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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 고성에서 하룻밤을…스위스 캐슬 스테이 진행

    중세 고성에서 하룻밤을…스위스 캐슬 스테이 진행

    스위스 내 고성 몇몇이 호텔 등 숙식 서비스 업소(bnb)로 변모해 여행자들을 맞는다고 스위스관광청 한국사무소가 31일 밝혔다. 스위스관광청은 “역사가 담뿍 깃든 고성에서 하룻밤 묵어가며 중세의 기사나 공주가 된 듯한 기분에 빠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루체른의 샤토 귀취는 루체른 성곽의 일부로 지어졌다. 처음 세워진 건 1590년 경인데, 1888년 화재가 일어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화재 이후 독일의 노이슈반스타인성을 모델 삼아 재건축됐다. 객실은 스위트룸 포함 37개다. 가든 룸과 선 테라스 등도 갖췄다. 현지에선 웨딩 호텔로도 인기가 좋다고 한다.부르그도르프의 슐로스 부르그도르프는 스위스에서 제일 오래된 요새 구조물 중 하나로 꼽히는 고성이다. 잘 보존된 중앙 건물은 약 1200년 전 채링엔 가문의 공작, 베리히톨트 5세가 지은 것이다. 당시 혁신적인 건축 자재였던 붉은 벽돌을 사용해 더욱 눈에 띈다. 지금은 고성 안에 박물관과 유스호스텔,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다. 더블 룸, 패밀리 룸, 도미토리 등이 갖춰졌다. 스위스관광청은 툰 지방의 슐로스 샤다우 호텔,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후 치타가 한동안 머물렀다는 로르샤허베르크의 슐로스 바르텍, 13세기의 성채 샤토 살라보, 16세기 이후의 역사가 고이 깃든 슐로스 휘니겐, 아스코나의 로만틱 호텔 카스텔로 제슐로스 등도 함께 추천했다.
  • ‘남양주 16세기 여성 묘 출토복식’ 국가민속문화재 된다

    ‘남양주 16세기 여성 묘 출토복식’ 국가민속문화재 된다

    16세기 중기 복식과 장례 문화를 생생히 보여주는 ‘남양주 16세기 여성묘 출토복식’이 27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 예고됐다. 이번에 지정되는 복식 유물은 2008~2009년 경기 남양주 별내 택지개발사업 부지에서 발견된 무연고 여성 묘에서 나왔다. 당시 출토된 52건 71점 중 사료적 가치가 있는 10건이 대상에 선정됐다. 이 가운데 ‘직금사자흉배 운문단 접음단 치마’는 조선전기 연금사(속심 실에 납작한 금실을 돌려 감아 만든 실)로 비단 바탕에 무늬를 짜 넣어 만든 사자 흉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주목된다. 흉배는 조선시대 문무관의 관복에 날짐승이나 길짐승 무늬를 직조하거나 수놓아 품계를 표시하던 사각형 장식이다. 사자 흉배는 궁궐 수비를 맡은 장수가 사용했다고 한다. 흉배가 관복이나 저고리 등이 아닌 치마에 활용된 사례로는 이 유물이 최초다. 승려의 겉옷 또는 양반층 부녀들이 예복으로 착용한 ‘장삼’ 역시 기존과 형태가 다르고, 장삼에 사용한 넓은 띠인 ‘대대’ 또한 상태가 양호해 연구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 문화재청은 30일의 예고 기간을 거쳐 의견을 수렴한 후 국가민속문화재로 최종 지정할 예정이다.
  • 한복이 중국옷? “조선옷이 명나라 부유층 패션 휩쓸어”

    한복이 중국옷? “조선옷이 명나라 부유층 패션 휩쓸어”

    중국이 한복을 자국의 문화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한복공정’ 움직임이 여전한 가운데 고려와 조선 시대 입던 옷이 과거 중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며 유행을 주도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구도영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21일 서울 중구 더 플라자에서 재단과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공동 주최한 학술회의에서 ‘명나라의 조선 드레스 열풍과 조선 전기 여성 한복’을 통해 “15세기 조선의 옷이 명나라의 부유층 패션을 휩쓸었다”고 발표했다. 구 연구위원에 따르면 말총으로 만든 속치마 마미군의 유행이 중국 서적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15세기 명나라 관료 육용(1436~1497)의 ‘숙원잡기‘에 보면 “마미군은 조선에서 시작되어 경사(京師·수도)로 유입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 부유층을 중심으로 퍼지다가 후에 “입는 사람이 날로 많아져서 성화 황제 시기에는 조정 관료들도 많이 입었다”고 한다. 마미군이 유행하자 말총이 필요한 사람들이 몰래 관가의 말총마저 뽑아갔다는 기록도 있다. 단 여기서 경사는 북경이 아니라 남경지역을 의미한다. 경사는 북경과 남경 모두를 지칭하는 용어로 마미군 관련 자료는 모두 명나라 강남 지역과 관련해 전하고 있다.15세기 명나라 문인 왕기(1432~1499)는 ‘우포잡기’에서 마미군에 대해 “겉옷이 펼쳐지는 게 마치 우산과 같다”고 적고 있다. 비판하는 이들조차 아름다움을 느꼈는지 육용은 그의 저서에서 “아랫도리에 사치스러운 옷을 입는 자는 예쁘게 보이고자 할 뿐이다”라고 했다. 15세기 한국의 치마를 짐작할 수 있는 그림 자료나 유물은 많지 않지만 16세기 유물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입던 치마들은 볼륨감 있는 형태로 길이가 길고 폭이 방사형으로 넓어지는 형태를 띠고 있어 옷을 입었을 때 하단을 풍성하게 하고 전체적으로 우아한 자태를 자아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반면 송나라, 명나라 사대부 가정의 일반적인 복장은 볼륨감 없는 형태로 슬림했다. 16세기 초중반에 활동한 명나라 화가 구영(1494?~1552)이 한나라 궁중 여인들의 생활상을 표현한 ‘한궁춘효도’를 보면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구 연구위원은 “조선의 마미군은 15세기 해상 교역을 통해 명나라 최고의 패션도시 소주에 전해져 명의 남경, 소주, 상해 등의 강남 지역에 열풍을 일으켰다”면서 “중국 강남 여성은 물론 고위급 남성 관료들까지 입었고 이것이 명나라 정부에서 우려를 나타낼 정도였다”고 전했다. 이어 “지금까지 한중관계에 대한 많은 연구가 15~16세기 조선과 명의 문화가 육로를 통해서만 교류됐다고 믿는 경향이 있지만 한중관계의 외변에 있던 제주도와 명의 강남지역 간에도 문화 교류가 이뤄지고 있었다”면서 “이는 한중 문화 교류의 역사상을 보다 넓은 시각으로 확장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고 덧붙였다. ‘한복공정’을 주장하는 이들이 한복이 중국의 한푸(漢服)에서 유래했다고 하지만 한, 당, 송, 명나라 옷을 보면 일반적인 옷의 형태가 조선의 여성 옷과 매우 다르다. 중국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일이지만 역사적 증거가 한류가 지금 못지않게 예전에도 거셌음을 보여주고 있다. 굳이 역사적 자료를 들어 설명하지 않아도 한복은 당연히 우리 전통옷이지만 한복이 중국옷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은 집요하게 제기되는 실정이다.
  • 500년된 이슬람 쿠란 필사본, 3년여 끝에 복원 [대만은 지금]

    500년된 이슬람 쿠란 필사본, 3년여 끝에 복원 [대만은 지금]

    전쟁과 지진 등 온갖 고초를 겪은 500년 된 이슬람교 경전 쿠란 필사본이 대만에서 약 3년여 복원 작업 끝에 28일 공개된다고 국립대만도서관이 밝혔다. 아랍어로 된 쿠란 경전은 대만 불교 츠지재단의 한 터키 자원봉사자가 중고 서점에서 구입해 2020년 7월 대만 불교계에서 아주 유명한 정옌스님에게 선물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옌스님은 불교경전인 법화경과 이슬람 경전 쿠란의 사상이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는 이를 소중히 간직하다 복원하기로 했다. 복원 전 쿠란 필사본은 표지부터 안쪽까지 습기나 벌레 등으로 인해 책장이 붙어 읽을 수 없는 상태였다. 복원 중 책 안에서는 피, 흙, 꽃잎, 머리카락, 식물의 씨앗, 벌레 피해 등으로 의심되는 것들이 나왔다. 도서관은 쿠란 필사본이 최소 10명이 15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작업된 것으로 추론된다고 했다. 도서관은 500년 된 쿠란이 전쟁과 지진을 겪었으며 세월은 물론 역사, 지식 및 문화도 담고 있다며 35개월에 걸쳐 복원사가 정성스레 복원해 귀중한 문서의 역사적 화려함이 재현됐다고 밝혔다. 
  • 파주 보광사 ‘동종’ 국가지정 보물 예고

    파주 보광사 ‘동종’ 국가지정 보물 예고

    약 400년 전 만들어진 ‘파주 보광사 동종’이 국가지정 보물로 지정된다. 파주시는 경기도 유형문화재인 보광사 동종이 최근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 예고됐다고 4일 밝혔다. 보광사 동종은 천보(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에 활약한 승려 장인)가 청동 300근을 들여 1634년(인조 12) 7월 조성했다. 종을 매다는 고리에 표현된 역동적인 두 용의 모습, 종 표면의 구름과 용·보살, 파도 등 각종 문양은 생동감과 장식성이 뛰어나 17세기 동종을 대표한다. 조선시대 종 전체로 볼 때도 매우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단에는 반듯한 해서체로 적은 주성기가 보인다. 이를 통해 동종의 제작연대와 목적, 봉안 지역과 사찰, 발원자와 후원자, 장인과 재료 등 중요하고 다양한 내력을 확인할 수 있어 사료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보광사 동종은 천보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졌다. 조선 전기에서 후기로의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공예사적 의미가 있으며, 조선 후기 동종 제작기법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특히 원 봉안처를 떠나 옮겨지는 일이 많은 다른 동종들과 달리 최초 봉안처에서 온전히 그 기능을 수행하며 잘 보전돼 왔다는 점에서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보광사 동종은 30일간 예고 기간을 거친 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될 예정이다. 김경일 파주시장은 “천보의 작품은 가평 현등사 동종, 거창 고견사 동종, 파주 보광사 동종 등 3점만 전해지는 흔치 않은 사례”라며 “앞으로도 파주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문화유산의 가치를 지속 연구하고 발굴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2000년 전부터 피자 먹은 로마인…폼페이 벽화 나왔다

