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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예가 김정옥(이세기의 인물탐구:152)

    ◎타고난 장인… 백자·분청사기 대가/7대 2백여년 이어온 도공후손의 무형문화재/자기의 순결·투박성에 매료… 전통도예 고집 백산 김정옥은 바로 은은한 흙냄새 속에서 한국도자기만의 무위자연미를 빚어내는 이시대 들꽃같은 존재다.생전에 백산을 극진히 아끼고 사랑했던 예용해씨는 불가마에서 나오는 순간에 ‘그의 작품은 이미 고태가 물들여진다’고 감탄한 바 있다.옛도공의 순결성과 투박성을 고수하기 때문에 그의 도자기는 빳빳하게 풀먹여 다린 선비의 무명옷같은 청정성이 깃들여 있다.현대에 사는 백산이 어떻게 이러한 도자기의 맥을 짚어낼수 있는가.이는 타고난 장인정신과 미적 진실을 밝혀내는 안목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우선 그의 작품에는 자기과시가 없다.기형이나 시문과는 무관하게 그의 차완은 새 영의 숨결이 흘러넘친다.이는 신비한 불의 마술을 체득한데서 얻어지는 독자적 실력이며 백산도자기가 시작되고 끝나는 도의 경지라 할 수 있다. ○작품엔 자기 과시없어 백산은 한눈에 보아도 꾸미지않는 사람이다.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되 우직성이 두드러지고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성격이다.그 무엇을 캐물어도 ‘이 말은 해도 된다’고 숙고한 끝에 비위에 맞지 않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에는 타협하지 않는다.구름도 쉬어간다는 경북 문경에서 그는 당대의 도공인 김장수씨의 3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문경서중 졸업후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부친의 작도를 전수받게 되었으나 부친은 처음에는 극구 만류했다.그때만 해도 도공을 천시하던 시절이라 사랑하는 아들에게 이를 대물리지 않으려는 의도였다.그러나 백산은 흙을 만지며 살아야 하는 도공의 피가 그의 몸속에서 흐르고 있음을 감출수 없었다. 백산가문의 도예는 경북 문경군 관음리 출신인 7대조 김취정으로부터 시작된다.이후 김광균 김영수 김락집 김운희로 이어지면서 백산의 조부인 김운희에 이르러 경기도 광주군 분원리에 있는 조선왕조의 관요에 발탁되었고 부친 김장수는 선친을 따라 광주에서 1897년 광주분원이 폐정될 때까지 분청사기를 빚었다.그러다가 다시 고향인 문경으로 돌아와 관음리에 터전을잡고 그 일대 대표적 도공으로 활약,태평양전쟁을 전후로 사기막은 내리막길을 걸었고 해방과 더불어 다시 활기를 띠면서 사발 종지 푼주와 오지그릇을 경상도 일대에 보급해왔다.60년대에는 양은그릇과 스테인리스에 밀려 생계에 큰 타격을 받았으나 궁핍한 생활중에도 조상들이 200여년동안 우직스럽게 흙을 빚어온 것처럼 그도 흙을 껴안고 재래식 망댕이가마 곁을 떠나지 않았다.망댕이란 흙을 뭉친 덩어리란 뜻으로 흙덩어리를 칸별로 빙빙돌려쌓는 식이다. 도자기란 불의 조화임을 감안할때 적송만을 태우는 소성과정은 오랜 경험에서 온 축적된 기술이 아니면 이루어질수 없는 차원이다.더구나 문경 관음리에는 소백산맥의 풍부한 연료와 도자기의 원료인 좋은 흙이 매장되어있다는 점도 간과할수 없다.조부인 김운희씨는 주로 큰 항아리를 빚었고 부친 김장수씨는 하루에 사발 840개,백산은 부친밑에서 고작 300개 정도 만들었다.날마다 새롭고 경이로운 체험끝에 그는 자신만의 흙의 배합에다 새나 국화꽃이나 추상적인 문양을 그려넣을수 있게 됐다.백산의도자기는백자와 분청으로 대별되고 그중에서도 ‘정호차완’은 분청사기의 백미로 손꼽힌다.자연색으로 되돌린 남성적인 멋에는 조선의 서기가 서려방금 흙으로 빚어놓은 것같은 순결성이 두드러진다.또 청화안료로 단숨에 그려낸 새와 물고기 문양은 15∼16세기경의 분청사기 인화문태 항아리,분청사기 조화어문편병을 보는듯한 절품이며 묘품들이다.단지 수작업을 하기 때문에 한달에 한번 정도 가마에 불을 지피고 여기서 성공하는 작품은 10여점을 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전승공예대전 특별상 그는 전승공예대전에서 두번이나 특별상을 받았고 일본 도쿄 게이오백화점 화랑 초대로 86년부터 일본에서 1년에 한차례씩 전람회를 가져오고 있다.지난 10월에도 일본 오사카와 후쿠오카에서 열린 아시아도예제전에 출품하여 중국과 일본의 도예인들로부터 ‘중국의 화려 장중과 일본의 경쾌 세련과는 달리 흙이 숨쉬는 듯한 생명감은 과연 조선백자만의 순정’으로 칭송되었다.91년에는 노동부가 인정하는 도예부문 대한민국 첫 명장,96년에도 역시 도예부문 최초의 중요무형문화재 제105호 사기장 기능보유자가 되었으나 그때까지 서울에서는 단 한차례도 전시회를 열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그러다가 그의 작도를 지켜보며 한결같이 격려해 마지않던 서울 인사동 본화랑(대표 권옥귀)의 초대로 일본전시에 앞서 지난봄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비매품전시를 연것이 서울에서의 첫 개인전이다. 그의 영남요를 방문했던 사회학박사 박창희 교수(외대)와 원로 서양화가 권옥연씨는 ‘백산은 한국 도예계의 보물’로 천명한다.특히나 권화백은 백산을 위해 ‘도예와 선은 둘일수 없다’는 ‘도선불이’의 휘호를 내리고 있다.이는 ‘백산이 조선도자기로서는 하나뿐이며 최고’라는 찬사다. ○91년 도예부문 첫 명장 그는 지금도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작도와 연구에 매달린다.가족은 김순이씨와의 사이에 1남4녀.그의 아들이 숙명처럼 8대를 이으리라는 예감때문에 내심 기뻐하는 눈치다.미술평론가 신항섭이 ‘만든 이의 체취를 그릇에 담으려하지 않는 무명성으로 인해 영남요의 전통성은 성립된다’고 한 것처럼 일가전래의 기법을 통한 뼈를 깎는 작가정신과 진솔한 품성이 융합된 그의 전통도예는 ‘생명력의 소생’이 가장 강점이다.영국의 미술평론가인 허버트 리드는 ‘한 민족의 민족정신과 사회기풍은 흙이라는 표현매체를 통해 나타나게 마련이며 한 나라의 예술과 감수성의 세련미는 그 나라의 도자기를 보면 알수 있다’고 했듯이 때묻지않은 장인의 순결성과 흙의 순성이 합치된 지점에 민족의 정기와 기풍을 살린 백산이 서있음은 자랑스럽지 않을수 없다. □연보 ▲1941년 경북 문경 출생,부친 김장수씨로부터 도예기법 전수 ▲1960년 문경서중 졸업 ▲1983년 전국공예품경진대회 ‘분청사기’출품 입선,경북공예품대전 입선 ▲1984년 중소기업진흥공단주최 올림픽기념품 전시회출품,전승공예대전 ‘다완’출품 입선 ▲1986년 한국문인협 점촌지부 향토문화상수상,경북공예품대전 출품 ▲1987년 문경문화상 수상 ▲1988년 전승공예대전 ‘청화백자초화문푼주’출품 문예진흥원장상수상 ▲1989년 일본개인전(도쿄 경왕백화점화랑),전승공예대전문화재관리국장상 1990년 전승공예대전 특별상,일본개인전(도쿄 경왕백화점화랑),전승공예대전 입선,하와이 개인전(호놀룰루 N·B·C전시홀) ▲1991년 법무부 장관상,대한민국 도예부문 초대명장선정,노동부장관상,일본개인전(도쿄 경왕백화점화랑) ▲1992년 일본개인전(도쿄 경왕백화점화랑)·나고야(명고옥)개인전(명철백화점화랑),경상남도 문화상수상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05호 보유자지정 ▲1997년 부산태화백화점 초대전,서울 본화랑초대 개인전(예술의 전당비매품전시),일본 아시아도예제전(오사카 및 후쿠오카 국제무역센터)
  • 피카레스크 소설 새롭게 떠오른다

    ◎원로영문학자 이가형 교수 문학이론서 발간/16세기 스페인서 발생… 유럽문단 영향/악한들의 모험 다뤄… 현대작가들 주목 피카레스크 소설(picaresque novel).악한소설 혹은 건달소설로 불리는 이 소설은 16세기 중반 스페인에서 발생해 17세기까지 크게 유행했던 문학양식이다.피카로(picaro,악한)라고 불리던 스페인 사회의 무직자·불량배 등을 주인공으로 한 자전적 형식의 소설로,생존을 위해 무작정 떠돌아다니며 되는대로 살아가는 악한들의 모험을 주로 다룬다.최근 원로영문학자 이가형 국민대 명예교수가 펴낸 ‘피카레스크 소설’(민음사)은 구체적인 작품분석을 통해 악한소설에 대한 이해를 돕는 문학이론서로 관심을 모은다. 피카레스크 소설은 1554년 스페인에서 출간된 작자미상의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에서 비롯된다.그러나 피카레스크 소설의 진정한 원형은 마테오 알레만의 ‘구즈만 데 알파라체’(1599)에서 찾을수 있다.이 작품은 스페인 소설에서 사실주의가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잡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이 책에서는 특히 피카레스크 소설이 영·미와 유럽 소설에 끼친 영향을 상세히 살핀다.영국 최초의 악한소설은 이른바 ‘대학재사’중의 한 명이었던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 작가 토머스 내시의 ‘불행한 나그네:잭 윌튼의 생애’이다.주인공 윌튼은 유럽을 돌아다니는 귀족 주인을 둔 악한 하인이다.이 작품은 전체적인 주제의식과 통일성이 부족하고 성격묘사가 결여돼 있다.그런 관점에서 평론가 엘리자베스 드루는 이를 피카레스크 소설(novel)이 아니라 ‘피카레스크 픽션’이라고 불렀다. 세계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악한소설의 하나는 독일에서 나왔다.살기 위해 피카로의 본색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한 부랑자의 방황을 그린 그리멜스하우젠의 ‘짐플리치시무스’가 그것이다.소설의 주인공은 로빈슨 크루소처럼 절해 고도에서 은둔생활을 한다.그러나 그와는 달리 속세로 돌아가지 않고 섬에 남는다.정신의 정화를 위해 절대 고독의 경지에 머무는 것은 전통적인 피가로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다.이러한 내면성의 추구는 훗날 독일 고유의 성장소설로 이어지는 토양이 됐다.스페인의 피카레스크 소설은 17세기 프랑스 소설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독일의 ‘짐플리치시무스’에 해당하는 프랑스의 피카레스크 소설은 르사주의 ‘질 블라스’이다.스페인 피카레스크 소설의 전통에 따라 르사주는 사회의 풍속을 폭로하는 일련의 희극적 또는 소극적 모험들을 엮었다.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피카레스크 소설의 피카로라기 보다는 로맨스의 주인공에 더 가깝다.고전적 피카로들에게서 나타나는 무지막지한 면이 없기 때문이다.‘질 블라스’보다 훨씬 낙천적인 피카레스크 히어로는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에서 발견할 수 있다.볼테르는 피카레스크 소설의 형태를 빌어 그의 철학사상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철학적 피카레스크 소설이라고 부를 만하다. 19세기 후반 미국에는 독특한 피카레스크 소설이 선보였다.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그것.‘라사리요’가 16세기 스페인의 피카로라면 ‘헉’은 19세기 미국의 피카로다.이러한 피카레스크 소설의 맥은 미국의 자연주의 문학에 속하는 작가들의 작품에서 한결 분명하게 드러난다.그 한 예로 프랭크 노리스의 ‘맥티그’나 시어도 드라이저의 ‘시스터 캐리’같은 작품은 피카레스크 소설로 읽힌다.돌팔이 치과의사 맥티그와 가난한 시골 아가씨 캐리는 비정한 대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각 피카로와 피카라가 되지 않을수 없다.이 두 작품은 자연주의 소설의 인간관과 피카레스크 소설의 인간관이 약육강식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줘 눈길을 끈다. 피카레스크 소설은 20세기 들어 새롭게 부활했다.이 교수는 현대의 대표적인 피카레스크 소설로 미국 작가 솔 벨로의 ‘오기 마치의 모험’,프랑스 소설가 셀린의 ‘밤의 끝으로의 여로’,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 등 3편을 꼽는다.현대의 많은 작가들이 피카레스크 소설형식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이 교수는 피카레스크 소설의 다양한 소설적 가능성에 주목한다.“피카로로 태어나는,자아가 강한 현대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하거나 사회문제를 다루는 소설을 지향할 때 피카레스크소설의 방식을 택하게 된다”는게 이 교수의 견해다.
  • 김치의 지적재산권론/임영숙 논설위원(서울논단)

