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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일 TV 하이라이트]

    ●한국인의 밥상(KBS1 밤 7시 30분) 충남 당진 장고항의 낚시대회 날. 푸른 바다에 30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고기를 잡는다. 광어, 우럭 등 여러 가지 고기가 낚싯줄에 걸려 올라오지만 그 중에서도 으뜸은 간재미다. 바다 가장 밑바닥에 사는 간재미는 가오릿과의 생선을 통칭하는 말로 홍어와는 사촌지간이다. 프로그램에서는 간재미를 이용한 다양한 요리들을 소개한다. ●세상의 모든 다큐(KBS2 밤 12시 40분) 지중해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휴양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16세기 당시에는 기독교의 유럽과 이슬람의 오스만제국 사이에 치열한 패권다툼이 벌어졌던 힘의 각축장이었다. 단지 부와 권력뿐만 아니라, 문화와 종교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싸움이었으며, 3세기 동안 지속된 이 두 문명의 충돌은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이두 아이두(MBC 밤 9시 55분) 지안을 찾아온 장 여사는 회사를 맡아달라고 부탁하고, 지안은 자신의 브랜드가 생길 생각에 들뜬다. 낙하산으로 힘든 회사 생활을 보내던 태강은 봉수에게 지안의 입사 초기 이야기를 듣게 된다. 충백에게 태강과 지안의 첫 만남 이야기를 듣게 된 봉수는 직원들에게 소문을 내고, 급기야 회사 게시판에 사건의 전말이 공개되기에 이른다. ●내 마음의 크레파스(SBS 오후 5시 20분) 앙골라에서 온 11살 소년 사무엘은 아버지와 함께 5년 전 오랜 내전으로 치안이 불안정한 앙골라를 떠나 한국으로 왔다. 어느새 앙골라보다는 한국에 더 익숙해진 사무엘. 하지만 떠나온 고국을 늘 그리워하며 언젠가 앙골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버지는 사무엘이 이대로 앙골라를 영영 잊어버릴까 걱정이다. ●다큐10+(EBS 밤 11시 10분) 1929년에 순항하던 미국 경제에 갑작스러운 위기가 닥친다. 1929년 10월 24일, 증시가 폭락하면서 경제 대공황이 발생한 것이다. 각국 경제가 연쇄적으로 붕괴되고,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났다. 한편 미국 정부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관세법을 제정했지만, 예상 외로 보호무역만 강화되었는데…. ●건강버라이어티-올리브(OBS 밤 11시 5분) 아나테이너에서 연기자로 거듭나 제 2의 전성기를 맞은 오영실이 2년 전 갑상선암을 극복한 사연을 전한다. 최근 건강을 위해 아이돌 댄스를 배운다며 즉석에서 티아라의 ‘러비더비’에 맞춰 숨겨진 댄스 실력을 뽐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또 건강검진코너를 통해 근막통 증후군 검진결과도 공개한다.
  • [글로벌 시대] 영국 여왕 즉위 60주년/강승중 수출입은행 런던법인장

    [글로벌 시대] 영국 여왕 즉위 60주년/강승중 수출입은행 런던법인장

    요즈음 영국 런던 시내 거리는 여기저기에 국기가 게양되고 축제를 준비하는 분위기이다. 1952년 왕위에 오른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축하행사가 6월 2일부터 열리기 때문이다. 영국 역사상 빅토리아 여왕에 이어 두 번째로 즉위 60주년을 맞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친근한 인상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여왕 즉위 당시 영국인들은 여왕이 다스리면 나라가 잘된다는 속설에 따라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기대감을 품었다고 한다. 과거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이류국가에 머물던 영국을 강대국 위치에 올려놓았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절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전성기였다. 그에 비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후 60년은 영국이 내리막길을 걸어온 기간이었으나 그나마 여왕 덕에 영국의 위상이 급속한 추락을 모면하고 대외적 위신과 존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여왕 재위 60년은 왕실의 권위도 실추된 기간이었으며 많은 고비가 있었다. 여왕의 여동생과 자녀는 이혼과 각종 추문으로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고 왕실 유지에 대한 회의론까지 대두하였다. 특히 1997년 국민의 사랑을 받던 다이애나비의 비극적 죽음은 왕실에 치명타를 안겨 주었으며 다이애나비에 대한 냉정한 태도 때문에 여왕마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여왕의 지혜로운 처신으로 그 후 비판이 수그러들었고, 작년 4월 서민적 풍모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윌리엄 왕자의 결혼을 계기로 왕실에 대한 호감이 다시 살아나 여왕 즉위 6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영국 왕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을 굳건히 지켜 오고 있어 근본적 신뢰감을 잃지 않고 있다. 영국 왕족들은 군 복무 전통을 이어 오면서 영국이 전쟁에 휩싸이면 기꺼이 참전해 왔다. 여왕 자신이 2차대전 당시 여군에 복무하면서 트럭 운전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여왕의 둘째 아들인 앤드루 왕자는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 헬리콥터 조종사로 참전하였으며, 둘째 왕손인 해리도 이라크 전쟁에 참가하였다. 영국이 천 년 넘게 현재까지 군주제를 유지해 온 것은 국왕이 국민통합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국민은 국론분열이나 외부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국왕을 중심으로 단결되는 모습을 보여왔다. 영국은 13세기 초 마그나카르타 이후 약 5세기에 걸쳐 서서히 입헌군주국 체제를 굳혀왔으며, ‘군림하나 지배하지 않는’ 국왕이 상징적 권위를 유지하고 ‘지배하나 군림하지 않는’ 총리가 실제적 권력을 갖는 이원적 체제를 300년 가까이 유지해 오고 있다. 이러한 권력분점 체제하에서 국왕은 정쟁의 과녁에서 벗어나 국가원수로서의 상징을 유지하면서 국가통합의 안전판 역할을 흔들림 없이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뒤엎으려 하기보다는 전통을 중시하고 타협의 가치를 인정하는 영국적 지혜에 바탕을 둔 것으로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가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숱한 유혈 참극을 겪은 사실과 크게 비교되는 부분이다. 또한 영국이 과거 영국의 영토였거나 식민지였던 나라들로 ‘영국 연방’을 구성하여 국가적 위상과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국왕(여왕)이라는 연결고리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영국 외 53개 영연방 국가들은 여왕의 상징적 권위를 인정하고 있으며,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15개국은 아직도 여왕을 자국의 국가원수로 모시고 있다. 영국의 국력 약화에도 불구하고 영연방이 유지되는 데는 여왕의 존재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영국 왕실이 존경과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왕실의 노력과 전통의 힘을 믿는 영국인들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에 노쇠해 가는 영국의 숨은 저력이 있다고 하겠다.
  • 문학·철학에 종말이 온다고? 읽고 쓸게 얼마나 많은데 감히!

    문학·철학에 종말이 온다고? 읽고 쓸게 얼마나 많은데 감히!

