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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벤스·벨라스케스 작품부터 조선 갑옷·투구까지… 600년 왕가의 보물 상자를 열다

    루벤스·벨라스케스 작품부터 조선 갑옷·투구까지… 600년 왕가의 보물 상자를 열다

    예술을 사랑한 합스부르크 왕가 사람들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예술을 소중히 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수없이 많은 예술품을 수집했으며, 오스트리아 이외 지역에서 왕가의 혈통이 끊기는 상황에서도 예술품을 수도 빈으로 보낼 정도로 예술에 진심이었다. 약 600년간 유럽 역사의 중심에 있던 그들이 남긴 유산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전시가 한국에 마련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국과 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빈미술사박물관과 함께 25일부터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특별전을 시작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빈미술사박물관에 남긴 유산 중 96점의 미술품이 전시됐다. 대부분이 한국에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 작품 보험료만 수억원에 달한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예술이 곧 힘이자 지식이고 권력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순탄하지 않은 역사 속에서도 예술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고, 이들이 수집한 작품은 빈미술사박물관의 유산으로 남아 오늘날에 전하고 있다.5부로 구성된 전시는 유럽 어느 박물관을 방문한 듯한 인상을 준다. 클래식으로 유명한 도시답게 전시관에 음악도 함께 흐른다. 루돌프 2세의 궁정악장이었던 필리프 드 몽테의 미사곡이라든지 빈을 대표하는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음악도 들을 수 있다. 전시 중간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초상화가 걸린 공간은 긴 공간에 큰 그림 몇 개가 걸린 구조로 돼 있는데, 이는 그가 사랑한 쇤브룬 궁전에서 영감을 얻어 꾸며졌다. 전시 1부에서는 프라하에 수도를 두고 예술품을 수집했던 16세기 루돌프 2세 황제 시대를 다룬다. 공예를 사랑했던 그는 다양한 공예품을 모았고, 이는 현재 빈미술사박물관 공예관의 기초가 됐다. 2부는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을 소개한다. 그는 오스트리아 서쪽 지역인 티롤의 암브라스성에 전용 건물을 지었고 진열장 설계와 전시품 배치도 직접 했을 정도로 열정이 남달랐다. 16세기 유럽에 전해진 야자열매로 제작한 공예품도 볼 수 있는데, 전 세계에 남은 6개 중 빈미술사박물관에 3개가 있고 이번에 2개가 한국에 왔다.3부는 빈미술사박물관의 회화로 채워져 관람의 절정을 이룬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흰 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나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주피터와 머큐리를 대접하는 필레몬과 바우키스’는 이번 전시에서 꼭 봐야 하는 대작으로 꼽힌다. 4부에서는 대중에게 박물관이 열린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를, 5부는 프란츠 요제프 1세 시대를 조명한다. 전시 끝에는 한국과 오스트리아 수교 기념으로 고종이 요제프 1세에게 선물한 조선의 갑옷과 투구가 있어 양국 수교의 의미를 되새긴다. 전시를 준비한 양승미 학예연구사는 “세계사 속에서 배웠던 유럽 왕가가 아닌, 예술 수집가로서의 면모를 통해 합스부르크를 이해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면서 “왕이 바뀌어도 열심히 수집품을 모은 역사를 통해 예술이 가진 힘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아몬드, 고소함에서 달콤함을 향한 여정/셰프 겸 칼럼니스트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아몬드, 고소함에서 달콤함을 향한 여정/셰프 겸 칼럼니스트

    남들은 이해하기 힘든 직업적 기쁨의 순간 같은 게 있다. 가령 말로만 듣던 음식을 현지에서 먹게 된다거나, 식재료의 원형을 발견했을 때와 같은 순간이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공부하던 시절 의도치 않게 아몬드 나무와 열매를 목격했을 때의 감격스러움은 지금도 쉬이 잊히지 않는다. 아마도 아몬드 열매를 보고 괴성을 지르며 흥분하는 요리사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몬드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아몬드 열매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한국인은 드물다. 한국에서 나지 않는 식재료이기 때문이다. 흔하디흔한 아몬드에 호기심을 갖게 된 건 시칠리아의 주방에서 일을 할 때였다. 식당 메뉴 중에는 훈연한 생선이 있었는데 아몬드 열매 껍질을 태워 연기를 쐬는 게 아닌가. 생선 훈연을 그토록 간단하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처음 본 아몬드 껍질을 훈연 용도로 사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웠다.시칠리아는 이탈리아에서 피스타치오와 함께 아몬드 산지로도 유명하다. 시칠리아 곳곳에서 아몬드 나무를 발견할 수 있는데 아몬드 열매 수확은 마치 호두나무에서 호두 열매를 수확하는 것과 유사하다. 우리가 먹는 아몬드 씨앗은 호두처럼 단단한 외피 속에 들어 있고, 그 겉을 과육이 덮고 있다. 호두 과육은 쓴맛 때문에 거의 쓸모가 없는데 아몬드 과육도 마찬가지다. 아몬드는 크게 쓴맛이 나는 아몬드와 단맛이 나는 아몬드 두 가지로 구분된다. 쓴 아몬드는 청산가리 성분의 독성이 있기에 일상에서는 거의 만나볼 수 없다. 식용으로 재배하는 건 덜 단맛을 내는 아몬드로 2020년 기준 미국이 전 세계 생산량의 57%를 생산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캘리포니아산 아몬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쓴 아몬드는 위험하지만 산업적 용도로 일부 재배되고 있다. 단 아몬드에서는 거의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아몬드 향이 쓴 아몬드에는 다량 함유돼 있는데 향을 추출해 특정 식품 용도로 사용한다. 롬바르디아 지방의 쿠키 ‘아마레티’, 리큐어 ‘아마레토’의 향을 내는 데 사용한다. 아몬드의 고향은 중동의 이란 고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리스를 통해 지중해로 퍼져 나간 것으로 추측된다. 다른 견과류처럼 열을 가하거나 하지 않고도 자체로 고열량을 제공하고 입맛을 돋우는 식재료이기도 했다. 중세 이전까지 유럽 세계에서는 아몬드는 간식거리로만 여겨졌지만 십자군 전쟁 이후 아랍의 요리법이 전해지면서 아몬드는 본격적으로 요리 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부터 아랍인들이 시칠리아와 스페인을 점령했을 당시 아몬드를 재배해 온 덕에 해당 지역에서는 아몬드를 이용한 요리가 지금도 전통요리로 남아 있다.아몬드를 이용한 대표적인 요리 중 하나는 아몬드 밀크다. 아몬드를 물에 불린 후 갈아 즙을 짜내 만들기에 요리라고 부르기엔 다소 민망하지만 중세의 귀족들은 꽤나 좋아했던 음식이다. 당시로선 흔한 식재료는 아니었기에 부유한 이들에게 아몬드 밀크는 육식을 금한 사순절 시기에 우유를 대체할 수 있는 대용품이기도 했다. 중세 상류층의 식탁엔 갖은 귀한 재료를 넣어 만든 소스가 유행했는데 소스는 오래 끓여 점성이 커질수록 가치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오랜 시간 타지 않게 잘 저어 가며 끓여야 했고 연료도 많이 필요했다. 이런 수고를 덜 하고도 소스를 걸쭉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는데 이때 아몬드가 사용됐다. 르네상스 시기 이후 밀가루와 버터를 증점제(점도를 높이는 물질)로 활용하기 전까지 아몬드를 곱게 갈아 만든 아몬드 페이스트는 상류층의 주방에서 요긴하게 쓰였다.또 하나 아랍 세계가 유럽에 남겨둔 아몬드 요리의 유산은 바로 마지판이다. 아몬드 페이스트를 설탕과 함께 섞어 만든 일종의 케이크와 과자의 중간 정도 되는 당과류다. 질감이 점토와 비슷해서 이런 특성을 이용해 온갖 형태로 성형하기 쉬워 중세부터 장식용 디저트로 사용됐다. 시칠리아의 카페에 가면 과일 모양의 마지판을 목격할 수 있는데 이를 프루타 디 마르토라나(Frutta di Martorana)라고 부른다. 16세기 팔레르모의 마르토라나 수녀원에서 교황 방문을 앞두고 과일이 부족하자 임시방편으로 과일 모양 마지판으로 식탁을 치장한 데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제과 기술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달한 요즘의 시선에서 보면 프루타 디 마르토라나나 독일의 마지판은 다소 조악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엔 제과 기술자들이 자신들의 기량을 뽐낼 수 있는 장이기도 했다. 유럽의 식탁에 남은 아랍의 흔적을 상상하며 한입 간식거리로 먹기엔 더할 나위 없는 디저트다.
  • 책을 탐구·탐독·탐미·탐험하는 사람… 그가 곧 책박물관[김언호의 서재탐험]

    책을 탐구·탐독·탐미·탐험하는 사람… 그가 곧 책박물관[김언호의 서재탐험]

