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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녹색공간] 세계 최하위권 맴도는 환경분야/안병옥 시민환경연구소 부소장

    시간은 모든 것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을 막아주는 자연의 섭리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현재의 노력만으로 우울했던 과거를 단숨에 털어버릴 수는 없는 모양이다. 며칠 전 세계경제포럼이 스위스 다보스에서 발표한 환경지속성지수 평가 결과는, 삶의 질을 희생시켜왔던 지난날 근대화의 자화상으로 읽힌다. 우리나라가 146개 나라 중 122위로 29개의 OECD 국가 중에서는 꼴찌를 면치 못했다는 것이다. 미국 예일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의 환경전문가들이 만든 환경지속성지수는 모두 76개의 평가항목을 종합한 결과다. 단순히 환경의 질만 평가한 것이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환경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사회적 역량까지도 고려하고 있다. 환경부는 2002년 142개 나라 중 135위였던 것에 비추어 순위가 올라간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눈치다. 하지만 인구밀도가 높고 사회 여건이 좋지 않은 방글라데시와 스리랑카에도 뒤졌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GDP 대비 에너지소비량과 재생에너지 비율로 결정되는 생태효율성이 2002년 109위에서 올해 119위로 하락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는 우리 경제의 미래와도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몇 주 뒤에 발효될 예정인 교토의정서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교토의정서는 과다한 에너지 소비로 지구가 더워져 기상이변이 발생하는 현상을 막기 위한 국가간의 약속이다. 우리나라에는 온실가스 감축 의무가 2013년부터 적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한낱 의정서 따위가 무슨 대수냐고 할지 모르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아홉번째로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나라다. 이번에도 석탄소비량과 1인당 온실가스배출량에 따른 환경지속성은 각각 144위와 124위인 것으로 드러났다. 온실가스 감축 의무가 적용되면 당장 철강 1t을 생산하는데 이산화탄소를 얼마나 배출했는지를 따지게 된다. 감축량을 지키지 못하면 막대한 돈을 들여 배출권을 사들여야 한다. 최악의 경우 우리나라 산업 전체가 붕괴되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환경세 도입으로 산업구조를 에너지 저소비형으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오염을 일으키는 화석에너지에 더 많은 세금을 물리는 대신 근로소득세는 낮추자는 것이다.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에너지 비용 지출이 늘어나지만 그만큼 근로소득세가 줄어 조세부담은 늘어나지 않는다. 또 화석에너지를 적게 쓸수록 환경세 부담이 적어져 실질소득이 증가한다는 이점도 있다. 기업은 근로소득세 경감으로 더 많은 인력을 고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파트나 댐, 도로 건설 위주의 환경파괴형 토목건설산업의 구조조정도 시급하다. 기업들이 풍력이나 태양에너지와 같은 재생에너지 사업에 투자 비중을 높이도록 길을 열어야 한다. 환경친화적인 소비를 장려하고 생산구조를 자원순환형으로 바꾸어야 한다. 비료사용량 138위, 농약사용량 143위인 농업 현실을 타개하려면,‘농업의 생태적 현대화’를 국가 발전 전략의 하나로 추진할 필요도 있다.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모스코비치는 세기별 패러다임의 변화에 주목한다.18세기와 19세기의 핵심적인 문제가 시민들과 노동자들의 정치적 권리 확보와 관련된 ‘사회의 문제’였다면,20세기 이후의 주된 문제는 생태계 파괴에서 비롯된 ‘자연의 문제’라는 것이다. 환경지속성지수 발표를 계기로 환경문제의 해결에 국가의 장래가 달려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으면 한다. 안병옥 시민환경연구소 부소장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진인왕, 한국판 전륜성왕?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진인왕, 한국판 전륜성왕?

    요즘은 ‘우담발라’가 꽤 자주 피는 것 같다. 연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최근에도 충북 단양군청과 충남 논산 성불사에 우담발라가 피었다고 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법화경’에 보면 우담발라는 부처나 전륜성왕(轉輪聖王) 같은 성인이 출현할 때만 핀다고 한다.3000년에 겨우 한 번 필까 말까 한다는데 생물학자들은 그것이 실상 풀잠자리알 또는 곰팡이에 불과하단다. 어쨌든 우담발라가 피어 있는 성불사의 금륜 스님은 상서로운 징조라며 “을유년에는 평화와 번영, 남북통일을 기원하고 싶다.”고 했다. 우담발라. 작디 작은 몇십 송이 꽃인가, 곰팡이에 스님은 참 크고 묵직한 기원을 매달았다. 그런데 나는 우담발라가 피면 등장한다는 전륜성왕과 ‘정감록’의 진인왕 사이에서 비슷한 점을 발견한다. 전륜성왕은 부처의 세속적 모습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불경을 결집한 아소카 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불심이 깊고 태평성대를 실현할 왕이 바로 전륜성왕인데 민중은 진인왕에게 바로 그런 역할을 기대했다. 정감록의 진인은 무엇보다 현실의 고난을 헤쳐 간 민중의 꿈을 형상화시킬 의무를 졌다. 진인왕은 조선왕조의 기득권층인 양반을 벌주고 신분구조를 뒤엎으며, 서구열강과 그들의 종교를 물리치고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할 민중의 구세주였다. ●진인은 못된 양반을 생지옥으로 1785년 정조 9년 또 한 차례 정감록 사건이 터졌다. 주모자들은 나라가 셋으로 쪼개진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유씨, 장씨, 김씨가 삼국의 왕이 된다고 했다. 그 뒤 나라를 통일할 진인(眞人)은 제주 700개 섬 가운데 어딘가 숨어 때를 기다린다고 했다. 사건의 주모자들은 그 진인이 마음대로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고 하면서 이미 서씨와 정씨 두 사람이 진인의 명에 따라 사람들의 허물을 낱낱이 기록한 일종의 ‘선악적(善惡籍)’을 작성중이라고 했다. 18세기말 민중이 진인의 출현에 걸었던 기대가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우선 주목되는 게 그 ‘선악적’이란 장부다. 딱히 양반의 허물만 기록한다고 명기돼 있지는 않다. 그러나 평민을 못살게 구는 양반들의 악행을 기록하는 데 그 중점이 있다고들 여겼을 것이다. 진인은 민중의 구세주였기 때문이다. 나라가 바뀌어도 무식한 아랫사람들로서야 당장 무슨 벼슬을 기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저 양반놈들 망하는 꼴 좀 보자.’는 것이 그들의 희망이었다. 현실은 물론 정반대였다. 여러 지방에서 양반들은 동약(洞約)이나 향약을 실시해 장부를 비치해두고 말 안 듣는 하층민들을 기록해 뒀다가 벌을 줬다. 윗사람을 몰라본다, 불효한다, 형제간에 불화한다는 등의 죄명이 양반들의 ‘선악적’에 기록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인이 민중의 편에서 선악 장부를 만들고 있다는 소문은 진인의 인기를 더욱 높였을 법하다. 통상적으론 양반 편에서 작성하는 것인데, 양반을 벌줄 수 있는 선악적이라니 얼마나 통쾌하랴. 진인의 상벌은 현세에서 시행된다는 점도 민중으로선 무척 달가운 일이었다. 자기들은 별다른 죄도 없이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데 약자들을 괴롭히며 놀고먹는 양반, 놀부 같은 그들이 밉고 싫었을 것이다. 민중은 자기들 눈앞에서 그런 못된 양반들이 생지옥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그리고 민중들은 지옥이란 말을 꺼낼 때마다 자연스레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을 떠올렸을 것이다. 지옥(범어 나라카·Naraka)은 사후세계란 뜻인데 그 참혹한 광경은 ‘목련경’에 자세하다. 석가모니의 큰 제자 목련존자의 지옥방문 이야기는 민간에 널리 알려졌다. 문맹인 사람들도 지옥도란 종교화를 통해서 지옥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불교의 지옥은 종류도 많아서 각기 8대 열지옥(뜨거운 지옥)과 한지옥(추운 지옥)이 있고, 그 아래 또 32개 소지옥이 있다고 한다. 진인은 선악 장부에 기록된 악인을 문자 그대로 생지옥에 보낼 것이 분명했다. ●푸른 옷(靑衣)은 천주교 신부요, 서구열강이다 진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또 있었다. 어찌 보면 좀 뜬금없는 소리 같기도 한데, 진인은 서양 종교인 천주교도 퇴치해야만 했고 서구열강도 물리쳐야 했다. 물론 이런 기대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말까지 서서히 무르익어 갔다. 북경에 파견된 조선의 사신일행이 거기 와 있던 예수회 신부를 알게 된 것은 이미 17세기부터였으나 천주교가 국내에 유입되어 본격적인 신앙운동이 벌어진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조정은 잔뜩 긴장하여 천주교를 엄금하였지만 그 세력은 제법 급속하게 늘어났다. 이런 가운데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층민들의 일부는 천주교의 문을 두드렸지만 천주교를 이단시하는 사람도 많았다. 조정의 ‘계몽’도 한몫했지만 천주교에서 조상의 제사를 금지한다는 게 그들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천주교에 대한 민중의 반발과 두려움은 정감록에도 감지된다.1923년판 정감록의 일부인 ‘무학비결(無學秘訣)’에서 푸른 옷이 남쪽에서 쳐들어오는데 ‘스님 같되 스님은 아니라’고 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여태 한반도엔 없었던 새로운 부류의 성직자 즉, 신부들이 침략자란 것이다.‘푸른 옷’은 본래 좀더 먼저 쓰인 ‘도선비결(道詵秘訣)’에서만 하더라도 미지의 외부인으로 해석될 뿐이었다.‘푸른 옷을 입고 남쪽에서 오니 오랑캐도 아니요, 왜적도 아니다.’라고 했다. 하필 왜 푸른 옷인지를 누구도 설명할 수 없다가 천주교의 국내 활동이 심각성을 띠게 되자 푸른 옷은 어느덧 서양신부로 비화됐다. 19세기 초에는 서양 함대의 파병을 요청하는 천주교 신자 황사영의 편지가 발각되어 여론이 비등했다. 연달아 천주교박해사건이 터졌으며 국내에 잠입한 프랑스 신부도 처형되었다.19세기 중반에는 그 여파로 프랑스 함대가 공격했고 설상가상 통상문제로 미국함대도 쳐들어 왔다. 그러자 이제는 서구열강 자체가 침략의 장본인으로 부상했다. 이런 변화를 기록한 것이 역시 정감록의 일부인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이다.‘푸른 옷과 흰 옷이 서쪽, 남쪽에서 동시에 침략한다. 이때 정씨가 바다 섬에서 군사를 이끌고 나온다.’ 역사란 아이러니요, 거기서 나는 또 정감록이 갖는 현실 적응력을 본다. 서양선박의 출몰을 계기로 17세기 후반에 해도진인설이 등장했었는데(연재3호 참고),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19세기 말엔 거꾸로 해도진인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 서양함대요, 서양신부였으니 말이다. ●동학의 최제우 새 세상 구현할 진인으로 1859년 최제우는 서학에 반대한다는 뜻에서 ‘동학’이란 이름의 새 종교를 만들었다. 그 뒤 1894년 동학은 서양과 일본을 물리치고 탐관오리를 내쫓아 백성을 구하겠다며 갑오동학농민운동을 벌였다. 한 마디로 동학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내부의 지배층만이 아니라 외세란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 바탕 위에 동학은 새 세상을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그것이 이른바 ‘후천개벽’이다. 최제우의 제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에게서 진인의 모습을 찾으려고 했다. 그들에게 최제우란 존재는 새 세상을 구현할 초인이었다. 진인은 서양세력의 위협에서 민중을 구해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 새 질서를 가져다줄 구세주였다. 그러나 모든 일을 진인 혼자 하는 것은 아니다. 방씨, 두씨 및 곽씨 성을 가진 3장군의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각각의 성씨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들의 활약상이 ‘토정가장결’에 나와 있다. “곽장군이 요동의 군사를 이끌고 방씨, 두씨 장수와 함께 왜적과 서남 오랑캐를 무찌른다. 청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돕는다. 정씨를 돕고 이씨를 공격한다. 그러면 이씨는 제주로 들어갈 것이나 4∼5년간의 운수에 지나지 않는다.” ●진인은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한다 두어 줄밖에 안 되지만 숨가쁜 격변, 그것도 국제적인 변화를 예언한다. 하층민중이 국제정세에 민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더라도 그들 나름의 생각이 없지 않았을 것은 물론이다. 특히 주목되는 구절은 일본과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이어서 조선의 이씨왕조를 무너뜨린다고 한 점이다. 먼저 외부에서 제기된 문제를 극복하고 그런 다음 비로소 내부문제에 착수한다고 한 점이 인상적이다. 다 아는 대로 일·청 두 나라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해 한국을 괴롭힌 장본인으로 수백 년이 지난 뒤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두려워했다. 더욱이 두 나라는 19세기말 한국에 진출, 내정을 간섭하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런 까닭에 대다수 민중은 진인이 나타나 그들 두 나라도 없애버리기를 바랐던 것이다. 특히 일본의 멸망에 대한 기대가 커, 일본 정벌론까지 등장하게 된다. 정감록의 한 파트인 ‘서계이선생가장결(西溪李先生家藏訣)’엔 호랑이해부터 뱀해 사이 진인이 일본을 쳐서 항복을 받는다고 했다. 호랑이는 섬나라 일본에 존재하지 않는 동물의 왕이며 뱀은 용과 더불어 성인, 또는 왕을 상징한다. 구한말 한반도 지도를 그릴 때도 한국 사람들은 이를 호랑이로 인식했다. 일본 사람들은 일본이 포항과 장기 앞바다에 등대를 설치한 것에 원한을 품기도 했다. 그곳은 호랑이의 꼬리에 해당하는데 등대가 세워지면 호랑이 꼬리에 불을 지른 셈이라는 것이다. 호랑이를 죽이려는 계략이라며 등대를 당장 허물라고 했다. 웃고 넘어갈 이야기지만 어쨌거나 막강한 일본을 이기려면 그런 주술에라도 호소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예언서에 언급된 일본정복설은 허망한 소망에 불과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은 해가 갈수록 더 많은 한국산 미곡을 수입했고, 값싼 면직물을 한국으로 대량 수출했다. 결과적으로 대다수 민중은 전례 없는 쌀 부족에 시달렸다. 값싸고 품질 좋은 수입산 면직물을 당해낼 길 없어 일반 농가의 면포(綿布) 생산은 위축돼 갔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른 뒤 한국을 집어삼키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예언서에는 그런 역사적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했던 민중의 열망이 표현돼 있다. ●진인왕과 보양법, 밀교 그야말로 초인적인 업적을 이룰 진인왕에 관해 정감록의 일부인 ‘동차결’은 이렇게 점치고 있다.‘태조의 성은 정(鄭), 이름은 홍도(紅桃), 자는 정문(正文), 무오생이다. 섬 가운데 평실에서 나와 계룡산에 건국한다.’ 정진인의 이름 ‘홍도’(붉은 복숭아)는 도교적이다. 복숭아는 수명과 성적 능력을 상징한다. 특히 그 빛이 붉다면 복숭아 중에서도 일품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름은 ‘정문’, 문(文)을 바로잡는다고 돼 있다. 통치 질서와 윤리도덕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진인은 유교적 덕성을 겸비한 존재다. 무오생이라 함도 의미가 있다.10간의 5번째인 ‘무(戊)’와 12지의 7번째인 ‘오(午)’는 각기 중간의 홀수, 즉 중양(重陽)이다. 진시황의 생일도 단오 또는 중양이었다. 이런 남성은 불세출의 영웅이라 한다. 진인왕은 도교적 성격이 강한 만큼 도교서적에 나오는 진인이 되는 방법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다. 도교에선 양기, 성적 능력을 극대화시키면 절로 진인이 된다고 본다. 그것이 양생법이다. 불교의 분파인 밀교에도 거의 똑같은 가르침이 있다. 당나라 때 도사 손사막이 지은 ‘방중보익(房中補益)’을 보면, 정액을 잃지 않고 93명의 여성과 성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했다. 몸에 내재한 이성성(二性性)을 살리게 돼 진인이 된다는 말이다. 허무맹랑한 얘기 같지만 밀교는 물론 힌두교에서도 다 그렇게 봤다. 정액을 몸 밖으로 쏟아내지 않고 변화시켜 뇌로 보낼 수만 있다면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유사종교의 지도자들은 이를 빙자해 간음 사건으로 물의를 빚기도 한다. 그들로서는 진인 될 수행을 했다고 강변할지도 모르겠다.1937년엔 백백교 사건이 발생했는데 교주 전해룡은 간음과 범법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무려 350명의 남녀신도를 살해했다고 한다. ●진인왕이 다스릴 새 세상 진인왕이 다스릴 새 세상의 특징을 ‘동차결’은 이렇게 적어놓았다.‘여러 대를 두고 내려오던 양반은 상사람이 되며, 상사람은 오히려 양반이 된다. 부처를 섬기는 사람들 가운데서 인재를 뽑아 쓴다.’ 짧은 내용이지만 정감록을 믿던 민중에겐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목이다. 진인왕이 평등사회를 실현한다고 볼 순 없지만, 조선사회의 신분질서를 뒤엎고자 한 민중의 의지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상사람이 양반되고 양반이 상사람 된다고 하였으니 그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진인왕은 유불선 삼교합일의 바탕 위에 존재하지만 그 본질은 불교적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재를 불교에서 구할 리가 없지 않은가. 또한 여기서 나는 조선후기 민중이 성리학적 지배 이념에 반발해 불교에서 대안을 찾고 있었음을 본다. 조선말의 혁명가 김옥균도 불교신자였으며, 이동인과 같은 개화승려도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를 융성시킬 진인왕은 전륜성왕이라고 생각한다. 불교 경전에 보이는 전륜성왕은 모두 4명이다. 공교롭게도 예언서에서 진인왕에게 왕업을 도울 세 아들이 있다고 한 것과 맞아떨어진다. 신라의 진평왕도 아들의 이름을 동륜, 금륜 등으로 불렀다. 그 역시 스스로를 전륜성왕으로 봤다는 증거다. 전륜성왕 가운데 첫 왕은 철륜왕인데 진인왕이 그에 해당한다. 그 뒤를 이어 동륜왕·은륜왕·금륜왕이 차례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게 불교의 가르침이다. 불교신자로서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은 진인왕의 협력자인 세 아들에게도 당연히 그런 역할을 기대한다. 전륜성왕이 출현할 때 우담발라가 핀다고 했다. 서두에서 말했듯 이미 우담바라는 피었다. 과연 전륜성왕은 오는 것일까. 전륜성왕이 가진 7개의 보물 중 하나인 거사보(居士寶)는 고아, 노인, 병자 등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을 모두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 더러 전륜성왕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예언서 속의 진인왕은 서양열강, 중국, 일본을 평정하고 동아시아에 새 질서를 구축한다고 했다. 정감록은 당대 민중의 현실적인 문제를 극복할 대안이었다. 그 예언이 실질적인 힘을 발휘했느냐는 별개 문제다. 대안이란 점에서 정감록은 예언서로서 생명력을 오래도록 유지했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열린세상] 소득 2만달러시대와 서비스산업/이영선 연세대 경제학 교수

