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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류, 다가올 빙하기를 준비하라…세상이 바뀐다

    인류, 다가올 빙하기를 준비하라…세상이 바뀐다

    그야말로 ‘겨울왕국’이 따로 없다. 지구 곳곳이 폭설과 혹한에 바들바들 떨었고, 끝도 없이 떨어지기만 하는 수은주에 피해도 속출했다. 각국 전문가들은 저마다 지나친 추위의 원인과 배경을 분석하고 나섰는데, 그 와중에 빈번하게 등장한 단어는 바로 ‘빙하기’다. 마치 당장이라도 빙하기가 시작될 것만 같은 조짐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워싱턴과 뉴욕 등 미국 동부는 무려 100년 만의 폭설로 28명이 숨지고 재산피해만 1조 2000억 원에 달했다. 중국 내몽고 지역에는 영하 60℃의 혹한이 찾아왔고, 아열대 지역인 대만에서는 60여 명이 갑작스러운 한파로 인한 저체온증과 심근경색으로 숨졌다. 그리고 서울의 기온은 영하 19℃까지 떨어졌고 ‘따뜻한 남쪽’ 제주는 폭설과 한파로 공항이 폐쇄되면서 수만 명의 발이 묶이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지피지기 백전불태,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알아야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처럼 인류가 어쩌면 빙하기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더 자세히 파헤치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빙하기를 대비해야 할 위기에 봉착했는지도 모른다. 영화에서나 보아 왔던 빙하기가 정말 현실로 다가온다면 지구와 인류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까. ◆‘빙하기 예언’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 공룡이 멸종했을 정도의 강력한 빙하기가 당장 오늘 내일 시작되는 것은 아니지만, 약한 빙하기로 볼 수 있는 미니 빙하기 즉 ‘소빙하기’가 불과 15년 내에 시작될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영국 노섬브리아대학교 연구진은 지난해 열린 국립천문학회의에서 태양 흑점 활동이 기후변화와 연관이 있다는 내용의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일반적으로 태양의 흑점은 4만~5만개로 관측되지만 17세기 소빙하기에 관측된 흑점은 50개에 불과했다. 태양의 활동이 줄어들고 흑점의 숫자가 낮아지면 지구 기온도 내려간다. 반면 태양의 활동이 왕성해서 흑점이 많아지면 지구 기온도 올라간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태양 흑점 주기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약 15년 후인 2030년이 되면 태양의 활동이 60%까지 감소하고 이후 약 10년 간은 지구 평균 기온이 1.5℃ 낮아지는 소빙하기가 찾아올 것으로 내다 봤다. 오로라의 출연 횟수가 소빙하기와 연관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의 천문학자 J. 에디는 1976년 발표한 논문에서 과거 소빙하기 시기에 오로라가 현저히 뜸하게 나타났음을 감안하면, 오로라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이 소빙하기를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빙하기가 가져온, 혹은 가져올 변화 과거 소빙하기의 흔적과 영향은 역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약 13세기에서 19세기까지 소빙하기가 찾아왔을 무렵 유럽에서는 마녀사냥이 급속하게 증가했다. 마녀가 날씨를 조종해 신의 노여움이 시작됐다는 대중의 오해가 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만든 것이다. 추워진 날씨로 시작된 대기근은 프랑스 역사에 길이 남은 프랑스 혁명과 같은 대규모 시민혁명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추위로 인해 포도 생산이 힘들어지고 와인을 마실 수 없게 되자, 본격적으로 보리를 이용한 맥주를 음용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현재의 ‘맥주 명가’ 자리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과학적 분석과 기록은 빙하기가 우리 인류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어떤 변화를 유발했는지를 확인케 한다. 그리고 빙하기를 포함한 기후변화는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나 먹을 거리의 변화뿐만 아니라 인류의 외모, 더 나아가 유전자까지 바꾸어 놓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영국 켄트대학교 연구진은 지구가 지구온난화로 극지의 얼음이 녹아 해수면이 상승해 일명 ‘워터 월드’가 되거나 소행성 충돌로 인해 빙하기가 찾아오거나, 혹은 인류 전체가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게 되는 시나리오에 따라 미래 인류의 외모가 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중 빙하기가 찾아올 경우, 인류의 피부는 지금보다 훨씬 창백한 빛을 띨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예측됐다. 피부빛이 옅어지면 적은 양의 자외선만으로도 비타민D 합성이 쉬워지기 때문. 또 체온보호를 위해 체모와 근육이 현재보다 더 많아질 수 있으며, 차가운 공기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더 많은 뜨거운 공기를 들이마시기 위해 코의 크기도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이러한 외모의 변화는 유전자의 변화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전문가들은 인류가 변화하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유전자 변형을 택하며, 특히 신체 일부는 자연적으로 변화하기보다 필요에 의해 변화를 선택한다고 설명한다. 즉 빙하기와 같은 기후변화가 유전자의 변형을 유발하고, 이러한 현상이 지금과는 다른 인류의 외모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빙하기 지연시킨다는 지구 온난화, 아군인가 적군인가 빙하기를 향한 두려움이 높아지는 가운데, 문젯거리로 인식되어 온 지구 온난화가 빙하기를 지연시킨다는 연구결과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최근 독일 포츠담기후영향연구소(PIK)는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시작된 지구 온난화 때문에 빙하기를 유발할만한 요소가 줄어들었고, ‘훈훈한 지구’가 적어도 10만 년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산화탄소 등 온실가스가 지구상의 생명체 90%를 멸종시킨 빙하기를 미뤄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지구와 인류는 빙하기로 인한 격한 변화를 피할 수 있게 되면서 졸지에 지구 온난화의 덕을 보게 생겼지만, 온실가스와 지구 온난화는 여전히 다양한 부작용과 황폐화를 유발하는 ‘공공의 적’과 다름없다. 급격한 빙하기와 온난화 등의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노력은 개인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와 역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송혜민의 월드why] 지구, 빙하기를 준비하라…세상이 바뀐다

    [송혜민의 월드why] 지구, 빙하기를 준비하라…세상이 바뀐다

    그야말로 ‘겨울왕국’이 따로 없다. 지구 곳곳이 폭설과 혹한에 바들바들 떨었고, 끝도 없이 떨어지기만 하는 수은주에 피해도 속출했다. 각국 전문가들은 저마다 지나친 추위의 원인과 배경을 분석하고 나섰는데, 그 와중에 빈번하게 등장한 단어는 바로 ‘빙하기’다. 마치 당장이라도 빙하기가 시작될 것만 같은 조짐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워싱턴과 뉴욕 등 미국 동부는 무려 100년 만의 폭설로 28명이 숨지고 재산피해만 1조 2000억 원에 달했다. 중국 내몽고 지역에는 영하 60℃의 혹한이 찾아왔고, 아열대 지역인 대만에서는 60여 명이 갑작스러운 한파로 인한 저체온증과 심근경색으로 숨졌다. 그리고 서울의 기온은 영하 19℃까지 떨어졌고 ‘따뜻한 남쪽’ 제주는 폭설과 한파로 공항이 폐쇄되면서 수만 명의 발이 묶이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지피지기 백전불태,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알아야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처럼 인류가 어쩌면 빙하기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더 자세히 파헤치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빙하기를 대비해야 할 위기에 봉착했는지도 모른다. 영화에서나 보아 왔던 빙하기가 정말 현실로 다가온다면 지구와 인류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까. ◆‘빙하기 예언’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 공룡이 멸종했을 정도의 강력한 빙하기가 당장 오늘 내일 시작되는 것은 아니지만, 약한 빙하기로 볼 수 있는 미니 빙하기 즉 ‘소빙하기’가 불과 15년 내에 시작될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영국 노섬브리아대학교 연구진은 지난해 열린 국립천문학회의에서 태양 흑점 활동이 기후변화와 연관이 있다는 내용의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일반적으로 태양의 흑점은 4만~5만개로 관측되지만 17세기 소빙하기에 관측된 흑점은 50개에 불과했다. 태양의 활동이 줄어들고 흑점의 숫자가 낮아지면 지구 기온도 내려간다. 반면 태양의 활동이 왕성해서 흑점이 많아지면 지구 기온도 올라간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태양 흑점 주기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약 15년 후인 2030년이 되면 태양의 활동이 60%까지 감소하고 이후 약 10년 간은 지구 평균 기온이 1.5℃ 낮아지는 소빙하기가 찾아올 것으로 내다 봤다. 오로라의 출연 횟수가 소빙하기와 연관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의 천문학자 J. 에디는 1976년 발표한 논문에서 과거 소빙하기 시기에 오로라가 현저히 뜸하게 나타났음을 감안하면, 오로라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이 소빙하기를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빙하기가 가져온, 혹은 가져올 변화 과거 소빙하기의 흔적과 영향은 역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약 13세기에서 19세기까지 소빙하기가 찾아왔을 무렵 유럽에서는 마녀사냥이 급속하게 증가했다. 마녀가 날씨를 조종해 신의 노여움이 시작됐다는 대중의 오해가 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만든 것이다. 추워진 날씨로 시작된 대기근은 프랑스 역사에 길이 남은 프랑스 혁명과 같은 대규모 시민혁명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추위로 인해 포도 생산이 힘들어지고 와인을 마실 수 없게 되자, 본격적으로 보리를 이용한 맥주를 음용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현재의 ‘맥주 명가’ 자리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과학적 분석과 기록은 빙하기가 우리 인류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어떤 변화를 유발했는지를 확인케 한다. 그리고 빙하기를 포함한 기후변화는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나 먹을 거리의 변화뿐만 아니라 인류의 외모, 더 나아가 유전자까지 바꾸어 놓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영국 켄트대학교 연구진은 지구가 지구온난화로 극지의 얼음이 녹아 해수면이 상승해 일명 ‘워터 월드’가 되거나 소행성 충돌로 인해 빙하기가 찾아오거나, 혹은 인류 전체가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게 되는 시나리오에 따라 미래 인류의 외모가 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중 빙하기가 찾아올 경우, 인류의 피부는 지금보다 훨씬 창백한 빛을 띨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예측됐다. 피부빛이 옅어지면 적은 양의 자외선만으로도 비타민D 합성이 쉬워지기 때문. 또 체온보호를 위해 체모와 근육이 현재보다 더 많아질 수 있으며, 차가운 공기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더 많은 뜨거운 공기를 들이마시기 위해 코의 크기도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이러한 외모의 변화는 유전자의 변화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전문가들은 인류가 변화하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유전자 변형을 택하며, 특히 신체 일부는 자연적으로 변화하기보다 필요에 의해 변화를 선택한다고 설명한다. 즉 빙하기와 같은 기후변화가 유전자의 변형을 유발하고, 이러한 현상이 지금과는 다른 인류의 외모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빙하기 지연시킨다는 지구 온난화, 아군인가 적군인가 빙하기를 향한 두려움이 높아지는 가운데, 문젯거리로 인식되어 온 지구 온난화가 빙하기를 지연시킨다는 연구결과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최근 독일 포츠담기후영향연구소(PIK)는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시작된 지구 온난화 때문에 빙하기를 유발할만한 요소가 줄어들었고, ‘훈훈한 지구’가 적어도 10만 년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산화탄소 등 온실가스가 지구상의 생명체 90%를 멸종시킨 빙하기를 미뤄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지구와 인류는 빙하기로 인한 격한 변화를 피할 수 있게 되면서 졸지에 지구 온난화의 덕을 보게 생겼지만, 온실가스와 지구 온난화는 여전히 다양한 부작용과 황폐화를 유발하는 ‘공공의 적’과 다름없다. 급격한 빙하기와 온난화 등의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노력은 개인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와 역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하얀 겨울에 운치 더해주는 사가현 도자기 마을 여행

