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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해찬 “정조 이후 DJ·노무현·문재인 빼고 다 독재”

    이해찬 “정조 이후 DJ·노무현·문재인 빼고 다 독재”

    “재집권, 이 기회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지금이야말로 분단 70년사 마감할 유일한 기회”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5일 “정조대왕 이후 219년 동안 김대중(DJ)·노무현 전 대통령 10년과 문재인 대통령 2년 등 12년을 빼고는 일제강점기이거나 독재 또는 아주 극우적인 세력에 의해 나라가 통치됐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이날 서울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컨벤션홀에서 열린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 학술회의에 참석해 축사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그는 “나라가 굉장히 기울어져 있는, 운동장이 기울어진 것이 아니라 평화·민주 세력이 벼랑 끝에 겨우 손만 잡고 있는 형상”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 대표는 “김대중 대통령은 목숨을 몇번이나 잃을 뻔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아주 갑작스럽게 서거하시는 변을 당하셨다”면서 “두 분을 모시고 정치를 하면서 우리 현대사가 얼마나 기구했던가 하는 것을 참 많이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대표는 극우세력의 통치가 아닌 진보 정권이 반드시 재집권해야 한다는데 방점을 찍었다. 또 분단 국가의 종식을 위한 유일한 기회라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이제 겨우 우리가 재집권했는데 이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다”면서 “특히 지금이야말로 분단 70년사를 마감하고 평화·공존 시대로 갈 수 있는 어떻게 보면 유일한 기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행히 문 대통령 임기가 3년 정도 남아있기 때문에 이제 문을 더 열면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의) 진도를 나갈 수 있다”면서 “절대로 역진하지 않는 정도의 진도가 나가줘야만 다음 정부가 남북관계를 더 크게 발전시켜 분단사를 마감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유시민 “여권 차기 대선주자 거론은 그분들 희망사항”

    유시민 “여권 차기 대선주자 거론은 그분들 희망사항”

    “후보 적합도 여론조사서 사라졌으면…정치 생각 있으면 이런 식으로 안 해” 새달 23일 ‘새로운 노무현’ 시민문화제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23일 여권의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데 대해 “그건 그분들의 희망사항”이라고 선을 그었다. 유 이사장은 이날 서울 마포구 신수동 재단 사무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정치 복귀를 하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 말했는데 안 믿어 주면 말로는 방법이 없다”며 “제 인생은 제가 결정하는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유 이사장은 대선후보 적합도 여론조사에 자신이 포함되는 데 대해 “제가 빼 달라고 간곡히 이런저런 방법으로 말했는데 빼 주는 언론사도 있고 그럼에도 넣는 언론사가 있다”며 “다행스러운 건 계속 (적합도가) 내려가고 있다. 계속 내려가서 사라져 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어 “저도 정치해 봤고 정치지도자 참모도 해 보고 선거 기획도 해 봤다”며 “제가 대선에 나가거나 정치를 재개할 생각이 있으면 이런 식으로 절대 안 한다”고 강조했다. 유 이사장은 노무현재단의 유튜브 채널인 ‘알릴레오’와 자유한국당 홍준표 전 대표의 ‘TV홍카콜라’의 공동 방송 추진에 대해 “저희가 먼저 아이디어를 내 제안했고 홍카콜라 측에서 해 보자는 답변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번 대화해서 공감을 이루거나 합의를 얻어내지 못하더라도 현실과 미래의 문제에 대해 평소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라며 “한 번으로 부족하면 두 번, 세 번 이렇게 대화하면 좋지 않을까 한다”고 취지를 밝혔다. 유 이사장은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을 평가해 달란 질문에 “문재인 대통령이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현재 어디에 와 있나를 보고 정부에 대한 비판점을 각자가 생각해 보는 게 필요한 시점”이라고 답했다. 노무현재단은 다음달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를 맞아 ‘새로운 노무현’을 주제로 대전·광주·서울·부산에서 시민문화제 등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특히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노무현 시민센터’를 건립하고자 다음달 2일부터 모금 캠페인을 시작한다. 모금 목표액은 100억원으로 오는 6월 착공해 2021년 개관 예정이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유시민 “권력 잡는 정치 안 한다…그분들의 희망사항”

    유시민 “권력 잡는 정치 안 한다…그분들의 희망사항”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23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 재단 사무실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정계 복귀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는 “그렇게 말씀을 드려도 안 믿어주면 말로는 방법이 없다”며 “그런 말씀을 하는 것은 그분들의 희망 사항이라고 생각하고 제 인생은 제가 결정한다”고 말했다. 이어 “많은 분이 아니고 몇몇 분들이 그런 생각을 하신다는 것을 제가 알겠고, 그렇게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차기 대선주자 관련 여론조사에 자신이 상위권을 차지하는 데 대해서는 “처음보다 (제 순위가) 내려가고 있어 다행이고 안심이 된다. 계속 내려가서 사라져주기를 바라겠다”고 말했다. 유 이사장은 “여론조사에서 제 이름을 빼달라고 했는데 빼주는 언론사도 있는 것 같고, 그런데도 계속 넣는 언론사도 있더라”고 전했다. 유 이사장은 최근의 각종 현안 발언이 사실상 정치 활동이나 마찬가지라는 지적에 대해선 “국가권력의 기능과 작동 방식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개별적·집단적 활동이 정치라고 보면 ‘알릴레오’도 정치가 맞다”고 대답했다. 아울러 “이런 의미에서의 정치는 모든 시민의 권리이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이기도 하다”며 “저는 이 정치를 수십 년 동안 해왔고, 죽을 때까지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그러나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조금 다른 문제로, 제가 직접 국가권력을 잡아서 그 기능과 작동 방식을 바꾸려는 시도는 안 하겠다는 것”이라며 “정치를 안 하겠다는 것은 이걸 안 하겠다는 것으로, 그렇게 가르마를 타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두언 전 의원은 제가 틀림없이 선거에 나올 것이고 그렇다면 너무 빨리 움직였다고 했는데 저도 동의한다”며 “제가 진짜 대선에 출마하거나 정치를 재개할 의사가 있으면 절대 이런 식으로 안 한다. 그것을 하는 방법을 저도 좀 안다”고 강조했다. 유 이사장은 노무현재단의 유튜브 채널인 ‘알릴레오’와 자유한국당 홍준표 전 대표의 ‘TV홍카콜라’의 공동 방송 추진에 대해 “저희가 먼저 아이디어를 내 제안했고, 홍카콜라 측에서 해보자는 답변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그는 “한번 대화해서 공감을 이루거나 합의를 얻어내지 못하더라도 현실과 미래의 문제에 대해 평소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라며 “한 번으로 부족하면 두 번, 세 번 이렇게 대화하면 좋지 않을까 한다”고 제안 취지를 설명했다. 유 이사장은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에 대해서는 “포괄적으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특히 민주주의의 위기는 많이 해소돼 안정기로 접어들었다고 본다”고 밝혔다. 또 “서민 경제의 위기는 아직 해결하지 못했지만, 계속 해결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며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는 갈림길에 와 있다. 이 문제가 분명 해결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단계로 전환하는 고빗길에 섰다고 본다”고 진단했다. 한편 유 이사장은 노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슬로건을 ’새로운 노무현‘이라고 정한 데 대해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균형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 등은 참여정부가 표방한 세 가지 국정방침이었다”며 “새로운 것을 찾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과제를 새롭게 발견해보자는 의미로 슬로건을 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노무현재단이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노무현시민센터‘를 건립하기로 하고 100억원 모금을 목표로 오는 5월 2일부터 건축모금 캠페인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유시민 “‘새로운 노무현’ 10주기 행사” 100억 모금 진행

