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17세
    2026-06-21
    검색기록 지우기
  • 지미
    2026-06-21
    검색기록 지우기
  • 무례
    2026-06-21
    검색기록 지우기
  • 2026-06-21
    검색기록 지우기
  • 여당
    2026-06-2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6,376
  • 일의 「영유권 망발」을 반박한다/신용하서울대교수·사회학

    ◎“서기 512년부터 독도는 우리땅”/일의 주장은 제국주의 논리에 불과 독도는 울릉도와 함께 옛 우산국의 땅이었다.서기 512년에 우산국이 신라에 귀속됨으로써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로 확정된 것이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년조에 실려있다.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 군정편에도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땅이라고 정의돼 있다. 태종 16∼17년(서기 1416∼17년)사이에 왜구의 침략과 노략질 때문에 태종은 울릉도에 공도정책을 실시했다.공도정책도 당시에는 영토관리 정책의 하나로 태종은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 영토였기 때문에 이같은 정책을 편 것이다. 성종 12년(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중종 26년(1531년)에 편찬된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도 울릉도와 우산도를 조선왕조의 영토로 규정하고 지리적 설명을 싣고 있다. 일본측의 조사에 의하면 일본에서 최초로 울릉도와 함께 독도가 문헌에 기록된 것은 1667년에 재등풍선이 편찬한 은주시청합기가 처음이다.여기에도 울릉도와 독도(송도와 죽도로 표기)가 일본영토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17세기 말에 대마도주는 공도정책을 악용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하는 활동을 시작했다.울산어부 안용복등이 일본에 건너가 구속되면서까지 투쟁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임을 명백히 한 것도 이때였다. 후에 일본의 덕천막부 관백(왕이 아닌 통치자)이 1696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임을 재확인 함으로써 대마도주가 일으킨 영유권 분쟁은 해결되었다. 그 결과 덕천막부 시대에 일본·조선·중국의 구분을 그린 대표적 지도인 일본학자 임자평의 「삼국접양지도」(1785년 간행)와 18세기 일본지도 「총회도」에는 울릉도와 독도(우산도) 두 섬이 조선 영토임이 색깔까지 칠해서 명백히 표시됐을 뿐 아니라 독도(우산도)의 위에는 일본말로 「조선의 것으로」라는 문자까지 적혀있다. 근대국가가 성립된 뒤 일본 내무성은 1876년 각 현에 영토의 지도를 그려 올리고 지적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그때 일본 시마네(도근)현으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해서 지도를 그리고 지적을 조사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일본내무성은 6개월간 조사한 뒤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영토이며 일본과는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이에 따라 일본 해군성이 작성한 「조선동해안도」와 육군성 참모국이 만든 「조선전도」등 당시 모든 일본의 지도에 독도가 한국영토로 표기돼 있다. 그뒤 개항 후 조선왕조는 공도정책을 폐지하고 울릉도에 대한 주민이주 정책을 실시하였다.1900년에는 대한제국정부 칙령 제41호로 울릉도를 군으로 개편한 뒤 군수를 임명하고 울릉군의 관할구역을 울릉도,죽도,석도라고 규정하였다.독도를 의역하여 「석도」라고 표기한 것은 독도가 바위만의 돌섬이라는 뜻이다. 1904년 2월8일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울릉도와 독도에 러시아군함을 감시하는 해군망루를 설치하려고 했다.이 무렵 중정양삼랑이라는 일본 어업가가 한국정부에 한국영토인 독도에서 물개를 잡을 것을 허용해 달라는 청원서를 내는데,일본정부가 중간에서 대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일본정부는 이 기회에 독도를 일본영토로 침탈하고 독도에 해군망루를 설치하기위해 중정에게 독도가 무주지이므로 일본영토에 편입시켜 물개잡이 독점권을 허가해 달라고 신청하도록 청원내용을 바꾸게 했다. 그리고 일본정부는 1905년 1월28일 내각회의에서 슬그머니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시켰다. 한국정부와 한국민들은 이러한 내용을 1년 뒤에야 알았고 강제로 체결된 「을사5조약」 때문에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제통감부가 서울에 설치됐던 때였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는 더 이상 항거할 능력이 없었다. 그 뒤 일제가 패망하고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SCAPIN(연합국 최고 상부지령)677호로 독도가 일본영토로부터 분리되었음을 선언하고 이를 한국에 반환했다. 이같은 역사적 진실에 비춰 독도는 서기 512년부터 한국의 불가분의 고유영토이며 한국정부가 일관되게 주권을 행사해온 것이 명백하다. 국제법적으로 볼때 무주지 선점에 의한 일본영토 편입이라는 주장도 1905년 1월 당시 무주지가 아니라 엄연히 대한제국의 영토였기 때문에 어불성설이다. 독도는 국제법을 위반한 일본이 대한제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민 모르게 슬그머니도둑질했다가 들켜서 뒤늦게 한국에 반환한 것일 뿐이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에 있어서나 국제법상으로 한국의 영토임이 명명백백한 독도에 대해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제국주의 논리의 연장에 불과한 것으로 우리 정부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국민들도 일본의 독도침탈 의도에 경각심을 더욱 높여야 한다.
  • 전북 부안 동문안 돌장승(한국인의 얼굴:62)

    ◎갓 쓰고 마을가는 이웃집 할아버지상/수장승이 암장승보다 키 작고 몸도 여려 한국의 인상이 각인된 풍물의 하나인 장승에는 가식이나 허식이 없는 어줍은 솜씨가 깃들였다.장승에서 자연스럽고도 소박한 민예의 정감이 우러나는 까닭도 여기있다.그런데 나무장승은 비바람에 오래 견디어 내지 못하는 수명의 한계성을 지녔다.이를 보완하기 위해 출현한 것이 돌장승이다. 돌장승은 조선후기인 17세기말부터 18세기전반에 걸치는 시기에 나타났다.돌장승에 새긴 기명이나 관련자료에 따르면 가장 이른 시기의 돌장승은 전북 부안군 부안읍내 두 군데에 자리한 돌장승들이다.이 가운데 조선시대의 부안읍성동문 청원루에서 가까운 부안읍 동중리3구의 돌장승 한쌍 동문안 장승이 있다.장승 유형을 굳이 분류하면 읍장승이라 할 수 있다.옛 고을에 읍성을 쌓고 그 앞에다 세운 장승이기 때문이다. 이들 암수 돌장승 한쌍은 동문안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다.모두 화강석으로 투박하게 깎아 기대석 위에 세웠다.여기 사람들은 수장승은 당산하나씨,암장승은 당산할머니라고 불렀다.당산하나씨 수장승은 당산할머니 암장승보다 50여㎝정도 작은 1백80㎝의 키를 했다.몸둘레도 수장승이 더 가늘다.수장승과 암장승에 상원주장군과 하원당장군이라고 각각 오목새김한 글씨가 희미하게 보였다. 수장승은 벙거지를 썼다.몸전체에 굴곡이 진 쪽도 수장승이다.암장승의 네모꼴 기둥형 몸통에 비해 동적 유연성이 수장승에서 더 엿보였다.얼굴은 달걀형으로 갸름한데 이마에는 백호를 새겼다.양쪽 귀는 본래 실했던듯 싶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눈가장자리를 깊게 오목새김으로 파놓아 눈망울이 주먹만하게 보이고 이빨을 드러냈다.그리고 큼직한 콧방울께서 시작한 돋을새김 볼록선을 귓가를 향해 돌렸다.얼핏 수염인가 했으나 사실은 볼을 두드러지게 강조한 표현기법임이 이내 드러났다. 커다란 눈망울 위에 바짝 붙은 눈썹이 무척 가늘다.그래서 수장승 당산하나씨가 무섭잖게 보이는데 눈썹이 한몫을 거들었다.수장승에 비록 신성을 가미했겠지만 그저 갓쓰고 마을가는 부안사람 할아버지 표정에 지나지 않았다.그러나 현존하는 돌장승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그룹에 속한다.그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간접적 징표가 있다. 이들 동중리 동문안 돌장승과 같은 시기에 세웠을 서외리 서문안 장승과 솟대당산 석간석의 새김글씨가 그것이다.이 석간석에는 청나라 연호로 강희 28년에 세웠다고 기록했다. 1689년의 일이다.그러니까 서문안 장승을 세우면서 같은 때 동문안 장승도 읍장승으로 함께 조성했을 가능성이 크다.동문안 장승을 일러 문지기장군이라 하는 것은 부안읍성 축조 당시 이미 지킴기능을 부여한 흔적일 것이다. 이들 돌장승 한쌍은 나이가 꽤 들어서인지 성에는 관대한 모양이다.정월 보름께 당산제 제의놀이로 그 앞에서 남녀가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할 때면 서로 심한 음담이 흉허물없이 오간다는 것이다.
  • 볼쇼이 오페라 「하반쉬나」 10년만에 무대에

    ◎피터대제 왕위계승 둘러싼 궁중음모 고발/세계적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지휘·감독 17세기 후반.러시아 피터대제의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왕정내의 음모를 고발한 무소르크스키의 오페라 「하반쉬나(왕위)」가 볼쇼이극장에서 10년만에 다시 무대에 올려져 세계음악인의 관심을 끌었다.음악적 관점에서 보면 「하반쉬나」는 당시의 사회적 문제를 다룬 「문제오페라」로 어지간한 감독자가 소화해내기 힘든 수준높은 오페라라는 것이 음악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 오페라는 최근 모스크바에서 활동을 재개한 세계적인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인 로스트로포비치가 지휘·음악감독을 맡은 데다 러시아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관현악곡으로 편곡.또 페테르부르크의 세계적인 마린스키극장 소속의 일류성악가들이 모두 출연,아름다운 목소리로 관중들을 사로잡았다. 지난 50년 초연된 「하반쉬나」는 지금까지 무소르크스키의 피아노오페라곡을 림스키­코르사코프가 관현악 편곡한 것만을 무대에 올려왔는데 쇼스타코비치의 관현악곡은 로스트로포비치가 처음으로 발견해 내 최근 연말무대에 다시 올려진 것이다. 「하반쉬나」는 차르 왕위계승을 놓고 피터 대제가 10살 때인 1682년부터 7년간 이복형인 이반과 벌이는 왕정내의 각종 음모와 배신,신하들의 암투 등 권력투쟁을 다룬 것이다.이 오페라는 그동안 극적인 구성에 집착해 있고 역사적 사실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아오긴 했다.하지만 가사와 음계의 조화,옛 러시아와 새 러시아의 적절한 대비,등장인물 개개인의 생생하고 심오한 인물 특성 등은 이 오페라의 단점을 충분히 보완하고도 남는다는 것이 지휘자들의 얘기다. 일부 음악평론가들은 쇼스타코비치의 편곡은 훌륭하다고 평가를 내리면서도 음악을 총감독한 로스트로포비치에 대해서는 그리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다. 지휘자로서는 지나치게 고집이 세고 음악적인 영감 표현이 아직 성숙된 것같지는 않다는 것이다.반면 그는 오페라 출연자들의 훌륭한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솜씨있게 끌어내 관중과 무대 사이를 유연하게 연결,공연은 결국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무대감독인 보리스포크로프스키는 『하반쉬나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출연배우들을 단지 가사와 음악에만 몰두하도록 어떤 간섭도 하지 않았다』면서 『무소르크스키의 영감을 최대한으로 살리기 위해 배우들에게 복잡한 스토리를 명확하게 이해시키기도 했다』고 말했다.하반쉬나는 1월초 볼쇼이극장의 자체 캐스팅을 통해 본격적으로 일반에 선보일 예정이다.
  • 6·25때 생이별 부부 45년만에 재결합(조약돌)

