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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세기 유럽 대가전」/바로크회화 흐름 한눈에

    ◎서울 워커힐미술관서 10일까지 열려/파리 세피아갤러리 소장품 옮겨 소개/29명의 유화 32점… 절반이 「루브르」 전시작가 현대 작가 일색의 요즘 전시회를 보다보면 과거에의 막연한 복귀욕구를 느낄 때가 가끔 있다. 서울 워커힐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17세기 유럽미술대가전」(10일까지)은 그런 측면에서 색다른 감상 기회를 제공하는 전시회로 비쳐진다. 특히 이 전시회는 파리 소재 세피아갤러리 소장 작품들을 국내에 옮겨 소개하는 것으로 최근 파리의 미술계 동향에 발맞춰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볼거리로 꼽히고 있다. 세계 미술계의 바로미터격으로 평가되는 파리에서는 3∼5년전부터 탈아방가르드를 표방하는 바로크회화(1600∼1750년)의 재현이 두드러지고 있는 흐름이다.이같은 경향은 영감보다는 기술적이고 감각적인 효과만을 강조하는데 염증을 느껴 고전적인 바로크시대 대가들에 대해 집착하는 재발견현상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이같은 흐름을 맞고 있는 파리 세피아갤러리의 소장작품 가운데 17세기 북유럽파 바로크회화작품을 추려 선보이고 있는 것.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등 당시 바로크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29명이 소개되고 있는데 절반정도가 루브르박물관 전시작가들로 정물 인물 풍경 해양 동물등 당시 서양화가들이 즐겨 택하던 주제들을 망라해 32점의 유화가 선보이고 있다. 국내 처음 등장하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안토니 반 딕을 비롯해 루돌프 바크화이전,얀 뵈헐,크리스토프 폰 벰멜,야콥 에슬런스,뢸로프 쾨츠,야콥 바우타츠,아브라함 고베르츠,마테이스 스후파르츠,라파엘 캄프화이전,얀 브뤼헐2세,아브라함 더 페르비어,아고스티노 부오나미코 타시,살로몬 판 롸이스달,루란트 사퍼레이,야콥 흐리머르,루이 드 코르리,니콜라 길리,발타자르 베샤이,얀 반 스코렐,그리고 크리스티안 얀스 스트리프,얀 밥티스트 람브레히츠,아브라함 베게인,아드리안 베일터마커르,루이 테시에,요한 크리스티안 블레르트도 눈에 띈다. 이 가운데 16세기 한국등 아시아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벌인 성 프랑수아 자비에트 예수교 신부를 소재로한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대형 스케치화 「성 프랑수아 자비에의 기적」과 동판위에 그린 화병그림으로 유명한 니콜라 길리의 작품중 유일하게 서명이 있는 화병그림은 가장 눈길을 끌고 있다.또 얀 브뤼헐의 알레고리화와 안토니 반 딕의 귀부인 스케치화(미국 워싱턴 DC 국립미술관 소장 귀부인 초상화와 동일인물)도 관심있는 감상가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종교적 소재를 비롯,다양한 주제를 다룬 이 전시는 모처럼 바로크시대 대가들의 숨결을 느낄수있는 값진 자리가 될것 같다.
  • 잉카문명의 스승/시칸문명유적 페루서 대량발굴

    ◎8∼14세기 황금왕관 등 2백50점/에메랄드가면은 화려함의 극치 멕시코와 과테말라를 중심으로 한 마야문명과 함께 중남미 고대문명의 양대산맥인 잉키문명은 15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남아메리카의 중앙 안데스지방인 페루 등에 번성했던 인디오문명이다.그러나 잉카의 유적은 대구모인 데다 잉카문자가 없는 탓으로 고고학자들에 의한 유적발굴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그나마 잉키문면의 연구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는 고작 16∼17세기에 스페인인들이 남겨 놓은 기록이 전부여서 그 이전의 유적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뿐 발굴작업은 엄두도 못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잉카문명 이전인 8∼14세기에 걸쳐 남미페루에 번성했던 것으로 알려진 「시칸문명」의 유적이 대량으로 발굴돼 고고학계의 큰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이번에 유적이 발굴된 고은 남미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북방으로 약 8㎞ 떨어진 바탄구란데로 거대한 묘에서 출퇴된 왕으로 추정되는 미라와 황금으로 된 왕관,의식용 창등을 비롯해 부장품이 무려 2백50여점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 부장품들은 오는 9월 도쿄 근처 우에노의 국립박물관에서 일반에 선보일 예정인데 「시칸발굴전」을 주최하고 있는 일본의 방송사 TBC가 그 가운데 일부를 최근 선부였다. 물론 그동안 잉카문명이전의 고대문명이 발굴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페루 해안지방에 걸쳐 있는 세친·챤찬유적,파차카마크 신선등이 모두 고대유적등의 대표적인 것들이다.그러나 이번 시칸문명의 발굴은 해안이 아닌 내륙지방의 유적발굴이어서 앞으로 내륙지방의 유적발굴이 활기를 띨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발굴된 유적물들은 대대분 철제가 아닌 금·은·동으로 장식돼 있어 잉카문명의 특징과 큰 차이가 없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한마디로 화려한 황금으로 채색된 인디오문명의 재발견인 셈이다.특히 발굴품 가운데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왕으로 추정되는 피장자의 얼굴에 부착된 가면.가로 46㎝ 세로 29㎝로 21개의 황금 판제로 된 가면표면은 붉은색으로 도색돼있고 눈부분은 은판위에 에메랄드가 입혀져 있어 잉카문명이전의 화려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이같은 사실을 접한 고고학계에서는 지리적으로 볼때 시칸문명의 유적발굴은 시마다 이즈미 남일리노이 대학교수팀의 끈질긴 발굴·연구작업 끝에 빛을 보게 됐다.이들은 바탄구란데 지방의 아열대삼림지대에서 지난 80년대부터 10년이상 피라미드군을 집요하게 추적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90년 미·일·영·페루등 6개국은 8∼14세기에 번성했던 잉카문명이전의 유적을 찾기 위해 「시칸문화학술조사단」을 구성해 이들과 공조한 것이 이같은 성과를 얻어내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고쳐쓴 한국 근·현대사」 출간/고대 강만길교수의 2권의 개정판

    ◎초판 10만부 팔려 현대고전 평가/「…현대사」/5∼6공화국·문민정부 출범까지 서술/「…근대사」/문호개방이후 사회경제사 대폭 보강 한국사의 근·현대사 부분을 다룬 개설서가운데 대표적인 책의 하나가 강만길 고려대교수의 「한국근대사」와 「한국현대사」다.지난 84년 첫판이 나왔을 때 「한국현대사」는 학계에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역사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동시대사를 다루지 않는다는 「금기」를 깨고 82년까지를 서술했다든지,「8·15」광복이후의 한국사를 「분단시대」로 규정한 것등이 당시로서는 새로운 시도였기 때문이다.그러나 일부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책들은 판을 거듭하며 10년동안 10만부가 넘게 팔려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그 책들의 개정판인 「고쳐 쓴 한국근대사」「고쳐 쓴 한국현대사」두권이 최근 나왔다(창작과 비평사 간). 강교수는 「고쳐 쓴 한국현대사」에서 문민정권의 출범까지를 서술했다. 그는 전두환정권을 『전투경찰이 크게 강화되어 경찰국가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했으며』『임기가 끝난대통령이 2년간이나 절간에 「유폐」될 정도로 국민의 지지도가 낮았다』고 평가했다. 또 노태우집권기를 『사회주의권의 변화,「7·7선언」,서울올림픽 개최등을 계기로 「북방정책」을 본격화해 동구권및 소련·중국과의 수교를 이루었으며 유엔에의 남북동시가입도 달성한 시기』로 보았다.강교수는 그러나 북방정책및 유엔가입을 『현실적으로 김일성정권에 대한 「고립화」정책』으로 판정했다. 따라서 민족의 평화통일로 가느냐,또는 「두개의 한국」의 고정화로 이어지느냐는 『30년만에 성립된 문민정권의 대북·민족통일정책의 추이에 달렸다』고 밝혔다. 16세기부터 한일합병까지를 다룬 근대사 부분에서는 문호개방 전후의 사회경제사가 대폭 보강됐다.
  • 미에 한국 고서 3천책 있다/유일본 16세기 학림옥로등 4백51종

