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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스모 요코즈나 ‘변태적 성행위’ 강요 논란

    日스모 요코즈나 ‘변태적 성행위’ 강요 논란

    몽골 출신의 요코즈나(천하장사) 아사쇼류(朝靑龍·27)가 비정상적인 성행위강요 논란으로 도마위에 올랐다. 아사쇼류는 몽골씨름의 최강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 17세때 일본으로 유학을 와 스모계를 장악한 최강자이다. 그는 최근 우울증을 이유로 스모협회에 건강진단서를 제출하지 않고 몽골에서 충구경기를 하다 발각돼 언론의 뭇매를 맞았으나 이후 달라진 자세로 스모에 임하겠다는 각오를 밝혔었다. 그러나 최근 자택에서 20대 여성에게 비정상적인 성행위를 강요했다는 보도가 나와 또 한번 스모계에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11일(오늘)발매예정인 주간 아사히(週刊朝日)에 따르면 아사쇼류는 지난 2003년 자택에서 열린 파티에 온 20대 후반의 한 여성을 거실로 데리고 가 비정상적인 성행위를 강요, 전치 20일의 상해를 입힌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그 여성은 변호사와 함께 사죄와 배상금 지불을 요구해 아사쇼류에게서 20만엔(한화 약 170만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사쇼류는 이에대해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강력히 부정했으며 지난 10일에는 예정했던 문부과학성 방문을 돌연 취소했다. 아사쇼루의 한 측근은 “이번 일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아사쇼류는 즉시 은퇴해야하는 불상사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주미옥 기자 toyobi@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50) 통청운동( 通淸運動 ) 앞장선 율관 장지완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50) 통청운동( 通淸運動 ) 앞장선 율관 장지완

    중인 가운데 법률을 담당한 관원을 율관이라 했는데, 율관의 판단에 따라 형률이 달라지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직무였다.1406년에 유학(儒學), 무학(武學), 이학(吏學), 역학, 음양풍수학, 의학, 자학(字學), 율학(律學), 산학(算學), 악학(樂學) 등 10학의 일부로 율학을 설치하고,1433년 형조 안에 있던 율학청에 별도 건물을 마련해 독립하게 하였다. 율과 합격자 명부가 율과방목인데, 현존하는 16세기 자료를 보면 1507년에 9명,1513년 7명,1525년 8명 등으로 3년에 한번 뽑았다. 율과 정원은 9명이었지만, 일정한 성적에 이르지 못하면 뽑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율과 합격자만으로 전국의 재판을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485년에 ‘경국대전’이 완성되면서 율관제도가 성문화되었는데, 율학교수(종6품) 1명, 별제(종6품) 2명, 명률(明律 종7품) 1명, 심률(審律 종8품) 2명, 율학훈도(정9품) 1명이 서울에 있고, 검률(종9품)을 서울에 2명, 각도 및 제주에 1명씩 파견해 모두 18명이었다. 검률(檢律)은 각 지방에서 발생하는 범죄를 조사하고 법률에 비춰 형량을 정하는 임무를 맡겼으니, 오늘날의 검사라고 할 수 있다. 형조에 판서(정2품), 참판(종2품), 참의(정3품), 정랑(정5품), 좌랑(정6품) 등의 문관이 있고, 그 아래 중인 출신의 기술직 전문 관리들이 18명 있었던 셈이다. 이 가운데 교수, 별좌, 훈도의 임기가 차면 고을수령으로 승진시켜 내보냈다. 율과 합격자가 열심히 근무하도록 격려하는 제도이다. ●전국 율학생도 정원 2388명 형조에는 정원 40명의 율학생도가 있었고, 부(府) 16명, 목(牧) 14명, 도호부 12명, 군 10명, 현 8명씩 있었는데, 이성무 교수가 전국의 율학생도를 모두 합해보니 2388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전국의 군현에서 날마다 소송이 일어나고 재판이 벌어지기 때문에, 막중한 재판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수많은 법률종사자가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인구가 10배나 늘어난 지금도 로스쿨의 정원을 2000명으로 묶어 두는 것과 비교가 된다. 생도에게는 잡역을 면제해 공부에만 전념케 했으며, 군역도 연기 혜택을 주었다. 율학 장려를 위해 생도를 그 지역의 토관(土官)으로 임명했으니, 지역 할당제에 해당된다. 율학교수와 훈도가 교육을 담당해, 율문(律文)을 강습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가에서는 양반들에게도 기술학을 장려해 습독관(習讀官) 제도를 설치했지만, 율학에는 습독관이 없었다. 중인들이 독점한 셈이다. 김재문 교수는 ‘한국전통법의 정신과 법체제(33)’라는 글에서 “이들의 처우가 일반직보다 낮으며 승진이 제한되어 있어, 율과 합격자는 법원장이나 검찰청장은 될 수 없는 기능직, 기술직 공무원”이라고 표현했다.“일종의 법무부 공무원이나 지방의 법원서기, 사법행정직에 가까운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문과 출신이 지방의 수령, 또는 형조판서나 의금부 도사가 되어 판사나 검사의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조선 전기의 율과 시험방법은 두 가지였다.‘대명률(大明律)’은 책을 덮어 놓고 뒤로 돌아 앉아서 질문에 대해 법조문을 외우며 강론하였다.‘당률소의’,‘무원록’,‘율학해이’,‘경국대전’ 등은 책을 펴놓고 지적하는 부분을 해설하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였다. 이 가운데 헌법인 ‘경국대전’과 ‘대명률’, 법의학서인 ‘무원록’은 500년 가까이 필수과목으로 지속되었다. 율학은 중인들이 다루는 잡학이어서, 사대부들은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지방 수령들의 판결에 잘못이 많이 생겼다. 문과에도 ‘경국대전’이 필수과목이었지만, 일종의 헌법이어서 실제 재판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정약용이 이러한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 지은 책이 바로 ‘흠흠신서’이다. 형사재판의 실태에 관한 비평과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 책이니, 지방 수령을 위해 만든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뒷부분에서 실례를 소개했는데, 제4부 상형추의(祥刑追議)에서 정조가 왕세손으로 섭정한 1775년부터 재위기간인 1799년까지 25년 동안 심리했던 사건 가운데 142건을 22개 유형으로 분류하여 요약하고, 주석과 비평을 덧붙였다. 제5부 전발무사(剪跋蕪詞)에서는 자신이 목민관이나 형조참의 자격으로 직접 다룬 사건과 유배지에서 들은 살인사건 16건을 논변하였다. 관리들은 살인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하지 않고, 검시(檢屍)도 직접 하지 않았다. 사건 현장이 참혹한 데다, 시체에 대해 거부감이 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수령과 의생(醫生)이 출동해 검시하지 않고, 시체를 만지던 오작인이나 아전에게 검시를 위임해서 문제가 많았으며, 고문을 가해 자백을 받는 방법을 주로 썼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거를 수집하고 엄밀한 심문과정을 통해 자백을 받아내지 않았던 것이다. 시체 검사방법을 자세히 소개한 ‘무원록(無寃錄)´이 율과의 필수과목이었지만, 중국에서 수입된 책이라 문장이 어려웠다. 세종은 이 책에 주석을 붙여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간행하게 했으며,‘검시장식(檢屍狀式)’이라는 공문서 서식을 인쇄하여 배포했다. 김호 선생은 ‘신주무원록과 조선전기의 검시’라는 논문에서 “‘신주무원록’이 일종의 검시 지침서라면 ‘검시장식’은 실제 검시 현장에 가지고 나가서 시체의 손상부위 등을 기록하는 공문서”라고 설명했다. ●율학 집안에 태어난 시인 장지완 장지완(張之琓·1806∼1867 이후)은 할아버지 장택과 아버지 장덕주를 거쳐 자신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율과에 합격한 집안에 태어났다. 넉넉한 집안이 아니어서 가정교사를 두지 못하고 장덕주가 직접 아들들을 가르쳤다. 장남 지련은 33세에 율과에 합격해 교수가 되었고, 차남 지완은 20세에 합격해 훈도겸 교수가 되었으며,3남 지환은 17세에 합격해 교수가 되었다.3형제가 모두 교수가 되었으니, 율관으로선 가장 출세한 편이다. 인왕산 언저리에 살았던 장지완은 율과 공부를 아버지에게 했지만, 시는 이름난 시인 장혼을 찾아가 배웠다. 글방 친구 유기의 시집 머리말에 “나는 총각 때부터 마을에서 친구들을 구했는데, 학덕도 비슷하고 나이도 비슷한 자가 일곱 명 있었다. 이 일곱 명은 다른 일에 유혹받지 않고, 오로지 글을 배우는 데만 뜻을 두었다. 시를 지어서 넣어 두는 주머니와 비단 시축(詩軸)을 가지고, 날마다 숲과 골짜기에서 노닐었다. 밤에는 등불을 밝히고 머리를 맞대면서, 마치 서로 떨어지기를 싫어하는 것 같이 지냈다.”고 회상하였다. 이 가운데 장혼의 손자 장효무는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장(五衛將)이 되었지만, 고진원은 글방 선생으로 늙었으며, 유기는 필경(筆耕) 품삯으로 한 달에 500전을 받아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게 살았다. 가난한 가운데도 시 짓기를 좋아했던 이들의 문학모임을 장지완의 호를 따서 비연시사(斐然詩社)라고 하는데, 장지완 말고는 거의 30대에 세상을 떠나 문단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중인 1670명 거사자금 234냥 마련 장지완은 “시가 성정(性情)에서 나온다.”고 했다.“성정이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이긴 하지만, 사람에 따라 그 기질이 맑고 흐린 구분이 있다.” 그가 말한 성령(性靈)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개성이다. 이 세상 사람 모두가 지니고 태어난 개성을 시의 존재근거로 삼은 까닭은 위항문학이 사대부문학에 대해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신분적 차이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이다. 그는 자신들의 신분을 자각하고 존재의의를 부각시키기 위해, 자기 당대에 살았던 여러 중인들의 전기나 묘지명을 지었다.50세가 넘어 문단의 원로가 되자, 위항인들의 시선집인 ‘풍요삼선(風謠三選)’에 발문을 써주어 후배들의 활동을 격려하였다. 양반이면서도 차별받던 서얼들은 조선 중기부터 여러 차례 상소하여 ‘신분에 제한없이 실력에 따라 벼슬하게 해달라’고 청했다.1772년에 삼천 명이 집단적으로 상소할 정도로 세력이 커지자, 정조가 1777년에 정유절목(丁酉節目)을 정하여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리수를 검서(檢書 5품)로 임명했다. 서얼들이 만족하지 않고 1823년에 9996명이 연명하여 상소하자, 결국 1851년에 서얼도 벼슬에 등용한다는 조치를 내렸다. 이에 자극받은 기술직 중인들이 4월 25일 통례원에 모여 통문(通文)을 만들고,5월 2일에는 통례원, 관상감, 사역원, 전의감, 혜민서, 율학, 주학(籌學), 도화서에서 4명씩, 내의원, 사자청(寫字廳), 검루청(檢漏廳)에서 2명씩의 대표자가 도화서에 모였다. 장지완은 ‘중인도 사대부 같이 벼슬하게 해달라.’고 상소문을 지을 제술유사로도 뽑혔다.1670명의 기술직 중인들이 거사자금 234냥을 갹출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5월 어느날 통청운동(通淸運動)의 핵심인물인 장지완의 집으로 투서가 날아들었다. 방법이 너무 온건하니, 좀더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몰아붙이라는 과격파의 선동이었다. 이들은 윤8월 18일에 철종이 경릉에 행행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행차길에서 상소문을 올리기로 하였다. 그래서 1872명의 이름으로 상소를 올렸지만,‘철종실록’에는 왕이 경릉에 행차하여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만 남아 있고 상소문은 실려 있지 않다. 고관 대작의 자제들이 중심이었던 서얼들의 통청운동은 성공했지만, 힘 없는 기술직 중인들의 통청운동은 공식적인 기록에도 남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들이 올렸던 상소문 초안만 역과 합격자 명부인 ‘상원과방’에 실려 전한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일대일 상황서 모험 기피·전술 이해 부족”