    1980년대와 90년대는 ‘책의 시대’였다. 책 쓰고, 책 만들고, 책 읽는 시대였다. 나라와 사회의 민주화가 우리들 삶의 중심 주제였다. 책 쓰기, 책 만들기, 책 읽기는 민주화를 구현해 내는 문제의식이자 실천 역량이었다. 파주출판도시는 1980년대와 90년대 책 만드는 우리들의 문제의식이고 그 성과였다. 권위주의 정치권력으로 책이 수난당하는 시대에 출판인의 삶은 고단했지만, 책 만들기와 함께 출판도시 건설은 우리에겐 축제 같은 일이었다. ●파주출판도시 건설의 선두에서 1980년대 후반 단행본 출판사 대표 10여명은 주말이면 북한산을 오르곤 했다. 산을 오르면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주제로 대화했다. 파주출판도시는 우리의 북한산 산행에서 발상됐다. 1980년대라는 험난한 시대가 출판도시와 같은 대형 프로그램을 구현하게 만들었다. 시대상황이 그 시대상황을 극복하는 지혜와 의지를 창출해 낸다는 사실을 우리는 체득했다. 세계출판문화사에 유례가 없는 파주출판도시의 건설은 탁월한 출판 장인 이기웅과 함께 이야기돼야 한다. 출판계의 동지들이 손잡고 더불어 함께 구현해 낸 파주출판도시는 이기웅이라는 출판인이 기획자로 선두에 나섰기에 구체화되고 실현될 수 있었다. 나는 파주출판도시를 ‘한 권의 큰 책 만들기’라고 생각했다. 한 권의 책은 혼자 만들 수 없다. 한 권의 책을 존재하게 하는 문화적·역사적 전통과 시대정신이 전제된다. 파주출판도시는 더불어 함께하는 협동과 연대의 정신으로 가능했다. 출판인 이기웅이 선도하고 이에 동의하는 출판 동인들의 파트너십으로 출판도시는 현실이 되는 것이었다.●미술출판 수준 한 단계 높인 열화당 열화당은 1976년에 창립한 한길사보다 5년 선배 출판사다. 이기웅은 열화당을 문 열기 5년 전인 1966년 일지사에서 책 만들기를 시작했다. ‘조지훈 전집’(1973, 전6권)과 ‘서정주 문학전집’(1972, 전5권)을 만들었다. 밤을 새우면서 교열에 매달렸다. ‘최초 독자로서의 편집자’의 재미를 누리는 것이었다. “조지훈에게서는 강건하고 우렁차며 꼿꼿한 선비정신을, 서정주에게서는 정교하고 서정적인 언어의 마술을 배웠습니다.” 미술출판을 중심 주제로 삼는 열화당. 열화당의 등장은 우리 미술출판의 수준과 차원을 드높이는 역사적인 사건 같은 것이었다. 한국 미술출판은 열화당의 등장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 한국과 동양미술, 서양미술의 전 영역·전 장르에 걸치는 미술출판이었다. 김원룡의 ‘신라토기’, 강우방의 ‘원융과 조화: 한국고대조각사의 원리 1’과 ‘법공과 장엄: 한국고대조각사의 원리 2’, 황수영 글·안장헌 사진의 ‘석굴암’, 문명대의 ‘고려불화’와 ‘한국조각사’, 조요한의 ‘한국미의 조명’, 권영필의 ‘실크로드 미술’, 최열의 ‘한국 근대미술의 역사’와 ‘한국근대미술 비평사’, 오광수의 ‘한국현대미술사’, 지건길의 ‘한국 고고학 백년사’ 등을 통해 우리 미술사의 찬란한 세계로 들어갔다. ‘근원 김용준 전집’(전6권)과 ‘우현 고유섭 전집’(전10권)을 펴냈다. ‘상허 이태준 전집’(전14권)이 진행되고 있다. 이기웅은 한국기층문화의 탐구에 나선다. ‘한국 호랑이’(김호근·윤열수 편), 황헌만의 사진집 ‘장승’·‘초가’·‘옹기’와 ‘우리네 옛 살림집’(김광언)이 그것이다. ‘창덕궁과 창경궁’(한영우 글·김대벽 사진), ‘서원’(이상해 글·안장헌 사진), ‘강릉 선교장’(이기서 글·주명덕 사진)을 통해 한국 전통건축의 철학과 미학을 담아낸다. 인간문화재 춤꾼들의 춤 사진과 현장비평으로 엮어낸 ‘춤과 그 사람’, ‘한국의 탈놀이’ 시리즈, 김수남의 사진작업 ‘한국의 굿’과 ‘한국악기’(송혜진 글·강운구 사진), 이종석의 ‘한국의 전통공예’·‘한국의 목공예’, ‘우리 옷과 장신구’(홍나영 외), ‘한국의 가면극’(전경욱), ‘조흥동의 한량무’를 통해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을 구현해 낸다. 출판인 이기웅과 사진작가 강운구, 북디자이너 정병규가 “30여회 경주를 유람하면서” 손잡고 펴낸 ‘경주남산’은 책 만들기의 풍류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열화당 사진문고’는 사진예술을 대중화로 이끈 작은 ‘사진박물관’이다. ‘사진의 역사’(보먼트 뉴홀)와 ‘영혼의 시선: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 에세이’ 등 사진이론서들이 이어진다. 이기웅의 에디터십은 건축작품집으로 진입한다. ‘김중업 다이얼로그’로 시작해서 ‘승효상 도큐먼트’, ‘새로 숨쉬는 공간: 조병수의 재생건축 도시재생’에 이어 ‘민현식 건축작품집’이 기획된다. 건축이론과 건축에세이로 확장된다. 지오 폰티의 ‘건축예찬’, 하산 화티의 ‘이집트 구르나 마을 이야기’, 손세관의 ‘북경의 주택’, 르 코르뷔지에가 쓴 ‘르 코르뷔지에의 사유’ 등이다. 이기웅은 다시 19세기 말과 20세기의 주요 미술운동을 다루는 ‘현대미술운동총서’로 들어간다. ‘후기인상주의’로부터 ‘추상표현주의’로 이어지는 전14권의 총서다. 다시 ‘위대한 미술가의 얼굴’ 전16권으로 이어진다. 고답적 해설에서 벗어나 한 시대의 미술운동을 역동적으로 서술해 내는 번역출판이다. 이기웅의 문제의식은 미술비평가이자 사진이론가, 소설가이자 다큐멘터리 작가이고 사회비평가인 존 버거(1926~2017)의 발견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다른 방식으로 보기’, ‘A가 X에게: 편지로 씌어진 소설’, ‘어떤 그림: 존 버거와 이브 버거의 편지’로 이어지는 존 버거의 책들은 우리의 사유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끈다. ●박물관 방불케 하는 책 컬렉션 열화당은 1971년 창립 이래 지금까지 1000여권을 출간해 냈다. 출판인 이기웅은 우리 출판계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는 출판인에 속할 것이다. 그의 손에는 언제나 책이 들려져 있다. 탐구·탐독하는 기획자다. 그는 책의 매무새를 치밀하게 살피는 책 탐미가다. 아름다운 문자들로 구성되는 한 권의 책이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학일 것이다.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출판 장인 윌리엄 모리스가 말하지 않았나.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적 성과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첫째를 건축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다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기웅과 나는 책을 탐험하는 길에 동행해 왔다. 우리는 새 책도 좋아하지만 헌책과 고서 속으로 들어가기를 누린다. 우리는 고서의 향기를 사랑한다. 1994년 4월이었다. 이기웅 대표 내외와 우리 내외는 영국의 웨일스 지방 헤이온와이로 갔다. 헌책에 새로운 생명 불어넣기, 헌책방운동을 세계에 펼친 리처드 부스 선생의 고서마을에 가서, 책의 정신을 온몸으로 호흡하고 싶었다. 농사 창고가, 마구간이 책방으로 재탄생하고 있었다. 수많은 헌책들이 책의 음향을 합창하고 있었다. 그 봄날의 하오, 고서마을 헤이온와이의 체험은 이미 우리가 펼치고 있는 출판도시의 당위와 철학을 우리들 가슴과 머리에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헤이온와이 여행을 계기로 나는 예술인마을 헤이리의 건설에 나섰다. 출판도시는 이기웅이, 헤이리는 김언호가 맡아서 진전시키게 되는 것이었다. 출판인 이기웅은 책 만들기, 책 읽기를 삶의 일상적 질서로 삼지만 아름다운 책, 의미 있는 책들을 발견하고 수집·보존한다. 그 자신이 책박물관이다. 한 권의 책이 존재하는 그 과정, 그 결과를 한자리에 운집시키는 지혜야말로 인문학이고 박물관 작업이다. 이기웅의 책에 바치는 헌신, 책에 대한 신념은 종교처럼 존엄하기도 하다. 51년째 책과 씨름하기에 나서고 있는 영원한 현역 이기웅이 동과 서, 남과 북으로 책을 찾는 여행에서 발견하고 수집한 책이 물경 4만 3000권이나 된다. 16세기의 독일 고서 ‘마르틴 루터 전집’(전12권)과 1827년부터 42년에 걸쳐 출간된 ‘괴테 전집’을 비롯해 우리 근현대의 의미 있는 책들을 모았다. “열화당 책박물관의 컬렉션은 ‘보편의 특수성’ 또는 ‘보잘것없음의 보잘것 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책의 역사성·희귀성으로 고서의 가치를 규정하는 일반적 잣대와 달리, 컬렉터가 아닌 ‘편집자’의 시각에서 발견한 책들입니다. 이들 책은 낱권으로서가 아니라 함께 존재함으로써 그 의미와 가치가 더욱 특별해집니다.” ●열화당과 이기웅을 다시 말하고 싶다 2004년 가을, 나는 북하우스에서 즐거운 책놀이를 펼쳤다. ‘두 출판인의 책 탐험전: 열화당 이기웅과 한길사 김언호의 꿈’이 그것이었다. 그와 내가 수집한 책 50여점씩을 전시해 책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공개했다. 다시 2014년 가을, 책축제 파주북소리를 열면서 나는 ‘7인 7색’전을 기획했다. 화봉 책박물관 여승구, 삼성출판박물관 김종규, 범우사 윤형두, 지경사 김병준, 열화당 이기웅, 한길사 김언호, 고서 컬렉터 변기태 등 7인의 고서 컬렉션을 전시하는 나름 재미있는 책 축제였다. 이기웅은 2014년 10월 ‘출판인 한만년과 일조각’전을 기획했다. 출판인 한만년(1925~2004)의 10주기와 일조각 창립 60년에 즈음하여 한만년과 일조각이 남긴 업적을 조명하자는 것이었다. “출판인 한만년의 출판정신을 통해 우리 시대의 책의 역사를 경험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2014년 1월에는 2018년 81세로 세상을 떠난 문예출판사 전병석 대표가 열화당 책박물관에 기증한 도서를 전시했다. ‘책은 캠퍼스 없는 문화대학’이라고 말한 한 출판인의 컬렉션은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책의 풍경이었다. 열화당은 1815년 이기웅의 5대조 할아버지 오은(鰲隱) 이후(李)가 강릉 선교장에 세운 아름다운 집이다. 서책을 만들고 수집하면서, 지적 대화를 펼치던 공론 공간이었다. 출판인 이기웅은 이 열화당에서 펼쳐진 선인들의 정신과 철학을 책으로 되살리기 위해 출판사 열화당을 설립했다. “인문주의자이자 기행문학가이고 건축가인 오은 할아버지는 출판인이셨습니다. 그 정신을 다시 살리고 싶었습니다.” 열화당 30주년인 2001년 나는 ‘출판사 열화당과 출판인 이기웅을 다시 말하고 싶다’는 글을 썼다. “아름다운 한 권의 책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탄생하지 않을 것이다. 한 시대를 일으켜 세우는 출판문화 역시 그러할 것이다. 출판인 이기웅의 책 만드는 일과 그 성취는 대형건물 같은 걸 지어내는 물량 출판이 아니지만, 이 땅의 출판문화사에 기록되는 ‘문화유산’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 출판인을 선배로 동료로 삼아 책 만드는 일을 하게 돼 나는 즐겁다. 아름다운 책의 정신으로 책 만드는 그 출판사와 그 출판인에게 경의를 표한다.” 한길사·한길책박물관 대표
  • [마감 후] 외교참사 논란과 체사레 보르자/이재연 정치부 차장

