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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광고 엿보기] 1930년대 뱀술(양명주)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1930년대 뱀술(양명주)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아는 사람이 드물지만 일본에 가면 양명주(養命酒)라는 술을 볼 수 있다. 양명주는 일본의 대표적인 약술이다. 일설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은 17세기 초 정권의 최고 실세인 막부에 바치던 약용 술이었고 계피, 지황, 작약, 인삼, 방풍, 울금 등을 넣었다고 한다. 일본의 양명주 병에는 약용(藥用)이라고 적혀 있고 제2종 의약품이라고 명시돼 있다. 양명주가 술의 외관을 갖추고 있지만 술이 아닌 약인 셈이다. 경옥고에 술을 탄 맛이라는 평가도 있는데, 알코올 도수는 14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술이 아니라 약이기 때문에 미성년자도 양명주를 마실 수 있다. 이런 이유 등으로 점차 사라져 가는 술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양명주라는 같은 이름의 술을 대선주조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발매한 적이 있다. 그 전에도 삼진양조장에서 양명주를 만들었고, 삼미양조에서도 제조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 술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양명주가 국내로 들어와서 광복 후에도 없어지지 않고 잠시 보약주로 남아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양명주는 각종 약재를 첨가한 약술이며 일본과 달리 약이 아닌 주류로 판매됐다. 양명주 광고는 1930년대부터 등장한다. 이때의 양명주는 뱀이 주요 성분으로 들어간 일종의 뱀술이었다. 중국에서 1년 만에 병을 땄더니 독사가 죽지 않고 튀어나와 사람을 물었다는 그 뱀술이다. 혐오감을 주는 붉은 살모사(赤?蛇·적복사) 그림을 넣어 생동감을 돋우었다. 국내에서는 뱀술 제조와 유통이 금지돼 있다. 그러나 여전히 뱀을 사육해 보약으로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있다. 뱀술은 미국 포브스 온라인이 꼽은 세계 10대 혐오 식품 가운데 3위에 이름이 올랐다. 의외로 1위는 몽골인이 즐겨 마시는, 말젖을 원료로 만든 술의 한 종류인 ‘마유주’이며, 2위는 아이슬란드의 홍어 요리인 ‘하칼’이다. 일본에서는 뱀술 판매가 여전히 합법적인 모양이다. 뱀이 많은 오키나와에서는 뱀술이 양명주가 아닌 ‘하브주’라는 이름의 관광상품으로 버젓이 팔리고 있다. 광고에선 정력 결핍, 빈혈 허약자, 병으로 쇠약한 자 등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양명주를 선전하고 있다. 또 시험을 앞둔 학생, 운동 선수에게도 필승의 비결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알코올양이 적어 고급 포도주보다 맛있다고도 했다. 붉은 살모사의 활즙(活汁)에 고산 약초 7종을 배합했고, 의학박사 3인이 추천했으며, 박람회에서 금패(金牌)를 받았다고 소개했다. 가격은 큰 병이 3~4원으로 돼 있는데, 쌀값으로 환산한 현재 가치로는 5만~6만원 정도다.
  • [금요칼럼] 스승이 말릴 수 없었던, 이재 황윤석의 호기심/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금요칼럼] 스승이 말릴 수 없었던, 이재 황윤석의 호기심/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충청도 전의 현감 황윤석이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한 죄로 벼슬에서 쫓겨났다. 그는 업무에 미숙해 고을 아전과 좌수에게 휘둘렸다. 가난한 백성에게 환곡을 배정하는 일도 틀렸고, 심지어는 관노가 죄수에게 곤장을 칠 때 뇌물을 받아먹었으나 알지 못했다. 한마디로 행정 실무에 꽝이었다. 암행어사 심환지의 보고에 따라 정조는 황윤석을 파면했다(실록, 정조 11년 4월 8일). 아직 정조가 세손이었던 시절, 황윤석은 시강원 익찬(정6품)으로 세손을 보좌했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훗날 정조는 황윤석의 학문을 칭찬했다. “옛일을 자세히 살피는 데 있어 내가 (황윤석에게) 도움받은 점이 많았다.”(정조 22년 2월 6일) 그런 맥락에서 왕은 말하기를, 전라감사가 왜란 때 조헌과 의병의 의로운 죽음을 제아무리 철저히 조사해도 황윤석이 나라에 보고한 것보다 충실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했다. 과연 황윤석의 저술은 후세에 호평을 받았다. 북학파의 후예로 개화파의 스승이기도 했던 박규수 역시 황윤석을 존중했다. 고종 12년(1875) 선비 윤사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환재집’ 제9권). 그 집안이 화재를 입었으나 “이당(황윤석)의 글씨와 저술이 무사하다니 기쁩니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소장한 황윤석의 ‘이재난고’(?齋亂藁)와 장차 비교 검토할 뜻을 보였다. ‘이재난고’는 황윤석 필생의 저작이었다. 10세 때부터 별세하기 이틀 전까지 54년 동안에 쓴 방대한 기록이었다. 날씨와 농사 형편, 날마다 책을 읽고 토론한 내용, 주고받은 편지며 여행 기록이 빼곡하다. 사실적이고 총체적인 기록이라 18세기의 정치, 경제, 사회 및 문화를 가장 생생하게 알려 주는 자료다. 아직껏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 못한 사실이 원망스러울 정도다. 황윤석은 진취적인 학자여서 18세기 조선에 전해진 서양의 천문학과 수학에도 해박했다. 그런데 그는 서양 학문의 원류를 중국 고전 문명에서 찾았다. 이러한 지적 흐름은 이미 17세기 중국 명나라의 황종희에서 비롯했다. 황윤석의 선배인 서명응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데, 그는 북학파의 비조요, ‘임원경제지’의 저자 서유구의 할아버지였다. 황윤석은 신지식에 심취해 과학백과사전에 해당하는 ‘이수신편’을 저술했다. 그 책에서는 사칙산법과 삼각측량법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이 사칙인데 수준이 다양했다. 삼각측량법은 두 점의 거리를 재보지 않고도 알아내는 방법으로, 정말 새로운 지식이었다. 신학문을 추구한 때문에 황윤석은 스승 미호 김원행과 노선 갈등을 빚었다.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였던 김원행은 편지를 보내 황윤석의 학문적 취향을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미호집’(제9권)에 보면 보수적인 스승과 진취적인 제자의 심적 갈등이 피부에 와닿는다. 스승은 책을 읽더라도 성리학적 의리, 즉 도덕을 규명하는 데 집중하기 바란다면서 제자를 나무랐다. “널리 읽고, 지나치게 많이 읽는 것을 추구하지 말게.” 또 “이제부터는 지난날의 널리 잡다한 지식을 추구하던 습관을 버리게.” 오직 성리학적 도덕의 연구와 실천에 힘을 쏟으라는 명령이었다. 스승 김원행의 눈에는 제자 황윤석이 세상사에 관심을 갖는 것도 걱정스러운 점이었다(‘미호집’ 제9권). “자네가 수년간 옛 성인의 책을 읽었는데도, 아직 이점을 환히 알지 못하는가.” 스승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황윤석은 신지식에 대한 호기심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헌것에서 새것이 나온다. 견해와 시각 차이로 갈등은 생기기 마련이지만 피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는 선각자라고 해서 일상에 만능이 되지도 못한다. 잘잘못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고, 완벽하지 못한 것이 사람의 일이다. 세사를 볼 때마다 나는 너그러움을 그리워한다.
  • [이종수의 헌법 너머] 양심의 무게와 색깔 따지는 사회