    18세기, 산업혁명 이후의 일이다. 많은 사람이 농업을 떠나 제조업에 종사하기 시작하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우려하기 시작하였다. 제조업이란 농업이나 광업의 생산품을 재료로 가공품을 생산해 낼 뿐 본질적인 가치를 만들어 내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제조업에 매달린다면 가치의 근원인 농업생산이 줄어 경제적 문제가 발생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농업과 광업과 같은 일차산업에 매이지 않고 제조업을 발전시킨 나라들이 19세기의 강국이 되었다. 우리나라도 뒤늦게 제조업을 발전시켜 신흥공업국의 대열에 끼어들었으며, 공산품을 국제시장에서 교역함으로써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그런데 최근 우리 경제의 생산구조에서 서비스의 비중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또 우려를 표명한다. 서비스업은 본질적인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조업을 지속적으로 육성해 나가야 한다는 논리이다. 제조업만이 경제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생각하면 서비스업은 가시적인 생산품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근원적인 가치를 생산해 내지 못하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다. 사실 유물론자였던 칼 마르크스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을 한데 묶어 비생산적 계급으로 분류하면서, 구체적인 물건을 생산하지 아니하는 서비스업은 가치를 생산하지 못한다고 규정하였다. 그 이론에 따라 서비스업을 경시해 온 사회주의 국가는 물건을 많이 생산했는지는 모르나 소비자와 연결되지 못한 경제구조를 보임으로써 결국 경제적 붕괴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높은 일인당 국민소득을 보이는 선진국일수록 국민총생산에서 서비스업의 생산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는 점이다. 일인당국민소득 4만달러에 가까운 미국은 서비스업의 비중이 75%이고, 그보다 조금 낮은 일인당소득을 갖는 일본은 72%이다. 일인당국민 소득이 2만달러 정도인 호주도 서비스업의 비중이 71%여서 우리나라의 경우인 55%보다 매우 높은 비중임을 알 수 있다. 국민소득 2만달러 이상인 모든 나라가 우리나라보다 높은 서비스업의 비중을 보이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최근 우리나라는 일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면 잠재성장률이 감소하느니, 일자리가 모자라느니,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경제성장은 산업구조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장을 위해서 기존 산업에 대규모의 자본을 투여할 경우 소위 한계생산성이 체감하여 생산성이 떨어질 뿐 아니라 투여된 자본의 비효율 때문에 경제적 위기가 닥쳐 올 수도 있다.1990년대말 우리가 겪었던 외환위기, 경제위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 우리나라의 서비스업이 발전해야 한다. 서비스업은 단순히 외식업이나 개인서비스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보다 더 높은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교육, 보건, 법률, 금융, 그리고 문화산업이 발전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 산업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 우선 이런 산업들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고방식이 확립되어야 한다. 물건을 생산하는 산업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서비스산업의 중요성이 온 국가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또한 더욱 중요한 것은 경쟁없이 산업은 발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의 서비스 산업을 국제적 경쟁에 내놓아야 한다. 사실 우리의 문화산업은 이미 국제적으로 높은 경쟁력을 보이고 있다. 한류(韓流)가 동아시아를 뜨겁게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스크린 쿼터의 유지는 더 이상 논리적 근거가 없다. 서비스산업이 개방되어서 국제적 경쟁을 겪어 나갈 때 국민들이 보다 질 높은 서비스를 누릴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서비스 산업의 생산성도 크게 높아질 것이다. 소득 2만달러 시대의 달성을 위해 서비스 산업의 발전이 필수적임을 우리 모두가 인식해야 할 때이다. 이영선 연세대 경제학 교수
  • 옥스퍼드 세계 영화사/제프리 노웰 스미스 엮음

    영화사에서는 흔히 영화의 기원을 100여년 전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벌인 활동사진 이벤트에서 찾는다. 그러나 영화는 사실상 뤼미에르 형제보다 두 달 앞서 베를린에서도 막스 스클라다노프스키에 의해 상영됐다. 움직이는 환영을 창조한다는 의미에서는 16세기 이탈리아의 카메라 옵스쿠라(어둠상자) 실험이나 18세기 에티엔 가스파르 로베르송의 판타스마고리아(마술환등) 같은 선구적인 실험들도 있었다. 요컨대 영화는 한 번의 ‘빅 뱅’으로 탄생한 게 아니라 여러 사건들의 연속 속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옥스퍼드 세계 영화사’(제프리 노웰 스미스 엮음, 이순호 등 옮김, 열린책들 펴냄)는 이처럼 열린 시각으로 세계 영화의 역사를 다룬다.1000쪽 가까운 분량에 색인 항목만 1만개가 넘는 이 책은 무엇보다 백과사전적인 서술의 방대함이 독자를 압도한다. 전 세계 80여명의 영화학자와 평론가들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대중의 성장과 양차대전 등 20세기를 특징짓는 사건들이 영화에 미친 영향이나 1980년대 이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에 나타나는 백인 피해의식의 배경 등을 살핀 글들은 영화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돕는다. 영화는 다른 산업과 달리 개인에 의존하는 측면이 강하다. 뿐만 아니라 그런 개인, 즉 스타를 창조한다. 영화사에서 스타의 비중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 책에는 위대한 영화인 132명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구한 설명보다 천재 감독 오슨 웰스의 삶을 한 번 들여다보는 것이 더 보탬이 된다는 게 이 책의 입장이다.5만 9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 정도령은 누구인가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 정도령은 누구인가