    하얀 겨울에 운치 더해주는 사가현 도자기 마을 여행

    한적한 마을길을 걸으며 다양한 도자기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 일본 규슈 북서부에 위치한 사가현은 예로부터 도자기 생산으로 번성했던 곳으로 일본 도자기의 요람이라고 불린다. 도자기 미술관부터 도자기 시장, 가마 등이 곳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리타야키와 가라쓰야키, 이마리야키를 만날 수 있다. 사가현의 아리타는 일본 자기의 발상지로서 17세기 초반 조선 도공이었던 이삼평이 도자기의 원료인 도석을 발견하고 가마를 쌓아올려 일본 최초의 백자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리타 마을에는 이삼평을 기리는 신사와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아리타야키의 산지인 아리타는 가마의 굴뚝이 남아있는 조용하고 한적한 산간마을로, 매년 봄, 가을에 열리는 도자기 축제로 더욱 유명하다. 매년 약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이는 도자기 축제날이면 공방에 있던 장인들도 모두 나와 함께 축제를 즐긴다고 한다. 올해는 특히 아리타야키 400주년을 맞이하여 크고 작은 이벤트가 열릴 예정이어서 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다. 축제 기간 동안에는 가미아리타역에서 아리타역까지 이어지는 약 4㎞에 걸쳐 500곳이 넘는 도자기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각양각색의 도자기들을 한 눈에 둘러보기 좋다. 가라쓰야키는 흙을 원료로 한 도기로 예로부터 주로 다도의 세계에서 진귀하게 여겨져 왔다. 초목 등을 그려 넣은 에가라쓰, 반점이 특징인 마다라가라쓰, 색의 조화가 아름다운 구로가라쓰 등 그 종류가 매우 풍부하며, 쓰면 쓸수록 깊이가 더해지고 표면이 반들반들해져 소박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꾸미지 않은 단순한 채화와 따스함이 남아있는 촉감 또한 일품이다. 가라쓰에서는 지금까지도 50인 정도의 도공들이 당시 도자기를 만들던 방식인 경사 가마를 이용해 도자기를 생산하고 있다. 일본산 도자기 중에서도 고급 도자기로 여겨지는 이마리야키는 희고 아름다운 도자, 화려한 채화를 지닌 도자 등 다양한 양식을 지니고 있으며 높은 내구성을 지녀 식기로 쓰기에도 적합하다. 원래는 아리타야키지만 이마리항에서 출항하여 유럽으로 수출되어 이마리야키로 유명해졌다. 험준한 산세 덕분에 ‘비밀의 도자기 마을’이라고 불리는 이마리의 오오카와치야마는 도자기 기술을 외부로 유출하지 않고 300년의 역사를 이어오며 현재까지도 약 30개의 가문에서 도자기를 생산하고 있다. 산수화를 연상케 하는 풍경을 따라 산길을 걷다 보면 옛 가마의 흔적 등 역사적 문화 유산과 함께 각양각색의 도자기를 만날 수 있다. 일본 대표 도자기 마을 사가현으로 떠날 계획이라면 인천공항에서 티웨이항공 직항을 이용하면 80분만에 도착 가능하다. 후쿠오카 공항이나 하카타항을 거쳐 가는 방법도 있다. 사가현에 도착하면 사가공항~다케오~우레시노~JR하카타역을 운행하는 현지 투어 셔틀버스인 사가 쿠루쿠루 셔틀을 타거나 리무진 택시, 렌터카 등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또한 사가현에서는 한국어가 지원되는 다국어 콜센터와 전용 관광 애플리케이션인 ‘DOGAN SHITATO’를 운영하고 있어 여행에 필요한 각종 정보들을 손쉽게 얻을 수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충북 지자체 너도나도 인물마케팅

    충북 자치단체들이 너도나도 지역과 관련된 인물 알리기에 뛰어들고 있다. 인물을 통해 지역 홍보와 관광객 유치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다. 충북 단양군은 도담삼봉 유원지에 조선 개국공신인 정도전 역사기념관을 건립키로 했다고 6일 밝혔다. 이 기념관은 활용도가 낮아 애물단지였던 광공업전시관을 리모델링해 꾸며지며 총 10억원이 투입된다. 내부는 정도전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수 있는 정도전 자료실, 조형물, 포토존 등으로 구성된다. 군은 정도전 유적지 답사 및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할 계획이다. 유년시절을 단양에서 보낸 정도전은 자신의 호를 ‘삼봉’으로 지을 정도로 도담삼봉에 애착을 뒀다. 도담삼봉에 얽힌 전설도 있다. 원래 도담삼봉은 강원도 정선의 삼봉산이 홍수 때 떠내려온 것으로, 이 때문에 단양이 정선에 세금을 물었는데 어린 정도전이 “우리가 삼봉을 갖고 온 것도 아니고 오히려 물길이 막혀 피해가 크다”며 세금을 중단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장대현 군 관광특구 담당은 “올해 안에 기념관 공사를 마무리할 계획”이라며 “준공되면 도담삼봉과 함께 관광명소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증평군은 2018년까지 45억원을 투입해 김득신문학관을 짓는다. 김득신은 조선시대 독서광이자 17세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증평읍 율리에 그의 묘가 있다. 군은 군립도서관 인근에 김득신 문학관을 지어 복합 문화·예술공간과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문학관은 김득신의 역사적 자료를 볼 수 있는 전시실, 문학 동호인들을 위한 창작사랑방, 문학토론방, 소규모 공연장 등을 갖출 예정이다. 이응란 군 문화예술팀장은 “김득신은 증평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며 “고전문학과 관련된 기념관이 적어 문학에 관심이 많은 타 지역 사람들이 찾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진천군은 독립운동가인 이상설 선생 생가 일원인 진천읍 산척리에 전시실, 추모실, 자료실 등을 갖춘 1917㎡ 규모의 이상설기념관을 건립하기로 했다. 군은 이상설 선생 순국 100주년이 되는 2017년 기념관을 착공, 이듬해 공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이상설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린 독립운동가다. 중국과 일본 등의 수학책을 최초로 번역해 ‘근대 수학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인물을 활용한 지자체 간 공동프로젝트도 추진되고 있다. 증평·진천·괴산·음성 등 도내 중부 4군은 국비 30억원을 확보해 청소년들을 위한 국어·영어·수학·미술 통합캠프를 운영한다는 구상이다. 현재 증평은 김득신 독서서당, 진천은 이상설 수학캠프, 괴산은 김홍도 사생대회, 음성은 반기문 영어경시대회를 진행하고 있다. 음성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고향이고, 괴산은 김홍도가 현감을 지낸 인연이 있다. 이 사업은 지역발전위원회 심사를 통해 다음달쯤 국비지원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다. 중부 4군은 국비가 확보되면 공동캠프 운영과 이야기길 조성 등을 추진할 예정이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해외여행 | 세 가지 빛깔 네팔 여행