    프랑스 월드컵 예선 한 일전의 일본팀을 응원하기 위해 내한했던 ‘울트라 닛폰’ 회원들이 김치 싹쓸이 쇼핑을 했다는 소식은 복잡한 상념을 불러 일으킨다.우리 김치에 대한 일본인들의 열광이 흐뭇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세계 김치시장에서 한국의 김치를 위협하는 일본의 ‘기무치’가 그 흐뭇함에 그늘을 드리운다. 월드컵 예선 경기가 열린 지난 1일 잠실의 한 호텔 면세점 토산품 코너에서는 포장김치가 재고까지 동나 버렸고 이들이 한국에 머무른 3일동안 투숙한 호텔의 본점과 잠실점의 면세점 매출액은 하루 평균 20∼30%(13만달러) 정도 늘어났다 한다.매출액이 늘어난 곳은 물론 김치등을 파는 토산품 코너였다는 것이다. 마침 기상청은 올해 김장 담그기 좋은 시기를 각 지역별로 예보하고 있다.그러나 올해는 또 얼마나 많은 우리 가정에서 김장을 포기하게 될지 모르겠다.농협을 비롯한 포장김치 업체들은 지난해보다 올해 매출액을 50∼100% 늘려 잡고 김장김치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그만큼 집에서 김치를 담그기보다 상품으로 만들어진 김치를사먹는 가정이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핵가족화,맞벌이 부부의 증가,청소년 입맛의 서구화,아파트등 주거공간의 변화로 김치보관이 어려워진 점등 때문에 우리 가정에서의 김치 담그기는 이처럼 퇴조하고 있는 추세다.반면 한국 김치에 대한 일본인들의 열광은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울트라 닛폰’ 회원들의 김치 싹쓸이 쇼핑과 일본인들의 한국관광에서 필수코스로 등장한 김치강습은 그 열광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한다.심지어는 김치관광을 왔다가 한국에 몇개월동안 머무르며 본격적으로 김치 담그는 법을 배워가는 일본인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러다간 도자기처럼 김치도 일본에 빼앗길 가능성이 없지 않다.16세기 후반 일본에서는 조선도자기를 갖는 것이 명예와 부의 상징이 됐다.당시 일본 상류사회의 조선 도자기에 대한 열망은 결국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그래서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으로도 불린다.실제로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수많은 조선 도공을 일본으로 납치해갔다. 그 결과 일본의 도자기 산업은 나중 조선을앞지른다.17세기 후반에는 서구와의 무역을 거부한 중국을 대신해서 세계적 도자기 수출국이 된다.이후 100년간 일본 도자기는 유럽을 석권하게 되고 독일의 장인이 일본에 가서 기술을 익힐 정도에 이른다.이 독일 장인은 나중 마이센으로 돌아가 오늘날 독일이 자랑하는 마이센 도자기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고 윤용이 교수(원광대)는 그의 저서 ‘아름다운 우리 도자기’에서 밝히고 있다. 도자기와 김치를 비교하는 것은 지나친 걱정일 수도 있다.한국의 1년간 김치소비량 1백50만t중 상품김치는 그 15%인 23만t 정도에 불과하다..또 일본의 1년간 김치 생산량 7만5천t은 한국에 비교할 정도가 되지도 못한다.한동안 일본에 뒤진것으로 알려졌던 김치 포장 방법등도 이제는 많이 개선됐다고 포장김치 업체측은 주장한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고장마다 집집마다 각기 다른 김치의 맛과 특색이 사라진다면 우리 김치는 일본의 ‘기무치’에 얼마든지 추월당할 수 있다. 김치의 상품화와 수출이 더욱 촉진돼야 하겠지만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의 손 끝에서우러나오는 김치의 깊은 맛 또한 가보처럼 전승돼야 하지 않을까.일본인들이 김치를 찾는 것은 획일화된 ‘기무치’와는 다른 깊은 맛 때문이라고 한다.그러나 우리는 상품화된 김치에서는 깊은 맛을 느끼지 못한다.입맛의 차이다. 그 입맛이 바로 우리의 재산이다.김치는 세계화 시대에 우리가 가장 자신있게 내놓을수 있는 지적재산이고 그 재산은 고유의 비법을 무궁무진할 정도로 많이 지니고 있는 것이다.샤토(성)마다 다른 맛을 지닌 포도주를 내놓는 프랑스처럼 우리 김치도 각양각색의 맛을 계속 살려가야 한다.그런 점에서 가정의 김장 담그기는 계속돼야 할 것이다.
  • 눈으로 보는 책의 역사/윤형두·안춘근 지음(화제의 책)

    ◎고대서 현대까지 세계 도서출판 역사 세계 도서출판의 변천사를 풍부한 시각자료를 곁들여 정리.고대 로마에서는 읽고 쓸줄 아는 노예로 하여금 원본을 소리높여 읽게 하고 필사생들은 이를 일제히 받아쓰는 방식으로 책을 대량 복제했다.때문에 로마의 유명한 시인 마르티알리스의 ‘에피그라마타(단문경구시집)’나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스’같은 책도 몇 데나리만 주면 살 수 있었다.기원전 207년 로마에서는 필사생의 동업조합이 조직됐다.그들은 일정한 노임을 받고 책을 베껴 줬다.이처럼 노예노동이 임금노동으로 바뀜에 따라 책값도 보다 비싸졌다. 중세에는 규모가 큰 수도원에는 스크립토리엄(scriptorium),즉 필사실이 있었다.수사들은 하루의 일과로 매일 일정 시간 그곳에서 책 베끼는 일을 해야 했다.이들 수사들은 로마시대의 영리를 목적으로 한 책방에 고용된 노예들과는 달리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성서의 복제나 그밖의 성업에 몰두했다.이같은 장엄함과 정확성이 존중되는 분위기속에서 중세의 호화스러운 채식사본이 등장했다.한편인큐내뷸러(incunabula)는 15세기 중엽 구텐베르크가 납 주조활자를 사용한 활판인쇄술을 발명한 이후 15세기 말까지 50여년 동안 간행된 초기간본을 일컫는다.16세기의 도서출판은 마르틴 루터가 1517년 ‘면죄부에 관한 95개조’를 낸 것을 계기로 특히 종교영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20세기 출판의 주목거리는 마가렛 미첼의 처녀작이자 최후작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출간.10년의 집필기간을 거쳐 완성된 이 책은 초판 이래 25년동안 950만부가 팔리는 대기록을 세웠다.범우사,6만원.
  • 분묘내부 제문 첫 발견/영주시 이산면서 16세기 유물 대량출토

    ◎만사 등 원형 그대로 보존… 복식연구 가치도 커/문화재 지정 신청… 99년부터 일반에 공개키로 지난 3월 영주시에서 대량 출토,16세기 장의제도를 규명할 수 있는 귀한 자료로 평가받는 제문 등 유물이 문화재 지정신청과 일반공개를 앞두고 있어 관련학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이들 유물은 국도 5호선 편입부지인 영주시 이산면 운문리 마을앞 야산에서 조선 중종 21∼23년(1526∼1528년) 장예원 판결사를 지낸 김흠조 부부의 묘소를 이전하던 후손들에 의해 묘관내부에서 출토된 것.즉시 영주시에 기증된 이들 유물은 비교적 완전한 형태의 제문과 만사 각 19점을 비롯,백자호 분청호 백자매병 유리구슬 장신구 명정 등 모두 20종 92점.깊이 2m70㎝ 지점의 무덤안에서 출토된 것으로 외관위에 두께 15㎝의 회판과 30㎝ 정도의 숯을 깔고 매장돼 잘 보존된 상태였다. 영주시는 이들 유물을 전문가들에게 의뢰,과학적인 보존방법을 강구한 뒤 학계와 문화재 전문위원 등의 고증을 거쳐 문화재 지정을 정부에 신청하기로 했다.아울러 순흥역사문화단지내에 건립될 소수박물관에 전시,99년부터는 일반인들에게 공개할 방침이다. 출토유물을 살펴본 문화재 전문위원과 학계 전문가들은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며 과학적인 보존대책을 수립할 것을 강조했다. 특히 학계의 관심을 끄는 것은 내관속 장지에 먹으로 쓴 제문과 만사,당시의 수의와 의류 등으로 470년이 지난 현재까지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보존돼 있었다는 점이다.또 출토된 제문은 당시의 형조판서 등 관직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연명으로 기록,보통의 제문이 각자가 고인을 애도하는 내용의 제문을 쓴 것과는 다른 특이한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남권희 경북대 교수(문헌정보학)는 “피장자의 문집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보관상태가 좋은 제문과 만사가 발견돼 피장자와 당시 사림(사림)들의 학맥·교류관계,필적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윤용진 전 경북대 교수(고고인류학)도 “지난 91년 5월 경북 칠곡군 북삼면 인평리 야산 벽진 이씨 분묘에서 수습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선조 18년(1585년)에 사망한 피장자(신원이 밝혀지지 않음) 묘관에서 만장 12점과 수의와 의류 등 16점이 출토된 것이 학계에 보고되었으나 묘관내부에서 제문과 만사가 같이 출토된 사례는 없었다”고 밝혔다. 이는 제문과 만사의 경우 대부분 탈상시까지 빈소에 전시되거나 비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분묘에서 제문과 만사 특히 제문이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16세기 전반기 조선 중종(1520년대)때의 복식이 대량출토 된 것도 복식사 연구에 소중한 고증자료라는 평가다. 김영숙 문화재 전문위원은 “옷감이 교직물(두가지 이상의 실로 섞어서 짬)을 사용,칠보무늬 등 문양이 특이하고 저고리가 전단후장(앞은 짧고 뒤는 긴 옷)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며 “절대 부족한 조선 전기의 복식연구를 위한 귀중한 고증자료”라고 말했다.
  • 불 스트라스부르(세계 문화유산 순례:43)