    사심 듬뿍 담아 감히 평하자면, ‘권력이란 무엇인가’,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펴냄)를 잇달아 내놓은 재독철학자 한병철과 함께 올 상반기 철학 교양서 저자 가운데 최고의 뉴 페이스로 꼽을 수 있겠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을 내놓은 사사키 아타루다. 한병철과 저자의 가장 큰 공통점은 스타일이다. 본인이 정말 꼭꼭 씹어 소화해 낸 것만 내놓는다. 자신만의 독해법을 드러내 보일 뿐 그걸 번드르르한 인용으로 애써 포장하려 들지 않는다.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비평가나 “하나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전문가의 주장 따위는 정보통이 되겠다는 헛된 욕망이라고 비판한다. 라캉의 말을 빌려 그것은 “향락 가운데 가장 비참한 팔루스(남근)적 향락”, 그러니까 홀로 우뚝 서겠다는 허세라는 것이다. 한병철은 똑같은 내용을 “(잡다한) 정보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이론을 내놓겠다.”는 말로 표현했다. 그래서 두 저자의 문장은 대단히 쉽다. 어려운 단어에다 말장난까지 섞어 두세번 꼬아 놓는 바람에 몇번을 봐도 헷갈리게 써 놓은 게 아니라, 누구나 알 만한 쉬운 단어로 문장을 구성했는데 읽는 사람은 오히려 멈칫멈칫 두세번 곱씹게 만든다. ‘아포리즘’이라는 표현에 딱 맞아떨어진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침이 꿀떡꿀떡 넘어갈 법하다. 저자가 이론을 제시하고 싶은 대상은 문학이다. 문학(Literature)을 넘어 문학(Literacy)이다. 시와 소설 같은 개별 문학작품을 넘어 종교, 철학, 역사에까지 확장된, 총체적으로 세상을 읽고 쓰는 행위로서의 문학이다. 모든 것을 텍스트화한다는 점에서, 그래서 모든 문제를 문학화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의 냄새가 짙게 배어난다. 사무엘 베케트·폴 발레리·버지니아 울프 같은 문학가들, 니체·라캉·푸코·들뢰즈 같은 철학자들이 수시로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저자의 핵심 메시지는 ‘포스트모던의 이름으로 모던의 종언을 얘기하는 모든 종말론에 대한 투쟁’이다.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으로 한국에서도 인기있는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을 잘근잘근 씹는 대목이나 현대 프랑스 철학이 종말론적으로 이해되는 상황에 대해 어느 데마고그가 그런 헛소리를 퍼트렸느냐는 대목에서 웃음이 난다. 일본인인 저자가 이런 얘기를 하니까 퍼뜩 ‘근대 문학의 종언’을 말한 가라타니 고진, ‘역사의 종언’을 말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떠오른다. 저자는 “프랑스어로 된 책을 멋대로 읽고, 멋대로 쓰고, 멋대로 여기저기 가져가고” 했을 뿐 “그 사람들 책은 읽어본 적이 없다.”고 시치미를 뚝 잡아뗀다. 그럼에도 “문학이 끝났다, 예술이 끝났다고 소동을 벌이는 사람”들에 대해 “가소롭기 짝이 없다.”고 명백히 말해 둔다. 한 술 더 떠 “철학이 끝났다고 한다면 철학과를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문학이 끝났다고 한다면 문학에 종사하는 걸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까지 한다. 무슨 근거로 문학, 종교, 철학, 역사의 종말을 부인하는가. 좁게는 문학작품, 넓게는 이 온 우주를 다 포괄하는 텍스트를 읽고, 다시 읽고, 제대로 읽어버린 이상 쓰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까 쓰고, 고쳐 써야 하니까, 그래서 읽고 쓰는 과정 자체가 늘 혁명일 수밖에 없으니까 종말 따윈 있을 수 없다는 게 저자의 대답이다. 얼마나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고 할 것들이 많은데 감히 문학의, 종교의, 철학의, 역사의 종언을 말하느냐는 되물음이다. 해서 책 제목은 종말론을 떠벌림으로써 은근슬쩍 자신을 구세주로 포장하는 이들에게 혹해서 구원의 기도를 올리려는 그 손을 잘라야 한다는, 저자의 단호한 외침이다. 저자는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고쳐 쓰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증명하기 위해 역사를 되돌아본다.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 4개 혁명 이전 혁명의 원형질이랄 수 있는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그리고 12세기 중세해석자혁명을 다룬다. 오늘날 루터에 대한 평가는 조금 각박해졌다. 라스카사스나 후스 같은 다른 개혁가에 비해 보수적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저자는 문헌을 읽을수록 오히려 루터의 위대함에 반했다고 한다. 이 부분은 직접 읽는 게 좋겠다. 다만, 저자의 강조점은 루터가 성서를 직접 읽어 봤고, 읽은 이상 쓰지 않을 수 없었고, 쓴 이상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에 꽂혀 있다. 이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12세기 중세해석자혁명이다. 저자는 서구의 ‘근대’라는 것이 이때 발생했다고 본다. 아날학파의 ‘장기 16세기’라는 표현에 빗대자면 ‘초장기 12세기’라 부를 만한 것인데, 물적토대라기보다 일종의 사상, 아이디어 차원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저자가 12세기에 주목하는 까닭은 교회법 정비다. 교회법은 오늘날 민법으로, 교황권은 주권(Sovereignty)으로, 공의회는 의회 개념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중세란 근대 계몽의 빛이 들이치기 이전의 암흑동굴이었다는 이분법을 완전히 깨부순다. 어쨌든 여기서도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우연히 발견한 로마법대전을 읽었고, 다시 읽었고, 읽은 이상 쓰지 않을 도리가 없어 교회법을 새로 쓰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하디자 부부 얘기도 흥미롭게 읽힌다. 이들이 천사를 통해 받은 신의 첫 계시는, 이쯤이면 짐작하다시피 “읽으라.”였다. 읽는다는 것은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이고 개념의 이해란 생각을 임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가장 반여성적이라고 비판받는 이슬람교가 실은 가장 여성적이었다고 논증한다. 이렇게 보면 복음주의 기독교건 이슬람교건, 종말론적 철학이건, 그 모든 원리주의의 문제점은 열렬히 믿어서가 아니라 읽지 않아서다. 읽지 않아서, 읽더라도 제대로 읽지 않아서, 정직하게 읽어낼 용기가 없어서 생긴 일이다. 겉으로는 가장 선명하고 도덕적이고 용맹해 보이지만, 속은 가장 비겁하고 나약하기 이를 데 없다는 얘기다. 저자는 2008년 ‘전장과 영원’이라는 책으로 일본 출판계를 뒤흔들었다. 깊은 사유와 독특한 문체가 눈길을 끌면서 온갖 대중강연, 토론 자리에 불려다녔는데 이때 제일 많이 받았던 질문이 “당신은 홀연히 나타났는데 지금까지 어디서 뭘하고 있었느냐.”였다고 한다. 그 뒤 각종 출판 제의를 거절하다 출판사 편집진들과 대화한 내용을 담은 것이 이 책이다. 실제 책도 5일밤 독자들과 나누는 대화체로 꾸며져 있다. 이 책 역시 지난해 일본에서 인문서 최대 화제작이었다고 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저자는 논의가 조금만 더 깊어지려면 “이 부분은 이미 ‘전장과 영원’에서 논했기 때문에 여기서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겠다.”는 언급을 반복한다. 아무래도 ‘전장과 영원’ 번역이 필요해 보인다. 문제는 그 책이 600쪽에 이른다는 사실. 번역자는 의욕을 보이지만, 출판시장 상황을 감안하면 낙관은 이르다. 참고로 번역자는 이 책의 저자가 안 그런 척하면서 때려대는 가라타니 고진을 한국에 많이 소개해 온 번역자다. 묘한 인연이다. 1만 35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인지도 3%서 결선 51% 지지로 당선된 리틀 미테랑

    인지도 3%서 결선 51% 지지로 당선된 리틀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당선자 프랑수아 올랑드(57)의 정치적 멘토는 사회당 출신 최초의 대통령인 프랑수아 미테랑(1916~1996)이다. 미테랑 시절 특별자문위원을 지냈다. 영국의 대처리즘, 미국의 레이거니즘이 절정에 달한 1980년대에 미테랑은 좌우동거 정부를 구성하는 등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마지막 보루였다. 올랑드는 선거 내내 미테랑처럼 말하고, 걷고, 행동했다. 목소리도 미테랑처럼 내기 위해 발성 교정도 받았다. 26세이던 1982년 그는 미테랑의 권유로 프랑스 중남부 코레즈를 지역구로 삼았다. 이곳은 미테랑의 정적이자 보수파 거목인 자크 시라크의 철옹성이었다. 시라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올랑드는 1988년 처음 이곳에서 하원에 진출했고, 1997년부터 사회당 대표를 맡아 왔다. 올랑드는 개성이 함축된 여러 개의 별명을 갖고 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별명은 ‘무슈 노르말’(보통사람)이다. 바퀴가 세 개 달린 스쿠터를 타고 사회당사로 출근하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다. 이 때문에 ‘피자 배달 소년’이란 별명도 붙었다. 둥근 얼굴에 둥근 안경을 착용하는 바람에 언론에서는 ‘마시멜로맨’,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러멜 푸딩 브랜드에 빗대 ‘무슈 플랑비’로도 불렸다. 물컹물컹한 푸팅처럼 물러터져 카리스마가 없다는 의미다. 이에 그는 2009년 다이어트에 돌입해 30파운드(13㎏)를 빼고 안경과 옷차림 등을 바꿨다. 도시적 카리스마를 갖기 위해서였다. 그에겐 한때 ‘무슈 루아얄’이란 닉네임이 붙었다. 2007년 대선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에게 패한 전 애인 세골렌 루아얄을 적극 지원하면서다. 루아얄이 당선되면 공직생활을 즐겁게 할 수 있음을 비꼬는 의미였다. 지난해 그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만 해도 인지도는 3%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력 후보로 꼽힌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미국 뉴욕 한 호텔 여직원과의 성추문으로 낙마하면서 올랑드가 사회당 대선후보 티켓을 거머쥐었다. 올랑드는 1954년 프랑스 북부 도시 루앙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프랑스 정치 엘리트의 산실인 국립행정학교(ENA)와 파리정치대학에서 수학하며 엘리제궁의 꿈을 키웠다. 대학 졸업 후 판사로 잠깐 일한 것이 그가 정부 월급을 받은 경력의 전부였다. 올랑드란 이름은 16세기 홀란드(네덜란드)에서 종교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이주한 칼뱅교 조상으로부터 유래됐다. 하지만 그의 종교는 가톨릭이다. 19세이던 1979년 사회당에 입당했다. 올랑드는 어젠다를 앞장서 만들거나 정면대결하는 스타일이라기보다는 타협안을 도출하는 리더십을 발휘한다. 다른 정당의 입장까지도 요약 정리하는 바람에 ‘종합의 남자’ 또는 ‘미스터 타협’이란 별명도 붙었다. 행정경험이 부족한 올랑드는 가장 먼저 외교력이 시험대에 오른다. 취임 직후인 5월 말 미국 시카고에서 열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와 6월 멕시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프랑스 대통령으로서 참석한다. 올랑드는 중도우파 보수의 화려한 언변을 가진 사르코지 대통령과 달리 좌파적 시각으로 경제를 해석해 시장의 우려를 사 왔다. 특히 부자증세와 성장전략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으며 연간 100만 유로(약 15억원) 넘게 버는 고소득층에 75%의 세금을 물리겠다고 공약했다. 또 사르코지가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함께 주도했던 긴축 중심의 신재정협약도 재협상을 통해 재정긴축에서 성장으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의 당선 직후 재협상론이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로 국제금융시장이 크게 출렁였다. 올랑드는 기존의 유로존 질서가 유럽연합(EU) 강국인 프랑스의 새로운 정치질서와 맞물리면서 높아진 불확실성을 해소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출범하게 됐다. 올랑드 측은 “유럽에 새로운 위기를 불러올 의도가 없다.”며 시장을 진화했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10)김상헌과 최명길