    해외여행 | 세 가지 빛깔 네팔 여행

    히말라야를 품은 순백의 나라, 설산만큼 순수한 사람들이 사는 대지, 가난해도 행복지수가 높은 무욕의 삶….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네팔의 표정은 훨씬 다채로웠다. 카트만두, 포카라, 치트완으로 떠난 백, 청, 홍 세 빛깔 네팔 여행기. ●白 포카라Pokhara히말라야 미니 트레킹 포카라에 머문 사흘 내내 찌푸렸다. 네팔의 우기(6~9월)는 9월 중순 끝자락으로 몰려서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하늘은 잿빛에서 먹색으로, 다시 희붐하게 변색하며 비를 흩뿌리다 거두길 거듭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Annapurna는 그 너머에서 아득했다. 짙고 자욱한 흰 벽 뒤로 안나푸르나안나푸르나 지역은 에베레스트Everest 지역과 함께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산맥을 구성하는 산군이다. 만년설로 새하얀 안나푸르나 주봉8,091m을 비롯해 안나푸르나Ⅱ7,939m, 안나푸르나 남봉7,219m, 마차푸차르Machhapuchhre 6,998m 같은 고봉준령이 불쑥 잇따르며 수직의 위용을 과시한다. 산 좀 탄다 싶으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4,130m나 마차푸차르 베이스캠프MBC 3,700m로 방향을 잡는다. 시간, 체력, 경험 모두 충분치 않을지라도 사랑코트Sarangkot 1,592m나 푼힐Poonhill 3,210m 같은 전망대가 있으니 안나푸르나 조망은 어렵지 않다. 관건은 언제나 날씨다. 안나푸르나로 향할 때 그 전초기지는 네팔 제2의 도시 포카라다. 네팔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페와 호수Phewa Lake 덕분에 호반 휴양도시의 정취가 물씬하다. 맑은 날이면 안나푸르나 연봉이 호수 표면에 그대로 내려앉는데 그 환상 같은 풍경을 쫓아 노 젖는 배들로 호수는 복작댄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부질없을 줄 알면서도 작은 나무배에 올랐다. 거무튀튀한 구름에 막힌 빛이 호수 물빛을 괴이할 정도로 짙은 옥빛으로 만들었을 뿐 안나푸르나의 반영은 없었다. 날씨 흐린 게 제 탓도 아닌데 여자 뱃사공은 기회 날 때마다 탁한 허공을 가리키며 저 즈음에 안나푸르나가 있다는 둥 어쨌다는 둥 졸지에 죗값을 치렀다. 끝내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꼭 보고야 말겠다는 헛된 욕심만 부풀렸다. 안나푸르나 미니 트레킹은 그래서 더 비장했다. 오스트레일리안 캠프Australian Camp 1,920m를 목적지로 삼았다. 푼힐 전망대나 사랑코트 같은 대중적 코스에 비하면 생소하지만 그만큼 덜 북적이고 더 호젓하다. 포카라에서 차량으로 40~50분쯤 굽이진 산길을 오르면 칸데Kande 1,750m라는 마을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오스트레일리안 캠프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산행거리다.그저 산을 좋아할 뿐이라는 원로급 산악인 여럿도 동행했다. 소싯적부터 히말라야를 숱하게 오르내린 산악인의 아우라는 숨길 수 없었다. 꼬박 이틀을 걸어 올랐던 길을 이제는 차로 단박에 오르니 그 감회도 남달랐으리라! 초행 초보 트레커의 기운을 북돋기 위함이었을까, 일순 안나푸르나가 구름 커튼을 젖히고 빼꼼히 내려봤다. 푸른 다랑이 논 위로 드러난 은빛 자태가 눈부셨다. 극적인 등장에 우왕좌왕 헤매다가 금세라도 숨을까 조마조마했다. 저 위에 오르면 더 가까이에서 더 웅장하게 맞이할 수 있겠지, 숨이 헉헉대는 가파른 길이었지만 흥이 났다.그 비탈길을 오르내리며 등하교하는 산간 마을 꼬마들과 마주칠 때면 밭은 숨이 창피했다. 나마스테! 이방인과 현지인의 길이 교차했다. 구름이 몰려오니 서둘러라, 하산길의 이방인이 조언했을 때 이미 때는 늦었었나 보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흰 벽은 아무리 기다려도 걷힐 성싶지 않을 만큼 짙고 자욱했다. 아랫마을 담푸스Dampus로 옮겨 다시 기회를 엿봤지만 아예 비가 내렸다. 더 이상 욕심 부릴 수 없으니 차라리 후련했다. 빗속에서 노래가 퍼졌다. 인생을 읊조렸고 사랑을 갈구했다. 산사람들의 노래는 처연했다. 4년 전 9월 중순, 안나푸르나 남벽 등정을 위해 떠났다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박영석 대장과 대원을 위한 조가였다. 조가는 비와 안개를 뚫고 더 다가갈 수 없는 아득한 산에 스몄다. 서로들 촉촉해진 눈을 피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靑 치트완Chitwan네팔 정글 사파리 네팔의 단편만 알았던 덕에 치트완은 흥미로웠다. 위로 솟은 수직의 히말라야 대신 수평의 평야와 밀림이 드넓었고, 카트만두의 소음과 번잡함은 찾을 길 없이 고요하고 평온했다. 코끼리, 코뿔소, 호랑이 노니는 그곳에서, 아련한 향수에 젖었다. 수평의 푸른 대지에서 향수에 젖다새로운 네팔을 만나는 데는 카트만두에서 소형 비행기로 30분이면 족했다. 치트완 바라트푸르공항Bharatpur Airport에 내리자마자 덥고 습한 기운이 턱 몰려왔다. 네팔 남부 지역이니 당연했지만 히말라야 설산의 차가운 기운만 떠올렸던지라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드넓게 펼쳐진 초원과 평야도 생경했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의 나라에서 해발 60m에 불과한 수평의 대지가 이토록 광활했다니….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했다. 타루Tharu족이 살고 있는 치트완 사우하라Sauraha 마을은 아련한 향수를 불렀다. 영락없이 30~40년 전 우리네 시골마을이었다.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하릴없는 아낙들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너른 풀밭을 운동장 삼은 천진난만한 동네 꼬마들 사이로 물소가 풀을 뜯었다. 호박잎 줄기를 벗기는 처자는 수줍은 미소로 이방인을 바라봤다. 흙벽과 나무로 지은 집은 초라하다기보다 따스함으로 정감 어렸다. 조무래기들은 자기들이 찍힌 사진을 보며 까르르르 웃고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다시 찍어 달라 카메라 앞에 섰다. 잊었던 어린 시절 해질 무렵의 풍경이 떠올라 아련했다. 그 마을에서 치트완 정글 탐험에 나섰다. 치트완은 1973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고 유네스코는 1984년 세계자연유산 목록에 올렸다. 희귀종인 외뿔코뿔소와 멸종위기종인 벵골호랑이 등 40종 이상의 포유동물과 450종 가량의 조류가 서식하고 있단다. 마을에 호랑이와 코뿔소 조형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카누에 정글 트레킹 그리고 코끼리 등에 업혀서까지 치트완 정글 곳곳을 누볐는데, 932km2에 달하는 전체 면적을 생각하면 진면목에 다가서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투어용’으로는 탁월했다.나무 카누에 올라 마을과 정글을 가르는 라프티강Rapti River의 흐름을 따랐다. 땅 속과 위, 그리고 물 속에서 각각 1,000년씩 총 3,000년을 살 정도로 단단하다는 살Sal나무로 만든 카누였지만 야생 악어와 맞닥뜨렸을 때의 긴장감은 어쩔 수 없었다.물 속에 손을 넣지 말라는 정글 길잡이의 지시에 충실할 수밖에…. 강 양쪽 둑으로 공작새며 이름 모를 야생조류들도 출몰했는데 악어와 달리 평온함을 선사했다. 탐험객의 긴장이 느슨해졌다고 판단한 건지, 길잡이는 카누에서 내려 정글 트레킹에 나서기 전 잔뜩 겁을 줬다. 코뿔소와 곰은 물론 호랑이와도 마주칠 수 있으니 반드시 뭉쳐서 다녀야 한다는 둥, 코뿔소가 달려들 때는 지그재그로 도망쳐야 한다는 둥, 얼마 전 마을의 한 소녀가 호랑이에게 공격당했다는 둥 진지했다.정작 정글에서 만난 것은 순하고 겁 많은 사슴과 들소뿐이어서 맥이 풀렸다. 호랑이와는 마주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 아니냐며 스스로 다독였다. 다음날, 코끼리를 타고 정글 투어에 나섰다가 강가 진흙에 선명하게 찍힌 호랑이 발자국을 보니 더욱 그랬다.조련사까지 포함해 5명을 등에 업고 물살 센 강을 건너고 빽빽한 숲을 비집는 코끼리의 수고스러움에 대한 연민만 극복한다면 코끼리 정글 트레킹은 이곳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정글 탐험법이다.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코끼리 걸음 특유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정글의 정취를 느긋하게 누렸다.호랑이쯤 못 보면 어때, 일찌감치 욕심을 버렸는데 풀숲에서 뭔가 바스락거렸다. 기연가미연가 시선을 집중하려들자 쑤욱 육중한 몸을 드러내는 코뿔소! 코끼리에게 덤벼들면 어쩌나 걱정도 잠시, 녀석은 관심 없는 듯 느릿느릿 제 갈 길 가며 제 볼일을 봤다. 무사의 철갑을 두른 듯 빈 틈 없는 그 투박한 외양이 맘에 들었다. ●紅 카트만두Kathmandu세계문화유산 순례 4월 네팔을 흔든 강진은 수도 카트만두에도 상처를 남겼다. 생명과 문명이 스러졌다. 5개월이 흘렀어도 상흔은 있었다. 다행히 흐릿했다. 삶은 일상을 되찾았고 흔들린 건물은 다시 섰다. 카트만두의 세계문화유산도 변함없이 여행자를 반겼다. 카트만두 첫 여행자들이 대개 그러하듯 타멜 시장Tamel Market에서 일정을 시작했다. 카트만두의 대표적 전통시장이다. 이어지다 갈라지고 다시 합류하기를 반복하는 골목 길목마다 삶의 활기가 펄떡였고, 골동품이며 과일이며 옷가지며 삶을 지탱하는 물품으로 빼곡했다. 크고 작은 불탑과 힌두교 건축물도 가세해 티베트불교와 힌두교가 혼재된 네팔의 색채를 더했다. 네팔의 옛 왕국들은 카트만두 밸리Kathmandu Valley로 불렸던 카트만두 분지 일대를 본거지로 삼았다. 카트만두, 박타푸르Bhaktapur, 파탄Patan 왕국이다. 왕궁과 함께 네팔 전통 건축물이 보존돼 있어 가치가 높다. 유네스코도 일찌감치 그 가치를 인정했다. 네팔의 8개 세계문화유산 중 석가모니의 탄생지인 룸비니Lumbini를 제외하고 모두 카트만두 밸리에 있다. 이러니 카트만두 여행은 곧 세계문화유산과의 동행일 수밖에 없다. 타멜 시장의 인파에 밀리다 더르바르 광장Durbar Square에 다다랐다. 왕궁이라는 뜻을 지닌 더르바르는 이곳이 옛 왕궁이었음을 알려 줬다. 힌두교의 원숭이 수호신인 하누만에서 이름이 유래된 하누만 도카Hanuman Dhoka 왕궁이 중심이다. 자간나트 사원Jaganath Temple에 서서 광장을 둘러보니 어떤 건축물은 나무 버팀목에 의지한 채 위태롭게 서 있었다. 가시지 않은 지진의 상흔이었다. 자간나트 사원 처마 받침목의 ‘에로틱 조각Erotic Carving’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 무거운 마음이 조금 가셨다.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남녀의 성애 장면을 조각했다고 하는데 노골적이어서 살짝 민망했다. ‘살아 있는 신’ 쿠마리가 살고 있는 쿠마리 사원Kumari Ghar에도 들렀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힌두교의 여신을 대신하는 살아 있는 신으로, 3~8살 소녀 중에서 선택해 이곳에 모시고 초경 때까지 섬긴다는데, 종교적 행사가 아닌 이상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갇혀 지내는 셈이니 외지인의 시각에서는 측은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3대 고도 중 파탄을 만나지 못해 아쉬웠지만 붉은 기운이 감도는 박타푸르가 이를 달랬다. 옛 정취가 고스란하고 규모도 컸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에 세워진 옛 건축물들이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중세 도시에 현대인이 거주하는 풍경은 압권이었다. 세계적 문화재 속에 일반인의 주거지가 함께 있다니, 놀라웠다. 광장과 골목마다 가게가 즐비했고 사원이나 왕궁 앞에서도 아무 거리낌 없이 무리 지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다. 타우마디Taumadhi 광장의 위용이 가장 높았는데, 하늘로 솟은 5층 규모의 냐타폴라Nyatapola 사원 덕택이었다. 그 사원에 올라 내려다보니 박타푸르가 한눈에 들어오며 마치 중세시대로 거슬러 간 듯했다. 옛 왕국이 아니더라도 세계문화유산은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보드나트Bodhnath는 네팔에서 가장 큰 불탑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티베트 불교 순례자들과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순례자들은 거대한 스투파를 시계 방향으로 돌며 의식을 치렀고, 한 번 돌릴 때마다 불교 경전을 한 번 읽은 것과 같다는 ‘마니차’는 멈출 틈이 없었다. ‘네팔 속의 작은 티베트’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았다. 원숭이가 많아 원숭이 사원으로도 불리는 스와얌부나트Swayambhunath 역시 마찬가지였다. 2,000년 역사를 지닌 네팔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사원인데, 힌두교 양식도 보태져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300여 개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하얀 돔과 황금빛 첨탑이 눈부신 스투파가 압도했다. 스투파에 새겨진 ‘부처의 눈’은 신성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네팔 힌두교 사원을 대표하는 파슈파티나트 사원Pashupatinath Temple도 지나칠 수 없었다. 네팔 최대의 힌두교 사원이자 성지인데, 외지인에게는 네팔 힌두교인의 장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장소로 더 의미가 있다. 사원 앞으로는 인도 갠지스Ganges강으로 연결된다는 바그마티Baghmati강이 흐른다. 살아서는 여기에서 몸을 씻고 죽어서는 이곳에 뿌려지는 게 힌두교도의 종교적 소망이라고 한다. 강둑에 늘어선 화장시설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장작불이 꺼지면 바그마티강에 뿌려지겠지, 누군가의 마지막 소망이 이뤄지고 있는 그 순간, 어린 소녀는 그 강에서 머리를 감았다. ▶travel infotravel TIP지진 이후 네팔여행2015년 4월25일 지진 발생 이후 우리 정부는 네팔 여행 안전정보를 상향 조정했다.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랑탕 3개 등반지역에 대해서는 ‘철수권고’를, 그 외 지역에 대해서는 ‘여행자제’ 조치를 취했다. 이번 취재는 지진 후 5개월 뒤인 9월 중순에 이뤄졌다. 전문 산악인과 미디어로 구성된 답사팀이 직접 네팔의 주요 여행지를 경험했으며 답사결과를 토대로 여행에 무리가 없다는 점을 주네팔한국대사관 등에 전했다. 대한항공도 지진 여파로 주 1회로 감편했던 인천-카트만두 노선을 10월2일부터 주 2회로 정상화했다. 주네팔한국대사관측은 우기(6~9월) 이후 여행안전정보 단계 재조정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11월10일 현재까지 기존 단계가 유지되고 있다. 네팔 여행 적기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우기(6~9월)가 아닌 10월부터 5월까지가 적기다. 네팔 남부 치트완은 고온다습해 한여름에는 무리가 따를 수 있다. 안나푸르나로 향하는 관문도시인 포카라는 상대적으로 덜 덥고 덜 추운 편이다. 고도에 따른 기온차가 심한 만큼 겨울철 트레킹에는 특히 방한에 신경 써야 한다. 히말라야 트레킹과 문화탐방3대 주요 등반 지역 중 안나푸르나 지역을 중심으로 트레킹이 서서히 이뤄지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안 캠프’는 중국인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기존의 푼힐 전망대 등을 대신해 트레킹 전문여행사인 혜초여행사가 새롭게 개발한 미니 트레킹 코스다. 하산까지 6시간 가량의 트레킹으로 안나푸르나를 조망할 수 있다. 혜초여행사는 우리네 둘레길처럼 히말라야 주변을 걷는 ‘히말라야 라운드’ 상품, 네팔 문화탐방 상품 등도 운영하고 있다. 혜초여행사 www.hyecho.com 02 6263 2000 히말라야 산악 비행기Mountain Flight국내선에 투입되는 소형 항공기를 이용해서 카트만두에서 히말라야 설산을 한 바퀴 돈다. 손쉽게 히말라야 연봉을 만날 수 있는 방법. 왕복 1시간 가량 소요되며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까지 볼 수 있다. 조종석도 잠깐 구경할 수 있다. 비수기에는 170달러선이지만 성수기에는 230달러 수준까지 오른다. 물론 날씨가 좋아야 가능하다.글·사진 김선주 기자 취재협조 혜초여행사 www.hyecho.com, 대한항공 kr.koreanair.com
  • 폭군 이반의 ‘귀족부대’ 무기고 발견 화제

    폭군 이반의 ‘귀족부대’ 무기고 발견 화제

    16세기 ‘폭군 이반’ 시대 러시아 장교들의 군사적 역할을 짐작케 해주는 무기고가 발굴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 등 외신은 4일(현지시간) 모스크바 서부 즈베니고로드 시에서 러시아 ‘귀족 정예부대’ 소속이었던 군인의 지하 무기 창고가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이 무기고는 60여 채의 목조건물 터와 함께 발견됐으며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Russian Academy of Sciences)가 주도해 발굴했다. 폭군 이반, 혹은 뇌제(雷帝)로 흔히 알려져 있는 이반 4세는 1533~1547년까지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이었으며 차르(Tsar)라는 호칭을 사용한 첫 번째 러시아 통치자로서 1584년까지 러시아를 다스렸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1944년 동명 영화로 제작해 그 흉포함이 더욱 널리 알려졌다. 이반 4세는 1550년 귀족 군인 중에서 1000여 명을 직접 선발해 정예부대를 창설했는데, 이번에 발견된 창고의 주인은 바로 이 부대 소속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무기고는 귀족이 기거하던 저택 지하에 위치해 있었는데, 저택이 17세기에 불타 없어졌던 이래로 창고에는 그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보관돼있던 갑옷과 무기들은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채 비교적 양호한 보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발견된 군용품들이 대부분 상자에 담겨 있는 상태였으며, 무기나 갑옷뿐만 아니라 군사용 천막들도 함께 발굴됐다는 점이다. 이에 비춰볼 때 창고 안의 물건들은 개인 물품이 아닌 군사 원정을 지원하기 위한 일종의 군수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견된 유물들에는 투구, 갑옷 조각, 검, 칼집, 화살, 군용 식기 등이 포함돼있다. 유물 중에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정수리 부분이 뾰족하게 솟아있는 투구다. 이는 당시 러시아 고위 군인들이 착용하던 흔한 물건이지만 이번 투구는 예외적으로 가죽 상자에 들어있었으며 화려한 귀 장식, 직물로 된 안감 등과 함께 발견됐다는 점에서 연구 가치가 크다. 학자들은 이번 무기고 발견이 당시 귀족부대의 군사적 역할을 짐작하게 해준다고 말한다. 당시 귀족 군인들이 본인 재산을 투자해 직접 상비군 유지를 도왔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는 것. 다른 귀족들 또한 각자 이와 같은 무기고를 마련했을 것이며 상비군에게 숙소 및 식량 또한 지원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학자들은 밝혔다. 이번 발굴의 과학고문이었던 알렉세이 알렉세예프는 “이제 러시아 군대의 근간을 이루었던 러시아 귀족들이 어떤 형태의 군사 활동을 펼쳤는지 직접 확인하게 됐다”며 “이들은 지하에 각자의 무기고를 마련해 군사 원정 지원을 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사진=ⓒ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英 초등학교 운동장서 ‘해적’ 유골 발견 화제

