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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요칼럼] 미강서원과 미수 허목 미술관의 우선순위/서동철 서울신문STV 사장

    [금요칼럼] 미강서원과 미수 허목 미술관의 우선순위/서동철 서울신문STV 사장

    파주에 살다 보니 쉬는 날 드라이브라도 하려면 교통체증에 시달리는 자유로 남쪽보다는 언제나 시원하게 달릴 수 있는 북쪽으로 방향을 잡게 된다. 재작년 문산에서 포천으로 이어지는 국도 37호선이 완공되고는 연천을 목적지로 삼곤 하는데 괜찮은 막국수집이 몇 군데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연천은 중요한 문화유산을 다양하게 품고 있다. 전곡리 구석기 유적과 전곡선사박물관은 한반도를 대표하는 구석기 문화유산이고 호로고루와 당포성, 은대리성은 남쪽에는 드문 고구려 유적이다. 경순왕릉과 숭의전은 각각 통일신라에서 고려, 고려에서 다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를 상징한다. 최근에는 군남리 막국수집으로 가는 길에 미수 허목(1595~1682)의 묘소를 알리는 자그마한 푯말이 눈에 띄어 반가웠다. 미수라면 흔히 남인의 영수로 불리며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과 이른바 예송 논쟁을 벌인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한마디로 당대를 대표하는 정치인의 한 사람이다. 그런가 하면 언젠가 삼척에서 미수 특유의 전서라는 뜻으로 미전(眉篆)이라고도 불리는 그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글씨를 보고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고, 영천 완귀정(玩龜亭) 같은 다른 전서도 무척 흥미로웠다. 안동 하회마을의 충효당(忠孝堂) 편액이 인상 깊었던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는 중국 상고시대 문자를 탐구해 자신만의 서체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17세기에 이루어진 과거에 대한 연구 결과가 21세기에도 현대적 느낌을 주는 글자체로 나타났다는 사실이 놀랍다. 미수가 만년을 연천에서 보냈고, 그를 배향한 미강서원이 이 고장에 세워졌다는 사실도 알고는 있었지만 푯말을 보기 전까지는 찾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사실 지금도 연천에 남은 미수의 자취는 무덤뿐이다. 초가에 불이 나는 바람에 은퇴한 거물 정객의 거처가 마땅치 않다는 소식에 숙종이 내렸다는 일곱칸 은거당과 임진강변의 사액서원은 주춧돌만 남았다. 십청원(十靑園)과 괴석원(怪石園)이라는 정원도 있었다지만 흔적이 없다. 연천군은 은거당 터와 미강서원 터를 발굴조사한 데 이어 두 유적을 복원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럴수록 개인적으로는 지역이 낳은 역사 인물의 거처와 그를 기리는 시설의 모습을 되살리는 흔한 방법보다 오늘날에도 미래지향적으로 느껴지는 작업을 펼친 ‘미술인 미수’를 조명하는 데 투자의 우선순위를 두면 관광객 유치 효과도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과거엔 정치인이 예술인이고 예술인이 정치인이었다. 추사 김정희도 그랬다. 그는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제주 대정에 8년, 함경도 북청에 6년 동안 유배되기도 했다. 추사는 제주에서 추사체를 완성했고, 그곳에서 그린 세한도는 대표작이 됐다. 제주에는 세한도에 담긴 소박한 집을 닮은 추사관도 세워졌다. 일종의 미술관이다. 겸재 정선도 양반 사대부라는 출신 성분상 정치적 색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양천현령 시절 겸재가 남긴 양천팔경첩(陽川八景帖)의 대부분은 노론 실세들의 별서(別墅) 등을 그린 것이다. 같은 시기 한강 주변 경치를 33폭에 담은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도 소재를 고르는 기준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겸재가 정치인이자 행정가로 머물렀던 양천 관아와 양천향교 주변에는 겸재정선미술관이 들어섰다. 지금은 서울 강서구에 속한다. 미수가 추사나 겸재와 다르지 않은 반열의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정치인으로서, 사상가로서의 자취가 너무 우뚝해 예술 분야에서의 성취가 오히려 가려지고 있지 않은가 싶다. 첫 번째 ‘미수미술관’이 연천에 세워졌으면 좋겠다. 우리 문화사를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미술관 입지가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미강서원 터 주변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 [금요칼럼] 뼛속까지 사대주의/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금요칼럼] 뼛속까지 사대주의/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17세기 전반 동아시아는 격동에 휩싸였다. 약 40년에 걸쳐 명에서 청으로 제국이 바뀌는 지각변동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지정학적으로 명과 후금(청) 사이에 처한 조선에서는 외교 노선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다. 모든 신료가 이구동성으로 친명배금(親明排金)을 외친 데 반해 국왕 광해군은 명나라 몰래 후금과 핫라인을 열어 우호적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며 홀로 분투했다. 후금이 조선을 침공할 경우 조선의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막아 낼 수 없었고, 명나라도 왜란 때처럼 구원병을 보낼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침공을 사전에 방지하려면 우호적인 대화 창구를 열어야 한다는 게 광해군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료들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 의리를 어떤 상황에서도 조정할 수 없는 절대 가치 곧 천륜(天倫)으로 전제했다. 따라서 명과 후금 사이에서 조선이 취할 태도는 강력한 친명정책뿐이었다. 신료들이 보기에 외교 노선은 친명배금 하나뿐이지 굳이 토론할 사안도 아니었다. 오히려 명과 후금 사이에서 어떤 노선을 취할 것인지 고민하는 그 자체를 명나라 황제에 대한 심각한 불충으로 간주했다. 어전회의에서 일부 신료는 “차라리 전하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천조(天朝)에는 지을 수 없다”는 폭탄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조선 국왕 위에는 엄연히 황제가 있으니 황제의 명령을 왕이 따르지 않겠다면 왕을 저버리고 황제에게 충성하겠다는 의미였다. 왕의 눈앞에서 대놓고 이런 발언을 해도 광해군은 그들을 처벌할 수 없었다. 황제와 모든 관계를 끊고 홀로서기를 하겠다는 굳은 결심이 서지 않는 한, 황제를 따르겠다는 신하를 함부로 처벌할 수도 없는 기막힌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신료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광해군이 만포첨사 정충신을 후금의 누르하치에게 특사로 파견했다. 조선은 후금과 원한이 없으니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는 국왕의 뜻을 전하는 임무였다. 그런데 정충신은 누르하치 보좌진과의 회담에서 국왕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과 명나라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그 관계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는 후금의 도성 한복판에서 조선은 유사시에 무조건 명나라 편에 서겠다고 선언한 셈이었다. 왕의 특사로 후금을 방문한 정충신이 왕의 뜻이 아니라 신료들의 생각을 그대로 누르하치에게 전한 것이다. 당연히 회담은 결렬됐다. 압록강을 건너 돌아온 정충신은 바로 한양으로 복명서를 올리지 않았다. 당시 압록강 어귀 용천에는 요동에서 피신해 온 명나라 군인과 난민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 우두머리는 모문룡(毛文龍)이라는 명나라 장수였다. 귀국하자마자 정충신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이 바로 용천의 모문룡 군영이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후금 방문을 통해 얻은 모든 정보를 일개 명나라 장수에게 보고했다. 국왕에게 올리는 보고서는 그다음이었다. 왕권이 심각하게 실추된 광해군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이요, 사면초가였다. 신료들은 아예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나라의 행정은 마비됐고, 광해군의 어명은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허공에 흩어졌다. 정변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발생했고, 광해군은 쫓겨났다. 광해군을 몰아낸 신료들의 생각이 이제 조선왕조의 절대 가치가 돼 후대에 이어졌다. 심지어 지금도 강하게 남아 현실에서 작동한다. 남북 관계의 돌파구를 좀 찾으려 하면 한국의 신하인지 미국의 신하인지 모를 태도로 일관하는 사람이 고위 공직자 중에 적지 않다. 몇 년 전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이메일 내용을 보면 녹은 한국에서 받으면서 정작 일은 미국을 위해 하는 이가 적지 않다. 위에서들 이 모양이니, 지난 4·15 총선이 부정선거라며 미국 백악관에 청원하고 그 참여자가 10만명을 넘었다는 얘기는 차라리 애교로 봐줄까?
  •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황금빛 사프란, 이토록 비싼 향신료라니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황금빛 사프란, 이토록 비싼 향신료라니

    ‘세계에서 가장 비싼 향신료’, ‘황금보다 비싼 식재료’. 사프란에 따라붙는 수식어다. 이런 최상급 수식어는 해묵은 이야기일지라도 언제나 대중의 이목을 잡아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에 동하지 않기란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앞에 두고 맛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런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대체 사프란은 어떤 식재료이길래 황금보다 비싸다는 대접을 받는 것일까. 사프란이 비싼 식재료인 것은 재배할 수 있는 조건이 까다롭고 노동력이 어마어마하게 드는 데 비해 수확량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사프란은 붓꽃과의 식물인 사프란 크로커스의 붉은 암술대를 말한다. 1년 중 가을에만 꽃을 피우는데 꽃을 손수 따서 암술을 분리한 후 건조해 만든다. 암술은 작고 연약해 기계로 수확하기 어렵다. 사프란 1㎏을 얻기 위해선 15만 송이의 꽃을 따야 한다. 한 사람이 400시간 이상 노동해야 수확할 수 있는 양이다. 게다가 수확 가능한 시간은 단 2주. 사람 손이 많이 간다는 건 곧 인건비 상승으로 연결된다. 다행인 건 사프란 꽃이 햇빛을 고스란히 받는 들판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만약 산속에서 자라는 야생화였다면 그 가치는 더 높아졌으리라. 사프란은 원산지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세계 생산량의 90% 이상이 중동 지역에서 나온다. 국제거래가 기준 중동산은 1g당 1~2유로 선. 스페인과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산과 미국산은 6~8유로 선에서 거래된다. 가장 비싼 사프란은 1g당 약 1만원인 셈이다. 요즘이야 금값이 치솟았지만, 사프란이 금보다 비싼 적도 있었다.이토록 비싼 사프란은 식재료로서 어떤 가치가 있을까. 우리 입맛을 기준으로 봤을 때 맛으론 딱히 매력이 없다. 약간의 쓴맛과 금속성의 날카로운 요오드 맛을 품고 있다. 품질이 좋은 사프란은 단맛도 난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익숙해질 만한 맛과 향과는 괴리가 있다. 중동과 유럽에서 사프란은 맛내기용보다는 식재료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착색제로 사랑받았다. 보통 따뜻한 물에 불려 색을 우려낸 후 요리에 활용한다. 쌀을 익히거나 국물요리를 할 때 사프란을 넣으면 먹음직스러운 노란빛으로 물든다. 오래 열을 가해도 색이 거의 변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향신료가 그랬듯 사프란은 약용으로도 사용됐다. 주로 진정제와 소독제로 쓰였는데 로마인들은 사프란을 섞은 물을 실내 청정을 위해 곳곳에 뿌려 댔고, 흑사병이 창궐한 14세기 무렵 사프란이 다른 몇몇 향신료와 함께 병을 막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유럽에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기대한 만큼의 효과는 없었지만 말이다. 유럽의 대표적인 사프란 생산지는 스페인이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배경으로 유명한 라만차 지방의 사프란을 제일로 친다. 아랍인들은 약 800년간 이베리아반도에 머무르면서 사프란을 이용한 쌀요리를 스페인에 전했다. 오늘날 스페인 음식의 대명사로 불리는 황금빛 파에야가 그 유산이다. 이탈리아도 사프란 생산지로 손꼽힌다. ‘리소토 알라 밀라네제’는 파에야와 마찬가지로 사프란을 이용해 금빛으로 물들인 쌀요리다. 프랑스에서는 주로 부야베스 같은 해산물 요리에 사용한다.17세기까지만 해도 사프란은 유럽에서 요리사와 약제사 그리고 염색업자가 탐내는 인기 향신료였다. 맛의 불모지인 영국에서도 사프란이 재배됐는데 18세기를 맞이하면서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사프란 경작지는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먼저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노동력이 농업에서 공업으로 집중됨에 따라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농업은 기피됐다. 같은 노동력과 시간이면 사프란을 재배하는 것보다 공장을 세우는 게 훨씬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프란을 주로 소비하던 상류층의 취향이 바뀐 게 결정타를 날렸다. 사프란보다는 커피나 차, 바닐라 등 다른 향신료와 기호품에 더 관심을 쏟기 시작한 것이다. 사프란은 여전히 중동과 인도, 북아프리카 그리고 일부 유럽의 전통음식에 사용된다. 사프란 없이는 파에야를 노랗게 물들일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요리사들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사프란을 구매한다. 한국에 사프란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식재료로 치자가 있다. 말린 치자 열매는 맛과 향은 다소 다를지 모르나 사프란과 동일한 착색 성분을 갖고 있고 약효 또한 유사하다. 음식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려면 비싼 사프란보다 치자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강황도 향이 강하긴 하지만 착색제로 좋은 대안이 된다. 파랑새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법이다.
  •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 국보된다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 국보된다

