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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병석 경제산책] 조선의 국가개조론 논의

    [정병석 경제산책] 조선의 국가개조론 논의

    영조 13년(1736년) 10월 유수원이라는 관료이자 학자가 저술한 ‘우서’(迂書)라는 국가개조론이 조정에서 논의되었다. 이 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조선의 국력이 극도로 쇠퇴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는 시기에 문벌 중심의 신분제, 관료제, 산업정책 등을 전면적으로 개혁하자는 획기적인 부국안민 제안이었다. 이를 읽어본 영조는 다른 학자들의 저술이 선현들의 책에서 발췌하여 멋진 문구로 표현한 데에 지나지 않으나 이 책은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것을 저술하였으니 참으로 귀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또 “나는 일을 행할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행하여지지 못할까 두려워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말이 아닌 글로 이를 기술하니 실로 나보다 훌륭하고 뛰어난 것이다”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그중에는 오활하여 시행할 수 없는 것이 많다”고도 했다. 조선시대에 많이 쓰였던 ‘우활/오활’(迂闊)이라는 단어는 실정에 맞지 않아 실용의 가치가 없다는 의미이다. ‘迂書’라는 제목도 그런 평가를 예상하여 비판을 피하기 위해 저자 스스로 조심스럽게 붙인 것이리라. 유수원의 주장이 허황된 제안인가? 1730년대에 저술된 그의 정책은 오늘날의 경제학 이론으로 판단해도 매우 획기적인 것이다. 그는 조선 국력쇠퇴의 원인으로 신분제의 문제를 지적하며, 폐쇄적인 신분제의 족쇄를 폐기하고 모든 백성에게 평등한 기초 교육기회를 부여하되 일정한 시험을 치러 그 적성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고 농·공·상의 적합한 직업에 종사하게 하자고 제안한다. 당시 중국은 교역이 활성화되어 개인이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할 수 있어 전문화되고 생산이 급증했음을 지적한다. 조선도 분업과 전문화를 토대로 자기 직업에만 전념하게 해야 시장경제를 활성화하고 국가의 부강, 백성의 생활향상을 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1776년에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밝힌 분업과 전문화, 자유경제활동과 시장경제의 장점 등을 훨씬 앞서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국가개조론이 조선에서 채택되지 못한 것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유수원 본인은 유력한 사대부 가문의 출신이면서 과거에 급제했어도 노론 소론의 당쟁에 피해를 입어 지방수령으로 맴돌다가 자신의 청각 장애가 심화된 상태에서 이 책을 저술한 것이다. 당쟁의 와중에서 소론계인 저자 본인이 역모혐의로 처형되자 저서도 마찬가지의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우서’는 사장되어 존재 자체가 잊혀지고 획기적인 국가개조론은 출판 보급될 기회도 갖지 못한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자. 조선 최고의 경세가의 하나로 꼽히는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1670년에 집필이 완료되고 많은 학자가 거듭 상소를 올려 이를 시행하자고 건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오활하여 시행할 수 없다고 답변한다. 반계수록이 영조의 지시로 경상도 감영에서 목판으로 발간된 것은 100년의 세월이 경과한 후의 일이다. 획기적인 국가개조론이 제안되어도 기득권층이나 정치적 이해가 다른 계층이 출판 자체를 막고 이를 외면한다면 나라 발전을 기할 수 없다. 조선은 국가에서 인쇄 출판을 독점하였다. 또 서적을 유통하는 서점을 설치하자는 건의도 조정에서 여러 차례 논의하고도 사대부들의 반대로 좌절된다. 국가에서 독점 인쇄하는 서적을 무상으로 배급받을 수 있는 관료들은 자유로운 서적 유통을 위한 서점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또 다른 계층과 지식 정보를 나누고 싶은 의사도 없었을 것이다. 조선에서 17세기 이후에 계속 제기된 실학파의 국가개조론 등을 수용하여 신분제를 타파하고 상공업을 활성화하는 등 제도를 쇄신하였다면 조선은 경제력이 배가되어 아시아를 주도하는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최근에 제기되는 국가개조를 위한 논의에서도 과거의 실패를 교훈 삼아 기득권 세력에 휘둘리지 않고 다양한 견해를 포용하며 사회적 합의를 모색해보는 그런 여건이 조성되기를 염원한다.
  • [데스크 시각] 정도전과 어느 총리 후보자/김경운 정책뉴스부장

    [데스크 시각] 정도전과 어느 총리 후보자/김경운 정책뉴스부장

    “삼봉이 생각하는 왕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태조 이성계) “듣는 것이옵니다.” “참는 것이옵고 품는 것이옵니다.”(삼봉 정도전) 요즘 TV 대하사극 ‘정도전’이 인기를 끄는 데에는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명대사도 한몫한다. 곱씹을수록 절묘하고, 또 지금 현실 정치를 빗댄 것 같기도 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정도전이 꿈꿨던 조선은 백성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는 민주적 복지국가였다. 그런 조선의 건국을 민본대업(民本大業)이라고 했다. 권력과 부를 모두 거머쥔 족당들의 수탈 아래서 노비에 가깝던 농민들은 조선에 이르러 비로소 제 땅을 갈고 천하의 근본으로 대접받았다. 출산한 관비의 남편도 육아휴직을 보장받은 곳이 조선이다. 당시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시대를 앞선 이상국가, 이상향이 아닐 수 없다. 느릿느릿 쟁기질을 하고, 아무 때나 흥얼거리는 구한말 농부의 모습이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에게는 게으른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어린 아이들마저 공장에 나와 값싼 노동력을 보태야 했던 산업혁명기의 본국과 비교하면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동양의 낯선 나라에 점차 애정을 느꼈고 돌아갈 땐 아쉬움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런데 요새 입에 오르내리는 국무총리 후보자는 정도전의 앞선 조선을, 비숍 여사의 다정한 조선을 애써 폄하하는 데 열을 올렸던 모양이다. 구한말에 우왕좌왕하다가 일제강점을 맞은 사실이 분하고 뼈아픈 교훈을 되새기자는 의미에서, 낯익은 교인들에게 한 것이라고 해도 이해되지 않는 뭐가 있다. 일관된 논리로 우리 역사에 대해 자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조선을 헐뜯고 싶었던 세력은 아마 일본의 국가주의자들이었을 것이다. 일본은 16~17세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시대를 열면서 조선과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즉 수도를 신도시 도쿄로 옮긴 뒤 군사정권의 특성대로 산업과 상업을 중시하며 국력 양성에 매진한다. 이 과정에선 민본 등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일본이 제국주의로 치달을 때도 여유를 부리던 조선은 기계문명 중심인 근대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만다. 당시 일본은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게으른 나라를 산업화로 구제한 것이라는 식민사관을 필요로 했다. 여기에는 어느 한 시기에 개방화, 산업화, 군사화 등이 뒤처졌다고 조선의 가치를 통째로 무시하는 태도가 담겼다. 총리 후보자가 말하는 ‘게으르고 남(일본)한테 신세나 지는 우리 민족의 DNA’에도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구석이 엿보인다. 역사시대 이래 세계 문명의 흔적은 거의 예외 없이 반도에서 열도로 넘어갔다. 이는 반도인들의 DNA가 더 우수해서가 아니고, 열도인들의 그것이 열성이어서도 아니다. 신문명이 세계 대륙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흘러드는 과정일 것이다. 하물며 근세기에 얼마간 열도의 기술력이 반도를 앞질렀을 뿐인데, 이를 두고 DNA까지 운운하는 것은 기어코 역사인식을 의심받을 만하다. 더욱이 할 말이 없는 게 ‘일본군 위안부 배상 요구는 떼쓰기’라는 말이 피해 할머니들을 울렸고, ‘욕망의 땅 세종시’가 충청인들을 뿔 나게 했으며 끝내 ‘표현을 잘하지 못해서’라는 해명은 표현도 직업 기술인 후배 기자들을 속 터지게 했다. 정승감으로서 민심을 되돌리기엔 너무 늦은 것 같다. 김경운 정책뉴스부장 kkwoon@seoul.co.kr
  • 독도 관련 日의 100대 거짓·왜곡 주장 낱낱이 반박

    독도 관련 日의 100대 거짓·왜곡 주장 낱낱이 반박

    경북도는 독도와 관련한 일본 주장의 허구성과 억지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한 ‘다케시마(竹島·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명칭) 문제 100문 100답에 대한 비판’을 발간했다고 16일 밝혔다. 이는 일본 시마네현이 지난 2월 ‘다케시마의 날’에 맞춰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담은 ‘다케시마 문제 100문 100답’을 펴낸 데 대한 대응 조치다. 총 380쪽인 이 책은 시마네현이 발간한 책을 번역 소개하며 여전히 모순되고 자국에만 유리한 자료를 선별해 교묘하게 논리를 왜곡하는 것에 대해 역사적·국제법적으로 분명히 독도가 한국 땅임을 규명하고 있다. 예컨대 일본이 17세기에 다케시마 영유권을 확립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에도(江戶) 막부가 1696년 1월 ‘죽도(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독도가 조선령으로 결말이 난 사항이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메이지(明治) 정부가 1877년 태정관 지령을 통해 독도가 한국령임을 다시 한번 인정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러·일 전쟁 중이던 일본이 군사적 요충지로 이용하려고 독도를 1905년 시마네현에 편입한 것은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불법이어서 1905년 이후 시마네현이 취한 모든 행정적 조치는 불법이며 무효라고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책은 관계 기관에 무료 배포하고 있으며 원본 파일을 경북도 사이버 독도 홈페이지(www.dokdo.go.kr) 자료실에 게시했다. 경북도 독도사료연구회 김병렬(국방대 교수) 회장은 “시마네현 다케시마문제연구회가 발간한 다케시마 홍보 책자를 그대로 방관하면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 사람까지도 ‘100문 100답’에서 기술한 내용을 사실로 여길 소지가 있다고 판단해 그 책의 주장을 1대1로 반박, 우리 국민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정리했다”고 밝혔다. 이어 “책자를 통해 일본의 논리가 허구임을 밝히고 우리 국민과 전 세계에 독도가 한국 땅임을 체계적으로 홍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구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무려 1072억…세계서 가장 비싼 ‘블루다이아’ 발견