    ◎‘비대칭의 파격’ 142m 노트르담성당 장관/운하로 싸인 섬 전체 ‘문화유산’ 등록/괴테가 ‘베르테르의 슬픔’ 구상한 곳 파리를 포함한 광역수도권을 ‘일 드 프랑스(Ile de France)’라고 부른다.프랑스와 차별화 된 생활방식과 문화가 존재해온 수도권,즉 ‘프랑스의 섬’이라는 뜻이다.그런데 파리에서 동쪽으로 4백여㎞ 떨어진 스트라스부르에는 ‘라 프티트 프랑스(La petite France)’라는 지역이 있다.‘작은 프랑스’라는 의미인데 운하로 둘러 쌓인 진짜 섬이다.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섬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한 섬이기도 하다. ○옛 목조건물·거리 보존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까닭은 옛날 목조 건물과 거리 등이 그대로 잘 보존돼 있기 때문이다.라 프티트 프랑스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곳은 운하 바로 옆거리에 군데군데 있는 흰색의 목조건물이다.라 프티트 프랑스라는 지역이름의 유래도 여기서 비롯됐다.스트라스부르는 지금은 알자스지방 바랭즈의 수도로 프랑스 땅이지만 독일과 프랑스의 삼색기가 번갈아 게양됐던 역사를 지니고 있다.스트라스부르에서 동쪽으로 4㎞만 가면 독일 국경이 나올 정도로 접경지역이어서 전쟁만 일어나면 총알받이가 됐다. 1867년 독일과 프랑스가 전쟁을 치르던중 프랑스 샤를8세 군대의 부상병들이 스트라스부르에 후송돼 왔다.당시 운하옆의 낭만스런 흰색의 목조건물이 부상병을 치료하는 병원이었다.부상병에 섞인 환자들 가운데 ‘이상한 병’에 걸린 환자들이 있었다.의사들은 그 ‘이상한 병’이 바로 성병인 매독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냈다.오늘날의 치료제인 페니실린이 없던 시절이라 걸리기만 하면 목숨을 앗아간 무시무시한 병이었다.매독 환자들이 수용된 작은 섬은 ‘더러운 프랑스인들이 이상한 병을 옮아 왔다’는 비아냥 섞인 불평이 들끓었다.그래서 ‘라 프티트 프랑스’라고 부르게 됐고,그 이름이 바로 유네스코문화유산 명칭으로 등재된 것이다. 스트라스부르 시내 구시가지에 해당하는 거대한 섬 라 프티트 프랑스는 명예롭지 못한 이름과는 달리 무척이나 깨끗했다.스트라스부르의 한 중앙에 위치한 덕에 20개의 다리가 운하를 가로질러갔다.그 다리 아래로는 낭만같은 물결이 때로는 우수처럼 넘실거렸다.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구상했던 곳도 스트라스부르다.1792년 프랑스의 시인이자 음악가였던 루제 드 릴이 나중에 프랑스의 국가가 된 군대 행진곡 ‘라 마르세예즈’를 작곡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프랑스국가 작곡한 곳 운하위의 다리를 건너 라 프티트 프랑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높이 142m의 노트르담 성당에 발길이 닿았다.베르느대주교가 지은 노트르담 성당은 19세기까지면 해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성당으로 명성을 날렸다.기념품을 파는 북아프리카 상인들을 제치고 내부로 들어서면 성당은 관광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던져 주었다.파리의 노트르담 성당과 비숫한 구조이나 예배소의 성모 마리아상이 주는 모성애는 너무나 감명적이었다.그리고 늘 직접 연주하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는 장중했지만 명상의 분위기를 이끌어냈다.성당 한 구석에 자리한 천문시계 또한 진귀한 구경거리이다.동구의 프라하를 방문했던 사람이라면 프라하 구청사에 있는 천문시계와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 노트르담 천문시계는 15세기 프라하의 카를대학 수학교수였던 하즈스가 만들었다고 짐작하고 있다.매시 정각에 12제자의 모습이 나타나고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던 장면이 시계에 묘사됐다.프라하의 지배자는 천문시계를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것으로 남겨두고자 했다는 것이다.그래서 하즈스교수의 눈을 멀게 했다.그때 이상하게도 프라하의 천문시계는 스스로 멈춰버렸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한다.그리고 나서 400년이 지난 1860년에야 다시 움직였다고 한다. ○16세기 천문시계 유명 그런데 프라하의 천문시계와 똑같은 구조의 시계가 스트라스부르에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스트라스부르의 천문시계가 제작된 연도는 1547년으로 돼 있다.아마도 프라하의 시계를 본땄거나 하즈스교수가 은밀히 만들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나온다.그러나 노트르담 성당측은 이런 추측에 펄쩍 뛰면서 프랑스의 시계전문가들이 만들었다는 주장을 일관하고 있다. 성당을 나와 광장에 서서 다시 한번 성당을 바라다 보았다.고딕식인데도 정면은비대칭의 파격을 이루었다.1870년 보불전쟁과 2차대전을 겪으면서 2차례 파괴되기도 했으나 내부 예술품들은 대부분 무사했다.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자 내부의 조각품들은 피난살이를 하는 불운을 겪었다.성당 맞은편의 건물에는 또 하나의 명물이 있다.광장앞 메르시에르가 모퉁이에 자리한 유럽 최고의 ‘사슴약국’이다.지금으로부터 7백여년전인 1262년에 문을 연 사슴약국을 들여다 보면 중세인들의 숨길이 와닿았다. ◎여행가이드/스트라스부르/역사 긴 세계 10대 도시/EU본부… 볼거리 많아 스트라스부르가 세계 10대 도시의 하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파리에서 동쪽으로 4백여㎞ 떨어진 스트라스부르는 유럽연합(EU)의 본부가 있는 곳이다.볼거리가 의외로 많은 지역이지만 스쳐 지나가기 쉽다.독일의 바덴바덴까지 승용차로 20분 거리에 있어 독일권과 묶어 여행을 다니기에 좋다. 최근 들어서는 외국인 투자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중세시대에는 잘 발달한 운하로 피혁제조,어부조합이 성행했다.켈트족이 살기도 했고 로마시대에는수비대의 주둔도시였으며 5세기 프랑크족의 점령하에서는 스트라테부르쿰이라고도 했던 스트라스부르는 역사가 긴 고도다.
  • 고려대 윤사순 교수 ‘한국유학사상론’ 증보판 발간

    ◎‘실용적인 학문’ 수학 만나기/성리학의 도입 토착화·조선시대 예사상 조명/실학의미의 변이·단재 신채호 유교관도 검토 “유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부정적 편견은 주로 유학이 낡은 사상이며 역사단절의 책임을 물어 폐기시켜야할 사상이라는데 근거하고 있습니다.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채 망국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지요.그러나 유학은 결코 잊혀진 사상일 수 없으며 사라져야할 사상도 아닙니다.‘비유학적’인 현대사회에서도 유학은 여전히 발언할 수 있는,생명력 있는 학문입니다” 유학의 현실적용 가능성을 꾸준히 모색해온 고려대 윤사순 교수(철학과·62)가 한국 유학에 관한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결산한 논문집 ‘한국유학사상론’(예문서원)을 냈다. 지난 86년 내놓은 초판에 10여년간의 연구성과를 보태 증보판으로 펴낸 이 책에서 윤교수는 성리학의 도입에서부터 후기실학의 자기 개혁단계를 거쳐 근대 유학의 각성으로 이어지는 한국 유학의 흐름을 면밀히 살핀다.이 책은 모두 5장으로 이뤄졌다.1장에서는 성리학의 도입과 토착화·관학화 과정을 살펴보고 2장에서는 사림파의 선비정신,휴암 백인걸의 도학사상,조선시대 예사상,조선말기 주리파의 현실 실천관 등 한국성리학의 정신세계를 분석한다.3장에서는 회재 이언적의 인사상,퇴계 이황의 성선관,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설,하서 김인후의 천명사상 등 한국성리학의 이론세계가 소개된다.4장에서는 실학의미의 변이,지봉 이수광의 무실사상,다산 정약용의 인간관,실학의 철학적 기반 등 탈성리학적 실학을 조명한다.마지막 5장에서는 근대유학의 역사적 변모과정과 단재 신채호의 유교관을 검토한다. 이 책은 특히 16세기 중엽에 있었던 ‘사단칠정의 이기론적 해석’을 둘러싼 학자들의 논쟁과 18세기 초엽에 있었던 ‘인성 물성의 동이문제’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을 들어 한국유학이 외래사상을 수용해 독자적으로 발전해온 과정을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송대의 성리학이 13세기 한국에 들어온 뒤 중국이나 일본 등지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수 없을 정도로 심화된 고도의 형이상학적 이론으로 발전했다는것이다. 또 유학이 비현실적이었다는 일반의 지적에 대해 지은이는 “어느 사상 못지않게 삶에 적극적이었으며 치열한 현실인식의 자세를 지니고 있었다”고 반박한다.특히 실학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켜 실학이 한국 유학의 긍정적 특징,즉 현실인식의 능력과 주체적 역량을 아우르고 있음을 논파한다.이것은 윤교수가 그동안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신실학론’의 주창으로 이어진다.신실학 은 유학의 특징을 ‘실용성의 추구를 향한 의지’로 보는 데서부터 출발한다.유학은 시의적절하게 자신을 변용하는데 적극적이었으며 시대에 맞게 옷을 갈아입었을 망정 ‘실학’이라는 정체적 특성만은 늘 유지해왔다는 것.현대사회의 여러 문제들은 이와 같은 유학의 특성을 살림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게 이 책의 결론이다.
  • 16세기 불 신교도 학살사건/교황,가톨릭 개입 시인

