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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산의 ‘목민심서’ 당대에 유통 안된 이유는

    다산의 ‘목민심서’ 당대에 유통 안된 이유는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강명관 지음/천년의상상/548쪽/2만 5000원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의 사상은 한마디로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富國强兵)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시대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해 개혁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표 저작인 ‘목민심서’도, ‘흠흠신서’도 당대에 인쇄돼 유통된 것이 아니었다. 사서오경과 관련된 그의 모든 저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약용의 저작은 참으로 중요하지만 당대 민중에게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고, 지식인 내부에서도 아주 가까운 극소수 지인들 사이에서만 겨우 읽히는 정도였다. 이게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책의 존재가 중요한가, 책의 유통이 더 중요한가. 책이 확산되려면 일정한 전문적 판매 공간이 필요하다. 중국은 송대에 민간 출판업자와 서적상이 등장했고 명대를 거쳐 청대에는 베이징에 유리창 서점가 같은 거대한 서적 시장이 출현했다. 일본도 임진왜란 때 약탈해 간 조선의 금속활자와 전적(典籍)을 밑천 삼아 도쿠가와 막부 이후 출판업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그러나 조선에는 서점이 없었다. 조선시대 책의 유통 구조는 그야말로 원시 수준이었다. 가장 수요가 많았던 책은 양반들의 출세 및 교양과 관련된 사서삼경 또는 사서오경이었다. 그 외에 농사서, 의학서 등 실용적인 책들도 꽤 간행됐다. 훈민정음, 곧 한글 서적은 한문을 번역한 형태로만 존재했다. 온전히 한글로만 쓰인 책은 임진왜란 후에나 나타났다. 그때까지 한국어로 사유한 책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한글 창제와 금속활자가 조선의 거창한 문화적 사건이긴 했으나 그것이 국문 서적의 인쇄와 출판, 민중에게 지식을 보급하는 일로 연결되지 못한 주된 원인이 지식의 확산을 경계한 지배계층, 즉 왕족과 양반 때문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책의 확산을 가로막은 다른 요인은 천문학적 수준의 책값이었다. 대학이나 중용 같은 책 한 권을 사려면 상면포(보통 품질의 무명) 3~4필을 주어야 했다. 참고로 오늘날 안동포 1필의 가격은 60만~70만원이다. ‘주자대전’ ‘주자어류’는 오승목(고급 품질의 무명) 50필이나 된다. 비싸도 너무 비싸서 관직을 보유한 양반이나 지주 계층만이 책을 구입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탄생, 유통에 천착한 이 책은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등 조선을 대상으로 한 책들을 다수 펴낸 강명관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가 썼다. 고려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그것보다 훨씬 앞서 발명됐는데도 왜 한국의 출판과 인쇄, 지식의 역사는 서양에 비해 크게 낙후됐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이 책은 출발했다. 두시언해는 중요한 책이지만 소수 문인들의 시세계에 영향을 준 정도다. 충(忠)·효(孝)·열(烈)을 강조하는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여러 차례 많은 수량이 간행돼 당대에 끼친 영향력을 기준으로 한다면 두시언해보다 훨씬 더 크다. 그런데 과연 어느 책이 더 중요한가. 저자는 이런 의문들을 품었고, 그에 답하기 위해 조선시대 책의 인쇄와 유통, 국가와 사회의 축조(築造)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책들에 대한 책 1호를 냈다. 조선의 인쇄·출판 문화와 관련해 앞으로 조선 전기에 대해 한 권, 조선 후기에 대해 두 권, 근대 계몽기(개항~1910년)에 대해 한 권을 더 낼 계획이다. 유상덕 선임기자 youni@seoul.co.kr
  • [기고] 다가오는 중국 서부의 꿈 -뉴 실크로드/박정동 인천대 무역학부 교수

    [기고] 다가오는 중국 서부의 꿈 -뉴 실크로드/박정동 인천대 무역학부 교수

    18세기 중국의 실크로드는 세계교역의 축이었다. 당시 중국은 세계 GDP의 약 32.96%를 담당했다는 연구 결과들도 있다. 중국은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질 때 4.59%라는 최저점을 찍고 2008년 세계 전체 GDP의 17.48%를 넘어섰다. 과연 중국은 과거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을까.?‘뉴 실크로드’로 불리는 철도망 인프라 건설은 그 답을 가늠케 해준다.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 때 중국은 국내 철도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사업에 치중해 팔종팔횡(八縱八橫)의 철도간선, 사종사횡(四縱四橫)의 여객전용 고속철도를 건설했다. 시진핑 국가주석 때 들어와선 국내를 넘어 중국과 유럽, 동남아를 잇는 대륙 간 철도 네트워크를 가속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7월 18일 개통된 중국과 독일을 잇는 컨테이너화물열차노선이다. 총 길이 1만 214㎞의 이 철도망은 중국 서부와 유럽을 연결하는 최단 코스다. 중국 정조우시를 출발해 산시성, 신장 아라산커우(阿拉山口), 카자흐스탄, 러시아, 벨라루스를 거쳐 폴란드 우치, 독일로 이어진다. 최소 주 1회 이상 운행되며, 한 번에 40피트 컨테이너 41개를 운송한다. 화물열차의 운송시간은 16~18일로 기존 유럽으로 통하는 열차노선보다 약 8~10일, 해상운송보다 15일가량 단축된다. 운송료는 항공운송비용의 20% 수준. 저비용 고효율 물류시스템이다. 컨테이너화물열차 노선은 전자데이터교환(EDI)시스템으로 운영돼 중국에서 단 한 차례의 통관검사로 유럽까지 운송 가능하다. 유럽에 도착하면 1~3일 내로 유럽 전역으로 배송된다. 공공서비스 플랫폼의 개방형 서비스 방식을 도입, 모든 운송과정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첨단 물류서비스이기도 하다. 지리적 한계에 열악한 교통 인프라 탓에 외국과의 교역에 항공 및 해상운송에 의존했던 중국 서부지역이 새로운 물류망을 열어나가고 있다. 유럽으로 이어지는 컨테이너 화물노선의 개통은 그동안 서부 내륙 진출의 걸림돌로 작용하던 물류 문제를 해결하고 기업의 선택 범위를 넓혔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내륙지역이 진정한 의미의 내륙의 항구로 탈바꿈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지난 2012년 말 페덱스, 미국 UPS와 같은 글로벌 물류기업 46개 사는 돈 냄새를 맡고 ‘새 실크로드’인 서부지역에 밀려들었다. 쓰촨성 청뚜에 아시아 최대 컨테이너 화물역이 건설되는 등 서부지역은 국제무역·물류 중심지로 변화하고 있다. 서부지역은 중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주변국으로 통하는 거점이다. 서부의 꿈(西部夢)이 점점 더 현실로 구체화되고 있다. 유럽시장은 물론이고 중앙아·중동시장의 영향권에 있는 40여개국이 ‘메이드 인 차이나’의 독무대가 될 가능성이 더 커졌다. 지금도 산업 생산시설과 기반이 거의 없는 중동 및 중앙아 시장은 중국기업의 안마당이다. 중국발 유럽행 ‘철의 실크로드’는 경쟁력을 잃어가고 무력해지는 ‘대한민국호’를 걱정하게 한다. 빛의 속도로 변하며 힘을 키우는 중국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동북아 경제중심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단단한 각오로 국가적인 전략을 다시 살펴볼 때다.
  • 18세기 프랑스의 SNS ‘詩’… 그 입을 틀어막아라