    지난 8∼9월 국내에서 열린 17세 이하(U-17) 청소년월드컵 축구대회에서 한국이 16강 진출에 실패한 것은 어린 선수들이 모험을 두려워한 데다 전술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쓴소리가 나왔다. 수비가 특히 강한 이탈리아 세리에A를 비롯, 유럽 빅리그에서 축구시스템 분석으로 명성을 날린 장 방스보(덴마크 코펜하겐대학) 박사가 27일 서울 JW매리어트호텔에서 열린 한국축구연구소(이사장 허승표) 세미나에서 지적한 내용이다. 그는 1999년부터 2년간 명문 유벤투스에서 카를로 안첼로티(현 AC밀란) 감독의 수석코치로 활약한 수비 전문가. 지난해 독일월드컵 16강 좌절의 이유를 조목조목 짚어 큰 반향을 일으킨 데 이어 1년 만에 다시 마이크를 잡은 것. 3개월여 한국 청소년대표팀의 문제점을 분석했다는 그는 어린 공격수들이 초반부터 롱패스를 남발하면서 안전한 플레이만 고집한 것을 지적했다.페루, 코스타리카와의 조별리그 두 경기에서 26차례 세트플레이와 31회 슈팅 기회를 날려버린 것은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일대일 상황에서 모험을 두려워했고 전술 이해도가 떨어져 나타난 결과라고 덧붙였다. 특히 수비에선 커버의 기본개념 자체가 잡혀있지 않다고 질타했다. 수비수들은 스피드도 갖춘 데다 높은 기량을 갖춘 선수도 더러 있지만 공만 쫓아다니다 뒷공간을 내주는 등 불필요한 압박에 매달렸다고 지적했다. 대표팀 21명의 월별 출생 분포 문제도 지적했다.1∼3월생이 6명,4∼6월생 12명,7∼9월생 2명,10∼12월생 1명이었는데 방스보 박사는 “왜 지도자들이 1∼6월생만 뽑느냐.7∼12월생은 재능이 없다는 건가?”라고 되물었다. 선수를 선발할 때 성장이 끝난 선수만을 선호한 결과라며 덴마크의 일류 선수들에도 비슷한 경향이 나타난다고 했다. 방스보 박사는 “스스로 한계를 만드는 지도자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지난해 국제축구연맹(FIFA) 올해의 선수로 뽑힌 파비오 칸나바로(이탈리아)를 예로 들었다. 그가 14세 때 나폴리 유소년 코치들은 키는 작고 등은 뒤로 굽어 체형도 나쁜 데다 기술도 특출나지 않은 것으로 평가했지만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다며 지도자들은 눈앞만 보지 말고 꿈나무들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공인중개사 최연소 합격 여고생 김수미양

    공인중개사 최연소 합격 여고생 김수미양

    “학교수업받으랴 시험준비하랴 정말로 고생스러운 1년이었지만 결국 열심히 했던 보람을 찾게 됐네요.” 17세 여고생이 공인중개사 자격시험에 사상 최연소로 합격했다. 경기 고양시 능곡고 2학년 김수미양. 김양은 지난 달 치러진 제18회 공인중개사 시험에서 당당히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지난해부터 미성년자에게도 시험기회가 주어지면서 이번에 응시를 하게 됐다. 이번 시험에는 8만 2465명이 응시해 1만 9593명(23.8%)이 합격했다. 합격자 중 22명이 김양과 같은 10대다. 김양이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한 것은 지난해 11월. 학교를 마치면 매일 저녁 8시부터 3시간씩 공인중개사 학원에 다녔다. 학원수업이 끝난 뒤에는 새벽 2시까지 독서실에서 공부를 했고 주말에는 13시간씩 강의를 들었다.4∼5시간 취침하고 아침 7시에 등교하는 강행군이었다. 시험 6개월 전에는 애지중지하던 휴대전화도 치워 버렸다. 분식점을 운영하는 어머니 김태은(44)씨는 “공인중개사가 앞으로 전망이 밝은 것 같아 ‘시험 한번 치러 보겠느냐.’고 물었는데 수미가 ‘해 보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내년 대입 수험생이 되는 김양의 다음 목표는 법과대학에 들어가는 것이다.“어렵고 힘들었지만 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서 기분이 너무 좋아요. 법률 관련 분야에서 일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강주리기자 jurik@seoul.co.kr
  • [씨줄날줄] 지문날인/황성기 논설위원

    지문은 만인부동(萬人不同), 평생불변(平生不變)이다. 쌍둥이라도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며 모양도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문은 범죄자를 특정하는 최고의 수단이다.17세가 되면 주민등록증을 만들고 지문을 찍는다. 경찰청 컴퓨터에는 17세 이상의 지문 4000만매가 등록돼 있다. 범죄 현장에서 올라오는 지문을 빈틈없이 조회해 낸다. 하지만 범인 지문이라도 조회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17세 이하이거나, 경찰 은어로 ‘쪽 지문’으로 불리는 반쯤 찍힌 지문 그리고 외국인 지문이다.2003년 강금실 법무장관이 폐지를 지시하면서 외국인에게 부과됐던 지문 날인제는 없어졌다. 오늘부터 일본에 입국하는 외국인에게 지문날인과 얼굴촬영이 의무화됐다. 테러 대책이라지만 외국인을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하는 불쾌한 처사를 입국장에서 겪어야 한다. 영국도 장기 체류하는 외국인에게는 유럽권 국가를 제외하고 비자 신청때 지문을 채취하도록 출입국관리를 강화하긴 했다. 그러나 단기체류자까지 혹독한 생체 정보를 요구하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미국과 일본뿐이다. 일본은 과거에도 외국인 지문날인제도가 있었다. 외국인 등록증을 만들 때 지문을 찍도록 강요하고, 날인하지 않으면 재입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재일 동포들은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지문을 찍었다.1982년 재일 한국인 2세 신인하도 지문날인을 요구 받았다. 가냘픈 14세 소녀이지만 날인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나 2년 뒤 미국 유학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지문을 찍어야만 했다. 일본 언론과 시민단체가 주도하고 재일 동포들이 후원한 운동에 힘입어 99년 날인제는 폐지된다. 그 지문날인제가 되살아났다. 재일 한국·조선인 59만명중 특별영주권자 43만명은 면제됐으나 나머지는 꼼짝없이 단기체류 외국인과 똑같이 지문날인과 얼굴촬영을 당해야 한다. 일본 신문에 스포츠 기사를 기고하는 기자가 된 신씨.25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난 듯 “9·11테러 대책을 본뜬 일본은 미국을 추종하는 속국”이라고 분통을 터뜨린다. 인권 침해, 외국인 차별에 소리 높였던 과거 일본 사회. 지금은 놀라우리만치 조용해진 일본의 변화에 그는 공포감마저 느낀다고 했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2008학년 대입 수능] 비문학 지문 까다로워