    2000년 전부터 피자 먹은 로마인…폼페이 벽화 나왔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아이네이아스가 이탈리아반도에 도착해 접시 대용으로 준 납작한 빵 위에 음식을 허겁지겁 먹으면서 마지막 빵까지 함께 먹어치웠다는 신화 속의 음식. 이탈리아 남부 고대 도시 폼페이 유적에서 피자의 기원으로 보이는 음식이 그려진 벽화가 발견됐다고 AP통신과 영국 BBC 방송이 2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폼페이 유적의 한 건물에서 발굴된 2000년 된 이 프레스코 벽화는 은색 쟁반 위에 빵과 적포도주 등이 놓인 정물화로, 고고학자들은 왼편에 그려진 둥글고 납작한 빵 모양에 주목했다. 학자들은 이 음식이 향신료나 페스토 등을 가미한 납작한 빵 포카차로 보이며 오늘날의 피자처럼 석류나 대추 열매 토핑이 골고루 올려져 있다고 설명했다. 이탈리아 문화부는 “토마토와 모차렐라 치즈가 빠진 것을 고려하면 벽화 속 음식은 엄밀한 의미의 피자는 아니다”면서도 “하지만 현대 피자의 먼 조상일 수 있다”고 했다. 가브리엘 추흐트리겔 폼페이 유적 발굴단장은 “은쟁반의 호화로운 세팅에도 그림 속 음식 자체는 단순하고 소박해 보인다”면서 “그런 점에서 이탈리아 남부 빈민들의 음식으로 탄생해 전 세계를 석권한 현대식 피자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미주 대륙에서 유럽으로 토마토가 건너간 것은 16세기로, 학자들은 이후 나폴리 지역에서 모차렐라 치즈가 추가되면서 오늘날의 피자가 탄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AP통신에 따르면 이탈리아를 방문한 외국인들이 식비의 3분의 1을 피자를 사는 데 쓰며, 창출되는 경제 규모만 연간 150억 유로(약 21조 4000억원)에 달한다. 한편, 폼페이는 기원후 79년 베수비오 화산 대폭발로 화산재와 가스에 뒤덮여 사라진 고대 도시로, 16세기 발견 이후 고대인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풍부한 사료를 제공해 왔다.
  • 피자의 기원은 나폴리 아니라 폼페이? ‘2000년 전 벽화’ 살펴보니

    피자의 기원은 나폴리 아니라 폼페이? ‘2000년 전 벽화’ 살펴보니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이탈리아 남부 도시 유적 폼페이에서 피자의 기원으로 보이는 음식이 그려진 벽화가 발견됐다. 영국 BBC 방송 등에 따르면, 이탈리아 문화부는 최근 폼페이 유적지구 발굴 작업 중 피자의 기원으로 보이는 음식이 그려진 프레스코화를 발견했다고 27일(현지시간) 밝혔다. 프레스코화는 벽면에 석회를 바른 뒤 수분이 마르기 전 채색하는 방식의 벽화다. 벽화에는 은쟁반 위에 둥글고 납작한 포카치아 식의 빵과 적포도주가 그려져 있다. 빵 위에는 대추야자나 석류와 같은 과일이 토핑처럼 올려져 있고, 향신료나 피자 소스 같은 것이 곁들여져 있다. 이탈리아 문화부는 “토마토와 모차렐라 치즈가 빠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벽화 속 음식은 엄밀한 의미의 피자는 아니다”면서도 “하지만 현대 피자의 먼 조상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발굴 작업을 감독하는 가브리엘 주흐트리겔은 “벽화는 검소하고 간단한 음식과 예술적이고 사치스러운 은쟁반 사이의 대조를 묘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탈리아 남부에서 가난한 사람의 음식으로 태어났던 피자가 이제 전 세계를 제패하고 별표(미슐랭 스타)가 붙은 식당에서도 제공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벽화는 총 9개 구역으로 나뉘는 폼페이 유적지구 중 9번째인 ‘레지오 9’(Regio IX)에 있는 빵집 옆 건물 복도에서 발견됐다. 이 건물은 19세기 부분적으로 발굴됐으나, 지난 1월 다시 발굴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고학자들은 최근 몇 주간 이 건물 옆 빵집 가마 근처에서 세 사람의 유골도 발견했다.오늘날 피자의 발상지로 꼽히는 나폴리에서 남동쪽으로 23㎞ 떨어진 폼페이는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화산재와 자갈, 먼지 속에 파묻혀 역사 속에 사라졌다. 당시 이 휴양 도시에는 약 1만 3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으나, 이 중 15%인 20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폼페이 유적은 16세기에 이르러서야 발견돼 1750년쯤부터 발굴 작업이 시작됐다.
  • 도시의 성장은 농촌 희생 없인 불가능했을 일… ‘연대의 책임감’ 공간을 살린다[마강래의 함께 살아가는 땅]

    도시의 성장은 농촌 희생 없인 불가능했을 일… ‘연대의 책임감’ 공간을 살린다[마강래의 함께 살아가는 땅]