    보물 제410호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水瑪瑙塔)이 국보로 승격된다. 문화재청은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을 국보로 지정 예고하고, 경북유형문화재인 ‘안동 봉황사 대웅전’을 보물로 지정 예고한다고 17일 밝혔다. 수마노탑은 석가모니 사리를 모셨다고 알려진 탑이다. 역사서 ‘삼국유사’에 따르면 정암사는 자장율사(590∼658)가 당나라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받은 진신사리를 들고 귀국해 643년 창건했다. 수마노탑이라는 명칭은 불교에서 금·은과 함께 7보석 중 하나인 마노(瑪瑙)와 관련이 있다. 자장율사가 귀국할 때 서해 용왕이 자장의 도력에 감화하여 준 마노석으로 탑을 쌓았고, 물길을 따라 가져왔다 해서 물 ‘水(수)’ 자를 붙였다는 설화가 전한다. 정암사에는 수마노탑을 바라보는 자리에 적멸보궁이 자리 잡고 있는데 양산 통도사, 평창 오대산, 영월 법흥사, 인제 봉정암의 적멸보궁과 더불어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으로 알려져 있다. 수마노탑은 거대한 돌덩어리를 올리는 일반적 석탑과 달리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차곡차곡 쌓은 모전(模塼)석탑이다. 모전석탑으로는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탑이 유명하다. 돌 재질은 석회암층 중에 산출되는 고회암이며, 회록색이 감도는 돌을 길이 30∼40㎝, 두께 5∼7㎝로 깎았다. 석탑 전체 높이는 9m로 화강암 기단 위에 세운 탑 1층에 작은 불상을 모셔두는 공간인 감실(龕室)을 상징하는 문이 있다. 그 위에 벽돌 모양 석재를 층층이 올렸다. 신라시대 이래 모전석탑이 구축한 조형적 안정감과 입체감, 균형미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려시대 이전에 쌓은 것으로 평가된다. 수마노탑은 1972년 해체 과정에서 탑 건립 이유와 수리 기록 등을 적은 돌인 탑지석 5매가 발견돼 조성 과정이 확인됐다. 불국사 삼층석탑, 다보탑과 함께 탑 이름이 전해지는 희귀한 사례이기도 하다. 문화재청은 “모전석탑으로 조성된 진신사리 봉안탑으로는 국내 유일하다는 점에서 국보로 가치가 충분하다”고 밝혔다.보물로 지정 예고된 안동 봉황사 대웅전은 건립 시기가 명확하게 전하지는 않으나 여러 기록상 17세기 후반 무렵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존불을 봉안한 정면 5칸의 대형 불전이며, 팔작지붕을 얹었다. 조선시대 후기에 3칸 맞배지붕 불전이 유행한 것을 고려하면 규모와 형식이 돋보인다. 전면 배흘림이 강한 기둥은 조선 후기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양식이다. 근래에 채색한 외부와 달리 내부는 17∼18세기 단청이 비교적 잘 보존됐다. 특히 정사각형 우물반자에 그린 용, 금박으로 정교하게 표현한 연화당초문, 연꽃을 입에 물고 구름 사이를 노니는 봉황이 인상적이다. 문화재청은 30일 동안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두 유물의 문화재 승격 여부를 확정한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고든 정의 TECH+] 코로나19가 깨운 고전 기술… ‘철의 폐’ 인공호흡기

    [고든 정의 TECH+] 코로나19가 깨운 고전 기술… ‘철의 폐’ 인공호흡기

    ‘철의 폐'(iron lung)는 20세기 중반 현대적인 양압 인공호흡기가 개발되기 전까지 널리 쓰인 인공호흡 장치입니다. 현재 주로 사용되는 인공호흡기는 기도에 관을 넣은 후 외부에서 공기를 인위적으로 주입하는 방식입니다. 폐에 압력을 가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양압 인공호흡기(Positive Pressure Ventilators)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이전 기술로는 양압 인공호흡기를 개발하기 어려웠습니다. 단순히 입으로 공기를 넣는 펌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기도와 폐에 손상을 주지 않고 안전하게 호흡을 유지하는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어렵다고 해서 호흡 장애가 있는 환자를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음압 인공호흡기(Negative Pressure Ventilator, NPV)입니다. 원리는 간단합니다. 환자를 머리만 밖으로 내놓고 밀폐된 통 안에 넣은 후 공기를 넣고 빼는 방식으로 호흡을 도와줍니다. 밀폐된 통 안에 음압을 걸면 환자의 폐가 확장되면서 숨을 들이쉬고 반대로 양압을 걸면 내쉬게 됩니다. 철의 폐라는 명칭은 철로 된 밀폐 용기에 유리창을 내서 환자 상태를 확인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기관 삽관이 필요 없어서 환자는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대화도 하고 식사도 할 수 있습니다. 음압 인공호흡기에 대한 아이디어는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널리 사용된 것은 20세기부터입니다. 1928년 소아마비로 인해 호흡곤란을 겪던 8세 소아에서 사용된 이후 그 효과를 입증해 1940-50년대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이 장치는 비침습적이고 환자에게도 큰 고통을 주지 않는 장점이 있지만, 현대적인 양압 인공호흡기가 등장하면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양압 인공호흡기가 중증 환자 치료에 훨씬 효과적이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최근 영국 워릭 대학의 이끄는 컨소시엄은 음압 인공호흡기인 엑소벤트(Exovent) 개발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공호흡기가 갑자기 부족해지자 음압 인공호흡기가 단순한 구조 덕분에 대량 생산에 쉽다는 점에 주목한 것입니다. 워릭 대학교 컨소시엄에 따르면 엑소벤트는 일주일에 5000개 생산도 가능합니다. 밀폐 용기와 공기 펌프, 그리고 환자의 호흡에 맞춰 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는 컨트롤러만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엑소벤트는 철의 폐와 달리 환자의 전신이 밀폐 장치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머리와 다리는 밀폐 용기 밖으로 나와 있으며 상반신만 투명한 밀폐 장치에 들어가 환자 상태를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호흡만 약해졌을 뿐 상태가 안정적이었던 소아마비 환자와는 달리 중증 코로나19 감염 환자는 상태가 불안정하고 집중 치료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엑소벤트 개발팀은 단순히 철의 폐를 복원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으로 부활시킨 것입니다. 물론 상태가 위중한 환자에서 엑소벤트의 기능이 부족할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상태가 안정적인 환자에 적용한다면 인공호흡기 부족으로 살릴 수 있는 환자도 포기하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코로나19 유행이 엑소벤트 개발보다 더 빨리 끝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가장 좋은 시나리오이지만, 그럼에도 엑소벤트 개발 자체를 취소할 이유는 없습니다. 백신이 개발되거나 집단 면역이 생기기 전까지 코로나19 재유행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또 코로나 19 이후에도 새로운 신종 전염병이 생겨 비슷한 사태가 재발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저렴하고 빠르게 생산할 수 있는 인공호흡기의 필요성은 분명합니다. 오래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필요 없는 기술은 아닐 것입니다. 고든 정 칼럼니스트 jjy0501@naver.com
  • 백자 속 용 꿈틀… ‘봄·옛 향기에 취하다’

    백자 속 용 꿈틀… ‘봄·옛 향기에 취하다’

    다보성갤러리는 고미술 특별전 ‘봄·옛 향기에 취하다’를 6일부터 이달 29일까지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 전시관에서 연다. 전시 유물은 통일신라 시대 철불좌상과 조선 전기 백자호 등 금속·도자기 300여점과 책가도 8폭 병풍 등 서화 70여점, 궁중에서 사용하던 주칠삼층책장 등 고가구와 민속품 120여점 등이다. 18세기 광주 분원리 관요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백자청화운룡문호는 여의주를 잡으려는 두 마리 용과 구름을 역동적으로 표현했다. 용의 머리를 달마의 모습처럼 해학적으로 그려 넣은 17세기 철화백자도 공개된다.백자유개사이호는 귀 네 개가 달린 항아리다. 외호(外壺)와 내호(內壺)로 구성되며, 모두 뚜껑이 있다. 15세기 조선 전기에 만든 것으로 짐작되는 순백자항아리 백자호도 나왔다. 조선시대 책가도 8폭 병풍은 중앙에 초점을 두고 방사형으로 뻗어 나가는 투시 기법을 적용해 그린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화가 이징 작품으로 전하는 니금산수도와 잣나무로 제작한 강화반닫이 등도 눈길을 끈다. 갤러리 관계자는 “코로나19 확산으로 고통받는 국민들에게 우리 문화재 가치와 정체성을 확인하는 자리를 마련해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자 전시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수익금 일부는 코로나19 피해 지역 의료비로 기부할 예정이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면역력 강화에 좋다는 강황의 정체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면역력 강화에 좋다는 강황의 정체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는 요즘, 자극적인 제목의 영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내용인즉, 13억 인구의 인도에서 코로나19가 확산하지 않는 이유를 인도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카레로 들면서, 그중에서도 강황의 특별한 효능 덕분이라고 했다. 상식적으로도 의아하다 못해 헛웃음이 나오는 이야기지만 의사 가운을 걸친 영상의 화자는 제법 진지했다. 이 영상이 올라온 후 며칠 뒤 인도에 코로나19가 퍼지기 시작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당연히 가짜 정보였던 셈이다.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음식은 치료제가 될 수 없다. 여기서 방점은 오늘을 사는 우리다. 영양 섭취가 극히 제한적이고 불안정했던 과거에는 음식이 약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덜 먹거나 줄이라는 처방을 뒤집어 생각하면 답은 쉽게 나온다. 현대인의 병은 안 먹어서 생기는 게 아니라 너무 먹어서 생기는 거다. 어쨌거나 그 영상의 여파일까, 이번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는 판매자들의 노력 때문일까. 코로나19에 대한 면역력을 강화시켜 준다는 온갖 음식 리스트에 강황이 포함됐다. 대체 강황은 어떤 식재료길래 건강식으로 주목받게 된 걸까. 터메릭, 쿠르쿠마 등으로 불리는 강황은 중국과 인도, 동남아시아에서 사용되는 대표적인 향신료 중 하나다. 향신료는 음식에 맛과 향을 불어넣어 주는 조미료이기도 하지만 약재로도 쓴다. 중세까지 유럽에서 약제사와 향신료 상인은 거의 동일인이었다. 현대 의학이 나타나기 전까지 서양에서는 향신료를 이용한 처방이 흔했다. 말려서 빻거나 가루를 물에 개어 약효성분을 다량 추출해 복용하면 즉효가 나타나는가 하면, 음식에 넣어 일상적으로 건강을 유지하는 민간요법으로도 향신료를 사용했다. 다만 음식에 넣는 경우 약효를 바로 얻긴 힘들다. 중세 유럽 상류층이 그랬듯, 향신료를 음식에 퍼붓는 것이 아닌 이상 조미료 수준으로 향신료를 섭취하면 약효가 더디고 적기 때문이다. 아무튼 강황이 갖고 있는 여러 효능에 대한 언급은 약재로서의 가치 덕분에 생긴 후광효과다.강황은 생강과에 속하지만 생강과는 달리 씁쓸하고 진한 흙냄새를 갖고 있다. 특유의 흙 내음은 다른 향신료들의 맛에 바탕을 깔아 주는 역할을 한다. 독특한 향이 나긴 하지만 자극적이진 않아 유럽에서 값비싼 사프란 대용으로 활용했다. 풍미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음식을 먹음직스럽게 황금빛으로 물들게 해주는 염료로 더 쓸모가 있었던 셈이다. 향신료 산지인 남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는 강황을 비롯한 다양한 향신료들을 음식에 활용해 왔다. 향신료의 살균작용으로 더운 기후 탓에 생길 수 있는 식중독을 예방할 뿐만 아니라, 특유의 강렬한 풍미로 더위에 지친 입맛을 돋우는 역할을 하는 기특한 식재료였기 때문이다. 지역마다 수백 가지가 넘는 향신료 소스가 발달해 왔는데 17세기 이곳을 찾은 영국인들은 카레라는 이름으로 통칭해 버렸다. 가짜 정보를 이야기한 영상의 주인공이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인도의 카레는 우리가 아는 카레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다. 인도인들이 주식으로 먹는 카레 중에는 강황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것도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카레는 인도에 거주하던 영국인이 자신들이 먹던 스튜에 현지 향신료를 곁들여 만든 퓨전 음식이다. 인도인들의 주식인 카레는 콩으로 만든 죽에 여러 향신료를 더해 만든 모양이다. 알록달록하고 푸짐한 건더기가 있는 카레를 상상하고 현지 카레라고 하는 건 곤란하다.강황은 동남아시아의 카레에 더 많이 들어간다. 옐로, 레드 카레 등의 이름처럼 인도 카레보다는 색이 비교적 선명하다. 코코넛 밀크를 넣어 맛을 달큼하게 중화시키거나 라임 등으로 새콤달콤한 맛을 낸 것도 인도 카레와는 다른 점이다. 강황을 매일 섭취하는 이들은 인도인들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인들이다. 안타깝지만 인도네시아도 코로나19 감염자가 늘고 있는 걸 보면 강황은 아무래도 바이러스를 막는 데는 효과가 없는 듯하다. 최근 서구에선 슈퍼푸드 마케팅으로 강황이 알려지면서 옐로 카레 파우더를 손수 만들거나 비스킷이나 디저트 등에 활용하는 등 붐이 일었다. 지금도 강황을 갈아 만든 터메릭 주스가 ‘디톡스 주스’라는 이름으로 인기다. 대부분 디톡스 마케팅이 그렇듯 실제로 해독작용을 하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이지만, 흙 맛이 나는 쓰디쓴 노란 강황 주스는 단언컨대 마셔본 음료 중 가장 끔찍한 맛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몸에 좋을 수도 있다는 희망이 없다면 도저히 먹을 이유를 찾기 힘든 맛이라고 할까. 강황을 다른 음식에 섞어 쓰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 코로나 시대 ‘킹덤2’가 낳은 새로운 한류 ‘오마이갓’