    무려 1072억…세계서 가장 비싼 ‘블루다이아’ 발견

    추정가격이 1000억이 넘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블루 다이아몬드’가 발견돼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영국 BBC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광산지대에서 122.5 캐럿의 희귀 블루 다이아몬드가 발견됐다고 1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해당 다이아를 채굴한 주인공은 세계적 광산 회사인 ‘페트라 다이아몬드’로 다이아가 발견된 곳은 남아공 프리토리아 인근 컬리넌 광산이다. 참고로 컬리넌 광산은 지난 2008년 페트라 다이아몬드에 인수돼 관리되어온 곳이다. 컬리넌 광산은 전 세계적으로도 특히 다이아몬드가 많이 채굴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작년 4월에는 25.5 캐럿 블루 다이아가, 올해 1월에는 29.6 캐럿 블루 다이아가 컬리넌 광산에서 발견된 바 있으며 경매에 오른 다이아 중 가장 고가격에 거래된 것은 2010년 363억에 낙찰된 화이트 다이아몬드다. 역사적으로 해당 광산에서 발견된 다이아 원석 중 가장 큰 것은 1905년에 채굴된 3,106 캐럿 원석이지만 이는 판매가 되지 않고 영국 왕관 장식용으로 쓰였다. 이번에 발견된 해당 블루 다이아는 무려 122.5 캐럿으로 특히 파란색은 무수한 다이아 결정 중에서도 극히 발견되기 어렵기에 그 가치는 어마어마할 것으로 추정되며 이전 다이아몬드 경매 기록을 가볍게 경신할 것으로 예상된다. 딸기 정도의 크기에 무게 25g인 해당 다이아의 추정 가격은 현재 1072억 원이다. 이 블루 다이아몬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는 페트라 다이아몬드 산하의 비밀 장소에서 철저한 감시 하에 보관되고 있으며 곧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릴 보석 경매에서 판매 될 예정이다. 한편, 블루 다이아몬드는 희귀한 보석인만큼 여러가지 전설도 많이 품고 있다. 그중 특히 유명한 것은 일명 ‘블루 다이아의 저주’로 유명해진 루이14세의 보석으로, 해당 이야기가 처음 시작된 것은 17세기 프랑스다. 당시 유명 보석상인 타베르니에로는 67캐럿의 블루 다이아몬드를 태양왕 루이14세에게 바쳤는데 이후 루이14세가 천연두로 사망하고 그의 후손인 루이 16세와 부인 마리 앙뜨와네트가 프랑스 혁명때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자 그 악명은 하늘을 찔렀다. 이후 이 블루 다이아몬드는 수세기를 넘나들며 소유자들을 차례로 몰락시켜 저주받은 보석으로 불리는데 여기에는 해당 보석의 가치를 높이기위해 보석상들이 지어낸 헛소문이 대부분이라는 비판적 시선도 존재한다. 이 블루다이아몬드는 1958년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기증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사진=Petra diamonds 조우상 기자 wscho@seoul.co.kr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경제학자의 영광과 패배(히가시타니 사토시 지음, 신현호 옮김, 부키 펴냄) 20세기의 운명을 바꾼 현대 경제학자 14명의 삶과 이론을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존 M 케인스를 중심으로 전개했다. 케인스 경제학을 받아들인 미국의 케인스주의자들과 케인스에 반발한 경제학자들로 나누어 독창적 주장과 이론을 소개한다. 하버드대 재학 중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교수로부터 받은 차별을 멋지게 극복한 폴 새뮤얼슨, 학생 시절 겪은 대공황의 충격을 계기로 빈곤 문제를 파헤치고 새로운 사회주의론을 펼친 존 갤브레이스, 무명의 학자로 살다가 금융위기 예측으로 극적으로 부활한 하이먼 민스키, 케인스 경제학의 허점을 날카롭게 비판한 밀턴 프리드먼, 아버지의 실명과 아내의 자살 등 연이은 불행을 새로운 경제학 연구로 확장한 게리 베커 등을 소개한다. 경제 사상과 이론의 발전 과정, 천재적 경제학자들의 눈부신 활약과 실수 속에 전개된 20세기 경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416쪽. 1만 6000원. 미학사3(타타르키비츠 지음, 손효주 옮김, 미술문화 펴냄) 폴란드 출신 미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인 브와디스와프 타타르키비츠(1886~1980)가 남긴 미학 분야의 명저 ‘미학사’ 중 마지막 권. 고대와 중세 미학을 각각 다룬 1권과 2권에 이어 15~17세기 근대 미학의 역사를 다뤘다. 총 9부로 구성돼 이 시기 유럽 미학에서 의미 있는 사건과 주요 인물, 특징을 정리했다. 책은 시, 시학, 음악, 건축, 회화 등 예술 장르 대부분을 아우르면서 근대 미학의 태동기로서의 15~17세기에 집중한다. 저자는 미학이 하나의 학문 분과로 자리잡는 데 이 시기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강조한다.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를 시작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로보르텔로, 스칼리체르, 뒤러, 몽테뉴, 카라바조, 루벤스, 코르네유 등 당대 예술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역사적 의미와 이론 등을 풍부한 원문 자료를 바탕으로 서술한다. 근대 미학을 이끈 주요 인물들의 희귀한 초상화를 각 장에 삽입했고, 역사적으로 사료 가치가 증명된 희귀 도판들도 고증 자료로 제시했다. 904쪽. 3만 8000원. 한반도 나비도감(백문기·신유항 지음, 자연과생태 펴냄) 한반도에 기록된 나비 전종(280종)을 분류학적으로 정리했다. 우리나라 나비 연구의 시초가 된 석주명 박사의 ‘한반도 나비’(1939년) 이래의 한반도 나비 연구사를 집대성한 책이다. 오랜 세월 한반도 나비 연구에 대한 종합적 분류작업이 없었던 탓에 잘못된 정보를 반복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수정하기 위해 우리나라 곤충 연구사의 산증인인 80대의 신유항 박사와 열정 어린 40대의 중반의 곤충연구자 백문기 박사가 합심해 공동작업에 들어갔다. 6년에 걸쳐 참고 문헌 400여종을 꼼꼼히 살펴 한반도 나비의 분류학적 소속을 명확히 하고 옛 지명을 현재에 맞게 정리했으며 같은 종의 다른 이름도 추리고, 북한명도 밝혀내 기입했다. 수리팔랑나비, 모시나비, 호랑나비 등 무리별로 우리나라 이름의 유래와 분포, 출현 시기, 먹이식물 등을 정리한 그림 검색표를 수록해 찾기 쉽도록 했다. 생태 및 표본 사진 3200여 컷을 수록했으며 한반도 나비의 먹이식물도 정리했다. 600쪽. 5만 5000원. 왜 나는 법을 공부하는가(조국 지음, 류재운 정리, 다산북스 펴냄) ‘강남 좌파’의 간판 스타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펼쳐 보인 자화상. 화려한 스펙, 잘생긴 외모로 소위 ‘엄친아’로 알려진 그가 어떻게 만 16세에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고, 만 26세에 교수가 되고, 그리고 대표 진보 지식인으로 살게 됐는지 솔직하게 풀어 놓는다. 조 교수는 주말을 제외하고는 시간 대부분을 7평 연구실에서 공부하며 보낸다. 책 제목은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라는 화두 아래 끊임없이 공부하는 그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공부란 자신을 아는 길이며, 자신의 꿈과 갈등을 직시하는 주체적인 인간이 세상과 만나는 문이다. 좋은 대학, 직장에 전전긍긍하며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한국 청년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드러난다. 류재운 작가가 조 교수를 인터뷰한 내용을 조 교수가 다시 집필했다. 260쪽. 1만 5000원.
  • “임진왜란은 성전” 화려한 그림 속 추악한 제국주의

    “임진왜란은 성전” 화려한 그림 속 추악한 제국주의

    그림이 된 임진왜란/김시덕 지음/학고재/360쪽/1만 7000원1592년(선조 25년)부터 7년간의 임진왜란을 우리는 ‘임진년에 왜구가 일으킨 난리’라고 간단히 이해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동북아 질서를 뒤흔든 근세 최대 규모의 국제전으로, 이후 이 지역에서 전개된 제국주의 국가 간 충돌을 예고하는 전쟁이기도 했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나라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의 기록을 남겼다. 신간 ‘그림이 된 임진왜란’은 전쟁을 일으킨 자들의 입장에서 삽화로 담아낸 7년 전쟁의 기록이다. 고문헌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하는 김시덕(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 박사가 썼다. 앞서 ‘그들이 본 임진왜란’(2012년·학고재)에서 일본 근세의 외전과 그들의 관점을 분석했던 저자는 이번 책에서 고문헌에 삽입된 17~19세기 일본의 목판화와 채색화 300여점을 통해 근세 일본인들의 관점에서 본 임진왜란을 소개한다. 17세기 후기~18세기 초 ‘조선정벌기’와 ‘에이리 다이코기’, 18세기 후기의 ‘에혼 무용 다기코기’, 19세기 전기의 ‘에혼 조선군기’와 ‘에혼 다이코기’, 19세기 중기의 ‘에혼 조선정벌기’ 등 7개 문헌에 수록된 삽화를 주로 담았다. 임진왜란이 다양한 형태로 이야기되고 문헌으로 정착한 것은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수립한 에도막부 때였다. 당시 출판인들은 상품으로서의 서적에 대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목적으로 임진왜란을 적극 활용했다. 목판 인쇄술의 발달로 다양한 계급의 독자층을 확보하게 되면서 문자해독률이 높지 않은 중하급 무사 및 상인·농민들을 겨냥해 되도록 많은 삽화를 실었다. 우키요에(浮世繪)의 발달도 이런 경향에 일조했다. 결과적으로 에도시대 집필된 임진왜란 문헌군에는 삽화가 많이 포함돼 있지만 삽화의 형태로 실린 그림 자료는 사료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방치돼 왔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들 그림자료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그 자체의 실상을 밝히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몰라도 일본인들이 조선과 대외 전쟁을 어떻게 파악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훌륭한 자료들”이라며 “그림 자료에 보이는 일본인들의 인식은 근대 이후 제국주의 일본의 인식과 상통한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실제로 이들 목판 출판물에 수록된 삽화들은 17~19세기 일본인들이 임진왜란과 바깥 세계에 대해 갖고 있던 정보와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에혼 무용 다이코기’에는 히데요시가 원리주의 불교 종파인 일연종 신도였던 가토 기요마사에게 나무묘법연화경 깃발을 하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중·근세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을 불교와 신토(神道)를 함께 믿는 일본의 위엄을 해외에 빛내는 ‘성전’(聖戰)으로 인식하기도 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그런가 하면 ‘에혼 조선정벌기’에는 ‘조선왕 이연(선조)이 여색에 빠져 국정을 망치다’라는 제목의 기이한 삽화가 들어 있다. 전쟁 전 조선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명나라가 구원해 준 덕분에 간신히 살아났다는 명나라의 ‘양조평양록’ 사관을 답습한 것으로 17세기 전기 이후 제작된 일본의 많은 문헌에서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증거다. 히데요시가 선봉장으로 세운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무용담은 임진왜란 문헌에 반드시 등장하고 삽화로도 즐겨 그려졌다. 문헌에는 이들의 이야기를 과장되게 해석한 부분이 많이 눈에 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뒤를 따라 서둘러 북진하던 가토 기요마사가 고니시의 부하들이 조선의 부녀자를 겁탈하는 모습을 보고 화내며 조선인을 보호해 주자 구출된 부녀자의 가족이 가토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앞다투어 가토군에 투항해 일본식으로 머리를 깎고 일본식 이름을 받았다는 주장까지 펼친다. 단편적인 정보와 상상력에 의존해 목판화를 제작한 삽화가들은 한국인지 중국인지 구분하지 않고 대충 이국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 집의 실내 장식이 중국풍으로 묘사되고 중국풍 헤어스타일에 중국풍 옷을 입은 조선 여인이 등장하기 일쑤다. 심지어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에 명나라 군대를 알리는 깃발이 휘날리기도 한다. 에도시대 일본에서 제작된 임진왜란 문헌들에는 전쟁 당시 활약상을 보인 조선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적지 않게 실려 있다. 일본인들이 남긴 임진왜란 문헌이 류성룡의 ‘징비록’을 적극 인용한 결과다. 진주 목사 김시민과 함경도에 진입한 가토 기요마사를 저지하려다 패한 거인 장군 한극함이 등장하고 특히 이순신은 불패의 장군이자 모함을 받았다가 복귀한 영웅신화의 주인공으로 그리고 있다. 저자는 “근세 일본인의 관점에서 그려졌기 때문에 한국인들에게는 낯설고 불편하지만 그 어색한 느낌은 전근대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역사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하는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농촌진흥청과 함께하는 식품보감] 감자