    英 초등학교 운동장서 ‘해적’ 유골 발견 화제

    운동장 아래에 누군가의 유골이 묻혀있다는 이야기는 어느 학교에나 있음직한 흔한 괴담 중 하나다. 그런데 실제 스코틀랜드의 한 초등학교에서 ‘해적’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굴돼 눈길을 끈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의 3일(현지시간) 보도에 따르면 문제의 유골은 스코틀랜드 수도인 에든버러 시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빅토리아 초등학교의 건물 증축을 위해 시의회 직원들이 지반을 검사하던 중 발견됐다. 빅토리아 초등학교는 뉴하벤 항구와 인접해 있어 시의회 직원들은 옛 선박 정박지의 터가 발굴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예상과 달리 정체불명의 유골이 대신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발견 직후 고고학자들은 유골의 손상이 심각하며 그 옆에서 4000년 전의 도자기 조각들이 발견됐다는 점을 근거로 유골이 청동기 시대 인물일 것으로 추정했었다. 그러나 탄소연대 측정방식을 통해 알아본 결과 유골의 주인은 16~17세기에 생존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망 당시 이 인물은 50대 남성이었고 고고학자들은 그가 해적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로 이 남성이 사망했을 시기 뉴하벤 마을에는 교수대가 하나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주로 마녀 누명을 쓴 여성들이나 해적들이 처형됐다. 또한 유골이 손상됐다는 점, 그리고 주변의 여러 다른 묘지 중 하나에 묻히는 대신 바다 가까운 장소에 묻혔다는 사실 등에 미루어 봤을 때 이 남성은 처형 직후 바다 위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위치에 매달려 ‘전시’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다른 해적들에게 보내는 경고 메시지의 역할을 했으리라는 것. 또한 이 유골은 깊지 않게 매장됐으며, 무덤임을 나타내는 어떠한 표식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남성의 묘를 찾아올 친인척이 도시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그가 연고 없는 범죄자였을 가능성에 더욱 무게가 실린다. 리처드 루이스 에든버러 시의회 문화의원장은 “에든버러 시의 고고학 및 박물관 인재들이 힘을 합쳐 이 같은 발견을 해냈다는 점이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로라 톰슨 빅토리아 초등학교 교장은 “학생들은 놀이터 깊은 곳에서 유골이 발견됐다는 사실에 흥분한 상태”라며 “곧 고고학자들에게 유골 분석과정에 대한 특별 강의를 열어달라고 요청할 예정이다. 학생들에게 좋은 학습기회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악귀 쫓아낸다고 믿어… 건강·성공 상징하는 동물로 숭배

    악귀 쫓아낸다고 믿어… 건강·성공 상징하는 동물로 숭배

    게와 원숭이가 떡을 해 먹기로 했다. 떡이 다 되자 원숭이가 가로채 나무 위로 올라갔다. 게가 나눠 먹자고 사정했지만 원숭이는 모르는 척했다. 나무 위에서 게를 놀려 대며 혼자 먹다가 떡을 땅에 떨어뜨렸다. 게가 떡을 얼른 주워 굴속으로 들어갔다. 이번엔 원숭이가 굴 앞에서 게에게 떡을 나눠 먹자고 애걸복걸했다. 게가 들은 체도 하지 않자 원숭이는 자신의 엉덩이로 굴을 막고 방귀를 뀌었다. 그 순간 게는 원숭이 엉덩이를 물어뜯었다. 이 때문에 원숭이 엉덩이는 오늘날까지 털이 없이 빨갛고, 게 앞발에는 아직도 원숭이 엉덩이 털이 붙어 있다.(게 다리와 원숭이 엉덩이 형상에 관한 설화) 병신년(丙申年)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설화 속 얘기 그대로 ‘붉은 원숭이’해다. 동양문화권의 신화에서 원숭이는 가장 사랑받는 동물 가운데 하나다. 원숭이는 대개 추하고 장난을 좋아하는 재수 없는 동물로 통했다. 그러나 스님을 도와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오는 데 공헌한 원숭이의 활약이 여러 희곡과 소설에 등장하면서 원숭이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악귀, 악마 등 사기(邪氣)를 물리치거나 쫓을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어 사람들의 건강을 지키고 성공을 이루게 해 주는 동물로 여겨지게 됐다. 사람들은 아프거나 장사나 시험에 실패하는 것은 악마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귀신을 쫓기 위해 축귀의 힘이 있다고 믿는 원숭이를 숭배하기도 했다. 원숭이는 십이지의 아홉 번째 동물이다. 시간으로는 오후 3~5시, 방향으로는 서남서, 달로는 음력 7월에 해당하는 방위신이며 시간신이다. 원숭이는 인간과 가장 많이 닮은 영장동물로, 만능 재주꾼이다. 원숭이해에 태어난 사람을 원숭이의 생태적 특징에 빗대 ‘재주가 많고 영리하다’고 하는 이유다. 원숭이는 부부지간이나 자식에 대한 사랑도 극진하다. 창자가 끊어질 정도의 지극한 모정을 의미하는 ‘단장’(斷腸) 고사가 원숭이에서 유래했을 만큼 원숭이의 모성애는 강하다. 하지만 사람을 너무 많이 닮은 모습과 간사스러운 흉내 등으로 인해 동양에선 불교를 믿는 몇몇 민족을 제하곤 원숭이를 ‘재수 없는 동물’이라며 기피했다. 띠를 말할 때 ‘원숭이띠’라고 하기보다는 ‘잔나비띠’라고 하는 것도 이 같은 속설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당초 원숭이를 재수 없는 동물로 여겼다. 속신(俗信)에 나타난 원숭이도 그다지 달갑지 않다. 아침에 원숭이에 대해 얘기하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재수가 없다고 여겨 말하는 것조차 꺼렸다. 불교의 영향과 중국·일본의 원숭이 풍속 전래 등으로 부정적인 관념이 희석됐다. 원숭이는 순우리말로 잔나비나 잰나비라고 한다. 잔나비는 원래 신(申) 자의 풀이인 ‘납’이 어근이다. 여기에 작은 것을 의미하는 접두사 ‘잔’과 접미사 ‘이’가 붙어 ‘잔납이’가 된 데 이어 연음으로 잔나비가 됐다. 예부터 우리나라엔 원숭이가 살지 않았다. 조선 전기 문인 어숙권은 ‘패관잡기’에서 우리나라(東國)에는 원숭이가 없으므로 고금 시인들이 원숭이 소리를 표현한 것은 모두 틀리다고 했다. 원숭이가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조선 초기 중국이나 일본에서 선물용으로 들어온 것 같다는 가설만 있을 뿐이다. 우리말에도 17세기까지 원숭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18세기에 와서 한자어인 ‘원성이’가 생겨났고 ‘성’의 음이 ‘승’으로 변해 ‘원승이’가 되고 이것이 또 변해 오늘날 원숭이가 됐다. 한국문학사에서 원숭이를 소재로 한 최초의 작품은 송강 정철(1536~1593)의 ‘장진주사’다. ‘한잔 먹새근여/(중략) 뉘 한잔 먹자 갖고/잰납이 파람 불제야’. 이때만 해도 송강이 잰납이를 실제로 보고 읊은 게 아니라 두보의 시에서 잰납이를 인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 문화 속 원숭이는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구비 전승되는 이야기에선 꾀 많고 재주 있고 흉내 잘 내는 장난꾸러기로 묘사됐다. 청자, 청화백자, 백자 등 도자기에선 도장의 꼭지, 서체(주머니 따위를 묶을 때 풀리지 않게 주머니끈을 고정하는 장식), 작은 항아리, 연적, 수적, 걸상 등에 원숭이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자연에서의 원숭이나 모자 유대 모습 등을 그렸다. 회화 속 원숭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십장생(十長生)과 함께 등장하면서 천도복숭아를 들고 있는 장수의 상징인 원숭이, 불교 설화와 중국 명대 소설인 ‘서유기’와 관련돼 스님을 보좌하는 원숭이, 자연 숲 속에 사는 원숭이 등이다. 시가에선 고독, 설화와 가면극에선 ‘꾀·흉내·재주꾼’ 등의 상징으로 표현됐다. 원숭이는 우리 생활에도 깊숙이 들어와 있다. 전남 지방에선 원숭이날을 좋은 날이라 해서 일을 하지 않고 가무와 음주를 즐기는 곳이 많다. 이날은 위험한 일도 하지 않는다. 칼질을 하면 손을 벤다고 해서 삼간다. 제주에선 원숭이날을 납날이라고도 한다. 납날엔 나무를 자르지 않는다. 이날 자른 재목으로 집을 짓거나 연장을 만들면 좀이 많이 먹게 된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오행과 간지의 배합에서 경(庚)과 신(申)은 모두 금()에 속하고 귀신은 금을 꺼린다고 전해져 경신이 붙은 때에는 어떤 일을 해도 탈이 나지 않는다는 속설도 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목을 ‘낫’으로 고정시킨 ‘뱀파이어 유골’ 폴란드서 발견

    과거 동부 유럽지역에서 행해지던 특별하게 매장된 유골이 또다시 발견됐다. 최근 과학전문매체 라이브사이언스는 폴란드 북서쪽 드로스코 지역에서 목과 골반 등이 낫으로 고정된 유골 5구가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약 17-18세기 매장된 것으로 보이는 이 유골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이들이 소위 '뱀파이어'라는 주장 때문이다. 당시 지금의 폴란드를 비롯 불가리아 등지의 주민들은 뱀파이어로 여겨진 인물을 특이한 방식으로 매장했다. 바로 심장 부위에 금속 재질에 말뚝을 박거나 이번 폴란드 사례처럼 낫으로 신체 부위를 고정해 파묻는 것. 이는 뱀파이어가 다시 무덤에서 부활할 수 없도록 한다는 의미로 자신들과 후손들을 지키기 위해 대대로 내려오는 풍습이다.   발굴을 진행한 연구팀은 "지난 2008년 이후 소위 뱀파이어 매장 방식의 유골이 다수 발견됐다"면서 "목에 낫을 고정시킨 것은 일종의 반-악령 의식으로 다시 이들이 부활해 흡혈과 저주를 막기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동유럽 지역에서는 이같은 유골이 자주 발견되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도 불가리아 고고학 연구팀은 수도 소피아의 한 수도원에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상태에서 심장부위에 금속 말뚝을 박은 유골 2구를 발견한 바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런 종류의 매장이 13~17세기 사이 가장 활발했던 것으로 보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정이 존재한다. 첫 번째로 뱀파이어로 여겨져 묻힌 이들은 대부분 지식인, 귀족, 성직자등 특권층으로 치열한 권력 암투에 밀린 희생양이 주장. 두 번째는 해당 시기 유럽은 흑사병 공포가 만연했는데 일부 특권층을 뱀파이어로 몰고 병균의 원인으로 지목해 살해하는 방식으로 민중 여론을 잠재우려는 의도였다는 분석이다. 종합해보면, 과거 실존했던 뱀파이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무시무시한 흡혈귀가 아닌 역사적 흐름에서 불가피하게 희생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당신이 몰랐던 루벤스 명작들

