사성에 더 집중한다. 반면에 서양인은 ‘닭과 소’를 하나로 묶었는데 그 이유는 닭과 소가 ‘동물’이라는 같은 범주에 더 주목했기 때문이다. 범주화에 민감한 서양인들은 어떤 사물을 구조로 나누어서 질서 있게 정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따라서 일련의 규칙이 있는 시스템에서 서양인들은 동양인들보다 더 적응을 잘하며 범주를 이용한 귀납적 추리를 잘 수행한다.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의 생각이 다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리처드 니스벳은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차이 나는 것은 생물학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라 문화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고대 중국과 고대 그리스의 서로 다른 생태 환경이 경제적인 차이를 가져왔고, 경제적인 차이는 사회 구조와 규범, 육아방식을 결정했다. 서로 다른 관심의 방식은 우주의 본질에 대한 다른 이해와 사고과정의 차이를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 중국에서는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중시해 행복이란 화목한 인간관계를 맺고 평범하게 사는 것으로 여겼다. 반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해 행복이란 자신의 자질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것으로 보았다. 자연을 이해하는 방법 또한 고대 중국의 관점은 사물의 관계를 중시해 인간과 자연의 융합(도교), 인간들 사이의 화목(유교), 불교 철학의 융합으로 조화를 강조했다. 우주 또한 개별적인 사물들의 조합이 아니라 서로 연결돼 있는 하나의 거대한 물질로 보았다. 그에 비해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물의 본질을 중시했고 인간보다는 자연계에 더 큰 관심을 가져 사물의 속성을 분석, 범주화하고 규칙에 근거해 사물의 특징과 행위의 원인을 설명하려고 했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 고정된 것으로 보는 직선적 사고와 이분법적 사고를 지닌 것이다. 과학과 수학 분야에서도 고대 중국에서 자연계와 인간계를 구분하는 개념을 갖지 못하고 우주나 사물을 전체 맥락에서 파악하려고 한 반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자연계와 인간계를 구분해 개체를 범주화하고 공통의 규칙을 부여하는 사고가 발달했다. 그러한 점은 과학발달과 논리학의 발달로 이어졌다. 동양인들은 형식과 내용을 따로 떼어 놓지 않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인들이 형식논리에 얽매여 범하는 실수를 좀처럼 하지 않는다. 또한 서양인들이 어떤 결과에 대해 한 가지 원인만 생각하는 경향에 비해 동양인들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요소를 종합해 판단하는 능력도 동양인이 서양인보다 앞선다. 서양인들이 유리한 점은 형식논리에 익숙해 모순을 더 잘 찾아내고 개인주의적이고 자기표현이 강해 논쟁과 수사학에서 뛰어나다는 것이다. 너무 복잡하고 거시적으로 생각하는 동양인들과 달리 서양인들은 단순하게 생각하고 한 가지 요인만을 주시하는 편이다. 그러한 점은 어떤 분야에서 새로운 발견이나 혁신을 일으키기 쉽게 한다. 이러한 점은 현대에 오면서 동양은 종합적 사고가 발달하고 서양은 분석적 사고가 발달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의술만 보더라도 19세기 전까지 동양에서 해부라는 개념은 생소했다. 건강은 몸 안 기들의 균형으로 유지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수술 개입은 최소화했다. 서양에서 해부학이 발달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신체부위를 찾아내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과는 다르다. 종교에서도 동양은 함께, 모두를 지향하고 타 종교에 대해 관대하고 서로의 교리를 흡수하는 특징이 있다. 반면 서양은 옳고 그름의 구조를 지니며 유일신 사상이다. 이 책에서 기술된 동양과 서양의 사유방식 차이는 상호 배타적이고 이분법적으로 나누려는 것은 아니며, 어느 쪽이 더 우세한 생각을 한다고 주장하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문화적 차이나 다른 사고방식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동양인들이 앞선 부분도 있고 서양인들이 앞선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 모두는 어떤 경우에는 동양인처럼 행동하고 어떤 경우에는 서양인처럼 행동한다. 마치 요리의 재료들이 각각의 속성은 그대로 지니면서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요리를 만들어 내듯이 두 문화는 섞여 있다. 외부 환경의 영향은 생물학적 기질 차이에 따라 달리 수용될 수도 있다. 더구나 현대처럼 타 문화와 소통이 활발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는 동서양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은 모호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생각의 기원이 다름은 우리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쳐 왔고, 그 영향 아래 우리 삶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내재해 있는 사고방식과 심리구조를 이해하는 과정은 나와 다른 사고를 이해하는 데 나침판이 될 수 있다. 더불어 더욱 온전해지는 사회를 만드는 데 단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과 함께 EBS 다큐프라임 ‘동과 서’를 시청하는 것도 생각의 기원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좀 더 인간 사고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다면 스티븐 핑거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추천한다. 동서양의 구분이 아니라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진화의 부산물이자 인간 사회의 필수 요소인 마음의 구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풀어내고 있다. 뇌의 활동을 중심으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이 책과는 다른 관점에서 내 생각의 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신운선 한우리독서토론논술 책임연구원 ●‘읽어라 청춘’은 격주로 게재됩니다.
  • 종교와 국가가 틀어막아도 술~술~ 잘 넘어가네요

    종교와 국가가 틀어막아도 술~술~ 잘 넘어가네요

    알코올의 역사/로드 필립스 지음/윤철희 옮김/연암서가/568쪽/2만 3000원 적당히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약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마시면 독이 되는 게 술이다. 지구의 어느 곳에서는 물보다 안전하고 건강에 좋은 음료로 자리를 잡은 적도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사회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물질로 정부 당국과 종교계로부터 어떤 품목보다 심한 규제를 받아왔다. 뉴질랜드 출신의 역사학자 로드 필립스(캐나다 칼턴대 역사학 교수)는 ‘알코올의 역사’에서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알코올에 깃든 변화무쌍한 문화적 의미들을 좇는다. 책은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문화권에서 술을 취급한 방법부터 술이 권력구조, 인종, 민족, 종교, 성별, 계급, 세대 등의 이슈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영향을 미치며 갈등해 왔는지를 짚어간다. 초창기 술의 역사는 약 9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고학자와 인류학자들은 가장 오래된 알코올성 음료에 대한 증거를 중국 북부 허난성 지아후에서 발견된 도자기들에서 찾아냈다. 쌀과 꿀, 과일 등을 조합한 원료로 만든 와인이었다. 가장 이른 와인 양조시설은 아르메니아 남부 리틀코카서스 산맥의 아레니마을에 있는 것(기원전 4000년경)이라는 주장이 있다. 기원전 3000~2500년 이집트에서 와인을 생산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그림들이 남아 있다. 와인의 희소성과 빚는 데 들어가는 높은 비용은 와인에 문화적 가치를 부여했다. 고대문화권과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신들은 다양한 알코올성 음료와 결부됐다. 바커스와 디오니소스는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신들이다. 와인과 비어는 종교와 지속적으로 관련지어졌다. 기독교는 와인을 상징과 의례에서 중심적인 자리로 격상시킨다. 서기 첫 세기에 성체성사에서 빵과 와인의 실체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고 주장한다. 반면 기독교와 같은 시기 출현한 이슬람은 술을 철저히 거부하고 추종자들에게 알코올성 음료를 마시는 걸 금지했다. 최대 규모의 양조활동은 8세기부터 수도원에서 행해졌다. 중세 유럽에서 소비된 알코올성 음료는 와인과 비어처럼 발효에서 생겨난 것들이었다. 증류에 의해 생산된 스피릿은 16세기에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브랜디, 럼, 위스키, 진, 보드카 등 알코올 함량이 높은 술의 등장은 음주 소비와 규제의 패턴에 변화를 가져왔다. 18세기에 스피릿을 중심으로 술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이뤄졌다. 서구의 주요 도시에 안전한 식수가 공급되기 시작한 19세기 초 물을 안전한 선택으로 묘사하고, 술을 해로운 것으로 비난할 수 있게 된다. 종교단체와 제휴한 절주운동과 금주운동이 미국과 캐나다, 영국, 스칸디나비아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술이 절주와 금주운동 옹호자들의 공격을 받는 동안에도 유럽인들은 그들의 알코올성 음료와 술 문화를 더 넓은 세계로 확장시켰다. 술은 대륙 곳곳에서 중요한 교환 수단으로 제국주의 확산과 식민지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탈식민지화 과정에서는 유럽인과 다른 지역 사람들이 접촉하고 협력하고 갈등하는 영역 중 하나가 됐다. 제1차 세계대전은 술의 역사에서도 분수령이었다. 많은 정부가 전시 비상조치로 유례 없는 규제들을 도입했고 양차 대전 사이에 절주와 금주정책이 서구세계 곳곳으로 확장됐다. 미국은 1920년 전국적인 금주령을 내렸다. 1933년까지 지속된 미국의 금주령은 이슬람이 무슬림의 술 생산과 음주를 금지시킨 이후 전국적인 기반에서 포괄적으로 제정된 정책 중에서 가장 엄중했지만 결과적으로 밀주와 밀수를 양산했다. 미국이 상대적으로 자유방임적인 술 정책을 채택하면서 전국적 금주령에서 벗어날 무렵 다른 국가들은 술 소비를 직접 통제하는 방식으로 규제적인 정책을 채택했다. 1960년대 이후 술 소비를 향한 공식적인 입장은 더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이동했지만 그런 흐름에 역행하는 음주운전과 폭음 같은 특유한 이슈들에 대해서는 더 엄격한 통제로 대응하고 있다. 저자는 “오늘날 세계의 중요한 일부 지역들에서 술 소비량이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가 ‘포스트 알코올’ 시대에 진입했다”며 “글로벌한 관점에서 보면 술이 절멸하기 직전은 아니지만 사회적 이슈로 갖는 술의 중요성은 상당히 줄어들 것 같다”고 결론 지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M16·콜트...200년 역사 ‘총기 명가’의 몰락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M16·콜트...200년 역사 ‘총기 명가’의 몰락