    유시민 “‘새로운 노무현’ 10주기 행사” 100억 모금 진행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23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 재단 사무실에서 기자단감회를 갖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를 기념해 다양한 추모 행사를 갖는다고 밝혔다. 노무현재단은 노 전 대통령의 10주기 슬로건을 ‘새로운 노무현’으로 정하고, 다음달 한 달 동안 서울과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추모 행사를 진행한다. 첫 행사는 이달 25일 ‘행동하는 양심과 깨어있는 시민’을 주제로 열리는 노무현재단과 김대중도서관의 공동학술회의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정치사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판문점 선언 1주년과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발제와 토론을 진행할 예정이다. 5월 5일 봉하마을 어린이날 행사에서는 대통령의 집 어린이 투어, 봉하 그리기 대회, 5월 역사 이야기, 전통 탈춤과 강강수월래 등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노무현재단은 또 5월 11∼19일 대전, 광주, 서울, 부산 등 전국 4개 권역에서 차례로 시민문화제를 열 계획이다. 시민문화제는 체험·나눔 부스 운영과 토크콘서트, 문화공연 등으로 구성되며, 유 이사장,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의원,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등이 참석한다. 노 전 대통령의 기일인 5월 23일에는 봉하마을 대통령 묘역에서 추도식을 엄수한다. 문희상 국회의장과 이낙연 국무총리가 참석해 추도사를 낭독한다. 추모 행사와 별도로 노무현재단은 윤태호 작가와 함께 제작한 10주기 기념품을 오는 29일부터 알라딘(www.aladin.co.kr)을 통해 판매한다. 노 전 대통령의 저서와 연보 등 7권을 엮은 ‘노무현 전집’을 5월 3일 출간하고, 배우 문성근 씨가 낭독한 ‘운명이다’ 오디오북과 전자책도 공개한다. 한편 노무현재단은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노무현시민센터’를 건립하기로 하고, 100억원 모금을 목표로 5월 2일부터 건축모금 캠페인을 시작한다. 노무현시민센터는 노 전 대통령의 철학과 가치를 계승하고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키워갈 민주주의의 열린 플랫폼’이라는 콘셉트로 올해 6월 착공해 2021년 개관할 예정이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만우절 거짓말처럼 떠난 장국영…죽음 둘러싼 루머들

    만우절 거짓말처럼 떠난 장국영…죽음 둘러싼 루머들

    중화권 톱스타 장국영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16주년이 됐다. 장국영은 1976년 가수로 데뷔한 뒤 1978년 ‘홍루춘상춘’으로 영화계에 뛰어들었고, 87년 ‘영웅본색’을 통해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천녀유혼’ ‘아비정전’ ‘종횡사해’ ‘패왕별희’ ‘동사서독’ ‘해피투게더’ 등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노래와 연기,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 실력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홍콩 연예계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리고 2003년 4월 1일. 장국영은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46세. 만우절 거짓말로 믿고 싶던 그의 죽음은 사실이었고 그의 팬들은 매년 4월 1일 장국영을 그리워하고 있다. 장국영은 호텔에서 투신하기 전 “한 명의 20대 청년을 알았다. 그와 탕탕 사이에서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몰라서 아주 괴롭다. 그래서 자살하려 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당시 장국영의 죽음과 관련해 가장 많이 거론됐던 소문은 대만 폭력조직 삼합회가 장국영을 살해했다는 것이었다. 홍콩 영화계가 삼합회와 여러 모로 얽혀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고, 장국영은 생전 삼합회가 홍콩영화계에 관여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장국영이 삼합회에 살해당한 뒤 자살로 위장된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장국영이 투신한 호텔은 중간 부분이 튀어나온 구조였는데 시신이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점, 혈흔이나 외상이 너무 적은 점 등 투신 현장과 관련된 여러 의문점이 쏟아졌다.사건 당시 연인이자 유산상속인이었던 당학덕의 행적을 둘러싸고도 의문의 시선이 모아졌다. 장국영이 사망하던 날 당학덕은 장국영과 배드민턴을 치기로 약속했다고 알리바이를 댔지만 그가 말한 시간은 이미 장국영과 매니저가 약속을 잡아 놓고 있었던 시간이었다. 또 장국영이 사망하기 얼마 전에는 두 사람의 사이가 예전같지 않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장국영 사망 며칠 전 당학덕과 장국영이 심하게 싸우는 걸 봤다는 목격자도 나타났다. 또한 당학덕은 평소 삼합회의 행사에 모습을 자주 드러냈었다. 결과적으로 당학덕은 장국영의 재산 460억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장국영 사망 직후 조카 알리사가 “평소 장국영이 우울증을 앓아왔고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다”고 밝혔고, 2013년 장국영의 사망 10주기 추모 콘서트에서 장국영의 매니저였던 ‘진숙분’이 장국영이 죽기 직전 자신의 입으로 “편하게 가는 방법이 있다”라는 말을 하는 등 현재는 자살로 결론이 모아지고 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故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모작 ‘노무현과 바보들’ 4월 개봉

    故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모작 ‘노무현과 바보들’ 4월 개봉

    고(故)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 맞아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과 바보들’ 개봉 소식이 전해졌다. ‘노무현과 바보들’은 사람 사는 세상을 꿈꿨던 고 노무현 대통령과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기억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아 오는 4월 개봉된다. 3년간의 기획 과정을 거쳐 완성된 ‘노무현과 바보들’은 80여명의 인터뷰이를 통해 부림사건과 국민참여경선, 그리고 대통령 당선의 순간은 물론 거듭된 위기와 서거, 그리고 현재까지를 그렸다. 특히 ‘노무현과 사람들’에는 이전 작품에서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미공개 영상들이 최초 공개될 예정이다. 故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모작 ‘노무현과 바보들’은 오는 4월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윤지오, 故장자연과 함께한 사진 공개 “책 수익금은..”

    윤지오, 故장자연과 함께한 사진 공개 “책 수익금은..”

    배우 윤지오가 사진 한 장을 공개했다. 윤지오는 최근 SNS에 고(故) 장자연과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하며 “환한 햇살처럼 밝게 웃던,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던 자연언니..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언니와 함께할게. 언니를 지켜나가 볼게“라는 글을 올렸다. 또한 윤지오는 ”이제는 하늘에서 밝게 빛내며 평안히 지내. 늘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해“라고 애틋한 인사를 전하며 ”#장자연 #윤지오 #10주기“라는 태그를 달았다. 한편 지난 5일 윤지오는 TBS교통방송 ‘김어준의 뉴스쇼’에 출연해 처음으로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며 사건 당시를 언급해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또한 10일 SNS에 “‘13번째 증언’은 진실만을 기록한 에세이 북이다. 사건의 진상이 규명되길 염원하시는 분들께 바치는 마음과,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고 모든 증언자와 생존자가 건승하길 바라며 진심을 담아 글을 썼다”고 설명했다. 그는 “제가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제가 섣불리 나설 수 없었기 때문”이라며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는 사안이었고 현재도 그러하다”고 밝혔다. 이어 “이제껏 언론에서 공개한 내용은 빙산의 일각”이라며 “저는 사실상 유일한 ‘목격자’가 아닌 유일한 ‘증언자’”라고 말했다. 윤지오는 또 “수익적으로 쥐어지는 금액은 그리 많지 않지만 기부를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한국에서 의미 있게 수익금 일부가 쓰일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을 찾고 있다”고 덧붙였다. 윤지오는 이어 ‘장자연 사건’을 알고 있는 일부 배우들이 이를 외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제가 되려 유명인이 아닌 것이, 또 유명배우로서 함구하는 거짓된 삶을 살아가지 않고 끝까지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 감사하다”며 “다른 배우들이 묵언하는 것을 보며 제가 감당할 수 있고 제가 언니 곁에 있었기에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진 = 서울신문DB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황교안이 노 전 대통령 묘역 참배하고 방명록에 남긴 글

    황교안이 노 전 대통령 묘역 참배하고 방명록에 남긴 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5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이 있는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방문했다. 황 대표는 이날 오후 5시 30분쯤 봉하마을에 도착해 노 전 대통령 묘역부터 찾았다. 묘역 입구에는 황 대표 명의의 추모 화환이 자리하고 있었다. 준비된 조화를 묘역에 바치고 참배한 황 대표는 방명록에 ‘대통령님의 통합과 나라 사랑의 정신, 깊이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앞서 황 대표는 당 대표 취임 첫날인 지난달 28일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고 이승만·김영삼·박정희·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했다. 당시 방명록에는 ‘위대한 대한민국의 새 전진, 자유한국당이 이뤄내겠습니다’라고 적었다. 노 전 대통령 묘역 참배를 마친 황 대표는 권양숙 여사와 약 30분 동안 면담했다. 황 대표는 권 여사에게 홍삼을 선물로 건넸다. 민경욱 대변인에 따르면 황 대표는 이 자리에서 “(노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아 여러가지 마음이 무겁고 힘드실텐데, 노 대통령의 뜻을 기리는 일을 잘 감당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권 여사는 “올해가 김대중 대통령 서거 10주기이기도 해서 민주당에서도 신경을 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황 대표는 노무현 기념관은 언제 건립이 완료되는지도 물었다. 권 여사는 “기념관은 2020년에 준공된다”고 답했다. 황 대표는 “잘 마무리가 되길 바란다”고 화답했다. 권 여사는 노 전 대통령이 사용했던 거실과 서재, 뒤뜰 등을 황 대표에게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권 여사는 황 대표에게 매화꽃을 선물했다. 황 대표는 권 여사와 만난 뒤 소감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노 대통령의 통합과 나라 사랑의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됐다”면서 “(노 대통령 재임 시절) 현안들에 있어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나 이라크 해외 파병이라든지, 이런 부분에서 갈등을 해소하신 것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날 일부 진보단체들은 집회를 열어 ‘5·18 망언 너희가 괴물이다’, ‘5·18 망언, 탄핵 불복 자유한국당 OUT’, ‘탄핵 촛불 부정하는 황교안이 박근혜다’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황 대표의 봉하마을 방문을 항의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윤지오, 장자연 문건 본 인물 ‘10년만의 반전 일어날까?’

