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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꽂이]

    ●강경애, 시대와 문학(김인환 등 엮음,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강경애 탄생 100주년 기념 남북 공동 논문집.1906년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난 강경애는 1932년 간도로 이주한 뒤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부자’‘채전(菜田)’‘소금’ 등의 단편소설을 남겼다. 민족적·계급적·성적 억압에 고통받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한 강경애 문학의 일관된 민중연대성은 작가의 민주체험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강경애 문학의 탈식민성과 프로문학’‘사회주의적 여성주의와 여성 서사의 실현’등의 글이 실렸다.1만원.●구운몽(김만중 지음, 림호권 고쳐 씀) 조선 후기 남녀와 상하를 아울러 가장 널리 읽힌 소설로 손꼽히는 작품. 하늘에서 불도를 닦던 주인공 성진이 금욕적인 계율을 어겨 지옥에 떨어졌다가 다시 인간세상에 양소유로 태어나 온갖 부귀공명을 누린다는 내용이다. 성진과 여덟 선녀가 꾼 화려한 봄꿈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다. 겨레고전문학선집 가운데 하나.2만원.●나가사키(요시다 슈이치 지음, 김영미 옮김, 밝은세상 펴냄) 나가사키에서 나고 자란 작가의 경험이 담긴 성장소설. 전후 나가사키 지역에서 번창했던 야쿠자 가문인 미무라가의 몰락 과정을 통해 만남과 이별, 인간의 상실감 등을 섬세하게 풀어냈다. 작가는 ‘파크 라이프’로 순수문학상을 대표하는 아쿠타가와상을,‘퍼레이드’로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대중소설에 수여하는 야마모토 슈고로상을 받은 일본 문단의 차세대 대표작가.9000원.●렘브란트, 마지막 그림의 비밀(알렉산드라 구겐하임 지음, 모명숙 옮김, 지식의 숲 펴냄)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의 삶을 그의 대표작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매개로 조명한 역사소설. 렘브란트를 연구해온 예술사가이기도 한 작가는 ‘그림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과 그 이면의 진실은 얼마나 일치할까.’라는 주제 아래 렘브란트 생존 당시의 암스테르담과 그의 작품세계를 다뤘다.1만원.●적패(정명섭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을지문덕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추리소설. 고구려 시조 추모성왕을 모시는 신성한 시조묘에서 황궁의 늙은 관리가 시체로 발견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을지문덕은 추모성왕의 사당을 지키는 당주. 그에게 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마을사람들을 모두 처형하겠다는 엄명이 떨어진다. 을지문덕은 현장에서 발견한 호적패와 특이한 발자국을 토대로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자신이 존경해온 인물임을 알게 된다. 전2권, 각권 8500원.
  •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 10만 포로의 눈물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 10만 포로의 눈물

    조선은 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비참한 환란을 겪어야 했을까. 한마디로 17세기초 명·청 교체기의 격랑 속에 조선 지배층이 국제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2007년은 병자호란이 끝난 지 370년이 되는 해이다. 북핵 문제를 놓고 6자 회담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듯,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안팎의 정세는 예측불허다. 우리가 과연 북한은 물론 미국과 중국·러시아·일본 등과의 숨가쁜 외교전에서 북핵이나 자유무역협정(FTA) 등의 난제를 슬기롭게 풀어가며, 미래를 당당하게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 병자호란을 살피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자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에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되짚어보기 위해서이다. 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의 눈을 통해 ‘병자호란´의 안과 밖을 살펴본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이 매주 목요일 연중기획으로 독자를 찾아간다. 편집자 주 ●준비 없이 전쟁을 선택하다 1636년(인조 14년) 봄.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해 3월, 청의 수도인 선양(瀋陽)에서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황제로 즉위한다는 소식이 조선에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척화파(斥和派) 신료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 칭호는 가당치도 않다.”며 “정묘년(丁卯年,1627년)에 그들과 맺은 맹약을 파기하고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이어 ‘황제 운운’하는 내용을 담은 국서를 가져온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의 목을 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주화파(主和派) 신료들은 “청이 명을 능멸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진 현실을 인정하여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사신을 박대해서도 안된다.”고 맞섰다. 최종 결정권자인 국왕 인조는 양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척화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곧 이어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조정이 청과 맺은 맹약을 파기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장차 발생할지도 모르는 청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내용으로 인조가 평안감사에게 보내는 극비교서(敎書)를 가져가던 금군(禁軍) 전령이 용골대 일행에게 교서를 빼앗긴 사건이었다. 자신의 목을 치라는 험악한 분위기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고 있던 용골대 일행에게, 다른 곳도 아닌 조선 영토 안에서 국왕의 밀찰(密札)을 빼앗긴 것이다. 척화냐, 주화냐를 놓고 정쟁만 무성했던 와중에 정작 중앙에서 지방으로 이어지는 정보 전달체계가 부실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1636년 12월6일. 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질풍같이 내달렸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병력을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大路) 바깥에 위치한 산성들 속으로 집결시켰던 조선군은 청군의 침입 사실을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청군이 조선군과의 접전을 피해, 곧장 서울로 진격하는 속전속결의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임진강 이북의 방어를 책임진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청군이 침입했다는 최초의 보고를 묵살하고 조정에 제때 알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적이 다가오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해 버렸다.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 양철평(良鐵坪-지금의 은평구 녹번동)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진 12월14일. 서울 도성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아이들과 노약자들, 부녀자들의 울부짖음속에 피란행렬이 줄을 이었고, 조정 신료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인조는 왕실 가족들과 종묘에 모셔져 있던 역대 국왕의 신주(神主)들을 강화도로 먼저 옮기도록 했다. 이어 자신도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김포에서 강화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해 버렸다.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남대문까지 갔다가 강화도 행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돼지´에게 무릎을 꿇다 1637년(인조 15년) 1월 중순. 준비 없이 들어왔던 남한산성의 상황은 참혹했다. 청군이 산성을 완전히 포위했고, 삼남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를 차단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군량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청군은 연일 서양식 최신 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쏘아대면서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조선 조정이 목이 빠져라 고대하던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혹독한 추위 때문에 동상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성을 지킬 의욕을 잃은 장졸들 가운데는 항복하자고 시위를 벌이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그 와중에도 신료들은 척화와 주화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인조는 눈물을 보이며 대책을 호소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1월26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청군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여 수전(水戰)을 치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강화도 조선군 지휘부의 방심이 불러왔던 결과였다. 청군은 이에 앞선 1월22일, 조선에서 노획한 선박에 홍이포까지 싣고 강화도에 대한 상륙작전을 벌였다. 조선군이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피란했던 왕실 가족과 중신들은 전부 포로가 되었다. 강화도의 함락 소식은 남한산성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1월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三田渡)로 향했다. 이윽고 그는 높다란 수항단(受降壇) 위에 앉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바쳤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번 큰절을 올리고, 한번 절할 때마다 세번씩 머리를 바닥으로 조아리는 오랑캐식 항복 예식이었다. 원래 조선의 지식인들은 홍타이지를 포함한 여진족들을 인간이 아닌 ‘금수(禽獸)’로 경멸했다. 일부 인사는 심지어 청 태종을 ‘황태극(皇太極)’ 대신 홍태시(紅泰豕)라고 불렀다.‘붉고 큰 돼지’란 뜻이다. 그런데 인조가 ‘인간’도 아닌 ‘돼지’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청 태종은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은 뒤 사로잡은 포로들을 이끌고 철수길에 올랐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또 다른 다짐을 받아냈다. “내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 단 한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뒤에 도망쳐 오는 포로는 조선 조정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무시무시한 약조였다. 날이 갈수록 영토는 넓어지는데 인구가 부족했던 청은 조선인 포로들을 보배로 여겼다. 그들은 훌륭한 노동력이자 값을 받고 팔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청은 10만이 훨씬 넘는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인조로부터 이같은 다짐을 받아냈던 것이다. 훗날 실제로 청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왔던 포로들은 이 ‘약조’ 때문에 청으로 다시 박송(縛送)되었다. 그리고 그 포로들은 청군에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에 신음해야 했다. 호란 후에도 인조는 어렵사리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의 통곡소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누가 안추원의 비극을 책임질 것인가? 1664년(현종 5년). 항복 후 27년이 지나 한 남자가 청에서 도망쳐왔다. 마흔한살의 안추원(安秋元)이 그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개성 부근에서 살았던 열세살의 소년 안추원은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란했다. 하지만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될 때 그는 청군의 포로가 되었고, 선양으로 끌려갔다. 그는 선양에서 한족 출신 대장장이에게 팔린 신세가 되었다. 호란이 끝난 뒤, 포로로 끌려왔던 조선인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가 몸값을 치르고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하지만 안추원은 그렇지 못했다.1644년 명이 멸망하자 청은 베이징에 입성한다. 베이징을 새로운 수도로 정한 청 조정은 선양의 거주민들에게 베이징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물한살이 된 안추원은 그의 주인에게 이끌려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18년이 지난 1662년(현종 3). 서른아홉의 장년이 된 그는 조선으로의 탈출을 결행한다. 산해관(山海關)을 통과하여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야 하는 일생일대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산해관에서 청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베이징으로 송환된 그는 이마에 글자가 새겨지는 묵형(墨刑)에 처해졌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비원(悲願)은 처절했다. 다시 2년이 지난 1664년, 안추원은 마침내 청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정확히 27년 만의 귀향이었다. 그가 사선을 뚫고 조선에 도착했을 때 조정은 고민에 빠졌다. 여전히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금지하고 있던 청의 존재 때문이었다. 하지만 27년만에 목숨을 걸고 탈출한 자국 백성을 어찌 차마 돌려 보내겠는가. 청이 알까봐 쉬쉬하는 가운데 안추원은 내륙으로 옮겨졌다. 안추원은 고향을 찾았다. 하지만 고향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자호란으로 그의 가족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목숨을 걸고 다시 찾은 고향이었지만 그는 당장 생계조차 막막했다. 조정은 그를 받아주었을 뿐 생계대책을 마련해 주지는 않았다. 귀향의 감격도 잠시 뿐 배고픈 그에게 아무런 피붙이도 남아 있지 않은 고향은 그저 또 다른 이역이었을 뿐이다. 안추원은 절망 끝에 베이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청으로의 귀환은 탈출보다 훨씬 위험했다. 1666년(현종 7). 그는 결국 고국을 탈출하려다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후 그가 어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처형되었을 것이다.2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던 그가 온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백성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 영의정까지 올라 안추원의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하지만 위정자들의 오판에 떠밀려 나락으로 떨어진 그의 비극은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할까? 병자호란을 통해 수많은 ‘안추원’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비극’을 불러왔던 최고책임자인 인조는 왕위를 유지했고, 책임을 져야할 신료들의 상당수도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전쟁 발생 사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적과의 싸움마저 회피하여 국왕과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은 인조 말년 최고위직인 영의정까지 올랐다. 오늘날. 병자호란의 참상을 떠올리면서 현실을 돌아본다. 꼭 10년전 ‘IMF 외환위기’가 불러온 칼바람 속에서 스러져갔던 수많은 민초들. 비극을 초래한 책임자들의 과실 또한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수많은 생령들을 도탄에 빠뜨려 놓고도 자신의 과실을 책임지지 않는 정치인들의 ‘무책임’은 시공을 초월하여 유전되는 것일까. 비극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내지 못하면 또 다른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소용돌이치고 정치권의 난맥상과 민생의 어려움 때문에 걱정이 쌓여가고 있는 오늘, 370년전 병자호란의 비극을 되돌아보는 마음은 여전히 착잡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교수> ●필자 한명기 교수는 ▲1962년생 ▲1985년 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 졸업 ▲1997년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졸업(문학박사) ▲1998∼2001년 서울대 규장각 특별연구원 ▲현재 명지대 사학과 교수. 계간 ‘역사비평’ 편집위원 ▲논저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광해군’(2000) 외 다수 ●청태종 송덕비(위 사진)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에 강요해서 세운 청 태종 송덕비. 병자호란의 전말을 적었다. 사진은 일제시대에 촬영된 것으로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삼전도에 있었다. 현재도 삼전동에 있으며 사적 101호로 지정돼 있다.
  • 佛畵 명칭에 ‘탱’자 안쓴다

