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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IFA 20세 이하 월드컵] 산토스·가마 빛났다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대회를 빛낼 선수로 주목받은 ‘영건’ 가운데 멕시코의 지오반니 도스 산토스(18·FC바르셀로나)와 포르투갈의 브루노 가마(20·FC브라가)가 나란히 골을 터뜨리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멕시코는 3일 캐나다 토론토 내셔널스타디움에서 열린 대회 C조 1차전에서 후반에만 3골을 몰아치며 감비아를 3-0으로 제압했다. 멕시코는 전반에 수차례 유효슈팅을 허용하며 감비아에 밀렸다. 하지만 후반 12분 산토스가 멋진 중거리 발리 슛을 성공시키며 감비아의 기세를 꺾었다. 2005년 17세 월드컵에서 산토스와 함께 멕시코의 우승을 일군 수비수 엑토르 모레노(19·푸마스 우남)가 문전 혼전 상황에서 추가골을 넣었고, 산토스와 교체투입된 하비에르 에르난데스(19·과달라하라)가 44분에 쐐기골을 작렬시켰다. 포르투갈은 2003년 17세 이하 유럽선수권 우승의 주역이자 주장인 가마가 전반 45분 프리킥을 성공시킨데 이어 후반 16분 페널티킥까지 추가하는 등 뉴질랜드를 계속 몰아붙인 끝에 2-0으로 이겼다. 가마의 두번째 골은 20세 이하 월드컵 통산 1600호 골이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여왕 커 ‘유방암을 위한 버디’

    US여자오픈 마지막 라운드는 크리스티 커(30·미국)와 로레나 오초아(25·멕시코)의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린 한 판이었다. 둘은 2일 4라운드 13번홀까지 공동선두를 달리며 생애 첫 메이저 타이틀 쟁탈전을 벌였다. 그러다 커는 14번홀에서 5m짜리 버디 퍼트를 떨구며 1타차 단독 선두로 올라선 반면 오초아는 17번홀(파4)에서 되레 보기로 1타를 까먹어 2타차로 사실상 승부가 갈렸다. 3라운드에서 66타를 뿜어내 선두를 꿰찬 데 이어 최종 라운드에서도 버디 2개와 보기 1개를 묶어 1언더파 70타를 친 커는 최종합계 5언더파 279타로 LPGA 투어 통산 10번째 우승을 생애 첫 메이저대회로 장식했다.1995년 17세의 아마추어로 US여자오픈에 처음 나선 이후 41차례 메이저대회를 들락거렸지만 한 차례도 우승컵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시즌 첫 승과 함께 56만달러를 움켜쥔 커는 “마침내 꿈이 이뤄졌다.”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세계랭킹 5위. 데뷔 10년차인 그는 골프코스 바깥에서는 ‘유방암 퇴치 운동가’다.4년 전부터 남모르게 버디 1개당 50달러의 암퇴치 기금을 마련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의 어머니는 유방암 환자였고, 자신의 홈페이지 ‘문패’도 ‘유방암을 위한 버디’다. 1997년 그는 한 골프잡지가 ‘네눈박이 뚱뚱보(four-eyed fatty)’라고 부를 만큼 160㎝의 작은 키에 79㎏까지 몸이 불어난, 검은 뿔테의 안경잡이 여자였다.그는 이후 10년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살빼기 운동에 매달렸다.“10년전 거울을 볼 때마다 내 자신의 모습이 정말 싫었다.”고 털어놓은 그는 지금 59㎏의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며 얼굴까지 이목구비가 또렷한 매력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몸이 달라지자 플레이보이지에서 여섯 자리 액수의 금액을 제시하며 누드 촬영을 제안하기도 했다는 후문. 커는 지난해 뉴욕 브루클린 출신으로 스포츠컴플렉스를 운영중인 에릭 스티븐스와 결혼했고, 이번 대회 캐디백을 멘 남편의 도움까지 곁들여 인간승리의 찬가를 불렀다. 세계 톱랭커에 올라있지만 메이저 우승컵이 없어 ‘반쪽짜리 여왕’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어온 오초아는 커에게 덜미를 잡힌 데 이어 마지막 홀 버디를 잡아낸 안젤라 박에게 공동 준우승까지 허용,‘메이저’와의 악연에 또 치를 떨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아직 젊고, 앞으로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고 애써 자신을 위로하며 골프장을 떠났다.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17세 된 해리 “키스신 처음만 약간 긴장”

    17세 된 해리 “키스신 처음만 약간 긴장”

    |도쿄 강아연특파원|선과 악 사이에서의 갈등, 고뇌하고 깊어지는 내면…. 더욱 성숙해진 ‘해리 포터’가 돌아왔다. 오는 11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의 제작진 및 출연 배우가 지난 29일 오후 일본 도쿄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아시아 취재진 650여명이 모인 가운데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회견에는 ‘해리 포터’ 시리즈 전편을 제작한 프로듀서 데이비드 헤이만과 해리 포터 역의 다니엘 래드클리프가 참석했다. 다니엘 래드클리프는 올해 만 17세. 이번 영화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다섯번째 이야기로, 어느새 청년으로 훌쩍 자란 주인공의 심리 묘사와 악의 무리에 대항하는 불사조 기사단의 활약을 중심으로 흥미진진한 서사를 펼쳐나간다. 특히 해리 포터의 본격적인 로맨스와 주요 인물의 죽음 등이 소재로 등장해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다니엘 래드클리프는 이날 “이번 작품에서는 개인적으로 미묘한 내면 연기 부분에서 많은 성장을 했다고 생각한다.”면서 “해리가 선과 악의 기로에 선 상황을 통해 선택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알리고 싶었다. 또 해리가 거짓말쟁이로 오해 받았을 때도 포기하지 않고 진실을 알리려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해리로 살아오면서 실제로 자신을 해리로 착각해 마법을 쓰려 시도한 적이 없느냐는 질문에 “사실 나는 항상 마법을 사용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트럼펫 마술은 할 줄 안다.”며 웃었다. 제작자 데이비드 헤이만은 “다니엘과 해리 포터는 닮은 점이 많다. 성실하고 진실하며,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밀고 나갈 줄 안다. 또 둘 다 건강한 사고를 지녔고 모든 일에 호기심이 많다.”고 덧붙였다. 특히 해리 포터와 마법학교 동료 초 챙(케이티 렁)의 첫 키스신에 대해 관심이 집중됐다. 이 장면 연기가 어렵지 않았는지 묻는 질문에 래드클리프는 “처음에는 긴장했지만 나중에는 다른 연기와 별 다를 게 없었다.”고 대답했다. 특히 “혀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해 좌중의 웃음을 이끌어냈다. 한편 내년에 나올 예정인 시리즈 6편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 연출은 5편의 데이비드 예이츠 감독이 이어서 맡을 예정이다. 헤이만은 “6편은 더욱 재미있는 요소들이 많다. 예를 들면, 론과 헤르미온느의 로맨스, 해리와 지니 위즐리(론의 동생)의 관계, 볼드모트의 기원 등이 나올 예정이다.”고 설명했다. arete@seoul.co.kr
  • 킬러 신영록 ‘복수의 칼’

    킬러 신영록 ‘복수의 칼’

    ‘덤벼라, 아두’ ‘탱크’ 신영록(20·수원)은 2003년 8월15일을 잊을 수 없다. 굴욕적인 패배를 맛본 날이기 때문. 당시 신영록은 한 살 위 선배들과 함께 국제축구연맹(FIFA) 17세 이하 월드컵에 나갔다. 조별예선 첫 경기에서 미국과 맞닥뜨렸는데 1-6으로 허무하게 무릎을 꿇었다.‘신동’ 프레디 아두(18·레알 솔트레이크)에게 해트트릭을 내주며 농락당한 탓이다. 신영록은 후반 23분 벤치로 물러났고 아두가 골을 넣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두는 4개월 뒤 20세 이하 월드컵에서도 미국이 한국을 2-0으로 제압할 때 한몫을 했다. 신영록은 설욕을 별렀지만 좀처럼 아두와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19세 대표팀에서 미국과 2차례 친선 경기를 펼쳐 모두 이겼지만 이때 아두는 없었다. 동반 출전한 2005년 20세 이하 월드컵에서도 조가 달라 승부를 겨루지 못했다. 신영록이 약 4년 만에 굴욕을 되갚을 기회를 맞았다. 새달 1일 오전 6시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스타디움에서 펼쳐지는 20세 이하 월드컵 D조 1차전을 통해서다. 한국과 미국 모두 최강 브라질과 같은 조에 속해 있어 이 경기를 반드시 잡아야 16강 진출의 교두보를 구축할 수 있다. 앞서 월반을 하며 세계 무대를 경험한 신영록과 아두의 책임감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지난해 아시아선수권에서 득점왕(5골)에 오른 심영성(20·제주)에 이어 4골을 넣으며 분위기를 달궜던 신영록은 올초엔 부상 등으로 포지션 경쟁에서 뒤처져 K-리그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이달초 부산컵에서 2골을 뽑아내며 상승세를 탔다. 특히 몬트리올 입성을 앞두고 치른 체코와의 24일 평가전에서 심영성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했고, 다음날 개최국 캐나다와의 비공개 연습경기에서는 쐐기골을 터뜨리며 ‘킬러 본능’을 끌어올렸다. 신영록은 심영성, 하태균(20·수원)과 번갈아가며 투톱으로 나와 미국 진영을 휘저을 것으로 예상된다. 어린 나이지만 미국 주장을 맡고 있는 아두도 북중미 지역 예선은 물론 25일 칠레와의 평가전에서 1골1어시스트로 여전한 실력을 뽐냈다. 하지만 이 경기를 관전한 조동현 감독은 “예전보다 파괴력이 떨어졌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아두와 호흡을 맞추며 공격을 이끄는 조스머 알트도어(18·뉴욕 레드불스)도 경계 대상. 무서운 스피드를 지닌 조안 스미스(20·볼턴)는 부상으로 낙마했다. 조 감독은 “요주의 선수인 아두 등을 밀착 수비로 막는다면 (신영록 등) 우리 공격진의 플레이가 좋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이종현의 나이스샷] 미셸 위 계속 도전하라