    윤지오, 장자연 문건 본 인물 ‘10년만의 반전 일어날까?’

    故장자연 씨의 동료인 배우 윤지오가 방송에 출연해 화제다. 5일 방송된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윤지오는 ‘장자연 리스트’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진실을 공개했다. 이날 윤지오는 故장자연 사망 10주기를 맞아 “자연 언니의 진정한 안식을 바란다”고 밝혔다. 지난 2009년 3월, 장자연이 세상을 떠난 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장자연 문건에는 생전 그녀가 접대를 강요받았던 이들의 이름이 담겼다. 이는 과거사위에 의해 조사되고 있고 곧 결과도 발표될 예정이다. 과거 장자연이 당한 성추행을 목격했고 10년 동안 수사기관에 진술하고 법정에서도 증언했던 목격자 윤지오가 10년 만에 처음으로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고 그날의 진실을 이야기했다. 윤지오는 장자연이 세상을 떠난 2009년부터 10년간 검찰과 경찰로부터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를 받아왔다. 지난해 2월엔 JTBC 뉴스, 7월엔 MBC ‘PD수첩’에 출연, 익명으로 인터뷰를 가졌다. 이후 윤지오는 ‘13번째’라는 책을 쓰고 세상 밖으로 나오기로 결심했다. 윤지오는 10년간 고통 속에 살아왔다. 윤지오는 “증언을 한 이후 일상생활을 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언론에서 취재가 있었고 이사도 수차례 했다. 경찰 조사 자체도 늦은 시간부터 새벽까지 이뤄지는 시간이었고, 그 이후엔 기자들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내가 일하는 곳이랑 대학원까지도 오셔서 생활하는 것 자체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배우였던 윤지오는 캐스팅 부분에서도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윤지오는 “그 당시엔 너무 어린 나이여서 제외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몇 년 후엔 캐스팅이 안되는 일을 체감하면서 감독님이라든지 직접적으로 ‘그 사건에 너가 증언했던 걸 알고 있다, 캐스팅이 불가하다’고 말씀해주시는 걸 실질적으로 들어 몇 년 후에 깨닫게 됐다”고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윤지오는 이례적인 조사 방식에 대해 언급해 김어준을 놀라게 했다. 윤지오는 “밤 늦은 시간까지 조사받았다. 이른 시간이라 해도 밤 10시 이후였다. 모든 조사가 그랬다. 새벽에 불려간 적도 있다. 참고인이었다. 난 누구에게 의논할 상황이 아니었고 혼자 한국에서 생활하다보니 스무살 어린 나이에 그런 공간에 가는 것조차 처음이고 생소해서 잘 몰랐다. 한번도 왜 이 시간에 진행하냐고 물어본 적도 없었다. 그 당시엔 그게 당연한가보다 생각했다”고 말했다. 현재 가족들과 해외에서 지내고 있는 윤지오는 공개적으로 방송에 나와 증언해야겠다 결심한 계기에 대해 “내가 국내에서 계속 거주했다면 이런 결정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캐나다에서 거주하면서 이런 사건이나 사고 케이스가 공개적으로 진행된다. 캐나다의 경우 피해자나 가해자의 이름과 얼굴이 공개된다. 그런 것이 당연시 여겨지고 피해자가 숨어서 사는 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존중받는 걸 보면서 어찌 보면 한국도 그래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가해자들이 너무 떳떳하게 사는 걸 보면서 억울하단 심정이 많이 들었다”고 전했다. 윤지오는 장자연 리스트라 불리는 장자연 문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소각되기 전 장자연 문건을 봤다는 윤지오는 “당시 문건을 공개한 소속사 대표님이 유가족과 원활한 관계가 아니었고 내가 중간에 전달자 역할을 하면서 ‘문건에 너에게 자연이가 남긴 글이 있다’ 해서 가게 됐다. 유가족들이 보시기 직전 내가 먼저 확인을 했다”며 “다 봤다. 정확히 기억 남는 것도 아닌 것도 있는데, 기억나는 건 한 언론사에 동일한 성을 가진 3명이 거론됐다. 13번에 걸친 조사에 항상 성실하게 임했다. 항상 얘기했다. 과거사위 소각되기 전 문건에서 질문을 해주시면 항상 성실하게 답했다”고 밝혔다. 2009년부터 참고인 조사를 13차례 받은 윤지오는 한 언론사에 근무한 적이 있던 전직 기자 조모씨가 술자리에서 장자연을 성추행한 걸 직접 봤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윤지오는 “내 기억 속 인물은 한 번도 번복된 적이 없다. 하지만 그 당시 21살인 내가 느끼기에도 수사가 굉장히 부실하게 이뤄졌고, 당시 사진 속 인물에는 조씨(A 언론사 전직 기자)가 없어 지목하지 못했다. 지목을 하더라도 그분이 아니었고, 내가 진술이 엇갈린 게 딱 한 부분이 있다라면 목격한 정황이나 그런 건 일관됐지만 인물을 지목하는 과정에 있어서 내가 이름을 아는 것도 아니었고, 주신 자료를 토대로 했고, 당시 선면 수사가 이뤄지면서 두 분의 인물을 보게 되면서 정정하게 됐다. 그 이후로 일관되게 그분을 지목했다. 명함 때문에 헷갈렸지만 내 머릿 속 인물은 항상 동일했다. 경찰이 제시한 자료만 보다보니 헷갈렸다. 기억 속 인물은 항상 일관됐다. 사실상 사진을 주시는 게 몇 년 전 사진이라든지 그래서 사진은 다른 인물로 보여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해명했다. 현재 조모씨는 재판을 받고 있지만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윤지오는 “날 아예 본 적이 없다 했다. 난 법정에서도 본 바대로 증언했다. 9년 전에도 13번 진술했던 거다”고 강조했다. 또 이날 윤지오는 경찰 조사 자체가 부실했다고 지적했다. 윤지오는 “질문 자체도 내가 느끼기엔 이게 왜 중요한가 싶은 거였다. 중요한 건 따로 있는데 수박겉핥기 식으로 다른 것만 물었다. 무슨 구두를 신었나 같은 질문이었다. 질문 자체를 늦은 시간 계속 듣다보니 반복되어지고 왜 이런 질문을 하나 했다. 이런 부분 질문해서 도대체 무얼 확인하려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며 “처음부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난 증언하는 목격자 입장인데 진술할 때 옆에 가해자가 있고 그 와중에 진술하고, 내가 진술할 때 비웃고 심리적인 압박감이 당연히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 좁은 공간에 같이 있으면서 여자 수사관 없었고 다 남자분이셨다.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상태에서 증언을 이어갔던 것이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윤지오는 “당연히 내가 얻을 이득이 없다. 그 나이엔 소설쓰듯 상상으로 말한다는 것도 불가능했고 조사가 이뤄진 시기도 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얼마 안된 시점이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거짓말을 하겠나. 오히려 어려움이 많았다”며 13번에 걸쳐 자세하게 진술했음에도 불구, 관련자들은 대표 한 사람 빼고는 처벌을 받은 사람이 없다는 점에 답답함을 토로했다. 조용히 이 사건이 덮여지는 걸 보면서 무서움을 느꼈지만 국민청원이 큰 힘이 됐다. 윤지오는 “국민청원 덕에 많은 힘을 얻었고 과연 국민청원이 없었더라면 재수사 착수하는 게 과연 가능했을까 싶다. 그냥 덮여지고 묻어졌을 사건인데 국민청원으로 인해 다시 재수사를 착수할 수 있게 되어 국민청원에 응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한 상황이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끝으로 윤지오는 “내가 쓴 책 제목 자체도 사실에 기반해서 ‘13번째’라고 지었다. 난 10년이란 시간이 그렇게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근데 숨어 살기 너무 급급했고 그것들이 솔직히 잘못된 것인데 당연시되는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 살 수 없다라는 판단이 들어 또 해외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데 나같은 피해를 겪은 분들이 세상 밖에서 당당하게 사셨으면 좋겠단 바람으로 썼다. 가해자가 움츠려 들고 본인의 죄의식 속에 살아야되는데 피해자가 오히려 책임감과 죄의식을 갖고 사는 현실이 한탄스러웠기 때문에 이젠 바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서 용기를 내고 이 자리에 나오게 됐다”며 인터뷰를 마쳤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부 seoulen@seoul.co.kr
  • 故 장자연 동료 윤지오 “성추행 직접 목격, 10년 간 숨었지만..”