    [이종수의 헌법 너머] 양심의 무게와 색깔 따지는 사회

    인류 역사에서 양심의 자유는 신앙의 자유와 더불어 국가권력에 의해 맨 먼저 승인된 기본적 자유의 하나로 손꼽히는데, 개인적 자유의 시초로도 일컬어진다. 헌법재판소는 양심을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 가치가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라고 표현했다.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도 양심을 “인간 내면에 자리 잡은 법관”으로 비유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 각자는 교회, 사회 및 전통과는 무관하게 이성적이고 도덕적으로 자신의 양심에 따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각자에게 서로 다른 양심을 두고서 그 무게를 저울질하는 일은 그 자체로 난센스다. 양심의 자유가 기본권으로 보장되지만, 결코 무제한적이지는 않다. 양심의 자유를 앞세워 합헌적인 법질서를 적극적으로 침해하거나, 특히 타인의 생명과 권리를 훼손해서는 아니 된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 이가 한편에서는 순교자로 추앙받지만, 또한 가장 섬뜩하기도 하다. 신념을 위해 때로는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하드’를 앞세운 이슬람의 자살폭탄 테러에서 목도되듯이 신념과 신앙을 위해 무고한 다수의 생명을 위협하는 행위가 정당화되기는 어렵다. 요즘도 ‘색깔론’이 정치권에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정치적 수사(修辭)로 여전한데, 1960~70년대에는 심지어 사형당하거나, 사상범 내지는 양심수로 오랫동안 영어(囹圄)의 몸이 되기도 했다. 반면에 특별한 직업적 양심의 보장에는 매우 관대하다. 특히 일부 국회의원들의 잦은 당적 변경은 헌법상 자유 위임에 따른 국회의원 개인의 양심상 결정이라 법적인 제재가 없다. 때때로 납득하기가 어려운 법원의 판결 역시도 재판상 독립과 법관으로서의 양심에 따른 결정으로 존중돼 왔다. 원칙적으로 모든 국민에게 병역의무가 주어지는 현행의 법질서에서 줄곧 양심적 병역 거부가 논란이 돼 왔다. 우리만이 아니라 ‘개병제’를 원칙으로 하는 다른 나라들에서도 오래전부터 불거져 온 문제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선과 악이 극명하게 갈리거나 또는 구별 자체가 아예 무의미한 기제로 전쟁에 비견할 만한 게 어디 있을까 싶다. 헌법재판소도 이 문제를 여러 차례 다뤄 왔다. 그리고 뒤늦게 2018년에서야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게 대체복무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 조항이 양심의 자유를 과잉적으로 침해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관련 법률들이 제·개정됐다. 관련 전문가들로 구성되는 ‘대체역심사위원회’가 신청자의 대체복무 편입 여부를 심사하도록 새로 정했다. 대체복무를 신청하는 자가 지닌 양심의 진정성과 무게를 따져 보겠다는 취지인 셈이다. 그런데 양심의 자유를 통해 보호되는 주된 내용이 이른바 “양심 추지(推知)의 금지”, 즉 “스스로 형성한 양심의 내용을 외부에 드러내도록 강제당하지 않을 자유”다. 예컨대 17세기의 일본에서 당시 막부 측이 기독교를 탄압하면서 기독교 신자를 가려내려고 예수나 마리아의 모습이 새겨진 목판을 밟도록 한 ‘후미에’(踏み)나 십자가 밟기가 양심 표명을 강제했던 대표적인 사례로 오르내린다. 그런데도 헌법재판소는 앞서 언급한 결정에서 “헌법상 양심의 자유에 의해 보호받는 ‘양심’으로 인정할 것인지의 판단은 그것이 깊고 확고하며, 진실된 것인지 여부에 따르게 된다. 그리하여 양심적 병역 거부를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의 ‘양심’을 외부로 표명하여 증명할 최소한의 의무를 진다”고 덧붙여 밝혔다.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대체역심사위원회’와 같은 기구의 구성을 예견했다고 짐작되는 대목이다. 확인해 보니 이 기구에 속한 인력의 대다수가 조사과 직원들이다. 최근 이 대체역심사위원회의 활동 내용이 언론에 보도됐다. 위원회가 활동을 처음 시작한 작년 6월부터 지금까지 총 2000여건이 넘는 대체역 편입 신청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신청이 인용되고, 기각된 사례는 단 한 건에 불과했다. 주로 종교적 신념에 따른 것이고 개인적 신념을 사유로 대체복무가 결정된 이들도 몇 있다. 이 위원회의 구성 초기에 지녔던 우려와는 달리 양심의 자유에 대체로 우호적으로 심사하니 퍽이나 다행이다. 그렇지만 양심의 진정성과 무게를 따지고 조사하는 이 제도가 여전히 마뜩잖은 것은 어쩔 수가 없다.
  • [영상] 400년 전 영국 고서(古書) 책갈피에 호랑나비 완벽 보존

    [영상] 400년 전 영국 고서(古書) 책갈피에 호랑나비 완벽 보존

    1600년대 낡은 고서(古書)의 책갈피에서 나비 표본이 발견됐다. 10일 데일리메일에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홀 도서관 소장도서 사이에서 보존 상태가 완벽한 나비 표본이 발견됐다고 전했다. 지난 3월 트리니티홀 도서관 측은 1634년 출판된 곤충 관련 서적 ‘곤충 극장’(The Insectorum Sive Minimorum Animalium Theatrum)에서 나비 표본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트리니티홀 도서관 수석 사서 제니 레키-톰슨 “곤충 관련 고서적을 살피다 우연히 호랑나비 표본을 발견했다. 책 속 나비 그림과 표본 사이에 유사성이 상당했다. 곤충 애호가들이 다양한 종을 식별할 수 있도록 의도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해당 고서는 영국에서 출판된 최초의 곤충 서적이다. 트리니티홀 도서관이 한 수집가 가족에게 기증받아 1996년부터 소장했다. 보존 가치가 높은 17세기 희귀 고서라 기증 이후 줄곧 서고에 보관했다. 하지만 누가 언제 나비 표본을 책갈피에 끼워두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은 사망한 수집가 역시 나비 표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나비 표본이 수세기 동안 책갈피에서 숨죽이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는 게 도서관 측 설명이다. 표본이 수세기 동안 책갈피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고서 전문가들의 진단도 함께 전했다.레키-톰슨 사서는 “기증 직전 책의 주인은 고고학 서적 수집가였다. 책 속에 곤충을 압착시키는 수집가는 보지 못했다. 고서를 보존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보존 상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이물질을 끼워넣는 수집가는 없다”고 부연했다. 이어 “17세기 최초의 책 주인이 넣어두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나비 표본은 400년 가까이 보존된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책 속에 숨죽이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고 말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생물-자연박물학회인 런던 린네협회 관계자 역시 “놀라운 발견”이라고 힘을 실었다. 또 고서 속에서 곤충 표본이 발견된 것 자체만으로도 주목할만 하다고 강조했다. 린네협회 윌 베하렐은 “식물 표본 발견 사례는 꽤 흔하지만, 이렇게 곤충 표본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찰스 다윈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진화론자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가 예외적으로 곤충 표본을 책갈피에 붙여놓곤 했다고 덧붙였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얼굴 너머로 내면 파고든 시대의 초상