    ○…6·25 때 헤어져 따로따로 월남했던 부부가 서로 다른 가정을 꾸며 살아오다 45년만에 재결합했다. 지난 연말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청룡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김용건씨(67)와 오용녀씨(68)는 16세와 17세 때인 지난 45년 결혼했으나 6·25를 만나 서로 엇갈려 월남,각각 재혼해 살아왔다.그러다 5년 전 생사를 모르던 처남이 TV에 출연한 것을 김씨가 우연히 보고 수소문 끝에 오씨가 처남과 함께 서울에서 사는 것을 확인. 이미 김씨는 6형제를,오씨는 2남1녀를 두고 있어 만나지 않았으나 두 사람 다 재혼한 배우자와 3∼4년 전 각각 사별하자 양측 자녀들이 적극 권유해 45년만인 작년 8월 극적으로 재회한후 신혼살림(?)을 시작. 주위에서는 『두 사람의 인연은 하늘이 점지해 준 것 같다』고 축복.
  • 여성의 모성은 본능일까/여성 본능 해부한 책 2권 출간

    ◎미 심리학자 서러 「어머니의 신화」·시인 리치의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어머니의 신화­선사시대부터의 서구 모성변화 분석/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가부장제속 임신·출산으로 여성 소외 「어머니는 언제나 자녀를 사랑하고,자녀키우기에 쏟는 온갖 노력을 스스로 만족해 한다.그리고 자녀의 성공여부에 인생의 승부를 걸고 있다」이같은 어머니상은 우리 사회에도 널리 퍼져 있으며 확고한 믿음의 대상이기도 하다.그러나 어느 때,어느 곳에서나 어머니 모습은 이러했을까. 현재 통용되는 어머니상은 남성지배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고 지적한 책 두권이 최근 나란히 번역돼 나왔다.미 보스턴대 교수인 심리학자 섀리 엘 서러의 저서 「어머니의 신화」(까치 펴냄)와 미국의 여류시인 아드리엔느 리치의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평민사)가 그것.「모성 신화 거부」는 여권운동 이후 일반화한 주제이지만 이 두권의 책은 인류사를 통해 어머니의 역할을 보다 깊이있게 다루었다는데서 눈길을 끈다. 「어머니의 신화」는 선사시대부터 미국대통령 부인 힐러리의 경우에 이르기까지,서구문명에서 모성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분석함으로써 『모성의 역사가 어머니들을 강압해 왔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사유재산과 계급이 존재하지 않은 선사시대 때 어머니는 요즘처럼 자비,겸손,모성적 애타주의 등의 짐을 지지 않았다.자녀를 양육하기는 했지만 절대적으로 헌신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고대 아테네에서는 아버지가 원하지 않은 자녀를 버리거나 어머니가 스스로 선택한 자녀만 좋아하는 것이 당연했다. 중세에 들어 영원한 어머니상으로서 성모마리아가 등장하며 마녀사냥이 절정에 달한 근대 초에 『자신의 소망은 미뤄둔 채 자녀를 격려하는 충실하고,종속적이며,정숙한 여성』이라는 「훌륭한」어머니상이 정립됐다.그리고 스폭박사의 육아이론과 후기 프로이트학파의 학설 등이 영향을 미쳐 지금같은 「완벽한 어머니,자녀양육에 무한책임을 지는 어머니」가 자리잡게 되었다. 서러교수는 『어머니에 대한 관념은 다른 모든 관념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구속이자,역사적으로 특별한 것』이라고정의한다.따라서 「덧없고,가치가 불명확하며,인공적」인 현대의 「훌륭한 어머니」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라고 충고한다.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도 같은 주장을 담고 있다.지은이는 가부장적 정치·사회제도 아래에서 여성이 어떻게 통제되고 이용되는지를 보여주면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으면서도 어머니를 경멸하도록 부추기는」병리적인 사회현상을 고발한다.특히 임신과 분만의 역사를 통해 여성소외가 심해진 사실을 입증한다. 가부장제는 여성의 육체를 남성 통제아래 두는 것을 기본으로 삼기 때문에 어느 문화에서나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없었다.또 분만은 오랜 세월 여성끼리의 일이었지만 17세기 남성 조산원들이 등장하면서 여성은 분만과정에서마저 소외됐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 원로시인 김상옥씨/일제때 시동인지 「맥」 재창간

    ◎37년 박남수·임화·함윤수씨 등 주축 창간/“순우리말 잡지” 이유로 일제 핍박… 자진 정간/“시류 휩쓸리지않는 좋은 작품 게재할것” 『절대로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이 나라의 옳은 문학작품을 찾아내는 눈이 필요해요.한국에서 가장 좋은 시잡지로 키울겁니다』 원로시인 김상옥(76)씨가 일제치하에서 중단됐던 동인지 「맥」을 재창간하며 불같은 일성을 내뿜었다. 「맥」은 지난 37년 박남수·임화·황민·김용호·함윤수씨 등 후일 한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 문학청년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계간 시전문지.가난한 인쇄소 공원이었던 김씨는 17세 최연소로 「맥」동인에 가세했다. 『당시 책은 서울서 꽤 큰 한성인쇄주식회사에서 나왔고 함북 청진과 평양 등엔 지부도 있었어요.경향각지에서 모인 동인들은 모두 애국청년들이긴 했지만 서정시를 위주로 발표했구요.그러나 태평양전쟁 준비에 혈안이 돼있던 일본은 「맥」이 순우리말 잡지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비밀결사로 몰아갔지요.그 등쌀에 못견뎌 한 너댓권 내고 그만 자진 정간해버렸어요』 「맥」은 꿈만 먹고 산다는 신화속의 짐승으로 예술가의 상징인데다 조선민족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고. 당시 동인들중 「이식문화론」으로 유명한 평론가 임화는 월북했다 처형당하는 비참한 종말을 맞았고 서울신문사주최 제2회 공초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재미시인 박남수씨도 얼마전 타계하는 등 김씨를 빼곤 거의 유명을 달리했다.김씨가 복간을 서두른 데는 『이렇게 가다간 「맥」이 기억속에서 영영 지워져버릴지 모른다』는 안타까움이 크게 작용했다.현재 문단이 와해직전에 있다는 위기감도 또 하나의 이유. 『요즘 문인들중 작품으로 승부하는 이들이 몇이나 됩니까? 조금만 이름얻었다 하면 되는 이 안되는 이 마구잡이로 추천,문인의 질이나 떨어뜨리고 문단정치에나 기웃거리는 한심한 작태가 태반입니다.일제시대 「맥」의 정신이 그랬듯이 글하나로 비뚤어진 문단을 뜨끔하게 만들겁니다』 중창 첫호엔 고결한 자연을 인간사와 비겨 주로 시조형식에 담은 김씨의 시 12편이 실렸다.한국의 대표적 수필가로 꼽히는 피천득씨의 신작시 7편(「꽃씨와 도둑」「어떤 오후」 등)도 눈길을 끈다.새로운 동인 노중석·이종문·김원길·송화선·조동화 시인도 시조를 보탰고 평론·수필·신간평 등도 실렸다. 『가끔 시조시인이란 말을 접하는데 시인 따로있고 시조시인 따로있습니까?이건 시조를 시의 서자쯤 취급하는 시조의 기본도 모르는 발상이에요.시조는 특정 정형률을 갖췄다뿐 가장 전통적이고 우리 정서에 닿은 대표적 한국시입니다.제대로된 작품으로 시조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는데도 분투할 생각입니다』 격월간으로 예정된 「맥」에 원고를 보내 채택되는 문인들은 원고료대신 전각가 정문경선생이 작가의 이름을 새겨준 도장을 선사받게 된다.
  • 조선성씨 집성촌(압록강 2천리:19)

