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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체언어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매체언어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지반이 침하됐다’보다는 ‘땅이 꺼졌다’는 말이 더 쉽다. 매체언어의 첫 번째 덕목은 쉬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빠르고 오해 없이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객관적이고 공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침 같은 구실을 해 왔다. 지난 26일 국립국어원, 방송문화진흥회, 한글문화연대 주최로 문화방송(MBC) 골든마우스홀에서 열린 ‘방송말, 매체언어의 나아갈 길’ 학술대회에서 전문가들은 이 같은 사실을 밝히며 매체언어의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 정희창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보도문에서 습관적으로 ‘상투적인 표현’을 사용하다 보니 정보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강원도 산불 피해 면적을 ‘여의도 면적의 3배가 피해를 입었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그렇지만 ‘여의도 면적’은 그동안 정확하게 제시되지 않았고, 최근 들어서야 국토교통부가 명확하게 밝혔다”고 말했다. 또 투표를 앞둔 상황에서는 실제 그렇지 않은데도 ‘긴장’이 늘 함께 나타난다고 했다. ‘무더기’도 무분별하게 쓰이는데, 9명이 코로나19에 확진됐을 때도, 2명이 징역형을 받았을 때도 ‘무더기’라고 하는 예를 제시했다. ‘안전사고’는 일어나면 ‘어이없는’ 것인데도 안전사고 앞에는 ‘어이없는’이란 수식어가 늘 붙는다고도 했다. 정 교수는 ‘벼락으로 잿더미’, ‘대학 입시에 결정적인 변수’, ‘형체를 알 수 없이 구겨진 자동차’처럼 선정적이거나 과장된 표현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산불 같은 재난 보도에서 시청자가 알아야 할 내용은 산불이 어느 정도 꺼졌는지였는데, 보도가 지나치게 현장 묘사에 치우치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그동안 보도 언어의 내용이나 기준에 관한 논의는 많이 이뤄졌으며 지금 필요한 것은 공감하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려면 각 분야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완수 동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한국 기자들이 사용하는 말과 글이 너무 어렵다”며 “뉴스 소비자들은 언론매체를 통해 어려운 글을 읽거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교수는 또 권위주의 시대에 사용하던 ‘소환’, ‘신병처리’, ‘이첩’ 같은 표현의 문제를 들며 매체언어가 권위적인 언어 표현을 사용한다고 밝혔다. 재판정 판사의 근엄한 언어, 검사의 고압적 언어, 군부 시대 관료의 언어를 사용하는 건 아닌지 되돌아 봐야 한다고 했다. 지나치게 권력 집단의 말에 편입돼 있다고도 말했다. 정부 관리나 기업 임원, 판사, 검사, 의사, 교수 등 사회 엘리트들이 사용하는 말을 확대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 밖에 영어 단어의 사용, 언론사마다 다른 용어의 통일, 특정 세대만 아는 줄임말의 남용 문제를 들었다. 주어와 술어가 일치하는 않는 문장과 ‘~라는 지적이다’, ‘~로 풀이된다’처럼 주체가 없는 문장, 피동형 문장의 남발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언론의 신뢰는 올바른 언어로 사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할 때 실현된다고 밝혔다. 이현주 인천대 불어불문학과 교수는 매체언어를 포함한 공공언어 관리와 관련해 프랑스의 ‘투봉법’을 예로 들며 설명했다. 이 교수는 “투봉법이 방송통신, 교육, 상품, 노동계약, 공공장소 분야 등에서 프랑스어 사용을 강제하고 있는데, 이를 위반하면 경범죄나 벌금형 등 형사적 처벌을 내릴 수 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프랑스에서 언어에 대한 법령은 16세기 ‘빌레르코트레 칙령’으로 시작되는데, 이후 18세기 프랑스대혁명 당시 혁명정부의 ‘바레르법’, 1994년 만들어진 ‘투봉법’까지 토대를 이루는 철학은 ‘이해 가능한 언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빌레르코트레 칙령’의 110, 111조는 지금까지 한 차례도 수정되지 않았고, 현재까지 유효한 법 조항이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110조에 ‘법령들의 의미를 의심할 이유가 없어야 하며, 아주 명확하게 쓰이고 만들어져서 모호함이나 불확실성이 없고 설명을 더 요구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111조에 ‘모든 법적 행위들은 프랑스어로 선포되고 쓰여야 한다’고 돼 있다고 했다. 이는 투봉법의 모든 부문이 국민들의 알권리와 직결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언어 사용의 주체가 일반 대중인 만큼 대중들이 공공언어에 대해 민감해지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이경우 전문기자 wlee@seoul.co.kr
  • ‘정조 왕비’ 효의왕후 한글 글씨 보물 지정

    ‘정조 왕비’ 효의왕후 한글 글씨 보물 지정

    문화재청은 조선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 김씨(1753~1821)가 1794년(정조 18년) 한글로 필사한 ‘만석군전·곽자의전’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17일 밝혔다. 왕후의 글씨가 보물로 지정된 건 2010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의 ‘어필 칠언시’(보물 제1627호) 이후 두 번째다. 효의왕후는 조카 김종선에게 ‘한서’(漢書)의 ‘만석군석분’과 ‘신당서’(新唐書)의 ‘곽자의열전’을 한글로 번역하게 한 뒤 그 내용을 적어 내려갔다. ‘만석군전’은 한나라 경제(景帝) 때 벼슬을 한 석분의 일대기이며, ‘곽자의전’은 안녹산의 난을 진압한 당나라 무장 곽자의에 관한 이야기다. 효의왕후는 표지에 ‘곤전어필’(坤殿御筆)이라고 적힌 어필책 발문에서 ‘충성스럽고 질박하며 도타움은 만석군을 배우고, 근신하고 물러나며 사양함은 곽자의와 같으니, 우리 가문에 대대손손 귀감으로 삼고자 한 것’이라고 썼다. 어필책을 보관하는 오동나무 함도 보물로 함께 지정 예고됐다. 문화재청은 “한글 어필은 왕족과 사대부들 사이에서 한글 필사가 유행하던 18세기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자 범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정제되고 수준 높은 서풍을 보여 준다”고 설명했다. 특히 왕후가 역사서의 내용을 필사하고 발문을 남긴 사례는 극히 드물어 희소성이 크고, 당시 왕실 한글서예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어 국문학과 서예사적 가치를 가늠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문화재청은 경남 고성 옥천사에 있는 19세기 초 대형 불화와 경남 하동 쌍계사가 소장한 16~17세기 목판 3건도 이날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수준 높은 서풍”… 정조 왕비 효의왕후의 한글 글씨 보물 된다

