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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틀러 보물 숨긴 비밀장소 11곳 적힌 나치 친위대 일기장 공개

    히틀러 보물 숨긴 비밀장소 11곳 적힌 나치 친위대 일기장 공개

    독일 프리메이슨 로지에 숨죽이고 있던 나치 장교의 전시 일기가 공개됐다. 프리메이슨은 18세기 초 영국에서 시작된 비밀단체로 ‘로지’(작은 집)라는 집회를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공개된 일기장에는 나치가 약탈한 28톤의 금과 도난 예술품이 숨겨진 장소가 적혀 있어 진위가 주목된다. 데일리메일은 8일(현지시간) 이 일기장에 나치의 보물이 숨겨진 11곳의 위치가 적혀 있다고 보도했다. 나치 친위대(SS) 장군이었던 에곤 올렌하워는 일기장에 히틀러가 진격하는 소련군에게서 보물을 지키기 위해 260대의 트럭을 폴란드 내 11곳의 지역에 숨기라는 명령을 했다고 밝혔다. 올렌하워는 소련의 ‘붉은 군대’에게 재산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지역 귀족과 다른 친위대 장교 사이에서 브로커 역할을 했던 작전의 핵심 인물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기장은 독일 작센안할트주의 도시 크베들린부르크에 있는 프리메이슨의 1100년된 로지에 숨겨져 있었다. 일기장이 밝힌 보물의 위치 11곳 중 1곳에는 폴란드의 도시 브로츠와프에 있는 라이히스방크 지점도 포함돼 있다. 라이히스방크는 독일 제국 성립 때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료 때까지 존속했던 독일의 중앙은행이다. 올렌하워는 이곳에 28톤의 금을 숨겼다는 기록을 남겼다. 또 다른 보물의 위치는 개울 밑의 콘크리트 석관, 궁전 공원 내 오렌지나무온실 지하, 궁전 벽 사이 비밀의 방 등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올렌하워의 일기장에는 나치가 숨긴 보물에 보티첼리, 루벤스, 세잔, 카라바기오, 모네, 뒤러, 라파엘, 렘브란트 작품을 포함해 프랑스에서 약탈한 48점의 미술품과 종교 관련 유물이 포함돼 있다고 기록돼 있다.  현재 이 일기장을 소유하고 있는 재단 관계자는 “올렌하워의 일기장은 독일 내 5개 기관에 의해 진위가 검증됐다. 우리는 폴란드 독립 100주년과 독일 프리메이슨 지부의 1100주년에 맞춰 이 일기장을 공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어 가능하다면 나치의 약탈 보물을 찾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해당 재단은 현재 일기장에 기재된 장소 11곳을 감시하며 안전 여부를 확인 중이다. 역사학자 조안나 램파스카는 “이 일기장은 전쟁과 관련한 많은 세부사항을 포함하고 있으며 약탈 보물을 어디에 감추려고 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어 주목할 만 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일기가 진짜라고 하더라도 보물을 실제로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 “만약 나치 친위대가 보물을 숨겼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내 의견”이라고 밝혔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조선통신사 축제 ...5월 부산 축제 이어 일본 4개 연고도시에서 개최

    조선통신사 축제가 5월 부산을 시작으로 일본 쓰시마 등 4개 연고 도시에서 열린다. 부산시와 부산문화재단은 5월 3일부터 부산에서 열리는 조선통신사 축제를 시작으로 8월에 쓰시마,시모노세키, 10월에 시즈오카, 11월에 카와고에서 조선통신사 한일문화교류사업을 개최할 예정이라고 7일 밝혔다.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 국서 교환식, 예술단 문화공연 및 홍보부스 등을 운영한다. 17~18세기 한일 간 평화와 선린우호를 위한 외교사절단인 조선통신사의 파견은 미래의 발전적 관계를 도모하고자 추진된 문화교류 행사이다. 당시 한일 양국의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우는 계기가 됐었다. 현대에 와서는 부산을 중심으로 조선통신사 연고도시 한일 문화교류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조선통신사가 국제도시 부산의 고유한 역사문화관광 아이템으로,문화도시 부산을 해외 현장에서 홍보하는 브랜드로 활용되는 등 일본 내 한류문화의 확산과 더불어 관광산업 발전과 경제교류 촉진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조영태 부산시 문화체육관광국장은 “조선통신사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국내외 연고도시와 관계기관들의 조선통신사 관련 사업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만큼 조선통신사를 부산 고유의 역사문화관광 브랜드로 육성하겠다.”고 말했다. 부산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위키피디아’ 접속 패턴을 보면, 種의 보전 전략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접속 패턴을 보면, 種의 보전 전략이 보인다

    수록 생물 3만 1751종 페이지뷰 분석 인터넷 사용 형태·자연계 변화 연관성 전체 25%가 계절 변화와 관련된 내용 어떤 종·지역 집중해야 할지 파악 가능 생태계 보전 효과 극대화에 기여 기대선물 증권거래인 출신의 미국 사업가 지미 웨일스는 2001년 1월 15일 인터넷에 접속만 되면 누구나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를 열었다. 전 세계 250여개 언어로 만들어지고 있는 위키피디아는 지식과 정보의 생산과 공유가 함께 이뤄지며 계속 커지고 있는 집단지성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고 있다. 현재는 백과사전의 대명사로 통했던 ‘브리태니커’ 정보량의 10배를 넘어섰고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참여하기 때문에 잘못된 사실이나 거짓 정보가 뒤섞일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오류 수준도 브리태니커와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확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런데 위키피디아가 과학 분야의 발전과 연구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주목받고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 지리학 및 환경학부. 버밍엄대 산림연구소, 이스라엘 네게브벤구리온대 사막생태연구소, 포르투갈 아조레스대 생태·진화·환경변화센터 공동연구팀은 사람들의 인터넷 사용 형태가 자연계의 패턴 변화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람들의 인터넷 사용 패턴을 분석하면 어떤 생물종과 지역에 집중해야 생태계 보전의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을지 좀더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같은 연구 결과는 미국 공공과학도서관에서 발행하는 생물학 분야 국제학술지 ‘플로스 바이올로지’ 3월 6일자에 실렸다. 계절학(Phenology)은 자연의 특성들을 기후, 날씨와 연관지어 연구하는 분야로 18세기 스웨덴의 박물학자 카를 린네가 처음으로 만들어 냈다. 대부분 동식물들이 보이는 계절현상을 다뤄 생물계절학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자연계의 계절현상 전반은 물론 계절병, 농사, 상업 분야와 접목해 연구 영역이 확장되면서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분석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연구팀은 생물계절학적 분석법이 생태계 보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가정하에 위키피디아 245개 언어판에 수록된 3만 1751종의 생물에 대해 2015년 1월 1일부터 2018년 6월 2일까지 총 1067일 동안 23억 3000만 페이지뷰(12만 6697페이지 분량)를 정밀 분석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의외로 동식물에 대해 관심이 높고 전체 데이터의 25% 정도가 생물종의 계절적 변화와 관련된 내용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또 위키피디아 페이지에서 사람들의 계절적 관심은 종별로 다르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사람들의 계절적 관심은 사시사철 푸르른 침엽수나 상록수에 대한 것보다는 꽃이나 열매를 맺는 식물 종, 동물에서는 포유류보다 곤충이나 새에 집중돼 있다는 분석이다. 언어판에 따라 계절 변화에 대한 관심도 다르게 나타났다. 핀란드어나 노르웨이어처럼 주로 고위도권에서 사용되는 위키피디아의 생물종 항목들이 태국어나 인도네시아어, 포르투갈어처럼 저위도권에서 쓰는 위키피디아보다 계절적 변화에 대한 내용이 많고 사람들의 관심도도 높다는 것이다. 리처드 그레니어 옥스퍼드대 교수(생물다양성)는 “전 세계 모든 생물종을 정확하고 광범위하게 모니터링한다는 것은 사실 SF소설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며 “이번 연구는 생태계 보전에 앞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자연계가 어떻게 변하고 어떤 생물종의 변화가 가장 심한지, 생태계 보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무엇에 관심을 둬야 하는지 등에 대한 답이 빅데이터 속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라고 말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권력은 나의사랑…사랑은 나의 권력

    권력은 나의사랑…사랑은 나의 권력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시 한 편을 소개하고 싶다. “‘사랑은 나의 권력’/ 나는 내 사랑의 귀에 속삭이네/‘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사랑이여/우리의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정현종 ‘사랑은 나의 권력―페테르부르크 시편2’ 중에서)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하는 권력이 어떻게 사랑과 연결될 수 있나. 그런 의문을 당신이 품을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힘이 사랑에서 비롯됨을, 오직 사랑의 강제력으로만 우리를 억압하는 것들과 싸울 수 있음을 힘주어 말한다. 이와 같은 ‘사랑의 권력’을 나는 전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이다. 한데 사랑과 권력은 순서를 뒤바꿔 결합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사랑의 권력은 ‘권력의 사랑’으로 거꾸로 놓인다. 사랑이 목적인 권력은 그와 관련된 모두가 아름다워지는 쪽을 향해 간다. 반면 권력이 목적인 사랑은 그와 관련된 모두가 추해지는 쪽으로 점차 방향을 튼다. 사랑의 권력은 추구할수록 숭고해지는데 권력의 사랑은 매달릴수록 우스워진다. 그렇지만 사랑의 권력보다는 권력의 사랑이 세상에 흔한 게 사실이다. 역사적 사례로도 그렇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18세기 초 영국 왕실에서 그것을 찾아내 영화로 재현했다. 자칫하면 진부해지는 테마인 사랑을 근사하게 변주한 ‘더 랍스터’(2015)와 잘못 다루면 역시 독이 되는 테마인 복수를 독창적으로 해석한 ‘킬링 디어’(2017)를 연출한 그의 솜씨는 새 영화에서도 고스란하다. 일부러 수고를 들여 란티모스 감독의 신작을 봐도 후회가 거의 남지 않는다는 말이다. 심지어 그는 이 영화에서 권력의 사랑뿐 아니라, 사랑의 권력까지 아울러 다루니까.‘더 페이버릿’(The favourite)은 누군가로부터 각별한 애정을 받는 사람을 뜻한다. ‘여왕의 여자’. 이런 부제를 달아 국내 개봉판은 ‘더 페이버릿’의 주체와 대상을 명확히 써두었다. 이때 여왕은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군주 앤(올리비아 콜맨·2019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왕이 애정을 쏟았던 여자는 사라(레이철 바이스)다. 둘의 관계는 애비게일(엠마 스톤)의 등장으로 흔들리게 된다. 사라와 애비게일은 여왕의 여자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고, 그들의 다툼을 앤은 괴로워하면서도 즐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권력의 사랑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전부 풀이되진 않는다. 특히 사라와 앤의 질척거리는 사이(진흙으로 채워진 욕조에 두 사람은 함께 들어간다)는 해명이 어렵다. 그때 사랑의 권력이 힌트가 될 것이다. “권력은 나의 사랑”이라는 추함과 “사랑은 나의 권력”이라는 아름다움이 ‘더 페이버릿’에 공존한다. 허 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 70년 전통의 러시아 음악의 대가 ‘보로딘 콰르텟’, 5월 15일 예술의전당서 공연