    탱화(幀畵)는 불화(佛畵)만큼이나 친숙한 표현이다. 그럼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이 당분한 불화에 ‘탱’이나 ‘탱화’라는 명칭을 쓰지 않기로 결정해 그 배경에 눈길이 모아지고 있다. 앞서 중앙박물관은 지난 8일 미술사 전시용어 개선작업 결과를 공개하면서 불화의 제목에 나오는 ‘탱’을 ‘도(圖)’로 고치기로 했다고 밝혔다. 보통 ‘정’으로 읽는 ‘幀’을 왜 ‘탱’으로 읽는지 명확한 근거를 찾아내지 못한 데다, 불화에서 ‘탱’이 같은 뜻으로만 쓰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앙박물관은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불화를 탱화로 부르게 됐는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연구가 극히 미진하다고 설명한다. 탱화가 티베트의 탕카(Thang-ka)에서 유래했다는 추정도 있으나 현재로서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 ‘탱’의 의미도 모호하다. 일본 네즈(根津)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불화에서 보이는 ‘신화성미타일탱(新畵成彌陀一幀)’이라는 문구에서 ‘탱’은 ‘서화를 세는 단위’로 본다. 그러면 이 문구는 ‘아미타여래도 한폭을 새로 그렸다.’는 뜻이 된다. 그런가 하면 17세기 이후 조선시대 불화에는 장곡사 아미타후불탱에서처럼 ‘탱’이라는 글자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여기에 나오는 ‘탱’은 ‘거는 그림’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가 밝혀질 때까지 불화에서 ‘탱’을 쓰지 않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사불회탱은 ‘설법하는 네 부처, 사불회도’로 ▲제석탱은 ‘제석과 여러신, 제석신중도’ ▲괘불탱은 ‘야외의식용 불화, 괘불도’ ▲산신탱은 ‘산신과 호랑이, 산신도’로 쓰기로 했다. 중앙박물관은 이번 미술사 용어 개선작업에서도 탱화의 명칭 문제를 명확히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더불어 족자형, 액자형, 두루마리형의 불화와 변상화 등을 구별하는 명칭은 무엇으로 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도 지속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슈퍼루키 김송희 대박

    올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신인왕 0순위로 꼽히는 김송희(18)가 10억원의 후원 계약 ‘대박’을 터뜨렸다. 지난해 LPGA 2부 투어에서 최연소 우승(17세10개월24일)과 상금왕, 다승왕, 신인왕을 싹쓸이한 김송희는 9일 서울 서초동 휠라코리아 사옥에서 2년에 10억원의 스폰서 계약을 맺었다. 최근 LPGA투어에서 몸값 하락세가 뚜렷한 상황에서 휠라코리아가 루키에게 이처럼 거액을 베팅한 것은 그의 잠재력을 방증한다.‘얼짱’ 홍진주(24)가 최근 SK와 맺은 스폰서 계약도 3년간 9억원에 그쳤다. 국가대표를 지낸 뒤 2005년 미국으로 건너간 김송희는 11월 LPGA 2부 투어인 퓨처스투어 퀄리파잉스쿨에 1위로 합격했지만 ‘만18세가 안 되면 투어에 나설 수 없다.’는 규정 탓에 투어 참가가 불투명했다. 그러나 투어 사무국이 김송희의 탄원을 받아들여 연령 제한을 17세로 낮춰 경기에 임할 수 있었다. 김송희는 지난해 4월 루이지애나클래식에서 1952년 사라소타오픈에서 말린 해지가 세운 최연소 우승 기록(18세 14일)을 갈아치웠다. 이어 4승을 보태 투어 최다승 타이와 7차례 ‘톱10’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올렸고 상금왕 자격으로 올해 투어 전경기 출전권을 얻었다. 김송희는 “목표는 신인왕이지만 우승뿐만 아니라 꾸준한 성적을 내는 데도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조인식 뒤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출국한 김송희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힐튼헤드아일랜드의 골프아카데미와 LA를 오가며 훈련하다 다음달 하와이에서 열리는 LPGA 개막전인 SBS오픈에 출전한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녹색공간] 손 씻으셨어요?/박정임 KEI 책임연구원

    올 겨울 감기가 유난히 심하다. 필자도 최근 며칠 동안 감기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연말에 우리 딸아이가 감기와 중이염에 걸렸는데 이게 나에게도 전염된 것 같았다. 한집에 살면서 수건을 함께 쓰고 밥을 함께 먹는 처지에 감기 바이러스가 나만 피해가는 요행을 바랄 수는 없었다. 지금은 상식이지만, 질병의 제1 원인이 병원체라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17세기 레벤후크가 현미경으로 세균을 관찰하면서부터 질병이 병원균 때문에 발생한다는 가설이 힘을 얻었다. 하지만 19세기까지도 유럽의 대다수 교양인들은 질병은 ‘나쁜 공기’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믿었다. 병원체 때문에 질병이 발생한다는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병원균에 오염된 물을 마셔 보인 ‘간 큰’ 지식인도 있었다. 이들은 질병을 치료하려면 그 원인인 나쁜 공기를 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 대포를 쏘거나 불을 질러 연기를 냈다. 연기가 공기 중 유해 병원체를 어느 정도 소독하는 작용도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지역의 전염병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병원체가 질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을 때에도 인류는 이처럼 병원체를 제거함으로써 질병을 줄일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세기 영국의 위생개혁 운동이다.1848년 영국에 두 번째로 콜레라 창궐이 우려되자, 채드윅은 하수관로를 정비하여 오물을 멀리 떨어진 장소로 보내고 급수관를 설치하였다. 덕분에 콜레라뿐만 아니라 장티푸스나 여러 수인성 전염병도 격감되었다. 이러한 환경위생 개혁조치를 여러 나라에서 채택한 덕택에 인류의 평균 수명은 비약적으로 증가되었고,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에 많은 인구가 전염병의 공포 없이 모여 살 수 있었다. 본격적인 도시산업화를 가능하게 한 역사적 사건으로 위생개혁 운동을 꼽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개인위생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질병을 일으키는 이유가 하도 다양해서 무엇이 가장 큰 원인인지 알 수 없더라도 개인적 수준의 위생 관리로 상당부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손씻기부터 시작하자. 손은 신체부위 중에서도 세균에 가장 많이 접촉하는 부위다. 감기나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같은 바이러스는 물론 식중독균 등 각종 세균도 곧잘 손을 거쳐 사람 몸으로 들어간다. 전염성 질병의 약 70%는 손씻기를 통해 예방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 질병관리본부는 구체적인 경우를 예로 들어 손을 씻도록 홍보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5년 여름 ‘범국민 손씻기 운동본부’가 출범하여 손씻기 교육과 홍보활동을 하고 있다. 손씻기 운동본부에서 2005년 10월 실태조사한 결과가 흥미롭다. 대부분의 국민이 손씻기의 중요성을 알고 있고, 전화설문에서도 응답대상자의 94%가 공공화장실 사용후 손을 씻는다고 응답하였다. 그러나 실제 관찰한 결과 63%에 불과했다고 한다. 남의 눈치를 보며 손을 씻는 경향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씻기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까. 뭐니 뭐니 해도 습관이 되지 않아서이다. 그러니 우리 아이들에게 어릴 적부터 손씻기가 습관이 되도록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아이들은 면역력이 약하고 위생관념이 부족하기 때문에 손씻기는 이들의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 우리 딸아이에게 손씻기를 잘 하면 10번 걸릴 감기를 3번만 걸리게 된다고 가르쳤다. 씻어야 할지 씻지 않아도 될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경우에는 무조건 씻으리라 이르고 있는데, 딸아이가 볼멘소리를 한다.“학교 화장실엔 찬물만 나오고 비누도 없고 수건도 없어요.” 우리 아이들의 평생 건강 습관을 길러줄 수 있도록 올해부터는 학교에서도 손을 제대로 씻을 여건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주인 선발대회를 하는 나라에 어울리는 소망인지는 모르겠다. 박정임 KEI 책임연구원
  • [2007 이들을 주목하라 (3)] 열일곱살 유망주 최진수