    18세기 프랑스의 SNS ‘詩’… 그 입을 틀어막아라

    시인을 체포하라/로버트 단턴 지음/김지혜 옮김/문학과지성사/264쪽/1만 5000원 바다 건너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신라 진평왕 때 ‘서동요’를 퍼뜨린 백제 무왕은 시와 노래의 위력을 유감없이 드러낸 역사 속 대표적인 인물이다. 설화에 따르면 무왕은 자신의 속내를 감춘 채 아이들에게 노래를 따라 부르게 해 여론을 호도한다. 이윽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진평왕의 귀에까지 닿는다. 쫓겨난 선화 공주를 취하면서 무왕은 손쉽게 사랑을 쟁취할 수 있었다. “건성건성 박수를 쳤다”는 죄목으로 공개 처형된 장성택도 소문의 희생양일 수 있다. ‘백두혈통’에 맞선 반역을 스스로 시인했다지만 그의 숙청 뒤에는 최고 권력자의 여인과 추문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따랐다. 문화사가 로버트 단턴은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8세기 중엽의 파리 거리 한복판에서 뜬소문에 불과했던 시와 노래를 추적한다. 1749년 봄 파리의 치안총감에게 대대적인 체포 명령이 떨어지고 대학생, 교수, 하급 성직자 등 14명이 잇따라 바스티유 감옥에 잡혀 들어온다. 이른바 ‘14인 사건’이다. 경찰은 ‘모르파의 유배’라는 시의 제목 말고는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한다. 경찰은 매수된 첩자를 통해 프랑수아 보니라는 30대 의대생을 체포한다. 보니는 자신이 시를 쓰지 않았다며 시를 건넨 다른 사람을 지목한다. 생 니콜라 데샹 교구의 하급 성직자인 장 에두아르가 잡혀 오지만 역시 다른 이에게서 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성직자인 몽탕주, 뒤자스에 이어 법학도인 알레르, 법률 서기 주레, 철학도 뒤 쇼푸르도 바스티유로 끌려온다. 이 과정에서 ‘모르파의 유배’ 외에 왕을 검은 괴물에 빗댄 ‘검은 분노의 괴물’ ‘매춘부 사생아’ 등 모두 5편의 시가 왕의 분노를 자아낸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경찰은 불법적인 시 암송에 가담한 혐의로 밀고된 평범한 파리 시민들만 잡아들였을 뿐 시의 창작자는 끝내 밝히지 못했다. 수사의 칼날이 윗선이 아닌 대학생 같은 깃털에만 치우친 탓이다. 수사 과정은 역설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문 구어 세계의 의사소통망을 복원하는 기능을 했다. 바스티유에 남아 있는 경찰의 수사 기록은 문맹률이 절반을 넘던 시절 어떻게 여론이 형성됐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가 됐다. 당시 시구는 시민들의 입과 손을 거치며 첨삭됐고 이 과정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갖췄다. 집단 창작물이었던 셈이다. 저자는 시가 회자되는 방식을 살펴보면 어디서 흘러나왔는지 쉽게 짐작된다고 말한다. 화려한 정치 풍토를 지닌 베르사유의 궁전 문화는 유독 시를 사랑했고 왕족과 귀족, 왕의 애첩 등은 정적을 숙청하기 위해 시를 활용했다. 30여년간 정권을 잡았던 모르파 백작이 1749년 4월 실각하며 유배된 것도 루이 15세의 애첩인 퐁파두르 부인을 풍자시를 통해 쳐내려다 역풍을 맞았기 때문이다. 모르파는 궁정 생활과 관련된 시와 노래를 수집해 왕에게 보고했는데 이는 왕의 주변 여론을 호도하는 역할을 했다. 그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모르파 샹송집’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그런데 책을 읽는 내내 궁금증을 자아내는 대목이 있다. 파리의 골목골목마다 회자되던 낯익은 풍자시 낭송에 루이 15세는 왜 그리 민감하게 반응한 것일까. 시기가 문제였다. 모르파의 몰락으로 친정 체제를 구축하려던 왕은 오히려 비난 여론이 들끓자 당황한다. 프랑스 국민의 지지를 받던 영국 왕실의 망명객 에두아르 왕자마저 추방되자 시민들은 ‘오늘날 이토록 비굴한 국민이여’란 시구를 따라 부르며 왕을 비난한다. 전비 마련을 위한 세금과 왕실의 성적 문란은 불에 기름을 부었다. 여기서 잠시, 작가 밀란 쿤데라의 에세이집 ‘소설의 기술’을 되돌아 보자. 전체주의 체제에서 유독 탄압받는 지식인의 모습이 담긴 책에는 오늘날 한반도는 물론 과거 프랑스의 모습이 가감 없이 담겨 있다. 반역자들에게는 죄가 있다기보다 ‘건성건성 박수’ 같은 뻔한 죄목이 뒤집어씌워졌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18세기 프랑스의 시와 노래는 오늘날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이렇게 되풀이되고 있는 셈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노들섬에 관한 상념/노주석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노들섬에 관한 상념/노주석 선임기자

    노들섬은 한강대교를 떠받치는 밑받침처럼 생겼다. 한강에는 토사 퇴적을 통해 10여개의 크고 작은 하중도(河中島)가 풍광을 뽐냈지만, 개발 과정에서 물밑으로 사라졌다. 여의도와 잠실, 뚝섬, 난지도는 이름만 섬이다. 저자도, 무동도, 부리도는 다른 섬을 뭍으로 만드는 데 온몸을 바쳤다. 밤섬과 선유도가 겨우 살아 남았다. 노들섬은 족보가 없다. 18세기 정선이 그린 실경산수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100만평이 넘는 한강백사장 중 두툼한 모래 언덕이었을 뿐이다. 한강인도교를 거쳐 제1한강교로 불린 한강대교가 세워지면서 생긴 인공섬이다. 이촌동과 노량진을 잇는 한강대교는 평균 1000m 이상의 드넓은 한강에서 강폭이 가장 좁은 지점이었다. 1960~70년대 강변북로를 깔고 동부 이촌동과 서부 이촌동에 아파트를 짓느라 백사장 모래를 다 퍼내 쓰고 남은 자투리다. 1995년 일제잔재 지명을 청산하면서 중지도(中之島)에서 강 남쪽 노들나루(鷺梁津)의 이름을 따서 노들섬이 됐다. 별 존재감이 없던 노들섬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2005년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오페라하우스 건립계획 때문이다. 배턴을 이어받은 오세훈 시장이 호주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나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미술관에 버금가는 예술 섬을 만들겠다며 의욕을 보였으나 2011년 박원순 시장이 지휘봉을 잡자 백지화됐다. ‘임시’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지만 서울을 세계 제1의 도시농업수도로 만들겠다는 계획에 따라 도시텃밭으로 변신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 같은’ 신세다. 서울은 지구 상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치열한 변화를 경험한 도시이다. 한강은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었기에 한강개발에 대해서도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노들섬의 유전(流轉)을 보면 사람마다 생각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같은 공간을 놓고 한 시장은 오페라하우스를 떠올렸고, 또 한 시장은 도시텃밭이라는 극과 극의 선택을 했다. 6000억원을 들여 오페라하우스를 만든다는 발상도 과했지만, 달랑 592명이 전원생활을 즐기는 도시텃밭도 또 다른 전시행정이라고 비판받을 만하다. 노들섬의 미래를 위해 제안하고자 한다. 자동차전용도로와 아파트 숲에 가로막힌 한강의 접근성을 높여 노들섬을 시민 품에 돌려주자는 취지다. 오페라하우스를 지을 자금 일부로 노들섬을 통과하는 근사한 보행전용 다리를 놓으면 어떨까. 한강에는 29개의 다리가 있지만 차들의 질주에 마음 편히 걸을 수 있는 보행교가 없다. 한강대교가 본래 인도교였으며 노들섬은 한때 창경원(창경궁), 남산과 더불어 서울시내의 3대 유원지였다는 자료를 참고하면 근거를 알게 될 것이다. 대중교통 이외에 자동차 통행을 금하고, 강 양쪽 한강둔치에 주차한 뒤 걷거나 자전거를 타도록 하면 될 일 아닌가. 박원순 시장은 ‘No more landmark’를 슬로건으로 외친다. 노들섬 다리는 또 다른 랜드마크가 아니다. 서울을 지리적, 심리적으로 양분하고 있는 한강의 북쪽과 남쪽을 한강 상에서 하나로 잇자는 것이다. joo@seoul.co.kr
  • 울산시 25억 ‘도산전투도’ 구입 추진 논란

    울산시 25억 ‘도산전투도’ 구입 추진 논란

    울산시가 정유재란(1597년) 당시 울산 학성의 전투장면을 그린 ‘도산전투도’를 25억원을 들여 구매를 추진하면서 논란을 빚고 있다. 이 그림은 일본인이 자국의 시각에서 그린 데다 모사본으로 울산박물관의 1년 유물 구입비의 두 배가 넘는 막대한 예산까지 투입될 예정이어서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도산전투도는 정유재란 당시 도산성(현 울산 중구 학성공원)에서 조선·명나라 연합군과 왜군이 싸우는 장면을 일본인 오키(大木)가 1차 전투 참가자들에게서 듣고 그린 6폭짜리 병풍 3점이다. 첫 번째에는 조선·명나라 연합군이 도산성 왜군 진영을 진격하는 장면, 두 번째에는 연합군이 도산성을 포위하는 장면, 세 번째에는 연합군이 후퇴하는 장면을 각각 그렸다. 원본은 소실됐고 18세기 이후 제작된 모사본 3점 가운데 한 점이다. 일본인 사카모토 고로(板本五郞)가 소유하고 있고, 오는 22일까지 울산박물관에 전시될 예정이다. 울산박물관은 최근 내년 예산에 도산전투도 구매 예산을 편성해 시의회 행정자치위원회에 상정했다. 행자위는 5일 심의·계수조정을 거쳐 오는 13일 본회의에 상정할 예정이다. 이와 관련, 행자위 내부에서도 엇갈린 반응이 나오고 있다. 김정태 의원은 “명군 7만명과 조선군 2만 5000명의 조·명 연합군은 2차례에 걸쳐 도산성(왜군)을 공격했으나 모두 패해 일본 입장에서는 자랑이고, 우리 입장에서는 뼈아픈 전투”라며 “일본인이 자국의 시각에서 그린 그림을 막대한 예산을 들여 구매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반면 허령 의원은 “박물관은 찬란했던 선조의 문화를 보고 배우는 곳이기도 하지만, 실패한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도록 하는 역할도 한다”면서 “아픈 역사를 교훈으로 삼고, 울산의 역사를 한번 더 돌아볼 기회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우림 울산박물관장은 “도산전투도는 조선의 시각에서 그린 ‘평양성탈환도’, 명나라의 시각에서 그린 ‘정왜기공도병’과 함께 중요한 가치를 가져 구매를 추진하고 있다”면서 “전문가들도 소장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 만큼 시의회를 통과하면 유물평가위원회 심의를 거쳐 구매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 유럽 호령했던 ‘합스부르크 가문’ 서울 나들이