    70년 전통의 러시아 음악의 대가 ‘보로딘 콰르텟’, 5월 15일 예술의전당서 공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악 4중주단 중 하나인 보로딘 콰르텟이 오는 5월 15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내한공연을 펼친다. 올해로 창단 74년째를 맞는 보로딘 콰르텟은 1945년 모스크바 음악원 4명의 학생으로 구성되어 결성되었고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창단 멤버는 남아있지 않지만, 역대 멤버들 모두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으로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다. 보로딘 콰르텟의 현재 멤버는 루벤 아하로니안(제1 바이올린), 세르게이 로모프스키(제2 바이올린), 이고르 나이딘(비올라), 블라디미르 발신(첼로)이다. 보로딘 콰르텟은 모차르트, 베토벤에서 쇼스타코비치, 차이코프스키, 스트라빈스키지까지 폭넓은 실내악 레퍼토리와 통찰력 있고 깊은 해석으로 세계적인 명성과 권위를 얻었다. 특히 쇼스타코비치는 콰르텟의 감독을 역임했던 긴밀한 인연으로 그의 실내악곡과의 연관성은 더욱 특별하다. 쇼스타코비치 실내악 사이클은 비엔나, 취리히, 프랑크푸르트 등 전 세계에서 연주되었으며 15곡으로 구성된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 전곡 음반은 앙상블의 최고 명연주로 꼽히고 있다. 이들은 창단 이후 환경과 인식의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음색과 탁월한 테크닉, 깊이 있는 음악을 계승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육과정을 통해 음악에 대한 변함없는 통찰력과 지속력으로 보로딘 콰르텟 고유의 미션과 비전을 이어나가고 있다. 음악에 대한 앙상블의 열정은 보로딘 콰르텟의 정기 공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스비아토슬라브 히리터, 유리 바쉬메트, 마이클 콜린스, 알렉세이 보로딘, 마리오 부르넬로 등 다른 저명한 음악가들과 협연하며 끊임없이 레퍼토리를 연구, 확장해 나가고 있으며 2005년 첫 음반 발매를 시작으로 레코딩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18세기 현악 4중주에 큰 영향을 끼친 곡 중 하나인 하이든의 현악 4중주 Op. 33 No. 5를 비롯하여 쇼스타코비치 현악 4중주 No. 9, 차이코프스키 현악 사중주 No.1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다. 2월 27일부터 예술의전당 유료회원을 대상으로 선오픈을 시작했으며, 일반 티켓은 3월 5일 11시부터 예술의전당 홈페이지와 인터파크 티켓, Yes24 공연을 통해 구매 가능하다. 보로딘 콰르텟 내한공연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예술의 전당 홈페이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명경재의 DNA세계] ‘SKY캐슬’과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사이에서

    [명경재의 DNA세계] ‘SKY캐슬’과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사이에서

    최근 방송이 끝난 인기 드라마 두 편을 통해 이공계 전공자로 여러 생각을 했다. ‘SKY캐슬’이란 드라마에서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교육 열풍을 다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사, 법조계 쪽으로 자녀의 진로를 정해 버리려는 많은 부모들의 세태를 볼 수 있었다. 반면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새로운 기술 개발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후자에서는 이공계를 전공한 기술 개발자가 만들어 낼 수 있는 환상적인 미래를 잠깐이나마 볼 수 있었다. 반면 전자에서는 이공계 기피 현상이 보였다. 이공계 학생들의 지속적인 전공 기피현상은 최근 대한민국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많은 사람들이 4차 산업혁명에 대해 듣고 있다. 어쩌면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을 것이다. 구부러지는 휴대전화, 자율주행차 같은 SF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물건들이 이미 우리 턱 앞까지 와 있다. 전자, 통신 기술과 의생명 분야의 발전 등을 통한 4차 산업혁명은 현대 사회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꿀 것이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새로운 자연현상의 이해와 이를 응용한 기술 개발이 있다. 17~18세기 산업혁명도 수증기로 만들어지는 열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는 현상의 발견과 이를 응용한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시작됐다. 의학 역시 여러 발견과 응용을 통해 생명연장과 삶의 질 향상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박테리아만을 선택적으로 죽일 수 있는 항생제 개발은 박테리아 연구를 통한 자연현상의 이해에서 나온 산물이고 만성백혈병 치료제는 백혈병 유발 암세포에서만 특이적으로 만들어지는 전위 단백질의 발견과 특이 단백질만을 저해하는 물질의 개발로 가능했었다. 최근 각광받는 인공지능, 유전자 가위, 빅데이터 분석도 이들을 가능하게 하는 자연현상의 이해와 이를 응용하는 기술 개발 없이는 불가능하다. 4차 혁명의 주체는 결국 과학기술자들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이 4차 산업혁명 중심에 서기 위해서는 역량 있는 과학기술인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각종 언론보도와 과학기술 현장인 대학과 연구소에서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하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들이 목격되고 있다. 그동안 한국 과학기술 발전을 주도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과학기술 분야 병역특례제도 축소, 4대 국립과학원 졸업생들의 의약학 분야 전문대학원 진학 등이 있다. 정부에서는 과학기술계 육성을 위해서 힘을 쓰지만 전반적 사회 분위기는 그렇지 않은 것이 이런 현상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의학, 치의학, 약학 전문대학원으로 진학한 많은 이공계 학생들은 과학기술 분야를 지속적으로 전공할 경우 직업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의생명과학의 발전을 현장에서 보고 느끼면서 앞으로 도래할 많은 변화에 대해 고민하다가 최근 보고 들은 몇몇 언론 보도들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사회 전반에 만연한 이공계 기피현상에 변화를 줄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요즘 바이오 분야를 비롯한 여러 회사들의 성공 사례들이 있다. 이런 성공 사례들과 이때 함께한 연구들을 대중에게 지속적으로 소개한다면 어떨까. 어려서 본 한 편의 SF영화나 다큐멘터리 때문에 과학, 공학을 선택하던 필자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던 세상이 다시 오기를 희망한다.
  •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왜 제사는 장남만 지내야 하나, 자식끼리 돌아가면서 지내면 안 되나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왜 제사는 장남만 지내야 하나, 자식끼리 돌아가면서 지내면 안 되나

    설 명절이 지난 지 채 한 달도 안 됐다. 제사 문제로 그렇게 시끌벅적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하다. 세대를 떠나 제사만큼 우리의 정서와 복잡한 내면을 가진 것도 없을 것이다. 제사는 그 시대의 약속이요 관습이다. 시대가 변하면 바뀌는 것이 이치인데 제례만큼 변화에 저항과 갈등을 야기하는 풍습도 없다. 오늘날과 같은 조상 제사는 고려 말에 시작됐다. 누구나 하고 싶다고 4대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지위와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어 6품 이상은 3대, 7품 이하는 2대, 일반 백성들은 부모 제사만 지내도록 했다. 조선 말기에는 일반 백성들도 4대조까지 지냈다. 오히려 4대 봉사를 하지 않으면 상놈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늘날은 어떤가. 필자의 집안은 부모 세대에서 자식 세대로 바뀌면서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제례문화의 변화와 문제점을 온전히 담고 있다. 필자는 6남 2녀에 아들로 막내다. 부모님 생전엔 설, 추석 차례, 기제사는 3대 모두 합쳐 1년에 여덟 번 제사를 지냈다. 1987년 양친이 돌아가시면서 큰형님이 제사를 모셨다. 2003년 설 명절 때 필자는 큰형수가 오랜 지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자식은 다 같은 자식인데 장남만 제사를 지내란 법이 어디 있냐며 형제끼리 돌아가면서 지내자”고 했다. 갑작스런 제안에 큰형님께서 “기제사는 내가 맡고, 설?추석 차례만 동생들이 돌아가면서 지내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어느 누구도 가타부타 말이 없길래 모두 동의한 것으로 여겨 “안을 낸 막내인 제가 돌아오는 추석 차례를 모시겠다”고 했다. 갑자기 집사람이 필자의 옆구리를 꾹꾹 찌르면서 자기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막내가 제사를 지낼 수 있냐며 불평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타성은 빠지세요” 했다. 타성은 며느리들이다. 결국 기제사는 장남이, 명절 차례는 동생들이 돌아가면서 지내도록 하고, 둘째 형님은 교인이라 제외됐다. 그리고 형제들이 다 죽고 나면 장손이 다시 맡도록 했다. 2006년에는 1년에 여섯 번 지내던 기제사를 아버지 기일에 맞춰 한 번만 지내도록 했다. 필자는 이를 ‘모듬제사’, ‘합동제사’라 칭했다. 그리고 기제사를 모시던 큰형님 내외가 2010, 2015년 돌아가시면서 또 한번의 변동이 왔다. 당연히 장조카가 물려받아야 되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부득이 필자가 차례와 기제사를 맡아 지내고 있다. 이처럼 형제가 제사를 나누어 지내는 것이 과연 예에 어긋나는 것일까. 아니다. 고려시대와 조선 중?후기까지도 장남이 제사를 전담하지 않았다. 경국대전에는 장남이 제사를 맡도록 했으나, 사대부는 물론 백성들도 아들딸 구별 없이 자녀들이 순서에 따라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회봉사를 행했다. 16세기를 무대로 ‘묵제일기’를 쓴 이문건(1495~1567년)은 형제자매가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내고 심지어 외손봉사까지 행했다. 율곡도 7남매가 재산을 똑같이 나누고 제사도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회봉사를 행했다. 부안군 우반동에 거주했던 선비 김명렬은 1669년 사위가 제물을 대충 차리고 제사를 빼먹는다고 딸에게 제사를 반납토록 하고, 재산은 아들이 받는 유산의 3분의1만 지급했다. 선비 김이성은 1637년 아내도 죽고 거주하는 곳도 멀어 처가의 제사를 지내기가 어렵게 되자 제사조로 받은 노비와 전답을 다시 돌려주었다. 윤회봉사는 재산상속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17세기 중엽부터 윤회봉사와 균분상속은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장남 단독봉사가 많아지고, 재산상속도 장자에게 더 주는 차등상속제로 바뀌었다. 하지만 윤회봉사는 19세기까지 해안 일부 지역에서 계속 시행됐으며, 지금도 제주에서는 형제끼리 제사를 나눠 지낸다.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형식은 시대적 상황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제사 또한 예외일 수 없다.
  • [주말엔 과학] 아인슈타인 상대성 원리에 ‘영감’ 준 사람은 100년 전 철학자 흄