    ◎봉성­본계현일대 서·문씨들 “오순도순”/이주후 300여년 걸려 서가보·박보촌 등 형성/동성동본 혼인기피… 다른민족 아내로 맞아/조상숭배 대단… 혼례전 선조묘소 절하고 예식치러 요령성은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왕래하자면 반드시 지나가야하는 회랑이다.그래서 오가는 길에 주저앉아 눌러살기도 하고 일부러 찾아와 자리를 잡기도 했다.동아시아 역사와 무관치 않은 요령성 이유민은 대를 두고 많은 후손을 남겼다.오늘의 조선족과 크게 구별되는 이유민의 역사는 꽤 오래되어 요령성에는 조선 성씨를 가진 유명한 집성촌이 더러 있다. 서씨와 문씨가 많이 사는 요령성 봉성현의 서가보,박씨의 못자리판인 본계현 산성자향의 박보촌이 대표적 집성촌이다.박씨의 경우는 박보촌 말고도 개현 진둔향의 박가구가 또 있다.이들이 집성촌을 이룬 것은 약 3백∼3백50여년이 된다고 한다.그러니까 이유민으로 들어온 선조로부터 약10∼11대손이 조선 성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봉성현 서가보의 문씨 선조가 요령성에 첫발을 들여놓은 시기는 17세기 중엽이었다.서가보의 문씨가 현재 보존하고 있는 「문가씨보서」의 머릿말을 보면 내력을 잘 밝혔다.시조는 문서였는데 본래 조선인이었다는 것과 압록강에서 1백20리 떨어진 옥상좌동(평안북도 땅)에서 세세대대를 살았다고 기록했다.그리고 문씨 시조 문서가 청나라 순치연간(1644∼61년)에 시험을 치러 역관이 되었다는 사실을 적었다. ○청나라 역관신분 정착 문서는 역관이 되었을 때 나이는 30살이었고 조선에서 중국으로 들어오는 첫 관문인 요령성 봉성현 봉황성에 배치받았다.6품 통역관 직책으로 조선사절의 신분을 조사하는 일을 담당했던 그는 늘 후덕한 인상을 풍겼다.그리고 김씨와 나씨,박씨 등 세 부인 사이에서 아들 셋을 두었다.그 후손들은 1911년 신해혁명까지 한 자리에서 세습 통역관의 대를 이었다.이들이 봉성일대에 여러 문가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봉성현에서 진장을 지낸 윤희봉(35)씨 이야기에 의하면 문씨와 서씨 말고도 여러 조선 성씨를 가진 만족(만주)이 요령성에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현재 단동시 조선족문화관장인 그는 조선 성씨를 가진 민족의 생활상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만족들 중에는 최씨와 김씨,백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디요.집성촌은 아닙네다만,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습네다.술자리에서 더러 자리를 같이 하면 자기 조상이 아무개 누구라면서 조선족 만난 것이 반갑다고 난리를 칩데다.그들 조상도 대개 문씨네 조상과 같은 시기에 건너온 사람들이디요.그러나 문씨와 서씨네 만큼은 조선의 냄새가 덜 합네다.문씨네는 초상을 당하면 흰상복에 삼띠를 두르고 여자들은 머리를 풀어 흰댕기를 매더란 말입네다』 그리고 본계현 삼성자향 박보촌에는 40가구가 박씨들이었는데 전체주민의 40%를 차지했다.박보촌은 만족어로 쌍하스마후다.17 25년부터 그렇게 불렀으니 3백년의 이주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청나라 초에 박대와 박오가 땅을 부친 것이 동기가 되어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박보촌의 맥을 잇고 있다.지금 박보촌에 자리잡은 박씨네는 박오의 후손이라고 한다. 청나라 가경연간(1796∼1821년)에 만든 「박씨족보」는 박씨 자신들이 조상신을 모신다는 사실을 기록했다.이는 한족이나 만족이 모시는 신보다 하나가 더 많은 것이다.이 마을 박문수(89)노인은 어렸을 때 자신이 실제로 본 조상신을 기억해냈다.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통 넓은 바지차림을 한 노인이었다고 했다.노인이 기억한 조상신상이라는 것은 아마도 영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보촌 박씨네들의 조상숭배 의식은 혼인풍속에도 나타났다.그들은 혼례를 올리기 이전에 먼저 고구려 고분에 재배분향하고 이어 박씨 조상묘소에 절을 올리고 내려와 예식을 치른다.혼례 전에 찾는 고구려 고분은 박보촌에서 3백여m 떨어진 산성유적 꼬우리광즈(고려방자)안에 있다.박씨의 조상들이 이주해온 이역타국에서 민족의 뿌리를 찾고자 노력한 흔적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김·백씨 만족도많아 박보촌 박씨들은 장례식 축문에서도 고구려를 떠받들었다.첫 구절에 「당나라 백만 대군이 침입하매 연개소문이 이를 무찔러 쫓아버렸도다」(당국백만대군입침 연개소문격이지퇴)라는 말이 나온다.고구려의 영광을 예찬한 이 글은 후손들에게어떤 긍지와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들의 족보에는 동성동본끼리의 혼인 흔적이 전혀 없다.한족과 만족의 잡거지역에 살았던 터라 다른 민족을 아내로 맞았다.그럼에도 조선족 전통음식인 된장과 간장을 집집마다 담갔다.또 옷과 이불 호청에 풀을 빳빳하게 먹이는 습속도 그대로 간직했다.어른을 공경하는 전통예절 역시 철저히 지켜 집안 어른의 밥상은 작은 소반에 따로 차렸다. 조선의 성씨인 박씨가 많기로는 개현 진둔향 박가구가 단연 으뜸이다.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89가구 2백87명을 헤아렸다.심양∼대련을 잇는 일망무애한 요동평원에 자리한 이 마을 이웃에도 고려산성과 같은 고구려유적이 있다.조선의 글과 그림이 있는 옹기와 조선의 낫과 호미,3백근짜리 동종이 마을에 전해내려왔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말았다.지금은 돌절구 방아확 하나가 남아있다.그 절구마저도 깨진채 절반쯤 땅속에 묻혔는데,무심한 빗물이 확을 가득 채웠다. 마을 어귀에는 화강함 비석 하나가 서 있다.청나라 연호로 가경14년(1809년)에 박씨 가문의 6대손 박동국을 기리기 위해 아들 4형제가 세운 것이다.박경청이 보존하고 있는 족보를 훑어보았더니 모계도 4대까지는 조선족 이름을 적었다.그후로는 한족이나 만족의 이름이 섞여 나왔다.마을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면 한어로 『나도 조선족』이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을어귀에 박씨 비석 중화민국시기에 이 마을에 사는 형씨들이 마을 이름을 박가구 대신 형가구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인 적이 있다.박씨들은 현에 진정하는 등 반대운동을 벌여 마을 이름을 지켰다는 것이다.한번은 좀 떨어진 다른 조선족 마을에서 안노인 둘이서 고사리를 꺾으러 박가구까지 갔는데 마을 박씨들이 집으로 불러들여 융숭한 대접을 해주었다.그리고 조선족 안노인들이 꺾어온 고사리나물 보따리를 10여리나 되는 정거장까지 등짐으로 날라다 주는 따뜻한 인정을 베풀었다. 요령성 조선 성씨들의 집성촌에서는 지난 1982년 중국 총인구조사 당시 조선족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벌였다.그 결과 서가보,박보촌,박가구에 사는 조선 성씨를 가진 사람들 모두가 정부의 비준으로 조선족 대열로 들어왔다.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어서 그들에게 무한한 연민의 정이 우러났다.
  • 시신 암매장 집중조사/「5·18」 현장수사

    ◎12개 마을 40명 소환 방침 【광주=최치봉·김태균 기자】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 광주현장조사팀과 광주지검 공안부(이귀남 부장검사)는 29일 5·18당시 민간인이 학살된 주남마을과 송암동,광주교도소 주변 등 세곳의 목격자와 피해자들을 참고인으로 소환해 계엄군의 발포상황,사체 암매장여부 등에 대해 조사했다. 검찰은 특히 당시 간호보조원 김순희(35·여)씨를 불러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의 정확한 사망자수와 피습시간 및 부상자 추가사살경위 등에 대한 진술을 들었다. 김씨는 검찰에서 『80년 5월23일 하오3시쯤 집중사격을 당한 미니버스에 올라가보니 유일한 생존자인 홍금숙(당시 17세·춘태여상1년)씨와 부상당한 남학생 2명만이 살아있었고 남학생 2명은 계엄군이 차에 싣고 화순쪽으로 갔다』고 말했다. 검찰은 앞으로 화순 너릿재터널 등 계엄군에 의해 양민학살이 자행된 광주·전남지역 12개 마을의 목격자및 피해자 40명을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할 방침이다. ◎5·18때 주남마을서 사체 21구 수습 주장/40대 시민 【광주=최치봉 기자】 80년 5·18 당시 양민이 학살당한 주남마을에서 민간인 사체 21구를 수습했다는 주장이 나왔다.이는 주남마을에서 10여명이 사망했다고 밝힌 지난 7월의 검찰 발표보다 훨씬 많은 사망자이다. 당시 앰뷸런스로 시민군 부상자와 사망자를 수송했다는 박대성(42·광주시 북구 문흥동 한신아파트 101동 1301호)씨는 29일 『미니버스 총격사건 다음 날인 80년 5월24일 하오 군의 요청으로 주남마을 도로변과 야산에서 시신 21구를 수습해 도청으로 운반했다』고 말했다.또 『당시 안내하던 사병으로부터 암매장한 시신이 더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 북 4개군단 증편/통일원 발간 「95 북한개요」

    ◎교도대 연령 연장… 예비병력 40만 늘려 북한은 정무원 산하의 15위원회 28부 1원 1은행 2국 등 47개 부처로 편제된 행정기구를,13위원회 22부 1원 1은행 2총국 2국 등 41개부처 체제로 전면개편한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통일원이 24일 발간한 「95 북한개요」에 따르면 북한은 기존의 국가검열위원회,철도부,무역부,해운부,대외경제사업부,상업부,양정부,발전소건설부 등 8개 부서를 유관부처와 통폐합하고 국가환경보호위원회와 원유공업부를 신설했다. 북한은 또 전력공업위원회는 전력공업부,수산위원회는 수산부,전력자동화공업위원회는 전자자동화공업위원회,원자력공업부는 원자력총국,해외동포영접부는 해외동포영접총국 등으로 명칭을 바꿨다. 군사조직에 있어서 북한은 당중앙위 예하의 호위총국을 호위사령부로 확대개편하고 총참모부 예하에 고사포사령부를 신설했으며 총참모부예하 전투군단도 16개에서 보병군단 12개,기계화군단 4개,전차군단 1개,포병군단 2개 등 모두 20개 군단으로 확대개편했다. 북한은 또 예비병력중에서 교도대 연령을17세부터 40세였던 것을 45세까지로 늘리고,41세부터 60세이던 노농적위대 연령도 65세까지로 연장해 교도대 병력수를 1백20만명에서 1백60만명으로 40만명정도 늘렸다.
  • 태양사원 신도 16명 사체로/불 검찰 발견

    ◎일부 총상 흔적… 타살 여부 주목 【생피에르드셰렌(프랑스)AFP 연합】 프랑스 국가검찰은 23일 그간 실종상태에 있었던 태양사원 신도 16명의 사체가 프랑스 동부의 산악지역에서 발견됐다고 밝혔다. 검찰당국은 숨진 신도 16명의 사체 일부에서 총상 흔적이 발견돼 타살여부가 주목된다고 말했다.총상을 입은 사체 가운데는 3명의 어린이도 포함돼 있다. 이와함께 엥포 라디오 방송은 베르코르 고원의 작은 마을 부근에서 발견된 사체들이 다리를 한 곳으로 모은 채 별 모양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프랑스 경찰은 22일 밤에 이어 23일 경찰관 5백명과 헬기 및 수색견을 동원,대대적인 수색작업을 펼친 끝에 이들이 집단으로 자살한 곳을 발견했다. 프랑스와 스위스 당국은 프랑스인 8명,스위스인 8명등 태양사원 신도 16명이 집단으로 사라진 뒤 이들에 대한 수색작업을 벌여왔다. 지난해에도 태양사원 신도 53명이 캐나다와 스위스에서 집단으로 자살함으로써 전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태양사원 종말론 신봉 사교집단/재림예수 자처40대교주가 87년 창설/캐나다·스위스 등 무대로 은밀한 활동 지난해 캐나다와 스위스에서 광신도 53명이 집단자살했던 사교집단 「태양의 사원」신도들이 또다시 자살극을 재연,관심을 끌고 있다. 이들 사망자들이 믿고 있던 「태양사원」은 지난 87년 벨기에 출신 캐나다국적의 뤽 주레(당시 46세)가 창설한 사교집단이다. 심령치료사였던 주레는 자신이 재림예수라고 자처하면서 「불에 의한 심판론」등 강력한 종말론을 주장,캐나다와 스위스를 무대로 강연등을 했었다. 특히 이들은 제단과 제복에 장미와 십자가 문양을 사용해 17세기 유럽 일대에서 은밀히 활동한 「장미십자회(연금마법술을 행하는 종교적 비밀결사 조직)」와 관련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교단은 조만간 말세와 아마겟돈(말세 때의 선과 악의 대결)이 닥칠 것에 대비,신도들에게 저마다 무기를 소지하고 다니거나 결혼도 미루도록 하는등 전형적인 사교집단의 모습을 보였다. 주레는 캐나다에서 불법무기소지죄로 체포된 이후 지난해 7월 스위스로 건너가얼마뒤 집단자살극을 벌인 것이다. 이번에 벌어진 자살극은 남아있던 신도들이 심리적 갈등이나 내부분열을 해소하기 위해 엽기적인 방법을 택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 주가 선물시장/최택만 논설위원(외언내언)