    영국의 농촌 풍경은 한마디로 ‘환상적’이다. 끝도 없어 펼쳐지는 초원이 부드러운 지평선을 만들고, 그곳에서 양 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린다. 하지만 목장의 아름다움에만 취해 낭만에 젖어 들진 마시라. 영국의 목장엔 파란만장한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민초가 겪었던 고난과 역경이 녹아 있다. 또한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투쟁, 농촌의 변화가 촉발한 도시 변화의 역사가 각인돼 있다. 농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은 약탈뿐만 아니라 영국 산업혁명이 촉발된 곳으로서의 흔적도 묻어 있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시 성장의 이면엔 농민들의 희생이 있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쌀값을 인위적으로 낮춘 1960~1970년대의 ‘저곡가 정책’은 농촌 붕괴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지만 도시 내 인력 공급을 통해 산업화를 촉진하는 기반이 됐다. 지난 칼럼에서도 강조한 바 있지만 산업이 변화하면 일자리가 변하고 이는 공간에도 영향을 준다. 농업이 뜰 때는 농업에 맞는 공간이, 제조업이 뜰 때는 제조업에 적합한 공간이 번성한다. 공간의 변화를 추동하는 힘은 바로 일자리다. 일자리가 사라지는 지역은 사람을 밀어내고, 일자리가 생기는 곳은 낯선 이들을 끌어들인다. 산업구조 변화와 일자리의 변화 그리고 공간의 변화에 대한 가장 드라마틱한 서사가 존재하는 곳은 바로 영국이다. 이번 칼럼에서는 산업혁명을 전후로 영국 농촌의 변화와 도시 성장의 관계를 소개하려 한다. 영국의 예는 풍요로운 우리 사회의 이면에 드리운 그림자를 반추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양들이 사나워지고 마침내 인간들마저 집어삼킬 정도였다’ 아주 오래전 중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14세기엔 영국 지주들의 땅이 프랑스에도 걸쳐 있었는데, 여기엔 모직공업의 중심지인 ‘플랑드르’도 포함돼 있었다(현재 플랑드르는 네덜란드에 속해 있다). 플랑드르엔 모직물 제조 기술자가 많았다. 이들은 영국 본토에서 양털을 값싸게 공급받아 모직물을 만들어 다시 영국 본토에 비싼 값에 팔았다. 14세기 중반부터 영국과 프랑스는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100년 넘게 지리멸렬한 전쟁을 벌였다. 백년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플랑드르를 얻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컸다. 영국이 더이상 플랑드르에 양털을 공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플랑드르의 기술자가 영국으로 대거 넘어왔다. 영국은 해외에 모직물을 내다 팔았다. 품질 좋은 영국 모직물은 금세 소문이 났다. 15세기 말 양털에 대한 수요가 더욱 커졌고 영국은 모직물 공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그러나 수요에 비해 양은 턱없이 부족했고 양털 가격은 폭등에 폭등을 거듭했다. 돈 냄새를 가장 빨리 맡은 사람은 지주들이었다. 이들은 양을 키우면 돈이 된다는 걸 간파했다. 이해타산이 빠른 지주들은 농지에 울타리를 치고 양을 키우기 시작했다. 소작으로 농사를 지어 먹고살던 농민들은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일부 지주는 농민들이 이용하던 공유지에도 울타리를 치고 자기 땅이라고 우겼다. 이게 16세기 초에서 17세기 중반에 걸쳐 일어난 1차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이다. 울타리가 쳐진 목장에선 많은 사람이 일할 필요가 없었다. 10명이 일하던 농경지가 목장으로 변하면서 1명의 양치기만 필요해졌다. 지주들은 떼돈을 벌었다. 토머스 모어는 그의 저서 ‘유토피아’(1516)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양들은 온순하고 많이 먹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제가 듣기로 양들이 사나워지고 게걸스러워지기 시작하여 마침내 인간들마저 집어삼킬 정도라고 합니다. … 욕망에 굶주린 대식가 한 명이 땅 몇천 평을 울타리 하나로 둘러치고 농부들을 몰아낸 형국으로 혹독한 국가적 역병이라 불러야 마땅하겠습니다. 농부들 가운데는 속임수나 혹은 강압에 의해 그들 소유의 토지에서 쫓겨났으며, 일부는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땅을 팔고 떠났습니다.”(토머스 모어(김남우 역) ‘유토피아’ 중) 지주의 횡포에 농민들은 분노했다. 1549년 7월엔 로버트 케트가 이끈 농민군이 봉기했다. 이들은 지주가 둘러친 울타리를 파괴했다. 이 난을 주도했던 케트는 두 달 만에 붙잡혔고 런던탑에서 처형됐다. 몰락한 농민들이 도시로 흘러들었다. 하지만 도시엔 집도 일자리도 부족했다. 도둑과 거지가 넘쳐났다. 영국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도시 빈민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자 1601년 엘리자베스 1세는 ‘구빈법’을 제정했다. 이 법을 통해 빈민의 구제를 담당하는 행정기관이 만들어졌다. 빈민을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 빈민 아동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노동할 수 있는 이들은 일을 하게끔 도왔고 노인, 장애인 등 일할 수 없는 이들은 ‘구빈원’에 수용했다. 농민의 희생이 커질수록 지주의 부도 커졌다. 다수의 빈민이 발생하자 국가는 이를 수습하기 위한 빈민 정책을 폈다.●극단까지 내몰렸던 노동자의 삶,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바뀌어 독자들도 잘 알고 있듯이 18세기 영국의 도시는 ‘격동’ 그 자체였다. ‘증기기관’의 발명은 생산력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증기기관이 가장 먼저 쓰인 곳은 다름 아닌 ‘방적기’다. 당시 모직물은 면직물로 대체되고 있었다. 기계가 면을 뽑아내기 전까지는 집마다 조그만 기계를 놓고 실을 뽑는 ‘가내수공업’이 대세였다. 당시 면을 뽑기 위해서는 손으로 물레를 돌려야 했다. 사람이 물레를 돌리니 상품의 질도 균일하지 않았다. 1764년 ‘하그리브스’가 아내의 이름을 딴 ‘제니 방적기’를 만들었는데, 이 기계는 한 번에 8가닥의 실을 뽑아냈다. 1768년엔 수력을 이용한 방적기가 등장했다. 1769년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 특허권을 냈고, 1779년 제니 방적기와 수력 방적기의 장점을 이용한 뮬 방적기가 개발됐다. 인도에서 쓰이던 전통적인 방적기는 면화 45kg을 가공하는 데 5만 시간이나 소요됐다고 한다. 뮬 방적기는 이걸 2000시간으로 줄였다. 뮬 방적기에 증기기관이 결합될 경우에는 작업 시간이 300시간으로 줄었다. 증기기관을 장착한 기계 덕분에 대량생산이 가능한 ‘공장’이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했다. 공장이 늘어나는 속도만큼 일할 사람도 필요했다. 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공급될 수 있었을까. 산업화와 맞물려 진행된 ‘2차 인클로저 운동’은 도시 내 공장에 인력을 공급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당시 지주들은 이곳저곳에 땅을 가지고 있었다. 지주들은 자그마한 땅, 그러니까 이곳저곳 흩어져 있던 ‘땅뙈기’를 강제로 통합하거나 맞교환해 농업 생산성을 높이려 했다. 이 과정에서 농민 대부분은 고용이 승계되지 않았다. 몰락한 농민의 도시 유입이 이어졌다. 도시에 빈민이 넘쳐나니 인클로저 운동에 제재를 가할 법도 했지만 영국은 오히려 그 반대로 나갔다. 인클로저 운동은 의회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의회 구성원 대부분이 귀족이나 지주였기 때문이다. 인클로저 운동은 더욱 체계화되고 공식화됐다. 국가가 농민들의 희생을 묵인한 것이다. 도시에 일할 사람이 차고 넘치니 임금이 낮아졌다. 노동자들은 먹고살기 위해 하루에 16시간 정도를 일했다. 이제는 방직기계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인식이 커졌다. 노동자들은 밤에 몰래 공장에 들어가 망치로 기계를 때려 부쉈다. 19세기 초 요크셔, 랭커셔 등 양모산업 중심지로부터 시작된 러다이트 운동은 전국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다급해진 정부도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1802년 공장법이 도입됐다. 이 공장법은 1833년까지 여러 차례 개정됐다. 노동시간은 최대 12시간으로 제한됐고, 밤 9시부터 새벽 6시까지의 야간노동이 금지됐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았는가. 지주의 횡포에 일자리를 잃고 떠도는 농민이 사회문제화되자 정부가 나섰다. 이번엔 공장주는 산업의 변화를 이용해 권력 집단으로 부상했고, 노동자들은 사회 안녕을 위협하는 존재로 취급됐다. 국가는 사후 대책으로 노동자를 위한 정책을 내놓았다. 공장법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삶이 나아진 건 아니다. ‘생의 극단까지 내몰렸던 노동자의 삶’이 딱 죽지 않을 만큼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1830년대 출판된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에는 당시 런던 빈민의 비참했던 삶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한 집단의 경제적 풍요는 다른 집단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 집단의 경제적 풍요는 다른 집단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허구생 ‘빈곤의 역사, 복지의 역사’ 중). 공간도 마찬가지다. 한 공간의 경제적 풍요는 다른 공간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증기기관은 교통의 발달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도시는 ‘철도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1829년엔 맨체스터에서 생산된 면을 리버풀까지 옮기기 위해 50㎞에 이르는 철도가 개설됐다. 도시와 도시가 연결되기 시작했다. 철도를 통해 무거운 화물을 먼 곳까지 운반할 수 있었다. 증기기관차로 인해 도시는 농촌인구를 더 강하게 빨아들이는 빨판까지 갖추게 됐다. 기차역을 중심으로 물건을 파는 상인이 모여들었다. 음식점과 호텔도 늘었다. 1850년 정도엔 런던에 런던 브리지역, 유스턴역, 패딩턴역, 킹스크로스역, 비숍스게이트역, 세인트판크라스역, 워털루역 등 7개의 종점역이 생겼다. 런던 지하철은 1863년에 개통됐다. 19세기 중반 런던은 가장 큰 인구 흡입력을 가진 대도시로 떠올랐다. 19세기로 들어서면서부터 영국의 도시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세기 말부터 전기에너지 기반의 대량생산이 대세가 됐고 이는 공장의 자동화를 더욱 촉진했다. 석탄에서 석유로의 전환은 화물차의 보급을 확대했다. 생산성이 폭증했다. 대량생산을 위해서는 넓은 토지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가 필요했다. 기업의 생산 활동이 도시 외곽으로 나가면서 도시가 팽창했다. 20세기 후반에는 컴퓨터, 인터넷, 반도체로 대변되는 3차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4차 산업혁명 시대로 진입했다. 이제 영국은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맞고 있다.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인구의 흐름보다 중소도시에서 대도시로 이동하는 인구의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융복합 산업의 대도시 입지 선호가 강해지면서 ‘농촌 대 도시’의 구도가 ‘중소도시 대 대도시’의 구도로 바뀌고 있다. 영국도 런던권 쏠림으로 인한 지역 격차 확대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우리나라도 시기만 다를 뿐 영국과 유사한 과정을 밟아 왔다. 영국의 농촌에서 공급된 인력이 영국의 산업화를 촉진하는 동인이 됐던 것처럼 우리나라도 1960년대 산업화 과정 속에서 농촌의 젊은이가 도시로 대규모 유입됐다. 이들은 제조업을 성장시키는 주역이 됐다. 1970년대 중반부터 산업단지가 도시 외곽에 지어지는 과정에서 도시는 계속 팽창했다. 1990년대 초부터 컴퓨터와 정보화 기반 산업들이 성장했고, 이는 도시 외곽뿐만 아니라 도시 내 정보기술(IT) 기업 일자리를 증가시켰다. 2010년 이후 고부가가치 일자리는 대도시, 대도시 중에서도 광역교통의 결절점에서만 성장하고 있다. 이젠 수도권만 활황이다. 학생도, 의사도, 근로자도, 투자자도 지방을 떠나고 있다. 대학도, 병원도, 회사도, 부동산도 수도권만 살아남을 기세다. ●대도시·중소도시·농촌은 ‘원팀’… 연대하여 지방도시 위기 극복을 도시의 성장은 농촌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했다. 산업화 시대에는 그랬다. 농촌의 붕괴가 현실이 된 지금은 큰 도시가 중소도시의 희생으로 인해 성장하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가 성장하고 있다면 그건 주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성장이 혼자만의 힘으론 어려운 것처럼 공간도 그러하다. 어떤 공간이 성장하고 있다면 그건 주변 공간에서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는 농촌에, 대도시는 중소도시에 빚을 지며 성장해 왔다. 그러니 잘나가는 곳은 그렇지 못한 곳에 대해 ‘연대의 책임감’을 져야 한다. 이런 책임을 무시하면 ‘도덕적 의무감’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앞으로 4차 산업혁명이 깊숙이 진행되면서 수도권 쏠림의 흐름은 더 강해질 것이다. 지방의 대도시마저 붕괴한다면 수도권의 성장도 불가능하다. 대도시, 중소도시, 농촌은 원래 한 팀이었다. 지방도시의 위기가 더 깊어지기 전에 대도시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익을 중소도시와 농촌에 교차 보전할 방안을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
  • [포착] “신비 그 자체”…물에 잠겨있던 460년전 교회, 가뭄으로 모습 드러내

    [포착] “신비 그 자체”…물에 잠겨있던 460년전 교회, 가뭄으로 모습 드러내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는 멕시코의 한 저수지에서 16세기에 지어진 가톨릭교회가 모습을 드러냈다.  PVDN 등 멕시코 현지 언론의 18일(이하 현지시간) 보도에 따르면, 최근 가뭄으로 수위가 급격히 낮아진 치아파스주(州) 네우알코요틀 저수지에서는 16세기에 지어진 산티아고 교회(케출라 교회)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 건물은 1966년 저수지가 완공되면서 약 30.5m 깊이의 물에 잠겨 있었다. 이후 2015년 당시 역시 가뭄으로 교회 윗부분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물속에 잠겼는데, 최근 가뭄이 다시 심해지고 저수지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8년 만에 교회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게 됐다.  AP통신에 따르면, 해당 교회는 높이 약 55.7m, 너비는 12m 정도이며, 종탑은 바닥에서 14.6m 높이로 서 있다.  이 교회는 16세기 당시인 1564년, 해당 지역의 인구가 급증할 것이라는 예상 하에 건축됐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교회에 상주하는 사제는 없었고, 이후 다른 지역에서 온 방문객들만 해당 교회를 드나들었다.  교회는 점차 폐허처럼 고립되다 1773~1776년 해당 지역에 흑사병이 돌기 시작한 뒤 완전히 버려져 현재의 형태가 됐다.  이후 2009년과 2015년 당시 수면이 낮아지면서 교회의 일부가 모습을 드러내자 지역 주민들은 이곳에서 일종의 관광사업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저수지 인근에서 관광객들에게 먹을 것을 팔거나, 배를 타고 교회까지 오가는 상품을 개발하는 등 관광객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약 60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물에 잠겨 있었지만, 교회 구조의 대부분이 그대로 유지돼 있다. 전문가들도 오랜 세월 침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가 양호한 상태로 보존돼 있다고 입을 모은다.  멕시코 당국은 한때 산티아고 교회를 유네스코 유산 목록에 올리려 고려하기도 했지만, 이는 현실이 되진 못했다. 다만 멕시코에서는 해당 교회가 단순한 역사를 넘어 미학에 이르기까지 종교‧건축학 적으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저수지가 완공되고 교회가 물에 잠길 때부터 이 마을에 살았던 한 주민은 PVND와 한 인터뷰에서 “교회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면서 마을 사람들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면서 “이러한 유적이 오랫동안 물에 잠긴 상태로 남아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 교회는 멕시코 남동부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 중 하나로 꼽히며, 역사와 신앙이 보존된 장소로 여겨진다”면서 “언제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지 불확실하기 때문에 더욱 신비롭다”고 덧붙였다.한편 멕시코는 지난 3월부터 극심한 가뭄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멕시코 영토의 52%가 건조한 기후로 인한 영향을 받고 있으며, 지난 10년 동안 가뭄의 빈도과 심각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 같은 가뭄은 멕시코 대부분 지역을 덮친 불볕더위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멕시코 보건부의 지난 16일 발표에 따르면 지난 3월부터 최근까지 발생한 온열질환 환자는 487명에 달한다. 남·북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한낮 기온이 40℃를 넘나드는 불볕더위가 계속되면서 베라크루스주, 킨타나로오주, 소노라주, 오아하카주에서는 8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멕시코 기상당국은 올해 멕시코시티 역대 가장 더운 날이 경신될 것으로 내다봤다.
  • 네덜란드에 대해 우리가 잘 몰랐던 4가지 아이러니한 이야기 [한ZOOM]