    [주말엔 과학] 아인슈타인 상대성 원리에 ‘영감’ 준 사람은 100년 전 철학자 흄

    최고의 천재라 하더라도 천재적인 발상을 떠올리는 데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때로는 필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져 관심을 끌고 있다. 세계 최고의 과학천재로 일컬어지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사실 어떤 철학자에게서 받은 영감 때문이라는 사실이 최근 영국 에딘버러 대학에서 발견된 아인슈타인의 편지에서 밝혀졌다. 아인슈타인에게 영감을 준 사람은 18세기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으로, 이 편지에는 1905년 아인슈타인이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기 직전에 데이비드 흄의 '인간의 본성 (Treatise of Human Nature)'에 푹 빠져 있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대목이 나온다. 물리학자들은 이 편지에 대한 평가에서, 흄의 질문이 아니었더라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탄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흄은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역사가, 경제학자로, 자연주의와 회의론에 관한 그의 철학은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 '인간의 본성'은 아인슈타인이 태어나기 61년 전인 1738년에 처음 출판되었으며, 과학의 맥락에서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 대해 질문을 포함하고 있다. "모든 추상적 추론의 대척점에 있는 주요한 반대는 공간과 시간의 개념에서 파생된다. 일상생활에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아이디어는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심오한 과학적 조사를 통해서 볼 때... 그것들은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인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상대성 이론은 바로 흄의 이러한 개념을 이론화한 것으로 획기적인 제안이었다. 시간과 공간은 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이 편지는 1915년 12월에 씌어진 것으로, 수신자는 빈 대학의 물리학 교수 모리츠 슐릭이었다. 이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흄의 작업이 자신의 상대성 이론을 탄생시키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당신이 정확하게 지적했다시피, 이러한 일련의 사상들이 나의 상대성 이론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에른스트 마흐와 데이비드 흄의 인식론은 내가 깊은 존경심을 갖고 공부한 것으로, 이를 통해 나는 인식에 관한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연구 없이는 해결책이 나오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발견한 에딘버러 대학의 데이비드 퍼디 교수는 영국 '텔레그래프' 지에 다음과 같이 전했다. "나는 정말 당혹스러웠다. 아인슈타인의 모든 논문을 읽었지만 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인슈타인의 오래된 편지를 파고들었다. 그 결과 잊혀졌던 이 편지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다른 누구보다도 흄이 자신을 고무시켰다고 말했다. 100년 전,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 살았던 누군가가 아인슈타인에게 그런 영향을 미쳤을 수 있었다니, 정말 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인슈타인은 1900년대 초반, 스위스에서 동료 과학자, 철학자들과 같이 만든 독서 모임인 올림픽 아카데미에서 데이비드 흄의 저작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이광식 칼럼니스트 joand999@naver.com
  •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아침에는 샐러드를 생각하는 것이 좋다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아침에는 샐러드를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일찍이 ‘삼총사’,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쓴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샐러드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음식이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이 야채를 먹을 체질을 타고나지 않았지만 문명 때문에 풀을 먹게 됐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말을 했다면 지탄을 받을 게 분명하다. 베저테리언이 대세는 아니라 할지라도 건강을 위해 샐러드를 먹는다는데 누가 딴지를 걸 수 있으랴.샐러드란 무엇인가. 일반적인 정의로는 생야채에 각종 양념을 더한 음식을 의미한다. 생야채에는 양상추나 상추처럼 부드러운 계열의 야채부터 루콜라·시금치·양파·샐러리 등 강한 향미를 지닌 야채, 바질·타임·로즈메리 등 향을 더하는 허브 등이 포함된다. 흔히 드레싱이라고 부르는 양념도 많은 개념을 포함한다. 소금, 오일, 식초는 기본이요 여기에 후추, 마늘, 달걀노른자로 만드는 마요네즈 등이 취향에 따라 더해지기도 빠지기도 한다. 사실 개념으로만 보면 한국의 나물이나 무침도 일종의 샐러드인 셈이다. 뒤마가 언급한 것처럼 샐러드는 모두가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었다. 수렵 채집에서 농경사회로 접어든 인류에게 생야채가 어떤 의미였는지는 명확하게 알기 힘들다. 그나마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시대의 기록이 남아 있기에 우리는 당시부터 샐러드를 먹어 왔다는 걸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샐러드는 라틴어 소금에서 파생된 단어다. 야채에 소금을 뿌려 간을 해 먹는 음식이란 의미다. 생야채에 소금을 뿌려 봤자 잘 묻지 않는다. 그래서 오일을 함께 뿌리고 여기에 상큼한 식초를 더해 입맛을 돋우는 음식이 탄생했다.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인간은 풀을 뜯어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을 올려다보는 숭고한 존재”라고 했지만 수세기 동안 인간은 풀을 뜯어먹어 왔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야채들을 층층이 올려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고 각종 드레싱을 뿌려 맛을 다층적으로 느끼며 먹는 방식은 유럽에서도 식문화가 번성한 18세기가 돼서야 상류층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가능한 한 칼로리를 최대한 섭취해야 했던 하층민들에게 샐러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음식이었다. 배가 고파 아사 직전의 인간에게 고기가 담긴 접시와 샐러드가 담긴 접시를 주면 어떤 걸 선택할지는 굳이 상상해 보지 않아도 되리라.시저샐러드나 콥샐러드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의 샐러드는 대부분 1920년대를 전후로 미국에서 탄생했다. 식초·소금·올리브유에 겨자가 들어간 비네그레트나 여기에 마요네즈, 우스터소스, 각종 허브들이 들어가 섞인 ‘프렌치드레싱’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정작 유럽에서는 기본에서 약간의 변주가 가미된 단순한 드레싱이 일상적으로 쓰였다. 이탈리아의 많은 가정에서는 아직도 소금과 올리브 오일, 약간의 후추와 식초만 이용해 샐러드를 만드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너무 많은 맛과 향이 가미되면 야채가 가진 풍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옳다 그르다의 문제는 아니다. 단지 취향의 차이일 뿐이니 말이다. 식탁에서 샐러드의 역할은 두 가지다. 다른 음식을 먹을 때 기분을 전환시켜 주는 부요리이거나 그 자체로 독립적인 하나의 주요리다. 단품이 여러 개 나오는 긴 서양식 코스요리에서 샐러드는 코스 시작 전 입맛을 돋우거나 코스 중간에 입안을 정돈해 주는 역할을 한다. 때로는 주요리의 맛을 보완하기도 한다. 우리가 삼겹살 구이와 함께 먹는 파절임의 역할을 생각하면 쉽다. 파절임도 이론적으로 보면 샐러드다. 새콤달콤한 파절임은 고기를 먹고 난 뒤에 느끼함을 가시게 하는 역할도 하지만 고기와 함께 먹었을 때 또 다른 차원의 맛을 내기도 한다. 요즘 같은 섭취 과잉의 시대엔 건강을 위해 샐러드를 먹으라는 이야기를 수없이 듣게 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건 샐러드를 먹으란 이야기가 다른 음식을 똑같이 먹으면서 샐러드를 ‘더’ 먹으라는 말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른 음식 섭취를 가능한 한 줄이고 그 대체음식으로 샐러드를 먹으라는 의미다. 샐러드는 야채와 소금, 오일 등으로 만든다. 몸에 좋다는 올리브 오일도 먹으면 살이 붙는 지방일 뿐이다. 사실 건강은 샐러드를 많이 먹어서 얻게 되기보다 다른 음식을 줄이는 데서 얻는 부상에 가깝다. 샐러드가 식탁에 선사해 주는 기쁨은 계절감이다. 계절별로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건 축복과도 같다. 요즘은 농업기술의 진보로 계절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생야채들을 만날 수 있지만 계절의 기운을 듬뿍 받고 자란 야채를 맛보게 되면 제철 식재료의 진정한 맛이란 어떤 것인지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봄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 [글로벌 In&Out] 쿠릴열도 분쟁과 러일 관계/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쿠릴열도 분쟁과 러일 관계/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동아시아 국가 중 러시아와 가장 특별한 관계가 있는 나라는 일본이다.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와 달리 러시아와 일본은 2~3번이나 전쟁을 치렀다. 그로 인해 영토 문제를 비롯, 서로 아프고 아직까지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많이 생겼다. 그 문제 가운데 현재 러일 관계 개선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쿠릴열도 문제다. 캄차카반도와 홋카이도 사이에 걸쳐 있으며, 오호츠크해와 태평양을 가르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56개의 섬으로 구성된 쿠릴열도에 러시아인들이 처음 들어간 것은 1640~1641년이다. 1708년 표트르 1세가 일본으로 가는 길을 찾는 탐험가에게 쿠릴열도의 원주민들을 러시아의 국적에 편입하라는 명령을 내려 쿠릴열도의 러시아 개척이 시작됐다. 이 작업은 18세기 중엽에 성과를 내기 시작하는데, 18세기 후반 상트페테르부르크조약에서 일본은 사할린섬을 러시아령으로 인정하고, 러시아는 쿠릴열도 전체가 일본의 영토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패배 후 맺은 체결한 포츠머스조약에서 러시아는 일본에 한국 식민화의 길을 열어 주었고, 사할린섬의 남부를 빼앗겼다. 제2차 세계대전 중 1943년 테헤란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은 유럽 공격을 약속했고, 소련은 대일 참전의 조건으로 일본이 빼앗은 사할린 남부와 추가로 쿠릴열도를 요구했다. 1945년에 열린 얄타회담에서 소련은 대일 참전을 재확인했고, 재차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요구했다. 미영 양국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으며, 소련은 약속대로 1945년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쿠릴 상륙작전은 만주 공격, 한반도 해방과 남사할린 작전 다음으로 개시됐다. 1945년 8월 15일 캄차카 주둔 소련군은 슘슈를 비롯한 쿠릴열도 북쪽에 있는 여러 섬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8월 18일 슘슈섬에 상륙했다. 쿠릴열도 주둔 일본군 제91사단장인 쓰쓰미 중장은 8월 15일 일본 항복 명령을 받았음에도 그 휘하에 있는 부대들에 항복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상륙한 소련군 부대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슘슈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큰 전투였다. 소련군은 약 1500명, 일본은 약 1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슘슈를 점령하고 다음 섬인 파라무시르섬으로 넘어가려던 소련군은 상륙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기습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고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소련군 공격으로 일본군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8월 21일 쓰쓰미 중장으로부터 쿠릴열도 북부에 주둔한 일본 부대들이 투항한다는 연락이 왔다. 8월 22일 오후 2시부터 일본군은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무기를 내려놓기 시작했고, 소련군은 8월 29일 쿠릴열도 북부를 점령했다. 이와 함께 홋카이도 상륙작전을 준비 중이었던 태평양함대사령부가 모스크바로부터 홋카이도 상륙작전을 취소하고 쿠릴열도 남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8월 28일 소련군 부대들이 9월 5일까지 쿠릴열도 전체를 점령했다. 미국과 소련은 ‘일반 명령 제1호’의 내용에 합의했으며, 미국은 모든 섬들의 점령을 소련군에 맡겼다. 그 후 1951년 9월 8일 일본은 연합국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쿠릴열도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했다. 조약 체결 당시 일본 국회는 쿠릴열도의 남부도 쿠릴열도에 포함돼 있다고 주장했으나 1956년 2월 의견을 바꾸고, 쿠릴열도 남부에 있는 군도가 홋카이도의 일부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쿠릴열도 분쟁의 시작이다. 1956년 10월 19일 소일 양국이 공동선언을 선포함으로써 국교가 회복됐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으로 일본은 다시 쿠릴열도 전부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소일 평화조약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 러·일관계의 미래와 쿠릴 열도 영토분쟁