    ●정도령과 진인 ‘정감록’ 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계룡산 밑에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된다는 ‘정도령’이다. 달리 ‘진인(眞人)’이라고도 한다. 누구나 빤히 아는 것 같으면서도, 조금만 따져들면 실체가 애매한 것이 바로 그 진인이고 정도령이다. 실체를 잘 모르면서도 사람들은 정도령에게 제법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모양이다. 여러 해 전 일이었다. 대기업 총수 정모씨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했는데 당시 칠순 노인이던 그를 가리켜 ‘정도령이 나왔다.’며 사람들이 수군댔다. 도령치곤 참 늙은 도령이었다. 맨손으로 일어나 굴지의 대기업을 키운 사람이었던 만큼 그 뚝심이면 못 할 일이 없다고들 봤던 것일까. 하여간 그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고 그 뒤에도 정도령 감은 몇 명 더 있었다. 그런데 막상 정도령이란 칭호는 ‘정감록’에 안 보인다. 고작 ‘정성(鄭姓)’ 또는 ‘진인(眞人)’이 언급되는 정도다. 때론 그 정씨와 진인이 같은 인물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내가 조사해 보니 민중들이 쉬쉬하며 진인의 출현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먼저 조성됐고, 한참 뒤 그 진인이 정씨라는 예언이 등장했다.18세기 후반 들어 ‘왕조실록’에 ‘정성진인’이란 단어가 보인다. 물론 체통 있는 양반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정감록’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에 섞인 단어다. 그런데 정진인이 난데없이 웬 도령인가? 알다시피 도령은 양반집 사내아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정도령은 정진인에 대한 일종의 애칭이다. 도령이란 호칭을 달리 풀이할 수도 있다. 진인이 초능력자라 해도 정식으로 민중 앞에 나서기 전엔 아직 검증이 안 된 인물이다. 시쳇말로 딱지를 못 뗀 일종의 미성년이다. 진인으로 검증을 받을 때까진 정도령, 검증이 끝난 한참 뒤에는 성스러운 임금이다. 진인이 정씨라는 수사의 논리는 무엇인가? 정감록에 그 답이 있다. 이 예언서는 이성계의 조상인 이심, 이연 형제와 정몽주의 선조 정감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돼 있으나 3인이 두 집안의 실제 조상은 아니었다. 상상속의 인물들일 뿐이었다. 그런데 민중은 유독 정감을 더 사랑했다. 엄밀한 의미에선 책 제목을 3인의 대담집이라 해야 옳을 테고 실제로 ‘정이문답(鄭李問答)’이라 한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매우 드문 경우고 대개는 ‘정감의 기록’이란 뜻에서 ‘정감록’이라 불렀다. 그 제목엔 역사의 승리자는 조선왕조의 적대자들, 즉 정씨 성을 가진 진인과 그의 추종자들이라는 주장이 담겨있다. 그런데 새 왕은 왜 하필 정씨여야 하는가? 정씨는 ‘정감록’의 맥락에서 볼 때 고도의 상징성을 지닌다. 조선왕조를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정씨로 대표된다는 뜻이다. 이 주장의 배후엔 민중들의 집단적 기억이 배경에 깔려 있다. 민중은 조선태조 이성계의 즉위를 반대하다 죽은 정몽주 이야기를 잊지 못했다. 조선왕조 건설의 주역이었으나 태종에게 제거된 정도전, 선조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정여립, 영조 때 일어난 반란 사건에 연루된 정희량의 이름을 들먹이기도 했다. 정씨는 조선왕조와 상극(相剋)이므로, 새 나라는 반드시 정씨가 왕이 돼야 한다는 민중의 주장이었다. 따지고 보면 김씨, 이씨, 박씨 등 다른 성씨 중에도 역모에 휘말려 죽은 사람은 수두룩했다. 그런 점에서 정씨 자손이 다음 세상의 주인이 돼야 한다는 논법은 너무 순박하다. 진인이 반드시 정씨 집안에서 출생해야 될 이유는 없었다.20세기 전반 어느 종교 운동가는 ‘정(鄭)도령’은 ‘정(正)도령’이라고 했다. 정씨 진인설의 핵심을 찔렀다고 본다. 정도령은 성씨가 무엇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민중이 믿고 따를 만큼 도덕적인 사람인가가 최고 검증요건이었다. ●진인이란? 조선시대엔 성리학이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였고, 그에 따르면 ‘도덕군자’가 제일이었다. 그 군자를 제쳐 두고 갑자기 왜 진인이란 생소한 존재가 나타나 왕조를 뒤엎는가? 그 이유를 나는 민중의 숨은 뜻에서 찾는다. 새 시대는 군자 되기를 외치는 사람들이 큰소리치게 내버려둬선 안 된다는 민중의 노여움이 느껴진다. 성리학을 아주 폐기처분하지는 못할망정, 민중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자.’는 뜻을 그렇게 밝힌 것이다. 진인(眞人)의 사전적 정의는 참된 도(道)를 깨달은 사람, 또는 진리를 체득한 사람이다. 진인이란 표현은 본래 도교 용어다. 영어로 된 도교전문 서적을 뒤적여 봤더니 ‘완벽한 인간 존재(perfect human-being)’라고 한다. 인간적 한계를 초월한, 신선과 비슷한 존재가 도교의 진인이다. 불교 쪽은 어떤가 싶어서 알아보았다. 놀랍게도 현대의 임제선에선 진인을 핵심개념으로 삼고 있다. 몇 해 전 어느 신문 기자가 서옹 스님(전남 장성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에게 진인의 개념을 물었다. 그때 서옹의 답은 이러했다. “거짓말 없는 사람이 ‘참사람’이지. 거짓이 없으면 양심에 부끄러울 게 없고, 양심이 깨끗하면 절대 자유로울 수 있는 거야. 정치인, 경제인, 관리들 정말 거짓말 너무 많이 하더군.” 서옹 덕분에 현대 불교의 진인 개념이 명료해졌다. 진인은 절대자유인이라 불릴 만한 참사람, 수행의 최고단계에 오른 사람이다. 조선후기 민중은 그런 진인이 나와서 세상을 확 뒤집어 놓기를 바랐다. 정감록에 함께 실린 예언서 ‘동차결(東車訣)’에는 진인왕이 건국한 뒤엔 불교신자가 대접받는다고도 되어 있다. 불교적 진인관이 맥맥이 흐르고 있다. 이 글을 쓰다 말고 잠시 나는 호남지방에 퍼져 있는 진묵 대사 설화를 떠올렸다. 진묵은 석가모니의 현신이었다는 전설도 있긴 한데, 그는 발달된 기계기술 문명을 가져다 백성들의 고생을 덜어주려고 잠시 서역으로 날아갔다고 했다. 육신은 절간에 두고 진묵의 영혼만 잠시 떠났던 것인데, 속된 유학자 김봉국이 그 육신을 불태우는 바람에 그만 개화의 꿈이 허망하게 무너졌다고 한다. 사실 진묵은 17세기 인물이었고 문명개화와는 무관하였다. 그럼에도 일부 민중은 유교가 못 이룬 개화의 꿈을 진묵이라면 이룰 수 있었을 거라고 여긴 것이다.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민중이 기다리던 진인은 도덕적으로 특출한 인물이어야 했다. 그런데 도덕성을 통치자의 필수요건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민중의 생각은 양반들의 정치관을 닮았다. 유교의 성현(聖賢)이 진인으로 대체되고 만 느낌이다. 민중은 기존질서에서 벗어나고자 애썼지만, 제도가 아니라 인물을 최우선으로 삼는 유교적 사유의 틀에 갇혀 버렸다. 그런 한계를 인정해도 민중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고 대안을 궁리하였다는 사실은 무척 중요하다. 민중의 의식 속에 자리잡은 진인은 구원자라는 점에서 미륵불 또는 기독교의 재림 예수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예수의 재림에 앞서 벌어질 아마게돈에서의 선악의 일대결전이나 최후의 심판 같은 것은 진인의 출현과 무관하다. 진인이 세상에 나올 때 전쟁과 환난이 예정되어 있긴 해도 그것으로 역사가 완결되지는 않는다. 예수는 죽은 사람의 영혼까지도 불러다 영생을 준다지만 진인은 산 사람들을 좀더 살기 좋은 사회로 이끌 따름이다. 진인은 미륵불처럼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성불시키지도 못한다. 진인의 문제해결은 한시적이고, 부분적이다. 진인은 예수나 미륵불에 비하면 훨씬 현실적으로 문제에 접근한다. ●때가 이르면 환상의 섬에서 나올 진인 현대의 우리로서는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조선후기 민중은 섬에서 진인이 나온다고 보았다. 깊은 산골짜기의 신비한 동굴도, 오랜 암자도 아니었다. 바다 한가운데 이상향으로 상정된 섬이 있고, 거기서 때가 되면 진인이 출현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상향을 말하다 보니 ‘이엿사나 이여도사나 이엿사나 이여도사나’로 시작되는 제주의 이어도 타령이 생각난다. 그 노래에는 이어도에 살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이어도는 파랑도라고도 하는데 제주도 남제주군 마라도(馬羅島)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수중섬(水中島)이다. 엄밀히 말하면 암초(暗礁)다. 해수면 아래 깊이 잠겨 있어 파도가 몹시 심할 때만 모습이 잠깐 보인다. 그런 이유로 이어도는 예부터 이상향으로 자리매김돼 왔다. 서양에서도 미지의 섬을 이상향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었다. 영국의 토머스 모어(1478∼1535)는 1516년 정치 공상소설 ‘유토피아(아무 데도 없는 나라란 뜻)’를 발표했다. 모어는 히스로디라는 뱃사람에게 어떤 신기한 섬나라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유토피아’인데 실제로는 당시 영국사회를 호되게 비판하고 저자가 동경하던 이상세계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 섬은 공화국이고, 모든 시민은 하루 6시간만 노동하면 된다고 했다. 거기선 남녀 모두 교육 혜택을 받아 교양이 풍부하다. 전쟁이나 다툼도 전혀 없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평등하다. 누구나 이상향에 가보고 싶겠지만 그곳을 찾아가긴 불가능하다. 토머스 모어는 자기가 속한 세상을 이상향으로 만들자고 했다. 조선시대 민중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 민중이 세상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조선왕조의 정치적·사상적 통제력은 그 시대 지구상 어느 나라보다 강했다. 그래서였을 테지만 민중은 이상향에서 구원자를 불러오고자 했다. 모어의 유토피아엔 법과 제도가 구원을 보장해 주었다. 그곳엔 구원자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조선 민중의 이상향은 그 반대였다. 사람이 문제를 푸는 열쇠였다. 민중은 진인이란 구원자를 통해 현실 문제를 풀려 했다.17세기 후반부터 역사기록에 나타난 해도진인(海島眞人)이 그것이다. 섬에 희망을 걸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되나? 바다는 신화시대로부터 생명이 숨쉬는 희망의 요람이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민중은 대부분 뭍에 살며 농사에 종사했다. 그런 판국인데 진인이 낯선 섬에서 나온다니 이해하기 어렵다. 이 문제로 씨름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고민 끝에 나는 이런 짐작을 해봤다. 진인을 하필 섬에서 찾는 이유는 민중을 괴롭혀온 조정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공간이라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권력의 공백 지대는 음모와 꿈이 무르익을 수 있다. 게다가 17세기부터 먼 바다에서는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낯선 서양 선박(황당선, 이양선)이 출몰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의외의 사건소식을 접한 민중은 바다에서는 상상하지 못한 일도 가능하다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이 해도진인설로 굳어졌다고 본다. 서양 선박에 관해 좀더 이야기해 보자. 그때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의 나가사키를 오가며 무역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조선 배보다 수백 배나 큰 거함을 타고 대서양·인도양을 가로질러, 대만을 지나 제주 남쪽 해상을 통과하여 일본을 오갔다.18세기 후반이 되면 그 큰 서양 선박들이 가끔 서남해에 나타났다. 그 소식을 듣고 실학자 박제가도 놀라 자빠질 정도였다. 배 안에는 생김새, 언어, 습관이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서양 선박은 조선 해안에 표류하기도 했다. 박연, 하멜 등이 그들인데 훗날 하멜은 도망에 성공, 나가사키를 거쳐 네덜란드로 귀국하였다. 그는 ‘하멜표류기’를 통해 유럽각국에 한국을 알리기도 했다. 조선후기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서양 사람은 외계인이었다. 얼마나 먼지 거리조차 짐작할 수조차 없는 곳에서 큰 대포를 장착한, 초대형 선박을 타고 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서양 선박의 출현은 민중의 공포심과 신비감을 동시에 자극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까지 아직 서양 함대가 조선을 침략한 일은 없었기 때문에 두려움 못지않게 신비스러움이 컸다. 이양선이 출몰하는 서남해는 경이로운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 바다에 서양 선박이 나타난 것이 전혀 뜻밖이었듯, 언제 또 새로운 존재가 등장할지 호기심 많은 민중으로선 귀추가 주목되었다. 동해나 서해에도 이상향이 있다는 소문이 가끔 떠돌았지만 남해설은 좀더 유력했다. 어느덧 서남해는 진인의 고향으로 자리매김되고 있었다. 물론 서양배의 출현만 가지고 해도진인설을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 조선후기엔 무인도가 이주지로 각광을 받게 됐다는 점도 언급돼야 한다. 당시는 육지의 개발이 이미 끝난 상태였다. 가난한 민중은 삶의 터전을 섬에서 일구기 시작했다. 한번 민중의 눈길이 바다 쪽으로 쏠리자 수십의 무인도가 유인도로 바뀌었고, 율도·무석국 등 상상의 섬들이 인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런 사회적 맥락을 염두에 둘 때 ‘진인(眞人)이 남해에서 계룡(산)으로 나오면 (새 왕조의) 창업을 알 수 있다.’는 예언의 의미가 충분히 살아난다. 서남해에 서양 선박이 출몰하고, 무인도가 개척되는 가운데 민중은 해도진인의 출현을 동경했던 것이다. 육지로 나온 진인은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진인의 정체를 밝히려는 나의 탐구는 다음 호로 이어진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서울광장] 대체입법/이목희 논설위원

    [서울광장] 대체입법/이목희 논설위원

    연말연초 국가보안법 논란 과정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여야가 강경파에 휘둘리는 모양을 보면서 정계개편을 떠올렸다. 열린우리당에서 끝까지 국보법 완전폐지를 주장하는 인사는 민주노동당에 합류한다. 한나라당에서 국보법 손질에 반대하는 사람은 자민련으로 간다. 민노당을 왼쪽, 자민련을 오른쪽으로 하고 열린우리당의 실용파와 한나라당의 개혁파를 묶어 중도개혁 정당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 정치권처럼 양보와 타협의 미덕이 없는 곳은 양당제가 맞지 않는다. 밀어붙이기와 강력저지는 신물난다. 중도파가 과반 정당이 되고, 좌우 양쪽에 중간 크기의 정당이 있는 게 낫다. 나라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좌우의 주장이 무시되지 않는 형태다. 지금 정치권에서 거론되는 정당개편은 전혀 엉뚱한 방향이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통합이 추진되고 있다. 한나라당은 당명을 바꾸는 정도로 중도개혁으로 탈바꿈했다는 주장을 할 태세다. 충청권에서는 자민련의 대표성이 약하다면서 새 정당의 필요성이 운위되고 있다. 호남표, 영남표, 충청표를 의식할 뿐이다. 이념의 잣대로 모이고 흩어지고 할 움직임은 아직 없다. 지난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집토끼론과 산토끼론이 치열하게 대립했다. 기존 지지층 유지에 주력하느냐, 다소 깨지더라도 중앙으로 보폭을 넓히느냐의 차이다. 새해 들어서는 여야 모두 산토끼론이 우세하다.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중도파를 향한 손짓이다. 하지만 지금의 정당구조를 갖고는 중도쪽의 목소리가 실제 입법에 반영되기 힘들다. 국보법은 물론 주요 경제입법에서 다수의 산토끼론이 소수의 집토끼론에 밀리기 십상이다. 대통령까지 유연한 입장을 보인 마당에 여당이 국보법 폐지안을 강행처리할 용기는 없어 보인다. 대체입법이 안 된다면 연말과 유사한 상황이 반복된다.“폐지를 못하느니 때를 기다리자.”는 여권내 강경론과 “그냥 두는 게 백번 옳다.”는 야권내 강경론이 목표는 다르지만,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이로니컬하다. 2월 임시국회에서 대체입법안을 어떡하든 통과시킴으로써 산토끼론이 대세임을 실천으로 보여줘야 한다. 대체입법에 성공한다면 올해는 실용주의 중도개혁파가 확실히 힘을 얻게 된다. 경제·민생 입법이 같은 방향으로 가고, 국가경제를 살릴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멋진 경구가 있다.“나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견해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당신의 편에서 싸우겠다.” 개인의 사상과 선택을 존중하는 자유주의 바탕위에 정치 민주화를 쟁취한 것이 서구의 역사다. 우리는 거꾸로다.1987년 6·10항쟁에 이은 직선제 개헌으로 민주주의는 수준급에 올랐다. 자유화는 아직도 게걸음이다. 국보법의 고무·찬양죄, 이적표현물 소지죄는 자유주의의 근본을 부정하는 대표적 법조항이다. 지난해 말 여야 협상파들은 이 부분을 없애는 데 잠정합의했다. 안보를 챙기는 부분은 남기고, 자유주의를 부정하는 규정을 없앤다면 나름대로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일이다. 대체입법만 되어도 국보법 기소자의 90%가 자유로워진다. 일반의 안보불안이 가시는 날, 완전폐지해도 된다.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확정되면 여야 지도부는 바로 내부 정지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그리고 강경파를 설득할 수 있는지 빨리 판단해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국회 표결에서 이념 스펙트럼이 드러나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해보라. 당론을 미리 정하지 말고 자유투표에 맡겨보자. 의사당에서 중간세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표로써 알아보자. 전원위원회를 소집해 한번쯤 난상토론을 할 필요가 있다. 국보법 자유표결 결과는 정당재편의 궁극적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OST 새음반]