    지난해 끝자락 2∼3개월은 시련의 시기였다. 허리 부상 탓에 그렇게 가고 싶던 브라질 전지훈련에 함께 가지 못했다. 미니홈페이지에 남겨놓은 ‘힘들다…그래도…더욱 노력할 것이다.’라는 짧은 글에서 마음고생이 그대로 묻어난다. 몸보다 가슴이 더 아팠지만 “이참에 부상을 뿌리뽑자.”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오전에는 물리치료를, 오후에는 웨이트트레이닝을 거듭했다. 이제 완전히 나았다고 활짝 웃은 그에게 어김없이 새해는 밝아왔다. 한국 청소년(17세 이하)축구대표팀 미드필더 최진수(17·울산 현대고).“프랭크 램퍼드를 닮고 싶어요.”라고 말할 정도로 공격형 미드필더에 매력을 느낀다. 램퍼드는 잉글랜드 대표팀과 프리미어리그 명문 첼시의 중원을 책임지고 있는 세계적인 스타. 수비는 물론 공격과 자로 잰 듯한 중거리포가 일품이다. 진수도 마찬가지. 중학교 초반까지 수비수였다가 미드필더로 올라온 진수의 플레이는 아직 ‘미완성’이지만 칭찬이 자자하다. 박경훈 청소년대표팀 감독은 “나이답지 않게 영리한 플레이를 한다. 넓은 시야에 패싱력도 좋다. 게다가 중거리슛도 일품”이란다. “다른 건 몰라도 킥 하나만큼은 자신 있다.”는 진수도 프리킥 등 세트피스를 전담하며 미드필더로 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물론 어린 나이라 체력과 순간 파워를 보강해야 한다. 램퍼드의 등번호는 8번. 대표팀에서 진수는 7번이다.8번에 욕심이 날 법하다. 하지만 “번호가 아니라 실력이 더 중요하죠. 부족한 점을 하나하나 끌어올리고 싶어요.”라며 어른스럽게 말한다. 국내에서 좋아하는 선배 역시 차세대 중원사령관 김두현(성남)이다. 오락을 해도 축구를 소재로 한 ‘위닝일레븐’을 즐긴다는 진수는 두 살 위 형을 따라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공을 찼다. 재능을 인정받아 2002년부터 대한축구협회 유소년 육성시스템을 통해 한국축구의 미래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14세 대표팀에선 주장을 맡을 정도로 리더십도 있다. 또 2004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개최한 유소년 축구대회 세계 8강까지 진출하는 등 일찌감치 큰 물에서 놀아본 경험이 예사롭지 않다. 부상의 두려움을 떨친 진수는 4일 17세 대표팀에 소집된다. 제주도에서 훈련을 한 뒤 오는 13일 호주 시드니로 떠난다.4개국 대회를 통해 호주, 일본, 중국의 또래들과 기량을 저울질한다. 모두 오는 8월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축구연맹(FIFA) 17세 이하 월드컵(미니월드컵)을 향한 담금질이다. 한국은 2회 대회 때 8강에 올랐으나 이후 7회 연속 예선에서 탈락했다. 개최국 자격으로 나서는 올해는 사상 최고 성적을 노린다. 뚜렷한 이목구비의 진수에게 이번 대회를 통해 ‘차세대 꽃미남 스타’로 뜰 것 같다고 하자, 진수는 “처음 듣지만 기분이 좋네요.”라면서도 이내 “목표인 결승에 반드시 오르겠습니다.”라며 의지를 다졌다. ■ 최진수의 모든 것 출생 90년 6월17일 안산생 체격 176㎝, 65㎏ 혈액형 B형 가족관계 2남 중 차남 학력 울산 현대중·고 존경하는 선수 김두현 별명 램퍼드, 치와와 취미 노래부르기, 영화보기 스트레스 해소 위닝일레븐(게임) 경력 14세 유소년대표, 동아시아 유스 페스티벌 우승,16세 대표, 도요타컵 우승, 아시아선수권 8강(2006)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열린세상] 사담과 조지/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언젠가 르몽드지에서 프랑스에서 행해진 마지막 공개처형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 사진에서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처형이 행해진 연도였다. 프랑스에서조차 20세기 중반까지 버젓이 공개처형을 했던 모양이다. 당시에는 그게 당연하게 여겨졌겠지만, 인상파와 야수파, 다다와 큐비즘을 낳은 예술의 도시 한복판의 기요틴은 오늘날의 눈에는 매우 초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하긴, 그 잔혹한 그 기요틴도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인도주의’의 도구가 아니었던가. 미셸 푸코가 묘사하는 17세기의 처형장면은 우리를 전율케 한다. 그때 처형은 단번에 집행되지 않았다. 사형수들은 피부가 벗겨지고, 안구가 뽑히고, 온 몸이 으깨지는 고통을 하루종일 당한 후 지는 해와 더불어 비로소 마지막 자비의 칼날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비하면 순식간에 목숨을 끊어주는 기요틴은 얼마나 인도주의적인가?처형이 잔혹극으로 연출되던 시절, 관객들의 성정도 지금과는 달랐다. 공동체의 안녕을 해친 범법자에게 가하는 정의의 심판이 그들을 심히 흡족하게 했던지, 사형수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면 그들은 크게 즐거워하며 환호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직도 이 바로크적 성정을 가진 관객들이 있나 보다. 얼마 전 어느 독재자가 처형을 당했을 때, 지구촌의 일각에서 기뻐 환호성을 지른 나라들이 있었다. 후세인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자 미국, 영국, 호주에서는 일제히 크게 반기는 성명을 냈다. 반면 유럽연합에 속하는 국가들은 일제히 그의 처형을 비난하고 나섰다. 앵글로색슨 계열의 나라에서 ‘정의’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유럽의 국가에서는 ‘야만’이라 느끼는 모양이다.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말대로 잔인성의 포기가 ‘문명화 과정’에 수반되는 현상 중의 하나라면, 같은 제1세계에 속하는 나라들 사이에도 문명화의 정도에는 차이가 존재하는 모양이다. 오늘날 문명화는 세계 3분의2의 국가에서 사형제가 폐지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설사 사형제를 유지하는 나라에서도 지금은 사형을 비공개로 집행한다. 이렇게 잔인함을 감추는 것 역시 문명화의 한 단계. 그리하여 우리는 중국이나 북한에서 행해지는 공개처형을 이미 ‘야만적’이라 느낀다. 그런데 후세인의 처형 장면은 어떤 이유에선지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다. 듣자 하니 저항세력의 기를 꺾어놓을 의도에서 행한 조치라고 한다. 목에 밧줄을 건 후세인의 사진을 보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이게 과연 죽은 독재자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 때문일까? 형리들은 사형대 위의 후세인을 조롱했다. 형장으로 향하는 사형수에게 조롱을 퍼붓는 관습. 여기에는 예수가 유대의 왕을 자처하던 시절이나 후세인이 이라크의 대통령을 자처하는 시대나 변함이 없는 모양이다. 수천 년이 흘렀어도 인류의 잔혹성의 정도에는 이렇게 큰 차이가 없다. 착잡함은 이 사실을 확인하는 우울함에서 온다. 시아파 형리가 부족의 이름으로 수니파 대통령을 모욕한다. 이것은 근대적 의미의 법 집행이 아니라 사실상 전근대 사회의 종파적 린치에 가깝다.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이었던 자의 처형 장면을 언론에 공개했다. 이는 트로이의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문 앞에서 전차에 헥토르의 시신을 매달아 질질 끌고 다니던 아킬레스 행위를 연상시킨다. 적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적장의 목을 베어 효시하던 고대의 관습이 이렇게 카메라와 비디오를 통해 부활했다. 세계인들은 사담 후세인이 왜 죽어야 했는지 안다. 그리스도가 온 인류의 죄를 사해주기 위하여 죽었다면, 사담 후세인은 딱 한 사람, 조지 부시의 죄를 사하기 위해 죽어야 했다.“사담이 없어져서 세계가 더 좋아졌다.” 부시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후세인의 처형으로 세계의 상태는 ‘더 좋다’로 바뀌었으니, 인류에게 남은 과제는 하나. 조지마저 사라져주면 가장 좋은 상태가 되지 않을까?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 추사 김정희, 중인들과 만나다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 추사 김정희, 중인들과 만나다

