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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다 영유권 주장 허구성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24일 내뱉은 ‘독도가 일본 땅’, ‘독도는 불법 점거’라는 등의 주장은 일본 외무성이 그동안 수없이 되풀이해 온 것에 불과하다. 노다 총리가 ‘일본 어민들이 에도(江戶)시대 초기에 막부의 면허를 받아서 다케시마(독도)를 이용했다.’는 주장의 근거는 1625년 당시 도쿠가와(德川) 막부가 내린 ‘다케시마 도해(渡海) 면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 다케시마라고 부른 섬은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였다. 도쿠가와 막부가 자국 어민에게 울릉도로 항해할 수 있는 면허를 준 배경에는 조선의 울릉도 공도(空島) 정책이 있었다. 당시 조선은 왜구에 의한 백성의 피해가 커지자 울릉도 등 접경 섬을 비우는 정책을 취했다. 영토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특히 1696년 도쿠가와 막부는 돗토리번에 다케시마(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일본 어민들의 울릉도 조업이 이어지자 이번에는 안용복이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령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문서도 받아냈다. 다시 말하면 노다 총리의 주장과는 반대로 적어도 17세 중후반에는 일본 스스로가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이 왜곡된 주장을 계속하는 것은 당시 조선의 고문헌상 울릉도, 독도 명칭이 일관되지 않고 자주 바뀐 데다 지도에 독도 위치가 정확하게 표기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였던 조선이 외부 누출을 우려해 지도를 정확하게 그리지 못하게 한 것을 일본 정부가 십분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 노다 총리가 1905년의 일방적인 독도 편입 결정을 ‘영유권 재확인’이라고 주장한 것도 일본 측 문헌을 보면 허구성이 분명해진다. 일본 근대 내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메이지 정부는 1877년 시마네현의 보고를 기초로 ‘울릉도(竹島)와 독도(外一島)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점을 명심하라.’고 지시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5)경북 영양 지훈길·두들마을길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5)경북 영양 지훈길·두들마을길

    면적은 서울의 1.3배이지만, 인구는 1만 8000명. 경북 영양은 중부고속도로 입구에서 차로 1시간 30분을 더 가야 닿을 수 있는 두메산골이다. 흔한 4차선 도로나 신호등조차 이곳에선 사치다. 하지만 영양은 오일도·조지훈·이문열 등 내로라하는 대가들을 연거푸 배출한 넉넉한 ‘문향’(文鄕)이다. 옛 이름 고은(古隱)처럼 수백 년 된 고택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밤이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내리는 별 무리에 없던 감수성도 살포시 샘솟는 곳. 권오승 영양군 부군수는 “영양의 이런 특이점이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은 문인을 배출하게 한 원인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조지훈의 주실마을과 이문열의 두들마을을 찾았다. 지난 9일 정오 영양 북단 일월면에 있는 주실마을. 노()신사가 발길을 멈추고 울컥, “선생님….” 외마디만 던지고 눈물을 훔쳤다. “고려대에서 문학을 가르친 조동탁(호 지훈) 선생의 흔적을 찾아 1960년대 학번 제자들이 자주 이곳을 찾는다.”고 양희 조지훈문학관 해설사가 말했다. 어디 제자들뿐이랴. 조지훈을 기억하고 그와 같은 시인이 되기를 꿈꿨던 이들에게 이 마을을 다녀간다는 건, 곧 성지순례다. 문학을 좋아하건 그렇지 않건,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승무)’ 한 구절쯤은 읊는다. 시인의 생전 모습과 그가 남긴 작품에 흠뻑 취해 걷는 길. 1017m 지훈길엔 시인이 나고 자란 고택(호은종택·壺隱宗宅)과 문학 공원의 20여개의 시비가 길 따라 놓여 있다. 호은종택은 겹겹이 쌓아올린 담에 口자 모양이다. 폐쇄적인 가옥 형태다. 이에 대해 김민자 문화해설사는 “당시 경상도 양반가는 자신을 꽁꽁 감춰 남을 배려하고 체통을 지켰다.”면서 “삼불차(三不借·빌리지 않는 세 가지)는 조선중기 환란을 피해 주실마을에 온 한양 조씨의 가훈”이라고 말했다. 재(財)불차·문(文)불차·인(人)불차로 재물·문장·양자를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수백 년을 이어져 온 이 원칙 때문에 주실마을 조씨를 ‘칼 같은 남인(南人)’이라 하여 검남(劍南)이라 불렀다. 퇴계학풍을 계승한 남인은 지금으로 치면 수백 년간 정권을 잡은 적이 없는 ‘만년야당’이라고 할 수 있다. 호은종택 뒤로는 시인이 17세까지 지냈던 ‘방우산장’(放牛山莊)이 있다. 시인은 이곳과 서울 성북동 자택은 물론 자신이 기거했던 곳은 모두 방우산장이라고 불렀다. 위치가 산도 아닐뿐더러 소를 키우지도 않아 이런 이름을 지은 까닭이 궁금하다. 그는 1953년 신천지에 기고한 ‘방우산장기’에 “설핏한 저녁 햇살 아래 내가 올라타고 풀피리를 희롱할 한 마리 소만 있으면 그 소가 지금 어디에 가 있든지 내가 아랑곳할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월산 전설이 조지훈의 ‘석문’ 소재 그 옆 지훈 문학관. 시인의 손때 묻은 자필 원고와 담배파이프·안경·모자 등 소품들이 눈에 띈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닥아서다(낙화의 한 부분)”. 생전에 여동생과 함께 육성으로 녹음한 시낭송도 들을 수 있다. 이 시는 창작 의도와 상관없이 한 정치인에 의해 더 널리 알려졌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2003년 구속될 때 자신의 심경을 이 시를 인용해 표현했다. 문인에게 고향이란 창작 소재이기도 하다. 일월산을 배경으로 전승되고 있는 황씨부인당 전설은 첫날밤도 치르지 않고 떠나버린 남편을 기다리다 죽은 한 규수의 안타까운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바로 조지훈의 ‘석문’(石門)의 모티브다. 이문열의 대표 소설인 ‘젊은 날의 초상’에도 영양에서 영덕으로 넘어가는 창수령이 등장한다. 영양군 남단 석보면 두들마을은 이문열이 나고 자란 곳이다. 이 마을을 관통하는 1787m 두들마을길은 석천서당·석계고택·유우당 등 ‘문화재투성이’다. 작가가 집필하고 후학양성을 위해 지은 한옥집 광산문우(匡山文宇) 담 아래에는 백일홍이 심어져 있다. 그의 문중인 재령이씨 사람들이 대대로 좋아하는 꽃이다. “내가 이만큼 글을 쓰는 것도 고향을 잘 만났기 때문”이라는 작가의 고향사랑이 묻어난다. 이르면 올해 말 이문열이 이곳으로 영구이주할 것이라고 군의 한 관계자가 귀띔했다. 지금도 잘 보존되고 있는 재령이씨의 두들마을 전통 중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음식디미방이다. 조선조 대학자 석계 이시명의 정부인 장계향이 380여년 전 지은 동아시아 최초의 조리서다. 종부 조귀분(63)씨가 이 조리서에 담긴 146가지 음식을 재현했다. 꿩·해삼·전복은 물론 곰바닥까지 이용해 화려하다. 특이한 점은 조리법의 51가지가 술 빚는 법이라는 점이다. 이 중 감향주(甘香酒)는 걸쭉해서 숟가락으로 떠먹는 술이다. 찹쌀·멥쌀·누룩·물 등 4가지 재료로만 만드는데, 도수는 13~14도 정도로 적포도주와 비슷하다. 박승길 군 전통음식육성담당은 “당시 재령이씨 문중을 찾아온 손님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그들에게 정성껏 술상을 차려 대접하는 것이 아녀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어쩌면 ‘문향’에 술이 발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지훈도 소문난 애주가였다. 1958년 ‘신태양’에 기고한 ‘삼도주’(三道酒)라는 글에서 그는 “술의 진미를 완미(玩味·음식을 잘 씹어서 맛봄)하는 심경이면 탁주·소주·약주 할 것 없이 가위 도주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재령이씨 음식디미방 술 빚는 법이 30% 장계향은 이문열의 소설 ‘선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가부장사회인 조선시대, 시문에 뛰어났던 그가 아녀자로서 자식 양육과 집안일에 충실했던 것이 ‘강요’가 아닌 ‘선택’이었다는 것을 일생을 짚어가며 설명한다. 이 때문에 1997년 연재 당시 ‘반페미니즘 소설’로 낙인 찍혀 공격을 받았다. 작가 자신도 인정하듯 “페미니즘에 저항할 논리는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작가는 “선입견 없이 읽어 보면 거기서 비판되고 있는 것은 저속하게 이해되고 천박하게 추구되는 페미니즘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논쟁에서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고집스러움은 1960년 4월 혁명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큰일을 위해 죽음을 공부하라.”고 한 조지훈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대학교수였던 시인은 학생들에게 “내가 죽음을 공부하라는 것은 군중 속에 휩싸여서 군중과 함께 여러 사람에 싸여서 죽는 공부가 아니라 혼자서라도 죽을 공부를 하라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오탁번 고려대 명예교수는 “(4월 혁명이) 무질서화되고 소인배들의 명리로 전락할 기미가 보이자 강경한 어조로 그들을 깨우쳤던 것”이라면서 “선생의 위치에서 떳떳이 설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지훈의 이와 같은 꾸짖음은 더욱 빛났다.”고 평가했다. 겹겹이 쌓아올린 경상도 양반가 담벼락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대가의 속마음을 정확히 알 순 없다. 하지만 껍질이 두꺼워 고춧가루가 많이 나오는 영양고추처럼 이곳 출신 작가들의 작품이 유난히 실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글 사진 영양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16회는 대전시 대덕구 동춘당로를 소개합니다.
  • 김민종 “‘신사의 품격’으로 내 이름 찾았죠”

    김민종 “‘신사의 품격’으로 내 이름 찾았죠”