    ●오페라 유령 이미 발매된 1장짜리 음반(14곡 수록)의 인기의 여세를 몰아 발매된 2CD 디럭스 에디션. 예스24에서 예약 구매만으로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두 장의 CD에는 영화 전편에 흐르는 모든 음악뿐 아니라 대사까지 담겨 있어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상상할 수 있게 한다. 풍부하고 깊이 있는 오케스트라 사운드에, 크리스틴 역의 에미 로섬, 유령 역의 제라드 버틀러 등의 드라마틱한 노래가 영화의 감동을 다시 한번 재현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단짝 히사이시 조가 음악을 맡아 다시 한번 아름다운 선율을 과시했다. 영화 배경이 된 18세기 유럽을 연상시키는 서정적이고 유려한 곡들이 가득하다. 영화 엔딩신에 흐르는 주제가 ‘세계의 약속’은 소피 역의 성우로 활약한 여배우 바이쇼 지에코가 직접 불렀다. ●알렉산더 그리스 출신 작곡가 반젤리스가 자국의 영웅을 음악으로 표현했다.1981년 올림픽 영웅들을 그린 영화 ‘불의 전차’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반젤리스는 ‘블레이드 러너’‘미싱’ 등 수많은 영화에서 수준 높은 음악들을 구사해왔다. 이번 앨범은 전작 ‘1942 콜럼버스’를 능가한다는 평. 서사극에 맞게 스케일 크고 웅장한 음악에서 가슴 뛰는 사랑의 멜로디까지 고루 담았다. ●샤크 윌 스미스, 안젤리나 졸리, 잭 블랙 등 할리우드 스타들의 목소리 연기로 화제가 된 애니메이션 ‘샤크’. 크리스티나 아길레라(Car Wash), 저스틴 팀벌레이크(Good Foot), 밥 말리의 아들 지기 말리(Three Little Thing), 메리 J 블라이즈(Got To Be Real) 등 유명 가수들이 참여한 OST도 유명세에 있어서 밀리지 않는다.OST 자체가 한 장의 컴필레이션 음반인 셈.‘라이언 킹’으로 아카데미상을 거머쥔 한스 짐머가 음악을 맡아 인간 세상을 패러디한 바다 도시를 경쾌한 힙합리듬에 실어 표현했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 정감록에 미국이 나온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 정감록에 미국이 나온다?

    1945년 8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다. 그러나 미처 봄날을 음미할 새도 없이, 제2차 세계대전의 승자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진출해 38선을 그었다. 그 때 어느 유명한 신종교 지도자가 신도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선포했다.“미소의 두 힘이 서로 상대하여 버티나 태양이 중천에 오르면 밝은 세계가 되리라.” 태양은 누굴까? 중천에 오른다 함은? 전후 맥락 없이 튀어나온 이 선언에 신도들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메시지만은 분명했다. 미국과 소련이 이 땅에서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것은 잠깐이고, 곧 민족의 구세주가 등장하여 외세를 물리치게 된다는 것! 누가 구세주일까? 김구, 여운형, 조만식, 이승만, 박헌영…. 아니면 김일성? 세상 사람들은 거물 정치가들을 놓고 누가 믿을 만한 민족지도자인지를 점쳤다. 극좌파, 중도파, 극우파의 이념적 스펙트럼에 따라 각자 선택의 폭은 넓었으나 민심의 합일점은 없었다. 지난한 시기였다. 그 때 정감록의 신봉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국난을 뚫고 나갈 진인은 어디 있는가. 계룡산에서 도를 닦았다는 진인, 지리산에서 뛰쳐나온 진인, 주역에 능통한 진인, 부처, 예수, 공자의 영이 내린 진인이 속속 등장했다. 그러나 고대해 마지않던 진인은 나오지 않았다. 해방정국은 갈수록 꼬이더니 남북분단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정감록’에 보이는 6·25전쟁 제2차대전 이후 전세계는 미소를 정점으로 한 냉전질서에 편입되었다. 양측의 긴장이 팽팽해지더니 1950년 마침내 6·25전쟁이 터졌다. 한국이 안고 있던 내부 문제가 곪아 터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미소 양측의 대리전쟁이라는 설도 있다. 원인이야 어떻든 전쟁이 장기화될 때 괴로운 건 민중이다. 그들은 난리가 언제 끝날지, 살아갈 방도는 무언지 필사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정감록 신봉자들은 가족을 이끌고 병화불입지지(兵火不入之地, 난리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땅)를 찾아 숨는 사람도 생겼다. 정감록 예언에 따라 충북 단양군 영춘면 삼풍리로 숨었던 사람들에게 직접 들은 이야긴데, 전쟁 내내 인민군은 커녕 국군도 본 적이 없었단다. 그들은 정감록의 영험을 믿는 듯했지만 그곳은 어느 편 군대도 진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지독한 오지였다. 꼼꼼히 정감록을 살피던 민중의 눈엔 요거다 싶은 예언 몇 구절이 눈에 띄었다.‘호랑이와 토끼해를 당하여 남북이 서로 솥의 발 같이 대치하리라.’ 우연히도 전쟁이 터진 1950년은 호랑이해인 경인년이었다. ‘금강산 서쪽과 오대산 북쪽은 12년간 도둑의 소굴이 된다.’는 구절도 있어 강원도 북부에 있는 금강산과 오대산을 경계로 남북이 무력 대치한다는 예언으로 볼 수 있었다. 다만 12란 숫자는 논란거리가 되었다. 남북의 대치기간이 글자 그대로 12년인가, 또는 갑자, 을축 이런 식으로 12지를 10간과 조합한 1갑자 60년인가? 총성이 멎은 지 벌써 52년째, 글자 그대로의 12년은 이미 지났고 60년 한 갑자가 되려면 8년이 남았다. 6·25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을 상징한다는 대목도 회자(膾炙)되었다.‘인천과 부평 사이 밤중에 배 1000척이 정박한다.’고 했다. 수도권에 ‘시체 더미’가 쌓인다고도 했다. 맥아더 장군이 수많은 전함을 거느리고 인천에 상륙했고 서울을 탈환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럴 듯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 구절은 19세기 후반부터 민중을 떨게 했던 전쟁공포증의 흔적 또는 청일전쟁이 남긴 집단적 기억이 재현된 것이라고 나는 판단한다(연재 제1회 참고). ‘정감록’의 또 다른 구절도 민중의 눈길을 끌었다.‘두 서쪽 땅 곧 황해도와 평안도는 3년간 천 리 안에 사람과 불 때는 연기가 없을 것이요, 또한 동쪽 골짜기, 즉 강원도는 심히 꺼릴 땅이라.’ 사람들은 이 구절을 전쟁이 3년 동안 지속된 까닭으로 봤고, 뺏고 뺏기는 육박전이 벌어진 장소가 강원도였다는 예언으로 해석했다. 중공군의 개입,1·4후퇴도 예언되어 있었다.‘백두산 북쪽에서 오랑캐의 말이 긴 울음소리를 내면 평안도와 황해도 하늘에 원한 맺힌 피가 넘칠 것이다.’ 오랑캐라,1950년 한겨울 급작스레 대거 투입된 중공군으로 해석됐다. 중공군은 물밀듯 남하를 계속, 평안도 황해도를 삽시간에 휩쓸었다. 인해전술이란 말은 정감록에 안 보였지만 그 신봉자들에겐 1·4후퇴를 할 수밖에 없던 사정이 이해될 듯 했다. ●미국대통령을 ‘정도령’으로 착각? 그런데 ‘정감록’ 예언에 대한 기발한 풀이는 따로 있었다. 전쟁 당시 미국의 원수(元首) 트루먼! 트루(true)는 참 진(眞), 먼(man)은 사람 인(人)! ‘정감록’에 예언된 진인(眞人)은 다름 아닌 트루먼이라는 해석이다. 트루먼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의회의 자문도 받지 않고 미군의 파병을 결정했다. 트루먼이 아니었으면 공산군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났다. 일제 식민지 후반, 특히 1937년 7월 중일전쟁 이후 민중의 살림살이는 참 고단했다.1945년의 해방도 반쪽짜리였고 민중의 형편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전쟁까지 터지자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바로 그런 시점에서 미국은 각종 구호물자를 한반도에 대량으로 투입하였다. 수만의 병력과 현대식 무기를 동원하여 전쟁도 수행했다. 사람들은 새삼 미국의 위력을 실감했다. 어떤 이들은 이처럼 구차히 살 바에야 차라리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기를 바랐다. 국회로 보내주기만 하면 미국에 가 달러를 더 많이 동냥해 오겠다며 표를 구걸하는 정치인들도 있었다. 그런 판국이라 미국 대통령을 진인, 정 도령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심지어 1953년 미국 대통령이 아이젠하워로 바뀌자 그가 진짜 정 도령이란 주장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말을 주고받은 민중도 많았다.“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 그리고 일본은 일어난다!” 미국-믿다, 소련-속다, 일본-일어나다. 다소 장난스러워 보이는 말투지만 미소는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란 인식이 확산된 결과 생긴 민중의 구호였다. 비록 패전국이긴 해도 일본을 조심해야 한다는 다짐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오래 전부터 민중은 일본뿐만 아니라, 서양 강대국들을 경원시했다.1894년 동학농민군이 내건 4대 구호 중에 ‘축멸양왜(逐滅洋倭, 서양놈들과 왜놈을 내쫓는다)’란 구절이 있어 그런 분위기를 잘 설명해준다. 그러다가 일제 말기 조상 전래의 성, 말까지 빼앗기자 민중은 주변국가인 중국과 소련에 다소 기대를 걸었다.‘조지로 목친다.’ 이 말이 민간에 퍼졌다. 조지란 남성의 성기를 뜻하는 남부지방 사투리다. 그것으로 어떻게 목을 자를까? 조(조선), 지(지나, 중국), 로(로서아, 소련)가 힘을 합해 목(목인, 히로히토 일본 천황)을 벤다는 예언이었다. 민중의 소망을 담았지만 꽤나 섬뜩한 내용이다. 누구나 한 번만 들어도 절대 잊을 수 없게, 그러나 아무도 그 뜻을 눈치 챌 수 없게 은어에 담았다. ●‘황해도서 난리 발생’ ‘삼국분기설’ 들먹 ‘정감록’으로 6·25전쟁의 참혹함과 미국의 개입을 읽었다니 얼핏 이해가 잘 안될 수 있다. 예언서에 보이는 오랑캐는 만주족 같은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경고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려 때는 북쪽으로부터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의 침입이 잇따르고 홍건적의 난도 있었다. 조선 초에는 여진족의 침입이 만만치 않았다. 인조 때는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이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서북지역은 이민족의 침입로가 되다시피 했고, 그 지역 민중은 외침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기도 했다. 외침의 기억은 민중들에게 잊지 못할 일이 되었고, 이것이 ‘정감록’에 ‘백두산 북쪽에서 오랑캐의 말이 긴 울음소리를 내고’ 라는 식으로 정착된 것이다. 오랑캐의 말울음 소리는 현대에 와서 중공군의 남하로 이해되었다. 이런 변화는 ‘정감록’을 처음 전파시킨 조선시대 술사(術士)들로서는 전혀 예측 못할 일이었다. ‘정감록’에는 외침과 무관하게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발생할 난리가 예고되어 있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서북지방에 대한 차별이 무척 심해서 그 지역 사람들의 불만이 컸다. 순조 연간에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여러 고을을 휩쓸었고, 그 와중에 많은 인명이 살상됐다. 사실 서북지방은 18세기 이후 과거시험에서 많은 합격자를 배출했다. 그럼에도 푸대접을 받았다. 내가 조사한 바로는 ‘정감록’이 가장 먼저 등장한 곳도 서북지방이었다. 대다수 서북지방 사람들은 조선왕조의 종말을 마다할 일이 없었고 그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할 때, 북쪽에서 반란이 재발해 남북에 두 나라가 대치한다는 남북분국설이 정감록에 기록된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기왕 분국설에 대한 말이 나온 김에 몇 마디 보태보겠다.‘정감록’에는 삼국 분기설도 나온다. 나라가 세 동강 난다는 예언인데, 이런 말은 특히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유행했다. 우리 역사에 삼국시대도 있었고 후삼국시대도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고려 때도 이의민은 신라를 부흥시킨다는 구실로 경주일대를 소란케 했다. 이런 역사적 기억이 있어서겠지만, 민중은 나라가 혼란에 빠질 때면 3국 분기설을 들먹였다. 그런데 3이란 숫자는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코드다. 미륵이 하생할 장소도 산이나 물이 셋으로 나뉘는 곳이었고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길지(吉地) 중에도 3도봉 같은 곳이 포함된다. 지금까지 알아 본 역사적 배경은 아랑곳없이 현대의 정감록 신봉자들은 ‘정감록’에 보이는 서북지역의 혼란상을 국토분단,6·25전쟁의 참상, 또는 1·4후퇴를 예언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민중의 예언 해석에는 시대적 맥락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 할아버지 세대가 그 구절을 뭐라 해석했든, 나는 내 시대의 문제를 푸는 새 해석을 좇겠다는 식이다. 이런 태도에서 예언 문화엔 층위랄까 나이테가 보태졌다. 현대의 민중이 미 대통령 트루먼을 ‘정감록’에 언급된 진인으로 본 것은 어떤가. 진인이란 새 왕조를 열 국왕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정씨 성을 가진 이가 나타나 계룡산 아래 도읍을 정한다고 보는 것이 사실상 정설이다. 우리 역사에서 진인의 도래설이 처음 나타난 것은 17세기였다. 그 때부터 오랫동안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 섬에서 진인이 나온다는 예언)이 인기를 끌었다. 역모를 꿈꾼 사람들은 늘 진인의 출현을 주장했을 정도다. 어쨌거나 진인은 기존질서에 대항해 싸울 영웅이었다. 그런 진인이 1950년대에는 세계 최강대국을 이끄는 지도자, 기존질서의 사령관인 트루먼으로 둔갑했다. 합리적·체계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한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정감록’ 신봉자들의 해석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논리적으론 말이 안 된다. 그럼에도, 시의에 맞기만 하면 민중은 꽤 엉뚱한 해석에도 환호한다. 수백 년 동안 ‘정감록’이 생명을 이어온 까닭은 그것이 시대상황에 맞게 새로 해석될 여지가 많아서다. ●예언서는 민중의 마음을 보여주는 거울 해방 이후 미국의 중요성은 국가 차원에서든 개인의 일상생활에서든 날로 커졌다. 민중은 ‘정감록’에서 미국에 관한 구절을 찾느라 열심이었다. 도대체 미국이란 나라가 이 세상에 있는 줄도 모르던 아득한 시절에 만들어진 ‘정감록’에서 미국에 관한 기록을 찾는다? 여간 우스운 일이 아니지만 필요는 때로 발명이나 발견을 낳는다. ‘정감록’에서 꺼낸 트루먼 진인설과 인천상륙작전설은 억지스러운 발견이었다.1970년대 이후 민중은 미국에 대한 그 이상의 예언을 요구했던지 새 예언서가 등장했다.‘격암유록’,‘율곡비기’,‘송하비결’ 등이 새로 나온 예언서다. 그 중 어떤 것은 특정 종교단체가 배후 조종하여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심지어 기독교 계통의 신종교 단체도 예언서를 빌려 지도자에게 절대권위를 부여한 흔적이 있다. 새 예언서에는 한·미관계가 자주 나온다. 어느 책에는 9·11사태(2001년 9월11일 발생한 뉴욕 세계무역센터 테러사건)도 언급되어 있다. 더욱 경악할 내용도 있다. 미국은 2004년 북한을 폭격하기 시작해,2005년까지 공격을 계속한다. 그리고 2004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부시는 재선에 실패하고 이슬람교도의 저격으로 사망한다는 등등의 예언이 보인다. 그러나 아직까지 미국은 북한을 폭격하지 않고 있으며, 부시는 보란 듯 재선에 성공해서 백악관에 건재하다.2004년의 예언은 완전히 빗나갔다. 내 관심사는 한국 민중이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빗나간 예언에도 투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최근 친미와 반미를 둘러싼 논쟁이 한국 사회의 중요 이슈로 등장했는데 민중의 다수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지배질서에 반감을 품고 있다. 민중은 부시의 대북 강경노선을 못마땅하게 여겼기에, 부시의 낙선과 암살을 예언한 것이다. 민중은 부시를 미워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부시의 북한 폭격설까지 예언으로 등장한 것이다.50년 전엔 현직 미 대통령을 진인이라 일컫던 것을 생각하면 금석지감(今昔之感)이 있다. 민중이 직접 예언서를 저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민중은 예언의 내용을 결정한다. 노스트라다무스든 ‘정감록’이든 사정은 똑같다. 민중의 심리를 정확히 반영한 예언서는 민중의 사랑을 받고 그 생명도 길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예언서는 곧장 버림을 받는다. 민중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정감록’을 해석해왔다. 시대가 바뀌면 그 해석은 늘 달라졌다. 한 시대의 해석은 다른 시대가 되면 효력을 상실한다. 그러나 내가 정감록을 바라보는 관점은 통시대적이다. 미셸 푸코가 말한 지식의 계보학에 가까운 입장이다. 푸코의 말처럼 시공간이 바뀌면 지식과 기억은 변화된다. 요컨대 변화된 사물의 의미를 계보로 정리하는 것이 지식 계보학이다. 나의 정감록 산책도 그렇다. 정감록에 담긴 의미의 변천을 역사적으로 정리하는 것, 이것은 한국 역사와 문화의 나이테를 읽는 새 방법일 것이다. 백승종(푸른역사연구소장)
  • [논술이 술술] 시사 키워드/사형제 논란