    네덜란드에 대해 우리가 잘 몰랐던 4가지 아이러니한 이야기 [한ZOOM]

    <편집자 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역사 등의 분야에서 홀로 진실에 다가가는 것은 쉽지 않다. 각 분야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이유가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단편적인 사실에만 의존할 뿐 이면에 존재하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지금은 드러나지 않는 사실에 대한 정보가 넘치는 세상이다. 비록 ‘필터 버블’(Filter Bubble·사용자 관심사에 맞춰진 필터링된 정보)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지만 조금만 깊이 보고 비틀어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올바른 사고의 알고리즘을 가질 수 있다. 조금만 더 들여다보는 노력을 한다면 더 많은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 손에 쥔 한줌의 사실을 ‘한ZOOM’을 통해 더 깊이 더 진하게 이해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네덜란드는 풍차와 튤립의 나라, '불멸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태어난 나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인 거스 히딩크 감독의 나라 등으로 익숙하다.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은 사람보다 자전거가 더 많은 도시, 후기 인상주의 화가 반 고흐(1853~1890)의 작품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도시, 나치의 박해를 피해 안네 프랑크(1929~1945)가 살았던 도시 등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풍요롭고 검소한 실용주의 나라 네덜란드를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 보면 우리가 몰랐던 아이러니한 이야기들을 마주하게 된다. 알면 더 잘 보인다고 한다. 세계적인 여행지로도 유명한 네덜란드에 좀 더 가까이 다가기 위해 그동안 우리가 네덜란드에 대해 잘 몰랐던 4가지 아이러니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터진 제방을 손으로 막아 마을을 구한 소년의 진실 #1   “네덜란드에서 한 소년이 제방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우연히 제방 구멍으로 물이 흐르는 것을 본 소년은 제방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구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밤새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소년의 용기는 제방이 무너지는 것을 막았고, 홍수로부터 도시를 구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에는 터진 제방을 손으로 막아 마을을 구해 낸 소년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실제 네덜란드에서 처음 시작된 이야기는 아니다. 네덜란드에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미국 작가 메리 맴스 도지(Mary Mapes Dodge·1831~1905)가 1865년 쓴 소설 ‘한스 블링커, 또는 은색 스케이트’(Hans Brinker, or the Silver Skate)에 등장하는 짧은 일화일 뿐이다. 소설에서 ‘한 네덜란드 소년이 물이 새고 있는 제방을 손가락으로 막아 대도시의 홍수를 구했다’는 이야기는 출간 당시에는 정작 네덜란드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전세계적으로 소설이 유명해지자 네덜란드에서 관광상품으로 동상들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물리학의 법칙을 거슬러 주먹으로 제방을 막았다는 것도 아이러니 것이지만, 이 이야기가 미국에서 네덜란드로 역수출되어 관광상품화 되었다는 것 역시 아이러니 하지 않을 수 없다.   바다보다 낮은 척박한 땅에서 성장한 비결 #2 네덜란드는 육지 대부분이 바다와 늪지를 개간해서 만든 나라다. 그래서 국토의 약 30% 정도는 바다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 그래서 제방이 무너지면 도시가 물에 잠길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안고 있는 위험한 환경이 오히려 네덜란드에게는 기회가 됐다. 중세유럽은 장원제도를 바탕으로 한 자급자족적 경제구조였다. 영주가 왕으로부터 받은 토지(장원)에 농노들이 농사를 짓고 영주에게 세금을 바치는 제도였다. 그런데 네덜란드에서는 장원제도가 발달하지 않았다. 육지 대부분이 사람들이 직접 개간한 땅이었기 때문에 귀족들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실제 귀족이 소유한 땅은 5%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직접 개간한 땅을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었고, 덕분에 제도와 종교에 억압받지 않는 자유롭고 실용주의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검소하고 실용주의 나라는 왜 ‘튤립 버블’ 앞에서 무너졌을까 #3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물에 젖은 휴지를 햇볕에 말리는 광경이 나타나는 지역이 바로 네덜란드다.” KDI 리포트 ‘작지만 강한 나라, 세계 일등국을 지향하는 네덜란드’(신덕수 KOTRA 암스테르담무역관장·2019)에 따르면 네덜란드 국민들은 검소해 고급 백화점도 많지 않고 오프라인 중고시장을 더 많이 찾는다. 또한 정부 고위관료나 정치인들도 자전거를 애용할 정도로 생활에서 명분보다 실리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중세시대 장원제도가 발달하지 않아 상업과 실용주의가 발달할 수 있었다. 게다가 16세기 초 종교개혁 영향으로 칼뱅파 신교가 널리 퍼졌고, 돈을 버는 것을 죄악시했던 구교와 달리 어떤 직업이든 신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열심히 돈을 버는 것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치는 신교의 영향으로 상업과 실용주의는 더욱 발달할 수 있었다. 그런 검소함과 실용주의의 나라 네덜란드에서 17세기 자본주의 최초 버블경제 현상이 발생한다. 바로 ‘튤립 버블’이다. 튤립은 네덜란드의 대표 꽃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산지는 튀르키예다. 오스트리아 외교관이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서 유럽으로 가져왔고, 네덜란드 레이던대학교 교수가 네덜란드로 가져온 것이다. 단색의 튤립은 헐값이었지만, 변종의 희귀한 색깔이 튤립이 만들어지면서 사람들을 열광시키기 시작했고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636년 가장 비쌌던 ‘황제(Semper Augustus) 튤립’의 구근(알뿌리)은 하나에 2500길더에 달했다. 당시 소 한 마리의 가격이 120길더 정도로 지금으로 환산하면 3000만원이 넘는 돈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튤립 버블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너도나도 튤립 재배를 시작하면서 이듬해 가격은 최고가 대비 1%까지 폭락했다. 검소하게 살아가던 실용주의 정신의 나라에서 튤립에 대한 광기어린 현상이 발생했다는 점은 아이러니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술의 도시 이면에 펼쳐지는 또 다른 밤 풍경 #4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은 낮에는 운하가 주는 아름다움과 예술이 지배하지만, 밤에는 운하 옆으로 차지한 홍등가 주변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다. 네덜란드는 동성애자, AIDS환자, 윤락여성들의 인권이 가장 잘 보장되는 곳이면서도 대마 흡연율은 금지국인 미국보다도 낮은 나라다. 암스테르담 운하 건너편 홍등가를 에워싼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바로 뒤 성당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종소리를 뒤로하고 운하 길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느 새 머릿속에는 종소리가 점점 희미해지고 ‘아이러니’ 이 단어가, 그리고 걸그룹 원더걸스의 노래 ‘아이러니’가 계속해서 맴돌기 시작했다. 머나먼 이 곳에서 원더걸스의 노래를 다시 떠올려 본다. 
  • 나치가 훔쳐간 16세기 그림이 일본에…폴란드로 돌아온 ‘웃픈’ 사정

    나치가 훔쳐간 16세기 그림이 일본에…폴란드로 돌아온 ‘웃픈’ 사정

    “점점 많은 약탈 물품이 경매에 나오고 있다. 예술품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거나 소장자들이 그 작품의 모든 것을 꿰뚫지 못하고 심지어 그 작품이 어디에서 왔는지조차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2차대전 때 독일 나치가 폴란드에서 훔쳐간 16세기 이탈리아 그림이 지난해 일본 경매에 출품됐다가 폴란드로 반환됐다고 AP 통신이 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아가타 모젤레프스카 폴란드 문화부 문화재반환국장이 AP 인터뷰를 통해 약탈 문화재가 주인을 찾는 과정의 웃픈 사연을 들려줘 눈길을 끈다. 화제의 그림은 바로크 시대의 화가 알레산드로 투르치가 그린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 18세기 폴란드 귀족 스타니슬라브 코스트카포톡키가 소장했고, 1823년 폴란드 쉐보르스크 귀족인 헨리크 루보미르스키의 소장 목록에 등장한 일이 있다. 2차대전 때 나치가 강탈해 갔으나 1990년대 말 미국 뉴욕 경매에서 팔렸고, 20여년 뒤 도쿄 경매에 나왔던 것이다. 폴란드는 이 그림이 지난해 도쿄 경매에 출품된 사실을 알고 반환 교섭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도쿄 경매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폴란드로선 반환 협상에 나서기 힘들었을 것이다. 모젤레프스카 국장의 발언은 이런 웃픈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폴란드는 최근 여러 나라로부터 약탈 미술품 600점 가량을 되찾았는데 지난 31일 도쿄 주재 폴란드대사관에서 반환식이 거행됐다고 AP는 전했다. 피오트르 글린스키 폴란드 문화부 장관은 수도 바르샤바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 그림은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했던 기간(1939-1945) 수만 점의 예술품을 약탈해 갔는데 그 중 진귀한 작품 목록에 올린 521점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예술품이 약탈당한 사연과 이를 되돌려 받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면서도 일본 정부와 경매회사인 마이니치옥션, 작품 소장자 등과 협의해 아무런 대가도 건네지 않고 이 작품을 돌려받았다고 밝혔다. 또 협상할 때는 늘 “약탈 예술품을 돌려주는 일이야말로 최상의 도덕적 윤리적 행위임을 강조한다”고 설명했다. 우리 문화재를 약탈해 간 일본이(물론 어느 개인이겠지만) 최상의 도덕적 윤리적 행위임을 폴란드 측에 과시했을 것을 상상해보니 역시 웃프기만 하다.
  • 일본, 나치가 약탈한 16세기 그림 ‘대가 없이’ 반환