    “수준 높은 서풍”… 정조 왕비 효의왕후의 한글 글씨 보물 된다

    문화재청은 조선 정조 임금의 왕비 효의왕후 김씨(1753~1821)가 한글로 필사한 ‘만석군전·곽자의전’을 보물로 지정예고했다고 17일 밝혔다. 왕후의 글씨가 보물로 지정된 건 2010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의 ‘어필 칠언시’(보물 제1627호)이후 두 번째다. 이 글씨는 효의황후가 1794년(정조 18년) 조카 김종선에게 ‘한서’(漢書)의 ‘만석군석분’과 ‘신당서’((新唐書)의 ‘곽자의열전’을 한글로 번역하게 한 뒤 그 내용을 적어내려간 것이다. ‘만석군전’은 한나라 경제(景帝) 때 벼슬을 한 석분의 일대기이며, ‘곽자의전’은 안녹산의 난을 진압한 당나라 무장 곽자의에 관한 이야기다. 효의왕후는 표지에 ‘곤전어필(坤殿御筆)’이라고 적힌 어필책 발문에서 ‘충성스럽고 질박하며 도타움은 만석군을 배우고, 근신하고 물러나며 사양함은 곽자의와 같으니, 우리 가문에 대대손손 귀감으로 삼고자 한 것’이라고 필사 이유를 밝혔다. 가문의 평안과 융성함에 대한 염원을 담은 자료임을 보여준다. 어필책을 보관하는 오동나무 함도 보물로 함께 지정 예고됐다. 1762년(영조 38) 세손빈으로 책봉된 효의왕후는 자녀를 두지 못한 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효성이 지극해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성으로 모셨다 하며, 일생을 검소하게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문화재청은 “한글 어필은 왕족과 사대부들 사이에서 한글 필사가 유행하던 18세기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자 범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정제되고 수준 높은 서풍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특히 왕후가 역사서의 내용을 필사하고 발문을 남긴 사례는 극히 드물어 희소성이 크고, 당시 왕실 한글서예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어 국문학과 서예사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덧붙였다.문화재청은 경남 고성 옥천사에 있는 19세기초 대형 불화와 경남 하동 쌍계사가 소장한 16~17세기 목판 3건도 이날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고성 옥천사 영산회 괘불도 및 함’은 1808년(순조 8년) 수화승 평삼 등 화승 18명이 화폭 20폭을 붙여 10m가 넘는 높이로 만들었다. 하동 쌍계사 목판은 문화재청이 비지정 사찰 문화재의 보존관리를 위해 불교문화재연구소와 시행하는 전국 사찰 소장 불교문화재 일제조사에서 발굴한 유물이다. 2016년 조사한 경남 지역 사찰 소장 목판 중 완전성, 제작 시기, 보존상태, 희소성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했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포토] 조선 과학기술의 정수, 해시계 ‘앙부일구’ 귀환

    [포토] 조선 과학기술의 정수, 해시계 ‘앙부일구’ 귀환

    문화재청은 지난 상반기 미국의 한 경매에 출품된 조선 시대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을 통해 지난 6월 매입했다고 17일 밝혔다. 앙부일구는 하늘을 우러러 보는(앙) 가마솥(부) 모양에 비치는 해 그림자(일구)로 ‘때를 아는 시계’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조선 시대 과학 문화의 발전상과 통치자의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이번에 환수된 앙부일구는 18세기에서 19세기 초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름 24.1㎝, 높이 11.7㎝, 약 4.5㎏의 무게를 지닌 금속제 유물이다. 2020.11.17 문화재청 제공
  • 조선시대 해시계 앙부일구 경매로 미국서 환수

    조선시대 해시계 앙부일구 경매로 미국서 환수

    조선시대의 천문과학기술을 반영한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1점이 미국에서 돌아왔다. 문화재청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을 통해 지난 6월 미국의 한 경매에서 매입해 8월에 들여온 앙부일구를 17일 오후 2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한다. 이와 유사한 크기와 재질의 앙부일구는 국내에 7점이 있으며, 이중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2점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앙부일구는 ‘하늘을 우러러 보는(仰·앙) 가마솥(釜·부) 모양에 비치는 해 그림자(日晷·일귀)로 때를 아는 시계‘ 라는 뜻으로, 백성을 살피는 애민 정신을 담아 만든 조선 최초의 공중(公衆) 시계다. 세종대왕이 처음 만들어 백성들이 오가는 종묘와 혜정교(현 종로1가)에 설치한 이후 조선 말까지 제작됐다. 현대 시각체계와 비교했을 때도 거의 오차가 나지 않으며, 일몰시간과 방향 등을 알 수 있는 체계적이고 정밀한 과학기기다. 이번에 환수된 앙부일구는 18세기에서 19세기 초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름 24.1㎝, 높이 11.7㎝, 약 4.5㎏의 무게를 지닌 금속제 유물이다. 정확한 시간과 계절을 측정할 수 있는 우수한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동시에 정밀한 주조기법과 섬세한 은입사 기법, 다리의 용과 거북머리 등 뛰어난 장식요소를 볼 때 숙련된 장인이 만든 수준높은 예술작품이란 평가다. 문화재청은 지난 1월 이 유물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면밀한 조사와 검토, 국내 소장 유물들과의 과학적 비교분석 등을 진행했다. 코로나19로 인해 3월부터 6월까지 수차례 경매가 취소되고 연기되는 우여곡절 끝에 지난 8월 마침내 국내로 들여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앙부일구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자격루, 혼천의 등 다른 과학 문화재들과 함께 연구와 전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계획이다. 우선 18일부터 12월 20일까지 박물관 내 과학문화실에서 일반에 공개된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금요칼럼] 코로나19와 집단기억력/황두진 건축가

    [금요칼럼] 코로나19와 집단기억력/황두진 건축가

    분야를 막론하고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흐른다. 소위 ‘뉴노멀’은 어느덧 ‘노멀’이 돼 사람들은 거기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자체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확진자 증가 추세는 여전하지만 사망자 비율은 그렇지 않고, 게다가 백신 개발 관련 뉴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근본적으로 확 변할 것 같지는 않다는 낙관적인 생각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항상 모험이다. 코로나19처럼 기본적으로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비전문가가 상식과 추측으로 접근하는 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그래서 때로 역사를 돌아보게 된다. 적어도 상황에 대처하는 인간의 방식이나 태도에 대한 교훈은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집단 기억력에 대한 의문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1918년에 발생했던 ‘스페인 독감’은 이런 점에서 참고가 된다. 유행했던 기간은 불과 1년 남짓. 그러나 그 피해는 엄청나서 어떤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500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어서 ‘무오년 독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백범 김구 선생도 상하이에서 감염됐다. 당시 한반도 인구 1670만 명 중 742만명이 독감에 걸렸고 14만명이 사망했다고 하니 현재까지의 추세로만 보면 코로나19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존재였던 셈이다. 그런데 스페인 독감은 그 이전에 인류가 경험했던 대역병, 이를테면 중세의 흑사병 등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과학의 발전이었다. 도저히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어마어마한 공포에 시달리며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경험, 혹은 주술과 신앙으로만 대처해야 했던 중세와는 달랐다. 박테리아는 1676년 네덜란드의 레이우엔훅에 의해 그 존재가 알려졌고, 바이러스가 발견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최초의 백신인 천연두 백신도 이미 18세기 말에 개발됐다. 스페인 독감 당시의 기록을 읽어 보면 당시의 대처는 요즘과 원리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격리는 중세부터 시행된 것이기는 했지만 그 필요성이 무엇인지 더욱 명확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구글에 들어가 당시의 사진을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할 수 없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유럽에서 극동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그전과는 사뭇 다른 방식과 태도로 대역병에 대처했던 것이다. 코로나19가 처음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마스크에 대한 사회적 논쟁이 길고 지루하게 이어졌다. 비용, 효과, 간편성 등의 종합적 관점에서 마스크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우 효과적인 전염병 대처 수단이다. 결국 논쟁은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쓰는 것으로 일단락됐지만, 방역 초기의 그 귀중한 시간을 조금 더 단축할 수는 없었을까? 심지어 질병관리청조차 올해 3월 초까지도 ‘일반인 마스크 착용은 불필요’라고 발표했다. 마스크 무용론, 제한적 효과설, 심지어 아예 대놓고 마스크 착용에 반대하는 주장이 등장한 것도 100년 전과 다르지 않다. 즉 모두 역사에 기록돼 있던 일들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작동하고 있는 부분은 분명히 있고, 그 덕분에 100년 전과는 사뭇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집단기억력이 종종 효과적으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문제는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만약 코로나19가 현재 상황 이상으로 확대되지 않고 종식된다면,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우리 모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잊고 말 것은 아닌지, 그러다가 다른 역병이 발생하면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것인지.
  • 김대중 전 대통령 “전태일 분신, 박정희 정권 노동정책에 대한 항의”