    러·일관계의 미래와 쿠릴 열도 영토분쟁

    동아시아 국가 중에 러시아가 가장 특별한 관계를 가진 나라는 일본이다.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와 달리, 러시아와 일본은 2~3번이나 전쟁을 치렀고 그로 인해 영토 문제를 비롯한 서로 아프고 아직까지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많이 생겼다. 현재 러일관계 개선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 있는 것은 쿠릴 열도 문제이다. 이번에는 그 문제의 역사를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쿠릴 열도는 캄차카 반도와 홋카이도 사이에 걸쳐 있으며 오호츠크해와 태평양을 가르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약 56개의 섬이다. 여기에 러시아인들이 처음에 들어온 시기는 1640~1641년이다. 러시아 기록에 따르면 1639년 이반 모스크비틴을 수장으로 한 카자흐 원정대가 오호츠크 해에 진출하였으며 쿠릴 열도에 상륙했고 원주민들과 교역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쿠릴 열도의 인구는 주로 아이누족을 비롯한 여러 원주민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국가가 따로 없었다. 1708년 표트르 1세가 일본으로 가는 길을 찾는 탐험가에게 쿠릴 열도의 원주민들을 러시아의 국적에 편입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쿠릴 열도의 러시아 개척이 시작되었으나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18세기 후반, 일본인들도 홋카이도 북부와 쿠릴 열도 남부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해 러시아와 충돌하였다. 전쟁을 피하려던 러시아 외상 고르챠코프와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에노모토가 상트페테르부르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은 사할린 섬을 러시아령으로 인정하고, 러시아는 쿠릴 열도 전체가 일본의 영토임을 인정하였다.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후 새로 체결한 포츠머스 조약은 일본에 의한 한국 식민화의 길을 열어주었다. 더불어 일본은 사할린 섬의 남부를 얻어 상트페테르부르그 조약을 사실상 파기되었다. 10월 혁명 발생으로 1918년 내전 중인 러시아의 상황을 이용해 일본은 1918년 4월 5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 파병해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는데 붉은 군대와 한인(韓人)의 항일부대 등의 저항으로 1922년에 철수했다. 일본군의 지원을 받았던 백위파 정권은 무너졌다. 또한 일본은 1920년 ‘노령 거주 일본인들의 생명과 그 재산의 보호’라는 구실을 내세워 사할린 섬의 북부를 점령했다가 1925년에 이르러 러시아에 반환하였다.1930년대부터 일본은 쿠릴 열도를 소련 캄차카나 미군 기지를 공격할 수 있는 거점으로 만들기 위하여 비행장과 해군 기지 등 시설을 건설했다. 1941년 12월 7일 미국 진주만을 공격한 일본 함대는 쿠릴 열도 남부에 위치한 이투루프 섬에서 출발했다. 진주만 공격 다음날인 1941년 12월 8일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가 소련 대사를 만나 대일전쟁에 참전할 것을 요구한 근거이기도 하다. 12월 11일, 소련은 2차 대전 참전을 검토하기 시작하였고 미국측도 그 요구를 계속 반복하였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간 독일도 1942년 7월 10일 일본 정부에 독소전쟁 참전을 요구했으나 태평양전쟁에서 피해를 당하는 일본은 이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소련 대일전쟁 참전은 결국 1943년 12월에 열린 테헤란 회담에서 약속되었다. 이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은 유럽에서 공격할 것을 약속하였고 소련은 대일참전의 조건으로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빼앗은 사할린 남부, 그리고 쿠릴 열도를 요구하였다. 독일 패전 직전 1945년 2월 4일에 얄타 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 소련은 대일참전의 계획을 재확인하였고 독일 패전 2~3개월 이내 대일참전해 달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 대가로 소련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빼앗긴 영토 회복과 별도로 쿠릴 열도가 소련에 양도될 것을 요청하였다. 미영 양국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으며 독일을 패배시킨 소련은 유럽에서 부대를 극동지역으로 빨리 옮기고 약속대로 1945년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했다.쿠릴 상륙 작전은 만주 공격, 한반도 해방과 남사할린 작전 다음으로 개시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제2극동전선군 참모부가 캄차카 방어구 사령관에게 일본이 항복할 예정이기 때문에 슘슈를 비롯한 쿠릴 열도 북쪽에 있는 여러 섬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소련군이 쿠릴 열도 주둔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준비하고 8월 18일 소련군 부대들이 쿠릴 열도 북단에 위치한 슘슈 섬에 상륙했다. 쿠릴 열도 주둔 일본군 제91사단장인 츠츠미 후사키 중장은 8월 15일 항복 명령을 받았음에도 그 휘하에 있는 부대들에게 항복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고 상륙한 소련군 부대들을 공격했다. 슘슈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 큰 전투였으며 이에 소련군은 약 1500명, 일본은 약 1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8월 19일 ‘자위 행동이라도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은 츠츠미 중장은 시간을 벌기 위해 항복이 아닌 정전(停戰)을 제안하였으나 소련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츠츠미 중장은 결국 8월 20일에 항복하려고 했지만, 일본군이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슘슈를 점령하고 다음 섬인 파라무시르 섬으로 넘어가려던 소련군은 상륙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기습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소련군 공격으로 일본군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8월 21일 츠츠미 중장으로부터 쿠릴 열도 북부에 주둔한 일본 부대들이 투항한다는 연락이 왔다. 8월 22일 오후 2시부터 일본군이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무기를 내려놓기 시작하였다. 8월 29일 쿠릴 열도 북부가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와 함께 홋카이도 상륙 작전을 준비 중이었던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모스크바로부터 홋카이도 상륙작전을 취소하고 쿠릴 열도 남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8월 28일 오전 3시 15분 청진 상륙 작전에 참여한 레오노프 해군대좌가 이끄는 부대가 쿠릴 열도 남부에 있는 이투루프 섬에 상륙하여 일본군 무장해제에 착수하였으며 9월 5일까지 쿠릴 열도 전체가 소련에 의해 점령되었다. 소련군의 이러한 전투 행동과 동시에 미국과 소련 간에 ‘일반 명령 제1호’의 내용을 둘러싼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만주와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패배시키고 급속도로 남하하는 소련을 막고자 트루먼 미 대통령은 8월 15일 소련 최고사령관인 스탈린에게 일본 항복 절차를 규정한 ‘일반 명령 제1호’의 초안을 보냈다. 이 명령의 내용을 검토한 스탈린은 미국이 제안한 한반도 분할 점령 등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트루먼에게 소련군 책임 지대에 홋카이도 북부와 모든 쿠릴 열도를 추가할 것을 요청했다. 트루먼은 8월 18일에 보낸 답변에서 모든 쿠릴 열도를 소련군 책임 지대에 포함하는 것에 동의했으나 홋카이도를 비롯한 일본 본토에 속한 모든 섬들의 점령은 맥아더 장군이 담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미국 대답을 받은 스탈린은 미국측의 동의를 재확인한 후 8월 22일 홋카이도 상륙 작전 준비를 중단하고 쿠릴 열도 남부에 진출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일반 명령 제1호는 항복문서에 서명한 일본 지도부에게 전달되었으며 대본영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1951년 9월 8일 일본은 연합국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쿠릴 열도에 대한 …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하였다. 중국이 초대받지 못한 점, 일본 재군사화를 막을 장치가 없다는 점 등의 이유를 들어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회는 쿠릴 열도의 남부도 얄타 협정에 언급한 쿠릴 열도에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1956년 2월에 의견을 바꾸고 쿠릴 열도 남부에 있는 군도(群島)가 쿠릴 열도가 아니라 홋카이도의 일부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스탈린 사망 후 외교노선을 바꾼 소련은 일본과의 별도의 평화조약 협상에 들어갔으며 일본을 미국 영향권에서 부분적으로라도 탈피시키기 위해 조약의 대가로 시코탄 섬과 하보마이 섬을 양도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소일 양국은 1956년 10월 19일 공동선언을 선포함으로써 양국 국교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으로 일본은 다시 쿠릴 열도 전부를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소일 평화 조약의 협상이 결렬되고 말았다. 러시아와 일본은 현재까지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있으나 최근 러시아와 일본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2016년 푸틴이 일본을 방문하면서 아베 총리와 만나서 쿠릴 열도 남부에서 공동경제활동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일본 방문단이 2017년 6월에서 2018년 10월에 걸쳐 3번이나 쿠릴 열도를 방문하였으며 러일 무역 규모도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양국 정부는 2018~2019년을 ‘러시아에서 일본 해’, ‘일본에서 러시아 해’로 지정했으며 러일 간의 문화 교류가 전대미문의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북방영토’가 빨리 돌려받을 수 있다는 일본 매체가 조성한 일본 국내 분위기 속에서 아베 총리가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블라디미르 푸틴과 만났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러시아인에게 반일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도 러일 평화 조약을 협상하기 전에 일본은 반드시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를 인정해야 한다고 일본 측을 강하게 비판한 것도 일본인들로 하여금 큰 실망을 느끼게 하였다. 쿠릴 열도 남부를 포함한 쿠릴 열도의 전체가 러시아 영토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도 변한다는 것도 객관적 사실이다. 미국 경제 제재로 러시아의 경제가 발전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가 그 대책으로 연금을 받는 연령을 높이는 연금 제도 개혁 등 수단을 택한 것에 대해 국민의 불만이 높이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 정부에서도 영토를 양도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함으로써 경제를 살리자는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다. 러시아가 일본에 ‘북방열도’를 돌려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가 발전되고 러시아의 경제 발전 속도가 계속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러한 가능성이 전무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글 사진: 바실리 V 레베데프(고려대 사학과 석사)
  • 지리산 자락에 터잡고 재력 키운 류씨 가문… ‘조선판 엘도라도’ 꿈꾸다