    -관급·내수 독점이 '독'으로...파산보호신청 어릴 적 일명 ‘BB탄 총’ 꽤나 가지고 놀았다는 사람들이라면 일명 ‘에무십육(M-16)'이나 ‘콜트 45’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미국의 콜트(Colt)라는 회사가 내놓은 소총과 45구경(11.43mm) 권총을 뜻하는 이들 이름은 총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몇 번쯤은 들어보았을 만큼 유명한 총이다. 이 같은 걸작들을 만들어내며 세계 총기 역사에 한 획을 그었으며, 약 200여 년간 미국 총기의 상징처럼 군림해 왔던 총기 명가(名家)인 콜트(Colt)가 과도한 채무와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지난 14일(현지시간) 파산 보호 신청을 냈다. 전 세계적으로 1,000만 정 이상이 생산된 M-16과 추정 불가능한 수량이 생산된 콜트45라는 히트작을 내놓았으며, 총기 소유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가장 미국스러운 총’의 상징처럼 사랑 받았던 이 회사는 갑자기 왜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일까? -서부를 제패한 권총 '전설의 시작' 1836년 사무엘 콜트(Samuel Colt)가 설립한 콜트는 설립 초기부터 리볼버(Revolver) 권총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업체였다. 서부영화를 보면 보안관이나 카우보이들이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바로 리볼버 권총은 19세기 후반 금속 탄피의 등장과 함께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콜트 역시 초창기에는 리볼버 권총 시장 확대에 따라 시장에 뛰어든 수많은 총기 회사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시기에 콜트가 내놓은 콜트 SAA(Single Action Army) 권총은 우수한 성능을 인정받아 미 육군에 제식 채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안관과 카우보이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앞 다퉈 구매하면서 ‘서부를 제패한 권총’이라는 별칭까지 얻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SAA는 높은 신뢰성과 명중률을 가진 우수한 권총이었지만, 19세기 후반은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총기와 탄약이 개발될 정도로 빠른 기술 변혁기였기 때문에 새로운 권총 개발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에 콜트는 총기 설계에 있어 천재로 불리던 존 브라우닝(John M. Browning)을 영입해 새로운 총기 개발에 나서는데, 이때 존 브라우닝은 “총알이 발사될 때 생기는 반동과 가스를 이용해서 다음 탄이 자동으로 장전되는 총을 만들 수 없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됐고, 결국 그러한 총기를 설계해 냈다. 1896년 미국 특허청에 등록된 특허번호 580924가 바로 브라우닝이 만들어낸 최초의 자동권총이었다. 콜트에서 브라우닝 주도로 자동권총 개발이 한창 진행되던 1899년, 미국은 필리핀을 침공해 각지에서 필리핀 원주민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미국은 이 전투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권총의 위력이 너무 약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대상으로는 효과적이었던 기존의 리볼버식 권총이 필리핀 원주민들에게는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미군은 모로족(Moros)이라는 부족에게 경악했다. 한 전투에서 미군 장교가 돌진해오는 모로족 전사의 가슴에 6발의 권총탄을 명중시켰는데, 그 전사가 그대로 달려들어 자신을 쏜 미군 장교를 칼로 난자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미군은 ‘최후 방어 무기’인 권총의 위력 강화를 요구했고, 여러 메이커가 차세대 권총 사업에 참가했는데, 여기서 승리한 것이 콜트의 M1911 모델이었다. 이 권총은 자동으로 재장전되는 자동권총이었으며, 대단히 강력한 45ACP 권총탄을 사용해 이전에 사용하던 리볼버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력을 자랑했다. 이 권총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또 한 번 대박을 쳤고, 콜트를 굴지의 거대 총기회사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이 권총은 개량을 거쳐 M1911A1이라는 명칭으로 우리 군도 사용 중에 있는데, 한때 9mm 권총탄을 사용하는 베레타 M92 시리즈 등에 밀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미군 장병들이 앞 다퉈 구매하고 있을 정도로 우수한 성능과 신뢰성을 가진 ‘명품 중의 명품’으로 대접받고 있다. -위기 후에 찾아온 꿈같던 시절 콜트의 전성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마지막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더 이상 대규모 군대를 유지할 여력이 없었고, 많은 부대를 해체하면서 이들이 쓰던 총기들을 우방국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기 시작했다. 남는 총기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민간 시장에서의 총기 가격도 폭락했고, 구태여 비싼 신품 총기를 구입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러던 시기에 콜트는 과감한 투자를 했다. 아말라이트(Armalite)라는 업체가 시험적으로 개발했던 AR-10/15 계열의 판권을 사들였다. 목재로 된 총몸을 사용했던 기존의 소총들과 달리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총열덮개와 손잡이, 개머리판은 당시 병사들에게 적지 않은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었다. 콜트는 5.56mm 소총이었던 AR-15에 약간의 개량을 거쳐 XM16E1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판매를 시작했는데, 미 공군이 기지 방어용으로 소량을 구매했고, 이 가운데 일부 물량이 월남전 초기에 베트남군에 지급되어 실전에 데뷔했다. 우려와 달리 생각보다 준수한 성능을 발휘한 덕에 육군은 “이것이 우리가 찾던 미래형 소총”이라며 제식 채용을 결정했고, M16이라는 이름으로 미 육군 전투부대에 실전 배치되기 시작했다. 제식 채용에 들뜬 콜트는 홍보용 팸플릿에 ‘휴대성과 신뢰성, 명중률이 우수한 미래형 소총‘이라며 과대 광고를 시작했고, 이 광고를 본 병사들은 “신형 소총은 청소할 필요가 없다”면서 총기 관리를 게을리 했다. 그 결과 작동 불량이 속출했고, 당시 납품되었던 불량 탄약 문제까지 겹치면서 어느 한 전투에서는 총기 고장으로 인해 부대원의 60%가 죽거나 다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미군은 즉각 M16 성능 개량과 탄약 개선 작업에 착수했고, 1967년부터 M16A1을 실전에 배치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우리 파월 국군이 사용했던 주력 소총이자, 우리나라도 면허생산해서 대량으로 보유했던 바로 그 소총이다. M16A1 소총은 1980년대에는 M16A2 소총을 거쳐 2000년대에는 M16A4 등 다양한 개량형과 파생형을 선보이며 끊임없이 진화했고, 1,000만 정 이상 생산되며 콜트 최대의 효자 상품으로 자리 잡았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그 단축형인 M4 시리즈가 히트를 치며 콜트로 하여금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으나, 이러한 꿈같던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끝없는 내리막길 콜트의 위기는 최대의 호황을 누리던 1986년에 처음으로 찾아왔다. 당시 콜트는 M16A1에 이어 M16A2를 미 육군에 납품하기 시작하면서 매출이 급성장하기 시작했지만, 회사의 이익률 증가에 비해 급여 인상이 충분치 않다는 노조가 무려 4년간 대규모 파업을 하면서 위기가 시작됐다. 강경 노조의 파업에 사측은 긴급히 모집한 대체 인력을 투입해 생산 라인을 돌렸지만, 미숙한 대체 인력들의 숙련도는 크게 떨어졌고, 납기일을 맞추지 못한 것은 물론 납품한 소총의 품질이 형편없어 미 육군으로부터 잦은 컴플레인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미 육군은 콜트를 버리고 벨기에 총기회사 FN의 미국 현지법인에 M16A2 생산을 주문했다. 파업으로 가장 큰 고객을 빼앗기고 매출에 치명타를 입은 콜트는 결국 1992년 파산 신청을 하고 법정 관리에 들어갔다. 이후 새로운 경영진이 긴급 자금 수혈과 대규모 구조 조정을 통해 1994년부터 다시 영업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콜트가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에는 시장 상황이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콜트는 M16의 단축형인 M4 카빈을 내놓아 좋은 평가를 얻었지만, 이것이 콜트를 살릴 수는 없었다. M16 계열의 특허 독점기간이 끝나 이제는 그 어떤 총기회사도 마음만 먹으면 M16이나 M4의 ‘짝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이었고, 세계 유수의 총기 메이커들이 너나 할 것 없이 M4를 만들어내면서 콜트는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명품 총기 메이커 시그 사우어(SIG-SAUER)가 신뢰성과 명중률을 획기적으로 높인 SIG516을, 독일의 총기명가 H&K가 우수한 신뢰성과 확장성을 가진 HK-416을 시장에 내놓아 고급형 M4 시장을 장악했고, 미국 내에서는 LWRC에서 M6를 내놓는가 하면, 심지어 중국의 NORINCO(北方工业)에서 CQ-A 소총을, AK소총으로 유명한 러시아 칼라시니코프(Kalashinikov)에서 VEPR-15를 발매하면서 저가형 M4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은 세계적인 총기 메이커들이 미국 시장에 현지 법인을 내고 몰려드는 춘추전국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콜트는 신형 총기 개발을 게을리 했고, 20여 년 전의 교훈을 잊은 노조는 다시금 투쟁과 태업을 일삼았다. 결국 미 육군은 지난 2013년 2월, 12만 정 규모의 M4 소총 신규생산 납품 계약 공개 입찰에서 콜트를 탈락시키고 또 다시 FN의 손을 들어주었다. 미군이 사용하는 모든 총기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미국 내에서 생산된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에 의존해 내수 군납 시장만 바라보고 살던 콜트는 기술 개발을 등한시하고 해외 시장 개척에 소극적이었으며, 내부적으로는 노조 활동 확대에 따른 생산성 악화라는 악재까지 겹치면서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결국 콜트는 지난 14일(현지시간) 델라웨어주 윌밍턴 법원에 파산보호신청(Chapter 11)을 제출했다. 법원이 이를 수용하면 콜트는 법정관리에 들어가며, 현재 쌓여 있는 부채 상환 시기 연장 등의 조치를 받은 뒤 새로운 경영진을 찾게 될 것이다. 현재 콜트가 가진 채무는 3억 5,500만 달러(약 3,900억 원). 콜트는 일부 사업 부문을 매각하고 대규모 구조 조정을 통해 사업 지속을 위한 자금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으나, 콜트의 앞날은 불투명하다. 시장에 경쟁자는 너무도 많고, 콜트는 기술이나 생산성 등 모든 면에서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콜트 몰락의 사례는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수 시장 독점과 그로 인한 호황에 도취해 새로운 기술 개발을 소홀히 하고, 노사분규만 일삼는 기업은 제아무리 초일류 제품을 개발했던 경험이 있더라도 시장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교훈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콜트 몰락 사례는 관급과 내수시장 독점으로 먹고사는 국내 일부 기업들도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야하지 않을까? 이일우 군사통신원(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그 유명한 M16의 美 ‘총기 명가’는 왜 몰락했나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그 유명한 M16의 美 ‘총기 명가’는 왜 몰락했나

