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17세기
    2026-08-17
    검색기록 지우기
  • 음악회
    2026-08-17
    검색기록 지우기
  • 안전망
    2026-08-17
    검색기록 지우기
  • 한·중
    2026-08-17
    검색기록 지우기
  • 케이스
    2026-08-17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851
  • [유용하 기자의 사이언스 톡] 화이트데이 = 파이 데이… 호킹이 우주로 떠난 날

    [유용하 기자의 사이언스 톡] 화이트데이 = 파이 데이… 호킹이 우주로 떠난 날

    ‘3월 14일’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요.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달콤한 사탕과 함께 한 아름 꽃다발 받기를 기대하며 ‘화이트데이’를 떠올리겠지요. 과학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다른 것들이 연상될 겁니다. 우선 유럽이나 미국에서 3월 14일은 수학 시간에 원과 관련된 문제가 나올 때면 항상 등장하는 원주율 ‘π’(파이)를 의미하는 ‘파이데이’입니다. 원둘레를 지름으로 나눈 값인 π는 ‘둘레’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페리메트로스’(περιμετρο)의 제일 앞 글자를 따왔습니다. 원주율을 숫자로 표시하면 3.141592…로 길게 이어지는 무한소수입니다. 그래서 매년 3월 14일 오전 1시 59분이 되면 원주율 탄생을 축하하는 ‘파이데이 행사’가 전 세계 곳곳에서 열립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π는 수학 문제를 풀 때나 필요하지만 과학사를 보면 π의 정확한 값을 구하기 위해 오랜 시간 많은 과학자들이 도전했습니다. 원주율에 대한 관심은 건축기술이 발달한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러던 중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원과 같은 넓이를 지닌 정사각형을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로만 그리는 ‘원적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3.14라는 근사값을 처음으로 유추해냈습니다. 17세기 말 영국의 아이작 뉴턴과 독일의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가 만든 미적분 덕분에 원주율 계산은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1882년 독일 수학자 페르디난트 린데만이 π값이 무리수이면서 초월수라는 사실을 증명하면서 정확한 원주율 값을 찾으려는 시도들을 끝냈습니다. 그렇지만 요즘도 슈퍼컴퓨터 개발 후 성능시험을 할 때 무한소수인 원주율을 소수점 이하 몇 자리까지 계산할 수 있는지를 본답니다. 파이데이로 알려져 있던 3월 14일이 지난해부터는 과학계에 더욱 특별한 날이 됐습니다. 바로 뉴턴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계보를 잇는 금세기 최고의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가 타계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호킹 박사는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사망한 지 정확히 300년이었던 1942년 1월 8일에 태어나 상대성이론을 만들어 낸 아인슈타인이 태어난 지 109년이 되는 지난해 3월 14일, 아인슈타인과 똑같은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블랙홀 연구에 있어서 호킹 박사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우주론에서 그의 영향은 상당합니다. 호킹 박사는 일반상대성 이론에서는 반드시 특이점이라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 블랙홀도 에너지를 방출하기 때문에 반드시 검은색 구멍이라고 볼 수 없다는 점 두 가지를 증명해 냈습니다. 즉 일반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빅뱅이나 블랙홀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며 블랙홀 경계구간인 이벤트 호라이즌 근처에서는 블랙홀도 빛을 내고 에너지를 내뿜는 호킹 복사를 한다는 것을 밝혀낸 것입니다. 그의 연구 덕분에 영화 ‘인터스텔라’도 가능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요. 호킹 박사의 젊은 시절을 그린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을 보면 그는 삶을 즐길 줄 아는 ‘로맨티스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이트데이이자 호킹 박사의 기일을 맞아 그가 평소에 입버릇처럼 한 말이 다시 생각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니라면 이 큰 우주도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밤하늘의 별이 된 호킹 박사를 생각하며 사랑으로 가득 찬 하루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edmondy@seoul.co.kr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

    19세기 전반 이탈리아 방문은 모든 화가들의 꿈이었다. 코로는 두 번째 이탈리아 방문 때 이 그림을 그렸다. 아르노강 건너편 보볼리 정원 테라스에서 바라본 피렌체의 모습이다. 대성당의 돔과 종탑이 뚜렷하고, 오른쪽에 베키오 궁전이 보인다. 피렌체 대성당은 1296년 공사가 시작됐다. 한 세기 이상 걸려 본체가 모습을 드러냈지만, 난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설계안에 있는 거대한 돔을 만들 방법이 없었다. 어쩌자고 불가능한 설계안에 따라 공사를 시작했을까? 성당 건축은 백 년 이상 심지어 수세기가 걸리는 대공사였다. 사람들은 짓는 동안 기술이 발전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건축 사업단은 상금을 걸고 방안을 모집했다. 많은 건축가, 기술자들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최종적으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안이 채택됐다. 로마에서 고대 건축의 궁륭 구조를 연구하고 돌아온 브루넬레스키는 돔 공사의 적임자였다. 그는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16년 만에 돔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설계부터 시작해 작업에 필요한 기계를 발명하고, 공사 중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문제들을 해결하며, 적수들의 비방을 견뎌야 했던 나날들이었다. 흰색과 녹색 대리석을 입힌 우아한 건물, 거대하지만 절도 있는 오렌지색 돔은 곧 피렌체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이 높이 솟은 돔은 벼락에 취약했다. 이틀이 멀다 하고 벼락이 대성당의 돔을 강타했다. 1492년에는 돔 북면의 대리석이 거리로 와르르 쏟아질 정도였다. 피렌체 북쪽 별장에 앓아 누워 있던 로렌초 데 메디치가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병세가 악화돼 죽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17세기에는 돔 내벽의 프레스코화를 가로지르는 균열이 발생했다. 논란이 벌어졌으나 원인을 밝힐 수 없었다. 20세기 후반 열 측정기를 동원해 조사한 결과 돔 내부에 삽입된 철제 지지대가 팽창하면서 습기가 스며들고 철봉에 녹이 슬어 균열이 일어났음을 알아냈다. 현재 대성당 주변에는 청소차를 제외한 모든 차량의 진입이 금지돼 있다. 이 아름답고 경이로운 건축물이 1~2년 사이에 어찌 되기야 하겠냐마는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 [강희정의 아시아의 美] 꽃이여, 속내를 보여 다오

    [강희정의 아시아의 美] 꽃이여, 속내를 보여 다오

    일제의 잔재라고 해서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밤 벚꽃놀이’라는 게 있었다. 놀이라고 해 봐야 별것이 아니고 밤에 벚꽃 구경을 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전깃불이 휘황하지 않던 시절에는 깜깜한 밤에 하얗게 빛나는 벚꽃을 구경하는 것이 나름 운치 있고, 낭만적으로까지 여겨졌다. 일본인들이 심은 벚나무라고 벚꽃 보길 꺼리는 이도 있지만 꽃이야 무슨 죄가 있으랴.사실 일본에서도 꽃놀이의 풍속이 그리 오랜 역사를 갖는 것은 아니다. 소상공인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17세기쯤에 기원을 둔 꽃놀이를 그린 당대 병풍 그림이 남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꽃을 보고 설레며 즐거워하는 일은 일본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니 애꿎은 벚꽃에 눈을 흘길 일은 아니다. 아시아에서는 예로부터 꽃을 즐겨 그려 집안을 장식했다. 멀리 갈 것 없이 사찰이나 궁궐의 단청, 기와에 표현된 꽃을 생각하면 된다. 물론 꽃과 관련된 그림을 독립 회화로 그려 완상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중국 남송(南宋)의 궁정에서 활동했던 마린(馬麟)의 ‘병촉야유도’(秉燭夜遊圖)는 13세기에 그려진 그림이다. 등불을 켜고 봄밤을 즐긴다는 제목 그대로 화면 가운데 뾰족한 지붕이 있는 건물 속에 주인이 앉아 밖을 내다본다. 앞마당에는 두 줄로 늘어선 높은 등잔이 보이고, 그 옆으로 잔잔하게 흰 꽃을 이고 있는 나무가 그려졌다. 빈 곳처럼 보이는 화면 상단 타원형의 도장 옆으로 작은 달이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떠 있다. 중국 그림에 찍힌 도장들은 수장가의 도장인지라 도장이 많이 찍힌 그림들은 매우 유명한 그림이라고 보면 된다.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한 어스름한 달밤에 꽃이 질까 노심초사하며 등촉에 불을 밝히고, 점점이 눈처럼 앉은 꽃들을 보는 사람의 정취가 아스라하다. 이 그림은 북송의 시인 동파(東坡) 소식(蘇軾ㆍ1036~1101)의 ‘해당’(海棠)이라는 시에서 화제를 가져왔다고 알려졌다. “밤 깊으면 꽃이 잠들어 떨어질까 두려워, 촛불 높이 들고 붉은 그녀 비춰 보네”(只恐夜深花睡去 故燒高燭照紅?)라는 구절이다. 결국 아름다운 꽃에 마음을 두다 보니 꽃이 질까 염려돼 불을 밝힌다는 뜻이다. 그래서 화가는 꽃의 현란한 자태보다 봄밤의 정취를 드러내려 꽃인지 아닌지 아득하게 느껴지도록 붓을 놀렸다. 흐르는 시간이 어지간히 야속했던 모양이다. 그 아련한 마음은 앞쪽의 진한 먹으로 그린 나뭇가지보다 뒤로 멀어지며 흐릿하게 보이는 꽃과 나뭇잎, 윤곽만 남은 산등성이에서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마린은 아버지 마원(馬遠)과 함께 남송 황실의 총애를 받았던 화원 화가다. 그런데 남송은 여진족의 침입으로 화북 지방을 빼앗기고 항저우로 쫓겨가 재건한 나라다. 높은 수준의 문화를 지녔지만, 남송 그림은 후대 지식인들의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림에서 지적인 세계를 추구하던 문인들의 눈에 마원과 마린의 그림은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이는 남송이 처했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하노이에서의 북미 회담이 기대에 어긋난다고 실망하는 사람이 많다. 두 정상의 속내가 무엇인지 해석도 분분하다. 꽃이 피기 전 봉오리를 보면 무슨 색인지 알 수 없다. 때가 되면 피울 꽃을 피기 전에 아쉬워하며 등불을 밝힐 필요는 없다. 불을 켜지 않아도 환하게 화향과 아취를 만끽할 수 있도록 만산에 평화의 꽃이 흐드러지길 기대해 본다.
  •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왜 제사는 장남만 지내야 하나, 자식끼리 돌아가면서 지내면 안 되나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왜 제사는 장남만 지내야 하나, 자식끼리 돌아가면서 지내면 안 되나