    [2008학년 대입 수능] 비문학 지문 까다로워

    올해 수능 시험은 전체적으로 지난해와 비슷한 난이도를 유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올해부터 수능 성적이 등급으로만 표시되면서 변별력을 높인 문항이 영역별로 1∼2개에서 3∼4개씩 포함되면서 체감 난이도는 조금 올라간 것으로 분석된다. ●언어 영역 지난해보다는 어렵게,9월 모의고사와는 비슷하게 출제됐다는 것이 중평이다. 지문의 길이도 줄고, 시험 시간도 90분에서 80분으로 줄면서 시험 부담은 줄었다. 그러나 수험생들의 체감 난이도는 달랐다. 변별력 확보 차원에서 출제한 몇몇 문항이 체감 난이도를 높인 것으로 풀이된다. 대표적인 것이 비문학 지문이었다. 언어 음절에 관한 지문과 촉매 설계에 대한 과학설계 지문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공공사업에 적용되는 사회적 할인율의 결정 기준 문제, 하비의 ‘피의 순환 이론’ 등을 다룬 지문,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인 ‘체스판이 있는 정물’을 설명한 지문 등도 낯설었다. 반면 문학과 듣기는 비교적 평이했다. 전체적으로는 개략적인 내용 파악보다는 세밀한 의미를 해석하는 능력을 평가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교육방송 교재 반영도 두드러졌다. ●수리 영역 ‘가’형은 지난해 수능과 비슷하거나 쉬웠고,9월 모의평가와는 비슷하거나 어려웠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나’형은 지난해나 9월 모의고사와 비슷하거나 어려운 수준이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평가원은 9월 모의고사 때 ‘가’형 1등급이 6.17%까지 나온 점을 감안해 난이도를 조정했다고 밝혔지만 결과적으로는 ‘나’형의 체감 난이도가 높게 나왔다. 이는 내용이 쉬운 ‘나’형에 자연계 학생들이 몰리는 현상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특징은 두 가지 이상의 개념과 원리, 법칙을 종합적으로 적용해야 풀 수 있거나 교과서 밖 상황에서 수학적 개념을 적용하는 문항이 출제됐다는 점이다. 지진 발생 횟수, 음악회 공연 순서, 전기선 가설 최소 비용을 묻는 문항이 대표적이다. ●외국어 영역 지난해나 9월 모의평가와 비슷하거나 약간 어려운 수준이었다는 평가다. 지문이 조금 길어진 면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지난해 문제 유형과 소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어휘 수준도 심화선택 과목 수준을 유지했다. 듣기와 말하기는 기존 유형이 그대로 출제됐다. 다만 듣기는 대화 속도와 길이가 길어져 집중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달라진 점은 지문 내용을 완전히 독해해 내지 않으면 풀 수 없는 문항이 많았다는 것이다. 문제 먼저 읽고 지문에서 실마리만 찾아 골라 찍는 방식으로는 풀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대체로 평이했다는 분석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일부 어렵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탐구 영역 사회·과학탐구 영역 모두 전반적으로 지난해 수능이나 9월 모의평가와 비슷한 수준으로 출제됐다. 그러나 변별력을 높인 문항이 1∼2개씩 출제돼 선택과목별로 수험생들의 체감 난이도를 높이기도 했다. 사회탐구 영역에서는 시사적인 내용을 교과서와 연계시킨 문항이 많았다. 과학탐구 영역에서는 생활 속 소재를 활용하되, 지난해 수능이나 모의평가에서 출제된 기출 유형을 응용한 문항이 많았다. 김재천 강국진 류지영기자 patrick@seoul.co.kr
  • (34) 아프리카의 카멜롯 - 곤다르 기행

    (34) 아프리카의 카멜롯 - 곤다르 기행

    성을 나와서 시청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곤다르 시장을 구경할 수 있다. 유칼립투스 나무로 얼키설키 비계(고층 건물을 지을 때 디디고 서도록 긴 나무나 쇠파이프를 얽어서 널을 걸쳐 놓은 시설)를 사용해 건물을 짓는 모습도 볼 수 있고, 길 양쪽에 도열해 있는 재봉사들도 큰 볼거리다. 가게 안이 아니라 전부 바깥에 재봉틀을 내 놓고 작업을 하는데 이제는 생활사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숯을 넣은 다리미로 쓰윽쓰윽 다림질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다운타운이라고 해봤자 우리나라 시골읍 정도의 규모지만 도시 곳곳에서 비교적 현대식 건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토모에 따르면 이러한 현대식 건물들은 이탈리아 침략시기에 지어진 것들로 곤다르에만 약 300개 정도가 있다고 한다. 대부분 역사가 60여 년 밖에 안 된 건물로 시내 중심가에 있는 우체국 건물 등 주로 관공서 건물로 이용되고 있었다. 물론 주택으로 이용되는 경우도 있는데 철제 대문을 비롯해 화장실의 욕조나 변기 등은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수입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성에서 나와 시청 반대쪽으로 길을 잡아 걷다 보면 파실라다스 왕의 풀장과 여행서에도 나오지 않는 쿠스쿠암(Kuskuam) 교회를 만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세례의식을 기념하는 날인 1월 19일에는 파실라다스 왕의 풀장에서 대대적인 팀캇 페스티벌이 거행되는데 서로 물을 뿌려가며 축제를 즐기고 밤을 새워 예배를 보는 인파 덕분에 이 때가 되면 주변은 발 디딜 틈이 없다. 쿠스쿠암 교회는 시내를 벗어나 언덕을 몇 개 올라가야 하지만 가는 길목에 펼쳐지는 풍광이 나그네의 발걸음을 결코 억울하지 않게 한다. 특히, 교회의 천장화가 인상적인데 그 유명한 데브레 베르한 셀라시에(Debre Berhan Selassie) 교회의 천장화를 연상케 한다. 데브레 베르한 셀라시에 교회는 17세기 이야수 1세(혹은 조슈아 1세)가 건립한 교회로 곤다르에 있는 44개의 교회 건물 중 1800년대 남(南)수단에서 쳐들어 온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교회다. 에티오피아의 최고 걸작이라고 하는 종교화가 이 교회에 있는데 에티오피아 국가 홍보물을 비롯해 관광상품에도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 천장을 올려다 보면 에티오피아 특유의 천사가 가득 그려져 있는데(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전부 80개라고 함.) 신기하게도 얼굴 표정이 같은 게 하나도 없다. 커다란 눈에다 몸통이 아닌 머리에 날개를 가진 천사들의 모습인데 전설에 따르면 이 천사들은 성 요하네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쿠스쿠암 교회 천장화의 천사들도 바로 이런 모습이다.       <윤오순>
  • [06일 TV 하이라이트]

    ●클래식 오디세이(KBS2 밤 12시45분) 최근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발표한 중국인 연예·문화계 순위 2위는 젊은 피아니스트 랑랑이 차지했다. 그는 17세에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해 베를린필하모닉과 빈필하모닉, 미국의 5대 오케스트라와 모두 협연한 최초의 중국인이다. 웬만한 연예인 부럽지 않은 랑랑을 만나 본다.   ●그대의 풍경(KBS1 오전 7시50분) 영옥과 판수는 국밥집을 내놓는 등 보배와 함께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종구는 아동복의 판로를 뚫어 보겠다고 말하는 수련에게 그동안 자신이 물건을 납품해 왔던 가게를 보여 준다. 동혁은 자신을 향해 거짓말쟁이라면서 밉다고 소리치는 보배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아현동 마님(MBC 오후 7시45분) 길라가 부산으로 떠나는 날, 시향은 정성스레 준비한 도시락을 건네준다. 시향의 정성에 길라는 감동하고, 눈시울을 붉힌다. 시향 또한, 눈물을 흘리며 차 안에서 백미러로 멀어지는 길라를 쳐다본다. 한편, 시향모는 제라에게 잘 보여서 오늘 결혼 확답을 받으라며 성종에게 용기를 북돋워준다.   ●세계 세계인(YTN 오후 9시20분)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는 온천욕이 이란에서 새로운 대체요법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유럽과 중동, 아시아에서도 관광객들이 찾을 정도다. 최고의 온천지로 소문난 사발란 온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온천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증기에 몸을 맡긴 채 나른한 휴식을 즐긴다.   ●미워도 좋아(SBS 오전 8시30분) 강 회장의 소개로 현수의 존재를 알게 된 윤진과 준혁은 당황스럽고 유쾌하지 않다. 특히, 준혁은 동희와 아는 사이라는 게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윤진은 아버지 강 회장의 마음을 헤아리고 현수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준혁은 윤현수의 존재 때문에 위협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불쾌하다.   ●와신상담(EBS 오후 8시50분) 월나라군이 역 포위될 것을 예상했던 범려는 문종에게 백비를 찾아가 방법을 찾아보라고 청한다. 아어는 범려에게 성을 지키는 장병들을 이끌고 나가 구천을 맞이하라고 명하고, 암응에게 여이 등의 호송을 맡겨 회계산으로 향한다. 신전, 개자표는 구천에게 서둘러 철수할 것을 청한다.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5) 세계일주 나선 역관들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5) 세계일주 나선 역관들