    당신이 몰랐던 루벤스 명작들

    17세기 유럽 최고 화가로 불린 피터르 파울 루벤스(1577~1640)의 대표 작품들이 대거 국내에 소개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기획특별전 ‘리히텐슈타인박물관 명품전-루벤스와 세기의 거장들’을 통해서다. 이번 기획전엔 대표적인 ‘루벤스 컬렉션’이자 유럽 최고의 왕립박물관 중 하나인 리히텐슈타인박물관의 소장품 중 회화, 조각, 공예, 판화, 태피스트리 등 120여점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였다. 리히텐슈타인공국은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사이에 자리잡은 인구 3만 7000여명의 작은 나라로, 오스트리아의 가장 오래된 귀족 가문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핵심 세력이었다. 이들이 수집했던 미술품은 유럽 왕실 박물관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작으로 르네상스 시대부터 바로크, 근대 비더마이어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걸작들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물관 측은 “이번 전시의 가장 중요한 테마는 루벤스에 대한 다각적 조망”이라며 “그동안 루벤스 작품들은 소묘나 드로잉, 일부 유화작만 국내에 소개됐는데 이번엔 루벤스의 대표작들을 포함해 대형 유화작품만 20점이 넘고 루벤스의 판화 작품이나 태피스트리 작품도 선보인다. 루벤스의 예술 여정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걸작들이 대거 전시되는 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4부로 구성됐다. 1부에선 ‘루벤스 컬렉션’으로 유명한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예술품 수집 역사를 다룬다. 도메니코 구이디의 ‘성모 마리아 흉상’, 멜히오르 바움가르트너의 ‘캐비닛’ 등 르네상스 시대부터 근대 비더마이어 시대에 이르는 리히텐슈타인의 걸작들을 감상할 수 있다. 2부 ‘루벤스와 플랑드르의 거장들’에선 플랑드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루벤스를 비롯해 루벤스 스튜디오 일원이자 유럽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안토니 반다이크와 야코프 요르단스의 작품들을 조명한다. 루벤스의 ‘클라라 세레나 루벤스의 초상’, 반다이크의 ‘제노바 귀족의 초상’, 요르단스의 ‘바다의 선물’ 등 여러 대작들이 국내 최초로 전시됐다. 3부에선 루벤스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북부네덜란드, 이탈리아, 플랑드르 브뤼헐 일가의 작품들을 살펴본다. 박물관 측은 “17세기 플랑드르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북부네덜란드 사회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고 정물화, 풍경화, 초상화, 장르화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들을 접할 수 있다”고 말했다. 4부에선 회화가 아닌 루벤스의 태피스트리와 판화 작품 등을 볼 수 있다. 루벤스의 생애를 다각도로 보여 주는 아카이브 공간을 마련해 ‘거장 루벤스’, ‘인간 루벤스’의 다양한 면모를 고찰할 수 있도록 했다. 내년 4월 10일까지, 관람료 5000~1만 3000원. 1688-9891.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백범일지·윤동주 시집 등 초판본 복간

    백범일지·윤동주 시집 등 초판본 복간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초판본 등 사라질 위기에 처한 옛 책 41권이 옛 모양 그대로 되살아났다. 복간의 주인공은 출판사 한국교과서를 운영하는 출판인 전갑주씨다. 전씨는 32년째 교육·역사 자료, 6·25 전시 자료, 근현대 생활사자료 등 고서를 수집하며 옛 자료 복제본 제작에 힘을 쏟고 있다.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은 태극 문양을 연상케 하는 구름과 빨간 꽃, 파란 새가 그려진 표지에 누런 속지, 한글·한자 병용 표기 등 옛 형태 그대로 복원했다. 김구 ‘백범일지’, 한석봉의 17세기작 ‘어제천자문’, 우리나라 최초 국어 교과서인 ‘국민소학독본’(1895), ‘소년잡지’ 창간호(1908)부터 11호, 6·25전쟁 당시 국어교과서인 ‘비행기’ 등도 마찬가지다. 복간본은 각 1000부씩 한정 판매된다. 전씨는 2006년부터 초판 원본을 한지에 인쇄한 뒤 손수 제본하는 수작업으로 복간을 해오고 있다. 그는 “올해 광복·분단 70년과 국어교과서 탄생 1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복제본을 손수 제작했다”며 “복간본 자료들이 전국 교원들에겐 연구 동기를 부여하고, 해외 동포들에겐 민족 정체성 확립에 활용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아줌마·아가씨 기자의 달콤살벌한 맛짱] 500년 전통 이어온 마카롱

    ●메디치家 카트린, 앙리2세와 결혼하며 제빵사 데려와 마카롱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디저트이지만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 이름도 이탈리아어로 ‘섬세한 반죽’을 뜻하는 마카로네(maccarone)에서 유래했다. 1533년 베네치아 메디치가문 귀족인 카트린이 프랑스 왕인 앙리 2세와 결혼하면서 이탈리아 출신 제빵사들을 프랑스에 데려왔다. 이들이 마카롱 레시피를 프랑스에 전파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17세기부터 프랑스 왕과 귀족들은 마카롱을 간식으로 즐겼고, 대중도 결혼과 같은 잔치나 축제, 종교행사에서 마카롱을 먹었다. ●처음엔 쿠키 형태… 20세기 초 샌드위치형 첫선 초기의 마카롱은 바삭하게 구운 과자 사이에 잼, 크림 등 속을 채운 지금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동그랗게 구운 아몬드 쿠키였다. 1862년 문을 연 파리의 유명 과자점 라뒤레의 창업자 루이 라뒤레의 손자 피에르 데퐁텐이 20세기 초 샌드위치 형태의 마카롱을 처음 만들었다. 이 마카롱이 프랑스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지금까지 이어졌다. 허핑턴포스트에 따르면 프랑스 3대 디저트인 마카롱, 에클레어, 가토(케이크) 가운데 마카롱의 판매량이 나머지의 2배로 가장 많다. 프랑스에 가면 맥도날드에서도 마카롱을 먹을 수 있다. 한 개당 0.95유로(약 1200원) 정도로 저렴한 편이다. 맥도날드는 독일, 호주, 중국 등 일부 매장에서도 마카롱을 판다. 3월 20일은 마카롱의 날이다. 2005년 프랑스 유명 요리사인 피에르 에르메가 주도적으로 만들었다. 미국 뉴욕, 영국 런던 등으로 퍼졌다. 행사에 참여한 베이커리는 손님에게 한 개의 마카롱을 무료로 제공한다. 이날 판매된 마카롱 수익금의 일부는 지역 자선단체에 기부된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프랑스 테러 희생자 130명 추도식

    프랑스 테러 희생자 130명 추도식

    27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도심의 앵발리드에서 열린 ‘11·13 파리 연쇄 테러’ 희생자 추도식에서 프랑수아 올랑드(앞줄 가운데) 대통령과 유가족, 정치인, 경찰관 등이 기립해 비통한 표정으로 희생자 130명의 넋을 기리고 있다. 17세기에 건립된 앵발리드에는 나폴레옹의 묘와 군사 박물관이 자리해 죽은 프랑스 군인의 추도식이 열리곤 한다. 파리 AP 연합뉴스
  • [씨줄날줄] 파리 크루아상 & 이슬람 초승달/구본영 논설고문

    초승달(新月)은 무슬림의 상징이다. 한때 중동의 패권국이었던 페르시아 사산왕조의 문양이었지만, 그 유래는 더 길고 모호하다. 예언자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박해를 피해 메디나로 ‘성스러운 피신’(헤지라)을 할 때 밤하늘에 떠 있던 초승달을 가리킨다는 말도 있다. 어쨌든 이슬람권 국기엔 대개 초승달이 그려져 있다. 초승달이 이슬람권 전사들의 신월도(新月刀), 즉 시미타르에서 유래했다는 오해도 있긴 했다. 이는 13세기 십자군 전쟁 이래 기독교를 표상하는 십자가에 비해 시미타르가 풍기는 호전성을 억지로 부각시키려는 억측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슬람권에서 초승달이 깜깜한 밤이 지난 뒤 떠오르는 것처럼 ‘진리의 시작’이라는 신성한 함의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슬람권 국가들의 적십자사인 적신월사의 상징 마크도 ‘붉은 초승달’이다. 초승달과 프랑스인들이 먹는 빵 ‘크루아상’이 닮은꼴임은 우연이 아니다. 이 빵의 기원이 17세기 말 이슬람제국 오스만튀르크의 유럽 침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니 말이다. 당시 초승달 깃발 부대가 오스트리아까지 쳐들어오자 폴란드 왕이 이들을 물리치고 만든 빵이 나중에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가 루이 16세와 결혼하면서 파리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 유래가 맞다면 크루아상에는 문명 갈등의 상흔이 배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크루아상은 오늘의 프랑스인들에게는 그저 맛있는 빵일 뿐이다. 지난 주말 프랑스 파리에서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가 저지른 잔혹한 테러가 지구촌을 뒤흔들고 있다. 크루아상을 즐겨 먹던, 무고한 보통의 파리 시민 수백 명이 희생되면서다. 프랑스는 물론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 전역과 신대륙인 미국까지 초비상이다. 특히 IS와의 전쟁을 선포한 프랑스는 연일 IS의 본거지인 락까를 공습했다. 그런 가운데 그제 한 파리지앵이 페이스북에 올린 편지가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대학살의 현장이었던 바타클랑 극장에서 아내를 잃은 남편의 애절한 사부곡(思婦曲)이다. 프랑스 지역방송국에서 일하는 언론인 앙투안 레리가 테러범들에게 쓴 메시지였다. 그는 17개월 된 아들의 엄마였던 아내 엘렌의 차가운 주검 앞에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다”면서도 단 한마디도 증오의 언사는 담지 않았다. 외려 “내 이웃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내 안위를 위해 자유를 포기하길 바랐다면, 당신들은 틀렸다”는 의연함과 함께. 파리 테러를 사주했던 이들이 간과했던 또 다른 비극이 싹트고 있다. ‘톨레랑스의 나라’ 프랑스마저 무슬림 이주자들에 대해 배타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니…. 전 세계 무슬림의 1%도 안 되는 극단주의 세력이 평화와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지향하는 이슬람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다면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니다. 구본영 논설고문 kby7@seoul.co.kr
  • [이광식의 천문학+] 우주의 진화 밝힌 ‘철학자 ​칸트’...외계 생명체를 예언하다