    얼굴 너머로 내면 파고든 시대의 초상

    초상화는 정지된 한순간을 포착해 인물의 내면까지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단순한 기록을 넘어 한 사람의 인생을 꿰뚫는 통찰이 담겨 있다. 자기 과시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때론 감추고 싶은 속내가 은연중 표출되는 게 초상화의 묘미다. 사진이 발명되기 이전 역사 속 인물을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초상화가 ‘셀피’(셀프 카메라) 홍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500년을 넘나드는 세기의 초상화가 한자리에 모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이 해외 문화재 특별전시로 개최하는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에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 전문 미술관인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의 소장품 78점을 처음으로 국내에 들여왔다. 1856년 문을 연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은 영국뿐 아니라 세계 역사와 문화에 기여한 인물들의 초상화를 소장하고 있다. 1960년대부터 그림을 넘어 사진까지 범위를 넓혔으며, 백인 상류층 위주에서 다양한 인종과 소수 계층으로 대상을 확대했다. ‘왕족을 제외하고 사후 10년이 지난 인물의 초상화’라는 원칙도 바꿔 생존 유명인의 초상화도 수집한다. 1991년생인 대중 뮤지션 에드 시런의 초상화가 소장 목록에 포함된 배경이다. 전시는 ‘명성’, ‘권력’, ‘사랑과 상실’, ‘혁신´, ‘정체성과 자화상’ 등 5개 주제별로 73명의 작가가 그린 76명의 인생 이야기를 펼친다. 양수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우리가 잘 모르는 인물이라도 초상화를 마주하면서 교감할 수 있도록 책과 음악 등 다양한 아카이브 공간을 함께 구성했다”고 소개했다.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인물은 영국이 낳은 최고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다. 셰익스피어 생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일한 회화 형태의 초상화로, 동시대 배우 겸 화가 존 테일러가 그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예술성보다는 역사적 가치에 주목해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이 맨 처음 소장한 작품이다. 수백년 세월에도 여전히 빛나는 그의 명성을 이 한 장의 그림이 대변한다. 튜더왕조의 마지막 군주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는 권력과 권위의 표상으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극대화한 초상화를 남겼다. 1575년쯤 나무에 유화로 그린 초상화에서 그는 가문의 상징인 붉은 장미를 들고, 순수를 의미하는 진주와 불사조 모양의 장신구로 치장했다.절대왕권이 사라진 현대사회에서 권력은 정치 이외에 사회, 문화적인 영향력으로 영역을 넓혀 왔다. 최연소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인권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실제 주인공인 패션지 ‘보그’ 편집장 애나 윈터, 월드와이드웹(WWW)을 발명한 팀 버너스 리의 초상은 일상적이고 소박하게 변화한 권력의 이미지를 흥미롭게 보여 준다.초상화 본질은 무엇보다 정체성의 투영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화상은 더 주목할 만하다. 17세기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초상화가 안토니 반다이크는 생전에 많은 자화상을 그렸는데, 한 인간이자 예술가로서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정신을 보여 준다. 데이비드 호크니, 루치안 프로이트의 자화상도 마찬가지로 인상적이다. 고전적인 유화에서 사진, 조각, 홀로그램, LCD스크린까지 초상화의 다채로운 변화상을 비교해서 보는 재미도 크다. 그레이슨 페리의 ‘시간의 지도’(2013)는 작가가 인생에서 겪은 감정과 경험을 성곽 도시의 지도 형태로 그린 그림인데 이를 자화상으로 분류해 전시 마지막에 배치한 점도 이채롭다. 초상화의 진화는 어디까지일까. 전시는 8월 15일까지.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얼굴 너머로 내면 파고든 시대의 초상

    얼굴 너머로 내면 파고든 시대의 초상

    초상화는 정지된 한순간을 포착해 인물의 내면까지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단순한 기록을 넘어 한 사람의 인생을 꿰뚫는 통찰이 담겨 있다. 자기 과시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때론 감추고 싶은 속내가 은연중 표출되는 게 초상화의 묘미다. 사진이 발명되기 이전 역사 속 인물을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초상화가 ‘셀피’(셀프 카메라) 홍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500년을 넘나드는 세기의 초상화가 한자리에 모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이 해외 문화재 특별전시로 개최하는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에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 전문 미술관인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의 소장품 78점을 처음으로 국내에 들여왔다. 1856년 문을 연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은 영국뿐 아니라 세계 역사와 문화에 기여한 인물들의 초상화를 소장하고 있다. 1960년대부터 그림을 넘어 사진까지 범위를 넓혔으며, 백인 상류층 위주에서 다양한 인종과 소수 계층으로 대상을 확대했다. ‘왕족을 제외하고 사후 10년이 지난 인물의 초상화’라는 원칙도 바꿔 생존 유명인의 초상화도 수집한다. 1991년생인 대중 뮤지션 에드 시런의 초상화가 소장 목록에 포함된 배경이다.전시는 ‘명성’, ‘권력’, ‘사랑과 상실’, ‘혁신‘, ‘정체성과 자화상’ 등 5개 주제별로 73명의 작가가 그린 76명의 인생 이야기를 펼친다. 양수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우리가 잘 모르는 인물이라도 초상화를 마주하면서 교감할 수 있도록 책과 음악 등 다양한 아카이브 공간을 함께 구성했다”고 소개했다.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인물은 영국이 낳은 최고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다. 셰익스피어 생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일한 회화 형태의 초상화로, 동시대 배우 겸 화가 존 테일러가 그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예술성보다는 역사적 가치에 주목해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이 맨 처음 소장한 작품이다. 수백년 세월에도 여전히 빛나는 그의 명성을 이 한 장의 그림이 대변한다. 튜더왕조의 마지막 군주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는 권력과 권위의 표상으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극대화한 초상화를 남겼다. 1575년쯤 나무에 유화로 그린 초상화에서 그는 가문의 상징인 붉은 장미를 들고, 순수를 의미하는 진주와 불사조 모양의 장신구로 치장했다.절대왕권이 사라진 현대사회에서 권력은 정치 이외에 사회, 문화적인 영향력으로 영역을 넓혀 왔다. 최연소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인권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실제 주인공인 패션지 ‘보그’ 편집장 애나 윈터, 월드와이드웹(WWW)을 발명한 팀 버너스 리의 초상은 일상적이고 소박하게 변화한 권력의 이미지를 흥미롭게 보여 준다. 초상화 본질은 무엇보다 정체성의 투영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화상은 더 주목할 만하다. 17세기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초상화가 안토니 반다이크는 생전에 많은 자화상을 그렸는데, 한 인간이자 예술가로서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정신을 보여 준다. 데이비드 호크니, 루치안 프로이트의 자화상도 마찬가지로 인상적이다.고전적인 유화에서 사진, 조각, 홀로그램, LCD스크린까지 초상화의 다채로운 변화상을 비교해서 보는 재미도 크다. 그레이슨 페리의 ‘시간의 지도’(2013)는 작가가 인생에서 겪은 감정과 경험을 성곽 도시의 지도 형태로 그린 그림인데 이를 자화상으로 분류해 전시 마지막에 배치한 점도 이채롭다. 초상화의 진화는 어디까지일까. 전시는 8월 15일까지.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미 최대은행 JP모건 CEO “비트코인에 전혀 관심 없다”

    미 최대은행 JP모건 CEO “비트코인에 전혀 관심 없다”

    미국 투자은행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최고경영자(CEO)가 비트코인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다이먼 CEO는 4일(현지시간) ‘CEO협의회’ 행사 인터뷰에서 “나는 비트코인 지지자가 아니다. 비트코인에 전혀 관심이 없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블록체인은 진짜이고 우리는 그것을 활용한다”면서도 “그러나 사람들은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통화란 한 나라의 세무당국과 법치, 중앙은행에 의해 뒷받침돼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라고 강조했다. 월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히는 다이먼 CEO가 비트코인을 비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다이먼 CEO는 2017년 9월 한 행사에서 “비트코인은 사기”라면서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 광풍에 비유했다. 당시 그는 “비트코인은 결국 작동하지 않을 것이며 좋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도 경고하기도 했다. 이듬해 1월 폭스비즈니스에 출연해 ‘사기’ 발언을 후회한다면서도 “비트코인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입장은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JP모건은 부자 고객들을 위한 비트코인 펀드를 곧 출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이먼 CEO는 “고객들은 (비트코인에) 관심이 있다”며 “그들이 자신의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2019년 2월 ‘JPM 코인’이라는 디지털 통화 출시 계획을 밝힌 바 있고, 지난해 10월에는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위한 부서를 신설하기도 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구례 화엄사 ‘목조 삼신불’ 국보 된다… ‘송시열 초상’ 등 3건 보물 지정 예고