    지리산 자락에 터잡고 재력 키운 류씨 가문… ‘조선판 엘도라도’ 꿈꾸다

    1776년 음력 3월, 52년이나 왕위를 누렸던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했다. 양력 3월, 지구 반대편에서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간했고, 7월에는 미국의 독립선언이 있었다. 정조는 18세기 영정조 문예부흥의 꽃을 피웠고, 국부론은 자본주의의 이론적 근거를, 미국 독립선언은 민주주의의 정치적 토대를 마련했다. 바로 그 해, 한반도 남쪽에선 한 지방 관료가 지리산 자락에 일생일대의 집을 지었다. 집의 이름은 ‘운조루’(雲鳥樓).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왔다고 하니 세계의 거대한 변화와 다소 동떨어진 소박한 꿈의 실현이었다.●금거북이 진흙에 들어간 ‘금구몰니’ 터에 자리 창건주 류이주(1726~1797)는 대구 태생으로 무과에 급제해 용천부사까지 역임한 고위 관료였다. 영남 양반인 그가 전라도 낙안군수를 지낼 당시 인근 구례 땅에서 명당 터를 발견하고 이곳에 정착할 뜻을 두었다 한다. 그는 소싯적부터 학문보다 사냥을 즐겼고, 관직은 주로 남한산성과 함흥성 공사 등 국영 건설업에 종사했다. 무신의 주임무는 국가 방위지만, 평화 시에는 산성 수축 등 건설 사업을 담당했다. 사냥은 땅을 읽는 능력을 개발하고, 건설업은 건축적 자신감을 키운다. 류이주는 자신의 두 능력을 활용해서 운조루를 창건한 것이다. 운조루가 자리 잡은 곳은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이다. 이 동네에는 3개의 진혈(眞穴) 터가 있다는데, 금거북이 진흙 속으로 들어간 ‘금구몰니’, 지리산 선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금환락지’, 그리고 다섯 보물이 서로 모여 있는 ‘오보교취’의 땅이다. 운조루 창건 시 땅속에서 거북 모양의 돌이 출토되어 가보로 삼았으니, 금구몰니 혈을 운조루가 차지한 셈이다. 이후 이 집은 대를 더하며 재력을 키운 명문가가 되었으니 오미동은 풍수설을 입증한 대표적인 명당 마을이 됐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조선총독부 보고를 보면 20세기 초에 풍수적 목적으로 오미동에 이주한 가구가 100여호에 달했다.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나머지 두 곳의 진혈을 찾아온 이들이다. 운조루 류씨 가문의 당시 일기에 의하면 금환락지의 땅을 발견하고 집을 지었다고 주장하는 이가 한 해에도 서넛이 됐다. 그러나 엘도라도의 꿈은 꿈일 뿐 대부분 몇 년 버티지 못하고 가산만 탕진한 채 다시 떠나갔다. 아직도 몇 개의 흔적은 남아 있다. 앞마을 샛뜸정은 둥그런 동네 윤곽을 가지고 있고, 환동 마을의 곡전재는 아예 담장이 동그란 모양이다. 서로 금환락지의 진혈이라 주장하듯, 가락지의 동그란 형태를 따라 집과 마을을 지은 까닭이다.●오미동가도에서 읽는 한옥의 정신 정말 류씨 가문이 쌓았던 막대한 부가 명당 때문이었을까? 가부를 묻지 말자. 풍수설이란 입증 불가능한 패러다임으로서 믿음의 문제이다. 오히려 250년간 이 집을 가꾸어 온 주인들의 성실한 노력에 주목하자. 5대주 류제양은 무려 70년 동안, 7대주 류형업은 40년간 일기를 써서 남겼다. 이들의 철저한 기록 정신은 건축에 대한 여러 도면도 남겨서 그동안의 건축적 변화를 추적할 수 있다. 한옥으로서 이처럼 정확하고 지속적인 건축 기록은 거의 유일하다. 가장 주목할 것은 1800년대 초 작품으로 추정하는 ‘전라구례오미동가도’이다. A1 정도 크기에 초창기 운조루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인데, 건물 몇 칸을 제외하곤 지금의 모습과 놀랄 만큼 일치한다. 심지어 마당의 위성류(버드나무의 일종)까지도 그대로 그렸다. 이 그림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집을 보여주기 위한 설명용이다. 집에 대한 주인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어서, 이 한 장의 그림만으로 운조루와 조선시대 한옥의 중요한 특징들을 이해할 수 있다. 가난한 집을 일컫는 ‘초가삼간’은 세 칸짜리 건물 한 채를 의미하며, 그 자체가 한 집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한옥은 사랑채, 안채, 행랑채 등 여러 건물들이 모여 한 집을 이룬다. 이 그림에는 10채가 넘는 기와집들이 그려져 있다. 한 건물 안에 수십 호의 집이 있는 아파트와는 반대로 한옥이라는 건축은 여러 건물의 집합이다. 특히 건물들이 그려진 방식이 특이하다. 어떤 건물은 옆으로 자빠졌고, 또 어떤 것은 아예 뒤집혀졌다. 이런 그림의 방법을 ‘사면전개도법’이라 부를 수는 있지만, 그 전개되는 뭉텅이가 여럿인 것이 특이하다. 2~4동의 건물들은 하나의 마당을 향해 전개되어 있는데, 이 건물들은 이 마당 소속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한옥의 중심은 비어 있는 마당이며, 건물들은 마당을 둘러싸기 위한 시설에 불과하다. 운조루의 경우 바깥사랑마당, 안사랑마당, 안마당, 책방마당, 곳간마당, 사당마당 등 적어도 6개의 마당이 중심을 이룬다. 담장 바깥 뒷산에 울창한 솔숲을 세워서 대문 앞에는 운치 있는 연못을 뒤집어 그렸다. 뒤 솔숲과 앞 연못은 운조루에 속하는 조경시설이라는 의미다. 담장은 소유권의 경계선이 아니라 집안의 마당을 만들기 위한 시설물에 불과하다. 더 뒤쪽 멀리 지리산 노고단과 형제봉을, 멀리 앞으로는 섬진강과 그 건너 오봉산을 역시 뒤집어 그렸다. 이제 운조루는 뒤로 지리산부터 앞으로 섬진강까지 대자연을 소유하게 된다. 물론 법적 소유가 아니라 심리적 경관적 소유이다. 집 그림은 자연과 건축이 조화를 이루는 한옥의 자연관을 뚜렷하게 표현하고 있다. 집이란 결국 사람을 위한 환경물이다. 오미동가도에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서쪽 큰사랑 누마루에 남자 주인을, 동쪽 안사랑 누마루에 여자 주인을 그렸다. 두 인물은 조선시대 한옥이 갖는 내외 구별의 상징인 동시에 건물과 마당과 외부의 자연까지 사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천인합일의 주인공이다.●방부터 대문까지… 비어 있는 공간 사이 ‘흐름’ 한옥은 온돌과 마루를 한 지붕 아래에 가진 집이다. 따뜻한 온돌과 시원한 마루는 각기 겨울과 여름을 나기 위한 시설이다. 온돌방은 닫혀 있고, 마루 대청은 비어 있다. 또 대청 앞마당도 뒷마당도 대문간도 비어 있다. 이 비어 있는 공간들 사이에는 흐름이 생긴다. 문전옥답인 너른 귀만들부터 집 앞의 연못을 거쳐 개울을 건너 대문을 통하고, 마당과 대청이 서로 연결되고, 그 흐름은 뒤뜰을 거쳐 다시 뒷산으로 이어진다. 자연과 건축이 하나가 되고, 건축과 인간이 일체가 된다. 비어 있는 마당은 모든 건축의 중심이며, 운조루 구성의 기본 틀이다. 이 집을 지을 당시 창건주인 류이주는 함흥, 상주, 용천 등 외지의 관직에 있었고, 실질적인 공사는 조카 류덕호가 맡았다. 그러나 류이주는 다년간의 국가 기반시설 공사 경험을 바탕으로 운조루를 직접 설계했고, 류덕호는 그 설계를 충실히 따라 감리 역할을 했다. 류이주는 대지의 남쪽과 중앙에 긴 행랑을 직각으로 설계했다. 남쪽 행랑은 집의 안과 밖을 구별하며, 중앙 행랑은 남자와 여자의 영역을 구획한다. 남자 영역은 바깥사랑마당을 중심으로, 여자 영역은 안마당과 안사랑마당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주인들의 영역 뒤로는 나뭇간과 우물 등 작업 영역이 위치하고, 집의 동쪽 뒤 양지바른 곳에 사당을 두어 조상의 영역을 마련했다. 매우 조직적이고 합리적인 설계였다. 이 집 곳곳에는 땅 위에 떠있는 누마루를 마련했고, 안채에는 아예 2층 다락인 층루들을 두었다. 이들은 마당을 내려 보고 먼 산의 경관을 바라보는 곳이다. 바깥의 경치를 집 안으로 끌고 들어와 내 것으로 만드는, 이른바 ‘차경’을 위한 곳이다. 한옥의 앞마당에 정원을 가꾸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정원을 차경하기 위함이다. ‘오미동가도’ 주인 내외가 각자의 누마루에 앉아 있는 모습도 멀리 앞산의 차경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다. 집 그림과도 같이 실제 운조루의 생활도 그처럼 평화롭고 풍요로웠을 것이다. 오미동의 형국을 하늘에서 떨어진 금가락지 모양이라 한다면, 그 정점에 위치한 운조루는 너른 풍요의 들판과 거대하고 아름다운 자연 경치를 자기 것으로 삼았다. 그러나 해방 후 토지개혁으로 대부분 가산을 해체당하고, 해방 공간의 빨치산 전쟁으로 장손을 잃는 등 가문의 운세도 기울었다. 설상가상으로 이 집의 문화재적 가치가 알려지면서 수십 차례 도둑과 강도가 들어 가보를 비롯한 소장품들을 강탈해갔다. 그 중요한 ‘오미동가도’도 절취당해 복사본만 남아 있다. 천혜의 명당도 추악한 역사를 피해갈 수는 없는가. 언젠가 명당과 명가라는 공간의 힘이 현대사라는 시간적 질곡을 치유하고 극복할 날이 오리라.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건축학자
  • [2030 세대] 통일은 대박이 아니다, 평화 그 자체로 소중한 것/양동신 건설 인프라엔지니어

    [2030 세대] 통일은 대박이 아니다, 평화 그 자체로 소중한 것/양동신 건설 인프라엔지니어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이루어진 한반도에 있는데, 분단의 역사를 겪다 보니 육로를 통해 타국을 가는 것이 불가능해 ‘섬’과 같았다. 그러다 보니 가끔 어떤 이들은 통일로 육로가 개방된다면 우리는 섬나라에서 탈출해 더 경제발전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역사학자 이언 모리스는 그의 저서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에서 동양은 6세기경부터 서양을 따라잡았고, 다시 18세기에 이르러 서양은 동양을 능가했다고 설명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15세기 초 정화의 원정 이후 중국은 해상후퇴 정책을 펼쳤고, 비슷한 시기에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기 때문이라 해석된다. 그렇게 근대로 넘어서며 인류는 바다를 중심으로 무역을 해왔고, 이를 통해 경제를 발전시켜 왔다. 세계경제사에서 지난 반백 년간 근대화에 성공하고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한 나라를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 하는데, 그 네 마리 용의 특징은 모두 ‘섬나라 경제’라는 점이다. 대한민국, 홍콩, 싱가포르, 타이완이 그러하다. 물론 그보다 일백 년 정도 앞서서 근대화에 성공한 국가가 섬나라 일본이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곳도 섬나라 영국이었다. 섬나라라는 지리적인 위치는 현대적 관점에서 장점이지 단점은 아니다. 오히려 바다에 접하지 않은 국가들이 경제발전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이 있다. 이라크도 이란, 터키 등 5개국과 육로가 이어져 있지만 쿠웨이트보다 짧은 해안선의 길이는 늘 경제발전의 저해요소로 작용해 왔다. 석유도 석유지만 쿠웨이트의 슈웨이크항은 후세인에게 늘 매력적인 장소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북한의 자원을 들고 경제발전의 장밋빛 미래를 점치기도 하는데, 사실 자원부국 치고 선진국인 나라는 별로 없다. 북한에 많다는 텅스텐 생산량으로 보자면, 세계 1위는 중국이며 그 뒤로 러시아, 캐나다, 볼리비아, 베트남이 뒤를 잇는다. 일반적으로 이들 자원부국이라 일컬어지는 국가가 우리나라보다 경제발전에 성공했는가. 이쯤에서 ‘통일이 대박’이라는 말은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물론 나는 통일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통일이 대박이라서가 아니라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를 원하기 때문이다. 통일이 돼도, 뉴요커가 LA를 비행기 타고 가듯이, 우리는 상하이나 모스크바를 비행기 타고 다닐 것이다.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는 해상 수송으로 조달할 것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처럼 통일 이후 사회갈등이 더 심화해 어려워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적 비용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치러야 할 과제이다. 언제까지 휴전선을 두고 서로 미사일을 겨누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통일은 대박이 아니다, 하지만 평화로운 한반도를 원한다면 통일은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다. 나는 그 소중한 평화를, 호들갑스럽게 대박이니 뭐니 하지 않고, 덤덤하게 찾아 나갈 수 있길 바란다.
  • [이광식의 천문학+] 음력과 양력은 어떻게 다를까?