    시곗바늘을 조선 후기,200여년 전으로 돌려보면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들을 오늘에 새롭게 접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전문기술자 신분인 중인(中人), 즉 위항인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위항(委巷)은 좁고 지저분한 거리, 현재의 골목길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한양의 창덕궁을 중심으로 옥인동, 통의동, 누하동 등의 인왕산 자락과 청계천 언저리에는 궁중 기술자들이 살았다. 이들은 60여개의 시사(詩社)를 만들어 ‘위항문학’을 꽃피웠다. 특히 이들은 서양의 문물을 가장 먼저 접한 신지식인들이었다. 조선 후기 근대화로 가는 과정에서 이들의 실용주의적 역할이 지대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과연 이들이 어떻게 살았으며, 또 그 발자취들이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이들의 문화를 재발견하는 것 또한 의미있는 일이다. 연세대 허경진 교수의 눈을 통해 연중기획으로 이들의 궤적을 추적해 본다. 조선 최고의 서예가이자 실학자인 추사 김정희는 누구 못지않게 19세기초 중인들과 교류를 가진 양반 선각자였다. 그는 중인들의 모임터인 송석원의 글씨를 써주는가 하면 조수삼·이상적·오경석과 같은 중인들과 교류를 갖기도 했다. 한양 인왕산의 서당 훈장 천수경(千壽慶·1758∼1818)은 집안이 가난했지만 글 읽기를 좋아하고, 시를 잘 지었다. 옥류천(玉流泉) 위 소나무와 바위 아래에 초가집을 짓고, 호를 송석도인(松石道人)이라고 했다. 아들 다섯의 이름은 일송(一松), 이석(二石), 삼족(三足), 사과(四過), 오하(五何)이다. 첫째 소나무와 둘째 바위는 자기 집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준 것이고, 셋째는 아들 셋이면 넉넉하다는 뜻에서 ‘삼족’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아들 하나가 더 생기자 너무 많다는 뜻으로 ‘과(過)’라 했는데, 하나가 더 생기자 “이게 웬 일이냐.”는 뜻으로 ‘하(何)’라고 했다. 창덕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양반 사대부들이 살았고, 그 오른쪽 인왕산 자락과 청계천 일대에는 역관이나 의원 같은 중인, 경아전들이 많이 살았다. 지대가 높고 외져서 집값이 쌌기 때문에, 가난한 서리들이 관청과 가까운 인왕산쪽으로 올라와 살게 된 것이다. 인왕산의 물줄기는 누각골(지금의 누상동)과 옥류동(지금이 옥인동)에서 각기 흘러내리다가 지금의 옥인동 47번지 일대에서 만났다. 깊은 산속에서 옥같이 맑게 흐르는 이 시냇물을 옥계(玉溪)라고 했다. 인왕산에서 태어나 함께 자란 친구들이 옥계 언저리에서 자주 만나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놀았는데,1786년 7월16일 옥계 청풍정사에 모여 규약을 정하고 시사(詩社)를 결성했다. 달 밝은 밤 솔숲에 흩어져 앉아 술을 마시며 거문고를 뜯고 시를 읊다가, 정기적으로 모여 시를 지으며 공동체를 구성하자는 것이다.13명이 모여 이날 지은 글들을 모은 ‘옥계사(玉溪社)’ 수계첩에 ‘차서(次序)’가 실려 있어 구성원의 이름과 나이를 알 수 있다. 장혼은 발문에서 “장기나 바둑으로 사귀는 것은 하루를 가지 못하고, 술과 여색으로 사귀는 것은 한 달을 가지 못하며, 권세와 이익으로 사귀는 것도 한 해를 넘지 못한다. 오로지 문학으로 사귀는 것만이 영원하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문학으로 사귀는 것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이들은 한달에 한번씩 모였고, 그때마다 제목을 정해 시를 지었다. 주로 정월 대보름, 삼짇날, 초파일, 단오, 유두(6월보름), 칠석, 중양절(9월9일), 오일(午日), 동지, 섣달그믐에 모였다. 또 기쁘거나 슬픈 일이 생기면 돈을 모아 축하해 주기도 했다.1791년 6월 보름날에도 옥계에 모여 시를 지었는데, 달밤에 술 마시며 시 짓는 모습을 이인문(李寅文·1745∼1821)이 그림으로 그렸다. 솔숲 큰 바위에 ‘松石園’이라 쓴 곳이 바로 이들의 모임터인데, 이날은 풍악 없이 조촐하게 모였다. 제시(題詩)는 여든을 바라보는 마성린(馬聖麟·1727∼1798)이 썼는데, 옥계사 동인이 아니라 선배격인 백사(白社) 동인으로 격려한 것이다. ●당대 문인들 송석원서 교류하다 승문원(承文院·외교문서 관장) 서리였던 마성린은 살림이 넉넉했기에 위항(委巷) 시인들의 후원자 노릇을 했다. 평생 인왕산 일대를 떠나지 못하고 몇차례 집을 옮겨가며 살았다. 그는 늘그막에 ‘평생우락총록(平生憂樂總錄)’이라는 자서전을 지었다. 제목 그대로 기쁘고 슬픈 한평생이다. 그의 집에 수많은 시인 화가 음악가들이 모여 풍류를 즐겼으며, 이제 친구들이 다 세상을 떠나자 후배들의 시첩에 와서 그림에 글씨를 써주며 격려했다. ‘송석원시사’가 장안의 화제가 되자, 문인들이 이 모임에 초청받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해마다 봄가을이 되면 남북이 모여 큰 백일장을 열었는데, 남쪽의 제목은 북쪽의 운(韻)을 쓰고, 북쪽의 제목은 남쪽의 운을 썼다. 날이 저물어 시가 다 들어오면 소의 허리에 찰 정도가 됐다. 그 시축을 스님이 지고 당대 제일의 문장가를 찾아가 품평받았다. 장원으로 뽑힌 글은 사람들이 베껴 가면서 외웠다. 무기를 가지지 않고 흰 종이로 싸우는 것이라서 백전(白戰)이라고 했는데, 순라꾼이 한밤중에 돌아다니던 사람을 붙잡아도 “백전에 간다.”고 하면 놓아 주었다. 송석원시사가 커지자, 천수경이 60세 되던 해에 당대의 명필 추사 김정희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추사는 송석원시사가 결성되던 해에 태어났는데, 어느새 그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이름이 났던 것이다. 추사의 집은 충남 예산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이 잘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인왕산 건너편의 통의동에 주로 살았다. 수령 600년의 통의동 백송(白松)이 10여년 전에 수명을 다해 쓰러졌는데, 이 나무가 바로 추사의 집 정원수였다. 추사의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이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에게 장가들어 월성위에 봉해지자, 영조가 통의동에 큰 저택을 하사했다. 너무 큰 집이어서 월성위궁(月城尉宮)이라고 불렸다. 추사는 김한신의 장손, 큰아버지 김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는데,12세에 양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 할아버지 김이주(형조판서)마저 세상을 떠나 큰 집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다. ●추사 32세에 송석원을 쓰다 송석원시사의 부탁을 받은 추사는 예서체의 큰 글자로 ‘松石園’을 쓰고, 그 옆에 잔 글씨로 ‘정축(丁丑) 청화(淸和) 소봉래서(小蓬萊書)’라고 간기를 쓴 뒤에 낙관했다. 정축년은 1817년이니, 추사의 나이 32세. 청화는 음력 4월(또는 2월)이고, 소봉래는 추사의 또 다른 아호이다. 예산 고향집 뒷산을 소봉래라 했는데, 청나라에 다녀온 뒤부터 호를 자주 바꾸는 습관이 생겼다. 1809년 10월에 호조참판으로 있던 생부 김노경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가게 되자,24세 되던 추사도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따라나섰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사신뿐만 아니라 상인·학자·승려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교류했지만, 조선초부터는 국경을 폐쇄하고 사신만 오가게 했다. 합법적으로 가볼 기회는 사신, 또는 사신의 수행원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사신들은 자기의 자제를 개인 수행원으로 데리고 가서 견문을 넓혀 주었는데, 이를 자제군관이라고 했다. 추사의 스승 박제가가 자제군관으로 가서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보고 돌아와, 추사에게 반드시 청나라를 구경하라고 당부했다. 청나라의 문인 학자들에게는 이미 추사를 한껏 자랑해 놓았다. 추사는 연경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 완원(阮元)을 만나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받았다. 추사는 이때부터 상황에 따라 당호와 아호를 새로 짓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나 추사로서는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인 옹방강(翁方綱)을 만난 것이 더 큰 행운이었다. 그의 서재 석묵서루에는 희귀본 금석문과 진적(眞蹟) 8만여점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추사는 조선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진본들을 맘껏 보았고, 모각본까지 선물받았다. ●청 문물 경험후 서체 달라져 청나라에서 돌아온 뒤에 그의 글씨가 달라졌을 것은 당연하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추사의 글씨가 바뀐 과정을 논하면서, 청나라에 다녀온 뒤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완옹(阮翁)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書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에 뜻을 두었고,(청나라에 다녀온 뒤) 중세에는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그의 글씨를 열심히 본받았다.(그래서 이 무렵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꺼운데다 골기(骨氣)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씨가 바로 ‘松石園’ 석 자이다. 장중하면서도 아름답다. 박제가의 제자였던 추사는 신분의 벽을 넘어서 송석원시사의 조수삼과 가깝게 지냈으며, 이상적이나 오경석 같은 역관 제자, 조희룡이나 전기 같은 중인 화가들을 길러냈다. 위항시인의 시가 순수하다는 성령론(性靈論)이나 ‘인재설(人才說)’도 그러한 생활 속에서 나왔다. 송석원은 위항시인들의 모임터로도 이름났지만 김수항(안동 김씨), 민규호(여흥 민씨), 윤덕영(해평 윤씨) 등의 권력가들이 서로 집을 넘겨주며 살았던 곳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지금은 이 일대가 고급 주택가로 바뀌었지만, 시멘트 벽속에 ‘松石園’ 글씨가 아직도 남아 있고, 복개된 길 밑으로는 옥계가 흐르고 있다. 인왕산 재개발을 앞두고, 이 일대의 문화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 허경진 연세대 교수 > ■ 중인이란 중인(中人)이란 신분계급으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사이를 말한다. 중인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좁은 의미로는 주로 중앙의 여러 기술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역관(譯官)·의관(醫官)·율관(律官)·산관(算官)·화원(畵員) 등 기술관원을 총칭했다. 이들은 잡과(雜科) 시험에 합격, 선발된 기술관원이거나 잡학 취재(取才)를 거쳐서 뽑혔다. 넓은 의미로는 중앙의 기술관을 비롯하여 지방의 기술관, 그리고 서얼(庶孼), 중앙의 서리(胥吏)와 지방의 향리(鄕吏), 토관(土官)·군교·교생·경아전 등 여러 계층을 포괄적으로 일컬었다. 양반 사대부 계층에 비하여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신분과 직업은 세습됐다. 육조(六曹)와 삼사(三司) 등의 일반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고, 한품서용제(限品敍用制)에 의해 관직 승진에도 제한이 가해졌다. 또 이들은 지방 양반의 명단인 향안(鄕案)에 등록되지 못했고, 향교(鄕校)에서도 양반의 아래에 앉아야 하는 등 천시를 받았다. 하지만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전문적인 기술지식이나 행정경험을 통해 양반 못지 않는 능력과 경제력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오늘날의 통역관에 해당되는 역관(譯官)들은 17세기부터 청(淸)나라와의 무역이 왕성해짐에 따라 자주 청나라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밀무역을 하거나, 상인들의 무역업무를 교섭해주고 돈을 받아 부자가 된 자들도 많았다. 이들은 전문적인 기술지식과 특수한 문서양식, 그리고 독특한 시문(詩文)인 위항문학(委巷文學)을 발전시켰으며 외세에 의한 변동기에 민감한 정세판단으로 전통문화의 해체와 근대화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 필자 허경진은 ▲1952년 목포 출생 ▲70년 제물포고 졸업 ▲74년 연세대 국문학 학사 ▲84년 연세대 박사 ▲84년∼93년 목원대 교수 ▲93∼2001년 미 하버드대 동아시아학과 연구교수(한국한시) ▲01년∼현재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서=우리 옛시(80년), 허균의 시화(82년), 평민열전(89년), 다산 정약용 산문집(94년), 연암 박지원 산문집(94년), 매천야록 매월당집(95년), 선조독살 전말기(95년), 조선위항문학사(97년), 허균평전(02년), 악인열전(05년) 등 다수.
  • 사씨남정기 아이 눈높이로 읽는다