    - 관급과 내수 독점이 '독'으로 어릴 적 일명 ‘BB탄 총’ 꽤나 가지고 놀았다는 사람들이라면 일명 ‘에무십육(M-16)'이나 ‘콜트 45’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미국의 콜트(Colt)라는 회사가 내놓은 소총과 45구경(11.43mm) 권총을 뜻하는 이들 이름은 총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몇 번쯤은 들어보았을 만큼 유명한 총이다. 이 같은 걸작들을 만들어내며 세계 총기 역사에 한 획을 그었으며, 약 200여 년간 미국 총기의 상징처럼 군림해 왔던 총기 명가(名家)인 콜트(Colt)가 과도한 채무와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지난 14일(현지시간) 파산 보호 신청을 냈다. 전 세계적으로 1,000만 정 이상이 생산된 M-16과 추정 불가능한 수량이 생산된 콜트45라는 히트작을 내놓았으며, 총기 소유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가장 미국스러운 총’의 상징처럼 사랑 받았던 이 회사는 갑자기 왜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일까? -서부를 제패한 권총 '전설의 시작' 1836년 사무엘 콜트(Samuel Colt)가 설립한 콜트는 설립 초기부터 리볼버(Revolver) 권총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업체였다. 서부영화를 보면 보안관이나 카우보이들이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바로 리볼버 권총은 19세기 후반 금속 탄피의 등장과 함께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콜트 역시 초창기에는 리볼버 권총 시장 확대에 따라 시장에 뛰어든 수많은 총기 회사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시기에 콜트가 내놓은 콜트 SAA(Single Action Army) 권총은 우수한 성능을 인정받아 미 육군에 제식 채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안관과 카우보이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앞 다퉈 구매하면서 ‘서부를 제패한 권총’이라는 별칭까지 얻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SAA는 높은 신뢰성과 명중률을 가진 우수한 권총이었지만, 19세기 후반은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총기와 탄약이 개발될 정도로 빠른 기술 변혁기였기 때문에 새로운 권총 개발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에 콜트는 총기 설계에 있어 천재로 불리던 존 브라우닝(John M. Browning)을 영입해 새로운 총기 개발에 나서는데, 이때 존 브라우닝은 “총알이 발사될 때 생기는 반동과 가스를 이용해서 다음 탄이 자동으로 장전되는 총을 만들 수 없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됐고, 결국 그러한 총기를 설계해 냈다. 1896년 미국 특허청에 등록된 특허번호 580924가 바로 브라우닝이 만들어낸 최초의 자동권총이었다. 콜트에서 브라우닝 주도로 자동권총 개발이 한창 진행되던 1899년, 미국은 필리핀을 침공해 각지에서 필리핀 원주민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미국은 이 전투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권총의 위력이 너무 약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대상으로는 효과적이었던 기존의 리볼버식 권총이 필리핀 원주민들에게는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미군은 모로족(Moros)이라는 부족에게 경악했다. 한 전투에서 미군 장교가 돌진해오는 모로족 전사의 가슴에 6발의 권총탄을 명중시켰는데, 그 전사가 그대로 달려들어 자신을 쏜 미군 장교를 칼로 난자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미군은 ‘최후 방어 무기’인 권총의 위력 강화를 요구했고, 여러 메이커가 차세대 권총 사업에 참가했는데, 여기서 승리한 것이 콜트의 M1911 모델이었다. 이 권총은 자동으로 재장전되는 자동권총이었으며, 대단히 강력한 45ACP 권총탄을 사용해 이전에 사용하던 리볼버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력을 자랑했다. 이 권총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또 한 번 대박을 쳤고, 콜트를 굴지의 거대 총기회사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이 권총은 개량을 거쳐 M1911A1이라는 명칭으로 우리 군도 사용 중에 있는데, 한때 9mm 권총탄을 사용하는 베레타 M92 시리즈 등에 밀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미군 장병들이 앞 다퉈 구매하고 있을 정도로 우수한 성능과 신뢰성을 가진 ‘명품 중의 명품’으로 대접받고 있다. -위기 후에 찾아온 꿈같던 시절 콜트의 전성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마지막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더 이상 대규모 군대를 유지할 여력이 없었고, 많은 부대를 해체하면서 이들이 쓰던 총기들을 우방국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기 시작했다. 남는 총기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민간 시장에서의 총기 가격도 폭락했고, 구태여 비싼 신품 총기를 구입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러던 시기에 콜트는 과감한 투자를 했다. 아말라이트(Armalite)라는 업체가 시험적으로 개발했던 AR-10/15 계열의 판권을 사들였다. 목재로 된 총몸을 사용했던 기존의 소총들과 달리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총열덮개와 손잡이, 개머리판은 당시 병사들에게 적지 않은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었다. 콜트는 5.56mm 소총이었던 AR-15에 약간의 개량을 거쳐 XM16E1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판매를 시작했는데, 미 공군이 기지 방어용으로 소량을 구매했고, 이 가운데 일부 물량이 월남전 초기에 베트남군에 지급되어 실전에 데뷔했다. 우려와 달리 생각보다 준수한 성능을 발휘한 덕에 육군은 “이것이 우리가 찾던 미래형 소총”이라며 제식 채용을 결정했고, M16이라는 이름으로 미 육군 전투부대에 실전 배치되기 시작했다. 제식 채용에 들뜬 콜트는 홍보용 팸플릿에 ‘휴대성과 신뢰성, 명중률이 우수한 미래형 소총‘이라며 과대 광고를 시작했고, 이 광고를 본 병사들은 “신형 소총은 청소할 필요가 없다”면서 총기 관리를 게을리 했다. 그 결과 작동 불량이 속출했고, 당시 납품되었던 불량 탄약 문제까지 겹치면서 어느 한 전투에서는 총기 고장으로 인해 부대원의 60%가 죽거나 다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미군은 즉각 M16 성능 개량과 탄약 개선 작업에 착수했고, 1967년부터 M16A1을 실전에 배치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우리 파월 국군이 사용했던 주력 소총이자, 우리나라도 면허생산해서 대량으로 보유했던 바로 그 소총이다. M16A1 소총은 1980년대에는 M16A2 소총을 거쳐 2000년대에는 M16A4 등 다양한 개량형과 파생형을 선보이며 끊임없이 진화했고, 1,000만 정 이상 생산되며 콜트 최대의 효자 상품으로 자리 잡았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그 단축형인 M4 시리즈가 히트를 치며 콜트로 하여금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으나, 이러한 꿈같던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끝없는 내리막길 콜트의 위기는 최대의 호황을 누리던 1986년에 처음으로 찾아왔다. 당시 콜트는 M16A1에 이어 M16A2를 미 육군에 납품하기 시작하면서 매출이 급성장하기 시작했지만, 회사의 이익률 증가에 비해 급여 인상이 충분치 않다는 노조가 무려 4년간 대규모 파업을 하면서 위기가 시작됐다. 강경 노조의 파업에 사측은 긴급히 모집한 대체 인력을 투입해 생산 라인을 돌렸지만, 미숙한 대체 인력들의 숙련도는 크게 떨어졌고, 납기일을 맞추지 못한 것은 물론 납품한 소총의 품질이 형편없어 미 육군으로부터 잦은 컴플레인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미 육군은 콜트를 버리고 벨기에 총기회사 FN의 미국 현지법인에 M16A2 생산을 주문했다. 파업으로 가장 큰 고객을 빼앗기고 매출에 치명타를 입은 콜트는 결국 1992년 파산 신청을 하고 법정 관리에 들어갔다. 이후 새로운 경영진이 긴급 자금 수혈과 대규모 구조 조정을 통해 1994년부터 다시 영업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콜트가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에는 시장 상황이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콜트는 M16의 단축형인 M4 카빈을 내놓아 좋은 평가를 얻었지만, 이것이 콜트를 살릴 수는 없었다. M16 계열의 특허 독점기간이 끝나 이제는 그 어떤 총기회사도 마음만 먹으면 M16이나 M4의 ‘짝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이었고, 세계 유수의 총기 메이커들이 너나 할 것 없이 M4를 만들어내면서 콜트는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명품 총기 메이커 시그 사우어(SIG-SAUER)가 신뢰성과 명중률을 획기적으로 높인 SIG516을, 독일의 총기명가 H&K가 우수한 신뢰성과 확장성을 가진 HK-416을 시장에 내놓아 고급형 M4 시장을 장악했고, 미국 내에서는 LWRC에서 M6를 내놓는가 하면, 심지어 중국의 NORINCO(北方工业)에서 CQ-A 소총을, AK소총으로 유명한 러시아 칼라시니코프(Kalashinikov)에서 VEPR-15를 발매하면서 저가형 M4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은 세계적인 총기 메이커들이 미국 시장에 현지 법인을 내고 몰려드는 춘추전국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콜트는 신형 총기 개발을 게을리 했고, 20여 년 전의 교훈을 잊은 노조는 다시금 투쟁과 태업을 일삼았다. 결국 미 육군은 지난 2013년 2월, 12만 정 규모의 M4 소총 신규생산 납품 계약 공개 입찰에서 콜트를 탈락시키고 또 다시 FN의 손을 들어주었다. 미군이 사용하는 모든 총기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미국 내에서 생산된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에 의존해 내수 군납 시장만 바라보고 살던 콜트는 기술 개발을 등한시하고 해외 시장 개척에 소극적이었으며, 내부적으로는 노조 활동 확대에 따른 생산성 악화라는 악재까지 겹치면서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결국 콜트는 지난 14일(현지시간) 델라웨어주 윌밍턴 법원에 파산보호신청(Chapter 11)을 제출했다. 법원이 이를 수용하면 콜트는 법정관리에 들어가며, 현재 쌓여 있는 부채 상환 시기 연장 등의 조치를 받은 뒤 새로운 경영진을 찾게 될 것이다. 현재 콜트가 가진 채무는 3억 5,500만 달러(약 3,900억 원). 콜트는 일부 사업 부문을 매각하고 대규모 구조 조정을 통해 사업 지속을 위한 자금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으나, 콜트의 앞날은 불투명하다. 시장에 경쟁자는 너무도 많고, 콜트는 기술이나 생산성 등 모든 면에서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콜트 몰락의 사례는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수 시장 독점과 그로 인한 호황에 도취해 새로운 기술 개발을 소홀히 하고, 노사분규만 일삼는 기업은 제아무리 초일류 제품을 개발했던 경험이 있더라도 시장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교훈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콜트 몰락 사례는 관급과 내수시장 독점으로 먹고사는 국내 일부 기업들도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야하지 않을까? 이일우 군사통신원(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 [사이언스 톡톡] 바이러스는 생존 위해 진화… 사람도 유전적 다양성 지녀

    저는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해안도시 오랑에 사는 베르나르 리외라고 합니다. 제 이름이 익숙하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알베르 카뮈 선생께서 잘 써 주신 덕분이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그의 소설 ‘페스트’에서 주인공으로 나온 의사입니다. 여기서 비행기로 열서너 시간 걸리는 한국이 메르스 때문에 어수선하다고 들었습니다. 중동이나 북아프리카처럼 낙타와 가깝게 지내는 나라도 아닌 곳에서 메르스가 발생해 빠르게 전염되고 있다는 소식에 좀 놀랐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인류에게는 큰 전염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969년 미국 공중위생국장 윌리엄 스튜어트가 “전염병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다”는 선언까지 했던 것이죠. 그런데 20세기 말부터 신종플루, 조류독감,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에볼라 등 새로운 전염병이 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인구 및 생태계의 급속한 변화 ▲병원체 전파를 가속화하는 국가 간 여행 및 교역의 증가 ▲기존 전염병 감소에 따른 공중보건 체계의 기능 상실 ▲항생제 남용 등을 신종 전염병이 증가한 원인으로 보더군요. 이 이야기를 들은 신문기자 랑베르는 “과학이 발달하면 바이러스 따위는 다 없애 버릴 수 있지 않느냐”고 하더군요. 하지만 바이러스도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진화(돌연변이)하기 때문에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그건 어려울 겁니다. 또 우리가 모르는 바이러스들이 아직 수도 없이 많기 때문에 기존에 알려진 바이러스를 다 죽인다고 해도 다른 바이러스가 빈 공간을 채우고 들어올 겁니다. 그러면 더 심각한 전염병이 발생하는 거죠. 인류와 전염병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와 비슷합니다. 새로운 바이러스가 날카로운 창을 갖고 나타나면 인류는 무적 방패를 찾아내거나 만들어 냅니다. 광우병이 대표적입니다. 바이러스가 아닌 변형 단백질로 인한 전염성 질환이기 때문에 치료나 예방법이 없다고 알려져 왔습니다. 그런데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 존 콜린지 박사가 지난 10일 ‘네이처’에 광우병을 예방하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발견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더군요. 광우병은 프라이온 단백질 때문에 생깁니다. 콜린지 박사는 프라이온 단백질의 코돈129와 코돈127이라는 부분의 염기서열이 바뀌면 광우병에 대한 저항성이 강해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연구가 좀 더 진행되면 광우병도 정복할 수 있을 겁니다. 새로운 전염병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겁을 먹습니다. 오랑 주민들도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바이러스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유전적 다양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질병이 나타났다고 해서 마냥 공포에 빠져 있을 필요는 없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군요.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서울대 지망생의 책장-읽어라, 청춘] 장하석 ‘과학, 철학을 만나다’

    [서울대 지망생의 책장-읽어라, 청춘] 장하석 ‘과학, 철학을 만나다’