    세계가 둥글다는 지식이 보편화되고 교통이 발달하면서 서양에서는 세계일주가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유럽에서는 세계일주에 나선 귀족들이 많았으며, 누가 더 빨리 세계일주를 하는지 내기를 걸기도 했다. 그런 소재로 1870년대에 쓴 작품이 바로 쥘 베른이 쓴 동화 ‘80일간의 세계일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관들도 1880년대부터 세계일주 여행길에 올랐으며, 일기나 시집, 기행문 등의 작품을 남겼다. 세계 각국의 언어는 저마다 달라서 세계일주를 하려면 당연히 여러 명의 통역이 필요했다.1883년에 보빙사로 미국에 파견된 민영익은 변수(일본어), 고영철(중국어, 영어) 등의 통역과 퍼시벌 로웰(미국인), 우리탕(吳禮堂·중국인), 미야오카 쓰네지로(宮岡恒次郞·일본인) 등의 외국인 수행원들을 데려갔다.1896년에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한 그의 사촌아우 민영환은 김득련(중국어), 김도일(러시아어), 윤치호(영어)를 데려갔다. ●청계천 해당루에 모였던 역관들의 ‘육교시사´ 청계천 주변에 모여 살았던 역관들은 아들이 10여세가 되면 가정교사를 모셔 역과 시험준비를 시켰다. 역관 변진환(邊晋桓·1832∼?)은 광교 옆에 해당루(海棠樓)를 짓고 자기 아들 변정(邊 ·1861∼1892)과 조카 변위(邊·1857∼?)의 시험공부를 위해 위항시인 강위(姜瑋·1821∼1884)를 초청하였다. 원주 변씨는 대대로 역관으로 이름난 집안인데, 변진환은 1855년 역과에 합격한 뒤에 한학 역관으로 압물주부가 되어 많은 재산을 모았다. 강위는 평생 집 하나 없이 떠돌아다니던 시인인데, 가을 소리를 듣기 위해 상상 속에 집 하나를 세우고 자신의 호를 청추각(聽秋閣)이라 하였다. 그럴 정도로 마음은 언제나 넉넉한 시인이었다. 강위가 청계천 해당루에 입주해 역관 자제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자, 의원 변태환의 아들인 변위는 17세 되던 1873년 역과에 합격하고, 변정만 계속 공부하였다. 이 일대에는 변위의 위당서실을 비롯해 김석준의 홍약관, 김경수의 인재서옥, 박승혁의 용초시옥, 김한종의 긍농시옥, 황윤명의 춘파시옥, 이용백의 엽광교사 등이 잇달아 있어 자주 오가며 시를 지었는데, 강위의 시집 ‘육교연음집(六橋聯吟集)’의 제목을 따서 이들의 모임을 육교시사(六橋詩社)라고 부른다. 광교가 청계천에서 여섯 번째 다리이기 때문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 벼슬까지 했던 이원긍(李源兢)도 육교시사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양반이었던 그가 아들 이능화에게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을 배우게 하여 국학자로 활동하게 했던 것도 이 시절 역관들과 가깝게 지내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육교시사에는 역관들이 많아서 그들이 중국이나 일본에 갈 때마다 송별회가 열렸는데, 추사 문하의 동문인 김석준이 중국으로 갈 때에 강위가 홍약관에 찾아가 이런 시를 지어주며 전송하였다. 노당(김석준)은 천하의 선비라서 옛책을 탐독하여 갈고 닦았네. 젊은 나이부터 북학에 뜻을 두어 나라 바깥을 마음껏 달렸네.(줄임) 지난번 내가 다시 중국에 갈 때 처음으로 수레를 나란히 했었지. 나그넷길 밤 새워 이야기 듣노라고 몇 차례나 외로운 등불을 밝게 켰었지. 우리 함께 완당선생의 문하에서 나왔지만 그대 혼자 칭찬받을 만큼 뛰어났었지. 중국을 드나들면서 서양 제국의 침략 아래 신음하는 중국의 모습을 보고 위기를 느낀 강위는 이제 청나라를 통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북학파의 시대가 다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김옥균 등의 개화파와 어울렸으며,1880년에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에 갈 때에 김옥균의 소개로 따라갔다. 스승격인 강위까지 중국과 일본을 다 돌아보고 돌아오자 육교시사의 역관 동인들은 거의 모두 개화파가 되었다. ●서재필보다 2년 먼저 美 대학 졸업한 변수 강위는 중국에 두 차례, 일본에 세 차례 다녀왔는데, 벼슬이 없던 그는 언제나 비공식 수행원이라 친지들이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김옥균이 1882년에 일본으로 가게 되자, 강위도 따라나서며 제자 변수에게 여비를 마련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변수(邊燧)는 호가 양석(養石)인데, 변정이 고친 이름이다. 변수는 스승과 함께 일본을 여행하게 된 것이 기뻐서, 변진환이 예전에 빌려 주었던 돈을 돌려 받으러 대구까지 내려갔다. 대구감영에 있던 채무자가 마침 서울로 올라가버린 바람에 빚을 받지 못하자, 다른 제자에게 융통해 부산까지 가서 김옥균 일행을 만났다. 강위는 이때 기록한 ‘속동유초(續東遊艸)’에서 “변수는 내가 그의 집에 머물면서 5년 동안이나 글을 가르쳤던 제자”라고 밝혔다. 김옥균 일행의 일본 방문은 3월 중순에서 8월 하순까지 다섯 달 걸렸다. 변수는 그동안 교토에 남아서 화학과 양잠 기술을 배우고 있었는데, 고국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중도에 급히 귀국하였다. 군란이 가라앉고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자 조정에서 다시 수신사를 일본에 보냈는데, 김옥균과 변수가 정사 박영효를 수행하고 갔다. 변수는 김옥균과 함께 도쿄에 남아서 차관교섭을 하였다. 1883년 7월에 보빙사 민영익이 최초의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하게 되자 변수도 육교시사의 동인인 고영철과 함께 수행하게 되었다. 아더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공식적인 일정이 10월 중에 끝나자, 변수는 민영익을 따라 유럽여행을 떠났다.12월 1일에 뉴욕에서 배편으로 떠난 이들은 그 이듬해인 1884년 5월에야 조선으로 돌아왔다. 갈 때에는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으니,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것이다. 일본과 미국을 돌아보며 견문을 넓힌 변수는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나서서 외국 공관과의 연락을 맡았는데, 삼일천하로 끝나게 되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베어리츠 언어학교를 마친 뒤에 1887년 9월 메릴랜드주립농과대학에 입학하여,1891년 6월에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 최초의 미국 유학생은 보빙사의 수행원으로 함께 미국에 왔던 유길준인데, 그는 거버너 더머 아카데미(대학예비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갑신정변 때에 귀국했으므로 대학에 진학하지는 못했다. 변수는 컬럼비아의과대학(현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서재필보다 2년 앞선 최초의 대학 졸업생이다. 미국 농무성에 취직해 공무원까지 되었지만,4개월 만에 모교 앞에서 열차에 치여 죽었다. 개화의 의지를 펼쳐보지 못하고 32세에 세상을 떠난 것이 아쉽다. ●고씨 역관 4형제 중국어 역관 고진풍의 네 아들 고영주, 고영선, 고영희, 고영철이 모두 역과에 합격해 역관으로 활동하였다. 중국어 역관인 세 아들은 육교시사에 참여해 시를 지었고, 왜어에 합격한 고영희는 독립협회 발기인 14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며 개화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다가, 일본세력을 등에 업고 법부대신이 되었다.1910년 이완용내각의 탁지부대신이 되어 한일합병조약에 서명하고 일본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변수와 함께 첫 번째 세계일주를 한 사람은 넷째 아들인 고영철(高永喆)이다.1876년 한어 역과에 합격한 고영철은 1881년에 영선사 김윤식을 따라 중국 천진에 유학했는데,25명 가운데 7명이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수사국(水師局)에 있는 중서학당(中西學堂)에 입학시험을 치렀다.3명이 합격했지만 2명이 곧 자퇴하였고, 고영철만 끝까지 남아 열심히 공부했다.1883년에 보빙사를 파견하게 되자,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그가 자연스럽게 수행원으로 합류했다. 한·미 교섭에서 주로 사용한 언어는 일본어였으므로, 미국인 로웰은 영어에 유창한 일본인 미야오카 쓰네지로를 개인 비서로 채용했다. 조선어를 일본어로 통역하면, 일본어를 다시 영어로 통역하는 식으로 의사를 소통했다. ●세계일주 시집을 일본에서 출판한 김득련 1896년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민영환은 세계일주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 ‘해천추범(海天秋帆)’이라는 기행문을 정리했는데, 실제로는 2등참서관으로 동행했던 역관 김득련(金得鍊·1852∼1930)이 중국·일본·미국·영국·네덜란드·독일·폴란드·러시아·몽고 등의 9개국을 거치며 기록한 것이다. 이때 세계일주를 같이 했던 일행 가운데 민영환과 김득련은 한문으로 기록을 남겼고, 윤치호는 영어로 기록을 남겼는데, 민영환과 김득련의 기록은 거의 비슷하다. 수행원 김득련의 기록이 공식적으로 전권공사 민영환의 이름으로 정리된 것이다. 김득련은 역관을 93명이나 배출한 우봉 김씨 집안 출신으로,21세 되던 1873년 역과에 합격하였다. 육교시사에 드나들며 강위의 지도를 받았는데, 모스크바 공관에서 시를 지으면서도 육교의 모임을 그리워했다. 러시아어를 모르던 중국어 역관 김득련이 민영환을 따라가게 된 것은 공식 기록을 한문으로 남기기 위해서였으며, 민영환과 한시를 주고받기 위해서였다. 러시아 사람들과의 대화는 김도일이 맡았기에, 그는 상대적으로 한가하게 시를 지을 수 있었다. 그는 지구를 한 바퀴 돌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감회를 한시 136수로 읊었는데,‘환구음초(環 艸)´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지구를 한 바퀴 돌며 읊은 시집”이라는 뜻이다.‘환구음초’에 그려진 신세계의 모습은 다음 회에 소개하기로 한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숙종시대 병적기록부 발견