    [이광식의 천문학+] 우주의 진화 밝힌 ‘철학자 ​칸트’...외계 생명체를 예언하다

    -'천문학자' 칸트의 태양계 형성설 '순수이성비판'을 쓴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박사학위 논문이 철학이 아니라 천문학 이론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1755년에 발표된 칸트의 학위논문은 그 제목부터가 '일반 자연사와 천체 이론'이었다. 하긴 그 시대는 철학과 천문학 사이에 명확한 선이 없던 때이기는 했다. 하지만 칸트의 논문은 명확히 천문학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것도 우리 태양계의 생성에 관한 학설로, 흔히 성운설'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현대 천문학 교과서에도 ‘칸트의 성운설'(Kant’s Nebula Hypothesis)로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다. 일찍이 뉴턴 역학에 매료되어 대학에서 철학과 함께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던 칸트는 ​틈틈이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측하며 천문학을 연구한 천문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대선배인 아리스토텔레스 세계관이 뉴턴에 의해 붕괴되는 것을 보고 새로운 시대의 우주론에 깊이 빠져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는 세계를 달을 기준삼아 천상계와 지상계 둘로 쪼개고, 그 소통을 금지시켰다. 따라서 기왕의 천문학에서는 천상은 불변 완전한 세계이고 천체들은 올림포스 신들처럼 신성한 존재였다. 그러나 천상이든 지상이든 중력의 법칙이 온 우주를 관통한다는 것을 증명한 뉴턴의 역학 앞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뉴턴 물리학의 등장으로 천문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천상의 천체들 역시 지구처럼 질량을 가지고 중력으로 빈틈없이 묶여 있는 물체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즉, 지상의 물리학은 천상에서도 적용되며, 지상의 물리학을 통해 우주의 상황을 알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인간의 몸은 비록 지상에 매여 있지만, 우리의 지성은 온 우주로 확장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제까지 항성천구에 붙어 있는 점으로 간주되었던 하늘의 천체들이 질량을 가진 물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하나의 흥미로운 문제가 제기되었다. 천체들의 내력, 곧 우주의 역사라는 문제에 인류가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전에는 사실 태양계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태양계라는 개념이 생긴 것은 17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 그럼 이 태양계는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나? 세계의 탄생과 멸망에 관한 이론들은 고래로부터 각 문명권마다 있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인류는 이러한 생멸 이론을 태양계에 접목할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뉴턴 이후에야 비로소 천체 형성에 관한 이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뉴턴 사후 22년이 지난 1749년,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박물학자인 조르주 드 뷔퐁이 태양계 형성에 대한 주목할 만한 이론을 발표했다. 뉴턴에 깊이 영향 받은 뷔퐁은 태양계는 공통의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 기원은 혜성이 태양에 충돌해 거기서 물질들이 빠져나옴으로써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물질들은 중력으로 인해 뭉쳐져 둥근 형태를 이루었으며, 서서히 식어 행성이 되었고, 더 작은 덩어리들은 위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두 개의 천체가 충돌하는 것은 우주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다. 심지어 은하들도 충돌하고 있다. 우리은하도 37억 년 후에 안드로메다 은하와 충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뷔퐁의 혜성 충돌설은 최초의 본격적인 태양계 형성설로, 이로써 그는 ‘우주 파국 이론’의 창시자가 되었다. -​칸트의 성운설과 섬 우주론 이 뷔퐁의 뒤를 이어 태양계 형성설을 들고나온 사람이 바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였다. 31살인 1755년에 발표한 '일반자연사와 천체 이론'에서 칸트는 뉴턴 역학의 모든 원리를 확대 적용하여 우주의 발생을 역학적으로 해명하려 했다. 이것이 바로 뒷날 유명한 ‘칸트-라플라스 성운설’로 알려진 우주 발생 이론이다. ​ 뉴턴이 생성 운동의 기원을 신의 '최초의 일격'으로 돌린 데 반해, 칸트는 우주의 생성과 진화에 사용되는 힘들을 물질에 내재하는 중력과 척력(반발 작용), 그리고 그 안에서 대립되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이 설에 따르면, 원시 태양계는 지름이 몇 광년이나 되는 거대한 원시 구름인 가스 성운이 그 기원이다. 천천히 자전하던 이 원시 구름은 점점 식어가면서 중력에 의해 중심 쪽으로 낙하하는 현상이 일어남으로써 수축이 이루어져 회전이 빨라지고, 마침내 그 중심부에 태양이 탄생되고 주변부에는 여러 행성들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행성들이 자전하면서 거기에서 떨어져나온 것들이 바로 위성이다. 칸트는 이러한 방식으로 진화론적 생각을 역학 법칙에 따르는 천제 운동의 과학적인 설명과 결합시켰다. 엥겔스는 바로 이 점에서 칸트가 형이상학적 세계상을 극복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이라고 보고, "현재의 모든 천체가 회전운동을 하는 성운 덩어리로부터 발생했다는 칸트의 이론은 코페르니쿠스 이래 천문학이 이룩한 가장 커다란 진보였다"고 평했다. ​ 칸트의 성운설은 행성들의 동일 평면상에서의 운동, 공전방향과 태양의 자전방향과의 일치 등을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초의 과학적인 태양계 기원설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칸트의 성운설은 한마디로, 태양을 비롯하여 행성, 위성, 혜성 들이 원초적인 근본물질들에서 분리되어 우주 공간을 채웠으며, 그 안에서 형성된 천체들이 태양계 공간을 운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칸트의 아래와 같은 추론은 현대 생물학자들의 견해에 접근하는 놀라운 예지의 소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채워진 공간에서 고요함이 지속되는 것은 일순간일 뿐이다. 원소들은 서로를 움직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 자체가 생명의 근원이다. 물질은 형태를 이루려고 분투한다. 흩어진 원소들 중 밀도가 높은 것은 가벼운 원소들을 주위로 끌어들인다.” '정신과 자연'의 저자인 영국의 생물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그의 책 안에서 “원자는 스스로 생명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한 말과 너무나 흡사한 주장이 아닌가! ​ -'외계 생명체'를 예언한 칸트 원시 태양계 형성의 얼개를 만든 칸트는 별들에 대해서도 기왕의 이론들과는 사뭇 다른 주장을 펼쳤다. 직접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측하기도 했던 칸트는 별들 역시 태양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비슷한 체계 안에 들어 있는 중심‘이라고 보았다. 이로써 태양계와 별들 사이의 관계를 정립한 칸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원리를 은하계로까지 확대했다. 그는 은하계가 거대한 렌즈 모양을 하고 있으며, 별들이 은하 적도 부근에 밀집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우리의 항성계가 다른 우주의 체계들, 성운들과 비슷하다고 보았다. 칸트는 자신의 우주론에 대해 갖고 있는 깊은 믿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는 어떤 꾸밈도 없이, 운동 법칙대로 잘 정돈된 세계가 생겨나는 것을 보면서 만족한다. 그것은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우주와 아주 비슷해 보이므로, 나는 그것을 진실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망원경으로 밤하늘에서 빛나는 나선 형태의 성운을 관측하기도 했던 칸트는 당시 성운으로 알려졌던 드로메다자리의 M31이 수많은 별들로 구성된 또 하나의 은하일 것이라는 구체적인 제안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나선형 성운에 ’섬 우주'(island universe)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주기까지 했다. 지금이야 이런 성운들이 외부 은하임이 밝혀졌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 은하 내부의 성간운이라는 주장이 널리 퍼져 있었다. 외계 생명체에 대한 칸트의 추론 역시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생명은 천체들이 진화한 결과 생겨난 것이지, 신의 창조 행위로 생겨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칸트는 19세기의 진화론자처럼 ‘생명체는 특정한 외적인 조건들과 연계되어 있다’라고 인식했다. “나는 모든 행성들에 다 생명체가 살고 있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또한 이것을 굳이 부정하는 것도 불합리하다. 태양의 티끌에 불과할 정도로 황량하여 생명체가 없는 지역들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모든 천체들이 미처 완전한 형태를 다 갖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거대한 천체가 확실한 물질상태에 도달하기까지는 수천 년에 또 수천 년이 더 걸릴지도 모른다.” 요컨대 외계 생명체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망원경을 통해서 우주가 점점 넓어져가고 새로운 별들이 계속 발견됨에 따라 다른 천체에도 생명체가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 18세기 중반 이후로 점차 넓게 퍼져갔다.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률" 칸트의 이러한 우주 진화론은 창조자로서 신을 중심으로 한 목적론적 질서와 조화라는 견해와 모순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칸트는 이러한 자신의 시도가 우주의 기계적 완벽성을 순수하게 역학적으로 설명한 것인만큼 신의 완전성과 합목적성의 증거가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칸트의 우주 진화론이 당시에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학자들은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잘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나은 시대를 위해 유보되었던’ 칸트의 진화론은 그들이 보기엔 너무 직관적이고 모호하게 비쳤던 것이다. 그러나 뒤이어 나타난 아마추어 천문학자 허셜이 놀라운 발견들을 거듭하면서 칸트의 진화론을 뒷받침했다. 150센티밖에 안되는 조그만 키에, 80평생 고향 쾨니히스베르크(오늘날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백 마일 이상을 나가본 적이 없으면서도 우주를 누구보다 멀리 내다보았던 사람,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오후 우주의 시계추처럼 일정한 시간에 산책을 다녔던 사람, 노년에 이르도록 깊이 우주를 사색했던 철학자- 이런 것들이 '천문학자 칸트'를 규정할 수 있는 몇 가지 요소들이다. 여담이지만,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칸트에게도 한번은 결혼할 뻔한 적이 있었다. 마을 처녀에게 청혼을 하여 승락까지 받았는데, 머리속엔 늘 생각으로 가득하고, 망설여지기도 하고, 또 깜박하기도 하여 세월을 죽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처녀와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껏 차려입고 처녀의 집엘 갔으나, 아뿔싸! 벌써 20년 전에 이사를 갔다는 것이다. 이것이 칸트 생애에 있었던 로멘스의 총량이다. ​1804년 2월 12일 새벽, 칸트는 늙은 하인이 건넨 포도주 한 잔을 마시고는 "그것으로 좋다”(Es ist gut.)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삶을 마감했다. 향년 80세. 끝으로, 놀라운 직관과 예지로 그 시대의 어느 누구보다 우주의 진면목에 다가갔던 칸트의 묘비명은 우주와 인간을 아우르는 아름다운 내용으로 다음과 같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 마음을 늘 새로운 놀라움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요, 다른 하나는 내 속에 있는 도덕률이다.”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글로벌 인사이트] 700년간 귀족 증세 반대한 상원… 왜 저소득층 증세 막았나

    [글로벌 인사이트] 700년간 귀족 증세 반대한 상원… 왜 저소득층 증세 막았나

    ‘307대277.’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영국 상원이 부결시킨 보수당 정부의 저소득층 증세안은 끝없는 파문을 몰고 왔다. ‘하원 우위의 원칙’이 확고한 영국에서 상원은 법안을 수정하거나 입법을 지연하는 권한만 갖고 있어 관습법(헌법)에 대한 ‘이례적’ 도전이자 용기로 받아들여졌다. 증세안 부결로 굴욕을 당한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이튿날 상원에 대대적인 ‘칼 대기’를 단행하겠다며 정략적 선언을 했다. 조지 오즈번 재무장관도 “선거를 통해 선출된 하원이 입법한 세금 관련 재정 조치를 임명직에 불과한 상원의 야당(노동당·자유민주당) 의원들이 부결시켰다”면서 불만을 표출했다. 캐머런 내각은 주요 결정과 관련해 보수당이 장악한 하원의 영향력을 상원보다 앞세우는 방안을 강구 중이라고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8일(현지시간) 전했다. 이는 장기적 청사진을 갖고 꾸준히 추진해온 기존 ‘상원 개혁’과는 다른 모습이다. 당파성을 앞세운 캐머런 총리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 국민적 동의를 끌어낼지도 알 수 없다. 보수당 지도부가 공공연히 상원 개혁을 외치는 배경에는 과거 노동당 정권이 주도한 개혁으로 수백년간 기득권을 유지해온 상원을 송두리째 빼앗긴 쓰라린 경험이 자리한다. 상원은 이제 귀족들의 사교장이라기보다 국가의 중심을 잡는 비정파적 성격의 원로원 성격이 더 강하다. 내각 책임제인 영국에서 실질적 통치자인 총리와 총리를 배출한 집권당이 하원을 통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보루이기도 하다. 앞서 1911년과 1949년 잇따라 개정된 의회법은 모든 법률안이 원칙적으로 상하 양원을 거치도록 했다. 다만 조세와 재정 지출 관계 법안(Money Bill)은 예외가 인정된다. 상원의 동의를 얻지 못하더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국왕의 재가를 받아 곧바로 시행할 수 있다. 하지만 상원은 정부의 세금 감면 철회안을 일반 법안이 아닌 위임안으로 해석해 부결시켰다. 상원의 정식 명칭은 ‘귀족원’이다. 이런 측면에서 세습 귀족들의 모임에서 유래한 상원이 저소득층의 세금 감면 혜택을 지키겠다고 나선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과거 의회가 왕과 갈등을 빚을 때 쟁점 역시 세금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특권층에 대한 ‘부자 증세’가 문제였다. 이번 세금 감면 철회안을 놓고 상원은 4시간 넘는 토론을 벌였다. 복지를 둘러싼 기득권층과 젊은층의 세대 간 전쟁으로 비화된 정부안을 놓고 원칙을 강조하며 약자의 편을 들었다. 보수당 내부에서조차 이견이 분분한 세제 개편안을 밀어붙인 캐머런 총리의 폭주에 제동이 걸린 셈이다. 이는 앞선 노동당 정부(1997~2010년)의 상원에 대한 체질 개선 덕분이다. ‘영악한’ 토니 블레어 총리는 1330명에 이르던 세습 귀족 의원들을 단 92명만 남겨 놓고 퇴출시켰다. 이들은 대부분 보수당 지지자들이었다. 세습 귀족을 몰아낸 빈자리는 총리의 제청을 받아 여왕이 임명한 종신직 의원들로 야금야금 채워졌다. 이는 상원이 보수당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영국 경제주간 이코노미스트는 “과거 보수당이 (정당한) 상원 개혁을 미뤄왔던 점에서 자업자득”이라고 평가했다. 미리 상원 개혁의 고삐를 잡았더라면 뒤통수를 맞는 일이 없었을 것이란 얘기다. ●증세 문제 때마다 갈등 빚어 영국 정치권에서 상원 개혁이 화두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세기 들어 국민 여론은 세습과 특권을 인정받는 상원에 부정적으로 기울었다. 미국처럼 선거를 통해 상원을 구성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9일 현재 상원에 등록된 정식 의원은 819명에 이른다. 이 중 의원직이 세습되는 귀족이 88명, 성직자가 25명이며 나머지는 종신직(706명)이다. 성직자인 대주교·주교 등은 자리에서 물러날 때 의원직을 상실한다. 정치 성향별로는 여당인 보수당 당적을 지닌 의원은 249명에 불과하다. 오히려 야당인 노동당(212명)과 자유민주당(112명)이 우위를 점한다. 이 때문에 상원은 하원에 비해 정파성이 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세습 귀족이 대거 퇴장하면서 중도세력이 늘어난 덕분이다. 당적도 고정적이지 않다. 보수당에서 자유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겨 개혁을 추진한 처칠 전 수상이 대표적인 사례다. 게다가 1910년대까지도 영국 유권자들은 ‘비국교도=자유민주당’, ‘국교도=보수당’이란 등식 아래 종교적 성향에 따라 투표했다. 영국 의회 홈페이지(www.parliament.uk)는 상원이 의학, 법률, 예술, 경영, 과학, 스포츠, 교육 등 각 분야의 대표성을 갖는 존경받는 직업인들로 구성됐다고 기술했다. 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등 영국 연합왕국에 속한 성인이면 누구가 상원 의원이 될 자격을 갖는다고 명기했다. 1295년 완전한 모습을 갖춘 과거의 상원은 귀족과 성직자, 법률가 등이 주축이었다. 17세기 청교도혁명을 이끈 크롬웰이 공화정을 선포해 잠시 폐지되기도 했으나 20세기 초까지 수백년간 예산 결정과 법률 제정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백발의 가발을 뒤집어쓴 채 망토를 착용한 예전 의원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의회법 개정 뒤 실질적 권한 빼앗겨 1900년대 초반부터 잇따라 이뤄진 의회법 개정은 실질적 권한을 대부분 하원에 넘겼다. 의원들의 구성도 귀족보다 전문 직업인에 초점을 맞춰 점차 바뀌었다. 현재 상원은 주요 법안에 대한 토의와 국가 중대사에 대한 위원회 구성 등의 역할을 맡고 있다. ‘드레스코드’도 변화했다. 의원들은 특별한 행사 때가 아니면 일반적인 정장 차림으로 등원한다. 홈페이지의 갤러리에는 평상복 차림으로 토론에 나선 의원들의 모습과 이를 지켜보는 방청객들이 모습이 담겨 있다. 이곳에는 또 신규 의원, 자격 정지 의원, 사망한 의원 등으로 세분화된 신상 정보가 매일 업데이트된다. 지난달에만 41명의 신규 의원들이 임명됐고, 각기 2명의 의원이 사망하거나 은퇴했다. 신규 의원의 당적을 살펴보면 과반이 넘는 21명이 보수당 소속이다. 야당인 노동당과 자유민주당은 각각 7명, 11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중립이거나 전문직 할당자다. 보수당 정권이 노골적으로 상원에서 세 불리기에 나섰다는 뜻이다. 과거 영국 언론은 노동당 정부의 상원 개혁도 정파적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당시 개혁은 장기적 로드맵을 갖고 이뤄졌다. 어느 정도 보수당과 정치적 합의도 이뤄냈다는 점에서 지금과 달랐다. 영국은 2007년 집대성한 ‘상원 개혁에 관한 백서’에 근거해 꾸준히 개혁을 이어오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2010년 합의안에 따라 상원의 의석 수를 300석까지 줄이고 80% 이상을 선출직으로 바꾸는 일이다. ●상원의 뿌리 깊은 반정부 정서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로드맵에는 세습 귀족 의원뿐 아니라 종신 의원 폐지까지 담겨 있다. 매번 선출되는 의원의 임기는 10~15년으로 5년마다 3분의1을 선거로 물갈이한다. 임명직도 총리의 제청이 아닌 상원 임명 위원회의 제청을 따르도록 했다. 또 무보수 명예직이었던 의원에게는 연간 약 6만 4000파운드(약 1억 1245만원)에 이르는 세비도 지급될 예정이다. 이를 추인할 마지막 선택은 국민 여론에 달렸다. 700년 전통의 귀족원이 ‘원로원’으로 개칭되는 순간이다. 일각에선 이 같은 변화가 자칫 총리·상원·하원을 단일 정당이 독식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걱정한다. 견제와 상생이란 영국 정치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앵글로·색슨족의 왕국이던 영국은 8세기 말부터 노르만인에게 정복당하면서 차츰 서유럽화했다. 노르만왕조의 혈통이 섞인 프랑스 귀족이 왕위를 이어받았고 존 왕에 이르러선 과도한 세금 부과로 귀족 계층과 대립했다. 이때 존 왕은 귀족들이 강요한 ‘대헌장’(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하는 굴욕을 당했다. 이는 의회 정치의 효시이기도 하다. 최근 수년간 상원은 정부 정책을 견제하며 존재감을 과시해 왔다. 정부 정책의 균형을 잡아줬다는 평가도 듣는다. 2002년 정부의 인간배아 복제 법안, 2006년 안락사 허용 법안, 2008년 테러용의자 구금연장 법안에 각각 거부권을 행사했다. 지난 6월 하원이 압도적 표 차이로 승인한 유럽연합(EU) 탈퇴 국민투표 시행안도 상원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김경운 기자의 맛있는 스토리텔링 16] 젓갈과 스시