    김대중 전 대통령 “전태일 분신, 박정희 정권 노동정책에 대한 항의”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친필 연설문 공개 “전태일씨의 분신은 결코 일개 피복 직장 노동조건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현 정권의 반근로자적 노동정책에 대한 항의이며, 오늘의 절망에 찬 사회현실에 대한 일대 경종이라고 반성해야 한다.” 11일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이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친필 연설문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분신 소식을 듣고 같은 달 21일 전북 전주에서 열린 유세를 위해 작성한 연설문이다.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해당 연설문에서 박정희 정권의 노동정책을 비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현 정부는 건설이라는 이름 아래 국가의 엄연한 실정법인 근로기준법 준수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이를 사문(화)시켰다”며 “경제건설이 어느 정도 이뤄질 때까지는 근로자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18세기적 경제정책에 젖어있는 현 정부의 사고방식은 너무도 위험하다”고 지적했다.그러면서 “정부는 지금까지의 방만을 반성하고 자유로운 노동운동에 대한 정보정치의 간섭을 지양하고 노동자의 정당한 지위 확립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해야 한다”며 “이것만이 전태일씨의 거룩한 희생을 살리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 열사는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22세의 나이에 분신해 숨졌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으로 당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과 열악한 노동 환경, 도시 빈민 등에 대한 문제의식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정치권과 학생운동, 언론은 물론 노동자들 스스로 노동권과 노동조합의 중요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도 전태일 열사의 영향이 컸다. 김대중도서관은 “이 자료는 1970년 당시 야당의 주요 지도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동문제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한국 근대화 새벽을 연 홍대용, 그가 만난 中 세 선비는 엘리트”

    “한국 근대화 새벽을 연 홍대용, 그가 만난 中 세 선비는 엘리트”

    “박지원을 연구하다가 홍대용이라는 커다란 산을 마주했습니다. 박지원에 관한 연구는 상당히 활발한데, 홍대용은 그렇지 못해 스스로 산을 넘어야 했어요.” 지전설과 우주무한론을 주장하고, 이를 근거로 화이(華夷·중국과 이민족) 구분을 부정했던 담헌 홍대용(1731~1783). 그는 30대 중반 연암 박지원과 우정을 맺고, 북학파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졌지만 제대로 연구한 이가 드물다. 박지원 전문가인 김명호 전 서울대 교수가 평전 ‘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돌베개)를 쓴 이유다. ●“홍대용, 존명배청 충돌 피하며 근대 문물 수용” ‘커다란 산´이라고 한 만큼 책은 860여쪽 분량이나 된다. 담헌이 중국의 세 선비와 필담으로 주고받은 ‘간정필담’을 위주로 ‘연기’, ‘을병연행록’의 3부작 북경 여행기와 여러 저작물을 기반으로 그의 삶을 재구성했다. 저자는 “15종에 이르는 ‘간정필담’이나 ‘연기’가 7~8년 전에야 공개됐다. 지난 5년 동안 이를 수집해 상호 비교하고 외국 자료도 모두 찾았다”고 했다.저자는 특히 담헌이 여행 중 오랫동안 우정을 나눈 중국 항주 지방의 세 선비 엄성, 반정균, 육비에게 주목했다. 일부 연구가는 이들을 ‘시골 선비’ 정도로 여기기도 하지만, 사실 이들은 1만여명이 응시하고 합격률은 1%도 채 되지 않는 절강성 향시에 급제한 인재들이었다. 육비는 특히 전체 1등을 차지해 최고 명예인 ‘해원’을 받기도 했다. 담헌은 엄성과 반정균의 향시 합격 답안지 판각본을 접한 뒤 이들의 문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게 됐다는 내용도 수록했다. 책에는 담헌이 중국 강희제와 청조 통치체제는 물론 시장, 선박, 건물, 도로, 성곽, 각종 무기와 악기를 살펴 만든 기록물 등도 자세히 실었다. 다만 당시에는 명과의 의리 탓에 청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긴 어려웠다. 저자는 담헌이 이른바 ‘존명배청’ 주의와의 충돌을 피하려는 논리를 펼치면서 근대 문물을 수용했다고 주장한다. 담헌은 청 문물을 고대 성현들이 제작한 이상적인 문물제도인 중화문물이라 소개하고, 중국 고대 예법을 담은 ‘주례’에서 구현한 ‘대규모 세심법’(규모가 크면서도 세밀함)으로 정의하면서 조선의 학자들이 무리 없이 청 문물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18세기 선각자 흔적, 우리 사회 하나의 좌표” 저자는 “우리 한국 사회가 근대로 진입하는 ‘근대화의 새벽’에 담헌 홍대용이 있었다”면서 “일부 학자가 일제강점기에 근대가 시작됐다고 하지만, 담헌과 같은 18세기 선각자들이 역사의 진전을 예감하고 사고의 흔적을 남겨 놨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들의 흔적은 지금 우리 사회가 어디서 유래했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에 대한 하나의 좌표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홍대용과 우정 나눈 ‘항주 세 선비’는 엘리트였다