    [마감 후] 외교참사 논란과 체사레 보르자/이재연 정치부 차장

    윤석열 대통령의 첫 유엔총회 순방이 성과는커녕 막말 참사 논란으로 시끄럽다. 집권 첫해의 유엔 외교는 새 정부의 한반도 정책, 국제 평화·번영 및 공적개발원조(ODA) 분야에서의 한국 기여 등을 제안하고, 국익 최전선의 양자·다자 외교 경쟁이 다각도로 노출되는 만큼 정부로선 외교 성과를 앞세우기에도 맞춤한 자리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냉전, 공급망 경쟁, 북한의 제7차 핵실험 가능성 등 그 어느 때보다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안보 환경이 버거운 시점에 윤 대통령의 이번 순방은 내실 여부보다 대통령의 말실수를 둘러싼 여야 정쟁으로 주객이 전도됐다. 역대 대통령들의 유엔 외교를 돌이켜 보면 저마다 기조연설과 양자 외교에 마치 도자기를 빚는 도공처럼 공을 들이고 외교안보 라인이 그림자처럼 수행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4년 유엔총회에서 탈북민 인권문제를 국제사회에 환기했고, ‘전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거론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다. 남북 대화에 의지를 보였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8년 남북·북미 정상회담과 맞물려 “비핵화를 위한 과감한 조치들이 관련국 사이에서 실행되고 종전선언으로 이어질 것을 기대한다”고 연설하는 등 당시 시점에서 한반도 화해협력 기조를 극대화하려 애썼다. 현안을 둘러싼 국내 갈등에서 잠시 거리도 둘 수 있기에 정권 초반의 해외 순방은 지지율의 호재가 되곤 했다. 윤석열 대통령을 보자. 집권한 지 6개월이 채 안 됐고 해외 순방 역시 두 차례가 고작이지만, 순방 직후 국정 수행 지지율이 오히려 하락하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유독 해외 순방 때마다 악재가 겹친 건 우연일까. 첫 국제외교 데뷔전이었던 지난 6월 스페인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는 부인 김건희 여사의 민간 수행원이 알려지며 비선 논란이 일었다. 연이은 순방의 악재를 단순히 야당의 공격이나 언론의 경마식 보도 탓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대통령실 외교안보 라인이 어느 때보다 살얼음판을 걷듯 해야 하는 외교 전략을 놓고 목적 달성에 경도돼 행여 정교함을 결여한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정상회담은 양국이 동시 발표하는 외교 관계를 깨고 우리 쪽에서 한일 정상회담을 선(先)발표한 것을 놓고 일본 외교 당국자가 우리 쪽 핵심 관계자에 대해 “상대국과 조율 없이 치고 나가는 사례가 많은 것 같다”고 했다는 뒷얘기도 흘러나온다.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대통령 접견 무산 등도 대통령실은 ‘상대국과 조율 중이거나 조율을 마친 사안’이라고 설명하지만 이 역시 미덥지 않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 16세기 중부 이탈리아 사령관 체사레 보르자를 모델 삼아 “군주는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교활함이 있어야 한다”고 썼다. 또 “군주의 최선의 요새는 인민들이 그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인민이 군주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면 음모자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국정 지지율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국민만 보고 가겠다’고 한 윤 대통령이 외교안보 라인 경질 여부와 별개로 짚어 봐야 할 대목 같다. 국익과 직결되는 외교 사안을 놓고 물 만난 고기처럼 재빠르게 정쟁의 도구로 삼는 야당 역시 국민 눈엔 달갑지 않다.
  • 여왕이 세상 뜨자 인도인들 “코이누르 다이아몬드 돌려주라”

    여왕이 세상 뜨자 인도인들 “코이누르 다이아몬드 돌려주라”

    대영제국을 70년 이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지난 8일(이하 현지시간) 세상을 떴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얼마 안돼 인도 트위터에 코이누르(Kohinoor)란 단어가 유행하고 있다고 시사주간 타임이 다음날 전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보석 가운데 하나다. 엘리자베스 2세의 어머니인데 이름이 같아 구분하기 쉽게 불린 퀸 마더(Queen Mother)가 썼던 왕관에 박힌 2800개의 보석 가운데 하나다. 105캐럿에 오발 모양이다. 영국이 빼앗아간 방식 때문에 인도에서는 악명이 높다. 처음 원석으로 채굴된 것은 12~14세기 카카티얀 왕조 때 지금의 안드라 프라데시주에서였다. 잘리지 않았을 때는 무려 793캐럿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유권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6세기 무굴 제국의 것으로 나온다. 그 뒤 페르시아 제국, 아프가니스탄이 차지했다. 시크 대왕(Maharajah) 란짓 싱이 아프간 지도자 샤 슈자 두라니로부터 받아내 인도로 가져왔다. 그 뒤 펀잡 병합 과정에 영국 손에 들어갔다. 동인도회사가 1840년대 말 손에 넣었는데 열 살 밖에 안된 대왕 던집 싱에게 토지와 재산을 포기하도록 강요한 결과였다. 동인도회사는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 알버트 공에게 선물했다. 다시 잘라 알렉산드라 왕비, 메리 왕비의 왕관에 자리한 뒤 1937년 퀸 마더의 왕관에 자리했다. 퀸 마더는 1953년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 때도 이 보석이 박힌 왕관을 쓰고 딸의 즉위를 지켜봤다. 코이누르는 그 때 이후 영국 왕실의 보석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정부가 모두 이 다이아몬드 주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인도 사람들이야 당연히 돌려줬으면 좋겠다는 뜻을 트위터에 올리고 있다. 한 누리꾼은 “국왕이 코이누르를 쓰지 않을 거면 돌려주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요구했다. 다른 누리꾼은 영국이 “죽음과 기아, 약탈로부터 부를 창출한 영국이 훔친 것”임을 분명히 지적했다. 물론 인도 사람들이 다이아몬드를 돌려달라고 처음 나선 것은 아니다. 1947년 독립하자마자 정부는 요구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한 해에도 요구했다. 하지만 영국은 법적인 근거가 없다며 귀를 닫아버렸다. 인도계 영국 작가이며 정치평론가인 사우라브 덧은 영국이 보석을 돌려줄 가능성은 극히 적다고 말했다. 19세기 영국 병사들이 훔친 베냉 청동상 72점을 나이지리아 정부에 돌려주는 절차를 최근에 간소화하긴 했다. 하지만 덧은 영국 왕실은 “죽은 지 오래 됐고 권한을 잃은 제국의 낭만적인 측면과 혼인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코이누르는 그런 권한의 상징과 같아 왕실은 돌려주는 일이 “스스로 존립 근거를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믿을 것이라고 봤다. 해서 덧은 적어도 차기 국왕 찰스 3세가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의 “흑역사”라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장과 사기를 통해 취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이 단계에서 상당한 진전이 될 것이며 다음 세대에서 돌려줄 수 있는 밑바탕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인도인들은 참을성이 부족할지 모른다. 여왕이 세상을 뜬 지 얼마 안됐는데 인도 트위터에는 한 가지 요구뿐이다. “이제 우리의 #코이누르를반환(Kohinoor back) 받을 수 있을까?”
  • 꼭 닮은 두 보살님, 화려한 금관 쓰고 800년 만에 나들이