    설 명절이 지난 지 채 한 달도 안 됐다. 제사 문제로 그렇게 시끌벅적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하다. 세대를 떠나 제사만큼 우리의 정서와 복잡한 내면을 가진 것도 없을 것이다. 제사는 그 시대의 약속이요 관습이다. 시대가 변하면 바뀌는 것이 이치인데 제례만큼 변화에 저항과 갈등을 야기하는 풍습도 없다. 오늘날과 같은 조상 제사는 고려 말에 시작됐다. 누구나 하고 싶다고 4대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지위와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어 6품 이상은 3대, 7품 이하는 2대, 일반 백성들은 부모 제사만 지내도록 했다. 조선 말기에는 일반 백성들도 4대조까지 지냈다. 오히려 4대 봉사를 하지 않으면 상놈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늘날은 어떤가. 필자의 집안은 부모 세대에서 자식 세대로 바뀌면서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제례문화의 변화와 문제점을 온전히 담고 있다. 필자는 6남 2녀에 아들로 막내다. 부모님 생전엔 설, 추석 차례, 기제사는 3대 모두 합쳐 1년에 여덟 번 제사를 지냈다. 1987년 양친이 돌아가시면서 큰형님이 제사를 모셨다. 2003년 설 명절 때 필자는 큰형수가 오랜 지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자식은 다 같은 자식인데 장남만 제사를 지내란 법이 어디 있냐며 형제끼리 돌아가면서 지내자”고 했다. 갑작스런 제안에 큰형님께서 “기제사는 내가 맡고, 설?추석 차례만 동생들이 돌아가면서 지내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어느 누구도 가타부타 말이 없길래 모두 동의한 것으로 여겨 “안을 낸 막내인 제가 돌아오는 추석 차례를 모시겠다”고 했다. 갑자기 집사람이 필자의 옆구리를 꾹꾹 찌르면서 자기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막내가 제사를 지낼 수 있냐며 불평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타성은 빠지세요” 했다. 타성은 며느리들이다. 결국 기제사는 장남이, 명절 차례는 동생들이 돌아가면서 지내도록 하고, 둘째 형님은 교인이라 제외됐다. 그리고 형제들이 다 죽고 나면 장손이 다시 맡도록 했다. 2006년에는 1년에 여섯 번 지내던 기제사를 아버지 기일에 맞춰 한 번만 지내도록 했다. 필자는 이를 ‘모듬제사’, ‘합동제사’라 칭했다. 그리고 기제사를 모시던 큰형님 내외가 2010, 2015년 돌아가시면서 또 한번의 변동이 왔다. 당연히 장조카가 물려받아야 되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부득이 필자가 차례와 기제사를 맡아 지내고 있다. 이처럼 형제가 제사를 나누어 지내는 것이 과연 예에 어긋나는 것일까. 아니다. 고려시대와 조선 중?후기까지도 장남이 제사를 전담하지 않았다. 경국대전에는 장남이 제사를 맡도록 했으나, 사대부는 물론 백성들도 아들딸 구별 없이 자녀들이 순서에 따라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회봉사를 행했다. 16세기를 무대로 ‘묵제일기’를 쓴 이문건(1495~1567년)은 형제자매가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내고 심지어 외손봉사까지 행했다. 율곡도 7남매가 재산을 똑같이 나누고 제사도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회봉사를 행했다. 부안군 우반동에 거주했던 선비 김명렬은 1669년 사위가 제물을 대충 차리고 제사를 빼먹는다고 딸에게 제사를 반납토록 하고, 재산은 아들이 받는 유산의 3분의1만 지급했다. 선비 김이성은 1637년 아내도 죽고 거주하는 곳도 멀어 처가의 제사를 지내기가 어렵게 되자 제사조로 받은 노비와 전답을 다시 돌려주었다. 윤회봉사는 재산상속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17세기 중엽부터 윤회봉사와 균분상속은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장남 단독봉사가 많아지고, 재산상속도 장자에게 더 주는 차등상속제로 바뀌었다. 하지만 윤회봉사는 19세기까지 해안 일부 지역에서 계속 시행됐으며, 지금도 제주에서는 형제끼리 제사를 나눠 지낸다.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형식은 시대적 상황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제사 또한 예외일 수 없다.
  • 조선 문인석 한 쌍 36년 만에 돌아온다

    조선 문인석 한 쌍 36년 만에 돌아온다

    獨 함부르크 로텐바움박물관 새달 반환독일 함부르크 로텐바움세계문화예술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조선시대 문인석 한 쌍이 3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로텐바움박물관이 소장한 조선시대 문인석 2점을 다음달 말 한국에 반환하기로 했다고 21일 밝혔다. 문인석은 16세기 말~17세기 초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한 점은 높이 131㎝·가로 40㎝·세로 32㎝이고, 다른 한 점은 높이 123㎝·가로 37㎝·세로 37㎝다. 이 문인석들은 1983년 독일인 헬무트 페퍼가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골동품상에게 구입해 독일로 반출했고, 1987년 로텐바움박물관이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 14~16년 로텐바움박물관이 소장한 한국 문화재에 대해 총 세 차례에 걸쳐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박물관이 먼저 조선시대 문인석의 유물 출처 여부에 대해 ‘불법성이 의심된다’는 의견을 국립문화재연구소 측에 전달했다. 박물관은 별도 조사에서 문인석이 컨테이너에 숨겨진 채 독일로 불법 반출된 사실을 확인한 뒤 함부르크주정부와 독일 연방정부를 통해 반환 절차를 진행했다. 문인석은 다음달 19일 로텐바움박물관에서 열리는 반환식 이후 국내에 돌아와 4월쯤 국립민속박물관에 양도돼 일반에 공개된다. 바르바라 플랑켄슈타이너 로텐바움박물관장은 21일 독일 현지에서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대한민국에 귀중한 유물을 돌려주게 돼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측은 “이번 환수 사례가 유물의 출처 확인 의무를 철저히 살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초한지 원본 ‘서한연의’가 삼국지의 아류?… 이문열, 오해한 것”

    “초한지 원본 ‘서한연의’가 삼국지의 아류?… 이문열, 오해한 것”

    “삼국지에 버금가는 역사 디테일·묘사 역사 비틀고 지나치게 엇바꾼 것 아닌 그 시대에 따른 민중의 관심·유습 반영 17세기 견위도 민간 이야기 섞어 출간 초한지, 이합집산 거듭하는 현재와 비슷”사면초가, 지록위마, 토사구팽, 낭중지추…. 이 많은 사자성어들은 다 ‘초한지’에서 왔다. 유방은 유비보다 멀고, 초·한은 장기판에서나 보는 듯하지만 생각보다 우리 실생활에 근접해 있는 게 초한지다. 정비석, 김홍신, 이문열 등의 책으로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초한지의 원본인 견위(생몰연대 미상)의 ‘서한연의’를 저본으로 완역한 것은 국내에 한 권도 없었다. 국내 최초 ‘루쉰전집’ 발간에 참여하고 ‘동주 열국지’를 완역한 인문학자 김영문(59)씨가 이번에는 ‘원본 초한지’(전3권·교유서가)를 내놨다. 그를 지난 1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만났다. -초한지를 완역한 계기는 무엇인가. “2015년에 내놓은 ‘동주 열국지’ 후속작을 고민하다 동주 열국지(춘추전국시대) 다음 시대가 초한지라서 보게 됐다. 원본이 ‘서한연의’라는 건 알았지만 이문열씨가 ‘초한지’ 서문에 서한연의에 대해 혹평을 해 놓은 걸 보고 선뜻 마음이 가질 않더라. 그래서 초·한에 관한 다른 소설이 있는지 조사해 봤지만 역시 서한연의밖에 없었다. 구입해서 읽어 보니 여러 가지 플롯이라든가, 역사 디테일, 묘사 기법이 삼국지에 버금가서 원전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지금까지 ‘서한연의’는 완역이 되지 않았을까. “조선시대에 완역이 되기는 했다. 1612년 견위가 ‘서한연의전’을 완성하고 금방 들어왔던 거 같다. 지금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셔한연의’ 언해 필사본 등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셔한연의’라는 이름으로 출간이 됐지만 그때 나온 건 조선시대 서한연의 언해본을 축약하고 편역한 것들이다. 이후 출간된 것들은 유명 작가들이 초한지 내용에 상당 부분 편역, 윤색을 하고 작가적 필력을 가미해서 낸 것들이다. 조선시대에 서한연의 언해본이 나왔는데도 해방 이후에는 원저자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초한지는 마치 저자가 없는 것처럼 비쳐지기도 했다. 지금도 검색해 보면 초한지는 저자가 없다는 설명이 많다.” -이문열 작가는 2008년 출간된 ‘초한지’ 서문에서 ‘서한연의’에 대해 ‘원전이 뻔히 보이는 아류’라며 ‘사실을 지나치게 뒤틀고 엇바꿔 ‘칠 푼의 진실과 서 푼의 허구’라는 연의의 본령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버렸다’고 적었다. “(이 작가가) 오해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작가는 ‘견위가 나관중의 상상력을 빌렸다’고 썼는데, 견위나 나관중 이전에 이미 중국 민간에서는 삼국지·초한지·열국지처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들을 서로 섞어서 공연했다. 이걸 가지고 1300년대에 나관중이 그러했던 것처럼 1600년대에 견위도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조금씩 윤색해서 배치하는 데 주의를 기울인 거다. 이 작가가 ‘역사를 뒤틀고 엇바꿈이 지나치다’고 말했던 ‘구리산 십면매복’ 같은 부분은 실제 이 작가가 서한연의의 원전 서사로 인정한 ‘삼국지통속연의’ 현존 최고본(1522) 중 관우가 ‘한 고조(유방)가 항우에게 구리산 일전에서 성공을 거두어 400년 기업을 열었다’고 언급하는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견위는 책 서문에서 ‘서한권을 읽어 보니 견강부회하고 저속한 대목이 많았다’고 썼다. 이 작가가 초한지를 나름의 문학관과 역사관에 입각해 쓴 것과 똑같은 입장이다. 연의 소설 안에는 청중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들을 집어넣는 유습이 있는데 그것은 실상 ‘적벽대전’ 같은 허구가 들어간 삼국지나 초한지나 비슷하다. 삼국지의 사실 대비 허구 비율이 6대4 정도라면 초한지도 그 정도 된다.”-견위표 ‘서한연의’의 매력은 무엇인가. “일단 스토리라인이 명쾌하다. 초·한 딱 두 나라가 쟁패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촉·오 세 나라가 뒤얽힌 삼국지보다 훨씬 덜 복잡하다. 이문열의 초한지가 인물 심리나 장면 묘사에 치중한 반면 견위의 서한연의는 훨씬 간명해 독자들이 독서 속도를 높이면서 전반적인 디테일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초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 “유방의 대군이 낙양땅에 와서 항우와 정면 대결을 준비하는 과정에 동삼로라는 사람을 만난다. 항우가 자신이 옹립한 황제 의제를 시해했을 때 그 시신을 건졌던 사람이다. 동삼로는 유방의 수레를 잡고 ‘당신이 전쟁을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욕망에 불과하다. 그래서는 천하의 민심을 얻을 수 없으니 의제를 위해 소복을 입으라’고 한다. 동삼로가 유방의 정복 전쟁에 ‘대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부여해 준 거다. 나중에 초·한이 일진일퇴하다가 홍구를 경계로 땅을 나눌 때 유방의 모사들은 협정을 파기하고 초나라를 쳐야 한다고 말한다. 대의·민의 같은 이데올로기가 정치적인 논리에 의해 깨지는 거다. 어떻게 보면 대의는 명분으로 놔두고 정당 이익에 의해서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현실과 비슷한 것 같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안달루시아부터 카탈루냐까지… 열정의 땅 스페인 소도시를 걷다