    ◎기독교도에 관용 촉구 【파리 AFP 연합】 제12회 세계 가톨릭청소년대회를 주재중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77)는 23일 4세기전에 발생한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사건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개입됐음을 인정하고 기독교도들에게 정직과 관용을 촉구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날 밤 파리 교외 롱샹경마장에서 1백60개국 청소년 70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야외미사를 집전했다. 교황은 이 미사에서 “과거의 약점을 시인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도록 도와주는 정직하고 용기있는 행동”이라면서 “오늘 우리는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불행한 학살을 잊을수 없다”고 말한뒤 “나는 오직 용서만이 결실있는 대화에 점진적으로 이르게 할 수 있으며 이것이 완전한 기독교도들의 화해를 보장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지적했다.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은 4세기전인 지난 1572년 8월 24일에 구교도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등이 신교 교파인 위그노파 신자 수천명을 학살한 사건으로 이 사건은 그후 수세기 동안 프랑스 전역을 들끓게 한 구교도와 신교도간의 종교전쟁을 촉발시켰다.
  • 걷혔나 안걷혔나 거품경제(눈높이 경제교실)

    ◎‘저성장기’ 주택·토지가격 적정성 논란 우리나라에도 부동산 가격의 거품붕괴 현상이 일어날 것인가.경기의 장기침체에 따른 기업들의 부동산 급매물이 쌓여 대규모 부동산의 가격이 감정가의 60∼70%에 거래되면서 부동산 가격붕괴­은행파산등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특히 우리경제가 일정기간을 두고 일본경제를 뒤따라가는 경우가 많아 일본의 거품붕괴는 조만간 우리나라에도 현실화될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 부동산거품의 제거가 불가피하다고 보는 이들은 부동산 가격상승폭이 컸던 80년대 후반과 달리 지금은 주택과 토지의 공급이 수요를 크게 앞서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90년이후 연평균 가구증가율은 1.8%인데 비해 주택수 증가율은 5.4%에 이르렀고,88년 69.2%에 불과했던 주택보급률도 96년말 89.2%로 높아졌다.또한 우리경제가 이미 저성장기에 들어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고도성장을 전제로 조성된 현재의 부동산가격은 거품제거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국내 부동산 수급상태가 여전히 ‘수요초과’라는 점을 들어 일본과 같은 급격한 거품붕괴는 없을 것으로 본다.우리나라의 경우 부동산가격이 지난 4∼5년간 하향 안정세를 지속하여 충분한 조정과정을 거쳤고 아직 낮은 주택보급률로 인해 주택과 토지에 대한 수요가 꾸준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고 있다.일본은 거품붕괴 시점에 주택보급률이 110%에 달했었다. 금융전문가들은 설령 부동산거품붕괴가 오더라도 국내 금융기관의 부동산 관련대출 비중이 일본에 비해 훨씬 낮은 수준이어서 금융위기로 비화될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평가한다.96년말 현재 우리나라 금융기관의 부동산 관련대출이 총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5%로서 일본의 30%의 절반 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렇더라도 저성장시대의 진입과 함께 지속적인 사정과 사회개혁으로 ‘지하자금’의 수맥이 말라버릴 경우 지하자금을 토대로 만들어진 비싼 음식값,너무 많은 술집등의 ‘거품’은 언제든지 하루아침에 붕괴될 수 있을 것이다.〈이순여기자〉 ◎어떤 의미로 쓰이나 요즘 우리는 신문지상이나 TV를 통해거품이란 용어를 심심치 않게 접한다.거품경제,거품인기,거품가격,거품의식 등이 그 예이다.거품이란 엄밀한 의미의 학술적 용어는 아니지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실상에 비해 마구 부풀려졌다가 어느 한순간 돌연 터져버려 빈약한 참모습이 드러나는 현상을 묘사하는데 자주 활용된다.경제현상과 관련해서는 부동산,주식과 같은 자산가격이 단기간에 걸쳐 급격히 상승하는 현상을 지칭한다. ○자산가치의 급격한 폭등현상 지침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거품현상은 17세기초 네덜란드에서 발생한 튤립파동을 들수 있다.16세기 중반 유럽에 소개된 튤립은 귀족은 물론 일반인 사이에서도 큰 인기를 끌면서 투기붐을 조성하였다.사람들은 튤립 뿐 아니라 이듬해 수확할 튤립알뿌리를 미리 사기 위하여 거액의 돈을 투자하였으며 급기야는 일부 품종의 알뿌리 가격이 일거에 25배 가량 폭등하기도 하였다.그러다가 가격이 터무니없이 올랐다고 생각한 일부 투기꾼들이 발을 빼기 시작하자 알뿌리 가격은 순식간에 폭락하고 말았다.그 결과 집과 땅을 팔아 투기에 나섰던많은 일반 시민들이 파산하면서 경제전체가 공황에 빠져들게 되었다. ◎화 튤립알뿌리값 25배 상승 첫사례 그 이후에도 미국,영국 등에서 몇차례 거품현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근래 들어 거품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게 된 것은 1980년대 후반 이후 많은 나라에서 부동산,주식 등 자산가격이 급격히 상승하다 폭락하여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면서부터이다. ◎어떻게 생성­소멸되나 이론적으로 부동산,주식 등 자산의 가격은 그 자산을 보유함으로써 얻을수 있는 예상수익,다시 말해 내재가치에 의해 결정된다.그러나 실제 시장에서 형성되는 가격은 투기적 요소때문에 내재가치만을 반영하지는 않는다.예를 들어 경기가 좋아지거나 소득이 늘어나면 사라들은 자산을 매입하기 시작하고 가격은 서서히 올라간다.가격상승을 목격한 다른 사람들이 엄밀한 경제적 평가없이 이에 가세하면서 자산가격의 상승 추세는 점차 가속된다.한걸음 더 나아가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하면 무조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투기심리가 사회전체에 확산되면 자산가격은경제적 요인만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을 정도로 급등하게 된다.그러나 정책당국이 자산가격의 이상 급등을 막기 위하여 투기억제정책을 시행하고 투자자들도 자산가격이 더이상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투매사태가 일어나 자산가격은 일순간 폭락하게 된다.거품이 꺼지는 것이다. ○내재가치 무시한 모방 투기심리 ‘발단’ 거품발생의 배후에는 거의 예외없이 통화량 확대가 자리잡고 있다.돈이 많이 풀리면 사람들은 자산을 매입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지게 되어 투기대열에 나설수 있게 된다.또 높은 통화증가세는 인플레기대심리를 높여 사람들로 하여금 부동산과 같은 실물자산을 더욱 선호하게 만든다. ○통화 확대 ‘배후’… 투매사태로 ‘제자리’ 근래 들어 거품생성과 소멸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 주었던 일본의 경우를 살펴보자.일본은 198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엔화 강세의 영향으로 경기가 둔화되자 즉시 재정지출을 확대하고 통화공급을 늘리는 등 적극적인 경기부양책을 실시하였다.이에 편승하여 대출담보 또는 투자대상으로서의 기업의 부동산 매입이 늘어나고 가계의 주식투자가 급증하면서 자산가격이 급상승하기 시작하였다.더욱이 그 시기에는 금리자유화가 크게 진전되어 자금조달 코스트가 상승함에 따라 금융기관들은 예대마진이 큰 부동산업에 대한 대출을 크게 확대하였다.그 결과 일본의 지가(6대도시 상업용지가격)는 1986∼90년중 연평균 30% 상승하여 5년사이에 3.8배나 상승하였고 주가도 1986∼89년중 3배 가까이 급등하였다.그러나 90년대 들어 경제가 하강국면으로 돌아서고 부동산대출 및 거래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거품은 빠른 속도로 꺼지기 시작하였다.주가는 89년 이후 3년 사이에 무려 50% 이상 폭락하였으며 지가도 급전직하하여 96년말 지가는 90년의 1/3 수준으로 하락하였다. ◎어떤 영향 끼치나 거품의 생성과 소멸은 그 주기를 잘 예상한 극소수의 투기꾼들에겐 부당이득을 가져다 주지만 국가경제 전체로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영향을 미친다.먼저 거품현상은 금융산업의 안정성을 크게 훼손시킨다.금융기관들은 일반적으로 경기가 좋을때 더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 주식투자나 부동산업에 대한 대출을 크게 확대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거품붕괴로 주식가격이 폭락하고 부동산 관련기업이 줄이어 도산하게 면 수지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투기꾼 부당이익… 금융기관 부실 초래 더욱이 금융기관은 대출을 해줄때 많은 경우 부동산을 담보로 잡게 되는데 부동산가격이 낮아지면 담보가치가 원금에 훨씬 못미칠 정도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이는 모두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누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금융기관의 경영부실과 이에 따른 신용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금융기관이 부실화되고 신용질서가 어지러워지면 돈이 필요한 부문에 제대로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경기침체가 장기화된다. ○기업·근로자 한탕주의 조장… 경기 침체 또한 거품경제는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마비시킨다.기업은 기술개발보다 재테크에 열중하고 근로자들도 열심히 일하고 저축을 늘리기보다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에 몰두하게 된다.땅에 떨어진 기업윤리와 근로의식을 가지고 건전한 경제를 만들어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어떤가?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1980년대 후반에 부동산 가격 및 주가의 급등을 경험하였다.주가는 1986∼89년중 연평균 62% 상승하는 폭등세를 보였으며 지가도 1986∼91년중 연평균 19% 상승하였다.당시에는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사상초유의 국제수지 흑자,근로자 임금의 급상승 등으로 우리경제는 온통 장미빛 일색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머니게임에 열중하였다.그러나 폭등세를 이어가던 주가는 89년 하반기부터 국제수지가 적자로 반전되고 경기전망이 불투명해짐에 따라 하락세로 돌아서서 1990∼92년중 연평균 14% 하락하였다.89년 4월에 1007.8로 최고치에 이르렀던 종합주가지수가 92년 8월에 절반을 밑도는 459.1까지 폭락하였다.그 이후 주가는 경기국면에 따라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고 있으나 아직도 거품형성기보다 낮은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한편 지가도 1990년대 들어 하락세로 돌아섰으나 하락폭은 주식에 비해 완만하여 1992∼96년중 연평균 1.5% 하락하는데 그쳤다.주식과 부동산 가격의 변동을 놓고 볼때 우리나라에서도 거품현상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으나 일본 등과 비교해볼때 그 정도는 상대적으로 크지않은 편이었다. ○80년대후반 지가·주가 폭등세 경험 한편 금년 들어 경기침체의 골이 깊어지면서 부동산 수요가 움츠러드는 가운데 기업들이 자구노력의 일환으로 보유부동산을 매각하거나 금융기관들이 기업부도후 담보로 보유하고 있던 부동산을 매각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이에 따라 일본의 예에서 보듯이 부동산가격의 폭락과 금융기관 부실화,그로 인한 신용불안이 겹쳐 실물경제가 더욱 위축되는 소위 복합불황 현상이 나타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일고있기도 하다.
  • 우리역사 움직인‘위대한 한국인’/한길사 인물평전 1차분 4권나와