    최근 종영한 SBS 주말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서 부드럽고 속 깊은 변호사 최윤 역으로 열연한 김민종(40). 그는 40대 꽃중년 4인방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이 드라마를 통해 폭넓은 인기를 얻는 등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지난 16일 소속사인 서울 청담동 SM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그를 만났다. →‘신사의 품격’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는데 인기를 실감하나. -내게 언제 제1의 전성기가 있었나 싶은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부담스럽다. 이전에는 나를 ‘김종민’이라고 부르는 10대들이 있었는데 이 작품을 통해 내 이름을 다시 찾은 것 같아 기쁘다(웃음). 얼마전 홍대에서 4인방이 모여 촬영을 했는데 10대들이 구름 떼같이 몰려다니면서 움직일 때마다 환호를 해줬다. 우리도 그 모습이 놀라워 차에서 동영상으로 찍었다. 오랜만에 예전에 가수 활동을 할 때 느껴봤던 기분이 들어 행복했다. →최윤의 어떤 면이 매력적으로 비쳤다고 생각하나. -처음에 캐릭터를 놓고 고뇌하는 인물로 그려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최윤은 친구 동생의 절대적인 짝사랑을 받지만 사별한 아내와 장모님에 대한 생각 때문에 심경이 복잡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감독님이 밝고 재미있게 가기를 바라셨다. 과거의 아픔이 있지만 친구들과 다닐 때는 활동적이고 재미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점이 매력적으로 보인 것 같다. →장동건, 이종혁, 김수로 등 출연 배우 중에 유일하게 결혼을 하지 않은 싱글남이었다. 주인공들의 삶에 어느 정도 공감했나. -자기 일을 하면서 친구들과 함께 모여 사는 것은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인생관이 아닐까. 나 역시 평소 친구들에게 결혼한 뒤에도 외곽에 집을 짓고 함께 모여 살자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내가 좀 철이 없어서 그런 낭만적인 삶을 꿈꾸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직 정신 연령은 20대 초·중반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웃음). →극 중 최윤은 친구의 동생이자 17세 연하인 임메아리(윤진이)와 결혼에 골인하는데 실제 본인의 경우라면. -나라면 최윤과는 달리 친구를 선택할 것 같다. 친한 친구가 딸처럼 아끼고 어릴 적부터 봐 온 동생인데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겠나. 실제로도 그렇게 나이 차가 많은 경우는 내가 먼저 작업을 걸지 못할 것 같다. 드라마에서 결혼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40대들의 로망이 아닐까. 동생을 생각하는 임태산(김수로)과 결혼을 애원하는 최윤이 만나는 장면에서 태산의 눈에 눈물이 고일 때 친구의 아픔이 그대로 느껴지면서 눈물이 나 혼났다. →네명의 캐릭터 중에 다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김도진(장동건)만 빼고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도진이는 대사가 제일 많아서 지칠 것 같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최윤을 선택하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태산이 역할도 매력적이다. 원래 김은숙 작가는 이정록(이종혁) 역을 제안했다. 그런데 전작인 드라마 ‘아테나’에서 바람둥이에 오렌지족인 코믹한 요소가 있는 캐릭터를 한번 맡았기 때문에 하지 않았다. 사실은 아직도 최윤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다른 캐릭터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 끝났는데도 마음이 공허하고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로맨틱 코미디의 대가 김은숙 작가와 신우철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신 감독님은 대사의 톤이 낮거나 높아지면 수위 조절을 하거나 연기할 때의 눈빛이나 시선 처리 등 디테일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셨다. 사실 네명의 배우 모두 나름대로 연기 경력도 있고 자신감이 있어 중반까지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사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해야 했기 때문에 다들 대본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모른다. 나중에 장동건씨는 대사 울렁증까지 올 정도였다. 애드리브도 대사가 다 끝나고 호흡이 남아 있을 때 한두번 했다. 하지만 대사의 수위와 지문이 대본대로 해야 감정이 맞더라. →이번 작품에 드라마 ‘느낌’의 주제곡과 ‘아름다운 아픔’ 등 가수 활동을 할 때 불렀던 노래가 삽입됐는데 앨범을 발표할 계획은. -음악적인 갈증은 굉장히 큰데 주눅이 드는 부분이 있다.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중압갑도 있고. 뭔가 스스로 밑에서부터 자신감이 생겨야 하는데 아직은 없는 것 같다. 사실 이번 드라마에 신곡 이야기도 나왔는데 대신 ‘아름다운 아픔’을 급히 새롭게 편곡해서 다시 불렀다. 오랜만에 녹음실에 들어가 적응도 잘 안 되는데 촬영 스케줄 때문에 1시간 만에 녹음을 마쳤다. 드라마 남성 스태프들이 다들 내 예전 노래를 기억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역시 음악이 주는 향수의 힘이 큰 것 같다. →결혼 계획은. 드라마에 나온 여자 네명 중 이상형을 꼽자면. -때때로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결혼이 혼자 아무리 애쓴다고 해서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딱히 정해 놓은 이상형은 없다. 드라마 속 이수처럼 자신의 주어진 삶에 충실하고 발랄한 여성도 좋고, 운동선수 세라의 도도함도 좋다. 민숙 같은 연상녀는 누구나 한번쯤 꿈꿔 볼 법하지 않을까. 메아리의 귀엽고 발랄한 면도 좋다. 그러니까 아직 장가를 못 갔나 보다(웃음). 올해 만나서 내년에는 결혼해야 하지 않을까. →최근 SM의 영상 콘텐츠 제작사인 SM C&C의 사외이사가 됐는데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2007년에 소속사가 없는 상황에서 지인의 소개도 있고 이수만 회장, 강타와 친분이 있어서 SM엔터테인먼트에 들어 오게 됐다. SM의 서열상으로는 막내지만 연기자로서는 한참 선배니까 SM이 드라마, 영화, 뮤지컬 제작을 할 때 외부의 연기자나 작가 등 저의 네트워크를 잘 활용해 좋은 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하게 될 것 같다. 현재 방영 중인 ‘아름다운 그대에게’가 첫 번째 작품이다. 아직 ‘신사의 품격’ 여운이 많이 남아 있지만 역할이 독특하고 좋다면 마음을 비우고 들어갈 생각이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겁없는 10대, 감시카메라에 ‘손가락 욕’ 벌금 폭탄

    겁없는 10대, 감시카메라에 ‘손가락 욕’ 벌금 폭탄

    한 겁없는 10대가 도로에 설치된 과속 카메라를 향해 ‘손가락 욕’을 하고 다니다 결국 벌금 폭탄을 맞게됐다. 최근 독일 뮌헨 경찰은 모터사이클을 타고 과속으로 시내 곳곳을 누빈 17세 소년 디미트리 살로빅을 체포했다. 경찰이 발표한 살로빅의 행각은 엽기적인 수준이었다. 시내 26곳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를 과속으로 지나가며 ‘손가락 욕’을 한 것. 이같은 행각에 뮌헨 경찰은 단단히 화가 났으나 신원을 파악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았다. 소년이 가죽 잠바와 헬멧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심지어 오토바이 번호판까지 가려버렸기 때문.  결국 뮌헨 경찰은 이 소년을 잡기위해 주로 지나가는 도로를 분석한 후 잠복에 들어가 붙잡는데 성공했다. 뮌헨 경찰은 “조사결과 소년은 스쿠터를 운전할 수 있는 면허만 있어 이 혐의도 추가했다.” 면서 “26개 카메라 당 각각 5000유로(약 700만원)의 벌금이 부과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인터넷뉴스팀  
  • 아이패드2 사고 싶어 신장 판 소년 결국…

    아이패드2 사고 싶어 신장 판 소년 결국…

    아이패드를 사고 싶어서 자신의 신장을 판 소년과 암거래 업자와의 재판이 지난 9일 열려 또다시 주요뉴스로 떠올랐다. 지난해 4월 중국 안후이성에 사는 당시 17세 소년 A군은 인터넷에 신장을 판다는 광고를 낸 뒤, 실제 수술을 통해 팔아 중국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다. 소년은 당시 암거래 업자에게 신장 판매 대가로 2만 2000위안(약 390만원)을 받았으며 이 돈으로 소원인 아이패드2와 휴대전화를 구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소년은 수술한 지 3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으며 부모가 소년의 몸에 난 상처를 발견하고는 이를 캐물으면서 전말이 밝혀졌다. 신고를 받은 현지 경찰은 암거래 업자와 수술을 집도한 비뇨기과 의사 등을 차례로 구속했다. 이날 후난성에서 열린 형사 재판에 따르면 암거래 업자는 신장을 팔아 번 돈 15만 위안(약 2660만원) 중 불과 2만 2000위안만 소년에게 건넨 것으로 드러났다. 암거래 업자는 “소년이 23살이라고 말해 성년으로 생각했다.”고 항변했으며 의사 역시 “수술 중 처음으로 장기 매매라는 것을 알았으며 합법적인 장기 이식이라고 들었다.”고 변명했다.   한편 수술 후 소년은 건강상태가 점점 악화돼 현재는 중증 장애를 얻은 것으로 전해졌다. 소년의 부모는 암거래 업자 및 의사를 상대로 227만 위안(약 4억원)의 민사소송도 제기한 상태이며 아직 판결은 나지 않았다.      인터넷뉴스팀
  • 빛 못 본지 10여년… 지하 8층서 집단생활 지배… 러, 이슬람 이단 지도자 검거

    지하에 왕국을 건설하고 10여년간 추종자들을 지배해 온 러시아 이슬람교 이단 종파의 지도자가 붙잡혔다. 러시아 중동부에 위치한 자치공화국 타타르스탄 검찰은 이슬람교의 이단 종파인 ‘무으민’(신자라는 뜻)의 지도자 파이즈라크만 사타로프(83)를 아동학대 및 방치 혐의로 8일(현지시간) 기소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이슬람교 선지자를 자처해 온 사타로프는 약 10년 전 70여명의 추종자들에게 지하 세계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들은 700㎡ 넓이의 3층 벽돌 건물 바로 아래 8층 깊이의 지하 공간을 건설해 집단생활을 해 왔다. 러시아 경찰은 지난달 타타르스탄의 수도 카잔에서 발생한 이슬람교 고위 성직자 암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지난 3일 사타로프의 거주 지역을 급습해 수색하는 과정에서 어린이 27명, 성인 38명을 발견했다. 경찰 관계자는 이번에 발견된 17세 이하 어린이들은 한 번도 지하 공간을 벗어나지 못해 빛을 본 적이 없으며, 학교나 병원에 다닌 적도 없다고 밝혔다. 어린이들은 건강 검진을 위해 지역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이후 임시로 어린이 보호시설에 머물 예정이다. 타타르스탄의 이슬람교 지도자들은 “정통 이슬람교는 창시자인 마호메트 이후의 어떤 선지자도 인정하지 않는다.”며 “사타로프가 추종자들에게 설파한 가르침은 정통 이슬람 교리와는 반대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검찰은 이슬람 고위 성직자 암살 사건과 관련해 5명을 체포했으며 용의자 2명을 공개수배했다. 사타로프와 그의 추종자들이 이 사건과 관련 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조희선기자 hsncho@seoul.co.kr
  • 천재 다빈치 ‘사라진 그림’ 발견? “최소 1762억 원”

    영국의 한 농가에서 천재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발견돼 미술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그림 뒷면에서 17세기 교황의 교지(칙서)로 보이는 문서를 발견했으며, 그림 전면에서는 다빈치의 그림임을 증명할 단서 6개를 찾았다고 전했다. 이를 소유하던 농가 주인인 피오나 맥라렌에 따르면, 이 그림은 1960년대에 의사였던 아버지 조지 맥라렌이 환자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며, 아버지가 사망한 뒤 어머니가 소유하다 이후 피오나에게 전달됐다. 최근 재정적 어려움에 처한 피오나가 그림을 팔기 위해 전문가와 만나는 과정에서, 수십 년간 먼지에 뒤덮여 있던 그림이 천재화가 다빈치의 그림일 수 있다는 감정결과를 받았다. 스코틀랜드 소더비의 경매전문가인 해리 로버트슨은 피플지와 한 인터뷰에서 “그림을 보는 순간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면서 “이 그림의 가치는 최소 1억 파운드(약 1762억 원)가 넘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미술전문가인 마이클 프라이셋은 “교황이 이를 주문했음을 뜻하는 그림 뒤 표식은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면서 “이것은 17세기 초반 가톨릭교회를 이끈 교황 바오로 5세의 소유였다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현재 교황의 칙서로 추정되는 표식은 일부 유실된 상태지만, 그림을 보유하던 농가 주인은 “‘Magdalene’(막달라 마리아)라는 글자를 똑똑히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소더비 경매업체 측은 이 그림을 런던으로 옮겼으며, 이르면 내년부터 케임브리지대학 소속 피츠윌리엄 박물관의 연구소에서 직접적인 감정 및 연구가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2) ‘단성호적’으로 본 노비의 삶