    안달루시아부터 카탈루냐까지… 열정의 땅 스페인 소도시를 걷다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잇는 정열의 땅 스페인을 EBS1 ‘세계테마기행’이 찾아간다. 4부작 ‘스페인 소도시 기행’에서는 사진작가 나승열이 다양한 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스페인의 작은 마을들을 하나씩 찾아간다. 1부 ‘정열의 꽃, 세비야’에서 찾아간 곳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수도이자 예술·문화의 중심지 세비야다. 세비야는 스페인이 ‘해가지지 않는 제국’이던 시절 신대륙 무역을 책임지는 항구로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도시이기도 하다. 스페인 광장에서 한평생 플라멩코를 춰온 무용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본다. 절벽 위의 마을 론다에서는 예비 투우사와 성난 소의 치열한 한판 승부를 느껴본다. 2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살라망카’에서는 스페인 대표 학문 도시의 살라망카 대학교를 찾는다. 유럽 최초로 대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학교다. 도심을 벗어난 곳에는 행복한 이베리코 돼지들이 뛰놀고, 살라망카 프랑시아 산맥 자락의 모가라스 마을에서 초상화의 비밀을 짚어본다. 3부 ‘축복의 땅, 피레네’에서는 험한 산길을 따라 멧돼지를 뒤좇는 사냥꾼들을 따라 나선다. 아라곤 왕국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마을 아인사에서 사냥꾼표 빠에야를 맛본다. 스페인 안의 또 다른 스페인 바스크의 어촌마을에서 마을 주민들과 선상낚시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4부 ‘시간을 달려 그곳으로’에서는 크리스마스 시즌의 카탈루냐를 만날 차례다. 스페인 최대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는 바르셀로나에서 명물 ‘똥 싸는 인형’을 만난다. 마드리드의 중세 마을 친촌에서 70도의 독주 아니스주를 맛보고 17세기 수도원을 개조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EBS1 ‘세계테마기행’의 ‘스페인 소도시 기행’편은 18~21일 오후 8시 40분에 방송된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북한 전쟁고아 기록정리가 남은 일…더 늦기 전에 끝내야”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북한 전쟁고아 기록정리가 남은 일…더 늦기 전에 끝내야”