    내년 5월 우리나라에 주가지수 선물시장이 개설된다.선물거래란 3개월 또는 6개월 뒤 주식이나 상품을 인도하면서 대금결제를 실행하는 것을 현시점에서 계약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시민에게는 생소할지 모르나 선물거래는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17세기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시절 지방제후들이 발행한 쌀물표(물표·일종의 창고증권))를 거래한 것이 선물거래의 효시이다.근대적인 선물거래가 시작된 것은 19세기 중엽 미국 시카고지역에서다.이 지역 곡물업자들이 중심이 돼 시카고상품거래소(CBOT)를 개설한 것이다. 상품이 아닌 주가지수 선물거래는 1982년 2월 미국 미주리주의 작은 지방거래소인 캔자스시티 상품거래소(KCTB)에 의해 최초로 도입되었다.미국내 11개 상품거래소 중 9위에 불과한 KCTB가 주가지수 선물제도를 도입한 것은 70년대 초부터 시카고상업거래소(CME)와 CBOT가 각각 기존의 상품선물거래 이외에 주요국가의 통화와 금리를 대상으로 선물거래를 시작한 것에 착안해서이다. 94년말 현재 주가지수 선물은 세계25개국 48개거래소에서 취급되고 있다.거래규모가 가장 큰 나라는 미국이고 이어 프랑스·싱가포르·독일·영국·일본 등 순위로 되어 있다.그러나 전세계 선물거래에서 주가지수 선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13.7%(94년기준)에 불과하다.농산물·에너지·금속 등 상품선물 비중이 86.3%를 차지하고 있다.우리나라도 내년에 주가지수 선물이외에 상품선물을 취급하기 위한 회사설립을 추진하고 있어 멀지 않아 상품선물을 포함한 본격적인 선물거래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선물거래는 현물시장의 가격변동 위험을 덜자는 데 그 뜻이 있으나 자칫 잘못하면 더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있으므로 투자가들은 전문적이고 안정적인 투자가 요구된다.지난 3월 영국계의 베어링은행 파산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증권당국은 주가지수 선물시장의 안정적인 출범과 운용을 위해 선물거래심리제도와 각종 사고방지대책에 만전을 기해야 하겠다.
  • 미 10대 “비행은 성인 수준”

    ◎「세컨 웨이브 세대」 조기성장 실태/WP지 특집/범죄·마약·섹스 만연 “최대 사회문제” 미국 10대들이 범죄·취업·마약·섹스 등 성인들과 똑같은 문제로 고민에 빠져있다.베이비붐세대 이후 최대의 세대층을 형성하고 있는 12세부터 17세까지의 이른바 「세컨 웨이브」세대의 조기성장 현상은 미국사회의 최대 골칫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지는 2천2백만명에 달하는 이들 세컨웨이브 세대의 조기성장 실태를 파악하고 그 문제점 해결을 위한 방안을 마련키 위해 집중기획을 마련했다.「10대」(The Teen Age)라는 주제로 10일자부터 매일 2개의 전면을 할애,보도를 시작한 이 기획은 오는 15일까지 모두 6회에 걸쳐 싣는 대형 시리즈로 계획돼 있다. 포스트지는 이들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워싱턴 시내와 근교에 거주하는 같은 연령대의 중고등학생 7백2명을 무작위로 추출,심층면담을 통해 밝혀진 결과를 활용했다. 그 결과 이들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마약·폭력·임신의 순으로 나타났다.이들의 친구관계는 10명을 기준으로 할때 6명은 몰래 마약을 투여하고 4명은 감방에 갖다온 경험이 있으며 3명은 임신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한창 학업에 열중해야할 청소년의 나이에 이미 성인들이 갖고 있는 문제들을 고민해야 하는 부정적 측면에서의 조기성장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졸업반인 12학년(고3)의 경우 2명에 한명이 적어도 한달에 한번 이상 술을 마시며 3명에 한명이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으로 나타났고 심지어는 8학년(중2)도 7명중 한명이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으로 밝혀졌다. 포스트지는 이들 세컨웨이브 세대의 조기성장 현상의 가장 큰 이유로는 부모들의 이혼등으로 인한 가정파괴와 폭력이 범람하는 성인사회의 타락을 들었다.
  • NYT 선정 올해의 책/에코작 「어제의 섬」 등 10종

    ◎새계적 권위 편집진이 작업/소설 5종·논픽션 5종 뽑혀 미국 뉴욕타임스 북리뷰가 「올해의 좋은 책」 10종을 선정,3일자에 발표했다.권위있는 서평과 출판기사로 인정받는 NYT 북리뷰 편집진 9명이 선정한 「올해의 좋은 책」은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탈리아 작가 움베르토 에코의 「어제의 섬」 등 소설 5종,논픽션 5종이다.선정된 책들을 간략히 소개한다. ▲티나 로센버그의 「유령의 땅」(원제 The Haunted Land,랜덤하우스간)=동유럽의 새 질서구축을 위한 움직임을 다루었다.공산주의 아래서 벌어졌던 일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을 경우 옛 동독·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등 동유럽의 개혁정책이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아나톨리 도브리닌의 「비밀」(InConfidence,타임북스·랜덤하우스간)=저자는 지난 62년부터 86년까지 워싱턴 주재 소련대사를 지냈다.냉전체제에서 미·소간 비밀협상 채널을 통한 위기극복 과정을 폭로하는 한편 40여년에 걸친 소련지도자들의 실책을 신랄히 비판했다.특히 고르바초프를 소련제국을 붕괴시킨장본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리처드 포드의 소설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크놉간)=예전엔 작가였지만 부동산업자로 전락한 이혼남 프랭크 바스콤이 주인공.주인공은 이혼후 대인관계,특히 여성과의 관계에 잘 적응하지 못해 사귀는 여자와 관계가 깊어질수록 항상 실패로 끝나고 만다.주인공이 10대 아들과 함께 떠난 독립기념일 여행이 비극으로 끝난다는 이 소설의 매력은 작가가 위트있게 그린 주인공의 풍모에 있다. ▲마틴 에미스의 소설 「고발」(The Information,하모니간)=실패한 작가인 주인공 리처드에게는 허섭쓰레기 같은 작품으로 성공을 거둔 기윈이라는 절친한 친구가 있다.친구의 말도 안되는 성공에 분개한 주인공은 암흑가의 도움을 얻어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아슬아슬한 게임을 벌인다.그러나 게임이 고조될수록 등장인물 모두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볼모의 신세가 되고마는 모습을 흥미롭게 그렸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어제의 섬」(The Island Of The Day Before,헬레 앤 쿠르트 울프·하코트 브레이슨간)=유럽 지성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17세기를 배경으로 작가의 현란한 지식을 동원했다.남태평양에서 난파한 배에서 혼자 살아남은 주인공이 다른 시간대의 공간인 섬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배에 남아 고독속에서 17세기의 물리학과 연금술,정치이론,신학논쟁을 비롯한 유럽지성의 성과를 되새긴다는 내용.인간사고의 영속성과 미래에 대한 과학적 전망,사해동포주의에 대한 옹호를 보여주고 있다. ▲노먼 쉐리의 「그레이엄 그린의 생애」(The Life Of Graham Greene,바이킹간)=알콜과 마약 중독자로 섹스·전쟁광인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의 일대기를 집요하게 추적,재구성했다.그린이 「권력과 영광」「제3의 사나이」 등을 집필하던 시기와 2차대전후 영국 첩보부원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흥미로운 면모를 상세히 기술했다. ▲데이빗 허버트 도널드의 「링컨」(Lincoln,사이먼 앤 슈스터간)=지금까지 시중에 나온 링컨대통령의 전기는 7천여종에 달하지만 이 전기는 철저한 자료조사와 명확한 설명으로 링컨 전기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을 얻고 있다. ▲리처드 포스너의 「법률 극복하기」(Overcoming Law,하버드대학간)=미 시카고 항소법원 재판장인 저자가 위기에 처한 미국 법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현실적 조건들을 무시하고 앞선 판례만을 나태하게 적용시키는 대부분의 판사와 검사,법학교수들을 비판한다.또 사회학·역사학·경제학 등을 수용해야만 법체제의 개혁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필립 로스의 소설 「사바드의 연극)(Sabbath’s Theater,휴톤 미플린간)=사회와 인간 존재의 추잡하고 불쾌한 단면을 그린 소설.코믹하게 전개되는 소설이지만 아내곁을 떠난 노인이 장례식에 가서 자신의 죽음을 계획한다는 결말부분에 이르면서 소설적 주제의 깊이에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드미트리 나보코프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선집」(크놉간)=중년인 성도착자의 미녀에 대한 집착을 그린 「롤리타」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러시아 태생의 소설가·시인·평론가·곤충(나비)학자인 나보코프의 작품 65편을 수록했다. ▲프레데릭 브라운의 「졸라」(파라 스트라우스 앤 지룩스간)=에밀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 당시 군부의 부당성을 공격하며 끝까지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해 프랑스 양심의 상징이 된 사실주의 작가.실증적이고 풍부한 조사를 통해 그가 어떻게 진실과 정의를 옹호하는 작가가 될 수 있었는지를 밝혀냈다.
  • 「미완의 혁명」 4·19(새로 쓰는 한국현대사:47)