    [선택! 역사를 갈랐다] (22) ‘단성호적’으로 본 노비의 삶

    단성현(현재 경남 산청군)에 사노(私奴) 형제가 살았다. 그들의 아버지는 평민, 어머니는 어느 양반집 종이었다. 17~18세기의 ‘단성호적’에서 우리는 그들 일가족을 만난다. 역사의 주름진 그늘에 숨겨진 ‘노비 정체성’을 이야기하자.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구의 30~40%가 노비였다. 양반은 고작 10~20%였다. 그때 우리가 평민 또는 노비였을 가능성은 80% 이상이다. 노비 일가의 역사는 곧 우리들의 과거였다. ●1678~1789년 13개 호적 추적 노비의 역사를 쓰려고 1678년부터 1789년까지 작성된 13개의 호적을 뒤졌다. 흥룡 형제와 그들의 일가·친척에 관한 기록을 다 모았다. 6세대 167명을 알아냈다. 그들과 결혼했거나 그들의 상전으로 기록된 또 다른 600여명도 조사하였다. 모두 770명가량이었다. 17~18세기 흥종 일가의 삶에 관한 이야기는 그렇게 탄생하였다. 호적이란 본래 무미건조하고 단편적인 기록이다. 이름, 나이, 가족관계 등만 사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정보들을 이리저리 모아놓으면 하나의 서사가 일어난다. 아무런 의미조차 없어 보이는 사실의 단편들이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로 재탄생한다. 여기에 미시사 연구의 즐거움이 있다. ●문태리의 종들 1678년 흥룡(당년 53세)과 흥종(당년 51세) 형제는 경남 산청군 문태리에 거주했다. 그들은 기혼이었고 슬하에 자녀를 두었다. 호적에 따르면 그곳에는 마흔 집이 살았다고 했다. 단성에서는 중간 크기의 마을이었다. 문태리는 이를테면 행정리였다. 실지로는 네댓 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골안땀, 동쪽토란땀, 비진동, 진태, 주막거리 등이 있다. 단성현은 토지가 비옥했다. 산수도 아름다웠다. 특히 적벽과 신안강은 절경이라 양반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인구와 농지면적으로 보면 작은 고을이었으나, 명문 양반이 많아서 문과 및 생원진사 합격자 수가 진주 다음이라는 호평이 있었다. 경남 서부지역에서는 선비 많기로 소문났던 고을이었다. 문태리 서편으로는 큰 내(川)가 흘렀다. 남강 상류였다. 강줄기를 따라 양쪽으로 문전옥답이 즐비하였다. 마을 뒤편으로는 야트막한 산자락이 북동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렸다. 밭은 주로 산기슭에 흩어져 있었다. 흥룡네는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문태리에는 그들과 처지가 같은 노비가 아홉 집이었다. 호적에는 빠진 기록이 있기 마련이었다. 실제 숫자는 그보다 많았을 것이다. 남의 종노릇을 하였던 그네들은 주인집을 나와서 독립된 가호를 구성하였다. 양반들이 옹기종기 모인 진태 마을에는 주인에게 얹혀사는 노비들도 많았다. 1678년 문태리의 노비 인구는 46명으로 조사되었다. 전체 인구가 139명이었으니, 대략 3분의1이 노비였다. 평민은 스물한 집으로 노비보다는 많았다. 하지만 문태리에서 평민과 노비를 엄격하게 나누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마을에 뒤섞여 살았고, 들판에서 함께 일하였다. 경제적으로도 처지가 엇비슷했던 데다, 군역(軍役)이나 부역 같은 부담을 똑같이 담당하였다. 노비가 군역을 졌다는 말이 신기할지도 모르겠다. 17세기 말에는 흥룡 형제처럼 주인집에서 멀리 사는 외거노비에게 병역의무가 부과되었다. 18세기 중엽부터는 주인이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노비에게 군역을 매기는 것이 보통이었다. 주인집이 가까울수록 노비의 신원이 확실하다고 믿었다. 노비에게 군역을 요구하려면 관청에서는 주인의 양해를 구했다. 물론 형식에 불과한 일이기는 하였다. 여차하면 노비와 평민이 서로 결혼하였다. 법으로는 금지된 일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난한 평민은 노비와 별다를 바 없었다. 이야기의 주인공 흥룡 형제의 경우만 해도 평민 아버지(양대생)가 맹씨댁 여종(덕개)과 결혼하지 않았던가. ●진태리의 양반들 양반들은 ‘진태’ 마을에 몰려 살았다. 박씨들이 주인이었다. 그들은 단성현의 최고 양반들끼리 모여 작성한 ‘향안’에 이름을 올렸다. 그들과의 인연으로 잠시 그곳에 와서 사는 타성 양반들도 있었다. 18세기 말까지도 이런 사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양반의 서자는 평민들과 마찬가지로 군역을 졌다는 사실이다. 17세기 후반까지는 그러하였다. 하지만 18세기부터는 서자들도 그 의무에서 벗어났다. 평민이나 노비와는 달리 그들은 점차 양반 대접을 받았다. 17세기 말 문태리에는 서자까지 포함해 양반이 열 집이었다. 주민의 4분의1이 넓은 의미로 양반이었다. 거기서 만약 서자를 제외한다면 양반은 10%를 조금 넘었다. 한데 양반들 가운데서 재산이 많은 집은 거의 없었다. 벼슬을 한 양반도 없었고, 사역 중인 노비의 숫자도 약간명에 불과했다. 시골양반의 가세는 초라하였다. ●흥종 후손, 종살이로 살거나 도망가거나 1670년대 말 흥종의 어머니 덕개가 사망하였다. 아버지는 그에 앞서 일찍 세상을 떴다. 흥종의 아내 순대(당년 45세)는 건너편 청현마을의 최진사댁(최경) 종이었다. 장인과 장모도 그 집안 노비였다. 관습대로 흥종의 두 딸, 숙굴이와 화구리도 그 집안 종이었다. 화구리는 이미 시집을 갔고, 열 살밖에 안 된 숙굴이도 주인집으로 옮아갔다. 숙굴이는 최진사의 며느리, 과부 조씨의 시중을 들었다. 숙굴이는 이를테면 사역비였다. 그보다 2~3년 전 과부 조씨는 숙굴이의 이모 옥비를 시아버지 최진사에게 바치고 그 대신 순대와 숙굴이 모녀를 받았다. 청현의 최씨들도 단성에서는 이름난 양반이었다. 진사 최경은 1639년(인조17) 진사시험에 합격한 수재로 향안에 이름이 올랐다. 그 할아버지 최기종도 생원시에 합격해 가문의 명성을 떨쳤다. 세월이 한참 지난 18세기 말까지도 흥종의 처가 쪽 사람들은 최씨댁에서 종살이를 하였다. 특히 흥종의 처제 매월대의 자손들은 대대로 그러하였다. 매월대의 손녀 팔례는 진주로 이사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예외였다. 최씨댁은 형편이 곤란해지자 노비를 팔아치우기도 하였다. 1730년쯤 매월대의 손자 삼학의 주인은 한 마을에 사는 이만복이라는 양반으로 바뀌었다. 종살이가 싫어 달아나는 이들도 생겨났다. 1741년 매월대의 손녀 삼랑은 주인집(최덕령)을 떠나 몰래 하동으로 달아났다. 21년이 지난 1762년까지도 삼랑은 돌아오지 않았다. 일찍이 1719년 아내의 고향 남원(전북)으로 도망간 매월대의 아들 광이도 끝내 붙잡혀 오지 않았다. 18세기에는 해마다 도망 노비가 증가하였다. 주인들이 가난해지자 그들은 노비를 통제할 힘이 약해졌다. 종들은 연고지로 도망을 쳤고, 주인들은 그 사실을 알았지만 붙들어 올 힘이 없었다. 종을 붙잡아 오려면(추노) 해당지역 관청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미약한 양반이 노비를 붙잡으려 나타나면 고을의 수령과 아전들이 심하게 방해하였다. 그들은 자기 고을의 세원(稅源)을 지키려고 애썼다. 이래저래 도망 노비의 수가 자꾸 늘어났다. 국가적으로나 도망친 노비 개인에게나 이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노비나 도망을 치지는 못했다. 흥종의 자손은 18세기 말까지도 여전히 종살이에 분주하였다. ●흥룡 후손, 18c후반 평지식인 부상 흥종보다 두 살 많은 형 흥룡의 자손들은 처지가 완전히 달랐다. 그들 중에는 누구도 더 이상 종살이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서히 문태리의 주인으로 성장하였다. 대대로 문태리에 모여 살며 마을 일까지도 좌우하였다. 두 형제의 자손이 고향에 눌러 살았지만 그들의 삶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차이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흥종의 아내 순대는 청현마을 최씨댁 종이었다. 그에 비해 흥룡의 아내는 양인, 즉 평민이었다. 이것이 결정적 차이였다. 따지고 보면 흥룡의 자손들도 서울에 사는 맹씨댁 종이었다. 하지만 서울은 한창 멀었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양인으로 행세하였다. 18세기가 되자 흥룡의 자손 중에는 수공업자가 나왔다. 흥룡의 증손 양인필이 ‘옹장’(옹기장) 노릇을 하더니, 출가한 증손 양만득도 ‘인출장’(인쇄기술자)이 되었다. 그 뒤로 이 집안에서는 수공업자가 부쩍 많아졌다. 18세기 후반 숫돌을 만드는 ‘여석장’은 그들의 가업이었다. 그때 문태리에서는 숫돌 만드는 일이 유행했는데, 기술자의 대부분은 흥룡의 후손이었다. 돈을 제법 번 사람들도 나왔다. 그래서 돈 있는 흥룡의 현손자와 5대손들은 서원과 향교에 출입하며 원생 또는 교생 노릇을 하였다. 그들은 군역을 면제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양반대접을 받을 정도로 출세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그들은 실력을 갖춘 평민지식인으로 부상하였다. ●비정규직은 ‘현대판 노비’ 진태리 사람들은 문태리 사람들과 통혼하지 않아 현지 방문을 통해 나는 1960년대까지도 문태리 뒷산에서 숫돌이 생산된 점을 확인하였다. 수백년 동안 주민들은 부업으로 숫돌을 만들었는데, 명품으로 거래되었다. 숫돌 덕분에 문태리의 경제형편은 이웃마을들보다 한결 좋아졌다. 이것은 진태 마을 주민들과의 대화에서도 거듭 확인되었다. 현지에서 나는 한 가지 놀라운 증언을 들었다. 1960년대까지도 진태 마을사람들은 문태리 사람들에게 반말을 썼다. 숫돌이나 만드는 천한 사람들이라 여겨서 그랬단다. 토박이 양반 박씨들은 아직도 문태리 사람들과 통혼하지 않는다. 20세기까지도 흥룡의 자손들은 단성의 양반사회로 진입하지 못했다. 우리 아이들이 배우는 역사교과서에서는 조선후기에 양반의 수가 부쩍 늘었다고 가르친다. 19세기 말에는 양반이 8~9할이나 되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흥룡 일가의 역사는 그런 변화가 하나의 희망사항에 불과하였음을 증명한다. 지금도 여러 가지 형태로 신분의 장벽이 존재한다. 학벌도, 재산도, 성별도, 나이도 차이가 아닌 차별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현대판 노비인 비정규직 문제도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 반세기 걸쳐 3代가 ‘노도부대 용사’

    반세기 걸쳐 3代가 ‘노도부대 용사’

    “아직도 전우들과 불렀던 부대 노래가 기억에 생생합니다. 아들, 손자와 함께 부르니 60년은 젊어진 것 같습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1950년 12월 17세의 어린 나이로 노도부대(육군 2사단) 예하 백호연대 박격포병으로 참전했던 이근수(79)옹은 지난 27일 당시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옹은 이날 부대에서 아주 특별한 만남을 가졌다. 아들인 이형석(50)씨와 손자 이영준(20)일병이 모두 노도부대 출신으로 ‘자랑스러운 노도인’의 자격으로 한자리에 모였기 때문. 이형석씨는 지난 1984년 2월에 입대해 노도부대 예하 독수리연대에서 의무병으로 30개월의 군 복무를 마쳤고 손자 이영준 일병은 현재 사단 수색대대에서 작전병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날 이옹 가족들은 강원도 양구군 소재 2사단 백호연대를 방문해 역사관을 견학하고 지난 63년의 부대 발전상을 소개 받았다. 지난 1952년 여름 김화지구 전투에서 포탄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은 이옹은 “성난 파도와 같다는 뜻의 노도부대의 명칭에서 나타나듯이 전우들은 참 용감하게 싸웠다.”며 “6·25 당시에는 매 끼니를 주먹밥으로 먹었는데 우리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라고 말했다. 아들 이형석씨는 “제가 1980년대 복무할 당시는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던 시기로 양구군 자선바자회 등 군민행사에 많이 참석한 기억이 난다.”며 “아들의 부대를 방문해 보니 예전과 달리 구타, 기합이 없어지는 등 병영생활이 많이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손자 이영준 일병은 “부대 곳곳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체취가 배어 있다고 생각하니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힘빼라, 박주영…힘내라, 박주영