    ‘독일서 韓문화재 발굴’ 김영자 박사가 말하는 ‘북한 전쟁고아’“한반도 현대사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아픔, 잊혀진 이들이 있다. 바로 북한의 전쟁고아야. 남편이 먼저 시작한 일인데 요즘은 그게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6·25 한국전쟁에서 남한뿐 아니라 북한에서도 전쟁고아가 많이 발생했지. 이들이 동유럽에서 위탁교육을 받다가 어느 날 하룻밤 새 갑자기 싹 사라졌거든. 이들에 대한 기록 정리가 여생의 일이 됐어.” 독일에 반출된 한국 문화재 발굴과 보존의 중심에 섰던 베커스 김영자(80) 박사가 한국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청했더니 경복궁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만나자고 했다. 김 박사는 “서울 지리를 잘 몰라 다른 곳은 잘 찾아갈 수 없어. 그런데 민속박물관은 찾아갈 수 있어.”라며 “1층 안쪽 커피숍에서 만나자.”라고 했다. 독일에서 50년째 사는 그가 박물관 1층에 커피숍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의 이력대로 문화재에 조예가 깊어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민속박물관을 찾나 생각하고 설날 연휴인 지난 2일 약속 장소로 갔다.(※독일로 먼저 돌아간 남편이 북한 전쟁고아 사진을 보내주기까지 기사 발행이 미뤄졌다.) “체코의 北전쟁고아, 남편이 먼저 발굴60여명 작은 궁전서 5년간 위탁교육한국 모르는 남편 탓에 이 일에 빠져”‘요즘 어떻게 지내시느냐.’라고 인사를 건넸더니 김 박사는 “나이가 이제 80인데 쉬어야지.”라며 잠시 뜸을 들였다. “남편(베커스 크리스토퍼·76)이 2015년 봄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체코의 어느 제후 궁전에서 북한 고아들이 1953~1958년까지 살았다는 기사를 읽은 거야. 아내의 조국 ‘코리아’라는 단어가 등장하니 솔깃했던 가봐. 남편이 당장에 차를 몰고 달려가 그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봤대. 60년이 훌쩍 지났으니 동네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는데, 어렵사리 수소문해서 기숙사 사감을 지냈다는 여성을 만났다고 해. 요양병원에 있는 그 여성이 나이가 많아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 정도였고, 정신이 오락가락했는데, 남편이 그 여성이 돌보고 교육했던 북한 고아들의 사진과 앨범, 이들이 돌아가서 그녀에게 보낸 엽서 등을 전달받았거든. 이 여성이 돌아가신다면 북한 전쟁고아들에 대한 귀중한 자료도 그냥 재로 사라질뻔한 것이지. 그런데 남편이 한국말과 한국 사정을 잘 몰라 한계가 있으니, 내가 이 일에 끌려들어 간 거지.” “北전쟁고아 1958년 하룻밤에 귀국가서 ‘보고싶어’ ‘그곳이 천국’ 편지도1962년 이후엔 서신 왕래도 뚝 끊겨” 팔순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발음은 또랑또랑했고, 말은 박력이 있었고 빨랐다. 기억은 엊그제 한 일처럼 생생했다. 그러더니 대뜸 김 박사가 “남한에선 북한 전쟁고아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었다. “한국에선 북한 전쟁고아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고, 잘 모르고 있다.”라고 답했다. 사실 기자도 수년 전 여자배우 추상미가 감독한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북한 전쟁고아들을 다뤘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한국 기자들이 우리 집에 많이 왔었어. 그때마다 남편이 북한 고아들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설명하면 기자들이 ‘네, 네.’라고 대답했지. 그런데 기사는 한 줄도 나오지 않아 남편도 거의 포기했어. 북한과의 적대적 관계도 있고 해서인지 한국에선 도통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까웠지. 북한 고아 문제는 외국에서 더 관심이 있었어. 폴란드에서 북한 전쟁고아를 다룬 다큐 영화 ‘김귀덕(Kim Ki Dok)’이 2006년도에 먼저 제작됐거든.” 영화 ‘김귀덕’은 폴란드에서 무덤이 하나 있는데 이걸 파버릴까 하다 동양인 무덤이 여기에 왜 있지 하고 조사를 하다 보니 북한 전쟁고아였다는 이야기다. ‘김귀덕’은 유튜브로 검색하니 나왔지만, 한글이나 영어 자막이 달려있지 않아 보기가 쉽지 않았다.체코에 있던 북한 전쟁고아 이야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 “체코의 작고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궁전인 발리치(Valec Valech)에 북한 고아 60여명이 위탁 교육을 받았어. 이 궁전이 사회주의 체제에서 공공건물로, 보육원으로 쓰였거든. 전쟁고아를 남쪽 한국에선 나쁘게 말하면 선진국에 팔았지만, 북한에선 우방인 동유럽 국가에 위탁교육을 했던 거야. 최근에 한국 PD 한 사람이 취재차 왔었어. 이 궁전에 전쟁고아들이 있었다는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어. 궁전 정원 한쪽 구석에 세워진 오벨리스크에 전쟁고아들이 위험하게도 올라가 영문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새긴 게 있거든. 글자가 많이 부식되고 상하고 있어 언제 없어질지 모르니 빨리 보존 조치를 취해야 해.” “北전쟁고아, 내 또래여서 더 동질감이들 북한서 어떻게 됐는지 문득 생각위탁 부모도 고령, 구술 정리도 시급” 김 박사의 설명은 계속됐다. 전쟁 직후 여력이 없던 북한은 1951년부터 전쟁고아들은 체코를 비롯해 구동독,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으로 위탁교육 명목으로 보냈다. 정확한 조사가 나오지 않았지만 이런 북한 전쟁고아는 몇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1958년 어느 날 김일성의 명령에 의해 북한 고아들이 어느 날 싹 귀국했어. 주위 사람들도 모르게 밤새 다 데려갔다고 해. 정성 들여 애들을 교육하고 돌본 엄마들은 ‘지금도 보고 싶어서 운다.’라고 해. 그리고 그 아이들이 북한으로 돌아가서 ‘엄마, 보고 싶어요.’, ‘그곳이 천국이었어요.’라는 내용의 엽서를 보냈지. 1962년 이후 편지 왕래마저 끊겼고, 그리곤 사라진 거지. 북한 전쟁고아들을 돌봤던 이들이 아주 고령이지. 더 늦기 전에 이들로부터 구술받지 않으면 전쟁고아의 기록은 사라질 수 있어.”북한으로 돌아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들이 대개 6~12살쯤 되어 동유럽에 와서 몇 년 살았어. 돌아갈 때 나이가 많은 아이는 스무 살가량 됐고, 유럽 문화를 알고, 한창 정이 들 무렵이었지. 그때 동유럽이 사회주의 체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북한보다는 자유스럽고, 풍족했지. 북한으로 돌아간 아이들이 수용소로 끌려가서 자유스럽지도 못하고 혹사를 당한 것으로 추정돼. 북한에서 적응을 잘한 아이들은 동유럽 언어가 되니 고급 인력으로, 외교관으로 살아남았을 거야. 북한 전쟁고아들의 나이가 내 또래여서 더 동질감이랄까 연민이 느껴져.” “발리치 궁박물관장이 전시실 한 두 개를 내줄 테니 한국관 전시실로 꾸미라고 우리한테 제안했어. 이 궁전이 1976년 화재로 불탔는데, 문화유산이어서 EU가 겉모습은 복원해 줬거든. 내부는 아직 텅텅 비어 있어서 주로 콘서트나 미술관으로 이용해. 여기에 ‘당시 아이들이 입었던 옷, 당시 영상물, 동요 등을 전시하면 좋겠다.’라고 나랑 남편이 이야기하지. 전시관 기획 잘해서 신청하면 (발리치궁이) 자국 문화재청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해보겠다고도 하더라.” 김 박사 부부의 집에서 발리치까지는 차로 3~4시간 거리여서 체코 문화와 맥주를 좋아하는 남편이 종종 놀러 간다고 했다.“1968년 장학금 받는다는 말에 獨유학레겐스부르크大 한국어문화 강좌 맡아직접 쓴 문법책 기초한국어 인기 여전” 베커스 김영자 박사는 어떻게 독일과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1939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난 그는 꽃다운 25살 때인 1965년 독일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1년 장학금을 받게 해주겠다는 신부님의 말에 “아무것도 모르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땐 외국 나간다는 말에 무조건 좋았거든. 처음 수녀원에 도착해서 어학연수를 받는 동안 말이 안 통하니 많이 울었지. 뮌헨대학에 서양사와 독문학을 전공하고, 레겐스부르크대학에 입학해 서양사를 전공했지. 건축사인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애를 키우다 1975년에 이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지. 1979년부터 레겐스부르크 시립박물관의 학예사로 근무하면서 인맥이 넓어졌고, 그때부터 한국과의 인연이 깊어졌지. 그러다 모교에 한국어문화 강좌가 개설되면서 교수가 된 거야. 1987년부터 정년퇴직한 2005년 9월까지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쳤지. 자매결연을 한 동국대에 독일 학생들을 보내 문화교류도 시키고 했어. 동국대가 독일 대학과 자매결연을 한 첫 한국의 대학일 거야.” 그가 사는 레겐스부르크는 뭔헨에서 동북쪽으로 자동차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다. “대학에서 한국어 강좌를 맡을 사람으로 내가 뽑힐 때 독일어와 한국어가 되니, 한국사람이 한국어 가르치는 것을 처음엔 아주 쉽게 생각했어. 그런데 말은 잘해도 한국 문법을 모르니, 독일 학생들은 문법적으로 명확하게 설명이 안 되면 이해는커녕 공부하려고도 하지 않아. 얼마나 깐깐하고, 황당한 질문이 많이 날아들었는지. 한국에 들어와 시중의 문법책을 다 보고, 한국어학당을 다 가봤지만, 마음에 드는 게 없었어. 오죽 답답했으면 교육부에 들어가 ‘제대로 된 문법책 하나 내 놓으라.’라고 닦달했을까. 나중에 고등학교 국어 문법책을 하나 구해, 문법을 연구하면서 ‘기초한국어’를 썼어. 여전히 인기 좋아 지금도 잘 팔리고 있어. 한국으로 발령나서 가는 독일 외교관들이 ‘이 책을 들고가면 걱정이 없다.’라고 할 정도야. 한국어의 심화 과정과 한국 문화까지 소개하는 ‘한국어 플러스’도 냈어.” ‘삼국유사’ 독일어 번역…도서전서 호평“韓정체성 보여주는 역사책 내고파 번역” ‘삼국유사(국보 306호)를 독일어로 번역한 계기가 무엇이냐?’고 묻자 김 박사는 그 뒷이야기부터 꺼냈다. “2005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이 ‘한국의 해’여서 삼국유사를 번역해 내겠다고 했더니 한국문학번역원이 글쎄, ‘삼국유사는 문학이 아닌 역사’여서 지원금 지원이 안 된다고 했거든요. 이런 소식을 들었던 당시 경북 군위군의 인각사 주지가 백방으로 뛰고 해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통하니 지원금이 나왔지. 당시 문학 100선이었는데 삼국유사가 더 들어가는 바람에 101선이 됐지. 출판기념회를 도서전에서 했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문학번역원조차도 ‘선생님 번역 책이 최고.’라고 했지. 유럽에선 한국이 일본이나 중국보다 덜 알려진 게 아쉬웠는데, 한국 고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역사책을 유럽에 내보이고 싶었거든. 그게 번역에 나서게 된 계기였어.” 국립민속박물관이 약속 장소로 정한 이유도 나왔다. 김 박사가 한국에서 가장 자신 있게 잘 아는 곳이기에 그렇다. 1906년 한국을 방문해 기록 사진을 남긴 독일군 장교 헤르만 구스타프 테오도르 산더 대위의 사진 기증전시회가 2006년 4월 여기서 열렸다. 당시 김 박사가 사진과 함께 전시된 문서와 관련 자료를 한국어로 번역해 줬다. 또 2008년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의 선교박물관이 소장한 유물 전시회가 민속박물관에서 열릴 때도 김 박사가 깊이 관여했다. 그가 유럽에서 수십년간 수집한 근대조선 사료를 고스란히 민속박물관에 기증했고, 베를린 등 유럽 골동품 가게나 벼룩시장 등에서 취미로 사모았던 인형 600여점을 2009년 기탁하기도 했다. 물론 그가 독일 문화재를 발굴해 정리할 때 민속박물관 학예사들의 도움도 컸다. “겸재 금강산 화첩 발견도 드라마틱수도원 ‘한국에 귀한 것…팔 수 없어’왜관수도원에 영구임대 형식 반환돼”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그녀가 1999년 번역한 ‘수도사와 금강산’(노르베르트 베버 지음)을 꼽았다. “이 책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이 조선시대 미술사를 다시 쓰게 했거든.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장을 지낸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년)는 1925년부터 4개월간 선교차 방한해 금강산을 돌아보고 가면서 ‘금강산을 잘 그린 그림을 하나 사고 싶은데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금강산 등정에 동행한 독일인 헹켈이 나한테 선물을 했다. 수도원 박물관에 두었다.’라는 기록만 남겼지. 어디에서 어떻게 샀다는 말은 남기지 않았어. 어쩌면 이 선물이 금강산 화첩이었는지도 몰라. 그리곤 아프리카 선교를 가서, 그곳에서 선종하셨거든. 그러면서 그림이 책에 실렸어. 원서에 실린 이 그림을 본 한국의 한 미술사학자가 수도원에 편지를 써서 ‘이 책에 나와 있는 그림이 있느냐.’라고 하니 당시 수도원장은 ‘모른다.’라고 딱 잡아뗐다는 이야기 전해. 수년이 흘러, 그런데도 아주 이상하니 국립박물관 학예관 한 명이 직접 가서 보겠다며 수도원을 방문한 거야. 그리고 갔더니 직사광선을 받는 곳에서 그림이 빛바랜 채 다 죽어가고 있는 걸 본거야. 이 학예관이 깜짝 놀라는 것을 본 박물관 신부님이 ‘우리 이런 것 또 있어’하면서 두 폭의 그림을 더 갖고 나왔던 거야. 또다시 놀라자 이번에는 소장한 그림을 모두 갖고 보여준 거야. 이게 모두 21첩, 겸재 정선의 금강산 화첩이 된 거지. 발견 과정이 드라마틱해.” “이 그림들이 우여곡절을 겪다가 2005년 한국으로 돌아와. 국보급 문화재 반환의 모범 사례지. 이 그림의 존재와 가치가 알려지면서 소더비 등 영국과 미국의 경매 회사들이 수도원에 그림을 팔라고, 그 비용으로 선교사업에 쓰라고 했어. 그렇지만, 예레미아스 슈뢰더 수도원 대원장이 ‘한국에 그렇게 귀한 것이라면 팔 수 없어. 돌려줄 거야.’라고 결심하고 자매관계인 경북 칠곡군에 있는 왜관수도원에 ‘국가에는 주지 마라.’는 단서로 영구임대하지. 난 반환된 겸재 화첩을 한국에서 보려고 겨우 날짜를 잡고 방문하기 1주일 전, 왜관수도원에 큰 불이 났어. 그 소식에 가슴이 철렁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아찔하지. 수도원이 거의 몽땅 다 불타버렸지. 다행히도 화첩은 다른 곳에 보관해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던 거야. 이런 보관의 이유로 반환된 겸재 정선의 금강산 화첩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거지.” “韓근대복식 300벌 한꺼번에 나와불상·곤여전도 등 1200여점 보관유럽 최대 한국 유물 소장 박물관”김 박사는 한국과 인연이 깊은 오틸리엔수도원 선교박물관에는 대학을 정년한 2005년부터 10년간 자원봉사직 학예사로 근무했다. “오틸리엔 수도원장이 한국 유물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합디다. 박물관에 가보니 조선시대 갑옷에 일본 사무라이 투구를 씌워 전시해 일본 유물로 착각하게 된 게 많았어. 설명도 엉터리가 부지기수였고. 동양관에는 한국·일본·중국 유물이 뒤섞여 있었던 거지. 선교박물관의 전시품 80%는 아프리카 것이었고, 나머지는 동양 3국의 유물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뒤섞여 있는 거야. 나 혼자 어찌할 수도 없고 해서 민속박물관에 요청하니 학예사 4명이 3주간 파견 나왔지. 우리 다섯이 먼지 속에서 정리했지. 전시실을 정리하니 한국 유물 540점이 나왔지. 다음해에는 지하실 창고를 뒤지니 먼지가 두텁게 쌓이고 거미줄이 쳐진 곳에서 한국 유물이 수두룩하게 나왔어. 17세기 불상과 1869년의 곤여전도(坤輿全圖·세계지도) 등 모두 1200여 점이나 됐지.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2016년 한국관을 별도로 재개관한 거야.” “하루는 수사님이 불러서 수도원에 갔더니 함을 하나 보여주는 거야. 열어보니 좀벌레가 휙 하고 지나가. 신랑 저고리, 신부 치마를 비롯한 근대 복식 300여벌이 나왔어. 전문가도 아니고, 정리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알고 지내던 조우현 교수(성균관대 복식과)에 연락해 사정을 설명했어. ‘비행기 비용도, 작업비도 못 준다. 그래도 숙식은 제공해 줄 테니 와서 도와다오.’라고 부탁했지. 그가 조교 두 명을 데리고 와서 2주 동안 수도원에서 먹고 자면서 정리해 주고 갔지. 이게 1920년대 복식인데 보기보다 귀한 거야. 우리 한국에선 사람이 죽으면 옷을 불태우는 관습이 있어서 근대 복식이 예상외로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거야. 문화재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진 국립민속박물관·서울시립역사박물관의 학예사들과 국외소재문화재단, 문화유산회복재단, 재정 지원을 해준 문화재청 등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야. 감사할 따름이죠.”“내 나이 팔순, 사명감 있는 후배 나서야” “무보수로 선교박물관에서 일할 때 힘들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는 사명감이 있었어. 훼손되는 귀중한 한국 유물을 복원하려고 독일과 한국의 정부 지원금을 받아내기 위해 정말 동분서주했거든. 이젠 후배들이 나서서 해야 하는데…. 한독 문화교류의 지식과 기반이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자기 분야가 아니면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없어서….” 김 박사의 백발이 더욱 선명해 보였다.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442년 전통 강릉 위촌리 ‘도배례’ 무형문화재 등록 추진