    코로나 시대 ‘킹덤2’가 낳은 새로운 한류 ‘오마이갓’

    17세기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한국의 좀비 드라마 ‘킹덤’이 코로나19가 창궐한 시점에서 세계인을 사로잡고 있다. 지난 13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킹덤2’는 1년여 전 처음 선보인 ‘킹덤1’ 보다 월등히 나은 만듦새로 인기를 끌고 있다. ‘gaylydreadful.com’ 사이트를 운영하는 대중문화평론가 테리는 킹덤에 대해 “시즌1은 멋졌고 새로운 시즌2는 말문이 막힐 정도다. ‘왕좌의 게임’이 부끄러워해야 할 지경”이라고 극찬했다. 미국 드라마인 ‘왕좌의 게임’은 시즌8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9년간 인기가 높았던 판타지 드라마로 ‘킹덤’과 비슷하게 권력 암투를 다루며 대규모 전투 장면이 등장한다. 중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덜 알려진 한국의 역사물이 좀비란 익숙한 소재와 만나면서 킹덤을 시청한 외국인들은 한국의 전통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중에서도 제일 외국인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모자다. 특히 투명한 소재의 갓 외에 여러 종류의 다양한 모자가 등장하면서 킹덤 팬을 위해 조선시대 남성과 여성의 모자를 소개하는 게시물이 만들어질 정도다.외국인을 위한 조선의 모자 안내서는 모자가 계층을 상징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킹덤 팬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갓은 조선시대에도 귀족 계급이 착용했으며, 갓 가운데서도 챙이 넓은 흑립은 과거시험을 통과한 자만 쓸 수 있었다. 흰색 갓인 백립은 국상이 있을 때만 착용했다. 게다가 좀비와 사투를 벌이는 상황에서도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 외국인 팬들 사이에서는 이채로운 점으로 통한다. 한 네티즌은 트위터에 “킹덤은 ‘왕좌의 게임’이 ‘워킹데드’와 만난, 훨씬 뛰어난 영화인데다 멋진 모자도 많이 나온다”고 썼다. 캐나다 네티즌 알리슨 앗킨은 “킹덤에는 정말 멋진 모자가 많이 나오는데다 모자를 쓰면 아주 굉장하게 보인다. 나도 모자를 써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조선시대에 창궐한 역병을 이겨내는 한국인들의 사투를 보면서 코로나19 바이러스란 새로운 역병을 만난 세계인들이 ‘킹덤’을 통해 힘을 얻고 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프랑스어처럼, 메이플 시럽처럼 달콤한

    프랑스어처럼, 메이플 시럽처럼 달콤한

    캐나다 원주민 말로 퀘벡은 ‘강이 좁아지는 곳’을 뜻한다. 북아메리카 동부를 가로지르는 세인트로렌스강의 폭이 갑자기 좁아지는 곳에 바로 퀘벡 시티(이하 퀘벡)가 있다. 캐나다 퀘벡주의 주도이면서 구도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역사 도시. 퀘벡이 우리에게 더욱 가까워진 것은 TV드라마 ‘도깨비’ 촬영지로 알려지면서부터다. 인구 90%가 프랑스 출신이고 어디서나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18~19세기 프랑스풍 건물이 많아 흔히 ‘작은 프랑스’라 불린다. 17세기 초부터 세인트로렌스강 일대에선 프랑스인들이 원주민들과 모피 교역을 하며 살았다. 1754년부터 10년간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이어진 영프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퀘벡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어를 유지하는 조건이었으나 두 문화 간 마찰은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나면서 미국이 퀘벡을 영국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퀘벡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영국은 방어의 목적으로 세인트로렌스 강가 절벽 위에 4.6㎞에 이르는 성벽을 쌓았다. 성벽은 군사 목적으로 지어졌지만, 지금은 어퍼 타운(Upper Town)과 로어 타운(Lower Town)을 구분하는 기준이면서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자리잡았다. 퀘벡이 북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성곽이 존재하는 도시가 된 배경이다. 성벽 위 마을 어퍼 타운엔 잘 깎은 연필처럼 뾰족한 지붕을 가진 웅장한 건물이 있다. 퀘벡 홍보 사진에 늘 등장하는 페어몬트 샤토 프롱트낙 호텔이다. 1000살 가까이 된 도깨비의 소유로 나오는 이 호텔은 사실 13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프랑스 문화를 상징하는 퀘벡 랜드마크로 퀘베쿠아(퀘벡 현지인을 이르는 프랑스어)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다. 호텔 뒤편 산책길은 지대가 높고 강변을 따라 이어져 있어 좌우 어느 쪽으로 가든 퀘벡의 전망이 거대한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긴 겨울의 끝 3월, 온통 흰색이던 퀘벡에 조금씩 원색이 퍼져 생기가 돌고 있었다. 움츠렸던 몸을 일으켜 햇살을 만끽하러 나온 사람들 사이로 거리 음악가들이 밝은 분위기를 더했다. 어퍼 타운에서 가파른 경사를 내려오면 성벽의 아랫마을, 말 그대로 로어 타운이 나온다. 구불구불한 골목엔 파스텔톤의 건물이 이어지며 상점과 레스토랑, 카페가 옹기종기 들어차 있다. 쌀쌀한 날씨엔 역시 고열량 음식이 제격이다. 퀘벡의 떡볶이 격인 푸틴은 튀긴 감자에 부드러운 그레이비 소스와 뽀도독거리는 치즈를 얹어서 먹는다. 절로 힘이 솟는다. 단것도 빼놓을 수 없다. 전 세계 메이플 시럽 생산량의 70%를 담당하는 퀘벡이니만큼 가게마다 메이플 시럽이 넘쳐난다. 특히 3월부터 4월 사이 퀘벡은 더욱 달콤해진다. 초봄이 되면 단풍나무의 녹말 성분이 당도가 높은 수액으로 변하면서 메이플 수액을 추출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를 맞는다. 갓 구워 낸 와플에 황금빛 시럽을 가득 쏟아부어 먹었다. 마음을 치료받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 고려왕 국새 찍힌 유일한 공문서… 630년 전 과거 합격증 보물된다

    고려왕 국새 찍힌 유일한 공문서… 630년 전 과거 합격증 보물된다

    고려 시대 공문서 가운데 유일하게 국새가 찍힌 과거합격증 홍패(紅牌)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 된다. 문화재청은 전주 최씨 송애공파 종중이 보유한 ‘최광지 홍패’를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3일 밝혔다. 문인 최광지가 고려 창왕 1년(1389) 문과에서 전체 6등에 해당하는 ‘병과 제3인’(丙科 第三人)에 올라 받은 문서로, 이름·성적을 기록한 문장과 발급 시기가 두 줄로 적혀 있다. 날짜 위에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 국새가 날인돼 있다. 이 국새는 명나라 홍무제가 1370년 고려에 준 도장으로, 조선 건국 직후인 1393년 명에 반납됐다. 국새가 찍힌 고려 공문서로는 최광지 홍패가 유일하다. 1392년 10월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개국공신 이제에게 하사한 국보 ‘이제 개국공신교서’에도 이 국새가 사용됐다.   현재까지 알려진 고려 시대 홍패는 총 6점이다. 시기는 모두 최광지 홍패 보다 빠르지만 관청에서 왕명을 대신해 발급했기 때문에 국왕의 직인이 없다. 문화재청은 “최광지 홍패는 1276년부터 과거 합격증에 ‘왕지’(王旨)라는 용어를 썼다는 고려사 기록을 입증하는 첫 실물”이라며 “임금 명령을 직접 실천한 공문서로서 형식상 완결성을 갖췄고, 조선시대 문서 제도에 미친 영향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설명했다.문화재청은 아울러 경남 사천 백천사 소장 고려 후기 불교 경전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 부산박물관에 있는 조선 후기 백자 항아리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육조대사법보단경은 원나라 선종 고승인 몽산덕이가 1290년 편찬한 책을 고려가 받아들여 1300년 강화도 선원사에서 찍은 책이다. 백천사 소장본은 전래한 동종 경전 중에 시기가 이르고, 조선시대 판본인 ‘덕이본’(德異本) 계열과는 형식이 달라 불교학은 물론 서지학 측면에서도 가치가 높다고 인정됐다. 백자 항아리는 17세기 말 18세기 초 왕실 가마인 관요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52.6㎝다. 조선 후기 백자 항아리 중 크기와 기법 면에서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다는 평가다. 문화재청은 문화재 3건에 대해 예고 기간 30일 동안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 지정 여부를 확정한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중세 유럽의 흑사병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중세 유럽의 흑사병

    크림반도의 항구도시 카파는 동서양 교역의 접점이다. 이 도시를 3년간 포위했던 몽골군은 1346년 물러나면서 선물을 남긴다. 병에 걸려 죽은 군사들의 시체를 투석기로 성벽 안에 던져 넣은 것이다. 흑사병은 그렇게 성 안으로 침투했다. 성에 피신해 있던 제노바 상인들이 본의 아니게 균의 전파자가 됐다. 이듬해 여름 이들이 고향으로 향하며 들른 지중해 항구마다 환자가 속출했다. 흑사병은 교역로를 따라 서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먼저 바닷가 항구를 기습했고, 그다음 내륙으로 이동했다. 하루 약 3㎞의 무서운 속도로 확산됐다. 이 최초의 세계적 대유행이 있고 나서 흑사병은 향후 300년 동안 유행병으로 발병했다. 15세기에는 유럽 거의 모든 지역에서 10년 주기로 흑사병이 새롭게 발병했다. 그러나 점차 빈도가 떨어지고 치사율도 줄었다. 1720년 이후 흑사병은 서유럽에서 더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다. 흑사병의 사망률은 상상을 초월한다. 유럽 인구의 최소 3분의1, 아마도 절반이 1347~1350년의 첫 흑사병 유행 기간에 사망했다. 그 후 인구는 계속 줄어들었다. 1450년에 이르러 흑사병, 기근, 전쟁 등의 복합적 작용으로 유럽 전체 인구 중 50% 이상이 사망했다. 흑사병 이전 인구가 가장 많았던 1300년경을 기준으로 하면 3분의2가 사망했을 것이다(주디스 코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유럽 인구는 17세기 말까지 흑사병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지 못했다. 흑사병에 대한 첫 반응은 광란의 공황 상태에서 무기력한 은둔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다양했다. 사람들은 흑사병이 전염병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떻게 확산되는지는 몰랐다. 그들은 흑사병이 나쁜 공기를 통해 확산된다고 믿었고, 감염된 지역을 떠나 도망치는 바람에 흑사병은 더욱 빨리 확산됐다. 엄혹한 시기에 일부 유럽인은 유대인을 공격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지만, 많은 성직자는 가공할 질병 앞에서 용기 있게 소임을 다했다. 그들은 흑사병이 자신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순간까지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들을 보살폈다. 작금의 헌신적인 의료진을 연상시킨다. 영국 시인 셸리는 “겨울이 깊으면 봄도 멀지 않으리”라고 노래했다. 더이상 질병에 무지한 중세가 아니다. 방역 당국의 의지와 역량을 믿고 봄을 기다리자. 우석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 [강희정의 아시아의 美] 오락가락하는 건 박쥐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