    ‘사씨남정기’는 조선 숙종 때 서포 김만중이 인현왕후의 폐출에 반대해 귀양을 가 쓴 소설이다. 제목에도 나타나 있듯, 사씨 부인이 첩 교씨의 간계에 휘말려 남쪽으로 가기까지의 기록이다. 당시 양반들은 소설을 허구로 치부해 멀리했지만 서포는 소설이야말로 따분한 역사서와 달리 독자들에게 교훈과 감동을 주는 장르로 여겨 각별한 애정을 가졌다. ‘사씨남정기’에는 삼종지도, 출가외인 등 유교적 이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구절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이는 주로 주인공 사씨의 삶을 통해 드러난다. 서포는 이 소설을 통해 유교적 가부장제 이념을 절대화했다고도 볼 수 있다.17세기 한글소설을 대표하는 이 작품은 우리 고전임에 틀림없지만 어린이들의 읽을거리로도 과연 적합할까. 창비에서 펴낸 ‘사씨남정기’(하성란 글, 이수진 그림)는 무엇보다 그런 점을 염두에 뒀다. 책은 인물의 성격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자극적인 구절을 고쳤고,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이해하기 어려운 고사도 줄였다. 모든 고통을 말없이 참아내는 인고의 여인 사씨. 요즘 감각으로 그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거꾸로 이 시대가 바라는 진정한 여성상,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나눔의 정신을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있을 듯하다. 창비의 ‘재미있다! 우리 고전’ 시리즈 가운데 하나.9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Book Review] 위대한 발명은 협동작업의 산물

    퀴즈 하나. 고대부터 있었으나 현대식은 미국의 엘리샤 그레이브스 오티스가 1854년 제작했다.1857년 뉴욕에 최초로 설치됐으며,1931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이것은 시속이 130㎞에 달했다.2001년 붕괴된 세계무역센터에는 이것이 255개 있었으며, 매일 5만 8000여명이 이를 이용했다. 이것은 무엇일까? 정답은 엘리베이터다. 매일 승강기를 타면서 내부에 붙어 있는 상표를 유심히 본 사람이라면 오티스란 발명가의 이름에서 벌써 정답을 찾아냈을 것이다. 퀴즈 둘.17세기 중반부터 이것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최초의 것은 피아노 건반과 흡사했다.1872년 미국의 총포제작자 필로 레밍턴이 현재의 이것과 비슷한 것을 제작했다. 많은 여성들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계기가 되어 여성해방의 물꼬를 튼 것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이것은 무엇일까? 정답은 타자기.1970년대 후반 개인용 컴퓨터의 등장으로 이젠 찾아보기 힘든 물건이 됐다. 하지만 많은 여성들이 타자기 덕에 타이피스트나 비서로 일할 수 있었다. 퀴즈 셋. 물, 설탕, 탄산, 식용색소 E150d(캐러멜 색소), 인산, 아로마, 카페인…. 그리고 비밀로 유지되는 고유한 혼합방식.1886년 미국 애틀랜타의 약사 존 스티스 팸버튼은 두통과 피로, 우울증 치료제로 어떤 시럽을 개발했다. 곧 이 시럽은 부작용이 많았던 모르핀을 대신하게 됐다. 팸버튼은 이 시럽에 소다수를 첨가하여 음료로 판매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히트 상품이 됐다. 이 음료의 이름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상표인 코카콜라다. 콜라나무의 열매와 코카나무의 잎에서 추출한 카페인과 코카인이 함유된 코카콜라의 이름은 팸버튼의 회계 담당자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후 사업가 아사 캔들러가 코카콜라의 상업적 권리를 획득하여 1892년 코카콜라사를 설립했다. 코카인의 중독효과가 문제시되자 코카콜라사는 고유의 맛을 내는 코카나무 잎을 그대로 사용하되 코카인 성분만 제외시켰다. ‘세계를 바꾼 가장 위대한 101가지 발명품(플래닛 미디어 펴냄, 김현정 옮김)’은 저자 한스 요아힘 브라운이 주관적으로 신중하게 선정한 101가지 발명품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다. 브라운은 독일 함부르크 헬무트 슈미트 대학의 교수로 근대사회사, 경제학사, 기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저자 브라운 교수가 서문에서 밝힌 대로 많은 사람들이 101가지 발명품 목록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왜 코카콜라가 위대한 발명품이냐부터 시작해서 볼펜이 빠졌다, 피임약 대신 비아그라를 넣어야 한다 등등. 연대순으로 나열된 발명품 목록은 독자들에게 ‘발명’이란 흥미로운 주제에 계속 심취할 수 있게끔 하는 자극제로 동원됐다. 저자는 발명이 ‘단계적 행위’임을 강조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무수한 발명들이 대부분 한 사람의 천재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지속적 노력을 통해 완성됐다는 것이다. 발명은 협동작업의 결과며, 존경받는 위대한 발명가의 주변에는 그와 함께 발명을 일궈낸 공동연구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고 덧붙이고 있다. 발명의 통사(通史)인 셈이나 결코 지루하거나 딱딱하지 않다. 주방에서 쓰는 전자레인지를 처음 만든 곳이 군수장비 회사라는 등의 발명 뒤의 사실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물론 저자의 주관적 101가지 발명품 목록과 나만의 세계를 바꾼 위대한 발명품 목록을 비교하며 논박을 벌이는 재미도 클 것이다.1만 20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뼈아픈 한해 발로 차!”