    [선택! 역사를 갈랐다] (10)김상헌과 최명길

    1637년 1월 18일 청군에게 포위되어 있던 남한산성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산성으로 쫓겨 들어온 지 한 달이 훨씬 지났지만,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다. 연일 이어지는 매서운 추위에 병사들은 얼어 죽거나 동상에 걸려 쓰러지고, 얼마 남지 않은 군량은 하루하루 줄어들고 있었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구원병이 끊겨 버린 점이었다. 시간은 자신들 편이라고 확신했던 청군 지휘부는 연일 출성과 항복을 독촉했다. 벼랑 끝으로 몰린 조선 조정은 결국 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조판서 최명길(1586~1647)이 청군 진영에 보낼 문서의 초를 잡았다. 문서는 ‘조선국왕은 절하고 대청국 관온인성 황제께 글을 올립니다.’라는 구절로 시작되었다. 조선이 처음으로 ‘오랑캐’ 청을 황제국으로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예조판서 김상헌(1570~1652)은 글을 보고 통곡했다. 그는 항복 문서를 빼앗아 찢어버린다. 그러자 최명길은 흩어진 종이 쪽을 주워 모아 풀로 붙인다. 처참하고도 희극적인 장면이었다. 왜 한 사람은 찢어버리고, 다른 한 사람은 도로 붙인 것일까? ●원칙을 위협했던 현실 17세기 초반,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 정세는 심하게 요동쳤다. 15세기 이래 패권국으로 군림했던 명의 몰락이 뚜렷해지고, 만주에서 급속히 떠오른 후금이 명에 도전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두 나라 사이에 낀 조선의 처지는 괴로웠다. 임진왜란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대륙 패권의 변동이라는 격변 속으로 휘말렸기 때문이다. 명은 조선을 끌어들여 후금과 싸움을 붙이려 했고, 후금은 후금대로 조선에 중립을 지키라고 압박했다. 명과 후금에 치여 ‘샌드위치’가 된 처지에서 1627년 조선은 정묘호란을 겪는다. 명과의 결전을 앞두고 조선을 묶어 두려 했던 후금의 침략을 받았던 것이다. 후금군 철기(鐵騎)의 돌격을 감당할 수 없었던 조선은 후금과 형제(兄弟) 관계에 입각한 화약을 맺는다. 조선 지식인들은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지닌 세계관으로 보자면 만주족 후금은 분명히 ‘오랑캐’이자 ‘금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금을 형으로 섬기는 것은 도무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갈수록 엄혹해졌다. 조선이 ‘임금’이자 ‘부모’로 섬기던 명은 후금에 계속 밀리기만 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명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하면서 기세가 높아졌다. 급기야 1636년 후금의 홍타이지 칸(汗)은 황제가 되기로 하고 ‘아우’ 조선에 그 사실을 통고한다. 칭제 사실을 알리려 후금 사신 용골대 일행이 입국하자 조선 조야는 정신적으로 공황 상태에 빠진다. ‘중화국 명의 천자(天子)만이 천지간에 군림하는 유일한 황제’라는 조선 지식인들의 믿음과 원칙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 조정은 격앙되었다. ●주화냐? 척화냐?의 선택 대다수 신료는 “명은 부모의 나라이고 후금은 부모의 원수인 데다, 명은 왜란 때 조선을 도왔으므로 절대로 배신할 수 없다.”며 용골대 일행의 상경을 막으라고 촉구했다. “용골대 일행의 목을 베어 명으로 보내고 전쟁을 불사하자.”는 초강경론을 펼치는 사람도 있었다. 김상헌은 그 같은 주장을 폈던 척화파(斥和派)의 맏형 격인 인물이었다. 천자국 명을 섬겨온 예의와 명분을 수호하기 위해서도 후금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결전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명을 위해서라면 종사가 망하는 것도 감수할 수 있다.’는 주장이기도 했다. 소수파였던 주화파(主和派)의 의견은 달랐다. 주화파의 대표자 최명길 또한 ‘오랑캐와 척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론이자 원칙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문제는 당시 현실에서 ‘원칙’을 관철하려 할 경우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최명길은 ‘임금의 의리는 필부의 그것과 다르다.’며 ‘조선의 임금이 명을 위해 종사를 망하게 할 수는 없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묘년에 맺은 후금과의 형제관계를 유지하도록 끝까지 노력하되, 후금의 칭제에 대해 호오(好惡)의 감정을 드러내지 말자고 강조했다. 최명길은 ‘오랑캐가 칭제했다.’는 사실 자체에 흥분하여 기존의 관계를 무조건 파기하자고 했던 척화파들을 비판했던 것이다. 인조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는 결국 다수파인 척화파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후금과 맺은 형제관계를 파기하고 절교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절교 ‘이후’에 대한 군사적 대책은 미흡했다. 청이 침략할 경우 서울을 떠나 강화도로 들어가 맞선다는 것이 주된 방책이었다.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이 얼어붙자 청군 철기는 서울을 향해 내달렸다. 12월 14일 청군 선봉은 지금의 녹번동 부근까지 도달했다. 청군은 의주에서 서울로 이르는 대로 주변의 산성에 들어가 청야작전(淸野作戰·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농작물이나 건물 등 지상에 있는 것들을 말끔히 없애는 작전)을 폈던 조선군을 무시하고 돌격을 감행했다. 허를 찔린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할 시간적 여유를 상실했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한산성에는 1만 4000여 명의 병력과 그들이 45일 정도를 버틸 수 있는 군량밖에는 없었다. ‘춥고 배고픈’ 산성은 청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고 남·북방의 구원병들은 산성으로 접근하는 족족 청군에게 궤멸하였다. 청은 처음에는 왕세자를 내보내야 항복을 받아 주겠다고 했다. 이어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고, 나중에는 척화신들을 묶어 보내야 한다고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포위된 산성에서도 ‘선택’을 둘러싼 논쟁은 지속되었다. 김상헌 등은 인조에게 “오랑캐의 신하가 되느니 최후의 결전을 벌여 깨끗이 망하자.”는 주장을 폈고 최명길 등은 “종사와 백성을 생각해야 할 임금은 은인자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성을 지키던 병사들도 동요했다. 추위와 굶주림, 공포에 지친 병사들 가운데는 항복하자고 시위를 벌이는 자들도 나타났다. 막다른 상황에 몰리자 인조는 결국 최명길 등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선택’의 역사적 의의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삼전포(三田浦)로 내려와 항복했다. ‘오랑캐 추장’ 홍타이지에게 세 번 큰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이었다. 인조가 겪은 치욕보다 더 처참한 것은 수십만의 백성이 청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사실이다. 조선 포로들은 심양으로 끌려가 노비로 사역되었다. 많은 포로가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는가 하면 도로 붙잡힌 포로들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을 받았다. 포로가 된 많은 여인이 끌려가는 도중 청군의 첩으로 전락했고, 심양에 도착해서는 질투심에 눈이 먼 만주족 본처로부터 끓는 물 세례를 받은 여인도 있었다. 어렵사리 종사와 국체를 보전했지만, 전란 때문에 백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처절함 그 자체였다. 조선은 과연 이 처참한 국난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일까? 조야를 막론하고 당시 조선 지식인들 대다수가 “명은 중화이고 청은 오랑캐”라는 것을 원칙으로 견지하는 한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원칙’과 ‘현실’이 부딪칠 때 무엇을 가장 우선적이고 소중한 목표로 삼을 것인지를 고려하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남한산성의 함락이 임박했을 때, 김상헌 등이 제기한 주장은 “조선의 신료는 물론 임금도 명을 위해 ‘옥쇄’(玉碎·명예나 충절을 위하여 깨끗이 죽는다는 의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최명길 등은 “조선 임금은 명보다는 조선 백성의 운명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전자가 ‘무차별적 원칙론’이라면 후자는 ‘선택적 원칙론’이었다. 병자호란의 발생부터 종결까지 인조는 양자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병자호란 무렵의 국제질서 변동 과정에서 조선은 ‘독립변수’가 아니었다. 명과 청 사이에 낀 조선은 두 나라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전화에 휘말리고 말았다. 양국과의 관계를 모두 원만히 유지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명과 청이 계속 싸우는 상황에서 ‘종속변수’ 조선은 선택의 기로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처한 이 같은 엄혹한 조건을 잘 알고 있었던 최명길은 병자호란 직전 인조에게 ‘결단’을 촉구한 바 있다. 그는 청과의 화친을 강조하면서도 “척화파들의 주장처럼 청과 맞서 싸우려는 것이 ‘진심’이라면 강화도를 포기하고 압록강까지 전진해서 싸우자.”고 촉구했다. 인조가 거부하여 무산되었지만, 이 주장이 갖는 의미는 만만치 않다. 국경에서 결전을 벌이면 승패 또한 그곳에서 조기에 결판날 것이고, 청군이 깊숙이 남하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그렇게 많은 포로가 청군에게 사로잡히는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최명길의 주장이야말로 ‘종속변수’ 조선이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명청 교체의 격변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대안이 아니었을까. 17세기 초반 조선이 명청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로 내몰렸던 사실은 미국과 중국이 맞선 오늘의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존의 패권국이 쇠퇴하고 새로운 강국이 떠올라 그에 도전하는 사태가 빚어질 때 한반도는 예외 없이 위기를 맞았다. 명청 교체를 비롯하여 14세기 후반의 원명 교체, 16세기 후반의 일본 굴기, 19세기 후반의 청일전쟁이 한반도로 몰고 왔던 결과들이 그 생생한 실례다. 다가오는 미·중 대결의 시대, 이른바 G2시대를 맞아 우리는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나아가 ‘선택의 기로’로 내몰리는 것을 피하고자 우리는 지금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한명기(명지대 사학과 교수)
  • [지방시대] 국립공원으로 승격되는 무등산/임낙평 광주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지방시대] 국립공원으로 승격되는 무등산/임낙평 광주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도립공원인 무등산이 우리나라 21번째 국립공원으로 승격을 준비 중이다. 최고로 반가운 소식이다. 무등산의 빼어난 자연경관과 자연자원, 높은 역사문화적 가치는 늘 시민들의 자부심의 대상이었다. 사실 지정학적으로 100만명 이상이 사는 대도시 바로 지척에 해발 1187m의 높고 우람한 산이 존재하는 곳은 국내에서 광주가 유일하고 세계적으로도 아주 희귀한 일이다. 이 무등산에 국내 멸종위기에 있는 수달이나 삵 등 29종이 서식하고 있고, 자연녹지도 8등급의 우수한 임상을 보이고 있으며, 최고봉인 천왕봉 일대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국내 최대 크기의 주상절리대인 서석대·입석대·규봉 등 암석들이 수직으로 병풍을 두르듯 장관을 이루고 있다. 광주시에서는 무등산 주상절리대를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등재를 신청 중이다. 무등산 자락 광주호(광주와 담양 경계) 일대에는 15~16세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무등산권의 역사문화 자원인 시가문화권(가사문화권 혹은 누정문화권이라고도 함)이 있다. 이처럼 무등산은 국가를 대표하는 국립공원으로 세상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다. 무등산이 국립공원으로 승격이 추진되면서 무등산에 행정구역을 두고 있는 광주시와 담양, 화순군 등 자치단체와 지역 주민들이 소중한 합의를 해 가고 있다. 현재의 무등산 도립공원 구역이 겨우 30㎢인데, 국립공원으로 가면서 약 80㎢로 공원구역이 대폭 확장되어 가고 있다. 이에 대해 자치단체와 주민들이 흔쾌히 수용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공원구역으로 편입되는 지역이 사유지가 태반이고 공원구역으로 지정되면 사적 개발이나 이용이 불가할 터인데, 여기에 합의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부동산 투기 등 물질에 경도된 각박한 세태에서 자신의 토지가 공공의 용도, 즉 자연공원으로 편입되는 데 흔쾌히 힘을 보내는 주민들, 시민들의 의지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국립공원으로 승격되면 무등산의 생태환경과 역사문화 자원의 가치는 증대돼 항구적으로 보존될 것이며, 주민들의 귀중한 결정도 길이 빛날 것이다. 무등산은 광주의 상징이자 광주와 동격이다. 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직후, 김준태 시인은 광주와 무등산을 등치시켜 ‘오! 광주여 무등산이여’라며 광주의 아픔을 노래했었고, 광주 출신의 한국의 영원한 야구선수 선동열 투수를 ‘무등산 폭격기’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이 우람한 무등산이 광주시민들의 가슴속에 오롯이 자리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예다. 그래서 시민들은 국립공원으로 승격되는 데 반기는 것이다. 국립공원제도는 1872년, 미국에서 옐로스톤 국립공원을 지정하면서 출발했다. 당시 골드러시라는 개발 광풍이 불던 시점이었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규제와 제한 없이 토지를 소유하고 이용하던 시점이었다. 이런 시점에 수려한 자연경관과 생태계를 항구적으로 보존하여, 모든 국민에게 여가와 즐거움을 주는 공공 공간으로 국가가 관리하자는 주장은 획기적이고 역사적인 일이었다. 지금도 국립공원 제도는 ‘미국인이 생각해낸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일’로 평가받고 있다. 무등산 국립공원의 승격을 위한 막바지 행정절차가 진행 중에 있다. 아마도 금년 하반기가 되면 우리나라의 21번째 국립공원으로 재탄생할 것이다. 무등산과 광주에 역사적이고 획기적인 좋은 소식이다.
  • [책꽂이]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류시화 지음, 문학의숲 펴냄) 시인 류시화가 15년의 긴 침묵을 끝내고 낸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1991),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1997) 이후 세 번째다. 인도, 네팔 등을 여행하던 시인은 그동안 쓴 시 350여편 중 56편을 추렸다. 오랜만에 내놓은 시집에는 정제된 언어와 명상, 진솔한 고백, 순정한 사랑 등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이나 ‘만약 앨런 긴즈버그와 함께 세탁을 한다면’, ‘독자가 계속 이어서 써야 하는 시’ 등 시인의 독특한 감성이 전해오는 시에서는 특히 눈길이 오래 머무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시집을 묶는 것이 늦은 것도 같지만 주로 길 위에서 시를 썼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한 채 마음의 갈피에서 유실된 시들이 많았다. 삶에는 시로써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시인의 말 또한 시로다. ●김원일 중편소설집(김원일 지음, 도서출판 강 펴냄) 김원일 순천대 석좌교수의 소설전집 중 중편소설집 3권이 출간됐다. 김원일 소설전집은 그의 사실상 등단작인 장편소설 ‘어둠의 축제’(1967)부터 소설집 ‘오마니별’(2008)을 아우른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살았던 작은할아버지의 삶을 추적하는 청년과 가족의 시선을 최적의 다양성으로 풀어낸 ‘손풍금’, 이 시대에서 보기 드문 사랑을 그린 ‘물방울 하나 떨어지면’, 한국사회의 기독교적 믿음의 작동방식을 다룬 ‘믿음의 충돌’ 등 중편소설 13편이 담겨 있다. 김원일 소설전집은 모두 28권으로 예정돼 있다. ●스타터스(리사 프라이드 지음, 박효정 옮김, 황금가지 펴냄) 16세기만 해도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그러나 20세기 말부터는 디스토피아가 대세다. 치사율 100%의 치명적인 생물학 폭탄이 미국을 강타했다. 2년에 걸친 태평양 연안국의 전쟁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백신을 미처 맞지 못한 대부분의 중·장년층은 폭탄이 떨어지고서 일주일 이내에 사망했다. 1년이 지나자 미국의 얼굴은 ‘엔더’라고 불리는 70~80세의 노인들과 ‘스타터’라고 불리는 10대 이하의 청소년만 남게 된다. 부자와 빈자의 장기이식과 같은 비극을 그린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보다 비극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 다빈치 코드가 현실로? 450년 만에 숨겨진 걸작 발견