    [농촌진흥청과 함께하는 식품보감] 감자

    감자는 세계적으로 벼, 밀, 옥수수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이 재배된다. 아메리카나 유럽에서는 주식으로 이용된다. 2012년 기준으로 연간 재배면적은 약 1800만ha에 생산량은 3억 3000만t에 이른다.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에서는 감자가 식량뿐 아니라 돈이 되는 환금작물이어서 더 가치가 높다. 우리나라에는 1824년 북간도를 통해 처음 도입됐다. 감자는 대부분 삶거나 쪄서 먹고 있다. 국산 감자를 가공용으로 이용하는 것은 감자칩, 감자떡, 감자탕용 등에 불과하다. 전분, 프렌치프라이, 군감자용 등은 대부분 수입해서 먹고 있다. 감자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 페루와 볼리비아 경계에 있는 티티카카호 근처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기원전 400년경 감자를 재배한 흔적이 남아 있다. 페루인들은 감자를 ‘빠빠’(Papa)라고 부르는데, 어머니신(Pachamama)으로부터 유래된 ‘감자여신’(Papamama)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다산숭배에 대한 의식과 식량으로서 감자의 중요성을 담고 있는 셈이다. 남미를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이 유럽으로 감자를 처음 도입한 것은 1570년경이다. 미국에는 영국과 버뮤다를 거쳐 17세기 초에 도입됐다. 유럽인들은 감자를 처음 보았을 때 성경에 나오지 않는 작물이라는 이유로 악마의 선물, 만병의 원인이라고 여기고 사료나 죄수의 식사로만 사용했다. 하지만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척박한 독일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에 주목했다. 감자를 강제로 심게 해 기근을 극복하고 독일 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 프랑스의 파르망티에는 프러시아에서 포로생활 중에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루이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를 설득해 프랑스에서 감자를 대중화시켰다. 괴테는 감자를 “신이 내린 가장 위대한 축복”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감자는 유럽에서 동양으로 전파됐다. 조선말 실학자인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24년이다. 북간도를 통해 개마고원으로 산삼을 캐러 다니던 청나라 사람들에 의해서 들어왔다는 것이다. 또 1832년 영국 상선 로드암허스트호에 의해 충청도 해안으로 전래됐다는 설도 있어 감자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 감자는 즉시 식량작물이 된 것으로 보인다. 조정에서 쌀을 세금으로 받았기 때문에 감자 재배를 그다지 장려하지 않았음에도 1879년에 강원도와 한성부에서 널리 퍼질 정도였다. 감자는 지구상의 대부분 지역에서 잘 자란다. 특히 재배 중 필요로 하는 물이 벼농사의 37% 수준이어서 물이 부족한 준사막지대, 고산지대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 알래스카, 그린란드와 같이 추운 곳이나 아프리카의 우간다, 케냐, 에티오피아 등 열대지방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 또 1㏊당 벼 4.7t, 보리 2.4t, 옥수수 9t을 생산할 수 있는데 비해 개발도상국에서도 감자는 10~15t을 생산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당 평균 25t을 생산한다. 감자는 재배기간도 짧다. 벼가 5개월, 콩·옥수수·고구마 등이 4개월인데 비해 감자는 3개월 정도면 수확할 수 있다. 밭이 빌 때 다른 작물들도 재배할 수 있다는 의미다. 게다가 감자는 땅에서 캐서 별다른 가공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다는 게 밀이나 옥수수와는 다른 장점이다. 감자는 다양한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있는 거의 완전한 식품이다. 거의 모든 필수 아미노산을 함유하고 있다. 특히 감자에 들어있는 비타민 B1은 쌀의 2∼3배, 비타민 B2와 B3는 쌀의 3배에 이른다. 또 비타민 C는 사과의 6배를 함유하고 있다. 채소류의 비타민 C 함량도 높긴 하지만 열로 가공하면 대부분이 파괴된다. 반면 감자의 비타민 C는 가열을 해도 전분입자들이 막을 형성해 손실이 많지 않다. 감자에 특히 많이 들어있는 성분이 칼륨(K)이다. 중간 크기의 감자 1개를 껍질째 먹을 경우 720mg을 섭취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칼륨함유식품인 바나나(400mg)보다 많은 양이다. 칼륨은 고혈압 개선에 효과가 있다. 감자의 이런 영양적 특성에 주목해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는 우주선 내에서 자체적으로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BLSS(Bio-regenerative Life Support System)를 개발하고 있다. 이미 1988년 수경재배를 이용한 우주 식량으로서 감자의 가능성을 시험한 적도 있다. 예전에는 속이 희거나 담황색인 감자가 대부분이었지만, 최근에는 붉은색, 자주색, 줄무늬 등도 개발됐다. 자주색이나 붉은색을 나타내는 성분은 항산화 기능성 물질로 잘 알려진 안토시아닌이다. 컬러감자는 항암작용을 하고 통풍을 개선하는 데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겉은 담황색이고 속은 흰색인 감자가 인기 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나 중국에서는 노랑색을 황제의 색으로 숭상하는 문화가 있어서 속이 노란색일수록 인기가 있다. 속이 노란 감자의 색소 구성성분은 카로티노이드다. 감자의 카로티노이드 중에는 루테인, 제아잔틴 등 망막의 구성성분으로 시력 감퇴나 실명의 위험을 낮추는 성분이 들어있다. 특히, 루테인은 동물 실험에서 단시간 내에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효과를 보였다. 농촌진흥청 고령지농업연구센터 이학박사 조지홍 문의 kdlrudwn@seoul.co.kr
  • [열린세상] 누가 변화를 두려워하랴만/이옥순 인도연구원장·연세대 연구교수

    [열린세상] 누가 변화를 두려워하랴만/이옥순 인도연구원장·연세대 연구교수

    며칠 전 투표를 끝내고 최근에 문을 연 서울시내 복판의 음식점을 찾아갔다. 만화주인공들이 실존을 증명하며 한 줌의 과거와 맛을 선사해주는 그곳은 사라진 피맛골에 ‘재개발된’ 최신식 빌딩에 있다. 과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으나 아직 시간의 두께가 얇은 공간에서 꿈과 현실을 이어주는 만화를 추억하고 오가는 사람들을 내다보며 밥을 먹는 기분은 새삼스러웠다. 간 김에 빌딩숲으로 탈바꿈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한때 부유한 상인들이 살았고, 땔나무를 팔러 온 나무꾼들의 해장국으로 유명해진 동네의 자취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400년 전 시간의 흔적이 마루와 옹기의 부스러기와 몇 점의 주춧돌로 남아 유리덮개를 덮고 박제돼 있었다. 높은 빌딩 사이의 흙바닥에 누운 사라진 것과 남은 것의 동거는 기이하면서도 낯설었다. ‘완전히’ 현대적 도시인 21세기 서울에서 16~17세기 흔적을 그렇게나마 일별하는 것은 다행일지도 모른다. 이제 과거는 박물관과 그 비슷한 곳이나 기록으로만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것이 변했으니 말이다. 새롭고 모던한 것이 최선이 아니듯 낡고 오래된 것이 최악이 아닌데도 시간과 경쟁을 벌인 서울에선 어느덧 100년 전 것은커녕 50년 전 대세도 구경하기 힘들어졌다. 이즈음에 서울을 찾은 이방인은 우리의 역동성과 진취적 분위기에 압도된다고 말한다. 그건 변화가 빠르다는 말의 긍정적 표현이다. 전진과 발전의 구호가 일상에서도 마취제처럼 위력을 발휘한 한국에서 낙후한 것, 세련되지 않은 것은 새것으로 대체돼야 했다. 마치 주술사가 악을 쫓아내듯 그것을 버려야만 발전한 사회와 대등해지거나 그들을 이길 수 있다는 관점이 그 언저리에 숨어 있다. 덕분에 서울은 언제나 새로운 수도, 한국은 늘 변화무쌍한 나라다. 그러나 변화가 전부인가. 시내 한복판을 걸으며 떠올린 이런 질문의 끝에 인도가 서 있다. 변화의 무풍지대, 그래서 후진국으로 비판받는 인도의 수도 델리는 서울과 다른 모습이다. 특히 과거의 흔적이 박물관이 아니라 일상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점이 그렇다. 고대 황허 문명의 흔적을 북경에서 볼 수 없고, 이집트의 고대 문명이 남아 있지 않으나 델리의 거리에서는 지금도 5000년 전 인더스 문명의 편린과 조우할 수 있다. 물론 400년 전의 세상도 볼 수 있다. 무굴 제국의 중심지엔 17세기에 문을 연 가게들이 성업 중이다. 단 1시간 만에 1000명분의 군복을 만들 정도로 규모가 컸던 무굴의 중앙시장 찬드니초크는 지금도 아시아 최대의 도매시장으로 기능한다. 200년이 훨씬 넘은 맛집도 많다. 호밀로 만드는 종이처럼 얇은 빵 파라타는 300년을 거치면서 맛과 기술이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수백년의 시간을 고봉으로 얹어주는 제과점도 있다. 무굴 황제가 모스크에 갈 때 탄 코끼리가 맛에 이끌려 발을 멈추던 곳으로 유명해진 제과점은 지금도 그때와 같은 재료와 방식으로 각종 단것을 만들어 고객의 입맛에 봉사한다. 무굴 황실과 귀족이 주요 고객이던 보석상들도 사리를 입은 오늘의 여인들을 상대로 수백년째 가업을 잇고 있다. 전쟁이 일상처럼 이어진 수도는 18~19세기 흔적과 20세기 전반의 파편도 드러낸다. 새삼 오래된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최고의 수입품만 팔던 찬드니초크는 오늘날 델리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꼽힌다. 그렇다고 골목이 좁고 꼬불꼬불한 시장을 번듯한 쇼핑몰로 다 바꿔야 할까. 그렇게 되면 그곳은 자아, 즉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실타래에서 외제 자동차 부품, 양말장수에서 IT엔지니어에 이르는 온갖 상품과 모든 사람이 모이는 그곳의 존재가치는 시간의 긴 누적과 더딘 변화에 있기 때문이다. 요즘도 우리는 변하지 않으면 낙오된다는 압박을 받으며 살아간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갈 길이 먼 인도는 변화에 대한 압박이 상대적으로 적다. 아니다. 인도 사회는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고, 강산이 바뀔 정도로 변했으나 중요한 것이나 본질적인 것이 더디게 변하는 곳이다. 그래서 인도는 ‘인도답다’, 즉 뿌리가 있다. 그러나 모든 걸 보기 좋게 바꾼 서울은 그저 세계적인 대도시답다. 옛것이 다 좋은 건 아니나 안방을 새로운 것으로 채우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상)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상)