    최근 골프 천재 소녀 미셸 위(17)의 남자 대회 도전이 다양한 찬반 이슈거리를 만들고 있다.‘더 이상 천재 끼를 쓸데없는 곳에 소비하지 말고 미여자프로골프(LPGA)로 돌아오라.’는 측과 ‘도전은 계속돼야 한다.’는 상반된 의견들이다. 필자는 후자의 입장이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충분한 시간을 가진 다음에 도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초 미셸 위의 남자대회 도전은 어른들의 욕심에서 시작됐다. 그녀를 대회에 끌어들임으로써 홍보를 배가시키고 마케팅에 적극 활용할 수 있었다. 300야드의 장타 소녀는 어른 손에 의해 남자 성인 대회에 초청됐고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 잠시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부담감과 언론, 동료들의 비난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미셸 위가 남자대회에 출전한다고 해도 성공적인 결과를 얻기가 어렵다. 아직 많은 경험과 주변 관계를 배워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주 짧은 시간에 미셸 위는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이를 지켜나가기 위한 능력을 키울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미셸 위는 너무 일찍 어른 손에 의해 남자성인무대에 나갔다. 미국의 보수적인 언론들마저 ‘미셸 위 미국 영웅 만들기’에서 ‘미셸 위 흔들어 놓기’로 태도를 바꿨다. 미셸 위가 미프로골프협회(PGA) 투어 존디어클래식 출전을 포기한 것은 잘한 일이다. 여자 대회에 꾸준히 참가해 동료들과의 관계도 개선시키고, 또 선배들의 생활과 실력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정신적인 성숙을 이룬 뒤 다시 남자대회에 출전해도 늦지 않다. 대회 스폰서, 주변 관계자, 그리고 미셸 위 부모도 돈보다는 선수의 자신감과 성숙에 투자해야 한다. 물론 달콤한 ‘초청료’ 제의는 프로선수로서 뿌리치기 힘든 유혹임에는 틀림없지만 미셸 위는 아직 17세의 소녀다. 그녀가 뛰어야 할 시간은 앞으로 20년,30년 그 이상이다. 지난해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는 1년 동안 1억달러(약 930억원)를 벌어들였다. 우즈의 뒤를 이어서는 오스카 델라 호야가 4300만달러를, 코비 브라이언트, 데이비드 베컴이 각각 3300만달러를 벌어들여 2,3위를 기록했다. 미셸 위는 1900만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어린 미셸 위가 지난해 벌어들인 수입으로 볼 때 정말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 초청료와 스폰서 수입으로 대회 상금은 아주 적다.LPGA에서 차근차근 상금을 벌어들여 진정으로 성숙한 실력과 정신력을 쌓았을 때 그녀의 남자대회 도전은 계속돼야 한다.레저신문 편집국장huskylee1226@yahoo.co.kr
  • [프로야구] KIA 2연승 ‘날개’

    [프로야구] KIA 2연승 ‘날개’

    KIA가 7연패 뒤 2연승을 내달렸다.LG는 선발 타자 전원 안타를 기록하며 4연패에서 벗어났다. KIA는 26일 대전에서 열린 프로야구 한화와의 경기에서 2-3으로 뒤진 7회 2사 1·3루에서 이현곤이 싹쓸이 역전 2루타를 날려 4-3으로 뒤집었다. 한화전 6연패의 사슬도 끊었다. 뒷심 부족에 허덕이던 KIA는 뒤집기를 연출하며 연승을 거둬 꼴찌 탈출의 희망을 되살렸다. KIA 마무리 한기주는 2이닝 동안 최고 150㎞가 넘는 강속구로 1안타 3탈삼진 무실점으로 시즌 15세이브(2패)째를 챙겼다. KIA는 선발 김진우가 제구력 난조로 3이닝 동안 3실점하며 조기 강판. 불안하게 출발했다. 그러나 이전과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0-3으로 뒤진 6회 이현곤의 안타와 장성호의 몸에 맞는 공으로 무사 1·2루를 만든 뒤 상대 실책과 김주형의 희생플라이로 2-3으로 따라붙었다. 이날 4타수 2안타 2타점의 맹타를 휘두른 이현곤은 “연승과 함께 상승세를 이어주는 역전 2루타를 날려 너무 기뻤다.”고 말했다. LG는 잠실에서 선발 봉중근의 호투와 장단 13안타를 터뜨린 타선을 앞세워 현대를 7-3으로 눌렀다. 봉중근은 6이닝 동안 삼진 5개를 잡아내며 6안타 1볼넷 2실점으로 막고 4승(5패)째를 챙겼다. 삼성은 대구에서 심정수의 선제 결승 2점포와 선발 제이미 브라운에 이은 권오준-윤성환-오승환의 황금 계투를 앞세워 두산에 3-0 완봉승을 거뒀다. 심정수는 1회 2사3루에서 왼쪽 담장을 넘기는 투런 홈런을 쏘아올렸다. 브라운은 5이닝 동안 2안타 1볼넷 무실점으로 상대 타선을 틀어막고 시즌 6승(4패)째를 챙기며 두산전 3연승의 휘파람을 불었다. 오승환은 1이닝을 삼자범퇴로 막고 17세이브(2승2패)째를 올렸다. 이날 허리 역할을 한 권오준과 윤성환도 홀드를 기록하며 계투진의 위력을 과시했다. 두산은 2위를 지켰지만 2연패에 빠져 선두 탈환에 대한 부담감을 키웠다. SK도 문학에서 선발 전원 안타의 불방망이로 롯데를 9-4로 제치고 6연승 콧노래를 부르며 선두를 고수했다. 롯데는 에이스 손민한이 1과 3분의2이닝 동안 4안타 3볼넷 6실점으로 주저앉는 바람에 초반에 무너졌다. 김영중기자 jeunesse@seoul.co.kr
  • [청소년 월드컵 개막 D-5] 멕시코 신화 재현 히든 카드 주목

    [청소년 월드컵 개막 D-5] 멕시코 신화 재현 히든 카드 주목

    이제 멕시코 4강 신화를 재현하는 일만 남았다. 새달 1일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막을 올리는 20세 이하 월드컵을 앞둔 한국 청소년축구대표팀이 25일 개최국 캐나다와의 비공개 연습 경기에서 하태균, 신영록(이상 20·수원)의 연속골에 힘입어 2-0으로 이겼다. 전날 동유럽 강호 체코를 1-0으로 제압하는 등 2연승으로 모든 준비를 끝낸 한국은 기분 좋게 개막을 맞게 됐다. 이번 대회에서는 6개조 1·2위와,3위 팀 가운데 4개 팀이 승점-골득실-다득점 등을 따져 16강 토너먼트에 나간다. ●어게인 1983! 세계 무대에 9번째 도전장을 던지는 한국은 박종환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던 1983년 멕시코 대회 4강이 최고 성적. 이후 1991년 포르투갈에서 남북 단일팀으로 8강에 올랐고,2003년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서는 16강에 진출했다. 나머지는 모두 조별 예선 탈락의 쓴잔을 들이켰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1차 목표가 16강 진입이지만 내심 멕시코 4강 신화 재현을 꿈꾼다.2005년 대회의 ‘천재’ 박주영(22·FC서울) 같은 특출한 스타가 없지만 한 명 한 명이 탄탄한 실력을 지녔다. 전문가들도 이번 팀을 역대 최강으로 꼽는다. 엔트리 23명 가운데 프로 선수가 15명. 숫자도 숫자지만 이청용(FC서울), 이현승(이상 19·전북), 이상호(울산), 하태균, 심영성(제주), 최철순(이상 20·전북) 등 소속팀에서 주전급으로 발돋움한 재목이 많아 질적으로도 빼어나다. ●죽음의 조를 뚫어라! 최근 골 감각을 회복한 신영록과 지난해 아시아선수권에서 5골을 뽑아낸 심영성, 장신(187㎝) 공격수 하태균이 최전방에서 선의의 경쟁을 펼치며 화력을 극대화할 전망이다. 간판 공격수였던 이상호가 수비형 미드필더로 내려와 플레이메이커로 변신, 눈길을 끈다. 신영록과 박종진(20·제프 지바)이 2005년 대회를 경험한 것도 대표팀의 심리적 안정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반면 최근까지 잔부상 선수들이 많은 점은 불안 요소다. 한국이 속한 D조는 미국 브라질 폴란드가 똬리를 틀고 있어 ‘죽음의 조’로 꼽힌다. 브라질은 버겁지만 미국과 폴란드는 해볼 만한 상대다. 조동현 감독은 첫 경기인 미국전에 승부수를 띄울 복안이다. 한국은 2003년 대회에서 미국에 0-2로 완패했지만 이후 친선전 등 3차례 경기에서 모두 이겨 자신감을 찾은 바 있다. 유럽 팀 가운데 전력이 처지는 폴란드에도 승산이 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눈여겨볼 신예 20세 이하 월드컵이 배출한 최고 스타는 단연 디에고 마라도나(47)다.1979년 일본에서 열린 2회 대회에서 현란한 발재간으로 골든볼(최우수선수)을 거머쥐었고 아르헨티나를 정상에 올려놨다. 이후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떠오른 별들은 ‘제2의 마라도나’로 불렸다. 1991년 포르투갈의 2연패를 달성하며 ‘황금 세대’의 출현을 선언한 루이스 피구도 이 대회가 낳은 스타. 누구나 인정하는 마라도나의 재림은 2001년 하비에르 사비올라(26·아르헨티나)와 2005년 리오넬 메시(20·아르헨티나)를 통해 이뤄졌다. 이번 대회에서는 브라질 명문 인터나시오날에서 뛰는 알렉산드르 파투(18)가 주목된다. 브라질의 미래로 꼽힌다. 탄탄한 기본기는 물론 화려한 개인기, 탁월한 골결정력을 모두 갖춘 ‘영건’으로 프리미어리그 첼시 등 유럽 빅리그에서 러브콜이 끊이지 않는다. 멕시코의 지오반니 도스 산토스(18)도 시선을 모은다. 바르셀로나 2군에서 ‘제2의 호나우지뉴’로 자라나기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받고 있다. 산토스는 2년 전 17세 월드컵에서 우승을 함께 일궜고, 역시 스페인 2부 리그에서 뛰는 카를로스 벨라(18) 등과 함께 파란을 꿈꾼다. 가나 출신으로 미국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3번째 출전하는 ‘신동’ 프레디 아두(18·레알 솔트레이크)도 빼놓을 수 없다. 이밖에도 아르헨티나 공격수 세르히오 아구에로(19·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스페인의 신성 알베르토 부에노(19·레알 마드리드)도 스타 등극을 ‘찜’한 상태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우승 후보는 1977년 튀니지 대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5번 열린 20세 이하 월드컵은 남미와 유럽이 호령했다. 남미가 9차례, 유럽이 6번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이번 캐나다 대회에서도 역대 최다 우승(5회)에 빛나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4회)이 강력한 우승 후보다. 디펜딩챔피언 아르헨티나는 1995·1997년 대회에 이어 두 번째 2연패를 노린다. 반면 남미 예선에서 아르헨티나를 제치고 1위로 올라온 브라질은 2003년 이후 4년 만에 정상 복귀를 꿈꾼다.D조 브라질과 E조 아르헨티나가 각조 1위를 차지한 뒤 토너먼트를 무사히 통과하면 역대 3번째 결승 격돌이 이뤄진다. 유럽이 마지막으로 우승한 것은 1999년 대회(스페인)이며 포르투갈이 1989·1991년 2연패로 가장 빛나는 성적을 남겼다.1990년대 초반 이후에는 남미에 주도권을 내줬다. 이번 대회에서는 2006년 19세 이하 유럽챔피언십 5경기에서 17골을 뿜어내며 우승한 스페인의 전력이 가장 돋보인다.1989·2005년 나이지리아,1993·2001년 가나 등 준우승만 4차례나 했던 아프리카 돌풍이 이번에는 우승컵까지 삼킬지도 주목된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생사 함께했던 형제