    ◎문화재관리국,화포도 2점 확인 16세기 초에 인쇄된 국내 유일의 전적 「학림옥로」를 비롯한 전적류 4백51종 2천9백43책과 화기류 2점이 미국 의회도서관과 해군사관학교 및 해병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문화재관리국은 7일 지난해 11월 22일부터 한달동안 문화재전문위원 등 관계 전문가 4명으로 구성된 「미국 소재 우리 문화재 조사단」을 현지에 보내 이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이 조사단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미의회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우리 문화재는 유물의 성격에 따라 한국과에 고려사등 4백9종 2천8백56책,법률자료과에 경국대전등13종 43책,지도과에 고지도 29종 43책등 모두 4백51종 2천9백43책이다. 이들 유물은 15세기의 갑진자에서 정·순조년간의 정이자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활자본을 지니고 있고 목판본,필사본등 여러 종류의 완질본이 여러점 포함돼 있어 전적문화재와 당시 인쇄문화 연구에 활용가치가 큰 것들이다.
  • 종말과 영생(외언내언)

    한글사전은 「사이비」를 「겉은 제법 비슷하나 속은 다름」이라고 풀이하고 있다.따라서 사이비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종교의 탈을 쓴 범죄적집단이다.허무맹랑한 교리를 내세워 신도들을 현혹한다.그대표적인 교리가 「종말론」이다. 종말론 자체는 그릇된 교리가 아니다. 그러나 사이비교주들은 이것으로 위기의식을 강조하면서 영생을 약속하는 혹세무민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종말론의 뿌리는 깊다.2세기중반 초대교회때의 몬티누스가 선두주자이고 12세기의 요아힘피오레,16세기의 재세레파,19세기의 윌리엄밀러,20세기의 찰스 다이어등이 그뒤를 이었다. 종말론은 초대교회때의 기독교박해,십자군원정,세계대전등 당시의 긴박하고 어려웠던 시대상황을 대변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20년,50년,75년,87년,92년등 여러차례 소동을 일으켰다.87년 32명이 집단자살의 참극을 빚었던 구원파의 오대양사건은 온세상을 전율시켰고 92년에는 다미선교회가 신도들에게 학업과 생업을 버리도록 강요하고 가정을 파괴하는등 반사회적행위를 해 교주가 구속되기도했다. 신도들로부터 3억5천만원을 갈취한 혐의로 12일 구속된 영생교 조희성교주도 종말론으로 신도들을 현혹했다. 그는 『곧 세상의 종말이 온다.「동방의메시아」 「구세주」 「이긴자」인 나를 믿으면 영생을 얻을것』이라고 외치면서 재산을 갈취했는가 하면 기혼자에게는 이혼을 강요하고 미혼자에게는 결혼을 못하게 하는등 어처구니없는 사기극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영생교말고도 얼마나 많은 사이비종교가 있고 희생되고 있는 신도들은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이 없다.검찰은 이번사건을 계기로 종교의 탈을 쓴 범죄집단의 뿌리를 뽑아주기 바란다. 또 우리 종교지도자들도 종말론같은 그릇된 신앙형태가 나오는데에는 자신들의 책임도 크다는 것을 통감해야 할 것이다.
  • 원주민 차별·나프타 부작용서 발단/멕시코 농민폭동 왜 일어났나

    ◎4일째 1백여명 사망… 장기화 조짐/농산물 수입땐 영세농 몰락 위기감 새해 첫날 일어나 4일째 계속되고 있는 멕시코 치아파스주 농민폭동은 4일 일단 소강국면에 접어들었으나 장기화될 전망이다. 이 폭동으로 현재까지 정부군과 폭동에 가담한 농민등 모두 1백여명이 숨졌고 치아파스주내 일부 시청사등 공공건물·상가 수십여채가 불에 탄 것으로 집계됐다.일부 도시에서는 토지분규로 수감돼 있던 원주민 죄수들이 탈옥하는등 무정부상태의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원주민 농민들은 한때 주내 6개도시를 점령했었으나 현재는 라스 마르가리타스시·차날시등 3개도시를 장악하며 정부군에 맞서고 있다. 자칭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주도로 이뤄진 이번 봉기는 멕시코정부의 오랜 대원주민 차별정책과 빈곤에다 1일 발효된 나프타(북미자유무역협정)가 불을댕겨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즉 빈곤속에 푸대접을 받아온 원주민들이 나프타의 발효로「공동체해체」라는 위기감이 증폭돼 일어난 것이다. 폭동농민들은 지난1일자로 된 성명에서 『멕시코정부가원주민에게 저지른 범죄에 저항해 봉기했다』고 밝힐 정도로 각종 정책에서의 소외감을 지적했다.한편으로 농민들은 값싼 농산물이 밀려오면 소규모 영세농인 자신들이 어디든 쫓겨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이들이『나프타는 남부 멕시코 원주민들에게 사망선고를 내린 것』이라며 정권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이다. 폭동이 일어난 치아파스주는 빈부격차가 심하고 토착종교와 카톨릭간의 종교,인종갈등이 깊은 지역.과테말라와 함께 마야문명을 꽃피운 곳이어서 전체주민 2백만명가운데 절반가량이 원주민 인디오들이다.토착민들은 산악과 정글이 많은 탓으로 경작할 땅을 놓고도 종족간의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주민들가운데 25%는 아직 스페인어대신 토착어를 쓰고 있고 약 30%가 문맹자로 파악되고 있으며 걸핏하면 「박해」「차별」을 이유로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어왔다. 폭동을 주도한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의 규모는 2천여명 정도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고도의 훈련을 받은데다 정규군이상의 무장을 하고 있어짧은 시간안에 진압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대부분 치아파스주의 젊은 원주민 농민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이름에서 보듯 이들은 멕시코의 혁명영웅이며 농민군지도자였던「사파타」의 이념을 따르고 있는데 에밀리오 사파타는 1911년 멕시코 혁명에 참가,빈농과 공동체 농민에 대해 토지재분배를 규정한 「아야라계획」을 멕시코헌법정신에 관철한 인물이다.따라서 이들이 최대요구사항은「토지의 무상분배」로 요약해볼 수 있다. 16세기 초반 스페인의 정복자 코르테스 이후 4세기간 반복되고 있는「정복자」와「원주민」사이의 반목의 역사청산은 나프타이후 멕시코정부의 경제성공여부에 달려있으나 쉽게 이뤄지기 힘들거라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 국내최고 목판지도 발견/16세기 후반에 만든 「동국주현도」

    ◎8도 한눈에… “독도는 우리땅” 입증 국내에서 제작된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목판본 전국지도가 발견됐다. 삼성출판박물관은 7일 16세기 후반에 제작된 「동국주현도」를 공개했다. 이 지도는 가로32㎝·세로47㎝ 크기이며 조선중기 당시의 지방행정 조직인 8도,3백30개 주현을 모두 표시하고 있다. 더욱이 우산도(독도)를 비롯 울릉도·대마도·일본등의 위치를 정확하게 표기한데다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명확히 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지도를 고증한 이상태박사(국사편찬위원회)는 『1540년이후에 설치된 경상도 가덕진과,1600년에 사라진 전라도 진원현의 이름이 함께 표기돼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지도는 16세기 후반에 만든 것임을 알수 있다』고 밝혔다. 삼성출판박물관측은 「동국주현도」에 대해 문화재 지정을 추진할 예정이다. 국내에서 만들어진 목판본 지도로는 1531년 제작된 「동람도」에 대한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을뿐 전해지는 것으로는 「동국주현도」가 가장 오래된 문화재다. 삼성출판박물관은 「동국주현도」를 포함,백두산사진과 지도등 관련자료 2백40여점을 「백두산자료 특별전」이란 이름으로 오는 28일까지 박물관 전시장에서 전시할 예정이다.
  • 평화무드속 긴장의 도시(평화 싹트는 중동:6)