    극심한 취업난과 기업의 이공계 선호로 문과보다 이과를 선택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수학이나 과학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학생들조차 취업이 더 잘된다는 이유만으로 이과를 선호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대기업들이 신입 사원을 뽑을 때 전형적인 스펙보다는 인문학적인 소양을 더 중시한다니 사회 전체가 인문학 인재 열풍에 들썩이고 있다. 기업이 선호하는 인재상은 인문학도와 공학도를 융합한 것이다. 학생들은 이제 국문과에 지원하려 해도 수학과 과학을 잘해야 하고 컴퓨터학과에 가서도 인문 고전을 읽어야 한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인문학 관련 책과 강의가 인기를 끌고 있다. 대부분 고전을 요약, 발췌했거나 인문학이 왜 중요한지 원론적 이야기를 하는 것들이다. 조금이라도 지적으로 보이고 싶으면 이런 책이라도 읽어 무식함을 티 내지 않아야 한다. 기업 대표들조차 인문학 강좌 프로그램을 이수했음을 자랑으로 여긴다. 정부에서도 인문학을 살리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부을 계획이라고 한다. 얼핏 보면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반겨야 할 것 같지만 사실은 성급한 성과주의의 연장에서 멀리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회 흐름이 대세인 가운데 경제적 가치에 기반을 둔 기술적 응용만 생각하면 순수과학이 지니는 문화적 가치를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과학철학자 장하석의 주장은 시사하는 바가 커 보인다.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칼텍)에서 물리학과 철학 공부, 스탠퍼드에서 철학 박사 학위 취득, 28세의 나이로 영국 런던대 교수 임용, 케임브리지 과학철학부 석좌교수 등의 화려한 이력이 주는 후광 효과만으로도 그의 말은 다 설득적일 텐데 과학을 인간적이라 말하며 어려운 과학 공부는 가라고 하니 들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의 시작은 교육방송(EBS)의 특별기획 프로그램에서부터였다. 방송을 보며 고교 시절이 떠올랐다. 화학 시험을 볼 때 주기율표를 외워 시험지를 받자마자 시험지 여백에 그려 놓고 문제를 풀었다. 그것만 외우고 있으면 많은 문제를 풀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학에 관한 탐구는 전혀 없는 암기력 테스트였다는 생각이 든다. 방영된 12강 모두가 책으로 출판됐다. 다시보기로 강의를 보며 책을 읽었다. 책의 내용이 훨씬 충실하지만 실험 부분은 방송을 직접 보는 것이 이해가 더 잘 됐다. 이 책은 과학 지식과 과학 탐구가 갖는 문화적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으로 서문과 3부로 구성돼 있다. 1부(1~6장)에서는 철학의 인식론적 관점에서 과학이 어떻게 지식을 얻어 내는가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일반적으로 과학 지식이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과학철학계의 거장들이 주장했던 여러 아이디어를 소개한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 지식의 기반이 되는 관측을 믿을 수 있는가, 이 관측을 가지고 이론을 증명할 수 있는가, 과학 지식은 축적되는가, 혁명적으로 개편되는가, 과학적 진리란 무엇이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인가, 과학은 어떤 의미에서 진보하는 것인가 등을 다룬다. 현대 과학은 개념의 수량화에 의존하므로 측정이 중요하다. 측정을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한데 최초의 기준을 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온도, 길이, 질량, 시간 등 기본 물리량 외에도 측정의 기준을 잡는 일은 난해한 작업이다. 그래도 측정 기준은 필요하므로 단순하고 간편한 체계를 기반으로 탐구를 시작하고 탐구 결과를 기반으로 다시 기준 자체를 수정하고 개선해 나간다. 장하석은 처음에 믿고 시작한 전제들을 유지·반복하지 않고 매 단계별로 재검토하고 지식을 쌓고 개선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을 ‘인식적 반복’이라 정의했다. 과학은 이런 과정을 통해 발달한다. 2부(7~10장)에서는 과학사의 일화를 자세히 소개해 과학 연구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과학 연구의 구체적 모습을 이론적·실험적·역사적·철학적 관점에서 소개함으로써 과학의 실천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도록 격려한다. 산소는 어떻게 발견했으며 왜 산소라 부르는가, 물은 늘 섭씨 100도에서 끓는가, 일상에서 많이 쓰고 있는 건전지는 어떻게 발명했으며 거기에서 전기는 어떻게 생기는가를 설명한다. 비교적 이해가 쉽고 직접 실험해 볼 수 있는 수준에서 과학사의 일화들을 고르다 보니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의 사건들로 모아졌다. 라부아지에에서 월라스턴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 과학자들의 배경은 다양했다. 귀족 출신에서 노동자의 아들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도 있었고 평생 학교 근처에도 못 간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그저 순수한 호기심으로 과학적 탐구에 몰두했다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과학 발전에 기여해서 유명해지겠다는 야심이나 돈을 많이 벌겠다는 욕망은 없이 그들이 법학자였든 사업가였든 독자적 연구에 몰두했다. 우리가 그동안 받았던 과학 교육은 ‘누가, 무엇을’에 집중됐을 뿐 ‘어떻게, 왜’는 없었다. 저자는 교과서가 가르치는 정답에만 골몰하지 말고 과학자들이 탐구했던 길을 따라가며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 나름의 생각도 커질 것을 기대한다. 이런 기대는 자신이 그러한 길을 갔던 경험을 통해 과학에서 철학적 깨달음을 얻고 실천하는 과정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충분히 느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다. 3부(11장과 12장)에서는 과학철학이 과학을 어떻게 하면 더 잘하게 하고 더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전체 강의를 종합하는 성격을 띤다. 과학 지식을 창조하는 과정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교육 이야기, 과학에서 다원주의가 필요한지, 유용한지에 대한 논의를 펼치며 자신의 철학 핵심을 설명한다. 저자는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에는 특별한 길이 없지만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는 창의성은 ‘정상 과학의 퍼즐 풀기를 열심히 하다 위기에 처하면 필요에 의해 생긴다’는 쿤의 주장을 빌려 설명한다. 우리 교육 현실에서 학생들이 자신의 문제에 직접 부딪칠 기회를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일침을 놓기도 한다. 창의력이 있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다원주의를 실행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는 과학에서의 다원주의를 과학의 한 분야에서 가능한 여러 실천 체계를 발달시키고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이라고 정의한다. 다원주의 과학의 지식 체계는 가능하면 한 분야 내에서도 여러 가지를 발달시키고 유지하는 것이 과학의 여러 목적(그 목적이 무엇이 됐든)을 달성하는 데 유리하다. 몇 가지 체계를 동시에 유지하면서 얻을 수 있는 관용과 상호작용의 이점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의 창의성을 최대로 발휘하고 자연의 가르침을 최대로 받을 수 있다. 다원주의는 과학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지 않았던 질문을 던지는 철학은 다원주의를 이루는 데 유용하다고 결론을 맺는다. 사상·문화 등을 중심으로 인간의 가치와 관련된 제반 문제를 연구 영역으로 삼는 것이 인문학이라면 첨단 과학기술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과학의 실천적 차원을 인식하고 즐기도록 하려는 시도 또한 인문학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지식과 정보를 나눌 수 있는 영역이 사물 간 통신(IoT)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이렇게 급변하는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개인과 사회를 이롭게 하는 데 과학의 탐구 정신은 쓸모가 많다. 세상살이가 문과 이과로 나누어지지 않듯 어떻게 하면 더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데 인문학과 과학의 구분은 쓸데없다. 하지만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는 오늘날 인문학의 영역 확장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는 점에서 소용이 닿는다. 최영주 한우리독서토론논술 책임연구원 ●‘읽어라 청춘’은 격주로 게재됩니다.
  • 쌍안경으로 소행성 팔라스 볼 수 있다!

    쌍안경으로 소행성 팔라스 볼 수 있다!

    이번 주 팔라스가 ‘충’에 도달 태양계에서 두 번째로 큰 소행성 팔라스(Pallas)를 이번 주에 볼 수 있다. 팔라스가 작은 쌍안경만 있으면 볼 수 있는 위치와 밝기인 태양의 정반대 쪽인 ‘충’(衝)의 자리에 왔기 때문이다. 팔라스는 ‘올베르스의 역설’로 유명한 천문학자 하인리히 올베르스가 1802년 발견한 소행성 2번이다. 지름 608㎞로 소행성 중 두 번째 크기이며, 공전주기 4.6년, 궤도의 긴 반지름 2.8AU(천문단위)이다. 이 팔라스의 발견으로 소행성이 1개가 아님을 알게 되었으며, 그 후 수천 개의 소행성이 발견되었다. 11일 팔라스가 충의 자리에 온 위치는 헤르쿨레스자리에서 네 번째로 밝은 4등성 람다 별 근처이다. 팔라스는 일주일에 1도(보름달 크기의 2배)씩 서진하고 있는데, 앞으로 3주 후면 헤르쿨레스자리의 델타 별인 3등성 사린에 근접한다. 충에 달한 이후 팔레스의 밝기는 9.4등급이다. 이때는 쌍안경으로 봐도 팔라스의 뚜렷한 자태를 감상할 수 있다. 지구로부터의 거리는 약 2.4AU, 3억 6천만km 정도 되는데, 1AU는 태양-지구 간 거리인 1.5억km이다. 소행성들이 최초로 발견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로, 1801년에서 1806년까지 6년 동안 팔라스를 포함하여 4개의 소행성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그 후 38년간 잠잠하다가 1845년에 이르자 20년간 수십 개의 소행성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나중에 사진술이 발명되자 소행성 발견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1923년에는 1000번째 소행성이 발견되었으며, 2013년 1월 30일 기준 35만 3926개의 소행성에 공식적으로 숫자가 부여되었다. 소행성 발견 초창기에 천문학자들은 소행성을 작은 행성이라고 생각했지만, 무더기로 발견되기 시작하자 이들을 위한 특별 범주를 만들어 ‘소행성’(asteroids)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말은 ‘항성과 닮은’이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소행성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화성과 목성 사이에 있는 소행성대에서 태양 궤도를 돌고 있다. 이 소행성대에 수많은 소행성이 모여 있지만, 영화나 게임 화면에서 보듯이 그렇게 복작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공간은 텅 비어 있으며, 한 소행성 위에서 가장 가까운 소행성을 보려 해도 쌍안경이 필요할 정도로 뚝 떨어져 있다. 따라서 두 소행성이 충돌할 확률은 거의 영(0)에 가깝다. 최초로 발견된 소행성 세레스는 지름 952km로 명왕성, 에리스와 함께 왜소행성으로 재분류되었다. 팔라스와 베스타는 크기가 거의 비슷해, 각각 524km, 512km이다. 지름이 10m 이하인 것은 '유성체'라고 한다. 소행성에 대한 인류의 탐사 노력도 꾸준히 계속되어, 미국의 니어 슈메이커호(號)는 253 마틸다 소행성에 접근한 데 이어, 2001년에는 433 에로스 소행성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으며, 2005년에는 일본의 하야부사 탐사선이 이토카와 소행성에 착륙하여 표본을 수집하기도 했다. 소행성을 관측하려면 쌍안경이 필요하다. 쌍안경으로 보면 희미한 별처럼 보이지만, 밝은 별들을 배경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살릴水도 죽이氣도

    살릴水도 죽이氣도

    물/베로니카 스트랭 지음/하윤숙 옮김/반니/292쪽/1만 5000원 공기/피터 애디 지음/임지원 옮김/반니/328쪽/1만 5000원 기원전 5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정치가, 시인, 의학자였던 엠페도클레스는 이 세상이 공기, 물, 불, 흙의 4대 원소로 이뤄졌으며 이 물질들의 사랑과 다툼 속에서 세상 만물이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지구와 인류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들이지만 수시로 인류를 위험에 빠지게 하는 요인으로 둔갑할 수 있음을 꿰뚫어 본 셈이다. 꺾일 줄 모르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전국을 타들어가게 하는 극심한 가뭄은 공기와 물의 위협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신간 ‘공기-신비롭고 위험한’과 ‘물-생명의 근원, 권력의 상징’은 공기와 물의 실체를 과학이론은 물론 지리, 역사, 문화, 예술 등 다각적인 방식으로 탐구한다. 책은 특히 공기와 물을 장악하려 했던 인간의 욕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두 가지 기본적인 자원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지구적 고민을 촉구한다. 공기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실체가 잡히지도 않는다. 하지만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존재하고 유지하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공기의 수수께끼 같은 특성은 오래전부터 인류의 호기심을 자극해 왔고, 공기를 이해하고 탐구하고 응용하고 장악하려 했던 수많은 시도들을 낳았다. 질소 78%, 산소 21%, 아르곤 0.96%와 기타 기체나 원소 0.04%로 이루어진 공기는 휘발성, 유동성, 압축성, 전도성 등 놀라운 특성을 갖는다. 영국지리학자협회와 왕립지리학회의 사회·문화 지리학연구 의장을 맡고 있는 피터 애디 런던대 교수는 그것이 훌륭한 메타포가 되어 인류의 과학과 사회,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공기를 인류문명의 동반자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저자는 “공기는 단순히 놀라운 물질이나 흥미로운 자연현상, 혹은 기술적 성취로 보지 않고 항상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지탱하게 해 주는 존재”로 바라본다. 책은 고대부터 20세기까지 다양한 시대, 장소, 배경을 무대로 공기의 발견, 연구, 이용, 표현에 관해 탐구해 온 개척자들의 발자취를 더듬어간다. 공기는 자연철학, 의학, 철학, 화학, 물리 연구에 불을 지피고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촉발제가 된다. 19세기 산업화·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도시의 공기가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공기를 통해 질병이나 전염병이 퍼져나가는 현상을 설명해 주는 ‘독기이론’이 등장하고 사람들은 건강과 치료에 도움이 되는 공기의 순기능에 대해서 알기 시작하면서 신선한 공기에 대한 열망도 높아졌다.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공기는 욕망의 대상이 된다. 물질을 운반하고 어디든 이동할 수 있는 공기의 성질은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무기를 낳았다. 방사능의 발견과 핵무기의 발명이다. 방사능 낙진에 의한 오염은 복잡하고 불확실하고 비선형적이며 우리가 숨쉬는 대기를 무기로 탈바꿈시킨다. 심각한 수준의 미세먼지와 호흡기 전염병은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더램대학의 베로니카 스트랭 교수가 쓴 ‘물’은 물과 인간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탐구한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다양한 문화적 잣대로 물을 숭배했다. 물을 다스리는 치수는 정치권력에 필수적이었다. 물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 인간은 물을 좀 더 주도적으로 사용하게 됐지만 인구팽창은 사회와 정치조직에 영향을 미쳤고 권력관계에도 불균형을 가져왔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물의 흐름을 바꿨고 이는 재앙으로 돌아왔다. 지금도 한쪽에서는 엄청난 물을 가둬놓고 있지만 10억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안정적인 식수공급을 받지 못하고 수질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이제 인류는 어떤 물도 마음 놓고 마실 수 없는 상황이다. 자연 속에서 흐르던 물은 사라졌고 댐에 갇혀 썩어가는 물에 인류는 역공을 받고 있다. 모든 물이 모이는 바다조차도 기후변화와 오염의 압박을 받고 있다. 물은 인류와 지구상의 모든 유기체 사이를 흐르며 이어주는 연결고리다. 그러나 인간 사회와 생태계를 거치면서 지구 곳곳을 돌아다니는 물의 흐름은 무질서해졌다. 이는 곳곳에서 나타나는 엄청난 쓰나미, 지진, 가뭄 등의 자연재해로 엿볼 수 있다. 저자는 “사회는 물이 정말 무엇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중요한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면서 “실용주의적인 환원주의를 버리고 물을 시간과 기억과 운동과 흐름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제안한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열린세상] 기술 진보, 세계화, 그리고 소득 격차/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열린세상] 기술 진보, 세계화, 그리고 소득 격차/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교수인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온라인 강의다. 현재도 여러 가지 형태의 인터넷 온라인 강의가 있다. 온라인 강의는 직접 선생님이 눈앞에서 지도하는 강의보다 학습 효과가 현저히 떨어진다. 하지만 최근 정보통신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3차원 동영상 강의가 나올 것이며, 감시 카메라로 학생의 움직임을 보다가 졸거나 딴짓을 하면 컴퓨터에서 손이 쑥 나와서 찰싹 때리거나 동영상 속의 교수님이 큰소리로 학생을 혼내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더욱이 동영상 강의는 저렴할 가능성이 크다. 살아 있는 교수가 같은 강의를 세 번 하려면 실제로 세 번 가서 강의를 해야 하지만, 동영상 속의 교수는 한 번 녹화한 영상을 다시 틀어 주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비용이 훨씬 내려가게 된다. 연극과 영화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동영상 속의 교수가 살아 있는 교수인 나보다도 더 훌륭한 강의를 할 것이라는 점이다. 동영상 강의를 만드는 회사의 입장에서는 해당 강의를 세계에서 가장 잘하는 교수를 섭외해 동영상 강의를 만들 것이 자명하며, 일반적인 교수들로서는 동영상 속 교수의 강의 수준을 따라가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급속한 기술의 진보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교수들만이 아닐 것이다.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가까운 장래에 로봇이나 고성능 컴퓨터, 동영상이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두려움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0년 전 산업혁명 초기에 이미 러다이트운동이 있었다. 기계가 자신들의 일을 빼앗아 갈 것으로 생각한 공장의 노동자들이 망치를 들고 와서 기계를 부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걱정은 지금까지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기계에 일자리를 빼앗긴 공장 노동자들이 기계를 만드는 공장이나 다른 곳에서 새로이 생긴 일자리를 얻게 되고 한편으로 기계를 이용해 값싸게 생산된 상품을 살 수 있게 돼 경제적으로 풍요해졌기 때문이다. 과거에 그러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인가. 구두를 만들던 노동자는 구두를 만드는 기계가 발명되는 경우 우선 구두 만드는 기계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구두를 만들던 노동자의 숫자보다 구두를 만드는 기계를 만드는 공장에서 필요한 노동자의 숫자가 적을 것이다. 따라서 구두를 만들던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으면 구두의 판매 또는 수선 같은 업종 또는 구두와 전혀 상관없는 음식점 사업으로 전환했을 것이다. 구두를 만드는 제조업에 대비해 이러한 직업들을 서비스업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기술 발전은 주로 물건을 만드는 제조업에서 발생했다. 따라서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숫자는 점점 줄었고 반면 서비스업 분야는 제조업에서 퇴출당한 사람들이 몰리면서 점점 종사자의 숫자가 늘어났다. 즉 기계의 도입으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의 탈출구가 바로 서비스업이었다. 그런데 지난 10년간 이루어진 기술의 발전 또는 기계의 발명은 이전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 바로 정보통신기술과 컴퓨터 프로그램의 발전에 따른 서비스 산업의 기계화다. 교수라는 직업은 당연히 서비스업이고 지난 과거 기술 진보에 의해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분필로 흑판에 쓰던 것을 이젠 매직펜으로 화이트보드에 쓰게 된 것 정도가 변화라면 변화다. 하지만 갑자기 교실에 컴퓨터가 도입되고, 인터넷을 통한 강의가 가능해지면서 교수라는 서비스업 종사자인 나 또한 기술의 진보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사람보다 더 자세히 제품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동영상 판매원이 등장한다면, 백화점이나 상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더이상 일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동네의 수많은 서점이 인터넷 서점으로 대체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19세기, 20세기와 달리 21세기의 기술 진보는 서비스업까지 영향을 미침으로써 많은 사회 구성원들의 일자리를 뺏어 갈 가능성이 있다. 결론은 교육이다. 그저 과거의 지식을 전수하는 교육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 진보를 따라가면서 미래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고급 지식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교육에 우리 사회는 또 개인들은 사활을 걸어야 할 것이다.
  • 해외여행 | 남아프리카를 달리는 럭셔리 열차①블루 트레인 The Blue Train