    꼭 닮은 두 보살님, 화려한 금관 쓰고 800년 만에 나들이

    경북 의성 고운사의 아미타불회도는 1701년 수화승(首畵僧) 혜명과 보조 화승 도문의 작품이다. 1990년대 초 도난당해 일본으로 넘어간 것을 현지 수집가가 사들여 부산 범어사에 기증했다가 범어사 측에서 지난 5월 고운사로 돌려보냈다. 먼 길 돌아온 기구한 사연과 달리 그림 속 아미타불과 사부대중의 표정은 극락을 보여 주는 듯하다. 아미타불회도는 서울 종로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오는 11월 27일까지 열리는 ‘등운산 고운사’ 특별전을 통해 일반에 처음 공개되고 있다. 이국적인 풍모와 머리에 화려한 관을 쓴 안동 봉정사의 목조관음보살좌상과 안동 보광사의 목조관음보살좌상은 한번 끌었던 시선을 쉽게 놔주지 않는다. 뛰어난 금속 세공 기법이 돋보이는 두 보살상은 고려의 귀족적인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김추연 학예연구사는 “11∼12세기는 고려 시대에서 가장 귀족적인 성향이 강한 시기였는데, 남아 있는 상이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나란히 12세기에 제작된 두 보물은 이번에 처음 사찰 바깥으로 나왔다.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 북부 지역은 유교문화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봉정사와 영주 부석사를 말사로 관장하는 고운사를 중심으로 꽃핀 불교문화 역시 찬란하다. ‘등운산 고운사’ 특별전에선 영남 북부 지역 사찰의 보물 11건을 포함해 총 97건 231점의 성보문화재를 볼 수 있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면 붉은색 벽을 배경으로 석가불좌상이 관람객을 맞는다. 고운사 나한전에 봉안된 이 불상은 15~16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대웅전에 있다가 화재로 대웅전이 소실되고 새 건물을 지으면서 나한전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김 학예사는 “고운사에서 가장 중요한 성보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전시 1부에선 고운사의 역사와 성보를 볼 수 있다.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고운사는 681년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한 유서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본래는 높은 구름이라는 뜻의 고운사(高雲寺)였으나 벼슬을 내려놓고 세상을 떠돌던 고운 최치원(857~908?)이 머무르며 그의 호를 딴 고운사(孤雲寺)가 됐다고 전해진다. 2부는 고운사를 가꿔 온 스님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소영 신경(미상~1706) 스님은 여러 전각을 중수하며 다양한 성보를 조성했다. 명부전의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극락전의 목조아미타불좌상과 대세지보살상 등이 신경 스님이 있을 때 제작됐다.봉정사와 보광사의 두 보살상은 영남 북부의 불교문화를 엿볼 수 있는 3부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또한 3부에선 경전의 판각과 인출이 성행해 불교 인쇄 문화가 꽃피었던 영남 북부 지역의 불교사를 살필 수 있다. 안동 광흥사와 봉정사의 ‘월인석보’와 같은 한글 경전은 창제 초기 한글의 대중화에 사찰이 기여했음을 보여 준다. 마지막 4부에선 왕실 축원을 목적으로 하는 연수전 관련 자료들이 기다린다. 이 건물은 1744년 영조의 기로소(연로한 고위 문신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 입소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 1902년에는 고종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해 건물을 중수했고, 2020년에 보물로 지정됐다.이번 특별전 기간에는 1700년대 제작된 대형 괘불도 돌아가며 선보인다. 부석사 오불회 괘불이 9월 25일까지, 봉정사 영산회 괘불이 10월 30일까지, 봉화 축서사 괘불이 11월 27일까지 전시돼 괘불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 국보 된 두 불상… 다른가요

    국보 된 두 불상… 다른가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인 합천 해인사의 두 불상이 국보로 승격된다. 문화재청은 1일 “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왼쪽) 및 복장유물과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오른쪽) 및 복장유물 등 2건에 대해 국가지정문화재국보로 지정 예고한다”고 밝혔다. 앞서 두 불상은 2012년 보물로 지정된 바 있다. 비로자나불은 ‘화엄경’의 교주로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을 구원하는 광명의 부처다. 해인사는 802년 창건됐는데, 두 불상의 조각양식과 과학적 조사 결과를 고려할 때 통일신라 때인 9세기 후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목조불상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는 데다 해인사 창건 시기와 가까운 시점에 조성돼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 한쪽 어깨를 드러낸 옷차림이나 둥근 얼굴과 당당한 신체 표현, 몸을 자연스럽게 감싼 옷주름 등은 석굴암 불상을 연상시킬 정도로 조각의 완성도가 높다. 불상과 더불어 복장유물도 역사적 가치가 높아 국보 승격이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해인사는 국사(國師)였던 학조대사가 1489~1490년 조선 왕실의 후원으로 중창했는데, 복장유물에는 고려 후기~조선 초기 이뤄진 불상의 수리 과정에서 추가로 납입된 서책이나 문서, 각종 직물이 포함돼 있다. 1490년 납입한 복장유물은 조선 초기 왕실이 발원한 복장유물의 대표적인 사례로 왕실과 불교의 관계를 보여 준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목조불상을 통해 석조불상에서 보이지 않는 신라시대 조각가들의 섬세한 솜씨를 확인할 수 있어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 “복장의례의식을 담은 ‘조상경’이 16세기 간행됐는데, 그보다 앞서 있어 복장유물의 시원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강조했다.
  • 1200년 전 불상인데도 멀쩡… 통일신라 목조불상 국보 된다

    1200년 전 불상인데도 멀쩡… 통일신라 목조불상 국보 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인 합천 해인사의 두 불상이 국보로 승격된다. 문화재청은 1일 “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과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 등 2건에 대해 국가지정문화재국보로 지정 예고한다”고 밝혔다. 앞서 두 불상은 2012년 보물로 지정된 바 있다. 비로자나불은 ‘화엄경’의 교주로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을 구원하는 광명의 부처다. 해인사는 802년 창건됐는데, 두 불상의 조각양식과 과학적 조사 결과를 고려할 때 통일신라 때인 9세기 후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목조불상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는 데다 해인사 창건 시기와 가까운 시점에 조성돼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 한쪽 어깨를 드러낸 옷차림이나 둥근 얼굴과 당당한 신체 표현, 몸을 자연스럽게 감싼 옷주름 등은 석굴암 불상을 연상시킬 정도로 조각의 완성도가 높다.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과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불상과 더불어 복장유물도 역사적 가치가 높아 국보 승격이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해인사는 세조때부터 연산군까지 국사(國師)였던 학조대사가 1489~1490년 조선 왕실의 후원으로 중창했는데, 복장유물에는 고려 후기~조선 초기 이뤄진 불상의 수리 과정에서 추가로 납입된 서책이나 문서, 각종 직물이 포함돼 있다. 1490년 납입한 복장유물은 조선 초기 왕실이 발원한 복장유물의 대표적인 사례로 왕실과 불교의 관계를 보여 준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목조불상을 통해 석조불상에서 보이지 않는 신라시대 조각가들의 섬세한 솜씨를 확인할 수 있어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 “복장유물은 조선시대부터 확인되는데 이렇게 복장유물이 많이 잘 남아 있는 사례가 없다”면서 “복장의례의식을 담은 ‘조상경’이 16세기 간행됐는데, 그보다 앞서 있어 복장유물의 시원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함안 말이산 45호분 출토 상형도기 일괄’ 등 고고유물 1점, 불교회화 1점, 불교전적 5점이 보물로 지정 예고됐다. ‘함안 말이산 45호분 출토 상형도기 일괄’은 집모양 도기 2점, 사슴모양 뿔잔 1점, 배모양 도기 1점, 등잔모양 도기 1점 등 총 5점으로 구성된 일괄 출토품이다. 삼국시대 고분에서 이렇게 여러 점의 상형도기가 한 벌을 이뤄 출토된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점에서 고고학적 의의가 크다. 1775년 제작된 ‘속초 신흥사 영산회상도’는 해외 유출됐다가 2020년 미국에서 환수한 작품이다. 불교전적 분야에서는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4건과 ‘법화현론 권3∼4’가 지정 예고됐다.
  • 경북 안동 3대문화권사업장 오는 31일 개장...경북 북부권 관광랜트마크 기대

    경북 안동 3대문화권사업장 오는 31일 개장...경북 북부권 관광랜트마크 기대

    경북 북부권 관광 랜드마크 역할을 할 복합관광지인 3대문화권사업장이 문을 열고 본격 운영에 들어간다.안동시는 31일 오후 3시 도산면 안동국제컨벤션센터에서 3대문화권사업장 개장식을 한다고 28일 밝혔다. 3대문화권사업은 유교·가야·신라를 주제로 역사문화와 자연환경을 관광자원으로 만드는 사업이다. 경북도내 43개 지구에서 진행된다. 안동에 들어선 3대문화권사업장은 세계유교선비문화공원, 한국문화테마파크, 안동국제컨벤션센터가 함께 조성된 복합·문화관광지다.안동국제컨벤션센터는 대회의장, 중·소회의실 등으로 구성돼 국제회의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할 수 있다. 오는 9월 21일 인문가치포럼을 시작으로, 10월 제16회 안동국제교육도시연합(IAEC)세계총회, 11월 제18회 세계역사도시회의가 안동국제컨센션센터에서 잇따라 열린다. 세계유교문화박물관은 박물관·기록관·교육관 기능을 갖춰 유교 미래가치를 세계인과 공유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문화테마파크는 16세기 조선시대 산성마을을 주제로 성곽길, 저잣거리, 종루광장, 군영, 향촌, 숲길, 연무마당 등으로 구성돼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9월 말부터 한국문화테마파크에서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를 소재로 한 ‘히든카드’, 도시로 떠난 남자가 귀향해 첫사랑과 만난다는 이야기인 ‘안동역에서’, 학교에서 일어난 코미디 퍼포먼스 ‘난리법석 버꾸통’ 등이 상설 공연된다. 경북도와 안동시는 2008년 광역경제권 선도프로젝트에 선정된 뒤 2014년부터 지난해 6월까지 도산면 안동호 인근에 3930억원을 들여 3대문화권사업장을 만들었다. 권기창 안동시장은 “3대문화권사업장이 세계적 관광 명소이자 국제 마이스 산업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신라 부석사 안양루·범종각, 보물된다