    [강희정의 아시아의 美] 오락가락하는 건 박쥐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

    우한에서 발병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근원이 박쥐라고 한다. 새가 아닌데 날아다니는 포유류 박쥐를 두고 인간은 종종 두 세계를 살면서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조롱해 왔다. 가뜩이나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며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을 박쥐에 비유하던 차에 박쥐를 향한 인간의 시선은 더 차가워졌다. 그런데 박쥐가 우리 전통에서 늘 지금처럼 푸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다. 쥐같이 생겼고, 날아다닌다 해서 ‘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는 ‘나는 쥐’라는 뜻으로 비서(飛鼠)라 부르기도 했지만, 중국에서는 박쥐를 예부터 편복(??)이라 했다. 편복의 복(?)이 복(福)과 발음이 같아 한자문화권에서 박쥐는 복을 기원하는 문양으로 쓰였다. 박쥐의 특징을 단순화해 다양한 미술에 표현한 것이다. 물론 박쥐가 ‘복을 불러 온다’는 생각이 한국 고례의 전통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17세기 이전 한국 미술에서 박쥐문양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쥐문양은 조선 후기 미술 곳곳에 등장한다. 도자기, 자수, 공예품은 물론이고 때로 그림에도 나타난다. 각종 금속공예품, 반닫이 등의 가구에서 박쥐문양은 행복을 바라는 소박한 염원을 드러낸다.특히 다양한 가정용품의 박쥐문양에는 번식력이 강한 박쥐를 닮아 많은 자손을 보기 바라는 마음도 깃들었다. 만복이 깃들고 자손이 번성하기를 기원하며 시각화한 박쥐문양에 혹여 오해라도 있을까 봐 문양 주위에 ‘수복강녕’(壽福康寧), ‘부귀다남’(富貴多南) 등의 문구를 넣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각종 백자나 목가구에 표현된 박쥐는 복을 바라는 마음에 신분의 귀천이 없음을 말해 준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이 주머니는 이미 일본에서 혼례를 올리고 아들을 얻은 영친왕이 1922년 조선에서 다시 혼례를 올리러 귀국했을 때, 순종과 순정효황후가 영친왕의 아기 진왕자(晋王子)에게 하사한 것이다. 부귀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붉은 주머니 윗부분에는 목숨 ‘수’(壽)자를, 그 아래에 금실로 테두리를 두른 연보랏빛 박쥐를 자수로 표현했다. 박쥐 아래 구멍을 뚫어 매듭을 달았고 그 아래로 불로초가 꽂힌 화병을 호사스럽게 수놓았다. 주머니에 두 개의 딸기봉술과 은방울 2개를 연결했는데 은방울에는 깔끔한 정자체로 ‘수복강녕’을 새겼다. 하지만 왕실의 바람과 달리 얼마 지나지 않아 진왕자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박쥐도, 주머니 아래 수놓인 바위와 파도의 문양도 헛된 기원이 돼 버렸다.조선 말기 유물에서 박쥐문양은 널리 확인된다. 영친왕비의 박쥐뒤꽂이는 비취로 만든 머리장식이다. 자그마한 꽂이에 극도로 단순화한 푸른색 박쥐와 금색 매화가 멋들어지게 어우러져 현대적 감각을 보여 준다. 평생 남의 인생을 사는 것 같았을 영친왕의 역사를 아는 우리에게 박쥐뒤꽂이의 세련미는 외려 쓸쓸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박쥐문양에 기원을 담을 수는 있으나 박쥐가 복을 가져오는 것도, 심지어 화(禍)를 부르고 병을 도지게 하는 것도 아니다. 길흉화복(吉凶禍福)은 인간의 일일 뿐이니 인류세(人類世)를 살면서 박쥐를 탓하는 건 덧없기 그지없다.
  • 도난 당한 ‘권도 동계문집 목판’ 134점 제자리로

    도난 당한 ‘권도 동계문집 목판’ 134점 제자리로

    종중에 반환했지만 1점은 행방 묘연도난 문화재인 ‘권도 동계문집 목판’이 3년 8개월 만에 종중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문화재청은 경남 산청군 안동권씨 종중이 책판 창고인 장판각에 보관해오다 2016년 6월 도난당한 목판 134점을 최근 회수해 5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반환했다.1983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233호로 지정된 ‘권도 동계문집 목판’은 조선 인조시대 문신인 동계 권도(權濤·1575∼1644)의 시문을 모아 후손들이 순조 9년(1809년)에 간행한 책판이다. 전체 8권 4책으로, 조선시대 양반생활과 향촌사회 모습 등 다양한 글들이 실려 있어 기록문화의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인조반정 공신인 권도는 1623년 승정원 주서로 나간 이후 홍문관, 성균관, 사헌부 등에서 근무했고, 65세 때 대사간에 제수됐다. 절도범은 문중 관계자였다.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장판각의 자물쇠를 열고 세 차례에 걸쳐 목판을 옮긴 뒤 매매업자에게 팔아넘겼다.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은 다른 도난 사건을 내사하던 중 2018년 11월 해당 첩보를 입수했다. 한상진 사범단속반장은 “지난해 17세기 세계지도 ‘만국전도’ 장물 거래를 수사할 당시 권도 책판도 장물로 나왔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도난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면서 “1년 간 꾸준히 수사를 벌여 유통업자의 집 창고에 보관돼 있던 목판 회수에 성공했다”고 말했다.하지만 정작 종중은 사범단속반 수사관들이 확인차 장판각을 방문할 때까지 도난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경남 유형문화재 지정 당시 총 135점이었지만 이번에 회수된 목판은 134점이어서 나머지 1점의 행방도 묘연한 상태다. 종중 관계자는 “관리에 소홀함이 있었다”면서 “세계기록유산인 유교책판이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앞으로도 경찰청 등 유관 기관과 공조해 도난·도굴과 해외밀반출 등 문화재 사범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천연두·콜레라·독감… 전염병이 역사를 바꿨다

    천연두·콜레라·독감… 전염병이 역사를 바꿨다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에 전염병 확산 사망자 속출 속 이순신 장군 위기 면해 숙종이 천연두 걸려 결국 ‘장희빈 탄생’ 고대 아테네선 전염병에 전쟁 양상 변화 전염병으로 아메리카 원주민 90% 몰살#장면1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해인 1593년 3월 남해안 일대에 전염병이 번졌다. 이순신 역시 12일간 고통을 겪어야 했다. 좁은 배 안에서 함께 생활하던 조선 수군에선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전투 중 전사자보다 몇 배 더 많았다. 1594년 4월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보고서를 보면 전염병 사망자가 1904명, 감염자는 3759명으로 전체 병력 2만 1500명의 40%가량이 전투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다시 전염병이 창궐한 1595년 수군 병력은 4109명까지 감소했다. 당시 이순신이 전염병에 쓰러졌다면 임진왜란은 어떻게 끝났을까? #장면2 숙종 10년(1683) 숙종이 천연두에 걸렸다. 첫 부인인 인경왕후 김씨를 천연두로 잃은 숙종을 살리기 위해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당이 알려 준 황당무계한 처방에 따라 한겨울에 소복 차림으로 물벼락을 맞았다. 이로 인해 병을 얻어 12월 5일 사망했다. 명성왕후는 숙종이 총애하던 중인 출신 궁녀를 궁궐에서 쫓아낸 적이 있는데 명성왕후가 죽자 숙종은 그 궁녀를 궁궐에 다시 데려왔다. 그 궁녀가 나중에 경종을 낳은 장희빈이다. 숙종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다면 오늘날 사극의 단골 소재인 인현왕후와 장희빈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몽골제국 몽케칸, 남송 원정 도중 병사 역사를 바꾼 결정적인 순간에 전염병이 있었다. 지금처럼 보건위생 개념이 발달하지 않고 상하수도 시설과 화장실 설비가 부족했던 전근대사회에선 대규모 전염병이 빈발했으며 그때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때로는 역사의 물줄기까지 바꾸는 일도 잦았다. 고대 아테네에서 기원전 430~428년 발생한 전염병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양상을 바꿨다. 당시 아테네 성벽 안에 있던 주민 가운데 3분의1이 사망했고 그중에는 페리클레스도 있었다. 특히 아테네가 자랑하던 해군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 칭기즈칸의 손자로 몽골제국 네 번째 칸이었던 몽케칸은 남송 원정을 이끌던 1259년 여름 지금의 쓰촨성 지역에서 갑작스레 사망했다.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몽골제국사인 ‘집사’(集史)는 몽케를 쓰러뜨린 전염병을 ‘바바’라고 표현했다. 정확히 어떤 전염병이었는지는 지금도 불분명하다. 일부에선 흑사병이었을 것으로 짐작하기도 하지만 확실하진 않다. 몽케칸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몽케의 그늘에 가려 있던 동생 쿠빌라이가 몽골제국의 칸이 됐다. 몽케칸을 만나러 가던 도중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려로 되돌아가던 고려 태자 일행은 쿠빌라이와 만나면서 쿠빌라이와 고려 태자 사이에 일종의 밀약이 이뤄진다. 고려 태자는 훗날 고려 원종이 되고, 원종과 쿠빌라이는 사돈 관계로 이어진다. 전염병은 때로 제노사이드보다 더한 비극을 초래하기도 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뒤 발생한 대규모 전염병은 원주민 인구 가운데 90%를 몰살시켰다. 오늘날 미국에 해당하는 지역만 해도 인구가 1500년 500만명에 달했지만 1800년에는 6만명으로 줄었다. ●인도 풍토병인 콜레라 전 세계 휩쓸어 조선 중종 19년(1524) 7월 평안도관찰사 김극성의 보고서가 국왕에게 도착했다. 평북 용천군 지역에 전염병이 돌아 670명이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평안도 전역과 황해도까지 전염병이 전파되면서 이듬해 가을까지 사망자는 2만 3000여명에 달했다. 중종대 인구가 400만명 내외로 추정되니까 전체 인구의 0.5% 이상이 사망한 것이다. 현재 남북한 인구 7000만명을 대입해 보면 35만명가량이 전염병으로 사망한 셈이다. 이 전염병은 ‘티푸스’로 추측되고 있다. 17세기는 세계적으로 소빙하기였다. 각종 전염병이 빈번했다. 특히 천연두가 많았다. 천연두는 조선에선 두창, 마마, 손님 등으로 불렀다. ‘백세창’이라고도 했는데 평생 한 번은 겪고 지나가야 하는 질병이라는 뜻이었다. 공기로 전염되는 바이러스성 질환인 천연두는 일단 감염되면 고열과 발진이 일어나고, 두통과 구토 등을 일으킨다. 얼굴, 손, 몸통에 발진이 생긴다. 증상이 일어난 지 8~14일이 지나면 딱지가 앉고 흉터가 남는다. 그 흉터를 흔히 마마 자국이라고 부른다. 1886년 제중원에서 작성한 ‘조선 정부 병원 1차연도 보고서’에서 4세 이전의 영아 40~50%가 두창으로 사망한다고 할 정도로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치료법도 발전했다. 일종의 백신을 활용한 치료법인 인두법이 대표적이다. 1821년(순조 21년) 조선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전염병인 ‘콜레라’로 치명상을 입는다. 그해 8월 평양감사 김이교가 작성한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갑자기 괴질이 발생해 구토와 설사와 가슴이 막혀 타는 듯한 고통을 호소하다 잠깐 사이에 사망한 사람이 100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의약도 소용없고 구제할 방법도 없으니 눈앞의 광경이 매우 참담합니다.” 인도 풍토병이었다가 1817년 콜카타에서 본격 발병한 콜레라는 말 그대로 전 세계를 휩쓸었다. 콜카타에 있던 영국 군인 5000명을 1주일 만에 몰살시킨 콜레라는 1819년에 유럽, 1820년에는 중국에 상륙했다. 조선에 상륙한 콜레라는 1821년 9월 17일 황해감사 이용수가 “사망자가 8000~9000명에 이르며 한창 앓고 있는 무리는 그 수를 다 셀 수 없는 상황”이라고 보고할 정도로 확산됐다. 콜레라는 중부지방을 통과해 제주도까지 퍼졌다. ●전염병 때마다 등장하는 소수자 혐오 전염병이 번질 때마다 등장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소수자 혐오다. 질병의 원인을 ‘저들’에게 돌리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오랜 못된 버릇이다. 19세기 콜레라가 한창일 당시 청나라에선 반체제 성향 신흥종교인 백련교도들에게 혐의를 돌리기도 했다. “백련교도들이 우물에 독약을 뿌리고 오이밭에 독약을 뿌려 생긴 질병”이라는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1918년 처음 발병해 감염자 5억명에 사망자가 최소 2500만명에서 최대 1억명으로 추산되는 ‘스페인 독감’만 해도 최초 발생지인 미국에선 “독일인 때문에 생겼다”, “동유럽 이민자 때문에 생겼다”, “흑인 때문”이라는 등 소수자에게 원인을 돌리는 각종 소문이 횡행하기도 했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신라는 무슬림 포용했는데… 지금은 차가운 시선 아쉬워”