    450여 년 동안 자취를 감췄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됐다고 AP 등 해외언론이 12일 보도했다. 수 세기 동안 세계 미술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여겨져 온 다빈치의 작품 ‘앙기아리 전투’는 1440년 여름 앙기아리 근교에서 발발한 피렌체 군과 밀라노 군의 전쟁에서 밀라노 군이 패한 뒤 도망치는 장면을 담고 있다. 1505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역동적인 전투장면을 잘 살려 미술학계 및 미술 애호가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아왔지만, 수 백 년 동안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이 그림의 정체를 추적해 온 마우리치오 세라치니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와 연구팀은 이탈리오 베키오 궁전에 걸려있는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의 ‘마르시아노 전투’에 구멍을 뚫어 내부를 관찰한 결과, 3㎝ 정도 뒤의 숨은 벽에서 다빈치의 ‘모나리자’ 등에 쓰인 물감 성분과 일치하는 물질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바사리는 스스로를 다빈치 작품의 숭배자라고 말해왔을 만큼 그의 예술적 추종자로 알려져 있으며, 16세기 중반 천장과 6개 벽면에 거대한 벽화를 작업하는 도중 다빈치의 작품을 숨긴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소설과 영화 ‘다빈치 코드’에서도 언급된 바 있는 세라치니 교수는 1975년 바사리의 또 다른 벽화에서 ‘찾으라, 그러면 발견할 것이다.’(Cerca Trova·체르카 트로바)라는 분구를 발견한 뒤 35년 이상 ‘앙기아리 전투’를 찾아 헤매왔다. 한편 이번 발견으로 미술학계 전체가 흥분한 가운데, 일부에서는 다빈치의 ‘앙기아리 전투’를 찾기 위해 바사리의 작품을 훼손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한 탄원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주말 하이라이트]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KBS2 일요일 밤 11시 35분) 서정(김희정·오른쪽)은 늘 모범생인 언니 서연(여민주)과 비교당하는 일이 너무 싫다. 오늘도 역시 학교도 빠지고, 기련의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니기에 바쁘다. 한편 서정이 엄마와 크게 싸우고 가출한 그날 언니가 쓰러졌다는 소식과 함께 언니 서연이 백혈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게 되는데…. ●공사창립특집 KBS대기획 문명의 기억 지도 제3편(KBS1 토요일 밤 8시) 고대의 바다를 지배한 것은 동양이었다. 그런데 유럽을 바다로 불러내 동양과 서양의 운명을 바꿔 놓은 지도가 탄생했다. 바로 1502년에 작성된 ‘칸티노 세계지도’의 탄생으로 유럽은 동방으로의 바닷길을 장악하고 세계사의 주인이 됐다. 과연 이 위대한 지도는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넝쿨째 굴러온 당신(KBS2 토요일 밤 7시 55분) 테리에게 차갑게 쏘아 붙이고, 청애는 귀남이라 믿는 남자를 집에 들인다. 그 사실을 윤희에게 들은 장수. 청애와 막례에게 귀남이는 죽었다고 냉정하게 얘기하지만 마음이 먹먹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한편 윤희가 장수에게 가짜 귀남의 출현을 일러바쳤다고 생각하니 청애는 더더욱 윤희가 맘에 들 리 없다. ●잘먹고 잘사는 법(SBS 토요일 오전 9시 45분) 새롭게 단장한 ‘시골 밥상’ 시즌2를 책임질 주인공은 1970~80년대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트로이카 배우 유지인이다. 세련된 이미지가 강하지만 알고 보면 털털한 성격의 소유자다. 언니 또는 의리 있는 형이 될 수 있는 그녀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함께한다. ●전기현의 씨네뮤직(OBS 토요일 밤 10시 15분) 매주 새로운 테마의 영화와 영화 음악 이야기를 전해 주는 ‘전기현의 씨네뮤직’. 생명의 빛깔을 되찾는 봄을 맞아서 ‘컬러로 말하다’라는 주제로 스크린 컬러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행을 준비한다. 스크린 속의 세상엔 어떤 빛깔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1998년 게리 로스 감독의 영화 ‘플레전트빌’로 시작한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MBC 일요일 오전 10시 40분) 2007년 뉴질랜드에 등장한 한 남자. 그 남자의 등장으로 영국이 발칵 뒤집힌다. 과연 그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지구 반대편 영국에서 큰 논란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한편 최악의 전쟁 2차 세계대전. 그 전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린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국 리버풀에 위치한 의문의 지하 괴터널인데…. ●SBS 스페셜(SBS 일요일 밤 11시) 400년 동안 시에라네바다 고산지대에 은둔해 살아가던 영혼의 부족 아루아코가 문명세계를 향해 경고를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6세기 스페인의 침공을 피해 숨어 사는 방식을 선택한 고대 타이로나 문명의 마지막 후예들이다. 그런데 20년 전부터 삶의 터전에 이상 징후가 발견된다.
  • ‘조선의 용’ 多있네