    무심하게도 휘슬이 울렸다. 0-0 무승부. 올림픽축구 대표팀이 26일 뉴캐슬 세인트제임스 파크에서 열린 런던올림픽 조별리그 B조 첫 경기에서 멕시코와 비겼다. 경기 내내 압도하고도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다소 불안했던 수비라인은 파비앙과 산토스를 앞세운 멕시코의 공격을 잘 막았지만, 박주영(27·아스널)·구자철(아우크스부르크)·김보경(세레소·이상 23) 등의 공격진은 이름값에 못 미쳤다. 홍명보 감독은 “더 중요한 두 경기가 남았다. 스위스전에 다시 초심으로 임하겠다.”고 추슬렀다. 이어 스위스도 가봉과 1-1로 비겼다. 따라서 30일 오전 1시 15분 스위스와의 2차전은 더욱 불꽃 튀게 됐다. 홍명보호는 ‘알프스 산맥’을 어떻게 넘어야 할까. ‘미우나 고우나’ 믿을 건 박주영이다. 멕시코전 원톱으로 출장한 박주영은 철저히 막혔다. 뉴질랜드전(2-1), 세네갈전(3-0)에서 두 경기 연속골을 터뜨리며 결정력을 뽐내던 그 선수는 없었다. 이미 ‘요주의 인물’로 유명해진 터라 2~3명이 경기 내내 박주영을 전담했다. 좌우 날개로 나선 김보경, 남태희(21·레퀴야)와의 콤비네이션은 괜찮았지만 스스로 기회를 열지 못했다. 구자철, 기성용(23·셀틱)과도 엇박자를 냈다. 몸이 무거워 보였다. 슈팅은 단 하나에 그쳤고, 프리킥 두 개도 모두 수비벽을 넘지 못했다. 결국 홍 감독은 후반 35분 박주영을 빼고 백성동(21·주빌로)을 투입했다. 홍 감독은 경기 뒤 “박주영의 컨디션도 그렇고…. 전술 변화를 줘서 마지막 15분 승부를 노리려고 했다.”는 말로 에둘러 아쉬움을 나타냈다. 스위스전까지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게 과제다. 박주영이 살아나야 재능 있는 공격진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공격진 전체의 흐름도 그렇지만 와일드카드로 뽑힌 ‘맏형’으로서 동료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크다. 주장 구자철은 “개인적으로 주영이형이 첫 번째 골을 넣었으면 좋겠다. 어렵게 팀에 합류한 만큼 후배들에게 기쁨을 줬으면 한다.”고 기대했다. 스위스는 만만치 않은 상대다. 대회 유럽예선에서 10승2무3패(22득점 10실점)의 빼어난 성적을 거둬 런던에 왔다. 2009년 국제축구연맹(FIFA) 17세 이하 월드컵 우승, 지난해 유럽축구연맹(UEFA) 21세 이하 챔피언십 준우승 등으로 돋보였다. 조추첨 직후 B조 1위 후보로 꼽힌 것도 스위스였다. 에이스 셰르단 샤키리를 비롯해 발론 베흐라미, 필립 센데로스 등이 소속팀 반대로 런던행이 무산돼 100% 전력은 아니지만 결코 쉽지 않다. 가봉전에서 주전 수비수 올리버 부프(취리히)가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해 한국전에 뛸 수 없는 건 호재다. 홍 감독은 관중석에서 이 경기를 지켜보며 전력 파악에 열을 올렸다. 스위스 격파의 해법은 이미 홍 감독의 머릿속에 있다. 역대 최강 전력인 올림픽대표팀이 스위스를 상대로 8강행의 교두보를 마련할지 주목된다. 뉴캐슬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박태환 - 쑨양 예선선 볼일 없다

    박태환 - 쑨양 예선선 볼일 없다

    올림픽 2연패를 노리는 ‘마린보이’ 박태환(23·SK텔레콤)과 ‘호적수’ 쑨양(21·중국)이 결선에서 만나게 됐다. 런던올림픽 조직위원회가 27일 발표한 대회 수영 경영 예선 조 편성을 보면 박태환은 대회 2연패를 벼르는 남자 자유형 400m 4개조 가운데 3조의 4번 레인을 배정받았다. 반면 쑨양은 마지막 4조의 4번 레인에서 예선을 치른다. 세계기록(3분40초07) 보유자인 파울 비더만(독일)은 박태환에 앞서 2조의 4번 레인에서 예선을 치른다. 조 편성은 최근 1년 동안의 최고기록을 바탕으로 했다. 쑨양은 지난해 9월 중국선수권대회에서 아시아 기록에 해당하는 3분40초29를 찍어 이번 대회 참가 선수 28명 중 랭킹 1위에 올라 ‘마지막 조 4번 레인’이란 ‘부상’을 받았다. 지난해 상하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딸 때 작성한 3분42초04로 전체 2위에 오른 박태환은 바로 앞 조에서 역시 가장 유리한 레인인 4번을 배정받았다. 보통 8명이 한꺼번에 물에 뛰어드는 경영에서는 헤엄칠 때 이는 물결이 벽에 부딪치는 1번, 8번 레인이 가장 불리하고, 영향이 거의 없는 3번, 4번 레인이 가장 유리하다. 같은 조 3번 레인에는 데이비드 매키언과 5번 레인 라이언 나폴레온 등 호주 선수들이 나선다. 쑨양은 피터 밴더케이(미국), 중국의 17세 신예 하오준 등과 역영하게 됐다. 28일 열리는 자유형 400m 결선 출발대에는 전체 예선 참가 28명 가운데 8위 안에 들어야 설 수 있다. 박태환은 자유형 200m에서는 마지막 조인 6조의 5번 레인을 배정받았다. 4번 레인은 최근 상승세가 뚜렷한 야닉 아넬(프랑스)의 몫이 됐다. 5조에는 강력한 우승 후보인 라이언 록티(미국)가 4번 레인을, 쑨양이 바로 옆 5번 레인을 차지했다. 이 종목에서도 세계기록(1분42초00)을 가진 비더만은 4조 4번 레인. 자유형 200m는 예선 34명에서 16명을, 다시 준결선에서 8명을 추려 결선을 치른다. 박태환은 또 자유형 1500m에서는 4개조 중 3조의 5번 레인에서 대회 마지막 예선의 물살을 가른다. 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1)조선 천주교 개척 이벽&황사영

    [선택! 역사를 갈랐다] (21)조선 천주교 개척 이벽&황사영

    1779년(정조 3) 겨울. 남인의 젊은 학자들이 천진암에서 강학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벽(李蘗)은 눈발이 날리고 호랑이가 출몰하는 100여리의 밤길을 내달려 강학회에 참여했다. 이벽의 등장으로 유학을 강마하던 모임은 대번에 서학과 천주교에 대한 토론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784년. 이벽의 권유를 받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자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천주교(가톨릭)가 싹텄다. 천주교는 지식인을 비롯한 중인, 평민과 천민, 여성 등 각양각색 인물들에게 퍼져갔다. 정조가 승하하고 반 년 정도가 지난 1801년 1월.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정약용의 조카사위 황사영(黃嗣永)은 서울을 빠져나와 충청도 제천의 산골짜기 배론(舟論)에 숨어들었다. 배론의 토굴에 숨어지내며 그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편지는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편지 말미에서 황사영은 조선 교회의 재건을 위해 전대미문의 요청을 했다. 편지는 그가 잡히면서 공개되었고 조선 조정은 뒤집어졌다. 이른바 ‘황사영 백서(帛書) 사건’이었다. 한국 천주교는 진리를 찾던 이들이 자발적으로 택했지만 그 선택은 박해가 예고된 고난의 여정이었다.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들은 진정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를 발견했던 것일까. ●18세기 중국 통해 서학·천주교 유입 17세기 초 조선 사람들은 ‘유럽’이란 또 하나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18세기에 접어들자 서양의 천문, 역법, 수리, 의학에 관한 서적과 기물에 더욱 익숙해졌고, 북경에 간 사신들은 으레 선교사가 거주하는 천주당을 방문하였다. 그 결과 저들도 나름의 진리가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당시 서양과 그들의 학문에 대해 가장 해박했던 인물은 이익(李瀷)이었다. 그로 인해 서학(西學)이 일세에 풍미하게 되었고, 그의 문하에서 이른바 ‘친서파’(親西派)로 일컬어지는 이가환, 권철신, 정약전·정약용 형제, 이승훈 등이 배출되었다. 이익 문하의 학자들은 여전히 ‘서학 수용’에 머물러 있었다. 서학은 새로운 지식일 따름이지, 유교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새 가르침이 아니었다. 그런데 홀연 학문에서 신앙, 신념으로 건너뛴 인물이 나왔다. 이벽이었다. 이벽은 어려서부터 ‘하늘의 도리’에 뜻을 두었다. 20세쯤 서학서에 충격받았고, 25세 전후에 서학 서적을 망라해 읽고는 드디어 마음을 바꾸고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이 시기 전후에 그는 조선 최초의 호교서로 평가받는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집필한다. 그것은 천지를 주관하는 천주(天主)에 대한 선언이었다. 그의 선언은 성리학의 근본 원리인 천리(天理)에 대한 도전이었다. 성리학에서 하늘은 천리이다. 천리는 우주 질서의 원리, 사물의 물리, 사회의 윤리이다. 천리는, 우리가 ‘하늘’을 들을 때 떠올리는 ‘하느님’, ‘푸른 하늘’ 같은 인격성과 자연성이 약하고, ‘질서·조화·바름’과 같은 추상성과 윤리성이 강한 개념이다. 천리는 유교 왕국 조선에서는 모든 질서의 원천이자 가치의 근원이었다. 이벽은 ‘천리는 현실에서 공허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천리에 비해 천주는 인격적 존재로 현실감이 있고 내세관마저 채워주는 존재였다. 그는 양 개념이 대립적이라고 여기지 않고 서로 보완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대다수 조선인들은 천주 선언을 유교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으로 보았다. ●관대하던 정조 사후, 1801년 대대적 박해 시작 천주교를 찬성하건 반대하건, 지식인들은 ‘천리’와 ‘천주’의 대결이 가져올 파장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서로 대결한다면 그것은 문명 사이의 가치관 전쟁이자, 그에 동반한 사유와 많은 개념들을 재조정하는 일이 될 터였다. 16세기 천주교를 동양에 전파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 점을 알고 있었고, 두 문명 사이의 대화와 상호 이해를 도모하였다. 선교사들은 ‘Deus’(God의 라틴어)를 유교 경전에 등장한 상제(上帝)와 유사한 천주로 번역했고, 또 천주를 천지의 대부(大父)·대군(大君)이라고 소개하였다. 천주교 설명에 유교의 텍스트와 개념을 빌린 것이다. 이 같은 설명 방식은 중국에서보다 조선에서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유교적 이상 사회를 가장 진지하게 고민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천주교에서 유학과 일치하거나 때론 유학을 뛰어넘는 가능성을 보았다. 예컨대 한때 천주교 신자였던 정약용은 인격적 상제관에 기초한 새로운 유학 틀을 구상하였다. 정약용에게 영향을 미쳤던 이벽 또한 천주교를 축으로 유학의 미비점을 보완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회, 윤리 측면에서 문제는 매우 복잡하였다. 천주교인들은 천주 공경이 대효(大孝), 대충(大忠)이므로 유교 윤리는 천주교에서 완성되고, 유학자들이 오히려 천지의 군주와 부모를 모른 체한다고 역공했다. 물론 그 논리는 유교 윤리의 소멸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더 위험한 것은 천주 앞에서 군(君)·신(臣), 부(父)·자(子)의 수직적 위계가 사라지는 일이었다. 천주교인들이 자신들은 충성과 효도를 어긴 적 없다고 아무리 강변해도, 대다수 지배층은 ‘천주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논리 속에 잠재한 현실적 파괴력을 알고 있었다. 백성 하나하나가 박해를 감내하면서 자신이 신앙을 결단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유교적 명분 질서가 사라진 무부, 무군의 미래였다. ●“서양군 통해 유교 압박”… 황사영 백서 큰 파장 1785년(정조 9) 형조의 적발로 최초의 천주교 모임이 발각되었다. 신부도 없이, 지식인들이 서로 성직을 맡아 진행한 모임이었는데, 정조의 관대한 처분으로 그럭저럭 무마되었다. 모임의 주동자였던 이벽은 사건 이후 얼마 안 되어 30대 초반의 나이로 요절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도 전해진다. 본격적 박해를 경험하지 않은 이벽은 차라리 행복했다. 1801년에 터진 대대적 박해는 일부 신자들을 극단적 선택으로 몰고 있었다. 그 와중에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터졌다. 백서의 내용 대부분은 순교자들의 전기이다.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 논란을 부르는 부분은 후반부이다. 황사영은 교회 재건을 위해 몇 가지 방책을 제시했는데, 그중 ‘조선을 청에 내복(內服)시킴, 서양 군함과 병사를 통해 압박함’이 들어 있었다. 그 방책은 반국가, 반민족적 구상이라고 줄곧 비판받았다. 교회 재건이라는 동기와 박해라는 정황을 인정하더라도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 비판의 골자였다. 백서의 청원은 너무나 대담하고 몽상적이어서 교인들 사이에도 논란이 있었고, 당시 북경 교회가 그대로 감행하기도 어려웠다. 황사영 역시 실제 그렇게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정부를 압박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그 방책들을 제시하였다. 그가 반정부, 반국가 의지가 강했다면 가장 쉬운 길은 교인들의 무력 봉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반란에는 분명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 보자. 황사영은 왜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종교의 보편 진리를 꿈꾼 그는 서양의 도리를 신뢰했던 듯하다. 예수회가 전한 서양은 안정된 생활, 인정이 넘치는 풍속, 약한 자에 대한 배려와 형제애가 실현된 ‘이상적 사회’였다. 현실의 고통이 강할수록 이상적인 바깥 세계에 대한 동경과 기대는 증폭되기 마련이다. 기독교적 형제애에 대한 갈망이 커질수록 전통적인 유교 윤리, 혈통 의식, 국제 관계 등은 무력하거나 부정적으로 보였을 법하다. 선교사가 청 황제, 기독교 국가의 군대를 움직일 수 있다고 믿고 싶었던 지나친 기대감은 그의 판단력을 가려버렸다. ●지금도 유교문화 속 기독교 신자 수 동아시아 1위 천주교와 유교의 보완을 꿈꾸었던 이벽의 노력은 정약종, 정하상 등으로 맥을 이어갔다. 일부 교인들은 동서양의 이상적 인간상을 투영하여 그를 되살렸다. 19세기 후반 천주교 공동체의 염원이 담긴 예언서 ‘니벽전’에서 그는 학문에 능통한 선비, 득도한 신선, 승천하는 예언자로 그려졌다. 황사영은 대역부도죄로 체포되어 능지처사되었다. 비극은 그의 개인과 가족, 당대 교인들에게만 끝나지 않았다. 지배층과 일반 백성은 백서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인들을 정말로 무부무군의 무리, 나라를 팔아먹는 무리로 여기게 되었다. 두 사람의 선택은 현재의 우리에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국은 유교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으면서도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 신자 수가 1위인 동아시아의 특이한 국가이다. 전근대의 보편 가치와 근대의 보편 가치를 상징하는 두 종교 사이에 현재의 우리가 놓여 있다. 예수회 이벽의 선택은 ‘내 안의 가치’와 ‘타인 안의 가치’를 동등하게 존중하고 서로 대화하는 자세와 통한다. 그리고 종교, 문명,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 사이의 조화에 힘쓰는 이들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 그러나 인정과 대화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이다. 서로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겸손에서 대화는 출발하지만, 나·우리 혹은 타자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고정해 버리면 성찰과 다양한 해석이 설 자리는 사라져 버린다. 그 점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황사영은, 박해라는 정황을 감안하더라도, 외재(外在)하는 기준을 절대화해 버렸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원을 긍정하고 독선에 빠지지 않는 자세야말로 언제나 곰곰이 생각해 볼 덕목이었다. 세계화, 다문화, 정보화가 가속하는 지금에서는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이경구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 “12세기 금나라 시조는 신라·고려인…여진족 역사도 한국사 편입시켜야”