    ◎원효서 윤이상까지 100명 삶과 사상 조명/철저한 자료조사·현장취재… 완성도 높여 삼국시대의 원효에서부터 현대의 윤이상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인물들의 삶과 사상을 조명한 한국인물평전 ‘위대한 한국인’시리즈(한길사) 1차분 4권이 나왔다.모두 100권으로 기획된 이 시리즈는 철저한 자료조사와 현장취재를 병행해 평전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는 것이 특징.대상인물은 사상가를 비롯,문학가 음악가 미술가 과학자 종교가 정치가 등 시대와 분야를 망라해 우리 역사의 다층적이면서도 역동적인 모습을 살필 수 있도록 했다.이번에 선보인 책은 ‘원효’(고영섭 지음),‘허균’(이이화 지음),‘일연’(고운기 지음),‘나운규’(조희문 지음) 등이다. 시리즈 첫째권인 ‘원효’는 민중불교의 대의를 보여준 신라 불교 르네상스기(7∼8세기)의 승려 원효의 승속의 삶을 다룬다.원효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갈라진 마음을 한 마음으로 귀일시키고,다양한 주장을 조화롭게 화해시켰으며,무애의 자유로움을 실천했다.이 책에는 원효가어린 나이에 출가해 60여년이 넘는 법랍을 출가수행자로 살다 혈사로 돌아와 입멸하기까지의 치열한 구도행각이 빈틈없이 담겼다. 허균이 살았던 16세기 말은 유교적 교조주의가 고개를 들고 당론이 심화됐으며 신분제도에서는 서얼금고가 한층 가혹해진 때였다.허균의 ‘홍길동전’은 이같은 봉건체제의 모순과 부당성을 폭로한 대표적인 소설이다.평전 ‘허균’에서는 그의 이같은 저항적 문학정신을 집요하게 살핀다.소설에서 뿐만 아니라 시에서도 그는 “명나라 변공의 청치가 있다”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일가를 이뤘다.1천500수가 넘는 시를 남겼다.허균은 수사에 치우친 시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글자에 집착해 시의 본래 맛을 잃는 것을 경계했다.따라서 그의 시에는 음풍농월류 보다는 사회개혁 의지가 담긴 것들이 많다. ‘일연’은 독특한 형식으로 된 평전이다.지은이 자신이 직접 일연이 거쳐간 지역을 답사하면서 서술한 기행문형식을 띠고 있다.이 책은 먼저 전라남도 장흥군에 있는 가지산파의 종찰 보림사를 첫 행선지로 삼는다.가지산파는 신라말 선문의 기운이 싹틀 무렵 그 첫번째 뿌리를 내린 곳이다.일연이 속한 산문이 바로 가지산파다.이 책은 일연의 생각을 추체험,고려후기 사회의 문화사를 되짚어보게 한다. 1∼3권과는 좀 색다른 기분으로 읽을수 있는 것이 ‘나운규’다.한국영화사의 개척자로 일제시대의 암울한 상황에서 영화로 민족정신을 대변했던 춘사 나운규.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춘사의 작품은 ‘아리랑’ 하나 뿐이다.그것도 필름이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데 불과하다.지은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 나운규를 복원해낸다.한국영화사의 신화적 존재인 나운규의 인간적인 면모를 들추어내 그 역시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나간 인물임을 보여준다.현실은 때때로 영화보다 더 극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가난과 혼돈 앞에서 몇번이고 쓰러졌지만 그때마다 다시 일어났던 나운규도 단 한가지 피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죽음이었다.폐병과 싸우던 나운규는 1937년 36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서구 등의 경우 인물평전은 고급 읽을거리로 꾸준한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그러나 그동안 국내에서 출간된 평전은 대부분 일부 사상가에 집중돼 있거나 위인전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등 양극화 양상을 보여왔다.한길사의 ‘위대한 한국인’시리즈는 단순한 개인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문화 등을 총체적으로 읽을수 있게 하는 색다른 차원의 역사교양서로 주목된다.이미 출간된 4권 외에 연말까지 10권이 더 나올 예정이다.
  • 「입술 사과」는 앙금을 못지운다(박갑천 칼럼)

    미국이 흑인노예 후손들에게 공식 사과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하원의원들은 6월중순께 그 결의안을 의회에 제출해놨다.하나 통과여부에 관계없이 화해를 위한 이조처는 미국 인종정책의 전환점이 되리라는 평가도 나온다. 『남북전쟁을 일으킨 사람은 톰아저씨다』라고들 말한다.대단한 인물같지만 다만 남부흑인노예일 뿐이다.그는 스토부인 소설 「엉클 톰스 캐빈」(1852년)의 주인공.그 작품에는 흑인노예의 비참한 생활상이 묘사된다.포스터의 「올드 블랙조」는 음악에서의 「엉클 톰」.그 감동의 충격파가 노예해방운동을 일으키면서 남북전쟁으로까지 발전한다. 아메리카대륙을 콜럼버스가 「발견」했다고 하는 말부터가 백인위주의 역사관에 바탕한다.그 콜럼버스가 벌써 1495년 검은 원주민 5백명을 노예로서 스페인으로 보내고 있다.그후 아메리카대륙에 유럽식민지가 넓혀지면서 노예무역도 번창해간다.아프리카 서해안은 노예상인들의 노예사냥터로 되고.아무튼 16세기로부터 18세기말까지의 약3백년사이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실려간 흑인노예는 1천5백만에 이른다고 한다. 조상들이 받은 핍박을 생각할때 후손들의 한은 오죽하랴.하지만 지난일에 매달려 오늘을 망그지르는 것도 현명한 일일수는 없다.가해자의 사과는 그래서 중요하다.화해의 문을 두드리는 신호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화해의 진실성이다.그 진실성은 사과이후의 언행에 나타나게 돼 있는 법.바로 그 점에서 이번 미국의 사과는 우리로 하여금 일본의 사과를 한번더 떠올리게 한다.건성으로 한것 아니었나 싶어지면서.독도문제하며 이른바 위안부문제 등 우리울화를 버릊고 있는게 현실아닌가. 음회세위라 했다.재를 마시고 창자속 오물을 씻어낸 착한 마음으로 언행할때라야 비로소 진실성은 나타나는 것.공자가 『자기자신을 엄하게 꾸짖고 남 꾸짖는 것을 가볍게 하면 남의 원망이 멀어지리라』(「논어」 위영공편)고 했던 말뜻은 깊다.진실을 담은 사과는 그 『자기자신을 엄하게 꾸짖는』 자세에서 출발된다고 할것이다. 입술에 머무르는 사과는 끝내 앙금을 지우진 못한다.과연 미국의 사과는 어떻게 현실로 이어질 것인지.또 정작 우리가 지켜봐야 할것은 일본의 괴상한 사과말 「통석」이 끌고가는 방향.문득 「훈」할머니 눈물이 가슴으로 전달돼 오누나.〈칼럼니스트〉
  • 인도 함피:하(세계 문화유산 순례:35)

    ◎자연과 어우러진 거대한 「조각도시」 함피의 비자야나가르 유적군은 독특한 대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한 무더기의 거대한 예술품이었다.눈에 보이는 것은 벌거벗은 바위산 골짜기와 훼손된 사원 뿐이다.그러나 그것이 이뤄내는 조화는 함피를 차라리 섬세하게 계획된 「조각도시」로 여겨도 좋을 만큼 절묘했다. 함피 유적지는 워낙 넓은 지역에 걸쳐 있어 대충 둘러 보는데도 적잖은 품이 든다.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인도산 택시 「앰배서더」를 한대 빌렸다.1950년대 영국의 「모리슨 옥스퍼드」를 모방해 만든 이 차는 비록 구식이었지만 오토 릭샤보다는 한결 널찍하고 빨랐다. 비탈라 사원으로 먼저 차를 돌렸다.16세기 비자야나가르 왕조가 남긴 최고 걸작품으로 꼽히는 유적이다.유장하게 흐르는 퉁가바드라강을 따라 남쪽으로 한참을 달렸다.멀리 희미한 물상이 망막에 잡혔다.대지의 복사열 때문일까.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비탈라 사원의 모습은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가물가물했다. ○곳곳에 훼손된 사원/벌거벗은 바위산과 절묘한 조화 마침내 비탈라 사원.장엄한 건축미에 압도된 채 사원안으로 들어섰다.사원 정면의 한 건물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무얼까.사원 관리인에게 물으니 함피의 명소 「뮤직 템플」의 돌기둥에서 나는 소리를 듣기 위해 모여든 것이라고 했다.관리인은 제 나라의 문화를 자랑이라도 하려는듯 안내를 자청했다.『자,여기를 두드려 볼테니 무슨 소리가 나는지 한번 귀 기울여 보세요』 그는 돌기둥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순간 더할나위 없이 청아한 음악소리가 기둥에서 흘러 나왔다.『사,레,가,마,파,다,니,사』(인도의 도,레,미,파,솔,라,시,도)….제국시절 이곳에서 궁중연회가 열리면 악사들은 아무런 악기도 없이 이 기둥을 두드려 음악을 연주하고,무대에서는 무희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고 한다.「뮤직 템플」은 단지 청각만을 자극하지 않는다.그 기둥에 새겨진 조각상의 정교함과 시각적인 아름다움은 비자야나가르 건축예술의 전범을 보여준다. 높이가 3.6m에 이르는 56개의 돌기둥 마다에 새겨진 사람과 동물의 모습은 살아 숨쉬는듯생동감이 넘쳤다.돌기둥에 삐죽 나온 선반격의 받침돌 초엽은 제비처럼 날렵했다.게다가 이 사원 기둥은 하나의 커다란 돌을 깎아 만든 것이어서 신묘함을 더했다. ○비탈라사원 56개 돌기둥은 손가락으로 때려도 청아한 소리 비탈라 사원의 또 다른 주목거리는 앞마당에 있는 돌수레다.이것은 원래 남인도에서 제단에 모셔진 신상이 바깥 나들이를 할때 사용하던 나무수레를 본따 만든 것이다.화강암으로 된 이 돌수레는 비시누신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비시누신은 피부색이 검고 노란색의 옷을 입었다고 한다.그리고 네 손에는 각각 곤봉과 소라고둥·원반·연꽃을 들고,「가루다」라는 커다란 독수리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묘사되는 신이다.비탈라 사원의 돌수레는 그 「가루다」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한때는 실제로 굴러 갔다는 이 돌수레는 지금은 멈춰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함피의 유적을 답사하는 것은 곧 성지를 순례하는 것과 같았다.끝없이 이어지는 힌두사원과 종교적 우상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일었다.신에 멀미가 나서 아뜩한 정신을 추스리며 꽤 먼 길을 갔다.폐허가 된 옛 왕궁터를 끼고 남동쪽으로 돌자 지금까지 보던 것과는 색다른 양식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지도를 펼쳐 보았다.이곳이 바로 「로터스 마할(연꽃 궁전)」이었다.「제나나」라고 불리는 작은 성벽 안에 있는 이 2층 건물은 왕이나 군사령관이 묵었던 숙소다.종교적 색채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아 우선 신선했다. 「로터스 마할」은 함피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유적 가운데 하나다.이 궁전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건축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로터스 마할」은 인도­사라세닉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매우 복합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궁전을 떠받치고 있는 24개의 사각 기둥들은 화려한 잎사귀 모양의 아치로 연결돼 있어 더없이 위풍당당했다.또 인접한 두 아치 사이의 삼각공간인 스팬드럴(spandrel)에는 원형 돋을새김 흔적이 역력해 환상적인 여운이 감돌았다. 「로터스 마할」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8각형 구조의 천장이다.천장은 둥근 지붕과 평지붕이 엇섞여 이뤄졌다.그 한 가운데에는 고딕 양식의 대사원에서나 볼 수 있는 고창층이 있어 시선을 끌었다.이곳은 치장벽토로 장식한 아치와 띠조각,굵은 동살,까치발,커다란 닫집인 벽감 등이 정교하게 어우러져 있어 비자야나가르 제국의 뛰어난 건축술이 그대로 엿보였다.기둥과 아치는 회교양식을,바닥·천장·배내기·치장벽토 장식 등은 힌두양식을 따랐다.그토록 상극이던 힌두교와 회교가 비록 건축물에서나마 행복한 결합을 하다니….아이러니와 허무로 가득찬 역사를 「로터스 마할」에서 읽었다. 인도­사라센 양식의 진수를 보았다는 뿌듯한 감흥을 안고 「로터스 마할」을 나왔다.먼 발치에서 다시 돌아보았다.건물 동쪽 모퉁이에 결딴난 채 방치돼 있는 돌기둥같은 물체가 눈에 띄었다.여인상 기둥인 카리아티드(caryatid)의 잔해임에 틀림없었다.그곳에는 뒷발로 일어선 「얄리」의 자취도 남아 있었다.「얄리」는 인도의 건축물에 흔히 등장하는 사자 비슷한 가상의 동물이다.비탈라 사원 돌기둥에서도 「얄리」를 만났다. ○왕이 머물던 「로터스 마할」굴은 인도­사라센 건축양식의 진수 함피에 또다시 아쉬운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일모도궁이라 했던가.마음을 함피 유적에 묶어두고 차에 올랐다.차창밖으로 보이는 진귀한 풍경이 이국정서를 자극했다.네루가 생전에 즐겨 썼다는 네루모에 허리를 감싸는 치렁치렁한 천 룽기를 걸쳐 입은 남자,바느질 없는 원색의 옷감 사리를 휘휘감고 짓붉은 이마점 빈디를 찍은 여인의 모습이 이채로웠다.또 십자 장대목위에 사탕수숫단을 싣고 가는 소며 더위에 지쳐 혀를 한뼘이나 빼어 물은 개,거무튀튀한 맨발에 발가락지까지 낀 낙타몰이꾼….함피는 언제 보아도 넉넉하고 평화롭고 정겨운 「생명의 도시」였다.
  • 인도 함피:상(세계 문화유산 순례:34)