    ●조선시대 도성 축조에 얽힌 두 가지 설화 1392년 조선 건국과 함께 도읍을 송악(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긴 태조 이성계는 “종묘는 조종(祖宗)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요, 궁궐은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정령(政令)을 내는 것이며, 성곽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는 것으로, 이 세 가지는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다”라면서 종묘와 경복궁, 도성(都城)의 축조를 독려했다. 종묘·사직과 경복궁이 완성되자 한양의 얼개인 도성을 짓는 축조도감을 1395년 설치했다. 삼봉 정도전이 성 쌓을 자리를 정했는데 태조가 직접 둘러보았다. 여기에서 두 가지 흥미로운 스토리가 등장한다. 첫 번째는 서울이라는 지명의 유래이고, 두 번째는 성리학과 풍수학의 정면 대결이다. 서울이라는 지명의 탄생과 관련된 속설을 조선 후기 방랑 실학자 청화산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소개하고 있다. “성을 쌓으려고 했으나 둘레의 원근을 결정하지 못하던 중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바깥쪽은 눈이 쌓이는데 안쪽은 곧 눈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태조가 이상하게 여겨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성 모양이다”라는 기록이다. 나중에 눈이 녹은 지역이 도성 안이 됐다. 눈(雪)이 쌓여 생긴 울(울타리)이라고 하여 도성 안쪽을 ‘설울’이라고 불렀으며 그것이 ‘서울’로 전이됐다는 얘기다. 수도(首都)를 나타내는 유일한 순우리말 지명인 서울의 유래는 처용가의 첫 구절 ‘새벌’이 서라벌을 거쳐 서울로 변했다는 양주동의 풀이가 정설로 돼 있다. 새벌이 서울의 옛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우용은 삼한시대의 성스러운 곳 소도(蘇塗)의 ‘소’가 새벌의 ‘새’와 같으므로 서울은 ‘솟벌’이나 ‘솟울’에서 온 것으로 보았다. ‘솟은 벌’이나 ‘솟은 울’이 ‘신의 땅’이나 ‘신의 울’이며 한자로 번역하면 신시(神市)라는 주장이다. 김정호가 그린 서울 지도 ‘수선전도’에서 보듯 서울을 ‘으뜸가는 선’인 수선(首善)으로 표기한 것과 같은 이치라는 풀이다. 입으로만 전해진 서울이란 지명은 1896년 4월 7일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 창간호에서 처음 공식 표기됐다. 독립신문 한글판의 제호 아래 ‘조선 서울’이라고 표기하고 있고, 영문판에서는 ‘SEOUL KOREA’라고 발행지를 인쇄했다. 서울이 ‘서울특별시’가 된 유래는 희극적이다. 해방 후에도 서울은 여전히 경기도 경성부였다. 미 군정청은 1946년 ‘서울은 경기도 관할에서 독립, 자유독립시가 된다’라고 발표했다. 영어 원문에는 ‘Seoul established Independent City’(서울독립시의 설치)라고 기록됐다. 하지만 법령 번역을 맡은 군정청 한국인 직원이 서울독립시는 한국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고민 끝에 ‘서울특별시’라고 고쳐 표기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또 한 가지는 정도전과 무학대사로 대표되는 유교와 불교의 한판 대결이다. 두 사람은 경복궁 명당이 앉을 자리를 정해 줄 주산(主山)을 백악(북악)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인왕산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차천로는 ‘오산설림’에서 “무학은 ‘인왕산을 진산(주산)으로 삼고, 백악과 목멱산(남산)을 청룡과 백호로 삼으시오’라고 하였으나 정도전이 수용하지 않자 ‘내 말을 듣지 않으면 200년이 지나서 내 말을 생각할 것’이라 하였다”는 설화를 전했다. 무학의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200년 후라는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뜻한다. 태조가 정도전의 손을 들어 주면서 주산은 백악으로 결정됐다. 무학은 굴하지 않고 도성을 쌓을 때 인왕산 선바위를 도성 안에 포함할 것을 제안했다. 선바위를 왕성 안에 집어넣어 불교의 중흥을 꾀하려는 몸부림이었으나 또다시 삼봉에 의해 바깥으로 밀려났다. 2전 2패를 당한 무학은 “불교가 망할 것”이라고 개탄했다. 얄궂은 운명인지 스님의 형상을 닮은 선바위 옆에는 일제강점기 남산에 조선 신궁을 짓느라 쫓겨난 국사당이 자리했다. 불교와 무속신앙이 500년이 지나고 나서 한자리에서 해후한 셈이다. 조선 개국의 설계자 정도전이 한양도성 건설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종묘와 사직 그리고 궁궐은 물론 관아와 시장의 터를 잡았고 도성 성곽의 윤곽도 결정했다. 서울을 5부(동·서·남·북·중부), 52개 방으로 나누고 경복궁을 비롯해 궁궐 전각의 명칭을 정하는 일도 모두 그의 생각대로 였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서울을 건설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유교 국가의 출범을 알리는 북소리였다. 신라 천 년과 고려 오백 년을 풍미한 불교와 풍수도참설은 시대의 도도한 흐름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양도성’ 명명 4년… 안내판에 ‘서울성곽’ 한양도성이란 무엇인가. 한양도성은 조선시대 한성부, 한성, 한양, 서울을 나타내는 표상이었다. 한양도성이 곧 조선이었다. 더불어 수도, 수선, 도읍, 도성, 왕성, 황성, 궁성, 경조(京兆), 경도, 장안, 사대문 안의 통칭이기도 하다. 서울을 나타내는 모든 용어 중 가장 대표적이고 권위 있는 명칭이었다. 한양은 세계에서 가장 큰 수도 중 하나였다. 17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가 10만명, 영국 런던이 15만명이었을 때 한양 인구는 20만명에 육박했다. 규모로 보아도 현존하는 세계 수도의 성곽 중 서울을 둘러싼 성곽이 가장 크다. 그런데 현실은 딴판이다. 우리는 ‘한양도성=서울을 에워싼 18.672㎞의 성곽’이라고 범위를 좁혀 해석하고 있다. 내용물은 다 빼고 도성을 둘러싼 성곽만 내세우는 축소지향의 우를 범하고 있다. 한양도성은 조선 500년 내내 성곽으로 둘러싸인 한성부 전체를 지칭하는 당당한 국가권력의 표상이었다. 도성 밖 10리를 나타내는 성저십리(城底十里)와 구별하려는 의도에서 쓰인 사대문 안과 같은 권역을 나타내지만, 의미는 훨씬 공식적이고 권위적이었다. 성곽은 유일무이의 대도시인 한양도성 안을 관리, 운영할 목적에서 세워진 상징 벽이었다. 8개의 크고 작은 문인 흥인지문~광희문~숭례문~소의문(서소문)~돈의문~창의문(자하문)~숙정문~혜화문은 한양도성의 관문이었다. 상경(上京)과 낙향(落鄕)이 구분되는 시대의 경계선이었다. 궁궐을 에워싼 백악~낙타산(낙산)~목멱산~인왕산 등 내사산(內四山)을 잇는 도성은 외적 방어용이 아니라 왕권과 통치의 상징이었다. 외적의 침입과 방비, 농성을 위해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탕춘대성 등 산성을 따로 외곽에 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양도성과 서울성곽은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 서울성곽이라는 용어를 쓰려면 ‘서울성곽=조선시대의 옛 서울인 한양도성을 둘러싼 성곽’이라고 분명하게 정의해야 한다. 개발연대 몰지각한 권력자와 도시행정가들이 한양도성에서 성곽만 따로 떼 ‘서울성곽’이라고 멋대로 이름 붙인 것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 도성 안 문화재와 유물은 마구잡이로 깔아뭉개면서 일제가 조선 정체성 지우기의 하나로 헐어버린 성곽은 잇는다는 앞뒤 맞지 않은 복원계획이 화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구자춘 서울시장이 1975년 ‘서울성곽 중장기 종합정비계획’을 세웠고, ‘서울성곽복원위원회’가 구성되면서 한양도성이라는 당당한 이름이 복권되지 못하고 서울성곽이라는 중성적 이름으로 둔갑한 것이다. 천박한 역사인식과 자가당착이 빚은 비극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문화재위원회가 2011년 사적 제10호 서울성곽의 명칭을 ‘서울 한양도성’으로 바꿨지만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눈이 어두워 서울성곽을 ‘서울 한양도성 성곽’이라고 분명히 밝히지 않고 서울 한양도성이라고 어정쩡하게 명명하는 과욕을 부려 또 다른 오해와 시비를 불러들였다. 차라리 서울성곽이라고 놔두는 편이 나았다. 우리는 도성을 둘러싼 성곽과 8개의 대·소문이 한 몸이란 사실을 가끔 잊곤 한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국보 1호, 보물 1호인 줄은 알고 있지만, 이들 문이 한양도성의 출입문이라는 점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성곽을 상실한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너무 오랫동안 보아 왔고, 출입이 통제된 숙정문과 차량통행에 방해된다며 철거해 버린 돈의문을 아예 보지 못한 탓이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한양도성은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됐고 정식 등재는 시간문제라고 한다. 송인호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장은 ‘한양도성의 유산가치와 진정성’이라는 논문에서 “서울성곽의 영어표기가 ‘Seoul Fortress’인데 반해 한양도성은 문화유산 등재 때 ‘Seoul City Wall’이라고 표기됐다”면서 “Fortress가 방어 요새로서의 역할만을 제한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City Wall은 역사도시의 도시성곽으로서 의미를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용어의 정의부터 정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한양도성을 둘러싼 전반적인 용어와 개념 정리를 주장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보다 더 시급한 일일 수도 있다. 서울성곽을 한양도성이라고 명칭을 바꾼 지 4년째를 맞지만 성곽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여전히 서울성곽이라고 표기돼 있다. 한 번 머릿속에 박힌 용어나 명칭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식민시기 서울의 조상 산인 삼각산을 북한산이라고 엉뚱하게 이름 붙임으로써 정체성이 훼손된 것처럼 용어의 변질은 의미의 변질을 수반하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한양도성과 서울성곽을 헛갈리고 있다. 묵은 역사인식을 바꾸려면 안내판부터 제때 바꿨어야 했다. 정책을 수립하는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한양도성이라고 하는데 이를 운영하는 자치구는 서울성곽이라고 우기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아픈 식민 역사 간직한 인도양의 진주 스리랑카