    유럽 호령했던 ‘합스부르크 가문’ 서울 나들이

    18세기 유럽 최대의 왕조는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제후들의 연합체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도 늘 합스부르크가의 차지였다. 거의 모든 유럽 왕실과 혈연 또는 혼인 관계를 맺다 보니 신성로마제국의 황후가 헝가리나 이탈리아의 왕비를 겸하기도 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뮤지컬 ‘엘리자벳’의 실제 주인공인 엘리자베트(1854~1898) 황후다. ‘시씨(SiSsi)’라는 애칭을 지닌 황후는 172㎝의 큰 키에 50㎏의 몸무게를 지닌 ‘개미허리’로도 유명했다. 황후 자리는 원래 언니인 헬레나의 몫이었으나,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의 젊은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엘리자베트를 보고 한눈에 반해 혼인 상대가 바뀌었다. 1854년 17세의 어린 나이에 황후에 오른 엘리자베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아들이 자살하고, 자신도 무정부주의자인 청년의 칼에 찔려 숨졌다. 이처럼 곡절 많은 헝가리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물 190여 점이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국립고궁박물관은 3일부터 내년 3월 9일까지 박물관 지하 전시실에서 17~19세기 꽃피운 헝가리 왕실의 보물들을 선보인다. 유럽 왕실과 귀족사회의 정수를 보여줄 이 전시는 내년 헝가리 수교 25주년을 맞아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헝가리 특별전이다. 전시품 가운데는 헝가리 화가 코퍼이 요제프(1859~1927)가 그린 엘리자베트 초상화가 포함되고, 라슬로 퓔뢰프(1869~1937)가 그린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모습도 공개된다. 엘리자베트의 실크 재질 검은색 외출복, 부채, 손수건, 모자 등 유품도 나왔다. 황후는 1889년 아들인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 뒤 검은색 옷만 갖춰 입었다고 한다. 또 헝가리의 왕실 문양 외에 금은보화로 치장된 폭 20㎝, 높이 17㎝의 ‘신성한 왕관’이 전시된다. 대관식에 사용된 의장과 보주, 검 등은 궁정화가인 에두아르트 구르크(1801~1841)의 그림에서 엿볼 수 있다. 1630년 무렵 제작해 합스부르크 황제가 사용한 갑옷과 투구, 방패도 전시대에 올랐다. 왕실 무기류로는 왕의 모습이 새겨진 칼, 상아 탄약통, 금제 철퇴, 도금 장식 검, 도끼가 달린 총, 사슬 갑옷 등이 눈에 띈다. 헝가리 왕실의 종교를 대변하는 화려한 성경 보관함과 묵주, 성골함 등도 나왔다. 의복으로는 금실과 비단으로 정교하게 장식한 연회복과 정장 등이 전시된다. 귀족들이 사용한 술병, 주전자, 그릇 등 금은 세공품도 만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221년의 역사를 지닌 헝가리 국립박물관의 도움으로 열린다. 이귀영 고궁박물관장은 “헝가리는 한국과 비슷한 지정학적 위치와 역사를 지녔다”면서 “생소한 헝가리 왕가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20·끝) 강남(하)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20·끝) 강남(하)

    강 남은 탄생 비화보다 조성 과정이 더 드라마틱하다. 택지 마련과 경부고속도로 편입부지의 무상취득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가지고 닻을 올렸던 강남개발은 정치자금 조성과 상공부 단지 제공이라는 ‘검은 거래’에 의해 변질됐다. 강북 억제라는 명분도 결과적으로 남북긴장 조성이라는 안보논리로 위장한 측면이 강하다. 강남은 현대 한국이 가진 모든 병리현상의 총집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군 이래 최대의 특혜와 듣도 보도 못한 정책 지원이 탄생을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개발촉진지구 지정으로 강남에 건물을 지으면 각종 세금이 면제됐다. 지하철 2호선이 강남 연결을 위해 직선노선에서 순환선으로 탈바꿈했고, 아파트 이외에는 지을 수 없도록 멀쩡한 땅을 규제하는 정책도 등장했다. 고속버스터미널이 반포로 강제로 옮겨졌고, 명문 고교의 강남 이전으로 말미암은 8학군의 형성은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서울의 확장이라는 시대적 산물이었지만 정권이 부동산 투기를 부추김으로써 강남개발의 선의는 빛을 잃었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청와대와 상공부(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돈을 내고,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이 하수인으로 토지를 매점하고, 서울시장이 땅값 빨리 올리라며 깃발을 흔들고, 많은 시민이 동참했으니 생각해 보면 온 국민의 분통터지는 웃지 못할 만화요, 연극이었다. 연극이라면 그것을 희극으로 볼 것인가 비극으로 볼 것인가”라고 말했다. 군사정권은 정치자금 조성과 상공부 단지 조성에 노골적으로 개입했다. 윤진우 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의 증언에 따르면 1970년 1월 초 김현옥 시장의 지시로 박종규 경호실장을 만났다. 박종규가 누구인가. 김종필 국무총리,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3인방이었다. “강남지역에서 가장 장래성이 있고 투자가치가 있는 곳이 어딘가”라는 박종규의 질문에 “탄천을 경계로 그 서부지역 일대(오늘의 강남구)”라고 답했다. “그러면 그쪽 땅을 사 모으지”라는 한마디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5억 5000만원을 받아서 땅을 사 모으고 땅값이 어느 정도 오르면 되팔았다. 박종규·김현옥이 이듬해 4월에 치러질 제7대 대통령선거(박정희 대 김대중)에 대비해 강남 땅을 투기대상으로 삼아 정치자금 마련 노름판을 벌인 것이다. 윤진우 도시계획과장은 그 뒤 1년 동안 25만평을 확보, 매각해 1971년 5월쯤 20억원을 상납했다고 한다. 현재 가치로 따지면 5000억원이 넘는 거액이다. 1963년 평당 300원 하던 땅값이 1970년대 초반 3만원으로 껑충 뛰는 과정에 정권 실세가 개입한 것이다. 이것이 강남 부동산 신화의 출발점이며 이후 강남은 평당 3000만원 시대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했다. 김현옥은 또 비슷한 시기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시절 비서관을 지낸 이낙선 상공부장관의 민원을 해결하라고 윤진우에게 지시했다. 강남에 상공부청사와 산하기관이 들어갈 부지 10만평을 물색하라는 것이었다. 오늘의 삼성동 코엑스부지가 이때 등장한다. 이 부지는 봉은사 땅이었으며 처분권은 조계종 총무원장이 쥐고 있었다. 마침 정부가 팔려고 내놓은 남산 중앙공무원교육원을 사들여 동국대 교육원으로 쓰려던 조계종 측과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금싸라기 땅 10만평은 평당 5300원씩 모두 5억 3000만원에 상공부 수중에 넘어갔다. 상공부 단지는 조성되지 못했다. 정부의 1976년 수도권 인구 재배치 계획에 따라 정부과천청사에 입주했다. 대신 무역센터와 아셈타워, 공항터미널, 한국전력 등이 들어서게 됐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으로 김현옥이 물러나면서 설거지는 후임 양택식 시장이 맡았다. 윤진우는 도시계획국장으로 승진해 잠깐 좋은 시절을 누렸으나 1974년 공무원 숙정자 명단에 포함돼 희생양이 됐다. 강남 부동산가에 파다했던 “서울시장 도둑놈, 도시계획국장 도둑놈”이라는 소문을 피해갈 수 없었던 탓이다. 윤진우가 맡았던 악역은 이 정도에 그쳤지만 하수인은 과연 그뿐이었을까. 부동산투기 억제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1968년 처음 등장한 이래 몇 년에 한 번꼴로 투기억제책이 발표됐지만 우성, 한신공영, 한양, 삼호 같은 강남 부동산재벌의 등장과 복부인의 횡행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강남에 부동산이라는 DNA가 깃든 것이다. 박 정희 대통령은 1975년 3월 4일 서울시를 연두 순시하면서 “영동·잠실지구를 개발하여 도시시설을 완비하고 주택을 많이 들어서게 하는 것은 서울시의 인구를 증가시키는 정책밖에 안 된다. 강북에 있는 사람들이 그곳으로 이주해갈 때는 주택분양이나 토지불하 때 우선권을 준다든지 해서 서울시의 인구증가 없이 강북의 조밀 인구를 강남에 소산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적인 방안이 깊이 연구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강북 인구의 강남 분산정책의 신호탄이었다. 1974년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으로 물러난 양택식으로부터 강남 신시가지 조성 임무를 물려받은 구자춘 시장은 고속버스터미널의 강남 이전, 지하철 2호선의 순환선 건설, 강남구의 신설을 대통령에게 보고해 재가받았다. 서울을 사대문 도심과 강남·잠실, 여의도·영등포 중심의 다핵(多核)도시로 개발한다는 이른바 ‘3핵도시론’이었다. 김현옥(1966~1970)이 여의도 및 한강개발과 한남대교 건설로 강남개발의 밑그림을 그렸다면, 양택식(~1974)은 택지를 조성하고 아파트를 들이는 초석을 놓았다. 방점은 구자춘(~1978)이 찍었다. 신천지 강남을 아파트공화국, 유흥가공화국, 부동산공화국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이 3명의 시장이 재임한 12년 9개월 동안 서울과 강남의 얼개가 완성됐다. 군인 출신 김현옥·구자춘이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일을 벌이고, 마무리했다면 관료 출신이던 양택식은 중간계투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뒤에는 독재자 박정희가 버티고 있었다. 서울 상공을 헬기를 타고 다니면서 일일이 지적하고 지시했다. 싫건, 좋건 간에 강남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된 1967년부터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까지 21년 동안 질풍노도처럼 불어닥친 변화의 한 중심에 있다. 개발의 합법성과 절차의 민주성을 따졌다면 지금의 강남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강남은 한국적인 특성, 쉽게 끓고 쉽게 식는 ‘냄비 근성’과 ‘빨리빨리 문화’의 합작품이다. 이들 문화의 긍정적 요인을 활용해 벤처와 인터넷, 제2금융권의 요람이 되었다. 온갖 특혜와 정책적 지원이 뒤따랐다. 구시가지 대부분을 도심재개발지구로 지정해 건물의 신·증축과 개축을 금지했다. 백화점, 도매시장, 공장 등의 신규시설도 허락하지 않았다. 다동·무교동 일대 술집과 다방, 카바레 등 유흥업소는 된서리를 맞았다. 규제가 없고 세금을 감면해주는 강남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불야성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1974년 서울지역에 고교평준화가 시행되면서 경기고 등 명문학교들도 낡고 협소한 강북 교사에 머물 이유가 없어졌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과 지하철 2호선 순환선의 등장이 강남폭발의 비등점이었다. 사평리라고 불리던 침수지역 반포로 구자춘의 시선이 쏠렸다. 1977년 강북 여러 곳에 산재했던 터미널을 폐쇄했다. 잠수교와 남산3호터널을 뚫었지만 1981년 터미널이 완공될 때까지 강북 가는 길은 고생길이었다. 1976년 반포·청담·이수·압구정·도곡·잠실을 ‘아파트지구’로 지정했다. 지정된 지역에는 아파트 이외에는 짓지 못하게 했다. “터미널 주변을 아파트단지로 조성하라”라는 구자춘의 지시 한마디에 5만 가구의 아파트가 10년 만에 들어섰다. 터미널 주변이 순식간에 아파트 숲으로 덮였다. 지하철 2호선은 본래 1970년 지하철 1호선 노선결정 때 교통량 조사와 투자비 회수계획에 따라 왕십리~을지로~마포~여의도~영등포노선을 뚫기로 정해져 있었다. 3, 4, 5호선 노선도 대체로 정해진 터였다. 구자춘의 즉흥적인 을지로순환선 계획은 강남에 바치는 찬가였다. 포병 장교 출신답게 계획에도 없던 종합운동장~삼성~선릉~역삼~강남~교대역 노선을 지도에 그려 넣었다. 성수~을지로, 사당~서울대입구~문래~을지로로 각각 연결하는 순환선이었다. 총연장 60㎞의 지하철 2호선은 1978년 착공해 6명의 서울시장이 3번의 기공식을 했고 5번의 개통식을 가진 끝에 1984년 완전 개통됐다. 2호선이 개통됐을 때 강북과 강남의 인구비는 54대46으로 균형을 맞추게 됐었다. 우 리에게 강남이란 무엇일까. 새서울도, 제2서울도, 남서울도, 영동도 아니다. 강남이 서울이다. 강북이 조선왕조의 도읍 한양이라면 강남은 우리 손으로 건설한 ‘진짜 서울’일는지 모른다. 서울을 찾는 외국인들은 강북에서 조선을 느끼고, 강남에서 현대 한국의 이미지를 떠올린다고 하지 않는가. 불과 50년 전에 시작된 한강의 기적이 곧 강남신화이며, 코리안드림이었다. 18세기를 살았던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21세기 강남의 낮과 밤을 필설로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왕국도 식민지도, 독재국가도 아닌 대한민국의 진정한 서울은 바로 강남이 아닐까. joo@seoul.co.kr ■지난 6개월 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서울을 지리 중심으로 살펴본 ‘서울 택리지’는 이번 20회로 맺습니다. 서울을 테마별로 집중조명하는 ‘서울택리지-테마기행’으로 2014년 신년에 찾아뵐 예정입니다.
  • [문소영의 시시콜콜] 천장 무너졌던 샹쉬르 마른 성의 교훈