    구례 화엄사 ‘목조 삼신불’ 국보 된다… ‘송시열 초상’ 등 3건 보물 지정 예고

    현존하는 국내 유일 삼신불 조각인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이 국보로 승격된다. 문화재청은 17세기 불교사상과 미술사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아 2008년 보물로 지정된 이 유물을 28일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 화엄사 대웅전에 봉안된 좌상은 모두 3m가 넘는 초대형 불상이다. 1635년(인조 13년) 당시 유명한 조각승인 청헌과 응원, 인균과 이들의 제자들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해 완성한 기념비적인 대작이다. 이는 불사를 주관한 벽암 각성, 의창군 이광 등 왕실의 후원이 합쳐진 결과다. 최근 발견된 삼신불의 복장유물 등 관련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화엄사를 재건(1630∼1636)하면서 대웅전에 봉안하기 위해 삼신불을 제작한 시기(1634∼1635)와 과정, 후원자, 참여자들의 실체가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17세기 제작된 목조불상 중 크기가 가장 크고 조각으로는 유일하게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여래불로 표현된 삼신불 도상이라는 점에서 조선 후기 불상 중에서 단연 돋보인다”고 설명했다. 문화재청은 이날 ‘울진 불영사 불연’,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 ‘송시열 초상’ 등 3건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한풍루·회암사지 사리탑 보물 지정 예고

    한풍루·회암사지 사리탑 보물 지정 예고

    문화재청은 20일 전북 무주의 한풍루(위)와 경기 양주시의 회암사지 사리탑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조선 시대 관아 건물인 ‘무주 한풍루’는 선조 때 문신 임제가 호남의 삼한(三寒)인 무주 한풍루(寒風樓), 남원 광한루(廣寒樓), 전주 한벽루(寒碧樓)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았던 문화재다. 현판은 한석봉이 썼다고 전해지며, 수많은 묵객들이 글과 그림으로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당시 시대상과 문화상을 알 수 있는 건물이다. 정면 3칸, 옆면 2칸의 중층 누각 팔작지붕 건물로 조선 후기 관아누정 격식에 충실하게 지어졌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5세기 문신 성임과 유순 등이 한풍루를 보고 쓴 시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기록을 통해 조선 초기부터 존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1592) 때 전소된 이후 다시 건립됐다. 문화재청은 “우리나라 몇 안 되는 중층 관영 누각으로 17세기의 시기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고 소개했다.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은 조선 전기 왕실에서 발원해 건립한 진신 사리탑(석가모니 몸에서 나온 사리를 모신 탑)이다. 규모가 장대하고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사리탑 형식과 불교미술의 도상, 장식문양 등 왕실 불교미술의 여러 요소를 알 수 있다. 문화재청은 “왕릉을 비롯한 왕실 관련 석조물과 비슷하고 사리탑 규모 등을 고려할 때 당대 최고의 석공이 설계해 시공했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조선 전기 석조미술의 정수이자 대표작으로 가치가 크다”고 설명했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무주 한풍루’,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 보물 된다

    ‘무주 한풍루’,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 보물 된다

    문화재청은 20일 전북 무주의 한풍루와 경기 양주시의 회암사지 사리탑를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조선 시대 관아 건물인 ‘무주 한풍루’는 선조 때 문신 임제가 호남의 삼한(三寒)인 무주 한풍루(寒風樓), 남원 광한루(廣寒樓), 전주 한벽루(寒碧樓)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았던 문화재다. 현판은 한석봉이 썼다고 전해지며, 수많은 묵객들이 글과 그림으로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당시 시대상과 문화상을 알 수 있는 건물이다. 정면 3칸, 옆면 2칸의 중층 누각 팔작지붕 건물로 조선 후기 관아누정 격식에 충실하게 지어졌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5세기 문신 성임과 유순 등이 한풍루를 보고 쓴 시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기록을 통해 조선 초기부터 존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1592)때 전소된 이후 다시 건립됐다. 문화재청은 “우리나라 몇 안 되는 중층 관영 누각으로 17세기의 시기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고 소개했다.‘양주 회암사지 사리탑’은 조선 전기 왕실에서 발원해 건립한 진신 사리탑(석가모니 몸에서 나온 사리를 모신 탑)이다. 규모가 장대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사리탑 형식과 불교미술의 도상, 장식문양 등 왕실 불교미술의 여러 요소를 알 수 있다. 문화재청은 “왕릉을 비롯한 왕실 관련 석조물과 비슷하고 사리탑의 규모 등을 고려할 때 당대 최고의 석공이 설계 및 시공했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조선 전기 석조미술의 정수이자 대표작으로 가치가 크다”고 설명했다. ‘무주 한풍루’와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은 30일 예고 기간 동안 각계 의견 수렴과 문화재위원회 심의 절차를 거쳐 보물로 지정된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조선 얼리 어답터 양반들 독일산 광천수 ‘SELTERS’ 마셨을까