    ◎「3·15마산시위」로 촉발… 한국현대사의 분기점/「혁명」·「의거」·「민중항쟁」 등 시각따라 평가 달라 1960년 4월19일 국민은 자유당 독재정권에 저항해 분연히 일어서 일주일만에 이승만 대통령을 권좌에서 쫓아냈다.비록 1년여 뒤에 일어난 「5·16」군사쿠데타로 그 꿈은 좌절되지만 「4·19」가 민주주의를 추구해 온 한국 현대사에서 뚜렷한 분기점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4·19」는 「3·15」부정선거와 이에 따른 「3·15 마산시위」로 직접 촉발됐다.그러나 이와 관련된 학생시위는 2월28일 대구에서 처음 발생했다.학생들이 반정부시위를 벌인 것은 광복이후 처음이었다.28일은 민주당 장면 부통령후보가 대구유세를 가진 날로 일요일이다.집권세력은 학생들의 유세장 참석을 막으려고 일요일인데도 고교생들을 모두 등교시키기로 했다.명목은 학교에 따라 달랐다.경북고교는 학기말시험 일정을 이날로 앞당겼고 대구고교는 전교생이 토끼사냥을 한다고 했다. ○대구서 첫 반정부 시위 학생들은 반발했다.28일 등교한 경북고생 8백여명은 하오 1시5분쯤 교문을 나서 시내 중심가를 돌며 1시간50분동안 시위를 벌였고 대구고·경북여고 학생들도 뒤를 이었다.이날 학생 2백50여명이 연행되지만 정부는 시위학생 처벌이 민심에 어긋날까 염려해 그날로 모두 석방했다. 학생시위는 3월5일 서울에서 다시 불붙었다.장면후보가 서울운동장에서 정견발표를 마친 뒤 종로4가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이자 학생이 대부분인 군중 1천여명이 뒤따랐다.퍼레이드를 끝낸 하오 5시10분쯤 시위가 시작됐다.경찰은 경찰봉을 휘두르는 한편 기마경찰을 동원,곧바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어 8일에는 대전에서,10일에는 수원과 충주,12일에는 부산·청주,13일 서울,14일에는 서울·부산·인천·포항에서 학생시위가 벌어지는등 자유당정권에 대한 저항은 전국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됐다. 제4대 정·부통령선거가 실시된 3월15일 무장경찰이 거리거리를 지키는 가운데 동이 텄다.당시 인구 15만 정도인 남녘의 항구도시 마산은 어느곳보다 시끄러운 아침을 맞았다.상오 7시 투표가 시작됐지만 민주당참관인은 대부분 투표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자유당원,경찰,반공청년단등 친정부세력이 야당 참관인의 출입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불만은 시민들 속에서도 터져나왔다.많은 마산시민들이 투표용지조차 받지 못해 선거를 할 수 없었다. 시민들은 자연스레 오동동 민주당사무실로 모여들었다.상오 10시30분 민주당 마산시당은 스스로 「선거포기」를 선언했다.그날 저녁 민주당사 앞에 시민들이 몰려 있을 때 반공청년단원 10여명이 차를 타고 몰려와 마구 몽둥이질을 하고는 달아났다.분노한 시민·학생들은 시위대로 돌변했다.시위대가 남성동파출소 앞에 이르자 소방차에서 물벼락이 날아왔고 시위대는 돌을 던졌다.이윽고 총성이 터지면서 앞선 학생이 쓰러졌다.하오 8시쯤이었다.시위대는 일단 흩어졌지만 『경찰이 학생을 쏘아 죽였다』는 소식이 시내에 퍼지면서 격분한 시위대와 총을 쏘는 경찰간에 유혈충돌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다음날 마산시내에서는 일대 검거선풍이 불었다.경찰은 시위를 민주당 마산시당이 사전계획한 「폭동」으로 몰아붙이는 한편공산간첩이 개입됐다는 쪽으로 몰고갔다.이기붕 부통령당선자가 『총을 줄 때는 쏘라고 준 것』이라고 말해 문제가 된 것도 이 무렵이다. ○마산시위서 10명 희생 하지만 마산사건은 곧 정치쟁점으로 떠올랐다.민주당은 물론 국회와 대한변호사협회,심지어 자유당까지 자체 조사단을 파견해 진상을 조사했으며 검찰도 수사팀을 현지에 보냈다.경찰이 주머니에 불온삐라를 만들어 숨진 학생 주머니에 집어넣었다든지,북마산파출소 방화범을 조작한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 3월26일 발포·고문 경찰관 5명이 구속됐다. 어느정도 분위기가 잦아들던 4월11일 김주열(당시 17세)군의 시신이 마산시청 뒤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됐다.전북 남원 태생인 김군은 마산상고 입학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3월15일 밤 김군은 형과 함께 시위행렬에 가담했다가 행방불명됐다. 그 김군이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바다에 떠오르자 다시 전국에 분노의 물결을 불러일으켰다.마산에서는 이날 저녁 시위대 3만여명이 시청·파출소·소방서등 공공기관을 습격했다.하오 9시30분쯤 마산경찰서 앞에서 경찰이 또다시 총을 쏘았다.1·2차 마산시위에서 희생된 사람은 모두 10명이었다. 전국에서 시위가 잇따른 가운데 4월18일 서울에서 고대생들이 시위에 나섬으로써 「4·19」에 불을 지핀다.18일 낮 교문을 나선 고대생 3천여명은 경찰의 저지를 뚫고 태평로 국회(현 서울시의회)앞까지 진출했다.학생들은 도로에 연좌해 『3·15 부정선거를 철회하라』며 농성을 벌였다.시청·광화문등 주변에는 시민·고교생등 1만여명이 모여 이들을 격려했다.고대생들이 유진오 총장의 설득으로 4시간 반만에 농성을 풀고 학교로 돌아가는 도중 동대문시장 앞에서 정치깡패 이정재 일당이 이들을 습격했다. 고대생들이 깡패들에게 당한 사실이 보도된 4월19일 아침 서울은 분노로 들끓었다.서울대를 비롯한 10여 대학 학생들이 상오중 시위에 들어갔고 고교생들이 뒤를 이었다.시위군중은 순식간에 10만명을 넘어서 하오1시40분쯤 경무대(현 청와대)앞 저지선에 다다랐다.경찰의 일제 사격에 군중은 잠시 흩어졌지만 수는 더욱불어났다.정부는 바로 계엄을 선포했다. ○이승만 하야로 새 국면 이어 정국은 숨가쁘게 돌아갔다.21일 국무위원 일괄 사퇴를 시작으로 23일 임기가 남은 장면부통령이 사임했다.24일에는 이기붕이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한다고 발표했다.25일 하오 3백여 대학교수들이 「이승만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이승만은 26일 드디어 하야성명을 냈다.제1공화국은 이로써 막을 내렸다.「4·19」전기간에 걸쳐 전국에서 1백86명이 숨지고 6천여명이 부상했다. 「4·19」는 혁명인가,의거인가,아니면 민중항쟁인가.발생 35년이 지났지만 「4·19」에 대한 평가는 아직 분명하게 내려지지 않았다.따라서 「4·19」를 부르는 이름도 「4월혁명」「학생의거」「4월민중항쟁」등 다양하다.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는 의미에서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한쪽에선 학생들이 주도해 우연히 일어난데다 실제 이룬 것이 없다고 보아 의거라고 해석한다.또 「4·19」가 반독재투쟁을 거쳐 「반외세 민족통일」을 제기했다고 비중을 두는 쪽은 「민중항쟁」이라는 주장을 편다. 이처럼시각이 엇갈리는 까닭은 「4·19」가 지금도 우리 사회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당대의 큰 사건이기 때문이다.결국 「4·19」는 어느 시점까지 미완의 혁명으로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4·19」엿새 뒤인 25일 하오 서울시내에서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대학교수들.이승만이 다음날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제1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미 CIA 「한국정세 보고서」/미 “장면정권 2년이상 못 버틴다” 예측/군사쿠데타 발생가능성엔 회의적/“서방과의 연대는 지속할 것” 전망 우리의 현대사에서 「4·19」와 「5·16」으로 이어지는 60년대 초는 격동의 시기였다.독재를 거부한 국민의지가 열매를 맺는가 싶더니 1년여만에 군사쿠데타로 뒤집혔다.미국은 이 무렵 한국 상황을 어떻게 판단했을까.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최근 비밀해제된 미국 정부문서 가운데 중앙정보국(CIA)이 작성한 「한국 정세에 관한 예상 보고서」를 발굴했다.1960년 11월22일자로 된 이 보고서는 이후 몇년동안 전개될 한국의 정치상황을 내다본 것이다. CIA는 먼저장면정권이 2년이상 버티기 힘들 것으로 전망했다.국회에서 다소 우위에 있긴 하지만 당면한 숱한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리라고 보았다.또 60년 3∼4월에 활동을 개시한 「혁명세력」도 아직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정치적 균형이 새로 정착되기 전에 지도력의 변화와 세력 재배치가 있을 것이며,이러한 변동은 보수정당 우위에서 얼마간 벗어나 사회주의 세력의 신장을 가져오리라고 예측했다. 보고서는 이어 『서울정부가 대중의 열망에 부응하지 못하면 불안한 상태가 유지돼 권위적,또는 혁명적 지도자들에게 이용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그러나 군사쿠데타 가능성에 대해서는 『한국 내 상황이 두드러지게 악화돼야만 군부가 민간정권을 대체하려 들 것』이라고 분석한 뒤 『현재로선 쿠데타가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한국인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침략 방어와 경제력 유지를 위해 미국등 서방과 연대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를 이어갈 것으로 자신했다.그러면서도 ▲민족주의 감정 대두 ▲통일에 대한 열망 ▲냉전체제 아래 한국의 허약한 위상에 대한 분개심등이 중립주의에 대한 관심을 높일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밖에 장면정부가 일본과 적극적으로 새로운 접촉을 시도하고 있지만 한일관계가 정상화되기까지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으며,특히 『한국 대중의 새롭고 약간은 과민한 민족적 자존심이 이를 복잡하게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4·19」와 「5·16」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중간시점에서 작성된 미 CIA 보고서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 결정에 활용됐다는 점에서 가치가 뛰어난 자료이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부국장급 ▲이용원 〃 차장 ▲김성호 〃 기자 ▲김영중 조사부 〃
  • X­마스트리/황석현 논설위원(외언내언)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크리스마스 트리,귀에 들리는 것으로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가장 보편적이다.산타클로스 할아버지도 있지만 그 상징성이 많이 줄어들었다.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이들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굴뚝속으로 선물을 가져오리라고는 믿지 않게 돼 버렸다. 크리스마스 트리와 캐럴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트리는 8세기때 독일의 보니파티우스라는 수도사가 어린 전나무에 갖가지 장식품을 매달아 수도원 정문앞에 세워 놓은 것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보편화된 것은 17세기 부터.「즐거운 노래」라는 뜻을 지닌 캐럴은 1521년 「멧돼지 머리」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공인되어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문학작품에 첫선을 보인 것은 1816년 독일작가 호프만의 소설 「호두까기와 쥐임금」.호프만은 이 소설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이렇게 묘사했다.「커다란 전나무에는 금색과 은색의 사과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나뭇가지마다에는 화려한 색깔의 캔디,그리고그밖의 예쁜 과자들이 새싹이나 꽃송이처럼 달려있었고 촛불이 빛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집집마다 트리를 세우는 것이 연례행사처럼 되어 버리자 산림훼손을 걱정한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는 한때 법으로 금지했으나 크리스마스 트리를 「천국의 나무」로 생각했던 신자들의 반발때문에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 1930년대에는 우리나라에도 상륙했다.어쨌든 크리스마스 트리는 사랑과 평화,그리고 화해를 상징하고 있다. 12월 들어 전국곳곳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지고 캐럴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6일 서부전선 애기봉에는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거대한 트리가 불을 밝혔다.오색등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트리를 보며 아름다운 선율의 캐럴을 듣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그러나 이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헤아려야 한다.한밤중 어두움을 밝히고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의 참뜻을 되새기면서 경건하고 조용한 연말연시가 되기를 두손모아 기원한다.
  • 괴산 고성리 목장승(한국인의 얼굴:55)