    “12세기 금나라 시조는 신라·고려인…여진족 역사도 한국사 편입시켜야”

    여진족의 역사를 한국사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문화유적학과 교수는 “만주 지역에서 생성과 성장·소멸을 거듭했던 종족의 역사 가운데 부여와 고구려, 발해는 한국사에 편입됐는데 동일 지역에서 활동한 여진족의 역사는 애매하게 처리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이 교수는 20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국고대사의 시공간적·문헌적 범위’를 주제로 열리는 학술회의에서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하는 논문 ‘한국사의 확대과정과 여진사(女眞史)의 귀속 문제’를 발표한다. 그는 부여 등이 한국사에 편입된 시기는 10세기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 편찬한 ‘구삼국사’부터라고 했다. 13세기 이승휴(1224~1300)가 지은 ‘제왕운기’에 나온 ‘단군본기’는 ‘구삼구사’를 인용했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의 편입은 고구려 시조의 계보 때문인데, 그 결과 북부여·동부여 등이 자연스럽게 한국사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문제는 여진족이다. 여진은 숙신(肅愼)→읍루(邑婁)→물길(勿吉)→말갈(靺鞨)→여진→만주족으로 이어진다. 이 여진족은 12세기 금을 세우고, 17세기 후금이 됐다가, 다시 청나라가 된다. 이 교수는 “(여진족이 세운) 후금(後)이 산해관 이남으로 진격해 중원 대륙을 제패하고 청(淸)이 되었을 때는 중국사인 것이 분명하다.”면서 “하지만 그 이전의 여진사는 중국사가 아니라 한국사로 편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 이 교수는 “12세기 금나라는 국가의 기원이 신라 또는 고려와 연결됐다.”고 주장했다. ‘고려사’는 물론 중국 문헌인 ‘이역지’(異域志)와 ‘신록기’(神麓記) 등도 금나라의 시조를 ‘신라인’ 또는 ‘고려인’이라고 기술했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이 교수는 여진의 역사를 한국사에 편입시킨 민족주의 사학자 박은식의 역사 인식을 해방 직후 손진태(1900~1950?)가 이어받았지만, 한국전쟁 때 그가 납북되면서 이런 역사인식이 남한에서 계승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신민족주의자로서 손진태는 한국사를 구성하는 족속으로 남북 9개 부족 즉, 부여, 예맥(고구려), 숙신, 조선, 옥저, 말갈, 진한, 마한, 변한 등을 말했다.”면서 “여진 등 일부는 한국사의 조역으로서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 교수는 중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과 ‘장백산 문화론’을 내세워 고구려·발해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여진사의 한국사 편입은 왜곡에 대한 효과적인 대처방안이 된다고 덧붙였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청소년에게 성관계 ‘권장’하는 소수민족 있다?

    미성년자의 성관계 행위를 금지하는 일반적인 풍습과 달리, 오히려 이를 권장하는 캄보디아 소수민족의 독특한 성교육과 결혼문화가 소개돼 눈길을 모으고 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이 소개한 캄보디아 북동부의 크룽(Kreung)부족 사람들은 딸이 청소년기가 되면 집 뒤뜰에 ‘사랑의 오두막’(Love Hats)을 지어주고, 직접 남자친구 또는 신랑감을 고르게 한다. 이 소수민족은 여성이 가능한 많은 남성과 잠자리를 가져본 뒤에야 자신과 잘 맞는 남편감을 고를 수 있다고 믿으며, 이곳 여자아이들은 ‘사랑의 오두막’에서 자유롭게 남자를 만난다. 낮 동안의 데이트는 금지돼있는 대신 누구든 마음에 드는 사람과 밤을 보낼 수 있으며, 함께 지낸 남자는 동이 트기 전 반드시 ‘사랑의 오두막’을 나와야 한다. 만약 여자아이가 아이를 가졌더라도 아이의 아버지에게 마음이 없다면 결혼을 강요하지 않으며, 실제로 결혼할 남자가 여자의 ‘전 남자친구’ 아이까지 책임져야 한다. 17세 소녀 낭-찬(Nang Chan)은 현지에서 촬영한 한 다큐멘터리에서 “이 오두막은 우리에게 독립심을 주고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면서 “만약 내가 특별한 남자친구를 찾아 사랑에 빠진다면, 나는 그를 불러내 이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보낸다.”고 설명했다. 캄보디아의 의사인 수딥타 바르마는 내셔널지오그래픽과 한 인터뷰에서 “서구의 관점에서 이같은 ‘사랑의 오두막’은 금기시 되어야 하는 존재며 부모 역시 딸의 순결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지만 이 소수민족 문화는 다르다.”고 말했다. 데일리메일은 “이곳 아이들은 피임기구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청소년 성매매·착취 등이 날로 증가하면서 에이즈 발생률이 높아지고 있다.”면서 “청소년에게 성관계를 권장하는 문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전했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19) 류성룡과 조헌