    6·25전쟁 직후 동반 징집된 뒤 같은 날 한 장소에서 전사한 형제의 사연이 뒤늦게 공개돼 전쟁의 비극성을 일깨우고 있다.1951년 4월 전남지역 빨치산 토벌작전에 참가했다 숨진 유석오·석환 형제의 이야기다. 24일 국립현충원에 따르면 유씨 형제는 1950년 12월31일 입대해 국군 8사단 10연대에 함께 배치받았다. 유족들은 입대연령이 안 된 동생 석환(당시 17세)씨가 함께 징집된 형 석오(당시 19세)씨를 의지하며 줄곧 따라다닌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2005년 개봉돼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진태(장동건 분)·진석(원빈 분) 형제의 사연을 떠올리게 한다. 형제는 1951년 2월 중공군의 춘계 공세 때 강원도 횡성지구 전투에 참전한 뒤 같은 해 4월6일 전남 화순군의 빨치산 토벌작전에 투입됐다가 화순읍 이십곡리에서 전사했다. 육군 전사(戰史)에는 유씨 형제가 배속됐던 8사단 3대대 10중대가 화순지역 화학산, 밀봉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을 토벌하려고 1951년 4월5일 이십곡리 일대로 파견됐다가 이튿날 빨치산의 기습을 받고 26명이 숨진 것으로 나와 있다. 형제의 유해는 육군이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으로 2001년 5월21일 실시한 유해발굴 작업에서 함께 발견됐다. 육군은 유해에서 유전자(DNA)를 채취해 전사자 유가족의 DNA와 일일이 대조한 결과 신원을 최종 확인,2002년 4월26일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했다. 형제는 죽어서도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나란히 묻혔다.이세영기자·연합뉴스 sylee@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6) 개화파의 비조(鼻祖) 오경석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6) 개화파의 비조(鼻祖) 오경석

    우리나라 개화파의 비조(鼻祖)로 흔히 오경석·유대치·박규수 세 사람을 꼽는다. 역관 오경석(吳慶錫·1831∼1879)은 북경을 열세 차례나 드나들며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시달리는 청나라의 모습을 보고 자주적으로 개화해야 한다고 깨달았던 첫 번째 개화파이다. 역관의 아들 유대치(유홍기)는 의학 공부를 해서 의원이 되었지만, 오경석과 교유하며 개화의 필요성을 공감해 20세 되던 김옥균을 개화파로 끌어들였던 인물이다. 좌의정까지 오른 박규수는 대동강을 거슬러 침입해온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시켜 대원군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중앙 정부로 돌아온 뒤에 북촌의 청년 지식인들에게 개화를 역설했던 정치적 후원자였다. 오경석은 중인이 주도하는 개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에, 북학파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를 통해 북촌의 양반 자제들을 개화파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8대 역관 집안에 태어나 5형제가 역과에 합격 오경석은 1831년 1월21일(음력)에 중인들이 많이 살던 청계천가 장교동에서 한어(漢語) 역관 오응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해주 오씨의 중시조인 오인유를 거쳐 11세 오인수까지는 문과 합격자를 낸 양반이었지만,12세 오동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참봉(종9품)을 지냈다가,13세 오구가와 14세 오대종이 무과에 합격하여 무반(武班)이 되었으며, 오대종의 맏아들인 15세 오인량이 역과에 합격하여 역관 가문이 되었다. 오제량의 아들인 16세 오정화까지 의과에 합격하여 의관(활인서 별제)이 되면서, 해주 오씨는 중인으로 신분이 굳어졌다.17세 오지항부터 23세 오경석까지 대대로 역과에 합격하여 역관이 되었으며, 혼인도 물론 역관 중심의 중인 집안과 하였다. 22세 오응현(1810∼1877)이 16세 나이로 1825년 역과에 2등으로 합격할 때에 1등은 이상적인데, 오응현은 친구 이상적에게 맏아들 오경석의 교육을 맡겼다. 오경석은 16세에 역과에 합격했으며, 아우들까지 모두 합격해 5형제 역관 집안이 되었다. 사위 이창현도 역관인데, 대표적인 중인 집안들의 족보를 종합하여 ‘성원록(姓源錄)’을 편찬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 무렵에는 중인들이 커다란 세력을 이뤘으며, 그 한가운데에 오경석이 자리했음을 알 수 있다. 오응현의 손자 가운데도 역관이 4명이나 나왔는데, 이들이 마지막 역관 세대였다. 갑오경장 이후에는 과거가 모두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한학습독관(漢學習讀官)으로 역관 생활을 시작한 오경석은 18세에 사역원 당상역관 이시렴의 중매로 그의 조카딸과 혼인했다. 처가인 금산 이씨는, 김양수 교수의 통계에 의하면 교회역관(敎誨譯官)을 가장 많이 배출한 중인 집안이다. 이씨 부인이 26세에 유행병으로 요절하자,3년 뒤에 역시 중인인 김승원의 딸과 혼인하였다. 아들 오세창도 역관이고, 딸도 역관 이석주의 아들인 이용백에게 시집보냈는데, 사위 이용백은 산학(算學)을 전공한 중인이다. ●무역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골동 서화 구입 오응현은 북경을 드나들며 재산을 많이 늘렸다. 신용하 교수가 오경석의 손자인 오일룡씨와 오일륙씨에게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맏아들 오경석에게 2000석 분의 재산과 집 두 채를 상속해 주었다고 한다. 장교동의 천죽재(天竹齋)와 이화동의 낙산재가 바로 그 집이다. 그는 ‘천죽재차록(天竹齋箚錄)’이라는 글에서 골동 서화를 모은 과정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계축년(1853)부터 갑인년(1854)에 걸쳐 비로소 북경에 노닐게 되어, 박식하고 단아한 동남의 문사들과 사귀면서 견문이 더욱 넓어졌다. 원(元)·명(明) 이래의 서화 백여 점을 차츰 사들이게 되었고, 삼대(三代)·진(秦)·한(漢)의 금석(金石)과 진(晉)·당(唐)의 비판(碑版)도 수백 종을 넘었다.(줄임) 내가 이들을 구입하는 데 수십년의 오랜 시간이 걸렸고, 천만리 밖의 것이라 심신을 크게 쓰지 않고는 쉽게 얻을 수 없었다.> 넓은 중국 천지 곳곳에 흩어진 골동 서화가 북경으로 모여들어, 유리창에 가면 구입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새로 발견되는 금석 탑본들은 역시 학자를 통해야 구입하기 쉬웠다. 오경석이 1861년 2월에 북경을 떠나기 직전에 청나라 학자 하추도(何秋濤)가 편지를 보내왔다.“보내드리는 석각(石刻) 한 장은 복건성 태녕현에 있는 주자(朱子)의 수서각석(手書刻石) 탑본입니다. 지금까지 금석가들이 모두 몰랐던 것이므로, 기실(記室)께 드려서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오경석이 이 편지와 탑본을 받고 얼마를 사례했는지 알 수 없지만, 청나라 학자 정조경(程祖慶)이 책과 인삼에 관해 보낸 편지를 보면 오경석이 인삼을 가지고 가서 팔아 골동 서화를 구입했음이 확인된다. <역매인형대인각하(亦梅仁兄大人閣下) 며칠 전에 나에게 인삼 값을 묻는 친구도 있고, 지화(紙貨)를 묻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귀국의 서적과 비판(碑版)을 서로 교환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혹 그런 일이 있게 되면 너무 번거로우시겠습니까? 전에 보내온 서목(書目)을 돌려드린 뒤에, 또 어떤 친구가 청구하고 싶어합니다. 아직 구입하지 않은 것도 있으니, 서목 한 벌을 다시 부쳐주시면 시기에 따라 모두 구입할 수 있고, 또 포장비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잠연당전서’는 종경이라는 친구가 가져 왔는데, 어제 또 찾아와 “서점에서 파는 값보다 헐하다.”고 하면서 이 서목을 읽어보아야 한다기에 하는 수 없이 빌려 주었습니다. 옛날 비판(碑版)은 장황(표구)되지 않은 것을 사야 값이 헐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범유경(范維卿) 같은 골동품상과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보를 교류했는데, 오경석이 북경을 왕래하며 기록한 ‘천죽재차록(天竹齋箚錄)’에 골동 서화 구입에 관련된 기록이 많았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아들 오세창이 지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일부 인용되어 남았을 뿐이다. 그는 골동서화를 구입해 감상만 한 것이 아니라, 훌륭한 글씨나 그림을 보고 연습하여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아들 오세창이 ‘근역서화징’이라는 불후의 저술을 남기게 된 것도 오경석이 수집한 골동 서화 덕분이었다. ●청나라가 망해가는 모습 보며 개화에 눈떠 오경석은 23세 때인 1853년에 처음 북경에 가서 같은 20대의 청나라 지식인들과 사귀기 시작했다. 스승 이상적의 소개로 빠른 시일에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북경에 갈 때마다 선물을 주고받았으며, 그들로부터 골동 서화만이 아니라 서양 문물을 소개하는 책들도 소개받아 구입해 왔다. 청나라 문사 61명과 주고받은 편지 292통이 현재 7첩으로 장황되어 후손 오천득씨가 소장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공자의 73대손 공헌이(孔憲彛)는 뒷날 내각 중서를 지내고, 만청려(萬靑藜)는 예부상서를 지냈으며, 반조음(潘祖蔭)과 서수명(徐樹銘), 장상하(張祥河) 등은 공부상서를 역임했다. 오대징은 갑신정변 때에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조선에 왔으며, 장지동(張之洞)은 호광총독(湖廣總督)과 군기대신(軍機大臣)을 역임했다. 조선과 중국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오경석이 이들의 도움으로 풀어나갔다. 오경석이 북경의 청년들 가운데 동방과 남방 출신의 양무파(洋務派) 개혁사상가들을 주로 사귄 것은 박제가의 영향 때문이다. 오경석이 역과 시험에 합격하도록 지도해준 스승은 역관 이상적이지만, 아버지 오응현은 박제가의 학문을 매우 높이 평가하여 후손들에게 박제가의 저술을 읽도록 했다. 오경석 또한 국내 학자 가운데 박제가를 가장 존경하여, 서재에는 그의 글씨와 그림을 한 폭씩 걸어놓고 그의 책을 읽었다. 추사에서 이상적으로 내려오는 중인 문화를 거슬러 올라가면 추사의 스승이 바로 박제가였으니, 이 집안에서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를 교과서로 받드는 것도 일리가 있다. 오경석은 다른 역관들같이 청나라에 드나들며 통역이나 하고 무역으로 재미만 본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청나라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신용하 교수는 오경석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1853∼1859년 사이에 개화사상을 형성한 선각자”라고 평가했는데, 오경석은 1840년부터 시작된 아편전쟁과 1851년에 수립된 태평천국 때문에 청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북경 현장에서 보고 자기만 개화사상을 지닐 것이 아니라 국내 지도층이 함께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청나라에서 간행된 ‘해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志略)’‘박물신편(博物新編)’‘양수기제조법(揚水機製造法)’‘중서견문록(中西見聞錄)’ 등의 서적을 구입해 왔다. 아들 오세창의 증언에 의하면, 유대치가 오경석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의 개혁을 성취할 수 있을까?” 묻자, 오경석이 “북촌의 양반 자제 가운데 동지를 구하여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오경석이 북경에서 구입해 온 세계 각국의 지리와 역사, 과학과 정치 서적들이 유대치와 박규수를 통해 김옥균과 박영효를 비롯한 북촌 청년들에게 전해지며 개화파라는 정치 세력이 생기게 되었다. 다음 호에는 오경석의 외교활동을 소개하기로 한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제2의 박지성’ 나왔다