    ◎긴 코에 이빨 듬성… 시골할아버지 모습/머리엔 갓… 눈썹은 붓으로 그려/천하대장군·지하장군 한쌍… 음력정월 장군제 올려 우리는 키가 큰 사람을 일러 과장하기를 「장승만 하다」고 말한다.그렇듯 장승은 키가 크다.기둥형 나무를 사람 모습으로 깎아 만든 나무인형(목우)이 장승이다.이를 목장승이라 하는데,돌을 쪼아 만든 석장승도 있다. 목장승은 장생이라는 이름으로 15세기말 기록인 「태평한화골계전」에 처음 나온다.「군수가 길가에 세운 장승을 보고 사람으로 착각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장생이 사람모습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대목이다.이 장생이 17세기이후부터는 장승으로 표기되었다.장승을 말하는 장생의 생자에는 나무 목이 들었다.그러고 보면 장승이 발생한 시기부터 나무로 장승을 만든 것이 분명해진다. 조선시대 내내 이어진 목장승은 오늘날까지도 더러 찾아볼 수 있다.충북 괴산군 청천면 고성리에서 만난 장승은 사람얼굴을 한 인면장승이었다.마을 사람들은 장승이라 하지 않고 장군으로 불렀다.오른쪽 천하대장군과 왼쪽 지하장군이 한 쌍을 이루었다.바깥 세상과 큰 거래가 없고 인적마저 드문 외진 마을인지라 마을 어귀의 장군이 사람만큼이나 반가웠다. 그런데 말이 장군이지 무섭지 않은 얼굴을 했다.무척이나 긴 인중,듬성듬성한 이빨에서 우러난 장군의 인상은 모나지 않은 성격의 촌 할아버지다.응석꾸러기 손주를 두었을 법도 한 나이인데,손주가 꺼들어 볼 수염은 없다.다만 눈썹은 코끝에서부터 붓을 대어 그려넣었다.돋을새김의 동그란 눈은 튀어나왔고 얼굴의 3분의 2를 차지한 코가 유별나게 길다.그래서 얼굴은 온통 코치레를 한 느낌이다. 천하대장군은 갓모양의 모자를 썼다.관모를 제대로 갖춘 천하대장군은 옆에 있는 지하장군과 함께 한 해에 한차례씩 대접을 받는다.음력 정월 열나흘이면 마을 사람들이 산신제에 이어 장군제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제사를 모신지가 3백년이 넘고 보면 장군제는 꽤나 오래되었다.제삿날에 비는 기원내용은 대개 농사의 대풍과 마을의 평안,무병,복 들기,잡신과 악살 막이 등이다. 이들 두장군을 모시는 장군제는 철저한공동체신앙이다.제주로 제관과 축관을 뽑는데,제삿날 10일전에 생기복덕한 사람을 반드시 가려서 선출했다.상을 당한 사람,상가와 접촉한 사람은 제주로 뽑지않는 불문율이 있다.제물은 고기를 전혀 올리지 않는 소제로 치렀다.이에 따라 삼색과일과 북어·메·탕·과가 제물로 올랐다.그 경비는 한 집에서 3천원씩 4만5천∼5만원이 든다고 했다. 이 고성리 장승인 두 장군 말고도 마을 어귀에는 다른 공동체신앙 대상이 더 있다.선돌과 돌탑·신목이다.그러니까 장군은 복합형태를 한 신앙대상물인 것이다.장군은 나무인지라 3년마다 드는 윤달이 있는 해에 새로 세운다.마을 아무 산에서 나무를 베어 만들지만,새가 둥지를 튼 나무는 제외시키는 금기사항도 있다.
  • 눈물의 메시지(외언내언)

    『아빠는 어른들의 싸움에 돌아가셨어요.그것은 제게 가장 슬픈 일이었습니다.…저의 올해 크리스마스 소원은 아일랜드에 평화와 사랑이 영원히 계속되게 해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북아일랜드의 아홉살 난 한 소녀가 사상 처음으로 아일랜드를 방문중인 미국대통령 환영행사에서 낭독한 메시지가 세계를 감동시키고 있다.금발머리에 예쁜 노란색 리본을 단 가냘프고 아름다운 이 소녀가 메시지를 읽어나가는 동안 장내의 많은 사람들은 손수건을 꺼내 눈시울을 훔치고 있었다. 이 장면은 미국의 CNN­TV를 통해 세계에 소개됐고 세계인들은 이 소녀의 절절한 「평화의 메시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클린턴 대통령은 이 메시지를 듣고 난 뒤 『저 아름다운 소녀가 평화의 필요성을 강조한 나의 연설을 불필요한 말로 만들어 버렸다』고 조크했다.무장단체의 총격으로 아버지를 잃은 캐서린 해밀이란 이 소녀의 메시지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것은 진실과 평화에의 간절한 소망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극은 16∼17세기 잉글랜드지방의 개신교신앙을 가진 노르만족이 북아일랜드지역으로 이주해 들어오면서 시작됐다.주민의 90%가 가톨릭인 이 섬에 혈통과 종교가 다른 이민족이 들어왔다.갈등은 자명한 일.비록 수적으로 열세이나 영국의 지원을 받는 개신교도들은 북아일랜드 지방의 지배계층으로 자리를 굳혔다. 1921년 아일랜드가 영국에서 독립할 때도 북아일랜드는 영국의 영토로 남게 됐다.북아일랜드에 사는 소수 가톨릭계는 60년대 무장투쟁부대인 IRA(아일랜드 공화군)를 만들어 북아일랜드의 아일랜드공화국 통합을 위해 싸우고 있으며 개신교쪽은 「얼스터자원민병대」(UVF)를 만들어 IRA와 맞서고 있다.이들간의 무력충돌이 표면화된 지난 25년여동안 양측에서 희생된 인원이 무려 3만여명. 21세기를 눈앞에 둔 시점에도 인종과 종교간 갈등은 조금도 순화되지 않고 있다.인간의 편견과 이기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새삼 일깨워 준다.
  • 이르쿠츠크 전투기 공장(시베리아 대탐방:52)

    ◎미그·수호이기 한해 1백여대 생산/공장면적 가로·세로 10㎞… 거의 지하에/탈냉전후 수출 격감… 민수용 제작 전환 시베리아 동부 이르쿠츠크시는 관광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세계최대의 담수호인 바이칼을 바로 이웃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르쿠츠크가 군사도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전투기·헬리콥터 공장이 도심 아파트 밀집지역에 위장돼 있는가 하면 시내복판에 공군사관학교가 있다.도심에서 약 10㎞ 떨어진 공항에는 항상 훈련중인 전투기로 가득하다.이르쿠츠크주의 역사 또한 「피의 역사」라 할만큼 군인들의 격전지였다. 도시가 처음 세워진 1661년부터 20세기 초반 러시아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이르쿠츠크는 주요 내·외전의 싸움터였다.17세기말 표트르대제때 스웨덴과의 전쟁을 치렀고 이 전쟁중에 원목으로 성곽을 쌓은 것이 이르쿠츠크의 출발이었다.신생 소비에트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1918년 일본이 14개동맹국의 일원으로 파견한 「시베리아출병」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진 곳도 이곳이다.이와는 별도로 황제군을 지휘한 코르차크장군측과 볼셰비키당의 앙가라강 진입군 우샤코프카군이 서로 치열한 접전을 벌인 곳도 이르쿠츠크다. 이 접전에서 코르차크 장군이 잡혀 총살당함으로써 소비에트혁명정권은 완성됐었다.코르차크는 총살된 뒤 차디찬 앙가라강 얼음밑에 묻혔다. 이같은 피의 역사를 간직한 채 이르쿠츠크는 군수산업을 육성시켜왔다.이곳 군수산업의 상징인 이르쿠츠크전투기공장을 취재진이 찾았다.이르쿠츠크 노바토로프 3번가에 자리잡은 이 공장은 취재진이 근처에 도착,공장입구를 찾는데만 30여분 이상을 소비했다.아파트단지내 가로수 옆으로 그 입구가 있어 위장돼 있었기 때문이다.물론 면적이 가로 세로 10㎞정도나 되는 이 공장의 상당 부분은 지하에 있었다. ○아파트 단지안에 위장 비탈리 젤렌코프 마케팅부장을 정문에서 만나 회의실로 들어섰다.복도 양쪽에는 이 공장이 지금까지 만든 모형전투기들이 전시돼 있었다.페트로프­14,샤샤­2,일류신­4등은 1930년대 중반 스페인내전에서 활동한 비행기라고 그는 소개했다.이외에도 투볼례프­14,일류신­28,안토노프­12,야크­28등 중·소형여객기도 바로 이곳에서 생산됐다. 이곳에서 조립되고 있는 전투기가운데 가장 최신형은 미그­23·27기,수호이­27Y,수호이­30기 등이었는데 중국이 이들의 큰 고객이었다.수호이­30은 2인용 전투기로 공중급유가 가능한 최신기종.이 전투기에는 특히 조기경보시스템을 갖추고 있는데다 모스크바에서 1만4천㎞가 떨어진 콤소몰스카야까지 중간기착없이 단번에 날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반면 수호이­27전투기는 엔진출력이 강력해 수직상승이 가능토록 설계된 최신예 전투기.이 전투기는 일명 코브라라고 불리는데 이는 수직상승·하강을 마치 코브라가 춤추듯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훈련용인 미그­23YB는 인도 시리아 앙골라 베트남 아프리카 각국등 세계 20개국에서 2백대이상이 활동하고 있는 훈련용전투기라고 젤렌코브부장은 소개했다.이쯤해서 취재진은 러시아제 전투기의 성능이 이처럼 우수한데도 한국등 서방에서 이들을 사가지 않는 이유를 슬쩍 물었다.취재팀은 한국정부의한 관계자는 한국군이 오랫동안 미국제 전투기에 익숙해져 있으며 훈련의 연속성문제,러시아전투기의 부품조달에 대한 어려움 때문에 러시아제의 도입을 꺼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견도 덧붙였다.그러자 한 간부는 『터무니없는 얘기』라며 반박했다.전투기를 사게 되면 훈련은 러시아공군이 담당해 도와줄 것이며 사실 러시아군은 그만한 능력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부품·수리문제에 대해서도 그는 점점 생산량이 떨어져 역시 적게 생산되고는 있으나 공급계약에 의한 부품공급은 반드시 지켜지고 있다고 강조했다.이들 간부들은 한결같이 최근 전투기등 러시아제 무기의 수출이 급감하고 있는데 대해 「슈퍼파워」 미국의 「전략적 방해」가 심각한 지경이라고 입을 모았다.최근 한국의 한 재벌그룹이 동남아시장을 겨냥,이 공장과의 합작의사를 타진하다 갑자기 접촉을 중단한데 대해서도 이들 간부진들은 의구심을 높이고 있었다. ○한국 합작파트너 희망 젤렌코프부장은 『우리 공장의 현재 생산능력은 연간 1백대정도』라면서 『전투기나 기타 특수비행기를 합작생산할 합작파트너를 한국에서 찾고 싶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소위 전투기장사가 뜻대로 안되자 이 공장은 현재 특수목적용 민간비행기 제작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올 겨울 취항식을 가질 베리예프­200기의 제작,구급용·농사용 야크­112기의 제작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베리예프는 화재 또는 산불진화용으로 50년간 물에서 이륙하는 비행기를 연구한 다가마노프씨가 설계한 것이다.야크­112는 미국의 텔레다인사의 엔진을 장착해 만든 것으로 최근 실험에 들어간 구급용(혹은 자가용)비행기다. 이 공장의 설계관계자들은 『현재 산불진화용은 캐나다의 화재진압용비행기가 「독식」하고 있다』면서 『베리예프기의 제작이 올해 완료되면 많은 나라에서 탐을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르쿠츠크 전투기공장의 자생몸부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비행기 엔진은 아니지만 비행기 엔진제작 기술을 이용한 크고 작은 엔진·모터도 주요 생산품 가운데 하나다.최근 한국의 한 기업과 합작,청소기나 잔디깎기용 모터를 제작하고 있는것도 자구몸부림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 한국의 신세대 그들은 누구인가(서울신문 50돌 특집)