    ◎동예루살렘 소유권 팽팽한 대립/“팔국 수도” 아랍주장에 「이」선 “못내준다”/거리마다 PLO 깃발·아라파트사진 예루살렘 옛성(Old City)의 북쪽 헤롯문과 바로 연결되는 동예루살렘의 살라후딘로드는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끝없는 봉기)로 유명한 거리.이스라엘이 완전 병합한 후에도 이따금씩 장갑으로 중무장한 이스라엘 경찰차나 순찰할뿐 유태인들은 잘못 들어왔다가는 돌을 맞든지 아니면 봉변을 당하는 곳이다. 곳곳에 팔레스타인 깃발과 아라파트의장의 사진이 붙어 있으며 상가 철문이나 담벼락은 낙서로 온통 떡칠이 되어 있다.탄흔들도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동예루살렘의 PLO본부인 오리엔트하우스는 이 거리로부터 두 블록 뒤에 있다.아라파트 후계설도 나도는 바이샬 후세이니를 비롯,PLO대변인 하난 아시라위 등이 있는 곳이다.팔레스타인 깃발이 높이 나부끼는 이 건물에는 주요 인사들이 회담 참석차 요르단으로 떠나고 없는데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PLO본부 소재지 요즘은 이 지역에 테러가 거의 없다는 말을 듣고 한 블록 뒤의 맨해턴호텔에 투숙했던 기자는 자정쯤『쾅』하고 호텔건물이 흔들리면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고 혼비백산해 호텔 밖으로 뛰어 나갔다.건물밖에는 빨간 승용차가 셔터가 내려진 호텔상가에 부딪쳐 불타고 있었다.운전사는 피를 흘리며 차안에 엎드려 있었다.깜짝 놀라 영문을 묻는 기자에게 호텔지배인은 『흔히 있는 일』이라며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이렇게 동예루살렘(팔레스타인측은 아랍 예루살렘이라 부름)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정으로 중동에 평화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협정에는 가자지구­예리코에 5년간의 자치가 실시된 후 요르단강서안(웨스트뱅크)과 가자지구에 탄생할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수도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기때문에 그를 둘러싼 유태인과 팔레스타인간의 공방이 벌써부터 극단적 대립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 67년 6일전쟁 이후 요르단땅이었던 동예루살렘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는 점령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골란고원과 함께 동예루살렘은완전병합해 버렸다.따라서 자동차 번호판도 웨스트뱅크의 파란색,가자지구의 흰색과 달리 동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같은 노란색이다. ○수도문제 보류상태 동예루살렘 문제는 양측이 한발도 양보할 수 없는 미묘한 문제를 안고 있다.이번 협상과정에서도 이스라엘측은 동예루살렘의 반환문제는 일체 고려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고,반면에 팔레스타인측은 독립국의 수도는 당연히 동예루살렘이 돼야 한다는 입장을 양보하지 않았다.결국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5년후 독립국 설립때로 보류된 상태다. 동예루살렘에 위치하고 있는 예루살렘 옛성을 가보면 이 지역을 놓고 무엇 때문에 양측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가를 바로 알 수 있다.회교지역,유태인지역,기독교지역,아르메니아지역으로 크게 사분되어 있는 옛성은 기원전 1천년쯤 다윗왕시대부터 16세기 오토만터키의 술레이만 황제시대까지 이 지역을 점령했던 여러 종파에 의한 건설과 파괴가 진행돼 오면서 구원이 쌓여 왔다.특히 솔로몬왕의 성전을 허물고 회교사원이 들어선 「통곡의 벽」을 둘러싼 유태인과팔레스타인 사이의 감정대립은 그중에서도 가장 첨예했다. ○그린라인 사라져 이 때문에 예루살렘은 원래 웨스트뱅크 한가운데 있는 도시였으나 이스라엘 독립 당시 이스라엘측이 강력하게 예루살렘을 주장,1949년 요르단과의 경계선인 그린라인 획정시 예루살렘 시가지를 동서로 나누고 회랑을 만들어 서쪽의 가나안땅과 서쪽 예루살렘을 연결시켰던 것. 오늘날 예루살렘 시내에서 킹 다윗 스트리트와 나블루스 로드를 연결하던 그린라인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외관상으로는 동서 구분없이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그러나 수도문제만 나오면 모두가 열을 낸다.동예루살렘에 있는 팔레스타인 국제문제연구소(PASSIA)의 이야드 무나연구원(34)은 『팔레스타인국의 수도는 역사적으로 보나 지리적으로 보나 당연히 동예루살렘이 돼야 한다』면서 『그러나 이스라엘이 굳이 반대한다면 이스라엘을 국제도시로 만들어 유엔관할로 하는 등의 방법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옛성의 유태인구역에서 만난 고미술상 주인 이츠하크 그로스만(40)은 『예루살렘이 다시 분할돼 시가지에 그린라인이 되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 만송원 뒷산 종가 묘역(일본속의 한국문화:4)

    ◎32대 7백년 통치 대마도주 집안 묘지/향나무 숲속 자리… 아래부터 웃분모셔 특이/청수산성은 조선 침략군 전진·병참기지로 만송원 원당을 보고 나면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선다.수령 1천년을 자랑하는 향나무 사이로 이끼낀 돌계단이 놓여 있고 좌우에는 석등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대낮에도 어두컴컴한 공동묘지다.혼자 가라면 망설여지는 곳이기도 하다. ○애첩까지 함께 묻혀 바로 이곳이 고려시대 중기부터 조선시대 말기까지 7백여년에 걸쳐 대마도를 지배하면서 한·일 두 나라 사이를 오간 32대에 걸친 대마도주들의 공동묘소다.일본에서도 단 세곳밖에 없다는 종중묘지인데 묘역에는 역대 도주는 물론 그 정실부인과 애첩들,그리고 그 피붙이들까지 모두 한곳에 묻혀 있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알고 보면 고려때 우리나라에서 이 섬으로 건너간 송씨일족의 무덤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양식이 모두 왜식이라 우리에게는 전혀 생소한 느낌을 준다.가장 이색적인 사실은 아래위가 뒤바뀐 무덤의 서열이라 할 수 있다.이 공동묘지는 윗무덤(상어령실)과 가운뎃무덤(중어령실),그리고 아랫무덤(하어령실)으로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져 있는데 제일 윗무덤에 19대 의지 이하 32대까지의 후손들이 자리잡고 그보다 아래에 자리한 가운뎃무덤에다 10대부터 18대까지의 선조들을 모셔놓았다.그리고 제일 아랫무덤에 이들 선조의 부인과 아이들을 묻어놓았으니 완전히 선후배가 꺼꾸로 자리한 꼴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대마도 나름의 까닭이 있었던 것 같다.19대 종의지와 그의 아들 종의성은 임진왜란을 이용하여 대마도를 일신해놓은 중흥의 명주로 알려져 있다.이 두 사람이 나오기 이전의 대마도는 먹고 살기도 어려웠고 왜구들이 군웅할거하던 섬이었다.이런 대마도의 사정을 잘 알려주고 있는 기록이 송희경이 쓴 「일본행록」이다.송희경은 세종대왕이 대마도를 정벌한 이듬해인 세종2년(1420) 사신으로 일본 가는 길에 대마도에 들렀다. ○왜군의 길잡이 노릇 그때 대마도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배추빛(채색)으로 떠 있었다고 한다.배추빛이란 굶어서 얼굴이 누르스름하다는 이야기다.대마도뿐만 아니라 일본본토가 모두 가난하여 도처에 해적들이 우굴거려 자칫 잘못하다가는 잡혀 죽을 정도였다.송희경보다 50년 뒤인 1470년(성종2년)에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를 읽어보더라도 마찬가지다.그러나 대마도로서는 일본을 믿고 의지할 데가 없었고 죽으나 사나 조선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6세기말 대마도는 갑자기 조선에서 일본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는데 다름아닌 임진왜란 때문이었다.풍신수길이 일본을 통일하자 종의지는 재빨리 왜장을 찾아가서 전승을 축하하였고 그 자리에서 조선과의 교섭사명을 부여받았다.그러다 보니 결국 왜군의 선봉장으로 나서게 되었고 조선으로부터는 배신자의 낙인이 찍히고 만 것이다. 종의지는 먼저 대마도를 조선침략군의 전진기지요 병참기지로 제공했다.바로 이곳 이즈하라의 진산인 청수산에 남아 있는 산성지가 그것인데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에 지은 것이다.북구주의 명호옥에서 일기도의 승본을 거쳐 대마도의 청수산성으로 이어지는 침략군 루트가 지금도 생생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셈인데일본에서는 임란사적으로 지정해놓고 있다. 종의지가 다음에 한 일은 대마도민 2천8백명을 침략군 선봉에 나서게 하는 일이었다.2천8백명이었다면 임란때의 왜군 총병력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마도군의 역할이 막중하였다.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침략 왜군은 크게 세 부대로 나뉘어 있었다.소서행장이 이끄는 제1번대와 악명 높은 가등청정이 이끄는 제2번대,그리고 마지막으로 흑용장정이 이끄는 제3번대가 그것이었다.이중에서 대마도군은 소서행장의 제1번대,그것도 최선봉군으로 부산에 상륙하여 일로 서울로 북진해갔다. 바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와 가장 가깝고 서로 믿고 지낼 수 있던 대마도주 의지가 침략군의 앞잡이가 되어 다시 나타났으니 배신도 이만저만 배신이 아니었다.이때만 하더라도 일본 본토의 왜장들은 조선의 지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 어떻게 나 있는지 아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아는 사람은 오로지 대마도인뿐.그들은 이미 고려때부터 조선을 내왕하여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상경로를 훤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가정이 가능하다.만일 이 고려인의 후예 종가놈이 완강하게 길안내역을 거절하였거나 아니면 길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더라면 왜군은 삼천포로 빠져 남한일대에서 헤매었을지 모를 일이다.만일 그랬더라면 왜란은 조기에 종결되었거나 그 피해 또한 그토록 극심하지 않았을 것이 확실하다. ○임난후 쌀수출 중지 뿐만 아니다.임진왜란이 끝난 뒤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나라가 대마도인의 접근을 금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부산에 있던 왜관이 폐쇄되고 대마도에의 곡물 수출을 일체 금지하게 되자 대마도경제는 일대 공황속에 빠지고 말았다.자업자득이었다고 할 수 있고 배신행위에 대한 당연한 응보였다고 할 수 있는데 대마도주로서는 「한 하늘아래 살 수 없는 원수」로까지 험악해진 조선과의 사이를 또 다시 교활한 속임수로 뚫고 나가기로 했다. 이것이 이른바 국서위조사건이라는 엄청난 사기극인데 임란 이후의 한·일국교정상화는 불과 8년만에 이루어졌다.이를일제침략 종식후 20년만인 1965년에 성립된 한·일국교정상화에 비한다면 배나 더 조기에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그 배후에는 대마도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고 그 때문에 그때 일본의 실권자 덕천가강은 단 한푼 배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단 한마디 사죄하지 않은 상태로 앉아서 통신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공로로 대마도주는 일본 상전에게 두둑한 상을 받게 되었으나 우리나라 조정에 대해서는 다시 배신행위를 하게 된 것이다.대마도가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서 기울어졌는가라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임란 전후였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 도굴꾼들(외언내언)