    442년 전통 강릉 위촌리 ‘도배례’ 무형문화재 등록 추진

    강원 강릉시는 442년간 이어져 오는 ‘위촌리 도배례(都拜禮)’를 무형문화재로 등록, 보존· 전승하는 작업을 추진한다고 11일 밝혔다. 설날 마을 합동 세배의식인 도배례의 맥을 잇고 있는 위촌리 마을 대동계가 지난해 “도배례를 무형문화재로 등록해 젊은이들을 더 많이 참여 시키고, 전통의 맥을 전승해 가치를 빛내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본격화 됐다. 시는 이미 지난해 말 전문가 용역을 마치고 각종 자료 확보에 들어갔다. 올해 사진· 영상과 문서자료를 구비하는 등 보완작업을 거쳐 내년에 문화재 지정을 신청할 계획이다. 지난해 실시한 ‘위촌리 도배례의 역사성과 문화재적 가치 재조명’ 연구 용역에서는 ‘문화재 지정을 적극 검토할 단계’라는 진단을 받았다. 연구 용역을 수행한 이규대 강릉원주대 교수와 박도식 강릉문화원평생교육원 주임교수, 최호 율곡연구원 교수는 “현재 도배례 참석자는 60대 이상이 대부분”이라며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소멸 위기를 인식해 2013년부터 국비를 지원하고 있지만 맥을 이어갈 중간 세대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어 무형문화재 지정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이들은 “1577년(선조 10년) 대동계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 위촌리 도배례는 17세기 중반 성산목린계 시행 이후 18∼19세기를 거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며 “마을 공동체의 결속을 보여주는 도배례는 세대, 계층, 이웃 간 갈등 등 현대사회의 고질적 병폐를 해결하는 치료제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위촌리 도배례는 해마다 설날을 전후한 음력 정초 한 장소에서 촌장을 모시고 집단으로 세배 드리며 준비한 음식을 나누고 서로 덕담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 된다. 강릉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김초엽 작가의 과학을 펼치다] 사실이 아닌 무지가 과학을 이끌었다고?

    [김초엽 작가의 과학을 펼치다] 사실이 아닌 무지가 과학을 이끌었다고?

    무지(無知)는 아는 것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단어이다. 아는 것이 힘인 사회에서 무지하다는 말은 늘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누군가에게 “당신은 무지하다”는 말을 들으면 창피하거나 화가 날 것이다. 어떤 의견을 두고 “그 생각은 무지의 소치이다”라고 평한다면 그것은 맹비난이다. 하지만 이 무지가 때로는 아는 것보다 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면 어떨까. 게다가 무지가 가장 유용한 분야가 다름 아닌 과학이라면? 스튜어트 파이어스타인의 ‘이그노런스’는 무지가 어떻게 과학을 이끄는 힘이 되는지를 말하는 책이다. 저자는 과학이 무지를 생산해 내는 활동이라고 말한다. 흔히 과학을 인류 지식의 축적으로 여기는 통념에 반하는 주장이다. 고대의 자연철학자들로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이름을 남긴 학자들은 당시의 학문을 폭넓게 이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노벨상을 받은 학자조차도 자신의 학문 분야 외에는 일반인만큼 무지할 수 있다. 이는 인류의 집단 지식이 과거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증가했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과학이 끊임없이 새로운 무지를 생산해 내는 활동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학이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질문들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한때는 ‘암흑에너지가 무엇인가’, ‘일반상대성과 양자역학이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세상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적도 있다. 성공적인 과학은 사실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과학자들을 또 다른 질문들로 이끈다. 사실이 아닌 무지가 과학의 추진력이라고 생각할 때,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도 변화하게 된다. 파이어스타인은 사회가 과학을 이해하는 방식도 무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은 현대사회의 중요한 축이지만 대중들은 과학을 멀게만 느낀다. 그러나 무지를 강조할 때 사람들은 과학의 장벽 앞에서 보다 평등해진다. 각자가 가진 지식의 정도는 차이가 클 수 있지만, 무지의 정도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설명하는 대신 질문을 던지고 ‘무엇을 아는가’를 묻는 대신 ‘무엇을 모르는가’를 물을 때, 우리는 더 유연하게 세계를 탐구하고 실재의 모습에 근접해 갈 수 있을 것이다.
  • 마포구, 6일 400년 전통 밤섬부군당제 개최

    서울 마포구는 6일 창전동 밤섬부군당에서 2019년 밤섬 부군당제를 개최한다고 5일 밝혔다. 매년 음력 1월 2일에 행해지는 이 제례는 약 400년 전 17세기부터 강을 건너다니는 밤섬 주민들의 태평과 풍요를 위해 지내졌다. 제례는 1968년 여의도 개발사업 때 밤섬이 폭파되면서 실향민들이 현재의 위치인 마포구 창전동 인근 부군당으로 자리를 옮겨 섬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다. 2005년 1월 10일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된 후 마포문화원이 주최하고 밤섬부군당 도당굿보존위원회가 주관하고 있다. 유동균 마포구청장은“??전통문화 행사의 보존과 계승을 위한 소중한 문화재인 밤섬부군당제를 앞으로도 잘 보존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저주 불렀다” 인도서 또 ‘마녀 사냥’…일가족 5명 사망

    “저주 불렀다” 인도서 또 ‘마녀 사냥’…일가족 5명 사망

    인도에서 또다시 ‘마녀사냥’이 벌어졌다. 영국 BBC는 30일(현지시간) 인도에서 ‘마녀’로 몰려 습격을 당한 여성과 아이들이 숨진 채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26일 인도 오디샤주 선디가르 지역의 한 부족 거주지에서 이 마을에 살던 미혼모 문다와 아이들이 시신으로 발견됐다. 시신은 문다의 집 근처 우물에서 나왔으며, 문다를 포함해 네 살, 일곱 살 난 아들 두 명과 일곱 살, 열두 살 난 딸 두 명 등 모두 5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 경찰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체포된 주동자는 자신을 마녀 잡는 주술사라고 밝혔으며 죽은 문다와 자녀들이 저주를 불렀다고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경찰에 따르면 마녀 사냥을 주도한 이 주술사는 지난 25일 한 무리의 남자들을 끌고 문다의 집에 침입했다. 도끼와 각목 등 흉기를 들고 습격한 이들은 문다와 자녀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오디샤주 동부에서 6명의 용의자를 체포했지만 가담자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소재를 파악하고 있다. 사건을 담당한 얄란 수사관은 “우리는 이번 마녀사냥에 연루된 용의자들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이들의 행방을 쫓고 있다”고 밝혔다. 마녀사냥은 무고한 여성을 마녀로 몰아 괴롭히는 광신도적 현상으로 16세기 말부터 17세기까지 횡행했다. 인도에서는 최근까지도 마녀사냥이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인도 북부 자르칸트 주에서 마녀로 몰린 모녀가 집단 구타와 성희롱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인도 경찰은 2017년 한해에만 99건의 마녀사냥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BBC는 이런 마녀사냥이 미신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과부의 토지와 재산을 노린 계획적인 범죄인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딸기의 계절을 맞으며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딸기의 계절을 맞으며