    홍대용과 우정 나눈 ‘항주 세 선비’는 엘리트였다

    “박지원을 연구하다 홍대용이라는 커다란 산을 마주했습니다. 박지원에 관한 연구는 상당히 활발한데, 홍대용은 그렇지 못해 산을 스스로 넘어야 했어요.” 지전설과 우주무한론을 주장하고, 이를 근거로 화이(華夷·중국과 이민족) 구분을 부정했던 담헌 홍대용(1731~1783). 그는 30대 중반 연암 박지원과 우정을 맺고, 북학파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졌지만 제대로 연구한 이가 드물다. 박지원 전문가인 김명호 전 서울대 교수가 평전 ‘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돌베개)를 쓴 이유다. ‘커다란 산’이라고 한 만큼, 책은 860여쪽 분량이나 된다. 담헌이 중국의 세 선비와 필담으로 주고받은 ‘간정필담’을 위주로 ‘연기’, ‘을병연행록’의 3부작 북경 여행기와 여러 저작물을 기반으로 그의 삶을 재구성했다. 저자는 “15종에 이르는 ‘간정필담’이나 ‘연기’가 7~8년 전에야 공개됐다. 지난 5년 동안 이를 수집해 상호 비교하고 외국 자료도 모두 찾았다”고 했다. 저자는 특히 담헌이 여행 중 오랫동안 우정을 나눈 중국 항주 지방의 세 선비 엄성, 반정균, 육비에 주목했다. 일부 연구가는 이들을 ‘시골 선비’ 정도로 여기기도 하지만, 사실 이들은 1만여명이 응시하고 합격률은 1%도 채 되지 않는 절강성 향시에 급제한 인재들이었다. 육비는 특히 전체 1등을 차지해 최고 명예인 ‘해원’을 받기도 했다. 홍대용은 엄성과 반정균의 향시 합격 답안지 판각본을 접한 뒤 이들의 문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게 됐다는 내용도 수록했다. 책에는 담헌이 중국 강희재와 청조 통치체제는 물론 시장, 선박, 건물, 도로, 성곽, 각종 무기와 악기를 살펴 만든 기록물 등도 자세히 실었다. 다만, 당시에는 명과의 의리 탓에 청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긴 어려웠다. 저자는 담헌이 이른바 ‘존명배청’ 주의와 충돌을 피하려는 논리를 펼치면서 근대 문물을 수용했다고 주장한다. 담헌은 청 문물을 고대 성현들이 제작한 이상적인 문물제도인 중화문물이라 소개하고, 중국 고대 예법을 담은 ‘주례’에서 구현한 ‘대규모 세심법(규모가 크면서도 세밀함)’으로 정의하면서 조선의 학자들이 무리 없이 청 문물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저자는 “우리 한국 사회가 근대로 진입하는 ‘근대화의 새벽’에 담헌 홍대용이 있었다”면서 “일부 학자들이 일제 강점기에 근대가 시작됐다고 하지만, 담헌과 같은 18세기 선각자들이 역사의 진전을 예감하고 사고의 흔적을 남겨놨다”고 설명했다 . 이어 “그들의 흔적은 지금 우리 사회가 어디서 유래했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에 대한 하나의 좌표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이필근 경기도의원, 실학정신과 경기도의 정체성에 대해 5분 발언

    이필근 경기도의원, 실학정신과 경기도의 정체성에 대해 5분 발언

    경기도의회 기획재정위원회 이필근 도의원(더불어민주당·수원3)이 제348회 임시회 제1차 본회의에서 5분 발언을 통해 ‘실학정신과 경기도의 정체성’에 대해 언급했다. 이필근 의원은 “18세기부터 성호 이익에서 다산 정약용에 이르는 경세치용학파, 홍대용 박지원 등으로 대표되는 이용후생학파까지 조선후기 실학자들은 경기권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해 왔다”면서 “2019년 경기연구원에서 도민 3천명을 대상으로 경기도를 대표하는 역사인물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다산 정약용 선생이 27.2%로 1위, 정조대왕이 21%로 2위, 율곡이이 선생이 9%로 3위, 명성황후가 6.7%로 4위를 차지했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경기도의 ‘하천 계곡 불법점용 단속’을 언급하여 훼손된 자연환경을 개선하고 도민의 안전을 도모한 정책으로 치산치수의 목민관을 잘 실천한 사례임을 설명했다. 특히 코로나19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도민들에게 재난기본소득을 지급한 것은 어려운 이웃들을 구휼하는 애민과 봉공의 모습을 보여준 것 이라면서 다산의 실학정신은 현실과 맞닿아 있는 실천적 고민이라 할 수 있고 그 의미를 충분히 살펴 오늘의 대안으로 이루어야 하는 귀중한 사상적 유산이라고 강조했다. 이 의원은 경기도 인재개발원에서 공무원 교육과정에 다산의 목민관 교육을 필수로 이수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개편하고, 학생들에게는 실사구시의 합리적 사고력 향상을 중점을 두고 실학, 목민 사상을 교육해줄 것을 도와 도교육청에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이 의원은 “경기연구원에서도 실학연구를 체계적으로 진행할 수 있게 지원해야하고, 다산연구소와 협력해 다산 아카데미를 개최해 도민 소양교육과 포럼을 개최해 다산 정신을 도민들에게 널리 알려야한다”고 언급하며 5분 발언을 마무리했다. 이필근 의원은 지난 10월 8일 화성행궁 한옥기술전시관에서 ‘코로나19 이후, 다산에게 길을 묻다’라는 주제 2020년 경기도 하반기 정책토론 대축제를 개최한 바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중국에서 부패가 없어지지 않는 이유/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중국에서 부패가 없어지지 않는 이유/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화신(和珅·1750~1799)은 고금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탐관오리로 꼽히는 인물이다. 과거에 낙방하고 만주족 가문의 관직을 물려받은 그는 26살 때 포목창고 관리를 맡아 뒷날 천문학적 재산을 끌어모았다. 한때 청백리로 명성을 떨쳤던 화신은 대학사 이시요(李侍堯)의 부패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의 재산을 몰래 빼돌리며 부패라는 단맛을 맛보았다. 이때 적발되기는커녕 뒷처리를 잘했다는 상찬을 들은 것이 그를 ‘세계 최고의 탐관’이라는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건륭제(乾隆帝)가 큰아들 풍신은덕(豊紳殷德)을 부마로 삼으며 화신의 권세는 날개를 달았다. 조정 대권을 거머쥔 그는 재산을 모으는 데 혈안이 됐다. 뇌물을 무람없이 받고 황제 진상품을 가로챘다. 전국 상인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시정잡배를 동원해 윽박질러 그의 손 안에서 춤추게 만들었다. 대상인으로 자처한 화신은 수백곳에 이르는 전당포와 은행 격인 은호(銀號)를 소유하며 동인도회사, 대외무역 독점기관 광동십삼행(廣東十三行)과 거래를 터 사복을 채웠다. 덕분에 화신은 18세기 세계 최고의 부자에 등극했다. 건륭제는 사돈을 너무 총애한 나머지 그의 부패를 모른 체했고 조정 대신들은 두려워 고발하지 못했다. 건륭제가 붕어하자 그의 국정농단을 곁에서 지켜본 가경제(嘉慶帝)가 죄목 20개항을 선포하고 집을 압수수색했다. 압수한 백은(白銀)이 자그마치 8억냥에 이른다.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0% 이상 담당하던 부국 청나라의 연간 조세수입은 7000만~8000만냥에 지나지 않았다. 화신이 청나라 조세수입 10년치를 꿀꺽한 것이다. 화신이 탐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관료제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수나라 때부터 귀족제의 폐해를 없애려고 개인 능력을 보고 관리를 등용하는 과거제를 실시했다. 과거 급제는 돈과 권력, 명예를 한꺼번에 움켜쥐는 티켓이었다. 과거 급제자를 내려고 온 집안이 매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과거 급제자는 희생한 가족에게 보답해야 했다. 그러나 관리의 봉록은 형편없었다. 황제는 세금을 줄여 주는 게 선정(善政)을 베푸는 척도로 여겼다. 나라 곳간은 비었고 관리들은 녹봉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관리들은 각종 뒷돈을 받아 배를 불렸다. 벼슬을 얻으면 곧 재물이 생긴다는 ‘승관발재’(升官發財)라는 고사성어가 탄생한 배경이다. 당나라 때 측천무후(則天武后)도 과거 급제자에게 일일이 ‘승관발재’를 축하해 줬다는 얘기도 있다. 20세기 신해혁명으로 왕조시대는 무너졌지만 부패만큼은 좀비처럼 살아남았다. 국공내전기 군벌의 부패는 말할 것도 없고 월등한 군사력을 지녔던 국민당이 공산당에 패해 대만으로 쫓겨난 것도 관리들의 부패 때문이다. 너무 가난해 부패할 수 없었던 마오쩌둥(毛澤東) 시대를 지나고 개혁·개방 이후 중국 경제가 발전하면서 부패는 시나브로 고개를 들었다. 왕조시대엔 과거 급제가 관리의 조건이었다면 21세기에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명문대를 나와 공산당원이 되는 게 지름길이다. 당원이 돼 관리가 되기만 하면 ‘눈먼 돈’은 사방에 널려 있고…. 중국에서 지난 9월 한 달 부정부패 혐의로 1만 7000여명의 관리를 처벌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직무유기 등 관료주의 사례 6760여건이 적발돼 1만여명이 처벌받았고, 뇌물수수·공금유용 등 부패 사례 5160여건에 7200여명이 징계받았다. 2012년 최고 지도자에 오른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취임 일성으로 반부패운동을 높이 외쳤다. 당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을 지낸 저우융캉(周永康) 등 ‘호랑이’와 지방 말단 관리인 ‘파리’까지 8년 동안 무자비하게 때려잡았으나 부정부패는 끊이질 않는다. 중국의 부패가 없어지기를 기대하기보다 황하(黃河)의 황토물이 맑아지기를 바라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khkim@seoul.co.kr
  • [길섶에서] 11월 영하의 날씨/문소영 논설실장