    17세기 후반 충청도 관찰사의 지휘를 받는 군인의 개별 신상 정보를 담은 군적(軍籍)이 발견됐다. 거주지와 키, 나이, 얼굴 생김새, 흉터같은 신체 특징, 신원보증인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왕조가 병역 자원을 어떻게 관리했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제7좌사좌초관(左司左哨官) 예하 일기(一旗)에 소속된 임유청(林有靑)은 나이 43세로 병촌(幷村)에 살며, 얼굴에는 마마 자국이 있고, 수염은 적으며, 왼쪽 빰에 흉터가 있다고 했고, 아버지 이름은 ‘맛생’, 주특기는 포(砲·포병)라고 적었다.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명재 윤증(1629∼1714) 집안에서 보관하고 있던 숙종시대 충청도 관찰사 휘하 군인의 군적을 최근 입수하여 4일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군적은 모두 3책으로 2책의 작성 시기는 강희 18년(숙종 5년,1679)과 강희 36년(숙종 23년,1697)이며, 나머지 1책은 작성 연대를 알 수 없다. 이현수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장은 “조선시대 군적은 서애 류성룡 가문에 전하는 17세기 초반의 ‘진관관병용모책(鎭管官兵容貌冊)’과 육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8세기 후반 자료 정도”라면서 “이번 군적은 대단히 희귀한 데다, 수록된 정보도 다른 군적보다 훨씬 광범위하다.”고 평가했다. 군적에 따르면 충청도 관찰사 휘하 군대는 천총(千摠·정3품)이 지휘하던 사단급이었다. 그 아래 여단장, 연대장, 대대장, 소대장에 해당하는 파총(把摠·종4품), 초관(哨官·종9품), 기총(旗摠), 대장(隊長)이 있었다. 군적에는 모두 3878명의 신상명세가 올라 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강남구, 입양가정에 양육비지원

    강남구는 4일 입양가정에 양육수당과 양육비를 현실화해 지원하는 국내 입양활성화 정책을 마련하고 내년 1월부터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 정책에 따르면 지역내 입양가정에 양육수당으로 0∼12세 1인당 월 20만원, 만 13∼17세 월 30만원을 지원한다. 장애아동의 양육비는 만 17세까지 1인당 월 45만원, 의료비는 연 48만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기존에 지원하는 국·시비를 합치면 양육수당은 17세까지 1인당 30만원, 장애아동 양육비는 17세까지 총 100만 1000원, 의료비는 300만원을 받을 수 있다. 구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대대로 혈연을 중시해 입양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서 “이번 입양활성화 정책으로 입양가정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바람직한 입양문화를 만들게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푸틴 7년 찬미가?

    모스크바에서 4일 개봉된 한 액션 영화가 주목받고 있다.‘1612’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소위 러시아의 암흑시대로 일컬어 지는 17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는 폴란드 지배하에서 자신들의 조국을 이끌 강력한 지도자가 없어 낙담하는 러시아 농부들이 농기구 대신 칼과 대포를 앞세워 폴란드 영주를 몰아낸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가 3선 연임 금지라는 헌법 조항에 걸려 내년 3월 대선 출마가 어렵게 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집권 7년을 그린 다큐멘터리 같다는 점이다. 현재 많은 러시아 사람들은 푸틴 대통령을, 또 다른 암흑시대로 여겨졌던 1990년 소비에트 붕괴 이후 경제 및 정치 혼란, 러시아를 노리는 서방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지도자로 여기고 있다. 오는 12월2일 총선을 한달 남기고 개봉되는 이 영화는 크렘린이 4일 ‘국민화합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을 의뢰했다. 블라디미르 코티넨코 감독은 러시아 일간 이즈베스티아와의 인터뷰에서 “17세기는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로 이를 모르고선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다.”며 “현재와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여기서 현재는 페레스트로이카 이후다.”라고 말했다.모스크바 연합뉴스
  • [부고] 축구스타의 꿈 끝내 못다 펼치고…

    지난 7월 무릎 십자인대 수술을 받은 뒤 뇌사 상태에 빠진 16세 이하 여자 청소년축구대표팀 공격수 김지수(16·충남인터넷고)가 끝내 숨을 거뒀다. 한국여자축구연맹은 3일 “김지수가 2일 밤 9시40분쯤 사망했다.”며 “병원과 의료사고 여부를 놓고 결론을 내리지 못해 장례식 일정조차 못 잡고 있다.”고 밝혔다. 김지수는 6월 청학기 여자대회에서 무릎 인대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어 수술대에 올랐다가 ‘못다 핀 꽃’이 되고 말았다.7월16일 대전의 한 대학병원에서 수술 도중 쇼크를 일으켜 뇌사 상태에 빠진 뒤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석달 이상 생명을 연장해 왔지만, 이틀 전 혈압이 크게 떨어진 뒤 끝내 소생하지 못했다는 것. 초등학교 때 육상선수로 활약한 김지수는 지난해 11월 청소년대표에 처음 선발된 뒤 3월 U-16 아시아선수권대회 3위를 차지하면서 내년 17세 이하 월드컵 본선 티켓을 따내는 데 앞장섰다. 유족들은 “수술 당시 마취과 전문의에게 ‘선택진료’를 신청했지만 실제 마취는 다른 의사가 했다. 마취에 문제가 생긴 뒤 후속조치가 미흡한 상태에서 수술을 강행해 뇌사에 빠졌다.”며 의료사고에 따른 사망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병원측이 최선을 다했는지를 밝혀내기 위해 장례 일정을 미루기로 했다고 유족측은 설명했다. 그러나 병원측은 “수술 과정에 문제가 없었고 이후 소생을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고 주장하고 있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강남구, 입양가정에 양육비지원

    강남구는 4일 입양가정에 양육수당과 양육비를 현실화해 지원하는 국내 입양활성화 정책을 마련하고 내년 1월부터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 정책에 따르면 지역내 입양가정에 양육수당으로 0∼12세 1인당 월 20만원, 만 13∼17세 월 30만원을 지원한다. 장애아동의 양육비는 만 17세까지 1인당 월 45만원, 의료비는 연 48만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기존에 지원하는 국·시비를 합치면 양육수당은 17세까지 1인당 30만원, 장애아동 양육비는 17세까지 총 100만 1000원, 의료비는 300만원을 받을 수 있다. 구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대대로 혈연을 중시해 입양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서 “이번 입양활성화 정책으로 입양가정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바람직한 입양문화를 만들게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씨줄날줄] 몬테고베이 협약/황성기 논설위원

    국가간의 해양 관계를 규정하는 모법(母法) 격인 유엔의 해양법 협약은 ‘몬테고베이 협약’으로 불린다. 몬테고베이는 카리브해 연안에 위치한 자메이카 제2의 도시이다.1982년 12월 이곳에서 채택됐다 해서 협약에 별명이 붙었다. 몬테고베이는 그림 같은 바다와 산호초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휴양 도시로 1494년 콜럼버스가 상륙했던 곳이다. 사탕수수, 커피, 바나나, 생강, 럼주 등의 집산지이기도 하다.17세기 카리브 지역의 보물 같은 물자를 노린 해적들이 창궐했던 이곳에서 유엔 해양법 협약이 서명된 것은 아이러니다. 협약 101조는 해적 행위를 “민간 선박 또는 민간 항공기의 승무원이나 승객이 사적 목적으로 범하는 불법적 폭력행위, 억류 또는 약탈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행위에 대해 100조는 “모든 국가는 공해나 국가 관할권 밖의 어떠한 곳에서라도 해적 행위를 진압하는 데 최대한 협력한다.”고 적시했다. 인지한 이상은 해적 행위 진압을 돕는 게 유엔 정신이지만 사실 모른 체하고 지나쳐도 그만인 게 협약이 지닌 맹점이기도 하다. 소말리아 연안에서 해적에 납치될 위기에 놓였던 북한 화물선 대홍단호를 미 해군이 구출하려고 긴급 작전을 펼친 것도 따지고 보면 몬테고베이 협약을 따른 것에 불과하다. 중국 베이징에서 핵문제 협의차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을 만난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가 도와줬다고 생색을 냈을 법하다. 납치되든 말든 미국이 모른 척했다면 끝날 일이었으니 힐의 공치사를 나무랄 일만은 아니지만 말이다. 땅이든 바다든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는 미국의 첨단 정보망을 감안하면 대홍단호는 납치 전부터 윌리엄스호의 감시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미사일을 실은 예맨행 북한 선박을 나포했다가 국제해양법상 근거가 없어 풀어준 전력이 있는 미국의 돌변한 북한선박 구출작전은 모종의 의도를 감지케 한다. 북·미관계 훈풍설도 있을 테고 미국 주도의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을 압박하려는 계산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미국에선 이번 사건이 연일 화제라고 하지만 북한쪽은 잠잠하다. 미국의 속셈이 무엇인지 분석이 끝나야 공식 반응을 내놓을 참인가 보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조선 달항아리 2점 국보 지정예고