    다음달 1일 캐나다에서 개막하는 20세 이하(U-20) 청소년월드컵을 앞두고 한국 대표팀이 24일 새벽 0시45분 체코와 평가전(MBC-TV 생중계)을 치르는 가운데 최근 대한축구협회의 인터넷 게시판에는 한 누리꾼의 글이 올랐다.‘일본 국가대표팀의 오심 감독이 극찬한 조영철이 (대표팀 명단에서) 왜 빠졌느냐.’는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조영철(18·요코하마FC)의 기량마저 난데없이 튀어나온 건 아니다. 그는 지난달 일본대표팀과의 연습경기에서 일본유통경제대 소속으로 뛰었는데 이비차 오심 감독은 그의 활약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는 후문이다.그는 특별히 조영철의 이름 석자를 언급하며 ‘최고의 스트라이커‘라고 극찬했다. 현지 언론은 ‘교토 퍼플상가에서 활약하던 ‘박지성(26·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재림’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조영철은 유망주를 해외로 연수 보내는 축구협회의 프로그램 3기로 프랑스 메스에서 1년간 선진축구를 배우고 돌아왔다. 그리고 지난해 돌아오자마자 문화관광부장관배 고교선수권대회에서 6골을 몰아치는 활약 끝에 우수선수상을 받았다. 17세 이하 청소년대표팀 출신인 조영철은 발재간에 유연성, 골결정력을 두루 갖춰 수도권 대학들과 K-리그 구단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유럽 빅리그 진출의 교두보로 삼겠다는 본인의 뜻에 따라 J리그로 눈을 돌려 지난달 요코하마FC와 2년 계약을 맺게 됐다. 초등학교 때부터 6∼7년간 그를 지도해온 최명룡 학성고 감독은 “분명 또래 선수들과는 한 차원 격이 다른 볼키핑, 유연성, 드리블 능력을 갖고 있다.”면서 박지성과 굳이 비교한다면 골결정력이 빼어난 점을 꼽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바지런하고 성실한 데다 남다른 승부근성까지 갖췄다는 게 최 감독의 평가. 지난해 1부리그로 승격한 요코하마FC는 일본축구의 영웅인 미우라 가즈요시(40)가 뛰고 있어 더욱 유명한 팀.조영철은 울산대를 그만두고 같은 시기에 입단한 ‘제2의 홍명보’ 배승진(20), 총련 계열로 세레소 오사카에도 몸담았던 미드필더 정용대(29)와 한솥밥을 먹어 눈길을 끈다. 최 감독은 “전담 수비수가 붙으면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경향만 고치면 몇년 뒤 한국 스트라이커로 충분히 성장할 재목”이라고 말했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이종현의 나이스샷] 한국 장타기록 세계를 뛰어넘어라

    지난 18일 원주 오크밸리CC에서 열린 국내 장타대회에서 만 17세의 박성호(제주관광고 3년)가 380야드를 날려 최장타자로 등극했다. 이전 기록은 아마추어 골퍼 김정운씨가 보유했던 369야드였다. 무려 11야드가 더 날아갔으며 또 자신의 365야드 기록보다 15야드나 더 나갔다. 참가자들은 “괴물이 나타났다.”며 감탄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190㎝,85㎏의 당당한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워풀한 스윙은 지켜만 봐도 시원하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박성호 자신은 “아직도 더 거리를 내야 한다.”며 땀을 쏟고 있다. 그의 목표는 9월 일본에서 열리는 ‘드라콘 장타대회’ 상위 입상이다. 나아가 기회가 된다면 미국에서 열리는 장타대회인 ‘리맥스’에 참가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 미국의 장타 기록은 어떨까? 일본 공식 기록은 2005년 드라콘대회에서 야마다 쓰스토모가 기록한 401야드다. 미국 공인기록은 1997년 기네스북에 등재된 제리 제임스의 473야드. 그러나 비공인으로 치러진 2004년 세계장타대회에서 스미스 스캇은 무려 539야드를 날렸다. 프로선수 가운데 존 댈리는 360야드를 날린 적이 있고, 한국의 허석호도 비공인 기록이긴 하지만 2002년 396야드를 날리기도 했다. 같은 해 행크 퀴니도 460야드를 날렸다. 최고 기록으로 보면 한국은 여전히 일본에 21야드의 비거리로 뒤져 있다. 미국과는 공인 기록에도 93야드나 모자란다.그러나 박성호는 “꾸준히 노력하면 400야드 이상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한다. 적어도 체형이 비슷한 일본 골퍼의 기록은 깰 수 있다는 설명. 박성호는 또 일본드라콘대회에서 우승한 뒤 그 자신감으로 미국 장타자들과 맘껏 겨뤄 보겠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아마추어와 프로를 막론하고 드라이버의 비거리는 자신감과 가능성을 나타내는 잣대나 다름없다. 많은 사람들이 더 멀리 날아가는 골프공에 열광하고, 또 그 자신도 멀리, 좀 더 멀리 보내려는 본능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스포츠가 바로 골프다. 장타 기록을 다시 살펴보면 박성호의 세계 최장타 기록 도전은 어쩌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스포츠는 항상 이변과 기적을 낳는 법이다. 이미 세계 최장타자들이 세운 드라이버 비거리 기록은 그저 숫자에 불과할 수도 있다. 깰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 그리고 새 기록에 대한 가능성과 도전 정신을 마구 솟구치게 하는 샘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레저신문 편집국장 huskylee1226@yahoo.co.kr
  • 한국 8개국 U-17축구 첫승

    한국 청소년 축구가 8개국 초청 국제청소년(17세 이하)축구대회에서 첫 승을 낚았다. 박경훈 감독이 이끄는 한국 청소년대표팀은 18일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대회 A조 2차전 아이티와의 경기에서 후반 막판 2골을 몰아친 배천석의 활약에 힘입어 2-0으로 이겼다. 지난 16일 브라질전에서 0-2로 무릎을 꿇었던 한국은 이로써 1승1패로 가나, 브라질(이상 1승1무)에 이어 조 3위를 달렸다.1.5군으로 짜여진 아이티를 상대로 완승을 거둔 한국은 20일 가나와 예선 최종전을 앞두고 있다. 한국은 이 경기에서 이긴 뒤 아이티가 브라질을 잡아줘야 조 1위로 결승에 오를 수 있다. 한국은 약체 아이티를 상대로 경기 내내 파상 공세를 펼쳤으나 후반 33분이 되어서야 숨통을 틔웠다. 미드필더 윤빛가람의 패스를 받은 배천석이 오른발 강슛으로 선제골을 뽑아낸 것. 배천석은 후반 인저리 타임에도 쐐기골을 뽑아내며 발재간을 뽐냈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프로야구] 롯데 2연승 ‘독수리 공포증’ 날렸다