    아픈 식민 역사 간직한 인도양의 진주 스리랑카

    탐험가 마르코 폴로는 인도양의 진주 스리랑카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고 극찬했다. 이슬람과 힌두, 기독교 등 다채로운 종교와 문화가 어우러져 1년 내내 축제가 이어지는 곳, 스리랑카. 26~29일 오후 8시 50분에 방송되는 EBS ‘세계테마기행’의 새 여행지다. 26일 1부에서는 남부 최대 항구 도시 갈레가 등장한다. 배들이 지나가는 길목으로 과거, 서구 열강들이 항상 노리던 갈레는 16세기 포르투갈에 점거돼 스리랑카의 주요항구가 됐다. 이후 17세기 네덜란드에 의해 더욱 견고한 요새 도시로 만들어졌다. 서구 열강에 여러 번 소유권을 내주며 아픈 식민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에서 유네스코가 인정한 아름다움을 만끽해 본다. 27일 2부에서는 신에게로 가는 길, 스리파다로 오른다. 다양한 종교의 스리랑카인들에게 오래전부터 ‘신앙 등산’의 대상이 됐던 스리파다 정상에는 거대한 발자국이 있다. 불교도에게는 부처의 불족석, 힌두교도에겐 시바신, 기독교인에게는 아담의 발 흔적 등 각 종교의 성지로 여겨져 왔다. 저마다 소망을 안고 묵묵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사람들과 다양한 신이 어울려 사는 산으로 들어가 본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실론티는 스리랑카의 옛 이름인 ‘실론’에서 유래했다. 스리랑카를 점령하던 영국은 이곳에 차밭을 만들었다. 독립 후에도 스리랑카는 세계 최대의 차 수출국으로 성장했다. 특히 누와라엘리야에서 재배되는 차는 고도가 높아 성장 속도는 느리지만 더 깊고 은은한 맛을 내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29일 4부에서는 ‘실론의 샴페인’이라 불리는 누와라엘리야의 홍차를 느긋하게 음미해 본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청나라 문인이 달아준 비평에… 박제가는 감격했네

    청나라 문인이 달아준 비평에… 박제가는 감격했네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정민 지음/문학동네/720쪽/3만 8000원 지난해 2월 27일 낮 12시 미국 하버드대 옌칭도서관 세미나실에서 한문학자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조촐한 연구발표회를 가졌다. 그가 방문교수로 와서 지난 6개월간 발굴한 ‘하버드 옌칭도서관의 후지쓰카 컬렉션’에 대해서였다. 제임스 청 옌칭도서관장과 사서 등 도서관 관계자들과 한국학, 일본학, 중국학 연구자 등 세미나실에 모인 사람들 중 후지쓰카가 누군인지 아는 이는 없었다. 후지쓰카 지카시(1879~1948)는 훗날 국보 180호가 된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를 소장하다 태평양전쟁 끝 무렵 서예가 소전 손재형에게 아무 대가 없이 넘겨줬다는 일화의 주인공이다. 청(淸)조의 학술과 문예가 어떻게 조선에 전해졌는지, 두 나라의 학자들이 어떻게 교유했는지를 연구하는 데 푹 빠져 평생 엄청난 양의 서적을 중국과 조선에서 수집한 인물이다. 나고야 대학의 전신인 제8고등학교 교수를 거쳐 베이징 파견 연구학자,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그는 특히 추사에 매료돼 18~19세기 한·중 지식인의 교류와 관련된 자료는 고서부터 메모, 그림까지 무엇이든 수중에 넣었다. 1940년 정년을 맞은 그는 수집한 사료들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가 모으거나 베껴 쓴 책들의 일부가 우여곡절을 거쳐 미국 하버드대 옌칭도서관까지 흘러들어 갔다. 60여년간 옌칭도서관 선본실 서가에 잠들어 있던 이 책들은 2012년 8월 방문학자로 옌칭연구소를 찾은 정 교수에 의해 빛을 본 것이다. 이날 발표는 “중국에 대해 연구하다 조선에 빠진 일본인 학자가 소장하고 연구했던 책들이 하버드 옌칭도서관에 오게 된 경위와 그 자료의 가치를 한국인 학자가 미국에서 설명하는 다국적 주제였다”고 정 교수는 요약한다. 신간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은 정 교수가 열정적 자료 탐구와 남다른 지식 생산력으로 시공을 넘나들며 지식의 바다에서 길어 낸 한·중 지식인의 교류사다. 문학동네가 펴내는 ‘우리 시대의 명강의’ 6번째 책으로, 정 교수가 지난해 3~12월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 매주 연재한 글 40편을 모았다. ‘문예공화국’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유럽 각국 인문학자들이 라틴어를 매개로 문화와 언어의 차이를 넘어 서로 소통하던 지적 공동체를 일컫는다. 물리적 국경을 초월한 상상 속의 문예공화국 안에서 글이 오가며 토론하는 가운데 지식인들 사이에 끈끈한 연대가 싹텄고, 이는 실질적인 계몽주의의 토대가 됐다. 18세기 청나라와 조선의 지식인들은 공통 문어(文語)인 한문을 사용해 필담으로 시와 학문을 나누고 우정을 다지며 또 다른 문예공화국을 형성했다. 동심원을 그리듯 점점 깊어지고 넓어진 지식 네트워크의 시초는 북학(北學)의 기틀을 다진 담헌 홍대용(1731~1783)이다. 그는 숙부 홍억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행사(燕行使)가 되어 1765년 베이징에 갔다가 향시를 보러 온 절강의 선비인 엄성, 육비, 반정균 등과 우연히 만나 사귀며 천애지기를 맺는다. 정 교수는 옌칭도서관에서 후지쓰카가 자신의 전용원고지에 베껴 쓴 엄성의 ‘철교전집’과 엄성·육비·반정균의 향시 답안지를 따로 모아 묶은 ‘절강향시주권’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조선과 청조 지식인의 교류사를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홍대용이 막을 열고 박제가가 발전시킨 18세기 한·중 문예공화국은 당시 양국 간 정치적 위계와 무관하게 평등한 지식 네트워크의 모습으로 지속적으로 확장했음을 후지쓰카가 수집한 필사본 ‘한객건연집’ 등 사료들은 증명하고 있다. 1776년 11월 연행길에 오른 유금(柳琴,1741~1788)은 연암 그룹의 문우인 이덕무·박제가·유득공·이서구의 시를 모은 ‘건연집’(巾衍集) 을 가지고 ‘월동황화집’이라는 시집을 쓴 청 조정의 관리 이조원을 찾아가 서문과 비평을 부탁했다. 이조원은 우연히도 홍대용이 오래전 우정을 맺은 반정균과 가까운 사이였다. 이조원·반정균 두 사람은 조선문인 네 사람의 시집에 ‘한객건연집’이라는 제목을 달아주고 각 시에 정성껏 비평을 달아주었다. 청색, 적색 글씨로 우아하고 정중하게 쓰인 비평을 받아든 박제가 등은 감격을 금치 못한다. 상대방의 지적 역량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가운데 만남이 만남을, 우정이 우정을 낳는 과정을 그들의 후학인 정 교수는 방대한 지식과 치밀한 자료 탐색, 감성적인 스토리텔링으로 한 장면씩 되살려낸다. 옌칭도서관을 뒤져 후지쓰카 컬렉션을 하나둘씩 찾아내고,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이라는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해가면서 어떤 때는 “좋아 펄쩍펄쩍 뛰며 연구실을 뱅뱅 돌았다”는 정 교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공자가 논어 첫머리에서 말했던 학문의 즐거움이란 바로 이런 것일 게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섬뜩한 이 영상들이 유명 아티스트 작품이라고?

    섬뜩한 이 영상들이 유명 아티스트 작품이라고?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Bill Viola·63)가 런던에 위치한 세인트 폴 성당에 순교자들이 볼 수 있도록 비디오 작품을 설치했다. 섬뜩함마저 자아내는 그의 작품이 주목받고 있다. 21일 영국 일간 가디언은 세인트 폴 성당에 설치된 빌 비올라의 작품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에는 화염에 휩싸인 채 의자에 앉아 꼼짝달싹 할 수 없는 남성, 한 남성이 거꾸로 매달려 세차게 쏟아지는 물을 맞는 남성. 또 거친 모래바람을 힘겹게 온 몸으로 맞는 남성. 교수형과 유사한 방식으로 손과 발이 묶인 채 매달려 있는 여성 등을 볼 수 있다. 미국의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Bill Viola)가 선보인 4개의 작품은 끔찍한 시련을 겪어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형식을 취했다. 평론가 조나단 존스는 비올라의 작품에 대해 ‘카라바조(1571~1610)’에 비유하며, 그의 작품에는 깊은 울림이 있다고 전했다. 카라바조는 17세기 초 바로크 회화의 서막을 연 이탈리아 회화의 거장으로 불린다. 문성호PD sungho@seoul.co.kr
  • [함혜리 선임기자의 미술관 건축기행] 英 런던 내셔널 갤러리