    ‘조선의 용’ 多있네

    흑룡의 해를 맞아 3월 4일까지 서울 관훈동 공아트스페이스에서 특별기획전 ‘운룡정상’(雲龍呈祥)이 열린다. 운룡정상은 ‘구름 속의 용이 상서로움을 드리운다’는 의미다. 이처럼 용은 귀한 동물의 대표적 상징이었다. 왕가에서도 용 문양을 즐겨썼고, 그래서 용이 들어간 작품들은 대개 격이 높은 당대 최고의 작품일 경우가 많다. 가령, 18세기 작품 ‘백자청화오조룡문호’는 지난해 3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3억원에 낙찰된 작품과 비슷한 항아리다.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는 문양이 선명하다. 이와 함께 심사정이 그린 ‘운룡도’도 전시된다. 용이 왕가의 문양이다보니 함부로 그리지 않아 용을 다룬 작품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런데 심사정(1707~1769)은 중국의 도식적인 화풍과 달리 자유분방한 필치로 역동적인 용의 모습을 그린 운룡도를 남겼다. 이와 함께 보물로 지정돼 쉽게 보기 어려웠던 ‘백자청화장생문팔각접시’, ‘백자청화매죽조문병’도 함께 전시된다. 보물 1063호 백자청화장생문팔각접시는 사슴, 학, 소나무, 대나무 등 십장생과 주변 자연환경이 자연스레 어우러진 풍경을 팔각형 접시 옆에 그려넣은 독특한 형식으로 눈길을 끈다. 보물 659호 백자청화매죽조문병은 단단하게 솟아오른 매화가지 사이로 두 마리 새가 다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려넣었다. 15~16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중국의 영향으로 빽빽하게 그려넣었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여백의 미를 중시한 조선의 미감을 고스란히 살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외에도 왕비의 처소에 둔 것으로 보이는 ‘십장생도팔곡병’ 등 50여점이 나온다. 입장료 3000원. (02)730-1144.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파나마 16세기 대포, 누가 훔쳐 갔을까?

    파나마 16세기 대포, 누가 훔쳐 갔을까?

    중미 파나마 당국이 잃어버린 대포를 애타게 찾고 있다. 하지만 당국은 대포를 잃어버린 시기조차 가늠하지 못하고 있어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12일(현지시간) 현지 언론에 따르면 대포가 사라진 곳은 카리브 콜론 주에 있는 산로렌소 성이다. 산로렌소 성은 1595년 당시 중남미를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이 차그레스 강을 통해 해적이 접근하는 걸 막기 위해 건설한 성이다. 1980년 인류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성에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제작된 대포들과 2차 대전 때 사용됐던 대포들이 보관돼 있었다 하지만 최근 익명의 제보를 받고 대포 수를 확인한 결과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1문, 2차 대전에서 전투를 벌인 1문 등 대포 2문이 모자랐다. 당국은 깜짝 놀라 대포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지만 대포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당국자는 “누군가 대포를 훔쳐 녹였다는 말이 있다.”며 “이게 사실로 확인된다면 대포를 녹인 회사에 무거운 처벌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에페 서울신문 나우뉴스 해외통신원 손영식 voniss@naver.com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끝) 필자 4명의 ‘쫑파티’날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끝) 필자 4명의 ‘쫑파티’날