    롯데가 한화에 2연승을 거두며 ‘독수리 공포증’에서 벗어났다.LG는 KIA와의 주말 3연전을 ‘싹쓸이’,4연승을 내달렸다. 롯데는 17일 대전에서 열린 프로야구 한화와의 경기에서 선발 최향남의 호투에 힘입어 3-1로 승리했다. 롯데는 한화전 7연패 뒤 2연승을 달리며 중위권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최향남은 절묘한 좌우 코너워크와 변화구, 노련한 완급 조절로 한화 타선을 요리했다.7과 3분의2이닝 동안 삼진을 6개 솎아내며 3안타 3볼넷 1실점으로 막고 10전11기 끝에 지난 12일 두산전에서 첫 승을 거둔것을 포함 2연승을 찍었다. 롯데 박현승은 25경기 연속 안타 행진을 이어갔다. 특히 부상으로 한달여간의 공백과 부친상의 아픔 속에 지난 12일 복귀한 뒤에도 이어간 기록이라 값졌다. LG는 잠실에서 선발 정재복의 무실점 호투를 앞세워 KIA를 3-1로 제압,4연승의 휘파람을 불었다.KIA는 또다시 3연패에 빠지며 LG전 5연패를 기록, 선두 두산과 승차가 10경기로 벌어져 꼴찌 탈출이 갈수록 멀어졌다. 정재복은 6이닝 동안 5안타 3볼넷 무실점으로 막고 3승(1패)째를 챙겼다.LG의 마무리 우규민은 2경기 연속 뒷문을 걸어 잠그고 17세이브(1승)째를 거머쥐며 이 부문 단독 1위로 나섰다. 불운에 우는 KIA 선발 윤석민은 7이닝 동안 삼진을 5개 솎아내며 9안타 1볼넷 3실점으로 퀄리티스타트했지만, 또다시 타선 불발로 시즌 최다인 9패(4승)째의 불명예를 안았다.LG전 4연패. 삼성은 대구에서 선발 임창용의 무실점 호투와 심정수의 결승 1점포를 앞세워 현대를 7-0으로 대파, 최근 4연패와 현대전 3연패의 사슬을 끊었다. 임창용은 6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3승(3패)째. 양준혁(삼성)은 5회 2타점 적시타로 지난 9일 통산 2000안타 이후 8연속 경기 안타를 이어갔다. 현대는 잇단 실책에 공격도 제대로 펴지 못해 3연승에 실패했다. 전날 홈런 3방을 폭발시킨 클리프 브룸바(현대)는 이날 침묵했다. 두산은 문학에서 SK를 연장 10회 접전 끝에 6-5로 제치고 2연승,SK와 승차를 1.5경기로 벌리며 1위를 지켰다. 김영중기자 jeunesse@seoul.co.kr
  • 美 공화 대선후보 여론조사 1위 톰슨 왜 뜨나?

    |워싱턴 이도운특파원|미국 공화당 차기 대통령 후보 가운데 선두로 급부상한 프레드 톰슨은 누구인가?톰슨은 공식 출마 선언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공화당원을 상대로 한 최근의 여론조사에서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 존 매케인 상원의원 등을 물리치고 지지율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톰슨은 파란만장하고 다양한 삶을 살아온 ‘풍운아’다. 그의 이력서에는 변호사와 로비스트, 상원의원, 배우, 대중연설가, 라디오 진행자 등 다양한 직함이 기록돼 있다. 미 외교위원회(CFR) 회원이며, 네오콘의 근거지로 알려진 미국기업연구소(AEI) 방문연구원이기도 하다. ●변호사·상원의원·배우·라디오 진행자 등 직함 다양 그는 1942년 8월19일 남부 앨라배마 주의 셰필드에서 태어나 테네시 주에서 학교를 다녔다.17세가 되던 1959년 사라 린지와 결혼했다. 톰슨은 플로렌스주립대와 멤피스주립대에서 철학과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밴더빌트 법대에 진학, 박사학위도 받았다. 그가 학위를 마치는 동안 사라는 세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도 다니며 톰슨을 뒷바라지했다. 그는 1967년 테네시 주 변호사가 됐고 1972년 테네시 출신의 하워드 베이커 상원의원 재선 운동을 도왔다. 공화당 인사들과의 안면을 바탕으로 1975년부터 1992년까지 워싱턴에서 로비스트로 등록해 활동했다. 제너럴일렉트릭(GE)과 테네시 저축·대출협회 등이 그의 주요 고객이었다. 저축·대출 업계와 관련, 이자율 규제 완화 로비를 벌였다. ●17세때 결혼… 75~92년 로비스트 활동 톰슨이 영화배우가 된 것은 1985년. 영화감독 로저 도널드슨은 1977년 테네시 방문 중 만난 톰슨에게 연기를 권했고 즉석에서 승낙을 얻어냈다. 이후 톰슨은 2007년까지 24편의 영화와 3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뉴욕타임스는 1994년에 발행된 영화 관련 기사에서 “할리우드 감독들이 미 정부 실력자 역할이 필요할 때는 톰슨을 찾는다.”고 전했다. 그는 NBC 인기드라마 ‘법과 질서’에서 검사역할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의 정치적 인기는 이 드라마의 이미지 탓도 크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한국에서도 인기 높은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에도 출연했다. ●85년 영화배우 데뷔… 2000년 매케인 지지 그는 1994년 의회 보궐선거에서 연방 상원의원(테네시주)에 당선됐다.1996년 선거에선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됐다. 상원에서 그는 정부관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00년 공화당 후보 경선에서 존 매케인 후보를 지지했다. 재선 임기가 끝난 뒤 그는 2002년에는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 톰슨은 첫 영화에 출연했던 1985년 조강지처 사라와 이혼했다. 사랑은 깨졌지만 우정은 유지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2002년 공화당 미디어 전략가로도 일하는 변호사 제리 켄과 재혼했다. 톰슨 부부는 2003년에 둘 사이의 첫 아이를, 지난해에는 둘째 아이를 낳았다. dawn@seoul.co.kr
  • “후배들아, 두려움 버려라”

    “후배들아, 두려움 버려라”

    “괜히 상대의 명성에 기가 질려 제대로 플레이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 적이 많다. 우선 두려움부터 없애야 한다.”(이영표)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좋은 선수들과 경기하면서 자신의 경쟁력을 알아보고 많은 걸 얻을 수 있기 바란다.”(박지성)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한국인 사총사가 모처럼 한 자리에 모여 세계대회 출전을 앞둔 청소년대표팀 후배들에게 조언을 건넸다. 박지성(26·맨체스터 유나이티드)과 이영표(30·토트넘), 설기현(28·레딩), 이동국(28·미들즈브러)은 11일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에서 대한축구협회가 마련한 20세 이하(U-20) 및 17세 이하(U-17) 대표팀 격려 오찬에 함께 했다. U-20 대표팀은 다음달 1일 캐나다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있으며,U-17 대표팀은 8월18일부터 9월9일까지 국내에서 개최되는 세계청소년월드컵에 나선다. 정몽준 축구협회장, 조동현 U-20 대표팀 감독, 박경훈 U-17 대표팀 감독 등과 한 테이블에 자리잡은 이들 4명은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맏형 이영표는 “후배들이 두려움을 극복하려 노력하고 주위에서도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목발을 짚은 채 여전히 왼발로만 걸음을 옮긴 박지성은 “세계대회에서 자기의 기량을 얼마나 보여주느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동국은 “최선을 다하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설기현도 “후배들을 만나보니 자신감에 차있어 결과가 좋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격려했다. 이영표는 재활에 대해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 아시안컵 출전 여부는 소속팀과 핌 베어벡 감독님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며 대표팀 복귀 의지를 피력했다. 하지만 이동국을 제외한 3명 모두 15일 발표되는 아시안컵 출전 명단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높다. 박지성은 “집에서 밥먹는 시간 정도만 빼놓고 기구를 이용해 열심히 재활 중”이라고 소개했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4) 서울에 중인은 얼마나 살았을까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4) 서울에 중인은 얼마나 살았을까