    신라 부석사 안양루·범종각, 보물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가운데 한 곳인 경북 영주 부석사의 문루(門樓·문 위에 세운 높은 다락) 등 주요 건축물이 보물이 된다. 문화재청은 부석사 안양루와 범종각, 봉화 청암정 등 3건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한다고 26일 밝혔다. 부석사는 통일 신라 시대 의상대사가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뒤 처음 지은 절이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 최순우 선생이 자신의 저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서 극찬한 고려 시대 무량수전이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안양루에서 올려다보는 무량수전 풍경은 한국 건축의 백미로 손꼽히다. 안양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문루다. 16세기 사찰 문루 건축을 대표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1600년대 작성된 옛 문헌에 따르면 강운각이라는 단층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이후 1576년 현재의 안양루를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문화재청은 “안양루를 방향을 살짝 틀어 사찰의 진입로를 무량수전으로 향하게 한 점, 대들보 구성 등에 조선 중기와 그 이전의 오랜 기법이 남아 있따는 점에서 보물로서 가치가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범종루로 불리기도 하는 범종각은 18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종각(큰 종을 달아두는 누각) 건축물이다. 1746년에 작성된 ‘부석사 종각 중수기’에는 그해 화재로 소실됐고 이듬해 고쳐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내부에 쇠 종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19세기 이후 해당 범종의 소재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범종각은 사찰 좌우에 종각을 배치하는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지붕의 포와 포 사이 놓여 무게를 받치는 부재인 화반을 화려하게 장식해 보물로 지정할 만하다고 봤다.봉화 청암정은 안동 권씨 충재종택 경역에 있는 정자다. 인근 석천계곡의 석천정 등과 함께 명승으로 지정돼 있으며 ‘청암정기’ 등 고문헌에는 1526년 충재 권벌(1478∼1548)이 살림집 서쪽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당대 사대부들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학문에 정진하기 위한 개인 거처를 경치 좋은 곳에 정자 형태로 지었는데, 청암정은 이런 문화를 선도한 사례로 보인다. 안동 권씨 가문과 인근 지역의 크고 작은 일을 논하는 회합의 장소로도 쓰였다. 문화재청은 “경상도 일원에 분포하는 정(丁)자형 평면을 가진 정자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됐고, 창문 등 주요 구조가 17세기 이전 특징을 지녀 역사·예술·학술적 가치가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문화재청은 또 사도세자(1735∼1762·후에 장조로 추존)와 순조(1790∼1834), 헌종(1827∼1849)의 태실(胎室)을 묘사한 ‘태봉도’ 3점을 포함해 문화재 총 7건을 보물로 지정했다. 태실은 태아를 둘러싼 조직인 태를 봉안해 항아리에 보관한 시설이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장태(태를 묻음) 문화와 의례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인종(1515∼1545)의 태실로 규모가 크고 설치 과정과 내력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전해져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 ‘영천 인종대왕 태실’도 이번에 보물로 지정됐다. 이 밖에 고려 후기 혹은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인 ‘건칠보살좌상’과 ‘금동아미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 ‘묘법연화경’ 등도 보물이 됐다.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다정한 왼손/미술평론가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다정한 왼손/미술평론가

    ‘돈키호테’ 2편 43장에서 돈키호테는 시종 산초에게 수신제가에 대해 설교를 늘어놓다가 이런 말을 한다. “글을 읽을 줄 모르거나 왼손잡이인 인간은 비천하기 짝이 없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든가 그 자신이 삐뚤어지고 구제 불능이라서 남의 가르침을 듣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기사담에 파묻혀 지내다가 살짝 맛이 가서 자신도 책에 나오는 기사처럼 돼 보겠다고 가출하기는 했으나 돈키호테는 지극히 상식적인 도덕관을 지닌 16세기 스페인의 시골 양반이다. 그런 사람 입에서 나온 말이니 왼손잡이에 대한 당대의 일반적 의견이라 해도 무방하다. 사람들은 왜 왼손잡이를 싫어했을까? 고대 철학자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상만사를 몇 개의 개념으로 깔끔하게 정리하기를 좋아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우주의 구성 요소를 남성과 여성, 빛과 어둠, 선과 악, 오른쪽과 왼쪽 등 열 개의 대립항으로 나누었다. 기독교 문화도 이를 이어받아 왼쪽을 혼란, 죄악과 짝 지웠다. 미술은 그런 이분법적 사고를 시각화했다. 그림에서 이브는 왼손을 내밀어 선악과를 따고, 음탕한 악마는 벌거벗은 처녀의 왼쪽을 공격한다. 이런 가운데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통치자 로렌초 데메디치는 대담하게 왼쪽 옹호론을 펼쳤다. 로렌초는 오른손이 무기를 들어 공격하는 손, 압제적이고 변덕스러운 손이라면 왼손은 온화하고 품위 있는 손, 사랑의 활을 당기는 손이라고 주장했다. 봉건귀족처럼 전사가 아니라 머리를 쓰는 사업가였던 로렌초는 왼손에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통치를 평화와 사랑의 이미지로 감싸려고 했다. 왼쪽이 지닌 부정적 개념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가치중립적으로 돼 갔다. 하지만 무의식을 탐구하기 위해 왼손을 사용하는 초현실주의, 왼손을 통제하는 우뇌를 주관성, 감성과 결부시키는 오늘날의 심리학자에 이르기까지 피타고라스학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근대 회화도 왼쪽이 오른쪽보다 유혹적이라는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인상주의 화가 베르트 모리조의 그림에서 한 여성이 왼쪽 어깨와 등을 활짝 드러낸 채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만지고 있다.
  • “표절이다” ‘中 한류열풍’ 허난설헌 괴롭힌 그 시비들 [클로저]

    “표절이다” ‘中 한류열풍’ 허난설헌 괴롭힌 그 시비들 [클로저]

    허난설헌, 살아서도 죽어서도 오해도교 색채 짙었던 그의 작품들그릇 작은 시대가 이해하기엔 무리“나이 스물일곱 살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과 9(3X9)의 수에 해당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하고 눈감았다.” 조선 사대부 시절 중국서 한류열풍을 일으켰던 허난설헌의 죽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허난설헌의 집안이 도교 색채가 강했고, 그의 작품에도 이러한 경향이 반영된 것을 보아 신격화된 기록일 수도 있겠죠. 혹은 자살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허난설헌은 1563년(명종 18년)양반집안서 ’초희‘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27세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400년 전 중국서 오직 실력으로 한류열풍을 일으켰던 허난설헌, 그는 남녀 유별이 엄격했던 조선에서 살아서도 죽어서도 논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의 남동생 허균의 다른 자아였을 거라는 주장은 오늘날까지도 진짜인 것처럼 퍼져있기도 하죠. 허난설헌의 작품은 당시 여성 시인들의 작품이 유행하던 중국서 빠르게 퍼졌습니다. 허균이 명나라 사신들과 교류하며 이들에게 조선의 여러 작품을 전파했는데, 이중 허난설헌의 시도 있었죠. 이에 따라 1600년 출판된 ’조선시선‘(오명제)에 그의 시가 소개됐습니다. 이어 ’긍사‘(반지긍), ’명원시귀‘(종성)은 허난설헌의 시가 대부분인 채로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조선 땅서 살아 생전 홀대받았던 허난설헌의 작품이 중국서는 높은 인기를 구가한 것입니다. ● 역수입된 조선 여인의 글 “낭군께선 본래부터 무심하신 분 동접들은 어떤 분들이시기에 이간질이실까?” 허난설헌 남편 김성립의 친구였던 문장가 신흠의 기록입니다. 이에 따르면 허난설헌은 김성립이 기생방에서 놀고 있다던 거짓말에 이렇게 응수하며 술을 보냈다고 합니다.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호방함을 가졌던 허난설헌은 평생을 오해받아야 했습니다. 중국과 일본에 널리 퍼졌던 허난설헌의 작품들이 조선으로 역수입되면서부터입니다. 허균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후, 동서 지간이던 이수광은 허난설헌의 시중 일부가 당나라 시인 조당의 시를 베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은 허균이 지은 것이라고 우겼죠. 앞서 허난설헌에 대한 기록을 남겼던 신흠도 허난설헌의 시 중 절반 이상이 표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들 주장의 상당 부분이 허균의 시를 끼워 넣은 것이라는 맥락이었죠. 즉, 남성만이 시를 지을 수 있다던 당대의 시각을 반영해 논리가 빈약한 주장을 읊었던 것입니다. 허균이 역적으로 몰려 사망한 후라 그와 거리를 두어야 했겠지만, 그 공격 대상이 여성인 허난설헌이 돼야 했고, 오늘날까지 그 주장이 영향을 끼쳐 허균의 작품이라는 설이 도는 것을 보면 씁쓸한 부분이죠. ● 표절, 남동생 작품 주장 허점은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허난설헌은 자신을 괴로움을 시로 풀었을 뿐, 활동을 한 적이 없으며, 27세 젊은 나이에 죽으면서 자신의 작품들을 태우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무서운 정치란 것이, 이미 죽은 창작자를 한 번 더 죽인 것이죠. 이 때문에 난설헌집의 대다수 작품이 습작이었다는 점이 이러한 논란을 더 부추겼습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불탔기에, 허균이 지닌 난설헌집엔 허난설헌 혼자만의 습작품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죠. 또한, 당대 중국 시를 가져다 재창조하는 의고시가 유행했던 영향도 있습니다. 또한 그의 작품엔 여성으로서 느끼는 답답함이 한껏 들어가 있어, 허균의 창작품으로 볼 수 없다는 해석도 힘을 얻습니다. ● 후대로 이어진 논란 허난설헌은 이미 혼인한 여인이 다른 남성을 사모했다는 우스운 오해도 받아야 했습니다. 오늘날에야 혼인한 남성, 여성이 당대 유명한 작품에 빠지는 것이 흠이 아니지만 16세기 조선에서 여성이 당나라 시인 번천 두목을 사모했다면, 논란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 또한 사실이 아니라는 데 무게가 실리고 있죠. 허난설헌의 집안은 허균과 함께 시를 공부할 수 있도록 하고, 자를 가질 수 있게 하는 등 당시로선 깨어있는 집안이었습니다. 허난설헌의 자는 ’경번‘이라고 지어졌는데, 이것이 당나라 시인을 사모해 지은 이름이라는 설이 조선에서 제기된 겁니다. 이 때문에 허난설헌은 되도 않는 오해를 받아야 했죠. 또한, 허균의 기록에 따르면 허난설헌의 호인 난설헌은 그가 직접 지은 것이지만 자는 누가 붙인 것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즉, 당대의 순리대로 아버지가 지었을 지점이 존재합니다. 또한, 김성립의 주변인들이 당나라 시인과 엮어 김성립을 놀렸던 것에서 이 논란이 시작됐다는 설도 있습니다. 다만 이들이 10대에 결혼했으므로, 이는 어린 장난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실인 것처럼 변질된 것이죠. ● 홍대용·박지원조차 치우친 기록 홍대용, 박지원 등 실학자조차 이를 오해해 “저 생에서 두목을 따루고 싶네”라거나 “경번이라는 이름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기록을 남기는 등 답답한 오해가 이어집니다. 다만 경번이라 함은, 도가 사상에 젖어있던 허난설헌이 중국 선여 번고에서 따왔다는 설이 더 유력합니다. 허난설헌은 작품 속에서 도교적 색채를 자주 드러냈고, 유선시를 통해 이를 노래했죠. 도술이 뛰어나며 남편과 관계가 좋았던 그 선녀처럼, 노니고 싶다는 의미였겠죠. 동일시의 대상은 이 선녀였다는 해석이 더 힘을 얻습니다. 중국에선 경번을 이름이나 호로 오해하고 있으며, 후대에 관련된 추측들이 이어집니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강릉서 태어난 이 유사한 여인들의 삶과 그 후 평가는 왜 달랐을까요. 친정에 머무른 시간, 바느질 실력, 여러 차이가 있습니다만 이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신사임당의 아들은 율곡 이이라는 점, 허난설헌의 남동생은 허균이었다는 점이죠. 두 인물의 길은 아주 다릅니다. 정치란, 옛날에도 아주 무서운 것이었죠. 
  •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번역 선진국/우석대 명예교수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번역 선진국/우석대 명예교수