    [이광식의 천문학+] 음력과 양력은 어떻게 다를까?

    -우리가 쓰는 음력은 태음태양력 구정 연휴가 끝나고 다시 일상이 시작되었다. 좀 오래 전 얘기지만, 정부에서는 신정, 구정 이중 과세를 없애기 위해 무든히 노력했지만, 오랜 구정의 전통을 정부시책으로 없애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구정은 민족의 명절로 짱짱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구정은 음력으로 정월 초하루, 곧 1월 1일을 가리키며, 설이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음력으로는 새해가 시작되는 날인 셈이다. 그럼 음력이란 대체 뭘까? 구정은 잘 알지만 음력은 뭔지 잘 모르는 젊은층이 꽤 있는 듯하다. 음력이란 달이 차고 기우는 주기를 기준으로 하여 만든 달력을 말하며, 태음력이라 한다. 그런데 이런 달력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달의 주기는 평균 29.53일 정도로 날짜가 딱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달의 주기를 이용한 음력은 한 달의 길이로 29일과 30일을 번갈아 사용하는 게 보통이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 즉 1년의 길이는 약 365일이다. 음력을 여기에 맞추려면 30일과 29일을 번갈아 사용하여 모두 12달을 만들면 되는데, 이렇게 하면 365-6×(30+29)=11일의 차이가 생긴다. 이게 해마다 쌓이면 계절과 달력 날짜가 맞지 않게 되어, 봄에 태어난 사람의 생일이 여름이 되는 수가 있다. 그래서 19년마다 일곱 번씩 윤달을 넣어 바로잡는다. 이처럼 계절의 변화(즉, 태양의 일주)까지 고려한 음력을 태음태양력이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쓰는 음력은 대개 이 태음태양력을 가리킨다. 이와는 달리 순태음력(純太陰曆)은 달의 차고 기욺을 기준으로 하여 만든 역법으로, 흔히 음력(陰曆)이라고 한다. 이슬람의 이슬람력(회회력)이 여기에 속한다. 순태음력에서는 윤달을 전혀 두지 않으므로 역일과 계절이 점차 달라져서 5, 6월에 눈이 오기도 하고 정월과 2월에 혹서가 되기도 한다. 24절기는 미니 태양력 이에 비해 양력, 또는 태양력은 태양의 운행을 기준으로 만든 달력이다. 태양력의 기원은 이집트로,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18세기, 나일강이 범람할 때면 동쪽 하늘의 일정한 위치에 큰개자리 알파별 시리우스가 뜬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1년을 365일로 하고, 이것을 30일로 이루어진 12달과 연말에 5일을 더하는 식으로 태양력을 만들었다. 이후 이것을 보완한 율리우스력이 만들어져 4년마다 하루를 더 넣어 윤년을 만들고, 간간이 윤달을 둠으로써 역일과 계절이 많이 어긋나지 않게 했다. 현재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양력은 그레고리력으로, 1582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율리우스력을 개정하여 시행한 역법이다. ​ ​그레고리력에서는 4년마다 윤년을 택하되, 100으로 나뉘는 해는 윤년으로 하지 않고, 다시 400으로 나누었을 때 나뉘는 해는 윤년으로 하는 방법으로 편차를 해결했다. 그레고리력의 1년 길이는 365.2425일이므로, 천문학의 회귀년보다 0.0003일(26초)이 길고 약 3,300년마다 1일의 편차가 난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것도 이 그레고리력이다. 구정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이지만, 공식적으로는 음력, 즉 태음태양력은 쓰이지 않고 있다. 우리가 흔히 잘 쓰는 24절기는 태양의 운행에 맞춰 1년을 24등분해서 계절을 자세히 나눈 것으로, 음력을 쓰는 농경 사회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절후(節候)·시령(時令)이라고도 하며, 음력만 쓰던 옛날, 달력 날짜와 계절이 잘 안 맞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인데, 태양의 운동과 일치하는 태양력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이광식 칼럼니스트 joand999@naver.com 
  • 성경 속 예수를 닮은 이슬람 경전 속 예수

    성경 속 예수를 닮은 이슬람 경전 속 예수

    무슬림 예수/타리프 칼리디 지음/정혜성·이중민 옮김/소동/384쪽/2만 2000원‘한 손엔 코란, 한 손엔 칼.’ 서방 세계가 이슬람교의 호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만들고 퍼뜨린 대표적 문구다. 요즘 지구촌 큰 문제인 테러와 난민도 걸핏하면 이슬람교와 연관짓기 일쑤다. 하지만 정작 이슬람은 ‘평화’의 뜻을 갖는다.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는 전혀 상관없고, 물과 불처럼 섞이지 못한 채 충돌할 수밖에 없는 유일신 종교들일까. 이슬람 실체를 알리는 데 앞장서 온 저자는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다”고 말한다. 무슬림은 예수를 사랑하며, 심지어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무슬림이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이슬람 경전 코란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전승언행록 하디스, 그리고 2~8세기와 12~18세기 남겨진 무슬림 복음을 샅샅이 훑어 분석한 결과다. ‘예수가 무슬림이라고?’ 기독교인들에겐 도발적일 수 있는 책 제목이다. 하지만 책은 기존 인식을 철저하게 뒤집고 있다. 우선 코란에는 예수의 아랍어 이름인 ‘이사’가 무려 25번이나 등장한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단 네 번 언급되는 것에 비하면 엄청난 횟수다. 이슬람 전승 속 예수가 기독교 경전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도 놀랍다. “악을 뿌린 자는 후회를 거두어들일 것이다” 같은 구절이 대표적이다. 두 종교 간 차이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코란은 십자가형을 부정하고 예수가 하느님께 승천한 일이 예수가 예언자임을 증명해 준다고 본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신격화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 보지만 이슬람은 예언자 중 한 명으로 본다. 결국 ‘무슬림 예수’는 ‘위대한 예언자’의 위상에 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무슬림 복음은 어떻게 한 세계의 종교가 다른 세계의 종교에 속한 중심인물을 받아들이고 제 청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인물로 인식하게 됐는지를 보여 주는 특별한 기록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금요칼럼] 선비타령/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금요칼럼] 선비타령/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설 연휴에는 서재에서 조용히 옛 선비들의 글을 읽었다. 글은 옛글이라도 느낌은 더욱 새로웠다. 어수선한 시절 탓이리라. 옛날의 유학자는 기득권층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안하무인인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소문은 서양에까지 널리 퍼졌다. “가난한 사람은 감히 부자와 다투지 못하는 법인데, 엔간한 부자라도 중국의 유학자와는 다투지 않는다.” 이런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선비의 나라 조선에서도 부정부패의 장본은 글 읽은 선비였다. 명종 때 남명 조식이 쓴 상소문이 생각난다. 남명은 경상도 단성현감에 임명됐으나, 부패한 세상을 비판하며 사직을 고집했다. 그가 올린 상소문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하급 관리들은 시시덕거리며 주색을 즐기고, 벼슬 높은 고관들은 제 일은 하지 않고 뇌물을 모으느라 여념이 없었단다. 요샛말로 누구도 나라의 적폐를 청산할 마음이 없으니, 이거 참 큰 문제라는 것이었다. 정승판서들은 부하들을 요로에 낙하산으로 앉혀 놓고, 이익을 독점하느라 부산했단다. 그러는 사이 지방관들은 성난 이리떼처럼 백성의 재산을 빼앗는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앞장서 세상을 망가뜨리는 축은 책권이나 읽었다는 지식인들이다. 그들은 공개 석상에서는 위선을 떨고 체면을 차리지만, 이권 앞에서는 품위고 신념이고 따질 겨를이 없다. 모두가 도둑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때로 진지한 반성과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하는 법이다. 18세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선비의 올바른 행실, 요즘 식으로 말해 지식인의 자세를 걱정했다. ‘배웠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간사한 말, 거짓말을 하는 데 이골이 나 있다. 여간 꿋꿋하고 방정한 이가 아니고서는 줏대를 가지고 똑바로 살기가 어렵다. 이름만 선비일 뿐 바람에 나부끼는 풀잎 같은 사람이 많다. 모름지기 내 마음을 굳게 지켜야겠다. 그래야만 세상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 시절에도 세파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정조 때 영의정이었던 채제공의 글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진주목사 정재원에 관한 일화였다. 목사는 임지에서 병으로 갑자기 숨졌다. 비보를 들은 그의 아들들이 달려가 통곡했다. 그들이 아전들이 가지고 있는 장부를 살펴보았더니 고을의 회계가 엉망이었다. 그런데 숨진 아버지의 머리맡에 작은 상자 하나가 있었다. 아들들이 뚜껑을 열어 보았더니 아버지가 평소에 기록한 기다란 문서 한 장이 나왔다. 관청의 재무 상태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이 문서를 바탕으로 아들들은 진주 관아의 회계장부를 완벽하게 정리했다. 채제공은 그 일을 낱낱이 기록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도 남거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이 선비는 마지막까지 벼슬살이하는 법도가 이처럼 삼가고 정밀했던가. 진주목사는 다산 정약용의 아버지였다. 그래서였을까. ‘목민심서’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글귀가 있다. “지혜로운 선비는 평소에 서류를 잘 정리해 둔다. 임기가 끝난 그 다음날 소리 없이 관아를 떠나는 것은 맑은 선비의 법도다. 모든 장부를 투명하고 바르게 마감하여 절대 이러쿵저러쿵 잡음이 나지 않게 하는 것이 지혜 있는 선비가 할 일이다.” 오늘날이라고 다르겠는가. 배운 사람이라면 자신의 행위를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결코 타인의 하수인이 돼서는 안 된다. 세상의 평판이나 돈에 휘둘려서도 곤란하다. 그런 독립적인 인간이 참된 지식인이다. 이런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낭보를 알리는 기해년이 됐으면 좋겠다.
  • [문소영 칼럼] ‘자명한 진리’로 불평등을 개선하는 사회