    일본, 나치가 약탈한 16세기 그림 ‘대가 없이’ 반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폴란드에서 훔쳐간 16세기 이탈리아 그림이 지난해 일본 경매에 출품됐다가 폴란드에 반환됐다. AP통신에 따르면 31일(현지시간) 일본 도쿄의 폴란드대사관에서는 바로크 시대의 작가 알레산드로 투르치가 그린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 반환식이 거행됐다. 그림은 18세기 폴란드 귀족 스타니슬라브 코스트카-포톡키가 소장했고, 1823년 폴란드 쉐보르스크 귀족인 헨리크 루보미르스키의 소장 예술품 목록에 등장한 적 있다. 2차대전 때 나치가 약탈한 후 1990년대 말 미국 뉴욕 경매에서 팔렸는데, 그 뒤로 자취를 감췄다가 20여년이 지난 2022년 도쿄 경매에 다시 나타났다. 폴란드 측은 이 그림이 지난해 도쿄 경매에 출품된 사실을 알고 반환 교섭에 나섰고 일본 측은 대가 없이 작품을 반환했다. 피오트르 글린스키 폴란드 문화부 장관은 반환식이 있던 같은 날 자국 수도 바르샤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 정부와 경매회사인 마이니치옥션, 작품 소장자 등과 협의해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이 작품을 돌려받았다고 밝혔다. 이어 예술품이 약탈당한 사연과 이를 되돌려 받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아가타 모젤레프스카 폴란드 문화부 문화재반환국장은 다른 나라와 협상할 때는 늘 “약탈 예술품을 돌려주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도덕적 윤리적 행위’임을 강조한다”고 덧붙였다. 모젤레프스카 국장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점점 더 많은 약탈 물품이 경매에 나오고 있다”면서 “이는 예술품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고 작품 소유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작품이 무엇이고 어디서 왔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일본이 반환한 그림은 나치가 폴란드에서 약탈한 예술품 수만 점 가운데 하나다. 그림은 나치 약탈품 중 가장 가치 있는 예술품 521점 목록에 올라 있었다. 현지언론에 따르면 나치는 폴란드 점령 기간(1939~1945) 예술품 수만 점을 빼돌렸다. 폴란드 정부는 당시 잃은 약 600점의 예술품을 여러 나라로부터 반환 받았으나 다른 6만 6000점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 광화문 월대서 조선 전기 유구 확인

    광화문 월대서 조선 전기 유구 확인

    광화문 월대에서 조선 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구의 흔적이 발견됐다고 30일 문화재청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가 전했다. 유구는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잔존 시설물로, 지난달 언론공개회 이후 추가 조사로 발견했다. 이번 조사를 통해 조선 전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광화문 앞 공간의 퇴적양상과 활용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으로만 전해오던 광화문 앞 공간 활용의 물적 증거를 처음으로 확보한 것도 성과로 꼽힌다. 월대 하부 퇴적양상을 보면 조선 전기 문화층(14~16세기)과 조선 중·후기 문화층(17세기 이후), 월대 조성층(19세기)을 거쳐 근현대도로층(20세기)의 순으로 형성됐다. 전기 문화층은 사각형 석재 1매를 중심으로 석렬(돌로 열을 지어 만든 시설)이 배열된 양상이다. 조선 중·후기는 파괴가 심하고 민가의 흔적 등도 나와 임진왜란 이후 방치된 상황을 보여 준다. 연구소는 “월대와 같은 형식의 건축물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조선 전기부터 바닥에 돌을 깔아 축조하는 방식의 시설을 갖추고 다양하게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 “13세기 북유럽 건물 원형이 잘 보존된 탈린 역사지구를 보러 오세요”…스텐 슈베데 주한 에스토니아 대사 인터뷰 [헬로 월드]

    “13세기 북유럽 건물 원형이 잘 보존된 탈린 역사지구를 보러 오세요”…스텐 슈베데 주한 에스토니아 대사 인터뷰 [헬로 월드]

    <편집자 주> 지구촌 별별 이야기를 담는 나우뉴스는 외국인 오피니언 리더들의 눈과 입을 통해 세계의 다양하고 유익한 정보를 전하는 ‘헬로 월드’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는 유엔공식벤더로 인정받은 통역번역 전문법인 (주)제이엠 커넥티드 임지민 대표와 함께 진행합니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Tallinn)은 13~16세기 북유럽 무역 중심지로 구시가지(올드타운)에는 북유럽 중세시대 건물이 잘 보존돼 있습니다.” 스텐 슈베데(Sten Schwede) 주한 에스토니아 대사는 17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서울스퀘어 1층에 있는 에스토니아 비즈니스 허브에서 “에스토니아를 방문한다면 구시가지를 꼭 둘러봐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북유럽의 발트 3국 중 최북단에 위치한 에스토니아는 인구 132만명 국가로 전 국토의 3분의 1이 울창한 삼림으로 덮여있어 ‘유럽의 아마존’이라고 불린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의 옛 시가지는 중세시대 건물들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어 ‘에스토니아 탈린 역사지구’(Historic Centre of Tallinn)는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됐다. 구시가지 성벽 사이로는 1500년 완공 당시 세계 최고 높이를 자랑한 올레비스떼 성당이 있다. 에스토니아는 정보통신 강국이다. 에스토니아는 회사 설립, 은행계좌 개설, 소득세 신고 등을 인터넷으로 쉽게 처리할 수 있다. 영상통화 서비스 스카이프(skype)가 에스토니아에서 탄생했다. 에스토니아는 2014년부터 전세계 기업가들이 온라인으로 에스토니아에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전자영주권’(e-Residency)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슈베데 대사를 만나 에스토니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 에스토니아는 어떤 나라인가. - 발트해 연안에 있는 에스토니아는 한국과 매우 유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에스토니아 사람들도 크고 강력한 이웃 국가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때로는 힘겨운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에스토니아 영토는 역사적으로 덴마크, 독일, 스웨덴, 폴란드, 러시아가 지배했다. 에스토니아는 1918년에 독립을 이뤘고, 올해 독립 105주년을 맞이했다. 1940년부터 1991년까지 에스토니아는 소련(구 러시아)에 점령당했다. 독립 후 에스토니아는 다른 자유 국가들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1991년은 에스토니아와 한국이 함께 유엔 회원국이 된 해다. 양국 간의 활발한 교류는 같은 해에 시작된 셈이다. 양국 간의 접촉은 최근 5년 사이 많이 강화됐다. 2018년에는 케르스티 칼률라이드 에스토니아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에스토니아 정부가 서울에 대사관을 개설하기로 결정한 직후였다. 현재 주한 에스토니아 대사관은 서울 도심에 있는 서울스퀘어 빌딩에 있다. 같은 건물 1층 로비에는 에스토니아 비즈니스 허브 서울을 개소해 에스토니아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에스토니아 비즈니스 허브 서울은 에스토니아와 한국 기업 간의 접촉을 촉진하고 에스토니아를 여행을 홍보하기 위한 곳이다. ▷ 한국인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관광 명소는. - 에스토니아를 방문한다면 수도 탈린은 꼭 둘러봐야 한다. 탈린의 구시가지는 완벽하게 잘 보존된 중세 북유럽 무역 도시다. 탈린은 13~16세기에 중요한 무역 중심지로 발전했다. 오늘날 탈린의 구시가지에는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많은 레스토랑, 카페, 바, 미술관, 박물관, 상점이 있다. 타르투, 페르누, 나르바 등 다른 도시도 추천한다. 도시를 벗어나 자연을 경험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잘 준비된 하이킹 코스와 조직된 투어를 통해 숲과 습지를 탐험할 수 있다. 에스토니아의 자연은 야생동물로 가득하기 때문에 곰이나 조류 관찰을 할 수 있다. 에스토니아에는 2000개가 넘는 섬이 있다. 가장 큰 두 개의 섬인 사레마와 히이우마는 독특한 섬 문화를 가진 곳으로 꼭 방문할 가치가 있다. 추운 겨울에는 해빙 위에 설치된 공식 빙상 도로를 통해 운전을 해서 섬에 갈 수 있다. ▷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한국을 잘 알고 있으며 한국 문화는 에스토니아에서 점점 더 인기를 얻고 있다.  많은 에스토니아인들이 한국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집에서 한국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유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 한국에서 추천하고 싶은 관광지는 어디인가. - 에스토니아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수도 서울을 방문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한국의 동해안과 부산, 그리고 제주도를 추천한다.  ▷ 에스토니아와 한국 간의 교류를 더욱 활성화하려면. - 먼저 항공권 가격이 내려가서 더 많은 사람들이 양국을 방문할 수 있어야 한다. 항공업계가 정상화되면 양쪽 모두 관광객이 급증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 영화, TV, 소셜미디어를 통해 한국인들의 관심을 높이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한국 영화와 TV 업계는 탈린이나 에스토니아의 다른 지역에서 영화의 일부 또는 TV 시리즈의 에피소드를 촬영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에스토니아의 낭만적인 풍경들이 에스토니아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에스토니아에 대한 비즈니스 정보를 얻으려면. - 에스토니아 비즈니스 허브는 평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한다. 에스토니아와 비즈니스를 하고 싶은 분들은 비즈니스 허브를 방문하시거나 요청서를 보내면 된다. 또 한국인들에게 에스토니아의 전자영주권(e-Residency)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에스토니아 정부가 발행하는 디지털 증명서를 통해 글로벌 기업가들이 온라인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에는 약 2000명의 한국인이 참여하고 있다. 아래에는 스텐 슈베데 주한 에스토니아 대사와 인터뷰 원문을 함께 게재합니다.    Interview with Sten Schwede, Ambassador of Republic of Estonia embassy in Korea   ▷ Estonian history, culture, relationship with Korea. - Estonia has a very similar history to the history of Korea. Just like Koreans, Estonians too had to exist and at times make a hard effort to survive between much larger and more powerful neighbors in the region. Located by the Baltic Sea meant that the territory where Estonians lived was throughout the history ruled by Danes, Germans, Swedes, Poles and Russians. Finally nation’s independence was declared in 1918. So this year the Republic of Estonia celebrated its 105th anniversary. Between 1940 and 1991 Estonia was occupied by the Soviet Union. After regaining our independence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Estonia and other free nations could start again 32 years ago. 1991 is the year when both Estonia and South Korea became members of the United Nations. Active bilateral relations between the two countries started the same year. Since then contacts between our countries have intensified a lot, especially in the last 5 years. In 2018 the Estonian President Kersti Kaljulaid visited South Korea. Shortly after the decision was taken by our government to open our embassy in Seoul. Today, the Estonian Embassy in Seoul is up and running in the city center, at the legendary Seoul Square Building. In addition we have opened Estonian Business Hub in the lobby of the same building, which is open to everyone who might have interest to learn more about our country. The Estonian Business Hub Seoul is there to facilitate contacts between Estonian and Korean businesses and promote Estonia as an exciting travel destination.  ▷ Can you introduce tourists spots? - When visiting Estonia one should reserve time to explore country’s capital Tallinn. The old town of Tallinn is an exceptionally complete and well-preserved medieval northern European trading city. The city developed as a significant trading center in the 13th-16th centuries. Today Tallinn’s old town hosts many restaurants, cafes, bars, art galleries, museums, shops, loved by tourists. Other important towns worth exploring are Tartu, Pärnu and Narva. For those who want to get out of town and experience the nature there are forests and wetlands to explore with well-prepared hiking trails and organized tours. Estonian nature is full of wildlife, so one can for example do bear or bird watching. Estonia has more than 2000 islands. The two biggest islands - Saaremaa and Hiiumaa - with their specific island culture are definitely worth visiting. In cold winters you can actually drive to those islands over an official ice-road, that is set up on the sea ice.  ▷ How much Estonians know about Korea? - Estonians know Korea well and Korean culture is getting more and more popular in Estonia. Many Estonians drive Korean cars or use Korean technology at home. More and more young people learn the Korean language and are interested in studying in Korea.  ▷ What tourist destinations would you recommend in Korea? - I would recommended Estonians to visit your beautiful capital Seoul. Then your country’s East coast, but also Busan and the Island of Jeju.   ▷ What would make exchanges between Estonia and Korea more attractive? - First, flight ticket prices should go down, so more people can visit both countries. When the situation in aviation industry normalizes, then I’m sure we’ll have a spike in tourists both ways. Secondly, one way is to raise the interest among Koreans through film, TV, social media. The Korean film and TV industry should look into options of shooting part of a film or an episode in some TV-series in Tallinn or anywhere else in Estonia. There is plenty of romantic scenery in my country. From what we know that would help a lot in awareness raising about my beautiful country. Thirdly, the Estonian Embassy and the Hub should continue what we are already doing – promoting Estonia in Korea, making sure that every inquiry about Estonia is answered so people would like to visit, work or study in Estonia, or do business with Estonia.  ▷ Anything else you want to add? - Those who would like to do business with Estonia should send us a request or visit the Estonian Business Hub which is open on weekdays between 11am and 6pm. I also suggest Koreans to explore the possibilities offered by Estonia’s e-residency program. Around 2,000 Koreans have already joined the program.   진행 임지민 통번역사·JM커넥티드 대표 jc@jmconnected.co.kr
  • ‘토리와 로키타’에 힘이 돼준 브란두아르디 노래와 아프리카 자장가