    조선 얼리 어답터 양반들 독일산 광천수 ‘SELTERS’ 마셨을까

    14세기 청자상감버드나무갈대무늬대접 한 점신안보물선보다 10년 앞선 첫 수중 신고유물고대부터 中도자기 아시아 넘어 전 세계 유통이집트 푸스타트 유적에선 모방품 발굴되기도 2002년 군산 해역서 ‘SELTERS’ 인장 병 발견獨 천연 광천수 브랜드… ‘젤터스’ 샘물의 기원폴란드 발트해에서도 인장 찍힌 병·물건 발굴도기 병 근대 해양실크로드 연구의 연결 고리1967년 5월, 바닷속 유물이 긴 침묵을 깨고 빛을 봤다. 전남 강진군 마량 앞바다에서 강모씨가 14세기 청자상감버드나무갈대무늬대접 한 점을 신고하면서다. 1975년 어부 최모씨가 존재를 알리면서 발굴이 시작된 신안보물선보다 10년이나 앞선, 우리나라 최초 수중발견 신고유물이다. ●수중 유물 발견 신고 421건 2168점·압수 655건 659점 수중에서 발견해 신고한 유물은 지금까지 421건 2168점이다. 이 유물은 1967년부터 50여년 동안 우리나라 서남해안에서 집중적으로 나왔다. 2004년부터 현재까지 무단으로 도굴된 유물을 압수한 건수는 655건, 659점에 이른다. 발견 지역은 고군산군도를 중심으로 한 전북 군산해역에 집중돼 있으며 전남 신안·완도 해역, 충남 보령·태안 해역과 경기만 일대에서도 신고가 많이 들어온다. 이렇게 찾은 수중 유물은 청자, 백자, 도기, 토기 등 도자기류를 비롯해 동전, 마제석검 등도 있다. 마제석검은 청동기시대 유물로 손잡이가 있는 유병식 한 점과 손잡이를 결합해 사용하는 유경식 석검 한 점인데, 각각 전남 무안군 해제면 도리포 앞바다와 함평군 손불면 월천 앞바다에서 나왔다.토기는 청동기시대 붉은 간토기, 삼국시대 항아리, 시대 미상의 토제품 등이 있다. 동전은 중국 전한의 무제 때부터 사용했던 오수전과 조선시대에 제작한 다양한 상평통보 종류다. 오수전은 전남 여수시 삼산면 서도리 해역에서 발견됐고 상평통보는 충남 보령시 무창포 앞바다와 불모도 앞바다, 태안군 안면도 방포 앞바다에서 신고가 들어왔다. 이 외에 고려시대 동곳(상투가 풀어지지 않도록 고정하는 장신구)과 청동 숟가락, 철제 화포도 있다.●범선 머물던 기착지 도자기는 신안 증도면 방축리 인근 해역에서 신고된 중국 송·원대의 자기가 많은 양을 차지한다. 근대 중국·일본·독일 등에서 생산된 도자기도 포함됐다. 고대부터 중국의 대표 특산품이었던 도자기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 각지로 유통됐다. 당대 이후 활발했던 중국의 도자 수출은 송·원대 적극적 교역정책으로 교역량과 교역 범위가 확대된다.징더전요, 룽취안요, 딩요, 루요 등에서 생산한 중국 도자기는 한국·일본·동남아·페르시아만 연안·아프리카·인도양 연안·홍해유역·유럽 등의 해안과 수중에서 발견된다. 중국 자기가 인기를 끌면서 국제적으로 수요가 증가했고 모방품이 나오기도 했다. 이집트 푸스타트 유적에서는 중국 룽취안요에서 생산된 뚜껑 있는 주름무늬항아리 청자와 닮은 도기질의 주름무늬항아리 뚜껑 편이 발굴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서남해안은 고대부터 한중일 선박이 왕래하던 주요 뱃길이었다. 19세기 초부터 한반도 주변 해역에는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무역 활동을 하던 외국 상선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범선이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서해안 연안을 항해하려면 바람과 조류의 흐름을 잘 이용해야 한다. 조류는 하루에 썰물과 밀물이 두 번씩 약 6시간 간격으로 반복된다. 서해에서 밀물은 남서에서 북동으로, 썰물은 북동에서 남서로 흐른다. 범선은 조류를 기다려야 하는데, 선원들이 사용할 물품을 공급받을 장소가 필요했다. 범선이 머물렀던 기착지는 험난한 항해 구간을 지나기 전 조류를 기다리기에 좋은 장소였다. 그래서 기착지 주변 해역은 수중발견 유물이 주로 신고되는 주요 지점이기도 하다. ●세계 곳곳서 발견된 ‘SELTERS’ 인장 2002년 전북 군산시 옥도면 야미도리 해역에서 ‘SELTERS’ 인장이 찍힌 도기 병을 박모씨가 발견한 적이 있다. 도톰한 입술부와 짧은 목의 이 병은 어깨 부분 한쪽에 손잡이가 붙어 있고, 반대편에는 동그란 인장과 명문이 찍혀 있었다. 인장은 왕관을 쓴 사자 한 마리를 중심으로 ‘SELTERS’라는 문자가 둘러싸고 아래에 ‘○○○THUM NASSAU’라는 명문이 있었다. 이 병은 2002년 신고된 이후 국가 귀속 절차를 거쳐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됐다. 병에 찍힌 ‘SELTERS’는 독일 타우누스산맥의 헤센주 젤터스(Selters) 지역에 있는 수원지에서 공급된 천연 광천수 브랜드다. 이 광천수는 청동기시대부터 알려진 유명한 천연 탄산수로, 현재 유명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젤터스’ 샘물의 기원이다. 16세기에 귀족과 왕족을 중심으로 이 광천수 수요가 많아졌다. 젤터스 광천수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도기로 만든 병에 담아 전 세계로 수백만개가 수출됐다고 한다.최근 폴란드 발트해 해안에서도 군산 옥도면 야미도에서 발견된 ‘SELTERS’ 인장이 찍힌 병과 유사한 물건이 발굴됐다. 폴란드 그란스크 국립해양박물관 고고학자 토마즈 베드나르즈 박사와 폴란드 고고학자들은 발트해 12.2m 아래에서 난파선을 발견했는데, 이 난파선에서도 200년 된 ‘SELTERS’ 인장이 찍힌 도기 병과 코르크 마개, 도자 편 등이 함께 나왔다. 2001년, 말레이시아 조호르 데사루 해안에서 약 2해리(3.7㎞) 정도 떨어진 지역의 수심 20m에서 1830년대 선박과 중국 징더전요와 더화요에서 생산한 청화백자병이 발굴됐다. 자줏빛 흙으로 만든 항아리로 유명한 이싱요에서 생산한 찻주전자와 함께였다. 1956년 미국 정부는 미네소타 스넬링 요새의 유적을 보존하고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고자 발굴했다. 이 요새는 1946년 군대가 해체할 때까지 다양한 군사 기능을 수행했다. 스넬링 요새는 1820년 미국 정부가 서부 영토에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미시시피강과 미네소타강이 합류하는 곳에 설립했는데, 미국 미네소타 역사협회(MNHS)의 낸시 벅 호프먼은 이 요새 복원 중에 발견한 ‘SELTERS’ 문장과 그 아래에 ‘HERZOGTHUM NASAU’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독일 도기 병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왜 1만여개의 호수가 있는 땅에서 무거운 도기 병에 담긴 물을 머나먼 유럽에서 수입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는 그 이유를 해상 운송 시스템의 뒷받침과 건강에 관심이 많았던 19세기 중반의 사회현상으로 보았다. ●獨 상인 1868년 조선과 통상 요구하며 군산으로 들어와 군산 야미도에서 나온 도기 병은 폴란드 발트해 연안 난파선, 말레이시아 데사루 해안 난파선, 미국 미네소타 스넬링 요새 등에서 발굴된 독일 병과 함께 근대 해양실크로드 연구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한다. 이 도기병은 근대 한반도 서남해안의 외국 범선의 항해와도 관련 있는 유물이다.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조선과의 통상 요구를 강화하고자 충남 덕산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기로 했다. 그 일행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소총과 도굴용 도구를 구입한 후 ‘차이나호’와 ‘그레타호’라는 두 척의 기선을 이끌고 덕산군 구만포에 들어왔다. 군산 야미도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구만포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주요 기착지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 해역은 2006년부터 3년에 걸쳐 12세기 고려청자 4000여점이 발굴된 곳이기도 하다. 목포에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우리나라 수중발견 신고·압수유물을 정리해 2010년과 2020년 두 차례에 걸쳐 2권의 도록으로 발간했다. 일부 유물은 연구소 전시실에서 직접 감상할 수 있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세상에 나온 수중발굴 유물과는 달리 긴 세월 동안 관심 밖에 있던 수중발견·압수유물 연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김애경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 백자 하나가 기마병 600명 값… ‘화이트 골드’의 세계