    한국 중부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날씨가 작물생장을 받쳐 주지 않는다. 씨를 뿌려야 하는 4~5월에는 주로 봄가뭄이 기본이다. 이앙법이 18세기에야 널리 퍼진 것은 벼모종하는 시기에 비가 오지 않으면, 직파보다 못한 상황이 되는 탓이었다. 여름이 되면 또 어떤가. 하루 종일 비가 오는 장마, ‘우기’가 있는데, 올해처럼 비가 너무 자주 많이 와서 밭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져 작물이 자랄 수 없는 땅이 되기도 한다. 봄여름을 무사히 넘겨 다 극복했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는 것이, 가을은 짧고 겨울은 빨리 온다는 것이다. 노지 재배하는 채소들은 서리가 내리면 비실비실하다가 영하로 떨어지면, 그냥 죽는데,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일이 있다. 그러면 고추는 물론 토마토, 가지, 호박들은 이제 끝장이 난다. 배추는 영하 3도까지 견디지만, 김장용 무는 상한다. 날씨 예보를 보니 3일에 영하 2도이다. 11월 중순인 17일쯤에 오는 한파가 보름 가까이 빨리 온다는 것이다. 2018년에는 10월 말에 영하 0도였던 적이 있었으니 새삼스럽지 않은 일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영하 0도와 영하 2도는 파괴적인 수준이 다르다. 오늘까지 무를 거둬야 하는데, 걱정이 태산이다. symun@seoul.co.kr
  • “참 훌륭한 일” 文, 동해 ‘한국 표기’ 옛지도 기증 중학생에 SNS 답장