    [논술이 술술] 시사 키워드/사형제 논란

    연쇄살인범 유영철에게 사형이 선고된 뒤 사형제도에 대한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열린우리당 유인태 의원 등 여야 의원 175명이 서명한 ‘사형제 폐지 특별법안’이 국회에 제출되긴 했지만 유영철 사건 때문에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형 폐지론자들은 여전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는 사형 집행이 중단된 상태다.59명이 사형이 확정됐지만 1997년 12월30일 23명의 사형을 집행한 뒤 지금까지 7년 가까이 사형은 한 건도 집행되지 않고 있다. 과연 유영철의 사형이 확정된 뒤에도 집행을 하지 않을지 궁금한 부분이다. 어쨌든 정치권 등에서는 다시 법안 폐지를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과 사형제를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사형제는 전 세계 83개국이 시행하고 있으며 112개국은 폐지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특히 유럽연합(EU) 45개국은 전시(戰時)에서도 사형을 할 수 없도록 결정했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2003년 4월 제59차 회의에서 사형제도의 폐지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찬성 24, 반대 20, 기권 8표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미국, 중국, 일본 등은 사형폐지에 다시 반대했다. 한국은 정부 수립 이후 모두 1634명을 사형시켰다. ●데이비드 게일과 유영철 사형제도를 다룬 ‘데이비드 게일’이라는 영화가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텍사스 오스틴 대학의 젊고 패기 있는 철학과 교수 데이비드 게일은 사형제도 폐지 운동 단체인 ‘데스워치’의 회원이다. 게일은 데스워치의 회원이자 친구이며 오스틴 대학 여교수인 콘스탄스가 성폭행 당한 후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자 살인범으로 의심받아 사형을 선고받는다. 콘스탄스의 몸에서 그의 정액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살인범이 아니었다. 백혈병을 앓던 콘스탄스는 자살을 한 것이었다. 게일은 사형이 집행되기 5일전 여기자에게 자신이 무죄임을 암시하지만 무죄를 최종 확인하기전 사형이 집행된다. 콘스탄스의 자살 과정을 촬영한 비디오 테이프는 게일이 죽은 뒤 여기자에게 전달된다. 결국 게일은 오심으로 사형이 집행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이 영화는 사형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오심으로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사형이 집행될 수 있다는 것은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하나의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유영철과 같은 극악무도한 살인마를 살려둬야 할까.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팽팽히 맞서 있다. ●사형은 위헌이 아니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 1996년 11월 헌법재판소는 사형을 규정한 형법 제41조와 제250조 의 관련 조항에 대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결정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형은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형벌로 범죄에 대한 근원적인 응보방법이며 가장 효과적인 예방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자 8조금법(箕子 八條禁法)에 “상살자 이사상(相殺者 以死償)”이라고 했다. 사형은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본능을 이용한 가장 냉엄한 궁극의 형벌로서 그 위하력이 강한 만큼 범죄예방 효과도 클 것이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동등한 가치를 갖지만 가치가 서로 충돌하거나 중대한 공익을 침해하는 경우 국가는 어떠한 생명 또는 법익이 보호되어야 할 것인지 규준을 제시할 수 있다. 사형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공포심과 범죄에 대한 응보욕구가 맞물려 고안된 ‘필요악’이다. ●사형 폐지론자들의 주장 사형의 폐지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들이며, 대표적 인물이 근대 형법학의 시조인 베카리아다. 인간의 존엄성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형벌은 용납될 수 없다. 사형은 오판의 가능성이 있다. 자백, 증언, 과학적 감정 등 증거에도 불확실성이 있다. 미국의 경우 1976년 이후 평균 사형선고 사건 7건 중 1건이 무죄로 입증됐다. 정치적인 도구로 악용된다.1974년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진 지 20시간 만에 8명에 대해 사형이 집행된 인혁당 사건이 그 예다. 사형집행자의 인권도 고려해야 한다. 뉘우치는 사형수들을 집행관에게 죽이도록 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반한다. 사형제도를 유지한다고 해서 흉악범죄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없앤다고 해서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캐나다의 경우 사형을 폐지하기 1년 전인 1975년 인구 10만명당 살인율이 3.09명이던 것이 2001년에는 1.78명으로 오히려 줄었다. ●사형제 존치론자들의 주장 반인륜적 범죄는 사형제도가 없으면 급증할 것이다. 인간은 감성과 이성의 복합체다. 흉악범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이성이 아닌 인간 본연의 감성이다. 흉악범에 대한 복수감정을 야만적이라고 매도할 수 없다. 제도적으로 대신하는 것이 국가 형벌제도이며 형벌의 외면할 수 없는 성질인 응보성이다. 계몽주의 철학은 이성과 범죄인의 인권만을 중시하고 피해자의 인권과 감성을 간과했다. 흉악범에 의해 죽은 피해자의 생명과 유가족의 고통은 어떻게 보상할 수 있는가. 사형은 일부 흉악범 또는 사회 파괴범에 대해 선량한 다수 국민 또는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오판에 따른 사형 집행은 극히 일부다. 재판제도를 개선해 보완할 수 있다. 손성진 기자 sonsj@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 왜 지금도 정감록인가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 왜 지금도 정감록인가