    “토 나오는” 작업이었다 했다. 마감이 다가오면 “얼굴이 누렇게 둥둥” 떴다고 했다. 마감이 왜 ‘데드라인’이라 불리는지 알겠다 했다. 대신 다시 한번 깨달은 건 공부의 즐거움이라고 했다. 누구나 자기가 아는 만큼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이라고 했다. ‘고전톡톡 다시 읽기’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를 2년간 서울신문에 연재한 연구집단 남산강학원 필자들이 지난 7일 오후 7시 서울 중구 필동 깨봉빌딩에 위치한 강학원 세미나실에 모였다. 파블로 네루다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등을 썼고 기획 전체 총괄 역할을 맡았던 수경(34)씨, 장 자크 루소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쓴 구윤숙(36)씨, 한유와 카를 마르크스를 쓴 홍숙연(38)씨, 버지니아 울프와 루쉰 등을 쓴 최태람(30)씨 등 4명이다. 이들은 어쩌면 세상 기준으로는 글쓰기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번듯한 학위가 없기 때문. 대신 이들은 지긋하니 궁둥이를 눌러 붙이고 앉아 공부하는 쪽을 택했다. 이번 연재를 계기로 후속 출판 기획도 이어지고 있다. 연재는 끝났지만 필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그간의 느낌을 들어봤다. →남산강학원과의 인연이 궁금하다. 어떻게 이 길로 접어들게 됐나. 최태람 교육대학원에서 논문 준비하는 게 너무 어색했어요. 정해진 틀에 맞추는 게 힘들었죠. 그런데 논문은 잘 썼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아, 내가 그럴 듯하게 잘도 속였구나.’라는 절망감이 들었어요. 그러다 학위로 나를 포장하지 않아도 되는 길을 찾았고 여기에 정착하게 됐죠. 신기한 건 논문 쓰면서 내내 아팠는데 여기서는 말끔히 나았다는 거예요. 수경 강학원 송년회 자리에 친구 따라 놀러왔다가 걸려들었어요. 여기 ‘삐끼짓’이 보통 아니거든요. 그 자리에서 밥 당번 날짜까지 배정받았어요. 참 어이없기도 한데, 처음 본 낯선 이에게도 공부를 권할 수 있다는 것이 이곳의 매력이자 힘이라 생각해요. 홍숙연 회사 다니다 사진, 도자기, 요리 같은 것들을 배우러 다녔어요. 금세 시들해지더라고요. 그러다 공부로 방향을 잡았아요. 평생 자기를 갈고닦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였거든요. 공부를 좋아하니까 주변에서 이곳을 추천해줬죠. 한때 제 이메일에다 역수행주(逆水行舟)라는 말을 꼭 넣었어요. 공부는 거꾸로 노저어 가는 것과 같아서 하루라도 멈추면 뒤로 밀려나는 거예요. 금세 시들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할 수 있는 거죠. 사실 공부 안 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건 바로 저예요. 구윤숙 처음엔 고미숙 선생님에 대한 관심이었어요. 잡지에 쓴 글을 보다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같은 책을 사 봤고 관심이 더 커졌어요. 공동체의 소박한 삶, 적은 돈으로 이렇게 많이 즐길 수 있는 삶에 대한 동경이 있었거든요. 그 뒤 직장인 저녁 강좌를 찾아 듣다가 대중지성 프로젝트를 하게 된 거예요. 대중지성은 철학, 예술, 글쓰기 같은 것을 한데 모아 하는 작업이거든요. →멘토 시스템으로 글쓰기를 가다듬었다. 글쓰기에 어려움은 없었나. 최 낭만적인 생각만 있었어요. 글 쓰는 과정은 빼먹고 쓴 결과물만 생각한 거죠. 한달 전에 원고 쓰고 몇 번이나 퇴짜 맞고…. 저도 자꾸 방어만 하려는 거예요. 그 자체를 대면하게 해준 시간 같아요. 보고 싶지 않은, 인정하기 싫은 나 자신을 보게 된 거죠. 글을 대하는 태도, 글 쓰는 일 자체가 하나의 생각하는 훈련과정이라고 받아들여요. 수 우리로서도 신문 연재는 일종의 도전이었어요. 멘토 시스템이 토 나오는 시스템이긴 한데 글쓰기에는 큰 도움이 됐죠. 남의 글을 지적하려면 나 스스로가 글에 대해 매우 예민해져 있어야 해요. 그 부분에서 저 역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자존심으로 방어에 나선 분들의 날 선 대응 때문에 마음고생은 좀 했지만. 홍 시간과 양에 맞춘다는 게 고역이면서도 굉장히 좋은 훈련이었어요. 고미숙 선생님은 늘 누구에게나 글쓰기 본능이 있다 하는데 저는 아니라고 했거든요. 예전엔 뭔가에 대해 쓰라고 하면 A4용지 3장을 채 못 넘겼어요. 쓰고 싶은 얘기가 없는 거예요. 이번 연재 때문에 실마리가 생긴 거 같아요. 지금은 쓰다 보면 A4용지 10장도 훌쩍 넘기거든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다는 것, 실마리를 잡아 풀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 좋아요. 구 인터넷 글쓰기는 많이 해봤어요. 블로그나 서평이나…. 그런데 그건 소비자의 글 같아요. 내가 쓴 글 내가 책임진다는 생산자로서의 입장을 되돌아보게 된 거죠. 루소를 썼는데 사실 루소는 제가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글을 쓰기 위해 공부를 해 나간 거죠. 어쨌든 그 시간 동안에는 붙들고 쭉 가는 것, 글쓰기는 그 노력에 대한 매듭짓기라는 점에서 꼭 필요한 스텝이었어요. →본인에게 의미 있었던 인물이 있나. 최 버지니아 울프였어요. 글에 대한 막연한 호감 같은 게 있었어요. 문학은 뭔가 좀 풀어져 있어 뵈잖아요. 울프는 그렇지 않았아요. 굉장히 규칙적으로 생활했고, 글쓰기에도 성실했고, 아는 것에 대해 정직하게 썼던 사람이 울프예요. 제게는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 같아요. 수 셰익스피어를 꼽고 싶어요. 위대한 작가라 하지만 사실 기록은 없어요. 16세기 영국이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시기에 외국어와 다양한 이야기들을 영어와 작가의 언어로 정리해낸 사람이거든요. 그 뒤의 변화상에 대해 더 파고들고 싶어요. 홍 마르크스를 꼽고 싶어요. 마르크스는 혁명을 외치지만 정작 딸들을 귀족학교에 보내는 인물이거든요. 이론과 실제의 괴리가 굉장히 큰 사람이란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정말 인간적이에요. 마르크스 스스로가 “나에게 인간적이지 않은 게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이 딱 맞아요. 경제적 무능을 비난하지만 사실 자본주의의 본질인 저축을 비속하다고 여긴 사람인 거죠. 구 다빈치예요. 너무 교과서적이겠다 싶었는데, 일탈적인 면모가 있어요. 가령 다빈치는 완성작이 드물어요. 당시 화가들은 후원자에게 물감, 안료를 일일이 허락받았거든요. 이를 거부한 거죠. 또 하나는 그가 남긴 방대한 노트예요. 마치 공부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매일매일 공부했고 그걸 노트에다 남겼어요. →공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최 진정 하고 싶은지, 하고 싶은 걸 놔두고 핑계를 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돌진할 용기를 가졌으면 해요. 수 모두가 공부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교양이나 취미로서의 공부는 이런저런 인문학 강의가 많으니 그걸 참고해도 충분하고요. 다만 책 읽기과 강의 듣기를 넘어선 공부를 원한다면 진지하게 다음 단계를 생각해보셨으면 해요. 홍 공부는 일이에요. 취미가 아니에요. 회사의 벽도 제대로 못 넘는다면 공부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이 악물고 벽을 넘어가는 공부까지 생각하셨다면 가능하다고 봐요. 구 직장 다니면서도 할 수 있어요. 포기와 선택의 문제는 아니에요. 다만, 여기서 공부는 투정 부릴 수 있는 고3 수험생의 공부가 아니라는 점이에요. 자기의 인생을 좀 더 잘 책임지기 위한 공부를 꿈꾸셨으면 해요.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씨줄날줄] 포클랜드 vs 말비나스/이도운 논설위원

    남아메리카 대륙의 아르헨티나 남단에서 동쪽으로 460해리 떨어진 곳에 나비가 날개를 편 모양의 군도(群島)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이 최근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또다시 영유권 갈등을 빚고 있는 포클랜드(Falkland Islands)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Islas Malvinas)라고 부른다. 포클랜드 군도는 16세기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등 유럽의 항해가들에 의해 무인도로 처음 발견됐다. 1832년 영국이 고래잡이 기지로 삼기 위해 영유권을 선언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1816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군도의 영유권도 계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82년 4월 2일부터 두 나라 간에 75일간에 걸친 영유권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포클랜드 군도는 중심지 스탠리가 있는 동쪽 섬과 서쪽 섬 그리고 776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돼 있다. 면적은 1만 2173㎢로 경기도(1만 136.16㎢)와 서울(605.52㎢)을 합친 것보다 조금 크다. 인구는 3140명(2008년 7월 조사)밖에 되지 않으며 이 가운데 2000명이 스탠리에 살고 있다. 원주민이 61.3%로 가장 많고 영국인 29.0%, 칠레인 6.5%, 스페인인 2.6%이며, 일본인도 0.6%가 사는 것으로 통계에 잡혀 있다. 군도 자체의 경제적 가치도 그다지 크지 않다. 주 산업은 목양(牧羊)이다. 양의 수가 60만 마리에 이른다. 수목이 자라지 않는 불모지가 많아 농산물은 거의 재배되지 않는다. 2005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은 7500만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5000달러로 우리나라보다 조금 높다. 화폐는 포클랜드 파운드를 별도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포클랜드는 현재보다 미래의 가치가 크다. 우선 근해에 많은 원유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인류의 마지막 자원 보고라는 남극 대륙의 전진 기지에 해당된다. 1차 세계대전 때에는 남대서양의 영국 해군기지 역할을 했다. 부근 해상에서 영국과 독일 함대의 전투가 벌어졌던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1982년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가 패배한 이유는 100가지가 넘을 것이다. 그러나 1999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했을 때 만났던 현지 지식인의 탄식은 아직도 마음을 두드린다. “4월 2일 드디어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주요 일간지의 헤드라인은 그 뉴스가 아니었습니다. 톱 뉴스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아르헨티나가 어떤 나라와의 축구 경기에서 2대0으로 이겼다는 겁니다. 이러고도 우리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이도운 논설위원 dawn@seoul.co.kr
  • [씨줄날줄] 모나리자의 눈썹/최광숙 논설위원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가 지난해 9월 평소와 달리 선명하고 강한 눈썹 문신을 하고 나타났다. 그 이후 그는 스마트폰 게임 앵그리버드와 닮았다며 ‘홍그리버드’라는 별명을 얻었다. 눈썹 문신은 대표적인 ‘관상 성형’ 중의 하나다. 단순히 인상을 좋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12월 디도스 사태가 터지면서 대표직을 물러났다. 관상학에서는 눈썹 모양으로 장래운을 점친다. 초승달 눈썹은 대인운이 좋아 출세길이 열리고, 눈썹이 끊기면 동분서주하나 결과가 미진하다고 한다. 일자 눈썹은 안정적이고, 팔자 눈썹은 두뇌가 명석하다고 한다. 눈썹 색깔이나 길이에 따라 운도 달라진다고 한다. 관상학 어디에도 눈썹이 없는 경우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굳이 쓴다면 풍파에 시달리는 험난한 인생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 천재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초상화인 ‘눈썹 없는’ 모나리자는 다르다. 전 세계 수많은 관람객들이 순전히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을 찾는다. 누드 모나리자, 진주 장식을 한 모나리자, 콧수염을 단 모나리자 등 라파엘로와 앤디 워홀 등 동시대 화가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가들도 모나리자를 모방한 작품을 남겼을 정도로 미술사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모나리자의 매력은 여태껏 풀지 못한 신비스러운 수수께끼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델과 정확한 제작 시기, 야릇한 미소의 의미 등 온통 미스터리투성이다. 모델을 놓고는 피렌체의 부호 상인의 부인인 리사 게라르디니라는 얘기도 있고, 다빈치 자신의 자화상을 여성화시켰다는 의견도 있다. 가장 큰 논란은 모나리자 그림에는 눈썹이 그려지지 않았다는 거다. 이를 놓고도 눈썹을 뽑는 것이 당시 미의 기준이었기에 그렇다는 주장이 있다. 넓은 이마가 섹시하다고 해 눈썹 뽑기가 유행이었다는 설이다. 한 미술전문가는 특수 카메라를 사용해 분석한 결과, 원래 눈썹이 그려졌으나 복원 과정에서 지워졌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최근 모나리자와 똑같은 쌍둥이 모나리자가 발견됐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이 소장하던 모나리자 복제품은 16세기 초 다빈치의 제자가 그렸다고 한다. 스승의 작품을 따라 그린 이 모작품이 원작과 유일하게 다른 점은 눈썹이다. 원작에 없는 눈썹을 그렸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모나리자의 눈썹을 둘러싼 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最古의 ‘짝퉁 모나리자’ 발견