    ‘토리와 로키타’에 힘이 돼준 브란두아르디 노래와 아프리카 자장가

    1980년대 성시완과 전영혁이 소개해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이탈리아의 음유시인 안젤로 브란두아르디(1950~)의 노래 ‘알라 피에라 델레스트(Alla Fiera Dell‘Est, 1976)’를 10일 개봉하는 장피에르와 뤽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 ‘로리와 토키타’에서 되풀이해 듣게 될줄 몰랐다. 큰 동물이 작은 동물을 때리고, 작은 동물은 더 작은 동물을 때리고, 이런 일이 무한 반복된다는 내용의 가사다. 15세기와 16세기 이탈리아인들이 세세손손 전해져 부르던 노래를 브란두아르디가 현대음악에 맞게 정리한 곡이다. 우리가 이민자를 업신여기고 차별하며 냉대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도 더 많은 권력을 쥔 이들에게 업신여김 당하고 차별 받으며 냉대 받고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를 전하고 싶은 것이다. 20세기 북미와 유럽으로 이주한 이탈리아인들이 자녀들에게 모국어로 가르친 노래인데 부모들은 빨리 적응하라고, 집에서는 모국어를 쓰게 하지 못했다. 대신 자녀들은 동물끼리 괴롭힘을 당하는 이 노래를 이탈리아 출신 친구들과 함께 부르며 이탈리아어를 잊지 않았다고 했다. 아프리카 출신 토리(파블로 실스)와 로키타(졸리 음분두)가 식당 손님들 앞에서 이 노래를 부르고 동전 몇닢을 챙긴다. 둘은 아프리카 출신 난민들이 이주 통로로 삼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의 람페두사 항구에서 이 노래를 배웠다고 영화에 그려진다. 로키타는 동생들 등록금을 재촉하는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주방장인 베팀의 마약 배달 심부름을 하고 그의 강권에 차마 못할 짓도 하게 된다. 단박에 큰돈을 쥐게 해주겠다는 베팀에 속아 3개월 동안 대마초 재배 시설에 갇혀 지낸다. 영악한 토리가 찾아오고, 결국 토리의 선택 때문에 참담한 운명에 맞닥뜨리게 된다. 난민선에서 만난 것으로 그려진 토리와 로키타는 친남매가 아닌데도 그 이상 뜨거운 남매애를 보여준다. 둘을 잇는 장치로 아프리카 자장가도 쓰인다. 토리는 로키타가 들려주는 자장가를 들으며 잠들곤 했다. 마약 재배시설에 갇힌 로키타를 찾아간 것도 누나의 노래를 듣지 않으면 잠들 수 없어 전화로라도 연결할 방법을 찾고 싶어서였다.첫 장면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로키타가 난민 심사를 받는데 첫눈에 봐도 이 소녀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는데 이를 최대한 숨기기 위해 공황장애가 있는 로키타가 진땀을 흘리는 장면인데 음분두는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장피에르 역시 형제가 이 장면을 영화의 결정적인 장면으로 꼽았다고 소개했다. 어딘가에 갇힌 인물이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가졌던 희망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예고한 것이었는데 관객들이 그 점을 깨닫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영화 내내 큰 덩치에도 소심하고 느려 폭력과 성적 학대에 쉽사리 노출되는 로키타와 작지만 영민하고 민감해 폭력에 반응하고 저항하는 토리를 대조하는데 둘의 연기 조화가 놀랍다. 요즈음 예술영화의 경향이 연기에 능숙하지 않은 이들을 기용해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는 것인데 ‘리턴 투 서울’의 박지민과 이 영화의 실스와 음분두도 멀지 않은 사례가 될 것 같다. 촬영 당시 실스는 12세, 음분두는 17세였다. 둘의 연기 호흡은 이 영화를 꼭 봐야 할 이유 중 첫째가 된다. 개인적으로 둘째는 막대한 제작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관객에게 진정한 감동을 안기는 방법을 다르덴 형제의 이 작품에서 배웠으면 하는 것이다. 두 노래가 온갖 위험과 시련에 무방비로 내던져진 둘의 우의와 단합에 촉매가 됐음은 물론이다. 형제 감독은 이 영화가 우의에 관한 것이라며 한국 관객들이 두 주인공과 친구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아래 당부를 남겼다. “한국에 도착하는 또다른 토리와 로키타 같은 이주 아동들의 친구가 되어주길 바란다.” 88분, 15세 이상 관람 가능
  • 英 국왕 대관식 앞두고 영연방 원주민 대표들, 찰스3세에 식민지배 사과 요구

    英 국왕 대관식 앞두고 영연방 원주민 대표들, 찰스3세에 식민지배 사과 요구

    영연방 12개국 원주민 대표들이 국왕 대관식을 앞둔 찰스 3세에게 식민 지배에 대한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3일(현지시간) 가디언에 따르면 앤티가바부다, 아오테아로아(뉴질랜드), 호주, 바하마, 벨리즈, 캐나다, 그레나다, 자메이카, 파푸아뉴기니, 세인트키츠네비스, 세인트루시아, 세인트빈센트그레나딘 등 영연방 12개국 원주민 대표는 ‘사과, 배상, 유물·유해 송환’이라는 제목의 공동 서한을 찰스 3세에게 보냈다. 서한에는 “6일 대관식에 맞춰 영국 국왕 찰스 3세에게 원주민과 노예 민족에 대한 대량학살과 식민지배의 끔찍한 영향을 인정할 것을 촉구한다”고 적혀 있다. 이 서한에 서명한 노바 페리스 전 호주 노동당 상원의원은 “왕실에게 힘든 대화일 수 있지만 변화는 경청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영연방은 영국 본국과 식민지였던 독립국 56개국으로 구성된 연합체로 이들은 영국 식민주의 유산과 결별하고 싶어한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던 대영제국은 16세기부터 담배·설탕·목화 등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노예를 활용하다가 이후 아메리카 등에 직접 노예를 수출하는 노예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생전 식민지배 시절 노예문제에 관해 사과하지 않고 사망했다. 리시 수낵 영국총리도 최근 영국 정부가 노예제도에 대한 영국의 역할에 대해 사과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다만 찰스 3세는 2018년 아프리카 가나를 방문해 “노예무역이라는 잔혹 행위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며 노예제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힌 적 있다.
  • [강희정의 아시아의 美] 천수각, 예상치 못한 전쟁의 산물/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강희정의 아시아의 美] 천수각, 예상치 못한 전쟁의 산물/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선발대가 부산을 공격함으로써 임진왜란이 시작됐다. 700척의 배를 타고 온 왜군은 하루 만에 부산성을 점령했다. 물밀듯이 북상하는 왜군의 기세에 눌려 4월 30일 선조는 피란길에 올랐으며, 5월 초에는 평양으로 도망갔다. 이맘때의 일이다. 1598년에야 비로소 명나라까지 참전한 동아시아의 전쟁이 막을 내렸다.전쟁은 조선 전역에 참혹한 상처를 남겼지만 전장이 아니었다고 해서 일본이 평온했던 것도 아니다. 전국시대의 혼란을 평정한 오다 노부나가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진 치열한 권력다툼을 거치며 막부가 득세했다. 권력을 잡은 쇼군과 다이묘들은 앞다퉈 자신들의 성을 지었다. 야트막한 구릉에다 성주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웅장하게 건설한 성은 무장들의 공간이다. 따라서 그만큼 투박하고 남성적이다. 우리나라 목조건물은 처마 모서리를 길게 빼서 지붕을 곡선적으로 만드는 게 특징이지만 일본의 성들은 지붕도 직선적이며 엄격해 보인다. 오다 노부나가가 세운 아즈치성이 16세기를 대표하는 성 건축이었지만 그의 몰락과 함께 소실됐다.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관광지인 오사카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것이다. 오사카성을 대표하는 천수각은 현대에 재건된 것이나 외형은 전통을 따랐다. 보통 3~5층 높이로 지은 천수각은 천수대라는 석축 위에 세운 목조건물이다. 천수각은 중국이나 한국, 베트남 등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일본 고유의 건축이다. 외관이 높고 화려하다 보니 천수각에 성주가 기거한다거나, 높은 탑이라고 착각하기 쉽다.하지만 천수각은 사방에 창을 두어 외부로부터 쳐들어오는 적을 감시할 수 있게 만든 방어용 누각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시야를 확보하고 전세와 전황을 파악해 전투를 지휘하기 좋게 만든 망루다. 일종의 군사시설인 셈이다. 그러니 그 내부는 밖에서 보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고, 어둡고 불편하다. 현재 남아 있는 천수각은 일본 전역에 12곳밖에 없으며,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이 효고현에 있는 히메지성이다. 외부를 모두 흰색으로 칠해 하얗게 보이기 때문이기도 한데, 층층이 올린 지붕이 날아가는 백로처럼 우아해 보인다고 해서 백로성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기와는 검은색인데도 강풍에 기와가 날릴까 봐 틈새에 모두 회반죽을 발라 천수각 전체가 흰색으로 보이는 것이다. 히메지는 에도, 즉 도쿄로 통하는 길목의 전략적 요충지여서 에도 막부에서 신경을 많이 썼던 곳이라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은 명의 몰락과 함께 동아시아의 정치·경제 지형을 바꿔놓았다. 저마다 제 나라 고유의 문화를 융성하게 만든 결과를 낳기도 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다 예측할 수는 없는 법이다. 특히 전쟁은.
  • [전문]尹 대통령 하버드대 연설