    ◎17∼26세 남녀50명 설문조사분석/“1억원 생긴다면 혼자 살 아파트 장만”/축구 등 격렬한 운동보다 영화·음악감상 즐긴다/동성연애­성개방 대체로 긍정적/“환경파괴­인간성 상실” 가장 우려/“정치인·판­검사 사양 방송인·디자이너 될래요” 신세대들의 통일관은 어떤 것일까.그들은 이성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다가올 21세기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으로 여기고 있을까.다음 세기를 이끌어 갈 그들이 제일 두려워 하는 불안은 또 무엇일까.서울신문사는 창간 50주년을 맞아 10월 한달동안 본사 취재진을 통해 서울지역 17세에서 26세까지 신세대 남녀 50명을 상대로 그들의 의식을 알아보기 위해 서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본사 사회부기자가 현장의 여론을 토대로 설문서를 만들고 직접 의견을 들어봤다. 조사결과 신세대 4명 가운데 1명은 남북한이 굳이 통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또 대부분 풍수지리사상에 공감을 느끼고 있었고 21세기에 환경파괴와 인간성 상실을 가장 심각하게 우려했다. 이들은 아파트와 자동차를 갖고 싶어하지만 무절제한 낭비생활은 원치않았다.동성연애등 성개방 풍조는 대체로 긍정하지만 전통 결혼관이 변하는 것은 원하지 않은 이중적 의식구조를 보여줬다.특히 신세대 여성들은 컴퓨터 오락이나 노래방보다 포켓볼을 더 즐긴다. 변호사나 판·검사,의사,군인,정치가보다 방송·광고인이나 디자이너 등 전문·자유직을 선호한다. 「가장 하고 싶은 놀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연극·영화(비디오)·음악감상」이 20명으로 가장 많았다.「디스코텍에서 춤추기」가 7명,「포켓볼등 당구」가 6명이었고 「농구·축구·야구등 구기운동」과 「노래방에서 노래하기」는 5명씩이었다.「컴퓨터게임」은 4명,「고스톱·포커등 도박」이 2명,「기타」1명 등의 순이었다.성별로는 남자가 「연극·영화·음악감상」이 9명으로 가장 많았고 「구기운동」(5명),「컴퓨터게임」(3명),「도박」「당구」「노래방에서 놀기」(각 2명),「디스코」「기타」(각 1명) 순이었다.여자도 「연극·영화·음악감상」이 11명으로 가장 많았고 「디스코」(6명),「포켓볼」(4명),「노래방」(3명),「컴퓨터게임」(1명)등으로 나타났다.신세대들은 적극적이고 활발하기보다는 영화·음악감상등 수동적인 오락문화에 더 익숙해 있었다. 「부담없이 쓸 수 있는 돈 1억원이 갑자기 생기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항목에서는 「혼자 살 아파트를 장만한다」가 15명으로 가장 많았다.「은행에 저축한다」도 11명이나 됐고 「자동차를 구입한다」「해외여행을 떠난다」(각 7명),「증권투자·사채놀이등 재산증식을 도모한다」(5명),「부모님께 모두 드린다」(2명),「컴퓨터를 산다」(1명),「그때그때 기분 내키는 대로 쓴다」(2명) 등의 순이었다.「책을 사본다」는 한명도 없었다.남자는 「아파트장만」(6명),「자동차 구입」(5명),「은행저축」「재산증식 도모」(각 4명),「해외여행」「기분내키는 대로 사용」(각 2명)「컴퓨터구입」「부모님께 드린다」(각 1명) 등의 순이었다.여자는 「아파트장만」(9명),「은행저축」(7명),「해외여행」(5명),「자동차구입」(2명),「재산증식도모」「부모님께 드린다」(각 1명)등이었고 「컴퓨터구입」「기분내키는 대로 사용」은 한명도 없었다.남녀 모두 아파트를 가장 갖고 싶어하지만 저축의 필요성도 느끼는 등 무절제한 낭비생활은 꺼리고 있음을 알수 있다.그러나 책을 멀리 하고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자기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을 묻는 질문에서는 「동성 친구」가 21명으로 가장 많았고 「부모님」이 17명,「연인」이 7명의 순으로 나타났다.「교수」「직장상사」「좋아하는 인기 탤런트」가 각 1명이었고 「기타」가 2명이었다.남자는 「친구」(11명),「부모님」(8명),「연인」(3명),「좋아하는 인기탤런트」(1명)등의 순이었고 「기타」가 2명이었다.여자는 「친구」(10명),「부모님」(9명),「연인」(4명),「교수」「직장상사」가 각 1명씩 이었다.이로 미뤄 신세대들은 친구들에게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고 있고 부모님의 영향력도 꽤 크다. 「다가올 21세기의 변화한 모습 가운데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을 묻는 항목에서는 36명이 「컴퓨터·인터넷·정보고속도로 등 정보화사회」라고 응답해 압도적인우위를 차지했다.「성개방」이 4명으로 두번째였고 「남북통일」「기존의 윤리관과 가족관의 파괴」가 각 3명,「태평양시대의 주역」「개성의 시대」가 2명씩 이었다.「자유로운 결혼과 이혼」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남녀별로는 「정보화사회」가 각각 16명·20명이었고 「성개방」이 3명·1명,「남북통일」이 2명·1명,「윤리관·가족관의 파괴」가 2명·1명,「태평양시대의 주역」이 각각 1명씩,「개성의 시대」도 1명씩 이었다. 「우리사회가 21세기에 직면하게 될 가장 큰 불안」을 묻는 질문에서는 「환경파괴」와 「인간성 상실」이 각각 28명,15명으로 1.2위를 차지했다.이어 「대형 사건·사고」가 4명,「에이즈등 전염병의 창궐」「에너지 고갈」「인구의 노령화」가 모두 1명씩 이었다.「가족개념의 붕괴」는 한명도 없었다.남자는 「환경파괴」(14명),「인간성상실」(8명),「대형 사건·사고」(2명),「인구의 노령화」(1명)를 꼽았다.여자도 「환경파괴」(14명),「인간성 상실」(7명),「대형 사건·사고」(2명)등의 순으로 나타났으나 남자와는 달리 「에이즈등 전염병의 창궐」(1명)과 「에너지 고갈」(1명)등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한반도 통일에 대한 생각」을 묻는 항목에서는 조사대상자의 26%인 13명이 「굳이 통일할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17명이 「10년내에 남한이 흡수통일할 것」이라고 응답,최고를 기록했고 「10년내에는 통일이 안된다」가 9명이었다.「전면전이 아니라면 어떤 방법으로든 통일이 돼야 한다」가 9명,「통일이 되면 북한주민을 위해 남한주민들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2명이었다.남자는 「10년내 흡수통일」이 10명으로 「통일 불필요」(4명),「10년내 통일 불가능」(4명)보다 많았다.그러나 여자는 「통일 불필요」(9명)가 「10년내 흡수통일」(7명),「10년내 통일불가능」(5명)보다 앞서 주목을 끌었다. 「21세기에 갖고 싶은 직업」으로는 「PD등 방송인」이 8명(남자 4명·여자 4명),「광고인」 6명(남자 2명·여자 4명),「컴퓨터 프로그래머」 6명(남자 4명·여자 2명),「기업인」 6명(남자만),「디자이너」 4명(남자 1명·여자 3명),「교수」 3명(남자 1명·여자 2명),「외환딜러」 3명(남자 1명·여자 2명),「공무원」 2명(여자만),「신문및 방송기자」 2명(여자만),「문학작가」 2명(남자 1명·여자 1명),「회사원」 2명(남자 1명·여자 1명),「변호사」 1명(남자만),「정치가」 1명(남자만),기타 4명(남자 2명·여자 2명) 등으로 나타났고 의사와 판·검사,군인 등은 한명도 없었다.변호사나 판·검사,의사 등은 비인기 직종이 됐고 대신 방송·광고인이나 디자이너등 전문·자유직이 인기직종으로 떠오른 것을 알 수 있다. 「식민통치의 옛 총독부건물인 중앙청 철거작업과 전국 주요 명산에 박혀있던 일제의 쇠말뚝 제거작업등과 연관이 있는 풍수지리사상에 대한 생각」을 묻는 마지막 질문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이므로 존중해야 한다」가 34명,「약간은 일리가 있다」가 13명으로 전체 조사 대상자의 94%쯤인 47명이 풍수지리사상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 강택민 중국 국가주석 국회연설 전문