    “신라는 무슬림 포용했는데… 지금은 차가운 시선 아쉬워”

    “알라(하느님)의 말씀인 쿠란에는 ‘누구에게도 종교(이슬람교)를 강요해선 안 된다’고 쓰여 있습니다. 아무리 교리가 좋아도 억지로 신앙을 믿게 하면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죠. 무력으로 종교를 이식하려는 극단주의 무장단체들은 무슬림이 아닙니다. 그들은 알라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해요.” 우리 민족 최대 명절인 설을 앞둔 지난 17일. 인천의 명물인 구월동 도매시장 거리의 한 건물에 자리잡은 ‘인천평화성원’에서 조촐하게 무슬림 예배가 진행됐다. 이날은 금요일로 전 세계 이슬람 신자들의 합동 예배일이다. 한국에서는 금요일이 평일이다 보니 무슬림이 예배에 참석하기가 쉽지 않다. 이날 성원에 온 신자는 모두 5명. 머리에 ‘이마마’로 불리는 모자를 쓰고 설교대에 앉아 아랍어로 능숙하게 예배를 이끄는 이가 눈길을 끌었다. 바로 박동신(34) 이맘. 한국인이다. 이맘은 무슬림 종교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로 기독교의 신부나 목사에 해당한다. 최근 이슬람 국가인 이란이 미국과 전쟁 직전 상황까지 치닫는 갈등을 빚고 있던 터라 그의 설교가 더욱 가슴에 와닿았다. 그는 지난해 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이슬람 성원을 열었다. 무슬림이라고 하면 ‘알카에다’ 등 테러조직이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를 외치는 모습을 떠올리는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이슬람 신자로 살겠다고 마음먹었는지 궁금했다. 그에게서 직접 ‘무슬림으로 사는 법’을 들어 봤다.●“목사 꿈 접고 이슬람에서 해답 찾아” 기원전 17세기 인류 문명의 중심이던 메소포타미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생몰연대 미상)에게 자신을 유일신으로 칭하는 ‘야훼’가 나타났다. 유일신은 “고향을 떠나 미지의 땅에서 새 민족을 세우라”고 명했다. 아브라함은 그의 말에 순종해 팔레스타인 가나안 지역에 정착했다. 이 이야기로 시작하는 신앙을 학계에서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라고 부른다. 유대교와 기독교(가톨릭·개신교), 이슬람교가 대표적이다. 세 종교는 모두 같은 신을 믿는다. 신자 수는 기독교 24억명, 이슬람교 18억명, 유대교 1500만명 정도로 전 세계 인구(약 77억명)의 절반이 넘는다. 이 가운데 이슬람교는 선지자 무함마드(570~632)를 신의 마지막 사도로 여기는 종교다. 무슬림은 아담과 이브, 아브라함, 모세 등이 본래 이슬람 신자였다고 본다. 박씨의 하루는 기도로 시작한다. 보통 오전 5시쯤 잠에서 깨 깔개 위에서 절을 하며 “알함두릴라”라고 되뇐다. 아랍어로 ‘찬양한다’는 뜻이다. 다른 무슬림과 마찬가지로 하루 다섯 번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사우디아라비아)를 향해 기도한다. 그는 ‘함양 박씨 문원공파’로 부산에서 태어난 토종 한국인이다. 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존재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아 고민이 컸다고 한다. 오랜 방황 끝에 그 해답을 이슬람에서 찾았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안식교를 믿으셨고 어머니도 장로교 신자셨어요. 친척들의 종파도 다양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기독교 안에서 자랐어요. 하지만 성경에는 분명 모순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20대가 돼서도 이 문제가 풀리지 않아 많이 힘들었어요. 결국 ‘나무보다는 숲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을 차근차근 살폈습니다. 본래의 하느님을 온전히 드러낸 종교는 이슬람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죠. 2009년 12월 한국 이슬람교 중앙성원(이태원)을 통해 입교했습니다.” ●10년 가까이 중동 유학… 어머니도 개종 무슬림이 되긴 했지만 ‘열정만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박씨는 1년 뒤 한국을 떠나 유학길에 올랐다. 터키(2011~2012)를 시작으로 사우디아라비아(2012~2015), 요르단(2015~2017), 이집트(2017~2019) 등을 다녔다. 대학과 모스크 등에서 아랍어와 이슬람 교리를 습득했다. 현지에서 돈을 벌며 공부하다 보니 시간도 길어졌고 어려움도 컸단다. 하지만 ‘덕이 있으면 외롭지 않고 반드시 돕는 이가 있다’고 했던가. 마지막 목적지인 이집트에서 만난 한 퇴직군인이 이역만리에서 고군분투하는 박씨가 안쓰러웠던지 크고 작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나중에는 자신의 딸까지 소개해 줬다고 한다. 지금의 아내인 올라(28)씨다. “이슬람교를 믿게 되면서 제 삶은 180도 변했습니다. 진정한 한 분의 신을 섬기며 쿠란에 기록된 선행을 행하자 삶이 긍정적으로 바뀌었고 진정한 행복도 느끼게 됐어요. 처음에는 가족들의 걱정이 컸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반대가 특히 심했죠. 하지만 ‘부모에게 최선을 다하며 짜증을 내거나 질책하지 말라’는 쿠란의 구절을 지키며 변화된 모습을 보여드리자 결국 아버지도 제 종교를 인정해 주셨어요. 어머니는 저를 따라 무슬림이 되셨죠.” 지난해 아내와 한국으로 온 박씨는 어머니가 사는 인천에 터를 잡고 가정 예배를 시작했다. 2013년 그가 개설한 유튜브 채널 ‘한국이슬람방송’ 등을 보고 무슬림 출신 이주 노동자들이 하나둘 찾아왔다. 신자가 많은 날에는 30명 가까운 무슬림이 박씨의 집을 방문했다. 예배 공간이 부족해지자 지난해 말 자비로 조그마한 사무실을 빌려 인천평화성원을 세웠다. 우리나라에 50~60곳의 이슬람 성원이 있지만 한국인이 세우고 직접 운영하는 성원은 거의 없다. 2009년 이슬람교에 입교한 지 정확히 10년 만에 이룬 성과여서 의미가 남다르다고 그는 자평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부자인 것 같다며 흐뭇해했다. ●천년 넘은 이슬람교와의 역사 원래 이슬람교는 우리 민족과 가까웠다. 845년 중동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드비가 쓴 ‘왕국과 도로 총람’에는 “상당수 아랍인들이 신라를 동경해 한반도로 이주했다”고 적혀 있다. 고려시대에도 무슬림 수만 명이 벽란도와 개성 일대에 모여 살았는데, 이들은 ‘예궁’이라는 모스크를 짓고 종교 활동도 했다. 고려가요 ‘쌍화점’에도 무슬림이 등장한다. 쌍화란 튀르크계 만두의 일종이다. 고려 여인이 쌍화점(만두 가게)에 음식을 사러 들어갔더니 무슬림 주인이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유혹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의 국호인 ‘코리아’는 당시 무슬림 상인들이 고려를 부르던 아랍어다. 금속활자와 고려 인삼도 무슬림이 전 세계로 퍼뜨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이 수시로 무슬림 지도자를 초청해 쿠란을 낭송하고 기도를 올리게 해 국가의 안녕을 바랐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국 이슬람교 중앙성원 등에서 추정하는 한국인 무슬림은 3만 5000명 정도다. 하지만 하루 다섯 번 예배를 보고 평생에 한 번은 다녀와야 하는 메카 순례를 경험한 ‘진짜’ 무슬림은 몇 백명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 이슬람교에 대한 차가운 시선을 극복하고 신자로 살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방증이다. “과거 중동에서 건설 붐이 일었을 때 일부 공사는 무슬림만 참가할 수 있었거든요. 이때 한국인 노동자들이 사업상 이유로 대거 입교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한국에 와서도 종교 활동을 이어가는 것 같지는 않아요. 이맘은 종교 공동체에서 추대 형식으로 선출되기에 무슬림 수십~수백명당 한 명씩 나오게 돼 있어요. 한국인 무슬림이 3만명이라면 한국인 이맘도 수백명은 돼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한국인 이맘은 저를 포함해 3명에 불과해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뜻이죠.” ●세계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 화해 분위기 현재 세계는 조금씩이나마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 화해를 모색하고 있다. 가톨릭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틈날 때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을 믿는 형제들”이라며 무슬림을 언급한다. 영국에서는 일부 성공회 교회가 금요일마다 이슬람 신자들에게 예배 공간을 빌려준다. 다만 한국에서는 신자 수 기준 세계 2위 종교를 위험하다고만 여기는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고 그는 전했다. “진정한 이슬람에는 강요가 없습니다. 헌금도 요구하지 않아요. 이슬람 교계에서도 모두가 힘을 합쳐 테러리즘 근절에 앞장서고 있어요. 한국인들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건 개인의 선택이자 권리이기에 존중합니다. 다만 이슬람 세계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 등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고 토론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만큼은 꼭 마련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중동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세계화 시대에서 대한민국이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할 좋은 전략이 아닐까 싶습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메트로시티, 승리의 여정 담은 ‘#Finding V’ 에피소드 공개

    메트로시티, 승리의 여정 담은 ‘#Finding V’ 에피소드 공개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지향하는 이탈리아 네오 클래식 브랜드 ‘메트로시티(METROCITY)’가 이달 초 메트로시티 공식 홈페이지와 SNS, 유튜브를 통해 2020년 첫 번째 에피소드 ‘#Finding V’를 공개했다. 이번 에피소드는 메트로시티의 V를 찾는 과정에서 사랑의 승리와 인생의 승리, 비즈니스의 승리 등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는 모든 승리의 여정을 쟁취하는 여정을 담아냈다. 또한 밀라노를 베이스로 활동하는 12명의 모델과 메트로시티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촬영해 감각적인 영상미와 세련된 분위기로 소비자의 호응을 얻고 있다. 에피소드에는 밀라노의 대표적인 르네상스 건축물인 ‘스포르체스코 성(Castello Sforzesco)’을 비롯해 밀라노의 랜드마크인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Milano Duomo)‘, 밀라네제들의 휴식처 ’셈피오네 공원(Piazza Sempione)‘, 밀라네제들이 사랑하는 유서 깊은 거리 ‘비아 브레라(Via Brera)’, 밀라노 외곽의 17세기 대저택 등이 등장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브랜드 관계자는 “#Finding V는 승리(Victory, Vittoria), 거리·여정(Via), 메트로시티의 V백 등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V를 찾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NEO CLASSIC’, ‘ITALIAN ORIGINS’, ‘CRAFTMANSHIP’이라는 메트로시티의 아이덴티티에 부합한다”라며 “에피소드에 등장한 메트로시티 신제품에 대한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라고 전했다. 에피소드 콘셉트 lo‘V’e의 V에 녹여내 사랑을 표현한 ‘V백(MP2522)’은 메트로시티의 시그니처 라인인 MF400번대 스퀘어 토트 라인에 트렌디하고 영한 감성을 더한 핸드백이다. 메트로시티의 V프레싱 기법은 빛을 표현한 루체 퀼팅을 더욱 심플하게 표현했으며, 세라토 오로메쪼(메트로시티의 시그니처 락 장식), 마지아(메트로시티의 테슬 장식)로 포인트를 더했다. 여기에 퀄리티 높은 소가죽과 O링 핸들로 실용성과 심미성을 모두 잡았으며, 미니 사이즈로 토트백과 크로스백 모두 활용 가능한 2-ways 아이템이다.V백을 비롯한 메트로시티의 제품은 전국 메트로시티 백화점 매장과 온라인 공식 사이트에서 구입할 수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잔혹하도록 달콤한 유혹…모를수록 놀라운 여정