    “번역, 그것은 창문을 열어젖히고 빛을 들이는 것이요, 껍데기를 깨고 알맹이를 먹게 하는 일이요, 장막을 걷고 가장 성스러운 곳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요, 우물 뚜껑을 열고 물을 마시게 하는 일이다.” 영어 공부를 해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1611년판 ‘제임스 왕 성경’(King James Bible)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번역 성경이지만 그 자체로서 영문학의 금자탑으로 평가된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독일 민족에 대한 가장 위대한 공헌으로 꼽힌다. 루터는 성경을 활기찬 구어체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독일의 문화적 민족주의 확산에 크게 이바지했다. 16세기까지 독일인은 다른 지방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지역별로 언어의 차이가 심했다. 그러나 루터가 번역한 성경에 의해 널리 보급된 독일어가 그 후 곧 독일 전역에서 표준어가 됐다. 루터는 세계사에서는 종교개혁자일지 모르나 독일인에게는 민족 영웅이다.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1790)은 ‘보수주의의 경전’으로 불리지만 광복 이후 60여년간 번역되지 않았다. 비유컨대 한국의 ‘보수’는 ‘한글 성경 없는 기독교’와도 같았다. 2009년 처음으로 이 책이 번역됐는데, 번역자는 ‘진보’ 성향 역사학자다. 이를테면 불교 승려가 기독교 성경을 번역한 셈이라고나 할까. 일본은 메이지유신 직후인 1881년에 번역했다. 우리와는 무려 128년 격차다. ‘보수’의 무능과 게으름을 보여 준다. 번역자의 손길을 거치지 않을 경우 수많은 외국 서적들은 (극소수 전문가를 제외한) 일반 독서 대중에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의미에서 번역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번역자에게 제공하는 노동의 대가는 한심할 정도로 미미하다. 일본과 비교해도 천양지차다. 한국의 번역자는 마치 ‘월간지’를 찍듯이 1년에 10권 이상의 번역서를 출간하지 않으면 생계 유지가 곤란할 지경이다. 우리는 우리가 읽는 것으로 만들어진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다. 지금 생산되는 번역물이 젊은 세대를 양육하기에 충분한지 고민해야 한다. 기성세대의 후대에 대한 책임이다. 번역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 [핵잼 사이언스] 중국의 ‘500년 전 마법 거울’ 발견…빛 받으면 부처 형상이

    [핵잼 사이언스] 중국의 ‘500년 전 마법 거울’ 발견…빛 받으면 부처 형상이

    미국의 박물관 창고에 방치돼 있던 수백 년 전 중국 거울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진귀한 유물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중국 안팎에서는 이에 ‘마법의 거울’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의 25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오하이오주(州) 신시내티 박물관 측은 박물관이 소장한 15~16세기 중국의 청동 거울이 투광경(透光鏡)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반사거울이라고도 불리는 투광경의 외관은 일반 거울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빛을 받으면 특정한 형상이나 무늬를 벽면에 맺히게 한다. 빛이 거울을 통과하는 듯한 특징 때문에 중국에서는 ‘투광경’이라고 불렀다. 투광경은 고대 이집트와 인더스 문명, 고대 일본에서도 만들어졌지만, 중국 투광경의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확인된 투광경은 500여 년 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됐다.해당 투광경은 신시내티 박물관의 쑹 허우메이 동양 미술 큐레이터가 진가를 알아보기 전까지, 무려 5년 동안 박물관 창고에 방치돼 있었다. 그러다 지난달 우연히 이 거울이 일본 에도시대에 만들어진 투광경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쑹 큐레이터가 창고에서 거울을 꺼내 빛을 비추자 놀랍게도 벽면에 흐릿하게 형상이 맺혔다.했다. 박물관 측은 벽면에 맺힌 형상이 아미타불(부처)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거울 뒷면에도 한자로 ‘아미타불’이 새겨져 있었다.투광경은 제조하기가 어려워 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희귀한 유물에 속한다. 이번 발견으로 신시내티 박물관은 중국 상하이 박물관과 일본 도쿄 국립 박물관,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이어 네 번째로 마법의 거울을 소유한 미술관이 됐다. 쑹 큐레이터는 “불교에서 ‘마법의 거울’은 희망과 구원을 주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이번 발견이 우리 박물관과 신시내티에게 있어 상서로운 축복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이 거울은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이어 “청동 거울에 ‘마법’의 효과를 주기 위해서는 거울의 표면 곡률을 정교하게 긁어내야 하기 때문에 매우 어렵다”면서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많은 박물관이 청동 거울의 진가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 몽테뉴 생각 담은 ‘에세이’의 시초 “현대인에게 필요한 위로·대답 담겨”

    몽테뉴 생각 담은 ‘에세이’의 시초 “현대인에게 필요한 위로·대답 담겨”