    BC330년 알렉산더대왕은 부하장교들을 죽은지 2백년이 지난 사이러스대제의 무덤에 보내 보존상태를 살펴보도록 했다.그리고 그로부터 6년후에는 자신이 직접 그곳에 가보고는 무덤이 파괴된채 보물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것을 알았다.유골을 모아 다시 안치한후 자신의 문장으로 봉인했지만 그후 수차례 도굴로 무덤속은 완전히 텅비어 버렸다. 고대 이집트 왕들의 시신이 있던 피라미드도 마찬가지다.아무리 정교한 미로를 만들어도 도굴꾼들은 비장된 장소를 예외없이 알아내 부장품들을 발굴해갔다.파라오들은 그 방지에 고심한 끝에 BC16세기 투트메스1세는 1천7백년전부터 계속되어온 피라미드조영을 단념하고 산골짜기 암굴에 왕들의 시신을 매장했으나 도굴꾼들은 미소띠며 고분을 파헤쳐버렸다. 지난 76년 신안앞바다에서 1만여점의 주옥같은 보물이 인양되고 있을무렵 그곳 감시초소일지에는 선박통행이나 어로사실이 전무한 것으로 되어있음에도 도굴범들이 창궐하여 신안앞바다는 한때 「도굴범들의 황금어장」으로 불렸었다. 대체로 도굴범들의고분식별 안목은 전문가 뺨치는 실력이다.그들은 사냥개처럼 냄새맡고 번개처럼 파헤친다. 충남 당진 영탑사에 있던 금동삼존불상도난사건은 지난 68년 현충사 이충무공의 「난중일기」를 훔쳤던 거물급 문화재절도범이 배후조정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그는 대학에서 사학과 전공후 공주에서 미술교사를 지낸 인텔리로 문화재 식별안목이 「귀신같다」는 평이다. 이번 전남 함평에서 미발굴의 백제 신덕고분을 파헤친 도굴범들의 안목 또한 문화재 관련자들을 앞지른 결과가 돼버렸다.그들은 「전국 곳곳에 발굴되지 않은 고분이 널려있다」느니 「경주의 한 고분도 자신들의 도굴이 계기가 되어 발굴된 예」라고 큰소리치고 있다. 문화재가 한낱 도굴범들의 사유재산이나 문화재 발굴개가의 공적으로 치부될순 없다.만인 공유재산인 문화재를 좀더 철저히 지키고 가꾸는 효율적인 관리정책이 요구된다.
  • 구더기/상처치료효과 놀랍다/미 두가스박사

    ◎욕창 심한 환자에 처방… 다리절단 모면/괴저박테리아 번식막아 항생제보다 빨리 치유 구더기가 세균에 감염된 상처의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가진 것으로 임상실험결과 밝혀졌다고 미국의 과학전문지 디스커버리지가 보도했다. 미국 루이지애나 마리온대학병원의 내과의사 크래디 두가스박사는 80세가 넘은 한 환자가 오랜 입원생활로 욕창이 생겨 두 다리를 절단 해야할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항생제와 수술로는 환자를 살릴 수 없다고 판단한 두가스박사는 30년대 할머니가 욕창을 치료하던 민간요법을 써 보기로 작정했다. 두가스박사는 루이지애나 주립대학의 곤충학자 제프리 웰스박사에게 쉬파리 구더기를 구해달라고 요구했다. 1주일뒤에 쉬파리알 8천개가 병원에 도착했다. 두가스박사는 쉬파리알을 상처에 발랐다.환자의 상처에서 쉬파리알은 구더기로 부화한 뒤 환자의 썩은 상처를 먹고 파리가 되어 날아갔다.4주가 지나자 상처가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구더기의 상처치료는 의료계에서는 새로운 학설이 아니다. 멀리는 1천년전 마야제국에서구더기가 상처치료에 사용됐으며 16세기 유럽의 의사들도 사용했으며 1차대전중 병사들의 상처가 구더기가 들끓음으로 빨리 치유되는 일도 있었다. 항생제의 초기단계인 설파제가 발견되기전인 30년 대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구더기가 상처 치료에 많이 쓰였다. 민간요법인 구더기 치료가 자취를 감추게된 것은 의약의 발전에 기인해서 뿐만 아니라 비위가 약한 환자들이 구역질나는 벌레 치료를 받기 싫어하기 때문이기도하다. 뉴욕의과대학의 외과의사 제인 페트로박사는 『임상 실험결과 구더기는 값 비싸고 약효를 믿을 수 없는 화학 복합물보다 훨씬 값싸고 효과적인 치료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많은 구더기중 금파리·쉬파리의 구더기만이 치료 효과가 있다. 쉬파리 알은 부화해 구더기가 되면서 상처의 썩은 살을 먹고 자랄뿐 아니라 괴저박테리아가 번식할 수 없는 성분의 배설물을 내놓아 박테리아를 죽이기때문에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다. 또 기어다니는 것만으로 상처에 마사지효과를 주어 치료 효과를 높인다.페트로박사는 구더기의 혐오성 때문에이 방법이 널리 쓰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있다.
  • 불,이 16C 벽화 3년 걸려 복원

    ◎베로네즈작 「가나의 혼인잔치」… 18c에 약탈/포도주 성찬 예수기적 표현 성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첫 기적과 세속적인 귀족계급을 동시에 묘사한 16세기 중엽의 벽화 「가나의 혼인잔치」가 3년만에 거의 완벽하게 「부활」돼 프랑스의 예술계가 흥분하고 있다.이탈리아 천재화가 베로네즈가 1562∼63년에 그린 이 작품은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가 관리부실로 훼손돼 그동안 완벽한 복원을 위해 1백여회에 걸쳐 전문가의 여론을 수렴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었다. 1797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베니스에서 전리품으로 빼앗아오기 전 생 조르쥐 마조에르수도원에 있던 이 벽화의 진본(10m×7m)에는 1백30명의 인물이 등장한다.갈릴리호수의 서쪽에 위치한 「가나」는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행한 바로 그곳이다. 미술사학자들은 이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따지기보다는 오히려 등장인물들이 시대상황을 초월,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그런 의미에서 종교적 색채가 짙게 밴 「최후의 만찬」 등과는 확연히구별된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연회장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예수의 뒤편에서 하인들이 양고기를 나르고 있고 왼쪽의 회식자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양측 출입문 기둥들의 화려한 장식,그리고 금빛나는 식기류,귀족들의 비단옷 등은 당시 이탈리아 귀족들의 호사스러운 생활수준을 엿보기에 족하다.큼지막한 술항아리와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 어릿광대들의 모습도 흥미롭기는 마찬가지다.특히 흑인하인들은 16세기 무렵 베니스에서 노예제도가 성행했음을 뒷받침해주고 있다.이 그림은 또 난간 뒤쪽에서도 예수의 기적으로 마련된 고기와 포도주가 곁들여진 풍성한 만찬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르네상스 당시 항구도시 베니스는 이미 부가 넘쳐 흐르는 「사치의 쇼윈도」였음을 이 그림은 여실히 입증해주고 있다.터번을 머리에 두른 회교국 군주 술탄의 사신들도 눈에 띄고 또한 당시만 해도 진귀하던 마로멜로(오렌지)잼과 접시에 담긴 과자류 등의 묘사도 매우 사실적이다. 사실 베니스출신 상인들은 10세기경부터 지중해의 크레타섬을 지배해온 아라비아인들과 교류,사탕판매권을 독점하는 등 그 활동영역을 넓혀왔었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이번 복원과정에서의 논란과 마찬가지로 이미 제작당시에도 종교회의에서 성직자들이 화가 베로네즈의 처벌을 요구하는 등 물의를 빚었었다. 이 벽화와 베로네즈에 대한 평가 또한 엇갈리고 있다.『수준이하의 형편없는 졸작』이란 악평이 있는가 하면 최근 프랑스 국립박물관협회가 발간한 서책은 『속물적인 것과 기독교의 복음을 동시에 표현한 걸작』으로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 불 6백명 소도시에 13개 서점 성업