    독일월드컵 16강 진출 실패, 아시아청소년(U-16)선수권 8강 패배, 아시아청소년(U-19)선수권 3위, 아시안게임 축구 4위…. 2006년은 한국 축구에 쓰라린 시기였다. 그다지 내용이 좋지 못했는데도 아시안컵 본선에 진출한 것을 제외하면 각종 국제대회에서 시련이 이어졌다. 한국 축구의 각급 대표팀이 해외 전지훈련을 통해 아픈 기억을 묻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중이다.2007년에도 베이징올림픽 아시아지역 축구 예선,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 청소년월드컵(옛 세계청소년선수권),17세 이하 월드컵, 아시안컵 본선 등 굵직한 대회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7일 조동현 감독이 이끄는 20세 이하 대표팀이 먼저 스페인 전지훈련을 떠났다. 아시아 대회 3연패 달성 실패를 ‘멕시코 신화’ 못지않은 세계대회 최고 성적(4강 이상)으로 연결하겠다는 각오. 신영록(수원) 심영성(제주) 이상호(울산) 송진형(서울) 등 19세 멤버들이 대부분 참여했다. 새달 15일까지 3주 동안 현지 클럽들과 5∼6차례 평가전을 치러 유럽 선수에 대한 적응력과 수비 조직력을 높이게 된다. 또 3월 수원컵에 출전하는 등 7월 캐나다에서 열리는 U-20청소년월드컵을 향한 담금질을하게 된다. 박경훈 감독이 지휘하는 17세 이하 대표팀이 뒤를 잇는다. 최근 한 달 정도 브라질 전지훈련을 다녀왔던 17세 대표팀은 새달 4일 제주도로 소집돼 13일 호주로 떠난다. 그곳에서 4개국 청소년대회를 통해 호주, 일본, 중국과 경기를 갖는다.8월 국내에서 사상 처음 개최되는 U-17청소년월드컵에 대비하는 것. 아시아 대회에서 티켓을 따지 못했으나, 개최국 자격으로 나선다. 내심 1987년 8강을 뛰어넘는 최고 성적을 기대하고 있다. 핌 베어벡 감독의 올림픽대표팀은 1월 중순쯤 소집,21일 개막하는 카타르 도하 8개국 올림픽팀 초청대회에 나선다.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이란, 이집트, 벨로루시와 승부를 겨룬다. 박주영(서울), 백지훈(수원), 오장은(대구), 김진규(이와타), 정인환(전북), 정성룡(포항) 등 아시안게임 멤버들이 포함될 것으로 보여 ‘도하 참사’를 만회할 기회다. 이후 올림픽팀은 2월28일부터 6회 연속 본선 진출을 향한 닻을 올리게 된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농촌가정 모델 제시… 지역발전 이바지

    농협문화복지재단은 27일 농업발전과 농가소득증대 및 농촌지역의 문화 계승 등에 힘써 온 농민 4명과 농업단체 2곳을 선정,`제1회 농협문화복지대상´을 수여했다. 최우수 농가로 경남 창원시 동읍의 김주근(39)씨, 충북 단양군 가곡면의 안연기(65)씨, 충남 청양군 장평면의 이은국(46)씨가 공동으로 선정됐다. 이들 농가에는 1억원씩 3억원이 부상으로 지급된다. 농업발전 부문에선 강원 홍천군 두촌면의 민황기(58)씨, 농촌문화 부문에선 전남 진도군의 소포리 전통문화보존회(대표 김병철), 농촌복지 분야에선 전남 곡성군의 심청노인사랑복지회(대표 최재영)가 각각 뽑혔다. 개인에게는 2000만원, 단체에는 4000만원씩 모두 1억원을 준다. 김주근씨는 4대가 한 집에서 사는 모범농가의 가장이다. 국립경상대학 축산학과를 졸업한 뒤 전공을 살려 서울에서 한우유통과 관련된 일을 하다가 1997년 부친의 척추수술 이후 귀농했다. 이후 단감 고유의 색도기술 배급에 힘써 지난해 새농민상을 수상했다. 안연기씨는 17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중학교를 중퇴하고 3명의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농업에 전력했다. 고향을 지키며 고추와 담배 등 특용작물 재배로 지역발전에 이바지한 공로가 인정됐다. 이은국씨는 89년 귀농, 소를 키우다 한때 실패했으나 굴하지 않고 청양의 지리와 지형에 적합한 ‘하우스 수박’ 재배에 성공했다. 새로운 소득작목인 멜론의 재배에도 나서 기술을 보급하는 등 농촌지도자로서의 역량을 인정받고 있다. 농업발전 부문의 민황기씨는 강원도 농업기술원 옥수수시험장장으로 있으면서 찰옥수수 신품종 6개와 종실용 옥수수 1개품종을 개발했다. 우리나라 찰옥수수 신품종 종자의 33%를 보급하고 있다.소포리전통문화보존회는 소포지역의 걸군농악, 명다리굿, 닻배노래, 베틀노래 등 농촌문화를 계승·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았다. 지역 167가구 331명으로 구성돼 두레정신을 살리면서 6개 이상의 전통민속보존회를 자발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심청노인사랑복지회는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이 전국 최고 수준(24.5%)인 곡성군 지역의 유일한 재가복지시설이다. 특히 장애인이나 홀로 사는 노인들을 직접 찾아가는 복지서비스와 이동목욕·이동세탁봉사 등으로 농촌복지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구청 문자메시지 도착했습니다”

    Q:. 자치구와 휴대전화가 만나면? A:구민들이 무지무지 편리해진다. 서울시 자치구가 다양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SMS)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서초구(구청장 박성중)는 서초생활넷(www.sclife.net)에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전송서비스를 실시한다. 구민이 아니더라도 서초생활넷에 가입하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가입할 때 100점을 받으며 문자메시지를 사용할 때마다 2점씩 줄어든다. 그러나 게시판에 글을 남기면 점수가 1점씩 늘어나 계속 문자메시지를 이용할 수 있다. 서초생활넷은 종합병원, 부동산, 문화·예술, 자동차·교통 등 다양한 생활정보를 제공한다. 관악구(구청장 김효겸)는 내년부터 주차단속 신고자에게 문자메시지로 단속 현황을 알려준다. 단속 신고 후 막연히 기다리는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서다. 불법 주차를 신고하면 신고 지점에 가까이 있는 주차단속반를 출동하면서 신고자에게 ‘주차단속반이 10분 후에 도착한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준다. 또 보건소에서는 여름철에 식중독 지수가 ‘35’ 이상으로 올라가면 집단급식소에 자동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식중독 예방 관리 시스템이다. 덕분에 지난해 관악구에서는 식중독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고, 서울시 위생분야 종합평가에서도 최우수구로 선정됐다. 구로구(구청장 양대웅)는 민원 만족도를 문자메시지로 조사한다. 구청 홈페이지 회원이나 통반장에게 ‘교육 행정에 만족하십니까.’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답신을 받는 것이다. 공사나 물품의 입찰 계획이 있으면 해당 기업에 관련 정보를 문자메시지로 보내준다. 기업들이 입찰 정보를 얻지 못해 손해입는 경우가 없도록 배려한 것이다. 성북구(구청장 서찬교)에서는 주민이 혈압·혈당 등을 측정해 보건소 홈페이지(bongunso.seongbuk.go.kr)에 올리면 전문의사가 진단하고 회원에게 문자메시지로 알려준다. 전문 치료가 필요하면 지역 의료기관에 진단 소견을 전달한다. 원서류 발급도 문자메시지로 알려준다. 동작구(구청장 김우중)는 민원서류가 처리되면 즉시 결과를 문자메시지로 보낸다.동대문구(구청장 홍사립)는 주민등록증 신규 발급자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과태료를 물지 않도록 돕는 것이다. 만 17세가 되면 6개월 이내에 반드시 주민등록증을 신청해야 하고, 기간이 지나면 최고 5만원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英 성매매 여성 연쇄살인 용의자 체포

    영국 경찰은 18일 잉글랜드 동부 입스위치 일대에서 성매매 여성 5명을 연쇄 살해한 혐의로 37세 남성 용의자 톰 스티븐스를 체포했다. 경찰은 이날 항구 마을 펠릭스토 인근 트림리의 용의자 자택에서 슈퍼마켓 종업원인 스티븐스를 체포했다고 BBC가 전했다. 그는 지난 2일 이후 11일 동안 입스위치 일대 개천, 연못, 숲 등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19∼29세 사이의 성매매 여성 5명을 살해한 혐의다. 이 사건은 1975∼1980년 잉글랜드 북부에서 주로 성매매 여성들을 중심으로 13명의 여성을 살해한 일명 `요크셔의 살인마´ 피터 수클리프를 연상시키며 영국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었다. `영국판 살인의 추억´이라 할 수 있는 이 사건의 피해 여성은 모두 항구 도시인 입스위치에서 성매매 여성으로 일했다. 용의자가 사는 트림리는 입스위치에서 남동쪽으로 8마일쯤 떨어진 곳에 있다. 용의자가 거주한 트림리 마을에서는 1999년 17세 여성 비키 홀이 나이트클럽에 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시신으로 발견돼 뉴스에 오른 적이 있다. 당시 범인을 잡지 못한 채 미궁에 빠진 이 사건도 이번 성매매 여성 연쇄 살인 사건과 연관성이 있을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다고 BBC는 말했다.런던 연합뉴스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씨