    故 장자연 동료 윤지오 “성추행 직접 목격, 10년 간 숨었지만..”

    배우 윤지오가 故 장자연 사망 10주기를 맞아 자신의 실명과 얼굴을 당당히 드러내고 마지막 증언을 했다. 5일 오전 방송된 tbs교통방송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는 故 장자연 동료 윤지오가 출연했다. 윤지오는 10년 전 장자연이 언론사 사주 등이 포함된 술자리에서 성추행을 당할 당시 그 자리에 동석해 있던 동료다. 이날 윤지오는 “장자연의 참고인 조사는 매번 밤 10시 이후에 불렀다”며 “조사 끝나고 경찰 측에서 집에 데려다 줄 때도 항상 미행이 붙었다”고 말했다. 장자연 성추행 장면을 직접 목격했던 윤지오는 지난 10년 동안 얼굴을 숨겨왔다. 윤지오는 10년이 흐른 후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게 된 이유에 대해 “피해자는 숨고 가해자는 떳떳한 걸 더 볼 수 없었다”고 밝혔다. 장자연 사건에 대해 증언한 이후로 윤지오는 언론 취재부터 경찰, 검찰에 새벽에 불러가 조사를 받으며 일상 생활이 불가능해졌다. 윤지오는 “당시 장자연 사건 조사는 21세인 제가 느끼기에도 부실한 수사였다”고 강조했다. 윤지오는 장자연 사건 증언 이후 캐스팅 라인업에서 제외됐다. 그는 “장자연 사건을 증언 했다는 이유로 캐스팅에서 제외됐다는 이야기를 감독으로부터 직접 들어야 했다”고 털어놨다. 윤지오는 최근 ‘13번째 증언’이라는 책을 통해 당시 수사과정과 장자연 관련 의혹들에 대한 내용을 공개했다. 그는 “저 같이 피해를 겪고 있는 분들이 세상 밖에서 당당히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책을 썼다”며 “피해자가 죄의식속에 살아야하는 게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군사작전 5일 앞두고 日 패망…물거품 된 ‘자주독립의 꿈’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군사작전 5일 앞두고 日 패망…물거품 된 ‘자주독립의 꿈’

    4부 광복의 여명 : 충칭 시기 ③ 미완의 ‘대한민국’ <끝>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8월 7일 미국 첩보기관 전략사무국(OSS)과 한미 연합 군사작전을 최종 합의했다. 20일까지 한반도에 침투하기로 하고 출동 명령을 기다렸다. 하지만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임정으로서는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자주독립을 위해 쏟아부은 노력이 물거품이 돼 버렸다. ●임정에 너무나도 아쉬운 해방 김구(1876~1949)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광복군을 국내에 진입시키려고 했다. 영국에서 망명정부를 이끌던 프랑스 샤를 드골(1890~1970)이 레지스탕스 부대를 이끌고 파리에 입성했듯 임정도 광복군을 모아 서울로 들어가려고 했다. 미국 OSS와 한반도 진공을 추진하는 동시에 중국 산시성 옌안에 있던 김두봉(1889~1961)의 조선의용군, 소련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일성(1912~1994)의 항일유격대 등과 손잡고 압록강을 넘어가려고도 했다. 임정이 실제로 미국, 중·소 한인부대와 연계해 대일전쟁을 수행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해방 뒤인 1948년 3월 김구가 안창호(1878~1938) 10주기 추도식 때 한 말이다.“선생이여, 우리 조국이 해방된 것을 10분(100%)으로 보면 7분(70%)은 우리 애국 선열들의 피와 땀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최후의 3분(30%)이 우리 힘으로 되지 못한 까닭에 해방에 기괴한 내용이 담기게 됐습니다.” ●대만, 국제사회 미아 임정 도운 유일한 우방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굳어져 가던 1943년 7월. 임정 수뇌부가 중국 국민당 정부 총통 장제스(1887~1975)를 만났다. 김구 등이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주장해 달라”고 호소했고, 장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해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회담에서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1874~1965) 영국 총리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했다. 당시 인도의 독립운동가로 훗날 총리가 되는 자와할랄 네루(1889~1964)는 한국을 “아시아 식민지 국가 가운데 열강에게 독립을 보장받은 유일한 나라”라고 부러워했다. 카이로 회담은 1914년 이후 일본이 점령한 영토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고 모인 자리였다.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된 한국은 논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장제스가 예외 조항까지 만들어 도왔다. 1932년 4월 윤봉길(1908~1932)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를 보고 우리 민족의 항일 의지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국민당 정부(현 대만)는 국제사회에서 ‘미아’가 될 뻔한 임정을 마지막까지 지켜준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중국의 노력에도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열강의 반응은 차가웠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임정을 한반도의 정식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국의 독립과 임정의 승인은 별개다.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이 분열돼 임정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 임정은 한반도와 연계가 없다. 중국이 임정을 승인하면 소련도 친소단체를 승인할텐데 이렇게 되면 연합국 내에서 마찰이 생겨날 수 있다.” 처칠도 임정을 인정하면 인도 등 영국 식민지들이 동요할 수 있다고 보고 반대했다. 실망스럽지만 임정 요인들은 모두 개인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와야 했다. 1945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임정 직원과 가족들이 차례로 귀국했다.●임정, 국제정세 못 읽고 선거불참…한독당 소멸 임정 인사들이 귀국하자 시민들은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김구의 거처이자 임정 청사 역할을 한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은 인파로 붐볐다. 1945년 12월 임정 인사들은 서울운동장(현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환국 행사에 참석했다. 15만명이 몰려와 이들을 축하했다. 하지만 미 군정은 자신 이외의 어떠한 정부 활동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임정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부터 김구는 미 군정 규정을 어기고 임정을 사실상의 정부로 간주하려고 해 갈등을 빚었다. 직접적 도화선은 신탁통치 문제였다. 1945년 12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개국 외상이 만나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의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임정은 즉각 국무회의를 열고 반탁운동에 나섰다.앞서 임정은 1943년 영국과 미국이 한국을 국제 공동관리하는 방안을 논의했다는 뉴스가 나오자 중국 충칭에서 ‘재중자유한인대회’를 열어 반대운동을 펼쳤다. 임정 연구의 권위자인 한시준(65)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해방 뒤 임정의 반탁운동은 충칭에서 국제 공동관리에 반대했던 연장선상에 있던 것”이라며 “일제가 패망하면 한국은 곧바로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 임정의 확고부동한 믿음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김용옥(71) 한신대 석좌교수는 “당시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논의한 신탁통치안은 (임정이) 반대할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미소 공동위원회는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방안을 내놨다”며 “당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신탁통치를 찬성했어야 했다. 그러면 분단도 일어나지 않았고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 민중항쟁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美군정, 비밀리에 임정 해체공작까지 임정은 1945년 12월 31일 ‘국자 1·2호’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신탁통치를 강행하려는 미 군정 대신 자신들이 정부 역할을 맡겠다는 것이었다. 1946년 1월 1일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1893~1963)가 김구와 언성을 높여 싸운 끝에 상황을 수습했다. 이때부터 미 군정은 임정을 위험한 존재로 보고 협력 대상에서 배제했다. 비밀리에 임정 해체 공작도 개시했다.이후 김구의 여러 정치적 시도는 번번이 무산됐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돼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다. 9월 9일 북한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38선을 경계로 국토와 민족이 둘로 나뉘었다. 임정 세력이 주축이던 한국독립당은 “남한만의 정부 수립에 반대한다”며 총선 참여를 거부했다. 제헌의회에서 정치권력을 얻지못한 한독당은 결국 세를 잃고 와해됐다. 당시 국제 정세와 한국사회 분위기를 제대로 읽지 못한 ‘패착’이었다는 평가가 많다.●주요 임정 지도자들 어두운 말로 주요 임정 지도자들의 말로도 불행했다. 1947년 7월 여운형(1886~1947)은 좌우 합작운동을 펼치다가 살해됐다. 김원봉(1898~1958)은 친일경찰 노덕술(1899~1968)에게 고문을 받은 뒤 월북했다. 그가 자신의 비서였던 중국인 학자 쓰마로(100·미국 거주)에게 보낸 편지에는 “북조선은 그리 가고 싶은 곳은 아니다. 하지만 남한 정세가 너무 나쁘고 (일부 우익들이) 나를 (죽이려고) 위협해 살 수가 없다”고 적혀 있었다. 한국전쟁을 1년 앞둔 1949년 6월 김구도 안두희(1917~1996)의 총탄에 스러졌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못생긴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과거시험에 번번히 떨어져 이른바 ‘과거 낭인’으로 살았다. 1919년 마흔이 넘은 나이에 “임정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상하이로 찾아가 명망가들이 떠난 이름 뿐인 정부를 끝까지 지켰다. 임정을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되살리는 데 누구보다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꿈꾸던 민족단일국가의 염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미완의 건국’으로 남았다.●‘1919년 임정이 대한민국의 시작’ 분명히 그렇다고 임정이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48년 7월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1875~1965)은 취임 직후 ‘대한민국 30년’이라는 연호를 썼다.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 임정을 세운 1919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보고 이를 계승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뉴라이트 등은 “대한민국이 1948년 건국됐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대한민국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아니라) 미국의 힘으로 세워진 나라’라는 속내가 있다. 하지만 이들이 ‘건국의 아버지’로 여기는 이승만조차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초대 내각 16명 가운데 자신을 포함한 5명을 임정 요인으로 채웠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1868~1953), 국회의장 신익희(1892~1956), 국무총리·국방부장관 이범석(1900~1972), 무임소장관 이청천(1888~1957) 등이다. 당시 정부도 한국 독립을 위한 임정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1987년 국회는 ‘6월 항쟁’으로 얻어낸 9차 개헌을 통해 대한민국의 법통이 임시정부에 있다는 사실을 재차 천명했다. 어떤 이들은 연합국이 해방을 가져다 줬다고 말한다. 한국이 독자적으로 일제를 이기지 못했고 국제사회도 임정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 제패를 꿈꾸며 전 세계로 세를 넓혀가던 강대국 일본을 우리 혼자 막지 못했다고 해서 독립을 위한 피나는 노력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 또 연합국이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던 배경에는 일본 항복 뒤 전리품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 그들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해방은 거져 얻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어느 나라보다도 오래 그리고 치열하게 일제와 맞서 싸웠다. 대한민국은 임정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 세력의 길고 긴 투쟁의 산물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김수환 추기경 선종 10주기 추모 행사…군위 추기경 생가에서 열려