    ◎찬란한 힌두문명의 잔해가 숨쉰다/50만 인구 북적이던 제국의 영화 간곳없고 황량한 폐허… 부서진 사원…/성소 비루팍샤 사원 줄잇는 참배객은 맨발로 해탈의 고행/사자머리에 인간의 몸체 흉몰스런 나라심하상에 머리7개 뱀신 「나가」가… 인도 남부의 거대한 유적도시 함피.14세기 중반 힌두문화가 절정을 이루었던 비자야나가르제국의 수도가 함피다.그 도시의 옛 영화를 찾아가는 길은 힌두교의 방랑승려 사두의 고행만큼이나 험난했다. ○비자야나가르제국의 수도 남인도 카르나타카주 호스펫에서 북동쪽으로 13㎞ 거리다.소형 3륜차 뒷부분에 2인용 좌석을 단 오토 릭샤를 타고 어둑 새벽길을 40분 남짓 달렸다.탈탈거리는 오토 릭샤의 운전사 어깨 너머로 황토빛 바위마을이 시야에 들어왔다.1336년 텔루구 부족의 두 왕자 하리하라와 북카가 세운 힌두왕국 비자야나가르가 남긴 「환상의 도시」 함피다.한때 르네상스기의 로마 인구에 버금가는 50만명의 사람들이 살았던 함피는 중세 델리의 전성기에 필적할만큼 번성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역사상 유례없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던 비자야나가르제국은 1565년 이슬람세력의 침공으로 멸망하고,함피의 영광은 역사의 어둠속에 묻히고 말았다. ○16세기 이슬람침공에 멸망 함피는 지금은 고작 80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한적한 시골마을로 변했다.그 전경을 보기 위해 함피에서 제일 높은 마탕가 언덕에 올랐다.비자야나가르제국의 젖줄인 퉁가바드라강이 한가운데로 흘렀다.강 유역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40여개의 부서진 사원과 바위무더기들이 한데 어우러져 더없이 황량한 느낌을 주었다.무려 26㎢에 걸쳐 있는 이 유적군은 지난 8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 전까지만 해도 일반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함피의 폐허」를 더듬는 기자의 발걸음은 역사의 무게 만큼이나 경건했다. 먼저 함피에서 가장 중요하고 성스러운 사원으로 꼽히는 비루팍샤 사원으로 향했다.제국시절 화려하게 장식한 마차들이 달렸던 함피의 옛시장 바자르 길을 따라 한동안 걷자 높이가 52m나 되는 거대한 9층 고푸람(gopuram)이 나그네를 반겼다.고푸람은 도시나 궁궐 또는 사원의 입구에 세우는 층이 있는 힌두교식 탑이다.온갖 형상의 조각들로 뒤덮힌 고푸람을 뒤로 하고 비루팍샤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사원 안에서는 모두 맨발로 다녀야 했다.발을 내디딜 때마다 인두로 지지듯 뜨거운 땅기운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팜파파티 사원으로도 불리는 비루팍샤 사원은 비자야나가르 왕조 이전 호이살라 시대 말기에 처음 세워졌다.그리고 나서 1510년 툴루바 왕조의 크리슈나 데바 라야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개조됐다.비루팍샤 사원은 전형적인 비자야나가르 건축양식에 따라 널찍한 안뜰을 뒀다.장방형의 경내에는 현란한 만다파(mandapa,홀)와 묘당들이 즐비했다.그중에서 창조의 신인 브라마의 딸 팜파의 결혼을 선포하는 만다파가 가장 눈길을 끌었다.퉁가바드라강의 가느다란 물줄기가 사원의 노천 베란다를 타고 흘러 들어 부엌을 통해 안마당으로 새나가도록 한 설계솜씨는 신기에 가까웠다. ○비루팍샤 경내엔 묘당 즐비 「비루팍샤」는 파괴의 신인 시바신의 또 다른 이름이다.시바는 브라만교의 경전 「리그 베다」에서는폭풍의 신 루드라의 존칭으로,길상을 뜻하는 형용사였다.그러나 시바는 훗날 토착적 요소와 결합해 대중적 신앙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예배장소로 사용되고 있는 비루팍샤 사원 안의 지성소에는 시바 링가(Shiva linga)라는 시바신의 남근상을 신주처럼 모셨다.그 주위는 신상에 예배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댔다.그들은 저마다 준비해온 야자를 그 자리에서 내리쳐 쪼갠뒤 야자 물을 머리에 바르거나 입술에 슬쩍 댔다가 신상앞에 흘렸다.그리고 무언가 간절히 빌고 있었다.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일까.그들을 보니 문득 『해탈의 길은 맨발로 면도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는 우파니샤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수직으로 솟은 시바 링가와 신의 불꽃을 담은 신성한 불판,버터기름 타는듯한 누릿한 냄새….남인도 어느 힌두사원에서나 볼 수 있는 물신숭배 의식이다.하지만 마지막 힌두왕조의 옛 터전에서 베풀고 있는 그 의식은 보는 이들을 한껏 주술적인 신비감의 늪으로 빠뜨렸다. 길가에 나뒹구는 돌멩이 하나에서도 신의 현현을느낄수 있는 영혼의 나라 인도.인도는 정녕 신들의 고향이다.인도의 모든 마을에는 사원이 적어도 하나씩은 있다.10억 인도 인구의 80% 이상이 힌두교를 믿는다.아니 믿는다기 보다는 힌두신에 취해 산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3억이 넘는다는 힌두신들의 어지러운 형상을 머리속에 그리며 햇볕 쏟아지는 광야를 끝없이 걸었다. 광야를 지나 물살 빠르기로 소문난 투루투 수로를 만났다.수로를 지나서 바나나밭을 끼고 돌자 사자 머리에 인간 몸통을 한 흉물스런 나라심하상이 유령처럼 나타났다.나라심하는 보존의 신인 비시누의 네번째 화신이다.1528년 크리슈나 데바 라야의 통치 후반기에 세워진 나라심하상은 높이가 6.7m로 함피에서 가장 큰 조각상이라 했다.마치 연화좌에 올라 요가를 수행하는 요기(yogi)처럼 앉아있는 나라심하의 꼭대기에는 머리가 7개 달린 뱀신 나가(naga)가 버티고 있다.기괴하기 짝이 없었다.나라심하의 왼쪽 무릎위에는 원래 비시누신의 배우자이자 행운과 미의 여신인 락슈미상이 있었다.그러나 무슬림의 약탈로 지금은 여신의 오른쪽 팔 흔적만 남아 있다. □여행 가이드 함피 유적지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교통의 요충지」 호스펫을 기점으로 삼는 것이 제일 편하다.호스펫에서 함피의 중심지인 함피 바자르까지 가는 버스가 상오 6시30분부터 하오 8시까지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된다.요금은 2.50루피(1루피는 우리 돈으로 30원 정도). 오토 릭샤를 이용하려면 50루피의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자전거를 빌리는 것도 경제적이다.호스펫,카말라푸람 등에 있는 자전거 대여점에서 10루피를 주면 하루동안 사용할 수 있다. 함피의 숙소 사정은 여의찮다.세면시설 정도를 갖춘 게스트하우스가 고작이다.그러나 호스펫에는 냉방장치가 된 초보적 단계의 호텔들이 몇군데 있다.호스펫의 숙소들은 모두 24시간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신고전주의/이경식 지음(화제의 책)