    [함혜리 선임기자의 미술관 건축기행] 英 런던 내셔널 갤러리

    런던 트라팔가 광장은 젊은이들과 관광객들로 언제나 북적인다. 1805년 스페인 남쪽 트라팔가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나폴레옹이 지휘하던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격파한 넬슨 제독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이 광장에는 높이 50m나 되는 기둥 위에 세워진 넬슨제독의 동상, 수많은 비둘기들이 모여드는 아름다운 분수가 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 명실상부한 런던 최고의 미술관인 내셔널 갤러리가 자리 잡고 있다. 트라팔가 광장의 넘치는 생동감은 미술관으로 들어가서도 이어진다. 미술관 하면 떠오르는 고상하고 딱딱한 분위기는 이곳에서 찾아볼 수 없다. 관람객들은 전시장 가운데 놓인 편한 소파에 앉아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휴식을 취한다. 어떤 이는 미술관에 비치된 이동식 의자를 좋아하는 거장의 그림 앞에 가져다 놓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감상하기도 한다. 손주에게 그림을 설명해 주는 할머니, 지팡이 짚은 할아버지 손을 잡고 나온 중년의 아들, 넥타이 맨 회사원까지 너나 할 것 없이 이곳에선 편안한 마음으로 거장들의 작품을 만끽한다. 마치 내 집 거실에 있는 것처럼. ●한 해 603만명 관람… 세계 4위 규모 13세기부터 20세기에 걸친 서양 유럽회화 2300여점을 모아 놓은 내셔널 갤러리는 다른 유명 미술관들처럼 블록버스터급 기획전시 없이도 한 해 603만명(2013년 기준)의 방문객을 모으는 세계 4위의 미술전시관이다. 이처럼 많은 관람객이 찾는 이유는 미술관 조직과 운영방식, 그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1824년 러시아 출신의 금융가이며 미술애호가였던 존 앵거스타인이 보유하던 회화작품 38점을 영국 정부가 5만 7000파운드에 구입한 것을 계기로 탄생한 내셔널 갤러리의 소장 작품들은 3분의2가 개인 기증을 통해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작품은 모두 국가소유로 되어 있고, 문화·미디어·스포츠부의 보조를 받지만 정부로부터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설립 초창기에 조직된 운영위원회가 ‘박물관·미술관 운동 1992’라는 조직의 세부원칙에 따라 운영한다. 위원회가 최고로 여기는 가치는 모든 사람이 내 집에서처럼 예술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원칙에 따라 갤러리는 설립 당시부터 모든 이에게 무료 공개되고 있다. 미술관의 접근성부터 소장품의 취득 , 관리, 운영 등에서 내셔널갤러리가 걸어 온 역사는 진정한 국립미술관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현재의 트라팔가 광장에 미술관이 문을 연 것은 1838년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의 화가 세바스티노 델 피옴보의 ‘죽은 나자로의 소생’을 포함해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등지의 주요 작품이 포함된 앵거스타인의 컬렉션은 팔몰가 100번지에 있는 앵거스타인의 집에서 전시됐으나 비좁고 더워서 방문객들의 불만이 컸다. 풍경화가이며 회화작품 수집가였던 조지 보몬트 경이 1826년 자신의 컬렉션을 국가에 기증했고, 1828년에는 예술품 수집가였던 윌리엄 홀웰 카 목사가 기증한 34점이 추가되자 팔몰가 100번지는 발딛을 틈 없이 붐볐다. 건물이 내려앉기 시작하면서 105번지로 옮겼지만 역시 비좁은 실내와 열악한 환경으로 혹평을 받았다. 언론은 영국의 국립미술관이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 등 인근 경쟁국에 비해 형편없다는 것을 기회가 될 때마다 비판했다. 1831년 의회는 새로운 미술관을 짓기로 결정한다. 어디에 지을지를 놓고 오랫동안 격론을 벌인 끝에 런던 중심부인 트라팔가 광장의 왕실 마구간 자리가 미술관 건축부지로 결정됐다. 부유층이 모여 사는 런던 서부와 동쪽의 서민 거주지역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모든 계층 사람들이 접근하기 좋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대학건물 건축가로 이름을 날리던 윌리엄 윌킨스(1778~1839)가 설계를 맡았다. ●전체 전시 면적 축구장 6개 크기 윌킨스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대가로 케임브리지 대학의 킹스칼리지, 트리니티칼리지, 코퍼스 크리스티칼리지 등 신고딕양식의 대학건물을 설계한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다. 그는 왕실 마구간의 구조를 살려 미술관 건물을 설계했다. 하지만 잇따른 기증으로 컬렉션이 점점 풍요로워지면서 건물은 1869년 전반적인 개·보수를 거쳐 7개의 전시실을 추가하는 등 몇 년에 걸쳐 확장되고 개선됐다. 그럼에도 작품들을 전시할 공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1985년 세인즈베리가의 형제들이 내셔널 갤러리의 신관 건축비용을 기부한 덕분에 2차대전 당시 폭격으로 부서진 뒤 방치된 서쪽의 가구공장 부지를 매입해 새로운 건물을 확장 건설할 수 있게 됐다. 1991년 미술관 서쪽의 세인즈버리관이 개관하면서 공간은 괄목할 정도로 늘어났다. 미국인 건축가 로버트 벤추리와 그의 부인이 설계를 맡은 세인즈베리관은 자연채광을 극대화시켰으며 2층의 전시실, 지하층의 극장 등을 갖추고 있다. 세인즈베리관이 완성되고, 2005년 동관이 재정비되면서 미술관의 전체 전시면적은 축구장 6개 넓이인 4만 6396㎡로 늘었다. 런던 시민들은 1월 1일, 크리스마스 연휴를 제외하고 연중무휴로 무료 개방되는 내셔널 갤러리를 내 집 거실처럼 애용한다. 직장인들은 점심 식사시간에 잠시 들러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을 감상하고 일터로 돌아가곤 한다. 지난달 초 내셔널 갤러리에서 만난 존 핀들리(88)도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냈다. 17세기 회화를 특히 좋아한다는 그는 “미술관에서 20분 거리에 직장이 있었기 때문에 점심시간이면 샌드위치로 간단히 식사를 하고 미술관에 책을 들고 와서 독서를 하다가 가곤 했다”고 했다. 나이도 들고, 런던 교외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전처럼 자주 찾지는 못하지만 가능하면 부인과 함께 한두 달에 한 번은 꼭 미술관을 찾는다고 했다. 인상파 회화를 좋아한다는 그의 아내는 “이렇게 가치가 있는 그림들을 언제나 와서 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로워진다”고 말했다. 내셔널 갤러리가 개관 이래 중점을 두는 분야는 교육이다. 인류문화의 꽃이라 불리는 예술작품을 활용한 성인교육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운영하고 있다. 특히 어린이들과 학생들에게 감수성과 예능적인 재능을 키워주기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다. 미술관 홈페이지에서는 초등학생과 중등학생용 교육프로그램을 안내하고 있으며 교사들을 위한 교육용 자료도 인터넷에서 참고할 수 있다. 전문 교육을 받은 미술관의 학예사들이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내셔널 갤러리의 소장 작품들을 설명해 주고, 놀이를 하고, 함께 그려보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모두가 어울려 마음껏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배우는, 살아있는 미술관이 바로 내셔널 갤러리이다. lotus@seoul.co.kr
  •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너새니얼 호손 ‘주홍글씨’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너새니얼 호손 ‘주홍글씨’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이사야 1장 18절) 17세기 미국의 어둡고 준엄한 청교도 사회를 배경으로 죄지은 자의 심리를 탁월하게 그려 낸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씨’는 치밀한 묘사와 인간의 보편적인 주제를 다룬 미국 문학의 걸작이다. 그의 작품 속에는 치욕의 상징인 주홍글씨가 알레고리로 등장한다. 성경에서 비롯된 주홍빛은 인류의 죄와 피를 의미한다. 주홍글씨란 어떤 죄나 잘못을 저지르면 평생 동안 죄를 지은 사람에게 따라다니는 불명예를 뜻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주홍글씨를 단순히 죄의 상징으로 낙인찍는 데 그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작품이 죄를 짓는 과정이 아닌 그 후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먼저 작품 속 주인공을 만나 보자. 뉴잉글랜드 보스턴. 젊고 아름다운 헤스터 프린은 2년 전 미국에 건너와 사생아 펄을 낳고 간통을 의미하는 A(Adultery)를 평생 가슴에 달고 다니는 벌을 받게 된다. 때마침 행방불명됐던 헤스터의 남편이 나타나 처형대 위에 서 있는 헤스터를 목격한다. 그는 로저 칠링워스라는 이름의 의사로 정체를 숨긴 채 마을에 정착한다. 헤스터는 청교도주의적인 사회에서 불의의 남녀 관계로 냉혹한 제재를 받지만 사랑하는 상대를 지키기 위해 모든 비난을 인내한다. 그의 딸도 세상과는 유리된 채 밝고 자유분방하게 살아간다. 그녀가 사랑한 상대는 목사 딤스데일이었다. 그는 젊고 온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자였다.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모두 포기하고 죄를 드러낼 의지가 약했던 그는 심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로저 칠링워스는 그런 목사에게 접근해 마음을 할퀴고 상처를 줘 쇠약하게 만든다. 헤스터는 목사가 자책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알고 로저 칠링워스에게 복수를 그치라고 간청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리고 목사를 찾아가 영국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삶을 살자고 설득한다. 그러나 목사는 장관 취임식 날 자신의 죄를 만천하에 고백한 뒤 목숨을 끊는다. 이렇게 작가 호손은 죄를 지은 후 벌어지는 죄의식과 벌, 나아가 구원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헤스터가 가슴에 늘 새기고 다니던 낙인은 원래 쇠붙이로 만든 뒤 불에 달궈 찍는 도장으로, 가축이나 목재에서 유래했고 노예가 도망치지 못하게 할 때나 형벌의 수단으로 썼던 것이다. 흔히 ‘낙인을 찍는다’는 말은 씻기 어려운 불명예스러운 판정이나 평판을 비유적으로 말할 때 사용된다. 주목할 점은 낙인의 기준이 시대와 종교, 사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한 번의 실수와 잘못으로 온갖 사람들에게 치욕을 당하고 평생 동안 낙인찍힌 채 손가락질을 감수해야 하는 건 옳은 일일까?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는 죄도 많다. 남의 마음에 심한 고통을 주거나 잘못된 가치관으로 사회를 변형시키는 경우를 많이 봐 왔다. 특히 그들이 권력자이거나 승리자였다면 그러한 잘못은 더욱 치장되고 미화돼 버린다. 마녀재판이라고 하는 잘못된 관습도 결국 그 사회의 약자요, 유리된 자들을 사회질서 유지의 희생양으로 사용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헤스터가 살았던 17세기 뉴잉글랜드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난 청교도들이 새롭게 뿌리 내린 곳이었다. 그들은 굶주림과 고통 속에서 미국 사회를 건설했다. 금욕, 절제, 규율을 기본 윤리로 삼은 청교도 사상은 미국 사회를 일군 힘이 되기도 했지만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고 죄의식과 규율 속에 가두는 독선적인 경향도 강했다. 19세기를 살아가던 호손은 작품을 통해 17세기 청교도적 삶의 허구성을 비판했다. 헤스터는 주홍글씨를 단 채 사람들로부터 온갖 저주와 욕설을 들어야 했지만 타고난 위엄과 기품을 잃지 않는다. 그녀의 실수가 정당하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사랑을 지키고 윤리적 규범으로 규정지어진 벌을 받겠다는 자세, 실수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는 자세 그리고 이제부터 제대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연하고 일관된 의지가 있었다. 그녀는 세상의 규범이 자신의 명예와 사랑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죄를 지은 뒤 보여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랑과 병자들에 대한 헌신, 불평 없이 깨끗한 삶을 영위하는 모습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주홍글씨의 A를 Able(유능함)로 인식하게 했다. 나아가 목사가 죽은 뒤에도 평생 주홍글씨를 달고 남을 위해 애쓰며 사려 깊고 헌신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이제 그녀는 Angel(천사)의 상징이 된다. 하늘나라의 기쁨을 전하고 가장 고상하고 순결한 여인으로 표적이 된 것이다. 한편 대조되는 인물이 있다. 목사는 성직자라는 위치에서 드러낼 수 없는 죄를 내면화해 자책하고 스스로에게 가혹한 벌을 내린다. 그리고 또 한 명, 끝까지 복수의 화신이 돼 목사를 괴롭혔던 로저 칠링워스는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양심도 이해심도 가지지 못했고 섬뜩한 복수의 칼날에 자신도 베어 버린 악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복수는 헤스터에 대한 사랑으로 볼 수 있다. 본문에서도 사랑과 증오는 근본이 하나이기 때문에 자비를 구하자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방법이 왜곡됐으며 결국 비극으로 끝나 버린다. 이렇게 호손은 세 사람을 통해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양심의 문제를 제기했다. 결국 사회적 낙인을 끊임없는 헌신과 사랑으로 승화시킨 헤스터, 마음속 낙인으로 괴로워하고 영혼의 구원을 외치며 죽은 목사, 죽기 직전 자신의 전 재산을 펄에게 물려주는 것으로 자신의 악행을 뉘우친 로저 칠링워스를 통해 도덕적 진실과 양심의 구원, 나아가 영혼의 자유를 밀도 있게 풀어내고 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본의 아니게 ‘주홍글씨’라는 크고 작은 치욕을 겪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똑같은 죄를 저지른 헤스터와 딤스데일. 한 명은 사회의 지탄과 멸시, 천대를 받았고 다른 한 명은 죄의 폭로를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자책했다. 올바른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데 중요한 것은 스스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세다. 양심과 도덕적 판단이 그 어떤 규범보다 중요한 이유다. 이것은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통해 마음속 깊숙이 숨겨 놓았던 인간의 본성과 규범, 죄와 벌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면 좋겠다. ■너새니얼 호손은 너새니얼 호손(1804~1864)은 19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다. 장편 ‘주홍글씨’와 함께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의 작품으로는 흔히 ‘큰 바위 얼굴’로 축약돼 알려진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과 다른 흰 산 이야기’가 있다. 청교도 집안에서 자란 호손은 작품에서 원죄와 속죄, 법과 양심을 진지하게 탐구했다. 호손은 자신의 조상들이 17세기 퀘이커교도에게 태형을 가하거나 마녀재판에 참여한 일 등에 대해 죄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1825년 보든대학을 졸업한 호손은 24살에 소설 ‘판쇼’를 출판하지만 스스로 회수했다. 이후 보스턴 세관에서 일하다가 1842년 결혼한 뒤 콩코드에 살면서 집필한 단편들을 모아 ‘영 굿맨 브라운’이 담긴 단편집 ‘낡은 저택의 이끼’를 출간했다. 1850년 ‘주홍글씨’를 출간한 뒤 소설가로 명성을 얻었다. 세밀한 구성력이 돋보이는 ‘주홍글씨’는 미국의 상징주의 소설에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팁:‘알레고리’는 어떤 한 주제 A를 말하기 위해 다른 주제 B를 사용해 그 유사성을 적절히 암시하면서 주제를 나타내는 수사법이다. 은유법이 하나의 단어나 문장 같은 작은 단위에서 구사되는 반면 알레고리는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총체적인 은유법으로 관철돼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 폴란드서 실제 중세 뱀파이어 유골 발견?