    잔혹하도록 달콤한 유혹…모를수록 놀라운 여정

    “Leave the gun, take the cannoli (총은 놔두고 카놀리나 챙겨)”“부온 조르노! 퀘스토에 시칠리아.”(Buon giorno! Questo e sicilia,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시칠리아입니다) 이탈리라 로마 테르미니역을 출발한 기차가 밤새 바다를 건너 시칠리아에 닿았을 때 열차에서는 이렇게 안내방송이 나왔다. 드디어 시칠리아였다. 시칠리아를 찾은 이유는 영화 ‘대부’ 때문이었다. 나는 배우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니로의 엄청난 팬이었다. 이들이 출연한 ‘대부’ 시리즈를 보며 언젠가 꼭 한번 시칠리아를 찾겠다는 열망을 가슴에 지닌 채 살아왔다. 드디어 그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해체돼 배에 실린 기차는 메시나에 도착해 다시 조립되어 철로를 달린 후 시칠리아의 첫 목적지인 카타니아로 내려놓을 것이다. ●“마피아는 관광객들을 건드리지 않는다네.” 시칠리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마피아를 먼저 떠올리나 보다. 시칠리아로 여행을 가겠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마피아를 조심해.” 그럴 만도 했다. 인터넷으로 시칠리아를 검색하면 마피아와 연관된 항목이 주르륵 올라온다. 실제로 시칠리아의 주도인 팔레르모는 이탈리아 최대 마피아 조직의 본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로마에서 시칠리아로 가는 기차 안에서 옆 자리에 앉은 이탈리아 노인(멋진 감색 양복에 붉은 머플러를 길게 두르고 중절모를 쓴 그 역시 약간 마피아스러웠던 것 같다)에게 “요즘에도 시칠리아에서는 마피아가 길거리 총격전을 벌이기도 하나요?” 하고 물었다. 그는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요. 가끔씩 일어나긴 하는데 다 옛날 일이죠.” 그리고 덧붙였다. “마피아는 관광객들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답니다. 안심하세요.”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가 건설되기도 했고 로마와 비잔틴제국, 아랍과 노르만족의 영향을 받아 왔던 시칠리아. ‘혹시 그리스에 온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고대 그리스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음식도 맛있다. 20일 동안 시칠리아를 여행해 본 후 내린 결론은 유럽 어느 도시보다 친절한 사람들과 아름다운 풍경으로 가득한 곳이 바로 시칠리아라는 것. 2018년 12월의 국내 신문들은 “이탈리아 경찰이 현지시간 4일 시칠리아섬 팔레르모에서 대대적인 마피아 단속 작전을 펼쳐 마피아 고위급 조직원 46명을 체포했으며 우두머리인 80세 세티미노 미네오 등 거물급 조직원들을 조직범죄 연루와 갈취 등의 혐의로 붙잡았다”고 전했다. 아 참, 팔레르모 공항의 정식 명칭은 ‘팔코네와 보르셀리노 팔레르모 공항’이다. 이는 마피아 수사를 지휘하다 1992년에 테러로 사망한 두 판사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마피아와 시칠리아는 떼놓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시칠리아를 여행하는 내내 그 흔한 소매치기 한 번 만나지 않았다. 기차에서 만난 노인의 말대로 마피아는 관광객들을 ‘건드리지’ 않는 것인가. 아무튼 영화사상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대부’ 시리즈는 이탈리아 장면을 팔레르모에서 촬영했다. ‘대부’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에서 부모와 가족을 모두 잃고 아홉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고생 끝에 뉴욕 암흑가의 보스로 군림하는 마피아 두목 돈 콜레오네의 이야기다.●대문호 괴테가 사랑한 도시 팔레르모 마피아는 마피아고, 관광객들에게 팔레르모는 가슴 설레게 하는 도시다. 대문호 괴테는 그의 책 ‘이탈리아 여행기’에서 팔레르모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극찬하며 “시칠리아를 보지 않고는 이탈리아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소설가 김영하는 “시칠리아에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생각해 오던 이탈리아가 있었다”고 썼다. 유럽과 아랍 양식이 어울린 건축물들, 유람선이 정박해 있는 항구, 크고 작은 성당으로 놓인 골목이 도시 곳곳에 가득하다. 팔레르모 여행의 출발점은 프레토리아 광장이다. 광장 주위로 스페인 바로크풍의 집들이 펼쳐진다. 광장 서쪽에 있는 노르만 왕궁은 꼭 찾아봐야 한다. 아랍풍의 천장과 비잔틴식 모자이크가 조화를 이룬 멋진 건물이다. 팔레르모 대성당은 1185년부터 짓기 시작해 약 600년에 걸쳐 건축됐다. 원래는 비잔티움 양식으로 짓기 시작했지만 워낙 오랜 기간에 걸쳐 지어졌기 때문에 여러 세대의 건축 양식을 보여 준다. 여행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단연 시장이다. 이 중 부치리아시장은 팔레르모에서 가장 유명하고, 시칠리아에서 가장 크다. 갖가지 해산물과 과일, 치즈, 농산물 등 없는 것이 없다. 우리나라의 5일장처럼 떠들썩하다. 팔레르모 사람들은 “만약 부치리아시장 바닥이 마른다면”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이 말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는 뜻이다.●시칠리아의 자부심 카놀리와 파스타 팔레르모의 거리를 걷다 보면 손에 길쭉한 과자를 들고 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시칠리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인 ‘카놀리’다. 밀가루에 와인을 넣어 반죽한 후 튜브 모양으로 얇게 돌돌 말아 튀긴 후 안에 부드러운 리코타 치즈를 채워 넣은 것이다. 시칠리아 사람들이 카놀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대부’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시리즈 3편에서 팔레르모 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를 감상하며 독이 든 카놀리를 먹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마피아가 등장한다. 그는 도저히 카놀리의 달콤한 유혹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카놀리를 만지작거리다 한 입 크게 베어 문다. 그러고는 목을 잡고 의자에서 쓰러진다. 그의 발 밑에는 먹다 남은 카놀리가 부서져 있다. 카놀리 사랑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 있다. 배신자를 처단하러 외출하는 행동대장 클레멘자에게 아내가 카놀리를 사오라고 부탁한다. 적에게는 잔혹한 마피아이지만 가족에게는 누구보다 극진한 마피아답게 클레멘자는 카놀리부터 사놓는다. 마침내 조직의 배신자를 제거한 클레멘자는 부하에게 가장 먼저 이렇게 말한다. “총은 놔두고 카놀리나 챙겨.”(Leave the gun, take the cannoli) 긴박하고 심각한 상황 속에도 냉혹한 마피아가 카놀리만은 잊지 않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아마도 영화의 배경이 시칠리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이왕 음식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이야기해 보자. 이탈리아 하면 파스타가 떠오르고 파스타 하면 이탈리아에서도 시칠리아다. 시칠리아는 서양에서 최초로 파스타를 전수받은 지역이다. 파스타의 시작은 국수인데, 히말라야산맥 북부 중앙아시아 지역의 유목 민족들이 처음 만들어 먹기 시작한 국수가 중국으로 이동하면서 음식으로 자리잡았고, 이 국수를 13세기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가는 길에 가져가며 이것이 파스타로 ‘변이’를 일으켰다고 한다. 물론 이는 가설에 불과하다. 중세사학자 몬타나리가 쓴 ‘유럽의 음식문화’(새물결·2001)를 보면 생 파스타는 고대부터 지중해 연안, 중국 등에 널리 알려졌으나, 마른 파스타는 근대에 사막을 이동하는 이슬람인들이 발명했다고 한다. 사막을 횡단하는 오랜 기간 운반과 저장이 쉬운 음식이 필요했고 그러던 차에 건조 파스타를 개발해 낸 것이다. 밀가루와 물, 소금을 넣고 만든 반죽을 얇게 밀어서 건조시키는 이 방법은 11세기경 이슬람 상인들이 시칠리아로 건너오면서 이탈리아에도 본격적으로 전해졌다. 시칠리아 파스타는 해산물과 채소를 많이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목축이 발달하지 않아 육류와 치즈는 귀하지만 해산물은 풍부한 섬이어서 그렇다. 파스타 중에서도 정어리의 일종인 사르데 파스타가 유명한데, 올리브 오일과 정어리, 소금으로 맛을 낸다. ‘쿠스쿠스’라는 아랍풍의 파스타도 많이 먹는다. 국수류가 아닌, 좁쌀처럼 생긴 것인데 밀가루로 만들기 때문에 파스타로 분류된다. 시칠리아를 여행하고 온 후 파스타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생크림에 면을 담아 주던 수준이었던 한국형 카르보나라는 이탈리아에 존재하지 않았다. 버터와 계란 노른자, 베이컨 약간, 후추와 소금을 뿌린 ‘뻑뻑한’ 카르보나라의 맛에 길들여지고 말았다.●우연히 닿은 18세기 도시 모디카 시칠리아는 한국인에게 다소 낯선 관광지다. 로마, 베네치아, 밀라노 같은 이탈리아 본토의 주요 도시는 배낭 여행과 패키지 여행의 단골 코스가 됐지만 시칠리아까지 가는 여행객은 드물다. 로마에서 기차를 타면 메시나에 닿는다. 그리고 메시나에서 1시간 정도를 가면 카타니아다. 카타니아는 시칠리아 제2의 도시. 기원전 8세기경 그리스인들이 세운 도시다. 카타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에트나 화산이다. 유럽에서 가장 큰 화산으로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카타니아에 갔다면 꼭 어시장에 들러 보기를 권한다. 이른 아침 찾아야 제대로 볼 수 있지만 오후에 가도 시장의 정취를 즐기기에 모자람이 없다. 참치와 조개, 새우 등 갖가지 싱싱한 해산물을 파는 시장은 활력으로 넘친다. 생선값을 흥정하는 이탈리아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카타니아에서 며칠 머문 후 모디카로 향했다. 모디카는 시칠리아 남동부에 위치한 자그마한 도시다. 팔레르모와 타오르미나, 시라쿠사 등 시칠리아의 큰 도시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꼭 한번쯤 찾아볼 만한 매력적인 도시다. 이탈리아 여행은 약간의 인내를 필요로 한다. 철도의 잦은 파업, 주먹구구식인 철도와 시외버스 시스템은 끊임없이 여행 계획을 수정하게 만든다. 모디카로 가는 여정 역시 그랬다. 원래 계획은 카타니아의 에트나 화산으로 출발하는 버스를 탈 예정이었지만, 버스정류장에 붙어 있는 버스 시간표가 엉망이었다. 정류장 앞의 바에 들어가 왜 버스가 오지 않냐고 물어보았지만 주인은 “30분 전에 떠났다”며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아마 이런 뜻이었겠지. “이탈리아에선 원래 이래.” 어쩔 수 없었다. 커피를 마시며 어떻게 할까 고민해보는 수밖에. 멍하니 앉아 있는 동양의 여행자가 안쓰러웠는지 바 주인이 다가왔다. “모디카라는 곳에 가보는 게 어때?” 고개를 들자 그가 말을 이었다. “음… 모디카는 시칠리아의 숨겨진 명소라고 할까? 관광객으로 붐비는 팔레르모나 타오르미나, 아그리젠토보다는 훨씬 멋진 곳이지. 아마 18세기를 걷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디카행 버스가 들어왔다. 그는 얼른 타라는 눈짓을 보내왔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버스에 올랐다. 때론 일정에도 없던 여정이 여행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법이다. 그리고 2시간 후 바 주인의 말처럼 18세기의 중세도시를 걷고 있었다. 모디카는 BC 400년 무렵 시쿨리족이 건설했다고 한다. 12~17세기에는 매우 부유한 곳이었지만 1613년과 1693년 발생한 지진, 1833년의 홍수로 인해 파괴됐다. 하지만 모디카는 곧 도시를 재건했다. 모디카는 칼타기론, 밀리텔로발디카타니아, 노토, 파라졸로, 라구사, 시클리 등 히블라이아산 기슭에 위치한 이웃 8개 도시들과 함께 ‘발디노토 지역의 바로크 후기 마을’로 불린다. 지진과 홍수로 파괴된 이 도시들은 재건 사업을 하면서 파괴된 도시가 있던 자리나 그 근처에 세워졌는데,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17세기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간 바로크 양식이 절정을 이루었던 당시의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이들 도시의 바로크 후기 모습은 지금까지도 잘 보존돼 200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모디카의 옛 영화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건물은 ‘산피에트로성당’과 ‘산조르조성당’이다. 산피에트로성당은 광장 가까이 있는 것으로 아직도 웅장한 18세기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산조르조성당은 모디카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모디카의 모습이 장관이다. 마치 레고 블록을 정교하게 맞춰놓은 듯한 도시의 모습에 입이 벌어진다. 피렌체, 베네치아, 로마와는 또 다른 이탈리아의 모습이다. 이탈리아에는 예전에 ‘사생활’이라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 이탈리아 사람들이 쓰는 ‘프리바토’(Privato)라는 말은 영어 ‘프라이버시’(Privacy)에서 따온 말이다. 모디카의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프라이빗’이 없는 시칠리아 사람들의 생활을 이해할 수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 삶의 특징 중 하나는 동네 사람들이 서로서로를 다 알고 지낸다는 것이다.●이탈리아 최고의 염전도시 트라파니 시칠리아를 여행한다면 시간을 내 트라파니에 가볼 것을 권한다. 섬 서북쪽에 위치한 트라파니는 시칠리아의 여느 도시들과는 사뭇 다른 풍광을 보여 준다. 이 도시들이 바로크풍의 건물들과 그리스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유적지로 가득한 반면 트라파니는 이 도시들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로맨틱한 풍경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광활한 염전과 염전 위에 서 있는 붉은 기와지붕을 얹은 풍차다. 트라파니로 떠나기 전 시칠리아 모디카에서 만난 미슐랭 요리사 주세페는 자신은 요리를 할 때 반드시 트라파니산 천일염을 사용한다고 했다. “소금이 음식 맛의 절반이지. 이탈리아에서 가장 질 좋은 소금은 오직 트라파니에서만 구할 수 있어. 파스타 역시 마찬가지야.” “한 가지 질문이 더 있어요.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려면 뭐가 가장 필요하죠?”라고 묻자 주세페가 말했다. “큰 냄비를 갖추는 것.” 이런, 신선한 재료도 아니고 좋은 밀가루도 아니고 고작 큰 냄비라니. 주세페는 이렇게 답하며 눈을 찡긋했다. “스파게티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국수 중 가장 딱딱해. 이를 제대로 삶기 위해선 기다란 스파게티가 통째로 담기는 냄비가 필요하지.”■여행수첩 인천에서 로마행 항공은 다양하다. 로마에선 국내선 항공편을 이용해 팔레르모나 카타니아로 간다. 시칠리아의 주요 도시까지 연결되는 항공편은 국영항공사인 알이탈리아 홈페이지(www.alitalia.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로마에서 열차로도 갈 수 있다. 이탈리아 국영철도 홈페이지(www.trenitalia.com)에서 시간표를 확인할 수 있다. 12시간 정도 걸리므로 침대칸을 이용하는 게 좋다. 시칠리아를 여행하는 루트는 크게 두 가지다. 섬 북부 왼쪽의 팔레르모에서 섬 왼쪽으로 돌면서 트라파니와 아그리젠토를 보고 로마나 나폴리로 귀환하는 것이 첫 번째다. 두 번째 방법은 섬 오른쪽으로 돌면서 카타니아, 시라쿠사, 라구사, 타오르미나를 여행하는 것. 되도록이면 한 방향으로 도는 것이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다. 시칠리아는 지중해성 기후다. 겨울에도 낮에는 그다지 춥지 않다. 하지만 밤과 아침에는 기온이 뚝 떨어진다. 심한 일교차에 대비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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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혹하도록 달콤한 유혹…모를수록 놀라운 여정