    [문소영의 시시콜콜] 천장 무너졌던 샹쉬르 마른 성의 교훈

    프랑스의 루이 15세와 코르티잔이던 퐁파두르 부인이 사용한 ‘동쪽의 베르사유’로 불린 샹쉬르 마른 성(Chateau de Champs-sur-Marne)은 지난여름 관람객에 재개장됐다. 흔히 ‘샹성’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성은 ‘태양왕’ 루이 14세 통치시기인 1699년 착공돼 1706년에 완공됐다. 18세기 초반의 건축·미술 양식과 프랑스식·영국식 정원을 잘 보여주는 곳으로 베르사유의 축소판으로 유명하다. 얼마 전 이곳을 방문해 17세기 말부터 유럽 궁전과 귀족 대저택에서 유행했던 중국풍의 장식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시누아즈리(Chinoiserie)로 불리는 이 유행 덕분에 궁전은 대형 청화백자와 일본의 이마리 자기 등과 옻칠 가구, 중국인 상상벽화 등으로 가득했다. 이곳은 최근 6년여 동안 폐쇄됐는데 2006년 9월 21일 밤 ‘중국인의 방’으로 칭하던 방의 천장 일부가 무너져내린 탓이다. 정확하게는 시누아즈리 화풍의 대가인 크리스토프 유에 2세(Christophe Huet, 1700~1759)가 천장에 석회를 바른 뒤 프레스코기법으로 천장화를 그렸는데, 그 일부가 훼손된 것이다. 드골 대통령 시절 해외 국빈의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자, 1974년 대중에 공개해 영화 ‘앙투아네트’를 찍는 등으로 더 유명해진 프랑스 문화유산에서 어떻게 이런 후진적인 일이 일어났을까. 프랑스 전체가 발칵 뒤집혀 원인을 조사해 보니 단순한 관리소홀이었다. 1분 거리에 문화재관리소가 있었지만, 천장화를 나무 천장과 분리시키는 곰팡이(mrule)가 가득 피어올라 문화재가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 곰팡이는 워낙 냄새가 지독해서 한 번만 문화재관리소에서 방문만 했어도 상황을 금세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것은 동서가 비슷하다. 5~6평 규모 작은 방의 천장화 복원에 6년 이상이 걸린 이유가 더 중요했다. 프랑스 역시 옛것을 활용해 복구할 것인가 여부를 두고 논란이 거셌던 탓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인 방의 천장화는 전체가 복제그림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문화재의 진정성’과 원형보존이란 문제에 봉착한다. 문화재보존복원의 헌법 격인 1964년 ‘베네치아 윤리 강령’에서 문화재 복구는 1항에 최소화 원칙과 4항의 복구·복원부위의 육안식별 원칙을 요구하고 있다. 또 책임소재를 두고 성의 관리책임자와 그의 부하 직원인 학예사 간에 법적 소송이 진행되면서 이들의 오래된 불화가 뒤늦게 밝혀졌다. 그 갈등으로 곰팡이를 발견하지 못한다. 안타깝다. 2008년 2월 방화로 훼손된 숭례문 복구사업에 5년여를 투여했으나 최근 부실 복구 논란으로 시끌시끌하다. 전통방식에 대한 이해도, 적용도 부실했음을 드러냈다. 또한 부실 복구논란이 가열된 배경에는 문화재청 안팎의 갈등과 불화도 한몫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문화재를 보존·관리해 후손에게 물려주려면 윤리의 준수와 인화(人和)가 필수적이다.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거실 탁자위 꽃병이 런던 경매서 45억원에 낙찰

    거실 탁자위 꽃병이 런던 경매서 45억원에 낙찰

    거실 탁자 위에 놓여 꽃병으로나 쓰던 중국 도자기가 우리 돈으로 무려 45억원에 낙찰됐다. 아무도 가치를 못 알아봐 무려 수십년 이상 ‘꽃병 신세’ 였던 이 도자기는 최근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돼 참가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화제의 이 도자기는 18세기 초 청나라 옹정제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노란색 바탕에 녹색으로 그려진 구름과 꽃 등이 어우러져 신비한 광택을 뽐낸다. 이 도자기의 진면목이 드러난 것은 그야말로 우연한 기회 때문이었다. 신원이 공개되지 않은 도자기의 소유자가 자택에 보관돼 있던 다른 도자기 감정을 위해 전문가를 초빙했던 것. 당시 감정에 참여한 도자기 전문가 페드람 라스티는 “소유자와 함께 소중히 보관된 여러 도자기들을 둘러봤다” 면서 “그러나 유독 눈길을 끈 것은 오히려 거실에 평범하게 놓여있던 꽃병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소유자는 전혀 이 도자기의 가치를 모르고 있었다” 고 덧붙였다. 우여곡절 끝에 빛을 본 도자기는 최근 경매에 나와 예상가의 10배가 훌쩍 넘는 무려 265만 파운드에 낙찰됐다.  크리스티 경매 측은 “이 도자기는 과거 소유자의 친척이 뉴욕에서 구매해 유산으로 물려준 것” 이라면서 “낙찰자는 유명 중국인 예술품 트레이더”라고 밝혔다.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꽃병’으로 쓰던 도자기 알고보니 45억원 짜리