    조선후기 전문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중인들은 대부분 서울에 살았다. 지방에는 중인이 맡을 관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신분은 호적에 가장 잘 나타나 있는데, 하버드대학의 와그너 교수가 1663년에 작성된 서울 북부 호적을 분석해 보니 양반 신분의 호주가 16.6%, 평민 신분의 호주가 30%, 노비 호주가 53.3%였다고 한다. 양반은 현(顯), 평민은 작(作), 노비는 천(賤)이라는 표시로 구분되어 있다. 평민 호주도 171호 가운데 67호가 비(婢), 즉 여종을 아내로 맞아 살고 있었다. 노비의 비율이 이렇게 많은 것은 양반이 많이 사는 서울이었기 때문이다. 중인은 워낙 적어 평민 속에 묻혀 있었다. ●중인들은 직업상 성안에 많이 살아 규장각에 ‘북부장호적(北部帳戶籍)’이란 책자가 소장되어 있다. 이 호적 첫 줄에는 ‘강희이년계묘식년북부장호적(康熙二年癸卯式年北部帳戶籍)’이라는 제명이 쓰여 있는데,‘3년마다 작성하는 관례에 따라 1663년에 작성한 서울 북부지역 호적’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북부는 사대문 안의 북부가 아니라 사대문 밖의 북부이다. 사대문 안은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의 5부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도성 밖 10리를 성저(城底)라고 했는데 이에 해당되는 북부 주민들이 이 호적에 실려 있다.16개 마을의 681호가 152장 분량으로 정리되었다. 망원정계(망원동) 141호, 연서계(역촌동) 96호, 합장리계(합정동) 89호, 성산리계(성산동) 57호, 여의도계(여의도동) 44호, 증산리계(증산동) 41호, 수색리계(수색동) 43호, 가좌동계(가좌동) 39호, 신사동계(신사동) 32호, 세교리계(서교동) 23호, 말흘산계(홍제동) 20호, 홍제원계(홍제동) 16호, 연희궁계(연희동) 16호, 양철리계(대조동) 11호, 아이고개계(아현동) 10호, 조지서계(홍제동) 3호 순의 크고 작은 마을이 섞여 있다. 조지서(造紙署)는 종이를 만드는 관청인데, 인왕산에서 창의문을 나서면 오른쪽에 있었다. 호수가 많다고 반드시 큰 마을은 아니다. 양반들이 사는 마을은 아무래도 집이 크기 때문에 호수가 적고, 노비들은 몰려 살다 보니 호수가 많아지기도 했다. 조선시대 평민들은 군역(軍役)을 지고 있었는데, 북부 평민의 군역은 보병(步兵) 3호, 마병(馬兵) 29호, 포수(砲手) 27호, 보인(保人) 7호, 한량 4호에 정병(正兵) 21호, 내금위(內禁衛) 등 12호, 무과 급제자인 출신(出身) 7호 등이 있었다. 군역 이외의 특수직역으로는 역리(驛吏) 38호, 어부 4호, 서리(書吏) 2호, 장인(匠人) 1호, 봉수군(烽燧軍) 1호가 있었다. 관직이나 품계 보유자로는 내시(內侍) 9호, 관직 보유자 20호, 품계 보유자 3호, 율학교수(律學敎授) 1호가 평민으로 분류되어 있다. 내시는 평민으로 분류되었지만 양반 색채가 짙으며, 모두 노비를 소유하고 있다. 와그너 교수는 서리와 어부의 아들도 모두 역리라고 밝혔는데, 서대문에서 홍제원을 거쳐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연서역(延曙驛)이 있었기 때문에 역리가 많았다. 이 마을은 지금도 역촌동(역마을)이라 불린다. 평민 가운데 서리 2호와 녹사 1호, 율학교수 1호가 중인 집안이다. 양반 출신의 처는 씨(氏), 평민 출신의 처는 조이(召史·이두식 표기), 노비 출신의 처는 비(婢)라 불리는데, 상류층 양반의 처는 대부분 씨로 표시되었지만 하류층 양반과 중인의 처는 씨, 조이, 비가 섞여 있어 중인이 양반과 평민 사이의 신분임이 드러난다. ‘북부장호적’만 가지고 서울의 중인 비율을 계산할 수는 없다. 한성부 북부는 성안에 9개방, 성밖에 3개방으로 나뉘어지는데, 이 자료에는 성밖 마을 호적만 남아 있다. 중인들은 직업상 관청이 많은 성안에 살기 때문에, 성밖 마을 자료만 가지고 전체 비율을 짐작할 수는 없다. 호적에는 4대조가 기록되기 때문에 중인들이 어느 집안과 혼인하여 전문직을 세습하는지 알아보기 좋다. 북부 호적에 나타난 중인의 직역으로는 율학교수, 산학훈도(算學訓導), 산학별제(算學別提), 역관(譯官)이라는 기술직과 녹사(錄事), 서리라는 행정직이 있다. ●수색에 살던 중인 율학교수 가족 수색리에 살던 율학교수 김익상(金益祥)은 전형적인 중인이다.‘용궁’이라는 본관부터 중인임을 나타내며, 외가인 오산 박씨도 역시 중인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산학(算學) 훈도와 별제였다. 장인 송인남도 율학교수여서, 전문직끼리 혼인하는 습관을 보여준다. 중인 전문직을 선발하는 과거가 잡과인데,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의 네 종류만 실시하였다. 격이 떨어지는 산학(算學)은 화원(畵員)같이 취재(取才)라는 시험으로 선발했다. 문과는 각도에서 1차시험을 치렀지만 율과는 서울에서만 실시하여 18명을 뽑았으며,2차시험인 복시에서 9명을 추려 선발했는데 형조(刑曹)에서 주관하였다. 문과같이 임금 앞에서 치르는 3차시험 전시(殿試)는 따로 없었다.‘대명률(大明律)’은 책을 보지 않고 돌아앉아 외었으며, 당률소의(唐律疏議)·무원록(無寃錄)·율학해이(律學解)·율학변의(律學辨疑)·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펴놓고 읽게 하였다.‘무원록’은 글자 그대로 원통하게 죽은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해 부검(剖檢)하는 방법을 기록한 책이고,‘경국대전’은 이전(吏典)·호전(戶典)·예전(禮典)·병전(兵典)·형전(刑典)·공전(工典)의 순으로 편집된 조선의 종합 법전이다. 율과 합격자에게는 예조인(禮曹印)이 찍힌 백패(白牌)를 주고,1등에게 종8품계,2등은 정9품계,3등은 종9품계를 주었다. 율관은 종6품까지만 오를 수 있었다. 형조에서는 법률·소송·노예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는데, 율학청(律學廳)에서 법률을 가르치는 책임자가 바로 종6품 율학교수이다. 형조에서 중인으로는 가장 높은 관직이며, 그 아래 종7품의 율사(律士)와 정9품의 율학훈도를 두었다. 율과시험에 응시하려면 율학청에서 법률공부를 해야 했는데, 법률문서가 한문과 이두(吏讀)로 복잡하게 쓰여서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율학생의 정원은 형조에 40명을 비롯해 전국 부(府)·목(牧)·군(郡)·현(縣)에 배정되었으며, 검률(檢律 종9품)이 각 지방에 파견되어 법률 해석과 교육을 담당하였다. 망원정계에 살았던 녹사 고승길(高承吉)과 서리 김자순(金自順)·오영철(吳英鐵)은 행정직 중인인 경아전이다. 조선 초에는 과거에 응시할 실력이 없는 양반들이 행정 말단에 녹사로 서용되어 기한을 채우다가 지방 관직으로 나가는 경우가 있었는데,17세기 이후에는 양반에서 완전히 탈락하여 중인의 일자리가 되었다. 고승길의 증조부는 통정대부였지만 부친과 조부, 그리고 외조부까지 모두 충순위(忠順衛)나 충의위(忠義衛)라는 특수 군역을 지녔으니 말단 양반에서 탈락한 중인이다. 처 오씨도 씨(氏)로 표기되었으니 양반 출신이다. 서리는 녹사에 비해 격이 떨어지며 인원도 많다. 김자순과 오영철의 부·조부·증조·외조 가운데 서리가 없었으니, 세습직이 아니다. 김자순의 부친은 어부였는데, 조이(召史) 처에게서 낳은 아들은 천역인 역리(驛吏)가 되었다. 오영철이 사비(私婢) 처에게서 낳은 아들은 사노(私奴)가 되었으니, 재산을 축적하여 중인 신분으로 자리잡는 서리들과는 거리가 멀다. 천민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1903년 성안 3개 지역에 중인 호주 1명뿐 갑오개혁 이후에 호적제도가 바뀌자 1903년과 1906년 두 차례에 걸쳐 신호적 양식으로 조사한 호구표가 일본 교토대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2만 4000장 분량이다. 이 많은 분량을 모두 조사 분석할 수 없으므로, 조성윤 교수는 성안 3개 방(坊)과 성밖 3개 방을 선정해 분석하였다.240년 전의 호적과 크게 달라진 점은 갑오개혁으로 노비가 폐지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4조와 외조를 기록하는 법은 여전하였다. 조교수는 6개 방에 양반 호주 903명, 중인 호주 1명, 평민 호주 1390명, 근대직업을 가진 호주 98명이 살았다고 통계를 냈다. 성안 3개 방에 중인 호주가 1명뿐이라는 것은 뜻밖인데, 갑오개혁으로 정부조직이 달라져 근대직업으로 바뀌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성윤 교수는 다른 자료를 통해 19세기 중인의 비중을 보여 주었다. 첫째는 ‘속대전’에서 서리 정원을 1400명 정도로 규정했는데 그 가족을 합치면 상당한 규모라는 점이다. 둘째는 1882년 임오군란에 파괴된 중인 부잣집만 해도 70여채였다는 점이다. 셋째는 1801년 서울에 거주한 천주교인이 양반 73명, 중인 75명, 평민 103명, 천민 27명이었으니 그 가운데 중인이 27%나 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 숫자들은 특수한 자료지만, 중인의 존재가 그만큼 특별하다는 증거는 될 것이다. 다음 호에는 중인들의 족보를 통해 전문직이 어떻게 세습되었는지 밝혀 보기로 한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세계적 명성얻은 큰무당 김금화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세계적 명성얻은 큰무당 김금화씨