    [김경운 기자의 맛있는 스토리텔링 16] 젓갈과 스시

     우리 고유의 젓갈, 식해가 일본의 스시(초밥)와 한 뿌리에서 나온 음식이라는 사실을 말하려면 2000여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젓갈과 본래의 스시는 강이나 바다를 끼고 풍요롭게 살아가던 옛 해양 민족의 고급스런 먹거리였다. 젓갈과 스시에 오랜 음식 문명사가 서려 있다. ● 소금 음식저장에 필수... 소금광산 차지가 전쟁의 필수 요건 기원전부터 인류는 상하기 쉬운 생선을 되도록 오랫동안 먹을 수 있는 방법을 고심했다. 그 결과 생선을 소금으로 절이는 염장법을 발견한다. 소금은 생선의 단백질이 필수 아미노산으로 분해되는 것을 도와주는데, 이런 발효와 더불어 저장 기간도 늘려주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소금은 워낙 귀한 식재료여서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기후 조건이 맞는 갯벌이나 지구상에 몇 안 되는 소금 광산에서나 공급이 가능했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북몽골의 거란족을 친 이유나 로마제국이 희생을 무릅쓰고 다키아(루마니아 일대)를 정복한 것도 그들의 거친 땅에 자연이 선물한 소금 광산을 손에 넣으려는 데 있었다. 소금 광산이 있는 곳은 아주 오래전 땅이 아니라 바다였다.  다행히 조수 간만의 차이가 큰 한반도의 서해 주변에는 귀한 소금이 풍부했다. 영산강과 금강을 중심으로 젓갈 문화가 발달한 이유다. 서해 건너편인 중국 산동 지방에서도 일찌감치 젓갈에 대한 역사가 전한다. 한(漢)족인 한나라 무제가 한때 강성했던 동이(東夷)족을 추격해 산동에 이르렀을 때 어디선가 좋은 냄새가 나서 찾아보니, 동이족이 생선을 소금에 절여 흙으로 덮어둔 젓갈 항아리를 발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짭조름한 감칠맛의 대표적인 젓갈에는 황석어젓 등 생선 젓갈 외에도 새우젓, 조개젓, 어리굴젓, 창난젓, 명란젓 등이 있다. 묽은 액젓은 음식 맛을 돋우는 조미료로도 쓴다. 이탈리아의 앤초비는 청어 액젓의 일종이다. ● 밥알로 소금 대체, 생선 뱃속에 밥알 채워 부패막기도 남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일본 규슈, 고대 오키나와, 인도네시아 등 당시 해상 교역이 활발했던 곳에서도 소금은 귀했다. 그래서 소금을 대체할 만한 식재료를 찾았는데, 그게 밥이다. 벼농사는 아시아 남방 지역에서 한반도와 북중국으로 유입됐다. 밥알은 소금보다 부패 억제 등 효능이 떨어졌지만, 그런대로 훌륭한 발효 촉진제다. 갓 잡은 생선의 배를 갈라 내장을 제거한 뒤 밥알을 눌러 채우는 것이다. 익힌 좁쌀 등 다른 곡물을 사용하기도 했다. 나중에 항아리에서 꺼내 먹을 땐 속에 넣어 둔 밥알을 버리고 딱딱하게 곰삭은 생선만 먹었다. 이게 세월이 흘러 일본의 후나즈시(붕어 초밥)와 라오스의 쏨빠, 태국의 남플라 등이 된다. 또 우리 동해 지역에서 발달된 식해도 곡물을 이용해 삭힌 젓갈의 변형이다.  백제와 문명 교류가 잦았던 일본 규슈와 간사이(관서) 지방에서는 후나즈시를 통해 젓갈 문화를 따라가기는 했으나, 만들기 까다로운 후나즈시는 귀족만 즐길 수 있던 고급 음식이었다. 그래서 또 생각해 낸 게 스시다. 생선에 밥알을 채워 1~2년씩 삭혀야 하는 후나즈시는 백성에겐 호사였기 때문에 더 쉽게 만들고 빨리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후나즈시를 속성 발효시키기 위해 누룩을 넣었고 썩는 것을 막으려고 청주도 뿌렸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납짝해지는 것을 빨리 맛보려고 절인 생선을 작은 상자(하코)에 넣어 손으로 눌렀다. 지금도 교토나 오사카의 명물인 하코스시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 밥알 넣어 발효시킨 스시 대신 식초-와사비 이용해 시큼한 맛 만들어 일본의 스시는 17세기 초 교토 등을 근거지로 했던 오다 노부나가 등 백제계 세력이 몰락한 뒤 도쿄를 건설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신라계가 득세하자, 또 한 번의 변신 기회를 맞는다. 교토의 하코스시 맛을 잊지 못하지만 바빠서 엄두를 못 내던 도쿄 젊은이들에겐 재빨리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새로운 스시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연안 도시인 도쿄에 풍부한 날 생선에다 한 움큼의 밥을 싸서 먹기는 했는데, 날 것의 독성을 제거하기 위해 식초와 와사비(고추냉이 뿌리) 소스를 함께 먹었다. 겨자는 고추냉이의 씨로 만든 노란색 소스이고 와사비는 뿌리로 만든 녹색 소스다. 즉 생선을 오랫동안 먹기 위해 밥으로 삭힌 음식이 어느 순간 시큼해서 자꾸 당기는 초밥을 신선한 생선회에 싸서 먹는 음식으로 바뀌었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전통의 도시 교토는 신흥 도시인 도쿄의 이 변종 스시를 외면했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도쿄는 고집스런 교토의 옛 스시를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도 두 지방에선 각자의 스시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고유의 맛을 아끼면서도 훌륭한 변화에는 찬사를 보내는 여유와 배려가 음식 문화를 더 풍요롭게 할 것이다.   <전어> 시인 안도현  날름날름 까불던 바다가 오목거울로 찬찬히 자신을 들여다보는 곰소만으로 가을이 왔다. 전어떼가 왔다. 전어는 누가 잘라 먹든 구워 먹든 상관하지 않고 몸을 다 내준 뒤에 쓰디쓴 눈송이만한 내장 한 송이를 남겨놓으니 이것으로 담근 젓을 전어속젓이라고 부른다.   김경운 전문기자 kkwoon@seoul.co.kr
  • [문화유랑기]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문화유랑기]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김소월의 시 ‘부모’...아이가 던진 '존재론적 물음' 우리네 시인들 중에 소월만큼 그 시를 노랫말로 많이 징발당한 시인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한을 7·5조의 정형률과 토속어에 담아 절절하게 노래한 것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한국 현대문학사 100년에서 최고의 시인으로 선정된 바 있는 소월은 '한국인의 심상을 최고의 격조로 수용한' 시인, '우리 시대 최고의 높이에 도달한' 위대한 시인이라는 평가를 후대의 평자들에게서 받았다. 가곡과 가요로 대중에게 친숙해진 그의 시 중에 '부모'라는 작품이 있다. 1968년 세상에 선보인 이래 어버이날이 있는 오월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이 노래는 이제 가요로서는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만큼 명곡이 되었다. 우선 이 시를 먼저 한번 감상하고 지나가기로 하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겨울의 기나긴 밤,어머님하고 둘이 앉아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이 이야기 듣는가?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김소월 시 '부모' 전문 (노랫말에는 원문 맨 끝의 '알아보랴'가 알아보리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운율상의 문제로 수정한 것으로 보이며, 뜻에는 별 차가 없는 듯하다.) 나 역시 이 시를 노래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노랫말을 듣는 순간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소월의 시라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이 시의 해석에 있어서는 제목 '부모'가 시사하듯이 '효심'에 초점을 맞춰 풀이한 것이 대세인 듯하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풀이이다.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라는 함축적인 말에서 부모를 알기 위해 내가 부모가 되어 그 마음을 헤아려 보기 전까지는 부모가 나를 어떻게 입히고 키우셨겠는가라는 것을 짐작만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일 것이다." (<김소월 전작 시집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정음사)에서> 또는 1920년대라는 일제 강점기의 엄혹한 시대를 사는 한 천재시인이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신의 운명론을 아프게 토로한 시'라는 시각으로 해석을 하는 이들도 없지 않은 듯하다. 물론 그런 해석들을 할 만한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먼저 소월이 첫 연에 제시한 저 '공간'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겨울의 기나긴 밤,어머님하고 둘이 앉아옛 이야기 들어라. 저 공간은 천지사방이 칠흑의 어둠으로 싸여 있는, 호롱불 하나가 힘겹게 어둠을 밀어내며 만들어내고 있는 한줌의 원초적인 공간이다. 그것도 낙엽지는 소리만 우수수 들려올 뿐인 겨울밤의 시공간이다. 이 같은 원초적인 시공간 안에 두 모자는 마주 앉아 있고, 아이는 엄마가 들려주는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아이는 스스로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나는 어쩌다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하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내용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어쩌다가 생겨나서 이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 걸까 하는 근원적인 의문이 아니었을까? 자의식에 눈뜨기 시작한 아이가 최초로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존재론적인 질문- 아, 내가 어쩌다 여기 있게 된 것일까? 그것은 17세기 철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가 한 저 원초적인 질문, '이 세상에는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는가?'란 물음과도 닿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가 다음에 한 말,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한 것은 그 물음에 지금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한 말이리라. 그래서인지 아이는 어머님에게 그런 물음을 던지지는 않았다. 자신이라는 존재의 근원이 되는 '부모'가 되어서 알아보려 한다는 다짐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소월은 자신의 어느 시 뒤에 쓴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시작(詩作)의 가치 여하는 적어도 그 시작에 나타난 음영(陰影)의 여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음영의 가치 여하를 식별하기는, 곧 시작을 비평하기는 지난(至難)의 일인 줄로 생각합니다." 위 시 '부모'의 음영은 짧은 두 연이 지닌 단순한 진술 속에 숨어 있는 웅숭 깊은 존재론적 의미가 아닐까? '효심'이라든가, 옛 이야기 같은 것을 굳이 음영이라 할 수 있을까? 기나긴 겨울밤에 어머니에게 옛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하는 존재론적 자의식에 눈을 뜬 그 아이는 나중에 자라서 시인이 되었다. 그저 그런 시인이 된 것이 아니라, 대시인이 된 것이다. 위의 시에 구사된 시어들 속에 어려운 단어는 하나도 없다. 정말 평이하기 짝이 없는 낱말들로 소월은 이처럼 웅숭 깊은 음영의 시를 만들어낸 것이다. 소월을 천재시인이라 하는 연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일찍이 작가 김동인은 “소월의 시는 시골 과부라도 넉넉히 이해할 것이었다” 라는 찬사와 함께 “조선말 구사의 귀재-그것이 우리의 시인 소월이었다”라고 극찬하기까지 했다.​ 물론 나의 이런 해석이 시인의 마음과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를 그렇게 다양하게 해석하는 것은 독자의 자유이고, 그런 음영을 깔아놓은 시인 역시 바라는 바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음영이 풍부한 시일수록 명시가 된다는 점에서, 소월의 '부모'는 걸작이라는 이름에 값한다고 할 것이다. 소월의 저물녘은 참으로 스산했다. 스물 안팍의 5,6년 동안 불꽃처럼 맹렬히 시를 쏟아냈던 소월은 고향 곽산으로 돌아간 후 조부의 광산업을 돕다가 일이 실패하자 처가인 구성군으로 이사해,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했다. 그러나 그마저 실패하는 바람에 심한 가난과 실의 속에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시골 장터에서 산 아편을 먹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1934년, 그의 가슴에 '부모'의 시상이 처음으로 심어졌던 계절인 12월 24일이었다. 향년 33세. 4남 2녀를 둔 그의 자손 가운데 손녀와 증손녀가 남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증손녀는 성악가 김상은으로, 몇해 전 그의 증조 외할아버지의 시로 된 노래를 모아 음반을 내기도 했다. 내로라 하는 수많은 가수들이 부른 소월의 명작 '부모'-. 그런 기분으로 다시 한번 감상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동영상 www.youtube.com/embed/XhSHtm2KGGE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김소월의 시 ‘부모’에 대한 한 생각-자의식 눈뜬 아이가 최초로 던진 ‘존재론적 물음’