    해외여행 | 남아프리카를 달리는 럭셔리 열차①블루 트레인 The Blue Train

    프롤로그prologue 내가 진정 그 자리에 있었던가? 진정 그 기차를 타고 아프리카 대지를 달렸던가? 아프리카에 ‘블루 트레인The Blue Train’과 ‘로보스 레일Rovos Rail’이란 호화열차가 있다는 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다. 1박 2일 여정에 대략 미화 2,000달러, 2박 3일 여정에 3,000달러 정도 하는 기차에 내가 탈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세계 최고의 럭셔리 기차’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주 부유한 사람들이나 탈 것이라 생각했던 그 기차에, 그것도 블루 트레인과 로보스 레일, 두 기차에 어느 날 문득 내가 몸을 실었다. 눈 깜짝할 새 이루어진 꿈같은 일이다. 블루 트레인을 타고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 인근 프리토리아Pretoria에서 케이프타운Cape Town으로 1박 2일을, 로보스를 타고 프리토리아에서 인도양의 도시, 더반Durban으로 2박 3일을 달렸다. ●블루 트레인 The Blue Train 레드카펫 위를 걸어 기차에 오르다 남아프리카의 영혼을 향해 열린 창 ‘남아프리카의 영혼을 향해 열린 창A Window to the Soul of South Africa’ 블루 트레인의 애칭이다. 내가 블루 트레인에 끌리게 된 데는 이 한마디 말이 큰 영향을 미쳤다. 어찌 보면 그저 광고 문구에 불과한 이 말은 왠지 내 가슴에 와 닿았다. 블루 트레인이란 호화열차를 타고 아프리카 대륙의 일부라도 달릴 수 있다면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블루 트레인을 타고 프리토리아역을 출발해 케이프타운으로 향한다. 블루 트레인 라운지 앞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다. 붉은 카펫을 밟고 VIP 라운지로 들어선다. 드디어 2,000달러짜리 호화열차 블루 트레인의 세계가 시작된다. 아침 7시30분, 출발 한 시간 전에 체크인을 하고 라운지에 앉아 차를 마신다. 스팀 밀크를 넣으니 차 맛이 한결 부드럽다. 늘 커피만 마시느라 외면하던 차 마시는 즐거움을 블루 트레인에서 새삼 알게 되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8시30분, 블루 트레인에 올랐다. 블루 트레인의 코치는 럭셔리 스위트와 딜럭스 스위트 두 가지로 나뉜다. 두 코치의 가장 큰 차이는 욕조가 있느냐 없느냐, 그리고 크기 차이다. 럭셔리 코치에 있는 스위트의 길이는 5.13m, 딜럭스 스위트는 4m다. 럭셔리는 한 코치에 세 개의 스위트가 있고, 딜럭스는 네 개의 스위트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스위트는 객실이다. 그렇다. 블루 트레인에선 방이 아니라 ‘스위트’라고 말한다. 단순한 방, 객실이 아니라 모든 서비스가 가능한 스위트라는 의미다. 승객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기서 ‘승객’이 아니라 ‘게스트’라 불린다. 내 방은 ‘딜럭스 스위트’ 35번. 낮에는 소파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밤에는 트윈 베드룸으로 변한다. 짙은 적갈색 원목 인테리어의 은은한 윤기가 스위트를 빛낸다. 담당 버틀러는 부드러운 미소를 가진, 건장한 체격의 흑인 남자 ‘리페’다. 24시간 서비스가 가능하다. 나로선 객실에서 리페에게 애프터눈 티 서비스를 받는 게 특별하게 여겨졌다. 묵직한 실버 티 포트 세트가 참 마음에 들었다. excursion 거대한 킴벌리 홀Kimberley Hole 익스커션Excursion은 첫째 날 오후, 블루 트레인에서 내려 즐기는 소풍이다. 노던케이프Northern Cape주의 주도인 킴벌리에 있는 거대한 ‘구멍’을 보러 간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어 구멍이라고 말했지만 킴벌리 ‘홀’의 깊이는 326m, 둘레는 1.6km에 달한다. 이제 구멍의 스케일이 상상되는가? 킴벌리 홀은 다이아몬드와 금을 찾아 파 내려간 구멍이다. 1869년 킴벌리의 농가주택 벽 안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행운을 찾아 아프리카 전역에서 1만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여기서 2,250만톤의 흙을 파내고 2,722kg의 다이아몬드를 채굴했다. 이때 사람들이 단지 ‘손으로만’ 파 내려가 만든 구멍은 이제 ‘지구상에서 사람이 만든 가장 큰 구멍’으로 불린다. 다이아몬드 채굴은 1914년에 끝났지만 인간의 집요한 욕망이 투영된 그 흔적은 지금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는 디 비어스De Beers사의 본사가 바로 킴벌리에 있다. 킴벌리 광산 박물관의 다이아몬드 홀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다이아몬드들을 볼 수 있다. 박물관 주변에는 1880년대 다이아몬드 러시 시절, 마을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화려하고 영광스러웠던 시절의 향수 1박 2일 블루 트레인 여정의 하이라이트는 디너 타임이다. 그런데 낮에는 드레스 코드가 ‘스마트 캐주얼’이지만 디너 때는 재킷과 타이를 해야 한다. 재킷과 타이는 블루 트레인의 전통이자 승객들의 ‘의무사항’이다. 남아프리카로 떠나기 전, 사실 이 문제로 한참을 고민했다. 변변한 양복 한 벌 없는 내가 파티 때나 입는 슈트가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어느 친구에게 빌리기로 했지만 단 한 끼의 저녁 식사를 위해 슈트와 구두를 한 달 동안 싸 들고 다녀야 하는 건 정말 귀찮은 일이었다. 출국 전날 밤까지, 짐은 안 싸고 슈트를 가져갈까? 말까? 두어 시간을 고민하다 결국 챙겨 왔는데 블루 트레인에서 저녁을 먹으며 생각했다. 정말 잘 가져왔구나! 블루 트레인의 다이닝 카에선 슈트와 보타이가 자연스럽다. 다이닝 카로 가기 전 내 방에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블루 트레인이기 때문에 이런 차림이 자연스럽다. 흔히 회사에서 일할 때 입는 ‘양복’과는 다르다. 여기서 양복은 웨이터와 버틀러가 입는 옷이다. 블루 트레인에는 승객이 인식하건 못하건 엄격한 격식이 존재한다. 단 한 끼의 식사를 위해 한 달 동안 슈트와 구두를 들고 다닌 일이 헛되지 않다. 슈트를 입고 다이닝 테이블에 앉는 순간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블루 트레인의 다이닝 카는 마치 무도회장 같다. 19세기 중후반 빅토리아 시대의 기차 여행이 이렇지 않았을까? 블루 트레인에 영국 손님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영국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영광스러웠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블루 트레인에서 곱씹는지도 모른다. 영국인이 아니더라도 여기서 블루 트레인이란 세계는 누구에게나 지속되어야 할 영광의 시대일 것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시가 한 모금의 선물 블루 트레인에서 유독 내 흥미를 끌었던 곳은 ‘클럽 카Club Car’다. 남자들, 아니 신사들의 놀이터인 클럽 카는 기차의 맨 끝에 있다. ‘신사들만의 클럽’은 술도 잘 안 마시고 변변한 슈트 한 벌 없는 내가 평소에 품고 있던 로망 중 하나다. 내 로망은 클럽 카에서 쿠바산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으로 이루어졌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담배도 안 피는 내가 클럽 카에서 난생 처음 피워 본 시가 이름이다. “시가를 한 번도 안 피워 봤다고요? 그럼 해봐야죠! 연기를 삼키는 게 아녜요. 쪽쪽거리며 입 안에서 향을 느끼고 연기를 내뿜는 거예요. 영국수상 처칠처럼.” 옆 자리의 중년신사, 마이클은 “시가는 코냑과 잘 어울려요”라며 코냑 잔까지 내 손에 쥐어 준다. 언젠가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었다. “시가를 피워 봤는데 너무 독해 입 안이 다 헐었어.” 그의 말 탓에 살짝 긴장한 채 시가를 입에 물고 마이클이 시키는 대로 서너 번 시가를 빨았다 연기 내뿜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웬걸, 예상과 다르게 아주 순했다. 심지어 입 안에서 느껴지는 향은 부드럽기까지 했다. 블루 트레인 명성에 걸맞는 쿠바산 핸드 메이드 고급 시가여서일까? 흔히 블루 트레인 앞에는 ‘세계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이는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종종 긴장하게 만든다. 한편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런 기차에 탈까? 라운지에서 만났던 30대 후반의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기차를 타러 가는데 무슨 옷을 입어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어요. 어떤 분위기일까?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거예요.” 나처럼 그녀도 블루 트레인에 처음 탔다. 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들도 있다. 세계 최고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마이클은 케이프타운에서 사업을 하며 요트를 즐겨 탄다고 했다. 나는 블루 트레인에 오르며 꿈같은 일이라고 말했지만 마이클처럼 기차 안의 어떤 이들에겐 블루 트레인이 대수롭지 않다.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기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천차만별이다. 여행이 좋은 점은 나와 아주 다른 삶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가를 피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어둠 속에 바깥 풍경이 흐른다. 블루 트레인에 탔는데 블루 트레인에 타는 꿈을 꾼다. 하나의 세계가 끝나고 다른 세계가 나타난다. 열차는 그저 달릴 뿐이다. 야간 기차의 철로 위에서 어느새 잠이 들었는데 햇살 때문이었을까? 이른 아침에 눈이 뜨였다. 창밖은 온통 붉은 빛이었다. 블루 트레인에서 맞는 아프리카의 일출이다. 블루트레인의 완벽한 배려 1946년부터 운행을 시작했지만 블루 트레인은 모던하다. 스위트 안에서 와이파이가 가능하고, GPS와 TV는 물론 DVD 플레이어가 있으며, 스위트에 에어쿠션 서스펜션 장치가 있어 고속 주행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최고 속도는 시속 90km, 프리토리아에서 케이프타운까지 1,600km를 27시간 동안 달린다. 차량 길이는 대략 396m, 블루 트레인의 코치 구성은 컨퍼런스룸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16개 또는 17개 코치로 구성된다. 게스트 룸으로 사용되는 코치는 각각 8개, 10개인데, 내가 탔을 때처럼 17개 코치로 구성될 경우 승객 정원은 74명이고, 컨퍼런스 카가 있으면 58명이다. 다이닝 카의 좌석은 모두 42개로 승객들은 두 차례에 걸쳐 식사를 하게 된다. 프랑스 샴페인과 캐비어를 제외하곤 기본적으로 모든 서비스가 요금에 포함된다. 아침은 7시에서 10시 사이 편한 시간에 즐긴다. 라운지 카는 미팅 플레이스, 만남의 장소다. 바Bar가 있어 식전 음료나 스낵과 함께 애프터눈 티를 마실 수 있다. 룸서비스도 특별한 메뉴를 제외하고 별도의 비용 없이 가능하다. 코치의 실내 온도는 20도에서 21도 사이에 맞춰진다. 하지만 18~28도 사이에서 개별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제한적이지만 세탁 서비스도 가능하다. 응급처치가 가능한 직원도 탑승한다. 담배를 필 수 있는 클럽 카는 기차 앞부분에 위치한다. 담배를 안 피우는 다른 승객을 배려하기 위해서다. 클럽 카를 지나면 세탁 차, 전력실과 수하물 차가 있다. 팁은 캐빈에 있는 봉투에 넣어 라운지 카에 있는 박스gratuity box에 넣으면 된다. 블루 트레인은 ‘Africa’s Leading Luxury Train’ 상을 2009년에서 2014년까지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받았다. 하나투어 1577-1233 에디터 트래비 글·사진 Travie writer 박준 취재협조 남아프리카항공 www.flysaa.com, 로보스 레일 www.rovos.com, 블루 트레인 www.bluetrain.co.za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軍人’ 1%의 영웅과 99%의 희생자들