    ◎베슈렐마을 89년 「책축제」 성공뒤 “활황”/매월 첫 일요일·부활절엔 책시장 개설/서점 한곳 없던곳이 주말마다 “북적” 프랑스 브르타뉴지방의 베슈렐이라는 인구 6백명의 한적한 마을에는 서점이 13개나 있다. 이곳이 「책마을」이 된 것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옛 소도시의 풍취를 간직하고 있는 아담한 마을의 중심에는 나막신 제조소,전기수리소,식료품가게,술집,빵집이 있었으나 시대의 흐름과 함께 하나 둘 사라지고 인구도 줄어 적막한 곳이 되었다.쇠락해 가는 이곳을 살리려는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애쓴 결과 89년부터 「책마을」로 널리 알려지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이 마을의 부흥노력은 85년에 시작되었다.향토발전에 관심이 많은 정신과 의사 하나가 친구 몇명과 「도약대」라는 애향회를 만들고 옛 나막신 공방건물 한 부분을 사서 문화센터 구실을 겸한 카페를 열었다.그러나 이것만으로 쇠잔한 마을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브르타뉴문화원 원장이 「책의 축제」를 이 마을에서 열자는 안을 내고 그 행사를 조직했다.85년 부활절때 대규모로 그 첫 행사를 벌였다. 이 마을에서의 「책의 축제」란 사실 좀 억지였다.이곳에 서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이 작은 마을에 6천명이 모여든 것이다.힘을 얻은 「도약대」모임은 아예 서점을 차리기로 했다.켈틱어 서점인 「미래」와 또 다른 서점 「뿌리」가 문을 열었다. 그뒤 외부인이 들어와서 서점을 하나 둘씩 열어갔다.서점을 차린 외부인중에는 항구도시 브레스트에서 미술도서 제본공을 하던 여자도 있고 명승지 몽셸미셸에서 카페를 하던 로렌 태생 남자도 있다.고물매매가 취미였던 이 남자는 고서의 전문가로 성장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지은 우아한 화강암 건물들을 아주 싼 값에 살 수 있다는 것도 이 마을이 서점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이었다.옛 미장원과 옛 약국 등에 서점이 들어섰다.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첫 가게가 서점이고 한눈에 서점 여러개가 들어온다. 이 서점들은 주말에만 문을 여는 것이 특징이다.특히 매월 첫 일요일과 부활절에 「책시장」이 열린다.부활절의 것은 「책의 축제」로서 대규모 행사다.누가 이 작은 마을까지 찾아올까.첫째는 책 수집가들이다.여기서 애서가들끼리 교분이 맺어지기도 한다.본격적인 수집가가 아니더라도 주말에 가족과 함께 산보하면서 기웃기웃하는 사람들이 많다.고서 노점상들도 온다. 「책마을」로서 베슈렐은 아직 초창기라 서점들의 분야별 전문화가 안되어 있다는 평이 있으며 이 점을 서점 주인들도 알고 있어 그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책의 축제」와 주말 책시장을 조직하는 「도약대」가 자체 로고의 사용을 강제하는 등 전횡을 부린다고 일부 서적상들이 불평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또 다른 조직 「베슈렐 서적상협회」가 생겼다.이제 두개의 조직이 각각 축제를 열고 있다. 두 조직의 경쟁이 책마을 베슈렐에는 더욱 이로운 결과가 되었다.새 조직은 새 행사 「책과 재즈의 밤」을 꾸몄고 서점 4개외에 화방 1개를 새로 더 열기로 했다.「도약대」는 요리학교와 주점을 열려고 준비하고 있다. 베슈렐의 인구는 50명이 늘었다.집값 또한 뛰어올랐다.이 마을을 다시 일으킨 것은 책이었다.
  • 16세기 베네치아 회화 한자리에(미술)

    ◎이 도시국가… 티티엔 등 수많은 거장 배출/“현대미술의 원조” 관객 몰려 파리 도심의 전시장 그랑 팔레에는 요즘 「티티엔의 세기」라는 이름의 16세기 베네치아 미술 특별전시회를 보기 위해 수많은 관람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탈리아 미술의 현란한 개화는 피렌체의 「콰트로첸토」 (4백이라는 뜻이며 1400년대의 미술을 말함)를 거쳐 베네치아의 「칭퀘첸토」(1500년대 미술)로 이어진다.당시 베네치아 미술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 티티엔이기 때문에 그를 포함한 거장들의 명작 3백점을 파리에 모은 이번 전시회를 「티티엔의 세기」라고 이름붙였다.4백년전의 그들을 한꺼번에 만나볼 수 있는 이번 전시회를 위해 작품들이 파리의 루브르미술관과 국내외 각지에서 옮겨져왔다. 지오르지오네,지오반니 벨리니,로렌초 로토,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티티엔,일 틴토레토,베로네제….베네치아는 놀랍게도 한 세기 동안에 이 큰 화가들의 무리를 배출함으로써 서양미술사의 한 시대를 대표하게 되었다.그 시대는 특히 「티티엔의 세기」라고 해도 전혀 과장이없을 정도로 이 화가의 예술적인 업적과 다른 화가들에게 준 영향이 컸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베네치아가 16세기에 예술의 꽃을 피운 것은 유럽의 상업 중심지로서 돈이 모여들고 풍부한 재력이 예술가를 포용했기 때문이었다.당시 화가는 특별한 대접을 받았으며 그림재주가 있으면 출세가 보장되었다. 16세기 베네치아 회화가 밝은 조명을 받는 까닭은 바로 거기서 벌써 현대미술의 싹이 트고 있었다는 데 있다.소재의 취택이나 표현기법에서도 전시대와 확연한 줄을 긋는다. 티티엔(1490?∼1576)이 만년에 그린 난폭스런 「마르사스의 징벌」은 매우 충격적인 작품으로 현대의 표현주의 회화와 비슷하고 평범한 아낙을 소재로 한 지오르지오네의 「노파」 역시 현대회화와 다를 바 없다.바사노의 「십자가에서 내려지심」이라는 작품은 검정색이 주조를 이룬 가운데 명암의 극렬한 대비가 인상적이다. 16세기 베네치아 회화는 엄밀히 말하면 지오르지오네(1477∼1510)에서부터 출발한다.티티엔은 스승인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지오르지오네는 페스트로30대에 죽었지만 티티엔은 장수했기 때문에 더 많은 작품과 더 큰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다.티티엔 또한 페스트로 죽었으니 옛날 이 병의 맹위가 어떠했는지 알만하다. 이번 전시회에는 티티엔의 그림 54점(모두 루브르미술관 소장품)이 내걸렸는데 역시 가장 볼만한 것들이라는 평이다.지오르지오네의 작품은 「노파」 「로라」등 18점이 전시돼 있으나 그의 최고 걸작이라는 「폭풍」등 3개의 그림이 빠졌음을 많은 이들이 아쉬워한다.괴기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로라」는 심리적 초상화의 효시로 꼽히고 있다. 오는 6월14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회는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만을 보아온 사람들에겐 커다란 놀라움이 될 것이다.
  • 소련박물관에 고대 예술품 대량 기증(북한의 이모저모)