    거실 탁자 위에 놓여 꽃병으로나 쓰던 중국 도자기가 우리 돈으로 무려 45억원에 낙찰됐다. 아무도 가치를 못 알아봐 무려 수십년 이상 ‘꽃병 신세’ 였던 이 도자기는 최근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돼 참가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화제의 이 도자기는 18세기 초 청나라 옹정제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노란색 바탕에 녹색으로 그려진 구름과 꽃 등이 어우러져 신비한 광택을 뽐낸다. 이 도자기의 진면목이 드러난 것은 그야말로 우연한 기회 때문이었다. 신원이 공개되지 않은 도자기의 소유자가 자택에 보관돼 있던 다른 도자기 감정을 위해 전문가를 초빙했던 것. 당시 감정에 참여한 도자기 전문가 페드람 라스티는 “소유자와 함께 소중히 보관된 여러 도자기들을 둘러봤다” 면서 “그러나 유독 눈길을 끈 것은 오히려 거실에 평범하게 놓여있던 꽃병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소유자는 전혀 이 도자기의 가치를 모르고 있었다” 고 덧붙였다. 우여곡절 끝에 빛을 본 도자기는 최근 경매에 나와 예상가의 10배가 훌쩍 넘는 무려 265만 파운드에 낙찰됐다.  크리스티 경매 측은 “이 도자기는 과거 소유자의 친척이 뉴욕에서 구매해 유산으로 물려준 것” 이라면서 “낙찰자는 유명 중국인 예술품 트레이더”라고 밝혔다.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240년전 로봇 맞아? 글쓰면 눈동자까지 따라가 깜짝

    240년전 로봇 맞아? 글쓰면 눈동자까지 따라가 깜짝

    240년 전 로봇이 공개돼 누리꾼들의 큰 관심을 받고있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240년 전 로봇’이라는 제목의 사진이 공개됐다. 공개된 사진에는 필기를 하는 인형과 인형 안에 들어 있는 기계 부품이 보인다. 이 로봇은 600개의 부품으로 이뤄졌고 휠을 돌려 글자를 적으며 글을 쓰는 동안 세밀한 동작이 살아 있다. 글을 쓰는 동작 가운데 눈동자가 글을 따라가고 펜이 잉크를 찍을 때 고개를 돌려 240년 전에 제작됐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다. 240년 전 로봇은 일명 ‘필기사’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글 쓰는 로봇으로 18세기 후반 스위스 출신 시계 장인 피에르 자케 드로가 아들과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240년 전 로봇의 신기한 모습에 네티즌들은 “240년 전 로봇, 얼마나 정교한 거야?”, “240년 전 로봇은 귀여운 모습이네”, “240년 전 로봇, 지금도 움직일까”,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 뉴스부 iseoul@seoul.co.kr
  • 레 미제라블… 제인 에어… 분노의 포도… 명작 속의 경제

    레 미제라블… 제인 에어… 분노의 포도… 명작 속의 경제

    명작의 경제/조원경 지음/책밭/526쪽/1만 8000원 흔히 문학작품은 시대와 삶의 실속 있는 반영물이라 한다. 작품 속 주인공이 현실에 발 딛고 사는 만큼 당대의 사회에 깊숙이 관련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문학작품을 읽을 때 시대상황과 배경을 촘촘히 들여다본다면 훨씬 더 많은 재미와 교훈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소설과 경제. 얼핏 보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생뚱맞은 조합일 터. 문학적 감성과 딱딱한 경제논리의 접합이 결코 쉽지 않으리란 생각이 앞설 것이다. ‘명작의 경제’는 그런 편견을 뒤집는 경제 교양서다. 가상의 매체에서 일하는 경제부 여기자가 명작소설의 고향을 찾아 소설에 연관된 경제 이슈들을 취재해 소설 형식으로 풀어내는 독특한 구성이다. ‘레 미제라블’‘안나 카레리나’‘분노의 포도’‘홍수의 해’‘생사피로’ 등 18세기부터 현재까지 유명한 13개의 소설 작품을 대상으로 작품 내용에 경제·사회적인 문제들을 연결해 해법까지 제시하는 흐름이 독특하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보자면 장발장이 빵을 훔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먼저 파고든다. 시민혁명 이후 1832년 6월 봉기까지 프랑스를 위기로 몰아갔던 재정 악화며 하이퍼인플레이션, 사회안전망 미비 등 요인을 짚어 지금의 고령화와 경제통합, 기술발전 같은 문제의 해결방안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을 친절히 이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탄생한 ‘제인 에어’에서는 역경을 이겨내는 주인공의 자세에 경제위기 극복의 비밀을 연결한다. 그런가 하면 ‘안나 카레리나’에선 주인공 안나와 레빈의 삶을 통해 행복의 경제적 의미를 묻고 ‘분노의 포도’에서는 기계와 자본에 대한 의미를 짚어 소설속 휴머니즘의 경제적 의미를 낱낱이 파헤치기도 한다. 대학 경제원론과 고교 사회과목 정도의 경제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각종 통계와 인터뷰를 곁들여 읽는 이의 수준에 따라 다양하게 소화할 수 있도록 한 것도 특징이다. 책을 어떻게 보고 해석하느냐는 독자의 입장에 따라 엇갈리겠으나,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는 의외로 간결하다. “궁극적 목적을 행복찾기에 두고 있는 경제의 본질은 역시 사람이다.” 그런 경제 인식은 ‘레 미제라블’편에서 극명하게 비쳐진다. “빵 하나 훔쳤다고 사람을 19년동안 감옥에 넣어 다시는 새 삶을 살 수 없게 영원한 죄수라는 낙인을 붙이는 사회야말로 사회적 위치 이동이 불가능한 억압된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저자는 행정고시 합격 이후 20년 이상 경제관료로 재직하다 지금은 미주개발은행 한국대표로 일하고 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지구 최고(最古)’어른’은 美 ‘8만살 사시나무’ 군락

    지구 최고(最古)’어른’은 美 ‘8만살 사시나무’ 군락

    얼마 전 507살 조개가 발견되어 가장 나이많은 동물로 확인됐으나, 연구진이 나이 확인을 위해 조개를 벌리다가 죽게 해 안타까움을 남겼다. 그렇다면 동물과 식물을 통틀어 지구상의 최고 연장자는 누구일까?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이번 507살 조개 발견을 계기로 살아 있는 최고 연장자들을 소개하는 기사를 14일 게재했다. 보도에 따르면 동식물 연장자중 단연 1위는 8만년 이상을 살아온 미국 유타주의 ‘사시나무’ 군락이다. 이 사시나무는 무성번식하는 특징을 갖고 있어, 지하에 거대한 뿌리를 뻗으면서 번식한다고 한다. 따라서 길게는 백만년 이상도 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구상 현존 최고의 살아있는 생명체로 자리잡고 있다. 사시나무보다는 훨씬 ‘어리지만’ 5000~6000년 된 올리브 나무 ‘자매’도 주목받는 연장자다. 레바논에 있는 이 나무들은 군락을 이루지 않은 생명체중에선 가장 오래됐다. 전설에 의하면 비둘기가 성서속의 노아에게 홍수가 끝난다는 의미로 이 올리브 나무 가지를 준 것으로 되어 있다. 18세기 미국이 독립을 얻기 26년 전에 태어난 거대 거북이도 연장자 리스트에 들어 있다. 이 거북이는 1875년부터 인도의 한 동물원에서 살다가 2006년 안타깝게도 숨을 거뒀다. 이밖에 168년간 생존한 백합조개, 1899년 영국에서 부화되어 114년째 살고 있는 마코 앵무새도 연장자 리스트에 포함됐다. 임창용 기자 sdragon@seoul.co.kr
  • 지구 최고(最古)’어른’은 美 ‘8만살 사시나무’ 군락