    백자 하나가 기마병 600명 값… ‘화이트 골드’의 세계

    17~18세기 유럽 왕족과 귀족 등 부유층 사이에선 중국 청화백자 수집이 최고의 사치였다. 얇고 매끄러우면서 투명한 하얀빛과 신비로운 푸른색이 조화를 이룬 중국 자기를 ‘화이트 골드’라 부르며 열광했다. 작센 공국의 아우구스투스 2세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가 소장한 1m 높이의 청화백자 화병을 기마병 600명과 바꿨을 정도로 당시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독일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성의 ‘자기의 방’처럼 중국 자기 수집품으로 방 전체를 장식하는 특별한 문화도 유행했다. 값비싼 중국 자기에 대한 막대한 수요는 유럽 도기 제작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 장인들은 코발트 안료와 투명한 유약을 사용해 중국 자기를 모방한 저렴한 도기 제품을 만들었다. 1709년 독일 마이센이 유럽 최초로 자기 제작에 성공한 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영국 등이 자기 기술을 익히면서 세계 자기 생산 중심지는 중국에서 유럽으로 이동했다.최근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3층 세계문화관에 문을 연 세계도자실에선 ‘도자기에 담긴 동서교류 600년’을 주제로 중국 청화백자, 고려청자, 일본 아리타 자기, 네덜란드 델프트 도기, 독일 마이센 자기 등 총 243점을 전시 중이다. 이 중 절반 가까운 113점이 네덜란드 프린세스호프 국립도자박물관과 흐로닝어르박물관 소장품이다. 도자기는 중국에서 처음 만들기 시작해 한반도와 일본, 동남아시아 등에 전해졌다. 1976년 신안 앞바다에서 발굴된 신안선도 14세기 일본으로 향하던 무역선으로, 중국 각지에서 만든 도자기 2만여점이 실려 있었다. 고려청자 7점도 함께 발견됐다. 16세기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중국 자기는 유럽에 소개됐고,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도자기 무역을 독점하기에 이른다.전시장은 신안선에서 발굴된 자기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유럽에서 유행한 중국 청화백자를 일목요연하게 배열했다. 중국 자기의 수출이 금지된 시기에 유럽 틈새 시장에서 명성을 높였던 일본 자기들도 다채롭게 소개한다. 일본 최초의 백자는 임진왜란 때 납치된 조선 도공 이삼평의 손에서 만들어졌기에 감상이 남다르다. 그릇 하나하나에 담긴 동서양 교류의 흔적을 찾아내는 재미가 크다. 유럽에서 주문 제작해 가문의 문장이나 서양 인물, 유럽 신화 등이 중국 문양과 함께 그려진 청화백자 ‘크락 자기’는 동서양 교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는 내년 11월 13일까지 열린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경북 예천서 ‘독도 영유권’ 입증할 새 증거 나왔다

    경북 예천서 ‘독도 영유권’ 입증할 새 증거 나왔다

    경북 예천에 위치한 예천박물관에서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입증하는 새로운 자료를 발견했다. 예천박물관은 소장 자료 가운데 우리나라의 첫 백과사전으로 알려진 보물 제878호 대동운부군옥(1589),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49호 동서휘찬(19C), 동국통지(1868) 등에서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1일 밝혔다. 예천박물관에 따르면 대동운부군옥에 수록한 섬(島·도), 사나움(悍·한), 사자(獅·사)와 같은 일반 명사에 울릉도를 인용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조선 전기 한국인의 사고 체계에서 울릉도를 일상에 유통·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 대동운부군옥에는 현존하지 않는 동국여지승람(1489)의 울릉도 내용을 싣고 있는 것도 확인됐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이자 독도사료 연구위원인 홍문기 박사는 “조선시대 울릉도와 관련한 지식을 지성계에서 유통 및 활용한 사례다”라면서 “조선 사회가 울릉도와 독도를 망각했다는 일본 학계 주장을 강력하게 반박하는 자료”라고 평가했다. 일본 학계는 그동안 “조선 사회는 울릉도와 독도를 망각했다가, 17세기 안용복과 일본 충돌, 19세기 일본 한반도 침략으로 비로소 조선인이 울릉도·독도를 재발견했다”고 주장해왔다. 예천군은 박물관 수선을 마무리하고 유물 확보와 전시물 제작 및 설치를 거쳐 오는 22일 예천박물관을 재개장한다. 이에 맞춰 독도박물관과 공동기획전을 개최, 이번에 발견한 울릉도·독도 관련 소장품을 일반인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예천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독을 막아 주는 고무 ‘삿구’/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독을 막아 주는 고무 ‘삿구’/손성진 논설고문

    최초의 콘돔은 17세기 영국 왕 찰스 2세의 주치의가 왕의 방탕한 생활을 염려해 어린 양의 맹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콘돔이라는 명칭은 그 주치의의 이름(Earl of Condom·콘돔 백작)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피임법이 있었다. 서양과 비슷하게 돼지창자(남성), 비단이나 창호지(여성)로 콘돔을 만들어 썼다고 한다. 콘돔이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 된 것은 1844년 찰스 굿이어가 쉽게 찢어지지 않는 가황고무를 발명한 덕이었다. 콘돔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20세기 초 일본을 통해서였다. 광고에 나오는 ‘삿구’가 콘돔이다. 다른 광고에서는 ‘삭구’라고도 표기하기도 했고 ‘사쿠’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영어 ‘색’(sack·자루)의 일본식 발음이다. 콘돔이 자루처럼 생겨서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광고 머리에는 ‘본방(本邦) 유일의 정량품(精良品)’, ‘남녀 방독(防毒) 고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정품인 독을 막아 주는 고무라는 뜻이다. 독을 막아 준다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만연한 매독과 임질 등 성병을 차단해 준다는 의미다. 즉 콘돔을 피임보다는 성병 예방용으로 썼다는 말이 된다. 제품 종류를 가격과 함께 상세하게 안내하고 있는데 상제(上製·최고급품)부터 특상(特上), 진형(珍型), 여자 전용까지 10가지나 된다. 뒷부분에는 “눈에 띄지 않게 개인 명의로 밀송(密送·비밀 배송)함’이라고 적었다. 당시에는 콘돔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고 용도가 알려지는 것이 민망한 일로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에 내용물을 아무도 모르게 보낸다고 했다. ‘타품(他品)과 비교걸’(比較乞·비교 바람)이라는 문구가 있고, 마지막에 주문처 겸 판매소가 도쿄 ‘정자당’(丁子堂)이라고 돼 있다. 일본에서 우편으로 주문을 받아 우편으로 부쳐 주는 방식으로 판매한 것이다. 사실 콘돔을 공개적으로 사고파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는 지금도 있다. 특히 청소년들은 더욱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는 탓에 피임 용구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미성년자에게는 콘돔을 팔지 않는다는 곳도 있었다. 2019년 질병관리본부(현 질병관리청)의 ‘시크릿 콘돔’(secret condom) 캠페인은 그런 이유에서 시작됐다. 편의점에서 ‘토마토 케찹’, ‘핫소스’, ‘하니머스터드’, ‘보성녹차’, ‘커피믹스’라고 적힌 작은 봉지를 무심코 뜯으면 깜짝 놀라거나 당황할 수 있다. 그 속에 든 내용물이 콘돔이기 때문이다. 우편으로도 판매하는데 안에 든 물건이 콘돔인 것을 모르도록 손편지와 함께 동봉해서 보내 준다. 100년 전의 ‘밀송’을 현대화한 셈이다. sonsj@seoul.co.kr
  • 조선의 군사의례, 역병에 맞서다