    조선 달항아리 2점 국보 지정예고

    문화재청은 리움미술관이 소장한 보물 제1424호 조선백자 달항아리와 보물 제1440호인 개인 소장 달항아리를 국보로 지정예고한다고 31일 밝혔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주로 빚어진 달항아리는 높이가 40㎝ 이상 되는 대형으로 유백색(乳白色)의 빛깔과 둥근 형태가 보름달을 떠올리게 해 붙여진 이름이다. 두 달항아리가 30일 동안의 예고기간 이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보로 지정되면, 국보 달항아리는 기존의 우학문화재단이 소장한 국보 제262호와 함께 세 점으로 늘어난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31) 에티오피아의 문화발상지 악숨 기행

    (31) 에티오피아의 문화발상지 악숨 기행

    솔로몬과 시바여왕의 로맨스 전설에 따르면 BC 10세기 아라비아 남서부에서 활동하던 시바 왕국의 지배자가 솔로몬이 재위할 때 금, 은, 보석, 향료 등을 실은 낙타 대상을 앞세우고 솔로몬의 궁전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 이야기를 두고 당시 고대 이스라엘과 아라비아 사이에 중요한 상업적 관계가 있었다고 파악하기도 하는데, 에티오피아에서는 그 해석이 다르다. 당시 솔로몬과 시바여왕 사이에 로맨스가 있었고, 한 아이가 태어났으며, 그 아이가 에티오피아의 단군 할아버지인 메넬리크 1세라는 것이다. 에티오피아는 역사서에도 이 내용을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 메넬리크 1세를 시작으로 1974년 군부 쿠테타로 물러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까지 에티오피아에서는 3,000년간 이 왕통이 끊어진 적이 없었다. 악숨에는 시바여왕의 이야기가 전설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로 여겨지는 흔적들이 산재해 있다. 오벨리스크가 모여 있는 곳을 등지고 좌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저수지가 하나 나타난다. 설명을 듣기 전에는 호수라고 생각했는데 시바여왕의 목욕탕이었단다. 폭 30m에 길이만도 100m에 이르니 수영장이라고 해도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닌데 욕조였다니 시바여왕은 대단한 권력가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생활용수 저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시내에서 자전거를 빌려 30분쯤 달리면 시바여왕의 왕궁 터에 갈 수 있다. 왕궁은 기원전 4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데 지금은 규모만 가늠할 뿐 궁전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 견고하게 쌓은 돌무더기들은 제주도의 돌담을 연상케 한다. 자기들도 신기한지 현지인들이 설명을 해주는데, 무너져서 현대에 와 다시 쌓아 올린 돌 자리는 과거에 있었던 자리와 차이가 난다고 한다. 자세히 살펴봤더니 정말 그랬다. 돌도 있고 기술도 있는데 궁성의 돌담을 지금은 그 옛날처럼 쌓을 수 없다는 혜곡 최순우 선생 이야기가 생각난다. 옛날에는 뭘 하나 만들어도 다 장인정신으로 만들었는데 요즘은 에티오피아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왜 그렇게 할 수 없는지 모르겠다. 시온의 성 마리아 교회(St. Mary of Zion) 악숨에는 시온의 성 마리아 교회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올드 시온의 성 마리아 교회(Old Church of St. Mary of Zion), 또 하나는 뉴 시온의 성 마리아 교회(New Church of St. Mary of Zion)이다. 전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자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17세기에 파실라다스 황제가 건립했으며 현재도 예배를 본다. 양식은 곤다르 성의 축조양식을 따랐다. 뉴 시온의 성 마리아 교회는 1960년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지었다. 영국을 방문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에게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교회에 여성출입을 금지하는 것은 남녀차별이지 않느냐고 충고해 같은 이름의 새 교회를 바로 옆에 짓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은 여성의 출입이 자유롭다. 외관은 17세기 라스 미카엘의 왕관을 본뜬 돔형으로 지어졌고, 실내가 넓은 편이다. 내부의 스탠드 글라스가 유명하며, 관리인에게 부탁하면 식물, 계란 등을 잉크로 사용해 양피지에 쓴 1,000년 전의 성서를 볼 수 있다. 문자는 전부 Geez로 되어있는데 기에즈는 현재 에티오피아 공용어인 암하릭의 모체가 되는 언어이다. 옛 교회와 새로운 교회 사이에는 ‘계약의 상자’를 보관하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이를 지키는 군사와 건물지기도 따로 있다. 무리해서 들어가려고 하면 실탄이 장전된 총기로 제지를 당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이 상자가 보관된 곳에 들어가면 죽기 전에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없다고 한다.       <윤오순>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3) 일본의 氣 가 살아나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43) 일본의 氣 가 살아나다 Ⅱ