    지구 최고(最古)’어른’은 美 ‘8만살 사시나무’ 군락

    얼마 전 507살 조개가 발견되어 가장 나이많은 동물로 확인됐으나, 연구진이 나이 확인을 위해 조개를 벌리다가 죽게 해 안타까움을 남겼다. 그렇다면 동물과 식물을 통틀어 지구상의 최고 연장자는 누구일까?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이번 507살 조개 발견을 계기로 살아 있는 최고 연장자들을 소개하는 기사를 14일 게재했다. 보도에 따르면 동식물 연장자중 단연 1위는 8만년 이상을 살아온 미국 유타주의 ‘사시나무’ 군락이다. 이 사시나무는 무성번식하는 특징을 갖고 있어, 지하에 거대한 뿌리를 뻗으면서 번식한다고 한다. 따라서 길게는 백만년 이상도 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구상 현존 최고의 살아있는 생명체로 자리잡고 있다. 사시나무보다는 훨씬 ‘어리지만’ 5000~6000년 된 올리브 나무 ‘자매’도 주목받는 연장자다. 레바논에 있는 이 나무들은 군락을 이루지 않은 생명체중에선 가장 오래됐다. 전설에 의하면 비둘기가 성서속의 노아에게 홍수가 끝난다는 의미로 이 올리브 나무 가지를 준 것으로 되어 있다. 18세기 미국이 독립을 얻기 26년 전에 태어난 거대 거북이도 연장자 리스트에 들어 있다. 이 거북이는 1875년부터 인도의 한 동물원에서 살다가 2006년 안타깝게도 숨을 거뒀다. 이밖에 168년간 생존한 백합조개, 1899년 영국에서 부화되어 114년째 살고 있는 마코 앵무새도 연장자 리스트에 포함됐다. 임창용 기자 sdragon@seoul.co.kr
  • [기고] 창조형 에너지경제와 한·영 신뢰증진/조환익 한국전력공사 사장

    [기고] 창조형 에너지경제와 한·영 신뢰증진/조환익 한국전력공사 사장

    영국은 전통적으로 세계의 에너지 선진화를 이끌어 왔다. 18세기 중엽 산업혁명을 일으켰고 20세기에는 북해의 거친 파도와 강풍 속에서도 해발 수백m 아래 원유와 가스를 시추할 수 있는 신기술을 개발했으며, 지금은 해상풍력 발전을 선도하고 있다. 1956년 세계 최초 상업용 원전을 만든 이래 지속적인 원전정책을 추진해 왔지만, 1990년대 전력산업 민영화 이후 에너지 분야 외국기업의 점유율이 높아져 수급 불안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에너지 분야에 대한 해외 협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대통령의 금번 영국 국빈방문은 시의적절하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 우리나라는 에너지산업을 창조형 에너지 경제로 전환하고 그 경험과 노하우를 국제사회와 공유해 나갈 계획을 갖고 있다. 지난 10월 대구에서 열린 세계에너지총회(WEC) 기조연설에서 대통령께서는 “에너지 산업은 창조경제의 빛을 발할 수 있는 분야이며, 에너지저장장치(ESS) 등 창조형 에너지 경제로의 전환을 선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다. 영국 국빈방문 둘째 날, 대통령께서는 양국 최초 장관급 ‘경제통상공동위’와 ‘글로벌 최고경영자(CEO) 포럼’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양국은 앞으로 ‘경제통상공동위’가 양국 간 미래지향적 협의체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무역투자, 금융, 에너지, 문화, 보건, 정보통신 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구체적 협력을 증진해 나가기로 했다. 특히, 에너지 분야에서는 향후 양국 및 제3국 시장에서의 상업용 원자력 에너지 분야 협력을 증진하겠다는 내용의 포괄적 원전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영국은 세계적 수준의 원전해체 기술 이전, 원자력 안전 및 국민 수용성 관련 정책을 한국과 공유하고자 하였으며, 한국은 장기적으로 영국과 제3국 원전시장 진출에 대비하여 영국 기업과 협력을 위해 매년 원자력 대화협의체를 운영하겠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이러한 성과물은 당장은 가시적이지 않더라도 양국 간 점진적 신뢰 구축을 기반으로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영국 원전시장에 한국형 원전의 수출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양국은 에너지 민간 부문 간 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해상풍력, 원전분야, 스마트그리드 등 전력 효율성 분야에 대해 정기 교류채널을 통한 협력을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필자도 에너지기후변화부(DECC) 에너지담당 부장관을 별도로 만나 안전하고 경제적인 한국형 원전을 소개하고 향후 제3국 원전건설 공동 진출을 통해 양국이 윈윈할 수 있도록 에너지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또 원자력산업협회(NIA) 회장과는 양국 간 원전분야의 신뢰를 쌓아가면서 상호 협력을 구체화하기로 했다. ‘잔잔한 바다는 능숙한 선원을 만들지 못한다’(A smooth sea never made a skilled mariner)는 영국 속담이 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거친 바다를 항해하면서 국가적 역량을 키워온 한국 유수의 기업들이 영국 원전시장에 대해 준비된 자세를 보여야 할 때가 머지않았다고 본다. 한·영 수교 130주년이 되는 올해다. 금번 영국 국빈방문을 통해 확인된 양국 간 신뢰의 파트너십을 토대로 창조형 에너지 경제의 빛을 밝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 이성의 아버지 데카르트의 유골을 찾아라

    이성의 아버지 데카르트의 유골을 찾아라

    [데카르트의 사라진 유골] 러셀 쇼토 지음/강경이 옮김/옥당/392쪽/2만 2000원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그 유명한 명제를 남긴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1596~1650). ‘유럽 철학이 플라톤에 대한 각주라면, 근대 유럽 철학은 데카르트에 대한 각주’라는 말 그대로 데카르트는 흔히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간주한다.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였고 17세기 근대과학의 등장이며 18세기 계몽주의, 19세기 산업혁명, 20세기 컴퓨터와 21세기 뇌과학에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연결된다는 그는 사후 관 뚜껑이 세 번이나 열리고 유골이 곳곳에 흩어지는 수난을 당했다. 왜 그런 고초를 겪어야 했을까. ‘데카르트의 사라진 유골’은 데카르트의 유골이 도난당하고 여러 차례 옮겨지는 과정을 추적한 탐정소설 분위기의 책이다. 저자는 ‘뉴욕타임스 매거진’ 칼럼니스트이자 암스테르담의 존 애덤스 연구원장. 탐정이 사건 현장을 조사하고 분석해 문제를 풀어내듯 1인칭 화법으로 사후 데카르트의 수난을 파헤쳐 그의 삶과 사상을 재구성해 내는 과정 자체가 흥미진진하다. 데카르트에 관해 가장 긍정적인 평가는 ‘개인의 이성을 깨우고 학문의 진리를 이성으로 탐구하기 위해 애썼던 위대한 철학자’이다. 미신과 신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인류로의 첫발을 내디딘 선각자였다고 할까.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의 힘을 주창하고 세웠던 만큼 왕과 교회의 절대적 힘에 편승한 당대 많은 세력들로부터 공격을 받거나 옹호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함께 받았을 것이다. 책의 큰 흐름은 역시 데카르트의 사후 수난의 재구성이다. 이국 땅 스웨덴에서 숨을 거둔 지 16년 후 스웨덴 주재 프랑스 대사가 유골을 몰래 파내 프랑스로 옮겼고 유골이 안치된 파리 생트 주네비에브 성당이 혁명정부에 몰수될 위기에 처하면서 프랑스유물박물관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그 뒤 프랑스 혁명에 공헌한 위인들을 팡테옹(국립묘지)에 모셔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생제르맹 데 프레성당으로 다시 옮겨지기에 이른다. 책의 특장은 단지 데카르트 유골의 수난 과정 찾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데카르트의 유골을 추적하는 저자를 따라가다 보면 서양 근대사를 장식한 굵직굵직한 명장면과 인물들을 자연스레 만나게 된다. 계몽주의자들의 비밀모임이며 프랑스혁명 절정기의 파리, 프랑스 아카데미데시앙스의 학회실, 초창기 인류학회의 현장들이 실감 나게 소개된다. 결국 사후 데카르트의 수난사는 유골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지성의 각축전이자 근대 철학·과학의 발전사였음을 보여주는 저자는 책에 이렇게 적고 있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공기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상식을 의심하라, 온도계라도

    상식을 의심하라, 온도계라도

    [온도계의 철학] 장하석 지음/오철수 옮김/동아시아/544쪽/2만 7000원 온도계는 열에너지를 측정하는 도구다. 물의 어는점(0℃)과 끓는점(100℃) 사이를 100 등분해 온도를 잰다. 미국 등에서는 물의 어는점(32℉)과 끓는점(212℉)을 180 등분한 화씨온도계를 쓴다. 온도를 표현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의 기온을 온도계에 표시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은 같다. 지금이야 당연시되는 명제이지만, 0도와 100도가 온도계의 고정점이 되기까지는 20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세계 유수의 과학자들이 끓는점과 어는점 같은 온도계의 고정점을 확정하기 위해 분투를 벌였고, 온도계에 적절한 개수의 눈금을 그려 넣기 위해 한 세기 넘게 논쟁과 실험을 거쳤다. ‘온도계의 철학’도 비슷하다. 저자는 ‘온도는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온도를 어떻게 정확하게 잴 수 있을까’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뒤 그 답을 찾기 위해 꼬박 10년을 쏟아부었다. 그 결실이 바로 이 책이다. 온도계가 없던 시절에 어떻게 온도를 측정했고, 온도에 대한 개념을 만들었으며, 온도계를 발명했는가 등 온도 측정 역사의 발전 과정을 짚고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책이 ‘상보적 과학’을 보여 주는 사례가 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상보적 과학은 ‘역사와 철학 연구를 통해서 과학지식에 기여하는 학문’이다. 현대의 전문가적 과학에서 벗어난 과학적 물음을 던진 뒤 이를 확인해 나가는 과정에서 일반인의 과학 지식 폭을 넓히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방식은 “상식이 된 과학의 기초 진리를 우리는 왜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가”라고 묻는 거다. 종교에선 보지 않고 믿어야 ‘진복자’다. 과학은 다르다.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과연 진리인 건지, 허점은 없는지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또 증명해야 한다. 저자가 그 복잡한 과정, 그러니까 측정이 과학의 진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단초로 삼은 게 바로 온도계다. 온도계의 발명은 과학의 발달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열을 측정하기 위한 노력 덕에 18세기 이후 각종 열 관련 연구들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은 2004년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부를 통해 영어로 출간됐다. 그해 과학철학 부문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러커토시상’을 받았다. 이듬해엔 영국 과학사학회가 과학사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저술가에게 주는 ‘이반 슬레이드상’도 받았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등의 베스트셀러로 친숙한 같은 학교 장하준 교수가 그의 친형이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기괴해라, 패션