    조선의 군사의례, 역병에 맞서다

    조선 4대 왕 세종은 문치(文治)의 표상이지만 군사력을 강화하고, 정비하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병서 ‘진설’과 중국과의 역대 전쟁을 정리한 ‘역대병요’를 편찬했을 뿐 아니라 군사의례인 ‘군례’(軍禮)를 집대성했다. 국가를 통치하는 다섯 가지 의례(오례) 중 하나인 군례는 군통수권자로서 왕의 권위를 드높이는 중요한 수단으로, 시대에 따라 의례 종류와 내용이 변화하며 대한제국까지 이어졌다.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 ‘조선 왕실 군사력의 상징, 군사의례’는 ‘문약(文弱)한 나라’라는 선입견과 달리 조선이 무치(武治)에도 힘쓴 국가였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조선 왕들의 군사적 노력과 아울러 왕실의 군사의례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전시로는 처음이다. 이를 위해 갑옷과 투구, 무기, 군사 깃발 등 176점의 다양한 유물을 한자리에 모았다. 특히 독일 라이프치히 그라시민족학박물관과 함부르크 로텐바움박물관 소장품인 갑옷과 투구 40여점은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유물이다. 조선의 군례는 강무의, 구일식의, 계동대나의, 대사의, 선로포의·헌괵의, 대열의 등 6가지 형태가 대표적이다. 전시는 각 군례의 의미와 내용을 의례에 사용된 유물을 통해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가장 눈길을 크는 의례는 전시장 한가운데 배치된 대열의(大閱儀)다. 왕이 직접 지휘하는 군사훈련인 대열의는 최대 규모와 최고 권위의 군례로, 국왕의 군사권 과시가 주된 목적이었다. 좌우로 진영을 나눠 실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 훈련을 펼쳤다. 대열의를 행할 때 장수와 병사들이 입었던 갑옷과 투구, 무기 등을 양쪽으로 배치해 관람객이 마치 왕의 시선으로 군사를 사열하는 듯한 생생한 분위기를 연출한 점이 흥미롭다. 붉은 융에 철과 동으로 만든 갑찰을 달고, 용과 봉황 등 각종 무늬로 화려하게 장식한 갑옷과 투구는 웅장함을 더한다. 전시장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지휘 신호용 깃발과 악기, 화약무기 등도 압도적이다.사냥하며 훈련하는 강무의(講武儀), 왕과 신하가 활쏘기로 화합하는 대사의(大射儀), 전쟁의 승리 과정을 적은 노포와 적의 잘린 머리를 내걸어 승리를 알리는 선로포의(宣露布儀)와 헌괵의(獻儀) 등은 모두 전쟁과 연관 있는 군례다. 반면 일식 때 행한 구일식의(救日食儀)와 역병을 쫓아내기 위한 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는 군사력으로 국가적 재난 상황을 안정시키려 했던 상징적 군례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전시 전반부에선 역대 왕들이 군사력 강화를 위해 펼친 정책을 소개한다. 조선 전기에는 북방 여진족과 남방 왜구를 견제하는 다양한 전법과 무기가 연구됐고, 16세기 말~17세기 초 두 번의 왜란과 호란을 겪은 이후에는 조총 등 신무기를 도입하고 군제를 새롭게 개편했다. 이런 변화상을 병서와 회화작품, 진법에 관한 영상 자료 등을 통해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전시는 3월 1일까지.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실전 같은 전투훈련에서 역병 쫓는 의례까지, 조선 군사의례 첫 전시

    실전 같은 전투훈련에서 역병 쫓는 의례까지, 조선 군사의례 첫 전시

    조선 4대 왕 세종은 문치(文治)의 표상이지만 군사력을 강화하고, 정비하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병서 ‘진설’과 중국과의 역대 전쟁을 정리한 ‘역대병요’를 편찬했을 뿐 아니라 군사의례인 ‘군례’(軍禮)를 집대성했다. 국가를 통치하는 다섯 가지 의례(오례) 중 하나인 군례는 군통수권자로서 왕의 권위를 드높이는 중요한 수단으로, 시대에 따라 의례 종류와 내용이 변화하며 대한제국까지 이어졌다.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 ‘조선 왕실 군사력의 상징, 군사의례’는 ‘문약(文弱)한 나라’라는 선입견과 달리 조선이 무치(武治)에도 힘쓴 국가였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조선 왕들의 군사적 노력과 아울러 왕실의 군사의례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전시로는 처음이다. 이를 위해 갑옷과 투구, 무기, 군사 깃발 등 176점의 다양한 유물을 한자리에 모았다. 특히 독일 라이프치히 그라시민족학박물관과 함부르크 로텐바움박물관 소장품인 갑옷과 투구 40여점은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유물이다.조선의 군례는 강무의, 구일식의, 계동대나의, 대사의, 선로포의·헌괵의, 대열의 등 6가지 형태가 대표적이다. 전시는 각 군례의 의미와 내용을 의례에 사용된 유물을 통해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가장 눈길을 크는 의례는 전시장 한가운데 배치된 대열의(大閱儀)다. 왕이 직접 지휘하는 군사훈련인 대열의는 최대 규모와 최고 권위의 군례로, 국왕의 군사권 과시가 주된 목적이었다. 좌우로 진영을 나눠 실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 훈련을 펼쳤다. 대열의를 행할 때 장수와 병사들이 입었던 갑옷과 투구, 무기 등을 양쪽으로 배치해 관람객이 마치 왕의 시선으로 군사를 사열하는 듯한 생생한 분위기를 연출한 점이 흥미롭다. 붉은 융에 철과 동으로 만든 갑찰을 달고, 용과 봉황 등 각종 무늬로 화려하게 장식한 갑옷과 투구는 웅장함을 더한다. 전시장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지휘 신호용 깃발과 악기, 화약무기 등도 압도적이다.사냥하며 훈련하는 강무의(講武儀), 왕과 신하가 활쏘기로 화합하는 대사의(大射儀), 전쟁의 승리 과정을 적은 노포와 적의 잘린 머리를 내걸어 승리를 알리는 선로포의(宣露布儀)와 헌괵의(獻?儀) 등은 모두 전쟁과 연관 있는 군례다. 반면 일식 때 행한 구일식의(救日食儀)와 역병을 쫓아내기 위한 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는 군사력으로 국가적 재난 상황을 안정시키려 했던 상징적 군례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전시 전반부에선 역대 왕들이 군사력 강화를 위해 펼친 정책을 소개한다. 조선 전기에는 북방 여진족과 남방 왜구를 견제하는 다양한 전법과 무기가 연구됐고, 16세기 말~17세기 초 두 번의 왜란과 호란을 겪은 이후에는 조총 등 신무기를 도입하고 군제를 새롭게 개편했다. 이런 변화상을 병서와 회화작품, 진법에 관한 영상 자료 등을 통해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전시는 3월 1일까지.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순천 팔마비 등 3건 보물 지정 예고

    순천 팔마비 등 3건 보물 지정 예고

    문화재청은 26일 전남 순천 팔마비, 충남 공주 갑사 대웅전, 경북 의성 대곡사 범종루 등 지방유형문화재 3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순천 팔마비는 고려시대 충렬왕(1236~1308) 때 승평부사를 지낸 최석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비석이다.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승평부(지금의 순천)에서는 수령이 교체될 때 말 8필을 기증하는 관례가 있었다. 최석은 1281년 비서랑의 관직을 받아 개성으로 가면서 승평부에서 준 말 8필에 자신의 말이 승평부에 있을 때 낳은 망아지까지 합해 돌려보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최석의 공덕을 기리고자 팔마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말 건립된 비석은 정유재란 때인 1597년 완전히 훼손됐다가 1616년 순천부사로 부임해 온 이수광이 이듬해 재건했다. 9세기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 공주 갑사의 대웅전은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지만 대체로 원형을 유지해 온 건축물로 꼽힌다. 대웅전 내부 ‘갑사소조삼세불’(보물 제2076호)이 1617년에 제작됐고, 1659년에 ‘갑사사적비’가 세워진 점으로 미뤄 17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의성 대곡사 범종루는 의성 지역에서 불교 사찰이 부흥하기 시작한 17세기의 양식적 변화를 잘 간직한 문화유산이란 평가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조선·대한제국 어보 어떻게 만들어졌나…과학적 분석서 첫 발간