    [선택! 역사를 갈랐다] (19) 류성룡과 조헌

    임진왜란을 앞두고 비둘기파였던 류성룡(1542~1607)과 영조 때 영의정에 추증된 매파 조헌(1544~1592)은 원칙주의자로서 서로 갈등했다. 전쟁 후 류성룡은 ‘징비록’을 저술했고,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전사한 조헌은 그의 제자 안방준의 기록 ‘은봉야사별록’을 통해 잘 알려졌다. 이 두 개의 문헌이 일본에 전래되면서 류성룡과 조헌에 대한 해석은 제2라운드를 맞이한다. ●임진왜란 직전의 일본의 망상 100년 이상 이어지던 일본의 분열상태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는 중국 명나라는 물론 인도까지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명나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조선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도요토미는 조선과는 싸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자리한 쓰시마(대마도)의 지배자인 소씨(宗氏)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소 요시시게(1532~1589) 등에게 조선 국왕이 직접 자신에게 항복하러 오게 하라고 지시했다. 조선 국왕이 순순히 항복을 하면 조선과는 전쟁을 하지 않고 조선군을 앞세워 명나라를 칠 것이요, 아니면 조선을 공격하겠다는 것이었다. 쓰시마와 조선의 관계는 도요토미가 생각하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리고 만일 반도와 열도 사이의 관계가 악화된다면, 그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는 쓰시마로서는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될 터였다. 그래서 쓰시마 측은 조선 국왕 대신 조선 측의 사절단을 오도록 하겠다고 도요토미에게 아뢴 뒤, 이번에는 조선 조정측에 사절단의 파견을 간청했다. 사절단만 보내주면 두 나라 사이에서 전쟁은 피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비둘기파와 매파의 이견 사절단을 파견해 달라는 쓰시마 측의 요청을 받은 조선 조정의 의견은 갈라졌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거부했지만 쓰시마 측은 끈질기게 매달렸다. 당시 대제학이던 류성룡은 속히 결론을 내려서 두 나라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현장에서 동분서주한 실무가였다. 그러나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일본의 침략 전쟁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일본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적대 정책을 펴서는 안 되며, 국내적으로는 전쟁을 대비하고 대외적으로는 능숙한 외교로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날의 잘못을 징계해서 뒤의 어려움을 대비한다.”는 뜻을 제목에 담은 ‘징비록’의 첫머리에 성종에게 신숙주(1417~1475)가 남긴 “일본과의 화의를 잃지 마소서.”라는 유언을 실은 것이나, ‘징비록’에서 “왜”라는 호칭과 함께 “일본”이라는 정식 국호를 사용한 데에서도 실무가 류성룡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조헌은 쓰시마 측의 사절단 파견 요구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에서는 일본의 상황을 도요토미가 선왕(先王)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조헌은 신하의 신분으로 임금의 자리를 빼앗는 불의를 저지른 도요토미가 통치하는 일본과는 절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1591년 귀국한 황윤길(1536~?)과 김성일(1538~1593) 등이 가져온 도요토미의 국서 내용에 분개한 조헌은 일본 사신을 참수하고 그 시체를 여러 나라에 보임으로써 불의의 일본을 정벌할 연합군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김상헌(1570~1652)의 ‘청음집’에 적혀 있다. 이처럼 전쟁 발발 목전의 조선 조정에서는 비둘기파와 매파가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립은 전쟁의 위기가 현실화된 상황에서 어떤 나라에서든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조선 군사정보, 일본으로 유출 두 사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일어나고 말았다. 조헌은 전쟁이 일어난 1592년에 고경명·영규 등과 함께 의병군을 이끌고 참가한 금산 전투에서 전사했고, 류성룡은 전쟁이 끝난 1598년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하회로 낙향했다. 전쟁을 막고자 한 두 사람은 전쟁 중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비슷하게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그래도 류성룡은 ‘징비록’을 집필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조헌보다는 행운이었다. 그 대신, 조헌은 비장한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후세에 변호인을 얻을 수 있었다. ‘은봉야사별록’을 쓴 안방준(1573~1654)도 그 중 하나이다. 그는 하늘이 조헌으로 하여금 살아서는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고 죽어서 후세에 이름을 남기도록 했다며 슬퍼했다. 실로 조헌을 대신하여 그의 변론문을 썼다고 하겠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징비록’과 ‘은봉야사별록’은 임진왜란을 온몸으로 겪은 류성룡과 조헌, 안방준에 대한 귀중한 증언임과 동시에, 전쟁 당시 조선 측의 상황을 생생하게 담은 중요한 군사적 문헌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헌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약탈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쟁 후 검은 커넥션을 통해 일본으로 유출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두 문헌이 조선국 바깥으로 유출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683년에 작성된 쓰시마의 장서목록에 이 두 문헌이 나란히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유출 시기는 그 이전으로 짐작된다. 유출된 지역은 아마도 왜관으로 생각된다. ●‘징비록’ 17세기 日 지성계에 큰 영향 근세 일본에서 이야기되던 임진왜란 담론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단계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당사자나 그 주변인이 남긴 증언과 문헌에 의거한 것으로, 여기에는 오로지 일본 측 시각만이 담겨 있다. 그러다가 17세기 초기에 중국 명나라에서 제작된 ‘양조평양록’과 같은 문헌이 일본에 유입되면서, 일본인들은 임진왜란 때 자신들과 싸웠던 적국의 내정(內政)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나 명측의 문헌에는 자국의 군대가 한반도에 진입하기 이전 단계인 1592년의 전황을 비롯하여 조선 측의 상황이 소략됐고, 조선에 대한 명의 편견 역시 상당했다. 그 결과 일본과 명나라의 문헌을 종합해서 편찬된 ‘조선정벌기’ 등의 문헌에서는, 임진왜란은 일본과 명나라 사이의 전쟁이고 조선은 전쟁의 무대이자 수동적인 역할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식으로 기록된다. 역사는 반복돼 1895년 청일전쟁 이후에도 되풀이된다. 17세기 중기 조선의 임진왜란 문헌 몇 점이 일본에 유입된다. 그 가운데 일본 지식인들이 주목한 것은 류성룡의 ‘징비록’이었다. ‘징비록’을 통해 명측 문헌에서 보이는 조선 측에 대한 편견 몇 가지가 수정되고, 조선 측에도 전쟁 영웅들이 다수 존재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일본에 알려졌다. 이순신이 일본에서 ‘영웅’으로 인식된 것도 ‘징비록’의 영향이었다. 비록 임진왜란을 명과의 일대 결전으로 바라보고 싶어 한 근세 일본인들의 관점을 ‘징비록’ 하나가 뒤집을 수는 없었지만, ‘징비록’이 근세 일본 사회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긴 것 역시 사실이었다. 예컨대, 1695년 교토에서 출간된 일본판 ‘징비록’의 서문을 쓴 유학자 가이바라 엣켄(1630~1714)은 당시까지 일본에 존재하던 임진왜란의 기록 가운데 ‘징비록’과 ‘조선정벌기’만이 ‘실록’(實錄)이며 다른 것들은 번잡하여 볼 것이 없다고 평하였다. ●日 ‘은봉야사별록’으로 ‘징비록’ 비판 물론 인기를 끌면 반발도 생기는 법. 18세기 후기가 되면서 ‘징비록’을 폄하하는 문헌들이 일본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왜관에서 근무한 경험을 지닌 쓰시마의 학자가 쓴 ‘조선정토시말기’라는 책의 서문에서, 아사카와 도사이(1814~1857)는 류성룡이 “당시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에게 해를 입힌 죄를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에 거짓을 적어 사람들을 속였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징비록’을 ‘실록’이라고 칭송한 가이바라 엣켄을 비판하기 위함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상반된 견해가 이 시기의 일본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아사카와는 1849년 일본에서 간행된 ‘은봉야사별록’에도 서문을 실었다. 여기서 그는 “임진왜란 직전에 조선 국왕 선조는 음락했고 조정에서는 류성룡·이덕형 등의 간신이 발호했기 때문에 일본군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고, 명나라의 도움을 기다려서 간신히 나라를 되살릴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양조평양록’의 기사를 끌어와 류성룡과 ‘징비록’을 비판한다. ‘은봉야사별록’를 간행한 것은 미토학(水戸学)이라 불리는 에도시대 후기의 일본중심적 학파의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아사카와처럼 ‘징비록’에 대한 불신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은봉야사별록’을 함께 이용함으로써 ‘징비록’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격하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류성룡과 조헌의 대립과 갈등은 ‘징비록’과 ‘은봉야사별록’이라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임진왜란 문헌에 실려 일본 학자들에게 알려졌다. 이 두 사람 중 어느 한 편을 들 필요가 없던 일본 학자들은 두 문헌을 비교하며 냉정한 눈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 측 상황을 서술했다. 조선 내부의 갈등이 근세 일본에서 재현되어 저들에게 편리하게 이용된 씁쓸한 역사적 사실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 가와구치 조주(1773?~1834)는 임진왜란 관련 문헌을 종합하여 임진왜란을 연대순으로 편찬한 ‘정한위략’을 간행하였다. 그는 이 문헌의 기본틀을 잡기 위해 ‘징비록’의 서술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이이·조헌과 대립한 류성룡을 비판하는 ‘은봉야사별록’의 구절을 여럿 가져와서 ‘징비록’과 류성룡을 비판한다. 예를 들어 류성룡이 간신이었다는 ‘양조평양록’의 글에 대해 ‘은봉야사별록’에서도 류성룡을 마찬가지로 비판하고 있는 걸 보니 이는 사실이었던 것 같다고 적고 있다. 다만, ‘징비록’에서 우국충정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니 류성룡은 처음에는 나라를 그르쳤으나 전쟁이 일어난 뒤에 반성했음을 알겠다고도 적고 있다. 김시덕(고려대 일본연구센터 HK연구교수)
  • ‘도가니’ 성폭행 가해자 인화학교 前행정실장 징역 12년 선고

    영화 ‘도가니’의 실제 배경이 됐던 광주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에게 검찰의 구형량보다 훨씬 높은 중형이 선고됐다. 광주지법 형사 2부(부장 이상현)는 5일 청각 장애 여자 원생의 손발을 묶고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인화학교 전 행정실장 김모(63)씨에 대해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또 10년간 신상정보 공개와 위치추적 장치 부착을 명령했다. 재판부는 “인화학교 사건 이후 장애인을 상대로 한 성폭력 사건에 대해 엄벌을 요구하는 여론이 커졌고, 국회에서는 이른바 ‘도가니법’이라는 법률 개정도 있었다.”며 “학생을 보호해야 할 행정실장이 저항하거나 피해 사실을 알리기 어려운 장애인을 성폭행한 죄질이 극히 불량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또 “피해자는 신체·정신적 충격으로 학교를 자퇴하고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인데도 김씨는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은커녕 범행을 부인했다.”고 중형 선고 이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사건이 발생한 지 7년이 지나 피해자가 인화학교의 다른 성폭행 사건과 혼동하고 있어 피해 상황과 경위 등의 진술에 일관성이 부족한 점은 있지만 범행 장소와 양손을 끈으로 묶였던 사실, 당시 상황의 감정, 가해자 등을 일관되게 진술한 점 등에 비춰 장애 내용과 특성을 감안하면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범행 발생 후 수사를 받았지만 당시에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인정되지 않아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됐다가 지난해 영화 개봉 이후 재수사 끝에 기소됐다. 이날 선고 직후 인화학교 성폭력 대책위 김용목 상임대표는 “재판부가 검찰 구형보다 높은 형량을 선고한 것은 지적장애와 청각장애에 대한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이번 판결이 앞으로 미성년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 사건의 좋은 선례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씨는 2005년 4월쯤 인화학교 행정실에서 A(당시 18세)양의 손발을 끈으로 묶고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으며, 이 장면을 목격한 B(당시 17세)군이 입을 다물도록 사무실로 끌고 가 깨진 음료수 병과 둔기로 폭행한 혐의도 받고 있다. 검찰은 앞서 김씨에 대해 징역 7년과 위치추적장치 부착 10년을 구형했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썰매야, 이제 하늘나라서 썰매 타렴

    썰매야, 이제 하늘나라서 썰매 타렴

    서울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바다동물관의 빅스타로 12년간 터줏대감 노릇을 한 북극곰 수컷 ‘썰매’가 하늘나라로 떠났다. 서울시설공단은 지난 2일 썰매가 심장 근육 출혈로 숨졌다고 4일 밝혔다. 공단은 정확한 사인을 캐기 위해 건국대 수의과대학 병리학팀과 공동으로 부검을 실시하고 있다. 북극곰의 수명이 보통 25년인 점을 감안하면 29세인 썰매는 천수를 누린 셈이다. 하지만 1970년대 인기 코미디언 남철, 남성남 콤비를 연상케 하는 ‘왔다 갔다’춤과 힘찬 팔다리 놀림, 자맥질로 사랑을 듬뿍 받았던 썰매의 죽음은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오랜 배우자인 ‘얼음’과의 사이에서 2세를 생산하지 못해 더하다. 썰매는 2001년 3월 경남 마산 돝섬유원지 폐쇄 때 올해로 17세인 얼음과 나란히 둥지를 옮겼다. 이후 사육사들은 썰매와 얼음 부부의 2세 출산에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끝내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올봄엔 둘의 남다른 애정 행각으로 큰 희망을 품었으나 썰매는 끝내 후손을 남기지 않은 채 쓸쓸히 눈을 감았다. 이로써 국내 북극곰은 얼음과 용인 에버랜드의 한 쌍, 대전동물원의 수컷 한 마리를 합쳐 네 마리로 줄어들었다. 북극곰은 국제적 멸종 위기 동물로 각 나라에서 반출을 엄격히 통제해 국내엔 매우 귀한 존재다. 어린이대공원은 배우자를 잃고 혼자 남은 얼음이 스트레스에 시달릴 것을 우려해 특별 관리에 들어갔다. 폐쇄회로(CC)TV를 통해 행동과 섭생을 예의 주시하고 얼음 속에 동태와 같은 바닷고기나 닭고기 등을 넣은 특별식을 많이 주기로 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15위에 지다니… 샤라포바 16강 탈락 쇼크

    여자프로테니스(WTA) 랭킹 1위 마리야 샤라포바(러시아)가 윔블던 여자단식 16강에서 탈락했다. 샤라포바는 3일 영국 윔블던 올잉글랜드클럽에서 열린 시즌 세 번째 테니스 메이저대회인 윔블던 여자단식 4회전(16강)에서 자비네 리지키(15위·독일)에게 0-2(4-6 3-6)로 졌다. 2주 전 프랑스오픈 우승으로 랭킹 1위에 오르며 상승세를 과시하던 샤라포바는 초반부터 실책을 연발하며 자멸했다. 이날 패배로 샤라포바는 17세 때인 2004년 대회 첫 우승 이후 8년 만에 두 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리려던 목표를 접었고, 세계 1위 자리도 내놓게 됐다. 반면 지난해 대회 준결승에서 샤라포바에 져 탈락하는 등 앞서 세 차례 맞대결에서 모두 무릎을 꿇었던 리지키는 매치 포인트에서 깔끔하게 서브에이스를 꽂아 넣어 기분 좋게 설욕했다. 개인 통산 다섯 번째 메이저대회 정상을 노리던 킴 클리스터스(벨기에)도 앙겔리케 케르버(독일)에게 0-2(1-6 1-6)로 완패, 8강 진출이 좌절됐다. 리지키와 케르버는 8강에서 맞대결을 펼친다. 남자프로테니스(ATP) 랭킹 1위 노박 조코비치는 빅토르 트로이츠키(34위·이상 세르비아)를 3-0(6-3 6-1 6-3)으로 완파하고 8강에 올라 대회 2연패에 한 걸음 다가섰다. 로저 페더러(3위·스위스)도 하비에르 말리세(75위·벨기에)를 3-1(7-6<1> 6-1 4-6 6-3)로 제압하고 8강에 안착했다. 개인 통산 850승을 채운 페더러는 미하일 유즈니(33위·러시아)와 준결승 진출을 다툰다. 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2012 런던올림픽 D-30] 당신의 마음을 훔칠 런던의 10대 빅매치