    기괴해라, 패션

    [패셔너블] 바버라 콕스 외 지음/이상미 옮김/투플러스북스/264쪽/3만 6000원 [패션의 역사] 준 마시 지음/김정은 옮김/시공아트/308쪽/2만 5000원 파니에 스커트는 18세기 프랑스왕 루이 16세 통치 시기에 베르사유궁에서 가장 크게 유행한 패션이다. 고래 뼈나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틀에 뻣뻣하게 풀을 먹인 천을 겹겹이 붙인 것으로, 허리 뒤에서 끈으로 묶는 형태였다. 앞은 평평하고 양옆의 길이는 최대 3m에 달해 소파에 앉을 수도 없고, 문을 통과할 때는 게걸음을 해야 하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옷이었지만 상류사회 여성들은 과시의 상징으로 파니에 스커트를 즐겨 입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행시킨 이 스타일은 결국 그녀의 비극적 운명와 함께 종말을 맞았다. ‘패셔너블’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류가 열광했던 가장 아름답고 기괴하며 별난 유행을 일목요연하게 보여 준다. 리본과 보석으로 장식한 남성용 하이힐, 터무니없이 높이 솟은 가발 등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황당하지만 당시엔 첨단 유행으로 뭇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패션들을 보노라면 패션계에서 아름다움과 추함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작은 발을 만들기 위해 발뼈를 부러뜨려야 했던 중국 소녀들, 빈민간 아이들의 이를 뽑아 틀니를 만들었던 19세기 유럽 귀족들의 사례는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패션에 대한 과도한 열정을 엿보게 한다. ‘패션의 역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현재까지 시대와 함께 변화해 온 패션을 통해 현대사회를 들여다본다.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뉴룩은 전쟁을 겪으며 획일적인 옷만을 입었던 여성들에게 아름다움을 되찾아 주었고, 이브 생로랑의 스모킹 슈트는 여성들이 바지 정장을 입을 수 있게 해 남성과 동등한 권력을 부여했다. 속옷과 겉옷의 경계를 허물어 패션에 자유를 부여한 장 폴 고티에, 길거리 문화를 하이 패션에 접목시켜 패션계에 충격을 던진 마크 제이컵스 등 시대상을 대변하며 트렌드를 이끈 디자이너들의 이야기와 패션계 안팎의 다양한 정보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빛을 밝히자 문명이 빛났다

    빛을 밝히자 문명이 빛났다

    인간이 만든 빛의 세계사/제인 브록스 지음/박지훈 옮김/을유문화사/380쪽/1만 5000원 ‘인간이 만든 빛의 세계사’는 인간이 만들어낸 빛이 삶의 양식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살핀 탐사기이자 역사서이다. 18세기까지 사람들이 경험한 빛은 고대 로마시대의 빛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까지 램프 제작 기술에 별 다른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램프의 밝기를 획기적으로 증진시킨 곳은 18세기 후반 유럽의 연구실이었다. 스위스 과학자 프랑수아 피에르 아미 아르강이 개발한 램프는 이전에 쓰던 램프의 오렌지색에 비해 불빛이 ‘하얗고, 생생하며, 눈부셨다’. 그의 램프는 일반 램프보다 10배나 더 밝아 등대의 항로 표지로 쓰였다.아르강 램프는 너무 밝아 눈이 감당하기 힘들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여서 넓적한 운모, 장식용 유리 등으로 불꽃을 가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램프나 전등에 씌우는 갓의 시초였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영국에서 새로운 조명 수단으로 가스불이 등장했다. 독일 출신의 영국 이민자 프레데릭 앨버트 윈저가 중앙 거점에서 가스를 생산해 관을 통해 가로등, 상업시설, 웨스트민스터의 가정집 등에 가스를 공급했다. 사람들은 가스불을 이렇게 예찬했다. “한여름의 대낮처럼 밝으면서도 달빛처럼 부드러워 눈을 편안하게 했다.” 가스불은 첫선을 보이자마자 런던 전체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사람들은 더 많은 저녁 시간을 여가에 할애하고 돈도 더 썼다. 아이쇼핑이 취미로 자리잡으면서 저녁 시간은 소비자들의 시간으로 탈바꿈했다. 1870년대에 러시아의 발명가 파울 야블로치코프가 전기를 이용한 아크등을 개발했다. 아크등은 너무 밝아서 가로등을 45m 간격으로 배치해도 충분히 거리를 밝힐 수 있었다. 그러나 빛이 지나치게 강렬해 빛의 세기를 낮추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었다. 그렇다면 촛불 10~20개에 맞먹는 빛을 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1802년 영국왕립협회에서 험프리 데이비가 발갛게 달군 백열 필라멘트를 선보이며 백열등 개발의 서막을 열었다. 그리고 77년이 흐른 1879년 12월 31일 밤 미국 워싱턴주 멘로 파크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에디슨이 그의 연구실, 사무실, 집에 설치한 수십개의 백열등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딸깍’ 스위치를 올리는 소리와 함께 진공 유리구 속에 나타난 빛은 불꽃도 나타나지 않고 달래거나 어를 필요도 없었다. 빛은 더 이상 떨리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았고 냄새가 나거나 촛농을 떨어뜨리지도 않았다. 산소를 소모하지도 않았고 공장에서 쓰는 걸레나 건초 더미에 불이 붙을 우려도 없었다. 아이 혼자 불 옆에 있어도 괜찮았다. 백열등의 등장은 사람들의 생활을 혁신적으로 바꿨다. 밤늦게 작업할 수 있고 공부할 수 있고…. 혜택이 셀 수 없이 생겨났지만 부작용도 컸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먹고 마시는 ‘노는 문화’는 불면증, 비만 등 현대병을 유발했다. 오늘날은 백열등이 더 환하고 전기를 덜 쓰는 발광다이오드(LED)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하지만 이젠 빛의 홍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인공조명이 넘쳐나 심신에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지경이 됐기 때문이다. 유상덕 선임기자 youni@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한강(중)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한강(중)