    김수환 추기경 선종 10주기 추모 행사…군위 추기경 생가에서 열려

    김수환 추기경 선종 10주년을 맞아 16일 추기경 생가가 있는 경북 군위에서 추모 미사 등이 열린다. 김영만 군위군수와 심칠 군위군의회 의장, 군의원, 간부 공무원 등 30여명은 이날 오전 8시 군위군 군위읍 용대리 김 추기경 생가를 찾아 참배한다. 참석자들은 헌화와 묵념을 하며 추기경 선종 10주기를 기릴 예정이다. 생가는 고인이 군위보통학교를 마치고 대구가톨릭대 전신인 성유스티노신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부모님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추기경은 1993년 3월 이곳을 찾아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오후 3시에는 생가 인근 ‘사랑과 나눔공원’ 내 경당에서 추모 미사도 열린다. 사랑과 나눔공원은 추기경의 사랑과 나눔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추모전시관, 추모 정원, 청소년 수련시설 등을 조성해 지난해 문을 열었다. 특히 전시관에는 추기경의 어린 시절부터 사제 서품, 추기경 서임 등 생애 전반에 걸친 물품과 동영상 자료, 사용했던 물품 등이 전시돼 있다. 군위군은 선종 10주기를 맞아 추기경 탄생 달인 오는 6월 사랑과 나눔공원에서 ‘사랑과 나눔 문화축전’도 열 계획이다. 또 추기경의 어린 시절과 업적 등을 기리는 뮤지컬을 제작해 선보일 예정이다. 김 군수는 “추기경 선종 10주년 맞아 추기경 생전의 사랑과 나눔, 봉사정신이 세상에 널리 확산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군위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10주기 추모도 낮게…약자의 손잡던 바보가 그립습니다

    10주기 추모도 낮게…약자의 손잡던 바보가 그립습니다

    노동 인권·민주화 등 현대사 질곡 관통 ‘세상 속 교회’ 기치로 민주적 가치 실현 분열된 사회, 자비·사랑으로 포용 실천 선종 후 ‘바보 정신’ 재단 통해 유지 이어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둘러싼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들의 발언이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여야 4당이 문제 발언을 한 의원 제명을 요구하는 등 강력 반발하는 가운데 역사전쟁으로까지 치닫는 분위기다. 그 와중에 5·18 민주화운동 유족들과 광주 시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정치적 입장을 앞세운 발언이라지만 민주화운동 폄훼와 왜곡은 많은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그 5·18 민주화운동을 놓고 김수환 추기경은 이런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무슨 보복이나 원수를 갚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해섭니다. 책임자는 분명히 나타나야 하고 법에 의해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어디 5·18 민주화운동뿐인가. 김 추기경은 생전 약자 편에 선 채 불의에 강하게 맞선 쓴소리와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다. “위정자도, 국민도, 여당도, 야당도, 부모도, 교사도, 종교인도 모두 이 한 젊은이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1987년 1월 26일 박종철군 추모 및 고문 추방을 위한 미사 강론 중 일부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일들이 생길 때마다 많은 이들은 김 추기경을 떠올린다. ‘김 추기경이 계셨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16일은 김 추기경이 선종한 지 10주기가 되는 날. 그날을 중심으로 추기경의 사랑과 배려 정신을 되새겨 실천으로 옮기자는 행사들이 이어질 전망이다. 추모 미사(16일 오후 2시 명동성당), 추모 사진전(23일까지 명동성당 지하 1898광장), 유품 전시회(16일~6월 20일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기념 음악회(18일 오후 8시 명동성당), ‘내 기억 속의 김수환 추기경’ 토크콘서트(17일 오후 5시 명동대성당 꼬스트홀)…. 그런데 이어지는 그 추모의 몸짓들이 요란하지 않다. 천주교의 최대 지도자, 시대의 사표, 민족의 양심…. 그 막중한 수식어들만 보더라도 성대한 행사가 있을 법한데 영 딴판이다. 그 조용하고 잔잔한 추모 열기를 놓고 천주교 서울대교구 신부들은 귀띔한다. “일회성 행사가 아닙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본받아 우리 삶 안에서 하루하루 살아 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그분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김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30여년간 서울대교구는 48개 본당 신자 14만여명에서 197개 본당 신자 121만여명으로 무려 8배 넘게 교세가 불어났다. 그 종교적 위업에서 비롯된 존경과 추모만일까. 김 추기경의 어록을 다시 뒤져 보았다. “교회가 모든 것을 바쳐서 사회에 봉사하는 ‘세상 속 교회’가 되어야 한다”(1968년 서울대교구장 취임 미사), “항상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살고 싶은 열망을 갖고 살았지만 그러지 못해 답답했다. 추기경이란 직책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1998년 서울대교구장 퇴임 소견)김 추기경은 그랬다. 인류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약자들 편에 기꺼이 서야 한다고 믿었다. 단순히 종교지도자에 머물지 않고 현대 시민사회의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앞장섰으며 각 개인의 양심을 일깨워 주고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그 인권과 노동, 생명 사랑의 족적은 너무 혁혁하다. 경제성장이 지상의 과제였던 1960, 1970년대 추기경은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된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쏟았다. 1967년 5월 강화도 심도직물의 노조원 해고 사태 당시 김 추기경의 건의에 따라 주교회의는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교단 공동 성명서을 발표했다. 이 사건은 김 추기경이 처음으로 대사회 메시지를 던진 사건이다. 이것 말고도 유사한 노동 탄압 사건이 있을 때마다 추기경은 노동자 인권을 지키는 데 앞장섰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에게 더 적극적인 사목을 펼쳐야 한다.’ 서울 상계동 철거 사태 등 정부 주도의 반강제적 철거로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고 빈민으로 전락하던 무렵 추기경은 스스로 빈민들의 삶의 현장을 수시로 방문했다. 직접 도시 빈민 문제 해결을 위한 공청회에 참가해 당시 정부의 정책이 빈민을 양산하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1987년 4월 28일 도시빈민사목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지금의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는 바로 그 추기경의 의지를 담아 탄생한 단체다. 그렇게 현대 한국 천주교회를 이끈 주역이었지만 그는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유신독재,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외면하지 않고 한가운데서 뚫고 나갔다. 1987년 6월 13일 밤 경찰력 투입을 통보하러 명당성당에 들어온 경찰 고위 관계자에게 던진 말은 아직도 쩌렁쩌렁하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그런가 하면 1971년 12월 24일 전국에 TV로 생중계된 성탄 자정 미사에선 이렇게 소리쳤다.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한테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이런 법을 또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 또 1972년 10월 유신 개헌 소식을 로마에서 접하곤 큰소리로 외쳤다. “10월 유신 같은 초헌법적 철권통치는 우리나라를 큰 불행에 빠뜨릴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랬던 추기경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장에서 이런 기도를 남겼다.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서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스스로를 ‘바보’라 부르면서 ‘밥이 되고 싶다’고 외쳤던 김 추기경의 아호는 옹기다. “옹기는 먹는 것도 담지만 더러운 것도 담는다. 우리 자신도 여러 가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웃었던 추기경의 유지와 정신을 이은 사랑과 봉사의 물결은 추기경 선종 이후 도도히 흐르고 있다. 박신언 몬시뇰이 설립을 건의해 김 추기경이 사재를 털어 2002년 설립된 옹기장학회와 김 추기경의 바보 정신을 이어받아 2010년 설립된 (재)바보의나눔은 대표적인 단체들이다. 갈라지고 분열된 세상을 사랑과 자비로 포용하려는 김 추기경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옹기장학회는 통일 이후 북녘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제 양성 목적으로 설립됐지만 현재 북한과 중국은 물론 아시아 선교에 뜻을 둔 신학생까지 지원 대상을 확대해 놓고 있다. (재)바보의나눔은 종교와 지역, 계층을 초월해 국내외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지원한다. 형편이 어려운 아동과 청소년 돌봄이 필요한 노인, 편견에 휘청이는 장애인과 다문화가정 등을 돕고 있다.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는 한편 신자와 국민을 위해 눈물 흘리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지도자.’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김 추기경이다. 물신주의 팽배와 경쟁 심화, 고통을 호소하는 가난한 사람들…. 그 어두운 모습 탓에 김 추기경이 더 그리워지는 게 아닐까.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김 추기경의 마지막 유언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김수환 추기경 선종 10주기… 다시 되새기는 그 말씀