    1629년 겐포(玄方) 일행은 상경을 허용하라고 요구하면서 자신들이 도쿠가와 막부 장군의 명령을 받아 온 사자(國王使)라고 강변했다. 조선 조정은 그들이 진짜 국왕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정홍명(鄭弘溟)을 선위사(宣慰使)로 왜관에 보냈다. 하지만 겐포 일행은 국왕사가 마땅히 지참해야 할 국서(國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조선은 당연히 상경을 다시 거부했다. 겐포는 국왕사라고 우기며 협박을 계속했다. 임진왜란 이후 최초의 상경을 둘러싼 실랑이는 쉽사리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외교전문가로 길러진 겐소의 제자 겐포 겐포(1588∼1661)는 17세기 초반 조·일 관계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승려였다. 그의 정식 이름은 기하쿠 겐포(規伯玄方)였고 호를 백운(白雲) 또는 회계(晦溪)라고 했다. 규슈 하카다(博多)에서 태어난 그는 출가한 이후 쓰시마로 건너갔는데, 출가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겐포에게 외교술을 가르쳐준 스승은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였다. 본래 하카다의 성복사(聖福寺) 주지였던 겐소는 1580년 쓰시마로 건너갔다. 겐소는 뛰어난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쓰시마에서 조선과의 외교 교섭을 담당하는 책임자로 활약했다. 조선과의 교역이 경제적 생명선이나 마찬가지였던 쓰시마의 입장에서는 능숙하게 외교문서를 다룰 수 있는 전문가가 절실했다. 문화적으로 일본인들을 ‘한 수 아래’로 보았던 조선 관인들과 접촉하려면 한문 실력뿐 아니라 시문(詩文) 등을 수작(酬酌)할 수 있을 만큼 문학적 재능도 필요했는데 겐소는 바로 그 같은 임무에 적격이었다. 겐소는 임진왜란에도 참전했다. 왜란 당시 명군 지휘부는 그를 일본군의 모주(謀主) 가운데 한 명으로 지목하여 그의 목을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상금을 주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겐소의 활약은 왜란이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를 통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한 이후 쓰시마의 소오씨(宗氏)는 겐소를 내세워 조선과의 강화를 성공시켰다. 겐소는 조선 사절의 도일(渡日)을 이끌어내고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과의 관계를 놓고 볼 때, 겐소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외교관이었던 셈이다. 겐포는 17세부터 쓰시마의 이정암(以酊庵)이란 곳에 머물며 겐소를 보좌하면서 조선과의 외교를 배웠다.1611년 겐소가 세상을 떠나자 스승을 이어 쓰시마의 외교문서를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오씨는 겐포의 나이가 아직 어린 점을 고려하여 그를 교토(京都)로 보내 좀더 학문을 닦도록 했다. 겐포는 1619년부터 쓰시마의 외교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1621년에도 국왕사라는 직함을 갖고 부산에 왔던 적이 있었다. 요컨대 겐포는 스승 겐소와 쓰시마 당국에 의해 의도적으로 길러진 외교 전문가, 조선 전문가였던 셈이다. ●조선, 논란 끝에 상경을 허용하다 겐포가 상경을 고집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조선 조정은 고민했다. 인조는 강경했다. 그는 ‘왜놈들은 우리의 원수’라고 전제한 뒤 일단 금제(禁制)를 풀면 이후의 폐단을 막을 수 없다는 것과 대의(大義)를 고려하여 상경을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고 했다. 또 ‘상경을 허용하면 공갈과 협박에 굴복하는 셈이 되고, 일본은 분명 조선에 사람이 없다고 여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신료들의 의견은 사뭇 달랐다. 병조판서 이귀(李貴)는 ‘선조(宣祖)께서도 일본을 이웃나라로 대우했는데 이웃 사신의 상경을 불허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했다. 그는 현실론을 내세웠다.‘호란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현실에서 왜인들의 비위를 거스를 수는 없으며 유순한 태도로 강자를 제압하는 것이야말로 보국(保國)의 방책’이라고 강조했다. 신료들의 생각도 대체로 이귀의 주장과 같았다. 하지만 인조가 워낙 강경하게 반대하여 결론은 쉽사리 내려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현실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겐포가 왔을 무렵 안팎의 사정이 너무 뒤숭숭했기 때문이다.1629년 2월, 후금 사신 만월개(滿月介)가 서울에 들어왔고, 같은 달 후금군은 선사포에 있는 모문룡의 둔전을 습격했다. 이 때문에 서울에는 후금이 다시 쳐들어올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퍼지면서 피란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3월에는 홍타이지가 국서를 보내와 ‘조선이 맹약을 지키지 않는다.’고 질책하고 ‘모문룡과 관계를 끊으라.’고 다시 협박했다. 전국적으로 가뭄이 계속되는 와중에 명화적(明火賊) 등이 발생했다. 이정구(李廷龜)는 이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당시의 조선을 가리켜 ‘공허한 나라(空虛之國)’라고 표현했다. 이귀가 다시 나섰다. 그는 ‘후금과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일본과 사단을 만들 수는 없다.’는 논리로 상경을 허용하자고 주장했다. 이정구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는 겐포 일행 가운데 몇 사람만 ‘특소(特召)’라는 명목으로 상경을 허용하되 나머지 인원은 부산에서 접대하자고 주장했다. 인조도 상황 논리에 밀려 결국 신료들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정의 절충안이 부산으로 전달되었다. 조선 조정은 겐포 일행에게 상경을 허용하면서 그들을 국왕사가 아닌 바로 아래의 거추사(巨酋使) 급으로 대우하기로 결정했다. 국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국왕사의 사절 정원은 25인이었는데 거추사의 정원은 15인이었다. 겐포는 반발하면서 거추사의 인원에 수행원 4인을 더 추가해야 한다고 강청했다. 또 자신이 ‘보행이 불편하다.’는 핑계를 내세워 가마를 타고 상경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정홍명은 겐포 일행의 집요한 요구에 밀려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이윽고 1629년 4월6일,19명으로 구성된 겐포 일행은 부산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했다. 임진왜란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린 상경 길이었다. ●돌아갈 때 목면 600동까지 챙겨 겐포 일행은 4월22일 서울로 들어왔다. 그들은 4월25일, 경덕궁(慶德宮, 오늘날의 경희궁)에서 인조에게 인사를 올리는 숙배(肅拜)를 행하고 5월21일 출발할 때까지 약 한 달 동안 서울에 머물렀다. 그들은 인조를 알현할 때 진상품으로 조총 20정을 비롯하여 화약 원료인 유황(硫黃)과 염초(焰硝) 수백 근을 바쳤다. 조선이 후금과 막 전쟁을 치렀던 것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전쟁을 치른 조선이 가장 아쉬워 할 수밖에 없는 무기류를 헌상함으로써 쓰시마의 존재 가치를 환기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기도 했다. 겐포가 이끄는 사절단의 본래 목적은, 막부의 명령을 받아 정묘호란 이후의 조선과 대륙 정세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겐포 일행은 서울에 머무는 동안 조선 내부 사정은 물론 명과 후금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부심했다. 조선인들을 통해 얻어들은 정보를 기행문 등에 꼼꼼하게 적었는가 하면, 대동했던 화가들을 시켜 목도했던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 기록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겐포 일행은 실리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쓰시마 도주(島主)가 특별히 보낸 스기무라(杉村采女)는 무기류 등을 헌상하여 조선의 환심을 사는 한편, 당시 이런저런 이유로 조선으로부터 받지 못했던 목면(木棉)을 지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스기무라가 요청한 목면의 양은 600동(同)이었다. 자그마치 3만 필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조선 조정은 당연히 거절했다.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겐포 일행은 5월21일 서울을 뛰쳐나갔다. 조선 조정이 쓰시마 도주에게 보내는 서계(書契)의 접수도 거부했다. 조선 조정은 난감했다. 최명길 등은 남변(南邊)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달래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은 결국 목면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왜관에 머물며 조선의 수락 소식을 들은 겐포 일행은 6월12일 유유히 귀국선에 올랐다. 정묘호란을 겪은 직후 ‘공허지국’ 조선의 외교를 이끌던 당국자들의 고뇌가 눈에 밟힌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세계사 교과서 바로잡기/삼인 펴냄

    교과서가 오류와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사회·세계사 교과서는 ‘세계를 처음 만나는 창’임에도 불구하고 강대국 중심으로 구성돼 편향된 세계관을 심어주고 있다. 때론 잘못된 지식을 전해주기도 한다.‘세계사 교과서 바로잡기(삼인 펴냄)’는 이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 인도·이슬람권·아프리카권 등 지역 전공학자 7명이 쓴 책이다. 저자들은 먼저 소승불교, 화교, 파오, 니그로 인종, 색목인 등 교과서에 나오는 잘못된 용어부터 지적한다. 조흥국 부산대 국제전문대학원 교수는 동남아시아와 스리랑카의 불교는 소승불교가 아니라 ‘상좌불교’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작은 수레’라는 뜻의 소승(小乘)이란 이름은 나중에 생긴 대승불교 쪽에서 소승불교의 개인주의적 구도 방식을 비판하며 일방적으로 붙인 이름이라는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사용된 ‘화교’라는 명칭은 외국에 일시적으로 체류하는 중국인을 뜻한다.20세기 중엽 이후 현지 사회에 점차 동화돼 가는 중국인들에게는 ‘화인(華人)’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게 조 교수의 지적이다. 화인은 14∼17세기 중국 역사를 기록한 ‘명사’에 나오는 용어로 해외에서 활동하는 중국인들을 지칭한다. 최근 중국에서도 공식 문서에 외국으로 이주한 중국계 사람들을 화인이라 부르고 있다. 몽골의 이동식 천막 게르를 중국어로 ‘파오’라고 하는 것은 김치를 기무치라고 하는 꼴이다. 또 니그로에서 파생된 ‘니거(nigger)’라는 속어는 흑인을 향한 가장 모욕적 표현으로 미국에선 금기시되는 말이다. 백인이 흑인 노예를 경멸하는 의미로 쓰였던 니그로란 단어를 우리 교과서에서는 왜 버젓이 쓰고 있을까. 색목인이라는 말도 문제다. 색목인은 제색목인(諸色目人), 즉 각양각색의 사람이란 말의 준말로 눈동자의 색이 다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중학교 교과서의 설명은 오류다.1만 98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주말탐방] 지문감식의 세계