    ■한강 잔혹사 무동·백마도 10여개 섬, 택지 조성 위해 훼손 ‘양화진의 절경’ 선유봉, 깎이고 깎여 ‘섬’ 신세로 한강에는 10여개의 크고 작은 섬(하중도)들이 명멸(明滅)했다. 한강 2000년사 속에서 실재했던 뭇 섬들은 불과 50년 전에 뭍으로 변하거나 사라졌다. 큰 섬을 꼽으라면 팔당 하류부터 당정섬(미사리 섬), 석도(무학도), 잠실도(잠실섬), 뚝섬, 저자도, 율도(밤섬), 여의도, 난지도를 들 수 있다. 부리도, 무동도, 반포도(서래섬), 노들섬(중지도), 백마도도 당당했다. 이 중 석도, 무동도, 부리도, 저자도, 백마도는 한강변을 메워 택지를 조성하는 모래로 쓰이면서 파괴됐다. 밤섬과 당정섬도 같은 운명이었지만 20여년 만에 되살아나고 있다. 잠실도와 뚝섬, 서래섬, 여의도, 난지도는 이름만 섬(도)일 뿐 육지가 됐다. 밤섬과 함께 ‘강의 기적’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당정섬은 경기 하남시 산곡천과 한강이 만나는 팔당대교 하류 미사리 조정경기장 옆에 있다. 석도는 고덕천과, 잠실도와 부리도는 성내천과 탄천이 한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각각 형성됐다. 잠실도와 부리도는 별개의 섬이었지만 합쳐져 육지가 되었다. 무동도는 탄천이 흘러나오는 지금의 청담동쯤에 있었다. 반포 서래섬은 이름이나마 남았지만 무동도는 무자비한 채취에 흔적도 없다. 저자도는 청계천과 중랑천, 여의도와 밤섬은 만초천(욱천)과 봉원천, 난지도는 한강 이남의 안양천과 한강 이북의 홍제천과 불광천이 맞닿는 곳에 있었다. 노들섬은 1917년 한강인도교(한강대교) 건설 당시 이름이 없던 모래 언덕에 둑을 쌓으면서 만들어졌다. 노들이란 ‘백로(鷺)가 노닐던 징검돌(梁)’이라는 뜻이며 강 건너편 노들나루(노량진)의 이름을 딴 것이다. 오페라하우스를 건립키로 했으나 한강대교를 오가는 차량이 내는 소음과 예산문제로 백지화되고 나서 텃밭으로 쓰이고 있다. 난지도는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보다 33배나 더 큰 거대한 쓰레기 산이 됐다. 난초와 지초 향기가 진동하던 섬이 쓰레기 침출수의 악취를 풍기는 인공산이 된 셈이니 비극이 따로 없다. 백마도는 김포대교 아래 모래섬이었지만 신곡수중보 공사로 가라앉았다. ‘한강 잔혹사’는 섬을 없애기도 했지만 새로운 섬을 생성시키기도 했다. 선유도와 세빛둥둥섬이 새롭게 태어난 인공 섬이다. 선유도는 본래 높이 40m의 선유봉이었다. 지금의 합정동 절두산(잠두봉)과 마주 보고 서 있었으며 18세기 겸재 정선의 실경산수화 ‘선유봉’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양화진의 절경이었다. 한강제방 축조와 여의도 윤중제 조성용 골재로 조금씩 깎여 나가기 시작해 결국 섬 신세가 됐다. 1390억 원을 들여 반포한강공원에 지어진 3채의 세빛둥둥섬은 세계최대의 인공 섬이다. 강물에 휩싸여 떠내려가지 않도록 쇠사슬로 고정한 유리성(琉璃城)이다. 인간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없앤 자연섬에게 바치는 레퀴엠(진혼곡)인지도 모른다. 자연을 훼손한 대가가 얼마나 비싼지 생각게 한다. ■뚝섬 과거사 경상·충청·강원도 연결하는 도성 동남쪽 관문 다리 건너고 배로 한강 넘어야 닿아 섬으로 인식 한강 제방이 생기기 전 한강 강폭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었다. 제2차 한강종합개발이 완료된 1987년 이후 한강의 강폭은 최대 900m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강제방이 없었던 1960년대 이전의 한강은 서울~원산 간 경원선(지금의 중앙선 구간) 철길이 경계선을 이뤘다. 홍수 때면 여의도, 이촌, 신사, 잠원, 반포, 압구정, 뚝섬, 잠실 등 한강 양안이 물바다가 되기 일쑤였다. 홍수기 한강의 넓이는 평균 1800~2000m였고, 잠실섬을 중심으로 현재의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석촌호수 남단까지를 측정했을 때 최대 3500m에 이르렀다. 갈수기에는 한강대교를 기준으로 노량진과 흑석동 쪽에 붙어 흐르는 50~100m의 가느다란 물줄기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백사장이었다. 옛사람들은 왜 뚝섬을 섬으로 여겼을까. 긴 다리를 건너고 배를 타야 닿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뚝섬은 한양인 듯하지만 한양이 아니었다. 도성 밖 성저십리(城底十里)의 경계지점이자 도성의 동남쪽 관문이었다. 1751년에 제작된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之圖)를 보면 뚝섬을 섬으로 그리지 않았다. 다만 살곶이다리를 건너 뚝섬, 광나루, 송파나루로 향하는 지점에다 ‘뚝섬’이라는 지명을 적어 놓았다. 중랑천을 건너서 다시 배를 타고 한강을 넘어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로 연결되는 뚝섬을 섬으로 여긴 까닭이다. 당시 강원도 가는 길은 경기도 광주를 거쳐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충청도와 경상도를 가려면 남한강 줄기를 따라 내려갔다. 3도의 물산이 모이는 광나루와 송파나루가 흥청대기 마련이다. ‘광주 가는 나루’라고 해서 광나루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양도성을 나서면 광희문~왕십리를 거쳐 개천(청계천)과 중랑천이 한강본류와 만나는 살곶이다리(箭串橋)를 건너야 뚝섬에 닿았다. 함흥에서 도읍으로 돌아오던 태조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태종에게 화살을 날렸던 바로 그 장소이며 조선에서 가장 긴 돌다리였다. 중랑천을 따라 도봉천과 만나는 지점까지 이어지는 동부간선도로를 생각해 보면 옛사람들이 뚝섬을 섬으로 여길 만했다. 뚝섬(纛島)이라는 지명은 태조 때 왕을 상징하는 깃발인 독기(纛旗)가 떠내려온 장소라고 하여 생겼다. 처음에는 독도라고 부르다가 이후 둑섬, 둑도, 뚝도를 거쳐 뚝섬으로 굳어졌다. 장안평이나 전관평(살곶이벌)처럼 넓은 벌을 형성하는 비옥한 땅이어서 한성부의 배후 농업지대 역할을 했다. 마장동(馬場洞)이나 면목동(面牧洞)이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을 키우고 사냥을 하던 드넓은 목장이었다. 이곳에 경마장과 골프장이 생겼다가 없어지고 현재의 서울숲이 조성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뽕밭 변천사 홍수방지 제방쌓기서 택지·도로 조성으로 변질 잠실섬·부리도 육지화… 금싸라기 땅으로 개발 한강의 섬은 어떻게 없어졌으며 강변 백사장은 어디로 다 사라졌을까. 물난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방을 쌓는 것이 1960년대 제1차 한강 개발의 주목적이었지만 차츰 택지조성과 제방 둑에 도로를 개설하는 사업으로 목적이 변질됐다. 이름하여 공유수면 매립공사로 불린 한강 제방쌓기가 이권사업으로 등장한 탓이다. 1960~1970년대 동부이촌동, 흑석동, 서빙고, 반포, 압구정동, 구의, 잠실 등이 주 대상지역이었다. 국유하천인 한강을 막아 제방을 쌓고 택지를 조성했다. 모래와 골재는 한강에 지천으로 널린 모래섬과 강변 암벽을 폭파해 메웠다. 그 결과 섬은 사라졌고, 한강제방에는 강변도로와 올림픽대로가 생겼고, 한강변은 아파트 단지가 됐다. ‘땅 짚고 헤엄치기 식’ 공유수면 매립공사를 수주한 건설업체들은 재벌이 됐다. 잠실섬은 본래 광진구 자양동에 붙어 있던 땅덩어리가 ‘아득한 옛날’ 홍수 때 허리가 잘려나가 섬이 됐다고 한다. 이때 새로 흐르게 된 북쪽 물길이 신천(新川)이다. 또 잠실섬 서쪽에 부리도가 있었는데 갈수기에는 하나의 섬이었다가 강물이 불면 딴 섬이 되었다. 행정적으로 잠실섬은 고양군 뚝섬면, 부리도는 광주군 중대면으로 갈렸다. 잠실에는 16세기 무렵까지 뽕나무가 무성했지만 잦은 홍수로 피폐해졌다. 지금의 서초구 잠원동이 잠실의 역할을 대신했다. 1960년대 말까지 서울의 끝은 뚝섬과 광나루였다. 잠실섬의 존재를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1969년 경기도 광주에 조성한 300만평 규모의 광주대단지(성남)에 집단이주한 주민 10만명의 교통불편 민원과 서울에서 소외됐다는 불만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강북의 기존 시가지와 광주대단지를 연결하는 방안이 검토됐다. 잠실 공유수면 매립과 잠실섬의 육지화, 잠실대교의 개설이 최대 현안으로 부각됐다. 1971년 4월 한강 남쪽 본류인 삼개나루(삼전도) 쪽 흐름을 차단하는 물막이공사가 완료됐다. 잠실섬이 뭍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북쪽 지류인 신천 쪽을 막지 않고 남쪽 본류인 삼전도 쪽을 막은 것은 택지를 더 많이 조성하기 위해서다. 서울에서 유일한 호수인 석촌호수는 이때 막은 강물이다. 롯데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대비한다는 명목 아래 이 땅에 동서 390m, 남북 265m, 바닥면적 합계 56만㎡의 엄청난 건물을 지었다. 이렇게 탄생한 잠실 롯데월드는 여의도 63빌딩이나 삼성동 코엑스보다 4배 가까이 큰 덩치를 자랑한다. 석촌호수를 가로지르는 송파대로 좌우 동호(東湖)와 서호(西湖) 중 서호를 20년 장기 대여해 실외테마파크를 운영하고 있다. 동호 남쪽에 이곳이 옛 송파나루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고, 서호 옆에는 1639년 병자호란 때 세운 삼전도비(大淸皇帝恭德碑)가 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뽕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 것을 이른다면 잠실의 변화는 ‘상전금지’(桑田地)란 신조어를 낳을만하다. 뽕밭이 금싸라기 땅(地)이 되었으니 말이다. 1972년 7월 잠실대교와 송파대로가 준공돼 서울과 성남시가 이어졌다. 1978년 잠실매립이 마무리되자 75만 평이 생겼다. 여기에 국유지와 시유지를 주축으로 대대적인 토지구획정리사업을 벌이자 무려 340만 평에 이르는 신생 도시 한 개가 생겼다. 이른바 잠실지구이며 올림픽유치의 꿈을 이룰 잠실 메인스타디움이 깃들 기회의 땅이었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매립 당시 토사가 부족하자 개발업체 측이 ‘몽촌토성 언덕을 헐어 사용하면 어떻겠느냐’라는 제안을 했으나 서울시가 수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성백제의 역사를 한순간에 허물어 버릴 수도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j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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