    “Leave the gun, take the cannoli (총은 놔두고 카놀리나 챙겨)”“부온 조르노! 퀘스토에 시칠리아.”(Buon giorno! Questo e sicilia,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시칠리아입니다) 이탈리라 로마 테르미니역을 출발한 기차가 밤새 바다를 건너 시칠리아에 닿았을 때 열차에서는 이렇게 안내방송이 나왔다. 드디어 시칠리아였다. 시칠리아를 찾은 이유는 영화 ‘대부’ 때문이었다. 나는 배우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니로의 엄청난 팬이었다. 이들이 출연한 ‘대부’ 시리즈를 보며 언젠가 꼭 한번 시칠리아를 찾겠다는 열망을 가슴에 지닌 채 살아왔다. 드디어 그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해체돼 배에 실린 기차는 메시나에 도착해 다시 조립되어 철로를 달린 후 시칠리아의 첫 목적지인 카타니아로 내려놓을 것이다.●“마피아는 관광객들을 건드리지 않는다네.” 시칠리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마피아를 먼저 떠올리나 보다. 시칠리아로 여행을 가겠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마피아를 조심해.” 그럴 만도 했다. 인터넷으로 시칠리아를 검색하면 마피아와 연관된 항목이 주르륵 올라온다. 실제로 시칠리아의 주도인 팔레르모는 이탈리아 최대 마피아 조직의 본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로마에서 시칠리아로 가는 기차 안에서 옆 자리에 앉은 이탈리아 노인(멋진 감색 양복에 붉은 머플러를 길게 두르고 중절모를 쓴 그 역시 약간 마피아스러웠던 것 같다)에게 “요즘에도 시칠리아에서는 마피아가 길거리 총격전을 벌이기도 하나요?” 하고 물었다. 그는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요. 가끔씩 일어나긴 하는데 다 옛날 일이죠.” 그리고 덧붙였다. “마피아는 관광객들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답니다. 안심하세요.”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가 건설되기도 했고 로마와 비잔틴제국, 아랍과 노르만족의 영향을 받아 왔던 시칠리아. ‘혹시 그리스에 온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고대 그리스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음식도 맛있다. 20일 동안 시칠리아를 여행해 본 후 내린 결론은 유럽 어느 도시보다 친절한 사람들과 아름다운 풍경으로 가득한 곳이 바로 시칠리아라는 것. 2018년 12월의 국내 신문들은 “이탈리아 경찰이 현지시간 4일 시칠리아섬 팔레르모에서 대대적인 마피아 단속 작전을 펼쳐 마피아 고위급 조직원 46명을 체포했으며 우두머리인 80세 세티미노 미네오 등 거물급 조직원들을 조직범죄 연루와 갈취 등의 혐의로 붙잡았다”고 전했다. 아 참, 팔레르모 공항의 정식 명칭은 ‘팔코네와 보르셀리노 팔레르모 공항’이다. 이는 마피아 수사를 지휘하다 1992년에 테러로 사망한 두 판사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마피아와 시칠리아는 떼놓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시칠리아를 여행하는 내내 그 흔한 소매치기 한 번 만나지 않았다. 기차에서 만난 노인의 말대로 마피아는 관광객들을 ‘건드리지’ 않는 것인가. 아무튼 영화사상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대부’ 시리즈는 이탈리아 장면을 팔레르모에서 촬영했다. ‘대부’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에서 부모와 가족을 모두 잃고 아홉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고생 끝에 뉴욕 암흑가의 보스로 군림하는 마피아 두목 돈 콜레오네의 이야기다.●대문호 괴테가 사랑한 도시 팔레르모 마피아는 마피아고, 관광객들에게 팔레르모는 가슴 설레게 하는 도시다. 대문호 괴테는 그의 책 ‘이탈리아 여행기’에서 팔레르모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극찬하며 “시칠리아를 보지 않고는 이탈리아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소설가 김영하는 “시칠리아에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생각해 오던 이탈리아가 있었다”고 썼다. 유럽과 아랍 양식이 어울린 건축물들, 유람선이 정박해 있는 항구, 크고 작은 성당으로 놓인 골목이 도시 곳곳에 가득하다. 팔레르모 여행의 출발점은 프레토리아 광장이다. 광장 주위로 스페인 바로크풍의 집들이 펼쳐진다. 광장 서쪽에 있는 노르만 왕궁은 꼭 찾아봐야 한다. 아랍풍의 천장과 비잔틴식 모자이크가 조화를 이룬 멋진 건물이다. 팔레르모 대성당은 1185년부터 짓기 시작해 약 600년에 걸쳐 건축됐다. 원래는 비잔티움 양식으로 짓기 시작했지만 워낙 오랜 기간에 걸쳐 지어졌기 때문에 여러 세대의 건축 양식을 보여 준다. 여행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단연 시장이다. 이 중 부치리아시장은 팔레르모에서 가장 유명하고, 시칠리아에서 가장 크다. 갖가지 해산물과 과일, 치즈, 농산물 등 없는 것이 없다. 우리나라의 5일장처럼 떠들썩하다. 팔레르모 사람들은 “만약 부치리아시장 바닥이 마른다면”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이 말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는 뜻이다.●시칠리아의 자부심 카놀리와 파스타 팔레르모의 거리를 걷다 보면 손에 길쭉한 과자를 들고 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시칠리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인 ‘카놀리’다. 밀가루에 와인을 넣어 반죽해 튜브 모양으로 얇게 돌돌 말아 튀긴 후 안에 부드러운 리코타 치즈를 채워 넣은 것이다. 시칠리아 사람들이 카놀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대부’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시리즈 3편에서 팔레르모 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를 감상하며 독이 든 카놀리를 먹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마피아가 등장한다. 그는 도저히 카놀리의 달콤한 유혹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카놀리를 만지작거리다 한 입 크게 베어 문다. 그러고는 목을 잡고 의자에서 쓰러진다. 그의 발 밑에는 먹다 남은 카놀리가 부서져 있다. 카놀리 사랑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 있다. 배신자를 처단하러 외출하는 행동대장 클레멘자에게 아내가 카놀리를 사오라고 부탁한다. 적에게는 잔혹한 마피아이지만 가족에게는 누구보다 극진한 마피아답게 클레멘자는 카놀리부터 사놓는다. 마침내 조직의 배신자를 제거한 클레멘자는 부하에게 가장 먼저 이렇게 말한다. “총은 놔두고 카놀리나 챙겨.”(Leave the gun, take the cannoli) 긴박하고 심각한 상황 속에도 냉혹한 마피아가 카놀리만은 잊지 않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아마도 영화의 배경이 시칠리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이왕 음식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이야기해 보자. 이탈리아 하면 파스타가 떠오르고 파스타 하면 이탈리아에서도 시칠리아다. 시칠리아는 서양에서 최초로 파스타를 전수받은 지역이다. 파스타의 시작은 국수인데, 히말라야산맥 북부 중앙아시아 지역의 유목 민족들이 처음 만들어 먹기 시작한 국수가 중국으로 이동하면서 음식으로 자리잡았고, 이 국수를 13세기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가는 길에 가져가며 이것이 파스타로 ‘변이’를 일으켰다고 한다.물론 이는 가설에 불과하다. 중세사학자 몬타나리가 쓴 ‘유럽의 음식문화’(새물결·2001)를 보면 생 파스타는 고대부터 지중해 연안, 중국 등에 널리 알려졌으나, 마른 파스타는 근대에 사막을 이동하는 이슬람인들이 발명했다고 한다. 사막을 횡단하는 오랜 기간 운반과 저장이 쉬운 음식이 필요했고 그러던 차에 건조 파스타를 개발해 낸 것이다. 밀가루와 물, 소금을 넣고 만든 반죽을 얇게 밀어서 건조시키는 이 방법은 11세기경 이슬람 상인들이 시칠리아로 건너오면서 이탈리아에도 본격적으로 전해졌다. 시칠리아 파스타는 해산물과 채소를 많이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목축이 발달하지 않아 육류와 치즈는 귀하지만 해산물은 풍부한 섬이어서 그렇다. 파스타 중에서도 정어리의 일종인 사르데 파스타가 유명한데, 올리브 오일과 정어리, 소금으로 맛을 낸다. ‘쿠스쿠스’라는 아랍풍의 파스타도 많이 먹는다. 국수류가 아닌, 좁쌀처럼 생긴 것인데 밀가루로 만들기 때문에 파스타로 분류된다. 시칠리아를 여행하고 온 후 파스타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생크림에 면을 담아 주던 수준이었던 한국형 카르보나라는 이탈리아에 존재하지 않았다. 버터와 계란 노른자, 베이컨 약간, 후추와 소금을 뿌린 ‘뻑뻑한’ 카르보나라의 맛에 길들여지고 말았다.●우연히 닿은 18세기 도시 모디카 시칠리아는 한국인에게 다소 낯선 관광지다. 로마, 베네치아, 밀라노 같은 이탈리아 본토의 주요 도시는 배낭 여행과 패키지 여행의 단골 코스가 됐지만 시칠리아까지 가는 여행객은 드물다. 로마에서 기차를 타면 메시나에 닿는다. 그리고 메시나에서 1시간 정도를 가면 카타니아다. 카타니아는 시칠리아 제2의 도시. 기원전 8세기경 그리스인들이 세운 도시다. 카타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에트나 화산이다. 유럽에서 가장 큰 화산으로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카타니아에 갔다면 꼭 어시장에 들러 보기를 권한다. 이른 아침 찾아야 제대로 볼 수 있지만 오후에 가도 시장의 정취를 즐기기에 모자람이 없다. 참치와 조개, 새우 등 갖가지 싱싱한 해산물을 파는 시장은 활력으로 넘친다. 생선값을 흥정하는 이탈리아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카타니아에서 며칠 머문 후 모디카로 향했다. 모디카는 시칠리아 남동부에 위치한 자그마한 도시다. 팔레르모와 타오르미나, 시라쿠사 등 시칠리아의 큰 도시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꼭 한번쯤 찾아볼 만한 매력적인 도시다. 이탈리아 여행은 약간의 인내를 필요로 한다. 철도의 잦은 파업, 주먹구구식인 철도와 시외버스 시스템은 끊임없이 여행 계획을 수정하게 만든다. 모디카로 가는 여정 역시 그랬다. 원래 계획은 카타니아의 에트나 화산으로 출발하는 버스를 탈 예정이었지만, 버스정류장에 붙어 있는 버스 시간표가 엉망이었다. 정류장 앞의 바에 들어가 왜 버스가 오지 않냐고 물어보았지만 주인은 “30분 전에 떠났다”며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아마 이런 뜻이었겠지. “이탈리아에선 원래 이래.” 어쩔 수 없었다. 커피를 마시며 어떻게 할까 고민해보는 수밖에. 멍하니 앉아 있는 동양의 여행자가 안쓰러웠는지 바 주인이 다가왔다. “모디카라는 곳에 가보는 게 어때?” 고개를 들자 그가 말을 이었다. “음… 모디카는 시칠리아의 숨겨진 명소라고 할까? 관광객으로 붐비는 팔레르모나 타오르미나, 아그리젠토보다는 훨씬 멋진 곳이지. 아마 18세기를 걷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디카행 버스가 들어왔다. 그는 얼른 타라는 눈짓을 보내왔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버스에 올랐다. 때론 일정에도 없던 여정이 여행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법이다. 그리고 2시간 후 바 주인의 말처럼 18세기의 중세도시를 걷고 있었다. 모디카는 BC 400년 무렵 시쿨리족이 건설했다고 한다. 12~17세기에는 매우 부유한 곳이었지만 1613년과 1693년 발생한 지진, 1833년의 홍수로 인해 파괴됐다. 하지만 모디카는 곧 도시를 재건했다. 모디카는 칼타기론, 밀리텔로발디카타니아, 노토, 파라졸로, 라구사, 시클리 등 히블라이아산 기슭에 위치한 이웃 8개 도시들과 함께 ‘발디노토 지역의 바로크 후기 마을’로 불린다. 지진과 홍수로 파괴된 이 도시들은 재건 사업을 하면서 파괴된 도시가 있던 자리나 그 근처에 세워졌는데,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17세기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간 바로크 양식이 절정을 이루었던 당시의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이들 도시의 바로크 후기 모습은 지금까지도 잘 보존돼 200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모디카의 옛 영화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건물은 ‘산피에트로성당’과 ‘산조르조성당’이다. 산피에트로성당은 광장 가까이 있는 것으로 아직도 웅장한 18세기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산조르조성당은 모디카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모디카의 모습이 장관이다. 마치 레고 블록을 정교하게 맞춰놓은 듯한 도시의 모습에 입이 벌어진다. 피렌체, 베네치아, 로마와는 또 다른 이탈리아의 모습이다. 이탈리아에는 예전에 ‘사생활’이라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 이탈리아 사람들이 쓰는 ‘프리바토’(Privato)라는 말은 영어 ‘프라이버시’(Privacy)에서 따온 말이다. 모디카의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프라이빗’이 없는 시칠리아 사람들의 생활을 이해할 수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 삶의 특징 중 하나는 동네 사람들이 서로서로를 다 알고 지낸다는 것이다.●이탈리아 최고의 염전도시 트라파니 시칠리아를 여행한다면 시간을 내 트라파니에 가볼 것을 권한다. 섬 서북쪽에 위치한 트라파니는 시칠리아의 여느 도시들과는 사뭇 다른 풍광을 보여 준다. 이 도시들이 바로크풍의 건물들과 그리스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유적지로 가득한 반면 트라파니는 이 도시들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로맨틱한 풍경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광활한 염전과 염전 위에 서 있는 붉은 기와지붕을 얹은 풍차다. 트라파니로 떠나기 전 시칠리아 모디카에서 만난 미슐랭 요리사 주세페는 자신은 요리를 할 때 반드시 트라파니산 천일염을 사용한다고 했다. “소금이 음식 맛의 절반이지. 이탈리아에서 가장 질 좋은 소금은 오직 트라파니에서만 구할 수 있어. 파스타 역시 마찬가지야.” “한 가지 질문이 더 있어요.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려면 뭐가 가장 필요하죠?”라고 묻자 주세페가 말했다. “큰 냄비를 갖추는 것.” 이런, 신선한 재료도 아니고 좋은 밀가루도 아니고 고작 큰 냄비라니. 주세페는 이렇게 답하며 눈을 찡긋했다. “스파게티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국수 중 가장 딱딱해. 이를 제대로 삶기 위해선 기다란 스파게티가 통째로 담기는 냄비가 필요하지.” ■여행수첩 인천에서 로마행 항공은 다양하다. 로마에선 국내선 항공편을 이용해 팔레르모나 카타니아로 간다. 시칠리아의 주요 도시까지 연결되는 항공편은 국영항공사인 알이탈리아 홈페이지(www.alitalia.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로마에서 열차로도 갈 수 있다. 이탈리아 국영철도 홈페이지(www.trenitalia.com)에서 시간표를 확인할 수 있다. 12시간 정도 걸리므로 침대칸을 이용하는 게 좋다. 시칠리아를 여행하는 루트는 크게 두 가지다. 섬 북부 왼쪽의 팔레르모에서 섬 왼쪽으로 돌면서 트라파니와 아그리젠토를 보고 로마나 나폴리로 귀환하는 것이 첫 번째다. 두 번째 방법은 섬 오른쪽으로 돌면서 카타니아, 시라쿠사, 라구사, 타오르미나를 여행하는 것. 되도록이면 한 방향으로 도는 것이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다. 시칠리아는 지중해성 기후다. 겨울에도 낮에는 그다지 춥지 않다. 하지만 밤과 아침에는 기온이 뚝 떨어진다. 심한 일교차에 대비하는 것이 좋다.
  • 트럼프 “이란 문화유적도 공격” 탈레반과 다를 것이 없다