    식물의 형태를 관찰하고 그리는 건 내게 늘 새로운 발견의 시간이다.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신종과 기록이 없는 미기록종을 그릴 때엔 물론이고, 우리 가까이에 늘 존재해 온 과일과 채소를 그릴 때에도 마찬가지다.작년 이맘때 우리나라에서 육성한 딸기의 씨앗을 그리며 생각했다. ‘ 딸기의 씨앗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보통 때 같으면 씻어 한입에 물어 먹던 딸기를 수시간 째 그리느라 가만히 들여다보고 씨앗을 세었을 때, 딸기 열매의 표면에는 이백개가 넘는 씨앗이 달라붙어 있었다. 딸기를 먹을 때에 톡톡 터지는 식감을 주는 까만 그 무언가는 규칙적으로 배열된 이백여개의 씨앗으로서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흥미로운 건, 식물이 내 입에 들어오는 순간 이들은 내게 그저 음식일 뿐이지만, 형태를 가만히 관찰할 때 이들은 단순히 식용을 위한 존재가 아닌, 산과 들에서 사는 살아 있는 하나의 생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내가 과일과 채소 기록하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건 이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몇 년 전 나는 노르웨이의 수도인 오슬로시와 함께 ‘도시 식량 도감’이라는 제목으로 미래의 주요 식용 생물들을 그렸다. 그때 그렸던 식물 중엔 딸기도 있었다. 노르웨이의 식물 연구는 우리에겐 낯설지만, 이곳에는 스발바르 시드 볼트라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식용 식물 씨앗 저장고가 있을 정도로 식용 작물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이곳에서 선정한 미래의 주요 작물인 딸기는 우리가 늘 먹는 딸기와는 다른 야생 딸기였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바 딸기는 과일의 역할을 넘어 생물학적으로 영양학적으로 중요한 식물이라는 것이다. 장미과 식물인 딸기는 고대 로마인에 의해 처음 재배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딸기를 ‘프라가’라 불렀는데, 속명 프라가리아의 어원이기도 한 이 단어는 ‘향기로운 것’이란 뜻이다. 그래서 이름만 보면 향기가 유난히 많이 나는 식물인 것 같지만 사실 이 향기가 많이 나는 고대 로마인의 딸기와 우리가 먹는 딸기는 다른 종이다. 이들이 재배했던 건 그 재배로 끝이 나고, 17세기 프랑스 육군 공무원이 칠레에서 일하다 발견한 야생 딸기, 칠로엔시스로부터 지금의 딸기로 발전된다. 프랑스로 옮겨 가 심어진 이 ‘칠로엔시스’의 암꽃과 ‘버지니아나’라는 종의 수꽃이 우연히 혼식되어 새로운 종, 우리가 먹는 딸기와 비슷한 밭 딸기가 생겨나고, 이것으로 딸기 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중요한 전환점은 늘 우연으로부터 시작한다. 후에 딸기는 생과뿐만 아니라 빵과 과자, 음료 등 모든 요리의 레시피로 이용되며 인류에게 유용한 식재료로서 세계적인 과일로 발전한다. 긴 역사 동안 수많은 육종가들 덕에 딸기가 지금의 맛과 형태로 진화할 수 있었지만 그중에는 식물세밀화가의 역할도 한몫을 했다. 프랑스의 원예가이자 식물학자이자 교수였던 앙투안 니콜라 뒤센은 당시 프랑스에서 육성된 딸기의 역사와 특성을 묶어 1766년 ‘딸기의 박물학’이란 책을 출간했다. 작년 봄 파리자연사박물관 내 서점에서 딱 한 권 남아 있던 손때 묻은 이 책을 발견하고 바로 집어 들었을 때의 쾌감을 잊을 수 없다. 뒤센 그림 특유의 자로 잰 듯한 네모칸 안에 연필과 펜으로 쓱쓱 그린 프랑스의 야생 딸기와 교배종들. 딸기 열매만을 붉은빛으로 채색해 둔 이 기록은 유럽의 야생 딸기 원종들과 당시 개인 육종가들에 의해 우후죽순 개량된 딸기 품종을 정리했다는 데에 의미도 있었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품종별 특성과 재배 방법을 식별하고 우량종을 선발할 수 있었다는 데에서 딸기 연구 역사에 큰 역할을 했다. 물론 책에는 원예가였던 뒤센이 스스로 육성한 품종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돼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재배, 육성된 딸기의 맛이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며 ‘우리나라 딸기 전성시대’를 열어 가기 시작했다. 수출량은 급속도로 늘어 가고, 외국인들 사이에서 한국에 가면 꼭 먹어야 한다는 음식 목록에 딸기가 있다. 소비량이 늘어난 만큼 재배농가도 늘고, 아이들은 주말이면 가족과 딸기 농장에 가 수확 체험을 한다. 이쯤에서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뒤센이 그랬듯, 이 딸기들을 기록하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에서 하필 딸기가 부흥하는 건 어쩌면 딸기를 그려야 하는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리향을 시작으로 설향, 매향, 죽향…. 우리나라에서 육성한 이 딸기들을 하나씩 그려 나가고 싶다.
  • 통일신라 말기 제작된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 보물로 승격된다

    통일신라 말기 제작된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 보물로 승격된다

    통일신라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남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된다. 문화재청은 사적 제207호 ‘보령 성주사지’에 있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밝혔다. 성주사는 847년 신라 승려 낭혜화상이 세워 17세기까지 명맥이 이어져오다가 조선시대 말기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진 사찰이다. 현재 성주사 터에는 금당 앞쪽에 있는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를 비롯해 금당 뒤쪽에 있는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9호), 보령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보물 제20호),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보물 제47호) 등 4점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됐다. 특히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된 동 삼층석탑은 금당 뒤쪽에 다른 2기의 석탑과 함께 나란히 배치돼 있는데 이같은 배치는 국내에 유사한 사례가 없다. 금당 앞쪽에 오층석탑을 세워 ‘1탑 1금당’ 형식의 가람배치를 조성한 이후 나중에 석탑 3기를 금당 뒤쪽에 추가로 배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 삼층석탑은 중앙 삼층석탑, 서 삼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말기 같은 장인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미 보물로 지정된 2기의 탑에 못지않게 균형미와 조형미를 갖췄다. 중앙과 서쪽에 있는 석탑 2기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됐으나 동쪽에 있는 삼층석탑은 1973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동 삼층석탑만 뒤늦게 보물로 지정된 이유에 대해 “1963년 서쪽과 중앙에 있는 석탑을 보물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동쪽 석탑이 빠진 걸로 추정할 뿐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동 삼층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개의 층을 올렸으며 총 높이는 4.1m이다. 기단 상부에는 별도의 돌로 만든 받침석이 있고 1층 탑신에는 문고리와 자물쇠를 표현한 문짝 모양이 조각돼 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달콤한 사이언스] 2040년 “우리 가볍게 커피 한 잔”이라는 말 하기 어려워진다

    [달콤한 사이언스] 2040년 “우리 가볍게 커피 한 잔”이라는 말 하기 어려워진다

    “한 잔의 커피를 만드는 원두는 나에게 60여가지의 좋은 아이디어를 가르쳐준다.”(베토벤) “커피가 위 속으로 떨어지면 모든 것이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생각은 전쟁터의 기병대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기억은 기습하듯 살아난다. 작중 인물은 즉시 떠오르고 원고는 잉크로 덮인다.”(발자크) 17세기 유럽을 시작으로 한국에서는 20세기 초를 전후해 인기를 끌기 시작한 커피. 많은 사람들이 식사 직후, 나른한 오후, 아침을 시작하기 직전 멍할 때 찾는 것은 ‘검은색의 음료’ 커피이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시작할 때도 “커피 한 잔할까”라는 말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21세기 중후반부터는 커피를 아무 때나 쉽게 마실 수 없을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와 주목받고 있다. 다름 아닌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 때문이다. 영국 큐 왕립식물원, 노팅엄대 지리학부, 런던 퀸메리대 생물·화학부 공동연구팀과 영국 큐 왕립식물원, 에티오피아 환경·기후변화 및 커피숲포럼(ECCCFF) 공동연구팀은 각각의 연구분석을 통해 기후변화로 인해 빈번하고 길어진 가뭄과 숲의 파괴, 치명적인 해충의 확산 때문에 전 세계 대부분의 야생 커피 종(種)들이 수 십년 내에 멸종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이번 연구결과는 기초과학 및 공학분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즈’와 생물학 분야 국제학술지 ‘지구변화 생물학’ 16일자에 각각 실렸다. 현재 전 세계 커피산업은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규모를 이루고 있다. 커피의 원료가 되는 커피콩은 아라비카와 로부스타라는 두 가지 품종이 대표적인데 특히 아라비카는 전 세계 커피 생산량의 75%를 차지하고 향과 맛이 좋아 최고의 품질로 평가받고 있으며 로부스타는 아라비카종보다 카페인 함유량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124종에 이르는 야생 커피 종들이 있지만 수확량도 많지 않고 많이 쓰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일반적으로 아라비카는 고온에 취약하고 로부스타는 건조한 토양에 민감하다. 큐 왕립식물원과 노팅엄대, 런던 퀸메리대 공동연구팀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모리셔스의 숲을 포함해 전 세계에 존재하는 야생 커피콩 표본을 카탈로그로 작성하고 각각의 질병 저항성, 카페인 함량, 가뭄 내성 등의 특성을 분류했다. 그 결과 전체 커피 종의 60%가 멸종위험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라비카를 비롯한 커피종의 72% 정도가 보호된 상태에서 자라고 있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재배 환경이 적합하지 않고 해충들의 공격으로 인해 재배가 어렵고 지금과 같은 수확량을 확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야생 커피 종들은 삼림벌채로 개체수가 급격히 감소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큐 왕립식물원과 ECCCFF 공동연구팀은 기후변화로 인해 2038년이 되면 커피 생산량이 현재보다 40~50% 가량 줄어들게 될 것이며 21년 뒤인 2040년이 되면 아라비카나 로부스타 커피종은 사실상 멸종하거나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2088년이 되면 전체 커피 종의 40%, 일부 분석모델에 따르면 80%가 사라질 것이라는 분석도 함께 내놓았다. 현재 아라비카와 로부스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들이 멸종 상태에 이르고 그 밖의 커피 종도 대부분 사라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금세기 중반경이 되면 커피는 지금처럼 아무 때나 마실 수는 없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애런 데이비스 큐 왕립식물원 연구원은 “현재 우리가 마시는 커피의 품종이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쳐 있는 상태에서 기후변화는 더이상 우리에게 커피를 마실 수 있게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종 다양성 확보 뿐만 아니라 기호식품으로 커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커피 종의 확보와 재배, 특성 분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횡재했네”…금속탐지기로 17세기 금반지 찾은 여성

    “횡재했네”…금속탐지기로 17세기 금반지 찾은 여성

    한 아마추어 보물 사냥꾼이 15cm 땅 아래에서 17세기 금반지를 발견했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지난 10일(현지시간) 잉글랜드 블랙풀 출신 여성 미셸 발(53)이 스코틀랜드 로몬드 호수 근처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는 반지를 찾았다고 보도했다. 이 반지의 보존 상태는 매우 완벽해 최대 1만 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1400만원의 가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소 금속탐지기를 들고 땅 속에 묻힌 보물을 찾는 미셸은 스코틀랜드 로몬드 호수 근처의 개인소유지에서 주인의 허가 아래 탐사 활동을 벌이던 중 이 금반지를 발견했다. 그녀는 “겨우 15cm를 파고 내려갔을 뿐인데 반지가 나왔다. 처음엔 그게 뭔지 모르고 그저 금을 찾았다는 사실에 기뻐했다”고 설명했다. 미셸은 반지 감정을 위해 한 경매사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 반지가 찰스 2세(1660~1685)를 섬기던 신하 에드워드 콜만(1636~1678)의 것임을 확인했다. 에드워드는 1678년 ‘구교도 음모사건’으로 교수형에 처해질 때까지 찰스 2세를 보필했다.구교도 음모사건은 1678년 영국의 재침례교파 타이투스 오츠(1649~1705)의 음모로 죄없는 카톨릭 교도들이 처형된 사건이다. 당시 타이투스는 카톨릭이 국왕 찰스2세를 암살하고 동생 제임스를 왕위에 오르게 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모함해 여론을 들쑤셨다. 공황 상태는 1681년까지 3년간 계속됐고, 에드워드 콜만을 포함해 최소 22명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했다. 에드워드의 반지는 그의 할아버지 사무엘 콜만이 물려준 가보로, 1673년 제임스 2세의 왕비 메리 모데나를 수행하면서 스코틀랜드로 넘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스코틀랜드국립박물관은 반지의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박물관이 소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데일리메일은 그 반지가 박물관에 소장된다면 미셸과 토지 소유주에게 일정액의 보상이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귀족 대구’ 때문에 미국 독립혁명이 시작됐다고?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귀족 대구’ 때문에 미국 독립혁명이 시작됐다고?