    새해 가장 바빠지는 사람들은 점술인이다. 개명한 세상에 누가 미신 따위에 솔깃하랴 싶지만, 일간지조차 새해를 맞아 국운이 어떠할지를 점친다. 옛날부터 이 땅에는 나라의 앞날을 예언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 뿌리도 제법 깊어서 삼국통일 이전까지 소급된다.‘고려비기(高麗秘記)’,‘고경참(古鏡讖)’이 고대의 예언서라면,‘삼한회토기’ ‘삼각산명당기’는 중세의 예언서였다. 근세의 예언서로는 ‘도선비기’를 비롯해 수십종이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정감록’이다. 18세기부터 민중의 사랑을 받던 ‘정감록’은 국가의 탄압으로 간행되지 못한 채 다종다양한 필사본만 유행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정감록’은 1923년 드디어 활자화되었고 그것이 사실상 정본 취급을 받고 있다. ‘정감록’의 줄거리는 이렇다. 곧 조선이 멸망하는데, 그 때 어디로 가야 살 수 있는지, 그리고 계룡산에 세워질 새 왕조는 언제 나타나는지로 압축된다. 아무 해에 무슨 사단이 터진다는 식의 짤막한 예언이 대부분인데, 한국의 예언서가 대개 그렇듯 60갑자로 햇수가 적혀 있어 세월의 흐름에 구애되지 않는다. ●예언서에 보이는 민중의 공포 ‘정감록’의 비교적 앞쪽엔 이런 오싹한 대목이 있다. 원숭이해 봄 삼월과 성스러운 임금이 다스리는 가을 팔월, 인천과 부평에는 밤중에 배 1000척이 들어오고, 안성과 죽산에 시체가 산처럼 쌓일 것이다. 여주와 광주에는 인적이 영영 끊어져버리고, 수원과 남양에는 피가 흘러 냇물을 이루리라. 한강 이남 100리에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끊어지고, 인적도 영영 사라질 것이다. 전쟁영화의 섬뜩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이 예언은 수도권 전체가 전쟁 통에 쑥대밭이 되고 만다는 이야기다. 작년 2004년도 원숭이해였다. 최악의 경제난으로 먹고 살기 참 힘든 한 해였고 북한의 핵문제로 전쟁 걱정도 컸었다. 북핵문제는 부시 미국 대통령의 강경책이 화근이기도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땅에 그런 참극은 없었다.‘정감록’의 예언이 틀린 셈이다. 그래도 여운은 남는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 구절을 보여주고 의견을 물어보았더니 다들 그렇단다. 과연 ‘정감록’에는 민심을 휘어잡는 묘한 힘이 있나 보다. 서울로 통하는 관문 인천 앞바다에 적을 태운 배가 1000척씩이나 들이닥친다고 했다. 그런 변고가 없다.1592년의 임진왜란, 그보다 5년 뒤의 정유재란도 이처럼 끔찍하지는 않았으리라. 이런 참혹한 예언은 뜬금없이 나오는 예가 없다. 지난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수많은 마을과 도시를 파괴했다. 바그다드 상공에 쏟아진 폭탄이 불꽃놀이 같았고, 명분 없는 전쟁에 죽은 사람만도 10만을 헤아렸다. 훗날 이라크에 예언서가 작성될 경우 미군의 무차별 폭격이 남긴 상흔은 집단적 기억이 되어 남을 것이다.‘정감록’에 담긴 이 대목도 민중의 전쟁공포증으로 헤아려봐야 한다. 우선 인명의 대량 살상을 말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안성 등의 지명이 등장하는 것도 대수롭게 넘길 일이 아니다. 아무래도 ‘정감록’의 예언은 1894년에 발발한 청·일전쟁과 무슨 관련이 있을 것만 같다. 1894년 7월 하순 일본군함은 인천 앞바다에 정박하다가 아산(牙山)·풍도(豊島)로 내려가 청의 해군과 한바탕 싸웠다.‘정감록’에 나오는 인천 앞바다 운운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격전지 아산과 풍도는 바로 예언서에 언급된 남양의 코앞이다. 그 뒤 일본군대는 천안 부근의 성환(成歡)에서, 같은 해 9월에는 평양에서 청나라와 싸워 대승을 거뒀다.‘정감록’에 나오는 안성, 죽산 등도 실제의 전쟁터 성환에서 멀지 않다. 근대식 무기가 동원된 청·일 양국간의 살벌한 전투 장면을 지켜보면서 민중은 공포에 떨었고 이것이 다소 과장된 형태로 ‘정감록’에 아로새겨졌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한 가지 다른 가능성도 있다.19세기 후반부터 한국에는 ‘서양오랑캐’의 침략을 두려워하는 위기의식이 조성되었다는 점이다.1840년 여름, 영국은 4000명의 병력으로 중국의 다구·톈진(天津)을 위협하였고, 이듬해에 다시 1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물밀 듯 난징(南京)으로 쳐들어갔다. 아편전쟁의 놀라운 소식은 연달아 한국에 알려져 조정은 물론 민심마저 발칵 뒤집혔다. 외침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1866년 프랑스 함대가 병인양요(丙寅洋擾)를, 불과 5년 뒤인 1871년에는 미국함대가 쳐들어와서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일으켰다. 흥선대원군은 당황한 나머지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외국과 교섭을 전면 금지했지만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감 속에서 각종 소문과 예언이 유행했다. 갑자기 1000척의 배가 쳐들어와서 수도권을 피바다로 만들어놓을 것이라는 예언은 19세기 후반부터 민중을 떨게 했던 전쟁공포증의 흔적일 것이다. 거기에 청·일전쟁의 집단기억이 덧칠되었다고 보면 무리가 없겠다. ●‘정감록’에 숨겨진 비밀을 읽는 법 10년쯤 전이었다. 역사에 나타난 한국인의 이상세계를 탐구하던 내 눈길이 예언서 ‘정감록’에 닿았다. 한국역사상 대표적인 예언서라면 다들 ‘정감록’을 첫손가락에 꼽았기에 그 책을 끌어당겼던 것인데 실망이 컸다. 거기에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도 없었고, 성경이 약속하는 새 하늘과 새 땅 같은 것도 안 보였다.‘정감록’에는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서술은 없고 대신 알쏭달쏭한 표현만 단편적으로 눈에 띄었다. 하지만 거듭 읽을수록 그게 아니었다. 나는 ‘정감록’이 지닌 독특한 역사적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마침내 ‘정감록’에는 비밀스러운 문화의 코드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정감록’의 한 줄 한 줄은 수천년 동안 생성된 우리 역사와 문화의 나이테였다. 민중은 공포와 절망에 떨면서도 예언 가운데 희망의 빛을 감춰두었던 것이다. ‘정감록’의 문화적 코드는 예언서를 예언서로서 바라보는 편협한 눈으로는 포착할 수 없다. 내 생각으로는 자구의 해석에 매달릴 경우 ‘정감록’은 그저 단편적이고 무질서할 수밖에 없다.‘정감록’을 읽는 옳은 방법은 그게 아니라고 믿는다. 역사의 앞뒤를 재고 정치와 문화를 하나로 뚫어서 읽을 때, 그 비밀스러운 코드는 비로소 풀릴 것이다. ‘정감록’의 밑바탕에는 풍수지리설과 선천후천 교대설(옛 세상이 끝나고 이제 곧 천지가 개벽한다는 주장)이 있다. 맥맥이 흐르는 미륵신앙도 있다. 그런 점에서 ‘정감록’은 한국문화의 젖줄이다. 따지고 보면 동학, 증산도, 원불교와 같은 근현대 한국의 신종교도 ‘정감록’으로부터 생명수를 제공받은 셈이었다. ●‘정감록’과 김지하 ‘정감록’ 공부를 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현대 한국의 지식인 몇몇도 오래 전부터 ‘정감록’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시인 김지하다.‘오적’이란 시를 비롯, 군사독재에 목숨 걸고 맞서 싸운 그의 투쟁담은 듣는 이의 마음을 울린다. 김지하는 사상적으로도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생명이니 살림이니 하는 토종의 생각으로 서양의 다양한 철학과 주의 주장을 아우르고 싶어했다. 그런 김지하가 ‘정감록’을 즐겨 인용하였다면? 김지하는 사실 ‘정감록’을 본떴으며,‘정감록’의 정수를 꿰뚫어 보았다. 이 말이 쉽게 믿기지 않을 사람도 있을 테니 그 이야기를 좀더 해보겠다. 김지하의 책 ‘말뚝이 이빨은 팔만사천개’의 ‘오행’이란 시가 앞서 살핀 ‘정감록’의 예언과 매우 비슷하다. 그 해 여름 복중 큰 눈이 내리고, 큰물이 지고, 큰 흉(凶)이 들고 안성과 죽산(安竹)과 수성과 당성 사이(隨唐間)에 굶어죽은 송장이 산처럼 쌓이고 비석이 땀을 흘리고 우물에 피가 솟고 대꽃이 피고 운운. 여기서 김지하는 전쟁의 참혹상을 흉년의 비극으로 바꿔놓았지만 지명도 그대로 두었고 얼개도 ‘정감록’을 그대로 떠올리게 한다.‘앵적가’의 경우는 더 심하다. 안성과 죽산 사이에 시체가 산처럼 쌓일 것이며 하는 식으로 그는 말을 이었다. 김지하의 패러디는 계속된다.‘이 가문 날에 비구름’에서는 아예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정감록’을 그대로 베끼다시피 했다. 이 작품은 동학의 역사를 한 편의 유장한 시로 풀어낸 것인데,‘정감록’을 빌려다가 최제우가 동학을 개창하게 된 사회경제적 배경을 생동감 있게 그렸다. 왜 김지하는 ‘정감록’을 자꾸 빌려다 썼을까. 단순히 그 예언서의 몇 대목에 관심을 둔 것일까, 아니면 ‘정감록’의 독특한 이야기 전개 방식에서 큰 매력을 느낀 것일까. ●‘정감록’이란 민중의 밥그릇 ‘정감록’을 이야기하다 보면 문득 정경모란 이름도 생각난다. 그는 80년대 중반 운동권의 필독서였던 ‘찢겨진 산하’의 저자로, 남북통일에 관한 이론가로도 유명했다. 그가 일본에서 발간한 잡지 ‘씨알의 힘’에는 ‘삼선각 운상 경륜문답’(‘찢겨진 산하’의 저본)이 실려 있다. 정경모는 그 글에서 민족지도자 김구, 여운형 그리고 장준하 세 사람이 천상에서 만나 민족의 미래를 논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마치 ‘정감록’에서 정감, 이심 및 이연이 금강산 비로봉에 앉아서 나라의 운명을 논의하는 장면과 흡사하다. 정경모와 김지하가 ‘정감록’의 형식과 내용을 빌린 것은 우연이었을까? 그들은 민중의 입장에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염려한 사상가 또는 운동가였고, 그 점이 ‘정감록’을 대한 그들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 같다. 그들로서는 ‘정감록’에 담긴 예언의 내용 못지않게 지난 수백년 동안 민중이 사용해온 비밀스러운 화법을 터득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언서가 그렇듯 민중은 겉으로 절망을 말하면서도 희망의 씨앗을 남몰래 감춰두고 싶어했다. 김지하 등은 그 점을 간파하였다고 할까. 그런 그들에게 ‘정감록’은 일종의 교과서였을 것이다. 민중의 편에 선 지식인들은 실의에 빠진 민중을 고무하고 싶었고 따라서 민중의 혀로 말하는 법을 배우려 애썼다고, 그렇게 믿어진다. 조선 후기부터 오랜 왕조정치에 염증을 내고 있던 민중은 ‘정감록’ 이야기로 수군거렸다. 잊을 만하면 ‘정감록’을 매개로 한 역모 사건이 터졌다. 그 때마다 수십 또는 수백명의 연루자가 붙잡혀 가 매를 맞고 더러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기도 했다. “이제 얼마 안 가서 양반들의 조선이 영영 망하고 말 것이다. 천지개벽하면 시쳇말로 개똥쇠에 불과한 이 몸도 운대가 풀릴 것이다.” 민중은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움켜잡는 심정으로 예언에 한 가닥 기대를 걸었으리라. 집권층의 입장에서 보면 ‘정감록’은 그야말로 혹세무민의 불온서적이었다. 그래서 금서로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정감록’은 합법적으로 출판되지 못한, 그러나 전대미문의 베스트셀러로 남았다. 일제시대까지도 그 인기는 여전해 ‘정감록’이 점지한 길한 땅을 찾아 수만명이 정든 고향을 버렸다. 일제시대 계룡산자락에는 불과 수년새 작은 읍 하나가 들어설 정도였다. 무수한 민중이 한 글자씩 ‘정감록’의 예언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난세에 살아갈 길을 찾으려 노력했다는 점은 무척 흥미롭다. 김지하가 ‘정감록’을 방불케 하는 담시를 연달아 지은 것도 민중의 마음에 희망의 싹을 틔울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정감록’은 예나 지금이나 기댈 곳이라곤 전혀 없는 민중의 희망을 퍼 담는 밥사발이다. ● 정감록이란 조선후기부터 유행한 대표적인 예언서이다. 정도전, 정여립 등이 저자란 설이 있지만 불분명하다. 영조 때 실록에 처음 등장한 뒤 조정의 금령으로 출판, 소지 및 독서가 일체 금지되었다. 지배층에게는 혹세무민의 황당한 책, 민중들 입장에선 위로와 희망의 터전이었다. 곧 조선왕조가 망한다, 살아남으려거든 복된 피난처로 가라, 정씨(鄭氏) 진인(眞人)이 와서 새 왕조를 연다는 것이 예언의 골자다. 조선후기에 일어난 수많은 역모사건과 19세기 말 동학농민운동도 이 책의 영향을 받았다. 수십곳에 정감록촌이 들어섰고, 수천의 신(新)종교단체가 등장했다. 겉보기엔 정감(鄭鑑), 이심(李沁), 이연(李淵) 3인의 엉성한 대담집인데, 풍수지리설·해도진인설·미륵신앙 등이 저변을 흐른다. 그들의 대화엔 은어(隱語)가 많아 해석이 안 되는 대목이 적지 않다. 제목은 달라도 내용이 엇비슷한 온갖 예언서를 ‘정감록’이라 부르기도 한다. ■ 백승종은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現 푸른역사硏 소장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독일 괴팅겐 막스·플랑크 역사硏 초빙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진단학회 총무이사 ●저서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돌베개,2003년)‘그 나라의 역사와 말’(궁리,2002년)‘아버지 난 누구에요’(궁리,2001년)등 다수.
  • [예언으로 읽는 우리역사]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6일부터 매주 목요일 연재

    [예언으로 읽는 우리역사]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6일부터 매주 목요일 연재

    서울신문이 새해부터 역사학자 백승종(47·푸른역사연구소장)씨의 역사 문화 에세이 ‘예언으로 읽는 우리 역사-백승종의 정감록(鄭鑑錄) 산책’을 연재합니다. 1월6일부터 매주 목요일에 실릴 이 연재물은 우리 사회 문화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민족의 예언서 ‘정감록’에 담긴 의미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가는 고급 에세이입니다. ‘정감록’은 동학을 비롯한 새로운 종교의 사상적 모태가 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변혁운동의 추동력도 바로 ‘정감록’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국 곳곳에 이른바 ‘감록촌(鑑錄村)’이 생겨났을 정도로 ‘정감록’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민간신앙의 경지에까지 오른 ‘정감록’의 본질에 대해 우리는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잘못 알려진 것들도 적지 않습니다. 필자에 따르면 ‘정감록’은 18세기 전반 함경도에서 출현했고, 세월이 지나면서 적지 않은 내용상의 변화를 겪었습니다. 한 사람의 창작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친 ‘민중의 저작’인 셈입니다. 그런 만큼 ‘정감록’의 비의(秘意)를 정확히 해독하기는 어렵습니다.‘…백승종의 정감록 산책’은 그 비밀의 코드를 여러 문헌 자료와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독자와 함께 풀어가는 흥미로운 지적 여정이 될 것입니다. 서강대 사학과 교수와 독일 베를린 자유대 한국학과 교수를 지낸 필자는 국내 미시사 연구의 개척자로,‘정감록’에 관한 논문을 6편이나 쓴 최고의 ‘정감록’ 학자입니다.‘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 등 대중적 역사서를 낸 베스트셀러 저자이기도 합니다. 새들은 태풍을 미리 감지하고 안전한 곳으로 부지런히 날갯짓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 선조들도 뭔가 큰 일이 닥쳐올 것 같으면 ‘정감록’을 서둘러 훑어 보았습니다. 거기에 절망을 희망으로 살아내는 예언의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백승종의 정감록 산책’은 ‘정감록’이 결코 단순한 혹세무민의 비기(秘記)나 길흉화복을 점치는 참서(讖書)가 아님을 증명해 보일 것입니다. 필자의 자유분방한 붓끝을 좇다보면 어느새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밝아지고 사유의 지평이 트인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서울신문
  • [예언으로 읽는 우리역사] 정감록 산책 작가의말