    폴란드서 실제 중세 뱀파이어 유골 발견?

    지난 수세기 간 불사의 신화적 존재로 각종 문학작품과 영화의 단골소재로 활용되어온 이름만 들어도 몸 속 혈액이 섬뜩해지는 ‘뱀파이어’ 즉 흡혈귀의 실제 유골이 발견된 것일까? 폴란드 지역 언론매체 ‘카미안스키 인포(kamienskie.info)’는 폴란드 북서부에 위치한 카미안 포모르스키 마을 공동묘지에서 중세 뱀파이어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됐다고 이번 달 초 보도했다. 마을 교회 묘지에서 우연히 발견된 이 유골은 16세기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지 고고학자들은 해당 유골의 형태가 과거 뱀파이어 봉인 의식 형태와 유사한 것으로 판단한다. 특히 이 유골이 당시 뱀파이어로 인식되었다는 유력한 증거는 못이 박혀있는 발 부분인데 이는 시신이 사후에 부활해서 지상으로 상승하는 것을 방지하고 땅에 묶어두기 위해 취했던 의식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발굴을 주도 중인 폴란드 고고학자 슬라미르 고르카는 “최초 발견 때는 그저 발에 상처가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 뱀파이어 봉인 의식 흔적 이었다”고 설명했다. 다른 증거도 속속 발견됐다. 입안에는 벽돌 조각이 채워져 있었고 그나마 남아있는 치아도 모두 제거돼 있었는데 이는 날카로운 송곳니로 피해자의 피를 빠는 것을 방지하게 위해 취했던 조치다. 유럽에서 이 같은 뱀파이어 매장 묘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09년에는 이탈리아 플로렌스 대학 인류학과 연구팀이 베니스 인근에서 입에 벽돌이 채워진 뱀파이어 유골을 발견했었고 작년에는 같은 폴란드 글로비체 지역에서 비슷한 형태의 유골 4구를 발견한 바 있다. 그 중에는 흔히 우리가 아는 것처럼 심장에 말뚝이 박혀있는 등 전통 흡혈귀 퇴치 방식을 취한 것도 있었다. 학자들은 이런 종류의 매장이 13~17세기 사이 활발했던 것으로 보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이 뱀파이어 시신의 주인들인 당시 지식인, 귀족, 성직자들과 같은 특권층들이 많았는데 이는 권력 암투의 희생양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또한 흑사병 공포가 만연했던 중세시대의 혼란스럽던 여론을 잠재우기위해 일부 특권층을 뱀파이어로 몰아 살해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사진=kamienskie.info 조우상 기자 wscho@seoul.co.kr
  • [함혜리 선임기자의 미술관 건축기행] 영국박물관

    [함혜리 선임기자의 미술관 건축기행] 영국박물관

    박물관과 미술관은 문화 생태를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전통적 문화 강국으로 꼽히는 유럽 국가들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서울신문은 창간 110주년을 맞아 ‘예술을 품은 예술 공간’, 즉 건축적 관점에서 세계 유수의 박물관·미술관과 국내의 대표 미술관을 탐사하는 특집 기획을 연재합니다. 문화융성을 위해 마련한 기획시리즈를 통해 예술의 역사와 건축의 역사, 그리고 미술관의 사회·문화적 가치를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글 사진 런던 함혜리 기자 유럽 주요 도시의 유서 깊은 박물관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른바 ‘박물관 전성시대’를 열었고, 그 유행을 선도한 곳이 바로 우리가 대영박물관이라고 부르는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이다. 파리의 루브르, 로마 바티칸 시국의 바티칸 박물관과 함께 유럽 3대 박물관으로 불리는 영국박물관은 800만점이 넘는 소장품을 보유한 세계에서 가장 큰 박물관으로 유명하다. 전 세계에서 모아 온 전리품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인류학적 가치를 지닌 문명사적 유물을 소장·전시한다는 점에서 영국의 박물관이라기보다 세계의 박물관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법하다. 규모 말고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또 있다. ‘박물관의 나라’인 영국의 첫 국립박물관이자 세계 최고의 박물관이라는 명성이 부끄럽지 않도록 영국박물관은 설립 이래로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한다는 점이다. 모두를 위해, 모두에 의해. ●2000년 ‘밀레니엄 프로젝트’로 대변신 부활절 연휴였던 지난달 초 런던 그레이트 러셀 스트리트에 자리하고 있는 영국박물관을 찾았다. 그날도 어김없이 런던에는 비가 내렸다. 우산도 없이 추적추적 걸어야 하는 여행자의 신세. 비에 젖은 신발 때문에 더욱 무거워진 발걸음이지만 위용을 뽐내며 서 있는 정면의 기둥들을 보는 순간 피곤이 싹 달아났다. 계단을 올라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자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바깥 날씨와는 정반대로 박물관 중앙 홀이 빛으로 가득했고 쾌적했기 때문이다. 빛은 격자모양의 수많은 유리와 철골조로 이어진 거대한 유리지붕에서 박물관 중앙부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빛 아래에서 박물관에 대한 정보도 얻고, 공부도 하고, 바닥에 앉아 쉬기도 하며, 기념품을 고르기도 한다. 박물관 안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어떤 도시의 중앙 광장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중앙홀은 활기로 넘쳤다. 영국박물관의 밀레니엄프로젝트로 지난 2000년 만들어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정원’(Queen Elizabeth Ⅱ Great Court)이다. 대정원을 설계한 이는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노먼 포스터 경이다. 단순함의 미학을 유지하면서도 기술적이고 합리적인 부분을 놓치지 않는 그의 건축은 인간과 자연, 예술과 건축기술을 조화시키는 건축 철학과 방법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독일 베를린의 연방의회의사당 건물을 통해 알 수 있듯 포스터는 거대한 유리 돔이나 유리 캐노피를 이용해 옛 건물에 신선하고 창의적인 감성과 혁신을 부여하는 데 탁월하다. 그의 건축철학과 기술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대정원이다. 영국박물관 위원회는 박물관에 있던 영국도서관이 1997년 세인트 판크라스의 새 건물로 이전하는 것을 계기로 박물관 개축 계획을 세우고 국제공모전을 열었다. 위원회가 내건 조건은 감춰져 있는 공간을 드러낼 것, 오래된 공간에 활력을 줄 것,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낼 것 등 세 가지였다. ●유럽 3대 박물관… 260년간 시민에 무료 공개 영국 박물관은 내과의사이자 박물학자였던 한스 슬론(1660~1753) 경의 유언에 따라 국가에 기증된 수집품과 왕실이 기증한 책과 메달 수집품을 기초로 1753년 설립됐다. 박물관 개관과 운영을 위해 구성된 위원회는 17세기에 지어진 블룸스베리의 몬태규하우스를 2만 파운드에 구입해 그 갤러리와 서재에서 1759년 1월 15일부터 첫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기존 박물관들이 교회나 왕실에 속해 있고, 귀족적인 회화 중심의 컬렉션을 소장하던 것과 달리 이 박물관은 최초의 국립박물관으로서 세계 각국의 다양한 사물 및 유물을 무료로 공개전시했다. 공공의 목적을 위해 기증된 귀중한 유물들을 국민들에게 돌려준다는 취지로 무료 공개하는 전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자연사유물과 도서 등이 탁월했던 영국박물관 컬렉션에 인류학적 유물들이 강화되기 시작한 것은 1772년이다. 나폴리의 영국 대사였던 윌리엄 해밀턴의 그리스·로마 컬렉션, 영국 내전을 기록한 토머슨 컬렉션, 1000여점의 희곡원고로 이뤄진 개릭 장서컬렉션, 세계여행에서 돌아온 토머스 쿡의 수집품들이 추가되면서 영국박물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특히 19세기 초에는 영국군이 나일강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한 후 고대 이집트의 조각작품이 대거 유입됐고, 이집트의 영국 영사로 근무한 헨리 솔트가 보유하던 람세스 2세의 거대 흉상, 찰스 타운리의 그리스 조각 컬렉션, 토머스 브루스의 파르테논 신전 대리석 조각 등이 차례로 유입됐다. 이들 방대한 컬렉션과 조지 3세의 장서를 함께 소장하기 위한 미술관 건립 계획이 수립됐고 네오클래식 디자인을 추구했던 건축가 로버트 스머크(1780~1867) 경이 설계를 맡아 세계 최고 수준의 컬렉션에 걸맞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4각형 건물이 1852년 완공됐다. 이후 박물관은 수차례에 걸쳐 확장과 개축을 거듭했다. 1900년부터 1914년 사이에는 북관을 증축했고 1930년대에는 이집트, 그리스, 아시리아 조각품을 소장하는 서쪽 갤러리와 두빈갤러리 증축이 이뤄졌지만 가장 괄목할 만한 변신은 밀레니엄프로젝트였다. 총 1억 파운드의 건축비 중 3000만 파운드는 밀레니엄위원회에서, 1575만 파운드는 문화유산복권기금에서 충당했으며 나머지는 개인과 기업의 기부로 메워졌다. 계단 양옆을 휘감고 있는 흰 벽에는 기부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공공의 공간이 40%… 중앙부에 도서관·서점이 포스터는 장소의 역사성을 살리는 한편 미래의 박물관이 기능하도록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 냈다. 박물관 중앙부에 열람실을 두어 도서실과 박물관이 공존해 온 역사를 이어가도록 하는 한편 격자무늬 유리지붕이 안뜰 전체를 뒤덮은 중앙홀이 완성되면서 카페테리아, 서점, 안내센터, 삼성디지털체험센터 등 공공을 위한 공간이 40%나 늘었다. 과거 이집트관의 전시품들을 쌓아 두었던 공간은 어린이와 가족 단위 방문객들을 위한 교육장소로 쓰이고 있다. 부활절 방학을 맞아 딸아이들과 켈트문화전의 연계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한 주부 엘런은 “날씨에 관계없이 박물관 실내 광장에 모여 휴식하고 공부하며 문화를 만끽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박물관은 내년 완공을 목표로 세계보존·전시센터(WCEC)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박물관 북서쪽에 들어서는 WCEC에는 총 1억 3500만 파운드가 소요되며 세인즈베리 가문의 기부와 문화유산복권기금 및 문화·유산·스포츠부 지원금으로 충당하며 기금 모금이 진행 중이다. 총면적 1만 8000㎡에 달하는 WCEC의 설계를 맡은 건축가 그레이엄 스터크는 “260년 역사를 지닌 영국박물관 진화의 다음 단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박물관은 전시, 보존, 실험 및 분석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공간을 확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lotus@seoul.co.kr
  • 사이먼 앤 가펑클 ‘명곡’ 속 집 경매 나온다