    [주말탐방] 지문감식의 세계

    지문(指紋)이 곧 신분증인 사회가 도래했다. 과거 인장(印章·도장)을 대신해 개인 식별 수단으로 쓰였던 지문은 이제 전자 여권과 디지털 도어록 등 첨단 과학이 접목돼 다양한 방면에서 활용되고 있다.‘사람마다 다르고, 평생 모양이 변하지 않는다.’는 특성 때문이다. 지문은 범죄 수사에서 더욱 힘을 발휘한다.‘법정 증거’로 채택되지는 않지만 범죄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경찰은 최근 고속도로 휴게소 폭력 사건 가담자 확인을 위해 지문을 채취하기도 했다. 범죄 현장에서 숨은 단서인 지문을 찾아내는 서울경찰청 과학수사대(CSI)를 방문, 지문에 대한 숨은 이야기를 들어봤다. 24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내자동 서울경찰청 3층 다기능 현장증거분석실. 오전부터 과학수사계 현장1팀 소속 과학수사대(CSI) 요원들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5명으로 구성된 1팀 요원들은 지난 8월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서 발생한 빌라 여주인 살인 사건 당시 심하게 부패된 시신에서 지문을 채취한 사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매일 아침 반복되는 일종의 ‘브레인스토밍(아이디어 회의)’이다. 서울경찰청에는 현장 스케치와 비디오, 지문감식 전문가 등 5명으로 구성된 3개의 현장팀이 있으며, 살인사건 등 강력 사건이 발생하면 사건을 맡아 처리한다. 서울에서만 매년 200여건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중 우발적인 살인사건 등 범인이 확정된 경우를 제외한 100여건에 대해 감식 활동을 한다. 강·절도와 변사 등은 일선 경찰서 감식반에서 처리한다. ●사건 현장마다 80여건 지문채취… 하루종일 걸려 “요원들의 가방 안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토론을 듣던 기자에게 정교래(30) 현장1팀장이 ‘과학수사’라고 써 있는 가방을 열어 보여 준다. 분말과 솔, 손전등, 줄 등 미국 드라마 ‘CSI 과학수사대’에서 봤음 직한 다양한 장비가 들어 있다. 범죄 현장에서 범인의 흔적을 찾는 데 필수품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오전은 사건이 없어 다소 여유있는 시간. 정 팀장은 지문 채취에 대해 궁금해하는 기자에게 간단한 시연을 했다. 기자가 슬쩍 책상을 만지자 곧바로 정 팀장이 지문 채취용 분말을 묻히고 솔로 문질렀다. 지문이 점점 또렷하게 나타났다. 이렇게 찾아낸 지문을 채취용 스티커로 세심하게 떠 내면 채취 작업은 끝난다. 지문 흔적이 흐릴 경우에는 1000만원이 넘는 ‘가변광원 장비’와 형광물질을 이용해 지문을 찾아낸다. 그렇지만 실제 사건 현장에서 지문 채취는 연습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용의자가 지문 위치를 알려주고 범행을 저지를 리 없을 뿐만 아니라 온전한 지문 흔적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건 현장마다 80여건의 지문을 채취하다 보면 지문 채취에만 하루 종일 걸린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지문 감식은 채취 이후가 더 힘든 과정이다. 온전한 지문의 경우 17세 이상 국민과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외국인 지문이 데이터베이스(DB)로 보관된 ‘지문자동검색시스템(AFIS)’으로 찾아낸다. ●“용의자 지문 대조는 일일이 수작업으로” 훼손되거나 컴퓨터로 식별이 불가능한 지문은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내 증거분석계로 보내진다. 이 경우 경찰청에서는 6∼7년차 이상 베테랑 요원 27명이 일일이 수작업을 통해 지문을 찾는다. 지문을 컴퓨터에 입력하면 컴퓨터가 곧바로 용의자 사진을 찾아주는 드라마 장면은 과장됐다는 게 경찰의 설명.AFIS가 용의자와 비슷한 지문 10여개를 찾아주지만 이후 용의자의 지문 대조는 오롯이 수사관의 몫이다.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관계자는 “모르는 사람들은 ‘그걸 왜 사람이 직접 하느냐.’고 묻지만 현실에서는 비슷한 지문을 50∼100여개 뽑아낸 뒤 다시 최대한 추려내고 나서 베테랑 요원들이 돋보기로 ‘원지(原指)’와 일일이 대조해 일치하는 지문을 찾아내야 한다.”고 어려움을 설명했다. 이어 “시체나 쓰레기를 하루 종일 보며 지문을 찾아야 하는 지문감식 활동은 영화나 드라마처럼 화려하거나 역동적인 것이 아니다.”라면서도 “그래도 지문감식은 모든 수사의 기초작업인 만큼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난제가 끈질긴 증거수집 끝에 찾아낸 지문 하나로 해결될 때 경찰로서 무한한 보람을 느낀다.”고 밝혔다. 지난해 경찰청 과학수사센터로 지문감정이 의뢰된 사건은 모두 1만 7630건. 하나의 사건 현장에서 평균 4개의 지문이 채취되는 점을 감안하면 한해 평균 7만여건의 지문 감정이 의뢰되는 셈이다. 또 매년 60만명 정도의 지문 정보가 새롭게 추가된다. 경찰청 관계자는 “유관순 열사의 지문도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주민등록법상 사망자의 지문은 DB에서 삭제하도록 돼 있다.”면서 “유관순 열사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의 지문은 별도로 국가기록원에 이관해 보관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선진국서 국내 지문감식기술 벤치마킹하기도 지문 감식만 24년째라는 베테랑 김희숙(45·여) 경사는 새로운 사건 용의자를 찾느라 AFIS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용의자로 추정되는 지문을 컴퓨터에 입력하면 DB자료와 대조해 비슷한 지문 10여개를 찾아준다. 이런 식으로 빠르면 한 시간 만에도 용의자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현재 국내 지문감식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2004년 12월 동남아 일대를 강타한 ‘쓰나미(지진해일)’로 한국인 20명을 포함해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전 세계 과학수사대가 총동원돼 자국인 시신의 신원파악에 나섰다. 그러나 날씨가 워낙 덥다 보니 시체가 심하게 부패해 어려움을 겪었다. 여기에서 국내에서 파견된 경찰청 소속 지문 박희천 경위 등 감식반 3명은 시체의 손가락을 물에 불려 지문 흔적을 찾아내는 신기술을 적용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우리 경찰이 이 기술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영문으로 번역하던 중 미국이 올해 5월 국제감식협회 저널에 자기들이 찾아낸 기술로 먼저 올려버린,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김 경사는 “국내 과학수사 여건이 열악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문감식 기술만큼은 선진국이 우리 기술을 벤치마킹할 정도로 세계적 수준”이라면서 “국내에서도 전문가들이 늘어나 곧 미국 CSI를 따라잡을 날이 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임일영 류지영기자 argus@seoul.co.kr ■ ‘국내 지문감식 1인자’ 박희천 팀장 경기 파주경찰서 박희천(52·경위) 과학수사팀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지문감식의 1인자다. 그는 2004년 12월 동남아를 강타한 ‘쓰나미(지진해일)’참사 당시 경찰청 지문감식 전문요원으로 현지에 파견돼 신원확인 작업을 했다. 특히 그가 개발한 ‘고온처리법’은 우리나라 지문감식 수준을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았다. 예전에는 익사체나 심하게 부패한 시체의 경우 지문 채취가 사실상 불가능해 신원 확인율이 20%를 밑돌았지만 고온처리법으로 80% 이상으로 높였다. 현장 경험을 토대로 발견한 고온처리법은 끊는 물에 시체의 손가락을 3초 정도 담근 뒤 꺼내면 손가락 피부의 땀구멍이 열리면서 속살이 팽창해 지문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방법은 오는 12월 대한의학회에 정식 논문으로도 제출한다. 1980년 사진채증 요원으로 특채돼 경찰에 입문한 그는 1992년 경찰청 근무 당시 변사를 담당했던 경찰관이 퇴직한 자리를 대신 맡게 되면서 지문 식별 업무에 뛰어들었다.1998년 그는 목을 매 자살한 시신에서 지문을 채취하려다 굳어버린 주먹을 보며 ‘손을 물에 부풀리면 좀 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굳었던 손이 부드러워지면서 지문도 선명하게 찍혔다고 한다. 이후 끊임없이 실험을 반복하며 100도로 끓는 물에 3초가량 담갔다 빼냈을 때 가장 선명한 지문을 채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히 고온처리법은 쓰나미 참사에서 빛을 발했다. 쓰나미 참사 당시 선진국 과학수사대 요원들이 최첨단 장비를 모두 갖추고도 지문채취를 하지 못해 애를 먹을 때 그는 커피포트만 갖고 불과 5분 정도면 시체 한 구의 지문채취를 끝내 전세계 과학수사대를 놀라게 했다. 덕분에 우리나라는 쓰나미 피해자가 발생한 46개국 중 가장 먼저 신원확인을 끝냈고 다른 나라 시신 수천여구의 지문감식을 돕기도 했다. 그는 “얼마 전부터 경찰 내부에 ‘과학수사대상’제도가 생겨나는 등 과학수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바뀌고 있다.”면서 “이제 과학수사가 수사의 기본이 된 만큼 과학수사 인력도 더 많은 승진기회를 얻어 사기가 높아졌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지문, 그것이 알고 싶다 지문은 손가락 끝 부분뿐만 아니라 손바닥과 발바닥 등에서 나타나는 피부 융선을 말한다. 쌍둥이도 지문이 다를 정도로 전 세계에서 지문이 같은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문은 태중 3개월 때 형성돼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성인의 경우 0.5㎜ 정도의 가는 융선으로 요철(凹凸)로 이뤄져 있다. 지문 분비물은 98.5%가 수분이며 나머지 1.5%가 지방산과 아미노산, 나트륨 등 유기·무기물질로 구성돼 있다. 지문에 대한 역사적인 유래는 확실하지 않지만 기원전 고대 유물과 동굴 벽화에서도 손바닥 문형이 발견된 적이 있으며,2000년 전 중국에서 손도장으로 지문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범죄자 체포를 위한 지문대조는 1890년 인도 경찰의 영국인 총경인 에드워드 헨리가 개발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1903년 독일 함부르크 경시청 로셔가 창안해 발표한 ‘함부르크식 지문법’ 또는 ‘로셔법’을 1910년 11월 도입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범죄 수사를 위해 경찰은 크게 4가지 종류로 분류하며,0∼9번까지 번호를 붙여 분류한다. 분류번호 1번인 궁상문(弓狀紋)은 활모양의 지문으로 보통·돌기 궁상선으로 분류한다. 제상문(蹄狀紋)은 말발굽 모형의 지문으로 흉선이 흐르는 방향에 따라 갑종 제상문(2번)과 을종 제상문으로 분류한다. 을종 제상문은 융선의 수에 따라 7개 이하(3번),8∼11개(4번),12∼14개(5번),15개 이상(6번)으로 분류한다. 와상문(渦狀紋)은 달팽이 모형으로 종류에 따라 7∼9번이 부여된다. 변태문(變態紋)은 어느 문형에도 속하지 않는 문형으로 9번에 점을 찍어 분류한다. 이 밖에 화상이나 자상, 손가락 절단 등으로 손상된 지문은 0번을 부여한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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