    김수환 추기경 선종 10주기… 다시 되새기는 그 말씀

    오는 16일 선종 10주기를 맞아 김수환 추기경을 기리는 평전과 잠언집이 나왔다. 문학평론가 구중서 수원대 명예교수는 ‘김수환 추기경 행복한 고난’(사람이야기 펴냄)을 출간했다. 추기경이 선종한 2009년 펴낸 평전을 손봐 10년 만에 새롭게 선보이는 책이다. 구 명예교수는 김 추기경과 40년 이상된 인연을 간직하고 있다. 평전은 순교자 집안에서 자라 1969년 당시 세계 최연소이자 한국 최초 추기경이 된 김 추기경의 삶과 신앙을 조명한다.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장을 역임한 저자는 1971년 가톨릭 잡지 ‘창조’를 창간할 당시 편집주간을 맡아 발행인이었던 김 추기경과 만났다. 구 명예교수는 “이데올로기를 떠나 인간 회복의 정신으로 이 땅의 진실된 역사 창조에 우리 모두가 이바지해야 한다”는 김 추기경의 ‘창조’ 창간사를 언급하며 “당신에 대해 큰 강처럼 끝없이 이어진 추모 행렬의 기운이 과연 온 누리를 새롭게 창조해갈 것”이라고 말했다.한편 ‘바보가 바보들에게 1·2’(산호와진주)는 김 추기경의 잠언집이다. ‘거룩한 바보’ 김 추기경이 ‘겉으론 잘난 척 하지만 외로운 바보들’, ‘매일매일 정신없이 달리고 있지만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미련한 바보들’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로 채워져 있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데는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평소의 삶이 겸손하고 가난해야 합니다.‘ 그 뜻을 헤아리기가 어려워 절레절레 하다가도, 어느덧 가슴 깊숙이 스며드는 말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10년 기다렸는데… 용산 망루 위 불구덩이 못 벗어나”

    “10년 기다렸는데… 용산 망루 위 불구덩이 못 벗어나”

    외압 논란 등 檢진상조사팀 사실상 와해 다른팀 단원 투입… 사건 재배당 가능성 “법무부 의지만 있다면 시한 연장 길 있어” 과거사위·조사단 분리 ‘태생적 한계’ 지적 “몸통 위기 일때 머리가 어떤 역할도 못해”“10년을 기다렸습니다. 조사를 중단한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원 1명이 목숨을 잃은 용산참사 사건의 검찰권 남용 의혹 등을 조사하는 대검찰청 진상조사단의 관련 팀이 사실상 와해된 것으로 알려지자 유족들은 참담한 심정을 드러냈다. 정부가 “과거의 잘못을 되돌아보겠다”며 스스로 진상규명을 한다고 해 놓고선 이렇게 허망하게 끝내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20일 경기 남양주 마석모란공원에서 열린 ‘용산참사 10주기’ 추모제에서 철거민 희생자 고 이상림씨의 부인 전재숙(75)씨는 “검찰에서 작은 것(진실)이라도 나올까 하고 기다렸는데 검찰은 조사조차 못하고 무산돼 가고 있다”면서 “더 열심히 투쟁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족들은 검찰이 무리한 진압 작전을 벌인 경찰을 기소하지 않은 이유와 수사기록을 공개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조사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유족들의 바람대로 검찰 진상 규명이 이뤄질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지난해 7월 이후 용산참사 사건을 다뤄 온 대검 진상조사단 조사3팀에는 검사 2명만 남아 있다. 검사 1명은 비상근이라 사실상 1명만 출근한다. 나머지 외부단원 4명(교수, 변호사)은 사퇴했거나 출근을 안 하고 있다. 과거 용산사건 검찰 수사팀이 이번 조사 과정에서 불복 수단으로 민·형사상 조치를 취하겠다고 하자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는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 등 최근 조사를 끝낸 다른 팀에서 단원을 수혈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성접대 의혹 사건처럼 사건 재배당을 통해 조사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새로 단원이 투입돼도 걱정은 남아 있다. 세 차례 연장된 활동 시한인 3월 말까지 조사, 심의를 모두 끝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조사단의 한 관계자는 “과거사 조사를 서둘러 끝낼 이유는 없다”면서 “법무부가 의지만 있다면 훈령을 개정해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용산참사 사건의 진상 규명은 법무부의 손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무부는 2017년 12월 과거 인권 침해와 검찰권 남용 의혹 사건의 진상을 규명한다며 검찰 과거사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실제 조사를 수행할 기구는 대검 산하에 두기로 했다. 조사단이 수사 기록을 열람하려면 감찰권을 가진 대검 산하에 있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이원화된 구조는 조사단(몸통)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과거사위(머리)가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는 한계를 갖게 했다. 조사 권한 등이 법률이 아닌 훈령에 근거한다는 점도 태생적 한계로 지적됐다. 법조계 관계자는 “독립성을 보장한다는 말 이면에는 ‘알아서 하라’는 무책임이 도사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에 법무부 관계자는 “과거사위가 대검에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아직 통보가 안 왔다”며 “대검이 애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대검 관계자는 “(조사 재개를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 중”이라고 답했다. 한편 이날 열린 10주기 추모제에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유가족, 생존 철거민, 일반 추모객 등 150여명이 참가했다. 생존 철거민 김창수씨는 “함께 망루에 올랐던 우리는 10년 전 불구덩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당시 이명박 정부는 왜 우리를 그 높은 곳으로 내몰았는지,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왜 방해하는지 묻고 싶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 “경찰·집행관·인권지킴이의 폭력 방관…제2 용산참사 부를 것”

    “경찰·집행관·인권지킴이의 폭력 방관…제2 용산참사 부를 것”