    까마득한 문명의 여명기로부터 동서양 어디서나 신탁(神託)과 점성술, 예언과 점이 위력을 발휘하였다. 서양문명의 정화(精華)인 ‘성경’에도 예언가의 음성이 도처에 메아리치고 있다. 예를 들면, 아기 예수가 태어난 베들레헴에서는 그와 동갑내기인 사내아이들이 헤롯왕에게 몰살당했다. 유대의 새로운 왕이 태어났다는 ‘불길한’ 예언이 있었기 때문에 헤롯왕은 심리적 공황에 빠졌고, 드디어는 집단 영아살해를 저질렀던 것이다. 옛날에는 그랬다 치고 첨단 과학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달하고 있는 오늘은 어떠한가. 여전히 대중은 점과 예언의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디지털 세대에 걸맞게 디지털화되어 편리하게 서비스된다.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통해 ‘토정비결’을 보거나 ‘오늘의 운세’를 알아보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의 예언서라면 단연 ‘정감록’이 가장 유명했다. 거슬러 올라가 18세기 이후 ‘정감록’은 한국 사회가 직면한 정치·사회·문화적 문제를 투시하는 거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 국가권력이 특정한 몇몇 가문에 집중되자 왕조에 저항하는 불만 지식인들이 전국에 널리 형성되었다. 이른바 원국지사(怨國之士)였는데, 그들이 ‘정감록’을 퍼뜨렸으며 체제전복을 위하여 많은 사건을 일으켰다. 세월이 흘러 20세기가 되었을 때 문득 나라의 운명은 기울어 한국은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자 시대의 절망과 어둠을 이겨내려는 듯 대중은 다시 ‘정감록’의 예언에 귀를 기울였다. 예언 가운데는 지난 수백 년 동안 한국 사회를 위기로 내몰았던 절망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놀랍게도 새 시대에 거는 대중의 기대 역시 녹아 스며들어 있다. 새해부터 나는 독자 여러분과 함께 예언문화의 향기를 따라가 보려 한다. 지금 빛바랜 ‘정감록’을 책장에서 꺼내 깨끗이 먼지를 털어내고, 알쏭달쏭한 예언에 새겨진 우리 역사와 문화를 만날 채비를 하는 중이다. 끝으로 ‘정감록’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에 대하여 한 마디 보태고 싶다. 어떤 종류든 새 예언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그것이 맞느니 틀리느니 격론을 벌이기가 일쑤였다. 무척 흥미로운 일이긴 하지만 나는 진위를 가리는 그런 식의 논쟁에 끼어들 생각이 별로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미래를 점치는 행위의 정당성을 둘러싸고 누구와 다툴 마음도 없다. 미래가 깜깜해 뵈면 점이라도 쳐서 알아보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딱히 못 배우고 못 사는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많이 배워 출세하고 떵떵거리며 잘 사는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다.1997년 외환위기 때 점술가들은 뜻밖에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회사의 경영자들이 자문을 구하러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평상시 같으면 체면 때문에도 그런 일이 드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 몹시 꼬이면 달라진다. 그러면 다들 예언에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내 관심거리는 바로 예언을 둘러싼 대중의 사회심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백승종 푸른역사연구소장·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 역사갈등 한·중·일 ‘연합’ 가능할까

    ‘동아시아’가 화두다. 세계적인 블록화의 바람에 유럽연합을 부러워하면서도 막상 ‘동아시아연합’을 들추면 대부분 “가능할까?”라고 반문한다. 과거를 두고 한·중·일 3국이 치열한 기억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현대에는 미·중간 갈등과 북핵문제가 미묘하게 겹쳐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단합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해 대답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과거 기억을 더듬고 있다. 먼저 20명의 학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주최로 지난 20일 열린 ‘근대전환기의 동아시아 삼국과 한국’ 학술회의는 일제시대를 중심으로 세밀하게 파고 들고 있다. 개화기 러시아인이나 중국인이 쓴 조선여행기나 조선총독부 치안관계자의 육성녹음, 개화기에 각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잡지 등을 분석해 한·중·일 3국이 서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추적했다. 이에 앞서 지난 16∼17일 15명의 연구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연세대 국학연구원 주최로 열린 ‘동아시아 지역구도:역사의 연속과 단절’ 학술회의에서는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좀 더 시야를 넓혀 동아시아 관계를 조명했다. 우선 ‘명·청(중)-조선(한)-막부(일)’시대 조공·책봉체제의 재해석이다. 이전의 ‘정치적인 상하관계’에서 ‘경제적인 유인’으로 해석의 초점이 이동했다.18세기까지 세계최고의 부를 자랑했던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경제체제가 형성됐었다는 다소 파격적인 근거와 함께다. 또 조공·책봉체제는 정권안정을 위한 왕조끼리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다.20세기 전반 동아시아에 끼치는 영향력은 중국에서 유럽으로, 다시 미국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여기서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동아시아지역의 이익을 요구하고 나선 일본과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일본의 패전 뒤였던 20세기 후반은 역설적이게도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이 사실상 부활한다. 이는 전세계적인 냉전과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한국전쟁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세계경찰 미국은 일본에 역할분담을 요구했다. 이는 미국의 재정부담 증가와 급성장한 일본이 1차적 원인이었고 길게는 일본이 시장논리에 따라 중국에 근접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영·일동맹과 미·일간 태프트-가츠라조약의 부활이라고까지 볼 수 있는 셈이다. 일본학의 권위자 하버드대 앨버트 크레이그 교수가 최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청 강연에서 일본을 ▲선진국 가운데 GNP대비 가장 최저의 군사예산을 가진 평화로운 나라 ▲일본이 다시 호전적 국가가 될 가능성은 0이라고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강대국에 빌붙는 사대,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균세, 스스로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자강. 세가지 갈림길은 결국 개별 국가를 중심으로 본다는 점에서 19세기적인 사고라는 비판이다. 결국 동아시아의 상호작용, 협력의 제도화 노력, 민간연대나 운동 등을 통한 발전 등이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식물 사냥꾼/케여 힐셔 등 지음

    인간은 유사 이래로 식물을 수집해 왔다. 식품이나 치료제로 쓰기 위해 혹은 종교적 제의를 위해 식물을 ‘사냥’해 온 것이다. 기원전 1500년께 이집트의 여왕 핫셉수트는 푼트(소말리아)로 원정대를 보내 자신의 신전에 바칠 향 덤불을 가져오게 했다. 또 알렉산더 대왕은 소아시아 지방으로 출정하던 도중에도 식물이 눈에 띄면 멈춰 살펴 봤다고 한다. 식물에 대한 인간의 열정은 시대를 뛰어 넘는다.16세기 이후 유럽인들은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금과 다이어몬드 등 광물자원만 빼앗은 게 아니다. 그들의 수탈 목록에는 미지의 식물 종(種)이 수두룩했다. 이국의 식물을 사냥하는 일은 처음엔 취미에서 출발해 돈벌이 수단으로 발전하며 차츰 하나의 직업으로 각광받았다. 마침내 식물 사냥꾼(plant hunter)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사냥과 정원 가꾸기에 여념 없던 영국인들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식물 사냥꾼’(케여 힐셔 등 지음, 김숙희 옮김, 이룸 펴냄)은 ‘녹색의 황금’을 찾기 위해 먼 길을 떠났던 독일 식물 사냥꾼들의 치열한 삶을 다룬 책이다. 남아프리카에서 제라늄을 발견한 ‘식물학의 영주’ 파울 헤르만,6000종이 넘는 식물을 중남미에서 들여온 알렉산더 폰 훔볼트,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노랑 양귀비를 발견한 식물학자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등 8명의 식물 사냥꾼 이야기를 들려준다. 책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들어 식물 사냥 덕분에 식물학이 급속도로 발전했음을 밝힌다. 수많은 새로운 식물들을 학문적으로 규명하기 위해선 하나의 통일된 체계가 필요했던 것. 식물분류학의 선구자인 스웨덴의 칼 폰 린네가 식물이름 사전을 만든 것은 그런 배경에서다. 수국, 양귀비, 백합, 제라늄, 난초, 선인장…. 식물 사냥꾼들의 풍요로운 노획물은 유럽의 정원을 꽃피는 낙원으로 만들었다. 식물 사냥꾼은 영국에서는 오늘날에도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이 책에선 그들의 위험하고 자극적인 여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2만 3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씨줄날줄] 브나로드 운동/이기동 논설위원

    모스크바국제공항의 정식이름은 세르메체보국제공항. 세계 유수 여행사들이 서비스, 청결, 안전 등 모든 면에서 ‘최악의 국제공항’으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지만 그 이름만은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한량, 세르메체프백작을 딴 것이다. 모스크바 교외에 위치한 그의 저택은 일명 작은 베르사유궁이라고 불리는데, 지금도 18세기 러시아귀족들의 영화를 엿보는데 손색없는 화려함을 자랑한다. 저택 안내판에는 그가 거느린 농노가 20만명에 달했다고 하니 당시 농노제의 위세를 짐작케 한다. 백작인 그가 농노의 딸을 정식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기록은 그가 탐욕의 화신처럼 돼있는 다른 러시아지주들과는 자못 다른 유의 귀족이었음을 은근히 내비친다. 혁명 뒤 볼셰비키들이 모스크바국제공항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도 그가 신분, 계급을 넘어 러시아인들의 존경을 받았음을 짐작케 한다. 1917년 볼셰비키혁명 때까지 제정 러시아는 철저한 농노국가였다. 따라서 19세기 러시아의 지식인들이 농민계몽을 혁명의 첫 단계로 삼고 ‘브나로드(V Narod·민중속으로)’운동을 시작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볼셰비키혁명의 성공도 사실은 브나로드운동에 힘입어 황제 차르와 대지주의 권위를 우습게 보기 시작한 계몽된 농민들 때문에 가능했던 셈이다. 일제하 이 땅의 젊은 지식인들이 브나로드운동에 눈돌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심훈의 ‘상록수’는 이광수의 ‘흙’과 함께 계몽형 브나로드 소설의 대표작이다. 다만 한국판 브나로드의 주인공들은 공산혁명가가 아니라, 농민계몽으로 식민시대의 질곡을 헤쳐보려던 젊은 남녀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적 또한 대지주가 아니라, 갖은 교활한 꾀로 이들을 괴롭히던 주재소 일본 순사들이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석연변호사가 주도하는 헌법포럼이 헌법 브나로드운동을 주창해 화제다. 급진세력의 개혁독점을 배격하고, 헌법정신이 국민의 구체적 삶에 파고들도록 만들겠다는 결의다. 일반국민 뿐아니라, 행정수도이전 위헌판결 이후 헌법재판소 때리기에 나섰던 여권 일각의 급진세력 또한 이들의 계몽대상이다. 어지러운 세상, 사실 헌법보다 더 좋은 나침반이 또 있겠는가. 반개혁, 반노(反盧)라고 성급하게 매도하기보다는 헌법바로세우기 운동쯤으로 받아들이며 어디로 가는지 지켜볼 일이다. 이기동 논설위원 yeekd@seoul.co.kr
  • 해외소장 고미술품 경매 열린다

    해외 곳곳에 흩어져 있는 우리 고미술품들이 고국의 품에 안길 수 있을까. 일본과 미국, 유럽 등지에 있는 한국 고미술품들이 국내 경매에 무더기로 나와 관심을 모으고 있다.17일 오후 5시 서울 평창동 서울옥션하우스에서 열릴 제92회 서울옥션 경매에 의뢰된 작품들은 ‘청화백자추초문팔각병’ 등 21점. 출품작들은 경매 당일까지 서울옥션하우스에서 전시된다. ‘청화백자추초문팔각병’은 조선백자의 최전성기인 18세기 금사리 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최상급의 청화백자각병으로 96년 10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60만달러에 낙찰된 작품이다. ‘청자상감매죽조문매병’도 고려시대 최고 전성기에 제작된 상감청자로 매화와 대나무 사이에 새를 상감기법으로 그려넣은 명품이다. 이번 경매에 의뢰된 해외소장 고미술품 중에는 1577년 선조시대 궁궐의 모임을 그린 ‘궁중계회도’와 석파 이하응의 ‘묵란도’, 허주 이징의 ‘백한도’ 등 그림 10점과 거북형 산통도 포함돼 있다. 한편 서울옥션은 젊은 유망 작가를 소개하는 ‘커팅 에지(Cutting Edge)’ 경매를 신설, 첫 번째로 정광호 이동기 이중근 서정국 손석 김유선 등 작가 17명의 작품을 같은 날 경매에 부친다.(02)395-0331.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찬란한 ‘서양미술 400년’

    찬란한 ‘서양미술 400년’