    ◎저질화장품탓 여성 피부질환자 늘어 ○변함없는 충성 강조 ○…북한은 최근들어 주민사상문제를 빈번히 거론,난국을 타개하는 길은 변함없는 충성과 신념 뿐이라면서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충성불변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은 최근 3∼4일 동안에만도 충·효일심,사상적 순결성,필승의 신념 등을 요구하는 논조의 기사를 당기관지 노동신문에 잇따라 게재했다. 당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 24일자에 「필승의 신심과 낙관에 넘쳐 힘차게 전진하자」제하의 사설을 게재한 것을 비롯해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철저히 세우는 것은 우리당의 일관한 노선」(5·25 노동신문 논설) ▲「우리 혁명대오를 충효일심의 결정체로 만들자」(5·26 노동신문 사설) ▲「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 교양을 더욱 심화시키자」(5·27 노동신문 사설)등을 계속해서 내보냈다. 북한은 「필승의 신념」에 대해 난관과 시련앞에서 좌절하면 재생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안팎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김일성부자가 있는한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을 확고히 견지할 것을 요구했다.○고려청자 등 포함 ○…북한은 지난 50년대 모스크바주재 북한대사관을 통해 많은 고대 예술품들을 옛 소련에 기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스크바방송은 25일 모스크바소재 「국립동방인민미술박물관」개관 75주년 관련기사에서 이 박물관의 「조선부」에 소장되어 있는 다수의 고대 예술품들은 북한이 50년대에 대사관을 통해 기증한 것들이며 나머지는 수집가들로부터 구입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방송은 이어 「국립동방인민박물관」에 소장된 조선예술품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8세기께 화강암으로 제작된 관음보살상과 고려청자,회화작품,그리고 16세기에 그려진 고려시대의 한 고관의 초상화라면서 고대 조선예술품들의 예술성을 극찬했다. ○「의무화장」이 주원인 ○…북한여성들의 상당수가 저가 화장품의 사용으로 인하여 각종 피부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북한을 다녀온 중국 동포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피부질환은 심한 가려움증에서 부터 발진,수포 발생 등 각종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 환자들 대다수가 변변한 치료를 받지못하고 민간요법에만 의존,병을 악화시켜 마치 천연두를 앓고난 것처럼 얼굴에 보기흉한 흉터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북한여성들이 이처럼 피부질환을 앓고 있는 것은 「의무화장」등이 주원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의무화장이란 김일성 부자 생일을 비롯한 주요 국경일날 행사에 동원될 때나 외출시 반드시 화장을 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화장을 하지 않고 행사에 참석하거나 외출하여 「도로정화원」에게 적발됐을 경우에는 심한 질책과 함께 당에 대한 충성부족으로 문제가 제기되어 자아비판을 받는 등 곤욕을 치르고 있다. ○조각천 팬티 인기 ○…북한의 젊은 여성들 사이에 혼수용품으로 「조각천 팬티」가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때문에 결혼을 앞둔 젊은 여성들은 물론 혼사를 앞둔 부모들은 딸과 며느리에게 줄 「조각천 팬티」구입을 위해 고심하고 있으며 이를 이용한 조각천 팬티 암거래상까지 등장했다.암시장에서 조각천 팬티는 1장당 20원의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조각천 팬티는 각 도·시·군 소재 수출 피복공장에서 수출용피복을 재단하고 남은 자투리 천을 이용하여 만든 「삼각팬티」로 북한의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여러가지 천을 이용하여 만들어 색상과 문양이 화려하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 스페인 라베라마을 민속촌 단장

    ◎14세기 형성… 전통가옥·마을축제 등 보존 어느 나라든 전통을 보존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그러나 전통이 아름답고 값진 유산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포르투갈 국경을 향해 서부로 가다보면 알칸타라호수를 끼고 있는 카세레스지방이 나오는데 그 안에 라베라라는 작은 전원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짙푸른 초목,티에타르강가의 비옥한 평야,마을어귀에 빽빽이 들어찬 참나무와 밤나무들.자연의 순리가 여유있게 조화된 고풍넘치는 마을. 플라멩코와 투우로 상징되는 정열의 나라에 속해있으면서도 현대문물에 동화되지 않고 옛 풍습과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 바로 라베라마을이다. 특히 라베라마을의 전통가옥및 건축양식은 독특하게 보존되어 있다. 거리·발코니·베란다 등은 돌을 재료로 썼으며 격자모양의 창문은 나무로 만들었고 마을 한가운데에는 작은 분수가 있다. 14세기 초에 형성된 이 마을은 당시에는 성곽이 있었으나 근대화과정에서 옛모습이 많이 바뀌었다.그러나 최근 정부에서 역사적 의의와 예술적 가치를 고려해 「민속마을」로 복원시켰다. 라베라 속의 또하나 작은 마을인 쿠아코스에는 16세기에 마을을 침략한 외부인들이 건축했던 저택들이 고딕양식 그대로 남아있어 그때의 굴욕을 되돌아보게 한다. 라베라의 중심부인 자란딜라에는 그때 요새로 썼던 건물이 남아있는데 고딕과 아크양식의 세련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지금은 여행객들을 위한 국립휴양소및 여관으로 이용되고 있기도 하다. 라베라는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건축물 뿐아니라 마을축제·종교행사등 옛풍습 역시 잘 보존되고 있는 곳이다. 라베라 주민들은 풍부한 물,기름진 땅,풍성한 농산물과 과일등을 조상들이 물려준 값진 유산으로 여기고 있다.현대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옛것을 지켜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라베라 주민들.그들이야말로 스페인의 민속문화를 지켜나가는 파수꾼들인 셈이다.
  • 교정에는 인생이 어린다(박갑천칼럼)

    밖에서 글을 써달라고 할때 항상 걱정되는 것이 교정이다.활자화하여 나온 결과에 백점짜리는 드물고 어딘가 잘못되어 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글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한 일이겠지만 이 오자는 대단히 불쾌하게 한다.그리고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최근 어떤 기업체에서 내는 사보에 글을 썼다.「소금 한줌」이라는 난이었는데 담당자는 「세상살이 해온 가운데서 교훈이 될만한 실화」를 써달라는 것이었다.얼마 지나서 활자화한 책자를 보내왔는데 읽기 시작하다가 덮어 버렸다.이 글은 『오는 4월11일로 백상 장기영선생이 돌아가신지 16주년이 된다』로 시작된다.한국일보 시절,사장인 그분과 기자인 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가 내용이다.그런데 이 무슨 농간인가.분명히 써준 괄호 속의 한자 「백상」이 「백상」으로 되어 있는것이 아닌가.그저 어안이 벙벙해질 따름이었다. 그래도 이경우는 주의력부족으로 놓쳐버린 오자였다고 생각하기로 한다.이런 오자일 때는 불쾌감이 덜한 편이다.그러나 편집자(혹은 교정자)의 지레짐작으로 가필이 되고그래서 글을 망쳐 놓았을 때는 참으로 불쾌해진다. 여러해 전의 일이긴 하지만 어떤 월간지에 글을 썼을 때의 사례가 그런 것이다.「소금장수와 우산장수」라는 제하의 글이었는데 그 글 또한 시작에서부터 마가낀다.『…비가 올만한데 오지 않고 가물면 무논의 벼가 비비꾀어 타들어가고…』가 써준 원고였다.여기서의 「무논」이 느닷없이 「무근」으로 활자화해 버린 것이다.「무논」이란 말을 처음 대했다면 국어사전이라도 뒤적여 봤어야 하겠건만 「무근」이라 고치고서 더구나 괄호 치고 한자까지 달아 놓았으니 이 「사실무근」한 글을 읽은 독자들은 필자를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활판술을 지배하는 것은 악마다』고 했던 16세기 네덜란드의 신학자 에라스무스의 말은 교정이 무엇인가를 압축하고 있다.에라스무스뿐 아니라 그후의 숱한 문필인들도 활자화했을 때의 오자에 대해 탄식을 해온다.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팔려오는 성서의 오자 사건도 그를 설명해주는 예로 된다.「사악한 성서」(Wicked Bible:고린도전서 6장9절의 잘못),「간음성서」(Adulter­ous Bible:모세10계의 제7계 잘못),「바보성서」(Fool Bible:시편 14편 1절의 잘못)등등이 그것이다. 우리의 선인 지봉 이수광도 교정의 어려움을 겪었던 듯,그의 「지봉유설」에 써 놓고 있다.­『주자로 책을 찍어내는 것은 본조에서 시작되었고 중국에 있던 것이 아니다.변이 있은 이후로는 각판은 쓰기가 어렵다 해서 많이 활자를 썼다.그러나 이는 교정 보기가 어려워 잘못되기 쉬우니 한스러운 일이다』 교정을 해보면서는 「모자라는 인간」을 절감한다.신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는 뜻이다.아무리 잘해도 잘한다 할수가 없지 않던가.잘못투성이 인생과 견주어지는 교정.교정에는 인생이 어린다.
  • 미주신대륙 발견/“덴마크가 20년 앞섰다”