    “몽테뉴는 ‘세계를 대하는 나의 인식이 맞는 것인가’라고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한 인물이죠. ‘에세’는 역사나 인간성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몽테뉴의 자기 사유에서 나온 책입니다. 삶이 얼마나 살 만한 것인가, 삶에 대한 긍정을 가르쳐 주는 것이 큰 장점이지요.”(최권행) “몽테뉴가 살던 때는 종교전쟁과 마녀사냥, 페스트가 창궐한 비참한 시대였어요. 그는 삶의 어두운 부분을 이해하고 모든 이에게 연민을 갖고 위로를 주는 대중적 철학자입니다. ‘에세’는 인간이 가진 주체성에 관해 말하며 모든 경우, 모든 시절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는 대중적 철학서라 할 수 있습니다.”(심민화)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교양인인 미셸 드 몽테뉴(1533~1592)의 고전 ‘에세’(전 3권·민음사)가 심민화(70) 덕성여대 명예교수와 최권행(68) 서울대 명예교수의 손으로 완역 출간됐다. 10년의 번역 기간과 5년의 검수를 거쳐 15년 만에 이뤄 낸 결실이다. 1965년 고 손우성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수상록’(隨想錄)이라는 이름으로 완역본을 낸 뒤 몽테뉴와 새롭게 만나기까지 57년이 걸렸다. 최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프레스클럽에서 만난 이들은 “문학과 철학의 성격을 모두 지닌 ‘에세’는 세계 문학사에서 열 손가락 안으로 꼽을 수 있는 고전임에도 현재까지의 번역본은 한글세대가 편하게 읽고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며 이번 번역이 다음 세대를 위한 작업임을 밝혔다.‘에세’는 법관을 지낸 귀족 몽테뉴가 1571년 사직한 뒤 영지인 몽테뉴성에 머물면서 쓴 길고 짧은 글 107편을 묶은 책이다. 중세 기독교의 종교적 규범에 제약을 받은 자기 성찰을 넘어 정신적 개인인 ‘나’로 출발하는 자율적인 개인의 각성을 보여 준다. 몽테뉴 생전에 다섯 번 발간돼 1588년 최종판이 나왔으나 여백 부분에 몽테뉴가 직접 손으로 빼곡히 적어 놓은 추가 글이 발견돼 20세기 들어 새 판본(보르도본)이 나왔다. 이번 ‘에세’는 이를 번역한 것으로 여러 판본 중에서도 몽테뉴가 추가로 자신의 생각을 첨가해 놓은 정수이자 완전체로 평가받는다. ‘에세’는 ‘시험하다’, ‘처음 해 보다’ 등을 뜻하는 프랑스어 동사 ‘에세이예’(essayer)에서 몽테뉴가 만들어 낸 명사로 영어로 통용되는 글쓰기 장르 ‘에세이’도 여기서 나왔다. 심 교수는 “일본식 번역의 ‘수상록’이라는 제목은 한자 ‘따를 수’(隨)가 수동적인 의미라 몽테뉴가 자기를 탐구하고자 애쓴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힘든 노력의 기록인 ‘에세’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선후배인 두 교수는 프랑스 고전 독서 모임 ‘명륜 독회’에서 같이 공부했고, 후배인 최 교수의 제의로 2007년부터 방대한 번역 작업을 하게 됐다. 프랑스 원서로 1000여쪽, 한국어 번역본으로는 1988쪽에 달한 것에 더해 16세기 프랑스어 번역 작업 자체가 만만치 않았다. 심 교수는 “몽테뉴의 문장은 관계대명사를 사용하고 길기까지 한 데다 논리적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생각의 행로를 기록한 경우가 많아 번역하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에세’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다양한 내용을 다뤘다. ‘확고한 목표가 없는 영혼은 길을 잃고 만다’,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나는 항상 그 마지막이 어땠는지를 고려한다’ 등이다. 또한 ‘그대는 그대 자신을 흘려보내고 흩뿌리고 있다. 그대의 밀도를 높이라, 그대의 고삐를 죄라’처럼 인생에 대한 성찰도 가득하다. 해당 주제를 논할 때 몽테뉴는 개인적 삶의 경험과 역사적 예화를 동원해 논거를 제시한다. 최 교수는 “몽테뉴는 당시 신대륙의 ‘식인종’으로 불린 사람들에 대해서도 ‘왜 그들이 우리와 다른 삶을 산다고 경멸하는가’라고 진리의 상대성과 문화상대주의를 내세웠다”며 “신분제 사회에서도 평등을 강조하고, 한 인간 안에 복잡하게 악과 미덕이 모두 존재한다고 본 현대적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교육적 측면에서도 암기식 교육보다 아이가 스스로 생각해 보고 깨우치는 배움을 강조한 그의 교육철학이 오늘날 프랑스 바칼로레아(논술형 대입 자격시험)로 나타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독자들에게 추천할 ‘에세’의 ‘문장’으로 ‘나는 내 견해와 상반되는 견해를 미워하지 않는다… 견해들의 가장 보편적인 성질, 그것은 다양성이다’를 꼽았다. 자기 의견과 다르다고 혐오하는 현 세태에 대한 일침이자 다양성을 강조하는 현대 사회에 맞는 말이다. 심 교수는 ‘나는 하루를 산다’를 예로 들었다. 24시간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 현실에서 주어진 하루를 충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살고 싶다는 바람이 담겼다.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 두 학자가 ‘에세’ 번역을 할 수 있었던 데는 프랑스 정부의 도움도 컸다. 심 교수는 2012년 몽테뉴의 고향 보르도를 찾아가 그의 자취를 살피고 보르도본에 대한 철저한 검수를 진행했는데, 프랑스 정부의 번역 지원 사업 덕에 출판 계약서만 제시하고도 석 달 동안의 체류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최 교수는 “상대의 진심을 믿고 맡기는 프랑스 문화”라고 거들었다. “몽테뉴가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는 인간이 자기 주체로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 준 시대입니다. 인문학은 바로 한 개인이 자기가 선 자리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립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학문이죠. 돈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더욱 필요한 학문 아닐까요.”(심민화)
  • “삶의 긍정성 가르쳐준 대중적 철학자 몽테뉴, 현대에도 맞는 성찰·위로”

    “삶의 긍정성 가르쳐준 대중적 철학자 몽테뉴, 현대에도 맞는 성찰·위로”

    “몽테뉴는 ‘세계를 대하는 나의 인식이 맞는 것인가’라고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한 인물이죠. ‘에세’는 역사나 인간성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몽테뉴의 자기 사유에서 나온 책입니다. 삶이 얼마나 살 만한 것인가, 삶에 대한 긍정을 가르쳐 주는 것이 큰 장점이지요.”(최권행) “몽테뉴가 살던 때는 종교전쟁과 마녀사냥, 페스트가 창궐한 비참한 시대였어요. 그는 삶의 어두운 부분을 이해하고 모든 이에게 연민을 갖고 위로를 주는 대중적 철학자입니다. ‘에세’는 인간이 가진 주체성에 관해 말하며 모든 경우, 모든 시절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는 대중적 철학서라 할 수 있습니다.”(심민화)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교양인인 미셸 드 몽테뉴(1533~1592)의 고전 ‘에세’(전 3권·민음사)가 심민화(70) 덕성여대 명예교수와 최권행(68) 서울대 명예교수의 손으로 완역 출간됐다. 10년의 번역 기간과 5년의 검수를 거쳐 15년 만에 이뤄 낸 결실이다. 1965년 고 손우성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수상록’(隨想錄)이라는 이름으로 완역본을 낸 뒤 몽테뉴와 새롭게 만나기까지 57년이 걸렸다. 최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프레스클럽에서 만난 이들은 “문학과 철학의 성격을 모두 지닌 ‘에세’는 세계 문학사에서 열 손가락 안으로 꼽을 수 있는 고전임에도 현재까지의 번역본은 한글세대가 편하게 읽고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며 이번 번역이 다음 세대를 위한 작업임을 밝혔다.‘에세’는 법관을 지낸 귀족 몽테뉴가 1571년 사직한 뒤 영지인 몽테뉴성에 머물면서 쓴 길고 짧은 글 107편을 묶은 책이다. 중세 기독교의 종교적 규범에 제약을 받은 자기 성찰을 넘어 정신적 개인인 ‘나’로 출발하는 자율적인 개인의 각성을 보여 준다. 몽테뉴 생전에 다섯 번 발간돼 1588년 최종판이 나왔으나 여백 부분에 몽테뉴가 직접 손으로 빼곡히 적어 놓은 추가 원고가 발견돼 20세기 들어 새 판본(보르도본)이 나왔다. 이번 ‘에세’는 이를 번역한 것이다. ‘에세’는 ‘시험하다’, ‘처음 해 보다’ 등을 뜻하는 프랑스어 동사 ‘에세이예’(essayer)에서 몽테뉴가 만들어 낸 명사로 영어로 통용되는 글쓰기 장르 ‘에세이’도 여기서 나왔다. 심 교수는 “일본식 번역의 ‘수상록’이라는 제목은 한자 ‘따를 수’(隨)가 수동적인 의미라 몽테뉴가 자기를 탐구하고자 애쓴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힘든 노력의 기록인 ‘에세’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선후배인 두 교수는 프랑스 고전 독서 모임 ‘명륜 독회’에서 같이 공부했고, 후배인 최 교수의 제의로 2007년부터 방대한 번역 작업을 하게 됐다. 프랑스 원서로 1000여쪽, 한국어 번역본으로는 1988쪽에 달한 것에 더해 16세기 프랑스어 번역 작업 자체가 만만치 않았다. 심 교수는 “몽테뉴의 문장은 관계대명사를 사용하고 길기까지 한 데다 논리적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생각의 행로를 기록한 경우가 많아 번역하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에세’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다양한 내용을 다뤘다. ‘확고한 목표가 없는 영혼은 길을 잃고 만다’,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나는 항상 그 마지막이 어땠는지를 고려한다’ 등이다. 또한 ‘그대는 그대 자신을 흘려보내고 흩뿌리고 있다. 그대의 밀도를 높이라, 그대의 고삐를 죄라’처럼 인생에 대한 성찰도 가득하다. 해당 주제를 논할 때 몽테뉴는 개인적 삶의 경험과 역사적 예화를 동원해 논거를 제시한다. 최 교수는 “몽테뉴는 당시 신대륙의 ‘식인종’으로 불린 사람들에 대해서도 ‘왜 그들이 우리와 다른 삶을 산다고 경멸하는가’라고 진리의 상대성과 문화상대주의를 내세웠다”며 “신분제 사회에서도 평등을 강조하고, 한 인간 안에 복잡하게 악과 미덕이 모두 존재한다고 본 현대적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교육적 측면에서도 암기식 교육보다 아이가 스스로 생각해 보고 깨우치는 배움을 강조한 그의 교육철학이 오늘날 프랑스 바칼로레아(논술형 대입 자격시험)로 나타나고 있다”고 덧붙였다.최 교수는 독자들에게 추천할 ‘에세’의 ‘문장’으로 ‘나는 내 견해와 상반되는 견해를 미워하지 않는다… 견해들의 가장 보편적인 성질, 그것은 다양성이다’를 꼽았다. 자기 의견과 다르다고 혐오하는 현 세태에 대한 일침이자 다양성을 강조하는 현대 사회에 맞는 말이다. 심 교수는 ‘나는 하루를 산다’를 예로 들었다. 24시간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 현실에서 주어진 하루를 충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살고 싶다는 바람이 담겼다.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 두 학자가 ‘에세’ 번역을 할 수 있었던 데는 프랑스 정부의 도움도 컸다. 심 교수는 2012년 몽테뉴의 고향 보르도를 찾아가 그의 자취를 살피고 보르도본에 대한 철저한 검수를 진행했는데, 프랑스 정부의 번역 지원 사업 덕에 출판 계약서만 제시하고도 석 달 동안의 체류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최 교수는 “상대의 진심을 믿고 맡기는 프랑스 문화”라고 거들었다. “몽테뉴가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는 인간이 자기 주체로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 준 시대입니다. 인문학은 바로 한 개인이 자기가 선 자리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립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학문이죠. 돈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더욱 필요한 학문 아닐까요.”(심민화)
  • 16세기 명화 ‘독서당계회도’ 일본에서 돌아와 전격 공개