    ◎한반도 안정은 세계평화의 큰 버팀목/한국과 기초과학·첨단기술 협력 희망 본인은 김영삼 대통령 각하의 초청으로 귀국을 국빈방문하게 된데 대하여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우선 본인은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에게 그리고 여러분을 통하여 한국국민에 중국인민의 따뜻한 인사와 훌륭한 축원을 전해드리는 바입니다. 중·한 양국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이웃나라입니다.우리 양국사이의 우호왕래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우리 양국인민은 2천여년전부터 벌써 왕래하기 시작했습니다.중국의 고대문화는 귀국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귀국의 학자인 최치원 선생님이 쓰신 계원필경)과 17세기에 편집된 동의보감도 우리 양국문화교류사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중국은 11세기에 활자인쇄술을 발명하는가 하면 한국은 13세기에 동활자를 발명했습니다.우리 양국은 동양은 물론 세계의 문명에도 제 나름대로의 기여를 한바 있습니다.세월이 흘러가고 세기도 교체되었습니다. ○개혁·개방정책 성공 오늘 이 강단에 선 본인은 저절로 우리 양국인민우호왕래의 유구한 역사에 대한 생각이 떠오릅니다.우리 상호간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본인은 이 자리에서 중국개혁개방의 정황과 중·한관계발전에 대한 견해를 요약해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새 중국이 창건된후 우리는 심각한 사회변혁과 대규모의 경제건설을 실시함으로써 역사적인 성과를 거두었습니다.지난 1970년대말기에 이르러 경제건설을 중심과제로 확정하면서 개혁개방의 위대한 실천을 시작한 우리는 중국의 실정에 맞는 발전의 길을 찾아냈는데 그것이 바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 입니다. 지난 17년동안의 노력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개혁은 위대한 성공을 이룩하였으며 일련의 중대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우리는 농촌에서 가정도급제를 실시하며 향진기업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우리는 국민경제의 공유제의 유일화구도를 변경시켜 공유제를 주체로 하되 국가소유·집단·개인·사영·외자경제를 비롯한 여러가지 경제성분이 같이 발전하는 새 국면을 마련하였습니다. 우리는 전통적인 계획경제체제를 점진적으로 개변하면서사회주의시장 경제체제의 기본 기틀을 형성시켰습니다.산업구조를 개선하는데 우리는 1차산업을 강화하고 2차산업을 조정제고시키며 3차산업을 힘있게 밀고 나가고 있습니다. 경제성장방식의 차원에서 우리는 조방형의 방식을 집약형으로 전변(전환)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외개방은 점차적으로 확대되어 연해로부터 내륙에로,1차·2차산업으로부터 3차산업에로의 전방위,다차원,다형식의 개방구조가 마련되었습니다.정치체계 차원에서 우리는 사회주의민주와 법제도건설을 큰 힘으로 강화하고 있으며 인민대표대회제도와 중국공산당 영도하의 다당협조와 정치협상제도를 보완하고 완벽화하고 있습니다. 개혁과 개방은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크게 추진시켰습니다.79년부터 94년까지 우리나라의 국민 총생산이 연평균 9.8%의 속도로 성장했고 국민생활이 현저히 개선되었으며 도시와 농촌주민의 수입이 연평균 6.3%로 늘어났습니다.94년에 우리나라의 수출입 총액이 2천3백67억달러에 달했고 95년 9월 현재 재중국실지투자의 외국자금이 누계 1천54억달러가 되었으며 지금 우리의 외화예비도 7백억달러를 넘었습니다. 우리는 국민경제의 제9차 5개년계획과 2010년까지의 장기발전목표를 작성하고 있습니다.2000년에 가면 우리나라 인구가 1980년보다 3억정도나 늘어날 것이지만 우리는 1인당 국민총생산을 80년보다 4배로 늘리며 인민생활의 중류수준을 실현할것입니다.2010년에 가면 우리의 국민총생산이 2000년보다 2배로 더 늘어나고 인민생활수준이 더 한층 향상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개혁개방은 국제사회로부터 광범한 칭찬과 관심을 모으고 있지만 중국정국과 개혁개방정책의 장기적안정 여부에 대하여 걱정하는 인사가 있는가 하면 중국이 강대해지면 다른 나라에 대한 위협으로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인사도 있습니다.본인은 이자리에서 본인의 견해를 말씀해 드리고 싶습니다. ○선린우호정책 견지 우리나라의 정치안정과 정책의 지속성은 충분한 담보가 있습니다.등소평 선생님께서 창시하신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건설 이론은 이미 우리 전국인민의 현대화 건설의 지도사상으로 되었습니다.그리고 우리는 실지에도 맞고 실효있는 일련의 방침과 정책을 제정하였습니다.지난 17년간의 개혁개방은 우리나라의 경제건설을 힘있게 추동시켰으며 인민에 확실한 실지이익을 가져다 주었으므로 인민들로부터 진심으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우리 당은 지난 몇십년의 분투과정에서 튼튼한 지도단체가 형성되고 지금 2세대 중앙지도단체로부터 3세대 중앙지도단체에로의 이양도 이미 순조롭게 실현되었습니다.우리는 경험과 교훈을 언제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전진도중의 모순과 문제를 제때에 발견하고 해결했으며 특히 개혁과 발전,안정 3자간의 관계를 잘 처리하는데 주의를 돌렸습니다.이 모든 것이 충분히 증명한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정치안정과 정책의 지속성이 튼튼한 기초와 믿을만한 보장이 있는 것입니다. 중국이 강대해지면 다른 나라에 대한 위협으로 될 수 있다는 설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입니다.중국경제가 빨리 발전하고 있지만 중국의 인구가 많고 기초가 약하며 1인당 국민소득으로 보면 아직도 수입이 낮은 개도국에 속합니다.중국은 중등발전수준에 도달하고 더나아가서 현대화를 실현하자면 몇세대에 걸친 간고한 노력이 필요하며 장기적으로 안정된 평화적 국제환경이 필요합니다.우리는 독립자주의평화적인 외교정책을 시종일관하게 실시하고 평화공존 5원칙에 기초하여 세계 각국과 우호적으로 지낼 것을 원하며 특히 이웃 나라들과의 선린우호관계의 발전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중국 교훈에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열강들로부터 장기간의 압박과 농락을 당해왔던 중국은 독립과 평화의 소중함을 잘알고 있습니다.중국은 평화공존 5원칙의 발기국의 하나이며 패권주의와 강권정치를 단호히 반대하여 왔습니다.중국은 어찌 자기가 당했던 고통을 남에게 강요하고 어찌 자기가 용인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중국의 군사력은 전적으로 방어적인 것입니다.중국이 대국으로서 군비의 현대화수준과 군사비 지출이 의연히 낮은 수준에 있고 군사비예산이 국민총생산의 1·5%에 불과하며 세계 대다수 국가보다 낮은 편에 있습니다. 중국은 1985년에 이미 1백만명의 병력을축감하였습니다.우리는 많은 군수업체를 민수업체로 전환시켰으며 지금 있는 군수업체의 총생산의 76%는 민수제품입니다. 우리가 거듭 천명한바와 같이 중국은 영원히 군비경쟁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확장을 하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패권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세계의 식견 높으신 분들은 중국의 발전이 세계의 안정에 유리하고 중국의 강대가 평화역량의 성장으로 된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우리는 유엔 창건 50주년을 경축하였습니다.21세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평화와 발전은 여전히 세계의 기본 과제로 되어있습니다.보다 더 아름다운 새 세기를 맞이하기 위하여 인류사회는 세계평화를 수호하고 공동발전을 도모하는데 반드시 같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아·태지역의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고 활기에 차 있으며 국제적인 영향력도 날로 확대되고 있습니다.중·한 양국이 위치하고 있는 동북아지역은 아시아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국제에서도 광범한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우리는 이 지역의 장기안정을 진심으로 바라며 역내 모든국가가 화목하게 지내고 번창할 것을 충심으로 희망합니다.중국은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이며 언제나 남의 나라의 주권을 존중하고 남의 나라의 내정을 간섭하지 않으며 어떠한 사리도 추구하지 않습니다.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는 것은 중국이 반도문제를 취급하는 데의 기본준칙입니다. 한반도의 긴장 정세를 완화하고 반도문제를 적당하게 해결하는 것은 남북 쌍방인민들의 공동이익에 부합되고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정에도 유리합니다.한반도의 가까운 이웃으로서 중국은 반도 남북쌍방이 접촉과 대화를 통하여 신뢰를 점차적으로 증진하고 관계를 개선하며 나중에는 민족의 화해와 나라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할 것을 진심으로 희망하고 있습니다. ○경젱무역 교류 증대 우리 양국은 인접하고 있는 지리적 우세와 유사하고 유구한 문화전통을 갖고 있습니다.우리 양국은 외래 침략과 농락을 당한 같은 역사적 운명이 있고 50년전에 있은 세계 반파쇼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제나름대로의 공헌을 하였습니다.우리 양국은 오늘 다같이 중요한 발전시기에 처해있고 경제 고속성장의 강한 추세를 보유하고 있습니다.중·한 수교후의 3년 남짓한 동안에 정치·경제·과학기술·문화등 여러분야에서의 양국간의 우호협력관계가 빨리 발전하며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양국간의 경제무역협력의 정세는 좋고 교역량이 매해 50%가량의 속도로 늘어나며 금년도 양국의 교역량은 1백50억달러를 넘을 것으로 예견되고 있습니다. 양국은 서로의 중요한 무역 파트너로 부상하였으며 중국은 한국의 가장 중요한 해외투자대상국으로 되었습니다.경제발전의 성장기에 처해있는 우리나라는 투자와 소비의 수요가 많으며 12억 인구의 커다란 시장을 갖고 있습니다.다년간에 고속성장해온 한국경제는 기타 국가와 평등하게 경쟁할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기초과학과 첨단기술등 영역의 연구와 응용,개발에서 우리양국은 제각기의 장점을 갖고 있고 양국경제는 매우 강한 보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중·한 쌍방은 「평등호혜·우세보완·성심협력·공동발전」의 원칙에 따라 양국의 경제무역협력을 강화한다면 할 수 있는 일이많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양국 경제의 번영과 선린우호관계를 밀고나가는 강한 추동역으로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고대 사상가인 공자가 『도덕이 있는 사람은 동반자가 반드시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본인은 중·한 쌍방이 평화공존 5원칙에 기초하여 신임을 앞세우고 서로 진심으로 대하면 반드시 선린우호와 호혜협력관계를 부단히 발전확대시켜 양국인민에게 복지를 가져오고 아·태지역과 세계의 평화와 발전을 위하여 자기의 기여를 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감사합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