    ‘軍人’ 1%의 영웅과 99%의 희생자들

    볼프 슈나이더 지음/박종대 옮김/열린책들/584쪽/2만 5000원 ‘국가의 안전 보장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일정한 조직 체계에 소속되어 전투를 수행할 수 있도록 교육·훈련을 받고, 전시에는 직접 전투에 종사하는 사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소개한 ‘군인’의 정의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군인은 사전적 의미를 뛰어넘는 다양한 개념과 이미지를 포함한다. 전쟁의 최일선 수행자 말고도 통치의 강력한 주체, 나라를 없애고 만들거나 인간을 잔인하게 죽이는 괴물, 비참한 죽음, 영웅…. 신간 ‘군인’은 군인을 매개 삼아 ‘인간 종’의 면모를 파헤친 색다른 전쟁문화사다. 저자는 국내에도 번역 소개된 ‘위대한 패배자’를 쓴 독일 언론인이다. 고교 졸업 직후 징집돼 나치 정권을 위해 싸웠던 당사자가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50년 천착 끝에 내놓은 ‘군인의 역사’로 읽힌다. 전쟁, 그리고 전쟁의 직접 수행자인 군인의 기원은 언제이고 무엇이었을까. 그 시발을 명쾌히 밝힌 자료나 문건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인류 역사가 싸움과 전쟁의 점철’이라는 평범한 관측에 얹어 책에서 찾아낸 그 시초는 상상보다 훨씬 앞선다. 그 이유는 남에 대한 멸시와 배척, 그리고 점령으로 모아진다. 이를테면 뉴기니 섬의 왈라루아 족은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 아닌, 왈라루아 족과 비(非)왈라루아 족으로 구분하면서 비왈라루아 족을 동물에 더 가깝게 대우했다. 뉴기니와 아마존 밀림 속 마지막 원시부족들은 다른 종족·부족을 여전히 그렇게 분류한다. 타 민족에 대한 경멸을 토대로 번창한 그리스 문화에서도 실상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스 세계를 외부 세계와 엄격히 구분한 개념인 ‘야만족’(babarian)은 그리스어를 잘 못하고, 교양 없고 거칠고 잔인한 모든 족속, 이방인, 적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것 말고도 차별과 무시에 기반한 점령·전쟁의 사례는 숱하다. 콜럼버스가 아이티섬에 도착한 지 40년 만에 이 섬 인디언 원주민들은 상당수가 천연두로 죽거나 학살당했다. 테네리페섬과 나머지 카나리아 제도의 원주민인 구안체 족은 일부만 남고 몰살됐다. 역사상 가장 큰 ‘인간사냥’이라는 아메리카 노예시장을 위한 흑인 생포는 어떤가. 16∼19세기 아프리카에서 배로 수송된 흑인 수는 1000만∼1500만명에 이른다. 1800년 제1통령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앞둔 밀라노에서 병사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위대한 민족의 땅을 모욕하려는 미친 자들(오스트리아)에게 반드시 저주가 내린다는 사실을 보여 줘라.” ‘군인은 다른 어떤 인간 집단보다 타인에게 더 많은 고통을 가할 뿐 아니라 자신이 크나큰 고통을 겪는 사람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전쟁에 휘말린 군인의 희생은 상상을 초월한다. 책에 명시된 통계만 보더라도 희생의 두께는 어렵지 않게 감지된다. 나폴레옹전쟁(1803~1815) 150만명, 미국 남북전쟁(1861~1865) 62만명, 보불전쟁(1870~1871) 18만 8000명, 제1차 세계대전 1000만명, 제2차 세계대전 1700만명, 한국전쟁 100만명, 이란·이라크전쟁 90만명…. 엄청난 희생을 부른 전쟁에 군인이 끌려 들어간 원인은 무엇일까. 핑계, 착각, 거짓말, 영토와 전리품, 조국, 명성과 복수, 종교, 모험 등 다양할 것이다. 저자는 ‘무엇을 위해 군인은 죽었는가’를 설명하며 ‘전쟁영웅’을 놓고도 회의적인 말을 던진다. “한 군대가 어떻게 수많은 영웅, 전대미문의 용맹성을 지닌 모범적 남자들로 이뤄질 수 있겠는가. 굳이 영웅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면 누구나 인정하는 훌륭한 일을 위해 죽을 때까지 초지일관 싸운 군인들에나 붙일 수 있다.” 대부분의 군인은 영웅이 아닌 희생자인 것이다. 이제 전쟁은 더이상 군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싸움으로 변했다. 무인 전투기 드론처럼 전자기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기술자로도 충분한 ‘군인 없는 전쟁’의 시대다. 민간 군사기업을 이용해 바로 공격에 나서고 무기 수준에 구애받지 않는 사이버전을 벌이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전쟁을 해 보려는 유혹도 과거보다 더 커졌다. 그래서 저자는 서문에 추도사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평화를 외치면 평화가 올 것’이라는 주장은 순진한 것이라며 다소 슬픈 말을 전한다. “수백만 명의 인간이 더는 군인이 될 필요가 없는 건 좋은 일이지만, 군인이 사라진다고 해서 미래의 전쟁이 없어지거나 덜 끔찍해지지 않는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공자, 서양에 혁명을 선물하다

    공자, 서양에 혁명을 선물하다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황태연·김종록 지음/김영사/368쪽/1만 4800원 “공자는 선지자가 아니고, 조금도 계시적인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의 도덕은 순수하고 엄격하며 동시에 인간적이기도 하다.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존경할 만 한 시대는 바로 사람들이 공자의 도를 따르는 시대였다.” 유럽의 근대를 연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1694~1778)가 ‘국민의 도덕과 정신에 관한 평론’(1756)에서 밝힌 내용이다. 새 책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에 따르면 공자철학은 계몽주의의 토대가 됐으며, 동양 선비문화의 복사판인 로코코 문화를 꽃피운 원동력이었다. 공자가 18세기 ‘유럽 계몽주의의 수호성인’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시민혁명을 촉발시켰다는 것을 서구맹종주의자들은 도무지 납득하지 못하겠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실증사료들과 철학 교류 이야기들이 책에 펼쳐진다. 책은 공자를 중심에 놓고 세계철학사를 재해석한 황태연 교수(동국대 정치외교학과)의 ‘공자와 세계’(전 5권)를 김종록 문화국가연구소장이 한 권으로 요약한 것이다. 프로이센제국의 왕립 할레 대학에서 총장을 맡았던 크리스티안 볼프는 1721년 이임식 연설에서 “공자의 언행은 그리스 철학과는 비교할 수 없는 도덕철학의 보고다. 공자는 그리스도가 유럽에서 받는 것과 똑같은 대우를 중국에서 받는다”며 공자의 무신론적 도덕철학을 높이 칭송했다. 종교계의 미움을 산 볼프는 조국에서 쫓겨나야 했지만 이 연설문은 해적판으로 인쇄돼 도처에서 활발한 토론의 주제가 된다. 이 밖에 라이프니츠, 루소, 흄, 애덤 스미스 등 우리가 아는 18세기 유럽의 최고 지식인들은 공자를 추앙하고 숭배했다.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중농주의 자유경제론의 창시자 프랑수아 케네의 사상적 모태 역시 공맹, 노자의 무위이치, 민본주의, 농본주의, 자유상업론이었다. 이처럼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태동에 공자는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공자 열풍은 최초로 중국에 가톨릭을 전파한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리치 이래 공자철학을 가톨릭 사상과 유사한 것으로 해석했던 예수회선교사들의 시도에 의해 촉발됐다고 책은 전한다. 유럽 선교사들은 중국에 기독교를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중국 문화를 배워야 했다. 그러다 만난 공자의 매력에 절로 빠져들었고 거꾸로 유럽에 열렬히 전파하기에 이르렀다. 17세기 후반부터 예수회 신부들을 통해 공자의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계몽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영국 명예혁명 이전에 유교의 사서(四書), 즉 논어, 맹자, 대학, 중용과 주역, 효경, 소학이 라틴어 등으로 번역된 상태였다. 공자의 철학과 사상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젖어 있던 유럽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급기야 유럽사회에 공자 열풍이 불었고, 유럽의 경험주의자들은 공자철학의 지원을 받아 스콜라철학과 그리스합리주의를 분쇄하는 사상투쟁을 벌인다. 프랑스대혁명은 그 산물이었다. 이랬던 동아시아가 왜 서구 열강에 참패했는지에 대해 저자들은 ”18세기 중국과 조선은 부족할 것 없이 두루 갖춰져 있어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어느 문명이건 정체는 곧 퇴보로 이어진다”고 진단했다. 반면 16~18세기 유럽은 동양과 여타 세계에 많은 관심을 두고 세계 각지로 진출하며 도처에서 문물을 받아들였고 서구문명을 꽃피웠다. 하지만 19세기 유럽은 제국주의로 옷을 갈아입고 문명개화라는 명목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약탈했다. 책은 “공자철학은 이성보다 감성을, 추리보다 경험을 앞세우고 천성적 욕망과 감정을 선하게 여기며 인의(仁義)의 덕성을 지식보다 중시한다”면서 “서구 경험론과 굳게 연대한 공자철학이야말로 인류의 새 삶을 디자인할 확실한 대안철학”이라고 강조한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외모의 정치학서 벗어나 ‘장애’ 바로 보기