    最古의 ‘짝퉁 모나리자’ 발견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가 걸작 ‘모나리자’(왼쪽)를 그리던 당시 같은 화실에서 그의 제자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복제품 ‘모나리자’(오른쪽)가 공개됐다.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은 1일(현지시간) “이 그림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다빈치의 원작과 같은 크기로, 다빈치가 원작을 그릴 당시인 16세기 초에 같은 화실에서 그의 제자가 그린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프라도 미술관은 이 그림을 몇 해 전부터 소장하고 있었으나 16~17세기에 그려진 수많은 복제품 가운데 하나로 여겨 별 관심을 두지 않다가 2년 전 복원 작업에 착수하면서 그림의 가치를 발견했다고 BBC 등 외신들이 전했다. 복제품 모나리자의 가장 큰 특징은 다빈치의 원작에 비해 모델이 훨씬 젊어 보이고 생생한 표정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다빈치의 원작은 그림 표면에 작은 금들이 많이 있고 전반적으로 어두운 색조여서 모델이 중년 여성으로 보인다. 반면 복제품 모나리자는 화사한 배경에 밝은 피부결이 돋보이는 젊은 여성의 모습이다. 눈썹이 없는 원작과 달리 엷고 가는 눈썹이 분명한 것도 눈에 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다빈치 제자가 그린 최초의 ‘짝퉁’ 모나리자 발견

    다빈치 제자가 그린 최초의 ‘짝퉁’ 모나리자 발견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년)가 모나리자를 그리던 당시 같은 작업실에서 제자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짝퉁’ 모나리자가 공개됐다. 지난 1일(현지시간)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은 “16세기 초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가장 최초 모사(模寫)로 보여지는 그림을 발견했다.” 면서 “다빈치와 같은 아틀리에에서 제자가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 그림은 프라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었으나 모나리자의 복제품들이 많아 큰 관심을 두지않다가 2년전 부터 복원 작업을 하던 중 그림의 가치를 발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모나리자의 가장 큰 특징은 보존상태가 양호해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비해 훨씬 젊어보이며 생생한 표정을 볼 수 있다는 것. 프라도 미술관 큐레이터는 “이 작품은 다빈치의 제자인 프란체스코 멜지가 그린 것으로 보인다.” 면서 “아마도 다빈치 옆에 서서 그렸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모나리자는 1505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수십개의 복제품 중 이 작품만큼 오리지널이 완성된 날짜와 가까운 작품은 없다.”고 덧붙였다. 한편 다빈치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적 미술가, 과학자, 기술자, 사상가로 활동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서울광장] 420년 전 유성룡이 있었다면 지금은?/최광숙 논설위원

    [서울광장] 420년 전 유성룡이 있었다면 지금은?/최광숙 논설위원

    임진년(壬辰年) 새해에 임진왜란을 되돌아보게 된다. 작금의 국내 정치 상황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를 보면 그때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왜군이 부산을 침략해온 1592년 4월, 지금으로부터 420년 전 그해도 임진년이었다. 16세기 말 동북아가 격동의 시대였다면, 아시아 패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 간에 힘겨루기가 벌어지는 지금의 정세도 긴박하긴 마찬가지다. 과거 동인·서인 간 당쟁으로 국가 재정과 민심이 피폐해진 것도 오늘과 닮았다. 선진국으로 가느냐 못 가느냐 기로에 서 있지만 국가의 미래는 안중에 없고, 정치권은 여야 모두 포퓰리즘이 난무한다. 국가 중대사도 사사건건 보수·진보로 나뉘면서 국론이 분열돼 있다. 임란 당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조총을 갖고 싸웠지만 조선은 변변한 무기도 없는 병졸을 데리고 7년을 싸웠다. 오죽하면 임란에 개입했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도망 잘 치는 군대’라고 비웃었겠는가. 그래도 우리는 어렵사리 이겼다. 조선 최고 재상으로 일컫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은 임진왜란이 얼마나 힘든 싸움이었는지를 ‘징비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오호라 임진의 화는 참혹하도다. 20여일 사이에 국도(國都)가 떨어지고 8도(八道)가 무너져 임금이 파천(播遷)의 길에 올랐다.” 흔히들 임란 하면 이순신을 떠올리지만 백척간두에 섰던 조선의 운명을 다잡은 이는 다름 아닌 유성룡이었다. 그는 임란 1년 전 왜군의 침략을 예견하고 말직에 있던 이순신과 권율을 발탁한 인물로만 알려졌지 역사적으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도망치기 바빴던 선조 대신 정치·군사 등에서 뛰어난 지략으로 전쟁을 진두지휘한 총사령관이었고, 경제·민생 등 국가 발전에 필요한 비전을 제시한 탁월한 리더였다.(이덕일의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무엇보다 유성룡은 국혼(國魂)을 지닌 지도자였다. 서울 도성을 버리고 평양성에서 머물던 선조가 명으로 피신하려 하자 “한 발자국이라도 (국경을) 나가면 조선은 내 땅이 아닙니다. 지방의 지사들이 며칠 안으로 크게 일어날 텐데 어찌 경솔히 나라를 버리고 압록강을 건넙니까.”라며 겁에 질린 임금을 붙잡는다. 만약 선조가 도망치듯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 땅으로 도망갔다면 조선은 없어지고, 나아가 대한민국이라는 국체(國體)를 오늘날까지 온전히 이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전세가 힘에 부치자 명을 끌어들여 반격의 기선을 잡은 인물이기도 하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저서 ‘서애 유성룡 위대한 만남’에서 “뛰어난 통찰력과 능수능란한 외교력으로 명과 왜가 조선을 분할 통치하려는 것을 막았다.”고 적고 있다. 임란이 한·중·일 3국의 국제전임을 처음 인식하고, 명이 조선에서 철수하면 위협받을 것이라는 ‘후퇴불가론’을 내세워 명으로 하여금 계속 조선과 연합전선을 펴도록 했다는 것이다. 만약 서애가 나서지 않았다면 우리도 모르게 조선이 분단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니 참으로 아찔한 역사의 순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올해 총선과 대선이 있다. 밖으로는 미국과 중국 등 세계 주요 국가들의 지도자 교체가 이뤄진다. 동북아 질서 새판짜기가 시도될 가능성이 높다. 그 어느 때보다 요동치는 시기다. 하지만 난세에는 영웅이 나온다고 한다. 역사상 가장 긴박한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와 백성을 지켜냈던 서애 같은 영웅 말이다. 지금도 난세라면 난세다. 흩어진 국론을 하나로 모으고, 국제 정세를 훤히 꿰뚫어 그 속에서 국가의 미래 좌표를 제시하며 국정을 제대로 이끌 리더가 필요하다. 서애가 죽자 백성들은 선조가 명한 ‘3일장’을 치르고도 “선생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찌 살아 남았겠는가.”라며 하루를 더 애도했다고 한다. 백성의 신망이 두터웠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 우리도 국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을 수 있는 진정한 지도자를 갖고 싶다면 무리한 욕심일까. bori@seoul.co.kr
  • [책꽂이]

    ●계절 밥상 여행 (손현주 지음, 아트북스 펴냄) 여행작가이자 와인 칼럼니스트, 파워블로거인 저자가 전국을 돌며 맛있는 제철 음식과 사람 이야기를 담았다. 봄에는 여수에서 제주까지, 여름에는 전남 증도에서 경북 영주까지, 가을에는 안면도에서 마라도까지, 겨울은 강원도부터 포항까지, 계절별로 맛과 길을 엮어 여행 동선을 그리기에 딱이다. 1만 5000원. ●당신의 목자는 누구십니까? (장석영 지음, 팔복원 펴냄) 서울신문 기자 출신이자 현역 시인인 저자가 신문 사설, 대학 강의를 통해 전하던 신앙 에세이 중 135편을 골랐다. 성경 속에서 깨달은 진리를 통해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한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1만 3000원. ●나라를 망친 조선의 임금들 (이충래 지음, 청조사 펴냄) 조선은 왜 망했는가. 성리학, 지방관리, 국가권력의 사적 남용…. 다양한 원인 중 저자는 ‘궁방 절수’에 집중한다. 임금이 제 식구에게 면세를 일삼고, 왕실과 그 부속(궁방)에까지 토지를 떼어주는 일(절수)이 파다해지면서 나라가 기울었다는 것이다. 위정자들은 뜨끔할 수도. 1만 2800원. ●마오의 독서생활 (꿍위즈·펑센즈·스증취안 외 지음, 조경희 옮김, 글항아리 펴냄) 중국의 정치·경제·사회 뼈대를 만든 마오쩌둥, “사람은 배워야 한다.”고 역설한 그는 어떤 책을 읽었을까. 1986년에 출간돼 지금까지 ‘마오 참고서’로 평가받는 이 책은 고전, 문학, 역사, 산문, 영어공부, 혁명기 소련 정치학, 철학서 등 마오의 평생 독서를 한 권에 담았다. 1만 8000원. ●어떻게 살 것인가 (사라 베이크웰 지음, 김유신 옮김, 책읽는수요일 펴냄) 정치적·종교적으로 혼돈의 시기였던 16세기 후반, 몽테뉴는 산문집 ‘에세’를 내놓았다. 에고이스트, 회의주의자, 순례자, 자유주의자, 로맨시스트 등 갖가지 수식어를 달고 산 몽테뉴의 생애와 사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에세’에서 스무 가지 테마를 뽑고, 그 답을 풀어내면서 21세기 현대인에게 삶의 방향을 안내한다. 1만 8000원. ●그들은 아는, 우리만 모르는 (김용진 지음, 개마고원 펴냄) 2010년 11월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위키리크스의 미국 외교전문 25만건 중 한국에 관련된 문서를 심층분석한 종합 보고서. 미국산 쇠고기 협상과 아프간 파병, UAE 원전 수주, 론스타와 한·미FTA 등 굵직한 사건을 중심으로 한국의 정치·외교라인을 발가벗겼다. 1만 6000원. ●넥스트 컨버전스 (마이클 스펜스 지음, 이현주 옮김, 곽수종 감수, 리더스북 펴냄) 세계 경제를 주도하던 미국와 유럽이 잇따른 위기를 맞으면서 세계 경제 지형도가 바뀌는 결정적인 길목에서 누가 세계경제의 미래를 주도할 것인가. 저자는 중국과 인도, 한국 등을 주목하는 한편 미래 성장과 세계 경제구조 등에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등을 심도있게 고찰했다. 2만원.
  • [데스크 시각] 앞선 것을 뒤따르며 극복하는 지혜/김경운 산업부 전문기자