    16세기 명화 ‘독서당계회도’ 일본에서 돌아와 전격 공개

    일본으로 갔던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가 마침내 국내로 돌아와 전격 공개됐다. 문화재청은 22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지난 3월 미국 경매를 통해 매입한 독서당계회도를 공개했다. 독서당은 중종 12년인 1517년 한강 연안 두모포에 신축돼 학문 연구 등에 쓰인 공간이다. 계회도란 문인들의 모임인 계회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이번에 돌아온 독서당계회도는 1531년 제작된 작품으로 현전하는 16세기 독서당계회도 3점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그려졌고, 그림 수준도 높게 평가받고 있어 계회도 중 최초로 국보 지정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그림 상단에는 전서체로 쓴 제목이 있고 중단에는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 일대 한강변이 묘사돼 있다. 그림 속에서 참석자들은 독서당이 보이는 한강에서 관복을 입은 채 흥겹게 뱃놀이를 하고 있다. 하단에는 참석자 12인의 호와 이름, 생년, 과거 급제 연도, 당시 관직 등이 쓰여 있다.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주세붕(1495~1554), 성리학의 대가로 ‘규암집’을 저술한 송인수(1499~1547) 등이 등장한다. 이전에는 일본 교토국립박물관장을 지낸 간다 기이치로(1897∼1984)가 소장하고 있었다. 그의 사망 후 또 다른 누군가가 유족에게서 입수해 최근 크리스티 경매에 내놓은 것을 재단이 매입했다. 박은순 덕성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독서당 주변 공간이나 한강 경관을 표현하는 묘사력, 먹의 표현력이나 뒤쪽 산에 칠한 푸른색의 색감도 뛰어나다”면서 “어떤 계회도보다 예술적 수준이 높은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독서당계회도는 다음달 7일부터 오는 9월 25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 특별전을 통해 일반에 공개된다.
  • “임진왜란은 국제전쟁”… 군사편찬연구소 ‘한중군사관계사’ 발간

    “임진왜란은 국제전쟁”… 군사편찬연구소 ‘한중군사관계사’ 발간

    조선 중기였던 1592년 부터 7년 간 벌어진 ‘임진왜란’이 일본과의 ‘국제전쟁’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22일 임진왜란 430주년을 맞아 ‘조선중기 한중군사관계사’를 발간했다. 연구소는 이 책에서 명(明)나라 중심 국제질서의 동요와 국제정세 변화, 갈등의 16세기 한중 군사관계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 봤다. 또 임진왜란의 배경과 한중 군사관계, 임진왜란과 한중 군사관계의 변화도 조명했다. 이어 임진왜란의 전개와 명군의 참전, 충돌과 모색의 16~17세기 한중 군사관계 등으로 구성했다. 임진왜란을 다룬 기존 역사 연구가 전쟁·전투 중심으로 7년에 집중했다면, 이번 연구는 전·평시 100년의 군사관계를 종합적으로 분석, 정리해 차별성을 뒀다. 전쟁 이전 조선과 명은 군사외교·정보, 편제, 국방정책 등에서 긴밀한 군사관계를 맺었다. 전쟁기에는 참전, 전쟁전략, 군수지원 등 다양한 이해관계로 협력과 갈등을 경험한 점에서 임진왜란은 조선의 입장에서 일본과 전쟁, 명과 군사외교를 펼쳤던 국제전쟁이라고 분석했다. 연구소는 “기존 연구에서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전쟁으로 인식하는 경향에 비해 이 책은 강대국 명의 참전·군사전략·역할 등을 분석해 조선, 명, 일본의 국제전쟁임을 논증했다”고 소개했다. 책을 집필한 김경록 선임연구원은 “한국사라는 일국사와 7년의 전쟁사 관점을 뛰어넘어 전쟁과 평화의 관점에서 조선중기 100년의 군사관계를 조명할 필요가 있다”며 “이를 통해 현재의 한중군사관계 전개의 역사적 배경과 그 정당한 지향점을 찾을 수 있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 신라 설화에 묻어난 미다스왕…동서양 잇는 최중심 ‘오리엔트’

    신라 설화에 묻어난 미다스왕…동서양 잇는 최중심 ‘오리엔트’

    “아내가 남편과의 잠자리를 거부할 경우 전후 사정을 조사해 아내가 과오가 없는 반면 남편이 외출이 잦고 평소 아내를 멸시했다면 아내를 나무랄 수 없다. 그럴 경우 아내는 자기 재산을 가지고 친정으로 돌아갈 수 있다.” “누군가 재판에서 거짓 증언을 한 경우 그 재판이 사형까지도 선고될 수 있는 사건에 관한 재판이라면 거짓으로 진술한 이를 사형에 처한다.”기원전 1754년경 제정된 고대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법전’은 그동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칙 때문에 야만적이고 반인권법적 법이란 오해를 샀다. 하지만 전체 282개 조항을 자세히 살펴보면 3700여년 전에도 오히려 사법 정의나 여성의 권리, 법 앞의 평등 등 정교한 근대법의 기본 원칙이 구현됐음을 알 수 있다. 문화인류학자이자 중동 연구의 권위자인 이희수 한양대 명예교수는 이처럼 서구 중심 관점에서 잘못 알려진 오리엔트·중동 지역의 역사를 인류의 뿌리 역사, 즉 ‘본사’(本史)로 선언하며 새롭게 정리했다. 오늘날 역사는 ‘서양사’와 ‘동양사’로만 나뉜다. 그러나 서양의 문명·문물은 서양에서 기원하지 않았고, 동서양은 인류사의 모든 순간 교류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서양과 동양을 촘촘히 이어 준 중간 문명으로서 ‘중양’(中洋)이 있었고 이는 인류 문명 자체를 탄생시킨 지금의 중동 지역이다. 저자는 중양을 중심으로 초고대 아나톨리아 문명부터 고대 오리엔트 세계, 오스만·무굴제국의 성쇠까지 인류사적 궤적을 면밀히 추적한다. 특히 지금으로부터 1만 2000년 전 건립된 터키 아나톨리아의 ‘괴베클리 테페’ 유적은 세계 4대 문명이 꽃을 피운 시기보다 6000년이나 앞서 인류가 체계화된 도시 문명을 이뤘음을 보여 준다. 고대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이 다문화 정책과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펼쳐 후일 로마 제국의 개방성에도 영향을 미치는 등 그동안 서구 위주의 역사 서술 방식이 가르쳐 주지 않던 진실을 일깨운다. 특히 7세기 무함마드가 등장한 이후 압바스, 사파비, 오스만제국 등으로 유려하게 흘러가는 이슬람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 12억 인구에 달하는 이슬람의 세계성은 무력을 통한 개종이 아니라 관용과 포용 정책 덕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15세기 조선 세종 시대에 갑자기 당대 최고 수준의 과학 기기가 발명되고 천문역법이 정비된 것도 이슬람 문명의 전래와 영향 덕분으로 분석된다.인류 본사 이희수 지음/휴머니스트704쪽/3만 9000원 저자는 책에서 정교일치 체제의 위험성을 강조한다. 종교가 국교의 위치에 있게 되면 항상 기득권을 쥔 성직자들로부터 정통 교리가 강화되고, 관용과 절충이 아닌 배타성과 아집이 사회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유럽이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정교분리를 택하면서 진보와 발전을 거듭한 반면 오랫동안 정교일치 체제를 고수하며 낙후성을 면치 못한 이슬람 세계는 이러한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오늘날 대부분 정교분리의 세속화 경향을 걷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시대에 왕실과 문벌이라는 보호막 아래서 권력과 결탁한 승려들이 정치에 깊숙이 개입해 결국에는 나라가 망하고 조선 왕조로 교체됐다. 이 밖에 기원전 8세기 프리기아의 미다스왕이 신의 노여움을 사 귀가 늘어나는 저주를 받게 됐다는 전설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경문왕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에 영향을 줬다는 분석도 문명 교류의 관점에서 흥미롭다. 무엇보다 저자는 수많은 제국이 명멸하는 과정에서 국가가 오랜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지속 가능성 시스템(거버넌스)이 구축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 사회 내부의 수요는 줄어들지 않는데 외부로부터의 공급이 줄어들면 내부에서 더 큰 힘을 가진 자가 약자를 수탈해 양극화가 심화되고 내분과 혼란이 증폭되는 현상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제국의 역사를 훑는 수준을 넘어 각 나라만의 정치적 맥락 안에서 구성된 통치 시스템, 지정학적 판도를 뒤바꾼 주요 사건과 종교·문화를 역사 문외한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저자의 내공이 경이롭다.
  • 웹툰 신작 ‘렐름 오브 퀸’ 흥행몰이… 여왕과 해적의 로맨스 ‘심쿵’

    웹툰 신작 ‘렐름 오브 퀸’ 흥행몰이… 여왕과 해적의 로맨스 ‘심쿵’

    카카오페이지의 웹툰 신작 ‘렐름 오브 퀸’(부제 ‘여왕의 영역’)이 흥행몰이 중이다. 지난 13일 공개된 이 작품은 카카오페이지 론칭 이틀 만에 독자 19만명을 돌파하며 로판(로맨틱판타지) 장르 실시간 랭킹 1위를 기록했다. 렐름 오브 퀸은 16세기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바다의 검은 용이라 불리는 해적 드레이크의 로맨스 스토리를 그렸다. 역사적 사실에 작가적 상상력이 더해져 신선하고 흥미롭다는 반응과 함께 탄탄한 스토리와 매력적인 작화가 독자들에게 호평받고 있다. 특히 독립적이고 자의식 강한 엘리자베스 여왕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대사와 전개가 시원시원하다는 평가다. 능글맞은 해적 남자 주인공 드레이코와 여왕에 대한 한결같은 순애보를 간직한 스웨덴 왕자 등의 주요 캐릭터는 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작품 말미에 토막 상식을 실어 실제 역사와 웹툰의 차이점을 언급하는 등 역사적 고증도 빼놓지 않았다. 현재 카카오페이지에서 20회차까지 공개됐으며, 매주 금요일 연재된다. 제작사 크릭앤리버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현재 중국에도 선판매돼 연재를 준비 중이고, 일본과 미국 수출도 논의되고 있다”며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흥행 기대감을 모으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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