    ◎16∼18C 유럽 극비평계에 미친 영향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신고전주의가 16∼18세기 유럽의 극비평계에 미친 영향을 깊이있게 고찰한 연구서.지은이는 신고전주의 비평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잘못 풀이하거나,그것을 호러스의 「시론」과 혼동했다고 주장한다.한 예로 신고전주의자들이 비극의 기능으로 중시한 기쁨과 교훈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호러스가 「시론」에서 밝힌 「dulce(즐거움)」와 「utile(교훈)」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대표적인 신고전주의 비평가로는 16세기 이탈리아의 스칼링거·로베르텔로·카스텔베트로,16∼17세기 영국의 시드니·존슨·밀튼·드라이든·라이머,17세기 프랑스의 코르네유·브왈로,보쉬,라팽 등을 들 수 있다.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극작법이나 원칙과는 동떨어진 독특한 비평기준을 지닌 신고전주의자들의 극비평세계를 중점 소개한다. 신고전주의자들은 17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고대 그리스 작가들보다 로마 작가들에게 한층 큰 관심을 보였다.그들은 호러스나 버질의 문체를 모방하려 했으며,롱기너스의 비평을 받들었다.찰스 2세의 왕정복고 시대의 영국문학을 「네오­오거스터니즘(Neo­Augustanism)」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게 지은이의 지적이다.서울대출판부 2만4천원.
  • 조선 이경윤의 「시주도」 노선비(한국인의 얼굴:105)

    ◎근엄하나 인저한 눈길에 도인의 풍모 조선시대 중기 그림에서 인물만을 앞세운 작품이 더러 있다.인물화 성격을 따 이경윤(1545∼1611년)의 「시주도」가 그것이다.그는 이와 비슷한 인물화로 「송별도」도 그렸다.초상화가 아닌데도 배경을 거의 무시한 「시주도」에는 세속에 물들어 보이지 않은 학덕 높은 선비 고사와 동자가 나온다.오늘날 역사소설의 삽화처럼 인물표정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이 그림은 화제부터가 사뭇 낭만적이다.사림세력의 성장에 따라 선비들의 정서가 한껏 푸근했던 시대배경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그렇듯 16세기의 선비정신이 짙게 깃들였다.그림의 매력을 다시 말하면,선비의 내면세계가 담긴 고매한 인품을 그려냈다는데 있다.화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최립(1539∼1612년)은 그림 한쪽에 써넣은 글발에서 「그림속의 인물은 비범하고 속기가 없다」고 했다. 「시주도」는 선비가 돈이라는 깔찌에 걸터앉아 술단지를 받쳐들고 선 소년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다.바탕천에 술을 칠한뒤 먹물을 입힌 이른바 선염법으로 둥그스럼하게그린 언덕 말고는 배경이 아무 것도 없다.그래서 인물이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되었다.선비는 옷 둘레에 검은 천을 잇대어 꾸민 학창의를 입었다.몸뚱이는 희고 나래끝이 검은 두루미를 본떴다는 이 두루마기는 글줄이나 읽는 문사들이 즐겨 입은 옷이다. 주인공 선비는 근엄한 표정으로 술이 담긴 항아리를 내려다 보고있다.항아리를 받쳐 든 소년은 고개를 숙였지만 선비의 기색을 살피는 눈치다.눈을 치깔은 선비와 눈동자를 할긋 돌린 소년의 표정이 묘하게 대비되었다.그러나 선비의 얼굴은 근엄할 뿐 무섭지는 않다.심부름 하는 아이를 대하는 것이지만 마치 어린 손자를 내려다 보는 할아버지 눈매처럼 인자한 데가 있다.단지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술항아리를 들고 온 소년이 안쓰러웠는지도 모른다. 선비는 늘그막에 든 연고한 나이라서 머리숱이 아주 적다.그래도 함함하게 빗어 올리고 조그마한 치포관으로 상투만을 덮었다.그래서 도인같은 풍모도 우러났다.몇 가닥 남지않은 머리를 빗어올려 상투를 틀었기 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높은 이마가 훤하게 드러났다.콧날이 젊을 때나 다름없이 여전히 우뚝한 선비는 그리 실하지 않은 수염을 점잖게 길렀다. 이경윤의 그림을 보고 「속기가 없다」고 한 최립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그림의 작가를 만난 적은 없으나 인물에는 자신의 모습이 깃들여 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 금연후진국(외언내언)

    미국이 담배의 원산지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 담배가 영국에 전해진게 16세기 때다. 당시 카리브 해안을 주름잡던 민간 무장선의 선장이었던 월터 롤리 경이 미국에서 맛들인 담배를 영국에 전파한 것이다.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였지만 영국에서도 초기에는 아무나 담배를 피울수 없었다.희귀하고 비쌌기 때문이다.당대의 귀족들이 너도나도 파이프 담배를 즐기며 거드름을 피웠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당시의 군왕 제임스1세는 담배를 혐오했다.왕이 담배를 싫어한 이유는 『냄새가 고약하고 두뇌에도 위험하며 폐에도 좋지 않다.지옥에나 있을법한 더러운 연기를 직접 퍼뜨린다는게 무엇보다 나쁘다』는 것이었다. 이런 나쁜 담배를 영국에 퍼뜨린 롤리경을 괘씸하게 여긴 왕은 담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반역죄의 누명을 씌워 참수형에 처해 버렸다.롤리경은 파이프를 물고 유유히 처형장으로 향했다고 전한다. 4세기전 영국의 왕이 담배의 해독성을 어떻게 그토록 정확히 짚어낼수 있었는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다.그러니까 영국에서는 담배가처음부터 시련을 당한 셈이다. 31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금연의날」.세계보건기구(WHO)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현재 세계의 흡연인구는 약 11억명.15세 이상 인구의 3분의 1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흡연인구중 약3백만명이 매년 담배로 인해 죽는다고 한다.10초에 1명씩 죽어가고 있다는 계산이다. 미국같은 금연선진국에서는 담배를 마약으로 취급하는 단계에 가있다.태평인 것은 한국.「세계 금연의 날」을 맞아서 어디서도 금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는 보도가 없다.수년전 미국의 월드워치가 조사한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1인당 연간 담배 소비량은 1천940개비.세계 6위의 흡연 대국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흡연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의 결핍.최근 금연자가 늘고있긴 하나 선진국에 비하면 턱없이 뒤져 있다.정부가 담배인삼공사를 운영하는 수준인 것이다.
  • 이집트 피라미드:하(세계 문화유산 순례:31)

    ◎「계단식」은 고왕조 절대왕권 출현 상징/고대 이집트왕의 무덤은 흙벽돌로 쌓아 올린 꼭대기 잘린 사각뿔형태/조세르왕의 산하 암호테프가 직선·각도 등 건축개념 적용 완벽한 피라미드 탄생시켜/고왕조 수도 멤피스엔 파라오의 영화 증언하듯 신전터 주춧돌 기둥만 남아 고대 이집트 파라오(왕)의 무덤들이 처음부터 기자의 피라미드처럼 완벽한 사각뿔의 형태를 갖추었던 것은 아니다.사각뿔 피라미드가 선보이기 이전 고대 이집트의 왕들은 사각뿔에서 윗부분이 잘려나간 것같은 형태의 무덤에 묻혔다.피라미드가 이같은 미완성 형태에서 완성된 형태로 발전해 나가는 중간단계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멤피스 외곽의 모래언덕 사카라에 있는 계단식 피라미드이다.「마스타바」라고 부르는 이 꼭대기 잘린 사각뿔 무덤을 여러개 포개얹듯 만들었다.이 때문에 무덤의 외곽선이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계단 모양을 띠게 된 것이다.계단식 피라미드는 자재면에서도 흙벽돌에서 석조 건축물로 탈바꿈하는 시기를 알려주는 편년표 역할이다.이전 마스타바 무덤들은모두 흙벽돌로 지었다. 계단식 피라미드의 출현은 고대 이집트에서 본격적인 절대 왕권의 출현과 그 시기를 같이한다.왕권이 강화돼 파라오가 무제한의 권력을 휘두르게 되면서 그의 무덤도 더크고 단단하게 짓기 시작한 것이다.계단식 피라미드가 지어진 시기는 기자의대 피라미드가 만들어지기 100여년 전인 기원전 2770년경으로 알려져있다.남북으로 갈라져있던 상·하 이집트가 처음으로 통일된 뒤 세번째 왕조를 일으켰고 이집트왕국의 창시자인 조세르왕이 바로 이 계단식 피라미드에 묻힌 주인공이다.500여년간 지속된 이 고왕국 기간중 왕국의 수도는 현대 카이로 남쪽 25㎞에 위치한 멤피스였다.당시 멤피스는 나일강안의 중요한 항구였고 최고로 번창하던 도시였다.그러나 지금 멤피스의 도성이 있던 자리에는 당시 신전터의 주춧돌 흔적을 어렴풋이 볼수 있는 폐허의 유적일부가 남아있을뿐 그일대 대부분은 대추야자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숲을 이루었다.멤피스가 수도로서 역할을 못하게 된지 수천년이 흘렀고 그 사이 해마다 나일강의 홍수가 뒤덮고 지나가 퇴적토가 쌓였다.그래서 실제 왕궁터는 수십m 지하에 파묻혔을 것이라고 안내인은 설명한다. 계단식 피라미드가 있는 사카라 모래언덕은 이 폐허에서 자동차로 불과 1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어찌보면 멤피스 시절 고대 이집트의 영화를 짐작하게 해주는 유일한 유물인 셈이다.6개의 마스타바를 차례로 얹은 듯한 이 계단식 피라미드는 총높이가 60여m에 달하고 원래는 계단 표면에 타일모양으로 매끈하게 만든 장식용 돌을 붙였다고 한다.그러나 이 장식 돌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계단식 피라미드를 만든 이는 뛰어난 예술가이며 역사에 이름을 남긴 최초의 건축가인 임호테프였다.그는 조세르왕의 재상이었고 모든 예술과 과학,특히 의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사후에는 건축가의 신으로 호칭된 사람이다.이 계단식 피라미드가 만들어지면서 직선과 각도,중량에 대한 계산이 시작됐다.계단의 미완성선들이 완벽한 직선으로 발전돼 기자의 피라미드들이 탄생된 것이다. 계단 피라미드로 올라가는 초입에서 여행객을 맞는 것은 과거 파라오가 누렸던영화의 한 편린을 엿보게 하는 거대한 돌기둥들이다.한때 신전의 기둥을 장식했음이 분명하지만 지금을 지붕은 사라지고 수십개의 기둥들만 두 줄로 늘어 서있다.이 모래언덕은 당초 귀족,왕족들의 무덤이 모여사는 「사자들의 도시」였고 주변은 수도 멤피스의 도선과 같은 모양을 한 성벽이 두르고 있었다.이 돌기둥들은 죽은 이들의 도시를 지키는 신전의 일부였던 것이다.예나 지금이나 이지브엣는 나무가 흔치 않다.석재를 쓰기 이전 고대 이집트인들은 파피루스 나무 묶음을 집의 기둥으로 썼다.그래서 석재르 이용한 뒤에도 이 파피루스 묶음 형태를 돌기둥 장식으로 응용한 것이다.흡사 도리안식 기둥의 원형을 보는 듯해 후일 그리스 건축에 고대 이집트가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케한다.신전에는 파피루스 돌기둥 사이로 모두 43개의 작은 방들이 만들어져 있는데 다시 이집트를 구성한 부족의 수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신전을 둘러싼 돌담의 꼭대기에는 정교한 솜씨로 코브라 뱀의 머리들이 줄이어 조각돼 있다.당시 멤피스가 위치한 북부 이집트는델타 지역으로 늪지대가 많았으며 뱀이 그곳 부족들의 상징이 됐다.반면 남쪽에서는 독수리가 부족들의 상징이었다.토템과 흡사한 이 상징들은 왕들의 왕관 이마 쪽에도 붙였고 건물의 기둥 꼭대기에도 장식됐다. 계단 피라미드 남쪽에는 제5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우나스왕의 계단 피라미드가 있다.60㎡정도의 터에 위차한 비교적 소형 무덤이지만 죽적은 상형문자를 새겼다.녹색 글씨가 무덤안 4개방의 벽면에 깨알같이 새겨져 있다.고대 이집트의융성에 크게 기여했던 통일 국가의 탄생과 문자의 발견,그리고 그와 함께 시작된 절대왕권의 출현을 한는에 보여주는 유적인 셈이다.피라미드를 탄생시킨 이집트 고왕조의 멸망을 재톨한 것은 역설적이지만 피라미드의 축조도 그 원인이 됐다.파라오들은 재위기가 시작되면 곧바로 신의 피라마드를 건설하는 일에 몰두했다.대규모 사업에의 과중한 투자는 결국 국가재정을 극도로 악화시켰고 계속된 흉작으로 번영의 기세사 꺽이기 시작했던 것이다.그리고 파라오의 권위에 숨죽이고 있던 지방 귀족들이 야금야금반기를 들었고 이어서 혼란기로 접어들었다. 이후 여러 왕족을 거쳐 기원전 16세기 남쪽의 룩소르 세력이 전국을 재통일하며 고대 이집트는 다시 한 번 최상의 전성기를 구가했다.이후 100여년 이상 룩소르가 수도 역할을 하면서 멤피스는 상징적으로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그러나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리아에 모든 역할을 빼앗겨 멤피스는 영원히 역사속으로 묻히게 된 것이다.한때 파라오의 대관식이 거행됐던 프타신전의 유적에서 발굴된 중왕조의 람세스 2세 석상 1개가 지금 카이로 철도역 앞 광장에 서있다.이 석상은 멤피스의 영화를 무언으로 전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 조선중기 이숭효의 「어부도」(한국인의 얼굴:104)