    1983년 10월 아웅산테러사건이 발생하기 1년여 전, 그러니까 1982년 봄 어느날이다. 한 전직 장관(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부인이 지인 소개로 용하다는 무당을 서울에서 만났다. 부인의 남편은 다름아닌 외무장관 후보로 하마평에 올라 있었다. 무당은 부인에게 “염려말라. 가만히 있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일러두었다. 그러면서 말미에 “요즘 들어 국상(國喪)이 자주 보인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원혼을 풀어야 한다.”는 말을 뱉었다. 며칠 후 무당의 말대로 전직 장관 부인 등을 포함, 몇몇 지인들이 서울시내 모처에 모여 고 박 전 대통령 부부의 원혼을 달래는 굿을 조용히 치렀다.(이때 지난해 작고한 사진작가 김수남씨가 무당옷을 빌려 입고 유일하게 외부인으로 참석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무당은 전직 장관 부인한테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장관 지명에서 자신의 남편은 탈락되고 대신 이범석씨가 신임 외무장관이 됐다는 것이었다. 목소리에는 약간 서운함이 담겨 있었다. 그러자 무당은 “변명 같지만 전화위복이 될 테니 두고 보라.”고 위로했다. 해가 바뀌어 1983년 9월. 무당은 매년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생일날(음력 8월18일)에 주위 친한 사람들을 일부 초청, 점을 봤다. 그런데 이날따라 뭔가 이상했다. 무당은 “버마(미얀마) 가면 안 되는데, 버마 가면 정말 안 되는데!”라고 하며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뱉어냈다. 한달 뒤인 10월7일 밤, 무당은 대통령이 죽는 꿈을 꾸었다.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건 개꿈이야, 개꿈!”하면서 남쪽을 향해 침을 퉤퉤 내뱉었다. 공교롭게도 이튿날 아침 아웅산테러라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대통령은 위기일발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이범석 외무장관을 포함, 청와대 수석비서관 등 수행원 17명이 사망했다. 인간의 운명을 ‘재천’이라고 할 때 몇 가지 흥미로운 상황이 떠올려진다. 첫째, 당초 전직 장관 부인의 뜻대로 남편이 외무장관에 발탁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결과적으로 보면 무당의 말대로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둘째, 무당이 ‘버마’를 운운한 점, 또 ‘대통령꿈’을 꾸고 벌떡 일어나 미얀마가 있는 남쪽을 향해 침을 뱉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어쨌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운 좋게도 살아 돌아왔다. 운명의 조화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역사적인 사건을 앞두고 신(神)의 전주곡 같은 기묘한 일이 벌어지는 경우가 가끔 있다. 특히 삶과 죽음이 피범벅이 된 끔찍한 사건일수록 그 뒷얘기는 더욱 신기하게 다가온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살아온 60년 이 시대의 큰무당, 인간문화재 만신 김금화(金錦花·77)는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가는 곳마다 숱한 일화를 뿌린다. 작두 타며 신을 만나는 그야말로 이승과 저승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뭔가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는 17세 때에 처음 신과 만났으니 올해가 꼭 60년째가 된다. 한때는 혹세무민이라는 이유로 핍박과 설움도 많이 받았지만 이제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훌륭한 ‘한국인’이 됐다. 그가 세계 여러 나라에 갈 때마다 단연 ‘인기캡’으로 관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국내에서 서해안풍어제(무형문화재82-2호) 굿판을 벌일 때도 많은 외국팬들이 일부러 찾아올 정도다. 그는 2년 전 강화도 북쪽 해안가에 3000여평의 부지를 마련해 무속체험장인 ‘금화당’ 간판(글씨는 ‘도올’이 썼다.)을 내걸었다. 서해안풍어제 굿판을 벌이기에도 좋고 고향인 황해도 연백땅을 바라보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서울 이문동의 서해안풍어제연구소와 금화당을 오가며 8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신과 가까이에서 ‘경계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난주 이문동 연구소에서 그를 만났다. 소박한 한복차림에 활짝 웃으면서 반긴다. 평범하고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머니와 다를 바 없었다.‘금화당’ 얘기를 먼저 꺼냈더니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해 뉴욕·워싱턴·LA 공연을 비롯, 유럽 각지의 해외공연을 수십차례 다니면서 무속 체험장 같은 공간을 꼭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여러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줘 뜻을 이룰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외국으로도 소문이 퍼져 최근에는 세계 연극평론가 70여명, 외국 신문사 기자, 천주교 수녀들이 다녀갔다고 귀띔했다. ●무속박물관이 내 꿈 아울러 여력이 되면 무속박물관을 세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고 부연했다. 그는 200여년된 탱화 등 우리 무속사 연구에 가치가 있는 귀중한 사료들을 다수 소장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931년 황해도 연백군 석산면의 아들이 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남자동생을 본다는 뜻에서 처음에는 ‘넘새’라는 이름을 가졌다. 나이 다섯에 남동생이 태어나자 이름을 ‘금화’라 했다. 그의 신기는 어릴 적부터 신통방통했다. 열살 무렵에는 아이들과 놀면서 시퍼런 낫을 맨발로 타고 올라가 춤을 췄다. 또 어느 집에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고, 임신한 사람을 보면 아들인지 딸인지 알아맞혔다. 열일곱살되던 정월 대보름날 밤이었다. 시름시름 무병을 앓던 그가 달맞이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개울을 건너려 하자 무수한 별들이 머리 위에 쏟아져내렸다. 한참 동안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일어났다. 이때부터 ‘신의 딸’이 됐다. 그러자 외할머니가 신 어머니가 돼 금화의 허주굿(온갖 잡신을 몰아주는 굿)을 해주었다. 금화는 이어 내림굿을 하면서 작두를 탔다. 열아홉살되던, 즉 6·25직전 어느날었다. 금화는 하늘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뚝뚝 떨어지고 달구지가 피묻은 옷가지를 싣고 가는 광경을 보게 된다. 물론 신의 계시였다. 당시 북한에서는 무당을 반동분자로 취급했던 터였다. 나라에 큰 난리가 날 것을 안 금화는 숨어다녔으나 자주 붙잡혀 온갖 고초를 겪었다. “전쟁 초기에는 북한군인들이 찾아와 피란간 사람들의 명단을 대라며 윽박지르더군요. 반동으로 몰리자 마을 원두막에 앉아 혼자 인공기를 만들며 위기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9·28수복 직후에는 남한 군인들이 와서 빨갱이 노릇한 사람의 명단을 대라고 하더군요.‘너는 무당이니 다 알지 않느냐.’고 하면서 목에 총을 들이대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지요.” ●올해 일어날 일은 비밀 결국 우여곡절을 겪으며 난리 중에 인천으로 피란오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순탄치만은 않았다. 특히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질 때에는 굿을 할 수가 없어 많이 울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석, 우수상·공로상·개인상·단체상 등을 싹쓸이하면서 당당한 민속예술인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장의 초청공연이 계기가 됐다. 이때 작두 타는 모습 등을 비롯, 한국의 토속 샤머니즘을 선보여 많은 관중을 불러모았고 이후 매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해외공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올해 큰 사건은 없느냐고 하자 “그건 천기누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사회가 너무 빠르다. 순리대로 가야 하며 남을 탓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는 9월 금화당에서 무녀인생 60년을 맞아 많은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큰 굿판을 벌일 예정이니 그때 구경 오라고 당부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31년 황해도 연백 출생. ▲46년 외할머니에게 허침굿(허주굿), 내림굿, 솟을굿을 받음. 방수덕·권만신에게 대덕굿, 철물이굿, 배연신굿, 대동굿 등 전수. ▲82년 한·미수교100주년기념사업 문화사절단으로 방미. ▲84년 미국 하와이주 인간학연구위원회 및 하와이대재단 초청공연, ▲8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 서해안배연신굿·대동굿 기능보유자 지정. ▲95년 김금화대동굿(연강홀) ▲2000년 서해안풍어제보존회 이사장
  • “70여가구중 환갑 때까지 생존자 드물어”

    “70여가구중 환갑 때까지 생존자 드물어”