    ◎사학자,15세기 벽화·지도 근거로 주장 「아메리카신대륙에 첫발을 디딘 최초의 유럽인은 스페인탐험대의 콜럼버스가 아니라 덴마크 사람이다」. 지난해의 콜럼버스 신대륙발견 5백주년 기념 축제와 이에 대한 논란으로 아메리카대륙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고있는 요즘 덴마크에서는 그동안의 정설을 완전히 뒤엎는 주장이 나와 화제가 되고있다. 덴마크의 역사학자인 에릭 키에르가르는 최근 한 문헌학자의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콜럼버스보다 20년가량 앞서 덴마크인·포르투갈인·독일인등으로 구성된 탐험대가 신대륙에 첫발을 내딛는 과정을 생생하게 재구성해 발표했다. 근착 덴마크 리뷰지가 소개한 그 내용을 보면 15세기의 포르투갈은 신세계개척의 라이벌인 스페인과는 경쟁관계였지만 덴마크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덴마크의 세력권이었던 북극개척을 통해 동방항로를 열어보려는 야심을 품고있었다.포르투갈의 아폰소왕은 이같은 야심을 실현하고자 크리스티엔 덴마크왕에게 해양탐험을 권유하고 이를 돕기위해 신하인 요아 바스 코르테 레알을파견했다. 이에따라 크리스티엔왕은 한스 포토르스트와 독일출신의 디트리크 피닝이라는 두 제독에게 탐험임무를 맡겼다.이들은 코르테 레알과 함께 아이슬란드를 경유하여 그린란드 동안을 향해 탐험선을 몰아갔다.그러나 그린란드해적인 에스키모인들의 공격을 받았다.난리를 치르는 사이 배는 거센 해풍에 밀려 엉뚱한 곳에 닿았으며 이들은 이곳에서 일정기간 머무른뒤 덴마크로 귀항했다.이때 탐험선이 도달한 곳은 캐나다 동북부의 래브라도이며 그 시기는 1472년이나 1473년이다. 키에르가르의 신대륙발견사는 이렇게 요약되며 그 뼈대는 문헌학자이자 코펜하겐대학 사서과장이었던 소푸스 라르센이 지난 24년 제21차 국제미국학회에 제출한 연구서에서 따왔다.이 연구서에 따르면 포르투갈의 코르테 레알은 1474년 탐험항해에 대한 보상으로 아폰소왕으로부터 한 섬의 총독지위를 수여받았으며 덴마크의 두 제독은 1480년대 초반 영국해적 소탕전에 나가 전사했다. 키에르가르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16세기의 포르투갈 지도와 당시 건립된 코펜하겐 북부 헬싱고르의 교회벽화를 새로운 역사적 사실로 제시했다. 1534년 포르투갈에서 제작된 한 지도에는 래브라도라는 지명 근처에 탐험에 나섰던 요아 바스의 이름을 딴 마을이 두곳이나 표기돼있다.그리고 탐험을 주도한 크리스티엔왕 재위시에 건립된 덴마크의 한 교회벽화에는 탐험가 포토르스트의 모습이 그의 이름과 함께 기록으로 남아있다. 덴마크 역사학자들은 키에르가르의 주장이 제기된뒤 이의 뒷받침자료가 부실한 점은 인정하면서도 당시의 탐험이 비밀리에 행해질 수밖에 없었던 점을 들어 사실쪽으로 굳혀가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어쩌면 아메리카 발견사에 관한 새로운 발견은 지금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 21세기 한국의 문을 여는 “이어령과의 대화”:12