    ◎낚시대와 물고기 꾸러미/허름한 행색에도 초연한 눈매 어부는 고기잡이를 일거리로 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그런데 옛날에는 격을 높여 어부라 썼다.이 보다 무게를 더 실어 어옹이라고도 불렀다.옛날의 어부라는 말속에는 고기를 낚아가며 고상한 삶을 살아가는 큰 그릇의 사람을 의미했던 것이다.그래서 시조나 가사에 곧잘 나온 것은 물론이고,때로는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그 어부를 주제로 한 그림중에는 조선시대 중기를 짧게 살았던 화가 이숭효가 그린 「어부도」가 있다.가는 올의 모시 바탕에다 먹물로 그린 저본수묵화인 이 그림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했다.16세기 작품으로 중국 절파의 화풍이 배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림이다.그의 작품은 매우 희귀하다.그래서 「어부도」는 미술사적으로 귀중한 자료일 수 밖에 없다. 이 그림에는 「어옹귀조도」라는 화제 하나가 더 붙어있다.화제에서도 여느 낚시꾼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그림을 보노라면,실제 그렇게 묘사되었다.낚시질에서 돌아오는 허름한 차림의 어부이기는 하나,범상치 않은 인물이다.그 늙은 어부가 대각선으로 가까이 이어진 길을 비치적비치적 걸어서 그림속으로 들어섰다.그림이 아니었더라면,금새 화폭을 빠져나올만한 자리를 걷고 있다. 어부는 낚시대를 오른손으로 잡아 어깨에 걸머메었다.그리고 왼손에 물고기 꾸러미를 들었다.낚시대는 대각선으로 화폭을 절반쯤 갈라놓았다.그런데 모질게 자란 대나무를 낚시대로 썼던 모양이다.곧은 데가 없이 멋대로 굽었다.그까짓 낚시대가 굽었다고 신경을 쓸리 만무한 노인은 초연한 자세로 길가 어딘가를 굽어보는 눈치다.온갖 수염이 덥수룩이 자라 얼굴 가장자리를 돌아갔지만,인상은 온화하기 그지없다. 늙은 어부는 대삿갓 보다는 차양이 넓은 모자를 썼다.그 아래로 드러난 눈매가 인자한 노인은 초연한 얼굴을 했다.입가 윗쪽의 수염 수가 아직은 거므스름하지만,살쩍에 난 터럭 빈과 구렛나루는 이미 희게 세어 버렸다.그러고 보면 설빈어옹이라 해도 좋을 흰수염의 늙은 어부인 것이다.갯가 등성이에는 갈대가 어부의 수염만큼이나 아무렇게 자랐다. 설빈어옹은 이현보(1467∼1555년)가 고려때 가사를 고쳐 쓴 「어부사」에 나온다.「설빈어옹」이 주포간,자언거수 승거산이라 하놋다」로 시작하는 가사가 그것이다.
  • 조선화가 김시의 「당나귀 끄는 소년」(한국인의 얼굴:103)

    ◎고삐당기는 얼굴에 구김하나 없어 조선의 16세기는 중국을 거쳐 들어오는 외래문물에 보다 밝게 눈을 뜨기 시작한 시기다.권력핵심의 사대부,특히 공신이나 왕실과 인연을 맺은 척신들은 새로운 정보에 더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그런 분위기는 실학이라는 이념을 받아들이는 바탕이 되었다.그림도 예외가 아니어서 조선 초기의 화풍을 계승한 가운데 중국 화풍을 조금씩 곁들인 작품세계를 개천했던 것이다. 그 16세기는 조선시대 전체를 전·후기로 나눌때 전기에 해당한다.또 초·중·후·말기로 구분하면 조선 중기(1550∼1700년)라 할 수 있다.그 시기의 대표적 화가는 김시(1524∼1593년)다.대표작으로는 지금 호암미술관이 소장한 보물 783호 「동자견려도」가 꼽힌다.제목 그대로 소년이 당나귀를 끌어당기고 있는 그림이다.통나무 다리를 사이에 두고 다리를 건너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당나귀와 기어이 끌고가려는 소년의 모습이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소년은 주인을 따라 한나절 산천바람을 쐬러 나온 모양이다.그런데 집에 돌아갈 채비를차린 주인 나리께 대령한 당나귀가 냇가에서 말썽을 부리고 있다.그러나 뻗대는 당나귀에 질세라 소년은 젖먹던 힘을 다해서 고삐를 팽팽이 거머쥐었다.소년과 당나귀의 대결이 해학적이거니와,박진감이 넘치고 있다.당나귀를 잡아끌고 있는 소년은 신분을 떠나 얼굴이 잘 생긴 홍안의 미소년이다. 소년은 힘을 쓰느라 제법 큰 머리통을 뒤로 젖혔다.당나귀가 말을 제대로 들어먹지 않는데도 얼굴에는 구김살하나가 없다.그래서 표정이 한껏 맑다.골상이 둥글둥글하나 미련스럽지 않은 까닭은 이목구비가 또렷하기 때문일 것이다.오히려 총명한 인상이다.붓으로 그린 것처럼 확연한 눈썹 한참 아래로 눈매가 초롱초롱하고 복스러운 코에 제법 날이 섰다.도타운 입술에 작은 입을 했다.그래도 소년은 말수가 헤퍼보이지는 않았다. 이 그림은 산수속의 인물에 촛점을 맞추었다.이른바 대경산수인물화에 속하는 이 그림의 형색은 조선 초기의 회화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이는 중국 절강성을 비롯한 강남의 화원들이 15세기 후반부터 주도한 절파의 화풍을 수용한 것이다.그 절파의 흔적은 주산의 바위표면을 도끼로 팬 것처럼 명암을 뚜렷이 구분한 이른바 부벽준기법에서 나타났다. 그림을 그린 김시는 주로 명종과 선조때 활약한 선비화가다.양송당이라는 아호를 가진 그는 이 그림에도 아호를 낙관했다.그리고 김시계수라는 네모꼴 붉은 도장을 찍어놓았다.
  • 김홍신씨 역사소설 「수호지」 평역본 내

    ◎중 북송말∼남송초 108호걸 영웅담/16C초 「천도외신서각본」 토대 형형색색 인물묘사 중국 북송 말기에서 남송 초기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108 호걸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소설 「수호지」(대산출판사 펴냄)가 소설가 김홍신씨의 평역으로 나왔다. 중국의 4대 기서 가운데 하나인 「수호지」는 「삼국지연의」를 쓴 나관중과 작가 시내암의 합작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원나라 말기에 시내암이 지었다는 것이 정설.부패관료들의 폭압에 시달리는 108 호걸들이 우여곡절끝에 양산박에 모여들기까지의 경로와 이들이 조정에 귀순해 대요국을 정벌하고 전호·왕경·방랍의 난을 평정하는 전투과정을 사실적으로 다룬다. 「수호지」에 등장하는 형형색색의 인물들은 저마다 독특한 인간학을 이룰 정도로 개성있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 특징.특히 주인공 송강에 대한 성격묘사는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송강은 시골 작은 현의 아전 출신으로 닭 모가지를 비틀만한 손힘도 없었으며 손오의 병법에 밝은 인물도 아니었다.그런 「무능한」 사람이 어떻게 107명의영웅을 거느릴 수 있었으며 대중의 우상이 될 수 있었을까.이와 관련,원작을 재구성한 김홍신씨는 『역사상의 실존인물과 비교한다면 송강은 한 고조 유방과 비슷한 점이 많다.중국 대중들이 전통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황제는 한 고조로,도가형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그는 사람을 다스림에 법이나 제도를 내세우지 않았다.송강 또한 그런 유형으로 의리와 인정에 얽매인 임협적인 사람이었다』고 지적한다. 「천하를 떠도는 호걸들」「강호의 일곱 영웅」「한을 품고 의를 찾아서」「맹호,광풍을 일으키다」「양산박으로 흐르는 물」「불타오르는 북경성」「의기로 뭉친 108호걸」「화로다,모반의 무리」「사필귀정의 수레바퀴」「유성되어 스러지다」 등 모두 10권으로 되어 있다.이번에 선보인 「수호지」는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평가되는 16세기초 「천도외신서각본」 곧 「100회본」을 토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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