    1793년 프랑스혁명의 세 거두 가운데 한 사람인 장 폴 마라는 고질인 피부병 때문에 반신욕을 하며 집무를 보던 중 반대파의 자객에 의해 암살당한다. 마라의 동지이자 나폴레옹 황제의 수석화가였던 자크 루이 다비드는 이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마라의 죽음’이라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3개월 만에 완성한다. 암살자가 들고 온 편지, 피묻은 칼이 당시 상황을 재연하듯 화면에 그대로 놓여 있는 ‘기록화’ 같은 작품이다. 자객의 단검에 살해된 마라의 시신은 실제로는 선혈이 낭자한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마치 격무에 시달리다가 잠이 든 ‘시민의 일꾼’ 같은 모습으로 이상화했다. 엄격한 형식미를 추구한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양식이 그대로 녹아 있는 이 그림이 10여 개월의 복원과정을 거쳐 새 단장한 모습으로 한국을 찾는다. 21일부터 내년 4월3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서양미술 400년전-푸생에서 마티스까지’가 바로 화제의 전시다. 소개되는 화가는 다비드, 푸생, 부셰, 앵그르, 들라크루아, 쿠르베, 코로, 모네, 시슬레, 피사로, 르누아르, 고갱, 마티스, 뒤피, 피카소, 들로네 등 88명. 미술애호가라면 한번쯤 그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유명 작가들이다. 프랑스 랭스미술관에서 70여점을 대여받은 것을 비롯,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릴, 말로, 몽펠리에, 피카르디 미술관, 트루아 역사박물관 등에서 모두 119점의 작품을 빌려 왔다. 전시는 시대별로 서양 미술 400년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도록 꾸며졌다.17세기 절대왕정을 배경으로 한 장중하고 화려한 바로크 양식과 국립 미술아카데미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고전주의 양식,18세기 귀족사회가 낳은 장식적인 로코코 양식, 산업기술의 발달로 근대화되기 시작한 19세기의 사조들인 낭만주의, 신고전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와 20세기 야수파, 큐비즘 등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초대형 전시인 만큼 전시작 중에는 눈길을 끄는 작품들이 적지 않다. 마티스가 친필 글씨를 새겨 랭스미술관에 기증한 ‘재즈’ 판화집, 엽서 한 장 크기인 1호도 채 되지 않는 작품이지만 여인의 코발트빛 옷과 장밋빛 혈색이 생생하게 묘사된 르누아르의 유화 ‘대본낭독’ 등이 공개된다. 특히 ‘대본 낭독’은 워낙 크기가 작아 도난 위험이 커 한번도 해외에서 전시된 적이 없는 작품이지만 특수액자를 제작해 이번에 처음 선보이게 됐다. 고대의 여러 조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부분만을 조합해 완벽한 아름다움을 구현한 앵그르의 두 작품 ‘샘’과 ‘물 속에서 태어난 비너스’도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원본 작품들이다. 이밖에 근대회화의 시조인 푸생의 ‘두 발을 적시고 있는 여인과 풍경’, 뒤프레누아의 ‘리코메드 왕의 딸들 사이에 숨어 있다가 율리시스에게 들킨 아킬레스’, 사실주의 대가 쿠르베의 ‘협로’, 인상파 화가인 모네의 ‘벨 일의 바위’, 피사로의 ‘루브르’, 고갱의 ‘건초 말리는 사람’, 뒤피의 ‘마리-크리스틴 카지노’, 고갱의 판화 ‘테 아릴 바이네(왕가의 여인)’ 등도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다. 입장료 일반 1만원, 청소년 8000원, 어린이 6000원.(02)2113-3477.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장롱문화재 250점 광주 나들이

    광주·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전국의 개인 소장 문화재를 선보이는 ‘개인소장 문화재특별전’이 1일부터 15일까지 광주국립박물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2003년도 국무총리실의 ‘비지정 개인 소장 문화재의 공개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이미 지난 2003년부터 서울·부산·대구·대전에서 열렸던 특별전에 이어 5번째다. 전남·광주 지역과 전국의 개인 소장자들이 출품한 회화와 조각, 공예, 고문서, 민속품 등 250여점을 선보인다. 특히 이 지역 출신 소치 허련의 산수도와 김홍도의 산수인물도, 조선시대의 백자달항아리, 고려시대의 명품인 청자퇴화연당초문주자 등이 눈길을 끌 것으로 보인다. 소치(小癡)는 조선 후기에 남종화풍의 뿌리를 내린 추사파의 대표적 화가로,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중국 원나라 말기의 4대가에 속하는 예찬과 황공망의 화풍을 소화해 산수화에서 자신의 회화세계를 이루었다. 이번에 선보이는 ‘산수도’는 그의 대표작이다. 단원의 산수인물도는 뾰족뾰족한 먼 산과 뒷산의 죽림이 배경을 이루고, 그 앞의 와옥에 선비가 와상에 앉아있는 가운데 앞마당에선 동자가 차를 달이는 정경을 담고 있다. 바위와 산수의 주름은 담원이 즐겨 쓰는 준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청자퇴화연당초문주자(靑磁堆花蓮唐草紋注子)는 능숙한 조각 솜씨와 우아한 빛깔을 보여주는 고려시대의 명품 청자로, 특히 목줄기의 흑백 상감 줄무늬 장식이 돋보인다.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백자 달항아리는 보기만 해도 둥글고 환한 한국인의 전통적 심성을 보는 듯해 미소를 자아내는 작품이다. 유약에서 비쳐나오는 유백(乳白)의 온화함과 몸체에 흐르는 유려한 곡선, 넉넉하고 포용력 있는 형태에서 조선 백자의 정수로 꼽힌다. 이밖에도 삼국시대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청화어문병을 비롯한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류,19세기에 제작된 궤인 ‘강화반닫이’, 조선 전기의 화가 이암의 매 그림인 ‘가응도’ 등이 눈여겨볼 만하다. 전시기간중 10일부터 12일까지 3일동안에는 시·도민들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를 갖고 오면 제작 시기와 특징, 문화재로서의 가치, 학술적 가치 등을 평가해주고 감정의견서도 교부해준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유키요에의 미/고바야시 다다시 지음

    유키요에의 미/고바야시 다다시 지음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한 거대한 파도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뱃전의 어부들, 이를 지켜보며 태연하게 자리잡고 있는 후지산….18세기 일본 에도 시대에 성행한 회화 장르인 우키요에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인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의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라는 그림이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작곡가 드뷔시는 이 그림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어 교향곡 ‘바다’를 완성했고, 영국의 소설가 조지 무어는 이 그림에 매료된 나머지 ‘호쿠사이의 그림 한 폭의 가치는 전 일본인의 생명과 대등하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우키요에의 어떤 점이 그토록 세계의 예술가들을 끌어당겼을까. ●우키요에 거장 12인의 생애와 작품 소개 ‘우키요에의 미’(고바야시 다다시 지음, 이세경 옮김, 이다미디어 펴냄)는 우키요에 거장 12인의 생애와 작품을 시대 배경과 함께 알기 쉽게 설명한 우키요에 입문서다. 일본 최고의 우키요에 권위자인 저자(63·가구슈인대 교수)는 개인적인 연구를 위해 소장하고 있던 작품 100편의 도판을 컬러로 실어 원화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끼도록 했다. 우키요에에 대한 사랑은 서구 미술계에서도 뜨거웠다.‘빛의 화가들’이라 불린 고흐와 모네, 드가, 로트레크 등의 인상파 화가들은 특히 우키요에의 강렬한 색채, 과감한 시점처리, 빼어난 소묘력, 현대적인 화면구성에 매료됐다. 모네는 방안을 우키요에로 가득 채울 정도로 열렬한 수집광이었으며, 고흐는 우키요에를 거의 표절한 듯한 그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우키요에는 처음엔 유럽으로 수출되는 일본 도자기를 포장하는 데 쓰였다. 그러나 우키요에가 불러일으킨 열풍은 19세기말 유럽에서 자포니즘(Japonism)이라고 하는 문화적 경향으로까지 확산됐다. 당시 자포니즘에 열광한 유럽인들은 우키요에를 일본 그 자체인 것처럼 여기기도 했다. 우키요에는 지금도 ‘서양 근대미술사에 새로운 지평을 연 일등공신’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전세계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우키요에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우키요에는 목판화와 육필화 두 종류가 있다. 괴기물에서 춘화, 인물화, 풍자화에 이르기까지 현실과 환상을 망라한다. 단색판화에서 시작해 다색 판화로 발전됐으며, 우키요소시(浮世草子, 일본 중세와 근세에 유행한 삽화가 많은 대중소설)나 삽화본 등의 읽을거리가 유행하면서 대중화됐다. ●춘화·인물화·풍자화 등 총망라 책은 ‘서민미술’인 우키요에의 탄생배경도 소상히 다룬다. 우키요에는 에도시대 초기부터 메이지시대 초기까지 약 200년간에 걸쳐 에도라는 특정한 도시에서 우키요(浮世), 곧 ‘이 세상’의 풍속을 소재로 하나의 유파를 형성했던 화가들의 그림을 말한다. 그런 만큼 당세풍(當世風)을 추구하는 ‘우키요’를 그리는 것은 우키요에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였다. 당대 풍속을 소재로 한 우키요에는 자연스레 유곽의 모습이나 기녀, 가부키, 스모 등 서민들의 향락적인 문화를 즐겨 표현했다. 신흥 도시 에도의 젊고 활기찬 분위기 또한 수준 높은 서민문화가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이처럼 일반 대중의 미적 관심을 반영해온 우키요에는 메이지시대 들어 사진이나 제판, 기계인쇄 등이 유입되면서 쇠퇴했다. 그러나 조선후기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린 민화와 마찬가지로 우키요에의 전통은 일본 현대미술에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그것은 ‘일본미술의 혼’이기 때문이다.2만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피라미드/미로슬라프 베르너 지음

    이집트 피라미드 하면 우리는 으레 사막에서 쓸쓸히 모래바람을 맞고 있는 사각뿔 모양의 구조물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는 사실과 다르다. 피라미드의 형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사각뿔 모양만 있는 게 아니다. 또한 피라미드는 단독건물이 아니라 여러 건축물로 이뤄진 전체 묘역의 일부분일 뿐이다. 피라미드가 죽은 자를 위한 황량한 공간이 아니라 일년 내내 축제로 떠들썩한 활기찬 삶의 장소였다는 사실도 우리에겐 낯설다. ●현재까지의 연구 총망라… ‘피라미드학’의 결정판 이집트사를 전공한 체코의 고고학자 미로슬라프 베르너가 쓴 ‘피라미드’(김희상 옮김, 심산 펴냄)는 지금까지 진행된 피라미드 연구 성과를 총망라한 ‘피라미드학’의 결정판이다. 저자는 기원전 3000년경에 형성된 이집트 왕국의 역사를 되짚어 내려가며 신왕국 이전 시기, 즉 기원전 1550년경(제17왕조 말기)까지의 대표적인 피라미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금부터 5000년쯤 전에 시작된 이집트의 역사를 기이한 옛 무덤들을 통해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장엄한 위용, 간결하면서도 조화로운 형태미의 극치…. 이집트 피라미드는 고대인이 보기에도 이미 하나의 ‘기적’이었다. 도대체 피라미드는 누가, 왜, 어떻게 만든 것일까. 이같은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수많은 고고학과 이집트학 연구자들이 애를 썼지만 아직까지 속시원히 실체를 밝혀내고 못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모두 몇 개의 피라미드가 만들어졌는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제껏 발견된 피라미드 가운데 그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는 것들도 적지 않다. 피라미드라는 말의 어원도 분명치 않다. 혹자는 피라미드의 높이를 표현하는 말인 기하학의 ‘페레무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그리스어의 ‘피르’(pyr, 불)에서 피라미드라는 단어가 나온 것으로 간주한다. 밀가루로 빚은 케이크를 뜻하는 그리스어 ‘피라미스’를 어원으로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피라미드 자체가 피라미드 복합체의 가장 중요한 건조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와 유기적으로 연관돼 있는 신전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으면 피라미드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피라미드와 인접한 장제(葬祭) 신전, 하안(河岸) 신전, 주벽(周壁) 등을 포함하는 피라미드 복합체를 폭넓게 다룬다. 피라미드는 대체로 나일강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피라미드의 묘역은 나일강 서안에서부터 시작된다. 바로 이곳에 하안 신전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죽은’ 왕이 ‘살고 있는’ 사후궁전의 입구로, 인공운하를 통해 나일강과 연결되는 선착장 구실을 했다. 이 하안 신전으로부터 서쪽으로 오르막길 즉 참도(參道)가 이어지는데, 이 길은 장제 신전에까지 닿도록 돼 있다. ●흥미로운 피라미드 탐사 일화도 소개 책은 지난 세대의 탐사일화도 흥미롭게 들려준다.‘람세스’의 이름을 토대로 로제타 스톤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해석해 낸 샹폴리옹의 감격적인 순간도 있고, 세켐케트 피라미드 발굴과정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뒀음에도 동료학자들의 몰이해로 나일강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이집트의 젊은 고고학자 고네임의 비극도 있다.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쿠푸의 대피라미드 꼭대기에 국기를 꼽고 “프로이센이여 고결하라!”라고 외친 프로이센 탐사대의 에피소드는 차라리 한 편의 소극(笑劇)이다. 이집트 피라미드를 처음 판독해 낸 샹폴리옹이 18세기 인물임을 감안하면 피라미드는 대략 48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침묵을 지켜온 셈이다. 이에 비해 이집트 연구의 역사는 200년 남짓이다. 그러니 피라미드의 실체를 밝혀줄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피라미드 한 기의 측량자료만 모아 놓아도 새로운 피라미드가 생길 정도라는 말도 있다. 그만큼 모든 피라미드를 개괄적으로 정리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이 책에서는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쟁쟁한 고고학 거장들을 만날 수 있다. 렙시우스, 로에르, 마리에트, 보르하르트, 피트리 등이 그들이다.2만 8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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