    “참 훌륭한 일” 文, 동해 ‘한국 표기’ 옛지도 기증 중학생에 SNS 답장

    文 “日 역사왜곡 확인 귀중한 자료”“수집 열정과 안목, 아름다운 기증”文, 일본 옛 서적 ‘풍공유보도략’ 기증 받아과거 靑에 해당 학생 초청한 사례도 공개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한 중학생이 청와대로 18세기 세계지도 등을 기증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는 일본 측 주장이 역사 왜곡임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면서 “어린 학생으로 참 훌륭한 일”이라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감사를 표했다. 문 대통령은 중학생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국립진주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면서 해당 학생이 여러 차례 관련 자료들을 기증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조군, 文에 보낸 편지에 “일본이 다시는억지 부리지 못하는 자료됐으면” 대전 글꽃중학교 3학년 조민기 학생은 지난 6월 18세기 영국에서 제작된 세계지도와 조선 선조 시기 한일 간 교류가 담긴 일본의 옛 서적인 ‘풍공유보도략’ 하권 등 두 점의 문화재를 청와대에 기증했다. 특히 조군이 제공한 지도에는 동해가 ‘Sea of Korea’로 표기돼 있다. 조군 역시 지도를 기증하며 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버지께서 오래된 지도를 구하셨는데 1700년대에 영국에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면서 “일본이 다시는 억지를 부리지 못하게 하는 자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문 대통령은 이날 “너무 늦기 전에 감사를 표하고자 선행을 알린다”며 답장 형태의 글을 SNS에 게시했다.文 “조군 2월에도 안중근 기록 기증”“靑에 초청해 감사의 마음 나눴다” “역사에 대한 자긍심, 열정 없이살림 쪼개어 수집 몰두하기 어렵다” 문 대통령은 “청와대는 두 점의 문화재가 임진왜란 연구에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해 국립진주박물관을 기증처로 결정했다”면서 “이 절차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민기 학생은 추가로 ‘풍공유보도략’ 상권, 조선 후기와 청나라 서적 일곱 권을 함께 기증해줬다”고 설명했다. 이어 “어린 학생으로 참 훌륭한 일인데, 조군은 이미 지난해 2월에도 ‘안중근 사건 공판 속기록’ 넉 점을 기증했다. 당시 제가 청와대에 초청해 감사의 마음을 나눈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역사에 대한 자긍심, 옛 것에 대한 열정 없이 살림을 쪼개가며 수집에 몰두하기는 어렵다. 발굴의 기쁨도 안목이 있어야 가능하다”면서 “수집의 열정과 안목뿐 아니라 기증의 보람까지 아들에게 나눠준 아버님도 매우 훌륭한 분”이라고 감사를 표했다.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금요칼럼] 정약용, 세종의 마음을 읽다/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금요칼럼] 정약용, 세종의 마음을 읽다/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이유는 다르겠으나 누구든지 세종을 호평한다. 다산 정약용 같은 석학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지 궁금하다. 그의 글 ‘요동론’이 내 시선을 잡아당긴다(‘다산시문집’, 제12권). 정약용은 이 글에서 세종이 북쪽에 천리나 되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한 사실에 감탄하였다. 그런데 세종도 고구려의 영토를 모두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요동을 회복하지 못한 사실을 놓고 예전부터 식자들은 설왕설래하였다. 정약용은 그 점을 언급하며, 요동을 되찾지 못한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주장했다. 그곳은 한족과 북방 유목민족이 모두 중시하는 땅이라 도리어 화근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정약용은 강조했다. 상무 정신이 부족한 조선 사람인지라, 요동을 오래 점령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에 나는 비위가 좀 상했다. 도대체 정약용은 왜, 그렇게 생각한 것일까.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먼저 세종이 요동을 차지했더라면 여러 나라와 복잡한 외교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사신 접대만 해도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고 했다. 또 국토방어에 많은 인력이 요구되어 국력도 고갈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게다가 주변 국가와 사이가 조금만 틀어져도 외적이 사방에서 쳐들어올 테니, 여간 큰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듣고 보면 냉철한 분석이요,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 보면 세종 때 명나라는 이미 북경에 도읍한 다음이었다. 요동은 그들의 앞마당이었던 셈이다. 굳이 명나라와 힘겨운 전쟁을 벌이면서까지 요동을 차지할 마음이 세종에게 있었을 리 없다. 그때 유목민족이 요동을 차지하였더라면 사정은 어땠을까. 정약용이 차분하게 분석하듯, 요동은 척박한 지역이라 경제적 이득이 별로 없는 땅이었다. 현명한 세종이 불모지에 가까운 요동을 얻으려고 국제적인 분란을 일으킬 리가 있었을까. 훗날 우리가 중국을 제압할 만큼 강성해지면 요동부터 찾으라는 정약용의 당부가 가슴에 와닿는다. 세종이 세상을 뜨자 조선의 국력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왕이 힘써 경영한 사군, 즉 무창, 여연, 우예, 자성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폐지되었다. 후세는 이를 둘러싸고 찬반으로 엇갈렸다. 그 사정을 잘 아는 정약용은 ‘폐사군론’을 지어 세종의 본뜻을 되새겼다(‘다산시문집’, 제12권). 병법에 밝았던 학자라서 그랬을 터인데 정약용은 비유를 꺼냈다. 몸통을 공격당한 뱀은 머리와 꼬리 힘으로 반격하는 법이라 했다. 갑산은 뱀의 머리, 위원은 꼬리에 해당하고 사군은 몸통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미 사군을 폐지했으므로 몸통이 사라진 뱀 꼴이었다. 이로써 조선의 국방에 큰 결함이 생겼다면서, 정약용은 한탄하였다. 외적이 사군 옛땅을 점령하고는 남쪽으로 쳐들어오면 어찌 될 것인가. 대동강 이북을 한꺼번에 잃을 염려가 있다고 정약용은 걱정했다. 그는 세종의 눈으로 국가방어체제를 재점검하였고, 그래서 사군의 복구가 절실하다고 보았다. 18세기 후반에는 옛 사군을 만주족이 점령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금과 은, 구리와 쇠를 캐어 이익을 얻었고, 산삼과 초피 가죽까지 독점해 부를 쌓았다. 그들은 화포를 비롯한 병기도 확보해 철통같은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우리나라 관리들은 그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 나라의 기강이 이렇게까지 무너졌으니 어찌 미래를 기약할 수 있었을까. 과거에 세종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방 영토의 개척을 고집한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토방어의 보루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정약용은 그러한 세종의 전략을 높이 평가하고 사군을 회복하자고 말하였으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 매사에 우리는 뚜렷한 이유 없이 누군가를 칭송하거나 비판할 때가 너무 많은 것 같다.
  • [여기는 남미] “코로나 안걸리게…” 해골 ‘죽음의 신’에 기도하는 멕시코인들

    [여기는 남미] “코로나 안걸리게…” 해골 ‘죽음의 신’에 기도하는 멕시코인들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에서 멀지 않은 지방도시 투티틀란. 이곳에는 거대한 입상이 우뚝 서 있다. 양팔을 양쪽으로 길게 뻗고 있는 모습이 마치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에수상을 연상케 하지만 입상의 얼굴을 보면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입상의 얼굴은 흉측한 해골이다. 양쪽으로 뻗은 손도 살아 있는 사람의 손이 아니라 바짝 마른 뼈의 손이다. 입상 주변에선 수많은 사람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번쩍 든 채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다.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달라고 비는 사람들이다.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멕시코주(州)의 투티틀란이 새로운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고 현지 언론이 최근 보도했다. 투티틀란에 설치돼 있는 높이 22m 입상의 주인공은 해골의 얼굴을 가진 이른바 '성스러운 죽음', 즉 '죽음의 신'이다. 이름부터 등골이 오싹한 신이지만 언제부턴가 입상 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원래 죽음의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날은 매달 1일이지만 요즘은 날짜와 요일을 가리지 않고 '죽음의 신'에게 기도를 올리려는 사람들이 밀려든다. 코로나19 봉쇄로 3개월 만에 '죽음의 신'을 만나러 투티틀란을 찾았다는 미용사 수리 살라스(34)는 "팬데믹으로 힘들지만 지금까지 보호해준 데 감사를 드리려 찾아왔다"면서 "'죽음의 신'이 항상 우리와 함께한다는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관리인은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된 이후 한번도 '죽음의 신' 제단을 폐쇄하지 않았다"면서 "갈수록 '죽음의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브라질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성스러운 죽음', '죽음의 '신'에 대한 추앙은 18세기 멕시코 중부에서 시작됐다. 원주민들이 해골을 모셔놓고 기도를 드리던 데서 출발한 일종의 무속 신앙이다. 200년 넘게 추종자 사이에서 은밀하게 전해져 내려온 '죽음의 신' 신앙은 1950년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원주민들이 멕시코시티로 대거 이주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백인사회까지 무속신앙이 퍼지면서 지금은 멕시코의 미국과 중남미 등 아메리카대륙뿐 아니라 유럽까지 신자들이 퍼져 있다. 최근 '죽음의 신' 입상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건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증폭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라는 한 남자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경제에서 치안, 건강에 이르기까지 '죽음이 신'이 돌보지 않는 분야는 없다"면서 "'죽음의 신'은 날카로운 칼 위에 서 있을 때 나를 붙잡아주는 존재와도 같다"고 말했다.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 12살 여동생 성폭행 해 임신시킨 친오빠 4명, 감옥행 면해