    [데스크 시각] 앞선 것을 뒤따르며 극복하는 지혜/김경운 산업부 전문기자

    기원전 3세기 신흥국 로마는 북아프리카의 해상강국 카르타고와 기어코 맞붙고 만다. 지중해 무역로의 패권을 둘러싼 포에니 전쟁의 서막이다. 로마군은 막강한 함대를 지닌 카르타고군의 최신형 5단 갤리선을 본떠 ‘짝퉁’ 갤리선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카르타고군처럼 빠르게 돌진해 뱃머리 하단의 쇠뭉치로 적함의 옆구리를 들이박는 전법을 구사하려면 함선뿐만 아니라 잘 훈련된 수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로마군은 까마귀 부리처럼 생긴 쇠갈고리가 달린 길이 12m의 나무다리를 만들어 짝퉁 갤리선에 탑재했다. 적함에 다가서면 재빨리 다리를 내려 쇠갈고리를 박은 뒤 병사들이 상대편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해상전에서는 맥을 못 추지만, 육상 근접전에선 강한 자신들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새 전법이었다. 16세기 후반 임진왜란을 맞은 이순신 장군도 승산 없는 해상전에 나섰다. 일본군은 배 밑바닥이 ‘V자형’인 신형 함선으로 빠르게 접근, 조선군의 느린 ‘U자형’ 판옥선 갑판에 뛰어들어 능숙하게 칼을 휘두르는 버거운 상대였다. 이순신 장군은 고민 끝에 구형 판옥선의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전략을 짜냈다. 둔하지만 튼튼한 판옥선에 대포를 탑재하고, 물 위의 판옥선이 거의 제자리에서 90도 회전할 수 있도록 노잡이 수병들을 훈련시켰다. 이는 일본군이 낡은 배라고 비웃던 평저선이었기에 도리어 가능했다. 판옥선은 적함을 유인해 ‘ㅡ형’으로 꽁무니를 빼다가 일제히 ‘∩형’으로 뱃머리를 돌린 뒤 적함을 향해 함포를 퍼부었다. 해상 함포전이라는 새 역사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삼성전자가 2년 연속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영업 실적을 거두었다. 두 해 전 이건희 회장이 경영 일선에 복귀하면서 ‘진짜 위기론’을 거론했을 때 일부 언론 등에서는 괜한 ‘꿍꿍이셈’이라며 꼬집었던 기억이 난다. 이에 대해 당시 본 칼럼에서는 ‘엉뚱한 의심 말고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지적했으며, 삼성에는 ‘뼈를 깎는 노력’을 주문했다. 삼성은 애플의 아이폰이 엄청난 돌풍을 불러일으키며 찬사를 한몸에 받을 때, 짝퉁이나 만든다는 손가락질을 감수해야 했다. 물론 그때 국내 기업들의 수준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삼성은 스스로 소프트웨어 시대를 열지 못하자, 장점인 하드웨어에 더욱 매진했기에 오늘의 성과를 냈다. 선두를 바싹 뒤따르는 ‘패스트팔로어’ 역할을 충실히 한 것이 요즘 경영인들이 좋아하는 성장 DNA, 즉 ‘삼성의 DNA’ 중 하나일 수 있다. 그렇게 따라가며 틈틈이 여력을 모아 새 디지털 시대를 준비할 것으로 믿는다.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려면 앞선 남의 것에다 나만의 것을 하나 보태야 한다. 그러다 보면 그 볼품 없는 내 것에서 결국 남의 것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탄생하지 않을까. 이 회장은 지난해 1월 9일 70세 생일 때 “앞선 회사도 퇴보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한국이 정신 안 차리면 또 한 걸음 뒤처질 수 있다.”고 특유의 위기론을 거듭 언급했었다. 애플의 독주를 일단 꺾었지만, 아직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닐 것이다. 동점골로 간신히 연장전에 들어갔고, 이제 골든골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어릴 적 농촌에서 ‘올게쌀’을 먹어본 사람들은 커서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곤 한다. ‘가을 들녘의 싱그러운 향기가 입안 가득히 구수하게 감도는’ 맛이다. 올게쌀은 볕이 덜 드는 땅에서 자란 설익은 벼를 찧은 뒤 쪄서 정성스럽게 말린 ‘찐쌀’의 남도 사투리이다. 어느 해 추석이 빨리 와 조상의 차례 상에 햇밥이 오르지 못할 처지가 되자, 위기에서 탄생한 지혜의 쌀이다. 햅쌀이 없으면 묵은 쌀을 올리거나 더 훌륭한 것으로 대체하면 될 테지만, 우리 조상들은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다. 기본에 충실함으로써 더 나은 명품을 낳은 것이다. kkwoon@seoul.co.kr
  • [씨줄날줄] 명함/주병철 논설위원

    스코틀랜드에 제임스 맥퍼슨이란 대학 교수가 있었는데 어느 날 명함을 또 찍어야 할 일이 생겼다. 마지막 남은 한 장을 인쇄소에 보냈는데 그것은 언젠가 한번 쓰려다 둔 명함이었다. 이 명함에는 무슨 글이 적혀 있었다. 그대로 인쇄한 새 명함은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병환의 회복을 빕니다. 맥퍼슨 교수.’ 윤처관(尹處寬)이 의정부 녹사(事)로 있을 때 어느 날 새벽에 정승 박원정을 찾아갔으나 일어나지 않았다며 청지기가 문을 열지 않았다. 분한 생각에 어린 아들 효손(孝孫)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니 너는 훌륭하게 되어 아비같이 되지 말아라.”라고 말했다. 효손은 이 말을 듣고 부친의 명함 뒤에다 이런 글을 써놓았다. “상공의 늦잠이 과해, 문전에서 사람의 명함에는 털이 났도다. 꿈속에서 혹 옛날 주공(周公)을 만나거든 그때 토포(吐哺) 악발(握髮)하던 수고나 물어보시오.”라고 했다. 주공은 나를 지극정성으로 대하였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거만하냐는 얘기였다. 이튿날 부친은 그 명함을 갖고 다시 정승댁에 들여보냈더니 박정승이 명함 뒤를 보고는 효손을 칭찬하며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자신을 소개하는 명함은 16세기 중국에서 시작됐는데, 방문한 집에서 주인을 만나지 못하면 종이에 이름을 적어두고 온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독일에서도 같은 무렵 비슷한 용도로 사용됐는데, ‘비지팅 카드’(Visiting Card)로 불렸다. 일본은 에도막부의 관리가 방일한 미국 사절단에게 명함을 건넨 게 처음이고, 우리나라의 최초 명함 사용자는 한국인 최초 유학생인 유길준으로 기록돼 있다. 지금의 명함은 몰라보게 진화됐다.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어 캐리커처나 사진을 넣은 지 오래됐고, 직업에 따라 크기도 다르고, 명함의 직함이나 이력 등도 개성 있게 꾸민다. 단순한 개인 소개보다는 홍보(PR) 용도까지 포함된 게 요즘 명함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건네는 명함의 모양이나 스타일을 보고 성격이나 개성, 인품을 가늠하기도 한다. 가장 흔해 빠진 게 정치인의 명함이다. 근데 이게 종종 화근이 된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BBK 주가조작 개입 의혹과 관련해 그가 만든 BBK 명함이 공개돼 논란이 됐다. 이번에는 고승덕 한나라당 의원이 2008년 전당대회 때 박희태 국회의장 쪽 인사가 자신에게 돌린 “돈 봉투 안에 박희태 명함이 있었다.”고 밝혀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명함이 범죄 혐의의 단서가 되는 세상이고 보면 명함의 본래 의미가 퇴색되는 것 같아 씁쓰레하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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