    [문소영 칼럼] ‘자명한 진리’로 불평등을 개선하는 사회

    프랑스가 수출한 최고의 상품은 와인이나 테제베, 에어버스가 아닌 ‘자유·평등·박애’라고 생각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의 산물로 현대 민주주의 국가 탄생에 지대하게 공헌했고, 현대인의 정신적 지주들이 아닌가. 프랑스에서는 ‘자유와 평등’은 천부적인 권리로서 혁명이 있던 그해인 1789년에 제정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 ‘박애’는 사회공동체에 대한 의무로서 1795년 제정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와 의무선언’에 각각 수록됐다. 우리의 헌법에도 이 정신들이 들어 있다. 그런데 설 연휴에 서독 총리를 지낸 헬무트 슈미트가 쓴 ‘구십 평생 내가 배운 것들’을 읽다 보니 ‘아니, 신생국가 미국에서 프랑스로 수출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미국은 프랑스혁명보다 10여년 전인 1776년 독립을 선언했는데, 이때 독립선언문의 초안을 쓴 이는 나중에 3대 미국 대통령을 역임한 토머스 제퍼슨으로 선언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그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이 제퍼슨은 프랑스혁명이 진행될 때 파리 주재 미국대사였는데 인권과 시민권 선포에 기여했다고 슈미트 총리가 설명했다(120~121쪽). 세계사 책에서 읽은 한 문장인 ‘미국 독립전쟁이 프랑스혁명에 영향을 미쳤다’는 구절이 갑작스레 훨씬 풍부해졌다. 제퍼슨이 독립선언문에 담은 ‘자명한 진리’로서의 천부인권론은 사실 18세기 중엽 유럽에서 가장 핫한 이론 가운데 하나였다. 제네바 출신의 장 자크 루소가 쓴 논문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5년)과 ‘사회계약론’(1762년)이 당시 유럽 지성계를 강타한 것이다. 루소는 두 논문에서 ‘인간 조건의 모든 불쾌한 특성이 자연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사회발전 과정에서 파행해 불평등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함으로써 불평등을 제도화했다’면서 “인민이 좋아하면 수임자를 지정할 수가 있고, 또한 그만두게 할 수도 있다”며 체제 전복도 옹호했다. 특히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프랑스 디종 아카데미가 1753년 ‘인간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라는 주제로 한 논문 현상 공모에 루소가 응모했다가 낙선한 논문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그는 앞서 1749년 디종 아카데미의 논문 현상 공모에서는 최고상을 받았다. ‘불평등의 창조’를 쓴 인류고고학자인 켄트 플레너리와 조이스 마커스는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대해 ‘찰스 다윈과 허버트 스펜서의 진화론보다 100년이 앞서고, 하인리히 슐리만의 고고학보다 120년이나 앞선 탓에 어떤 자료의 도움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통찰만으로 인류의 불평등을 진단했다’며 감탄한다. 이 자유·평등·박애와 같은 자명한 진리는 유럽과 미국을 오가면서 서로에게 깊이 영향을 주고 현대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다. 인류의 불평등은 언제 시작됐을까. 인류학자들은 기원전(BC) 2500년부터 어느 문화권이든 나타난다고 한다. 1만 2000년 전 신석기혁명이 일어났으니, 농사를 지은 뒤 1만년쯤 지난 무렵이다. 불평등은 약 5000년도 안 된 셈이다. 500만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대신 5만년 전에 나타난 현생 인류 호모사피엔스를 기준으로 해도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평등하게 살았다. 즉 인류는 경쟁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협동하고 겸손하고 이타적으로 살아 3만년 전 빙하기도 뛰어넘고 대륙을 뛰어넘는 사상적 연대로 연결돼 발전해 온 것이 아닐까. 미국 시카코에 살인적인 한파가 닥치자 지난달 30일 모텔방 30개를 빌려 노숙자에게 제공한 30대 평범한 여성의 충동적인 용기는 지역의 이웃들에게도 영향을 줘 100여명의 노숙자들이 한파를 피하는 모텔에 있다고 한다. 두 달도 안 돼 새해가 또 시작됐고 새 각오를 하고 있다. 집안을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를 바라보다가 저 작은 고양이조차 빅뱅 이후 지구의 생성과 진화 과정을 품은 생명체이거니 생각하니 문득 경외심이 솟고 팔뚝에 소름도 오스스 돋는다. 인류가 공존의 힘으로 수십만년을 진화해 왔다는 많은 연구들을 접하면서 자유·평등·박애가 다시 자명한 진리인 세상을 떠올린다. symun@seoul.co.kr
  •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귀족 대구’ 때문에 미국 독립혁명이 시작됐다고?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귀족 대구’ 때문에 미국 독립혁명이 시작됐다고?

    지난해 말 강원 고성군 죽왕면 공현진 앞바다에 명태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일이 있었다. 표본을 추출해 유전자 분석을 해 보니 모두 자연산이었다. 어민들과 수산 전문가들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언제부턴가 동해에서 명태가 사라졌고, 이를 되살리기 위해 2014년부터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어민들과 수산 전문가들은 그 계획의 성공을 예측했지만, 놀랍게도 2만 1000여 마리의 명태는 모두 자연산이었다. 40여 마리가 더 잡히고 다시 사라진 명태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간 것일까. 수산 전문가들은 명태의 회유 경로와 습성 등을 더 세밀하게 연구해야 한다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장담하기 어려운 모양이다.기후변화와 남획으로 사라진 명태의 속성을 좀더 자세하게 볼 수 있는 책이 있다. 명태와 사촌쯤 되는 대구에 얽힌 역사와 조리 방법까지 서술한 마크 쿨란스키의 ‘대구’가 그것이다. 일단 책에서 말하는 대구는 ‘대서양대구’로 몸집이 크고 개체수가 많으며 맛이 담백해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어종이었다. 얕은 물을 좋아해서 잡기 쉬웠다. 전 세계에서 상업적인 생선이 된 이유다. 저자에 따르면 대구는 역사상 유럽인의 주요 식량이자 부를 쌓는 수단이었다. 8세기에 바이킹은 말린 대구, 우리로 치면 북어를 주식으로 삼아 유럽을 주름잡았다. 17세기 초 종교 박해를 피해 바다를 건넌 순례자들은 종교도 종교지만, 대구를 잡아 부자가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 앞바다에는 그만큼 대구가 풍부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어민들 중에 명태 잡아서 큰 부자가 된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대구를 잡아 큰돈을 번 유럽인들은 제법 많다. 18세기 초 뉴잉글랜드는 대구 무역의 중심지였는데, 대구 어업으로 가문의 부를 쌓은 사람들을 일러 ‘대구 귀족’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국제적인 상업 세력으로 부상했는데 소금에 절인 대구를 지중해 시장에 판매해 큰 이익을 챙겼다고 한다. 질이 떨어지는 대구는 서인도제도의 설탕 플랜테이션에 팔았다. 설탕 플랜테이션 노예들은 이 물고기를 주식 삼아 하루 16시간의 중노동을 버텨야만 했다. 저자는 말한다. “결과적으로 소금에 절인 대구는 카리브해의 노예들을 먹여 살려 노예무역을 더욱 활성화시켰다.” 저자는 대구 때문에 미국이 독립했다는, 듣기에 따라 황당한 주장도 펼친다. 역시 18세기 들어 영국이 식민지인 뉴잉글랜드의 당밀과 차에 세금을 매기고 대구 무역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었다. 대구를 잡아 부자가 될 꿈에 부푼 사람들이 이 조치에 반발해 미국 독립혁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1782년 영국과 평화협상이 벌어졌지만, 가장 큰 난제는 미국의 대구 잡이 권리에 대한 것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예나 지금이나 남획이 문제다. 더 많은 대구를 잡기 위한 노력은 끝이 없었는데, 19세기 들어 어업 현대화가 이뤄지면서 대구 개체수는 급감했다. 어업의 현대화를 이룬 수단은 주낙이었다. 프랑스는 국가적으로 선단에 주낙을 설치하기도 했다. 낚싯줄에 낚싯바늘이 여러 개 달린 이 장비에 얼마나 많은 대구가 잡혔을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대구의 남획을 걱정하면서도 저자는 각 장이 끝날 때마다 ‘한 요리사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대구 요리를 소개한다. 흥미롭지만 다소 생뚱맞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구’를 읽으며 자연산 명태도 돌아오고,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로 바다에 나간 치어들도 성장해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식탁이 더 풍성해질 테니 말이다. 이 기대도 다소 생뚱맞은 것 아닌가 저어된다.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 아무도 모른다, 이 수수한 평화의 땅…나만 알고 싶은 풍경 한 점 와인 한 잔