    아스라한 전설의 시대, 호주의 남쪽 어느 바닷가에서 인간과 비슷한 동물이 만들어져 뭍으로 기어올라왔다. 이들은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다시 물가로 내려가 자맥질을 했다. 또한 새로운 먹을 것을 잡거나 다른 곳으로 건너기 위해 스스로 헤엄치는 요량을 터득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두뇌가 발달됐고 육신이 점차 단련되면서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설이다. 이후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많은 세월이 흐른 근대에 이르러, 영국은 이같은 인간의 원초적 헤엄을 스포츠화시켰고 올림픽의 부흥과 함께 세계적인 인기 스포츠로 각광을 받았다. 우리나라는 어떨까.1970년 방콕·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조오련 선수가 연이어 2관왕을 차지하면서 국민적인 ‘수영 붐’을 일으켰다.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는 최윤희 선수가 3관왕을 차지하면서 또 한번 불을 댕겼다. 그로부터 24년 후인 도하 아시안게임에서의 박태환. 그는 과거 조오련 선수의 주종목 자유형 200m,400m는 물론 1500m에서 당당히 3관왕을 획득, 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다. 특히 그의 쾌거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영웅 이언 소프와 비교된다. 인간 어뢰로 불리며 호주 전역을 들끓게 했던 이언 소프의 신드롬처럼 박태환 역시 차가운 겨울철에 뜨거운 ‘수영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 요즘 각 수영장마다 신기(神技)의 발차기와 잘 생긴 박 선수의 외모는 폭발적인 부러움의 대상이다. 영원한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55)씨. 일곱살 때부터 헤엄을 쳤으니 아마 조씨처럼 물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도 드물 터. 기네스북 도전과 한국인의 기개를 떨치기 위해 한강 600리 수영, 대한해협과 울릉도∼독도, 도버해협 횡단 성공 등 수많은 바닷길을 열었다. 때로는 해파리떼들과 만나 사투를 벌였고 교통사고를 당해 팔이 휘어졌지만 그래도 물살을 가르며 살아온 특별한 인생이다. 추운 날에도 옷을 벗어야 했고, 다들 살 빼려고 하는 대신 오히려 찌워야 하는 정반대의 역정이었다. 이처럼 한국 수영계의 대부로 끝없는 도전을 해온 그는 요즘 남다른 감회에 빠져 있다. 다름 아닌 도하 아시안게임의 3관왕인 박 선수의 경기를 지켜보면서. 하기야 30여년 만에 자신의 주종목에서 금메달을 보란 듯이 따줬으니 얼마나 대견스러울까. 박 선수가 세번째 금메달을 따던 날 조씨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정말 대단하다. 우리나라 수영의 새로운 희망이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귀향해 집을 짓느라 바쁘다.”고 해 지난 13일 조씨의 고향인 해남에서 만났다. 그가 귀향해 사는 곳은 해남군 계곡면 여시골마을. 해남읍내에서 자동차로 15분거리에 위치한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산골이다. 사방 2㎞ 안에는 주민들이 살지 않는 외진 곳이지만 맑은 물이 곳곳에 솟아나오는 청정지역. 때마침 비가 온 뒤여서 그의 집까지 가는 비포장도로에는 군데군데 물이 고여 있었다. 조씨는 흙 묻은 작업복 차림에다 농부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보시다시피 아직 집이 완성이 안돼 컨테이너 막사에 거주하고 있다. 먼길 오느라 점심도 못했을 텐데….”라고 하면서 주방으로 사용하는 비닐하우스 안으로 데리고 가 직접 삶은 국수 한 그릇을 권한다.6년 전 부인과 사별하고 혼자 오래 살아온 솜씨여서 그런지 싱싱한 굴과 큼직큼직한 멸치가 투박하면서도 잘 조화를 이루어 맛이 그만이다.“부엌에서 인부들에게 밥이나 지어주고 있다.”며 활짝 웃는다. 여전히 특유의 호방한 성격 그대로였다. 언제 귀향했느냐는 질문에 “지난 8월31일 이곳으로 주민등록을 이전했다.10년 전부터 귀향하려고 땅을 사놨다.”는 즉답이 나온다. 옛날 절터 주변의 땅 2만여평을 매입했단다.“해남을 떠난 지 꼭 38년 만의 귀향이다. 서울나들이를 비로소 이제야 마치고 내려왔다.”면서 “조용한 곳에서 음악도 듣고 책도 좀 보고 자서전도 준비할 생각”이라고 의미부여를 했다. 전환점에 선 수영의 마라토너답게 거침없이 나오는 바리톤 음성에는 간단치 않은 삶의 철학이 배어 있었다. 현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황토집은 내년 3월에 완공된다. 집 앞마당에는 30m 레인 하나 정도 나올 만한 작은 수영장과 낚시터까지 갖춰진다고 했다. 조오련 수영캠프가 아닌 남은 인생을 스스로 조용히 돌아볼 혼자만의 공간이라고 했다. 박 선수의 경기를 지켜본 소감에 대해 “이제 아시안게임을 제패했으니까 원을 더 크게 그려 베이징올림픽을 봐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주변에서 많은 관심과 독려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또한 “이제 17세인 만큼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일취월장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면서 “박태환이라는 총알이 올림픽 과녁을 정확히 맞힐 수 있도록 행정적인 지원도 따라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화려했던 현역시절이 문득 생각났는지 “나는 수영 선수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면서 다만 전국대회에서 3등 정도만 하면 공짜로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에 1968년 12월 완행열차를 타고 무작정 상경했다고 회고했다. 시골 형편이 대부분 그랬듯 가난한 가정의 5남5녀 중 막내로 자랐다. 수영은 일곱살 때부터 자연스럽게 익혔다. 해남고 1학년 때 심부름하러 제주도에 갔다가 우연히 하계체전 예선전을 지켜봤는데 1등 기록이 자신보다 못하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얻어 양정고 1학년에 입학했다. 청계천 부근 간판집과 창고지기로 일하면서 틈틈이 종로 2가의 YMCA 실내수영장을 다니며 실력을 쌓았다. 그의 천부적 수영실력은 이듬해 6월 전국체전 서울시 예선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수영복조차 없이 ‘사각팬티’를 입은 채 자유형 400m와 1500m에 참가, 내로라하는 장거리 주자들을 모두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이때 마침 귀빈석에서 관람 중이던 민관식 대한체육회장이 그의 사정을 듣고 태릉선수촌에 입촌시켜 훈련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후 경기할 때마다 한국 신기록을 작성했다. 고3 때인 1970년 드디어 방콕 아시안게임에 출전, 한국 스포츠 사상 최초의 2관왕에 올랐다.4년 뒤인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도 2관왕에 올랐고 은퇴할 때까지 통산 50개의 한국신기록을 세운다. 은퇴 후에는 거친 바다에 도전한다.1980년 13시간여 만에 대한해협을 횡단한 것을 시작으로 도버해협(1982년), 대한해협 재횡단(2000년) 성공,2003년 8월15일 강원도 화천 비무장지대에서 여의도까지 한강 600리를 수영으로 완주했다. 뿐만 아니라 광복 60주년을 앞둔 지난해 8월 성웅(26·회사원), 성모(22·고려대4) 두 아들과 울릉도∼독도간 93㎞를 18시간 만에 횡단하는 데 성공,‘독도가 헤엄쳐 건널 수 있는 우리 땅’임을 당당히 입증했다. 1986년에 결혼한 그는 서울 압구정동에 수영교실을 열어 집안생계를 꾸려나갔다. 두 아들을 키우며 행복하게 살았던 조씨 부인은 2001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혼자 살다 보니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습니다. 아들 둘도 인생을 스스로 개척할 만큼 다 컸고 결국 이래저래 귀향결심을 하게 됐죠.” 그는 장시간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 보면 무아지경을 경험한다. 성철 스님이 무념무상에서 9층탑을 쌓는다고 하면 자신은 3층높이는 될 것이라는 그는 “바다수영은 조류의 흐름과 파도, 수온 등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한다. 억지로 떠오르려고 하면 가라앉는 것처럼 몸과 마음이 하나가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집이 완공되면 주변 땅에서 녹차밭을 가꾸겠다는 그는 내년에 또한번 새로운 도전을 할 예정이다. 독도 둘레가 6㎞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내년 7월 독도 둘레를 수영으로 33바퀴(3·1독립선언문의 33인 상징) 돌 예정이다. 비록 귀향했어도 굽힘없는 도전정신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52년 해남 출생 ▲71년 양정고등학교 졸업 ▲76년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81년 고려대 사학과 편입졸업 ▲89년 조오련 수영교실 설립 ▲98년 대한수영연맹 이사 ●경기기록 ▲70년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 자유형 400m,1500m 1위 ▲74년 제7회 아시아경기대회 400m,1500m 1위,200m 2위 ▲78년 제8회 아시아경기대회 접영 200m 3위 ▲78년 이후 수영부문 한국신기록 50회 수립 ▲80년 대한해협 횡단 13시간 16분 ▲82년 도버해협 횡단 9시간35분 ▲03년 한강 600리 종주 ▲05년 을릉도∼독도 횡단 18시간 ●상훈 자랑스런 양정인(03년)외 국민훈장목련장, 체육훈장 거성장, 대한민국체육장 등 다수
  • [책꽂이]