    트럼프 “이란 문화유적도 공격” 탈레반과 다를 것이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거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살해에 이란이 보복하면 이란의 문화유적들을 재보복하겠다고 공언한 것이 테러리스트들이나 과거 탈레반의 문화유적 파괴와 다를 바 없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고 영국 BBC가 6일(이하 현지시간)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일 “이란 내 52곳을 겨냥해 반격하겠다”고 트위터를 통해 주장하고 “52곳 가운데는 매우 높은 수준의, 그리고 이란과 이란 문화에 중요한 곳이 있다. 그 표적들을 매우 빠르고 강력하게 타격하겠다”고 위협했다. 52란 숫자는 1979년 11월 4일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반미 성향 대학생들이 급습해 444일 동안 억류한 미국 외교관과 대사관 직원 숫자다. 오드리 아줄라이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미국과 이란 모두 세계자연유산과 세계문화유산을 보호하겠다는 1972년 국제협약에 서명했으며 무력분쟁 중이라도 문화유산을 보호하겠다는 1954년 협약에도 서명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유네스코가 이스라엘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탈퇴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조금 심하다고 느꼈는지 미국은 국제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행동할 것이라고 위협 수위를 완화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비쳤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나중에 다시 “그들은 우리 국민들을 살해하도록 허락했고, 그들은 우리 국민들을 고문하고 불구로 만드는 것을 허용했고, 그들은 매복 폭탄을 이용하도록 허가해 우리 국민들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문화유적을 손도 대지 못한다고?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고 더 명확하게 언급했다. 켈리앤 콘웨이 백악관 고문은 6일 트럼프 대통령이 문화유적들을 겨냥하겠다고 말한 것은 아니라고 감싸고는 나중에 문제가 되자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 언급했을 뿐이라고 둘러댔다. 그녀는 “이란의 많은 전략적 군사 요충들이 문화유적들이기도 하다고 여러분(기자들)이 인용했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 뒤 그녀는 이란이 군사적 타격점들을 문화유적들로 위장했다고 전제하고 얘기한 것은 아니라고 확인했다. 엘리자베스 워런과 크리스 머피 민주당 상원의원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범죄를 저지르겠다고 위협한 것”이라며 무함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의 성명과 동조하는 입장을 밝혔다. 도미니크 랍 영국 외무장관도 6일 문화유적들은 국제법에 의거해 보호되어야 하며 영국은 이것이 존중될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밝혔다. 과격 테러리스트 집단인 이슬람 국가(IS)가 장악한 시리아의 팔미라 같은 광범위한 지역들에서 문화유적이나 모스크, 사원, 교회들이 공격을 받았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은 바미얀 지역의 세계 최대 불상을 파괴해 세계인의 분노를 샀다. 그런데 아무리 상대의 보복을 전제로 위협 수위를 끌어올린다고 해도 문화유적을 파괴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겠다고 공언한 것은 문명국가의 지도자임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란 지적이다. 이란은 스무 곳이 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들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기원전 6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페르시아 아캐메니드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17세기 초 세워져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광장 가운데 하나인 이스파한의 나크시-에 자한 광장, 1785년부터 1925년까지 이란을 통치한 카자 왕조의 궁전이었던 테헤란의 골레스탄 궁전 등이다. 물론 유네스코에 등재돼 있지 않은 수많은 중요한 유적들이 널려 있다.한편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숫자 ‘52’를 언급하는 자들은 IR655 편의 숫자 ‘290’도 기억해야 한다. 이란을 절대 협박하지 마라”고 트윗을 날렸다. 1988년 7월 3일 미군 순양함 빈센스 호에서 발사한 미사일이 이란 남부 항구도시 반다르압바스를 떠나 두바이로 향하던 이란항공 IR655 편을 호르무즈 해협 상공에서 격추해 290명(어린이 53명. 비이란인 46명 포함)이 희생됐다. 이란-이라크 전쟁 막바지에 발생한 이 사건에 대해 미국은 이란 전투기로 오인했다고 해명했다. 당시 이란은 미국의 제재로 새 비행기를 구매할 수 없었는데 미국은 이 사건에 대한 보상 차원으로 에어버스 여객기 한 대를 이란항공이 구입하도록 승인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달성 하목정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달성 하목정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대구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 ‘달성 하목정’이 보물로 지정됐다. 보물 제2053호로 지정된 ‘달성 하목정’은 낙포 이종문(1566~1638)이 1604년경에 건립한 정자형 별당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과 정면 1칸, 측면 4칸의 방들이 서로 붙어서 전체적으로 ‘丁’자형의 독특한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커다란 사랑대청을 가지면서도 사랑윗방 앞에 개인적인 공간인 누마루를 설치, 조선 중·후기 별당건축의 한 예를 보여준다. 가구구성은 5량과 3량의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인 가구의 구성은 두꺼운 부재를 사용하면서도 건물고를 높여 건물이 둔중해 보이지 않으면서 당당한 기품과 함께 시원한 공간감을 준다. 중대공과 대공을 포대공으로 꾸미는 등 고급 장식과 치장을 곁들이면서도 화려해 보이지 않는 건물이다. 사랑윗방의 정면 창호, 대청 측면 부분, 대청 배면의 어칸 부분의 창 윗틀에서 영쌍창의 홈 흔적이 보인다. 이러한 영쌍창의 모습은 17세기 이전의 사랑방이나 안방의 전면 창호 또는 대청의 창에서 많이 쓰이던 것으로 18세기에서도 일부 이어져왔던 수법이며 건축의 연대를 파악하는 중요한 잣대 중 하나이다. 일반적인 와가는 지붕의 모습을 날렵하게 보이기 위하여 처마 모서리를 뾰족하게 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하목정은 초가지붕의 모습과 같이 둥글게 만든 방구매기 수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수법은 청도 선암서원(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79호) 정도에서나 볼 수 있는 매우 희귀한 처마구성 방식이다. 김문오 달성군수는 “새로 지정된 문화재에 대해서는 우선 소유자와 협의하여 보존관리 대책을 수립하고, 장기적으로는 군 홍보 및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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