    아무도 모른다, 이 수수한 평화의 땅…나만 알고 싶은 풍경 한 점 와인 한 잔

    슬로베니아. 조금 낯선 나라다. 유럽 동남부에 자리한 나라인데 옛날에는 유고 연방에 속했다. 나라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슬라브족들이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슬로베니아에 관한 책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인터넷 서점을 찾아보면 김이듬 시인이 슬로베니아를 여행하고 쓴 여행기 ‘디어 슬로베니아’가 나온다. 슬로베니아에 교환 교수로 머물며 틈틈이 여행한 슬로베니아를 시인 특유의 감수성 어린 문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슬로베니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힐링’ 혹은 ‘위로’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 그것이 지닌 가식적인 느낌을 싫어하는 다소 까칠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온 후로 조금씩, 천천히 마음을 치유받았다. 바쁘게 뛰어다니며 불안하고 초조하게 살아온 지난 삶을 돌아보며 자족과 평화를 길어 올렸다. 태생적 방랑자인 양 수없이 여행을 다니며 노마드적인 생활이 몸에 배어 있는 내가, 슬로베니아에서 고향에서조차 느낄 수 없었던 수수하고 평화로운 삶의 길을 발견한 것이다.” 김이듬 시인의 이 감상이 가장 정확한 것임을 슬로베니아에 가보면 알게 되시리라.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는 나라. 뉴스를 따라가기조차 버거운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른 느린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나라가 바로 슬로베니아다.슬로베니아는 발칸반도에 숨은 듯 자리잡고 있다. 면적은 전라도와 비슷하다. 인구는 20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나라가 워낙 작다 보니 동서를 횡단해 봐야 고작 3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슬로베니아를 여행하다 보면 맨날 국경지대만 다니게 된다. 여기는 헝가리, 저기는 독일, 저기는 크로아티아와 국경이다. 슬로베니아는 1991년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이 해체되면서 독립했는데 이 나라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보다 더 많다. 파울루 코엘류의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 주인공 베로니카는 자살을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조국 슬로베니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글을 쓴 기자에게 슬로베니아를 설명하는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탄식한다. “슬로베니아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몰라. 아무도. 이는 온당치 못한 국제적 무관심이다”라는 황당한 유서를 쓰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슬로베니아를 찾는 여행자들은 수도 류블랴나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발음하기가 약간 까다로운 이 도시는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다.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큰 도시라고 하지만, 인구라고 해봐야 28만명밖에 되지 않는다. 어느날 가이드와 함께 류블랴나 거리를 걷는데 가이드가 이렇게 말했다. “아니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못 보던 사람들이 많지?”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 오늘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구나.” 그렇다. 류블랴나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인근 도시와 국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류블랴나로 온 것이다. 그러니까 류블랴나에서 태어나 30년째 살고 있는 그녀는 류블랴나 사람들 대부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류블랴나는 그만큼 작다.류블랴나 가운데 자리한 프레셰렌 광장은 오스트리아와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등지에서 오는 기차들이 정차하는 중앙역과 가깝다. 그래서인지 언제나 여행자들과 현지인들로 붐빈다. 프레셰렌이라는 이름은 슬로베니아의 국민 시인인 프레셰렌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낭만주의의 선두주자였으며, 강렬한 문장으로 유명했던 시인이다. 그가 죽은 날인 2월 8일을 국경일로 정하고, 이날 전국적으로 그의 시를 읽는 낭송회와 콘서트, 연극 공연 등이 열린다고 하니 그에 대한 슬로베니아 국민들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동상은 아득한 시선으로 어느 지점을 응시하고 있는데 그 시선이 닿는 지점에는 그가 평생 사랑했던 여인 율리아 프리미츠의 집이 있다. 평생 사랑했지만 신분의 차이로 함께할 수 없었던 그들을 위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이루라는 의미로 이렇게 동상을 배치했다고 한다.광장 옆으로는 류블랴니차강이 흐른다. 강 양옆으로는 바로크 양식과 아르누보 스타일의 건축물이 즐비하다. 대부분 레스토랑과 카페, 서점 등이다. 소란스럽지 않아 산책을 하듯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니기 좋다.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트리플교가 나온다. 슬로베니아의 대표적인 건축가 요제 플레치니크가 설계한 것으로 류블랴나 엽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류블랴나 여행의 하이라이트이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명소는 류블랴나 성이다. 9세기에 처음 세워졌다가 1511년 지진으로 파괴된 후 17세기 초에 재건됐다. 성에 오르면 장난감 도시 같은 류블랴나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슬로베니아를 일컫는 또 다른 별명이 있다. ‘유럽의 미니어처’다. 이 작은 나라 안에 유럽의 모든 것이 다 모여 있기 때문이다. 블레드 호수에서 2시간 정도 북쪽으로 가면 피란 지역. 또 다른 풍경을 보여 준다. 이탈리아와 면한 휴양도시인데 슬로베니아 사람들도 즐겨 찾는다. 가이드는 피란이 너무 좋다고 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을 꼽으라면 이곳일 거야.”●물 좋고 산 좋은 ‘유럽의 미니어처’ 유럽에서 유명한 온천지대 중 손꼽히는 곳이 슬로베니아다. 물이 좋기로 유명한 이 나라는 수로의 길이가 3만㎞에 달하고 수돗물은 그냥 마셔도 될 정도로 깨끗하다. 또한 나라 곳곳에 흩어진 87곳의 샘에서 온천수와 광천수가 솟아난다. 마그네슘과 칼슘이 풍부한 온천 지대는 고대 로마 시대부터 다양한 질병에 효능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도 크로아티아, 독일, 이탈리아 등 주변국부터 멀리 대만에서까지 치유 목적으로 여행객들이 찾아온다. 라스코 온천 마을은 EDEN(European Destination of ExcelleNce)이 뽑은 ‘2013 유럽 최고의 여행지’로 뽑히기도 했다. 라스코 지역은 중세 시대 로마인들에게 발견된 이래 선교사들이 주기적으로 방문했던 곳으로 1854년 합스부르크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공식적으로 온천 지역으로 명명했다. 알프스 풍경도 만날 수 있다. 알프스 하면 스위스를 떠올리지만 슬로베니아도 발을 걸치고 있다. 줄리안 알프스라고 부르는,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댄 북서부 산악지대다. 트리글라브 등 2000m 이상 고봉이 줄줄이 이어진다. 6월까지도 잔설이 남아 있을 정도다. 블레드 호수는 ‘줄리안 알프스의 진주’라고 불리는 곳이다. 둘레 6㎞의 작은 호수이지만 전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알프스의 만년설이 녹아 만들어졌다. 호수가 보여 주는 풍경은 정말이지 그림 같다. 푸른 물비늘을 일으키며 햇살을 반사하는 호수와 그 호수 위에 떠 있는 작은 섬, 그리고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알프스 산맥은 방금 달력에서 오려낸 듯한 풍경을 보여 준다. 블레드 호수가 유명한 건 블레드 호수에 떠 있는 블레드섬 때문이다. 이 자그마한 섬은 슬로베니아에서 유일한 섬으로 전통 나룻배 ‘플레타나’를 타고 들어갈 수 있다. 블레드 호수엔 플레타나가 23척뿐이다.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시대 때부터 그랬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블레드 호수가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았고 딱 23척의 배만 노를 저을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 숫자가 200년 넘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뱃사공 일은 가업으로만 전해지고 남자만 할 수 있다고 한다.●첫맛은 화이트·끝맛은 레드 ‘오렌지 와인 ’ 슬로베니아 와인도 빼놓을 수 없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크로아티아, 포르투갈 등 유럽 국가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 와인에 대한 찬란한 수식어를 붙이는데 슬로베니아 와인도 이 리스트에 한자리를 차지한다. 오렌지 와인이다. 많은 이들이 오렌지로 만든 와인이라고 오해하지만 당연히 포도로 만들었다. ‘제4의 와인’으로도 불린다. 몇 년 전 영국 와인저널 ‘디켄터’의 칼럼니스트 크리스 머서가 자신의 칼럼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은 오렌지 와인일 것”이란 추측을 해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화이트 와인 품종으로 레드 와인 양조 방식을 접목해 만들기 때문에 레드 와인의 풍부함과 화이트 와인의 상쾌함을 모두 갖고 있는 게 특징이다. 첫맛은 화이트, 끝맛은 레드다. ●400세 가장 오래된 포도나무 기네스북 올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나무도 슬로베니아에 있다. 드라바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마리보르는 슬로베니아 제2의 도시로, 생산되는 와인 중 90% 정도가 화이트 와인인, 그야말로 화이트 와인의 천국이다. 마리보르 사람들의 와인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은 대단한데, 그 자부심의 한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나무가 있다.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라 온 이 포도나무는 기네스북에 올랐으며, 16세기에 지어진 올드 바인 하우스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슬로베니아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다. 여행하는 동안 한 번도 화내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다. 어느 레스토랑에서 가이드가 내게 슬로베니아식 치킨을 맛보여 주기 위해 웨이터에게 10분 동안 치킨에 관해 이것저것 물었지만 그는 시종일관 웃으며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아마도 우리나라 같으면 메뉴판을 던져 놓고 나갔을 텐데 말이다. 김이듬 시인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대한 자유롭고 게으르게,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삶이라는 여행을 누려 가야겠다.” 슬로베니아를 여행하다 보면 알게 된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에 낙관과 사랑이 생겨나게 하는 것은 열렬함과 치열함이 아니라, 한낮의 따스한 햇볕과 한 줌의 시원한 바람 그리고 맛있는 음식이 아닐까 하는 사실을 말이다. 글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여행수첩 슬로베니아로 가는 직항은 없다. 뮌헨, 터키 등을 거쳐 가야 한다. 블레드는 오스트리아 국경과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크로아티아 등 인근 국가에서 도착하고 출발하는 국제선 전용 기차역이 따로 있다. 자세한 정보는 유레일 홈페이지(www.eurail.com/kr)를 참조하면 된다. 중부 유럽과 발칸반도를 잇는 주요 열차편도 류블랴나를 거쳐 간다. 시차는 한국보다 7시간 늦다. 비자는 필요 없다. 통용되는 화폐는 유로화. 물가는 한국과 비슷하다. 슬로베니아 소시지로 크라니스카 크로바사가 있다. 다진 돼지고기에 마늘과 소금, 후추 등을 넣어 양념한다. 식감이 탄탄하고 간이 짭조름하다. 라스코와 유니온은 슬로베니아 맥주의 양대 산맥. 두 맥주 모두 풍미가 강한데 라스코는 쌉싸름한 맛이 강하고, 유니온은 부드러운 맛이 강하다. 포티차라는 음식도 있다. 호두나 허브, 양귀비씨, 치즈, 꿀을 넣은 것으로 롤케이크와 비슷하다. 결혼식이나 부활절, 성탄절과 같이 중요한 행사나 공휴일에 먹는 전통음식이다.
  • [금요칼럼] 환관도 족보를 만든 나라, 조선/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금요칼럼] 환관도 족보를 만든 나라, 조선/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환관은 생식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궁녀가 많은 궐내에서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일을 마음 놓고 맡기려면 거세된 남성이 필요했다. 고대부터 동서양 각국에 환관이 존재한 이유였다.조선왕조의 법전 ‘경국대전’에는 환관의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 140명쯤이 있었다고 한다. 실지로는 그보다 더 많았다. 실학자 이익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18세기 궁궐에는 환관이 335명, 궁녀가 684명이었다. 그들이 받는 녹봉을 모두 합치면 매년 쌀 1만 1430석이 든다고 하였다(성호사설, 제24권, ‘환관궁녀’). 조선의 환관들은 별로 큰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왕을 최측근에서 보좌하였으므로 어느 정도 학식을 갖춰야 했다. 그들은 매달 유교경전에 관한 시험을 치렀다. 어느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환관의 평균수명은 70세 정도였다. 노동에 종사한 평민보다는 무려 10여년이 길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결과이지만, 믿기 어려운 점도 있다. 질병으로 사망한 환관도 적지 않았던 데다가 항상 궁중의 사나운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참고로, 조선의 환관은 체격도 훌륭했고 목소리도 남자다웠다. 그들은 체력도 우수한 편이어서 궐내의 건물을 보수하는 등 육체노동을 너끈히 감당하였다. 다른 나라에서는 환관이 가정을 이루는 경우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환관은 다들 결혼해서 가정을 이뤘다. 그들 또한 조상의 제례(祭禮)를 모시는 데 열심이었다. 환관들은 일찌감치 어린아이를 입양하여 환관으로 키웠다. 세력이 좀 있는 환관들은 슬하에 두세 명의 양자를 거느리기도 하였다. 환관 집안에서는 양부와 양자의 성이 서로 다르기 일쑤였다. 가령 명종 때의 상약(약을 담당하는 환관) 노익겸의 양부는 환관 박한종이었다(조선왕조실록 명종 14년(1559) 9월 25일자). 이처럼 성은 달랐어도 환관 부자간의 정은 두터웠다. 만일 아비(환관)가 죄를 짓고 귀양을 가게 되면 양아들(환관)은 아버지를 위해 구명 상소를 올렸다. 행여 아버지를 모욕하는 사대부라도 있다면, 아들은 목숨을 걸고 항의하였다. 1663년(현종 4), 사대부 이상익이 어린 환관들을 모아 놓고 환관 최대립을 노골적으로 비판하였다. 무엄하게도 사대부를 정면 비판했다는 이유였다. 그 소식을 듣고 환관 양달원이 거칠게 항의했다. 조정은 양달원의 무례를 문제 삼았다. 양달원은 다름아닌 최대립의 양자였다. 아버지를 비방하는 이상익의 언동을 보고 그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환관 최대립에게 그다지 큰 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경상감사 이상진에게 내시부 소속의 노비들에 관한 일로 협조를 부탁하였다. 그런데 이상진이 환관의 요청이라는 이유로 무시해 버렸다. 최대립은 환관의 대표로서 이상진을 공적으로 비판하였다(조선왕조실록 현종 4년 6월 15일 기사). 환관들의 가문의식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화되었다. 18세기 정조 때는 환관 이윤목이 여러 환관 집안의 통합족보인 ‘양세계보’(養世系譜)를 발행했다. 환관들의 상호연대는 그 뒤 더더욱 공고해졌다. 이윤목의 7대손인 환관 문건호 등은 100년 뒤에 옛 족보를 개정하였다. 새 족보에는 15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활동한 환관 650명이 수록되었다. 조선의 환관들이 가문의 영속과 단결을 위해 족보까지 만들었다는 사실, 이것은 실로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희귀한 일이었다. 중국과 베트남 등에서는 ‘환관의 집안’ 자체가 단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환관들도 족보를 따졌다. 조상의 제사와 자손들의 친목은 환관 사회에서도 인간의 필수적인 도리였다. 조선은 누구에게든 핏줄이 소중한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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