    지난해 말 강원 고성군 죽왕면 공현진 앞바다에 명태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일이 있었다. 표본을 추출해 유전자 분석을 해 보니 모두 자연산이었다. 어민들과 수산 전문가들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언제부턴가 동해에서 명태가 사라졌고, 이를 되살리기 위해 2014년부터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어민들과 수산 전문가들은 그 계획의 성공을 예측했지만, 놀랍게도 2만 1000여 마리의 명태는 모두 자연산이었다. 40여 마리가 더 잡히고 다시 사라진 명태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간 것일까. 수산 전문가들은 명태의 회유 경로와 습성 등을 더 세밀하게 연구해야 한다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장담하기 어려운 모양이다.기후변화와 남획으로 사라진 명태의 속성을 좀더 자세하게 볼 수 있는 책이 있다. 명태와 사촌쯤 되는 대구에 얽힌 역사와 조리 방법까지 서술한 마크 쿨란스키의 ‘대구’가 그것이다. 일단 책에서 말하는 대구는 ‘대서양대구’로 몸집이 크고 개체수가 많으며 맛이 담백해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어종이었다. 얕은 물을 좋아해서 잡기 쉬웠다. 전 세계에서 상업적인 생선이 된 이유다. 저자에 따르면 대구는 역사상 유럽인의 주요 식량이자 부를 쌓는 수단이었다. 8세기에 바이킹은 말린 대구, 우리로 치면 북어를 주식으로 삼아 유럽을 주름잡았다. 17세기 초 종교 박해를 피해 바다를 건넌 순례자들은 종교도 종교지만, 대구를 잡아 부자가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 앞바다에는 그만큼 대구가 풍부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어민들 중에 명태 잡아서 큰 부자가 된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대구를 잡아 큰돈을 번 유럽인들은 제법 많다. 18세기 초 뉴잉글랜드는 대구 무역의 중심지였는데, 대구 어업으로 가문의 부를 쌓은 사람들을 일러 ‘대구 귀족’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국제적인 상업 세력으로 부상했는데 소금에 절인 대구를 지중해 시장에 판매해 큰 이익을 챙겼다고 한다. 질이 떨어지는 대구는 서인도제도의 설탕 플랜테이션에 팔았다. 설탕 플랜테이션 노예들은 이 물고기를 주식 삼아 하루 16시간의 중노동을 버텨야만 했다. 저자는 말한다. “결과적으로 소금에 절인 대구는 카리브해의 노예들을 먹여 살려 노예무역을 더욱 활성화시켰다.” 저자는 대구 때문에 미국이 독립했다는, 듣기에 따라 황당한 주장도 펼친다. 역시 18세기 들어 영국이 식민지인 뉴잉글랜드의 당밀과 차에 세금을 매기고 대구 무역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었다. 대구를 잡아 부자가 될 꿈에 부푼 사람들이 이 조치에 반발해 미국 독립혁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1782년 영국과 평화협상이 벌어졌지만, 가장 큰 난제는 미국의 대구 잡이 권리에 대한 것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예나 지금이나 남획이 문제다. 더 많은 대구를 잡기 위한 노력은 끝이 없었는데, 19세기 들어 어업 현대화가 이뤄지면서 대구 개체수는 급감했다. 어업의 현대화를 이룬 수단은 주낙이었다. 프랑스는 국가적으로 선단에 주낙을 설치하기도 했다. 낚싯줄에 낚싯바늘이 여러 개 달린 이 장비에 얼마나 많은 대구가 잡혔을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대구의 남획을 걱정하면서도 저자는 각 장이 끝날 때마다 ‘한 요리사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대구 요리를 소개한다. 흥미롭지만 다소 생뚱맞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구’를 읽으며 자연산 명태도 돌아오고,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로 바다에 나간 치어들도 성장해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식탁이 더 풍성해질 테니 말이다. 이 기대도 다소 생뚱맞은 것 아닌가 저어된다.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 아무도 모른다, 이 수수한 평화의 땅…나만 알고 싶은 풍경 한 점 와인 한 잔

    아무도 모른다, 이 수수한 평화의 땅…나만 알고 싶은 풍경 한 점 와인 한 잔

    슬로베니아. 조금 낯선 나라다. 유럽 동남부에 자리한 나라인데 옛날에는 유고 연방에 속했다. 나라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슬라브족들이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슬로베니아에 관한 책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인터넷 서점을 찾아보면 김이듬 시인이 슬로베니아를 여행하고 쓴 여행기 ‘디어 슬로베니아’가 나온다. 슬로베니아에 교환 교수로 머물며 틈틈이 여행한 슬로베니아를 시인 특유의 감수성 어린 문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슬로베니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힐링’ 혹은 ‘위로’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 그것이 지닌 가식적인 느낌을 싫어하는 다소 까칠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온 후로 조금씩, 천천히 마음을 치유받았다. 바쁘게 뛰어다니며 불안하고 초조하게 살아온 지난 삶을 돌아보며 자족과 평화를 길어 올렸다. 태생적 방랑자인 양 수없이 여행을 다니며 노마드적인 생활이 몸에 배어 있는 내가, 슬로베니아에서 고향에서조차 느낄 수 없었던 수수하고 평화로운 삶의 길을 발견한 것이다.” 김이듬 시인의 이 감상이 가장 정확한 것임을 슬로베니아에 가보면 알게 되시리라.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는 나라. 뉴스를 따라가기조차 버거운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른 느린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나라가 바로 슬로베니아다.슬로베니아는 발칸반도에 숨은 듯 자리잡고 있다. 면적은 전라도와 비슷하다. 인구는 20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나라가 워낙 작다 보니 동서를 횡단해 봐야 고작 3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슬로베니아를 여행하다 보면 맨날 국경지대만 다니게 된다. 여기는 헝가리, 저기는 독일, 저기는 크로아티아와 국경이다. 슬로베니아는 1991년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이 해체되면서 독립했는데 이 나라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보다 더 많다. 파울루 코엘류의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 주인공 베로니카는 자살을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조국 슬로베니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글을 쓴 기자에게 슬로베니아를 설명하는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탄식한다. “슬로베니아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몰라. 아무도. 이는 온당치 못한 국제적 무관심이다”라는 황당한 유서를 쓰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슬로베니아를 찾는 여행자들은 수도 류블랴나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발음하기가 약간 까다로운 이 도시는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다.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큰 도시라고 하지만, 인구라고 해봐야 28만명밖에 되지 않는다. 어느날 가이드와 함께 류블랴나 거리를 걷는데 가이드가 이렇게 말했다. “아니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못 보던 사람들이 많지?”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 오늘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구나.” 그렇다. 류블랴나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인근 도시와 국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류블랴나로 온 것이다. 그러니까 류블랴나에서 태어나 30년째 살고 있는 그녀는 류블랴나 사람들 대부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류블랴나는 그만큼 작다.류블랴나 가운데 자리한 프레셰렌 광장은 오스트리아와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등지에서 오는 기차들이 정차하는 중앙역과 가깝다. 그래서인지 언제나 여행자들과 현지인들로 붐빈다. 프레셰렌이라는 이름은 슬로베니아의 국민 시인인 프레셰렌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낭만주의의 선두주자였으며, 강렬한 문장으로 유명했던 시인이다. 그가 죽은 날인 2월 8일을 국경일로 정하고, 이날 전국적으로 그의 시를 읽는 낭송회와 콘서트, 연극 공연 등이 열린다고 하니 그에 대한 슬로베니아 국민들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동상은 아득한 시선으로 어느 지점을 응시하고 있는데 그 시선이 닿는 지점에는 그가 평생 사랑했던 여인 율리아 프리미츠의 집이 있다. 평생 사랑했지만 신분의 차이로 함께할 수 없었던 그들을 위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이루라는 의미로 이렇게 동상을 배치했다고 한다.광장 옆으로는 류블랴니차강이 흐른다. 강 양옆으로는 바로크 양식과 아르누보 스타일의 건축물이 즐비하다. 대부분 레스토랑과 카페, 서점 등이다. 소란스럽지 않아 산책을 하듯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니기 좋다.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트리플교가 나온다. 슬로베니아의 대표적인 건축가 요제 플레치니크가 설계한 것으로 류블랴나 엽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류블랴나 여행의 하이라이트이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명소는 류블랴나 성이다. 9세기에 처음 세워졌다가 1511년 지진으로 파괴된 후 17세기 초에 재건됐다. 성에 오르면 장난감 도시 같은 류블랴나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슬로베니아를 일컫는 또 다른 별명이 있다. ‘유럽의 미니어처’다. 이 작은 나라 안에 유럽의 모든 것이 다 모여 있기 때문이다. 블레드 호수에서 2시간 정도 북쪽으로 가면 피란 지역. 또 다른 풍경을 보여 준다. 이탈리아와 면한 휴양도시인데 슬로베니아 사람들도 즐겨 찾는다. 가이드는 피란이 너무 좋다고 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을 꼽으라면 이곳일 거야.”●물 좋고 산 좋은 ‘유럽의 미니어처’ 유럽에서 유명한 온천지대 중 손꼽히는 곳이 슬로베니아다. 물이 좋기로 유명한 이 나라는 수로의 길이가 3만㎞에 달하고 수돗물은 그냥 마셔도 될 정도로 깨끗하다. 또한 나라 곳곳에 흩어진 87곳의 샘에서 온천수와 광천수가 솟아난다. 마그네슘과 칼슘이 풍부한 온천 지대는 고대 로마 시대부터 다양한 질병에 효능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도 크로아티아, 독일, 이탈리아 등 주변국부터 멀리 대만에서까지 치유 목적으로 여행객들이 찾아온다. 라스코 온천 마을은 EDEN(European Destination of ExcelleNce)이 뽑은 ‘2013 유럽 최고의 여행지’로 뽑히기도 했다. 라스코 지역은 중세 시대 로마인들에게 발견된 이래 선교사들이 주기적으로 방문했던 곳으로 1854년 합스부르크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공식적으로 온천 지역으로 명명했다. 알프스 풍경도 만날 수 있다. 알프스 하면 스위스를 떠올리지만 슬로베니아도 발을 걸치고 있다. 줄리안 알프스라고 부르는,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댄 북서부 산악지대다. 트리글라브 등 2000m 이상 고봉이 줄줄이 이어진다. 6월까지도 잔설이 남아 있을 정도다. 블레드 호수는 ‘줄리안 알프스의 진주’라고 불리는 곳이다. 둘레 6㎞의 작은 호수이지만 전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알프스의 만년설이 녹아 만들어졌다. 호수가 보여 주는 풍경은 정말이지 그림 같다. 푸른 물비늘을 일으키며 햇살을 반사하는 호수와 그 호수 위에 떠 있는 작은 섬, 그리고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알프스 산맥은 방금 달력에서 오려낸 듯한 풍경을 보여 준다. 블레드 호수가 유명한 건 블레드 호수에 떠 있는 블레드섬 때문이다. 이 자그마한 섬은 슬로베니아에서 유일한 섬으로 전통 나룻배 ‘플레타나’를 타고 들어갈 수 있다. 블레드 호수엔 플레타나가 23척뿐이다.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시대 때부터 그랬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블레드 호수가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았고 딱 23척의 배만 노를 저을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 숫자가 200년 넘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뱃사공 일은 가업으로만 전해지고 남자만 할 수 있다고 한다.●첫맛은 화이트·끝맛은 레드 ‘오렌지 와인 ’ 슬로베니아 와인도 빼놓을 수 없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크로아티아, 포르투갈 등 유럽 국가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 와인에 대한 찬란한 수식어를 붙이는데 슬로베니아 와인도 이 리스트에 한자리를 차지한다. 오렌지 와인이다. 많은 이들이 오렌지로 만든 와인이라고 오해하지만 당연히 포도로 만들었다. ‘제4의 와인’으로도 불린다. 몇 년 전 영국 와인저널 ‘디켄터’의 칼럼니스트 크리스 머서가 자신의 칼럼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은 오렌지 와인일 것”이란 추측을 해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화이트 와인 품종으로 레드 와인 양조 방식을 접목해 만들기 때문에 레드 와인의 풍부함과 화이트 와인의 상쾌함을 모두 갖고 있는 게 특징이다. 첫맛은 화이트, 끝맛은 레드다. ●400세 가장 오래된 포도나무 기네스북 올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나무도 슬로베니아에 있다. 드라바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마리보르는 슬로베니아 제2의 도시로, 생산되는 와인 중 90% 정도가 화이트 와인인, 그야말로 화이트 와인의 천국이다. 마리보르 사람들의 와인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은 대단한데, 그 자부심의 한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나무가 있다.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라 온 이 포도나무는 기네스북에 올랐으며, 16세기에 지어진 올드 바인 하우스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슬로베니아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다. 여행하는 동안 한 번도 화내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다. 어느 레스토랑에서 가이드가 내게 슬로베니아식 치킨을 맛보여 주기 위해 웨이터에게 10분 동안 치킨에 관해 이것저것 물었지만 그는 시종일관 웃으며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아마도 우리나라 같으면 메뉴판을 던져 놓고 나갔을 텐데 말이다. 김이듬 시인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대한 자유롭고 게으르게,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삶이라는 여행을 누려 가야겠다.” 슬로베니아를 여행하다 보면 알게 된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에 낙관과 사랑이 생겨나게 하는 것은 열렬함과 치열함이 아니라, 한낮의 따스한 햇볕과 한 줌의 시원한 바람 그리고 맛있는 음식이 아닐까 하는 사실을 말이다. 글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여행수첩 슬로베니아로 가는 직항은 없다. 뮌헨, 터키 등을 거쳐 가야 한다. 블레드는 오스트리아 국경과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크로아티아 등 인근 국가에서 도착하고 출발하는 국제선 전용 기차역이 따로 있다. 자세한 정보는 유레일 홈페이지(www.eurail.com/kr)를 참조하면 된다. 중부 유럽과 발칸반도를 잇는 주요 열차편도 류블랴나를 거쳐 간다. 시차는 한국보다 7시간 늦다. 비자는 필요 없다. 통용되는 화폐는 유로화. 물가는 한국과 비슷하다. 슬로베니아 소시지로 크라니스카 크로바사가 있다. 다진 돼지고기에 마늘과 소금, 후추 등을 넣어 양념한다. 식감이 탄탄하고 간이 짭조름하다. 라스코와 유니온은 슬로베니아 맥주의 양대 산맥. 두 맥주 모두 풍미가 강한데 라스코는 쌉싸름한 맛이 강하고, 유니온은 부드러운 맛이 강하다. 포티차라는 음식도 있다. 호두나 허브, 양귀비씨, 치즈, 꿀을 넣은 것으로 롤케이크와 비슷하다. 결혼식이나 부활절, 성탄절과 같이 중요한 행사나 공휴일에 먹는 전통음식이다.
  • 우크라정교 자치권 서명…종교도 러시아서 독립