    12살 여동생 성폭행 해 임신시킨 친오빠 4명, 감옥행 면해

    미국에서 네 명의 친오빠가 12살 여동생과 강제로 성관계를 갖고 임신을 하게 했지만 감옥행을 면했다. 25일(현지시간) 미국 지방지 웹스터 카운티 시티즌에 따르면, 미국 미주리주 웹스터 카운티에 사는 아미시 신자인 아론 슈왈츠(22)와 페티 슈왈츠(18) 등 4형제는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여동생을 수차례 성폭행했다. 기독교 종파 가운데 하나인 아미시는 현대 문명에서 벗어나 엄격한 규율에 따라 18세기 말처럼 생활하고 있다. 검은 모자를 쓰거나 단추가 없는 검은 양복을 입고 마차를 타는 식이다. 올해 13살인 여동생은 지난 6월 병원에서 임신 사실을 확인한 데 이어 2주 전 아기를 출산했다. 친오빠들은 병원 의사에 의해 고발돼 재판을 받아왔다. 검사는 친오빠 중 미성년자인 2명을 제외하고 법적으로 성인인 아론과 페티에게 강간과 아동 추행 등의 혐의를 적용해 15년 형을 구형했다. 그러나 최근 이들 2명의 변호사와 감형 협상을 통해 징역형의 집행을 유예하고 24일 열린 순회재판소에서 구형을 변경했다. 검사는 이들 형제에게 30일 안에 지역사회 주민들에 대한 사과 편지와 현 거주지에서 100시간 사회봉사, 지역 경찰의 처우 개선을 위한 기금인 LERF에 250달러(29만원) 기부, 성범죄자 치료 프로그램(MOSOP) 이수 등을 주문했다. 검사는 이에 대해 이들이 고립된 생활을 하는 아미시 신도인 데다 실제 나이에 비해 정신적으로 매우 덜 성숙했고 철이 들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형제들이 평생 성범죄자 꼬리표를 달고 살게 되는 점도 거론했다. 그러나 검사는 형제들이 명령을 지키지 않을 경우 바로 감방으로 보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창고에 버려둔 15㎝ 주전자, 알고보니 6억짜리 中 황제 도자기

    창고에 버려둔 15㎝ 주전자, 알고보니 6억짜리 中 황제 도자기

    성인 손바닥만한 작은 도자기 주전자가 경매에서 수 억 원에 낙찰됐다. 영국 BBC 등 해외 언론의 24일 보도에 따르면 이 술주전자는 18세기 청나라 황제인 건륭황제 시대 당시 만들어진 것으로, 길이 15㎝ 정도의 작은 크기다. 찻주전자와 유사한 외형이지만, 전문가들은 도자기인 이 주전자가 술을 담아 마실 때 사용됐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주전자는 잉글랜드 중부 더비셔 지방의 한 가정집 창고에 오랫동안 방치돼 있었는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창고를 정리하던 중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매를 담당한 업체는 올 초 전문가들의 의견을 토대로 이 주전자에 대한 가치를 추정했고, 그 결과 이것이 건륭황제가 직접 사용했던 술주전자 총 4개 중 하나라고 추정했다.당초 이 주전자의 경매 예상가는 2만~4만 파운드였다. 하지만 경매를 담당한 경매업체는 해당 주전자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것을 확인하고 예상 경매가를 15만 파운드로 상향 수정했다. 최근 열린 경매에는 중국과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8명의 전화 입찰자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결국 영국 런던에 거주하는 구매자가 예상 가격의 2배가 넘는 39만 파운드, 한화로 약 5억 8200만원에 낙찰받았다.주전자의 원래 주인이었던 더비셔주의 51세 남성은 “이 주전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시아로 건너갔던 할아버지가 중국에서 영국으로 가져온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이후 부모님이 이를 보관하시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다락방으로 옮겨졌다. 이후 상자에 넣어진 채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봉쇄령이 내려진 뒤 마침 창고의 상자를 열어 볼 시간이 생겼고, 이 과정에서 주전자를 발견했다”면서 “이 주전자의 가치를 알기 전에는 자선단체에 기부할 생각이었다”고 덧붙였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이런 런던패션위크는 처음…농장에서 펼쳐진 세계적인 패션쇼

    이런 런던패션위크는 처음…농장에서 펼쳐진 세계적인 패션쇼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이어지는 가운데, 세계4대 패션쇼 중 하나인 런던 패션 위크가 기발한 방법을 동원해 패션쇼를 선보였다. 오는 22일까지 온오프라인에서 동시에 펼쳐지는 2021 S/S 런던 패션위크 중 하나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런던 북서쪽 아머샴에 있는 한 농장에서 열렸다. 극소수의 관객과 관계자만 출입이 허가된 이 농장의 패션쇼는 이번 시즌에 열린 런던 패션위크 패션쇼 중 유일하게 실제 청중이 오프라인에서 관람할 수 있는 쇼로 알려졌다. 쇼에 선 모델들은 청중과 멀리 떨어진 목장의 풀밭을 런웨이 삼아 워킹을 시작했다. 화려한 조명과 특수효과가 가득한 일반적인 패션쇼와 달리, 이번 쇼의 유일한 특수효과는 풀밭 한가운데서 터지는 폭죽이 전부였다.모델들은 단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색다른 패션쇼에 서서 각자의 맡은 바 임무에 충실했고, 관객들은 모델들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곧 다가올 2021년 S/S 시즌의 트렌드를 파악하는 등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이번 쇼를 맡은 브랜드는 파리아 파르자네는 이란 출신의 20대 젊은 디자이너로, 최근 영국 패션업계에서 빠르게 인지도를 확장하고 있는 디자이너로 알려졌다. 이란 출신인 만큼 이란의 전통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탁월한 능력을 뽐내 왔으며, 쇼가 끝나면 18세기 중동에서 평화와 사랑의 상징이었던 노란 장미를 나눠주는 퍼포먼스로도 알려져 있다. 한편 매년 2월과 9월 런던에서 열리는 런던 패션 위크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대부분 온라인으로 대체됐다. 영국을 대표하는 브랜드인 버버리는 디지털 라이브 패션쇼로 런던 패션위크의 오프닝 무대를 열었다. 영국 정부의 방역지침에 따라 스페인과 프랑스, 미국 등 코로나19 확산세가 심각한 국가에서 런던을 방문하는 참가자들은 행사 전 14일간 자가격리를 한 후에야 쇼에 설 수 있었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차례·제사는 그 시대의 사인이다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차례·제사는 그 시대의 사인이다