    외모의 정치학서 벗어나 ‘장애’ 바로 보기

    보통이 아닌 몸/로즈메리 갈런드 톰슨 지음/손홍일 옮김/그린비/308쪽/1만 9000원 미국에서 19세기 중반부터 100여년 동안 기형인간쇼는 당대 박물관과 서커스의 주요 부분으로 흥행을 보장하는 문화사업이었다. 얼굴이 둘 달린 여성, 동물도 인간도 아닌 멕시코 원주민 여성, 거인과 소인 등 비정상적인 몸을 구경거리로 전시함으로써 흥행업자는 돈을 쓸어 모았다. 장애여성주의자인 로즈메리 갈런드 톰슨은 저작 ‘보통이 아닌 몸’에서 다른 몸들을 전시하는 기형인간쇼가 ‘이성적이고 통제된’ 백인 남성을 이상형으로 하는 미국적 자아의 모습을 확인시켜 주었으며 동시에 구경꾼들 자신이 ‘정상’이라는 우월감과 안도감을 심어 주었다는 점을 포착해 낸다. ‘미국문화에서 장애는 어떻게 재현되었는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은 장애학의 관점에서 미국 문화와 문학을 비평하는 독창적이고 선구적인 분석으로 장애에 대한 우리 시선의 편향성을 일깨워 준다. 책은 ‘장애’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재조명하기 위해 장애를 규정하는 다양한 조건들이 얼마나 자의적인지를 다양한 이론과 함께 소개하고, 장애가 어떻게 문학과 문화에서 재현됐는지를 살핀다. 기형인간쇼에 이어 저자는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아저씨의 오두막’, 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니 모리슨의 소설들, 흑인이자 장애여성이며 동성애자였던 작가 오드리 로드의 자전적 소설을 흑인 해방이나 여성 해방의 관점이 아닌 장애 해방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한다. 인문학적 장애학의 모델을 제시하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저자의 주장은 “장애를 결핍이나 결여가 아니라 보통이 아닌 몸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말미에 이 책의 수사적 취지를 밝힌다. “우리의 신체적 다름에 대한 해석을 지배하고 있는 외모의 정치학을 비판하는 것, 장애는 보상이 아니라 수용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는 것, 그리고 우리의 장애에 대한 생각을 병적인 현상에서 정체성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열린세상] 대한민국, 돌고래의 ‘명민전략’ 구사해야/윤지원 평택대 외교안보전공교수·남북한문제연구소장

    [열린세상] 대한민국, 돌고래의 ‘명민전략’ 구사해야/윤지원 평택대 외교안보전공교수·남북한문제연구소장

    동북아시아에는 새로운 세력경쟁 질서가 도래했다. 고조되고 있는 미국과 중국 간의 세력 각축은 19세기 영국과 러시아(독일), 20세기 미국과 소련 간의 ‘제국경쟁’에 버금가는 21세기 패권경쟁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미국의 동북아 재균형 전략에 중국의 시진핑은 ‘신형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를 주창하며 냉전종식 이후 유일 초강대국의 위상을 구가한 미국에 맞서기 시작했다. 최근 미·중은 구체적인 정책 사안에까지 힘겨루기가 구체화되고 있다. 주한 미군기지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대한 중국의 예민한 반응이 가시화됐고, 중국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으로 미국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대응함으로써 동북아 및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에 접어들었다. 미·중의 각축에 일본의 아베 총리는 집단적 자위권을 확보해 평화국가에서 ‘보통국가’로 나가기 위한 예비적 조치를 강구했고, 대미 편승전략 적극화로 미·일 안보 지침을 개정해 대중 견제전략을 구체화하고 있다. 미·일의 강화된 해양 동맹은 대륙 연합으로 표면화되는 중·러의 경제 및 군사협력의 확대를 자극하고 있다. 미·중 패권경쟁의 역학은 해양 동맹과 대륙 연합의 양극화로 동북아를 ‘신냉전적 대립’으로 격화시킬 소지마저 안고 있다. 이에 더해 우리는 핵으로 무장한 광기 어린 폭압 전제로 동포의 인권을 유린하고 대한민국을 겁박하는 북한의 군사적 모험주의에 직면해 있다. 동시에 21세기 미·중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존과 번영을 확보하고 통일을 촉진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 다양한 층위와 복합적인 이슈를 놓고 주변 4강의 각축과 마찰이 전개되는 가운데 남북한 간의 긴장도 지속적으로 고조되고 있다. 그렇다고 이런 갈등과 마찰, 긴장이 곧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아니다. 유동적인 질서 변동기에는 위기와 기회가 병존하기 때문에 우리는 열국의 싸움 속에서 국가 발전과 통일의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동북아 ‘세력경쟁체제’의 전개에 대한 엄밀한 현실 인식과 국론 통일이 필요하다. 최근 한국 사회에는 구한말 제국주의 열강의 싸움에 국권을 상실함으로써 시작된 ‘새우 콤플렉스’가 재현되고 있다. 얼마 전 국무회의에서 외교장관과 대통령마저도 ‘고래싸움’이 벌어져도 새우 등이 터지는 것이 아니라는 발언을 했을 정도다. 물론 노무현 정부 때 ‘동북아 균형자론’으로 인해 ‘탈미접중’(脫美接中)의 동맹 변경을 타진한 적도 있었다. 우리는 위험스런 패배주의와 모험주의적 환상과 같은 극단주의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산업화·민주화를 거쳐 발전한 세계의 모범 국가이자 군사·경제적으로 세계 10위 전후의 종합국력을 가진 중견 국가가 됐다. 구한말 제국주의적 고래싸움에 희생될 ‘새우’가 아닌 것이 자명하고, 급성장한 중국과의 무역 관계가 미국과의 동맹을 변화시켜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한·미 동맹은 핵으로 무장하고 모험적인 북한의 도발을 실효적으로 억제하고 자유민주주의적 평화통일을 추동하는 전략적 지렛대인 것이다. 한·미 관계는 군사부문을 넘어 민주주의적 가치와 제도를 공유하며 과학과 기술·교육 부문의 교류가 심화되고, 자유무역협정에 의한 경제적 결속이 지속될 세계적으로 가장 견고하고 포괄적인 동맹이다. 한·미의 포괄적 동맹은 실효적 대북 군사억제와 대중·대일 관계의 협상력을 제고하는 전략적 자산인 것이다. 반미(反美) 내지 탈미(脫美) 정책은 진정한 자주가 아니라 위험한 고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미화중’(以美和中) 전략이 답이다. 더이상 대한민국은 구한말의 낙후된 ‘은둔의 왕국’도, 냉전 시기 자유 진영의 군사적 전초기지도 아니다. 중견 국가로서 능히 중국과 미국의 대립을 완화시키는 중재 능력을 배양하고 한반도 통일을 완수함으로써 해양과 대륙의 21세기적 공영 발전을 중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 구한말 이후의 ‘새우 콤플렉스’를 벗어던져야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돌고래의 명민함으로 ‘거인고래’들의 싸움을 말리고, 남북한 평화통일을 완수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평화공존과 공영질서 형성의 주도자가 돼야 한다.
  • 해외경매장서 찾아온 범어사 칠성도

    해외경매장서 찾아온 범어사 칠성도

    “범어사에서 사라진 칠성도가 스위스 경매에 나왔습니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우리가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 손으로 되찾아야 합니다. 금액은 상관없습니다. 어떻게든 찾아와야 합니다.”(부산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수불 스님) 3일 오전 10시 54분(현지시간) 스위스 취리히의 콜러 옥션 경매장. 단상 뒷벽에 붙은 두 개의 스크린에 숫자와 사진이 동시에 떴다. 왼쪽엔 경매 시작가가, 오른쪽엔 불화(佛畵)가 떴다. 1861년(철종 12) 제작돼 범어사 극락암(極庵)에 봉안됐다 자취를 감췄던 ‘칠성도’ 3점이었다. 경매는 1만 스위스프랑(약 1200만원)부터 시작됐다. 3명 이상이 참여했다. 금액이 올라가며 응찰자들이 하나 둘 포기했다. 재단 측과 전화 응찰자 둘이 맞붙었다. 거듭 경매가를 갈아치웠다. 손에 땀을 쥐는 순간이 이어지던 중 전화 속 응찰자가 불현듯 6만을 불렀다. 장내가 술렁였다. 재단 측은 6만 5000으로 맞받았다. 진행자가 단상을 ‘땅땅’ 두드렸다. 56분, 칠성도는 재단 측으로 넘어왔다. 최종 낙찰가는 경매수수료를 포함 7만 8500스위스프랑(약 9400여만원)이었다. 이날 경매에서 가장 높은 낙찰가였다. 1950~60년대 초 사회 혼란을 틈타 해외로 유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범어사 칠성도 3점이 문화재청 산하 재단과 원래 봉안됐던 사찰의 노력으로 이달 말 국내로 돌아오게 됐다. 매주 해외 경매 사이트에서의 한국 문화재 거래 여부를 점검하던 재단이 지난달 14일 콜러 옥션 사이트 모니터링 과정에서 칠성도를 발견했다. 재단은 곧장 전문가들을 소집했다. 불화의 진위와 가치를 평가했다. ‘칠성도’ 하단에 적힌 그림의 조성경위를 적은 화기(畵記)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화기를 통해 불화 3점이 1861년 밀양 표충사(表忠祠)에서 제작된 뒤 범어사 극락암으로 옮겨 봉안된 ‘칠성도’ 11점 가운데 3점(비단에 채색, 84×55㎝)이란 사실을 확인했다. 재단은 지난달 22일 조계종단을 통해 범어사에 알리고, 팀을 꾸려 스위스로 날아갔다. 불교문화재 전문가인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는 “칠성도는 조성연대와 제작처, 화승, 봉안처 등 조성유래를 확실히 알 수 있고 짜임새 있는 구도와 단아하면서 건장한 불상의 형태, 칠성도의 중심인 ‘치성광삼존도’가 남아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19세기 후반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재단은 “해외 경매 매입을 통해 불교문화재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문화재 환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한편 칠성도가 봉안됐던 극락암은 1960년대 후반 훼손돼 철거됐다. 수불 스님은 “환수된 ‘칠성도’는 본래 봉안처인 극락암을 재조성해 안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물길 따라 예술이 흐른다… Norway 또 다른 물의 도시 ‘올레순’

    물길 따라 예술이 흐른다… Norway 또 다른 물의 도시 ‘올레순’