    [2012 런던올림픽 D-30] 당신의 마음을 훔칠 런던의 10대 빅매치

    [양궁] 임동현 “男 개인전 품어보련다” 양궁은 올림픽 메달의 텃밭. 하지만 남자 개인전에선 아직 금메달이 없다. 런던올림픽에서 ‘G20프로젝트’, 역대 통산 20번째 금메달을 따겠다고 목표를 세운 양궁 대표팀에 남자 개인전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지금까지 올림픽에서 금메달 16개를 딴 양궁 대표팀은 이번에 남녀 개인·단체전을 모두 석권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G20 프로젝트’의 성공이 걸려 있는 빅매치가 8월 3일(이하 현지시간) 열릴 남자 개인전 임동현(26·청주시청)과 브래디 앨리슨(24·미국)의 대결이다. 각각 세계랭킹 2위와 1위인 둘의 맞대결은 번번이 앨리슨의 승리로 귀결됐다. 지난해 10월 영국 런던 로즈크리켓 그라운드에서 열린 올림픽 테스트이벤트 개인전 결승에서도 앨리슨이 임동현을 6-2로 눌렀다. 앨리슨은 1980년대 한국 대표팀을 이끌었던 이기식 감독이 만든 작품. 1990년대에 이어 2006년부터 미국 대표팀을 지도한 이 감독은 앨리슨을 한국의 ‘천적’으로 키워냈다. 지난해 2월 오른쪽 광대뼈에 퍼진 종양을 제거하는 시련을 겪은 임동현은 앨리슨을 반드시 꺾어야 생애 첫 개인전 금메달을 딸 수 있다. 충북체고 2학년 때인 2002년부터 10년간 국가대표 자리를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임동현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수확한 금메달은 5개지만 개인전 금메달과는 인연이 없었다. [복싱] 축구대표 출신 테일러, 복싱퀸 될까 런던올림픽에서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여자 복싱.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의 역사적인 주인공이 누가 될지 복싱계 안팎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가장 유력한 주인공은 케이티 테일러(26·아일랜드)다. 국제아마추어복싱연맹(AIBA)이 주최하는 세계여자복싱선수권대회 60㎏급에서 4회 연속 챔피언벨트를 거머쥔 독보적인 선수다. 오는 8월 9일 치러지는 이 체급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따고 테일러가 아일랜드 국민들의 우상으로 떠오를 수 있을지가 이번 올림픽의 관전포인트 가운데 하나. 테일러는 아마추어 복서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12살이던 1998년부터 복싱을 시작했다. 170㎝, 60㎏이라는 단단한 신체조건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테일러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2005년 노르웨이 퇸스베르그에서 열린 유럽아마추어선수권대회 60㎏급에서 금메달을 따면서부터다. 그해 말 러시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선 준결승까지 진출했다. 이듬해 인도 뉴델리 세계선수권에서 아일랜드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세계 챔피언에 등극한 뒤 2008년, 2010년, 2012년 연속으로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특이한 것은 테일러가 아일랜드 여자축구대표팀에서 뛴 적이 있는 축구선수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U-17(17세 이하)과 U-19 대표팀에서 활약한 적이 있는 테일러는 2009년 유럽축구연맹(UEFA) 여자챔피언스리그 예선전에서 헝가리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테일러는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것도, 축구를 하는 것도 좋지만 결국엔 나의 최고 스포츠는 복싱이다. 복싱을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허들] 황색탄환 류샹 ‘나쁜손’ 보란듯 웃나 중국의 ‘황색 탄환’ 류샹(오른쪽·29)은 런던올림픽에서 다이론 로블레스(왼쪽·26·쿠바)와 풀어야 하는 숙제가 하나 있다. 지난해 8월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허들 남자 110m에서 로블레스의 진로 방해로 아쉽게 은메달에 그친 것을 멋있게 되갚아 줘야 한다.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다. 재경기는 다른 선수들에게 공평하지 않다. 이번 대회는 한 대회일 뿐”이라면서 깨끗이 결과에 승복했던 류샹은 런던올림픽에서 4년 전 베이징의 악몽을 씻어낼 준비를 하고 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세계 타이기록(12초 91)으로 금메달을 딴 뒤 조국 중국에서 화려한 2연패를 노렸던 류샹은 2008년 아킬레스건 부상 탓으로 예선 첫 경기에서 기권하며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올림픽 직후 수술대에 오른 류샹은 13개월간 이를 악물고 재활에 매진했다. 2009년부터 국제대회에 모습을 나타내긴 했지만 줄곧 13초대에 머무르며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13초 09를 찍고 금메달을 목에 걸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고, 지난해 대구에서 화려한 부활을 꿈꿨지만 로블레스의 ‘나쁜 손’ 때문에 은메달에 머물러야 했다. 류샹의 컨디션은 상승세를 타고 있다. 지난 5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국제육상연맹(IAAF) 다이아몬드 리그에서는 12초 97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세계 랭킹 1위로 올라섰다. 4년 만에 처음으로 12초대에 재진입한 것. 올림픽 전초전 격이었던 지난 3일 IAAF 다이아몬드 리그 프리폰테인 클래식에선 12초 87의 비공인 세계 타이기록으로 정상에 올랐다. 현재는 올림픽 준결선과 결선이 함께 열리는 8월 8일에 초점을 맞추고 몸 상태를 끌어올리고 있다. 이날 110m 허들 결승선에서 과연 류샹은 활짝 웃을 수 있을까. [장대높이뛰기] 이신바예바 ‘올림픽 3연패’ 금자탑? ‘육상 사상 최초로 올림픽 3연패를 이루고 멋진 은퇴를 한다.’ ‘미녀새’ 옐레나 이신바예바(30·러시아)의 야심찬 청사진은 실현될 수 있을까. 8월 6일 열리는 여자 장대높이뛰기 결승전에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이신바예바는 장대높이뛰기 종목에서 여자 선수로는 처음 5m 벽을 넘어선 세계기록 보유자다. 2003년 4m82로 처음 세계기록을 세운 이신바예바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4m91)에 이어 2008년 베이징올림픽(5m05)에서도 세계기록을 갈아치우며 올림픽 2연패에 성공했다. 승승장구하던 이신바예바는 2009년 런던 그랑프리와 베를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잇따라 쓴잔을 들며 슬럼프에 빠졌다. 하지만 그해 8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벨트클라세 골든리그에서 5m06을 뛰어넘어 또다시 실외 세계기록을 작성하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해 보였다. 더 이상의 목표를 찾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진 이신바예바는 2010년 4월 활동 중단을 선언하기도 했다. 지난해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6위에 그쳐 예전의 명성을 무색하게 했다. 그러나 올림픽은 차원이 다르다. 더욱이 내년에 은퇴를 생각하고 있는 이신바예바로서는 마지막 올림픽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 지상과제로 떠오르게 됐다. 이신바예바는 부활의 신호탄을 쏘고 있다. 지난 2월 24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실내육상선수권대회에서 5m01에 걸린 바를 넘어 실내 세계기록을 새로 썼다. 이 기세를 몰아 전무후무한 올림픽 3연패를 이뤄낼 수 있을지 세계의 이목이 런던으로 쏠린다. [펜싱] 남현희 “베이징 은메달 금빛으로 바꾸고 엄마될래요” 7월 28일은 한국 펜싱의 대들보 남현희(31·성남시청)에게 매우 중요한 날이다. 4년을 기다려온 설욕전에 성공해 베이징에서 딴 은메달 색깔을 금빛으로 바꾸게 될 날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반드시 넘어서야 할 선수가 숙적 발렌티나 베잘리(38·이탈리아)다. 베이징올림픽 여자 플뢰레 개인전 결승에서 남현희는 베잘리에게 1점 차로 분패해 아쉽게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1회전에서 0-3까지 뒤지던 남현희는 2회전에서 3-3 동점을 만든 데 이어 3회전에선 41초를 남기고 5-4로 역전에 성공했다. 금메달은 손에 잡히는 듯했다. 그러나 5-5 동점 이후 경기 종료 4초를 남기고 베잘리에게 통한의 공격을 허용한 남현희는 5-6으로 무릎을 꿇었다. 패배를 깨끗하게 인정한 남현희는 4년 동안 절치부심하며 수많은 국제대회에서 기량을 갈고 다듬었다. 이제 남현희는 ‘여우 같은 펜싱’으로 정상에 서겠다고 다짐한다. “베이징에선 너무 어려서 정직하게 펜싱을 했다. 심리적으로 상대 선수를 도발하거나 심판에게 강하게 어필할 땐 하면서 승부의 주도권을 쥐겠다.”고 남현희는 런던올림픽 각오를 밝혔다. 지난해 11월 5살 연하의 사이클 국가대표 출신 공효석(26·금산군청)과 결혼하면서 심리적 안정을 찾은 것도 남현희에게는 플러스 요소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아기를 갖고 싶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는 만큼 이번 올림픽은 남현희에게 남다른 의미가 될 듯하다.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축구] 종주국 英? 월드컵 단골 브라질? 축구 종주국 영국은 1960년 로마대회 이후 올림픽에서 자취를 감췄다.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로 나눠진 4개의 축구협회가 단일팀 구성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 그러나 안방에서 열리는 런던올림픽에선 41년 만에 ‘영국단일팀’(Team GB)을 구성했다. A조 톱시드를 받은 영국은 세네갈·아랍에미리트연합·우루과이를 상대한다. 가레스 베일(토트넘)·에런 램지·잭 윌셔(이상 아스널) 등의 영파워가 앞장서고, 와일드카드(연령제한 없이 뽑는 선수 3명)가 유력한 데이비드 베컴(LA갤럭시)이 중심을 잡는다. 브라질을 빼면 섭섭하다. 이집트·벨라루스·뉴질랜드와 C조에 속한 브라질의 목표는 당연히 ‘골드’다. 월드컵 최다우승국(5회)이면서도 아직 올림픽 금메달이 없다. 최고 성적은 은메달(1984 로스앤젤레스올림픽·1988 서울올림픽). 호나우두가 나선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호나우지뉴가 출전한 2008년 베이징올림픽 모두 동메달에 그쳤다. 리오넬 메시(아르헨티나)와 비교되는 ‘신성’ 네이마르 다 실바(산투스FC)는 물론, 알렉산더 파투(AC밀란)·하파엘 다 실바(맨유) 등 빛나는 멤버가 출동할 예정이다. 호기롭게도 영국 단일팀과 브라질은 올림픽 개막 전인 7월 20일 미들즈브러의 리버사이드스타디움에서 평가전을 치르기로 했다. 지난해 유럽축구연맹(UEFA) 21세 이하 선수권대회 챔피언 스페인은 티아고 알칸타라(FC바르셀로나)·이케르 무니아인(아틀레틱 빌바오) 등을 앞세워 메달 사냥에 나선다. 구자철(아우크스부르크)·기성용(셀틱)·박주영(아스널) 등의 출전이 유력한 한국 홍명보호도 ‘다크호스’로 손색이 없다. 런던에는 올림픽 2연패를 이룬 아르헨티나를 비롯, 이탈리아·독일·프랑스 등 축구강국이 본선행에 실패해 우리로선 기회가 좋다. [테니스] 페더러 이번엔 ‘금메달 恨’ 풀까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세계 3위·스위스)에겐 올림픽 단식 금메달이 없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4위, 2004 아테네올림픽 땐 2회전에서 탈락했다. 4년 전 베이징올림픽 때도 8강에서 탈락한 뒤 스타니슬라스 바브린카(스위스)와 나선 남자복식에서 금메달를 딴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메이저대회 최다 우승 타이기록(16회)을 갖고 있는 페더러의 유일한 약점이 올림픽 금메달인 셈. ‘라이벌’ 라파엘 나달(2위·스페인)이 베이징대회 금메달을 걸고 일찌감치 ‘커리어 골든슬램’(커리어 그랜드슬램+올림픽 금메달)을 달성한 걸 감안하면 한참 늦은 감이 있다. 만 31살인 페더러의 나이를 봐도 런던은 ‘골드’를 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가능성이 크다. 금메달을 다툴 선수는 ‘신황제’ 노박 조코비치(1위·세르비아). 최근 프랑스오픈을 놓치는 바람에 한 해에 4대 메이저대회와 올림픽 단식 금메달을 싹쓸이하는 ‘골든슬램’의 꿈은 좌절됐지만 잔디코트에서 최강자의 면모를 되찾을 기세다. 올림픽과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윔블던에서 지난해 우승한 것도 이런 전망에 힘을 싣는다. 전쟁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낸 조코비치는 ‘조국에 선사하는 금메달’에 대한 열의도 남다르다. ‘디펜딩챔피언’ 나달과 홈 코트의 이점을 안은 앤디 머리(4위·영국)도 늘 그렇듯 우승 후보다. 여자부는 이달 프랑스오픈 우승으로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완성한 마리야 샤라포바(1위·러시아)가 유력한 금메달 후보다. 4년 전 베이징올림픽 때는 오른쪽 어깨 부상으로 금메달 꿈을 접었지만, 런던에서는 러시아 기수까지 맡으며 승부욕을 불태우고 있있다. [핸드볼] ‘우생순’ 덴마크에 복수혈전 8년 전 아테네올림픽 때 여자핸드볼은 순도 100%의 ‘감동 드라마’를 썼다. 결승에서 덴마크와 만나 19번의 동점과 두 번의 연장전을 치렀고, 결국 마지막 승부던지기까지 128분을 꽉 채우는 명승부를 펼쳤다. 아쉽게 은메달에 그쳤지만 선수단은 챔피언 못지않은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이 경기는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으로도 제작돼 핸드볼 인기에 한몫을 톡톡히 했다. 이후 여자팀은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을 통틀어 덴마크와 딱 한 번 만났다. 2009년 세계선수권대회 5·6위 순위결정전. 하지만 한국은 그때도 두 점차(31-33)로 졌다. 세대교체가 한창이라 짜임새가 갖춰지지 않았고 체격·경험에서 덴마크가 우위였다. 얄궂게도 이번 런던올림픽에서 한국은 덴마크와 같은 B조에 속했다. 7월 30일 조별리그 2차전에서 상대한다. 세계랭킹 6위 덴마크는 지난해 세계선수권 준우승을 차지할 만큼 여전히 정상급 기량을 뽐내고 있다. 녹록지 않은 상대인 것은 분명하지만 단판전이 아닌 조별리그에서 만나는 만큼 홀가분하게 ‘아테네 한풀이’에 나설 절호의 기회다. 당시 ‘달콤 쌉싸름한’ 기억이 아직 생생한 우선희(삼척시청)·최임정(대구시청)·김차연(오므론)·문경하(경남개발공사)가 이번에도 태극마크를 달고 뛴다. 김온아·유은희(이상 인천시체육회)·이은비(부산BISCO) 등 겁 없는 ‘젊은 피’도 힘을 보탠다. 1984년 LA올림픽 은메달을 시작으로 7차례의 올림픽에서 금메달 2·은메달 3·동메달 1개를 따낸 ‘효자’ 여자핸드볼이 복수에 성공할지 지켜보는 것도 관전포인트다. [농구] 美드림팀 ‘유종의 미’ 거둔다 미국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때 마이클 조던·매직 존슨·스카티 피펜·찰스 버클리 등 프로농구(NBA) 호화 라인업을 내보내 전승으로 금메달을 땄다. 그때를 시작으로 미국은 1996애틀랜타, 2000시드니올림픽까지 올림픽 농구를 3연패했다. 그러나 2004아테네올림픽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에 져 동메달에 그쳤다. 전열을 가다듬은 ‘드림팀’은 4년 전 베이징올림픽에서 압도적인 기량으로 금메달을 되찾았고, 2010년 세계선수권을 잇달아 제패하며 최강의 면모를 과시했다. 최근 미국 대표팀은 20명의 예비엔트리를 발표했다. 코비 브라이언트(LA레이커스)·카멜로 앤서니(뉴욕 닉스)·레이 앨런(보스턴 셀틱스)·드웨인 웨이드(마이애미 히트) 등 최고의 NBA 리거들이 모두 이름을 올렸다. ‘구슬은 서 말’인데 이달 말 끝나는 NBA플레이오프 일정으로 손발을 맞출 시간은 고작 보름 남짓이다. 6월 확정하려던 최종엔트리(12명)도 새달 8일쯤 발표할 예정이라고. 2006년부터 대표팀을 이끌어온 마이크 슈셉스키 듀크대 감독이 변함없이 지휘봉을 잡는다. 어쩌면 이런 드림팀도 마지막일지 모른다. NBA사무국은 지난달 “올림픽 농구를 23세 이하 출전대회로 변경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올림픽은 축구처럼 연령 제한을 두고, 최고의 농구축제는 4년에 한 번 열리는 국제농구연맹(FIBA) 월드컵으로 한정하겠다는 얘기다. 올림픽 출전을 꺼리는 구단들의 이해관계 때문이다. NBA의 계획이 실행된다면 런던올림픽은 ‘드림팀’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아름다운 퇴장’을 견제할 파우 가솔(스페인)·토니 파커(프랑스)·더크 노비츠키(독일) 등의 활약도 관심을 끈다. [리듬체조] ‘국민 요정’ 손연재 개인종합 결선 진출할까 기계체조에서는 여홍철·이주형·양태영 등이 올림픽 메달을 땄지만, 우리나라의 리듬체조는 불모지나 마찬가지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홍성희·김인화가 출전했지만 하위권에 머물렀고, 4년 뒤 바르셀로나올림픽의 김유경·윤병희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구나 이후엔 올림픽 본선행조차 맥이 끊겼다. 2008베이징올림픽 때 신수지(세종대)가 16년 만에 올림픽 무대를 밟았지만 10위까지 주어지는 개인결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그 기대와 부담은 손연재(세종고)가 오롯이 이어받았다. 수줍은 소녀였던 손연재는 지난해 국제체조연맹(FIG) 세계리듬체조선수권 11위로 올림픽 티켓을 따내더니 올 시즌 월드컵시리즈에서도 심심찮게 메달을 획득하며 리듬체조 강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올해 나선 네 차례 월드컵시리즈에서 손연재는 개인종합 11위(페사로), 4위(펜자), 7위(소피아), 5위(타슈켄트)를 꿰찼다. 펜자월드컵 후프와 소피아월드컵 리본에서 연속 동메달을 따내기도 했다. 마지막 타슈켄트 월드컵에선 후프-볼-리본-곤봉 등 전 종목에서 ‘꿈의 28점’을 기록했다. 올림픽에 걸린 메달은 개인종합(8월 11일)-단체전(12일), 단 두 개. 종목별로 시상하는 월드컵시리즈와 달리 네 종목을 합산해 랭킹을 매기는 만큼 모든 종목에서 실수 없이 안정적인 연기를 펼치는 게 포인트다. 손연재는 소박하게 상위 10등까지 주어지는 ‘개인종합 결선’을 목표로 잡았다. 손연재는 “결선에 오르면 다시 처음부터 경쟁이 시작된다. ‘톱10’에 든 뒤 실수 없이 최고의 성적을 올리겠다.”고 다짐했다.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아랍이나 아시아 민주화 싹을 꼭 서구적 틀에서 찾아야 합니까