    조선·대한제국 어보 어떻게 만들어졌나…과학적 분석서 첫 발간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까지 500년에 걸쳐 제작된 왕실문화재 어보(御寶)의 재료와 제작 기법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보고서가 처음으로 나왔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소장 어보 322점(금보 155점, 옥보 167점)을 대상으로 2018년부터 3년 간 진행한 연구 결과를 담은 ‘어보 과학적 분석’ 보고서 3권을 발간했다고 15일 밝혔다. 어보는 왕과 왕후의 덕을 기리는 칭호를 올릴 때나 왕비·세자·세자빈을 책봉할 때 만든 의례용 도장이다. 2017년 ‘조선왕조 어보·어책’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돼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이번 연구는 어보의 구성 재료와 제작 기법에 중점을 두고 비파괴 분석방법으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유물을 전수 조사한 첫 결과물이다. 금보는 국립고궁박물관이 자체적으로 분석했고, 옥보는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과 공동으로 진행했다.어보는 시대에 따라 재료 및 제작 기법이 변화했다. 금보는 구리·아연 합금 등에 아말감 기법으로 도금해 제작했는데, 시기별로 아연의 함량이 달라졌다. 15∼17세기 10% 내외였다가 18세기 이후 10∼30%로 폭이 넓어졌다. 19세기에는 아연 함량 20% 이상인 금보가 많이 제작됐다. 아말감 기법은 수은에 금을 녹인 아말감을 금속 표면에 칠한 후 수은을 증발시켜 도금하는 방법이다. 제작 기법에서도 변화가 발견됐다. 17세기 후기부터 18세기 중기까지 제작된 거북 모양 손잡이(귀뉴·龜紐)가 있는 금보에서만 점으로 새긴 무늬와 조이질(쇠붙이에 무늬를 쪼아 새기는 일)로 장식한 거북 등딱지 문양이 나타났다.옥보는 대개 사문암 계열로 제작됐지만 19세기 이후에는 대리암 및 백운암 계열이 일부 옥보에 사용되기도 했다. 손잡이 머리에 ‘王’(왕)자 등 글자가 새겨진 옥보는 총 25점이며, 거북 눈동자가 검게 그려진 옥보는 11점이었다. 어보에 달린 붉은 끈인 보수(寶綬)는 보통 비단으로 제작됐으나 1740년에 제작된 1점과 1900년대 이후 제작된 5점에서는 인조섬유인 레이온을 사용한 것이 확인됐다. 국내에 레이온이 들어온 시기가 1900년대 초였으므로 1740년 제작된 어보의 보수는 후대에 교체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이번 보고서가 앞으로 어보 환수나 유사 유물의 시기 판별에 기준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전하는 어보는 총 331점으로, 국립고궁박물관 외에 국립중앙박물관이 7점, 고려대박물관이 2점을 소장하고 있다. 보고서는 국립고궁박물관 홈페이지(www.gogung.go.kr)에 공개됐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런던탑 까마귀’ 실종에 발칵 뒤집힌 英왕실

    ‘런던탑 까마귀’ 실종에 발칵 뒤집힌 英왕실

    영국 관광 명소인 런던탑에 살던 까마귀 한 마리가 사라지는 바람에 왕실에 비상이 걸렸다. 런던탑에 까마귀들이 살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왕가의 전설 때문이다. 영국 데일리메일 등에 따르면 런던탑 관계자는 2007년부터 런던탑에 살기 시작한 14살 까마귀 멜리나가 지난 수주 동안 보이지 않고 있다며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13일(현지시간) 전했다. 영국에는 까마귀 6마리가 런던탑 안에 살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전설이 있다. 최초로 런던탑 까마귀에 대해 보호령을 내린 왕은 17세기 대영제국을 통치한 찰스 2세였다. 그는 천문관 존 플램스티드로부터 ‘런던탑의 까마귀를 죽이거나 내쫓으면 탑이 무너지고 국왕도 쫓겨날 것’이라는 경고를 받은 뒤 적어도 런던탑에는 까마귀 6마리가 살아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2차 대전 당시 런던탑 안의 까마귀 6마리 가운데 한 마리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죽었는데 즈음해서 독일 침략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영국은 까마귀 6마리의 전설을 신봉하게 됐다. 2007년 멜리나의 합류로 8마리가 된 까마귀들은 런던탑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면서 사육사가 주는 먹이를 먹고 보호를 받으며 관광 명물로 그 몫을 톡톡히 해 왔다. 멜리나의 실종은 영국인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소셜미디어에는 멜리나가 실종되면서 올해 암울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등 ‘국가에 망조가 들 것’이라는 불길한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런던탑 측은 멜리나 외에도 7마리의 까마귀가 있고 전설의 6마리보다 한 마리 더 많은 만큼 멜리나의 빈자리를 채울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길이 25m 조선 공신 충성서약문 국보 된다

    길이 25m 조선 공신 충성서약문 국보 된다

    조선 숙종 때 공신(功臣)들의 충성 맹세 기록을 담은 길이 25m의 왕실 문서가 국보로 승격된다. 문화재청은 1680년(숙종 6년) 8월 30일 열린 회맹제를 기념해 1694년(숙종 20년) 제작한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보물 제1513호)를 7일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 회맹제는 조선시대 임금이 공신들과 함께 천지신명에게 지내는 제사이며, 회맹제를 기록한 어람용 문서가 회맹축이다. ‘20공신회맹축’은 종묘사직에 고하는 제문인 회맹문, 1392년 개국공신부터 1680년 보사공신에 이르는 역대 20종의 공신과 그 후손 등 489명의 명단을 기록한 회맹록, 종묘에 올리는 축문과 제문으로 구성돼 있다. 말미에 제작 사유 및 연대를 적었고, ‘시명지보’(施命之寶)라는 국새를 찍어 왕실 문서로서 완벽한 형식을 갖췄다. 길이가 25m 이상인 문서의 양 끝을 붉은색과 파란색 비단으로 덧대고, 위아래를 옥으로 장식한 두루마리 막대로 마무리했다.회맹제가 거행되고 14년 후에 회맹축이 조성된 것은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 서인과 남인 세력 간 정쟁을 거치며 공신 지위 부여와 박탈, 회복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보사공신은 1680년 4월 서인이 집권한 경신환국 때 공을 세운 이들에게 내린 훈호(勳號)였다. 그러나 1689년 숙종의 계비였던 희빈 장씨의 원자 책봉 문제로 남인이 서인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기사환국 때 공신 지위가 박탈되었다가 1694년 폐비 민씨(인현왕후) 복위 운동을 전개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복훈됐다. 문화재청은 “17세기 후반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사료로 역사·학술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왕실유물 중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로 제작된 조선 후기 왕실 공예품의 백미”라고 설명했다. 조선 시대에는 공신회맹제가 있을 때마다 어람용 회맹축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1910년까지 문헌을 통해 전래가 확인된 회맹축은 3건에 불과하다. 1646년(인조 24)년과 1694년(숙종 20년) 제작된 회맹축, 1728년(영조 4년) 분무공신 녹훈 때의 회맹축 등이다. 이 중 영조 때 만들어진 이십공신회맹축의 실물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고, 1646년에 제작된 보물 제1512호 ‘20공신회맹축-영국공신녹훈후’는 국새가 날인되어 있지 않다. 문화재청은 “어람용이자 형식상·내용상 완전한 형태로 전래된 회맹축은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가 유일하다”고 했다.문화재청은 이와 함께 ‘구미 대둔사 경장’과 ‘상주 남장사 영산회 괘불도 및 복장유물’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1630년(인조 8년)에 조성된 구미 대둔산 경장(經欌· 불교 경전을 보관한 장)은 조선 시대 불교 목공예품 중 명문을 통해 제작 시기가 명확하게 파악된 매우 희소한 사례다. 상주 남장사 영산회 괘불도 및 복장유물은 높이 11m의 대형 불화 1폭과 복장유물로 구성돼 있다. 괘불도는 경상도 지역 화승 23명이 참여해 제작한 것으로, 18세기 후반기 불화의 기준이 되는 작품이다. 문화재청은 예고기간 30일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보 및 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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