    예이랑에르와 직선 수로로 연결된 산간 마을 헬레쉴트 인근에서 655번 도로를 타면 웅장한 노랑스달과 만난다. 렌터카 여행의 묘미는 바로 이런 점에 있을 터다. 가고 싶고 보고 싶은 곳을 제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것. 이름에서 눈치챘겠지만, 노랑스달은 빙하가 흘러간 흔적을 제대로 살필 수 있는 거대한 협곡(달)이다. 노랑스달에서 시작된 피오르는 외예를 거쳐 우르케 선착장까지 이어진다. 이 길에서 호텔 유니온을 만난 건 뜻밖의 소득이었다. 19세기에 지어진 호텔은 고풍스럽다.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 탐험가 로알 아문센, 영국의 추리소설 작가 아서 코난 도일 등이 이 호텔에서 묵어갔다고 한다. 방문마다 묵었던 인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는 올레순이다. ‘올레’는 노르웨이 말로 장어를 뜻한다. 그러니 이름을 풀자면 장어 형태의 좁고 굴곡진 수로를 끼고 있는 마을쯤 되겠다. 올레순은 아르누보(신예술) 양식의 건축물이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모두 7개의 섬에 마을이 형성돼 있다. 악슬라 산 전망대에 오르면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레고 블록 같은 고풍스런 건물들과 좁은 수로를 오가는 크고 작은 배들, 그리고 넓게 펼쳐진 주변 섬들이 ‘북유럽스러운’ 풍경을 펼쳐낸다. 올레순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아틀란테하브스파르켄(대서양 수족관)이다. 주변 바다 지형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인 친환경 수족관으로 유명하다. 건물 안팎으로 다양한 체험, 관람시설이 조성돼 있다. 올레순은 흔히 ‘아르누보의 도시’라 불린다. 도심의 건축물들이 아르누보 양식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1904년 겨울, 화마가 도시를 휩쓸었다. 당시 건물 대부분이 목재로 지어져 피해가 더 컸다. 이때 아르누보 양식에 영향을 받은 젊은 건축가들이 도시 재건에 나섰다. 이들은 3년에 걸쳐 대리석과 벽돌로 건축물을 지었다. 20세기 중반 들면서 아르누보 양식은 본거지인 서유럽에서조차 영향력을 급속히 잃었지만, 올레순은 유럽 전체에서도 보기 드문 아르누보 건축 양식이 밀집한 도시로 남게 됐다. 올레순 중심가에 들면 둥글고 뾰족한 첨탑, 건물의 벽면과 출입구를 다양한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건축물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아치형 창문들과 층별로 다른 모양의 창문들도 아르누보 건축 양식의 특징이라고 한다. 1907년 지어진 시내 중심가의 아르누보 센터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주변 섬을 돌아보는 맛도 각별하다. 바람에 몸을 누이는 사초와 바다 위에 견고하게 선 빨간 등대, 그리고 그 너머 웅장한 자태로 서 있는 설산까지, 그야말로 이국적인 풍경이 한가득이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섬 주민들과 눈인사라도 나눌 때면 가슴이 저릿해진다. 올레순에서 엘링쇠위아 섬과 발데뢰위아 섬, 이스케 섬을 거쳐 고되위아 섬까지 갈 수 있다. 3개의 해저터널과 1개의 연도교를 지난다. 4㎞ 안팎의 해저터널은 내리막 구간과 굽잇길이 많아 운전에 조심해야 한다. 특히 내리막의 경우 저단 기어로 엔진 브레이크를 걸어도 금방 시속 100㎞에 달할 만큼 경사가 급하다. 해저터널에서 빠져나올 때마다 섬들은 다양한 풍경을 선사한다. 고되위아 섬의 호그스타이넨 등대가 특히 인상적이다. 섬에서 바다로 돌출된 곶부리 끝에 홀로 서 있다. 북대서양의 변화무쌍한 날씨를 이겨내고 있는 모습에서 강인함이 잔뜩 묻어난다. 등대 주변엔 옛 고분 흔적과 두 개의 커다란 빗돌도 남아 있다. 마지막 밤. 숙소 맞은편의 빨간 등대가 눈에 띈다. 지어진 지 150년이 넘었다는 등대는 객실 1개짜리 실제 호텔이다. 이웃한 호텔에서 운영하고 있는 특별 객실이다. 1층은 침실, 2층은 욕실이라는데 하루 묵는데 550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그 붉은 등대 너머로 백야의 해가 저문다. 글 사진 올레순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한진관광이 6월 20일~7월 11일 매주 토요일, 총 4회(6월 20·27일, 7월 4·11일) 인천~오슬로 직항 대한항공 전세기를 운항한다. 일년 중 피오르가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국적기를 타고 방문할 수 있는 기회다. 환승 없이 오슬로까지 곧장 날아가는 덕에 비행시간도 대폭 줄어든다. ■인천~오슬로 상설 직항 편은 없다. 카타르 항공에서 인천을 출발해 카타르 도하를 경유, 오슬로까지 가는 항공 편을 운항하고 있다. ■본격적인 백야는 6월부터 시작된다. 밤 10시 무렵까지 훤하다. 시차는 한국보다 7시간 늦다. 서머타임은 10월 25일까지다. 평지 기온은 우리의 늦은 봄쯤에 해당되지만 산 꼭대기는 여전히 눈이 쌓여 있다. 늘 겉옷 하나쯤은 준비해야 한다. ■화폐는 노르웨이 크로네다. 1크로네는 약 150원. 전압은 한국과 같은 220V다. ■렌터카 비용은 오슬로 수령·반납의 경우 중형 경유차가 1일 180달러(볼보 S60 기준)다. 크리스티안순 수령, 올레순 반납의 경우 비용이 추가돼, 1일 276 달러다. 내비게이션 13달러는 별도다. 한데 스웨덴에서 만든 차라 탑재된 내비게이션 지도 또한 스웨덴 중심이다. 노르웨이에선 다소 불편하다. 구글 맵과 병행해 사용하길 권한다. ■올레순에 간다면 꼭 바칼라우를 맛볼 것. 소금에 절여 말린 대구를 요리한 것으로, 우리의 황태 비슷한 식감을 준다. 곁들인 소스도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는다. 시내 중심부의 ANNO 식당이 잘 한다. ■오슬로 시내 관광 때 ‘오슬로 패스’를 구입하면 편리하다. 버스·트램 등과 박물관·전시관 등 다양한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24시간권 어른 320크로네, 48시간권 470크로네. 오슬로공항·철도역 등의 관광안내소에서 살 수 있다.
  • 한국인 체질 120년간 태음인 줄고 소양인 늘었다

    한국인 체질 120년간 태음인 줄고 소양인 늘었다

    ‘사상(四象)의학’의 창시자 이제마는 1894년 펴낸 ‘동의수세보원’에서 “1개 고을에 1만명이 있다고 볼 때 태음인은 5000명, 소양인은 3000명, 소음인은 2000명 정도이고 태양인은 10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썼다. 그로부터 120여년이 흐른 지금도 한국인의 이런 체질 분포는 유효한 것일까.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한의학연구원의 진희정 박사팀은 우리나라 사람 4000명을 대상으로 사상 체질 분포를 분석한 결과를 전통 의학 분야 국제학술지 ‘BMC 보완·대체의학’ 최신호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한의사의 1차 진단과 체질별 한약 처방을 바탕으로 다시 사상 체질을 감별하는 방법으로 4000명을 분석했다. 그 결과 태음인이 전체의 39.2%를 차지했고 소양인은 33.7%, 소음인은 27.1%의 분포를 보였다. 태양인은 거의 없었다. 19세기 말 이제마가 당시 사람들의 체질 분포를 정확한 수치로 제시했던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따져 볼 때 태음인은 전체 국민의 50% 수준에서 40% 수준으로 약 10% 포인트 줄어든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 소양인과 소음인은 과거보다 증가했다. 태양인이 거의 없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상의학은 사람의 체질을 네 가지로 나눠 체질에 맞는 한의학 치료를 시행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의료 모델이다. 소음인은 작고 마른 체격으로 신장 기능은 좋지만 소화기관이 약한 편이다. 태음인은 뼈대가 굵고 이목구비도 큰 편으로, 간과 위가 튼튼하지만 폐와 기관지는 약하다는 특징이 있다. 머리가 작고 둥근 소양인은 위장 기능은 좋지만 신장 기능이 약하다. 태양인은 폐 기능은 좋지만 소화 기능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팀은 태음인이 감소하고 소양인·소음인이 증가한 데 대해 “전쟁과 산업화 등 격변의 시기를 거치면서 인구구조가 변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한국인의 체질 분포가 변하면서 관리해야 할 질환군도 달라질 것으로 예상됐다. 실제로 연구팀은 이번 연구에서 체질별로 잘 걸리는 질병의 빈도를 조사했다. 그 결과 태음인은 소음인·소양인에 비해 복부 비만이 많고 이로 인해 당뇨병·고혈압 같은 각종 성인질환 발병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소음인의 경우 고지혈증과 뇌졸중 증상이 많고, 소양인은 당뇨병이 많았다. 진 박사는 “사상의학 체질 분포에 대한 종합적이고 객관적인 통계로는 동의수세보원 이후 처음 나온 것”이라며 “체질과 특정 질병 간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이 모든 게 불평등 때문

    이 모든 게 불평등 때문

    불평등을 넘어/앤서니 B 앳킨슨 지음/장경덕 옮김/글항아리/512쪽/2만2000원 이따위 불평등/이원재 외 지음/북바이북/256쪽/1만5000원 “미국의 소득 및 부의 불평등이 10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에 근접했다.” 지난해 10월 재닛 옐런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 의장이 한 콘퍼런스에서 밝힌 말이다. 미국 연준의장이 불평등 문제를 공개 거론하기는 처음이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퓨리서치센터가 지난해 글로벌 태도조사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큰 위험’을 물은 결과 응답자들은 ‘불평등’을 압도적으로 꼽았다. 불평등 문제가 미국을 포함한 지구촌 최고의 화두로 떠오른 셈이다. 보수 주류경제학자들도 불평등의 심각성을 공공연하게 입에 올린다. 불평등은 왜 생겼고, 그 양상은 어떤가, 그리고 해결할 길은 없는 것일까. ‘불평등을 넘어’와 ‘이따위 불평등’은 그 어려운 화두를 정색하고 풀어낸 책들이다. ‘불평등을 넘어’가 ‘불평등 연구의 대가’인 옥스퍼드대학 너필드칼리지의 앳킨슨 특임연구원이 쓴 불평등 연구 총론이라면 ‘이따위 불평등’은 국내 불평등 관련 저술을 총괄해 한국사회의 민낯을 그려낸 서평 모음이다. ‘불평등을 넘어’는 돌파구 찾기에 비교적 낙관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 한껏 심해지도록 내버려 두면 우리는 19세기형 세습자본주의로 돌아갈 수 있다.” 지난해 전 세계를 뒤흔든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의 이 지론과는 조금 다른 입장을 견지한다.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 낙관론의 배경으로 불평등이 축소됐던 제1·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25년간의 역사적 전력을 소개한다. 실제로 1914년과 1945년 최상위 소득자의 몫에 관한 자료를 보유한 8개국 중 대부분의 나라에서 1945년 전체 총소득 중 상위 1%의 몫이 18.6%에서 7.4%로 줄었다. 저자는 이 상황을 노동시장에 적극 개입한 정부의 역할과 미국의 뉴딜정책, 그리고 노동조합 강화를 들어 설명한다. 이 사례에 얹어 비교적 가까운 시기의 중남미 상황은 불평등 축소의 또 다른 교훈으로 소개된다. 중남미 17개국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2000년대 거의 모든 나라에서 불평등이 감소했다. 더 많은 교육을 받은 근로자들의 임금 프리미엄 감소와 정부의 누진적인 소득이전, 최저임금의 큰 폭 상승 등이 주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각종 통계를 보면 1980년을 고비로 상황이 역전됐다. 이른바 ‘불평등의 회귀’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전대의 교훈을 다시 되살릴 수 있을까. 저자는 노력을 통해 불평등을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강자가 주도하는 시장에 그저 맡겨 두고 방관할 게 아니라 제도적으로 적극 개입해 평등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공정경쟁에는 성과 일부를 지속적으로 재분배하는 게 필수라는 것이다. 특히 이 대목이 눈길을 끈다. “불평등에 대한 사고의 틀과 정책 패러다임을 바꿔야 하며, 무엇보다 기술변화와 시장의 힘, 그리고 세계화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키우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부터 버려라.” 이에 비해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이따위 불평등’이 그린 한국상황은 암울한 편이다. 노숙인들이 겪어야 하는 삶의 비참함,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치료받을 수 없는 현실, 노동의 주체이면서 노동현장에선 한사코 약자인 노동자들…. 한국사회에서 나름의 함의를 가진 경제학자, 사회학자, 교수, 언론인, 출판인, 작가 등 다양한 이력의 저자들이 쓴 25권의 서평을 통해 불평등 상황이 어떤 교묘한 책임 회피 과정을 통해 퍼지는 지를 세밀하게 포착해냈다.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사회의 불평등은 극도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촘촘해 보이는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단번에 올라갈 수도 있지만 그 문이 누구에게 언제 열릴 지 모르는 일이며, 그 문이 언젠가 나에게 열릴 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기대 때문에 사람들은 불평등의 질서를 수호하는 가난한 문지기가 된다”(‘불평등 이전의 세계는 어떠했나’·이하영) 기획회의 편집위원회 명의의 책 서문대로라면 “하루가 멀다 하고 풍문으로 들려오는 갑질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이 극한에 치달았음을 보여주는 방증”일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불평등만 평등하게 누리는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은 깜깜한 민낯 그리기에 멈추지 않고 ‘가장 아픈 곳이 몸의 중심’이라는 식의 희망 섞인 대안도 빼놓지 않고 있어 눈길을 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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