    민족 최대 명절 추석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추석의 들뜬 분위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우리의 추석 명절 풍속까지 바꾸고 있다. 명절 가족의 만남도 비대면으로, 성묘는 물론 차례도 생략하거나 온라인으로 하려 한다. 심지어 조선시대에는 재해가 있는 경우 제사는 물론 차례를 지내지 않았다는 역사적 기록까지 들춰내 간략한 명절 보내기에 힘을 보태고 있다.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상황이라 매우 혼란스럽다. 그럼 이번 추석 차례는 지내지 않아도 괜찮을까. 제사란 무엇일까. ‘제’(祭) 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나 양, 돼지 등 희생으로 쓴 고기를 손으로 바치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제물을 하늘과 땅과 조상에게 바쳐 나라와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고 복을 구하는 의식이다. 제사의 근본은 자신의 존재 근원을 찾고,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해 혈연을 확인하는 자리다. 오늘날 유교식 제사는 언제부터 지냈을까. 고려 말 성리학의 수용과 더불어 조선 초 중국의 ‘주자가례’가 수용돼 점차 보급됐다. 누구나 다 제사를 지낸 것이 아니다. 신분과 지위에 따라 봉사 대수를 달리했다. 고려 말에는 4품 이상은 3대를, 6품 이하는 2대 조부모까지, 7품 이하와 서민들은 부모만을 지내도록 했다. 조선시대로 넘어와서도 품계만 조금 조정돼 6품 이상은 3대를, 7품 이하는 2대까지, 일반 백성들은 부모만 제사토록 하여 이를 ‘경국대전’에 명문화했다. 하지만 제사가 사회 전반에 정착된 것은 성리학이 심화하기 시작한 16세기 중엽부터다. 4대 봉사를 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말기다. 양반 숫자가 늘어나면서 양반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백성도 4대조까지 제사를 지냈다. 오히려 4대 봉사를 하지 않으면 상놈의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일제는 1934년 간소화라는 명분으로 ‘의례준칙‘ 만들어 제사는 부모와 조부모 2대까지만 지내도록 강제했다. 1969년에도 ‘가정의례 준칙’을 제정 공포해 2대까지만 지내도록 강권했지만 여전히 4대 봉사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예전처럼 4대 봉사를 하는 집안은 종가 외에는 거의 없다. 그래도 어느 누구 하나 상놈이라 하지 않는다. 명절 차례도 조선시대에는 1년에 설·한식·단오·추석·동지 등 다섯 번 지냈지만, 지금은 설과 추석 차례 두 번으로 줄어들었다. 일반적으로 제사는 장남이 지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오늘날처럼 큰아들이 제사를 전담하지 않았다. 아들딸 구별 없이 재산도 똑같이 나누고 자녀가 돌아가면서 제사를 맡아 지내는 ‘윤회봉사’를 했다. 심지어는 ‘외손봉사’도 널리 행해졌다. 이런 윤회봉사는 18세기 성리학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재산상속도 균등상속에서 차등상속으로 바뀌면서 윤회봉사도 장남 단독봉사로 변화됐다. 수천 년 이어온 제사는 현대사회에 들어와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전화 한 통화면 호텔이건 콘도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제물을 차려 주어 제사를 지낼 수 있다. 아예 제사 대신 추모 모임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우리 집안도 1년에 여섯 번 지내던 기제사를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아버지 기일에 맞춰 ‘모둠제사’ 형식으로 한 번만 지낸다. 명절 차례도 형제끼리 돌아가며 지내다가 형제분들이 돌아가시고 종교적인 이유로 못 지낸다고 해서 막내인 내가 기제와 차례를 모두 지낸다. 하지만 이 제사마저도 자식에게 부담 지우기 싫어 내가 죽은 후엔 지내지 말도록 했다. 왜나하면 제사도 그 시대 행해 온 하나의 신호인 사인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면 풍속도 변하듯 민족의 신앙처럼 이어온 제사도 시대에 맞게 바뀌고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리다.
  • [금요칼럼] 개혁의 짐/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금요칼럼] 개혁의 짐/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개혁. 듣기에 좋은 말이다. 실행할 때는 숱한 험산을 넘어야 한다. 도중에 계곡으로 떨어지거나 낙석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 산사태가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알기 어렵듯이, 어떤 세력이 개혁의 발목을 잡아 부러트릴지도 예단하기 어렵다. 이처럼 개혁은 무거운 짐을 지고 멀고도 험한 길을 돌고 돌아 뚜벅뚜벅 걷는 길이다. 어쩌면 혁명이 더 쉬울 수도 있다. 학술용어로서 개혁의 고전적 의미는 지배층의 태생적 기득권을 제도의 개정을 통해 축소하는 것이다. 혁명보다 고차원의 정당성과 협상기술이 필요하다. 그래서 힘든 여정이다. 조선시대 서자는 과거(문과) 응시자격이 없었다. 법으로 엄히 규정한 일부일처제를 위반한 산물이기에, 사실상 유일한 출세 수단인 과거 응시 자체를 차단한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흘러 서자 인구가 증가하면서 불만도 들끓었다. 16세기 명종 때 일부 조정 대신은 중국에서는 입현무방(立賢無方)이라 하여 인재를 등용할 때 출신을 따지지 않는데 왜 조선만 그런 천리(天理)을 따르지 않느냐며 개혁을 말하기 시작했다. 조정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이때 퇴계 이황은 서출에서 한두 인재를 얻기 위해 나라의 근본을 허물 수는 없다며, 서얼 허통을 위한 개혁 입법에 강력히 반대했다. 우리가 흔히 좋게만 아는 이황에게 이런 면이 있었다. 조선시대 노비는 전체 인구에서 약 40%를 차지하였다. 현재 대한민국 5000만 인구라면 세 명 가운데 한 명꼴로 조상이 노비에 닿는다는 의미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 정조 때부터 사회경제적 변화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노비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여러 여건상 노비를 유지하는 데 이득이 없음을 깨닫고 1801년 국가에서는 국가기관이 소유한 관노비를 일거에 해방하였다. 동아시아나 세계사 맥락에서 보면 너무 때늦은 조치였지만, 그래도 한국 역사에서는 의미 있는 개혁이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접한 다산 정약용은 크게 탄식하며 나라의 앞날을 심히 우려하는 글을 남겼다. 그 요체는 이렇다. 나라의 근본인 상하 위계질서를 국가가 먼저 스스로 허물었으니, 이제 나라의 기강은 무너졌다. 윗사람(上)은 약해지고 아랫것들(下)은 강해져서 상하가 문란해졌다. 이로써 상명하복이 깨졌으니, 변란이라도 발생한다면 흙더미가 무너지듯이 나라가 졸지에 와해할 것이다. 이번 조치를 철회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는 어지러워져 끝내 망할 것이다. 노비 인구가 급속히 감소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사회경제 상태임에도, 정약용은 이미 한물간 명분(名分)과 분수(分數)를 절대 가치로 전제하고는 노비 해방 개혁에 울분을 토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정약용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다. 이처럼 개혁 성향과 보수 성향은 한 개인의 생각 속에 화학적으로 뒤섞여 있다. 어떻게 보면 꽤 진보처럼 보일지라도 다른 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의외로 보수적인 사람이 우리 주변에 매우 많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진보와 보수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함께 가는 것이지, 상종할 수 없는 적대 진영이 아니다. 금슬 좋은 페미니스트 부부가 집회를 마치고 귀가하여 남편이 “여보. 밥 먹자”라고 말하고 소파에 몸을 던지면, 아내가 “그래. 피곤하니 오늘은 대충 먹자”라면서도 저녁 밥상을 차려내는 일이 예전에는 흔했다. 민주화에 투신한 386운동권 세대 안에 강고한 비민주적 가부장적 구조도 마찬가지다. 이런 게 바로 우리 안에서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는 보수성이자, 익숙함이다. 촛불 한 번 들었다고 해서 사회가 바로 바뀌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발 세력이 본연의 모습을 수면 위로 드러낸다. 전공의들이 갑자기 꽹과리를 쳐댈 줄 누가 미리 알았을까? 도도한 개혁의 물결이 분명할수록 우리 안의 퇴계와 다산이 들고일어나기 마련이다. 개혁의 짐은 무겁고 길은 멀다. 프랑스혁명도 100년 넘게 걸리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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