    우크라정교 자치권 서명…종교도 러시아서 독립

    동방정교 수장인 바르톨로메오스(가운데) 세계 총대주교가 5일(현지시간) 터키 이스탄불 성게오르기오스 성당에서 우크라이나 정교회 수장인 예피파니(오른쪽) 대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우크라이나 교회의 자치권을 승인하는 ‘토모스’(교회령)에 서명하고 있다. 17세기부터 사실상 러시아 정교회 관할 아래 있던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6일부터 자치 교회 지위를 갖게 된다. 우크라이나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병합에 반발해 정치·종교적 독립을 추진해 왔다. 이스탄불 EPA 연합뉴스
  • [서울광장] 네덜란드라는 거울/이두걸 논설위원

    [서울광장] 네덜란드라는 거울/이두걸 논설위원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야간순찰)’는 네덜란드 바로크 양식의 거장인 렘브란트(1606~1669)의 대표작이다. 암스테르담의 치안을 담당한 민병대를 묘사한 그림이다. 황금빛 복장에 붉은 휘장을 어깨에 거는 등 화려한 귀족 복장을 하고 있지만, 이들의 신분은 상인 등 시민 계층이었다. 당시 번성했던 네덜란드의 상업과 시민 계급의 위상을 보여 준다.렘브란트가 등장하기 전부터 네덜란드는 플랑드르 화파 등 현대 서양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들을 배출했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네덜란드가 찬란한 문화유산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기 때문이다. 렘브란트가 주로 활동한 17세기 초는 ‘네덜란드의 시대’였다.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떠오르기 전까지 활발한 세계 경영을 펼쳤다. 주식회사 형태의 동인도 회사를 설립한 것도,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아시아 등 전 세계에 본국의 60배에 달하는 식민지 경영을 벌인 것도 네덜란드가 먼저였다. 당시 영국을 포함한 다른 국가들 경제 정책의 주 목표는 네덜란드를 따라잡는 것이었다. 경제사학자 로버트 C 앨런 옥스퍼드대 교수에 따르면 암스테르담 노동자들은 최저생계비의 4배 안팎 실질 임금을 벌어들였다. 영국 런던이나 이탈리아 플로렌스 등 여타 경쟁 지역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해’는 한 세기를 지속하지 못했다. 영국 크롬웰 정부가 1651년 발표한 항해조례가 계기가 됐다. ‘영국 항구에 화물을 가지고 입항하는 선박은 모두 영국 선박을 이용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보호무역 조항은 무역으로 먹고사는 네덜란드에 치명타가 됐다. 영국과의 세 차례 전쟁에서도 패배했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 경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현재 1700만명)와 협소한 영토라는 한계로 내수시장을 충분히 키우지 못한 네덜란드는 이후에도 강국으로 남았지만 당시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피식민지 국가 중 선진국으로 도약한 유일한 국가다. 네덜란드처럼 수출 위주의 전략으로 성공을 거둔 덕분이다. 지난해 미국과 독일, 중국 등에 이어 일곱 번째로 수출 6000억 달러 고지에 올라섰다. 하지만 수출 위주의 ‘패스트 팔로어’ 전략은 한계에 봉착한 상태다. 생산가능 인구 감소 추세까지 겹쳐 잠재성장률은 2% 후반대에서 중반대로 떨어질 조짐이다. 최근의 경기 둔화는 급격한 최저임금 상승 등 정부의 실책이 한몫했지만 근본적으로 산업 경쟁력 약화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반도체를 제외하고 별다른 미래 먹거리가 보이지 않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정부가 슬그머니 다시 꺼내든 ‘투자 확대’ 역시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총투자율은 2017년 기준 31.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20% 남짓인 미국이나 독일, 일본 등을 훌쩍 뛰어넘는다. 과잉투자로 경제가 거덜난 건 한 세기 전 대공황뿐 아니라 불과 22년 전 우리가 겪었던 일이다. 세계 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도 높다. 미국 등을 중심으로 한 보호무역주의는 더욱 거세질 게 명확하다. 경기 후퇴기에 세계 각국은 어김없이 자국의 문을 걸어 잠갔다. 수출로 자전거의 패달을 돌리는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나라 소득의 절반 정도를 벌어들이는 수출을 포기하자는 건 아니다. 수출과 내수가 동반 성장하는 경제를 목표로 삼아 국민 전체의 소득을 끌어올려 소비와 내수를 성장의 지렛대로 삼는 소득주도성장론이 유일무이한 대안이라는 말이다. 5000만 인구는 적은 숫자가 아닐뿐더러 한반도 긴장 완화에 따라 더 커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소득주도성장은 최근 경제난의 주범으로 융단폭격을 맞는 형편이지만, 비난의 화살은 이를 잘못 운용한 정부에 돌려야 한다. 유일한 수단이 아닌 최저임금 인상은 속도 조절이 필요하고, 복지 확대로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귀를 닫은 채 소극적인 재정정책으로 일관한 책임이 작지 않다. 청와대가 당장 할 일은 경제 실정(失政)을 언론 탓으로 돌리는 대신 과오에 대해 국민에게 솔직히 사과하고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것이다. 구조조정과 규제완화 등에 따라 고통 분담이 불가피하다는 점도 고백해야 한다. ‘20년 집권’을 꿈꾸는 대신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밝혔듯이 “평범한 국민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전력을 다하는 건 3년 임기를 남겨 둔 정부의 의무다. douzirl@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