    김소월의 시 ‘부모’에 대한 한 생각-자의식 눈뜬 아이가 최초로 던진 ‘존재론적 물음’

    -자의식에 눈뜬 아이가 최초로 던진 '존재론적 물음' 우리네 시인들 중에 소월만큼 그 시를 노랫말로 많이 징발당한 시인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한을 7·5조의 정형률과 토속어에 담아 절절하게 노래한 것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한국 현대문학사 100년에서 최고의 시인으로 선정된 바 있는 소월은 '한국인의 심상을 최고의 격조로 수용한' 시인, '우리 시대 최고의 높이에 도달한' 위대한 시인이라는 평가를 후대의 평자들에게서 받았다. 가곡과 가요로 대중에게 친숙해진 그의 시 중에 '부모'라는 작품이 있다. 1968년 세상에 선보인 이래 어버이날이 있는 오월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이 노래는 이제 가요로서는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만큼 명곡이 되었다. 우선 이 시를 먼저 한번 감상하고 지나가기로 하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겨울의 기나긴 밤,어머님하고 둘이 앉아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이 이야기 듣는가?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김소월 시 '부모' 전문 (노랫말에는 원문 맨 끝의 '알아보랴'가 알아보리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운율상의 문제로 수정한 것으로 보이며, 뜻에는 별 차가 없는 듯하다.) 나 역시 이 시를 노래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노랫말을 듣는 순간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소월의 시라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이 시의 해석에 있어서는 제목 '부모'가 시사하듯이 '효심'에 초점을 맞춰 풀이한 것이 대세인 듯하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풀이이다.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라는 함축적인 말에서 부모를 알기 위해 내가 부모가 되어 그 마음을 헤아려 보기 전까지는 부모가 나를 어떻게 입히고 키우셨겠는가라는 것을 짐작만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일 것이다." (<김소월 전작 시집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정음사)에서> 또는 1920년대라는 일제 강점기의 엄혹한 시대를 사는 한 천재시인이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신의 운명론을 아프게 토로한 시'라는 시각으로 해석을 하는 이들도 없지 않은 듯하다. 물론 그런 해석들을 할 만한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먼저 소월이 첫 연에 제시한 저 '공간'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겨울의 기나긴 밤,어머님하고 둘이 앉아옛 이야기 들어라. 저 공간은 천지사방이 칠흑의 어둠으로 싸여 있는, 호롱불 하나가 힘겹게 어둠을 밀어내며 만들어내고 있는 한줌의 원초적인 공간이다. 그것도 낙엽지는 소리만 우수수 들려올 뿐인 겨울밤의 시공간이다. 이 같은 원초적인 시공간 안에 두 모자는 마주 앉아 있고, 아이는 엄마가 들려주는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아이는 스스로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나는 어쩌다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하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내용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어쩌다가 생겨나서 이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 걸까 하는 근원적인 의문이 아니었을까? 자의식에 눈뜨기 시작한 아이가 최초로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존재론적인 질문- 아, 내가 어쩌다 여기 있게 된 것일까? 그것은 17세기 철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가 한 저 원초적인 질문, '이 세상에는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는가?'란 물음과도 닿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가 다음에 한 말,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한 것은 그 물음에 지금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한 말이리라. 그래서인지 아이는 어머님에게 그런 물음을 던지지는 않았다. 자신이라는 존재의 근원이 되는 '부모'가 되어서 알아보려 한다는 다짐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소월은 자신의 어느 시 뒤에 쓴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시작(詩作)의 가치 여하는 적어도 그 시작에 나타난 음영(陰影)의 여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음영의 가치 여하를 식별하기는, 곧 시작을 비평하기는 지난(至難)의 일인 줄로 생각합니다." 위 시 '부모'의 음영은 짧은 두 연이 지닌 단순한 진술 속에 숨어 있는 웅숭 깊은 존재론적 의미가 아닐까? '효심'이라든가, 옛 이야기 같은 것을 굳이 음영이라 할 수 있을까? 기나긴 겨울밤에 어머니에게 옛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하는 존재론적 자의식에 눈을 뜬 그 아이는 나중에 자라서 시인이 되었다. 그저 그런 시인이 된 것이 아니라, 대시인이 된 것이다. 위의 시에 구사된 시어들 속에 어려운 단어는 하나도 없다. 정말 평이하기 짝이 없는 낱말들로 소월은 이처럼 웅숭 깊은 음영의 시를 만들어낸 것이다. 소월을 천재시인이라 하는 연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일찍이 작가 김동인은 “소월의 시는 시골 과부라도 넉넉히 이해할 것이었다” 라는 찬사와 함께 “조선말 구사의 귀재-그것이 우리의 시인 소월이었다”라고 극찬하기까지 했다.​ 물론 나의 이런 해석이 시인의 마음과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를 그렇게 다양하게 해석하는 것은 독자의 자유이고, 그런 음영을 깔아놓은 시인 역시 바라는 바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음영이 풍부한 시일수록 명시가 된다는 점에서, 소월의 '부모'는 걸작이라는 이름에 값한다고 할 것이다. 소월의 저물녘은 참으로 스산했다. 스물 안팍의 5,6년 동안 불꽃처럼 맹렬히 시를 쏟아냈던 소월은 고향 곽산으로 돌아간 후 조부의 광산업을 돕다가 일이 실패하자 처가인 구성군으로 이사해,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했다. 그러나 그마저 실패하는 바람에 심한 가난과 실의 속에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시골 장터에서 산 아편을 먹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1934년, 그의 가슴에 '부모'의 시상이 처음으로 심어졌던 계절인 12월 24일이었다. 향년 33세. 4남 2녀를 둔 그의 자손 가운데 손녀와 증손녀가 남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증손녀는 성악가 김상은으로, 몇해 전 그의 증조 외할아버지의 시로 된 노래를 모아 음반을 내기도 했다.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색에 담은 선 삶을 닮은 손

    색에 담은 선 삶을 닮은 손

    깊은 숲 같은 초록, 밤하늘 같은 보라…. 짙고 선명한 바탕색에 도드라진 선들은 간결하지만 힘이 넘친다. 마티스의 작품에서 본 듯한 악기를 연주하는 여인, 꽃을 든 여인의 초상, 춤을 추는 무희의 모습을 담은 화가 오천룡(73)의 그림을 보다 보면 선과 손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간다. ●“형태·색의 본질 찾아 끊임없이 변화 추구” 경남 창원의 세솜갤러리에서 ‘선(線) 유화’ 작품과 함께 화가 경력 50년 기념전을 하고 있는 재불 화가 오천룡은 “선은 50여년간 형태와 색의 본질을 찾아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 온 결과”라며 “선을 위주로 그림을 하면서 다양한 손의 표정에 자연스레 집중하게 됐다”고 말했다. “사람은 손에 자신의 흔적을 남깁니다.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을 알 수 있어요.” 그의 그림이 손에서 출발하는 이유다. 그는 선명한 색으로 바탕을 칠한 뒤 짙은 색 혹은 흰색의 두꺼운 선으로 드로잉을 한다. 그 위에 금을 그어 홈을 판 뒤 어두운 색이나 검은색을 입힌다. 이때 17세기 베네치아의 화가들이 사용했던 반짝이는 안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윤곽이 더욱 또렷해 보인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추상화가로 화단에 데뷔한 그가 프랑스로 건너간 것은 서른 살 때인 1971년. 프랑스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고 싶은 마음에 구상으로 회귀했던 그는 낙엽의 다채로운 색에 집중하는 시기를 거쳐 지금의 선에 집중하게 된다. 70대 중반을 맞은 그의 작품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자유롭고 에너지가 넘친다. 선의 힘과 색의 힘이 조화를 이룬 작업을 할 수 있는 비결을 묻자 “걷기와 고전음악”이라고 답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프랑스에서 랑도네라고 하는 걷기에 참여합니다. 7~8시간 정도를 자연 속에서 걷다 보면 머릿속에 있던 모든 고정관념이나 잡념이 사라지고 원초적인 상태가 될 수 있어요.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마치 원시인 같은 상태로 돌아간 뒤에 붓을 잡습니다. 작품을 하는 동안 늘 음악과 함께합니다.” ●젊은 작가들에 전시 데뷔 기회도 제공 오 화백은 정헌메세나 회장이라는 직함도 갖고 있다. 정헌메세나는 친구인 동일방직 대표 서민석 회장과 뜻을 모아 만든 예술 지원 재단이다. 2004년부터 유럽 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만 35세 미만 한국 청년 작가들과 프랑스 내에서 활동하는 35세 미만 프랑스 청년 작가를 대상으로 매년 한 명씩 선발해 작가상을 수여하고 전시회를 열어 주고 있다. 그는 “예술가와 세상을 이어 주는 다리 역할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젊고 유능한 작가들에게 전시 데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며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수상자들이 작가로 성장해 가는 것을 볼 때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전시는 11월 27일까지. 글 사진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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