    ◎부채의 원리/인간과 도구·기계와의 관계 변화/로봇과 구도여행하는 삼장법사/상호 대립·단절… 균열속에 따로 존재/서구/쥘 부채처럼 사용자 마음따라 변화/동양/친화 바탕 새 도구관 한국서 나와야/이불·요는 필요에 따라 펴고 개키고/서양침대는 사람 일어나도 그대로/한국이이 자동차를 발명했더라면/주차장 공간 필요없게 연구했을것 □황규호문화부장=이 대담이 처음 시작되었을때 선생님께서는 「에너지에서 정보」로 산업사회의 가치체계가 달라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21세기는 그동안 서양문명이 구축한 두꺼운 벽이 무너지는 자리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에너지와 벽은 어떤 면에서 상관성을 갖고 있는지요. ○인력·축력 1% 불과 ■이어령 전문화부장관=19세기 중반까지 인간이 사용한 전 에너지의 94%가 인간과 가축의 근력에서 나오는 에너지였다고 합니다.그런데 1백년이 조금 지난 오늘날에는 그것이 불과 1%도 안된다고 합니다.놀랍지 않습니까.산업화의 기점은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의 발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것은 국민학교 학생들도 아는 상식이지요.근력이 증기의 힘,전기의 힘,그리고 이제는 원자력의 힘으로,에너지원의 새로운 개발이야말로 오늘의 산업화시대를 만들어낸 바로 그 심장이요 손발이라고 할 것입니다. □자연에너지가 인공적인 에너지로 바뀌어 갔다는 것이지요.지금도 자동차를 몇마력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산업화 이전의 에너지를 대표하였던 것은 말의 힘이었지요.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마는…. ■그래요.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지요.그런데 조금 파고 들어가면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들이 드러나게 되지요.말의 힘이 증기기관의 힘으로 바뀌어간 그 과정을 살펴보면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된 문명의 그 숙명적 의미를 피부로 느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산업혁명을 낳은 당시의 영국사회 특히 런던의 그 도시환경 말씀이신가요. ■16세기중반에서 17세기에 이르면 런던과 같은 대도시의 연료와 목량업의 발전으로 영국의 산림자원은 황폐해지기 시작합니다.수풀의 죽음속에서 서서히 농경 문명이 막을 내리게 되는 상징적인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지요.심각한 열 에너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나타나게 된 것이 바로 석탄이었는데 이 검은 돌과 탄광이야말로 산업문명을 낳은 아버지라고 할 것입니다. □『석탄 백탄 타는데』라는 개화기때의 우리나라 노랫가락이 생각나는군요. ■문제는 석탄을 연료로 썼다는 자체가 산업화를 이룩했다는 것은 아닙니다.첫째 이 석탄을 캐려면 탄광의 배수문제를 해결해야 되는데 결국 거기에서 발명된 것이 바로 배수펌프이고 후일 와트의 회전식 증기기관으로 맥을 잇게 되는 뉴커먼 기압기관의 탄생입니다. □산업혁명을 낳은 아버지가 석탄이라면 그 어머니는 동력기의 발명이라는 말씀이군요. ■뿐만이 아닙니다.산에서 캔 석탄을 도시로 수송하려다 보니 이번에는 말이 자꾸 증가하기 시작합니다.말이 증가되면 그 사료를 증산해야 하고 이렇게 말 사료가 늘어가면 결국 사람의 식량이 달리게 됩니다.더이상 말을 늘릴 수 없는 한계상황에 부딪치고 만것입니다. ○채털리부인 숲향기 □알겠습니다.그 극한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와트가발명한 인공의 동력의존이라는 말씀이시지요. ■그렇지요.말의 힘을 대신할 인공동력의 발명,기차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석탄을 때서 석탄을 운반하는 이상한 현상이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웃음).숲이 죽고 말이 죽고 그대신 태어난 것이 동력기관과 기계들이었지요.탄광과 공장,로렌스의 소설을 보면 숲의 죽음과 산업문명의 탄생이 아주 선명하게 그려지지요.그의 문학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바로 이 상실한 숲의 재생이라고 할 것입니다.그가 그리는 섹스라는 것도 이 남벌된 숲의 한 풍경에 지나지 않아요.왜 그 유명한 채털리부인의 사랑이 있지 않습니까.그 정사장면의 묘사를 보면 그가 그리려는 섹스와 숲이 얼마나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있습니다.채털리부인의 온 몸에서는 숲의 향내가 나고 성불능에 걸린 그 남편의 몸에서는 검은 연기와 불꽃을 토해내는 공장 굴뚝의 석탄 냄새가 나지요.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산업문명이 어떤 것인지 오관을 통해서 직접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석탄냄새,지하의 탄광과 광부들,그리고연기를 내뿜고 달리는 철마­초기 산업문명의 이 풍경이야말로 근대인이 뽑은 운명의 카드였지요. □그런데 21세기를 앞두고 있는 우리는 그와는 다른 또하나의 「운명의 카드」를 손에 들고 있다는 것이군요. ■우리 손에 들린 그 새로운 운명의 카드에는 어떤 그림들이 보일까요.우선 동력기에 의해 돌아가던 거대한 기계들이 마이크로 일렉트로닉스로 변한 모습이 보입니다.전자시계를 비롯한 전자제품들,전화,반도체를 이용한 컴퓨터와 모든 정보기기와 관련된 것들은 19세기때의 기계식 제품과는 달리 아주 작은 동력으로 돌아갑니다.강전의 시대에서 약전의 시대로 말입니다.어떻게 하면 에너지를 덜쓰는가?정보기기가 아니더라도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제품일수록 이 지상에서는 공룡처럼 자취를 감춰가는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후기 산업사회는 전세계가 오일쇼크를 경험하고 난 그 뒤부터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에너지」에서 「정보」로 그 힘의 비중이 바뀌어 간다는 말은 에너지에서 전파로,기계에서 전자로 그 패러다임이 변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기계가 마이크로 일렉트로닉스로 바뀌면서 모든 산업주의의 패러다임도 변화되었다는 말씀이시군요.동력기는 반도체로,에너지는 전파로,강전은 약전으로 중심개념이 옮겨간다.그래서 도구에 대한 개념도 달라진다…. ■그렇습니다.기계는 동력기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들이라 인간과 다른 자기독자의 심장을 갖고 있지요.인간과 기계는 대립적이거나 단절적입니다.인간과 기계의 이같은 관계를 극단화시킨 것이 그 유명한 프랑켄슈타인입니다.작품이 아니라 실제로 기계와 인간이 힘을 겨루는 이야기는 유럽 미국등지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서양사람들은 인간과 인간사이 만이 아니라 도구와 인간사이에도 두꺼운 벽을 가지고 있었지요.이러한 벽때문에 인간은 자연과 도구를 객체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그래서 인간따로 기계따로 제각기 따로 노는 균열이 생겨난 것입니다. ○마음따라 수시 변용 □한국의 경우는 어떻지요.인간과 도구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기계의 관계말입니다.더 적대감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서양사람과 한국사람 넓게는 동아시아 사람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지난번에 병풍이야기를 하였지만 그 쓰는 도구를 보면 분명히 알수가 있습니다.부채를 보십시다.서양이나 동양이나 부채를 사용한 것은 다 같습니다.그런데 일본과 한국인은 접는 부채를 발명하였고 애용했습니다.전주의 합죽선은 지금도 그 맥을 이어오고 있지 않습니까.보통 부채와 달리 왜 우리는 접는 부채를 많이 사용하였을까요.부채 역시 사람이 쓸때에는 펴고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접어 둡니다.상황에 따라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과 태도에 의해서 도구도 수시로 변하는 것이지요. □사람과 도구가 대화를 한다는 것이군요. ■서양부채는 사용할 때에나 그렇지 않을 때에나 똑같습니다.그러나 접부채는 쓰지 않을 때에는 작게 접혀서 옷소매나 주머니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부채만이 아니지요.이불과 요를 보세요.잠잘 때에는 펴고 일어나면 개키지 않습니까.이불과 요는 그 주인인 인간과 함께 행동하지요.그런데 서양침대는 어때요.사람이 자고 일어나도 꼼짝도 안합니다(웃음).24시간 자리를 차지하고 드러누워 있는 거예요.어디 침대만 그래요.집집마다 양옥을 짓고 응접실에 소파를 들여놓고 삽니다마는 그 의자라는 것은 사람이 앉아 있는 시간보다는 제가 혼자서 죽치고 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응접실은 결국 사람보다 의자를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그러나 한옥 사랑방을 보십시오.의자 대신 방석이 있는데 손님이 오면 내왔다가 돌아가면 방석을 넣어둡니다.사람이 앉을 때만 존재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라집니다.인간과 도구는 일체가 되어 함께 호흡하지요.서양식탁은 세끼 밥먹기 위해서만 있는데 밤낮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먹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그러나 우리 밥상은 어디 그래요.먹을 때에는 나오고 먹고나면 들어갑니다(웃음). □먼저 시간에 말씀하신 한국의 보자기와 서양 가방의 차이와 같군요. ■자동차는 서양사람이 만든 물건 가운데 대표적인 최악의 발명품으로 사람이 탈때나 내릴 때나 변함이 없어요.한국인이 만들었더라면 전주 합죽선처럼 내리면 척 접혀져 작아지거나 벌떡 일어서거나(웃음)무슨 변화가 있도록 디자인 되었을 것입니다.빈차가 잠자고 있는 주차장 공간을 볼때마다 과학기술이 발달했다고 자부하고 있는 현대인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됩니다.농담이 아니라 사실 근대에 들어서 동양인의 독창적인 발명품으로 유일하게 손꼽히는 인력거를 보더라도 손님이 내려 비었을 때에는 세워놓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습니까.가마도 다 해체할 수 있도록 되어 있구요. □근대 기계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도 그런가요. ■일렉트로닉스는 합죽선과 가까운 도구인 것입니다.전자제품은 인간과 일체형으로 되어 있지요.그것들은 몸에 휴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안테나를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도록 된 라디오 카세트처럼 쓸때와 쓰지 않을 때에 따라 달라집니다.인간과 대화를 하고 있지요.컴퓨터의 변화를 보세요.이젠 노트북 컴퓨터에서 펌(손바닥)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인체에 밀착하도록 발전되어가고 있지요.인간과 함께 하는 마치 인체의 일부처럼 붙어다니는 기계 그것이 전자제품들의 특성입니다. □무선전화니 휴대폰도 다 그렇구요. ■기계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면서도 그 결과는 인간을 해치고 대결하고 파멸시키는 프랑켄 슈타인이 되었지만 앞으로의 그것은 좋은 동반자로서 같이 호흡하고 대화하는 커뮤니케이션 파트너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기계는 생산하는 도구,공장의 기계로 대표되었던 그런 도구가 아니라 방안에서 인간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따뜻한 도구로 변신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도구와 인간이 일체가 되는 그런 정신을 우리는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어서 미래의 기계에 대한,도구에 대한 새로운 철학은 한국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도구론이 말입니다.삼장법사가 손오공과 저팔계를 데리고 경전을 구하러 가는 그 여행처럼 앞으로 우리는 로봇이었던 컴퓨터였던 그런 반려자를 데리고 복지의 땅 행복과 번영의 인간문명의 경전을 받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호칭에도 인격부여 □실제로 그런 현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지요. ■가령 접부채를 만들어낸 일본의 예를 들어보면 그들이 어떻게 로봇왕국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지요.전세계의 공장에서 일하는 로봇의 80∼90%는 일본것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급속도로 로봇이 인간과 함께 공장에서 일하게 되는 것은 로봇에 대한 거부감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마치 인간처럼 기계와 친숙하게 벗하면서 일을 한다는 것이지요.아침에는 로봇과 함께 라디오체조를 하기도 하고 인기가수나 연예인 이름을 따다 로봇에 붙여 놓고 부릅니다.『고장났다』고 하지 않고 『병에 걸렸다.몸이 불편한가 보다』라고 말한다는 겁니다.서양에서는 로봇을 인간의 대립물로 보기 때문에 노조에서는 물론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으로 적대감을 갖는 경우가 많지요.도구와 친화력을 갖는 전통문화를 갖고 있는 사회에서 로봇이나 전자제품은 보다 잘 수용되고 발전해 갈 가능성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기계의 개념이 바뀌어지는 데서 21세기의 문이 열린다.산업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도구관이 탄생되어야 한다.이 가능성이 우리에게 많다.대체로 이러한 논법에서 산업문명 뒤에 오는 미래의 역사를 전망해 주셨습니다.다음에 계속하지요.
  • 한국 도자기사 흐름 한눈에

    ◎호암미술관,20일부터 「분청사기 명품전」 마련/보물급포함 2백점 소개… 제작과정도 재현 호암미술관이 한국도자사의 흐름을 심층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전시의 하나로 「분청사기 명품전」을 마련한다.호암미술관 소장의 보물급등 2백여점을 엄선하여 소개하는 이 특별전은 오는 20일부터 3월30일까지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펼쳐진다. 분청사기를 폭넓게 감상할 수 있는 이 전시는 국내에서 고미술품 소장에 첫 손꼽히는 호암미술관이 방대한 도자사 자료를 공개함으로써 이루어졌다.특히 이번 전시회는 분청사기의 독특한 위치를 정립시킴과 동시에 분청사기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고조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전시는 분청사기 실물에 작품해석과 시대적 배경을 밝히는 설명문이 제시되고 전시장 한켠에 20여평의 전통 분청사기 작업실을 재현,도공이 분청사기를 제작하는 모습 전과정을 보이는 것으로 꾸며진다.출품되는 분청사기는 보물로 지정된 분청사기철서어문호(787호),분청사기조화수조문변병(1069호),분청사기조화박지목단문장군(1070호)를 비롯,15∼16세기의 명품이 대거 망라된다.이들 옆에서 실연되는 분청사기 제작모습은 백암도예의 마순관도공에 의해 물레질부터 문양그리는 작업까지 전과정을 실연하는 동시에 관람자들도 직접 제작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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