    아랍이나 아시아 민주화 싹을 꼭 서구적 틀에서 찾아야 합니까

    ‘비서구 민주주의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가 모순처럼 보인다. 민주주의는 고대 아테네에서 시작된 가장 서구적인 제도 중 하나이기 때문에 ‘비서구’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학습된 탓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이니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의 ‘아랍의 봄’ 소식을 들으면, ‘이들 나라에서도 이제야 서구 민주주의가 싹트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민주주의=서양의 것’이란 상식을 뿌리부터 흔들어대는 이가 있으니 김상준(52) 경희대 공공대학원 교수다. 김 교수는 19~20세기 근대화와 함께 유럽의 수출상품이었던 서구 민주주의의 뿌리가 중국과 조선에 있었다는 뚱딴지 같은 주장을 한다. 막무가내는 아니고 그럴 듯한 근거를 댄다. 김 교수는 근대적 민주주의의 시작을 17세기 스피노자에게서 찾고 있다. 그렇다. ‘지구가 내일 멸망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했던 그 스피노자다.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는 17세기 유럽 최초로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급진 계몽주의자였다. 그가 살았던 17세기 유럽에는 민주주의가 없고, 혹독한 사상 탄압과 종교의 폭정뿐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민주주의는 비판을 받았고,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 경험은 부정적으로 평가됐다. 아테네는 민주주의 때문에 망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기독교가 유럽을 석권하고 나서 민주주의를 분명하게 옹호하는 유럽인은 없었다. 이때 스피노자가 인간과 세계의 자연성을 설파한 (교회가 볼때는 불온한) ‘에티카’를 썼고, 교회는 그에게 ‘무신론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17세기 무신론자는 대한민국에서 ‘빨갱이’와 같은 지위를 갖는다. 스피노자는 그 후 1670년 ‘신학-정치 논고’를 출간했고, 이는 19세기 초까지 유럽 사상계를 뒤흔들었다. 김 교수는 스피노자가 친하게 지낸 14살 연상의 아이자 보시우스란 철학자가 있는데, 보시우스가 중국과 조선을 동경했다고 말한다. 17세기 해상권을 확보한 네덜란드가 극동의 일본과 교역했으니 아시아와 관련한 각종 정보가 네덜란드에 유입됐을 것은 당연한 이치. 보시우스는 중국과 조선은 철학자들이 다스리는 나라이고, 이들 철학자가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지 못하면 인민들이 평가하는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왕이 잘못하면 대놓고 이 철학자들이 왕을 비판하는 정치 선진국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보시우스의 이런 생각은 같은 동네에 살면서 친하게 지내던 후배이자 동료인 스피노자에게 옮겨갔을 것이고, 스피노자의 급진 계몽주의 사상의 이론적·철학적 배경이 됐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설명이 길어졌지만, 스피노자의 급진철학과 유럽 민주주의 탄생의 이론적 배경에 ‘비서구’인 중국과 조선이 있었으니 ‘과연 민주주의를 서구에서 빌려왔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나아가 김 교수는 BC 500년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 원형도 사실은 BC 2000년 시리아-메소포타미아 고대 아시아 국가의 다중 의회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이것도 김 교수의 막연한 아시아 우월주의적 주장이 아니고, 덴마크 출신의 미국 고고학자 토르킬드 야콥센(1904~1993)이 주장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민주주의 원형을 찾아보면 서구보다 아시아 쪽이 기원이 빠를 수 있다고 한다. 아무튼 서구의 근대화 따라잡기 식, 흉내내기 식 민주주의를 추구하지 않아도 인도나 한국, 중국, 베트남 등은 자신들의 전통과 역사에서 민주주의 방안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알렉산더 우드사이드 교수는 저서 ‘잃어버린 근대’(2006년)에서 ‘중국의 능력주의에 입각한 과거-관료제도야말로 또 하나의 근대였고, 이것을 유럽은 19세기에 받아들였다.’고 했다. 이어 포스트모던한 사고방식으로 김 교수는 “아랍의 민주화나 아시아의 민주화를 꼭 서구적 테두리에서 찾아야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런 주장은 계간지 ‘실천문학 106호’ 여름 특집물인 ‘정치를 넘어선 정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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