    청량리4구역 철거민 등 심신 고통 호소 “우릴 국민 아닌 재개발 방해물로 여겨” “용역 쇠파이프에 맞아 갈비뼈 부러져” 추모위, 진상규명·조사팀 외압 조사 촉구“재개발 지구에서는 아직도 사람이 죽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재개발입니까.” 용산 참사 10주기를 닷새 앞둔 15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용산참사 10주기, 강제퇴거 피해자 증언대회’에 나온 철거민들은 “용산의 비극이 일어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철거 폭력과 인권 침해는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고 고발했다. 철거민들은 강제 집행에 투입되는 용역들로부터 무차별적 폭력에 시달린다고 호소했다. 재개발이 진행 중인 청량리 4구역 백채현 전국철거민연합 청량리 위원장은 “불과 3개월 전인 지난해 11월에도 용역 200여명이 들이닥쳐 소화기를 난사하고 쇠파이프를 휘둘렀다”며 “사람이 먼저라고 말하지만, 사람을 먼저 죽이는 게 개발 지구의 현실”이라고 울먹였다. 월계2동 인덕마을 재건축구역 세입자 김진욱 인덕마을 위원장은 “철거 날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도, 서울시민도, 노원구민도 아닌 재건축 사업에서 치워져야 할 방해물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인덕마을은 지난 2016년 4월 26일 강제 집행 과정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김 위원장은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서울시 코디네이터 파견 등을 요청한 상태였는데, 조합은 폭력으로 주민을 무력화시키려 했다”며 “주민 24명이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큰 부상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윤헌주 노량진수산시장 현대화비대위원장은 “상가 현대화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며 “수산시장 현대화사업이 소비자가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시작됐지만 옛 시장 부지에 리조트 등을 짓겠다는 의도로 변질됐다”고 밝혔다. 이들은 불법 강제집행이 경찰, 집행관, 인권지킴이의 묵인 속에 이뤄졌다고 비판했다. 김 위원장은 “인덕마을 강제 집행 3시간 동안 법원 집행관은 집행을 계속했다”며 “시나 구가 동절기 강제집행을 막아도 현장에서는 무기력하다”고 지적했다. 백 위원장은 “인권지킴이는 먼발치에서, 경찰은 200m 밖에서 지켜볼 뿐”이라며 “이런 방관이 계속되면 제2, 제3의 용산 참사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오전 144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용산참사 10주기 범국민추모위원회’는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용산 참사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이들은 “용산 참사 당시 수사본부 출신 검사들의 외압으로 검찰과거사위원회 용산 조사팀이 조사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며 “청와대가 외압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공권력의 피해자들] “모든 죄를 철거민에 씌워, 도대체 왜?… 국가는 10년간 사과 안 해”

    [공권력의 피해자들] “모든 죄를 철거민에 씌워, 도대체 왜?… 국가는 10년간 사과 안 해”

    “벌써 10년이 흘렀습니다. 뭐 하나 제대로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 이렇게 시간만 지나가니 마음이 아픕니다.” 이충연(46) 전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평범한 장사꾼으로서의 삶 말이다. 3년 전 호프집도 다시 차렸다. 상호도 예전처럼 ‘레아’로 정했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려고 발버둥칠수록 ‘그날’의 아픈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를 뿐이다. 철거민 목소리를 들어달라며 아버지와 함께 올랐던 ‘망루’. 그날 그는 아버지를 잃었다. 동료 넷도 세상을 떠났다. 그 또한 참사의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결혼식을 올린 지 6개월 만에 철창 신세를 져야 했다. “도대체 왜?” 이 물음은 지난 10년간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 “아직도 납득이 안 된다”는 그를 지난 2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의 호프집 레아에서 만났다. 이 전 위원장은 “용산 진압 이후 모든 죄를 철거민한테 뒤집어 씌웠다”면서 “10년이 지난 지금도 국가는 사과 한마디 없다”며 울분을 토했다. 다음은 이 전 위원장과의 일문일답.→오는 20일이 용산참사 10주기다. 아홉 번째 맞는 아버지 기일이기도 한데 심정이 어떤가. -슬퍼도 울 수가 없다. 얼마나 억울한 죽음이었는지 밝혀내지도 못한 채 어떻게 아버지 묘소 앞에 가서 눈물을 보일 수 있겠나. 자식된 도리로서 진상규명이 되는 날까지 싸워야지. →어머니도 많이 힘드실 것 같은데. -남편을 잃고 355일 동안 장례를 치르지 않은 채 국가의 사죄를 요구했다. 얼마나 힘들었겠나. 당시 구치소에 수감돼 어머니 곁을 지켜드리지도 못했다. 지금은 저보다 더 많이 아픈 곳을 찾아다니신다. 최근에는 고공농성 중인 파인텍 노동자들을 응원하기 위해 희망버스를 타셨고,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의 추모제도 다녀오셨다고 들었다. 옆에 같이 있어준 사람들 덕분에 어려운 시절을 버텨왔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똑같은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그때 망루를 꼭 지었어야 했나. -경찰도, 구청도 우리 얘기를 듣지 않았다. 아버지 유품 중에 검게 그을린 용산구청 공문이 있다. ‘절차상 세입자 대책이 세워지지 않았다고 해도 구청이 상가 세입자에게 해줄 게 없다. 이점 양해해주길 바란다’는 내용이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 공문을 안주머니에 넣고 망루에 올랐을까. 당시 엄정한 법 집행이 이뤄졌다면 우리는 망루를 짓지 않았을 것이다. →법 집행이 엄정하지 않았단 말인가. -철거용역 업체들이 먼저 시비를 걸고 주먹질해서 경찰에 신고를 하면 우리는 두들겨 맞고도 쌍방 폭행으로 입건돼 벌금을 냈다. 경찰이 인지하고 있었고, 우리도 조사를 받으면서 충분히 설명을 했지만 결과는 늘 똑같았다. 어느 누가 돈 몇 푼 더 받자고 용역들 행패를 견디며 버틸 수 있나. 무서워서 다 도망가지. 엄연히 계획적이고, 기획된 기업형 조직폭력인데 그에 맞는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다.→당시 망루를 짓자 경찰이 당황한 것 같았다. 예상보다 빨리 진압 작전이 이뤄졌다. -영화를 보면 극악무도한 흉악범을 검거할 때도 협상을 몇 차례 한 뒤 진압을 한다. 우리는 인질극을 벌인 것도 아니고, 강제로 철거당하는 게 너무 억울하다며 얘기를 들어달라고 망루에 오른 것 뿐인데 경찰특공대를 투입하더라. 결국 철거민 다섯 명과 함께 경찰관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공권력에 의한 살인 아닌가. 그런데 10년이 지나도록 처벌을 안 한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얼마 전 대검찰청을 항의 방문했다. 검찰총장을 만나겠다고 했는데.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용산 사건을 재조사한다고 했을 때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그런데 현직 검사들 외압 때문에 진상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눈이 뒤집히고 속에서 천불이 나더라. 그래서 검찰총장에게 따지러 갔다. →검찰총장을 만났나. -연좌농성을 벌였지만 끝내 못 만났다. 누군가 우리한테 와서 검찰총장에게 직접 전달하겠다며 우리의 요구안을 들고 갔다. →요구안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나. -크게 세 가지다. 진상조사가 제대로 이뤄지게 조치해달라. 조사단이 외압을 받고 있다고 하니 외압을 가한 사람에 대해 수사해서 처벌해라. 조사 기간이 촉박하니 연장해달라. →요구안대로 조사 기간은 3개월 연장됐던데. -그래봤자 시간이 얼마 없다. 3월 말까지 보고서 마무리하려면 2월 안에 조사가 끝나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지금껏 단 한 번도 우리를 부른 적 없다. ‘어떤 부분에서 부당함을 느꼈는지’ 물어봐야 하지 않나. 대체 무슨 조사를 하는 건지 답답하기만 하다. →지난해 경찰청에서 용산참사 사건에 대해 진상조사를 했다. 기대를 했었나. -처음에는 진상조사 뭐하러 하느냐고 반대를 했다. 당시 진압 책임자는 현재 국회의원이 돼 있다. 조사받으러 오라고 해도 강제수사권이 없어 안 오면 그만인데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그래도 지난 정부에서는 자료 수집조차 하지 않았으니 자료라도 확보하는 차원에서 나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지. →경찰청 진상조사 결과 어떻게 받아들이나. -참사 9년 9개월 만에 정부의 첫 번째 공식 조사 결과가 나왔다. 안전 조치가 부실한 상태에서 경찰 지휘부가 무리한 진압을 지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공적인 부분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진압 책임자에 대해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예상된 결과였다. 진상규명을 해나가는 과정의 일부일 뿐 완벽한 진상규명으로 볼 수 없는 이유다. →당시 진상조사위원회에서 경찰청에 유가족 사과를 권고했다. 경찰이 사과를 했나. -연락 온 적 없다. 말뿐인 사과도 없었다. 적어도 사과를 하려면 앞으로 용산참사와 같은 진압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재발 방지 대책을 갖고 와야 한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 경찰도 바뀌겠지. 아직까지 그 우려가 가시지 않는다. →왜 경찰이 사과를 못하고 있다고 보나. -경찰이 과거 잘못을 거울 삼아 앞으로 공권력을 남용하지 않겠다고 해놓고선 잘못이 드러났는데도 인정을 하지 않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경찰 지휘부가 조직의 눈치를 봐서는 안 된다. 경찰은 국민을 위해 복무하는 조직 아닌가. 경찰이 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경찰 눈높이가 아닌 시민의 눈높이에서 바라봐야 한다. →책임자 처벌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현실적으로 처벌 가능할까. -당시 대통령, 서울시장, 서울경찰청장은 반드시 처벌 받아야 한다고 본다. 물론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는 우리의 의지는 죽을 때까지 그 누구도 꺾지 못할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대로 놔두면 우리 같은 사람들 또 나타난다. 이런 일이 반복되고 당연시되는 사회는 정말 무섭지 않나.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유시민 “노무현 비판·부정할 자유 전적으로 존중”