    [전문]尹 대통령 하버드대 연설

    윤석열 대통령은 28일 보스턴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연설을 했다. 이하 전문 자유를 향한 새로운 여정 자유를 향한 새로운 여정(Pioneering a New Freedom Trail) 케네디스쿨의 엘멘도프 학장님, 정치연구소 워렌 소장님, 그리고 세계의 미래를 이끌어 가실 여러분. 110년 전, 대한민국의 초대 이승만 대통령께서 조국의 독립과 미래를 꿈꾸며 공부했던 이곳 하버드 대학교에서 대한민국의 제20대 대통령으로서 연설하게 돼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저는 서울중앙지검장이던 2018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하버드 로스쿨 교수진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특히,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해주신 윌리엄 알포드 교수님은 자유와 연대의 가치를 설명해 주셨고, 하버드 장애인 프로그램을 예로 들며 약자와의 연대의 중요성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가 청년 법률가 때부터 가장 중요하게 여겨온 자유와 인권의 가치에 대해 한층 깊이 이해하게 됐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자유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곧 자유 수호와 자유 확장의 역사였습니다. 중세시대 신분의 질곡에서 해방돼서, 자기 자신의 인생을 자유롭게 창조해 나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걸어온 기나긴 여정이었습니다. 보스턴에는 ‘자유의 길(Freedom Trail)’이 있습니다.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개척자들이 자유를 이야기하고 토론을 벌이던 흔적이 그 길 곳곳에 묻어 있습니다. 이들이 자유민주주의 국가 미국의 기틀을 만들었고, 17세기에 성직자 양성 교육기관으로 설립된 하버드가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존 아담스, 존 핸콕, 이런 ‘건국의 아버지’들이 하버드에서 키운 자유에 대한 열망은 미국 독립선언서와 헌법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미국은 독립과 건국 과정을 통해 자유를 쟁취하고 확대해 나갔습니다. 건국 초기인 18세기 후반의 자유는 ‘레세페어(laissez-faire)’라고 불리는, “각자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는” 형태의 자유였습니다. 처음에는 국가 권력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시장이 다 좋은 것으로 여겨졌지만, 19세기 후반 ‘트러스트’라는 독점 대기업들의 횡포가 극심해지면서 결국 산업사회에서 독과점이 경제적 약자의 자유를 위협하게 된다는 사실을 미국인들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과 함께, 공정한 시스템에 대한 요구가 분출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1890년에 제정된 셔먼법은 자유의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셔먼법은 하버드 출신인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의 결단으로 강력히 집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재임 기간 중 40여 건의 트러스트를 기소하여 ‘트러스트 분쇄자(trust buster)’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기존의 자유방임에 ‘공정한 경쟁’, ‘공평한 기회’의 기회의 가치가 더해져 비로소 타인과 ‘공존’하고 ‘연대’하는 자유로 발전했습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할 때 바로 그 책임은 자유가 공존하기 위한 조건인 공정(fairness)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의 지배(Rule of law)는 자유의 공존 조건인 공정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정의 가치, 공정한 경쟁 원리는 미국 경제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뒷받침했습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자유의 역사는 태평양 너머 대한민국에도 뿌리를 내렸습니다. 1950년 한국이 공산주의 침략을 받았을 때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 국가들이 참전하여 함께 싸웠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대위는 하버드에서 라이샤워 교수의 지도로 동아시아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 6.25 전쟁에 지원하여 28세의 나이로 전사했습니다. 대한민국은 당시 그가 전사한 서울 녹번동 언덕에 추모공원을 건립하여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하버드인’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오신 쇼 대위의 손자 윌리엄 캐머런 쇼(William Cameron Shaw)와 그의 어머니(쇼 대위의 며느리) 캐럴 캐머런 쇼(Carole Cameron Shaw), 이 두 분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어디 계시는지요? Thank you. Thank you so much. We remember your family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하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조금 전 저는 하버드 추모교회(Memorial Church)에 들러서,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열 여덟 분의 졸업생들을 추모했습니다. 이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대한민국은 자유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자유를 빼앗으려는 공산 전체주의 세력의 불법적인 시도를 저지하고 억제할 수 있었습니다. 올해로 70년을 맞이한 한미동맹은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고 번영을 일구어 온 중심축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시민의 자유 수호를 위한 안전판의 상징이었습니다. 그제 저는 바이든 대통령과 ‘미래로 전진하는 행동하는 동맹’의 비전을 담은 공동성명을 채택했습니다. 한미동맹은 단순히 이익에 따라 만나고 헤어지는 편의적 계약관계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가치동맹’입니다. 지속가능하고 회복력 있는 동맹,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정의로운 동맹입니다. 하버드 학생과 교수진 여러분 지금 전 세계를 돌아보면 우리가 땀과 희생으로 지켜온 자유와 민주주의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고,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공동체의 의사결정 시스템입니다. 민주주의는 진실과 자유로운 여론 형성에 기반하는 것입니다. 허위 선동과 거짓 뉴스가 디지털, 모바일과 결합해서 진실과 여론을 왜곡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자유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AI 기술이 상황을 더 심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는 상식과 진실, 그리고 양심으로 대표되는 지성에 기반하는 제도입니다. 거짓 선동과 가짜뉴스라는 반지성주의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위기에 빠뜨립니다. 조직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흔들고 위협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바로 독재와 전체주의 세력입니다. 그리고 이들 편에 서서 이익을 취하려는 세력도 있습니다. 이들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용기와 연대가 필요합니다. 자유의 열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강력한 연대입니다. 국제적 연대도 필요합니다. 자유는 평화를 보장합니다.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과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나라는 다른 사람의 자유, 다른 나라의 자유를 존중합니다. 국제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자유, 다른 나라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종종 힘에 의한 현상 변경 시도로 나타납니다. 국제사회에서는 이를 국제법 위반으로 규정합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이 1년이 넘었습니다. 국제법을 위반한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자유와 인권이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대한민국은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자유 수호를 위한 인도적, 재정적 지원을 계속 확대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자유를 무시하는 ‘힘에 의한 현상 변경 시도’는 국제사회가 용기 있고 결연한 연대로서 대응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시도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시키고 앞으로 이런 시도를 꿈꿀 수 없게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무시하는 독재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태도는, 바로 그 결정판을 북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북한의 불법적인 핵무기 개발과 핵 협박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주변국, 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체주의적 태도는 필연적으로 북한 내 참혹한 집단적 인권 유린 상황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지난달 최초로 북한 인권 실상 보고서를 공개 출간했습니다. 500여 명의 탈북자 증언에 기반한 보고서는 남한 드라마를 보았다는 이유로, 성경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공개 총살당한 끔찍한 사례들을 담고 있습니다. 인권의 개선은 그 실상의 공개에서 출발합니다. 국제사회의 폭넓은 인식과 각성이 상황의 개선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결국 세계 어디서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심각한 도전은 바로 독재와 전체주의에 의해 이뤄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이들은 민주 세력, 인권운동가 등으로 위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늘 경계하고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자유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자유의 전당 하버드 대학의 학생과 교수진 여러분, 자유는 혼자 지킬 수 없습니다. 자유를 위협하는 세력에 맞서기 위해서는 힘을 합치고 연대해야 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미국이 가장 사랑하는 하버드 출신 정치인 John F. Kennedy 대통령의 1963년 서베를린 연설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영어로 짧게 얘기하겠습니다. “Freedom is indivisible, and when one man is enslaved, all are not free” 자유를 위협하는 세력은 공동체 안에도 있고 공동체 밖에도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의 자유도 소홀히 취급된다면 그 공동체는 자유 사회가 아닙니다. 자유 사회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자유인이고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자유를 누리는 데에는 일정한 경제적, 문화적 여건이 필요합니다. 자유를 누리는데 필요한 여건은 자유 시민들이 함께 연대해서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와 연대는 그 개념이 서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유가 없이 누군가에게 지배당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연대라는 개념 자체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것으로 보이는 현상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명령에 의한 것입니다. 하버드인 여러분, 지금은 디지털 시대입니다. 우리는 이제 디지털 시대의 자유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합니다. 인류는 16세기 대항해(大航海) 시대에 봉건시대의 신분 질서에서 벗어나근대적 의미의 직업과 소유권, 자유계약의 질서를 구축했습니다. 20세기 초에 미국은 자유방임이 양산할 수 있는 불공정을막고자 독과점과 싸우면서 공정한 시장 질서를 정착시켰습니다. 이제는 디지털 심화 시대에 맞춰 새로운 규범과 질서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디지털 기술로 인해 막대한 양의 정보가 쉼 없이 생산되고 공유되고 있습니다. 그 덕에 인류의 삶은 한층 편리하고 풍요로워졌습니다만,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는 부작용도 초래되고 있습니다. 자유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국가권력이 디지털 기술을 악용하는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오.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되고, ‘디지털 전체주의’로 인한 폐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유를 침해하는 디지털 기술의 악용은 전 세계 자유시민이 연대하여 이를 막아야 합니다. 저는 작년 9월, 뉴욕대학에서 ‘디지털 자유시민을 위한 연대’를 촉구하는 ‘뉴욕 구상’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 핵심은 디지털 기술과 서비스의 향유를 인류의 보편적 권리로 규정하고 디지털 시대가 지향해야 할 비전을 제시한 것입니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디지털 질서가 정당성, 통용성, 지속가능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 질서와 규범이 세계시민의 자유와 후생을 극대화하고 공정한 기회가 보장되어야 하며, 특히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국제사회도 함께 연대해야 합니다. 디지털 선도국은 디지털 기반이 미흡한 나라를 교육과 시스템 지원 등으로 도와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보편적 정의에 터 잡은 공정한 디지털 질서가 국제사회에 구축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아울러 디지털 ODA도 확대하여 디지털 기술과 문화의 향유를 세계시민들이 공유하게 노력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하버드인들도 그 연대와 협력에동참해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오늘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그보다 한 사람의 자유인으로서, 자유의 전당 하버드에서 여러분과 자유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오래오래 기억할만한 영광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 그 시대 감정 따라가니 역사도 다르게 보이네