    사이먼 앤 가펑클 ‘명곡’ 속 집 경매 나온다

    지금도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브리지 오버 트러블드 워터’(Bridge Over Troubled Water)의 배경이 된 집이 경매에 나온다. 최근 영국 부동산 회사 세빌스 측은 “다음달 19일 데번주 빅레이 다리 인근에 있는 집 두채가 경매에 나올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집이 현지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것은 미국의 듀오 사이먼 앤 가펑클에게 영감을 준 역사적인 곳이기 때문이다. 지난 1969년 사이먼 앤 가펑클은 이 지역에 머물면서 세계적인 명곡 ‘브리지 오버 트러블드 워터’ 를 썼으며 그 가사에 등장하는 다리가 바로 빅레이다. 이듬해 발표한 이 앨범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으며 이후 이 지역은 전세계 관광객들의 명소가 됐다. 특히 경매에 나오는 집은 다리와 더불어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이었으며 그간 가장 많이 그림카드로 등장하기도 했다. 1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 집은 여러차례 재건축을 거쳤으며 한동안 호텔로 이용되기도 했다.부동산 관계자 리처드 앤딩턴은 “이 집은 유유히 흐르는 엑스강을 배경으로 빅레이 다리 오른편에 위치해 있다” 면서 “사이먼 앤 가펑클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의 풍광에 반해 숨이 멎을 정도였다” 고 밝혔다. 이어 “연이어 있는 두 집이 각각 팔릴 수 있으며 예상가격은 총 60만 파운드(10억 3000만원)”라고 덧붙였다. 한편 1960년 대 폴 사이먼과 아트 가펑클이 결성한 미국의 2인조 음악그룹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and Garfunkel)은 ‘The Sound of Silence’, ‘Mrs. Robinson, ‘Bridge over Troubled Water’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씨줄날줄] 경제대국 변천사/손성진 수석논설위원

    대항해 시대 이후의 세계 경제패권은 16세기엔 스페인, 17세기엔 네덜란드, 18·19세기엔 영국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경제이론과 통계학이 발전하지 않았던 근대에는 한 국가의 경제력을 추산할 방법이 없었다. 고전학파의 선구자 윌리엄 페티가 국민소득의 개념을 처음 도입했지만 통계적인 관점에서는 미흡했다. 그 뒤 국민소득 추계 방식이 발전하면서 1789년 프랑스를 시작으로 19세기 들어 일본, 영국, 미국, 독일이 이어서 국부 통계를 공식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얼추나마 국가 간 비교도 가능해진 것이다. 대영제국으로 군림하던 영국을 미국이 추월해서 세계 1위의 경제대국에 오른 때는 1872년이라고 한다. 이는 서양 중심의 시각에서 본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제대국 순위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에 인구를 곱한 총 GDP를 기준으로 한다. 소득도 소득이지만 인구가 많아야 순위에 낀다. 12세기 초 북송시대에 인구가 1억명을 넘었고 19세기에는 4억명을 넘어선 중국은 20세기 이전에도 최상위에 있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면적과 인구(약 3억 1880여만명)가 세계 3위이며 1인당 GDP가 5만 2000달러를 넘는 미국은 지난해 총 GDP가 16조 7242억 달러로 세계 1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그러나 4위의 면적과 1위의 인구(약 13억 5500여만명), 급속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이미 일본을 제친 중국의 기세는 무섭다. 지난 10여년간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순위는 변화를 거듭해 왔다. 2001년 미국-일본-독일-영국-프랑스-중국-이탈리아-캐나다-멕시코-스페인이던 것이 지난해엔 미국-중국-일본-독일-프랑스-브라질-영국-러시아-이탈리아-인도로 바뀌었다. 영토가 넓은 신흥국들이 치고 올라온 게 눈에 띈다. 이는 물가수준을 감안하지 않는 명목 GDP이며 물가를 감안한 실질 GDP로 따지면 크게 달라진다. 구매력평가(PPP) 기준으로 올해 중국의 GDP가 미국을 앞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미국이 영국에서 넘겨받은 바통을 142년 만에 중국에 넘겨주는 셈이다. 예상보다 몇 년 앞당겨졌다. 물가를 고려하지 않아도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는 시점은 2020년 전후가 될 것이라고 한다. 또 2030년이 되면 중국의 GDP가 미국의 두 배에 이를 것이라는 예상이 있다. 2003년 세계 11위였던 한국의 명목 GDP 순위는 금융위기를 겪으며 2008년 15위까지 떨어졌다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은 러시아, 멕시코, 인도, 호주 등이 우리를 딛고 올라섰다. 땅이 좁고 인구가 정체 상태에 접어든 우리가 기댈 곳은 기술 혁신밖에 없는 듯하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다이빙벨 원리, 16세기 발명…이종인 대표 다이빙벨 특징은?

    다이빙벨 원리, 16세기 발명…이종인 대표 다이빙벨 특징은?

    ‘다이빙벨 원리’ 세월호 침몰 사고 현장 투입을 놓고 논란을 빚었던 다이빙벨이 본격적으로 투입되면서 다이빙벨의 원리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다이빙벨은 마치 종처럼 생겼다는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잠수사들이 오랜 기간 물속에 머물며 사고현장에 접근, 수중작업을 도와주는 구조물이다. 일반인에게 다소 생소한 기술이기는 하나 이미 16세기 발명돼 17세기 말에는 난파선이나 보물선 탐사에 사용되기도 했다. ’다이빙벨’의 원리는 종처럼 생긴 구조물을 조심스럽게 가라앉히면 윗부분에는 공기가 남아 있는 원리다. 이 구조물을 선체 옆에 놓고 일종의 작업용 엘리베이터로 활용하면 일종의 바다 속에서 잠수사들이 쉴 수 있는 에어포켓(공기주머니)이 만들어져 작업 효율성을 크게 높일 수 있다. 특히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가 개조한 다이빙벨은 물 밖에서 공기압축기로 잠수부에게 공기를 공급하고 작업인력 수를 늘리는 등 한층 개선된 방식이다. 하지만 해경 측은 작업의 방해가 될 수 있다며 다이빙벨을 투입을 거부했다. 그러나 뒤늦게 해경이 모 대학에서 일본형 2인용 다이빙벨을 빌려 세월호 침몰 사고 현장에 몰래 투입하려 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또 한 번 논란을 모았다. 더구나 다이빙벨을 빌려온 업체가 청해진해운과 계약을 맺은 언딘으로 알려져 파문이 일었다. 결국, 해경 측은 실종자 가족들의 요구에 따라 이종인 대표에게 요청해 다이빙벨을 수색 작업에 투입하게 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다이빙벨 원리는? 이종인 대표 다이빙벨 투입 결정

    다이빙벨 원리는? 이종인 대표 다이빙벨 투입 결정

    ‘다이빙벨 원리’ ‘이종인 다이빙벨’ 세월호 수색작업 현장에 투입하기로 결정된 다이빙벨 원리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다이빙벨은 잠수부들이 오랜 기간 물속에 머물며 사고현장에 접근, 수중작업을 도와주는 구조물이다. 다이빙벨은 마치 종(鐘)처럼 생겼다는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생소한 이름이어서 신기술로 생각하기 쉽지만 다이빙벨은 이미 16세기에 발명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가 개발한 다이빙벨은 물 밖에서 공기압축기로 잠수부에게 공기를 공급하고 작업인력 수를 늘리는 등 한층 개선된 방식이다. 17세기 말에는 난파선이나 보물선 탐사에 사용되기도 했다. 종처럼 생긴 구조물을 조심스럽게 가라앉히면 윗부분에는 공기가 남아 있는 원리다. 일종의 에어포켓(공기주머니)를 만든 셈이다. 이 구조물을 선체 옆에 놓고 일종의 작업용 엘리베이터로 활용하는 것이다. 세월호 구조·수색작업은 선체 접근 자체가 힘들어 가이드라인(유도줄) 설치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잠수사는 다이빙벨안에서 휴식도 취하고 선체에 곧바로 접근할 수 있어 작업 효율성을 크게 높일 수 있다. 지난 5월 대서양 바닷속에 침몰한 배 안에 갇혔다가 사흘 만에 기적적으로 구조된 나이지리아 남성 구조 때도 이 다이빙벨이 사용됐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이빙벨은 물 속에서 중심을 잡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거센 물살 등에 구조물이 흔들리거나 유실될 때는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 안에 있는 잠수사에게 큰 위협요인이 될 수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경 측에서 다이빙벨이 안전에 문제가 있고 구조 작업에 방해가 된다며 투입을 거부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밑부분이 개방된 다이빙벨과는 달리 ‘챔버’는 아랫부분이 폐쇄된 형태의 벨이다. 역할을 같지만 잠수사는 챔버안에서 가압 등으로 작업환경에 맞는 압력을 유지한다. 수면과 케이블이 연결돼 전력 공급, 통신이 가능하며 체온유지와 기체의 재공급 등을 할 수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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