    유시민 “노무현 비판·부정할 자유 전적으로 존중”

    “재단도 바다처럼 품 넒은 모임 되어야”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방하는 행위에 대해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전적으로 존중한다고 밝혔다. 유 이사장은 16일 노무현재단이 운영하는 ‘사람사는세상’ 홈페이지에 ‘노무현 대통령을 비방하는 행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라는 글을 올렸다. 그는 “표현의 자유란 노무현 대통령의 가치와 철학과 업적을 비판하고 부정할 자유를 포함한다는 것을 깊게 인식한다”고 덧붙였다. 극우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와 보수논객을 중심으로 퍼진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희화화하는 글, 이미지 등에 대한 대응방침을 공식화한 것이다. 유 이사장은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해 거짓이나 부정확한 사실을 유포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정확한 사실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조처하겠다”며 “불합리하거나 잘못된 견해를 유포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합리적이고 올바른 견해를 제출하는 방법으로 조처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명백히 노 전 대통령을 모욕할 목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행위에는 단호하게 법적 조치를 하겠다고 유 이사장은 밝혔다.유 이사장이 노 전 대통령 비방행위에 대한 대응방침을 분명히 한 것은 일부 회원과 시민들로부터 재단이 이런 행위를 바로잡는데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유 이사장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노무현재단은 이메일과 홈페이지, 페이스북 등을 통해 330여건의 노 전 대통령 비방 사례를 제보했다. 일부 회원은 재단의 소극적 대응을 비판하면서 후원 중단을 통보하거나 후원금 환불을 요청했다고 유 이사장은 전했다. 유 이사장에 따르면 재단은 지난 2014년 이사회를 열어 노 전 대통령 비방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응방침을 정했다. ▲사회적으로 인지도와 영향력 있는 단체 대표, 정치인, 교수 등의 허위 사실 유포는 엄중 대응한다. ▲언론에 모욕 이미지와 정보를 유포하면 직접 또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통해 사과를 받는다. ▲온라인과 SNS 계정을 통해 명예 훼손 사진과 정보를 유포하는 네티즌에 대해서는 대응하지 않는다. ▲단, 포털 등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공간인 경우 사이트 담당자에게 삭제를 요청한다.유 이사장은 현재 재단이 처한 환경과 과제가 당시와 달라져 대응방침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 달라진 정치의식과 정권 교체 상황, 노 전 대통령의 높아진 위상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게 유 이사장의 생각이다. 그는 “생시의 노무현 대통령은 ‘결코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 강물’이었지만 서거 10주기를 앞둔 지금은 ‘어떤 강물도 마다 않는 바다’가 되셨다”며 “우리 재단도 바다처럼 품이 넓은 모임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고 밝혔다. 유 이사장은 이와 같은 방침은 재단의 공식 입장이 아닌 개인적인 생각이라며 회원들의 비평과 제안을 반영하겠다고 덧붙였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노란 넥타이’ 유시민 “언젠가 할 줄 알았지만…공직에는 다신 안 나간다”

    ‘노란 넥타이’ 유시민 “언젠가 할 줄 알았지만…공직에는 다신 안 나간다”

    유시민 작가가 15일 새 노무현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사장 취임이 정계 진출을 위한 발판이 아니냐는 여러 언론의 의혹 제기에 유 이사장은 “임명직 공직이 되거나 공식 선거에 출마하는 일은 다시는 없다”고 못박았다. 이날 노란넥타이를 매고 서울 마포구 노무현재단 사무실에서 열린 이·취임식에 나타난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생전 링컨 미국 대통령을 존경했다는 말로 취임사를 시작했다. “링컨 대통령은 특정 정파에 속한 대통령이었지만 역사 안에서는 미합중국과 국민 전체의 지도자로 받들어졌다”면서 노 대통령을 떠올린 그는 “노 대통령이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와 번영, 사회 정의 실천에 노력했던 대한민국 지도자로 국민 마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또 “내년 노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아서 재단이 우리 사회의 더 많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만들고 시민의 정치 참여와 사회적 연대를 확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모든 분들의 뜻과 지혜를 모아 나가겠다”면서 “봉하마을 노무현 대통령 기념관과 서울 노무현 센터 건립 사업도 계획대로 잘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왜 자리를 수락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개인적으로는, 언젠가는 저도 재단을 위해 봉사해야할 때가 올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이사장 한번 해야지’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권하셨다”면서 “노 대통령 모시고 일했던 사람으로서 지금 사양하는건 도리가 아니겠다고 생각해 맡았다”고 답했다. 유 이사장은 특히 “앞으로도 글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한다”면서 “임명직 공직이 되거나 공직 선거에 출마하는 일은 제 인생에 다시는 없을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드린다”고 말했다. 이날로 위원장 임기를 마감한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재단을 유 작가에게 넘겨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운을 뗐다. 이어 “유(시민) 작가는 노 대통령을 모시고 2002년 선거부터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가치와 철학을 가장 잘 실천한 휼륭한 공직생활 잘 해왔다”면서 “지금 자유분방하게 잘 지내고 있는데 제가 이 무거운 자리 맡기게 되서 죄송하다. 자유롭게 살고 싶은데 이 자리 맡아서, 또 중요한 일을 보람차게 잘 할 거라고 생각한다”면서 감사의 말을 전했다. 노무현재단은 지난달 26일 이사회를 열어 유 작가를 이 대표의 후임 이사장으로 낙점했다. 약 지난 4년 동안 재단 이사장을 맡아 온 이 대표는 당직 취임 후 사임 의사를 밝히고 후임으로 유 작가를 낙점, 직접 설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와 유 이사장은 이날 오후 경남 봉하마을에 있는 노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한 뒤 노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를 예방한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故 최진실 10주기 참석한 정선희 ‘마르지 않는 눈물’

    故 최진실 10주기 참석한 정선희 ‘마르지 않는 눈물’

    개그우먼 정선희가 최진실 10주기 추도식에서 눈물로 고인을 떠올렸다. 2일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에 위치한 갑산공원에서는 고 최진실 사망 10주기를 맞아 추도식이 진행됐다. 이 자리에는 최진실의 아들 환희 군, 딸 준희, 어머니 정옥숙 여사를 비롯한 가족들과 지인들이 참석했다. 추도식에 앞서 방송인 홍진경이 ‘진실언니 평안히 쉬세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헌화한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생전 최진실과 절친했던 개그우먼 이영자와 정선희, 주진우 기자 등 여러 방송계 인사도 추도식에 참석해 고인을 추모했다.최진실 팬클럽 연합회원들은 지난 주말 현장을 찾아 먼저 묘지를 정리했으며, 10주기를 맞아 한강 뚝섬 전망문화콤플렉스에서 오는 7일까지 ‘그 시절 우리가 가장 사랑했던 배우 최진실’을 주제로 사진과 영화 전시회를 연다. 최진실은 1988년 광고 모델로 데뷔해 ‘약속’, ‘질투’, ‘별은 내 가슴에’ 등 인기 드라마에 출연하며 톱스타 자리에 올랐다. 2000년 12월 프로야구 스타 조성민과 결혼했으나 2004년 8월 이혼했으며, 그로부터 4년 후인 2008년 10월 2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그의 동생인 가수 최진영, 전 남편 조성민 또한 같은 길을 선택하며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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