    ●웃는 남자(빅토르 위고 지음, 이형식 옮김, 열린책들 펴냄) 어린 시절 어린이 매매단에 납치돼 끔찍한 수술을 당한 뒤 평생 웃을 수밖에 없는 기형적 얼굴을 갖게 된 주인공 콤프라치코스의 이야기. 위고가 19년간 영국 망명 기간에 집필한 소설 가운데 하나로 17세기 영국 귀족사회와 하층민의 생활을 소상하게 그렸다. 아름답고 순결한 맹인 소녀와 당대 최고의 권세를 지닌 여공작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콤프라치코스의 모습.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전2권 각권 9800원.●고야의 유령(밀로스 포먼·장 클로드 카리에르 지음, 이재룡 옮김, 현대문학 펴냄) 18세기 말에서 19세기초, 전통적인 가톨릭 군주제와 혁명의 물결이 첨예하게 맞서던 시대의 스페인. 그 가운데에 궁정화가로 명성을 날린 프란시스코 고야가 있었다. 고야의 눈에 비친 스페인과 유럽의 현실은 이성이 잠든, 악마만이 득실거리는 세상이었다. 왕족의 초상화를 그리며 명성을 인정받았지만, 악마에게 영혼을 판 사탄의 후계자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고야 작품엔 암울한 기운이 짙게 배어 있다. 이 소설은 종교재판소의 수도승 로렌조 신부가 고야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하면서 시작된다.9500원.●내쫓긴 아이들(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김연수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 4인조 청소년 갱단의 극단적인 폭력과 일탈행위를 통해 정치와 일상의 파시즘 문제를 파헤친 소설.200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는 1965년에 발생한 실화 ‘우도 분더러 사건’을 토대로 이 작품을 썼다. 파시즘의 폐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르트르의 희곡 ‘알토나의 유폐자’와 비교된다. 청소년들의 끔찍한 행태와 무정부주의적인 경향은 장 콕토의 ‘무서운 아이들’을 연상시킨다는 평.9800원.
  • “17세 유학생도 정기적 성매매”

    “최근 필리핀 세부에서만 에이즈에 걸린 성매매 여성이 68명이나 나왔습니다.” 7일 서울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와 청소년을 위한 내일여성센터 공동 주최로 열린 ‘아동·청소년 대상 해외 성매매 실태에 관한 토론회’. 필리핀 세부의 성매매 여성 쉼터인 ‘이시도라 보호센터’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는 카멜리타 이고트 펠론은 “(한국인들은)듣기 고통스럽겠지만 한국 남성 단체 관광객들이 필리핀 여성들을 학대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실태를 직접 공개했다. 내일여성센터 김경애 이사장과 그가 밝힌 필리핀 현지의 한국인 성매매 실태를 문답으로 재구성했다.▶한국 남성들의 성매매 행태가 어느 정도인가.-주로 단체 관광객들이다. 항문 성교를 강요당해 성병에 걸린 여성이 있는가 하면 여성의 질에 플라스틱 병을 넣는 남성도 있다. 그러나 이는 현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매매의 수많은 사례 중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김 이사장)골프 관광객의 경우 현지 파트너로 5∼6일씩 지속적으로 데리고 다니며 성매매를 하기도 한다.▶최근에는 한국 대학생들의 성매매도 있다는데.-그렇다. 결혼하겠다는 한국 대학생의 약속만 믿고 학비까지 대주는 여성도 있었다.(김 이사장)17세에서 20대 초반 남학생까지 성매매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필리핀 여성들을 현지처처럼 두고 6∼8개월 동안 매주 세 차례씩 성매매를 하고 있었다.▶한국인이 운영하는 포르노숍에서 구출한 아이들도 만났다고 했는데.-(김 이사장) 포르노숍은 8∼16살 남녀 아이들을 고용해 손님 앞에서 성관계를 갖게 하고 마음에 드는 여성과 성매매를 하는 가게다. 최근 적발된, 한국인이 운영하는 업소에서 구출된 아이들은 19살 부부였다.▶피해 여성들의 신상은.-12살부터 30살까지로, 주로 극빈층 여성이다. 필리핀 현지에서는 인신밀매단이 적지 않은데 도시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꾐에 빠져 업소로 팔려간다.(김 이사장) 학대당하는 아이들은 우리나라 아이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비쩍 마르거나 성장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 [책꽂이]

    ●조선고전문학논고(안영길 지음, 아세아문화사 펴냄) 한국문학사에서 사림파 문학은 16세기에 융성했고,18세기에는 실학파 문학이 빛났다. 그러면 17세기는? 저자(성결대 교수)는 이 시대의 문학을 논하면서 월상계택(月象谿澤)을 빼놓을 수 없다고 말한다. 월사 이정구, 상촌 신흠, 계곡 장유, 택당 이식 등이 그들이다. 그동안 소홀히 다뤄져온 17세기 조선 고전문학을 집중적으로 다뤘다.1만 4000원. ●사람을 찾습니다(웡찡 등 지음, 김혜준 등 옮김, 이젠 펴냄) 특정 이데올로기나 문학관념의 지배를 받지 않는 다양성, 현대 대도시에 바탕한 소재, 칼럼성 산문이나 무협소설 등이 성행하는 대중성…. 홍콩문학의 독자적인 면모다.‘후적응기’ 등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1997년 이후 나온 홍콩의 대표적인 단편소설들을 수록.8500원. ●꿈을 빌려드립니다(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하늘연못 펴냄) 마술적 사실주의의 대표적인 작가로 잘 알려진 마르케스. 그의 소설세계는 사실주의라는 말이 내포하는 재현성과 역사성, 마술적이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글쓰기의 실험성을 아울러 보여준다. 이 책엔 표제작을 비롯한 아홉편의 중단편 소설과 ‘노벨상의 환영’ 등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9편의 에세이가 실렸다.9500원. ●시골선생(다야마 가타이 지음, 김욱송 옮김, 숲 펴냄) 일본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사소설. 러·일전쟁을 겪은 일본 청년들의 고뇌와 방황을 그렸다. 사소설적 개아(個我)에 주목하는 일본의 자연주의는 개인의 경험과 ‘고백적’ 리얼리즘 세계를 중시하는 것이 특징이다.1만원. ●절대 울지 않아(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이선희 옮김, 창해 펴냄) ‘러브홀릭’ ‘플라나리아’ ‘내 나이 서른하나’ 등의 작품을 쓴 저자의 단편소설집. 여성들이 택한 수많은 직업들에 대한 호기심을 경쾌한 문체로 풀어냈다.‘자유의 대가는 고독이다’ ‘여자는 왜 아름다워야 하는가’ 등이 대표적인 작품.9000원.
  • FIFA집행위 참석위해 4일 출국

    정몽준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 겸 대한축구협회장이 5일부터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리는 FIFA 집행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4일 오후 출국한다. 회의에서는 내년 한국에서 개최되는 청소년(17세 이하)축구선수권대회와 중국 FIFA 여자월드컵 준비에 대한 보고가 있을 예정이다.
  • [현천 스님의 아헹가 정통요가] 파당구쉬타아사나 & 파다하스타아사나

    [현천 스님의 아헹가 정통요가] 파당구쉬타아사나 & 파다하스타아사나

    파다(pada)는 발, 앙구스타(angustha)는 엄지발가락, 하스타(hasta)는 손을 뜻한다. 사진 1,2 자세는 엄지, 검지, 중지로 엄지발가락을 잡고, 사진 3,4 자세는 손을 발바닥 밑에 완전히 넣고 행한다. 1. 다리를 30cm 정도 벌리고 선다. 숨을 내쉬며, 몸통을 앞으로 구부려 각 엄지발가락을 잡는다. 머리를 위로 향하게 하고, 횡격막을 가슴 쪽으로 쭉 뻗고, 등을 최대한 오목하게 한다. 2. 어깨가 처지지 않도록 하면서 미저골에서 등까지 오목하게 하기 위해서 골반 부위에서부터 앞으로 향하며 휘게 한다. 다리에 힘을 주고 무릎과 발가락 사이에서 서로 당기는 힘을 늦추지 않아야 하며 어깨뼈 역시 쭉 뻗는다. 이 자세로 한두 번 숨을 쉰다(사진1). 3. 이제 숨을 내쉬며, 무릎에 힘을 주고 발가락을 마루에서 떼지 않은 채 당기면서 머리를 무릎 사이로 가져간다. 정상 호흡을 하면서 10∼20초간 머문다. 두발에 집중하고, 가슴을 활짝 연다(사진2). 숨을 들이마시며 천천히 일어선다. 4. 사진3의 자세는 두 손을 발바닥 밑에 넣고 1,2번 설명을 따른다(사진3). 5. 이제, 숨을 내쉬며, 팔꿈치로 구부리고 발은 손을 누르고 손은 발을 지그시 위로 당기면서 무릎 사이에 머리를 넣는다. 정상 호흡으로 10∼20초 정도 머문다(사진4). 숨을 들이마시며 일어서서 타다아사나로 돌아간다. ※ 초보자나 몸이 너무 굳어 발을 잡을 수 없을 때는 두 손으로 무릎이나 정강이를 잡고 행한다. 벨트를 이용해도 좋다. 디스크 환자는 등을 오목하게 하는 사진1, 사진3 자세까지만 하고 사진2, 사진4 자세는 피한다. # 효과: 두 자세의 효과는 같다. 복부 기관을 조율하고 소화력이 증가되며, 동시에 간장과 비장이 활성화된다. 복부팽만감을 줄이고 위장병에도 좋다. 척추를 고르게 펴 디스크를 치료 및 예방한다. # 요가 교실: 17세기의 신비주의자인 카리바 에켄은 “만일 당신이 고요한 영혼을 갖고자 한다면 먼저 호흡을 조절하라. 호흡이 잘 조절되면, 마음은 평온해 질 것이다. 호흡이 불규칙하다면 항상 걱정 근심으로 불안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시도하기에 앞서 당신의 기질을 부드럽게 하고, 당신의 영혼을 잔잔하게 가라앉히는 호흡을 조절하라.”고 했다. ※아헹가 요가 센터를 대구시내에서 가까운 팔공산으로 옮겼습니다. 주소:대구 동구 중대동 41-17 053) 981-3553 www.iyengar.co.kr 아사나:전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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