    지난 4일 서해안 고속도로를 두 시간쯤 달려 도착한 충남 홍성군 덕정마을은 전형적인 한국의 농촌이었다.40세 이하 젊은이를 찾아보기 힘들었고, 뜰에는 간간이 노인들의 모습만 보였다. 나지막한 뒷산이 마을을 넉넉하게 끌어안았고, 논에는 푸릇푸릇한 모가 종아리 높이로 자랐다. 이방인을 반갑게 맞이해 주는 노인들은 저마다 ‘석면의 공포’에 짓눌려 있었다. 지금은 70여가구밖에 남지 않은 덕정마을이 일제시대에 아시아 최대 규모의 석면광산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을 포함해 1000여명의 노동자가 석면 원석을 캐고 나르던 기억은 이제 몇몇 주민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들이 전하는 석면광산의 기억은 평화로운 마을의 모습과 사뭇 대조적이었다. 3대째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이정석(79)씨는 광천석면광산의 50여년 역사를 두 눈으로 지켜봤다. 자신도 열두살 때부터 30년간 광산에서 일했다는 이씨는 “눈꽃이 핀 것처럼 돌가루와 석면가루가 소나무에 하얗게 쌓여 있었다.”고 회상했다.“석면 원석을 보면 가느다란 흰 줄이 있어. 그게 석면이거든. 그걸 뽑아 내려고 돌을 빻았지. 그땐 마스크 같은 게 있나. 그냥 먼지를 다 마시는 거야.” 건강검진은커녕 변변한 보신책(保身策)도 없었다.“수당받는 날 돼지고기 몇 점 사먹는 거지. 목에 쌓인 먼지 씻는다고….” ●일제시대 아시아 최대 석면 광산… 1000여명 일해 광복 이후 광산이 외지인에게 팔리면서 광천석면광산의 규모는 쪼그라들기 시작했다.1983년 폐광 직전엔 근로자 수가 100여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노출 후 잠복기가 긴 석면의 특성 탓에 광산과 주민 피해의 상관관계는 아직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온 가족이 광산에서 일했다는 홍순표(48)씨는 가족의 대부분이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사망했다. 홍씨의 아버지 3형제가 모두 광산에서 일했는데, 아버지 홍종수씨는 1970년 51세에 사망했고, 큰아버지 홍갑수씨는 10년 뒤 66세에 세상을 떴다. 작은아버지 홍수복(74)씨는 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있지만 관절염이 심하다. 홍씨의 고모와 고모부 역시 광산에서 일하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요절했다. 홍씨의 형은 17세 때 굴이 무너지며 목숨을 잃었다. 홍씨는 “그땐 병원도 가지 못한 어르신들 대부분이 병명도 모르고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기침이 잦고 오랫동안 앓았던 기억만 남아 있다. ●“마스크 없이 석면가루 먼지 그대로 들이마셔” 마을회관에서 만난 이장 이조민(64)씨는 마을 출신 피해자를 거의 다 기억하고 있었다. 이장의 입에선 사람들의 이름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가장(家長)이 죽고 나머지 가족들이 외지로 간 사람도 많고…다하자면 한도 끝도 없어. 신○○ 형제도 둘 다 폐병으로 죽고, 강○○씨 아버지, 김○○씨 아버지…죄다 환갑잔치도 못 치르고 죽었으니 악상(惡喪)이 많았지.”이장 자신도 어머니(사망 당시 57세)를 폐암으로 잃었다. 지금은 서울에 사는 이석동(66)씨의 아버지도 광산 생활 15년이 죽음으로 돌아온 경우다.1967년 이씨의 아버지는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진단은 폐결핵이었지만, 이씨는 석면으로 인한 폐암일 것으로 믿고 있다.“담배도 피우셨지만 워낙 석면 먼지를 많이 드셨어요. 돌아가시기 3∼4년 전까지 광산에서 일하셨으니까요. 정확한 병명을 모르니, 애꿎은 결핵약만 드셨지요.”아버지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주위에 환갑을 못 넘기고 돌아가신 분들이 많아요. 옛날엔 폐결핵이 흔했다지만, 덕정마을은 주변 마을에 비해 훨씬 심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다 석면 때문이지요.” ●인근 담산리 주민 중 폐질환 사망자 없어 대조적 국립 홍성의료원 진료기록에서도 덕정마을의 심각함은 드러난다. 내원자의 병명 기록이 남아 있는 2000년 이래 폐 관련 질환으로 병원을 찾은 상정리(덕정마을 포함) 주민은 41명이었고,7명이 폐암 판정을 받았으며,3명이 사망했다. 인구가 비슷한 인근 담산리 주민 중 같은 기간 폐 관련 질환으로 사망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에 비하면 주목할 만한 수치다. 한때 수만평에 이르는 3개 광구를 갖췄던 덕정마을의 석면광산은 녹화작업으로 풀숲이 우거졌다. 지금은 석면 원석을 캐내 천길 낭떠러지가 된 절벽과 발에 차일 정도로 흔한 흰색 석면줄을 품은 돌멩이들이 당시의 엄청난 작업량을 짐작케 할 뿐이다. 광산은 과거가 됐지만, 광산이 남기고 간 석면의 상처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홍성 이창구 김민희기자 window2@seoul.co.kr 그래픽 강미란기자 mrkang@seoul.co.kr ■앞으로 40년간 늘어날 환자 유럽 25만·일본 10만3000명 석면 사용량은 산업화에 비례한다. 건축 자재나 자동차 부품에 주로 쓰이기 때문에 산업화가 진행될수록 사용량도 폭증했다. 부작용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산업화가 먼저 진행된 미국·영국 등 선진국에서 대규모 피해가 먼저 나타났고, 한국 등의 후발 산업국가에서 피해 조짐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산업화 단계에 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위험성을 따질 겨를도 없이 석면을 마구잡이로 사용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50∼60년대 보일러공에게서 먼저 악성 중피종이 집단 발병했다. 보일러를 단열성이 뛰어난 석면으로 감쌌던 탓이다. 영국에선 1970년대 글래스고·버밍엄 등 공업지역을 중심으로 중피종이 확산됐다. 미국은 1972년부터 석면 규제를 시작했으나 세계적인 공감대는 1980년대에 이르러서 형성됐다. 일본은 1983년부터 일부 석면 제품의 수입을 금지하기 시작했다.1999년에는 유럽연합(EU) 13개국이 석면 사용을 전면 금지했고,2002년 1월엔 프랑스가 독일·이탈리아에 이어 8번째로 석면의 생산·수입·판매를 불법화했다. 우리나라는 1997년에서야 청석면·갈석면의 사용을 금지했고, 모든 석면의 사용 금지는 내년에야 실현될 전망이다. 하지만 선진국에서도 아직 석면 공포는 끝나지 않았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권위있는 보건잡지 ‘더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에 따르면 2004년에 환자수가 정점을 지난 나라는 미국 뿐이다. 유럽은 2015∼2020년, 일본은 2025년에 정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40년간 늘어날 환자의 수도 유럽 25만명, 일본 10만 3000명, 미국 7만 2000명, 호주 3만명 등이다. 국제노동기구(ILO)는 매년 10만명이 석면 관련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가톨릭대 의대 김형렬 교수는 “최근 일본에서 부작용이 속속 나타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도 향후 25년간 석면 피해가 크게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앞으로 국제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는 급증하는 아시아의 석면 사용을 막는 일이다. 노동건강연대 이상윤 정책국장은 “현재 건설공사가 활발한 중국·인도·태국 등에서 석면 사용량이 늘고 있다.”면서 “비극을 답습하지 않도록 모든 석면 사용을 하루빨리 금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석면은 허가된 살인도구… 통제 못한 정부 책임 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 앞에 놓인 심정을 아십니까. 우리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노동·환경단체들은 지난달 18∼19일 서울대병원에서 ‘석면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공동 심포지엄’을 열었다. 석면 전문가, 환경 운동가, 직업병 전문의, 사망자 가족 등 100여명이 참석한 이 행사에서 단연 주목을 받은 이들은 악성 중피종과 싸우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두 피해자였다. ●“폐렴인 줄만 알았는데…” 창밖에는 비가 내렸다. 하이숙(54·여)씨는 “날이 궂으면 기침이 더 심해져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며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하씨는 국내 최대 석면공장이었던 부산 연산동의 제일화학에 1971년 5월부터 2년 4개월간 다녔다. 최근 집단 피해 조짐이 보이고 있는 바로 그 공장이었다. 현재는 ‘제일E&S’로 이름이 바뀌었고, 공장도 양산으로 옮겨졌다.1992년부터는 석면 제품을 생산하지 않는다. 하씨와 동료들은 천으로 된 일반 마스크만 쓴 채 석면 가루가 풀풀 날리는 공장에서 일했다. 석면 입자는 머리카락 굵기의 5000분의1 정도여서 공기중 분진을 99.97% 이상 걸러내는 특수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5년 전 하씨는 갑자기 기침이 심해져 보건소를 찾았다. 보건소에서는 폐렴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아무리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어 큰 병원으로 갔으나 의사는 “왜 자꾸 폐가 굳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씨는 1995년에 석면폐(진폐증)로 사망한 동생을 떠올렸다. 동생 역시 같은 공장에 다녔다. 하씨는 의사에게 “석면 공장에 다녀서 이렇게 된 것 아니냐.”고 물었지만 “당신이 뭘 아느냐.”는 면박만 돌아왔다. 폐병 환자라는 주변의 멸시를 참고 견뎌온 하씨는 결국 2005년에 악성 중피종 판정을 받았다. 다행히 직업병으로 인정돼 산재 처리를 받았다. 그러나 완치가 안 된다는 사실에 하루하루 좌절하며 살아간다. 같은 공장에 다녔던 하씨의 남편도 걱정이다. 남편 하재복(56)씨는 “죽어가는 아내를 보는 것도 괴롭고, 내가 언제 이 몹쓸 병에 걸릴지 몰라 괴롭다.”며 눈물을 훔쳤다. ●“한국은 심각성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 38년 동안 건축 현장에서 일한 나카무라 사네히로(59) 역시 가쁜 숨을 내쉬었다. 목수로, 현장 감독관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일하던 나카무라는 2003년 2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심한 가슴 통증으로 병원을 찾았더니 흉막에 악성 중피종이 생겼다는 진단이 나왔다. 의사는 “기껏해야 2개월 정도 더 살 수 있다.”고 했다. 나카무라는 죽을 각오로 그해 5월 수술대에 올라 오른쪽 흉막을 들어냈다.15시간의 긴 수술이 다행히 성공적이어서 생명을 지금까지 연장할 수 있었다. 나카무라는 “수술이 아무리 잘 됐어도 완치가 안된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절망했다.”면서 “죽을 때까지 석면의 위험성을 알리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나카무라는 요즘 석면피해자 가족 모임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지만 계단을 제대로 오르내리지 못할 정도로 심장이 약해졌다. 나카무라는 “일본은 석면 때문에 큰 홍역을 치러 위험을 잘 알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면서 “허가된 살인도구인 석면 제품을 무책임하게 생산한 업자나, 그 위험성을 통제하지 못한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처럼 큰 피해를 당하기 전에 한국은 미리 석면이 함유된 건축물과 제품을 잘 처리해 대재앙을 피해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용어클릭 ●석면 단열성, 내화성, 내마모성이 뛰어나 건설자재로 많이 사용되는 솜 같은 물질로 슬레이트, 자동차 브레이크 패드, 석고보드, 단열재 등에 널리 사용됐다. 몸 속에 들어가면 폐에 박혀 사라지지 않고 석면폐, 폐암, 악성 중피종 등을 유발한다. 청석면, 갈석면, 백석면, 악티노라이트, 안소필라이트, 트레모라이트 등으로 나뉜다. ●악성 중피종 석면에 의해서만 유발되는 암으로 흉막(폐막), 복막 등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사망한다. 석면 노출 후 20년 이상 경과한 뒤 발병하며, 치사율은 100%다. ●구보타 사태 석면을 함유한 외벽재와 파이프를 생산해 온 일본의 대형 석면공장인 구보타의 근로자와 주민에서 중피종 환자가 발견됐다고 1995년 발표돼 일본 사회를 큰 혼란에 빠트렸던 사건.1978∼2004년 사이에 근무한 전·현직 종업원 79명이 중피종 등으로 숨졌고,18명이 치료를 받고 있으며, 공장 주변 주민 3명에게도 중피종이 발생했다. 현재까지 구보타 피해자는 15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회에는 지하철 등 생활 주변의 석면 문제를 다룹니다.
  • 스페인, 수천억원대 난파선 놓치고 분통

    스페인이 영해상에서 보물 탐사를 벌인 미국 탐사선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영해인 대서양 바닥에 가라앉은 난파선의 보물들을 미국 탐사선들이 무더기로 실어 갔다고 보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스페인 법원은 최근 난파선의 보물을 찾고 있는 미국 선박 두 척에 대해 남단 항구도시 지브롤터를 떠나도록 했다고 BBC가 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또 이 탐사선들이 스페인 영해에 들어올 경우 체포할 것도 경찰에 요청했다고 덧붙였다. 앞서 미국 플로리다가 본사인 배 소유주 오디세이 해양 탐험사는 대서양 특정 지점에 가라앉은 난파선에서 5억 달러(4630억원)상당의 옛 동전을 발견했다고 밝힌 바 있다. 난파선은 17세기 영국 선박으로 알려져 있다.‘오디세이 익스플로러’와 ‘오션 얼랏’이란 이름의 두 배는 현재 영국 원양 해역으로 떠났다. 인양품들은 이미 지브롤터에서 미국으로 보내진 것으로 전해져 스페인은 ‘닭쫓던 개’신세가 됐다. 보물 유출에 대해 카르멘 칼보 스페인 문화부 장관은 “이 판결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면서 “해군이 도울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칼보 장관은 “국제법이 우리 뒤에 있다. 어떤 일이 법 테두리 밖에서 벌어졌다면 국제법이 해답을 줄 것이다. 우리 것은 스페인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EFE통신사에 밝혔다. 스페인 영해안에서 불법 탐사로 인양되어 간 보물들을 되찾아 오겠다는 태도다. 눈에 핏발이 오른 스페인 정부는 국제법 전문가 등 변호사들을 고용해 법적 검토에 들어가는 등 난파선에서 발견된 동전 등 보물 환수 조치에 나섰다. 스페인 언론들은 탐사선들이 최근 몇달 동안 스페인 영해에서 해양 탐사 중임을 알리는 깃발을 달고 있었다고 전했다. 반면 오디세이사의 공동창업자 그렉 스템은 “어떤 위법행위도 없었다.”고 반박했다. 다만 보물 인양 위치에 대해선 보안과 법적 이유를 들어 “알려줄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전문가들은 인양작업에도 불구, 난파선에여전히 천문학적 액수의 보물이 들어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Local] 저소득층 아동돕기운동 벌여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관심을’ 5일 전남도에 따르면 도청 공무원들이 저소득층 아이들을 돕기 위해 ‘1인 1계좌 후원운동’을 펴고 있다. 또 후원을 못받는 아이들을 찾아내 돕는 결연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정부는 4월부터 장애아동, 소년·소녀가장 등 저소득층 아이들이 사회 진출 때 목돈을 쥐어주는 ‘아동발달 지원계좌’ 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전남도내 대상자의 일부는 후원금이 적어 저축을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혜택을 받으려면 대상자들이 후원금 가운데 3만원 안에서 이 계좌에 저축해야 한다. 정부는 저축을 한 아이들에 한해 만 17세까지 같은 금액을 적립해 최대 2100만원까지 목돈을 줘 자립을 돕는다. 그러나 도내 대상자 2736명 가운데 실제 저축은 1920명(76%)에 그쳐 전국 평균치(80%)를 밑돌고 있다. 이는 도내 아동 후원금이 전국 평균치보다 1만 1000원가량 낮아 저축하는 데 경제적 부담이 적잖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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