    그 시대 감정 따라가니 역사도 다르게 보이네

    루터는 1529년 작성한 ‘소교리 문답’에서 십계명 구절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반복한다. 당시 독일은 ‘신성한 공포’가 지배했다. 공포는 신의 전유물이었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의 사사로운 공포는 엄격히 통제됐다. ‘분노’ 역시 신의 감정이었다. 제후만 쓸 수 있었고, 일반인의 분노는 ‘광기’로 봤다. 그러나 종교 전쟁의 시대였던 17세기부터는 변화가 감지된다. 이 시기 한 궁정인의 일기에는 이전 시대에서 볼 수 없던 슬픔, 사랑에 대한 직접적 표현이 거침없이 등장한다.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감정을 통해 살피는 방법은 2000년대 들어서야 활발해졌다. 그동안 사람들의 감정은 역사와 큰 연관이 없는 개인의 것으로 여겨졌다. 동아대 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16세기부터 1970년대까지 여러 사료를 들추며 독일의 감정사를 살핀다. 저자에 따르면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감정은 종교와 결합해 도덕공동체 수립의 핵심 기제로 작동했고, 19세기에는 경제의 영역으로 이동해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활용됐다. 과거 노동은 ‘징벌’ 개념이 강했지만, 자본주의가 힘을 얻으면서 ‘기쁨’이라는 감정으로 점차 바뀌었다고 지적하는 부분은 새롭다. 1911년 노동자들의 영혼을 돌본다며 사회복지사가 배치된 사례는 이런 점에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신경쇠약이 염려되는 상황에 출동했는데, 감정이 노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여러 자료를 살핀 저자는 시대에 따라 중요하게 여기던 감정이 바뀌고, 부정적인 감정에 대응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감정의 역사를 살피다 보면 지금의 내 감정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된다. 내 감정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이 시대의 흐름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 성찰하는 일은 지금의 역사를 바라보는 한 방법일 터다.
  • ‘화포전술’ 경험 살려 충무공 도와… 관직 떠난 80세에도 한산도 진중에[서동철의 임진왜란 열전]

    ‘화포전술’ 경험 살려 충무공 도와… 관직 떠난 80세에도 한산도 진중에[서동철의 임진왜란 열전]

    정걸(丁傑·1514~1597) 장군은 1592년 당시 우리 나이로 79세였다. 이듬해에는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행주대첩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앞서 정걸은 1591년 이순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의 조방장이 됐다. 조방장(助防將)이란 글자 그대로 주장을 돕는 참모장이다. 정걸이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오른 것은 20년 전인 1572년이다. 이순신이 무과 별시에 말에서 떨어져 낙방한 바로 그해다. 1577~1578년에는 전라좌수사였다. 이순신은 대선배 정걸을 존경했고, 그의 수군 운용 경험을 배우려 노력했던 것 같다. 그렇게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왜수군을 압도할 수 있었던 배경에 정걸이 있었다.정걸이라는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555년(명종 10)이다. 5월 11일 왜구가 70척 남짓한 선박으로 전라도 남해안에 침입했다. 왜구는 해남의 달량포와 이진에 몰려들어 성을 포위하고 장흥, 영암, 강진 일대를 휘저었다. 을묘왜변이다. 전라도병마절도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이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은 포로가 됐다. 원적은 죽기 전 왜구에 항복할 뜻을 밝혔으니 조정은 치욕스러웠다. 왜구는 이덕견을 놔주며 들려 보낸 서신에서 모욕적인 표현으로 군량미를 요구하기도 했다. 조정은 결국 “얼마나 비굴하게 목숨을 애걸했느냐”면서 이덕견을 참형으로 다스렸다.●을묘왜변 평정 공헌, 부안현감에 올라 조정은 이준경을 전라도도순찰사로 임명해 토벌 작전에 나선다. 이준경은 “환란이 있어도 진장(鎭將)이 살해된 적은 있었지만 주장이 죽은 일은 없었다. 직접 나주로 먼저 가서 군마를 점검하고 싶지만 혹시 늦어질까 염려된다”면서 “군관 김세명과 정걸을, 숙배(肅拜)를 생략하고 먼저 내려보내 각 고을로 하여금 군마를 정돈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서울을 떠나 임지로 가는 관원이 임금에게 부임인사를 하는 것이 숙배다. 새로운 지휘부가 현지에서 전열을 새롭게 갖추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지역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무장을 다급하게 물색했고, 그 결과 정걸과 김세명이 천거된 것이다. 정걸은 1553년 평안도 지역 병마만호에 임명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을묘년 전라도 왜구 방어에 다급하게 투입됐을 당시는 북방이 아닌 고향에 머물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진도 출신 김세명은 1554년 흑산도에서 왜선을 나포하고 왜구를 참해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왜구는 녹도전투에서 참패하고는 물러났다. 명종실록은 ‘녹도에서 포위를 푼 뒤 왜선 28척이 금당도로 물러갔는데 6월 3일 전라도좌방어사 남치근이 병사·수사와 함께 전함 60척 남짓을 셋으로 나누어 추격하자, 왜선 26척이 먼저 패주하고 2척은 그 뒤를 막으며 대항했다. 우리 군사들이 난사하자 왜적이 거의 모두 화살에 맞아, 한 배에 합쳐 타고 다른 한 척은 버리고 도망갔다’고 적었다. 정걸·김세명의 활약이 뒷받침됐음은 물론이다. 정걸은 와중에 남도포 수군만호에 임명된다. 지금도 남도진성이 남아 있는 진도남단의 남도포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최전선이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에 쫓긴 삼별초가 항쟁하기도 했다. 정걸은 상황이 진정된 이듬해 완도 가리포첨사로 승진한 데 이어 부안현감에 오른다. 을묘왜변을 평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을묘왜변은 조선 수군의 무장과 전술에서 변화가 일어난 계기가 됐다. 조선 전기 수군의 주력은 대형 맹선(猛船)이었다. 판옥선처럼 바닥이 평평한 맹선은 기동력이 떨어졌다. 반면 조선을 침범한 왜구의 배는 빠른 소형선이어서 우리 전선도 소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결과 수군은 1510년(중종 5년) 이후 맹선을 조운선으로 돌리고 비거도선(鼻居刀船)과 포작선(鮑作船)을 주력전선으로 삼게 된다. 빠르기는 했지만 비거도선은 불과 4~5명이 탈 수 있었고 포작선은 고기잡이배와 다르지 않았다.●무기·전술의 개선·성과 전장에서 경험 왜변 당시 왜구의 배는 과거보다 훨씬 커진 데다 방패막이까지 둘러 대적하기가 버거워졌다. 무엇보다 전통적으로 왜구의 주력전술은 칼과 창을 이용한 단병접전이었는데, 조선은 수군이나 육군 모두 활이 주력 개인 무기였다. 해전에서도 일단 아군 전선에 오른 적에게 힘을 쓰기가 어려웠다. 적선이 크고 높아지면서 적이 우리 소형 전선에 뛰어들기는 더욱 쉬워졌다. 이런 판단에 따라 대맹선(大猛船)보다 큰 판옥선이 본격 건조되기 시작했다. 판옥선은 많게는 300명 이상의 승조원이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전선이 대형화하면서 무게가 많이 나가는 화포도 10문 이상 장착할 수 있게 됐다. ‘지봉유설’에는 ‘우리 전함은 제도가 굉장하다. 왜선 수십 척이 우리 전선 한 척을 당하지 못한다’고 했다. 판옥선은 90명 남짓 타는 일본의 대선 안타케부네(安宅船)보다 강력했다. 적이 오르지 못하는 대형 전선에서 거리를 두고 화포로 공격하는 조선 수군의 전술은 이렇게 태어났다. 판옥선 건조와 대형 화포 탑재, 전선과 무장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전술의 고안을 모두 정걸의 공로로 돌리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 하지만 수군의 변화는 16세기 중반 이후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그렇다 해도 결정적 변화의 계기는 을묘왜변이었고, 정걸은 그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정걸은 왜구의 침범 양상 변화에 따른 조선 수군의 무기 체계 및 전술 개선의 필요성과 그 성과를 실제 전장에서 체득했다. 수군 경력이 많지 않았던 이순신에게 정걸이 쌓은 경험은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정걸이 임진왜란 첫 접전인 5월 7~8일 옥포·합포·적진포 해전에 나섰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3차 출전인 7월 8일 한산도대첩에도 출전 기록은 없다. 2차 출전인 5월 29일~6월 5일 사천·당포·당항포 해전에서는 ‘정걸을 흥양현에 머물러 지키면서 계책에 맞게 호응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 나온다. 1·3차 출전에서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고령이 이유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정걸은 9월 1일 부산포해전에 나섰다. 전라좌우수군과 경상우수군이 모두 참여한 통합수군이었으니 정걸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걸은 조정에서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장수였던 것 같다.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100세 노인과 다름없는 80세의 정걸이 1593년에 접어들면서 충청도 수군절도사에 기용된 것에서도 드러난다. 앞서 전라좌수군의 조방장으로 부른 것도 이순신이 아닌 조정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정걸과 충청수군에 주어진 역할은 한강 하구를 중심으로 왜수군의 준동을 막아 평안도에 머물던 선조의 안전을 도모하면서 도성 탈환에 힘을 보태는 것이었다.●삼도수군통제영서 이순신 고문 역할 이 시기 정걸의 가장 큰 공로는 행주산성전투의 승리에 기여한 것을 들어야 한다. 선조실록에는 전라도 고산현감 신경희가 전황을 알리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기병과 보병이 섞인 적이 들판을 뒤덮었는데 숫자를 알 수 없었다. 적군이 진격해 물러가기를 8∼9차례나 했다. 화살이 떨어져 가는데 마침 정걸이 화살을 운반해 와서 위급을 구해 주었다”고 했다. 3만의 왜군이 몰려든 행주산성에서 권율 장군이 이끈 조선군이 마지막에는 부녀자까지 나서 돌팔매로 적을 막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정걸이 수군 전선으로 공급한 화살이 없었다면 행주산성 전투의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정걸의 충청수군은 한강을 더욱 거슬러 올라가 2월 15일에는 왜군 2만이 몰려들어 진을 치고 있던 용산창(龍山倉)으로 접근해 포사격을 가하기도 했다. 당시 사헌부는 “경성을 수복하는 시기를 놓치지 말라”고 청하면서 문제점의 하나로 ‘적을 죽이거나 막을 책임을 수백 명에 불과한 정걸의 피곤한 병사들에게 맡기는 것’을 들고 있다. 당시 한강에 진입한 충청수군의 전선 규모는 기록이 없지만 판옥선 3척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정걸이 노익장을 과시한 충청수군의 역할은 인상적이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정걸이 관직에서 떠나 있던 시기에도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영에 머물며 이순신의 고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1594년 선조실록에는 ‘전 수사 정걸은 80세의 나이에도 나라 일에 힘을 바치려고 아직 한산도 진중에 머물러 있다고 들었다. 이 사람에게도 은사가 내려진다면 군사들도 필시 감동할 것’이라고 비변사가 상주한 내용이 나온다. 정걸의 자는 영중(英中), 호는 송정(松亭)이다. 1544년 무과에 급제했다.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1595년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 여름 세상을 떠났다. 전남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의 안동사(安洞祠)에 배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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